[사참위] (1)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_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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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권 Ⅱ 발간등록번호 11-1074601-000005-01 4·16 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본권 Ⅱ
4·16
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94년 가습기살균제가 판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과 가족 의 건강을 위해 이를 사용한 분들은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소리 없는 암살자’와 다르지 않았던 가습기살균제는 헤아리기 어 려울 정도의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하고 출시 17년 후인 2011년에 이르러서야 사용자제 권고가 내려졌습니다. 제대로 된 실험이나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제품을 출시했던 기업 들은 이 죽음과 고통이 자신들과 관련 없다고 변명하기 급급할 뿐 어떠한 책임도 지려 하 지 않았고 심지어 증거를 조작까지 하였습니다. 국가 역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건강에 유해한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지 않도록 관리·감독하여야 할 의무를 제대 로 수행하지 못하였으며, 피해자인 국민에 가해진 위해에 대해 무관심과 외면으로 일관하 였습니다.

발간사

2014년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였습니다. 세월호는 그리 안전 한 배가 아니었습니다. 선사는 탑승객과 화물을 늘리기 위해 증개축을 실시하여 복원성 이 나빠졌고 수밀문도 그냥 열어둔 채 운항을 하였습니다. 국가는 구할 수 있는 생명을 구 하지 못하였고 결국 304명의 무고한 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존자를 비롯한 희생자 유가족 등의 경우 아직도 참사 당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트라우마와 같은 정신 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피해자들을 불법 사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가족과 국민들의 진상규명 외침 속에 만들어진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 회의 활동을 철저하게 방해하였고, 급기야 강제종료 시켰습니다. 이 두 참사는 안전보다 이윤을 더 추구했던 우리 사회의 탐욕, 국민의 생명에 대한 위험을 방관했던 국가의 무책임이 주요 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참사로 인한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에 대한 배보상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사에 대한 직간접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생명 경시로 인한 참사는 또다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사회는 안 전한 사회라 할 수 없으며, 피해자의 온전한 치유와 회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진상규명을 통한 안전사회건설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희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 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양 참사에 대한 진실 규 명, 온전한 치유, 안전한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지난 2018년 12월 10일부터 3년 6개월동안 많은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사활동의 내용과 그 결과들을 총 7권의 종합보고 서와 1권의 백서에 각각 담았습니다. 이 보고서들은 시간적으로 국회 국정조사와 검찰수 사를 비롯해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등 을 종합한 것이며, 내용적으로는 양 참사의 진상규명만이 아니라 피해지원과 인권, 더 나 아가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개선방안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양 참사의 발생원인과 문제점, 미비한 피해지원 현실, 관련 안전대책 등을 각 각 ‘가습기살균제참사 종합보고서’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에 담아 참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좀 더 깊이 있고 세부적인 조사결과를 전 달하기 위해 4개의 각 소위원회별로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소위원회 보고서’, ‘4·16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소위원회 보고서’, ‘안전사회 소위원회 보고서’, ‘지원 소위원회 보고 서’를 추가로 작성하였고, 조사결과들을 바탕으로 참사의 재발방지를 위해 국가기관 등이 개선해야 할 실질적 정책과제를 권고의 형태로 담아 별도의 책자로 발간합니다. 백서에는 위원회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한시적 조 사기관인 우리 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한계는 무엇이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과제는 무엇 인지 등에 대해 담고자 하였습니다.

종합보고서와 백서를 작성함에 있어 일반시민과 피해자들도 최대한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며, 국제사회와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 본권(참사별 보고서)의 경우 영어로 도 번역해 제공할 예정입니다. 또한 본 종합보고서와 함께 제공되는 USB에는 종합보고서 외에도 개별 조사결과보고서와 위원회가 실시한 용역결과보고서 등을 함께 담았습니다. 현실적 한계로 피해자 분들과 진상규명을 위해 애써 오신 모든 분들에게 전달해 드리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모든 내용은 웹페이지를 통해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저희 위원회는 활동기간 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으며, 다방면의 조사를 통해 여러 진 실의 조각들을 찾아냈고 안전 및 피해지원대책 마련 등 많은 결과물들을 남겼습니다. 이 는 진상규명을 열망한 수많은 피해자 분들, 그리고 피해자 권리를 옹호해온 여러 시민들 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내용과 결과물에 대해 피해자와 국민 들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고 계신 것 같아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참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기억을 지우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위험이 있습니다. 본 보고서들을 통해 가습기살균제참사와 4·16세월호참사에 대한 기록을 명확히 남기고 피해자들의 회복과 안전사회를 위한 길에 한걸음 내딛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보고서를 참사 희생자와 그 가족, 우리 국민과 미래세대에게 바칩니다. 2022년 9월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문 호 승

발간사 10 요약문 16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19 그날의 기억 20 배반당한 신뢰 23 방치된 혼란 26 멈춰버린 시간 29 국민을 적대시한 국가 33 치유되지 않은 상처 37 세월호참사라는 꼬리표 37 진실과 정의를 향한 연대 41 세월호참사의 기록, 공동체의 회복 44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46 1. 불안한 출항 46 청해진해운의 세월호 도입과 증개축 51 4월 15일 출항 당일의 세월호 51 선박 복원성 어떠했나 55 화물 적재 상태 어떠했나 56 수밀 관리 어떠했나 59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61 2. 세월호 침몰의 재구성 62 멈추지 않은 우선회, 급격한 횡경사 69 열린 수밀문 탓에 빨라진 침수와 침몰 71 3. 침몰 원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CONTENTS
2
원인에 관한 마린의 분석과 대한조선학회의 견해 87 세월호 침몰 원인에 관한 종합 결론 및 진상규명의 한계 90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92 1. 그날의 절규는 누구에게 닿았나 92 8시 52분, 최초 신고 전화 접수 92 “살려주세요” A○○ 군의 최초 신고 93 세월호참사의 최초 희생자, Q△△ 선생님
72 조타장치 고장에 의한 침몰설의 재현과 검증 77 외력에 의한 침몰 가능성의 재현과 검증 83 침몰

93

“350명 탑승 여객선 침몰 중” 해경은 무엇을 했나 93

목포해양경찰서 94

서해지방해양경찰청 95 진도VTS 95 해양경찰청(본청) 96

청와대는 세월호 사고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97 2. 그 누구도 세월호를 파악하지 않았다 97

승객 수도 파악하지 않은 현장출동 세력 99

정보 파악 실패 99

서해청의 엉뚱한 지시 100 목포서와 해경 본청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102 진도VTS는 역할을 다했는가 104 준비 없이 현장에 도착한 국가 105 3. “가만히 있으라” 106 자기들만 살기에 급급했던 선장과 선원들 107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 구조한 해경 108 선원들에게 묻지도 않은 123정 109 해경 상황실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123정황 111 무책임했던 해경 항공기 112 퇴선조치를 하지 않은 현장출동세력 112 해경 지휘부의 실질적인 부재 113 목포서장 김문홍의 확인되지 않는 1시간 114 부적절한 지시로 일관한 해경 지휘부 115 구조 대신 보고를 종용한 해경 지휘부 116 4. 때 이른 포기: 섣부른 응급조치 중단과 이송 지연 119 5. 사라진 컨트롤타워: 세월호참사 초기대응의 실패 120 세월호참사 당시 국가위기관리체계 122 세월호참사 초기 컨트롤타워의 부재 122 중대본과 중수본은 무엇을 했나 124 세월호참사 당일 청와대는 무엇을 했나

137
130 범정부적 대응의 실패 132 6. 그날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134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1. 바다에서 육지로, 그리고 다시 바다로 137 생존자 172명

139 피해자를 맞을 준비 143 전원 구조 오보와 구조 인원 집계 혼선 147 “지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라는 거짓말 151 내 가족의 이름은 어디에 153 2. 원칙 없는 수색, 커지는 혼란 154 현장에는 책임자가 없다 156 통제 없이 무너진 현장 159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160 3. 피해자를 적으로 삼다 160 청와대로 가는 길 163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 165 4. 대책 없는 희생자 수습 165 희생자에 대한 예의 170 가족 품으로 174 5. 기다릴수록 커지는 고통 174 바지선에 오르다 177 실종자 가족 지원의 허점 179 진도군민의 희생 182 6. 참사 수습은 왜 실패했는가 186 제5장.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188 1. 여론전과 기록조작 188 책임 회피용 여론 전환 193 정부 비판, 진상규명 여론 누르기 197 소실된 기록, 만들어지지 않은 기록 200

2. 진상규명을 막아라 201 피해자 청원안을 무시한 여·야만의 합의 206 세월호특조위 설립준비를 방해하라 206 ‘세금 도둑’ 발언과 조직적 방해의 시작 211 세월호특조위 시민사회의 저항과 정부·여당의 시행령 밀어붙이기 213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월호특조위를 흔들어라 213

CONTENTS
시도 222 청와대의 보수단체 지원을 통한 세월호특조위 활동 방해 224 대통령 7시간 조사 관련 대응과 세월호특조위 무력화 231 3. 피해자는 어떻게 불온 세력으로 몰렸나 231 국정 부담 요인이 된 재난
세월호특조위 동향을 파악하라 217 세월호특조위 구성원 사찰과 ‘조사관 채용 배제’

234 ‘순수 유가족’ 이야기는 듣겠습니다 234 “좌파 세력”과 연계될 유가족? 239 유가족 분열을 위한 낙인 찍기 243 수색 종료 종용, 배 보상 신청 유도 246 “제2의 광우병 촛불은 막아야 한다” 254 4. 진상규명의 책임을 다하는 국가로 258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치유와 회복은 과연 가능한가 260

1. 강요받은 치유 260 급조된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 264 혼란스러운 정부 의료 지원 체계 267 회복되지 않는 일상 267 ‘신속’하지만 불공정한 배·보상 268 일관적이지 않은 생계 지원 270 부족한 법률 지원 271 이름뿐인 지역경제활성화 사업 274 2. 피해자 지원의 공백 274 집에 남겨진 아이들 278 참사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받은 상처 278 민간 잠수사 284 진도어민과 자원봉사자 286 그 외의 공백들 288 3. 변화의 시작: 세월호참사 이후 바뀐 피해 지원 체계 292

덧상처: 공공연한 혐오

297 5.
302 6.
302 희생
304
307 4·16생명안전공원 311 7.
314 제7장.
316 1.
318 2. 국가의
320 3.
322 4. 권고안
4.
진실과 정의를 향해
논쟁과 협상의 대상이 된 추모
학생에 대한 예우
분향소
피해자와 연대하는 시민사회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8년간의 참사
두 얼굴
온전한 슬픔의 시간

연안 여객선 세월호는 2014년 4월 15일 밤 9시경 인천항에서 출항해 제주로 향했다. 세월 호에는 승객 443명과 선원 및 승무원 33명을 비롯해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다. 승객 가 운데에는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이 있었다. 4월 16일 8시 46분 경 세월호는 우현 쪽으로 병풍도와 0.9마일 정도 거리를 두고 약 18노트 속력으로 나아가 고 있었다. 8시 48분경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돌면서 왼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세 월호는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 101분 만에 뒤집히며 가라앉았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476명 탑승자 가운데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해 304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단원고 학생 250명이 사망하고 75명이 살아남았다. 우리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많은 생명 이 희생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세월호참사의 전모를 낱낱이 파헤치고 이것을 정확히 기록하는 일은 피해자에게 공감하 고 시민사회의 연대를 이루어내기 위한 출발점이다. 피해자들은 2014년 4월 16일 평온했 던 일상을 산산조각 내버린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후 국가가 어떻게, 왜 그 렇게 대응해왔는지 알 권리가 있다. 또 같은 날 세월호참사 소식을 접한 모든 국민 역시 세

요약문 10

월호참사의 발생원인, 수습 과정, 후속 조치와 관련된 사실관계와 책임 소재의 진상을 이 해할 권리가 있다. 사참위는 세월호참사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참사의 진상 에 대해 국가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수년간의 조사 작업에 기반 하여 이 보고서를 발간한다. 세월호참사는 2014년 4월 16일 특정 장소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안전을 확보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기업과 정부가 제대로 감독하고 지휘하지 않고 심지어 방치해왔기에 세월호의 침몰은 거 대한 참사가 되었다. 신고를 받은 정부는 배의 침몰을 막는 데 실패했고, 생명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부과 해경 지휘부는 위기에 처한 승객들을 지키고 구하 지 못했고, 정부는 재난 대응을 지휘하여 인명을 구하는 일에 한없이 무능했다. 팽목항과 진도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대혼란 속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했을 때, 죽음의 원인을 규명해달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피해자들을 사찰했을 때, 304명 사망이라는 크나큰 피해 를 낳은 선박 사고는 더 거대한 사회적 참사로 확대됐다. 사참위의 보고서는 세월호참사 를 낳은 다층적 실패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생명과 안전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 들어 달라는 피해자와 시민들의 요구에 응답하고자 한다. 세월호는 승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상태로 출항했다. 중고 선박으로 수입되어 여객선으로 증개축하는 과정에서 세월호의 무게중심은 높아졌고 복원성은 취약해졌다. 한 국선급의 경사시험은 개조공사가 다 마무리되기 전에 시행되어 무게중심은 실제보다 낮게 측정되었다. 세월호는 평형수를 넣지 않은 상태에서는 복원성이 매우 취약해 스스로 직립 할 수 없는 배였다. 세월호를 운항하는 청해진해운은 출항 당시 규정을 어겨가며 화물을 빽 빽하게 실었다. 서류에는 일반 화물 657톤이 실렸다고 보고됐으나, 실제로는 적정 화물량을 훨씬 넘긴 2,214톤의 화물이 고박도 허술한 채 실려 있었다. 안전한 운항을 위해 닫혀 있어 야 하는 수밀문과 맨홀은 모두 열린 상태였다. 선박 수밀성을 규정에 따라 제대로 관리했다 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세월호 탑승자를 더 많이 구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참위는 복원성이 취약한 세월호에서 일어난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이 우선회와 횡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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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원인인지, 또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에 미상의 수중체 추돌이 작용했는지 검증했다. 이를 위해 증거의 재검증, 새로운 영상 증거 복원, 모형 시험, 시뮬레이션 분석을 비롯한 여 러 조사 방법을 활용했다. 그 결과 사참위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 선회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의 원인이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 충격일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대한조선학회 자 문 결과와 네덜란드 마린 연구소의 세월호 모형 자유항주 시험 보고서 등을 종합할 때, 사 참위 조사 결과가 외력 충돌 외의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으며 외력이 침몰의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다. 사참위는 널리 퍼진 의혹을 검증하고 확인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었지만 침몰 원인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내지 못한 점은 한계로 남았다.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현장의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신속하게 계 획을 세워 구조했다면, 승객들이 배에서 나오도록 퇴선조치를 내리고 빠져나온 승객들을 구조했다면, 304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급하고 위태로운 순간에 국가가 모든 세력을 동원해 우리를 구하리라는 희망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세월호참사 당일 범정부대응은 실패했고, 재난상황에서의 컨트롤타워는 총체적 부재 상태였다. 선장과 선원은 승객들을 어떻게 탈출시킬지 고민하고 요청하는 대신 자신 들이 먼저 배에서 탈출했다. 현장출동 세력은 배 안에 훨씬 많은 승객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 구조하고 현장에서 철수했 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구조 계획을 세워야 할 해경 지휘부는 현장 상황을 즉각 파악하 지 않고, 구조가 시급한 때 대통령에게 보고할 내용을 달라고 종용했으며, 정보를 파악하 고도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위기상황 대응을 종합적으로 총괄 하거나 중앙사고수습본부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등 위기관리기구가 제대로 가동되도 록 지휘하지 않았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 현장출동 세력의 집단적인 임무 방 기, 해경 지휘부의 조직적인 무책임, 컨트롤타워의 부재가 모두 결합해 사회적 참사로 이 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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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이 사망하고 실종되고 부상당한 참사는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났지만 그 현장은 이내 이들이 이송된 서거차도와 팽목항과 진도로 확대되었다. 정부는 대규모 참사의 피해 자를 수색, 이송, 치료,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누가 생존자이고 누가 실종자인지 파악하 는 일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실종자 수색 과정에 대한 정보는 과장되고 왜곡되고 숨겨 졌다. 신체적, 심리적으로 무너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언론이 폭력적으로 취재했지만 정부는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정부는 실종된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을 감시하고 적대시했다. 극심한 고통에서 비롯되는 현장의 불신을 가라앉히고 갈등을 중재하려 나서 는 책임자는 없었다. 수습된 희생자를 예를 갖춰 맞이하고 가족에게 인계하는 시스템은 허술했고 제때 작동하지 못했다. 생존자, 희생자, 또 그 가족 모두에게 팽목항과 진도실내 체육관은 극도의 불신과 무책임이 만들어낸 아수라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정부, 무책임 한 정부의 공백을 메운 것은 지역 주민, 지역 공무원, 잠수사, 자원봉사자 등 참사 소식을 듣고서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었다. 국민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청와대는 책임을 모면하고 여론을 전환하기 위해 다방면으 로 노력했다. 청와대는 문화계를 검열하고, 보수단체를 통해 여론을 관리했으며, 언론 보도 에 개입하여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 또 세월호참사 관련 기록 을 조작하고 파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과정을 훨씬 더 어렵고 더디게 만들었다. 청와대는 또한 세월호참사의 진상조사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박근혜 대 통령은 공식적으로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정 부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특조위 설립을 준비하며 특조위가 실제로 활동하는 동안 줄곧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방해했다. 정부의 특조위 방해 작전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뤄졌으며, 이로 인해 특조위의 권한은 축소되고 사실관계를 조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국가는 피해자들을 불온 세력으로 간주했다.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은 참사 발생 직후부터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항의를 반정부 행위로 보고 피해자들을 사찰하고 동향 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정보기관은 재난을 마치 공안 사건처럼 인식하고 행동했고, 피해자들을 지원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좌파와 연계해 사회질서를 해칠 수 있 는 세력으로 여겼다. 정부의 이러한 행위로 인해 피해자들은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으며, 사회적으로는 ‘순수한 피해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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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는 책임 소재를 조사받는 국가 기관들이 증거를 조작하고 책임을 회피한 극단 적인 사례를 낳았다. 만약 국가가 이렇게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피 해자들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이 이렇게 지지부진하지는 않았을 것 이다. 세월호참사의 피해자들이 겪은 일련의 책임 회피, 조사 방해, 괴롭힘에 대해 국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다시는 재난 피해자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 참사 직후 정부의 피해자 지원 정책들은 오랫동안 진행되는 참사의 피해를 다루기에는 매 우 단기적이고 일방적이었다. 급조된 지원 프로그램과 혼란스러운 의료 지원 체계 하에서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일상 회복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지원의 손길은 공백 없 이 모든 곳에 미치지 못했다. 희생자나 생존자의 형제자매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 고, 참사 당시 구조에 뛰어들었던 민간 잠수사, 진도 어민, 자원봉사자들 역시 신체적, 정 신적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기까지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거 나 아예 지원받을 수 없었다. 세월호 피해자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기도 했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을 혐오하는 발언이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했고, 이 발언들은 인터 넷과 언론을 통해 확대되고 재생산됐다. 정치권에서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세월호참사 를 동원했고, 이는 피해자들을 이념적으로 낙인찍으며 세월호참사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기억교실, 분향소, 추모공원과 같은 시설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추모는 협상의 대상으로 인식되거나 정치적 공세에 휘말리곤 했다. 이로 인해 피해 자들은 희생자를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와의 갈등으로 극심한 고립을 경험했다. 조사위원회의 종결은 결코 참사의 종결이 아니다. 피해자를 위한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회복과 치유의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참사의 시간을 겪고 있다. 다만 조사의 마무리가 온전한 슬픔과 추모, 뒤늦은 회복과 치유의 시작으로 이어지기를 겨우 희망할 뿐이다. 사참위는 세월호참사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이러한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한 권고안을 종합보고서에 선별하여 제시한다. 사참위의 조사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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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생명과 안전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 재난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첫걸음 이 될 것이다.

첫째, 사참위는 세월호참사와 피해자 사찰 등 그 이후 행위로 인한 국민 희생과 피해, 권리 침해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한다.

둘째, 사참위는 피해자 사찰 및 세월호특조위 조사 방해 행위를 추가로 조사하거나 자체 감사를 실시할 것을 권고한다. 셋째, 사참위는 피해자 사찰 및 조사 방해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제도를 개선할 것을 권고 한다.

넷째, 사참위는 해양재난 수색구조 체계 개선을 권고한다.

· 다섯째, 사참위는 세월호참사 피해자 및 피해 지역 지원 개선을 권고한다.

여섯째, 사참위는 재난 피해자의 인권침해 및 혐오표현 확산 방지를 위한 개선을 권고한다.

· 일곱째, 사참위는 선사·선원의 안전 운항 능력을 높이고 책임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

여덟째, 사참위는 여객선 등 선박 안전관리 체계 개선을 권고한다.

· 아홉째, 사참위는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4장에 따른 세

월호참사 희생자에 대한 추모 사업을 중단 없이 추진할 것을 권고한다.

· 열째, 사참위는 (가칭)중대재난조사위원회 설립을 권고한다.

열한째, 사참위는 재난 피해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정보 제공·소통 방식을 개선할 것을 권고한다.

열두째, 사참위는 사회적 참사 기록물 폐기금지 및 공개·활용 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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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그날의 기억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 하는 참사가 발생한 이후 8년 정도가 흘렀다. 여전히 참사를 애도하고 ‘잊지 않겠다’는 이 들도 있지만, 이제 세월호가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은 세월호를 애도하는 사람들, 세월호 이야기에 무관심해진 사람들 모두 공유하는 기억 이 있다는 점이다. 4월 16일 우리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참사의 피해자뿐 아니라 전 국민이 참사 당일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그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할 만큼 큰 충 격을 받았고, 사고가 일어나고 이후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처받은 기억을 현재까지 안고 있다. 이 상처는 ‘지겨움’이 아니라 ‘트라우마’라 일컫는 것이 합당하다. 그날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 각인되어 현재까지 이어진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세월호참사 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기회가 충분히 없었다.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목표로 2015년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특조위’)가 출범했지만 조사 업무를 마무 리하지 못한 채 2016년 9월 강제 해산되었고, 2017년 4월에 출범한 세월호선체조사위원 회(이하 ‘선조위’) 역시 확실한 침몰 원인을 도출하지 못한 채 두 개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처 럼 세월호참사에 대한 공식 설명이 없었던 이유는 세월호참사가 그만큼 복잡했다는 측면 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을 저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있 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세월호참사에 대해 한국 사회가 규명하고자 하는 ‘진상’이란 무 엇을 의미하는지, 그러한 진상에는 어떻게, 어디까지 접근할 것인지 등을 충분히 논의하 지 못했다. 즉 한국 사회가 세월호참사를 이해했다고 말하기 위해 전제되었어야만 했던, 진상규명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성찰과 공감대가 부족했다.

이처럼 세월호참사의 전모에 대한 공인된 설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부는 악의적으로 정 보를 날조했고, 그 결과 배·보상 등에 관한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참 사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참사의 책임을 묻고 향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고통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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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한 단초로 공식적인 진상규명 작업이 필요했지만, 이 작업이 계속 미루어지는 동안 참사 원인 가운데서도 자극적인 내용에만 관심이 쏠렸고, 결국 국민과 피해자들은 애도의 시 간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치유받고 회복할 희망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이 보고서는 지금까지 공인된 설명을 듣지 못했던 독자들이 세월호참사를 소상히 되돌아 보도록 작성한 기록이다.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왜 그토록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 어야만 했는가? 세월호의 피해자들은 지금까지 어떤 아픔을 겪어왔는가? 피해자들이 지 금까지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던 이유는 무엇인가? 왜 어떤 이들은 세월호참사 피해자들 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피로하다고 느끼게 되었는가? 한국 사회는 세월호참사 피해자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참사가 일어난 지 8년, 2022년이 된 지금도 우리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하지 못한 채 선정적인 언론 보도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발언을 수없이 들어왔다.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제대로 조사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 목소리는 왜곡 되거나 무관심 속에 묻히고 말았다. 2014년 4월 16일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 참사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피해자의 고통을 살피는 것을 시작으로 복잡다단한 세월호참 사의 전모를 조명해보자.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짙은 안개 속에서 476명이 승선한 세월호가 제주도를 향해 인 천항을 떠났다. 배가 출발하고 얼마 후 갑판 위 하늘에 화려한 불꽃이 펼쳐졌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세월호에 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은 레크리에이션 강사 와 게임을 하고 갑판 위에 올라가 불꽃놀이를 보면서 그간 학업과 일상으로 지친 마음을 달랬다. 다음 날인 4월 16일 아침 8시경, 단원고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삼삼오오 모 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늦게까지 베개 싸움을 하느라 잠을 설친 몇몇 학생들은 느긋하 게 쉬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제주도 수학여행의 설레 는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20 제1장
배반당한 신뢰
21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하지만 갑자기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오전 8시 52분, 한 학생이 119에 구조 요청 신고를 했다. 선내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울렸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대피 방송, 기다리라는 방송이 나왔잖아요. 저희는 아무런 지식도 없었고, 처 음에 탈 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로 나가라는 교육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승무원이나 선장이 저 희보다 지식이 많으니까 믿어야겠다는 생각, 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을 믿고 계속 기다 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승선했던 단원고 학생 z□□의 증언) 1) 수학여행 전 학교 강당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며 안전수칙에 관해 간단히 설명을 듣긴 했지만, 구명조끼를 착용하는 방법이나 세월호 안 탈출 경로에 관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개개인이 아닌 모두의 안전을 위해 방송에 따라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 었다. 누가 움직이면 “주변에서 야유를 했고, 선생님도 주의를 주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10번 넘도록 나오는 동안, 학생들은 해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 헬리 콥터랑 … 해경이 온대요. 뭐, 계속 알려줬어요. 30미터 전이라고 이렇게.”2) 하지만 해경은 선내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배가 더욱 급격히 기울며 가구들이 쓰러지 고 물이 밀려들자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승객들은 선실 내 캐비닛을 뒤져 구명조끼 를 찾아 입고, 미끄러운 벽을 더 잘 오르도록 신발을 벗었다. 선생님과 학생, 일반 승객들 은 서로 손을 내밀고 잡았다. 공포가 물밀 듯이 몰려들었지만 학생들은 “혼자였으면 얼마 나 무서웠겠냐”,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정신 차리자고, 서로 믿자”고 말하며 서로 의지했 다. 배 안에서 일반 승객은 단원고 학생에게 허리를 내어 밟고 밖으로 나가도록 도와줬고, 커튼을 묶어 만든 줄과 고무호스를 내려 허리에 묶게 하고 줄을 끌어 올렸다. 배

22 제1장
밖으로 탈출한 학생들은 바다에 뛰어내리고 가까스로 구명보트까지 올라가 배 안의 상황을 알 렸다. “저 뒤에 애들 엄청 많았다고. 저 뒤에 애들 아직 많다고.”3) 하지만 선내에서 구조되 기를 기다리던 승객들은 국가로부터 외면당했다. 1) 광주지방법원. 2014고합180, 공판기록, 제07권, 증인신문조서, 증인 z□□ (2014.7.28.), 10~15쪽. 2)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2016), 40쪽. 3) 앞의 자료, 47쪽.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침몰하는 세월호 안 승객들은 국가가 자신들을 구해주리라 믿었지만 차갑게 배반당했 다. 배의 안전을 책임지고 유사시 승객이 탈출하도록 도왔어야 할 선장과 일부 선원은 배 를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서 인명구조 작업에 뛰어들었어야 할 해경은 구조 요청을 외면하고 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 생존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배 속에 있던 승객들이 다 도움 주고, 뭐 해경들이나 그런 분들한테는 도움을 받은 적이 아예 없어요.” 4) 피해자들은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그간의 믿음이 오해 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들은 “‘우리나라는 이런 나라였구나’ 하는 걸” 느낀 다.5)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 ‘내 아이, 지금 남은 아이까지도 뺏어가면 어떡하지?’ 이 런 불안감, 그런 것 때문에 나라에 대한 모멸감”이 들기도 했다.6) 세월호참사는 국가가 국 민을 보호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신뢰를 산산조각냈다. 탈출한 생존자들은 이후로도 방치된 채 국가에게 보호받지 못했다. 생존 학생들은 중간 경유지로 도착한 서거차도에서부터 무분별한 취재 경쟁에 그대로 노출됐다. 물에 젖어 추 위에 떨고 있는 학생들에게 기자들은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고통의 세월,

23
카메라를 들이댔고, 이들의 모습은 여과 없이 방송 을 통해 전국으로 전파됐다. 생존자들이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이하 진도체육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마주한 상황은 극 도로 혼란스러웠다. 4) 앞의 자료, 46~47쪽. 5) 김정해·4.16기억저장소, 『그날을 말하다: 주현 엄마 김정해』, 한울 (2020), 103쪽. 6) 앞의 책, 116쪽. 방치된 혼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24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그 무정부 상태라는 말이 딱 맞는 정도로 혼란스러웠어요. 2차로 버스를 타고 진도실내체육관에 딱

내려서 체육관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는 뭐 아수라장이었죠.”(생존 학생의 증언) 7)

생존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지옥과 같은 혼란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수많은 기자가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학생들을 향해 “어떻게 나왔냐고”, “기분이 어떻냐고”, “친구들은 어 떻게, 친구들 선생님들 어떻게 된 것 같냐고” 질문을 쏟아냈다.8) 정치권이나 지역의 “높으 신 분이 오셔서 이렇게 저희를 다독이신다 하면은 그렇게 포즈를 취하시고 사진을 막 찍” 었다.9) 생존 학생들을 향해 기자들은 “돈 줄 테니까 제발 인터뷰 좀 한번 해달라”고 부탁 했고,10) 옆에서 몰래 듣고 있다가 대화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기도 했다. 안산의 단원고에서 학부모들 역시 극도의 혼란을 겪었다. 참사 직후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아무런 정보를 듣지 못한 채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학교로 모였 다. 단원고는 학부모들의 문의와 항의가 계속되자 해경과 언론 등을 통해 얻은 정보만으 로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잘못된 문자메시지를 학부모들에게 거 듭 전송했다. 급하게 올라탄 진도행 버스 안에서 학부모들은 전화를 돌리고 인터넷을 검 색했지만, 구조 상황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현장에 도착해서도 누가 구조됐는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구조본부, 진도군 등이 생존자 명단 작성을 위한 명확한 역할 분담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도체육관 시설 관리 담당자가 체육관에 들어온 생존자들에게 직접 이름을 받아적는 방식으로 생존자 명단을 작성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구조 후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된 생존자들의 정보를 취합하지 못했고, 승선자 정보가 잘못 흘러들어 생존자가 아직 구조되지 않은 실종자로 게시되기도 했다. 급히 현장에 도착해 구조자 명단을 보고 가족 이름을 확인하지 못한 사 람들은 오열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하루가 지난 4월 17일 오후까지도 정확한 구조자 명단 을 확인할 수 없었다. 7)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 실태조사 1,2과제 최종보고서”, 피해자지원점검과(2016.9.19.), 14쪽. 8)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2016), 50쪽. 9) 앞의 자료, 153쪽. 10) 앞의 자료, 152쪽.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고통의 세월,

25

정부 부처와 관계자들은 이처럼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방치했다. 당시 진도체육관에

있었던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의 고위공무원들은 관계 공무원들을 소집하거나 현장을

지휘하지 않았다. 안전행정부는 ‘해상사고는 해양수산부 소관’이라며 현장 지휘에 나서지 않았고, 해양수산부 역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가가 잘못된 정보로 오히려 혼 란을 더하고 현장을 방치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있었다.

시간

참사 다음 날 생존자 가족들이 대부분 귀가하고 실종자 가족들은 진도체육관에 남았다.

아무도 책임 있게 설명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실종자 가족들은 진도체육관에서 나와 수 난 현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팽목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도체육관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팽목항에 임시로 설치된 천막에서 브리핑을 듣고 실종된 가족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그런 하루가 매일매일 반복”됐다.11) 가족을 기다리는 반복된 날들 앞에서 시간 의 흐름은 낯설기만 하다. “진도에 꽃 필 때 왔는데, 모심고 있네, 나락을 베네, 단풍 드네 … 계절 바뀌는 걸 보면 답답”하다.12) 4월 16일 세월호참사 이후 실종자 가족, 유가족을 포함한 피해자들의 시간은 멈췄다. 가족을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상념과 죄책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밤늦게까지 사진을 보며 울다 가 간신히 잠들고, 그러다가 밤낮이 바뀌는 게 일상이었다.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수년 간 수면제와 안정제에 의존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한 유가족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 직도 2014년 4월 16일을 살고 있다.”13)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지 않는다. 11) 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창비 (2015), 268쪽. 12) 앞의 자료, 269쪽. 13) “[르포] ‘아고라’된 광화문 광장…꿈틀거리는 시민들”, 노컷뉴스 (2015.4.12.).

26 제1장
멈춰버린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27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28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피해자들은 4월 16일 이전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후로도 고스란한 시간의 흐름을 경험할 수 없었다. 피해자들은 참사 이후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온전히 애도할 만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세월호참사 를 차분히 되돌아볼 만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희생자를 추모하고, 참사를 기억하며, 이로 부터 한국 사회가 성찰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련의 절차들이 무시됐다. 정부는 피해자 들을 거리에 내몰고 사회 밖으로 밀어내며 피해자들의 시간에 역행하기도 했다. “기억교 실이나 팽목항, 분향소 같은 장소들이 하나둘 사라질 때마다 마음에 구멍이 계속 뚫리는 느낌이에요.”14) 추모 시설의 건립과 운영을 둘러싸고 지역 사회는 갈등했고, 정치권은 선거 를 위해 그러한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고통의 세월,

국민을

적대시한 국가

2022년 4월 16일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기억, 약속,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8주기 기억 식에서 피해자들은 새 정부에게 진상규명의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응급구조사 가 되어 기억식에 참석한 한 단원고 생존 학생은 “계속해서 학생의 신분에 멈춰 있고 성인 이 될 줄은 몰랐는데 26살이 되어버렸네요. 제가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쯤이 면 조금은 진상규명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그만하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네요.”라고 말했다.15) 세월호참사 이후 8년, 희생 자를 온전히 추모하고, 진상을 규명해 국가의 책임을 묻고, 사회가 더욱 안전해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마땅한 시간의 흐름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한 것이다. 국가는 피해자들을 감시와 억압의 대상으로 여겼다. 현장에서 가족의 생환을 기다리던 가족들 사이에서 수상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실종자 가족인 줄 알고 함께 있었던 몇

14) 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창비 (2019), 353쪽. 15) “‘벌써’가 아니라 ‘아직’ 8년…“尹 당선인, 진상규명 약속 지켜달라””, 노컷뉴스 (202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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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몇 사람들이 알고 보니 경찰로 확인되었고, ‘가족 대표’ 행세를 하던 사람도 위장한 것으 로 발각됐다. 가족들이 생환을 기다리는 공간이었던 팽목항 가족 숙소에서 같이 자던 사 람들 가운데 정보관들도 섞여 있었다. “거의 사복경찰들이 부모들 막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스윽 와가지고 듣는 거예요. 근데 이제 사복 입 으니 누군지 모르잖아요. 근데 표가 나요. 등산복 차림에 좀 이렇게 깎아지른 이런 밤톨 머리에 그 무 전기에. 그니까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스윽 가면, 가서 인제 ‘지금 이런 상태고요. 가족들은 이런 상태 고, 그담에 큰 동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고) 통화하는 걸 들킨 거죠, 가족들한테. 그래 가지고 멱살을 잡고.”(유가족 홍영미)16) 극도의 혼란 속에서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와의 소통 채널 확립 등을 요구하며 청와대 항 의 방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경찰은 1,800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배치하며 이를 저 지했다. 경찰은 가족들을 에워싸고 행진을 차단하며 “이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라 질타했 다. 언론은 현장의 문제와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사항은 보도하지 않고 가족들이 청와대 방문을 시도하다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는 점만 보도했다. 정부는 피해자들을 국론 분 열을 노린 반정부 세력으로 취급했고 이들을 더 강하게 감시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바닷물 속에 뛰어들어 희생자들을 수습했던 잠수사는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해경에게 고발당했다. 세월호참사 당시 잠수 사는 목숨을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는데도 말이다. “저희 잠수하면서도 ‘너무 무리합니다, 너무 무리합니다’ 그래도 그래도 물에 들어갔어요. 그때 해수 부 장관이나 경찰청장이 들어가 달라고…, 들어가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들어갔습니다. ‘부상 입으면 책임지겠냐?’고 (하니까) ‘책임지겠다’고까지 얘기를 했어요, 해경이나 해수부 장관이 나중에는 책임지 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잠수사 김상우)17) 16) 홍영미·4.16기억저장소, 『그날을 말하다: 재욱 엄마 홍영미』, 한울 (2020), 59쪽. 17) 김상우·4.16기억저장소, 『그날을 말하다: 잠수사 김상우』, 한울 (2020), 46쪽.

30 제1장
31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사진 출처 : 연합뉴스
32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참사 이후 여러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아온 잠수사를 고발한 국가에 대해 잠수사들은 “이 나라가 진짜로, 정말로 실망”스럽다고, “우리 써먹고 버린 거 같다”고, “자존감 떨어지 고 슬프다”고 말한다. 유가족이 보기에도 잠수사들이 “목숨을 걸고 잠수를 해내서 아이 들을 다 데리고 왔다는 (상황을) 우리는 뻔히 아는데 그것을 다 묻어두고, 정의를 묻어두고 이 사람들 고소, 고발”을 하는 것은 “진짜 국가 폭력”이었다. 2015년 9월 15일 국회 안전행 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한 잠수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책임을 져 야 한다면, 왜 그게 저희 민간 잠수사입니까? … 저희가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앞으로)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18)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고통의 세월,

참사 이후 정부가 생존자들을 위해 마련했다는 심리 지원 프로그램들은 초기에 피해자 들의 아픔을 치유하기보다는 더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정부를 불신하게 했다. 단원고 생 존 학생들은 참사 당일 병원에 입원해 400문항에 답하는 고강도의 심리검사를 받고 2014 년 4월 30일부터 연수원에 입소하여 ‘힐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 지 주5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참사를 겪은 지 얼마 안 된 생존자들이 정서적으로 안정 을 찾고 회복하기에는 지나치게 압축적인 일정이었고, 학생들은 강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정신의학의 ‘실험 대상’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이 놓친 대상도 있었다. 단원고가 참사 당일 임시휴교에 돌입하고, 부모들이 모두 생사 확인을 위해 진도로 이동한 상황에서 실종 학생의 미성년 형제자매 는 학교나 집에 혼자 남겨졌다. 생존 학생이 연수원에 부모와 동반 입소해 있는 동안 형제 자매는 집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성년 형제자매가 남은 가족 으로서 느끼는 고통은 자기혐오나 공포의 감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 18) “어느 세월호 민간 잠수사의 죽음”, 시사IN (20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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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4・16세월호참사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한동안은 거울을 못 봤어요. 거울을 못 봐서 다 덮어놓고. 헤어드라이기를 켜면 무서운 느낌? 소리에 깜짝 놀라고, 가스레인지 켜놓은 것도 다섯 번씩 왔다 갔다 확인하고. 확인해야 마음이 편해요.”(희생학 생의 형제자매)19)

경기도교육청은 희생 학생의 형제자매가 재학한 학교에 상담 인력을 배치했지만, 이마저 도 해마다 재계약되거나 교체되어 “했던 일을 또 얘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또 생기고 … 이 런 상황들이 생겨서 많이 힘들어하고 그 이후에는 아예 끊”는 일들이 발생했다.20) 또한 형 제자매들은 “상담사분이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 이해를 굉장히 못 하고 계시는 느낌”을 받 거나,21) “상담 시간 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재촉하여 상담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지기도 했다.22) 생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심리 지원 프로그램이 상당 부분 피해자들의 공감 없 이 진행되면서 상처를 치유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계속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더 커지기도 했다. 2015년 「세월호피해지 원법」이 제정되면서 정부는 의료비 지원 기한을 2016년 3월 28일로, 정신질환 검사 및 치 료 지원 기한을 2020년 3월 28일로 설정했다. 하지만 수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의료

비 지원이 끊기는 시점에서야 드러나기 시작하는 아픔도 있다. 현장에서 받은 충격 외에 참사 이후 정부 행태로 인해 2차로 생긴 트라우마도 있었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이 겪 은 여러 정신적인 상처가 치유되기에 5년이라는 기한은 너무 짧았다. 한 잠수사는 여전히 “정부에 버림받은 거에 대한, 진상규명 똑바로 안 된, 그 담에 치료 지원이 안 된 것들에 대 한 울분”을 안고 있다고 말한다. 치료 지원을 제대로 못 받은 한 잠수사는 이렇게 말한다. “치료 못 받는 것? 큰 울타리로 보면 중요하지 않다. 이 사회(전체)가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지. 세월호는, 세월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의 현 모습이다.”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315쪽. 20) 앞의 자료, 302쪽. 21) 경기도교육청 중등교육지원과, “세월호 사고 희생자 형제자매 및 직계비속 심리치유 현황 제출”, (2014.9.1.), 75쪽. 22)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3)치유회복프로그램 운영 실태 등에 관한 통화조사 결과보고”, 3쪽.

23) “어느 세월호 민간 잠수사의 죽음”, 시사IN (20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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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성균관대학교산학협력단,
피해자 지원 심화 연구 최종보고서
23)
“세월호참사
2권”, 가습기살균제사건과
35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36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지금까지도 많은 피해자가 자신이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되도록 숨기면 서 살고 있다. 어떤 모임에 나가든 누군가가 먼저 세월호 피해자임을 눈치채고 물어볼까 봐 두렵다.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이들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 한 유가족은 이를 ‘나비 효과’라고 부른다. “내가 가서 울면 그 사람이 슬플까 봐 … 광화문 가서 엄마들이 뭐라고 했냐면 우리가 너무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울고 있으면, 시민 들이 우리한테 와서 말도 안 건다고. … 그런데 제가 광화문에서 웃으니까 페이스북에 ‘애 잃고 웃네’ 그런 게 올라온 거예요. ‘광화문에서 웃지 마. 사람이 왔을 때 웃어.’”24)

참사 당시 수색 활동을 위해 바닷물에 뛰어들었던 잠수사들은 이후 채용에 어려움을 겪 었다. 세월호참사의 수색 활동에 참여했던 잠수사들이 골괴사 같은 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관급공사 현장에서는 신체검사를 한 뒤 해당 질환을 앓고 있음을 확 인하면 고용하지 않았다. 민간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참사 수습에 참여한 잠 수사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선입견 때문에 채용 과정이나 업무를 수행할 때 부당대우를 받았다. 세월호참사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그 자체로 꼬리표가 되어 이후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참사 현장을 수습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적대시한 정부를 상대 로 피해자들은 세월호참사의 진실을

고통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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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히고 피해자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 대했다. 2014년 5월 5일 200명이 넘는 단원고 피해자 가족들은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 24) 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창비 (2019), 301쪽. 세월호참사라는 꼬리표 진실과 정의를 향한 연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현 사단법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이하 4·16가족협의회)를 발족하고, 국회 를 상대로 철저히 진상규명을 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결정은 계속해서 미뤄졌고, 피해자들은 전 국민 서명운동과 100일 넘는 농성을 하며 가 까스로 국회에서 특별법이 통과되도록 했다. 비록 특별법은 4·16가족협의회의 요구사항 에 비하면 미흡했지만, 이에 근거하여 세월호참사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 활동이 개시될 수 있었다. 참사 현장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길거리에서 힘을 보탠 시민사회의 작은 도움의 손길들 이 있었다. 서거차도 주민들은 세월호로부터 막 탈출한 생존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언론에서 무분별하게 취재할 때 보호하고자 했다. 진도의 택시 기사들은 희생자 가족들 을 위해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며 봉사했다. 참사 당일 저녁 안산시민들은 곳곳에 서 촛불을 들었고, 4월 17일 ‘무사 귀환을 위한 안산시민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이후에는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여러 활동을 이어갔다. 4월 19일 대학생연합동아리 알트(ALT) 회원 7명은 리본 500개를 만들어 서울 신촌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제 많은 참사 피해자들이 봉사자로 나서고 있다. 이들은 사고 이후 자신들을 도와줬던 자원봉사자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껴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봉사한다고 말한다. 2022년 5월 경북 울진 산불 현장에 봉사 활동 을 다녀온 한 유가족은 “세월호참사 때 자원봉사자에게 받았던 고마움을 다른 피해자에 게도 전하고 싶었다”며 “유가족도 아이와 똑같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이 말에 두 번 당하지 않고 계속 싸울 것”이라 말했다.25)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진상규명을 통해 피해자 인권을 되찾고 안전사회를 만들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힘겹게 싸워왔다. 피해자들은 온전한 진상규명을 위해 세월호특별법 제정 운동을 펼쳤고 이로써 진상규명 활동을 제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시민들은 단체 구성 원으로서, 노란 리본과 촛불을 든 개인으로서 이러한 움직임에 연대하며 힘을 보탰다. 피 25) “‘유족다움’ 벗으려 하이힐 꺼내 신었습니다”, 서울신문, (2022.4.14.).

38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39
40 제1장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해자들은 정부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정식 조사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해

산하자 국민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켜 사참위가 출범하기 전까지 진상규명 활동을 이어 나

가고자 했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인권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은 비단 세월호참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이 이후 발생한 재난 현장들을 찾아가고 그들과 연대했던 것처럼, 진실과 정의를 향한 피해자들의 발걸음은 다른 참사 피해자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고 우리 모두 안전한 사회에서 살 권리를 확보하려는 과정이었다.

참사 이후 8년, 세월호가 한국 사회에 남긴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를 기록함으로써 피해자들을 포함한 사회 전체의 공동체 회복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을까? 세월호참사의 전모를 낱낱이 파헤치고 이것을 정확히 기록하는 일은 피 해자에게 공감하고 시민사회의 연대를 이루어내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피해자들은 2014 년 4월 16일 평온했던 일상을 산산조각 내버린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후 국가가 어떻게, 왜 그렇게 대응해왔는지 알 권리가 있다. 또 같은 날 세월호참사 소식을 접 한 모든 국민 역시 세월호참사의 발생 원인, 수습 과정, 후속 조치와 관련된 사실관계와 책 임 소재의 진상을 이해할 권리가 있다. 이처럼 세월호참사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기관인 사참위의 일차 적 역할이라면, 이 보고서는 세월호참사의 진상에 대해 국가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설 명이어야만 한다. 세월호참사는 배가 출항하기 전에 벌어졌던 허술한 관리, 4월 16일 침몰 과정에서 배를 버리고 그 안의 무수한 생명을 저버린 선원과 해경, 피해자를 보호하기는 커녕 적대한 국가, 조롱을 일삼으며 피해자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던 일부 시민과 정치 권 인사, 대중매체의 행태를 모두 포함하는 장기간의 사회적 참사다. 세월호참사 보고서 는 사참위에서 현재까지 진행한 수년간의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고통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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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조사 작업들에 기반하여 이 모든 과정을 담고
했다. 이 보고서가 수행해야 할 일차 과제는 바로 우리가 다 같이 지닌 공통의 기억, 즉 세월호참사의 기록, 공동체의 회복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침몰 순간의 공통 기억에서 출발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모두가 납득할 만한 참사의

전모를 밝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세월호참사는 2014년 4월 16일 특정 장소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재난을

예방하고, 대응하고, 사후 지원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 였다. 세월호참사의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은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는 와중에 배를 버 리고 떠난 선원들이나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하지 않은 해경들을 포함해, 참사 현장을 관 리하지 못했던 국가 재난 대응 체제, 정부 보고 및 정보 공유 시스템, 국가의 국민 감시 체 제 등과 같은 잘못된 사회구조에 있다. 하지만 이는 사회구조의 전반적인 체계를 포괄적 으로 비난함으로써 책임을 모호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책임 을 회피했는지를 낱낱이 조사하고 기록함으로써 이 참사가 몇몇 개인이 잘못하여 일어난 것이 아님을 밝히고, 국가가 어떻게 잘못했고 어떤 부분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명백 히 드러내고자 한다. 국가가 다하지 못한 책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작업은 세월호참사와 같은 참사가 한국 사회에서 더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다. 국 가가 재난을 예방하고, 수습하고, 후속 지원을 할 때 책임을 쉽게 회피할 수 없는 제도를 마련하는 작업은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이 침해받은 인권의 일부를 회복하는 길이다. 또 온 국민이 안전한 사회에서 살 수 있는 지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에서 구체적인 교훈을 얻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계속 애쓴다면, 시 민사회가 국가의 존재 의의를 다시 생각하고 국가를 향한 무너진 신뢰를 조금씩 쌓아나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참위의 조사 활동과 이를 정리한 세월호참사의 기록은 공동체의 회 복을 위해 앞으로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여정의 첫걸음이다.

42 제1장
43 고통의 세월, 우리는 무엇을 겪었는가 제1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 2 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1. 불안한 출항 2. 세월호 침몰의 재구성 3. 침몰 원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출항

세월호는 승객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한 상태로 출항했다. 4월 15일 세월호에 오른 승객 443명은 세월호가 중고 선박으로 수입되어 여객선으로 증개축하는 과정에서 무게 중심이 높아지고 복원성이 취약해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출항 당일 적정한 적재량보다 한참 많은 화물이 불안한 상태로 적재된 채 함께 제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 다. 승객들은 안전한 운항을 위해 닫혀 있어야 하는 수밀문과 맨홀이 모두 열린 상태였다 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승객들은 청해진해운에서 세월호를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 출항시 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청해진해운의 세월호 도입과 증개축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일본 나미노우에호(6,586톤, 1994년 건조)를 8억 엔(한화 115억 원)에 들

여와 인천~제주 항로의 내항 여객선 세월호로 증개축해 사용했다. 1999년부터 인천~제

주 항로를 독점해온 청해진해운은 2003년부터 오하마나호(6,322톤, 1989년 건조)를 월·수·금

요일(인천항 출발 기준)에 운항했으나 항로를 복선으로 운항하기 위해, 그리고 오하마나호의 선

령이 다하면 이를 대체하기 위해 일본 나미노우에호를 사들였다.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를 들여온 직후에 2012년 10월 7일부터 이듬해 2월 16일까지 전남 영암에 있는 CC조선에서 이 선박의 증개축 작업을 벌였다. 승객이 머무는 여객실을

증설해 승객 정원은 804명에서 117명 늘어나고 선원 정원은 1명 줄어 최대 승선 인원은 956명(여객 921명, 선원 35명)이 됐다. 증개축으로 선수 우현 램프가 제거됐다. 이런 개조 작업으 로 아무것도 싣지 않은 배 자체의 무게를 뜻하는 경하중량은 307톤 증가했고, 이에 따라 선박이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을 의미하는 재화중량은 307톤 감소했다.26) 개조된 세월호는 선수에서 선미까지 145.61m, 좌현에서 우현까지 22m인

46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26) 적재할 수 있는 짐의 최대 중량을 의미하는 재화중량에는 화물, 연료, 식량, 평형수, 창고품, 여객, 선원, 소지품 등 일체가 포함된다. 선박이 수송할 수 있는 실제 화물의 톤수는 재화중량 톤수에서 화물 외 다른 짐들의 무게를 뺀 중량이 된다.
여섯 층의 구조 1. 불안한

표 2-1 선박 주요 제원

선명 세월호 깊이 14m(건현갑판 7.67m)

국적 대한민국 폭 22m

선적항 인천광역시 무게중심 12.102m

호출 부호 100 세월 총 톤수 6,825톤

선박 번호 ICR-121832 재화중량 톤수 3,664톤

선박 종류 로로여객선 만재흘수 6.264m

선박 소유·운항자 청해진해운 주기관 12PC-6V(AKASHI, 일본)

최대 탑재 인원 956명(여객 921명, 선원 35명) 최대 출력 6,618kW X 520RPM X 2기 조선사 일본 하야시카네조선소 연료 소모량 179.52gr/kW·hr 용골 거치일/진수일 1994년 1월 25일/1994년 4월 13일 추진기(Inward) 2기

선박검사단체 한국선급 타(Rudder) 1기 전장(L.O.A.) 145.61m 최대속력/설계속력 23.55노트/22노트

로 이뤄졌다. 위쪽 3개 층(선교갑판, A갑판, B갑판)은 승객이 머무는 객실이며, 가운데 2개 층(C갑 판, D갑판)은 차량이나 화물 등을 실을 수 있는 화물칸이다. 선교갑판 위쪽으로 승객들을 위 해 불꽃놀이를 하던 컴퍼스갑판이 있고, D갑판 아래층에는 화물칸, 기관실, 평형수·연료 유·청수 탱크, 횡방향 스러스터 등이 있는 구역과 화물을 적재하는 E갑판이 있다. A갑판에는 2등 객실, 로비 등이 있으며 총 여객정원은 484명이었다. B갑판에는 3등 객실, 2등 객실, 매점, 노래방, 로비(안내 데스크), 식당, 주방(선원 식당), 선원 침실, 운전자 객실 등이 있 었고, B갑판의 총 여객정원은 426명이다. C갑판은 선수갑판과 개방된 화물 적재 구역(컨테 이너 등 적재), 그리고 화물칸(차량 적재구역), 선미갑판으로 구성되었다. 선수 쪽에는 배의 닻을 올 리고 내리는 양묘기 등 계선 시설과 선수 마스트가 있었다. 화물칸 뒤 선미 쪽에는 C갑판 과 B갑판 사이에 승용차를 적재하는 공간인 트윈갑판이 있었다. 세월호의 1층 격인 D갑판에는 선수 창고와 화물칸, 선미 창고가 있었다. 화물칸 내 화물 은 선미에 있는 램프를 통해 D갑판으로 들어왔다. 화물차 및 일반 화물은 주로 D갑판에

47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48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그림 2-1 세월호 선박 구조

4・16세월호참사

배는 국내에서 다시 선급(선박 검사 기관)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2012년 10월 6일 일본에서 출항한 세월호는 27) 배가 짐을 가득 실을 수 있는 한계를 규정하는 데 기초로 삼는 갑판. 보통 상갑판을 말한다. 28) 선박 양 측면 날개 형태로 설치돼 좌우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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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종합보고서
싣고, 승용차는 차량 이동용 경사로를 통해 C갑판으로 옮겨 실었으며, 일부 잡화 등은 D 갑판의 화물 승강기를 통해 E갑판에 적재됐다. 건현갑판27)인 D갑판은 물의 압력으로 인 한 침수, 누수를 방지할 수 있는 수밀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선박의 하부 구조는 해수와 접하는 외판(선저외판, 선측외판, 갑판 등)이 물이 새지 않도록 수밀이어야 한다. 또 일부 구역이 침 수되더라도 다른 구역으로 물이 퍼지는 것을 막아 배가 오랫동안 떠 있을 수 있게 수밀격 벽도 일정 간격으로 설치해야 한다. D갑판의 아래쪽 공간(E갑판)에는 선수 피크 평형수 탱크, 1번 평형수 탱크, 선수 횡방향 스 러스터실, 2번 평형수 탱크, 3번 평형수 탱크, 힐링 탱크, 1번 연료유 탱크, E갑판 화물칸, 기관실, 보조 기관실, 축실, 2번 청수 탱크, 선미 횡방향 스러스터실, 타기실 등이 있었다. 기관실, 보조 기관실 및 축계실 각 격벽에 있는 출입문은 수밀문으로 구성돼 있었다. E갑 판 아래쪽에는 4과 5번 평형수 탱크, 1번 청수 탱크, 핀 안정기28) 실, 2번 연료유 탱크 등이 있었다. 하지만 개조 이후 세월호는 많이 바뀌었다(표 2-2 참조). 선미부에 전시실을 새로 짓고, 객실 을 증설해 승객 정원이 기존 840명에서 956명으로 116명이 늘어나면서(승객 117명 증가, 선원 1 명 감소) 이로 인해 여러 시설도 새롭게 설치되었다. 그러면서 선박의 무게는 239톤이 증가했 고, 무게중심이 최소 60cm가량 높아진 것으로 평가됐다. 이에 따라 세월호는 경하중량이 늘어나면서 만재배수량을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재화중량을 줄여야 했고, 줄어든 재화중 량만큼 선박 평형수 적재량을 늘려 상시 적재해야 했다. 늘어난 평형수 적재량은 세월호 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지키고 출항 전에 확인했어야 했다. 증개축한 결과, 세월호의 복원성은 전반적으로 일본 선박 건조 당시보다 취약해졌다. 이는 세월호 선박 검사 과정에서도 일찍이 확인됐다. 세월호처럼 중고로 들여온

표 2-2 세월호 개조 전후 비교

이전 개조 이후 변화량

총 톤수 6,586톤 6,825톤 239톤 증가

만재 배수량 9,907톤 9,907톤 변화 없음

경하 중량 5,926톤 6,233톤 307톤 증가 재화 중량 3,981톤 3,674톤 307톤 감소

화물 적대 최대량 2,437톤 987톤 1,450톤 감소

선박 평형수 적재량 370톤 1,703톤 1,333톤 증가

최대 승선 인원 840명 956명 116명 증가

무게중심 11.27m 12.102m 11.912m 83.2cm 상승 64.2cm 상승 *개조 이후 무게중심 값의 변화는 선체조사위원회의 두 가지 보고서에서 인용했다. 12.102m와 11.912m는 선조위 내인설과 열린안 보고서가 각각 제시한 값이다.

곧장 목포에 있는 CC조선소에 도착해 증개축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는데, 증개축 작업 도중에 목포 외항부두에서 한국선급의 경사시험29)을 받았다. 한국선급의 경사시험 에서는 증개축 이후 세월호의 경하중량이 일본에서 건조된 당시 선박의 5,926톤보다 187 톤 늘어난 6,113톤으로, 무게중심은 11.27m에서 약 51cm 더 높아진 11.777m인 것으로 계 산됐다. 무게중심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선박이 물 위에서 기울다가도 제자리로 돌아 가는 복원성이 취약해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국선급의 경사시험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감사원과 선체조사 위원회 조사 결과에서 각각 확인됐다. 2014년 10월 감사원 조사 결과, 경사시험 당시에 경하중량을 계산할 때 누락된 중량을 추가로 확인했다. 감사원은 경사시험 계산 오류를 수정하고 추가로 확인된 중량을 보정한 결과에서 세월호의 경하중량을 6,213톤으로, 무 게중심을 11.889m로 다시 수정했다. 이를 통해 무게중심은 일본 선박 건조 당시보다

50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29) 경사시험은 배 위에서 중량물의 위치를 옮겨 배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약 62cm나 더 높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측정하는 시험을 말한다. 선박 자체의 무게인 경하중량과 무게중심을 구하는 데 필요한 시험이다. 구분 개조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2018년 선조위가 인양된 세월호 선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또다시 누락된 중량 이 추가로 확인돼 세월호의 경하중량은 6,233톤으로 수정됐으며, 이에 따라 무게중심도 다시 조정됐다. 선조위 열린안 보고서는 세월호의 무게중심을 일본 선박 건조 시 승인된 것보다 64.2cm 더 높아진 것으로 계산했으며, 내인설 보고서는 83.2cm 더 높아진 것으로 계산했다. 계산 결과는 각기 달랐지만, 세월호의 경하중량은 증개축으로 300톤가량 늘어났고, 그로 인해 무게중심은 상승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감사원과 세월호 선체조사위원 회에서 발견한 누락된 중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세월호는 한국선급에서 승인한 99척의 여객선 중 유일하게 평형수와 화물의 무게를 제외한 경하중량 상태의 메타센터(선체의 무게 중 심-부력 중심 교차점, M)가 무게중심(G)보다 낮았다(‘음의 메타센터’ 상태). 이는 선저 평형수 탱크에 평형 수를 넣지 않은 상태에서는 복원성이 매우 취약해 스스로 직립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의 미한다.

4월 15일 출항 당일의 세월호

4월 15일 세월호는 어떤 상태로 인천항에서 출항했을까? 선박의 복원성과 화물 적재 상 태, 그리고 수밀문의 관리 상태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수사하거나 조사한 여러 기관이 주 목하며 일차 조사 대상이 되었다.

선박 복원성 어떠했나 출항 당일 세월호가 어떠한 상태로 운항했는지, 특히 그 선박 복원성30)의 상태는 어떠했 는지에 대한 평가는 선체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 크게 두 갈래로 엇갈렸다. 출항 당일 세 30) 선박의 복원성은 물 위에서 배가 기울어졌다가도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오려는 성질을 말하는데, 복원성은 선박의 복원성 측정 시험 또는 계산식을 통해 평가된다. 복원성 시험은 선박을 일부러 횡경사시켜 선박의 무게중심 위치를 측정하는 경사시험, 선박을 동요시켜 선박의 횡요주기를 측정하는 동요시험 등을 통해 이뤄진다. 복원성 계산은 화물을 싣지 않았을 때 또는 화물을 실었을 때의 중량 중심(무게중심)과 침하(트림) 값을 이용한 계산 등이 활용된다. 그러므로 무게중심(G)과 침하 값은 복원성 계산과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해양수산부고시 제2020-8호, 「선박 복원성 기준」, 국가법령정보센터.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51

복원성 수치: GM, GoM, GZ

GM과 GoM은 선박의 복원성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다뤄지는 계산값이다. GM은 아래 그림에 나타나 는 배의 무게중심(G)과 메타센터(M) 간의 거리, 즉 G와 M 간의 거리를 말한다. GM은 초기 복원성을 보 여준다. GM이 클수록 복원성은 좋아진다. 여기서 ‘메타센터(M)’는 배가 기울었을 때 배의 최저점(K)에 서 무게중심을 통과하는 중심선, 그리고 기울 때 옆으로 이동하는 부력중심에서 부력의 작용 방향으로 그은 선이 만나는 점을 말한다. 무게중심이 낮을수록 GM이 커지고 선박은 안전해진다. GoM은 여기에 더해 평형수와 청수의 자유표면효과를 반영해 계산한 복원성 수치이다. 평형수 탱크 에 물이 100% 차지 않는다면 물이 출렁이면서 자유표면효과가 생기는데 그로 인해 무게중심의 위치 와 GM이 달라진다. 이를 반영한 수치가 GoM이다. 아래 그림에서 G-Z 값의 변동을 복원정 곡선(GZ curve)이라 부르는데, 이 역시 복원성을 나타내는 수치이다. 선박의 무게중심(G)은 높아질수록 선박의 안정성이 깨지지만, 복원성 수치인 GM과 GoM의 값은 커질수록 배의 복원성은 좋아진다. 배가 기울어졌을 때 GM이 양수면 평형 상태로 되돌아가지만, GM이 음수면 기울어진 방향으로 더 기 울어져 전복된다. 그림 2-2 부력중심과 무게중심, 그리고 복원력의 관계(출처: 선조위 종합보고서)

52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월호의 복원성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데에는 여러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출항 당일 세

월호의 실제 상태를 지금 와서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항 당일

세월호의 복원성을 계산하려면 출항 당시의 여러 기록과 인양한 세월호에서 확인된 증거 들을 바탕으로 당시의 화물과 연료, 평형수, 청수의 양을 추정하여 계산해야 했다. 선조위의 내인설 보고서와 열린안 보고서에는 출항 당시 세월호의 복원성이 서로 다르게 계산되어 있다. 내인설 보고서에서는 GM 0.724m, GoM 0.406m로, 열린안 보고서에서는 GM 0.74m, GoM 0.62m로 계산되었다. 세월호 선박의 화물, 연료, 평형수, 청수 등의 양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엇갈렸다. 특히 세월호 평형수의 자유표면효과를 어떻 게 얼마나 반영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벌어졌다.

자유표면효과에 대한 평가 차이는 세월호 평형수 탱크 상태에 대한 추정에서 비롯했다. 내인설은 4, 5번 평형수 탱크가 95% 정도만 찼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유표면효과가 크

다고 보아 출항 당시의 세월호 복원성을 GoM 0.406m로 계산했다. 이런 근거를 바탕으 로 내인설은 “4월 15일 세월호는 출항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GoM이 0.5m 이하 일 때는 다른 선박과 마주쳐 피하거나 변침점에서 대각도로 타각을 사용할 경우 배의 횡 경사가 커져 전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했다.31) 이와 다르게 열린안 은 평형수 탱크가 98% 이상 찼을 것으로 판단했으며 또한 자유표면효과를 줄여주는 내 부재가 설치된 평형수 탱크 구조를 감안해 계산하면 출항 당시의 세월호 복원성은 GoM 0.62m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세월호 선박의 초기 복원성에 대한 합동수사부와 해양안전심판원, 세월호특조위, 그리 고 선체조사위원회의 내인설과 열린안의 평가를 모아 정리하면(표 2-3 참조), 대체로 GM은 0.609m부터

53
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31) 세월호
0.857m까지 대략 0.25m의 편차를 보였으며 평형수의 자유표면효과를 반영
GoM은 0.405m부터 0.627m까지 대략 0.22m의 편차를 보였다.
선체조사위원회(김창준·김영모·김철승 위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침몰원인조사(내인설)』, (2018.8), 67쪽.

비교 항목 검경합수부 해양안전심판원 세월호특조위 선조위 자연소실분 미반영 자연소실분 반영 내인설 보고서 열린안 보고서 화물(톤) 2,142,700 2,142,700 2,142,700 2,286.100 2,210.085 2,210.085 평형수(톤) 761.200 761.200 743.972 743.972 788.029 799.02 연료유(톤) 198.380 150.600 150.600 150.600 204.440 204.440 청수(톤) 150.000 259.000 259.000 259.000 268.608 268.608 재화중량(톤) 3,462,280 3,523.200 3,505.971 3,649.372 3,515.032 3,654 경하중량(톤) 6,113.000 6,213.000 6,213.000 6,213.000 6,232.718 6,233.000 배수량(톤) 9,575.280 9,736.200 9,718.971 9,862.372 9,882.450 9.887

GM(m) 0.609 0.820 0.810 0.694 0.724 0.74* GoM(m) 0.483 0.700 0.460 0.580 0.406 0.62* *열린안 보고서에는 NAPA(선박 안정성 평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복원성 계산값이 함께 실렸다. 그 값에 따르면 GM 0.857m, GoM 0.707m이다.

배수량(톤) 9,553.6 9,646.980 9,629.752 9,775.176 9,786.15 [1번 조건] 9,790.0 [3번 조건] 9,749.0 [4번 조건] 9,567.2

평균흘수(m) 6.058 6.063 6.053 6.166 6.22

[1] 선미/선수 6.035/6.310 [3] 6.002/6.293 [4] 5.615/6.456

선미트림(m) -0.646 -1.022 -1.054 -0.262 -0.26 [1] -0.275 [3] -0.291 [4] -0.841

KG(m) 10.53 10.57 10.58 10.521 10.40 [1] 10.453 [3] 10.485 [4] 10.641 GM(m) 0.67 0.73 0.73 0.626 0.64 [1] 0.619 [3] 0.591 [4] 0.561

GoM(m) 0.37 0.62 0.38 0.306 0.51 [1] 0.517 [3] 0.311 [4] 0.495

54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표 2-3 출항 당시 복원성 수치 기관별 비교 표 2-4 사고 당시 복원성 수치 기관별 비교 비교 항목 검경합수부
해양안전심판원 선조위 사참위* 자연소실분 미반영 자연소실분 반영 내인설 보고서 열린안 보고서
*사참위는 1번 조건부터 4번 조건까지 네 가지 경우를 가정하여 복원성을 계산했다. 2번 조건은 실제 상황과 상당히 동떨어진다고 판단되어 제외됐다.
1번 조건(Case 1)에서는 경사 시험, 화물량 추가 조사 결과를 선조위 열린안 계산 방식에 반영했으며, [3] 3번 조건에서는 경사시험, 화물량 추가 조사 결과를 선조위 내인설 계산 방식에 반영했고, [4] 4번 조건에는 1 번 조건에서 1번, 4번 평형수 탱크의 평형수가 배출된 경우를 반영했다.
[1]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4월 16일 오전, 사고 당시 세월호의 복원성은 출항 때보다 감소했다. 항해하면서 연료와 청

수를 많이 사용해 배의 전체 무게가 변화할 때 무게중심과 복원성도 함께 바뀐다. 사고 당

시 세월호의 복원성은 이전 여러 기관의 조사에서, GM 0.626~0.73m, GoM 0.306~0.62m 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며 평가되어왔다(사고 당시 복원성 수치 비교 표 2-4 참조). 사참위는 새롭게 확 인된 세월호 경사시험 결과와 1번, 4번 평형수 탱크 적재 가능성 등을 반영하여 복원성 값 을 다시 계산했다. 사참위는 서로 다른 조건에서 사고 당시 복원성을 평가했는데, 첫째 선 조위 열린안 보고서의 계산 방식으로, 둘째 내인설 계산 방식으로, 셋째 열린안 계산 방식 에서 1, 4번 평형수 탱크의 평형수가 배출된 조건으로 GM과 GoM을 계산했으며, 여기에서 얻은 첫째 조건 GM 0.561m, GoM 0.495m, 둘째 조건 0.591m, 0.311m, 셋째 조건 0.619m, 0.517m의 복원성 수치를 세월호의 선회와 횡경사 시뮬레이션 등에 활용했다(표 2-4 참조) 화물 적재 상태 어떠했나32)

4월 15일 출항 당시 세월호에 실린 화물의 적재 상태는 침몰사고에 영향을 끼친 주요한 요

인으로 여러 조사 과정에서 주목받았다. 화물의 고박 상태는 세월호 선체가 인양된 이후

선조위가 본격 조사하면서 자세하게 드러났다. 출항 당시 세월호의 화물들은 화물 고박 배치도의 고박 장치 및 방법, 간격 등을 고려하 지 않고 빽빽하게 실린 것으로 확인됐다. 선박 배치도에 규정된 고박 장치와 다른 장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예컨대 D갑판 앞쪽에는 배에 있어야 하는 고정식 고박 자재가 설치되지 않아 화물을 제대로 고박할 수 없었다. 선수갑판에는 컨테이너 45개를 2단으로 쌓아 실었다. 컨테이너들 사이의 빈 공간에는 철 근, H-빔, 파이프들이 적재됐다. 선체조사위원회에서는 이 화물들이 제대로 고박되었는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었으나, 부실한 고박으로 보이는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종합보고서–침몰원인조사(내인설)』, (2018.8), 46~53쪽;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권영빈·이동권·장범선 위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침몰원인조사(열린안)』, (2018.8), 50~57쪽.

55
료 분석 결과도
쪽에 만들어진 트윈갑판 32) 화물 적재 상태에 대한 설명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의 내용을 옮겨 정리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김창준·김영모·김철승
일부 상태가 관찰된다는 영상 자
제시됐다. B갑판과 C갑판의 중간층 높이로 선미
위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에는 자동차를 6대씩 2열로 총 12대를 적재하는 것을 전제로 14.4톤을 실어도 된다고 승 인이 나 있었으나 4월 15일 당일에 트윈갑판에는 총 33대의 자동차가 실렸다.

C갑판에는 승용차 65대, 화물차 33대를 합해 100대 가까운 차량이 실렸다. 세월호의 화 물 고박 배치도에 따르면, 자동차는 좌우 2개씩 총 4개의 고박 장치를 이용하여 고박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지만, CCTV와 차량 블랙박스 영상 속 고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차량 절반 이상에 고박 장치가 체결되지 않았고 타이어 접지 부분에 고임목을 둔 것으로 대신 했다. 고박한 경우에도 차량 1대당 고박 장치를 2개만 사용했다. 트럭은 체인으로 고박했 는데,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역시 화물 고박 배치도에서 승인된 고박 방식 은 아니었다. 대형 트럭 전방 2개, 후방 2개에 체인으로 고박했는데, 20톤 이상의 차량은 이 체인이 감당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 화물을 실어서는 안 되는 차량 이동용 경 사로에도 차량이 7대가량 실렸다. D갑판에도 자동차와 화물차들이 많이 실렸다. 화물 고박 배치도에는 1열당 6대만 적재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9대를 매우 빽빽하게 실었다. 게다가 중앙과 선수 사이 지점에 양쪽 으로 철근 273톤이 제대로 고박되지 않은 채 실려 있었다. 그 사이에 디스크 건조기(대형 드 라이어) 2대가 트레일러 위에 실렸고, 그 옆에 시멘트 트레일러, 또 옆에는 디스크 건조기 한 대가 더 실렸다. 가장 큰 디스크 건조기는 자체 무게가 52톤, 트레일러 무게까지 합하면 73 톤이다. 작은 디스크 건조기는 자체 무게 25톤, 트레일러 포함 40톤이다. 이 건조기들이 전 날 오하마나호(세월호와 번갈아 인천-제주를 오가던 카페리선)가 싣기를 거부했다던 중장비였다. E갑판 에도 컨테이너와 사료, 잡화가 실렸다. 화물 고박 배치도에는 컨테이너 적재가 승인되어 있지 않았으나 E갑판에서 컨테이너 30개가 발견됐다. 사참위가 선조위의 화물 조사 결과 를 다시 검증하여 밝힌 세월호 화물 총중량은 3.8톤가량 늘어난 2,214톤이다(표 2-5 참조). 수밀 관리 어떠했나 건현갑판인 D갑판 아래의 E갑판에서는 수밀성이

56 제2장
침몰했는가?
세월호는 어떻게
잘 관리되어야 한다. 침수가 발생하더라 도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도록 수밀격벽 구조를 갖추고 통로가 되는 맨홀 과 수밀문은 닫아두거나 비상시에 즉시 닫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적재위치 종류 수량

중량(톤) 소계 합계

트윈갑판 차량 33대 41.46 41.460

컨테이너 화물 - 114.72

선수갑판

철근 86 B/D 138.13 H-빔 95본 53.96 파이프/직관 - 28.609

컨테이너 45개 70.97 413.069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C갑판 (화물칸)

D갑판

차량 98대 278.88 349.392 차량화물 12대 68.674 컨테이너 1개 1.45 컨테이너 화물 1종 0.388

차량 54대 263.266 1,134.127

차량화물 19대 261.008 컨테이너 7개 11.66 컨테이너 화물 - 20.704

철근 153 B/D 272.576 잡화 - 304.913

컨테이너 30개 46.78 275.867 컨테이너 화물 - 52.437 사료/철좌대 80 B/D 124.25 잡화 - 52.4 합계 2,213.915 항목 선조위 사참위 비교 표 2-5 사참위의 세월호 선적화물 조사 결과 표 2-6 사참위와 선조위의 화물무게 및 무게중심 비교

2,210.085톤 2,213.915톤

3.835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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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화물무게
E갑판 증가 X 방향 무게중심 79.77미터 79.41미터 약 0.36미터 뒤로 이동 Y 방향 무게중심 0.01미터 -0.01미터 큰 차이 없음 Z 방향 무게중심 10.61미터 10.93미터 약 0.32미터 높아짐

하지만 인양된 세월호에서는 E갑판의 맨홀 5개와 수밀문 2개가 모두 열린 상태여서 침몰 사고 당시에 수밀격벽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밀문은 비상시에 즉 시 닫을 수 있어야 했으나, 보조기관실과 축실을 연결하는 수밀문(6번)에는 고인 물을 빼내

기 위한 호스가 통과하고 있었다. 선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수밀문은 고장이 잦아 관행 적으로 열어둔 채 운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밀문은 출항할 때 닫아야 하고 항해 도중 필요할 때 열더라도 평상시에는 닫아두는 것 이 원칙이다. 필요에 따라 열어두더라도 항상 닫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월 호의 수밀문은 유압을 활용해 원격으로 닫을 수 있는 미닫이문 구조로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의 수밀문은 평소에 고장이 잦고 제대로 유지 보수를 하지 않아 항상 열어 둔 채로 두어 수밀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맨홀들도 늘 열린 상태였다. 맨홀은 선원들이 기기 내부 점검을 위해 설치하는 개구부로, 덮개를 너트로 여닫게 돼 있으며 운항할 때는 닫아놓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세월호에서 는 맨홀 통로를 드나들어야 하는 작업이 잦다는 이유로 맨홀을 늘 열어두었다. 그중 하나 로 핀 안정기실은 선원들이 자주

58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출입하는 곳이었는데 그 출입구가 맨홀 구조였다. 2013 년 9월 핀 안정기를 원격 조정하는 기능이 고장 나고 부품이 없어 수리하지 못하는 상황 그림 2-3 E갑판 기관 장비 구획 개구부

이 되자, 이후에 기관부 선원들이 선장의 지시에 따라 수작업으로 핀 안정기를 접고 펴야 했다. 하지만 핀 안정기실을 자주 출입하게 되면서 이곳의 맨홀은 늘 열린 상태로 방치되 었다. 우현 핀 안정기실의 통로인 맨홀은 너트도 없이 열려 있었고, 좌현 핀 안정기실로 들 어가는 맨홀은 덮개가 아예 떨어진 채 다른 곳에 방치됐다. 외국선급의 핀 안정기실 수밀 규정을 보면, 핀 안정기실 출입구는 맨홀이 아니라 긴급 상황에서 원격으로 조정할 수 있 는 수밀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연안 여객선 세월호는 4월 15일 밤 9시경 인천항에서 출항해 제주로 향했다. 세월호에는 승객 443명과 선원 및 승무원 33명을 비롯해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다. 승객 가운데에는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이 있었다. 「출항 전 여객선 안전검검 보 고서」(그림 2-4) 서류에는 일반 화물 657톤이 실렸다고 보고됐으나, 실제로는 적정 화물량을 훨씬 넘긴 2,214톤의 화물이 고박 상태도 허술한 채 실려 있었다. ‘보고서’의 점검 사항에 는 선체 상태, 기관 상태, 통신 상태, 화물 적재 상태, 선박 흘수 상태, 구명설비 상태 등이 모두 ‘양호’로 표기되었다.

4월 16일 아침까지 순항하던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서거차도 부근에 이르렀 을 무렵 사고가 일어났다. 오전 8시 48분 무렵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면서 왼쪽 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배가 기울자 ‘구명조끼를 입고 선내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 고 있었다. 8시 55분이 되어서야 세월호 항해사는 제주 해상교통관제(VTS)센터에 조난 신 고를 했다. 101분이 지난 10시 30분 무렵에 세월호는 뱃머리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 세월호 침몰사고 는 476명 탑승자 가운데 304명의 생명을 앗아갔다(미수습자 5명 포함), 단원고 학생 250명이 사 망하고 75명이 살아남았다. 해양경찰의 구조 활동은 참사의 피해 규모를 줄이는 데 도움 이 되지 못했다. 생존자 172명 가운데 절반 이상은 해양경찰보다 늦게 도착한 어선 등 민 간 선박에 의해 구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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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60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세월호는 2017년 3월 23일 침몰한 지 1,073일 만에야 인양되어 물 밖으로 다시 모습을 드 러냈다. 하지만 실종자 5명의 주검은 끝내 찾지 못했다. 보고된 수치는 승객 450명, 선원 24명, 차량 150대, 일반 화물 657톤이었으나, 실제 승선 인원은 476명(승객 443명, 승무원 33명)이었고 화물은 약 2,214톤이었다. 그림 2-4 세월호의 출항 전 여객선 안전 점검 보고서

2.

세월호 침몰의

재구성

세월호가 출항한 4월 15일 밤부터 다음날 오전 8시 48분 무렵까지 세월호 선박과 운항에 서 주목할 만한 이상 징후가 있었다는 증언이나 자료, 증거는 그동안의 여러 수사와 조사 과정에서 보고되지 않았다. 그 시간대까지 대체로 순조롭게 항해했을 것이다. 사고의 중 대한 이상 징후는 8시 48분 무렵 시작됐다. 이에 앞서 8시 46분경 세월호가 우현 쪽으로 병풍도와 0.9마일 정도 거리를 두고 약 18노트 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3등항해사 박한결은 조타수 조준기에게 선수방향33) 을 135도에

서 140도로 변침하라고 지시했다. 배는 140도 정침되었다. 3등항해사는 다시 8시 48분경 배 를 140도에서 145도로 변침하라는 조타 명령을 내렸다. 배가 오른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월호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타수가 다급하게 “어어, 안 돼, 안 돼, 안 돼.” 하고 소리 질렀고, 배는 오른쪽으로 계속 돌면서 곧이어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34)

33) 선수방향: 선수미선(선박의 선수와 선미를 잇는 선)과 자오선(경도)이 이루는 각도로 표시된다. 34) 박한결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2014.4.30.), 20815~20816쪽; 선원사건(박기호 피고인신문 부분), 1심, 19회 공판조서 (2014.9.30.), 53쪽; 선원 사건, 검찰 감정서 (2014.9.30.), 별첨1; 세월호 선내 CCTV의 ‘화질 개선 동영상’ 자료표, 세월호 선내 CCTV(화질 개선), 수사 기록 13952쪽;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침몰원인조사(내인설)』, 2018년 8월, 80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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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침몰위치 병풍도 맹골도 서거차도 송도 대마도 관매도 하조도 상조도 진도군 인천 제주 전라남도 다도해해상 국립공원 (좌) 인천-제주 세월호 일반 항로 (우) 침몰 지점 및 주변 해역 지도

멈추지 않은 우선회, 급격한 횡경사

조타수의 우현 5도 조타 이후에 세월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른쪽으로 선회했다. 그 항 적은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의 데이터에서도 확인된다. (그림 2-5 참조)

사참위는 세월호가 적어도 8시 48분 24초 무렵에는 기울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상 증거 를 추가로 확인했다. 사참위는 이전에 다 복원하지 못한 CCTV 영상 데이터의 복원 작업 을 해서 이 가운데 일부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사참위가 새롭게 복원한 선내 CCTV 영 상 가운데 매점에 설치된 CCTV 채널 12번에 녹화된 영상을 보면, 매점 벽에 달린 전화기 그림 2-5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에 나타난 세월호의 항적 데이터(출처: 선조위 종합보고서)

62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63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의 전화선은 계속 왼쪽으로 기울어졌으며, 잠시 좌선회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오른 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왼쪽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을 반복했다. 새로 복원한 영상에는 8시 48분 24초부터
두 장면은 횡경사가 없는 상태와 횡경사가 발생한 이후 매점 전화선 기울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울기 정도가 확연하게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2-6 횡경사 이전(좌)과 횡경사 이후(우) 매점 전화선 기울기 변화 그림 2-7 매점 전화선 기울기 그래프
8시 49분 31초까지 총 67초 동안의 상황이 담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화선은 점점 더 왼쪽으로 기울었다.

AIS에서 이와 비슷한 시간대의 세월호 항적을 보면, 8시 48분 44초부터 49분 13초까지 29

초 동안에 세월호의 선수방향은 우현으로 10도 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1분에 20도씩 선 회하는 20도/분의 선회율을 보인 것이다. 뒤이은 8시 49분 30초까지 17초 동안에 선회율은 급격히 커졌다. 선수방향은 150도에서 166도로 변했으며, 선회율은 57도/분에 달했다. 이때 세월호 선체의 횡경사 거동 변화가 어떠했는지는 CCTV 영상 속의 전화선 기울기 변 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복원된 CCTV 영상의 시작점인 8시 48분 24초부터 전화선 기울 기는 전반적으로 점점 더 커졌으며, 잠시 기울기가 줄었다가 8시 49분 16초 무렵부터 급격 하게 커졌다. 49분 31초 무렵에는 20도까지 커졌다. 영상에서는 매점 물품과 식당 집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참위는 전화선 기울기 추세로 봤을 때, 우현 조타 이후 최소 2번 이상 조타각 변화가 있었으리라 추정했으나, 실제 조타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세월호는 이후에 더욱 빠른 속도로 기울었다. AIS 항적 기록에는 세월호의 선수방향이 8 시 49분 37초부터 49분 51초까지 불과 14초 동안 180도에서 243도로 급변한 것으로 나 타났다. 비슷한 시간대에 세월호의 기울기 변화는 C갑판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의 기울기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쇠사슬 기울기 자료는 선조위가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서 추출해 당시 기울기 분석에 사용한 바 있는데, 사참위는 쇠사슬 기울기 분석을 통한 세월

64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그림 2-8 블랙박스에 촬영된 쇠사슬 차량 블랙박스에 녹화된 c deck 천장 쇠사슬

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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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기울기(8시 48분 24초부터 49분 32초까지)와 쇠사슬 기울기(8시 49분 37초부터 49분 51초까지)를 종합하여 추정한 세월호 횡경사 각도의 변화 그림 2-9 사고 당시 세월호 횡경사 변화 추정 그래프
호 횡경사 값을 더욱 정밀하게 추정하기 위해 재조사를 실시했다. 쇠사슬 기울기를 정밀 계측한 결과, 세월호의 기울기는 차량 블랙박스 영상이 시작되는 8 시 49분 37초 시점에 약 22도에 달했으며, 이후에 계속 증가하다가 49분 51초경에 최대 약 51도까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AIS 항적과 쇠사슬 기울기를 종합하면 8시 49분 37 초부터 불과 14초 동안 세월호의 선수방향은 180도에서 243도로 급격히 우선회했으며, 선체는 22도에서 51도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세월호 선내 화물의 대량 이동은 세월호를 더욱 빠르게 기울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화물 이동은 언제 시작됐을까? 2018년 선조위 내인설 보고서는 선체조사자문기관인 영국 브룩스벨(Brookes Bell)의 분석

결과를 근거로 세월호가 20도까지 기울었을 때 D갑판에 있던 화물 가운데 철근 더미를 묶은 체인이 파손되면서 철근, 디스크 건조기, 트레일러의 초기 화물 이동이 시작됐을 것 으로 추정했다. C갑판과 트윈갑판에 있던 차량 블랙박스 가운데 199번, 226번 블랙박스에 8시 49분 26초 전후 녹음된 굉음과 화물 이동 소음은 철근 더미를 묶은 체인이 파손되고 화물 이동이 일어났음을 말해준다고 분석했다. 이 시간대에 250톤 규모의 화물이 도미노 현상으로 우현에서 좌현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시작한 1차 화물 이동이 세월호의 횡경사를 더욱 심각한 상태로 만들었고, 횡경사 각도 33도에 이른 시점인 8시 49분 43초 무렵 여러 갑판에서 본격적으로 화물이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D갑판에서 1차 화물 이동이 시작했음을 직접 보여주는 블랙박스 영상 증거는 확 보되지 않았다. 이렇게 1차 화물 이동이 블랙박스에 녹음된 소음 분석을 근거로 제시되었 다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사참위는 사고 당일 8시 49분 31초까지 녹화된 선내 CCTV 영 상들을 다시 분석하여 이 시점까지의 영상에서 화물이 이동하는 장면은 눈에 띄게 관찰 되지 않음을 확인했다. 매점과 식당의 CCTV 영상에서는 8시 49분 24초경(전화선 기울기 각도 약 15도)부터 매점 물품들과 식당 집기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39번 채널 CCTV 복원 영상에서 D갑판의 건조기는 8시 49분 31초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C갑판 상황을 보여주는 영상에서는 8시 49분 43초경 랙카 차량이 전도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49분 45초부터 48초 사이에 C갑판에 선적된 화물이 대부분 움직였다. 사참위는 확보된 영상에 담기지 못한 다른 상황이 있을 수 있으므로 초기 화물 이동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으나, 현재의 영상 증거들을 종합하면 화물의 대량 이동 은 8시 49분 45초에 C갑판 중앙부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보았다. C갑판과 트윈갑판 화물 의 대량 이동은 49분 51초경 종료됐다. 갑판에서 이렇게 대량으로 화물이 움직이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이전의 주요한 설명은 선조위 보고서에서 제시됐다. 그 하나는 선조위 내인설 보고서의 설명으로, 8시 49분 26 초경 시작됐을 D갑판의 1차 화물 이동으로 인해 선체가 제자리로 복원하지 못한 채 횡경 사 각도가 더 커졌고 뒤이어 대량의 2차 화물 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조위

66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열린안 보고서에서는 이와 다르게 8시 49분 38~39초경에 블랙박스 3대에 녹음된 ‘기~ 익’ 하는 소음이 난 이후 횡경사가 증가해 8시 49분 49초경 최대 약 47도에 달한 점에 주

목하여, 이것을 외력의 작용 여부를 검증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단서 중 하나로 보았다.

사참위는 쇠사슬 기울기 변화를 통해 시간에 따른 세월호의 횡경사 각도와 그 각도가 변 하는 빠르기, 즉 횡경사 속도(ROH, 횡경사율)35)를 분석해 아래와 같은 결과를 얻었다.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사참위는 여기에서 대량의 화물 이동이 일어난 8시 49분 45~48초 무렵에 두 차례의 높

그림 2-10 사고 당시 세월호 추정 횡경사(주황색) 및 횡경사 속도(노란색) 35) ROH는 Rate of Heel의 약자로, 횡경사가 진행되는 속도를 가리킨다. 1초당 횡경사 각도 변화로 표시한다.

67
종합보고서

은 횡경사 속도 피크(peak)가 나타난 것에 주목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피크(횡경사 속도 4.8도/ 초)는 C갑판의 대량 화물 이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보더라도, 첫 번째 피크(3.6도/초)는 대 량 화물 이동 이전에 외력 같은 다른 요인의 작용에 의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이다. 사참위는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MARIN, 이하 ‘마린’)에 의뢰해 수행한 모형 선박의 자 유항주 시험 데이터를 분석해, 화물 이동과 외력을 동시에 적용한 조건에서 두 차례의 횡 경사 속도 피크가 나타남을 확인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월호의 급격한 횡경사에 외력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36) 한편, 사참위는 이런 조사 결과를 대한조선학회에 보내 전문가의 검토와 자문을 정식으 로 요청했으며, 대한조선학회는 공식 의견서를 사참위에 제출했다.37) 대한조선학회는 의

견서에서 “대각도 횡경사 문제 그리고 대각도가 아니더라도 화물 이동 효과를 포함하는 문제의 경우 자유항주 모형 시험 결과 또는 자유항주 모형 해석 결과는 정량적이라기보다 정성적 참고자료로 활용되었어야” 한다고 밝혔다. 자유항주 모형 시험 결과를 해석할 때 ROH 등의 숫자 그 자체를 정밀하고 확실한 값으로 간주하여 이를 바탕으로 분석을 진행 하는 것이 아니라, 모형 시험 데이터를 선체 움직임의 추이와 특성을 파악하는 수준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조선학회는 “사참위는 세월호 쇠사슬 기울기 및 전화선 기 울기 분석을 통하여 얻은 세월호의 ROH가 재현되기 위해서는 외력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모형 시험을 통하여 얻은 ROH, ROT(선회율)38)가 실선의 궤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외력을 추정하는 것은 오히려 비과학적이고 비공학적이다.”라는 견해를 제출했다.

마린도 사참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횡경사 속도를 정량적 수치 그대로 신뢰할 만한 데이터 로 간주하여 사용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횡경사 각도 자체가 직접 측정한 값이 아 니라 영상 기록 등을 분석하여 추정한 값이므로, 이를 미분해서 이 각도가 얼마나 빠르게 변 하는지 계산하여 도출한 횡경사율 값은 신뢰성이 현저하게 더 떨어진다는 것이다. 횡경사 각

윈치(winch)라는

작동한 자유 항주 시험의 결과에 대한 견해는 따로 밝혔다. 75쪽 이하 참조.

대한조선학회, 「세월호 침몰 원인 보고서 직나-09 및 직나-10에 대한 대한조선학회 공식 의견서」, (2022.6.17.). 38) ROT는 Rate of Turn의 약자로, 선회가 진행되는 각속도를 가리킨다. 1초당 선회 각도로 표시한다.

68 제2장 세월호는
침몰했는가?
어떻게
36) 마린은 「최종 보고서」에서 외력의 작용을 모사하고자
장치를
37)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도에 작은 오차만 있어도 횡경사 속도가 전혀 다른 값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39)40)

열린 수밀문 탓에 빨라진 침수와 침몰

세월호는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 101분 만에 뒤집히며 가라앉았다. 넘어진 세월호에 바닷 물이 빠르게 흘러들면서 배가 뒤집히는 속도도 빨라졌다. 인양된 세월호 선체에서 확인된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맨홀과 수밀문 관리 실태는 2018년 선조위 조사에서 빠른 침수와 전복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바닷물은 기운 선체의 C갑판 상부에 있는 통풍로에서 들어오 기 시작해 수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E갑판으로 밀려들면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8시 49분경 세월호가 45도가량 기울어지자 바닷물은 C갑판 외판에 나 있는 루버 통풍구 를 통해 E갑판의 기관 장비 구획에 있는 핀 안정기실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됐다. 선조위 는 인양된 선체를 조사하고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하여 이렇게 추정했으며, 마린이 시행한 모형 선박의 침수·침몰 시뮬레이션에서 그 가능성이 검증됐다. 루버 통풍로와 비슷한 위 치에 있던 C갑판 외부 상단의 배수구를 통해서도 바닷물이 흘러 들어갔다. 이런 초기 침수로 인해 배는 더 심하게 기울었고, 그러자 C갑판의 파손된 창문을 통해서 도 바닷물이 들어갔다. 9시 50분 무렵, A갑판 선수와 B갑판 객실 중앙부까지 침수가 시작 됐고 세월호의 기울기는 62.8도에 달했다. 해경 123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해 촬영한 영상 을 보면, 세월호는 9시 50분 무렵까지 50~60도로 서서히 기울다가 이후에 빠른 속도로 넘어갔다. 오전 10시 15분경 기울기는 104.6도에 달했으며 불과 10분 만인 10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언급하고 이 데이터를 서로 비교했으며 또한 모형 시험 결과와 세월호 AIS 항적, 추정 횡경사각(estimated heel angles)을 비교·분석한 바 있었듯이, 이번 모형 시험 결과도 의미 있는 물리량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린은 선조위와 사참위가 유사한 방법으로 분석해 제시한 추정 횡경사 각도에 대해 아주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횡경사 각은 블랙박스 영상과 부합하도록 다물체 동역학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에서 도출한 것이며, 횡경사의 도함수를 통해 횡경사 속도를 구하는 방법은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세월호조사1과(2022.6.9.), “자유항주 모형 시험 용역결과보고서 검토 결과” 참조)

69
39) MARIN, Sewol Additional Turning and Heeling Model Tests: Final Report, Report
40) 마린의 자유항주 시험 결과는 정성적 참고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이견도 존재한다. 마린이 선조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이미 수차례 선회율(ROT)을
25분경 127.5도에 달했다.
No. 33705-1-SMB (2022.5), p.6.
70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마린이 2018년 수행한 컴퓨터 모의실험에 따르면, E갑판의 수밀문이 제대로 닫혀 있었다 면 초기 침수를 지연시켜 세월호가 65도 횡경사 상태를 훨씬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 로 나타났다. 침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건, 선박 수밀성을 규정에 따라 제대로 관리했다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세월호 탑승자를 더 많이 구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E갑판의 열린 맨홀과 수밀문들. 세월호 선원들은 수밀성을 유지해야 하는 맨홀과 수밀문을 열어둔 채 항해했다. 그림 2-11 기관 장비 구획 개구부 상태

4・16세월호참사

3. 침몰 원인은 어떻게

AIS 항적과 영상 증거들은 세월호가 사고 당시에 우현으로 빠르게 선회하면서 좌현으로

급속히 기울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유로 좌현 쪽으로 횡경사하기 시작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침몰 원인의 규명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사참위 이전에도 여러 수사, 감사기관과 조사기구들이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설명을 제 시해왔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 검경 합동수사본부 전문가 자문단 조사가 세월호 인양

이전에 이뤄졌으나 블랙박스 영상을 비롯해 선체 내 여러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져 한계가 있었다. 반면 선체조사위원회는 세월호에 실린 차량 블랙박스 17대의 영상 을 복원하고 사고 당시 C갑판과 트윈갑판 상황을 담은 블랙박스 7대의 영상을 분석함으 로써 세월호의 급격한 횡경사 진행 과정과 원인을 규명하고자 했다. 수사와 조사 활동을 통해 세월호의 급선회와 횡경사의 원인은 그동안 몇 가지 갈래로 설 명되었다. 먼저 세월호의 낮은 복원성과 조타 실수(조타 미숙)로 인해 선회와 횡경사가 시작 했다는 안이 검찰에서 제시됐다. 검찰은 조타수 조준기가 3등항해사 박한결의 지시 에 따라 우현 변침을 시도하던 중에 원하는 대로 변침이 되지 않자 당황해서 임의로 조타기를 우현 쪽 대각도로 돌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세월호가 급격히 우현 으로 선회하고 좌현으로 횡경사했다고 설명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합동수사본 부 자문단 보고서(2014년 8월)는 당직 조타수가 전속 항해 중에 복원성이 극히 불량한 세 월호를 조타 미숙으로 대각도로 조타한 것이 침몰의 주된 원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해양 안전심판원 특별조사부(2014년 12월)는 조타수가 필요 이상의 대각도로 타를 썼거나 타각 을 장시간 유지함으로써 선체의 급격한 ‘회두’(回頭)41)를 야기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42)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71
종합보고서
설명할 수 있는가? 41) 회두: 뱃머리를 돌려 진로를 바꿈. 42) 선원 사건, 1심,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2014.10.1.), 16~17쪽; 합동수사본부 보고서, 1쪽; 해양안전심판원 보고서, 112, 118쪽. 이상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내인설』, 81쪽에서 재인용.

선체조사위원회(2018년 8월)는 블랙박스 영상 복원과 분석, 선체 손상 부위 확인, 모형 시험 과 시뮬레이션을 비롯해 여러 증거를 추가로 확보하면서 선회와 횡경사 원인을 좀 더 구체 적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조위는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단일한 결론을 제시 하지는 못하고 엇갈린 두 가지 설명을 내놓았다. 하나는 낮은 복원성과 불량한 화물 적재 상태로 출항한 세월호가 사고 해역에서 우현 조타를 하던 중 조타장치가 고장(솔레노이드 밸브 고착) 나서 우선회가 멈추지 않으면서 좌현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는 설명(내인설)이었다. 다 른 하나는 세월호가 사고 당시에 우선회하던 중에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외력이 작용해 급격한 횡경사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설명(열린안)이었다. 두 가지 침몰 원 인 설명은 ‘내인설’과 ‘열린안’라는 이름의 두 갈래 『종합보고서』로 제출되었다. 사참위는 선조위에서 제시된 두 가지 시나리오, 즉 복원성이 나쁜 선박에 조타장치 고장

이 발생하여 침몰에 이르렀다는 설명과 선체 변형 및 손상 조사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에

부합하는 가능성 중 하나로 미상의 수중체 추돌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조타장치 고장에 의한 침몰설의 재현과 검증

선조위의 두 갈래 보고서 중 하나인 ‘내인설’ 보고서(이하 내인설)는 선박 개조와 화물 과적으

로 복원성이 취약했던 세월호가 우현 조타 중에 신호를 전달하여 방향타를 움직여 주는 타기장치의 솔레노이드 밸브43)가 고장 나는 바람에 멈추지 않고 계속 우선회하면서 급격 히 횡경사했다고 밝혔다.44) 세월호 선체 인양 이후에 2번 타기장치의 부품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철심이 눌린 상태로 발견됐는데, 이것이 선조위 조사 결과 내용 중 급선회를 설명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세월호에 설치되어 있던 두 대의 타기장치45) 가운데

솔레노이드 밸브의 철심이 눌린 방향에 따라 방향타(러더)의 방향이 결정되는데, 선조위 조사에서 확인된 솔레노이드 밸브 철심의 눌린 방향은 방향타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방향이었다. 일반적으로 선박이 진행하고 있을 때 방향타가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선박은 오른쪽으로 회전한다. 44)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김창준·김영모·김철승 위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침몰원인조사(내인설)』, (2018.8.).

45) 타기장치: 선박의 방향타(러더)를 움직이게 하는 유압장치. 세월호에는 2대의 타기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각각 제주행, 인천행으로 표시하여 사용했다.

72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인천행 타 43) 솔레노이드 밸브: 조타기로 입력된 타각의 신호대로 선박의 방향타를 움직이도록 하는 장치. 자동차 변압 브레이크에도 솔레노이드 밸브 장치가 사용된다. 선박에서는 타기장치가 작동하는 상태에서

기장치(2번)를 사고 당시 사용하고 있었고, 우현 조타 명령이 내려졌을 때 타기장치 내부의

솔레노이드 밸브 철심이 눌려 고착됐다면, 방향타가 중립 위치로 돌아오지 않고 우현 방

향 최대 각도(35도)까지 돌아갔을 것이다(우현 전타). 46)

선조위는 인양된 세월호 선체에서 2대의 타기 유압 시스템을 수거하여 2018년 2월 조사 한 결과 타기실의 2번 타기펌프의 B측 솔레노이드 밸브의 철심이 안으로 눌린 채 고착된 상태였음을 확인했다. 확인된 증거를 바탕으로, 내인설 보고서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 이 사고 지점에서 우현 조타 도중 일어났을 것으로 판단하여, 예상치 못한 기계 고장이 우 현 전타와 선회로 이어졌으며 복원성이 취약한 세월호가 자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좌현으 로 크게 기울었을 것이라는 침몰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하지만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으로 세월호에 우현 전타 현상이 발생했다는 설명에 대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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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세월호 선체에서 수면 위로 드러난 방향타는 우현 전타 상태가 아니라 반대 방향인 좌현 8도로 돌아간 상태로 관측됐다. 솔레노이드 46) 우현 전타: 우현 방향으로 최대한도까지 타가 돌아간 상태. 보통 우현 35도까지 돌아간 상태를 말한다. 그림 2-12 세월호 타기장치 2번 타기 (인천행) 1번 타기 (제주행) 타기펌프와 모터
문점이 남아 있었다. 특히 뒤집혀 침몰하던

모형을 제작해 ‘우현 전타’와 ‘좌현 8도 방향타’가 동시에 나 타날 수 있는 여덟 가지 시나리오 상황을 설정하고서 그 각각의 가능성을 따져보는 모형 시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74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해석했다. 좌현 8도에
방향타를 설명할
솔레 밸브 케이싱이 손상된 상태로 함몰되어 있고 그 내부에 있던 러버 스토퍼가 눌린 상태로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다. 오른쪽은 이 영상에 기초해 제작한 모델링 자료. 그림 2-13 2018년 1월 18일 분해 과정에서 촬영한 인천행 솔레노이드
세월호가 항해할 때 방향타에 미치는 수압을 재현하기 위한 장치로 제작되었다. 유압으로 작동되는 이 모형 장치는 방향타 각도 변화에 따라 압력에 비례하는 크기로 작용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림 2-14 사참위가 제작한 타기장치 모형 2번 타기 (인천행) 방향타에 수압을 가하는 장치 1번 타기 (제주행)
밸브 눌림 현상으로 인해 우현 전타가 일어났다면 왜 침몰 직전에는 방향타가 좌현 8도에 있었는지 추가로 설명해야 했다. 이런 의문을 중심으로 사참위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의 직접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검증했다. 사참위는 세월호 타기장치의
놓인
수 없다면
밸브(So.B측) 사진

노이드 밸브 고착으로 우현 전타가 실제로 일어났을 개연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에서는 ‘우현 급선회’와 ‘좌현 8도 방향타’ 현상이 함께 구현될 경우에 선원의 고의 또

는 과실에 의한 대각도 조타가 있었을 가능성과 외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또 사참위는 2018년 당시 솔레노이드 밸브 증거물의 분해 조사 과정을 담은 영상과 사진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해 솔레노이드 밸브 덮개인 케이싱이 손상되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솔레노이드 밸브를 감싸는 케이싱 부분이 먼저 손상되고 이로 인해 그 안쪽의 러버 스토 퍼(고무마개) 부품이 눌리면서 철심이 눌리고 고착됐을 가능성이 드러난 것이다. 러버 스토 퍼는 완전히 눌린 상태로 철심과 맞닿아 있었다. 솔레노이드 밸브 케이싱과 러버 스토퍼 의 손상과 변형 상태를 바탕으로, 사참위는 손상된 솔레노이드 밸브 케이싱이 러버 스토 퍼와 철심을 밀어 눌렀으며 철심의 위치 회복을 막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 을 내렸다. 사참위는 2022년 4월 12일 제140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조타장치 고장에 따른 세월호 전타 선회현상 검 증」이라는 조사결과보고서(직나-8)의 채택을 의결했다. 이날 보고서 채택 의결에 6명 위원 가운데 4명이 찬성하고 2명이 반대했다. 보고서 채택에 반대한 이민, 이재원 두 위원의 소수의견을 간추려 싣는다. 이민 위원, 이재원 위원의 소수의견 가. 사참위의 판단은 논리와 경험칙에 합치하여야 하고, 합리성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연 성이 인정되는 경우 증거에 입각한 사실관계의 정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단순한 관념적인 의심이 나 추상적인 가능성에 기초한 의심에 근거하여 확인된 자료들의 신빙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양된 세 월호의 타기장치를 검사하여 세월호에 설치된 인천행 타기장치의 솔레노이드 밸브가 눌려 있는 상태로 고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사고 당시 세월호의 우현 전타를 발생시킨 증 거임을 확인하였다.

나. 먼저 세월호 인양 후 발견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에 관한 재현실험에서 정상 조타 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발생하는 경우 우현 전타 현상 발생에 대한 반복재현성이

방향타의 움직임과 우현 급선회와는 연관성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하여 모형 시험과 해석을 수행하였고, 솔 레노이드 밸브 고착 유무, 사용되는 타기펌프 종류 등 각 상황에 따라 15개의 시나리오로 나누어 시험 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인천행 타기펌프 1대를 작동시킬 때 우현 정상 조타 중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착

75
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검증되었다. 사참위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발생할 경우, 실제 방향타의 움직임은 어떻게 되는지, 해당

되는 경우 밸브 고착으로 인하여 방향타는 우현 35도까지 전타되었고, 우현 전타(우현 35도) 이후에도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으로 인해서 계속 유압이 공급되어 방향타는 한계각인 37도까지 회전하는 것이 반복 시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다. 다음으로 조타실에 있었던 선원들은 일관되게 참사 당시 조타기를 우현 전타로 돌리는 행위는 없었 다고 진술하고 있다. 제3항해사는 ‘무리하게 타를 써서 변침한 것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조타수는 ‘변 침 오더를 받고 약간의 키 수정을 하여 변침하던 중 키가 고정된 상태에서도 계속 변침이 되었다’는 취지 로 수사기관에서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고, 대법원에서 이에 관한 진술이 받아 들여져 업무상과실에 대해 무죄가 선고·확정되었으며, 달리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만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인양된 세월호의 타기장치에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확인되었고, 조타실에 있었던 선원들은 시종일관 정상 조타를 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으며, 정상 조타 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발생하 는 경우 전타 현상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재현성이 증명되었으므로 증거에 입각한 사실관계의 정리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 이에 대하여 다수의견은, ① 급선회 발생 시점으로부터 86분 이후 확인된 방향타 좌현 8도를 설명 하기 위해서는 고착이 발생한 타기장치를 정지시키고 정상 상태의 타기장치를 가동하는 선원의 긴급 행위가 있어야 했는데, 선원 진술 및 기타 조사에서 이러한 ‘비상 조타 행위’를 확인할 수 없었으며, ② 인천행 타기장치 솔레노이드 밸브 케이싱 손상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손상으로 내부에 있던 러버 스 토퍼가 눌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솔레노이드 밸브 눌림 현상으로 세월호의 우현 급선회와 침몰 당시 방향타 좌현 8도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직나-8 조사결과 보고서 주요 내용 정리 참조). 바. 그러나 제3항해사는 타기 장치 알람이 울려 타기장치를 조작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고 있어 타기장치 를 끄고 켜는 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솔레노이드 밸브에 물리적 충격이 있었을 경 우 발생해야 하는 타기 장치 전체 구조에 손상 등이 확인되지 아니하는 점, 누름구를 통한 수압 등으로 약 4.3kg의 자중이 가해질 수 있고 철심이 고착된 경우 러버 스토퍼가 쉽게 변형 가능한 점(대한조선학회의 자문의견도 이와 같다) 등에 비추어 위와 같이 다수의견이 들고 있는 사정들은 단순한 관념적인 의심 내 지 추상적인 가능성에 기초한 의심에 불과하여 위에서 인정된 사실을 번복하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당시 세월호의 우현 전타 현상은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으로

76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사참위는 모형 시험과 해석, 그리고 선원 진술을 종합해볼 때 사고 당시의 세월호 우현 급 선회는 타기장치 고장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다른 변수가 없다면 솔 레노이드 밸브 눌림 현상은 횡경사 발생 시점과 선체 인양 시점 사이에 알 수 없는 외부 충격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조사를
인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통해 확인된 내용에

르면, 솔레노이드 밸브의 설계 특성으로 볼 때 철심을 눌렀을 것으로 지목된 오일 슬러지

가 철심 구역에 흘러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 기계 내부 요인인 오일 슬러지

가 철심 눌림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제거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사참위는 복원성이 취약한 세월호가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을 계기로 급히 우선회하며 좌현으로 기울었다는 내인설 보고서의 설명 중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우선회를 유발했다는 부분의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력에 의한 침몰 가능성의 재현과 검증

선조위의 두 갈래 보고서 중 하나인 ‘열린안’ 보고서(이하 열린안)는 인양된 세월호에서 발견 된 선체 손상의 흔적에 주목해 세월호의 급격한 선회와 횡경사에 외력이 작용했을 가능 성을 제시했다.47) 사참위는 선조위 조사 결과를 검토하고 선체의 구조를 해석하는 기초 자료이자 보존 기록의 자료를 확보하고자 선체 내외부 상태를 3차원 계측기법으로 촬영 하는 사업을 시행했다. 3차원 계측기법 영상을 통해 나타난 선체 변형·손상 현황과 사참 위가 주목해 조사한 변형·손상 위치는 <그림 2-15>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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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그림 2-15 세월호 선체에 대한 3차원 계측기법 영상에 표시된 선체 외판의 여러 변형 손상 위치 47)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권영빈·이동권·장범선 위원),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침몰원인조사(열린안)』, (2018.8.). 이 가운데 세월호를 증개축하면서 본래 있던 승선 계단을 제거한 좌현 스틸 펜더 부근의 외판 변형, 선저 외판의 만곡부 용골(Bildge Keel) 변형, 닻사슬(anchor chain)로 인해 흔히 생기

는 선수부의 긁힘 자국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이전에 생성되어 침몰 원인과 관련이 없는 것 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좌현 선체 중앙부의 데크-스토어(Deck-Store) 선내 외판 변형(위 그림의 ①), 보일러 탱크 외판 돌출부(②), ‘( )’ 형태 변형 구간(③), 선수 측 용골(Keel)48) 선저면 변형 구 간(⑤)은 인양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으며, 난간 변형 구간(④)은 컨테이너 부유물의 충격과 접촉에 의해 생겼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선체 변형과 손상 가운데 특히 좌현 핀 안정기는 인양된 선체에서 심하게 변형된 상태로 발 견돼 침몰 원인과 관련해 주목을

78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받는
핀 안정기는 본래 최대 25도 범위에서 작동 ① 데크-스토어(Deck-Store) 선내 외판 ‘十’ 형태. ② 보일러 탱크 외판 돌출부. ③ ‘( )’ 형태 변형 구간. ④ 난간(Handrail) 변형 구간. ⑤ 선수 측 용골(Keel) 선저면 변형 구간. 그림 2-16 국부 변형 분석 구역 그림 2-17 좌현 핀 안정기의 위치(화살표) 48) 용골(keel)과 프레임(frame)은 선체의 강도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뼈대 구조물이다.
증거였다.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인양된 핀 안정기의 샤프트-보스49)가 50도 넘게 ‘과회전’ 된 상태 였다. 핀 안정기가 과회전하는 과정에 상당히 강한 외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사참위는 선체 변형 및 손상 조사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에 부합하는 가능성의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로 핀 안정기가 왜 과회전했는지 조사했다. 사참위는 그 원인으로 첫째

선체가 가라앉아 해저에 닿을 때 암반 또는 지반과 부딪혔을 가능성, 둘째 해저에 가라앉 은 뒤 조류 등에 의해 선체가 수평으로 이동하면서 변형이 생겼을 가능성, 셋째 운항 중 외부 힘이 가해졌을 가능성을 조사했다. 먼저, 사참위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세월호 침몰 지점의 지반 특성 조사와 더불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분석하고 해석했다. 시뮬레이션 분석, 즉 전산수치해 석 결과에서,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해 세월호는 침몰 당시에 좌현 선미가 해저 지반에 닿 은 상태에서 선체가 좌현 쪽으로 돌면서 가라앉아 지반에 닿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착저 속도가 매우 낮아 선체 침몰이

79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준정적 과정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핀 안정기가 해 저면에 관입될 때 과회전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사참위는 판단했다. 두 번째 가능성과 그림 2-18 50도 넘게 과회전한 상태의 핀 안정기 49) 샤프트(Shaft)-보스(Boss) 축은 핀 안정기를 선체 내부 구동장치와 연결해주는 축을 가리킨다. 2016년 5월 17일 11시경 촬영사진 선조위 조사 결과 50.9도 과회전 된 것으로 확인 선체 인양 후 확인된 과회전 상태의 절단면

관련해서는 선체가 착저하면서 핀 안정기가 정상 작동범위인 25도까지 돌아간 상태로 해

저면에 관입되었더라도 세월호 선체가 선저 방향으로 수평 이동하는 과정에서는 핀 안정 기가 50.9도만큼 과회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았다.

사참위는 핀 안정기에 50.9도의 과회전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의 크기를 추정하고자 핀 안

정기를 강제 회전하는 시험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분석을 시행했다. 사참위는 먼저 핀 안

정기 실물의 특성을 적용한 예비 시험체들과 시험 장치를 제작하여 네 차례의 예비 시험

을 진행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월호 핀 안정기를 강제 회전하는 데 필요한 최소 회전력 을 계측하고자 우현 핀 안정기 실물을 강제 회전하는 시험을 했다. 핀 안정기의 회전변형 실험에서, 적어도 약 157톤-미터(ton·m)50)의 회전력이 가해질 때 핀 안정기의 샤프트-보스

사이에서 회전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계측됐다.

사참위는 운항 중 외부 힘이 작용했을 세 번째 가능성과 관련해, 209번 차량 블랙박스에 녹음된 충격음의 성격에 주목했다. 이 블랙박스에는 8시 49분 31~36초에 ‘쾅’ 하는 충격 음(7회)이 연달아 녹음되었다. 핀 안정기의 강제회전 변형 시험에서도 충격음과 함께 축이 회전하는 현상이 예비 시험과 실물 시험 때 관찰됐다. 사참위는 우현 핀 안정기의 회전변 형 실험 때 발생한 소음과 블랙박스 영상에 녹음된 소음을 비교하여, 두 가지 음향의 특

80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해석은 외부 물체 의 충돌이라는 상황을 전제하고 행한 실험 결과이고 다른 대조 실험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림 2-19 우현 핀 안정기의 강제 회전변형 실험 장면 세월호 우현 핀 안정기 실험장치에 조립 ◀◀ ◀◀ 50) 회전력(토크)의 단위는 무게×길이로 표시된다.
성이 유사하다는 음향 분석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음향 특성의 유사성

4・16세월호참사

는 점, 그리고 공기 중에서 수행한 핀 안정기 회전변형 실험의 소음과 수중에서 발생한 핀

안정기 변형의 소음을 음향 특성만으로 분석한 결과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와 함께 사참위는 세월호 외관의 변형과 손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핀 안정기 격납고 가 선수 방향으로 약 9mm 이동하고, 선수 쪽은 우현 방향으로 6mm, 선미 쪽은 좌현 방 향으로 26mm 이동한 형태, 즉 선미를 기준으로 격납고의 선수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 형태의 변형이 발생한 것을 새롭게 확인했다. 또 기관 구역에서 핀 안정기 격납고에 이르 는 구간 가운데 71~75번 프레임(Fr. 71~75) 부위에서 인양 과정으로 인한 손상 가능성이 없 는 독특한 손상 흔적을 발견했다. 72번 프레임 부위에는 특이한 형상의 덴트(함몰 자국)가 있

고 하단에 가로 파단이 있었다.

가해질 경우, 핀 안정기의 샤프트 재료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실제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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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종합보고서
것으로 나타나, 이런 힘의 작용으로 핀 안정기 과회전 변형과 격납고 변형을 동시에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림 2-20 72번 프레임(Fr. 72) 부위 선체 외판에 나타난 움푹 들어간 자국 형상
이에 사참위는 핀 안정기실 격납고와 주변 변형을 일으킨 힘의 방향과 크기를 추적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분석을 진행했다. 그 결과 선체 외판으로부터 1.0m 이내 위치에 하중 이 2,400톤 가해졌을 때 가장 유사한 핀 안정기실 격납고 변형 형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만일 미상의 수중체가 격납고를 변형시켰다면 그것은 선미에서 선수 방향으로, 좌현에서 우현 방향으로 향하는 형태의 추돌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같은 힘이 핀 안정기에 직접
형상과 달리 크게 휘어 변형하는

이와 함께 사참위는 좌현 핀 안정기실의 변형과 파단이 세월호 침몰 이전에 외력에 의해

일어났다면 세월호의 침수 과정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침수 시뮬레이션을 시행 했다. 앞서 선조위에서 이뤄진 침수 시뮬레이션은 C갑판 배수관은 고려했으나 좌현 핀 안 정기실 파단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초기 침수 과정을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결과는 세월호 의 실제 침수 자세와 달랐다. 사참위는 선조위에서 고려되지 않은 좌현 핀 안정기실 통풍 관 내부 구조, 좌현 핀 안정기실 외판 파단, C갑판 배수관 등의 경로를 통한 침수의 유량 계수를 모형 시험을 통해 계산하고, 이를 침수 시뮬레이션에 적용해 세월호의 실제 침수 자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침수 조건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사참위는 이런 조사 활동 에서 침수 초기 단계의 세월호 자세를 유사하게 모사할 수 있는 침수 조건을 찾기 어려웠 다. 또 시뮬레이션에 사용한 유량 계수가 실제 상황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신뢰성 문제 가 제기되어 침수 시뮬레이션 결과를 조사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사참위는 세월호의 변형·손상 원인을 조사하면서 이에 대한 전문가 검토를 대한조선학회 에 정식 요청했다. 대한조선학회는 핀 안정기의 과회전 변형의 원인을 찾는 데 사용한 사 참위의 모델링이 적절한 방법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공식 의견서를 보내왔다.51) 대한 조선학회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대한조선학회는 사참위 조사에서 핀 안정기가 해저 지반에 관입된 상태에서 세월 호가 수평 이동한 정황은 고려했으나 회전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째로 대한조선학회는 사참위 조사에서 핀 안정기를 탄소성체52)로 보지 않고 강체로 보았기 때

51) 대한조선학회 해양안전위원회, 「사회적참사특별조사 위원회 세월호참사진상규명 소위원회 중간보고서 및 최종보고서에 대한 대한조선학회 검토 의견서」, (2022.5.23.); 대한조선학회, 「세월호 침몰 원인 보고서 직나-09 및 직나-10에 대한 대한조선학회 공식 의견서」, (2022.6.17.).

52) 강체와 탄소성체: 강체(rigid body)는 어떠한 힘을 가하여도 모양과 부피가 변하지 않는다고 가상되는 이상적인 물체다. 일반적으로는 외력에 의한 변형이 아주 적은 물체를 이르는 말로 쓰인다. 탄성체(elastic body)는 외력에 의해 변형된 후에 외력을 제거했을 때 원위치로 돌아오려는 성질을 가진 물체를 말하며, 소성체(plastic body)는 외력에 의해 변형된 후에 외력을 제거했을 때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고 잔류 변형이 남는 성질을 가진 물체를 가리킨다. 탄성체와 소성체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는 물체를 탄소성체(彈塑性体, elastic-plastic body)라 한다.

82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문에 핀 안정기의 굽힘 변형을 유발하는 하중과 과회전을 유발하는 회전력이 제대로 산

4・16세월호참사

정될 수 없었다는 모델링 과정상의 문제를 지적했다. 만일 선체의 이동과 회전을 고려하 고 또 핀 안정기와 격납고 주변을 탄소성체로 모델링했다면, 핀 안정기가 해저 바닥에 관 입하고 회전함으로써 격납고 주변에 실제로 나타난 것과 같은 비교적 큰 변형을 일으키는 결과를 모델링에서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대한조선학회는 셋째로 격납고 변형을 모사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강제 변위에 의 한 반력을 도출한 것이었기 때문에 손상 원인을 분석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은 시뮬레이 션 방법이며, 시뮬레이션에서 산출된 2,400톤의 반력(격납고 변형 하중 추정)을 유발하는 하중 원인을 추정하거나 특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넷째로는 세월호 인양 과정에서 선체 변형 과 손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도 이에 대한 검증과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을 들어 보완과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53)

침몰 원인에 관한 마린의 분석과 대한조선학회의 견해

아래에서는 사참위의 공식 견해는 아니지만 세월호의 침몰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

성을 보여주는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의 선체 모형 시험 분석과 대한조선학회가 사참

위에 제출한 공식 의견서를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참위는 2022년 1월 마린에 세월호의 선회와 횡경사 과정을 모사하여 분석하는 세월호 자유항주 시험을 의뢰했으며, 마린은 2022년 5월 사참위에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54)

마린은 선체의 조건을 다양하게 바꾸면서 총 114회 모의 항주 시험을 시행했다. 각각의 모 의 항주는 선박의 항해 속도, 방향타 각도, D갑판 화물과 다른 화물들의 이동 상황, 그리 고 수중체 추돌을 모사하는 윈치(winch)55)의 작동 여부를 달리해 시행했다. 53)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전원위원회 147차 회의, (2022.5.19.);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전원위원회 148차 회의, (2022.5.24.). 54) MARIN, Sewol Additional Turning and Heeling Model Tests: Final Report, Report No. 33705-1-SMB (2022.5).

55) 윈치(winch)는 밧줄이나 쇠사슬을 감았다 풀었다 함으로써 물체를 들어 올리거나 끌어당기는 데 사용하는 기계 장치를 말한다. 마린의 모의 항주 시험에서는 세월호 선박에 가해지는 외력의 효과를 살펴보고자 모형 선박에 연결해 사용했다. 좌현에 미상의 수중체가 충돌 또는 추돌할 때 왼쪽으로 기우는 효과를 구현하고자 윈치는 우현 쪽에 설치하여 우현 핀 안정기를 들어 올리는 작용을 하도록 설계됐다.

83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종합보고서

모형 선박의 항주 시험은 마린 연구소에 있는 길이, 폭, 깊이가 170m x 40m x 5m인 시험

시설(SMB: Seakeeping and Manoeuvring Basin)에서 이뤄졌다. 이 시설은 물을 채운 풀에서 모형 선 박의 자유항주를 제어하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각종 데이터를 기록하는 장 치로 구성되었다. 모형 선박은 세월호 실물의 25.39분의 1로 축소해 탄소 재질로 제작되었 다. 모형 항주 시험에서는 선박 적재 화물과 평형수 등에 따라 달라지는 적하조건(loading condition)56)을 표현하고자 GM과 선미 침하57) 값을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설정했다. 즉 ① 1번 조건(Case 1): GM 0.560m, 선미 침하 0.28m, ② 3번 조건(Case 3): GM 0.353m, 선미 침하 0.29m, ③ 4번 조건(Case 4): GM 0.495m, 선미 침하 0.83m이라는 세 경우의 적하 조건을 기 본으로 삼아서 서로 다른 상황으로 114차례 모형 항주 시험을 진행했다. 마린은 『최종 보고서』에서 모형 시험의 결과를 종합해 “낮은 GM과 방향타 사용(조타), 그 리고 화물 이동이 모형 세월호의 빠른 선회와 극도의 횡경사를 만든 주요 요인”이라는 결 론을 제시했다. 이어 이런 결론은 선체조사위원회 의뢰로 시행한 2018년 모형 시험 결과 를 다시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외력의 작용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했

다. “외력 자체의 정확한 성격과 동역학에 관한 명확한 가설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가설적 인 외력을 적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 더욱이 모형 시험은 과도한 횡경사가 외력의 작용을 도입할 필요 없이 내적 요인에 의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린은 모의 항주 시험의 결과를 몇 가지로 간추려 제시했다. 첫째, 배의 GM이 낮다면 그 만큼 배가 선회하는 동안 최대 횡경사 각도가 커지고 횡경사 속도도 커진다. 둘째, 방향타 각도를 크게 할수록 최대 횡경사 각도와 선회율이 증가한다. 셋째, 화물 이동은 배의 횡경 사 동역학에 영향을 주며 대부분 선체의 안정성을 훼손하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즉 초 기의 작은 불안정화 모멘트도 선박의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다시 이것이 큰 각도의 횡경사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56) 적하조건(loading

84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condition)은 선박 복원성 평가와 관련한 요소로서 하중조건이라고도 번역된다. 마린은 세월호 선박 모형에
선수보다 선미 쪽이 물에 더 잠긴 상태를
때 선미 침하라고 하며 이 경우에 선수는 물속에서 그만큼 들어
여러 GM과 선미 침하 값을 설정하여 서로 다른 적하조건의 선박 항주 시험을 진행하고 비교했다. 57) 선미 침하(stern trim)는
가리킨다. 물에 잠긴 흘수가 선미 쪽이 클
올려진 상태가 된다.

4・16세월호참사

네 번째, 마린은 외력의 영향을 검증한 시험에 대한 결론으로 “(외력의 작용을 모사하고자 우현 쪽에 설 치한) 윈치를 들어 올려 생긴 힘과 횡경사 모멘트는 선박의 횡경사 동역학에 영향을 준다”고 확인했지만, 부연 설명으로 “윈치는 횡경사 속도를 증가시키도록 설정되었기에, 그 결과로 윈치가 작동하는 동안에 횡경사 속도가 증가했다”고 덧붙였다. 외력을 모사하는 윈치를 들어 올릴 때 횡경사 속도가 증가하는 효과가 나는 것은 실험 설계상 당연하다는 뜻이다. 마린 보고서는 수중체 추돌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복원성이 낮은 선박에서 대각 변침 또는 빠른 변침 등의 방향타 사용으로 선박을 더욱 불안정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 히 작은 GM이 선미 침하를 유발하는 적하조건이 선박 운항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데 중대 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모형 항주 시험에서 다시 확인됐다. 마린 보고서는 114차례의 모형 항주 시험 결과를 종합하면서 횡경사 각도 측정 결과를 <그림 2-21>에 요약해 제시했다.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이 그림은 화물 이동과 외력 작용은 없는 조건에서 방향타 각도만 증가시킬 때, 적하조건

이 각기 다른 모형 선박에 나타난 최대 횡경사 각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마린 모형 항주 시

85
종합보고서
화물
작게 설정되었으며(0.353m),
그림 2-21 선박 적하조건과 방향타 각도가 최대 횡경사 각도에
전반적인 영향을
그림
이동과 외력 윈치 작용은 배제한 시험 결과다. 선박 적하조건을 나타내는 GM은 3번 조건(Case 3)에서 가장
그다음은 4번 조건(0.495m), 1번 조건(0.560m) 순이다.
끼치는
보여주는

험에서는 특히 선박의 GM이 가장 낮은 3번 조건에서 타각의 증가에 따라 횡경사 각도가 매 우 크게 증가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마린 보고서는 “적하조건과 방향타 각도가 선박 횡경사

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GM이 낮을수록 또한 선미 침 하가 클수록 화물 이동과 외력(윈치 작동) 없이도 선박 횡경사는 커진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는 최대 횡경사 각도(세로축)가 15~20도 구간에서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마 린 보고서는 이것이 세월호 선박의 독특한 외형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로 인 해 선박 복원력이 감소하고 급격한 횡경사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정을 덧붙였다.58)

이밖에 화물 이동과 관련한 항주 시험 결과 데이터를 보면, D갑판에서 화물 이동이 횡경

사 각도 12도 또는 23도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설정한 모형 항주 시험에서 100톤 정도의 적은 중량이 이동해도 선박 안정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해석됐다. 초기 화물 이동이 대 량으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연쇄작용을 통해 횡경사 33도까지 빠르게 나아가 대규모의

2차 화물 이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마린의 해석이다.

사참위는 대한조선학회에 「세월호의 변형·손상 원인 조사결과보고서」(직나-9 보고서)와 「세 월호의 횡경사 원인 검증과 침수 과정 조사결과보고서」(직나-10 보고서)에 대한 전문가 검토 를 의뢰했다. 대한조선학회는 미상의 잠수함 추돌을 전제하는 “외력설의 가능성이 현저 히 낮을 것으로 판단한다”는 공식 견해를 제시했다.59) 대한조선학회는 그 근거로 첫째 사 고 해역의 최저 수심이 30m에 불과해 작은 규모의 잠수함이더라도 잠항이 불가능하다 는 점, 둘째 사고 해역이 유속이 3노트에 달할 정도로 강한 조류가 발생하는 지역이라 잠 수함 조종이 어렵다는 점, 셋째 잠수함은 중성부력으로 잠항한다는 특성을 감안할 때 잠 수함이 충돌할 경우 복원력이 취약하여 큰 피해가 불가피한데도 사고 해역에서 잠수함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없었다는 점, 넷째 잠수함의 잠망탑을 감싼 외부는 비압력 선체 구조 를 이루어 잠수함 측의 피해가 막대한데도 그런 사고가 보고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 하기 힘들다는 점, 다섯째 사고 당시 잠수함 목격자가 전무하다는 점, 여섯째 소형급 잠수 함이 17노트 이상으로 운항하는 세월호를 추돌하려면 20노트 정도로 잠항해야 하는데 58) MARIN, Sewol Additional Turning and Heeling Model Tests: Final Report, p.20. 59) 대한조선학회, 「세월호 침몰 원인 보고서 직나-09 및 직나-10에 대한 대한조선학회 공식 의견서」, (2022.6.17.).

86 제2장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이는 작전 상황에서만 가능한 최대 속도이며 이 정도 속도를 유지할 경우 배터리는 2시간

이내에 방전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제시하며 “외력의 가능성은 기술적으로 현저히 낮으

며 내인설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대한조선학회는 또한 마린의 『최종 보고서』와 관련해 “대한조선학회는 마린의 보고서 내 용 및 결론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견해를 사참위에 밝혔다. 낮은 복원성, 방향 타 움직임, 화물 움직임이 세월호 침몰의 주요 원인이며 침몰에 대한 설명에서 가상의 외 력은 배제할 수 있다는 입장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대한조선학회는 “선조위 조사 결과 및 CCTV 분석을 토대로 GM이 얼마였다라고 추정하는 식의 연구가 아니라, 이미 전복하여 침몰한 세월호의 GM이 얼마 정도일 때 이러한 대각 횡경사가 발생하는지를 좀 더 면밀하 게 확인했어야 한다”고 공식 의견서에 서술했다.

세월호 침몰 원인에 관한 종합 결론 및 진상규명의 한계

사참위는 침몰 원인과 관련해 선조위가 제시한 두 가지 가능성과 의문을 검증하는 조사 활동을 벌였다. 즉, 복원성이 취약한 세월호에서 일어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우선회와 횡경사의 원인인지,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에 미상의 수중체 추돌이 작용했는지를 검증 하는 것을 조사 활동의 주요 과제로 삼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참위는 그 가운데 하 나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 우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하나로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의 원인이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 충격일 가능성 과 관련해, 사참위는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 는 이르지 못하여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참위는 개 별 조사 보고들을 종합 검토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의 한계에 유의했다. 먼저, 여러 조사 활동에서 얻은 결과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불일치 또는 모순이 발견되었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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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다. 차량의 블랙박스에 기록된 소음을 분석한 조사 결과와 전화선·쇠사슬 기울기로 추정 한 선체 거동 조사 결과 사이에서 수중체 추돌 추정 시점의 불일치가 있었다. 수중체 추돌

시점에 관해 「세월호의 변형·손상 부위 확인 및 원인 조사결과보고서」(직나-9 보고서)에서 밝 힌 8시 49분 31초와 「세월호 횡경사 원인과 침수 과정 조사결과보고서」(직나-10 보고서)에서 밝힌 8분 49초 41초는 상당한 불일치를 보여주었다. 이밖에 수중체 접촉 시뮬레이션에 나 타난 선체 거동과 쇠사슬 기울기로 파악한 선체 거동에 불일치와 모순이 존재하여 조사 결과들이 상호 충돌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참위가 조사 활동을 통해 얻은 결과들을 종합 검토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결론을 단정 하기에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다른 가능성도 함께 제기되었다. 핀 안정기실 파단의 원인 에 관한 조사에서 그 원인이 세월호 인양 과정에 사용된 인양 빔의 영향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외력의 가능성을 추정하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리하다고 판단되었다. 그것이 인양 빔의 직접 접촉 가능성 외에도 침몰 이후 인양 완료 시점까지 다른 원인에 의해 훼손 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블랙박스에 녹음된 소음의 분석 결과는 소 음의 정체가 좌현 핀 안정기 과회전 때 발생하는 소음 특성과 유사함을 보여주었다고 밝 혔으나 녹음된 소음이 선수갑판 컨테이너나 다른 화물의 이동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완 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문제가 함께 제기되었다. 사참위는 여러 추정이 개입해 얻은 결과를 확정된 조사 결과로 채택하는 과정을 경계하 고자 했다. 사참위 조사에서는 여러 계산값을 바탕으로 사고 당시 세월호의 복원성 수치 가 0.495m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세월호의 급격한 횡 경사율(2.5도/초와 3.6도/초)이 세월호 자체 거동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기에 외력 작용이 있었 을 것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었으나, 이는 추정에 추정을 더한 것이라는 점을 유의할 때 확 인된 결과로 인정하여 확정하기는 어려웠다. 사참위 조사 활동을 통해 얻은 일부 결과에서는 여러 다른 침몰 상황을 동시에 모두 설 명하는 데 부족함도 있었다. 세월호 선체의 주요한 변형·손상 흔적인 핀 안정기 과회전과 핀 안정기실 변형은 시뮬레이션 분석에서 동시에 설명되지 못했으며 세월호 침몰 당시의

88 제2장

선체 거동 등 다른 상황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또한 수중체와 추돌했다면 선회율

은 증가하나 횡경사 속도는 감소해야 함에도 마린의 모형 시험에서 우현 핀 안정기 쪽을 윈

치로 잡아 올리는 방식으로 시험한 결과 선회율과 횡경사율이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밖에 참사 발생 해역은 잠수함이 잠항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할 설득력 있는 근거를 찾기 어려웠으며, 사고 당시 그 해역에 잠수함이 존재하고 항해했다고 볼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도 침몰 원인의 종합 결론을 내릴 때 유의해야 했다.

사참위는 그동안 조사 활동에서 얻은 결과들을 검토하고 또한 대한조선학회 자문 결과와 마린 연구소의 세월호 모형 자유항주 시험 보고서 등을 종합할 때, 사참위 조사 결과가 외력 충돌 외의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으며 외력이 침몰의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다.

선박 증개축, 평형수 배출, 화물 과적, 화물 고박 불량, 조타 실수, 기계장치 오작동, 외부 물체 충돌. 2014년 이후 지금까지 세월호 침몰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공식 조사와 수사 대상이 되 었던 것들이다. 그중 일부는 문서, 진술, 실험,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고, 다른 일부는 역시 문서, 진술, 실험,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참위의 세월호 침몰 원인 조사도 이와 같은 오랜 사실 확인과 검증 과정 의 일부였다. 다만 지금까지의 세월호 침몰 조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각종 증거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해석도 다양했다. 특히 세월호 침몰의 물질적 증거들은 선체가 해저에 가 라앉아 있는 동안 훼손되고 유실되었다. 이런 제약으로 인해 사참위가 충분한 증거를 바탕 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침몰 원인을 제시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사참위는 증거의 재검증, 새로운 영상 증거 복원, 모형 시험, 시뮬레이션 분석을 비롯한 여러 조사 방법을 통해 그동안 침몰 원인과 관련해 제기된 의문과 의혹을 풀고자 했으며, 그 과정 에서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에 의한 급격한 우선회의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할 수 있었 고 수중체 추돌로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설의 근거가 부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참위는 널리 퍼진 의혹을 검증하고 확인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다만 침몰 원인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내지 못한 점은 한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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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가? 제2장 4・16세월호참사
제 3 장 구하지 않은 생명: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1. 그날의 절규는 누구에게 닿았나 2. 그 누구도 세월호를 파악하지 않았다 3. “가만히 있으라” 4. 때 이른 포기: 섣부른 응급조치 중단과 이송 지연 5. 사라진 컨트롤타워: 세월호참사 초기대응의 실패 6. 그날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1. 그날의 절규는 누구에게 닿았나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세월호에서 처음으로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119 종합상 황실을 거쳐 8시 54분 목포해양경찰서(이하 ‘목포서’)로 연결된 전화기 너머로 살려달라고 절 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후에도 수차례 전화가 왔다. 승객들은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고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한 명은 이미 바다에 빠졌다며 급박한 사고 현장 소식을 전 했다. 그러나 당시 목포서 상황실 담당자에 의하면, 이 소식들은 중복 신고라는 이유로 목 포서 내에도, 다른 해경 상황실에도 전달되지 않았다. 신고 전화를 통해 세월호의 사고 상황을 인지한 해경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신고 전화 를 받은 목포서는 사고 접수 상황을 전달하고 경비정, 어선들이 구조에 참여하도록 지시 했다. 그러나 목포서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을 선내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이하 ‘서해청’)은 현장에 출동하는 헬기를 지 휘하고 있었지만 승객 수 등 기본적인 정보도 전하지 않았다. 세월호 갑판부와 기관부의 선원들이 모두 탈출할 때까지 세월호와 교신했던 해경은 진도 해양교통관제센터(이하 ‘진도 VTS’)가 유일했다.

8시 52분, 최초 신고 전화 접수

“살려주세요” A○○ 군의 최초 신고 오전 8시 52분, 좌현으로 기울어진 세월호로부터 119로 첫 신고 전화가 접수됐다. 단원고 학생 A○○는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며 배가 침몰되고 있다고 신고했고, 전남소방본부 119 종합상황실은 목포서 상황실에 연락했다. 8시 54분경 신고를 접수한 목포서 상황실은 신 고 내용을 큰 소리로 복창해 상황실 내 근무자들에게 전달했고, 세월호 위치를 파악한 뒤 가장 가까이에 있는 123정에 연락해 세월호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최초 신고가 접수된 8시 52분경, 세월호 선내에서는 안내방송이 시작됐다. “현재 자리에 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동을 하시면 지금 위험

92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하오니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배가 갑자기 기우는 상황에서 승객을 안

정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안전봉을 잡고 잠시 대기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당

연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라는 방송은 3층 갑판이 침수되어 방송 이 불가능해 지는 시점까지 계속되었다.

세월호참사의 최초 희생자, Q△△ 선생님

배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한 8시 49분경, 최초 희생자가 발생했다. 8시 55분경 전남소방본 부 119 종합상황실에 “한 명 아까 빠진 것 같아요, 사람이.”라는 신고가 들어왔고, 이 내용 은 목포서 상황실로 전달됐다. 그러나 사참위 조사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이 시작된 그 시 점에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기 위한 계획이나 조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배가 기울고 있다는 신고 이후 3분 만에 다시 전화가 걸려와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 았지만, 해경은 이후 교신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았고 관련 보고 내역도 확인되지 않는다. 물에 빠진 사람은 단원고 교사 Q△△이었다. 생존 학생들은 선생님이 배가 갑자기 기울면 서 몸이 붕 뜬 상태로 바다에 빠졌다고 기억했다. 승무원들에게 구명보트를 내려야 한다 고 외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Q△△이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한 시점인 8시 49분에 바다로 추락한 사실60)은 세월호 선원들을 재판하는 법정에서도 사실로 인정했다. 그러나 최초 희생자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일에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사참위는 세월호 의 최초 희생자에 대한 수색 및 구조 시도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관련 재판 에서 최초 희생자를 제외하고 303명을 피해자로 적었던 공소장을 사참위 조사 결과를 반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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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350명 탑승
침몰 중” 해경은 무엇을 했나 목포해양경찰서 단원고 학생 A○○의 최초 신고 이후에도 세월호에서 119, 122로 신고 전화가 계속 걸려왔 60) 다만 정확한 사망시점이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광주고등법원 2014노490호 판결문).
영하여 피해자 304명으로 다시 써야 한다.
여객선

다. 9시 3분 세월호 여객부 직원 F○○은 122 신고로 “지금 배가 기울어서 사람 한 명이 바

다에 빠졌고요”, “지금 저희가 배가 40도 45도 지금 기울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 있는 상황

이 안 돼요”, “지금 (구명동의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 안 돼요, 배가 기울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 요”, “지금 선내에서 움직이지 마시라고 계속 방송하고 있고요”라며 선내의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이 신고를 접수한 목포서 상황실원 G○○은 앞서 들어온 신고와 중복된다 생각해 F○○이 신고한 정보를 목포서 상황실 내에 공유하거나 보고하지 않았다. 이어 G ○○은 9시 13분에 여학생의 122 신고 전화를 받았다. “저희 지금 배가 기울어져 가지고 갇혔거든요”라는 신고에 지금 경비정이 가고 있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9시 5분경 122 신 고를 접수한 목포서 상황실원 H○○은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빨리 오셔야 할 거 같은데”, “구명동의 입을 지금 상황도 못 돼요”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기다리라는 말만 했 을 뿐, 세월호 선내 상황이 어떤지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다.61)

목포서 상황실은 해경의 여러 통신수단을 사용해 사고 접수 상황을 전달하고 인근에 있 던 경비정, 어선들이 구조에 참여하라고 지시했다. 목포해양경찰서장 김문홍은 당일 불법 조업 중인 중국어선을 단속하려고 3009함에 타고 있다가 9시 3분경 세월호 사고 상황을 처음 알게 되었다. 김문홍은 3009함에 전속력으로 사고 현장으로 가고, 가능한 인력은 모 두 대기하고 구조 물품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세월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확인

해보라고 지시하거나, 그때까지 파악된 정보가 무엇인지는 알아보지 않았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서해청 상황실은 8시 59분경 목포서 상황실에서 연락받고 세월호 상황을 알게

94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서 해청은 관할 항공대와 서해청 특공대에 사고 상황을 전파하고 신속하게 출동
내려 야 했다. 하지만 당일 서해청 상황실은 목포항공대에 “여객선 침몰 중, 헬기 출동 지시”를 61) 해경서 상황실 122 신고접수가 들어오면, 신고 전화 위치 정보와 신고자 진술을 토대로 재난 위치를 추정하고 신고자에게 정확한 재난지점을 되물어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곧바로 사고지점에 최단 시간 내에 접근할 수 있는 세력을 파악해 초기대응을
신고 전화를 접수한
되었다.
지시를
하라고 지시하고, 신고자의 인적사항과 현장 기상 정보, 선박 정보 등 정확한 현장 정보를 파악한 후 통화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신고자와 추가로 통화해야 한다. 이는 ‘상황실 운영규칙’에서 정하고 있는 절차다. 세월호참사 당일
이후 사고 현장 가장 가까이 있던 123정을 현장으로 가도록 지시한 사실은 확인되지만, 최초 신고접수 이후 10~20여 분간 신고 전화가 계속되었음에도, 신고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고, 신고 내용으로 파악한 세월호의 상황을 다른 기관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내리기는 했으나, 배의 규모, 탑승 인원 등 구체적인 정보는 전하지 않았고, 목포항공대에

서도 구체적인 상황을 묻지 않았다. 현장으로 출동하는 헬기가 기본적인 정보도 알지 못 한 채 출동한 것이다. 서해청에서는 당시 불법어선 단속차 3009함에 대기 중이던 목포항 공대의 또 다른 헬기인 512호기에도 출동지시를 하기 위해 3009함에 전화를 한 것으로 보이나 지시는 바로 헬기로 전달되지 않았다. 512호기는 목포항공대에 우연히 전화를 하 였다가 사고를 전해 듣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또 서해청은 서해청 소속의 군산항공대, 남해청 소속의 여수항공대, 제주청 소속의 제주 항공대 등에 즉각 항공기 지원을 요청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산항공대와 남 해청에 대한 상황 전파가 지연됐고, 결과적으로 군산항공대 502호기 헬기의 출동이 20분 가량 지연됐다. 제주청에는 사고 사실이 전파되지 않고 있다가 9시 8분경에야 목포서 상 황실을 통해 지원 요청이 전달됐고, 그제야 이미 불법 어선을 단속하기 위해 비행하고 있 던 제주청 소속 513호기에 출동 지시가 내려졌다. 서해청 특공대의 출동도 30분가량 늦춰 졌다. 서해청이 처음에 현장출동 지시가 아닌 ‘출동대기’ 지시만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진도VTS 신고가 접수되고 사고 상황이 전파된 이후 세월호와 직접 교신한 것은 진도VTS62)뿐이었다. 세월호가 진도VTS 구역 내에 들어왔을 때는 어선들을 살피느라 곧바로 인지하지 못했으 나, 목포서 경비 전화를 통해 사고 상황을 인지했고, 9시 5분경 최초로 세월호와 교신한다. 진도VTS 외에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세월호와 직접 교신한 해경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95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세력은 없었다. 해양경찰청(본청) 목포서 상황실에서는 122 신고 전화를 접수한 이후 상황을 전파하기 위해 KCG 메신저 62) 해상교통관제센터(Vessel Traffic Service Center, 이하 ‘VTS’)란 선박의 안전사고 예방과 해양환경 보호를 위하여 레이더 및 교신 장비를 이용하여 통항 선박의 동정을 관찰하고 이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해상교통관제(Vessel Traffic Service)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VTS는 해양사고가 발생하면 신속히 보고하고 필요한 초동조치를 해야 하고, 구조에 관한 사항을 인지하면 상황실과 구조 세력에 정보를 제공하고 VHF(초단파, Very High Frequency)를 통해 방송해야 한다.

문자방을 개설했다. KCG는 해경의 부처 간 메신저 연락망으로, 이를 통해 9시경 해경 본청 에서도 세월호 상황을 알게 되었다. 당시 본청 상황실장 I○○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목 포서 상황실, 서해청 상황실에 물어 상황을 파악했고 선장과 교신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사 고해역으로 인근 해경서의 함정들을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I○○는 상황담당관63) 임근조 에게 세월호 사고 상황을 보고했는데, 임근조는 추가 정보를 파악하느라 해경청장 김석균 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았다. 결국 김석균은 9시 27분이 넘어서야 상황실에 들어왔다.

청와대는 세월호 사고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세월호참사 당일 청와대의 초동대응을 맡은 중심 부서는 청와대 국가안보실 산하 위기관 리센터였다. 당일 위기관리센터는 9시 19분경 「YTN」 보도를 보고 세월호 사고를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참위는 조사과정에서 이와 어긋나는 여러 자료를 확인했다. 다만 근무자들의 진술 외에 사고 소식 인지 경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웠고, 구체적인 인지 시점 역시 특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사고 정황을 언 제 어떻게 인지했든 그 이후 제대로 대응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위기관리센터는 상황팀, 대응팀, 사이버대응팀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상황팀은 3개의 상황반이 24시간 교대로 근무했다. 상황팀은 통상 8시 30분경 인수인계를 하고 근무교대 를 한다. 2014년 4월 16일 브리핑과 인수인계를 마친 상황반이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 지 않아 세월호 사고 상황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상황팀은 9시 20분 해경 본청 상황실에 전화해 진도에 여객선 조난신고가 들어왔는지, 심각한 상 황인지, 현장에 구조대가 있는지, 작동하는 카메라가 있는지 등을 문의한 후, 파악된 정보 를 청와대 내에 공유하고 국가안보실 주요 인사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대통령비서실은 각 행정부처와 연락망을 갖추고 있으므로 상황을 조기에

96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참위 조사 결과, 참사 당일 대통령비서실은 해경,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등 관 63) 세월호참사 당시 해경 상황실은 상황실을 총괄하는 상황담당관과 그 아래 상황실장 등 3교대 직원들이 근무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련 기관64)에서 소식을 전달받아 세월호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

다. 해경은 9시경에 사고 사실을 인지하고 9시 17분경에, 해양수산부는 9시 3분경 사고 사 실을 인지하고 9시 20분경에, 안전행정부는 9시 19분경 사고 사실을 인지하고 9시 31분 경에 각각 기관 안팎으로 사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위 기관들은 사고 발생 소식을 알게 된 즉시 대통령비서실에 보고하지 않았고, 결국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을 비롯한 대 통령비서실 근무자들은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세월호 사고를 처음 알게 되었다.65) 현장출동 세력이 세월호에 도착하기 전까지 진도VTS는 세월호와 직접 교신하여 위급한 상황 정보를 전달받았고 그 내용을 서해청과 목포서 상황실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러나 서해청과 목포서는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구조 계획을 수립하지도 않았고, 출동 세력에게 정보를 전달하지도 않았다. 승객 수도 파악하지 않은 현장출동 세력 목포서로부터 세월호 사고 현장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은 해경 123정은 9시 32분경 현 장에 도착했다. 서해청 헬기 511호기는 서해청 지시를 받고 9시 10분경 출동해 9시 26분경 현장에 도착했고, 513호기는 목포서에서 연락을 받고 9시 8분경 출동해 9시 32분에 도착했 다. 3009함에서 9시 17분경 출발한 512호기는 9시 45분경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천해 양경찰서 소속 고정익

안전행정부를 관계 부처로 두고 각 기관 소속 근무자를 파견받아 소통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65) 세월호참사 발생 이후 2014년 5월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의 지시로 세월호 사고 발생 당시 상황을 인지한 경위와 청와대의 세월호참사 대응 과정이 정리되어 청와대 내부에 공유된 바 있다. 이로 인해 근무자들의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97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항공기(CN-235) B703(이하 ‘703호기’)는 항공순찰 업무를 수행하던 중 9 64) 대통령비서실 소속 정무수석실 사회안전비서관실은 해양경찰청,
해양수산비서관실은
정무수석실 행정안전비서관실은
기억이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나, 언론 보도 이전에 대통령비서실에 보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 그 누구도 세월호를 파악하지 않았다
경제수석실
해양수산부,

시 15분경 세월호에 사고가 났음을 인지하고 현장으로 이동해 9시 30분경 도착했다. 123정과 헬기, 항공기는 세월호와 사고 현장 정보를 얼마나 알고 현장으로 갔을까? 구조 를 위해 출동하는 함정과 헬기가 사고 선박과 교신해 승객 수와 배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 은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임무다. 만약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고 선박과 직접 교신하 기가 여의치 않다면, 각급 상황실에 정보를 요청해 출동 전 또는 출동 중에라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123정과 헬기 3대, 703호기 항공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23정장 김경일은 8시 57분경 목포서 상황실장 C○○에게 휴대전화로 “서거차도 근해 승 선원 350명이 탄 여객선이 침몰 중이니 즉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CVMS(통합선 박모니터링시스템)를 통해 세월호 근처에 다른 해경 함정이 없고, 123정이 세월호에서 가장 가 까운 경비정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초동조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123정은 승조원 13명의 100톤급 소형 함정이고 안정적으로 탈 수 있는 인원이 50 명 안팎이어서 수백 명에 이르는 승객을 구조하기에는 부족한 선박이었다. 123정이 이런 한계를 극복할 가장 수월한 방법은 세월호에 탑재된 장비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23정은 세월호에 세 차례 교신을 시도한 것 외에는 상황을 파악하려는 다른 노력을 하 지 않았다. 123정은 9시 3분부터 9시 4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세월호와의 교신을 시도했 으나 세월호로부터 답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9시 30분에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세월호와 교신을 더 시도하거나, 목포서 상황실이나 진도VTS에 세월호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지 않 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약 30여 분간 세월호의 상황이 어떤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현장으로 출동한 것이다. 123정장 김경일은 당시 현장에 신속하게 도착하는 것이 목표 였고, 여기저기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세월호와 교신을 취할 여력이 없었다고 진술했 다.66) 그러나 정장이 구조 지휘에 집중해야 한다면 승조원 중 한 명에게 세월호와의 교신 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또 30분이나 흐르는 동안 교신수단을 통한 보고 내역은 몇 차 례 확인되지 않아, 세월호와의 교신을 통해 정보를 파악하지 않은 것은 김경일의 판단 결 과라고 할 수 있다. 9시 18분경 TRS(주파수공용무선통신시스템, Trunked Radio System)로 세월호 승선 66) 2016년 세월호특조위 조사, 그리고 검찰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조사과정에서 이러한 취지로 진술하였다.

98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원이 350명이 아닌 450명이라는 정보가 123정에 전달되었고, 123정 내 방송을 통해 알려

졌다. 123정은 자신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다른 세력이 구조하거나 관련 지시도

없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하고 추가 구조 세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거나 구조 계획 수립을 요청하는 등 승객 수백 명 을 구조할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다. 헬기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 헬기와 항공기의 기장은 세월호 선장 또는 선원과 교 신해 세월호 상황을 파악하거나 VHF 또는 SSB(단측파대, Single Side Band)를 통해 세월호 관련 교신 내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고 선박에 탄 승객이 몇 명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여객선이라는 사실만 알고 출동했고, 출동 과정에서도 세월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실 질적인 교신은 확인되지 않는다. TRS 통신망이라도 확인했다면 해경 상황실에서 123정에 지시하거나 전달하는 내용이라도 볼 수 있었겠지만, 헬기에서는 사고 선박에 대한 TRS 통 신망 교신 내용도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보 파악 실패 123정과 헬기 등이 현장으로 출동하고 있는 동안 각급 구조본부에서는 세월호의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알렸을까? 세월호와 직접 교신해서 배 안의 상황이 어떤지, 구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한 사람이 있었을까?

서해청의 엉뚱한 지시

진도VTS는 사고 신고 접수 직후 9시 5분에 세월호와 최초로 교신을 시도했다. 이후 9시

36분까지 세월호와 교신해 세월호가 좌현으로 50도 정도 기울어져 침몰하고 있고, 승객 들이 움직일 수 없으며 배가 곧 완전히 기울어질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입고 대기하라고 했다는 사실, 현재 침수 상태는 확인할 수 없다 는 사실, 승객이 많아서 헬기만으로 다 구조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해경 함정과 상선이 50미터가량 근접해 있다는 사실, 좌현으로 탈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탈출 시도하라는 방 송을 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99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러던 9시 23분경, 세월호 측에서 진도VTS에 승객들이 탈출하면 구조가 가능한지를 물

었다. 진도VTS는 이를 다시 서해청 상황실에 문의했고, 서해청 상황실에서는 “현장 상황

을 잘 아는 선장이 판단하여 퇴선 여부를 결정하라”는 답변을 했다.67) 이때 서해청 상황실 은 ① 세월호의 상황이 급박해 승객들이 탈출하면 구조가 가능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문의하고 있다는 사실, ② 진도VTS가 세월호와 교신을 하면서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하 고 있다는 사실, ③ 현재 세월호와 교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해청 상황실은 진도VTS의 문의를 받았을 때라도 그 정보를 TRS 등 통신수단으 로 다른 부서나 상황실에 전달하거나 진도VTS에 세월호와 교신을 유지하면서 여타 통신수 단에 참여해 세월호 상황 정보가 해경 내에서 공유되도록 지시해야 했다. 그러나 서해청은 진도VTS의 문의와 보고를 목포서나 해경 본청에 전달하지 않았고, 진도VTS에 세월호와 계속 교신하라고 지시하거나 통신망에 참여해 정보를 전달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서해청은 KCG 메신저(문자상황보고시스템)를 통해서 123정에 계속 지시했다. 그러나 123 정에는 KCG 메신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시 내용은 123정에 직접 전달될 수 없었다. 123정에 코스넷(광역위성통신망)이 설치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목포서에서 9 시 6분경에 알렸음에도 123정이 현장으로 출동하는 동안 KCG 메신저로 “영상회의 시스 템 가동”, “OSC(현장 지휘관) 지정”, “전속대응 이동” 등의 지시를 내렸다. 직접 전달될 수 없는 지시를 한 것이다. 그나마도 구조에 도움이 되는 내용도 아니었다. 서해청은 또 지시사항 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지시사항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목포서와 해경 본청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세월호로부터 사고 신고가 접수되고 목포서 함정, 서해청 항공기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의 함정과 항공기가 현장으로 출동했다. 해경청장이자 중앙구조본부장인 김석균은 현장 구 조를 비롯해 구조 업무 전반을 총괄하고 지휘해야 할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김석균은 신 67) 당시

100 제3장
않은 생명
구하지
진도VTS 관제요원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전달했는지, 서해청 상황실에 보고하여
전달했는지에 대한 관계자들의 진술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해청 상황실에 있었던 직원들의 공통된 진술로, 서해청 상황실의 지휘부가 이와 같은 내용을 결정해 진도VTS로 지시했다는 점은 확인되었다.

4・16세월호참사

고 접수 이후 33분이 지난 9시 27분 이후에 상황실(위기관리회의실)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

다.68) 본래 해경 본청 상황실에서 파악하고 분석한 정보를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 중앙 재난안전대책본부 등 유관 기관에 즉시 보고하고 전달해야 하는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 았다.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해경 본청에서 정보를 보고받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해 경 본청 상황실에 사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다. 김석균은 상황실에 임장한 이후에라도 회의실 내에 구비된 교신수단을 이용해 정보를 파 악하고 구조 계획을 수립하고 지시를 내릴 수 있었으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나 김석균이 당일 상황실에 나온 이후 구체적으로 지시한 내역은 확인하기 어렵다. 당시 3009함에 승선해 있던 목포해양경찰서장 김문홍은 자신이 ① 9시 3분경 3009함에 전속력으로 사고 현장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고, ② 9시 15분경 목포서 상황실장 C○○ 에게 사고 현장 대응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69) ③ 9시 29~30분경 3009함과 목 포서 상황실의 KCG 메신저 일대일 대화창에 “모든 함정은 전속기동”, “구난장비 준비철 저”, “단정 휘발유 만재하기 바라며 구조대원들은 슈트준비 등 인명구조 준비 철저하기 바 람”이라고 세 차례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KCG 메신저 기록에도 남아 있다.

9시 3분의 전속 이동 지시는 당시 상황에서 당연히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나, 9시 30분경 의 지시는 사고 접수 후 30분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하기에는 구체성이 없는 지시였다. 또

9시 15분에 김문홍과 C○○이 통화한 내역은 확인되지만, C○○은 통화 여부와 그 내용에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분명하게 확인됨에도 이런 입장을 유지하다가, 검찰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수사 과정에서야 9시 19분 이후

투하할 것을 지시, ③ 선장에게 선장이 현장

적의 조치 판단해 여객선 선내방송으로 승객에게 퇴선 명령을 하도록 지시할 것, ④ 목포122구조대 현장 즉시 투입 지시, ⑤ 123정장 현장 도착 시 대공 마이크를 이용하여 즉시 퇴선하라고 방송을 실시하라고 하는 등 사고 처리에 완벽을 기해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 ⑥ 여객선 도면 확보, ⑦ 해상크레인, 예인선 동원 지시 및 부산 저인망 트롤, 여수트롤협회에 구조 협조토록 지시하는 등 구체적으로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101
과연 무엇을 했는가?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68) 김석균은 그동안 조사 및 수사 과정에서 세월호참사 당일 9시 5분경 보고를 받았고 9시 10분경 상황실에 임장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석균이 당일 9시 27분에 이르러서야 상황실에 임장했다는 사실은 당일 경비 전화 내역에서
사고 발생 사실을 보고받았고 9시 28분 이후 상황실에 임장했다고 말을 바꾼다. 69) 김문홍은 감사원 문답 과정에서 자신이 C○○에게 전화를 걸어 ① 목포상황실에 모든 가용 세력 총동원 구두 지시 및 총원 비상소집하고 해군 등 유관 기관 협조 요청 지시, ② C○○ 상황실장에게 123정장에게 직원들이 여객선에 직접 승선해 구명벌을
관한 진술을 계속 번복하고 있어 김문홍이 실제 통화해 지시했는지 의구심이 남는다. 법
상황을

원도 해경 지휘부에 대한 재판에서 김문홍의 위와 같은 주장은 진실에 반하는 것으로 보 인다고 판단했다.70)

결국 123정장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김문홍이 했던 유의미한 지시는 ‘3009함 현장으 로 전속 이동’ 지시뿐이었다. 목포서 상황실 역시 진도VTS를 통해 확보할 수 있었던 세월 호의 상황 정보를 토대로 구조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그 정보를 출동 세력에 전달하지 도 않았다. 해경 상황실은 9시 16분경 KCG 메신저를 통해 123정을 OSC(현장 지휘관)로 지정했으나, 메 신저가 설치돼 있지 않은 123정에서는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상수색구조 매뉴 얼」에 따르면 123정은 사고 현장에 첫 번째로 도착한 함정으로 OSC 지위에 있었고, 교신 내역을 확인하지 못한 123정도 이를 알고 있었다. 당시 123정이 OSC 지위에 있음은 분명 했고, 해경 지휘부는 OSC로 지정된 123정에게 현장 수색구조 계획을 지시하고, 이를 수 행한 결과를 보고받아야 했다. 그러나 세월호의 정보를 파악하지도, 구조 계획을 세우지 도 않았던 해경 상황실은 123정으로부터 보고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VTS는 역할을 다했는가

진도VTS는 세월호와의 교신 과정에서 세월호가 기울고 있고, 세월호에 승선한 총인원이 약 500명 정도라는 사실, 배가 많이 기울어 탈출을 시도하기가 어렵고,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라고 했으나 정작 구명동의를 입었는지 확인은 불가능하며, 선원들도 움직일 수 없 는 상태라는 자세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진도VTS는 이렇게 구체적인 세월호의 상황 을 듣고도 승객 수백 명을 안전하게 구조하는 데 필요한 정보는 별도로 확인하지 않았다. 진도VTS는 세월호와 교신하면서 경비정이나 어선들에 연락을 취해 세월호로 가고 있다 거나 전속력으로 해경이 이동 중이라는

102 제3장
않은 생명
구하지
정도의 정보만을
70) 법원은 사고 상황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김문홍이 9시 15분에 한 지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내용이 구체적이고, 김문홍이 C○○에게 퇴선 유도 지시를 상세히 했는데 C○○이 임의로 이를 이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59분경 김문홍이 123정장에게 퇴선 지시를 하는데 9시
전달했다. 또 선원들이 움직일
9시
15분경 퇴선 유도 지시를 했다면 이를 점검하거나 아직 퇴선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이러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3009함 승선원, 목포서 상황실 직원 등이 모두 일치하여 9시 15분경 상황이 퇴선 방송 실시 등 구체적인 지시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진술을 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이와 같이 판단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21. 1. 25. 선고 2020고합128판결문).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시간 발신국 교신 내용

09:09 세월호 진도VTS, 여기 세월호.

진도VTS 진도VTS입니다.

세월호 배가 기울어서 금방 넘어갈 것 같습니다. 지금 한쪽으로 계속 천천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진도VTS 네, 지금 귀선 승선원들은 어떻습니까.

세월호 승선원 지금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바다에 빠져야, 어쩌야 될지 모르겠네.

진도VTS 예, 지금 DOOLA ACE가 접근 빠르게 귀선한테 인명 구조차 접근 중에 있습니다.

09:12 진도VTS 지금 승선원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세월호 네, 450명입니다. 총 인원 약 500명 정도 됩니다.

진도VTS 예, 500명 양지했습니다. 지금 그 DOOLA ACE가 가고 있습니다.

09:13 세월호 지금 배가 많이 기울어가지고 사람이 움직일 수가 없어서 탈출 시도가 어렵습니다.

표 3-1 진도VTS와 세월호 사이의 주요 교신 내용 09:16 진도VTS 기울기 상태가 어떻습니까?

진도VTS 저희가 최대한 경비정들과 어선들을 최대한 연락을 취해서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지금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져 가지고 사람들이 좌우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지금 승선원들은 라이프자켓(구명조끼) 입고 대기하라고 하는데 사실 라이프자켓도 입었는지 확인도 불가능한 상태이고 선원들도 브리지(조타실) 모여서 지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빨리 와주시기 바랍니다.

09:20 세월호 네, 지금 해경이 구조 작업하러 오고 있습니까?

진도VTS 해경, 전속력으로 이동 중에 있습니다. 세월호 소요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09:22 진도VTS 경비정 도착 15분 전입니다. 방송하셔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 착용토록 하세요.

세월호 네, 현재 그 방송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진도VTS 방송이 안 되더라도 최대한 나가서 승객들에게 구명조끼 착용하고 두껍게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조치 바랍니다.

09:22 세월호(W△△) 본선이 승객들을 탈출을 시키면 옆에서 구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둘라에이스 라이프링(구명환)이라도 착용을 시키셔서 탈출을 시키십시오.

세월호(W△△) 지금 탈출을 시키면은, 탈출을 시키면은 구조가 바로 되겠습니까?

둘라에이스 맨몸으로 하지 마시고 라이프링이라도 착용을 시키셔서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09:24 ~25

진도VTS 세월호, 세월호, 감도 있습니까?

세월호(W△△) 여기 세월호입니다. 감도 있습니까?

진도VTS 세월호, 진도연안VTS입니다. 인명 탈출시키는 것은 선장님께서 직접 판단하셔서 빨리 지금 결정하십 시오.

진도VTS 경비정이 10분 이내 도착을 할 겁니다.

09:26 진도VTS 1분 후에 헬기가 도착 예정입니다.

103

09:27 세월호 승객이 너무 많아서 헬기 가지고는 안 될 거 같습니다. 진도VTS 헬기도 도착할 거고요, 인근에 있는 선박들도 접근 중이니까 참고하십시오.

수 없고 선내에 방송할 수 없더라도 최대한 나가서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착용하고 옷 을 두껍게 입도록 조치하라는 등 당시 선내에서 하기 어렵다는 일들을 요구했다.

진도VTS는 파악한 세월호 상황을 서해청 상황실에 실시간으로 보고했고 목포서 상황실 에도 보고했다. 그러나 9시 23분경 서해청에 세월호의 퇴선 조치 문의를 전한 것 외에는 추가로 세월호에 어떤 조치를 내려야 하는지 문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도VTS에서 보고 된 정보가 다른 해경 세력에게 전파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진도VTS가 유사 상황 발생 시 전 해경 세력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일원화된 통신수단인 TRS 통신망, KCG 메신저로 정보를 전달했다면 세월호의 상황을 더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진도VTS가 세월호와 교신하여 파악한 정보가 신속하게 전파되도록 하지 않고, 사 고 선박으로부터 추가적인 상황을 파악하도록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책임은 서해청 지휘 부에 있다. 서해청은 진도VTS로부터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받고 있었고, 진도VTS가 그 내

용을 TRS 통신망이나 KCG 메신저 같은 일원화된 통신수단으로는 전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해청은 진도VTS가 TRS 통신망이나 KCG 메신저 회의실에 참여해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거나 진도VTS로부터 인지한 정보를 직접 해경 본청, 현장구조 세력 등에 전파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구조 계획을 세우거나 구조하라 고 지시하지도 않았다. 세월호의 절체절명 위기 상황의 정보는 그렇게 진도VTS와 서해청에 만 머물렀다. 준비 없이 현장에 도착한 국가 세월호에서는 8시 52분경부터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배가 급격히 기우는 것을 느끼고 곧바로 119에 신고했던 승객들의 다급한 목소리, 세월호에 있 던 단원고 학생들이 보낸 문자메시지, 세월호가 침몰하기 전까지 휴대전화로 촬영한 영상

104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을 보면 승객들은 국가가 곧 자신들을 구조하러 오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객들은 현장에 도착한 헬기 소리를 듣고 곧바로 구조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기다렸다.71) 그러나 이토록 다급하고 위태로운 순간에 국가가 모든 세력을 동원해 우리를 구하리라는 희 망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구조하기 위해 현장에 출동하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 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이동했다. 세월호와 교신하여 정보를 파악하지 않았고, 해 경 구조본부 상황실에도 정보를 묻지 않았으며, 구조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출동하던 123정은 세월호 승객이 450명에 달한다는 사실과 현장에서 구조를 지휘하 는 임무는 바로 123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가장 기본적인 정보파악도 하지 않았 다. 해경의 각 구조본부도 알고 있는 세월호 상황을 현장출동 세력에 전하지 않았다. 이후 정 보가 없는 상태에서 세월호에 도착한 현장출동 세력은 배 안에 훨씬 많은 승객이 구조를 기 다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 구조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은 사고가 발생하면 승객들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가장 먼저 책 임져야 할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배가 기울기 시작한 순간부터 선장과 선원은 승객들을 어떻게 탈출시킬 것인지 고민하고 요청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먼저 탈출하느라 급급했다. 123정은 현장에 도착한 이후에도 세월호와 교신하거나 세월호에서 구조한 선원들을 통 해 세월호 안의 상황을 파악하지 않았다. 다른 구조 세력에게 출동을 요청해 승객들을 구 조할 방법을 찾지도 않았다.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 구조한 123정과 헬기는 그렇게 현장을 떠났고, 배 안에서 구조될 것이라 믿고 기다리던 이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71) 광주지방법원, 선고 2014고합436 판결문, (2015.2.11.), 11쪽.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3. “가만히 있으라”

105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자기들만 살기에 급급했던 선장과 선원들

항해하는 배의 안전과 관련된 책임은 일차적으로 선장과 선원에게 있다. 사고 발생 시 선

장과 선원들이 가장 먼저 필요한 조치를 하고 해경 등에 구조를 요청하여 승객들의 안전 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날 세월호에는 이러한 상 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 밖으로 탈출시키려는 아무 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123정이 세월호에 도착하자 선원들이 가장 먼저 탈출해 구조됐다. 신고 전화가 접수된 8시 52분경부터 조타실에 있던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한 9시 45분경 까지, 세월호에는 선내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라는 방송이 계속 나왔다. 세월호가 기울 기 시작하자 조타실에 모였던 선장과 선원들은 탈출하기 위해 조타실을 나설 때까지 50 여 분 동안 승객들을 어떻게 탈출시킬지 구체적인 논의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72)73)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9시 36분경 진도VTS에 ‘탈출을 시도하라고 방송했다’고 한 후, 자신들은 9시 46분경 세월호를 빠져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신원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123정에 의해 구조됐다.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들에 대한 조치를 전혀 하지 않고, 선내 대기 방송만을 계속 내보내고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이다. 탈출한 이후 자신들의 안전 이 확보된 때도 선원들은 승객 모두를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특히 선장 이준석은 세월호에서 이탈한 이후에도 승객 안전을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퇴선 이후 구조 작업 불이행 등 승객 안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74)으로 인해 이 72) 검찰 조사과정에서 항해사 박한결은 “선장 이준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특별히 그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무얼 하겠다고 하는 선원들도 없었습니다. 배가 기울고 조타실에 모였을 때부터 누구 하나 나서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분담시킨다든지 어떻게 해야겠다든지 하는 것 없이 계속 우왕좌왕하고 있어서, 진도VTS가 승객들을 구호하라고 지시를 내렸어도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해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분위기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살인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진행했던 사참위 조사과정에서도 선장 이준석은 자신이 그때 “왜 그렇게 멍하게 있었는지 후회”스러울 뿐이며 무기징역을 받은 것에 대해 “아무 불평불만이 없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진술했다. 73) 세월호참사 직후 세월호 선장과 1~3등항해사, 조타수 등은 승객들을 탈출시키지 않고 사상에 이르게 한 책임을 묻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선장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되었고, 법원은 살인 혐의를 인정했다(1심에서는 인정되지 않았으나 2심에서 인정됨). 처음부터 승객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선장인 자신이 승객들이 퇴선하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장과 선원들만 탈출한 행위에 대한 살인죄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74) 광주고등법원, 선고 2014노490판결, (2015.4.28.).

106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4・16세월호참사

준석은 이후 살인죄를 인정받았다. [보론] 세월호 선장 및 선원의 신병 관리에 관한 의혹

세월호참사 당시 수사기관이 선원들을 제삼자와 접촉하게 해 진실을 의도적으로 은폐·축소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대두되었다. 사참위는 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의혹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해경은 참사 당일부터 선장과 당직사관이었던 3등항해사 박한결과 조타수 조준기를 긴급체포하려 했고, 당일 저녁 검찰에 수사 상황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긴급체포를 건의하기도 했다. 그 러나 해경의 보고를 받은 검찰은 긴급 체포하지 말라고 하며 ‘신병을 포함한 수사 전반에 대해 검찰의 지 시를 받고 선원들이 언제든 조사를 받을 수 있게 소재 및 동향 파악을 잘하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검찰 지시에 따라 서해청 광역수사대는 선원들을 목포서 인근 모텔에 단체 투숙시키기로 하고, 16시경 목포 서에 도착한 선원들을 23시 30분경 관용차를 이용해 모텔로 데리고 가 투숙시켰다. 선장 이준석은 다 음 날 14시경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 후 해경에서 긴급체포하려고 했으나, 검찰은 이준석을 다시 숙소 에 복귀시키고, 도주하거나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하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해경은 직원 에게 이준석을 모텔로 데리고 가 동숙하라고 했다. 목포서 수사계장의 지시에 따라 이준석을 데리고 모 텔로 이동하던 해경 직원은 기자들이 계속해서 쫓아오자 이준석을 본인의 집에 투숙시키기로 했고, 2인 1조로 함께하던 다른 직원에게 이준석을 관리하게 한 후 목포서에 복귀해 수사계장 등에게 상황을 보고 했다. 수사계장은 추가 지시를 하지 않았다. 세월호 침몰 당일 선장 이준석과 1등항해사 강원식은 3009함에서 만나 22시 20분경 목포서로 함께 이동해 다음 날 새벽까지 조사를 받았고, 3등항해사 박한결도 다음 날 새벽까지 목포서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세 명이 목포서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모텔과 병원에 단체 투숙한 선원들이 선사 직원들과 여러 번 만나기도 했다. 신병 확보가 강제되지 않은 참고인과 피의자에 대해 수사기관이 소재 및 동향을 파악할 방법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검찰의 지시는 부적절한 초동 조치로 판단된다. 수사기관이 선원 들을 모텔에 단체 투숙시키고 피의자였던 선장을 해경 직원 집에 투숙시킨 것은 증거 인멸 및 공모 등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적절한 조치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사참위 조사과정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은폐· 축소할 목적으로 선원·선사 간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할만한 증거와 진술은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 나 선원과 선사가 함께 수사에 대비할 시간적·공간적 여건은 충분했으리라 판단된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07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 구조한 해경 476명을 태운 여객선이 40~45도로 기울어 있고 갑판이나 해상에 탈출한
지 않는 상황에서 해경
승객들이 보이
123정과 511호기와 512호기 헬기 등이 세월호 현장에 도착했다.

123정은 현장에 도착해서도 세월호와의 교신을 시도하거나, 선장 또는 선원들과 연락하 여 세월호 내부 상황을 알아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 구조하고 방송이나 승조 원들을 통해서 세월호 내에 있던 승객들이 배에서 내리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TRS 기준으로 9시 44분경 헬기가 6명을 구조했고, 9시 39분경 세월호 기관부 선원 7명이 탈출 하고, 9시 46분경 조타실 선원과 선장이 123정으로 옮겨 타는 등 선원들을 포함해 52명 이 123정으로 구조되었다. 이후 123정은 10시 6분경 좌현으로 76도 정도 기운 세월호 3 층 객실 유리창을 깨고 승객 5명을 구조한 후 10시 11분경 세월호를 떠났다. 인근 민간 어 선 등을 통해 구조된 인원까지 합쳐 당일 10시 30분까지 172명이 구조되었고, 이후 생존 자는 없었다. 현장에 출동한 703호기는 현장에서 항공 통제만 하다가 9시 58분경에는 “잠시 후에 본 청 1번님(해양경찰청장)께서 출발하셔 가지고 현장에 오실 예정이니까 너무 임무에 집착하지 말고 안전에 유의하세요”라는 납득하기 힘든 교신을 했다. 10시 39분경에는 현장에 진입 하고자 하는 소방헬기에게 “구조할 인원이 없습니다. 복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통 보했다. 밖으로 탈출한 승객이 없으므로 구조할 인원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원들에게 묻지도 않은 123정 123정은 현장에 도착한 후 배를 멈추고는 고무단정을 내렸다. 고무단정은 세월호에 접안 해 기관실 선원 5명을 구조했다. 구조된 선원들은 고무단정에서 123정으로 옮겨탔다. 구 조된 선원들이 세월호특조위에서 한 진술에 따르면, 자신이 선원이라는 점과 승객들이 선 내에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을 말했지만, 123정장과 승조원들은 추가 정보를 파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123정은 선원들과 협의하여 승객에 대한 구조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으나 그 렇게 하지 않았다. 고무단정으로 구조한 선원 및 승객들을 123정에 옮긴 후, 123정은 9시 43분경 세월호로 다시 향하여 승조원 T○○가 세월호 3층 갑판에 승선했다. 갑판에 오른 T○○는 1분여 만 에 5층 선수 갑판으로 갔다. 이는 9시 43분경에도 세월호에서 갑판으로 층간 이동을 어렵 지 않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약 배 안에 있는 승객들에게 배 밖으로 나오

108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도록 유도하였다면, 배 밖으로 나온 승객들이 탈출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123정은 세월호 조타실에 접안하여 선장과 선원을 구조했는데,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배 안의 상태와 현재 구조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을 123정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닌 조타실에 접안하여 선장과 선원들을 구조하면서도 선장이 누구인 지, 선장과 선원들이 선내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경 상황실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123정황

9시 32분경 세월호에 도착한 123정장 김경일은 바다에도 갑판에도 사람이 없는데 구명정

도 펼쳐져 있지 않은 상황을 보고 승객이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미 50도 정도 기운 세월호가 계속 기울고 있어 위급한 상황임을 확인했 다. 김경일은 이미 현장 상황을 9시 36분경 본청 상황실 S○○, 경비과장 여인태와 통화하 면서 모두 보고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인태가 한 지시는 “현장 상황을 TRS로 보고하라” 는 것뿐이었다. 해경 상황실에서는 9시 33분, 9시 37분, 9시 38분, 9시 42분경에 123정을 호출했으나 123 정에서는 응답하지 않았고, 123정은 9시 45분경에 이르러서야 TRS로 현장 상황에 대해 처음 보고했다.75)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이 보고만 보면 123정이 승객을 나오도록 유도해 한 명씩 구조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 나 123정은 승객들이 배에서 내리도록 유도하지 않았고 세월호 선내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했다. 123정 승조원들이 한 명씩 구조한 대상은 세월호 갑판부 선원들이었다.

109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채, 75) 9시 45분경 보고 이전에, 9시 32분경부터 9시 45분경까지 123정장은 선내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는 TRS를 통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123정 조타실에 있던 항해팀장 R○○은
9시 37분경까지 123정이
통화 내역은 9건이 확인된다(다만
123정장 김경일은 선내에 대기하고 있는 대부분 승객에게는
TRS가 연결되지 않아 조타실에 있던 TRS 여러 개로 교신을 시도했다고 했고, TRS 통화 내역 조회 결과 9시 30분경부터
발신한
구체적인 통화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현장 상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고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임에도, 보고 자체에 몰두하면서 정작 9시 45분경 첫 보고가 이루어졌을 때는 세월호의 선내 상황이나 구조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았다.

표 3-2 김경일 정장의 TRS 교신내역

교신시간 TRS 교신내용

09:45:02 목포타워, 여기는 123. 현재 승객이 안에 있는데 배가 기울어 가지고 현재 못 나오고 있답니다. 그래 서 일단 **시켜가지고 안전 유도하게끔 유도하겠습니다. 이상.

09:45:40 현재 123, 123 선수를 여객선에 접안, 접안해가지고 밖에 지금 나온 승객 한 명씩, 한 명씩 구조하고 있습니다. 이상. **는 청취 불능

본인이 하던 조치만을 언급하며 실제 현장 상황과 다르게 보고했다. 현측(배의 가장자리) 인명 구조 훈련만 받아온 123정이 상황실 등 상급기관으로부터 선내 승객 구조에 대한 적절한 지휘도 받지 못하자, 선내에 있는 승객 구조는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9시 48분경 123정장 김경일은 TRS를 통해 “잠시 후 침몰할 것으로 생각된다”, 9시 53분경 “현재 승객 절반 이상이 지금 안에 갇혀서 못 나온다, 빨리 122구조대가 와서 구조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때 김경일의 보고를 보면 선내 승객을 구조할 수 있는 해경 세력은 123정이 아니라 잠수가 가능한 122구조대라는 김경일의 인식을 보여준다. 상황이 그러했 다면 123정은 자신들이 승객들을 구조하고 있다고 현장의 구조 상황을 사실과 다르게 보 고할 것이 아니라 다른 구조 세력이 추가로 현장에 와서 다른 승객들도 구조하도록 상황 을 정확하게 전하고 출동을 요청해야 했다. 하지만 123정은 9시 53분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23정은 9시 45분부터 9시 49분까지 조타실에 접안해 조타실에 있던 선장과 선원을 구조 하고, 세월호와 한 번 멀어졌다가 다시 10시 초반에 세월호에 접안해 유리창을 깨고 3층 다인실 승객들을 구조한 후 세월호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결국 123정은 정장의 구조

않았

123정이 ① 세월호와 교신하거나, ② 123 정 방송 장비를 이용하거나, ③ 123정 승조원을 세월호 갑판에 승선시켜 선내에 대기하고 있던 승객을 퇴선시킬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책임을 인정했다. 최소한 이 세 가지 방법은

110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포기 판단에 따라 할 수 있는 다른 구조 활동도 시도하지
다. 123정장 김경일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법원은

4・16세월호참사

123정 승조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세월호 승객 대부분을 구조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

나, 123정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무책임했던 해경 항공기

세월호에 도착한 헬기와 항공기 또한 눈에 보이는 승객들만을 구조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세월호는 50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고 배 밖으로 나와 있는 승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라서, 빨리 퇴선 조치를 하지 않으면 배 안에 있는 승객들의 생명이 위험하리라 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완전 침몰 이전에 헬기에서 세월호와 교신을 시도한 내역은 확인되지 않는다. 또한 항공 구조사가 세월호 선체에서 구조 작업을 수행한 30-40분여 동안 항공 구조사를 조타실로 내려보내 승객들의 퇴선을 유도하거나 선실로 들 어가 퇴선 조치를 하도록 하지도 않았고, 항공구조사들은 구조한 승객들에게 선내 상황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항공구조사들은 이것이 구조 작업을 마친 후에야 선내에 승객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기장들의 진술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해경 헬기는 세월호참사 이전에 인명 구조자를 호이스트로 끌어올리는 훈련만 했고, 실제 사고 시 선내에 진입하여 승객들을 퇴선시킨 경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일 헬기와 고 정익 항공기 측의 대응이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장에 출동한 세 대의 헬기가 모두 사 고 선박인 세월호, 해경 상황실과 거의 교신하지 않은 채, 구조 계획도 없이 밖에 보이는 승 객들만 끌어 올리려고 한 대처 자체가 해경이 따라야 할 법령, 규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때문이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11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항공기 사고 인지 시간 인지 장소 출동 시간 현장 도착 시간 항공 구조사 구조사 선체 하강 시간 구조사 선체 이탈 시간 구조사 선체 잔류 시간 511호기 09:02 목포항 공대 09:10 09:26 U○○ 09:31 10:16 45분 V○○ 09:32 10:16 44분 513호기 09:08 제주연안 상공 09:08 09:32 W○○ 09:47 10:18 31분 512호기 09:10 3009함 09:17 09:45 X○○ 10:08(09:52)* 10:18 10분 * 512호기 항공구조사는 09:52에 바다로 하강해 512호가 투하한 구명벌에 탑승한 인원들을 123정이 인계한 후 수영해서 10:08에 세월호 선미에 도착했다. 표 3-3 각 헬기 및 헬기의 항공구조사 관련 시간 정리
가장 기본적인 임무를 저버린 것이기

퇴선조치를 하지 않은 현장출동세력

선장이 선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내리며 현장을 총지휘하고 있다면, 퇴선 조치를 할지 말지에 대한 판단은 선장 몫이다.76) 이는 어디까지나 선장이 배의 상태 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동시에 선장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전제 한다. 그리고 승객의 생명과 안전이 직결되어 있으니 자신이 내린 지시가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해경은 경찰의 일원으로 「경찰관직무집행법」 등 관련 법령이 정하 고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이 위험할 때 해경의 권한은 권한을 넘어 의무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해경은 해양에서 국민에게 위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해양조난사고의 경우 육상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비해 훨씬 위험성이 높 고 상황이 긴박하다는 점에 비추어, 육상경찰이나 소방대원보다 더욱 엄격한 업무상 주의 의무를 부담한다.77) 그러나 세월호에서는 선장과 선원이 승객들을 구할 의무를 저버리고 먼저 탈출했고, 탈 출하고 나서도 선내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진도VTS를 통해 9시 23분경 세월호에서 퇴선 여부에 대해 문의한 사실은 있으나, 이런 내용이 123정이나 현장에 출동한 헬기에 전달되 지 않았다. 선내에 승객이 남아 있고 퇴선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123정과 헬 기는 퇴선 조치를 내리거나 적어도 퇴선 조치를 내려야 할지 상황실에 문의하고 지시받 아야 했다. 그러나 123정과 헬기는 퇴선 조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시도도 하지 않았다. 123정은 조타실에 접안해 조타실에 있던 선장과 선원을 구조한 상황에서도, 이들의 신원 을 확인하거나 이들이 배 안에 있는 승객들에게 퇴선 조치를 했는지, 선내 승객들의 상황 이 어떠한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해경 지휘부 역시 현장에 출동해 있는 123정이나 헬기를 통해 승객들에 대한 퇴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해경 지휘부의 실질적인 부재 위기 상황에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은 구조에서 가장 76) 「선박안전법」 [시행 2020. 8. 19.] [법률 제17028호, 2020. 2. 18., 일부개정] 제31조. 77) 광주고등법원, 선고 2015노177판결, (2015.7.14.).

112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기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구조 계획을 세워야 신속한 구조가 가능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 당일, 현장출동세력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신속하게 확인하

여 전달하고 이를 토대로 구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도록 지시해야 할 책임은 당시 해경 지휘부에 있었다. 123정과 헬기가 세월호에 도착한 이후 각급 해경 상황실에서는 현장출 동 세력에게 무엇을 어떻게 지시하고 보고받았을까?

목포서장 김문홍의 확인되지 않는 1시간

참사 당일 9시 26분경 511헬기가 현장에 도착하고 4분 뒤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다. 511 호기는 “현재 우측으로 40도 기울어져 있고 인원들은 대부분 선상과 배 안에 있음”이라고 보고했다. 123정장 김경일은 세월호를 2마일 앞두고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세월호를 보 고 “현재 본국 도착 2마일 전, 현재 쌍안경으로 선박 확인 가능, 좌현으로 45도 기울어져 있고 기타 확인되지 않음”이라고 보고했다. 9시 32분경 현장에 도착한 후 도착 보고를 했 다. 그러나 목포서 상황실과 3009함의 목포서장 김문홍은 보고를 받고도 추가로 상황을 문의하거나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다. 목포서장이자 지역구조본부장이었던 김문홍은 세월호참사 당일 9시부터 10시 사이에 3009함을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는 것 외에 세월호와 관련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9시 59분에 처음으로 TRS에 김문홍의 목소리가 등장하는데, 이때 김문 홍은 “마이크를 이용해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나”라는 질문인지 지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9시 45분경 김경일이 세월호 안에 승객이 있는데 배가 기울어서 못 나온다고 할 때도, 9시 48분과 9시 49분경 배가 침몰할 것 같다고 보고했을 때도 이에 답변하지 않 았다. 8시 54분 최초로 신고 전화를 받은 곳은 목포서였지만, 목포서의 책임자인 김문홍 은 3009함에서 세월호 사고를 인지한 9시 3분경부터 9시 59분까지 약 1시간 동안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해경 지휘부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저버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참사 당일 김문홍이 했던 실효성 있는 지시는 세월호의 상황 을 인지한 후 자신이 타고 있던 3009함을 세월호 현장으로 전속 이동하도록 한 것이 유일 하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13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부적절한 지시로 일관한 해경 지휘부

서해청과 해경본청도 마찬가지였다. 서해청장이자 광역구조본부장인 B○○의 지휘 내용

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약 9시 48분경이다. B○○과 위기관리실에 있던 본청장 김석균에 게 9시 48-49분경 전화를 걸어 상황을 논의한 후 9분 52분경 TRS통신망을 통해 ‘승객들

이 동요하지 않도록 안정시키라’는 부적절한 지휘를 했다. 약 20분 가량이 지난 10시 8~9 분경에는 B○○이 직접 TRS통신망을 통해 통해 목포서장 김문홍에게 ‘기울기로 출입구가 봉쇄될 수 있으니 배수 작업을 통해 배가 가라앉지 않는 상태로 유지시켜놓고 조치를 취 해야할 것 같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는 김경일이 ‘배가 기울어 승객이 못 나오고 있고 경 찰관을 승선시킬 수도 없다’, ‘잠시 후에 침몰할 것으로 생각된다’는 보고와 이에 대해 김 문홍이 ‘직원이 승선해서 고함치거나 마이크를 이용해서 퇴선시키라’는 지시를 한지 한참

이후로 부적절한 지시였다. 이에 대해 B○○은 ‘퇴선과 같은 위험한 지시는 현장에서 판단 해야 하므로 자신이 할 수 없고, 배수 지시는 여건상 실행하기 어려웠지만 절박한 마음에 최선을 다해보자는 취지로 지시하였다’며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본청 경비과장 여인태는 123정이 현장에 도착한 후 9시 36분경 123정장 김경일과 통화했

다. 123정이 현장에 도착한 이후에도 123정에서 보고가 오지 않았고, 본청 위기관리회의 실에서 빨리 현장을 파악하도록 상황실에 지시했지만, 이는 본청 상황실에 전달되지 않 았다. 그러자 여인태는 상황실에 함께 있던 상황요원 S○○에게 123정에 연락해보도록 지 시해 김경일의 개인 휴대전화로 통화를 한다. 여인태는 김경일과 통화하면서 세월호가 45~50도로 기울어져 있고, 갑판과 바다에 모두 사람이 보이지 않으며 구명동의나 구명정 이 하나도 투하되지 않았고, 배가 계속 기울어지고 있다는 등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는 현장에 출동한 123정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은 현장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확인한 즉시 각 해경 부서에 이 사실을 전달해야 했다. 그러나 여인태는 위기관리회의실에만 보고하고 상 황실, 서해청, 목포서 등에는 이를 전파하지 않았다. 김경일에게 TRS로 현장 상황을 보고 하라고 지시했지만, 김경일이 9시 45분 “현재 승객이 안에 있는데 기울어서 못 나오고 있 답니다”라고 보고했는데도 이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렇게 김경일과 직접 통화해 세월호의 상황을 파악한 후에도 본청 상황실에서는 123정

114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이 직접 확인할 수 없는 KCG 메신저로 9시 44분경 “탈출 권고 바람”, 9시 52분경 “해상 투

신도 검토할 것”, 9시 55분경 “여객 퇴선할 수 있도록 안내 조치”, 9시 56분경 “무조건 선내

에서 나와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한참 지난 10시 18분 경에는 “여객선 자

체 부력이 있으므로 바로 뛰어내리기보다는 함정에서 차분하게 구조할 것”이라는 정반대 의 지시를 하기도 했다. 당일 해경 조직 내에서뿐만 아니라 본청 상황실 안에서도 세월호 의 상황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민들은 해경 지휘부라면 구조의 골든타임동안 현장에서 어떻게 구조가 이루어져야 할 지, 선내에 남은 승객들을 구조하려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얼마나 많은 구조 세력이 현장 으로 출동해야 할지에 관한 논의와 필요한 지시를 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여러 세 력 간에 현장 상황이 전혀 공유되지 않고, 상황에 맞지 않는 지시와 질문이 이어지고 있는 교신 내역을 보면, 참사 초기 해경 지휘부가 얼마나 무책임하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다. 구조 대신 보고를 종용한 해경 지휘부 123정장이 현장에 도착한 이후, 본청 경비과장 여인태는 김경일과 약 2분 22초간 통화했 고 서해청 상황실 등은 TRS로 20여 회 보고하게 하는 등, 현장에서 촌각을 다투는 때도 상황을 보고하라고 종용했다.78) 현장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파하는 것도 물론 중요 하지만, 상황을 파악한다는 이유로 구조에 차질을 빚을 만큼 보고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여인태는 123정장 김경일에게 보고받아 파악한 정보를 지휘부에 전달한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판단하고, 이를 서해청, 목포서 등에 전파하지 않고, 이후 TRS를 통해 현 장 상황을 추가로 파악하거나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79) 여인태는 본청 경비과장의 지위 에서 123정장 김경일과 직접 통화를 하기 전까지 TRS 등 교신수단을 통해 123정으로부터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사고 현장에 같이 출동한 해경들에게도 승객 구조 소홀에 대한 공동책임이 있다고 보았지만, 123정장 김경일에게만 모든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사정을 유리한 양형 사유로 반영했다(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됨). 79) 여인태는 검찰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조사과정에서 이러한 취지로 진술하였고, 이에 대하여는 감사원 감사 과정에서도 구조 지휘를 소홀히 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115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않는 상황임을 알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김경일과 직접 통화하여 파악한 정보를 해경 본청 지휘부에만 보고하 78) 광주고등법원 2015. 7. 14. 선고 2015노177판결, 34쪽. 법원은 본청과 서해청 상황실 등에서 123정장이 구조 활동에 전념하기 어렵게 하고, 평소 해경들에게 조난사고에 대한 교육 훈련을 소홀히 하는 등 해경 지휘부나
보고된 정보가 없고 다른 해경 세력이 파악한 정보도 확인되지
있었다.

고, 그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여기며 이를 전파하지 않고 추가로 정보를 확인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여인태는 자신이 파악한 정보를 보 고하는 데에만 급급했고, 보고와 전파를 통해 실제 구조까지 이어지도록 노력하지 않았다. 세월호가 기울어 가라앉고 있다는 상황을 접수한 해경은 세월호로부터 즉각 정보를 파 악하고 구조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현장출동 세력이 출동한 이후에도 구조 상황과 현장 에 필요한 조치를 확인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상황을 보고받기에 급급했다. 이 후 참사 당일 해경은 희생자 6명80) 을 발견했는데, 발견한 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끝 까지 응급조치하고 신속하게 이송하려고 노력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당일 네 번째 희생자로 알려졌던81) 故 K◇◇ 군의 경우, 17시 30분에 발견된 이후 목포한 국병원으로 이송되기까지 4시간 46분이 걸렸다. K◇◇은 1010함에서 발견되어 3009함으 로 옮겨졌는데, 3009함의 응급구조사들은 원격 응급의료시스템으로 목포한국병원의 담 당 의사에게 병원으로 K◇◇을 이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82) 목포한국병원의 지시를 받 았고, 당시 의료지도를 했던 의사는 병원으로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사망 여부 판정은 의 사만 할 수 있으므로, 그 누구도 현장에서 사망 여부를 단정하고 응급조치를 중단하거나 이송을 지연시킬 권한은 없었다. 3009함의 응급구조사들은 헬기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 고 헬기로 구조자를 이송할 것이라고

내용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3009함에 있던 응급구조사가 사망 여부를 판단하고 사망선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병원으로 즉시 이송하라는 취지의 지도를 했다는 점은 확인되었다.

116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라는 지시를
이후 P22정,
거쳐
도착했다. (표 3-4) 4. 때 이른 포기: 섣부른 응급조치 중단과 이송 지연 80) 최초 희생자로 확인된 Q△△ 선생님의 경우 발견되지 못했다. 81) 당일 권○○ 군에 이어 네 번째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K◇◇이 한 시간가량 먼저 발견되었다. 82) 위원회에서의 조사, 검찰 특별수사단에서의 조사 과정에서 구체적인 진술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함내 방송으로 P정으로 이송하
받았고
P112정, P39정을
서망항에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시간 상황 출처 17:24 17:24:25 넘버투 단정 익수자 수습 TRS 녹취록 17:26 1010함 ‘지금 현재 익수자 한 명 함정에 태우고 3009함으로 가고 있음’ 보고 TRS 녹취록

17:30 3009함 ‘실종자 발견, 본함 인수’ 보고 3009함 항박일지

17:35 원격 의료시스템 가동, 목포한국병원 이송 조치 지시받음 3009함 항박일지

18:00 3009함 ‘실종자 1명 심폐소생술 지속 실시 중이나 반응 없음’ 보고 3009함 항박일지

18:40

P22정에 1010함 인양 실종자 1명 이송 조치 3009함 항박일지

19:00 P112정 환자 1명(심폐소생술 실시 중) 인수 P112정 항박일지

19:15 P22정으로부터 인수받은 환자 1명 심폐소생술 중단(사망 추정) P112정 항박일지

19:30 P39정 시신 2구 인계 P112정 항박일지 20:00 P39정 시신 2구 인계, 진도 팽목항 P39정 항박일지 20:50 서망항 도착 시신 2구 인계(시신 2구 한국병원 후송 예정) P39정 항박일지 22:05 목포한국병원 도착 문자상황방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서해청장, 목포서장 모두 3009함에 승선해 있 었다. 서해청장 B○○은 3009함에서 17시 44분경 헬기를 타고 서해청으로 이동했는데, 3009함에 병원으로 즉시 이송돼야 하는 K◇◇이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헬기를 타고 이동했다. 해경청장, 서해청장, 목포서장이 모두 3009함 회의실에 있을 때 ‘익 수자를 구조했다’는 조타실 방송이 함내에 모두 전달되는 것을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당일 3009함에서 실종자 다수를 인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종자를 인계하고 병원으로 이 송하는 일련의 과정을 몰랐다거나 알기 어려웠다는 해경청장 등의 변명을 신뢰하기는

117
했는가?
K◇◇이 3009함으로 인계된 때, 해경청장,
어 렵다. 나아가 함정에서 방송을 만약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수색구조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림 3-1 K◇◇의 이동경로(항박일지, 상황문자 등 정리) 17:24:25 17:30~18:40 18:40~19:00 19:00~19:30 19:30~20:50 넘버투 단정 서망항
표 3-4 K◇◇의 이동 동선

실종자를 얼마나 확인했고 어떻게 구조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보고받아야 할 이들

이 K◇◇의 구조 상황을 몰랐다면 그 자체로 중대 과실이다. 해경은 생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심폐소생술을 계속하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병 원으로 이송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헬기가 아닌 P정으로 이 송했고, 그것도 두 차례나 P정을 옮겨 타면서 이송하는 과정에서 19시 15분경 심폐소생술 을 중단했고 임의로 K◇◇이 사망했다고 단정했다. K◇◇을 발견했을 당시 K◇◇이 어떤 상태였는지 여부를 사후에 확정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일 K◇◇의 생존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도 3009함에 있던 헬기에 K◇◇ 대신 해경 지휘부가 탄 것이다.83) 3009함은 현장을 총괄 지휘하고 있었 고, 해경청장 김석균, 서해청장 B○○, 목포서장 김문홍, 함장 Y△△ 모두 3009함에 탑승해 있었으나 피해자의 수습, 헬기 및 함정 이송등과 관련해서는 서로 보고를 받지 않았다 또 는 보고를 하였다며 엇갈린 진술을 하고 있다. K◇◇을 P정으로 이송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3009함장 Y△△는 이에 대한 김석균, 김문홍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으나, 김석균은 기억나지 않는다, 김문홍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진술했다.84)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추 가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확인된 내용만 보더라도 해경 지휘부가 상황 을 알고도 P정 이송을 지시했든, 상황을 알지 못했든, 모두 지휘부로서 책임과 임무를 다하 지 않은 결과다.85) 83) 당일 항박일지에 의하면 3009함에 18시 37분경 B517호 헬기가 착함하였고, K◇◇은 P정으로 18시 40분경 이송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검찰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은 수사 과정에서 항박일지를 가(假)일지에서 항박일지로 2014년 5월경 옮겨쓰는 과정에서 오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항박일지는 실시간으로 작성되는 문서임에도,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정식으로 작성되었다고 전제하고, 기록이 아닌 진술을 신뢰하여 헬기의 존재 여부를 다르게 판단한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세월호참사

118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업무상과실치사’의 혐의를 묻기 위해서는 사망 내지 생존 가능성이
두고 수사를 진행하게 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당일 의사가 아닌 해경 내에서 임의로 사망 여부를
84) 검찰
특별수사단 각 피의자신문조서. 85) 이에 대해 검찰 세월호특별수사단은 당일 K◇◇이 살아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해경청장 김석균, 서해청장 B○○, 목포서장 김문홍과 3009함장 Y△△에게 K◇◇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의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고, 위원회에서 ‘검찰’에 ‘수사 의뢰’를 했기 때문에 사망 여부에 중점을
판단한 것이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았다는 점, K◇◇의 상황에 대한 보고 및 지시 여부에 대한 김석균, 김문홍과 Y△△의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보완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 급히 이송이 필요한 구조자가 있는 상황에서 서해청장, 해경청장이 차례로 헬기를 타고 이동한 구체적인 경위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 등, 수사 결과에는 많은 비판 지점과 한계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2소위 보고서 및 조사결과보고서(직나-3) 참조.

세월호 침몰 당일 첫 번째 희생자로 언론에 알려진 X△△ 군은 사참위 조사 결과 구조 이

후 이송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0시 42분경 123정 단정에서 구조된 정 군은 123정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맥박이 회복됐음을 확인했다는 선원 D○○의 진술도 있 었으나,86) 해경TRS에는 10시 46분경부터 ‘사망 추정’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세월호가 완 전히 전복된 시점으로부터 30여 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적, 객관적 근거를 토 대로 사망을 추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1시 37분경 발견된 세월호 선원 B◇◇의 경우에 도 발견 당시 ‘시체 1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일 해경 교신 내역이나 상황보고, 채증 영 상 등에서는 시신으로 판단한 근거를 찾기는 어려웠다. B◇◇이 발견된 11시 37분경부터 K◇◇이 발견된 17시 30분경까지 추가 구조자는 없었다. 그러나 11시 1분경부터 전원을 구조했다는 오보가 나갔다.87) 전원을 구조했다거나 대부분을 구조했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지고 보도되면서 수색구조 상황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세월호에 올랐던 가족과 친구를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세월호참사 당시 청와대, 그리고 법에 따라 재난 상황을 관리해야 하는 기구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세월호참사는 대규모 해양 선박사고로, 해경, 해군, 민간 자원이 신속하게 현 장에서 수색구조 및 수습을 해야 했고, 법이 정하고 있는 위기관리기구가 제대로 작동해 야 했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이들이 보내는 정보와 대응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해 종합 적인 위기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호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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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당일 범정부적 대응체계와 컨트롤타워는 작동하지 않았다. 5. 사라진 컨트롤타워: 세월호참사 초기대응의 실패 86) 구조되어 123정에 함께 타 있던 선원 D○○는 정 군의 어머니에게 당일의 상황을 담은 편지를 직접 써서 전달하기도 했다. 87) 중대본은 당일 해경으로부터 전파되는 정보를 토대로 구조 인원을 발표하였는데 10시에 110명, 12시 11분에 179명, 13시에 368명이라는 내용의 사실과 전혀 다른 발표를 하였다. 구조 관련 상황의 정보는 당시 해경이 주요한 출처일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과 전혀 다른 정보가 전파되고 보도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라 재난이 발생하면 소관 정부 부처에서 재난 상황의 효율

적 관리와 수습을 위해 중앙사고수습본부(이하 ‘중수본’)를 설치·운영할 수 있고, 일정 규모

이상의 대규모 재난의 경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가 구성된다. 세월호참사 당

일 중대본부장(안전행정부 장관)에게는 중수본부장(해양수산부 장관)을 지휘할 수 있는 법적 권한 이 있어 안전행정부 중심의 국가 재난관리 컨트롤을 할 수 있었다. 중수본부장과 중대본 부장은 수습에 필요한 범위에서 시 군 구대책본부의 장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국가안보실에 접수·전파된 위기 상황 정보를 대통령에게 최종 보 고할 책무가 있었고, 청와대는 중대본, 중수본이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지휘·감독해야 했다. 중대본과 중수본은 법정위기관리기구로서 재난 상황에 엄밀히 대응해야 했다. 그러 나 세월호참사 당일 범정부대응은 실패했고, 재난 상황에서의 컨트롤타워는 총체적 부재 상태였다. 세월호참사 당시 국가위기관리체계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법령에 따라 모든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 감독하고, 국 가안보실과 대통령비서실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한다. 세월호참사가 발생하기 1년 전, 박근혜 정부는 국가위기를 ‘재난’과 ‘안보’로 나눠 대통령의 국가 위기상황 관리기능을 보 좌하기 위해 국가안보실을 신설하고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편해 국민생활안전 을 책임지는 총괄부처로 그 위상과 기능을 강화했다. 하지만 실제 체계가 작동할 수 있도 록 관련 법령 및 제도는 정비되지 않았고, 법령 간 충돌이 예정돼 있었다. 국가안보실의 조 직, 담당업무에 대한 정비는 이뤄지지 않았고, 재난관리의 총괄기능을 하는 안전행정부 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재난 상황별 주관관리기관이 별도로 존재하고 타 부처에 대한 조정능력은 갖추지 못하는 등 한계가 분명했다. 국가안보실은 ‘안보’ 기능의

120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국가안보실이
을 포함한 컨트롤타워로
면서
실제
중심이었지만, 당시 국가위기관리지침과 위기관리 매뉴얼에는 여전히
‘재난’
표기돼 있었다. 재난과 안보에 대한 컨트롤타워를 분명히 하겠다
정작
가동할 수 있는 준비는 뒷전이었다.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3장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림 3-2 세월호참사 당시 「청와대 위기관리 매뉴얼」(2013) 내 국가위기관리 조직도 연합사령관 · 국가안전보장회의 · 외교안보장관회의 국무총리 중앙안전관리위원회 국가정책조정회의 테러대책회의 등 대통령 국가안보실장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 국가정보원장 테러대책상임위원회 국가사이버안전전략회의 국방부장관 군사분야 작전부대 합참의장 합동참모본부 통합방위본부 소방방재청장 중앙긴급구조통제단 안전행정부장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해당부처 장관 중앙사고수습본부 시 도지사 시도재난안전대책본부 현장지휘소 안보 분야 사이버 분야 재난 분야

121
구하지 않은 생명: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은 모든 유형의 재난 상황에서 기본법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박 근혜 정부가 국가안보실을 신설하고 안전행정부로 개편하면서 국회에 제출한 이 법률의 개정안은 국가안보실을 재난 대응체계의 최고 실무책임자로 정하고 있었다. 행정부 내에 서 강력한 지침으로 기능하는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대통령훈령 제318호)은 컨트롤타워로 서 청와대의 역할을 정하고 있고, 재난 위기에 관한 정보 및 상황의 종합·관리기능은 국 가안보실의 몫으로 정하고 있었다. 청와대 「위기관리 매뉴얼」 또한 국가안보실을 재난을 포함한 국가위기컨트롤타워로 정하고 있었고, 해양수산부의 「해양사고(선박) 위기관리 실 무매뉴얼」도 대통령과 국가안보실이 중수본의 상급기관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제도 정비가 미비한 상태에서, 세월호참사 당시 청와대와 국가안보실은 국가 차원의 위기관리 관련 정보를 분석, 평가 및 종합하고, 국가위기관리 업무를 기획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등 재난 상황에서 초동대응의 컨트롤타워로서 책임이 있었다.

표 3-5 국가 위기관리기구의 권한과 임무

위기관리기구

중앙안전관리위원회 (국무조정실)

· 분야별 위기징후 목록 종합 관리·운영

권한과 임무 근거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

· 분야별 위기정보·상황 종합 및 관리

· 국가위기평가회의 운영

· 재난관리에 관한 중요정책의 심의·조정

·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 및 집행계획의 심의

· 중앙행정기관 간 재난·안전관리업무 협의·조정

· 재난사태 및 특별재난지역 선포 등 건의사항 심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안전행정부장관)

중앙사고수습본부 (해양수산부장관)

· 대규모 재난에 대한 예방, 대비, 대응, 복구 활동에 관한 사항을 총괄 조정

· 대규모 재난의 효율적 대응을 위한 실무반 편성

· 재난관리책임기관의 장에게 행정상 및 재정상의 조치, 소속 직원의 파견, 지원 요청

· 재난 수습에 필요한 범위에서 수습본부장 및 시·군·구대책본부의 장 지휘

· 재난사태 및 특별재난지역 선포 검토 및 건의 · 재난 현장 대응 활동 종합 및 조정

· 중앙수습지원단 구성 및 필요시 현장 파견 등

· 재난정보의 수집·전파, 상황관리

· 재난 발생 시 초동조치 및 지휘를 위한 수습본부상황실 설치·운영

· 재난관리책임기관의 장에게 행정상 및 재정상의 조치, 소속 직원의 파견, 지원 요청

· 재난 수습에 필요한 범위에서 시·군·구대책본부의 장 지휘

· (필요시) 중앙수습지원단 구성·운영할 것을 중대본부장에게 요청

· 선박 재난 수습에 관한 업무 총괄·조정

지역재난안전대책본부 (시 도, 시 군 구)

· 관할 지역 내 재난 ·대응·복구에 관한 사항 총괄, 지휘(지역 안전관리 기본 계획 수립 등)

· 재난현장지휘본부 설치 및 대응 활동 총괄 지휘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제318호 (2013. 8. 30.)

재난안전법 (2013. 8. 6. 개정)

· 인명 구조 및 사고 수습 등 지원 · 대피명령 등 주민 보호조치 이행 중앙구조본부 (해양경찰청장)

· 해상 긴급구조 활동의 총괄·조정 및 지휘·통제

· 긴급구조 지원기관 간 역할분담 및 긴급구조를 위한 현장 활동계획 수립

· 사상자의 응급처치 및 의료기관 이송에 관해 수난구호 협력기관과 협의

· 수난구호에 필요한 범위에서 사람 또는 단체에 대한 수난구호 종사 명령

희생자 수습 및 피해자 지원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세월호참사 당일 10시 30분경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한 시점부터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예상한 조치가 필요했다. 당일 해수 온도(20도 미만), 침몰지점의 조류상태 등에 비추어 3일

수난구호법 (2013. 3. 23. 개정)

122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세월호참사 초기 컨트롤타워의 부재 중대본과 중수본은 무엇을 했나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경에서 인지하고 대응에 나선 시점부터 정부 차원의 참사 초기대응, 특히 재난 상황에 가동되도록 법이 정하고 있는 기구들의 대응은 실패했 고, 이는 이후

이내에 수중수색을 신속히 진행해야 했고 이를 위한 전문 잠수 인력을 확보해야 했다. 그

러나 당일 해경본청에서는 수중수색이 아닌 선체 인양을 위해 청해진해운에 구난업체 언

딘과 구난 계약을 체결하도록 종용했고, 해경 지휘부는 사고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한 다른 업체의 장비 투입을 통제했다. 해경은 해군, 민간 잠수 인력과의 협력을 통해 실종자 수색에 만전을 기해야 할 시점에 확인되지 않는 선내 에어포켓의 존재 가능성을 전제로 ‘선내 공기 주입’ 여론을 확산시켰다. 신속한 수색구조가 급선무였지만 세월호가 침몰하고 3일이 지난 4월 19일까지도 수중 작업 현장의 지휘 및 관리는 부재했고, 해경과 해군 간의 정보 교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해경청장은 3일간 실종자 수색의 골든타임에 대통령, 국무총리의 현장방문에 동행하거나 실종자 가족 대상 브리핑을 하는 등 현장 지 휘가 아닌 다른 업무에 여념이 없었다. 참사 당일 9시 40분경 구성된 중수본은 대규모 해양 선박사고 발생 시 해양수산부가 설 치하는 조직이다. 중수본은 재난정보를 수집, 전파하고 상황실을 설치, 운영하면서 피해 복구 통합 지원체계를 가동하고 사상자 처리 및 장례 등의 지원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 러나 세월호참사 당일 중수본부장은 구조 임무에 사용되어야 할 헬기를 타고 ‘구조 활동 독려’를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해경청장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추상적 지시만 했을 뿐, 사상자 현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해경과 마찬가지로 중 수본에서도 수중수색에 필요한 계획이 수립되지 않은 채, 수색에 집중돼야 할 시간이 속 절없이 흘러갔다. 중대본도 다르지 않았다. 안전행정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여 구성된 중대본은 재난의 예방, 대비, 대응, 복구 등에 관한 사항을 총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세월호참사 당 일 9시 38분경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한 안전행정부 장관은 9시 45분경 중대본 가동을 지 시했으나, 예정된 일정(경찰교육원 졸업식)을 모두 수행하고 서해청, 사고 현장, 팽목항을 거쳐 17 시 40분에야 중대본 상황실로 복귀해 실질적인 지휘를 하지 않았다. 중대본은 당일 10시 40분경부터 중수본, 해경 등과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피해 상황을 발표했고, 이는 구조 활 동에 혼선을 초래하는 요인이 됐다. 법령상 관계 기관 및 부처와의 체계적인 대응을 총괄 해야 했지만, 유선을 통한 정보전달만 하다가 사고 발생 후 10시간이 지나서야 기관별 역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23
무엇을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할에 대한 공문을 각 기관에 발송했다.

구조 세력 도착 시간 구조 시간 구조 인원

목포123정 09:30 09:40~10:25 79명

목포 헬기(B-511) 09:30 09:35~10:10 12명

해경

목포 헬기(B-512) 09:45 09:50~10:22 10명

목포 헬기(B-513) 09:32 09:45~10:35 13명 관공선

전남207호 09:55경

전남201호 10:00경

전남707호 09:40경 58명

10:02경

척 09:55~10:30

세월호참사 당일 청와대는 무엇을 했나

세월호 사고 발생을 알게 된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대통령비서실은 각각 대통령 보고를 준 비했다. 국가안보실에서는 위기관리센터가 세월호참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통령에 게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위기관리센터는 제1부속비서관, 제2부속비서관 등 청와대 근 무자 153명에게 “08:58 전남진도 인근해상 474명탑승 여객선(세월호) 침수신고접수, 해경확 인중”의 문구로 문자를 발송했으며, 국가안보실장에게 사고 발생 소식을 알렸다. 9시 25분 경 위기관리센터는 대통령에게 사고 발생 소식을 알릴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의 1보 작 성을 시작해 약 10분 만에 선박 제원, 사고 현황 등을 포함한 초안을 완성했다. 그러나 상 황팀장은 보고서에 현장 지도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려했고, 보고서는 10시

본청 상황보고서 2보와 동일한 정보를 포함한 보고서는 10시 36분경 대통령 보고를 위해 제1부속비서관실로 발송됐다.

124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서관실(이하 ‘사회안전비서관실’)이 대통령 상황보고서 1보를 작성했다. 탑승객 수를 제외하고 해 경
12~13분경 완성됐다. 대통령비서실에서는 9시 19분경 세월호 사고 발생을 인지한 정무수석실 산하 사회안전비
아리랑호
어선 30여
표 3-6 참사 당일 구조세력별 생존자 172명에 대한 구조 상황

4・16세월호참사

표 3-7 세월호참사 당일 대통령 및 청와대 조치사항

시간 세월호참사 당일 대통령 및 청와대 조치사항

09:25 국가안보실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1보 작성 시작

10:12 국가안보실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1보 완성

10:19 국가안보실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1보 관저 도착 대통령 국가안보실장 대통령, 국가안보실장에게 지시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여객선 내 객실 등을 철저히 확인해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할 것’

10:25 국가안보실 해경 본청 상황실에 대통령 지시사항 전달

10:29 국가안보실 세월호 전복 인지

10:36 대통령비서실 사회안전비서관실, 대통령 상황보고서 1보 제1부속비서관실 발송

10:37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비서관실, 사회안전비서관실의 대통령 상황보고서 1보 수신

10:46 국가안보실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2보 완성

10:49 국가안보실 세월호 침몰 인지

10:53 국가안보실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2보 관저 도착

11:10 국가안보실

‘학생 전원 구조’는 잘못된 정보임을 인지

* 11:01 언론 ‘학생 전원 구조’ 오보 보도

14:15 대통령 민간인 S□□ 관저 방문, 제1부속·제2부속·총무비서관과 회의

16:10 대통령비서실 대통령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개최

17:15 대통령 대통령 중대본 방문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제3장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국가안보실과 대통령비서실에서 작성한 상황보고서가 대통령에게 보고됐는지는 알 수 없다.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에서는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1보 완성 후 10시 12~13분 경 보고서를 출력했고, 보고서는 상황병에게 건네졌다. 상황병이 위기관리센터에서 박근 혜 대통령이 있는 관저까지 뛰어가 전달했지만,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되지 않고 대통령의 개인 공간인 관저 침실 앞 탁자에 놓였을 뿐이다.

대통령비서실의 보고서는 관저 도착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대통령비서실 사회안전비서 관실에서 작성한 세월호 상황보고서는 10시 36분경 완성돼 제1부속비서관실에 이메일로

발송됐고, 10시 37분경 제1부속비서관실에서 확인했다. 그러나 제1부속비서관실에서 대 통령에게 언제, 어떻게 이 보고서를 보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25
구하지 않은 생명:

국가안보실과 대통령비서실은 세월호참사라는 재난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보

고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업무 관행

과 관련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매주 수요일에는 일정을 비우고 관저에 머물렀 다. 대통령이 집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사적 공간인 관저에 머문 탓에 참모진의 접근이 제 한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보고 시 대면보고보다 서면보고 방식이 통용 됐다. 이 때문에 세월호 사고 발생 소식이 청와대 내부에서 전화와 문자로 공유되는 동안 대통령에게는 보고서 완성 전까지 보고되지 않았다. 대통령보다 먼저 세월호 사고 발생을 알게 된 국가안보실장과 대통령비서실장이 상황의 위급함을 대통령에게 알려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즉각적인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와대의 이러한 경직되 고 폐쇄적인 업무 방식으로 인해 대통령이 보좌 기관으로부터 제대로 된 상황보고를 받 았는지 여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첫 지시는 상황에 맞지 않는 늦은 대응이었다. 대통령의 상황보고서 확인 여부 는 알 수 없으나 대통령은 10시 25분 이전에 세월호참사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 안보실 위기관리센터의 보고서가 관저로 전달된 이후 대통령은 국가안보실장에게 전화 해 인명 구조에 관한

126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도록 하라’,
등을 포함해서 철저히 확인해가지고 누락되는 인원 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10시 25분경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에서 해경 본청 상황 그림 3-3 10:36경 대통령비서실 사회안전비서관실에서 완성한 세월호 상황보고서(추정)
지시를 했다. 대통령 지시사항은 ‘단 한 명도 인명 피해 발생하지 않
‘여객선 내에 객실, 엔진실

실에 연락해 전파됐다. 이후 위기관리센터는 대통령 지시사항을 중대본에도 전달했으며,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 지시사항을 브리핑했다.

청와대는 대통령과 국가안보실장이 통화한 후 10시 30분경 대통령이 해양경찰청장에게

연락해 특공대 투입 등의 지시를 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해양경찰청장의 통화 내역 등 관련 자료를 검토한 결과 10시 30분경 대통령이 해양경찰청장과 통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위와 같이 국가안보실의 첫 보고와 대통령의 첫 번째 지시가 있었던 9시 25분에서 10시 25분 사이에 세월호는 급격히 가라앉고 있었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당시 현장에 있던 해경 123정은 10시 15분경 “약 80도 정도 기울었기 때문에 저희 경찰 (배 에서) 다 나왔습니다. (중략) 현재 90도입니다.”라며 상황의 위급함을 해경에 전파하고 있었으 나, 대통령과 청와대의 상황인식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구조 가 시급했던 위 시간대에 해경 본청에 연락해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구 조 현황 파악과 현장 영상송출을 우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정작 세월호 사고 발생을

127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10시 25분경 대통령이 처음으로 구조를 지시했던 시각, 세월호는 전복되어 승객 9시 34분경 세월호 상태 10시 25분경 세월호 상태 그림 3-4 9시 34분경, 10시 25분경 세월호 상태
알리는 국가안보실의 보고는 위와 같이 현장구조 세력이 세월호에서 빠져나온 후 관저에 도달했다.

이 탈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정부 부처들은 대통령의 지시를 전파했을 뿐 대통령

지시 이후 구조를 위한 추가적인 실효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세월호 전복 이후 청와대의 대응도 다르지 않다.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10시 29분경

세월호가 전복됐음을 인지했고, 10시 49분경 해경 본청 상황실로부터 세월호가 침몰했 다고 보고받는다. 그러나 위기관리센터는 10시 46분경 대통령 보고를 위한 세월호 수시 09:39

표 3-8 2014. 4. 16.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와 해양경찰청 상황실 통화 내용

그거 보내기가 조금… 외부로 나가지 아마 않을 건데, 이게 환경이. 청와대 그러면 여기 지금 VIP 보고드리려고 그러는데, 영상이라도 하나 찍어서 핸드폰으로 하나 보내주시겠습니까?

해경 예, 그러면 제가 촬영을 해가지고, 그쪽으로 해가지고.

청와대 현지 영상 받아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사진이라도.

해경 저희들도 하고 있는데 지금 50명을 실은 배가 함정이 이동 중이라 연락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현장 쪽에서.

10:09

청와대 사진 한 장이라도 있으면, 급하니까 빨리 보내주세요, 먼저.

해경 예, 예.

청와대 지금 다른 거는 괜찮고, 우선 구조 인원이 파악이, 몇 명인지만 들어온 거 빨리 알려주십시오.

해경 저희들 파악한 거로는 함정에서 50명, 헬기에서 6명 파악이 됐고요.

10:10

청와대 그런데 이게 아까 10시 3분에 저한테 알려주신 거거든요.

해경 그다음에 지금 해가지고 저희도 확인해야 되는데, 전화 받느라 확인을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 그러면 빨리 우선 인원만 확인해가지고 다시 한번 전화를 주시고요.

10:15 청와대 영상 가지고 있는 해경 도착했어요? 해경 아직 도착 못 했습니다.

해경 배로 52명 구조해가지고 행정선에 인계했고요. 그래서 현재 70명 한 거로 파악이 돼 있고요. 좀 더 세부적으로 더 파악을 해야겠습 니다. 파악 후 바로 보고드릴게요.

청와대 이거 가지고는 안 되고, 가장 중요한 게 인원 파악이니까, 구조 인원 파악이니까 인원 파악을 잘해야 돼요.

해경 예, 알겠습니다.

청와대 그다음에 영상시스템 몇 분 남았어요?

10:25

해경 거의 1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청와대 지시해가지고 가는 대로 영상 바로 보내라고 하세요.

해경 예, 예.

청와대 그거부터 하라고 하세요, 다른 거 하지 말고.

128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청와대 그 영상 좀 잠시 보내주시겠습니까? 해경 그거요?

상황보고서 2보에 ‘(선체가) 왼쪽으로 60도 기울어진 상태’라고 기재해 10시 53분경 관저로

전달했다. 또한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2보에는 실제상황과 다른 사진이 ‘세월호 현재 상 태’로 첨부돼 있었다. 위기관리센터는 세월호가 이미 침몰했고, 탑승객 대부분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나, 11시 25분경까지도 대통령에게 침몰 사실을 보고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언론은 ‘학생 전원 구조’ 오보를 냈다. 과연 청와대도 언론 보도를 그대로 믿고 있었을까. 국가안보실은 10시 52분경 침몰한 세월호 안에 상당수의 승객이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11시 01분경부터 ‘학생 전원 구조’라는 사실과 다른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파되고 있었다. 11시 07분경 사실관계 확인에 나선 국가안보실은 11시 10분경 해 경을 통해 구조인원은 148명임을 전달받아 ‘학생 전원 구조’ 보도는 사실이 아님을 확인 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했을 뿐 국민적 혼란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은 없었다. 세월호 침 몰 상황을 확인한 후 국가안보실장은 위기관리센터에서 구조 방안에 대해 논의했는데, 국가안보실장이 ‘뚫고 들어갈 수 있나’, ‘크레인 동원해서 끌어당길 수는 없나’라고 묻자 당시 위기관리센터 근무자가 ‘뚫고 들어가면 공기가 아니라 물이 들어갈 수 있다’, ‘저 정 도 배를 들어 올릴 만한 크레인은 동원되는 시간이 걸린다’라는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29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답을 했을 뿐이다. 국가 안보실장과 위기관리센터 근무자의 이러한 문답은 승객 구조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로 이 어지지 않았다. 10시 46분경 세월호 상태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2보 그림 3-5 10시 46분경 세월호 상태, 세월호 수시상황보고서 2보

이렇듯 청와대가 우왕좌왕하며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일수록 대통

령의 의사 결정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 중요성과 정반대였다. 세

월호참사 당일 오후 국가안보실장은 14시경 예정된 회의 참석을 위해 위기관리센터를 떠 났고, 대통령비서실장은 16시 10분경에야 수석비서관을 소집해 대책회의를 개최했다. 참 사 당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이어진 청와대의 상황대처를 살펴보면, 대통령과 청와대가 당 시 세월호참사를 국가위기로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당일 대통령의 대 응을 보면 이러한 의문은 더욱 짙어진다. 오전 10시 25분 이전 국가안보실장에게 인명 피해가 없게 하라는 지시를 했던 대통령은 14 시 15분경 이후에야 세월호참사에 관한 첫 회의를 했다. 14시 15분경 민간인 S□□이 관저를 방문했고, 대통령은 민간인 S□□, 제1부속·제2부속·총무비서관과 논의해 중대본 방문을 결 정했다. 국가안보실과 대통령비서실의 대면보고도 받지 않던 대통령이 민간인 S□□이 참석 한 회의에서 중대본 방문을 결정한 것은 비정상적 의사 결정 그 자체라 평가할 만하다. 이후 14시 53분경 대통령의 머리 단장과 메이크업을 위해 미용사를 관저로 불렀고, 15시 22분경 미용사가 관저에 도착했다. 청와대 관저에서 중대본 상황실까지는 차량으로 약 10 분 정도면 이동할 수 있었으나, 대통령은 회의를 개최한 지 약 3시간이 흐른 17시 15분경 에야 중대본에 도착했다. 청와대는 세월호참사라는 국가위기 앞에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 령의 권한은 국가의 국민 보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어졌으나, 대통령 박근혜와 청와 대는 그 권한과 역량을 세월호참사 초기 피해를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수습하는 데에 사 용하지 않았다. 세월호참사 당일 청와대의 정보전파와 보고체계는 비정상적으로 가동됐 고, 무의미하고 지체된 대응만 있었을 뿐이다. 청와대는 세월호참사 초기대응에 실패했다. 범정부적 대응의 실패 세월호참사 당일 청와대는 위기상황 대응을 종합적으로 총괄하거나 중수본과 중대본 등 법이 정하고 있는 위기관리기구가 제대로 가동될 수 있도록 지휘하지 않았다. 범정부적인

130 제3장
않은 생명
구하지

세월호참사 초기대응은 실패했다.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는 ‘위기관리 관련 정보의 분석·평가 및 종합, 국가위기관리 업

무의 기획 및 수행체계 구축 등 위기 상황의 종합·관리 기능을 수행하며 안정적 위기관 리를 위해 전략 커뮤니케이션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파악한 위기상황정 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 당일 중수본, 중대본, 중앙구조본부의 대응상황과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종합적인 관리기능을 해야 했다. 그러나 국가안보실은 중수본이 세월호 참사 당일 상황을 안일하게 인식하고 곧바로 ‘심각’ 단계의 경보를 발령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시정하지 않았다. 중수본은 세월호참사 당일 11시 30분경 작성한 상황보고서 3보에

“11:00 현재 인명 피해 없음”이라고 기재해 16개 기관에 전파했고, 해양사고 ‘심각’ 경보 발 령 사실은 당일 15시경에 이르러 작성된 상황보고서(6보)에서 확인될 뿐이다.

세월호참사 당일 재난 상황 관련 정보가 전파되는 창구도 일원화되지 않았다. 세월호참 사 당일 9시 45분경 중대본을 가동하도록 지시한 안전행정부 장관은 중대본부장의 지위 에서 중앙구조본부, 중수본 등과 사전 협의 없이 피해 및 구조 상황 등을 독자적으로 발 표했다. 이로 인해 정보의 혼선이 빚어졌지만 국가안보실은 중대본과 중수본, 중앙구조본 부를 아울러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국가안보실은 ‘언론브리핑 등 대 외홍보 활동 공식창구 지정·운영’을 해야 했지만 현장 구조 세력에게 2~3분마다 전화해 현장 영상송출을 지시하고 구조 인원을 보고하라고 종용했을 뿐, 세월호참사 관련 정보 의 혼선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가안보실은 ‘위기정보·상황 종합 및 관리’를 위해 세월호참사 상황의 정보를 종합하고 유관 부처 및 기관들이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수중수색구조 관 련 임무는 해경(중앙구조본부)과 해양수산부에 맡겨져 있었고, 현장 상황에 대한 판단과 이에 따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세월호참사 상황에서 행정부 수반으로서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하고, 중대본·중수본이 제 기능을 다하면서 가동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해경만으로는 수중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31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수색구조를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자원과 인력을 보유한 해군을 비롯한 군 병력을 통한 수

색·구조가 필요했고,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휘·감독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수중

수색 지휘체계 확립과 자원 동원에 대한 대통령의 지시는 없었다. 300명이 넘는 국민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위기상황에서 컨트롤타워는 모습을 감췄다.

세월호는 8시 49분경 우현으로 선회하면서 좌현으로 기울었고 침수가 시작된 후 100분 여 만에 침몰했다. 10시 30분까지 탈출하거나 구조된 것으로 확인된 인원은 172명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생존자는 없었다. 해경은 피해자를 구조하면 응급처치를 중단하지 않고 신속하게 이송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침몰하고 있는 배 안에 있는 승객 한 명이라도 구하고 살리기 위해 현장에 출동한 해경과 해경 지휘부, 상황실과 중대본, 중수본 등 법정위기관리기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 일 것을 기대한다. 그것은 곧 재난 상황에서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고 그 역할을 다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 기대와 믿음은 무너졌다. 해경과 선원, 선장, 청와대는 참사 초기 한 명 의 희생자라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야 했지만,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그 역할과 임무 를 방기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내가 책임을 피할 수 있을지, 자 신의 안위에만 초점을 맞춰 최선을 다했다. 이는 304명의 희생자, 세월호에 올랐던 모든 이들, 그리고 이들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가게 만들었다. 왜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까?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하더라 도 현장의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신속하게 계획을 세워 구조했다면, 배 안의 승객들이 배에서 나오도록 퇴선 조치를 내리고

132 제3장 구하지 않은 생명
빠져나온 승객들을 구조했다면 304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보를 파악하거나 구조를 지휘하지 않으면서 보고만 종 용하고 현장출동 세력의 상황 판단에 맡겼던 해경 지휘부, 구조 상황을 왜곡하여 보고하 6. 그날 그곳에 국가는 없었다

고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묻지도 않았던 현장출동세력, 구조에 몰두하고 현장출동세력과

위기관리기구를 아울러 재난 상황을 총괄적으로 관리·대응해야 할 상황에 현장 영상을 요구하며 대통령 보고만 신경 썼던 청와대, 참사 당일 7시간의 행적을 여전히 알 수 없는 대통령. 재난 상황에서 신속하게 최선을 다해 국민을 구하는 국가는 없었다. 구조할 골든타임을 놓치고 수많은 희생을 낳은 결과를 두고 단순히 개인이 무능했기 때 문이라거나 상황이 이례적이었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다. 사고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상할 수 없는 양상으로 나타나기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체계와 매뉴얼을 따 르면서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승객 수백 명이 배 안에 있는데 배가 침 몰하고 있다면, 현장에 출동한 해경은 구조하지 못했을 때 승객이 사망할 가능성과 심각 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현장출동 세력에게 상황을 보고하라고 종용하고, 정작 보고받고 나서도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은 해경 지휘부는 무 엇을 위해 보고를 받았던 것인지,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어떤 임무를 한 것인지 묻지 않 을 수 없다. 참사 당일 청와대, 특히 대통령에 대한 보고 및 관련 지시에 관해서는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으나, 현재까지 확인된 내용에 따르더라도 대통령에게 보고된 시간과 내용 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당일 청와대 내부에서 일어난 상황을 감추기 위 해 한 시도들은 청와대의 대응이 적절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현장 상황을 즉각 파악하지 않고, 구조가 시급한 때 대통령에게 보고할 내용을 달라고 종 용했으며, 정보를 일부 파악하고도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던 해경 지휘부의 조직적인 무책임, 재난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대응 계획을 수립하고 지시 및 보고를 진행 했어야 할 컨트롤타워의 부재, 최소한의 의무도 저버린 채 자기만 살겠다는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 출동 전부터 현장에 도착한 이후까지 누구 하나 세월호의 실시간 상황 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던 현장출동 세력의 집단적인 임무 방기가 모두 결합해 사회적 ‘참사’로 이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적인 무책임과 집단적인 임무 방기는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발견된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을 전제하고 최대한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하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도 지키지 않았다. 원칙, 의 무, 책임을 모두 저버린 국가에 의해 참사는 더욱 확대됐다.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구하지 않은 생명:

제3장

133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선원, 해경, 청와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제 4 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1. 바다에서 육지로, 그리고 다시 바다로 2. 원칙 없는 수색, 커지는 혼란 3. 피해자를 적으로 삼다 4. 대책 없는 희생자 수습 5. 기다릴수록 커지는 고통 6. 참사 수습은 왜 실패했는가

4월 16일 오전 세월호가 침몰한 그 해역만이 참사의 현장인 것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이 사망하고, 실종되고, 부상당한 참사는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났지만

그 현장은 이내 이들이 이송된 서거차도와 팽목항과 진도로 확대되었다. 생존자들은 서거차도와 팽목항을 통해 육지로 돌아와 진도실내체육관과 병원에서 가족을 만났다. 사망자들도 팽목항을 통해 육지로 돌아와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을 절망케 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은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부터 실종자 수색이 중단된 11월 10일까지 진도 앞바다, 팽목항, 진도실내체육관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

정부는 대규모 참사의 피해자를 수색, 이송, 치료,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누가 생존자이고 누가 실종자인지 파악하는 일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실종자 수색 과정에 대한 정보는 과장되고 왜곡되고 숨겨졌다. 신체적, 심리적으로 무너진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언론이 폭력적으로 취재했지만, 정부는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정부는 실종된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을 감시하고 적대시했다. 극심한 고통에서 비롯되는 현장의 불신을 가라앉히고 갈등을 중재하려고 나서는 책임자는 없었다. 수습된 희생자를 예를 갖춰 맞이하고 가족에게 인계하는 시스템은 허술했고 제때 작동하지 못했다. 생존자, 희생자, 또 그 가족 모두에게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은 극도의 불신과 무책임이 만들어낸 아수라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정부, 무책임한 정부의 공백을 메운 것은 지역 주민, 지역 공무원, 잠수사, 자원봉사자 등 참사 소식을 듣고서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었다. 생존자와 희생자를 맞이하고, 실종자를 수색하고, 그 가족을 지원하는 일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던 이들 덕분에 가능했다.

136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4・16세월호참사

서거차도

1. 바다에서 육지로, 그리고 다시 바다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와 팽목항 일대는 지옥이었다. 가까스로 세월호를 빠져나온 생존자 들이 육지로 돌아오는 일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은 이들을 찾고 수 습하는 일도, 구조되었다던 가족이 명단에 없는 것을 발견하는 일도, 배를 얻어 타고 어떻 게든 침몰 현장으로 나가는 일도, 그곳에 있던 모두에게 끔찍한 경험이었다. 지역 주민들 이 내 일처럼 여기고 도우려고 나섰지만, 재난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는 신속하지도 체 계적이지도 못했다. 정보는 왜곡됐고, 판단은 지체됐고, 실행은 미흡했다. 생존자 172명 세월호에 승선한 476명 중 304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살아남았다. 생존자 가운데 승객을 구하지 않고 탈출한 선원이 15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세월호 생존자는 157 명이다. 대다수 생존자는 서거차도를 경유해 팽목항으로 옮겨졌고, 팽목항에 설치된 현장 응급의료소에서 중증도 분류 후 진도와 목포 소재 병원 다섯 곳과 진도실내체육관(이하 ‘진 도체육관’)으로 분산 이송되었다. 일부 생존자는 세월호 침몰지점에서 팽목항으로 곧장 이송 되었다. 세월호를 탈출해 구조된 생존자들은 헬리콥터 또는 선박으로 인계됐다. 서해지방해양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137
진도실내체육관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세월호 침몰지점 (수난현장) 팽목항
진도·목포 소재 병원 진도실내체육관  구조 직후 생존자 상태 확인과 응급처치   육상 인계 후 생존자 보호조치와 귀가 지원  그림 4-1 생존자 이동 및 인계 장소
(중간경유지)
(육상 인계지점)

경찰청 항공단 목포항공대 소속 B-511호와 B-512호, 제주지방해양경찰청 항공단 소 속 B-513호가 생존자를 태우고 서거차도로 갔다. 세월호를 빠져나온 승객 일부는 해경 123정에서 보낸 고무단정에 직접 탑승하거나 바다로 뛰어든 다음 고무단정에 올라탔다. B-512호 헬리콥터가 해상으로 투하한 구명벌에 탔다가 고무단정으로 옮겨 탄 이들도 있 었다. 세월호가 상당히 기울어진 이후 배를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123정 고무단정뿐 아니 라, 인근에 있던 전남201호(어업지도선), 전남207호(행정선), 민간 어선에 탑승했다. 123정 본정 은 세월호 선수에 두 차례 접안해 선장과 선원들과 일부 승객을 구조했다. 123정 고무단정이 구조한 생존자들은 곧 123정 본정, 행정선, 민간 어선 등으로 인계됐다. 전남201호, 전남207호, 민간 어선은 구조한 이들을 인근에 있던 123정 본정과 진도아리 랑호(행정선)로 인계하고 다시 구조 작업에 나섰다. 123정 본정은 인계받은 생존자들을 전

남707호(행정선)와 민간 어선인 명인스타호 등으로 인계했다.

세월호 조타실에 있다가 곧장 123정 본정으로 탑승한 세월호 선원을 제외하면 123정에 오른 생존자 대다수는 물에 젖어 있었다. 일부 생존자는 탈출하면서 화상, 찰과상 등 외 상을 입기도 했고,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로 바다에서 발견되어 123정으로 이송된 생 존자도 있었다. 생존자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모포 등을 받았으나 의약품을 제공받거나 치료를 받지는 못했다. 123정에는 위생사로 지정된 승조원이 있었지만 그는 123정이 침몰 현장에 도착한 후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할 때까지 위생사 임무를 하는 대신 휴대전화로 영상 채증 작업을 했다.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 보고를 위해 현장 영상 촬영과 전송을 반복 적으로 요구(10시 21분, 10시 27분, 10시 37분, 10시 44분)했기 때문이다. 진도아리랑호는 인계받은 생존자들을 태우고 침몰 현장을 떠나 서거차도로 향했다. 이들 은 서거차도에서 잠시 머문 후 조도훼리호를 타고 팽목항으로 왔다. 전남707호와 명인스 타호는 123정을 타고 온 생존자들을 바로 팽목항으로 이송했다. 구조된 후 123정 본정에 서 대기하던 일부 선원들은 해양경찰 경비정에 인계되어 3009함으로 이동했다가 3009함 에서 다른 경비정으로 옮겨 타고 팽목항으로 이송됐다. 또 다른 일부 선원들은 123정 본 정에서 곧장 팽목항으로 이동한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시 3009함으로 이송됐다.

138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표 4-1 생존자 172명 구조 현황

해경

4・16세월호참사

관공선

구조 세력 도착 시간 구조 시간 구조 인원

목포123정 09:30 09:40~10:25 79명

목포 헬기(B-511) 09:30 09:35~10:10 12명

목포 헬기(B-512) 09:45 09:50~10:22 10명

목포 헬기(B-513) 09:32 09:45~10:35 13명

전남207호 09:55경

전남201호 10:00경

전남707호 09:40경 58명

아리랑호 10:02경

어선 30여 척 09:55~10:30

여객선 침몰 소식이 전해진 서거차도에서는 생존자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 다. 진도보건소는 서거차도 보건진료소에 “생존자가 서거차도로 올 수 있으니 침수자와 부상자들을 위해 따뜻하게 준비하고 있으라”고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서거차도 보건진 료소는 보일러를 가동했다. 조도면사무소는 조도면 서거차도출장소에 “생존자들이 침몰 현장과 가까운 서거차도로 갈 것이고 다수의 인원이 갈 것이니 생존자들을 수용할 수 있 는 장소를 마련하라”고 요청했다. 서거차도출장소는 어민복지회관, 노인회관, 진료소, 출 장소 등을 생존자 임시보호 장소로 사용하도록 준비했다.

진도군은 서거차도로 보건소 의료진 등 30여 명을 파견하고 모포, 의약품, 신발 같은 구호 물품을 행정선에 실어 보냈다. 진도보건소는 생존자 진료를 위해 진도보건소 공중보건의

2명, 간호사 3명, 예방의학 담당자 1명을 서거차도로 보냈다. 해남소방서도 소방 구급대원 들에게 응급환자 장비를 챙겨 서거차도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소방 구급대원

2명이 구급차에 있던 거즈, 소독약, 붕대 등 응급조치 물품과 제세동기를 챙겨 행정선을 타고 서거차도로 들어갔다.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139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피해자를 맞을 준비

서거차도 주민들은 물에 젖은 상태로 섬에 들어온 생존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당 시 서거차도에는 주민 120여 명이 살고 있었고, 이날 서거차도로 이송된 생존자는 90명

정도였다. 생존자 중 성인들은 복지회관에, 여학생들은 조도면 서거차도출장소 직원 집에, 남학생들은 조도면 서거차도출장소 인근 주민 집에 잠시 머물렀다. 주민들은 학생들을 위 해 보일러를 따뜻하게 틀어주고 이불을 꺼내주고 갈아입을 옷도 내주었다. 서거차도 이장 은 여학생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속옷과 양말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배 가 고픈 학생들에게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다. 가족에게 소식을 알리고 싶다고 하는 학생 들에게는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주민들은 기자들의 무자비한 취재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팽목항으로 이동 하는 배를 타러 나온 학생들을 찍어대는 기자들을 제지하고 담요로 학생들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생존 학생은 2016년에 한 인터뷰에서 당시 취재진의 행태와 주민들의 행동을 이렇게 회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이 물에 잠긴 거 보고 왔는데, 막 기자들이 정신없이 저희를 찍고 있으니 까 되게 당황스럽고 저희는 다 젖고 막 꼴도 말이 아닌데. 얘네들이 대체 언제 와서 저러고 있는지, 막 친구들끼리 얼굴 가리려고 뭉쳐 있었는데, 마을 주민, 아주머니가 담요 들고 오시더니 저희를 덮어주 시는 거예요.”88) 진도군은 「YTN」 뉴스속보와 목포해양경찰서를 통해 사고를 인지하고 육상에서도 생존자 들을 맞이하려고 준비했다. 진도군수 긴급지시로 진도체육관에 임시보호소를 설치하기 로 했다. 진도군청 행정계장은 국악고 등 기존 임시대피 시설이 아닌 진도체육관을 임시 보호소로 쓰자고 추천했다. 깨끗한 신축 건물이고 물에 빠졌던 사람들을 위해 난방을 가 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설관리사업소장은

140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오전 10시경 진도군청에서 긴급회의를 마 친 후 진도체육관 마룻바닥에 깔 은박지를 준비하고 전기설비를 점검한 후 난방기를 가 동하라고 지시했다. 88)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2016), 49쪽.

진도군은 9시 30분경부터 7개 읍면의 관계 기관에 문자를 발송했고 이에 따라 구호 관계

자들이 진도체육관에 집결했다. 진도군자원봉사센터는 보관하고 있던 헌 의류를 열 상

연결하는 비상 연락망 을 마련해두었기에 생존자 긴급구호에 신속하게 나설 수 있었다. 전남소방본부장은 사고 접수 후 목포해양경찰서 상황실에서 육상 인계지점에 대한 정보 89) 진도군, 『4.16세월호참사 진도군 백서』, (2019.06.20.), 386쪽. 그림 4-2 4월 16일 서거차도에서 생존자들을 취재하는 기자들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141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자가량 진도체육관으로 보냈다. 대한적십자사 진도지구협의회장은 진도군 보건소로부터 위급 상황이 발생하여 구호물품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대한적십자사 광주 전남지사 에 연락해 담요 1,000장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11시경 승객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 스 속보가 나왔다. 진도체육관에는 진도군 내 봉사단체가 거의 다 모였다. 담요는 12시쯤 도착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대한적십자 진도군 지부 회원은 “당시에는 전원 구 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옷이 젖어 있을 거라고 판단해 봉사자들 30~40명이 담 요를 하나씩 들고 대기하고 있었죠.”89)라고 진술했다. 생존자들에게 제공할 신발, 라면, 커 피도 준비해두었다. 비슷한 시각 팽목항에서도 임회면 선진회가 설치한 텐트 두 동에 적 십자사가 보온물통 등을 준비했고, 진도군방범연합회 대원들도 담요를 가져와 생존자들 의 입항을 기다렸다. 당시 진도군은 재난 발생 시 구호지원기관을

를 얻지 못하자 자체 판단으로 팽목항을 사상자 인계장소로 정했다. 전라남도, 의료기관, 3함대 등 유관 기관에 연락해 모든 자원을 현장에 집결시키도록 했다. 9시 52분경 해남소 방서 진도119안전센터 임회119구급대가 팽목항에 먼저 도착했고, 10시 28분경 해남소방 서 지휘본부가 도착해서 팽목항 대합실 맞은편 20미터 지점에 현장 지휘소 상황판을 설 치했다. 11시경부터 본부 상황실에서 영상을 보고 지휘할 수 있도록 소방 위성중계차량

(Satellite News Gathering, SNG)이 현장 상황을 실시간 송출했다. 전남소방본부장은 11시 31분경 팽목항에 도착해 소방 세력을 현장 지휘했고, 중증도 분류를 마친 생존자를 구급차 20대, 버스 2대 등으로 병원과 진도체육관으로 이송했다. 경찰청은 세월호 침몰 사실을 인지한 후 팽목항에 진도경찰서장을 비롯해 타격대, 기동대 등을 배치했다. 진도경찰서장은 9시 40분부터 현장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팽목항에서 현 장 지휘를 시작했다. 팽목항에 출동한 경찰은 인간 띠를 만들고 통제선을 설치해 생존자 동선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세월호 승선자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생존자 이동통로를 확보해 안전하게 보내면 되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생존자들 이 도착했을 때 경찰은 현장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고, 이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그림 4-3 세월호참사 현장 지도

142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4・16세월호참사

생존자를 실은 배가 전남707호(조도면 급수선)(47명, 11시 12분), 명인스타호(27명, 11시 50분), 조도훼

리호(90명, 13시 50분) 순으로 팽목항에 도착했다. 생존자들을 따라가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인터뷰를 하려는 기자들끼리 취재 경쟁이 벌어졌다. 생존자들은 배에서 현장응급의료소

와 이송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방송 카메라를 피하려 모포를 뒤집어써야 했다. 한 기자

가 생존 학생에게 “친구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90)라고 묻자 그 학생이 놀라 울음 을 터트리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다. 팽목항에서 간단한 처치를 마친 생존자들은 구급 차나 헬기로 병원으로 이송되거나 버스를 타고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했다. 사참위는 생존

전남707호(47명)

123정 (79명) 단원고 학생/교사 명인스타호(27명)

3차 입항(164명) 1차 : 전남707호, 47명 (병원 : 10, 진도체육관 : 37) 2차 : 명인스타호, 27명 (병원 : 11, 진도체육관 : 26명) 3차 : 조도훼리호, 90명 (병원 : 5, 진도체육관 : 85)

(1명)

개별차량 (1명) 개별차량 (38명) 버스 (43명)

목포한국병원(16) 진도한국병원(4) 해남우리병원(6) 해남우석병원(2) 해남한국병원(22) 제주 화물기사(22명) 우수영항 ▶ 귀가 ▶ 제주소재병원

팽목항 수습현장 수난현장 생존자 거주지 이동 전원 구조 오보와 구조 인원 집계 혼선 4월 16일 당시 총 몇 명의 생존자가 어떤 경로로 이동하고 있는지 정보가 제대로 집계되 90) “[표] 한국 언론의 밑바닥을 보여준 세월호 보도”, 경남도민일보 (2014.4.24.).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143
진도실내체육관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그림 4-4 생존자 주요 이동 경로 서거차도 세월호 팽목항 (164명) 병원 (50명) 진도체육관 헬기(36명) B-511, B-512, B-513 진도아리랑호(53명) 조도훼리호
자 172명 중 166명의 이동경로를 확인했다.
(90명) 행정선(전남201호, 전남207호) 민간어선 생존자 (1명) 단원고(19명) 일반인 미확인 구급차 (1명) 미확인 미확인 미확인 닥터헬기
B-512 구명벌 123정 고무단정
차량 (22명) 전문병원 ▶ 귀가 귀가 ▶ 지역소재병원 중증외상센터 ▶ 귀가
생존자 (1명) 구급차 (25명) 버스 (138명) 일반인 생존자 병원 ▶ 귀가 ▼ ▶ 지역소재병원 귀가 ▶ 귀가 ▼ 고대안산병원 ▶ 병원(교사 1명)

지 않았다. 서해청은 생존자 명단을 별도로 작성하지 않았고, 123정(79명), 헬리콥터(35명), 관공선 및 민간 어선(58명) 등이 각각 실어 나른 인원을 합산하여 구조 인원을 집계했다. 그

러면서 서해청은 “190명 탑승 선박 팽목항 도착 예정(13시 40분)91)”이라는 미확인 정보를 검

증하지 않고 해경 본청에 보고했으며, 해경 본청은 이를 직전 구조 인원에 합산해 중대본 에 보고했다. 이후 해경 본청은 서해청으로부터 ‘190명 추가 구조’라는 정보가 틀렸음을 확인하고도 중대본에 즉시 통보하지 않아 14시에 열린 정부 공식 브리핑에서 중복 집계 된 인원이 공표되고 말았다. 당일 해경 본청 상황실과 통화하고 있던 국가안보실(위기관리센 터 상황실)은 해경에 인원 확인을 요청하여 14시 6분경 “아까 370명 그거는 아닌 것 같고요. 잘못된 보고입니다”라는 답을 받았다.92) 뒤이어 14시 24분에는 “지금 현재 정확하게 카운 트된 게 166에 사망자 2명 포함”이라는 보고를 받았다.93) 그러나 국가안보실은 초기대응 의 혼선을 막기 위해 조치하지 않았고, 중대본이 구조자 숫자 오류를 정정한 것은 16시 30분의 6차 브리핑 때였다.

4월 16일 13시 30분에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해경 상황실은 구조자 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통화했다. 이때는 생존자 일부를 태운 전남707호, 명인스타호가 팽목항에 도착한 이 후였지만 국가안보실은 생존자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3:30 국가안보실 안보실 상황반장입니다. 인원 변동사항 있습니까?

해경청 근데 370도 정확한 게 아니라고 하네요.

국가안보실 이거 카운터를 어디서 하고 있습니까?

해경청 서해청에서 해서 저희에게로 오는데 수색 쪽에서 통보를 받아서 전화를 드리거든요. 우리는 370이 라고 확인을 했는데, 일부 중복이 있었나 봐요. 소방하고 한 것들 하고 우리 구한 것하고 그쪽 구한 것 190명을 더해보니까 370이라고 했는데… 약간 중복이 있어 가지고요. 재차 확인 중에 있습니다. 국가안보실 확인되는 대로 알려주시고요.

91) 감사원 행정안전감사국, “세월호 침몰사고 구조인원 집계 및 전파에 관한 사항”(답변기관: 해양경찰청), (2014.6.17.), 102~128쪽.

92)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4월 16,17 핫라인 녹취록”, 27쪽.

93) 앞의 자료, 29쪽.

144 제4장 불신과
아수라장
무책임의
우리가 기준으로 잡는 것은 해경청에서 알려주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 이다. 이 분위기입니다. 입장을 정리했거든요. 표 4-2 4월 16일 구조자 집계 오류 관련,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과 해경상황실 간 녹취록

국가안보실은 이처럼 위기관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대통령 서면보고서 작성에 급급했으

나, 이렇게 작성된 보고서도 대통령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현장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대통령은 4월 16일 17시 15분경 중대본을 방문해서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지금요?”라고 물었다. 안전행정부 장관이 책임자인 중대본은 세월호 침몰 당일 오전부터 피해 규모를 파악하지 도, 구조사 수를 집계하지도 못했다. 4월 16일 아침 안전행정부 장관은 경찰교육원 졸업 식 참석차 이동하다가 여객선 침몰 소식을 보고받고(9시 38분), 중대본 가동을 구두로 지시 했다(9시 45분경). 그러나 안전행정부 장관은 중대본 상황실로 복귀하지 않고, 당초 계획대로 졸업식에 참석했다(10시~10시 37분). 중대본은 정부 공식 브리핑의 주체나 방식, 내용 등에 대 해 중앙구조본부, 중수본 등과 사전에 협의하지도 않고 10시 40분부터 피해 및 구조 상황 을 독자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면서 언론에 보도되는 구조 현황 사실관계를 점검하는 데 소홀했다. 이로 인해 11시 1분경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확산되었다. 이 보도 를 보고 경기도교육청에서 38개 언론사에 ‘학생 전원 구조’ 문자메시지를 두 차례나 발송 (11시 9분, 11시 25분)했고 언론사가 이를 재차 보도했다. 또 중대본이 한 시간 간격(총 6회)으로 실 시한 브리핑 내용은 중앙구조본부가 발표한 구조자 수나 동원 세력 내용과 달랐다. 결국 중대본은 14시 4차 브리핑에서 중복 집계된 구조 인원(386명)을 발표함으로써 관계 기관의 구조와 대응 활동에 혼선을 일으켰다. 해양수산부 장관이 책임자인 중수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오전 8 시 경제관계장관회의 참석차 서울정부청사에 가 있었다. 「YTN」 뉴스 보도로 사고 소식을 접한 해양수산부 관계자들은 상황실이 아닌 기획조정실장 방에 모여 회의했다. 이들은 구 조본부 상황실을 통해 직접 실태를 파악하지 않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기 획조정실장이 주재한 회의에서 내항 여객선 사고는 해운물류국 소관이니 해양정책실장 이 현장에 가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9시 40분에 「해양사고(선박) 위기관리 매뉴얼」에 따라 중수본을 구성한 뒤, 10시 6분에 상황보고 1보를 전파했다. 중수본이 작성한 「목포, 인천제주 운항 여객선 세월호 침수사고 보고」는 제3보(11시 20분)에서 “11시 00분 현재 인명 피 해 없음”이라는 내용을 국방부 상황실, 소방방재청 상황실 등 16개 기관에 전파했다. 당시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145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300명가량이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고 있다는 엄중한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전 달되지 않았다.

4월 16일 오후 구조자 집계 오류가 드러나면서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의 상황은 급변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MBC」, 11시 1분) 등 낙관적인 소식을 전하던 언론이 오보 를 정정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6시 30분 중대본은 앞서 발표한 구조자 숫자 368명(3 차 브리핑)을 164명으로 정정했다(4차 브리핑). 이 무렵 진도체육관에 게시된 구조자 명단에서 가족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실종자 가족 일부가 팽목항에 도착했다. 피해자들은 현장 책 임자를 찾았고, 당시 팽목항에 있던 해경 진도파출소장은 실종자 가족들이 원하는 수색 구조 상황 정보를 전달하지 못해 가족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현장에서 쫓겨났다. 실종자 가족들은 해경 정복과 민방위복을 입은 공무원들을 강하게 비난했고, 여기저기에서 소리 높여 분노하고 오열하면서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무원들은 자체 판단과 상급자의 구두 지시에 따라 근무복을 벗었다. 팽목항에는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전남소방본부장은 현장을 지휘할 필요 가 있다고 스스로 판단해 관계 기관 회의를 소집했다. 그곳에 집결해 있던 경찰, 의료진, 보건복지부, 진도군 소속 공무원들은 현장을 지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호응하는 분 위기였다. 그러나 현장을 지휘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전남소방본부(긴급구조통제단)로 모이지 않았고, 첫날 이후 전남소방본부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이에 관해 중앙119 구조본부 특수사고대응단장은 “육상에서 재난이 발생하면 사고지점 주위로 제1통제선을 설치한 뒤 사고 현장이 보이는 위치에 현장 지휘소 천막(또는 지휘 차량)을 배치하는데, 이때 현 장 지휘관이 누구인지 지정한 후 이를 유관 기관에 통보해 첫 회의를 소집하는 것으로 사 고대응을 시작한다”면서 “당시 팽목항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무너졌다”고 진술했다. 또한 “전남소방본부장이 참사 당일 자체 판단으로 현장 지휘관을 자임하며 회의를 소집한 건, 법령에는 어긋날지 모르나 현장의 혼란과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다”고 진술했다.94) 그만큼 팽목항 현장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94)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참고인(소방청 기획재정담당관) 면담 녹취록_최종”, (2020.11.10.), 74~75쪽.

146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생존자들과 실종자 가족들이 함께 머물게 된 진도체육관은 모두에게 견디기 어려운 슬픔

과 분노의 공간이 되었다. 진도체육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생존자들은 승객 300여 명이 구 조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괴로워했다. 현장 책임자에게 침몰과 구조 현장 정보를 얻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은 생존자들에게 당시 상황이나 동승객의 생사 여부를 물었고, 생존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실종자 가족이 속속 도착하면서 진도체 육관은 생존자를 위한 임시보호소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안정과 정보 안내를 위한 별도의 공간 분리 조치는 없었다. 다만 아동 생존자는 진도군 공무원이 자택에서 별도로 보호했고, 안산에서 도착한 학부모와 교사들이 요청하여 단원고 생존 학생 일부를 별도 공간으로 보내 심리적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진도체육관에도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 나서는 현장 책임자는 없었다. 진도체육관에 는 해양수산부 해양정책실장 등 고위공무원이 여럿 있었지만, 관계 기관 공무원을 소집 해 역할을 부여하거나 지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도군이 구조자 명단을 작성해 게시하거 나 화물기사 등이 귀가 방안을 요청함에 따라 생존자 귀가 지원을 결정한 것은 모두 자체 판단이었다. 실종자 가족이 계속해서 현장에 도착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추가 구조 소식이 들리지 않자 여기저기서 고성과 오열이 이어졌다. 이곳에서도 공무원들은 실종자 가족들 에게 비난받지 않으려고 민방위복을 벗었다. 안산시 공무원이 안전행정부 공무원에게 현 장을 지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해상사고는 해양수산부 소관’이라고 발뺌할 뿐이었다. 해 양수산부 관계 국장에게 재차 요구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책임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책임을 맡지 않으려 했다. “지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라는 거짓말 중앙구조본부가 승객 300여 명이 세월호에서 탈출하지 못한 사실을 최종 확인한 시점은 14시 36분경이다. 「주변 해역 대형 해상사고 대응 매뉴얼」과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 등에 따르면, 해수 온도가 20도 미만일 때는 사고 발생 후 3일 이내 집중 수색을 실시해야 한다. 즉, 구조본부장은 한시라도 빨리 수중수색 활동에 필요한 지시를 해야 했다. 전문가들은 맹골수도처럼 조류가 빠르고 시야가 탁해 작업 속도가 느린 구역에서는 일반 스쿠버 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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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비만으로 수중수색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명을 구조하거나 희생자를 수습하려면 표

면공급식 잠수장비(후카)와 바지선, 40미터 이상 심해까지 잠수할 수 있는 잠수 인원을 충

분히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해양경찰청 차장, 수색구조 과장, 경감은 중앙구조본부가 수중수색을 위한 종사 명령을 내려야 할 시점에 청해진해운이 구난업체 언딘과 구난 계약을 체결하도록 종용하 고 현장에 도착한 타 업체 장비의 현장 투입을 통제했다. 이들은 4월 16일 15시 18분부터 언딘 이사와 청해진해운 관계자에게 재차 전화해 구난 업체를 선정하는 데 관여했다. 즉 인명구조 작업보다 시급하지도 않고 소관 업무도 아닌 선체 인양 작업에 더 신경을 쓴 것 이다. 침몰한 선박에 대한 제거 명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또는 공유수면관리청 소관이고, 세월호의 인양과 관련된 구난 업체를 선정하는 일은 제거 명령을 받은 청해진해운과 청해 진해운의 보험회사에서 결정할 사항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던 청해진해운 해무팀이 해양수중개발과 구난 계약을 체결(17시 12분경)하고 현장 출동을 요청했다가 뒤늦게 취소했 고, 대영5001호와 현대보령호 등 사고 해역에 먼저 도착해 있던 바지선이 수색구조 활동 에 참여하지 못하고 복귀해야 했다. 진도체육관의의 실종자 가족들은 30분 주기로 수색구조 상황 정보를 발표해달라고 요구 했고, 서해청 정보수사과장은 수난 현장의 여건을 설명하며 당시로써는 선체 접근이 어 려워 정조 시간이 되어야 수색을 재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때 세월호 침몰 현장은 ‘대 사리 기간’인 데다 기상상태까지 나빠 선체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정조 시 간이라 하더라도 선체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와중에 선내에 진입하면 잠수사가 위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수중수색에 필요한 잠수 바지선과 선체도면도 없었고, 수색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중앙구조본부장이 수중수색에 필요한 조치보다 지휘부 의전과 보여주기식 실적보고에 급급했던 것처럼, 중수본부장(해양수산부장관)도 해양 정보와 선박 구 조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실종자 수색을 위한 현실적인 상황 판단을 하지 않았고, 지시도 없었다. 수색 작업에 진전이 없었음에도 해경은 4월 16일 15시경부터(상황보고서 6보) 수색상황과 구

148 제4장

조 동원 세력을 과장하여 발표하기 시작했다. 상황보고서 6보는 수중수색에 해경 118명, 해군 42명 등 160명이 동원되어 격실 등 생존자 확인을 위해 수색을 실시하고 있으며, 해 상수색에는 해경 55척, 해군 17척과 관공선과 어선 27척 등 72척, 항공기 18대 등이 동원 되었다고 과장했다. 목포서, 서해청, 해경 본청 상황실 상황보고서 작성 및 결재 관련자들 의 진술에 따르면, 참사 당일 해경, 서해청, 목포서 등은 유선 통화 및 메모 보고 등으로 상 황보고서 내용을 서로 확인하며 작성했다. 그러므로 누가 과장된 상황보고서를 작성하라 고 지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상황기획팀은 상황보고서를 모두 구조본부와 중대 본에 메모 보고로 전달했고, 이후 언론은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이 내용을 받아쓰며 “지 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라고 계속 보도했다. 이후 실종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 브리핑에서도 수색구조 세력을 과장한 발표가 이어졌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4월 17일 0시경 3009함에서 잠수 인력이 선체에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상황임을 ENG 카메라(Electronic News Gathering Camera)로 보았고, 해양경찰청장은 해경 P정을 통해 실종자 가족 다수가 수색구조 현장을 방문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 나 해양수산부 장관과 해양경찰청장은 4월 17일 진도체육관을 방문한 대통령 앞에서 잠 수사 600여 명이 동원되어 수색 중이라고 발표했을 뿐 실제 수중수색을 위한 선결 조치 사항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은 감추었다. 대통령비서실에서는 이런 발표가 허위 사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정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은 정무수석실(사회안전비서관실)의 행정관(해양경찰청 파견근무자)이 ‘해경상시문자전 송시스템’(이메이트)에 동시 접속해 수색구조 현장 상황 정보를 보고받고 있었고, 해경에게 서 가족 동향도 보고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통령비서실은 수색구조 상황을 허위로 발 표한 것을 문제 삼거나 수정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가족 대상 브리핑을 맡은 서해청장과 해경 차장은 3009함 회의에 참석하거나 주재했고, 각 거점 정보관들을 통해 TRS(주파수공용무선통신)로 수신된 현장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구조본부 상부의 메 시지대로 동원 세력을 과장한 브리핑을 이어갔을 뿐이다. 현장에 게시한 상황판의 내용도 「상황 처리 매뉴얼」에 따라 “상황 개요, 초동조치, 조치계획, 주요 진행 사항, 조치 결과”를 담는 대신 과장된 동원 수치를 보여주었다.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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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수중수색을 위한 중요한 판단과 결정은 때를 놓쳤다. 4월 16일 18시경 3009함에서 진행된 ‘민·관·군 상황 대책 회의’에서는 세월호의 특성으로 보아 실종자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 하며 40미터 수심에서 희생자 수습 활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니 수심이 얕은 곳으로 세월 호를 예인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산업잠수사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이 합당하 고 가능한지 제대로 따져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4월 16일 23시경부터 생존자가 직접 구 조 요청을 하고 있다는 허위 메시지가 확산되고, 에어포켓에서 60시간을 보낸 후 구조되 었다는 사례가 방송에서 나오는 등 여론의 흐름으로 인해 실제 세월호 상황에 근거해 논 의하고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구조본부는 치밀한 상황 분석과 신속한 의사 결정을 제때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생존구조 활동 이외에 실종자 수중수색 계획과 희생자 후속 조 치 방안을 함께 마련하지 않았다. 현장에는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솔직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책임자가 없었다. 한 피해자는 현장에서 ‘에어포켓’ 이야기가 나오고 ‘생존자 구조 요청 카톡’이 왔다는 허위 정보가 퍼지고 있을 때 그건 아니라고 분명한 근거를 들어 설명을 해주었어야 하며, 24시 간

150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수색이 가능한 줄 알고 조명탄을 계속 터트려달라고 요구하는 가족에게 수색 작업이 그림 4-5 2014. 4. 16. 18:30 구조본부 브리핑(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 95)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8) 참사현장 실종자 가족 지원에 대한 조사보고”, 5쪽.

가능한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었어야 한다고 진술했다.95) 다른 피해자는 현장 지휘부가 판

단을 회피하고 결정을 미루자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자기 의견을 주장하며 나섰고 그에 따라 가족들도 편을 갈라 몸싸움을 벌일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일분일초가 지날 때 마다 애가 탔을 실종자 가족은 구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시도하고 싶 은 심정이었다. 그럴수록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가족들 이 납득할 수 있도록 구조 현황과 대책을 설명해주어야 했다. 구조 소식은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크 게 절망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는 잠수 인력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판단과 지시가 내려졌다. 4월 17 일 0시 27분부터 1시 35분까지 서해청 상황실과 3009함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면, 당 시 중앙구조본부가 지휘부 의전과 보고를 위해 잠수 인력의 안전을 무시했음을 알 수 있 다. 중앙구조본부장은 생존자 구조를 위한 수중수색 작업이 그 담당자에게 중대한 위험 을 초래할 우려가 있을 때는 수색하지 않거나 중지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국무총리의 지 시로 해양수산부 장관이 3009함에서 ENG 카메라로 지켜보는 상황에서 서해청 상황실

은 3009함에 잠수 인력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지시를 내렸다. “현재 해수부 장관님 상 황실 임장. 바로 입수 바람. 조명탄 발사 바람”(서해청 상황실, 00시 36분)이라는 지시가 나왔고, 뒤 이어 현장 상황을 보고받은 다음에도 “액션이라도 하기 바람. 들어가는 척이라도 하기 바 람. 청장님 지시사항임” 등의 지시가 반복되었다. 이에 대해 3009함은 4월 17일 0시 43분 해경 문자상황정보시스템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위험한 상황에서 무조건 들어 가라고만 지시하기가 힘듭니다. … 현장에 있는 직원들의 안전 확보도 중요한 사항임을 헤 아려주시기 바랍니다.”96) 내 가족의 이름은 어디에 세월호 침몰 당일에는 누가 구조되었고 누가 구조되지 못했는지 아는 일조차 힘겨웠다.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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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96)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3과(2016.9.19.), “(11) 해경 상황정보문자시스템(이메이트) VTS-상황실 메신저 내용”.

구조본부는 사상자 명단을 작성해 진도군에 인계하지 않았고, 중수본과 중앙구조본부

사이 역할 분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도군은 자체적으로 생존자 명단을 파악했다. 진 도군 행정계장이 단원고에 전화해 수학여행단 명단을 메일로 받았고, 진도체육관 근무자 에게 생존자들의 중간 경유지 등에서 작성된 명단을 취합해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렇게 작성한 명단은 정확도가 떨어져 진도체육관 시설 관리 담당자가 체육관에 들어온 생존자들에게 이름을 직접 받아 적는 방식으로 다시 작성했다.

부정확한 명단을 보고 실종자 가족들은 더 절망했다. 현장에 도착해 있던 실종자 가족이 승선 가족의 이름을 말한 것이 구조자 명단에 잘못 게시되기도 했다. 현장에 도착해 구조 자 명단에서 가족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오열하며 쓰러지기도 했 다. 당시 진도체육관에는 구조본부 현장대응반장(서해청 정보수사과장)이 상황실을 설치하고 있 었고,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청해진해운에서 승선자 명단을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은 실종자 가족들이 부정확한 구조자 명단 때문에 혼란을 겪고 그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 는 상황에서도 이를 모르는 척하거나 지역 공무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태도를 보였다.

“체육관 들어와서 왼쪽에서 저하고 이렇게 있는데, 인원이 안 맞다고 막 거기서 이제 이러더라고. 그 래서 제가 화를 냈어요. 아니 해수부하고 해경에서 구조자 생존자 인원파악을 했냐고. 그런데 왜 안 맞냐고 그러냐. 근데 이제 그때 이제 보니까 해경인가 해수부 분은 탑승자, 승선자 명단을 갖고 있더 라고요. 저는 단원고 학생들 명단만 갖고 있어요. 그래서 아니 해수부하고 해경에서, 그러면서 막 전 라남도하고 저희들한테 그 생존자 숫자가 다르다고 약간, 뭐랄까 책임을 전가하는 듯이.” (당시 진도군

152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00 계장의 진술)97) 비슷한 시각 안산시 공무원들도 명단을 다시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진도체육 관에 있던 경기도교육청 공무원에게 단원고 수학여행단 명단을 요청했다. 그 공무원이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명단을 주지 않으려 해 마치 빼앗듯이 명단을 받아내서 재작성했 다. 진도군 공무원도 해양수산부(추정) 공무원이 가지고 있던 승선자 명단으로 구조자 명 97)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01.2020.10.16.(1차) 前 진도군 행정계장 E○○, 前 A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 J○○”(2020.10.16.), 6~7쪽.

단의 오기를 바로잡아 나갔다. 애초에 승선자 명단을 대조해가며 작성했다면 단순 오기

는 피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각 방송사도 구조과정에서 사망했거나 해상에서 수습된 희생자 이름을 자막으로 내보내 기 시작했다. 故 정00 군의 부모는 진도로 내려오던 중에 뉴스 속보로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다. 부정확한 구조자 명단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내 실종자를 구조자로 잘못 보 도한 사례도 있었다. 이 실종자의 아버지는 현장에 있던 공무원에게 실종 상태인 자녀의 이름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시정되지 않아 방송사에 직접 요구해야 했다. 방송통신위 원회(방통위)는 4월 16일 16시 35분, “진도해역 여객선 침몰사고 대비 재난방송 강화 요청”이 라는 제목의 공문을 통해 “재난방송 준칙, 사생활 보호 등에 만전”을 기해줄 것과 “국민의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관계 기관과 협력할 것을 각 방송사에 요청했다. 그러나 각 방송사는 진도체육관에 게시된 구조자 명단을 촬영해 영상으로 송출하거나 자막으로 내 보냈다. 실종자 가족들은 4월 17일 오후까지도 정확한 구조자 명단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에 4월 17일 진도체육관을 방문한 대통령에게 정확한 사상자 명단을 게시해줄 것을 요구했고, 구조본부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해양경찰청 홈페이지에 생존자 명단을 게시했다. 그러 나 이미 생존자는 대부분 가족과 만나 진도체육관을 떠난 뒤였다. 정부가 참사 현장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팽목 항과 진도체육관에는 혼란과 갈등이 커졌다. 현장의 필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책 임자가 없는 상황에서 실종자 가족들은 극도의 불안과 분노를 느꼈다. 아무도 믿을 수 없 다고 판단한 실종자 가족들은 서로 신원을 확인하고 현장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을 스스 로 마련했다.

2. 원칙 없는 수색, 커지는 혼란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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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현장에는 책임자가 없다

실종자 수색이 진행되던 현장과 그 소식을 기다리는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현장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팽목항과 진도의 책임자조차 수색구조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 했다. 4월 16일 해경 지휘함인 3009함에서 열린 회의 참석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은 실종자 들의 생존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4월 18일 진도군청에서 진행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범부처 사고대책본부(이하 ‘범대본’) 회의에서는 실종자들의 생존구조 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치들이 논의되었다. 이는 4월 17일 청와대가 “현재로서는 생환에 대한 기대감이 큰 실종자 가족 등을 감안, 실종자 수색 및 실종자 가족 불만 최소화 등에 주력”하고, “사망을 전제로 한 장례 문제, 사망 등”에 대해서는 “대외 표출 없이 내부적으로 만 검토 중”이라는 대응 기조를 세웠기 때문이다.98) 청와대의 대응 기조에 따라 4월 17일 구조본부는 4월 17일 대통령의 현장 방문에 앞서 선내 공기 주입 실시 계획을 발표하고, 이 후 범대본도 대통령 지시사항인 생존구조 가능성을 높이는 조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가령 심해잠수 능력이 있는 남해청 소속 해경이 현장에 와서 맡은 업무는 실종자 수중수 색이 아니라 공기 주입 작업선에서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3009함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당시 해경은 수중수색을 지휘할 수 있는 경험, 역량,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경은 해군이나 민간 잠수 인력과 협력해 수색 방안을 강구해야 할 시점에 선내 공기 주입 등 보여주기식 조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때까지 선내 진입에 성공한 잠수사도 없었고 에어포켓이 있을 만한 위치도 모르는 상태였다. 즉 공기 주입에 실효가 없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당시 작업용 컴프레셔는 인체에 유해한 공업용 오일을 사용했다는 점이 국정조사와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를 통해 알려졌다. 해경이 계속 에어포켓의 존재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동안 실종자와 희생자에 대한 현 실적인 조치에 차질이 생겼다. 4월 17일 진도체육관으로 근무지를 옮긴 해경 차장은

154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서해 청장을 대신해 팽목항의 현장 책임자로서 회의를 주재하거나 수색구조 상황을 브리핑했 98) 대통령기록관 대통령기록물생산지원단, “(140417)사고수습 후속 조치2”, (2020.8.4.), 2쪽.

다. 당시 현장 여론은 선내에 공기를 주입해 생존구조 가능성을 높이자는 주장과 실종자

들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조속한 선체 인양으로 희생자를 수습하자는 주장

이 맞서고 있었다. 생존자를 사칭한 카카오톡 메시지가 확산되고 있었고, 언론은 전문가 입을 빌려 에어포켓에 대한 낙관적인 보도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해경 차장은 실종자 가 족 대표와 관계 기관이 참석한 회의에서 ‘선내 에어포켓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이 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 공무원에게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희생자 규모를 현실적으로 예측하고 장례 지원 업무 등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는 어려웠다. 4월 16일 15시 45분 중앙구조본부장이 주재한 수색구조 방안 관련 첫 회의를 시작으로 4 월 20일 23시까지 회의는 총 20차례 이어졌다. 그러나 4월 18일의 ‘민관군 상황 대책 회의’ 에 이어 4월 19일 ‘수색·인양 구난 자문단 회의’에서도 수중 작업에 대한 현장 지휘 체계 가 부재하다는 의견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구조본부장이 선체 인양과 수색구조 방안 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당시 국군기무사령부 (기무사) 610부대는 “해경과 해군 간 작전통제권을 두고 정보 교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데도 두 기관을 제대로 통제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99)

- 4월 17일, 해군이 수중 탐색 작전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대기했으나 해경이 요청하지 않아 작전에 투입하지 못했고

- 정조 시간조차 공유하지 않아 기관 간 10~50분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으며

- 4월 18일, 해경에는 공기 주입할 수 있는 구난선이 없어 민간 장비를 투입했는데, 군에는 가능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아 구난선 2척이 있었음에도 활용하지 못함 4월 18일 선내 공기 주입 직후 선체가 가라앉고 단 한 명도 추가 구조되지 못한 채 희생자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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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수습되기 시작하자 실종자 가족들은 곧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실종자 가족들은 수난 현장 상황을 알기 위해 직접 배를 타고 나갔고, 현장 지휘 책임자의 격상과 지휘 체 계 일원화를 요구했다. 급기야 4월 20일에 가족들은 현장에 지휘 책임자가 없다고 판단해 99) 국군기무사령부 610부대, “범정부 사고대책본부 기능 정상화 필요”, (2014.4.20.), 2쪽.

청와대 항의 방문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통제 없이 무너진 현장

생존자와 가족이 귀가한 뒤 진도체육관은 실종자 가족들이 수색구조 소식을 기다리며 24시간 대기하는 장소가 되었고 이들을 지원하는 조치가 필요해졌다. 당시 시설관리사업 소장은 진도체육관 개관 이후 24시간 동안 난방을 가동한 적이 없어 전기 시설 과부하로 인한 화재 발생을 우려했다. 이에 진도군은 한국전력공사 진도지사의 협조를 얻어 가용 전력 문제를 해결했다. 진도군은 또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인근 숙박 시설을 예약하는 한 편 수습 장기화에 대비해 옮겨갈 수 있는 숙소를 물색했다. 여타 재난의 피해자들을 지원 하는 것과 비슷한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자연재해로 인한 이재민이 필요한 것 과는 달랐다. 가족들은 안정적인 숙식 공간보다 정확한 생존자 명단, 추가 구조 가능성, 수 색구조 진행 상황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한 정보를 원했다. 진도체육관 내에 수색구조 정보를 책임 있게 전달할 수 있는 현장 지휘관이 없다고 판단한 실종자 가족들은 4월 16일 밤부터 사고 해역과 가까운 팽목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색구조 상황을 직접 지켜보 려고 배를 타고 사고 해역으로 나갔다. 참사 직후 이틀간 실종자 가족들은 총 13회에 걸쳐 민간 어선, 행정선, 해경 P정, 해경 함정, 여객선을 타고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동승한 해경과 기자 등을 제외하고도 연인원이 590여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팽목항으로 이동한 가족 중 일부는 다시 진도체육관으로 돌아왔지만, 단원고 실종자 가족 다수는 팽목항에 남았다.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체육관에 머무는 이유는 하나였지만, 가족들의 요구가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실종된 가족이 생존 상태로 구조되리라고 기대하는 정도가 달랐고, 또 선 박 구조나 바다에 대한 지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일부 실종자 가족은 여객선의 구조 를 고려할 때 에어포켓이 있을 리 없고 선체 인양이나 수중수색을 통한 희생자 수습에 오 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다른 실종자 가족들은 생존구조 가능성을 높이는 조치에 희망을 걸고 실시간 수색구조 정보를 얻기 위해 침몰 현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

156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했다. 수색 기간 초기부터 진도체육관 내에 가족별 칸막이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가

족도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로 인해 피해자들 사이에 정보가 단절될 것이라며 반대

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정보를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고, 진도체육관 내에 칸막이를 설 치하는 것은 피해자들을 서로 분리해서 정보 교환을 막으려는 조치라며 의심했다. 토요일인 4월 19일부터 실종자 친인척까지 진도로 집결하면서 진도체육관의 내부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해졌다. 침몰 후 이틀 동안 피해자와 공무원이 자주 충돌하면서 공무

원들은 근무복을 벗게 되었고 진도체육관 안에서 군의관과 자원봉사자 외에는 근무복 을 입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불신이 극심해서 누가 피해자고 누 가 정부 측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자 의심은 더욱 커졌다. 현장에 있던 실종자 가족 이 다른 가족을 정부 측 프락치로 오인해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공무원들은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단원고 학부모들이 무질서한 현장을 정리 하기 위해 반별로 구역을 나눠달라고 경기도교육청 관계자에게 요구했다. 그에 따라 단원 고 2학년 1반부터 10반까지 자리를 정하고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일반인 실종자 가족들 이 진도체육관 밖으로 밀려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일반인 실종자 가족들이 크게 반발 했고 결국 진도체육관 내 자리 재배치는 무산되었다.

4월 16일 밤부터 팽목항에 도착한 실종자 가족 다수는 진도체육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팽목 항에 남았다. 첫날 팽목항에서 가림막이 설치된 천막은 현장응급의료소 몽골텐트뿐이었다.

4월 17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현장응급의료소와 대합실에서 비를 피했다. 팽목항은 사상자가 육상으로 인계되는 입항지였고 4월 18일부터는 희생자 임시안치소가 팽 목항에 설치되었다. 가족들은 실종자 수중수색이나 신원확인 결과를 신속하게 얻을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도체육관보다 환경이 열악했지만 팽목항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경찰은 팽목항 접근을 통제하고 출입자를 관리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4월 16일 전남지방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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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경찰청과 진도경찰서가 팽목항 진입 차량 통제를 위한 출동명령을 내려 경비 인력과 장비 가 집결했을 때 현장에는 이미 방송사 중계 차량이 무질서하게 난입해 있었다. 당시 전남 지방경찰청 경비교통계장은 “육상에서 재난이 발생하면 긴급구조통제단이 구조와 사상

자 이송에 필요한 현장 접근 통제 구역을 정하고 장비 투입로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면 경 찰이 이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해왔는데, “세월호참사 당시에는 구조본부로 부터 협조 요청이 없었으며, 전남도지사의 지시를 따르거나 범대본 결정사항에 따라 폴리 스라인을 설치하는 등 질서유지 활동을 전개했다”고 진술했다.100)

4월 16일 하루 동안 흐트러진 현장의 질서는 쉽사리 바로잡히지 않았다. 4월 17일 사고 해 역에 나갔던 실종자 가족 중에 응급환자가 발생해 구급차로 이송하려 했으나 팽목항에 들 어와 있는 방송 차량에 가로막혀 서망항 쪽으로 돌아나가야 했다. 4월 18일 오전 실종자 가족들은 현장 지휘 책임자가 없고 정부가 수색 현황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호소 문을 발표했고 기자들이 이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몰려들면서 주위가 소란해졌다. 이때 피해자 L△△가 방송 기자들을 향해 ‘너희들 때문에 길이 막혀 생존자가 나와도 구급차 를 타고 나갈 수가 없다’며 항의했다.101) 또 다른 피해자는 해남소방서 천막을 찾아가 현장 통제를 요청했다. 전남소방본부장은 119소방대원을 대동해 확성기를 들고 경찰이 무질서 하게 놓인 차량들을 통제하도록 지휘했다. 결국 피해자들의 항의 끝에 방송 차량과 사설 구급차 등이 외곽으로 옮겨가면서 긴급 차량 통로가 확보되었다.

100)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병합(직라-10, 신라-8) 경찰의 임무수행 관련 통화조사 결과보고”(2020.9.24.), 2~3쪽. 101)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병합(직라-10, 신라-8), 참고인(L△△) 통화조사 결과보고”, 1~2쪽.

158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그림 4-6 4월 16일 팽목항 차량출입
통제구역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은 계속해서 주변을 의심하게 되었다. 기자들 은 실종자 가족인 척하며 잠입 취재를 하고 가족들의 협의 내용을 기사로 작성하다 발각되 기도 했다. 사복경찰과 국가정보원 등의 정보관들은 실종자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 상부에 보고했다. 가족들이 의심했던 자가 2학년이 10반까지 있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2학년 11반 부모라고 말했다가 들통난 일도 있었고, 핸드폰을 빼앗아 살펴보았더니 카카오톡으로 작성 한 보도자료나 통화 내역 때문에 기자나 경찰임이 탄로 나기도 했다. 또 가족 대표로 행세하 던 자가 안산 고잔동 통장임이 발각되어 현장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팽목항 가족 숙소(몽골텐 트)에 누워 있던 사람이 나중에 정보관으로 확인된 일도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분위기를 폭력적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 정보관이거나 프락치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서로 믿 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술했다. 피해자 간에도 서로를 프락치로 오인해 충돌했다.

4월 18일 실종자 가족 대표는 “피해 가족 간 이간질, 피해민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외부인 접근 등”에 강력한 조치를 해달라고 범대본부장에게 요청했다.102) 또 자원봉사자와 피해 자가 동일한 의복을 착용해 구별되지 않으므로 식별할 수 있게 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수습 현장 통제 구역 설정, 방문자 출입제한과 식별조치는 이행되지 않았고, 방문 자에게 안내하는 현수막을 게시하는 정도에 그쳤다. 결국 세월호참사 수습 현장인 팽목 항과 진도체육관에 하루 최대 2,600여 명(4월 22일 기준)에 이르는 사람들이 아무런 통제나 표식 없이 출입하게 되었다. 희생자 수습 기간 내내 일반인 방문자나 방송 카메라가 희생 자의 존엄을 훼손하고 실종자 가족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문제가 이어졌다. 4월 18일 단원고 학부모들은 경기도교육청에 수학여행단 명단을 요청해 “OO 엄마” 또는 “OO 아빠”라고 기재한 가족 명찰을 자체적으로 제작해 패용했다.103) 진도체육관 2층에 모여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 1반부터 10반까지 반 대표를 뽑은 후 ‘네이버 밴드’ 등을 만들어 정보 공유와 소통 창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4월 20일부터는 진도군에 요청해서 받은 하늘색 조

102) 해양수산부 기획재정담당관(2016.1.27.), “범대본회의자료(20140417-0430)”(2014.4.18.), 6쪽.

103)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참고인 Z△△ 진술청취 조사결과 보고”, (2019.6.11.~17.), 8쪽.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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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끼 330개를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의 실종자 가족들이 나눠 입었고, 그중 10개에는 가족 대표

스티커를 부착했다. 한 피해자는 그렇게 조치하고 나니 열린 공간인 팽목항에서는 차이가 크

지 않았지만 진도체육관에서는 인원이 다수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가족 명찰은 범대본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 지휘 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관계자끼리 식별 조차 되지 않아 불신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피해자들이 생각해낸 자구책이 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전체 실종자 가족 명단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시행한 것이 아 니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단원고 학부모들이 가족 명찰을 패용한 뒤로 의심스러운 사람의 접근이 현저히 줄고 부모들 사이의 소통 창구가 마련되었으나, 의도치 않게 현장의 실종 자 가족이 단원고 학부모와 일반인 가족으로 나뉘었다. 범대본은 실종자 가족별 맞춤형 서비스가 실시(4월 30일)되기 전까지 일반인 승선자 가족의 명단뿐만 아니라 체류 인원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단원고 실종 학생 가족들의 요구가 현장 관리에 반영되면서 그 외의 승선자 가족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3. 피해자를 적으로 삼다

4월 20일 이른 새벽, 현장 상황을 견디다 못한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에게 호소하러 청 와대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이들의 행진은 곳곳에 배치된 경찰에 막혀 좌절되었다. 피해 자들의 분노에 찬 요구를 억누르는 일에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움 직였다. 상황 파악과 의사 결정도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확실했다. 정부는 피해자를 감시 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긴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청와대로 가는 길 4월 18일 선내 공기 주입 직후 선체가 수면 아래로 침몰하고, 추가 생존자는 구조되지 않 고 희생자가 본격적으로 수습되기 시작하자 가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160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현장이 통제 불능의 상황인데도 해양수산부 장관은 실종자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

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해수부 장관이 실종자 가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체육관과 팽목 항 방문은 자제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104) 당시 팽목항의 현장 책임자인 서해지방 해양경찰청장은 해경 지휘함인 3009함에 있는 해경청장에게 전화 연결조차 하지 못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현장에 권한을 가진 책임자가 없다고 보고, 책임자 교체와 지위 격상을 거듭 요구했으나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동안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서 따로 움직이던 가족 대표가 4월 19일 한자리에 모여 상 황을 공유하고 청와대를 항의 방문하기로 뜻을 모았다. 4월 20일 오전 1시경 팽목항에 있 던 가족들은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해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가려고 계획했다. 팽목항의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체육관으로 이동하는 동안 국무총리와 해양수산부 장관과 즉석에 서 면담이 이루어졌지만, 당시 현장 지휘부는 책임 있는 답변 대신 변명으로 일관해 가족 들을 더욱 흥분하게 했다. 그러나 팽목항에서 출발한 버스 기사들이 진도체육관에 도착 한 후 갑자기 더 갈 수 없다고 했고, 경찰 병력이 진도체육관 주변을 통제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해졌다. 가족들은 걸어서라도 청와대로 가겠다며 행진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부모들 외에도 친지 와 단원고 3학년 학생들까지 400여 명 규모였다. 가족들이 진도대교로 향해 걸어가던 중 오전 3시 40분경 국무총리 일행이 탄 차량과 마주쳤으나 국무총리가 눈을 감고 차에서 나오지 않아 약 2시간 30분 동안 대치했다. 하지만 며칠간 오열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12킬로미터를 걷는 것은 무리였다. 안산시 공무원과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관계 자들이 물과 간식류를 챙겨 만일의 사고를 대비했다. 구급 차량이 행진 중 실신한 가족을 싣고 병원으로 향하기도 했다. 행진 대열은 진도대교 인근 도로에서 대기 중이던 차량과 경찰 수백 명에 가로막혔고, 실종자 가족과 경찰 사이 대치가 이어졌다. 경찰은 가족들의 행진을 통제하기 위해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현장 상황을 보고 104) 국가정보원 감조,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동향 1부(223p)”, (2019.7.18.), 22쪽(4일째, 3보).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161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받은 경찰청장의 일제 전화105)(오전 2시 22분)에 따라 전북지방경찰청은 2시 24분경 과장급을

비상소집 했다. 오전 3시경에는 전북청 지휘부 대책 회의를 열어 전남지방경찰청과 핫라인

을 구축해 상황을 공유하고 전파할 것, 군산과 정읍 톨게이트에 경찰 2개 중대를 배치해 상 경하지 못하게 할 것, 고속도로순찰대를 비상소집 해 톨게이트에 배치할 것 등을 논의했다. 이후 3시 35분에 서해안고속도로 군산휴게소(상행선 방향)에 경찰 1중대, 신속대응팀, 채증팀 2개 조를 배치했고, 이를 군산경찰서장이 지휘하도록 했다. 4시 15분에는 호남고속도로 정읍휴게소(상행선 방향)에 경찰 1중대를 배치하고 12지구대장이 현장을 지휘하도록 했다. 경찰 간부들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진도경찰서장은 실종자 가족 행렬의 국도 이 동 전 구간(약 10킬로미터)을 순찰차로 행렬을 따라가며 현장 상황을 지휘했다. 전남지방경찰 청장은 2시 50분경부터 11개 중대 2제대를 진도체육관 앞, 굴다리, 녹진검문소, 군내 만 금사거리 등 주요 거점에 배치해 실종자 가족들의 청와대 항의 방문 행렬이 진도를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4월 20일 진도체육관에서 진도대교로 향하는 주요 거점과 인근 고 속도로 휴게소 상행선 방향에 배치된 전체 경력은 12개 중대 약 1,800여 명에 이른다. 4월

19일 22시 기준 현장 배치 인원(775명)과 비교하면 약 1,025명 증원된 수다.

실종자 가족들과 경찰의 대치는 4월 20일 오전 10시 30분경까지 이어졌다. 팽목항에서 뒤 늦게 출발한 가족들이 진도대교를 빠져나갈 다른 경로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경찰은 이 미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결국 실종자 가족 대표 A□□의 제안 대로 ‘국무총리와 실종자 가족 대표 면담’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진도체육관으로 복귀했다. 국무총리와의 간담회 가 1차로 진행되고, 오후에는 ‘해양수산부 장관-실종자 가족 대표 간 간담회’가 열렸다. 두 차례 면담하여 현장 지휘부와 가족 대표는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62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 국무총리가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해군·해경에 대한 지휘권 위임 - 해양수산부 장관과 실종자 가족 대표 간 직통전화 개설 - 매일 실종자 가족 대표가 정부 대책 회의 참석 105) 경찰 내부에서 지시자가 다수의 하급 기관장에게 동시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거나 지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106) 해양수산부 기획재정담당관(2016.1.27.), “범대본회의자료(20140417-0430)”(2014.4.20.~4.21.).
106)

4・16세월호참사

실종자 가족들의 청와대 항의 방문 시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영국 「BBC」는 경찰이 가족

들의 행진을 겹겹이 에워싸 차단하는 모습을 “기이한 광경”(eccentric scenes)이라고 두 차례 나 언급하며 보도했다.107) 그러나 정작 국내 주요 방송사들은 “청와대 항의 방문 시도…경 찰과 대치”(4월 20일, 「YTN」) 등의 자막을 달면서 당시 현장의 문제와 피해자들의 요구를 심층 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대통령과 국민에게 알리려 했던 피해자들의 시도는 좌절됐고, 관계 당국과 언론사에 대한 불신과 고립감은 한층 더 깊어 졌다.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월 20일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 항의 방문을 시도했을 때부터 대통령비서실과 정보기 관은 피해자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반정부 세력과의 연계가 우려되는 감시와 통 제의 대상으로 보았다. 행진 당일 현장에 집결한 경찰의 규모와 인원, 경찰청 차장 이인선 의 현장 발언을 볼 때, 경찰청 지휘부는 가족들의 청와대 방문 시도를 ‘불법 집회’로 간주 한 것으로 보인다. 오전 2시 50분경 실종자 가족들이 굴다리 입구 방면에서 국무총리가 탄 차량과 대치하며 면담을 요구하고 있을 때, 경찰청 차장은 “이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입 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라며 가족들을 질타하는 발언을 했다. 또 4월 21일 경찰 청장은 온라인 공간의 “유언비어 난무”를 언급하며 “기소되지 않더라도 최대한 책임을 묻 도록” 하고, “국론 분열을 노린 좌파 단체의 반정부 행위”를 엄하게 다루라고 지시했다. 4월 20일 행진은 기무사의 실종자 가족 대상 정보 수집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무사 대원이 4월 21일에 작성한 ‘충성! 부대장님 지시문건입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에 첨부한 파일에 4월 20일 이후 610부대원들의 현장 근무 위치를 “실종자 가족 대표자 회의 장소(항 대합실 앞 몽골텐트)”로 적시하고, 동정 파악 중점사항에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사항, 정부 측 대 책반과 실종자 가족 대표 간 토의 내용, 가족들 반향, 특이언동”, “반정부 선동자, 유언비어 유포자 등 색출”을 제시했다. 5월 22일 발송된 ‘충성! 세월호입니다’ 제목의 이메일에 첨부 107) 김호성·김성한·설치환, 『세월호 보도 저널리즘의 침몰 : 재난보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방송기자연합회 (2014).

163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시간 가족들의 이동 동선 경찰 조치사항

01:00 팽목항 실종자 가족, 진도체육관 도착하여 현장상황 공유 · 전경버스 3대 진도체육관 출입구 봉쇄 (※출처: 진도체육관 근무일지)

01:40 실종자 가족 300여 명 진도체육관에서 출발 대기

01:50 해양수산부 장관, 진도체육관 인근 도착하여 가족 만류

02:00 실종자 가족, 경찰 공권력 뚫고

02:18

02:30

복귀. 100여 명은 굴다리 대기 중. 남은 50 명은 해남 방면으로 이동 중.

02:40 해수부 장관, 차량 위에 올라가 설득했으나 불응. 녹진대교 방면으로 이동하여 해수 부 장관에게 “책임 있는 사람이 나와라, 인양을 해라”며 항의(약 1.4km 도보이동 중)

02:53 굴다리 입구 방면, 국무총리와 면담 요구 대치 중

03:10 선두 50명, 후미 30명 진도대교 방면으로 이동

03:30 실종자 가족 80여 명이 증가한 가운데 가다 서다를 반복 중

03:40 300여 명이 진도체육관 삼거리로 이동하여 대기 중, 굴다리에서 100여 명은 국무총 리와 대치 중

04:00 도보로 이동 중인 80여 명은 약 5km 이동하여 진도대교까지 약 8km가량 남음

06:00 실종자 가족 탑승한 버스 3대, 군내파출소 도착하여 진도체육관으로 이동

06:15 도보로 이동 중인 80여 명은 진도대교까지 3km 남음. 국무총리, 가족면담 약속 → 가족들 진도체육관 복귀 결정. 국무총리, 숙소로 이동

06:40 대사삼거리에서 실종자 가족 80여 명과 대치 중

· (02:22) 경찰청장 일제전화 · (02:55) 서해안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휴게소 경력 배치 · (02:34) 고속도로순찰대 상행선 집중배치 지시

· 진도경찰서장 현장지휘

· 광주119 교통 및 순11, 순12, 순13 교1선, 후구등 배열 교 통안전 확보

· 전남지방경찰청 현장지휘(11중 2제)

· 진도경찰서장 진도대교 경력 배치 차단 대기(녹진검문소, 충남505중대 배치)

· 군청 버스 1대(녹진치안센터) 대기

· 굴다리 2개 중대 배치 → 1개 중대 추가

· (03:00) 전북청 지휘부 대책회의

· (03:15) 녹진검문소 바리케이트 설치, 2개 중대 배치 → 1개 중대 추가

· (03:43) 우발상황 대비 목포해경 통보

· (03:50) 119구급차 3대 선두후미 배열

· (06:00) 목포해경 경비정 진도대교 도착 · 주요 거점 5개 중대 배치 : ① 굴다리 ② 녹진검문소 ③ 군내 만금사거리 ④ 진도체육관 앞 · 실종자 가족 행렬 선두에 3개 중대 배치

07:25 실사삼거리 대치 중이던 가족 80여 명 중 40여 명은 진도체육관으로 돌아가고, 현 장에 40여 명이 남아 연좌 중 · 3개 경력이 고착 관리 중(진도대교까지 약 2km) 09:10 실종자 가족이 증원되어 약 100여

164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버스 2대에 탑승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저지 당함
실종자 가족, 진도대교 방면 이동 중 “걸어서 청와대
가는데 왜 막느냐, 법적 근거가 무엇이냐”며 강력 항의
실종자 가족 150여 명은 진도체육관으로
만금사거리에서
일부
팽목항 50여 명, 진도체육관 600여 명 운집 ※ 특이동향 없음 표 4-3 실종자 가족의 청와대 항의방문 시도 당시 시간대별 상황 된 ‘140421 세월호 현장 분위기(최종)’에는 “軍 관련성 없는 단순 유가족 동정 등 파악 지시 수행에 부담감 포지”라는 구절과 “반정부 시위 확산 방지를 위해 선제적으로 종북세 활동 차단에 주력”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4월 20일 행진에 대한 국정원의 대응은 5장 참조)
명이 연좌 중 · 5개 중대 지원 중 10:30
대치중인 실종자 가족 100여 명은 대표단 10명 구성하여 국무총리 와 면담(시간 미정)하기로 결정하여 청와대 항의방문 계획 취소 → (10:20) 진도군청 버스 3대 승차 → (10:30) 진도체육관 도착 · (만금사거리) 경기3기동대 배치 12:00
대치중이던 실종자 가족, 진도체육관 복귀(12:30) 13:00

실종자 가족들의 4월 20일 도보 행진은 현장 지휘부가 가족들의 요구에 변명으로 일관하

고 심지어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촉발한 것이다. 생존구조 가능성이 없는 절망적 인 상황에서 실종자가 언제 수습될지 몰라 불안하고 초조해진 가족들 앞에서 현장 지휘 부가 정확하고 믿을 만한 응답을 했다면 4일간 지칠 대로 지친 가족들이 도로로 나서지 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현장에는 가족들에게 질타받는 한이 있더라도 자리 를 지키며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지휘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도보 행진 이후 가족 들은 현장에서 보호받기보다는 감시와 통제를 받는다고 느꼈고, 희생자 수습을 멈출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겹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갔다.

4. 대책 없는 희생자 수습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했던 4월 20일은 희생자 시신이 다수 수습되기 시 작한 날이기도 했다. 가족들은 이날 국무총리 면담을 통해 해양수산부 장관이 해군·해 경에 대한 지휘권을 위임받고 가족들과 해양수산부 장관 사이에 직통전화를 개설한다 는 등의 약속을 받아냈지만, 정작 현장에서 희생자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한 대비 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4월 20일만 해도 23명의 희생자가 수습되었지만, 시신 확인과 인계 를 위해 어떤 조치를 내릴지 결정되지 않고 실행이 지연되면서 부모, 가족, 교사 등의 정신 적 고통이 증가했다. 시신이 다른 가족에게 인계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고 실종자 가족이 나 잠수사가 요청한 다음에야 수색 및 수습 현장에 필요한 것들이 겨우 갖추어지기도 했 다. 희생자 수습 문제는 수난현장과 수습현장을 총괄·조정·지휘하는 현장책임자의 부재 와 대응조직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였다. 희생자에 대한 예의 세월호 침몰 당일부터 희생자가 수습됐고 해양경찰, 해군, 민간 어선 등은 침몰 인근 해역 에서 생존자와 희생자를 수색했다. 4월 19일부터는 잠수사들이 선체 내부에서 희생자를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165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수습할 수 있었다. 실종자 수중수색이 종료된 2014년 11월 10일까지 295명이 수습되었고, 9명의 미수습자가 남았다. 희생자 304명 중 212명은 4월 16일부터 4월 30일 사이에 수습 되었고, 5월에 76명, 6월에 5명, 7월에 1명, 10월에 1명이 수습되었다. 세월호 침몰 후 10일 동안 전체 희생자의 60% 이상을 수습했는데, 특히 4월 20일부터 4월 24일까지 5일 동안 집중적으로 희생자가 수습되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 후 바다에서 발견되어 육지로 이송된 첫 희생자는 단원고 학생 X△ △이었다. 해경 항박일지에

166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구분 인원 단원고 단원고
학생
(교사, 여행사) 업무, 여행, 이사 목적 승선자 선박직 (선원) 기타 승무원 (아르바이트생 등) 전체 승선자 476 325 15 103 15 18 생존자 172 75 4 70 15 8 희생자(미수습자) 304(9) 250(4) 11(2) 33(3)
표 4-4 세월호참사 희생자 발생 현황(2014. 11. 10. 기준) 그림 4-7 일자별 희생자 수습 추이 4. 16. 4. 17. 4. 18. 4. 19. 4. 20. 4. 21. 4. 22. 4. 23. 4. 24. 4. 25. 4. 26. 4. 27. 4. 28. 4. 29. 4. 30. 5. 1. 5. 2. 5. 3. 5. 4. 5. 5. 5. 6. 5. 7. 5. 8. 5. 9. 5. 13. 5. 14. 5. 15. 5. 17. 5. 18. 5. 19. 5. 21. 6. 5. 6. 6. 6. 8. 6. 24. 7. 18 10. 28 6 6 15 8 23 29 36 36 21 5 2 1 1 16 7 9 7 8 12 14 6 1 4 2 1 5 3 1 1 1 1 1 1 2 1 1 1 (단위: 명) (단위: 명)
따르면, 16일 오전 10시 35분 123정 구명보트가 남성 2명을 해
외 승무원
인솔자
- 10(0)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상에서 구조해 123정 본정으로 옮겼다. 그중 한 명은 10시 50분경 의식을 회복했고, 다른 한 명인 X△△은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였다. 11시경 502호 헬기에서 123정으로 구조 바스켓을 내렸고, 11시 15분에 헬기로 X△△을 목포한국병원 으로 이송했다. 헬기는 11시 48분에 목포한국병원에 도착했으며 12시 11분에 목포한국병 원 의사가 사망 판정을 내렸다. 목포해경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X△△을 비롯한 남성 2명

의 발견 시점보다 한 시간 뒤인 11시 35분에 해경 P35정이 선원 B◇◇의 시신을 발견하고 수습했다. 12시 15분 513함이 P35정으로부터 B◇◇의 시신을 인수받았고, 그 후 시신은 14시 35분에 P125정으로 옮겨졌다. 125정은 15시 30분에 팽목항에서 목포경찰에 시신을 인계했으며, 시신은 16시 33분경 목포한국병원에 도착했다.

4월 16일에 세 번째로 발견되고 이송된 희생자는 단원고 학생 K◇◇이다. 사고 해역에서 인명구조 수색 중이던 1010함 단정이 17시 24분경 K◇◇을 발견했고, 17시 30분에 3009함 에 인계했다. 3009함 의무실에서 해경 응급구조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했고, 원격의료시스 템을 통해 목포한국병원과 연결했다.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지시받은 후 해경 헬기 또는 119소방헬기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으나 결국 헬기 이송을 포기하고 P정으로 이송하기로 했다(3장 참고). 3009함 항박일지에 따르면 서해청장 B○○이 17시 44분에 서해청으로 이동 하는 데 B515 헬기를 사용했다. 18시 40분에 응급구조사 2명이 동행해 K◇◇을 P22정으 로 인계했고 19시에 다시 P112정으로 옮겼다. P112정으로 이송한 후인 19시 15분경 K◇◇ 에게 실시하고 있던 심폐소생술을 임의로 중단했다. 해경청장 김석균은 19시경 B517 헬기 로 서해청으로 이동했다. K◇◇은 19시 30분에 39정으로 인계된 후 20시 50분에 서망항 에 도착했고 22시 5분에 목포한국병원으로 이송되었다. K◇◇을 처음 발견한 이후 목포한 국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약 4시간 40분이 걸렸다. 4월 16일에 추가로 발견된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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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해경
10시경
4월 17일
25분에
희생자는 단원고 학생 L◇◇(18시 36분), 교사 K○○(23시 30분), 학생 I☆☆(23시 58분) 등 3명이다. L◇◇은 세월호 침몰 해점 인근에서
구조대가 발견했고 밤
목포한국병원에 안치됐다. K○○과 I☆☆의 시신은 각각
0시 5분과 0시
513함에 인계됐고, 513함은 오전 1시에 시신을 해경 P120정에 인계했다. P120정은 오전 2시 30분에 팽목항에 도착했고 시신은 목포중앙병원에 안치됐다.

4월 19일부터 잠수사들이 선체 내부 수색을 통해 수습한 희생자들을 해저에서 해수면까 지 부유시킨 후 해수면에 대기하고 있던 고무단정, 소형 함정 등으로 옮겼다. 해경은 해역 과 선내에서 수습한 희생자들을 513정 등 중대형 함정으로 이송한 후 인상착의, 소지품, 신체적 특징 등을 눈으로 확인하고 소형 함정으로 팽목항까지 이송했다. 4월 20일 범대본 회의에서 범대본부장(해양수산부 장관)과 해군총장이 ‘시신의 훼손 방지를 위해 헬기로 이송 하는 방안’을 협의하기도 했으나, 다음 날 회의에서 헬기 이송은 시신 이송 경로가 분산되 는 등 제한점이 있으므로 해경 함정을 이용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세월호 침몰 당일부터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음에

도 이에 대한 대비는 부실했다. 침몰 직후부터 안산시 국장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장 등은 다수의 희생자 수습에 대비해 현장에서 시신 안치, 신원확인, 가족 인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관계 기관에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선내 공 기 주입 등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논의는 정식으 로 이뤄지지 못했다. 장례 지원을 위해 현장에 내려온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현장 상황 과 범대본 회의 분위기를 보고 생존구조 가능성이 크다고 느낄 정도였다. 진도군청에 설 치된 범대본 종합상황실에서 수난 현장 정보를 실시간 파악할 수 있는 상황 관리 체계도 마련되지 않아, 관계 공무원들도 현장 브리핑을 통해 수색구조 정보를 접할 수밖에 없었 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희생자가 본격적으로 수습되기 시작하자 실종자 가족들 의 충격과 오열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중앙구조본부(해양경찰청)는 4월 17일에도 희생자 이송 방안을 마련하거나 안치 장소를 확 보하는 데 나서지 않았고 통상적인 변사 사건 처리 절차를 따르려고 했다. 당초 해경은 변 사자 검시 절차에 따라 수습된 희생자를 인근 장례식장으로 이송한 다음 그곳에서 검사 의 지휘를 받아 검안 검시 후 보호자에게 인도하려 했다. 하지만 해경은 세월호 희생자 중에는 지문으로 신원확인이 불가능해 반드시 DNA 검사를 해야 하는 미성년자가 250명 이 넘는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고, 수습된 시신이 도착했을 때 가족들이 직접 얼굴을 확 인하려고 몰려드는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다.

168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4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팽목항에 도착한 희생자 시신을 119구급차량, 인근 보건소 및 병원 구급차량으로 목포 소재 병원까지 이송했다. 이 시기 희생자는 병원에 임시안치되었 고, 거기에서 희생자 신원확인과 보호자 인도가 이뤄졌다. 당시 구조본부는 희생자 이송 시 구급차 이동통로 확보와 주변 접근 통제를 위해 경찰에 사전 안내나 협조 요청을 하지 않았다.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이 도착할 때마다 몰려들었고,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고 플 래시를 터트리며 희생자 이송 과정을 근접 촬영했다. 경찰은 실종자 가족과 기자들 사이 의 충돌을 제지하지 않았다. 시신을 들것에 싣고 운구하던 소방대원들이 몰려드는 사람 들을 막으려 했지만, 이에 반발한 「KBS」 기자가 “가족들이 보겠다고 하는데…” 운운하며 사체포를 들추었다. 그러자 가족들이 방송기자들의 카메라를 던지고 폭행 시비가 붙는 등 현장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당시 팽목항에 있었던 한 카메라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서 술했다. “시신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들 혼이 나간 얼굴로 200여 미터 떨어진 외항으로 정신없이 뛰 어갔다. … 배에서 내려진 시신이 이동식 침대로 50여 미터 밖에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로 옮겨질 때 배 앞에서 조명을 켜고 찍던 취재진들도 시신을 따라 같이 움직이며 촬영을 하고 있었다. 시신과의 거 리가 불과 1미터도 되지 않는 상태였다. … 한 번에 5구 정도의 시신이 들어왔기에 여러 대의 앰뷸런 스 앞에서 동시에 확인 작업이 벌어졌다. … 너무나도 엄숙하고 조심스러운 자리임에도 취재진들은 잔인함을 드러냈다. 시신의 얼굴을 찍겠다며 너도나도 사다리 위로 올라간 것이다. … 유족들이 쫓아 내면 다른 앰뷸런스로 가서 촬영하고, 멀리서 바라보다 가족들이 오열하며 주저앉으면 다시 그쪽으 로 뛰어갔다.”108)

4월 17일 실종자 가족들은 팽목항에 시신안치소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했고, 4월 19일에 ‘임시안치소’가 팽목항 행정선 선착장 쪽에 설치되었다. 임시안치소는 몽골텐트 여러 동을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내부에는 시신을 안치할 수 있도록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4월 18일 오후 팽목항에서 첫 관계 기관 대책 회의가 열렸고, “임시안치소 주변 교통 통제 및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169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안치소 내 질서유지”를 위해 팽목항 일대 100미터 구간에 폴리스라인을 설치했다.109) 이후 108) 앞의 자료, 74~77쪽. 109) 해양수산부 기획재정담당관(2016.1.27.), “범대본회의자료(20140417-0430)”(2014.4.18.).

구조본부 3009함 현장 상황실에서 희생자가 항구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오면, 경찰은 도 착 시간을 예상해 항구부터 임시안치소까지 병력을 배치해 통제했다. 경찰 병력이 일렬로 대기하기 시작하면 기자들도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폴리스라인만으로는 무분별한 취재기자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기자들은 실종자 가족인 척하며 임시안치소에 출입했고, 안치소 주변에서 피해자들의 울음소리를 녹음하 는 등 비윤리적인 취재를 이어갔다. 4월 21일에는 시신을 촬영한 화면이 방송으로 나가기

도 했다. 4월 21일부터는 소형 함정이 접안하는 선착장에 대형 텐트를 설치해 임시안치소 까지 이동하는 동안 희생자 시신 노출을 최소화하도록 했다. 선착장 대형 텐트가 설치된 이후 팽목항에 도착한 희생자는 텐트 안으로 옮겨진 후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로 팽목항 임시안치소까지 이송됐다.

4월 20일부터 희생자가 하루 20명 이상 수습되었다. 한꺼번에 다수 희생자가 이송되면서

병원 임시안치 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일부 병원은 시신 안치 시설을 늘리기도 했 지만 일부 병원에서는 희생자가 구급차에 계속 실려 있거나 방치되기도 했다. 팽목항 임 시안치소에 냉동 컨테이너가 설치되기 전에는 희생자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드라이아

이스를 사용했다. 그러나 드라이아이스 사용 방법을 잘 알지 못하는 자원봉사자가 드라 이아이스를 비닐에 싸지 않은 상태로 시신에 올려두어 시신이 변색되는 일도 있었다. 가족 품으로 수습된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들에게 인도하는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해경은 희생자를 수습한 후 신체적 특징, 소지품 등을 확인했으나 그 정보가 팽목항에 있던 실종 자 가족들에게 공유된 것은 4월 18일부터였다. 일부 실종자 가족은 4월 18일 팽목항에 접 안한 해경 경비정에 승선해 눈에 보이는 희생자

170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특징을 팽목항에 있는 가족들에게 카카 오톡으로 알리기도 했다. 이후 가족들은 해경에게 수습된 희생자의 신장, 상하의 의류 상 표, 신발, 머리 모양, 신체 특징, 인양 장소 등을 직접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4월 19일에 팽목항 임시안치소가 설치된 이후에는 희생자가 팽목항에 도착하면 해경이

신체 특징, 소지품 등을 육안으로 1차 확인했다. 그 내용은 보건복지부 직원 등 현장 관계

자를 통해 실종자 가족에게 전달됐다. 한 피해자는 그 과정을 이렇게 진술했다.

“참사 직후에는 팽목으로 시신이 오기만 하면 모든 가족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하려고 몰려가서 일일이 육안으로 확인했었는데 2~3일이 지나고 나서는 일단 시신이 왔다고 하면 가족들이 시신이 올 라오는 곳으로 모였고, 그러고 나면 정부 쪽에서 스피커를 통해 시신에 대해 “남학생, 여학생, 일반인 남 자, 일반인 여자” 등등을 구별하여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남학생 시신’이라고 하면 아들을 가진 부모들 이 가서 확인하고 ‘여학생 시신’이라고 하면 딸을 가진 부모들이 가서 확인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110)

실종자 가족들은 희생자 수습 정보가 언제 전달될지 몰라 자리를 뜰 수 없었고, 스피커에 서 소식이 나올 때마다 혹시나 해 몰려가기도 했다. 가족들은 새벽에 방송이 나올까 봐 잠도 교대로 자면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공지를 제때 듣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방송되는 내용을 게시판에 붙여달라고 요구했다. 추후 해경은 수 습된 희생자의 특징을 공지문 형태로 붙여 놓았다. 진도체육관에서는 희생자 신원 정보 를 초기에는 마이크를 이용해 음성으로 전달하다가, 이후 전면 스크린으로 정보를 송출 하거나 출력물을 공고 형태로 게시했다. 이에 대해 한 피해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시신을 발견했을 때 신원이 확실하다고 확인이 된 경우에는 “OOO 보호자님 앞으로 나와 주세요” 라고 불렀습니다. 신원이 확실치 않을 때는 말로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었습니다. “OO 모자를 쓰고 있 음’ 이런 사항을 얘기하면 자기 아이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막 뛰어나가고 했습니다. 일단 이름이든 인상착의든 불리게 되면 그게 바로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부모가 나가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엉 엉 울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인상착의를 종이로 붙이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하지 않으며 언젠가부터 체육관 입구 앞쪽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OO대 추정, OO바지에 OO신발’ 이런 식으로 붙이기 시작 했습니다.”111)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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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110)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점검과, “참고인 진술조서(L○○)”, (2016.9.14.), 320~321쪽. 111)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점검과, “신청인 진술조서(M○○)”, (2016.9.14.), 118~119쪽.

현장에서 희생자 관련 공지를 듣거나 보고서 자신의 가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실종자 가족들은 팽목항 임시안치소로 와서 직접 확인했다. 희생자는 가족의 확인 후 목포에 있 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검안이나 DNA 채취 등 신원확인과 인도 절차를 거쳤다. 이 시기 팽 목항 임시안치소는 희생자를 임시안치하는 곳이라기보다 실종자 가족이 육안 확인을 하 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4월 18일 새벽 희생자 시신이 다른 가족에게 잘못 인계된 사례가 확인됐다. 이후 범대본 은 반드시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도록 결정했다. 이를 위해 4월 19일부터 실종 자 가족의 동의를 받아 DNA를 채취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눈으로 희생자를 명확히 알아 볼 수 있는데도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즉시 인도받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표출 했다. 이에 4월 19일 범대본은 해경의 1차 육안 확인과 실종자 가족의 확인까지 거치면 시 신을 가인도 하도록 했다. ‘DNA 검증 후’ 희생자 인도에서 ‘DNA 검사 후’ 인도하는 것으로 절차를 간소화한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기록에 따르면 희생자 인도 오류 사례는 5 건이다. 그중 4건은 육안 확인 과정에서 희생자가 잘못 특정된 사례이고, 육안 확인 결과와 DNA 검사 결과가 달랐음에도

172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세월호 침몰 당일부터 4월 21일까지 목포 소재 병원이나 팽목항에서 파견 근무를 나갔던 그림 4-8 진도실내체육관과 팽목항에 게시된 실종자 수색 및 수습 정보112) 112) “<세월호참사> 사망자 수습 대비... 국과수, 냉동 컨테이너 지원”, 연합뉴스 (2014.4.21.).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잘못된 정보가 실종자 가족에게 전달된 사례도 1건 있었다.

단원고 교사들이 해경과 학부모에게 요청받아 학생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 참여 했다. 해상사고로 인한 사망자(변사체)의 신원확인은 해양경찰의 임무이지만 희생 학생들을 빨리 확인하려는 의도로 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교사들은 단원고 학생이라 추 정되는 희생자 사진을 전송받아 신원을 확인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얼굴을 잘 아는 당시 2 학년 담임 교사들은 인솔자로 세월호에 함께 탑승했으므로, 신원확인 요청을 받은 교사 들은 모든 실종 학생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결국 교사들은 해경처럼 학생들의 사진과 대 조해 확인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한 교사는 학생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확인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고 진술했다. 신원확인에 참여한 교사들은 정신적 고 통을 호소하며 안산시 공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육안 확인 후 희생자가 가족 에게 잘못 인도되는 사례가 거듭되자, 범대본 회의에서 단원고 교사를 희생자 신원확인 작업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4월 23일 오전 9시부터 팽목항 임시안치소에서 냉동 컨테이너를 사용할 수 있었다. 냉동 컨테이너 내부에는 선반이 있어 시신 20구를 안치할 수 있었다. 임시안치소에는 냉동 컨 테이너 외에도 CSI버스(이동식 현장 증거분석실), 검안실, 국과수 사무실, 해양경찰 사무실, 검사 사무실, 그리고 시신을 공개하는 장소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희생자 신원확인의 모든 절차를 현장에서 실시할 수 있었고, 범대본은 ‘임시안치소’ 대신 ‘신원확인소’로 명칭을 변 경했다. 그러나 팽목항에 냉동 컨테이너를 구비한 신원확인소가 운영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희생자 128명이 수습된 이후였다. 팽목항 신원확인소는 보건복지부 총괄하에 해경, 국과수, 소방서, 진도군, 전남도, 교육청, 안산시, 국방부, 전남도경, 장례지도사, 상조회사 등 11개 기관이 협업하는 공간이었다. 이 곳에서 해상에서 인도된 시신의 안치, 검안·검시, DNA 채취, 결과 판정, 검안서 작성, 검사 지휘 후 보호자 인도 등 모든 절차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희생자가 신원확인소에 도착 하면 검사, 해경, 경찰, 국과수 법의관이 검안하고 DNA와 지문을 채취했다. 그 후 해경이 희생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소지품 등 눈으로 확인한 사항을 기재한 후 방송이나 게시물 을 통해 알리면, 그 희생자가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신원확인소를 방문해 직 접 확인했다. 희생자의 신원은 DNA 검사를 통해 확정됐다. 희생자 신원 확정 후에는 가입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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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관 등 준비를 한 후 보호자에게 인도했다.

세월호참사 당시에는 재난 희생자 수습과 가족 인도에 대한 표준화된 지침이 없었다. 현 장 지휘부는 희생자 수습 체계를 언제 어떻게 전환해야 할지 판단하고 미리 대비하지 못 했다.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많은 희생자가 동시에 수습되자 시신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방치되었으며, 신원확인 작업에 교사들을 투입했던 것이나 육안 식별로 인한 신원확인 오 류 등 큰 혼란과 부적절한 조치가 이어졌다. 4월 23일이 되어서야 희생자의 육상 이송, 냉 동 컨테이너 안치, 신원확인과 결과 판정, 시신 가족 인도 같은 절차가 일괄적으로 이루어 지기 시작했다. 실종자 수습이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도 정부의 참사 피해 대응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 는 실종자 수색의 원칙과 방식을 가족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피해자들의 요구 를 들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피해자 핑계를 대고 피해자 뒤에 숨었다. 피해자들이 강하게 요구하고 제안한 뒤에야 겨우 조치에 나섰고, 현장의 갈등을 완화하고 중재하는 데 도 소극적이었다. 가족들은 기다림 속에 지쳐갔고, 진도 주민들의 상처도 깊어졌다. 피해자 들과 조력자들 모두 현재진행형의 참사 한가운데에서 온당히 보호받고 지원받지 못했다. 바지선에 오르다 세월호 침몰 이후 구조자 숫자와 명단이 정확하지 않고 기관별로 다른 정보를 제각각 발 표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각 방송사는 수중수색을 위한 선결 조치조차 지연되는 상 황임에도 “지상 최대의 구조 작전”(「YTN」) 운운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고, 현장 브리핑은 자세하지 않고 부정확하여 실종자 가족들에게 지탄받았다. 게다가 수색구조 방안에 대한 책임 있는 판단과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각종 의혹과 의구심이 확산되었다. 브리핑을

5. 기다릴수록 커지는 고통

174 제4장 불신과
아수라장
무책임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접하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은 직접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실종자 가족 대상 수색구조 브리핑 문제는 4월 24일에 열린 ‘팽목항 수색구조 지휘부 간 담회’를 계기로 일부 해소되었다. 이날 오후 3시경 실종자 가족들은 팽목항 대합실에 모여 있던 해양수산부 장관, 해양경찰청장, 해양경찰청 차장 등 현장 지휘부를 가족대책본부 천막으로 끌어냈다. 정확한 수색구조 상황을 알고 싶었던 200여 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참여해 오후 17시경부터 다음 날 오전 1시 30분경까지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는 범대 본부장이 실종자 가족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수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113)

- 4월 16일~4월 24일까지 수색구조 진행 상황 및 향후 계획 공유 - 실종자 가족의 바지선 방문 허용 - 실종자 가족의 해경 TRS(주파수공용무선통신시스템) 실시간 청취 허용 - 하루 2회 수색구조 현장 브리핑 실시 - 다이빙벨 투입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실종자 가족이 바지선을 방문하고 수색구조 상황을 TRS로 실시간 청취하게 되면서 현장 브리핑 문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구조본부는 더는 수색구조 상황을 은폐하거나 동원 세 력의 규모와 활동을 과장해서 발표할 수 없게 되었고, 가족들도 현장 방문과 TRS 청취를 통해 수중수색 작업의 위험성과 특수성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수색구조 브리핑 문제가 해소되자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첫째는 바지선을 방문한 실종 자 가족 일부가 수색 구역 변경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본인의 가족이 있으 리라 추정되는 구역에 대한 수색 요청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졌지만, 시신 유 실 가능성이 커지면서 불안해진 가족 일부가 그러한 불문율을 깨고 수색 구역에 대한 구 체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가 현장에서 원칙 없이 수용되고, 실제로 변경된 수색 구역에서 실종자가 수습되면서 더 많은 가족들이 바지선에 올라 수색 구역 변경을 113) 전남청112종합상황실, “여객선(세월호) 관련, 상황보고(49)”, (2014.4.24.23:40); 전남청112종합상황실, “여객선(세월호) 관련, 상황보고(53)”, (2014.4.25.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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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요청하거나 특정 구역의 수색 세력을 변경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급기야 현장에는 ‘부 모가 바지선에 올라가 목소리를 높여야 아이가 수습된다’는 인식이 생겼고, 팽목항과 진 도체육관에서 대기하던 가족들까지 바지선에 오르게 되었다.114) 이는 현장 책임자가 수색 구조의 원칙과 방식을 실종자 가족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지 않아 생긴 혼선 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족을 빨리 찾고 싶은 이들에게 각 구역을 수색하는 순서와 그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했어야 한다. 둘째는 수색구조 작전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TRS를 실시간 청취하게 되면서 실종자 가족들이 수난 현장 활동에 실시간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수색 작업 기간이 길어지고

시신의 유실, 부패, 훼손에 대한 가족들의 불안이 가중되면서 기상이나 유속이 괜찮아 보

이는데도 작업 종료 소식이 들려오면 가족 일부가 곧장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건에서 피해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전문적 판단이 중요한 수중수색 활동 에 피해자의 의사결정 참여 범위 기준을 설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장 지휘부 가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실종자 가족의 엇갈리는 요구들을 원칙 없이 수용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일반인 실종자 가 족들도 진도체육관 상황실을 항의 방문하고 범대본부장을 면담하여 일반인 객실 수색의 문제점을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그로 인해 실종자 가족 사이의 갈등도 커졌다. 바지선 방문 규모가 커지면서 민간 잠수사 수색 작업의 안전과 효율을 저해하는 일도 일 어났다. 바지선은 민·관·군 합동 수색구조 잠수사들의 작업 현장이고, 민간 잠수사에게 는 숙식하고 휴식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해경과 해군 소속 잠수사는 근무 시간 외에는 각 지휘함정으로 복귀해 숙식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민간 잠수사는 바지선 위에 설치한 컨테 이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구조본부에서 바지선 승선 인원 제한, 출입자 명부 관리, 안전사고 예방 조치 등을 하지 않아 잠수사들의 작업 환경이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바지선에 오르는 실종자 가족들은 수심 40미터 아래 가족이 있다는 생각에

176 제4장 불신과
아수라장
무책임의
114)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8) 참사현장 실종자 가족지원에 대한 조사보고”, (1차 대인조사-2019.6.28., 2차 대인조사-2019.7.23., 전화조사-2019.10.11.), 10~11쪽.

오열하다 쓰러지기도 했다. 바지선에 상주하며 실시간 유속을 측정하던 한국해양과학기

술원 연구원들도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전사고를 막으려면 잠수사들이 최상의 심신 상태를 유지해야 했지만, 바지선 방문 인원이 많아 제 대로 쉴 수 없거나 잠수사용 도시락이 부족하게 된 일도 있었다. 수색 실적이 저조할 때는 잠수사들이 큰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2014년 5월 27일부터 2014년 11월 7일까지 수색 환경 악화와 수색 활동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구성된 「수색 구조 지원을 위한 장비 기술 연구 TF」는 실종자 가족들의 수색 요구 를 전달하는 창구가 되었다. 일부 전문가들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새로운 장비나 수색 방 법을 소개하면, 회의 안건에 없던 기술적 논의가 시작되고 새 장비를 투입하자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회의를 주재하는 해양경찰청장은 신형 장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음 에도 가족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고,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차마 가족들 앞에서 그 장비의 효과에 대한 냉정한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TF 구성원이었던 한국해양 과학기술원 관계자는 TF가 수색구조 지휘부의 의사 결정을 지원하기보다 실종자 가족들 의 의문, 불만, 울분을 해소하는 통로로 운영되었다고 진술했다. 수색 계획을 수립하고 이 를 실행하는 주체가 실종자 가족 사이의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면서 설득하는 역할을 맡 아야 했으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식도, 의지도 없었다. 격실 붕괴가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5월 4일 팽목항을 방문한 대통령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수습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에서 그 누구도 ‘수중수색 중단’을 언급할 수 없었다.115) 책임이 있는 현장 지휘부가 책임 있게 행동하지 못하면서 가족들의 고통이 더욱 길어졌다.

실종자 가족 지원의 허점 희생자 수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 머무르고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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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있는 실종자 가족을 지 원하고 보호하는 일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담당 공무원과 자원봉사자들이 노력했 음에도 실종자 가족에 대한 태도와 조치에는 빈틈이 많았다. 115)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참고인(N○○·O○○·P○○) 속기록”, (2021.11.10.).

실종자 가족을 지원하려면 현장에 모인 가족의 숫자와 필요사항 등을 확인해야 하지만 희 생자 수습 종료 전까지 현장에 체류한 전체 실종자 가족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

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습 현장 체류 가족의 명단을 파악하려 나선 것은 안산시 공무원 들이었다. 안산시는 참사 직후 진도체육관에 설치한 상황실을 팽목항으로 옮긴 후 실종자 가족대책본부와 천막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체류 가족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범대본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단원고 실종자 가족들이 요구해 실시한 것이었다. 일반인 실종자 가족들은 이 같은 조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종자 가족을 파악한다는 곳에 가 보았더니 안산 단원고 학부모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모든 실종자 가족 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조사와 집계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구조와 수색 결과에 따라 실종자와 희생자 가족의 상태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피해자 지 원과 보호를 위한 공간 관리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4월 16일 생존자들의 안정을 위해 지정한 임시보호소는 승선자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또 진도 체육관에서 수색구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던 실종자 가족이 팽목항으로 이동하면서 피해 자 현장 체류 공간이 이원화되었다. 생존 여부, 부상 정도, 실종, 사망 등 피해 정도에 따라 당사자와 그 가족의 의사와 요구는 매우 달랐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등 거점별 환경과 특성을 반영하여 피해자를 보호하는 조치를 내렸어야 했다. 또 수습 기간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서 가족별 공간을 설치하는 등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장 지휘부는 공간 문제 에 대한 가족 간 이견을 조정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피해자와 지역 주민 사이 갈등으로 비 화할 때까지 방치했다.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고 조정할 수 있는 소통 창구는 주로 실종자 가족 대표와 범대본부장 사이에 부분적으로만 열리다가 4월 27일 ‘실종자 가족 대상 설명 회’가 정례화되면서 비로소 체계를 갖추었다. 참사 초기 현장에 배치된 경찰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경찰에게 더 중 요했던 것은 정부 주요 인사가 현장에 방문했을 때 어떻게 의전하고 돌발상황에 잘 대처하는 가였다. 가령 임회파출소장은 현장에 온 주요 인사가 기자들에 에워싸이거나 피해자들과 충 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복경찰을 배치하거나 이동통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희생자 수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실종자 가족 자살 예방’을 위한 조치가 강화된 것도 「특별법」 제정

178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국면에서(5장 참조)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는 악재를 막기 위해서였다. 자살을 예방한다는 명목

으로 실시한 피해자 동향 파악은 피해자가 아니라 정부를 보호하려는 조치였던 셈이다. 실제 의도가 무엇이든 실종자 가족의 심신 상태를 살펴야 했다. 실종 학생 어머니가 해안 가에서 자살하겠다는 소동을 두 차례 겪은 경찰은 현장에 여경 제대를 24시간 배치하고 해안선을 따라 경계근무를 서도록 했다. 4월 18일부터 진도경찰서에 설치한 상황실 운영 주체를 전남지방경찰청으로 격상하고, 전남지방청장이 팽목항에 상주하며 현장을 지휘 했다. 경찰청에서도 치안정감을 3일씩 교대로 현장에 파견하고, 경찰청장이 직접 작성한 임무수행 지침을 반복적으로 교육했다. 전남지방경찰청 경비교통계장에 따르면, 실종자 가족들이 경찰에 강한 반감이 있었으므로 경찰은 가족과 거리를 두고 활동할 수밖에 없 었다. 예를 들어 저녁마다 단원고 희생 학생 형제자매들이 선착장 돌무더기에 앉아 촛불 을 켜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경찰은 그들의 감정 상태를 고려해 지켜볼 뿐이었다. 진도경찰서는 4월 21일 팽목항 선착장 접근을 통제하기 위해 안전띠를 설치했다. 4월 24 일부터는 진도체육관과 진도한국병원, 팽목항, 서망항 주변에서 ‘범죄 예방과 안전사고 예 방’ 목적으로 취약 시간대(0~4시, 14~17시) 순찰을 강화했다. 곧이어 해안가 주변 실종자를 수 색하며 도보 순찰 활동을 시작했고(4월 26일), 실종자 가족별 전담 인력을 배치하여 밀착 지 원을 시작했다(4월 30일). 수중수색이 장기화되면서 수습된 시신의 부패 정도가 심각해 신 원확인 직후 희생자 가족들이 자주 실신했고,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의 유실 가능성과 부 패된 시신을 마주하게 될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심리적 위기 상황에 놓였다. 누구 든 세월호참사가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진도군민의 희생 세월호참사 후 팽목항 이용이 제한되면서 조도면 섬 주민들은 4월 19일부터 서망항 쪽으로 150미터 지점에 있는 적출항을 임시기항지로 써야 했다. 팽목항과 달리 임시기항지 주변은 수 심이 얕아 대형 여객선이 접안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선박 운항 횟수가 7~8회에서 2~3회로 줄었고 육지로 나간 조도면 주민들이 배편이 없어 당일 귀가하지 못하는 불편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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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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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수습 기간 동안 다수의 진도군민은 생업을 뒤로하고 힘을 보탰다. 수색구조 및 방제작업,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한 진도군민은 1만 4,655명(2,064개 단체)이고, 이는 진도군 인구 3만

2,977명의 47%에 이른다(2014년 5월 31일 기준). 사고 해역 인근 주민들은 생존자들을 더 구하 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가졌고, 해상수색이나 어업 활동 중 시신이나 유류품을 수습하며 심리적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시신을 운구하는 헬기 소리를 들어야 했던 진도군민 전체가 충격과 비탄에 빠졌다. 세월호참사 직후 진도군의 지역경제는 위축됐다. 전년(2013) 대비 관광객 수는 80% 감소했 고(11만 2,000여 명 → 2만 3,000여 명), 관광업 수입도 10%(232억 원 → 29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수 난 현장 일대가 통제되고 유류 오염 피해를 입으면서 진도군의 수산물 생산량이 떨어졌 을 뿐 아니라 청정해역이라는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었다. 진도군의 피해는 인접 시·군(목포, 신안, 완도, 해남, 장흥, 강진)으로 확대되었고, 이들 지역의 관광 서비스 업체 중 전년 대비 매출이

50% 감소한 곳이 55.8%에 달했다. 수습이 장기화되고 일상생활과 생업에 미치는 영향이 누적되면서 조도면 주민들의 인내

심에도 한계가 왔다. 5월 9일 조도면 이장단 임원 10명은 팽목항 이용에 지장을 주는 각 종 텐트를 철거하고 차량을 옮겨달라고 요구했고, 5월 10일까지 조치하지 않으면 5월 12 일부터 육상 시위와 어선 시위 등 집단행동에 나서겠다고 진도군에 통보했다. 5월 10일 오 전 팽목항 재개항을 요구하는 조도면 주민의 1인 시위가 있었고, 당일 오후에는 조도면 이장단 단장이 진도군청에 있는 범대본과 전라남도 상황실을 항의 방문했다. 진도군은 범대본이 나서서 실종자 가족 대표에게 조도면 주민들이 입고 있는 생활 불편 과 피해 사항을 전달하고 5월 10일에 범대본·진도군·안산시가 함께 가족 대표를 면담하 자고 건의했다.

180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그때까지 범대본이 도서민들의 해상교통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취한 조치 는 임시기항지를 지정(4월 19일)하고 인근 주민들의 수송대책으로 행정선 아리랑호를 투입(5 월 11일 기준 207명 이용)한 것뿐이었다. 이는 같은 시기 실종자 가족들(5월 11일 기준 실종자 29명)의 교 통편의를 위해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사이를 셔틀버스 8대가 20분 간격으로 하루 총 54 회씩 운행했던 것에 비해 미흡한 조치였다. 이후 조도면 주민의 건의(5월 13일)에 따라 조도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와 진도(서망 쉬미항) 사이 운항 선박을 2척(화물차도선 행정선) 신규 투입(5월 14일)하면서 기존에 팽 목항을 이용했을 때의 운항 횟수를 회복했다. 5월 14일에는 임시기항지인 쉬미항에 주민 편의를 위해 임시대합실을 마련하고 안내 현수막을 게시했다.

5월 15일이 되자 희생자 284명이 수습되고 실종자 20명이 남았다. 5월 16일 이후 수색 실 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팽목항 이용 제한 조치를 재검토해볼 만한 상황이 되었다. 그 러나 조도면 주민들의 생활 불편 가중, 진도 지역 분위기 침체로 인한 관광객 감소와 소비 위축, 유류오염 피해와 지역 수산물 이미지 저하 등에 대해 주민들이 반복해서 대책을 요 구하고 범대본을 항의 방문한 후에야 팽목항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참사 초기 외지인이 과도하게 방문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속도로 전광판에 게시한 ‘팽목항 방문 자제’ 문구조 차 5월 29일 요식업 진도지부의 항의를 받고서야 삭제되었다. 전반적으로 사고수습 지역 피해 최소화를 위한 범대본의 대책과 조치는 미흡하고 소극적 이었다. 당시 범대본의 현장 관리 방침은 “가족이 원하지 않을 경우 기존 시설을 유지”한 다는 것이었다.116) 지역 주민들은 팽목항 재개항 여부를 실종자 가족들의 의사와 결단에 달린 사안으로 인식했고, 이는 지역 주민과 실종자 가족 사이에 갈등과 불신이 싹트는 계 기가 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 유실에 대한 극심한 불안감과 팽목항 재개항에 앞선 각종 시설의 이동, 축소, 재배치가 희생자 수습 종료의 수순일 거라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 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실종자 가족 대표(Q○○)에 따르면, 진도경찰서 관계자에게 인근 섬 주민의 상황을 전 해 들은 후 가족들의 의견만 고집할 수 없다고 느껴 팽목항 재개항을 수용했다. 이러한 소 통과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가족 대표와 관계자가 수습 현장에서 형성해온 신뢰 덕분이 었다. 관계자는 지역 주민들이 수습 기간에 겪어온 불편과 피해를 가족 대표에게 들려주 었는데, 그때까지 실종자 가족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해준 공무원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참사 초기부터 실종자 가족들과 소통하며 신뢰를 쌓아온 진도경찰서 관계자는 2014년 116) 해양수산부 기획총괄과, “[붙임] 중수본이 범대본으로 보고한 상황보고서(11보~443보)”, (2019.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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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팽목항은 5월 30일에 재개항했다. 팽목과 진도의 아수라장은 정부가 만든 것이다. 그곳이 아수라장이 된 것은 사람들이 죽 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월호에 탔다가 산 사람, 죽은 사람, 다친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 족 모두가 세월호참사의 피해자다. 국가가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함 으로써 참사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 고통이 심화되었다. 피해자의 고통을 직시하고, 피해자 의 권리를 보장하고, 참사 현장을 수습하려는 책임 있는 태도는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 관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구조와 수색 결정은 재난 대응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보고하기 편한 방 식으로 내려졌다. 어떤 방식의 수색 작업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정보를 정확하게 공 유하지 않았고, 수색 현장 정보를 공개할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과 갈등에도 대비하지 못 했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육지로 옮겨와서 가족에게 인계하는 과정은 체 계가 없고 때론 무례했다. 통제되지 않은 현장에서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은 언론의 몰 상식적인 취재에 노출됐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이들에게 정부와 언 론은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켰다. 무엇보다 정부는 팽목항과 진도에서 피해자들의 권리 를 존중하고 이를 위해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감시와 통제의 대상, 싸워야 할 적 으로 상정하고 참사 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방치했다. 2014년 4월 20일 새벽, 국무총리가

182 제4장 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있던 참사에 대한 정부의 인식 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부는 4월 16일 이래 실종자 가족들이 이 세상의 시간이 아닌 시 6. 참사 수습은 왜 실패했는가 117)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김현미 위원 질의서) 140709_경찰청_진도대교 대치”, 1쪽.
탄 차량과 대치하던 가족들을 향해 경찰이 “지금 시간 이 몇 시입니까?”117)라며 꾸짖듯 말했을 때 당시 벌어지고

간을 겪고 있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평상시의 감각을 잃고 수백 킬로미터를 걸

어서라도 청와대로 가서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려는 이들에게 합법과 불법으로 나뉘는 시

간의 잣대를 들이밀었다. 거대한 비극을 대면하고 고통에 귀 기울일 의향이 없는 권력에 길거리로 나선 피해자들은 그저 일상의 시간 질서를 파괴하는 무리로 보였을 뿐이다. 팽 목항과 진도에서 시간이 어떻게 멈추고 흘렀는지 알지 못했던 것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정 부였다. 경찰이 진도대교 인근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막아섰을 때 가족들은 청와대가 있 는 서울로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참사의 현장은 진도에서 서울과 안산과 그 밖의 모든 곳으로 확대됐다. 전국 곳곳이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으로 변했다. 팽목과 진도에서 정부는 참사에 대응하는 책임을 방기했고,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했고, 더 나아 가 피해자들과 싸우려 했다. 2014년 4월 팽목항과 진도에서 정부가 세월호참사 피해자를 대했던 태도와 행동은 향후 정부가 전국에서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활동을 대하는 기본 틀로 작동했다. 팽목항과 진도의 혼란상은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 16일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참사 에 대응하는 컨트롤타워는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재난 발생 시 구성하도록 되어 있 는 법정 위기관리기구인 중앙구조본부, 중수본, 중대본은 유기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청 와대는 이 기구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현장상황 정보는 생존구조 및 수중수 색 전환을 위한 실질적 조치가 아니라 대통령 의전과 현장여론 유화대책 마련을 위해 활 용되었다. 중앙구조본부는 “신속한 잠수사 투입으로 先생사 확인, 後구조 활동”이라는 대 통령 지시에 따라 그때까지 검토하던 사항(선체 예인이나 인양, 선체 고정을 위한 크레인 활용 등) 대신 선내 공기 주입에 몰두했다. 중수본부장은 참사 당일 ‘구조 활동 독려’를 위해 구조 임무에 써 야 할 헬기를 타고 현장을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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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방문했다. 그러면서도 해경청장에게 고작 ‘최선을 다하라’는 추 상적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법정 위기관리기구가 초동대처에 실패하고 실종자 300여 명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상황 에서 급하게 설치된 비법정 기구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118)국무총리실은 4월 17일

세월호 사고수습과 사후대책을 총괄할 ‘세월호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하며 국무총리가 “부

처간 역할 분담과 조정을 진두지휘”119)한다고 밝혔지만 한 차례 회의 후 더이상 가동되지

않았고, 수색구조·현장수습·사후대책의 총괄조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 날 구성된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범부처 사고대책본부’(범대본)도 마찬가지였다. 4월 20일 새벽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 항의방문을 시도할 때까지도 범대본 본부장이 국무총리인지 해 수부장관인지 불분명한 상태였다. 범대본 회의에서는 현장 정보를 근거로 사고수습에 필 요한 판단과 결정이 이뤄지기보다 대통령 지시 사항에 대한 점검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 다. 법정 기구든 비법정 기구든 정부가 2014년 4월 19일에 발표한 “범정부 대응 체계”는 그 저 문서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4월 22일이 되어서야 해양수산부 장관이 하루 2회 범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전날 결정 사항에 대한 이행점검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범대본이 설치된 진도 군청과 현장 각 거점(팽목항, 진도체육관)을 잇는 지휘소통체계가 확립되지 않았다. 4월 29일부터 진도체육관 관계기관 대책회의 주재자가 서해청 정보수사과장에서 해양수산부 국장으로 격상되고 범대본 회의 결과 요약본이 전달되면서 이행점검체계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장 공무원들은 2박 3일 단기교대 근무를 하면서 담당업무조차 숙지하지 못했고, 범대본 부장의 지시보다 소속 장·차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5월 1일부터는 세월호 수습 관계차 관회의가 개최되면서 가족별로 전담팀(3인 1조)을 구성하고, 가족의 요구사항을 파악하여 부 처별 소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원체계를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담팀은 유가족 지원

118) 대통령비서실은 정부의 신속한 사고수습 지원을 위해 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를 개최(4월 16일 21시 50분, 목포 서해청)하기로 하고, “현지에 중앙정부 사고수습 지원창구를 마련”하고, “일사불란한 지휘(안행부)”를 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4월 17일 국정기획수석실에서 작성한 「세월호 침몰사고 사고수습 및 후속조치 관련 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성격을 가진 대책본부가 동시에 설치·가동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사고수습 및 후속조치 관련 보고(2014.4.17., 국정기획수석) ○ 중대본(안행부)과 부처 사고수습본부 연계, 중앙-지자체-현장 간 사고수습 연계 등을 위해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대통령기록관 대통령기록물생산지원단, “(140416)사고수습후속조치1”, (2020.8.4.); 대통령기록관, 대통령기록물생산지원단, “(140417)사고수습후속조치2”, (2020.8.4.), 1쪽 119) 감사원 행정안전감사국, “[보도자료] 정부, 17일 ‘세월호’ 사고수습과 사후대책을 총괄할 대책본부 구성”, (2014.4.17.), 제1과 7책 2권,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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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세월호사고대책본부’* 가동(4.17) *유관부처 장관, 해경청장, 방재청장, 해군참모총장, 전남지사 등으로 구성, 매일 개최 예정 ○ 오늘부터 진도군청 내 중앙부처 현장대책본부도 설치 운영(4.17, 각 부처 국장급 구성)

4・16세월호참사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제4장 종합보고서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

뿐 아니라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5장 참조) 청와대는 이 모든 과정을 관장하였음에도, 초동조치, 현장수습, 사후대책을 통합하고 연 계하여 지휘하지 못했다. 그로 인한 피해 확산에도 책임 있게 대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 와대는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고, 참사의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유가족을 괴롭히는 일에 나섰다. 청와대의 여론전, 기록조작, 진상규명 방해, 유가족 사찰 등은 1차적으로 청와대 가 4월 16일 당일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 시 작됐고, 2차적으로는 4월 16일 이후에도 위기관리기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 대 한 실종자 가족들의 항의를 무마하고 억압하기 위해 강화됐다. 참사 초기 청와대는 피해 자들이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수준에서 피해자 동향을 파악하였다면, 수습이 장기화되고 정부 책임론이 커지자 조기 수습 여론조성과 국면 전환, 청와대 책임 부인과 축소, 피해자에 대한 부정 여론 확산 및 고립화를 위한 전략을 확고히 했다.120) 세 월호참사 직후 비법정 기구 설치부터 관계부처 역할 분담, 각종 피해지원 시책에 관해 실 질적으로 지휘하고 통제했던 대통령비서실의 대응 기조가 전환된 것이다.

그림 4-9 범정부 대응 체계도(2014. 4. 19. 기준) 120) 국방부 보통검찰부, 25018형제153,171,187호, 제1책 제7권, 수사보고[유가족 사찰 동기 관련], 89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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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무책임의 아수라장:
제 5 장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1. 여론전과 기록조작 2. 진상규명을 막아라 3. 피해자는 어떻게 불온 세력으로 몰렸나 4. 진상규명의 책임을 다하는 국가로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1. 여론전과 기록조작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을 때,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이 애타게 자녀들의 생환을 기다리고 있던 4월 17일부터 19일 사이에도 청와대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국민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청와대는 책임을 모면하고 여론을 전환하기 위 해 갖가지 애를 썼다. 청와대는 문화계를 검열하고, 보수단체를 통해 여론을 관리했으며, 언론 보도 개입 등을 통해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 또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을 조작하고 파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과정을 훨씬 더 어렵고 더디게 만들었다. 책임 회피용 여론 전환

청와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정부에 책임을 묻는 여론이 강해졌다. 청와대는 세월호참사 초반에는 피해자 가족을 적절히 지원하자는 태도

였으나, ‘구조 실패’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이를 회피하는 데 더 힘을 쏟기 시작했 다. 박근혜 정부는 참사의 책임을 선원 선장 및 해운회사로 집중시키고 이들을 엄단하는 방향으로 국민과 희생자 유가족들을 납득시키려 했다. 청와대는 특히 언론 보도 방향을 바꾸고 싶어 했다. 홍보수석 이정현이 공영방송 「KBS」의 보도에 개입해, ‘해경 비판 기사를 뉴스 편집에서 빼라’는 등 보도 축소 외압을 행사했다 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2014년 4월 21일 홍보수석 이정현 은 「KBS」 보도국장 S△△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이 잘못한 것처럼 몰아간다”, “이렇게 중요 할 때 해경과 정부를 두들겨 패는 게 맞냐”며 항의했고, 4월 30일에는 “<KBS 뉴스9> 방송 을 대통령이 봤다”며 해경을 비판하는 보도를 삭제해달라고 요구했다. 언론의 보도 방향에 개입해야 한다고 지시한 점은 대통령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이하 ‘실수비회의’)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었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은 인터넷에서 대통령 을 비방하는 등 정부를 질책하면 이를 즉시 삭제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작성한 사람을

188 제5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응징할 방법을 찾아 처리할 전담 직원을 지정했다. 또, 국민적 분노가 정부로 향하게 하는

대신 국민 의식개혁을 촉구하는 분위기 조성에 언론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애쓰라고 지시했다.

121)

2014-04-25

2014-05-07

YOO M□□

122) 2014-08-23

Z○○

표 5-1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의 대언론 관련 지시사항 121)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 (2014.4.25.).

122)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 (2014.5.7.).

123)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 (2014.8.23.). 124)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 (2014.8.27.).

124)

123) 2014-08-27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189
왜 참사를
정부는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이처럼 반정부 여론을 ‘사회개조’ 이슈로 전환하려는 시도 외에도 청와대는 청해진해운 실

소유 유병언(전 세모그룹 회장)에게 관심이 집중되도록 노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국무회 의에서 세월호참사 관련 지시(세월호 침몰사고 원인 규명, 책임자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는 두 번 언급한 반 면, 유병언 수사 관련(유병언 검거 총력, 유병언 수사 관련 조치 사항 등)해서는 네 번 지시했다. 또 선원과 선장, 선사인 청해진해운 및 실소유주 유병언 일가를 처벌할 것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저 지른 일은 ‘살인 행위’라고 질타했고, 검경의 검거 방식을 질책하며 이들을 조속히 검거하 라고 강조했다.

실수비회의에서 유병언 수사가 70여 차례나 논의가 되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정부의 재 난 대처 문제점을 일부 개인들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로 만회하고자 한 것이다. 청와대는 계속해서 유병언 검거가 중요하다고 검찰을 독려했으며, 검찰이 철저한 수사를 해왔고 앞 으로도 최선을 다하리라는 것을 피해자 가족과 국민이 납득하도록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청와대의 이런 기조에 따라 검찰은 기자들에게 유병언 수사와 관련한 정보를 27차례나 비공식적으로 넘겼고, 언론도 유병언 검거 작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언론 보도는 점

190 제5장
그림 5-1 세월호참사
관련 보도양상의 변화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차 구조 및 사고 원인 규명과 거리가 먼, 세월호 실소유주의 행적을 좇는 데만 쏠리게 되 었다. 이외에도 청와대는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세월호참사 관련 성명을 발표하

며 청와대 및 정부의 위기 상황 대응을 비판하고 단식에 동참하자,125) 종교지도자를 활용 하여 시위하게 하는 등 언론 보도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 했다. 국민소통비서관실 행 정관 W□□의 수첩에는 “문재인 단식(광화문 피켓팅 시위 독려 → 문재인 끌어내기 자살방조(죽음의 정치)”이라 고 쓰여 있었는데, W□□에 따르면 이는 “단식투쟁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정치라는 명분 을 내세워, 문재인 단식에 반대하는 시위를 독려해야 한다는 지시사항”이었다.126) 청와대는 친정부 성향의 ‘보수단체’를 동원해 여론에 개입했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 과 정무수석 조윤선 등이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에 직권을 남용해 특정 보수단체에 지원금을 지급하도록 요구한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사건’이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났다. 대 표적인 보수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하 ‘어버이연합’)은 전경련으로부터 2014년에만 3억 9,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어버이연합은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거나 세월호진상규명법 제정을 반대하는 집회 등을 진행했고, 집회 참여자들에게는 일당도 지급했다. 어버이연합 외에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이하 ‘고엽제전우회’)도 전경련으로부터 집회 개최 명목으로 3,500 여만 원의 자금을 지원받았다.127) 청와대 정무수석실 등은 이러한 보수단체가 잘 활동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파악했다. 전경 련을 통해 자금 지원을 받은 보수단체의 활동은 ‘시민단체 동향 보고’를 통해 정무수석에 게 보고됐다. ‘시민사회 동향 보고’에 진보단체의 활동 현황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 에는 국정 현안에 우호적인 어버이연합, 고엽제전우회, 차세대문화인연대 등 보수단체의 125)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 (2014.5.21.). 문재인이 “해경과 해수부에 필요한 것은 사안에 따른 엄중 문책 이후 전문역량 강화와 조직혁신이지 해체와 권한 약화가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지도자 한 사람의 선택이 국가 전체의 명운을 가른다. 불통과 독선이 계속된다면 ‘대한민국호’는 기울 수밖에 없다”라고 비판하자, 새누리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문 의원의 정쟁을 유발하는 발언, 치고 빠지기식의 무책임한 비난을 이제는 삼가 달라”고 비판했다.

126) 서울중앙지검, 2017년 형제96188호, 2018년10586호 증거기록 W□□ 진술조서 (2017. 1. 23.).

127) 서울중앙지검, 2017년 형제96188호, 2018년10586호 증거기록 [전경련 보수단체 자금 지원 내역].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191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집회, 1인 시위, 광고, 고발,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등 활동 전반에 관한 현황이 담겼다. 세 월호참사와 관련해서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 중단 요구, 수사권·기소권을 포함한 세월호특별법 반대,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인 <다이빙벨> 상영 반대 등 여러 세 월호참사 이슈에 관해 청와대 기조에 상응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 보고됐다.

192 제5장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은
보수단체는 세월호특별법 제정 반대 여론을 확대하기 위해 활동하겠다는 의 그림 5-2 집회 인원 동원 일당 수기 장부128) 128) 서울중앙지검, 수사보고 I◇◇ 제출 집회인원동원 관련 장부 정리보고, (2017. 9. 11.).
보수단체 및 인사와의 오찬, 간담회 등도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4・16세월호참사

사를 표시했고, 청와대는 보수단체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엽제전우회는

제5장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014년 7월 28일 정무수석, 국민소통비서관 등이 참석한 간담회에서 “세월호 선동 세력 과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이고, “대통령 임기 동안 끝까지 힘을 보태겠다”며 국정 협조를 약 속하면서, 신규 회관 건립 등 숙원 사업을 진행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청와대는 고 엽제전우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2014년 8월 10일 대통령이 고엽제전우회 회관 건립을 지 시했다. 이처럼 보수단체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함한 세월호특별법 제정 반대와 같은 세 월호참사에 관한 특정 여론을 확산시키고, 청와대는 국정 현안에 협조하는 보수단체들을 다방면으로 지원했다. 정부 비판, 진상규명 여론 누르기 세월호참사 발생 전부터 청와대는 정부에 비판적인 개인과 단체를 ‘종북·좌파’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었다.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의 지시로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은 ‘좌파 척결, 우파 보강’이라는 청와대의 기조에 따라 2014년 3~4월경 좌파단체 등에 보조금이 편중 지원되는 문제를 개선하겠다며 경제금융·교육· 문화체육·고용노동비서관 등이 참여하는 민간 보조금 TF를 조직해 정부를 비판하는 단 체와 인사를 각종 정부 사업에서 배제했다.129) 또한 이 조치를 세월호참사에 대한 정부 대 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 단체와 인사에게도 적용했다. 2015년 문체부에서 작성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에 보고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는 문화예술계 인사 9,473인의 명단이다. 이는 ‘세월호 시국선언’,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계 인사 명 단을 취합해 작성한 것으로, 정부가 세월호참사의 적극적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문화계 의 움직임을 반정부 활동으로 규정했음을 증명한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해 문화예술계를 탄압하는 움직임은 김기춘이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 129) 서울중앙지검, 2018년 10586호 증거기록 A△△ 피의자 신문조서, (2017. 1. 15.).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193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특별법 제정 과정 청와대의 보수단체 활용 여론 대응 세월국민대책위, 특별법입법청원 7월 9일 7월 14일 유가족, 특별법 제정요구 단식 시작 52건 유가족 비난 ‘유가족 무리한 요구’, ‘진상규명 내세운 선동세력’, ‘단식 유가족 아빠 자격 없어’ 8월 3일 「산케이신문」 ‘대통령 7시간 의혹’ 칼럼 게재 44건 「산케이신문」 명예훼손 혐의 고발 ‘국가원수 명예훼손’ 고발, ‘T△△ 서울지국장 규탄’ 시위 여야 특별법 협상 시작 8월 7일 54건 세월호특별법 제정 반대 기소-수사권 남용 특별법, 정치적 특검 반대 서명운동 ‘노란리본의 광화문광장 장기 점령, 절망과 불신’ 8월 8일 T□□ 그림 ‘세월오월’ 전시 예정 9건 대통령 풍자 작품 명예훼손 고발 화가 T□□ 세월오월 작품 명예훼손 고발 ‘T□□ 화가 고발’ 건, 주요 블로그 및 카페 200곳 이상 공유 여야 특별법 2차 협상 8월 19일 교황방한 (한국 천주교 200주년)

27건 교황 면담 유가족 및 시국미사 비판 ‘M□□가 교황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편지 교황청에 전달 ‘교황님의 선의를 악용한 세력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성명

9월 19일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32건 김현 의원, 유가족 고발 규탄 김현 의원 및 세월호 유가족 5명, 야간 집단폭행 혐의 고발 ‘특권의식이 법과 원칙을 짓밟고 있다’ 성명 발표 유가족 구속영장 기각 규탄 성명

9월 24일 미시USA 커뮤니티, 「뉴욕 타임스」에 정부비판 광고(2차)

10월 6일 부산국제영화제 <다이빙벨> 상영

17건 미시USA단체 비난·제재 ‘종북 해외동포 입국 거부’ 청원서 제출, 세무조사 요청 ‘이제 세월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맞대응 광고

25건 <다이빙벨> 상영 금지 시위, 악평 후기 ‘<다이빙벨> 사기, 제작진 비판, 부국제 상영 부당’ 영상 공유 악플 공세, 평점 2점대 등 관람 후기

194 제5장
여야
문제제기 SNS ‘천문학적 인양 비용, 세월없는 수색 언제까지…’ 특별법 통과 11월 7일 ● 유가족, 특별법 비판 여론 ● 대통령, 정부 비판 대응 그림 5-3 청와대의 보수단체 활용 여론 대응
특별법 3차 협상 10월 30일 52건 세월호 수습 비용 비난 세월호 수습에 과도한 혈세 투입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주 비엔날레 전시와 U△△ 감독의 세월호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등이 발표되면서 더 강 화되었다. 정부 측은 이 전시와 다큐멘터리가 확산되는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통 령비서실장 김기춘은 문화영화예술 분야의 ‘이념 편향적인’ 행태를 막아야 한다며, 향후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독립·예술영화 제작 및 유통 지원 체계’를 개편하라고 지시했다. 반면 청와대가 ‘건전’하다고 분류한 영화는 지원하라고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 령은 관련 보고를 받은 뒤 “<명량> 같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사랑과 우정을 다루는 건전한 영화를 지원해야 한다”는 지시를 하기도 했다. 한편 청와대는 교사들의 세월호 관련 1인 시위, 노란 리본 달기 등 개인적인 추모 행위도 정치적 활동으로 판단해 교육부에 금지 명령을 내리라고 지시하고, 교육부는 각 학교에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교원을 관리하라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냈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세월호 관련 계기 교육130)에 관해서도 ‘사회적 현안에 대해 학생을 바르게 이해

시키기 위한 교수 학습과정안은 학교장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계기 교육 지침을 철저히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미시USA133)는 세월호참사 관련 정부 비판 광고

134)를 뉴욕타임스에 세 차례 게재 130) 계기 교육은 학교 교육과정에 제시되지 않은 특정 주제를 다루는 교육으로,

132) 교육희망,

133) 미국 거주 한국 교민들이 각종 생활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 사이트.

134) 1차 광고 “BRING THE TRUTH TO LIGHT”, (2014.5.11.).

2차 광고 “THE Truth Shall Not Sink”, (2014.8.14.).

3차 광고 “The Collapse of Truth and Justice in South Korea?”, (2014.9.24.).

195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화가 T□□이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며 그린 ‘세월오월’의 광
가진
김영한,
지키라고 하는 반면, 세월호 계기수업에 대응하는 ‘우파 계기수업 자료 개발’ 지시를 하는 등131) 사실상 검열132)을 유도했다. 청와대는 세월호참사와 관련한 이른바 ‘오보 및 유언비어’에 대해 철저히 대응하라고도 지 시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을 ‘응징’하고 ‘끝까지 추적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청와대 의 기조였다. 이러한 ‘응징’은 실제 실행됐는데, 당시 「뉴욕 타임스」(NYT)에 정부의 세월호참 사 대응 비판 광고를 실은 한인커뮤니티 MissyUSA(이하 미시USA)에 대한 대응이 상징적이다. 2014년
시사적 의미를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131)
업무수첩,
(2014. 9. 14.).
교육부 계기수업 지침, ‘그때그때 달라요’, ‘천안함 4주기 추모는 적극 추진…역사 왜곡 계기수업은 “하지 마”’, (2014. 3. 25.).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은 실수비회의에서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광고 를 게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위상을 실추”시켰다며, “분노하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지 시했다. 김기춘은 ‘새누리당,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등 애국건전단체가 논평, 담화, 반박 광고 등의 형태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대응 방향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135)

청와대는 미시USA를 운영하는 ‘해오름아이’에게 「대통령 모독 및 명예훼손죄」를 적용하 는 등 법률적 대응까지 모색했다.136) 2014년 10월 5일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 V △△은 청와대가 보수단체로 분류한 시민단체 중 하나인 ‘블루유니온’과 이메일로 고발장 과 보도자료를 주고받았다. 다음 날 블루유니온은 미시USA를 명예훼손 등 혐의로 서울 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후 블루유니온은 법무부에 해외 동포 입국 거부 청원서를 제출 하고, 미시USA 광고비 모금과 관련하여 미국 FBI(연방수사국), HSI(국토안보국), IRS(국세청)에 수사 를 요청했다. 당시 민정수석 김영한의 업무수첩에는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의 지시사항 으로 “·미시 USA - P△△. 해외 국익 훼손. 불통분자(不通分子) - 인적사항 확인. VISA 거부 등 입구(入口) 차단 등 응징 필요 - 법무부(法務部) 출입국(出入國) 당국(當局) - 국정원(國情院) 연 계”라고 적혀 있었다. 청와대가 특정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광고를 문제 삼으며 법률적 대응을 모색하는 동시에 보수단체를 통해 커뮤니티 운영진에 대한 입국 거부, 자금 추적 등 전방위적 ‘응징’에 나선 일련의 상황은 말 그대로 이례적이다. 당시 청와대가 대통령 비판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정무수석실 국민소통비서관실은 당시 정부의 ‘국정 철학’에 어긋나는 반대되는 이슈에 대 응했는데, ‘세월호 사건’은 ‘B△△ 관련 사건’ 등과 함께 주요 이슈로 분류되었다. 이와는 상반되게 보수단체들에게는 관련 비용을 지원하면서 여론을 관리했다. 이처럼 청와대는 블랙리스트, 대통령 비난 발언에 대한 응징, 보수단체 활용 등 다양한 수단으로 정부 비판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135)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2014.5.12.).

136) 청와대, “미시USA 주요현황 및 대응 방안”, (2014.9.17.).

196 제5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세월호참사 대응 관련 기록은 청와대 및 정부 부처가 세월호참사에 적절히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사참위의 조사 결과 중 기록과 관련한 사항은 크게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두 가지다. 첫째, 세월호참사 당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자료 들이 2017년 정권 이양기에 소실된 점, 둘째, 박근혜 정부 당시 세월호특조위를 방해하기 위해 개최한 세월호관계차관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하며 관련 내용을 정부 기록관리시스 템에 등록하지 않은 점이다. 2017년 7월 17일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에서 세월호 관련 문건 두 상자 분량이 파기된 일명 ‘세월호 문건 파기 사건’은 2019년 「JTBC」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위기관리 센터는 참사 당일 청와대 내에서 세월호참사를 가장 먼저 인지했고 대통령 보고 등 초동 대응을 담당했기 때문에 관련한 핵심 자료를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대선이 있었던 2017년 5월 위기관리센터 상황실 캐비닛에서 세월호 문건이 담긴 두 개의 상자가 발견되었다. 상자 안에는 세월호참사 관련 해양경찰청, 경찰청 등에서 보고된 상황 보고서, 언론 보도자료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세월호참사를 담당했던 사회 담당이 남겨 둔 자료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상황팀장 E△△는 위기관리센터장 F△△에게 “세월호 관련 해경 상황보고서와 언론스크랩 등이 상자에 보관된 채 파기되지 않고 남아 있는데, 이관 대상이나 중요한 문서는 아닌 것 같다”며, “세월호 관련 상황보고서 등은 PC에 저장 되어 있었고, 중요한 자료는 기록물 이관할 때 대응팀에게 주었기 때문에 상황팀에 남아 있는 세월호 관련 문건은 파기해도 될 것 같다고 보고”했다. 상황팀장 E△△는 안에 어떤 문서가 들어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이렇게 판단했는데, 이 보고를 들은 F△△는 중요한 문서가 아니면 파기하라고 지시했다. 상황반원들은 위기관리센터에서 어떤 문건을 특정해 파기를 지시한 경우가 없었기에 세 월호 문건 파기 지시를 ‘이례적인 지시’로 인식하고, 다른 상황반에 계속 파기 지시를 떠넘 기는 식으로 2017년 7월 전까지 세월호 문건을 파기하지 않았다. 문건이 낱개로 흩어져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197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소실된 기록, 만들어지지 않은 기록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있는 것이 아니라 상자로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관리해 정리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민감한 자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2017년 7월까지 세월호 문건은 파기되지 않고 상황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2017년 7월, 위기관리센터에는 문재인 정부에서 임용된 신임 선임행정관의 출근 예정 소 식이 공유되었다. 위기관리센터장 F△△는 ‘이제 새로운 직원들이 오는데, 과거의 불필요 한 자료로 새로운 직원들에게 오해를 살 필요가 없으니 다시 한번 정리하라’며 전 정부(박 근혜정부) 문건을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상황반장 C△△은 상황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세월호 문건 파기를 지시했지만 상 황반원들은 지시를 거부했다. 은폐 의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보 담 당 D△△는 은폐 의혹을 받을 수 있다며 상황팀장 E△△에게 “세절하지 마시죠”라고 만류 했으나, E△△는 ‘비서관님이 하라고 하신다’며 재차 세월호 문건 파기를 지시했다. 그런데 도 상황반원들이 세월호 문건을 파기하지 않자, 상황반장 C△△은 2017년 7월 17일 밤 상 황반원들보다 직급이 낮은 상황병에게 세월호 문건이 담긴 상자를 포함해 위기관리센터 캐비닛에서 나온 문건을 파기할 것을 지시했다. 이날은 청와대 캐비닛에서 박근혜 정부 문 건이 발견된 사실이 공표된 날이었다. C△△은 “세월호 문건을 파기하는 시점이 오해받기 좋은 시기였다. 다른 비서관실은 전 정부 문건이 나왔다고 보고하고 있는데 우리 상황실 은 전 정부의 문건을 파쇄하라고 하니 굉장히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하기 싫었다.”라고 진 술했다.

2017년 7월 18일 아침에도 아직 세월호 문건이 담긴 상자 하나가 남아 있었으나, 상황팀장

E△△가 “마저 정리해라”라고 지시해, 결국 하나 남은 상자의 문서도 세절되었다. 이로써 2014년 이후 위기관리센터 상황실 캐비닛에 보존되어 왔던 세월호 문건은 2017년 7월 17 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파기되었다. 이렇게 세월호참사 당일 위기관리센터의 초동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사라졌다.

198 제5장

문재인 정부에서 임용된 새로운 선임행정관 출근 전날과 당일 아침 세월호 문서가 세절되 었기 때문에 은폐 의혹이 제기되었다. 위기관리센터는 세월호 문건 은폐 의혹에 대해 지

시자가 누구인지, 파기된 문건이 무엇이었는지,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감찰과 수사를 받았 고, 위에 적시한 대로 지시자가 특정되었으나 관련자들이 처벌받지는 않았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고려할 때 이 런 보고서들을 파기하는 업무 방식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대통령기록물법」에도 대통령 의

보좌 기관이 생산한 기록물뿐만 아니라 ‘접수해 보유하고 있는 기록물’ 또한 ‘대통령기 록물’로 규정하고 있어

제5장

199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위기관리센터의 기록 관리 방식은 법 위반 소지 또한 있다. 이렇듯 접수된 문서를 파기하는 것이 위기관리센터의 관행이었으나, 세월호 문건이 2014년 이후 2017년까지 보존되었기에 위기관리센터 상황팀 근무자들은 세월호 문건을 ‘전임자가 대통령 기록물 파기 금지 공지 세월호 문건 발견 종이 기록물 파기 금지 공지 문건 파기 지시 문건 파기 박 대통령 탄핵 새 정부 행정관 출근 연설기록비서관실 위기관리센터 총무비서관실 위기관리센터 행정관 파기 거부 새 정부 출범 새 정부 행정관 출근 공지 3월 10일 16일 5월 10일 11일 7월 17일 18일 그림 5-4 기록물 파기 사건
사참위 조사에서 위기관리센터장 F△△와 상황팀장 E△△는 ‘세월호와 관련해 이관이 필 요한 자료는 없다’는 취지의 보고를 받았고, 위기관리센터에 보고된 타 기관의 보고는 파 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업무 방식이었기에 파기를 지시했다며 은폐 의혹을 부인했다. 이들 의 진술대로 위기관리센터에서는 접수된 타 기관의 보고를 상황 종료 후 파기했던 것으 로 추정되는데, 타 기관의 보고를 기반으로 대통령 보고서가 작성되는 것을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굳이 남겨둔’ 문건으로 인식하고 세월호 문건의 파기를 거부했다. 또한 이 시기 청와대 내에 기록물의 파기를 금지하는 지시가 수차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기관리센터장 F△△ 와 상황팀장 E△△의 기록물 파기 지시는 단순한 부주의 이상의 문제가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중요 기록 자체가 공식 기록물로 남지 않은 점이다. 2014~2016년 세월호 후속 대책을 관련 부처 차관들이 참석해 논의하는 세월호관계차관회의가 운영되었는데, 정상적인 세월호관계차관회의 말고도 세월호진상규명법 제정 이후 세월호특조위를 방해 할 목적으로 ‘비공개 세월호 관련 관계 부처 차관들이 참석하는 회의’(이하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 회의)가 진행되었다.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회의는 2015년 1월 22일 첫 번째 개최 이후 최

소 13차례 이상 개최되었다. 사참위는 세월호특조위 관련 최초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회의가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 의 지시로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회의는 ‘세월호관련차 관회의’, ‘현안점검회의’, ‘현안정책조정회의’, ‘서별관회의’ 등 다양한 형태의 이름으로 열렸 으나 모두 세월호 관련 관계 부처 차관들이 참석해 회의 개최부터 그 결과까지 비공개하 고 보안을 유의하며 진행한 회의라는 공통점이 있다. 법에 따라 차관급 이상이 참석하는 회의는 시스템에 등록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회의를 주재했던 국무조정실과 회의 안 건을 주로 준비했던 해수부 모두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회의 관련 문건을 시스템에 등재 하지 않았다.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회의를 통해 청와대와 정부 부처는 세월호특조위를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2014년 5월, 세월호특조위 설립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 식적으로는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특별법을 제정하고 세월호특조위 설 립을 준비하며 세월호특조위가 실제로 활동하는 동안 줄곧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방해

200 제5장
2. 진상규명을 막아라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했다. 정부의 이러한 방해 작전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로 인해 세월호특

조위의 권한은 축소되고 사실관계를 조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피해자 청원안을 무시한 여・야만의 합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정부는 효율적으로 현장 상황에 대응하는 데 실패해 인명 피해를 키웠다고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주로 선장, 선원과 선사인 청해진해 운, 출항 전 점검을 진행한 운항 관리자 등을 수사하는 데 집중했고 정부 부처가 현장 대 응에 실패한 것에 대한 법적 책임은 거의 묻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검찰 수사의 미흡함을 지적하며 독립된 조사기구를 구성해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규명을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 모든 진 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정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 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합니다. 거기서 세월호 관련 모든 문제들을 여야가 함께 논의해주기 바랍니다.”라고 특별법을 통한 독립적 조사기구를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사건 초기부터 실종자들을 조속히 수색하고 구조할 것과 투명하고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2014년 6월 7일에 는 세월호진상규명법 제정을 위한 ‘세월호특별법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을 열고, 2014년 7월 9일 특별법 청원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에 세월호특별법 여당(새누리당)안, 야당(새정 치민주연합당)안, 피해자 청원안 간의 이견을 조정해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하는 임무가 주어 졌다. 특별법 여당안은 조사 기한과 권한, 조사의 범위가 가장 좁았고, 야당안은 조사 기 한은 길었지만 안전사회 과제 등이 빠져 있었다. 피해자 청원안이 조사 기한이 가장 길고 권한도 강했으며, 안전사회 과제도 중시하는 안이었다.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3자 협의체를 만들어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 을 수렴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여 야는 일방적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2014년 8월 7일 여야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201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1차 세월호특별법 합의, 8월 19일 여야 2차 세월호특별법 합의는 유가족들과의 사전 협 의 없이 타결되어 유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수사권 기소권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

제가 되었다. 당시 정부는 수사권·기소권을 독립적 조사기구가 갖게 되면, 컨트롤타워 역 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청와대까지 수사 대상이 될 것을 우려했다. 9월 30일 여야 3차 세 월호특별법 합의 역시 수사권·기소권을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세월호특조위 구성이 계속 미뤄지는 것을 우려한 유가족들이 합의 내용을 수용해, 10월 31일에 여야 세월호특별법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로써 2014년 11월 7일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특별법」’)이 국회의원 251명이 참석한 가운데 212명 찬성(84.5%), 반대 12명, 기권 27명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은 2014년 11월 19일 공포되어

2015년 1월 1일에 시행되었다.

언론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8월 20일경까지는 여론이 유가족들 요구에 호의적인 편이 었고,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여·야 합의안이 도출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 가족대

책위원회(이하 ‘가족대책위’)는 수사권 기소권이 제외된 협상안을 거부할 의사를 밝히고 2014 년 8월 20일 대통령에게 특별법 제정 결단을 내릴 것, 그리고 단식 중인 유가족을 만날 것 을 요청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면담 요청을 거절하면서 유가족들은 대통령을 직접 만나겠 다며 청와대로 향했는데, 경찰은 청와대 인근에 있는 청운동 주민센터 주변을 경찰 버스 로 막아 언론과 가족대책위 관계자는 물론 다른 시민들의 출입도 통제했다.137)

2014년 8월 21일, 일부 보수 언론은 2차 합의안을 수용하겠다는 일반인 희생자 가족대책 위의 인터뷰를 강조하며 유가족 분열을 조장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2014년 8월 22일, 리 얼미터에서 세월호특별법 긴급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여론조사는 그동안 유가 족의 특별법(안)을 지지하는 여론이 반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 여론조사에서는 여야 의 2차 협상안대로 통과시키면 좋겠다는 응답이 45.8%였고, 세월호 가족대책위의 뜻에 따라 다시 협상하자는 의견이 38.2%, 모름/무응답이 16.0%로 나왔다. 이 결과는 「조선일 보」에 「세월호특별법」 추가 협상 ‘필요 없어 45.8%, 필요해 38.2%’로 보도되었다. 137) “청와대 “대통령 나설 일 아냐” 세월호 유가족 면담 공식 거부”, 경향신문 (2014.8.21.).; “‘청와대 답변달라’ 세월호 유가족들 밤새 기다려(종합)”, 연합뉴스 (2014.8.23.).

202 제5장

그림 5-5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제5장

138) 청와대, “실수비회의 결과”, (2014.8.22.).

203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그림 5-6
R△△
청와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14년 8월 22일 수석비서관 회의 결과를 보면, 청와 대는 단원고 학생 유가족과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부각시키자고 논의했다. 8월 25일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 W□□의 업무수첩을 보면 “국민정서와 유 가족 분리”라고 메모되어 있어, 청와대가 가족대책위의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목소리를 고립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2014년 당시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가 만든 세 특별법안 비교표
대통령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결과(2014. 8. 22.)138)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한편 청와대는 2014년 8월부터 세월호특조위 구성에 대비하고자 비서실에 위원을 추천

하도록 했다. 8월 7일 1차 합의에서 “진상조사위는 총 17인으로 구성(여야 각 5인, 대법원장·대한변

호사협회 각 2인, 유가족 3인)”한다는 내용이 결정됐는데, 청와대는 이 내용을 8월 8일 실수비회의 에서 보고받았기 때문에 청와대에 위원 추천 권한이 없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2014년 8월 23일 청와대 민정수석 김영한은 수석비서관실별로 세월호특조위 위원 후보 군을 추천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사참위는 이는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의 지시에 따 른 것으로 판단한다. 그 이유는 첫째, 위원 후보군 추천 외에도 김기춘이 세월호참사와 관 련해 청와대 책임을 부인하고 세월호특조위의 권한을 제한하는 취지로 지시한 내용이 김

영한 업무수첩과 실수비회의 문건에 다수 남아 있고, 둘째, 8월 8일에 김기춘이 김영한에 게 세월호 특검 추천위 위원을 추천하라고 지시한 점을 보았을 때 세월호특조위 위원 추 천 업무까지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인사 업무 권한이 없는 김영한이 김기춘의 지시 없이 단독으로 이런 공문을 보냈을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여러 비서관실에서 추천받아 청와대는 “세월호 진상조사위원 추천 명단(총 47명)”을 작성했 다. 이 명단의 추천 사유로는 주로 ▲ 박근혜 정권에 우호적인 보수 성향 ▲ 정부 정책에 대한 공감대와 유대 ▲ 「세월호특별법」 반대 취지 주장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일례로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차기환 추천 이유를 보면, “종북 이슈 등 각종 사회적 이슈 에 관해 보수 우파의 가치에

204 제5장
입각해 맹활약하고 있음.
겸비.
는 떠오르는 샛별로 부각되고 있음.”이라고
그림 5-7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
139)
국민정서와
논리와 전투력
우파 SNS에서
되어 있다. 이처럼 청와대는 세월호특조위의 진
W□□ 업무수첩(2014. 8. 25.)139)
W□□, 업무수첩, (2014.8.25.).
유가족 분리

4・16세월호참사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제5장

등을 정기적으로 하며 세월호특조위 조사 동향을 공유하고 세 월호특조위 설립 및 조사를 방해할 목적의 대응방안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그림 5-8 세월호 진상조사위원 추천 명단

변 호사 단체 결성 지원 세월호 진상조사위 참여” 등의 내용을 보았을 때 사실상 청와대 추 천 인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실제로 세월호특조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청와 대, 정부, 여당과 회의 연락

205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상규명 활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세월호특조위 위원 후보가 청와대와 여당에
우호적인 ‘보수’ 성향인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세월호특조위가 세월호참사 당시 청와 대와 정부의 대응이 적절했는지를 조사하는 기구임을 고려할 때, 위원 추천권이 없을 뿐 아니라 세월호특조위의 조사 대상인 청와대가, 본인들에게 우호적인 성향의 인물을 추천 하여 조사에 대응하고자 했던 것은 부적절한 행위였다. 세월호특조위 부위원장이었던 조대환, 이헌, 새누리당 추천위원 차기환은 청와대 작성 문 건, 김영한 업무수첩 기재 사항, 국민소통비서관실의 2014년 실적 문건에 기재된 “건전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세월호특조위 설립준비를 방해하라

‘세금 도둑’ 발언과 조직적 방해의 시작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2014년 11월 7일 의결된

직후 해수부는 위원회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내부에 자체적인 설립준비팀을 꾸리고 ‘희생 자가족대표회의’의 위원 선출 등을 행정적으로 지원했다. 11월 말경에 해수부의 H△△ 과 장이 담당자로 지정됐고,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위원회를 빨리 설립해야 한다 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12월 초 H△△는 이석태 위원장 내정자에게 위원회 사무처 준비단 의 구성계획안이 포함된 보고를 했다. 청와대는 이 과정에 대해 모두 보고를 받고 있었는 데,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 해양수산비서관실 행정관 M△△의 진술에 따르면, 이 시기 에는 청와대에서도 알겠다는 수준으로 답변하는 등 설립준비가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고 한다. 2015년 1월 14일 설립준비단은 행자부에 공식적으로 ‘사무처 직제’ 문건을 전달 했다. 당시 세월호특조위가 확정한 직제안은 ‘1사무처, 1관, 1실, 3국, 14과, 상임위원 5명을 포함한 총 125명 정원’이었다. 세월호특조위 설립준비단의 활동은 2015년 1월 16일 새누리 당 김재원 의원이 원내 브리핑에서 “여성가족부, 방송통신위원회보다 더 큰 부서, 부처를 만든다고 한다. … 이걸 만들려고 하는 분은 공직자가 아니라 세금 도둑이라고 확신한다” 고 발언한 이후부터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김재원 의원의 발언 이전에 청와대에서도 세월호특조위 사무처를 축소해야 하지 않느냐 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2015년 1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진행된 정무수석실회의에서 ‘진상조사위 사무처가 처음부터 120명 정도는 너무 많지 않나’라는 말이 나왔다. 곧이어 ‘청와대는 진상조사에 관한 자료 및 정보 제공에 응하지 않는다’는 정무수석실의 방침이 전파되었다. 한편 해당 정무수석실 회의 이전부터 국정원은 세월호특조위의 진상규명 활 동이 정부 부담으로 이어질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세월호특조위 조직을 축소하고 파견 공 무원 비중을 높여야 하며, 박근혜 청와대에 비판적인 인물을 걸러내야 한다는 취지로 문 건을 작성해 청와대 등에 보고했다. 1월 15일 조대환 부위원장은 김재원 의원과 만나 ‘특조위 조직구성표(안)’와 ‘예산총괄표(안)’

206 제5장

4・16세월호참사

부위원장이 구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농담조로 건네기도 했으며, 보고하는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자료가 특별하지 않고 상임위, 기재부, 행자부에도 주었던 자료여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2015년 1월 16일)에 김재원이 ‘세금 도둑’ 발 언을 한 것이다. 같은 날 오후 2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는 세월호특조위 관련 회의를 진 행했는데, 해양수산비서관 윤학배는 정무수석 조윤선으로부터 ‘세월호특조위 인원이 여 성가족부 인원보다 많다. 축소하라.’는 취지로 심한 질책을 받았다. 세월호특조위를 축소하기 위해 청와대는 숨 가쁘게 움직였다. 1월 19일은 청와대와 새누 리당, 여당 추천위원들이 만나 세월호특조위 축소 논의를 시작한 날로, 청와대 새누리당 ·해수부가 어떻게 공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월 19일 아침 청와대에서 비서실장 김기춘 주재로 실수비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김기춘은 수석들끼리 협의해 세월호 문제를 전담할 수석실을 정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실과 해수부는 ‘세월 호 후속 조치 총괄 TF’를 구성하기로 협의했다. 세월호특조위 설립 동향 등을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수립하기 위함이었다. 이날 오후 플라자 호텔에서 청와대 정무수석 조윤선과 새누리당 의원 김재원을 비롯해 해수부 해양정책실장 J△△, 세월호특조위 파견 해수부 서기관 H△△, 세월호특조위 여당 측 추천위원 조대환, 고영주, 차기환, 석동현, 황전원 등 총 11인이 참석하는 회의가 열린다(2015년 1월 19일, 플라자 회의). 이 회의에서 조윤선은 조직과 예산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으며, 회의에서는 설립준비단이 마련한 조직안 대신 정원을 절반(60~70명 수준)으로 줄인 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등의 수정안이 논의됐다. 청와대의 의사를 확인한 부위원장 조대환은 1월 19일 5시에 열린 세월호특조위 5차 상임 위원 회의에서 기존에 합의된 사안임에도 설립준비단이 구성한 직제 시행령안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음 날인 1월 20일 여당 추천 비상임위원 황전원은 세월호특조위 설립준비단 을 해체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한편 국정원에서도 ‘세월호 특별조사위 활동 대비 편향성 견제 보고서(2015년 1월 19일)’를 작 성하여 청와대 등에 배포했다. 해당 문건에서 국정원은 “박근혜 청와대에 비판적인 단체 내에서 세월호특조위에 대한 설명회가 진행되는 등 조사관 채용에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

제5장

207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을 건네주었다. 이 자리에 동석한 파견 공무원 H△△는 “당시 상임위에서 여당에 협조를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획을 수립하고 있어 ‘정부 책임론’ 등 정치 공세가 재연될 것이 예상”된다고 언급했다. 또 “여당 및 해수부 등 관계 부처들은 개입하기 어렵다며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세월호특

조위 내 여당 추천 인사들과 물밑으로 교감해 조사관 채용 기준을 엄격하게 해 박근혜 청

와대에 비판적인 인물들이 다수 채용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정원이 여 당이나 해수부 등 관계 부처의 소극성을 평가하며, 더 적극적으로 청와대에 세월호특조 위 설립에 개입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사참위가 처음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2015년 1월 20일 아침 별도 안건 없이 진행된 실수 비회의에서 김기춘은 세월호특조위 설립 방해 지시를 했다. 그는 세월호특조위 준비단을 비공식 활동으로 간주하고, 세월호특조위가 조직과 예산을 지나치게 과다하게 요구하였 으니 각 정부 부처가 원칙에 입각해 철저히 업무를 수행하기 바라며 관련 수석들도 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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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9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결과

4・16세월호참사

조위 사무처준비단이 비공식 활동 조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기춘은 세월호 관련 논의가 ‘새로운 불씨로 살아날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며 세월호특조위 축소 취지의 지시를 내렸 다. 또 이틀 뒤인 1월 22일부터 비서실장 김기춘의 지시로 앞서 언급한 비공개 세월호관계 차관회의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16일 당일 구조의 컨트롤타워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한 청와대는 세월호특조위를 방해하는 데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했다.

1월 21일 세월호특조위에서는 6차 상임위원 회의와 설립준비단 초청 임명 예정자 간담회 가 개최되었다. 부위원장 조대환은 설립준비단의 근거 부족을 이유로 들며 기존 설립준비 단은 임무를 종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준비단 인원을 다시 정하자는 안건을 제출했으 나 부결됐다. 해수부 사무관 H△△가 증언한 이 날의 상황은 여당 추천위원들이 얼마나 긴밀히 정부부처와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날 진행된 두 회의(상임위원 회의 및 간 담회)에서 설립준비단에 파견된 공무원 복귀는 논의하지 않았는데, 4·16세월호참사 특별 조사위원회 전원위원회 개최 결과 보고에는 “부위원장은 설립준비단에 자신이 추천한 3 명은 복귀시키고, 공무원 4명은 원 소속기관으로 소환 요청할 것을 선포”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건 작성자 H△△는 실제로 2015년 1월 21일 부위원장 조대환이 공무원 파견 복귀 얘기를 꺼낸 적 없다고 시인하며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파견 공 무원 복귀를 선언해라’고 하였고, 조대환 부위원장은 ‘예, 예, 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회의 분위기가 그런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닌지 계속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끝까지 파견 공무원을 복귀시키겠다고 말을 못 하고 회의가 종료되었습니다.”140) 140) 서울동부지검, “J△△ 피의자신문조서(제4회, 대질 H△△)”, (2018.1.31.).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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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부처 업무를 면밀하게 챙기라고 지시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해수부 파견 공무원이 먼저 ‘준비단’을 구성하겠다고 보고하고, 청와대도 이를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세월호특
“애초에는 조대환 부위원장이…아까 말씀드린 문제 제기 후 파견 공무원을 철수시키겠다고 말하여 야 하는데 이를 회의가 종료될 때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도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조대환 부위 원장이 파견 공무원 복귀를 선언하지 않아 J△△ 실장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조대환 부위원장을 바 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대환 부위원장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는데, J△△ 실장이 아마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오전 상임위원 회의에서 조대환이 파견 공무원을 복귀시키겠다고 선포하지 못하자 J△△ 실

장이 전화해서 재차 독촉하기까지 했다는 증언을 보면, 여당 추천위원들이 정부 부처로부터

전혀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세월호특조위 위원장이 파견 복귀를 요청하지 않았는

데도 다음 날(1월 22일) 해수부는 파견 공무원들의 지원 근무를 면한다는 공문을 특조위에 발송했다. 해수부와 행자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은 다음 날인 1월 23일 원소속기관으로 복귀했다. 해수부는 이것이 세월호특조위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으며, 파견 공무원들이 서류를 들고 복귀해서 세월호특조위 업무 추진이 늦어지게 되었다. 세월호특조위 부위원장 조대환을 비롯한 여당 위원들은 이후에도 당·정·청과 긴밀히 협 의하며 세월호특조위 설립을 방해했다. 해수부와 여당 추천위원이 함께 회의하면, 해수부 공무원이 서류를 작성하고, 여당 추천위원들이 이를 실행에 옮기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1 월 26일 플라자호텔에서 여당 추천위원 4명과 해수부 J△△ 실장과 설립준비 지원 TF 반 장 B□□, H△△ 등이 참석하는 진상조사위 여당 추천위원 오찬 간담회가 열린 뒤, 1월 28

일 B□□이 ‘직제·예산안 관련 부위원장 검토 제출안,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처 구성 및 예산요구(안)’을 작성하고, 이틀 뒤인 1월 30일에 조대환이 상임위원 회의에

서 이 문서를 제출하고 설명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또 조대환 등은 세월호특조위 출범이 늦어지는 책임을 기존 안을 고수하는 이석태 위원 장 및 다른 위원들에게 돌리는 식으로 프레임을 만들었다. 조대환은 2월 2일, 6일에 진행 된 9차, 10차 상임위원 회의에서도 계속 자신의 안으로 해야 해수부를 설득할 수 있고 위 원회가 출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해수부 공무원 H△△는 지시에 따라 ‘세월호특조위 조직·예산이 여당 추천 위원들의 주장대로 축소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브리핑 문건을 작 성해 해수부, 해양수산비서관실, 여당 추천 위원 황전원에게 메일로 전달했다. 황전원 위 원은 2월 11일 이 내용을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2015년 2월 12일 세월호특조위 전원위에서 설립준비단은 부위원장이 마련한 안이 아니라 기존에 마련했던 직제와 예산을 확정했다. 이 결정에 청와대는 바로 반응했다. 역시 사참위가 처음 밝혀낸 바에 따르면, 2015년 2월 13일 실수비회의에서 김기춘은 “새정연 및

210 제5장

4・16세월호참사

이 큰 만큼, 혈세 낭비·방만 운영·불합리한 결정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새누리당 추천위원

들은 합동 기자회견 등을 하여 국민에게 이를 알린 후 국민 여론을 토대로 합리적인 주장 을 관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며 세월호특조위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지시를 했다.

2015년 2월 14일 5명의 새누리당 추천 위원(조대환, 고영주, 석동현, 차기환, 황전원)은 기재부·행자 부·해수부에 세월호특조위 회의에서 의결되지 않은 자체 직제 시행령안을 발송하고 2015 년 2월 15일 자체적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2015년 2월 25일에는 제1차 당·정·청 정책 조정협의회가 개최되어, 세월호특조위의 직제 및 예산을 해수부가 관계 부처들과 협의해 만들겠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청와대, 해수부, 여당, 여당 추천 세월호특조위 위원들이 긴밀 하게 협조하며 움직인 탓에 세월호특조위는 출범 전부터 독립성을 심각하게 침해받았다. 세월호특조위・시민사회의 저항과 정부·여당의 시행령 밀어붙이기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1월 중순부터 청와대와 해수부, 여당 추천위원들이 협조하여 조직적으로 설립 과정을 방 해했음에도 세월호특조위는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2015년 2월 17일 세월호특조위 설 립준비단은 행자부, 기재부, 해수부에 직제 및 예산안을 제출했다. 같은 날 여당 위원들은 별도로 관계 부처에 조직·예산 축소 요구서를 제출했는데, 이러한 여당 추천위원들의 행 동으로 세월호특조위 내부에서 두 시행령안이 대립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3월에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기춘에서 이병기로 바뀌었지만, 주간 단위 세월호특조위 관련 동향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세월호특조위는 2015년 3월 5일 행정자치부(행자부) 장관과 면담 하고, 다음 날인 3월 6일에는 기획재정부(기재부)를 방문해 협의를 진행했다. 행자부는 대외적 으로는 세월호특조위안을 우선하여 검토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해수부가 세월호특조위안 에 대해 1차 검토를 하고, 해수부 입장이 반영된 안을 정식으로 통보하면 이를 ‘엄중하게 검 토할 예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행자부는 ‘청와대와의 교감을 통해’ 세월호특조위 정원을 90명으로 출범시켰다가 업무량 추이에 따라 증원해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한편 기재부 는 ‘세월호특조위의 규모가 커질수록 현 정부에 부담이 되는 사업을 벌일 가능성이 크므로 해수부의 직제안이 아니라 기재부가 만든 직제안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

제5장

211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유가족 측 추천위원이 압도적으로 많아 앞으로 위원회 운영이 이처럼 일방 진행될 가능성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었다. 기재부는 또한 청와대 정무라인 국장급을 통해 기재부 안을 관철시킬 여지가 있는지 탐문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수부뿐만 아니라 기재부와 행자부 또한 청와대 및 관련 부 처 등과 긴밀히 협의하여 세월호특조위 조직 예산 축소 방안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행자부와 기재부를 비롯한 정부 차원의 입장이 정해졌기 때문에, 세월호특조위와 정부 부 처 간 직제 시행령 관련 협의는 진척되기 어려웠다. 2015년 3월 5일 서별관회의부터 세월호 1 주기인 2015년 4월 16일까지 세월호 후속 조치 논의를 위한 관계차관회의가 수시로 열렸는 데, 실질적으로는 이곳이 결정 단위였다. 2015년 3월 5일 서별관 회의는 청와대 정책조정수 석이 주재하고 정무수석, 해양수산비서관, 국무조정실장, 관계 부처 차관 등이 참석한 회의 로, 여기에서 세월호특조위 직제·예산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했고, ‘해수부를 단일 창구로 하여 직제와 예산을 함께 협의’할 것을 결정했다. 2015년 3월 25일 해양수산부 장관 유기준 과 세월호특조위 위원장 이석태의 면담이 진행되었고, 이틀 후인 3월 27일 해수부가 세월호 특조위 시행령 입법을 예고했다. 해수부가 입법 예고한 시행령은 안전사회국과 피해자지원 점검국을 과로 축소하고, 조사1과장 등 요직에 공무원을 파견받아야 하며, 정원도 90명 출 범 후 120명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안으로, 세월호특조위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다. 2015년 3월 29일 세월호특조위는 시행령안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2015 년 4월 2일 제3차 위원회 회의에서 ‘특별법 시행령안 철회 요구 결의문’을 의결했다. 세월호 특조위는 계속해서 정부 측과 협의를 진행하고, 2015년 4월 6일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입 법 예고 마감일에 의견서도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 입장은 강경했다. 2015년 4월 15일 이석 태 위원장은 1주기 전에 세월호특조위 출범 일정과 내용을 제시하라는 대통령 결단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세월호참사 1주기는 추모와 애도의 장이 아니라 시행령 폐기를 요구 하는 투쟁의 장이 되었다. 그런데도 정부 입장이 변하지 않자, 2015년 4월 27일 이석태 위 원장은 농성 돌입을 공표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월호특조위의 강력한 항의에도 결국 처 음 입법 예고된 시행령에서 파견 공무원 수를 소폭 조정한 시행령이 2015년 5월 6일 국무 회의에서 통과되고, 5월 11일에 공포되었다. 세월호특조위는 시행령 공포 후에도 고위직 공무원의 파견 요청을 하지 않는 한편, 시행령

212 제5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시행령에는 세월호특조위 직원 중 최고위직인 행정지원실장 및 기획행정담당관, 조사1과장 같은 ‘요직에 공무원을 파견하도록’ 되어 있었 다. 그러나 세월호특조위는 ‘이런 인사가 운영의 독립성을 저해한다’고 판단해 세 직책에 파 견 요청을 하지 않고 소위원장의 권한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운영 규칙을 만들었다. 이에 관계 부처들은 세월호관계차관회의 등을 통해 이를 통제할 방안을 논의했다. 합법적으로 는 독립적 기구인 세월호특조위에 공무원 파견이나 규칙 개정을 강제할 수 없음이 확인되 자, 이후 기재부는 예산을 집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월호특조위를 압박했다.

2015년 7월 17일 최경환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시행령 직제에 따르면 예산을 집행하겠다”고 말한 후, 결국 세월호특조위는 7월 21일 공무원 파견 을 요청하게 되었다. 공무원 파견 요청에 따라 행정지원실장, 기획행정담당관, 조사1과장 이 파견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행정지원실장은 당·정·청의 세월호특조위 방해 회의에 참 석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한편 8월 국무회의에서 통과한 세월호특조위 예산은 89억 원이 었다. 세월호특조위는 처음 설정한 직제와 예산보다 그 규모가 제한된 형태로 활동을 시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작하게 되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세월호특조위를 흔들어라 세월호특조위 동향을 파악하라 해양수산부는 2015년 5월 12일 ‘세월호 후속 조치 추진본부’를 발족했다. 청와대의 지시 에 따라 2015년 1월 21일에 구성된 ‘세월호 후속 조치 총괄 TF’의 후속조직이었다. 해수부 후속 조치 추진본부는 해수부 차관 김영석을 본부장으로 하여, 세월호 선체인양추진단 (세월호인양추진단)과 배상 및 보상 지원단을 산하에 두었다. 하지만 세월호인양추진단은 이름 과 달리 세월호특조위 동향을 일일·주간 단위로 파악해 청와대·정보기관·관계 부처 등 에 전파하고, 청와대 기조에 맞춘 세월호관계차관회의

안건을 상정하고 논의 결과에 따른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세월호인양추진단 기획총괄과 사무관 I△△는 특정 기관의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와 정보기관에 보고하는 일을 처음 해봤다고 진술했다. “세월호특조위 내부 동향을 특조위 파견 직원에게 받는 것이 당시에도 내가 할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13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업무가 아니라 생각했고 과한 지시라고 생각했다.”

해수부 세월호 후속 조치 총괄 TF와 세월호인양추진단은 세월호특조위 동향 보고 문건

을 정기적으로 작성해 청와대 등에 보고했다. 사참위가 입수한 ‘해수부 작성 세월호특조 위 관련 일일·주간 상황보고 문건’은 약 350여 건으로 여기에는 세월호특조위가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조사 신청 및 진행 사항 등이 적혀 있었다. 2015년 8월 13일경 청와대 해양 수산비서관 윤학배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해수부 문건에는 세월호특조위 조사에 대 응할 방안과 원칙이 수립되어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소극적 협조’라는 항목을 넣어 법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조사를 지연시킬 수 있는 방법 등이 포함되었다. 2015년 9월 21일 해양수산부 과장급 회의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공유되었다.

해수부는 이러한 행위들이 세월호특조위의 독립성을 해하는, 외부로 알려지면 문제가 될 수 있는 행위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기획총괄과 I△△는 여기에 ‘비공식적으로 파악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절대 대외 유출 주의’라며 관련자들에게 메일을 보냈고, 세월호인양추진단 기 획총괄과장 K△△은 사참위 조사에서 “상식적으로 해수부 공무원들도 적절하지 않았다고 인지했을 것”이라고 답했으며, 해수부 운영지원 과장 역시 9월 21일 해양수산부 과장급 회의 에 대해 ‘세월호특조위 조사 활동에 비협조할 목적으로 당시 과장급 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냐’는 취지의 질문에 한참을 침묵하다 “이런 회의를 왜 했는지 참……”이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에도 또 사후에도 부적절한 행위였음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었다.

214 제5장
해수부가 세월호특조위 동향을 파악한 것은
제목 발신자 발신부서 발송일자 수신자 첨부파일명 특조위 조사개시현황 I△△ 기획총괄과 20151006122904 M△△ 접수 및 조사개시 동향(10.5).hwp 특조위 조사개시 동향 자료를 보내드리니, 관련 담당자에게 전파 부탁드립니다.
청와대 에 보고를 하기 위한 목적 뿐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중이며, 파악되는 대로 또 공유토록 하겠습니다. 붙임 자료는 비공식적으로 파악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니 절대 대외주의 해주시기 바랍니다.
5-2 해수부 온나라 이메일 수발신 내역 및 I△△의 이메일 본문 내용(2015. 10. 6.)

대응 원칙

소극적 협조

특별법 제51조 및 제53조에 따라 정당한 이유 없이 자료 미제출시 과태료(3천만 원 이하), 청문회 미출석 시 징역 (3년 이하) 또는 벌금(3천만 원 이하)이 부과됨 ㅇ 특조위의 요구 내용을 분석해 지연 제출, 제공사항 최소화 및 동행명령장 발부 시(2회 이상 출석요구 불응 시)까지 미출석 등의 방법으로 대처

특조위 활동에 일관되게 대응하기 위해 제출자료 등 특조위

방해라는 불필요한

세월호특조위의 해수부 조사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해수부 공무원들은 어떤 조사 사건이 신청되는지 신속하게 보고했다. 2015년 10월 5일에는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조사 신청 접수 및 조사 개시 결정 관련 동향(10. 5.) ○ 특조위 전원위원회(10. 5.)에서 총 17건의 안건이 상정, 이 중 15건*(우리 부 관련 3건)은 조사 개시 결 정 및 2건은 소관 소위원회 조정 * 부처별로 우리 부(3건), 안전처(8건), 국방부(2건), 국정원(1건), 검찰청(1건), 문화부 및 방통위(1건), 교육청(1건) 등이 관련

제5장

215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활동 대응현황을 관계 부서 간 사전 사 후 공유 추진 ③ 대응 상황
구조 활동 방해’ 등 해수부를 조사 대상으로 한 사건이 신청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해 해수부는 조사 대상이 되는 관련 부서들에도 이 사실을 전파하고 범정부 차원의 대응 방 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ㅇ 조사 활동
그림 5-10 세월호 후속조치 추진현황 보고 내용 (2015. 8. 13.) 그림 5-11 특조위 조사신청 접수 및 조사개시결정 관련 동향 보고 내용 (2015. 10. 5.)
자료제출 요구 등에 대해 비협조 시 과태료, 벌금 부과* 등은 물론 진상규명 방해 비난 초래 우려
*
부내 정보 공유
대외주의
논란과 관련 제재를 차단하기 위해 대응 현황에 대해 비공개 원칙 준수
특조위
□ 향후 계획 ○ 관련 부서(해사국 등)에 내용 전파(인양단), 동건 관련 특조위의 조사 진행 경과에 따라 관계 부서 간 대응 계획 논의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해수부는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데 책임이 있는 부처이자, 독립적인 위원회인 세월호특조

위의 조사 대상 부처였다. 해수부가 세월호특조위의 내부 정보를 파악할 권한이 없음을

고려할 때, 해수부가 세월호특조위 동향, 조사 내용 등을 파악해 청와대를 비롯한 관련 부 처 및 해수부 내부에 전파하고, 세월호특조위의 조사에 대응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 것은 세월호특조위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부적절한 행위다. 해수부 외에 국정원도 계속해서 세월호특조위 방해에 동참했다. 국정원은 2014년 9월부 터 2016년 10월까지 세월호특조위 대응 TF를 국정원 내부에서 운영했다. 세월호특조위의 ‘국정원 관련 조사 현황’을 공유하고, 조사 대응 계획 등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TF의 주요 업무였다. 국정원은 세월호특조위의 진상조사가 박근혜 국정 운영에 방해가 되며, 국

【2015 성과】

ㅇ 세월호특조위의 부조리 운영실태 및 反정부 활동 기도 폭로

- 비판성향 인사들의 특조위내 파견공무원에 대한 인신공격 실태·건전인사 건너뛰기식 편법 보고체계 등 문제점을 적출, 보고

- 청와대·院 등을 겨냥한 조사안건 논의 배후동향과 1차 청문회(12.14~ 16) 쟁점화 사항· 여론전 전략 등 사전 입수, 대처 지원

* ‘세월호특조위 내부, 대통령님 행적 조사건 배후로 000 지목’(12.3), ‘세월호 조사위 청문회 추진현황 및 증인선정 방안’(11.17) 등

216 제5장
【2016 계획】 ㅇ 세월호특조위의 혈세낭비·정치편향 행태에 대한 공분 확산
- 연간 막대한 예산(2015년 89억원·2016년 62억원)을 지출하면서도 정부비판 소재찾기에만 골몰하 는 점을 집중 부각 * 유가족 추천 000위원(000)조차 “조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며 특조위의 업무성과 미흡을 강도높게 비판 (2016.1.11) - 3월중 2차 청문회 추진·특검 국회의결 요청이 4월 정치일정에 영향을 주기 위한 포석임을 입증하는 자료 입수, 비판여론 견인 * 2차 청문회시 청와대·院 인사를 출석시켜 정부비판 여론 조정 시도 가능성 농후 그림 5-12 세월호특조위의 反정부 활동 견제 문건 내용 (2016. 1. 12.)
유도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동 견제”(2016년 1월 12일)에는 2015년 성과와 2016년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국정원은 세월호 특조위의 운영실태와 반정부 활동 기도를 폭로하고, 청와대와 국정원을 겨냥한 조사 안건 논의의 배후 동향과 1차 청문회 쟁점화 사항, 여론 전략 등을 사전 입수해 대처를 지원한 것을 2015년 성과로 기록했다. 2016년 계획으로는 세월호특조위와 관련해 부정적인 여론 확산을 유도하고, 2차 청문회 관련 자료를 입수해 비판 여론을 견인하겠다고 적었다. 또한 국정원 자신도 세월호특조위의 조사 대상이었기 때문에 국정원 역시 해수부와 유사하게 세월호특조위가 공식적으로 홈페이지, 보도자료 등을 통해 조사 내용을 공유하기도 전 에, 국정원 조사와 관련해 어떤 안건이 언제 상정되는지, 관련 조사 내용은 무엇인지, 진행 현황은 어떠한지를 확인해 내부적으로 대비했다.

이처럼 해수부와 국정원 등 조사 대상은 권한을 남용해 독립적 조사기구인 세월호특조위 의 조사 진행 상황을 미리 파악해 대비하고, 조사 활동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방해했다.

세월호특조위 구성원 사찰과 ‘조사관 채용 배제’ 시도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특별법 제정 운동 당시부터 유가족과 이른바 ‘종북좌파 세력’이 연계되면 안 된다는 상황 인식하에 과도한 사찰과 탄압을 진행했던 청와대는 세월호특조위에도 ‘종북좌파 세력’이 진입해 정권 비판적인 내용을 조사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판단 아래 청와대는 세월 호특조위 설립준비 민간위원·세월호특조위원·별정직 채용 예정자·별정직 조사관들의 정치 성향을 확인하고, 동향을 파악했다. 2015년 6월은 세월호특조위의 별정직 공무원 채용 절차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 행정관 M△△의 업무수첩(2015년 6월 29일)에는 “① 세월호 민간 채 용 관련 OK – 면접 등으로 대충 윤곽 나옴. 새정연 출신.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출신 세

월호 유가족 출신도 있음 – 명단 확보 요청(연원정 行) → 부처별 파견 후보자 명단 요청(연원 정 行)”이라 기재되어 있었다. 위원 선출 과정에도 개입한 청와대는 이렇게 별정직 조사관 채 용도 통제하려 했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17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정원도 세월호특조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세월호특조위 동향 파악과 대응 방안 수립을 진행했다. 사참위가 열람한 국정원 문서 중 “세월호특조위의 反정부 활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2015년 7월 1일 실수비회의에서 비서실장 이병기는 세월호특조위 별정직 공무원에 이념 편향성 인사들의 신청이 많다고 언급하며, 세월호특조위 조사 활동이 종북 활동에 이용 되지 않도록 신원조회 과정에서 이들을 잘 걸러내라고 정책조정수석, 민정수석, 경제수석 에게 지시했다. 관련 문건은 <그림 5-13>와 같다.

그림 5-13 비서실장 이병기 지시사항 2015년 7월 1일 실수비회의 결과 문건

국정원도 청와대와 마찬가지로, 세월호특조위가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조사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세월호특조위 조사관으로 채용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세월호 후속 조치 관련 참고사항(2015년 7월 10일)’141) 문건에 따르면 국정원은 ‘세월

세월호 후속 조치 관련 참고사항, 29999 / 목: 세월호 후속조치 관련 참고사항, 2015. 7. 10. 07:05 → 공무원 파견기관(12개, 36명) 장·차관 책임 아래 유능한 직원 위주로 배치, 내부견제 기능 강화 → 건전언론과 협조, 民間 직원들의 과거 행적 등 이념 편향성을 부각, 활동 중립성 훼손 여부를 감시 조직

<붙임 2> 2. 현안별 대응방안 【 특별조사委 활동 】 (박스) ㅇ 비판세력들의 조사 활동 개입 시도 등 정치투쟁에

218 제5장
141) 국가정보원, “국정원 보고서 연번 29999”. 나서는 초기 단계부터 단호 대처 ㅇ OOO 등 전문시위꾼에 대한 구속영장(세월호 1년 불법시위 주도) 신속 집행 주요 쟁점 대응방안 조직 운영 비판성향 民間직원 다수 채용

4・16세월호참사

호특조위에 비판 세력들이 들어와 조사 활동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할 경우 초기 단계부터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며, ‘세월호특조위에 공무원을 파견해야 할 12개 기관이 장·차관 주도

하에 유능한 공무원을 파견해 내부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건전언론과 협조해 세월호특조

관련 내용

○○○○○○청

- 합격자 중 구 통진당에서 강성 당으로 활동한 전력의 인물이 다수 있는가 하면

- 참여연대·사회진보연대·우리사회연구소·노동건강연대·흥사단 등 좌파단체 활동 전력자들이 15명을 넘어 이들의 신원조사에 애를 먹고 있다면서

* 좌파 전력자들의 신원조사 결과서에 활동 전력을 상세히 기록할 예정이나 최종 판단은 특조위가 하기 때문에 특조위 야당 위원들이 다수의 힘으로 합격시키지 못하도록 보수언론·단체 등을 통한 여론 플 레이가 필요하다고 지적

- 만약 이들이 신원조사를 통과해 특조위에서 최종 합격 판정을 내릴 경우 특조위가 좌파 세력들에 의 해 좌지우지되어 정부에 큰 부담은 물론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상

ㅇ 따라서

제5장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 ○○○○○○청에서는 신원조사 종료 후 다수 좌파단체 전력자들이 특조위에 들어갈 경우 전국의 구 통진당 세력 및 좌파단체들과의 연계를 통해 정부 흔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 차주 중(일시 미정) 정보국장 주재로 경찰청·서울시경은 물론 전국 지방청에서 구 통진당 등 좌파단체 담당 정보관들을 모두 모아 전체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며

-

각종 집회·시위 발생 시 불법 사항 채증을 면밀하게 진행 향후 특조위의 정부에 대한 무리한 요구 시 반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19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위 내 민간 직원들의 과거 행적 등 이념 편향성을 부각해 감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202. 2015-07-17 경찰청 세월호특조위 본격화 대비, 전국 좌파 담당 정보관 회의 개최 예정 (중략)
서울시경 관계자들은 -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별정직 공무원 최종 합격자를 발표한 후 경찰청 주관으로 합격 인원에 대해 마지막 신원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박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침을 내릴 계획이라고 언급. 끝. 국정원은 경찰청의 신원조회 과정에 주목해 이에 대한 정보를 문건으로 남겨두었다. 국정 원 문건 ‘경찰청 세월호특조위 본격화 대비, 전국 좌파 담당 정보관 회의 개최 예정’(2015년 7
- 동 회의에서 특조위 인적 구성이 마무리되면 활동이 본격화될 것에 대비해 전국 좌파 세력의 특조위와 의 연계 동향 및 대정부 투쟁을 위한 특조위 지원 분위기를 면밀히 파악하라고 지시할 방침이고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월 17일)을 보면, 서울시경 관계자들은 세월호특조위 별정직 공무원 합격자에 대한 신원조

사 결과 구 통진당에서 활동한 전력의 인물이 있고 참여연대 등 좌파단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은 15명이 넘는다고 파악했다. 경찰청은 아래 문건에서 보이듯이 신원조사 결과

서에 좌파단체 활동을 했던 전력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보수언론과 단체를 통해 여론전을 진행해 이들을 불합격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인 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별정직 조사관 가운데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는 이들을 신원조사 과정을 통해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경찰청은 국가보 안법을 위반한 사람 3명, 집시법을 위반한 사람 6명 등을 확인하고 신원조회 결과서에 적 고자 했으나, 해당 인물들의 형 집행이 종료됐거나 사면 복권 또는 공소시효 만료로 이 경 우에도 법 위반 전력을 기재할 수 없었다. 경찰청은 ‘좌파를 걸러내지 못하는 공무원 신원 조회’에 실효성이 있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5-07-29 경찰, 세월호특조위 별정직 공무원 신원조사 관련 실효성 의문 제기 (……) - 경찰 내부적으로 이번 세월호특조위 임용 예정자 중에 국보법·집시법 위반 및 좌파단체 전력자 다수 를 신원조사에서 걸러내려고 했으나 결국 음주운전 경력자 2명밖에 회보서에 적시하지 못했고

* 경찰청은 내심 특조위 신원조사 대상자 중 좌파단체 가담자들의 과거 전력을 상세히 기록해 특조위에 통보한 후 여당 측 위원들을 통해 최종 합격자 선정 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토록 할 방침이었으나 무산되 었다고 지적

- 세월호특조위는 경찰 신원조사 회보서를 근거로 31명에 대해 모두 적격 판정을 내리고 7. 27. 최종 합 격 처리를 했다면서

- 지금까지 별정직 공무원은 소수가 채용되는 것이 일반직이어서 규정상 공안직과 같은 상세한 신원조 사 회보서가

220 제5장
작성되지 않았으나 - 세월호특조위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구에서 다수의 별정직 공무원을 채용하는데 개인정보보 호 등을 이유로 과거 문제 경력을 상세히 기록조차 못 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 향후 세월호특조위와 같은 한시 기구의 별정직 공무원 다수 채용에 대비해 관련 신원조사 규정을 개 정, 신원조사 기관이 상세한 전력을 통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적 구성 자체에서부터 정치적 편향 성을 방지함과 동시에 공정성을 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 끝.

4・16세월호참사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경찰청의 ‘박근혜 청와대에 비판적인 조사관 채용 배제’ 계획은 경

제5장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청와 대 실수비 회의에서 ‘특조위에 구 통진당 당원들이 채용되거나 채용 움직임(총 31명 중 4명)이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 이를 점검해 사실일 경우 언론에 자연스럽게 알릴 것’이라는 취지 의 지시를 했다. 사참위에서 청와대의 지시와 국정원의 대응 방침이 실제로 실행되었는지 까지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2015년 9월경 보도된 언론 기사에 ‘보수단체들이 세월호특조

221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찰이 법리에 따라 업무를 진행해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청의 행위가 미수에 그쳤 다 하더라도, 국가기관인 경찰청이 이미 시효가 지난 법 위반 전력과 개인의 경력·정치적 활동을 조회해 청와대 및 국정원 등에 이를 제공하고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려 했던 것은 경찰청이 정치적인 이유로 개인을 선별하고 차별적으로 처우한 인권침해 행위다. 한편 이들의 행동은 별정직 조사관 채용 배제 시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국정원은 야당 및 유가족 추천 상임위원, 설립준비단 민간 전문위원, 별정직 조사관을 사찰했다. 2014년 12 월 18일 국정원은 불상의 부서에 야당(5명) 및 유가족(3명) 추천위원의 과거 특이사항 관련 정보를 긴급 요청했고 바로 다음 날 총 특이사항 96건을 수집했다. 이때 국정원이 요청한 특이사항은 ‘종북 논란 등 문제 될 사례, 정치 편향적 언행, 도덕적 결함’이었다. 반면에 여 당 혹은 법원 추천위원의 ‘문제 될 사례’, ‘도덕적 결함’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는 기록은 확 인되지 않았다. 세월호특조위 출범 후에도 국정원은 세월호특조위 직원 및 위원의 측근 을 통해 야당·유가족 추천위원들의 발언과 행동을 지속적으로 확인해 보고하는 사찰 행 위를 이어갔다. 또 설립준비단 민간 전문위원의 과거 이력을 확인해 ‘10명 중 7명이 국가보 안법 위반 전력자 등 비판 인물로 충원돼 조사의 공정성 확보에 의문이 제기된다’는 취지 의 보고를 청와대 등에 한 정황도 확인됐다. 국정원은 별정직 조사관 1차 채용이 끝난 이 후에도 세월호특조위 인원 증원 및 추가 채용 등에 대비해 ‘인사 중립성 제고와 함께 예산 편성 사용에 대한 내·외부 감시 강화 등 견제장치 보강’, ‘건전 언론·단체 등과 협조해 세 월호특조위 편향적 운영·활동 및 외부 세력의 개입사례 등을 지속 비판 부각’할 계획 등 을 수립해 내·외부에 보고했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별정직 조사관 신원 특이사항’을 폭로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별정 직 조사관 채용이 끝나고 출근을 앞두고 있던 2015년 7월 22일 비서실장 이병기는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위 별정직 조사관들의 경력을 요구하며, 통진당 등을 언급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아 이들

에게 청와대, 국정원이 관련 자료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는 국가기관이 정권

유지를 위해 사찰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민간에 전파·활용한 불법 행위가 실행되었을 가 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청와대의 보수단체 지원을 통한 세월호특조위 활동 방해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참사 이전부터 보수단체를 지원해 정권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2009년 국정원 심리전단 주요 업무 보고에 ‘보수 세력 역량 강화 지 원’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명박 정부 때도 보수단체를 지원했으나, 박근혜 정부 부터 더욱 강화됐다.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Y□□ 등의 진술에 따르면, 비서실장 김기춘이 취 임하면서 ‘좌파 배제, 우파 보강’ 기조로 청와대 분위기가 바뀌었고 점차 강해졌다. 정보기관과 청와대는 박근혜 정권에 우호적인 보수단체를 동원해 세월호특별법 제정 운 동 당시는 물론, 세월호특조위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방해 집회, 시위, 광고, 칼럼 게재, 고 발 등을 기획해 세월호특조위 비난 여론을 조성했다. 청와대 정무수석 국민소통비서관실 에서는 보수단체의 세월호특조위 관련 대응 현황을 지속적으로 파악 관리했다. 다음 절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2015년 11월 23일 박근혜 대통령의 2014년 세월호참사 당 일 행적 조사를 포함한 ‘청와대 등의 참사대응 관련 업무 적정성 등에 관한 건’ 조사 개시 의결은 청와대가 가장 강하게 막고자 한 조사 사건이었다. 이때 보수단체가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이나 세월호특조위 사무실 앞에서 ‘세월호 전원 회의 개최 무력화’ 집회, ‘세월호특조위는 월권행위를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 라는 내용의 기자회견 등을 진행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222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이처럼 박근혜 정부 시기 청와대는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정권에 우호적인 여론 형성을 위해 보수단체 활용 및 지원 방침을 세우고 계획을

수립하여 실제로 실행했다. 청 와대의 세월호특조위 방해 행위는 청와대를 지지하는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취득한 보수 단체의 여론전을 통해 뒷받침되었으며, 피해자에게 2차·3차 피해를 입혔다. 그림 5-14 세월호특조위 보수단체 대응 현황(2015.11.)

제5장

223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대통령 7시간 조사 관련 대응과 세월호특조위 무력화

세월호특조위는 2015년 9월 14일 신청 사건 접수를 개시했고 2016년 3월 11일에 마감했

다. 2015년 9월 29일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기관을 ‘청와대 및 대통령’으로 특정한 조사신

청서가 세월호특조위에 접수되었고, 10월 16일에 ‘청와대 등의 참사대응 관련 업무 적정 성 등에 관한 건’이라는 사건명으로 검토보고서가 작성됐다. 검토보고서에 따른 다섯 가 지 항목의 조사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대통령 및 청와대의 세월호참사 관련 지시사항

② 청와대 지시사항에 따른 각 정부 부처의 지시이행 사항

③ 각 정부 부처에서 청와대로 보고한 사항

④ 구조구난 및 수습 지휘 체계에 따른 청와대 및 정부 부처 책임자들의 행동에 대한 위법사항

⑤ 재난 수습 ‘컨트롤타워’에 대한 전반적인 사안

해당 사건은 2015년 10월 20일 제4차 진상규명소위원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4차 회의 에서는 별다른 이견 없이 조사 개시가 의결됐으나, 10월 27일 제5차 진상규명소위원회에서 고영주·차기환 위원이 ‘참사 당일 대통령 행적 사항, 대통령 7시간’이 조사에 포함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세월호특조위 설립 방해 때 작동한 여당 추천위원, 해수부, 청와대의 협조 관계가 다시 긴밀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해수부는 ‘세월호특조위의 청와대 조사 동 향’을 파악해서 청와대에 보고했고, 이병기 비서실장은 10월 3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 월호특조위에서 ‘사고 당일 VIP 행적’을 조사 안건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 건이 채택되지 않도록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는 이 조사 사건에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 고, 진상 규명 소위에서의 논의 절차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이외에 도 전원위원회에 청와대 조사 안건이 상정된 11월 23일 전까지 ‘세월호특조위의 청와대 행 정 조사 건이 의결되지 않도록 주무 부처인 해수부가 책임지고 세월호특조위 부위원장, 여 당 추천위원들 간 긴밀히 협의해 대응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여러 번 했다.

224 제5장

연번 세월호특조위 청와대 행적조사 관련 청와대 비서실장

1 2015. 10. 30. 실수비 회의결과 2 2015. 11. 11. 실수비 회의결과 3 2015. 11. 13. 실수비 회의결과 4 2015. 11. 16. 실수비 회의결과 5 2015. 11. 20. 실수비 회의결과 6 2015. 11. 22. 실수비 회의결과

행적을 조사한다 는 내용을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세월호특조위의 의결 전부터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 이 병기, 정책조정수석 현정택, 정무수석 현기환, 인사수석 정진철, 경제수석 안종범을 중심 으로 세월호특조위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행적 조사 의결을 막기 위한 대응 조치가 진 행되고 있었다. 조사 개시가 의결되자, 의결 직후에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비서 실장 이병기는 “세월호특조위가 청와대 대응 5개 사항(VIP 7시간 행적 포함 논란)을 조사하는 내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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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015년 11월 23일 오전, 세월호특조위 제19차 전원위원회에서 ‘2015-42-다-19 청와대 등 의 참사대응 관련 업무 적정성 등에 관한 건’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이병기 지시 사항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표 5-3 세월호특조위 관련 이병기 지시 사항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용의 안건을 전원위원회에 상정, 처리하는 것은 명백한 일탈이자 월권행위인 만큼 해수부 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응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청와대와 해수부, 국조실, 새누리당 등이 모여 대응 계획을 논의하고, 이를 문건으로 작성해 청와대 내 수석에게 공 유했다. 해당 문건에는 “당정 간 협의, 특조위 협조 전면 중단 검토 추진”, “여당 측 추천위 원(5명 사퇴)”, “특조위 예산 삭감 및 ‘16년 예산 배정 보류”, “공무원 추가파견 전면 재검토, 감 사원 감사 청구 등”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었다. 청와대 해양수산비서관실 행정관 M△△ 의 진술에 따르면, 해당 대응 계획은 비서실장 이병기와 대통령 박근혜에게까지 보고됐을 것으로 추정된다.142)

조사 개시 의결 이틀 뒤인 25일 수석비서관회의 결과에는 “세월호특조위의 청와대(VIP) 조

사결정(11. 23.) 관련 법적 검토 결과, ① 특조위 의결의 절차적 위법성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 ② VIP 행적 조사는 명백한 한계 일탈 및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③ 다만 위헌 여부 문

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 필요가 있으므로 이러한 결과를 공유하고 공동 대응해주기 바람”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청와대가 빠르게 대응 논의를 진행했을 뿐 아니 라, 의결 과정에서 위법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세월호특조위의 조사 활동을 방 해했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는 먼저 세월호특조위 진상규명국장 임명을 가로막았다. 청와대는 아직 조사 개시 가 의결되기도 전인 2015년 11월 20일 진상규명국장 임용을 중단했다. 세월호특조위 진상 규명국장 예정자는 전날인 11월 19일 인사처로부터 인사심사 통과 사실을 통지받은 상태 였고, 청와대의 임용 재가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인사처 내부의 임용 재가안을 인사 처장이 반려하면서 결재 절차가 중단되었다. 사참위 조사에 따르면 세월호 업무 담당 수 석(정무수석 현기환 또는 정책조정수석 현정택)에서 인사수석 정진철로, 인사수석에서 인사처장 이근 면으로 세월호특조위 진상규명국장 인사 중단 지시가 내려왔다. 인사처장 이근면은 ‘정진 철의 요청을 잠시 보류로 받아들여 협조한 것’이라고 했지만, ‘잠시 보류’가 아니었다.143) 142) “각 수석실별로 비서실장이나 대통령에게 간단하게 보고할 사안을 정리한 것입니다. 정책조정수석실에서 취합하여, 비서실장이나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 같습니다.” (“M△△ 조사대상자 진술조서 3회”, (2020.2.7.), 24쪽.). 143)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이근면 조사대상자 진술조서”, (2020.3.12.), 12쪽.

226 제5장

2015년 12월 14일과 2016년 4월 28일 세월호특조위는 인사처에 진상규명국장 임용을 요

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하지만 인사처는 세월호특조위 공문에 회신하지 않고, 진상규 명국장 임용 절차도 진행하지 않았다. 세월호특조위 운영지원담당관실 소속 인사담당행 정사무관 X□□은 공문에 대한 회신이 없자 인사처에 문의했다며 당시 상황과 관련해 “조 규도 팀장이 ‘나중에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 같아 청와대에 공문도 전달하고 법령에 어긋난다 전달하기도 했지만 청와대에서 답이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라고 진술했 다. 결국 청와대는 세월호특조위가 종료될 때까지 진상규명국장을 임명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진상규명국장 임용만 막은 것이 아니라, 관련 정부 부처와 공모해 파견하기로 한 공무원도 파견하지 못하게 했다. 2015년 11월 11일 기점으로 세월호특조위 정원은 90명(파 견 공무원 정원 36명)에서 120명(파견 공무원 정원 48명)으로 확대되었다. 세월호특조위는 기존에 파견 공무원을 추천하지 않은 부처(4개 부처 6명)와 11월 이후 공무원을 파견해야 하는 부처(9개 부 처 12명)에 파견 요청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2015년 11월 12일 기재부 소속 공무원 1명이 파 견된 것 외에는 세월호특조위가 종료될 때까지 단 한 명의 공무원도 추가로 파견되지 않 았다. 세월호특조위 운영지원담당관실 소속 행정사무관 X□□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진술했다. “공문을 보내고 모든 부처의 파견 담당자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사실 부처에서도 파견을 보내면, 해 당 직위가 비어 승진 수요가 생기기 때문에 파견 자체를 꺼리진 않습니다. 그런데 세월호특조위의 경 우 각 부처에서 파견하는 것 자체를 꺼렸고, 공무원 파견과 관련해 인사처와도 몇 번 협의를 진행했는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227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데 인사처에서도 당시 이유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곤란해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15년 11월 19일 해수부 차관 윤학배는 세월호특조위의 참사 당일 대통령 박근혜 행적 조사 건에 대응하기 위해 ‘세월호특조위 공무원 파견 중단’ 등을 포함한 대응책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기, 정책조정수석 현정택에게 보고했다. 이들은 세월호특조위가 박근혜 대 통령의 참사 당시 행적을 조사 범주에 포함할 경우 ‘세월호특조위에 대한 공무원 추가 파 견을 전면 재검토’한다는 계획을 함께 수립했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그림 5-15 윤학배 메모(2015. 11. 19.)

1. 머니투데이 보도 件

2. 대응 현황

① 11. 19: 여당 측 위원 기자회견

새누리당 성명서

* 원내대표 최고회의 ↳당정(15:00)

② 11. 20(金)

○ 예결위(계수조정소위): 해수, 특조

○ 농해위 안효대 간사 대응 ↳문○○ → -

○ 특조위 위원장: 장관면담 件

* 日요일 당정청 예정

③ 11. 23(月)

○ 특조위 전원위원회: 최종결정시.

부 image 안 좋다 언짢아 하셨다(매우)

23일 가능하면 부결시켜라

1) 특조위 여당측 추천위원(5) 사퇴, 대법 추천(2)명 추가 사퇴

2) 특별법 개정안 여당 발의 - 위원회 구성 기능 재편 내용

* 필요시 특조위 폐지법안 발의

3) 위원장 등(특조위) 검찰 고발 및 사퇴 촉구 요구 * 위원장: 4.29피고발(자유청년연합) * 박종운: 피고발 4) 감사원 위법 탈법 감사 청구 5) 특조위 활동기간. 예산 지원. 공무원 추가파견 전면 재검토 6) 16년도 예산 배정 금지 등

⑤ 현재 파견中: (파견공무원 해수부서 챙겨라 모두 ok(대응방안) 현직자 갈등) 격려 등(파견공무원들) 파란 글씨체

그림 5-16 윤학배 메모 편집본(2015. 11. 19.)

228 제5장
실장님 ◎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수사 요청서를 접수했다. 2020년 5월 28일 검찰 세월호특수단은 수사 요청 대상자 19명 중 비서실장 이병기, 정책조정수석 현정택, 정무수석 현기환, 인사수석 정진철, 경제수석 안종범, 인사처장 이근면, 해수부 장관 김영석, 해수부 차관 윤학배 총 8명을 불구속 기소하였다. 2020년 12월 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020고합412> 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229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특조위의 민간인 채용과 관련 특 조위에서 자체적으로 채용조건을 만들어 인사처와 협의하게 되어 있으므로 협의 과정에서 144) 사참위는 세월호진상규명국장 미임용, 공무원 미파견 건을 조사하여, 2020년 4월 21일 제57차 전원위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혐의로 19명에 대한 ‘수사 요청안’을 의결했고, 2020년 4월 23일 검찰청에
2015년 11월 20일 청와대 인사수석 정진철을 포함한 인사혁신비서관실 행정관은 ‘세월호 특조위 공무원 파견 보류’를 결정하고 인사처에 지시했고, 11월 23일 세월호특조위가 청 와대 조사 개시를 결정하자, 인사수석실은 인사처에 세월호특조위 공무원 파견을 중단하 라고 지시했다. 인사처는 이에 협조하여 세월호특조위에 공무원을 파견해야 할 10개 부처 인사 업무 담당자에게 연락해 청와대 지시사항을 전파하기도 했다.144) 세월호특조위는 2016년 2월 17일 미파견 공무원 17명에 대한 파견 요청 공문을 10개 부처 에 재발송하고, 정례 브리핑 등을 통해 공무원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각 정부 부 처들은 이 공문에 회신하지도 않은 채 소속 공무원을 보내지 않았다. 2015년 11월 12일부 터 2016년 2월경까지 세월호특조위의 미파견 공무원 결원은 17명(35.4%)이었고, 3월과 5월 에는 각각 1명이 복귀해 2016년 6월 30일에는 19명(39.5%) 결원이었다. 청와대의 세월호특조위 무력화의 끝은 2016년 6월 30일 세월호특조위 강제종료였다. 특 별법 규정에 따르면 세월호특조위의 활동 기간은 ‘구성을 마친 날’로부터 1년 6개월이다(기 본 1년, 연장 6개월). 세월호특조위가 조사관을 채용하고 예산을 집행하기 시작한 것은 각각 2015 년 7월 27일과 8월 4일이었기 때문에 세월호특조위는 8월 4일부터 활동을 기산해야 한다 고 보았다. 그러나 정부는 세월호특조위 조사관 채용 전부터 이미 활동 기한 축소를 논의하 고 있었다. 2015년 5월부터 세월호관계차관회의에서 특조위 기산일 관련 검토가 이뤄졌다. 당시 정부는 세월호특조위 활동 기산일을 세월호진상규명법 시행일(2015년 1월 1일), 임명 절 차 완료일(2015년 2월 26일), 시행령 시행일(2015년 5월 11일), 사무처 구성 완료일 등 다양하게 해석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국조실장, 세월호특조위 제기 예상 쟁점 검토회의(2015.5.15.)’ 문 건에는 전날인 5월 14일 개최된 비공개 세월호관계차관회의 참석자와 회의 당시 국무조정 실장이 지시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객관성 전문성 보유 여부 등을 꼼꼼히 살펴볼 것”, “예산이 적정 예산이 되도록 살펴볼 것”

외에도, “특조위에서 사무처 직원 구성 시를 활동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 것으로 예

상되지만, 정부가 특별법 시행 시점인 2015년 1월 1일과 위원 위촉 시점인 2월 17일 중에 고

민하고 있는 만큼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법적 타당성 시점을 검토”하라고 적혀 있다. ‘특조위 기산일을 2015년 1월 1일로 고수’하는 것은 세월호특조위의 참사 당일 대통령 행 적 조사 의결 이후 분명해졌다. 2015년 11월 24일 국정원 문건145)에 따르면 해수부는 특조 위 기산일과 관련해 “당초 특조위원장이 임명장을 받은 시점이 금년 3월 9일임을 감안하 여 2개월가량 활동 기한을 연장하는 쪽으로 중재안을 제시해 왔으나 이제는 이마저도 없 다며 원리 원칙에 따라 대응해 나가겠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2016년 4월 21일 개최된 세월호관계차관회의에서도 “정부의 현행법 해석의 일관성(활동 기산일 2015. 1. 1.)을 유지”하기 로 결정됐다. 당시 법제처는 ‘활동 기산일을 위원 임명에 대한 대통령 재가일(2015년 2월 17일)

로 보는 것이 해석상 논리적이나 현시점에서 입장을 변경하는 것은 일관성이 결여된다’는 취지의 입장을 내놓았고, 법무부는 ‘법제처가 유권 해석을 할 경우 향후 사법기관이 상이 한 판결을 내리면 문제 발생 소지가 있다’는 취지로 의견을 제시한 상황이었다. 2016년 4월 21일 세월호관계차관회의의 결정은 이처럼 세월호특조위 기산일을 2015년 1월 1일로 해 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인지한 상태에서, 정부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함으로써 관철시 려는 것이었다. 이를 보았을 때, 사실상 2015년 11월 23일부터 청와대와 정부, 새누리당은 세월호특조위 기산일을 2015년 1월 1일로 고수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이것이 2016년 4월 21일 세월호관 계차관회의에서 관련 부처 차관들에게 재전파되고 확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호특조 위 활동 기한에 대한 여야 간 입장 차이와 국회 내 논의가 계속되는 와중에, 결국 정부는 2016년 6월 30일에 특조위의 조사 활동 기간을 만료시킨다. 세월호특조위의 박근혜 대통령 행적 조사 개시 결정 이후로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방해 행 145) 국정원, “해수부, 세월호특조위에 원리 원칙에 입각하여 대처 방침”, (2015.11.24.).

230 제5장

정부는

3.

피해자는 어떻게 불온 세력으로 몰렸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세월호참사는 국가 시스템의 실패를 고스란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 실패를 지켜본 피해 자들과 국민이 다시 사회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이라도 회복해가기 위해, 국가는 피해자들 의 입장을 헤아리고 그에 맞게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세월호참사 발 생 직후부터 국정원, 기무사, 경찰 등 정보기관들은 세월호참사와 이에 대응하는 피해자 가족들의 행위를 ‘국정 부담’ 요인으로 보고, 정부 책임론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며 광범위한 사찰을 진행했다. 국정원, 기무사, 경찰에 정보수집 및 첩보 활동 같은 권한이 있기는 하지만, 국정원은 대공, 146) 공안(公安)이란 ‘공공의 안녕과 질서가 편안히 유지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공안 사건은 이 상태를 파괴하고 붕괴시키는 사건을 가리키는데, 역사적으로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이용해왔다. 국정원, 기무사, 경찰은 법 집행과 치안 및 안보 유지를 목적으로 이러한 공안 사건을 담당해왔다.

제5장 왜 참사를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31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덮으려 했는가
위가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은, 세월호특조위 방해 활동이 세월호참사 당시 청와대의 조치 사항 등에 대한 진상규명을 방해하기 위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과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 등 참사 발생 직후부터 세월호참사 피 해자들의 항의를 반정부 행위로 보고 피해자들을 사찰하고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 고했다. 정보기관은 재난을 마치 공안 사건146)처럼 인식하고 행동했고, 피해자들을 지원 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좌파와 연계해 사회질서를 해칠 수 있는 불온 세력으 로 여겼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피해자들은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으며, 사회적으로는 ‘순 수한 피해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강화되었다. 국정 부담 요인이 된 재난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 등의 정보 수집만을, 기무사는 군과 군 관련 첩보

만을, 경찰은 치안 정보의 수집만을 권한으로 갖고 있다. 이러한 정보기관들의 업무는 본질 적으로 국민 기본권의 제한이나 침해 가능성이 매우 크고, 실제로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선

례도 있었기 때문에 국가가 법률로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점차 이를 제한해왔다. 그러나 세 기관 모두 세월호참사 대응 과정에서 제한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했다.

국정원은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바로 당일에 세월호참사를 국정 부담 요인으로 판단했다. 국정원은 참사가 발생하고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16시 37분에 「140416(세월호) 수습 방 안」을 작성하고, 이 문건을 한 차례 수정해 같은 날 「진도여객선 ‘세월호’ 사고 관련 사후 수습 방안(OOO)」을 작성했다. 국정원은 이때 이미 “사고 초기 구조 인원 발표 혼선 등으로 불신(이) 초래”되었다며 ‘민심·여론(을) 관리’해 ‘정부 책임론’으로 비화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서 ‘피해자 가족·주변 관리’ 등 선제적인 조치를 통해 피해자 들의 불만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에는 언론 보도 추이 를 분석한 문건을 통해 정부 책임론과 각종 음모론이 대두하고 있다고 파악했으며, 다음 날인 4월 18일에도 보고서를 통해 민간 과실로 시작된 세월호 사고가 정부 수습 미흡 등 에 대한 비난 여론으로 전이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세월호참사 사후 대응 과정 내내 오로지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강화되는지에만 관심을 두었다.

2014년 4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밤은 실종자 가족에게도, 정보기관에게도 분기점 이었다. 수색 구조 활동을 지켜보던 실종자 가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유가 있었다. 4

월 16일 오후부터 4월 19일 밤까지도 정부의 위기관리기구들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 했다. 세월호참사 직후 구성된 법정 위기관리기구는 피해 경감을 위한 실질적 조치보다 상부 보고와 의전 수행에 치중했고, 범대본 등 비법정기구 설치 후에도 현장 상황에 관한 분석과 판단에 따라 책임 있는 결정과 지시를 내리기보다 현장여론이나 청와대 지시에 따 라 조치하기에 급급했다. 에어포켓이 있다 해도 생존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자 실종 자 가족들은 더는 참지 못하고 ‘청와대로 가자’며 밤새 행진했다. 행진 대열은 이른 아침에 진도대교에 도착했으나 경찰에 저지당했다. 이 사건 이후 국정원은 세월호참사의 책임이 선장 선원 선사 책임에서 정부 책임으로 전가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국정원은 실종

232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3처는 ‘상황 평가’에서 “미숙한 초기대응으로 對정부 불신 고조” →

4・16세월호참사

기무사

제5장

233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자 가족들이 정부에 항의한 까닭이 정부 조치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실종자 가족 배 후에 정부와 국정원을 비판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국기를 어지럽히는 배 후 세력이 있다는 공안 사건 논리대로 사고한 것이다. 국정원은 비판 세력들이 ‘세월호 사 고’를 빌미로 대정부 불만 여론을 자극해 ‘제2의 광우병 집회’로 확대시키려고 할 것이라 며,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이 배후 조종에 휩쓸리지 않도록 ‘순수 유가족들’로 유가족 대 책위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민 감 정의 ‘집단 분노’로 확산 우려 → 일부 불순세, 南南갈등·국론 분열 조장(희생자 가족 선동, 對정부 부실대응 규탄 분위기 조성/노란 리본·촛불집회의 反 정부 집회로 변질 기도)” 순서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 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므로 사령부 차원의 적극 지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2014년 5월 1일에 국민들이 세월호 추모 집회에 동참하기 시작하자 제2의 광우 병 사태 가능성이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2014년 5월 28일에는 이 전까지 집회 참여를 하지 않던 유가족들이 “참여연대 측에 ‘세월호 대책회의’ 주관 주말 집회에 참여(60~120명)하겠다며 처음으로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면서, “답보 상태이던 촛불 집회, 유가족 가세로 새로운 국면 진입 양상”을 보인다고 판단하고 이를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게 보고했다. 앞서 청와대가 피해자 가족들과 시민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반정부 목소 리로 여기고 계속 억누르려 한 데는 이러한 국정원 보고도 영향을 주었다. 국정원은 청와 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직무 범위를 벗어나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불법적으로 유가족을 사찰하고, 선원재판을 담당한 판사 등의 성향까지 파악했다. 또 이러한 동향 파악과 사찰 내용을 바탕으로 유가족 대책위 활동과 여론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했다. 기무사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다. 2014년 4월 당시 기무사령관이었던 N△△는 2014년 4월 25일, 청와대 중요보고를 한 후 참모장 회의에서 청와대, 국방 장관 및 범정부사고대책본 부에 세월호참사 관련 첩보 및 제언을 제공하기 위해 세월호TF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대간첩·대테러를 담당하는 기무사 3처에서 2014년 4월 29일경 작성된 세월호TF 관련 회 의 설명 자료를 보면, 기무사 역시 국정원의 인식과 비슷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우울·좌절된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경찰도 유사하게 인식하고 계속해서 유가족의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경찰 정보국에서는 다른 주제의 보고서는 거의 쓰지 않았고, 2014년 4월 17

일부터 세월호 이슈만으로 약 3주~한 달가량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다. 세월호참사와 관 련해 경찰이 청와대에 보고한 문건 중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2014년 4월 28일 문건이다. 여기에서 경찰은 실종자 가족이 장례를 마친 후에 정부에 책임을 묻고, 다시 진도로 모여 실종자 가족들과 연합해 행동할 가능성이 부상하고 있다고 보았다. 2014년 4월 29일 보 고서에는 “유족들 스스로가 정치적·이념적 장소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처럼 국정원 기무사 경찰 등 정보기관은 세월호참사의 피해자들을 지원과 위로가 필 요한 대상이 아니라, ‘국정 부담’ 요인으로, 또 소위 ‘불순 세력’(좌파 세력)과 연합해 ‘제2의 광

우병 사태’를 만들 수 있는 세력으로 보고 관리 대상으로 삼았다. 이렇게 인식하고 업무 범위를 넘어선 활동을 한 것은 청와대의 정책 기조에 적극 부응한 결과였다.

‘순수 유가족’ 이야기는 듣겠습니다

“좌파 세력”과 연계될 유가족?

국정 부담 요인이 되지 않게 유가족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국정원은 자신들의 입맛 에 맞는 ‘순수 유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류해내기 시작했다. 참사 발생 4일 차인 2014년 4월 20일, 국정원은 뉴스에 방송된 유가족 거리행진 일행 중 미소를 짓고 있는 중 년남자, 일간베스트 게시물에 등장한 학부모대표 등은 순수 유가족은 아니라는 식으로 동향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세월호참사 실종자 가족의 이름을 특정해 거명하 고, 진보정당에 가입해 있거나 노동조합 조합원인 실종자 가족들을 파악하고, 유가족 대 책위의 ‘강성화’를 주도하는 인물을 파악해 보고했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이후 국정원 첩보 상에서 특정 실종자 가족의 이름을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첫 첩보는 2014년 4월 21일 보고이다. 국정원은 그전까지도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의 정부 불만 양상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지만, 2014년 4월 20일 진도대교 행진을 기점으로 이

234 제5장

4・16세월호참사

관과 팽목항 등에서 책임을 맡고 있던 실종자 가족 이름을 언급한 ‘세월호 대책위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같은 날 국정원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조합원 파악 보고’를 작성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 실종자 가족들은 자 녀를 잃은 피해자가 아니라 주요 관리 대상으로 실명이 국정원 보고서에 올라갔다.

2014년 5월 1일에는 유가족 대책위 ‘강성화’ 주도 인물 파악 보고가 이뤄졌다. 유가족 대책 위원회 공동대표로 나섰던 유가족들은 국정원의 사찰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세월호참사 이전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세월호참사 이후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는 등의 이유로 ‘강성’ 으로 분류됐고, 국정원은 보고서상에서는 이들이 유가족 대책위를 ‘주도’하고 있다고 표 현했다. 국정원은 5월 1일 보고서에서는 유가족 대책위가 점차 강성화하고 있으며, 주도자 는 2명의 유가족이라고 지목했다. 보고서에는 “유가족 대책위는 ○○○ 2명이 주도하고 있 는데, 이 중 한 명은 ○○○으로 과거(‘13.12.) VIP 사퇴 촉구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反정부 성향 인물로서 좌성향 단체와 연계(가)우려”되고, 다른 한 명은 “팽목항 앞바다 入

水 기도(4.17), 英 BBC 인터뷰(4.18.), 기자회견문 낭독(4.29.) 등을 통해 언론 주목”을 받으면서 점차 강성화되었다고 적혀 있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좌성향 단체와 연계 우려”라고 적었듯, 국정원은 정부 비판 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것 을 핵심 과제로 보고 특정 실종자 가족이 비판 세력과의 연계점이 될 수 있다며 사찰했다. 또 피해자 가족들에게 법률 지원을 하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대한변호 사협회(이하 ‘대한변협’) 등도 정보 활동 대상으로 삼았다. 2014년 5월 16일 보고서에서 국정원 은 민변이 ‘세월호 진상규명 법률 지원 특위’를 출범하고 ‘세월호 진상규명 17대 과제’ 발 표 및 법률 지원단 구성 등을 통한 “반정부 획책에 부심” 중이나 유가족들이 참사를 정치 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대한변협을 법률 지원단으로 지정했다는 점을 첩보로 보고했다. 또한 “‘세월호 국민대책위’가 5월 24일 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같은 날 유족 대표단과 서울 시내 미상처에서 오찬 회동”을 했고 유족 측 대표단 ○○가 “유가 족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고, 자녀들이 죽어서 모인 것뿐인데, 유족 대표들이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정권 퇴진 주장은 특정 정파적 이해관계로 비춰져서 ‘진상 및

제5장

235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후에는 구체적인 인물을 적시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인 4월 21일 행정우편에는 진도체육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책임 규명, 재발방지대책’ 등 우리의 요구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정권 퇴진’ 운 동 참여에는 단호한 거부 입장을 피력했다는 것도 보고했다.

국정원은 단순히 정보만 수집한 것이 아니라, 실제 유가족 대책위 활동과 여론에 전방위 적으로 개입했다. 2014년 5월 20일 국정원 미상의 부서(경기지부로 추정)는 「‘세월호 사고 안정 화 ○○’ 운영 계획」을 작성해 ‘유가족 순화’를 목표로, 세월호참사 유가족들과 가장 가까 운 곳에서 유가족의 동향을 입수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 및 피해 지원을 하는 안산시 공무 원, 장례 지원단 및 합동분향소에 파견 나가 있는 공무원들을 통해 유가족 내외 여론 작 업에 개입하고, 좌파 성향이 아닌 새로운 유가족 대책위 구성을 유도했다.

「‘세월호 사고 안정화’ ○○운영계획」

세월호 사고 관련 유언비어·선전·선동 차단, 유족·실종자 가족 안정화, 구원파 수사 등 각종 현안을 선체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운영.

1. 활동 기본 방침 가. 불순여론 확산·반정부 시위 동향을 철저 체크·대응하고 보수·종교 단체 등을 통한 여론선도 역할 협 조 등 민심 관리 나. 유○○○ 수사, 유족·실종자 보상 추진에 따른 특이동향 종합 다. ○○○○○○○ 등과 교감을 통해 상호 정보공유.활동방향

236 제5장
조율과 함께 향후 돌발적인 정국부담·민 심 악화 소지가 있는 잠복 이슈 점검 철저 (중략) 3. 운영 계획 가. 당면 현안에 대한 상호 역할분담 및 구체적 대응전략 수립 1) 매일 오전 ○○○○○○○회의를 개최(09:00, ○○○○○○○호), 핵심 일일현안 및 ○○지부 차원의 조치 필요사항 등을 리스트업, 현안별로 대응방향 정립 2) 담당 목표를 고려해 현안별로 활동계획·성과를 매일 결산하고 향후 상황추이 분석 및 업무방향 再설 정 등 피드백 강화 → 주 3회(월.수.금) 업무 종합보고 및 특이 사항은 당일 보고 나. 담당관별로 현장에서 적극적인 조정 활동 전개 역할/구체적 활동/담당관 등을 표에 기재 그림 5-17 국정원, 「‘세월호 사고 안정화 ○○’ 운영 계획」(2014. 5. 20.)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이 시기 청와대 비서실장·안보실장·경호실장 등은 직무 범위를 벗어난 기무사의 유가족 사찰첩보 및 관리 방안 보고를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독려했다. 기무사령관의 중요보고 대상, 보고 시각, 보고 목록, 후속 조치 내용을 담은 중요보고 결과를 살펴보면, 2014년 5 월 10일 비서실장이 “구체적 유가족 보상 방안을 궁금해하여” “유가족 보상 방안”을 작성 할 예정이라고 기재돼 있다. 또 2014년 5월 17일 세월호TF 소속 정△△가 작성한 「사령관 님 강조 말씀」에 따르면 N△△가 세월호TF 현장 지원팀 사무실에 방문하여 전날 청와대

237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이 계획을 성명 미상의 국정원 직원이 실제 실행해 그 실적을 보고한 사실도 여러 문건을 통해 확인됐다. 국정원은 계획 이행을 위하여 세월호참사 유가족이 의지하던 자원봉사 단 체를 활용했다. 국정원 직원은 안산 합동분향소 자원봉사를 했던 한국자유총연맹(자총),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바살협) 등 단체들을 통해 유가족, 생존 학생 학부모들에게 접근해 정부 비판 세력이 피해자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말해, 서명운동, 집회 참석 등 을 거절하도록 했다는 것을 활동 성과로 보고했다. 예를 들어 “유가족 지원을 빌미로 접근 하려는 좌파 시민단체원의 실체 및 의도를 건전 유족들에게 제보하여 좌파들과 유가족 간 조직적 연계 차단 및 지연 조치”했고, “좌파 시민단체들이 서울 추모 집회 후 BH 기습 행진을 시도하면서 유가족을 선두에 배치하려는 의도를 사전 제보하여 행진 불참을 유도 함으로써 기습행진[을] 무력화”했다는 내용이 보고서에 서술되어 있었다. 한편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도 세월호참사 당일부터 세월호실종자 가족의 동향을 파악해 지휘부에 보고하고 4월 28일부터는 기무사 내 세월호TF를 구성하여 첩보 및 동향을 적 극적으로 파악했다. 기무사는 천안함 피격 사건 등 과거 해상에서 발생한 참사의 유가족 을 제대로 관리했다는 것을 성과로 여기고 있었는데, 세월호참사 역시 해상사고라는 점에 착안해 기무사에서 세월호참사 유가족을 관리하는 방안을 청와대에 제언했다. 군과 관 련성이 없는 유가족들의 동정을 파악하라고 하는 데 기무부대원들이 부담감을 느낄 정 도로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기무사령관 N△△는 군이 실종자 수 색·구조를 담당했던 독도함 등에 인원을 배치할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다른 정보기관 이 하지 못하는 첩보를 했다. 이런 첩보가 청와대로부터 호평을 받자 기무사는 더욱 적극 적으로 유가족을 사찰했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보고 분위기를 전하며 “비상·위기 시에 기무사밖에 없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청와대의 독려로 기무사는 청와대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더 적극적으로 불법

행위를 하게 되었다. 수집된 첩보를 분석·종합하여 N△△는 매우 구체적인 유가족 관리 방안을 정책 제언에 포함해 지속적으로 청와대에 보고했다. 경찰도 2014년 5월 2일 보고서부터 본격적으로 유가족의 실명과 정치적 성향을 거론하 여, ‘좌파’와의 연계 가능성 및 현황을 기재했고, 조치할 때 고려할 사항을 제언했다. 보고 서에는 주로 유족들의 정치 성향, 노조 관계자 여부 등이 기재되었다. 금속노조 기아차 지 부가 유족 대표 측에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거나 ‘좌파 성향’인 안산시민연대

가 촛불시위와 유족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으나 유족 측이 실제 동조할 가능성은 작다

는 보고 등이 포함되었다. 경찰 역시 추모 촛불집회에 유가족이 참여하는지에 주로 관심 을 가졌는데, 2014년 5월 8일 보고까지도 좌파의 유가족 연계 시도가 “사실상 실패”한 것 으로 보면서도 유가족 불만이 가중되면 일부가 ‘좌파 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 았다. 경찰은 “장△△ 생존자 대책위원장은 ‘엄마의 노란 손수건’ 운영자들과 친밀한 관 계”여서, 또 “일부 강성가족(유△△ 대변인 <정의당 당원> 등), 민주노총 소속 유족(6명) 등 일부”는 정 치 성향과 노동조합 가입 여부 때문에 “좌파 투쟁에 합류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평가했 다. 이렇게 상황을 진단한 후 경찰은 소위 ‘좌파 세력’과 유족 간 연대를 차단하기 위해 유 가족들의 요구(불만) 사항을 적극 수렴하여 장례·보상 절차를 조기에 합의하는 한편, “유가 족들이 정치 투쟁에 부담을 갖고 있는 만큼, 보수언론 등을 통해 좌파의 정치적 의도를 부 각”하는 방안을 제언했다. 이처럼 국정원, 기무사, 경찰은 유가족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이른바 ‘좌파 세력’과 연계 되면 안 된다며 유가족 성향을 수집하고, 자신들이 보기에 ‘강성화’될 가능성이 있는 유가 족을 사찰했다. 이들 유가족을 처음부터 위로와 지원의 대상이 아니라 감시받고 관리해 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셈이다. 또 정보기관들은 진보적인 단체·조직의 동향도 주시해서 계속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는 모두 세 정보기관의 직무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지만, 청와 대의 독려 속에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238 제5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국정원 기무사 경찰 등이 유가족 관리 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출하며 유가족을 세월호참

사 대응이 정부 책임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했지만 이런 방식은 오히려 유가족의 적극적인 행동을 끌어냈다. 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세월호참사의 책임을 선원과 선장, 현 장에 출동한 해경, 청해진해운과 유병언 일가의 책임으로 전가하고, 해경 지휘부나 청와 대는 검찰 수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유가족들은 독립적 조사기구를 구성하기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유가족 대책위가 세월호특별법 제정 운동에 적극적으 로 참여하자, 국정원은 별도의 유가족 대책위를 구성하기 위한 작업도 진행했다. 2014년 6 월 19일 국정원 첩보를 보면, “좌파 성향이 아니면서 건전하고 뜻을 같이하는 학부모들끼

리 뭉쳐 별도의 유가족 대책위를 구성하기 위한 물밑 작업에 착수”했다며 “○○○○○○○ ○ 분향소 봉사·안심귀가 서비스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유족들을 새로운 대책위에 동 참하도록 적극 유도할 방침”이라며 세부적인 방안까지도 마련했다.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014년 8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국회와 광화문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같은 시기 국정원은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 임원들 각각의 실명, 소 속 정당, 과거 직업, 친분 관계, 성격 등 내밀하고 보호받아야 할 사적 정보를 상세하게 파 악하고, 온건/강경/합리적 등 성향을 분류해 보고서에 기재했다. 8월에는 특히 가족 중 마지막까지 단식을 진행했던 △△ 아빠 M□□에 대한 사찰이 극에 달했다. 사참위는 M□□에 대한 사찰 결과가 ‘지휘부 미보고, 무가치 첩보’였기 때문에 활 용되지 않았다는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적폐청산 T/F의 주장과 달리 다수의 M□□ 관련 문건이 작성되어 보고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14년 8월 20일 M□□가 세월호특별법 제 정을 위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청와대로 향하던 중 경찰과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건 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M□□에 대한 첩보와 보고서가 급격히 늘어났다. 국정원은 보수언 론 등에서 M□□의 과거 전력을 보도할 예정임을 미리 확인해 보고하기도 했다. ‘전문시위 꾼들이 배후에서 유가족 단식농성과 특별법 합의안을 거부하도록 M□□를 조종하고 있 으며, M□□는 금속노조 조합원이고, 이혼 후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으면서도 국궁 취미생활을 즐기는 등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고 언론에 보도될 것이라는 보고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39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유가족 분열을 위한 낙인 찍기

원조격

- ○○ 소재 주방가구 회사 사무직으로 알려져 있고 정당 활동이나 운동권 경력은 없다 하는데 마른 체 구에 안경을 쓴 전형적인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로 - 주로 긴팔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자신이 지적인 인물임을 알리려는 듯한 태도로 도보행진 및 각종 집회 시 나서서 기자회견 및 인터뷰를 자청하며 강경 분위기를 주도하는 대표적 강성 유족

* 유족 내부 및 유족지원업무 담당 시청 직원들이 “차기 대책위원장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

특별법 제정 범국민서명운동을 계기로 적극적이고 강경한 성향으로 변모했다 하는데

서명운동을 계기로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측과 친분을 쌓은 것을 계기로 유족과 좌파단체인 ‘국민대 책회의’ 간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어. ○○○○○○○과 함께 강성으로 분류

240 제5장 회피하고,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 주도 및 강성
· ○○○○○○○ - 과거 보습학원을 하다 망한 후 건축업 등에도 실패하고 지게차 임대 사업을 한다는 말이 있으나 본인 이나 妻가 직업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 주변에서도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 ○○○○○○○ 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과격한 유가족 대책위 집행부 내에서는 그나 마 ○○○○○○○ 함께 온건한 편이라는 것이 유족 지원업무 담당 공무원들의 평가 ○○○○○○○ - ○○○○○○○과 함께 온건 성향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집행부 내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화가 가 능한 유족이라는 의견 ○○○○○○○ - 진보정의당 및 노사모 출신으로 최초부터 강경 성향의 분위기를
방해하고, 괴롭혔다
유족(2014. 8. 14.)
이끌어온 인물로 유족 강경파의
· ○○○○○○○
○○○○○○○ -
○○○○○○○ - 대책위 간부가 아님에도
들을 정 도로 기회만 있으면 국회 및 경찰 관계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강경 대응에 앞장 ○○○○○○○ - 금속노조 충남지부 명신지회 노조원이고 특별한 정당 활동 또는 두드러진 노조 활동은 없었으나 유족 들 대규모 단식에 처음부터 참여한 후 혼자만 8. 14. 현재까지 단식 중인데 - 유족지원업무 담당 안산시청 직원들 말로는 강경 성향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을 도와주는 등 주변 사 람에게 나름대로 친절하게 대하는 온순한 스타일이라는 평 그림 5-18 국정원,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 주도 및 강성 유족 보고
-
매번 국회 및 광화문 집회시마다 참석해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말을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보고 있었다. 유가족 분열 시도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고 세월호특조위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2015년 12월 4일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안산 지역 동향(598일 차)」에는 “자총 안산시 지회(○○○○○○는 12.8(화) 대부도 엑스퍼트 연수원에서 실시될 유가족들과의 간담회 에서 ○○○ 사무국장의 발언 시간을 활용하여” 유가족의 행동을 비판할 예정인데 “(국정원 직원과) 발표문을 사전 조율 완료”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국정원은 이처럼 보수단체와 내용 을 사전 조율하는 등 세부적인 개입도 진행했다. 국정원과 청와대, 보수언론 등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요 구는 곧 배후 세력에 의해 조종당한 반정부 요구라는 인식을 상호 강화했다. 또한 국정원 은 M□□에 대한 이른바 “실체 집중 폭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나아가 이런 프레임 이 확대되도록 개입했을 개연성 또한 상당하다는 것이 사참위의 판단이다. 국정원이 보수 언론 및 보수단체 첩보에서 이들의 활동 내용, 일정, 확산 수단 등 대단히 구체적인 내용을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241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도 있었다. 국정원은 2014년 8월 24일에 유가족 대책위에서 M□□를 사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 를 문제 삼고 나섰는데도, 개의치 않고 M□□ 관련 내부 첩보를 계속 생산했다. 여기에는 M□□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망하는 보고서, M□□ 주변 인물인 주 치의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는 보고서도 포함됐다. 2014년 8월 25일 자 「보수권, 세월호 정 국 주동 M□□의 극단선택 대비 필요성 제기」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국정원의 상황 인식 을 잘 보여준다. 국정원은 이 보고서에서 “정부 비판 세력들이 세월호 사고를 정부 공격 소 재로 계속 악용하기 위해 혈안인 가운데 민노총 산하 금속노조원인 자칭 ‘△△ 아빠 M□ □’를 전면에 내세워 세(勢)몰이에 나서다가”, “M□□의 부도덕성이 드러나고 투쟁의 아이콘 으로 계속 활용하기가 어려워”, “정부 비판 세력들이 항상 해온 방식인 궁지에 몰린 인물 분신 유도 → 정부 책임론 몰아가기 → 열사 만들기 → 시신 투쟁을 통한 反정부 투쟁 선 동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적고 있다. 국정원은 피해자를 지지하고 진상규명과 안전한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사람 목숨을 투쟁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세력들로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체계적으로 작성해 다수 보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세월호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이 본격화되자 기무사도 국정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특정 유 가족에 대한 사찰을 강화했다. 기무사령관 N△△는 2014년 5월 28일 청와대 중요보고 제 공을 목적으로, 1처장 손△△를 통해 세월호TF를 인원들에게 안산 유가족 대책위 대표 및 대변인 사찰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월호TF의 실무를 총괄했던 V□□(군사정 보차장) 진술에 따르면, 손△△는 세월호TF를 축소하자는 건의를 하려고 사령관 보고에 들 어갔다가 오히려 새로운 임무 지시를 받고 축소 건의는 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V□□는 그 임무가 유가족 대책위 대표와 대변인 사찰인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기무사령관의 갑 작스러운 유가족 대책위 사찰 지시는 실무처장도 예측하지 못하는 첩보 수집 지시였다는 점에서 기무사 내부 논의가 아닌 청와대 등 외부 기관에서 정보를 요구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시기 기무사는 유가족 대책위를 주도하는 인물의 성향을 파악해 보고하는 한편, 촛 불집회 확산에 따른 대응책도 마련했다. 「종북세 촛불집회 확산시도 차단 대책」에서는 “세월호 피해자 대책위(위원장 M□□ 정의당 당원, 대변인 유△△ 정의당 당원) 연계 진상규명 촉구 1000만 인 서명운동 전개”라며 피해자 대책위의 진상규명 촉구 활동을 피해자들의 정당 등과 연 결해 분석했다. 당시 3처 소속의 M□□은 기무사 내부에서 피해자대책위 M□□, 유△△을 ‘종북세로 분류하는 분위기’였다고 진술했다. 경찰도 유가족 분열을 활용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계속해서 작성했다. 2014년 6월 10일 「세월호 단원고-일반인 유가족 갈등 첨예에 따른 제언」 보고서에서는 단원고와 일반인 유 가족 간의 “감정의 골이 첨예한 상황”이라며, “정부와 새누리당에서 일반인 유가족 부분 을 부각하여 같이 대책을 논의하면서 야당에 기우는 단원고 유가족 대책위를 견제도 하 고 양측간 갈등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세월호참사 유가족 M□□의 단식이 진행되고 있던 시점인 2014년 8월 21일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 등 강경 투쟁 전망 등 대책 긴요」 보고서에는 “유가족 중에서 강성 투쟁에 불만을 갖고 있는 유가족과 일반 유가족들 이 여론 형성할 수 있도록 관계 기관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본래는 정부가 관여하지 않아

242 제5장

야 하는 부분이지만, “시기적으로 꼭 필요한 대응”이라고 첨언해 위법성을 인식하고도 이

처럼 제언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보기관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찰하자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위축되었다. 2014년 4

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후 가족들은 이미 경찰 미행 등을 경험하고 국가기관을 불

신하고 있었는데, 이에 더해 경찰, 국정원 등 정보기관이 가족들을 사찰하면서 극도의 불 안감을 겪어야 했다. 세월호참사 유가족은 가족들만 참석한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을 경 찰이나 외부인들에게 유출당한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에 도청이나 감청을 당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진상규명 활동을 하는 데 극도로 위축되었다. 유가족 대책위는 회의에 외부인 출입을 제한했고, 도·감청 및 사찰을 의식해 핸드폰의 배터리를 빼놓고 회 의하거나 심지어는 유가족 대책위 회의 내용이 사찰당하고 있는 정황을 확인하려고 가짜 내용을 회의 안건으로 올리는 등 극심한 압박감을 받았다. 수색 종료 종용, 배・보상 신청 유도 정보기관은 실종자 수색을 종료시키기 위해서도 나섰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특히 기무사 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 기무사는 진도에 계속 남아 있던 미수습자 가족에 대한 사찰을 계 속하며 실종자 가족과 타협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기무사령관 N△△는 청와대 안보실장, 경호실장, 비서실장에게 대면보고를 한 다음 날인 2014년 7월 6일 실시된 회의 에서 격앙된 채로 지시했다. ‘실종자 11명 중 단원고 학생이 5명이면 이들 학부모에 대한 성 향을 파악해서 일대일로 맨투맨을 붙이든 종교계를 동원하든, 국정원을 동원하든’ 실종 자 가족 타협 방안을 강구하라고 말이다. 610기무부대 구△△ 등은 지시받은 당일 실종 자 가족의 개인별 성향을 분석하여 ‘학생 5명 중 2명(이△△, 남△△)이 끝까지 시신을 수습하 길 원하는 강경파’이고 나머지 6명은 ‘정부가 당장이라도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243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온건파’라고 사령부에 송부했다. 610기무부대장 소△△ 등은 다시 이 보고서를 발전시켜 2014년 7월 9일 ‘남○○, 이○○가 가족들을 대표해 실종자 전원 수습 요구 등 강경 분위기 주도’하고 있으니, ‘남△△과 이△
시신 수습을 중단한 후 선체 인 양을 하겠다고 발표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고 정부 의견에 수긍할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를 설득하면 실종자 수색 중단 선언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실종 학생 가족들의

친족과 지인을 활용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언했다. 한편 212기무부대 정보보안반에서도

실종자 가족에 대한 온라인상 사찰 결과와 언론 보도 확인 결과를 보고했다.

N△△는 2014년 7월 19일 실종자 성향을 분류하고 인터넷을 사찰한 결과 및 단계별 실종 자 가족 설득 방안을 포함한 중요보고서를 청와대 안보실장·경호실장·장관에게 건넸다. 이 보고서에는 실종자 가족들로부터 수색 중단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범대본·국정원·경 찰을 통해 실종자 가족들의 개인별 성향은 물론 경제적 형편과 말 못 할 고충·관심 사항 등을 세밀히 확인’하고, ‘맞춤형 설득을 위해 주거 지역 연고자 및 종교계 저명인사, 가족 들이 신뢰하는 현장 잠수요원 등 설득 적임자를 맨투맨式’으로 지정하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N△△는 2014년 8월 29일과 9월 3일에도 안보실장·경호실장·비서실장 등에게 각 각 대면보고와 서면보고를 통해 세월호 탐색구조를 종결할 방안을 제안했다. 기무사 세월호TF는 계속해서 2014년 8월 30일 610기무부대에게 탐색구조 비용, 격벽 붕 괴 현장, 초기 구조단계에서 탑승자가 물에 휩쓸려가는 것을 봤다고 하는 목격자 진술 등 을 파악하도록 하고, 2014년 10월 4일에는 607기무부대에게 1인당 구조 작전 투입 비용, 차후 희생자들에게 지급될 보상금 현황, 기부금 현황, 민간 잠수사 일당을 파악하여 보고 하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2014년 11월 11일 실종자 수색을 종료할 때까지 기무사는 빠른 수색 종료를 위한 방안을 청와대에 지속적으로 제언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자신들의 요구 가 잠수사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무리한 요구라는 압박 속에 수색 종료 결정을 내렸다. <그림 5-19>는 국방부 보통검찰부가 기무사의 유가족 사찰을 조사한 후, 이들의 동기를 구조화한 것이다. 이 구조도에 따르면 정부의 유가족 사찰은 ① 피해자들이 국정운영에 부담이 되는 세력이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가족들의 언동 등에 대한 정보 활동을 강화하 고, ② 수습 장기화 단계에서 가족별 성향을

244 제5장
으로
분석하여 분류한 뒤, ③ 수집된 정보를 바탕
피해자에 대한 부정 여론 조성, 수습종료를 위한 가족별 설득 전략을 시도하는 등
세월호 국면 전환을 이용하여 대통령 지지율 상승과 6·4지방선거에 여당이 유리하도

4・16세월호참사

록 지원하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한편 국정원은 배상 프레임으로 유가족들 사이에 개입하려고 했다. 2015년 2월 국정원은

실종자 수색 종료 후 소강 국면을 보였던 세월호 이슈가 「4 16세월호참사 피해자 구제 및

제5장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배·

보상을

245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적극 유인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 했다. 국가 배상 소송이 민변이 주도하는 “거국적 대정부 민사소송”이
① 세월호 유가족 언동,
파악 ③ 인양포기·조기인양을 위한 설득 시 활용 유가족에 대한 부정적 여론 조성 ② 유가족 성향 분석 정부의 책임 회피 ④ 대통령, 정권 지지율 상승, 6·4지방선거 여당 지원 그림 5-19 기무사의 유가족 사찰 목적 구조도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피해지원법」)이 통과(2015년 1월 12일)된 이후 세월호 유가족들 이 결집하면서 다시 점화할 조짐을 보인다고 판단하고 유가족들이 배 보상을 빨리 받게 해 세월호 국면을 종결시키려고 했다. 「세월호피해지원법」 제16조에 따르면, 배상금 지급 에 유족이 동의하면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국정원은 국가 책임을 묻기 위한 유가족 대책위의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이 세월호 국 면을 장기화할 것이라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유가족들이 배·보상을 받는 것이 관건이라 고 판단했다. 국정원은 유가족들이 배·보상을 받게 해 소송에 동참할 수 없도록 유도했다. 세월호 1주기를 전후로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관련 갈등이 격화되자, 국정원 내부 첩보 및 보고서는 더 늘어났다. 2015년 5월 21일 이후 첩보부터 국정원은 마치 목표 달성량을 셈 하듯이 배·보상 신청자 숫자를 계속 보고했다. 시행령 문제가 일단락된 뒤인 2015년 7월 에도 국정원은 민변 등이 보상 거부를 선동하면서 국가 상대 손해배상소송을 할 가능성 이 크다며, “생계 애로 유족”을 목표로 삼아
될 것인지 ‘일부 유
분위기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가족들만 참여하는 김빠진 소송’이 될 것인지가 국정원의 핵심 관심 사항이었다. 2015년 8

월 19일 「세월호 배·보상 막판 유인 주력」 문건에는 국정원의 직무 범위와 무관한 세월호

참사 배·보상 전략이 기재되어 있기도 했다. 국정원의 이러한 전략 속에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인 배·보상은 유가족들을 가르는 또 다른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제2의 광우병 촛불은 막아야 한다”

세월호 추모 집회가 ‘제2의 광우병 집회’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표는 광범위 한 민간 사찰과 정보 수집을 정당화하는 핵심 이유였다. 경찰은 2014년 4월 28일 2008년 광우병 당시 촛불집회 양상과 세월호참사 후 촛불의 양상을 비교해 청와대에 보고했고, 국정원 역시 5월 1일 보고서에서 “일반 시민과 중산층들이 세월호 추모 집회에 동참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2008년 광우병 사태와 유사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변질될 지표”라고 파악했다. 국정원은 이 보고서에 “2008년 ‘광우병 사태’와 유사한 대규모 反정 부 시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도 국민들과 같은 편에 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있 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세련된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썼다. 2014년 5월 7일 보고서는 제목 자체가 「‘광우병’ ‘여객선 사고’ 촛불집회 비교 및 시사점」으로 정보기관이 얼마나 세 월호 추모 집회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 등 정보기관의

이러한 민감한 반응과 과도한 대응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국정원이 세월호참사 유가 족 외에도 얼마나 광범위하게 민간 사찰을 진행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국정원은 직무 범위와 무관한 정부 비판 성격의 네티즌 동향을 인터넷상에서 사찰 하고,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할 언론사의 세월호참사 관련 취재 보도 동향을 정보 활동의 대상으로 삼아 수집·배포했다. 국정원은 이른바 ‘비방 세력’들이 세월호참사를 “대정부 비 방 구실로 악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며 최소 2014년 4월 19일부터 「세월호 침몰 관련 네 티즌 특이 동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 등의 뉴스 게시판에 시민들이 올린 댓글 중 정부와 대통령에 비판적인 게시물들을 ‘좌성향’, ‘선동’, ‘비방’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적대적으로

246 제5장

인식하여 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트위터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게시물 들을 사찰대상

으로 삼아 화면들을 캡처해 보고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20일 「세월호 침몰 관련 네티즌 특이 동향」에서는 세월호참사 후 첫 주말에 좌성향 세력들이 세월호참사를 반정부 시위 촉매제로 활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일반’ 네티즌들도 ‘안타까움’에서 ‘정부 비난’ 분위 기로 변화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파악했다. 2014년 4월 22일에는 네티즌 여론이 “대통령님 에게 최종 책임을 돌리려는 분위기 조장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4월 25일에는 “‘세월호’ 구 조 및 수습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사고 원인·대처 관련 비판 대상이 ‘선원·공무원’에 서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라고 봤다. 이후에도 유사한 동향 보고가 이어졌으 며,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의 네티즌 단체를 특정해 보고서를 작성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처럼 네티즌 여론을 민감하게 수집함과 동시에 국정원은 언론 동향에도 민감하게 반응 했다. 국정원은 세월호 특보 체계가 ‘감성적인 보도’로 민심을 자극하고, 정부 책임론을 부 추긴다고 판단했고, 시급하게 특보 체계를 종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정원은 이슈를 전환하고, 세월호 선원과 선사에게로 책임을 돌려 정부에 대한 책임 추궁을 피하 며, 차분한 분위기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2014년 4월 18일 보고서에서 국정원은 세월 호참사와 관련해 “민심 이반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있다며, “언론이 이에 대한 자극적 보 도보다는 마음을 추스르는 보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으니 “대국민 대상 ‘자제 멘트’ 보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국정원은 실제 이렇게 언론 보도의 기조가 변화 하는지도 계속 점검했다. 2014년 4월 말~5월 초 국정원 보고서에는 「매일경제」 등 신문사 들이 세월호참사 보도 분량을 축소하고 자극적인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청와대 홍보수석 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점, 「MBN」 보도국이 5월 초 연휴를 기점으로 세월호참 사 관련 보도 비율을 대폭 축소하고 이슈 전환을 위해 북핵 문제 등 새로운 아이템을 발 굴할 계획이라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중앙일보」 내부 협조자와 접촉해 정부 책 임을 추궁하는 성격의 1면 기사를 선장과 선원에게 책임을 묻는 기사로 교체한 사실 등 이 적시된 보고서도 있다. 이처럼 국정원과 청와대의 언론 개입은 실체가 있는 행위였다. 국정원은 진보언론은 압박하고, 보수언론은 지원해 여론 지형에 개입하고자 했다. 국정원 은 특정 언론사 보도가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좌파팔이”, “선동”이라는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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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격한 표현을 사용해 “파렴치한”으로 매도했다. 나아가 언론사의 존폐가 달린 “종편 재허 가”, “광고 발주·협찬금 축소 유도”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압박 대상이 된 것은 이른바 ‘좌 편향 언론’으로 분류된 「JTBC」와 「한겨레」·「경향신문」 등이었다. 여기서도 ‘광우병 사태’ 가 언급된다. 「중앙일보」의 감성팔이 무분별한 의혹 제기 정부 비판 보도는 “과거 「MBC」 <PD수첩>이 광우병 사태를 주도한 것과 동일한 행태”라는 것이다. 국정원은 「JTBC」에는 ‘과징금’ 부과 등을, 「한겨레」 「경향신문」에는 광고 발주나 협찬금을 축소하라고 제언했 다. 반면 보수언론에는 지원을 늘리라고 제안했다. “건전 여론”이 확산되어야 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었다.

2014년 5월 13일 국정원 보고서를 보면, 보수지들 역시 ‘정권 퇴진’을 외친 2008년 ‘광우병 사태’가 재연될 조짐이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며, “保守 3大紙들이 민심 수습에 효율적으 로 대처할 수 있도록, △ 유족들도 공감하는 현장 공직자들의 헌신적 수범 사례 △ 불순 집회 주도 인물 신원 자료 △ 시위 현장의 不法. 從北性 채증 사진 등 지원을 요망”하고 있 다고 보고했다. 2014년 당시 국정원이 보수언론의 요청에 따라 집회 주도 인물 신원 자료

와 집회 채증 사진 등을 지원했는지는 확인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1년여 뒤 특별법 시행령 으로 갈등이 격화되었던 시기인 2015년 4월 22일에 작성된 국정원 보고서에는 「A신문사」 가 “○○○○○○에서 지원한 자료를 토대로 ‘정치 투쟁이 끼어든 세월호…’라는 제목으로 8면 전면을 할애 확대 보도”했으며 “○○은 「세월호 국민대책회의」의 약점을 보완해 현재 폭력 투쟁을 주도하고 5월 중 정식 출범 예정인 「4·16연대」(준) 실체 자료를 추가 지원”했다 고 기록돼 있다. 이는 국정원이 자신들의 첩보 자료를 보수언론에 주면서 지원했을 가능 성을 보여주는 자료다. 국정원은 또한 대법원 법원행정처로부터 선원재판 등 내밀한 첩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성 명 미상 정보관이 수집한 첩보에는 ▲ 선원 재판 판사 과거 이력 및 성향 보고 ▲ 법원의 예상 적용 법리 등이 적혀 있었다. 2014년 4월 24일 「법조계, ‘세월호 사건’ 裁判 관할 문제 신중 검토 필요성 제기」를 보면, 선원 재판 판사가 “법리에 충실한다는 미명하에 엉뚱한 판결을 하는 특이 성향”이며, “2010년 4월 학생들의 빨치산 추모제 참가를 종용한 전교조 교사에 무죄를 선고, 파문함”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또 2014년 5월 20일 첩보에서는 “판

248 제5장

4・16세월호참사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하며 다른 재판은 몰라도 이번 세월호 재판은 무조건 자신이 말한 대로 따라야 한다고 설 득했지만 성격상 어디로 튈지 몰라 우려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런 첩보 활동은 재판 독 립성을 침해해 헌법 질서를 유린할 수도 있는 중대한 위법 행위이다. 국정원은 해외 단체와 유가족 순회 집회에까지 신경 썼다. 성명 미상 국정원 직원은 보고 서에 국정원이 해외 교포사회에 세월호참사 유가족 초청 집회를 어떻게 ‘제압’했는지를 기 술했다. 국정원은 유가족의 범죄 이력 등을 첩보 입수해 보고한 후, 이 사실을 해외 단체 와 유가족이 순회 집회를 할 때 활용했다. 국정원은 “일부 유가족의 만취 후 시민을 폭행 한 사실을 부각, 유가족에 대한 교포사회 內 일방적인 동정심[을] 교정”했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이처럼 내부 첩보 등을 활용해 세월호참사 유가족의 해외 활동을 위축시켰다. 정보기관들의 광범위한 유가족 관리·사찰, 민간 사찰 및 언론 개입 등은 청와대의 세월호 참사 대응 기조와 동일선상에서 진행됐다. ‘순수 유가족’과 ‘강성 유족’을 구분하고, 후자가 ‘외부 세력’과 연계점이 될 수 있다는 정보기관의 인식은 청와대의 공개적인 발언을 통해 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U□□ 청와대 대변인은 2014년 5월 유가족들이 「KBS」 S △△ 국장의 발언에 항의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을 때 ‘순수 유가족분들의 요청’이라 면 들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과 국민의 목소리를 ‘적대시’하여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보수단 체들과 공조를 제언하였던 국정원·기무사·경찰의 기조도 청와대 내부 회의록에서 동일 하게 확인되었다. 청와대가 항상 정보기관에 명시적으로 첩보 활동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와대 가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정보기관의 불법사찰을 묵시적으로 승인 하는 것이 된다. 청와대의 정책 기조에 정보기관이 부응하려는 것도 있었다. 정보기관은 불법으로 민간인을 사찰해 청와대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청와대가 원하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정보기관은 세월호참사 피해자, 법률 조력 단체, 시민사회단체, 언론, 네티 즌, 안산합동분향소의 공무원, 범대본, 해수부, 해군, 해경, 경찰, 사법기관까지 모두 정보

제5장

249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사 임용 이전 민노당 당원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으며, “간접적으로 지휘부의 우려를 전달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수집의 대상으로 삼았다. 모든 정보가 객관적으로 수집되지도 않았다. 청와대의 정보 수 요에 따라 선별·수집된 정보는 국정원 본원, 기무사 사령부, 경찰 정보국 등을 거치며 가 공, 왜곡되어 청와대로 보고되었다. 청와대로 보고된 정보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 표현에 따르자면 “소관 수석이 참고할 사항이 있으면 참고하도록 해당 수석에게 전달”되었다. 정 보기관은 이런 정보들이 청와대뿐만 아니라 보수단체, 보수언론과 범대본, 국조실, 해수 부, 기재부 등 각 부처에서 활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국정원과 기무사 관련 의혹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이후 언론과 국회 등에서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 관련 의혹이 제기 되었다. 2014년 5월 5일 「MBC」는 청해진해운 직원 등을 출처로 국정원이 세월호 국가보호장비 지정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세월호 취항이 지연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2014년 5월 15일 「경향신문」은 세월호 운항 관리 규정의 붙임자료인 「해양사고 보고 계통도」에 따라 국정원에 ‘1차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일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해운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 했다. 「경향신문」은 이 계통도에 따라 김한식 청해진해운 사장 등이 사고 직후인 4월 16일 “오전 9시 10 분에 국정원에 문자메시지로 사고 사실을 보고”했다고 보도하여 국정원이 세월호참사를 언제 인지했는 지가 문제시되었다. 2014년 5월 20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국정원에 세월호에서 선원이 전화로 사고 보 고를 했다”고 언급하면서 청해진해운 임원 또는 선원이 국정원에 이례적으로 최초로 직접 보고했다는 의혹은 더 거세졌다. 2014년 6월 22일에는 세월호 선내 수색 작업 과정에서 발견된 노트북에서 「[선내 여객 구역 작업 예정 사항]-국정원 지적사항」 문서가 발견되면서 국정원과 세월호의 특수관계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었다. 한편, 세월호참사 이후 수사 과정에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1등 기관사 손지태가 세월호참 사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 오전 9시 42분에 가족에게 자신이 오후에 국정원 취조가 예정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정원이 선원을 조사하는 데 개입했다는 의혹의 개연성이 높아졌다. 국정원이 제3의 인물을 내세워 선원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A법무법인 소속 C□□ 변호사는 2014년 4월 21일 피의자 신분의 이준석 선장 등 3명을 ‘비선임 변호인’ 신분으로 6시간 동안 접견했고, 접견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이례적인 행위였는데, 2014년 5월 7일 C□□ 이 속한 A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인 D□□이 국정원 2차장에 내정되면서, 국정원이 C□□ 변호사를 매 개로 초기 선원들이 수사받는 과정에서 진술을 유도했다거나, 선원 접견을 근거로 사고 원인에 대한 왜 곡된 언론 보도를 유도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250 제5장

사참위는 국정원, 기무사 등이 세월호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 기존 수사·재판 자료

의 입수 및 비교 검토 △ 청해진해운 업무용 PC 포렌식 자료 검토·분석 △ 국정원 서버의 세월호(號) 키 워드 검색 열람 결과 약 68만 건 중 약 58만 건의 목록 및 관련 원문 열람(국정원 임의 제출) △ 군사안보 지원사령부(안보사)의 자료협조(실지 조사 등)를 통한 문건 제출 및 열람 △ 조사 대상자 및 참고인 대인 조사를 실시했다. 1) 국정원과 기무사의 사고 인지 및 전달 국정원 상황실은 ‘9시 19분경 「YTN」 보도를 통해 세월호 사고를 인지’했다고 사참위에 자료를 제출했 다. 국정원이 그 외의 경로를 통해 사고 사실을 인지했다는 증거는 현재까지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2014년 5월 15일 「세월호_최초 보고(○○○ 올림)」, 2014년 6월 3일 「사고 당일(4 16) 대외기관 접촉 내역」에는 ‘세월호 침몰사고 방송 청취 후 9시 17분에 서해해경 정보관과의 휴대폰 통화로 사실 확 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처럼 분 단위까지 꼼꼼하게 표기하려면 휴대폰에 기록된 통화 시각을 확인하 기 마련이다. 따라서 성명 미상 인원은 서해해경 정보관과 통화한 9시 17분보다 앞선 9시 16분에 「YTN」 뉴스를 확인했을 개연성이 상당하다.

사실 국정원의 세월호 사고를 최초 인지한 시각이 9시 19분이 아니라 9시 16분이라 해도, 그 3분이 실제 구조 조치에 영향을 미칠 만한 의미 있는 숫자는 아니다. 다만 청와대를 비롯한 다수의 기관이 “「YTN」을 통해 9시 19분에 세월호 사고를 인지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정부 기관의 사후 대처를 살 펴보는 데 있어 유의미한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문건을 작성한 국정원 직원이 누구인지 파 악할 수 없어 추가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한편 세월호는 국가보호장비147)이므로 대테러 주무 기관인 국정원은 세월호참사를 인지한 후 테러와의 연 관성 여부 등을 파악해야 한다. 국정원 대테러 상황실도 상황실과 마찬가지로 9시 19분경 「YTN」 보도를 통 해 세월호 사고를 인지했으나, 해경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사고 원인을 질문한 것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 지 않았다. 국정원은 세월호참사를 ‘해난 사고’로 규정했고 청와대에 테러 연관성을 분석 보고하지 않았다. 기무사에 최초로 상황보고가 된 것은 200부대(합참본부 상황실), 610부대(광주·전남) 자료를 바탕으 로 위기관리센터가 작성한 「민간 여객선(세월호) 진도해상에서 좌초」(2014년 4월 16일)를 통해서였다. 해당 보고서의 보고 시간은 10시 00분으로 되어 있다. 기무사는 국정원이 하지 않은 세월호참사 테러 관련성 보고를 진행했다. 참사 당일 601기무부대는 청해진해운, 해경 등과 접촉해 테러 관련 첩보를 수 집한 후 본부에 보고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무사는 2014년 4월 18일에 「진도 여객선 침몰 관련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251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테러 147) ‘국가보호장비’란 파괴·태업 또는 비밀누설로 인해 전략적 또는 군사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거나 국가안전보장에 연쇄적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선박·항공기 등 중요 장비를 가리킨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가능성 판단 결과」를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는 세월호참사를 즉시 ‘해난사고’로 판단하고 테러 연관성을 분석 보고하지 않은 국정원과 대비된다. 그러나 기무사의 이러한 보고가 세월호참사의 수습 하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은 없었다.

2) 국정원·기무사와 청해진해운의 관계 국정원 인천지부 직원 G□□는 청해진해운과 국정원 인천지부가 ‘대테러 활동 차원에서 항만 시설 점 검, 특수 선박 보안 측정, 제주 노선의 밀입국 예방 조치’와 관련해 업무를 협조하는 관계였다고 진술했 다. 그러나 이 진술과 달리 국정원은 청해진해운의 기획관리부장 F□□을 ‘실제 업무 관계와 무관한 동 향 수집 협조자로 관리’했다. 사참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국정원 인천지부는 안보 교육(견학)을 계기 로 업무상 F□□과 관계 맺기 시작했고, NLL 인근 보안 관련 사항에 대해 F□□에게 수시로 보고받았고, 백령도와 연평도 등에 입도하는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 동향 등도 보고받았다. 기무사(601기무부대)는 인천광역시와 부천시, 김포시에 주둔하는 군부대 보안 업무 및 대간·대테러 업 무를 수행했다. 안보사무소 근무자들은 601기무부대 방첩과(2과) 방첩계 소속으로, 통상 국제항만과 연안항만으로 업무를 분리해서 국제여객터미널의 경우 대테러보안대책협의회 업무 등을, 연안여객터미 널의 경우 서해5도를 출입하는 장병들의 지원 업무와 간첩 신고 홍보 업무 등을 수행했다. 기무사는 서 해5도를 출입하는 장병들의 지원 업무, 간첩신고 홍보 업무 등을 수집하면서 청해진해운 임원들과 업무 적으로 관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하는 관계였다.

청해진해운의 업무용 PC에서 국정원 관련 문건을 분석한 결과 ‘국정원’ 207건, ‘R□□’(국정원 인천지 부 별칭) 14건이 확인되었다. 문건들은 백령도 안보관광 요금 협상, 세월호 보안측정 관련 협의, 청해진 해운과 국정원의 평상시 업무 관계와 관련된 문건이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과 국정원·기무사 등 정보 기관과의 특수 관계(도입·소유·운영·관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의혹)를 입증하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양사고 보고 계통도’에 국정원이 들어간 이유가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사참위는 한국해운조합이 발간 한 「연안해운통계연보 2014」를 기준으로 여객선 34척의 「운항관리규정」도 검토했다. 그 결과 세월호를 제외한 모든 조사 대상 선박에는 국정원에 최초·직접 보고하도록 한 비상사고 보고 계통도가 존재하지 않 았다. 다시 말해 「운항관리규정」에 따라 국정원에 1차 보고를 하도록 한 여객선은 세월호가 유일했다. 광 주지검 목포지청이 수사 결과에서 발표한 대로 오하마나호 조타실에 국정원이 포함된 보고 계통도가 부

252 제5장
2017년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적폐청산TF에서 ‘국정원 직원이 「운항관리규정」 작성·승인·심사에 개 입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사참위 조사 결과 국정원 인천지부 대테러 담당 직원 G□□가 세월호 「운항관리규정」 내 「해양사고 보고 계통도」에서 ‘국정원에 최초·직접 보고하도록’ 관여한 것으로 판단했 다.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 ‘세월호에서 국정원으로 직접·최초 보고하도록 하는 해양사고 보고 계통도’
착되어 있긴 했지만, 승인받은 오하마나호의 「운항관리규정」 문서에는 국정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5장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기록(세월호참사 특수단 수사결과 포함), 세월호특조위에서 입수한 선원들의 카카오톡 메시지와 청해진해운

선사 임직원 및 선원 진술, 전 현직 청해진해운 임직원 진술 및 면담, 국정

253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가 포함된 시점은 2013년 2월 19일 「운항관리규정」 심사회의 당일 또는 그 이전으로 보인다. 당시 청해진 해운 해무팀장 Q□□는 「운항관리규정」 작성 시점에 국정원 인천지부 직원 G□□가 “그렇게 하라고 해 서”, “넣어달라고 해서” 국정원을 해양사고 보고 계통도에 넣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G□□는 본인(국정원) 이 「운항관리규정」 작성에 관여한 바가 없다면서도 “조언을 해주었을 것 같다.”고 번복 진술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입수한 관련 수사·재판 기록, 통화 내역, 진술 등을 검토한 결과 「운항관리규정」의 해양 사고 보고 계통도에 따라 세월호 선장 이준석, 1항사 강원식, 사무장 故 H□□ 등이 사고 시점에 국정원 과 통화했다는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또 국정원에서 공식적으로 밝히는 세월호참사 인지 시점(9시 19분)보다 이른 시각에 청해진해운 임직원이 G□□에게 연락하거나 F□□ 핸드폰에 저장된 국정원 직 원 연락처에 연락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국정원과 청해진 임직원의 연락 사실을 단독 보도한 「경향 신문」 기자에게서도 ‘청해진해운 임원이 9시 10분에 국정원에 최초 보고’는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기자는 기사에 기재된 ‘9시 10분’이 제보자와 함께 기억을 역순으로 추적해 도출한 시간으로, 후속 취재 과정에서 통화 내역이나 문자 내역을 밝히고자 노력했으나 제보자와 연락이 두절 되는 등 추가 확인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다만 청해진해운 선사 임원 F□□이 9시 33분 및 9시 38분에 G□□에게 세월호 사고 사실을 알린 것은 확인되었다. F□□은 “세월호가 국가보호장비이기 때문에 국 정원 인천지부 직원 G□□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진술했다. 「[선내 여객 구역 작업 예정 사항]-국정원 지적사항」 문건을 작성한 이는 세월호 사무장 故 H□□으로 보인다. 기존 수사·재판 자료를 검토하고, 전직 청해진해운 직원을 면담하고, 청해진해운 업무용 PC를 분석한 결과 등을 종합했을 때 국정원이 세월호 소유·관리·운영에 개입했다고 판단할만한 증거나 진술 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참위는 세월호 국가보호장비 지정을 위한 보안측정 과정, 「국정원 지적사항」 문건 등을 통해 국 정원이 세월호를 소유, 도입·관리·운영했는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 국정원이 세월호를 국가보호장비 로 지정하면서 항만 시설(야적장 등) 및 경비 시설 등에 대해 과도하게 개입했다는 사실 △ 국정원의 세월 호 보안측정이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실시되었고 이로 인해 청해진해운 직원들이 상당한 압박을 받았던 정황을 확인했다. 또 국정원 직원을 피의자로 「국정원 지적사항」을 수사하던 검찰이 국정원 직원에게 대 응 방향을 제시하거나 수사결과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정황을 확인했다.
‘세월호’ 키워드 검색 결과 열람 자료를 종합해봤을 때 국정원이 선원 수사 등에 개입해 수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다. 1등 기관사 손지태에 대한 국정원 수사 의혹에 대해서는 세월호참사 특수단에서 조사한 것
3) 선원 수사 과정에 대한 국정원의 개입 여부 현재까지 관련 수사·재판
직원 진술, 참고인 진술, 국정원
이상의 새로

운 사실이 없었다. 세월호참사 특수단은 손지태가 국정원에서 조사받은 사실이 없다는 진술을 청취했 고, 선원 강원식, D○○, 박기호, 이준석 등의 진술에서 “국정원 직원의 선원 접촉 사실이 없거나 알지 못 한다”는 진술을 확인했다. 변호인으로 선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원들을 만난 변호사 C□□이 국정원 등 정보기관의 수사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는지에 대한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C□□의 선원 접견 동기 는 그 후에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며, 2014년 6월 3일에 왜 다시 선원 박한결, 조준기, 박기호, 강원 식을 접견했는지 그 이유도 확인되지 않았다.

4) 유병언 검거 작전에 대한 부적절한 지원 기무사 및 국정원 자료 검토 결과,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이 유병언 일가 수사 및 검거 작전에 개입 한 것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유병언 검거를 위한 당시 검찰 수사 서류는 국정원이 제공한 자료 등을 토대 로 ‘완벽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검찰은 청해진해운 등 그룹사 주요 재무제표 및 국세청 내부 재무상태를 확보했고, ▲ 유병언 아들의 해외 출국 동향 ▲ ○○회계법인이 자금 유입과정을 짜 맞추고 있다는 사실 ▲ 유병언이 객실 설계 변경을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 등을 정보기관들의 협조를 통해 파악했다. 기무사는 ‘유병언 검거와 재산 환수가 세월호 사건 종결의 관건’이라고 판단하고, 유병언을 검거하는 데 TF를 구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기동 방탐 장비를 활용해 금수원 등에 있던 민간인을 사찰했 고, 유병언 은신 예상지 등을 특정해 수색, 정찰 활동을 실시했으며, 특히 예하부대인 601기무부대는 인 천지검과 협력해 민간인 통화 내역 등 약 170만 건의 데이터(수사자료)를 제공받아 분석했다. 청와대에 도 보고된 이상 기무사의 활동은 수사기관의 수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행정절차법상 행정응원에 해당 할 여지가 없는 위법 부당한 활동이다.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세월호참사는

지속성, 수단의 측면에서 책임 소재를 조사받는 기관이 증거를 조작하고 책임을 회피한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청와대는 세월호 구조 실패에 대 한 비판 여론과 세월호특별법 제정 등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을 ‘국정을 흔드는 행위’로 판단했다. 실수비회의 등을 통해 네티즌 여론을 관리하고, 언론사를 통제했으며, 유병언 수사를 통해 여론을 바꾸려 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

254 제5장
그 규모와
4. 진상규명의 책임을 다하는 국가로

해 애썼으며, 정부에 비판적인 피해자 가족을 종북 세력으로 몰아갔고,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하도록 저지했으며, 세월호특조위 조사를 방해했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지시를 전파받은 국정원과 기무사 등 정보기관과 해수부, 기재부, 행 안부 등 정부 부처는 청와대의 필요에 부응하고자 각자의 의무와 권한을 벗어나 민간인 을 사찰하고, 유병언 수사에 협조했으며, 초·중·고의 세월호참사 관련 수업을 통제하고,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육계 인사 명단을 작성했으며, 전경련을 통해 보수단체를 지원하는 등 불법·부당한 행위에 가담했다. 재난을 국정 부담 요인으로 여기는 정부 기조 속에서, 진상규명을 하고 피해자를 지원하 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은 다시 한번 큰 상처를 받았다. 피해 자들은 청와대의 지시와 대응 기조 변화에 따라 때로는 불만 최소화를 위해 주력해야 하 는 대상, 때로는 반정부세력과의 연계를 차단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순수(온건) 유가족 과 좌파 강성 유가족 등으로 부당하게 분류되었다. 피해자들을 관리 통제 분열시키려는 과정에서 피해지원 서비스와 지원체계가 활용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컨트롤한 대 통령비서실의 주된 관심사는 ‘세월호 국면전환/정국 안정/대통령 지지율 상승’ 이었다. 상 처는 피해자들만 입은 것이 아니었다. 세월호참사를 둘러싸고 사회는 청와대와 정보기관 이 임의로 선별하고 분류한 ‘보수’와 ‘좌파’로 갈라졌고, 오히려 갈등이 증폭되었다. 만약 국가가 이렇게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피해자들을 괴롭히지 않 았다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과정이 이렇게 지지부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혹도 지금 보다 더 빠르게 해소됐을 것이고, 필요한 쟁점에 집중해 더 적은 사회적 자원으로 진상규 명을 완료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진상규명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거나 여론이 분 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피해를 보고 상처 입은 이들은 피해자들이다. 세월호참사의 피해 자들이 겪은 일련의 책임 회피, 방해, 괴롭힘에 대해 국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다시는 재난 참사 피해자들이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5장

255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256 제5장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그림 5-20 세월호참사 시기별 정보기관 정보보고와 청와대 대응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정부는 왜 참사를 덮으려 했는가

제5장

257
회피하고, 방해하고, 괴롭혔다:
제 6 장 아물지 않는 상처: 치유와 회복은 과연 가능한가 1. 강요받은 치유 2. 피해자 지원의 공백 3. 변화의 시작: 세월호참사 이후 바뀐 피해 지원 체계 4. 덧상처: 공공연한 혐오 5. 진실과 정의를 향해 6. 논쟁과 협상의 대상이 된 추모 7. 피해자와 연대하는 시민사회

탑승자 476명 중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참사는 살아남은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희생자 및 피해자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 겼다. 정부는 참사 직후 생존 학생들에게 심리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거나, 2015년 3월 29일 「4ㆍ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세월호피해지원법」’)의 시행과 함께 피해자 지원 사업들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 정책들은 피해자들에 게 일부 도움이 됐으나,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참사의 피해를 다루기에는 매우 단기적이 고 일방적이었다. 급조된 피해자 지원 프로그램 참사 당일 진도군보건소와 진도한국병원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진도군보건소는 환자 이송 을 대비해 오전 10시 진도한국병원에 행정 요원을 배치했고, 진도전남병원에도 행정 요원 1 명을 대기시켰으며, 다수의 생존자가 들어오는 진도실내체육관(이하 ‘진도체육관’)에도 의료부스 를 설치했다. 진도군보건소장은 지역의 진도중앙연합의원, 한마음의원 전문의들이 진도체 육관에서 의료 지원을 하도록 협조 요청했다. 진도체육관에서는 진도군보건소 의료진이 증 세를 호소하는 고통을 호소하거나 부상당한 피해자를 인근 진도한국병원으로 이송해 치료 받을 수 있도록 구급차 등을 대기시켰다. 참사 당일 총 34명의 부상자를 진료한 진도한국병 원에서는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의료진 외에도 병원 모든 직원이 대기해 신속하게 부상자를 진료할 수 있었다. 11시 37분 최초의 부상자가 이송된 이후 12시 47분까지 일차로 19명을 진 료했고, 이 중 5명을 목포한국병원으로 전원했다.148) 이후에도 다수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병원 직원들의 비상 대응으로 환자 적체 등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4월 16일 단원고의 생존 학생들은 차례로 고려대학교 안산병원(이하 ‘고대병원’)

260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에 입원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도 생존 학생들은 한동안 안정을 취하기 어려웠다. 생존 학 1. 강요받은 치유 148)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4) 참사 당일 진도군 병원 관계자 참고인 면담보고”, (2020.4.17.), 2쪽.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생들은 4월 17일부터 27일까지 약 열흘간 고대병원 일반 환자와 함께 병동을 사용했는데, 주위 환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다른 환자들이 시청하는 아침 뉴스를 통해 함 께 탑승했던 이들의 사망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병원에서의 생활이 언론에 노출되는 등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병원은 외부인 출입을 통제했지만, 기자들은 신분을 감추고 취재를 강행하는 등 무분별한 취재를 계속했다. 고대병원은 생존 학생들이 입원한 이후 외상치료와 더불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심리검사 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생존 학생들 본인의 동의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됐다. 일방적으로 편성된 상담 및 심리검사 같은 프로그램으로 생존 학생들은 오히려 큰 스트 레스를 받았다. 학생들은 유사한 검사들을 반복해 받고 계속 질문받은 탓에 심리치료에 대한 거부감이 늘어났다. 병원에서는 심리검사뿐 아니라 그림이나 마술 등을 이용한 상 담 프로그램도 운영했으나, 심리검사에 지친 생존 학생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치 유받기보다는 소진되었다. 생존 학생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무슨 놀이 같은 거를 한대요. 무슨 마술 그런 공연도 있다 그러고, 또 뭐였지, 무슨 만화 그리기? 그 런, 그런 걸 또 일정을 짜서 상담이 끝나면 그런 걸 할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저희는 상, 상담하는 것도 벅찬데 또 그런 걸 하라는, 하라니까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 저는 친구들하고 억지로 했던 거 같 아요. 끌려다니면서 … 근데 너무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그것 때문에. (중략) 쉬고 싶은데 왜 계속 그런 걸 타임마다 짜서 올라가게 해, 해가지고, 막 간호사가 들어와서 이거 올라가라고 이거 뭐 한다고 그러 고, 억지로 가, 활동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생존 학생의 진술)149) “제일 싫었던 거, 400문항인가 그거, 엄청 긴 설문지가 있었거든요. 그거. 400문항짜리 그거 계속 시 키고. 너무 귀찮았어요, 그거. [어떤 내용이었어요, 이름 기억나요?] 이름이나 그런 건 기억 안 나는데 무슨 두 칸이 있으면 한 칸 검게 칠하는 거 있잖아요. [MMPI?] 네, 그런 거. 너무 그걸 계속 시켜가지고 싫기도 했고.”(생존 학생의 진술)150)

149)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2016), 67쪽.

150) 앞의 자료, 67쪽.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61

각종 검사와 상담 프로그램들은 생존 학생들을 위한 충분한 설명 없이 진행되었다. 검사 결과는 이를 요청하는 생존 학생과 보호자에게만 고지되었고, 무슨 검사를 하는지 전반

적인 내용도 모르고 검사에 응했기에 점차 형식적으로만 참여하면서 프로그램에 대한 거 부감이 생겼다.

“집단상담 이런 것도 있고. 클레이 같은 거. 근데 암튼 그런 것도 있고. 저는 병원에서 가장 싫었던 게 강 압적으로 이것저것 해야 됐던 거? 검사 그런 거는 시키는 대로 해야죠, 뭐. 어떡해요?”(생존 학생의 진술)151)

“상담 같은 것도 일단은 얘들 다 하니까 저도 가서 받았는데, 너무 다 형식적인 그런 질문들만 하고, 또 이게 점점, 계속 이게 일정에 맞춰서 막 다 해야 하니까, 빡빡하게 뭘 하니까, 다 그냥 다 싫었던 거 같 아요. [다 싫었어요?] 도움이라, 도움은 전혀 안 됐던 거 같아요.”(생존 학생의 진술)152)

생존 학생들은 병원 생활을 하며 구속감을 느끼기도 했다. 병원과 보호자들은 학생들이 외출하면 기자들이 접근해올 수 있다고 판단해 외출과 가족 이외 면회를 모두 금지했다. 보호자들과 간호사는 자살 가능성 등을 우려해 병원 안에서도 생존 학생들의 동선을 계 속 확인했는데, 이러한 관리 방식은 학생들을 심리적으로 더 위축되게 만들었다. “다른 학교 친구들이나 그런 친구들이 원래 와서 제가 좀 더 뭔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는데, 막 못 올라 오게 하고 막 제 친구들 막았거든요. 그리고 검사도 별로 안 하고 싶은데, 그리고 병원에서도 무조건 나갈 수 없고, 그냥 아예 감옥처럼 진짜 병원에서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너무 그게 싫었고.”(생존 학생의 진술)153) “저는 압박이 심했던 거 같아요. 가둬놓고 어디 간다고 그러면, 괜히 걱정돼서 보호자든 간호사 선생 님이든 그냥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잖아요. 그게 또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거예요. 아우, 나 자살하러 안 가는데, 화장실 가는데, 나 누구 만나러 가는데, 왜 나를 이렇게. 이런 거?”(생존 학생의 진술)154) 151) 앞의 자료, 68쪽. 152) 앞의 자료, 69쪽. 153) 앞의 자료, 71쪽. 154) 앞의 자료, 71~72쪽

262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병원에 입원한 생존 학생의 보호자 73명은 4월 21일 논의를 통해 병원치료 이후 학교에 복귀하지 않고 4월 30일부터 중소벤처기업연수원(이하 연수원)에서 ‘생존 학생 회복 및 가정· 학교 복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생존 학생 75명 중 입원 치료가 필요한 5명 을 제외한 70명은 퇴원 후 안산시 소재 연수원에서 2주로 계획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155) 프로그램은 소그룹 상담, 심리치료, 교과 수업, 회복 멘토링 같은 내용으로 오전 9시 30분 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주5일 동안 진행했다. 생존 학생의 정서적 안정과 회복을 단기간 에 추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힐링’ 프로그램은 초반에 다소 일방적인 방식과 부담스러운 종일 일정으 로 인해 생존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존 학생들이 원했던 것은 휴 식이었으나 압축적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으로 인해 오히려 안정을 취하기 어려웠다. 입소 직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온종일 편성된 소그룹 상담 시간에는 생존 학생들이 참사 경 험을 이야기하도록 했는데, 이는 참사를 겪은 지 얼마 안 된 생존 학생들의 상처를 더 자 극할 뿐이었다. “그때는 자기 시간을 갖고 싶은데 너무 그렇게 강, 반강제적으로 하니까 또 그런 면에서 또 스트레스 였던 거 같아요. 저희는 쉬고 싶은데 계속 반강제적으로 하니까…. 그 나빴던 점은, 심리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좀 오전 오후랑 저녁 먹고 또 있다는 거. 네, 오전에, 아침 먹고 그거 하고 점심 먹고 또 그거하고 저녁 먹고 또 몇 시간 있다가 더 하고.”(생존 학생의 진술)156)

“애들도 미쳐가지고 막, 안 한다고, 집에 갈 거라고. 그니까 보호를 하려고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울타 리 안에서 난리가 나버린 거 같은 그런 느낌? (중략) 저희, 모든 애들이 다 싫어했어요. 진짜, 어우, 이거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고, 근데 그게 반영이 안 되고. 정해진 일주일이 지나 버렸어요. (중략) (제가) 굉장히 무기력해가지고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63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하고 나가고.”(생존 학생의 진술)157) 155) 이후 교육청과 보호자 간의 협의를 거쳐 연수원 기간은 6주로 연장되었다. 156)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157) 앞의 자료, 96쪽.
아침 되면 한숨 세 번 쉬고 대충 나가고, 그냥 영혼 없이 앉아 있다가, 시계 보다가 대충
2016년, 95~96쪽.

“제일 싫었던 거는 맨 처음에 가자마자 한 거. 소그룹 상담이었던 거 같아요. (중략) 막 이런 걸 하는 거 예요. 뭐, 상상에서인가 얘들 이렇게 둘러앉아서 막말을 이렇게 이어 나가는, 이렇게 이어 나가는데, 뭐, 수학여행 갔다 막 이렇게 시작하는 거예요. [아….] 얘들이 처음에 이렇게 하다가 이건 뭔가 아닌 거 같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왜 이런 얘기를 꺼내게 하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되 게 싫어, 다 싫어했거든요. 반감도 되게 많았고.”(생존 학생의 진술)158)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생존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일정이 조정되고 회복 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도 진행됐다. 2주 차부터 진행된 회복 멘토링은 대학생 멘토와 함께 제빵, 요리 등 원하는 내용을 선택해 부담 없이 즐기도록 하는 프로그램이었 다. 이 프로그램은 생존 학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심리적 지지 기반을 다지고 안

정감을 가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3주 차부터 야간이나 주말에는 프로그램을 진행하 지 않는 것으로 조정됐고, 이후에도 계속된 회복 멘토링 프로그램은 연수원 내에서 교과 수업에 적응하는 과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정부 의료 지원 체계

수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진도군과 팽목항에서 다수의 실종자 가족이 장기간 상주하게 되 어 이재민 재해구호와 같은 상황으로 전환되었다.159) 4월 18일 팽목항의 현장응급의료소는 3개 동으로 확대되어 의료진 13명(의사 3명, 간호사 3명, 구조사 1명, 행정 6명)이 각 동에 나눠 근무했 고, 4월 20일에는 총 32명(의사 9명, 간호사 9명, 기타 14명)으로 증원됐으며, 진도에서는 주간 19명, 야간 7명의 의료진이 상주하여 의료 지원을 시작했다. 4월 20일 진도군과 안산시가 특별재 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하 ‘「재난안전법」’)에 따라 응급대책 및 재난 구호와

264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복구에 필요한 행정·금융·의료 부분에서 특별
참사 일주일 후 정부는 의료비 지원에 대한 방침을 마련했지만, 피해자를 승선자와 나머 158) 앞의 자료, 97쪽. 159) 「재난안전법」상 긴급구조에 따른 현장 응급의료는 응급환자의 이송이 완료될 때까지이며, 이후 실종자 가족의 응급 상황 발생 위험에
지원은
160)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160)
대한
「재해구호법」의 의료 지원을 적용한다.
「재난안전법」 제60조, 제61조.

4·16세월호참사

지로 구분함으로써 혼란을 일으켰다. 4월 23일 중대본은 구상권 행사를 전제로 먼저 치료 한 후 치료 비용을 국가나 청해진해운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구조된 승선자, 즉 생존자는 보건복지부의 ‘세월호 부상자 등의 치료비 지원지침’에 따라 청해진해운의 보험 사인 한국해운조합에서 직접 의료비를 지원하게 하고, 나머지 피해자는 국민건강보험공 단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승선자들은 솔로몬손해사정업체를 통해서 한국해운조합에 의 료비를 청구할 수 있었는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통해서 의료비를 지원받는 과정보다 훨 씬 복잡했다. 이처럼 승선자와 피해자 가족이 의료비를 환급받는 방식이 서로 구분되어 있는 상황에서 병원, 약국 등 모든 의료기관에서 이를 제대로 숙지하고 처리하기 어려웠 다. 이는 국가가 생존자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대신 일반적인 교통사고처럼 한국해운 조합의 공제약관을 따르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으로, 이 비용은 이후 「세월호피해지원법」

의 배·보상금에서 공제되기까지 했다.

피해자들은 의료비를 지급받기 위해 신체 및 정신질환과 세월호참사의 연관성을 입증하 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세월호피해지원법」에 따라 의료진이 피해자의 질병과 참 사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의료기관에서 의료 지원금을 국민건강보험공단으 로 직접 청구하는 식으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의료진마다 그 연관성을 판단하는 근거가 서로 달라 의료비 지원이 필요한 피해자와 의료진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피해자 들은 지원제도를 잘 모르는 의사들에게 이런 과정을 직접 설명해야 했으며, 연관성을 인 정해주지 않으려는 의사를 설득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의료비를 지원받기를 꺼리게 되었 다. 특히 비교적 인과관계가 명확한 신체적 외상을 제외한 정신적 충격 또는 기저질환의 악화, 정신적 스트레스로 유발되는 신체 질환의 경우 의사마다 다른 의견을 밝혀 피해자 간 지원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의료진 역시 모호한 기준으로 연관성 입증에 대한 책임을 의사 개인에게 부담시키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피해자 심리 지원 역시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방방재청은 참사 당시에 피해자 심 리 지원을 실시할 법적 근거, 실행 체계, 상세한 매뉴얼을 갖추고 있었지만 소방방재청이 재난 심리 지원을 체계적으로 지휘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다. 4월 17일 관계 기관 실무자 들이 참여한 회의에서 관계 부처 합동 심리 지원 체계를 세우려고 했지만, 소방방재청은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65
종합보고서

보건복지부의 협조 요청 공문을 받은 4월 23일에야 운영 계획을 수립하는 등 업무 지휘 를 원활히 수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각 부처에서 제각기 단독으로 관련 업무를 진행했 으며,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기관의 개입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국립정신병원, 정신건강복지센터), 교육부(학생정신건강센터), 여성가족부(청소년상담복지센터, 건강 가정지원센터), 소방방재청(재난심리지원센터), 경찰청(피해자심리전문요원), 법무부(스마일센터)뿐 아니라 민 간 차원에서도 각종 학회와 개인병원 등이 참여했다. 이로 인해 각 기관이 개별적으로 피 해자를 접촉하는 등 통일되지 못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한편 안산에서는 4월 17일 정신건강증진센터와 지역사회복지기관들이 참여해 신속하게 경기도·안산시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을 구성하고 긴급 심리 지원을 실시했다. 5월 1일 보건

복지부는 ‘4.16 참사 심리 지원에 있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다’는 목적으로 안산트라우마

센터를 설치해 심리 지원을 전담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은 국립서울

병원 의료진과 안산지역사회복지협의체 소속 사회복지사가 팀을 이뤄 유가족 지원팀(30명)

을 구성하고 방문상담 등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안산트라우마센터 개소 이후 이들은 새 롭게 채용된 사례관리 인력(7명)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자주 바뀌는 담당자 들을 경계했으며 새롭게 생긴 안산트라우마센터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이미 안산 지역 복 지관들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피해자들과 장례 과정부터 신뢰 관계가 형성된 인력이 있었지만 안산트라우마센터는 이러한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안산시에는 2014년 관내에 정신의료기관 18개소가 있어 지역 자원이 부족하지 않았고, 경기도가 자체 예산으로 심리치료비를 지원했기 때문에 지역 주민을 포함해 폭넓게 지원 할 수 있었다. 정신과 치료의 특성상 지속적인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 역에 있는 기존의 의료기관을 활용해 피해자가 자신이 원하는 병원에서 치료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피해자들은 민간에서 운영했던 ‘치유공간 이웃’이나 안산생명센터, ‘0416 쉼과 힘’, ‘우리함께’ 같은 민관기관들도 다수 이용했는데 이 러한 민간단체가 지속적으로 운영되도록 돕는 지원은 부족했다.

266 제6장
않는 상처
아물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회복되지 않는 일상

‘신속’하지만 불공정한 배ㆍ보상

2015년 3월 23일 「세월호피해지원법」에 따라 국무총리 소속으로 ‘4·16세월호참사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이하 배·보상심의위원회)가 설치되고, 법 시행 이후 6개월간(2015년 3월 29일∼9월 30일) 배·보상 신청접수를 받았다. 「세월호피해지원법」 제1조는 법의 제정 목적을 “신속한 피해구제”로 규정했는데, 실제 과정은 신속한 처리를 위해 피해자들의 의견 반영 절차를 보장하지 않는 등 불공정하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2015년 3월 23일 배·보상심의위원회는 판사 3명, 변호사 3명 등 법률가 6명, 고위공무원 6 명, 대학교수 1명, 손해사정사 등 전문가 2명 등 총 15명으로 구성되었다.161) 3월 31일 배·보 상심의위원회는 화물 피해·세월호참사로 인한 유류오염 등에 대한 손해배상 및 진도어업 인 소득손실에 대한 보상 기준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견이 반영되는 통로는 거의 없었다. 「세월호피해지원법」 제11조가 배·보상 시 신청인 의견을 반영하도록 규정했음에도 배·보상심의위원회는

「4·16세월호참사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 운영규칙」 제13조에서 배·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한 의결 없이 위원장이 단독으로 허가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즉, 「세월호피해지원법」

이 규정한 신청인의 적극적 권리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다. 심의 과정에서 해양수산부와 배·보상심의위원회는 신청인에게 과도한 입증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어구에 손실이 생겨 해경에 신고했던 어민들이 손실보상을 요청했지만 입증자 료 미제출을 이유로 기각 처리되었다. 이에 대해 해양수산부는 어민들에게 어구의 손실 을 입증할 수 있는 개별적인 증빙자료를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어구를 분실한 어민이 당시 해경에 즉시 신고했지만 해경이 분실 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것임에도 어민은 분실을 입증 할 수 있는 자료를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받은 것이다. 또 무면허 어업인에게는 배·보상 신 161) 해양수산부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67
배보상지원과, “(붙임 2) 4.16세월호참사 배상 및 보상 심의위원회–일반현황”, (2019.4.22.); 해양수산부, “세월호 사고 배·보상 업무 본격 추진(보도자료, 2015.3.30.)”, (2020.4.6.), 최종 접속.

청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며, 제출한 자료가 부족한 경우 미제출 사유에 대한 검토 없

이 신청이 기각되었다.

심의 이후에는 신청인에게 간단하게 항목과 금액만 기재된 배·보상 결정서만 통보하고 구 체적으로 왜 그렇게 산정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배·보상 결정서에는 구체적인 내용 없

이 항목별 결정 금액만 간단히 기재되어서 피해자가 결정 금액에 이의 제기를 하는 데 걸 림돌이 되었다. 심지어 「세월호피해지원법 시행령」이 규정한 배상금 지급신청 서식에는 “4·16세월호참사에 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도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 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5·18보상, 민주화보상, 부마항쟁보상처럼 기존에 국가가 실시 했던 배·보상에서 동의·청구서상의 내용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청구하지 않을 것임 을 서약합니다.”라고 규정했을 뿐, ‘일체의 이의 제기 금지’를 규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의 제기 금지 규정은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배·보상 절차를 신속 하게 종결시키고자 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관적이지 않은 생계 지원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은 희생자·실종자를 수습하거나 구조자를 돌보면서 일상을 보 낼 수밖에 없었다. 보건복지부는 참사 피해자 가족의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2014 년 4월 23일 생계 지원을 결정했다. 신청 대상은 세월호참사 피해 가구 또는 피해자의 직 계 1촌이 부상당하거나 가구원이 실종되어 소득 활동에 종사하지 못해 생계가 어려운 가 구로 했다. 집행을 맡은 기초자치단체는 신청 대상 여부를 확인하고 접수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건복지부와 기초자치단체 간에 혼선이 발생했다. 보건복지부는 4 월 23일 지방자치단체에 긴급생계지원금 운영 방안을 안내했을 때 세월호 승선자 명단을 보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각 지방자치단체는 팽목항 또는 진도체육관 등 현장에서 세월 호참사 피해자 가족의 정보를 개별적으로 파악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지방자치

268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단체가 개별적으로 파악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았고, 누락된 피해자가 생겼다. 결국 보건 복지부가 지방자치단체의 요청에 따라 2015년 4월 7일에야 피해자 정보가 포함된 명단을

제공했다. 참사 후 1년 동안 부정확한 명단을 바탕으로 긴급 생계 지원을 한 것이다.162)

지방자치단체장이 긴급 생계 지원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지원 대상 및 시기 등 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보건복지부는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긴급 생계 지원을 하도록 탄력적으로 운영’하라는 지침을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했지만, 각 지방자치단체가 적용을 달리하면서 제도 운영 과정에 혼선이 생겼다. 세월호 피해자가 가 장 많았던 경기도 안산시는 소득 조건 부합 여부와 무관하게 1개월의 생계비를 신속하게 지 급하고 조사 후에도 환수하지 않는 것으로 시행한 반면, 인천시는 소득과 재산 기준을 들 어 일부 피해 가족에게 긴급 생계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인천시의 피해자들이 2014년 9 월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면담하고 나서야 인천시로부터 긴급 생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에게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전제로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부상자 가족에게는 희생자 가족 지원금액의 1/2을 지급했다.163) 이와 관 련해 생존자 피해 가족들은 “생존자는 돌봄이 필요하고 (생존자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데 희 생자와 차등 지급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부서에 전화해 따지기도 했다.164) 165) 지 방자치단체의 생활안정자금 지원 담당 공무원은 “서울에서 2014년 5월 14일 담당자 회의 가 있었지만 생존자 차등 지급과 관련한 내용은 없었고, 당시 분위기가 생존자분들이 나 서서 차등 지급과 관련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개인적으로 희생자와 생존 자를 차등 지원한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66) 생존자 피해 가족들도 “당시 생존 학생 부모들 입장에서 생존자 1/2 지급에 대하여 이야기할 입장이나 상황은 아니었 다.”고167) 진술했다.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163) 행정안전부 산업교통재난대응과(2019.4.29.), “1405115_제4차 중대본회의 심의결과”, 1쪽.

164)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점검과, “피해자군별 4.16세월호참사 피해실태조사 3과제 최종보고서”, 가족3 진술, (2016.8.26.), 177쪽.

165)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점검과, “제4과제 최종보고서 발송용”, 참여자1 진술, (2016.8.5.), 153쪽.

166)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5) 지방세 감면과 생활안정자금 지원 참고인 조사 보고”, O□□ 진술, (2019.4.26.), 7쪽.

167)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붙임 3. (직라-15) 고용생계 관련 안산시 피해자 참고인 조사 보고”, P□□ 진술, (2019.6.17.),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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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생활안정자금 지금을 담당한 해양수산부 역시 정확한 세대 명부를 바탕으로 집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62)
2014년 5월 11일 중대본 제4차 회의 결정을 통해 지급된 1차 생활안정자금 지원 시 3가구가 누락되는 결과가 발생하였다.

중대본은 생존자의 생활안정자금 지원액을 희생자의 1/2로 결정하면서 「재난안전법 시

행령」 제70조 제4항 제2호를 준용했는데 이는 맞지 않는 법률을 준용한 것이었다. 더욱이 「재난안전법」 제66조 제4항에 따르면 사회재난 시 생활안정자금의 지원기준을 중대본 심

의를 거쳐 중대본부장이 정하도록 하고 있을 뿐 지급기준과 관련한 준거규정이나 준용규 정을 별도로 제시하지 않았다. 즉, 중대본이 심의를 통해 결정이 가능한 상황에서 부합하 지 않는 법률을 준용해 지원기준을 결정하면서 생존자와 희생자 사이에 생활안정자금 지

원에 차등이 생겼다. (관련 규정은 이후 차등이 없도록 개정됐다.)

수색 기간이 길어지면서 근로자나 자영업자는 장기 휴직하거나 휴업해야만 했다. 중대본 은 5월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들의 휴가 지원을 결정했다. 이를 시행한 고용노동부는 피 해자 가족들이 장기 휴가 및 휴직 사용 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사업장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하고, 사업자에게 피해자 가족의 휴직, 휴가 시 고용유지를 위한 비용을 지원했다. 하 지만 이러한 결정마저도 참사 후 한 달이 지난 뒤였고, 이후에도 피해자들은 원래 직장에 복귀하는 데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다. “2회에 걸쳐 지원금을 받았는데 회사를 거쳐 지원금이 나오다 보니 사장 눈치도 보이고, 휴직 자체가 회사에 부담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쉬다 보니 회사 복귀가 어려워져서 회 사를 그만두었습니다.”(N□□ 진술)168)

장기 휴직했던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본래 직장으로 복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 주에게 고용유지 기본 경비와 대체 인력 채용 비용 등을 제공하는 것 못지않게 피해자들 을 대상으로 하는 구직 활동 지원이 필요했던

270 제6장
않는 상처
아물지
부족한 법률 지원 세월호참사의 국가 책임에 관한 논란으로 인해 피해자들과 참사 수습을 하는 정부 기관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던 만큼 피해자에 대한 정보 제공, 세월호참사 수습 및 배·보상 등 168)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5) 고용생계 관련 일반인 희생자 참고인 조사 보고”, N□□ 진술, (2019.6.17.), 3쪽.
지점이었다.

국가의 의사결정과정에서 피해자 참여는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생존자 구조·희생자 수

습·실종자 수색 및 피해 가족 지원 등 피해 최소화 방안,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세월호참 사 책임자 처벌 등 많은 과제가 놓여 있었다. 이러한 과제들과 관련된 법적 문제에서 전문 가인 변호사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세월호참사를 수습하는 동안 공적인 법률 지원은 법무부의 검사와 법무관으로 구성된 법률 지원단이 피해자 44명을 상담했던 것이 전부였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를 위한 법률 지원은 주 로 대한변협과 민변을 중심으로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한변협은 세월호참사 법률 지원 을 희망하는 변호사를 500명 넘게 모집했고, 세월호특위를 구성하고 산하조직을 두어 현장 지원, 입법 지원, 진상조사, 형사피해자 지원, 법률상담, 언론대응 등에 걸쳐 다양하게 활동했다. 민변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17대 과제를 선정하고,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국정조사 기관보고

에 대한 검토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산하 4·16법률지원센터를 통해 피해자 진술청취카드를 작 성하는 등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민간 차원에서는 다양한 분 야에서 다수의 변호사가 참가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직 간 협업 체계가 미흡 했다는 한계가 있었고, 세월호참사 수습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변호사들이 본업으로 돌아가 게 되면서 정작 법률 지원이 많이 필요했던 배·보상 과정에서는 지원 인력이 부족했다. 이름뿐인 지역경제활성화 사업 참사 이후 방문객이 감소하면서 관광산업과 특산물판매에 의존해왔던 진도의 지역경제 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14년 4월 19일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범부처 사고대책본 부 (이하 ‘범대본’) 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당시 지역 행사였던 완도해조류박람 회에 방문한 일반인의 현장 방문 자제를 요청했고, 범대본은 5월 5일에도 연휴 기간 일반 인 방문객이 애도 분위기를 저해할 것을 우려하며 현장 방문을 자제할 것을 재차 당부했 다. 문체부는 팽목항이나 진도체육관과 같은 현장 방문 자제를 건의한 것이었으나 범대본 브리핑 과정에서 진도 방문 자제로 발표됐고, 언론은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71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이를 방송 자막 등으로 내보내면서 진도의 방문객들이 줄어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 진도군은 2014년 4월 20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재난 구호에 필요한 특별 지원

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는 재난 대응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소요된 비용의 긴급 지원에만 한정되었고 소비심리 침체 등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에 대한 지원 대책은 없었다. 신속한

보상을 위해 ‘세월호 피해보상지원단’이 설치되었으나 피해보상 대책은 유류오염 피해로 한정되었다.

2014년 6월 10일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는 국립수산과학원과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을 통해 사고 해역 주변 해양오염을 조사하고, 바지락, 미역, 톳 등의 수산물이 안전하다고 발표하 며 진도 특산물 구매를 호소했다. 국무조정실은 세종청사에 진도 농수특산물 직거래장터 를 열고, 범부처 차원의 추석 선물 구입, 정부 구내식당 진도산 식재료 구입, 학교급식 진도

산 권장 조치 등의 대책을 전개했다. 온라인 직거래 쇼핑몰 ‘진도몰’을 통해 국방부 본부 및 소속기관은 6,300만 원, 식약처는 1,600만 원, 외교부는 2,200만 원어치의 진도산 특산물 을 구입했다. 하지만 진도몰과 같은 온라인 직거래 쇼핑몰을 활용한 구매는 진도군에서도 규모가 있는 업체만 참여했기 때문에 진도몰을 통해 판매하지 못하는 영세소상공인들의 매출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진도의 한 소상공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14년 이후 중앙부처에서 명절선물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텔레비전에서나 그랬다. 우리 같은 데는 전혀 그런 것 없었다. 직거래하는 데를 한 것 같다. 몇 군데는 왕창 가져갔다는 소문만 들었다. 그런 것 은 행정상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골고루 해줬어야 한다.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에 자영업자는 타격 을 받았으니… 똑같이 피해를 봤으니… 다 똑같이 갈아주라고 했어야 한다. 우리 같은 경우 창고에 전 부 재고가 남았었다. 그러니깐 매출이 하락될 수밖에 없었다.”169)

지역경제활성화 사업은 참사 1년 후에 「세월호피해지원법」이 시행되고도 곧바로 시작되 지 못했다. 연구와 협의를 거쳐 사업이 사실상 본격화된 것은 참사가 일어난 지 3년 후인 2017년부터였다. 2014년 참사 초기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피해 지역의 실질적인 사 정이 고려되지 않은 매우 뒤늦은 대응이었다. 더욱이 지역경제활성화 사업은 다수의 부처 가 관련되어 있어 사업수행 주체, 내용, 방법 등에 관한 총괄 체제가 부재했다. 169) 정책공방유즈, “세월호참사 피해지역 회복사업 평가와 개선안 최종보고서”,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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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국무조정실 지원추모사업단이 지역경제활성화연구를 통해 제안한 사업 가운데 실제로 사업을 추진한 것은 안산시와 진도군 각각 1개 사업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안산시와 진도 군이 기존에 추진해오고 있거나 정부 중장기 계획으로 확정 또는 확정 단계에 있는 사업 이었다. 다시 말해 세월호참사와 관계없이 정부 계획에 따라 지원받을 시점이 되었거나 자 체 연구를 거쳐 실행이 확정되는 단계에 있던 사업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안산시 지역 경제활성화 사업 가운데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 조성’은 행정안전부 간판정비 지침에 따 라 지역별로 진행해온 사업이었으며, 진도군의 ‘국가명승지활성화’ 사업은 순차적으로 진 행되어온 문화재청의 명승지 개보수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온 것이었다. 반대로 정부는 지역 상권을 살리기 위한 사업들을 선정하지 않았다. 수산물 직매장 건립, 팽목항 마을 꾸미기 미술프로젝트, 농축특산물 집하가공 시설 건립, 수산물 산지 거점 유 통센터 건립,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 수산물 보관 시설 및 전시 판매 시설 건립 등은 진도 군이 반복적으로 제안했으나 제외된 사업들이다. 해수부도 소상공인 지원과 상권 활성화 를 위해 진도군이 제안한 사업을 한 건도 수용하지 않았다. 진도군은 세월호참사 이후 유 언비어 등으로 급속히 나빠진 진도산 농수산물 이미지로 인해 판로가 막혀 어려움을 겪 고 있었고, 범군민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진도 이미지 개선 사업’을 지원해달라고 지속적 으로 요청했으나 이 사업 역시 통과되지 않았다.170) 안산시에서는 지역 상권 경제가 장기 침체로 이어지고 생업에 위기감을 느끼는 상인들의 불만이 표출되었다. 이에 안산시는 지역 상권을 활성화할 수 있는 소상공인 맞춤형 경영 지원 컨설팅 사업, 소상공인 운영자금 확대 지원, 농·식품 온라인 로컬푸드 직매장 설치 지원, 농어촌체험마을 체험농장 조성, 산업단지 근로자 문화커뮤니티센터 활성화, 과실브 랜드 육성 사업 대부포도 브랜드 사업 등 지역 맞춤형 사업을 제안했으나 모두 추진되지 않았다. 이는 지역경제활성화 사업의 효과성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 어졌다. 안산은 세월호참사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73
후 지역경제활성화 사업이 지역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는 긍정 170) 허베이 스피리트호 유류오염사고 이후 2017년까지 10여 년간 충남, 전북, 전남에서 청정 해양환경 및 수산물 이미지 개선을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유사사례가 있음에도 정부는 진도군의 이미지 개선 사업을 지자체 고유 사업이란 이유로 추진하지 않았다.

적 응답이 22.0%, 부정적 응답이 29.9%, 진도군은 긍정적 응답이 30.4%, 부정적 응답이 43.5%로 나타났다.171) 피해자 지원 과정에서 미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공백이 발생했다. 희생자 및 생존자의 형제자매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참사 당시 구조에 뛰어들었던 민간 잠수사, 진 도 어민, 자원봉사자들 역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기까지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거나, 아예 지원받을 수 없었다. 집에 남겨진 아이들

2.

사고 직후 단원고는 휴업을 결정하고 재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172) 참사 당시 단원고

에는 피해 학생들의 형제자매 9명이 재학했다. 한 남학생은 참사 당일 형이 구조자 명단에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채 학교를 돌아다녔고,173) 학교가 임시휴업을 한 이후에도 한 실종 학생의 동생은 집에 가지 못하고 학교에 남아 있었다.174) 단원고뿐 아니라 다른 학 교에 재학 중이던 형제자매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 희생 학생의 동생은 학교에서 속 보로 소식을 접하고 학원에서 부모님과 통화 후 집으로 돌아와 혼자 울면서 시간을 보냈 다.175) 이처럼 참사 당일 부모가 모두 자녀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진도로 이동한 터라 남겨 진 형제자매에 대해 별도의 보호조치가 부족했다.

피해자 지원의 공백 171) 정책공방유즈, “세월호참사 피해지역 회복사업 평가와 개선안 최종보고서”,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진도군 지역경제활성화 사업 효과성 설문조사, (2019.11.22.); 국가명승지활성화 사업(운림산방개보수) 전수 조사, 안산시민 인식조사, (2019.11.15.~25.)).

172)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단원고생산문서(4)”, 90쪽.

173) 4.16민주시민교육원, “기록물제작을 위한 기억자료수집 인터뷰(7)”, (2021.11.19.).

174) 4.16민주시민교육원, “기록물제작을 위한 기억자료수집 인터뷰(14)”, (2021.11.19.).

175) 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거에요』, 창비 (2016), 92쪽.

274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2014년 5월 1일까지 미수습자는 85명이었고 수습 기간은 예상보다 장기화되었다. 형제자 매는 가족의 장례가 끝난 뒤 학교로 복귀했지만, 수중수색이 종료된 11월 10일까지 또 다 른 희생자가 발견될 때마다 가족을 잃은 아픔과 상처에 반복해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극심한 충격에 휩싸였고, 이후 건망증, 집중력 저하, 심한 감정의 기복, 불면증으로 고통받았으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까지 했다.176)

2014년 4월 30일부터 6월 24일까지 8주 동안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연수원에 합숙할 때 부모도 함께 입소하라는 방침이 있었다. 참사 직후 생존 학생들이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은 기간까지 고려하면 부모와 함께 한 시간은 총 10주였다. 그동안 한부모가정 생존 학 생 형제자매는 거의 방치되거나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단원고 1학년에 재학 중 이었던 한 학생은 학교로 복귀한 생존 학생들을 보면서 자기 형은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 에 너무 화가 나 단원고를 다니고 싶지 않다며 전학하기도 했다. 희생자 형제자매의 충격은 상실의 고통과 분노, 불면 등 정신 건강상의 문제로 이어졌다. 활달하던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하고 건망증, 집중력 저하, 격심한 감정의 기복, 무력감, 불 면증과 같은 증상을 호소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거울을 보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거울 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형제자매가 죽었음에도 살아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었다.177) “한동안은 거울을 못 봤어요. 거울을 못 봐서 다 덮어놓고. 헤어드라이기를 켜면 무서운 느낌? 소리에 깜짝 놀라고, 가스레인지 켜 놓은 것도 5번씩 왔다 갔다 확인하고. 확인해야 마음이 편해요.” (희생자 형 제자매의 증언)178)

형제자매들은 남은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76) 성균관대학교산학협력단, “세월호참사 피해자 지원 심화연구 제1권”,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27쪽, 315쪽.

177) 앞의 자료, 27쪽.

178)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5) 고용생계 관련 일반인 희생자 참고인 조사 보고”, 3쪽.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75

“사건 초기 때는 엄마가 방에서 조금만 조용히 해도 방으로 달려가 보고, 화장실에서 오래 안 나오면 두드려 보고, 나는 죽지 않을 것이지만, 다른 가족들이 죽을 것 같아요.”179)

“예민해진 것 같아요. 제가 엄청 활발했는데, 성격도 내성적으로 바뀌었고, 생각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해요. 친구의 성격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평상시에 우울하기도 하고… 자살 생각은 아닌데, ‘내가 그 배에 있었더라면 나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180)

2014년 5월 경기도교육청은 ‘세월호침몰사고 관련 형제자매 지원을 위한 교육복지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형제자매의 학교생활 적응력 향상을 목표로 학교 상황에 따라 교육복지사를 배치하거나 순회 교육복지사를 연계하고, 학생들이 원하는 교육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희생 학생의 형제자매가 10명 이상인 학교에는 교육복지사가 5명 배치되었고, 10명 미만인 학교에는 관내 교육복지사가 순회하며 모니 터링하고 관리했다. 세월호참사 당시 형제자매가 재학 중이었던 35개 초·중·고교 중 기존에 전문상담교사가 배치되어 있던 곳은 7개교, 전문상담사가 고용되어 있던 학교는 9개교로, 전문상담 인력 은 매우 부족했다. 경기도교육청은 희생 학생 형제자매가 재학 중인 안산 지역 28개교에 Wee 클래스를 추가로 구축했다.181) 형제자매 재학교에 배치되는 상담 인력은 재난 지역 선 포에 따른 한시적 계약으로 채용됐다. 형제자매가 다니는 학교에 재직한 상담교사와 교육복지사는 경기도교육청 소속이었으 나 단기계약직 또는 기간제로 근무해 해마다 재계약되거나 교체되었다. 상담교사의 잦은 교체로 인해 형제자매들은 “했던 일을 또 얘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또 생기고… 이런 상황 179) 성균관대학교산학협력단, “세월호참사 피해자 지원 심화연구 제2권”,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319쪽.

180) 앞의 자료, 338쪽.

181) Wee 클래스는 학교, 교육청, 지역 사회가 연계해 학생들의 건강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지원하는 다중의 통합 지원 서비스다. 2008년부터 학교에는 Wee 클래스, 지역 교육지원청에는 Wee 센터, 시·도교육청에는 Wee 스쿨이 있다.

182) 성균관대학교산학협력단, “세월호참사 피해자 지원 심화연구 제2권”,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302쪽.

276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들이 생겨서 많이 힘들어하고 그 이후에는 아예 상담을 끊고…”,182) “담당 선생님이 기간이 끝나면서 이후 조치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 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일들이 발생했다.183) 회 복지원단 2014년도 컨설팅보고서는 ‘대부분 학교에서 피해 학생 재학교에 전문상담교사

의 상주 배치를 희망’하며, ‘꾸준한 상담을 위해 상담교사의 잦은 교체를 지양’해야 한다고 했으나 경기도교육청은 이를 보완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 일부 상담교사의 전문성 부족도 형제자매의 심리 치유에 저해 요소가 되었다. 한 피해자는 ‘세월호 피해자인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다니던 중학교에서 세월호 형제자매를 위한 집단 상담을 한다며 대상자를 호명하여 친구들이 알게 되었다’고 하였고,184) 한 피해자는 ‘선 생님 상담사분이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 이해를 굉장히 못 하고 계시는 느낌, … 형제자매 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상담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고 진술했다.185) 또 다른 피해자는 ‘상담 시간 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재촉하여 상담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졌다’고 답했다.186) 형제자매의 심리 지원과 학교생활 정상화 사이의 갈등 역시 단원고를 비롯해 다른 학교에 서도 드러났다. 참사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희생 학생의 동생은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1주기가 다가오니 애들이 막 힘들어지는 거예요. 수업 못 들어가고, 밖으로만 돌아다니고. 그러다 애 들이 힘들어서 그냥 운동장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한 샘이 저희를 보고 왜 여기 있냐고 하셔서 저희 가 갈 곳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언제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직라-13)치유회복프로그램 운영 실태 등에 관한 통화조사 결과보고”, 3쪽.

185) 경기도교육청 중등교육지원과, “세월호 사고 희생자 형제자매 및 직계비속 심리치유 현황 제출”, (2014.9.1), 75쪽.

186)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3)치유회복프로그램 운영 실태 등에 관한 통화조사 결과보고”, 3쪽.

187) 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거에요』, 창비 (2016), 274쪽.

277
거냐고 고만하라고
그런
요. 안 그래도 힘든데….”187) 교육기관이 일상적인 교육과정으로 복귀하기 위한 단체에서 학생들의 심리적 회복을 위 183)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6)참고인 면담보고(N○○, O○○, P○○, Q○○)”, 6쪽. 184)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이럴
식으로 말을 하는 거예

한 상담이 학교 정상화의 방해 요소나 갈등 요소로 인식되기도 했고, 형제자매에 대한 심 리적 지원은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학교별로 큰 편차를 보였다. 「세월호피해지원법」이 제정된 2015년 1월 이전까지 경기도교육청은 생존자 형제자매들을 지 원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단원고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의 심리 지원은 교육부와 경기도 교육청이 담당했고 이외의 모든 심리 지원은 보건복지부 주도로 트라우마센터가 총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존 학생의 형제자매는 어느 부처에서도 담당하지 않은 채 누락되었다. 형제자매를 지원했던 모든 기관에서 일관되게 호소했던 어려움은 ‘승선자 명단을 개인정 보 사항이라는 이유로 제공받지 못해 해당자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 명단을 확보한 뒤에는 안산시, 안산시건강가정지원센터, 보건복지부, 트라우마센터, 우리 함께 등 모든 기관이 각자 팀을 꾸려 피해자가정을 가가호호 방문해 비슷한 서비스를 중 복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사각지대에 있는 피해자는 계속 방치되고, 연락이 닿아 지원할 수 있는 피해자에게는 지원이 집중된 경향이 있었다.188)

안산시 행정 지원 돌보미의 경우 공무원이 이웃 주민들과 함께 가정에 방문함으로써 피해 자들이 정서적 안정을 찾는 면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수습 기간이 길어지 면서 행정 지원 돌보미의 지원 범위와 역할이 희생자의 장례 지원부터 긴급생계 지원, 진 료 및 심리상담, 법률, 취업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지만 준비는 미비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나오는 다양한 시책을 숙지하고 즉각적으로 시행했지만 전체 행정 지원 돌

278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따를 수밖에 없었다.189) 참사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이 받은 상처 민간 잠수사 침몰 다음 날인 2014년 4월 17일 해양경찰청(이하 해경) 목포해양경찰서는 ㈜언딘에 수난구 188)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6)참고인 면담 보고(안산시건강가정지원센터)”, 11쪽. 189) 안산시, “4·16세월호참사 안산시 백서”, (2016), 210쪽; 안산시, “세월호사고희생자, 유가족피해자 행정 지원 및 가족 돌보미 운영 개선 계획”, (2014.6.2.).
보미 973명으로는 운영이나 활동 관리에 한계가

4·16세월호참사

로 바지선에 도착하면 충분하지 않은 물품과 부식이 전달되곤 했다. 구분 해경 해군 민간 소방 등 기타 합계 횟수 232 1236 665 916 3049

279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종합보고서
표 6-1 민관군 잠수사 수중수색 기록
호명령을 내렸고, 언딘은 수중수색·구조를 할 수 있는 민간 잠수사를 모집했다. 4월 17일 ㈜언딘이 모집한 잠수사 3명이 수색 현장에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11월 15일까지 민간 잠 수사 1,382명이 수중수색을 하기 위해 총 665회 잠수했다. 세월호 선내 희생자 수습에 동원 되어 활동한 민간 잠수사들은 총 143명이었다.190) 당시 해군, 해경 소속을 포함한 전체 잠수 사들이 선내에서 수습한 희생자는 252명으로, 이 중 179명은 민간 잠수사들이 수습했다.191) 민간 잠수사들은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했다. 잠수사들이 작업 과정에서 노출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감압병(decompression sickness)이다. 이는 수압이 높은 깊은 물 속에서 수면 가까이 올라올 때 발생하는 급격한 압력 저하로 인해 혈액 속에 녹 아 있던 기체가 혈관 내에서 기체 방울을 형성하면서 혈관을 막는 증상으로, 두통, 난청에 서부터 호흡 곤란과 의식 상실까지 이어질 수 있다. 감압 챔버는 고압의 공기를 주입하여 잠수사가 수면으로 올라온 이후에도 잠수했을 때와 비슷한 압력을 느끼게 하여 감압병 을 예방하도록 돕는 장치다. 그런데 참사 직후 민간 잠수사들은 감압 챔버가 탑재되어 있 지 않았던 ‘2003금호호’라는 바지선에서 작업을 수행했다. 4월 23일이 되어서야 감압 챔 버 2대가 탑재되어 있는 1,171톤 규모의 언딘리베로호로 바지선이 교체되었으므로 약 일 주일간 감압병의 위험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진도체육관에는 전국에서 구호품이 밀려들었지만, 배분에 문제가 생겨 잠수사들이 작업 하는 바지선까지는 물품과 부식이 전달되지 못하기도 했다. 팽목항에서 물품과 부식을 가득 실은 해양경찰선이 여러 민간 선박과 구조본부 지휘함을 거쳐 마지막으로 언딘리베
460 2475 1382 1785 6102
190) 해양경찰청 해양안전과, “특조위 요청 자료 답변(민간 잠수사 명단 등)”, (2020.2.14.). 191)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이메일 접수보고] 민간 잠수사 선내 수습 관련 통계(해양경찰청)”, (2019.3.11.).

수색 구역의 수심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민간 잠수사들의 피로 누적, 응급 상황 등의 문제 로 의료진이 바지선에 상주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의료진 투입은 계속 지

연됐다. 4월 30일까지 구조 인력 가운데 부상자가 발생한 사고는 해경 9건, 해군 3건, 민간 5건으로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해군과 해경은 구조 작업 이후 각 함정의 의료진에 게 건강 상태를 점검받거나 치료받을 수 있었지만, 바지선에서 생활하는 민간 잠수사들 은 이러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해경과 보건복지부는 5월 4일 의료진을 바지선에 파견해 잠수사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고 잠수 여부를 자문하도록 협의했다. 의료진 투입이 계속 지연되는 와중에 5월 6일 새벽 이OO 민간 잠수사가 입수 중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5월 8일이 되어서야 범대본은 민간 잠수 사들이 있는 바지선에 의료진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바지선 의료진 투입이 민간 잠수사들에게 실질적으로 의료 지원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잠수 후 최소 12시간을 휴식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면 작업 속도가 늦어지고, 경 험 많은 대체 인력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민간 잠수사들은 무리하게 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 차례도 힘든 잠수를 대여섯 번씩 했다. 보건복지부는 5월 21일 잠수사 건 강 및 안전관리 TF를 구성하고 잠수사들을 상대로 건강검진을 실시하려 했지만 민간 잠수 사들은 진료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한 민간 잠수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혈압 안 잰다고 했다. 감압 제대로 못 하고 올라오는데 혈압 높은 게 당연하고 해군처럼 혈압 높아서 잠수 못 하면 누가 들어가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몸 상하는 거 알아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내가 아프다고 못 들어가면 다음 순번이 쉴 수가 없다.”192)

바지선에 대한 의약품 공급 역시 원활하지 않았다. 의료기관에 전달된 물품이 팽목항 현 장응급의료소에 배송된 뒤 바지선까지 도착하는 데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이 걸렸

280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전달되고, 의사소통 과정에서 생긴 오해로 민간 잠수사와 의료진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192)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민간 잠수사 피해에 대한 참고인 조사 보고”, (2020.2.24.), 3쪽.
다. 중간에 약품이 분실되거나 잠수사에게 맞지 않는 잘못된 약품이

4·16세월호참사

바지선에 투입된 의료진은 안전을 보장받지 않은 채 바다 위에서 의료 활동을 이어갔다.

2014년 6월에는 태풍이 불어서 의료진이 바지선까지 이동하는 과정이 매우 위험했음에 도 투입되는 의료진이 매일 바뀌다 보니 보험 가입이 어려웠다. 의료진들은 해상 이동이나 선내 근무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보건복지부나 해경이 의료진의 안전 확보 조치를 마련하 지 않아 구명조끼를 착용하는 것조차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색 기간이 길어지면서 민간 잠수사를 포함해 많은 잠수사가 사고를 당했다. 5월 30일 또 다른 이OO 잠수사가 사망했다.193) 2014년 11월 5일까지 수중수색 활동 중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구조자는 총 107명이었다. 해군이 48명으로 가장 많고 민간 잠수사와 해경 소속 잠수사가 각각 22명, 21명이었다.194)

언딘 소속 민간 잠수사들의 경우 사고 해역의 작업 여건이 좋지 않고 실종자 수색이 시급 하다 보니 무리하게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더욱이 민간 잠수사 사망사 고가 두 차례나 발생해 신규 잠수사를 충원하기도 쉽지 않았다. 일부 민간 잠수사들은 불 면증 치료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면서까지 수색·구조 활동을 했고,195) 수십 일간 반복적으 로 잠수 작업에 투입되는 바람에 중이염·후두염 등 가벼운 질환부터 골괴사처럼 누적된 잠수병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까지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다. 이는 이후 경제적 피해로도 이어졌다.196) 당시 수색·구조 활동에 참여했던 민간 잠수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잠수병은 무조건 누적인데 잠수를 많이 할수록 축적된다. 통증들이 다 있어도 내가 안 하면 다른 잠 수사가 더 해야 되기 때문에 아파도 참고 무리했던 것이다.”197) 193) 해양경찰청 해양안전과, “380. [메모보고] 민간 잠수사 사망관련 자료 알림. 붙임 2: 세월호 희생자 수습 중 민간 잠수사 사망 발생 보고(140506_최종)”, (2019.11.15.);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2과, “잠수사 사망사고(L□□)”, (2016.8.8.).

194) 해양경찰청 해양안전과, “2412. [메모보고] 잠수로그(2014.11.5.)”, (2019.11.15.).

195) “[세월호참사] 잇따른 잠수사 사망·부상…안전 도마 위”, 뉴시스 (2014.5.30.).

196) “세월호 수색 현장 잠수사, 졸피뎀 복용하며 반복 잠수”, 연합뉴스 (2014.6.24.).

197)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직라-17) 민간 잠수사 피해에 대한 참고인 조사 보고”, (2020.2.24.), 3쪽.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81
종합보고서

“민간 현장에서도 ‘세월호참사 수습에 참여한 잠수사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어 채용되더

라도 안전교육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산재 처리를 늦게 해주는 등 불이익을 받았다.”198)

이처럼 수색 작업에 참여하며 피해를 입은 잠수사들은 적절히 보상받지 못했을 뿐만 아 니라 오히려 동료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추궁받기도 했다. 해경과 검찰은 당시 수색 작 업을 관리 및 지시하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들며 공◌◌ 잠수사를 故 이◌◌ 사망 사건 의 피의자로 입건해 업무상과실치사죄로 2014년 8월 26일 기소했고, 계속된 무죄 선고와 상고를 거쳤다. 약 2년 6개월 만에 공◌◌ 잠수사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현장 잠수팀의 지휘 체계가 해경청장을 중심으로 민관군 합동으로 구성되었음에도, 해경은 해 경 수색팀장, 해경 경비안전국장, 해경청장이 아닌 공◌◌ 잠수사 한 명을 희생양으로 삼 음으로써 잠수사 사망사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해경은 부상당한 민간 잠수사들에 대한 보상금 지급 과정에서 총체적인 행정 무능력을 보였다. 참사 당시 「수난구호법」에 따르면 부상자는 치료만 실시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잠수사들에게 국가에서 보상한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2014년 7월 해경청장은 부상 민간 잠수사들에게 보상금 지급을 약속하고 전라남도에 이를 신청하도록 했으나, 전라남도는 「수난구호법」상 부상자에게는 치료비를 지급하게 되어 있고 이미 국가가 치료비를 지급했 기 때문에 이중지급에 해당하므로 추가 지급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11월 해경과 민 간 잠수사들에게 이를 통보했다. 전라남도로부터 「수난구호법」에 대한 법령 해석을 요청 받은 법제처는 “수난구호 업무에 종사하던 중 신체에 부상을 입었으나 장애에는 이르지 않은 사람에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부상치료를 실시하는 것 외에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199) 이에 따라 민간 잠수사 22명 전원의 보상금 신청은 반려 됐다. 부상당한 민간 잠수사들에 대한 「수난구호법」 상의 보상금 지급이 거절된 후 민간 잠수사 198)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보고”, (2018.12.27.), 1쪽.

“도민안전실 안전총괄과(2015.3.30.), 「세월호 침몰사고 수습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 보상금 신청서 반려」”, “붙임 2: 법령해석 요청에 대한 법제처 회신 공문(사본)”, “붙임 3: 법제처 회신 내역”, (2019.2.22.).

282 제6장
않는 상처
아물지
“민간 잠수사 간담회 결과
199) 전라남도 도민행복소통실,

4·16세월호참사

22명은 2015년 3월부터 7월 사이에 진도군을 통해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신청을 했다. 그

러나 2015년 8월 28일에 열린 제3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 회의에서 ‘부상을 입은 민간 잠

수사들은 수난구호 비용을 지급받고 수색·구조 활동을 했기에 이는 계약을 기본으로 한

직무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민간 잠수사들의 의상자 신청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200) 민간 잠수사들의 의상자 신청이 모두 기각되고 약 7개월이 지난 후 「수상에서의 수색·구 조 등에 관한 법률」(이하 「수상구조법」)이 개정되어 수난구호 종사 명령을 받아 구호 업무에 종 사하던 중 부상당한 민간 잠수사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2016년 1 월 27일 총 55명의 민간 잠수사들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나 이 가운데 28명은 골괴사, 백혈 병, 백내장, 디스크 등이 세월호참사 수색·구조 활동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질환이 라는 이유로 보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보상금 지급이 승인된 27명은 부상 정도에 따라 1~9급의 부상 등급을 받았으며 1급 2명, 7급 5명, 8급 5명, 9급 15명이었다.201) 민간 잠수사 15명은 보상금 지급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재심의를 요청했다. 이 중 3명은 부상 등급이 상향됐지만, 12명은 골괴사 등이 수색·구조 활동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질환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후 「세월호피해지원법」이 2020년 6월 개정되면서 민간 잠수사들에게도 보상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세월호피해지원법」상 규정된 손해배상 및 손실보상에 관한 업무를 수 행하기 위해 설치된 ‘배·보상심의위원회’는 2021년 2월 제29차 회의에서 잠수사 보상기준 을 의결하는 등 총 일곱 차례 회의를 거쳐 신청자 39명의 민간 잠수사 중 20명에게 추가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오랜 과정을 통해 민간 잠수사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그 내용에서는 상당 한 차이가 있었다. 업체에 고용된 민간 잠수사들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어 요양급여, 휴 업급여, 장해급여, 간병급여, 유족급여 등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업체와 고용관계에 있

200) 보건복지부 사회서비스자원과, “2015년도 제3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 심사결과 통보”, (2019.5.9.).

201) 해양경찰청 수색구조과, “2016년 2차 중앙수난구호 대책위 회의록”, (2019.3.8.), 37~39쪽.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83
종합보고서

지 않은 민간 잠수사들은 「수난구호법」에 따른 보상금을 받았다. 민간 잠수사들은 열악

한 환경에서 수색·구조 활동을 했지만, 잠수업체와의 고용관계에 따라 적용되는 법이 달

라져 보상금 지원 정도에 차이가 생긴 것이다.

진도어민과 자원봉사자

세월호참사 당일 오전 9시 16분경 전남 119 상황실로부터 여객선 침몰 소식을 접수한 진 도군은 행정선·급수선·어업지도선 등 관공서 소속 어선을 현장에 급파했다. 태선호와 피 시헌터호 등 동거차도·서거차도·대마도 진도군 도서 지역 마을 어촌계 어선 36척도 승객 구조를 위해 동참했다.202)세월호참사 수색·구조 기간(2014년 4월 16일~11월 18일) 동안 수색·구 조에 참여한 민간 어선은 총 366척으로, 이 중 동원된 어선은 134척, 자발적으로 참여한 어선은 232척이었다.203)

피해자의 탈출을 돕거나 시신을 수습한 어민들은 트라우마 같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 다. 어민들은 불면증에 시달렸고, 더 많은 사람을 못 구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보건 복지부는 진도어민에게 심리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고, 진도심리지원단은 수색·구조에 참 여한 진도어민과 인근 섬 주민의 심리증상 조기 발견과 예방, 정신건강 상담, 중재를 위해 서거차도(2014년 5월 9일)와 동거차도(2014년 5월 13일)에서 예비 조사를 겸한 1차 정신건강 순회 진료를 진행했다. 제1차 정신건강 순회진료 당시에 서거차도 56명과 동거차도 66명이 진 료를 받았다. 1차 순회 결과 주민의 정서 상태가 양호하지 않고 추후 관리가 필요한 주민 들을 선정했다. 이후 진도군 8개 섬으로 진료를 확대했고, 희망하는 진도어민을 대상으로 2014년 7월까지 6회에 걸쳐 심리검사 43명, 심리상담 43명, 투약 9명 등 총 95명이 진료받 았다. 심리검사가 이뤄진 43명 중 22명이 위험군에 해당되었고 이들에게는 상담이나 인근 의료기관 연계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204) 하지만 이러한 심리 지원은 한시적이었다. 심리검사 대상자의 약 절반에 이르는 높은 비

202) 진도군, “4.16세월호참사 진도군 백서”, (2018), 230쪽.

203) 해양수산부 어업정책과, “세월호 침몰사고 관련 구조수색 어선의 소요 비용과 어업손실액 조사 연구 최종보고서”, (2016.3.11.), 8쪽.

204) 보건복지부 운영지원과, “85. [붙임] 진도 섬 지역 주민 심리 지원 사업 결과”, (2019.4.4.), 1~9쪽.

284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중이 위험군일 정도로 심각했지만, 진도어민이 심리 지원을 위해 내륙까지 가기엔 교통이

불편했고 생계 활동의 부담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기는 어려웠다. 또 수색·구조

에 참여한 진도 어민들은 2014년 11월 18일 해역수색이 종료될 때까지 활동했기에 심리 지원을 받을 여유가 없었다. 참사 당시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희생자들이 안치된 분향소 등 피해자들이 있는 곳에는 자원봉사자가 많이 있었다. 2014년 4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안산시 관내에서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은 총 4만 655명이었다. 이 중 진도에 파견된 자원봉사자는 총 8,618 명이고, 안산시 관내에서 자원봉사를 한 사람은 3만 2,037명이었다. 진도군에는 참사 당 일부터 범대본 해체 다음날인 2014년 11월 20일까지 219일간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등에 서 총 5만 612명(전남 지역 2만 1,329명, 타 시도 2만 9,283명)이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자원봉사자들은 2014년 4월 16일부터 팽목항, 진도체육관, 희생자 안치 안산시 분향소 등에 상주하면서 피 해자 가족 돌봄, 식사 지원, 세탁 지원, 물품 정리, 환경미화, 분향소 안내 등의 일을 했다. 참사 소식을 듣고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 많은 자원봉사자가 모여들었지만 참사 초기에 는 숙박 시설이 없어 진도체육관 계단이나 복도 등에 스티로폼을 이용해 잠을 자야 할 정 도로 상황이 열악했고, 수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원봉사자들에게 급식조차 불안정하게 지원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수색·구조 활동 종료로 2014년 11월 20일 범대본과 자원봉사 센터 모두 현장에서 철수했지만,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현장에 남아 미수습자 가족과 유 가족을 도왔다. 그러나 관계 기관이 모두 철수하다 보니 현장에 남은 자원봉사자는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었고 활동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205) 세월호참사 자원봉사자 중 병원치료를 받은 사람은 총 6명이었다. 봉사하다가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어 치료받은 사람도 있었고, 과로 등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증세 악화로 사망한 이도 있었다. 봉사 활동 후 목에서 출혈이 시작되어 폐 수술까지 받은 사람도 있었 고, 봉사 활동을 마치고 새벽에 귀가하다가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었 205) 416인권실태조사단, 『세월호참사, 인권으로 기록하다』, 4.16연대 (2015), 193~194쪽.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85
종합보고서

다. 또 귀가하다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은 사람과 장기간 자원봉사로 인한 과로

로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정신적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2014년 5월부터 6월까지 진도 주민 2,298명을 대상으로 시 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진도 주민 756명 중 20%인 151명이 뚜렷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을 보였다.206) 자원봉사자들은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렸 고, 안산 합동분향소에서는 유가족들을 돕던 한 자원봉사자가 정신적인 고통을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207)

자원봉사자에게 치료비를 지원하는 데도 공백이 생겼다. 「자원봉사활동기본법」 등에 따 르면 자원봉사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민간 보험사의 자원봉사보험에 가입한 경우에만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자원봉사센터 소속이거나 또는 「비영리민 간단체지원법」에 의해 등록된 단체에 소속된 사람만 자원봉사보험에 가입할 수 있기 때

문에 개인 자원봉사자 또는 종교단체, 소규모 봉사단체 소속 자원봉사자는 자원봉사를 하다가 재해를 입었을 때 발생한 비용을 자원봉사자 개인이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실제 로 故 문○○ 목사의 경우 2014년 4월 16일부터 4월 26일까지 10일간 자원봉사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자원봉사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자비로 치료비를 부담해야 했다. 그 외의 공백들

이 외에도 소수의 피해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빈틈들이 있었다. 세월호참사의 일반 인 희생자 중에서는 가정경제를 책임졌던 가장의 비율이 높았다. 이에 따라 남은 가족들 은 경제적 부담까지 져야 했기 때문에 희생자의 부재에 따른 깊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안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심리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어 려웠다.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상담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포기했던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206) “[종합] 세월호참사

286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때 진도 주민 16%
“두 아들 둔 ‘세월호 자원봉사’ 40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뉴시스 (2017.7.5.). 207)
남성, 자살…단원고 학부모 자살 기도도 잇따라”, 조선일보 (2014.5.11.).

4·16세월호참사

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받으려고 보건복지부에게 물어보니까 안산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그래서 제주도에 있는데 어 떻게 거기를 가냐. 그래서 다 모든 것이 다 안산에만 집중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이용을 안 했어요.”208) 안산 지역에는 「세월호피해지원법」에 따라 지원되는 피해자 외에도 단원고 희생 학생들의 친인척, 친구, 이웃 주민, 자원봉사 참여자 등 다수 간접피해자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세월 호참사 이후 단원고 희생 학생 친구와 자원봉사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보건 복지부는 안산트라우마센터 설치 계획에 안산 지역 주민에 대한 심리 지원을 포함했지만, ‘재난과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 향상’ 등과 같은 간접적인 교육 활동만 이루어졌다. 안산트 라우마센터는 「세월호피해지원법」 시행 이후 피해자 대상 진료와 사례 관리에만 집중하 고 지역 주민이 상담을 요청할 경우 정신건강증진센터로 안내했다. 또한 공동체 회복 프 로그램의 실행 과정에서 지역 주민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은 안산트라우마센터에서 전문 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결과적으로 친인척, 친구, 이웃 주민, 자원봉 사 참여자 등 간접 피해자에 대한 개별적인 심리 지원은 공동체 회복 프로그램을 담당하 는 희망마을사업추진단과 안산트라우마센터 두 기관 모두 실시하지 않았다. 단원고의 기간제 교사들은 정규직 교사들보다 치유할 충분한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세 월호피해지원법」이 제정되면서 세월호참사 당시 단원고에 재직 중이던 교직원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치유할 수 있도록 휴직이 보장됐다. 그러나 계약직 교 직원은 계약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계약이 만료될 경우 특별휴직을 신청할 소속기 관이 없었고, 다른 지역 교육청에 재임용되었을 때도 특별휴직을 사용할 수 없었다. 「세월 호피해지원법」에 치유를 위한 교사의 특별휴직 권리는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87
종합보고서
기간제 교사에게는 충분히 적용되 지 않았다.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 교사에 차별이 생긴 것이다. 208) 성균관대학교산학협력단, “세월호참사 피해자 지원 심화연구 제2권”,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82쪽.

세월호참사는 피해 지원 체제의 여러 근본적인 문제들을 드러냈다. 이에 정부는 재난이라 는 속성을 반영한 심리 지원 체계를 마련했고, 안전취약계층을 고려하고 공동체의 회복 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피해 지원 제도가 작동할 수 있도록 했다. 세월호참사 이후 관련 제 도들이 완전히 새롭게 전환된 것은 아니나, 세월호참사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참사 이후 피해 지원 체제를 보완하고자 한 시도들이 있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해양 재난에 대한 신속한 심리 지원을 강화하는 방안들이 마련됐다. 행 정안전부 재난구호과는 2021년 7월 「재난심리회복지원 업무 매뉴얼」을 개정하여 재난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심리 지원 대상자 현황을 파악하고 심리상담사를 연계 배치하여 상담 상황을 확인하도록 했다. 해양수산부의 「해양 선박사고 재난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2020) 은 위기관리 기구로서 보건복지부가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PTSD) 관리, 심리 상담 지원 계획 마련 등의 업무를 하도록 했으며, 피해 규모가 커서 중대본을 설치할 때는 중대본에서 피해자에 대한 심리상담 지원을 검토하고 지시하도록 했다. 보건복지부는 「해양선박사고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2019)을 통해 사고수습지원본부를 편 성할 때 별도로 심리 지원반을 구성하도록 했다. 또한 재난 피해 지역의 긴급 상황을 복구 한 이후 지역 주민, 근로자,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정신건강평가를 실시하여 고위험군을 선별하고, 국립정신병원 의료진,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를 통해 정신과 치료 서비스를 제 공하도록 했다. 사고 발생 후 1년 동안은 피해 지역에 정신건강증진센터 전문요원이 주기 적으로 피해 지역 주민의 정신건강을 모니터링하도록 했다. 해양 재난을 포함해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재난 이후 심리 지원 체계를 보완하고자 한 시 도도 있었다. 참사 이후 2016년 개정된 「재해구호법」은 재난 이후 심리 지원 대상에서 공백 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참사 이후 소방방재청이 담당하던 재난 심리 지원

288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업무가 국민안전 처를 거쳐 현 행정안전부 재난구호과로 이관됐는데, 국민안전처 출범 이후 재난 심리 지원 3. 변화의 시작: 세월호참사 이후 바뀐 피해 지원 체계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의 지원 대상과 지휘 체계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2016년 「재해구호법」을 개정해 심리회복

의 지원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로 인해 재해로 인한 심리 지원 대상에 재난을 직접 목 격한 사람, 재해 현장에서 구호·자원봉사 또는 복구 활동에 참여한 사람뿐 아니라 재난 피 해 정도 등과 관계없이 당사자 또는 재난 심리 유관 기관에서 지원을 요청하여 지원이 필 요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모두 포함됐다. 개정된 「재해구호법」은 구호 종류에 심리회복 지원을 포함했고 이를 위해 재해구호기금 또는 재난관리기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재해구호 전문인력 양성 교육 훈련 내용에 도 재난 심리회복 지원에 관한 사항을 포함했고, 중앙심리지원단을 구성하여 대규모 재 난 현장에서 심리회복 지원 관련 업무를 총괄·조정하고 관련 기관 간 업무 연계 등의 지 원 업무를 수행하며, 관계 부처 공통의 심리회복 지원 표준지침을 마련하고 보급하도록 정 했다. 시·도심리 지원단은 중앙 및 지방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역 보건·의료기관 총괄·조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고, 이에 행정안전부 재난구호과가 재난 심리 지원 의 총괄부서로서 예산, 교육·훈련, 지휘 체계 등에 대한 법적 근거를 갖게 했다. 재난심리 지원의 추진 체계도 변경되었다. 국민안전처는 2016년 대한적십자사와 업무협 약을 맺고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의 위탁 운영 주체를 일원화했다. 대한적십자사는 협약 에 따라 시·도 센터장을 자체 인력으로 선임하고 각 지사 사무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했다. 행정안전부가 2017년에 마련한 「재난 심리회복 지원 실무 매뉴얼」은 재난 심 리회복 지원이 현장 중심의 새로운 안전복지 서비스 영역이고, 재난 발생 시 재난 경험자 와의 초기 신뢰 형성을 바탕으로 한 심리상담 활동을 통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을 예 방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이라고 규정했다. 2021년 개정된 「재난 심리회복 지원 실무 매뉴얼」에서는 평상시 준비를 포함하여 심리회복을 위한 일련의 활동을 모두 포괄하는 재난 심리회복 지원과 재난 직후 필요한 활동인 심리적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89
특히 개정된 매뉴얼은 심리적 응급처치의 수행
상담하고 심리검사
내용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응급처치를 구분하고, 심리적 응급처치의 주관기관을 행정안전부로 명시하여 정부의 책임 을 강화했다.
방안을
하는
피해자에게 필요한 지원 사항을 안내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

시했다. 또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는 요청하는 재난 경험자를 횟수 제한 없이 무료로 대면상

담이나 전화상담 등을 하도록 했다. 심리 지원 활동 실적은 재난이 발생한 시·도에서 관리하

도록 하며 실질적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재난 심리회복 지원의 실시 여부를 판단하여 재난 규

모별로 실시하도록 했고, 관내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사고에도 심리 지원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매뉴얼들을 개선하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연구와 교육 및 훈련 과정이 확대됐다. 보건복지부는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단을 통해 재난충격 회복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지속적 으로 실시했으며, 전문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한국 재난 정신건강 지원 가이드라인」, 일반 국 민을 대상으로 홍보와 교육을 위한 ‘재난 정신건강 정보센터’ 웹사이트를 개발했다. 국가트라 우마센터는 「재난 정신건강 서비스 표준 매뉴얼」, 「재난 정신건강 서비스 지원을 위한 현장 대 응 지침서」 등을 개발하고 재난 정신건강 지원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을 편성했다.

취약계층의 정신건강 지원을 위해 보건복지부는 2018년 6월 「재난 정신건강 지원을 위한 취약계층별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다. 이는 취약계층을 아동/청소년, 노인, 신체 및 정신 장애인, 특별한 건강 관련 유의사항이 있는 대상, 노숙자, 빈곤층,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대상, 일차 현장대응 인력 및 보건 인력으로 정의했다. 이 매뉴얼은 재난 상황에서 일상적 인 지원을 저해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특히 클 수 있는 대상군을 대상으로 한 대응 체크 리스트와 행동지침 등을 포함하고 있다. 교육기관 역시 피해 학생에 대한 심리 지원을 원활히 하도록 심리 지원의 근거와 「응급 심 리 지원 매뉴얼」을 마련했다. 「학교안전법」이 개정되면서 학교안전사고로 피해를 입은 학 생·교직원 및 교육 활동 참여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심리적 안정과 사회 적응을 위한 상담 및 심리적 치료 등의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또한 교육부 학생

290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정신건강지원센터는 학교 응급 심리 지원 실행자209)와 교육청 담당자, 학교의 교직원이 활 용할 수 있도록 『학교를 위한 응급 심리 지원 실행자 입문서』(2015)를 발간했다. 209) 학교 응급 심리 지원 실행자는 학교 응급 심리 지원 전문기관 소속이다. 학교 응급 심리 지원 전문기관은 학교가 통상적인 학교의 기능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을 때 초기 응급 심리 지원을 하는 전문기관이다(학생건강정신지원센터, 교육청 소속 심리 지원 기관 등).

교육기관은 피해 학생뿐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심리 지원을 하기로 했다. 세 월호참사 당시 「학교안전사고 예방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하 ‘「학교안전법」’)에는 학교안전사고 로 피해를 본 학생의 가족을 위한 지원 조항이 없었고,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지원은 교 육기관의 의무사항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세월호참사 생존 학생의 형제자매는 「세월호피해지원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교육기관의 심리 지원 대상에서 누락됐다. 하지만 2015년 「학교안전법」을 일부 개정해 제10조의3 제1항에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은 학교안 전사고로 피해를 본 학생·교직원 및 교육 활동 참여자, 그 가족에게 심리적 안정과 사회 적응을 위한 상담 및 심리적 치료 등의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로써 생존 학생 및 희생 학생 형제자매 모두 상담 및 심리적 치료 등을 지원받을 수 있 게 되었다. 안전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방안도 마련됐다. 2018년 「재난안전법」에서 안전취약계층을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재난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처음 정의하고 2021년 같은 법을 일부 개정하여 저소득층 등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하여 재난으로 취약한 사람으 로 확대했다. 경기도가 2017년 「경기도 안전취약계층 지원 조례」를 제정한 것을 시작으로 2022년 2월 기준으로 전국지방자치단체·시군구에서 총 31건의 「안전취약계층의 안전에 대한 지원 조례」가 시행되고 있다. 부처 역시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조치를 마련했다. 보건 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단은 2018년 6월 취약계층을 아동/청소년, 노인, 신체 및 정 신장애인, 특별한 건강 관련 유의사항이 있는 대상, 노숙자, 빈곤층,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 닌 대상, 일차 현장대응 인력 및 보건 인력으로 정의하고, 취약계층별 지침을 마련했다. 행 정안전부는 「2022 재해구호 계획 수립지침」에서 비축된 응급구호세트에 시각장애인용 응 급구호세트를 추가했고, 비축된 물자 중 10% 물량을 시각장애인용으로 제작하여 비축하 기로 했다. 피해 지원 절차 가운데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업이 명시된 것 역시 변화 중 하나였다. 「세 월호피해지원법」은 기존의 시설 복구 위주의 재난 지역 지원에 무형의 공동체 회복이라 는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사례다. 이후 2019년 강원도 동해안 산불에 대한 피해 지원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원 외에 마을공동체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2020년에 제정된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91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포항지진의 진상조사 및 피해구제 등을 위한 특별법」이 공동체 회복 사업을 명시하는 등 공동체 회복이 재난 복구단계의 중요한 사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세월호 피해자들은 참사가 일어난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사 람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기도 했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을 혐오하는 발언이 공공연 하게 새어 나왔고, 이 발언들이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더 확대되고 재생산된 것이다. 정치 권에서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세월호참사를 동원했고, 이는 피해자들을 이념적으로 낙 인찍으며 세월호참사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참사 당일부터 희생자에 대한 반윤리적인 혐오 표현이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16일에 한 청소년(당시 17세)이 희생자들을 ‘물고기떡밥 노잼’이라 표현한 이후, 10 대 청소년과 20대들이 일간베스트(이하 일베)를 포함한 인터넷사이트, SNS, 인터넷방송, 게임 사이트 등을 통해 ‘세월호 오뎅탕’과 같은 표현들을 확산시켰다. 큰 틀에서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 또는 비난, 그리고 부정적 여론 형성을 부추겼던 표현들을 정리하면 다음 과 같다. 사참위가 피해자 자문위원들과 논의해 선정한 대표적인 표현들은 강조 표시했다. 2015년 1월 26일 일베에 교복을 입고 어묵을 먹는 사진 밑에 희생자를 ‘어묵’이라 부르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2015년 1월 26일부터 2015년 1월 29일까지 3일 동안 이 사건과 관련 해 언론에 총 107건이 보도됐다. 해당 표현의 최초 발화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이 기소된 후 학생의 어머니가 사과하고, 기소부터 대법원 최종 판결까지의 수사 및 재판의 모든 과정이 기사화되면서 보도 건수가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기사마다 관련 게시물 화 면을 캡처한 이미지가 반복 노출되었다.210)

4. 덧상처: 공공연한 혐오 210) “단원고

292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일베 비하 사진 ‘친구 먹었다’ 비난 여론 일파만파?”, 서울신문 (2015.1.27.).

표 6-2 세월호참사 피해자에 대한 직·간접적인 명예훼손과 혐오 표현

어묵, 오뎅, 물에 빠진 원숭이, 유족충, 시체팔이, 시체장사, 목숨장사, 성관계, 교복

직접적 명예훼손과 혐오

참사의 부인과 축소 등 간접적 방식을 통한 명예훼손과 혐오 직접적 조롱·비난 부정적 여론 형성

벼슬, 노숙자, 거지 근성, 가난한 집 아이들, 제대로 단식, 납골당, 안산 우울

종북, 빨갱이, 선동, 전문시위꾼, 개념학생

돈 잔치, 잠수사 인센티브, 특혜, 대입특례, 공무원 시험 가산점

교통사고, 조류 인플루엔자, 지겹다, 세금도둑

희생 학생을 오뎅·어묵에 비유하며 혐오 표현을 한 발화자는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다. 당 시 23세 이○○은 페이스북에 세월호 희생자 K◇◇의 사진을 게시하고 ‘주문하신 특대 오 뎅’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에 희생자 K◇◇의 아버지 임△△, 4.16가족협의회 위원장 전◇

◇ 등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가해자인 23세 이○○를 모욕죄로 고소했고, 법원은 이 ○○에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120시간을 선고했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의 유가족들이나 진상규명 활동가들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혐오 표현은 ‘시체팔이’ 또는 ‘시체장사’라는 반윤리적인 표현이었다. 이 표현들은 인터넷 논객 I □□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2014년 4월 22일 I□□은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 ‘시스 템클럽’에 ‘박근혜, 정신 바짝 차려야’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시했다. 이 글에 “시체장사에 한두 번 당해봤는가? 세월호참사는 이를 위한 거대한 불쏘시개다. 선장과 선원들의 당당 함을 보면서 그리고 마치 사전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없는가?”라고 적었다.211)

각 언론사는 ‘시체장사 한두 번 당해봤는가’를 제목으로 기사를 올렸고, 이 내용은 4월 22~23일 이틀 동안에만 400건이 넘게 기사화되기도 했다.212) 이 과정에서 211) 웹페이지 <System Club>, 2014.4.27.(k□□), (검색일: 2021.11.22.). 212)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3과, “세월호참사에 관한 명예훼손·모욕·혐오표현 실태 보고 및 진단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 (2015.11.20.), 32쪽.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93
종합보고서
4·16세월호참사
이 글이 게시되자

글의 원문은 물론, 원문을 링크한 트위터 글, 인용한 기사를 다시 링크한 글이 연쇄적으로 확대·재생산되어 무수히 유포됐다. 2016년 4월 28일 J□□는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 비례 대표 후보로 나서면서 SNS에 “시체장사를 한다”, “국가유공자 연금액의 240배나 되는 보 상금을 요구한다”라는 글을 올렸다.213) ‘시체장사’라는 표현은 I□□이 처음 사용한 이후, 유 사한 정치적 이념을 가진 정치인들이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데 반복해 사용되 었다. 사참위에서 수집한 판결문을 통해서는 ‘시체팔이’ 또는 ‘시체장사’라는 표현을 통해 유가 족을 비난하는 일은 2014년 4월 28일에 처음 벌어진 것으로 조사됐다.214) 이후 ‘주검장사’, ‘자식 시체 팔아 벼슬’, ‘죽은 영혼 팔아 호의호식’, ‘애새끼 목숨장사’라는 변용된 키워드가 나타났다. 이후에 이 키워드들은 온라인 댓글 등에서 배·보상과 연결 지어 피해자를 공격 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됐다. 이러한 혐오 표현은 이념적 낙인찍기로 이어졌다. 세월호참사 4일 만인 2014년 4월 20일 에 새누리당 한기호 국회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제부터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단체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215) 그 후 “한기호, 세월 호 침몰 좌파단체 색출 발언 논란”,216) “나라가 빨갱이 보상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217) 등 관 련 기사들이 확산됐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해 ‘빨갱이, 종북’ 발언은 정치권, 기무사, 보수 인사 등 다양한 곳에서 나왔으며 이념적 낙인찍기로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세월호참사 피 해자들을 고립시키는 일이 계속됐다. 한 희생 학생 부모는 “우리는 자식을 잃은 유가족인 데 부모일 뿐인데 빨갱이 소리를 왜 들으며 왜 시체팔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되는지…

213) “세월호 유가족에 막말 J□□ 비례대표 철회하라”, 데일리팜, (2016.3.23.).

214)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3과, “세월호참사에 관한 명예훼손·모욕·혐오표현 실태 보고 및 진단을 위한 전문가 간담회”, (2015.11.20.), 33쪽.

215) 한기호 페이스북, (2014.4.20.).

216) 한기호, “세월호 침몰 ‘좌파단체 색출’ 발언 논란”, 머니투데이 (2014.4.20.).

217) I□□, “나라가 빨갱이 보상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 머니S (2015.8.5.).

294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당연한 권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의무고 권리인데, 알려달라 할 수도 있고 하는 건데 그 게 왜 지탄을 받아야 되는지…”라고 진술하며 빨갱이, 시체팔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참담 함을 토로했다.218) 피해자들에게 지급될 배·보상 이슈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여론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세월호참사 당일부터 「MBC」는 피해자들이 받게 될 보험금이 얼마인지 보도했다. 「MBC」 <특집 이브닝뉴스>에서는 “먼저 인명피해가 났을 경우 한 사람당 최고 3억 5천만 원, 총 1억 원 한도로 배상할 수 있도록 한국해운조합의 해운공제회에 가입된 것으로 전 해졌다”며 보험금의 구체적인 액수를 언급했다.219) 이후 보상금 액수에 관심이 몰렸고, 6 월 초부터 이를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GOP 총기난사 사건 등의 보상과 비교하는 부정적 여론이 트위터를 통해 확산됐다. 피해자를 향한 비난은 정부에서 피해자 지원에 관한 공식 발표를 하고 난 이후 더욱 거세 졌다. 「세월호피해지원법」이 시행되고 배·보상 지원단은 2015년 4월 1일 오전 6시경 단원 고 희생자 1인당 4억 2천만 원 수령이 예상된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오전 10시에는 국 민성금과 여행자보험 등이 포함된 총액 8억 2천만 원이 지급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보도 자료에서 포함되지 않았던, 정부 배상금과는 관계없는 성금과 보험을 포함해 피해자들이 받게 되는 총액을 강조하면서 브리핑한 것이다. 언론은 10시에 추가 발표된 내용을 토대로 총 수령 금액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고, 이는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이 상당한 액수의 보 상금을 이미 수령했거나 수령할 것이라는 루머성 여론이 확산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교통사고’ 용어는 세월호참사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2014년 4월 말 「KBS」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95
종합보고서
성균관대학교산학협력단,
피해자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 218)
“세월호참사
지원 심화연구 제2권”,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2019), 499쪽. 219) “세월호 구조하고 있을 때 보상금 따진 「MBC」에 분노”, 미디어오늘 (2014.4.17.).

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고 발언한 이후,220) 정치권에서는 2014년 7

월 24일 당시 여당 정책위의장은 ‘세월호참사는 기본적으로 교통사고다’라고 하면서 지원 과 배·보상 측면을 언급했다.221) 연이어 한 달 사이 국회의원 두 명이 유사한 발언을 했는 데,222) 이 시기는 피해자들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강하게 요구하고, 세월호 관련 특별 법을 제정하느라 정치권에서의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다. 이후에도 2020년에 이르 기까지 정쟁 과정에서 세월호는 교통사고라는 표현은 꾸준히 등장했고, 언론은 관련 기 사를 보도하면서 ‘세월호 교통사고’는 반복적으로 회자됐다. ‘지겹다’는 표현 역시 진상규명의 노력을 폄훼하고 참사의 의미를 축소시켰다. 참사 5주기 를 앞둔 2019년 4월 15일 E□□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 병상련을 회쳐 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 다, 지구를 떠나라, 지겹다”는 등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 모욕을 담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 고,223) 이후 3일간 언론들이 경쟁하듯 집중보도하면서 피해자들은 더욱 심하게 상처받았 다. 2019년 5월부터 6월까지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진상규명 촉구를 위한 시민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이 피해자를 향해 ‘세월호 너무 지겹다, 당신 들이 부모면 직접 애들을 꺼내오지 그랬냐’, ‘세월호는 아직도 저러고 있어, 벌써 5년째야’, ‘지겹다 지겨워, 언제까지 세월호냐’, ‘세월호 그만 우려먹어라’는 등의 말로 직접 비난하면 서 충돌하기도 했다.224) ‘세금도둑’은 피해자들을 지칭한 것은 아니며 세월호특조위와 관련해 언급한 것이었지만 피 220) S△△, “‘교통사고’ 발언 관련 언론노조KBS본부

일으킬 뉴스 기획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워야 한다는 발언이었는데 노조가 전체 내용은 거두절미하고 성명서를 냈다’고 해명했다.; “‘KBS 보도국장 교통사고·세월호 사망사고 비교한 적 없었다’ 해명”, 뉴스원코리아 (2014.5.8.). 221) 주호영, “세월호는 교통사고…野유가 가슴에 대못”, 연합뉴스 (2014.7.24.), 이에 대해 정책위원장은 ‘철도, 항공기, 선박사고의 본질은 교통사고라며 이런 사고는 운전한 사람과 운송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222) “[세월호특별법 논란] ‘교통사고론’은 여권의 방패막이”에서 재인용, 경향신문 (2014.8.20.); “홍문종, 세월호 해상 교통사고…법조계 ‘수사권·기소권’ 주장은 일부 불과”, 로이슈 (2014.7.28.).

223) E□□, “세월호 유족들,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지겹다”, 중앙일보 (2019.4.15.).

224) “피해자 지원 및 명예훼손 관련 광화문광장 현장 점검 계획(안)”, (2019.5.16.), 1쪽.

296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성명서 원문”,
이에 대해 보도국장은 ‘세월호참사는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경각심을
(2020.7.29.),

해자들은 이를 주요 혐오 표현으로 인식했다. 2015년 1월 16일 세월호특조위가 출범해 본

격 활동을 시작하면서 김재원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세금도둑’이라는 말을 언급한 이후225)

‘국민혈세 탕진 세력’, ‘돈 잔치 논란’ 등과 같은 표현으로 세월호특조위를 향한 거센 비난

이 이어졌다. ‘세금도둑’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세월호특조위를 향한 것이었지만,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전반적으로 많은 세금이 투입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회자되었다는 점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도 부담을 주었다.

참사 당일의 아수라장에서부터 이후 수습 단계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거짓 해명과 피해 자 감시로 대응했다. 언론들은 참사 현장을 왜곡하고 거짓된 내용을 전 국민에게 보도했 다. 정부는 이러한 혼란 상황과 관련하여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 사항을 거부했을 뿐 아 니라, 피해자를 적대하기까지 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수동적인 피해자로 남지 않고, 세월 호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을 펼치기 시작 했다.226) 구조와 수습에 대한 정부의 책임 방기에 대응하기 위해 200명이 넘는 단원고 피해자 가 족들은 2014년 5월 6일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현 (사)4.16세월호 참사가족협의회, 이하 4.16가족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5월 7일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세월호 사고 가족대책위 호소문’을 발표했다. 5월 6일 실종자 구조 작업을 하다가 사망한 고 이광 옥 잠수사를 향한 애도와 잠수사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인사로 시작하는 이 호소문은 정 부를 상대로 실종자를 조속히 구조하고, 투명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함과 동시에,

5. 진실과 정의를 향해 225)

특별법 특별조사위원회 규모 지나쳐…세금도둑”, MK (2015.1.6.). 226) 이 과정을 자세히 정리한 것으로 다음을 참조: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험난한 여정”, (2022년 6월 5일 접근), 이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다음을 참조: 이광윤, “세월호 운동의 전략 장에 관한 연구–전략 장의 출현과 제도화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21).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97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세월호 진상규명

국민에게 함께 행동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227)

2014년 5월 8일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영정사진을 들고 서울 여의도 「KBS」 본사와 청와 대를 항의 방문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참사를 교통사고에 비교 하는 발언을 해 큰 논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유가족들은 5월 8일 밤 안산 정부 합동분향 소를 나와 「KBS」 본관으로 향했다. 이들은 「KBS」 사장의 사과와 보도국장의 해임을 요구 했지만, 진입을 막는 경찰에 막혀 네 시간가량 건물 밖에서 대치했다. 몇몇 국회의원의 중 재로 오후 11시가 넘어 「KBS」 건물로 들어갔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자정을 넘긴 시간에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 주변에 배치된 약 1,000명의 경찰 인력 앞 에서 유가족들은 학생들의 휴대전화에서 복구한 영상들을 공개했다. 기울어진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웃다가 기도하고 기어오르려다가 미끄러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가만 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도 들렸다.228) 5월 9일 「KBS」 사장의 사과와 국장의 경질로 이들의 밤샘 농성은 마무리되었지만, 진상규명을 향한 험난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5월 16일 4·16가족협의회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4.16가 족협의회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강조했다.229) 또 진상규명 과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조사는 침몰 전부터 침 몰 원인, 구조 및 수습 과정, 이후 피해자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대해 이루어져 야 하며, 모든 관련자를 철저히 조사하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진상규명은 정 부나 국회 주도가 아닌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진상조사기구가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진상규명의 결과에 근거하여 관련자에게 책임을 묻고 실질적인 참사 재발 방지 대 책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도 제시했다. 4·16가족협의회는 이처럼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적극 수용할 것을 국회에 요청했다.230) 227) “[전문] 세월호 사고 가족대책위 호소문”, 한겨레 (2014.5.7.).

진상규명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는 의견은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참사피해자지원및진상조사특별위원회, 『4·16세월호참사백서』, 대한변호사협회 (2015), 209~213쪽.

230) “[전문]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관한 가족 대책위 성명 전문”, 한겨레 (2014.5.7.).

298 제6장
않는 상처
아물지
228) “[세월호참사] 유족들
229) 특별법의 제정이 세월호참사의
KBS 항의방문…청와대 인근서 대치”, 한국경제 (2014.5.9.)

피해자 가족들은 2014년 5월 27일부터 세월호참사 국정조사를 요청하는 국회 농성을 시

작했다. 본래 5월 27일은 국정조사요구서 채택을 논의하는 본회의가 개최되는 날로, 앞서 여야는 21일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 본회의에 보고하고

25일 국정조사 계획서 작성을 위한 실무협의를 벌였다. 이러한 일정에 따라 27일은 국회 본회의에 국정조사 계획서가 보고될 예정이었지만, 증인채택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가 합 의하지 못하면서 국정조사 요구서 채택이 연기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27일부터 국정조 사 통과를 압박하며 농성에 돌입했고, 이들의 요구로 여야 간 협의를 거쳐 29일 ‘세월호 침 몰사고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계획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정조사만으로는 철저한 진상규명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2014년 5월 초부터 피해자 가족 들은 분향소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는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5월 중 순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현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이하 4.16연대)는 천만 명을 목표로 진상규 명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했으며, 4·16가족협의회의 유가족 80여 명은 6월 7일 덕 수궁 대한문 앞에서 ‘유가족과 국민이 함께하는 세월호특별법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을 열었다. 4·16가족협의회는 7월 2일부터 ‘세월호 가족 전국순회버스’를 타고 전남 진도, 경 남 창원,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서명운동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231) 7월 9일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4·16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안)’을 입법 청원했다. 이 특별법안은 유가족과 민간 전문가 등이 참여하여 독립되 고 전문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성역 없는 조사를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 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여야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협상에 돌입했지만 이 과정에 서 피해자 가족들은 배제되었다. 가족대책위는 7월 12일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철저한 진 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단식 농성에 돌입 했다. 이어 14일에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함한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299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231)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면서 광화문광장에 서도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국회에서 단식 중인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은 7월 15일 특별법
4.16기억저장소, “유가족과 국민이 함께하는 세월호특별법 범국민 서명운동”, (2022.6.5.접근).

제정을 촉구하는 350만 명의 서명부를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

유가족의 특별법 제정 촉구 운동에 생존 학생들 역시 동참하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이 350 만 명의 서명부를 국회의장에 전달한 같은 날, 안산 단원고의 생존 학생 40여 명과 학부 모, 교사들은 단원고에서 국회까지 1박 2일의 도보 순례를 했다. 이들은 ‘세월호 생존 학 생 도보 행진, 우리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 진실을 밝혀주세요.’라는 깃발을 들고 시민의 격려를 받으며 다음 날인 7월 16일 오후 3시경 국회의사당에 도착했다.232) 22시간 만에 도 착한 생존 학생들은 국회에서 단식 농성 중이던 유가족들을 만나 학생들이 쓴 편지 37통 을 전달하고 국회 정문 화단 철제 벽에 ‘잊지 않을게.’, ‘억울한 친구들의 죽음을 밝혀주세 요.’라고 적힌 깃발을 달았다.233) 2014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국회 국정조사, 검찰 수사 결과가 속속 발표되었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국회는 2014년 6월 2일부터 8 월 30일까지 이례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세월호참사 국정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몇 몇 내부 자료들이 공개되어 세월호참사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청문회 증인채택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합의하지 못해 청문회를 개최하지 못하고 활동을 마무리 해야만 했다. 검찰의 수사는 감독기관 및 민관 유착 등에 관한 몇몇 비리를 밝힐 수 있었 지만, 세월호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짚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234) 4·16가족협의회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세월호참사의 총체적 구조 책임, 국정원의 개입 여부,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을 규명하지 못했고, 선원, 해경, 선사에만 책임을 물었다고 비판했다.235)

진통을 거듭한 끝에 10월 31일 여야는 세월호특별법 합의안에 동의하고, 11월 7일 유가족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이 추가된 특별법이 본회의에 통과되었다.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지 206일, 피해자들의 국회의사당 농성 119일, 광화문광장 농성 117일째 되는 날이었다. 통

232) “단원고 생존 학생들, 국회까지 1박 2일의 행진…첫날”, 시사인 (2014.7.16.).

233) “22시간 만에 국회 도착…눈물바다 학생들, 편지 37통 유가족들에게 전달”, 오마이뉴스 (2014.7.15.).

234) 대한변호사협회·세월호참사피해자지원및진상조사특별위원회, 『4.16세월호참사백서』, 대한변호사협회, (2015), 13~14쪽.

235)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험난한 여정”, (2022.6.5.접근).

300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과된 특별법은 4·16가족협의회의 요구 사항에 비하면 미흡한 내용의 법안이었다. 하지만 4·16가족협의회는 11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하루라도 빨리 진상규명을 시작하기 위해 오늘 통과된 특별법을 반대하지 않으며, 앞으로 특별법에 따라 구성될 특별위원회를 철저 히 감시하고 독자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236) 그러나 정부는 2015년 2월 17일 세월호특조위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내용의 시행령 제정 (안)을 입법 예고했다. 4·16가족협의회는 조사 범위와 인력이 대폭 축소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정부의 시행령(안)을 전면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배·보상 절차를 진행하 면서, 피해자들이 정부에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4·16가족협의회는 배·보상 절차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4월부터 광화문광장과 안산분향소 앞에서 삭발식 과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세월호참사 이후 1년이 지난 첫 주말인 2015년 4월 18일 피해자 가족을 포함한 시민 3만 여 명이 서울광장에 모여 대규모 추모 행사를 열었다.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주최 한 ‘세월호 1주년 범국민대회’에서 피해자 가족들과 시민들은 시행령을 폐기하고 실종자 9명을 수습하라고 외쳤다. 이날 경찰은 차벽 트럭 18대를 포함해 차량 470여 대와 경찰병 력 172부대, 1만 3700여 명을 배치했다.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을 살포하며 진압에 나섰 고, 결국 유가족을 포함해 약 100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237) 결국 정부의 시행령은 국무회 의와 5월 11일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공포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세월호특조위 구성 이후에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나갔다. 앞서 5장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세월호특조위는 정부의 여러 방해 공작으로 어려움을 겪 었다. 결국 2016년 6월 30일 세월호특조위가 해산되자, 2017년 1월 7일 4·16가족협의회 와 4.16연대의 후원으로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이하 ‘국조위’)가 발족했다. 국조위는 “피해자 가족과 시민의 참여로 4.16세월호참사와 이로 인해 발생한 권리침해의 진상을 밝 히기 위해” 4·16가족협의회가 구성한 한시적인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301
기구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236)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가족대책위 기자회견] 세월호특별법 본회의 통과 관련 입장 발표”. 237) “‘세월호 집회’에 경찰 물대포·최루액 살포…유족 등 100명 연행”, 한겨레
(2015.4.18.).

조사 활동과 교육 및 홍보를 수행함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후 국조위는 사참위가 출범하 기까지 약 1년 2개월에 걸쳐 활동을 이어가면서 진상규명이 지속될 수 있도록 교량 역할

을 했다.238) 참사 이후 피해자 가족들의 운동이 세월호참사와 피해자 인권침해에 대한 진 상규명 활동이 처음으로 제도화되고 후속 공식 조사위원회가 출범함으로써 계속 이어지 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세월호참사와 같이 다수 희생자가 발생한 재난은 피해자와 공동체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희생자를 기억하고 추모할 권리는 재난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이며, 희생자의 유해 를 온전히 수습하고 관리하는 작업은 유가족들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애도와 추모로 나 아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피해자뿐 아니라 국민적인 애도가 표출될 수 있는 공 간을 마련하는 작업 역시 사회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기억교실, 분향소, 추모공원과 같은 시설들이 설치되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추 모는 협상의 대상으로 인식되거나 정치적 공세에 휘말리곤 했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희생자를 충분히 애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와의 갈등으로 극심한 고립을 경험했다. 희생 학생에 대한 예우 다수의 희생 학생 보호자들은 세월호참사 이후 상당 기간 차마 사망신고를 할 수 없었다. 경기도교육청과 단원고는 희생 학생들의 학적 처리 문제로 재학생 부모와 유가족 부모 간 갈등을 일으켰다. 세월호참사 이후 경기도교육감은 유가족과 만나는 자리에서, 또 언론 인터뷰에서 희생 학생들을 명예졸업시키겠다고 수차례 언급했지만, 정작 이에 대한 행정

6. 논쟁과 협상의 대상이 된 추모 238) 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 홈페이지, (2022.6.5.접근).

302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적 조치는 행하지 않고 있었다. 단원고는 2014년 6월경 학적 처리 계획을 세우며 희생 학

생 학적 처리는 유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음에도 경기도교육청에만 이에 대

해 문의했을 뿐 별다른 방안을 찾지 않았다. 결국 희생 학생들의 명예졸업 시기가 다가오 자 단원고는 학교생활기록부 시스템상 희생 학생들의 학적이 처리되지 않으면 생존 학생 들의 학적도 처리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2016년 2월 29일 희생 학생들을 제적으로 처리 했다. 2016년 5월 9일 아이들의 학적이 제적으로 처리된 사실을 유가족들이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4·16가족협의회는 학적 원상복구를 위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경기도교 육감은 희생 학생의 학적 상태를 제적에서 학적 유지로 변경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 했고, 5월 12일 학적은 원상회복됐다.239) 2016년 12월에는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 침」을 일부 개정해 학적처리 용어에 ‘명예졸업’을 신설했고, 2019년 희생 학생들에 대한 단 원고 명예졸업식이 진행됐다. 단원고 2학년 교실은 세월호참사 이후에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상태로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경기도교육감은 유가족과 2014년 여름 희생 학생들이 명예졸업할 때까 지 기억교실을 존치한다고 구두로 합의했다. 교실 곳곳에는 희생된 학생들의 유품이나 가 족들의 메모가 남겨 있었고, 많은 국민이 희생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기억교실을 찾았 다. 기억교실은 세월호참사로 인해 250명의 학생과 12명의 교사가 돌아오지 못한 아픔을 기억하며 되새기는 장소였다. 한편 일부 단원고 재학생 부모들은 면학 분위기 조성 등을 이유로 기억교실을 정리하라고 요구했다. 단원고 학교운영위원회는 4·16가족협의회, 재학생 부모, 단원고, 회복 지원단이 참여하는 단원고세월호대책협의회(이하 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기억교실에 관한 논의를 시작 했다. 하지만 명예졸업 이후 기억교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 했다. 2016년 2월 28일 학교, 재학생 부모, 유가족 간 합의를 위한 기구로 ‘단원고 존치교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303
종합보고서
239) 2016년 12월 「학교생활기록 작성 및 관리지침」이 일부 개정되어 학적처리에 사용하는 용어로 “명예졸업”이 신설되었고, 희생 학생들은 2019년 2월에서야 단원고를 명예졸업할 수 있었다.

시설 건립을 위 한 협약이 비로소 체결됐다.240) 하지만 협약 당일 희생 학생들이 제적 처리된 사실이 우연 히 발견되면서 4·16가족협의회가 협약 이행 논의를 중단하고 무기한 농성에 돌입하게 됐 다. 경기도교육청이

304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실 관련 협의회’(이하 존치교실 협의회)가 구성되고 한 달 이상 진통을 겪은 뒤 4월 13일 “기억교 실을 단원고 인접 부지로 이전하고 민주시민교육원을 건립하여 경기도와 경기도교육청 이 매년 추모행사를 지원한다.”는 내용이 합의되어 5월 9일 4·16
기억교실에 대해 책임이 있는 기관으로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수렴하 거나 조정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재학생 부모와 유가족 간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그림 6-1 기억 교실의 모습 240) 현재 기억교실은 안산시 4·16민주시민교육원으로 이전하여 4·16기억저장소에 보존되어 있다. 분향소 세월호참사 이후 장례를 치르기 위해 진도에서 고려대 안산병원으로 올라온 가족들의 요 청에 따라 2014년 4월 20일 합동분향소 설치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후 몇 차례 논의
안전교육

4·16세월호참사

를 거쳐 4월 22일 범대본은 희생 학생 가족 대표와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4

월 23일 오전 단원고 근처의 안산 올림픽기념 체육관에 희생자 22명의 영정과 위패를 안

치한 것을 시작으로 설치된 임시합동분향소는 이후 총 159명의 영정과 위패를 안치하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첫날 1만 2000명이 조문했고, 4월 28일 자정 운영이 종료될 때까지 30만여 명의 조문객이 방문했다. 다음 날인 4월 29일 유가족들은 안산시택시연합이 차량 을 지원하고 순찰차가 따라가는 가운데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를 직접 안산 화랑유원지 (이하 ‘화랑유원지’)로 이전했다. 범대본은 희생 학생 가족 대표와 합동분향소 설치에 관해 합의하는 과정에서 일반인 희 생자 유족들과의 소통창구를 마련하지 않았다. 안산시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았던 인천 시 역시 4월 22일 인천 서구 국제성모병원에 인천시민과 경기도 희생자 11명의 영정을 안

치한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 역시 희생자 유족들과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인천, 경기, 서울, 제주 등 거주지가 서로 달랐던 일반인 희생자의 유가족들 은 5월 12일 일반인희생자유가족대책위원회(이하 일반인희생자대책위)를 구성하고 인천 서구 국 제성모병원 합동분향소를 미래광장 내 합동분향소로 통합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인천시는 5월 18일 미래광장 내 합동분향소로 통합하고 분향소 내에 유족대기실과 편의 시설을 제공했다.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305
종합보고서
그림 6-2 안산 올림픽체육관의 임시합동분향소

안산시와 인천시 외의 지역에서도 세월호참사 분향소들이 설치되었다. 4월 28일 안전행정

부가 광역지방자치단체에 지역 단위의 합동분향소 설치 협조를 요청하면서 각 지방자치

단체도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진도 팽목항, 서울광장, 제주도 체육회관 등을 포함해 전 국 광역 단위 17곳과 기초 단위 132곳에 합동분향소가 설치됐다. 수습 기간이 길어지면서 지역 상권 침체를 우려하는 민원이 제기됐고, 이는 지역 사회의 갈등으로 번지기도 했다. 2014년 여름 안산시에는 하루 수백 건의 세월호참사 관련 현수 막 철거 요청 민원이 들어왔다. 8월경에는 몇몇 상인과 일반 시민이 안산 시내에 설치된 세월호참사 관련 현수막 25점을 몰래 철거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유사한 사건들이 안 산뿐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다. 안산지역상가연합회, 고잔신도시지역상인회 등은 “말라가는 상가 침체로 얼마나 힘들었으면 추모 현수막이라도 철거해야 했는지도 역으 로 생각해볼 일”이라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이처럼 갈등이 깊어짐에도 안산시는 중 앙정부와 유가족이 합의할 사항이라고 보는 등 이해 당사자 간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 하지 않았다. 각 지방자치단체에 합동분향소 설치 및 운영 협조를 요청했던 안전행정부 를 비롯해 국민안전처, 해양수산부, 국무조정실 등 중앙부처들 역시 책임 있는 조치를 내 리지 않았다.

7월 10일 인천 정부합동분향소에서 개최된 유가족 설명회에서 일반인희생자대책위는 안 전행정부, 해양수산부, 보건복지부와 함께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건립을 논의하고, 8월 14 일 안전행정부, 인천시와 제반 추진 절차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 10월 14일 인천시의회가 추모관 건립 예비비 지원을 승인하자 11월 14일 일반인희생자대책위는 합동분향소를 방 문한 해양수산부 장관과 간담회를 하고 합동분향소를 닫는 시기를 정부 결정에 맡기겠 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반인희생자대책위는 합동영결식 일시, 장소, 지원 등에 관해 인천 시와 합의하고 이에 따라 합동분향소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12월 27일 일반인희생자대 책위가 주관하고 정부와 인천시가 지원하는 합동영결식이 인천시청 앞 미래광장에서 개 최됐다. 인천 정부합동분향소가 철거되기까지 38위의 영정과 위패가 안치됐고, 조문객 3 만 7,347명이 방문했다.

306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안산 정부합동분향소는 정부의 소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5년

6월 안산시는 연말까지 합동분향소 운영에 35억 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특 별교부세의 조속한 집행을 요구하는 공문을 중대본을 비롯해 안전행정부, 행정자치부, 국 민안전처 등에 수차례 보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경기도 또한 안산시의 재정 악화를 우려하며 신속히 국비를 지원해달라고 국무조정실, 국민안전처, 행정자치부 등에 건의했 다. 이에 따라 2015년 8월 6일 국무조정실은 2015년도 정부합동분향소 운영비는 국민안전 처가 지원하고, 2016년부터 해양수산부 재해대책비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기획 재정부가 국회에서 예산 증액에 따른 논란이 야기될 수 있다며 반대했고 국회 예산심의회 에 반영되지 못했다. 결국 12월 10일 국무조정실에서 다시 논의한 끝에 우선 재해대책비 로 집행하고 필요할 때 예비비로 지원하기로 결정됐다. 이후에도 정부합동분향소 운영비 는 매년 본예산이 아닌 ‘성립 전 예산’으로 사용하고 추경에 반영하는 형태로 국비가 지원 됐다. 2018년 2월 20일 제종길 안산시장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합동분향소가 위 치한 안산 화랑유원지에 희생자 봉안 시설을 포함한 추모공원 조성 방침을 밝히면서 세 월호참사 4주기인 2018년 4월 16일 합동영결식을 마지막으로 정부합동분향소 운영을 종 료한다고 발표했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의 철거 작업은 2018년 4월 17일부터 시작됐다. 철거 과정에서 시민들이 전달한 노란 리본과 같은 추모 물품 일부가 버려지고 4·16기억저 장소로 가져갈 조형물들이 폐기물 옆으로 치워지는 등 물품을 소홀히 다루는 것에 4·16 가족협의회가 항의하느라 잠시 철거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는 안산시장의 사과와 수습 대 책 마련으로 일단락됐고, 4월 30일 철거가 완료됐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에 있던 세월호 추모 물품, 배 조형물, 방명록, 액자 등 2,550점은 4월 26일 서울시 신청사 지하 4층 문서고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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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4ㆍ16생명안전공원 「세월호피해지원법」의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에
로 이전됐다.
제정으로
대한 추모 사업을 추진할 수 있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세월호피해지원법」의 제37조는 추모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

하기 위해 국무총리 소속으로 ‘4·16 세월호참사 피해자 지원 및 희생자 추모위원회’(아래 지 원추모위원회)를 두며 추모 사업의 경우 ‘추모 사업 분과위윈회’가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 「세월호피해지원법 시행령」은 지원추모위원회는 추모 시설 등을 설치하기 위한 계획을 심 의하고 의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인천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의 경우, 「세월호피해지원법」이 마련되면서 추모관 건립을 위한 계획 수립이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지만 그러한 계획을 정작 실행하고 추모관을 운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지원추모위원회의 추모 사업 분과위원회는 2015 년 9월 ‘4·16세월호 추모 사업 기본방향’을 통해 인천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을 인천가족 공원에 2015년 7월 13일 착공하여 2016년 1월 4일에 준공하고 세월호참사 2주기인 4월 16 일에 개관하기로 확정했다. 하지만 개관일이 다가오는 데도 인천광역시와 국무조정실은

운영 주체와 비용 등에 대한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 결국 추모관은 일반인희생자대책위 임 원들이 상주하여 관리하고 인천광역시가 인천시설관리공단에 위탁해 임시로 운영했고, 이후로도 추모관 운영에 관한 쟁점은 확정 짓지 못한 채 4·16재단 설립 전까지 한시적으 로 해양수산부와 인천광역시의 협조 아래 행정자치부와 국민안전처의 특별교부세를 지 원하기로 잠정 결정됐다. 이후에도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 운영을 위한 예산이 제때 편성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 을 겪었다. 2016년 말 인천광역시는 추모관 인건비와 운영비 등으로 2억 5,000만 원의 국 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기획재정부가 법적 근거 미비를 이유로 반대하여 2017년 추모관 운 영비는 예산에 편성되지 않았다. 이에 일반인희생자대책위는 2017년 1월 1일 자체적으로 추모관 출입구를 폐쇄했고, 이후 2월 15일 해양수산부의 예산 1억 9,000만 원이 지급되면 서 추모관 운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 2018년 7월 9일 정부는 4·16가족협의회, 4.16연대, 4·16안산시민연대 등이 모여 발족시 킨 4·16재단의 설립을 허가하고 세월호 추모 사업 공식 지원 재단으로 선정했다. 이에 따 라 인천광역시는 인천가족공원의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의 운영과 관리를 4·16재단에 위 탁했다. 위탁 운영 기간은 2022년 12월 31일까지 3년간이며, 전액 국비의 지원으로 추모관

308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운영 및 관리, 추모식 진행, 홍보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추모공원 조성을 두고서 시민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피해 가족, 지역 주민, 갈등관리 전문가 등 20명으로 구성된 ‘4·16세월호참사 안산시 추모사업협의회(이하 4·16추모협의회)’는 수차례 주민간담회를 열어 지역 사회 의견을 수렴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 역 주민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렸다. 2017년 2월 화랑유원지에 봉안 시설이 들어오는 것 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화랑유원지 시민지킴이 반대대책위원회(이하 화랑유원지 지킴 이)’가 결성됐다. 화랑유원지에 추모공원이 들어서는 것을 찬성하는 4·16안산시민연대 회 원들은 2017년 6월 7일 찬성하는 시민 3만 3,095명의 서명지를 안산시에 전달하는가 하 면, 화랑유원지 지킴이 회원들은 6월 19일 반대하는 시민 3만 7,565명의 서명지를 안산시 장에게 전달했다. 반대 의견을 가진 주민과 단체들이 안산시장실 등을 점거 농성하는 등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갈등이 극심해진 가운데 4·16추모협의회는 2017년 6월 19일 연구용역 결과 등을 종합하여 추모공원 입지로 화랑유원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역 사회의 찬반 의견이 맞서고 봉안 시설에 대한 시민의 공감대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 지 않은 채 화랑유원지가 입지로 적합하다는 다수 의견과 반대하는 소수 의견 등을 담은 보고문을 채택하고 국무조정실에 제출했다.

2018년 2월 20일 안산시장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산 추모공원 조성 방침을 발표 했다. 이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추모공원 조성이 선거의 쟁점으 로 떠올랐다. 여야 후보들은 각각 추모공원에 대한 찬반 공약을 내놓았다. 이때 ‘세월호 납 골당 화랑유원지 결사 반대’와 같은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선거 기간 동안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안산시장 후보들은 화랑유원지 봉안 시설을 백지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 고, 민주당 후보는 뚜렷한 견해 없이 사회적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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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를 도출하고 신중하게 처리하겠다는 의견 을 밝혔다. 6·13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O△△ 안산시장은 관계중앙부처 공무원, 시의원, 지역

아물지

주민, 전문가 등 25명으로 구성된 4·16생명안전공원추진위원회(이하 4·16추모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4·16추모공원추진위원회는 추모공원 조성에 관해 논의한 후 25명 중 12명이 찬

성, 5명이 반대 의견을 냈다는 결과를 안산시에 전달했다. 2019년 1월 안산시는 「4·16생명 안전공원 기본구상(안)」을 정부에 제출했고, 2019년 2월 27일 국무조정실은 안산시 추모 시설 건립 기본방향을 의결했다. 안산시는 2020년까지 4·16생명안전공원 전시 계획을 수 립하고 2021년 여름 국제설계공모를 추진했다. 추모 공간이 정치적 논쟁이나 타협이 대상이 되어 제때 추진되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 도 4·16생명안전공원의 건립이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4·16가족협의회를 비롯한 피

해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공모당선작 설계에 따르면 세월호참사가 남긴 6000여 개의 유류 품이 아카이브 형태로 상설 전시될 예정이다. 현재 재난 희생자의 유류품 처분에 관한 규

정은 없고, 「유실물법」은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처분하도록 한다. 하지만 피해자들 은 세월호참사의 유류품을 재난을 사회적으로 기억하는 상징물이자 안전사회의 가치를 실현하는 유산으로 활용하기를 원했다. 2017년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면서 구성된 유품 관련협의체가 2019년부터 사참위와 해양수산부, 4·16가족협의회, 일반인희생자대책위, 4·16재단 등이 참여한 유류품관리협의체로 재편되어 희생자의 유류품을 보존하고 관리 해왔다. 이에 더해 2022년 현재 4·16가족협의회는 지역 주민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세월 호참사를 위한 추모 공간이 지역 사회에서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찾아가는 간담회’ 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전국 곳곳에서 이어가고 있다.

재난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은 피해자를 치유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만드는 행위다. 전 국민이 희생자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국가가 나서서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은 피해자를 치유하고 사회 전체가 스스로 되돌아보며 재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확대해나가기 위한 중요한 절차이다. 추모 사업은 재난 피해자를 기념할 권 리일 뿐만 아니라 재난의 재발 방지를 위해 사회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 다. 국가의 공식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조치로 추모는 참사에 대한 집단 기억을 형성하고 참혹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사회적 메시지를 공유할 수 있게 돕는다. 그간 삼풍백화점 붕괴나 대구지하철 화재와 같은 참사를 겪으면서도 정부의

310 제6장
않는 상처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적극적인 역할 부재로 한국 사회는 추모를 위한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장소를 갖지 못했

다. 4·16생명안전공원은 지난 참사를 잊지 않고 국가가 나서서 공동체의 집단 기억을 형

성함으로써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더 안전한 사회를 도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매김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참사 이후 정부는 다양한 지원대책을 마련하고 추진했지만, 여러 제도적 문제와 소 극적인 대처로 인해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온전하게 치유하고 회복할 수 없었으며, 더 깊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와 연대하며 이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권리침해에 대항했던 시민사회가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참사 당일 저녁부터 안산시 곳곳에서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2014년 4 월 17일 안산에서는 ‘무사 귀환을 위한 안산시민들의 모임’이 만들어져 21일부터는 ‘세월 호 문제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4월 19일 대학생연합동 아리 알트(ALT)는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노란색 천을 구입해 리본 500개를 만들어 신촌에 서 나누어주기도 했다.241)

안산 지역의 사회복지사들은 5월 ‘안산 지역 공동체 회복을 위한 복지관 네트워크 우리함 께’(이하 우리함께)를 구성해 가족 지원 사업 및 공동체 회복 사업을 진행했다. 안산시 고잔동 에서 빌라 한 세대를 임대해 희생자 형제자매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형제자매가 직접 기 획한 ‘너에게 보내는 편지’, ‘우리 동네 공부방’, ‘다시 봄 마주하기’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했 다. 진도 팽목항과 안산을 오가며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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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을 상담하던 정신과 전문의와 그의 동료들은 9 월 11일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비영리단체 ‘치유공간 이웃’을 만들었다. 천주교 수원교 7. 피해자와 연대하는 시민사회 241) “노란 리본 달았다고 불심검문 ‘우리 사회의 세월호 인식…마음 아파’”, 한겨레 (2015.4.21.).

구 와동성당은 신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2014년 12월 20일 ‘안산생명센터’를 열

었고, 명성교회는 헌금과 후원금 등으로 ‘0416 쉼과 힘’을 개소했다.

시민사회는 피해자를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함께 촉구함으로 써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이들의 정당한 권리를 확보하는 투쟁에 함께하고자 했다. 2014년

4월 17일 촛불기도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무사귀환을 위한 안산시민들의 모임’을 만들고, 4월 21일부터 ‘세월호 문제해결을 위한 안산시민사회연대’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5월 15일 ’세월호 문제해결을 위한 안산시민대책위원회‘로 이름을 변경하 고, 촛불문화제를 매일 진행하면서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으며 이후 특별법 제 정 범국민 서명운동, 국민촛불 범국민대회, 유가족 간담회 지원, 거리행진 같은 다양한 활 동을 펼쳤다. 일반 시민들 역시 노란 리본을 달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해자들의 운동 에 힘을 보탰다. 참사를 경험한 우리 사회가 완전히 치유하고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월호참사 피해 자를 근거 없이 비난하면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시민사회의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며, 우리 사회는 더욱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시민이 작은 실천을 이어나가며 치유 문화를 형성하고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려 애썼다. 시민사회가 피해자와 연대하고 이들의 인권 문제에 귀 기울일 때 사회 공동체가 참사의 경험을 발판 삼아 더 나 은 시민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312 제6장 아물지 않는 상처
313 아물지 않는 상처 제6장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제 7 장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1. 8년간의 참사 2. 국가의 두 얼굴 3. 온전한 슬픔의 시간 4. 권고안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에 침몰했지만, 4월 16일의 사건은 그보다 오래전에 시작됐다. 2013년 2월 세월호 5층에 전시실을 세우고 객실을 늘려 배 위쪽이 무거워지도록 증개축 했을 때, 개조공사가 다 마무리되기 전인 2013년 1월 경사시험에서 한국선급 검사원의 부 주의로 무게중심이 실제보다 낮게 측정되었을 때, 그렇게 세월호가 평형수를 넣지 않은 상 태에서는 스스로 직립할 수 없는 배가 되었을 때부터 세월호의 침몰은 시작됐다. 한국선 급이 승인한 대로 화물을 적게 실으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세월호를 운항하는 청해진 해운이 규정을 어겨가면서 화물을 실어 매출을 올리기로 선택했을 때 4월 16일의 침몰은 시작됐다. “화물이 많네요, 배가 가라앉겠습니다, 그만 좀 실으십시오.”라는 선원들의 지적 과 항의를 청해진해운 임직원이 무시했을 때 4월 16일의 침몰은 시작됐다.242) 청해진해운 이 2013년 3월 15일 최초 운항부터 2014년 4월 15일까지 총 241회 세월호 운항 중 139회 를 과적으로 운항했을 때 4월 16일의 침몰은 시작됐다. 과적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만 재흘수선 기준을 맞추려고 평형수를 빼서 복원성을 더욱 악화시켰을 때 4월 16일의 침몰 은 시작됐다. 그러면서 화물을 부실하게 고박하고 기관실 수밀문과 맨홀을 늘 열어둔 채 로 다녔을 때 4월 16일의 침몰은 이미 시작됐다. 검경합동수사본부, 해양안전심판원,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사참위 등이 그동안 실시한 조사는 안전을 무시한 청해진해운의 부실한 선박 관리가 세월호 침몰의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확 인했으며, 법원도 이를 인정했다. 이 요인은 2014년 4월 15일 밤 세월호가 출항하는 순간 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비극은 4월 16일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하며 시작됐지만 배의 침몰이 크나큰 참사로 이어 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모든 승객을 인천에서 제주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갈 의무가 있는 선장과 선원이 진도 앞바다에서 승객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참사는 없 었을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316 제7장
사람을 구하라는 임무를 띠고 출동한 해경과 그 지휘부가 눈앞에서 침몰하는 배 안에 수백 명이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임무를 다하기 위해 무 1. 8년간의 참사 242) 가습기살균제사건과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강원식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제5호)”,
29쪽.
(2014.4.26.),

4·16세월호참사

엇이든 해보려 했다면, 국민의 생명을 그렇게 빨리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큰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안전을 확보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기업과 정부가 제대로 감독하고 지휘하지 않고 심지어 방치해왔기 에 세월호의 침몰은 거대한 참사가 되었다. 4월 15일 저녁 인천항에서 세월호에 오른 승객들은 기업과 정부에 철저히 배반당했다. 가 습기살균제참사 피해자들이 1994년부터 2011년까지 기업이 개발해서 출시한 가습기살 균제를 믿고 사서 썼던 것처럼, 그날 세월호 승객들도 여객선을 관리하고 운항하는 기업 을 믿고 배에 올랐다. 소비자들이 정부가 생활화학제품에 대해 최소한의 규제와 감독은 할 것으로 믿었던 것처럼, 승객들은 정부가 여객선을 규제하고 감독했을 것이라 믿었다. 소 비자들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제품을 산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승객들은 사람 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배에 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비극적인 배반은 위험에 처 한 국민이 공포에 떨면서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국가가 구하러 오리라는 기대가 무너 진 것이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구하지 않은 것처럼 국가는 세월호 승객들도 구하 지 않았다. 세월호에 오른 승객들이 이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하지만 타당한 신뢰

는 4월 16일 아침 모두 무너졌다. 기업과 정부의 책임은 너무나 크고 분명하여 이 책임에 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4월 16일 국가가 이미 벌어진 참극의 책임을 깨닫고 인정하고 이를 조금이라도 바로 잡기 위해 곧바로 나섰다면 세월호참사의 양상은 지난 8년과는 달랐을 것이다. 4월 16일 늦은 오후 대통령이 중대본을 찾아갔을 때, 또는 4월 17일 진도체육관을 찾아갔을 때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참사 현장에서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고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 았다면 지난 8년이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종자 수색 현장과 팽목항, 진도체 육관에서 정부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결정을 내려 행동에 옮기고, 이에 책임을 지기 위해 애썼다면 피해자들에게 지난 8년은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는 이 모든 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을 실행에 옮겼다. 실 종자 수색에 대한 정보를 감추고 왜곡함으로써, 4월 20일 새벽 진도에서 청와대로 행진하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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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려는 실종자 가족들을 경찰을 동원하여 막아섬으로써, 피해자와 가족들을 사찰하고 낙 인찍음으로써, 죽음의 이유를 밝혀달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억압함으로써, 겨우 설립된 특 별조사위원회를 방해하고 강제종료시킴으로써, 정부는 세월호가 한국 사회에 던진 충격 과 피해자들의 고통에 응답할 의지도 능력도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판단과 행동에 따라 세월호참사는 팽목항과 진도에서 전국으로 확대되고 2014 년 4월에서 적어도 2022년까지 연장되었다. 여객선 침몰 사고는 사회적인 참사가 되었고, 이 참사를 만든 것은 바로 대한민국 정부였다. 그러므로 사참위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뿐만 아니라 그 후 8년 동안 세월호 희 생자와 그 가족들이 겪어온 모든 고통과 억압과 불의를 조사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 었다. 출항, 침몰, 구조, 수색, 수습, 사찰, 회피, 방해, 추모, 기억, 치유…. 사참위의 조사가 8 년간 피해자들이 경험한 것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사참위는 참사의 매 국면에서 국가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기록하고, 특히 국가가 참사의 피해자들을 어 떻게 다루었는지 밝혀내고자 했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승객 304명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가족을 잃고 쓰러진 이들에게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세월호참사는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지 묻게 했다.

2. 국가의 두 얼굴

세월호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국가의 두 얼굴을 목격했다. 두 얼굴의 국가는 정권에 관대 했고 피해자에게 가혹했다. 사참위의 조사는 우리가 지난 8년 동안 목격한 바를 확인해 주었다. 국가는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놀랄 만큼 유능했다. 재난 대응을 지휘하여 인명을 구하는 역할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그 책임을 회피하려 여론을 조작하고 피해자 정보를 수집하는

318 제7장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4·16세월호참사

제7장

쟁 속에 유가족과 지원 세력은 불법사찰의 대상이 되었다. 누군가는 참사 전에 대통령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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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종합보고서
일이나 진상규명 방해를 지휘하는 역할에는 비할 수 없이 성실했다. 진도 앞바다와 팽목 항에서는 정부의 그 누구도 컨트롤타워를 자임하지 않았지만, 광장, 언론, 국회 등 유가족 의 행동을 막아야 하는 곳에서는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국가의 역량은 선 택적으로 그리고 편향적으로 발휘되었다. 책임자를 위한 보고는 많았지만 책임 있는 조치는 없었다. 참사 대응에 나섰어야 할 지휘 부는 현장에 쉼 없이 보고하라고 요구했지만 막상 구조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내리지 않았다. 침몰 직전인 9시 59분 목포서장 김문홍의 “마이크를 이용해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나”라는 질문인지 지시인지 알 수 없는 말은 현장에 출동해 있는 123정에 아무런 영 향을 미치지 못했다. 책임자들을 위한 보고는 바다 한가운데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생명을 구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에 게 수색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사람도, 최소한의 예를 갖춰 사망자를 수습하기 위해 판단하고 실행하는 책임자도 없었다. 무책임은 조직적이었고 임무 방기는 집단적이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 해경 지휘부, 현장 출동 세력 등 위기에 처한 승객들을 끝까지 지키고 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은 조직적 이고 집단적으로 그 책임을 방기했다. 선장과 선원은 승객들을 버리고 가장 먼저 빠져나 왔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갑판으로 빠져나오려는 승객들도 배 안에 주저앉혔다. 골든 타임 내 도착한 유일한 해경정이었던 123정은 너무 빨리 구조를 포기했다. 가라앉는 배 안에서 승객들이 믿고 기다렸던 국가는 도착하지 않았다. 생존자, 실종자, 그리고 그 가족 들도 보호받지 못했다. 참사를 당한 피해자를 눈앞에 두고도 국가는 손을 놓고 있을 뿐이 었다. 위로하는 대신 탄압하고, 지원하는 대신 감시했다. 무책임한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돌려 준 것은 위로의 말과 회복을 위한 지원이 아니라, 진상규명 목소리에 대한 탄압과 평생 경 험해보지 못한 감시였다. 국정원, 기무사, 정보경찰과 같은 정보기관들이 나서서 이를 주 도했다. 청와대의 묵시적인 승인 속에, 청와대의 정책 기조에 부응하려는 정보기관들의 경

판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는 이유로 불순 세력으로 낙인찍히고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위로가 필요한 유가족이었다. 앞에서는 약속하고, 뒤에서는 방해했다. 유가족 앞에서 특별법이든 특검이든 여한이 없도 록 조사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청와대, 정부 부처, 새누리당은 힘을 합쳐 세월호특조위 설립을 방해했다.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세금도둑’ 발언으로 출범 전 부터 세월호특조위를 흔들었으며, 해수부의 ‘세월호 선체인양추진단’은 이름과 달리 세월호 특조위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의 목적을 저지할 방안을 마련하는 일을 주요 업무로 삼았다. 이외에도 특별법 취지를 훼손하는 시행령, 별정직 조사관 채용 배제 시도, 보수단체를 동원 한 세월호특조위 앞 집회, 공무원 파견 중지 등 세월호특조위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시기별 로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이 동원되었다. 진상규명 목소리를 누르기 위해 혐오가 묵인되거나 조장되기도 했다. 진상규명이 지연되면서 피해자들은 애도할 시간을 빼앗겼다. 정부는 배의 침몰을 막는 데 실패하고, 생명을 구하는 데 실패하고, 점점 확대되는 참사에 대응하는 데도 실패했다. 정부가 참사 피해자를 적으로 삼으면서 참사의 피해는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질 뿐이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때를 놓치면서 피해자를 위한 정의는 더 멀어졌다. 대규모 피해의 발생, 대응과 진상규명, 피해자 지원의 모든 단계에서 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4월 16일에도 그 후로도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었다. 정부의 조 직적 감시와 억압과 조롱을 받으며 참사 피해자는 한국 사회 밖으로 밀려났고, 8년이 지 난 지금도 완전히 복귀하지 못했다.

320 제7장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이들은 어떻게 회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가. 언뜻 난해하게 들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난 8년 동안 항상 명백했으며 모두가 알 3. 온전한 슬픔의 시간

4·16세월호참사

고 있었다. 모두가 답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참사의 원인과 과정을 밝히는 것, 처벌받아야 할 사람을 처벌하는 것, 그리고 2014년 4월 16일보다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이 줄곧 호소하고 요청해온 그것을 통해서만 회복과 치유는 시 작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8년 동안 지연된 것에 대해, 세월호의 침몰부터 지금까 지 국가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음에 대해 사과하 는 것 또한 참사 피해자들을 다시 사회로 맞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사참위는 모두가 알 고 있는 답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뿐이다.

사참위의 조사 결과는 또한 국가가 사라진 공간에서 참사에 대응하려 나선 이들, 피해자 를 지지하고 피해자와 연대했던 이들의 존재를 확인한다. 4월 16일 바다에 빠졌다 살아난 사람들이 온다는 소식에 보일러를 틀고 담요를 가져온 주민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 에 동참한 600만 시민들, 여전히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지하철을 타는 학생들, 기억의 길을 걷고 추모의 숲을 가꾸는 사람들. 이들은 세월호참사가 드러낸 국가의 공백을 메우 면서 이 참사를 우리가 어떻게 함께 겪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했다. 세월호참사 피해 자와 더불어 이들에게도 회복과 치유, 그리고 참사 이후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다. 세월호참사는 분노를 낳았다. 구할 수 있었던 수많은 생명을 이토록 무력하게 놓쳐버렸다 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고, 그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채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였다. 피해자들은 분노를 승화시켜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목소리를 모았고 시민들은 함께 분노하며 지지했다. 사참위는 국가의 처절한 실패를 조사하면서 그 분노가 정당한 것 이었음을, 피해자들의 요구가 합당한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그 실패에 분노하 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가장 숭고하고 엄중한 요구, 즉 생명과 안 전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이제 국가의 책무이 자 우리의 과제로 남았다.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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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보고서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에게 지난 8년이 어떤 시간이었을지 우리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가족이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했고 조사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국회 앞에

서 쪽잠을 자야 했던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우리는 차마 상상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한국 사회가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지지부진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자 들은 가족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들에 게서 슬픔의 시간, 추모의 시간을 빼앗아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8년 동안 기다리라고만 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그리고 이제 활동을 종료 하는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과연 그 8년의 기다림에 부 응했는지 스스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조사위원회의 종결은 결코 참사의 종결이 아니다. 피해자를 위한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 회복과 치유의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참사의 시간을 겪고 있다. 다만 조사의 마무리가 온전한 슬픔과 추모, 뒤늦은 회복과 치유의 시작으로 이어지기를 겨우 희망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조사위원회의 종결을 맞아 기억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 니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8년 전의 다짐을 다시 상기할 뿐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4. 권고안

사참위는 4·16세월호참사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이러한 참사의 재발 방 지를 위해 다음과 같은 권고안들을 종합보고서에 선별하여 제시한다. 사참위가 제안하는 열두 가지 권고안은 생명과 안전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 재난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 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첫째, 사참위는 세월호참사와 피해자 사찰 등 그 이후 행위로 인한 국민 희생과 피해, 권 리 침해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한다. 사참위 조사 결과 세월호참사 이후 국정원, 기무사, 경찰 등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민간인 사찰이라

322 제7장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4·16세월호참사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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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종합보고서
는 중대한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이는 개별 공무원의 일탈 행위가 아닌 국가 차원 에서 이루어진 행위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 해자와 국민에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둘째, 사참위는 피해자 사찰 및 세월호특조위 조사 방해 행위를 추가로 조사하거나 자 체 감사를 실시할 것을 권고한다. 사참위 조사 결과 피해자 사찰과 세월호특조위 방해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국가는 이를 인정하고 책임을 수용하고 사과 하여 피해자의 명예 회복에 적극 협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정원, 경찰 등은 추가 조사를 실시하여, 불법적인 사실이 확인될 경우 고발 및 징계 조치하고, 공무원이 불법적 인 사찰을 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명확하게 할 것을 권고한다. 또 사참위 조사를 통해 세월호특조위 방해 행위에 개입한 것으로 확인된 청와대(현 대통령실)· 국무조정실·해양수산부·행정안전부·기획재정부·법제처·인사혁신처는 소속 공무원에 대한 자체 감사를 진행하여 실체를 규명하고, 구체적인 개선 과제를 도출하며, 수사를 요 청하고, 행정적인 조치 또는 기타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셋째, 사참위는 피해자 사찰 및 조사 방해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제도를 개선할 것을 권 고한다. 사참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법적인 행위인 피해자 사찰은 개별 공무원의 일탈 행위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국정원장 등은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불법사찰의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판단되는 피해자에 대해 사찰자료 제공 등 피해구제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추후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불법·부당한 명령을 공 무원들이 거부할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공무원법」 개정 등 입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 다. 또한 민간인 사찰과 진상규명에 대한 조사방해 행위의 재발 방지를 위해 정보기관에 대한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하며, 국정원·경찰 등 정보기관 통제를 위하여 관련 법률, 운영 원칙, 정보 활동지침 등을 개정해야 한다. 넷째, 사참위는 해양재난 수색구조 체계 개선을 권고한다. 세월호참사 당시 수색구조 활 동을 총괄 지휘, 조정하는 실무 체계에 여러 혼선이 있었다. 이에 사참위는 해양사고 대응 시 구조본부의 중복된 비상 가동에 따른 지휘 혼선을 최소화하고 구조본부의 책임성을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강화하기 위해, 해상수색구조 활동 방안을 총괄할 구조본부를 지방청으로 지정하고 본

청과 해경서는 지방청을 지원하도록 하는 등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수색구조 활동 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이를 위해 관련 법령에 수색구조 활동의 총괄·지휘·조정을 위한

수색구조임무조정관을 단일한 지휘관으로 지정하는 등 명확한 지휘·조정 체계의 확립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수색구조 업무 관련 직원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보수 교육이 실시 될 수 있도록 수색구조 전문교육을 의무화하는 등 해양 수색구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에 힘써야 한다. 또 수색구조를 총괄·지휘·조정하는 모든 지휘관을 대상으로도 정 기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일정 교육을 이수한 자가 지휘관이 될 수 있도록 지휘관의 자 격을 제한하는 등 지휘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다섯째, 사참위는 세월호참사 피해자 및 피해 지역 지원 개선을 권고한다. 「세월호피해 지원법」에 의하면 세월호참사 피해자 지원은 여러 정부 부서가 담당하고 있어 사업 내용 중복, 지원 누락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특히 피해 지원 및 추모 사업에 있어 중장기 계획

이 부재한 실정이다. 세월호참사 피해 지원을 위해서는 정부기관의 총괄 기능을 강화하여 야 한다. 관련하여 향후 의료비 추정의 어려움이나 생존자 중 다수인 미성년자들은 장기 간 관찰과 치료 등이 필요한 점을 고려하여 미성년과 장년층, 형제자매 등 피해자 특성과 생애주기를 고려한 ‘장기 지원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며, 세월호참사 생존자 의료 지원금 지급 기간을 연장하여야 한다. 또한 경제활성화 사업을 넘어 사회재 난 지역 회복을 고려하여 피해 지역 공동체회복 지원 개선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섯째, 사참위는 재난 피해자의 인권침해 및 혐오 표현 확산 방지를 위한 개선을 권고 한다. 세월호참사 당시 수색구조 과정이나 사후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피해자들과 피해 자 가족들의 인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피해자의 사진이나 정보 등은 여과 없이 보 도되었고, 배·보상 금액이 과도하게 부풀려 보도되면서 피해자들은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까지 했다. 그 결과 세월호참사 이후 피해자들을 향한 혐오 표현이 계속 이어졌고, 피해자 들은 명예를 훼손당했다. 피해자들은 현재까지도 ‘사회적 고립’ 등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 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재난 피해자 인권침해 및 혐오 표현에 대한 실태조 사를 진행하고, 방지를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며, 교육과 홍보를 실시하여야 한다.

324 제7장

4·16세월호참사

일곱째, 사참위는 선사·선원의 안전 운항 능력을 높이고 책임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 세월호참사로 인해 드러났듯이 선원들의 낮은 임금 수준은 여객선 안전 운항의 저해 요

소로 귀결되고, 승객들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현재 연안 여객선을 운영하는 선사 중 많은 기업이 여객선 시장의 구조적 문제로 정상적 기업 경영이 어려운 실정임이 드러났다.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하는 데 필요한 선사들의 구조적 운항 능력을 향상하려 면 선원 최저안전임금 지원 제도를 포함하는 내항 여객선 안전공영제를 도입해야 한다. 또 선사의 경영층을 대상으로 하는 안전교육이 의무화되도록 관련 내용을 법제화하고, 「해 양 교육 및 해양문화의 활성화에 관한 법률」에 사업주 및 종사자의 안전의식 전환을 위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교육 과정 이수를 의무로 규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안전관리책임 자 제도’를 재검토하여 안전관리책임자의 권한 보장과 책임 이행의 근거를 마련하고, 운항 관리규정 이행에 필요한 기록 관리, 내부 심사 등과 관련된 교육 항목을 추가하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 또 여객선 선장 적성심사제도를 재검토하여 여객선 선장별 상이한 선종, 항로 등을 고려한 적성심사 내용을 수정하고 세부 항목 및 평가 기준 추가 등 객관 적인 심사를 위해 평가 방법을 개선하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 여덟째, 사참위는 여객선 등 선박 안전관리 체계 개선을 권고한다. 준해양사고 통보 제 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동시에 사용자 편의에 맞게 신고 절차를 간 소하게 수정하고, 수집된 정보를 정기적으로 선사에 제공해야 한다. 또 이를 선박 운항 관 련자를 교육할 때 활용해야 한다. 세월호참사 이후 도입된 해사안전감독관 제도를 수상 레저기구, 어선 등 사고 발생 비율이 높은 다중이용 선박 분야에 신규 도입하고, 선사들이 자율적으로 안전관리 체계를 만들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유·도선 선사가 자 체적 안전관리를 강화하도록 선사 내 안전관리자를 지정하고, 운영 및 관리기관의 유·도 선 안전관리 업무가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유선 및 도선 사업법」을 개 정해 운영 근거를 마련하고, 해상 안전을 담보하고 신고자 신변 보호를 강화하는 별도의 공익신고센터를 설립해야 한다. 아홉째, 사참위는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제4장에 따른 세월호참사 희생자에 대한 추모 사업을 중단 없이 추진할 것을 권고한다. 세월호참사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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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모 사업은 사업 추진 과정에서 사업의 주체 및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여 지연과 혼선이 초 래되었다. 현재 「세월호피해지원법」에 근거한 추모 사업의 주체가 다양하므로 각 추모 사 업이 지속적,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 심 의·의결권이 있는 지원추모위원회의 역할을 제고해야 한다. 추모 사업을 총괄하여 지원하 거나 관리할 수 있는 조직 또는 기구가 필요하며, 세월호참사와 관련된 여러 추모 시설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유기적으로 운영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열째, 사참위는 (가칭)중대재난조사위원회 설립을 권고한다. (가칭)중대재난조사위원회 를 설립하여 가습기살균제참사와 세월호참사와 같은 중대 재난이 발생하면 독립적으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정부 부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기구로 설치하고 강력 한 조사 권한, 개선 권고 및 권고 이행 여부 점검 기능, 피해자와의 소통 기능 등을 확보하 여 전문성, 투명성, 공정성을 보장해야 하며, 조사 결과가 실질적인 안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열한째, 사참위는 재난 피해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정보 제공·소통 방식을 개선할 것 을 권고한다.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 및 재난참사가 발생하면, 피해자와 피해자의 조력자 가 국제법상 규정된 ‘인권침해 행위 및 재난참사가 발생한 원인 및 조건에 관한 정보를 열 람하고 획득하고 전파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 다. 차후 헌법 개정 관련 논의가 나올 시, 헌법에 ‘중대한 재난참사와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피해자와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의 진상규명의무’, ‘안전권’ 등을 명시적으로 추가할 방안 을 검토하여 인권 보호와 안전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또 피해자 인권을 지키고 이들에 대 한 낙인을 방지하기 위해 재난피해자 정보 제공을 법제화하고 재난 수습 홍보 방식을 개 선해야 한다. 열두째, 사참위는 사회적 참사 기록물 폐기금지 및 공개·활용 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 한다. 현재 사회적 참사 및 재난 관련 기록물 수집·보존·활용에 관한 종합 정책이 부재하 고, 기록물들은 매년 평가에 따라 폐기되고 있다. 중요한 기록물이 폐기되는 것을 막기 위 해 우선적으로 가습기살균제참사와 세월호참사 기록물(사회적 참사 기록물) 폐기 금지 조치를

326 제7장
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취하여야 한다. 조사 결과물 등 기록물은 참사와 재난에 대한 사회적 교훈을 얻는 학습

콘텐츠 등으로 활용해야 하지만, 한시적인 조사기구 활동 기간이 종료되거나 기록물이 이

관된 후에는 활용이 미비한 실정이다. 추후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활용할 방안을 마련하 고 이를 위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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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위한 국가는 없는가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본권 Ⅱ

발행일 2022년 9월 1일

위원장 문호승

위원 강기탁, 문현웅, 이 민, 이재원, 황필규

종합보고서 작성기획단

오관영(단장), 변바른(팀장), 이병국(조사관), 박형섭(조사관)

집필위원 전치형(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이두갑(서울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유상운(한밭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교수)

오철우(한밭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강사) 박상은(충북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플랫폼C 운영위원)

오민애(법무법인 율립 변호사)

보조집필인

강미량(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김성은(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발행처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발간등록 11-1074601-000005-01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70 포스트타워 20층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웹페이지 http://socialdisasterscommission.co.kr

디자인·제작 (주)명진씨앤피(02-2164-3000)

ISBN 979-11-969100-3-7(94300) <비매품>

ISBN 979-11-969100-1-3 <전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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