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꺼내 온 선교사 이야기
김준형 지음
준형미디어
차 례
Ⅰ. 주제 선정 배경 및 한국 기독교 역사 ………………… 1 Ⅱ.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모습
1. 북한에서 활동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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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울에서 활동한 선교사
………………………… 11
3.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 ………………… 22 4.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 ………………… 27
Ⅲ.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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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주제 선정 배경 및 한국 기독교 역사 초등학교 때 내가 다니던 교회 유초등부를 담당하던 이종훈 전도사 님(지금은 목사님)께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와 우리나라 각 지역을 다 니며 초기 선교사님들의 삶을 소개하는 일을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양화진 선교사의 묘지를 방문하여 선교사님들의 삶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름성경학교 대신 3년에 걸쳐 비젼 트립을 떠나기도 하였다. 첫 해는 전라도 지방으로, 둘째 해에는 경상도 지방,
셋째 해에는 제
주도로 비젼 트립을 다녀왔다. 오래 전의 일이라 거의 기억이 나지 않 지만 관련 책과 인터넷 자료, 비젼 트립 때의 전자 앨범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의 삶과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책을 쓰기로 결정했다. 비젼 트립을 다녀 온 후 처음으로 전자 앨범을 열어 보았다. 2007년 첫 해에는 전주 선교사 묘역, 전주 서문교회(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김제 금산교회(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ㄱ자 교회), 여수 애양원(나병환자 병원), 손양원 목사 묘, 호남신학대학에 있는 광주 선 교사 묘를 다녀왔다.
<전주 선교사 묘역>
<전주 서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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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교회>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 묘>
<광주 선교사 묘>
둘째 해 2008년에는 대구 제일교회, 마산 호주 선교사 기념비, 진해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관, 부산진교회, 일신 기독병원을 다녀왔다.
<대구 제일교회>
<대구 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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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호주 선교사 기념비>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관>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관>
<부산진교회>
2009년 셋째 해에는 제주도로 비젼 트립을 다녀왔다. 제주도 최초의 교회 성안교회, 순교자 이도종 목사 기념비가 있는 재정 교회, 하멜 상 선 전시관, 제주도에 파송한 이기풍 선교사 기념관, 열방 대학 등을 다 녀왔다.
<제주 성안교회>
<제주 성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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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종 목사 기념비>
<하멜 상선 전시관>
<이기풍 선교 기념비>
<열방대학>
선교사들의 삶을 소개하기 전에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의 전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선교사상 찾아보기 어려 운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교사 입국 이전에 이미 성경 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또한 그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자 생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한국에 표류해 온 화란인 벨트브레나 하멜 등은 한국에 종교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하멜이 쓴 표류기 를 읽은 귀츨라프 선교사는 1832년에 상선을 타고 충청남도 홍성군 고대도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한자로 된 성경을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 파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주민들에게 감자 심 는 법과 포도 재배법을 가르쳐 준 뒤 한 달 만에 마카오로 돌아갔다. 윌리암슨 선교사는 토마스나 로스 등을 격려하여 한국 선교에 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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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들 어 왔으나 27세의 나이로 대동강 변에서 순교하면서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만주에서 이응찬, 서상륜 등과 함 께 성경을 번역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 사업을 하고 있었다. 선교사로서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사람은 알렌이었으나 그는 선교사 로서보다는 의사로서 활약했다. 그는 감신정변을 계기로 고종의 총애 를 받아 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서 활동했다. 1885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과 헤론 등이 입국하여 의료와 교육사업 등을 시작했다. 또한 1908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 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꾸준히 입국해 들어왔다. 의료선교 활동은 알렌과 스크랜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알렌은 광혜원을 세워 병자들을 치료하고 서양의술을 교육하였다. 스크랜톤은 빈민들의 치료에 관심을 가져 상동에 병원을 세웠고, 하워드양은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녀관을 세웠다. 교육선교 활동은 특히 감리교 측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했는 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학당을 세웠다. 한편 언더우드는 구세학당을 엘러는 정동여학당을 세웠다. 문화선교 활동은 주로 성경번역과 출판 방면에서 수행되었다. 기존 의 로스역과 이수정역을 보완하기 위하여 1893년에 번역연합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러 해 동안의 번역을 통하여 1900년과 1910년에 각각 신약과 구약을 번역했다. 찬송가는 1897년 감리교의 「찬미가」를 시 작으로 하여 1928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신정찬송가」가 발행되었고, 다시 1935년에 「시편찬송가」, 「합동찬송가」 등이 각 각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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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모습 1. 북한에서 활동한 선교사 (1) 로버트 토마스 1840년 9월 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교사 의 꿈을 품었다. 1863년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땅에 도착 후 2 년 뒤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조선에 가고 싶던 토마스 선교사는 목선을 타고 1865년 우리나라에 들어오다가 큰 풍랑을 만나 목숨만 부지하고 중국 땅에 머물게 된다. 그러던 중 천주교인을 만나나 그들 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음을 보고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고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한다는 소식 을 듣고 토마스 선교사는 자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다. 군인에게 생포된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변에서 자신의 목을 베는 박춘권이라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주고 순교한다. 박춘권이라는 사람은 훗날 예수를 믿고 요즘의 장로와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는다. 피 를 흘리며 그가 전해 주었던 성경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다. 성 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신앙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많이 나왔다.
<토마스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순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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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임스 홀과 로제타와 셔우드 홀 1890년 로제타가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한다. 이듬해 제임스 홀이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에 들어온다. 이 두 사람 은 결혼을 하고 조선 전체의 복음화를 위해 평양으로 가 병원과 학교 와 교회 사역을 활발히 했다. 이 때 세워진 학교가 6.25전쟁 이후 평 양에서 서울로 옮겨진다. 이 학교가 바로 서강대 앞에 있는 광성고등 학교이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중 평양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제임 스 홀은 전염병에 감염되어 조선에 들어 온지 3년 만에 숨졌다. 로제타는 본국으로 돌아가나 어린 두 자녀들의 손을 잡고 다시 조선 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딸 에디스가 세 살의 나이에 풍토병으로 눈을 감고 만다. 양화진에 있는 남편의 무덤 옆에 딸을 묻고 남편과 딸아이 가 미처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대신 펼치기 위해 더 열정을 쏟는 다. 평양에 제임스 홀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특별히 여자 환 자들을 위해 ‘광혜여원’을 개원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만을 위한 병 원을 개원하고,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와 농아학교를 세운다. 로제타는 84세의 나이로 남편의 묘에 묻힐 때까지 이 땅에서 한평생 헌신했다. 그녀는 평양 사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의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지금 동대문 옆에 있는 이화여대부속병원, 현재의 인천기 독병원과 인천 간호보건전문대학으로 창설되었다. 셔우드 홀은 제임스 홀과 로제타의 아들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리나라의 결핵 퇴치를 위해 미국 토론토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가 되어 결핵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공부를 마치고 우리나라에 돌아 와 황해도 해주에서 병원 사역을 시 작하고 결핵 환자를 위해 요양소를 세운다. 요양소 운영비도 마련하고 결핵의 심각성을 계몽하기 위해 1932년 12월 3일 ‘크리스마스 씰’을 최초로 발행한다. 1940년 일본이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하여 셔우드 홀은 조선을 떠나게 된다. 셔우드 홀은 자신이 창설했던 결핵협회와 그의 아버지 제임스 홀이 세운 광성고등학교의 초청을 받아 1984년 91세의 나이로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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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땅을 밟는다. 1940년 일본에 의해 조선에서 강제 추방 당한 뒤 처음으로 한국에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는 양화진 선교사 묘 지에 묻혀 있는 부모님의 묘를 찾게 된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 나의 생애를 다 드린 이곳에 나를 묻어 주십시오. 일본 사람에게 추방당해서 인도에 갔을 때에도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눈물로 기도했던 나의 조국 땅에 우리를 묻어 주세요. 우 리가 은퇴해서 캐나다에서 쉬고 있을 때에도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눈물로 기도했던, 내개 태어나 자라난 땅, 나의 생애를 다 드린 나의 조국 땅에 우리를 묻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이 유언대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아들과 여동생이 묻혀 있는 묘지 옆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
<로제타 셔우드 홀>
<의료 선교를 시작한 집>
<평양 기홀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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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우드 홀>
<셔우드 홀 부인 메리안 홀>
<해주 구세병원>
<크리리마스 씰>
<노년에 양화진을 찾은 셔우드 홀>
<홀 선교사 가족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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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버트 하디 1890년 서울, 부산, 원산 등에서 의료 선교를 했으나 선교의 열매가 없었다. 1906년 8월 평양에서 열린 연합기도회를 인도하였다. 말씀을 전하는 로버트 하디 목사를 통해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조선 사람들을 미개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당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주님!, 오, 주님! 나의 자만심을 회개합니다.” 로버트 하디 목사가 통곡하며 회개하자 다른 선교사들도 회개하기 시작했다. 모든 선교사들이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이 뜨거운 회개의 눈 물이 모여 1907년에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
<로버트 하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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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울에서 활동한 선교사 (1) 언더우드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여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갈 준비가 완벽했다. 어느 날, 그에게 조선에 대한 메시 지가 들어왔다. 그 작은 나라가 불쌍하지만 이미 자신은 인도 선교사 로 헌신한 사람이었다. 집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조선 땅에 누군가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 도했다. 그때 주님은 언더우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국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다.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음성을 들은 언더우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선에 부르신 것을 확신하고, 조선으로 가기 위해 장로교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 다. 하지만 장로교 선교부의 대답은 “no”였다. 첫 번째 지원에 고배를 마신 언더우드는 다시 지원서를 낸다. 하지만 역시나 “no”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언더 우드는 다시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 지원서를 냈다. 세 번씩이나 언더 우드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본 장로교 선교부 엘린우드 총무 목사는 다 른 선교부 목사들과 상의한 끝에 그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한 다. 처음 미국 개신교에 우리 민족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을 때 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이때 엘린우드 목사가 그 자리에 일어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은 축복이 아닙니까?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그 민족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엘린우드 목사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담대히 조선 선교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발언 덕분에 회의의 결정은 번복되었고, 결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파송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미 인도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 지만 하나님께서는 언더우드를 우리나라에 보내셨던 것이다. 선교사로 왔지만 막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그 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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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만 같습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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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코배기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볼보다가 부모가 없는 거리 아이들 을 데려 새롭게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고아원은 ‘예수교학당’이라 이름하고, 학비와 의 복과 음식까지 주면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성경 등을 가르쳤습니다. 이 는 후에 ‘구세학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01년에 연동으로 자리를 옮겨 ‘경신학교’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 이다. 이 학교에서 배출한 인물 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규식 박사님이 있다.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안식년 기간을 보내는 중에도 강연과 신학교 방문 등을 통해서 직접 후배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역 할을 하였다. 에비슨, 무어, 레이놀즈, 테이트, 리 등이 언더우드의 영 향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선교사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 타자기의 소유자이던 언더우드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가 재정을 지원한 덕분이었다. 언더우드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은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 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 하였으며, 한국에 오게 될 선교사와 외국 인들을 위해서 손수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들을 만들어 직 접 출판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 는 '조선기독교대학'(나중에 세브란스 의대와 합해져서 연세대학교가 됨)를 설립해서 초대학장을 맡는 등 한국 대학교육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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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2세는 아버지를 이어서 조선기독교대학의 3대 교장으로 학 교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민간고문으로 일하였다. 그리고 언더우드 3세도 연세대학교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하였다.
<언더우드선교사 부부>
<2대 원한경>
<신약전서>
<언더우드선교사 부부 합장 묘>
<3대 원일한>
<새문안교회>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있는 언더우드 가족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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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펜젤러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학생 신분으로 미국 북감리회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였다. 아내 엘라와 결혼하고 두 달 만이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와 함께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았지만, 미국 공 사는 부인을 데리고 입성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언더우드만 서울에 입 성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첫 번째 배재학당 창설에 관한 공헌을 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다. 1886년 6월 8일에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지어주는 동시에 학교 간판을 써 주었다고 한다. 학교 교훈으로는 ‘크게 되고자 하는 사 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20:26-28)는 말씀에 따라 1895년부터는 대학부까지 병설하였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 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고난 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 까지 확장되기를 원했던 것이 다.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이기도 하다. 1887년 10월 아펜젤러는 벧엘이라고 이름 지어진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공중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 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벧엘 예배당의 헌당식을 드렸다. 그는 출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배재학당 안에 삼문 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 문을 인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 다. 그는 오지여행과 우리나라 문화연구를 하였다. 아펜젤러는 우리나라 의 풍속과 인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1888년 8월 그는 존스와 함께 서울을 떠나 15일간 강원도 원주를 방문했고,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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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대구, 부산까지 장장 380마일의 장거리 여행을 함으로써 개척 선교 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을 섬기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 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배가 침몰하면 서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4살이었다. 한국에 27살 때 들어왔 으니 17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것이다.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일평생 교육선교 사로 헌신하였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 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이 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어 섬겼다.
<아펜젤러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 추모비>
<배재학당>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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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
<한글 번역 성경>
<아펜젤러 2세>
<아펜젤러 2세 부부 묘역>
<딸 엘리스 레베카>
<딸 엘리스 레베카 묘역>
(3) 존 헤론 헤론은 테네시 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 받은 수재였다. 하지만 그는 수재로서 보장된 길을 선택 하지 않고, 헤티와 결혼한 후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 6월 21일 조 선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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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한 후에는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일했다.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알렌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서 존 헤론 선교사는 병원 일과 더불어 궁궐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왕진을 다니며 전염병을 예방했 다. 조선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존 헤론이 어느 날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이 때, 헤론의 병상을 3주 동안 불철주야 지킨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선교 초기 갈등을 빚기도 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이때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조선 사람에게 눈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온지 5년 만에 하늘나라 로 떠난다. 헤론의 유가족으로 아내와 어린 두 딸이 남았는데, 헤론은 아내에게 조선에 계속 남아서 선교의 일을 계속 하기 원한다고 부탁 하였다. 또한 조선인 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도 부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론은 ‘나의 사역이 참 보잘 것 없었지만, 그것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은 헤론이다. 헤론 선교사가 죽자 시 신을 집 뒤 뜰에 묻으려 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동료 선교사들은 고종 황제에게 그를 묻을 수 있는 땅을 달라고 부탁 한다. 고종 황제는 한강의 모래땅을 준다. 그곳이 지금 서울 합정동 외 국인 선교사 묘지이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는 존 헤론 선교사 때문에 생긴 땅이다.
<존 헤론 선교사>
<존 헤론 선교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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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에비슨 에비슨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외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토론토 시내에 개업해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차에 존 헤론의 죽음 으로 병원 사역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되자 언더우드는 미국 교회를 돌 아다니며 조선에 의료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 르시는 것 같았지만 선뜻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하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확신한 에비슨은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조선을 향해 떠난다. 에비슨 가족은 제중원을 찾아간다. 에비슨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있는 병원을 설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의 이러한 바람은 에비슨의 안식년 기간 중 ‘세브란스’라는 강철회 사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년 전부터 어딘가에 병원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가지고 있던 세브란스가 에비슨에게 1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새 병원은 1904년 현대식 시설을 갖춘 병원을 짓고 제중원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칭했다. 이것이 오늘날 연세의대 부속 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에비슨은 한국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의사와 간 호사의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서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하 였다. 한편 에비슨은 병원장을 그만 두면서 다른 선교사들의 거센 반 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람 오긍선이 자신의 후임이 되도록 하였다. 이 것은 선교의 목적이 한국 사람들 스스로 모든 책임을 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있다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한 것이다. 또한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서 조선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 교)의 교장으로 1916년부터 18년을 일하기도 하였다. 33세 때 한국에 들어온 에비슨은 42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 하다가 1935년 은퇴 후 귀국했으며, 1956년 플로리다 주에서 96세의 나이로 소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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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부산에서 태어난 에비슨의 아들 더글라스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 의학부를 졸헙하고, 1920년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한다. 그 는 선천 선교부, 서울 선교부,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 교수 및 병원장을 봉직하다가 2차 대전 직전에 캐나다로 귀국한다. 1951년 캐나다 밴쿠 버에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는 아들 더글라스와 부인 캐서린이 안장되어 있다.
<에비슨 선교사>
<세브란스 병원>
<더글라스 부부 묘역>
<에비슨 가족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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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크랜턴 스크랜턴은 52세 되던 1884년 미감리회 해외 여선교회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고, 이듬해 외아들 내외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스크랜턴은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온 학생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첩들이었다. 처음엔 낯선 이방인에 대한 이웃사람들 의 불신이 있었지만, 불신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학생들의 숫자는 점차 로 불어났고 조정에서도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스크랜턴은 ‘전도부인’을 조직하여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전도부인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 을 전하였다. 52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에 들어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24년 동안 조선 여성들을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76세 때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스크랜턴 선교사>
<이화학당>
<전도 부인>
<스크랜턴 선교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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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 (1) 유진 벨 유진 벨 선교사 가족은 전라도 지역 복음화의 초석을 놓았다. 유진 벨 선교사와 로테 벨 선교사 부부는 1895년 4월9일 미국 남장로교 선 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벨 선교사 부부는 1897년 3월부터 전라남도 나주에서 첫 선교사역 을 시작했으나 지역 유림의 강력한 박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듬해인 1898년 3월부터는 새로 개항한 목포에서 선교를 다시 시작하여 그해 5월15일, 목포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양동교회를 설립했다. 목포 선교사역이 점차 열매를 맺어가던 1901년, 아내 로테 벨 선교 사가 소천했다. 어린 자녀들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던 유진 벨 선교 사는 아내가 묻혀 있는 이 땅을 가슴에 품기 위해 1903년 다시 돌아 와 헌신적으로 선교사역을 펼쳤다. 그는 목포, 광주를 중심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교육 및 의료 중심 의 선교사역을 펼쳐, 오늘의 목포 영흥학교, 광주기독병원과 수피아여 고, 숭일학교 등의 설립에 기여했다. 또 광주 제일교회, 양림동교회 등 1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등 전라도 지역에 기독교 선교의 초석을 놓 았다. 유진 벨 선교사는 재혼한 아내 마가렛 선교사마저 1919년 교통 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었으나 끝내 한국 선교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 는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고 1925년 광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 았다. 벨 선교사 부부의 선교사역은 후손들이 계승했다. 벨 선교사 부부의 큰딸인 샬롯 벨은 1922년부터 군산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하고 있던 윌 리엄 린튼 선교사와 결혼한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1940년까지 부부 선교사로 일했다. 이들은 해방 이후 한국을 다시 찾아 1956년 대 전 한남대를 설립하는 등 한국 사랑과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다. 또 샬 롯 벨과 린튼의 두 아들, 휴와 드와이트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 다. 특히 벨 선교사 부부의 한국 선교 100주년이 되는 1995년에는 이 를 기념하기 위해 4대손들이 중심이 되어 ‘유진벨재단’을 만들어 북한 지역 의료 및 식량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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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에는 유진 벨 선교사의 첫 번째 아내인 로테 벨 선교사가 잠 들어 있다. 유진 벨 선교사는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아내 마가렛 선교사와 함께 잠들어 있다.
<유진 벨과 사위 윌리엄 린튼>
<아내 로테 벨 선교사 묘지>
<유진 벨 선교사 묘지>
<아내 마가렛 선교사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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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킨(전위렴) 전킨 선교사는 1892년 6월 메리 레이번(Mary Leyburn)과 결혼하여 함께 내한하여 전주를 최초로 방문하여 호남 선교 터전을 마련하였다. 한국에서 선교활동 중 전킨은 숯불가스 중독, 모기 빈대에 시달리는 등 많은 고비를 겪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에 남아 선교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전킨은 1899년 12월 21일 군산 영명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어 선 교 뿐만 아니라 교육에 힘썼던 선교사였다. 또한 전주에서 1904년 서 문교회를 담임하며 예배당을 신축하고, 6개에 교회를 더 설립하였으며 고아원을 지어 선교사업의 폭을 넓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달은 타국에서의 많은 고비와 건강상의 악화로 힘들어하던 전킨은 마침내 1908년 1월 2일 장티푸스로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 주에서 잠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 는 삶이다”라는 가슴 따뜻한 어록을 남겼다. 그는 16년 동안의 한국에 서의 헌신적 활동으로 호남선교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훗 날 선교부는 “전킨의 공적을 기리고 기념한다”는 뜻으로 기전 여자 중 학교, 기전 여자 고등학교, 기전 여자 대학을 전주에 세운다.
<전킨 선교사>
<전킨 선교사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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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네 데이비스와 해리슨 리네 데이비스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신앙교육을 받 으며 성장했다. 서울에 도착한지 9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이 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뵐 수 없지만 , 천국에서 어머 니를 다시 만날 때는 한국의 수많은 영혼들과 함께 만나겠다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직 한국인을 위하여 최선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였다. 1896년 군산에서 어린이들과 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고, 학교사역도 감당하였다.
그 후 전주로 이전하여 해리슨 선교사와 결
혼하였다. 당시 해리슨 선교사는 서문 밖에서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면서 선교하고 있었다. 해리슨은 전주에서 5일마다 서는 장터에 서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인근 장터마다 두 개의 헛간을 지어 장터 선 교를 계속했다. 전주의 선교의 문이 더욱 더 활짝 열렸다. 선교부는 정식으로 전주 에 잉골드라는 여의사를 파견하여 병원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전주 예수 병원이다. 전주 예수병원을 중심으로 불신자 어린이 와 부녀자를 전도하며 환자를 돌보다가, 그녀 자신도 발진티푸스에 감 염되어, 1903년 6월 19일 41세로 순교했다. 전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 로 묻힌 선교사로, 동료 선교사들은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라고 하면서 애도 했다.
<데이비스 선교사>
<해리슨 선교사 전도여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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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스 선교사 묘>
(4) 오웬 오웬은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선 교부에 부임하였다. 1899년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오웬은 선교 초기 의사와 목사로서 의 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다. 그 후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 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치중하였다. 그 는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였다. 그의 한국 선교 업적은 의사
로서 보다는 목사로서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1904년 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열린 연례회의는 광주 선교부 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웬 선교사는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였으며 광주 양림교회 설립에 벨과 협력하였다. 그리고 완도 관 산교회, 나주 방산교회, 보성 무만, 신천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고흥 옥 하교회를 설립했다.
<오웬 선교사>
<오웬 선교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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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 (1) 조셉 헨리 데이비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누나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1889년 10월 2일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입국했다. 부산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하지만 먼저 서울에 올라가서 5개월 동안 우리말을 배운다. 부산 경남 지역에 선교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전도 하며 내려오는데, 도착하기 전 5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천연 두와 폐렴에 걸리고 만다. 부산에 도착한 그 다음날 소천하셨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6개월 만에 순교한 데이비스 선교사 소식이 교 향 호주 멜버른에 알려지면서 호주에서 대거 ‘데이비스 선교사를 뒤따 르는 후배 선교사’들이 자원한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 그 후에 해방 전까지 78명, 해방 후까지 약 120명의 호주 선교사가 대거 한국으로 들어오는, 큰 열매를 낳았다. 그래서 특 히 호주 선교사들은 그 후에도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했다.
<메리 데이비스와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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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윌리엄 베어드 1891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베어드 부부는 처음 부산 선교를 개척하면서 부산 초량교회를 개척한다. 그러나 한 번도 복음 듣지 못 한 다른 지역 전도를 위해 경상도 전도 여행을 떠난다. 대구에 있는 한 집을 사서 대구 선교를 시작한다. 후에 대구를 떠나 서울 사역을 하다가 1897년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에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당을 열었 다. 3년 후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에는 합성숭실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중학교 교장이던 맥큔의 초청으로 숭실 개 교일에 참석한 베어드는 한 달 후 장티푸스에 걸려 소천 하였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
<베어드 선교사 묘>
(3) 대구 선교의 3인방 존슨, 아담스, 브루언 선교사 아담스 선교사는 부산에서 언어를 배우던 중 매형 윌리엄 베어드 선 교사가 대구를 떠나면서 대구에 왔다. 그 후에 존슨 선교사가 이사 오 면서 두 가정이 함께 대구 선교를 맡게 된다.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온 존슨 선교사는 경북 지방 최초의 병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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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현 동산의료원)을 세운 뒤 의료 선교의 기초를 닦았다. 1899년 부터 1910년까지 초대 병원장으로 활동했다. 아담스 선교사는 계성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대구 경북 지역의 첫 번째 교회인 남문안교회를 설립하였다. 브루언 선교사는 경북 지역을 다니며 순회 전도와 교회 개척을 했 으며 나환자를 돌보고 대남학교와 대구 남산교회에서 시무했다. 부인 인 마르다 스코트 선교사도 신명여자 중학교를 세워 초대교장으로 봉 직을 하여 대구 지역 선교에 이바지하시다가 50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 하여 지금 동산병원 선교사 묘지에 묻혀있다.
<동산 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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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1. 근대식 학교 설립 사회는 개화와 근대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히 팽배해 있었으며, 그 때 이미 육영 공원이라는 근대식 국립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운영 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근대 교육을 담당할 세 사람의 교사를 미국에 요청했고, 그래서 한국에 파견된 세 사람의 미국인은 우연히도 모두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졸업생으로 파송되었다. 그들이 바로 모어, 벙커, 헐버트였는데, 이 중 헐버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1905 년 을사조약 이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헤이그 밀사들의 활동을 돕 는 등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1887년 2월 아펜젤러에 의해 배재 학당이 설립되고, 이어 이화 학당 (감리회), 연희대학, 정신 여학교(북장로회), 평양의 숭실 학교, 숭의 여 학교, 광성학교, 기전여고, 정신여고 등이 설립되는 등 전국적으로 기 독교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교육 선교는 서구 학문의 수용, 기독교 정신의 전파, 그리고 한국 전통 문화의 진작이라는 세 가지 의미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런 기독교 학교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는 민 족 운동의 선구가 되어 많은 민족 운동 지도자가 배출되어 독립운동에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2. 의료 시설의 근대화 알렌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해준 것을 계기로 조정의 신임을 얻게 되고 마침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게 된다. 기독교 전래 초기 의료 선교는 기독교를 경 계하던 정부와 사회전반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완화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알렌의 광혜원에서 보여준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 비천한 천 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는 의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계층적 인 소외감을 없애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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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세브란스 병원, 대구 동산병원 평양 기홀 병원 등이 세워졌으며 결핵 퇴치를 위해 결핵 요양원이 설립되고 크리 스마스 씰이 발해되기도 하였다.
3. 기독교 남·녀 청년운동 YMCA와 YWCA, 이 두 단체는 모두 나라 잃은 어려운 시절에 우리 젊은이들의 혈기를 기독교 정신으로 승화시켜서, 많은 무지한 민중들 의 계몽과 건전한 스포츠 활동 등을 선도한다. YWCA는 국내 여성 단체로는 가장 오래 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단 체로서 농촌 계몽운동과 여성운동을 통해 무지한 민중에게 신지식을 전파하는 노력과 여성의 권위 향상과 배움의 길을 여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YMCA는 YWCA보다 훨씬 먼저 한국에서 그 시작을 보게 된다. 한 국에 와 있는 여러 선교사들과 기독교인, 한국인 선각자 사이에 조선 에도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모임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래 서 1899년경에 150여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서울에 YMCA간사를 보 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세계 YMCA 본부에 보냈고, 세계 연맹 본부 국제 위원회에서는 이를 철저히 검토했다. 그 결과 1903년 10월 윤치호, 이상재 등의 기독교 민족 운동가를 중심으로 한 '황성 기독교 청년회' 라는 명칭을 가진 YMCA가 설립하게 된다. 초기 YMCA의 활동 중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체육 활동의 시작과 보급이다. YMCA를 통해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어 보급된 운동은 농구, 스케이트, 배구, 탁구, 원반치기 등이 있는데, 서구식 운동 경기 는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승만, 김규식 등 조국 해방을 위해 노력한 여러 독립투사들 을 YMCA를 통해 배출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도 큰 기여를 한 다. 이처럼 19세기 말 전래된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사에 미친 영향은 교 육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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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 초기에는 근대적인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해 우리나라 민중의 근 대의식 성장에 기여했다. YMCA와 YWCA 등의 계몽단체를 통해 교육 기회 확대, 여권 향상, 반상 철폐, 구습 타파, 절제 운동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 청년들이 마음껏 꿈을 키우고 역량을 발산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의 울타리가 되어줌으로써 후에 여러 선각자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해 우리나라의 독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리고 성경번역 으로 한글을 정착시켰다.
<참고 문헌 및 인터넷 사이트>
*이용남. 복음에 미치다. 두란노 *http://www.yanghwajin.net *http://cafe.daum.net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lykim33&logNo=13 0096142710 *http://blog.daum.net/sunghwa/15853141 *http://blog.daum.net/soon0975/7717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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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포구청 논술지원비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