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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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깃든 생명의 신이시여. 당신이 제 몸 떼어 주신 공기 한 줌, 물 한 바가지, 흙 한 움큼, 세 뼘 나무에 우리 더 욕심내지 않고 족한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아흐레 꼬박 빚어 숨 넣은 세상에 갓 태어나 보채는 우리 너무 울지 않도록 조금씩 나누길 허락하소서. 고요의 아침에 잠을 깨어 태양빛에 달은 몸으로 세상 달리다가 저녁에는 돌아가 쉴 수 있도록 늘 그래 평온하소서. 그리고 이리 모다 취해 족할 줄 모르는 우리가 기어이 족했을 때 당신의 가슴 안에 돌아가게 하소서. 내 멈춘 숨과 몸이 공기 한 줌, 물 한 바가지, 흙 한 움큼, 세 뼘 나무로 환 원하게 하소서. 비로소 족하게 하소서.


포도의 달 13일.  새 일기장 첫 페이지에 기도문을 써봤지만 나는 신도가 아니다. 그래도 생명 의 경전은 다 읽었다. 도시 사람들은 독실하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만났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취급당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집은 도시에서 멀리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주변에 교리를 가르쳐 줄 성당도 없고, 도서관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 엄마는 원래 부잣집 외동딸이 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난한 아빠랑 결혼하면서 얼마나 반대가 심하고 고생을 많이 했는지, 사람이 거의 없는 여기 왕국 외곽의 새비지랜드까지 도망쳐 왔다 고 한다. 도와주는 사람은 그때 엄마 하인이었던 요한 오빠 딱 하나였단다. 엄 마는 그때부터 신을 믿지 않게 된 것 같다. 엄마가 안 믿으니까 나도 안 믿는 다. 저번에 엄마가 요한 오빠랑 이 얘길 하다가 메리가 듣고 있다고 목소리를 낮 추길래, 나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인데 왜 그러냐고 끼어들었다. 그랬더니 그러 냐면서 둘 다 깔깔 웃었다.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바보 취 급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한데, 웃는 사람들한테 화내는 건 어려운 일이 다 정말!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이렇게 외진 대신에 우리 집엔 정말 책이 많다는 거다. 몰랐는데 우리 집만큼이면 작은 도서관 수준이라고 한다! 지금도 서재가 책으로 가득한데 부모님은 계속 새 책을 구해온다. 언젠가 우리 집은 왜 이렇 게 책이 많으냐고 물어봤더니, 메리 너한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 해서 그렇다고 한다. 하여튼, 어른들은 정말로 바보 같다! 엄마아빠 미안하라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내가 책을 정말 열심히 읽기는 한 다. 확실히 집안이 심심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데, 엄마아빠는 모른다. 아니 알 수도 있었는데 바보 같아서 모른다. 내가 분명히 얘길 했었는 데, 어린애 말이라고 안 믿고 넘기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신 일기로 꿈에 대해서 적기 시작한 거니까. 오늘은, 전쟁하는 꿈이었다. 아마 론즈브라우와 루비오나 사람들. 깨고 나서 의복 사전을 찾아봤더니 그쪽 군복이랑 사람들 옷이 거의 같았다. 그런데 사실


전쟁하는 꿈은... 그다지 자세히 적고 싶지가 않다. 이제 웬만한 꿈에는 큰 감흥 이 들지 않는데도 전쟁하는 꿈은 여전히 무섭다. 자각몽 꾸는 연습을 하던 걸 다시 해볼까? 중간에 깰 수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그래도 이번 꿈에서 본 루비오나의 여왕님은 예뻤다. 하얀 드레스도, 반짝거 리는 왕관도 예쁘고 말씀하시는 온통 예쁜 사람이었다. 이런 여왕님은 안경 같 은 건 안 쓰겠지? 요한 오빠가 이번에 도시에 갔다 오면서 내 안경을 사오겠 다고 했는데, 슬슬 올 날짜가 됐는데. 오빠는 기다려지지만 사실 안경은 별로 쓰고 싶지 않다. 눈은 한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눈이 나빠지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이제 평생 작은 글씨를 볼 때 안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역시 속상하다...

포도의 달 14일.  요한 오빠가 돌아왔다! 반가워 달려갔더니 안경부터 꺼내다주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구겨졌 나 보다. 오빠는 갑자기 표정이 바뀐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선물 꾸러미 하나 를 더 꺼내주면서 방에 들어가서 풀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너무 기분이 좋다! 잉크도 펜도 마음에 든다. 바로 지금 손에 들고 일기를 쓰고 있는데, 기울일 때마다 공작 깃털처럼 반짝거려서 계속 손을 움직여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오빠가 예전에 도시에 갔다 올 때에는 주로 밖에서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 같은 걸 선물로 받았었다. 내가 너무 방에 틀어박혀서 뭘 계속 읽 고 쓰기만 하니까 오빠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오빠는 워낙에 가만히 있는 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너는 어린애가 그런 게 재밌느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책을 읽는 나한테 오더니, 내가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나이에 비해서 말도 조리 있게 잘하니까 소설가나 무언가 쓰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 다고 했다. 펜도 그래서 선물해 준 것 같고.


그래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다른 건 몰라도 소설가는 역시 무리라고 생각한 다. 꿈 때문이다. 오늘은 고양이가 담벼락 앞에 아기를 낳는 걸 봤다. 어제는 전쟁. 그제는 내가 가본 적 없는 학교. 그리고 예전에는 요한 오빠가 밤 산책 을 하다가 넘어지는 꿈도 꿨다. 그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오빠 무릎에 커다 란 흉터가 있었고. 결국 꿈에서도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지 못하고 이미 있는 세계의 여러 모습을 보는 거다. 가끔 몽상처럼 이색적인 광경들도 보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전부 다 른 차원에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그게 싫으냐면, 그렇지 도 않다. 나는 세계 이곳저곳의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고, 내 상상이 그 자리 를 메우는 건 바라지 않는다. 이런 내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가가 될 수 있 을 리가 없지. 아마 이건, 안 되는 거다. 나는 계속 의식적으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꿈과 현실 에 대해서 생각한다. 꿈은 대개 안 되는 것이고, 눈으로 직접 보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물론 꿈을 바라는 건 자유다. 그렇지만 꿈과 현실을 혼동해서 나는 많이 고통스러웠다. 꿈속의 세상은 이렇게나 넓고 근사한데 내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항상 똑같은 광경이다. 앓고 바랄수록 더 괴롭기만 했다. 그 때 우연히 생명의 경전을 읽었다.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글귀들이 마 음에는 큰 위안이 되었다. 사람들이 왜 종교에 귀의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 다. 이 구절을 떠올리면 언제고 마음이 평안해진다. 우리 더 욕심내지 않고 족한 줄을 알게 하소서.

포도의 달 15일.  요한 오빠가 부모님께 얘기하는 걸 들었다. 도시에서 소문을 들었는데, 우리 나라 근처에서 루비오나 론즈브라우 연합군과 그란데레니아 제국이 교전 중이라 고. 역시 꿈에서 본 대로다. 이럴 때 나는 가끔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내 얘길 들어줘요, 그거 내


가 꿈에서 본 내용이에요. 내 꿈이 이상해요. 믿어줘요. 그렇지만 역시 망설이게 되는데, 첫째는 역시 어린애 얘기라고 아무도 진지하 게 들어주지 않아서고. 둘째는 꿈에서 그동안 봤던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어딘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사실 이 세상에 아주 많다. 내 꿈 정도야 평범할 정도다. 눈 깜짝할 사이에 3알레를 뛰는 사람도 있고, 몸에서 불이 나 는 사람도 있고, 동물 귀가 달린 사람도 있었지. 이 중에 자기 능력을 숨기는 사람도 있고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능력을 드러냈을 때, 이해받고 능 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보다는 이용당하고 휘말려 삶이 불행해진 사람이 훨씬 많았다. 우리 엄마아빠도, 좋은 분들이시긴 하지만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시지는 못한 다. 저 애는 너무 상상이 과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 다른 사람들이랑 떨어져 지내서 그런가.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잘 보살펴줘야지! 정말 내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얘길 하시는 걸까! 원망하고 탓하고 싶지는 않다. 엄마가 원래 얼마나 곱게 자랐는지, 그리고 그 래서 간혹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빠는 그래서 얼마나 엄마한테 미안해하고 마 음을 쓰는지 나도 보고 들어서 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힘들면 남에게 완전히 신경을 쏟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난 그래도 엄마랑 아빠가 오빠가 정말정말 좋고, 다시 경전의 글귀를 생각한다.

포도의 달 16일.  하필 또 그 전쟁 꿈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그 얘기를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전쟁이나 보고 싶지 않은 꿈을 꿀 때, 운이 좋아서 의식이 있으면 최대한 덜 잔 인한 쪽에 의식을 집중하고는 한다. 저번에는 루비오나 왕국의 예쁜 여왕님을 봤는데, 이번에는 론즈브라우 쪽이 보여서 그럴 수는 없었다. 론즈브라우측의 상황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왕은 건강이 좋지 않고 왕자님이 대신 일선에 나서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다. 이 왕자님은 아주 잘생겼


지만 그만큼 아주 무섭기도 하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이야 다 그렇지만, 이 왕자님은 특히나 그렇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상한 사람이 하나 있다. 전장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 렇게 무서운 게 보통이다. 눈빛부터가 예사 때랑은 달라서 독기나 광기 같은 게 잔뜩 서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상하게, 그냥, 지쳐 보였다. 이런 사람이 전쟁에 없는 건 아니지만 후방에 있다가 금방 낙오되고는 한다. 그런데 이 사 람은 그런 얼굴을 하고도 전방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신기하다.

포도의 달 18일.  사람들은 그 이상한 사람을 쿠르트 소령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밤늦게까지 전선의 대열을 정리하다가 막사로 들어와서 판판하게 접힌 편지를 꺼내 읽었다. 편지 중간 중간에 적혀 있는 게 그 사람 이름이겠지. 빌헬름. 그러면 풀 네임은 빌헬름 쿠르트가 되는 건가? 이름도 이상하다.

포도의 달 21일.  그 사람이 매일 밤 같은 편지를 꺼내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낸 날짜는 작년으로 되어 있다. 어쩐지 종이가 낡았다고 생각했지. 역시 정말 이상한 사람 이다. 외로워 보여. 비슷하게 느껴진다. 같은 책을 끝없이 거듭해서 읽는 나랑.

포도의 달 23일.  손이 떨리고 땀이 나고 자꾸 펜이 미끄러지고 글씨가 엇나간다


좋아. 이제 좀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이. 적군에게 가슴을 찔리는 걸 봤다. 찔리자마자 아랑곳 않고 일어나서 상대를 찔러 누르는 것도 봤다.. 누가 보지는 않았는지 주변 눈치를 살피는 것까지. 너무 놀라서 한동안 침대에서 일 어나지를 못했다. 찔리는 것도, 그러고도 멀쩡하게 일어나는 것도 놀라웠지만, 돌아와서 혼자 또 그 편지를 읽다 자기 가슴을 찔렀던 게 제일... 새삼 놀랄 것도 없다. 그간 꿈에서 본 게 한두 가지였던가? 그 사람이 심장 을 찔려도 금방 낫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새삼 놀랄 것도 아닌데, 자꾸 스스로 찌르던 그 얼굴이 생각나고 꼭 내가 심장을 찔린 것처럼 쿵쾅쿵쾅 아파서 눈물이 난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아프면 그랬을까.

포도의 달 25일.  오늘 빌헬름은 적진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 찔려 죽기 직전인 병사를 뒤로 밀 쳐내고 자기가 대신 칼에 맞았다. 이 사람은 딱히 위험한 상황을 피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죽을 곳을 찾고 있는 사람 같다. 위기 때마다 몸을 던지지만 아무리 다쳐도 죽지를 못하고 다시 깨어날 때 모습은 거의 허탈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다른 아군은 필사적으로 구 한다. 빌헬름이 높은 계급인 게 당연하지. 아무리 위험한 곳에 가서도 그렇게 살아왔을 테니까. 빌헬름은 밤마다 그 편지를 읽는다. 답장도 쓰지 않고 다음 통이 오지도 않는 작년 편지를 계속 다시 본다. 답장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빌헬 름이 자길 내던지듯이 행동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지. 사람은 원래 자기가 힘들면 남에게는 신경 쓰 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나는 빌헬름에게 생명의 서를 보여주고 싶다. 빌헬름은 아마 자기가 죽지 못 해서 싫은 거겠지. 그렇지만 나는 그게 아주 많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


람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죽고 싶어하는 거다. 그런 사람인 거야.

포도의 달 26일.  오늘은 꿈에서 전쟁을 보지 못했다. 아쉬워서 다시 자려고 눈을 감는데 엄마 가 자꾸 흔들어 깨워서 확 짜증을 내버렸다. 그랬더니 가족들이 요즘 내가 이 상하다고, 우리 메리가 사춘기가 왔나 뭐라 뭐라 하는 거다. 그래서 다시 짜증 을 내고 방에 들어와 버렸다. 빌헬름은 어제 크게 다쳤다. 그런데 오늘 꿈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지 를 못했어. 그동안 아프거나, 또 자길 찔러서 크게 다쳤거나, 무슨 일이라도 일 어났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다쳤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또 평소처럼 전장 에서 싸우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그동안 아무리 애를 써도 꿈에서 보는 내용은 내 마 음대로 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요즘은 며칠 내내 같은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그런데 왜 오늘은 보지 못했지? 내일도 보지 못하는 걸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입맛이 없어서 종일 끼니를 걸렀더니 배가 주리고 꼬르륵 소리 가 나는데 먹고 싶지도 않다. 보고 싶어서 얼른 자고 싶은데, 보고 싶어서 잠이 오지를 않아... 창밖에 별이 너무 밝은데 정신이 이상하게 또렷하기도 하고 몽롱 하기도 하고. 나, 어딘가 이상한 걸까?

포도의 달 28일.  사랑에 대해 찾아보고 있다.


포도의 달 30일.  이상하고,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서재에 쌓인 그 많은 책의 기억나는 내용 들이 전부 내 것이 되고 새로 읽는 이야기들이 전부 내 것이 되었다. 안다고 생 각했지만 정말로는 몰랐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시나, 노래나, 비극 같은 것 들. 마음과 생각이 뚜렷해질수록 다른 것도 뚜렷해졌다. 억울함. 비참함. 억울해 서 계속 울었다. 비극 속의 연인들이야 직접 만난 적이라도 있지, 상대가 자기가 누군지 알기라도 하지. 나는 누구도 못지않게 간절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만큼 비참하지는 않아 보였다. 다 내가 이렇게 이상한 꿈을 꾸기 때문인 거다. 하필 꿈속의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도, 좋아하는 사람을 눈으로 볼 수조차 없는 것도. 그런데 눈물이 마르면서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꿈을 꾸지 않 았다면. 빌헬름을 보지도, 알지도 못했겠지. 그 순간, 고마워졌다. 빌헬름이 계속 죽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거다. 나도, 내가 아주 오래 살았으면 좋겠으니까. 빌헬름이 죽지 않고 오 래 사는 만큼만. 아마 평생 직접 볼 수는 없겠지. 그래도 꿈속에서는 계속 볼 수 있겠지...

안개의 달 1일.  자꾸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보니 나를 부르는 게 아니 라, 가족들끼리 얘기하면서 계속 내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거였다. 무슨 얘긴지 궁금해져서 좀 더 잘 들으려고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런데 그 만 턱에 발이 걸려서... 아빠가 일으켜 주시는데 엄청나게 부끄러워서, 괜찮으냐고 물어보시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랬더니 아빠가, 안 그래도 메리 너한테 할 말이 있었다면 서. 너 도시로 가고 싶지 않으냐고, 같이 도시로 이사하면 좋지 않겠냐고.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다. 나는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었다. 친구라고는 거의


없고 매일 보이는 풍경은 같았고, 그래서 책을 읽었다. 바깥세상을 꿈꾸며 책을 읽고 또 읽다가 서재에서 잠들기를 몇 번째였던가, 졸면서 잠깐 꾼 꿈이 말도 안 되게 또렷했다. 꿈에서는 세상 밖의 일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경치에 홀려서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책을 더 많이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꿈은 더욱 또렷해지고 갈망이 강해질수록 여기저기를 널뛰다가 심지어 전 혀 다른 세상의 일들까지 보게 되었다. 아빠나 요한 오빠가 도시에 갔다 오는 날이면 나는 종일 달라붙어서 이야기 를 듣고는 했다. 동경하는 티가 나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생각하다 보니 좀 이 상했다. 이사 의논을 하는데 왜 계속 내 이름을 말한 거지? 혹시 나 때문에 무리해서 이사하려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족하다고. 경 전의 어투를 그대로 썼더니 다들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아빠는 메리 네가 요즘 부쩍 안 좋아 보여서 다시 얘기가 나온 건 맞지만, 전부터 이사는 생각해보고 있었다고. 너는 도시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냐 고 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눈치를 보니 다른 가족들은 이미 어느 정도 얘기를 마친 것 같았다. 아빠는 머지않아 떠나도록 준비할 테니까 메리 너도 꼭 챙겨 야 할 중요한 것은 미리 정리해 두라고 했다. 이렇게 갑자기. 내가 살면서 얼마나 바랐었는데. 정작 이렇게 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시에 나가면 하고 싶었던 것들을 손꼽아 보지만 얼떨떨해 생각 이 전부 나지가 않는다. 미리 상상해봤자 의미가 있을까? 틀림없이 지금과는 완 전히 달라질 텐데. 지금까지 겪지 못한 새로운 일들이 잔뜩이겠지. 그러면 나는 정신을 빼앗기고, 바람도 흐려지고, 어쩌면 꿈을 꾸지 못하게 되 고 빌헬름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꼭 챙겨야 할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는 가장 먼저 빌헬름을 떠올렸 다. 그런데 나에게는 빌헬름과 관련된 챙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면 빌헬름은... 그냥 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빌헬름에게는 답장을 할 수 없는 편지가 있다. 그러니까 나도 보내지 못하는 편지 하나 정도는 있어


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운이 좋아서 빌헬름을 볼 수 있었던 만큼 또 운이 더한다면. 수십 년이 지나고 내가 빌헬름을 완전히 까먹기 전에, 한 번은 만났으면 좋겠다. 아마 나는 언젠가는 빌헬름을 잊겠지. 나도 언젠가는 커서 어른이 될 거다. 키도 빌헬름만큼 크고, 생각도 더 철이 들고, 현실에서 따로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당장 이사라는 현실에 비하면 꿈 같은 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거다. 그 사람이 나를 알기는커녕, 정말 이건 나 혼자만의 꿈인지도 모른다. 실 제로는 빌헬름 같은 건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나는 자꾸 꿈이랑 현실을 헷갈려 버린다. 생각이랑 마음이 따로 놀아서, 솔직히 나 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아. 꿈도 현실도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이젠 필요 없고 나는 빌헬름만 있으면 좋은데, 당신은 나한테 아무 형체도 없는 꿈이라는 게.

안개의 달 2일.  어제 쓴 일기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페이지를 찢고 싶었다. 그렇지만 일 기는 절대로 고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는 나와의 약속이 있어서 참았다. 애초에 일기의 형태로 꿈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내가 나를 믿어줄 증거를 가지 기 위해서였던 거다. 내 꿈이, 아니 적어도 내가 겪고 기억하는 것들만큼은 진 짜라는 것, 그리고 또... 그래, 내 마음도.

안개의 달 3일.  그래. 꿈을 기록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한 일기였다. 그러니까 본 목적에 충실 해야지! 오늘은 빌헬름이 식사를 마치고 병사들과 주변 숲을 탐색했다. 장갑을 끼고 손에는 램프와 칼을 차고 다른 몇 명과 함께 수풀을 헤쳐 나아갔다. 그러


던 중에 갑작스럽게 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반사적으로 칼을 빼 들 었는데, 나타난 건 자그만 다람쥐였다. 옆의 병사들이 다람쥐에게 칼을 겨누자 빌헬름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서 칼을 거두게 했다. 그리고 다람 쥐 앞에 쪼그려 앉았다.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다람쥐는 빌헬름의 무릎과 어깨 위를 타고 지나가더니 수풀 속으로 쪼르르 사라졌다. 빌 헬름의 황망한 표정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서 잠에서 깨버렸다. 다람쥐도 귀엽 고 빌헬름도 귀엽다. 나는 역시 빌헬름이 너무 좋아! 너무 좋아하는 빌헬름을 내일도 모레도 볼 수 있겠지. 행복해.

안개의 달 4일.  뭐가 그렇게도 급한지 다들 이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책은 너무 많아서 일부만 챙기고 두고 가야겠다기에, 다 두고 가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몇 권만 간추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꿈은 이상하고 가족들은 부산하다. 꿈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 하나가 병 사들이 진을 친 곳에 들어갔다. 그 사람은 약간의 물과 먹을 것을 얻어먹고, 거 듭 감사 인사를 하면서 병사들과 담소를 나눴다. 웃으며 이야기하던 병사들은 어느 순간 그를 찔렀다. 윗몸을 찌르고, 다리를 찌르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가 날 때까지 계속 찌르다가 한밤중에 행군을 시작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가족들에게 얘기를 할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어차 피 얘기해도 믿어줄 리도 없고, 다들 바빠 보이기도 하고. 어두워지니 불현듯 그 꿈이 다시 떠오르고 덕분에 기분이 싸하고 잠이 오지를 않아서 뒤척이다가 일기를 쓴다. 전쟁이란 게 원래가 그런 걸까. 원래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걸까?


메리의 일기는 여기서 끝났다. 메리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간밤에 잠 을 설친 탓에 더 자겠다고 도리질을 치며 베개에 얼굴을 묻던 메리는, 지금 일어나야 한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과하게 부드럽고 또렷하다는 사실을 퍼 뜩하고 깨달았다. 뒷목이 싸늘해지는 느낌과 함께 반짝 눈을 뜨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창문 밖에서부터 노란 불빛이 번져와 두 사람의 형체가 번 뜩이고 있었다.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소리와 사람 소리인지 짐승 소리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가 뒤섞여서 늘 조용하던 집 주위를 메아리쳤다. “침착해, 메리. 괜찮아.” 그러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일어난 일의 경위는 간단했다. 기나긴 행군 중에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고 식량이 바닥난 병사 일부가 새비지랜드의 유민 중 하나를 만났고, 근처에 국 가에서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토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굶주리고 기다림 에 지친 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터를 찾아가 식량과 물건을 보이는 대로 약 탈하고 취했다. 그리고 아무리 방치된 땅이라고는 하나 타국의 영토에 허락 없이 침공한 꼴이 되었으므로 두려워 불을 지르고 살아남은 이들을 죄 찾아 다 죽였다. 이러한 일은 결국 차후에 밝혀질 수밖에 없음에도. 메리는 나중 에 꿈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감정을 놓은 후였다. “집 주변이 소란스럽구나. 자, 어서 떠나자. 도시에 이사를 가려고 봐둔 곳들이 있어. 도시에만 도착하면 집을 구하고 거기서 살 수 있을 거야.” “요한 오빠는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메리의 손을 꼭 쥐었다. 손도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메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세게 쥔 손에 이끌려 집 밖 으로 나왔다. 불길이 발하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데도 타오르는 불의 열 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요한이라는 청년은 잠귀가 밝은 사람이었다. 이 예민한 청년은 이상한 기 분에 잠에서 깨자마자 집 앞 숲의 소리가 평소 같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짐 승들이 이상하게 울부짖는다 싶었는데, 가만 듣다 보니 짐승 소리 속에는 사


람 소리도 섞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새비지랜드의 유랑민들이 도착했구나 생각했겠지만, 지금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 는 제국과 연합국이 교전 중인 지역이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다던 소문을 떠 올렸다. 그는 재빨리 집안의 어른들을 깨운 후,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자 신이 먼저 나가 얘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숲으로 들어간 그는 한동안 돌아오 지 않았고, 대신 숲에 불길이 타올랐다. 시간이 지나고 메리의 부모님은 메 리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큰 손을 잡은 자그만 손에 땀이 흘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 이후로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도시는 집에서 아주 멀다고들 했다. 체력이 좋은 요한 오빠도 도시에 가면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 오고는 했다. 메리는 점점 부모님께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바닥의 돌멩 이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듯 멈칫하면서도 계속 뛰듯이 걸었다. 아 무리 걸어도 뒤쪽에서 들리는 귀신같은 사람 소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가냘픈 걸음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메리를 업고 뛰었지만 계속 그렇게 갈 수 는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날이 밝자 어머니는 가방에서 물과 약간의 부 식을 꺼냈다. 아직도 아까 진입한 숲 속이었다.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니니 방 향이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계속 걸을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모두가 지쳤지만, 어린 메리가 가장 심각했다. 아무런 불평도 잔말도 않고 그저 부모님을 따라가던 조숙한 아이는 며칠 내내 제대로 먹지 못하고 걸어 발이 부르트고 눈에 빛을 잃었다. 이마에서는 열이 났다. 마침 개울이 있어 땀으로 달라붙은 앞머리를 닦아내고 목을 축이게 해주었지만 잠시 상태가 호 전된 듯 방긋 웃고 잠이 든 아이는 그대로 긴장을 놓쳐버렸는지 아예 끙끙 앓기 시작했다. 기어코 어머니가 눈물을 비치자 눈을 게슴츠레 뜬 아이가 울 지 말라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이대로 계속 걸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부드러운 땅, 바위와 나무가 둘러싼 안전한 자리를 찾아 외투를 벗어 아이를 뉘이고 천으로 감쌌다. 먼저 길을 찾아서 떠난 것은 아버지였


다. 어머니는 메리의 옆에 남아 아픈 아이를 돌보며 옛날이야기를 했다. 생 명의 경전 속의 이야기들. 태초에 혼자였던 외로운 신이 몸을 나눠 대지와 바다를 낳고 숨결을 불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결핍으로부터 태어나 사는 내리 끝없이 갈구하지만 결국 신의 가슴 속으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의 이야 기들. 반쯤 넋을 놓은 채로 이야기를 듣던 메리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엄마… 전에는 경전 얘기는 절대 안 했잖아.” 제 꼴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고 어렵사리 웃는 아이에게 어머니도 쓰 게 웃는 것 외엔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없었다. “그럼 나도 안 하던 얘기를 해줄게… 나는 꿈이 보여, 엄마. 세상의 이런 저런 것들을 꿈으로 봐.” 영문 모를 말을 마치고 메리는 금방 다시 잠이 들었다. 꼭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약한 그녀는 무서웠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무섭고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무서워, 아픈 아이를 위해 좀 더 먹을 것이라도 찾아볼까, 그 김에 남편도 찾아볼까,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어머니는 스카프를 몸에 두르고 걸음을 옮겼다.

말 그대로 비몽사몽이었다. 열에 들뜬 메리는 반쯤 의식을 놓고 현실과 꿈 을 함께 보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시야에 세계 저 어드메의 광경이 보 였다가, 다시 누워서 보는 숲의 하늘이 보였다가 했다. 꿈과 현실이 뒤섞여 갔다. 메리는 엄마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혼란 속에 자고 또 자고 한참이 지나고 끈적끈적한 몸에서는 열이 잔뜩 나고 메리는 엄마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이제는 헷갈렸다. 이것도 다 꿈이 아닐까? 겨우 몸을 일으켜보니 엄마가 남기고 간 말린 과일이 있기에 그걸 먹고, 물도 마시고 흐릿한 정신으로 밤낮이 지나는 횟수를 세었다. 세 번이 지났 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빠가, 오빠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메리가 웅얼거렸다. “도와줘, 빌헬름…” 이제 꿈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게 빌헬름이 보였다.


론즈브라우 군의 소령인 빌헬름 쿠르트는 제국과의 교전에서 왕자가 위험 한 것을 보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 군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왕 자가 죽는다면 지금은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교전이 어떤 모양새가 될지 잘 알기 때문이다.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지는 일은 이제는 습관이었다. 무사히 위기를 벗어난 왕자의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에게 칼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쿠르트 소령을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찔렀다. 만신창 이가 되어 바닥에 버려진 몸 위로 편자 댄 말발굽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죽 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몸이 넝마가 되어가면서도 의식은 너무 나 느리게 저물고 마지막 의문만이 흐릿하게 남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 기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시체는 날이 다 저물고 난 후에 깨어났다. 발길 질에 얼마나 채여 떠밀려 왔는지 완전히 혼자였고 도무지 위치를 종잡을 수 가 없었다. 빌헬름 쿠르트는 다 떨어진 군복에 단신으로 비척비척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숲이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열매나 사냥감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그는 잠깐 이대로 굶으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 했지만, 필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우리라는 사실만 예견할 수 있었다. 결국 숲에 들어서면서 언뜻, 누군가가 작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숲은 오묘했다. 사냥감도 열매도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미궁에 빠진 것 같 았다. 왼쪽으로 길을 꺾었는데 아까 오른쪽에서 봤던 냇물이 보이고 바위를 올랐더니 수풀이 있었다. 방향을 헤매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는 않았다. 그는 애초에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계속 여로를 헤매며 슬 슬 이 숲 자체가 꿈이나 환상처럼 느껴질 때 즈음, 빌헬름 쿠르트는 바닥에 서 정말로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보았다. 아주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이건 정말 꿈인가, 환상인가 싶어 가만 들여다봤더니 아이는 숲을 며칠은 헤맨 것처럼 행색이 남루했다. 머리맡에는 무언가 먹은 듯한 껍데기가 흩어 져 있었다. 앓는 소리도 나기에 이마에 손을 올리니 불덩이처럼 열이 끓고 있었다. 차가운 손의 감촉을 느꼈는지 아이가 반짝하고 눈을 떴다. 그리고


놀라지도 않고 빌헬름 쿠르트를 빤히 바라보더니 웅얼거렸다. “도와줘, 빌헬름…” 그는 깜짝 놀랐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아이가 자신을 부른 데 놀라고,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놀랐다. 놀라서 왜 놀랐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 었다. 놀랜 마음이 한숨 진정된 후에야 그는 자연스레 이유를 깨달았다. 빌 헬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너무도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이제 불러줄 이가 없는 이름을 아이가 부르며 도와달라고 하는 순간, 생각보다 결심이 먼 저 앞섰다. 반드시 이 아이를 구해야겠다고. 외로운 소녀와 외로운 남자가 만났다. 열에 들떠 눈앞이 흐린 소녀는 이건 틀림없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열이 잦아들자 이제 눈 앞이 또렷이 보였다. 메리는 역시 이게 꿈이 아닐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묘한 조합이었다. 전장을 이탈한 군인과 숲 속에 떨어진 소녀. 그럼에도 둘이 원하는 것이 일치했기에 둘은 아무런 마찰도 없이 당연하게도 맞붙어 있었다. 빌헬름은 아이를 구하기를 바랐고, 메리는 그저 함께 있기를 바랐다. 물을 마시게 하자 아이의 움푹 꺼진 눈에 빛이 돌아왔다. 약초를 먹이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더니 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듯한 아이 에게 빌헬름은 두 가지를 물었다. 첫 번째는 왜 이런 곳에 홀로 있는지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빌헬름은 메리의 부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곁에 함께 있어주 기로 했다. 두 번째는, 응당 어떻게 빌헬름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불렀는지였다. 드문 이름은 아니니 아마 아는 사람을 부른 것이 우연히 때가 맞았겠거니 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상상 이상이었다. “꿈에서 봤어.” “꿈?” “응. 나 꿈에서 세상 여기저기를 보거든. 먼 나라도 보고, 전쟁도 보고, 그 리고 빌헬름은 특히 많이 봤어.” 잠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입을 여는데,


아이가 먼저 선수를 쳐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믿을 수 없다고, 엉뚱한 상상이라고 말할 참이지? 알아. 그동안 많이 들 었으니까. 그런데 빌헬름, 세상에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거든. 빌헬름도 그렇잖아, 안 그래?” 말뜻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빌헬름에게 소녀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 다. “죽지 않잖아, 빌헬름. 특히 많이 봤다니까.” 아이는 서서히 의혹에서 경악으로 바뀌어가는 빌헬름의 얼굴빛을 빤히도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빌헬름. 탤런 중위. 사흘 내내 아팠던 거 아니야. 사실 하루 만에 나았는데 꾀병 부리고 있던 거. 전혀 몰랐지? 아니면 눈치채고 있던 거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눈치고 뭐고 기가 막혀서였다. 빌헬름이 영 대답할 기색이 아니자 메리는 바닥의 잔가지를 만지작거리다 큼직한 둥치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나무 위에 앉아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메리의 눈은 꿈을 꾸는 것처럼 흐렸다. 아이가 나이에 비해서 말도 안 되게 조숙한 것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빌헬름과 메리는 찾아오기 쉽도록 불을 피워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표시를 남기고 주변을 탐색하기도 했다. 어딘가는 불을 지른 흔적이 있었고, 어딘가는 스카프가 떨어져 있었다. 메리는 바닥에 몸을 웅크 리고 한참이나 그 스카프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빌헬름은 차마 아무 말 도 묻지 못했다.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갔다. 날짜가 지날수록 메리가 허공을 바라보는 횟수는 늘어났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건 메리 쪽이었다. “빌헬름. 여기서 더 엄마아빠를 기다려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기어이 아이의 입에서 그 말을 듣자 비릿한 고통이 엄습했다. 아이가 아무 리 조숙하다 해도 고작 열 살 남짓이었다. 빌헬름은 답장할 수 없는 편지를 떠올렸다. 이렇게나 자그만 아이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기를 바랐다. 아이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받아들였는지 감히 가늠할 수도, 쉽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어 메리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래, 내가… 가까운 도시까지는 데려다 주마. 오래 같이 지낸 건 아니지 만, 너라면 분명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과연, 어떨까? 한 번도 도시에서 지내본 적이 없었던 어린아이가, 힘도 의 지할 곳도 없는 아이가 제대로 지낼 수 있을까? 메리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꿈과 현실에 대해 생각했다. 보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의 현실은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꿈이 되는 것이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빌헬름은, 가는 거야?” “물론… 이만 가야지.” “어딜? 왜?”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알리러.” “하지만 알릴 곳이 없잖아.” “무슨 소리야, 나는…” 빌헬름을 빤히 바라보는 메리의 말간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간 메리 가 이렇게 바라볼 때에는 분명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빌헬름은 조숙 한 아이의 말을 한 발짝 늦게야 이해했다. 벌린 입술이 말을 맺지 못하고 허 공에 달싹거렸다. “빌헬름은 왜 계속 전쟁을 해? 당신은 거기에 정말로 안 어울려. 역시 죽 을 곳을 찾고 있는 거야? 그러지 마.” 메리는 무릎을 꿇고 앉은 빌헬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이는 자그만 동물 처럼 팔다리가 가냘프고 체온이 뜨끈했다. 작은 몸에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 어서 이대로 놓으면 금방 스러져버릴 것 같았다. “당신이 돌아가려던 곳은 전장이 아니잖아… 있지, 빌헬름. 내가 그동안 꿈에서 봤거든. 당신만은 제발 웃어넘기지 말고 들어줘. 사람들이 가진 이상 한 능력은 대부분 자기가 원하는 바랑 관련이 있었어. 나는 더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빌헬름이 죽지 않는 건, 어쩌면 살고 싶은 게 아닐까? 살아갈 이유를 다시 찾고 싶은 거야.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빌헬름밖에 없으니까.” 숲의 공기가 서늘했다. 찬바람이 불어 소름이 돋자 아이는 빌헬름의 품 안 으로 더욱 세게 파고들었다. 빌헬름도 아이의 등에 팔을 둘러 감싸주었다. 숲에는 단둘이었다. 빌헬름은 지금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 다. 나중에는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르긴 해도 분명 이 아이를 알고서 기다린 건 아닐 거다. 그렇지만 메리도 기다릴 수 없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아이였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 순간 빌헬름을 붙잡아 부른 거다. 기다림과 기다림이 만난다면 무언가가 남을까? “빌헬름.” 메리가 웅얼거리고 빌헬름은 이제 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은 메리 하나 남 았음을 알았다. 결심이 생각보다 앞섰다.

시간은 꿈처럼 속절없이 흘렀다. 소녀는 꿈과 현실을 구분 짓는 일을 그만 두었다. 아마도 꿈이 현실이고 꿈이 현실이려니. 악몽을 꾸고 난 후 흐려지 는 것처럼 소녀에게 일어난 일들은 너무나 현실감이 없었다. 다만 메리는 가 끔 앓았다. 밤중에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깨었다. 소녀의 이마에 맺힌 땀 을 닦아주며 빌헬름이 물었다. “그런데 메리. 원래 꿈에서 다른 곳의 일들을 본다고 하지 않았니?” “응. 그런데 이번에 앓다가 깨어난 이후로, 이제 꿈에서는 거의 내가 직접 봤던 것들만 봐. 전이랑 완전히 바뀌었어.” 메리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멍한 눈으로 자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 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제는 현실이 더 꿈같아서 그런 것 같아.” 그 순간 이마 위에 있던 손이 멈칫했다. 다시 평정을 되찾고 이마를 닦는 듯하더니, 빌헬름은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쉬고 몽롱한 눈을 한 아이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 마음 안다. 내가 잘 알아. 믿기지 않겠지. 괜찮다, 괜찮아. 우리는 괜


찮을 거야, 메리. 네 말이 맞았어. 우리도 살아야겠지. 살아갈 이유를 다시 찾겠지. 너도, 나도.” 영특한 메리는 자신이 지금이 꿈같다고 한 의도를 빌헬름은 단 하나만 이 해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보내지 못한 편지가 있었다. 혼자서 쓰던 일기가 있었다. 전하지 못한 말 이 있었다. 아마도 살아서는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고, 만에 하나 기회가 닿 는다면 반드시 하리라고 울었던 말이 있었다. 메리는 눈을 깜박였다. 빌헬름 의 품 안이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빌헬름의 심장 뛰는 소리가 바로 귀에 닿았다. 이 순간 꿈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차라리 꿈이었으면도 했고 메리는 다시 한 번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메리는 당장 말하지 않아도 좋을 것을 알 만큼 영특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메리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감았다. 그대로 빌헬름의 가슴에 귀를 기대어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빠른 심장 소리를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기도를 외웠다. 마른 혀가 입안에 달싹거렸 다. 이 현실이 꿈이 아닐 리가 없었다.

고요의 아침에 잠을 깨어 태양빛에 달은 몸으로 세상 달리다가 저녁에는 돌아가 쉴 수 있도록 늘 그래 평온하소서.

우리 더 욕심내지 않고 족한 줄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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