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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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응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소년처럼 높고 맑았다. “응아, 그러니까 내랑 스승님 얘기가 듣고 싶단 기제?” 서로 다른 빛깔이 두드러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양손으로 의자 가를 쥔 채 몸을 앞쪽으로 한껏 숙였다. 금방이라도 앞 으로 쏟아질 것 같은 자세는 모로 봐도 정돈된 어른의 품새 는 아니었다. 인터뷰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카 게히라 미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환하게 웃었다. “마, 그런 용건이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첨부터 그렇게 말 했어야지! 어디 보자, 언제 얘기부터 하는 게 좋겠노? 아주 처음에 봤을 때? 스승님이랑 같이 학교 다닐 때? 아니믄, 졸 업하고 나서 다시 만났을 때? 아고,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아가 뭣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네.” 이츠키 슈의 화제가 나오자 아까까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미카가 숫제 눈밭에 온 강아지 같았다. 봄볕 아래 꽃가루처럼 잔뜩 들떠서 말도, 눈길도 여기저기 제멋대로 튀었다. 기어이 인터뷰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만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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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라 씨, 들뜨신 건 알겠지만 조금만 진정해 주세요.” “싫다, 스승님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나보고 진정하라고 하 노?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정말 나랑 스승님에 대해서 하나 도 모르는 기다.” “모르니까 들으려고 여기 왔잖아요.” 이제 인터뷰어는 거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미카를 살살 구슬리는 중이었 다. “두 분의 이야기를 카게히라 씨가 기억하시는 만큼 하나 하나,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돼요.” “뭐, 좋다……. 역시 처음부터 말하는 게 좋겠제?” 인터뷰어가 다급히 펜을 달칵거렸다. 녹음기가 작동하는 미 세한 소음을 배경으로 미카의 시선이 꿈을 꾸는 것처럼 위를 향했다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카게히라 미카는 웃었다. 새삼스럽게 지난 추억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다소 부끄러운 듯 수줍은, 그러나 그 이상으로 설렘과 환희로 가득한 행복한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는 녹음 되고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목 소리를 낮추어서 소곤거렸다. “저기, 스승님한테는 내가 말한 그대로 전하면 안 된다 ……?” 인터뷰어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이츠키 슈 씨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요?” “아니, 꼭 그런 건 아이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 다.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기다……. 그래도, 직접 말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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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르니께. 역시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기라. 알겠제?” 미카가 눈을 맞추고 재차 확인하자 인터뷰어는 잠자코 고개 를 끄덕였다. 사실 그에게는 당장에라도 뱉고 싶은 말이 많았 다. 지난 일들에 대해서 캐묻고 싶은 질문들이 목구멍에 잔뜩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대화로 이제 겨우 이끌어낸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맡아 본 중에서도 손꼽히게 중요한 인터뷰였다. 꿈꾸는 듯 몽롱한 눈빛으로, 그러나 노래하듯 또렷한 목소리 로 카게히라 미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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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고양이를 키운 즉 있나? 아주 어릴 때는 애옹애옹 울 어대는 것들이 발길에 채여도 눈길 한번 안 줬다. 내도 그 고양이들이랑 똑같았으니께. 야옹, 야옹 울면서 누군가 관심 한 푼 동정 한 닢 주기만 바라는 신세. - 그러니까, 그때는 열일곱 살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 다웠던 시기, 우리가 삶의 대부분을 공유했던 시절. -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날이었다. 내는 발갛게 곱아붙는 손을 비벼대면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오시상이 봤으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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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잔소리했겠지만, 나루쨩이랑 걸었던 내기 내용에 정신이 팔려서 장갑을 책상서랍에 놓고 와버린 기라. 맨손을 입으로 호, 호 불어가면서 걷는 수밖에 읎었다. - 한참 그렇게 정신없이 걷는 와중에 귓가에 문가 높은 소리 가 걸리는 기다. 처음에는 이명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온종 일 같은 음악에 맞춰서 춤을 연습하다다보면 종종 그런 일이 있었으니께. - 그 담에 소리가 뚜렷해지고는, 아기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린 다. 그케 생각했다. 아고, 이런 골목길에서 아가 울음소리라 니 큰일이다! 거까지 생각이 딱 미쳐서 달려가 봤더니, 아가 는 아가인데 내 손 절반밖에 안 되는 쪼만한 자슥이었다. 그 추운 날에 핏덩이 같은 게 바닥에 엉겨서 용케 울음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던 긴지. 내는 우짜지도 못하고 집까지 헐레 벌떡 뛰어가가 스승님을 부른 기다. - 스승님은 영문도 모르고 입고 있던 옷 위에 외투만 걸친 채로 급하게 뛰쳐나왔다. 앞치마 앞에 크로와상 반죽이 그대 로 묻은 채였데이. 그리고는 바닥에서 꼬물거리는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서는 얼굴 을 들이대고, 숨이 붙어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불면 꺼질까 조심스레 양손에 안아서 집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따뜻한 곳 에 둔 후에, 나를 휙 돌아보더니 잔소리를 하는 기다. 누가 동물을 함부로 주워오라고 했지, 카게히라. - 우습제? 웃기지 않나? 스승님이 주워와 놓고 그런 말을 하 는 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스승님은 꼭 소꿉장난하는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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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맹키로 쭈그려 앉아가 다락에 고양이가 누울 자리를 보고, 상처가 없는지 살피고, 먹기 편한 위치에 우유를 따라뒀다. 그런 스승님은 상냥해가, 꼭 우리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 게 하는 기다. - 야옹야옹 칭얼대는 녀석 옆에 쭈그려 앉아가 어르고 달래 는 스승님을, 나는 옆에서 쭈그려 앉아갖고 쳐다봤다. 계속, 계속 들여다봤다. - 그때는 그랬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 꼭 그런 감 각이 매 순간이었다. 일 초가 두 달 같고, 삼 개월이 한 순 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몰랐지. 우리만, 우리만 서로를 알았다. - 아무튼, 아가 어떻게든 우유도 핥아먹고 좀 더 움직이는 걸 확인한 후에야 우리는 겨우 한숨을 놓고 평소대로 움직일 수 있었제. 스승님은 방에 들어가서 가만 앉아가 옷을 짓고, 내 는 고 옆에서 짜투리 천으로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인형 옷을 짓다가, 스승님한테 잔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뺏겨가, 엉성하 게 만든 앞치마가 금방 레이스에 코르셋 달린 드레스가 되는 걸 구경하고……. 혼자 방에서 음악을 듣다가 맛있는 냄새가 나서 밖으로 나오면 스승님이 차린 밥상이 있고. 그런, 그런 평범한 하루를……, 그립고마. - 아이코, 뜬금없이 말을 멈춰버렸네. 아무튼 그렇게 데따놓 은 괭이가 담날 우째 됐는지 아나? - 알았으면 지금 얘기를 안 들었을 거라고? 아가씨, 재미없는 사람이고마. 마 알긋다, 퍼뜩 말하면 되는 거 아이가.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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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아 있는 자리를 확인했을 때는, 괭이라고는 온데 간데없이 다락이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 로 꺼졌나, 어데로 도망가 버렸나. 어안이 벙벙해가 주변을 살피고 있으니께 스승님이 다락에 올라왔다. 스승님, 이상타. 아가 읎다. 그렇게 말하니까 스승님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 녀석은 천상으로 갔다고 하는 기다. - 그게 대체 무슨 말이고? 그렇게 물어보니까 스승님은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언제까지 그 녀석을 우리가 돌볼 수 있을 줄 알았느냐고 잔소리를 하는 기다. 계 속 연습을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연습하겠다고 쪼만한 아를 방치해둘 수도 없고. 그러니까 아는 여기보다 훨씬 좋 은 곳으로 갔다고, 간 곳서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좋은 걸 먹고 꼼꼼하게 돌봐질 거라고 했다. 더 좋은 곳, 더 높은 곳…….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내는 정말 스승님을 처음 만났 을 때가 생각나서. 마음속으로 그 아한테 작별인사와 함께 말을 걸었다. 너도, 스승님에게 구원받았구나, 하고. - 에헤헤……. (여기서 카게히라 미카는 부끄러운지 손을 뒷 머리에 얹고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뭐, 괜히 스승 님한테 말하지 말랬던 게 아니다. 이때 일은 스승님은 제대 로 기억도 못 한다. 나만 혼자 기억하는 얘기라, 새삼스럽게 꺼내기 부끄러워가……. - 또……, 별로 남한테 전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섞여 있기도 하고. - 지금 떠올리면 역시 내한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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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 기다. - 스승님을 모르는 나라니, 어떻게 그런 게 있을 수 있었을 까. - 그 시절의 나는, 나라기도 기분이 이상하다. 그 시절의 카 게히라 미카는, 그 존재의 기억은. 대체로 명도 낮은 어둠 속에 있다. - 고개를 들고 어깨를 똑바로 펴기가 어려웠다. 그런 환경에 서 건방져 보이는 건 위험한 일이었으니께. 시선은 대체로 어둡고 컴컴한 그늘 속에 뒀지. 지저분한 것들 사이에서 지 저분한 것들보다도 뒤로 떠밀린 신세. 그 컴컴한 곳에서 깨 끗하고 반짝거리는 게 눈에 걸리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 이라도 좋았다. 손님이 두고 간 금장 단추나, 호의인지 동정 인지 모를 의도로 손에 쥐여 준 조약돌 같은 사탕이나……. 까마귀처럼 그런 걸 모아다 잠자리에 두고 자기 전 머리맡에 서 꺼내보고는 했다. - 그러니까 그때 일은, 내게는 너무 이상했던 기다. - 내는 쓰레기장에 있었다. 내가 남한테 혼나지 않고 가질 수 있는 제일 좋은 것들은 쓰레기장에 제일 많았던 기라. 남들 이 쓸모없다고 버린 인형이나, 그 인형에 입혀 줄 헝겊 같은 것들. 그러다가 그 아를 만났다. - 뺨이 동그랗고 윤이 나고, 머리는 곱슬거리고, 지금까지 쓰 레기장에서 주워본 어떤 인형보다도 예뻤던기라. 인형이 아 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금방 내 손을 잡고 내를 끌 고 갔으니께 인형이 아닌 줄은 알아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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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는 수건에 물을 묻혀다 내를 씻기고 따뜻한 물에 적 셔다 기름을 바르더라. 그리고 바닥에 앉더니, 마법처럼 뚝 딱 옷을 만들더라. 따뜻한 온기와, 좋은 냄새와, 하얗고 반짝 거리는 세상에 눈이 멀어서 내가 입고 있는 게 치마인줄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니까 그 아는 어 쩔 줄 몰라 하더니 차랑 빵을 가져다줬다. 내 그런 건 그때 처음 먹어본기다. 버터 냄새 나는 빵이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았다. 달고 따뜻하고 빛나고……, 그 중에 제일 빛나는 건, 그 아였다. 빗어놓은 머리카락은 양털 같고 눈동자는 얇게 뜬 저녁노을 같고, 보송보송한 뺨은 장미 같고. 한참을 쳐다 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 딱 그 하루의 일이었으니께, 그 아이네 부모님이 오시고 당 황해하자 나는 거길 나와야 했으니께. 내가 그 일을 꿈이라 고 여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분명히 그때 그 애가 입힌 옷이 남아있었지만, 아마 꿈이었 을 거야. 내가 꾼 좋은 꿈이 현실로 남은 걸 거야. 이렇게 좋은 것이 내게 현실일 리 없으니까 꿈이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할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 몇 년이고 몇 번이고 다시 되새겼던 가장 기분 좋은 꿈. - 그러니까 역시 이건 스승님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은 부분 인 기다. - 왜냐하면,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도 우연이 아니었으 니까. -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TV에서 스승님을 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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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그때 그 아인 줄 알았다. 얼마 후 전시회를 보기 위 해 오사카에 올 예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 전시회 날짜를 알아보고, 그 날 입을 옷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가 정확히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계속해야 만 했다. 그때까지 살면서, 무언가 그렇게 하고 싶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운명이라고 느낀 적도 없었다. - 그 사람은 예쁜 걸 좋아하고, 내 얼굴은 나름대로 손님들에 게 인기가 있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깔끔하게 하고 가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텐 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무언지도 모르는 준 비를 계속했다. 한 번이라도 더 마주치고 조금이라도 더 눈 짓을 받기 위해 짰던 동선과 행동 중에 사실 우연은 하나도 없었다. - 그리고 마침내, 스승님을 만났다. 눈이 마주쳤고, 대화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다. - 함께 천상으로 가자, 카게히라. - 분명히 우리는 운명이지만, 그 운명은 내가 만든 기다. 그 리고 나는 그때부터 정말로 ‘내’가 되기 시작한 거지. (카게히라 미카는 이 말을 하고는 자길 칭찬해달라고 자랑하 는 아이처럼 가슴을 펴고 뿌듯하게 웃었다.) - 스승님을 따라간 후부터는, 하루하루가 휘몰아쳤다. 써본 적 없는 근육을 쓰고, 불러본 적 없는 노래를 연습하고, 스 승님에 대해 알아갔다. - 학원에 입학했을 시기가, 봄이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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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 보자……. 그러니까 그 날이, 첫 등굣길이었다. 걱정이 많았제. 따돌림당하거나 괴롭힘당하지는 않을까, 스승님의 얼 굴에 먹칠을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제부터 스승님과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설레기도 하고, 실감도 잘 안 나고…….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어버려서, 스승 님의 호통에 눈을 떴을 때는 정신이 반쯤 혼미했다. - 미리 가방을 챙겨둔 게 다행이었제. 급하게 세수를 하고, 교복 단추도 다 채우지 못한 채로 뛰쳐나와서 고개를 드니, 세상이 노랗고 밝고 눈부셨다. 아직 덜 깨서 비비고 있던 눈 에는, 지나치게 눈부셨다. - 봄이라서, 꽃가루가 많았다. 아침 햇빛에 길가의 가로등과 잡기가 아른아른 빛나고, 코가 간질간질했다. 왠지 모르게, 이 세상이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세상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봄 돌풍이 휙 일고, 얼굴에 벚꽃 이 쏟아지고. - 부드러운 꽃잎이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얼굴 에 쏟아졌다. 그리고 얼굴에 따뜻한 뭔가가 더 닿았다. 가려 워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콧잔등을 움찔거리다가, 스승님이 내 얼굴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방금까 지는 꽃이었는데? 어쩐지 현기증이 일어서 비틀거리자 스승 님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나, 카게히라. 하고. - 바람은 계속 불고, 꽃은 어지럽게 날리고, 세상에 분홍색과 분홍색과 분홍색이 가득하고……. 내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확실하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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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현재와 미래와 일생을 바쳐서. - 그 순간이 맞을까. 아니면 그 전이었을까? - 그 전이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 전에. 처음으로 스승 님의 무대를 실제로 보았던 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 스승님이 공짜로 봐도 좋다고는 했지만, 안내를 받고 관객 석 세 번째 열에 앉았을 때는 불안한 맘이었다. 스테이지는 바닥이 꽤 높았고, 올려다보려면 고개를 잔뜩 치켜들어야 했 고, 고개를 빼고 있자니 역시 이런 공간은 내하고는 맞지 않 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옆에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내는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와 있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불안하게 손에 깍지를 끼고 있었제. 지금이라도 나갈까 고민하는 찰나에,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관객석이 물 끼얹은 듯이 조용 해졌다. - 그리고 어둑한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금빛으로 빛나는 태 엽이, 황동으로 마감한 가시덩굴이 바닥부터 천정까지 가득 했고. 낮은 관악기 소리와 가느다란 현악기 소리가 귀에 감 기며 레이스를 단 인형들이 빛 속에서 춤을 췄다. - 그 온전한 세상 가운데, 세계의 신이 있었다. 장갑을 낀 길 고 가는 손가락 끝을 들어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세상을 지휘하던 그 사람을 보면서, 경탄인지 경배인지도 모르게 몸 을 휘감는 것이 있었다. 감격이라기엔 크고 감탄이라기엔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이, 어쩌면 이미 사랑이었는지 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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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믄, 그보다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이미 사랑하 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 아니믄, 그 전에 언제라도 만난 적이 있었을까? 전생 같은 게 정말로 있는 걸까? 있다면 우리는 몇 번의 전생을 겪고 다시 만나서 이렇게 서로 눈을 뗄 수 없게 된 걸까? 어쨌든 지, 그게 중요할까? - 내는, 스승님이 특별해서 사랑한 거였을까? 아니면 사랑해 서 스승님의 모든 부분이 특별해 보인 걸까? 하기야 그게 인 제 와서 중요할까. - 아무래도 좋았다. 내는 이것에 일생을 걸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스승님은 말도 똑바로 못 하고, 귀찮 고 까다롭지마는, 그게 좋은 기라. 내 스승님이 어떻게 상냥 한지. 어떻게 나를 걱정하고, 어떤 점에서 바보 같고. 그래서 어떻게 귀여우면서 안쓰럽고, 그래서 눈을 뗄 수 없게 사랑 스러운지. 그런 걸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할까? 남이 내를 보고 걱정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물었다. 이런 걸,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알아야 할까? 아니. 필요없제. 그러니께 그런 말을 들을수록 만족스러웠던 기다. - 그러니께 남이 뭐라고 해도, 세상에 내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던 기라. 그저 그렇게 곁에 있는 것으로 좋았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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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요?” 인터뷰어가 되묻자 미카는 작게 웃었다. “아가씨는, 사랑을 해본 적 있나?” “누구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한 번쯤은 그런 기억이 있겠죠? 지나간 첫사랑의 기억이나, 학창 시절 풋사랑이나, 서투르게 연애했다가 헤어진 기억 같은 거요.” “그러면서 내한테 되묻는 기고?” 인터뷰어가 말없이 미소만 짓자, 카게히라 미카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씩 웃었다. “응. 새삼스럽게 부끄럽고마……. 그때 우리는, 열일곱이고 열여덟이었다. 그리고 나즈나 형이 Valkyrie를 탈퇴하면서, 스승님한테는 내만 남았고. 있제. 모든 사랑을 원하는 만큼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를테면……. 나는 이 사람이 랑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지켜보기만 해야지.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으니, 절대 아무런 티도 내지 말아야지. 뭐……, 다들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겠제, 바보같이도. 그리 고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말을 듣지 않는 것들이 있제. 안 그러나?” 미카는 잠시 고개를 갸울이고 앞의 테이블을 괜히 툭 툭 쳤 다. 여전히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남아있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스스로 단도리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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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부분들이 있단 기다.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가 눈을 내 렸다가, 또 아쉬워서 한 번 더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고 마 는 것. 아니믄, 별거 아닌 이유로 몸이 맞닿았을 때, 내도 모 르게 동작이 느려지는 것. 목소리가 들리면 이미 눈이 향해 있고. 한 번 봤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이번에는 무 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돼가, 계속 다시 쳐다보게 되고……. 그런 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기라…….” 남자는 계속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속닥속닥 낮은 소 리로 속삭였다. 속삭이는 소리에 설렘 같은 것이 간헐적으로 섞여 웃음처럼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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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스승님과 함께 지내는 매일매일 마음을 졸였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혀를 깨물고도 싶었다. 도무지 숨겨지지 않는다. 티가 다 나는 것 같다. 이런 걸 다 알면 스승님은 나를 내칠까? 혐오스러워하거나 미안해하거나 거북해하고 거 리를 둘까? 그렇겠제? 이미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과 무대 외에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니까. - 그리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이렇게 온몸으로 좋아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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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은 증말 하나도 눈치를 못 채나? 스승님은 세상에 둘 도 없을 진짜 천재면서도, 바보라서. 그냥 내가 매일 뚫어져 라 쳐다보고 찰싹 달라붙어도 그렇게는 생각을 못 하는 기 다. - 화가 나고 귀엽고 짜증이 나가 매일 짓궂게 굴었다. 물건을 받을 때 손가락을 손등에 길게 문댔다. 내는 이제 스승님 없 이는 못 산다고, 자기 전마다 말했다. 그만 하는 게 좋지 않 을까 싶다가도, 습관이 돼가 잠결에 계속 끌어안았다. 그러 믄, 스승님은 우째 이상한 듯한 표정이 되어서도 다 받아주 는 기다. 이것저것 더 있지만은 그것까지는 다 말 안할 기니 께……. - 그러니께 학원에서의 삼 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 고 있으면서, 만나고 있지 않았다. 매일 서로 눈을 마주치면 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갈증이 나서 견디기 어렵 다가도, 행복해서 붕 뜨는 같고. 하루가 너무 길다가도, 한 달이 훌쩍 흘러 있는 이상한 시간들. - 서로 손을 맞잡은 채로 땅에 발을 어떻게 디뎠는지 확인하 지도 않고 매일 같이 춤을 연습하고, 화음을 일부러 맞추지 않고도 서로 목소리가 얽히는 노래를 부르고, 요리를 하는 걸 돕다가 바느질을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하고 깔깔 웃고 함께 잠자리에 들면서 기묘한 정적 속에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다시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 같 은 이상한 시간들. - 그리고, 아마 어느 순간은. 스승님도 생각해버린 게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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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 이건 뭔가 이상하다. 카게히라를 떠나야겠다고. 졸업하면 어차피 떠나게 되어 있기도 했고. - 시간이 걸렸지만, 눈치챌 수 있었다. 스승님이 내게 유산을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 었다. 누구의 일인데. 그래서 내는 괴롭고, 우스웠다. 인제 와서? 놔줄 생각 따위 없는데? 하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온갖 것을 생각하면서 춤을 추고 아침인사를 하고 메인테넌 스를 받고 전보다 더 달라붙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로 전과 다른 미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이상한 긴장감을. -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스승님도 나와 비슷한 걸 겪었던 게 아닐까. 나는 카게히라랑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졸업 후에는 헤어져야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으니, 더 이상은 하지 말아야지. - 내는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런 걸 겪고 받아들였지만, 스승님 은 나랑 몇 년을 함께하고도 우리가 얼마나 이상한 관계인지 몰랐으니께……. 그런 고민이 짧은 시간 동안 휘몰아쳤겠지. - 그치만, 내는 그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 그저 안달이 났다. 안달이 나서 손을 잡고 끌어당기면서, 내는 이제 스승님 없이는 못 산다. 쭉 같이 있어 도. 그렇게 말하면 스승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별 말을 다 한 다며 웃어넘겼다가, 어느 날은 핀잔하기도 하고. 스승님이 그렇게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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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맛이 쓰고, 온갖 미친 것 같은 생각이 불티처럼 피었다가 지고. 그런데 스승님을 보채자니 또 스승님은 스승님대로 고 민이 많고 힘들어 보여서 차마 더 괴롭힐 수도 없고 몸을 웅 크리고 앉아서 스스로만 갉작갉작 갉아먹다가……. - 그러다가, 어느 때쯤의 겨울이었더라……. - 새벽 즈음에, 내도 모르게 잠에서 깼다. 푹 자던 도중에 갑 자기 깬 게 불쾌하고 머리가 아파가 눈을 찌푸리면서 베개를 껴안고 뒤척이다가, 스승님이 없다는 걸 알았다. - 그리고, 내가 깬 게 스승님의 통화하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스승님은 밖에 있었지만 그때는 내도 신경이 예민했으니께. 그런데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영 스승님답지 않았다. 날 서고 가칠하고 초조한 소리로, 스 승님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도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 생각해가, 당연히 문틈에 귀를 가져 다 댔제. - 싫습니다, 됐어요, 말했습니다……. 스승님의 목소리는 대개 그런 단답이었고 가끔 빠르게 뭐라고 하는 말은 알아듣기 힘 들었다. 그래서 귀를 더 가까이 가져다 댔던 긴데. - 갑자기 목소리가 끊겨서 얼굴을 드니께, 끼익 문 열리가 나 면서, 눈앞에 굳은 표정으로 내를 보는 스승님이 있어가. - 안 그래도 분위기가 안 좋은데, 스승님이 혼낼까, 어쩌면 소리를 지를까, 가슴을 졸이고 있으니께……. 스승님이 깊게 한숨을 푹 내쉬더라. 그리고 내한테 손짓했다. 따라와라, 카 게히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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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가 내는 잠자던 옷 위에 그대로 외투만 입고 밖에 나 갔다. 매일 들리던 풀벌레 소리나 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 막한 겨울밤에, 집 저 앞쪽 벤치에서, 허우대 큰 남자 둘이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채로 나란히 앉아가 있었다. 거 기분 이상하대. - 스승님이 물었다. 어디까지 들었냐고. - 들은 단어나 문장들을 슬쩍슬쩍 얘기했더니, 스승님이 천천 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는, 양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가, 내를 한번 흘끗 보 고는, 다시 자기 뺨을 붙잡았다가, 한숨을 쉬면서 웃었다. - 그래도 너한테는 얘기해야겠지, 라면서. - 항상 강한 척하던 이츠키 슈답지 않게, 말을 자꾸 멈추고, 느릿느릿 생각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하면서, 스승님은 이야기 했다. - 스승님이 이츠키 가문의 후계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 도 스승님이 추구하는 길이 워낙 뚜렷하니께, 거기에 내는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 그래도, 집안에서 스승님의 활동을 썩 자랑스럽게만 보지는 않는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 애초에 학원에 입학하던 때부터, 졸업 후에는 가업을 잇기 로 약속한 채였다니. 그런 말은 내는 정말 그때 처음 들었 다. - 스승님은 그때는 그렇게 약속했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걸 버리기 싫어졌다고, 집안의 기대를 버리고 연을 끊는 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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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지금까지의 청춘과 단절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고, 순수하게 열중했던 진심을 생에 이어가고 싶다고. - 집안에서는 아이돌 활동 따위를 가업에 댈 수 있느냐고, 말 이 되느냐고 코웃음 치지만, 자신은 분명히 이 활동을 천상 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을 통해 더 높은 것, 더 고결한 것, 긍지와 순수함,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 고. 그런 말을 참 스승님답지 않게, 자신 없다는 듯이 더듬 더듬, 그래도 절대 굽히지는 않을 것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 어쩌면 정말로 집을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고, 경제적 지원 한 푼 없는 생활 같은 건 평생 해보지 않았으니 뜻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제대로 된 꼴로 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고. - 잠옷 위에 외투만 입고 나와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제일 횡설수설하는 스승님을 보면서 내는 생각했다. - 내 사랑은 어찌 이렇게 사랑스럽지. - 그래서 내가 그때 무슨 정신이었을까.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지만 분명히 말했다. - 스승님, 마 그런 걸 걱정하나. 내가 옆에 있을게. 뭘 해도, 어떤 모습이어도 내가 곁에서 도와줄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꺾이지 않게 할게, 스승님이 원하는 거라면. - 스승님은 웃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이상하게 울 것 같았 다. 정말로 오랜만에 스승님이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 맨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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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울컥, 가슴께에서 뭔가가 치미는 것 같고. 먹먹해가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 눈이 멀 것처럼 별이, 별이……. 소리 하나 없는 겨울밤에, 하늘 가득 알알이 별이 빛나고, 다시 고개를 내렸더니 눈앞 에 별보다 제일 빛나는 게……. - 스승님이, 옅은 물처럼 흔들리는 눈을 휘면서 말했다. 애송 이구나. 한결같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실패작 주제에 그런 걸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냐? - 내는 대답했다. 응, 하고. - 스승님이 다시 물었다. 영원을 말하는 거야? - 응. - 영원을? - 응. 영원한 약속을. - 스승님은 세상에서 웃긴 소리를 들은 것처럼 껄껄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면 가자, 카게히라. 함께 천상으로 가자. 마지막까지, 같이. - 내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승님도 고개를 끄덕였고, 웃었고, 웃다가 웃었다. 눈이 마주쳤고, 동작이 멎었다. - 현기증이 났다. - 우리가 연애하지 않는 채로도 이미 서로 몇 번을 고백했 지? 마음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어색한 태도로 우리가 이미 몇 번을 애무하고, 몇 번을 거듭 연애했고……. - 그러니까 다음 순서는, 하늘 위에 서 있다가 바닥의 발판을 치워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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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저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다. - 아찔하게. 나락까지. - 스승님은 수줍었다. 어쩌지 못하고 눈을 피하다가도, 또 굳 이 나를 다시 마주보려고 했다. 이제는 더는 피하지 않겠다 는 작정인 것 같아가,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서. 뺨에 눈에 코에 입을 맞추고, 물고, 깨물어서 자국을 남기고, 잡아 먹을 것처럼 입을 맞추다 몸을 부비고. - 이츠키 슈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었을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내는 내가 무서웠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 달고 사랑스럽고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가벼운 구름이나 솜사탕 같 이 느껴져서, 자칫하다가는 내가 한입에 먹어버릴 것 같았 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우리는 천상을 약속하고서 땅을 기는 벌레들처럼 엉겨 붙어서 방에 들어갔다. - 그리고 시간이 녹는 것처럼 지났다. - 스승님은 졸업했고, 내는 학교에 남았다. - 학교를 마치고 머무는 방에 돌아가면 스승님이, 이츠키 슈 가, 내 애인이 기다리고 있었고. 방금 간식을 만들어서 앞치 마를 한 채로 내한테 학교생활은 제대로 하고 온 거냐며 잔 소리를 하면 먼저 입을 막고, 왜 이렇게 무리하냐고 화를 내 면 다리를 감고 올라탔다. - 나중에는 전부 엉망진창이 되어서, 주말이면 스승님은 내 트렁크를, 내는 스승님의 브리프를 입고 이불 속에서 굴러다 니다가. 코타츠가 있는데도 굳이 난방을 틀지고 춥다면서 서 로에게 파고들고. 그렇게 엉겨서 칭얼거리면서 잡지를 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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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 넘겨보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가야 할 때가 되면 겨 우 느릿느릿 서로 몸을 뗐다. - 내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면 스승님은 안경을 쓴 채 신문을 읽고 있었고, 내는 입을 맞추려다가 안경이 거치 적거린다고 투정을 부리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스승님은 안경만 쓴 채였고. 실은 학교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아침 에 자국이 잔뜩 남은 가슴팍에 파고들면서 자국을 남기고 더 남기고 있으면 스승님을 내 코를 비틀어 꼬집고 머리를 잡아 당겨서 내보냈다. - 가끔은 싸우기도 했다. 작게는 티비에서 어떤 채널을 보느 냐부터, 아침식사로는 어떤 메뉴가 좋은지, 하루에 섹스는 몇 번까지인지. 스케쥴이랑, 미래랑, 장래랑, 드림페스에서 어떤 유닛을 응원하느냐 같은 별 시답잖은 문제로 말다툼을 하기도 했고……. 난 그런 순간마저도 좋아가 견딜 수 없었 다. 말다툼을 한 후에는 화해하기 위해서 다시, 속삭일 걸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 둘 사이에 조금의 틈도 비우지 않을 것처럼 꼭 끌어안고 귀에 대고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고. - 그러다가 여름이 됐을 때, 스승님은 비행기를 타고서 떠났 다. - 응아? 뭘 새삼 놀라고 그르노? 스승님의 행적 정도는 알고 있을 거 아니가. - 스승님은, 프랑스에 유학 가고 싶어 했다. 물론, 나도 함께 가려고 했지. 처음에는 무작정 따라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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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은 이때만큼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꾸짖었다. 내가 앞으로 네 얼굴을 어떻게 보게 할 셈이냐. 그런 짓은 하지 마라, 하고. - 그래도, 난 정말 스승님이랑 떨어지는 게 싫었다. 스승님이 없는데, 애초에 스승님 때문에 들어온 학원인데 졸업장 따위 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 서러워가 훌쩍이고 있으니께 스승님은 다시 내를 안고 달 래더라. 어차피 영원을 약속했지 않느냐고. 그걸 의심하냐고. - 그렇게 말하는 스승님이 너무나 다정하고 말이 너무 달콤 해서. 다른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아니. 믿는다. - 스승님은, 가끔은 그렇게도 다정한 말을 했다. 들어봐, 카 게히라. 당연히 누군가를 함께 넣어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 그게 사랑이라더라. 그리고 우리는 영원을 약속했지. 굳이 현재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 - 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애처럼 스승님 품에 안겨서 도리도 리 얼굴을 묻었다. - 스승님은 떠났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연락했다. 메일을 보 내다가,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면 통화비를 아껴 가며 빠르게 말했다. 알림이 오자마자 재빠르게 메일을 확인하면, 스승님 이 해주는 이야기는 또 흥미진진했지. 스승님은 정말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공연예술, 극본, 대중매체, 영상, 고전……. 교수와 논박하다가 새 프로젝트 권유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협업이 흥미롭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역시 천재는 어딜 가서도 천재인 법이라. 신기하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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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초조했다. 스승님은 내 머리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수많은 걸 배우고, 내가 생판 들어본 적도 없는 일들 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점 모르는 곳으로 멀어지는데, 내만 뒤에 남겨지는 것 같았다. - 내는 내를 믿었다. 나는 우리가 추락했을 때도, 밥을 굶어 야 했을 때도 지금까지 무엇이라도 견뎌냈으니, 스승님을 위 해서라면 앞으로도 그 무엇이라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그 렇지만 내는 열여섯 이후로 한 번도 정말로 스승님과 떨어진 적이 없었던 기다. 내가 했던 일은 모두 스승님의 뒤를 따르 기 위한 일뿐이었던 기다. - 아마 스승님의 성격에 자신의 힘든 일은 쏙 빼놓고 이야기 했겠지만, 그런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서운함이……, 아마도, 박탈감 같은 것이 영 사라지지는 않았던 기다. 내는 그래도 이어져 있다고 느끼고 싶었고. - 그래가 주말이면, 부러 시간을 내서 길게 통화했다. -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의상 이야기를 하고, 지 금 무얼 입고 있는지 묻고,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고, 영상 통화를 하자고. 그리고 벗고, 벗고……. 나중에는 도구를 주 문해가 스승님 주소로 보냈다. 주문할 때 남들 눈에 어떤 물 건인지 들키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지, 가끔은 깜박하기 도 했지만……. 그래 맞다, 사실은 깜박한 게 아니라 고의였 지만……. 그래도 스승님은 잠깐 화를 내다가도 다 받아줬다. 그게, 좋았다. 결국에는 선물한 물건을 쓰면서 낮은 목소리 로 흐느끼는 듯 보채는 듯 내 이름을 부르는 스승님의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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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께. 내는 고개를 옆으로 젖혀서 휴대 전화를 얼굴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또 스승님의 떨리는 목소리 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손을 놀리고, 서로 이름을 계속 부르 고, 부르다가……. - 마, 그만하자. (카게히라 미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내가 어떻게 그 시기를 견뎠는지 알겠지. 자주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저 건너 어딘가에는 지금 스승님이 있겠지. 항상 바쁜 것 같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힘낼 수 있었다. -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락을 했지만, 어느 날은 연락 을 빼먹었다. 응, 그러니까 10월 29일이었지. 스승님은 불안 했겠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내한테 문자를 하고 전화를 했 지. 영 미안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러고 싶었다. - 그리고 프랑스 시각으로 10월 30일이 되는 12시, 일본 기 준으로 아침 7시에, 내는 프랑스 대학 기숙사 문 앞에 서 있 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 비척비척 걸어 나오면서 문을 연 스승님은 눈에 띄게 야위 어 있었다. 눈 밑에 퀭하게 그늘이 지고 지친 표정을 하고 있던 스승님은,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 내게 달려왔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한참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스승님의 어깨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 나는 스승님에게 뺨을 마주 댔다. 이츠키 슈의 뺨이 라고는 믿을 수 없이 가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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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은 잘, 까지 말하고는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잘 왔어, 카게히라. 라고 겨우 말했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대체 학교는 어떻게 한 거냐면서 화를 내 려다가, 나를 다시 끌어안고. 얼른 돌아가라고, 하지만 지금 은 가지 말라고 쥐어짜듯이 말했다. - 걱정이 돼가 견딜 수 없어서, 스승님에게 잘 지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 스승님은 당연히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카게히라 너에게도 항상 보여주고 싶었 다고……. - 응. 그래서, 우리는 그대로 한참을 엉기고, 속삭이고, 끌어 당기고, 끌어당기고도 모자라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더 끌어당기다가 지쳐서 잠이 들고, 이미 햇빛이 찬란할 때 잠에서 깨어서,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 아름다운 도시였다. - 학원에는 바다는 있었지만, 강은 없었지. 내는 머리가 복잡 할 때 종종 바다 쪽을 쳐다보고는 했는데, 그걸 기억했는지 스승님이 내 손을 잡고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이 강이었다. 햇빛 아래 잔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녹색으로, 푸른색으로 반 짝이는 걸 보면서 스승님은 내한테 설명했다. 여기가 세느 강이고, 레 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몸을 던진 곳이기도 하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한참 조곤조곤한 투로 해 주다 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연인들의 다리로 유명한 퐁데자르라 고, 여기서 키스하는 연인들이 많다고 했다. 너무 덤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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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께, 스승님은 아무 일도 없는 척 먼 곳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내는 웃 느라 둥글게 부풀어 오른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연인들의 다리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 그런 식으로 둘이서 온종일 여기저기를 다녔다. 스승님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해서 표정을 잔뜩 구기면서도, 그래도 파리까지 왔으니 예의상 봐줘야하지 않겠냐면서 나를 잡아끌 어서 에펠탑을 올라가기도 했고 말이다. 그 위에서는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스승님은 모형 정원처럼 반듯 하게 나뉜 구획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앞으로 갈 곳을 가르쳐줬다. 또, 어디였지. 그날 하도 여기저기를 쏘 다녀가 다 기억도 안 난다……. - 건물에 아치와 장식이 대어져 있고, 이방인들로 가득해가 낯선 세상을 스승님이랑 손을 잡고 단둘이 쉬지 않고 이야기 하며 걸어 다녔다. 꿈만 같았다. 그러니께 사실은 어디를 가 더라도 매 순간이 좋았던 기다. 응……. 스승님은 종종 가게 앞에서 발을 잠깐 멈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지갑을 확인하고 머쓱한 표정으로 길을 가는데, 그런 건 모른 체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 아 그래, 노트르담 성당도 갔었지. 거기는 진짜로 예쁘더 라. 아가씨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 있나, 없나? 아무 튼 꼭 같이 가봐야 한다. 알겠제? -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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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어둡지도 않은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에서, 성당은 부드러 운 금빛으로 빛났고. 내는 아마 여기가 천국으로 가는 문이 아닐까 싶었다. -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안으로 들어서니, 천정이 하늘까지 닿 을 듯이 높았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을 댄 스테인드 글라 를 통해서 저물어가는 하늘이 반짝이고, 수많은 샹들리에가 감싸듯이 부드럽게 빛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을 삼 키고 있으니,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귀가 먹먹했다. 여 기저기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내는 스승님한테 말했다. 여기는 천국으로 통하는 문 같다. - 스승님은 대답했다. 그게 맞아, 카게히라. 우리는 함께 천 상으로 가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말이, 기도 보다 간절했던 기다. - 그리고 성당을 나와서, 촛불처럼 아른거리는 야경을 바라보 면서, 서로 손이 떨어질세라 꼭 붙들고 밤거리를 얼마나 더 다녔을까……. - 밤이 늦어서 방에 돌아왔을 때는 둘 다 그만 완전히 녹초 였다. 방바닥과 벽에 거의 붙어서 늘어져 있다가, 껌딱지 같 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지. 그리고 스승님이 내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그런데,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고 있 는 거냐고. 꼴이 이게 뭐냐고. - 하염없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을 해가, 하얗던 뺨이 야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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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어져서는, 내한테, 그런 말을. 내는, 사랑스럽고 안쓰럽 고 그동안 눌러둔 것들이 갑자기 몰아쳐 버려서, 그대로 웅 크려 앉았다. -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당황해서 벌떡 일어난 스승님의 다리를 붙들고 내는 꺽꺽 울었다. 스승님, 내가 돈을 벌게. 잔뜩 벌어서 보낼게. 스승님도 돈을 벌 수 있는 게 있으면 해라. 꼴이 이게 뭔데. 그렇게 말하니께 스승님은 고개를 저 었다. 자긴 지금 받는 장학금으로 충분하다며, 예술을 위해 서 추구한 길에서 속된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고. -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더라……. 손을 붙들고 싸우다가, 끌어당기고, 입을 맞추고……. 그래,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더 싸우고 싶지 않아서, 내는 스승님을 끌어안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스스로를 챙기라고. 스승님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그렇게 각자 너무 벅찬 것 들을 가슴에 안고, 서로 꼭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들었지. - 다음 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스승님의 학교 동기들이 방에 찾아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를 흘끗거리기도 했고, 스승님을 끌어안고 선물을 건넸으 니 어제 생일 축하를 하지 못해서 찾아왔겠거니 하고 짐작할 수 있었지. - 내는 알면서도 칭얼거렸다. 스승님, 이 사람들 누구고. 내 모르는 사람들 와서 무습다. 빨리 보내도. - 그러니께 여자 한 명이 킥킥 웃더라. 뭐, 알아들었겠나? 싶 어서 계속 스승님 뒤에서 칭얼거렸다. 그러니께 그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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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를 보고 말하더라. 우리는 슈의 대학 동기들이고, 자기네 어머니는 일본인이라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겉으로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예, 하고. - 그 여자는, 내를 카게히라 씨라고 부르면서, 심심하면 자기 랑 잠깐 걸으면서 얘기라도 하자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내한테 시비 거는 긴가?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겨우 정신을 잡아가 그러자 했다. - 밖으로 나오니께, 그 여자가 내보고 대뜸 물었다. 슈랑은 얼마나 됐냐고. - 이제 일 년쯤……, 하고 대답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 개를 드니께 그 여자가 킥킥 웃었다. 너무 티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 말도 않겠다고. - 어쩔 줄 몰라가 말없이 몇 걸음을 더 걷다가, 그 여자가 다 시 물었다. 한창 좋을 때 같은데 이렇게 멀어져서 힘들지 않 냐고. 그래서 내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스승님의 목표는 천계로 향하는 기라고. 더 고결하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 유학을 갔으니께 내는 그걸로 좋다, 스승님의 행복이 내 행복이다. 그렇게 대답했다. - 그러니까 그 여자가 바로 되묻더라. 너는? 하고. -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미카 네 목표는 뭐냐고 하는 기다. - 그래서 내는 스승님의 목표가 내 목표다, 스승님이 꿈을 이 루고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한 기다. 그렇게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지. - 여자는 잠깐 발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다니, 내한테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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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갑자기 사적인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고, 슈를 처음 봤 을 때부터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외국인으로 먼 곳 에 유학을 와서도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직속 교수와도 꼬장꼬장한 태도로 논의하고. 예술관에 대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도무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 같 은 사람이어서 항상 걱정이 되었는데, 네가 있어서 살아남았 구나, 하고 알아챌 수 있었다고. 너희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고. - 그때는 그 여자가 스승님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것 같아가 그것까지도 기분이 나빠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 했다. 하지만 어쩐지 알 것도 같더라. -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스승님과 있었던 일들만큼이나 계속, 그 말을 생각했다. 스승님은 내가 있어서 살아남았다. 나는 스승님의 힘이다.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그건, 정 말로 기묘한 문장이었다. -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견딜 수 없게 뛰었다가, 또 슬프고 괴로울 때 그 생각을 하면 진정이 되었다가. 확실한 건, 내 가 그 생각으로 살게 되었다는 기다. - 그렇게, 파리에 다녀오기 전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되 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승님 에게 온 메일에 평소와 다른 내용이 쓰여 있었다. - 주변 제의를 받아서 극본을 써보기로 했다고, 잘 되면 용돈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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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응, 두근두근했다. 내 스승님은 학원에 다닐 때도 종종 극본을 썼으니까. 일본인이 불어로 작품을 쓴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 걱정도 되면서, 또 내용이 궁금해서, 그럼 일본어로도 써서 나한테도 보내달라고 했다. - 스승님은, 내한테도 보인다면 단순한 돈벌이용이 아니라 정 말로 열심히 써야겠다고 대답했다. 진심을 담은 작품을 써야 겠다고. 그 대답이 좋아서 난 또 헤실헤실 웃었지. - 웃었지. - 어땠을까? 만약에, 내가 그때 스승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 삶이 그런 것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 사랑이 예기치 못하게 이루어진 만큼, 삶도 예기치 못하게 변한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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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까지는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조잘거리던 카게히라 미 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짓씹듯이 뇌까렸다. “일 년이 안 되어서, 극이 흥행했다. 당신도 대충 알고 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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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츠키 슈의 처녀작이죠? ‘달의 오페라.’ 일본인이 쓴 극이 프랑스에서 흥행하고, 일본으로 역수입이 되어서 크게 화제가 되었죠.” “응. 역시 잘 아네. 그러면, 그 후로 스승님이 계속 글을 쓰 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겠네.” “그러니까 이츠키 슈는 우리 세대에게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잘 알려진 이름이죠.” “그게 문제였지.” “아이돌 활동 대신 글에 전념한 게 문제였나요?”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는 스승님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좋았으니께. 원래 추구하던 것과 형태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스승님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스승님은 절대 내랑 Valkyrie를 잊지도 않았다.” “연출가가 애걸하다시피 해서 쓴 두 번째 극본도 흥행에 성 공하고, 극본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해서 출간한 소설본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스승님은 조건을 걸었다. 우리의 무대도 함께 방송에 출 연시켜 달라고. 요구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지.” “그러면, 뭐가 문제였던 건가요?” 그러자 카게히라 미카는 인터뷰어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빙 그레 웃었다. 웃음기가 없는 웃음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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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그때 일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모든 것이 지 나칠 정도로 잘 되기만 했어. 이츠키 슈가 베스트셀러 작가 가 될수록 Valkyrie의 명성도 높아졌다. 그리고 내도, 더는 스승님을 도와줄 돈과 활동비를 동시에 벌려고 쩔쩔맬 필요 가 없어진 기다. - 스승님이 번 원고료로 우리는 스테이지를 준비하고, 앨범 작업을 했다. 스승님은 첫 책의 계약료로 비싼 재료를 잔뜩 사다가 옷을 지어서 내한테 선물했다. 물론 스승님의 옷과 세트였지. 뿌듯해하는 스승님을 보면서 내도 마냥 기뻐가, 포옹을 하고 여기저기 입을 맞추다가, 나중에는 옷을 벗겼 지. 마냥 좋았다. 마냥 좋았어……. - 그리고 두 번째 책의 계약료로는, 스승님은 비싼 시계를 사 다가 내한테 선물했다. - 세 번째 책의 인세가 나오고는, 내 명의로 자동차가 한 대 생겼다. 기뻐해야 하는데,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명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스승님은 내게 진 빚을 갚고 싶어하고 있던 기다. 나를 너 무 고생시켰다고 생각했어. 나를 아주, 호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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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의 글은 잘 되고, Valkyrie는 그만큼 유명해졌고, 이 제 우리는 걱정 없이 앨범을 낼 수 있었다. 매일 맛있는 걸 먹고,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지. - 아무 걱정도 없었다. 우리의 고생은 끝났고, 이제사 좁은 문을 지나서 천계로 향하고 있는 기다! 하지만, 스승님이 너 무 바빴다. Valkyrie 활동은 베스트셀러 작가 이츠키 슈의 부산물이 되었지. 하지만 뭐 어때? 스승님이 어떤 방식으로 든 꿈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내는 그걸로 좋은 기다. - 스승님은, 정말 쉴 새 없이 바빴다. 언론사와 계속해서 인 터뷰하고, 시상식에 불려 다녔다. 스승님이 주로 쓰는 작품 은 환상적인 내용의 단편이었고, 아이들과 어머니가 자주 읽 었어. 이츠키 슈는 동화 작가, 혹은 아동문학 작가로 유명해 졌지. - 스승님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유명세를 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런 관심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스승님 이 한참이나 주변 사람들과 함께 논의한 이후에, 이츠키 슈 의 이름을 딴 복지재단이 설립됐다. 생전 돈이라고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 자금줄을 대려고 유명 인사들의 거처에 발이 닳도록 다니기 시작했지. - 스승님의 명예가 높아질수록, 스승님에게는 점점 책임질 것 들이 많아졌다. 스승님은 아무 일도 새로 벌이지 않아도 바 빴고, 집필 기간 동안은 더 바빴다. - 그래서 서운했냐고? 내가, 감히? 스승님은 내가 서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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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전에 먼저 내게 미안해했다. 자꾸 혼자 두게 되어서 미안 하다면서, 솔로 앨범을 낼 것을 권했지. 스승님은 모든 곡을 작곡하고 모든 컨셉에 관여하고 싶어했지만, 그러기에도 너 무 바빴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시작한 솔로 앨범이었으니 까……. 그렇게 유명한 작곡가들과 저명한 예술가들에 둘러 싸여서 내는 앨범을 내게 되었지. - 그렇게 우리는 성공했다. -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일로 바빠져 갔다. - 그렇게 우리는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명예에는 언제나 부 차적인 것들이 따르지. - 우린, 그걸 알고 있을 만도 했는데. 그렇게 조심하고 조심 했는데도……. 지금 생각하면 당연할 만큼 예견된 일이었지. - 작은 찌라시 일간지에, 우리의 기사가 실렸다.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가 너무 바빴거든. - 그다음 날에는, 세 개의 기사가 더 났다. 인터넷이 시끄러 워지기 시작했지. 스캔들이었다. - 그리고 다음주에는, 모든 언론사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다뤘 다. 사진이, 목격담이 떠들썩하게 돌아다녔다. 원래도 알아보 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좋지 않은 의미로 따끔거리는 시선을 느껴서 맨얼굴로는 도무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당장 앨범을 홍보해야 하는데, 방송마다 일방적인 취소 통보 가 오기 시작했다. 취재 요청이 줄을 잇는데, 새 앨범을 내 는 가수에게 오는 인터뷰 요청이라기에는 묘하게 기분 나쁜 어미가 항상 끝에 붙어있었다. 앨범 홍보가 인터뷰의 본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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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아니라는 걸, 굳이 여러 번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스승님은, 스승님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꼿꼿이 들 고 맨얼굴로 다녔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점을 사 랑했던 거지. 스승님은 내한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시정 잡배 소인배들의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카게히라. 괜찮 아. 우리가 진심으로 예술을 피로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에서 알아줄 거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암흑이야. - 가엾은 스승님. - 어렸을 때도 이미 한 번 꺾였으니, 이제는 주변 시선 따위 에 굴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스승님이었지만……. - 복지재단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후원을 받아 수술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자금줄이 사라졌다. 스 승님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뛰어다녔지. 스승님 자신의 성향이 어떻든지, 그게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과 상관이 있 느냐고 물었지. 그리고, 어떤 반응이 돌아왔는지 짐작하겠지. 이츠키 슈는 동화 작가로 유명했으니까. - 그리고 현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스승님은 황급히 내 쪽을 돌아봤고……. - 새 앨범을 낸 내가 방송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보 게 되었고. - 응……,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자신보다는 내 쪽을 더 걱 정하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견딜 수 없어졌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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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스로 만든 틀에 고립되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선택도 할 수 없었다. - 그때 우리는 만나면, 아무 얘기도 길게 하지 않았다. 긍지 를 지키기에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고, 현실에 순 응하기에는 우리가 살면서 지켜온 것들을 전부 부인하는 일 이었다. - 그냥, 입을 맞추고, 몸을 엮고. -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계속 그렇게 몸을 섞다가, 나중에 는 그런 행위마저 사무적인 과정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 고……. - 그렇게 고작 한 달 후에, 우리는 크게 싸웠다. - 왜였지? 왜였을까? 이제는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사소 한 이유로. - 내 머리카락이 욕실 배수구에 끼었는데, 청소를 하지 않았 던가? 스승님은 농담처럼 카게히라 너는 한결같이 칠칠찮다 고 놀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몇 년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 다고. - 아니지, 내가 얼마나 변했는데. 스승님 때문에 얼마나 변했 는데. - 스승님은 침묵 후에 대답했다. 자기 탓이라는 거냐고. - 아니, 아니다. 내는 스승님에 비하면 별로 안 변하긴 했네. 뭐 그런 말을 했던가. - 스승님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 말하지 않는 게 좋았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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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몇 년 치의 설움이 갑자기, 갑자기 북받친 기다. - 그래서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스승님은 예전에는, 무얼 해도 나를 먼저 생각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스승님은 발끈했다. 자기가 왜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지 아느냐고. 다 너 때 문에, 너 때문에……. 그런 말을 했고,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텐데, 내는 그 말이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려서. 말다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 하하……, 어쩌다가 얘기가 그렇게 흘러갔을까? - 묵혀둔 것들이 곪아 터졌다. 정말 크게 싸운 적이 없었던 우리였던 만큼, 온갖 것들이 터져 나왔다. 전에는 절대 서로 하지 않았을 소리들. 다시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표현들, 의심, 상처내기, 그리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문제들까 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 우리는 베개와 종이를 던지고 서로 몇 시간이나 소리를 질 렀다. - 스승님은, 아마 나와 잠자리에 들려고 씻던 중이었을 텐데, 어쩌다가, 그렇게……. - 한참 언쟁을 하다가 스승님이 문득 말했다. 그만하자, 카게 히라. - 내는 대답했다. 그러자. 내도 지쳤다. - 말싸움에 대한 이야기였지. 하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로도 들렸던 거다. - 우리는 같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찬바람을 쐬러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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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다.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채였다. 언젠가, 전에도 이랬 던 때가 있었는데. - 그때는, 말다툼조차도 달콤했는데, 이제는 지나가는 말조차 도 불길한 전조 같아서 무서워졌지. - 새벽 공기에 차갑게 깨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은 차가웠고, 내는 길바닥에 있던 깡통을 괜히 발로 찼다. - 그러자 스승님이 내한테 괜찮으냐고 물었다. - 내는 그렇다고 했다. 내는 항상 괜찮다고, 원래 그렇지 않 았냐고. - 스승님이 괜찮겠냐고 했다. -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했다. -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 그 새벽에, 우리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정말로 한참을 울었다. - 그 후로 연락이 며칠을 끊겼다가, 다시 몇 번의 연락을 거 쳤지. - 그래. 그랬어. - 그렇게 우리는 3년을 사귀었고, 7개월을 동거했고……. 어 디 보자. 다시, 3개월을 헤어졌구나. - 우리는, 약간의 속임수와 많은 돈을 써야 했다. 우선 각자 가 전면적으로 스캔들을 부인했다. 그동안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루머라고 생각해서 대응하지 않았다고. 함께 유닛 활동 을 하면서 스킨십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런 추문이 도는 것이 불쾌해졌고, 더 이상 함께 활동하고 싶지 않아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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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 우리는 이제 각자 가진 것이 많았다. 그걸 돌보는 데만 해 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 그게 다행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도 흐르더라. 빠르던가? 느리던가? 정확히 기 억할 수가 없지. - 이상한 시간이었다.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쭉 꿈을 꾸고 있었던 거겠지. 스승님을 만나서 몇 년간 함께 지냈던 게 꿈 이고, 이 기분이야말로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느낌인 건지도 모르지. - 시간이 갑자기 빠르게 흐르거나 느리게 흐르지도 않고, 겨 울 공기는 뺨이 얼어붙을 만큼 차갑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 게 따뜻하거나 그마저도 눈물겹지도 않고. 세상은 돌아가고, 나는 살아가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정신을 차려 보면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있고 말이 지……. - 생각보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는 지도 모른다. 눈을 닫고 귀를 닫고, 이제야 꿈에서 깨어 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죽겠구나. 뭐, 대충 그런 생각이 었제……. 평범하게,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 그러니까, 3개월 후였다. 연락을 받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 는지 세어봤을 때는 깜짝 놀랐지. 헤어지고도 벌써 3개월이 나 무탈하게 살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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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같이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의 PD가 우릴 초대했다. 그때 우리는 싸워서 연락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는 걸로 세간 에 알려져 있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같이 초대 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술을 마셔서 싸우고 멱살을 잡기라도 하면 그것조차도 방송의 소재로 삼을 생각이었는지 도 모르지. - 그러니까 그때 스승님이 무슨 생각으로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건 내도 마찬가지지. 갑자기 이번 주말에 시간이 되시냐고 연락이 온 후부터는,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너무 후줄근한 모습으로 가면 당신은 걱정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조금 신 경을 쓸까, 아니 걱정을 끼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이전 에 당신은 정말로 그 자리에 올까, 오지 않을까. 이렇게나 신경을 쓰는 걸 보면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하나. 그리고 당 신은 아직도 나를 사랑할까.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 었다. - 금요일 저녁,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히려 차분했다. 자명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혹은 선고를 기다리 는 죄수처럼 나는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츠키 슈 라면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이르지도 않은 약속 10분 전에 나타날 테니까.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7시 20분 전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 PD와 날씨 나 세금 이야기를 하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면서 나는 계 속 시간을 곁눈질했다. 6시 42분, 6시 46분, 6시 48분, 49 분, 50분, 51분에……. 이츠키 슈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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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은 우리가 합석해 있던 좌석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 다. 3개월이 지났는데, 놀랄 정도로 변한 게 없었다. 아니, 살짝 야윈 것도 같았지만. 옷도 전에 즐겨 입던 것 그대로였 고, 강박적으로 단정하게 정리하는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관리하는 가죽 시곗줄도, 단호하게 치켜 올라간 눈 매와 짐짓 덤덤한 표정도 변한 것 하나 없이 엊그제처럼 그 대로여서 살짝 헛웃음이 났다. 나도 스승님에게 가볍게 목례 했다. 오랜만이구나, 카게히라. 스승님도 오랜만이네. 별일은 없고? 보는 대로다. 그렇게 사무적인 몇 마디를 하고, 다시 주변 사람들과 안부를 물었다. - 식사가 나왔다. 평소라면, 아니 예전이었다면 맛이 저질이 라고 품평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제대로 먹지도 않을 기름 기 잔뜩 낀 튀김을 스승님은 아무 불평 없이 얌전히 전부 먹 었다. 그래놓고는 속이 뒤집힐 것 같은 표정이기에 내가 시 킨 민트 차를 살짝 밀어다 스승님 쪽에 놓았지. 스승님은 별 말 없이 그걸 전부 들이켰다. 그래서, 그때 그 자리에서 무 슨 말을 했더라…….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별로 중요한 얘기는 없었다. 스승님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사실 전부 확인 하고 있었으니께. 입안에서 바삭거리는 튀김 요리에 탄산 넣 은 음료를 곁들여서 먹으면서, 나와 스승님과 PD와 프로그 램 진행자는 서로 약간의 안부를 묻고, 요즘 하는 취미 얘기 와, 정치와, 증권과, 날씨 얘기를 했다. - 너무 무난하고 문제없는 대화였어서, PD가 무언가 기대했 다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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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였다. 그렇게 대화하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당 연하지.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전부 먹고 슬슬 대화가 뜨문 뜨문해졌을 때는 날이 저문 후였다. -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죠,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우리는 의자를 밀어젖히고 일어났다. - 모자를 뒤집어쓰고 역 쪽으로 2분쯤 걸었을 때, 휴대폰을 놓고 온 걸 알아챘다. 급하게 뛰어가서 점원에게 휴대폰을 걷고, 나는 역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급히, 뛰어서, 스승님의 뒷모습이 보이자, 닿을 때까지 계속 뛰어서, 손을 낚아챘다. 스승님이 뒤돌아봤다.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말하더라. 뭐지, 카게히라. -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스승님은 놀라지도 않았네. 아니면, 놀라지 않은 척했거나. - 나는 할 말이 없어가 그냥 웃었다. 얼마나 멍청한 표정이었 을지 상상이 안 가네. 그래도, 좋더라. 이제야, 오랜만에 둘 만 같이 있는 게 반갑고 기쁘고, 또……. - 스승님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 손을 놓았다. 뭐라더 라. 여전히 멍청하구나, 카게히라. 그랬던가. - 눈치도 없고, 배알도 없고, 생각도 없구나. 대체 무슨 심산 이냐. 뭐 그런 식으로 말했제. - 스승님은, 내가 정을 떼게 하고 싶으면 일부러 모진 말을 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께. 내는 그럴 때의 스승님의 표정을 안다. 몇 달 만에 본 표정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 다. 일부러 눈썹 앞머리를 팍 내려서 찌푸린 모양이 웃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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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는 그 모습을 사랑했다. 몇 년 이나 사랑했다. - 아무튼, 스승님은 말했다. 그러니까 왜 온 거냐, 카게히라. 이렇게 재차 물었다. 그냥 뭐 부르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고 반문하니깐, 스승님은 이제 쓸데없이 자길 부를 필요 없지 않냐고, 그렇게 말하더라. - 그런 말을 들으니까 나는 이제야 오랜만에 둘만 있는 게 반갑고, 기쁘고, 또 원망스러워서. - 스승님에게는, 쉽구나. 끝내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정리 하는 것도 참 쉽구나. 뭐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 그리고 물었지. 날 정말 사랑하기는 했나? - 스승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는……. 그 순간만 큼은, 상처를 내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어떻게든 움 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말을 했다. 스 승님이 밉다고. - 스승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 나는 다시 물었다. 스승님도 내가 밉나? - 스승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몇 초간 대답 없이 묵묵하게 서 있다가, 고개를 겨우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말했지. 가라, 카게히라. - 믿었을 리가 있나. 스승님은 우습게도 계속 그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께. 그러니까 상관없었다. 오히려 안심하고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눈 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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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님은 자리에서 조금도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스승님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자, 스승님은 그대로 가만 서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차마 더 다가가지도 못하고, 잠시 옆을 보면서 망설이던 스 승님이 내 손을 쥐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내 손등에 입 을 맞추더라. - 그렇게 몇 초였다. 고작 몇 초, 손등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 각이 살짝 닿고, 세상이 멈춘 것 같았던 몇 초. 내 고지식한 스승님에게는 그게 최대한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작 그 몇 초에 구름 위에 뜬 것 같아서. - 미안……. (카게히라 미카는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횡설수 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말은 잘 기억이 안 난 다. 역시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 흠, 흠. 괜찮다. 진정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 니께 스승님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웃었다. 스승님은, 결코 제대로 모질지 못한 내 스승님은, 내가 당신을 미워하 는 것만은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은 내 스승님은. 나를 보고 말했다. 자긴 이미 선택을 했다고. 이도 저도 아닌 것도 아 마 선택일 거라고. 그리고 선택은, 감당하는 것이라고. 그러 니까 이렇게 이도 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카게히라 네가 싫어하든, 경멸하든, 자긴 받아들일 거라고. - 하지만 만약 허락한다면 앞으로 살면서 내가 쓰는 이야기 는 죄 카게히라 너의 이야기일 거라고. - 그리고 나는 아마, 그게 우리의 우주에서 가장 낭만적인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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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포즈일 거라고.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었고, 스승님도 웃었 다. 반지는 없었지만 손은 이어져 있었고, 약속이 있었다. 고 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망설임도 없이 헤어졌다. 믿을 수 있 었다. 우리는 제대로 이어져 있다고. -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다. 세상에서 제일 흔한, 지나간 사랑 이야기. - 세간에는 우리가 다시 싸웠다고, 음원과 파생상품의 이권 문제로 크게 다투어서 다시 만날 일은 없다고, 그렇게 묻혔 지. 그렇게 알려진 채 스승님은 계속 책을 썼고, 나는 계속 그걸 읽었지. 버려진 인형을 주워와 옷을 입히는 이야기, 고 양이를 주워 와서 기르는 이야기, 깐깐한 예술가와 덜렁대는 아이가 함께 지내는 소소한 이야기……. - 이게 어떤 감각인지,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살면서 알고 있는 것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햇살은 찬란하고, 저녁 하늘에는 별 이 뜨고, 그런 우주의 법칙에 무언가 하나가 추가된 거다. - 상상해 봐. 저녁 때 일과를 마치고 두꺼운 겨울 외투 후드 에 얼굴을 묻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으면, 어디선가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린다. 언젠가 둘이 함께 연습했던 노래다. - 그 여름에 질척질척해진 연습복 아래로 땀방울이 떨어지던 감촉까지도 느껴질 것 같다. 지직거리던 기기의 소음과, 창 너머로 들리던 매미 소리와, 집중하라고 소리치던 스승님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몸에 닿던 손가락……. 우리가 더 어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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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첫 등교를 함께하면서 보았던 벚꽃의 돌풍과, 서로의 주 변을 빙빙 돌면서 위성처럼 보냈던 시간들. 어느 날 밤에 나 가서 보았던 별들. 눈이 멀 것처럼 황홀했던 그 순간. 잠시 끊겼지만 결국 다시 이어지고 말 영원한 약속, 한숨과 편지 들, 함께 다녔던 도시들. 나누었던 꿈과 미래. 흘러가는 물살 위 다리 위에서 새처럼 나눴던 짧은 입맞춤들. - 온갖 것을 떠올리다가 문득 멍하니 고개를 들고 보면, 그리 고 큰 가게의 유리문 위에 달린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지. 이츠키 슈가 신작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소스라칠 정도로 아 름다운 작품이다. 당신은 여전히 빛이고, 별이고……. 처음 몸을 맡긴 그 순간부터 변함없이, 내가 믿는 진짜 천재인 거 다. - 당신이 남긴 흔적이 세상의 공기에 짙게 묻어 있고, 나는 언제고 들이마실 수 있는 기다. 우리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당신이 여전히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는 제일 흔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세상에 남 고 있는 기다. - 우리가 속삭였던 소리와 공유했던 시간과 시시콜콜한 추억 이 당신의 펜 끝에서 사랑, 추억, 애틋함, 그리움 따위의 너 절하고 머저리 같은 언어로 기록되고 수록되고 향기처럼 세 상에 짙게 짙게 퍼져나가. - 이런 기분을, 당신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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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카게히라 미카는 벽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댔다. 고양이처럼 만족스럽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미카를 보며 인터 뷰어는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만족하시나요, 카게히라 씨?” “그럼.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들은 기고, 세상에 이보다 행복할 리가 있나.” “정말 그걸로 만족할 수 있나요?”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 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우리가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다는 기 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어져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인터뷰어는 미카의 대답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초 조하게 펜을 달칵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카게히라 씨, 말이 되지 않습니다.” 미카가 계속해보라는 듯이 턱짓을 하자 그는 다시 말을 꺼 냈다. “이츠키 슈는, 몇 년간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했어요.” 그리고 방은 한동안 조용했다. 다시 녹음기가 돌아가는 소리 만이 나고, 인터뷰어가 눈을 깜박이다가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시절의 몇 작품 이후로 그는 결코 예전과 같은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카게히라 씨도, 아실 거예요. 기본적인 필 력이 있으니 작품은 되지만, 기존의 비상한 재치와 틀을 깨는 천재적인 센스는 갖추지 못한,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을 써내서 결국 예전의 이름값으로 연명하는, 한때는 유망주였던 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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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하지만 기존에 작품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결코 좋 은 평을 듣지 못했죠. 실망하고 혹평한 후 떠나간 팬도 많 죠…….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일 년에 한 편 이상씩은 써냈 어요. 납기일을 맞추는 성실한 회사원처럼, 상사나 누군가에 게 자신이 하는 일을 보고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소재나 영감을 소 진했다면 다시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 기 마련이죠. 이츠키 슈처럼 기존에 성공한 작품이 있는 작가 라면, 더욱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말이에요.” 인터뷰어가 마른 입을 축이고 펜을 돌리다가 종이에 한번 점을 찍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영감이 소진되고도 몇 년이고 때까지 의무감으로 글을 쓰 는 작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게히라 씨?” 미카가 눈을 들었다. 결코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무 거운 의문이 공기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정말 계속 당신을 사랑했을까?’ ‘계속 글을 쓴 것은, 단순히 약속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은 아닐까?’ “아이고. 한참 얘기했더니 피곤하고마. 잠깐 쉬고 다시 얘기 해도 될까?” 미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목을 이리저 리 돌리고 눈을 비비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주머니에서 담배 를 꺼냈다. “혹시 불 있나?” 그리고 인터뷰어에게 라이터를 받아서 불을 붙였다. 다리를 꼰 채 담배를 물기 위해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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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는 순간, 카게히라 미카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보였다. 마냥 아이 같아 보이던 얼굴에 세월에 지친 사람의 기색이 얼핏 스쳤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다시 완전 히 원래의 어린아이 같은 낯빛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제.” 그는 다시금 꿈꾸듯 황홀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중요한 기다. 우리가 어떻 게 행복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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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으면 당신도 알겠지. 이츠키 슈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는지……. - 스승님은, 항상 천상으로 가고 싶어했다. 더 고결한 것. 더 완벽하고 무구한 것. 세속을 벗어나, 더 높은 곳에서 빛나는 것을 찾아 헤맸지. - 완벽을 추구하다 못해 자신을 깎을 정도로 연마하고, 새로 운 관념에 도전할 정도로. 그런 사람이 결국에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 이건 내가 스승님을 정말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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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여름이었지. 지금까지는 횡설수설했지만, 이때 일만큼은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 - 당신, 아까 내한테 물었지. 정말 그걸로 만족할 수 있냐고. 역시 당신은 진짜 영원에 대해서는 모르는 기다. - 사랑은 그런 거다. 그게 아무리 허무맹랑한 말 같고 이루어 지지 않을 것 같아도, 믿고 기다리는 거야. 내가 아주 어려 서, 언제인지도 모를 그 옛날부터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을 시작했고, 맹목적으로 목을 매었고, 결국에 는 이루어진 것처럼. - 스승님을 만나서 역 앞에서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를 들 은 이후부터, 나에게는 머릿속에 끊이지 않는 노래가 생겼 다. 그게 노래일까, 이야기일까, 진실일까, 약속일까. 어쨌든 그날만큼은 노래였던 기라. - 나는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노래처럼 애틋하고 사랑스러웠 지. - 그렇다고, 그리움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라. 내는 예전에 스승님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밤길을 걸었다. - 내 파트만 부르면, 스승님의 파트는 비게 된다. 그러면 내 는 머릿속에 울리는 스승님의 목소리로 빈 곳을 채웠다. - 그러다가 내는 문득 그대로 길에 주저앉았다. 그리워서 견 딜 수가 없었어. 내는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기 도했어. 당신을 다시 보고 싶다고.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다 시 한번만 약속을 얻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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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풀벌레 소리가 반주처럼 울리는 여름밤이었다. 하늘은 까만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맑았고, 하늘을 가득히 수놓은 별이 알알이 빛나고 있었지. 그 수많은 별들이 내한테 쏟아지기 시작했다. 혹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찔하게 어지러웠어. - 그리고, 종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노트르담에서 들었던 종 소리 같기도 하고, 노랫소리 같기도 한 소리로, 스승님이 나 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히라 미카, 하고. - 어안이 벙벙해가 고개를 들자, 천사의 옷처럼 얇은 옷감을 걸친 스승님이 내를 보고 있었다.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보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기라. - 무얼 해야 하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뭐 하나 알 수가 없어서 눈만 깜박이고 있자니 스승님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카게히라. 천상으로 가자고 했잖아. - 나는 계속 영원을 찾아 헤맸고, 드디어 여기에 도착했어. 하지만 너와 약속했잖아. 혼자는 싫었어. 그래서 여기까지 끈을 이어서 내려왔어. -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하얗고 창백한 스승님의 손에 이끌려서, 내는 별이 있는 곳에서부터 내려온 긴 동아줄을 잡았다. 스승님은 내한테 속삭였다. 이게 바로, 천상으로 가는 줄이라고. 줄은 하얗고 가늘고 뻑뻑했지. -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스승님은 정말로, 마지막까지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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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은 기다. 당장이라도 스승님을 따라가고 싶어가 내는 계속 줄을 어루만졌다. - 하지만 생각할수록, 내한테는 아직 좀 더 할 것들이 있었 다. 스승님의 책도 더 읽고 싶었고, 우리의 노래도 정리하고 있었고, 아직 세상에 좀 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내한테 는 많이 남아있었던 기라……. -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가, 나는 스승님한테 말했다. 먼저 가, 스승님. 내도 금방 따라갈 기다. 조금만 기다려도. - 그러자 스승님은 내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 리가 달큰하게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애인의 목소리였 다. 내를 밀어내려고 일부러 꾸며낸 목소리도, 남에게 들려 주려고 내는 목소리도 아니고, 서로 의심하는 것 하나 없이, 그저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그 시절의 그리운 목소리 였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닌 줄 알 수 있었지. - 알았어, 카게히라. 그러면 앞으로도 종종 찾아올게. 네가 원하면, 나를 부르면 어디서라도 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라고. - 첫 키스를 했을 때처럼, 가슴이 떨렸다. 도무지 가만히 있 을 수 없었다. 설레고 황홀해서 나는 세상을 죄다 가진 아이 처럼 웃었다. - 드디어, 내는 영원한 약속을 갖게 된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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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볼펜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계속 볼펜을 달칵거리기 시작했다. 마른 입술을 축이던 인터 뷰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하지만…….” “하지만?” 인터뷰어는 더 말하지 않고 노트에 메모를 적어 내려갔다. ‘정신착란의 여지 있음.’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앞에 카게히라 미카의 얼굴이 있었다. 시릴 정도로 밝은 노란색과 푸른색의, 들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카게히라 미카는 인터뷰어 를 닿을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깔깔 웃기 시작했 다. “내 말을 안 믿는구나.” 인터뷰어는 잠시 생각하다가 빠르게 대답했다. “좋은 이야기지만, 카게히라 씨. 그게 당신이 기억하는 이츠 키 슈 씨의 마지막 이야기인가요? 혹시 다른 기억은 없나요?” “글쎄, 나는 내가 아는 걸 말했는데……. 그러면, 아가씨. 뭐 라도 더 말해볼 테니까 당신이 믿고 싶은 대로 말을 맞춰 봐. 내 얘기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인터뷰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미카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천상 같은 게 정말로 있을 리 없으니께 말이다. 그 렇제? 내도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게 뭔지 대충 안다.” 인터뷰어는 노트에 방금 쓴 메모 위에 줄을 직직 그어 지웠 다. “이건 만약의, 만약의 이야기다. 내가 처음에 말했던 그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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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말이제. 사실은 죽었던 게 아닐까? 이츠키 슈는, 근본적 으로 다정한 사람이니까. 다락에 올라가서 싸늘하게 식은 고 양이의 시체를 발견했지만 차마 고양이를 주워 온 카게히라 미카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기다.” “그래서 이츠키 슈는 시체를 빠르게 치워버리고 열일곱 살 의 카게히라 미카에게 말했겠지. 그 고양이는, 천상으로 갔다 고. 이츠키 슈는, 내 같은 놈의 마음이라도 지켜주어야 한다 고 믿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서투르게 둘러대어 도 카게히라 미카가 금방 사실을 눈치챌 거라고, 그래도 순진 한 스승님을 위해 모른 척해줄 거라고까지 생각하지 못한 기 다.” 그렇게 말하고 카게히라 미카는 키득키득 웃었다. “당신은 답을 찾고 싶지? 프로파일러 씨.” 인터뷰어는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미카를 바라보다가, 이 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볼게. 근본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니까, 그래……. 여름이었다.” 미카의 시선이 먼 허공을 향했다. 꿈이나 꾸며낸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먼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한 기 묘한 말투로 미카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년 만이었지, 스승님의 작품이 호평을 들은 게……. 아 무튼 정말 오랜만에 스승님이 초청된 시상식이 있었지.” “아직 문단은 스승님을 용서하지 않았으니 큰 시상식은 아 니었지만, 스승님으로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자리였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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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내는 집에서 맥주나 들이켜면서, 별 감흥도 없이 시상식을 지켜보고 있었제. 내는 왜 이걸 보고 있는 걸까, 그 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보니께 내도 모르게 옛 노래를 흥 얼거리고도 있더라. 그걸 깨달았을 때는 괴로워서 혀를 자르 고 싶었어.” “그래도, 사회자에게서 이츠키 슈의 이름이 호명됐을 때는 역시 기뻤다. 기쁘고, 또 비참했제. 이번에 시상된 새 작품에 서는 내 이야기로 생각할만한 거리를 찾기 어려웠던 기다. 뭐, 굳이 억지로 뭐라도 가져다 붙이려면 여러 가지가 있었겠 지만.” “하지만 내는, 지쳐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장님 처럼 더듬거리면서, 당신에게서 정처 없이 내 흔적을 찾는 일 이 몇 년째였다. 당신 말이 맞다. 사람은, 지친다. 하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것도 있는 기다.” “그러니까 그때도,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던 기라. 술 을 잔뜩 들이켜고, 몽롱해진 정신으로 스승님이 장황하게 말 하는 수상 소감을 듣다가, 번뜩 술이 깨는 것을 느꼈다.” “카게히라 미카. 여섯 글자가 비수처럼 귀에 꽂혔다. 내 이 름을 말하면서 고맙다고 하는 스승님을 보면서, 내는 경악했 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데? 어떻게 알려져 있는데? 당신 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재킷에 지갑과 차 키만 챙겨서 집을 나왔다.” “여름이었다. 그리고 밤이었지. 초여름의 하늘빛에 초저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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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겹친 시각이었다. 파란 하늘에 어스름이 엷은 베일처 럼 낮게 깔리고, 별이 아른아른 빛나기 시작해서 꿈만 같았 지.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터널 같은 밤길을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루머에 지친 스승님의 집은 남들이 오지 못하는 외진 산에 있었다. 나는 산기슭에 차를 대고 몇 걸음씩 성큼성큼 산을 올랐지. 스승님은 얇은 여름 외투를 걸친 채 집 앞에서 담배 를 피고 있었다. 내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스승님, 그러다 감 기 걸린다. 스승님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멀거니 넘겨보더니, 당연하게 대답했다. 왔나, 카게히라. 너무 당연하게도 그렇게 대화를 해서 웃음이 났다. 스승님은 들고 있던 담배를 손에서 툭 놓더니 구둣발로 비벼 끄고 앞장서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스승님의 뒤를 따르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 고……. 스승님은 당연한 듯이 뒤를 돌아보며 내게 소파에 앉 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 선반에서 리큐르 몇 개와 음료 를 꺼내서 잔에 차례로 따르더라. 받아서 마시니까 알싸해가 목구멍이 탈 것 같았다. 그래도 묘하게 계속 넘어가는 기다.” “이미 취한 상태에서 더 술이 들어가,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내는 웃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맑게 말했 다. 축하해, 스승님.” “스승님도 웃었다. 벌게진 내 얼굴을 재밌다는 듯이 들여다 보더니, 이윽고 깔깔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술 한 잔에 취한 길까. 스승님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하더라. 뭘 축하 받아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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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같은 넋두리가 이어졌다. 스승님은 말했다. 자긴 더 이상 어떤 것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없다고. 미맹이 된 것 같 다고. 무얼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해도 그 때뿐이고……. 그렇게 말하더니 스승님은 벽 너머 위를 가리 켰다. 집의 벽 한 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서, 하늘 가득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시선을 저 먼 하늘에 두고 스승님은 말했다. 저 별들이, 예 전에는 별이 보이는 만큼 꿈 같고 희망 같았는데. 이제는 전 부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다고. 머리 위가 무거워서 현기증이 인다고. 그렇게 말하다가, 스승님은 휘청거렸다. 내는 달려가 스승님을 품에 받아 안았다.” “품 안에서, 흐드러진 눈으로 스승님이 웃었다. 그래도, 지 금만큼은 예전 같네.” “스승님 말이 맞았다. 무거웠다. 그런데 하늘을 날 것 같았 다. 덥고, 까마득하고, 비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추락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 쳤지.” “모든 경계가 흐릿했다. 안과 밖도, 스승님과 나도, 세상과 우리도, 현재와 과거도, 이야기와 현실도, 진심과 이성도.” “유리벽이 비스듬히 투명했다. 하늘에는 가슴까지 쏟아질 듯 별이 가득했고. 별이 반짝일 때마다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 다. 벚꽃이 쏟아지던 봄의 거리와, 춤을 연습하던 학원의 연 습실과, 집 앞 벤치와, 입을 맞췄던 퐁데자르와, 노트르담, 역 앞의 포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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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에, 우리는 어디였을까? 현재도 과거도 아닌 어드 메. 그렇다면 여기야말로 천상이 아닐까. 혹은 천상으로 들어 가는 경계가 아닐까. 우리는 만취해 있었고, 별은 아찔하게 밝았고……. 그 짧은 순간이 기쁘고 슬퍼서. 이대로 영원이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했다.” “스승님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우리는 항상 천상으로 가고 싶어했지. 너는 아니었나? 내 욕심으로 너를 괜히 끌고 들어 갔던 걸까?” “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나. 그러자 스승님은 만족스럽고 애틋한 낯빛으로 웃었다. 그리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내 양손을 붙들었다.” “예전에 함께 바느질을 하면서 바늘을 찌르던 긴 손가락 끝 이, 더듬더듬, 검지와 중지 사이 움푹한 곳을 누르고. 내 손 을 잡아끌면서 조금씩 더 위로 올라갔다. 스승님의 목은, 하 얗고 길면서도 가수였던 사람답게 단단했지. 꼭 밧줄을 잡은 것 같았다.” “내는 스승님의 목을 어루만지다가, 손톱 끝으로 살짝 긁었 다. 스승님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내게 눈을 맞췄지. 그리고 말했다. 카게히라. 내가 말했었지. 선택은, 감당하는 것이라 고. 네가 무엇을 하든지…….”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물기 젖은 연보라색이, 술보다 알싸하고 별보다 달았다. 목을 감싸 쥔 손가락에, 엄지부터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스승님은 눈을 찌푸렸다. 얇은 눈꺼풀 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웃었지. 내가 마주 웃자,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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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님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함께 가자, 카게히라. 라 고.” “그 목소리가 귀에 긁히자, 가렵고 가려워서, 내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함께하지 않기로 한 채로도 우리는 충분 히 서로를 그리워했고, 그러니까 다음 순서는, 당연하게…….” “내는 스승님을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탔다. 당신을 한입에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은 참을 필요 없다는 걸 알았어. 생각보다 먼저 몸이 나갔다. 그러니 더, 더 세게……, 전부 담아서, 몸이 거의 겹쳐질 정도로, 세게, 더 세게, 우리 를 나누는 경계가 전부 없어지고, 하나가 될 때까지, 마지막 까지…….” “그리고, 끝났다. 조용해졌다. 완전히 끝났지. 나는 그제야, 이츠키 슈를 내가 닫았고,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소유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만족스러웠다. 웃음과 함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완전한 결말을 오랫동안 마음 깊이 원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나는 다시 키스했다. 내가 마침내 손에 넣은 내 것. 이제 나만의 것. 이제 정말로 나 혼자 아는, 내 사랑스러운 사랑. 마지막까지 기다린 과실은 다디달았다. 혀가 녹을 만큼 맛있 었지.” 카게히라 미카는 처음 인터뷰를 받아들일 때와 꼭 같이, 황 홀하고 꿈을 꾸는 것 같은 눈빛으로 웃었다. 그렇게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한 채로 인터뷰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프로파일러 씨. 그렇다고 이쪽 이야기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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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마음에 걸리제? 당신들은 내 흔적도, 스승님도 찾지 못 했다 아이가. 그래서 내를 찾아와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 겠나? 아주 복잡하겠고마.” 그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울이다가는, 후련한 얼굴로 고양 이처럼 기지개를 켰다. “뭐 내는, 어느 쪽이든 좋다.” 그가 채근하듯 상대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그래.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노? 아가씨도, 일종의 소설 가 같은 거 아이가. 스승님이 그랬듯이, 진실과 정답을 정제 하고 추출해서 세상에 남기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기제. 나 를 읽고 있는 거지 않나.” 여전히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 “어떤 쪽이 정답일까?” 혹은 백치나 광인처럼 새하얗게 말간 낯이었다. “어느 쪽을 정답으로 남기는 게 좋을까?” 담이 없는 질문이 이어진다. “이츠키 슈가 쓴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이었을까? 허구고 허상이었을까? 그게 이 세상에서 금방 사라지는 사랑을 박제 한 것이었어도?” 카게히라 미카는 겨울 불빛 아래 춤추는 나비처럼 웃었다. 시리도록 밝은 빛의 눈동자 아래 붉은 줄이 갔다. “어느 쪽이든, 당신이 보기에 우리는 미쳐있을 기다. 그러면 이제 어느 쪽일까? 미친 게 우리일까, 이 세상일까? 둘 중에 하나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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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의자를 밀어젖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다지 세상에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가 바라는 천 상이 되기에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해지고 지저분했지. 우리는 겨울에 핀 꽃이었다. 뭍에서 헐떡거리는 물고기였고, 길에 나앉은 고양이었고, 가을 나비였다. 우리는, 그래도 우리 의 방식으로 영원하고 싶었다.” 창백하게 하얀 얼굴이 다가온다. 그렇게 점점 더 이쪽으로 가까워진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노? 미치광이의 세상에서 두 미치광 이가 찾아간 것을.” 진실처럼 무겁고 날 선 것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난다. 당 신은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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