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day of sun sa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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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책은 캐릭터 사망 등의 예민한 소재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며, 다양한 커플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차례

설국의 아이들 에이치x케이토 / 5p

얼음 자국 에이치x케이토 / 10p

별의 파편 에이치x슈 / 32p

미정 에이치x슈, 에이치x와타루 / 55p

Sense-less boy 에이치x츠무기 / 61p

EIROID 에이치x레오 / 82p

아무래도 좋은 날 에이치+토리 / 103p

꽃의 언어 에이치x안즈 / 105p



설국의 아이들 에이치+케이토

1. 행사가 열린 지 사흘째, 호된 매질을 당했다. 불공을 드리는 행렬을 지켜보며 향로가 가득 찰 때마다 새것으로 갈고, 향이 떨어질 때마다 채워 넣는 것이 어린 케이토의 일이었다. 가장 쉬운 일이니까 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 케이토는 바닥까지 길게 떨어지는 승복을 입고 오도카니 한쪽에 앉았다. 햇볕 속에서 즐 거운 얼굴로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방문객들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고즈넉이 그늘진 한구석의 어둠 속에, 사찰의 일부처럼 무릎을 꿇고 가만 앉아, 연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쪽을 신경쓰지 않도록. 그렇 게 서로 신경쓰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불청객이 있었다. 야산에서 떠돌아다니며 가끔 절밥을 얻어먹는 고양이 녀석이 케이토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케 이토가 앉은 그늘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야옹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과 앉아 있던 케이토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귀엽다며 깔깔 웃는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수군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경건 하던 사찰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서, 케이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채 고양이를 안고 뛰듯이 절간을 나섰다. 안아 든 채로 갑작스 레 뛰어가자 고양이는 애옹애옹 울면서 발버둥을 쳤고 케이토의 콧등 이며 팔에 발갛게 할퀸 자국이 생겼다. 부끄러움이 앞서 상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참을 뛰다 보니 문득 콧잔등이 시큰거려 케 이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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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할퀸 상처에 서늘한 것이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 다. 개울에, 돌다리 위에 나풀나풀 눈발이 내려앉아 이미 반쯤 하얀 세상이 점점 더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케이토는 넋을 잃은 듯 새하 얗게 빛나는 설국을 걸었다. 삼베로 만든 승복 자락이 눈 위에 질질 끌렸다. 사흘 만에 보는 세상에 눈이 부셔 케이토는 야산 꼭대기까지 라도 올라가고 싶었다. 아니면 이 산을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나 눈이 내리면 산도 바다도, 개울도 도시도 세상 끝까지라도 새하얗겠지. 눈에 젖어 무거워진 승복 자락을 끌고 돌아온 이미 절간은 난리였 다. 향로가 넘쳐서 바닥에 그을린 자국이 생겼고 향이 동나서 불공을 드리려던 사람들이 길게 줄 선 채로 웅성거리다가 돌아갔다. 부모님 께 불려간 후 종아리에 고양이가 할퀸 자국보다 훨씬 굵고 새빨간 자 국이 여러 줄 생겼다. 매를 맞으며 이를 악물었지만 아픔보다도 아쉬 움이 더 컸다. 아직 그 눈부신 설국을 끝까지 보지 못했는데.

2. 병원의 약물 냄새는 향 냄새와 비슷한 점이 있다. 코를 자르르 찌르고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병 냄새가 나는 침묵 속에 사람들 은 애써 화사한 꽃을 들고 오고 부자연스럽게 소란을 떨지만 기본적 으로는 가라앉아 있는 공간이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이런 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겠지. 그래서 에이치 녀석도 나가버린 걸까. 혼자 생 각에 잠겨 있는 케이토를 알아본 사용인이 반갑게 부산을 떨었다. “왔구나, 케이토. 어서 에이치 도련님 좀 찾아주련. 네가 오니 어쩐 지 안심이구나. 얘기를 듣고 바로 널 보내주다니 그쪽 어르신도 친절 하시지.” 행사에서 사고를 쳐서 반쯤 쫓겨난 거지만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 6


키고 케이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호화로울 정도로 넓은 병실은 주인 없이 빈 채, 뽑아 놓은 링거 선 몇 개만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 너는 이렇게 많은 사용인의 눈을 어떻게 피하고 사라진 걸까. 밖에 나갈 만한 곳이라도 있나 보려고 창가에 기대 선 케이토는 곧 선득한 느낌에 놀라 뒷걸음질쳤다. 대리석 창틀이 창 틈새로 조금씩 날아온 눈에 식어 서느렜다. 아직까지도 눈발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병원은 온갖 방 구석구석 을 뒤지는 텐쇼인 가의 사용인들로 소란스러웠다. 설마 병약한 에이 치가 이런 날씨에 밖에 나가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 지만. ‘그 녀석은 꿈이 크니까.’ 정확히 말하면, 꿈만 크지. 매일같이 골골대느라 혼자서는 아무것 도 못 하는 주제에. 그렇게 생각하며 꼭대기 3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케이토는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조그맣게 난 철문의 손잡이를 돌리자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주어 어깨로 문을 밀어보았다. 드 르륵, 돌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더 볼 것도 없었 다. “에이치이이이이!” 그리고 갑자기 열린 문 쪽으로 바람이 불어 하얀 눈발이 와르르 쏟 아졌다. 그 가운데, 이쪽을 돌아보는 에이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무 서울 정도로 창백한 녀석이 눈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것이 사람이라 기보다는 눈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케이토.” 난간에 기대선 채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 조그맣다. 어서 달려가 외투를 걸쳐 주고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곧바로 떼었다. 시체라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을 것 같았다. 7


“대체 뭐 하는 거냐, 네 녀석은! 이런 날씨에 바깥이라니 내일 제 단에서 만나고 싶은 거지!” “어떻게 찾아왔어?” 곧 끊길 듯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에이치는 작게 웃었다. “아. 너도 설경이 보고 싶었구나. 어때, 케이토?” 에이치가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 난간 아래로, 까마득하게 설국이 었다.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한쪽 멀리 눈 덮인 산에서부터, 저 멀리 얼 어붙은 강물이 보이고, 길마다 건물마다 하얗게 쌓인 눈이 색색의 불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점점이 희게 빛나는 세상이 아득해 숨이 멎을 듯했다. “정말 하얗다. 그렇지?” 그리고 눈을 맞아 반짝거리는 에이치의 얼굴은 설탕을 입힌 과자 같았다. “도시 밖은 더 근사하겠지. 방에 가서 그려 줘, 케이토.” “멋대로 나와 놓고 뭘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려고 하는 거야, 네 녀석은.” “그야,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병실 안에만 있기 싫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왔으니까 괜찮아. 여기서 보는 것보다 네가 그려주는 게 더 근사해.” 이렇게 웃는 모습만 보면 말썽이라고는 부릴 줄 모르는 천사 같지. 금방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천사. 고운 설탕 과자는 곧 깨질 것처럼 보인다. 케이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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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날 밤은 에이치의 병실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결국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는 에이치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케이토. 여기 그 려준 것들 직접 본 거야? 아니. 사실 나도 못 봤어. 그냥 상상이지. 그러면,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병원 옥상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곳 으로. 누구라도 올려다볼 그런 곳으로……. 그때는 훨씬 근사한 경치 를 보여 줄게……. 에이치는 계속 열에 들떠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이미 잠이 든 채였다. 이렇게 머리를 맞댄 채 잠이 들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될까. 얼굴에 닿는 숨이 기침처럼 잘았다. 퐁, 퐁, 퐁, 가는 날숨을 느끼며 케이토는 눈을 감았다. 꿈결에 퐁, 퐁, 퐁, 숨이 닿을 때마다 에이치가 하늘을 날다가, 설탕 과자처럼 웃다가, 창백한 시체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다시 하늘을 날다가 했다. 우리는 언젠 가는 저 높은 곳으로 갈 거야. 아무도 닿지 못할 곳으로, 누구라도 올 려다볼 그런 곳으로 함께…….


얼음 자국 에이치+케이토

“몸은 어떤가?” A군이 후원자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단도직입적이네, 라 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들어 남자를 마주보았다. 처음으로 대면하 는 후원자는 꾹 다문 입가의 주름부터 네모진 안경까지 구석구석 완 고한 인상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니 직선으로 굳어 있 던 남자의 입매가 슬그머니 무너지며 웃음기가 돌았다. 기묘한 광경 이었다. “미안하네. 아직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군. 자네는 내 오랜 친구 를 무척 닮았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격의 없이 대하고 말았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실례했네요. 상태 는 상당히 괜찮습니다. 모두 후원해주신 덕분이지요.” “아직 조금 불편한 것 같은데?”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A군의 다리를 응시했다. 확인하는 듯한 눈빛에 짐짓 가볍게 대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A군은 실없이 웃 으며 앉아 있는 전동 휠체어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아하하, 아무래도요. 그렇지만 한동안은 무균실에서 나오지도 못 했는걸요. 이 정도로 개선된 것만 해도 기적이죠.” “그렇지. 자네의 몸은 엉망이었어. 조직과 세포를 완전히 재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걷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 가지도 못하고, 식사 대신 수액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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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했고…….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차도 마실 수 있으니까요. 으 음…….” “차가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여전히 탐색하는 듯한 눈빛에 A군은 가벼운 긴장감을 느끼며 고개 를 끄덕였다. “수온도 적당하고, 꽃향기가 아주 향긋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원래는 녹차를 즐겼다네. 그런데 홍차를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마시다 보니 취향도 변하더군. 그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진즉 이 맛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어.” “생각보다 다감하시네요.” 무심코 중얼거린 A군이 급히 덧붙였다. “아. 초면에 무례했네요. 죄송합니다, 하스미 케이토 씨.” “그런 말은 됐네. 자네에게 사과를 듣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지.” “이상합니까?” “그래. 그냥 편하게 말했으면 좋겠군. 그 편지에서처럼.” 남자가 눈짓하자 A군은 잠시 머뭇거리다 테이블 한쪽의 편지 더미 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소년처럼 수줍게 웃는 것이었다. “역시 알아보시네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여기까지 들어오기 힘들지 않으셨나요?” “괜찮네. 검사를 스무 가지쯤 받고 전신 소독까지 거치긴 했지 만……. 오면서 예상한 일이고 말일세.” “아, 죄송합니다. 이제는 면역력이 생겨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요.” “무리하지 말게. 자네는 매일 받는 검사지 않은가. 나와 오래 대화 하는 것도 힘에 부치지 않겠나?” “아닙니다. 지금 무척 기뻐서, 매일이라도 이렇게 하스미 씨와 대 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11


“고집불통이군.” 짧게 대답한 케이토가 차를 홀짝거렸다. 안경에 하얗게 김이 서렸 다. “예스러운 안경이네요. 손편지도 그렇고, 오래된 문물을 좋아하시 나 봐요.” “옛 물건을 오랜만에 꺼냈더니 이 모양이라네.” 케이토가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아내며 답했다. “내 나이가 적지 않으니, 자네로서는 대하기 불편할지도 모르겠 군.” “오히려 반갑습니다. 저도 골동품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흠.” 짧은 헛기침 후 이어지는 침묵에 A군은 어김없이 작은 긴장을 느 꼈다. 상대는 오래도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한때 아이돌이었 던 것치고 완고한 사람이라고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본디 말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침묵이 계속되니 괜한 생각이 드는 것이 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렇지만, 먼저 보자고 한 쪽은 분명 히……. “내가 왜 갑자기 자네를 보자고 했는지 궁금하겠지.” “하하, 네……. 제 치료를 후원하신 지는 벌써 좀 되셨잖아요.” “처음 후원을 시작했을 때는 만나려도 만날 수 없었지. 자네의 몸 때문에. 그래서 대신 편지를 주고받았네만, 이제는 자네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잠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선고처럼 엄격하고 담 담하게 말을 이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자네를 직접 보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 었다네. 유언, 이라고 하면 거창하려나. 죽음을 목전에 둔 늙은이의 12


회고 정도로 생각해도 되겠군.” “아…….” 고개를 끄덕이던 A군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 럼 미동도 없던 A군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 보다가, 다시 편지 더미를 바라보다가는 입을 열었다. “아니, 역시 농담이시겠죠. 이렇게 정정하신데.” “그렇게 보이나……. 한때 시선을 받는 몸이었으니, 아무래도 겉모 습은 신경 쓰게 되더군.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네. 기다려야 만 하는 것이 있어서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 어. 그러니까, 나는. 내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왔다네. 언제나 누 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친구였거든.”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유언이라면 보통 친구가 아니라 본인 이야 기를 하는 거 아닌가요? 죽을 때까지 자길 신경 쓰게 하다니, 굉장히 나쁜 친구네요.” “하하. 죽을 때까지가 아니야. 아마 나는 죽은 후에도 그 애를 신 경 쓸 테니까……. 이래서야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케이토는 이곳에 도착한 이래 가장 사심 없 이 말갛게 웃고 있었기에, A군은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미적지근했 다. “뭐, 자네로서는 죄다 갑작스러운 소리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사후 에 내 모든 재산을 자네에게 양도할 걸세.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적 은 돈은 아니야. 내게는 가정도 없고, 아이도 없고 제자나 후계자도 없다네. 그러니 모두 자네에게 넘기고 싶은 게야. 대신에 내 이야기 를……. 아니 내 친구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줬으면 하는 거라네.” 답이 없는 A군에게 케이토가 재차 물었다. “괜찮겠나?” 13


“……네. 들어보고 싶습니다.” “좋아,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자네는,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나?” “누군가의 생명활동이 정지되는 것이겠지요.” “원론적인 대답이군. 그렇다면 생명활동이 정지되는 것은 언제일 까? “선문답 같네요. 일반적으로 인식하기에 심장과 뇌가 멎을 때, 그 래서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때가 아닐까요?” “……그런 게 일반적인 생각이지. 내 친구는 말일세. 여러모로 조 금 독특한 녀석이었어. 녀석은 늘 죽음에 가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 죽음은 관념 이라고. 생각하기에 따라 뒤집을 수도 있는 것을 우리가 끝이라고 여 기는지도 모른다고.”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뭐,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군……. 한번 들어보겠나.” 케이토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기기를 꺼냈다. 재생 버튼, 정지 버튼, 전원 버튼 세 가지만 달린 간소한 재생장치 역시 수십 년 전의 물건이 틀림없었다. A군이 가만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 토가 버튼을 몇 번 달칵거렸다. 기기에서 젊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음질은 좋지 않았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소 리는 금방 부서질 것 같았다. 하염없이 낡은 소리에는, 어쩐지 그리 운 느낌도 있었다. A군은 기기에서 재생되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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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파편 에이치+슈+케이토

여름이었다. 햇빛이 바닥까지 내리쬐어 달구고 매미가 병처럼 숨 막 히게 울었다. 그리고 지금은 야외 수업이다. 아무리 유메노사키가 해안 이라고 해도,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드는 날씨에는 별 수가 없는지 건 장한 고등학생들도 뜨거운 볕에 하나 둘씩 녹아내려갔다. 하물며 원체 약골인 녀석은 어떠랴. “차라리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케이토, 기상조절센터에 연락 해볼까? 몇 억엔 정도 부르면 되려나?” “정신 차려.”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에이치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아 보였다. 제대로 더위를 먹었는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진심인데. 나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건 싫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야외수업 같은 건 교사에게 부탁해서 빼도 되지 않아? 이제 2학년인데 적당히 타협해줄걸.” “그래도 수업을 그렇게 쉽게 빠지면 안 돼. 입원했을 때는 수업을 듣고 싶어도 못 듣는단 말이지……. 그러면 케이토. 잠깐 교실에서 내 체온조절 팩 좀 가져다줄래? 지금 갑자기 냉방을 쐬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묘하게 성실하게 구네. 그럼 일단 가져올 테니까 혹시라도 무리겠 다 싶으면 얼른 들어가라. 아무튼, 네 녀석은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 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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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에이치의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지면 꼭 조퇴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을 옮기려는 찰나, 운동장 한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 쩍 들었다. “오늘 수업은 조퇴하겠다.” 특유의 거만한 말투와 목소리. 제왕이라는 별명에 딱 어울려서, 굳 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츠키 슈임을 알 수 있었다. “날씨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아. 이런 상태에서 연습해봤자 비효율 적일 뿐이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에이치 쪽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 린다. “여전히 제멋대로시네.” 영락없이 비웃는 목소리였다. “제왕님은 날씨가 나쁘면 예정된 공연도 안 나가신다더라고. 케이 토. 날씨도 더운데, 학교 옆 바다에 사람 한 명쯤 밀어버리면 쥐도 새 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에이치의 상태가 유독 안 좋아 보이는 건 어쩌면 날씨보다도 합동수업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치는 이츠키 슈를 싫어한다.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말투가 기 분 나빠. 재능도 있으면서 공연에 날씨를 가리는 게 싫어. 나는 건강 때문에 필사적으로 먹는데, 멀쩡한 몸으로 음식을 가리는 게 싫어. 이츠키에게 삼류 글쟁이라고 핀잔을 듣는 나도 그 정도로 싫어하 지는 않는다. 이렇게까지 이유가 많다면, 오히려 ‘그냥 싫어’에 가까 운 게 아닌가. 어쩐지 녀석은 이렇게 이츠키가 보이기만 해도 기분 나쁜 표정으로 비꼬곤 했다. 하지만 정작 이츠키 쪽에서는 텐쇼인 에이치라는 사람을 인식하고 33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는 소위 제왕이라는 별칭만큼이나 방약무인 했으므로, 아무리 같은 학원의 학생회라도, 그리고 대재벌인 텐쇼인 가문의 자제라도 신경이나 쓰고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너는 대체 왜 그렇게 이츠키를 싫어하는 거야? 동기잖아. 별로 서 로 말해본 적도 없지 않아?” “날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그게 뭐야. 네가 야쿠자야? 지나가는 사람한테 너 눈이 마음에 안 든다고 돈이라도 뜯게?” “내가 말해놓고도 웃기지만, 정말이야. 케이토는 왜 내 말을 안 믿 어?” “그게 무슨 대사야. 네가 내 여자친구냐?” 말해놓고 어쩐지 무안해지고 말았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크흠. 아무튼 솔직히 네 녀석의 피해망상처럼 들릴 뿐이다. 정 그 렇게 느껴지면 이츠키한테 대놓고 말하든가.” “아직은 안 돼. 알잖아, 케이토. 앗, 지금 봐!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잖아.” “어디? 이츠키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잖아……?” “그새 눈을 돌렸잖아! 칫, 분해.” “역시 네 착각인 것 같…….” “그런 소리 할 거면 내 팩이나 가져다 줘. 만약에 이대로 일사병으 로 사망하면 염은 케이토가 해줄 거지?” 또, 이런 식이다. 사사건건 병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녀석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이 병약한 녀석이 혼 자 뭘 할 수 있을까. 얼른 입을 닫고 교실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차 피 늘 있는 일이다. 34


Sense-less boy 에이치+츠무기

저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야겠네요. 이를테면 검과 마법이 나 오고, 용사가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의 책 말입니다. 제가 이 취미에 대해 말하면, 주변의 어른들은 흔히 이런 식으로 핀잔을 주고는 했습니다. 그런 건 현실과는 달라, 아오바. 그런 허무 맹랑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낼 시간에 주변의 진짜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게 어떻겠니? 현실 세계의 문제는 이야기책보다 복잡하단다. 저는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저도 알아요. 그러면 어른들은 혀를 쯧 차는 것입니다. 지금 너를 혼내는 거잖 니. 여전히 눈치가 없구나. 그리고 저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대답합 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그러면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납니다. 말을 하던 어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서거든요. 그리고 저는 비로소 읽던 책에 다시 머리를 박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을 겪어도 종국에는 이겨내는 용사와, 입에서 불을 뿜는 머리 다섯 달린 괴물과, 위기가 닥칠 때마다 지혜를 발휘하는 마법사 와, 왕궁에서 아무리 이간질을 당해도 변함없이 용사의 편을 드는 학 자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그 안에 저의 현실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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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없습니다.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듯 느껴집니다. 그것이 평온합니다. 그렇게 수백 권째의 책을 읽고 수백 번째로 눈을 감던 도중, 별안 간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말에서는 용사의 이야기만 다루어지는데, 왕궁에서 묵묵히 용사 를 도왔던 학자는 어떻게 된 걸까? 용사가 괴물을 물리쳐 세계를 구하고, 보옥을 얻어 왕위에 오르는 동안 학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왕이 된 용사의 보좌관이 되었 을까, 아니면 새로운 용사가 되어 모험을 하러 떠났을까? 이것이 한 동안 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에이치 군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네요. 학 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물었더니 에이치 군이 뭐라고 대답했었 지……? 바로 기억이 나질 않네요. 아아. 그러고 보니 에이치 군의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에이치 군은 제 소중한 친구랍니다. 언제까지고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친구예요. 겨우 일 년 넘게 같이 지낸 주제에 평생을 말하는 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요~. 아니, 이제 이 년을 채워가던가요? 제가 에이치 군을 처음 봤을 때가 열여섯이었죠, 아 마? 네, 맞을 거예요. 그때 우리는 열여섯이었어요. 아니, 제가 그를 만났던 때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이것도 아닌 것 같네요……. 열여섯이 되던 해, 제가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여섯 살은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적 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결코 많은 나이도 아니었죠. 하기야, 나이 같 은 것이 중요할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변화하게 되는 순간이 62


있고, 그 순간을 언제쯤 맞는지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니까요. 여하튼, 열여섯의 우리에게는 당시 보고 겪는 것이 우리의 전부였 습니다. * * * 정확히 말하면 제가 에이치 군을 본 건 열다섯 살 때군요. 이런, 제 가 셈을 틀렸다는 걸 알면 에이치 군이 실망할 거예요~. 너는 좀 더 제대로 일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츠무기. 「fine」의 총무 역할이었 잖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요. 아니, 요즘의 에이치 군은 제게 그런 말을 하지 않던가요? 에이치 군과 대화한 지도 꽤 되어서 헷갈리네 요. 반이 갈린다는 건 아무래도 아까운 일이에요~. 같은 반에서 지내 다 보면, 친해질 기회도 더 많으니까요. 제가 2학년 때 에이치 군의 친구가 된 것처럼요. 실은 그 전부터 에이치 군을 알고는 있었어요. 모를 리가 없죠, 그 텐쇼인 가문인걸요! 학원에 텐쇼인 가문의 도련님이 입학했다, 그런 데 병약해서 학원에 나오지 않는다, 실은 그건 핑계고 아이돌 학원에 멋대로 입학했기 때문에 집안에 감금되어 있다, 사실은 그것도 연막 이고 학원을 나오는 대신 비밀리에 집안에서 개인 교습을 받고 있 다……. 이런저런 소문들이 무성해서, 정말이지 근사하다고 생각했어 요. 에이치 군, 역시 소설의 주인공 같지 않나요? 때문에 처음 보는 금발의 소년이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사 실을 친구에게 들은 후부터는, 그를 마주칠 때마다 이런저런 몽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텐쇼인 에이치는 집안에서 박해를 받고 있다 거나? 그래서 집안을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거나? 지금은 병약한 도련님이지만, 졸업 후에는 세계를 변혁하는 불세출의 영웅이 된다거 63


EIROID 에이치x레오+츠카사

삐빅, 삐빅. 알림 소리에 눈을 뜬 하스미 케이토는 무심코 귓가에 놓인 휴대폰 을 손끝으로 밀어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화면 을 켜고 확인해본 시간은 11시 37분.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이래서야……. ‘생활이 망가졌군.’ 본가에서 계속 만화를 그리기가 여의치 않아 작업실을 따로 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여러 번 밤을 새워 마감을 하고, 깨워줄 사람이 곁에 없는 생활을 반복하자 생활 리듬이 무너지고 말았다. 금방 깰 수 있도록 일부러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잔 탓에 빗장이 쑤시고 어 깨가 결렸다. 휴대폰 메시지 알림 덕분에 중간에 깰 수는 있던 게 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비스듬히 일으키고 메시 지의 발신인을 확인한 케이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 녀석은 3학년이나 되어서는 아직도 학생회 일을 스스로 못 해 내나…….” 히메미야 토리(姫宮 桃李). 네 글자로 표시된 발신인은 연초에 종 종 케이토에게 연락해서 학생회 업무에 대해 상담하던 녀석이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케이토에게 그렇게까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 다. 그 과정은 예전의 좋은 시절을 기억하게 하고, 어느 부재(不在)에 대해 상기하게 만들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척하거나 밀어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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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도 되지 못했다. 피곤을 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던 케이토는, 안경을 고쳐 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거울을 보니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방금 자고 일어나서 부 스스한 머리에, 늘어난 추리닝.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하자 마감에 찌든 만화가는 언젠 가의 귀신같은 부회장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하스미 케이토는 곧 바로 차를 몰고 유메노사키로 향했다. * * * 2년 만에 들어오는 학생회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 소한 부분들이 변해서 ― 가령 선반에 다구와 티캔 대신 귀여운 인형 들이 진열되었고 ― 세월을 실감하게 했다. 물론 가장 달라진 것은 눈앞에 있는 녀석이었다. 마냥 자그만 체구에 다른 사람에게 매달려 애교부리기를 좋아하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키가 크고 의젓해졌는지. 요정이 데려갔다가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묻고 싶었다. "불렀나, 히메미야." 그러자 학생회장, 히메미야 토리는 놀랍게도 제법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금방 왔네, 하스미 선배. 여기까지 오려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도 마실래?” “그건 됐다. 그보다, 네가 보낸 메시지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은데.” 그러자 그린 듯이 웃던 토리의 표정이 금세 흐려졌다. “별 문제는 아니야, 부회장……, 아니, 하스미 선배. 별 문제는 아 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한 녀석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은 표정을 하자, 현 83


재의 진짜 부회장이 ― 하늘색의 긴 머리카락을 보자 어쩐지 '오른팔' 쪽이 떠오르기도 했다 ― 옆에서 거들었다. “일단, 직접 보시는 게 좋겠어요.” 탁자 위에 있던 태블릿 PC를 앞으로 끌어당긴 하지메는 능숙하게 미리 저장해 놓은 주소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사이트는…….” “설명은 생략해도 된다, 시노. 노래나 영상을 업로드하는 웹사이트 인가. 나도 그림을 몇 번 투고했으니 알고 있어.” “아……. 만화가셨죠, 하스미 선배는.” 하지메가 미소지었다. “그러 면 설명은 생략하고, 일단 보여드릴게요.” 말을 마친 하지메는 검색 창에 몇 글자를 입력했다. ‘VOCALOID A’. 곧 화면에 여러 영상의 리스트가 떠올랐다. “보컬로이드는……, 물론 아시겠죠? 사람의 목소리에서 음성을 추 출해서 저장해 두고, 사용자가 지정한 악보와 발음대로 합성해서 노 래를 만드는 프로그램이에요. 그런데 지금, 처음 공개되는 보컬로이 드의 신곡이 무작위로 올라오고 있어요. 그것도 하루에 한 곡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실제 사람처럼 매력적인 목소리 탓에 반향도 엄청나 고요. 여기서, 문제는…….” 화면 위의 커서가 리스트 가장 위에 있는 동영상으로 향했다. 달칵 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면 전환이나, 화려한 연출은 없었다. 단지 검은 배경으로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에 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를 기억하고 찾아와준 여러분, 정말 고마워. 앞으로 기억해줄 여 러분에게도 고맙네. 내 이름은, A-R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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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하지.” 곧 이어진 노래가 채 한 소절 흐르기도 전에 케이토가 불현 듯 말 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토리 대신, 일시정지를 누른 하지메 가 말했다. “……저희는, 하스미 선배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보컬로 이드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나요? 아니면, 혹시 회장이…….” 잠시 망설이던 하지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말했다. “생전에, 이런 내용을 녹음한 적이 있었는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른 하지메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너무, 너무 비슷해요. 벌써 2년이 되어가니, 솔직히 이제는 회장 님의 목소리도 가물가물했어요. 하지만 이 보컬로이드의 목소리를 듣 고는, 학교 자료실에서 fine의 노래를 찾아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 랫동안 회장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제 착각이기를 기대했지만, 이 건 실제 회장님의 목소리와, 거의 오차가 없다고 봐도 좋아요……. 하 스미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케이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차마 곧바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보컬로이드가 공개된 건 벌써 3주 전. 그리고 저희는, 사흘 전 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동안 저희는 고민했어요. 토리 군 은, 그래도 이제는 제법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몇 곡을 듣고 펑펑 울다가, 히메미야 가의 재산을 총동원해서 보복하겠다고 날뛰던 것을 겨우 진정시켰어요. 우선, 경위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안하다. 이건, 나도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너희는 알아 보지 않았나?” “계정은 완전히 새로 만들었고, IP 역시 우회하고 있어요. 사람을 시켜 추적해 보았지만, 꽤 철저하게 준비해서 정체를 가리고 있는 것 85


같더군요. 역시 우선 하스미 선배에게 연락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 하지만 그 표정은……, 역시 지금까지 모르셨던 거군요…….” 케이토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참담했다. 저 많은 노래를 웹사이트에 요청해 삭제하고 폐기처분해 버리고 싶기도 했고, 혹은 그 전에 전부 듣고 저장하고 싶기도 했다.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감정에 생각을 맡기는 것은 지금 그의 몫이 아니었다. 케이토는 울컥 차오르는 상념을 머리 한구석에 밀어 넣고 말했다. “……그런데 3주 전이었다면, 너희가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지? 아, 탓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유메노사키 전대 회장의 목소리다……. 3학년 녀석들은 기억하고 있을 텐데, 이제야 알았다는 건 조금 신경 이 쓰이는군. 명색이 아이돌 학교인데, 보컬로이드에 관심이 있는 녀 석은 없었나?” 그러자 한동안 말이 없던 토리가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개하는 쪽에서 의도적으로 계획했거나……, 학생 쪽에서도 알아 도 쉬쉬했거나. 둘 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왜……?” “그런 우민 녀석들의 생각이야 ― 토리군, 예전 말투가 나오고 있 어요! 하고 하지메가 옆에서 속삭였다 ― 내가 모르지. 하지만 부회 장. 하스미 선배. 들었으니까 알지? 이건 억양부터 숨소리까지 완벽 한 에이치님의 목소리야. 이런 걸 만든 쪽에서 관련인이 알았을 때 문제시될 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뒤늦게야 안 우리 는, 기대대로 후속 조치를 취해주면 되는 거지. 가만있지 않겠어.” 하지만 케이토는 분개하는 토리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어 딘가, 마뜩찮은 부분이 있었다. 곧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말이 없는 케이토에게 토리가 재촉했다. “선배도 함께 86


할 거지? 에이치님의 일이잖아.” 그때 드르륵 학생회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드러난 얼 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케이토에게 다시 한 번 새삼스러운 기 분을 느끼게 했다. 곧으면서도 선이 수려한, 단정한 미남의 얼굴을 한 학생은 문을 열자마자 케이토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몇 초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더니, 곧 예의바르게 목례했다. “오랜만이군, 스오우.” “네. 스오우 츠카사, 지금 텐쇼인 형님의 보컬로이드에 대해 의논 하고 있다는 연락을 듣고 왔습니다.” “뭐하는 거야, 츠카사. 네가 낄 자리는 아니거든?” “그러니까 토리 군, 예전 성격이 나오고 있다니까요!” 투닥거리는 회장과 부회장의 모습을 보며 츠카사는 놀랍게도 희미 하게 웃었다. “그 돼먹지 못한 들개 같은 모습도 오랜만이네요, 토리 군. 아, 진정하시죠. 지금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러면 대체 뭔데? 그 빌어먹을 작곡가의 목이라도 가져올 게 아 니라면 가버려. 우리는 지금 바쁘니까…….” “목은 무리지만, 짐작 가는 소재지 정도는 알려줄 수도 있겠네요.” 그러자 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상 기되어 있었다. “뭐?” “하지만 토리 군이 그렇게 흥분한 개 같은 상태여서야 무리네요. 일단 조금 진정해 주시죠. 저는 그래도 그 사람이 다치는 것은 원하 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잠깐 뜸을 들이던 츠카사가 한숨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그 사람의 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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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가지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차로 내리 세 시간을 달리고, 내 린 후에도 이십 분 가량 나무와 수풀을 헤쳐서 도착한 곳은 외진 숲 한가운데의 공터였다. 츠카사가 묘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의심했을 것이다.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건가?’ 같은 의구심. 나무가 무성한 숲의 한가운데, 성의 없이 외벽에 대충 시멘트를 발라 놓은 직사각형 모양의 구조물을 ‘집’ 이라고 부르자니 미안할 정도였다. 케이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마당 을 살폈다. 흙 위에 남은 발자취나, 마당에 포대 째로 내놓은 의미 모 를 부자재를 보면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숨을 죽인 채 조 심스레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조악한 첫인상과 달리 생각 외로 집 내부는 안락했다. 벽에는 산뜻 한 무늬의 벽지가 발렸고, 난방이 잘 되어 따끈따끈했다. 다만 벽지에 빈 곳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구석구석을 채운 음표가 집 주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가 맞구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며 미로 같은 집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어느 닫힌 방문이 보였다. 집 에서 유일하게 닫혀있는 것이 어쩐지 신경쓰였다. 소리를 죽여 문을 살짝 열어 보자, 문틈으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 소 녀처럼 보일 정도로 체구가 작은 그 청년은, 무엇이 잘 되지 않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다가, 기척을 눈치챘는지 옆을 돌아보 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오.” 작업실 가득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오선지. 그리고 화면에 보이 는 작곡 프로그램의 주파수.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었다. 레오는 자리 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빙글 몸을 돌려 쾌활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빨랐네, 하스밍. 찾아온다면 네 쪽일 거라고 생각하긴 88


했어. 하지만 어떻게 알았지? 나, 꽤 신경썼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츠키나가.” “안 되지. 내가 먼저 질문했어. 네 질문은 먼저 대답한 다음이야.” 순간 케이토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두어 개 생겼다. 그래도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정시에 맞추어 업로드하는 신곡 투고 패턴. 곡의 장르에 따라 서 수십 개의 가명을 쓰지만, 시기에 따라 선호하는 악기가 달라지지. 네 녀석은 정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팬을 너무 얕봤어, 츠 키나가.” 그러자 레오는 기분이 좋은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팔을 들어 올렸다. “와하하, 팬인가! 생각도 못했잖아. 좋아, 항복이야! 사랑에 패배한 왕이라니, 기분 좋은 악상이 생각날 것 같아! 마침 여기 빈 자 리가 있잖아!” “정말이지 네 녀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전에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조용히 해 봐, 하스밍. 지금이 이 골방에서 세기의 명작이 탄생하 는 순간이니까!” “어째서 에이치의 보컬로이드를 만들었지? 심지어 프로그램 배포 일자로 간을 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더군. 대체 이유가 뭐지, 츠키나가? 별 이유가 없다면, 그저 네 녀석의 흥미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고인을 능욕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라.” “싫어.” 레오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네 녀석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 거냐.” “하늘? 아아, 지금 하늘에 계신 폐하 말인가? 왕이니 황제니 했지 89


만, 난 그 녀석의 가신이 아냐. 망령의 하명에 따르는 취미는 더더욱 없고. 아니면, 하스밍 너 그런 거냐? 무당? 전령? 죽은 자와의 교신? 그 녀석이 뭐래? 그쪽 세계는 살만하다냐? 아, 사는 곳이 아니었군. 실례.” “장광설하지 마라, 츠키나가. 왜 그랬느냐고 묻는 거다. 에이치의 목소리를 샘플링하고, 노래를 배포하고……. 네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네가 고인을 욕보인다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어.” “하하, 난 원래 그 녀석을 싫어했어! 있잖아. 취향을 말할 때 기호 라는 표현은 너무 안이하지 않아? 호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우리의 혐오는 우리의 선호보다 우리를 더 정직하게 나타낸다! 츠키 나가 레오는 텐쇼인 에이치를 싫어했고 앞으로도 싫어할 것이다. 그 래서 그랬어. 그게 새삼스러운가?” 케이토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마른기침을 하며 안경을 고 쳐 썼다. 레오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안경 가를 만지작거리던 케이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싫어했든, 좋아했든……. 어쨌든 좋아. 그 과정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냐고 묻고 있는 거다. 에이치와 관련된.” “헤에. 만약에 있다면 뭐가 달라지나? 저지른 일과 현상과 기억이 사라지기라도 하나? 그리고, 하스밍.” 레오는 케이토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씩 웃었다. “그런 게 있어도 내가 너한테 말하겠어?”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토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데려왔지. 인사해라.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어 보라고.” 달칵,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90


그리고, 수 초간 방에서 아무 소리도 없었다. “으…….” 레오는 방금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짧게 들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츠카사가 되려 놀랄 만큼 와락 달려들었다. “와하하. 스오! 스오냐! 오랜만이네! 나의 기사님, 아니 임금님!” “놀라는군.” “당연하지, 스오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나의 후계자, 적통!”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Leader. 저도 궁금합니다. 왜 그런 일을 했나요?” 레오를 바라보는 츠카사의 눈빛은 여느 때와 같이 순수하리만치 진지했다. “왜 텐쇼인 형님의 Vocaloid를 만들었는지,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 으면서,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만든 것은 왜 퍼뜨렸는지, 그리고 왜 바꾸었는지, 왜 모습을 감춘 채로 그랬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 세요. 알고 싶어요. 이해하고 싶어요, Leader.”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적어도 저에게는 영문 모를 소리 하면서 모르는 체 밀어내지는 말 아 주세요……. 약속했었잖아요?” 그러자 레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츠카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었다. “아, 그래. 인정할게. 어쩐지 너 침착했어! 주먹은 안 내질러도 소 리는 지를 줄 알았는데. 숨겨둔 패가 있었구나, 복마전이었어!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하스밍도 사회인 삼년이면 수를 쓰는 거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뭐, 좋아. 솔직히 반가운 얼굴이기도 하고. 우리 어린 왕에게는 아 직 이것저것 알려줄 의무가 있지……. 약속했으니까.” 91


케이토가 눈에 띄게 반색하자 레오가 금방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스오에게야. 하스밍 너에게는 알려줄 생각도 없고 알려줄 의무도 없어. 너는 여기서 돌아가. 같이 온 녀석들이 있다면 그 녀석 들도 전부 돌려보내. 응대할 것도 없고 말이지~. 그게 내 조건이야.” 잠시 생각하던 케이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대로 '왕'이 된 스오우라면 믿을 수 있다.” 그러면서 흘끗 츠카사 쪽으로 눈짓을 했다. 그러자 레오가 경계하 듯이 츠카사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우리 스오가 하스밍 너한테 그대로 고하리란 생각은 마.” 레오는 츠카사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뺨을 꾹꾹 눌렀다. “얘는 내 편이라고? 내 후계자라고? 안 돌려보낼지도 모른다고?” “도발은 그만둬요, Leader……. 물론, 당신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왔습니다만…….” 츠카사가 어쩔 줄 몰라 뒤에 있는 레오와 케이토를 번갈아 쳐다보 는 동안, 케이토가 다시끔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엄격한 눈빛 이었다. “츠키나가가 수상하게 굴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 그럼.” 케이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자, 레오는 기다렸다 는 듯이 문을 달칵 잠갔다. “Leader?” “우리 꽤 오랜만에 만났는데.” 츠카사의 팔에 매달린 채였다. “나보다 질문이 먼저인 거야? 오래 보지 못한 불량 리더보다는 이 제 착실한 하스미 선배가 좋은 거야?” 츠카사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92


그리고 결심한 듯 눈을 번뜩 뜨고 말했다. “애초에 주소도 남기지 않고 잠적한 건 Leader잖아요. 말 돌리지 마세요. 이건 대결 구도도 아니고 누구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하러 온 거예요.” 레오는 뺨을 푸 부풀리다가, 츠카사에게서 몸을 떼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 각오하고 온 거구나? 너도 남자라는 거지, 한 명의 왕이라 는 거야. 훌륭하다, 훌륭해.” 박수 소리가 곧 멎었다. “하지만 권고하는 건데, 네가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들을 의무는 없어. 나는 졸업했고, 그 녀석은 죽었다. 추잡하고 우스꽝스러운 촌극 대신 너는 너의 왕국에 전념하면 되잖아.” “물론……. 왕좌는 힘듭니다. 너무 높아서 현기증이 나고, 너무 많 은 것이 눈에 들어와요. 저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멤버들을 가족으 로서 책임질 의무, Knights의 긍지가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보 고 관리할 의무, 그리고 학원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분명 제 의무 중에 하나겠죠…….” 말끝을 흐리던 츠카사가, 레오의 팔을 붙잡았다. “이 따위 얘기는 그만두고, 그냥 당신들과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으로서 알고 싶다. 는 말로는 불충분한가요?” “고작 그 정도로 망자의 사생활을 파고들겠다고?” 보라색 눈과 녹색의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 고, 곧 레오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같은 건, 정말 내가 할 소리는 아니네에.” 레오는 그대로 츠카사의 어깨에 풀썩 쓰러지듯이 기댔다. “응. 이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알려 93


주는 게 좋을지도. 그게 스오 너라는 건 좀 망설여지지만, 너이기 때 문에 말할 수 있는지도 몰라. 너는 우리 둘 다 좋아했으니 공정한 사 관이 되겠지. 나도 무거워. 원혼 같은 거……, 덜어내고 싶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던 레오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아. 역시 그래도 싫어! 무거우면 어때, 나는 네게 주의를 주는 거야. 분명히 경고하는 거라고. 왕과 황제의 치부가 정말 듣고 싶어?” “네, Leader. 오랜만에 만났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얼마 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는 처음 볼 때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하하.” 레오는 허탈한 듯도 상쾌한 듯도 한 낯으로 웃었다. “맞아, 나는 형편없지.” “저는 그런 점을 동경했고.” “알았어, 알았어. 얘기할 테니까 예쁘장한 얼굴로 막무가내 소리는 그만해.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시한 이야기야. 다 내가 평소처 럼 즉흥적으로 멋대로 벌인 일뿐이고 말이지.” “저에게는 시시하지 않아요.” “어, 그렇게 똑바로 말하면. 말하는 내가 시시해져 버려서…….” 잠시 멍하니 있던 레오는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발 자국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놓인 악보 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츠카 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런 걸 네게 말해야 한다니 우스운 이야기야. 촌극이야. 하지만 약속했지. 자, 가자. 이야기를 하면서, 하스밍 말대로 회포라도 풀고. 그러기엔 우린 서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같지만. 아, 어쩌다 좀 복 잡해졌는데 이쪽 일은 따지자면 정말 별 거 아닌 사정이야. 듣고서 실망해도 책임 못 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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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언어 에이치x안즈

장미향기가 잔뜩 났어요. 아주 코를 찌를 지경이었죠. 우리 황제 폐 하께서는 꽃에 둘러싸여 차 마시기를 좋아하시니, 장미를 산더미처럼 쌓아 보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시는 흰색 장미를 하얗고 하얗게 쌓았어요. 그런데 도무지 기분이 좋아지실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 하죠. 아, 이제 황제 폐하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려나요? 에이치는 학원을 졸업했으니까요.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니군요. 결코 잊지 못할 졸업식이었죠. 졸업식의 마지막 공연은 물론 학원 정점인 우리 「fine」이 맡았습니다. 아아, 「fine」의 「마지막」이라니 이 얼마나 유 쾌하고 영광스러운가요? 귀여운 토리는 분명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알 고 있어요. 제법 영악한 아이입니다. 작은 몸에 하얀 유닛복을 앙증 맞게 걸치고 발을 구르고, 보는 사람이 웃음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애교를 부리죠. 그날은 특히나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답니다. 주인이 힘을 잔뜩 냈으니 원래도 완벽한 유즈루야 말할 여부가 있겠 습니까? 물론, 이 히비키 와타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무대에 입장할 때 마다 탄성과 환호를 듣는 일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네, 확실히 그날의 공기에는 평소의 무대보다도 더 뜨겁고 애태우는 무언 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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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팡파르 속에서 황제 폐하가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거짓말 처럼 환호성이 멎고 모두가 숨을 죽였어요. 에이치는 천사 같았어요.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가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랍니다. 갓 하늘에서 내려와서, 금방 다시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천사요. 희끄무레 웃는 에이 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그 어느 무대에서보다도 아름다 웠습니다. 이것만은 제가 살아온 세월을 걸고 확언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습니다. 황제는 무대에서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학생회장이 병원에 실 려가는 동안 졸업식은 끝났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꿈의 학원도, 한단지몽도, 무지갯빛의 서커스도 모두 끝났고 지금은 모라토 리엄입니다. 그래도 아직 유예기간이 조금 남았죠. 원하던 대로 무사히 졸업을 했고, 거기에 조금 더 시간이 남았는데 왜 그리도 심통이 난 채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광대가 풀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에이치는 한 송이를 들고 장미 향기를 맡는 듯 얼굴을 가져다 대더 니 주먹을 쥐어 손에 쥔 꽃잎을 우그러뜨려 버리더군요. 그리고 내던 졌습니다. “꽃이 마음에 차지 않나요?” “응.” 참, 별일입니다. 곧 쓰러질 듯 아플 적에도 언변은 유창했던 우리 폐하가 아닙니까? 그런데 짧은 단답에 입조차도 꾹 닫고 있으니 어쩌 겠습니까. 광대는 광대의 일을 하고, 폐하가 꽃이 성에 차지 않으신다 면 성에 찰 만한 것을 가져와야죠. 그래서, 특히나 향이 빼어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장미를 대령해 106


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전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히비키 선배. 아무튼 텐쇼인 선배가 이 저택에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걸 저택이라고 할까요, 병원이라고 할까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부른 거죠? 텐쇼인 선배의 상태를 보러 와 달라, 는 말은 들었지만 왜 하필 저인지…….” “아아, 학원의 모두가 곤란할 때 부르는 사람이라면 응당 프로듀서 인 당신 아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기는 하네요! 이제 저는 학원의 학생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그 끈으로 이곳에 남아있답니다.” “……선배는 가끔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해요. 아무래도 좋아 요. 그래서 저는 간병을 하면 되나요?” “당신답지 않게 뾰족한 태도로군요. 병적으로 남을 돌보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만! 혹시 하기 싫은데 억지로 온 겁니까?” “……아뇨. 단지, 의문이 들어서. 전문 간병인이라면 텐쇼인 가문의 재력으로 고용할 수 있을 테고, 말벗이라면 저보다는 하스미 선배가 좋겠죠. 하스미 선배는, 요즘도 많이 바쁘신 걸까요?” “케이토는 화가 나 있어요. 에이치가 입원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설비가 있는 곳에서 치료받는 쪽이 승산이 있으 리라 믿는 거죠, 딱하게도.” “그건 저도 동의하는데요. 텐쇼인 선배는 떼를 쓰는 어린애도 아니 잖아요. 냉정하게 가능성을 따져봐야 하지 않나요?” “글쎄요, 몸보다 마음이 먼저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극 아니겠 습니까.” 장미 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군요. 오랜만이라고 몰 라볼까요, 그녀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할 때의 눈빛입니다. 107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텐쇼인 에이치는 꼭 어떤 것에서도 의 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 같습니다. 저는 그래도 에이치라면 의연하게 이 시간을 맞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에게는 사람을 지 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습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도 힘든 거겠죠.” “그 사람은,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아아,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저로서도 당황하고 만 것 이죠! 하지만, 당신은 기적의 프로듀서가 아닙니까? 하하, 그런 표정 하지 마시고요. 분명히 인간은 히비키 와타루와 그 외의 사람으로 나 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제3의 분류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니까요. 마 음의 간병을 부탁할 사람이라면 당신 외에 따로 생각나지 않는군요.” “과찬이에요. 그저 우연히 모두가 저를 좋아해 주었을 뿐이고…….” “우연의 일치라,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서로 적대하던 사 람들이 당신에게 이끌려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던 수백 수천의 우연. 우연이 그렇게 겹치고 또 겹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신이라고 하죠! 이런, 당신은 저보다 도 상위의 존재로군요.” “……휴. 됐어요. 더 이상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내가 왜 여 기 왔는지 잊어버릴 것 같아. 그래서, 텐쇼인 선배는 어느 쪽에 있나 요?” “물론 안내해드리죠. 무도회로 공주님을 모시는 안내인처럼, 정중하 게. 따라오겠습니까?” 무도회라고 말은 했지만 이곳이 과연 무도회일까요? 전학생 씨는 이런 모습의 에이치를 보는 건 처음일 텐데요. 그래도 에이치가 설마 이 장미마저 내던지기야 하겠습니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기, 히비키 선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전학생 씨는 제 뒤를 따라오지 않고 꼼지 108


락거리고 있었습니다. “저……, 잠시만요. 준비를 할게요. 저, 텐쇼인 선배는 아직도 조금 무서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장미는 작게 웃었습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어깨 를 움츠리고 팔을 교차해서 꽉 깍지를 낀 채로 난처하게 눈썹을 찌푸 리며 웃었습니다. * * * 뭐, 가는 길은 제법 무도회를 닮았습니다. 벽은 청결하고 금빛의 장 식은 정갈하나 품위가 있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궁전이니까요. 에이치 의 취향대로 꾸민 건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전학생 씨는 두리번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저를 따라옵니다. 에이치의 방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죠. 전학생 씨는 이쯤에서 제법 왕자님의 궁전에 들어서는 공주님의 기분 이 되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방문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에이치. 안에 있습니까?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가 왔습니다.” 방에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럼, 들어가지요.” 저는 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습니다. 전학생 씨가 쭈뼛 쭈뼛 제 등을 넘어다봅니다. 에이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방안에서는 미동조차 없었으니까요. “일어나세요, 에이치.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있을 참인가요? 자아, 몸을 일으켜 기쁨으로 새 장미를 맞아주세요.” “……대체 뭘 가져온 거야, 와타루.” 등 뒤에서 전학생 씨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에이치의 목소리 는 갈라지고 가라앉았습니다. 아마 그녀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목 109


소리일 겁니다. “Amazing! 모두의 해결사, 민완 프로듀서님이 당신의 궁을 방문하 셨답니다. 물론 기쁘게 맞아주시겠죠?” 그제야 에이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는군요. 밖에 들리지 않게 마 른기침을 두어 번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환자가 몸에 밴 황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군요. 전학생 씨가 조심스럽 게 방 안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에이치가 빙긋 웃자 전학생 씨가 안도 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거 오랜만이야, 안즈쨩. 내 상태가 보다시피 썩 좋지가 않아, 손 님 대접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미안하네.” “괘……괜찮아요, 선배. 당연한 거죠. 아니, 당연히 제 쪽에서 텐쇼 인 선배를 도와드려야죠. 이런 걸로 미안해하시면 제가 민망해요.” “응. 그래도 역시 미안하니까…….” 에이치가 눈을 반 접어 웃습니다. 묘하게 반박하기 힘든 미소입니 다. 그가 소꿉친구에게 자주 보여주는 것이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요? “날이 밝는 대로 떠나, 안즈쨩.” “네?” “이건 내가 불편해. 오늘 바로 떠나기에는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단 입구의 손님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 될 거야. 떠나기 전까지 식사나 시설은 모자라지 않게 제공될 거고. 그렇지, 와타루?” 이건 아니죠. 도대체가 에이치는 제 입장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반박하려고 하는데, 전학생 씨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 “응?” 또 예의 그 미소입니다. 전학생 씨가 입술을 깨뭅니다. 바로 뭐라 110


대답하기 힘든 게로군요. “그러면 부탁해, 와타루. 나는 지금 놀라고 피곤해서 조금 쉬고 싶 어. 일단 안즈를 방으로 데려다주겠어? 나와는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아, 에이치가 이 장미마저 내던질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요. 이제는 저도 어떻게 해 야 좋을지 알 수 없군요! 일단 풀죽은 전학생 씨를 다시 데려갑니다. 에이치와 이야기를 따로 나누어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 * * “미안합니다. 에이치를 놀래 주려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쌀쌀맞게 굴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에이치는 나름대로 박애주의자 이지 않습니까. 이제 졸업했다고 그 사랑도 벗어버린 걸까요? 모르겠 습니다. 아아, 완벽하게 저의 불찰입니다.” “에이, 아니에요. 정말 지금 히비키 선배도 당황한 것 같고……. 이 런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진귀한 경험이네요.” 장미 양은 짓궂게 웃습니다. 이런 점은 에이치와도 닮았죠. 미안해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겠지만요. “아무튼, 텐쇼인 선배가 불편하다면 저는 돌아가야겠지만요, 여기는 선배가 머무는 장소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께름하네요. 확실히 예 전의 그 사람 같지 않아요. 선배가 왜 걱정했는지 알 것도 같아요.” “그렇지요. 아무래도 저는, 에이치에게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아 무리 폭군이라도 황제 폐하의 기분을 풀어드리는 것이 광대의 의무랍 니다.” “응, 그럼…….” 전학생 씨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이고 아이처럼 해맑 111


게 웃는군요.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여기서 앉아 있는 걸로 충분하니까.” 어쩐지 무언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어쨌든, 지금은 에이치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시 에이치의 방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습니다. “안즈와는 관계없잖아.” 그게 제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이상한 말이네요. 당신이 그렇게 선을 긋는 사람이었습니까? 어째서 화난 얼굴인가요. 당신은 전학생 씨를 특히나 흥미로워하지 않 았나요? 지치거나 분란이 있을 때도, 전학생 씨 이야기가 들리면 새 장난감을 가진 아이 같은 얼굴이었죠. 전학생 씨라면 분명 조금쯤은 당신의 흥미를 돋울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지루한 재계 인사들이 불쑥 찾아올 때도 겉으로는 웃었던 당신이 왜 그렇게 전학생 씨에게 무안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돌아가기 전에 사과하지 않을 겁니 까?” “하고는 싶지. 하지만 안즈는 가끔 나를 불편하게 해. 네가 대신 전 해줘.” 잘도 잔인한 소리를 하는 황제님입니다. 전학생 씨가 돌아가고 나면 아마 에이치는 다시 그녀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겁니다. 제가 대답하 지 않자 에이치가 칭얼거립니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들어주다마다요.” 이것은 물론 우리 둘 다 유언을 전해주는 형태가 될 것을 상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에이치의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하는 말입니다. 방에서는 병의 냄새가 납니다. 에이 치가 창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밤바람은 건강에 해롭겠지만, 어쩌겠 112


습니까. 창문을 천천히 밀어 열자 까만 밤이 밀려 들어오고 그제야 에 이치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자에서 눈을 붙이던 저는, 다음 날 아침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음, 아니 이거 전학생 씨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아침에 가기 로 했던가요. 에이치를 돌보아야 하니 데려다주는 건 무리입니다만, 에이치에게 운전수를 불러 달라고 할까요?” “저에게 거짓말을 했군요, 선배.” 잘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확실하군요. 성난 얼굴 의 전학생 씨가 휴대폰을 쥐고 제 눈앞에 흔듭니다. “하스미 선배에게 연락했어요. 텐쇼인 선배의 상태가 이상하니까, 크게 바쁘지 않다면 곁에 있어 주시는 게 낫겠다고. 그런데. 선배가 화 난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떠난 건 아니라면서요.” “아아, 맞습니다. 지금 에이치의 상태는 케이토가 어떻게 할 수 있 는 영역이 아니죠. 엄밀히 말하자면 케이토는, 에이치의 차트를 들고 만의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서 각국을 누비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에 이치의 상태가 악화된 원인을 의료진 누구도 구명하고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공기 좋은 곳에나 머무르고 있는 거죠. 이해가 되 었나요?” “그건, 이상해요. 아니,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제가 이해가 되지 않 는 건……, 텐쇼인 선배는 그렇게 자신을 내버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은 무대 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더라도, 탈출한 사자를 보고 놀라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병이 원인불명이라고 자 포자기한다고요?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제가 알던 텐쇼인 선배가 아 니에요.” “말했잖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당신을 불렀던 거 113


지요.” 전학생 씨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습 니다. 그대로 서 있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하스미 선배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본인이 갈 때까지 텐쇼인 선배 를 책임지고 보아달라고.” “안 돼, 안즈.” 에이치가 깨어났군요. 이렇게 시끄럽게 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 한가요. “돌아가. 나는 네가 불편하다고 말했어.” “선배가 그런 식이니까, 갈 수 없어요. 그렇게 되는 대로 내버려두 라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하스미 선배와 약속을 했어요. 그러니 선배 가 지금 이런 모습이어서는 갈 수 없어요.” 강경하게 선고하던 전학생 씨가 이윽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선배는 제가 그렇게나 불편한가요? 한때 대립하고 있었으니까? 처 음부터 당신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전에도 그렇게 얘기하 셨어야죠.” 그녀는 어쩐지 울컥하는 것 같습니다. 에이치가 한숨을 내쉽니다. “……좋아.” 전학생 씨가 그제야 손을 비껴 에이치를 다시 바라봅니다. “너 좋을 대로 해, 안즈쨩. 네가 그렇다면 내가 강제할 수는 없어. 하지만 곧 떠나고 싶어질 거야.” 어느새 환하게 날이 밝았고, 방안에 햇빛이 비추어 들어옵니다. 창 가에서 새 소리가 납니다. 전학생 씨는 심경이 복잡해 보였지만, 일단 은 허락받은 것만으로 안심한 듯 아까보다는 얼굴이 밝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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