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night mister love sa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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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 |

서정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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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 10p

영안(英眼)

…………………… 13p

7p

만남 길들임과 길들여짐

…………………… 20p

wired

…………………… 28p

흐르고

…………………… 39p

고인 곳

…………………… 43p


교차 모순

…………………… 48p

농담

…………………… 52p

장난

…………………… 57p

연금술사의 하루

…………………… 61p

안녕 Breath Control

…………………… 78p

채워지는 것에 대하여

…………………… 80p

소나기(fin.)

…………………… 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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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20xx년 7월 14일, 이츠키 슈는 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책을 읽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탓에 근육이 뭉친 데다, 피로로 몸이 무거워 바닥에 눌어붙을 것 같았다. 수화물을 찾는 것도 통관 절차도 번거롭게 느껴져 어서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귀에 들어 오는 모국어는 정겨웠지만, 아직도 딱히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 지 않았다. 얄브레한 가디건을 걸친 채 캐리어를 끌고 사뭇 기계적으 로 걸어가던 이츠키 슈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년간 보지 못한 얼굴을 떠올렸다. 창백하다시피 희게 마 른 얼굴에 기이할 정도로 밝은 눈동자가 눈에 띄는, 꽤나 강렬한 인상 이지만 여전히 앳된 기가 남아있는 청년의 얼굴. 그래, 이 나라에는 그 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제야 이츠키 슈는 생각한다. 나는 돌아왔어.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공항과 캐리어 바퀴 끌리는 소리, 구두 소리가 소음처럼 페이드 아웃되고 머릿속을 스치는 카게 히라 미카의 목소리. 스승님. 슈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으며 느리게 눈 을 깜박였다.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한데, 이 목소리가 정말 미카 의 것이 맞는지 아니면 자신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되뇌다가 그려낸 환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갑작스러운 일정 때문에 온 도쿄였다. 미카에게 말하면 자신의 일 정을 무리하게 빼서 공항에 마중 나올 게 뻔하기에 일부러 말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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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임과 길들여짐

애완동물을 데려오는 감각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본가에서 순종적이며 얌전했고, 색이 예쁘고 보기 좋았으며, 밥도 그리 많이 먹지 않았다. 선뜻 손을 내밀자 믿을 수 없다는 듯 깜박대는 두 눈이 인형 같았다. 앞으로 이 무해하고 무 력한 생물의 삶을 책임지게 된다는 전능감이 있었다. 가엾은 아이를 데려와 멀끔하게 키워내, 결혼까지 지켜보는 이야기 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청결한 옷 을 입고, 예절을 배우고, 훌륭한 숙녀로 자라난 코제트가 외간남자와 결혼해 떠나자 장 발장은 결국 상심하고 쇠약해져 죽고 말았던가? 느 닷없이 불길한 결말이 떠올라 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유메노 사키 학원의 ‘제왕’인 자신이 그렇게 몰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명예, 돈, 친구가 있으면 세상 대부분의 일은 쉬워진다. 이츠키 슈 는 열일곱의 나이에 세 가지를 전부 갖추고 있었다. 안 그래도 늘 내 심 본가에서 나오고 싶었고, 마침 저번 방송의 출연료가 들어와 통장 의 잔고도 적지 않게 두둑하니,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였다. 이츠키 슈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졸졸 따라오던 카게히라가 멍하니 눈을 깜박인다. 파란색과 노란색의 눈동자 두 쌍이, 깜박깜박. 티 없이 서글서글 말간 눈동자와, 치켜 올라간 눈매와, 희고 갸름한 턱선과, 빼빼 말랐지만 제대로 자리 잡은 골격이,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소재인지도 모르는 예술품이 거 적때기나 다름없는 허름한 옷에 둘둘 싸인 채 반짝반짝. 위아래로 훑 어보며 씩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카게히라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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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곳

이제는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그 애는 그 애를 좋아한다고. 늘 곁에 있고 싶어하고,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싶어 하고, 눈길을 끌고 싶어서 목소리를 높여 뛰어다니고, 그 정도로는 모 자라 새벽 숨부터 오후 단꿈까지 소유하고 싶어한다고. “뭐, 생각해보면 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지……?” “이츠키 선배 본인만 빼고 다 알걸. 어련히 모르는 척 해줘야지.” 그렇게 주변을 떠도는 재잘거림 속에서 이츠키 슈는 언제나와 같았 다. 가늘고 긴 팔을 들어 아침 요리를 하고, 옷의 치수를 재고, 레이스 를 뜨고 무대를 그렸다. 그러므로 카게히라 미카는 제 마음도 언제나 와 같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터질 것 같은 마음도 더 커질 수가 있 는 모양이었다. “카게히라. 앞치마를 부탁하마.” 미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오자, 앞치마를 입은 채 반쯤 등을 돌린 슈가 보였다. “어……? 이거 매달라고?” 대답 대신 슈가 뒷걸음질로 두어 발짝 다가가자 미카는 엉성한 품 으로 등 쪽에 달린 끈을 양손에 쥐었다. 미카는 아직도 잠이 덜 깨어 몽롱한 눈을 들었다. 코앞에 살짝 숙인 하얀 뒷목이 보인다. 아침에 샤워를 한지 얼마 안 됐는지 달큰한 샴푸 냄새가 나고, 머리카락 끝에 살짝 물기가 남아 있다. “뭐하고 있는 거지?” “어, 어? 이게 잘 안 매지네.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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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어릴 적 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어들은 늘 비슷했다. 아름답 고, 인간을 쉽게 사랑하고, 세상에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미지근한 물 을 채운 욕조에 손을 담그고 슈의 하얀 살결을 닦아내면서 미카는 이 야기 속의 인어들을 떠올렸다. 세상이 그리운 듯, 세상을 떠날 듯 야 트막한 물속에 잠겨 지느러미를 꿈틀대는 인어들. 뽀그르르. 욕조에서 포말이 일었다. 민감한 부위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긁어내자 슈 가 읏, 하고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제지하지는 않는다. 미카 는 허벅지 안쪽의 붉은 자국 위에 비누를 대고 문질렀다. “안 지워지네.” “쯧. 웬만하면 자국은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 남자랑은 오래 안 만나는 게 낫겠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응, 스승님이 알아서 하겠지.” 스승님은 완벽하니까. 미카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자 슈가 문득 가려운 듯 물속에 잠긴 다리를 꼬았다. 지느러미를 꿈틀대듯이. 아름 답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고 세상에서 금방 떠나버리는 인어들. 미카는 손에 꽃향기가 나는 거품을 묻혀 남은 정사의 흔적을 조심스 럽게 닦아내었다. 혹여나 거칠게 만지면 당신의 비늘이 상할까, 정성 스러운 손길로 닦아내었다. 이츠키 슈가 느닷없는 커밍아웃을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남자가 더 좋아. 헤에, 그랬구나. 미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람을 만날 거다. 공개연애를 한다는긴가?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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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의 하루

1.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2.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눈을 뜨고 창밖을 보면 이미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지붕 위 첨탑까지 올라 있는 느지막한 아침. 길게 기지 개를 켜고 탁자 쪽을 보면 계란과 호밀 빵으로 차린 간소한 식사가 있 다. 보통 연금술사와 그의 제자라고 하면, 식사나 잡무를 챙기는 것은 제자 쪽이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집의 하녀들이 챙겨주면 되는 것 이 아니던가? 하지만 슈는 굳이 자신이 미카의 식사를 준비하기를 고 집했다. “사람은 적당량의 고기와 곡류, 과일을 먹어야 해. 특히 너처 럼 말라비틀어지고 내장이 뒤틀려 아무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꼴불견 인 녀석은 더더욱 그렇다. 더 이상 내게 실패작처럼 거치적거리지 마 라.” 미카는 빵을 한 손에 들고 냠 베어 물었다. 맛있으니까, 스승님의 그런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인들이 사는 곳보다 별달리 나을 바 없는 다락방에 머물고 있지 만, 슈에게 딸려서 이곳에 묵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작은 손거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옷깃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 안 그러면 슈가 또 잔소리를 할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는 않지만 오늘은 참아야지 ― 펜과 종이 더미를 챙겨서 2층으 로 향했다. 복도를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방문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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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th Control

‘그 행위’를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새 둘 사이의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함께 연습을 하던 중이든, 요리를 하던 중이든 어느 때든 미카가 슈의 손을 끌어당겨 손끝으로 더듬다 가 검지와 중지 마디 사이의 움푹한 곳을 찾아 누르면 그것이 신호였 다.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진 슈이지만 처음 미카에게서 청을 들었 을 때는, 기겁했다. 그런 행위를 따로 칭하는 용어가 있는 줄은 나중 에야 알았다. 그래도 어차피 녀석이 일종의 쾌감을 원해서 청하는 것 이라면, 성교 따위보다는 이 쪽이 안전하고 위생적이고 간편하지 않 은가. 처음 승낙할 때는 그런 계산이었던 듯도 하다. 미카는 슈의 손을 잡아끌고 가까운 벽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새처럼 몸에 힘을 쭉 빼고는, 앞에 선 슈의 손을 잡아, 제 목 위에 올리는 것이다. 긴 손가락이 목을 감싸고, 그 손은 다시 미카의 손이 감싸고 있다. 미카가 목이 길게 빠지도록 고개를 들고 눈을 까닥 거린다. 이제 손에 힘을 주면 되는 차례이다. 하지만 레이스를 뜨고 수를 놓던 손에 우악스런 행위는 익숙하지 않아, 행위는 오히려 조심 스러운 시험의 단계에 가깝게 된다. 아직 채 굵게 여물지 못한 소년의 가느다랗고 하얀 목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천천히 엄지 끝에 힘 을 가할수록, 벌어지기 시작하는 미카의 입술과 흐려지기 시작하는 눈빛. 그리고 동시에 스멀스멀 쾌감처럼 온몸을 죄어오는 것들. 손끝 의 미세한 힘의 조절에 상대의 쾌감이 온전히 달렸다는 사실에 대한 묘한 달성감과, 여기서 자칫 조금만 실수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과, 자신의 손 위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는 양손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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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fin.) 그런 순간이 있다. 문득 미뤄둔 일들을 하고 싶어지는 날. 빗자국이 남은 창문을 닦으며 집안을 말끔하게 청소하기도 하고, 늘 지나다니는 길에 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던 가게를 부러 찾아가 향초를 사기도 하고, 언젠가 만들어보리라고 벼르고 있었지만 정말로 시도한 적은 없는 디저트의 레시피를 노트에 적고 식료품점에 가서 재료를 사기도 하고. 그렇게 기억 한 구석에 잊고 있던 사소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하는 날. 그 날도 딱 그런 날이었다. 화분에 영양제를 꽂고 싶었고, 정오에 빛이 너무 눈부신 창가에는 반투명한 아이보리색 커튼을 달고 싶었고, 카게히라 미카에게 편지가 쓰고 싶었다. 마지막 소망은 너무나 강렬 하게 다가왔으므로 그 생각을 한 순간 이츠키 슈는 자신이 그 전까지 무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전부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편지지는 무엇이 좋을까? 무늬는 있는 것이 좋을까, 없는 것이 좋 을까? 지우기 좋게 연필을 쓰는 게 좋을까, 아니면 편지인 만큼 만년 필을 쓰는 게 좋을까? 하지만 고민보다도 충동이 강했다. 이츠키 슈는 서랍을 뒤져 손에 잡히는 편지지와 필통을 가죽 가방에 집어넣고 집 을 나섰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설탕을 넣지 않은 진한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매주 오는 카페에 도착한 이츠키 슈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오늘과 같은 일요일,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다가 일 년 만에 도쿄에 왔던 날. 아니, 정작 그 날에는 이 카페에 얼마 있지도 않았었지. 졸인 꿀이나 장마철 저녁의 하늘같던 연인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슈는 피식 웃었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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