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where over the star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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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외곽을 거닐다 보니 바람결에 물비린내가 끼쳤다. 밤 느지막한 시간의 거리는 한적했다. 길에 가로등이 드문데도 어쩐지 어둡지 않았 다. 고즈넉한 밤길을 죽 돌아보던 안톤은 지평선 위에서 찬찬히 발을 옮기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멀리 있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가까이 갈수록 확연하게 체구가 작았다. 작은 몸에 비해 성숙한 차림의 소녀는 하염없이 하늘을 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안톤도 따라서 눈을 들어보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세상에 비해 자신이 아주 작게 느껴지는 순간들 이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까만 하늘에 알알이 별빛이 가득해 눈이 멀 듯했다. 불빛이 드문 거리라 은하가 더욱 눈에 시렸다. 황홀한 광경에 넋을 놓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든 채로 걷고 있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에 아주 정신이 팔린 모양새였다. 저 러다 넘어질라. 신경이 쓰인 안톤은 다가가 작은 어깨를 툭툭 쳤다. 소 녀가 돌아보았다. “크로우?”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곧 웃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는 친구가 생각나서요.” “친구? 근처에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 “그 친구는 지금 멀리에 있어요.” 말갛게 고운 웃음이었다. “……그래도 늘 가까이 있는 기분이라서.” 말을 마친 소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 리기 시작했다.




Somewhere Over the Starlight 1. 우주 먼지 ………… 5 2. 궤도 ………… 24 3. 스텔라 가르텐 ………… 43 4. 이심률 ………… 62 5. 혜성 ………… 99 6. 유성 ………… 102 7. 은하수 ………… 106



1. 별은 우주 먼지에서 시작한다

칠요력 1203년 가을, 에레보니아 제국의 수도 헤임달 부근은 말도 안 되게 날씨가 좋았다. 평년보다 햇볕이 보드랍고 바람이 적당히 선선 해, 근교 트리스타에 있는 사관학교 학생들이 활동하기 딱 좋은 나날이 었다. 엄격한 하인리히 교감도 기분이 누그러져 부드러운 말씨로 면학 에 힘쓰길 권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맘때 많은 학생이 책에 얼굴을 묻 고 공부에 열중했다. 각 동아리마다도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용무에 힘쓰는 학생도 있었다. “헤헷. 여기서 7이다. 어떠냐? 형님은 못 따라오겠지?” “볼-트! 크로우 형아 여기서 또 당하지!” “어 잠깐 잠깐. 우리 한 번씩만 물리지 않을래?” “내기 게임에서 물리는 사람이 어딨어? 형이 전에 그렇게 말했잖 아?” “저번에 주기로 했던 과자 안 갖다 준다?” “와, 치사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지고선…….” 한바탕 일어난 소란에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물릴 필요 없단다.” 그리고 소녀의 쨍한 외침이 뒤를 이었다. “크로우 구운, 또 수업 땡땡이치고 여기서 애들이랑 블레이드나 하고 있지!” “와아아. 토와 누나랑 안제 누나 죠르쥬 형이다!” 5*


“헤헤, 끼어들어서 미안. 우리가 크로우 군을 좀 데려갈게.” “응! 치사한 형아 이제 필요 없다!” 그러니까 이게 이맘때 트리스타에서 일상처럼 보이는 풍경 중 하나 였다. 크로우가 수업을 땡땡이치고, 토와, 안젤리카, 죠르쥬가 찾으러 온 마을을 돌아다닌다. 이번처럼 키르히에 앉아있으면 다행이지, 본교 사 옥상에서 내기 판을 벌인다거나, 상점가의 부탁을 받아서 가로등 위 에 올라가 수리를 하고 있다거나, 행적을 영 종잡기 힘들 때가 많았다. 저 녀석들 또 저러는구만. 카운터의 프레드가 느긋하게 접시를 닦으며 눈앞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그러게요. 종업원 돌리가 맞장구를 쳤다. “어. 너네들이냐.” “너네들이냐-가 아니야, 크로우 군! 크로우 군이 아무리 실습이 특기 라도 최소 출석일수는 맞춰야 할 거 아냐. 이제 세 번만 더 빠지면 낙제 라고, 알아?” “어-. 나도 세고는 있다고. 뭐냐, 너희, 그 못 미덥다는 얼굴. 그러니 까 두 번까지는 더 빠져도 되는 거잖아?” “크로우 군-!” 토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정말 안 되겠어, 이제 이 블레이드는 압수야.” “엇차, 그건 안 되지.” 크로우가 얼른 테이블에서 블레이드를 집어다가 등 뒤로 숨겼다. 토 와가 뒤로 뛰어들자 여유 있게 빙글 몸을 돌렸다. 토와가 손을 뻗자 휘 파람을 불면서 백스텝을 밟았다. 다시 토와가 달려오자 이번엔 등만 쓱 숙여서 피했다. “포기하라고, 토와. 그리고 참견은 이제 그만두라고. 나한테도 나름 자유의지가 있단 말이야.” “이익, 정말!” 6


그냥 보고 있기 미안해진 죠르쥬가 토와를 도와주려고 앞으로 나섰 다. 한 발짝을 뗀 후, 죠르쥬는 옆의 안젤리카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젤리카는 감히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앞의 광경 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쪽도 못 쓰는 토와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네. 그래서 그만 죠르쥬도 힘이 쭉 빠져버렸다. 개미와 베짱이인가. 확실 히 보기에 재미난 구경거리이기는 했다. 크로우는 피하고 토와는 허공 에 헛손질하기를 수 번째, 순간 토와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다. “엇차. 조심해야지.” 미끄러질 뻔한 토와의 손을 크로우가 낚아 올렸다. 워낙 체구부터 차 이가 있는지라 토와의 손이 크로우의 손 안에 쏙 잡혀 들어왔다. 균형 을 잃은 토와의 이마가 크로우의 가슴 위에 콩하고 닿았다. 순간 카페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크로우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 잠깐. 이거 뭐냐, 토와.” 크로우가 토와의 손을 들어 확 펼쳐보았다. 손가락 한쪽에 밴드를 몇 겹씩 친친 둘러 감은 것이 지나치게 두꺼웠다. “아 그거, 가사 실습 중에 손을 베어서…….” “가사 실습은 저번 주였잖아. 그런데 이 꼴이 됐다고? 아. 알았다.” 웃는 표정 그대로 눈썹만 찌푸린 크로우의 얼굴이 기묘했다. “너 학생회 서기 하고 있으니까. 그 성격에 빼지도 못하고 계속 받아 적다가 상처가 덧나기만 한 거구만 그래. 맞구만? 학생회 놈들은 뭐 했 대? 다 정신 빠진 거 아냐? 말로는 모든 학생을 돌보니 어쩌니 하더니 만 정작 옆에 있는 꼬맹이 상태 하나를 못 보냐.” “꼬맹이 아니거든-!” “꼬맹이가 아니라고? 그 와중에 내 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있으면서? 인마, 그러다 늙어 죽는다고 내가 말했냐 안했냐. 세상 모든 걸 네가 챙 7*


길 수는 없다고. 그냥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알았어, 지금 수업 갈게. 그 런데 그 전에 학생회부터 들를 거야. 너 좀 적당히 굴리라고.” 토와가 뭐라고 대꾸하려 했지만 크로우가 먼저 선수를 쳐 토와의 머 리 위에 손을 덮었다. 토와는 벌린 입을 미처 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부끄러우니까 그런 말 말라고 할 셈이지? 자기 몸 건사도 못하 는 꼬맹이한테 돌아가는 벌인 줄 알어. 그럼 난 학생회실 들러야 하니 까 먼저 간다.” “으……, 크로우 군 정말…….” 크로우가 먼저 쌩하니 나가버리자, 토와는 아까 크로우가 손을 얹었 던 이마 위를 두 손으로 감쌌다. 얼굴에 열이 올라 발갰다. “저 녀석들……, 또 저러는구만.” 프레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돌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장구쳤다.

실습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느릿느릿 김나지움으로 걸어가는 토와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죠르쥬와 안젤리카는 모른 척 토와의 속도에 맞추어 뒤를 따랐다. 이 녀석들도 참 한결같구만. 토와 에게 정신이 팔린 채로 걸어가던 죠르쥬는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어, 그런데 안제. 귀족반 수업도 김나지움이었……?” 미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안젤리카가 죠르쥬의 작업복 깃을 낚 아챘다. 엄청난 악력에 죠르쥬는 저항도 못 하고 수련실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곧 쾅 하는 파열음이 귀청을 때렸다. 안젤리카가 주먹을 벽 에 꽂은 참이었다. 균열이 간 벽 조각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저 녀석들, 왜 안 되는 걸까.” 8


“아……안제, 학교 기물에 제로 임팩트를 쓰면 안 돼.” “정말 답답해 죽겠단 말이다. 처음에는 어련히 마음을 접던지, 아니 면 이어지든지 둘 중에 하난 되겠거니 했지. 그런데 벌써 가을이 다 지 나가겠어. 서로 호감도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토와가 크로우의 취향이 아닌 거 아닐까?” 안젤리카의 안광이 번뜩였다. 흡사 야생의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크로우 자식 주제에, 나의 토와가 취향이 아니라고……?” “그, 그치만 안제. 취향이라는 건 어쩔 수 없잖아. 크로우 방에 붙어 있던 포스터 봤지? 관심 있는 여학생들도 대체로 성숙한 매력이 있는 쪽이었던 것 같고, 전에 웬 미모의 누님이랑 단둘이 있더란 목격담도 있 었잖아?” “아니. 아니야.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갖는 데 취향이란 게 그렇게 절대적이진 않을걸. 죠르쥬, 지금까지 크로우가 토와 외의 사람을 저렇 게 챙기는 걸 본 적 있어?” “……없지.” “그렇지만 그래. 그 말대로라면……, 호감이 가는 상대가 많아서 한 사람에게 매이지 않으려고 재고 있다, 고 생각하면 이해는 되네. 용납은 안 되지만.” 죠르쥬가 흠칫 뒷걸음질 쳤다. 안젤리카의 표정과 온몸에서 발산되 는 기가 전에 없이 불길했다. “후후……. 그래. 그 녀석, 겉모양은 멀쩡해서 인기는 나쁘지 않았던 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면, 선택지를 하나로 줄이면 되는 일 아니겠어.” “뭐……뭘 어떻게 할 셈이야, 안제.” “후후, 이 기회에 어느 쪽이 위인지 그 녀석에게 확실히 보여주지. 너 도 도와줘, 죠르쥬. 함께 토르즈 연애조작단을 결성하는 거다.” 9*


“연애……조작단? 그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해야 해?” “우리가 하는 일인데 당연하지! 도와줄 거지, 죠르쥬?” 안젤리카가 특유의 상쾌한 미소를 짓자 죠르쥬는 푸우 한숨을 내쉬 었다. 그리고 이내 따라 웃었다. 안젤리카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쉽게 쉽게 방향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을 휩쓸어 버린다. 지금까지 그녀를 따 라서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하리라고 믿게 되는 것 이다. 물론 스스로 한 선택이기에 훗날에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둘 중 누구라도 그때를 떠올리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어땠을까?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곧이어 선연하게 떠오르는 추억에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숙사에 들러 실습 용구를 챙기고 나온 크로우는 곧바로 학생회관 으로 향했다. 식당 테이블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 들이 크로우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온다. 오, 크로우. 오늘은 수업 안 빠 졌어? 잡화를 파는 제임스가 반색하며 외쳤다. 크로우! 소식 들었어? 럼버 블리츠가 복귀한대! “어.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이따가 얘기할게.” 크로우가 고개만 까닥이고 계단으로 척척 걸어가자 남은 사람들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래요? 평소답잖게.” “그러게…….” 어쨌거나 화제의 주인공은 남들이 뭐라든 상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서 학생회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참이었다. 안에 있던 서넛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10


“어, 너는.” “크로우 암브러스트.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크로우가 샐샐 웃으면서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 왜, 학생회에 이런 애 하나 있지 않습니까? 일요학교 학생만치 쪼끄매서 제 가슴까지밖에 안 오고, 힘도 없고, 그런데 일 떠안기는 좋 아해서 만날 서류에 얼굴 박고 있고, 최근에는 손가락도 다쳐서 붕대 감 고 있고.” “토와? 토와라면 지금 수업 중일걸. 토와는 갑자기 왜 찾지?” 그런데 학생회실에 불쑥 쳐들어온 1학년의 얼굴이 답을 들은 표정치 곤 썩 개운치 않았다. 아니, 도리어 못마땅한 듯 미간을 홱 좁혀버렸다. “그걸, 아는 사람들이, 그러느냔 말이지.” “뭐, 뭐야, 갑자기.” “회의 기록, 안건 수리, 대안의 실제화. 학원제에 관련된 서류 작성. 이걸 다 그 콩알만 한 꼬맹이가 하고 있잖아. 댁들이 이렇게 세상 좋게 앉아나 있는 동안에 말임다.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다친 손가락이 퉁퉁 붓기만 했더라고. 어떻게 생각하쇼?” “아니 그렇게 말해도 우리는…….” “토와가 일을 많이 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학생들이 뭐라고 답할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안쪽에서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걸상에 앉아 있던 귀족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왔다. “자네는 나와 얘기하지.” “회장님!” 학생들이 직함을 부르자 크로우는 혀를 찼다. 아. X됐다. 그냥 적당 히 면박 주면 임원들이 알아서 양심껏 일 좀 빼주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11*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이 얘기하자는 건 뭐람. 뭐, 애초에 답 없는 승부라 면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입 잘 놀리는 쪽이 이기는 거다. 크로우는 눈 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얘기? 저는 하고 싶은 얘기 다 했습니다만.” “1학년 IV반 크로우 암브러스트. 일개 학생이 학생회 임원의 처우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있나?” “VI반이기도 하죠. 그 꼬맹이랑 같은 반이란 거지.” “VI반은 ARCUS 테스트의 편의를 위한 비공식 명칭이지, 정식으로 분 반된 반은 아니야.” “어째 회장님이 당장 아는 대로만 말하심까아. VI반은 엄연히 담당 교관에 커리큘럼도 따로 있는뎁쇼. 그 교관이 영 못 미더운 팔푼이라 문제지만.” “반이야 어찌 됐든, 우리는 자네를 잘 알고 있지.” 학생회장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크로우를 가리켰다. “무단결석의 일인자. 교관님들의 최고 요주의 대상. 사라 교관님과 함께 미성년 음주를 하질 않나, 학교 대대적인 사행성 이벤트를 기획하 던 것을 학생회 측에서 저지한 적도 있지. 자네야말로 현재 토르즈 최 고의 문제아 아니겠나.” 크로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거, 여기서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 “자네는 우리 학생회의 적이라는 거다.” “저어억?” 어이가 없어 크로우는 입을 딱 벌렸다. “참 내, 학생회라는 거, 무슨 무력 단체나 저항 단체 같은 겁니까?” “자네같이 불량의 표본 같은 학생이 하는 말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 들일 이유가 없단 거다. 더욱이 교내에서도 손꼽히게 성실한 우리 토와 12


허셜 양에 대한 것이라면.” “그, 미안하다, 크로우. 회장님 말씀이 강경하긴 하지만, 지금 학생회 에서 토와가 하는 만큼의 일을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없어…….” “응, 지금 학원제 준비 때문에 다들 업무량이 만만치 않아서, 토와가 아니면 우리는 상당히 곤란해져……. 좀 이해해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리가 띵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몰아가고 있 는 거지? 그리고 그보다 먼저, 화가 났다. “그래서 결론이 고작 그겁니까? 토와 일을 더 빼줄 수가 없다, 그 말 하나 하려고 문제아니 적이니 들먹거린 거?” “……아니. 물론 그 말 하나 하려고는 아니지. 그래서 우리가 자네에 게 제안할 게 있다네. 허셜 양에게 할당된 업무를 없앨 수는 없으니, 자 네가 그 일을 나누어 맡으면 되는 거 아니겠나.” 크로우는 헛웃음을 쳤다. “이거 벼룩의 간을 빼먹을 사람들이네. 노동착취 좀 그만 시키라고 왔더니 두 배로 노동을 시키겠다는 거죠, 지금?” “두 배가 아니라, 두 사람이 일을 맡음으로써 개개인의 업무량을 절 반으로 줄이자는 말이라네. 아까 들으니 자넨 허셜 양의 업무 내역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더군.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바 없지 않겠어.” “저기요. 망설이는 건 이쪽 몫입니다요?” “그래, 자네 말이 맞네.” 학생회장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허셜 양의 일손을 도와주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아닌 자네에게 달린 일이지. 자네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는 거야. 이거 실례했네.” “거 적당히 좀 몰아가쇼.” 크로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황이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 러니까 이 사람 아마, 진작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지. 이렇게까지 하는 13*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께름칙했다. 그러니 일단 여기에서 빠져나가면, 나가면……. 크로우는 아까 밴드를 친친 감고 있던 자그만 손을 떠올렸다. 손안에 쏙 잡혀 들어온 작은 손과 쉽게 균형을 잃고 넘어지곤 하는 작은 체구. 뭐, 딱히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지. 크로우는 쳇 하고 혀를 찬 후 책상을 탁 쳤다. “알았다고.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꼭 나한테 일을 맡기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할게. 하면 되잖아. 됐죠? 대신 확실히 하라고 요.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토와 그 꼬맹이 일을 도와주는 거라고.” “좋다. IV반 크로우 암브러스트. 자네를 임시 학원제 준비 위원으로 임명하마.” 회장이 다부진 표정으로 크로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허……, 그렇게까지 본격적인 겁니까?” “그렇고말고.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아니겠나. 추가 사항은 토와를 통해서 전달하도록 하지.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니 이만 가보게나.” 그리고 크로우의 등을 밖으로 떠밀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하는 눈빛에 담긴 것은 분명히, 장난기였다. 웃 음을 못 참겠다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학생회실의 문이 쾅하고 닫혔다. 복도로 쫓겨나듯 내쳐진 크로우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와아, 이거 무지하게 수상하네.”

“이제 나와도 된다네.” 회장이 고갯짓하자 옆에 닫혀 있던 문이 조심조심 열렸다. 학생회 준 비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라는 문패가 걸려 있지만 사실 상대하기 곤 14


란한 사람이 왔을 때 없는 척하기 딱이라서 대피소로 쓰일 때가 더 많 은 방이었다. 전신 라이딩 수트를 빼입은 여자가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아아, 갔군요.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요. 계속 주의를 환기시켜 주셔 서 감사합니다.” “자네는 준비실 안에서 가만히 있었는데 들킬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 가?” “그는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니까요.” 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안젤리카가 붙임성 좋게 웃으며 두 주먹을 맞대고 동방 식으로 인사를 했다. “후후, 아무튼 갑작스런 부탁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로그너 양의 부탁이니 일단 받아들이긴 했다만 말일세. 정말 이렇게 하면 진전이 된다는 건가? 두 사람, 서로 너무 다르지 않은가. 태도나 말투부터 외모까지 통하기는커녕 비슷한 부분을 찾기 힘들어 보이는데.” “바로 그 점이 재밌는 게 아니겠습니까. 공통된 점이 없다. 그래서 회장님께 도움을 요청한 거죠. 서로 호감은 있으니 함께 지낼 시간만 만들어주면 뭔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람 간의 차이란 것이 서로 마음이 통하는 데 의외로 큰 장애가 될 수 있어서 말이네.” “토와처럼 아까운 아이에게 크로우 같은 불량 학생은 걸맞지 못하다, 이런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도 저의 친우입니다.” 안젤리카가 그녀로서는 드물게 진지한 눈을 했기에 회장은 서둘러 손을 내저어야 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아니, 오해를 사는 듯하니 이 이야긴 그만 두지. 두 사람이 서로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한가?” 15*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회장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거나 저 치는 허셜 양이 최우선이구나. 이거 허셜 양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되겠더군.” “옆에서 보고 있으면 화가 날 정도라니깐요. 자, 회장님도 저희 연애 조작단에 가입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학생회장은 겸직은 금물이라네.” “이거 아쉽게 됐군요.” “그래도 허셜 양의 의중만 확인된다면 내 있는 힘껏 돕도록 하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냥 딱 보면 보이니까요. 저의 토와를 위해 하는 일인데,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죠.” 안젤리카의 대답에 한숨이 섞였다. “사실 저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저의 귀엽고 바르고 사랑스 러운 토와가 어디가 부족해서 저런 녀석에게서 눈을 못 떼고……, 하지 만 보기보다는 믿을 만한 남자니까, 서로 마음만 확인한다면 참 좋을 텐 데요.” 이 말을 시작으로 안젤리카가 사랑하는 그녀를 더 큰 행복을 위해 떠 나보내야만 하는 자신의 비장한 마음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기에, 학 생회 임원들은 모두 안젤리카를 위로하려고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렇 게 몇십 분이 지나자 안젤리카는 학생회실 안에 있던 모두에게 작전에 대한 협조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토르즈 연애조작단 단장이자 참모 를 겸직하는 안젤리카 로그너의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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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를 대강대강 살피던 크로우가 고양이처럼 기묘한 소리를 내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흐아아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꿈쩍없이 앉아 있는 건 적성이 못 돼. 그냥 지쳐버린다구. 오후 수업도 땡땡이치고 싶다아. 하필 정체경제라니, 틀림없이 졸고 말 거야…….” 옆에서 같이 일하던 토와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애초에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야, 크로우 군. 지금이 라도 회장님께 얘기할 테니까 크로우 군은 그냥 쉬도록 해. 원래는 다 내 일인걸.”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기세 좋게 쳐들어간 학생회실에서 도리어 코가 꿰여 나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당사자가 모른 채로 이루어진 약속 은 곧 토와에게 전해졌고 토와는 몇 번이나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그때 마다 크로우의 대답은 지금 같은 식이었다. “안 되지, 안 되지. 이걸 다 혼자 하겠다고? 너는 그런 식으로 남 수 명 조금씩 늘려주다가 저가 제일 먼저 죽을상이야. 어떻게 그냥 두냐.” “……나는 크로우 군이 좋은 사람인 건지, 나쁜 사람인 건지 모르겠 어.” “응?” “아니. 아무튼 땡땡이는 안 돼, 크로우 군. 안 그래도 지금 출석이 아 슬아슬한데 교감 선생님께 찍히면 정말로 진급하기 힘들어져. 일 끝나 면 내가 바로 손잡고 교실에 데려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우리 서기님은 왜 또 요새 빡빡해졌을까.” 책상 위에 등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끌어안은 채 괴로워하던 크로우 가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토와의 눈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 밀었다. “자, 토와.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이 학교의 누구라도 잘 알고 17*


있는 사실이 있지.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거야. 나는 네 성실 함을 존중하니까, 너도 내 불성실함을 존중해줬으면 해.” 크로우는 미간을 좁히고 짐짓 목소리를 진지하게 내리깔았다. 하지 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말? 아닌데. 크로우 군은 별로 내 성실함을 존중하지 않잖아. 그 러니까 나도 크로우 군한테 참견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선까진 서로 존중할 필요가 있지 않 겠냐는 얘기지. 나 이래 봬도 시험 평균 이상은 가뿐하다고? 출석 점수 까지 더했을 때…… 좀 문제가 생겨서 그렇지.” “응. 그래서 내가 크로우 군을 걱정해서 이러는 거잖아. 벌써 몇 명 은 크로우 군, 재수 없다고 싫어한다고.” 토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죠르쥬. 내가 얘한테 뭘 좀 잘못한 것 같다. 원래 이런 말 아무 렇지도 않게 하는 애였나?” “하하, 잘못한 줄은 아는구나.” “……응. 잘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잘못했나 봐. 하하. 내 편이 없 네.” “당연한 소릴 하는군.” 안젤리카까지 한마디를 거들자 크로우는 책상 위로 고개를 축 늘어 뜨렸다. “항복, 항복. 좀 봐 줘. 너네 요새 들어서 유독 나한테 가차 없다.” 그리고 그동안 안젤리카와 죠르쥬가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저거 정말 나쁜 녀석이지.’ ‘그러니까 말이다.’ 아까 크로우가 얼굴을 들이민 이후로 토와의 뺨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안제.” 그 와중에 토와가 갑자기 안젤리카를 불렀다. 18


“불렀어, 토와?” 대답하는 안젤리카의 눈빛이 평소보다 진득하니 수상쩍은 것을 크로 우는 금방 눈치챘다. “학생회에서 교감 선생님께 학원제 날까지 풍기 단속을 주문받은 거, 너도 알지? 그런데 최근에 안제에 대한 제보가 있었어. 안제가 학년 불 문하고 여학생들을 불러내고 있다고.” “후후, 질투하는 거야? 걱정 마, 토와. 나의 가슴 속 가장 소중한 장 미는 너뿐이니까.” “질투하는 건 아닌데……, 조금 이상해서. 안제가 조금, 아니 많이 밝 히기는 해도, 자신의 절도를 아는 사람이잖아. 갑자기 이렇게 많은 여학 생들을 만나는 건, 역시 이상해.” “아아, 사랑스러운 토와가 그렇게 말해주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하 지만 모처럼 이렇게 멋지게 태어났건만 가슴 설레는 여학생들의 부름을 무시하는 것도 실례거든. 어찌할 수 없잖아.” “……안제도 참. 아무튼, 걱정하게 하지만 말아 줘.” “라져.” 그리고 또 안젤리카와 죠르쥬가 서로 눈짓하는 것을 크로우는 놓치 지 않았다. “아, 이런. 죠르쥬. 약속한 게 있었지. 우리 둘은 이만 먼저 나가보 지.” “무슨 약속?” 크로우가 묻자 안젤리카는 씩 웃어 보였다. “그건 비밀이야.” “비밀? 안젤리카 로그너 아가씨, 비밀 같은 것도 키우는 사람이었 어?” “후후, 물론이지. 크로우 암브러스트만 간혹 답지 않게 비밀스러운 19*


척 할 줄 아는 건 아니란다. 자. 늦기 전에 가자, 죠르쥬.” 안젤리카가 곤란한 얼굴의 죠르쥬를 끌고 가다시피 데리고 나가자, 회의실에 토와와 둘만 남은 크로우가 혀를 끌끌 찼다. “하. 수상하다, 수상해. 저 녀석들 정분이라도 났나? 왜 자꾸 서로 눈 짓을 하고 그러지.” “정분…… 나는 것도 좋지. 헤헤.” “얼씨구. 학생회 임원이 대담한 말씀을 하시네.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교감이 들으면 기절할걸.” “뭐 어때, 남자랑 여자잖아.” “응? 그 말 듣고 보니 좀 이상하다. 젤리카 취향이라면 여자 쪽 아닌 가?” “꼭 사람이 평소 취향에 맞는 사람하고만 만나는 건 아닌걸.” 토와가 작게 웃으며 막 결재한 서류를 뒤로 넘겼다.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높은음으로 귀를 긁다가 금방 사라졌다. 찰나의 정적 속 에 크로우는 방금 대화의 내용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들어보니 토 와는 침착하게 서류의 결재를 해나가고 있었다. 괜히 멋쩍어져 크로우 도 서류에 얼굴을 박았다. “우리 봄에 입학했는데 벌써 가을이잖아, 크로우 군. 교장 선생님의 요청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동안 마음이 통한 학생들이 만난 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일 아닐까? 아! 물론 불건전한 이성 교제를 뜻하 는 건 아니야! 나도 학생회 일원이니까!” 정신없이 서류를 넘겨 보던 토와가 서둘러 앞으로 양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구. 아무튼 순 꼬맹이라니까.” “……으으, 이것도 왠지 기분이 좋지는 않네. 크로우 군, 전부터 말했 지만 나, 그렇게 꼬맹이는 아니니까…….” 20


“하하, 그래. 우리 토와 양도 참 복잡하시구만.” 사실 여기서 토와의 심경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건 흐뭇하게 웃으 며 상대를 바라보는 크로우의 얼굴이었지만, 본인이 그런 걸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웃으며 토와를 바라보던 크로우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네 말대로네. 입학식이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라니, 언제 이 렇게 시간이 흘렀다냐.” “헤헤……, 그렇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넷이서 ARCUS를 받을 때만 해도 우리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사라 교관님까지 해서 다들 첫인상이 굉장했거든.” “……나는 그때 널 처음 본 건 아닌데.” “흐엑?” “워낙 쪼끄맣잖냐. 눈에 안 띌 수가 있어야지. 입학식 때부터 와. 저 렇게 조그만 애도 사관학교 같은 데 들어오는구나, 하고 감탄했었어.” “그랬구나……. 키가 작은 것도 좀 장점이 되는 거려나?” “글쎄올시다. 아무튼 꼬맹이인 줄만 알았는데 너, 엄청 열심이더라 고. 그래서 꽤 감탄했지. 그래도 역시 친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던가. 나랑은 아주 정반대니까.” “헤헤, 사실 나도 그랬어.” “신기할 것도 없구만.” “그런데 특별실습이 있었으니까……. 크로우 군, 몇 번이나 나를 구해 줬잖아. 총 쏘는 법도 자세히 가르쳐줬고. 크로우 군이 알면 알수록 생 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거든.” “야. 대체 처음 이미지가 얼마나 바닥이었길래…….” “아냐, 그게 아니야! 나는 그냥, 크로우 군이 생각보다도 더 좋은 사 람이어서.” 21*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토와 너한테 좋은 사람이라는 말 들으면 내가 기분이 이상해져. 너도 참 어쩌다 나 같은 놈이랑 엮여 서 고생이 많다고.” 토와는 대답 대신 서류에서 손을 놓았다.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크로 우가 방금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토와는 반박할 말을 떠올 리는 듯 잠깐 곰곰이 생각하다가, 반박 대신 짧게 잘라 말했다. “크로우 군, 정말 고마워.” “응?” “돌이켜 보니까 크로우 군이 꼬맹이니 뭐니 짐짓 밉살스레 말해서 그 렇지, 그동안 날 많이 보살피고 챙겨줬잖아. 그런데 거기 대해서 고맙다 는 인사는 제대로 안 한 것 같아서…….” 크로우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예의 그 흐뭇한 미소였다. 토와는 크게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하지 않을 만큼 사랑을 받고 자라왔지만, 이런 표정과 감정은 그동 안 겪은 것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토와는 크로우가 스스로 어떤 얼굴을 한 채인지 자각하고 있을까 궁 금해지곤 했다. 가을 햇살이 간지러웠다. “하하, 고맙다는 말은 됐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뭐. 네가 그 몸으로도 열심히 일하는 거 보면 괜히 뿌듯하고, 또 한편으로 걱정도 되 고. 너무 작아서 내가 일부러 챙겨주지 않으면 어디서 픽 쓰러져버릴 것 같아서, 여러 마음이 섞여서 이렇게 지켜보게 된 거지, 어, 그러니 까…….” 크로우가 허공을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대. 정치경제 늦겠다, 토와. 얼른 정리하고 가 자.” “……응.” 22


토와가 웃었다. 오늘도 이렇게 웃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 절은 서늘한데 창문 너머로 비추는 햇빛이 계속 몸을 간지럽힌다. 결국 가을의 한낮은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 어중간한 온기가 썩 싫지는 않아서, 이런 뜨뜻미지근한 온 도로 벌써 근 반년째였다. 토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로우와 함께 바지 런히 서류를 정리했다.


2. 동일궤도

전원 기숙사제인 토르즈의 학생 네트워크는 긴밀하고 신속하다. 요 새 들어 상상하기 힘든 조합이 부쩍 붙어 다닌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 져나갔다. 고목나무에 매미 같기도 하고, 개미와 베짱이 같기도 하고 넉살꾼과 잔소리꾼 같기도 하다고. 어쨌거나 소문이 퍼질 때는 이런저런 양념이 함께 붙는 법이라, 생각 이상으로 분위기가 괜찮다는 쑥덕거림도 함께 였다. 토와 허셜은 공부와 학생회 업무에 열중하느라 바로 눈치채지 못 했지만, 발이 넓은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미묘하 게 따뜻한 눈빛을 받기 시작했다. “여어. 요즘 봄이라며?” “잉? 봄이라니. 슬슬 쌀쌀해지고 있는데? 이 사람, 군사학 수업 따라 가는 데 스트레스받더니 드디어 이게 홱 도신 건가.” 크로우가 검지를 들어 관자놀이께를 쿡쿡 찌르며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귀염둥이랑 매일매일 붙어 다닌 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모른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이게 무슨 소린가, 설마하니, 토와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야, 이거 어림없는 소리 마십셔. 학생회에서 저번 도박 사건 눈감아주는 조건으 로 학원제 준비 도와주기로 해서 같이 다니는 거야. 네 보기엔 그 콩알 만 한 꼬맹이가 나한테 여자로 보이게 생겼냐?” 24


크로우를 놀릴 건수를 잡았다고 신나있던 옆방 동기가 단호한 부정 에 멋쩍어 입맛을 쩝 다셨다. “뭐, 그럼 말고. 사람 무안하게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하지만 크로우의 관심은 이미 대화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복도 끝 창문을 열고 빼꼼 밖을 내다보다가, 손을 창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비가 내리나.” “응. 아침에 트리스타 방송 안 들었어?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한 참 쏟아질 거라던데.” “아하. 땡큐. 그럼 이따 보자!” 대답을 듣기 무섭게 크로우는 방에서 우산을 꺼내서 계단으로 향했 다. “역시 저놈, 요즘 묘하게 정신없는데,”

타닥 타닥.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이슬비가 삽시간에 굵은 장대비가 되어 건물 벽을 때렸다. 회의실에서 혼자 문서를 정리하던 토와가 팔을 끌어안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 춥다……,” 고개를 들고 뻐근해진 목을 몇 번 돌렸다. 서류에서 손을 떼고 자리 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한가득 껴서 바깥은 이미 어 두웠고 산발적으로 천둥번개까지 번쩍거렸다. “금방은 안 그치겠지. 꼼짝없이 못 들어가겠네.” 오늘은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날인가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계까지 힘내볼까― 라고 생각을 해봐도 이미 방 안이 습기로 축축하니 서류 작업할 맛이 나지 않았다. 토와는 시린 창가에 뺨을 대고 빗줄기 25*


가 점차 굵어지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래서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응? 크로우 군.” 흐릿하던 형체가 거짓말이나 꿈처럼 금세 가까워졌다. 어느새 창가 까지 다가온 크로우가 씩 웃으며 손등으로 창문을 톡톡 쳤다. 토와가 마주 웃으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 어. 열지 마, 열지 마. 비 엄청 내리는데 무슨 짓이야. 너 감기라 도 걸리면 큰일이라고.” 창을 황급히 닫은 크로우가 빗방울로 범벅된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 모양을 뻐끔뻐끔해 보였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토와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크로우는 등을 돌려 걸음 에 속도를 붙였다. 그리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크로우 군!” 토와가 반색하며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순간에 맞추어 크로우가 주 먹을 들었다. 토와의 이마에 딱 맞는 높이라 자연스럽게 꿀밤을 먹이게 되었다. “으, 으?” “인마. ARCUS는 뒀다가 국 끓여 먹냐. 이럴 때는 나나 안제라도 부 르라고. 안제 녀석이라면 나이스 찬스! 라면서 좋다고 뛰어올걸.” “기다리다 보면 그칠지도 모르잖아.” “언제까지 기다리려고? 넌 또 남을 부를 생각 따윈 아예 안 했지? 어 쩔 수 없지, 이 형님이 또 챙겨줘야지.” “헤헤, 고마워…….” “엇차. 서류는 일단 이쪽 캐비닛에 넣는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26


가지고 나가긴 좀 그렇지.” 크로우가 캐비닛을 정리하는 동안 토와는 제 발치에 놓인 커다란 검 정 우산을 들어보았다. 교사 안에 크로우는 잠깐 들를 뿐이었다. 그런 데도 우산은 물기를 말끔하게 털어서 단정하게 여민 채였다. 모양 나게 접은 큰 우산을 토와는 품에 당겨 끌어안았다. 그리고 비에 젖어 짙게 얼룩이 든 크로우의 교복 어깨나 부츠 밑창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마 침내 캐비닛 걸쇠까지 닫은 크로우가 고개를 들었다. “어.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 아니야. 그럼 가자, 크로우 군.” 비와 흙으로 미끌미끌해진 복도를 지나서, 본교사 정문 앞에서 둘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바깥은 한 치 앞까지밖 에 보이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대로 말이 없는 크로우에게 토와가 멋쩍 게 우산을 내밀었다. “그러면 크로우 군, 우산 좀 들어 줄래? 기숙사까지 같이 가면 되겠 다.” “아니. 네가 들어.” “응? 크로우 군. 우리 키가 있잖아. 내가 우산을 들면 크로우 군은 못 쓰는……”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크로우가 재킷을 벗어 머리에 쓰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토와가 황급히 우산을 펼쳐 들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보폭 자체가 차이가 나서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폭우 때문에 시야가 부 옇게 흐렸다. 금세 멀어진 크로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우산대를 잡고 있으니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만 귓전을 때 렸다. 토와는 그대로 크로우가 사라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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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식 사실 고자가 아닐까?” “고, 뭐, 안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토르즈 연애조작단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라고는 해도 안젤리카 가 기술동에서 ARCUS를 정비하던 죠르쥬를 낚아채어 회의실 문을 잠근 것이 전부기는 했다. “분위기는 정말 좋아. 좋다. 좋다는 데서 끝나는 게 문제란 말이다.” “아, 그건 동감이지만.” “밤늦게 단둘이 걷다가 트리스타 방송 시간이 되었다면서 들어가고, 흐뭇한 얘기라도 나오면 얼마 안 있어서 다른 화제로 넘어가 있고, 몸이 라도 부딪히면 철석같이 사과하고……. 난 정말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그렇게 성실한 인간인 줄은 몰랐지. 나라면 절대로 안 그래. 그런데도 그 녀석 좋다는 여자가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란 말이다.” “안제, 설마 정말로 그거 하고 있는 거야? 크로우와 친한 여학생들을 모두 꼬셔서 토와 외의 선택지를 없애버리겠다― 였나.” “그게 말이지. 그놈이 생각보다도 훨씬 발이 넓더란 말이지. 친밀하 게 지내는 여자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역시 그런 건 포기하고……” “후후……, 그렇기에 더 도전의식이 불타오르는 거다. 루르에서 이름 난 이 안젤리카 로그너, 여기서 크로우 암브러스트에게 질 수는 없지.” 요즘 친구 셋 중 누구를 봐도 재미진 덕에 죠르쥬는 심심하지 않은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학생회까지 제보가 갈 정도 는 곤란하겠지. 죠르쥬는 저번에 토와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그래도 안제, 이제 우리…… 조작단 활동은 적당히 해도 되지 않을 까? 이다음부터는 그 두 사람에게 달린 것 같아.” “아니, 지금처럼은 안 돼. 이미 가을이고 곧 학원제라고.” 안젤리카가 발표자처럼 단상 앞으로 나섰다. 28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교내 커플의 절반 이상이 학원제 마지막 날의 후야제를 커플 성사의 코스로 거친다고 한다.” “으으음, 학생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있다는 뜻이구나.” “그냥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냐. 생쥐수염 교관이 학생회에 학원제 날 까지 교내 단속을 주문한 것도 그 때문이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뤄지고 싶은 상대가 있는 학생이라면 거진 후야제를 노리게 마련 이거든. 서로 호감을 확신하지 못하는 학생들일수록 마음이 급해진다. 축제일이 되기 전에 다급히 상대에게 떡밥을 던지고, 약속을 잡고, 마음 을 재확인하다가 풍기까지 문란해진다―는, 흔한 패턴이야.” “그런 게 흔하다고?” “뭐, 교감이 신경 쓰일 만큼은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우리도 학원제 까지는 승부를 봐야 하는 거다. 크로우라는 남자의 여자관계를 확인해 볼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친밀한 여자가 너무, 너무 많아.” 죠르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그렇지만 이렇게 같이 지낼 시간을 만들어 줬는데 지지부진하면. 뭘 더 할 수 있는데?”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이성으로 의식할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거지.” 다시 안젤리카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거렸다. 남을 끌어들일 때 으 레 하는 눈빛이었기에 죠르쥬는 슬쩍 눈을 피하려 했지만 그 전에 안젤 리카가 덥석 손을 잡아서 소용없게 되었다. “자, 그러니 죠르쥬여. 함께 작전 단계 2로 넘어가도록 하자.” 죠르쥬가 난감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였다. “……새로운 모습인가. 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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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마다 토르즈 사관학교 특별 클래스, 가칭 VI반의 추가 수 업이 있었다. 수업 내용은 때마다 제각각이라 전투 테스트일 때도 있고, 교련일 때도 있었고 매달 있는 특별 실습의 시작 시간이기도 했다. “자아, 그럼 오늘 훈련은 이걸로 끝. ARCUS의 분석 리포트 고마워, 죠르쥬. 그냥 이대로 상부에 제출해도 될 것 같네.” “날로 먹겠다는 소리를 대놓고 하는구만.” “크로우 너한테 그런 걸로 지적받고 싶진 않아.” 오늘 수업은 평소보다 일찍 끝난지라 크로우와 사라가 노닥거리며 남은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미 예상했겠지만 이번 달 특별 실습은 없어. 모쪼록 모두 일 년에 한 번 있는 학원제를 만끽하도록 하라고. 그럼 이상!”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젤리카가 번쩍 손을 들었다. “교관님, 학원제 무대에 대한 지시는 없습니까?” “으음, 우리 특별반 무대 말이지? 너희, 각자 속한 반의 무대 준비로 도 충분히 바쁘지 않아?” 크로우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관련 지시가 전혀 없었어? 무대에서 1위를 한 반에는 포상도 한다는데.” “어머, 그래? 나는 올해로 토르즈에 초임이니까, 전해듣지 못했는걸.” “뭐……, 대충 알겠어. 상부에서도 시범 클래스는 정식 반으로 안 본 다는 거지.” “루르에, 제국 서부까지 보낼 거면 좀 더 대우해줘야 하는 거 아닌 가.” “오히려 학교 밖에서 우릴 더 알아주는 기분이야.” 한 명씩 차례로 투덜거렸다. 처음부터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내년에 정식으로 특별반을 출범하기 전의 시범적인 클래스라고. 그러나 그렇다 30


고 경험이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배경도 성격도 맞지 않아 삐걱거렸던 넷이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를 하고 또 해도 끝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기회로 만들 수는 있겠지. 학원제는 어디까지나 학생회가 주도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 말은, 젤리카.”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이용해서, 깜짝 무대를 만드는 거 다. 절대 우리를 잊지 못하게 해 주는 거야.” “어어. 나 학생회에 미움받은 거 같은데 허락해주려나?” “내가 이미 회장님께 말해봤지. 흔쾌히 허락하시더군.” “젤리카 인석아. 이렇게 막 멋대로 진행해버리면…….” 크로우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최고다. 역시 너랑은 맞는다니까.” 안젤리카도 손을 마주 뻗어 짝 소리 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도와줄 거지, 크로우?” “좋아. 무대라면 이 형님한테 맡기라고.” “역시 믿음직하군. 토와는 어때?” “물론 나도 되는 힘껏 도울게. 우리의 기억, 올해의 학원제에 빠짐없 이 남기고 싶어. 우리 함께 힘내자!” 상상 이상의 반응에 나머지 셋이 모두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토와를 내려다보았다. “응? 왜 다들 그런 표정을…….” “아아, 나의 토와는 오늘도 사랑스럽구나!” 안젤리카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토와를 모두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토와는 바빠서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 31*


“그러게 말이다. 공부만 하던 우리 병아리가 언제 이렇게 컸다니.” “읍, 으, 나도, 일원, 이니까…….” 남은 힘을 짜내 겨우겨우 말하던 토와의 목소리는 한층 격렬해진 안 젤리카의 포옹에 묻혀서 잦아들었다.

그날 저녁 바로 조촐한 회의가 열렸다. “일단 무대의 목표부터 정해 볼까?” “역시 우리 VI반을 잊을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거지.” “그렇다면 모토는 하나구만. 충격 스릴 쇼크 서스펜스.” “역시 답은, 선정성인가.” “안제랑 크로우 군. 나도 엄연히 학생회라는 걸 잊지 않아 줬으면 좋 겠어. 지나친 건 내 선에서 제지할 거니까.” 교실은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나름대로 치열한 언쟁 끝에 결국 무대는 제국에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장르로 정해졌 다. 각자 무얼 맡을지도 논쟁거리였다. 록에 조예가 있는 크로우와 안 젤리카 두 사람이 멜로디 파트를 맡았고, 죠르쥬는 비교적 쉬운 드럼을 연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토와의 컨셉으로 화제가 넘어가자 프로듀스 를 맡은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토와가 메인 보컬이라면 역시 머리는 풀어주어야겠군.” “아니, 여기는 트윈 테일이야.” “크로우, 너는 나의 토와에 대해 잘 모르는군. 토와는 머리를 풀면 의 외로 성숙한 느낌이란다.” “모르는 건 젤리카 네놈이다. 토와 허셜의 매력에서 귀여움을 빼놓을 수 있나. 사랑스러움을 극도로 강조한 세팅에 언밸런스한 의상과 와일 드한 음악의 조합으로 남학생들의 하트를 캐치! 하려는 전략을 왜 모르 32


는 거야.” 그러자 절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안젤리카가 묘하게 만족한 표정 을 지었다. “좋아. 그러면 여기는 내가 물러나지.” “응? 어. 그래 좋아.” 한창 얘기에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 뒤편에서 지금 이야기의 주인공 만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저기, 꼭 그런 식의 의상으로 가야 하는 거야……?” “물론이지.” “록으로 가는 이상, 노출은 다다익선이라고.” 엄청난 위압감으로 생글생글 웃어 보이는 두 사람에게 더 뭐라고 말 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토와의 등을 죠르쥬가 말없이 두드려 주었다. 크로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의상이 정 아니다 싶으면 하워드 씨가 물릴 테니까.” “하워드라면, 부티크 르 사쥬의 오너 말인가?” “응. 제도에 자주 다니다 보니까 안면이 생겼걸랑. 그 아저씨도 여기 저기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크로우 군은 정말 신출귀몰하구나. 어디로도 갈 수 있을 것 같고, 어 디에도 안 얽매일 것 같고.” “과연 그럴까나.” “나,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나쁘지 않은걸.” “토와 넌 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가볍게 웃어넘긴 크로우가 손뼉을 쳐 친구들의 시선을 모았다. “자아 자아. 그럼 후보곡이랑 컨셉도 정했겠다, 한 번 정도는 대강 맞 춰 보자고.” 33*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번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노래를 마치고 숨 을 헐떡거리는 토와에게 크로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아니 야.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잖아. 노래 실력은 상관없어. 느낌을 못 잡고 있는 게 문제지. 템포가 빨라질 때 얼굴을 들어. 그렇게 어깨를 움츠리 고 있으면 아무도 똑바로 봐주지 않아. ― 여기서 크로우가 어깨를 툭 툭 치자 토와가 움찔했다 ― 아니 거기서, 말했잖아, 토와. “……안되겠다. 좀 심각해. 이대로는 본격적으로 연습 들어갈 때 차 질이 있겠는데. 토와, 너 한 번도 이런 거 해본 적 없지? 교회 성가대도 한번 안 해봤지?” “으응. 그래도 음악 수업 따라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는데…….” “노래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토와 너 시간 있으면 나랑 연습 좀 더 하고 가자.” 묘하게 교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는 크로우에게 겁을 먹은 토와가 애달픈 눈빛으로 도움을 바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안젤리카와 죠르 쥬는 이미 한 발짝씩 뒷걸음질을 친 차였다. “특별연습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 “맞아 맞아. 힘내, 토와. 우리는 먼저 갈게.” 까닭도 모르고 배신감이 들었지만 이제 수가 없었다. 크로우가 싱글 싱글 웃으며 앞으로 다가오자 토와는 정체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그럼 토와 양. 약 한 시간 동안 잘 부탁한다. 이 어깨, 이 자세, 발성 까지 다 확실하게 고쳐놓을 거니까.”

안젤리카가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 런 모습을 뜻한 건 아니었을 터다. 자기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책더미 를 안은 채로도, 혹은 학생회에서 콧대 높은 귀족 생도들을 상대하면서 34


도 늘 다부져 보이는 토와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 위에 머리카락이 땀기로 곱슬곱슬 달라붙어 엉망이었다. “이제 좀 낫네. 고생했어, 토와.” 토와는 대답도 못 하고 그만 자리에 픽 주저앉았다. “그래서, 정말 할 수 있겠어?” “응?” “이 정도 강도로 연습할 거야. 괜찮겠어? 겨우 짐 좀 덜어놓은 걸 더 고생시키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또 안제 녀석한테 휘말리는 바람에. 힘들겠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아냐, 아냐! 할 거야! 나만 힘든 게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 VI반 의 존재를 보여줄 수 있는 어쩜 마지막 기회인데, 그냥 흘려보내긴 싫 어.” “헤에. 묘하게 적극적이네, 토와 아가씨.” 크로우가 제 머리에 양팔을 얹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면 약속한 거다. 이제 울고불고 매달려도 안 봐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윽……!”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의상, 싫으면 거절해도 돼. 다른 안도 몇 가지 있으니까.” “아니야. 크로우 군과 안제의 선택을 믿을게. 나 실습 때처럼 너희만 큼 체력이 없어서 힘들겠지만, 대신에 되는 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다 시 한 번 잘 부탁해, 크로우 군!” “아니, 그래도 우리 중에 제일 일이 많은 건 너잖아. 나도 이제 무대 준비 들어가면 일도 전만큼 못 도와주겠고. 뭣하면 같이 학생회에 가서 사정 설명이라도 해볼래? 그동안 한 게 있는데 축제 때까진 좀 봐줄 걸.” 35*


하지만 토와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어차피 내가 하지 않는 만큼 다른 학생들이 하게 되는걸. 내가 맡은 업무는, 지금까지 내가 누구보다 익숙하게 해온 일들 이야. 내가 계속 맡아서 하는 게 제일 나아.” “학원제 준비에, 회의 기록에, 안건 수리까지 전부 계속 맡아 하겠다 고? 너 쉴 시간은 있냐?” “지금은 크로우 군도 조금씩 도와주는걸.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총 괄을 맡았을 뿐이지, 다른 학생들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부탁하고 있 어.” “……그거, 너보다는 회장이 해야 할 일 아니냐? 멍청하다, 멍청해, 토와 허셜. 그렇게 나오니까 학생회 놈들이 너한테 계속 일을 떠맡기는 거야. 힘들지도 않아?” “크로우 군도 참 바보 같은 소릴 하네, 힘들지 않을 리 없잖아! 그래 도 나, 학생회를 위해서라거나, VI반을 위해서라거나 그런 생각을 하면 힘들었던 게 거짓말처럼 싹 날아가거든. 아마 이것도 천성이겠지. 헤 헤.”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천성이네.” 토와가 킥킥 웃었다. “꽤 괜찮지 않아? 내가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면, 내가 한 일들이 나를 기쁘게 해. 게다가 다른 사람도 도움을 받는 거야. 그럼 이건 나한테 축 복이겠지?” 방금까지 힘이 부쳐 색색거리던 소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해맑 았다. 연습의 여파로 발간 홍조가 남은 뺨이 둥글게 부풀었다. 기분 좋 은 모습에 크로우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 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만 젓다가, 그저 한 걸음 다가와서 토와의 머 리 위에 손을 얹었다. 36


“……크로우 군?” “토와. 나랑 블레이드 몇 판 할래?”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자유행동일 저녁까지 교사에 머무 르는 학생은 많지 않기에 건물은 평소보다 적막했다. 의자 당기는 소리 가 고막을 긁었다. 묘하게 긴장되는 공기 중에 자리에 앉은 크로우가 덱을 꺼냈다. “토와 네가 이기면 지금 디자인 그대로에서 의상의 노출을 줄여 주 지.” “그건 괜찮다니까. 그런데, 크로우 군이 이기면?” “당연히 노출을 늘리는 거지.” “싫어……! 아니, 안 할래!” “농담이고, 이기면 내 얘길 좀 들어줬으면 해. 안 봐줄 테니까, 진지 하게 승부 한판 해보자고.” 눈을 동그랗게 뜬 토와가 곧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내볼게.” 빈 교사에 간헐적으로 카드 내는 소리나 신음이 이어졌다. 승부를 선 언하는 크로우의 목소리는 계속 같은 내용을 말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고, 토와는 아까보다도 더 지쳐서 책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작은 등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거짓말……. 룰만 봤을 때는 간단해 보였는데, 한 판도 못 땄어…….” “이렇게 안 되는 것도 드문 데 말이지. 역시 예상한 대로네.” “너무하잖아……. 왜 그렇게 예상한 건데?” “넌 패를 아낄 줄 모르니까.” 억울함 반, 궁금함 반인 얼굴로 토와가 바라보자 크로우가 천천히 입 37*


을 열었다. “너는, 토와. 앞으로의 여력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때그때 있는 좋 은 패를 고스란히 내어버려. 그러니 내가 기습적인 공격을 했을 때 제 대로 대처를 못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크로우가 자신의 블레이드 패를 착 소리 나게 손에 쓸어 담고 정리하 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것도 비슷해. 너는 늘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을 챙기고, 이끌지. 학생회 녀석들도 언제부터인가 너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고. 너 는 올곧고, 한 점 오점이 없어. 그래서 늘 그렇게 온 힘을 다해도 뒤탈 이 없지.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끈다는 건, 언제고 책임을 동반 하게 되어서.” 크로우가 판 위에 손을 올렸다. 검지를 들어서 토와가 낸 카드를 손 가락으로 훑다가 7과 1을 한 장씩 빼서 토와 쪽으로 밀어냈다. “아낄 건 아끼고, 뺄 때는 빼도록 해.” 토와가 눈을 깜박였다. 상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쯤 낮았다. 크로우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곧잘 하는 목소리였다. “학생회 일은 너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수많은 학생들이 얽혀 있지. 그러니까 네가 제대로 했다고 생각해도 언제 어디서 삐거덕할지 모른다 고. 학생회 녀석들이 무슨 생각으로 너한테 일을 모는지 알고 있어? 봐, 토와.” 탁 소리가 났다. 크로우가 정리한 패 중에서 볼트 카드를 뽑아서 판 위에 내던진 참이었다. “사람이란 나쁜 패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고, 상황과 본심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런데 네가 그렇게 남을 위한답시고 모든 힘을 쓰다 가는 정작 정말로 큰일이 닥쳤을 때 힘을 낼 수 없을 거야. 그러다가 픽, 쓰러져 버리는 거지.” 38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토와는 천천히 그 내용을 생각했다. 소녀 는 제 쪽으로 들어온 카드 두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살짝 들어 크로우가 내던진 볼트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주워서 크로우에게 되돌려주었다. “자.” “어……, 고맙다.”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겠어, 크로우 군. 하지만 크로우 군은 정말로 는 나에게 볼트를 내지 않을 거잖아.” “……응?” 소녀의 얼굴은 아까와 한 치 다름없었다. 웃는 얼굴이 맑고 눈에 티가 없었다. “나, 원래 이런 게임에는 재능이 없어. 다른 사람의 속내를 추측하는 것도, 힘을 아끼는 것도, 남과 간격을 재는 것도 어려워. 그래서 나는 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 사람도, 미래도, 믿고 힘을 다할 수밖에 없어. 어떻게 보이든, 무엇을 하든, 믿고서 돕는 거야.” “아니 그, 말이야 좋지만,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좀 경계도 하고 그래 라.” “나한테 제일 이상한 사람은 크로우 군이었는데?” “엣.” 토와가 배시시 웃자 크로우는 머리 한편이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말 이, 통하지 않는다. 게임이 어딘가 잘못 굴러가고 있었다. “생활 방식도, 외양도, 말투도. 뭐 하나 나랑 맞는 부분이 없었잖아. 솔직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아마 VI반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난 틀림없이 크로우 군을 멀리했을 거야……. 멍청하지? 그런데 그런 크로우 군이 언제고 날 도와줬잖아.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대책 없이 다른 사람을 믿는다면, 그건 크로우 군 때문인 거야.” 39*


“뭐냐, 그게.” “그러니까 게임을 잘하는 크로우 군이 책임을 지면 되는 거야. 내가 이런 식으로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크로우 군이 나를 쭉 도와줘야 해?” “허.” 크로우가 피식 웃었다. “너 말하는 거 완전히 엉망이다.” “헤헤, 그렇네…….” 토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카드만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내 대답은- 기각한다.” “어, 왜?” “나는 그렇게 믿음직한 놈이 못 된다고. 봐, 지금도 니가 사람을 잘못 보고 잘못된 부탁을 하는 거야.” “항상, 그렇게 말은 하면서. 크로우 군은 어쩔 수 없구나, 나는 오히 려 크로우 군 쪽이 걱정이야…….” “뭐?” “지금도, 전에도, 항상 그래……. 쉽게 쉽게 자랑하는 척하지만 정작 누가 칭찬하면, 아니라고 발을 빼면서. 아무도 진짜 자신은 모른다는 것 처럼……. 나는 크로우 군을 대체로 좋아하지만, 그런 점은 섭섭해. 그 러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좀 더 서로 믿어도 좋잖아.” 크로우는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작은 별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겉보기엔 영락없이 조그만 여 자애 주제에 가끔 이렇게 치고 들어올 때가 있다. 크로우가 중얼거렸다. “토와. 네가 좀 더 멍청했다면 좋았을 거야.” “어……, 지금은 싫다는 거야?” “거기서 생각이 그렇게 가냐.” 40


고개를 들어 본 토와의 얼굴은 정말로 울상이었다. 그 점이 뭐가 그 렇게 중요하다고 크게 뜬 눈에 걱정이 그득했다. 그 표정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몸에서 힘이 빠져서, 크로우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그만 웃어…….” “넌 정말 못 이기겠다.” 여전히 키득거리며 크로우가 대꾸했다. “왜 웃는 거야. 나는 정말 크로우 군이 내가 쓸데없이 참견해서 싫다 는 걸까 봐, 걱정이 돼서……,” “참견한 건 아냐? 그런데 지금 내가 먼저 쓸데없는 참견을 했던 참이 라 말입니다.” 크로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우리 같이 지낸 게 벌써 몇 달인데. 내가 말 한마디 때문에 니가 싫어지겠어? 이거 믿음이 없으시구만.” “……크로우 군은, 그래.” “응?” “예전에 안제도 말했잖아. 크로우 군은 어딘가 다르다고. 한없이 가 벼워서 바닥을 모르겠어. 싫지는 않아. 그런데 익숙하지도 않아서…….” “으음, 이 아가씬 가끔 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신지 모르겠다. 아무 튼 그렇게 쉽게 친구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 점은 안심하라고.” “그래? 그러면 계속 참견해도 돼?” “안 돼.” “싫지 않다며?” “그래도 안 돼.” “정말로……?” 토와는 다시 뺨을 부풀리고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크로우는 다시 웃 음을 참기 어려워졌다. 41*


“그만 웃으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우리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만 들어가자.” “응, 응.” 제3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크로우는 옆에서 걷고 있는 소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가끔 느꼈지만, 토와 허셜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 능이 있다. 아마 그래서 자꾸 어울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토와는 하늘 을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별을 보기를 좋아했던가. 앞을 제대 로 보지 않는 게 넘어질 것처럼 불안해 보여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 녀는 밤하늘의 별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크로우는 소녀 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 토와가 말했다. “봐. 정말 예쁘지, 크로우 군.” “응. 그렇네.” 그래, 이 세상에 부러 너를 공격할 사람을 상상할 수는 없지. 앞으로 도 그러길 바라. 크로우는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주머니 안에 아까 토와가 주워준 볼트 카드가 들어있었다. 크로우는 카드를 한 줌으로 구 겨다 가는 길에 내다 버렸다.


3. 별이 빛나는 밤에

요 며칠 토르즈 사관학교의 분위기는 정신없고 어수선했다. 두말할 것 없이 이제 스무날이 남은 학원제 때문이다. 일주일 전만 해도 축제 같은 건 없는 셈 치고 지내던 학생들이 지금은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 는지 애가 닳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트리스타 지역 최고의 축제였다. 학교에 연이 있는 각지의 귀빈이나 황족까지 학원제를 구경하러 온다는 소문이 분위기에 한몫을 더했다. 몇몇 학생들은 허가증을 얻어서 작은 노점을 준비하고, 각 동아리는 부실을 정리하고 온 학교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역시 가장 불이 붙어 준비되는 것은 각 반의 무대였다. 귀족반과 평민반이 사이가 안 좋은 일이야 예사지만 귀족반과 귀족반, 평민반과 평민반끼리도 알게 모르게 견제하기 시작해 엉망이었다. 크고 작은 신경전이 이어지고 종종 목소 리가 높아지는 일마저 있었다. “그래서, III반에 로긴스를 찾아갔더니 나를 벌레 보는 것처럼 쳐다보 면서 무대 염탐하러 왔느냐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로긴스 주제 에 나를 그런 눈으로 봤다는 게 자존심 상해……!”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프리델의 방문을 마다하다니, 로긴스도 축 제 준비로 바빠서 정신이 흐려진 게 아닌가.” “안제도 빈말은 참. 하하. 그래.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할래? 안제가 상대라면 나도 몸 좀 풀 만하지.” “아니 그건 사양할게.” 43*


프리델의 푸념을 들어주며 습관대로 미사여구를 늘어놓던 안젤리카 가 의도치 않은 반응에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무튼, 어차피 며칠이면 서로 무슨 무대 하는지 다 소문날 텐데 그 러고 몸 사리는 게 웃기다는 거지. 어차피 다섯 개밖에 없는 무대인 데……, 아, 맞다. 다 끝나고 추가 무대인가 특별 무대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는 하던데.” “호오. 그 소문 궁금한걸.” 안젤리카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뭐, 헛소문이겠지. 그리고 만약에 정말로 그런 게 있대도 얼마나 대 단하겠어? 지금까지 본 사람도 없을 정도로 몰래몰래 연습하는 게.” “그도 그렇군.” 안젤리카가 웃는 얼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제?” “프리델, 오랜만에 대련 한 번 할까?”

“그러니까, 이기자.” 안젤리카의 이야기를 들은 VI반 세 명이 서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네가 진 분풀이를 왜 학원제로 하려는 거야.” “애초에 브레이서로 검이랑 대등하게 싸운다는 것부터가 상궤를 벗어 난 거 아니냐…….” “무기는 자신의 연장선일 뿐이다. 결국 마음이 흔들려 지고 말았으 니, 패배는 인정해야지.” “패배를 인정한다는 자세가 그러세요? 학원제 무대로라도 이겨버리 겠다?” 44


“진정한 무술인은 다음의 승리를 기약하며 물러나는 법이지.” “아, 네. 그러세요.” “그도 그렇지만……, 깜짝 무대를 하려고 했는데 왜 소문이 난 걸까.” “그 소문 내가 냈는데.” 크로우가 당연하게 대꾸하자 안젤리카가 눈을 깜박거렸다. “뭐? 어째서?” “당연하잖아? 무대 다 끝나고 갈 준비 하는데 그냥 갑자기 저희가 깜 짝 무대를 하겠습니다! 하면 애들이 좋다고 받아들이겠어? 이 정도 밑 밥은 깔아 놔야 아, 그게 정말이었구나 하고 야광봉 흔들어 주지.” “그래도 깜짝 놀래주도록 계획한 거잖아.” “기습공격이 성공하려면 일단 기반이 있어야 된다고. 맨몸으로 덤볐 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살아나오면 다행이지. 그래서 내가 부지런히 밑 밥을 깔아놓고 있다는 말씀.” “그래서 결국 오늘 내가 겪은 굴욕은, 크로우 네놈 때문이라는 말이 군…….” “뭐 그런 억지가……. 졌으면 그냥 받아들이라고 좀…….” “이 굴욕 네가 갚아줘야겠다, 크로우 암브러스트.” “뭣, 젤리카 이 녀석 자존심 단단히 상했구나. 아 아니 내가 말 잘 못 했어. 그만, 그만…….” “그만하자, 둘 다.” 느긋하게 구경하던 죠르쥬가 끼어들었다. “요새 다들 바빠서 겨우 연습시간을 맞춘 거잖아. 오래 축낼 시간은 없지.” “응. 나랑 크로우 군은 학생회 일을 하고, 죠르쥬 군은 루르 공과대학 학생들이랑 협업하고 있고. 그런데, 안제는 뭘 하느라고 그렇게 바쁜 거 야?” 45*


“난 알지.” 크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요즘 얼굴 보는 여자애들마다 젤리카 녀석 얘기라고. 그렇게 정열이 불타나. 진짜 혀를 내둘렀다.” “뭐어어? 안제, 지금까지 그러고 있는 거야?” “이런 이런, 토와. 너는 언제나 나의 첫 번째니까 걱정하지 말래도.” “그런 게 아니잖아, 안제! 걱정하게 하지만 말라고 했는데, 이 정도면 나도 걱정된다고오.” 토와가 볼을 푸우 부풀리는 사이 죠르쥬가 안젤리카에게 속닥거렸다. “안제,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작전 아직도 하고 있는 거야? 솔직히 말 해봐. 이젠 그냥 여자애들이 좋아서 하는 거지?” “음……, 그게, 사실 내 적성에 맞기도 하고, 또 신경쓰이는 게 있어 서 말이지. 지금 회의실로 가겠나, 죠르쥬?” “응? 그냥 여기서 얘기해, 안제. 긴급회의라고 해봤자 딱히 정말 비 밀스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죠르쥬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안젤리카는 답지 않게 불안한 표정이었 다. 옆에 있는 두 사람을 흘끗 쳐다보더니 잠깐 실례하겠다며 죠르쥬의 손을 잡아끌고 빈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얘기하라니까……, 대체 뭔데 그래?” 죠르쥬가 투정하는 동안, 안젤리카는 문을 잠그고 방에 사람이 없는 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크로우가 특히 가깝게 지내던 아가씨들 중 몇 명 말이다. 공통적으 로 한때의 기억이 희미해.”

“두 사람, 안 오네. 꽤 시간이 지났는데.” 46


“둘만의 시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크로우가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잠시 방이 조용했다. 둘 만의 시간이라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흠흠. 크로우가 헛기침을 했다. “흠,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 앵콜 무대나 한번 해볼까? 이쪽은 보컬 위주니까, 그 녀석들 없이도 연습할 수 있을걸.” “으, 응……!” 토와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움츠린 어깨와 목이 뻣 뻣하게 굳어 있었다. 완전히 교정하기엔 아직도 멀었나. 쓴웃음을 지으 며 크로우는 도력 기타의 줄을 몇 번 퉁겼다. “가자, 토와.” 단출한 반주에 맞추어 토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메인 보컬은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듯 얼굴이 긴장으로 파리했다.

무지개 너머 어딘가, 아주 높은 곳에, 노랫말로 들었던 곳이 있어요 무지개 너머 어딘가, 하늘이 푸르고, 당신이 꿈꾸던 꿈이 진실로 이 루어지는 곳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토와의 얼굴에 부드 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크로우가 잘 아는 미소였다.

언젠가 난 별에게 소망을 빌고 내 뒤 멀리에 구름이 있는 곳에서 잠 을 깨겠죠 골칫거리가 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그곳에서 소녀의 높은 목소리를 들으며 크로우는 잠자코 기타 줄을 퉁겼다. 노 래가 끝난 후 잠시 말이 없는 크로우에게 토와가 걱정스레 물었다. 47*


“왜 그래, 크로우 군. 아직도 이상해?” “아니.” 크로우가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훌륭해. 여기까지 잘 해줬어, 토와.” “응, 고마워……! 안제가 바라는 대로, 모두가 잊지 못할 무대가 되면 좋겠어. 여기까지 온 건 크로우 군 덕분이야. 앞으로도 크로우 군을 믿 고 열심히 할게.” 잔잔한 노래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토와가 크로우를 바라보고 있었 다. 커다란 연녹색 눈동자가 정말로 한 치 흔들림 없이 믿음과 애정으 로 가득해서, 크로우는 순간 뒷걸음질 치고 싶다고 느꼈다. 혹은 한 발 짝 더 앞으로 가고 싶었다. 어깻죽지가 가려운 듯했다. 토와의 얼굴에 서 웃음이 사라졌다. 낯빛이 발그레했다. 마주하고 있었다. “자, 오래 기다렸지. 미안. 연습에 들어가자, 제군.” 안젤리카가 벌컥 문을 열고 쩌렁쩌렁하게 외치자 토와와 크로우 둘 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했다. “음……? 이 반응은, 뭐지? 둘이 좋은 분위기였나? 실수한 건가? 이 거 미안. 다시 돌아갈까?” “아니 아니, 얘랑 그런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안젤리카 아가씨. 내 너한테 맞아 죽을 생각은 없다.” 크로우가 툴툴거렸다.

그러나 사람 일이 늘 생각한 대로 되는 법은 없다. 학원제를 보름 앞둔 자유행동일 아침,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침대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새벽 늦게 잠들었는데도 습관대로 어김없이 아 침 일찍 눈이 뜨였다. 아침 운동을 하려고 간단하게 옷을 챙겨 입고 계 48


단을 내려가는 크로우를 보면서 일찍 일어난 학생 몇몇이 휘파람을 불 었다. 저것들은 뭐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크로우는 외투를 입을 걸 하고 후회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1층에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진 탓이다. 그리고 로비에서 눈에 띄는 차림새의 여자를 본 순간, 잠이고 뭐고 확 날아간 크로우는 번쩍 눈을 떴다. “어……, 토와. 벌써 준비 다했어?” “앗, 응. 너무 일찍 나왔나……?” “아니, 미안, 나도 금방 준비하고 나올게.” “내가 일찍 나온 거니까 천천히 나와도 돼……!” 사실 서류 같은 건 거의 토와에게 있겠다, 크로우가 따로 준비해야 할 건 별로 없었다. 그저 방에 돌아가 급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몇 번 눌러 만진 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가방을 메고 나왔다. “이제 됐어.” “헤헤, 그럼 나가자.” 신이 나서 앞장서는 토와를 크로우는 저도 모르게 곁눈질했다. 하늘 거리는 원피스 위에 몸에 붙는 재킷을 걸치고, 평소와 다르게 보랏빛으 로 맨 머리 리본이 산뜻해 누가 봐도 눈에 띌 법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자신의 머리에 대충 쓴 검은 반다나나 구겨진 바지, 부츠 뒤축의 덜 털어낸 모래에 신경이 미쳤다.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학원 제 준비를 하러 가는 것뿐이잖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크로우에게 토와가 의아한 낯을 했다. “무슨 일 있어, 크로우 군?” “아니, 아니. 아침은 역시 키르히에서?” “응. 같이 밥부터 먹고 오늘 계획을 세워보자!” 환하게 웃는 토와를 보면서 크로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가게 종업원들의 반응이 눈에 훤했다. 49*


“저…… 저희, 그냥 식사하러 왔을 뿐인데요.” “괜찮아, 괜찮아. 두 사람이 너무 보기 좋아서 서비스하는 거니까. 밥 만 먹지 말고 음료까지 쭉-쭉 마시고 가라고.” 토와가 모기만 한 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크로우가 주는 건 사양 않겠다만……,하고 말꼬리를 흐리자 돌리가 크로우의 등을 팡팡 치고 귀를 잡아당겨 소곤거린다. 오늘 제대로 안 하면 너는 남자도 아 니다. 아니 그러니까 뭘 제대로 하라는 건데……. 카페 안의 모두가 보 고 있는 것 같아 식사가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를 않아서 크로우는 연 거푸 물을 마셔댔다. 반면에 토와는 기분이 좋은지 야무지게 한 접시를 싹싹 비우고 주문 한 적도 없는 음료의 빨대를 쪽쪽 빨고 있었다. 토와가 입고 있는 원피 스 색과 비슷한 음료의 빛깔에 크로우의 눈길이 쏠렸다. 잠깐 잔을 흘 겨보다가 곧 마시고 있던 음료를 빼앗았다. “크, 크로우 군?” “이거 칵테일 아니야? 지금 쪼그만 애한테 뭘 주는 거야.” 프레드가 태연히 대꾸했다. “한번 마셔보기나 하셔.” 크로우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 미간이 풀 렸다. “……아. 무알콜이네.” 프레드와 돌리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빛을 교환하며 킥킥거렸다. “그리고 크로우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 씨 옆 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켜던 놈이. 지금도 말이야, 토와는 안 되고 너는 괜찮아?” “당연히 얘는 안 되지. 이 녀석 몸 쪼끄만 거 봐, 내가 얘 다섯 배는 되겠다. 그리고 사라 때야 그쪽에서 주니까 사양 않은 거라고. 웃어른 50


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도 결례야.” “그래서 같이 몇 병을 쌓았다고? 하여간 말은 잘해요.” 그렇게 돌리와 크로우가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하자, 토와가 공기 넣 은 헛박수를 몇 번 쳤다. “자, 자. 크로우 군. 이만 적당히 하고 오늘 일정을 정리해보자.” “아. 알았어. 처리할 게 한 서너 개 있던가?” “응. 먼저 베아트릭스 교관님께 들러서, 노점을 하는 학생들에게 요 식업 허가증을 배달할 거야.” “응? 그거 지들이 알아서 받아가야 되는 거 아니냐.” “각자 준비에 열중하느라 빠뜨린 학생이 한둘이 아닌가 봐. 헤헤, 어 쩔 수 없지.” 어느새 작은 노트를 펼친 토와가 메모를 순서대로 짚어나갔다. “다음으로는, 일부 동아리와 각 반의 담당자를 만나서 무대의 내용과 제출한 내용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일. 이게 오늘 일정의 핵심인데. 각 무대에 필요한 장치를 RF사에 발주해야 하거든. 이게 꽤 시간이 걸 릴 거야. 그래도 중요한 일이니까, 꼼꼼하게 하자.” “손이 많이 가겠구만.” “그리고, 저녁에 안제랑 합류해서 잠시 우리 무대를 맞춰 본 다음에, 마지막으로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 학원제 서류를 재검토하고 수리하면 돼. 자. 할 수 있지, 크로우 군?” “이거 이거 기합 팍팍 넣고 가야겠네.” “에헤헤. 믿음직하다 우리 크로우 군.” 기운찬 토와의 미소를 보면서 크로우는 문득 자신이 이 미소에 휘둘 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자각했다. 뭐, 아무렴 어때. 다른 쪽 일은 새 벽까지 되는 만큼 정리해 둔 터였다. 오늘은 학원제 준비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51*


온종일 기가 막히게 날씨가 좋았다. 새파란 하늘에는 티 한 점이 없 었다. 햇빛은 온난한데 선선한 바람이 몸을 간지럽혔다. 허가증을 배달 하러 교내와 트리스타 상점가를 돌아다니는 일이 실은 소풍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기숙사나 가게 안의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상 점가를 배회하자, 가드닝샵의 제인이 수고한다며 싱싱한 그랑 로제 몇 송이를 건네주었다. 물을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슬이 송골송골 맺 힌 붉은 장미를 토와에게 건넸다. 토와가 꽃을 얼굴에 대고 향기를 맡 았다. 건네준 순간 아차 싶었지만 기뻐 보이는 토와의 표정에 아무래도 좋지 않나 싶은 기분이 되었다. 배달을 전부 마치고 돌아가자 베아트릭 스 교관이 차를 권했다. 그나저나 허셜 양 혼자서 뛰어다닐 때는 역시 아슬아슬해 보였는데, 암브러스트 군이 함께 있어 주니 보기가 좋네요. 손 안에 쥔 찻잔이 따끈따끈해서 평소처럼 시끄럽게 말을 붙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날이 좋은 탓에 양호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바람결 에 원예부 화단의 꽃향기가 실려 왔다.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가을볕 아니랄까 봐 내리쬐는 빛에 살갗이 물리적으로 따가웠다. 교사 뒷문에서 걸음을 뗀 토와는 그만 눈이 부셔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고, 크 로우는 재킷을 벗었다. 어, 크로우 군. 겉옷은 걸치는 게 덜 따갑지 않 겠어? 의아해하는 토와의 머리 위에 크로우가 짠하고 재킷을 펼쳤다. 한 사람을 가릴 만큼 자그만 그늘이 생겼다. 아하하, 이게 뭐야, 크로우 군. 뭐기는, 그늘이십니다. 자자. 뜨거우니까 빨리 학생회관까지 뛰어가 자. 뛰는 내내 토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들거렸다. 학생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각 무대의 담당자를 만나러 교 사와 학생회관을 드나들 때마다 학생 몇 명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본교사 옥상에서 무대에 대해 설명하던 에밀리가 문득 크로우와 토와를 교대로 훑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둘이 이렇게 같 52


이 다니니까…… 크로우가 먼저 말을 막았다. 보기 좋다고 할 셈이지? 그래. 그러니까 네가 앞으로도 자주 이렇게 토와 좀 챙겨 줘. 크로우가 콧등으로 웃어넘겼다. 너는 남한테 신경 쓸 시간에 테레지아랑 뜨거운 시간이나 보내라고. 언제나처럼 상대와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한 크로우 를 보면서 토와가 악의 없이 말했다. 크로우 군은 정말 사교성이 좋구 나. 에밀리가 질색을 했다. 우리 토와 눈에 벌써 콩깍지가 쓰인 것 같아 서 어쩐담. 토와가 당황해 얼굴이 발개진 사이 다시 크로우와 에밀리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금세 해가 뉘엿뉘엿했다. 가을이 제법 깊어 화창한데도 날이 금방 저무는 시기였다. 마음이 급해 진 두 사람이 기술동에 가서 죠르쥬를 만나는 동안, 안젤리카가 당당하 게 나타났다. 품에 4인분의 도시락과 죠르쥬를 위한 달콤한 군것질거리 를 잔뜩 안고 있었다. 죠르쥬는 감격해 포옹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렇 게 네 사람 모두 힘을 비축하고, 구교사에 마련한 간이 무대에서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연주를 맞출 수 있었다.

“좋아.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다. 수고했어, 크로우 군. 정말로 고마 워.” “참. 내 평생 이렇게 성실한 하루를 보내본 적이 없는데.” “에헤헤, 그거 미안.” “그래, 미안해해야지. 아니 자랑스러워해도 되겠다, 평생. 제가 크로 우 암브러스트를 이렇게 성실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고. 너는 특별히 성공한 인생이야.” 크로우가 과장스럽게 감격한 시늉을 하자 토와가 배시시 웃었다. “응, 나 이제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크로우 군은 헐렁한 척할 뿐이라 53*


는 거.” “……뭐야. 그건 나를 앞으로도 이렇게 부려 먹겠다는 소리인가? 이 사람 무서운 사람이었네.” “아니, 내가 크로우 군을 믿는다는 뜻이야.” 샐샐 웃던 크로우가 더 어쩌질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믿을 놈을 믿으라니까…….” “응! 학원제 무대도, 크로우 군의 프로듀스를 믿고 따라갈게!” “으으…….” 크로우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더 뭐라고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히겠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참이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오늘은 끝까지 성실이다. 마지막으로 부티크 에 의상 주문 상태를 확인하러 가자, 토와!” 토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로우와 함께 검토하던 서 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종이 한 면 가득히 학원제 비품의 재고와 관리 상태가 단정한 남자의 글씨로 보기 좋게 정 리되어 있었다. 토와는 그 위를 손가락 끝으로 찬찬히 쓸어보았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혹은 무슨 까닭인지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 겠지. 까만 밤거리를 걸으며 토와는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있었고, 조금 더 시선을 내리면 크로우의 뒷모습이 있었다. 등이 크고 넓다. 사실은, 지금도 그다지 정신이 없는 듯했다. 앞서 걷던 크로우가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잘 따라오고 있는 거야? 왜 바로 앞을 보고 안 걷고.” 토와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걱정되면 나란히 걸으면 될 걸, 크로우 군이 자꾸 혼자 앞서 가니까 54


그렇지.” “아, 그렇네.” 크로우로서는 나란히 걷다가 다정한 소문이 돌 것을 염려한 행동이 었지만 이렇게 밤이 늦어서야 볼 사람도 없겠지 싶었다. 상점가의 가게 들은 이미 반쯤 문을 닫았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다만 옆에 토와가 함 께 걷고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기묘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겠 는데, 이상하게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트리스타 공원에 두 사람의 발걸 음 소리만 울렸다. 낙후된 가로등이 깜박거렸다. “너희들 늦게까지 고생한다.” 말없이 걸어가던 두 사람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토와가 어색하게 말 했다. “미휴트 씨. 오늘은 늦게까지 있으시네요?” “어. 이번에 복귀한 럼버 블리츠에 걸 배팅액이 모자란 기분이라, 오 늘 마지막 손님 한 명만 더 받으면 딱 좋을 텐데 하고 있었지. 마침 잘 왔다, 너희들. 마수의 흰살, 마수의 붉은살, 마수의 젤라틴 중에 뭐 필요 한 거 없냐?” “아저씨. 팔 물건 없으면 그냥 팔 생각을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 미휴트가 껄껄 웃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그건 그렇고 너희 이 시간까지 학원제를 준비하던 거냐? 올해도 기대해도 좋겠구먼. 이거 오르디스에서 열리는 연회 못지않겠네.” “오르디스?” “어. 아직 몰랐냐? 학원제랑 비슷한 날에 카이엔 백작이 오르디스에 서 연회를 연다고.” “그 귀족 나리가? 갑자기 왜일까.” 55*


“거기까지 자세히는 모르지. 워낙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양반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거나, 아니면 보여주고 할 말이 있거 나.” “뭐, 그렇겠구만.” 먼 하늘을 바라보는 크로우의 어깨를 미휴트가 툭툭 쳐왔다. “자, 마지막 손님. 그러면 정보료 내놔라.” “아니, 무슨 소리야. 자기가 와서 멋대로 말해 놓고는 다짜고짜.” “그러면 물어보질 말았어야지. 또 카드 게임 같은 걸로 때울 생각은 말고.” “그런 돈은, 지금은 없어.” “그럼 됐다.” 뜻밖에도 미휴트는 그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오늘의 정보료는 좋은 모습 보여준 걸로 탕감하지. 앞으로도 좋은 구경시켜줘라.” “정말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크로우에게 손을 흔들던 미휴트가 토와 쪽을 돌아보고 정중하게 인 사하자, 대화에 통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토와는 얼결에 꾸벅 맞절을 했 다. 크로우는 다시 먼 허공을 보고 있었다. “벌써 움직이는 건가.” “응?” “아니, 그냥 혼잣말.” “궁금한데!” “꼬마 아가씬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빨리 자세요. 그래 야 쑥쑥 크지.” “와아, 애 취급 심해…….” 투덜거리면서도 토와는 크로우의 대답이 묘하게 건성인 것을 민감하 56


게 알아챘다. 애초에 토와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있었다. 토와 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크로우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지만 밤하늘 에 무수한 별만 반짝일 뿐이었다. “크로우 군도, 별을 보는 거야……?” 그러자 크로우가 피식 웃으며 토와 쪽을 돌아보았다. “맞다. 넌 별 보는 걸 좋아했지.” “응.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첫 실습으로 켈딕에 갔을 때 생각난다.” “아아, 켈딕.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거기서 크로우 군이 도력총 사용하는 법을 알려줬었지. 가도 언덕 위에서 밤늦게까지 연습을 했는데도 크로우 군처럼 근사하게 쏠 수가 없어서 한숨을 쉬니까, 안제가 뒤에서 확 밀쳐서, 넷이 다 같이 언덕을 굴렀어. 그리고 누워서 별을 바라봤잖아.” “……하하. 그때도 이제 그립네.” 크로우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왜 꼭꼭 검은 스타킹을 신는지도 알게 됐지.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자꾸만 넘어지니까. 지금도 스타킹 안에 밴드 붙이고 있 는 거 아니냐?” “아, 아냐! 지금은 깨끗하거든……!” “아무튼 그럴 때 옆에서 보면 아슬아슬해 죽겠으니까 발밑도 좀 보라 고. 걸을 땐 가까운 곳을 봐야지 안 넘어지지.” “하지만, 별은 멀기에 보고 싶은걸.” “응?” “절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머니까, 세상이 끝없이 이어져 있 다는 걸 느끼게 되거든.” “철학적이네.” 토와가 발돋움을 했다. 그리고 손을 있는 힘껏 하늘로 뻗었다. 하늘 57*


을 향해 웅크린 손가락이 반짝이는 별을 한 움큼 움켜쥘 듯했다. 물론 손은 허공만 휘젓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우주는 이렇게 아득히 넓으니까, 다른 별에서도 지금 우리가 있는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우리처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라.” “헤에. 그 외계 생명체라고 하는 거 얘기야?” “에헤헤. 꼭 그런 건 아니야.” 토와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순수한 열망 이 가득한 시선이라 꼭 그대로 하늘로 올라갈 듯했다. 혹은 별빛이 토 와의 얼굴 위로 와르르 쏟아질 듯도 했다. “수없이 많은 다른 장소가, 다른 사람들이, 지금 우리 머리 위를 반짝 이는 별 아래에 있을 거야. 죽은 영혼은 하늘로 간다는 말도 있고, 별은 수억 년을 산다고 하니까, 어쩌면 다른 행성뿐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도 같은 별을 바라보았을지 몰라.” 둥글게 웃는 뺨이 별빛을 받아 빛났다. “그래서 이렇게 별을 보고 있으면, 끝없이 넓은 세상에 수없이 많은 것들이 있다는 걸 느껴. 작게는, 크로우 군과 나도 같은 별 아래에 있 고.” “세상이 넓다, 라는 거구나.” 크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중에 세계 일주라도 하고 싶어?” “헤헤, 꼭 그런 건 아니고.” “어라.” “세상이 그렇게 넓다고 생각하면 좀 무섭기도 하고, 나는 그냥,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거든. 이렇게 별을 보면, 내가 매일매일 할 일을 하 는 걸로도 이 넓은 세상에서 무언가 나만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뿌듯해지는 거야.” 58


“헤에, 그렇게 소박한 마음으로 그렇게 성실이란 말이지. 신기하네.” “으음……, 실망했어?” “아니.” 크로우가 키득키득 웃으며 토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기특하다. 기특해.” “애 취급하지 말라니깐.” 토와는 머리를 흔들어 크로우의 손을 떼어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 아 보였다. “그래서, 크로우 군은 무슨 생각을 해?” “응?” “나는 항상 궁금했어. 크로우 군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하기에 크로우 군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이면서도 어디에도 크게 연연하 지 않으려고 하는 걸까.” “생각은 무슨, 토와. 복잡-”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토와가 말꼬리를 낚아챘다. “헤헤. 어때 조금은 나도 크로우 군을 파악했다고.” 득의양양한 낯으로 씩 웃은 토와가 다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응. 세상은 끝없이 넓고, 사람은 한없이 많고, 그중에서도 우린 서로 다르니까. 크로우 군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크로우 군을 이해하기 어 려울지도 몰라. 그래도 이렇게 같은 별 아래 있는 걸.” 크로우는 잠자코 토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토와를 따라서 시선을 올렸다. 별이 머리 위 높은 곳에 반짝거렸다. “……별생각은 안 해. 뭐 지금 생각하는 거라면, 이 순간은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는 건가.” “뭐……?” 59*


“세상이 넓다, 고 해도 나는 그렇게 좋은 연상을 하질 못하는 거지. 그거 알아, 토와? 인간의 10% 이상은 사고로 죽는다. 나머지 중 20% 는 전쟁으로 사망하지. 가령 언제 트리스타에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불 바다가 되거나, 사고가 나서 우리 넷 중 한 명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거야. 이 세상은 넓으니까.” 말을 마친 크로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대체로 그렇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지금이라도 어떻게 될 지 모를 내 청춘을 만끽하겠다―는 말씀.” 크로우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이번에는 토와가 크로우를 바라보 았다. “……그런 생각으로 지내는구나……. 크로우 군은, 외로운 사람이네.”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옆얼굴이 기이하게도 사무치게 외롭게 느껴졌 다. 토와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을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크로우가 눈을 크게 떴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왠지 잡아줘야 할 것 같아서……, 놓을까?” “인마, 아무리 그래도 외간 남자 손 덥석덥석 잡는 거 아니다.” 그리고 토와는 더 어찌할 바 없이 의아해져 버렸다. 크로우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토와의 손을 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난 후 크로우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 손은 괜찮아. 우리 VI반이 남이냐.” 이제는 토와가 손을 잡힌 꼴이었다. 토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 다. 손이 제법 크고 따뜻했다. 손을 잡힌 채로 토와는 방금 크로우가 한 말들을 머릿속에 되뇌어 보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 그런 것은, 바로 옆에 있다고 느꼈다. 언제든 훌훌 털고 날아갈 것처럼 하릴없이 가벼운 사람. 큰 손의 온기가 유독 따뜻했기 때문인지,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60


“그러면 크로우 군. 크로우 군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지금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도, 나도 그대로 있어 줬으면 하는 것 정도는 있어.” 대답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토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아 직도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큰 손을 내려다보고, 이해했다는 듯 하얗게 웃었다. “그럼, 괜찮아.”


4. 이심률

이제 학교는 온통 산만하다 못해 수업을 듣는 학생을 보기 어려울 정 도였다. VI반 네 명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죠르쥬는 그나마 페이스를 잃지 않았지만 안젤리카는 제 생각에 빠져 수업 내용을 놓치기 일쑤였 고, 토와는 온통 어수선한 수업 분위기 속에서 집중하느라 진탕 애를 써 야 했고, 크로우는 평소보다도 꾸벅꾸벅 조는 빈도가 늘어났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우르르 모여 학원제 이야기를 했다. 이제 겨 우 일주일이 남았으니 모두 총력을 기울이느라 수업은 뒷전이었다. 그 리고 사실 뒷전이 되는 건 수업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뒤쪽에 조명이 들어온 후에 앞으로 나가서, 소개 멘트는 이렇게 가는 거지. 듣고 있어, 젤리카?” 크로우가 말하거나 말거나 안젤리카의 시선은 학생회관 구석에 멍하 게 앉아 있는 귀족 여학생에게 못 박혀 있었다. 크로우가 물었다. “음? 저거 일마구만. 쟤도 네 취향이냐?” “울 것 같은 아가씨가 있잖아. 그냥 넘어가는 건 실례다.” “아이고, 그러시겠죠.” 크로우가 빈정거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안젤리카는 혼자 앉아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테이블에 합석했다. “어……, 안젤리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일마?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혼자 앉아 있 길래.” 62


“응, 다들 학원제 준비로 바쁘니까…….” “괜찮다면 나에게라도 말해주겠어?” 애써 웃어보이던 일마의 눈꼬리가 처졌다. 그리고 왈칵 울음을 터뜨 렸다. “읍, 갑자기 미안……,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미안하기는. 친구잖아. 괜찮아, 괜찮아.” 한참 훌쩍거리던 일마가 겨우 흐느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며칠 전 루르의 군수 공장에 테러가 있었던 거 알아……? 신입 직원 이 제조 설비를 폭파하고 연막탄을 뿌리고 달아났다고…….” “응. 들었던 것 같아.” “이런 생각은 못된 거 알아. 하지만 왜 하필 그때였을까? 그때는, 우 리 오빠가 방문 중이었단 말이야. 오빠가, 폭발에 휘말려서, 다리를 다 쳐서……,” 함께 듣고 있던 토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건강은, 괜찮으시고?” “응. 그런데 오빠는 소위니까……. 다리가 불편하면, 하던 업무에 복 귀할 수 있을지……. 다들 걱정이라서…….” 안젤리카가 일마를 토닥여 주는 동안, 잠자코 듣고 있던 크로우가 불 쑥 말했다. “이상하다, 일마. 너 오빠가 군인인 거 마음에 안 들어 하지 않았어? 최전방에 있어서 걱정이라며. 그렇게 보면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 “크로우 군!” 토와가 소리쳤다. “어떻게 지금 그런 말을 해. 가족이 아파서 일을 쉬는데, 그게 달가울 리 없잖아.” “그건……, 당연히 그렇겠네.” 63*


“좀 놀랐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일마한테 사과해.” “미안해, 일마. 내가 너무 쉽게 말했지.” “괜찮아, 토와. 크로우도 위로하려고 한 말이겠지.” 크로우가 순순히 사과하자 일마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난, 억울해서. 왜 그때였을까. 꼭 오빠가 시찰 온 시간에 맞 춘 것처럼. 군의 정보를 테러리스트가 알 수도 없었을 텐데.” “고약하구만. 그래도 아마 부상만 나으면 행정업무에는 복귀할 수 있 을 테니까 너무 풀죽지는 마. 오빠가 학원제 보러 오지 않아? 기운 내 서 준비해야지.” “고마워, 크로우.” 가볍게 어깨를 두들겨 주자 일마는 겨우 눈물을 훔치고 흐느낌을 멈 추었다. “다들 고마워……. 너희는 학원제 준비 잘하고 있지?” “응, 우리 반은…….” “각자 잘 하고 있겠지. 반이 다르니까 다 아는 건 아니라서.” 크로우가 말끝을 낚아채자 토와가 흠칫했다. “참, 그렇지. 너희 넷은 뭐든지 서로 알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 무튼 들어줘서 고마워, 정말……. 이제 좀 나은 것 같아.” 아직 눈가가 발간 일마를 위해서 안젤리카가 가벼운 음료를 주문해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토와가 크로우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크로우 군.” “응?” “나도 모르게 우리 무대 얘길 할 뻔했잖아. 막아 줘서 고마워.” “비밀은 엄수해야지.” 크로우가 의뭉스레 웃었다. “그나저나, 다 너무 잘 되어서 도리어 불안하네.” 64


“응?” “나는 원래 운이 없는 편이거든. 슬슬 안 되는 일 하나쯤은 일어날 때 됐는데, 너무 좋은 일만 연속이라 왠지 불안하단 말이지.” “크로우 군은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네.”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인생의 경험이야. 안 좋은 일들은 한 번에 정 신없이 밀려오는 법이니까.” “아이참, 학원제가 코앞인데 불길한 소리 말아줘.” “그래, 그래. 무대도 완성되어 가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되지.” 크로우가 속없이 웃었다.

학생회실에서 모인 넷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둑한 구교사 1층에 들 어왔다. 토와가 먼지 쌓인 석벽을 손끝으로 슬슬 쓸어보았다. “이제 여기도 일주일 후면 안녕이네.” “정이라도 들었어? 처음엔 여기서 연습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기겁 하더니.” “폐건물이라서 음산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아래층에 마수가 득 실득실한데 그 위에서 연습하는 거, 기분 이상했다고…….” “그놈들은 우리 상대는 못 되잖아?” “크로우 군한텐 그렇겠지만……” 한숨을 쉬던 토와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남들 몰래 찾은 연습장소라도 정이 들었나 봐. 폐건물이라 서 분위기를 타긴 좀 힘들었지만 말이야.” “그건 무대 장치가 하나도 없어서 그렇지. 여기에도 RF사에 발주 넣 은 설비를 설치하면 꽤 그럴듯할걸. 실제로는 강당에 설치하겠지만.” “그럴까…….” 65*


“하하, 그러면 아쉬운 만큼 더 빡세게 한번 가보자고. 리허설이라고 생각해.” 크로우가 기타 줄을 두어 번 퉁기자, 각자 익숙하게 자기 위치에 자 리를 잡았다. 씩 웃은 크로우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젤리카의 베 이스가 합세했고, 죠르쥬가 드럼을 세 번 치자 토와가 마이크를 잡고 입 을 열었다. 음산하던 구교사가 노래로 가득했다. 음악이라는 것은 신비해서 이때만큼은 교사의 먼지도 거미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주를 마친 크로우가 팔을 머리 위로 들어 크게 박 수를 쳤다. “좋아. 다들 완벽해. 감격해서 이 형님 눈물이 다 난다…….” 눈물 훔치는 시늉을 하던 크로우가 고개를 홱 돌렸다. “다만, 문제는…….” 안젤리카가 고개를 들어 크로우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 다. “그래. 너야. 젤리카, 끼니라도 걸렀어? 틀려도 틀린 줄을 모르고 있 잖아. 왜 머엉 때리고 있는 건데. 무슨 일 있어?” “있기야 있지.” “어라. 진짜냐.” “이제 와서 뭘 숨기겠어. 모두 내가 지나치게 매력적인 탓인 것을.” “느이 추종자끼리 싸움이라도 났냐? 내 언젠가 치정 날 줄 알았지.” “본가에서 호출이 왔다.” 악기를 점검하던 죠르쥬와 토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 낮의 일이야. 당분간 집에 와서 자숙하고 있으라더군.” 크로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 소문이 루르까지 간 거구만…….” “무슨 말이야, 둘 다. 안제가 뭘 잘못했다고…….” 66


“원래 젤리카는 집이랑 사이가 안 좋았잖아. 그런데 최근 행적이 좀 화려했나. 로그너 가의 영애가 기이한 복장을 고집하다가, 기어코는 여 성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돈다. 4대 명문에서는, 추문이겠지.” “받아들일 수 없어. 안제는 학생회 단속에 걸릴 만한 짓도 안 했다 고…….” “하지만 아가씨 본가에선 실상보다 소문이 중요할 테니까.” “나도, 별로 그 답답한 집구석에 가고 싶진 않아.” 안젤리카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에 4대 명문의 심기를 거스르라고 할 수도 없 어. 내가 따르지 않으면, 다음에는 학교에 압력이 갈 테니까…….” “안제…….” 걱정스레 이름을 부르는 토와를 안젤리카가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토와. 나의 토와가 그런 얼굴을 하면 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단다.” 이럴 때면 벗어나려고 버둥대던 토와가 지금은 얌전했다. 근심 가득 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학원제는 참여할 수 있는 거냐고, 차마 묻지도 못하고 토와는 얼굴만 울상이었다. 그때 크로우가 훠이 손을 저었다. “좋아. 가라고. 갈 거면 후딱 가버려.” “크로우 군, 하지만……!” “대신에 학원제 전에 돌아와, 젤리카. 그럴 수 있겠어?” “……알았어. 그렇게 해보지.” “……그렇구나. 나도, 안제라면 믿을 수 있어.” 안젤리카를 따라서 토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학생회 일원으로서 최고의 학원제를 준비해 둘게. 안제가 돌아와서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곧 토와는 숨이 막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67*


“그, 러니까, 안제, 살살 좀……! 숨막혀……!” “사랑스러운 토와를 위해서라도 꼭 돌아오도록 할게. 약속하지.” “응……. 잘됐네.”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죠르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평상시와 같다고 생각했다. 토와 허셜이 종종거리며 돌아 다니는 모습이야 토르즈 사관학교에 있다 보면 며칠 걸러 한 번씩은 보 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잦았다. 토와는 정말로 매 순간 쉬 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수업 사이사이와 방과 후, 짬이 나는 모든 시간 을 토와는 학원제 준비에 매달렸다. 보다 못한 크로우가 부러 토와를 붙들고 한소리를 했다. “너 요즘 뭐 하냐.” “응? 보면 알잖아, 크로우 군. 학원제 준비를 하고 있어.” “굳이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느냔 거지.” “흠 없이 완벽한 축제를 만들 거야. 안제랑 약속했잖아,” “그러다가 젤리카가 오기 전에 네가 먼저 쓰러지겠는데? 전에도 말 했잖아, 토와. 적당히 하라고.” “걱정 마, 크로우 군. 이 정도는 거뜬해.” “하다못해 나한테 도와달라고라도 하든가…….” “괜찮아. 크로우 군은 지금까지 충분히 도와줬는걸. 이제는 학생회에 서 스스로 해야지.” 이왕 완벽을 기할 테니까 자신이 다 알아서 하겠다는 뜻이었다. 크로 우가 혀를 찼다. “그래도, 나도 그 뭐냐. 학원제 준비 위원이니까. 혹시 필요하면 언제 든 얘기하고.” 68


그리고 마침내 토와 허셜이 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날은, 학원제 사흘 전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크로우는 제2기숙사 앞 벤치에 토와가 인형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 토와. 이제 바람 좀 쐬는 거야?” “응. 헤헤. 오늘 바람이 좋네.” 좋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쌀쌀한 날이었다. 크로우는 별말 없이 벤 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말없이 몇 분이 흘렀다. “안 들어가, 토와?” “응. 좀 더 있으려고.” “무슨 일이야?” 그제야 토와가 크로우와 눈을 맞추고 쓴웃음을 지었다. “학생회 일이니까, 굳이 크로우 군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이제 와서 뭐야, 학생회에서 날 끌어들였잖아. 무슨 일이냐니까.” 토와는 그만 더 웃지 못하고 양 손바닥을 펴 눈을 가렸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안제한테, 최고의 학원제를 보여주기로 했는데…….”

“모두 도착했나?” 회의실을 빙 둘러보던 학생회장의 시선이 크로우에게서 멈췄다. “자네는 왜 여기 있지?” “어. 임시 학원제 준비 위원으로서 참여하게 됐수다. 불만 없지?” “……좋다. 회의를 시작하지. 이미 몇 명은 알고 있겠지만, RF사에 발 주한 무대 설비를 보내줄 수 없다고 한다.”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크로우가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RF사씩이나 되는 곳에서 별 이유 없이 계약을 공 69*


칠 리가 없는데. 거긴 보통 빡빡한 회사가 아니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4대 가문 가주의 요청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 지.” “갑자기 무슨 말인데.”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그냥, 오르디스에서 카이엔 백작이 여는 연회의 규모가 확장되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RF사 상층부에서 개발부에 압력을 가해서, 여분의 무대 설비를 묶어 놨다고.” “그리고, 마침 타이밍 좋게 토르즈 학원제 설비가 있었다는 거구만. 설비가 없다면, 학원제는 개최할 수 있나?” “……날짜를 연기하거나.” “다른 곳의 설비를 임시변통하거나…….” “사흘 전인데, 어느 쪽도 제대로 된 꼴은 안 나겠군.” 크로우가 중얼거렸다. “RF사 쪽에 재요청은 해 봤어?” “간곡하게 사정을 설명했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제국 굴지의 그룹 에서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생도와 4대 명문 가주의 요청, 어느 쪽에 무 게를 둘지 말이다. 별 소득은 없었다네.” “권력의 추란 게 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네.” 크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회 임원이 발끈해 소리쳤다. “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지금 우리 상황이 얼마나……!” “그래서 담당자는 지금 RF사에 있겠지?” “그야 당연히……, 그런 건 왜 묻지?” “재계약하려고.” 크로우는 내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다는 것처럼 예사롭게 말했다. “라인폴트 본사가 있는 루르까지 다섯 시간이었나. 내일 첫차를 타고 갔다가, 오후 차로 돌아오면 되겠네. 호들갑 떨길래 뭔가 했더니, 별문 70


제도 아니잖아?” “……별문제 아니라고? 4대 명문의 요청이? 사기라도 치려는 건가?” “물론 직접 만나서 설득할 거야. 전권을 나에게 넘겨.”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은 회장이 다시 크로우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이 더 빨랐다. “회장님,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1학년 귀족 학생이었다. “사실 전, 아무리 일손이 바쁘다 해도 저놈을 학생회에 임시로나마 받아준 것부터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어느 학생회입니까. 대제 께서 설립하시고 황족이 재적하는 유서 깊은 토르즈 사관학교의 학생회 입니다. 그런데 저 불손한 놈은, 걸핏하면 땡땡이에, 낙제 대기조에, 도 박 좋아하고 여자도 밝힌다고 들었습니다.” 맞는 말이네. 크로우는 앉은 채로 턱을 괴었다. “거기다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시골구석에서 왔다는 데다, 가족도 본 적이 없으니 어디서 온 망나니인지도 모르는데……” 크로우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여기까지 잠자코 들어줄 필요는 없 다.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할까. 그때 옆에 앉아 있던 토와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로우 암브러스트 군의 신뢰성은 저 토와 허셜이 보증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 “이 학생회에서의 저의 모든 것을 걸고.” 우스운 소리라고, 크로우는 생각했다. 그런 말로 설득이 될 리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낯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학생회실이 조용 했다. 의아해진 크로우에게 회장이 재차 물었다. “그냥 되는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있어서 하는 말인 가?” 71*


“응. 믿어 봐. 어차피 지금 다른 방법도 없잖아?” “내일 하루 안에 RF사에 발주한 자재를 찾아올 수 있다고?” “응. 맞아.” “어떻게?”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 나를 못 믿겠다면 이쪽 보증인을 믿 어보는 건 어때? 나 꽤 대단한 보증인을 가진 것 같은걸.” 크로우가 옆에 있는 토와의 팔목을 쥐며 씩 웃었다. “……좋다. 그러면 믿고 예정대로 진행해보지. 혹시라도 어렵겠다 싶 으면 바로 ARCUS로 연락해. 행사를 연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겠 어.” “알았어.” “그리고,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로, 일주일 전 루르의 군수 공장 에 테러가 있었다고 하니 모쪼록 안전에 주의했으면 좋겠군. 둘째로, 보 증인인 허셜 양과 함께 가도록 해.” “회장님, 그건……!” 토와가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크로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옆을 내려다보며 다정히 웃었다. “들었지, 토와?” “어, 응…….”

아침 새가 지저귀는 이른 새벽이었다. 트리스타 역 앞에 선 크로우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팔에 단 학생회 완장을 툭툭 당겨보았다. “이게 뭐냐, 이게. 아무튼 학생회 놈들은 촌스러워요.” “……나도 포함해서 말하는 거야? 너무하네, 크로우 군.” 72


“아 그래, 맞다. 토와. 너는 이만 들어가도 돼.” “응?” “어제는 분위기를 무마하느라 그렇게 말했다만, 네가 꼭 같이 갈 필 요는 없잖아? 기숙사에 돌아가서 잠이라도 좀 더 자라고. 안색이 이게 뭐냐.” 간밤에 잠을 설쳤는지 퀭한 눈을 한 토와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그래도 그 먼 곳에 크로우 군을 혼자 보낼 수는 없는걸. 크로우 군만 불편하지 않다면, 같이 가게 해줘.” “……알았어, 그럼.”

트리스타에서 루르로 가기 위해서는 제도에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 야만 했다. 헤임달로 가는 첫 차 안은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복작거렸지 만, 제도에서 루르로 가는 직통 열차는 상대적으로 한적했다. 선로를 통 과할 때마다 열차가 조금씩 덜컥거렸다. 토와는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예전 실습 때도 한 번 봤던 풍경인데 오늘은 또 새로웠다. “긴장했어?” 토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도리어 목이 뻣뻣하게 굳어 긴 장한 기색이 역력한 티를 내고 말았다. “별 일도 아니야. 설비 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마음 편하 게 먹고 경치 구경이나 하고 있어.” “그런데 크로우 군, 정말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단순히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만으로 설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나를 믿으니까 보증한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러면 믿고 지켜봐. 자. 안심해, 토와. 긴장 풀고. 야아, 지금 저쪽 73*


에 지나가는 절벽 무지하게 장관이다. 700에이쥬는 되겠네.” 너스레를 떠는 크로우를 보면서 토와는 아, 정말 언제나와 같구나 생 각했다. 절로 웃음이 나고 안심이 되어 긴장이 풀렸다. 잠시 후 크로우가 얼굴을 들었을 때, 토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덜컥거리는 기차 안에서 고개를 계속 앞으로 끄덕거리고 있는 모양이 영 아슬아슬해 보였다. 크로우는 토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어 깨에 기대게 했다. 그러니 루르에 도착했을 때 한바탕 난리가 나는 것 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미, 미안해! 나 대체 얼마나 잔 거지!” “괜찮아, 괜찮아. 침 같은 거 안 흘렸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십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 쬐끔 흘렸나?” “크, 크로우 구운!” 맞은 편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아, 미안해요. 두 사람이 귀여워서. 학생들 같은데, 루르에는 관광하 러 가는 건가?” “네, 그런 검다.” 아, 아니잖아, 크로우 군. 토와가 진땀을 흘렸다. 그게 그거지 뭐. 그 러자 여자가 다시 웃어버렸다. “후후, 귀여운 커플이네. 그럼 루르에서 좋은 시간 보내요.” “네이 네이.” 크로우가 이제는 포기했다는 투로 대답했다.

와본 적 있는 건물인데 다시 봐도 역시 까마득히 높았다. 하지만 라 인폴트 본사는 안으로 들어갔을 때 보다 압박감이 큰 건물이었다. 한 74


순간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이 대 기업을 상대로 교섭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들어서 토와는 기가 죽었다. “그런데, 크로우 군.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아? 우리는 설 비가 묶여 있다는 것만 알잖아. 회장님도 아주 자세한 건 모른다고 하 셨고…….” “거야 뻔하지. 카이엔 백작의 연이 닿은 곳이라면 역시 그쪽인걸. 제 1제작소.” “그게 어디인지…….” “37층이야.” “전에 여기 와 봤어, 크로우 군?” “실습 때 왔었잖아?” 크로우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하자 토와는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휴, 이제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설득해야지.” “그러니까 어떻게? 크로우 군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 아니야.” “으음, 여기는, 카운터에 젊은 비서가 있던가.” 크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여기서부터는 나한테 맡겨 둬. 그래, 로그너 가에 가서 젤리카 녀석이라도 찾아보고 있을래?” “뭐?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그럴 수는 없……” 크로우가 뒷짐을 지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대로 토와와 눈을 맞추 고 웃었다. 어제 저녁과 비슷한 다정한 미소였다. “토와. 나를 믿는다고 말했잖아. 이제는 못 믿어?” “……믿어.” 엉겁결에 대답하자 크로우가 나긋나긋한 말씨로 말했다. “그래. 그래야 우리 아가씨지. 걱정 말고, 여기 로비에 앉아서 기다리 75*


고 있어. 금방 가져올게.” 어쩔 줄 모르는 토와를 소파 위에 앉혀 두고, 크로우는 혼자 엘리베 이터에 타서 37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무너지듯이 주저앉아서 한숨 을 내쉬었다. “아, 이거 진짜 나쁜 놈이 된 기분이네…….” 고속 승강기는 눈 깜짝할 새에 37층에 도착했다. 폭신한 소파와 화사 한 색색의 화분을 열 지어 놓아둔 로비 끝에 철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거 뭔가 숨기고 있다는 티를 내도 너무 내네. 다음에 얘기 좀 해야겠 어. 혀를 차며 걸어간 크로우가 문을 열자, 쌀쌀맞은 인상의 여자가 카 운터에서 의례적으로 인사했다. “어서오십시오. 제1제작소 사무소에 무슨 일이십니까?” “네. 저는 제도 근교의 토르즈 사관학교에서 온 학생입니다. 거진 다 섯 시간을 걸려서 왔더니 목이 마르네. 혹시 물 한잔 있습니까?” “용무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뭐, 아마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토르즈 사관학교에서 발주를 넣은 무대 설비 일체를 이쪽에서 수거해 갔다고 들었거든요. 뭔 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서, 한 번 담당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비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착오는 없습니다. 수거해 간 제품군은 곧 오르디스로 배송될 예정입 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이거 곤란하네. 말이라도 한 번 해보게 해주십쇼.” “현재 개발부는 비상 상황입니다. 일개 학생의 요청에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담당자를 만날 때까지는 못 갑니다.” “계속 이러면 경비병을 부르겠어요.” “아이쿠. 그건 곤란해요. 소란을 일으키면 학생회에 망신인데. 좀 봐 76


줘요.” 이거 그냥 말로는 안 통하겠네. 크로우가 손끝을 깨물고 씩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에게 다가갔다. “그나저나 피곤해 보이네요. 이렇게 단정한 아가씨가 손톱 끝마다 벗 겨져 있고 말이야. 덧바를 시간도 없이 밤을 샌 모양이네. 이런 아가씨 를 과로시키다니 그쪽 오너도 너무하지.” 비서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표정이 었다. “하긴 어지간히 바쁘겠어. 곧 오르디스에서 개발품의 ‘선’을 보일 테 니까, 그런데 갑자기 연회 규모를 확장한다는 거 보니 신형 병기, 벌써 완성됐나 봐요? 남들 몰래 돌리는 라인이라서 한참 걸릴 것 같더니.” 비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크로우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아니, 그래. 알겠다. 이제 막바지라 발주 날짜를 맞추느라고 이렇게 들 까칠한 거구나.” 알겠다는 듯이 웃는 크로우를 비서가 홱 쏘아보았다. 그러나 눈꺼풀 이 떨리고 있다. 당혹과 두려움. 크로우는 이런 감정을 접하고 다루는 데 익숙했다. “누구지, 당신은?” “여기서 자세하게 말하기는 좀 그렇고, 일단 안쪽에서 담당자를 만났 으면 하는데.” “먼저 신원을 밝혀 주셔야……” 크로우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가는 손목이 남자의 손 안에 있었다. 비서의 몸이 굳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과 표정을 한 사람이 눈 앞에 있었다. “아가씨 보기보다 안 똑똑하네. 이쯤 했으면 알아들을 때도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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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만족스러워.” 응접실 소파에 걸터앉은 청년이 개발부장을 바라보며 깍지를 꼈다. “서로 구면이라서 다행이네. 기신을 보일 때 이후로 일 년만인가. 카 이엔 아저씨에게는 내가 잘 전하지.”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생각인지…….” “난 연회에서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라고 보거든.” 크로우가 여유 있게 대답했다. “카이엔 아저씨는 이왕이면 신형 병기까지 보이고 싶은 거지. 하지만 이렇게 대귀족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단순히 병기만 선보여서야 재미없 잖아? 연회는 더 화려해질 거야. 규모만 늘려서야 오히려 방해지.” “……확실히 ‘기사’가 맞군요. 가까이서 보니까 놀랍습니다. 이렇게 젊은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리고 고개를 든 부장은 상대의 표정에 흠칫 놀랐다. “아, 미안합니다. 역시 오늘 일은 비밀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걸.” 크로우가 비죽 웃었다. “어차피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청년이 영문 모를 소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무슨 뜻인지 다시 물을 수 없었다. 당장 업무가 잔뜩 밀려 있기에 자세한 생각은 후 일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야근 중에 낮의 일을 상기하던 부 장은 당황하고 만다. 그래서, 상대가 누구였더라? 얼굴도, 복장도, 말한 내용도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말처럼 잘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불안감에 휘 둘렸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머리를 드는 불안을 78


꾹 누르며 응접실에서 나오던 크로우는 놀라서 그대로 자리에 멈추었 다. 제1개발부의 비서가 낯익은 친구와 화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젤리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꼬리를 잡혔을까? 비서에게 눈짓하자, 겁먹 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여자라 다행이었다. 안젤리카가 돌아보았다. “오, 친구여. 오랜만이군. 루르로 올 거면 진즉에 말을 했었어야지. 뭐라도 대접했을 것을.” “작작해라, 너.” 크로우가 안젤리카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안젤리카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는 꼴이었다. “여기 온 건 어떻게 알았지? 토와한테 들었어?” “아니. 학생회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토와는 내가 여기 있는 줄 몰 라.” “그래서, 슬슬 이유를 물어도 되겠지? 왜 내가 만나는 여자마다 작업 을 거는지.” “내가 사랑스러운 아가씨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데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끌려오다시피 하고도 태연자약하게 웃는 안젤리카를 빤히 쳐다보던 크로우가 그만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됐다. 지금 따져서 뭘 하겠냐. 아래에서 토와가 기다리고 있 어.” “토와를 위해서 여기 온 건가?” “나도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 좋을 대로 생각해.” “토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해?” “……이거 역시구만.” 79*


크로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보통 이 나잇대 학생의 최대의 고민이란 것은 친구들의 연애사 정도다. 진상을 눈치챌 리가 없다. “네가 뭘 하고 있는지 한번 맞춰 볼까.” “뭘 말이지? “나랑 토와를 이어보겠다고 기를 쓰다가, 나와 친한 여자를 다 꼬셔 버리겠다는 어이없는 발상까지 했겠지.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어쩌다 제 법 재미가 붙어서 못 멈추게 된 거야. 그래서 지금 이렇게 루르에 계시 고 말이지. 그러다 나랑 토와 둘이 루르로 온다는 소식을 학생회장한테 듣고 몰래 지켜보다가, 나 혼자 올라가는 걸 보고 뭘 하나 보려고 따라 왔겠지. 그런데 내가 여기 카운터 아가씨랑 은밀하게 무슨 얘기를 하면 서 한참 시간을 보내는 것 같더라. 그래서 또 뿔이 난 거지. 뻔해, 안젤 리카 로그너. 내 말이 틀려?” 잠시 뜸을 들이던 안젤리카가 대답 대신 말했다. “먼저 내 질문부터 대답해 봐.” “무슨 질문?” 이내 크로우는 헛웃음을 웃었다. “아. 그럼 진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생각하게?”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자꾸 어긋나고, 둘 다 수줍 어서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거라고……. 그런데 이제는 모르겠어.”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잖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건가.” 저도 모르게 해버린 말에 크로우는 스스로 아차 싶었다. 학기 초, 안 젤리카가 크로우의 의뭉스러운 태도를 문제 삼았을 때 처음 했던 대답 과 똑같았다. “……미안하다.” 잠시간 어느 쪽도 말이 없었다. 짧은 정적 후에 안젤리카가 먼저 입 80


을 열었다. “그러면, 믿겠어. 내가 지금까지 봐온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그래 봬 도 믿을 만한 남자였으니. 모쪼록 토와가 상처받게만 하지 마.” 안젤리카가 선고처럼 쏘아붙이고 방을 나서자, 크로우는 반짝거리는 유리창 바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러고 싶은 건데.” 37층의 풍경은 아찔하게 높았다. 크로우는 까마득히 작아 보이는 루 르를 내려다보았다.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도시의 수십 구획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세밀히 나뉘어 보였다. 순간 어질어질했다. 많은 것이 머 리에 파도처럼 연이어 일었다. 루르, 폭발, 계획, 학원제, 아까 위협을 가하며 손안에 두었던 가는 손목과, 언젠가 손안에 들어왔던 밴드 친친 감은 손가락. “……나는 믿어달라고 한 적 없어.” 바보 같은 놈들이다. 기껏해야 학원제나 남의 연애사 따위나 걱정할 놈들이라, 옆에 있는 친구가 내전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할 것 이다. 하지만 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 이름을 팔았지? 후회라는 감정이 가슴에 엘 듯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에 후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루르에 온 것? 회의에서 나선 것? 토와와 친구들을 만난 것? 사관학 교에 들어온 것? 고향을 떠나온 것? 할아버지의 곁에 있던 때 더 똑똑 한 아이가 되지 못한 것? 혹은 크로우 암브러스트인 것? 어쩔 수 없다. 어느 것도 이미 일어나고 해버린 일이라 어쩔 수 없었 다. 무엇이든 절대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 십여 년이었다. 전부 그 대로 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어지럼이 죄 가시지 않아 크로우는 서늘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나쁜 놈이 된 기분은 무슨. 나는 원래 나쁜 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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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와는 RF 본사 빌딩 1층 로비에서 손을 꼭 움켜쥐고 앉아있었다. 주 식 거래를 하는 사람, 밤을 새우고 출퇴근하는 엔지니어, RF사와 계약 을 맺으려고 다른 기업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미끄러운 바닥 위에 구두 소리를 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토와는 그 사이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운터의 직원이나 엔지니어 몇 명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나 손 안이 축축했다. ‘괜찮을까?’ 지난 한 달간 준비한 학원제가 떠올랐다. 학생회의 학우들과, 캐비닛 안에 정리해 놓은 서류. 땀 흘려 무대를 준비하던 각 반의 학생들, 위생 심사를 받고 노점을 준비하던 학생들, 그리고 네 사람이 함께했던 무대 연습이 떠올랐다. 토와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쳐다본 엘리베이터 쪽을 다시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새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 면서 지나갔다. ‘괜찮을까?’ 이른 아침부터 종일 학원제 준비를 했던 하루가 떠올랐다. 아침에 키 르히에서 마셨던 음료와, 정오의 햇볕을 가릴 수 있었던 작은 그늘과, 어두운 구교사에서 하던 연습과, 별이 빛나는 하늘과 손의 온기가 떠올 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체격이 큰 남자가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크로우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괜찮아.’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한 거야?” “그냥, 열심히 설득했어. 진심은 통한다―라는 거지. 헤헷. 어때, 이 형님의 수완이. 대단하지?” “……응.” 82


하얗게 웃는 토와에게 크로우도 마주 웃었다. “쉬어, 토와. 넌 기차 안에서라도 좀 쉬어야 돼.” “나보다는 크로우 군이 고생했지. 나는 그냥 뒤에서 구경만 했는걸. 크로우 군이야말로 좀 쉬어.” “그러게. 지쳤다, 야. 하도 별일이 다 있어서.” “이번엔 크로우 군이 내 어깨에 기댈래?” “우리 꼬맹이가 이제 농담도 잘하네.” “응……, 그럴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건 진심인데.” 크로우가 작게 웃었다. 그 후로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저녁의 열 차는 조용했다. 차체가 덜컹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차창 밖으로 해 질 녘 석양에 물들어 있던 풍경이 흔들리며 천천히 어둠 속에 잠겨 갔다. 오랜 시간이 찰나처럼 빠르게 느껴졌다. 토와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떻게 되나 싶었어. 안제도 갑자기 사라 지고, 학원제는 엉망이 되게 생겼고.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게 괜찮을 것 만 같아. 왜일까, 크로우 군?” 대답은 없었다. “응?” 옆을 돌아보자, 턱을 괴고 있던 크로우가 말없이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토와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아아, 별이.” 놀티아 주의 열차 노선은 산맥을 타고 흐른다. 굵직굵직한 암벽 위로 탁 트인 대기가 맑았다. 어느새 하늘이 물 아래처럼 새까맣게 잠겼다. 기차가 완만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흔들릴 때마다 잔물결 같은 별들이 반짝이며 넘실거렸다. 알알이 빛이 그득해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았다. “예쁘다…….” 83*


토와가 솔직하게 감탄하는 동안, 크로우는 평소답잖게 별 말이 없었 다. 눈을 낮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안색이 안 좋네, 크로우 군. 멀미라도 하는 거야?” “그냥 좀 어지러워서. 너무 멀리 왔다 갔다 했잖아, 오늘.” “가는 동안 좀 자는 게 좋겠다. 제도에 도착하면 깨워 줄게.” 하지만 크로우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계속 하늘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불쑥 입을 열었다. “별이란 거.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다고 했나.” “어……, 말이 그렇게 되나? 응, 어느 때 어느 곳이라도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별 아래 있을 거라고.” “그거 진짜야?” 토와가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럼, 크로우 군. 보이지? 지금 다른 건 다 차창 밖으로 휙휙 흘러가 는데, 별은 우리랑 같이 가고 있는 거.” “재미있네. 우리가 첫 실습 때 켈딕 가도에 드러누워서 봤던 별도 저 거랑 같다는 거지? 지금 같은 별들 밑에 있다고?” “응, 같은 별 아래.” “우리가 블레이드 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봤던 것도-” “그것도 같은 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적에 뛰어다니던 때도-” “역시 같은 별 아래.” “바로 지금도.” “같은 별 밑에.” “이거 웃기네.” 크로우가 킬킬거렸다. “재밌다, 토와.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한결같이 빛나는 게 있다고 하는 84


게. 나는 한 번도 그런 발상을 못 했거든. 그런 건 너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토와는 뭐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크로우가 답지 않게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눈을 반쯤 감은 채 크로우가 중얼거렸다. “그래, 별이라고. 그거 꼭 너 같네…….” 그래서 토와는 미처 말을 하지 못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되지 않는 순간이 지나가고, 한 박자 늦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용기를 쥐어짜 겨우 옆을 흘끔 보니 크로우는 눈을 감고 졸고 있었다. 토와는 어쩌지도 못하고 잠든 남자의 옆자리에서 깍지를 꼭 끼고 눈 만 껌벅거렸다. 혹시 깨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리 지 않을까 생각하면 더 심장이 세게 달음박질쳤다. 덜컥거리는 기차의 진동과 심장 박동이 혼동되었다. 원래 하지도 않는 멀미가 나서, 토와는 먼 하늘을 내다보았다. 반짝이는 밤이 황홀하다. 별 아래 두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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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하러 왔슴다아.” 크로우가 문을 열어젖히자, 학생회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원이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따로 보고할 것도 없어. 설비 일체가 이미 도착했다고. 어떻게 한 거야?” “연락했잖아? 내가 화려한 언변으로 잘 설득하셨다고.” 그리고 한 명은 어쩔 줄 몰라 방 뒤편을 돌고 있었다. 회의에서 시비 를 걸었던 학생이었다. 크로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더듬더듬 사과 했지만 크로우는 그게 뭐 별거냐는 투로 넘겨버렸다. 모든 사람이 몰려 와서 고맙다느니 수고했다느니 법석을 떨었다. 뭐라고 계속 말을 하는 데 지친 둘에게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크로우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다 됐고 오늘은 그냥 쉬게 해줘요. 온종일 기차 타는 거 쉬운 일 아니니까. 토와가 난처하게 웃었다. 동의의 뜻이었다. 그러고도 한 참을 더 감사치레를 받고 나서야 겨우 학생회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 누구는 피곤해 죽겠고만. 기운이 넘치는 인간들이야.” “크로우 군,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나 때문에 오늘 종일 뛰어다니 고, 고생하고.” 크로우가 몸을 돌려 토와의 뺨을 쭈욱 늘려 잡아당겼다. “읍, 으…….” “인마. 니가 미안해해야 할 건 하나야. 지금까지 지나치게 무리한 거. 말했지? 네가 모든 걸 책임질 수는 없다고. 그런 의미에서 내 생활에 간섭하는 것도 적당히 해 두고.” 말을 마치자마자 토와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 버렸기 때문에 크로 우는 한 마디를 더 덧붙여야만 했다. “탓하는 건 아니야. 나도 그동안 많이 고마워, 토와.” “그러면, 있지, 크로우 군. 조금만 더 걷다가 들어가도 될까?” 86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토와를 보면서 크로우가 피식 웃었다. “또 별이냐? 알았어. 잘 보이는 장소로 안내해 달라고.”

―라고 말했던 것을 크로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있었다. “크로우 군? 뭐 해. 이쪽이야.” “야. 니가 다람쥐냐. 거긴 언제 올라간 거야.” “별이 잘 보이는 장소로 안내해 달라며.” 토와는 가도 옆 가파른 언덕 사이사이 평지를 딛고 뛰어서 꼭대기까 지 올라간 참이었다. 그러고서 의아한 표정으로 크로우를 내려다본다. “너는 가벼우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내가 그렇게 밟으면 언덕이 꺼져 요.” “어쩔 수 없지. 자, 손잡고 올라와.” 지금 저 몸으로 나를 끌어올리겠다는 말이지. 토와의 눈에는 장난기 한 점이 없어 진심인 듯했다. “어쩔 수 없네. 뒤로 비켜 봐, 토와.” “어?” 토와가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치자, 크로우가 힘차게 발돋움을 하더 니 언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토와가 박수를 쳤다. “역시 대단해, 크로우 군!” 그런데 크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야, 나 방금 허리 삐끗한 것 같다.” “뭐어어어? 정말? 어떡해!” “아니 농담.” 크로우가 자세를 고쳐 앉고 혀를 쏙 내밀자 걱정하던 토와가 금세 웃 음을 터뜨렸다. 크로우도 마주 웃었다. 87*


“여기가 제일 좋은 자린가? 여기는 이제 내 차지다. 어우 장관이네.” “그렇지, 그렇지? 저기 밝은 별 세 개 보여? 가을에만 볼 수 있는 별 자리야.”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토와의 콧잔등과 뺨 위에 가도의 가로등 불빛 이 아른거렸다. 크로우는 그 모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응?” “아니, 고마워서. 어제도 그렇게 믿는다고 나서 줘서 쪼끔 감동했어. 고마워, 토와.” 그 말을 마치자마자 토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에 크로우 는 무진 당황해 다음 말을 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학생회에서의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는 뭐야? 원래 학 생회 전통이 부끄러운 짓이냐? 무슨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나 진짜 당황했다고.” “아하하, 그러게. 좀 부끄러웠지. 내가 그때 걸 수 있는 건 하나였으 니까.” “응?” “크로우 군이 물었지. 왜 그렇게 나한테만 일이 몰리는 거냐고. 그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거든.” 토와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다음 해 학생회장 제의가 들어왔어.” “아하,” 크로우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랬던 거구만. 왜 진작 생각을 못 했을까. 천직이네. 천직이야. 좀 새삼스럽지만서도, 너라면 누구보다 잘 할 수 있겠네.” “에헤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사실은 어서 수락해 달라고들 난 리라. 좀 정신이 없어. 아무래도 차기 인선은 일찍 결정되는 쪽이 좋으 88


니까.” “잘 됐구만. 그런데 왜 즉답을 안 했어? 설마 자신이 없어? 나도 이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네 이상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또 없을걸.” “헤헤……. 고마워, 크로우 군. 그런데, 생각해 봤는데.” 하늘을 보던 토와가 시선을 끌어내려 크로우를 바라보았다. “크로우 군 말대로 나는 지금도 바쁜데. 아마 학생회장이 되면 훨씬 더 바쁠 거야. 방과 후에도, 자유행동일에도 거의 학생회실에서 지내야 할 거고. 이렇게 크로우 군이랑 단 둘이 나오거나, 얘기할 기회도 별로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쓸쓸해지고, 좀…… 싫었던 거야.” 연녹색 눈이 어려 보이는 외모와 걸맞지 않게 더없이 차분했다. “크로우 군. 나 부탁이 있어. 크로우 군이 항상 장난스럽고, 가볍고, 진심을 속으로 숨기는 사람인 건 알지만, 이번만큼은 진지하게 듣고 대 답해 줬으면 좋겠어……. 아니, 지금 크로우 군이 그런 사람인 걸 책망 하려는 게 아니라. 나는 물론 그런 크로우 군을 좋아하지만-” 거기서 말이 뚝 끊겼다. 토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얼 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서 양손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 사이로 겨 우, 겨우 용기를 내서 조금씩 눈을 들었다. 크로우는 토와 쪽에서 등을 진 채였다.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반대 방향이라 크고 넓은 등에 그림자가 졌다. 그 등이 처음으로 두렵다고 생각했다. “토와.” 크로우가 그대로 말했다. “너는 연애를 하기에는 너무 서툴러. 너무 좋은 인간이야. 완전히 꼬 맹이지. 한 열 살쯤 더 먹고 오면 어른의 연애 같은 게 어울리려나.” “아니, 크로우.” 89*


토와가 크로우의 팔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얼결에 토와의 얼굴을 마 주하게 된 크로우가 당혹한 낯빛을 했다. “나는 진지하게 말해달라고 했어.” 목소리가 열렬하고 또 간절했다. “크로우는 내가 싫어?” 크로우는 잠깐 시선을 피하려는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소용없 는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토와를 보고, 웃어버렸다. 바라보는 눈 이 더없이 다정했다. “이 학교에서 너라는 사람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러면?” “그렇지만 토와.” 크로우는 여기에서 요령 좋게 대답을 생략하고 넘어갔다. “이해해 줘. 이기적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이해해 줬으면 해.” 크로우가 헛숨을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제 그 녀석 말이 맞아. 나는 노는 걸 좋아하고 불성실하지. 고향 은 멀리 두고 왔고, 가족도 본지 한참이고. 그런데 그래서 더 망가뜨리 지 않고 고스란히 두고 싶은 것들이 있거든.” 입가에 아직 아까의 미소가 남아있었다. “가령 우리 학교 멍청한 놈들이 실실거리면서 준비한 학원제나, 허구 헌 날 블레이드 치러 오는 카이랑 루디 녀석들이나, 그리고 좋다고 뒤에 서 비웃는 키르히 종업원들이나, 우리 네 사람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 지. 여기에는 물론, 네가 언제나처럼 크로우 군이라고 불러 주는 것도 포함돼.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까만 밤의 적막 속에 날벌레 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흐르고 벌레 소 리에 기묘한 소리가 섞였다. “……응. 알았어. 크로우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대 90


답해 줘서 고마워.” 토와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뺨 위에 찍었다. “그러면 나, 학생회장이 되면. 학생회장으로서, 학생에게, 크로우 군 에게 참견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줘.” 애써 눈물을 훔치려고 손등으로 얼굴을 찍을 때마다 물기가 번졌다. 손목으로 눈 아래부터 바깥쪽으로 대강 훔쳐내자 오히려 귀까지 엉망이 되었다. 곧 눈가부터 뺨, 코끝부터 입술까지 물기로 발갛게 반들거렸다. 토와 가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말갛게 웃었다. “응, 크로우 군?” 그러니 이제는, 토와 허셜이 울면서 웃으면서 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 믿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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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인데 본교사 옥상의 벤치 위에 누워 있는 학생이 있었다. 크로우는 심란한 듯 몇 번이고 몸을 돌리고 뒤집고 했다. 엎드려서 한 숨을 쉬다가 다시 몸을 뒤집고 보니, 눈에 익은 라이딩 수트가 앞에 있 었다. “울렸지.” “어이쿠. 이게 누구야.” “일어나.” “넵. 일어나겠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크로우를 안젤리카가 매섭게 쏘아보았다. “진지하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언제나 진지해.” “그런데 왜…….” “젤리카 인석아. 이 몸이 보기보다 인기가 엄청 많아요. 나한테 특히 나 집착하는 어엄청 무서운 누님이 한 명 있거든. 토와 녀석이 만나면 뼈도 못 추릴걸. 너의 사랑스러운 토와를 그런 데 말려들게 하고 싶 냐?” “그런 걸 이유라고 말하는 건가?” “상처입히지 말라며.” “바보냐, 너는!” 안젤리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감수하고 상대를 지켜주는 게 도리 아닌가. 네가 그러고도 사내냐.” “사내가 아닌가?” 크로우가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였다. “니가 보기엔 내가 사내 같냐, 젤리카? 뭐, 그러면 내가 토와를 정말 로 좋아하는 게 아닌가 보지.” 92


순간 안젤리카의 눈빛이 맹렬하게 빛났다. “한심한 녀석.” “야, 사람 배에, 제로 임팩트, 꽂으면, 커헉.” 크로우가 의자 위에 상체를 구부리고 신음하는 동안 안젤리카가 손 을 탁탁 털었다. “토와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야. 너라는 인간에게 실망한 거다.” “헤헤……, 내가 이런 놈인 줄 몰랐던 것처럼 말하네.” “자기 감정도 마주할 줄 모르는 놈이.” “그러니까 그게 다르대도…….” 안젤리카가 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등을 홱 돌리고 계단으로 내려갔 다. 뚜벅뚜벅 걷는 발소리가 옥상에 울렸다. “저 녀석 화났네.” “그러게, 어머머. 정말 아프겠다. 어쩌면 좋아.” 어디선가 여자의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귀가 탁 트이는 목소리였다. 크로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벤 치 위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누님이란 거, 나보고 하는 소리?” 여자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다. “싫다아, 꼭 내가 악역인 것 같잖아.” “거 핑계 대는 데 이름 팔아먹어서 미안하게 됐수다.” “그렇다고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게 깔린다. 소름이 팔을 타고 뒷목까지 올랐다. “루르 쪽의 뒤처리는 해줬어. 후후, 아무리 기사님이라도 원래 ‘뱀의 사도’를 이렇게 사적으로 굴려먹으면 안 되는 건데. 자. 하는 김에 그 작은 아가씨한테도 최면을 걸어 줄까?” 93*


“그러면 댁부터 나를 사적으로 굴려먹지 말았어야지. 최면은, 됐어. 기억을 완전히 지우는 것도 아니고.” 비타가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하지만 네가 말했다시피 나는 핑계지. 너는 애초에 그 누구와도 순 진한 연애 따윌 할 생각은 없잖아, 제국해방전선 리더 C.” “응.”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목소리에 이제 억양이 희박했다. “이 집념에 다른 감정을 병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근처에 기척은 없지만, 다음 얘기부터는 안전한 게 좋겠지.” 비타가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검지 끝부터 푸른 막이 퍼져나가 고 공간은 침묵 속에 잠겼다. “마침 잘 왔어, 비타. 안 그래도 오르디스로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길 을 열어줄 수 있겠어?” “열 수야 있지. 하지만 그 정도 거리의 전위술은 위험을 감수해야 해. 잘못될 수 있다고. 괜찮겠어?” C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흡사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미안, 기사님. 쓸데없는 질문을 했네.” “아무래도 좋아. 나는 늦기 전에 가봐야겠거든. 귀족파의 회합을 준 비하고 있으면서, 우리한테 연락하는 건 쏙 빼먹었단 말이지. 카이엔 아 저씨의 생각은 알겠어. 기껏 모아놓은 세를 과시하는 자리에서 테러리 스트 같은 거랑 직접 결부되기는 싫단 거지. 기신에는 그렇게 집착하는 주제에.” “말한다고 호락호락 들어줄까? 잘 얘기할 수 있겠어?” “당연히 말만으로는 부족하겠지. 패를 준비해놨어. 나는 테러리스트 같은 거니까.” 94


입꼬리를 끌어올린 청년의 눈에는 명백히 웃음기가 없었다. “지금까지 후원이야 감사하다만, 그만큼 엽병 대신 우릴 요긴하게 써 먹고 있잖아? 그 아저씬 아직도 내가 오갈 데 없는 열세 살 꼬마로 보 이는 거지.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지. 슬슬 조직도 제대로 선보일 때가 됐는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C를 보며 비타는 묘하게 시원섭섭한 표정 이었다. “이건, 확실히 내가 아는 기사님이구나. 학교에 있는 동안은 영락없 이 청춘에 전념하는 어린 청년 같아서, 구경하기 심심하진 않았는데.” “그렇게 보였다니 의외네.” C가 작게 웃었다. “본분은,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 이건 긴장을 놓지 않는 게임이었으 니까. 애초에 내가 왜 토르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긴 대귀 족과 군부 최고 간부의 자제들이 몰려있는 학교다. 혹은 직접 교관으로 있는 사람도 있지. 이렇게 손쉽게 군의 근황을 알 수 있는 장소가 또 없 지. 아무리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도 결국 가족에게 근황을 숨기진 못하 기 마련이거든.” “하기는, 방금 얘기하던 아가씨도 4대 가문의 영애지.” “뭐, 그렇지. 여자 쪽 취향이었던 건 예상외였지만. 남자에 관심이 있 었다면 좀 더 쉬웠을까.” “결국 그래서 여자들에게 접근한다는 거지? 기사님은 나쁜 남자네.” “17살의 여자애들은 순진해. 좋은 가문 아가씨일수록 더 그렇지. 염 문이나 연애라는 단어와 결부시켜 놓으면 얼핏 수상한 점이 있어도 남 한테 함부로 말 못하거든.” “하지만 자그만 아가씨랑은 그래서 만난 게 아니잖아.” 그러자 청년은 한숨처럼 웃었다. C가 잠깐 크로우 암브러스트의 얼 95*


굴이 되었다. “그래서 거절했잖아.” “그래도, 호감이 없는 남자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생경하긴 해도 역 시 구경하긴 재밌었거든. 우리 기사님은 그 자그만 아가씨도 믿을 수 없는 건가?” “아니, 좀 다른데. 그렇다기보다는……,” 생각에 잠긴 청년의 눈이 허공을 헤맸다. “내가 못 믿는 건 나 자신이지.” 마침내 눈을 둔 곳은 먼 하늘 위였다. “토와뿐만이 아니야. 아가씨들을 대할 때면 가끔 눈 안에 호의나 열 정이 보여. 순진하게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지. 나도 가끔은 그런 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해. 여기에 답하고 싶다, 이 시간을 좀 더 지속해 도 좋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리운 기억이 떠올라. 줄라이의 사람들 은 이보다 더 친절하고 상냥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했더라? 떠올리는 순간 그 일말의 따뜻함이 눈 녹는 것처럼 사라져버 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 대리석을 만지는 것처럼 뺨에 손 을 올리고 키스할 수도 있어.” 입가에 아까와는 다른 미소가 돌았다. “토와는, 그 애는, 그래. 작고 귀엽고 성실하고 사랑스럽지.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저 녀석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안 믿어. 이 모양이어서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정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해.” 청년은 하늘로부터 시선을 내렸다. “그러면 그때 말이야. 저 애가 저렇게 한 치 경계도 없이 남을, 처음 으로 만나는 남자를 완전히 믿고 마음을 주다가 상대의 마음이 더 이상 없다는 걸, 혹은 처음부터 모래 위에 지은 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그 96


언젠가를 생각해 봐. 저 쪼그만 꼬맹이가 어떻게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버릴지. 인간이란 곧고 맑을수록 더 충격에 무너지기 십상이야. 나는 십년 전에 바로 옆에서 봐서 잘 알지. 그건 바라지 않아.” 긴 이야기를 듣는 비타의 얼굴이 무심했다. 얼핏 심드렁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마녀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마녀다운 웃음을 웃 는다. “후후. 기사님은 나를 보면서도 그런 로맨틱한 생각을 할까?” “아니, 우린 처음부터 서로에게 기대하지 않잖아. 그래서 당신이 편 한 거지.” 그러자 마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어 그리 우스운지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웃다가 진득한 미소로 청년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러고 도 다시 한참을 더 웃어젖혔다. 여자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있었다. 웃 음소리가 독처럼 귀를 적시고 몸 구석구석을 체념처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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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혜성

1204년의 여름, 제국해방전선 리더 C는 갈레리아 요새 내부에 있었 다. 서 제므리아 대륙 통상회의가 열리는 날이었고, 벼르고 벼르던 조직 의 결전의 날이었다. 최선은 동지 G가 엽병단을 이끌고 철혈재상의 사 살에 성공하는 것이고, 차선은 이 과정에서 크로스벨의 여타 관계자까 지 몰살되는 것이다. 이 경우 혼란의 규모가 상당해진다. 그러나 이 단 계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C도, G도 알고 있었다. 철혈 재상이라는 자가 분쟁 지역의 영토로 가면서 단단히 대비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대비할 수 없는 공격을 하면 된다. 말하자면 G는 스스로 미끼가 되기를 자청한 셈이었다. 토르즈 사관학교 학생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는 C는 견학 을 명목으로 도착한 갈레리아 요새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회담 장소 에 가장 가까운 최전방의 군사 지역에 있는 이상 곧 회담의 소식이 들 려올 것이다. C는 열차포 탈취를 계획하고 있었다. 동료와 민간인의 죽 음을 발판 삼을 계획을 우선 생각하고 있는 마음이 가볍지는 못했다. 테러리스트의 신상 정보를 소개하는 스크린에 G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C는 그가 가는 길동무로 철혈재상을 보내 줄 셈이었다. G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다른 조직원들의 상세 정보는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C는 믿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에 정보국의 에이전트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무렵이 되자 사관학교생을 통솔하던 나이트하르 99*


트 소령에게 ARCUS로 회담의 경과에 대한 연락이 왔다. 제국해방전선 을 격퇴했다는 것은, 제1작전은 실패했고 G가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뜻 이다. 이제 제2작전에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애초에 양동 작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대로 지하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도력 넷의 해킹 은 성공적이었다. 크레이그 중장이 해킹된 전차를 처리하기 위해 이동 했고, 그때를 맞추어 조직의 비행정이 격납고에 침투했다. C는 사관학 교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이들은 이미 조직의 작전을 두 번이나 저 지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또다시 조직을 저지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 했다. 적당한 실력으로 전투를 도우며, C는 옥외로 나왔다. 눈이 부셨다. 상반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없어 재킷을 빠짐없이 걸치 고 있었기에 여름의 햇빛이 유독 무더웠다. 전차가 아스팔트 바닥을 이 동하는 소리와 폭발하는 굉음이 어지럽게 귀를 찔렀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런 하늘을 또 본 적이 있었다. C는 어쩔 수 없이 작 년의 가을을 떠올렸다. 그 녀석, 살면서 연애는 한번 해봤으려나. 토와는 학생회장이 된 후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남에게 일 일이 참견하기도 힘들어진 덕분에 C가 조직의 활동을 하기에 더 자유로 워지기는 했다. 생각은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간다. 크로우는 손에 닿았 던 체온과 울음기 섞여 떨리던 목소리, 물기로 반짝거리던 연녹색 눈동 자를 기억했다. 역시 그 녀석은 연애 같은 걸 해보기엔 너무 숙맥이었어. 거절한 게 다행이지. 아니, 사귈 걸 그랬나? 이왕 그렇다면 사귈 걸 그랬다. 크로우는 스스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계속했다. 크로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히 푸르 100


렀다. 제국해방전선의 조직원들이 열차포를 탈취하려고 비행정에서 내 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름 하늘이 말도 안 되게 눈이 부셨다. 병치할 수 없을 감정들이 나란히 놓였다.


6. 유성은 중력에 이끌려 몸을 사른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햇살은 다른 때에 비할 바 없이 눈 부시다. 이런 계절에도 꼬박꼬박 동복 재킷을 챙겨 입는 학생이 있다. 크로우는 학생회관 2층 복도 끝까지 갔다가 다시 뒤돌아 걷기를 반복했 다. 얼굴을 보기 망설여졌다. 하지만 더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 국 크로우는 앞으로 걸어가 작년에 했던 것처럼 학생회실 문을 벌컥 열 어젖혔다. 점심시간이라 아직 한창 뜨순 햇빛이 맞은편 창에서 따갑게 쏟아졌다. 방 가득 빛이 떠돌았다. 크로우는 잠시 그대로 서서 눈을 깜 박였다. “여, 토와.” 잠긴 목소리로 부르자 책상에 앉아 있던 체구 작은 소녀가 고개를 들 었다. 빛을 받은 얼굴이 유독 말갛게 빛났다. “크로우 군!” 토와가 안기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반갑게 뛰쳐나왔다. “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냐. 정부의 수행단까지 갔다 오 시고, 완전히 얼굴이 멀끔해졌네.” “그거야 크로우 군이랑 VII반 학생들 덕분이지. 에헤헤, 생명의 은인 인데 고맙다는 인사를 따로 못한 게 아쉬워서 일부러 불렀어. 정말 고 마워, 크로우 군.” “그래, 그래. 수행단은 어땠어?” “그게……, 역시 쉽지는 않더라고. 기대하지 않은 일들도 있었고. 세 102


상이라는 게 참 넓어. 그렇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몫까진 최대한 했던 것 같아. 다들 칭찬해 주셨고, 결과가 나쁘진 않은 것 같네. 헤헤.” “정말 새삼스럽구만. 처음에는 쪼끄만 꼬맹이가 뻘뻘대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을 뿐이라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언제 이렇게 든든해졌대. 아무래도 학생회장이라는 거 역시 네 천직인 것 같다.” “응……!” 토와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조금 쓰라린 기분이 들어서 크 로우는 습관대로 속없는 웃음을 웃었다. “학생회장이 된 후부터, 매일매일이 보람찬걸. 교관님이나 동급생들 에게 도움이 될 때도 기쁘고, 회장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1학년 후배들도 귀엽고. 그리고 크로우 군도 제대로 챙길 수 있게 되었어.” 웃는 얼굴 뒤편의 창가에 반사되는 햇빛이 눈을 찔렀다. 찬란해서 크 로우는 눈을 찡그렸다. “토와. 내가 늘 얘기했었지. 네가 모든 걸 챙길 수는 없다고. 세상에 는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있어.” “크로우 군이 그렇게 말하니까 재밌네. 내가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결 심할 수 있었던 건 크로우 군을 만났기 때문인데.” “……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운 사람. 크로우 군 을 만나지 못했던 나라면, 이렇게 다른 온갖 사람을 이해하고 도와주려 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익숙한 미소가 아득히 흐렸다. “그러니까, 크로우 군. 미안해하지 마.” 크로우가 움찔하자, 토와가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왜 크로스벨에서 돌아올 때 마중 나오지 않은 거야? 역시 아직도 미 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럴 필요 전혀 없는데.” 103*


웃는 얼굴이 언제나처럼 말갰다. “있지, 크로우 군. 나는 작년에 조급해했던 것 같아. 나답지 않게 욕 심을 부렸거든. 크로우 군은 언제든 바람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은 사람 이었어. 그래서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 싶었어.” “간지럽다, 야.” “지금 생각하면, 크로우 군. 바람은 바람대로 흘러가게 두면 되는 거 잖아. 나는 그냥 돌아올 때 맞아줄 수 있도록 여기에 있는 걸로 충분한 거였는데.” 햇빛이 눈이 부셨다. 크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들어서 눈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토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크로우 군, 울어?” “그러니까 니가 모든 걸 받아줄 수는 없을 거라고, 이 세상모르는 꼬 맹아.” “괜찮아, 괜찮아.” 토르즈에서 가장 작은 2학년이 손꼽히게 체격이 큰 남자를 품에 안 아 다독여주었다. 꼴불견이었다.

토와 허셜은 그해의 일은 마지막 날까지 빠짐없이 선득하게 기억한 다.



7. 은하(銀河)

혹한이었다. 눈이 서리서리 쌓일 만큼 많이도 내렸다. 토르즈가 제아 무리 명문이라지만 명색이 사관학교라 저녁까지 학생회관에 불을 뜨끈 하게 때기엔 자원 낭비라고 판단하는 성싶었다. 난방이 끝날 때까지 남 아서 업무를 보면 손이 얼어서 종이에 손을 벤다고 다들 불평이었다. 결국 학생회실 안쪽에 작은 난로가 놓였다. 한참 서류를 넘기던 토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뜨끈한 난로 위에 팔을 뻗고 뻣뻣한 손을 녹였다. 창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위치였다. “오늘 이상하게 사람이 많네. 날이 이렇게 추운데.” “다 견학 온 사람들일 거예요.” “하긴, 요즘 학생회실을 보러 오는 사람도 엄청 늘었어. 일부러 볼 게 있는 곳은 아닌데.” “과연 그럴까요? 다들 선배님이 학생회장이라고 하면 놀라거나 농담 이라고 생각하던데.” “으으, 그런 식으로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후배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회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요즘은 교내에 별별 사람이 다 있어서. 고향에 돌아갈 돈이 없다고 행패 부리는 여행객이나, 가족을 잃 어버린 어린애나, 볼 때마다 황망해서 정말. 그런데 회장님은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니까요. 볼수록 대단해.” “별로 대단한 건 아닌데……. 그냥 그 사람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심 106


정일까 생각하면 돼. 학생회 임원이라면 익숙해지는 게 좋아.” “아휴, 저는 몰라요. 그런 거 못 해요.” 후배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회장님이 가시고 나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네요……. 올해는 지 원자도 엄청 몰리는데 말예요.” “그러게. 학교 입장에서는 잘 됐지.” “헤헤, 다 커레이져스 덕분이죠.” 토와가 못 들은 것처럼 가만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기에 후배는 한마 디 더 운을 띄웠다. “토와 회장님이 지휘하신 붉은 날개 말이에요.” 토와가 작게 웃었다. “오늘따라 왜 이런담. 비행기 태운다고 나오는 거 없어요.” “그냥, 우리 회장님 기운 좀 팔팔 내셨으면 하고.” “일을 많이 도와주면 기운이 날 것 같은데? 지금 서류 접어 누르고 있는 팔부터 떼고.” “이크.” 후배가 얼른 팔을 치웠다. “……그런데, 회장님.” “응?” “정말 졸업하면 일 년 동안 비정부기구를 돌아보실 거예요?” “응. 말했잖아.” “회장님 같은 분께 일 년은 너무 아까워요. 고작 한 달 만에 커레이 져스를 끌고 내전의 판도를 바꾸셨잖아요.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학생 회 일도 보고 있는 거고…….”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쪽 서류 다 확인했으면 좀 가 져와 줄래?” 107*


토와가 단호히 대답하자 후배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서류 더 미를 안아 들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튼 절 부르셔서 다행이에요. 아이고, 무거워라. 어떻게 그만한 몸으로 이런 걸 혼자 하셨대.” “혼자는 아니었어. 부르면 금방 와서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토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류에 코 를 박았다. 후배는 이제 토와의 몸에 자연스럽게 밴 저 태연함이 오히 려 걱정이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서류를 넘기며 대강 답한 토와가 고개를 들어 방금 들어온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곧 뺨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쿠. 선배님들 오셨어요?” 후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회장님이랑 약속 있다고 하셨지. 나머지는 제가 정리할 테니까 지금 나가세요, 회장님!” “내가 회장인데 어떻게 후배만 혼자 두고 나가.” “저도 슬슬 회장님 없이 일하는 연습을 해야죠. 이러다가 회장님 졸 업하시면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걱정 말고, 가세요.” “헤헤, 알았어. 그러면 부탁할게.” 안젤리카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서는 토와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후 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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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이게 누구야. 갓 성인들이네. 너희도 술 마시러 왔어?” “역시 말 안 해도 아시는군요. 칵테일 네 잔이요.” 자연스럽게 주문한 안젤리카가 잠시 그대로 있자, 프레드는 별말 않 고 주문을 받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음료가 놓였다. 각자 한 잔씩 가져가고 한 잔이 남았다. 푸른 빛깔의 음료를 바 라보다가, 토와가 갑자기 웃었다. “어, 토와.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었어?” “아니. 갑자기 웃긴 게 생각나서. 예전에 여기서 칵테일을 서비스받 았는데, 크로우가 기겁해서 뺏었거든. 그러고 자기는 쭉 마시는 거 있 지? 자긴 괜찮아도 나는 쪼끄매서 그런 거 마시면 안 된다나. 진짜 웃 기지.” “바보 같은 놈.” “그 녀석이 원래 그렇지.” 각자 한마디씩 거들었다. 토와가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응. 진짜 나쁜 인간이야.” 얼굴이 다소 붉었다. “그때 말고도 나보고, 꼬맹이라고. 너무 어려서 상대할 가치도 없다 고…….” “뭐? 그 무지몽매한 놈이 감히 나의 토와에게……” “크로우를 욕하지 마!” 토와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 지르자 안젤리카와 죠르쥬가 재빨리 눈 빛을 교환했다. 술이 이 정도로 약할 줄은 미처 몰랐다. 다행히도 소녀 는 금방 무너지듯이 꾸벅 사과했다. “……미안해.” “아니야, 이해해. 그 녀석이……, 그 녀석을…….” 안젤리카는 잔을 홀짝였다. 말을 곧바로 맺을 수 없었다. 109*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쉽게 말하잖아.” “어쩔 수 없지……. 나도 마찬가지인걸.” 토와가 잔 안에 작은 스푼을 넣고 빙글빙글 돌렸다. 달칵거리는 소리 가 났다. “나는 그 누구라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토와가 한 모금을 더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학생회장 일이 그랬거든. 누구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고 단 한 명의 의뢰도 빼놓지 않았어. 그러면서, 나는 제법 자신이 붙었어.” 그리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달랐던 거야.” “너는 충분히 했어, 토와.” “안제는 오늘도 상냥하구나.” 토와가 미소 지었다. “그러게. 크로우 군이 말했는데. 내가 모든 걸 챙길 수는 없다고, 이 세상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이윽고 토와는 잔에서 손을 놓고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알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그리고 알고 있는데, 지나간 일이라는 것도. 그런데 자꾸 아쉬움이 남는 거야.” 힘이 빠진 얼굴이 어깨 위로 미끄러졌다. “어땠을까? 어떤 마음일지 이해하고 있었다면, 아니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그래. 지나간 일인데. 모두 이제는 지나간 일인데. 어쩔 수 없는데. 그래서 지금 더…….”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가 한숨 같았다. “챙긴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만약 내 역할이 조금 더 컸다면. 그저 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면, 눈치챌 수 있 을 정도로 더 많이 알았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면 하고.” 110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토와는 테이블을 딛고 일어나 조용히 웃었 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렇다면 이건 아마 개인적인 감 정이겠지.” 자리에서 일어선 토와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이는 소녀의 뒤에 두 친구가 따랐다. 토와는 가게 밖으로 나서, 탁 트 인 가도까지 나왔다. “나는 이 세상을 좀 더 알아가고 싶어. 그렇게 앞으로 가다 보면, 이 아쉬움이 어딘가로 닿을 거라고, 나는.” 토와는 의젓하게 몇 걸음을 더 걸었다. 그러나 이미 취한 동작에는 힘이 없었다. 얼마 가지 못해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안해, 안제, 죠르쥬. 나…….” “알아. 잘 알아.” 소녀는 앉은 그대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묻었다. 흐느 낌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목이 메어 헛기침 을 하고 눈가를 훔쳤다. 소녀는 한참이나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 를 내며 무너져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누군가 툭툭 치는 것 같 았다. 토와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감탄했다. “아아, 별이.” 눈이 시리게 부셨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하늘 위에 잔물결 같은 별들 이 반짝거렸다. 깊은 물 아래에 잠겨 수면을 올려다보는 듯했다. 알알 이 빛이 그득해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았다. 토와는 발돋움을 했다. 그 리고 손을 있는 힘껏 하늘로 뻗었다. 하늘을 향해 웅크린 손가락이 반 짝이는 별을 한 움큼 움켜쥘 듯했다. 물론 손은 허공만 휘젓고 아무것 도 건지지 못했다. 토와는 반동으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111*


별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토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빨려드는 것처럼 세상에 걸음을 내디뎠다. 이 세상이 애달게 아름다웠다. 가슴 설레는 풍경이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Some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If happy little bluebirds fly beyond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

Somewhere Over the Rainbow – The Wizard of Oz


Somewhere Over the Starlight 2015. 08 동네 페스타 발간 영웅전설 섬의 궤적 – 크로우 암브러스트 * 토와 허셜 소설본 파본 및 낙장은 당일 행사장에서 교환 가능합니다. 글 셀라, 표지 도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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