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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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은 사자전역에 관련된 사료를 읽던 중, 당시대에 나타났다는 마 수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스케치라고 표현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단출한 실루엣의 그림이 어쩐지 눈을 사로잡았다. 독을 품은 숨을 한 번 내쉬면 생물을 시체로 만들고, 반나절 만에 제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는 검은 용 은 그 자신도 시체마냥 뼈대만 있었다. 왜 하필 이런 형태를 하게 되었을까? 원래는 이 생물도 따뜻한 살과 피를 갖고 있던 게 아닐까? 제 숨에서 독기로 인해 자신마저 곯아 없어진 게 아닐까, 그러고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움직였던 걸까. “헛소리네.” 열변을 펼치는 미하엘에게 동료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료도 찾기 힘든 그런 전설 같은 걸 연구하겠다고? 도력혁명의 시대 에 소설이라도 쓸 셈이야? 이봐, 차라리 경제학 같은 걸 연구하지 그래. 우리 새 후원자는 실용성 있는 분야를 좋아한다고.” 그래도 어딘가에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1


전설 속에 남은 생물의 희소한 모습에 호기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 정도 말이 트였다 싶은 사람이면 매번 용의 그림을 보여주 었지만, 모두 마지못해 웃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미하엘을 핀잔할 뿐 이었다. 그래서 미하엘은 용의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경제 학을 전공으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앞서 자신을 몽상가라고 무시하던 사람을 연구 성과로 압도하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 비록 가장 관심 있던 분야에 매진하지 못했더라도, 결국 서른의 나이에 제국학술원의 조교수라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꽤나 어깨 펴고 다닐만한 인생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02 맥주에서는 고린내가 난다. 귓전에 시끄럽게 울리는 시정잡배들의 소란 은 수준이 낮아 도무지 눈 뜨고 들어줄 수가 없다. 그래도 미하엘은 눈살 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히 바 한 구석에 몸을 수그리고 앉아있었다. 이 술집 이 근방에서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석에 앉아 있으면 맥주 한 잔으로 정오의 햇빛에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미하엘은 작은 필기용 노트를 펼치고 볼펜으로 한 줄을 썼다. ‘오스트 지구 주민의 주 수입원은…….’ 미처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옆 테이 블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러니까 말이야. 재상 각하가 더 실권을 틀어쥐면, 이 오스트 지구도 제도 중심가처럼 근사하게 개발될 날이 오지 않겠느냐 이거야! 저 귀족들 이 우리한테 굽신거릴지도 모르지. 생각만 해도 통쾌하지 않아?” 2


“그럴 리가 있나. 화풀이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영토를 확장하느라 바쁜 재상이 거기까지 신경써줄까.” 작게 중얼거리고 다시 펜을 잡는데, 몸이 휙 돌아가며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너 이 자식.” 아까 말하던 남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였다. 얼굴이 벌게져 거나하게 취 한 남자를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 재상 각하를 모욕하는 거냐? 뭐야, 너 귀족파의 끄나풀이냐?” “아, 아닙니다.” 빠르게 대답했다. 자기 얼굴만 한 주먹이 코앞에 있고, 입바른 소리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다면 아무리 한때 1인 시위를 했 던 사람이라도 목소리가 작아지는 법이었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했다간 봐라. 확…….” 그만해, 샌님이 겁먹었네. 여자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우 남 자의 손아귀에서는 풀려났지만 목이 계속 얼얼했다. 미하엘은 고개를 숙 였다. 서러움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이 알딸딸한 취기와 함께 엄습했다. 애초에 이 구역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집세가 싼 곳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도무지 수준이 맞는 인간이 없었다. 아니, 이 세상 자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쓰고 있는 논문은 언제쯤 투고할 수 있을까? 과격시위자라는 명목으로 학술원에서 파면된 지도 이제 한참이었다. 지인들도 슬슬 바쁘다는 핑계 로 만나주지 않는다. 복권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놓은 지 오래였다. 사설이라도 쓰면 어떨까? 지인의 소개로 제국시보에 연이 닿아 몇 번 경제 문화면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정권비판적인 첫 글이 비난을 산 이후로 소위 가하는 ‘편집’이 가해졌다. 비판과 고찰은 흐려지고 두루뭉술 한 허울만 남은 글이 자신의 이름으로 실린 것을 미하엘은 무력하게 읽었 3


다. 그마저도 이제는 다른 필자를 고용한 듯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계속하며 돌 아온 미하엘을 집 앞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맞아주었다. 결코 반갑지 않은 마중이었다. “어딜 갔다 오나? 술 마실 돈이 있으면, 집세나 밀리지 말고 내. 어디 일도 안 하고 대낮부터 술이나 마시나?” “그게, 일자리는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2만 미라다. 2만 미라. 모레까지는 완납하라고.” 그렇다. 사상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일단 당장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 는 게 미하엘이 직면한 문제였다. 너무 고학력자라서 기피되나? 경기가 나 빠서 일자리를 못 얻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최근의 일들이 너무나 불운 했다. 단순한 사무직을 맡아도 사고가 연이었다. 새 일을 맡은 지 몇 주일 이 못 되어 누군가 정치 건으로 시비를 걸어서 성질을 못 이기고 말다툼을 하거나, 분명히 멀쩡하게 전달한 서류가 얼룩투성이가 되어 질책을 받거 나, 이런저런 사고가 이어져 하는 일마다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평생 을 몸담았던 학계에서는 외면당하고 새 일에서 경력을 쌓지 못하니 그동 안 모아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였다. 너무 오랫동안 상아탑의 엘리트로 지냈던 걸까. 그래서 다른 일에 적응 을 못 하는 걸까? 고민해 봐도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침대에 누우려던 미하엘은, 방 한쪽 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그만 나자빠질 뻔했다. “아저씨가 미하엘 기데온이지?” 열 몇 살이나 될까. 하얀 얼굴에 흐트러진 곳 한 군데 없이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은, 이런 허름한 골목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멀끔한 소년이 었다. 백발에 가까운 재색 머리에, 더운 날씨임에도 가볍게 걸친 파란 코 트가 매끄럽게 어울려 어린 천사처럼도 보였다. 4


“그렇다만, 너는 누구지?” “개인교습 좀 해 줘.” “이 녀석, 앞뒤 없이 무슨 소리냐……. 너 어디 사니?” “그러니까, 개인교습 좀 해 줘.” 아이는 미하엘의 책상 위에 두터운 봉투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두 시간에 2만 미라. 해보고 괜찮으면 앞으로도 일정을 잡고, 아니면 말고. 그리고 아저씨. 어떻게 되든 문은 닫고 다니자. 위험한 세상이잖아.” —라고 말을 하면서 녀석이 걸쇠를 잠그는데, 어이가 없어서 환장할 지 경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누구인 지도 모르는 녀석이 그저 멋대로 집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뭐 이런 경우 없는 놈이 다 있는지. ……라는 생각과는 달리, 미하엘의 손과 눈은 바쁘 게 봉투를 들어 지폐를 훑어보았다. 진짜다. 진짜인 것 같다. “뭘 가르쳐달라는 거지?” “세상에 대해서 가르쳐 줘. 아저씨가 아는 대로.” “세상……이라니, 정말 영문을 모르겠군. 시사 상식이 궁금한 거라면 제 국시보라도 꾸준히 읽으면 될 거야.” 그러자 소년은 턱을 괸 채로 피식 웃었다. “아저씨. 설마 지금 그 신문을 믿는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미하엘이 오스트 지구에서 처음으로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열 몇 살 남짓이나 되어 보이는 꼬마였다.

03 “이름은?” “크로우.” 5


“성은? “없어.” “출신지는?” “아저씨는 배경과 출신만으로 인간을 판단하는 사람이야? 내가 잘못 찾아온 걸까?” “이 정도는 그냥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잖아.” “아무튼 알려주기 싫어. 아저씨랑 나는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지. 그런 건 좀 더 친해지고 나서 얘기하자.” “이봐, 너에 대해서 좀 알아야 내가 거기 맞춰서 뭘 가르칠 거 아니야. 계속 이런 식이면 교습이고 뭐고 당장 확 일어나서 가버릴…….” “어, 누나. 스트로베리 크림 브륄레 이쪽이요.” 메이드가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식사할 돈도 궁하니 디저트 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밀도 높은 하얀 크림 위에 발갛게 빛나는 딸 기가 얹힌 것을 보고 미하엘은 침을 꿀떡 삼켰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마지막 조각까지 입에 넣었다. 혀가 녹을 만큼 맛있었다. 녀석은 영 속을 알 수 없이 알쏭달쏭했다. 요구사항을 밀어붙이면서도 정작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미하엘을 어떻게 아는지는 말하 지 않았다. 키도 크지 않아서 열 서넛이나 될까? 옷이 곱고 얼굴이 멀끔하고, 반말 이 자연스러웠으므로 미하엘은 아마 소년이 영세한 귀족가나 중산층의 자 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외양과 어울리지 않게 영 낯선 것은 어린애 주제에 능구렁이 일곱 마리쯤 뱃속에 넣은 듯한 태연자약함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자. 너는 어떻게 날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으응, 아저씨는 제국학술원의 부교수였지?” 6


“그래. 제국 최고의 석학이다. 아무나 하는 건 아니지.”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지.” 순간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었다. 끓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쾌 활하게 말을 이었다. “나, 어릴 때 거기에 진학하고 싶었거든.” “무슨 이상한 말을 하는 거냐? 지금도 충분히 어리잖아.” “아, 맞다. 그랬지.” 소년은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우스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킥킥 웃 었다. 녀석은 늘 그렇게 어딘가 모를 위화감을 휘장처럼 몸에 두르고 있었 다. 불쑥 나타나 미하엘이 필요한 돈을 가져다 준 것부터 아이라고는 믿 을 수 없게 느긋한 눈매까지, 묘하게 현실의 존재 같지 않았다. 사실 보기보다 나이가 무척 많은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 배움을 요청하려고 비밀스럽게 나를 찾 아온 건 아닐까? 그런 망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04 전 대륙의 인재들이 모이는 학술원의 부교수였다고 해도 이 정도로 어 린 아이를 가르친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동네 친구들이랑 골목대장 노릇 이나 할 나이가 아닌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가벼운 이야기부터 훑으며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대 이상으로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그렇게 정당성을 인정받은 드라이켈스가 제국의 차기 계승자로 주목받게 된 거지.” “그 정도 설화는 당연히 알고 있어. 하지만 드라이켈스는 서출이잖아? 정당성도 정당성이지만, 세력을 인정받은 게 아닐까.” 7


“그 말이 맞다. 이때 드라이켈스는 이미 노르드 전사들과 철기대라는 새로운 전법의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고, 거쳐 간 지역마다 지지를 받 게 되었으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된 게지.” “친화력이 가장 큰 자질이었구나. 다른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 는 재능. 부럽네…….” 일방적으로 듣는 대신 함께 생각하는 학생과 함께 수업하고 있자니 제 법 학술원 시절의 즐거움이 떠오르는 듯도 했다. “지금은 일단 역사부터 가볍게 훑고 있다만,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수업할 수도 없고. 너는 자세히 배우고 싶은 분야는 안 정한 건가?” “배우고 싶은 거야 잔뜩 있지. 역사나, 수사학이나, 탄도학이나…….” “그걸 다 한 사람에게서 배울 생각이야?” “내가 사정 상 여러 수업을 찾아가기는 좀 어렵거든. 왜, 아저씨한테는 무리야?” “아니, 제대로 찾아왔군. 부전공은 인류학이다. 역사나 문헌에는 자신 있고, 수학도 학부 수준까지는 가르칠 수 있어.” “응……. 솔직히 말하면, 아저씨를 만난 건 행운이야. 나는 학교를 제대 로 다니지 못했거든.” “그런 것 치고는 나이에 비해 공부한 것 같은데?” “일요학교 정도는 나왔어. 월반 비슷한 형태로. 최근에는 좀 여유가 생 겨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아무래도 혼자 공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서…….” “학술원에 진학하고 싶었다며, 사정도 좋은 것 같은데 무슨 사고라도 있었어? 진학 준비를 하려고 나를 찾아온 건가?” 그러자 아이는 처음으로, 수줍은 얼굴로 웃었다. “아니. 그건 그냥 어릴 때 꿈이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의 과거에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사고가 있 8


었겠거니 하고 짐작할 수는 있었다. 미하엘은 녀석의 코를 콱 잡아서 비틀 었다. “으읍, 하지 마. 다른 사람이 내 몸 만지는 거 싫어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는 아직 어려. 자꾸 어 릴 때 어릴 때 하는 거 어울리지도 않고, 꿈을 포기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 잖아. 자질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장학금을 노리면 명문 학교에 진 학하기도 무리 없을 거다.” “이제는 흥미 없어. 목표가 바뀌었거든. 진학해서 교수 정도 되어봤자 아저씨처럼 파면되기나 할 테고…….” 미하엘은 말없이 아이의 뺨을 꼬집었다. “읍, 하지 말라니까!” “나이도 많은 스승님에게 이렇게 입을 못되게 놀리는 녀석은 혼내줘야지.” “꼰대 같은 소리 하기는! 나이 같은 거 신경 안 써!” “그러면 스승에 대한 예우라 도 갖춰. 그래야 건방진 녀석이라도 좀 귀엽게 보고 가르칠 맛이 나지!” 뺨을 푸 부풀린 녀석의 눈을 노려보다, 미하엘은 그만 힘없이 손을 놓 아버렸다. “됐다. 지금 어린애랑 뭐하는 거람. 네 말이 맞아. 나는 파면되었고 지 금은 명예도 돈도 없지. 당장 2만 미라가 없어서 이렇게 너를 가르치게 되 었고……. 하지만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야, 제국시보에서 아저씨 사설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서 알아봤지.” “윽, 그건 잊어라. 편집부에서 제멋대로 자르고 수정한 조악한 글이야. 돈이 급하지 않았다면 안 했어. 이제 신문사는 쳐다도 안 볼 거다.” 하지만 아까까지 까불거리던 아이는 별안간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대 꾸하지 않았다. “크로우?” “이상하네, 아저씨. 월세도 못 낼 만큼 가난했어? 제도가 이렇게 넓은 데. 일자리가 안 구해졌어?” 9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구나.” 미하엘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아이는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뭐, 사고가 이어졌어. 별 거 아닌 사고가. 중요한 서류가 사라진다 거나, 술에 취한 사람이 시비를 건다거나, 사장이 갑자기 심기가 거슬린다 고 말하거나 해서 얼마 가지 못했어. 면접을 봐도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응답했던 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서…….” “아저씨. 정말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이상하다니? 대체 무엇이? 지금 걸리는 것은, 나에게 가장 걸리는 것 은……. 곰곰이 생각하던 미하엘은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제국시보에 사설을 낸 이후에, 어김없이 일자리에서 사고가 생겼군.”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미하엘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그 남자의 습성이지. 본보기를 보이는 것……. 제도는 위험하겠다. 자 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 이제부터는, 다른 곳으로 가자.”

05 방이 작았으므로 챙길 짐은 많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추려낸 백여 권의 책들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들만 추렸다. 책과 노트와 개인용 도력기기 몇 가지를 챙기면 모든 짐을 챙겼다고 생각되는, 미하엘은 그런 종류의 사 람이었다. 평생토록 학문에 전념한 그런 삶을 살아왔다. 약속은 밤이었다. 미하엘은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어둠을 틈타서 빠져나 왔다. 책상 위에는 십만 미라짜리 지폐 두 장을 남겼다. 더 남길 것도 챙길 것도 없어서 쓴웃음이 났지만, 의외로 걸음은 가벼웠다. 가로등도 희미한 골목길에서 벽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걷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10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어린 남자아이 하나를 믿 고 반평생을 머무른 도시를 떠나는 건가?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주지 도 않는 그 조그마한 어린아이를, 무엇을 믿고? 나는 지금 망설이고 있는 건가? 생각하고 있던 찰나, 이제는 귀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이쪽이야.” 아이는 어느새 곁에 있었다. 가까이와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이 아이를, 무엇을 믿고? 그렇게 생각하며 미하엘은 가볍게 챙긴 짐을 만지작 거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다른 사람들은 이 작은 아이보다 믿을 만 했던가? 교수직에서 파면되자 연락을 끊은 사람들. 처음에는 위로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복권이 되지 않자 은근한 핑계로 약속을 끊은 사람들. 미안 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전 은사, 분명 멀쩡한 서류를 가져다주었는데 얼룩졌다고 성질을 부렸던 동료, 정치 관련 화제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시비를 걸던 상사. 그들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비밀에 부치는 이 아이가 믿을 만하지 않은가. “뭘 가만 보고 있어, 아저씨. 얼른 따라와!” 손짓하는 아이를 보며 미하엘은 다시 한 번 자문했다. 나는 지금 망설 이고 있는 건가? 아니. 놀라울 만큼 망설임은 없다. 크로우를 따라간 곳에는 화물차로 위장한 작은 트럭이 있었다. 미하엘 은 화물칸에 앉아 천막 사이로 덜컹덜컹 흔들리는 제도의 야경을 바라보 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버리고 속이고 배신한 것들이 멀어지고, 작아지고, 일그러져서 곧 시야에는 까만 하늘의 별빛만 남았다. 그렇게 미하엘은 반평생을 머물렀던 제도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과 같 은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11


06 “일어나, 아저씨. 거의 다 왔잖아.” 여긴 어디지? 무심코 머리맡에서 안경을 찾던 미하엘은 눈을 뜨고서야 시야가 흐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제 크로우를 따라 나왔지.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자 대리석으로 조성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어 디선가 은은하게 소금 짠 내가 났다. 바다 내음일 것이다. 도착한 곳이 어 디인지 알 법했다. “해도 오르디스…….” “맞아. 이른바 귀족파의 본거지야. 정세에 대해서는 교수님이 알 만큼 알 테니까, 내가 주의를 줄 필요는 없겠지?”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자신을 아이 대하듯 하는 말투에 어이가 없지만서 도 일단 고개를 까닥였다. 며칠 전 갑자기 제도를 떠나자고 말하던 크로 우에게 무얼 믿고 널 따라가느냐고 묻자, 녀석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카이 엔 공작가의 문장이었다. 궁금하던 것이 대번에 정리되었다. 어린아이가 한 번에 몇 만 미라씩을 쓸 만한 재력도, 하필 재상에게 반대했던 미하엘 자신에 대해 알고 찾아 온 것도 귀족파의 수장인 카이엔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납득이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귀족파와 연이 닿는 것은 미하엘에게는 새로운 기회나 다름없었다. 학계의 동료들이 후원자를 찾아 연회에 다닐 때도,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럴 시간에 학문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미하엘은 파면되었고, 자신을 비호해줄 사 람이 필요했다. 정확히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른다. 이 도시에서 어떤 식으 로 머무르게 될지도 아직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미간에 주름 생기겠다, 아저씨. 표정 풀어. 카 이엔 아저씨는 건방진 놈을 좋아해.” 12


아저씨라니. 지금 이 녀석, 귀족파의 수장을 아저씨라고 부른 게 맞지. 잠시 머리가 띵했다. 카이엔 공의 조카뻘 되는 먼 친척 같은 건가? 격변의 시대이지만 평민인 자신이 앞으로도 코를 꼬집고 볼을 잡아당겨도 되는 건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크로우가 길게 하품하며 짐칸에 반 쯤 누웠다. 이런 꼴을 보면 곱게만 자란 귀족 같지도 않다. 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크로우는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곱 떼, 아저씨. (미하엘은 황급히 얼굴을 비볐다.) 카이엔 저택은 나 름대로 아름다운 장소니까, 처음 왔으면 볼만할 거야. 맑은 정신으로 봐 야지.” 끼익, 타이어 끄는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추었다. 미하엘은 크로우를 따 라서 차에서 내렸다. 눈이 부셨다. 높게 세운 담장과, 곳곳에 세운 조각상 과, 내부 건물과, 처마까지 온통 눈부시게 새하얗다. “겉모양은 멀끔하지? 2층에서는 바다도 내려다보이거든. 나쁘지 않은 경치야.”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대리석으로 세운 건물은 저택이라기보다 도 궁궐처럼 보인다. 앞장서는 운전수와 크로우를 따라 역시 새하얀 별관 에 들어서자 긴 치마를 입은 메이드들이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크로우!” “왔네, 크로우! 어디 갔었어? 심심했잖아!” “새로 구운 쿠키 먹을래, 크로우?” “뭘 새삼스럽게 야단이야. 쿠키 말고 식사할 거 없어? 오래 이동했더니 배고파……. 여기 있는 아저씨도 뭣 좀 먹어야 되고.” “지금 남은 게, 치킨 파이에 에그 타르트 괜찮아?” “어머, 새 손님이야? 공작님은 특이한 사람을 좋아하시니까.” “샌님 같이 생겼는데? 그래도 뜯 어보니까 나쁘지 않네. 공작님이 좋아하시겠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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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너 사실 카이엔 가의 사생아, 뭐 그런 거냐?” 정신없이 타르트를 흡입하던 크로우가 얼굴을 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렇지만 여기서 입을 막 놀리면 카이엔 아저씨가 가만있지는 않을걸?” 뒤에 서 있던 사용인이 헛기침을 큼큼 했다. “나는 그냥 여기서 좀 장기체류하고 있는 식객이야. 카이엔 아저씨한테 좀 예쁨 받는 식객. 그렇게 알아두면 돼. 뭐, 아저씨도 한번쯤은 카이엔 공을 만나야 할 테니까.” 입가를 냅킨으로 닦은 크로우가 옆의 메이드에게 눈짓했다. 갑자기 다 가온 메이드 두 명이 미하엘의 양팔을 잡았다. “뭐, 뭐야?” “카이엔 아저씨는 외모를 좀 보는 사람이라서. 어느 정도는 깔끔하게 하고 가는 게 점수를 딸 거야. 잘 보이면 나처럼 공짜 밥 먹는 수도 있고.” “자……잠깐, 사대명문의 필두를 지금 바로 만난다고?” “내가 좀 이 저택의 인기인이라서, 누나들도 공작님도 내가 없으면 심심 해하거든.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준비해둬.” 얼마 후, 미하엘은 생전 몇 번 입은 적도 없는 예복을 입고 카이엔 저택 의 응접실에 있었다. “하하, 그래서 무작정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자네도 보기보다 무모한 사람이군.” “예……. 때로는 직관이 따르는 대로 움직일 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공작님을 뵈었으니, 아무리 많은 것을 잃었어도 새로이 얻 은 것에 못 미치죠. 어쩌면 우연히 크로우와 마주친 것까지 여신의 인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4


“과연 교수였던 사람이라, 언변이 나쁘지는 않군. 첫인상만 봤을 때는 한 마디도 못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크로우가 데려온 남자인가.” “아저씨 성에 안 찰 것 같으면 안 데려왔지.” “좋아. 그럼 자네가 한 번 크로우를 좀 더 재미있는 아이로 만들어 주 게. 기대하겠네.” “맡겨주십시오.” 미하엘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표정을 숨기며 웃었다. 얼핏 호인처 럼 유쾌하게 말하는 공작의 말투에서 어딘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내려 다보는 기색이 역력해서 불쾌했다. 분명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을 다스리 는 위치에 있었던 자의 시선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쾌감을 드러낼 때가 아 니었다.

08 어릴 때 전쟁통에 부모를 여읜 이후로, 늘 장학생이었다. 왜 인간이 그 런 지옥을 만들어야 했는지 알고 싶었다. 역사책과 고전, 에세이와 소설까 지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책 속에는 역사가 있었고, 공상이 있었다. 아 름다운 세상에 대한 공상이었다. 지옥을 보았기에 세상이 발전할 거라는 믿음이 더 가슴에 사무쳐서 미하엘은 몇 천 권이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끈질긴 노력에는 보상이 따른다. 제국의 수재로서 미하엘은 그리 믿고 살아왔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는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변덕스러워 보이는 한 사람의 호의에 기대어 그럭저럭 풍요를 누리는 생활. 늘 삶을 열심이게 했 던 긍지도 직위도 없이, 노력을 평가받지도 않고, 그저 아이 한 명에게 아 는 것을 가르치며 저택에 머무르는 생활. 영 기분이 이상했다. 15


그래도 제도에 마지막으로 있던 시기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영 보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하엘이 가르치는 아이는 학술원의 자제들에 뒤지 지 않을 만큼 명석하고 의욕이 넘치는 녀석이었다. 별 일이 없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수업을 들을 기세였다. “마음이야 내내 공부하고 싶지. 그동안 못 배운 시간이 너무 길어. 그런 데 내가 가끔 몸이 아파서. 그리고 밥값은 해야 하니까, 가끔은 심심해하 는 카이엔 아저씨랑 놀아줘야 하거든.” “공작님을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거냐? 너, 정말 먼 친척의 아이 같 은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니지만~, 카이엔 아저씨는 건방진 놈을 좋아한다니까? 그렇 지만 아저씨는 그렇게 부르면 안 돼. 나처럼 귀여운 애나 가능한 거지.” “……수사학은 다른 말로 연술론이라고도 한다. 상대의 의견을 바꾸어 자신의 뜻대로 설득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 설득을 위해서는 일단 논거 가 필요한데…….” “앗, 대놓고 말 돌렸어.” “어쨌든, 수사학에 관심이 있다면 기본이라도 배워보도록 해. 네 그 귀 여운 (미하엘은 여기서 얼굴을 찌푸렸다.) 외모를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황가에서도 수사학을 따로 배운다고 하더군. 너는 드라이켈스 의 친화력에 관심이 있지 않았나?” “으음, 글쎄……. 나는 황자가 아닌걸. 그리고 황제라고 해도 꼭 사자심 황제처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허수아비마냥 재상한테 정치를 맡 기고 물러날 수도 있고~.” “……귀족파의 총본산지에서 할 만한 소리는 아니군.” “뭐 어때. 나도 여기 죽 있으면서 귀하신 분들을 좀 봤는데 말이지. 세 상은 바뀌고 있고, 귀족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언제까지고 계급으로 사람 을 나눌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깨닫고 있어. 그렇지 않은 놈이 많다는 건 16


인정하지만…….” “이런 귀족의 도시에서까지 그런 변화가 느껴진다니 놀랍군. 철혈재상 이……, 실권을 잡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미하엘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덧붙였다. “사상은 언제나 권력과 함께해 왔으니까. 내가 너무 안일했지.” “아저씨에게도 사상 같은 게 있었어?” “사상이 없었다고 하는 게 학계인으로서 더 이상하지.” “아저씨의 사상은 어땠는데?” “논문 몇 권 분량이니까, 간단하게 설명할 건 아니야……. 개개인의 자 유가 보장되는 세계라고 표현할 수 있겠군. 수십 명 단위의 작은 문화권부 터 백만 명 단위의 민족으로 구성된 큰 문화권까지, 서로의 권익을 해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연결되어 자유롭게 교류하는 그런 세계.” “아하하. 제국 학술원에서 쫓겨날 만하잖아? 철혈재상이 이끄는 제국 의 정책과는 반대 방향이잖아. 하지만 아저씨. 아저씨 말 대로면 사상은 언제나 권력의 노예인 거야? 사상이 권력을 바꾸는 경우는 없는 거야?” “있지.” 미하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소수가 다수가 되거나, 피지배자가 지배자가 되는 경우. 혁명. 어느 때 어느 시절에나 세상은 혁명을 통해 바뀌었어. 권력 교체는 항상 사상의 변화와 함께했지. 권력만 바뀌거나, 사상만 바뀌는 경우는 사실 드물어.” “그렇지만 아저씨는 일단 사상부터 바꾸려고 했던 거지? 그래서 권력을 잡은 분을 극렬하게 비판하다가 파면되었던 거지……. 학술원의 후원자 중에는 재상도 있었으니까. 아저씨, 그렇게 했던 걸 후회해?” “아니.” 미하엘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후회될 텐데. 후회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말 좀 잘못했다고 평생 동 17


안 쌓아올린 걸 잃고, 몸도 해치고, 신의도 명예도 친구도 잃고, 제국학술 원의 교수였다는 사람이 이렇게 나 같은 어린애나 가르치고 있고…….” “그래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으니까.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내가 평생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세상을 광폭하게 휘두르고 있어. 학술인으로서 어 떻게 그걸 그냥 두고 볼 수 있지?” “그것도 지나간 일이잖아. 아저씨. 그런 데에 더는 신경쓰지 말고 아저 씨의 삶을 살아. 안 되는 일에 연연해서 어쩔 건데. 아저씨보다 훨씬 심한 일을 겪은 사람들도, 먼 곳으로 떠나서 밭을 일구고 평화롭게 살아가. 그 런 사람들을 알고 있어. 아저씨는 가진 걸 잃고 후회하잖아. 더 잃기 전에 전부 잊는 게 나은 거잖아.” 미하엘은 최근의 일을 되돌아보았다. 확실히 지금은, 전보다 훨씬 평안 하다. 배가 부르고 신선한 해산물과 디저트는 입에 달게 붙으며 환경은 쾌적하다. 그저 적당히 돈을 버는 생활로도 결핍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함부로 말하지 마. 알고 있었어. 학술원의 재정은 재상이 휘어잡았고,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상을 극렬하 게 비판하고 시위했어. 설마 그렇게 저급한 방식으로 후원하는 학술원 교 수의 입을 닫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지. 두고 볼 수 없었어. 다른 사람을 쉽게 선동하는 그 사람 한 명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과, 전쟁과, 오해와 퇴보를 참을 수 없었어. 재상이 휘장 뒤에 감춘 그림자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내 입 을 닫았지. 그런데 전부 잊으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역시……,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크로우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갔으니 분명 미소일지언데 아주 기묘하고 괴이한 웃음이 18


었다. 입매가 일그러지고 뺨이 도드라졌다. 이 아이에게서 처음 보는 얼굴 이었다. 아니, 전에 사람의 얼굴에서 이런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낯설고 두려웠다. “궁금했지, 아저씨? 내가 왜 여기에 아저씨를 데려왔을까?” “학문을 배우고 싶어서잖아……?” “궁금한 게 많았겠지. 내가 조금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카이엔 공작 은 왜 이런 어린애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아저씨 를 찾아가서,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간단해. 아주 간단한 공통점이 있거 든. 우리는 모두, 철혈재상을 증오해.” 그렇게 말하며 크로우는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것으로 벼려 낸 것 같은 웃음의 끝에, 소년은 짧게 덧붙였다. “말했었지, 아저씨? 내 목표가 바뀌었다고. 그건 재상을 죽이는 거야.” 그런 말을, 아이는, 오늘 저녁에 오렌지주스 대신 포도주스를 먹기로 결 심했다는 것처럼 간단하게도 했다. 그러니 미하엘도 간단하게 대꾸해야 했다. 하지만 어쩐지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적잖은 시간을 함께 지낸 소년의 눈빛이 전에 없이 매서웠다. “장난치지 마. 너 같은 어린애가…….” “장난으로 보여?” “……장난이 아니어도 어린애니까 할 법한 생각이지. 제국의 재상 되는 남자를 죽이겠다니. 그렇게 쉬울 거라 생각해?” “가능성을 문제 삼지, 생각은 문제 삼지 않는구나. 그럴 줄 알았어. 그 남자를 죽여서 정책을 막을 수 있다면 더없이 이득이잖아. 구실 좋은 대화 로 방식을 바꿀 남자도 아니잖아.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희끄무레한 얼굴에서 붉은 눈동자만 전에 없이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하얗게 타오르는 목탄 안의 불씨 같다. 집념이 섞여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19


“자, 아저씨. 나는 그래서 지금까지 움직였어! 재상에게 가장 반감이 심 하고, 재력과 실권을 가진 귀족파의 수장에게 접근했어. 하지만 나 혼자서 는 모자라. 그래서 아저씨에게 손을 내미는 거야. 행운이라고 여겨도 좋 아. 지금까지 재상을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은 수도 없이 많거든! 강력한 세를 지닌 귀족파의 리더들이, 대륙에서 손가락 안에 꼽는 실력을 지닌 엽 병들이, 재상에게 수족이 잘린 정적들과 강제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 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남자를 죽이려 시도했고,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면 나이 같은 게 뭐가 중요하지. 어차피 그 남자 앞에서는 피 차 어린애에 불과해.” “그래. 어린애지! 대륙을 전란에 몰아넣은 괴물 같은 남자니까. 네 말대 로 다른 사람 모두 실패했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가 성공할 거라는 보장 은 어디에 있지? 그런 걸 목표로 삼아야 인생을 진창에 처박을 뿐이야!” “그러면 아저씨의 목표는 뭔데?” 미하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표를 몰라서 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 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명확히 알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 철혈재상을 막고 싶다. “그리고 아저씨. 그렇게 미리부터 겁먹어봐야 쓸데없는 생각에 매몰되 어서 불리해질 뿐이야. 앞선 사람들은 재상이 생각한 변수를 생각하지 못 했던 거지. 간단하게 생각해! 이건 재상과 우리의 게임이야. 다만 조금 많 은 것을 거는 게임이라고 치자.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에 하나라서, 이기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게임.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사용해서, 마지막까 지 집중력을 놓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모 아니면 도의 게임.” “정신 나갔군.” 고개를 돌리는 미하엘의 팔을 크로우가 붙잡았다. 이 녀석은, 미쳤다. 광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글거리는 눈에 델 것 같았다.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정신 나갔지. 그렇지만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을 20


알아봐. 그래서 아저씨를 데려온 거야.” 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말로 어린애니까 할 수 있는 발상이다. 미하엘은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녀석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는 나는 대체 무언가. “아저씨도 그 남자에게 맞서봤다면 알겠지. 이 세상의 질서는 무섭도록 변하고 있어. 사람은 자신이 발 뻗고 자는 기득권이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 이든 한다. 게임에서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거든. 그리고 철혈재상은 그런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남자야. 이익을 창출하고 기존 세력과 결합해서, 세계를 휘어잡고 있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낙오자가, 바로 우리야.” 너는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 바로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저씨보다 훨씬 심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알고 있 어.’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렇게나 지독한 집념에 빠졌다. 크로우가 앞서 말한 것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는 데는 실패했고, 신분도 명분도 잃었고, 우리 같은 낙오 자가 무언가를 해봤자 근사한 일은 못 되고, 고작해야 삼류 악당이나 하 류 악당 짓이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흙바닥에서 꿈틀대는 지렁이나, 터지 고 남은 폭약의 파편 같은 것이어도 상관없어. 세상의 다른 곳에 불씨가 튀어도 좋아. 어차피 그 남자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집어삼키도록 방조 한 세상이야. 남의 삶을 무시하고 짓밟은 것에게 조금이라도 복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세상 일이 마음대로만 되는 건 아니잖아. 그저 주어진 대로 운명 대로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아저씨. 아까 했던 말이랑 정반대인 거 알고 있어?” 미하엘이 대답하지 않자 크로우는 얼굴을 숙이고 아이답게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21


“아무튼, 말해버렸네. 응. 드디어 말했구나.” 소년답지 않게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미하엘이 익히 알고 있는 예쁘장 한 어린아이가, 그렇게 순식간에 눈앞에 돌아왔다. 아이는 뒤통수를 긁적 이다가는 미하엘을 향해 예쁘게 웃었다. “강요하진 않을게. 처음부터 내 목표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 염두에 두 고 아저씨를 찾아갔던 건 맞아. 그렇지만 아저씨는 나한테 좋은 선생님이 었어. 만약 이런 내가 기분 나쁘다면, 여기서 어디론가로 떠나도 좋아. 잡 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만약에, 내 얘기가 더 듣고 싶다면……, 생각이 있 으면, 내일 저녁에 2층 테라스에서 보이는 해변에서 다시 만나자. 응, 미 안……, 나 지금 미리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아.”

09 왔네, 아저씨? 아저씨는 나를 볼 때마다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지. 항상 궁금해 하면서 도 따로 묻지 않았던 걸 알아. 그러니까 여기 온 보답으로 내 얘기를 들려 줄게. 별 거 아닌 얘기야. 별 거 아닌 변방의, 별 거 아닌 어린애의 이야기야…….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제므리아 대륙의 변방이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은 곳이었어. 오르디 스처럼 바다 냄새가 물씬 나는 곳이었지. 모래가 하얗고 진주랑 칠요석이 많아서 여자들의 머리마다 하얀 진주가 반짝거렸어. 우리 부모님은 외교관이었어. 레미페리아에 외교 특사로 다녀오다가 폭 풍이 와서, 선박 사고로 죽었지. 그 대신 할아버지는 혼자 남은 손자인 나 를 끔찍하게 아꼈어. 할아버지는 취미가 많았어. 책도 한 방을 가득 채웠고, 음반도 잔뜩 모 22


았어. 동네에 나가서 술 마시는 것도 좋아했지. 그리고 카드게임을 좋아했 어. 나랑 매일같이 카드를 했는데, 난 한 번도 할아버지를 이기지 못했어. 매일 그게 분해서 길길이 뛰었지. 문득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서 집무실에 찾아가면,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어서.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틈을 내서 나를 돌봐주는 거였으니까, 뭐라고 투정할 수도 없었지. 그러면 할아버지는 카드게임 말 고 진짜 중요한 게임에 이기면 되는 거라면서 내 등을 찰싹 때려서 쫓아 보냈어. 응. 우리 할아버지는 좀 바쁜 사람이었어. 시국의 시장. 활동하기에 젊 은 나이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시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주책없이 그 나이까지 직접 집무를 봤어. 서운했지만 자랑스러웠어. 좀 더 크면, 응, 할 아버지가 하던 일을 도울 생각도 있었지. 나름대로 수업을 빠르게 뗀 우수 생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했더니 할아버지도 나를 자랑스러워해서, 나를 제국에 유학 보내고 싶어했어. 그래서 조금 알아봤었어, 제국 학술원 같은 거. 할아버지는 그래도 꼭 시국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잊지 않았어. 물론 그럴 생각이었지.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눈에 띄게 바빠졌어. 할아버지의 반대를 이기고 제국으로 통하는 직통철로가 뚫렸거든.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이 야기지만, 처음 보는 것들이 흘러들어왔어. 향신료와, 전에 입던 옷을 초라 하게 만드는 제국에서 최신 유행하는 의상과, 대량의 자본과, 조금의 약 같은 것들. 나는 어렸으니까, 응.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으니까,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예민하게 느꼈어. 모두 새 흐름 속에 한몫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어. 전에는 존경받던 할아버지가 주변에서 눈엣 가시로 여겨지는 것도 알 수 있었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시국은 혼란 스러워졌어. 싸움이나 도난이나 더 큰 사고가 연이었어. 할아버지가 시국을 수습하려고 정신없이 바쁘던 때에, 철도 폭발 사고 23


가 일어났어. 제국은 자본을 인상하고 시국은 엉망이 되었지. 그리고 그 남자가 찾아왔어. 시국을 제국에 합병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수습해주겠다지 뭐야. 이미 돈 맛을 본 사람들에게 제국에서는 계속해서 미끼를 던졌어. 그리고 폭파사건의 범인으로 할아버지를 지목했지. 시장직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어, 할아버지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고 있었어. 진짜 범인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고. 시국에 평생을 바친 사 람이었는걸. 하지만 아저씨도 알고 있지? 술수와 이익 앞에서는, 옳은 말 이 언제나 통하는 건 아니야. 시장직에서 물러난 할아버지는 편하게 은거하기로 했어. 할아버지는 나 를 다른 집에 맡기려고 했지만, 나는 할아버지 곁을 지키고 싶었어. 말상 대를 하고, 몸을 닦았어. 할아버지는 금방 몸도 제대로 못 가눌 만큼 불편 해졌거든. 나는 할아버지를 위해서 매일 같이 카드놀이를 했어.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어. 그리고 얼마 후에는 카 드놀이를 하지도 못했어, 그 똑똑하던 사람이.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기억해. 이 세상에서 나만 기억해. 그러니 잊지 않을 거야.

10 “그래서, 어쩔 생각이야? 철혈재상의 곁에는 늘 수준급의 호위가 함께 한다. 가장 뛰어난 엽병들도 기습에 실패할 정도라며. 그런데 무슨 수를 생각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단순하게 생각했겠지. 그보다 뛰어난 사람을 고 용해서 암살하자. 하지만, 그래서야 그 남자가 짜놓은 판에 놀아날 뿐이 잖아. 그 남자는 권력과 세상을 장기말로 쓰고 있어. 그러면 우리도 판을 24


바꿔야지……. 우선 밑작업이 필요해. 여러 가지 수를 써서 재상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겠지. 카이엔 아저씨는 그걸 바랄 테니까. 재상의 거취와 동향에 대한 정보도 상세히 있을수록 좋고.” “방법은?” “여러 가지 생각이야 해봤지만, 나는 보다시피 (크로우는 어깨를 으쓱 했다.) 가진 게 없는 어린애라서. 내가 진두지휘하기에는 한계가 있네. 사 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을 밝히는 것도 아저씨가 처음이야. 이런 생각, 아무래도 아무한테나 쉽게 말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분명 철혈에게 원한을 지닌 사람은 많겠지……. 아예 사람을 모아서 제대로 조직을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다. 너, 드라이켈스의 이야기 에 관심을 가졌었지. 혁명이 소수의 힘으로 일어난 경우는 드물어. 같은 뜻 을 지닌 동지를 모으는 거다. 일단 문제는 시간과 자금인데…….” “돈은 걱정 마. 나는 제국에서 가장 풍족한 스폰서를 끼고 있으니까.” 이제는 거리낌이 없었다. 일찍이 1인 시위를 하다가 학술원에서 쫓겨난 것도, 이렇게 혼잡한 격동의 세상에서 말하자면 망국의 왕자뻘 되는 소년 을 불쑥 집에서 만났던 것도, 그래서 이 아름다운 저택에 도달한 것까지 모든 것이 운명처럼 생각되었다. 한번 조직에 대해 화두를 꺼내고 나니 다 음부터 이야기는 일사천리였다. 크로우와 만나는 시간 내내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적지 않은 낮과 밤이 지났다. 놀랍게도 즐거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밀이 생명이야. 이런 레지스탕스 조직에서는 단 한명이라도 스파이 노릇을 한다면 활동 자체가 치명적이게 된다.” “아예 처음부터 철저하게 사람을 가려서 받거나, 만약에 그 정도로 큰 조직이 된다면, 계급을 나누면 어때. 정보를 공개하는 양에 차등을 두는 거야. 이름도, 본명을 밝히는 대신 이니셜 같은 걸 사용하거나……. 그러면 나는 C가 되겠네.” “나는……, 미하엘보다는 기데온 쪽이 낫겠군. 세간에는 기데온 교수로 25


알려져 있었으니까, 역시 그 이름을 쓰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 “흠……. 조직 리더 C라니, 어감이 좀 이상한데.” “왜 네가 리더지? 너 같은 어린애를 누가 믿고 따르겠어.” “뭐야, 아저씨. 지금 리더 자리에 욕심을 내는 거야? 기다려봐. 나도 조 금만 있으면 아저씨보다도 키가 커질 거라고. 우리 할아버지도 부모님도 모두 작은 체격은 아니었다고.”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너는 너지. 키 큰 크로우라니, 상상도 안 된다. 그리고 커봤자 네 녀석, 이렇게 곱상한 얼굴이라서 레지스탕스의 리더 같 은 거 어울리겠냐.” “왜? 이렇게 잘생겼는데. 정 뭣하면 가면이라도 쓰지 뭐. 응, 괜찮네, 가 면. 얼굴을 숨기고 어딘가에 잠입할 수도 있고.” “아무리 떼를 써도 무리다. 너는 키도 작고, 힘도 없어 보이고 자꾸 아 프다고 수업도 빠지잖아. 역시 리더는 나한테 넘기라고. 지성미가 있잖 아.” “지성미 좋아하시네. 그런데, 응. 오늘도 몸이 좋지는 않긴 하네. 피곤 해…….”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는데도 크로우는 느닷없이 길게 하품했다. “나름대로 좋은 걸 먹고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너는 왜 이렇게 허약한 거냐? 뭘 하려고 하든 건강이 우선이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러게. 오늘은 좀 무리했나봐…….” 이미 탁자 위에 고개를 반쯤 뉘인 크로우를 보며 미하엘은 혀를 찼다.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계속 그런 체력으로는 할 일도 못 할 거다. 제대로 진찰받은 적은 있어? 무슨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니지?” “그쪽은 걱정 마. 카이엔 아저씨는 나름대로 나를 예뻐하니까 못 고칠 병을 앓도록 놔두지는 않아……. 전에 많이 험하게 굴렀거든. 후유증 같은 거야.” 26


미하엘은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도닥거렸다. “무리하지는 마. 이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응. 아저씨. 나는 기뻐. 아주 오랫동안 혼자 이런 걸 삭이고 있었는 데, 이제야 드디어 뭔가 시작하는 것 같아서…….” 크로우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반쯤 조는 눈을 하고 있는 녀석 을 지금 머무는 방까지 바래다주었다. 크로우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제시와 마주쳤다. 크로우와 유독 친하 게 지내는 메이드였다. 지나치게 살갑게 대하는 이곳 메이드들의 태도는 부담스럽지만 멀리할 필요도 없으니 미하엘은 가볍게 목례했다. 제시가 방긋 웃으며 답한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예의 차린 태도가 메이드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것 같았다. “크로우는 자고 있나요?” “네. 갑자기 졸려 하기에, 침대에 재우고 나왔습니다.” “잘 됐네요. 꿈도 안 꾸고 푹 잤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렇게 병아리마냥 꾸벅꾸벅 조는지…….” “가엾게도……. 그럴 만도 하죠. 어젯밤에는 여러 손님이 오셨잖아요. 그래도 항상 명랑한 아이라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그 애 정도 되니까 하는 거지.” 제시는 미하엘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미하엘 씨도 계속 여기서 지낼 거면 크로우와는 지금처럼 가깝게 지내 시는 게 좋아요. 워낙 수완도 재간도 좋아서 공작님이 자주 예뻐하니까,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거든요.” 방금 들은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몇 마디를 머리에 받아들이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이해한 걸까?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표정 27


이 굳은 미하엘을 보고 메이드가 반문해 버린다. “설마 지금까지 모르셨나요……, 미하엘 씨?” 그리고 미하엘은 문득 크로우가 몸을 드러내는 옷을 입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1 새벽의 저택에는 빛이 적었다. 램프가 드문드문 놓인 복도에서는 유독 그림자가 길게 떨어진다. 어둡고 적막한 복도를 소년은 유령처럼 발소리 없이 걸었다. 미하엘은 녀석이 가까이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평소에 는 기척에 예민한 녀석이 지금은 무슨 생각이 빠졌는지 미하엘의 바로 앞 에 와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아저씨……? 이 새벽에 웬일로 깨어있어? 나쁜 꿈이라도 꿨어?” “……꿈이면 좋겠네.”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되잖아. 그냥 나쁜 꿈일 뿐이야. 그렇게 여기면 돼.” 희미하게 웃는 크로우를 미하엘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지금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이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발소리도 죽이 고.” “뭐야, 아저씨.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의처증 남편도 아니고.” “너는 종종 몸이 아파서 수업을 못하겠다고 했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그건……. 아저씨랑 내가 좀 더 친해지면 얘기하자.” “크로우.” 명백한 회피에 미하엘은 그만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크로우의 어깨를 28


쥐고 흔들었다. “널 팔아먹은 돈으로 계획을 세우고 싶은 건 아니었어! 나는 네가 그저 카이엔과 뜻이 맞아서 자금을 지원받는 줄 알았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저씨. 좋은 게 좋은 거지. 카이엔이 왜 나를 지원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저씨는 그냥 잔 생각 말고 계획이나 계 속 세우면 돼.” “세상을 더 넓게 봐. 너는 아직 어리잖아! 꿈이 있었다면서. 할아버지의 일을 이어받고 싶었다면서. 고향에서 일하고 싶었다면서. 그런데 복수 때 문에 이러고 싶어?” 미하엘은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아이의 헐렁한 셔츠자락을 잡아 끌어 올렸다. 곧이어 드러난 살갗은 멀끔한 얼굴과는 반대로 형편없이 지저분 했다. 구석구석 아직도 붉은 자국이 있었고 얽히고 쓸린 상처로 잔혹할 만 큼 엉망이었다. 그는 곧 후회했다. 이 녀석, 울겠지. 아니면 길길이 화를 내겠지. 아직 애잖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치기도 전에 소년의 높은 목소 리가 귀에 긁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아저씨, 보기보다 순진하구나. 공부만 한 샌님이라서 그런가? 정말 카 이엔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이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댈 거라고 생각했어? 이 저택에 머무르는 사람은 누구나 대가로 무언가를 카이엔에게 팔아. 매 주마다 다른 곡을 연주하는 연주가도 있고, 카이엔이 부탁하면 멀리까지 가서 사람을 죽이는 엽병들도 있어. 나도 연회에서 정보를 캐거나, 음료에 약을 섞기도 해. 뒷골목에서 궂은일을 하고도 대가를 못 받던 때도 있었는 데, 아저씨들 비위 좀 맞춰주는 대가로 이만큼 카이엔 가의 자산을 끌어 다 쓸 수 있다니 행운이잖아? 내 힘만으로는 승산 없는 게임이었는데, 행 운이고말고. 안 그래?” 크로우는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채 내려가지 않은 옷자락을 다시 내 29


릴 생각도 않았다. 단지 말간 붉은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하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수업 중에 궁금한 점이 생겨서 손을 들고 질문할 때와 꼭 같은 모습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의 소년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미친 것인지 분간 이 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미친 사람인 것을, 오르디스의 해변에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속 이 울렁거리고 혼란스러웠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인간과 같은 보폭으로 걸을 수는 없다.

12 미하엘은 어지럽고 답답해 창을 열었다. 그리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오 르디스의 바람에서는 언뜻 비린내가 났다. 처음 올 때는 이 소금내까지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궁궐 같은 저택이 대리석과 휘장으로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이 지붕 아래에는 복수에 미친 소년과 그걸 이용하는 공작과 알고 도 모른 체 하는 고용인들과 연회에서 그림같이 웃고 있는 명사들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메이드가 딸기를 곁들인 크림 브륄레를 들고 들어왔다. 오후마다 들어오는 이 디저트는 그 잔망스러운 녀석이 부탁해 놓은 것이겠지. 한 입을 먹으니 혀가 녹을 만큼 맛있었다. 미하엘은 포크 끝으로 애꿎 은 크림을 쿡쿡 찌르다,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진 크림 표면이 어제 들춘 녀석의 살을 닮았다. 속이 미친 듯이 뒤틀렸다. 포크가 좀 더 크다면 자신의 배를 찔러서 꿰뚫고 싶었다. ‘고작해야 하류 악당 짓이겠지.’ 30


자조하던 크로우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지금까지 무슨 착각을 했던 걸까?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를 대든 정의의 사도나, 거룩한 혁명가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두 사람 모두 세상에서 밀려난 낙오자였다. 하류 악당이라는 건 그런 뜻이었다. 낙오자들이 남의 권세에 들러붙어서 없는 몸집을 부풀리고, 기 회가 될 때마다 되는 만큼 악을 쓰는 것. 처음부터 그런 형태의 결탁이었 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가 그런 식으로 얻은 돈에 몸을 맡길 수 는 없었다. 여길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갈 곳이 있을까? 이런 짓은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너는 달리 갈 곳이 있을까? 네가 말했 던 바닷가의 총명한 소년은 이미 파괴되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내가 돌아갈 곳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다시 제도에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학술원에 돌아가 자신을 내버 렸던 스승에게 사과하고, 학술원에 일전의 과격한 행위에 대해서 해명하 고 학계에 복귀하기를 간청할 수도 있었다. 먼 곳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아주 먼 곳, 제국에서의 일들이 떠오르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발이 닿는 대로 떠나서, 지금까지의 삶을 잊고 밭을 일구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오르디스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이 도시는 웬만한 소국만큼 넓고, 적어 도 제도만큼 혁신파의 입김이 닿지는 않을 것이므로 근방의 어딘가에서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지금 다시 크로우에게 돌아가서 그 조그만 녀석의 어깨를 잡고 원망하는 말을 쏟아 부을 수도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해도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더 망설이 기 전에 어서 떠나야만 한다. 미하엘은 짐 가방을 열었다. 마땅한 목적지가 없었기에 짐을 꾸리는 데 31


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르디스에는 거의 빈손으로 왔는데, 언제 이렇 게 짐이 무거워졌는지 알 수 없었다.

13 떠나는 시각은, 어둠을 틈타서, 가로등이 없고 빛이 적은 골목을 통해 서. 일찍이 제도를 떠날 때 크로우에게 배운 대로였다. “이쪽을 지나갈 줄 알았어.” 그러니까, 따라잡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 다. 달빛 아래 아이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났다. 얼마나 오래 나와 있었 는지 밤바람을 맞은 뺨이 붉었다. “떠날 거야?” 미하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새벽에 혼자 짐 가방을 들고 나왔으므 로, 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로 갈 건데?” 이번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정한 것은 하나도 없었으므로. 하 지만 아이는 침묵의 의미를 오해한 것 같았다. “대답 안 해도 돼.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왔어.” 크로우는 먼 달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은 평소의 능글맞은 녀석 답지 않 게 눈을 둘 곳 몰라 이리저리 시선을 헤매다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나서 온 대륙을 떠돌았어. 나는 열 살 남짓이었고, 힘도 없고 가진 것도 내세울 재능도 없었어. 카이엔을 만 나서 다행이라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 여기 오기 전에는 많은 일을 겪었으 니까. 그렇지만 나도 언제까지 이러고 싶었던 건 아니야……. 있지.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저씨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카이엔은 변덕쟁 32


이고, 나는 더 자라서 성격도 외모도 바뀔 테고, 이런 것도 언제까지 통하 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바로 그래서 아저씨를 필요로 했던 거 란 말이지……. 내 시야를 넓혀 줄 사람을, 이런 나라도 함께해줄 만한 사 람을 오래 찾았어. 정말 오래 기다렸어. 고향을 떠난 이후로 이만큼 내 속 을 보여준 건 아저씨가 처음이었어.” 크로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공기가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저씨…….” 그리고 말이 끊겼다. 단 한 마디를 차마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 을 미하엘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냐?” “응…….” 망설이듯 대답하는 녀석을 향해 미하엘은 한 발짝 걸어갔다. “이렇게 서로 꼴이 엉망진창이어도, 복수뿐인 길을 함께했으면 좋겠다 고?” “응.” 소년은 이번에는 다급히 대답했다. 미하엘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뭐가 이렇게 생겼는지 모르겠군. 분명히 이 도시에 올 때는 아무런 짐도 없었는데.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세 상에 연도 없고 책임질 것도 없는데 네가 나한테 이상한 걸 심었잖아. 역 시 여기 너무 오래 머무른 거야. 얼마 전에는 내 이름을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고…….” “잠깐, 아저씨.” “왜.” 미하엘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영 멋쩍었다. “아저씨의 이름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언제?” 33


“정확히는, 어제였지. 어제 저녁 때 복도에서 웬 여자가 미하엘 기데온 이 맞느냐고 묻더군.” “여자라니? 아무리 카이엔이라도 별관에 아무 여자나 들이지는 않아. 새 손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했고. 아저씨도 이제 여기 꽤 오래 머 물렀는데, 낯선 얼굴이 있을 리 없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저씨. 여기 와서 카이엔 외의 사람에게 성을 밝힌 적 있어?” 없었다. 오르디스에 온 것은 교수로서의 기데온도 아니었고, 그런 과거 를 밝히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는 이곳에서 단순히 ‘미하엘’로서만 지내고 그렇게 불리었다. 크로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꼬리를 밟혔구나.” 소년은 잠시 주변을 확인한 후, 미하엘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 삭였다. “그럴 만도 하지……. 극렬 시위를 주도했고, 파면당한 후에도 계속해 서 정책을 비판하는 사설을 낸 전 제국학술원 교수. 아저씨는 위험분자야. 그런 사람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찾는 게 당연해……. 그렇 네. 지금 나온 게 차라리 잘 됐어. 더 꼬리를 밟히기 전에 어서 떠나, 아저 씨. 나도 가까스로 정체를 숨기고 있는데 이렇게 함께 있어서야 우리 둘 다 위험해지겠어. 정보국은 점점 세를 키우고 있으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꾀하기도 전에 밟히는 수가 있어……. 나도 몸을 숨겨야겠어. 좀 더 발판 을 다지고, 안전해질 때 즈음에 내가 다시 찾아갈게. 이 나라 안에 있다면 어디든 찾아갈게. 어서 가, 아저씨.” 그렇게 말하고 크로우는 뒤를 홱 돌았다. 그리고 곧장 앞으로 걸어 나 갔다. 미하엘은 천천히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 야만 했다. 녀석은 그렇게 몇 걸음을 걷고 더 천천히, 천천히 걷다가 우뚝 발을 멈추었다. 34


“단지…….” 가만히 선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크로우는 떨어지는 고개를 몇 번이고 다시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안 그래도 작 은 등이 더더욱 우그러들었다. 뒷모습이 형편없이 작았다. “분해.” 작은 어깨가 간헐적으로 흔들리다가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알아……. 상대는, 괴물이란 거, 알고 있었다고. 알아, 나도 안다고,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된다고…….” 꽉 억눌러 낮게 잠긴 목소리였다. 그것도 잠시일 뿐, 점점 새된 소리가 새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 겨우 시작하려는데, 그것까지도…….” 보지 않아도 가려진 얼굴이 어떨지 짐작할 만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녀석에게서 본 적 없는 표정. 그 나이에 걸맞은 치기나 서러움, 애다움, 억 울함 같은 것. 있는 대로 안으로 밀어 넣고 눌러두었다가 한꺼번에 폭발하 는 것. 발이 멈칫했다. 지금은 크로우를 위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녀석은 아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이런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 지. 웅크린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고 말았다. 그것은 아마 크로우에게는 남에게 보여선 안 될 감정이었으므로. 그리 고, 리더의 작은 실수 정도는 못 본 체 넘어가는 것이 조직원 되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므로, 미하엘은 서툰 인사 대신에 조용히 모른 체 그 자리를 떠났다. 등 뒤로 들리는 소년의 섧게 흐느끼는 소리가 오래도록 귀에서 떨어지 지 않았다.


14. 도시 변두리의 자그마한 술집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썩 번듯한 가 게는 아니었지만, 술집이란 곳이 원래 그럴듯한 화제만 있으면 금세 들썩 거리는 장소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고린내가 나는 맥주를 마시 면서도 내내 시끌벅적했다. “공화국 국경에서 그쪽 군대와 충돌이 있었다더군.” “그쪽 민간인들이 휘말렸다는데, 괜찮은 건가?” “알 게 뭔가. 공화국 녀석들, 전부터 이쪽에서 봐준 은혜도 모르고 꼴사 납게 굴었고.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면 좋지 않겠나.” “자네 말이 맞네. 뭐, 재상이 집권한 이후로는 외교에서 밀리지 않아서 기분이 좋단 말이지. 재상 각하를 위해 건배합시다!” 그렇게 모두가 잔을 부딪히기 직전, 술집 한쪽에서 혼자 맥주를 홀짝거 리던 남자가 잔을 탕 소리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무식한 입을 잘도 놀리는군.” “뭐?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무식하다고 했어.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도 않고 그저 신문에서 떠드는 대로 희희낙락. 사고를 일으켜서 교섭할 빌미 를 만드는 재상도 재상이지만, 당신들도 그에 일조하는 거지.” “아니, 이 인간이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네.” “틀린 말은 안 했다만?” “지금 시비 거는 건가?” 건배를 주도하던 상인은 기어이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재색 머리카락 의 남자는 상인이 주먹을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리면서도 상대를 매섭 게 노려보았다. “말이 막히니까 바로 멱살을 잡는 걸 보니 수준을 알겠군.” “이 양반이 보자보자하니까……!” 36


상인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내지르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주 먹을 맞잡았다. 재빠른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상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남자의 악력이 부족하니 거기까지였다. 상인이 비쩍 마른 남자의 몸을 힘주어 밀쳐냈다. 앉아 있던 탁자 위에 내동댕이쳐 진 남자의 앞으로 몇 사람이 천천히 걸어온다. 눈앞으로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보며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큰 소리가 났다. 한 사람이 맞아 쓰러지는 소리라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요란한 소리였 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사람들이 어 느새 벽 쪽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청년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은발의 청년은 탁탁 손을 털고, 남자에게로 몸을 돌려 손 을 내밀었다. “샌님 아니랄까봐. 여전히 몸 쓰는 일에는 재주가 없으시네.” 미하엘은 씩 웃으며 크로우의 손을 잡았다. “너무 늦었잖아.” 미하엘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서 쓰러진 상인의 배를 한 번 발로 찼다. “그새 좋던 성질을 많이 버리셨구만.” “너야말로 많이 변했네.” “응, 그때랑 조금 변했지?” 미하엘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눈앞의 청년을 훑어보았다. 조금 변 한 정도가 아니었다. 뭐라고 딴지를 걸려고 입을 여는데, 아까 쓰러진 사 람들이 다시 비척비척 일어난다. 하나같이 제대로 성이 난 얼굴이었다. “그래서, 크로우.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어떡하긴, 아저씨. 튀어!” 그래서 미하엘은 크로우가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함께 정신없이 뛰었 다. 허파 바닥까지 바람이 들어차고, 가슴이 아플 때까지, 탁자와 문을 제 37


멋대로 밀쳐내고, 고함치며 따라오는 사람들의 소란을 뒤로 하고 하염없 이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새 어디까지 왔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 게 한참이나 뛰고서야 미하엘은 숨을 헉헉거리며 멈추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지금까지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뛰어왔다. 수많은 갈림길을 거쳐, 명확한 나침반도 표지도 없이 가지고 있던 것은 오 래 전에 전부 잃고 빈손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다. 하지만 그동안 잊지 않은 약속이 있다. 미하엘은 숨을 고르며 옆을 올 려다보았다. 한때 메이드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사던 어린 소년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었다. 어린아이 같던 녀석은 고작 일 년 만에 키가 멀대같이 크고 어깨 가 떡 벌어져서 청년이라는 말이 훨씬 어울렸다. 묘하게 나른한 눈이 아니 었다면 아예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너무 징그럽게 많이 큰 거 아니냐.”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겼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래, 그렇다고 치자.” 서로 마주보며 씩 웃었다. 전과 달리 눈높이가 비슷해서, 크로우가 조금 만 더 크면 올려다보아야 할 판이었다. 미하엘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크로우.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을 찾았어. 이 세계에서 철 혈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은 수없이 많으니까. 하나같이 우리 같은 낙오자 들이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낙오자들을 모아서 세력을 키울 거야. 나는 황자는 아니지만, 불법 조직 리더 정도는 될 수 있겠지.” “나도 어지간히 여러 곳을 돌아다녔어. 전에는 꿈도 못 꿔본 제국 구석 구석을 흘러다녔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네 말대로 샌님에 책벌레이지만, 배운 게 많으니 사람을 설득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더군.” 38


“그거 든든하네.” “조직의 이름도 한번 생각해봤어.” “뭔데?” “제국해방전선.” “괜찮잖아.” “이왕이면 조직을 대표하는 로고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엠블럼도 생각 해 봤어. 예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미하엘은 그동안 생각한 것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하면서 리더의 옆을 함 께 걸었다. 한때 대리석으로 담장을 쌓은 오르디스의 대저택에서 지냈던 그들이 그렇게 걸으며 도착한 곳은 제국 변방의 지저분한 뒷골목이었다. 떨어진 길을 콘크리트로 성의 없이 메우고 남은 철근이 바닥에 나뒹굴고, 공기 중에는 매캐한 재와 먼지가 날린다. 어둑한 골목길을 미하엘은 끊임없이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걸었다. 사실 은 조직에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떠나온 이후로 한동안 흐느끼는 소리가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거나, 덕분에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거나, 건강해 보여서 안심이라 거나, 이런 소리는 악당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몸은 일부러 키운 건가? 싸움에도 익숙해 보이던데.” “아저씨 말대로 조직의 리더니까 풍채는 좋은 편이 낫겠지. 완력도, 무 력도 내 몸을 챙길 만큼은 있는 게 낫겠더라. 이렇게 몸을 키우느라 적지 않게 고생했지.” “그래. 잘 생각했어.” “그건 그렇고, 아저씨도 그동안 꽤 많이 생각했네. 좋아, 아저씨.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서브리더 정도는 시켜줄게.” “그거 영광이네.” 미하엘은 짧게 대답했다. 입을 벌리기 무섭게 매캐한 공기가 목구멍에 39


아프게 쓸린다. 지저분한 골목 사이로 붉게 저무는 석양빛이 눈을 아프게 찌른다. 마치 하얗게 타오르는 목탄 안의 불씨 같다. 이글거리는 석양에 눈이 부셔 델 것만 같았다. 미하엘은 고개를 숙이고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곧 눈을 똑 바로 뜨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온통 붉고도 붉었다. 꼭 이렇게 델 것 같은 붉은색을, 일 년 즈음 전에 이미 본 적이 있다. “가자. 기데온.” 예전에 생각했던 모든 곳을 거치고,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도달한 인생 의 하류였다. 더 이상 방황하고 흘러갈 곳은 없다. 귀에 델 것 같은 점착성 을 지닌 목소리가 들린다. 기데온은 망설임 없이 리더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 아마 죽는 날까지도 이렇게 하류 악당으로서 함께 어울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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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후기다. 지금은 행사당일 여섯시고요 이게 정말 나오긴 나오나봐요... 20일까지 앤솔마감 치고나니 당분간 궤적행사가 없지 않겠나 하시길래 제가 크로우를 사랑해서 뭐든 책이 내고싶어서 폭염 사흘동안 40페이지를 썼습니다 죽고싶다 나 지금 살아있니? 전에 대충 잡아둔 내용에 살을 붙인 거긴 하지만 굉장히 힘들었네요. 나 는 그냥 느와르가 쓰고싶었는데 너네 왜 내가 알지도못하는 역사얘기 하고 있어 나 힘들어..... 무언가 극렬히 미화하고 싶지도 비판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작중 에서 스스로를 설명하거나 납득시키려 하지 않는 조직이었기에 그들의 이야 기가 보고 싶었습니다. 묘사를 자제하면 너무 맹탕이 아닌가, 혹은 너무 자 세히 쓰면 편파적인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썼습니다만 일단 장르 는 느와르물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기데온은 제국해방전선의 네 간부 중 유일하게 복수가 아닌 사상적인 동 기가 크게 있는 특이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지점을 훑을 시간도 지식 도 부족해서 대부분 개인사 위주로 퉁쳐버려서 아쉽네요. 애초에 테러리스 트 간부가 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도 아이러니긴 합니다... 간부 중 C와 G를 고른 건 그냥 이 둘이 제일 초기멤버일 것 같아서...네요. 잔망스러운 어린 크로우 정말정말 좋아합니다. 네 저 크로우 사랑함..... 그러니까 결국, 하류 악당의 이야기입니다. 더 말을 붙이면 사족이겠죠. 무거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퇴고 볼 시간도 없는데 너무 나쁘지는 않은 책 이었으면 좋겠네요.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차기 작을 3년텀으로 내는 팔콤 잊지않겠다..... 크로우 사랑해ㅜㅜ 이건 너무 아 픈 사랑이니까 분명 사랑일 거야............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2016. 07. 24 셀라


하류 악당 2016. 07. 24 궤적 연대기 발간 영웅전설 섬의 궤적 제국해방전선 리더 《C》, 서브리더 《G》 2차 창작 프린트매니아 출력소 파본 및 낙장은 당일 행사장에서 교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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