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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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문 앞에서 안즈는 숨을 고르고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곧 만날 남자에게서 무사히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제 수완 좋은 프 로듀서가 된 그녀에게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뻣뻣하게 힘이 들 어간 손끝으로 문을 밀어젖힌 후, 안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방은 어두웠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밀폐한 공간에서 파르스름 한 수조만이 부옇게 빛나고, 노랗고 붉은 열대어와 해파리가 조명을 받 아 작은 별처럼 빛을 내며 물살을 흘러다녔다. 그리고 구석에서 붉은 머리를 수조에 기대고 있는 남자. 안즈는 그의 뒤로 한 발짝씩 걸어갔 다. “해양생물부 부실이잖아요. 신카이 선배는 알고 있나요?” “안즈! 어떻게 내 우주에 들어온 거야? 여긴 지금 무중력 상태라고? 숨이 막히지 않아? 너, 사실은 항성이야? 아니면 가스 구름인가? 그러 고보니 너는 어디에나 존재했었지? 역시 신이구나! 와하하하!” 휩쓸리면 안 돼. 쏟아지는 목소리 속에서 안즈는 애써 생각을 고르 며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스오우 군이 츠키나가 선배를 찾고 있어요.” “찾고 있어? 스오가? 어린아이가 부모를 찾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 는 거구나!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태도! 방치됐 음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까지 하염없이 가여운 녀석이구나! 좋아, 악상이 떠오를 것 같아!” “남의 일처럼 말하고 계시네요. 지금뿐만이 아니에요. 항상, 스오우 군은 선배를 찾고 있으니까요. 나이츠는 계속 새 일이 생기는데 왜 책 임자인 선배는 항상 찾지 못할 곳만 돌아다니는지, 역시 모르겠다고 저 에게 하소연해요.” “아아, 스오야 늘 그렇지~. 아직 새파란 애송이면서 따박따박 불만 이 많아서. 그런 점이 귀여운 거지만?” 1


“땡땡이만 치는 불량 리더라면서.” “와하하, 제대로 알고 있잖아?” 안즈는 눈을 살짝 들어, 호탕하게 웃는 레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그리고 웃었다. 몇 마디 도발에 제 세계를 무너뜨릴 남자가 아니라 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선배가 그러시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안즈도 제법 망상에 익숙해졌구나? 좋아, 작곡가로서 좋은 태도다! 호기심을 가질 때, 뇌내에서는 무한한 이야기가 생겨난다! 게다가 넌 생겨난 파장을 그대로 무대에 옮길 수 있지!” “원래 종잡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세 나 선배가 말했으니까요.” 그리고 조용했다. 부글부글. 수조에 거품 오르는 거리는 소리가 들 린다. 고장 난 것처럼 떠들던 레오는 잠시의 침묵 후 콧노래를 흥얼거 리며 유영하는 해파리 떼를 올려다보았다. 잠자코 곁에 함께 앉아 수조 를 들여다보던 안즈가 재차 말을 붙였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우주를 날고 있어.” “우주, 같긴 하네요. 어둡고, 반짝거리고, 깊고, 예쁘고……. 날고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안즈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레오는 홱 뒤를 돌아 안즈의 눈을 마주보았다. “음. 안즈, 우주를 나는 법을 모르는구나? 어렵지 않아. 일단 눈을 감 고 셋, 둘, 하나를 세는 거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안즈가 곧 순순 히 눈을 감았다. “셋, 둘. 하나……. 이렇게요?” 2


“응, 그렇게.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지지. 잡다한 것들은 지워지고 눈앞이 새까맣지.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여기는 새까만 우주야. 내 머 리 위에는 별이 있어. 보라색, 푸른색, 붉은색의 빛무리가 눈에 시리게 빛나지. 그리고 별들 사이로는 노래의 강이 흐르고 있어. 노트르담 성 당의 종소리가 들리고, 재즈 바의 기타 소리가 흐르고, 냇물 소리가 들 리고, 노래는 계속해서 가지처럼 뻗어나가. 가지의 끝에는 서사시와 무 용담과 희곡이 흥건해. 모짜르트와, 베토벤과, 괴테와 위고와 졸라와 루소와 보들레르. 그리고 나는 어린애처럼 잔뜩 신이 나서 손을 뻗어서 그 중에 하나를 끌어다가, 손끝으로 적어내는 거야.” 레오가 마지막 말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안즈는 얼른 재킷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건넸다. “여기요.” 레오는 오른손으로 펜 을 받아들고, 왼손으로 안즈의 손을 낚아다, 손바닥 위에 두 글자를 적 었다. ‘우주.’ 당황해 손끝을 꼼지락거리는 안즈에게 레오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 런 때가 있었어.” 안즈는 손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펴서 손바닥에 적힌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언제 어디서든, 눈만 감으면 금방 우주 구석구 석으로 떠날 수 있는. 내 의식이 세상을 자유롭게 둥실둥실 떠다니던 때가 있었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어떤 어린애 같은 황제가, 나를 땅 아래로 끌어내려서. 날개를 뜯고 발을 꺾어서 땅에 묻었어. 금방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생겼 어. 눈을 감으면 자꾸 우주가 아닌 지하에 있어. 자꾸만, 자꾸만 땅으로 떨어져버려. 나는 우주에 가고 싶었는데.” “저……. 함부로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선배는, 지금도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고, 누구 도 따라갈 수 없는 작곡가잖아요.” 3


“당연하지! 나는 우주로 갈 거거든.” 그거 동어반복 아닌가요, 라는 표정으로 반쯤 얼이 빠져 쳐다보는 안즈에게 레오는 장난스레 웃었다. “진짜 우주 말이야. 추정 2천만 달러면 여행할 수 있지. 저작권은 지 속적으로 돈을 끌어 모으는 자산이야. 내가 더 많은 곡을 만들수록 우 주에 가까워져. 그걸 위해선 텐쇼인 녀석의 도움이라도 받을 생각이야.” “왜 그렇게까지……?” “진짜 우주에 가서, 그래서 우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보고 싶 어. 그러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한번 날개를 꺾인 새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는 거군요.” 안즈는 작게 웃었다. 수조를 거쳐 물결치는 조명을 받아 아른거리는 소녀의 얼굴은 얼핏 우는 것처럼도 보인다. 깜박, 깜박. 푸른 조명이 파 란 눈동자에 어려 넘실거렸다. “저는 선배를 붙잡으러 왔는데, 붙잡을 수가 없네요.” “그렇게 쉽게 될 거였으면 스오가 벌써 날 부실에 붙박았겠지? 와하 하,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네. 나는, 우주로 갈 거야.” 그렇게 말하고 레오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세상이 까맣고, 별이 악 상처럼 빛나고, 귓가에는, 종소리처럼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지금은 같이 가요.” 손 위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저런 잡무를 도 맡아 하느라 못이 박힌 작은 손이 제법 따뜻했다. 레오는 손을 감싸는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셋, 둘, 하나. 4


온통 새하얀 선체가 눈에 들어온다. 경량화를 위해 장식을 최소화한 우주선 선내는 알싸할 정도로 황량했다. 츠키나가 레오는 입고 있는 우 주복이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하며 동그랗게 난 창에 손을 대고 고개를 바짝 가져다대었다. “너무 힘을 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사소한 오차로도 궤도가 틀어 질 수 있어요.” 동승한 승무원에게 주의를 들은 레오가 금방 대꾸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연약한 선체도 아니잖아?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말 자고.” “좋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하죠. 그래서, 츠키나가 씨는 그때 그 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도망쳤거든. 그 애가 너무 무서웠 어.” “무섭다고요?” 승무원이 반문하자 레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서웠지. 그 애의 손이 그때까지 느꼈던 어느 중력보다도 무거 워서, 나를 지상에 속박할 것 같았어. 무겁고 무거워서, 나를 사정없이 눌러서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지. 갈수록 말도 안 되게 무 서워서 그 애한테서 도망쳤어. 나는 우주에 가고 싶었거든.” 당연하게 대답하는 레오에게 승무원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츠키나가 씨. ‘우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찾으셨나요?”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는걸. 묘하게 실감이 안 난단 말이지. 너 무 자주 상상했던 걸까? 우주에만 가면 뭔가, 번뜩하고 오는 게 있으리 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여행은 막 시작했으니까요.” “당신, 안즈 같은 소리를 하네. 응. 그 애도 그런 성격이었지.” 5


승무원은 한숨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면의 스위치를 눌 러 관리실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답을 찾으려면 츠키나가 씨를 혼자 두는 게 좋겠네요. 우 주는 끝없이 넓으니, 어디에 답이 있을지 모르죠. 그럼 행운을 빕니다, 츠키나가 씨.” 승무원이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레오는 묘하게 초조한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창백하도록 하얀 선체 접합부나 알루미 늄으로 만든 나사 따위만 눈에 밟혔다.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는 초조 감만이 머리에 박혀서 내내 동경하던 우주에 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 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레오는 가볍 게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세상의 모든 잡다한 것이 사라진다. 황량한 우주선도 2천만 달러도 여행의 위험성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세상이 온통 까맣다. 모든 것을 비운 세상에서 언젠가 들었던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 여기는 우주예요. 이제 눈을 떠요, 츠키나가 선배. 셋, 둘, 하나. 그리고, 츠키나가 레오는 우주에 있다. 끝도 없이 세상을 메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불꽃처럼 머리 위를 부드럽게 튀는 노랗고 붉은 별무 리. 빛을 비춘 무명처럼 희부옇게 물결치는 성운과, 저 멀리에 눈부시 게 휘몰아치는 은하. 상공 500km, 중력은 지구의 수억 분의 일. 무엇도 생각의 무게를 속박하지 않는 무중력 상태의 우주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어느 동그랗고 파란 별이었다. 저 먼 우주에 와서야 보이는 것들. 6


눈에 시릴 정도로 새파랗게 빛나는 작은 별. 그리고 저 파란 별 안에, 별보다 빛나는 눈동자로 손을 잡던 파란 눈의 소녀. 조심스러운 손의 온기와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선고처럼 세상을 죄던 그 순간을. 츠키나 가 레오는 열여덟 살 소년처럼 웃었다. 그랬구나. 내 가장 거대한 우주는 너였어.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는, 그래도 조금 키가 컸다. 물론 그래 봤자 몇 센티이고 아직도 평균 이하인 건 마찬가지다. 레오는 신고 있는 신 발 굽을 괜히 바닥에 툭툭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봤던 안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때는 하이힐을 신었던가. '사람들은 왜 불편하 게 힐을 신지.' 지나치게 사소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며, 손 목에 찬 시계를 스무 번째쯤 쳐다보았을 때 그녀가 나왔다. "선배!"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안즈의 얼굴은 고등학생 시절과 그다지 달라지 지 않았다. 아니, 조금 변했나? 얼굴이 상했는지 화장이 전보다 짙어졌 고 긴 머리는 틀어 올려 핀으로 단정하게 머리에 고정했다. 새파랗고 동그란 눈동자만이 여전히 소녀다운 인상을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안즈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이름난 작 곡가 겸 아이돌과, 과감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성공시켜 업계에서 화제 에 오른 프로듀서. 안즈가 유메노사키를 졸업하고 업계에 자리를 잡아 가면서 한두 달에 한 번 꼴로는 얼굴을 마주쳤었다. 하지만 이렇게 따 로 약속을 잡은 것은 아마도 처음이었다. "들었어요, 우주 여행 갔다고." "응! 어제 저녁에 집에 돌아왔어." "그런데 이렇게 바로 나왔어요? 비행 전에 훈련도 따로 한다고 들었 는데, 힘들지 않아요?" "하하, 별 거 아니야. 신기한 게 잔뜩이어서 오히려 신났다고? 무중 력 실험이나, 생존 훈련 같은 거." 학창시절부터 꾸며낸 말을 하는 데에는 익숙했다. 지나치게 익숙해 서, 레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말하지 못 한 본심들이 마른 입가에 걸렸다. 보고 싶었어. 별로 변하지 않았네. 피 곤해 보여.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오랜만 8


에 만났다기에는 지나치게 매끄럽고 평이한 대화가 흘러갔다. 좋지 않 은 예감에 레오는 잠시 안즈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그 려낸 듯이 완벽한 미소와, 이따금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모습. 기억 속 의 고등학생 안즈는 긴장할 때 이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왜? "정말 감탄했어요. 열여덟 살 때 목표를 기어이 3년 만에 해냈구나.“ "뭐 그렇지. 여행 순서가 한참 뒤로 밀려서 황제의 도움을 좀 받았지 만 말이야~." "그래도 대단해요. 그렇게 한결같이 꿈을 좇기가 쉽지 않은데……." "그러는 너도 꿈이 있었잖아? 프로듀서과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싶 다면서." "그런 건 그만뒀어요." 안즈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릴 적 꿈을 끝까지 이루는 건, 선배처럼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거 죠." 레오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목이 까끌했다. 지구 로 돌아오는 내내, 안즈에게 연락하는 것을 망설였던 이유가 있었다. 자각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형태를 이루어 뭉근히 목을 메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

야근을 하게 된 안즈를 굳이 늦게까지 기다려 만났기에 갈 수 있는 가게라고는 바 정도였다. "술은 안 돼요. 내일 아침에 출근해야 하니까 요. 근처에 가게가 없기도 하고요. 요 앞이 오피스텔이니까 잠깐 커피 나 하고 가세요." 그렇게 말하는 안즈를 따라서 오피스텔에 들어왔다. 경계심이 없는 건지, 레오 자신을 연애 상대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되어 들어간 오피스텔에는 각종 아이돌의 사 9


진과 관련 서류가 잔뜩이었다. "너도 어지간히 바쁘게 지내고 있구나?" "으으, 방 정리 못 한 걸 깜박했어요. 구석 정도는 못본 척 넘어가줘 요? 그것보다 선배. 늦었는데 출출하지 않아요?" "간단하게 먹기는 했는데, 슬슬 조금 배고플까나~." "으음, 딱히 먹을 게 없네. 잠깐만요." 조리대 찬장을 뒤지던 안즈가 무언가 들어있는 통을 꺼내 후라이팬 에 들이부었다. 곡물과 붉은 알갱이가 눈에 익어, 무언가 기억날 것 같 았다. "오. 알았다. 뮤즐리바 만드는 거지?" "네. 크랜베리를 넣은 프로틴바예요. 제가 가끔 과자 대신 츠카사에 게 만들어 줬던 거요." "그거, 꽤 좋아했어. 그립네." 안즈는 작게 웃으며 후라이팬 위에 당을 부었다. "군것질 좋아하는 츠카사를 위한 건데, 다른 멤버들이 반은 넘게 먹 었죠." "네가 만드는 건 다 좋아했어. 간식도, 무대도, 노래도. 구성이 한참 모자라서 꾸중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악상은 좋아했잖아. 기억나지?" 타닥타닥 재료 익는 소리가 났다. 안즈는 후라이팬 바닥에 눌러 붙 은 설탕을 긁었다. "좋아한다고 하는 건 선배 입버릇이었잖아요. 습관처럼 하는 말 아 니었나?” "진심이었어."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그것도." 안즈는 픽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레오의 얼굴을 보고, 입술을 10


악물더니 곧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런데 그랬어요?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나를 피하기 시작하더니, 졸업하기 무섭게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잖아요." "그때는, 어렸어." 안즈는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알아요. 선배는 절박했잖아요. 두 명 이 졸업하는 나이츠의 기반을 닦아야 했고, 어떻게든 다시 전과 같은 곡을 쓰고 싶어했죠. 나는 그걸 이해했어요. 나는 그런 선배를 좋아했 거든요. 너무 많은 걸 짊어지고도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사람을." 잠시 망설이던 안즈가 덧붙였다. "힘들었지만요, 이해했어요. 이제는 그럭저 럭 괜찮게 됐어요. 그러니까……." 발끝을 쳐다보던 안즈가 고개를 홱 들었다. 레오는 눈썹을 찌푸린 안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별이 넘실거린다.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나는 이미 힘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나왔지…….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가라고 하는데, 어쩔 수 없잖 아." 한숨을 푸우 내쉬던 레오가 중얼거렸다. "프로틴바, 먹고 싶었는데." "금방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런 소리 해도 설득력 없어, 왕님……." "그 정도야?" "자. 여기 거울 봐봐." 레오는 눈앞에서 꽃무늬 거울을 밀쳐냈다. "괜찮아……. 그런 건 상관없어. 들어봐, 나루. 내가 싫다고 하면 이 11


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좋아했다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정말, 하는 말이 엉망이네~. 어린애 같은 소리 하지 마, 왕님. 내가 안즈쨩 대신 때려주는 수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서로 좋아했는데 왜 안 되는 거야? 이제는 마음이 바뀐 걸까?" "정말~, 3년 동안 변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이제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런 건 본인이 말해야 하는 거지만, 글쎄……. 나라면 싫어하는 사 람을 위해서 울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 왜?" "하아아, 왕님한테까지 누나 노릇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아라시가 데킬라를 물잔처럼 입에 털어 넣고 말 을 이었다. "왕님은 그런 사람이잖아. 강하지만 순수하지. 온전함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변해버린 나이츠도 차라리 깨뜨리거나 본인이 도망치려 했지. 좋게 말하면 어린아이같고, 다르게 말하면 책임감 없는 나쁜 남자라 고." "와앗, 그건 오해인걸! 스오가 설명 안했어?"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다는 거야! 남자 의도가 어땠든, 여자가 그렇 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닌 거라고~? 어쨌든, 왕님은 한 번 망가진 사 람이어서 안즈쨩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으니까 도망친 거지. 마음을 걸어닫고, 그리운 추억으로 남기고 헤어졌으니 아름다운 감정으로 남 았겠지. 하지만 동급생이었던 나는 기억해, 왕님. 안즈쨩은 그 후에도 계속 왕님에게 연락하려고 했어. 마음을 닫지 못하고 계속 열어놓았어. 그래서 비도 바람도 먼지도 맞고 있는 대로 곪아버린 거야." "그렇게 들으니까, 내가 무지하게 나쁜 녀석 같네……." 12


"이제야 알았어? 그러면 내가 안즈쨩 대신 한 대!" 경쾌하게,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바에 얼굴을 박고 비척 비척 일어나지 못하던 레오가 몇 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얼굴을 들고 중얼거렸다. "나루." "응."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왕님이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처음이네." "여자 마음은 네가 잘 알 것 같아서 찾아왔다고?" "흐응, 왕님이 일부러 듣기 좋은 소리까지 하다니 진지하구나." 기분 좋게 웃던 아라시가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레오 에게 속삭였다. "좋아. 특별히 가르쳐줄게. 다시 안즈를 찾아가. 그리고 안즈가 원하 는 걸 해줘. 어차피 이제는, 잃을 것도 없잖아?" "원하는 거?" "궁금하다는 표정이네. 그 정도는, 왕님 스스로 알아내야지."

길게 하품하며 사무실에서 나오던 안즈는 복도에서 씩 웃으며 손을 올리는 남자를 보고 기겁해 뒷걸음질쳤다. "서, 선배? 뭐예요! 말도 없이 찾아오는 건 실례예요!" "아하하. 옛날에는 내가 오면 웃으면서 맞아줬잖아?" "그때는 그때예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그렇지만 요즘 바쁜 것 같고, 기다리겠다고 하면 또 부담이 되거나 네가 미안해할 것 같아서." 레오가 머리에 손을 올리고 머쓱하게 사과하자 안즈는 조금 누그러 13


진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내쫓은 건, 저도.……. 미안했어요. 하지만……." "아니아니, 내가 사과해야지!" "뭘 사과할 건데요!" "그야 물론……!" 안즈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둘 모두 목소리가 높아져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안즈는 일단 레 오의 손을 잡고,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야?" "비상구요.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안 지나가는 곳이에요." "오오, 안즈도 그동안 땡땡이치는 법을 배웠구나!" "선배만큼은 아니에요! 정말……, 따지고 싶은 게 잔뜩이에요." 안즈는 차가운 시멘트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어둑한 복도에서, 머리 위 비상구 불만이 깜박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도 없이 찾아온 거예요?" "따로 약속을 잡자니 네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사무실 앞에서 사적인 얘기를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떡해요. 아이돌이면서, 누가 들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응?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데!" "프로듀서로서 납득할 수 없어요! 그러면, 고등학교 가을 축제 때요. 경단을 사온다면서, 왜 돌아오지 않고 날 내버려 두었어요?" "으응? 아……! 그때는 다른 멤버들한테 붙잡혔어. 돌아가려고 했는 데 또 어딜 가려는 거냐고 놔두질 않아서……." "그럼 오후에 함께 곡을 살펴보기로 했을 때는, 왜 먼저 떠났어요?" "아, 이른 겨울이었나? 루카가 학교에서 아팠어.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갔거든." 14


"그럼요, 졸업 후엔 왜 연락을 받지 않았어요? 제가 몇 번이나 전화 했는지 아세요? 몇 번이나 이번에는 연락이 될까 하고 마음 졸였는지 아세요?"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안즈의 질문 공세에 변명하기 급급하던 레오는 문득. 이 모든 질문이 하나의 종착점을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렇구나." 웃음이 났다. 레오는 씩 웃으며 어둠 속에 흐리게 보이는 안즈의 얼 굴을 마주보았다. "안즈. 너는 처음부터 나한테 함께 가자고 했지."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머리 위를 반짝거리는 비상구 불빛이 흡사 별 처럼 느껴졌다. "함께 축제에 가자. 녹음실도 같이 가자. 같이 경단을 먹고, 음악을 골라 듣고, 앞으로 뭘 할지 함께 얘기하자." 레오는 그대로 안즈의 손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꼭 우주가 아니어도 좋아. 이전에 못 다한 만큼 같이, 같이 있자." "……선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 위를 쳐다보던 안즈가, 곧 피식 웃었다. "간지러워요." 발작이라도 일으키듯이 킥킥 웃던 안즈는, 곧 큰 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크게 휘면서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레오는 알아차 렸다. 까르륵 웃는 웃음소리와 온기와 향기가 휘저어놓은 것처럼 범벅 이 되어 혼탁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수년 전에 지나친 애정과 현재가 뒤섞여간다. 레오는 안즈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따뜻한 체온에는 사람 을 땅에 잡아주는 중력이 있었다. 이제는 이 무게가 무엇인지 알고 있 다. 맥박이 기분 좋게 뛰는 것을 느꼈다. 15


"지금은 같이 가자." 열여덟 살 소년이 열일곱 소녀에게 말하듯, 그렇게 말했다. 실내는 어둑하고,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고, 그러므로 셋, 둘, 하나. 3년 전에 해야 했던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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