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가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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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가르드

유리창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아침의 황금빛 햇볕. 맑은 풍금 소리와 모 두 함께 입 맞추어 부르는 성가. 웅장한 노래가 잠시 멈추고 보이 소프라노 의 톤 높은 독창이 시작된다. 소년의 웃는 얼굴은 천사처럼 곱고 맑은 목소리는 더더욱 곱다. 여러 사 람이 넋을 놓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 축복이어라, 영광이어라, 주님의 지복이어라. 예배가 끝나고,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웅성 안부를 묻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즈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서 들어가서 게임을 하고 싶어. 몸을 돌 리는 나즈나를 성가대의 지휘자 역할을 맡은 신부님이 불러 세웠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에 나오더구나. 고맙다. 나즈나는 성실하구나.” “아, 아니에요. 중요한 파트를 맡았으니까 당연하죠.” “그래, 네 목소리는 분명히 주님의 축복을 받은 게야.” “네…….” 대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니토 나즈나는 무신론자였다. 혹은 적어도 불가지론자였다. 친구들을 따 라 들어온 성당에서 권유를 받아 성가대를 시작했고, 노래를 부르고 칭찬받 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면 안 되겠지. 몇 년이고 예배를 들어도 도저히 신의 존재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즐겁다. 그래서 나즈나는 오늘도 천사처럼 예쁘게 웃는다. “감사합니다. 다음 대회까지 힘내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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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불경한 아이였을까? 그래서 신이 벌을 내린 것이었을까? 눈 앞에서 쓰러진 신부님을 보며, 나즈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승이나 성가 같은 것에 큰 미련은 없다. 하지만 모두 함께 준비한 대회였다. 이런 식으 로 끝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즈나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세요. 신을 믿지는 못하더라도, 열심히 미사 를 들을게요. “신부님은 안정 중이시라지만,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 “다른 지휘자를 알아봐야지.” “안 돼. 당장 한 시간 후가 대회인데, 사람이 와도 그 사이에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괜찮아. 그 녀석이 와준다고 했어.” 언제나 신중한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이유 모를 안도와, 의아한 마음과 궁금증이 함께 일었다. 대체 어떤 이를 불렀기에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걸까? 몇 십분 후 나즈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키가 멀끔하게 큰 남자였다.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은 것 같고, 고등학생일까? 어쩌면 대학생? 하염 없이 올려다보고 있으니 남자가 이쪽을 쳐다본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보 랏빛의 눈이 가늘어진다. 응? 내가 뭔가 잘못했나? “니토 나즈나.”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나즈나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소프라노지?” “네, 네……!” “말은 편하게 해라. 나이도 비슷할 테니까.” “네. 응……?” 남자는 다시 휙 몸을 돌렸다. 나즈나는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지휘자로 오면서 대원 정보 정도는 알아보고 오는 게 2


당연하잖아. 그래도, 묘한 눈빛이었다고 생각했다. 합창 순서까지는 이제 겨우 십여 분 남았다. 정말 할 수 있을까. 나즈나 는 아까 도착한 남자를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남자는 빠르게 악보를 훑어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 속도로 악보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의 문에 답이라도 하듯 남자는 품에서 펜을 꺼내 악보 여기저기에 체크를 하기 시작한다. 남자를 보는 데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던 나즈나는 진행자의 목 소리가 들리자 그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음 팀, 이제 입장 준비하세요.” 벌써 차례가 다 되었다니 시간도 빠르다. 나즈나는 생긋 웃는 연습을 하 며 긴장된 얼굴근육을 풀었다. 자신의 예쁜 얼굴이 무기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곁에 선 대원들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 아.” 목을 푸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노래를 하면서 긴장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목소 리와 미소에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미지의 존재가 곁에 있다. 나즈나는 우뚝 솟은 무대 가운데에 올라섰다. 그리고 더 높은 단상 위에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 다. 나를 봐. 나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가 지휘자이다. 신은 믿지 않는다. 나즈나는 보이지 않고 닿지 않는 것을 막연히 믿을 정도로 순진하고 감성적인 아이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축복이나 지복 같은 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바로 이 장소에. 서로 톤이 다른 목소리가 켜켜이 쌓이고 더 풍성한 울림을 지닌 하나가 되어 넓은 홀 가득히 울린다. 니토 나즈나는 모두 함께 부르는 성가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제 곧 나즈나의 독 창 순서였다. 앞 순서의 악보를 미리 읽던 나즈나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여기가 연출의 포인트인데. 아무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3


다음 부분의 악보는 세 줄로 나뉘어 있다. 나즈나의 독창이 시작되고, 반 주가 뒤따르고, 그 다음이 합창이다. 복잡한 구성을 모두 잡아내는 것이 지 휘자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악보에는 무엇이 무엇인지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아서 그저 순서대로 있는 세 줄의 악보로 보일 것이다. 손바닥에서 식은 땀이 났다. 나즈나는 울상이 되어 눈을 크게 뜨고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다 시 한 번만, 기도를 들어주세요. 남자가 무슨 일 있냐는 듯 이쪽을 쳐다보지 만 말을 전할 방법이 없다. 왜, 사람은 기도를 들을 수 없을까? 그렇게 생 각하는 동안 남자가 손을 들었다. 손가락으로 나즈나 쪽을 가리키고, 손을 더 높이 들었다. 아. 나즈나는 입을 열었다. 높고 고운 목소리가 홀 가득 울려 퍼진다. 주님의 축복 있으리.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남자는 악보를 보고는 클라이막스에서 반대편 손 을 들어 반주자를 가리킨다. 걱정하던 반주자가 허둥지둥 준비하고 지휘에 맞추어 건반을 치는 것이 보인다. 잠시의 정적 후 남자는 두 손을 다시 올 리며 앞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의 합창 소리가 회장에 울렸다. 아아.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나는 영원히 당신께 신실하리라.

나즈나는 티셔츠를 들어올리고 몸 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치렁치렁한 성가대 옷을 벗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수고했어, 수고했어. 인사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나즈나 의 시야에 오늘의 지휘자가 들어왔다. 이제 다들 긴장이 풀려서 헤벌레 하 고 있는데, 혼자서 각 잡아 놓은 것처럼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나즈나는 다가가 그를 차가운 음료수 병으로 툭툭 쳤다. “읏, 뭐냐.” “마시라고. 응? 왜 그렇게 봐, 말 편하게 하라며? 시합도 끝났는데 혼자 4


왜 구석에서 그러고 있어. 지휘자 씨,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같이 요 앞에 산책이라도 할래?” “친한 것처럼 말을 붙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자는 병뚜껑을 따서 음료 한 모금을 마시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츠키 슈다.”

대회장인 큰 성당 뒤에는 제법 넓은 뜰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에서 앵앵 거리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나즈나는 슈와 함께 나무그늘 아래를 계속 걸었다. 나무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봄볕이 기분 좋게 따뜻했다. “이츠키……. 라고 했나. 그때, 우리 노래 순서를 어떻게 알았어? 꽤 복 잡하게 되어있을 텐데. 누가 따로 말해줬던 거야?”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슈는 당연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뭐든 해 달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어지간히 아둔하지 않은 이상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나즈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 가지고 그 잠깐 사이에 순서를 다 파악했다고? 장난치는 것처 럼 들릴 정도네.” “너야말로, 노래를 들으니 어지간히 열심히 연습한 모양이던데. 독실한 신자인가? 나는 교회는 어릴 때 몇 번 나가고 그만두었는데.” “아니. 별로.” 당연하게 대꾸하고 나니 너무 편하게 말해버렸나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더 내키는대로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신은 믿지 않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네~ 그렇게 말해도 말이야, 직접 5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목소리는 내가 직접 내는 거잖아. 신 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해도 기분 나쁠 뿐이야. 성가는 아름답지만, 이 모든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단 한 존재를 위해서라니 아깝지 않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노래를 부르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 슈는 나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눈매가 아까처럼 가 늘어진다. 그리고는 씩 웃었다. “너, 내가 아는 사람을 굉장히 닮았는데. 말하는 건 조금 다르구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이, 봄날의 햇볕보다 따뜻했으므로 “그 사람, 좋아해?” 그렇게 묻고 말았다. 슈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참 동안 대답을 미루 다가 영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래도 신자들을 너무 바보 취급하지는 마라. 누구라도 정말 간절한 게 있을 때에는 의지할 신을 찾게 되어 있으니까.”

애를 써서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그 남자를 보았을 때, 나즈나는 한눈에 그때 그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둘 다 썩 살가운 성격은 아니어서 알아채는 눈빛만 서로 대강 확인 하고는 인사도 없이 넘어갔던 것 같다. ‘동갑이었구나.’ 처음에는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감상은 나날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굉장하구나.’ ‘천재 였구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구나.’ 신심도 없으면서 성가대에 남아 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칭 찬하는 게 좋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돌 학교에 입학했다. 정말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는데. 열심히 연습해도 그들의 타고난 센스를 따라 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자존심이 상하고 하루하루 스스로를 책 6


망하는 마음만 들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현실이 힘들다. 상반된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즈나는 혼자서 정처 없이 교정을 걷다가 학교 별관에 들어갔다. 한편에 대리석으로 만든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다. 교내의 신자들을 위한 작은 예배 당이었다. 구석에 세워둔 십자가를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나즈나는 지복으 로 가득하던 성가대 시절을 떠올렸다. 나즈나는 그대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모아 입술을 달싹거렸다. “신은 믿지 않는다며?” 얼굴을 들고 뒤돌아보니 팔짱을 낀 ‘그 남자’가 보인다. “우, 우냐앗, 왜 하필 너야~!” “? ……지금, 혀를 씹은 건가? 네가 공터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고 있 기에, 병이라도 걸렸나 하고 지켜봤을 뿐이다.” “……걱정했다는 뜻이야? 별 일 없으니까 걱정 마. 그냥, 오늘부터 한 번 믿어볼까 하고. 기도하면 들어줄까 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게?” “간절할 때는 의지할 신을 찾게 되어 있다며.” “뭐가 그렇게 간절하지?” “아이돌이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나즈나는 작게 웃었다. “너 같은 천재는 모르겠지. 하지만 노력하려고 해도 어느 쪽으로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아직 배워야 할 게 산더미인데, 헤매고 있을수록 이미 앞서 가 는 녀석들과의 격차는 멀어지는 것 같아. 아……, 정말. 너한테 왜 이런 얘 기를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신에게 기도하려고 왔는데.” “원한다면, 내가 너의 신이 되어주지.” 7


나즈나는 짐짓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따르겠다면, 인형처럼 아무 고민도 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어떻 게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길을 몰라 헤맬 필요도 없어. 길도 무대도 내 가 제시할 테니까. 너는 그저 그 예쁜 목소리로 내가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르면 된다.” 지금 나랑 장난치는 거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자 그럴 수 없었다. 기묘한 일이다. 이렇게나 오만한 말을 하면서, 자신이 기도하는 것 처럼 간절한 눈을 하고 있다니. 나즈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너는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그리고 다 시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의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구나. “감당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너는 사람이잖아?” “보통 사람은 아니지.”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밉지 않았다. 나즈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이츠키 슈(しゅう)……. 정말, 주님이구나.” 그때 왜 그렇게 했는지, 아직도 나즈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가 서로를 선택한 순간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좋아. 너의 인형이 되어줄게. 너를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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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일이었다. 이제 성당 밖에서도, 굳이 성가를 부르지 않아도 모든 곳이 축복이었고 모든 곳이 영광이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신은 실존하고 그 를 따름으로서 모든 고난은 해결된다. 이츠키 슈는 이 세상의 신이다. 나즈 나가 스스로 선택한 신. 나즈나는 가끔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님은 나를 가 없이 사랑하시네. 스승님. 하고 작은 목소리로 부르면 곧바로 슈가 고개를 돌아본다. 나즈 나가 불러주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 살짝 긴장한 어깨를 둥글게 올리고 있다. 나즈나 쪽으로 상체가 살짝 기울어지고, 어떤 말을 할 지 곧바로 들 을 준비가 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즈나가 입을 열어 한 마디만 더 하면 곧바로 웃음기가 오른 뺨이 둥글게 올라온다. 평소에는 마냥 날카로운 눈을 동그랗게 휘며 웃는 눈매가 예쁘다. 그리고 나즈나는 생각한다. 주님은 나 를 가없이 사랑하시네. 자신을 늘 따라붙는 그 모든 시선과 애정과 보살핌. 그것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영광이어서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한 문제가 되게 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비추어보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아주아주 사소한 문 제가 되어버릴 정도로 축복된 시간이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무신론자의 눈을 그렇게 적어도 몇 년은 멀게 할 정 도로 지복으로 가득한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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