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언어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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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향기가 잔뜩 났어요. 아주 코를 찌를 지경이었죠. 우리 황제 폐 하께서는 꽃에 둘러싸여 차 마시기를 좋아하시니, 장미를 산더미처럼 쌓 아 보았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시는 흰색 장미를 하얗고 하얗게 쌓았 어요. 그런데 도무지 기분이 좋아지실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죠. 아, 이제 황제 폐하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으려나요? 에이치는 학원 을 졸업했으니까요. 그리 오래 지난 일도 아니군요. 결코 잊지 못할 졸 업식이었죠. 졸업식의 마지막 공연은 물론 학원 정점인 우리 「fine」이 맡았습니다. 아아, 「fine」의 「마지막」이라니 이 얼마나 유쾌하고 영광스 러운가요? 귀여운 토리는 분명 자신이 어떻게 해야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알고 있어요. 제법 영악한 아이입니다. 작은 몸에 하얀 유닛복을 앙증맞게 걸치고 발을 구르고, 보는 사람이 웃음 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애 교를 부리죠. 그날은 특히나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답니다. 주인이 힘을 잔뜩 냈으니 원래도 완벽한 유즈루야 말할 여부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히비키 와타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무대에 입장할 때마 다 탄성과 환호를 듣는 일에는 익숙해진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네, 확실 히 그날의 공기에는 평소의 무대보다도 더 뜨겁고 애태우는 무언가가 있 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의 등장입니다. 팡파르 속에서 황제 폐하가 천천히 허리 숙여 인사했을 때, 거짓말처럼 환호성이 멎고 모두가 숨을 죽였어요. 에이치는 천사 같았어요. 너무 상 투적인 표현인가요? 하지만 이건 정말이랍니다. 갓 하늘에서 내려와서, 금방 다시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천사요. 희끄무레 웃는 에이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고 그 어느 무대에서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이것만 은 제가 살아온 세월을 걸고 확언할 수 있겠군요.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었습니다. 1


황제는 무대에서 쓰러졌습니다. 의식을 잃은 학생회장이 병원에 실려 가는 동안 졸업식은 끝났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꿈의 학원 도, 한단지몽도, 무지갯빛의 서커스도 모두 끝났고 지금은 모라토리엄입 니다. 그래도 아직 유예기간이 조금 남았죠. 원하던 대로 무사히 졸업을 했 고, 거기에 조금 더 시간이 남았는데 왜 그리도 심통이 난 채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광대가 풀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에이치는 한 송이를 들고 장미 향기를 맡는 듯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주먹을 쥐어 손에 쥔 꽃잎을 우그러뜨려 버리더군요. 그리고 내던졌습니 다. “꽃이 마음에 차지 않나요?” “응.” 참, 별일입니다. 곧 쓰러질 듯 아플 적에도 언변은 유창했던 우리 폐하 가 아닙니까? 그런데 짧은 단답에 입조차도 꾹 닫고 있으니 어쩌겠습니 까. 광대는 광대의 일을 하고, 폐하가 꽃이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성에 찰 만한 것을 가져와야죠. 그래서, 특히나 향이 빼어나고 눈에 띄게 아름다운 장미를 대령해 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전부 알아듣지 못하겠어요, 히비키 선배. 아무튼 텐 쇼인 선배가 이 저택에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걸 저택이라고 할까요, 병원이라고 할까요? 당신의 판 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부른 거죠? 텐쇼인 선배의 상태를 보러 와 달라, 는 말은 들었지만 왜 하필 저인지…….” “아아, 학원의 모두가 곤란할 때 부르는 사람이라면 응당 프로듀서인 2


당신 아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기는 하네요! 이제 저는 학원의 학생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그 끈으로 이곳에 남아있답니다.” “……선배는 가끔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해요. 아무래도 좋아요. 그래서 저는 간병을 하면 되나요?” “당신답지 않게 뾰족한 태도로군요. 병적으로 남을 돌보는 사람이라 생 각했습니다만! 혹시 하기 싫은데 억지로 온 겁니까?” “……아뇨. 단지, 의문이 들어서. 전문 간병인이라면 텐쇼인 가문의 재 력으로 고용할 수 있을 테고, 말벗이라면 저보다는 하스미 선배가 좋겠 죠. 하스미 선배는, 요즘도 많이 바쁘신 걸까요?” “케이토는 화가 나 있어요. 에이치가 입원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조 금이라도 전문적인 설비가 있는 곳에서 치료받는 쪽이 승산이 있으리라 믿는 거죠, 딱하게도.” “그건 저도 동의하는데요. 텐쇼인 선배는 떼를 쓰는 어린애도 아니잖 아요. 냉정하게 가능성을 따져봐야 하지 않나요?” “글쎄요, 몸보다 마음이 먼저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극 아니겠습 니까.” 장미 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군요. 오랜만이라고 몰라 볼까요, 그녀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할 때의 눈빛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텐쇼인 에이치는 꼭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 같습니다. 저는 그래도 에이치라면 의연하게 이 시간 을 맞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에게는 사람을 지나치게 과 대평가하는 습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도 힘든 거겠죠.” “그 사람은,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아아,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저로서도 당황하고 만 것이 죠! 하지만, 당신은 기적의 프로듀서가 아닙니까? 하하, 그런 표정 하지 마시고요. 분명히 인간은 히비키 와타루와 그 외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3


그러나 당신은 제3의 분류에 있는 것 같은 사람이니까요. 마음의 간병을 부탁할 사람이라면 당신 외에 따로 생각나지 않는군요.” “과찬이에요. 그저 우연히 모두가 저를 좋아해 주었을 뿐이고…….” “우연의 일치라,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서로 적대하던 사람들 이 당신에게 이끌려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던 수백 수천의 우연. 우연이 그렇게 겹치고 또 겹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기적 을 일으키는 사람은 신이라고 하죠! 이런, 당신은 저보다도 상위의 존재 로군요.” “……휴. 됐어요. 더 이상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잊어버릴 것 같아. 그래서, 텐쇼인 선배는 어느 쪽에 있나요?” “물론 안내해드리죠. 무도회로 공주님을 모시는 안내인처럼, 정중하게. 따라오겠습니까?” 무도회라고 말은 했지만 이곳이 과연 무도회일까요? 전학생 씨는 이런 모습의 에이치를 보는 건 처음일 텐데요. 그래도 에이치가 설마 이 장미 마저 내던지기야 하겠습니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기, 히비키 선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전학생 씨는 제 뒤를 따라오지 않고 꼼지락거 리고 있었습니다. “저……, 잠시만요. 준비를 할게요. 저, 텐쇼인 선배는 아직도 조금 무 서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장미는 작게 웃었습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교차해서 꽉 깍지를 낀 채로 난처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웃 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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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는 길은 제법 무도회를 닮았습니다. 벽은 청결하고 금빛의 장식 은 정갈하나 품위가 있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궁전이니까요. 에이치의 취 향대로 꾸민 건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전학생 씨는 두리번거리며 종종걸 음으로 저를 따라옵니다. 에이치의 방은 복도 끄트머리에 있죠. 전학생 씨는 이쯤에서 제법 왕자님의 궁전에 들어서는 공주님의 기분이 되었을 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방문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에이치. 안에 있습니까?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가 왔습니다.” 방에서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럼, 들어가지요.” 저는 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습니다. 전학생 씨가 쭈뼛쭈뼛 제 등을 넘어다봅니다. 에이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방안에서는 미동조차 없었으니까요. “일어나세요, 에이치.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있을 참인가요? 자아, 몸을 일으켜 기쁨으로 새 장미를 맞아주세요.” “……대체 뭘 가져온 거야, 와타루.” 등 뒤에서 전학생 씨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에이치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가라앉았습니다. 아마 그녀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일 겁니다. “Amazing! 모두의 해결사, 민완 프로듀서님이 당신의 궁을 방문하셨 답니다. 물론 기쁘게 맞아주시겠죠?” 그제야 에이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는군요. 밖에 들리지 않게 마른 기침을 두어 번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환자 가 몸에 밴 황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군요. 전학생 씨가 조심스럽게 방 안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에이치가 빙긋 웃자 전학생 씨가 안도하는 것이 보입니다. “이거 오랜만이야, 안즈쨩. 내 상태가 보다시피 썩 좋지가 않아, 손님 5


대접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미안하네.” “괘……괜찮아요, 선배. 당연한 거죠. 아니, 당연히 제 쪽에서 텐쇼인 선배를 도와드려야죠. 이런 걸로 미안해하시면 제가 민망해요.” “응. 그래도 역시 미안하니까…….” 에이치가 눈을 반 접어 웃습니다. 묘하게 반박하기 힘든 미소입니다. 그가 소꿉친구에게 자주 보여주는 것이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날이 밝는 대로 떠나, 안즈쨩.” “네?” “이건 내가 불편해. 오늘 바로 떠나기에는 시간이 늦었으니까, 일단 입 구의 손님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면 될 거야. 떠나기 전까지 식사나 시설은 모자라지 않게 제공될 거고. 그렇지, 와타루?” 이건 아니죠. 도대체가 에이치는 제 입장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는 걸까 요? 반박하려고 하는데, 전학생 씨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선배!” “응?” 또 예의 그 미소입니다. 전학생 씨가 입술을 깨뭅니다. 바로 뭐라 대답 하기 힘든 게로군요. “그러면 부탁해, 와타루. 나는 지금 놀라고 피곤해서 조금 쉬고 싶어. 일단 안즈를 방으로 데려다주겠어? 나와는 그 다음에 이야기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아, 에이치가 이 장미마저 내던질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요. 이제는 저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군요! 일단 풀죽은 전학생 씨를 다시 데려갑니다. 에이치와 이 야기를 따로 나누어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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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에이치를 놀래 주려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쌀쌀맞게 굴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에이치는 나름대로 박애주의자이지 않습니까. 이제 졸업했다고 그 사랑도 벗어버린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아아, 완벽하게 저의 불찰입니다.” “에이, 아니에요. 정말 지금 히비키 선배도 당황한 것 같고…….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진귀한 경험이네요.” 장미 양은 짓궂게 웃습니다. 이런 점은 에이치와도 닮았죠.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겠지만요. “아무튼, 텐쇼인 선배가 불편하다면 저는 돌아가야겠지만요, 여기는 선 배가 머무는 장소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께름하네요. 확실히 예전의 그 사람 같지 않아요. 선배가 왜 걱정했는지 알 것도 같아요.” “그렇지요. 아무래도 저는, 에이치에게 돌아가 보아야겠습니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황제 폐하의 기분을 풀어드리는 것이 광대의 의무랍니다.” “응, 그럼…….” 전학생 씨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숙이고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군요.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여기서 앉아 있는 걸로 충분하니까.” 어쩐지 무언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어쨌든, 지 금은 에이치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시 에이치 의 방으로 빠르게 발을 옮겼습니다. “안즈와는 관계없잖아.” 그게 제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이상한 말이네요. 당신이 그렇게 선을 긋는 사람이었습니까? 어 째서 화난 얼굴인가요. 당신은 전학생 씨를 특히나 흥미로워하지 않았나 요? 지치거나 분란이 있을 때도, 전학생 씨 이야기가 들리면 새 장난감을 가진 아이 같은 얼굴이었죠. 전학생 씨라면 분명 조금쯤은 당신의 흥미를 7


돋울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지루한 재계 인사들이 불쑥 찾아올 때도 겉으 로는 웃었던 당신이 왜 그렇게 전학생 씨에게 무안을 주었는지 모르겠습 니다. 그녀가 돌아가기 전에 사과하지 않을 겁니까?” “하고는 싶지. 하지만 안즈는 가끔 나를 불편하게 해. 네가 대신 전해 줘.” 잘도 잔인한 소리를 하는 황제님입니다. 전학생 씨가 돌아가고 나면 아 마 에이치는 다시 그녀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겁니다. 제가 대답하지 않 자 에이치가 칭얼거립니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들어주다마다요.” 이것은 물론 우리 둘 다 유언을 전해주는 형태가 될 것을 상정하고 하 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에이치의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는 것도 알고 하는 말입니다. 방에서는 병의 냄새가 납니다. 에이치가 창 문을 열어달라고 합니다. 밤바람은 건강에 해롭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창 문을 천천히 밀어 열자 까만 밤이 밀려 들어오고 그제야 에이치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자에서 눈을 붙이던 저는, 다음 날 아침 벌컥 문이 열리는 소 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음, 아니 이거 전학생 씨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아침에 가기로 했던가요. 에이치를 돌보아야 하니 데려다주는 건 무리입니다만, 에이치 에게 운전수를 불러 달라고 할까요?” “저에게 거짓말을 했군요, 선배.” 잘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확실하군요. 성난 얼굴의 전학생 씨가 휴대폰을 쥐고 제 눈앞에 흔듭니다. “하스미 선배에게 연락했어요. 텐쇼인 선배의 상태가 이상하니까, 크게 바쁘지 않다면 곁에 있어 주시는 게 낫겠다고. 그런데. 선배가 화난 건 사 8


실이지만, 그래서 떠난 건 아니라면서요.” “아아, 맞습니다. 지금 에이치의 상태는 케이토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죠. 엄밀히 말하자면 케이토는, 에이치의 차트를 들고 만의 하나의 가능성을 찾아서 각국을 누비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에이치의 상 태가 악화된 원인을 의료진 누구도 구명하고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공기 좋은 곳에나 머무르고 있는 거죠. 이해가 되었나요?” “그건, 이상해요. 아니,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텐쇼인 선배는 그렇게 자신을 내버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은 무대 뒤에서 산소마스크를 쓰더라도, 탈출한 사자를 보고 놀라더 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병이 원인불명이라고 자포자기한다 고요?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제가 알던 텐쇼인 선배가 아니에요.” “말했잖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서 당신을 불렀던 거지 요.” 전학생 씨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지도 않았습니 다. 그대로 서 있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하스미 선배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본인이 갈 때까지 텐쇼인 선배를 책임지고 보아달라고.” “안 돼, 안즈.” 에이치가 깨어났군요. 이렇게 시끄럽게 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요. “돌아가. 나는 네가 불편하다고 말했어.” “선배가 그런 식이니까, 갈 수 없어요. 그렇게 되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하스미 선배와 약속을 했어요. 그러니 선배가 지금 이런 모습이어서는 갈 수 없어요.” 강경하게 선고하던 전학생 씨가 이윽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9


“선배는 제가 그렇게나 불편한가요? 한때 대립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부터 당신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면 전에도 그렇게 얘기하셨어 야죠.” 그녀는 어쩐지 울컥하는 것 같습니다. 에이치가 한숨을 내쉽니다. “……좋아.” 전학생 씨가 그제야 손을 비껴 에이치를 다시 바라봅니다. “너 좋을 대로 해, 안즈쨩. 네가 그렇다면 내가 강제할 수는 없어. 하지 만 곧 떠나고 싶어질 거야.” 어느새 환하게 날이 밝았고, 방안에 햇빛이 비추어 들어옵니다. 창가에 서 새 소리가 납니다. 전학생 씨는 심경이 복잡해 보였지만, 일단은 허락 받은 것만으로 안심한 듯 아까보다는 얼굴이 밝았습니다. 꽃의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꽃, 햇빛, 꿈, 무지개. 이런 것으로 마음에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가 망이 없는 겁니다. 한동안 에이치는 시들어서 재기할 수 없는 꽃 같아 보 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가져온 장미는 효과가 있군요. 물론 사랑과 놀 라움은 이 히비키 와타루의 장기입니다만, 에이치도 어느 정도 무뎌진 거 겠죠. 원래 이쯤 되면 그와는 헤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은 예측할 수 없는 놀라움의 연속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겠죠. 아무튼 장미 양은 수완가입니다. 커튼을 걷고 조그맣게 리본을 묶어 고 정하는 모양이나, 차 위에 둥둥 띄운 꽃잎이 소소하게 에이치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녀가 눈에 띄는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차나 식 사를 가져다주며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장식물의 먼지를 털다가 학생회 청 소를 하던 일을 얘기하며 이러다 에이치 전속 메이드가 되겠다며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에이치는 맞받아칩니다. 안즈쨩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시급으로 500만 엔 정도면 될까. 그렇게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평소처럼 웃으며 말을 하면, 전학생 씨는 농담인지 진심인지 몰라 어쩔 10


줄 모르는 얼굴이 됩니다. 그 얼굴을 보는 에이치는 근래에 본 중에 가장 즐거워 보입니다. 영락없이 짓궂은 사내아이 같군요. 그녀가 처음 왔을 때 서로 언성을 높였다고는 믿을 수 없이 두 사람은 묘하게 친근합니다. 에이치와 스스럼없이 말을 나누며, 전학생 씨는 제가 하던 일은 무엇이든 도우려고 합니다. 에이치의 말벗을 하고, 식사를 나 르고, 차에 우유 크림을 내어 곁들이고, 어라. 잠깐 사이에 마술까지 따라 하려는 건 무리죠, 전학생 씨. 에이치는 지금 말로만 아픈 게 아니라 정말로 쇠약하니 도울 일이야 많습니다. 전학생 씨는 에이치와 담소를 나누며 머리를 빗겨줍니다. 반짝 이는 금발이 헝클어진 채 빗에 걸립니다. 전학생 씨는 잠시 한 움큼 뭉쳐 서 빠진 머리카락을 쳐다보는군요. 그리고 다시 웃으며 에이치와 처음 만 날 때의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한밤중에 귀신처럼 기척도 없이 웬 남자가 나타나서. 그래도 칭찬해주는 걸 듣고 상냥하고 멋있는 사람이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속이 시꺼먼 사람인 줄도 모르고 겉모습에 깜박 속았지. 너무하네, 안즈쨩. 나는 내가 악당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으니 까. 그거 아세요, 선배? 저도 그래요.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확실히 다른 학생들 이상으로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선배는 누구보다도 열심이었고, 아 이 같은 면도 있었고. 그래서 전……. 에이치는 조잘거리는 그녀의 목소 리를 들으며 평온하게 웃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더니 이윽고 꾸벅꾸 벅 좁니다. 전학생 씨는 조심스럽게 에이치의 얼굴을 베개에 뉘입니다. 살이 빠져 두드러진 광대가 손가락 끝에 닿습니다. 전학생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영 신경이 쓰여 따라가 보니, 그녀는 복도에 앉아 눈을 훔치고 있습니 다. “힘든가요?” 11


“아니요.” 그녀가 쓱쓱 눈가를 닦고 벌떡 일어납니다. “무리할 필요 없습니다. 힘들다면 여기에는 저도 있고, 늘 그렇게 열심 일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일밖에 모르는 사람인 건 알지만.” “아니에요. 정말 힘든 건 아니에요. 그냥……, 가끔. 텐쇼인 선배가 낯 설어서…….” 그녀는 손바닥에 남은 금발 한 뭉텅이를 쳐다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원래 아픈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항상 반짝이는 사람이었는데……. 책을 읽다가 저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나요. 늘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자다 깼을 때 가끔 우리의 이름을 반대로 불러요. 네. 저는 입원해 있을 때의 선배는 본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이게 당연하다는 걸 알고는 있는 데.” 결국 왈칵 솟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군요. “왜, 저는 이렇게…….” “운명을 바꾸고 싶나요?” 그녀가 당황하는군요. 하기야 눈앞에 우는 여자가 있다면 보통 사람은 달래는 게 우선이겠네요. “운명……, 선배가 아픈 것 말인가요? 물론 바꾸고 싶죠. 하지만 제 마 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마음대로 되는 게……, 선배는, 뭔가 알고 있 나요? 운명을 바꿀 수 있나요?” “아니요.” 흥분한 전학생 씨가 맥이 빠져 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집니다. “물론, 그렇겠죠…….” “지금의 상황은 이 저로서도 파악할 수 없군요. 궤도가 손안을 벗어났 어요. 당신을 담보로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에이치 12


가 싫어할 것 같네요. 그러길 바랐다면, 진즉에 말을 했겠죠. 당신은 상관 없다고도 했었고.” “……선배?” “그러니 웃읍시다, 그 수밖에는 없군요! 인생은 장밋빛입니다. 삶에는 기복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고들 합니다! 당신의 힘으로 우리의 무대에 유쾌함을, 반짝임을, 경탄과 사랑을 채워갑시다.” “……위로해 주시는 거지요. 감사해요. 히비키 선배는 언제나 좋은 사 람이네요.” 어리둥절해 하던 전학생 씨가 곧 방긋 웃습니다. 언제나 좋은 사람이라 니, 흔하게 듣지 못한 말이라 저야말로 어리둥절하군요. “저는 잠깐 세수를 하고 갈게요. 아, 얼굴이 초췌해진 것 같아요. 선배 말대로 좀 더 반짝이고 싶은데, 뭐라도 좀 발라야겠어요.” “오오, 화장이군요. 도와드릴까요?” “하하, 그건 사양할게요. 제 얼굴에 무대 화장이라도 그려놓으려고. 텐 쇼인 선배도 잠든 것 같으니까, 일단 세수부터 하고, 바람도 좀 쐬고 기운 차리고 올게요. 읏샤, 선배가 깨면 불러주세요?” 하지만 제가 돌아가니 에이치는 일어나 있습니다. 그녀가 우는 소리를 들었을까요? 하는 말을 들었을까요? 에이치가 저에게 손짓을 합니다. 가 까이 가자 몸을 살짝 숙여 귀엣말을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에이치의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그의 작은 요청대로, 그날 밤 안즈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남자끼리 정리할 것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이제 방에는 저와 에이치, 단둘밖에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와타루.” 조용히 입을 여는 그에게서 좋은 말을 들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 니다. 아아, 어째서 최근의 저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역할일까요. “왜 나는 죽지 않고 있는 거지?” 13


“새삼스럽게 그것을 묻나요?” “목숨을 연장하는 건 졸업 때까지라고 했지. 그래서 그때를 향해 살아 왔어. 남은 힘을 아끼고, 쓰러져 죽을 것 같아도 무대 위에 섰어. 한단지 몽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더 힘낼 수 있었어……. 죽음이 두렵 지 않은 사람처럼. 이미 죽음을 겪은 사람처럼. 꿈을 꾸는 주인공처럼. 황 제로서 모두의 정점에서 막을 내리는 그 순간을 위해서……. 그런데 이 꼴은 뭐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야. 폐포는 괴사해 가는데 호흡은 하 고 소화기는 말을 듣지 않는데 숨은 이어진다. 하하, 마물의 왕이 보면 웃 을지도 모르겠네.” “그러게 말입니다. 우습네요, 에이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너도 만능은 아니구나.” “저를 책망하는군요. 그때는 제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것처럼 절박했던 사람이! 오히려 잘 되지 않았습니까? 학교를 졸업했으니 더 넓은 세계를 볼 수도 있겠군요. 세상을 진군하고 정복합시다. 텐쇼인의 에이치가 그렇 게 싫은가요? 하지만 폐하,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권력도 재력도 재능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 이변을 기회 삼을 생각이 없나요?” “이런 몸으로?” 에이치가 단추를 뜯어 앞섶을 풀어헤칩니다. 메말라 갈비뼈가 드러나 고 살갗의 색이 기괴하여 봐주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에이치.” 스스로 죽기라도 하지 그래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에이치가 웃 었습니다. “너무하네, 와타루.” 저는 조금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자리에 장미 양이 있었다면. 14


이게 전부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면, 저도 정확한 구성이나 까닭은 모릅 니다. 에이치의 목숨은 본래 우리 「오기인」과의 대결에서 다해야 했던 것 을 이어붙인 것이에요. 상처를 봉합하는 의사처럼, 끈을 엮는 재주꾼처럼, 생명과 집념을 집어 서 조그만 재주를 부렸습니다. 저는 사람의 바람에 부합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요. 사람들은 저를 이상하게 보더군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자신 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저도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인류는 히비키 와타루와 그 외로 나뉜다는 것을요. 그저 저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튼 죽어가는 순간의 에이치의 열망은 제가 살면서 느껴본 중에서 도 가장 간절하며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정도의 재주를 부릴 수 있었겠지요. 저는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어찌 된 일일까요. 누구보다도 병약하나 누구보다도 강인하던 황제는 어 디에 있을까요. 그는 지금 혼자 있기를 원하고, 저는 무언지 모를 무언가 를 찾아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깁니다. 여기는 텐쇼인 가의 사유지 중 한 곳이었죠, 정말로 아름다운 장소입니 다. 뒤뜰에는 갈대와 함께 들꽃이 만개해 있고 석양이 저물어 가는 가운 데 철새들이 떼 지어 날아갑니다. 휘익 휘파람을 불자 몇 마리가 퍼드덕 거리며 날아오는군요. 깃털이 어깨 위로 떨어집니다. 함께 가지 않겠냐는 듯 제 주변을 맴돌며 날갯짓을 합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 다.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 걷다 보니, 갈 대밭 사이로 무언가 파란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꼼지락거리는 파란 것……. 무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생은 놀라움의 연속!” “아. 히비키 선배.” 두리번거리던 전학생 씨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15


“바람을 좀 쐬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택 터가 너무 넓어서, 그만…….” “허허벌판이고 주변에 길을 찾을 지표가 없지요. 그래서 길을 헤매고 있었던 건가요? 아아, 예측불허의 상황! 그 와중에 이렇게 저와 만났다니 이것도 운명의 인도로군요.” “그렇네요. 운명이네요.” 전학생 씨가 키득거립니다. “왜, 춤이라도 추자고 할 거예요?” 바람이 휙 불고 갈대가 휘날립니다. 바람에 날려 얼굴을 덮는 갈색 머 리카락을 전학생 씨가 손끝으로 빗어 넘깁니다. “미안해요. 이상한 말이었죠. 텐쇼인 선배의 기분은 나아졌나요?” “당신이 나올 때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그렇지만 어설픈 핑계로 오지 말라고 했으니 아마 저는 두고 혼자 있고 싶은 거겠죠. 선배 표정을 보니 맞군요. 그래도 그동안 잘 지냈 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제가 불편한 걸까…….” 전학생 씨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 생각에 사로잡혀 저를 책망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합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부러 보폭을 크게 휘두르며 행진합니다. 그래도 잡 념이 떨쳐지지 않는지, 결국 자리에 우뚝 멈추어 저를 올려다봅니다. “실은 저도 텐쇼인 선배가 좀 불편하거든요.” 이곳에서 장미 양은 이상한 표정을 자주 하는군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이대로는 히비키 선배에게 계속 폐를 끼칠 것 같으니, 그냥 조금 말해 둘게요. 제가 가끔 이상하게 구는 건 그냥 제 문제니까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요. 그냥……, 사소한 이야기예요.” 다시 바람이 붑니다. 그녀는 바람을 피할 생각도 날리는 머리칼을 고정 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머리칼이 갈대처럼 갈래갈래 흩날립니다. 16


“이런 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시작, 시작이요. 시 작은 좋지 않았죠. 텐쇼인 선배와는 말하자면, 적이었으니까요. 화사한 얼굴만 봐서는 그랬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과격하고 종잡을 수 없는 언 동을 하는 남자. 하지만 그럴 만큼 위엄이 있고 권력이 있어서, 우리는 선 배가 무서웠어요. 두려운 상대였죠.” 해가 저물어 가고 하늘에 별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우리를 산산조각내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더니 또 부 추기는 듯하더군요. 나는 이곳에 서 있으니 나를 밟고 올라가 봐라, 그럴 수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침내 그 사람이 있던 자리 까지 올라서, 이렇게 혁명에 성공했죠. 어떻게 보면 선배에게 계속 이끌 리고 있었다고도 생각해요.” 갈대 쓸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녀는 숲을 반주로 노래하는 것처럼 조용 히 말을 잇습니다. “바닥에서 정상으로, 정상에서 바닥으로 자리를 서로 바꾸고 보니 붕 뜬 것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갑자기 너무 많은 주목을 받 아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역시 당황스럽지 않을까 생각한 그 사람은 의외 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더군요. 이 상황이 즐거워 보이기도 했어요.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던 그 시기에, 네, 텐쇼인 선배는 저 에게 상냥했어요. 망설이지 말고 자신에게 도전하라고, 그리고 부딪히라 고. 그렇게 가끔 이야기도 나누었죠.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음악 을 듣고, 콧노래를 부르고……. 그런 자신의 평화에 저를 초대했어요. 섞 일 수 없을 것 같은 우리가 가끔은 그랬어요. 티타임에 어울릴 법한 음반 을 고르면서, 텐쇼인 선배는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를 했어요. 선배는 의 외로 음악 취향이 넓더라고요. 그 넓은 취향이 전부 좋았어요.” 석양 아래서 얼굴을 물들인 채 그녀는 말갛게 웃습니다. “하루는, 유닛 복장을 입은 선배를 만났어요. 별거 없는 날이었어요. 17


네. 학생들은 왁자지껄 떠들고, 하늘에서 새들이 울고, 날씨가 유난히 화 창해서 하늘이 파랗고, 햇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정말 그렇게 별 거 없는 날이었어요. 그래서 하얀 의상이 유난히 더 하얗게 빛났던 기억 이 나요. 무심코 왕자님 같다고 말했어요. 선배가 말했어요. 이것도 운명 일까? 하고. 죄송해요, 사실은 자세하게 기억이 안 나요. 정말 별거 아닌 날이었으니까……. 선배는 여러 이야기를 했어요. 학원이나 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정체되어 있는 학원에 제가 발전을 가져다주었으면 좋겠 다고, 그래서 선배는 언제나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저에게, 선배는 또 괜히 딱딱한 얘기를 해버린 것 같다고 사과의 의미로 뭐라도 해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유난히 햇볕이 뜨거워서, 저는 눈을 가 려 햇빛을 막으며 선배를 올려다보았고, 빛나는 흰 옷을 입은 선배가 춤 을 청했어요. 분수대 앞이었어요. 물소리가 음악 같았어요. 세상이 빙글 빙글 돌고, 선배의 웃는 얼굴이 빙글빙글 돌고……. 그러다 분수대에 누 군가가 던진 돌이 떨어졌던 것 같아요. 물이 요란하게 튀고 선배가 절 품 에 끌어당겼어요. 가슴에 뺨이 닿아서 심장 소리가 들리고, 이상하게도 둘 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대로 선배가 저에게 말했어요. 너를 늘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그러게 해주겠냐 고. 즉흥시를 읊는 시인처럼, 아니면 꿈을 꾸는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로 그런 말을 하는데……. 대답할 수 없었죠. 저는 Trickstar의 프로듀서로 시작했고, 이렇게 수수한 저를 혁명의 상징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있었 고. 쉽게 대답하기에는, 그렇잖아요,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저는 어쩌지 도 못하고 당황해서 그대로 학원을 빠져나왔어요.” “하지만 거절하지는 않았군요.” “그냥 그렇게 흐지부지되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기억하고는 있군요.” 장미 양이 작게 웃습니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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