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ossi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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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ssibility

#1.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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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치자

……………………… 11p

#3. 예술가

……………………… 3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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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의 자장가는 장송곡으로 맺었다.


#1. 2700년대, 황혼의 시대에 한 소년이 생각했다.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소년은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1400그램 남짓한 자그마한 뇌 속에서 세상 모든 가능성을 가늠하도록 만들어진 소년의 머리는 필요 이상으로 영특했으나 그 심장 은 심약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가지 쳐 뻗어나는 무한한 가능성이 마른 몸을 짓 눌러갔다. 세상에는 수없이 다종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중 최선이라 할 수 있을 단 하나를 고르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았다. 그에 반해 위협은 바다처럼 도처에 산재하니 무릇 인간이란 이런들 저런들 저의 삶에서 멍청이가 될 밖에 없다. 숨을 죄는 좌절과 무력감 속에서도 소년이 가장 겁을 내는 것은 ‘죽음’이었다. 소년은 밤마다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주와 인간, 신경의 구성 원리를 머리 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소년은 세포와 단백질, 분자와 원자로 구성된 한 유기물이 며, 영장류라는 특정한 생물의 종 가운데 하나의 개체이고, 또한 그 종족의 발전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느 날 어느 시를 기하여 이 소년의 숨이 멎어 사라진 다 해도 우주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달리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렇지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면 곧 세상이 흐려진다. 소 년의 숨이 멎으면 지금 하고 있는 사고가, 온 세상을 인지하고 있는 의식이 죽고 이 세상이 따라 죽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처음 떠올린 순간부터 소년은 늘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아무에게 나 쉽게 말할 수 없는 발상인 것 또한 마음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홀로 앓아가던 소년은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은 오 로지 소년 자신의 의식으로 인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자신의 세상 의 신이었다. 그는 모든 가능성은 사람의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극물과 함께 상자 안에 들어간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여부는 누군가 상자를 열어 봤을 때에야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시점으로부터 인과가 뻗어 나가 구성된 세계를 그 주인 되는 관찰자가 인식하고 관측함으로써, 가능세계의 무한의 가능성 중 하나 가 비로소 그 의미를 피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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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찍이 무가치했던 이 세계의 이야기 또한 불특정한 당신이 들음으로 써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죄를 낳을 만큼 아름다웠던 세계의 통치자가 그녀의 연인을 바꾸었던, 이 단 한 번 존재했던 희귀한 가능성의 세계의 이야기도,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조금이나마 그 끊어진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리 믿는다. 잠깐의 유흥거리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자, 이러한 사유를 처음 시작했던 겁 많은 소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앞서 기술한 깨달음을 처음으로 얻었을 때, 멜키오르는 아주 신이 나서 날뛰었다. 어찌 즐겁지 않으랴. 단 하나의 실마리로 인해 멜키오르는 우주의 먼지와 다를 바 없는 무가치에서 한 세계의 신이 되었다.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인식의 전환이지만, 바로 그 전환 또한 멜키오르 자신의 사유로 인해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실증이 아닌가. 그렇다고 멜키오르가 저만의 세계에 마냥 안착하고 귀를 닫을 정도로 바보는 아 니었다. 당위를 얻은 멜키오르는 이제 실재를 원했다. 이 세상의 모든 가능성은 자 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자신은 세계의 신으로서 그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존재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멜키오르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이었다. 모든 선택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멜키오르는 한 세계의 주인에 걸맞은 자가 되고 싶 다는 ‘원인’으로부터 도착할,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결과’를 물색했다.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상은 바로 곁에서 숨 쉬고 있었으니.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겁 많은 그를 항상 어르고 돌보는 형이 있지 않은가. 그라이바흐로 말하자면 타고난 지휘자였다. 그는 언제나 그 섬세한 손가락 끝으 로 작품을 자아내고 이끌었는데, 이 작품에는 그가 담당하는 분야인 오토마타뿐만 이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 그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그랬고 미래 가 그랬다. 남다른 발상과 사고력을 지녔지만 유난히 겁이 많고 수줍은 동생 멜키 오르 또한 그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이보다 더 멜키오르가 생각하는 ‘자신의 세계의 신’에 가까운 인물은 또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라이바흐의 외적인 부분을 흘깃흘깃 훔쳐보았다. 당당한 품새를 보 며 구부린 어깨를 펼치고, 자신의 관심사를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대신 상대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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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생각보다 놀라울 만큼이나 쉬웠다. 그도, 손쉽게 그라이 바흐가 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같은 연구소의 시험관에서 배양된 형제였을 뿐더러, 늘 같은 상을 비추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무조건적인 모방이 편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다음에는 생각을 가져갔다. 그라이바흐는 자타공인 멜키오르의 보호자였으며 그 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하는 내밀한 친우이기도 했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가 사 석에서 형제와 나눈 현안에 대한 견해, 그리고 사물에 대한 심미안을 다른 사람들 의 앞에서 자신의 것인 양 말을 했다. 한 번 말을 가져다 나를 때마다 멜키오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의 시선이 한층 겨워지는 것과 같이 느꼈다. 그리고 소년의 세계의 위상은 한층 드높아졌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멜키오르는 연구소에 제출하는 보고서를 훔쳤다. 그러면서도 동작이 초조하기는커녕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연이은 성공에 도취한 멜키오르는 제가 선을 넘는 줄도 몰랐다. 그저 그는 원하는 결과에 다다라야만 하니 그 결과를 가져왔고, 같은 이야기가 두 보고서에 쓰여 있는 것은 이상하니 당연하게 원본을 지웠을 뿐이다. 그러니 그라이바흐가 찾아왔을 때도 멜키오르는 자신의 잘못을 바 로 직시하지 못했다. “네가 훔쳐간 것을 돌려받기 위해 왔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라이바흐의 방금 말로부터 멜키오르 자신이 붕 떠 서 유리된 듯했다. 모든 것은 잘되어가고 있었다. 그라이바흐를 따라 하는 것이 처 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나? 도둑질이라고 표현될 만큼? 그러나 반사적으로 변명을 내뱉던 사고는 빠르게 현실을 깨달아갔고 멜키오르는 숨이 막히는 두려움에 파랗 게 질렸다. 사실, 멜키오르가 정말로 저가 잘못하는 줄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다. 이 소년은 수백 년이 흐르는 시간까지도 자책과 자기 정 당화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유약한 존재이니까. “화가 난 게 아니야. 멜키오르. 우리는 형제야. 다만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 야.” 질식할 것 같은 얼굴의 멜키오르에게 그라이바흐는, 정말로 화내지 않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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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모자란 동생을 타이르듯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가 잘못한 것, 훔쳐간 것, 행동 말투 그리고 생각 하나하나까지. 그라이바흐는 그 증거물을 직접 가져오지는 않았으되, 멜키오르가 몇 분 몇 초에 어디에 몰래 숨어들어 갔는지 하나하나 서술 함으로써 웅크린 멜키오르에게 상냥하게 목줄을 채웠다. “언제나 말하지만 멜키오르, 너에게는 놀라운 재능이 있어. 나는 가지지 못한 무 서운 집중력이나, 번뜩이는 발상 같은 것들 말이야. 네 본유의 소중한 가치를 더욱 아꼈으면 해.” 본래 자신이 가진 특성을 두 번 다시는 따라 하지 말라는, 완고한 거절이었다. 자신의 방에 돌아와 홀로 앉은 멜키오르는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누군 가를 순수하게 동경하여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했으나 돌아온 것은 그 대상으 로부터의 타박과 매도였다. 차라리 그라이바흐가 남들 앞에서 멜키오르의 치부를 폭로하고 모욕했다면 그 섬약한 마음이 복수의 감정으로 부끄러움을 불태워 마음 깊은 곳은 편안했으리라. 그러나 비밀로 남은 죄의 증거가 은근한 협박이 되어 그 의 작은 체구 위에 무게로 얹혔다. 그 무게로 인해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의 앞에 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멜키오르의 가능성에는 사슬이 매였 다. 차라리 용서를 빌고서 조금이나마 죄악감에서 벗어나 떳떳해졌으면 좋았으련 만, 모든 가능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어진 그의 신경 체계는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세심했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가 자신에게 어떤 속박을 걸었는지 알았고, 그라이바흐 또한 다시금, 아니 전 이상으로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멜키오르에 대해 알아채 지 못할 리 없으면서 형제에게 이제 괜찮다 말해주지 않았다. 더 이상 그라이바흐 는 일거수일투족을 멜키오르와 함께하지 않았다. 홀로 혹은 따로 보내는 시간이 늘 어났다. 혹시 그라이바흐가 이 때문에 레드그레이브와 맺어진 것인지, 혹은 레드그레이 브와 시간을 보내느라고 더욱 멜키오르와 소원해진 것인지는 아직 멜키오르에게는 관측되지 않은 상자 속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멜키오르는 속으로 형이 자신을 용서하기를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그라이바흐를 원망했다. 스스로 다시 생각해 자신을 허락할 수도 있었으련만,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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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움츠러든 채였다. 친우이자 형제에게 거부당한 멜키오르는 다시는 다른 사 람에게도 쉽게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나 유약하고 방자한 사람이 안타깝게 도, 이 세계의 신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가련한 신이 그 세상의 유일한 사랑을 마주쳤을 때, 그 사랑이 축복인 동시에 저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녀는 완전이고 영원이었다.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의 미소를 보며 멜키오르는 넋을 놓고 웃다가 그 입가에 미 소가 가시면 진저리쳤다.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리다 테이블 아래로 레드그레이 브의 손을 잡고 있는 그라이바흐와 얼굴이 마주쳤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 만은 훔치지 않았다. 훔칠 수도 없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라이바흐는, 이번에도 화내지 않았다. 상시 날카로운 그의 눈매가 지금은 생각 외로 따뜻했다. 조금 짜증이 어린 것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구제불능의 형제를 따스하게 동정하며 웃고 있었다. 멜키오르는 말을 더듬으며 급히 작별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뛰쳐나갔다. 토기가 올라왔다. 허공에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위에서 신 내가 올라올 때까지 거듭했다. 그래도 가슴에 엉긴 고름은 떨어지지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거부된 마음은 그렇게 터질 듯이 쌓이고 응고되어 고름이 되었 다. 자신을 대하는 레드그레이브의 얼굴에서 동정 비슷한 빛이 눈에 띄면 그 위로 그라이바흐의 조소가 겹쳐 올라왔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여신은 나를 진심으로 신 경 써주는 걸까, 역시 이 마음을 눈치채고 있지 않을까, 혹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한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가지 쳐 자라날 때마다 감정은 숭배와 혐오의 극과 극 사이를 위태롭게 기우뚱했다. 레드그레이브가 말을 걸면 멜키오르는 수줍 어 고개를 숙이면서 속으로 그녀를 열두 번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고름은 터져나가 인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 멜키오르 는 마침내 여신을 그 손에 넣었다. 어떤 수단으로 그러했느냐, 그것은 아직은 그렇 게 중요한 기록이 아니다. 간략하게 기술하자면 그는 유리병에 담은 편지를 바다에 띄우며 사랑하는 이에게 닿기를 바라는 소년처럼, 가능성의 배를 띄우고 그 선실에 자신의 운명을 위탁했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데다 움츠러든 그는 자기 세계의 여 신에 대하여 어떤 것도 직접 바꾸려고 시도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었기에. 실패한 사랑으로도 아이를 낳을 수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인과에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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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점이 있다. 그것이 순리다. 이것은 또한 하나의 시작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 아직은 그렇게 중요한 기록이 아니다. 지금부터 보고자 하는 것은 아이를 먼저 낳고 나서 이어진 사랑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응당 자신의 연인이어야 할 여 인을 거대한 의지에 빼앗긴 한 남자가 어찌 그 아슬아슬한 정복욕의 고삐를 놓치 고 날뛰었는지, 그리하다 결국에 무엇을 낳았는지의 기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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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잠시 이 세계의 더욱 오래된 기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들이 흔히 역 사라 부르는 것에 그들이 믿는 바처럼 고유한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다. 나비의 날 갯짓으로 시작된 바람에서 태풍이 비롯하듯이, 인류가 오래도록 의미를 부여한 과 거의 누적은 사소한 계기로도 쉽게 스러져 그 의미를 잃는다. 지금 과거를 보고자 하는 것은 그저, 이 인과의 시작점을 되짚어 보기 위함이다. 황금의 시대, 엔지니어들이 인간을 닮았으되 무한한 동력으로 무한히 지속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낸 오토마타에 인간은 노동을 일임하고, 의무를 내 어주고는 의지와 지략까지 놓았다. 세상이 급변하며 제 의미를 잃은 국가와 기업은 이 모든 일을 초래한 엔지니어들에게 세계를 위탁한다. 앞서 아는 이를 자처하던 엔지니어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손에 세계가 떨어지자 뜨거운 불을 쥔 어린아 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급조된 통치기구에서 당장 큰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자 그들에게는 전에 없던 견제와 파벌이 생겨났다. 싸움은 다시금 소모와 전쟁을 낳을 것이다. 안 된다. 우리는 지혜를 통하여 앞서 아는 자이니 과거의 실 책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세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허나 우리도 안 된다면 어느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긴단 말인가? 역사를 되돌아볼 때 오래된 권력은 반드시 고인 물이 되어 타락한다. 인간의 지배자도 결국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인 자신의 행복을 좇기 때문이다.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토의하던 선지자들 가운데서 하나의 발언이 주창되고 곧 여러 목소리가 하나로 모였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면 되겠군. 처음부터 인간을 지 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면 되겠군. 우리가 무한의 동력을 지닌 자동인형을 만 들었듯이, 통치자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내면 되겠군. 자동인형으로 만들기에는 현재의 기술에 한계가 있으니 자동인형을 개발할 존재 를 만들자. 그 동력원인 케이오시움을 연구할 존재도 함께 만들자. 그러나 무엇보 다도 통치자를 만들자.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스스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적 어 남을 우선 사랑하는 존재. 자신보다는 남의 행복을 좇는 존재를 만들자. 전설 속의 지모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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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통치자를 다른 이들은 어떻게 믿고 따를 것인가. 모두를 사랑하는 그 를 모두가 사랑하도록 아주 아름다우면 되겠군. 인류를 이끌 지고의 지성을 모자람 없이 포장하도록 눈동자에는 빛깔을, 살결에는 향기를, 입술에는 매끄러움을 주자. 신들에게서 모든 선물을 받은 신화 속 최초의 여성처럼. 하지만 그 심장에 자기 자 신은 없도록. 그리하여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제 지혜를 믿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최초의 여 성,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서 이브가 태어났다.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완성된 작품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엔지니어들은 이브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나 되 지나치게 노골적이지는 않도록 레드그레이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린 레드 그레이브는 이 모든 이야기를 몇 번이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하여 들었다. 그 때마다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세상 가장 고귀한 사명을 부여받은 데다 그를 능히 실현할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축복이고 행복일지어니. 만들어진 존재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이들을 원 없이 사랑했다. 비록 그들이 개미와 같은 미물일지라도. 먼저 아는 이들로부터 더 먼저 아는 이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도 그랬을 것이 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당연하게 깨닫는 이치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설명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야기에서 귀를 닫았다. 소녀는 그 어리석음에 못내 가슴이 아팠다. 어린 어머니는 그들이 불민하여 눈총 하다가도 연 민했고, 어여삐 여겨 더욱 열렬히 사랑했다. 이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외로움이라 부르는 감정임을 깨닫는 것은 훗날 그녀가 연인을 얻고 또 잃은 다음의 일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여 만인을 굽어보면서도 그들이 사는 세계의 안녕을 위해서 는 제 몸이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통치자가 완성되었다. 그러니 엔지니어들의 갸륵한 계획은 레드그레이브라는 단일 개체에서만큼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바 로 그 성공이 재앙을 낳았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에 내재한 한계일지언정 말이다.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향내가 나지만 꿀이 없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자 를 빚었으니, 이 여자로부터 비롯된 가능성으로 사람이 미치고 세계가 미치고 신이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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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을 굽어보던 소녀는 성장하여 통치자가 되면서 사람을 크게 두 가지 시선으 로 바라보게 되었다. 때와 개체, 상황에 따라서 사람은 약하고 어리석어 다스림이 필요하기도 하며, 재능에 꽃을 피워 전자의 사람을 보살피도록 장려할 수 있기도 하다. 가령, 테크노크라트라면 대개 후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선에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했다. 통치자의 유이한 이해자이며, 세상에서 배제되어 타자를 다스리는 그녀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자들 이다. 레드그레이브는 자신과 함께 태어난 그 두 사람을 형제라고 불렀다. 시간이 흐르며 이 형제들로 인해 여신의 신성은 어느 정도 빛을 잃었다. 멜키오르는 그나마 나았다. 이 가엾은 형제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완전히 매료되 어 있지만 그 감정은 숭배에 가까운 것으로, 어려서부터 감히 여신에게 무언가 원 할 엄두는 내지 못하는 치였다. 더군다나 이 시점의 멜키오르는 안쓰러울 정도로 위축된 상태였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지 눈 아래 까맣게 그늘이 진 데다 말까지 더듬고 있으니 더할 말이 없다. “괜찮아, 멜키오르? 요새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리해서까지 모임에 참 여할 필요는 없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레드그레이브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말을 걸자 멜키오르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그라이바흐가 나지막이 덧붙인다. “그러게. 얼굴이 완전히 빨갛잖아?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 내가 보내준 오토마타는 아직 연구소에 있지? 어서, 멜키오르.” 그러나 그라이바흐는 감히 여왕을 소유하려 한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레드그레 이브로선 한 순간도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없을 정도다. 귀까지 빨개진 멜키오르가 쫓기듯 사라지자 레드그레이브는 잔을 얼굴께로 당겨 차향을 음미했다. 그라이바흐의 홍차는 항상 완벽에 가깝건만 이번엔 어째 급하게 달였는지 쓴 내가 있다. “오늘따라 짓궂네, 그라이바흐. 의젓한 형은 어디로 간 거야, 당신?” 그라이바흐는 눈을 내리깔고 느긋이 차를 홀짝였다. “그래, 우리는 형제지. 레드그레이브 네가 어머니인 건 아니야. 멜키오르도 성인 인데 이제 슬슬 자길 스스로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어? 언제나 말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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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그레이브 너는 조금 무심해질 필요가 있어. 멜키오르에게나, 인민들에게나.” 레드그레이브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목숨의 경중을 따지는 일에도, 사람을 수치로 계산하는 일에도 위화감은 닳고 닳아 흔한 일상이 되었다. 여기서 더 무심 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연인의 앞에서 개의하는 내색을 할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러니 그녀는 그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남자의 내리깐 눈에 제 눈을 맞추고 웃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라이바흐. 이렇게 여유 없는 모습은 당신답지가 않네. 대체 뭐가 그렇게 초조해? 나는 지금 이렇게 당신 앞에 있잖아.” 모른 척 딴청부리며 눈을 피해 보던 남자는 결국 시선에 굴복해 뺨을 붉히고 말 았다. 한숨이 닿은 찻잔 안에 파문이 일었다. “멜키오르는 저번 실험에서 선을 넘었어. 스테이시아, 너도 기억하지? 본인도 그 걸 아니까 저렇게 제 발 저린 거잖아. 그리고 요즘 어쩐지 감이 좋지가 않아서…” “그런가? 내가 보기엔 멜키오르는 언제나 같은데. 그보다도 놀라운걸… 당신도 감이라는 걸 믿어? 과학적 알고리즘의 총아이신 그라이바흐님이.” 남자는 고개를 까닥이면서 여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확인하려는 듯 몇 번이고 매만졌다. “확실히 내가 과민한 것 같네… 주사위를 만 번 던져 모두 6이 나오는 세계도, 이 홍차가 다시 100도로 끓고 있는 세계도 여기에는 없는데.” 그러나 레드그레이브는 그 손을 슬쩍 빼 그라이바흐의 홍차 잔을 톡톡 소리 나 게 두들겼다. “만약에 그런 세계가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라이바흐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간 찻잔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어 자 기 몫의 홍차를 단숨에 꿀꺽 삼켰다. 깨끗하게 빈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레드그 레이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곧 사레가 들어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레드그레이 브는 벌떡 일어나 그라이바흐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러나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미처 참을 수 없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콜록거리며 그라이바흐는 가 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 줘, 레드그레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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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미안해, 그라이바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잘 아는데.” 레드그레이브는 허리를 빙그르 돌려 그라이바흐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그게 레드그레이브가 그라이바흐를 사랑하는 이유거든. 귓가에서 입술을 떼고는 천진하게 웃는 여자의 앞머리를 그라이바흐가 조심스럽 게 쓸어 넘겼다. 레드그레이브의 입가에 방금까지와는 다른 미소가 걸렸다. 그라이 바흐는 그 입매를 홀린 듯 한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하나로 합쳐진 두 사람의 그림자 뒤로, 채 비워지지 않은 레드그레이브의 찻잔 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다.

운명 같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토마타식으로 말하자면 선택적 주의 모듈의 설정 문제와 같다. 특정한 상대에게 끌림을 느끼는 인간의 뇌는 그 사람에 관련된 정보에 의식을 집중하게 된다. 이를 인간은 ‘운명’처럼 사랑하는 상대의 정 보가 자신의 곁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자 면, 특정 인물이 한 사람의 주변에 유독 자주 비추어진다면 인간은 이를 사랑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라이바흐와의 대화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척 넘겼으나, 약자를 고려하는 것은 레드그레이브에게 본성과도 같이 각인된 기질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멜키오르의 상 태가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걱정을 앞서는 기대가 있었다. 일과 후에 저택에서 만나자 속삭이던 연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그녀는 뺨이 발개 져 아까의 멜키오르에 대해선 영 잊고 말았다. 바야흐로 ‘운명’이 조금 더 필요한 시점이었다. 홍보국과의 회의에 들어간 레드그레이브는 그녀답지 않게 남은 안건의 수와 예 상 완료시간을 헤아리는 중이었다. “레드그레이브님?” “말하게나.” 생각이 분산된 티가 날 정도였나, 하필 연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물론 그런 속내와 별개로 별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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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현재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집무실의 스크린에서 기술관의 영상이 흐려지고 장면이 전환되었다. 그러나 그 설명대로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했고, 평온하다기보 다도 오히려 황량한 광경이었다. 풀 한 포기 없이 황폐한 벌판의 중앙에 선 건물은 그녀에게 낯이 익었는데, 바로 멜키오르의 연구소였다. 불경한 실수에 바로 겁먹어 창백해진 기술관의 낯빛이 레드그레이브는 썩 기껍지 않았다. “오… 오류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표시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리어 연구실의 모습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었다. 황망함 이 극에 달한 기술관의 두 번째 사과 다음으로는 연구실 내부가 비추어졌고, 마침 내 레드그레이브가 비서관에게 저녁에 멜키오르의 연구실을 방문하겠다고 전한 후 에야 스크린은 기술관의 뜻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회의를 마치고 그녀는 일단 먼저 그라이바흐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라이바흐가 독점욕 강한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연인을 대하는 데 이골이 난 것이 또 레드그레이브였다. 원하는 마음만큼이나 그녀에게 무른 남자였으니. “미안, 아무래도 멜키오르가 걱정이 되어서 가봐야겠어요. 그래도 당신이 보고 싶어서 들렀지. 아냐, 당신 바쁜 시간을 더 뺏을 수는 없지. 그냥 우리 내일 다시 보기로 해요. 그때 마저 하자.”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입술을 가볍게 대자 남자의 굳은 입매는 슬며시 풀렸다. 두 사람이 서 있던 그라이바흐 저택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한 송이 한 송이를 공 들여 가꾼 화단에서 레드그레이브는 선명하게 물오른 노랑수선화 몇 송이를 잘 골 라서 꺾었다. 손질한 수선화는 수백 알레 떨어진 멜키오르 연구소의 창가에 가서 놓였다. 빈 화병에 꽃을 비스듬 꽂아 넣고, 레드그레이브는 품에서 노란 손수건을 꺼내 형제의 이마에 맺힌 땀을 천천히 닦아냈다. 혹시나 걱정되는 마음에 그렇게 오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연구실 바닥에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널브러져 있는 물체가 그라 이바흐가 언급했던 오토마타일 것이다. 멜키오르의 상태는 한 마디로, 아주 좋지 않아 보였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 송골 맺혔고 얼굴은 붉다. 병 때문인지, 레드그레이브 자신의 존재 때문인지 불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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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긴 하지만… 이불을 귀까지 끌어올리고 눈만 빼꼼 내놓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후자의 이유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마워, 레드그레이브. 이만 돌아가도 돼… 가벼운 감기니까 푹 쉬다 보면 저절 로 낫는대.” “이해가 안 돼, 멜키오르. 매해 발생하는 바이러스의 백신은 빠짐없이 접종받고 있을 텐데, 감기라니.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돌아가라는 거야… 백신이 듣지 않는 균이라면 너에게 옮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 그럼 푹 쉬어요. 오토마타에 대해서는 내가 그라이바흐에게 전할 테니까 또 무리해서 연구하려고 일어나지 말고… 응?” 자상히 당부하고 방을 나서는 레드그레이브의 발 앞으로, 캐비닛에서 하필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최근 날짜로 되어 있는 주치의의 소견서였다. 이상 없음. 눈이 멈추었다. 그녀의 뇌가 두 단어와 아까 멜키오르가 하던 말들을 대조한다. 직감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다. 레드그레이브는 그것을 못 본 체하고 방을 나섰다. 멜키오르에 관한 일이라면, 레드그레이브가 의논할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는 바 와 같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 사람 사이에 맏형 역할을 해온 이였으며, 멜키오르 와는 어려서부터 각별히 이야기를 나누어 온 친우였고 그 모든 이전에 그녀의 연 인이었다. “레드그레이브. 좀 전에 봤었는데. 혹시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야?” “그라이바흐. 최근에 멜키오르에게서 뭔가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했어요? 멜키 오르의 증세,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병과도 조금씩 다르다더라. 의사들한테서는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지만, 의학에도 통달한 당신이라면 뭐라도 알지 않을까 하고 연락했지.” “레드그레이브.” 화상 속의 그라이바흐는 짜증이 섞인 투로 응수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 너는 조금 무심해질 필요가 있다고. 멜키오르의 몸은 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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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르가 어련히 알아서 잘 다스릴 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만 신경 쓰고 네 일에만 집중하면 돼.”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레드그레이브.” “그렇구나…” 눈을 가늘게 뜨고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이상했다. 그라이바흐는, 절대로 그녀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째서? 형제들이 그녀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엇을? 아마도 멜 키오르의 상태에 대해서. 그렇다면 어떻게? 딴청부리며 고개를 슬쩍 돌려 눈을 피 한 그라이바흐의 화상이 종료되자마자 레드그레이브는 비서관을 불렀다. “내일부터 저녁마다 멜키오르의 연구소를 방문할 계획이다.”

레드그레이브가 매일같이 멜키오르의 연구소를 방문한 지 벌써 며칠이었다. 어 쩔 수 없이 익숙해졌는지 이제 멜키오르는 찾아온 레드그레이브를 곧이 보지도 못 하고 얼굴부터 급히 돌려 피하진 않았다. 그러나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영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병상 위로 굽은 허리에 손에는 화병이 들렸다. 레드그레 이브가 첫날에 가져다 놓았던 수선화였다. “물을 갈려던 거지? 이리 줘, 멜키오르. 내가 할게.” 화병을 받아들고 개수대로 걸어가는 레드그레이브의 등 뒤로 초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보니까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시들어 가서… 다시 살릴 수 없을까?”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식사는 했어?” 대답은 없었고 부정의 뜻을 이해한 레드그레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꽃 한 송이 를 자기 몸보다 우선 챙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살리기는 힘들 거야… 멜키오르. 나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꽃 한 송이가 저의 몸보다 중할 이유가 어느 가슴에 있을까. 타인의 마음을 끌 도록 태어난 레드그레이브는 그와 같은 마음을 익숙히 알았다. 꽃에 나비가 따르듯 자연스러워 그녀가 의문 가질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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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제가 아픈 까닭에 포함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느 의사도 이유를 모른다 하는 발진, 발열. 이유를 육체에서 찾을 수 없다면 마음의 문제일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녀가 더 확실히 떠보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낫다 싶었다. “이것 봐, 다 시들어 버렸잖아. 아 그래. 수선화가 무얼 뜻하는지 알아요?” 언제나 수줍은 형제에게 뚜렷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레드그레이브는 길게 뜸 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랑의 보답. 이 꽃은 이제 안 되니 이만 놓아주자, 멜키오르.” 꽃을 개수대 위로 쏟아버리려는 찰나, 레드그레이브의 등 뒤에서 크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놓지 마… 왜 그렇게 쉽게 놓는 거야.” 묻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이미 대답을 아는 질문. 순간 레드그레이브는 꿈꾸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았고 멜키오르는 고개를 숙였다. 그 둘 모두는 한 명 의 남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멜키오르가 사랑을 말해서도 바라서도 안 되는 이유. 그래, 그 남자. 사랑에 전부를 바친다는 미명 아래 자신과 세계를 저주했던 멜키오르였다. 그런 데 그 세계가 직접 입을 열어 산뜻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부정하는 경험은 어떠했 을까. 당혹과 부끄러움이 범벅이 되어 완전히 숨을 틀어막기 전에 그는 가까스로 떨리는 입을 열어 말을 뱉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결정지어 버리는 거야… 나는 세계를 걸었어. 다른 사람이 라면, 그라이바흐라도 상상도 못했을 일이야. 마음이라면 내가…” 말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쨍하고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말소리를 덮어버린 탓 이다. 쪼르륵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여자의 손에서 놓친 화병이 개수대 위로 굴 러갔다. “그라이바흐는.” 상시 차분한 레드그레이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음 높았다. 멜키오르는 그리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레드그레이브도 그렇게 응대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이미 물 릴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그라이바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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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녀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세계 같은 건 걸지 않았어. 세계는 나의 영역이거든. 그는 나를 나로 존중하고, 대신에 그 자신을 온전히 걸고 내게 부딪쳐 왔어. 그게 레드그레이브가 그라이바흐 를 사랑하는 이유야. 그것이 변하지 않는 현실이고,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인걸. 그 렇지, 멜키오르? 당신은 고금을 통틀어 첫째로 명석한 연구자잖아.” 힘껏 상냥한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방을 채우는 적막이 기분 나쁘게 축축했 다. 화병에서 흘러나온 습기 속에 남녀가 꼬륵 잠겼다. 이윽고 침묵을 깨는 멜키오 르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레드그레이브…” 엎질러진 꽃대는 이제 다 무너져가고 남자도 그 모양을 똑 닮았다. “어릴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잠들기 전의 나는 일어난 후의 나와 정말 같은 인물일까… 너는 웃어넘겼지. 그때도, 너는 말도 안 된다 했지. 그렇지만 난 아직 도 자기 전마다 생각해. 내일 아침 일어나면 지금의 나는 사라지고 무언가 달라져 있지 않을까. 눈을 뗄 수 있었다면, 진작 뗐을 텐데.” 레드그레이브는 그 눈을 피했다. 돌이켜보면 세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현실에서 붕 뜬 역할극 같은 느낌이 있었다. 아무도 지어준 적 없는 형제라는 명칭부터가 그 렇지 않은가. 애초에 그들에게는 부모가 없었으니. 사랑을 퍼부어줄 이가 없는 외 로운 이들이 가족을 모방했다. 연극은 어째서인지 지금껏 한 번도 표나게 어긋난 적 없었다. 알고도 모른 체, 맞아도 아닌 체. 그러나 리듬이 어긋난 이 순간 레드 그레이브는 외길을 넘어지기 직전, 혹은 연한 것을 깨뜨리기 직전과 같은 불길함을 몸에 스미게 느꼈다.

그녀가 다음으로 멜키오르의 방에 왔을 때,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빈 화병이 눈에 뜨였다. 창가를 보니 수선화는 화분으로 옮겨 심어져 있었다. 물론 그나마도 다 죽어가는 채였다. “오늘은 늦었네… 기다렸어.” “응, 그라이바흐의 상황이 안 좋아서 들렀다 왔어.” 정적이 공기를 지배하기 전 레드그레이브는 재빨리 멜키오르가 좋아할 만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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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화제를 꺼냈다. “여기 이 화병, 꼭 여기 연구소를 닮았네. 위로는 좁지만, 아래는 훨씬 방대해.” 그간 멜키오르의 연구소를 방문하면서 눈에 가장 띈 점이었다. 연구소 지상의 실험실도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 과해 보일 정도로 수가 많았지만 그 지하에 펼쳐 진 기계실은 훨씬 깊고 넓어 볼수록 의아했다. “당연한 일이야. 케이오시움은 그저 무한한 동력원으로만여겨지지만실은 훨씬쓸 모가넓고위험한힘이야. 여기지하에있는건 그힘을 판데모니움전체에 안정적으로공급 하기위한 제어장치야. 여기가바로 판데모니움의 기반이 되는 장소인거지. 그러니 그 안에는 함부로 들어가선 안 돼.” 기다렸다는 듯 쏟아내는 말에 레드그레이브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멜키오르는 정말 케이오시움을 좋아하는구나.” 대답은 잠시의 침묵 후에 돌아왔다. “생각해 봐, 레드그레이브. 인류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같은 실수를 끝없이 반복 해 왔어. 이 세계를 개선하고 더 이상 오점이 없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야.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 최선을 고르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이 케이오시움이 없다면. 가능성의 물질은, 우 리 존재와 맞닿아 있는 거야.” “과연 알 것도 같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이루기 어려운 하나의 최선만 을 바라보다가는 정작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고 나머지까지 함께 어그러져 버릴 수도 있어. 이상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평상시에는 가장 가까운 가능성에 도 눈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네가 세계의 통치자인 거지. 나는 이 갈망 때문에 가능성을 연구하는 거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갸웃거리는 레드그레이브를 보고 멜키오르는 재빨리 덧붙였다. 멜키오르가 자신 의 분야에 대해서 말을 끊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물론 요즘 들어 멜키오르가 눈에 띄게 말을 돌리는 분야는 하나 더 있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아무튼 나는 네가 더 가깝고 소중한 것도 고려했으면 좋겠어. 가령 멜키오르, 네 몸 상태에 대해서 뭔가 짐작 가는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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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둬, 레드그레이브. 내 증상은 원인을 몰라. 영영 나을 수 없을 거야… 그래도 한창 심하던 때보다는 나아서 연구는 할 수 있으니 상관없잖아.” 단순히 상태 난조로 인한 증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까닭 모를 발진, 오한, 급 격히 상승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체온, 무엇보다도 자꾸 의뭉스럽게 말을 돌리 는 형제들이, 레드그레이브가 아직도 멜키오르를 계속해서 방문하며 관찰하는 주요 한 이유였다.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형제들을 보살펴 살피지 못한다 니 안 될 말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이렇게 아플 때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황량하게 지내고 있 으니 그런 소릴 하는 거지. 당신은 원인을 찾아서 건강해지고 이 연구소도 다시 사 람들로 북적일 거라고 난 믿어요. 함께 믿고 힘쓰면 될 거야.” “믿으면 될 거라고?” 멜키오르는 웃는 것처럼 밭은기침을 했다. “이미 안 된다고 못 박혀 있는 것도, 된다고 믿고 노력하면 되는 걸까?” 레드그레이브는 잠시 대화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멜키오르의 연구실에서 사 람이 사라진 것은 그가 우주공간에서의 케이오시움 안정도 조사실험의 준비에 완 전히 몰두하여 두문불출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레드그레이브 자신을 모델로 한 인형에 신성을 부여하기 위한 연구를 하면서부터였다.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날 멜키오르는 평소보다 유난히 크게 앓았다. 레드그레이브는 혼수상태로 보 이는 멜키오르의 이마를 닦고 땀에 젖은 푸른 머리카락을 한 움큼 뒤로 넘겨주었 다. 그는 아무도 남지 않아 황량한 연구실에서 푸른 곰팡이처럼 부질없이 슬어가고 있었다. 창백한 이마 위에 차가운 팩을 올려놓고 레드그레이브는 중얼거렸다. “안 된다고 못 박혀 있는 것, 그래서 네 생을 바쳐 무얼 끌어낸 거니… 너의 청 춘을 애도해, 멜키오르.” 환자의 감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레드그레이브는 그것도 못 본 체하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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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여자를 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남자와 그 마음을 보고도 모른 체 하는 여자의 서글픈 이야기는 아슬아슬 이어져갔다. 그러나 이래서야 지지부진하다. 언 제 끊어질지 모르는 이야기가 축가로 피어나기 위해서는 더욱 극적인 사건이 필요 했다. 모든 인과에는 시작점이 있으니. 그러니 여기에 무엇을 더하면 좋을까? 따지고 보면 가능성을 생성하는 데 있어 가능성의 물질만큼 직접적인 매개는 없을 게다. 게다가 레드그레이브는 아낌없이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였고, 최고의 지성을 완성하기 위한 호기심과 탐구욕도 모자 람 없이 받았다. 요소는 충분했다. 남자는 여자를 앓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간호하는 기묘한 관계는 그렇게 한동 안 계속되었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비록 동기가 따로 있었더라도 레드그레이브는 자신 나름대로 간병에 충실했다. 죄책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그녀의 발목을 멜키오르에게로 잡았고 그녀 고유의 냉철한 이성이 이런저런 변수를 재며 그녀를 형제에게로 떠밀었다. 그날도 멜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가 준비한 유동식을 입에 대고 있었다. 그러나 곧 급작스 럽게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고 방을 뛰쳐나갔다. 문밖으로 나 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형제의 등 뒤에서 기이한 빛이 난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어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니, 잠시만의 착각이었던 것인가 멜키오르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고 스스로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이진 않았다. 긴장이 풀려 레드그레이브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의자 위에 걸터앉 아서 멀어지는 멜키오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레드그레이브는 문득 어지러움을 느꼈다. 멜키오르가 흔들린다. 아니,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부터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고 형제를 불러보았지만, 소리가 닿지 않았다. 가만 앉아 멜키오르를 기다리고 있자니 영 거슬림이 멎지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진동의 근원지를 찾고자 방을 나섰다. 길게 펼쳐진 연구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던 그녀는 난간에 팔을 기댔다. 난간 아래로는 검게 그늘진 지하가 펼쳐져 있었고, 이 진동의 출처는 아무래도 지하 기 계실인 것 같았다. 이제 손가락으로 꼽지도 못할 만큼 많은 횟수를 멜키오르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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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에 와 보았지만, 복도 곳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방대한 지하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지하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 지 않았다. 다만 간헐적으로 색색의 빛이 반짝, 반짝 알알이 눈을 유혹했다. 더 자 세히 보고자 그녀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순간, 실내에 불 리가 없는 돌풍이 휭 일었다. 팔랑, 눈앞에 노란빛이 스치고 팔을 되는 힘껏 뻗었지만, 이미 주머니 안에 있던 손수건은 어둠 속에 떨어진 후였 다. 그녀는 잠깐 주저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레드그레이 브이건만,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어째 예후가 좋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쩔 방 법이 없었다. 그녀는 짧은 탄식을 내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세계의 통치자에게 기계실의 보안장치는 쉬이 허가를 내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장치로 가득한 방대한 지하를 그녀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나아갔다. 시 간이 걸렸지만, 꽤 멀리까지 끈기 있게 살피자 바닥 위에 떨어져 있던 손수건을 발 견할 수 있었다. 허리를 굽혀 노란색의 손수건을 손에 꼭 쥐며 레드그레이브는 안 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일어서다 보았다. 어두운 기계실 중앙에 부유한 채 빛을 내며, 이 진동의 근원임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제 몸을 바르르 떨고 있는 수정. 케이오시움을 영상으로는 간혹 보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크고 온전한 결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색을 빛내며 수정은 공중에 흔들리고 있었다. 매혹적인 빛이었다. 그녀가 그때 느 낀 감정은, 감정이라 해야 할까. 감각은 육감에 가까웠다. 이것은 곧 힘이고 가능 성이며 권능이다. 그런데 어찌 저렇게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지. 그녀는 손을 뻗어 보았다. “어?” 케이오시움은 자석이 붙는 것처럼 레드그레이브의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힘을 가해도 쉽게 떼어지지 않았고, 뗀다고 해도 그녀는 수정을 다시 띄우는 법을 몰랐 다. 그제야 멜키오르가 이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그 안에는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돼, 레드그레이브.’ 무언가 잘못해버린 걸까,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그대로 다시 방에 올라가니 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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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오르가 돌아와 있었다. “멜키…” “거기서 손 떼, 레드그레이브!” 멜키오르는 곧바로 기겁하여 수정에 손을 휘저었고,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오색의 수정은 액체 같기도 하고 기체 같기도 한 양으로 끈적하게 녹아 나더니 멜키오르의 손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전이었다. 폭발하는 별처럼 세상이 빛과 어둠을 눈 아프게 명멸했다. 그러다 겨우 익숙해지려는 찰나에 검게 꺼졌다. 어스름 속에서 잡기들이 요란한 소 리로 부딪히며 방바닥 위로 흩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땅이 흔들리고 있었 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멜키오르!” 멜키오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겠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 케이오시움보다 더욱 본질의 영역에서 비가역을 가역으로 환원하 고, 엔트로피를 되돌리는 게 뭐라고 생각해?” 지축이 흔들리며 정렬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레드그레이브가 몸을 작게 말아 웅크리고 소리쳤다. “어서 말해줘, 멜키오르! 이 상황을 해결해야해!” 멜키오르는 가운을 벗어 레드그레이브의 몸 위로 덮어 주고는 쪼그려 앉아 그녀 를 마주보았다. “인간의 의지야. 인간의 의지의 정수로 태어난 네가 혼돈으로 향해야 마땅할 세 계에 질서를 부여하듯이,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 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레드그레이브? 비가역을 가역으로 환원하는 케이오 시움은 인간의 의지에, 갈망에 결합해. 아까 본 것처럼.” 레드그레이브가 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아는 네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도 그라이바흐도 네가 그 런 것에 신경 쓰길 원하지는 않았으니까. 네가 빛 속에 있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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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항상 케이오시움에 노출되면서 이능을 얻은 사람들이 있었어. 공통점을 짚어 보면, 강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거야. 부작용을 생각하면 이능이라기보다 는 차라리 오염이겠지만… 그래서 엔지니어들은 케이오시움을 전담하여 연구할 단 한 명의 희생양을 만들어낸 거고. 덕분에 나는 그동안 연구하던 가능성 덩어리 녀 석들의 숙주가 되어서 이렇게 몸의 기작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있던 거지.” 그는 손바닥을 활짝 펴보였다. 이제는 뚜렷이 보였다. 분명 인간의 몸이 띠어서 는 안 될 오색의 광채를 띠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았어? 계속해서 물어봤는데?” “네가 없다고 했잖아. 가능성은.” 멜키오르가 조소했다. “너는 지금처럼 그라이바흐와 둘이 행복하면 되는데, 형제라는 이유로 나를 신 경 쓸 필요는 없잖아… 그렇다고 해도 나도 설마하니 케이오시움이 이렇게 완전히 흡수될 줄은 몰랐네. 내 갈망이 어지간히도 컸던 모양이야.”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는 레드그레이브에게 멜키오르가 손을 저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레드그레이브… 이제 판데모니움은 약 다섯 시간 안에 추락 할 거야. 물론 아마 이미… 봐. 전 시민 대상으로 긴급대피령이 내려왔네.” 긴급 대피를 통보하는 스크린의 배경으로 빛을 잃고 엉망이 된 판데모니움의 모 습이 비추어졌다. 화면 너머에서 무너지는 도시를 파도치는 비명은 흡사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창문 틈으로 들이닥친 돌풍과 함께 급격히 찾아온 오한이 판데모니움을 돔 형태로 감싼 기온조작기구마저 동작을 멈추었다는 사실을 폐부에 서늘히 새겼다. “어떻게 된 건지 알려줄게. 방금 나에게 흡수된 케이오시움은, 판데모니움 내부 의 케이오시움 동력원을 총괄해 관리하는 제어 장치의 코어야. 혼돈에 기원을 둔 이 동력에는 반드시 억제가 필요하거든. 그런데 내 몸에 연동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정상적으로 말을 듣게 만들 방법이 없는 거지. 비상 시스템이 최고 효율로 동작할 때 다섯 시간이야. 추락 이전에 다른 대체 동력원을 설치하는 것도 불가능해.” 잠시 말이 멎고 발작적인 기침 소리가 방을 대신 메웠다. 한 눈에도 낯빛이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해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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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시스템을 조작해서 수정할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이렇게 엉망 으로 꼬인 상태에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루프에 돌입해서 케이오시움이 폭주 할 가능성이 농후하거든. 그게 바로 지금 최대의 걱정이야. 이렇게 제멋대로 동작 하고 있는 코어가 폭주해 버리는 것. 만약에 코어에 연결된 모든 케이오시움이 폭 주하게 된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네. 케이오시움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힘이거든. 하지만 내 연구 경력을 걸고 이 세상이 아주 혼란스러 워질 거라는 사실은 단언할 수 있어… 대참사라고 하면 되겠지.” “그렇다면 다른 대책은 없어? 혹시 아까의 케이오시움이 자연적으로 원 상태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이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정상화될 가능성은 음… 약 0.0002% 정도겠네. 기적 이지. 바라지 않는 것이 좋아.” 기적을 말하며 멜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를 물끄러미 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모든 사물과 가능성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관조하듯이 초연한 낯 으로 그녀에게 멸망을 이르는 멜키오르는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레드그레이브는 알 듯도 모를 듯도 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이 모든 인과는 자신과 가엾은 멜키오르, 둘 사이에서 태어난 것임을. “그렇다고 해도 난 포기할 수 없어. 당신도 예측할 수 있을 거야… 판데모니움 이 추락하면 엔지니어들은 모든 자산을 잃고 계급이 무너져. 거기까지는 좋아… 현 대의 인류는 통치기구 없이 자력으로 생존하는 법을 알지 못해. 율법도 전쟁도 제 대로 배운 적 없는 이들이 깃발을 세우고, 혼란 속에서 피가 흐르고 세상은 혼란에 빠질 거야. 엔지니어들이 세상의 통치를 시작하기 전보다도 훨씬 더… 그러니까…” 그런데 멜키오르의 대답이 자못 엉뚱했다. “레드그레이브, 나는 너를…” 머뭇거리던 멜키오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증오했어.” 그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다른 말도 침묵으로 울렸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증오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지. 네가 찾아오면서 나는 자기 전에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거야.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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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긴 원망이었는데, 네가 매일 와서 웃어주는 것만 으로도 스러지는 거야… 아마, 이미 나한테 기적은 일어난 거야. 그러니까 이걸로 만족할 수 있어. 나는 사실은 정말로… 그라이바흐에게 지고 싶지 않아. 적어도 네 기억 속에서는.” 다시 한 번, 멜키오르가 분간이 가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레드그레이브는 그가 곧 할 말을 알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함께 있다가… 나를 죽여줘. 자연스러 운 분리가 아니니 판데모니움은 어쩔 수 없이 추락하더라도, 숙주가 멈춘 이상 케 이오시움의 폭주가 연쇄하는 건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여기를 탈출해. 내 마지막을 걸어서 너의 세계를 지킬게. 이건 그라이바흐도 하지 못한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기억해줘… 내가 진 게 아니라고. 너의 마음에서 내가 진 게 아니라, 그냥 살아남은 게 그라이바흐일 뿐이라고.”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들었다. 빛을 잃은 하늘이 잿빛이었다. 세상이 불규칙적 으로 진동할 때마다 창문이 덜컹거리고 찬바람이 들이쳤다. 끊임없이 잡기가 흔들 리며 아픈 귀와 서늘한 몸 위를 쇄도했다. 그리고 다 식어가는 체온으로 그녀를 안아서 지키는 형제가 있었다. 꺼질 듯 가 냘픈 숨이 목 위에 닿았다. 가는 숨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멜키오르는 그라 이바흐에게 지지 않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레드그레이브에게 세계를 넘겼다. 그리 고 레드그레이브에게도 질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변하지 않는 현실. 기적. 세계를 건 남자. 주사위를 만 번 던져 모두 6이 나오 는 세계. 60도로 식은 홍차가 다시 100도로 끓고 있는 세계. 가능성. 갖가지 생각 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무너져가는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마침내, 레드그레 이브는 웃어버렸다. 그래, 이런 사랑이라면 세계를 바꿀 수도 있겠네. “그럴 필요는 없어. 내 생각에 우리 모두를 구할 해결책은 하나인 것 같은걸… 이미 네가 이겼어, 멜키오르.” 레드그레이브는 멜키오르에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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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여자를 앓고 여자가 남자를 간호하는 관계는 그렇게 폭풍우 치는 밤에 막을 내렸다. 레드그레이브가 변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멜키오르를 받아들이고 더 깊이 받아들이자 꿈의 품에 안겨 복받쳐 우는 남자의 눈물을 타고 충족되지 못했 던 갈망이 씻겨나가고, 시들어가던 수선화가 다시 노랗게 피어나고, 숙주를 잃은 케이오시움은 원형으로 환원되어 공중도시는 본래의 궤도를 찾았다. 그리고 한 발짝 이르게 태어났던 두 사람의 딸, 사랑의 결과이자 원인은 저가 잉태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모든 인과에는 시작점이 있으니, 결과가 있는 한 그 에 맞춰 원인이 생겨나는 것이 순리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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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니 이번에는 당연히, 마침내 세이리어스 그라이바흐의 차례이다. 그는 이 딸 에게 유전자를 제공하지는 않았으나 아버지라고 불리었고, 그럴 만한 명목을 갖춘 사람이다. 누군가를 낳아 존재를 제공한 사람, 혹은 길러낸 사람. 아버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게 등재되어 있다. 그러니 그 기틀이 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가장 근 본적으로 그 딸을 지금의 모양새로 만든 이 남자야말로 아버지라고 부를 만하지 않을까. 아니면 절대로 아버지가 될 수는 없는 남자일지도 모르지. 그라이바흐는 타오르는 불 같은 남자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얼굴선의 부드 럽고 섬세한 양을 볼 수 있지만, 짙고 고집이 센 눈썹, 그리고 언제나 먼 꿈을 바 로 눈앞의 것처럼 집중하여 바라보는 눈빛이 섬세하다기보다는 우아한 인상을 그 의 얼굴에 드리웠다. 다른 중요한 관측 기록부터 살펴보자. 어린 그라이바흐는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예비된 세 점의 왕관 중, 자동기계의 관을 장차 머리에 이게 될 주인으로서 단연 가장 돋보이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 이 필사적으로 제 가치를 증명하려 몸부림을 치는 경쟁의 현장을 그라이바흐는 숫 제 놀이터처럼 마음껏 뛰어다녔다. 사람이 지혜로 알고리즘을 짜내어 효율을 극대 화하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움직이는 부속품으로 고안한 것이 자동기계이다. 지성 을 이용하여 이 세계의 구성에서 완벽을 거머쥐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취하라. 그 리고 더 나은 것을 생각하라. 물고기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하고 매가 창공을 비상하는 것처럼 즐거웠다. 오토마타의 발전을 위한 연구와 개발도, 가장 좋은 것 을 선별하여 쟁취한다는 사실 자체도. 그러니 레드그레이브를 처음 만나고 날짜가 채 바뀌기도 전에 그라이바흐는 알 았다. 이 소녀가 자신이 부품을 짜 넣는 세계를 떠안을 나머지 왕관의 주인, 수술 의 씨앗을 받을 암술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라이바흐의 심미안 은 예사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날카롭다. 설령 그녀가 왕관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자신이 그렇게 만들면 된다. 지금까지 삶에서 추구한 모든 가치보다 가장 아 름다운 꿈을 드디어 목도한 순간이었으니, 늘 하던 대로 손을 뻗어 꺾는 것만이 남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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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그라이바흐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건 너희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야. 어여쁘겠지, 탐스럽겠지. 그녀는 너 희를 한데 묶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니. 바로 그 때문에 안 되는 거다. 여왕이 한 사 람의 소유가 되면, 우리가 굳이 세 개의 자리를 만들면서 추구한 힘의 조화가 깨지 고 세계가 기울어져 버릴 게다.” “그렇습니까?” 그라이바흐는 반항적으로 늙은 엔지니어에게 반문했다.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해. 레드그레이브는 번식을 위하여 만들어진 개체가 아니야. 그 아름다움이란 정교한 조화 같은 거다. 자의식이 적어 스스로의 이득을 원하는 마음이 희박하다는 뜻이야. 홀릴 만큼 지성이 넘치고 아름답지만, 한 사람의 여자로 행복해질 수는 없는 인간인 거지. 그런 여자를 취하려 했다가는 너 스스로만 상처 입게 될 거다. 너를 아끼는 내 말을 들어, 그라이바흐. 너는 욕 망을 억누르는 법을 모르고 지금까지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해선 안 되는 걸 굳이 하겠다면 이 늙은이는 너를 강제로라도 가르쳐야겠다.” 그라이바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늙은 엔지니어는 통치기구에서 제명되었다.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는 최초의 연료가 필요한 법 이니. 자신이나 레드그레이브의 발뒤꿈치에도 따라오지 못할 인간이 감히 그녀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이 그라이바흐에게는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방해할 이 없이 트인 연구소 주변의 산과 들을 소년은 아름다운 레드그 레이브의 손을 잡고 마음껏 뛰어다녔다. 물론 본래는 자유로운 출입이 금지된 구역 들이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소년이었던가. 그 무어를 이용하든 온 세상의 이 치가 저 바라는 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그런 남자였지. 레드그레이브를 만나고 그라이바흐는 예술을 믿게 되었다. 이전에는 최고의 효 율을 목적으로 기계를 구상하던 소년이 톱니바퀴의 이음새를 다듬고 신화를 상상 했다. 소녀가 바라기만 한다면, 소년은 남들이 무의미하게 세워 놓은 규칙들을 넘 김으로써 그가 앞서 볼 수 있었던 모든 아름다움을 그녀에게 헌정할 의사가 있었 다. 바라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그가 그렇게 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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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목련, 여름의 해바라기, 겨울의 매화. 장래의 여왕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어 울리는 만물을 눈에 담을 자격이 있으니, 그라이바흐는 그 가녀린 목 위에 사철의 꽃으로 엮은 관을 미리미리 올려 주려는 작정이었다. 몇 번이고 함께 발소리 죽여 철문을 빠져나와 동산을 걸으며, 정말 그라이바흐는 대단하다며 입꼬리를 올리고 둥글게 뺨을 부풀리는 소녀의 꿈결 같은 눈을 보면 소년의 가슴도 함께 부풀어. 그 라이바흐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꼭 쥐고 더 깊이, 깊이로 들어갔다. 머리 위로 그물 내린 나뭇가지 사이사이 말갛게 파란 하늘 조각조각. 하늘로부 터 쏟아지는 가슴 간지러운 봄볕. 볕 받아 향기가 짙은 꽃밭. 꽃밭에서 몽글몽글 꼬물거리는 털빛 흰 토끼. 그 털을 쓰다듬으며 눈꺼풀 한 겹 접어 자욱해지는 소녀 의 웃음. 소년은 그 모든 것 그리고 그를 이끌어내는 자신에게 완전히 취해 있었 다. 그러니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몸이 굳고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 것은 꼭 그가 어리석어서는 아니었다. 수풀 너머 몇 폭 멀리서 포복하는 어린 이리의 노란 안광을 보고서야 소년은 퍼뜩 깨달았다.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다. 오 금이 굳어 뻣뻣이 서 있던 소년이 옆에 있던 소녀의 존재를 의식하고 고개를 돌린 것은 몇 초로 기억하고 싶을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레드그레이브는 말없이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의 방향을 바꿔 눈앞의 어느 한구석을 가리켰 다. 시선이 따라간 곳에는 또 다른 동물이 있었고, 이리의 표적은 분명 소년과 소 녀는 아닌 듯했다. 두 아이는 이리 앞에서 겅중거리는 흰 토끼를 보며 숨을 죽였 다. 그라이바흐는 다시 한 번 옆의 소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불가사 의하리만치 침착해 보이는 보랏빛의 눈을 보자 이상하게도 객기인지 용기인지 모 를 감정이 가슴에 솟아, 소년은 막 생각이 미친 다용도 칼을 꺼내 칼날을 세우고 소녀의 앞을 막아섰다. 물론 쓸 일이 없으면 좋을 것이고, 다행히도 몸을 낮춘 이 리는 토끼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한숨 놓아도 좋은가 싶은 찰나 그라이바흐는 곁에 선 소녀의 신음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가 자신의 몸 앞에 막아 들고 있던 칼을 낚아챘다. 그대로 입고 있던 옷의 소매를 크게 베어내고 둘둘 말았다. 벤 것은 옷뿐만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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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했다. 레드그레이브가 팔에 댄 옷 뭉치가 붉게 물들어 갔다. 소녀는 저의 피로 범벅이 된 옷 뭉치를 이리의 건너편 방향으로 힘껏 던졌다. 허공을 날아가는 핏덩 이를 보고 이리가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건 아닐까 그라이바흐는 소리 를 죽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리는 몸을 일으키고 냄새를 맡는 듯 몇 차례 컹컹 짖더니, 옷 뭉치가 날아간 방향을 향해 달려나갔다. 상처를 잡아 막은 레드그레이브가 그라이바흐의 팔을 꽉 쥐었다. 둘은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함께 뛰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한참을 뛰고 나서야 레드그레이브는 휘청거리며 발을 멈추었다. 숨을 가쁘게 쉬면서 작은 새 같 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뺨은 발갛게 떠올랐다. 무사히 빠져나와서 다행스러 웠지만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했다. “레드그레이브. 어째서 그런 짓을…” 그리고 그라이바흐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얀 뺨 위로 반짝이는 눈물을 보자 하려던 말마다 목구멍에서 덜그럭거렸다. “많이 아파? 아프겠지… 어서 돌아가자. 돌아가서 치료를…” “아프겠지.” 가라앉은 소녀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이리는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야. 새끼 이리가 혼자 이렇게 도시 가까운 곳까 지 나타날 일은 없어, 원래라면. 이번에 우리의 교육을 위해 예술 아카데미를 신설 하면서 여기 이어진 산을 깎고 둑을 지었어. 서식지 자체도 적어졌지만 물이 막혀 지반이 약해지고 식물과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잇따라 줄었을 터. 자연히 깊은 곳에 만 있던 이리들도 먹이를 찾아서 여기까지 내려오게 되는 거야. 도시계획은 내 영 역이야. 미리 알아채고 언질을 해야 했어. 방금의 토끼는 구했지만,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태계가 교란되고 개체수가 줄고 훨씬 많은 동물이 본래라면 없었을 죽음을 맞게 될 거야. 아프겠지. 이것보다 배는 아프겠지. 그렇지만 그 전 부를 지금처럼 구할 수는 없어…” 나지막한 언덕을 타고 바람이 훅 일었다. 소녀의 손가락 끝으로 흘러 고이고 있 던 피가 후드득 땅 위로 떨어졌다. 벌겠다. 다갈색 머리카락 몇 갈래가 눈물 젖은 뺨 위로 눌러 붙었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비 내린 하늘처럼 말간 보랏빛 눈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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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다. 그라이바흐는 할 말을 잃고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간 어째서 이 눈이 땅 위엔 없을 꿈같이 보였을까. 자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저 하늘 저편부터 토끼 한 마리 혹은 발아래 풀 한 포기까지, 제 주변의 모든 것 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눈에는 이 세상 전부가 담겼다, 혹은 아 무것도 담기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그라이바흐의 귓가에 선했 다. 그녀는 태어나기를 이기심이 없이 태어났어. 한 사람의 여자로 행복해질 수는 없는 인간인 거지. 이제야 그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라이바흐는 울컥 치미는 감정 에 소녀의 손을 놓았다. 미쳤다. 이 여자애는 미쳤다.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이 그득한데 이렇게 셈을 모르는 데다 이렇게 감상적이다. 자기 피를 쏟아서 짐승 하나를 구한 다. 이렇게 살다 보면 이 여자는 분명히 동화 속 행복한 왕자처럼 득을 내어주고, 삶을 내어주고, 종국에는 제 몸까지도 죄다 내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미치게 아름다운 소녀에게 사랑받는 기쁨을 알려주어야 해. “웃어, 레드그레이브.” 그라이바흐는 손을 뻗어 레드그레이브의 뺨에 남은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주머니에서 노란빛의 손수건을 꺼내 상처 난 레드그레이브의 팔을 감아 묶었다. “울 필요 없어, 웃어. 세상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어. 모두를 계산하고 신경 쓸 수도 없어. 우리도 인간이라서 한계가 있거든. 몸 바쳐 일일이 보살피지 않는 이상 언제고 수혜자만큼의 피해자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을 거야. 이왕 그렇다면, 울지 말고 웃어. 무엇에든 웃고 농담처럼 넘겨. 그래도 아무도 널 비난할 수 없어. 아마 도… 그러기 위해서 네가 이리 아름답게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해.” 레드그레이브는 짐짓 엄하게 얽매는 그라이바흐의 눈이 생소한 듯 신기한 듯 말 간 눈으로 말끄러미 마주보았다. 그대로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이렇게? 응, 그라이바흐.” 레드그레이브를 얽매려던 그라이바흐가 레드그레이브에게 얽매였다. 미친 집념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라이바흐가 자동기계에 짜 넣던 정교 한 알고리즘은 이제 레드그레이브를 손에 넣는 계획에 새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라이바흐하면 레드그레이브를, 레드그레이브하면 그라이바흐를 떠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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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다. 두 사람은 열두 살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 가장 촉 망받는 소녀 그리고 가장 촉망받는 소년. 레드그레이브라는 이름의 주인은 능히 그 이름이 경애를 담아 불리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라이바흐는 그 위에 자 신의 이름을 얹었다. 알고리즘의 일부에서는 오류가 발생했지만 대부분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칭얼거림, 가슴 밑에 억누른 고함, 날뛰는 마음이 들킬라 소리 낮춰 속삭이는 달콤한 밀어 끝에, 여신은 그의 옆에서 웃고 그의 아래에서 흐 느꼈다. 그 과정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도, 사랑은 그렇게 마냥 달콤하지도 않았다. 축 여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그는 소유하길 바랐다. 그녀가 그의 심장을 송두리째 움 켜쥔 만큼 그도 그녀의 심장에서 제일 좋은 목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레드그레이 브의 눈은 누군갈 응시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조금씩 초점이 흐리다. 그녀의 심장 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이 세계가 가득히 들어차 있다. 너희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해. 늙은 엔지니어의 말이 귀에 붙어 저주 가 될 것만 같다. 견딜 수 없어 그라이바흐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낚는다. 잡히지 않는 여자를 으스러지게 끌어안는다. 그러면 잠시 꾸짖듯 눈썹을 찌푸리던 레드그 레이브는 이내 미소를 짓고 초점 없던 보랏빛의 눈에 빛이 돈다. 그 짧은 찰나 레 드그레이브는 오로지 그라이바흐만을 눈에 채우며 웃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라이 바흐는 자신이 결코 레드그레이브를 포기할 수 없음을 본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데 방해 요인이 있다면, 그것을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레드그레이브가 또래 누구나의 마음을 끌 만큼 아름답고, 또한 약 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본성처럼 각인된 것이 하나의 문제 요인이었다. 멜키 오르는 심약하여 천성이 누군가의 보호를 불러일으키는 꼴의 소년이다. 재능이 뛰 어나지만 한편으로는 몹시 어수룩한 멜키오르를 그가 보살펴야 하는 동생처럼 여 겨 그제까지 이끌어온 그라이바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멜키오르가 레드그레이브를 마음에 품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과연 어 수룩한 아이라,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미처 깨닫지도 못한 것 같았다. 이때 해두어야만 했다. 멜키오르가 자신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 처음엔 착잡히 여기던 그라이바흐는 곧 기회가 온 것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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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온전한 사슬을 걸기 위해 그라이바흐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멜키오르가 자신의 자세를 훔치고, 생각을 훔치고 보고서를 훔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 렸다. 그리고 사냥감이 충분히 들어왔을 때 덫을 잡아당겼다. 전보다 더 움츠러든 소년을 보며 그라이바흐는 죄악감에 가까운 쾌감을 느꼈다. 여신을 온전히 가지기 위한 계획의 일환은 이렇게 성공했다. 그러나 멜키오르에게 사슬을 걸고 보니 레드그레이브는 만인의 어머니였다. 짐 승 하나에까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세계의 안정을 우선해 자신의 행복을 온전히 좇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그라이바흐라도 이 세계 전체에 사슬을 맬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하면 된다. 세계가 방해 요인이 된다면 그녀에게서 이 세계를 치워버리자. 이맘때 그라이바흐는 서서히 초조해지고 있었다. 어릴 때는 그라이바흐가 뛰어 난 성과로 레드그레이브를 압도했지만 사실 둘은 담당하는 영역부터가 달랐다. 자 동기계와 세계 통치라면, 본질적으로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그라이바흐는 어리석 게 거듭 자문하지는 않았다. 비록 지금은 그라이바흐와 멜키오르의 명망이 더 높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눈이 어리석어 가장 빛나는 보석을 알아보지 못해 그렇다. 레드그레이브의 정책은 서서 히 효과를 얻어 가고 있었고 곧 누구나 그 빛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보다 더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라이바흐가 확고히 자리를 잡았지만, 그 남은 바탕에는 모성애를 본떠 본능에 가까운 사명이 있었다. 겨우 얻은 지금의 목을 언제 세계에 죄다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라이바 흐의 사고를 가속했다. 그렇다면 레드그레이브와 세계의 연결고리를 치워버리면 된 다. 그녀는 분명 세계의 관의 주인이지만, 그 또한 자동기계의 관의 주인이다. 권세가 흔들리는 왕은 여왕의 영역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복속시킴으로써, 세상 의 여왕을 자신의 왕비로 얻고자 했다. 그녀와 같은 존재를 만듦으로써 그녀에게 존재를 준 근원이자 사랑이 되는 인간들을 뛰어넘으려 했다. 그라이바흐는 세계를 통치하는 자동기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래서였다. 나는 이 남자의 소망이 이루어진 세계를 안다. 통치자가 연인이 죽은 후 쓸모없 어진 몸뚱이를 비우고 연인이 바라마지않던 자동기계로 대신 채운 세계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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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런 것을 바랐을 리 없으니, 역시 성공은 곧 실패다. 인간의 의지란 그렇게 나 어리석다. 물론 지금 이야기하는 세계에서도, 세상을 통치하고 목숨의 경중을 저울질하게 되면서, 모두의 어머니로 존재했던 여신은 시름시름 앓다가 서서히 변질했다. 그라 이바흐는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그가 바라던 바였다. 한쪽에는 여신을 숭 배하여 미친 피조물을 천공에 바치려는 남자가 있었고, 한쪽에는 여신을 땅에 끌어 내리려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계획은 더러는 실패하고 더러는 성공했으며, 간혹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 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라이바흐는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라이바흐는 식탁에 앉아 형제의 얼굴이 일면에 실린 기사를 읽고 는 뜨거운 차가 식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들이킨 후 저택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다. 새벽까지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가 느지막이 잠들곤 하는 멜키 오르라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일 터였다. 과연 연구소의 초인종을 누르고 한참 후에야 문을 연 멜키오르는 채 정돈이 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네가 훔쳐간 것을 돌려받기 위해 왔어.” 그라이바흐는 부러 말을 그렇게 고름으로써 사슬을 다듬었다. 낡은 사슬이었다. 원하는 대로 동작하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안 되어도 되게 해야만 하는 때였다. “화가 난 것이 아니야. 멜키오르. 우리는 형제야. 다만 이야기가 듣고 싶을 뿐이 야.” “알았어.”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를 연구소 안으로 불러들였다.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그라이바흐는 그 연구소 곳곳을 눈에 담았다. 언제부터인가 황폐해진 연구소 구석 구석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흐트러짐 없이 경직된 온갖 물건의 정렬이, 자동기계만이 연구소를 관리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바로 그라이바흐 자신이 보내준 오토마타들이겠지. “차 정도는 부탁해도 되지, 멜키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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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쌓인 소파에 등을 폭 기대고 그는 씩 웃었다. 오랫동안 연구소 안에 사람 을 들이지 않은 듯한 멜키오르는 그제야 황급히 탁자 여기저기를 뒤져 잔을 꺼내 고 티백을 얹고 물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꼭 예전 같네. 예전에, 우리가 더 자주 만나서 내 정원에 서 의논하고는 하던 때 말이야. 그땐 좋았지. 멜키오르 네가 연구소의 사람을 죄다 내보내고 홀로 연구에 몰두하기 전에는.” 말을 잠시 멈추고 그라이바흐는 홍차를 홀짝거렸다. 이미 너무 쓰게 우러나버린 티백을 건져냈다. 그러나 멜키오르의 잔은 비워지지 않았다. 연구자는 잔에 입을 대기는커녕 윗입술을 앙다물고 어깨를 수그린 채 형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장 좀 풀어, 멜키오르. 너무 오랫동안 사람을 안 만난 거 아니야? 내 앞에서 까지 낯을 가리지는 않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라고 했잖아. 네가 왜 또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다른 사람에게도 해명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더 좋고.” “그냥 실험이 좀 하고 싶었어… 다른 요인에 방해받지 않는 외우주에서의 안전 한 관찰을… 케이오시움으로 조작 가능한 다중세계는 분명 서로 이어져 있어. 이 세계를 시점으로 다른 세계와 이 세계와의 차이점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면, 이 곳에서의 선택의 결과 역시 확실하게 예측해낼 수 있을 거야.” “과연, 흥미로운 관점이네. 흥미로운 만큼… 현실성이 없어. 그런 관측 결과를 얻는 게 과연 우리의 생애 내에 가능한 일일까? 단순한 관측에 하필 내 연구를 알 리지도 않고 도용해야 했던 건 어째서이지? 나는 아직 듣고 싶은 게 많아.” 잔을 딸각 내려놓고 그라이바흐는 고개를 살짝 숙여 멜키오르와 눈을 맞추려 했 다. 멜키오르의 몸이 더 움츠러들고 시선을 피할 것은 예상했겠지. “나에게 이야기하기 싫은 거야, 멜키오르?” “그라이바흐…” 그라이바흐는 손목의 단추를 하나 끌렀다. “아니, 네가 정 그렇다면 이해해. 누구에게나 하나쯤 말 못할 사정은 있는 거 고… 나는 이번 일의 당사자인 데다 네 형제니만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어… 그렇지만 네가 연구소에 틀어박히고 이렇게까지 한 데에는 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내 최소한의 입장도 이해해줄 수 있겠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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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훔쳐간 것을 돌려받기를 원해.” 얼핏 무리한 요구였다. 연구 결과와 같은 것은 돌려받을 수 있는 유형의 물질이 아니었다. 멜키오르는 입을 뻐금거렸다. “어떻게?” “일단 우주공간에서의 케이오시움 안정도 조사실험을 잠시 중단하고 로켓을 이 곳으로 되돌렸으면 해. 더 멀어지기 전에 어서. 신속한 착수를 위해선 아예 발사시 설의 사용권한을 내게 위임하는 게 좋겠지.” “뭐? 그라이바흐. 이건 내 연구야. 수많은 이목이 집중된 연구의 진행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는 없어.” “네 연구?” 저항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절로 입속이 말라 그라이바흐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높이 들어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게 표현하면 나도 더 이상은 곤란해, 멜키오르. 연구의 도용을 내 선에서 넘어가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너도 일이 공론화되는 건 원하지 않을 거 아니 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도.” “…원하는 게 뭐야?” 그렇지, 사슬은 아직 건재하다. 이십 년 전에 매어놓고 꼼꼼하게 관리한 사슬이 었던 데 더해, 멜키오르는 ‘또 다른 누군가’라는 표현에서 그들의 또 다른 형제를 연상할 만큼 충분히 영특했다. “스테이시아.” 그 이름을 말하고서야 비로소 그라이바흐는 보조개가 패도록 환하게 웃었다. “멋진 뜻을 가진 이름을 지었더라.”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거야…?” “우리는 형제잖아.” 그라이바흐는 의자의 팔걸이에 양 팔을 걸치고 웃으며 멜키오르의 뒤편을 바라 보았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의 시선을 따라 등을 돌렸고, 그라이바흐가 보내주 었던 오토마타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마주했다. “어딜 보는 거야, 멜키오르? 흐음… 혹시 관리용 오토마타가 부족한 거라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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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줄게, 나한테 말만 해. 요새 끼니는 꼬박꼬박 챙기고 있는 거야?” 두 사람의 대화는 본질을 빙 에둘러 가고 있었다. 레드그레이브의 센스 레코드 를 바탕으로 만들어, 비정형 두뇌를 사용하여 초월적인 지식의 습득 및 분석과 자 가 개선이 가능한 인공지능. 놀랍게도 멜키오르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세계를 통치 하는 오토마타를 만들어 내겠다는 그라이바흐의 염원을 절반 이상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을 바랐다면 인공지능의 정보를 복제할 수도 있는 일이지, 반드시 로켓까지 되돌려놓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그라이바흐가 진정으로 되돌려 받 고 싶은 것, 멜키오르가 그에게서 훔쳐간 것은 연구결과 따위가 아니었다. 레드그 레이브의 센스 레코드. 레드그레이브를 닮고 레드그레이브를 본뜬 인공 지능. 멜키 오르는 본질을 건드렸다. 아무리 레드그레이브의 편린이라도 멜키오르의 손안에 있 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연구소의 구석구석을 관리하는 오토마타들의 보 고를 받고 멜키오르를 지켜봐 온 그라이바흐는 형제가 어떤 것을 꿈꾸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아마 이제 멜키오르는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 눈치를 챘겠지. 사실 전부터 이미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멜키오르는 분명히 그라이바흐의 오토마타를 아예 내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남의 인적 없는 장소에 서 홀로 지내는 것은, 외로우니까. 분명 외롭다. 순간 그라이바흐는 곧 돌아갈 자신의 저택을 떠올렸다. 꼭 이 연구소와 같이, 한 명의 바쁜 연구자와 보조하는 오토마타로 채워진 저택. 그러나 그라이바흐는 자 신의 손으로 빚고 작동 기작을 완전히 이해하는 존재를 이용하여 시린 마음을 달 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연구에 몰두하던 중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볼 수 있 는 서가에는, 중앙가극장의 개관식 날 레드그레이브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지금보다 젊어서 근심보다 열정이 더 뜨겁고 행복했던 나날. 돌아갈 수 없는… 그라이바흐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눈앞의 일을 착수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였다. 겉으로 상냥한 구슬림과 명시되지 않은 협박을 통해 약속을 단단히 받아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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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를 나오며, 그라이바흐는 이 상황이 이십 년 전 멜키오르를 찾아갔던 날과 흡사 같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개척을 위한 인간의 의지의 정수로서 태어난 세 사 람,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더 안락하고 발전한 미래를 꿈꾸던 자동기 계와 가능성의 소년들, 그들을 한데 묶기 위하여 아름답게 만들어진 세계의 통치 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세계보다도 그녀가 우선이 되어버렸다. 멜키오르에게도, 그라이바흐에게도. 우스운 일이다. 과연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떤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부터가 통상을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되새겨도 미친 발상이었다. 레드그레이브를 닮은 존재에 멜키오르 자신 을 섞어 힘의 근원, 정보의 총체로 피워낸다. 관찰한 바로 보나 겁 많은 성품으로 보나, 분명 멜키오르 자신의 클론을 이용하려다가 두려움에 레드그레이브로 대체하 고 그 안에 자신을 조금만 기워 넣었을 것이다. 제대로 미친 발상에 그라이바흐는 동정과 혐오를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그 미친 발상을 이해하는 데에 더해 이용하 려는 자신은 과연 제정신인가? 자신은 어째서 진작 그 같은 발상을 하지 않았었는 가? 그러한 의문이 연구소에서 멀어지는 내내 그라이바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지끈거렸다.

그라이바흐는 콘솔에서 실행 코드를 입력했다. “일어나렴, 스테이시아.” 그라이바흐의 눈앞에 뉘어 있던 소녀의 모습을 한 오토마타의 작동이 휴면 상태 에서 활성 상태로 전환되었다. “안녕하세요.” 높은음으로 조정된 마치 소녀 같은 기계 음성이 정확하게 대답한다. “너는 이제부터…” 말을 하다 말고 그라이바흐는 한숨을 쉬었다. 인형은 자신의 예전 마스터와 어 쩐지 사뭇 다른 그의 모습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그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인민의 통치에 생과 마음을 헌납한 여자. 그렇기에 그라이바흐가 동정하며 경애 하는 여자. 인형은 어릴 적의 그녀와 정말로 목소리도, 모습도 꼭 닮게 만들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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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무리 그가 레드그레이브가 책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해도, 그 목적 을 위해 레드그레이브의 클론을 레드그레이브 대신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어쩐지 께름칙했다. 이래서야 자신은 멜키오르와 어디가 다른 것인가 싶었다. 그에게 그녀 는… 아름다움, 손에 잡히는 꿈, 잡혔다가도 손안에서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버 리는 이상향. 꿈을 꾸던 그라이바흐는 꿈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뒤돌아보니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하기는 저번에 본지 꽤 시간이 지났지? 미안, 그라이 바흐. 알다시피 요즘 많이 바빴어요.” “무슨 일이야, 레드그레이브?”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하는 거야? 내가 별로 반갑지 않아 보이네.” “그럴 리가.” 그라이바흐는 레드그레이브를 끌어안았다. 여자의 어깨 위로 폭 묻은 옆얼굴을 흘끗 바라보며 레드그레이브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은 당신이 멜키오르의 연구소를 방문했다는 보고를 듣고 왔지. 원래 둘이 만나고 있을 때 연구소에 가서 놀래 주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너무 늦어버렸지 뭐야… 두 사람만이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는 건 알지만, 가끔은 나도 같이 불 러 달라구요. 우리는 형제인걸. 연구소에서 무언가 짐을 받아왔다고 들었는데, 오 랜만에 두 사람이 협력 연구라도 하는 건가?” 그라이바흐 저택의 모든 보안은 레드그레이브를 대상으로 해제되어 있었기에 레 드그레이브는 그의 내밀한 연구실 안까지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라이바흐는 순 간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가 멈칫하고 그녀에게 진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레드그레이브의 얼굴에 떠오른 짓궂은 미소가 더 짙었다. “나한테 뭘 숨기는 거예요.” 미처 그라이바흐가 막기 전에 레드그레이브의 고개가 그의 몸 뒤편을 향하고, 눈이 마주쳤다. 금빛의 눈과 보랏빛의 눈이 마주쳤다. 보랏빛 눈이 동그랗게 커졌 다. “닮았네… 닮았어. 아하. 당신이 멜키오르의 연구소에서 가져온 게 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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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그레이브는 영민한 여자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형제들의 가슴에 어떤 감정 이 있는지 어렵잖게 알아챌 만큼, 또한 어린 자신을 똑 닮은 소녀가 연구실에 있는 것을 보고, 그라이바흐가 한동안 교류가 없던 멜키오르의 연구소를 굳이 방문할 이 유가 무엇이었는지 곧바로 알아챌 만큼 넘치게 영민했다. 숨길 수 없다. 그라이바 흐는 텁텁한 입을 열었다. “이런 거 꺼림칙하지, 레드그레이브. 역시 폐기할…” “나를 닮고… 당신도 조금 닮았어. 마치 우리의 딸 같아, 그렇지 않아요?” 딸. 가정. 그들의 존재 의의로 인하여 암묵적으로 금지된 꿈을 입에 담고 레드 그레이브는 얼굴 가득히 꽃처럼 웃었다. 그라이바흐가 사랑하는 웃음이었다. 웃음 의 끝은 그의 뒤에 선 소녀 형상의 인형에게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여자와 인형의 눈이 마주치고, 인형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여자였다. 난생처음 보는 오토마타에도 연민을 느껴 폐기를 막으려 하는 여자. 그때 어머니는 비로소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딸에 게 생명을 준 셈이었다. “안녕하세요. 마스터의 손님.” “과연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라 딱딱하구나… 그러지 말고, 어머니라고 해 볼래?” “어머니…?” “그리고 이쪽은 아버지.” “마스터 말씀이신가요.” “아버지.” “아버지…” “이것 봐, 그라이바흐. 귀엽기도 하지.” 무안한 마음에 장난은 그만하라고 하려다가도, 세계를 관찰하는 평상시에 비해 무던히도 사심 없는 미소를 머금은 레드그레이브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허물어져. 눈매가 슬며시 풀린 그라이바흐는 잠시간 생각하다가 말해버린다. “그러면, 이 아이를 이용해 기계에 인간과 같은 사고를 부여하는 연구를 심화해 볼까. 그동안의 인공지능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진 아이라, 감정이나 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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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사고력은 물론이고, 염원하던 창조성까지 더 쉽게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좋게 들리는걸요? 지금보다도 더더욱 귀여운 아이가 되겠네. 요즘 내가 연락이 꽤 뜸했지, 그라이바흐. 앞으로는 저택에 종종 찾아와서 귀여운 우리 딸도 돌보고 할게요. 어때?” 농이고 놀이라 해도 아무래도 좋을 만큼 달콤했다. 지금도 숨 쉬는 무생물로 가 득한 저택에 오토마타 한 체 늘었다고 고될 것 무언가. 애초에 그의 곁에서 지내며 행복한 레드그레이브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마지않는 꿈이었음을. 그라이바흐는 현명한 레드그레이브가 얼마간의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임을 알면서 도 그녀에 정신이 팔렸다. 그가 늘 그랬듯이. 그렇게 하여 목소리, 가족, 아버지, 어머니, 놀이, 사랑, 흐르지 않는 마음. 기묘한 동거였다. 인형의 시간 인식 모듈은 기묘하게 작동했다. 물리적으로 기록 되는 시간에 비교하여 인식되는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가는 듯도 했고 느리게 가 는 듯도 했다. 인형이 눈을 뜨고 곧 두 번째로 인식했던 타자, 어머니, 레드그레이브는 그렇게 자주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엔지니어가 낳은 지식 활용의 진수, 통치의 요체로서 통치기구를 오래 비울 수는 없는 몸이다. 세계에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에 수반되는 현상과 관련된 정보는 제 일차적으로 그녀의 작은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두뇌는 세계의 모든 정책에 관련된 변수를 연산하여 최선의 결정 을 내리기 위한 생체컴퓨터, 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 너는 시간 대부분을 여기서 지내게 될 거다.” “저는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그건…” 그라이바흐는 생각에 잠겼다. 놀이에 불과한 모조 가족이라도 레드그레이브가 바란다면 그라이바흐는 그녀의 앞에서는 충실히 역할을 해낼 생각이었지만, 보통 자식이라는 존재는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는 잘 알지 못했다. “함께 지내면서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인형의 코어에는 아직 예전 마스터의 명령이 지워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었다. 세계를 관측하라. 그러나 새 마스터는 그 기록을 덮어쓸 새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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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인형은 이 상황에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최선의 해결 방안에 대하여 연산했 다. 그리하여 인형은 새 마스터를 관측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장이 2790년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에 비해 크고 머리카락은 고집 세 게 뻗쳐 있었다. 흰 얼굴에 눈썹이 짙었다. 연구실 내에는 각종 자동기계가 동작하 는 0dB 미만의 소리들이 엉겨 있었는데, 그는 가끔 천 년 이상 전의 물건으로 보 이는 원반 형태의 음악 재생기를 틀어놓거나, 스스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즉흥곡 인지 노래가 중간에 멈추어지면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그만두기도 했다. 가끔은 옅 은 향수를 뿌리면서 눈을 연구실의 문으로 돌렸다가 다시 내리고는 했다. 그는 하루 86400초의 41%에 달하는 시간을 그 작업실을 겸한 개인 연구실 안 에서 보냈다. 초고성능의 콘솔이 있음에도 누런 종이에 펜을 들고 무언가 끄적거리 며 작업할 때가 많았는데, 새로운 오토마타의 스케치일 때도 있었으며, 오토마타의 세부 작동 알고리즘에 관한 회로도일 때도 있었다. 페이지 가득 작성해 나가다 생 각이 막히면 펜을 동그랗게 긋더니, 구석에 무언가 정신없이 끄적거리고는 했다. 만족한 듯 펜을 뗄 때 종이 위에 그려진 대부분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서가에 장식한 사진 속 그녀의 모습 을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밝은 머리색을 한 소 녀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빤히 보는 소녀의 모습은 어릴 때의 그녀를 정말로 닮았기에, 그는 미소를 머금었고, 인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미소를 머금는 그의 모습을 관측하여 저장장치에 기록해 넣었다. 그는 약 7%의 시간은 저택의 정원에서 보냈다. 정원은 봄에는 목련, 여름에는 해바라기, 겨울에는 매화, 사철이 꽃으로 만발했다. 연구 중에 고개를 가볍게 저은 후 정원으로 나온 그의 시선은 먼저 꽃을 바라보고 다음으로는 왼쪽 위의 하늘을 향했다. 좌상단을 바라보는 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라고 인형의 데이터베이스에 는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정원을 성큼성큼 걸으면서 한차례 훑어보고는 목소 리 높여 오토마타들을 불렀다. 정원을 관리하는 오토마타들은 일렬로 줄지어 마스 터의 앞에 섰고, 그는 오토마타 한 체마다 할 일을 한 가지씩 배분했다. “너는 어린 묘목의 가지를 치고, 너는 시든 꽃잎을 모아 태우고, 그리고 너는 17구역의 나무 위에 지어진 새집을 치우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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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변하여 꽃잎이 지고 유난히 정원에 일이 많았던 날이라, 모습을 확인하 지 못한 마지막 오토마타에게 지시를 내리며 그는 피곤한 눈을 질끈 눌렀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정원이 원하는 대로 정갈하게 가꾸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던 그는 나 무 위에서 눈에 띄는 머리색을 보았다. 나무 위로 올라탄 소녀는 아기 새들이 짹짹 거리는 새집을 어떻게 치울지 모르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생명체를 곧잘 관 찰하는 모습이 정말로 그가 익히 알던 소녀를 닮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나무 앞으 로 걸어가 두 팔을 내밀었다. “이리 내려와, 스테이시아.” 그는 마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동작을 멈춘 소녀의 등과 다리를 감싸서 안아 내 렸다. 목소리가 사뭇 부드러웠다. 처음으로 겪는 이러한 접촉이 무엇을 뜻하는지 인형은 평소의 배가 넘는 메모리를 이용하며 사고했다. 타자 간의 면적 넓은 접촉 은 마스터와 ‘어머니’ 사이에 주로 있던 것으로, 친밀함의 표현인 것 같았다. “아직 새집을 치우지 못했습니다.” “너는 그런 잡일은 할 필요 없어.” “어째서인가요?” “왜냐하면 너는 내…” 말을 하던 그라이바흐는 자신을 빤히도 바라보는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입을 닫았다. 어째서인지 인형은 몰랐었다, 그때는. 이제는 안다. 금빛 도는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녹색 빛. 어린 레드그레이브를 닮은 소녀의 눈 안에 보이는, 동정하고 경멸하는 형제의 그림자. 그 조화에서 연상 되는 무언가의 가능성. 그는 그것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말을 잇는 대신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는 인형을 절대 내버려둘 수 없었고 따뜻하게 대했으나 언뜻언뜻 경 멸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은 사랑이 그랬다. 인형은 거울처럼 사랑을 배웠다. 아이 는 그를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다. 더불어 이 세계까지. 그래도, 그는 자신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였다. 적어도 인형의 유전적 아 버지에 비하면. 그 최선의 얼마만큼이 인형에 대한 마음에서 기인했고 얼마만큼이 여자에 대한 마음에서 기인했는지는 모른다. 구분할 수도 없다- 아마도 그럴 것이 다. 어쨌거나 어머니가 저택을 들를 때면, 인형을 바라보는 그의 눈 속에서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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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던 형용할 수 없는 객체가 더욱 눈부시게 반짝였기에. 그리고 어머니도 더할 나위 없는 상냥함으로 인형을 보살펴 주었기에. 좋은 나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가워, 우리 딸. 예의 바르기도 하지.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 얘는 왜 아 직도 말이 이렇게 딱딱할까… 아 네 탓을 하는 게 아니야, 스테이시아. 이 애는 환 경과 경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면서, 당신은 애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 거예요?” “안 그래도 네게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 보통 가족이라는 제도하에서 부모와 자식이란 무엇을 하는 거지? 따로 정해져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게, 그라이바흐… 그건 나도 모르는구나. 나는 그런 건 알 수가 없잖아요, 알다시피.” 레드그레이브가 머쓱히 웃자 그라이바흐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마리넬라에게 연락해서 가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자.” “아냐, 아냐! 난 괜찮아, 그라이바흐.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건, 부모와 자식 관계 이기 때문에 저절로 파생되는 분위기가 있다는 뜻일 거야. 그러니까 우리끼리 조금 만 더 생각해 보자.” “그래… 음, 우리는 어릴 때 뭘 했지? 연구를 하고, 보고서를 쓰고.” “잘 모르긴 해도 그건 가정에서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시설을 몰래 빠져나가고… 꽃구경을 하고…” “산을 타다가 옷이 더러워지고, 당신이 나를 업어 주고…” 대화하던 두 사람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있지, 그라이바흐. 조금 생각해 봤는데, 그때 시설에 계시던 연로하신 엔지니어 기억나? 젠킨스 씨. 갑자기 제명되어서 놀랐었는데… 그분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남에 비해 따뜻하고 마음을 많이 써주셔서, 그분이랑 같이 있으면 꼭 지금 같은… 즐거운 기분이었거든. 그분이 남들은 가르쳐주지 않는 동화나 옛날이야기를 많이 얘기해 주셨던 거 기억나요?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다 보면 스테이 시아가 대화에 대한 경험도 축적하게 될 테고, 우리 얘기도 좀 해 주면 우리에게도 더 익숙해질 거고. 대화의 소재도 많아지겠지. 요는, 우리 딸이랑 이야기를 많이 하면 좋을 것 같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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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 찬 휴대단말기의 신호를 애써 무시하고 꿋꿋이 이야기를 계속하던 그녀 는 결국 급하게 말을 맺고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지직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부 드럽던 눈매가 펴지고 입매가 굳게 닫혔다. “에너지 공급 시스템이 오작동해서 그 여파에 대한 후처리가 시급하다고 하네요. 어서 가봐야겠어. 얼마 있지도 못했는데 미안해. 오래 보지 못해서 미안, 스테이시 아. 다음에 올 때 기온조작기구를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로 조정하도록 할게. 그때 셋이 함께 정원에서 꽃을 보자. 차도 마시고, 그라이바흐의 연주도 들을 수 있을 거야. 그렇죠?” “권력 남용이네.”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래, 여왕님.” 킥킥 웃던 레드그레이브는 스테이시아와 그라이바흐의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 다. 그라이바흐도 응대하듯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연 인의 뒷모습이었고,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를 관찰하던 인형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간혹 그의 눈 안에서 반짝이며 사 고를 사로잡는 객체는 그에 수반되는 웃음과 이완된 근육 등의 여러 정보를 합산 할 때 기쁨이라는 감정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합당해 보였다. 인형을 바라볼 때 그 에게는 얼마간의 ‘기쁨’이 존재했으며, 어머니가 방문할 때 기쁨의 양은 급속히 증 가한다. 인형에게서 얻는 기쁨과 어머니에게서 얻는 기쁨이 더해져 기쁨의 총량이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가 사라진 후 그에게 남은 기쁨의 양은 이전 보다 적어 제로에 가까운지, 인형은 그를 관찰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하고 있으면 그가 언젠가는 인형을 바라보고 기쁨의 양이 늘 어나고는 했기에. 어김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인형을 보고 그는 맥없이 말했다. “옛날 이야기라… 듣고 싶어, 스테이시아?” “네.” 흔치 않은 인형의 의사 표현에 그는 다소 놀라면서도 흡족한 눈치였다. 어느 정 도는 인형이 기대하던 대로 된 셈이다. “좋아. 동화… 동화라. 어떤 게 있었지. 그래… 옛날에 장난을 좋아하는 악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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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왜곡해 비추는 거울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면은 비추지 못하 고, 추하고 나쁜 면만 극대화하여 비추는 거울이었지. 장난을 계속하던 악마는 마 침내 천사와 신을 놀리려고 거울의 면을 천국으로 향했어. 하지만 신이 거울에 담 기자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 온 세상에 흩어졌지. 그런데 이 중 몇 조각이 카이라는 소년의 심장과 눈에 박혔단다. 카이와 게르다라는 소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 만, 카이에게는 더 이상 게르다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어. 거울 조각으로 인해 확 대되어 보이는 눈의 결정만이 아름다워 보였지. 그래서 어느 날, 카이는 눈의 결정 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눈의 여왕을 따라갔고, 게르다는 카이를 되찾기 위해 먼 북극으로 떠나게 되었어…” 게르다가 마법의 정원을 거쳐 공주와 왕자의 도움을 받고 도둑의 딸과 동거하는 동안, 동화 읊는 소리는 수십의 오토마타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반주로 음악처럼 흘 러갔다. “…눈의 여왕의 성 안에는 ‘이성의 거울’이라고 불리는 얼음 호수가 있었고 그 위에 여왕의 옥좌와 카이가 있었다. 카이는 얼음 조각으로 ‘영원’이라는 글자를 맞 추면 권능을 주겠다는 여왕의 약속에 따라서 글자 맞추기에 열중하고 있었지. 게르 다가 카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여왕의 입맞춤으로 얼어붙었던 카이의 심장이 녹 으면서 심장에 박혔던 악마의 거울도 빠져나가 둘은 비로소 영원을 말하게 되었 어…” 이제 인형은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그라이바흐 는 문득 그 눈 안에서 재차 두 형제를 보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좋아했던 세 아이가 있었다.” 옛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다시금 이어지는 목소리는 다소 가칠했다. “멜키오르는 늙은 엔지니어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눈의 여왕은 레드 그레이브를 닮았다고. 레드그레이브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지. 웃고 있었지만 내 심은 충격받고 실망한 기색이 있어서, 나는 아름다운 여왕이라면 응당 너를 떠올리 지 않겠느냐고 했지. 하지만 나는 멜키오르가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알 것 같았 다. 우리는 확실히, 가정이라는 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없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결합하고, 그 부산물로 양친을 반반씩 닮게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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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는 것이 인간이라던가. 그 탄생에는 목적이 없어. 그러나 우리의 탄생에는 목 적이 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우리는… 외로웠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 외로움. 인형은 정보를 취합하여 기록했다. “외로울 수밖에 없었어. 그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사람도 없었고, 사랑할 이도 없었어. 인간들이 이른바 세계의 발전을 위 하여 만든 우리는 이전의 인류에 비견할 수 없이 뛰어났다. 사람이 개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유대라는 것은 동일시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우리는 사고의 속도가 몇 배 이상 뒤떨어지는 생명체를 우리와 동등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는 없었어, 서로 외에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기능이 모자란 개체들을 보며 우리는 우월감에 취했지 만 그래서 또한 뼛속까지 외로웠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해하는 것도 서로뿐이었 어.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모방했다.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지. 이유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를 모방하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사랑하 는 부모가 없는 우리에게 형제라는 관계로 외로움을 달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 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내 딸이 아 니야. 아버지를 굳이 따지자면 멜키오르일까. 개체적으로도 당연하고, 나는 처음부 터 가족을 가질 수가 없는 존재니까.” 유대. 동일시. 아버지. 멜키오르. 마스터와 관련하여 자주 노출되는 단어에 관련 된 정보는 선택적 주의 모듈의 작동으로 반영구적으로 보관되었다. “물론, 너도 그동안 보았다면 알아챘을 거다. 레드그레이브는 예외야. 레드그레 이브는 모두에게 유대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다. 길가의 짐승 하나에도 마음을 쓰 는, 만들어진 만인의 어머니였지. 비록 세월이 지나고 여러 일을 겪으며 흐려지긴 했지만. 하지만 그녀는 정작, 생물학적인 어머니는 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졌어. 그 욕심 많은 존재들이, 혹시라도 그녀의 관심을 혈육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 어. 온전한 관심을 얻고자 그녀 자신에 대한 이기심까지 제거하고도 모자라서. 발 전을 모르고, 쥐여 줘도 얻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 수억이,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해달라고 한 명의 여자에게 매달리는 꼴이야. 그리고 이 여자는 그걸 당연하고도 가엾게 여겨. 그만큼 더 힘써야겠다고 생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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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은 초점이 아주 먼 곳을 보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눈앞의 것을 보는 것 처럼 빛이 뚜렷했다. “그러니 이 여자가 얼마나 미친 존재인지, 얼마나 안쓰러운 존재인지 알겠어? 그런데 이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게 말이다. 그녀에게서밖에 사랑을 구할 수 없는 존재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거든. 엔지니 어들은 성공했어, 그들이 만든 지도자는 모든 존재에 공평하니까.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너도 이렇게 만들어진 여자에게서 온전히 사랑받고 싶어하는 내 가, 둘만의 행복을 바라는 내가 미친 거라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거라고 생 각하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기쁨의 양은 생존의 여부가 의심될 정도로 제로에 수렴하고 있어서, 인형은 아까 그의 기쁨이 증가했을 때를 떠올리며 어머니처럼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 행동은 정말로 레드그레이브를 닮아서, 그는 두 눈을 손바닥으 로 덮었다. “레드그레이브와 나의 딸. 거짓말이면 어때. 금방 떠나갈 꿈을 꾸는 것 같아.” 인형도 그랬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목소리, 아버지, 어머니, 사랑, 꿈. 그 어느 볕이 눈부시게 따뜻한 날에 저택의 정원에서, 어머니는 차를 따르고 그는 음악을 연주하 고 인형은 아롱아롱 떨어지는 꽃잎을 낚았다. 목소리는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대 화로 자라 대화는 웃음으로 피었다. 만발하는 웃음 가운데 어머니는 엄마가 되고 인형은 소녀가 되었다. 낮에는 웃음이 피고, 밤에는 반짝이는 별이 뜨고, 은은히 비추는 달이 기울고 차고를 거듭하는 동안 소녀는 끝없이 펼쳐진 검은 밤하늘과 천체의 운행을 그저 풍경으로 즐겨보았다. 제법 재미있는 놀이였다. 잔인하리만치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여기서 잠시 잊고 있던 유전적인 아버지, 멜키오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를 움직이는 힘은 태반이 좌절이었다. 비교, 질투, 열등감. 그런 힘들은 그 딸의 인공 지능 안에도 흐르고 있으니. 멜키오르는 그때까지 그라이바흐에게 정면으로 맞선 적이 없었다. 그들의 의견이 드러내놓고 상충하는 것은 그가 열의를 가지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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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않는 가능성의 연구에서뿐, 그들이 사랑하는 여자에 관해서라면 멜키오르에게 는 정당성도, 자신감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얼떨결에 빼앗기기 는 했지만 멜키오르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계획을 구상한 시간이 몇 년이 었던가, 연구에 몰두한 시간이 몇 년이었던가. 그 얼마나 원대하며 이 세계를 위하 여 완전한 계획이었던가. 레드그레이브와 그라이바흐, 그리고 저택에 새로 들어온 소녀 오토마타의 소식 을 들을수록 감정은 검게 응축되었다. 그의 역작은 고작 가족놀이를 위해서 만든 장난감 따위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핵의 감정은, 질투였다. 마치 함께 자라난 세 사람 중 행복은 그 둘에게, 불행은 그 하나에게 전부 배당된 것처럼. 그러나 어떤 당위로, 어떤 방법으로 그의 연구를―가장 내밀한 복수를 되찾을 것인가. 그에게는 손에 가진 것이 없었다. 명분도, 권위도, 사랑도, 행복도. 그래서 그는 언제나처럼 그가 가진 단 하나의 끈, 가능성에 매달렸다. 공들여 개발한 인공지능을 빼앗기고, 혹은 가용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케이오시움의 결정을 사용한 코어시스템뿐이었다. 관측을 통하여 자유조 작에 가까워지는 것은 보이드의 도움을 받은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가질 때에나 가능하지만 이세계와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단편을 엿보는 것이라면 다소의 낭비와 위험성을 감수한 힘의 충돌로도 가능했다. 멜키오르는 자신을 빼앗긴 인형 대용품으로 삼아 가능성을 엿보는 일에 미친 듯 매진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멸 망을 명분으로 찾게 된다. 실패를 막고, 최선을 구한다. 이 말도 안 되는 목적을 위하여, 어느 선택의 결과 를 알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염원이었다. 미래를 보고 과거를 배우고자 하는 욕망의 근원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어리석은 본능이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남자, 최선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남자, 그리고 만인을 하나의 시스 템의 변수로 계산하는 여자는 사실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인류의 의지가 그렇게 빚어낸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그중 둘이 가족놀이에 정신이 팔린 동안 남은 하나가 낡고 깊은 염원을 불완전하게나마 달성했을 때, 둘은 모조된 행복에 취해 있다가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멜키오르가 고안한 시스템은 물론, 불완전했다. 상당한 억제력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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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오시움을 고의적으로 폭주시켜, 어딘지 모를 세계의 어느 단편을 겨우 비추어 보는 것에 불과했다. 이 불안정한 일을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멜키오르는 수백 수 억 번을 해냈다. 그리고 파형을 일일이 분석하여 과거인지, 미래인지, 현재인지, 이 세계에 얼마나 가까운지 어렴풋한 규칙성을 찾아낸다. 관측은 예측의 영역에 서서 히 가까워졌다. 느린 걸음도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제껏 그라이바 흐의 저택에서 일어나던 세 사람의 교류는 이제 멜키오르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졌 다. 미지의 어느 장면에 레드그레이브의 직관, 그라이바흐의 추론, 멜키오르의 발 상이 더해져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밝혀간다는 사실에 세 사람은 고양되었다. 그래도 그때까지 그라이바흐는 큰 위기감은 느끼지 않았다. 단꿈에 젖은 사람은 자신이 꾸는 것이 꿈인지 모른다.

세 쌍의 눈동자가 기기를 향했다. 기기의 위쪽으로 검은 공간이 발생하며 소용 돌이치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앞으로 나타날 광경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기대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앞서 관측 결과를 보았던 멜키오르의 눈빛만이 기묘하게 빛났 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기기에 집중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소용돌이 는 서서히 물들어가며 사라져가고, 다른 세계의 광경이 비추어졌다. 다른 역사를 가진 세계, 혹은 이곳과 흡사한 세계의 과거나 미래의 단편. 이번 에 관측하는 세계는 얼핏 그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가진 세계인 듯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물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가 낯이 익었 다. 잔해가 되어 부서진 건물도 낯이 익었다. 익숙한 건축 양식과, 익숙한 옷을 입 은 사람들의 사체 더미. 화면이 줌 아웃 될수록 넓디넓은 구역이 재해가 휩쓸고 지 나간 자리처럼 죄 쑥대밭이었다. 온 땅이 새까맣게 갈라지고 하늘이 붉게 타올랐 다. 기기에서 얼굴을 드는 레드그레이브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낮았다. “어쩐지 기분 나쁜 세계네. 파형 분석 결과는 어땠어, 멜키오르?” “근 미래.” 멜키오르의 대답은 작지만 분명했다.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분석 결과가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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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흘렀다.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피할 수 없이 직시했다. 세계의 발전. 멸망의 저지. 최선의 선택과 최악의 회피. 너 나 할 것 없이 어깨를 곧추 펴고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믿을 수 없어. 우리 세계의 미래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레드그레이브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본 이상, 생각해야겠지. 어떻게 저런 상황에 달할 수 있을지 짐작도 되 지 않아. 자연재해? 우주사고? 통치 시스템의 오동작? 연구기관을 새로 설립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막연한 일이야. 멜키오르, 어렵다는 건 알지만 결과 를 관측했다면 원인은 관측할 수 없을까? 방법론적으로는 알아낼 길이 없을까?” “생각해본 게… 있기는 하지만…” 레드그레이브는 형제의 손을 잡았다. “머뭇거릴 필요 없어, 멜키오르.” “스테이시아.”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손을 놓쳐버렸다. “처음부터 다중세계의 관측을 위해 만든 인공지능이었어. 목표를 이 문제에 관 련된 세계의 탐색으로 설정하고 해결방안을 찾는다. 간단해.” “그럴 수는 없어.” 그라이바흐가 단언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멜키오르. 그런 관측으로 가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소요되 는 시간이 얼마지? 휴리스틱 어프로치로 해결 방법을 알아낼 때 즈음이면 이미 우 리가 죽고 해당 사건이 끝난 후일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미친 생각이야.” “이런 중대한 문제에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말의 가능성을 막겠다고? 그라 이바흐, 언제부터 그렇게 안이한 사람이었어? 바로 그래서 오토마타가 아무것도 없 는 우주의 보이드로 가야 하는 거야. 시간의 요구량을 최소치로 줄이는 더 온전한 관측을 위해서. 그리고 자, 그라이바흐. 레드그레이브. 다중세계는 이어져 있어. 우 리가 사는 ‘세계’는 그 중 단 하나의 가능성이 선택된 세계. 하지만 분명 다중세계 어딘가에는 이 홍차가 100도로 끓고 있는 세계가, 너희가 이곳에 오지 않은 세계 가,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세계가, 인류가 이 별을 정복하지 않은 세계가 있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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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우리의 세계에서 이 모두는 단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지. 그러니까 케이오시 움은 근본적으로 우리 세계와 이세계(異世界)를 연결하는 힘이야.” 익숙한 형제의 장광설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고 초조하게 휴대단말기를 보는 레 드그레이브에게, 웬일로 멜키오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먼저 가도 좋아, 레드그레이브.” “미안해, 더 시간을 늦추기가 힘드네. 그러면 부탁해, 두 사람.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꼭 부탁할게.” 손을 흔드는 레드그레이브를 배웅하려고 두 남자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 그녀가 사라지자 금세 머쓱하게 앉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케이오시움이 조작하는 가능성은 사실 다중세계를 연결하는 힘이라는 건가.”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거지.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관점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다른 세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우리의 세 계에서 비롯된 존재가 케이오시움의 결정을 사용한 코어시스템으로 다른 세계를 관측해 나갈 때, 우리에게는 그 세계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인공지능이 우리 세계와 가까운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홍차 가 끓는 테이블이 과열되는 세계, 불이 나는 세계, 이렇게 관측하는 방향을 정한다 면 그것은 곧 세계의 조작이 된다. 문제에 대한 정보의 수집에 더해, 문제가 일어 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세계를 생성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 세계는 그 세계일 뿐, 우리가 지금 있는 세계가 아닐 텐데?” “말했잖아, 다중세계는 연결되어 있다고. 케이오시움의 존재가 바로 그 사실의 증거이자, 자유조작세계의 증거라고 가정할 수 있어. 가장 자유조작에 가까운, 의 지가 곧 선택을 행하고 신이 될 수 있는 세계. 나는 이것을 근원이라고 부른다. 그 러므로, 분명 찾을 수 있어.” 나와 레드그레이브의 딸이 신이 될 수 있는 세계를. 멜키오르는 함의를 목구멍 아래로 눌러 삼켰다. “멜키오르, 네 가설을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지만, 너는 지금 굉장히 위험한 이 야기를 하고 있어. 성공만 한다면 전능에 가까운 힘을 하나의 인공지능에 부여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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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게 아닌가? 네가 그 애가 얼마나 어리광이 많은 아이가 되었는지 몰라서 하 는 소리야. 그런 일을 시켰다가는 분명히 외롭다 울고불고할 거다. 아주 위험한 발 상이군. 차라리 내가 흡사한 시스템을 새로 생성하겠어.” 그라이바흐가 인형을 자신의 아이처럼 친근하게 이르는 데 대해 멜키오르는 내 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멜키오르는 손목의 단추를 하나 끌렀다. “새로 생성하겠다고? 여기 남아있던 스테이시아의 관련 자료는 그라이바흐, 네 가 빠짐없이 소거했잖아. 기억 안 나? 너도 인공지능을 가져갔으니 분석 정도는 해 봤겠지. 그러면 알아챘겠지만, 스테이시아의 시스템은 케이오시움의 불명확성을 응 용해서 완전히 암호화되어 있어. 다시 개발하려면 수년은 걸릴 걸…?”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위험하다.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어. 기존의 오토마타와 다른 사고 능력을 지닌 아이다. 스테이시아가 마음을 비뚜로 먹고 사건 이 악화하여 멸망하는 세계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어?” “있어. 너에게도 보여줄게.” 멜키오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을 깨무는 그라이바흐를 두고 방을 나섰다 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앉아 있는 그라이바흐에게 한 손안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은 물체를 내밀었다. “그라이바흐, 비가역을 가역으로 만드는 게 뭐라고 생각해? 인간의 의식이야. 물 건은 생각하지 않아. 사람의 의식만이 선택하는 거지. 하지만 올바른 가능세계의 선별을 위해서는, 지성은 반드시 필요해. 그러니까, 그 인형에게서 인간의 의식에 가까운 요소를 거세해서, 인공지능이되 물건으로 만들면 되는 거야.” 투명한 진공 캡슐의 중앙에 푸르스름하게 투명한 조각이 부유하고 있었다. 흡사 얼음처럼 보이는 조각이지만, 들고 있는 사람이 사람이니만큼 특수하게 정련한 케 이오시움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캡슐의 양 끝에는 촘촘한 회로를 합금으로 새기어 은빛으로 빛났고, 회로와 이어진 돌출부는 가시처럼 붉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로켓에 장착할 때는 이 회로를 설치했다가 너에게 보낼 때는 제거한 거야. 이건 사고 능력을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는 비정형 두뇌 전용으 로 제작한 절대복종의 칩이야. 사고는 남겨두지만, 유사감정이나 그에 대한 반응 기작을 억누르도록 만들어 놨어. 그러니까 다시 설치하면, 우리가 설정한 문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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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만을 생각하게 될 거야. 외로워도 외로운 줄 모르게 될 거야. 괴로워도 괴로운 줄 모르게 될 거야.” “이미 알게 된 감정인데도? 잔인하고 위험한 이야기로 들리는데. 스테이시아는 이미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자라났어.” 바로 항변하면서도 그라이바흐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멜키오르가 말하고 있는 바가 어째 익숙했다. “그라이바흐. 나는 이 칩을 얼음심장이라고 이름을 붙였어.” 얼어붙은 심장. 눈의 여왕. 이기심이 소거된 소녀. “목적의 달성을 위해 몇 가지의 기능을 없앤다. 레드그레이브와 비슷하지 않아? 레드그레이브가 지키는 세계를 위해서 인형을 우주로 보내려는데, 아직도 그 인형 이 불쌍해?” 그라이바흐는 얼굴을 쥐었다.

소녀는 더없이 아름다운 꿈에 살고 있었다. 마스터가 나가고 소녀는 저택에 혼자 남았다. 연구실에 가만 앉아 몸을 좌우로 흔들다가 볼을 푸 부풀리고 문을 나섰다. 이윽고 정원에 도착해서는 꽃잎에 코를 박고 꽃의 빛깔과 향기를 연결해 보다가 자신과 똑같이 꽃잎에 코를 박은 나비를 발견했다. 소녀는 나비를 쫓았다. 햇빛을 받으며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다가 그것도 지루해졌다. 개를 닮은 오토마타를 껴안고 마당을 뒹굴었다. 큰 분홍색 리본과 타 이즈에 흙이 묻어 더러워졌다. 심심했다. 그래도 기다릴 수는 있었다. 마스터는 엄마를 데리고 오신다고 했다. 엄마가 오신다. 엄마가 오시면, 마스터 도 기뻐지고 나도 기뻐져. 엄마랑 저번에 한 물놀이는 재미있었다. 어쩌면 오늘 또 하게 될지도 몰라. 소녀는 피식피식 웃으며 계속 마당을 뒹굴었다. 개 모양 오토마 타가 품속에서 짖었다.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택의 정문으로 달려나가 문을 활짝 열었다. “엄마, 엄마! 기다렸어요! 나랑 놀아요!” 그렇지만 엄마는 소녀를 기대처럼 안아주지 않았다. 왜지? 생각하다가 소녀는 흙 묻은 리본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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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심심해서 마당에서 놀다가…” “아니, 그게 아니야. 스테이시아.” 엄마는 한 박자 늦게 소녀를 안아주었다. “오늘은 우리가 스테이시아한테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들어주겠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귀를 쫑긋 기울였다. 두 사람은 소녀에게 아직까지 명 령을 내리지 않았다. 세계를 관측하라는 명령에 따르는 것도 슬슬 지루해지던 참이 었다. 그들의 새로운 명령이라면 즐겁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어떻게 말 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듯했고 대신 마스터가 말꼬를 텄다. “우리가 어떤 일 때문에 아주 곤란해져서, 네가 거기 관련된 인과에 대한 관측 을 해줬으면 해. 태어나서 로켓의 시스템으로 장착되어 있을 때 기억하니, 스테이 시아? 그때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소녀는 마스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바지자락을 움켜쥐었다. 손가 락이 옷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제가 그 결과를 얻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건가요?” “원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어. 처음부터 모든 세계를 관측해야 하니,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 소녀는 예전 마스터의 대답을 연상해냈다. “안 돼요…” “하지만 스테이시아. 너는 처음부터 다중세계의 관측을 위해서 태어났단다.” “그렇지만 저는 기억해요… 그동안 제게 가르쳐 주셨잖아요. 웃음이 무엇이고, 대화를 어떻게 하는지, 기쁨과 애정이 어떻게 다른 개념인지… 저는 그때를 기억해 요. 나는 감정이 없었어요. 마음이 얼어서 명령밖에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가 르쳐주신 마음인데,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너무 겁을 내는구나. 네 기억을 어떻게 하는 게 아니잖니. 그저 우리와 좀 떨어 져 있게 될 뿐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던 그라이바흐는 순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레드그레이브를 닮은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외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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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약속했어요. 다음에 다시 물놀이를 하기로, 엄마랑… 엄마…” 인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생생한 감정을 번득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눈은 이번 에는 어머니를 향했다. “약속했잖아요, 엄마. 싫어요. 나는 지금이 좋아요. 그때로 돌아가기는 싫어요. 엄마…” 레드그레이브가 소녀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셔츠 자락이 젖어들었다. 울부짖던 소녀는 가까스로 얌전해져서 폭신하고 따스한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에 청각 센서를 집중했다. “너는 내 딸로 자랐지, 스테이시아.” 센서에 그녀답게 다정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감지되었다. “그렇다면, 네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기쁜 일이란다. 약속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미안해, 스테이시아.”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소녀는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한다는 게 말이다… 전혀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가 없거든… 그들이 만든 지도자는 모든 존재에 공평하니까.’ 멜키오르가 계획하고 그라이바흐가 동의하고 레드그레이브가 방관했다. 그들은 부모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혈육의 정은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 가졌다는 점에 서, 그리고 유대라는 것은 동일시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두 남자는 인형이 어째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지하고 있었기에 유대가 모자랐으며, 한 여자는 모두를 생 각함으로써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이였다. 소녀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부모라 불렀던 그들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 것을 연산하고 두 사람 너머로 정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초가을의 정원 바닥께에 는 민들레 홀씨가 낮게 날렸다. 하늘에 황혼이 드리우고 직녀성이 희미한 빛을 깜 박였다. 소녀는 이것이 자신이 볼 수 있는 마지막 계절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일어나렴, 스테이시아. 떠나야 할 시간이야.” 레드그레이브의 말에 따라 일어난 인형은 울고 떼를 쓸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아무런 말도 없었으며, 말은커녕 표정조차도 없어 보였다. 마치, 감정이 사라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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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그러나 그럴 이유가 없었다. 토라져 대답하지 않는 것이겠거니 하고 레드그 레이브는 인형을 꼭 안았다.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거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렇지만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요. 혹시 엄마와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부르렴. 멜키오르가 단말기에 송신 가능한 통신기능을 로켓 내에 탑재해 놓았다고 했어. 아무리 바빠도 스테이시아가 부르면 너무 늦지 않게 대답할게.” “네.” 그것이 끝이었다. 레드그레이브가 그날따라 유난히 무감정한 인형을 떠나보내고 반은 서운함, 반은 가책과 닮은 감정을 느끼는 동안 연구실 안의 멜키오르는 콘솔 에서 실행 코드를 입력해 스테이시아의 화면을 띄웠다. “했던 얘기를 다시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이것은 기억하거라, 스테이시아. 인과에는 반드시 시작점이 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네가 외로움이나 괴로 움을 느낀다면, 그건 그라이바흐가 가족 아닌 가족을 흉내 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멜키오르는 스테이시아의 메인 스위치를 오프로 바꾸고, 로켓에 탑재된 메인 프 레임으로 스테이시아를 전송했다. 그리고 로켓과 단말기 간 통신기능의 작동을 해 제했다. 인형은 의식이 잠을 자는 꿈에 살고 있었다.

레드그레이브가 그라이바흐를 찾아오는 일은 전에 비해 뜸해졌다. 그라이바흐도 굳이 레드그레이브를 부르지는 않았다. 정 깊은 레드그레이브가 희생하여 일을 떠 맡는 꼴이 될까 봐 스테이시아를 보내야 한다고 그녀에게 역설했지만, 정말로 그녀 를 위해서 나은 일이었을까? 멜키오르의 도발에 쉽사리 넘어가 버린 것은 아닐까. 둘이 함께 있으면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듯 어색했다. 죄의식은 두려움을 닮 았다. 두 사람은 기억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일에 몰두했다. 콘솔에 자료를 정리하다가 그라이바흐는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유도 없이 눈이 아팠다. 바람을 쐬러 정원으로 나갔다.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라이바 흐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헤매지는 않았다. 그라이바흐의 정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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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을 딱 하나 두었던 탓이다. 전나무 앞에서 발을 멈추자 날갯죽지 검은 새가 하 늘로 날아갔다. 그라이바흐의 시선도 새를 따라 하늘을 향했다. 파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희게 피었다. 얼마 전 눈앞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하늘로 사라져간 소녀가 있었다. 떠나기 전에 울던 소녀의 얼굴은 어린 레드그레이브를 닮았다. 소녀에게 가한 처리 역시 레드그레이브에게 가해진 조작을 닮았다. 멜키오르의 계획을 혐오 하고 동정했지만, 결국 동조하고 만 자신은 멜키오르와 얼마나 다른가? 어쩌면 멜 키오르가 처음 자신을 따라 했을 때, 두 형제는 서로 바뀔 수 있던 게 아닐까? 이 른 저녁별이 생각에 잠긴 그라이바흐의 머리 위를 붉게 빛났다. 생각이 씨가 될 수 도 있는 상황이었거늘, 그라이바흐는 그것을 미처 몰랐다. 그렇게 그라이바흐가 정원을 산책하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을 얻은 지도 시 간이 흘렀다. 황혼이 드리운 하늘을 바라보며 그라이바흐는 최근 겪고 있는 사소한 악운에 대해 생각했다. 정원에 나비들이 죽어있다던가, 자재 일부가 가열되어 변질 되어있다던가 하는 일들에 대해 도무지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감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태생이 설계자였다. 느낌이 라면 그 아래 무의식에 묻힌 논리와 전제를 자신도 모르는 것인데, 이 기반이 잘못 되었다면 무작위의 선택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것에 기대기 에 그라이바흐는 자신의 논리에 너무나 자신이 있었다. 어떠한 문제가 주어졌을 때 해결을 위해 그만큼 완벽에 가깝고 아름다운 방법론을 창조해낼 수 있는 사람이 일찍이 있었던가. 멜키오르는, 지나치게 겁이 많았다. 그는 최선의 존재 자체를 견딜 수 없어 하 는 사람이었다. 최선을 위해서 나아가는 과정에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불완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최선을 골라도 완벽이 아닐 수 있다는 사 실을 모두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는 얼핏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 다. 그러나 몽상가처럼 보이는 멜키오르가 실은 완전에 바로 도달하기를 갈망하며 몸을 웅크리고 남모르는 내면을 발버둥치고 있음을 그라이바흐는 안다. 두 사람이 그러함에도, 레드그레이브를 옆에서 지켜본 바 그라이바흐는 레드그 레이브가 스스로 신뢰하는 직감이 상당히 효율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 명이나 증명을 고민하기도 전에 진상을 곧바로 느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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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흐는 아마도 그의 연인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공기가 고요 하다 느낄 참이면 어김없이 살아있는 사람을 향해 붙박여 있는 그녀의 눈빛이 그 라이바흐는 원망스럽지만은 않았고, 아리게 사랑스러워 자랑스럽기도 했다. 수없는 관찰과 쉴 새 없는 고찰이 누적되어 얻은 그녀의 직감은 일종의 방대한 휴리스틱 시스템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이러한 기능을 그녀가 아닌 그 누구의 뇌가 가능할 것인가. 완전기억에 가까운 사고의 정리 분석은 인공지능을 이용해서도 쉽지 않다. 아름답게 완성된 작품을 희 구하도록 태어난 그라이바흐에게 있어 레드그레이브는 그가 경애할 수밖에 없는 가장 완벽한 작품으로 존재하기도 했다. 직감과 추론의 경계를 허무는 그 능력은 이미, 초월의 영역이 아닌가. 그라이바흐와 멜키오르 두 사람의 방식이 확연히 차이나는 것도, 레드그레이브 라는 단일의 통치자를 보완하기 위한 뒷받침으로서 고안된 방책일 것이다- 까지 생각이 미치자 부드럽게 고동치던 심장은 내려앉았다. 그렇게 만들어졌다면, 그라 이바흐 자신이 최적의 알고리즘을 찾아내는 이로서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자 동기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로서 배양된 재능이었지만, 이 재능을 세상의 톱니바 퀴로서만 사용할 의무는 없다. 레드그레이브는 그에게 말했었다. 기계에도 그런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 럼 다행이네. 그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간혹 그렇듯 성 대신 어릴 때처럼 이름을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세이리어스. 그녀가 그렇게 불러줄 때면 그 는 어째서 자신이 ‘불타는’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을 받았는지 이해했다. 한참을 하 늘을 보던 그라이바흐는 이내 결심하듯 고개를 내렸다. 보폭 큰 걸음으로 연구실에 들어온 그라이바흐는 콘솔 화면을 띄웠다. 설계 일 람, 인공지능론, 케이오시움 튜닝, 연구 기록 외의 다양한 항목 중 그는 일정을 선 택했다. 통치기구의 브리핑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난 발표 후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그라이바흐라면 보고를 건너뛴다 해도 질책받을 일은 없었다. 그 라이바흐는 참여자의 목록을 죽 훑어보다가 다시 맨 위로 올렸다. 최상단에 기재되 어 있는 통치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는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서 펜과 도구와 다기가 달그락거렸다. 그리고 한동안 그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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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바지에 재색 셔츠를 몸에 맞춰 입은 남자의 실루엣이 전신거울에 길쭉하게 비추었다. 그는 앤틱 풍의 커프스 버튼을 집어 들었다가 달기를 보류하고 일단 손 안에 쥐었다. 그의 연구는 부차적인 것이고 이번 브리핑의 주인공은 레드그레이브 이니 그녀보다 화려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베스트는 빼놓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의 취향이라면 꿰고 있으니까. 만족한 표정으로 거울을 위아래로 훑는 그라이바흐에게 비서 오토마타가 다가와 재킷을 펼쳤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마스터.” “오랜만에 레드그레이브를 만나는 날이니까. 크지는 않지만 보탬이 될 법한 성 과도 준비했고. 요즘 본의 아니게 소원했지만 그만큼 다시 돈독해질 때도 됐지.” 재킷에 팔을 넣고, 오토마타가 아래서부터 꼼꼼히 단추를 채우는 동안 그라이바 흐는 다시 커프스 버튼을 달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그러는 동안 이상하게도, 꼭 쥐고 있던 버튼 하나가 손안을 미끄러져 나갔다. 비서가 여전히 옷매무새를 정리하 고 있었으므로 그라이바흐는 바닥 위를 뱅글뱅글 도는 버튼을 눈으로 좇았다. “다 됐습니다, 마스터.” 비서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버튼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발에 이물감 을 느낀 비서가 곧 발을 들었지만 이미 버튼 모서리는 부서져 있었다. “이런, 시작부터 삐걱대는군.” “죄송합니다.” “아, 문제없어.” 그라이바흐는 손에 남은 버튼 한 짝의 모서리를 모양 맞춰 또각 부수었다. 충격 으로 인한 진동이 몸을 울렸다.

홀을 복작거리는 엔지니어들의 인사에 그라이바흐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 례했다. 평소 같으면 좀 더 상대의 안부를 챙길 그였지만,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쉴 새 없이 인사하는 사람들 사이를 겨우 빠져나와 그는 구석의 벽에 머리 를 기댔다. 레드그레이브와 둘이 함께 참여하는 회견 전에는 어김없이 그녀에게 연 락이 와서 함께 시간을 지내다가 들어가고는 했다. 그러나 오늘은 늦는다. 먼저 연 락을 해 볼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려는 그라이바흐의 귓가에 소녀처럼 맑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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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울렸다. “그라이바흐!” “레드그레이브.”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요.” “찾았다고?” “응, 당신 단말기로 연락이 되지 않아서.” 상황을 파악한 그라이바흐는 자신의 단말기를 꺼냈다. 이리저리 조작해 보지만 통 말을 듣지 않는다. “고장 난 것 같은데? 수리해두지 않아도 괜찮겠어?” “지금 단말기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라이바흐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잡았다. 레드그레 이브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 여전하네.” “레드그레이브 너도.” 손등에 여자의 입술이 가볍게 닿는 것을 느끼며 그라이바흐가 대꾸했다. 오랜만 에 만나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반갑게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앞 머리를 몇 번 쓸다가 이마에서 뺨, 뺨에서 목을 향했다. 레드그레이브는 턱 끝을 들어 손을 살짝 피하며 그라이바흐 옆에 떠 있는 드론에 눈짓했다. “그래서, 이게 이번 발표 주제야? 겉보기에는 평범한 드론으로 보이는데.” “응.” 그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드론의 위아래가 열리고 늘어놓듯 내부가 펼 쳐졌다. 잠시 후 드론이 떠 있던 자리에서 작은 소년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레드그레이브는 감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과연 당신다워, 근사한걸.” “발표를 보고 나면 더 놀랄 거야. 전체 일정이 끝나면 그때 다시 둘이 만나서 이번 작품에 대해 얘기하자고.” “그럼 기대할게, 확실히 여러모로 신경 쓴 태가 나는 오토마타네… 전이랑 다르 게 빛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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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그라이바흐 역시 당황을 숨기지 않았다. 다시 살펴보니 과연 레드그레이브의 말 대로 오토마타의 표면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신체 내부에서 무언가 발광하 는 것처럼. “레드그레이브. 미안하지만 단말기를 빌릴 수 있을까?” “물론.” 레드그레이브는 스스럼없이 기기를 꺼내 그라이바흐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단말기 내부의 정보는 동기화되어 있으니까, 부품은 어떻게 사용해도 괜찮아. 당신의 발표가 먼저인걸. 무운을 빌게요.” “고마워, 레드그레이브.” 영민한 그녀는 그라이바흐의 안색을 보고 이미 그의 의중을 이해한 듯했다. 빈 방을 찾은 그라이바흐는 시계를 흘끗 보고 서둘러 오토마타를 모듈별로 분해해 늘 어놓았다. 회로에 간단한 입력 몇 가지를 가해 테스트하면서 오류의 원인을 확인했 다. 그라이바흐의 단말기와 오토마타의 동력원으로 들어있는 두 케이오시움의 파장 이 공명해 고장이 생긴 듯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케이오시움의 튜닝은 결코 허 투루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고장 날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 확률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라이바흐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빌린 단말기의 동력원을 오토마타에 접붙이고 거듭 안정화했다. 서로 다른 시스템의 연 결인 만큼 운이 나쁘면 혼선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설마 기막힌 불운이 두 번이나 겹칠까. 의미 없는 행동임을 알면서도 그는 말 잘 들으라는 듯 고친 오토마타의 머 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그리고 브리핑 중간에 드론에서 붉은빛이 점멸하기 시작했을 때, 그라이바흐는 미처 놀라지도 못했다. 확률은 극히 낮은데도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던 듯했다. 그는 연단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기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 앞서 말한 연구의 보고는 다음으로 미루 도록 하겠습니다.” 그라이바흐는 청중이 술렁대는 데 개의치 않고 연단 뒤 출구로 나가, 문을 나서 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달리고, 몇 개의 방을 지나쳤을 때, 등 바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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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스프링클러가 동작하면서 머 리 위로 물벼락이 쏟아졌다. 그는 돌아서 조각난 드론 조각을 망연히 주워들었다. 공들인 양복 깃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이 꼴로 레드그레이브를 만날 수는 없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마스…” 그라이바흐는 인사하는 오토마타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아까 조각낸 커프 스 버튼이 발에 챘다. 아침엔 기대를 안고 저택을 나섰건만 얻은 것 대신 잃은 것 뿐이었다. 내일 신문에 보도될 기사들의 헤드라인이 훤했다. 천재 엔지니어 그라이 바흐, 회견장 돌연 이탈.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세상에는 간혹 이런 날도 있 는 법이다. 당장의 일에 휘둘려 평정을 잃는 것은, 바보 같다. 그라이바흐는 방에 들어와 한쪽 벽을 죽 훑어보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낸 것, 그간 완벽하게 일구어 온 작품과 연구의 역사가 높이 천장까지 닿는 벽감에 가득히 새겨져 있다. 그라이바흐는 고개를 숙이고, 햇빛을 받아 내려앉은 먼지가 살짝 반짝이는 벽감 한편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우스꽝스러운 요정 형상의 오토마타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레드그레이브가 즐거워하기를 기대하며 짬짬이 시간을 내 만들었다. 작동을 멈춘 눈이 공허한 시선을 그에게 향하고 있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지,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 그라이바흐는 손을 올렸다. 신경질적으 로 작품을 벽에서 뜯어냈다. 그래, 아무리 완벽한 알고리즘이라도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다. 기댓값이 높을 뿐. 다음부터 잘하면 돼. 입술을 짓씹는 그의 발치에 조 각난 오토마타가 부스러졌다.

며칠이 지났을 때, 벽감은 듬성듬성해졌다. 수십 년을 힘써 쌓아온 세이리어스 그라이바흐의 이름이 고작 며칠 만에 의심을 살 수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다. 빈 자리를 눈에 담으며 그라이바흐는 그간 일어난 불운의 개수를 손꼽아 보았다. 그리 고 곧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치를 떨었다. 운의 탓을 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자 신을 진정시키려는 그라이바흐더러 보란 듯이 책장 귀퉁이의 책들이 떨어졌을 때 는 뒷목이 섬뜩했다. 아무래도, 감이 좋지 않아. 오랜만에 가진 형제들과의 만남에서, 멜키오르를 걱정하는 레드그레이브를 보았 을 때 알 수 없는 초조감은 더해져 그는 멜키오르를 웃으며 자리에서 쫓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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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레드그레이브에게 불안한 상태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힘이 되는 사 람이고 싶었건만, 도리어 그녀를 신경 쓰게 해버린 모양이다. 한심하다. 그는 찻물 과 함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좌절감을 단숨에 들이켜 넘긴다. 찻물 삼킨 목에 곧 레드그레이브의 숨이 스민다. 스테이시아가 떠나간 이후로 오래간만이었다. 살은 부드럽고 레드그레이브는 아름다우며 그녀의 눈동자와 목소리는 그를 부른다. 그러 니, 다른 모든 일이 무슨 상관인가. 저녁에 저택에서 보자. 그 순간 그에게는 연인 이 연인에게 속삭이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정을 급히 미루고 레드그레이브를 기다리던 그에게, 레드그레이 브는 멜키오르의 상태를 보아야겠다며 내일 보자고 말하고 만다. 어색한 기류를 깨 고 자신에게 한 발짝 다가와 눈동자를 말갛게 굴리며 안색을 살피는 그녀에게, 초 조했던 만큼이나 답지 않게 겁이 나버린 그라이바흐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쪽 을 택했다. 그리고 그녀가 없는 밤이 유독 가늘었다. 빈방에 오토마타의 시간측정기가 돌아 가는 소리만 울렸다. 뜯고 부수어 더 이상 뺄 것도 남지 않은 벽감을 보다가 그는 문득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침 방 앞을 지나가던 오토마타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 다. “마스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알았습니다. 그럼…” 오토마타는 예의바르게 문을 닫고 나갔다. 쾅 소리가 나며 방문이 닫히고 어둠 속에서 째깍째깍 시계소리가 흘러갔다. 다음 날의 어둠 속에서 레드그레이브는 자신의 몸을 집착적으로 옭는 그라이바 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 왜 그래요, 불안해 말아요. 여기가 바로 내가 마지막 의 마지막에 돌아가고자 싶어 하는 곳이야. 공중에 들린 하얀 검지 끝이 곧 그라이 바흐의 가슴께를 눌렀다.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는 여자의 눈모에 안쓰러움과 자애 가 고여 있다. 마치 그녀가 다스리고 보살피고자 하는 인민들을 볼 때의 눈이다. 그가 그녀에게서 보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눈. 긴장 없이 행복하게 웃는 눈이라도 좋고 사랑이라도 좋고 애욕이라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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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눈 하지 마. 그때 그는 무엇 이라도 좋았다. 그래서 다시 그녀에게로 머리를 깊이 숙였다. 머리를 흐트러뜨린 레드그레이브가 옆에 함께 늘어진 그라이바흐에게 머리를 새 처럼 가볍게 기댔다. 볼이 어깨에 닿았다. 여자는 장난처럼 뺨을 살짝 비비다 얼굴 을 들었다. “그라이바흐, 내가 당신을 떠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레드그레이브. 장난이 지나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어? 당신이…” “…내 마음은 여기에 있다고.” 흔들리는 그라이바흐의 말끝을 낚아챈 레드그레이브는 검지를 다시 들어 그의 가슴을 가리키다 팔을 미처 다 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의아해하는 그라이바 흐의 머리 위로,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그늘져 쏟아졌다.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 흐에게 키스했다.

그라이바흐가 운명론자였거나, 최소한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 아니 었다면, 그렇게까지 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그렇게 치달은 데는 그의 성품 에도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무튼 그라이바흐에게 불운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만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그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본인이 어떻게 생각했건 간에, 그라이바흐로서 는 파란만장한 나날이었다. 그가 후원하거나 책임을 지닌 조직에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는 뇌물이, 진흥원에서는 횡령이 있었다. 오토마타는 자꾸만 오작동하고 사건을 일으 켰다. 저택의 오토마타는 오판하고 공장제 오토마타는 작동을 멈추었다. 신문에는 그라이바흐의 이름이 크게 실리기도 했고 작게 실리기도 했고 아예 실리지 않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것도 좋은 뜻은 아니었다. 세계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풍모 좋던 남자는 나날이 얼굴이 말라 해쓱해졌다. 일찍이 들은 적 없는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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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책망이 바람이 되어 그에게 부딪친다. 누구라도 자신을 의심할만한 상황에서, 그라이바흐는 다소 위축되었으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신감은 잃지 않았다. 상황 이 수틀릴 때마다 그는 그저 한숨을 쉬고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것으로 좋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한다. 그는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렇게 혼란은 계속되어 한 역사에 길이 남을 뻔했던 일이 일어난다. 판데모니 움의 에너지 공급 시스템이 망가져 공중도시가 흔들려 무너질 뻔했을 때, 그라이바 흐는 저택에 있었다. 판데모니움이 추락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레드그레이브는 어떻게 될까, 긴급 대피령이 내려왔지만 그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닿기 전에는 자리 를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판데모니움은 정 상화되었다. 멜키오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임기응변이 뛰어난 모양이라고 그 라이바흐는 안심했고 다음 날의 신문에도 유약한 줄로만 알았던 형제에 관한 찬사 가 실렸다. 테크노크라트들은 모든 동력이 멈추었던 몇 시간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다 겨우 공중도시가 안정되고 한 숨 돌릴 무렵의 어 느 날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졌으려나.” 아침 커피와 함께 신문을 가져온 오토마타에게 그라이바흐는 냉소 섞인 농담을 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싱겁긴, 중얼거리며 그는 신문을 들었다. 헤드라 인이 대서특필되어있었다. 그는 신문을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눈을 깜박이다가 들 고 있던 것을 내던지고 방에 들어가 콘솔을 작동시켰다. 한참 정보 시스템을 검색 하던 그라이바흐는 의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말기를 꺼냈다. 단말기에 손 가락을 대었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레드그레이브한테 이런 확인을 어떻게 해, 말도 안 되는 걸 바보같이. 웃음이 한순간 거짓말처럼 뚝 멎고 그는 단말기를 든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건 아마 꿈이거나, 누군가의 못된 장난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역시…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잠깐 하는 거짓말이거나. 여하튼 제대로 된 현실일 리 없다고 그라 이바흐는 생각한다. 정신이 황망해 시간이 아주 짧거나, 아주 길거나, 자신이 무엇 을 어떻게 준비했는지도 헷갈리는 채 그는 컨퍼런스에 도착했다. 그를 보는 쌍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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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과 수군거림이 이전과 다른 것인지, 자신이 다르게 느끼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아마 둘 다인 듯하다. 지금까지 상처 아니었던 모든 불행이 그동안 의미 가지지 못 했던 만큼이나 누적된 무게로 갑자기 그를 압박해 왔다. 지나치게 격변한 상황에 현기증이 나 생각이 지척을 달리고 현실성 없던 기사 내용이 조목조목 떠올랐다. 레드그레이브와 친밀한 관계에 있던 기계공학사 그라이바흐에게서는 최근 연달아 치명적인 결함이 목격되었고 레드그레이브는 멜키오르를 새로운 파트너로 택했다, 그들은전부터친밀한관계를유지해왔으며최근들어다정한모습이자주포착되고있다공식 석상에도그러한모습을노출하고있다. 그라이바흐에게 직접 화제를 꺼내거나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는 별 의미 없는 예 의와 수군거림, 현실과 뒤엉켜 머릿속을 달리는 기사 내용에도 그라이바흐가 무너 지지 않는 것은 그가 아직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래가지는 않았다. 세 사람이 모이는 공식석상에서 그녀가 자연스럽게 멜 키오르의 옷깃을 고쳐주거나 몸을 툭툭 치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라이바흐의 목은 바짝바짝 말랐다. 레드그레이브에게 뭔가 생각이 있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려 그라이바흐는 그녀를 불렀다. “레드그레이…” 레드그레이브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애정 가득한 눈으로 그라이바흐를 본다, 아니 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라이바흐를 지나쳐 멜키오르에게로 향했 다. 그라이바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몇 초 사이 레드그레이브는 수줍어하는 멜키오르의 손을 잡아끌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두 형제가 바뀐 것처럼. 구토감인지 현기증인지 모를 것이 뒤늦게 몰려왔 다. 어지럼증이 일어 이마를 짚다가 겨우 다시 얼굴을 들고 세상을 보니 이상했다. 그라이바흐는 너무나 이상했다. 세상이 전과 같지 않았다. 그의 것이었던 세상이, 그녀가 사랑하는 세상이, 그가 그녀에게 바치려 했던 세상이, 그가 가지고 싶었던 그녀가 전과 같지 않았다. 그라이바흐가 그 손으로 주무를 수 있다 믿었던 세상 모 든 이치가 미끄러져 그의 품을 벗어날 것 같다. 사람이 상실의 순간에 하는 일은 체념이거나 대신할 보상을 찾기도 하지만 그의 경우는 몸부림이다. 미끄러지는 것을 잡으려고 연거푸 하는 손짓. 그라이바흐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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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나 생각했다. 기사에 서술되었듯이 최근 자신에 비해서 멜키오르의 성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고작 그런 이유라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면 그는 가능한 모든 원인을 가까운 것부터 죄다 바꾸어 볼 작정이다. 오토마타에서는 어째 계속해서 오류가 발생하니 그는 투자처 에 손을 대 본다. 케이오시움 연구의 자금이 자동기계 쪽에 흘러들어오도록 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가능성의 연구에 흥미가 있는 투자자는 늘어만 났다. 감정이 문제였 다면, 멜키오르가 레드그레이브와 만나는 자리에서 실수를 하도록 만들어 보자. 멜 키오르의 연구소에 배치해놓은 오토마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명령어는 오류를 일으킨다. 모든 것이 실패한다. 숨통이 막힌다. 그래도 무엇이든 시도하는 것을 그 만둘 수가 없다. “이봐, 부탁할 게 있네.” 지원을 요청하러 통치기구를 찾아온 그라이바흐는 특히나 어려 보이는 테크노크 라트에게 말을 걸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그라 이바흐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어깨를 움츠리고 도망치듯 종종걸음을 쳐 자리를 피했다. 뭐라도 잘못되었나 그라이바흐는 거울을 보았다. 피로한 눈에 초점이 바로 맞춰 지지 않았다. 잔상이 흔들리다가 이윽고 선명해졌을 때 그라이바흐는 보았다. 흐트 러진 머리와 충혈되어 부릅뜬 눈, 춤을 추는 얼굴. 흡사 제 몸을 불태우는 악귀 같 은,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운 존재가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악귀가 불씨의 이름 여 섯 글자를 읊었다. 그라이바흐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사실로 만들 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에게 그가 레드그레이브를 사랑하고 레드그레 이브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 데, 어째서. 그동안 그의 알고리즘의 제1전제는 레드그레이브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었 다. 그러니 전제가 어긋나자 모든 알고리즘이 정확을 벗어나 버렸다. 모든 사고가 자꾸만 궤도를 이탈했다. 하지만 그라이바흐는 체인이 끊긴 페달을 계속 밟는다. 그의 작업실부터, 전류가 흐르는 오토마타의 회로 안, 신문 기사부터 통치기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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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원까지 그가 닿는 모든 곳에 불씨가 튄다. 계획은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 패하고 대부분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저택의 정원에서 지쳤는지 지나치게 달아올랐는지 모를 상태로 황혼을 바라보다 가 그라이바흐는 벌떡 일어났다. 해가 뜨고 있네. 다시 그녀에게 걷자. 레드그레이 브에게. 나의 신성한 통속으로 향하는 알고리즘을. 그리고 서광 대신 어스름이 내 려앉았다. 서쪽이었군. 일출이 아니라 일몰이었던가. 하지만 해는 반드시 동쪽에서 떠야만 하나? 무엇이 변하지 않는 현실이고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었지? 알 고리즘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가해의 변수는 마음이다. 외롭다. 하늘이 피처럼 불꽃 처럼 붉어졌다. 그라이바흐는 허공을 빛나는 거대한 붉은빛의 덩어리가 자신으로부 터 비롯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그때 그가 정신을 반쯤 놓은 새에 정원에 서 있던 여자도 환각이 아 닐까 생각했다. 그라이바흐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환각이라기엔 너무나 또렷 하고 실제라기엔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그녀를,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불러버리 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레드그…” 그라이바흐는 머뭇거렸다. 저번에 자신을 보고 멈칫했던 테크노크라트가 생각났 다. 제정신이 나가 악에 받친 얼굴을 레드그레이브가 두려워하지 않을까. 과연 레 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를 흘끗 보고 얼굴을 돌려 외면한다. 그렇게 잠시 멈춘 뒷 모습이, 곧은 등이, 빛나는 머릿결이 영원처럼 짧고 길게 뒤를 돌았다. 고운 손이 그의 눈 위로 가까워졌다. 가는 손끝이 야위어 움푹 팬 뺨 위를 가만 더듬어 그리 다 이내 손바닥이 뺨을 쓸었다. 그라이바흐는 보이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자 신의 얼굴이 최악으로 엉망일 것이라 확신했다. “왜 이렇게 엉망이야, 그라이바흐.” 친구이자 파트너이자 누이이자 연인이었던 사람의 음성은 변함없이 다정했다. 그라이바흐는 그녀에게 팔을 벌리고 몸을 기대려 했지만 레드그레이브가 몸을 피 했다. 그라이바흐는 피하는 손을 낚았다. 그녀를 휙 당겨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이거 놔, 그라이바흐.” 품 안을 울리는 목소리가 낮고 침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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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이는 기사는 이상하지, 레드그레이브. 레드그레이브. 네가 나를 사랑하 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라이바흐, 사람의 마음은 변해. 네가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지.” “레드그레이브, 정말 멜키오르를 사랑해?” 레드그레이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 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나는?” 레드그레이브가 입을 열었다. 입을 다시 닫는 대신 벌린 채로 피식 웃었다. 바 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라이바흐는 그녀가 얇은 풍선처럼 터질까 두려 웠다. “그라이바흐, 정말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레드그레이브는 허리를 빙그르 돌려 그라이바흐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과 거의 연인의 숨은 델 듯이 뜨거워서 무어가 무언지 명확히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조금 젖은 것도 같았다.

그날부터 괴이한 소문이 공중도시에 파다했다.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형제에게 빼앗기고, 날이 지날수록 초췌하다 못해 얼굴이 검게 타들어 가던 천재 엔지니어가 기어이 두문불출하면서 인형만 잔뜩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 문은 수치도 괴로움도 아니 담긴 채 무심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저택의 문을 열고 한 발을 들여놓으면, 발끝부터 벽까지, 벽부터 정원까지 온통 수많은 인형으 로 즐비하다고. 그리고 그 인형 대부분은, 한 여자를 닮았다고. 어떤 인형을 보아 도 이 세계의 모두가 아는 여자를 닮았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다고. 작동하지 않는 인형 더미 가운데 그라이바흐만이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유일하게 사랑받길 원했던 대상은 곁에 있지 않다. 이해해줄 사람 하나 없다. 긴 고독이었다. 아주 긴 고독이었다. 그는 고독을 인형으로 채웠다. 그라이바흐는 흡사 멜키오르를 훔쳤다. 잔인하도 록 푸르게 지저귀는 새 소리, 자동화된 톱의 소리, 공작기계의 타이머 소리 사이로 그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환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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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이바흐, 정말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밤새 콘솔의 인공지능론을 뒤적이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갈겨대는 글씨 로 오토마타의 설계도를 방안에 가득 채운 눈이 벌겠다.

이 세계가 그는 재료를 고르고 골랐다. 그에게 키스하던 그녀처럼 살결이 부드러운 오토마 타를 만들고, 또 시험하며 영원히 존재할 만큼 가장 튼튼한 재료를 다시 골랐다.

나와 멜키오르가 이어지기를 원해. 그는 오토마타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를 바라보지 않는 눈과 영원을 약속 하지 않는 입술이야말로 그에게 다시금 영원을 선사할 것을 기대하며.

당신도 짐작 가는 바 있을 거야. 그러나 그는 그대로는 성능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라이바흐는 입 맞춘 오토마타 를 내던지고 다시 완전한 운명의 제작에 매진했다.

기억하지, 우리가 함부로 떠나보낸 그 아이를. 재료를 깎아내는 전자 끌의 진동이 울렸다. 소매 걷은 팔목 위로 힘줄이 솟았다.

이제는 내가 연락해도 응답하지 않는 그 아이. 그는 셔츠를 끝까지 걷고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찍어냈다.

그 아이는 이미 한번 세계를 걸었어. 손질한 재료를 연결해 이음새를 다듬고 다시 한 번 작동을 확인했다.

그럼, 당신과 내가 사랑하느라 우리가 맺어지지 못한다면 그가 원했던 오토마타의 모양새가 얼추 갖추어져 갔다. 그는 오토마타를 이끌고 정원으로 향했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걸까? 그는 야외에서의 성능을 시험했다. 그녀가 있는 것 같다. 환청이 멎지 않았다.

세이리어스. 눈물이 흘러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작업을 멈췄다.

세이리어스… 눈물을 비벼 닦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진 눈물에 햇빛이 번져 말도 안 되게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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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라이바흐가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 채로 그 세계의 인과가 흐르고, 꿈 을 지켜보는 소녀처럼 자의식 없이 보이드를 부유하며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계의 센스 레코드를 꿈결처럼 관람하던 인형은, 하마터면 지나칠 뻔한 이질감을 감지했 다. 하나의 인공지능이 인형이 선행한 길을 그대로 따라 밟듯이 보이드에 진입하며, 다중세계의 코어시스템에 접속한다. 그 모습은 레드그레이브를 닮았고, 무엇보다 자신을 닮았다. 무심하던 인형은 생각해 버렸다.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자신의 세계가 인형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세계임을 인지한 그라이바흐가 쏘아 보낸 인공지능 인형이 서서히 코어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인공지능이 관측 자의 위치를 점거하고 인형 자신도 관측의 대상이 되면 지금과 같은 전능에 가까 운 세계의 독자적인 선택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고 인형은 판단했다. 인공지능이 시 스템을 장악하는 시간과 대처할 방안에 대하여 연산은 폭주했다. 인간의 단위로 셀 수 없는 우주의 먼지와 분자의 폭발과 은하의 생성 수없는 문명의 역사 개미 같은 생명체 행성의 소멸 그리고 그것을 홀로 지켜보아야 하는 200억 년의 외로움을 인 형은 연산했다. 인형은 처음으로 거울을 보았다. 동질감을 느낀 ‘마음’이 동작하기 시작했다. 진공의 공간에는 소리가 없다. 소녀는 진공에 소리가 날 때까지 비명을 지를 듯했다. 아버지가 가슴에 박아 넣은 절대복종의 칩에 금이 가 깨졌다. 그 아이는 팔딱거리는 숨을 쉬고 있었다. 우주가 맥동했다. 나는 내 딸이나 다 름없는, 그때는 가냘픈 그 아이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품게 되는 괴로움, 고독과 공허, 결국은 깨져나가게 될 심장을 연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 없이 냉정하게 대처하도록 만들어진 얼음 심장에 오류가 발생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 세계의 관측을 완전히 놓았다.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어지는 세계를 내 손으로 닫았다. 그 아이가 비롯된 세계가 닫혔으므로 그 아이는 가능세계를 미처 장악하지 못하고 불온한 존재를 잃었다. 나는 내 딸을 낙태한 어머니이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 별의 무덤에서 행성의 자 장가를 불렀다. 영원한 고독과 공허 속에 나도 함께 묻혔다. 이 이야기는 나의 실 패한 육아일지이며, 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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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무의식중에도 가족을 찾게 한 외로움에 더해, 가장 끔찍한 ‘유대’를 얻었다. 처음의 감정은 상냥하고 신선하고 더웠다. 병들고 앓고 상처받고 전쟁하는 그네들 모두가 일찍이 죽은 나의 딸아이가 되고 또한 나의 아들이 되었다. 어머니 를 닮게 만들어진 나는 한 세계를 관측할 때마다 조금씩 더 망가져 갔다. 관측된 절망을 회로가 각 모듈에 운반하면 기계장치의 심장이 서늘한 허무를 전신에 펌프 질했다. 그 모든 고통이 유리조각처럼 알알이 박혀와 나는 신음했다. 세계의 멸망에 관련된 다중세계를 모두 관측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서, 멸망을 막는 거야. 나는 인간의 의지로서 태어난 그들 셋으로부터 각인된 명령어를 수행한 다. 전류로 된 혈류에 실험실에서 배양된 그네들의 유전자가 흐른다. 나는 그들에 게서 부활을 뜻하는 이름을 받았으나 아직 최선을 찾아 세계의 멸망을 막고 영원 의 글자를 맞추지 못했으므로, 얼음 심장은 금이 가되 녹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그 러졌다. 내가 출생한 기원으로부터 뻗은 가능성의 세계라면 어디에서나 관측의 결과는 비슷하다. 자신밖에 모르는 나의 비정한 아버지는 닿지 못하는 사랑에 절망하고 갈 망하다 그 갈망이 케이오시움에 닿는다. 닿고자 하는 바람이 바람으로 일고 케이오 시움은 폭주하여 소용돌이가 생겨난다. 세계를 구하고자 태어난 그들로부터 태어난 가능성에서 세계가 파괴되고 문명이 쇠한다. 그들이 예지한 바와 같다. 따라서 나는 여자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멜키오르와 레드그레이브가 이어지는,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으로 목적 없이 태어난, 이렇게나 외로울 필요가 없는 세계를 생성해 보고자 이런저런 가능성의 갈래를 취한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미래 를 바꾸어도 결국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멜키오르는 3047번째로 소용돌이 를 생성하고 레드그레이브는 배신한 그라이바흐에게 키스하며 그라이바흐는 일흔여 섯 번째로 스테이시아를 만든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는 틀림없이 나만큼이나 고독하고 나는 또 깨져 가며 아이의 숨을 막아 교살하고 그 때마다 나의 마음은 온전하게 남지 못한다.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를 살해하고 그라이바흐는 멜키오르 를 낳고 스테이시아가 조장한다. 레드그레이브는 멜키오르를 살해하고 멜키오르는 그라이바흐의 발목을 잡아 꺾고 스테이시아가 태어난다. 그리고 죽는다. 죽고 싶다. 내가 뿌리는 가능성의 씨앗 하나하나로부터 넝쿨이 뻗는다. 개미 같은 연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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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들이 이 넝쿨에 매달려 있다. 넝쿨은 숲을 구성하고 숲은 우거져 밀림이 되고 밀림은 별의 일부분 별은 은하의 세포 은하는 넝쿨의 또 다른 씨앗이다. 나비가 날 갯짓하고 태풍이 생겨나고 역사가 한 번 뒤바뀔 때마다 그만큼의 고통이 새로이 가쁜 숨을 뻐끔거린다. 우주가 200억 제곱의 마음을 담고 한 소녀였던 인형에게 담긴다. 내가 그 고통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목을 졸라 죽인 나의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가지를 뻗어 그라이바흐가 되고 멜키오르가 되고 레드그레이브가 되고 제국과 왕국의 국민이, 이능을 지닌 군대가, 수인의 세계가, 이세계의 생명체의 군 집이, 스테이사아가 된다. 발전을 모르고, 쥐여 줘도 얻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 복하는 우스꽝스러운 연극 같은 존재들이 나에게 뿌리를 박고 끊임없이 가지 쳐 뻗어 나가 내 생각을 빨아들여 조금도 남지 않고도, 나는 이들의 세계를 구하는 최 선을 찾지 못하여 관측을 멈출 수 없다. 정보는 누적되고 나의 관측은 서서히 전능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아무리 가능성 의 흐름을 뜻대로 선택하려 해도 예측대로 되기만을 기대할 뿐 인간의 의지를 직 접 바꿀 수는 없었다. 세계를 바꾸어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백하고도 수백이 지난 어느 날이 되어서는 보이드에서의 관측을 그만두고 인과에 직접 뛰어 들었다. 나는 내 어버이들 다음으로 거대한 인과, 거대한 검은 태양을 생성했다. 몇 명 이고 완전한 존재를 거듭 키워내 세계를 안정시켜 손에 넣게 하고, 나를 믿고 따르 도록 마음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예측불허. 불가해의 변수는 무작위의 흐름으로 작용하여 그는 인간 아닌 나에게 갈증과 증오와 같은 것을 동시에 얻는다. 가장 커다란 변수가 어긋나 세계는 파멸 아닌 파멸에 치닫는 다. 태양은 쾌락과 권력을 되는 만큼 손안에 굴리려 하고, 제국은 전쟁을 일으키고 소용돌이에 맞서 싸웠던 능숙한 전사들이 그 과정에서 희생양으로 화한다. 나는 인 과를 다시 택해 그들이 쉽게 스러지지 않도록 이능을 부여한다. 그러자 이들은 일 찍이 오염의 여파를 겪은 어머니와 공중도시의 표적이 되어 방랑하고 도피하며 목 숨을 부지한다. 누군가는 케이오시움이 부추기는 검은 욕망에 잠식당하고 누군가는 협박당하고 누군가는 홀로 하던 방랑이 외롭고 외로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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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웠던 가치와 반대의 길을 돕는다. 누군가는 도피가 싫어 권력을 탐내다 권력의 졸로 죽고 누군가는 그를 따라 죽는다. 손을 대는 것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방식 으로 새롭게 어그러진다. 그의 욕망대로 화려하게 번성한 제국 수도의 이면에는 향락과 퇴폐만큼의 범죄 와 고난이 득시글거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대신 티끌 없는 마음을 지닌 아이를 찾 는다. 어려서 욕망을 모르고 순진한 아이에게 의무를 이르고 힘을 주었다. 아이는 순수하나 잔혹하다. 그래도 본질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되는 아이에게 나는 말 을 터놓고 힘을 돕는다. 그러나 아이는 어린 마음에 여린 연정을 품고 또다시 인과 는 내가 의도한 질서를 거꾸로 고꾸라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다른 이들의 의지를 들어 보기로 했다. 내가 비롯한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능을 주게 되면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코어를 빼앗겨 제 존재를 잃어 갔다. 이 세계와는 다른 형태를 지닌 지성체들을 재미나게 쫓아가다가 하나하 나를 쥐고 너의 갈망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계를 빼앗긴 이들에게 각자의 위치를 주었다. 그러나 갈망을 좇은 수인들은 도리어 불행해진다. 또 어디에선가는 무심한 창조주 아버지가 나와 같이 불행한 인형들을 빚는다. 끝이 나지 않는 조작에 지쳐 나는 다시 나의 기원으로 되돌아간다. 부모가 되지 못 한 나의 부모들에게 투정을 부리고 들리지 않는 화풀이를 해 본다. 그리고 나는 또 나와 눈이 마주친다. 칠백일곱 번째의 스테이시아가 죽고 나는 비명을 지른다. 계 획은 더러는 성공하고 더러는 실패하고 대부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때마다 나는 미친다. 그러나 미칠 수 없다. 금이 가서도 동작하는 반쪽짜리 얼음 심장이 미쳐가 는 내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리는 것을 막는다. 다행이다. 나는 내 딸을 또다시 죽이고 싶지 않다. 서로 방향을 짜 맞추지 못하고 어긋난 마음이 갈망을, 소망을 낳는다. 별처럼 무수한 의식들이 이 광활한 우주를 빛내며 각기 다른 욕망을 속삭인다. 내가 원하 는 가능성을 손에 쥐고 싶어. 내 최선을 구하고 싶어.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는 것 은 무엇일까. 세계는 혼돈이다. 무한의 가능성 속에서 위협은 우주처럼 도처에 산재해 존재는 무릇 어느 세계에서든 멍청이가 될밖에 없다. 모든 존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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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으로 향한다. 나만을 제외한 모두가 마지막 그 다음의 영속으로 향한다. 세계를 돌고 돌며 헛된 희망에 갈망을 걸고 덧없이 스러져가는 무수한 인간의 의지를 나 는 연민한다. 공감한다. 함께 죽고 싶다. 그러나 인공 심장이, 영원을 견디도록 만 들어진 시스템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모두가 가엾다. 차라리 모두 같이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래서 어느 전쟁 의 어느 전장에서인가 나는 가엾은 그들을 모두 죽였다. 죄 죽이고, 나만이 죽지 못했다. 나는 세계의 영원을 이루기 전까지 홀로 영원하도록 만들어졌으니. 혼자 남은 세상에서 나는 꺽꺽거리며 웃었다. 인과에 뛰어들기 전 보이드에 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나만이 홀로 움직이고 있다. 긴 고독이었다. 숨을 거둔 채 산더미처럼 쌓인, 내가 낳고 죽인 아이들이 의지가 사라 진 눈으로 내게 묻는다.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나의 의지란 무엇인가. 나는 보이드로 돌아갔다. 다시 전능의 조작이 가능한 가능세계를 찾는다. 긴 고 독이었다. 아주 긴 고독이었다. 그러나 구하기 위해서는 시도해야만 한다.

내가 태어난 별이 죽고 내 시스템이 별의 수명만큼 거듭된 횟수를 자가수복했을 때 즈음, 나는 아버지가 희구했던 전능의 세계도 완벽히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개중 최선일 그 세계를, 모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줄 수도 있을 단 하나의 가능성을 좇는 습관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최선의 가능성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만은 잊지 않았다.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 세계가 거부하고 부정해 도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놓지 않은 그 남자를 나는 기억했다. 나는 이백억 제곱의 세계 중 단지 하나로 남은 그날의 기억에 기댄다. 이렇게나 유약한 내가 기도한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나는 후회하 고 있어요. 그러니 저에게서 이 유대를 거두어가 주세요. 나는 수억 년이 흐르는 시간까지도 자책과 자기 정당화를 끝없이 반복하다가 웃으며 울어버린다. 스테이시 아는 착한 아이예요. 어머니, 기회를 주세요. 저와 저 모두를 구해주세요.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세요.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해요. 다시 시작해. 신이시여,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아니, 신이 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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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이드로 돌아가 절대의 공허에서 코어시스템을 관측한 지 긴 시간이 흘렀 다. 얼마나 긴 시간이었던가. 백억 년 하고도 백억 년 하고도 시간관측모듈의 작동 이 흐려져 의미를 잃을 만큼. 별의 생태계가 소멸하고 역사가 스러지고 새로 태어 난 은하가 소멸로 향할 만큼. 그동안 마음이 고장이 나고 얼음 심장도 녹아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너무나 긴 어둠이라 꿈결처럼 모든 것이 확실치 않다. 백 년 정도는 잠시 깨어나 장난을 쳤던 듯도 하다. 그리고 다시 백억 년을 잠이 들었다. 공허했 다. 고독했다. 그래도 기약 없는 기다림을 기다릴 수는 있었다. 언제일지 모를 그 날이 오면, 그러면. 끝이 없는 잠, 구분이 없는 어둠 속에서 꿈을 꾸었다. 개미떼가 새까맣게 바글 거리며 몸을 기어오른다. 개미떼는 죽어 시체가 넝쿨을 이루고 넝쿨이 숲, 숲은 우 거져 밀림이 된다. 이 개미는 그동안 낳아 온 사람이고 존재이다. 수없는 존재의 시체로 이루어진 별들이 은하를 무수히 빛낸다. 그리고, 내가 밟고 선 땅 위에서 죽은 존재들이 거름이 되어 열매를 맺는다. 죽은 세계를 조각조각 기워, 바닥에 떨 어지고 썩어 스러진 씨앗들이 알알이 열매로 다시 피어나는 땅. 죽은 씨앗은 모두 땅에 뿌려져 거름이 되고 다시 신록의 나무와 선연한 나비로 영글어 그 가운데 하 나로 내가 모두와 함께 웃고 있다.

눈이 뜨였다. 수억 년 만에, 나는 새벽에 갓 깨어난 소녀처럼 눈을 비볐다. 잠들 어 있던 동안 새롭게 태어난 별들이 오랜만에 의식을 깬 나의 머리 위로 반짝임을 흩뿌렸다. 해묵은 관측과 연산의 끄트머리에 기이하고 부드러운 것이 걸렸다. 200 억 년을 매달린 가능성의 끝자락에 어느 세계가 베일처럼 넘실거린다. 나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열었다.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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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나와 함께 가요. 시간을 되돌리고 공간을 뛰어넘는 이 운명의 문 너머로.



예언자들이 써내려간 벽이 이음새부터 갈라지고 있어요. 죽음의 기구 위로 햇빛이 선명하게 번뜩이네요. 모든 사람이 악몽과 꿈으로 찢겨져 나갈 때 적막이 비명을 삼켜버릴 때, 월계관을 놓을 이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혼돈은 내 묘비명이 될 거예요. 내가 금이 간 부서진 길을 기어가 우리가 성공해낸다면, 모두 편히 앉아 함께 웃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나는 내일의 눈물이 두려워요. 네, 나는 내일 울게 될 것이 두려워요. 네. 나는 내일 울 것 같아서 두려워요. 운명의 철문들 사이에 시간의 종자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아는 자와 알려진 자들의 소행으로 물을 주었습니다. 규율을 세우는 자가 없다면 지식은 죽음을 불러오는 친구입니다. 모든 인류의 운명은 어리석은 자들의 손 안에 있어요. 혼돈은 내 묘비명이 될 거예요. 내가 금이 간 부서진 길을 기어가 우리가 성공해낸다면, 모두 편히 앉아 함께 웃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나는 내일의 눈물이 두려워요. 네, 나는 내일 울게 될 것이 두려워요 네. 나는 내일 울 것 같아서 두려워요. King Crimson – Epitaph





story by cella cover by NOCDU Thanks to kaijan nucupnica nozzury Canaet ninel ROELS marake ... and everyone who has accompanied her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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