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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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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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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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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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명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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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방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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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색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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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반역자

…………………… 24

7. 배드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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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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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살을 누르는 감각이 생경하다. 서툴러 거칠기까지 한 손길이었 지만 달뜬 공기 속에서는 그것마저도 자극인 듯하다. 손가락이 닿는 곳 마다 점점이 열이 올라 붉어진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이츠키는 움찔거 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정직하고 노골적인 반응이라 오히려 거짓 말 같았다. 여린 살 안쪽에 손을 대자 이츠키는 숨을 흡 들이키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니토, 니토. 그만…….” 내가 한때 이 사람을 신처럼 올려다보았다니. 나즈나는 묘한 기분이 되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긴 눈꼬리 끝 이 붉게 상기된 채, 젖은 눈동자로 애원하는 얼굴은 오히려 상대에게 보채는 것만 같아 보인다. 거울이라도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강제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빼는 거야, 이츠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하지만 니토 나즈나는 이츠키 슈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하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정말 안 돼, 스승님? 나, 스승님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나즈나는 예전, 발키리 시절에 있을 때 줄곧 그랬듯 눈썹을 올린 채 눈을 크게 뜨고 이츠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는 나쁜 아이구나. 그 시절의 옷을 입고 그때의 얼굴로 스승님을 부르는 자신을 이츠키 슈가 내칠 수 있을 리 없다. 그게 죄책감 때문이든, 혹은 다른 무엇 때 문이든 결과는 확실하다. 이츠키가 입술을 달싹거리다 얼굴을 붉힌다. 웃음이 났다. 쾌감이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고 어깨가 가벼워서 날 아갈 것 같다. 드디어 벗어던졌어. 마냥 착한 아이로 지내는 건, 정말 지긋지긋했어.


1. 토끼

“잘했어, 나즈나. 착한 아이구나.”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니토 나즈나는 말재주는 없어도 충분히 영리했기에 성공의 요령을 알고 있 었다. 일단 한 발짝 빠져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모든 것이 확실해 지는 때에 실패 없이 단번에 해내는 것. 그렇게 하면 온갖 달콤한 것들 이 호박 넝쿨처럼 줄줄이 얽혀서 작은 손안에 굴러들어왔다. 애정, 칭 찬, 인정, 신뢰. 그래서 나즈나는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성서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빠짐없이 성가를 부른 이 유는 단순하고 확실했다. 사람들의 웃음이 좋았다. 있는 힘껏 노래를 부 르고 나면 사람들이 보여주는 믿음 담긴 미소가 좋았고, 애정에 가득 찬 목소리가 좋았다. 그렇게 해서, 열다섯 해 동안 그럭저럭 행복한 인 생이었다. 나즈나의 방은 언제나 조금씩 어질러져 있었다. 한쪽에는 플레이하 다 그대로 놓은 게임 패드가 있었고, 작은 플라스틱 함에는 모아 둔 캔 배지가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벽에는 키 재기용 줄자가 붙여져 있고(설 마 고등학생이 되면 키가 더 크겠지!), 인테리어나 침구의 색조도 밝은 톤이라 항상 이래저래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부모님이 퇴근하시 기 전 시간이면 나즈나는 잽싸게 바닥을 대충 치워놓았다. 애교가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집에 들어오는 대로 나즈나부터 찾아주었 다. 그리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메뉴는 무엇일까 상상하는, 그런 작고 소소한 온기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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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내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남들보다 부쩍 크지 않는 키가 걱정이었고, 토끼가 자꾸 케이지 밖에 멋대로 똥을 싸놓았고, 교회에 새 로 부임한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즈나가 어릴 적부터 예뻐하시 던 나이 많은 목사님 대신 새로 온 젊은 목사가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꽤나 엄숙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한 달쯤 전에는 성가 대회가 있었는 데, 나즈나가 대회 날 성가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취 하며 사진을 찍자 그가 야단을 쳤다. “남에게 자랑하려고 입는 옷이 아니야. 주님께 더 좋은 노래를 헌상 하기 위해서 입는 거지.” “죄송해요.” 물론 나즈나는 남에게 보이려고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사 실은 조금도 죄송하지 않았다. 대회에서 우열을 가리면서 자랑하지 않 는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나즈나에게 그가 덧 붙였다. “요즘 목소리가 조금 걸걸해진 것 같더구나. 네 고운 목소리는 주님 이 너를 사랑하셔서 내려주신 게니까, 그렇게 계속 불경한 태도로 임하 면 큰일이 날지도 몰라.” 당연히, 신 같은 건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세상에는 노력해도 쉽 게 되지 않는 게 있었다. 현실주의자가 성격을 바꿀 수 없고, 무신론자 가 신을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내 목소리야. 내가 연습해서 갈고 닦은 노래야!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속으로 불평 하다가 눈을 드니 목사가 대답이 없는 나즈나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나 즈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목사님.”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남들이 보는 나즈나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 다. 그 믿음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4


“만약에 신이란 게 있어도, 그 사람 같은 성격일 거야.” 혼자 있는 집 거실에서 나즈나는 입을 오물거리는 토끼를 안고 케일 을 먹이며 말했다. “권위적이고, 변덕스럽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아끼다가도 내버려 서 벌을 주고……. 구약성서 속의 신은 그렇잖아. 정말로 인간을 사랑하 기는 하는 걸까? 그런 신은, 있어도 난 그냥 안 믿을래. 그리고…….” 갑자기 짜증이 치솟은 나즈나가 눈썹을 찌푸리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연습해서 갈고닦은 거야, 이 목소리는! 누가 멋대로 앗아갈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게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깜짝 놀란 토끼가 후다닥 튀어 올라 케이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던 나즈나는 곧 토끼 는 소리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토끼는 아직 거실 구석에서 눈을 크게 뜨고 나즈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잘 놀라고, 귀가 커서 소 리에 민감하고, 계속해서 남의 눈치를 살피는 토끼. 나즈나는 다시 조심 스레 다가가 몸을 숙이고 토끼의 하얀 털을 쓰다듬었다. “너도 불쌍하구나.” 그리고 제 입에서 나온 소리에 흠칫 놀랐다. 아니야, 나는 불쌍하지 않아! 나즈나는 흠칫 일어나 몸을 뒤로 빼고, 혼잣말을 들은 사람이 없 는지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벽에 걸린 거울을 마주했다. 나즈나는 그 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반질반질한 유리면에 하얗게 비친 얼굴을 바라 보았다.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피는 자신의 모습은, 정 말로 토끼를 닮았다.


2. 천사

이제 공연까지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츠키 슈는 아직 새 의상의 레이스를 뜨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수예부실에서 그 모습을 그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사정은 간단했다. 원래 벚꽃페스에 참 가하기로 했던 유닛의 멤버들이 여자와 놀다가 적발되어 지역 신문에 실리고 자숙을 선언했다. 그래서 대타로 무대에 설 것을 요청받은 때는, 이미 공연 일주일 전이었다. 물론 이츠키 슈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하지 만 그 능글맞은 양호선생이 완고한 슈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결국 참 여하겠다고 대답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만, 너희가 신경 쓸 건 없다. 조금 부지런을 떨면 내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이야.” ……라고 말했지만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침묵 을 지키던 나즈나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스승님……. 레이스 같은 디테일은 생략하는 건 어때? 이제 사 흘 남았는데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조용히 해라, 니토. 집중이 흐트러진다.” 이럴 줄 알았지. 나즈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동안 옆에서 미카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응아아, 스승님. 바빠 보여서 나도 좀 도와줄라 캤는데 이 레이스 엉 켜버린 것 같다! 이걸 어째?”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니까! 실패작 같으니. 좀처럼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오늘 저녁은 해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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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안타, 스승님!” 좀이 쑤시는지 슈의 눈치를 보던 미카가, 나즈나가 말을 거는 동안 레이스에 손을 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럴 실력은 못 되는데 말이지. 괜스레 미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나즈나가 대신 사과를 했다. “미안, 스승님. 괜히 내가 말을 걸었지…….” “미안해할 것 없어. 너는 나의 최고의 작품이니까.” 그가 레이스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로 당연하게 이런 말을 하는 데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서, 낯간지럽다. 예전에는 들 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칭찬 아닌 칭찬에 소름이 돋고 얼굴이 달아 올랐다. 그리고 슈가 얼굴을 들었다. 역시 가장 낯간지러운 것은, 표정 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마주하면서 이런 표정을 할 수 있는 걸까? 지금까지 살면서 들었던 모든 칭찬이나 보았던 웃음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표정이었다. “아무튼, 이제 구상이 끝났으니 너희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거다. 둘 다 조용히 하거나 멋대로 나가서 차나 마시고 있거라.” 그렇게 말하고 슈는 옆에 있던 모포를 뒤집어썼다. 그가 극도로 집중 할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긴 손가락이 하얗게 빛나는 은사를 들어, 날실과 씨실을 엮고 꽃잎 모양의 레이스를 짜낸다. 길고 얇은 눈꺼풀을 내리깐 채로 집중하는 얼굴이 창백하다. 예전에 성당에서 보았던 마리 아상이 꼭 저런 모습이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즈나는 고개를 세 게 흔들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인간인걸. 신데렐라 이야기 속 요정도 아니고, 인간 이 저 많은 양을 한 번에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어.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중간에 타협하겠지.’ 나즈나의 생각에 아랑곳없이 슈는 하염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자세 가 추처럼 굳게 고정된 채로 손가락만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손 7


끝에서 줄줄이 레이스가 완성되어 나오는 모습은 흡사 기계 같아 보이 기도 했지만, 만들어진 것을 보면 기계라기보다는 차라리 마법 같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완성된 직물 끝에는 봄의 꽃과 나비와, 하늘과 아지랑이와 온갖 꿈같은 것들이 가느다랗게 빛나는 은사로 그려져 있 다. 나즈나는 넋을 놓고 완성된 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사람은 그냥 인간이 아니었지.’ 그렇게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자 슈가 나즈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그러지, 니토? 이 직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그런 표정은 아닌데……? 뭐, 좋아. 이렇게 고비는 넘겼다만, 솔직히 오늘 저녁까지 는 고생을 좀 해야겠구나. 그러니 사랑스러운 너는 좀 더 나의 창작욕 을 고취시켜 주거라. 자, 예쁘구나.” 슈는 나즈나의 얼굴 위에 방금 온 정성을 기울여 짠 레이스를 베일처 럼 씌우고 웃었다. 눈앞에 희고 반투명한 은빛의 직물이 너울거렸다. 어 지러웠다. 어쩐지 머리에 쓴 레이스와 슈의 손을 그대로 내치고 싶었다. 예쁜 인형 취급받는 것이 답답했다. 가슴이 갑갑할 뿐만 아니라 울렁거 렸다. 아마 아직도 인형처럼 취급받는 게 낯간지럽고 어색해서, 그리고 또한 그런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 었다. 그는 노래에 자신감을 잃고 헤매고 있던 나즈나를 발굴해낸 프로 듀서이고, 지금의 자신을 만든 창조주이고, 인형의 마스터이고, 신이었 기에. 열여섯에, 니토 나즈나는 처음으로 신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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