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roid sa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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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고 찾아와준 여러분, 정말 고마워. 앞으로 기억해줄 여 러분에게도 고맙네. 내 이름은…….


EIROID

1. 아케론

2. 코퀴토스

3. 플레게톤

4. 레테

5. 스틱스


1. 아케론

삐빅, 삐빅. 알림 소리에 눈을 뜬 하스미 케이토는 무심코 귓가에 놓인 휴대폰을 손끝으로 밀어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화면을 켜 고 확인해본 시간은 11시 37분.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이래서야……. ‘생활이 망가졌군.’ 본가에서 계속 만화를 그리기가 여의치 않아 작업실을 따로 구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여러 번 밤을 새워 마감을 하고, 깨워줄 사람이 곁에 없는 생활을 반복하자 생활 리듬이 무너지고 말았다. 금방 깰 수 있도록 일부러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잔 탓에 빗장이 쑤시고 어깨가 결렸다. 휴대폰 메시지 알림 덕분에 중간에 깰 수는 있던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비스듬히 일으키고 메시지의 발신인을 확인 한 케이토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 녀석은 3학년이나 되어서는 아직도 학생회 일을 스스로 못 해내 나…….” 히메미야 토리(姫宮 桃李). 네 글자로 표시된 발신인은 연초에 종종 케이토에게 연락해서 학생회 업무에 대해 상담하던 녀석이었다. 정직하 게 말하자면, 그게 케이토에게 그렇게까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 정은 예전의 좋은 시절을 기억하게 하고, 어느 부재(不在)에 대해 상기 하게 만들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척하거나 밀어낼 수 있는 성격 도 되지 못했다. 피곤을 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 던 케이토는, 안경을 고쳐 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


급하게 거울을 보니 꼴이 아주 엉망이었다. 방금 자고 일어나서 부스 스한 머리에, 늘어난 추리닝.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빠 르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하자 마감에 찌든 만화가는 언젠가의 귀신같은 부회장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하스미 케이토는 곧바로 차 를 몰고 유메노사키로 향했다. * * * 2년 만에 들어오는 학생회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소한 부분들이 변해서 - 가령 선반에 다구와 티캔 대신 귀여운 인형들이 진 열되었고 - 세월을 실감하게 했다. 물론 가장 달라진 것은 눈앞에 있는 녀석이었다. 마냥 자그만 체구에 다른 사람에게 매달려 애교부리기를 좋아하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키가 크고 의젓해졌는지. 요정이 데려갔 다가 돌아오기라도 했는지 묻고 싶었다. "불렀나, 히메미야." 그러자 학생회장, 히메미야 토리는 놀랍게도 제법 근사한 웃음을 지 으며 다가왔다. "금방 왔네, 하스미 선배. 여기까지 오려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 했는데. 차라도 마실래?" "그건 됐다. 그보다, 네가 보낸 메시지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은데." 그러자 그려낸 듯이 웃던 토리의 미소가 금세 흐려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별 문제는 아니야, 부회 장……, 아니, 하스미 선배. 하지만…….” 그렇게 말한 녀석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은 표정을 하자, 현재 의 진짜 부회장이 ― 하늘색의 긴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사라 진 ‘왼팔’ 쪽이 떠오르기도 했다 ― 옆에서 거들었다. 4


“일단, 직접 보시는 게 좋겠어요.” 탁자 위에 있던 태블릿 PC를 앞으로 끌어당긴 하지메는 능숙하게 미 리 저장해 놓은 주소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사이트는…….” “설명은 생략해도 된다, 시노. 노래나 영상을 업로드하는 웹사이트인 가. 나도 그림을 몇 번쯤 투고했으니 알고 있어.” “아……. 만화가셨죠, 하스미 선배는.” 하지메가 미소지었다. “그러면 설명은 생략하고, 일단 보여드릴게요.” 말을 마친 하지메는 검색창에 몇 글자를 입력했다. ‘VOCALOID A’. 곧 화면에 여러 영상의 리스트가 떠 올랐다. “보컬로이드는……, 물론 아시겠죠? 사람의 목소리에서 음성을 추출 해서 저장해 두고, 사용자가 지정한 악보와 발음대로 합성해서 노래를 만드는 프로그램이에요. 그런데 지금, 처음 공개되는 보컬로이드의 신곡 이 무작위로 올라오고 있어요. 그것도 하루에 한 곡이라는 엄청난 속도 로. 실제 사람처럼 매력적인 목소리 덕분에 반향도 엄청나고요. 여기서, 문제는…….” 화면 위의 커서가 리스트 가장 위에 있는 동영상으로 향했다. 달칵거 리는 소리가 나고 곧,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면 전환이나, 화 려한 연출은 없었다. 단지 검은 배경으로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에서 남 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를 기억하고 찾아와준 여러분, 정말 고마워. 앞으로 기억해줄 여 러분에게도 고맙네. 내 이름은, A-ROID. “거기까지 하지.” 곧 이어진 노래가 채 한 소절 흐르기도 전에 케이토가 불현 듯 말했 5


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토리 대신, 일시정지를 누른 하지메가 말했다. “……저희는, 하스미 선배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 보컬로이 드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나요? 아니면, 혹시 회장이…….” 잠시 망설이던 하지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말했다. “생전에, 이런 내용을 녹음한 적이 있었는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숨을 고른 하지메가 계속 말을 이었다. “너무, 너무 비슷해요. 벌써 2년이 되어가니, 솔직히 이제는 회장님의 목소리도 가물가물했어요. 하지만 이 보컬로이드의 목소리를 듣고는, 학 교 자료실에서 fine의 노래를 찾아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랫동안 회 장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제 착각이기를 기대했지만, 이건 실제 회장 님의 목소리와, 거의 오차가 없다고 봐도 좋아요……. 하스미 선배도 그 렇게 생각하시나요?” 케이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차마 곧바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보컬로이드가 공개된 건 벌써 3주 전. 그리고 저희는, 사흘 전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동안 저희는 고민했어요. 토리 군은, 그래도 이제는 제법 의젓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몇 곡을 듣고 펑펑 울다 가, 제작자를 찾아서 히메미야 가의 재산을 총동원해서 보복하겠다고 날뛰던 것을 겨우 진정시켰어요. 우선, 경위를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 어요.” “……미안하다. 이건, 나도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너희는 알아보 지 않았나?” “계정은 완전히 새로 만든 계정이고, IP 역시 우회하고 있어요. 사람 을 시켜 추적해 보았지만, 작곡가는 꽤 철저하게 준비해서 정체를 가리 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 역시 우선 하스미 선배에게 연락해봐야겠 6


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그 표정은……, 역시 지금까지 모르셨 던 거군요…….” 케이토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참담했다. 저 많 은 노래를 웹사이트에 요청해 삭제하고 폐기처분해 버리고 싶기도 했 고, 혹은 그 전에 전부 듣고 저장하고 싶기도 했다. 상념이 꼬리에 꼬리 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감정에 생각을 맡기는 것은 지금 그의 몫이 아니었다. 케이토는 울컥 차오르는 상념을 머리 한구석에 밀어 넣고 말 했다. “……그런데 3주 전이었다면, 너희가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지? 아, 탓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유메노사키 전대 회장의 목소리다……. 3 학년 녀석들은 기억하고 있을 텐데, 이제야 알았다는 건 조금 신경이 쓰 이는군. 명색이 아이돌 학교인데, 보컬로이드에 관심이 있는 녀석은 없 었나?” 그러자 한동안 말이 없던 토리가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개하는 쪽에서 의도적으로 계획했거나……, 학생 쪽에서도 알아도 쉬쉬했거나. 둘 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왜……?” “그런 우민 녀석들의 생각이야 ― 토리군, 예전 말투가 나오고 있어 요! 하고 하지메가 옆에서 속삭였다 ― 내가 모르지. 하지만 부회장. 하 스미 선배. 들었으니까 알지? 이건 억양부터 숨소리까지 완벽한 에이치 님의 목소리야. 이런 걸 만든 쪽에서 관련인이 알았을 때 문제시될 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그러니까 뒤늦게야 안 우리는, 기대대로 후 속 조치를 취해주면 되는 거지. 가만있지 않겠어.” 하지만 케이토는 분개하는 토리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어딘 가, 마뜩찮은 부분이 있었다. 곧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말이 없는 케이토에게 토리가 재촉했다. "선배도 함께할 거지? 7


에이치님의 일이잖아." 그때 드르륵 학생회실의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 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케이토에게 다시 한 번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곧으면서도 선이 수려한, 단정한 미남의 얼굴을 한 학생은 문을 열자마자 케이토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 몇 초간 눈을 동그랗게 뜨 고 바라보더니, 곧 예의바르게 목례했다. “오랜만이군, 스오우.” “네. 스오우 츠카사, 지금 텐쇼인 형님의 Vocaloid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는 연락을 듣고 왔습니다.” “뭐하는 거야, 츠카사. 네가 낄 자리는 아니거든?” “그러니까 토리 군, 예전 성격이 나오고 있다니까요!” 투닥거리는 회장과 부회장의 모습을 보며 츠카사는 놀랍게도 희미하 게 웃었다. “그 돼먹지 못한 들개 같은 모습도 오랜만이네요, 토리 군. 아, 진정하시죠. 지금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러면 대체 뭔데? 그 빌어먹을 작곡가의 목이라도 가져올 게 아니 라면 가버려. 우리는 지금 바쁘니까…….” “목은 무리지만, 짐작 가는 소재지 정도라면 알려줄 수도 있겠네요.” 그러자 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뭐?” “하지만 토리 군이 그렇게 흥분한 개 같은 상태여서야 무리네요. 일 단 조금 진정해 주시죠. 저는 그래도 그 사람이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 습니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잠깐 뜸을 들이던 츠카사가 한숨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그 사람의 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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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차를 가지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차로 내리 세 시간을 달리고, 내린 후에도 이십 분 가량 나무와 수풀을 헤쳐서 도착한 곳은 외진 숲 한가운 데의 공터였다. 츠카사가 묘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의심했을 것이다. 사실은, 도착한 후에도 그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정말 이런 곳에 사 람이 살 수 있는 건가?’ 같은 의구심. 나무가 무성한 숲의 한가운데, 성 의 없이 외벽에 대충 시멘트를 발라 놓은 직사각형 모양의 구조물을 '집 '이라고 부르자니 집이라는 개념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케이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마당을 ― 이 공터를 마당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 살폈다. 흙 위에 남은 발자취나, 마당에 포대 째로 내놓은 의미 모를 부자재를 보면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케이토는 조심스레 집의 문고리 를 돌려보았다. 숨을 죽인 채 조심스레 돌려 잡아당기자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조악한 첫인상과 달리 생각 외로 집 내부는 안락했다. 벽에는 산뜻한 무늬의 벽지가 발렸고, 온돌이라도 설치했는지 난방이 되어 따끈따끈했 다. 다만 벽지에 빈 곳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구석구석을 채운 음표 가 집 주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가 맞구나. 의심을 확신으 로 바꾸며 미로 같은 집을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어느 닫힌 방문이 보 였다. 집에서 유일하게 닫혀있는 것이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소리를 죽 여 문을 살짝 열어 보자, 문틈으로 슬쩍,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 소녀 처럼 보일 정도로 체구가 작은 그 청년은, 무엇이 잘 되지 않는지 뾰로 통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다가, 기척을 눈치챘는지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9


“오.” 작업실 가득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는 오선지. 그리고 화면에 보이는 작곡 프로그램의 주파수.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빙글 몸을 돌려 쾌활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빨랐네, 하스밍. 찾아온다면 네 쪽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 어. 하지만 어떻게 알았지? 나, 꽤 신경 썼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츠키나가." "안 되지. 내가 먼저 질문했어. 네 질문은 먼저 대답한 다음이야." 순간 케이토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두어 개 생겼다. 그래도 그는 안 경을 고쳐 쓰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정시에 맞추어 업로드하는 신곡 투고 패턴. 곡의 장르에 따라서 수십 개의 가명을 쓰지만, 시기에 따라 선호하는 악기가 달라져서 지문 처럼 남고 있지. 네 녀석은 정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팬을 너무 얕봤어, 츠키나가.” 그러자 레오는 기분이 좋은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양팔을 들어올 렸다. “와하하, 팬인가! 생각도 못했잖아. 좋아, 항복이야! 사랑에 패배한 왕이라니, 기분 좋은 악상이 생각날 것 같아! 마침 여기에 빈 자리가 있 잖아?” “정말이지 네 녀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전에 내게 할 말이 있 을 텐데?” “조용히 해 봐, 하스밍. 지금이 이 골방에서 세기의 명작이 탄생하는 순간이니까!” “어째서 에이치의 보컬로이드를 만들었지? 심지어 프로그램 배포일 자로 간을 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더군. 대체 이유가 뭐지, 츠키 나가? 별 이유가 없다면, 그저 네 녀석의 흥미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고 10


인을 능욕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그만둬라.” “싫어.” 레오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내가 왜?” "네 녀석은,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 거냐." “하늘? 아아, 지금 하늘에 계신 폐하 말인가? 왕이니 황제니 했지만, 난 그 녀석의 가신이 아냐. 망령의 하명에 따르는 취미는 더더욱 없고. 아니면, 하스밍 너 그런 거냐? 무당? 전령? 죽은 자와의 교신? 그 녀석 이 뭐래? 그쪽 세계는 살만하다냐? 아, 사는 곳이 아니었군. 실례.” “장광설하지 마라, 츠키나가. 왜 그랬느냐고 묻는 거다. 에이치의 목 소리를 샘플링하고, 노래를 배포하고……. 네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 면, 나는 네가 고인을 욕보인다고밖에 받아들일 수 없어.” “하하, 난 원래 그 녀석을 싫어했어! 있잖아. 취향을 말할 때 기호라 는 표현은 너무 안이하지 않아? 호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우리 의 혐오는 우리의 선호보다 우리를 더 정직하게 나타낸다! 츠키나가 레 오는 텐쇼인 에이치를 싫어했고 앞으로도 싫어할 것이다. 그래서 그랬 어. 그게 새삼스러운가?” 케이토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마른기침을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레오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안경 가를 만지작거리던 케이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싫어했든, 좋아했든……. 어쨌든 좋아. 그 과정에 특별한 이유가 있 었냐고 묻고 있는 거다. 에이치와 관련된.” “헤에. 만약에 있다면 뭐가 달라지나? 저지른 일과 현상과 기억이 사 라지기라도 하나? 그리고, 하스밍.” 레오는 케이토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씩 웃었다. “그런 게 있어도 내가 너한테 말하겠어?” 11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토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데려왔지. 인사해라.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어 보라고.” 달칵.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수 초간 방에서 아무 소리도 없었다. “으…….” 레오는 방금 들어온 사람을 보고는 짧게 들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냈 다. 그러다가 츠카사가 되려 놀랄 만큼 와락 달려들었다. “와하하. 스오! 스오냐! 오랜만이네! 나의 기사님, 아니 임금님!” “놀라는군.” “당연하지, 스오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라고! 내 후계자, 나의 적 통!”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Leader. 저도 궁금합니다. 왜 그런 일을 했나요?” 레오를 바라보는 츠카사의 눈빛은 여느 때와 같이 순수하리만치 진지 했다. “왜 텐쇼인 형님의 Vocaloid를 만들었는지,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으 면서, 그동안 뭘 하고 있었는지, 만든 것은 왜 퍼뜨렸는지, 그리고 왜 바 꾸었는지, 왜 모습을 감춘 채로 그랬는지……. 제대로 설명해 주세요. 알고 싶어요. 이해하고 싶어요, Leader.”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적어도 저에게는 영문 모를 소리 하면서 모르는 체 밀어내지는 말아 주세요……. 약속했었잖아요?” 그러자 레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츠카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 리고 손을 탁탁 털었다. 12


“아, 그래. 인정할게. 어쩐지 하스밍 너 침착했어! 주먹은 안 내질러 도 소리는 지를 줄 알았는데. 숨겨둔 패가 있었구나, 복마전이었어! 서 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고, 하스밍도 사회인 삼년이면 수를 쓰는 거 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뭐, 좋아. 솔직히 반가운 얼굴이기도 하고. 우리 어린 왕에게는 아직 이것저것 알려줄 의무가 있지……. 약속했으니까.” 케이토가 눈에 띄게 반색하자 레오가 금방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스오에게야. 하스밍 너에게는 알려줄 생각도 없고 알려줄 의무도 없어. 너는 여기서 돌아가. 같이 온 녀석들이 있다면 그 녀석들 도 전부 돌려보내. 솔직히 내 얘기는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고, 그동안 나의 성에 불청객을 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응대할 식사도 없고 말이 지~. 그게 내 조건이야.” 잠시 생각하던 케이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대로 '왕'이 된 스오우라면 믿을 수 있다.” 그러면서 흘끗 츠카사 쪽으로 눈짓을 했다. 그러자 레오가 경계하듯 이 츠카사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우리 스오가 하스밍 너한테 그대로 고하리라는 생각은 마.” 레오는 츠카사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뺨을 꾹꾹 눌렀다. “얘는 내 편이라고? 내 후계자라고? 안 돌려보낼지도 모른다고?” “도발은 그만둬요, Leader……. 물론, 당신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듣 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왔습니다만…….” 츠카사가 어쩔 줄 몰라서 뒤의 레오와 케이토를 번갈아 쳐다보는 동 안, 케이토가 다시금 츠카사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엄격한 눈빛이었다. “너라면 나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어, 스오우.” “그래그래. 하스밍은 얼른 요정 나라로 돌아가 버리라고~.” 13


“츠키나가가 수상하게 굴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연락해라. 그 럼.” 케이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자, 레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달칵 잠갔다. “Leader?” “우리 꽤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직도 츠카사의 목을 한 팔로 끌어안은 채였다. “나보다 질문이 먼저인 거야? 오래 보지 못한 불량 리더보다는 이제 착실한 하스미 선배가 좋은 거야?” 이제 키가 부쩍 큰 츠카사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레오가 혀를 날름거 렸다. “차갑잖아, 스오. 기왕이면 하스밍 같은 거 머리에서 지워주고 싶은 데.” 츠카사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그리고 결심한 듯 눈을 번뜩 뜨고 말했다. “애초에 주소도 남기지 않고 잠적한 건 Leader잖아요. 말 돌리지 마 세요. 이건 대결 구도도 아니고 누구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하러 온 거예요.” 레오는 뺨을 푸우 부풀리다가, 츠카사에게서 몸을 떼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좋아. 각오하고 온 거구나? 너도 남자라는 거지, 한 명의 왕이라는 거야. 훌륭하다, 훌륭해.” 박수 소리가 곧 멎었다. “하지만 권고하는 건데, 네가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들을 의무는 없어. 나는 졸업했고, 그 녀석은 죽었다. 추잡하고 우스꽝스러운 촌극 14


대신 너는 너의 왕국에 전념하면 되잖아.” “물론……. 왕좌는 힘듭니다. 너무 높아서 현기증이 나고, 너무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와요. 저에게는 의무가 있습니다. Knigts의 긍지를 지킬 수 있도록 지켜보고 관리할 의무, 멤버들을 가족으로서 책임질 의무. 그 리고 학원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분명 제 의무 중에 하나겠죠…….” 말끝을 흐리던 츠카사가, 레오의 팔을 붙잡았다. “이 따위 얘기는 그만두고, 그냥 당신들과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 던 사람으로서 알고 싶다. 는 말로는 불충분한가요?” “고작 그 정도로 망자의 사생활을 파고들겠다고?” 보라색 눈과 녹색의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곧 레오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같은 건, 정말 내가 할 소리는 아니네에.” 레오는 그대로 츠카사의 어깨에 풀썩 쓰러지듯이 기댔다. “응. 이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알려주 는 게 좋을지도. 그게 스오 너라는 건 좀 망설여지지만, 너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지도 몰라. 너는 우리 둘 다 좋아했으니 공정한 사관이 되 겠지. 나도 무거워. 원혼 같은 거……, 어딘가 덜어내고 싶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던 레오가 갑자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아. 역시 그래도 싫어! 무거우면 어때, 나는 네게 주의를 주는 거 야. 분명히 경고하는 거라고. 왕과 황제의 치부가 정말로 듣고 싶어?” “네, Leader. 오랜만에 만났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는 처음 볼 때부터 잘 알고 있었어요.” “하하.” 레오는 허탈한 듯도 상쾌한 듯도 한 낯으로 웃었다. “맞아, 나는 형편없지.” “저는 그런 점을 동경했고.” 15


“알았어, 알았어. 얘기할 테니까 예쁘장한 얼굴로 막무가내 소리는 그만해.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시한 이야기야. 다 내가 평소처럼 즉흥적으로 멋대로 벌인 일뿐이고 말이지.” “저에게는 시시하지 않아요.” “어, 그렇게 똑바로 말하면.” 레오가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말하는 내가 시시해져 버려서…….” 잠시 멍하니 있던 레오는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발자 국 앞으로 걸어가 바닥에 놓인 악보 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츠카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런 걸 네게 말해야 한다니 우스운 이야기야. 촌극이야. 하지만 약 속했지. 자, 가자. 이야기를 하면서, 하스밍 말대로 회포라도 풀고. 그러 기엔 우린 서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같지만. 아, 어쩌다 좀 복잡해졌 는데 이쪽 일은 따지자면 정말 별 거 아닌 사정이야. 듣고서 실망해도 책임 못 져.”


2. 코퀴토스

'항쟁 시대'.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른다. 단지 가늠해볼 뿐 이다. 대항하는(抗) 전쟁(爭). 이미 군림하고 있는 존재에게 군림당하는 자들이 감히 맞서는 것. 지금 돌이켜 보면, 이미 그 단어 자체에서 판이 짜여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황제'라는 호칭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별칭에서부터 그는 확실하게 이미 존재하는 '왕'들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정해져 있 었다. 지나치게 거창한 별명을 비웃다가도 무대 위에 선 그 남자의 어쩐 지 초월적인 눈빛과,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몸짓. 그리고 명료하면 서도 달콤하게 귀에 붙는 목소리를 관람하고 나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게 되는 것이다. 텐쇼인 에이치는 천사와 같았다고. 물론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에이치를 싫어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황제는 항상 승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텐 쇼인 에이치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항상 특유의 그려낸 것 같은 미소 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이제는 그만 아쉬워져, 츠키나가 군. 언젠가 너마저도 무릎을 꿇고 나면, 어느 누가 나에게 도전할까.” 방금 '드림페스'에서 싸운 츠키나가 레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드럽 게 웃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좌란 권태로워. 도전하는 적마저도 사랑스러워지지……. 너는 나 에게도 조금은 하사하고 있을까? 입버릇처럼 만인에게 베푸는 너의 호 의와 사랑을.” 그 말을 들은 레오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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