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remembe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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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지금도 나는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6호라고 적힌 문패 아래 두 번 노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낮은 목소리 가 들렸다. “어, 들어와라. 변변치는 않지만.” “변변치 않은 게 아니라, 완전히 엉망이네…….” 딱 떨어지게 정돈되진 않아도 나름 깔끔한 방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어수선 했다. 바닥에 놓인 온갖 서류 박스부터 시작해 마이크나 잡다한 기자재까지 정신없이 쌓여서 천장까지 닿을 기세였다. 편하게 발을 디딜만한 장소도 마땅 찮아 조심조심 걸어가자 크로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엘리엇 방은 그냥 악기 보관소고, 네 방은 어지럽히기 좀 그렇고… 작업실로 쓰기는 내 방밖에 남는 게 없잖냐. 그래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좀 지쳐서…….” “얼라라, 리더 씨가 마음 약한 소리를 다 하네.” “리더 같은 거 아니야.” 린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입을 벌렸다가 말을 하는 대신에 한숨만 푹푹 쉬고 있자 크로우가 큭큭 웃으면서 축 늘어진 어깨를 쳐왔다. “하하, 이거 완전히 녹초구만. 엘리엇이 쬐끔 스파르타지? 나도 깜짝 놀랐 다니까. 그 순둥이한테 그런 면이 있을 줄이야. 완전히 다시 봤어.” “조금이 아니야, 조금이……. 오늘도 방에 못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내가 도무지 연주에 집중을 못하니까 보내준 거지.” “건 의아하긴 하구만. 뭐 딱히 심란한 일이라도 있어? 그러니까 인생 선배 의 조언이 필요해서 온 거구나. 역시 여자 문제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그래. 어디 이 형님한테 다 털어놔 보라고.” “응, 그게-” 1


대답을 하려고 얼굴을 드는데, 크로우가 눈을 크게 뜨고 빙글 웃고 있었다. 빤히도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응? 쉽게 말 못할 일이야?” “아, 아니.” 급히 고개를 돌렸다. 요새 들어 갑자기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많아진 것 역시 모를 일이었다. “그냥, 모르겠어……. 요즘 갑자기 여러 생각이 들거든. 벌써 가을인데, 언 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어, 내 말이 그거다만. 시간이 훌쩍 가지 않냐. 아직 블레이드 삼천 판도 다 못 채웠는데 말이야.” “……음, 이천 판도 굉장하다고 보지만 일단 넘어갈게. 아무튼, 내가 학교에 처음 들어올 때는 그저 나의 ‘길’을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 특과 VII반에 들어온 것도 그저 수련하는 입장에서 편한 길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 는데, 하하. 설마 이렇게 황궁에 초청받아서 폐하께 치하까지 받게 될 줄은 몰랐네.” “아아, 동감. 확실히 굉장했지. 이 학급도 대단한 놈들 투성이지만 정말로 높으신 어른들은 느낌이 확 다르더라니까.” “그래서……, 지금 자꾸 현실감이 없는 거야. 입학하고 나서 계절이 한두 번 바뀌었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기대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걸 얻었어. 실습의 성과도, 친구들도, 너무 내게 분에 넘치게 충만해서, 오히 려 불안해져. 정말 앞으로도 이대로 지낼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드 는 거야.” 생각나는 대로 말을 죽 늘어놓고 한 숨이 지난 후에야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안……, 이래서야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오호. 하긴 뭐, 그럴 때구만.” “그럴 때?” 크로우가 손을 허리에 얹고서 씩 웃었다. 2


“가을을 탄다는 거지.” “아……. 그런가.” 툭, 툭.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손의 무게가 머리 위에 두 번 실렸다 가 사라졌다. “뭐 그런 걸 고민하고 그러냐, 인마. 앞날의 일이야 누구라도 모르는 거지. 불안하고 걱정되는 게 당연해. 하지만 그렇다고 움츠리고 경계만 하고 있기 엔, 네 말대로 그 넘치게 충만하다는 이 순간이, 너무 아깝잖냐. 그러니 그저 불안하다고 느끼는 만큼 더 맘껏 즐기면 되는 거지. 아무래도 그래야지 청춘 이라는 녀석한테 실례가 안 되지 않겠어?” “크로우…….”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긴 답에 반쯤은 감탄하고 반쯤은 얼떨떨해 눈을 동 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크로우는 또 금방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내가 길게 말한다고 바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진즉에 해결됐겠지만 말 이야.” “하하, 그것도 그렇네. 그래도 이해했어, 크로우의 생각. 너무 청춘을 즐기 다가 유급하는 건 역시 곤란하겠지만…….” “야, 야. 기껏 멋있는 말 해놨더니 여기서 그 얘기를.” “그래도 아직 싱숭생숭하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명쾌한 기분이야.” “그거 다행이구만.” 팔자로 풀린 눈썹을 하고 빙긋이 웃고 있는 크로우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다가 곧 미간을 확 좁혔다. 장난기가 그득해진 눈동자를 린 쪽으 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거 배부른 놈이네. 불과 며칠 전에 유미르에 휴가 갔잖 아? 부모님도 보고 귀여운 여동생도 봤으니 이래저래 좋았을 거 아냐. 아, 그 래서 싱숭생숭한건가? 두고 온 귀염둥이가 그리워서? VII반 여자애들도 귀여 움이라면 지지 않을 텐데, 욕심이 많으시네~” ―라고 하면 당연히 평소처럼 당황해 쩔쩔맬 줄 알고 한 말이었겠지만 린 의 반응이 단호했다. 3


“몰아가지 마, 크로우. 그리고 여동생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엘리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줄래…” “앗차차, 이 녀석 시스콤이었지…….” “엘리제는 아직 사교계 데뷔도 하지 않은 몸이야. 혹시 엘리제에게 다른 마 음이 있는 거라면, 아무리 크로우 너라고 해도…” “히야~ 이거 큰일 날 사람이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조용히 팔엽일도류의 기까지 담기 시작하는 린에게 질겁해 크로우가 급하 게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제 아가씨는 너무 어리잖아. 아직은 응석쟁이던만. 나 는 귀염둥이도 좋지만, 좀 더 믿음직한 쪽이 더 좋다고.” 손사래를 치던 크로우가 문득 뭔가 깨달은 듯 눈을 깜박였다.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대로 린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지. 나는 좀 더, 내가 기댈 수 있을 만큼 가슴이 넓은-”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눈빛이 아까보다 사뭇 진지했다. 린은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예를 들어… 저런.” 보란 듯이 높이 치켜든 크로우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헐벗은 여자의 포스터가 있었다. 끝이 자꾸 벽에서 떨어지는 걸 열심히도 붙였는지 테이프 자국이 벌써 몇 겹이었다. “하아아…….” 어째 그만 기운이 쏙하고 빠져버렸다. 내가 이 한심한 선배 상대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람. “그럼 이만 가 볼게.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허탈한 기분이 되어 뒤를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와 놓고 가긴 어딜 가, 어딜.” 아까 잡힌 어깨를 다시 잡혔다. “어-” “괜히 정리가 안 되는 기분이라면- 역시 그거지.” 4


다시 돌아서니 눈앞에 크로우가 손을 불쑥 내밀고 있었다. 치켜세운 집게와 중지가 딱 딱 부딪혔다. “아.” “자리가 따로 없어도 괜찮겠지. 침대에 앉아, 린.”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크로우가 옆의 선반 위로 손을 올렸다. 린도 거의 동시에 침대 위로 몸을 날려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좋아. 오늘은 지지 않을 테니까 각오해, 크로우.” “큭큭. 어디 한번 그동안 얼마나 실력을 갈고 닦았는지 봐 주마.”

게임은 평소보다도 치열했다. 첫 판에서는 크로우가 짐짓 여유를 부렸지만 둘째 판은 기습에 미처 대처하지 못해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 결국 끝까지 승 부를 보자며 크로우가 엄포를 놓고 둘 다 제법 투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판세 는 막상막하였다. “이 녀석, 생각보다 꽤 하잖아… 역시 집에 갔다 와서 원기회복 한 건가. 부럽구만.” “응, 원래 가려고 했던 건 아닌데…….” 손패를 훑느라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린이 카드를 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부러울 것까지야……. 그러고 보니, 크로우의 집은 어디에 있어?” “그냥, 북부에 있는 시골구석. 아마 이름을 얘기해도 넌 모를걸.” “헤에…” “헤에, 가 아니라, 다음 카드부터 내지 그래. 이건 남자 대 남자의 진지한 승부라고.” “방금 냈잖아.” “역시 실력이 늘었잖아……. 곤란하네.” 카드를 노려보고 있는 크로우에게 린이 가볍게 물었다. “크로우의 고향, 어떤 곳인데?” 5


“뭐…….” 크로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럭저럭 살만한 동네였어. 너희 마을만큼 특별나진 않아도, 나름대로 특 색도 있고. 풍광도 볼만하고. 자그맣지만 전통도 있고. 인심도 괜찮아서 어른 들도 쪼끄만 나를 많이 예뻐해줬던…….” 크로우는 한참이나 카드를 뒤적이며 고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영 답이 안 나오는 촌구석이었어. 제대로 있는 게 없는 답답한 동네라. 한마디로, 말이 안 통했어. 그런 데 박혀 있기엔 내가 너무 불쌍하잖 아. 그래서 아예 훌훌 털고 나왔지.” 마침내 3 위에 7 카드가 올라갔다. 잘 이해되지가 않는 선택이었다. “캬, 역시 이 몸은 화려한 도시 체질이랄까. 경마장이 있는 헤임달이나, 젤 리카네 아버지가 꽉 잡고 있는 루르나, 그래, 켈딕도 꽤 괜찮지. 그 동네야 조그맣지만은 사람도 많고 시끌벅적하고.” 린은 다음 카드를 내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결국 한 마디를 덧 붙였다. “그런 것 치고는, 아까 그리워 보인다 싶었는데…….” “응, 뭐 그런가……. 아주 싫어서 떠난 건 아니니까. 나도 어렸을 땐 꿈 같 은 게 있었거든. 내가 잘 하면, 이 고향을 먹여 살릴 수 있겠다, 다 같이 더 잘 지낼 수 있겠다, 뭐 그런 거.” “뭐야, 크로우답지 않네. 그런 책임감이 있었다고?” “그래, 아주 건실한 꼬맹이였지. 큭큭. 왜, 부럽냐?”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그렇지만 떠나왔다는 건……, 그 후로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 거야?” “엇차. 카드가 뒤집어졌네. 잠깐 이것부터 처리해야겠는걸.” “응, 크로우?”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혀 처음 듣는 얘기에 궁금증이 동 해 되묻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크로우는 무심하게 카드를 정리해갔다. “우연히, 딱 한 번. 그동안 안 가기를 잘 했다 싶었지. 앞으로도 안 갈 작 6


정이고.” “하지만 그러면 좀…… 쓸쓸하지 않아?” 말을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혹시 실수한 걸까 하는 자책감과 함께 호 기심도 널을 뛰어 어디까지 말을 해도 좋을지 딱 가늠해 잘라낼 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들르고 봤더니 그리웠다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못할걸.” 크로우는 카드를 부채꼴로 펼치고 어깨를 크게 으쓱해 보였다. “네가 길을 찾아낼 때까지 유미르로 안 돌아가려던 거랑 비슷한 거야. 너 나, 나나, 사람이 거취를 옮길 때는 다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는 거잖냐. 성공하겠다고 버리고 온 이상, 더는 돌아갈 이유가 없지. 이대로는 역시 얼굴 떳떳하게 들 수 없잖아.” 성공? 의문이 들었다. 이 되는 대로 사는 선배가 성공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이던가? 린은 크로우와 성공이라는 단어를 결부시키는 데에 꽤 애를 먹었 다. 그리고 의문보다도, 어쩐지 안타까웠다. “그러면, 성공한 후에는? 그때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있어?” “글쎄다. 그래, 그때쯤이면 거기도 좀 봐줄 맛이 나려나…….” 혀끝이 썼다. 분명 게임은 유리하게 끌어가고 있는데, 가슴이 갑갑했다. 대 화의 흐름이 어쩐지 어딘가 허공을 빙 에둘러가고 있는 듯했다. 지금껏 크로 우와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크게 탁 소 리가 났다. “그럼 여기서 순진한 후배님이 얘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볼트―!” “크……크로우, 날 속였구나?” “헤헷. 이거야말로 형님의 고등 테크닉이라는 거란다.” 회심의 한 수를 던져 놓고 크로우는 그야말로 득의양양했다. “더 쓸 패가 없겠구만. 어때, 내 말이 틀려?” “윽, 맞아…….” “자, 이제 판돈을 줘 보실까.” “판돈 같은 거 애초에 건 적 없었잖아!” 7


“무슨 소리셔. 판돈은 게임의 기본이야, 기본. 설마 100미라도 없냐?”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거든!” “정 싫다면―” 크로우가 자리에서 반동으로 벌떡 일어나더니, 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린도 얼결에 그 손을 받아서 끌려 일어났다. “헛차. 판돈 대신에 같이 밤 산책이나 갈래? 누구 덕분에 이번엔 내가 기분 이 영 텁텁~해져서 말이다.” “그런 건…… 환영이지.”

10월의 밤이라 어쩔 수 없이 냉기가 얼굴에 스몄다. 아무리 기능적이라고 자랑하는 교복이라도 방에 있다가 나오니 뒷목이나 소매에 바람이 들어 소름 이 오소소 돋는 것은 어찌할 바가 없었다. 크로우는 늘 하는 양대로 팔을 올려 머리 뒤에 손을 얹고 앞서 걷고 있었 다. 따라가는 것이 어째 어색했다. 그리고 곧 린은 이런 식으로 크로우의 뒷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면 늘 상대를 충실히 의식하고서 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아까도 그랬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크로우가 불쑥 뒤를 돌았다. 팔짱을 끼고 몸을 과장되게 움츠린 채였다. “오늘 좀 쌀쌀하구만. 미안, 들어갈래?” 지금만큼은 이게 배려 차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나는 괜찮아. 크로우는 어때?” 대답 대신에 희미한 미소가 돌아왔다. 크로우는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린도 다시 그 뒤를 따랐다. 늦은 밤이라 보이 는 것도 들리는 것도 많지 않았다. 길게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두 사 람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고요 아닌 고요는 크로우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릴 때까지 이어졌다. “이거 꽃은 다 져 버렸구만.” 8


무슨 말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더니 라이노 꽃나무뿐이었다. 린은 그만 피 식 웃어버렸다. “벌써 가을이잖아. 꽃이 진 건 벌써 몇 달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 그랬지.” 크로우는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빛과 섞인 가로등 불빛이 은발 위에 발 간 기운을 드리웠다. 린은 익숙치 않게 느껴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었 다. “네 말대로 많은 일들이 있었네. 그치?” 크로우가 다시 빙글 뒤를 돌아 씩 웃는다. “그런데 어쩌냐. 너한테는 앞으로도 일이 많을 것 같다 싶단 말이지~ 불운 의 별 아래 태어난 그런 느낌.” “으……. 저주하지 말아 줄래…….” “하여튼 너도 참 공사다망한 놈이야. 오늘도 그렇지. 이 몸은 연출가 자리 를 찜해놨으니 연주 연습 같은 건 필요없다만, 너는 정말 고생이 많아.” “연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인걸. 크로우가 없었으면 우린 이렇게 무대 준비 를 못 했을 거야. 응. 확실히 작년의 무대는 굉장했어서, 크로우가 나와 준다 면 마음이 든든하겠지만―” “그치만 어쩌겠냐, 2학년에 편입생인데 내가 참을 수 없는 퍼포먼스로 분위 기를 후끈하게 폭발시켜도 반칙이잖아. 약 오르더라도 좀 참아라. 금방 학교 를 떠날 인간보다는 너희가 눈도장을 찍어 놓는 게 아무래도 낫지.” “역시 안 어울리네. 이상해, 오늘의 크로우는.” “뭣.” “크로우는 늘 자기 멋대로고, 기분파라, 딱 보면 못미더워 보이지만, 필요 할 때면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 점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크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가가 싱글싱글했다. “호오, 이 형님을 그렇게 동경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방금 말 취소하고 싶어졌어.” “뭘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고 그래. 이 여세를 타서 얼마나 존경하는지 형님 9


한테 확 고백을―” “크로우한테도 보기랑은 다르게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건 알겠어. 정말 아 무 생각 없어 보이는데, 어쩐지 배신감도 들고.” “헤헷. 이거 유감이겠네~ 생각보다도 멋진 형님인줄 이제야 알아서 어쩌 나.” “또 혼자 센 척하지.” ―했다. 웃음기가 그림처럼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린은 크로우를 똑바로 마 주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걸치지 않은 크로우는 평소와는 표정이 아주 달라 보인다. 그리고 분명 이런 표정을 가끔,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금방금방 사라져 놓쳐 버렸을 뿐. 명멸하는 기억에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어쩌면 주제넘은 말일지도 몰라. 나는 크로우가 아니고 크로우는 내가 아 니니까. 하지만 얼마 전 나는 유미르에서 분명하게 깨달았어. 앞을 꿈꾸기 전 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게 첫 번째라고. 그러니까 크 로우도 마음이 복잡할 땐 굳이 애써서 멀쩡한 척할 필요 없잖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보여도 괜찮잖아.” “내 참. 너는 젊으니까 그런 부끄러운 소리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 을지 몰라도, 형님은 이미 세상 물이 들어버렸다고. 그렇게 티 없이 반짝반짝 하는 거 어려워요.” “나한테 말했잖아, 크로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그리워도 성공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다거나, 곧 졸업할 테니까 나서지 않는다든가, 그런 거 역시 크로우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린의 열띤 얼굴에 크로우가 쳇, 하고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린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단호했기에 아예 얼굴을 돌려버리지도 못했다. “나도 있지, 크로우. 그래, 길을 찾기 전에는 유미르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어. 하지만 정작 내가 한 단계 성장한 건 동료들과 함께 유미르로 돌아가 서였어. 지금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동안 함께해온 동료 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거기엔 분명 크로우의 도움도 적지 않게 있 10


었을 거야. 그러니까 크로우도 만약 고향에 혼자 가기 마음이 복잡하고 꺼려 진다면, 나를 불러줬으면 해.” 말을 하다가 가슴에서 무언가 왈칵 치솟아 린은 크로우의 손을 꽉 붙잡았 다. “아니, 성공이라거나 성장한다거나,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잖아. 크로우는 지금 이대로 내가 보는 것처럼 믿을 만한 사람이잖아. 혼자서 돌아가기 마음 이 복잡하다면 다른 친구들도 있고, 나도 있어. 어떤 사정이 있든 나에게 크 로우는 크로우니까. 크로우에게는 내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물론 나는 지금 크로우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적지만 보기보다는, 크로우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런 나라도 나에게 네가 그런 만큼, 떠올렸을 때 힘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걸…… 역시 너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고, 응. 나는 지금 바라고 있어.” 크로우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힘이 빠졌다. 눈썹이 쳐졌다. 아주 환하게 웃거나, 아니면 완연한 울상이거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과도 비슷했다. 크로우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네 녀석 말이야.” “응?” “아니, 새삼 VII반 여자애들이 불쌍하다 싶어서 말이지.” “지금 내 욕하는 거지?” “용케도 알아채네.” “아, 정말-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아까부터 자꾸만 힘이 빠지게 만들어버리는 건 분명 크로우의 잘못인 거다. 뿔이 나서 홱 뒤를 돌았다. 발을 떼기가 무섭게, 머리 위에 무언가 얹혔다. 린은 발을 더 옮길 수가 없게 되었다. 잠시 후에 깨달았다. 손일 거다. 크로 우의. 11


“고마워, 린.” 등 뒤에서 작지 않은 체구가 조금씩 무게를 실어 기대 왔다. 뺨 위에 팔이 닿았다. 뒷머리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느껴졌다. “이건 진심이야.”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은 듯했다. 쌀쌀한 날이라 유독 다른 사람의 체온이 따끈따끈했다. 등에서부터 어깨 위, 얼굴에서 열기가 점점이 퍼졌다. 라이노 꽃은 진 지 오래일 텐데 밤바람 에 달큰한 잔향이 있었다. 등 뒤에서 떨어지는 가로등 불빛이 바닥에 두 사람 의 그림자를 길게 남겼다. 린은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 눈으로 는 보이지 않는 크로우의 실루엣이 자신의 실루엣과 섞여서 보였다. 다시 고 개를 들자 입김이 피어올랐다. 조금씩 간격을 두고 가지런히 설치된 가로등 불빛과 달빛이 뒤섞여 밤공기 위에 범벅이 되었다. 밤이 찰나나 영원 같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크로우가 헛기침을 하고 린은 퍼뜩 정신 을 차렸다. “흠, 이만 돌아갈까.” “응…….”

서로 반 보쯤 떨어져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오니 샤론이 올 걸 알고 있던 듯이 현관에서 완벽한 인사를 했다. 돌아오셨군요, 린 님, 크로우 님. 바깥에 서 오래 있다가 만남을 마치셨는데 출출하지 않으신가요? 야식을 내올까요? 린은 도망치듯이 거절하려고 했지만 크로우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방에 들어가려는 린에게 배라도 채우고 가라고 윙크를 한다. 조금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서 요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에 부엌 소리를 듣고 나 온 사라가 합세했다. 이 냄새는 설마… 조개구이? 여기엔 맥주가 제 맛이지! 아니, 교관님. 내일도 출근하시잖아요. 그렇게 빡빡하게 귀염성 없이 굴면 어 떤 여자가 데려가겠니. 맞아, 사라. 이 녀석이 영 귀염성이 없지. 크로우 너는 왜 맞장구야!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2층의 남학생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12


방에서 공부하던 마키아스가 안 그래도 출출했다며 이것저것 집어먹자 유시스 가 남을 위해 만든 것을 빼앗아 먹냐며 질책하고 언제나처럼 싸우기 시작하려 는 것을 엘리엇이 땀을 흘리며 겨우 말린다. 소란이 점점 커지자 1층에 내려 와 본 알리사가 테이블을 보고 질겁을 한다. 샤론~ 그러니까 어떻게 그런 요 리재료가 다 여기에 있는 거냐고. 계단 위에 피가 자다 깬 얼굴로 나타나 일 침을 놓는다. 시끄러워, 다들. 뒤에 선 엠마가 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조용해질 거예요. 다시 가서 자요, 피. 뭐야, 뭔데? 나도 끼워줘! 왜 돌아가는 거야? 발을 구르는 밀리엄도 겨우 진정시켰다. 가이우스가 느긋한 얼굴로 말 한다. 기숙사 생활을 담은 그림도 나쁘지 않겠군. 그렇게 야밤의 깜짝 파티는 해산이 되었다. 여학생들은 3층으로, 남학생들은 2층으로 돌아갔다. 린과 크 로우는 함께 2층 가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까부터 쭉 함께 있어서인지 린은 크로우가 방까지 따라 들어올 때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방 안쪽의 침 대에 걸터앉아서 앞에 서 있는 크로우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오늘……. 고마웠어.” 고마웠다? 즐거웠다? 한심했다? 그립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뒷 머리에 손을 얹고 있으니 크로우가 빙긋이 웃었다. “나야말로. 그럼, 잘 자라.” “잘 자, 크로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뒤돌아 떠나는 크로우의 뒷모습이 쌔했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좀 더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계 속 함께 있는 편이 당연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실례잖아. 이미 한참 시간이 늦었는데. 크로우 의 말대로 이런 것도 가을을 탄다는 건지 모른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온지 얼마 지나지가 않아서, 그래서 외로워진 거라고, 크로우의 뒷모습도 아 마 그래서 외로워 보이는 걸 거라고. 어쩐지 신경이 쓰인다. 누워 있자니 좀이 쑤시고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크로우에게 찾아가야만 할 것만 같다. 그리고 하던 만남을 계속해야만 할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13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에 붉게 얼룩져 있던 뒷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진정해, 린 슈바르처. 내일 일어나서, 내일.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 으니까. 대화가, 목소리가, 얼굴이 꿈 대신 아른거렸다.

린은 눈을 떴다. 트리스타 제3기숙사 201호였다.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차림을 정리했다. 짐 꾸러미는 침대 앞에 정리되어 있었다. 웬만한 준비는 자 기 전에 갖추어 놓았다. 짐을 메고 나와 건너편 방으로 향했다. 린은 206호 방문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그대로 서서 작게 숨을 쉬고서 습관적으로 노크를 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 뺨이 달아오르고 콧등까지 시큰 했다.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돌리자 자주 사용되지 않은 경첩이 녹슬어 삐걱 거리는 소리를 냈다. 방에는 별 물건이 있지 않았다. 린은 그 물건들을 하나 하나 차례로 눈에 담았다. 방 오른편에 선반과 화분이 있고, 안쪽으로는 먼지 쌓인 침대가, 왼편으로 시선을 옮기니 책상 위에 펜과 책 몇 권이 남아있었 다. 그리고 책상 앞에 나무로 만든 간소한 함이 놓여 있었다. 린은 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갈까?” 허리를 굽혀 함을 두 손으로 들었다. 손이 묵직했다. 내용물이 혹여나 새거 나 흔들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움직임이 뻣뻣했다. 서늘한 기 운이 훅 몸을 감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가까운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창 문 너머로 작은 싸리눈이 날리고 있었다. 혹여 눈발의 습기가 함에 닿을까봐 조심스레 천을 두르고 받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도 불안해 가슴에 닿도 록 받치니 꽤 안정적이게 되었다. 팔 안쪽과 가슴과 턱 아래에 닿았다. 온몸으로 한껏 끌어안은 채 기숙사를 나섰다.

1205년 초 겨울날 린 슈바르처는 줄라이 특구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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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 슈바르처는 아직도 그 순간의 일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기조로 된 외벽과 천정이 일그러졌다. 붕괴한다기보다도 아련히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세상 같지도 않은 장소였다. 엠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요. 피가 린을 돌려세우고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우스가 린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밀리엄에게 알리사가 손을 내밀었다. 앞장선 사라가 ARCUS로 교신하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유시스가 세드릭 황태자를, 그리고 라우라가 크로우를 안아 들고 있었다.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린은 황마성의 외벽으로 향했다. 이미 반 쯤 흐려진 장소에서 VII반은 커레이져스의 갑판 위에 뛰어들었다. 열세 사람 이 함내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작게 숨을 삼켰다. 걱정 마라. 황태자 전하께서 는 무사하시다. 유시스의 말을 들은 학생 몇이 신음처럼 흐느꼈다. 유시스를 맞이하러 왔던 폴라와 람베르트가 세드릭을 받아 안고 의료실로 걸음을 옮겼 다. 사라와 특과클래스 멤버들은 곧장 5층의 브리지로 향했다. VII반 전원 도 착했어, 함장. 다른 학생들은 전원 탑승 완료한 건가? 네. 대답하면서 뒤를 돌 아본 토와가 잠시 함장모를 벗었다. 모자로 입을 틀어막듯 가리고 신음인지 울음일지 모를 소리를 목 안쪽으로 삼킨 후에 모자를 다시 쓰고 외쳤다. 커레 이져스, 발진! 트리스타로 향합니다. 안젤리카가 응, 하고 짧게 대답했다. 앞 면의 유리창 너머로 제도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이미 붉은 기운이 사라져 제도의 전경은 여느 때와 같았다. 하늘이 파랗다. 아까까지의 일이 모두 꿈인 것만 같았다. 눈앞의 시신을 제외하면. 마침내 앨런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어떻게 안 되는 거야……? 피 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의 침묵이 이어진 후 라우라가 린의 손을 잡았다. 알 리사가 말했다.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야, 린. 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 괜찮아. 그보다……. 15


모두가 린을 따라서 시신을 바라보았다. “비타 씨가 크로우를 부탁한다고 했는데.” 그 한 마디로 VII반의 다음 행동 지침이 결정되었다. 떠올린 이상 무엇을 하든지 앞으로 향하지 않고 멈추어 있을 수는 없었다.

크로우는, 저와 함께 전설 속의 마왕에게 맞서다가, 제게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먼저 몸을 날린 후, 붉은 마왕의 공격을 혼자서 막아내다가, 기습을 피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크로우는 제 기회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저는 그 덕분에 황태자 전하를 구출하고 제국을 혼란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 다. 린은 거짓말이 아닌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가슴 한 쪽 벽이 내려앉듯이 얽히는 것이 있었다. 설명을 거듭할수록 의문은 깊어지고 확신이 되어 결국 린은 자신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이해 했다. 그러나 차마 다른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라, 마침내 수고 했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여름 벌레 소리처럼 지질한 무음으로 들리게 되었 다. 그러나 토와와 안젤리카, 죠르쥬가 손을 잡고 정말 고맙다고 말할 때는 견 딜 수가 없었다. 린은 도망치듯이 빈 회의실로 들어가 그들에게 있었던 일을 고백했다. 믿고 싶지 않은 것까지 빠짐없이 고백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토 와가 말 대신에 린을 안아주었다. 둑 터진 것처럼 눈물이 흘렀다.

장례식은 교내에서 미휴트와 사라의 주도로 거행되었다. 크로우 암브러스트 를 기억하는 많은 2학년 학생들이 제단에 꽃과 카드, 경마나 외설 잡지 따위 를 올렸고, 잘 모르면서도 분위기를 따라서 꽃을 올리는 학생이나, 이해하지 못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학교에 있는 교관은 거의 조문을 왔다. 카이와 루디, 그리고 다른 트리스타 주민 몇 명도 들렀다. 이런 현황을 자세히 알게 된 건 16


VII반 학생들이 조문을 오는 이들마다 붙잡고 크로우에 대하여 아는 것을 물 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크로우의 친지나 따로 친밀한 지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저에게 말할 때는 할아버지가 유일한 가족이라고 했었습니다.” 린의 말을 듣고 토와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2년이나 같이 있었는데. 결국 지금 제일 중요한 걸 알고 있는 건 린 이네. 헤헷, 역시 린은 대단하잖아.” “흠.” 안젤리카가 밭은기침을 했다. “아저씨는 뭐 아는 거 없어요?” 사라가 탁 소리 나게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벌써 옆에 여섯 병이 쌓여 있는데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게 그 게으른 녀석의 대단한 점이지. 수상쩍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 다. 하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 다른 가족이나 애인 얘기를 한 적은 없군. 과거 도 어지간히 깨끗하게도 정리한 것 같고 말이야. 그 정보국에서도 겨우 알아 낼 정도니 말 다 했지.” “아저씨는 정보국이랑 또 다른 의미로 대단할 텐데?” “그래도 말할 수 없는 건 말 못 해.” 미휴트의 말에 제임스가 덧붙였다. “이하 동문이야. 크로우랑 했던 얘기는 주로 경마같이 잡다한 얘기지. 가족 쪽 얘기가 나오면 말을 돌리거나, 음, 뭔가 있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배님들도 그렇다고 하셨으니, 역시 언니의 비술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미스티, 아니 비타 클로틸드 씨는 역시 뭔가 알고 있지 않 을까?” “하지만 클로틸드 씨가 우리한테 크로우를 부탁한다고 했잖아. 으음, 어쩌 면 팡타그뤼엘에서 같이 지냈던 귀족 연합이나 결사 쪽 사람이라면…….”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도 나름대로 알아봤지만, 크로우 님을 맡겠다는 분 17


이나 따로 친지를 아는 분을 만날 수는 없었네요. 지금의 입장에서는 행방이 묘연한 클로틸드 씨에 대해 알아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구요.” “제국해방전선 쪽은?” “본가에서 대화해봤다만……, 여기서 지금까지 말한 것보다 특별히 유용한 정보는 없더군. 그리고 아마 지금은 그 여자한테 자꾸 말 걸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유시스가 말을 맺자 미휴트가 뒷머리를 긁으며 린의 등을 툭툭 쳤다. “결국에는 아마 이쪽 녀석이 말한 대로라는 거지. 그 팔년 전에 죽은 할아 버지가 그 멍청한 놈의 유일한 가족이었다고.” 잠시 모두 말이 없었다. “역시 토르즈 내부에 안치하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마땅한 장소도 없고……, 따로 돌봐 줄 사람도 없어요. 저희는 셋 모두 여행을 떠나니까…… 부탁할 사람이 있을까요?” “가일러 씨라면―” “영감한테 더 일 지우기도 껄끄러운데.” “골치 아프군. 로그너 가의 영지로 보내면 그 녀석 싫어하려나. 한번 우리 가문에서는 고집불통만 나오느냐고 묻기는 했었다만.” 안젤리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린은 빈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크로우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크로우는 어디에 있던 걸까? “그 녀석, 진짜 누구한테나 사랑받는 녀석이었는데. 결국 갈 곳이 딱 떨어 지게 없다니 웃기지. 엽병 방식으로 해버릴까.” “사라, 그건 좀.” “넌 좀 그만 마셔야겠다.” “시끄러워 다들. 그래, 맞아. 그때는 수도 없이 먼저 보냈지. 하지만 난 2 년 동안 교관이었는데, 학생 주제에 먼저 보내려고 이 일을 한 건 아니었는 데……. 꽃도 없고 꿀꿀한데 술까지 마시지 말라고 하면 싫으니까―” 린은 갑자기 피식 웃어버렸다. 18


“아직 1월인데 무슨 꽃 타령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린에게 꽂혔다. 그날 이후부터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던 린 이 이렇게 가볍게 말하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린도 가만 생각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예전에도 꽃 타령하는 사람이 있었다. 쌀쌀한 가을밤에 이런저런 대화를 했 었다. 연주회라든가, 청춘이라든가, 블레이드, 라이노 꽃나무, 머리 위에 올라 왔던 손의 체온, 그리고 모두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너와 함께 있어주겠 다고. “아.” 린이 다음 말을 이었다. “한번 저희가 직접 줄라이로 가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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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앞이란 어느 방향일까? 그저 자신이 당장 바라보고 있는 방향, 그것이 앞이 아닌가? 우리는 과연 그때 똑바로 가고 있던 걸까? 크로우가 끝마치지 못했던 문장의 맺음말은 무엇이었을까? 미열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혹한은 찾아왔다. 아이들이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지나간 신년은 장례식이 되었고 그들이 지금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분 주하게 뛰어다니는 동안 거리가 술렁거렸다. 입소문, 목격담, 그리고 제국시 보. 철혈재상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 는 아이들은 묵인했다. 근교도시인 만큼 다음 날에는 좀 더 자세한 소문이 돌 았다. 제도는 하루 만에 완벽히 점령되었으며, 귀족파에서 혁신파에게 먼저 회담을 제의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내전의 종결이 머지않았다는 기분 좋은 짐 작에 아이들을 치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전히 크로우의 연고를 찾아내 지 못한 아이들은 실의 속에 묵인했다. 그 다음날 정보국의 요원들이 토르즈 사관학교를 방문했다. VII반과 면담하기를 요청하는 것을 교장과 교관들이 막 아섰다. 사라와 토마스가 아이들의 ‘충격’과 ‘상황’을 말하며 선처를 부탁했고 정보국에서는 ‘유예’를 말했다. 한 주가 유예기간으로 선고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당황하여 알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입소문, 목격담, 그리고 제국시보. 그리고 청년들은 며칠 전 마주했던 그들이 이미 세상이 되었음을,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1월 3일이었다.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헤임달에서 사망한 지 사흘, 장례를 채 지내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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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토르즈 사관학교 교관 사라 발레스타인, 2학년 토와 허셜, 안젤리카 로그 너, 죠르쥬 놈, 1학년 엠마 밀스틴, 마키아스 레그니츠, 알리사 라인폴트, 라 우라 S 알제이드, 유시스 알바레아, 엘리엇 크레이그, 피 클라우젤, 가이우스 워젤, 밀리엄 오라이온, 그리고 린 슈바르처. 총 14명. 한 번에 기차 여행을 하는 인원수로써는 꽤 대인원이었다. “이전에 말씀드린 줄라이 특구 열네 명이요.” “어머나. 이번엔 같이 타시네요, 사라 씨.” “네에. 그렇게 됐어요.” “학교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실습이라니, 과연 VI반과 VII 반 학생들은 다르네요.” “실습은 아니고, 여행이에요. 묻어줘야 할 녀석이 있어서요.” “어머.” 역무원 마틸다가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묵념했다. 최근 트리스타에서 하나 밖에 없었던 장례를 떠올리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모두 무사히 다녀오세요. 내전이 일단락되었다고는 해도 철로가 정상 화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쪼록 몸 조심하시구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 다.” “감사합니다.” 사라가 싹싹하게 인사를 하고서 뒤를 돌았다. “어디 보자, 열네 명 다 와 있지? 머릿수는 맞네. 그리고…… 잘 챙겼지, 린?” “네.” 린은 떠맡기둣이 품 안의 함을 넘겼다. 사라는 다시 토와에게 넘겼다. 토와 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으며 품에 받았다. 그리고 순간 린은 왠지 모를 충격을 받았다. 그런 거, 계속 안고 싶은 건 아닐 텐데. 21


그렇다고 다시 자신이 들기에는 역시 내키지 않았다. 토와 회장님은 역시 정말 착한 사람이구나. 그걸 받으면서도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 언제 나처럼 사랑스러운 회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뒤통수가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때맞춰 마틸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은 딱 좋은 시간에 오셨네요. 곧 북부 행 열차가 도착합니다.” “자, 가자.” 선로에 바퀴 얽는 소리를 배경으로 커다란 경적 소리가 역을 가득 채웠다. 기차가 미끄러지듯이 들어오고 문이 열리고 기차 안으로 발을 옮기는 일련의 과정이 습관처럼 익숙했다. 이 순간 모두가 같은 과거를 상기하고 있을 것이 빤했다. 기차 칸에 들어선 엠마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오늘은.” “그래, 그러니까 앞쪽으로 가자.” “앞쪽으로요?” “응.” 엠마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사라는 자신 있게 앞장서서 걸었다. “아무리 철도헌병대의 보증이 있다 해도, 아직 정세가 불안한데 막 재개한 철도편을 앞 다투어 타는 사람이면 주로 둘이지. 미리 좋은 몫을 맡아두려는 장사꾼이나 거래인, 그리고 피난 온 실향민. 우리처럼 일종의 여행(여기에서 사라는 잠시 어깨를 으쓱했다)이 목적인 사람은 별로 없어. 그리고 이 사람들 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뒤쪽의 화물칸에 가깝게 탈 거란 말이지. 그러니 까 앞쪽으로 가면―” 사라가 기세 좋게 앞쪽 칸 문을 열어젖혔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칸이 나온다고.” “헤헤, 전세 낸 것 같네요.” 엘리엇과 알리사가 먼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자리씩 맡아 착석했다. 토 와, 안젤리카, 죠르쥬, 사라가 함께 앉았고, 엠마, 알리사, 라우라, 피, 밀리엄 22


이 함께 앉았으며 마키아스, 유시스, 엘리엇, 가이우스 같은 남자아이들은 가 장 늦게 자리를 잡았다. 린도 남자 쪽으로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나지막한 여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안젤리카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쪽에 합석해주겠나, 린?” “아아, 물론이죠.” 그렇게 네다섯 명씩 자리를 잡자 사라가 먼저 박수를 치고 목소리를 높였 다. “다들 기억하지? 줄라이에 도착하는 날부터 사흘이야. 어떻게든 연장할 수 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흘 안에 조사를 마치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 어.” “어떻게든 연장, 하면 또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요?” “으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확정하지 못한 채로 돌아오는 것도 곤란하잖 아? 그렇지만 너무 걱정 마, 그쪽 동료한테도 연락을 취해놨으니까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정말 꼭 특별 실습 같네요.” “인원도 그렇지.” 2학년 칸의 인원이 한 자리를 차지한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흠흠. 아무튼 린을 부른 이유가 있지, 안젤리카?” “음. 물론이지. 린. 얼마 전에 말했던 크로우와 했었다는 대화,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아.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난감한 기분으로 고개를 드니 시선이 한껏 집중 되어 있었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열띤 눈빛이었다. 사라는 담임 교관으로 서, 선배들은 친우로서 크로우의 이야기를 재확인하고 싶다는 의지가 뚜렷이 느껴졌다. 크로우의 거취를 정하고자 가는 여행이니, 가는 도중에 단서가 되 는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싫었다. 애처럼 굴지 말자, 린 슈바르처. 린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내뺄 이유 23


같은 거 없잖아. 너는 지금 과민한 거야. 여러 일 때문에. 린은 창문 너머로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그 후에 크로우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기에, 함께 기숙사 앞에서 바람을 쐬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때?” “만약 고향에 혼자 가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함께 가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린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네.” “아닙니다, 회장님. 우연히 제가 크로우의 고향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억했 을 뿐이죠. 결정적인 얘기를 들었다면 아마 저도 선배님들처럼 기억이 흐려졌 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때 린이 말해준 덕분에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장례식에 참석한 모두에게 물어봤는데도 크로우의 과거 친지에 대해서 뚜렷한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는걸. 고마워, 린.” 토와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동조를 구하러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 런데 안젤리카는 창문 너머만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안제? 무슨 일 있어?” “……뭐, 그래. 괜찮겠지.” “앤?” 안젤리카가 창에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합석한 네 사람 모두에게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그 녀석의 과거라면 사실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긴 있어. 그 자리에서 말 할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가만있었다만.” “……그랬구나.” 사라가 짐작할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리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내가, 열 세 살 쯤 되던 해였을 거다. 그때의 나는 지 24


금보다 가련하고 깜찍했기에, 로그너 가의 영애라는 위치를 답답해하면서도 아버님의 지시를 거부할 생각은 하지 못했지.” “다시 들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야, 앤.” “아무튼 어린 나는 가련하게도 숨이 막히는 드레스를 갖춰 입고 카이엔 공 의 연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귀부인들과 웃는 얼굴로 신경전을 벌이는 회화나 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어. 거의 얼굴만 비추고 저택 구석구석을 쏘다니고 있 었지.” “정말 거부하지 않은 게 맞아?” 안젤리카는 연이은 반론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거기에 내 또래 사내아이가 있었다. 아마, 그 녀석이 돌이킨다면 우스꽝스러운 꼴이라고 칭했을 거야. 남들에게 보란 듯 선보이기 위한 것처럼 화려한 복장이었어.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녀석은 그 모 두에게 끊임없이 웃었어. 사람들이 계속 다가오는 데 지치고 물려 죽겠다는 눈을 하고서 말이다.” 여기서 안젤리카는 피식 웃었는데 기쁨으로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도 연회의 회화는 어지간히 질려했다만, 그 녀석의 상황은 그런 것과는 또 달랐지. 그런데도 악착같이 웃고 있었단 말이야. 나와 나이도 거의 비슷해 보이는 녀석이. 인상적인 모습이라 기억에 남았지만, 다시 떠올릴 이유가 없 으니 한동안은 잊고 있었지. 그 녀석의 기묘하게 초연한 인상이라거나, 은색 머리카락이나 짙은 눈이나.” “―크로우라는 건가.” “카이엔에게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는 이야기와 종합해 보면 확신해도 좋 겠지. 그것도 바로 그 백작의 일이고.” “그러면 카이엔의 연회에 참석하던 사람 중에 크로우를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거군요. 그런데 선배님.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말하지 못하신 건가 요?” 사라가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안젤리카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죠르쥬는 공구 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토와는 깍지를 꽉 끼고서 우는지 25


웃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린은 혼자서 어색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 었다. “자, 린.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피곤할 텐데 조금 눈을 붙이는 것도 좋겠다. 오늘 밤은 기차 안에서 자느라 피로할 테니까, 평소보다 조금 많이 자는 것도 좋아.” 무언의 압박이었다. 신경이 쓰여서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토와 선배까지 저런 상태니 감히 침묵을 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만 머릿 속에 뒤죽박죽이 되었다. -연회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람들은 크로우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크 로우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크로우는 고향에 함께 가주겠다고 했을 때, 과연 내게 긍정의 대답을 했 던 걸까? -크로우는 어디로 가게 될까? 답이 없는 의문이 계속되는 동안 기차가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생각도 진동 도 끝이 없이 이어지고 그동안 점점, 눈이 감겼다.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맞은편 자리 위에서 나무로 만든 함을 잘 싸놓은 꾸러미가 보였다.

은발의 작은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기 직전의 노인처럼 지 친 눈동자를 하고서 입만 웃고 있었다. 린은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빠 져나왔다. 달리고 달리던 도중 뒤에 있던 크로우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키 가 큰 크로우가 린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몸을 기대 왔다. 밤이 영원이나 찰나 같았다. 크로우가 말했다. 고마워, 린. 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크로우는 죽기 직전의 노인처럼 지친 눈동자를 하고서 입만 웃고 있었다.

“―잠꾸러기들,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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