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e en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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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는 장미가 흐드러지게도 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 을 때마다 눈앞에 닿을 듯이 만발하는 꽃잎을 손가락으로 헤치고, 질식 시킬 것처럼 코끝에 풍기는 향기를 넘어, 이 길의 끝에는 네가 기다리 고 있음을 안다.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슈는 그대로 발을 멈추었다. 그리 고 허리를 굽혀 분홍빛으로 만개한 장미 중 가장 아름다운 세 송이를 골라내었다. 가장 빛깔이 선명하고 고운 꽃송이, 가장 향기가 짙어서 방에 두면 마음을 흡족하게 할 꽃송이, 꽃잎이 가장 동그랗게 꽃술을 감싼 꽃송이를 차례로 골라 손에 들었다. 살면서 꽃을 꺾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이츠키 슈는 살아 있는 생물을, 설령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식물일지라도, 감상하기 위해서 죽일 수 있 는 성미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가장 싱싱하게 붉은 것을 솎아 사랑하는 이에게 바칠 작정이었다. 짙은 녹색의 줄기를 뚝, 뚝, 소리 나게 끊어낼 때마다, 송이송이 만 개한 장미처럼 끝도 없이 피어나는 기억들. 슈는 어느새 물기 묻은 장 미를 품안 가득 안고서 뜸을 들였다. “그러고 보면 좋은 순간에는 늘 네가 곁에 있었구나. 그렇지?” 슈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는 이의 얼굴이 보인다. 더는 참지 못하고 그는 숫제 아이처럼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웃음기 가득한 뺨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카게히라.” 바람이 불어오고, 짙고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슈는 준비한 꽃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흐르지만 신경쓰이지 않 는다. 이미 삶은 이렇게나 아찔하게 향기 고운 장밋빛이니. 자, 이 모든 향기로운 기억에 건배.


La Vie en Rose

1부

01. 약속

………………

3p

02. 새싹

………………

6p

03. 개화

………………

11p

04. 향기

………………

21p

05. 바람

………………

36p

06. 만개

………………

50p

07. 열매

………………

58p


01. “당신, 인생을 망쳤군요.” 이츠키 슈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여기는 무대의 백스테이지였다. 방금 막을 내린 공연의 열기가 남아 배우와 스태프가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관람한 연 극이, 특히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이츠키 슈는 그답지 않게 일부러 무대 뒤까지 찾아온 참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찾고 있던 배우가 보이기에 반색을 하고 다가갔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들은 게 이런 소리다.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치렁치렁한 무대 의상을 그대 로 입은 배우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차례로 들리는 말은 현실감이 없어 마치 연극 속의 대사처럼 멀게 들렸다. “당신의 인생에는 사랑이 없어요! 이건 거의 감정적 무능력자나 마 찬가지네요.” “하, 당신. 이츠키 선배와는 초면 아닙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죠? 그리고 선배는 두 번이나 결혼했거든요?” 동료직원이 대신 나서서 대꾸하는 바람에 그만 슈의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람은 좋은 녀석인데 눈치가 없다. 배우가 빙글빙글 웃으 며 슈를 바라보았다. 그것 봐요, 라고 비웃는 듯한 웃음. 사실 결혼은 세 번 했지만 그렇게 정정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괜찮네. 그만 돌아가지.” “아니, 뭐가 괜찮아요? 선배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데, 인생을 망쳤다니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죠. 부인들도 하나같이 미인이었잖아 요? 왜, 프랑스 인형처럼 금발에 푸른 눈의…….” “그만해!” 3


“죄, 죄송합니다…….” 슈 자신이 폭력을 쓰는 사람이 아닌 게 지금만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후배는 전혀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 점이 가장 속이 끓 었다. 기분을 완전히 잡쳐서 돌아가고 싶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슈는 배우에게 몸을 돌려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그 얼굴을 보면 안답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 뭡니까?” “그건…….” 배우가 커다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이 답을 찾아 헤매온 질문을 이렇게 간단히 던져버리다니, 파렴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슈는 미간을 콱 찌푸렸다. 파렴치한 건 당신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노려보자 배우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간단히 답해보자면……, 자.” 배우가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쑥 내밀었다. 손 안에는 붉은색의 장 미가 있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없었는데, 언제 준비한 거지? 마술인가? 얼결에 그가 내민 장미를 받아들자마자 짙은 향기가 코끝에 훅 끼쳤다. “사랑이……, 장미꽃이라는 겁니까?” “네.” 슈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무슨 바보짓이람. 하긴, 예술계에 몸담은 사람 중에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혹은, 천재 는 원래 조금 미쳐있다던가. 이 사람도 아마 그런 부류인 것 같았다. 슈는 더 대화하지 않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채 돌려주지 못한 장미의 잔향이 곁에 남아 코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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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까지 들어와서야 이츠키 슈는 자신이 지금까지도 꽃을 들고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붉디붉은 장미가 눈에 걸려 들여다보니 꽃은 시 선을 확 빼앗을 정도로 탐스럽고 싱싱했다.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인데, 집에 화병이 있던가. 두리번거리던 슈는 그대로 자리에 멈추었다. 그리 고 피식 웃었다. 웃음기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이 주택은 마지막 아내 와 함께 산 집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있었나? 두 번 째 아내, 첫 번째 아내에게는? 슈는 혼자 쓰기엔 지나치게 넓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엎드렸다. 장미꽃이 그대로 툭 바닥에 떨어졌다. 결혼한 아내들은 하나같이 프랑 스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적은 한 번 도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소녀처럼 순수한 사람이었다. 환한 금발을 늘어뜨리 고 주변을 신경쓰지도 않는 듯 입을 훤히 벌리고 웃는 것이 예쁘던 여 자는, 결혼 반 년 후에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두 번째 부인은, 첫 번째 부인과 자신이 닮았다는 것을 알고서도 아 무 불만도 없는 듯이 상냥했다. 이해심이 넓고, 배려심이 깊어 어떻게 대해도 웃어줄 것 같았다. 그녀는 어느 추운 겨울날 신발도 신지 않고 엉엉 울면서 집을 나섰다. 세 번째 부인은……, 그녀는 슈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만은 당 신은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미안해요, 나만은 당신 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배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감정적 무능력자. 제대로 된 사랑 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장미 향기가 계속해서 피어올라 머리가 지끈지 끈 아프다. 슈는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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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오늘도 근사하시네요, 이츠키 씨.” 업무용 복장이라기보다는 예복에 가깝게 보이는, 부드러운 선으로 떨어지는 셔츠 위로 쉴 새 없이 줄자가 지나간다. 사무직치고는 넓게 벌어진 어깨를 따라 줄자를 대고, 가죽 벨트부터 반들반들 윤이 나는 구두코까지 또 치수를 재고, 팔을 올려서 가슴둘레를 재고, 그 아래에 가느다란 허리둘레까지 재고 나면 색색의 천이 얼굴 아래에 대어진다. “치수가 조금 늘었네요.” “살이 불었나 봅니다.” “아니, 몸이 더 탄탄해지셨어요! 더 근사해지셨지만, 전에 맞추신 옷 이 딱 맞겠어요. 업무에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며칠 더 기다리게 되더라도 품을 늘이는 게 나으려나.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려보고 있는데 재봉사가 문득 미간을 좁히고 냄새를 맡는다. “그런데, 이츠키 씨. 무슨 향수를 쓰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꼭 장 미 생화 같아서 근사하네요.” “향수는 뿌리지 않았는데……, 아.”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츠키 슈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간밤에 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영문 모를 막말, 이상할 만큼 짙었던 장미 향기, 정신 나간 것 같은 배우. 이제 와서 생각하면 모든 게 어이없기 그지없었다. “그냥 그대로 사가죠.” “네?” “출고된 양복, 시착만 해 보고 바로 가져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 데 뭐라도 가져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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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소매에는 도금한 커프스를 끼우고, 베스트가 몸에 붙도록 단추 를 꼭 채운다. 베스트와 같은 색의 재킷을 덧입고, 컨설턴트이니만큼 넥타이는 신뢰감을 주는 푸른색으로, 그리고 그 위에 은색 핀 두 개를 끼운다. “이야, 딱이네요, 워낙 포스처가 좋으니 슬림 핏도 어울리시네요. 제 가 다 흐뭇한걸요.” 방금 나온 정장을 입은 이츠키 슈는 전신거울 앞에서 몇 번 몸을 돌 려보았다. 짙은 청색의 양복에 포마드로 깨끗하게 넘긴 앞머리까지, 스 스로 보아도 제법 기분이 풀릴 만큼 멀끔한 모습이었다. ‘선배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데요.’ 이츠키 슈. 서른의 나이에 증권사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펀드매니 저. 주변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 투자마다 성공하느냐고 묻는다. 그 냥 그렇게 보였다고 대답하면, 말할 생각 없으면 하지 말라고 혀를 차 며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어려서부 터 세상일의 흐름이 보였고, 지금은 돈의 흐름이 보일 뿐. 일은 딱히 즐겁지도 않지만 못 견디게 힘들지도 않다. 적당히 일하 고, 적당히 결혼하고, 적당히 좋은 물건을 사며 살아가는 것이 나쁘다 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가끔, 대체 살면서 무엇을 했다고 이렇게 금방 시간이 흘렀는지 궁 금할 때는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걸 이유로 사람을 비난할 수 있 단 말인가. 슈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옷은 다시 넣어드릴까요? 아니면 입고 가시겠어요?” “입고 가겠습니다.” 내일부터는 향수를 뿌릴 것이다. 장미 향기 같은 것은 대번에 덮을 수 있는, 진한 머스크 향의 퍼퓸을 뿌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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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들러 새 향수까지 사서 돌아가던 슈는 집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체격이 그리 크지 않은 걸 보니 고등학생 쯤 될까. 따뜻한 계절인데도 손등까지 덮는 긴 옷을 입고 문 앞을 서성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둑인가? 이 지역에서 눈에 띄 게 부유한 슈의 집을 노린 절도범은 이미 몇 번 있었지만, 현장에서 목 격한 적은 없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쓴 모자 까지, 상대는 모로 봐도 수상한 차림새였다. 미리 경찰에 신고할까? 그렇지만 만에 하나 무고한 사람이면 어쩌 지? 고민하던 슈의 시야에 상대의 가느다란 손목과 목이 들어왔다. 저 정도 상대라면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슈는 계속 문 앞을 서성거리며 집안을 들여다보는 상대의 뒤로 다가가, 푹 눌러쓴 모자를 확 들어 벗겼다. “응아아?” 바보 같은 목소리다. 어쩐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 집 앞에서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아. 앞집 분이신가봐예.” 웃으며 돌아서는 상대를 보며 슈는 눈을 크게 떴다. 양 쪽 색이 확연 히 다른 눈동자. 렌즈인가? 상대는 슈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얼굴을 돌 려 시선을 반쯤 피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 요 앞에 이사 왔슴더. 여기 국수 돌리러 왔는데예, 주인분이 안 계신가베 하고 한참 기다렸다 아입니꺼. 그냥 들어갔다간 부모님께 완 전히 꾸중 들을 것 같아서예. 자, 여기 받아주이소.” 상대는 키도 그렇게 크지 않고 얼굴도 하얗고 앳된 것이 잘해야 고 등학생이나 되어 보였다. 관서 지방 억양이 귀에 긁힐 정도로 심한 목 소리가, 묘하게 정겨운 느낌이었다. 정겹고, 그립고, 반가운……. ‘반갑다고?’ 8


이 아이를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한번이 라도 보았었다면 절대로 잊지 못할 외모였다. 양 쪽 색이 서로 다른, 서글서글하게 치켜올라간 눈동자. 밤의 짐승처럼 시리게 맑은 노란색 과 푸른색의 눈빛이 유달리 선명해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예쁘네.’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도, 수 초는 그렇게 서로를 바 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슈는 지레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 질했다.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뭘, 그렇게 보는 거냐?!” “죄, 죄송합니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상대를 한참이나 쳐다본 것은 슈 자신도 마찬 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주 들여다보는 녀석도 녀석이다. 아까는 낯을 가리는 것 같더니, 대체 뭐하는 성격이야? 슈는 무안해 흠흠 헛기 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나야말로 의심해서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주인이 없다고 남의 집 을 그렇게 들여다보는 건 실례라는 거다. 알겠나? 모처럼 새 이웃인데 잔소리는 여기까지 하지. 이름이 뭐지?” “카게히라. 카게히라 미카입니더.” “흠……. 고등학생 쯤 되나?” “맞아예. 요 앞 학교에 전학왔습니더.” “그래, 카게히라. 국수라니 전통적이구나.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고. 잘 먹겠다. 고맙다.” 슈는 한 손으로 상자를 받고, 한 손으로는 아까 들어 올린 모자를 미 카의 머리에 다시 씌워주었다.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려던 슈는 문득 발을 멈추고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카게히라.” 9


“예, 예. 이츠키……, 이츠키 씨?” “네 눈, 일부러 가리는 거라면 아깝구나. 모처럼 부모님이 예쁘게 낳 아 주시지 않았느냐.” “예……, 예?” 미카는 그대로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갑작스런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겨우겨우 고개를 들고, 감사 인사를 하려고 집 쪽을 바라보니 슈는 이미 집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 다. 미카는 집 담장에 반쯤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바닥에 미끄러졌다. 그리고 아까 슈가 씌워준 모자를 푹 눌러 얼굴을 가렸다. 스스로도 부 끄러울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라 도무지 누군가에게 보일 꼴이 아니었 다. 슈가 씌워준 모자에서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미카는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냄새를 맡았다. “이츠키, 이츠키 슈…….” 카게히라 미카는 담장 그늘에 앉아 방금 들은 이름을 되새기듯이 중 얼거렸다. 그늘 너머로는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고, 바람결에 짙은 꽃향 기가 실려와 아찔하다. 때는 늦은 봄,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03. 비교적 한가로운 마을이었다. 뒤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있고, 수십 년 된 가게들과 새로 생긴 가게들이 상점가에 나란히 열을 세우 고 있고, 철로가 놓여서 교통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많 은 편도 아니었다. 넓게 펼쳐진 들판에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들꽃이 많 았다. 장미, 아네모네, 들국화, 카틀레야……. 언제 어디서 누가 심었는 지도 모를 잡다한 종의 꽃들이 철마다 피었다 지는 그런 마을이었고, 사람도 종종 마을에 들었다가 몇 년 후에 더 큰 곳으로 나가고는 했다. 누가 와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떠나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곳. 장년층이 많은 마을이라 학교의 규모는 작았고 주말에도 학생 몇 명 이 자전거를 타고 더 큰 도시에 놀러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의 주인인 이츠키 슈는, 이 한가한 일요일 오전, 전화기 앞 에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갑자기 못 온다는 거냐, 니토. 벌써 일주일 전에 말했잖아, 오늘 작품을 하겠다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신경질적인 대답 소리가 들린다. 슈는 얼굴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떨어지게 옮겼다. 통화하 는 상대의 대답만으로도 시끄러운데 설상가상으로 대문 쪽에서 시끄럽 게 벨소리가 울린다. 슈는 한쪽 귀를 틀어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네 일정이 있겠지, 하지만 이미 준비를 다 해놨는데 이 제 와서…….” 다시 벨소리가 정신없이 울려대는 통에 도무지 통화를 계속할 수 없 었다. 슈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현관문을 던지듯이 열어 젖혔다. “뭡니까?” 11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는 남학생의 얼굴이 보인다. 앞집 에 이사 온……, 카게히라 미카였나. 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렸다. 이 녀석에게는 왜 자꾸 짜증내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걸까. “카게히라랬나. 무슨 일이지?” “그……, 이츠키……, 씨. 이츠키 씨라도 불러도 됩니꺼? 이거, 즈번 에 떨궈져 있는 걸 주웠는데. 이츠키 씨 물건 아닌가 해가 왔습니더.” 미카는 머뭇머뭇 무언가 조그만 것을 내밀었다. 은으로 테두리를 대 고 석류석으로 만든 단추. 전에 맞춘 양복 재킷의 단추가 틀림없었다. “내 물건이 맞는데……, 어떻게 알았지? 눈썰미가 좋구나.” “옷이, 정말 예뻤거든예. 집도 예쁘고, 이츠키 씨도……, 아 아니, 제 말은, 멋있으셔가지고. 무사히 찾아드려가 다행입니더…….” 두서없이 말하는 미카를 보며 슈는 한숨을 푸 내쉬었다. 고등학생이 나 되는 놈이 왜 이렇게 숫기가 없담?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처 음 볼 때도 생각했지만, 위로 치켜 올라간 밝은 눈동자는 야생의 동물 같은 인상이었다. 혹은 반대로 잘 연마한 순도 높은 보석 같기도 했다. 예민해 보이면서도 이목구비가 반듯해서 무엇을 걸쳐도 잘 어울릴 인 상이다……, 까지 생각하고 나서, 슈는 웃음이 나는 것을 억지로 참았 다. 이 녀석은 눈앞에 굴러들어온 원석이었다. 굳이 억지로 니토를 부 를 필요가 있을까? 한번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츠키 씨……?” “아, 그래. 카게히라.” 슈가 씩 웃었다. 녀석이 얼굴을 붉히는 것이 보인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겠나?” 유난히 쑥스러워 보이는 녀석의 표정에, 거절당하지 않을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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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렇게 막 들어와도 되는 긴지…….” “남자끼리 뭘 그렇게 쑥스러움을 타는 거냐. 편하게 해. 이쪽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면 되겠구나.” 미카는 소파에 주저앉아 부엌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찻주전자와 다 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차를 준비하는 슈의 뒷모습이 보인 다. 미카는 슈의 헐렁한 티셔츠 위로 보이는 하얀 뒷목을 빤히 쳐다보 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이 현실 감이 없었다. 이츠키. 이츠키 슈. 이름을 다시 입안에 되뇌어보는 동안, 슈가 다기를 잔뜩 올린 쟁반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지는 아무거나 잘 먹습니더.” “……설탕을 상당히 많이 넣는구나.” “와, 앗. 저는 단 게 좋아서예……. 쓴 것도 잘 먹심다!” “나무라는 게 아니란다.” 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숫기 없는 녀석으로 괜찮을까? 일단 말을 좀 붙여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학교생활은 괜찮니? 워낙 젊은 아이가 적은 마을이라, 전학생이라 면 많이 주목받을 텐데.” “그게, 사실은 좀 어렵심더. 제가 낯을 가리는 편이고, 거기다 이, 눈 이, 이렇게 생겨서……. 생판 남이랑 눈 똑바로 마주치고 말하는 것도 어렵고. 워낙 눈에 띄게 생겼으니까예. 그래도 이츠키 씨가 어제 그렇 게 말씀해 주시가…….” 말하던 미카가 양손을 올려 달아오른 뺨을 꾹꾹 눌렀다. “그, 감사했습니더. 어제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예. 살면서 그런 말 은 잘 못 들어봤는데, 기뻤어예.” “열여덟? 열일곱?” 13


“열일곱입니더.” “어리구나. 네가 아직 좋은 사람을 많이 못 만나서 그래. 좀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사람을 사귀다 보면 네게 좋은 말을 해줄 사람쯤은 질릴 정도로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러자 미카가 눈을 들어 슈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밝은 노란색과 청색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느낌은 기묘했다. 유난히 맑은 눈 빛에 꿰뚫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이츠키 씨는 어른이시네예. 멋있습니더.” “당연히 어른이지. 이제 삼십대인데.” 슈는 작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뜨거운 찻물을 후 후 불다가, 더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실은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단다.” “네? 지한테예……?” “갑작스럽지만 한번만 듣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구나. 혹시 한두 시 간 정도, 시간이 있다면 사진 모델을 부탁하고 싶구나. 내가 취미로 사 진을 좀 찍고 있는데, 오늘 모델이 약속을 펑크내지 않았겠니. 네 허락 없이 이상한 용도로 쓰지는 않을 테니 그런 걱정은 말고. 물론, 보수도 제공할 거란다. 음……, 이 정도면 될까. 더 필요하겠니?” 두꺼운 지폐 뭉치를 본 미카가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괘괘괜찮습니더! 돈은, 필요없습니더! 어차피 오늘 할 일도 없고 예!” “내가 맨입으로 갑자기 부탁을 하자니 미안해서 그래.” “진짜로 괜찮습니더! 전 이츠키 씨한테 부탁받은 것만으로도…….” 잠시 망설이던 미카가 말을 이었다. “기쁨더. 그런 거 없이도 돕고 싶네예.” 14


쑥스러워하면서도 딱 잘라서 대답하는 미카를 보며 슈는 잠시 생각 에 잠겼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가? 아는 사이인가? 아무리 생각해 도 이렇게 눈에 띄는 외모를 전에 보았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이렇게 나를 따르는 걸까. 뭐,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그러면 부탁하마. 일단 이쪽으로 따라와 보겠니?” 집 안쪽으로 걸어가는 슈를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따라가던 미카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역시 이렇게 막 들어가도 되는가 모르겠심더……. 사모님은 안 계십니꺼?” “내 아내는…….” 슈가 발을 멈추었다. 거실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나선형으로 이어 지는 계단이 있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그늘진 지하층에 불이 들어온다. 슈는 어스름히 불 밝힌 지하로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꽃을 가꾸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었어. 정확히는, 식물학자였지. 그 래서 그녀와 의논해서 이 집을 골랐어. 야생화가 많고, 뜰이 넓고, 지하 실이 있고 방이 넓고. 이끼나 수중식물부터 집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 은 잔뜩 길렀지. 하지만 지금은 여기 살지 않는 사람이라…….” 지하는 어둑어둑한데다 퀴퀴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미카는 어깨를 움츠린 채 눈앞의 남자를 뒤따랐다. 이쪽저 쪽을 돌며 방의 상태를 확인하던 슈는 어느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미카에게 씩 웃었다. “그래서 내가 방을 만들었지.”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에 조명이 들어왔다. 미카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는 실내인가? 실외인가? 지하실로 들어왔으니 분명히 실내 15


일 텐데, 바닥부터 천정까지 식물이 가득했다. 제멋대로 자란 담쟁이와 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고, 껍질이 검은 고목 끝에 꽃이 피었다. 바닥에 는 이끼 긴 돌멩이와 잔디가 있고, 곳곳에 색색의 들꽃이 피었으며 방 을 메운 식물 사이에 커다란 조명판과 페인트로 칠한 나무의자가 있었 다. 지하에 자리잡은 네모난 숲은 마치 이형(異形)의 숲처럼 기묘하고 신비하다. 미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방을 두리번거렸다. “자. 여기가 내 스튜디오다.” 챙이 넓은 모자를 머리 위로 눌러쓰며 말하는 이츠키 슈가, 잠시 지 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을 움직일 때마다 까슬까슬한 나뭇잎이 이마에 닿아 간지럽다. 꽃잎이 닿는 것도 간지럽다. 카게히라 미카는 화관을 쓴 채 나무의자 위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발에 닿는 잔디와 돌멩이도 간지럽고, 갈아입 은 옷의 재봉선도 간지러웠고, 무엇보다도 귀에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 리가 가장 간지럽다. “카게히라. 시선을 왼쪽 위로. 그렇지.”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미카는 잠자코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래, 카게히라. 거기서……, 음, 입을 다물어 봐. 그래. 좋아.” 눈부시게 조명이 떨어지는 방에 셔터소리가 연속해 울린다. 여섯 번 쯤 셔터를 누른 슈는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앞섶 단추를 풀었 다. 한 시간 내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모델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집중하고 말았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얼굴, 마냥 순진하지도 그렇다고 생기를 잃지도 않은 눈빛. 무엇보다도 녀석은 몇 번만 지시하면 본능적 으로 어떤 포즈와 표정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16


‘기질이 있군. 제대로 선택했어.’ 이츠키 슈는 촬영 내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자세한 설명도, 칭찬 도, 질책도 하지 않고 간단히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미카는 그의 말에 따라 나무에 기대서, 그늘 안에 숨어, 그리고 꽃을 꺾으며 몇 장씩 사 진을 찍었다. 대체 지금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미카는 사진을 찍는 이의 표정과 동작에 집중했다. 가늘게 뜬 연한 청색의 눈과, 굳게 다문 입술 밑에 생기는 주름, 포즈를 지시하며 문지르는 엄지와 검지.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슈가 무척이나 집중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함께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렇게 계속되던 셔터 소리는 필름 한 통이 끝까지 쓰인 후에야 멈 추었다. 필름을 꺼내 상태를 확인하는 슈 곁으로 미카가 쪼르르 달려왔 다. 촬영 중에는 야생동물처럼 눈을 빛내던 녀석이 지금은 순 강아지 같아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생각보다 길어졌구나. 이런 경험은 낯설었을 텐데 잘 따라와줘서 고맙다.” “신기하고 좋았습니더!” “……다행이구나.” 피식 웃고는 카메라를 접는 슈의 곁에 미카가 바짝 따라붙었다. “이렇게 커다란 사진기를 쓰는지 몰랐다 아입니꺼. 억수로 신기하네 예.” “보통은 좀 더 작고 휴대하기 좋은 놈을 쓰겠지.” “이츠키 씨는 사진 찍는 일을 하시는긴가예?” “사진은 그냥 취미야. 본업은 따로 있고……. 비싼 카메라를 살 돈이 있었을 뿐이지.” “왜, 그래도 시에서 열린 공모전에 출품하시지 않았습니꺼.” 17


“아, 본선에 올라간 걸 보고 취소해달라고 했어. 진지하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지망생들의 앞길을 막게 되면 실례겠지.” 슈는 카메라 렌즈를 헝겊으로 조심스레 닦아내며 건성으로 대답했 다. “그럼 이츠키 씨는 와 사진을 찍기 시작한건데예?” “……아내의 취미였어. 물론 그 사람은 정말로 취미 수준이어서. 이 렇게 스튜디오를 만들거나 조명판을 세우지도 않았고, 노출도를 제대 로 조절할 줄도 모르면서 느낌대로 찍어대는 게 전부였지만. 오히려 아 내가 시켜서 몇 번 사진을 찍어 본 내가 꽤 재미를 붙여서, 나답지 않 게 말이다.” “집 구한 얘기도 그렇고, 이츠키 씨는 아내 분을 억수로 사랑하시나 봅니더.” 슈는 입 밖으로 싫은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꾹 눌렀다. 슈가 굳은 표 정으로 입을 다물자 지레 겁에 질린 미카가 말했다. “응아, 죄송합니더. 제가 함부로 남의 아내 분 얘기를 했네예. 잊어주 이소, 잊어주이소.” “……아니다.” 어제 처음 본 아이에게, 그것도 건너편 집에 이사 온 아이에게 결혼 사정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이츠키 슈라도 앞집 가족에게 세 번 이혼한 남자 따위로 첫인상을 각인시키는 건 사 양이었다. 일단 대충 얼버무리자. 아내 이야기도, 사진 이야기도……. 그렇게 생각하던 슈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아아? 무슨 일입니꺼?” “카게히라.” “예?” “너, 내가 시 사진전에 출품한 걸 어떻게 알고 있지?” 18


방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미카는 슈를 보며 눈을 몇 번 깜 박거리다 곧 아래로 내리깔았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냐. 놀란 건 내 쪽이야.” 잠깐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닫아버린 미카에게 슈가 다시 한 번 채근했다. “말해봐.” 미카는 다시 겁먹은 눈으로 슈를 올려다보다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 다. 그리고 눈을 내려 시선을 피하고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편지 를 읊듯 말하기 시작했다. “……이츠키 씨. 저는 이와테 현에 사는 17살 고등학생입니다. 얼마 전 당신의 사진을 보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익숙한 소품과 친숙한 정경이 당신의 사진 속에서는 하나하나 특별하게 빛납니다. 당 신의 사진을 보고, 저는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이 촬영하는 사진을 계속 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팬 입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관서 억양이 남은 채로도 애를 써 또릿하게 말하는 미카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듣고 있던 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미 렌즈 같은 것은 안 중에 없었다. “어떻게……?” “외우고 있습니더. 메일을 보내기 전에 이상하게 안 썼나 하고 몇 번 이고 다시 확인했으니께…….” “정말 네가 ‘아메짱’이라고?” “예……. 이츠키 씨, 웹에 검색해서 나오는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펀드매니저라고 쓰여 있어서 어짜면 동명이인이지 않을까 허고 생각했 어예. 그런데 국수 돌리러 왔다가 이츠키 씨를 보고, 너무 놀래가……. 이츠키 슈라고 이름을 들었을 때도 놀랬고, 사실은 그래서 지금도 무지 19


무지 기뻤습니더! 제가 좋아하는 그 이츠키 씨가 맞고 이츠키 씨의 사 진에 찍힐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응아 아, 너무 말이 많았네예!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더. 죄송합니 더!” “카게히라 미카.” “네, 네!” 슈는 초조해 깍지를 낀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미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상황을 판단하지 못해 데록데록 굴리는 소년의 눈동자가, 꿀 같은 노란색과 연해처럼 말간 파란색의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소년도 어른도 아닌, 구면도 초면도 아닌, 쑥스러움을 타면 서도 용감하게 고백하는 오늘의 뮤즈. 말도 안 되는 우연에 기가 막혀 슈는 혀를 쯧 찼다. 그리고 곧 웃었 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욕심. 이츠키 슈는 눈앞에 넝쿨째 굴러들어온 소재를 굳이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었 다.


04. “프레임 속에는 프레임 속의 세계가 있어.” 이츠키 슈가 흐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 자체로서 완성된 세계를 지니고 있는 거다. 물론 그 어떤 종류의 작품이라도 저만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는 마찬가 지일 거다. 그런데……, 카게히라.” 슈가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자 미카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너에게는 네 세계가 없는 거냐? 오늘은 야근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 데, 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느냔 말이다!” “내일 또 촬영하기로 했지 않았습니꺼. 그런데 이츠키 씨가 밤이 다 지나도록 안 돌아오기에 걱정이 돼서 기다렸습니더.”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이츠키 씨.” 미카가 앞에 선 슈를 흘끗흘끗 올려다보았다. “술 냄새 납니더.” “………….” “……드링크라도 사올까예?” “……어쩔 수 없었어. 고객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상담을 많이 하는 건 좋은데, 자꾸만 이렇게 술자리를 권해서…….”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인데예?” “신생 벤처업체 사장인데, 버는 돈을 다 여기에 쓰는 건지…….” 말하던 슈는 입을 꾹 닫고 자신에게 얼굴을 바짝 붙인 미카의 이마 를 콩 때렸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내가 왜 내 고객 정보를 네 녀석에게 말해 야 하는 거냐.” 21


“말하기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예. 어휴, 가방이나 이리 주이소. 그렇 게 비틀비틀하면서 용케 여기까지 걸어오셨네예.” 어쭈? 이 녀석, 지금 한숨 쉰 건가? 하지만 술기운으로 어지러운 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짐을 미카에게 맡기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침실까지 들어간 슈는 곧바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엎어졌다. “카게히라…….” “예?” “거기. 가방 옆에 종이봉투가 있지. 열어 봐.” “이건……, 사탕이고마. 까 드릴까예?” “아니. 단 것은 즐기지 않아.” “그럼 이건 왜…….” “네 닉네임이 아메짱이었으니까. 먹어보고 입에 안 맞으면 집에라도 가져가라. 나는 어차피 안 먹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슈는 베개 위에 얼굴을 박았다. 퇴근 후 너무 지쳐서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을 때 베개에 얼굴을 박고 수 초 동안 그대로 있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얼굴을 누이자마자, 입 안 에 작고 딱딱한 것이 들어왔다. 과일 맛이 나는 달콤한 사탕이 혀 위에 서 스르르 녹는다. “읍, 남의 입에 함부러…….” “이걸 내 혼자 묵으면 뭐합니꺼. 아메짱은 취한 사람이나 배고픈 사 람 줄라고 가지고 댕기는 겁니더.” “그리고, 몰 자연스럽게 내 집 안에 드러오느냐는 마리다.” 슈가 사탕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츠키 씨, 내가 처음 왔을 때도 도둑 아닌가 의심했 고. 집에 남이 들어오는 게 싫은깁니꺼?” “이 즤베만 절도범이 네 번 드렀어. 근방에서 제일 큰 집이니까 눈에 22


띄겠디.” “내도 이츠키 씨 물건을 훔쳐갈 거라고 생각하심꺼?” “아니.” 별 생각 없이 즉답한 슈는 옆으로 누운 채 반쯤 감긴 눈을 깜박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곧 머리 위에 앞머리를 넘겨주 는 손의 무게가 느껴진다. 술기운 때문일까. 왜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이렇게 멋대로 구는 게 싫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침대에 누울 때 누군 가 곁에 있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입에서는 단 내가 나고, 곁에 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고, 나른하고 노곤하다. 슈는 깊게 생각할 겨를 도 없이 금방 잠이 들었다. 이츠키 슈와 카게히라 미카가 처음 만난 지 벌써 보름을 훌쩍 넘긴 날이었다. * * * “조명판을 뒤로 대지.” 스튜디오에서 의자를 옮기던 미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늘은 간접 조명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예.” “이제 제법 기어오르는구나. 처음엔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그대로 따를 것 같더니.” “닥치고 조용히 할까예?” “그렇게 험하게 말하지 마라. 교양 없고 시끄러운 아이는 좋아하지 않아.” “예…….” 풀죽은 얼굴을 한 미카를 보며 슈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아예 말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수다스러운 게 네 녀석 특징이 23


니까.” “이츠키 씨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예.” “아무튼, 그러면 조명판은 일단 차치하고 어스름한 느낌으로 찍어보 자. 앉아 봐, 카게히라. 아예 그늘 아래 들어가도록. 그리고 이쪽을 봐.” “이런 느낌으로?” “그래. 딱 좋은데, 거기서 고개를 좀 올리지.” 저벅저벅 다가간 슈가 미카의 턱을 집어 슥 위로 올렸다. 눈이 마주 쳤다. 서로 바라보면서 몇 초나 지났을까, 슈가 먼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섰다. “그렇게 시선을 조금씩 올리면 되겠구나.” “예…….” 찰칵, 찰칵. 묘하게 조용한 스튜디오에 카메라 셔터 눌리는 소리만 계속 울렸다. 촬영을 마친 후에는 습관처럼 티타임이 있었다. 크리스탈로 된 쟁반 위에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와, 큰 숟가락을 넣은 설탕과 사탕 상자가 놓였다. 스푼으로 찻잔을 저으며 슈가 나지막이 말했다. “요즘 부쩍 말대꾸가 늘었구나, 카게히라. 너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 로 하면 되는데. 내 작품에 타협할 생각은 없으니 입 아프게 떠들어봐 야 별 소용없을 거다.” “압니더. 이츠키 씨는 말로는 그냥 취미라고 하지만, 예술관이 뚜렷 하고 사진에 자부심이 있으니까 그런 작품이 나오는 거 아이겠습니꺼.” “아는데?” “그치만, 그렇다 카고 입 꾹 닫고 암말도 안 하면 내는 이츠키 씨한 테 모델 외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거 아인가베. 그기 인형이랑 뭐가 다른가예. 그런 건 더는 싫습니더.” “더는 싫다니, 전에 나한테 착취당한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얘기하 24


는구나.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그, 런 건 아니지만…….” “아니긴? 마치, 내게 오랫동안 불만이 있던 것처럼 말해놓고는 말이 다. 나는 피해의식이 심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유가 있겠지. 역시 무보수로 일하는 게 불만이었나? 내가 너무 무뚝뚝한가? 어때, 촬영 같은 건 지금이라 도 그만둘까?” “그, 그게 아닙니더. 이츠키 씨는 내한테 충분히 잘 해주셨고, 말이 무보수지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아니긴, 오래 참았다는 말투였잖아. 솔직히 말해도 괜찮다.” “그러니까 그게…….” 미카가 머리를 벅벅 긁는 동안 슈는 느긋이 차를 홀짝였다. 어린아 이를 궁지에 몰아넣고 즐기는 건 좋지 못한 취미겠지만 솔직히, 즐거웠 다. 어떻게 반응할 거지, 카게히라?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던 미 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아내 분은 어디 멀리 출장이라도 가셨 나봐예?” 말을 돌리는구나. 어린애다워. 슈는 작게 웃었다. “이혼했어.” 슈가 당연하게도 대답했기에 미카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 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시던 차에 사레가 들러 켁켁렸다. “큭, 큭! 이, 이츠키 씨. 그렇게 말 안하셨다 아입니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앞집에 새로 이사 온 가족들에 게 첫인상을 이혼남으로 삼고 싶지도 않았고…….” “그게, 뭐 중요합니꺼. 내가 그런 걸 가족들한테 함부로 꼰지를 것도 아니고예.” 25


“아. 참고로 전에 말한 아내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야. 사진이 취미였 던 건 첫 번째 아내, 식물학자는 세 번째 아내.” “이야……, 역시 능력 있는 분이셨네.” “비꼬지 마라.” “아니, 정말 이츠키 씨 같은 사람을 남들이 그냥 내비둘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더! 잘생기고, 능력 있고, 다정하고. 누구라도 사귀고 싶지 않겠어예.” “너는, 내가 어딘가 모자라서 세 번이나 이혼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츠키 씨는 뭐라 생각하시는데예?” 미카의 반문을 듣고 슈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걸 본인에게 어떻 게 생각하느냐니. 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길을 잃은 사람 같 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러면, 차차 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꺼. 내도 그때까지 이츠키 씨 옆에서 도와드릴께예.” “카게히라…….” 씩 웃는 미카를 감격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슈가, 미카의 얼굴 위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 코를 꼬집었다. “어른인 척 하지 마라.” “아, 아야! 아픕니더!” “아프라고 꼬집은 거야. 어린애 주제에 자꾸만 건방지게 어른을 챙 기려고 하는구나. 이래봬도 네 걱정 들을 신세는 아니야.” “아, 이츠키 씨. 그러면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는긴가예? 제가 눈치 없이 막 집에 오고 그런 거 아닌지 모르겠심더.” “그런 건 없어. 이제 별로 새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미카가 입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26


“……다행이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잖아. 그렇지?” “여,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거 아입니까?” “있어도 알아서 뭐 하게? 너 같은 어린애가 어른들 일에 끼어들 것 도 아니고.” “어린애 아닙니더!” “이렇게 우기는 점이 어린애라는 거다. 봐, 입맛도 그렇잖냐.” 슈가 설탕 통을 톡톡 두드리자 미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설탕 통과 사탕 상자를 쟁반 밖으로 밀어냈다. “다음부터는, 둘 다 안 먹을 거니까 필요없습니더.” 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푹 숙인 슈의 어깨가 들썩거렸 다. 기침하는 것처럼 콜록거리던 슈는 곧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뭐, 뭡니꺼!” “하, 하하하……. 그래도 열일곱이라며. 이렇게까지 어린애 같아서 어떡할 거냐, 카게히라 미카. 어쩔 수 없지. 아저씨가 돌봐주마.” “어린애 취급 좀 그만하이소!” “억울하면 너도 서른 살 되어서 오던가.” “우이씨, 십년만 딱 기다리소. 내는 이츠키 씨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 될 겁니더.” “그건 곤란하겠구나.” 슈는 웃다 못해 눈물이 맺힌 눈으로 대답했다. 보고 싶네,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어쩐지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은 왜였을까. 카게 히라 미카는 너무나 어리고, 서른 살의 어른이 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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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차라리 어리고 순진한 아이를 상대하는 게 나았지. 늦은 밤 술을 마시던 이츠키 슈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이 아찔하고 몸에 열이 올랐다. 슈는 애써 흐린 눈을 똑바로 뜨며 맞은편에 앉은 손님을 쳐다 보았다. 눈빛이 초조하면서도 입가에 걸친 웃음이 의뭉스러운 것을 왜 진즉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상하게, 자꾸 술자리를 만든다 싶었지…….’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투자 를 걸어놓은 고객을 무작정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츠키 씨?” “아, 아닙니다.” 갑자기 어지럽고 몸을 가누기 힘들다고 하면 근처에서 쉬자고 하겠 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눈앞에 훤했다. “더 마시지 않으시는 건가요?” “네……,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적당히 할까 합니다.” “그러면 하던 투자 이야기를 마저 하죠. 그때 이츠키 씨가 소개해주 신 상품이…….”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필요했다. 도움이 필요했다. 무언가 부탁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줄 사람. ‘카게히라.’ 곧바로 떠오른 얼굴에 슈는 입을 악물었다. 하필 그런 순진한 아이 를 이런 일에 연루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점점 몽 롱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생각을 할 정 신마저 놓을지도 모른다. 슈는 테이블 아래로 휴대전화를 꺼내어 화면 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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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라’ 느지막한 밤에 도착한 메시지는 완성된 문장도 아니고 구두점도 없 어, 평소의 이츠키 슈가 보낼 법한 메시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발신인이 이츠키 씨였다. 미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었다. 뭐라고, 뭐라고 하지? 한참 고민하다가 답을 했을 때는 5분이 지난 후였다. ‘이츠키 씨. 좋은 밤입니다.’ 대체 이게 뭐라고 5분이나 지났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무 늦 어서 답이 안 오면 어쩌지? 안절부절못하고 손에 폰을 든 채 방 안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곧 기기에서 수신음이 울렸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츠키 씨는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할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장난을 치는 걸까 싶었지만 딱히 두 사람의 관계 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주 다급한 상황인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는 짧게 답했다. ‘네’ ‘37분에 전화해’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릴 만큼 계속 소리를 질러’ 정말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걸까? 미카는 화면을 눌러 시간을 확인 해보았다. 35분.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내 말은 무시하고 아무 내용이나.’ ‘무슨 일이신데요?’ 더 답은 오지 않았다. 빠르게 흘러가는 초침을 보며 미카는 침을 꼴 깍 삼켰다. 에라, 모르겠다. 만에 하나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해도 나중 에 이츠키 씨에게 다시 설명하면 되겠지. 미카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 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29


“이츠키 씨!” - 예. 이츠키 슈입니다. “전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더!” - 계속하십시오. “이츠키 씨. 저번에, 이혼한 걸 알고 나서 이츠키 씨가 모자라 보이 지 않느냐고 했었잖아예!” - 네. 맞습니다. “그때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더! 내한테 이츠키 씨는 처 음 보는 순간부터, 이걸 뭐라카나, 빛이 난다고 해야카나, 꼭 이츠키 씨 사진 같이, 세상에서 예쁜 것만 모아놓은 것 같고 좋은 것만 보이는 것 같고. 그러니까 내한테 그렇게 물어봐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고예!” - ……죄송합니다. 미처 확인하지 못했군요. “이혼을 했고 안했고, 그런 게 와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더! 어쨌든 내한테 이츠키 씨는 이츠키 씨일 뿐이거든예……. 아, 글타고 그때 거 짓말하려던기는 아입니더!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그랬던 깁니더!” -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투자처에서 계약한 상품의 주가가 급락 했다고 하네요. “아직 할 말은 억수로 남았는데 어디까지 들어주실지 모르겠네예!” - 저는 빨리 가봐야겠습니다. 뚜. 뚜. 뚜.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리자 미카는 기기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숨이 차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통화하는 동 안, 뒤늦게 도착한 메시지 하나가 더 있었다. 미카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서 후드 하나를 꺼내 입은 옷 위에 휙 걸쳤다. 그리고 집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통화가 끝나면 학교 앞 공원으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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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게 누구야.” “이, 이츠키 씨……?” “카게히라 아니야.” 공원의 나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슈가 미카를 보자마자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 이츠키 씨. 쓰러지시겠심더!” 미카가 다급히 달려가자, 발이 꼬여 비틀거리던 슈가 미카의 몸 위 로 반쯤 풀썩 쓰러졌다. “아하하. 역시 젊구나. 몸이 빨라.” “이……, 이츠키 씨. 취하셨습니꺼?” “응? 응. 취했네……, 독하지. 양주에, 뭐라도 탄 건지……, 안 되겠 다 싶어서 널 불렀는데 다행이지……,” “이츠키 씨!” 미카가 소리를 지르자 슈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볼멘 소리를 했다. “그러게. 널. 왜 하필 널 불렀지? 정말, 싫구나……,” 슈가 입술을 뾰족 내밀고 미카를 노려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 이, 닿을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는 미카의 볼을, 슈가 한손으로 잡아서 쭈욱 잡아당겼다. “우우우웃?” “카게히라 미카. 정말로 멍청하게 생겼군.” “너, 너무합니더!” “딱 봐도 멍청한 얼굴이잖아. 성적은 어떻지? 나는 도쿄대 출신인데, 어디 댈 만하려나?” “서, 성적이 인생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닙니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예…….” 31


“정말 새파란 어린애로군.” 슈는 갑자기 킥킥 웃다가, 또 갑자기 지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담배. 담배가 피고 싶어.” “이츠키 씨, 담배도 폈어예?” “끊은 지 17개월.”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인생에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없으니, 담배라도 펴야지. 장미. 그놈의 장미가 저주였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슈가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미카는 슈를 부축해 편의점까지 데려 갔다. “말보로 레드 주십시오. 아, 일회용 라이터도.” 점원에게서 담배와 라이터를 받아든 슈가 미카를 보고 씩 웃었다. 너는 이런 거 못 하지? 라고 자랑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 착각이 겠지, 하고 생각하던 미카는 보란 듯이 담배를 흔들고 있는 손을 보고 서야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공원의 벤치에 앉은 슈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끝이 타 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이더니, 곧 정신없이 기침하기 시작했다. 미카는 슈의 손에서 얼른 담배를 뺏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몸을 구부린 채 기침하던 슈가 눈물 고인 눈으로 미카를 올려다보았다. 흠칫 놀라는 미카의 뺨을 슈가 살짝 꼬집었다. “그, 그만하이소……! 아까부터……!” “네 그 억양……. 오사카에서 왔지, 카게히라?” “네. 실은 아일 때 3년 정도 있던 게 다인데, 왜 이렇게 말이 입에 붙었는지 모르겠어예…….” “오사카 나카노시마에는 장미원이 있어.” 32


슈는 미카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은 것처럼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가장 큰 장미원일 거다. 장미 정원, 장미 길, 장미 광장으 로 나뉘어져 있는데, 세 구역 모두 수백 종의 장미로 가득해.” “이야, 그 정도면 아예 세상이 분홍빛이겠어예.” “그렇지. 분홍색, 붉은색, 노란색, 상아색의 산뜻한 꽃송이를 보면서 처음 보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장미의 나라에 있다고 생각하겠지……. 기후가 온난하고, 어디서든 달콤한 꽃향기가 진동해. 화원 옆에는 오카 와 강이 흘러. 여름에 물이 불어난 강에서 배 위를 둥실둥실 흘러가고 있으면 막 싱그럽게 피어나는 장미 향기가 코를 자극하지. 언젠가는 그 곳에서 사진을 찍어보고 싶구나…….” 반쯤 꼬인 발음으로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는 슈의 뺨은 스스로 얘기 하고 있는 내용과 꼭 같은 장밋빛이었다. 이렇게 엉망인 슈의 모습은 처음 보지만, 어쩐지 싫지 않아서 미카도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뭐랄까. 말만 들어도 둥실둥실 행복하네예. 내도 한번 가보고 싶다. 이츠키 씨는 나이도 지보다 훨씬 많으니까 여행도 여기저기 많이 가봤 을기고. 좋아보여가꼬 괜시리 부러워진다 아입니꺼.” “나도 안 가봤는데.” “예?” “옛날에 여행 가이드북에서 봤어.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 하고 있었지. 그 생각을 한 지가, 벌써 십 년이 지났지만……. 어쩐지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구나.” “그럼 함 같이 가볼까예?” “너랑?” “네.” “너랑 내가?” “네? 네…….” 33


대답하는 소년의 손끝이 긴장으로 살짝 떨리는 것이 보인다. “좋네.” 슈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반색하는 미카에게 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거기까지 여행하기에 너는 너무 어려. 부모님 의 허락도 맡아야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살 경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 고……. 무얼 하나 해도 어른의 보호와 동의가 필요하겠지. 뭘 해도 말 이야……. 너는 너무 어려.” 그렇게 중얼거리며 슈가 계속 뺨을 콕콕 찔렀기에 미카는 움찔거리 며 눈을 찡그려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눈을 떠서 평소와 다르게 멍하게 풀려 있는 슈의 얼굴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느릿느릿 눈을 껌 벅거리던 슈가 결국 미카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입버릇처럼 느리 게 되뇌었다. “너는, 너무 어려……. 네가 더 큰 후에…….” 그리고 그대로 미카의 몸 위로 풀썩 고꾸라졌다. 카게히라 미카는 이츠키 슈의 상체를 품에 끌어안은 채 두리번거리 며 주변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골목에서 오래되어 낙후된 가로등이 깜박거리고 있다. 세상이, 너무나 어둡고 넓었다. 세상에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드넓은 세상 어디선가 휙 밤바람이 불어봐, 미카는 몸을 움츠리고 입고 있던 겉옷을 슈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색 색 고른 숨을 내뱉는 슈를 반쯤 안아든 채, 미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품안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슈의 얼굴이 달처럼 희게 빛나는 것 같다. 어 디선가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향기 쪽은 환각임을 분명 하게 알았다. 슈를 처음 만났을 때 맡았던 장미 향기, 그때 그 향기를 지금 느끼고 있을 뿐이다. 34


미카는 제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그리고 붉은 자국이 남을 때까지 뺨을 세게 문질렀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 내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면 편했을 텐데. 미카는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떠도는 구름 사이로, 달이 어렴풋한 은빛으로 빛난다. 흐릿한 달빛이 어쩐지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곁에서 정신을 잃은 남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조차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지금 한번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꺼내면, 가슴 안쪽에 애를 써 꾹꾹 눌러둔 것들이 둑 터진 것처럼 흘러넘칠 것 같았다. 가슴 안쪽이 불에 델 것처럼 따끔거림을 느끼며 미카는 생각했다. 장미. 장미에는 원래 가시가 있었지. 때는 초여름, 장미가 만개하는 계절이었다.


05. 아주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꿈. 꿈속에서 카게히라 미카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시계소리처럼 끊임없이 귓전을 때리는 노랫가락이 들릴 때마다, 가슴 속에 무언가 따 뜻하고 뭉근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카게히라 미카는 옆을 돌아 보았다. 이츠키 슈가 눈을 마주치며 웃어준다. 이것이, 내가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유. 눈을 뜬 후에도 미카는 한동안 꿈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 었다. 꿈이 현실처럼 너무나 생생하면서, 또 꿈결같이 행복했다. 나와 이츠키 씨가 함께 태어나고,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나기 전에 만나서, 같 은 학교를 다녔다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었을까. 어딘가 다른 세계에 서는 그런 모습으로 함께 지냈던 게 아닐까? 이별도 작별인사도 않고 줄곧 그렇게 곁에서……. 거기까지 생각하고서야 미카는 정신을 차렸 다. 이츠키 씨, 이츠키 씨는 어떻게 됐지? 공원에서 반쯤 쓰러진 슈를 어떻게든 슈의 집에 데리고 와서, 침대에 뉘이고, 너무 지쳐서 잠깐 소 파에 누웠었는데, 왜 나는 지금 베개를 베고 있지? 푹신한 이불에서 슈 가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여기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 을 들고 보니, 눈앞에 인형이 있었다. 하얀 얼굴에 금발을 늘어뜨린, 장인이 정성스레 깎아 만든 듯 예쁘 게 생긴 작은 사람 크기의 인형.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눈동자까지 꼭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동감이 있어서, 미카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인형이 빙긋이 웃는다. 덜 깬 정신으로도 그 웃음이 참 예쁘다 고 생각했다. 인형이, 웃었……? “응아아아아아아?” “왜 그러지, 카게히라. 내 집에서 그런 멍청한 소리를 내지 마라!” 36


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미카는 슈 쪽으로 몸을 기울여 허리를 꽉 붙들었다. “이, 이츠키 씨, 인형이 움직였……, 또! 히끅!” “정말, 실례네! 나는 인형이 아니야!” 인형이 잔뜩 화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인형……, 사람……? 옆에 서 슈가 배를 잡고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하네. 이츠키, 지금 이게 웃겨?” “아……아하하. 그렇지만 웃지 말라고 해도 무리잖나. 어쨌든 진정 해, 카게히라. 이쪽은 니토 나즈나다. 내 사진에서 종종 봤을 텐데?”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서 손을 놓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미카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내가 미안타. 나즈나……라고 부르면 되나?” “정말, 또 실례잖아! 니토 씨라고 불러! 너, 고등학생이라며!” 떨리는 입꼬리를 갈무리하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는 얼굴로 슈가 옆에서 첨언했다. “나에게 대하는 것처럼 하면 되겠구나. 니토는 나와 동갑이니까. 아, 그렇다고 너무 기어오르지는 않는 게 좋을 거다. 이래보여도 화를 잘 내는 남자라.” “도, 동갑이라면 나이가……?” “이제 서른은 넘겼지.” 당연하게 대꾸하는 나즈나를 보고 미카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이나, 예쁘장한 소녀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졸지에 여기까지 와서 새벽부터 산만한 남자 둘 수발을 들 었는데. 이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이츠키?” “따지고 보면 니토 네가 멋대로 약속을 깬 탓이다.” “흥. 이츠키는 예전부터 자존심밖에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고개 꼿 37


꼿이 세우는 소리밖에 안 한다고. 너라도 고마운 줄 알아, 카게히라. 내 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새벽에 뜬금없이 이츠키한테 메시지가 왔다 고. 집에 꼭 와서 사람을 봐달라니……, 죽어도 그런 식으로 부탁 안 할 사람이라서. 나는 집에 응급환자라도 생긴 줄 알았지.” 오차즈케를 한 접시 가득 건네주며 나즈나가 계속 틱틱거렸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술에 떡이 된 이츠키랑 웬 시체 같은 고등학생 이 있잖아.” “아, 고마……, 아니 감사합니더…….” “뭐, 어떻게 보면 고마운 건 나지. 네가 지금까지 나 대신 이츠키의 모델을 해 주고 있었다니……. 뭐야, 왜 그렇게 봐?” 미카는 나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이 사람이 이츠키 씨의 원래 모델을 해주던 사람. 과연 그럴만한 분위기라는 생각이 들었 다. 이렇게 작고, 인형처럼 예쁘고……. 절로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니토 씨는……, 이츠키 씨랑 어떻게 아는 사인가예?” “어렸을 때 교회에서 만났어.” “니토는 그때 나랑 만난 걸 후회할 거다.” “두 분, 친해 보이시네예…….” “너야말로.” 나즈나가 곧바로 대꾸했다. “나 사실 많이 놀랐거든. 너같이 젊은 애가 어울리기에 이츠키는, 뭐 랄까, 고압적이지 않아? 그 이츠키가 아무리 모델이라도 고등학생과 어울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것도 꽤나 아끼는 것 같고.” “이츠키 씨는 좋은 분입니더. 왜 그렇게 말하시는지 모르겠슴더.” 그렇게 말하자 나즈나가 방긋 웃었다. 꽃이 피는 것 같은 미소였다.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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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둘이 이런 사진을 찍었구나…….” 사진 더미를 만지작거리는 나즈나를 등 뒤에서 흘끗 넘겨다보며 슈 가 말했다. “최근에 찍은 사진은 아직 현상하지 않았다만.” “현상이라니, 아직도 그 구닥다리 필름 카메라를 쓰는구나?” “구닥다리라니, 골동품이다. 웃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지.” “이 시대에 필름이라니 비효율적이잖아. 사고라도 나면 유실되기 십 상이고, 보관하기도 힘들고. 사진 자체도 마찬가지야! 이츠키 네 고집 은 알지만, 좀 더 폭을 넓혀보는 건 어때? 취미 선에서 끝내기는 아까 운 수준이잖아.” “흥. 내가 원하는 것을 찍을 뿐이다. 남의 눈에 띌 사진이었으면, 진 즉에 그랬겠지.” “뭐, 말이 통할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 카게히라. 네가 보기엔 어때?”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멀뚱멀뚱 듣고 있던 미카가 퍼뜩 놀라 얼굴을 들었다. “뭐……, 뭐가 말입니꺼?” “이츠키가 찍는 사진들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냐고.” “좋아합니……, 딸꾹.” 순간 미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니. 방금 말은 잊어주이소. 좋다고……, 생각합니더. 뭐랄까, 담백하고……, 햇살처럼 평온하고, 따뜻하고……. 평소에는 그냥 지나 치게 되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도 프레임 안에 잡아내니까. 그냥, 쳐다 보게 됩니더. 계속계속, 하염없이 들여다보게 되고예…….” “완전히 횡설수설하는군.” 팔짱낀 채 말을 듣던 슈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뚝 잘라 끊었다. 39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다만, 심사위원들은 그런 걸 싫어하거든. 좀 더 강렬한 게 눈에 띄니까.” “저는, 좋아합니더!” “사실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데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던 건 아니야.” 슈가 한숨을 쉬며 웃었다. “그런데 저번에 시 사진전에 출품한 이후……, 길고 정중한 메일을 받았지. 정중하지만 표현은 직설적이었어. 지금 내 사진은 사진일 뿐이 라더군. 정물로서는 뛰어난데, 작품으로서는 지나치게 객관적이어서 평을 내리기 힘들다. 사진 안에 사진사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 술은 아마추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뛰어나지만 디테일에 집착하는 바 람에 감정을 배제해버렸다.” “그 사람이……, 뭘 모르는 겁니더!” “하지만 사실이잖나. 내 사진에는 눈을 사로잡는 훅이나 강렬한 주 인공이 없어. 그 후에도 여러 번 비슷한 반응을 받았지. 그 사람들 입 맛에 내 사진은, 알맹이가 없으면서 디테일에만 집착하는 도착적인 작 품인 거다. 그렇다고 일부러 남들을 흉내 내거나 따라할 마음도 안 들 더군……. 뭐, 그래서. 사진은 취미로만 남기기로 한 거다.”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엷게 웃는 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미카가 입 술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내는, 아쉽습니더. 이츠키 씨의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봤 으면 좋겠습니더……. 모든 것이 쉽고, 강렬하고, 한눈에 확 들어올 필 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작품은, 작품이 아닌가 예.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가치가 없 는 건가예.” 사뭇 진지한 두 눈동자가 슈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슈는 마른침을 40


삼키고는, 미카의 이마에 콩 딱밤을 놓았다. “일부러 설명을 해 주어도 공연한 소리를 늘어놓는구나. 카게히라 미카, 생각보다 더 멍청한 녀석이었나.” “그냥 고맙다고 해, 이츠키.” 옆에서 지켜보던 나즈나가 혀를 쯧 찼다. “카게히라, 네가 좀 이해해 줘. 이츠키 녀석, 아마 지금 부끄러워서 이러는 모양이니까. 아무튼 어려서부터 말을 곧이 하질 못하는 성격이 어서…….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진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니토.” “싫은데? 지금까지 사람을 부려먹어 놓고 입까지 다물라고? 듣기 싫 으면 이츠키 네가 들어가. 현상할 필름이라도 정리하든가.” 나즈나가 제법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슈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지하 실 쪽으로 향했다. “와, 진짜 들어가네. 덕분에 우리끼리 얘기하기는 쉽겠다. 그치, 카게 히라?” “저, 저는…….” 미카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슈가 사라진 쪽을 향해 눈을 갸울 이자, 나즈나가 얼굴을 낮추어 미카에게 장난스럽게 소곤거렸다. “그러지 말고. 이츠키가 돌아오기 전에 뒷담화라도 하자고? 이츠키 가 어렸을 때 얘기, 듣고 싶지 않아?” 그러자 미카의 시선이 확 나즈나에게로 돌아왔다. “너 정말 반응이 정직하구나……? 뭐, 좋아. 하지만 나도 말이지, 너 같은 어린애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말꼬리를 흐리던 나즈나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꺼내 불 을 붙였다. “앗. 이츠키 씨랑 같은 담배네예.” 41


“응. 내가 추천해 줬으니까.” “두 분, 언제부터 알던 사이입니꺼?” “중학생 때였지?” “그때부터 친하셨나봐예?” “글쎄다, 친구……라고 할까? 아무래도 그때는.” 나즈나가 입술을 오므리고 연기를 훅 뿜었다. “내가 동경했던 것 같아. 이츠키를.” “예에?” “그 녀석, 어렸을 때부터 천재였으니까. 못하는 거 하나 없었다고. 막 대기처럼 말라서는 힘도 세고, 학업도 숨 쉬는 것처럼 쉽게 해내고, 말 도 안 되게 까탈스럽고, 방약무인하게 구는 주제에 나같이 붙임성 없던 애를 챙겨주는 성미였어서.” 담배를 들고 한 모금을 더 들이킨 나즈나가 두서없이 중얼거리듯 말 했다. “내가 많이 의지했어. 이츠키의 곁에서는 나도 그 특별함을 나눠받 을 수 있었거든. 그리고 실망했어. 그 녀석이 흔들리고 나를 전처럼 챙 겨주지 않자 배신감을 느낀 거야. 그거 알아? 사람은 동경한 상대일수 록 더 강하게 환멸하게 돼……. 상당히, 모진 말을 퍼부었었어. 쓸모없 다거나, 글렀다거나……. 그 정도 말을 해야 나 같은 사람이 그 대단한 이츠키 슈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알아……, 그 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시간이 흐를수록 후회가 깊어졌어. 괴로웠어. 마침내 사과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흐른 후였지.” 미카가 어쩔 줄 몰라서 상대를 바라보자, 나즈나는 작게 웃었다. “들어봐, 일단. 그때가 겨울이었지……. 싸우고 헤어진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가 안색을 살피면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이츠키는 엄 한 표정을 했어. 역시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이츠키가 42


저벅저벅 걸어와서 군소리를 했지. 날이 추운데 왜 그렇게 서있냐고, 몸을 축낼 셈이냐고……. 벌써 십 년이 지났지만, 사람의 성품이란 그 렇게 쉽게 변하지 않지. 이츠키 슈는 그런 사람이야. 서툴고 솔직하지 못해서, 돌아와서 반갑다는 말도 못하고. 대신 차를 끓여다주면서 잔뜩 잔소리를 쏟아붓던……. 왜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내 죄책감을 네가 대신 갚아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네. 응. 웃기 지, 이런 어린애한테.” 나즈나가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주변이 밝아진다고 느껴질 정 도로 예쁜 미소였다. “카게히라.” “예……?” “이츠키는 자기 반경 안에 좀처럼 사람을 들이지 않아. 원래도 그런 성격이었는데, 재혼과 이혼을 여러 번 거치면서 더 심해졌지. 그런데 너 같은 어린애를 믿고, 의지하고 도움을 청했다는 거잖아?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어. 이츠키는 썩 솔직한 성격이 못 되니까 너처럼 어린 아이와는 곧 틀어지지 않을까 걱정됐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대도 됐 어……. 너는, 정말로 오랜만에 이츠키의 반경 안에 들어간 사람이거 든. 이런 말을 듣는 건, 부담스럽니?” 미카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나즈나가 킥킥 웃었다. “그래 보이네. 이상하지. 왜 너한테는 그 성격 나쁘고, 솔직하지 못해 서 세 번이나 이혼한 이츠키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은지……. 나도 참, 무슨 소리람. 너를 이츠키에게 키우라고 맡겨야 할 참인데. 18살이 랬나? 젊구나. 좋구나, 좋아.” ……라고 나즈나가 말하자 미카는 괴리감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어린아이 같고, 잘 봐줘도 중학생이나 될 것 같아 보이는 외 모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기분 이전에, 뿌듯했다. 괜스레 가슴이 콩닥 43


콩닥 뛰어서 발을 바닥에 구르면 하늘까지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래서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둘이 무슨 말을 그렇게 신나게 하고 있던 거냐. 설마 남의 집에서 집주인의 험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라, 들켰네.” “아, 아닙니더……!” “변명은 됐고, 카게히라.” 슈가 시선을 내려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오늘은 일단 들어가거라. 연락은 해 두었다만, 더 늦어지면 부모님 이 걱정하시겠구나. 그리고 혹시 이번 주말 오후 즈음에 시간 되겠니? 역시 너에게는 한번쯤 보여주는 게 좋겠구나…….” * * * 지하실은 어둑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밀폐된 공간 안에서는 인 식할 수 있는 감각의 범위마저 제한되는 느낌이었다. 검게 칠한 벽, 탁 상 위에 일렬로 늘어진 기계와 철판과 약품들. 시멘트로 벽을 바른 지 하의 퀴퀴한 냄새,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의 숨결과 희미한 체온. 이츠 키 슈는 들고 온 케이스에서 필름을 길게 뽑았다. “내가 어릴 때까지는 사진을 찍을 때 이런 필름을 썼어. 셔터를 누르 는 순간, 렌즈에 맺힌 빛의 상이 이렇게 필름에 남게 되지.” 긴 손가락이 필름을 틀 안에 넣고, 기계 사이에 삽입했다. “이건 인화기라는 거다. 조리개를 개방하고……, 그쪽에 가서 불을 꺼주겠어, 카게히라? 어두울 테니 오면서 발밑을 조심하고.” 달칵. 불을 끈 지하실은 이제 거의 빛이 없는 칠흑이었다. 다만 인화 44


기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불빛이 슈의 콧등 위에, 뺨 위에 부드럽게 드 리워졌다. “자……. 여기 상이 맺히는 게 보이지. 이제 종이를 깔고 초점을 맞 추는 거다. 이제 잠시 빛에 노출시키고……. 현상액에 담그고, 잠시 기 다리자꾸나.” 소리 없이 2분여가 지나자, 아무것도 없던 종이 위에 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카는 붉게 물든 인화지 위에 꽃을 뒤집어 쓴 제 얼굴이 비 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한 순간이 종이 위에 아른아른 떠오르 고 있는 것이 기묘했다. 마치 시간을 박제한 공간과 순간 같았다. “자. 이제 이걸 몇 번을 반복해야 한단다……. 번거롭지?” 미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즘은 거의 디지털카메라를 쓰지.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을 통해서는 온전한 상을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현상액에 담그는 시간과 온도에 의해서도 스캔한 것과는 다른 사진이 만들어진단다. 내 경우에 는, 인화 과정에서 노출을 보정하고 닷징이나 버닝 작업을 하는 것까지 도 사진을 완성하는 과정에 포함되겠구나. 이렇게 한 번 만들어진 사진 은, 다시 만들 수 없는 세상에 유일한 작품이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사진이 나온다 니 신기하네예. 이런 데 사진이 담기면, 보관하기 번거롭지는 않나예?” “그냥 번거로운 정도가 아니다. 필름을 따로 보관하는 것도 일이고, 빛을 보아서도 안 되고, 시간이 지나면 화학성분이 날아가 상하기도 하 고……. 인화 과정까지 번거로우니 현재는 이런 아날로그 카메라를 쓰 는 사람은 거의 없지. 원래는 필름에 맺힌 상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며 죽어서 스러졌어야 할 물건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다는 사실이 참 을 수 없어……. 미련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애착을 갖게 되는구 나. 그런 번거로움이나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유지하고 싶은 것이 사람 45


에게는 가끔 있는 거겠지.” 미카는 눈앞에 선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빛을 받으며 중얼거리는 슈의 모습이, 사진보다 더 사진 같다고 생각되었다. 이렇게 나 완고하고 고집 센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신 기했다. 그는 고목 같았다. 완고하고 집착적일 정도로 성실한 모습이 나이든 나무처럼 뻣뻣했다. 그러면서도 내심은 다정해 집에 들르는 아이의 사 탕을 챙기고,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주지 못해 안달하는 남자. 미카는 탁자 위에 놓인 기스투성이의 아날로그 카메라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이츠키 슈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누군가의 진심이 이렇게 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흔치 않을 것이다. “별나다 싶지?” 미카는 기스가 잔뜩 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렇네예.” 어두운 암실에서 그렇게 대답하는 미카의 얼굴이, 얼핏 썩 나쁘지 않아 보였기에 슈는 씩 웃었다. “뭐……, 솔직하구나. 이제 한동안은 이 지겨운 작업이 반복될 거다. 그러니까 너는 올라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내 집이지만 부엌에 먹 을 게 부족하지는 않고 말이야. 현상이 끝나면 나가마.” 미카가 머뭇거리자 슈가 다시금 웃었다. “집중하려면 혼자가 좋을 것 같고 말이다.” * * * 냉장고에 있던 과일치즈 몇 개를 먹었다. 알아보지 못할 외국어가 쓰여 있는 병을 잔에 따라 마셔보다가, 술 냄새가 훅 올라와 싱크대에 46


따라버렸다. 거실에서 오래된 축음기를 이곳저곳 만져보다가 고장날까 봐 무서워 그만두었다. 혼자 올라온 지 30분이 넘게 지났는데 슈는 털 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친구 녀석들에게 연락을 해보자니, 왠지 그 녀석들에게는 지금 뭘 하는지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셔서, 미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보지 못한 쪽의 집 복도를 흘끗 쳐다보았다. 조심조심 걸어가서 불을 켜자, 한쪽 방에 책이 가득 꽂힌 책장이 보 인다. 미카는 그 안으로 슬쩍 들어가 보았다. 서류가방이 비스듬히 놓 여 있고, 책상 위에 일체형 컴퓨터와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철 그리고 펜꽂이가 보인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이나 갈색 조의 정갈한 방이었다. ‘이츠키 씨 같아.’ 어쩐지 기분이 잔뜩 들떠서 방을 둘러보다 보니, 경제서적이나 스크 랩, 교양서적으로 가득한 책장 끄트머리에 진주색의 큰 커버들이 보였 다. 호기심이 일어 제일 끝에 꽂힌 것부터 펼쳐보자……, 결혼사진이 있었다. 흰 턱시도를 입은 슈와, 밝은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여자 가 어깨를 맞대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어 표지를 덮은 미카는 그 왼쪽에 꽂힌 앨범을 펴보았다. 그리고, 페 이지를 넘기자……. 긴 금발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여자가 슈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분명히 아까와는 다른 여자였다. 하지만, 닮았다. 미카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앨범을 꽂고 그 왼쪽에 있는 것을 펼쳐보았다. 구 불거리는 긴 금발이 허리까지 오는 미인이 슈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듯 앨범을 덮고 미카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제 일 왼쪽에 꽂힌 앨범을 꺼내 열었다. 한참 사진첩을 넘기던 미카의 손 이 어느 순간 멎었다. 여러 번 펼쳐보았는지 유독 손때가 탄 페이지에, 못해도 수십 년 전 의 풍경으로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 금발 벽안의 온화한 인상의 여자 47


와, 그 밑에 매달리듯이 서 있는 두 명의 남자아이들. 그리고 그 중 하 나는 밝은 분홍색 머리이다.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미카는 다시 한 번 아까의 앨범들을 좌르륵 펼쳐놓고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바보라도 알아챌 만한 사실이었다. 그가 결혼한 여자들은 모두 그녀의 표절이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설상가상으로 등 뒤에서 낮은 목 소리가 들린다.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집을 뒤지는 녀석은 아니라고 믿었어.” “이, 츠키 씨……?” “그런데 내가 집에 살쾡이를 들였구나.” 슈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하고 서늘했다. 뒤돌아서 본 얼굴은 무기 질적으로 싸늘하다. 덜컥 겁이 났다. 얻은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너는, 정말로 오랜만에 이츠키의 반경 안에 들어간 사람이거든.’ 그래, 이츠키 씨는 언제나 나를 예뻐하는걸. 겉으로는 밀어낼 듯하 면서도 항상 나를 생각해주는걸. 미카는 마음 한구석에 치미는 무서움 을 이기려 부러 더 속없이 웃으며 슈에게 다가가 치댔다. “미안합니더, 너무 심심해서 돌아다니다 보니까 예까지 들어와 버렸 어예. 에이, 이츠키 씨. 그런 표정 하지 마이소. 어차피 세 번 이혼했다 고는 벌써 알고 있던 거 아닙니꺼. 그런데 이츠키 씨 취향이 인형마냥 똑같이 금발머리 한 여자든 어쨌든 중요할 게 뭐…….” 말하면서 고개를 들자 슈의 표정이 보였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 었다. 싸하게 소름이 돋았다. 실수했다. 잘못했다. “나가.” “이, 츠키 씨…….” “나가, 카게히라. 나가!” 48


“이츠키 씨, 하지만 모델…….” “필요 없어. 이제 네가 다시 내 모델이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손목이 덥석 잡혔다. 반쯤 슈에게 질질 끌려가는 꼴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억지로 뿌리칠 수도 없어서, 미카는 슈에게 반쯤 질질 끌 려 현관까지 나왔다. “잘 가라.” 온갖 감정이 담겼거나, 혹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것 같은 짤 막한 인사를 끝으로 집 문이 쾅 소리 나게 닫혔다.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원에서 벌레 울음소리가 들린다. 미 카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모델을……, 아니 모델은 하지 말라고 하셨지. 그러면, 다음 주에 이 츠키 씨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책을 사러……, 아니, 선물 못 하나? 진 정하자. 이츠키 씨가 없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미카는 최근에 한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 방과 후에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다 저녁이 되면 슈의 집 앞에서 퇴근을 기다리고, 토요일에 는 슈를 만나면 이야기할 거리를 생각하고, 일요일에는 촬영을 했다. 촬영을 하면서 슈의 눈을 보고, 그의 조곤조곤한 이야기와 나지막한 웃 음소리를 들었다. 그 외에는,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당신이 없는 세상을,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던 걸까? 아니, 처음 부터 당신이 없는 세상이라는 게 있기는 있었을까? 서러웠다. 어쩌지도 못하고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계속 눈물이 흘렀다. 눈에서 시작된 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여름의 낮이었다. 어린 가슴이 열병을 앓기에 충분히 무르익은 날씨 였다.


06. “너도 한 잔 할래?” 나즈나가 잔을 기울이자 미카는 덥석 받아서 한입에 들이키고는 눈 을 찌푸렸다. “쓰……네예.” “처음이면 그렇지. 너, 술 마시는 애는 아니구나. 하지만 놀랐어……. 전국의 니토 나즈나를 다 찾은 거야? 뭐,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래 서 이츠키한테 연락은 안 되고?” “메시지를 잔뜩 보냈는데, 답신이 없었습니더. 그래도 요 앞집이니 까, 퇴근하시는 시간에 맞춰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리고 들어가 버리니깐은…….” “그건, 모르겠네……. 그렇게까지 충동적인 녀석은 아닌데, 역린을 밟았구나. 너를 동정해야 할까, 꾸중해야 할까……. 으으,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겠네. 기운 좀 차려,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니니까!” 조금 시간이 지나고서야 미카가 눈가에서 손을 뗐다. 나즈나가 한숨 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게히라 미카.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너를 도와줄 의무도 책임도 없어. 너는 내 친구에게 결례를 범한 거라고. 남의 사적인 영역 을 함부로 침입하는 건 실례야. 알고 있지?” 미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 다. “좋아……. 전에도 말했지만, 이츠키는 이혼을 거듭할수록 안으로 파 고들었어. 그러니까 너에게도, 이츠키에게도 한 번쯤은 기회를 더 주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아는 만큼은 말해줄게. 반성은 지금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너를 한 번 더 믿어볼게.” 50


나즈나가 위스키를 잔에 쭉 따르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나도, 이츠키와 십 수 년 간 알면서 겨우 몇 번 들은 이야기야……. 그 녀석에게는, 첫사랑이 있었다고 했어. 아주 어렸을 때 만났던 이웃 집 친구의 어머니를 무척 많이 좋아했다고. 웃기는 얘기지? 나도 그때 는 웃었어. 그분은 상냥했고, 이츠키에게 어머니 이상으로 잘해주셨고, 집이 이사를 가면서 헤어지게 되었지만, 여러모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 았던 모양이야……. 그냥 어렸을 때의 추억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 언젠가는 그분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핑계가 생긴다면 한번쯤 그 집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이츠키는 수줍은 소년처럼 웃었어. 그때 나에게 이츠키는 동 경하는 사람에 가까웠는데. 그때만은 이츠키가 어린아이처럼 귀엽다고 생각했어.” 나즈나가 잔에 담긴 얼음을 달칵 흔들어 입을 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츠키가, 그 근방에 갈 일이 생겼어. 하는 일에 영 집중하 지 못하고 설레는 기색이 역력해서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가 알게 되 었지. 자기가 어릴 적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상기된 표정으로 하교 한 녀석은, 다음 날 넋이 나간 채로 돌아왔어.” 나즈나는 입가를 닦고 쓰게 웃었다. “그분은, 이츠키가 찾아가기 바로 한두 달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 야……. 이츠키는 완전히 얼이 빠진 것 같았어. 나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고……. 이 이야기는 넘어갈까. 아무튼, 어릴 때의 기억이 라고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아. 사람이 변할 정도였으니까. 결 혼하는 여자들의 면면을 보면서 설마 싶었는데, 역시 그랬구나…….” “부인들은, 어땠나예?” “좋은 사람들이었어. 이츠키 슈의 심미안에 찰 만큼, 나름대로 재능 51


있고 똑똑한 여자들이었지……. 그러니까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몇 년 이상 눈치 채지 못하거나,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거야. 모두 원만하게 이혼했어. 표면상으로는.” 미카는 양 손을 들고 얼굴을 묻었다. 언젠가 들었던 슈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어……. 미련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애착을 갖게 되는구나. 그런 번거로움이나 희생 을 감수하고서도 유지하고 싶은 것이 사람에게는 가끔 있는 거겠지.’ 아내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지금까지 사랑을 하 지 않았다고 생각했지. 내가 처음이니까 당신도 당연히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지. 왜 그렇게 믿었을까.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상관없어. 우리는 원래 이어져 있으니까. 제대로 된 근거도 까닭도 없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미카는 흠칫 놀라 제 머리를 흔들 었다. * * * 사무실에 앉아 있던 이츠키 슈는 입고 있던 재킷 깃을 끌어올렸다. 어쩐지 멍하고 어지러웠다. 지나치게 냉방을 세게 틀었을까. 머리를 괴 고 관자놀이를 짚자 지나가던 직원이 이거라도 먹으라면서 사탕을 건 네주었다. 무심코 바로 생각했다. “카게히라 녀석이 좋아하겠군.” 입안에 넣은 사탕에서 단내가 난다. 사탕 같은 밝은 색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녀석은 계속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만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이렇게 형편없는 남 52


자의 인생에 끼어들기에는, 지나치게 티 없고 쾌활한 녀석이었다. 역정 을 낸 것이 부끄러웠고, 후회되었다. 그래도 녀석은 지금까지 강아지처 럼 자신을 마냥 믿고 따라주었다. 그 시간에 보상 하나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사진 정도는, 챙겨줄까. 멍하니 의자를 뒤로 당겨 앉 은 채 사무실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츠키 슈는 생각했다. 퇴근 후에 옷을 간편하게 갈아입고 바로 지하 암실로 향했다. 현상 은 길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그만큼 사진에 마지막 정성을 쏟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위치와 노출을 조절하고, 현상액의 온도를 정확히 맞 추고, 얼굴과 얼굴이 인화지 위에 떠오른다. 카게히라 미카의 웃는 얼 굴이, 렌즈를 곧이 바라보는 눈동자가,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뺨이, 나 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사진을 인화하며 슈는 몇 번이고 손을 멈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결국 작업을 멈췄다. 그리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었다. 이런 걸 카게히라에게 주겠다니 절 대로 안 될 말이었다. 이건, 카게히라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 카게히라 니까 보여줄 수 없다. * * * 숨바꼭질 같은 일일이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등교 시간마다 이츠키 슈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이츠키 슈는 그것을 모르는 체한다. 그날 도 그랬다. 이른 아침이라 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석판을 댄 집 벽에 햇빛이 비추고, 미카는 까치발을 들어 담장 너머로 슈를 보다가, 슈가 홱 째려보자 보지 않던 척 고개를 돌려버리고……. 그래도 담 너머로 삐죽 보이는 까만 머리카락을 보며, 슈는 혀를 쯧 찼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카게히라!” 53


혼날까? 더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게 아닐까?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누르며 미카가 슬며시 뒤를 돌자, 눈앞에 슈의 얼굴이 보 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못 봐주겠군. 학교는 제대로 나가고 있는 거냐?” “가, 가고 있습니더……! 가끔, 늦긴 하지만…….” “더는 눈뜨고 봐줄 수가 없구나. 그렇게 쫓아냈으면 네 할 일이나 할 것이지, 대체 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야?” “걱정하셨어예?” 슈가 미간을 확 찌푸리자 미카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전에는……, 죄송합니더. 제가 경솔했어예. 무척, 후회했습니더.” “메시지로 수십 번은 한 소리 또 할 필요 없어. 귀에 딱지라도 앉겠 구나……. 하지만 이렇게 이웃집에 살면서 계속 모르는 체 하는 것도 웃기겠구나. 나도 어른스럽지 못했고…….” 미카가 담벼락에 바짝 붙었다. 사이에 담이 없었다면 슈에게 달라붙 었을 기세였다. “그러면, 다시 사진 작업 하는긴가예?” “말했을 텐데. 네가 다시 내 모델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 렇지예…….” “너에게는 정말 실망했다. 내가 출근이 늦으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질 않나. 학교 수업은 뒷전인 거냐? 도무지 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있 다고 볼 수 없구나. 그러니까, 내일 시간이 되면 우리 집으로 와라.”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미카가 눈을 껌벅거리자, 슈가 말을 덧붙였다. “이래봬도 아마 이 근방에서 제일 연봉이 비싼 과외선생일 거다. 네 가 멍청하게 나 때문에 학업을 망치는 건 못 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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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종이가 수북이 쌓였다. 국어, 역사, 수학, 과학……. 테스 트 결과를 확인하며 슈가 눈살을 찌푸렸다. “종잡을 수가 없구나.” “공부는 그렇게 열심-히 안해서예…….” “문제해결능력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아주 기본적인 문제를 모르 질 않나……. 공부하면 될 것 같은데, 정말 흥미 본위로만 지냈나 보구 나. 아무래도 한동안은 계속 가르쳐야겠어.” “한동안이예?” 미카가 눈을 빛내자 슈가 엄격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았다. “촬영과는 달라, 이건 노는 게 아니야. 진지하게 해야 할 거다. 네가 나 때문에 학업에 뒤떨어지게 되면 참을 수 없을 뿐이야.” “에헤헤, 그래도 기쁩니더. 이츠키 씨 집에 오랜만에 오는 것도 반갑 고, 이츠키 씨도 반갑고예.”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녀석이구나. 뭐, 억지로 시키는 건 아 니겠지.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있어?” “글쎄예……, 아직은 좀 남았으니까예? 집에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시켜주겠다니까, 한번 입시도 해볼까 생각하고는 있었습니더.” “정말, 태평하구나. 걱정도 생각도 없고. 실패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아?” “실패……예? 그럼 다시 하면 되지 않겠습니꺼? 어디 병이 있는 것 도 아니꼬 이렇게 힘내서 하면은,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꺼.” “어리구나.” 슈가 먼 창밖을 내다보았다. “젊구나. 그래, 그 때는 나도 그랬어……. 흔들거렸고 불안했으면서 도 겁이 없었지.” “이츠키 씨가예?” 55


“응.” 슈는 미카 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호기롭고, 세상에 불만은 많았다만 그만큼 바꾸고 싶은 게 많았고, 내키는 대로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고……. 그리고, 지금보다 더 젊었지. 그때도 책에 파묻힌 학생이었다만, 역시……, 좋았구나. 세 상에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또 그만큼 사소한 것들이 소중했 어. 아침에 집을 나서며 받는 햇빛이나, 오래된 책에서 발견한 글귀 같 은 것들이……. 너는 학교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겠지? 친구들이랑은 잘 지내고 있고?” 그러자 미카가 백지 같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학교생활이예? 뭐, 특별히 말할만한 건 없는데예……. 뭐, 하루 일 과라도 말해볼까예?” “싱겁기는……. 그래, 그거라도 말해보든가.” “뭐, 여긴 좀 시골이니까예. 아침이면 새소리 때문에 눈이 뜨이더라 꼬예. 거실에 나가보면 엄마가 밥 하고 있으니께 옆에서 반찬도 담고, 식탁도 닦고. 낫토 얹어서 한 그릇 뚝딱 먹고 치우고 씻고 가방 챙겨가 지고 나옵니더. 학교가 좀 멀다보니께 보통은 자전거를 타예. 철길 따 라 달리다보면, 왜, 여기는 꽃이 예쁘지 않습니꺼. 그거 보면서 이어폰 꽂고 가다가 사고 날 뻔한 적도 있어예. 이츠키 씨는 조심하이소. 수업 은 제대로 들을라꼬는 하는데, 이 학교 쌤들이 워낙 나이가 많지 않습 니꺼. 특히 역사는 너무 목소리가 졸려가꼬……. 자꾸 졸다가 찍힌 것 같은데, 나머지는 괜찮습니더만, 솔직히 점심시간만 기다리게 됩니더. 도시락은 집에서 적당히 싸오는데, 집 반찬이 인기가 많아가 한 절반은 뺏기지 않습니꺼. 그만큼 제가 뺏아먹어야지예. 이상하게 점심 먹고 나 면 꼭 졸음이 오는데, 그나마 자리가 창가라 다행이라 생각합니더. 부 활동은 야구를 하는데, 내는 빡세게 하는 쪽은 아니라서예……. 주전들 56


은 저녁 넘어서까지 계속 연습하는데 내는 그렇게는 안 하고, 오후 즈 음 연습 좀 하다가 들어옵니더. 그래도 이번에는 친구들이랑 내기를 좀 해가꼬, 투구 연습을 했더니 진즉에 좀 그렇게 하라고 빠꾸먹었지 말입 니더. 아무튼 그러다가 들어오면 씻고, 화분에 물주고 이츠키 씨 사이 트 확인하고, 숙제하고 책 읽고, 친구들이랑 메시지 하다가 또 금방 나 가서 뛰어다니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울타리에 잔가지 좀 치고, 옷에 붙은 가지는 떼고, 열매는 먹고 꽃은 불고……, 에헤헤, 아무리 생각해 도 별로 자랑할 만한 건 없네예. 너무 자세하게 말하기는 또 쪼끔 부끄 러워가. 내한테도 사생활이 있는 거 아닙니꺼.” “아니, 거기까진 됐다. 뭐 어차피 특별할 것도 없구나.” “네. 말했잖아예, 별 거 없어예.” 그렇게 말하며 미카가 천진하게 웃었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불고 여름 들꽃 냄새가 난다. 티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이 부셔, 슈는 눈을 깜박였다. 시야가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곧 눈앞이 흐리다. 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츠키 씨, 웁니꺼?” 영문도 까닭도 모르고 눈물이 흐른다. 너의 시간은 이렇게나 싱싱한 장밋빛이구나.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렌즈를 통한 빛의 투과와 필름액 의 노출을 통해 수 장의 영원 속에 박제했지. 그래야만 했던 거야. “카게히라.” 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사진을 출품하면 어떨까.”


07. 이미 준비된 것을 추려내어 정리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컨셉도, 사 진도, 스튜디오도, 모델도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결심한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미카는 시간이 맞을 때마다 슈의 집에 들렀다. “이번에 제출할 사진은 총 네 점 이내인데, 한 장은 처음 촬영한 사 진 중에서 고를 생각이다. 첫 촬영은 백색 기조였으니, 이번에는 반대 로 조명을 줄이고 찍어서 대조를 주는 게 좋겠어.” “검은 배경을 쓰게예? 그러면 오히려 조명은 원색으로 주는 것도 괜 찮을 것 같은데예. 색감이 과할 것 같으면 현상할 때 처리하고예.” 미카가 끼어들자 슈가 미간을 찌푸리다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끼어들지 마라. 더는 안 돼. 저번에 네게 현상하는 과정을 보여준 건 후회하고 있어.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내 방까지 들어갈 일도 없었 지……. 너를 너무 주제 넘는 구역까지 끌어들인 거야. 너는 모델이고, 학생이고, 미성년자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미카는 멍하니 눈을 내리깔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방금 들은 말이 서운하다기보다는 어쩐지 익숙하고 반가워서 눈을 깜박이다가, 곧 슈 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사람이랑 사람 사이 관계가 그렇게 일방적인 건 아니지 않습니꺼.” 슈가 미카를 마주보았다. 거절해야 한다. 제대로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카의 얼굴을 보았다. 이쪽을 똑바로 보는 푸른색과 노란색 의 눈동자가, 마치 사진 속의 작품 같아서 몇 초간 그대로 바라보다가 잠시 후 고개를 돌렸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구나. 그러면 둘 다 해보는 걸로 하지.” 슈는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화관을 집어 미카의 머리 위에 씌웠다. 첫 촬영 때 썼던 것과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장미를 엮어 만든 관이었 58


다. 관을 누르며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 미카가 짧게 신음했다. “앗.” 다급히 화관을 들고 앞머리를 헤쳐보자 가시에 찔렸는지 이마에 붉 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슈는 얼른 거실로 달려가 구급약상자를 들고 와서, 솜에 소독약을 적셨다. 알코올이 상처에 스미자 따끔따끔 눈물이 나는 것을 느끼며 미카는 눈을 깜박거렸다. “미안하다. 장미를 쓰는 게 아니었어. 어차피 주로 온실에서 자라는 원예종인 주제에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가시를 달고 있다니, 비생산적 이야.” “내는 그게 좋습니더.” 미카가 티 없이 웃었다. “가시에 찔려도 키우고 싶을 만큼 예쁜 게 아닌가예. 부럽네예……. 장미에는 가시가 있지만 그만큼 예쁘고, 커피는 쓰지만 향이 좋습니더. 사람은 어른이 될수록 힘들고 아픈 일도 많겠지만,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니겠습니꺼. 그거랑 비슷한 거 같아예. 역시 부럽네 예. 내는 장미가 되고 싶습니더.” “너, 전에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문득 손을 멈춘 채 생각에 잠긴 슈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다……. 그러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이츠키 씨도 싱거운 소리를 하네예. 별일입니더. 이렇게 다시 이츠 키 씨랑 사진 찍으니까 좋아예.” 기분이 좋아졌는지 헤실헤실 웃던 미카가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듯 슈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츠키 씨. 왜 갑자기 사진전에 나가기로 마음먹은 긴가예?” “있지, 카게히라.” 슈는 핀셋과 솜을 내려놓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59


이츠키 슈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말씨였다. “나는……. 얼마 후에 이사를 갈 거야.” * * * 후회 같은 것이 찌꺼기처럼 가칠하게 목부터 가슴까지 달라붙는 듯 했다. 제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계속해서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저 녁이 된 지금은 아까에 비해서 확연히 대화가 적었다. 낮에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이사라니 무슨 말입니꺼. 갑자기 어째서예. 그냥, 시골 에서 지내는 것도 질렸구나. 이 집은 마지막 부인과 같이 샀는데, 이혼 한 지금까지 혼자서 지내고 있는 것도 웃기지. 그런 건, 상관없지 않습 니꺼. 지하에 마련한 작업실은 다 어떡하고예. 정리해야지. 아깝습니더. 이츠키 씨는, 여기에서 좋아 보였습니더. 내 주거는 내가 정해. 주제넘 게 참견하지 마라, 카게히라. 저번 일로 경고가 되지 않았어? 그리고 조용했다. 계속 촬영은 하고 있었지만 미카는 줄곧 부루퉁했다. 그런 표정과 눈빛마저도 새로운 그림이 되는 인상이었기에 ― 원망하는 눈 빛과 움츠러든 어깨가 카게히라 미카에게는 기묘한 야생성을 부여했다 ― 촬영을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불편한 느낌이 가시처럼 가슴께에 남 았다. 어느 정도 촬영을 마친 슈는 거실에 올라가 맥주 한 병을 따고 유리잔에 따랐다. 벌컥벌컥 들이키자 쪼르르 따라온 미카가 따지듯 물 었다. “술인가예?” 슈는 대답 대신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내도 주이소.” “안 돼. 아까부터 미성년자 주제에 자꾸 엄한 데 욕심내지 마라.” “미성년자는 사람이 아닙니꺼? 까놓고 말해서, 화납니더. 이츠키 씨. 60


지금까지 내랑 있던 시간은 시간이 아닌가예? 내가 미성년자라서, 이 츠키 씨한테 내 생각은 무시해도 되는기였나예? 내가 한두 번 여기에 왔나예? 그런데 그렇게 내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이사를 한다고 결 정해 버리면, 내는, 내는…….” 탁자에 탁 하고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슈가 미카의 앞에 놓은 잔에 술을 쪼르륵 따랐다. “한 잔만이다.” 손을 겨우 뻗어 잔을 드는 미카를 보며 슈가 중얼거렸다. “울지는 마. 나는 위로는 잘 못하니까.” “예…….” * * * 여름이라고 얇은 반팔 위에 모슬린 코트 하나를 나왔더니 밤바람이 제법 서늘하게 느껴졌다. 옆에 있는 아이는 춥지 않을까 하고 흘끗 쳐 다보았다. 아직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추위를 느낄 겨를은 없을 것 같다. 분명히, 한 잔이라고 했었는데……. 잠깐 보았는데 어떻 게 알았는지 미카가 금방 옆을 돌아보았다. “뭘 봅니꺼.” “그게 무슨 말투야. 정신 좀 차려라, 인마. 오늘 밤 안으로 네가 술이 안 깨면 네가 너희 부모님을 무슨 낯으로 봐.” “술 좋네예. 술 마시니까, 후끈후끈하고. 이츠키 씨가 차도 태워주꼬, 강가까지 데리고 나오고……. 내, 이츠키 씨한테 내는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습니더.”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내가 이사 가고 나면 남남이 될 거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네예……. 이츠키 씨를, 몇 년 전부터 쭉 좋아 61


했습니더. 사진도 좋았고, 이름도 좋았어예. 그런데 그런 사람을, 여기 오자마자 앞집에서 마주친 겁니더. 단추를 주워주꼬, 집에 초대받고, 사진을 찍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하고 부축하고 기다리 고, 기다리고, 이츠키 씨만 기다리고, 쫓겨났다가도 다시 만나고……. 이츠키 씨랑 있는 동안은, 꿈을 꾸는 것 같았어예. 반대로 이거야말로 내 인생이고 지금까지 쭉 꿈을 꾸고 있던 것 같기도 했어예.”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마.”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엄한 표정을 짓던 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 러지더니, 곧 피식 웃어버렸다. 웃고 있는데 어쩐지 울음기가 있는 듯 한 눈이었다. “어리다니까. 어려서 어떤 말을 해도 되고, 어떤 말은 좀 가려서 하 는 게 좋을지 구분을 못 하는 거야…….” 미카가 배시시 웃더니 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푹 쓰러졌다. 거의 품에 안긴 꼴이었다. 슈는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 그대로 미카의 허리께 를 어색하게 받아 안았다. 사실은 슈 자신도 꽤나 취해서 몸을 똑바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귓가에서 혀가 있는 대로 꼬인 오사카 사투리 가 들린다. “이츠키 씨.” “오냐.” “에헤헤.” 슈의 어깨 위에 얼굴을 늘어뜨리고 있던 미카가 고개를 들고는 살풋 웃었다. 언제 봐도, 기묘한 얼굴이다. 슈는 그대로 미카의 얼굴을 들여 다보았다. 서로 색이 다른 밝은 빛깔의 눈동자를, 치켜 올라간 눈매를, 하얀 뺨을, 그리고……. 상대의 손이 허리께에 닿는 것이 느껴지자 슈 는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카를 확 밀쳐냈다. 코트가 젖혀지고, 팔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주머니에 있던 것이 강물 위로 날 62


아갔다. “아, 안 돼…….” 술기운으로 붉은 기가 남아있던 슈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저게, 뭔데예?” “사진이야, 최근에 인화한 사진……. 일부러 품에 두고 가지고 다니 고 있었는데…….” “아…….” 멍하니 눈을 굴리던 미카가 전에 들은 말을 떠올렸다.

‘내 경우에는, 인화 과정까지 사진을 완성하는 과정에 포함되겠구 나……. 이렇게 한 번 만들어진 사진은, 다시 만들 수 없는 세상에 유 일한 작품이 되는 거야.’ 그리고, 말릴 새도 없었다. 카게히라 미카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깡 마른 몸이 점점 수면 안으로 잠긴다. 까만 머리가 수면을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곧 수면 밑으로, 카게히라 미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카게히라.” 술에 취한 아이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슈는 조금 느리게 지금 의 상황을 이해했다. “카게히라. 카게히라. 카게히라. 카게히라!” 이 세상에, 카게히라 미카가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머리가 빙빙 돌아 터질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고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있는 대로 고함을 지른 목이 찢어질 것 같다. 숨이 차올 랐다.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말도 안 되는 걸 알아도, 잡아주었으면 했다. 사실은, 사실은, 사실은……. 잠깐의 시간 동안 억 지로 눌러 놓은 온갖 생각이 비죽비죽 뒤틀려 자라고 후회와 감정이 뒤죽박죽이 되어 덩어리졌다. 너를 여기서 잃고 싶지는 않아. 코트를 벗어던지는 찰나, 몇 발치 떨어진 강둑 쪽에서 무언가가 비척비척 물 63


속을 기어서 올라왔다. 순간 시야가 흐려져 슈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었다. 그곳에는 사진 몇 장이 든 비닐을 들고 완전히 엉망 이 된 꼴로 웃고 있는 미카가 있었다. “다행이다……. 지켰어. 지켰어, 이츠키 씨. 우리 시간을 지켰어.” “카게히라, 대체…….” “다행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카는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 * * 정신이 들자, 좋은 냄새가 났다. 머스크 향에 얼핏 장미 향기가 섞였 다. 몸이 폭신한 것에 둘둘 싸여 있었다. 눈을 뜨자 어렴풋한 조명 속 에 큰 침대와 작은 샹들리에가 보였다. 분명, 이츠키 슈의 침실이었다. 미카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옆의 서랍 위에는 인화지 몇 장이 잘 말리 려는 듯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 미카는 사진을 뒤집어 보았다. 인화지 가 고급품이어서인지 다행히도 사진은 번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계속, 계속 사진 속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진, 굳이 꺼낼 필요는 없었는데.” 선반에 찻주전자와 음료를 얹어서 들고 온 슈가 문간에 서 있었다. 하지만 탓하거나 꾸중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미카는 슈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 그리고 사진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차례로 늘어진 사진 안에 있는 것은, 소년이라기보다는 남자의 모습. 열매를 향해 입술을 벌렸을 때 드러나는 목젖과, 입을 꾹 다물었을 때 보이는 굳은 턱선, 마른 체구 위에 나름대로 다부진 근육이 붙은 어 깨와, 렌즈를, 찍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매. 인화지 속 64


에서 금방이라도 살아 숨 쉴 것 같은, 그리고 손을 뻗어 보는 상대를 움켜쥘 것 같은, 살아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나……, 이런 식으로 이츠키 씨를 보고 있었구나.” “절제를 모르는 거지. 말했잖아. 너는 어리니까. 절제할 줄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남이 숨기던 걸 멋대로 보아버리고 말이다.” 슈가 사진을 개어 치우고 그 자리에 들고 온 선반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를 나무랄 수는 없구나……. 이제는 알고 있으 니까. 내 것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사람은 나인걸. 네가 볼까봐 일부 러 가슴 안에 두고 다녔는데도.” 차를 따르던 슈가 고개를 들어 미카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러지 말았어야 해, 카게히라. 너는 위험에 조심할 줄 몰라. 네가 귀한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답게 불나방처럼 뛰어들었어.” “그렇지만, 해냈어.” 슈를 똑바로 바라보는 미카의 얼굴이, 아까 사진 안에 있던 것과 꼭 같았다. “당신 말대로, 나는 어릴지도 몰라.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서 내 의지 로 당신을 따르고 있어. 언제든 그럴 거야.” 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말하는 대신 선반 위에 가지고 온 손수건을 들어, 아직 잔여물이 남아있던 미카의 얼굴 구석을 닦았다. 슥슥 닦아내던 손이 뺨 위에서 문득 멎었다. “카게히라. 그러니까 너는…….” 창백한 입술이 천천히,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눈빛에 슈는 잠시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 였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깊은 키스였다. 65


혀와 혀가 얽히고, 입천장부터 목구멍 근처까지를 깊게 얽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카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슈를 품에 끌어당겨 짐승 처럼 귀를 물고, 목을 물었다. 목께의 단추가 풀어헤쳐졌다. 붉게 깨문 잇자국이 귀부터 시작해 목 옆을 따라 남았다. “카게, 히라…….” 침대 에 반쯤 내동댕이처진 슈의 눈과 코와 입 위에 미카는 차례로 입술을 살짝 맞추었다. 그리고, 웃옷과 바지를 차례로 벗어던졌다. 슈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제 바지가 벗겨질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 그만…….” 바보 같은 소리였다. 저항할 의지도 의미도 없 었다. 이미 불룩하게 솟은 부분의 바지가 팽팽하다. “나는.” 애써 모양뿐인 저항을 하고 있었건만, 뜨거운 숨이 귀에 닿자마자 몸에 힘이 풀렸다. “오래 참았어요.” 속옷까지 내려가고, 허벅지 사이에 뜨겁고 단단한 물건이 닿았다. 성기가 허벅 부근을 비벼대자 몸이 절로 뒤틀렸다. 하지만 차마 보챌 수도 없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게 무색하게, 미카의 손이 곧 허벅다리를 우악스레 잡아 벌렸다. 엉덩이 골에, 그리고 그 사이 구멍 에 귀두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묵직한 것이 입구를 비비는 느낌에 소 름이 돋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준비할 새도 없이, 곧바로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눈 끝에 눈물이 맺 혔다. “흐, 윽…….” 슈는 제 손을 입에 집어넣었다. 다른 손으로는 이불 을 그러쥐었다. 몸이 쪼개질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무엇 때 문이든 참아야만 했다. 미카가 움직일 때마다 아프고, 아팠다. 몸짓은 서투르고, 거칠고, 제대로 배려도 없었다. 정신없이 세상이 흔들거리고 매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다만,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내 려다보고 있는 선명한 두 눈동자만은 눈에 띄어서, 그것을 바라보며 고 66


통을 참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찔하고, 아득했다. “핫……!” 미카는 바로 알아챘는지 그쪽을 세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몸이 뒤틀린다. 고통 속에 야릇한 느낌이 섞여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응, 앗……!” 열 댓 살은 어린 아이의 사지에 짓눌러지고 포박되고, 질척대는 소리와 함 께 교합하며 흥분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면서도, 이게 진짜 자신인 것만 같았다. 남자가 어떻게 하면 기쁠지 정도는 알고 있다. 슈는 눈물 자국 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미카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애쓰며 허리 를 흔들었다. “아, 좋아, 하…….” “이, 츠키 씨…….” “계속해, 카게히라. 계속…….”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에 무언가 경고 사인이 울리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선을 넘었다. 이제 다시는 돌 이킬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바뀌어 이 세상은 영원 토록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지금 여기에서 멈추라고? 이 순간을 얼마나 오 래 기다렸는데! 카게히라를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얼마나 오래……. 이제 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머리에 연기처럼 피어나는 상념을 잊기 위해서 슈는 더 열심히 몸을 비틀며 미카에게 매달렸다. 익숙치 않은 각도로 벌어진 허벅지가 당겨서 아프다. 그래도 괜찮았다. 미카의 몸에서 땀이 떨어져 슈의 몸 위로 흘렀다. 슈는 미카 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땀이 흐르는 미카의 얼굴을 핥았다. 짠 맛이 났다. 카게히라다. 카게히라. 그것이 좋았다. 슈는 반쯤 이성을 놓고 허 리를 흔들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떠나지 마, 카게히라.” “응, 응.” 67


“떠나지 마.” 이제 대답은 없었다. 미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허릿짓이 빨라진 다. 혼자 가겠다고? “안, 돼.” 슈는 허리를 비틀어 미카의 물건을 빼냈다. 그것마저도 자극이 되어 헉 소리가 났지만 그전에, 되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떠나지 마.” 거듭되는 재촉을 들은 미카의 눈빛이 열에 들떠 흐렸다. 곧 얼굴을 든 미카가 슈를 똑바로 쳐다보고 답했다. “한 번도 당신을 떠난 적 없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정신없이 혀를 얽고 조금 이라도 떨어질세라 살을 부비며, 계속 교합부가 들썩거린다. 곧 뜨뜻한 것이 안에 차는 것을 느끼며 슈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을 한시도 멈추 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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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제멋대로 뛰어다니지 마라, 카게히라. 꽃이 상하겠어.” “그치만, 이츠키 씨. 내는 신나가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아, 정말로 이츠키 씨랑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오사카는 진짜로 오랜만 이네!” “전부터 오고 싶어했던 건 나인데, 왜 네가 더 들떠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미꽃잎 사이를 상기된 얼굴로 뛰어다니는 미 카를 보자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츠키 슈는 지금 오사카 나카노시마의 장미 화원에 있다. 앞을 바라보자 꽃, 아래를 내려다보자 발밑에 꽃밭, 고개를 들어 위 를 보자 파란 하늘 사이로 꽃잎이 날린다. 붉은색, 분홍색, 흰색, 노란 색……. 화사하게 물올라 만개해 있는 여름의 장미꽃 사이를 꽃잎보다 더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소년. 그것이 가장 예뻤다. 한차례 바람이 불 고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짙은 장미 향기가 물씬 풍긴다. 아득한 기분 에 슈는 고개를 들었다. 벌써 저만치까지 뛰어간 미카가 양손을 번쩍 들고 슈를 향해 흔든다. “이츠키 씨, 이쪽으로 와라!” 슈는 성큼성큼 뛰듯이 걸어서 미카의 손을 맞잡았다. “너는 정말 천방지축이구나.” “헤헤. 내 지금 너무 신나가 그런다. 우리, 나중에는 여기 말고도 더 많은 데를 가자. 산도 가고, 바다고 가고……. 일본 밖까지 갈까? 내 사 실은 한번도 비행기를 못타봤거든. 이츠키 씨는 타 봤나? 뭐꼬~, 그렇 게 당연한 거 묻느냐는 표정으로 보지 마라. 내 자존심 상한다.”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세울 자존심이 있었다고 그래.” “헷, 그건 그렇제. 그래도 나 이츠키 씨한테 좋은 남자가 되고 싶으 니깐!” “까마득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성적부터 챙겨. 입시를 해보겠다며, 수학은 아직 그대로잖아. 다음 시험까지는 90점은 만들도록 해.” 69


“으으,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다만 그게 그케 마음대로만 되는 게 아 니잖나~, 내가 대학도 못 가고 재수라도 하면, 이츠키 씨는 내를 버릴 기가?” “아니.” 곧바로 대답한 것이 후회되려나 싶다가, 미카의 밝은 얼굴을 보자 아무래도 좋겠다 싶어졌다. “몇 송이 정도는 집에 사가자. 우리 동네에도 꽃은 많지만, 이렇게 몽실몽실하게 생긴 건 없지 않나. 이츠키 씨는, 이 중에서는 흰색이 맘 에 들지? 안 봐도 알겠다.” “그래.” “아니면 씨라도 사서 정원에 심어 두면, 한 3년 후에는 여기만큼 자 라겠지? 이츠키 씨가 바쁘면 내가 키울게. 이래봬도 약 치는 거랑 가지 치기는 계속 해서 자신 있다.” “그래.” “혹시라도 걱정은 마라. 내가 계속, 계속 돌볼게. 이츠키 씨는 갑자기 야근할 일이 자꾸 생기니께, 내가 대신 이츠키 씨네 정원을 봐야지. 지 금은 정원이라기보다는 정글이잖나. 그 생각하면 시간이 자유로운 쪽 으로 진로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빨리 내가 그쪽으로 들 어가가 이츠키 씨를 챙겨야 되는데.” “그래. 기대할게.” 그러자 미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행복하고 간지러워 견딜 수 없다 는 표정으로 슈의 손을 놓았다. 단조로운 대답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데, 눈물이 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 저기 구름다리도 보인다. 저쪽으로도 가 볼란다.” 미카는 다시 한 번 꽃잎처럼 훌쩍, 먼 곳으로 뛰어간다. 그 바람에 꽃가루라도 날렸는지 슈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눈 70


을 들자 장미가, 분홍빛이, 햇빛이, 선홍색이……. 세계가 수채화로 덧 칠한 것처럼 곱게도 아롱진다. 알록달록 쇄도하는 색상에 눈이 부시다. 이 세상이 원래 이렇게나 아름다웠던가? 눈이 부셔 눈물이 고였다. 서 른이 넘는 해 동안, 삶이 이렇게 충만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저 너머에 서 있다. 어느 꽃보다도 환하게 웃어주는 미카를 보며 슈는 생각한다. 내 아이. 내 장미. 내 사랑. 나의 연인. 그리고 내 인생. 내가 잃어버린 것, 이제야 되찾은 것. 나의 카게히라.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걸어가자 다시 한 번, 미카가 가까워졌다. 미카가 슈를 향해 흐드러지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슈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손끝이 맞닿고, 피처럼 뜨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슈는 이를 놓 칠세라 손가락을 엮고 더 세게 얽어 꽉 쥐었다. 이 삶은 분명 붉디붉은 장밋빛이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아찔한 행복의 한가운데, 짙은 장미 향기가 난다. 정신을 놓을 듯이 짙고 짙은 장미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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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츠키 슈는 눈을 떴습니다. 이곳은, 카게히라 미카가 없는 세상입니다. 아아, 슈, 결국에는 다시 이렇게 인생을 망치고 말았군요. 정말이지 당신의 친우로서 동정을 금할 길이 없네요. 자, 이 모든 향기롭고 덧없는 기억에 건배.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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