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ch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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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장난삼아 벌레를 짓이기고는 했다. 흙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진 잔 가지 중에서 가장 가느다란 것을 골라 들어서 날개를 들추고 내장이 보일 때까지 헤집었다. 쿡쿡 찌를 때마다 벌레는 파들거리며 몸을 경련했다. 특별 난 죄책감은 없었다. “죄 없는 벌레는 그만 괴롭히고.” 타박이 들리자 아이는 벌레 파편이 엉긴 나뭇가지를 재빨리 등 뒤로 숨겼 다. “그냥 장난이에요.” “생명은 장난의 대상이 아니야.” 아이를 나무라고 있는 남자는 론즈브라우 왕국 경비대 수색대장이었다. 최근 야생동물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서 수색을 떠난 경비원이 사흘 째 돌아 오지 않자 아이를 데리고 직접 성 바깥으로 나선 참이었다. 하지만 단서 하나 찾아낸 것 없이 허탕만 치고 있는 것이 다섯 시간째, 숲은 벌써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어린 아이로서는 지루해 장난이나 칠 만도 했다. 결국 남자도 아이를 따라 땅에 주저앉고 길 게 하품하고 있는데, 벌레나 찌르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저 쪽 봐요.” “뭔가 찾았니?” “네, 저기 저 쪽 나뭇잎 사이에… 약간 보랏빛.”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서 시야를 가리고 있던 나뭇가지를 헤쳐 보고 남자는 짧게 탄식했다. 저 멀리서 회오리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온갖 색을 발하고 있는 빛의 덩어리. 왕국의 외곽에 또 새로운 소용돌이가 생겨난 것이다. 혹여나 적성생물이 나타날까 주변을 신중히 경계하며 2알레 가량을 더 걸어가자 두 사람은 마침내 찾고 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돌아 헛구 역질하는 남자 옆에서 아이는 전에 경비원이었던 시체의 상처를 헤집어 보 았다. 오래된 상처 안에 구더기 수 마리가 드글거렸다. 1


“이빨이 아니라 손톱자국이에요. 이번 소용돌이에 있는 건 아마 그 눈 크 고 팔 긴 녀석들인 것 같네요.” “미안해, 로휀. 나는 도무지 눈 뜨고 볼 수가… 부탁한다.” 이것 봐요, 소용돌이 녀석 앞에서 우리는 파리 목숨만도 못하잖아. 그러 니까 나도 벌레 몇 마리쯤은 보란 듯이 짓밟게 해줘요.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하세요.” 로휀이라고 불린 아이는 예사처럼 뇌까리면서 바닥에서 가는 나뭇가지를 집어 상처 몇 개를 더 헤집었다. 밤이 가라앉아 가는 숲 속에서 풀벌레 우 는 소리가 들리고, 반짝이는 별이 발밑에서부터 차올랐다. 아이는 눈 뜬 채 로 꿈을 꾸었다. 꼭 이런 모양으로 발견되었던 부모님의 시체가 떠오르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아이 자신의 시체도 환상으로 떠올 랐다. 죽음은 공기 중에 있었고 아이는 졸려 하품을 들이켰다.

의자에 앉아 꾸벅거리던 로휀은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에 퍼뜩 고개를 들 었다. 분주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리고 있었다. 벌써 새끼 사 슴 한 마리의 털가죽을 벗겨낸 어린 왕자의 칼끝을 보면서 노인은 난처하게 웃었다. “여긴 제 지하실입니다, 왕자. 또 마음대로 들어왔나요.” 소년은 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남은 동물들을 해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저까지 박제하시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짓궂은 농담을 던지자 바쁘게 박제를 준비하던 소년의 손이 순간 멎었다. 의외의 반응에 노인은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말을 이었다. “물론 방금 말은 장난이에요, 왕자.” “쳇.” 소년이 아쉬운 듯 툴툴거리자 노인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빙긋이 웃었다. 그는 늙었고 이미 죽음은 공기 중에 있다. 그러니 시체를 들쑤시기 를 좋아하는 소년의 손에 헤집어지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장난이었을걸.


루비오나, 론즈브라우, 미리가디아, 마이오카. 요라스 대륙 모든 나라의 국민들은 자신이 저 황야의 떠돌이들과 달리 소 용돌이에 쉽게 집어삼켜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 지만 그중에서도 가히 유서 깊고 명망 높은 나라가 론즈브라우 왕국이었다. 자그마한 도시국가 여럿이 살기 위해 연합한 루비오나나 교단이 위세를 떨 치는 미리가디아와는 달리, 고귀한 왕가가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유구한 전통을 지켜왔다는 것이 론즈브라우 국민들이 지닌 긍지였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 가운데서도 특별히, 23대 왕은 마술을 부린다고 알 려져 있었다. 더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왕에게는 마법사 친구가 있다고들 말했다. 그리고 로휀은 멋쩍어 머리를 긁다가 껄껄 웃었다. “마법사 친구에게 작업실이나 하나 마련해 주시지요, 폐하.” 작업실을 얻은 론즈브라우 왕국의 마법사는 조수 하나 없이 혼자 일했다. 누구도 오래 있으려고 하지 않는 성 어두운 지하에 똬리를 틀고, 청년 시절 에 판데모니움에서 파견 나온 공학사들을 쫓아다니며 얻었던 기계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브론하이드 성 지하에 마법사의 공방이 있다고 했다. 찌걱거리는 기계 잔해가 입구 바닥에서부터 삐죽 튀어나와있고 텁텁한 공기 가 숨을 틀어막아 누구도 오래 머물려 하지 않는 공방. 그러나 실상은 피난처였다. 한 명의 존엄한 왕이 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왕국의 이면에는 왕자들 간의 칼부림과 줄을 잘 타려는 제후들 간의 신경전으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것이 왕의 가신이 되면서 로휀이 배 우게 된 왕국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타국의 엔지니어와 교류하며 고대의 기술을 연구하고 마법이라고 불리는 기기를 개발하는 데만 해도 로휀은 한창 바빴다. 정쟁에까지 휘말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지하에 기계로 성벽을 세웠다. 그만의 국가는 홀로 완 전했고 침입자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피난처를 원하는 사람은 로휀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사실이 로휀이 나이를 훨씬 많이 먹고 난 후에도 아주 못된 장난을 치게 만든다. 3


로휀 왕국의 첫 침입자는 바로 론즈브라우 왕국의 둘째 왕자이자 막내 왕 자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여기가 어딘지 알고 들어오느냐는 은근한 고압으로 충분히 몰아낼 수 있었을 터다. 사실은 왕자에게도 그렇게 말을 했었다. 그러나 요지부동 지하실 구석에서 훌쩍이고 있는 왕자를 억지로 쫓 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눈물이 많은 왕자는 그 다음 날에도 구태여 지 하실을 찾아왔다. 그 다음 날에는 기계에 손을 대다가 로휀에게 혼쭐이 났 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로휀의 서고에 꽂힌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몇 년 후에, 왕자는 로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제 로휀은 처음 만날 때 왕자가 울고 있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의 사당에 들어가 가신들의 얼굴을 볼 때면 로휀은 왕자가 해 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루키우스의 가문에서 보내 온 꿀차를 마시고 사흘 밤낮을 앓았어. 한두 번 일이 아니었으니 나는 아마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 비타우티스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무시하고 형님께 가서 인사를 했어. 그리고 하우어는 내 석연찮은 행실이 왕실의 위엄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아바마마께 탄원했어. 그러니까 로휀, 그대에게도 바깥에서는 친한 체 안할게. 여기서 내쫓지만 말 아줘. 그렇게 매일 빛 없는 지하로 숨어들던 소년이 청년이 되고 난 어느 날인 가부터, 왕자의 지하실 방문은 뜸해졌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찰나, 왕자는 뺨을 상기한 채 아주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잡고 지하실에 들어왔다. 여인은 퀴퀴한 지하실 공기에 눈썹을 살짝 찌푸리면서 도 고아한 자태로 고개를 숙였다. “마술사라 불리는 로휀 경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저 누추한 곳에 머무는 공학사일 뿐이랍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방까지 이름을 떨치는 엔지니어시죠. 그리고 왕자님의 친구시고요.” 첫 만남에서부터 마루라는 당당하고 머뭇거림이 없었다. 4


“저는 제 부군 되실 왕자님이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지내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의 힘이 되어주세요.” 로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외부로부터 최선을 다해 벽을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숨지는 못한 모양이다. 아주 잘못 걸렸구나.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날,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선왕은 마침내 맏아 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표했다. 새 왕의 즉위에 가장 높은 궁정에서 부터 가장 낮은 사창가까지도 왕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술렁였다. 그러나 그 흥겨움은 이제 왕제가 되는 왕자가 목소리 낮춰 말하고 있는 브론하이드 성 지하까지는 닿지 않았다. “이제 날 지켜줄 건 없어. 이대로는 목숨을 오래 부지하지 못할 거야.” 로휀은 별 말 듣지 않은 것처럼 머리를 벅벅 긁었다. “로휀, 나에게는 이제 아내와 두 명의 아이가 있어. 지켜야 할 것이 생겼 는데 더 이상 지하실에 숨어서 울기만 할 수는 없어. 나는 왕이 될 거네.” “저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눈에 띄게 낙담한 왕제를 두고 로휀은 반대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 다. 그리고 책장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더니 표지가 다 해어져 가는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왕자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저번에 이 책 찾지 않으셨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왕제는, 곧 침을 꼴깍 삼키고 책을 받아 살짝 열어 보더니 웃어버렸다. 소꿉친구와 비밀스러운 장난을 공모하는 아이처럼 짓궂 은 악의가 담긴 웃음을 웃었다. 새로운 왕은 즉위한 지 채 일 년이 안 되어 급격한 건강 악화로 사망했 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 새 왕으로 즉위했다. 새 왕은 아버지의 전설을 더 강하게 이어받았다. 론즈브라우 왕국의 25대 왕에게는, 늘 옆에서 지혜를 빌려주는 마법사 친구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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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지 않습니까, 폐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여기 레지멘트에는 진짜로 이능력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이제 늙은 가짜 마법 사는 갈 데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라도 다시 받아주신다면… 현 론즈브라우 국왕의 즉위로부터 수년이 흐른 레지멘트의 장비개발실. 램프 아래서 펜대를 책상에 두들기던 로휀은 쓰던 편지를 두 번 접어 주머 니에 넣고 새 종이를 꺼냈다. 빳빳한 새 편지지 위에 사각사각 인사말을 적 어 나갔다. 론즈브라우 국왕 폐하께 가신 로휀이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윙윙거리는 구동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작게 낸 창문 너머 어슴푸레한 새 벽 공기 속에서 로휀이 탄 비행정, 콜뱃의 진동이 점차 부드럽게 가라앉았 다. 칠 년 동안 떠나 있던 고향 왕국이 가까워졌다. 침엽수가 울창하게 솟 은 숲이 내려다보였다. 이 숲 너머에는 붉은 빛을 띤 석벽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억대로 곧 시야에 들어온 브론하이드 성 앞에는 수십 명의 가신이 서 있었다. 콜뱃이 이륙하기 무섭게 로휀은 문을 젖히고 뛰쳐나와 가신단 가운데 붉은 망토를 걸치고 선 옛 친구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친히 성 앞까지 마중나온 왕과 가신단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론즈브라우 에 귀환한 로휀과 인사를 나누었다. 가슴을 곧게 편 두 왕자는 그새 몰라볼 정도로 훤칠하게 자라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은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큰 키의 가신단 가운데에서 어울리지 않게 아래로 쏙 들어간 어린 아이였으므 로 처음에는 아이가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만 나와서 인사하려무나, 그룬왈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의 머리칼은 잿빛의 새벽 공기 가운데 가볍게 묻 혔다. 때문에 로휀은 아이가 선명한 붉은색 눈을 치들었을 때 내심 놀랐다. 말끄러미 로휀을 바라보던 앞으로 아이는 나오는 대신 그 자리에서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고는 가신단의 뒤로 숨었다. 6


“저 아이로군요.” “그래, 바로 저 아이라네… 자네가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국왕이 한숨을 내쉬자 부옇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예전 일들 때문인가. 짐도 그리 건강하지 못한데 큰 왕자들 역시 짐을 닮았고, 작은 왕자까지 이리 말썽이니 걱정이라네.” 한참 정정할 나이임에도 영 파리한 안색의 국왕을 보며 로휀은 잠시 입을 오물거렸다. “지금까지처럼 모두 괜찮을 겁니다, 폐하. 작은 왕자님과는 제가 잘 말해 보겠습니다.”

로휀은 레지멘트로 떠나기 전 막내 왕자가 태어나던 날을 기억했다. 사실 셋째 왕자가 생겨난 것부터가 계획 밖의 일이었고, 왕비 마루라는 겉으로는 언제나처럼 우아했지만 속으로는 노산이 몸에 부담이 많이 가 우울해했다. 왕비의 진통이 시작되고, 잔치와 통보와 산후조리를 분주하게 준비하던 시 녀들은 마침내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자 놀라서 단체로 고꾸라질 뻔했다. 질식한 것처럼 움직임 없던 핏덩이는 천천히, 느리게 눈을 뜨고 시녀들의 놀란 양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기는 목청 높여 울음을 터뜨렸다. 태어난 날 이후에도 막내 왕자는 갓난쟁이치고 통 울지를 않아서 왕실 사 람들의 걱정을 샀다.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로휀은 연대로 떠났기 때문 에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 후로는 왕실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고 들었다. 바로 어제도, 시녀들이 기르던 고양이에게 칼부림을 했다고. 어디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훌쩍거리는 시녀들에게 직접 들었으니 틀림이 없었다. 로휀은 혀를 끌끌 차고 싶었다. 어쩌다 어린아이 시절의 국왕을 만나서 친해졌을 뿐, 그에게는 아이를 계도하는 취미도 특기도 없었다. 눈앞의 왕자 는 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웃지도 않았다. 말조차도 않았다. 그러나 서늘한 새벽에 자신을 마중 나왔던 국왕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고 그는 다시 끈기 7


있게 열한 살 배기 그룬왈드에게 말을 붙였다. “왕자.” 깍듯이 경칭을 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짧은 호칭에 아이는 눈을 동그 랗게 뜨고 로휀을 쳐다보았다. 일단 눈을 맞추는 데는 성공했다. “어제 고양이를 죽였다면서요?” 다시 눈을 내리깔려는 아이의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로휀은 이어 물 었다. “왜 그랬나요?” 방에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이를 따라 로휀도 시선을 내리고 차 한 모금을 훌훌 불어 마셨다. “그게 좋으니까.” 갑자기 들려온 대답에 로휀은 그만 차를 마시던 입천장을 데었지만 태연 한 척 그룬왈드에게 눈을 고정했다. “나는 배가 고프면 푸딩을 먹고, 죽이고 싶으면 칼을 휘둘러. 그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그러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요?” 그러자 아이는 까르륵 웃었다. 처음 보는 그룬왈드의 웃음에 로휀도 절로 따라 입가에 미소를 띠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누가? 형님들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그 사람들은 나를 원래 좋아하 지 않아.” 로휀은 습관대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가족 하나 없는 늙은이가 남의 가정사 하소연이나 듣고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이람. “그렇다면 왕자는 어떻습니까? 국왕 폐하와 왕비님과 큰 왕자님들을 좋아 하나요?” 그룬왈드는 아무 말도 않았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닫았는데 억지로 몰아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죽이는 건 좋아한다고 했죠. 그럼 좋아하는 건 살을 가르는 것 쪽인가 요, 생명을 빼앗는 것 쪽인가요?” 8


“둘 다.” 이번엔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은 아이에 대해 감을 잡을 것 같았다. “남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과정이, 칼을 쑤셔서 육체를 분해하며 당신이 남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좋다는 거군요?” 로휀은 화두를 던져 놓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마 이 아이는 그저 자 신의 세계에서 홀로 완전한 게다. 좋아하는 것을 내면으로 쌓아두고 있을 뿐, 누군가 이해한다면 벽을 틀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 왕자는 로휀 자신을 닮은 듯도 했다. 잠시 후 왕자가 작은 입술을 벌렸다. “그냥, 나만 죽을 수는 없다는 거야.”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왕자는 허리에 맨 칼집을 툭툭 쳤다. 로휀은 한숨 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아무래도 아까 질문에 대해서 그룬왈드가 속으로 삼 킨 대답은 부정인 것 같았다.

“어땠나, 그룬왈드와의 대화는.” 터덜터덜 응접실을 나오는 로휀을 국왕이 눈에 띄게 반색했다. 아까 삼킨 한숨이 도로 나와 버렸다. “폐하. 저는 이제 막 궁정에 도착했기에 막내 왕자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가족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알겠더군요.” 그 모습이 어린 당신을 닮았으니까요, 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무작정 야단치기보다는 사냥을 보내십시오. 폐하나 다른 왕자님들과 함 께라면 더 좋겠군요. 그곳에서라면 왕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겠죠. 어린 나이에 검을 잡는 것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경계부터 하기보다는 칭찬하세요. 지금 막내 왕자님에게 필요한 건 이해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국왕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룬왈드의 괴상한 성향을 이해하라는 말인가? 내가 바란 건 그게 아니 네, 로휀. 나는 자네가 그 녀석의 버릇을 고쳐 놓길 바랬어.” “왜 굳이 그렇게까지 계도하려 하십니까? 어린아이의 장난일 뿐입니다.” 9


방금 누가 말한 것인지 로휀은 순간 헛갈렸다. 늙은 공학사인지, 왕국 경 비대원들 사이에 묻어 살던 어린 아이인지.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야. 지금 나라에는 막내 왕자가 저주받았다고 소문이 파다하다네. 특히 가신단이 이 화제를 적극적으로 꺼내지. 무슨 말인 지 알겠나? 그룬왈드의 기행이, 왕실의 위엄에 누가 되는 거라네. 다시 한 번 대안을 강구해주길 부탁하겠네.” 늙은 공학사의 어깨를 꼭 잡고 당부한 후 국왕은 떠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아 고개를 젓던 로휀은 아까 나온 응접실 문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엿듣는 것은 고귀한 습관이 아니랍니다.” 소리가 바로 멎었다.

굳이 콜뱃을 타고 왕국으로 온 것은 장비개발실에서 로휀이 챙겨 오는 기 기가 도무지 마차 따위로는 옮기지 못할 만큼 많은 탓이었다. 귀환하자마자 내리 왕국 이곳저곳으로 초청받느라 바빠서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절반가량의 짐은 채 정리가 되지 않고 지하실 한쪽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천장까지 쌓아놓은 짐 더미 옆에서 무언가가 슥 움직였을 때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말할 게 있어. 내 이름은 막내 왕자가 아니다. 그룬왈드다.” “그룬왈드 론즈브라우겠죠. 국왕 폐하와 저의 대화, 오늘 낮에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로휀은 테이블 위에 놓인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한 손에는 고양이, 한 손에는 검을 들고 다른 사람의 거처에 난 입하는 걸 보고 론즈브라우의 이름에 누가 된다고 하는 거랍니다. 고양이를 해치려다가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서 여기까지 들어오신 게군요?” “네 거처? 네가 오기 전까지 지하는 내 공간이었다.” 10


왕자는 특유의 붉은 눈을 치떴다. 그리고 곧 내리깔았다. “그리고… 꼭 그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야.” 이런 데서까지 국왕을 닮았나. 로휀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어 떻게 잘 달래야 쫓아낼 수 있을까. 아니, 쫓아낼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이 상황을 잘 이용하면. “이곳에 있고 싶으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셔도 여기는 이제 제 거 처입니다.” 왕자는 검을 잡은 주먹을 꽉 쥐었다. 뭐라고 항변하려고 얼굴을 들었지만 로휀이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저와의 약속을 지켜 주신다면 머물러 있어도 됩니다, 왕자. 적어 도 여기서 다른 생명을 해치지는 마세요. 아니, 그냥 이곳에 다른 살아있는 것을 가지고 오지 마세요.” 그룬왈드는 바로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고양이를 지하실 밖으로 휙 내던 졌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말 잘 듣는 면 하나는 좋다고 생각하면서 로 휀은 뻐끔뻐끔 파이프를 피웠다. 다른 생물을 죽이는 것이 왕자의 말대로 식욕과 같은 욕망이라면, 이렇게 조금씩 절제시키면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이렇게 매일같이 지하실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 니, 몰랐던가? 로휀은 약 이십년 전 이곳에서 국왕과 있던 일들을 어제처럼 떠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로휀 왕국의 테이블에는 의자가 단 두 개 있었는데, 지금 그 중의 하나 위에는 지하실의 모든 피륙을 그러모은 높다란 쿠션층이 쌓여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의자를 높여 놓고, 어린 왕자는 테이블 위에 당당히 손을 올린 채 로휀을 바라보았다. “의자가 멋지군요.” “나도 알고 있어.” 11


“아주 여기 자리를 잡으셨네요. 왕자는 이 위에는 친구가 없습니까?” 그룬왈드는 입을 열었다 다시 오므리고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긁었다. 아 차. 말실수였다. “이거 잘 됐네요. 마침 저도 친구가 별로 없던 참이라… 괜찮으시다면 이 노인네에게 왕자님과 친구가 될 기회를 주시겠나요.” “친구? 일국의 왕자를 무시하지 마. 아무리 나라도 당신 같은 노인과 아 이인 내가 친구가 될 순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거 아십니까? 국왕 폐하와 처음 만날 때, 저는 나이가 들었고 국왕 폐 하는 열한 살이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 친구였거든요.” 의심스럽다는 듯이 로휀의 눈을 한참 바라보던 그룬왈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아까보다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의자 위의 가죽들은 제 자리에 갖다놓으세요. 레지멘트에서 여기까지 가져온 기기들을 덮어 놓았던 피륙인데 허참… 연구실의 물건은 함부로 옮겨 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규칙을 지 킨다는 조건 하에서 왕자님은 제 거처에 계시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상해. 처음에는 살아있는 걸 가져오지 않는다고만 약속했었 는데 규칙은 늘어나기만 하고… 있지, 당신과 나 정말 친구라고 생각해?” 로휀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지만 친구 사이에는 장난 정도는 칠 수 있지 않아? 아바마마께 말했었잖아, 어린아이의 장난일 뿐이라고. 친구끼리 장난칠 때는 사소한 규 칙 같은 건 어겨도 되는 거잖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사탕발린 말을 잘 하는 아이인데, 어째서 성 위에서는 그렇게 요 지부동 입을 닫고 있었을까. 역시 나이가 들어서 어린아이에게는 약해진 모 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로휀은 테이블 위에 뺨을 댄 그룬왈드의 어깨를 두드 렸다. 높게 쌓은 피륙 위에서 왕자는 그대로 새근새근 잠들었다. 이거 원, 혹시 길들여지고 있는 건 로휀 자신이 아닐까.


론즈브라우의 심장부, 붉은 빛이 도는 석벽을 두른 브론하이드 성은 서북 쪽으로는 드넓은 침엽수림이 에워싸고 있었다. 도심부치고 꽤나 널찍하게 펼쳐진 이 숲 안에는 듬성듬성 초원이 펼쳐져 있어 동물을 쫓기 적합했기에 왕실 사람들과 귀족들이 가끔의 유흥을 위해서 즐겨 찾는 사냥터였다. 그렇 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사냥을 나오는 일은 나라의 큰 행사 때 외에는 거의 없었다. 가신들이 저마다 활이나 검을 손질하는 가운데, 왕족들은 붉은 휘장을 두 른 채 튼튼한 말에 올랐다. 그룬왈드 역시 작은 몸에 꼭 맞춘 휘장을 두르 고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서늘한 공기에 어린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이 든 로휀도 이번 사냥을 구경하기 위해 나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 사냥을 주최하기를 국왕에게 약 일 년 간 끈질기게 청한 장본인이었다. “왕자의 솜씨를 보여주세요.” 나름대로 긴장한 것인지 왕자는 대답 없이 계속 검만을 매만졌다. 로휀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너른 숲 가득히 울렸다. 나무 위에 쉬고 있던 새들이 일제히 푸드덕푸드덕 날아올랐다. 무예에 자신 있는 무장 들은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가기도 했지만, 노인과 아이까지 포함한 대규모 행렬이었기에 대부분은 함께 남아서 천천히 숲 속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깊숙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하나둘씩 제 표적을 점찍어 쫓기 시 작했고 대열은 조금씩 와해되었다. 아이와 노인으로서 행렬의 뒤쪽에서 천 천히 말을 몰고 있던 로휀은 옆에 있는 그룬왈드를 살펴보았다. 살 베는 소 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하기는 했지만 묵묵히 말고삐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잘 참고 있어요, 왕자.” 점점 사람들이 흩어지고, 숲을 메운 피 냄새가 짙어지자 슬슬 그룬왈드는 고삐를 몸 가까이 당기며 대열의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흡사 피 냄새에 반응하는 날랜 맹수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 내음에 반응하는 것은 왕 자뿐만이 아니었다. 13


숲 한 쪽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르 렁거리는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이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맹 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는 사람들이 활을 쏘고 말을 달려 쫓으면서 힘을 빼놓은 사냥감들을 죄다 물어뜯었다. 대열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사 람도 있었다. 로휀은 정신을 차리고 그룬왈드를 챙기려 했다. 어린 왕자가 분명 겁을 먹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들 물러서는 가운데 그룬왈드는 말을 탄 채로 미동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금의 위축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걷다가는 갑자기 사냥감에 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피를 보는 사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겁 보다는 차라리 동경이나 찬탄에 가까운 눈빛을 띤 채, 흡사 사자와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로휀은 무의식적으로 왕자의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룬왈드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사자가 더 빨랐다. 맹수는 대열에서 툭 튀어나온 어린 왕자의 자리로 날듯이 달려들었다. 로휀은 눈을 깜박였다. 세상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천천히, 사자가 달려 들던 그대로 멈추었다. 곁에 있던 무장들이 급히 달려와 멈춘 사자의 옆구 리에 검을 꽂았다. 사자는 그르렁 울면서 앞발을 휘둘렀지만 곧이어 합세한 다른 가신들의 검에 막히고 말았다. 사자는 크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리고 곧 우뚝 옆으로 쓰러졌다. 앞목에는 남들의 것보다 좀 더 작은 검이 박혀 있었다. 손잡이 끝에 왕실의 문양이 주조되어 있었다. 그룬왈드의 검이다. 로휀은 나이가 든 후 실로 오랜만에 몸을 떨었다. 흥분감이 몸을 휘감았 다. 왕자의 검술과 집중력이 천부적인 것은 눈치 채고 있었지만 이런 위기 상황까지 넘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마련한 자리에서, 그 의 생각보다 배로 화려하게 왕자는 그의 재능을 증명해냈다. 로휀은 기대에 차서 말을 돌렸다. 그리고 듣고 보았다. 14


가신들이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결코 승리의 환희 나 축하와 같은 종류의 수군거림은 아니었다. 이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나라에는 막내 왕자가 저주받았다고 소문이 파다하다네. 특히 가신 단이 이 화제를 적극적으로 꺼내지.’ 로휀은 기분 나쁘게 쑥덕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말을 했던 오랜 친구를 찾아보았다. 국왕은 충격과 경멸을 띤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어린 왕자가 있었다. 왕자는 표정이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온몸을 피로 물들이고 말 위에 앉 아 있었다. 그러나 계속 왕자와 함께 했던 그에게는 보였다. 익숙한 체념. 그리고 망연함. 그룬왈드는 수많은 검이 박힌 사자의 시체를 거울처럼 하염 없이 내려다보았다. 장면이 죽어 박제된 것처럼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로휀은 큰 소리가 나게 박수를 짝 쳤다. 모두가 로휀을 쳐다보았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룬왈드 왕자님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 구의 피라도 볼 만한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왕자님의 용맹함 덕분에 이 위 기를 넘겼습니다. 이제 열 몇 살 남짓한 분께서 이렇게나 비길 데 없이 뛰 어나시니, 실로 왕실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왕자를 흘끗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이 사자는 이 늙은이가 박제로 남겨 왕가의 위엄을 길이 남길 수 있도록 해도 되겠습니까? 오늘 일어난 기적의 증표가 될 겁니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냥터에는 다시 소리가 들리고 움직임이 생겨났 다. 아까보다 한층 활기가 넘치는 왁자지껄함이었다. 그룬왈드는 로휀과 사 자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로휀이 지하연구실 문을 열자 시종들이 끙끙거리며 들고 온 사자를 던지 듯이 바닥에 놓았다. 몸은 칼자국으로 너덜너덜했지만 다행히 얼굴 부분은 성했다. 이렇게 된 이상 머리면 충분하겠다 싶어 아예 잘 드는 칼로 머리를 도려내었다. 다행히도 피는 빠질 만큼 빠진 후였다. 오십 년도 더 전에 시 15


체를 헤집던 일이 어제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기묘한 감상에 젖어 있는데 끼익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왔습니까.” 로휀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거 아주 멋있는 녀석이네요. 과연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녀석다워요. 박제가 완성되면 아주 멋질 겁니다. 왕자의 방에 걸어두시겠습니까? 맹수의 박제는 예로부터 위엄의 상징입니다. 왕가의 이름을 드높일 거예요.” 대답 대신 끙끙대는 짐승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니 말쑥하게 피를 씻어낸 왕자의 손에 들린 토끼 두 마리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녀석이 다 못 잡은 사냥감들. 내가 대신 잡아 왔어. 가는 길에 선물 하려고.” “이곳에서 생명을 해치지는 않기로 약속했을 텐데요.” “그냥 친구끼리의 장난이야.” “장난은 할수록 커지고 규칙은 어길수록 걷잡을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렴 어때. 아주 작은 장난일 뿐이야.” 로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책장 쪽으로 걸어가 빼곡히 꽂힌 책을 차례로 훑다가 낡은 표지의 한 권을 뽑아들었다. 페이지를 잠시간 넘겨 보 고는 책을 왕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지하실 구석에 있는 보관함의 철제 뚜 껑을 열어서 빛바랜 라벨이 붙은 시약병 몇 가지를 골라 들고 사자를 내려 놓은 바닥 옆으로 늘어놓았다. “조심하세요, 왕자.” 당부를 하고 로휀은 그새 죽은 사자의 살점에 달라붙은 벌레 몇 마리를 떼어냈다. 장비 끝으로 누르자 벌레들은 한참이나 경련하다가 움직임을 멈 췄다. 매캐한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착란처럼 코를 찔렀다. 눈시울이 붉어졌 다. 부연 시야 속에서 그룬왈드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사자의 머리 갈기 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로휀. 나는 사자가 되고 싶어. 저기 바닥에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비참하 16


게는 죽고 싶지 않아.”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법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사자 쪽이 부러워서…” 무엇을 그리 동경하는지 그룬왈드는 사자의 털가죽을 손질하는 로휀의 손 끝에서 눈을 떼질 않았다. “로휀, 나도 한 가지 약속을 맺고 싶어. 내가 죽으면 이 사자처럼 박제해 주지 않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나는 이렇게 늙었고 왕자는 한참 어린데, 왕 자가 먼저 죽는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그룬왈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로휀은 헛소리를 무시하려 핀셋을 집었지만 더 이상 박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왜 말이 없습니까, 왕자.”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아까 그룬왈드가 익숙한 미움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 망연히 서 있던 때처럼 시간이 박제되어 죽은 것 같았다. 시야가 계속 흐렸다. 작업을 계속하질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던 로휀의 눈이 레지멘트에서 가 지고 온 장비들에 닿았다. “그래요, 왕자. 왕자가 사자처럼 살 수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 다.”

로휀으로부터 레지멘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룬왈드는 아주 들 떠 있었다. 다음 날 당장 국왕에게 달려가 레지멘트에 자원하고 싶다고 말 을 했고, 한 나라의 왕자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고 만류를 해도 막무가 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룬왈드는 박제에 맛을 들였다. 평소에는 말수가 많 지 않은 아이가 동물의 뼈와 살을 발라내어 해체할 때만큼은 신이 나서 날 뛰었다. 그리고 로휀의 지하실 안에서만큼은.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노 17


인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난 생에서 거짓말처럼 즐거웠던 몇 년이었 다. 즐거운 날들은 금방 끝이 나게 마련이라, 열네 살이 된 그룬왈드가 신 이 나 마침내 정말로 추방령을 받았음을 자랑했을 때 로휀은 그간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생각했다. 알현실 앞에서 로휀은 잠시 망설였다. 칠 년의 공백은 오랜 친구였던 국 왕과의 사이를 벌려놓았고, 로휀은 때때로 국왕을 자신이 모르는 낯선 사람 처럼 느끼곤 했다. 그리고 로휀은 자신의 새로운 어린 친구를 떠올렸다. 그 리고 오랜 친구가 딱 그 나이만큼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갈 곳 없는 왕자 와 지하실의 노인은 분명 친구였었다. 가슴 속에 차오르는 믿음 그대로 로 휀은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폐하. 왕자의 추방 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룬왈드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닐세.” 처음부터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날 곳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하의 시체 건은 왕자의 소행이 아닙니 다. 저는 그간 왕자에게 절제를 가르쳤고, 왕자는 그 정도의 분별은 있는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전부터 왕자가 사형수의 시체를 모으려고 했던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왕자는 그저 이곳을 떠나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폐하께서 그 의중을 헤아려…” “그러나 그룬왈드가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아. 짐인들 어쩌겠는가.” “폐하.” 무슨 말을 준비해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혹시 처음부터 왕자를 쫓아낼 생각이셨습니까?” 국왕은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이보게, 로휀. 왕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흑태자라고 불리고 있다네. 지 금 왕자는 내게 짐덩이 같은 존재야. 또 가신들은 어떤가? 그들은 언제나 불만이 많아. 그룬왈드를 추방한다면 당분간은 그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거라네… 나는 지금까지 희생한 것이 너무 많아. 작은 희생으로 지금껏 지 18


켜온 것을 계속 지킬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걸세.” 숨이 턱 막히고 꽉 쥔 주먹이 떨렸다. “보이지 않습니까, 폐하? 지금 막내 왕자가 어렸던 당신과 꼭 같은 처지 인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게 선왕에게 했던 것처럼 하기라도 할 셈인가?” 국왕이 무심한 양 내던진 질문에 내포된 의미에 로휀은 기함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답에 따라 자신은 이 방을 성히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러나 거짓말할 마음은 없었다. “아뇨.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까끌까끌한 목구멍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후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 정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제 세상의 규칙을 어기고 당신에게 책을 건네주었던 과거를요.” 로휀이 그 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외부로부터 꽁꽁 문을 닫 고 있던 마법사는 자신의 공방에 들어온 친구의 목숨을 구하고 한 남자를 왕으로 만들었었다. 오래 전 로휀의 친구였던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 지 알아채고 황망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론즈브라우 국왕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가신 로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로휀은 깊은 한숨을 쉬 었다. 아주 깊어서 추억이 멍들고 가슴이 우그러들었다. 유치하게 굴지 않으려 했으나 속이 쓰렸다. 결국 몇 년 동안 로휀은 얻은 것 없이 잃기만 했다. 오랜 친구를 잃었으며, 새로 생겼다고 생각한 친구는 늙은이를 두고 멀리로 떠나는 데 대해서 아무런 거슬림이 없어 보였다. 판데모니움에서 보내 온 자료를 고찰하고 있는데 잡음이 들렸다. 반사적 으로 연구실 문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바람에 종이가 구겨 지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룬왈드는 떠났지. 습관처럼 파이프를 피우 려고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파이프는 반만 들리고 반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두 동강이 난 파이프 옆으로 깨끗한 종이 위에 정갈한 글씨가 짤막하게 쓰여 19


있었다. 그가 잘 아는 열네 살짜리 소년의 글씨체였다.

내가 죽는 것을 당신이 보게 될 때까지 살아있을 것.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니깐…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결국 잃은 것은 파이프 한 대가 끝이었다.

재미없고 지루한 말년의 몇 년이었다. 왕국은 유구한 전통 그대로 끊임없 는 권력 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고 로휀은 피난처에 머리를 기댔다. 어 쩐지 이전에 비해 허전하게 느껴지는 로휀 왕국이었지만 반 동강 난 파이프 와 가끔씩 오는 전보가 있었다. 새로 파이프를 사놓기는 했지만 한 대 피우 고 싶을 때마다 어쩐지 반 동강이 난 파이프가 시선에 걸려서 피울 수가 없 었다. 그동안 바깥에서는 두 왕자가 싸우고 앓다가 죽었다. 마침내 국왕마저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런 바깥일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레지멘 트의 소식에는 어느 정도 귀를 기울였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소용돌 이가, 마침내 소멸했다. 그룬왈드가 떠난지 다시 칠 년이 지난 후였다. 다른 왕자들은 죽었고 국왕의 병세는 위태로웠다. 오래 전의 결정을 후회 하는 국왕의 뜻에 따라 가신단은 추방했던 그룬왈드를 다시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미움 받던 막내 왕자라면 어렵잖게 가신단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 을 거라는 계산도 그 귀환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정치에 관여하지 않 기로 결심했던 로휀은 그 우스운 연극 같은 양을 그저 지켜보았다. 예전 친 구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은 포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왕자를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 로휀은 경탄했다. 여렸던 얼굴선은 날카로워졌고 잘 단련되어 죽 뻗은 몸은 십 년 전 브론하 이드 숲에서 보았던 위풍당당한 맹수를 떠올리게 했다. 마치 사자처럼, 잘 만든 박제처럼. 그리고 붉은 눈동자는 큰 감정 없이 유리알처럼 매끄러웠다. 유약하게 흔들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안심이라면 안심이었지만 또 걱 정이기도 했다. 20


“레지멘트는 어땠습니까. 고향을 떠나서 굳이 찾아간 곳인데, 여기서보다 즐겁고 보람이 있었나요?” “즐거웠지.” 지나가는 말처럼 묻자 그룬왈드는 칠 년의 공백 따위 없었던 것처럼 대답 을 받아쳤다. “동료들은 어땠습니까?” “하나같이 좋은 녀석들이었다.” “그 말, 진심인가요?” 로휀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솔직히 당신이 여기에 동료 몇 명쯤은 데리고 올 줄 알았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사실은 연대의 대원 모두 흩어져 쫓기는 신세가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은 일국의 왕자고요. 마음을 나눈 몇 명쯤은 왕국에 따라올 줄 알았습니다.” “당신 때문이지.” 그룬왈드는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고는 다음 말을 어찌할지 생각하는 듯 붉은 눈을 치뜨고 로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피식 웃었다. “당신이 어린애 투정을 너무 오냐오냐 받아줘서 버릇을 망친 거야. 모두 아주 좋은 녀석들이었지만, 당신만큼 절대적으로 날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 을 수는 없었으니까.” 로휀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말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이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당신이 예전 그대로만 해 준다면 문 제없다고 생각한다. 부름을 받아서 오기는 했지만 이제 여기서 나는 다시 혼자다. 그러니까 당신이 언제 어느 때든지 간에 내 편이 되어 줘. 내 가신 이 되어서 충성을 바쳐. 그러면 되는 거다.” 일찍이 했던 결심과 당황 사이에서 로휀은 수긍도 거절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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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몇 년이었다. 론즈브라우 왕국에 돌아온 그룬왈드는 사자 같았 다. 누구보다도 용맹하고 당당했으나 그 명예를 노리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귀한 사자는 한두 번의 공격은 능히 피해낼 수 있을 만큼 강건했다. 그러 나 수많은 공격이 이어지고, 목부터 옆구리까지, 대퇴부부터 다리까지 적에 게 뜯겨 나가 마침내 사자는 만신창이가 되어 머리만이 남았다. 그룬왈드는 전쟁에서 돌아왔으나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왕비가 돌아온 왕자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숨기는 점, 그리고 극소수 생존자 들의 증언을 들어보아 로휀은 그의 상태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왕 자의 거취에 대해서 수소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실 복도 눈에 잘 띄는 곳 에 걸어 놓은 사자의 머리가 눈에 띄었다. 머리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까끌한 후회가 입 안에 맴돌았다. 외부로부터 벽을 치겠다는 것은 실은 아주 어리석은 결심이 아니었을까. 결국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관심 을 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더 적극적으로 국정에 개입했더라면. 왕자를 지키기 위해서 처음부터 가진 모든 수를 이용했더라면. 가신이 되어 충성을 다하라는 명령에 망설임 없이 응답했더라면. 그룬왈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레지멘트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사냥을 열지 않았더라면. 국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부모님이 소용돌이의 괴물에게 돌아가셨을 때, 두려운 것 없는 아이인 채로 생을 마감했더라면. 모두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남은 것은 사지와 눈과 턱을 잃은 왕자 그리 고 늙은 몸의 자신 뿐. 그룬왈드를 이끌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어렸을 때 사자(死者)가 되기 바라는 소망을 입에 담았던 왕자가, 성치 못한 몸으로 사는 데 의미를 둘까. 몇 년간 함께 지냈을 뿐인 노인에게 의지하려고 할까. 그룬왈드는 가신이 되어 자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는 이제 로휀을 이끌 수 없는 몸이다. 로휀 은 늙었지만 아직 재주가 많고 연을 둔 곳도 많았다. 이 나라가 곧 내란에 휩쓸린다면 몸을 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머리만 남은 사자를 품에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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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부탁을 받고 성한 곳이 얼마 남지 않은 그룬왈드의 몸을 살펴보면 서, 로휀은 왕자의 모습이 마치 어릴 때 나뭇가지로 찌르고 놀던 벌레를 닮 았다고 생각했다. 몸 내부를 훤히 드러낸 그룬왈드는 의식이 없는 채로도 기계를 신경부에 이어 붙일 때마다 몸을 경련했다. 로휀은 스스로에게 되뇌 고 다시 되뇌었다. 이건 그냥 장난일 뿐이다.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해. 지금 가장 곤혹스러울 사람은 바로 왕자 본인이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전하.” 매캐한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뜻 모를 환각이 되어 코를 찔렀다. 의사소통 을 위해 뇌에 연결한 콘솔에 채 익숙해지지 않은 그룬왈드는 처음엔 색과 이미지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아이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과연. 참혹한 모습이시지만 이것도 하나의 운명입니다.” 로휀은 이제부터 그에게 행할 시술에 대해 설명했다. 콘솔은 순간 암전이 었다. 그룬왈드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말조차도 않았다. 신호가 점멸했 다. 주마등처럼 깜박이는 콘솔의 빛을 로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다시 불을 밝힌 콘솔 화면에 몇 글자가 띄워졌다. 로휀에게는 그것이 열네 살짜리 소년의 정갈한 글씨체로 읽혔다.

결국에 나를 박제해주는군. 로휀은 일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로휀. 나는 사자가 되고 싶어. “…그것이 당신이 바라시는 것입니까?”

아주, 아주 작은 장난일 뿐이야. “좋습니다. 전하를 위한 저의 마지막 충성입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로휀은 그의 마지막 주군이 될 사자왕에게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작업 도중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못된 장난을 공모하는 어린 아이처럼 로휀은 키득키득 웃었다. 턱을 잃은 사자도 함께 부글거리는 소리로 웃었다. 두 아이는 그저 웃을밖에 더 함께할 것이 없었다.


찬란하고 유구한 론즈브라우의 역사에서 믿을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났다. 아직 시민들에게는 함구하고 있지만, 시종은 전부 보았다. 마치 지옥에서 지 상으로 올라온 것 같은 왕자가 어떻게 이 궁정을 지옥으로 만들었는지. 어 떻게 호령하듯 들끓는 목소리를 내었고 어떤 눈빛으로 가신들을 비웃으며 어떻게 모두의 피를 보고 웃어젖혔는지. 그리고 그 참사의 준비 과정이 이 지하실에서 있었다고 한다. 시종은 왕 비님의 명에 따라 불길한 지하실에 남은 물건을 모조리 치워버리기 위해 분 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벽을 따라 끝도 없이 줄지어 꽂힌 책들, 괴상 한 기계들, 그리고 한편에 즐비한 박제.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처럼 기묘한 광경이었으므로 시종은 더욱 서둘러서 모든 것을 지하실 바깥쪽으로 내몰았다. 계속 그렇게 물건을 치워나가다 보니 지하실 바닥 한 쪽에는 박제된 사자 머리도 놓여 있었다. 분명 궁정 복도에서 보았던 사자인데, 지금은 입가가 피로 얼룩져서 이 나라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종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자의 시술 중에 묻어난 것이겠지만 섬뜩한 기분이 들어 일단 다 른 것부터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지하실을 둘러보니 구석에 피륙 을 겹쳐서 두텁게 쌓아 올린 쿠션 같은 것이 보였다. 우선 저것부터 치우려 고 발을 옮겼다. 순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압 넘치는 포효에 시종은 깜짝 놀 라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자의 눈이 이상하게 생생해 보였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살펴보니 역시 움직이지 않는 박제일 뿐이라, 시종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어서 박제된 것이 살아 돌아올 리 없잖아. 어린 아이 장난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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