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where over the star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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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외곽을 거닐다 보니 바람결에 물비린내가 끼쳤다. 밤 느지막한 시간의 거리는 한적했다. 길에 가로등이 드문데도 어쩐지 어둡지 않았 다. 고즈넉한 밤길을 죽 돌아보던 안톤은 지평선 위에서 찬찬히 발을 옮기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멀리 있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가까이 갈수록 확연하게 체구가 작았다. 작은 몸에 비해 성숙한 차림의 소녀는 하염없이 하늘을 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안톤도 따라서 눈을 들어보았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세상에 비해 자신이 아주 작게 느껴지는 순간들 이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까만 하늘에 알알이 별빛이 가득해 눈이 멀 듯했다. 불빛이 드문 거리라 은하가 더욱 눈에 시렸다. 황홀한 광경에 넋을 놓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든 채로 걷고 있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에 아주 정신이 팔린 모양새였다. 저 러다 넘어질라. 신경이 쓰인 안톤은 다가가 작은 어깨를 툭툭 쳤다. 소 녀가 돌아보았다. “크로우?”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녀가 곧 웃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는 친구가 생각나서요.” “친구? 근처에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 “그 친구는 지금 멀리에 있어요.” 말갛게 고운 웃음이었다. “……그래도 늘 가까이 있는 기분이라서.” 말을 마친 소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노래를 흥얼거 리기 시작했다.



Somewhere Over the Starlight 1. 우주 먼지 ………… 5 2. 궤도 ………… 24 3. 스텔라 가르텐 ………… 43 4. 이심률 ………… 62 5. 혜성 ………… 99 6. 유성 ………… 102 7. 은하수 ………… 106



1. 별은 우주 먼지에서 시작한다

칠요력 1203년 가을, 에레보니아 제국의 수도 헤임달 부근은 말도 안 되게 날씨가 좋았다. 평년보다 햇볕이 보드랍고 바람이 적당히 선선 해, 근교 트리스타에 있는 사관학교 학생들이 활동하기 딱 좋은 나날이 었다. 엄격한 하인리히 교감도 기분이 누그러져 부드러운 말씨로 면학 에 힘쓰길 권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맘때 많은 학생이 책에 얼굴을 묻 고 공부에 열중했다. 각 동아리마다도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용무에 힘쓰는 학생도 있었다. “헤헷. 여기서 7이다. 어떠냐? 형님은 못 따라오겠지?” “볼-트! 크로우 형아 여기서 또 당하지!” “어 잠깐 잠깐. 우리 한 번씩만 물리지 않을래?” “내기 게임에서 물리는 사람이 어딨어? 형이 전에 그렇게 말했잖 아?” “저번에 주기로 했던 과자 안 갖다 준다?” “와, 치사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지고선…….” 한바탕 일어난 소란에 여자치고 낮은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물릴 필요 없단다.” 그리고 소녀의 쨍한 외침이 뒤를 이었다. “크로우 구운, 또 수업 땡땡이치고 여기서 애들이랑 블레이드나 하고 있지!” “와아아. 토와 누나랑 안제 누나 죠르쥬 형이다!” 5*


“헤헤, 끼어들어서 미안. 우리가 크로우 군을 좀 데려갈게.” “응! 치사한 형아 이제 필요 없다!” 그러니까 이게 이맘때 트리스타에서 일상처럼 보이는 풍경 중 하나 였다. 크로우가 수업을 땡땡이치고, 토와, 안젤리카, 죠르쥬가 찾으러 온 마을을 돌아다닌다. 이번처럼 키르히에 앉아있으면 다행이지, 본교 사 옥상에서 내기 판을 벌인다거나, 상점가의 부탁을 받아서 가로등 위 에 올라가 수리를 하고 있다거나, 행적을 영 종잡기 힘들 때가 많았다. 저 녀석들 또 저러는구만. 카운터의 프레드가 느긋하게 접시를 닦으며 눈앞의 소란을 지켜보았다. 그러게요. 종업원 돌리가 맞장구를 쳤다. “어. 너네들이냐.” “너네들이냐-가 아니야, 크로우 군! 크로우 군이 아무리 실습이 특기 라도 최소 출석일수는 맞춰야 할 거 아냐. 이제 세 번만 더 빠지면 낙제 라고, 알아?” “어-. 나도 세고는 있다고. 뭐냐, 너희, 그 못 미덥다는 얼굴. 그러니 까 두 번까지는 더 빠져도 되는 거잖아?” “크로우 군-!” 토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정말 안 되겠어, 이제 이 블레이드는 압수야.” “엇차, 그건 안 되지.” 크로우가 얼른 테이블에서 블레이드를 집어다가 등 뒤로 숨겼다. 토 와가 뒤로 뛰어들자 여유 있게 빙글 몸을 돌렸다. 토와가 손을 뻗자 휘 파람을 불면서 백스텝을 밟았다. 다시 토와가 달려오자 이번엔 등만 쓱 숙여서 피했다. “포기하라고, 토와. 그리고 참견은 이제 그만두라고. 나한테도 나름 자유의지가 있단 말이야.” “이익, 정말!” 6


그냥 보고 있기 미안해진 죠르쥬가 토와를 도와주려고 앞으로 나섰 다. 한 발짝을 뗀 후, 죠르쥬는 옆의 안젤리카가 가만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젤리카는 감히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앞의 광경 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쪽도 못 쓰는 토와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네. 그래서 그만 죠르쥬도 힘이 쭉 빠져버렸다. 개미와 베짱이인가. 확실 히 보기에 재미난 구경거리이기는 했다. 크로우는 피하고 토와는 허공 에 헛손질하기를 수 번째, 순간 토와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했다. “엇차. 조심해야지.” 미끄러질 뻔한 토와의 손을 크로우가 낚아 올렸다. 워낙 체구부터 차 이가 있는지라 토와의 손이 크로우의 손 안에 쏙 잡혀 들어왔다. 균형 을 잃은 토와의 이마가 크로우의 가슴 위에 콩하고 닿았다. 순간 카페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크로우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 잠깐. 이거 뭐냐, 토와.” 크로우가 토와의 손을 들어 확 펼쳐보았다. 손가락 한쪽에 밴드를 몇 겹씩 친친 둘러 감은 것이 지나치게 두꺼웠다. “아 그거, 가사 실습 중에 손을 베어서…….” “가사 실습은 저번 주였잖아. 그런데 이 꼴이 됐다고? 아. 알았다.” 웃는 표정 그대로 눈썹만 찌푸린 크로우의 얼굴이 기묘했다. “너 학생회 서기 하고 있으니까. 그 성격에 빼지도 못하고 계속 받아 적다가 상처가 덧나기만 한 거구만 그래. 맞구만? 학생회 놈들은 뭐 했 대? 다 정신 빠진 거 아냐? 말로는 모든 학생을 돌보니 어쩌니 하더니 만 정작 옆에 있는 꼬맹이 상태 하나를 못 보냐.” “꼬맹이 아니거든-!” “꼬맹이가 아니라고? 그 와중에 내 꽁무니나 따라다니고 있으면서? 인마, 그러다 늙어 죽는다고 내가 말했냐 안했냐. 세상 모든 걸 네가 챙 7*


길 수는 없다고. 그냥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알았어, 지금 수업 갈게. 그 런데 그 전에 학생회부터 들를 거야. 너 좀 적당히 굴리라고.” 토와가 뭐라고 대꾸하려 했지만 크로우가 먼저 선수를 쳐 토와의 머 리 위에 손을 덮었다. 토와는 벌린 입을 미처 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왜, 부끄러우니까 그런 말 말라고 할 셈이지? 자기 몸 건사도 못하 는 꼬맹이한테 돌아가는 벌인 줄 알어. 그럼 난 학생회실 들러야 하니 까 먼저 간다.” “으……, 크로우 군 정말…….” 크로우가 먼저 쌩하니 나가버리자, 토와는 아까 크로우가 손을 얹었 던 이마 위를 두 손으로 감쌌다. 얼굴에 열이 올라 발갰다. “저 녀석들……, 또 저러는구만.” 프레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요…….” 돌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맞장구쳤다.

실습 시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느릿느릿 김나지움으로 걸어가는 토와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죠르쥬와 안젤리카는 모른 척 토와의 속도에 맞추어 뒤를 따랐다. 이 녀석들도 참 한결같구만. 토와 에게 정신이 팔린 채로 걸어가던 죠르쥬는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어, 그런데 안제. 귀족반 수업도 김나지움이었……?” 미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안젤리카가 죠르쥬의 작업복 깃을 낚 아챘다. 엄청난 악력에 죠르쥬는 저항도 못 하고 수련실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곧 쾅 하는 파열음이 귀청을 때렸다. 안젤리카가 주먹을 벽 에 꽂은 참이었다. 균열이 간 벽 조각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저 녀석들, 왜 안 되는 걸까.” 8


“아……안제, 학교 기물에 제로 임팩트를 쓰면 안 돼.” “정말 답답해 죽겠단 말이다. 처음에는 어련히 마음을 접던지, 아니 면 이어지든지 둘 중에 하난 되겠거니 했지. 그런데 벌써 가을이 다 지 나가겠어. 서로 호감도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토와가 크로우의 취향이 아닌 거 아닐까?” 안젤리카의 안광이 번뜩였다. 흡사 야생의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크로우 자식 주제에, 나의 토와가 취향이 아니라고……?” “그, 그치만 안제. 취향이라는 건 어쩔 수 없잖아. 크로우 방에 붙어 있던 포스터 봤지? 관심 있는 여학생들도 대체로 성숙한 매력이 있는 쪽이었던 것 같고, 전에 웬 미모의 누님이랑 단둘이 있더란 목격담도 있 었잖아?” “아니. 아니야.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갖는 데 취향이란 게 그렇게 절대적이진 않을걸. 죠르쥬, 지금까지 크로우가 토와 외의 사람을 저렇 게 챙기는 걸 본 적 있어?” “……없지.” “그렇지만 그래. 그 말대로라면……, 호감이 가는 상대가 많아서 한 사람에게 매이지 않으려고 재고 있다, 고 생각하면 이해는 되네. 용납은 안 되지만.” 죠르쥬가 흠칫 뒷걸음질 쳤다. 안젤리카의 표정과 온몸에서 발산되 는 기가 전에 없이 불길했다. “후후……. 그래. 그 녀석, 겉모양은 멀쩡해서 인기는 나쁘지 않았던 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면, 선택지를 하나로 줄이면 되는 일 아니겠어.” “뭐……뭘 어떻게 할 셈이야, 안제.” “후후, 이 기회에 어느 쪽이 위인지 그 녀석에게 확실히 보여주지. 너 도 도와줘, 죠르쥬. 함께 토르즈 연애조작단을 결성하는 거다.” 9*


“연애……조작단? 그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해야 해?” “우리가 하는 일인데 당연하지! 도와줄 거지, 죠르쥬?” 안젤리카가 특유의 상쾌한 미소를 짓자 죠르쥬는 푸우 한숨을 내쉬 었다. 그리고 이내 따라 웃었다. 안젤리카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쉽게 쉽게 방향을 제시하고 다른 사람을 휩쓸어 버린다. 지금까지 그녀를 따 라서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하리라고 믿게 되는 것 이다. 물론 스스로 한 선택이기에 훗날에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둘 중 누구라도 그때를 떠올리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어땠을까?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곧이어 선연하게 떠오르는 추억에 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숙사에 들러 실습 용구를 챙기고 나온 크로우는 곧바로 학생회관 으로 향했다. 식당 테이블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 들이 크로우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온다. 오, 크로우. 오늘은 수업 안 빠 졌어? 잡화를 파는 제임스가 반색하며 외쳤다. 크로우! 소식 들었어? 럼버 블리츠가 복귀한대! “어.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이따가 얘기할게.” 크로우가 고개만 까닥이고 계단으로 척척 걸어가자 남은 사람들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래요? 평소답잖게.” “그러게…….” 어쨌거나 화제의 주인공은 남들이 뭐라든 상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서 학생회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참이었다. 안에 있던 서넛의 이목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10


“어, 너는.” “크로우 암브러스트.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크로우가 샐샐 웃으면서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 왜, 학생회에 이런 애 하나 있지 않습니까? 일요학교 학생만치 쪼끄매서 제 가슴까지밖에 안 오고, 힘도 없고, 그런데 일 떠안기는 좋 아해서 만날 서류에 얼굴 박고 있고, 최근에는 손가락도 다쳐서 붕대 감 고 있고.” “토와? 토와라면 지금 수업 중일걸. 토와는 갑자기 왜 찾지?” 그런데 학생회실에 불쑥 쳐들어온 1학년의 얼굴이 답을 들은 표정치 곤 썩 개운치 않았다. 아니, 도리어 못마땅한 듯 미간을 홱 좁혀버렸다. “그걸, 아는 사람들이, 그러느냔 말이지.” “뭐, 뭐야, 갑자기.” “회의 기록, 안건 수리, 대안의 실제화. 학원제에 관련된 서류 작성. 이걸 다 그 콩알만 한 꼬맹이가 하고 있잖아. 댁들이 이렇게 세상 좋게 앉아나 있는 동안에 말임다. 덕분에 쉬지도 못하고 다친 손가락이 퉁퉁 붓기만 했더라고. 어떻게 생각하쇼?” “아니 그렇게 말해도 우리는…….” “토와가 일을 많이 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학생들이 뭐라고 답할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안쪽에서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걸상에 앉아 있던 귀족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왔다. “자네는 나와 얘기하지.” “회장님!” 학생들이 직함을 부르자 크로우는 혀를 찼다. 아. X됐다. 그냥 적당 히 면박 주면 임원들이 알아서 양심껏 일 좀 빼주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11*


학생회장이라는 사람이 얘기하자는 건 뭐람. 뭐, 애초에 답 없는 승부라 면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입 잘 놀리는 쪽이 이기는 거다. 크로우는 눈 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얘기? 저는 하고 싶은 얘기 다 했습니다만.” “1학년 IV반 크로우 암브러스트. 일개 학생이 학생회 임원의 처우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있나?” “VI반이기도 하죠. 그 꼬맹이랑 같은 반이란 거지.” “VI반은 ARCUS 테스트의 편의를 위한 비공식 명칭이지, 정식으로 분 반된 반은 아니야.” “어째 회장님이 당장 아는 대로만 말하심까아. VI반은 엄연히 담당 교관에 커리큘럼도 따로 있는뎁쇼. 그 교관이 영 못 미더운 팔푼이라 문제지만.” “반이야 어찌 됐든, 우리는 자네를 잘 알고 있지.” 학생회장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크로우를 가리켰다. “무단결석의 일인자. 교관님들의 최고 요주의 대상. 사라 교관님과 함께 미성년 음주를 하질 않나, 학교 대대적인 사행성 이벤트를 기획하 던 것을 학생회 측에서 저지한 적도 있지. 자네야말로 현재 토르즈 최 고의 문제아 아니겠나.” 크로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거, 여기서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 “자네는 우리 학생회의 적이라는 거다.” “저어억?” 어이가 없어 크로우는 입을 딱 벌렸다. “참 내, 학생회라는 거, 무슨 무력 단체나 저항 단체 같은 겁니까?” “자네같이 불량의 표본 같은 학생이 하는 말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 들일 이유가 없단 거다. 더욱이 교내에서도 손꼽히게 성실한 우리 토와 12


허셜 양에 대한 것이라면.” “그, 미안하다, 크로우. 회장님 말씀이 강경하긴 하지만, 지금 학생회 에서 토와가 하는 만큼의 일을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없어…….” “응, 지금 학원제 준비 때문에 다들 업무량이 만만치 않아서, 토와가 아니면 우리는 상당히 곤란해져……. 좀 이해해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리가 띵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몰아가고 있 는 거지? 그리고 그보다 먼저, 화가 났다. “그래서 결론이 고작 그겁니까? 토와 일을 더 빼줄 수가 없다, 그 말 하나 하려고 문제아니 적이니 들먹거린 거?” “……아니. 물론 그 말 하나 하려고는 아니지. 그래서 우리가 자네에 게 제안할 게 있다네. 허셜 양에게 할당된 업무를 없앨 수는 없으니, 자 네가 그 일을 나누어 맡으면 되는 거 아니겠나.” 크로우는 헛웃음을 쳤다. “이거 벼룩의 간을 빼먹을 사람들이네. 노동착취 좀 그만 시키라고 왔더니 두 배로 노동을 시키겠다는 거죠, 지금?” “두 배가 아니라, 두 사람이 일을 맡음으로써 개개인의 업무량을 절 반으로 줄이자는 말이라네. 아까 들으니 자넨 허셜 양의 업무 내역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더군. 그렇다면 더욱 망설일 바 없지 않겠어.” “저기요. 망설이는 건 이쪽 몫입니다요?” “그래, 자네 말이 맞네.” 학생회장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허셜 양의 일손을 도와주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아닌 자네에게 달린 일이지. 자네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는 거야. 이거 실례했네.” “거 적당히 좀 몰아가쇼.” 크로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황이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 러니까 이 사람 아마, 진작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지. 이렇게까지 하는 13*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께름칙했다. 그러니 일단 여기에서 빠져나가면, 나가면……. 크로우는 아까 밴드를 친친 감고 있던 자그만 손을 떠올렸다. 손안에 쏙 잡혀 들어온 작은 손과 쉽게 균형을 잃고 넘어지곤 하는 작은 체구. 뭐, 딱히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지. 크로우는 쳇 하고 혀를 찬 후 책상을 탁 쳤다. “알았다고.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꼭 나한테 일을 맡기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할게. 하면 되잖아. 됐죠? 대신 확실히 하라고 요.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토와 그 꼬맹이 일을 도와주는 거라고.” “좋다. IV반 크로우 암브러스트. 자네를 임시 학원제 준비 위원으로 임명하마.” 회장이 다부진 표정으로 크로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허……, 그렇게까지 본격적인 겁니까?” “그렇고말고.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아니겠나. 추가 사항은 토와를 통해서 전달하도록 하지.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니 이만 가보게나.” 그리고 크로우의 등을 밖으로 떠밀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하는 눈빛에 담긴 것은 분명히, 장난기였다. 웃 음을 못 참겠다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학생회실의 문이 쾅하고 닫혔다. 복도로 쫓겨나듯 내쳐진 크로우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와아, 이거 무지하게 수상하네.”

“이제 나와도 된다네.” 회장이 고갯짓하자 옆에 닫혀 있던 문이 조심조심 열렸다. 학생회 준 비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라는 문패가 걸려 있지만 사실 상대하기 곤 14


란한 사람이 왔을 때 없는 척하기 딱이라서 대피소로 쓰일 때가 더 많 은 방이었다. 전신 라이딩 수트를 빼입은 여자가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아아, 갔군요.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요. 계속 주의를 환기시켜 주셔 서 감사합니다.” “자네는 준비실 안에서 가만히 있었는데 들킬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 가?” “그는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니까요.” 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자 안젤리카가 붙임성 좋게 웃으며 두 주먹을 맞대고 동방 식으로 인사를 했다. “후후, 아무튼 갑작스런 부탁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로그너 양의 부탁이니 일단 받아들이긴 했다만 말일세. 정말 이렇게 하면 진전이 된다는 건가? 두 사람, 서로 너무 다르지 않은가. 태도나 말투부터 외모까지 통하기는커녕 비슷한 부분을 찾기 힘들어 보이는데.” “바로 그 점이 재밌는 게 아니겠습니까. 공통된 점이 없다. 그래서 회장님께 도움을 요청한 거죠. 서로 호감은 있으니 함께 지낼 시간만 만들어주면 뭔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람 간의 차이란 것이 서로 마음이 통하는 데 의외로 큰 장애가 될 수 있어서 말이네.” “토와처럼 아까운 아이에게 크로우 같은 불량 학생은 걸맞지 못하다, 이런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도 저의 친우입니다.” 안젤리카가 그녀로서는 드물게 진지한 눈을 했기에 회장은 서둘러 손을 내저어야 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아니, 오해를 사는 듯하니 이 이야긴 그만 두지. 두 사람이 서로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한가?” 15*


“방금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회장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거나 저 치는 허셜 양이 최우선이구나. 이거 허셜 양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되겠더군.” “옆에서 보고 있으면 화가 날 정도라니깐요. 자, 회장님도 저희 연애 조작단에 가입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학생회장은 겸직은 금물이라네.” “이거 아쉽게 됐군요.” “그래도 허셜 양의 의중만 확인된다면 내 있는 힘껏 돕도록 하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냥 딱 보면 보이니까요. 저의 토와를 위해 하는 일인데,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죠.” 안젤리카의 대답에 한숨이 섞였다. “사실 저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저의 귀엽고 바르고 사랑스 러운 토와가 어디가 부족해서 저런 녀석에게서 눈을 못 떼고……, 하지 만 보기보다는 믿을 만한 남자니까, 서로 마음만 확인한다면 참 좋을 텐 데요.” 이 말을 시작으로 안젤리카가 사랑하는 그녀를 더 큰 행복을 위해 떠 나보내야만 하는 자신의 비장한 마음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했기에, 학 생회 임원들은 모두 안젤리카를 위로하려고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렇 게 몇십 분이 지나자 안젤리카는 학생회실 안에 있던 모두에게 작전에 대한 협조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토르즈 연애조작단 단장이자 참모 를 겸직하는 안젤리카 로그너의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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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를 대강대강 살피던 크로우가 고양이처럼 기묘한 소리를 내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흐아아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꿈쩍없이 앉아 있는 건 적성이 못 돼. 그냥 지쳐버린다구. 오후 수업도 땡땡이치고 싶다아. 하필 정체경제라니, 틀림없이 졸고 말 거야…….” 옆에서 같이 일하던 토와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애초에 왜 그런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야, 크로우 군. 지금이 라도 회장님께 얘기할 테니까 크로우 군은 그냥 쉬도록 해. 원래는 다 내 일인걸.”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기세 좋게 쳐들어간 학생회실에서 도리어 코가 꿰여 나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당사자가 모른 채로 이루어진 약속 은 곧 토와에게 전해졌고 토와는 몇 번이나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그때 마다 크로우의 대답은 지금 같은 식이었다. “안 되지, 안 되지. 이걸 다 혼자 하겠다고? 너는 그런 식으로 남 수 명 조금씩 늘려주다가 저가 제일 먼저 죽을상이야. 어떻게 그냥 두냐.” “……나는 크로우 군이 좋은 사람인 건지, 나쁜 사람인 건지 모르겠 어.” “응?” “아니. 아무튼 땡땡이는 안 돼, 크로우 군. 안 그래도 지금 출석이 아 슬아슬한데 교감 선생님께 찍히면 정말로 진급하기 힘들어져. 일 끝나 면 내가 바로 손잡고 교실에 데려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우리 서기님은 왜 또 요새 빡빡해졌을까.” 책상 위에 등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끌어안은 채 괴로워하던 크로우 가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토와의 눈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 밀었다. “자, 토와.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이 학교의 누구라도 잘 알고 17*


있는 사실이 있지.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거야. 나는 네 성실 함을 존중하니까, 너도 내 불성실함을 존중해줬으면 해.” 크로우는 미간을 좁히고 짐짓 목소리를 진지하게 내리깔았다. 하지 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말? 아닌데. 크로우 군은 별로 내 성실함을 존중하지 않잖아. 그 러니까 나도 크로우 군한테 참견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선까진 서로 존중할 필요가 있지 않 겠냐는 얘기지. 나 이래 봬도 시험 평균 이상은 가뿐하다고? 출석 점수 까지 더했을 때…… 좀 문제가 생겨서 그렇지.” “응. 그래서 내가 크로우 군을 걱정해서 이러는 거잖아. 벌써 몇 명 은 크로우 군, 재수 없다고 싫어한다고.” 토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죠르쥬. 내가 얘한테 뭘 좀 잘못한 것 같다. 원래 이런 말 아무 렇지도 않게 하는 애였나?” “하하, 잘못한 줄은 아는구나.” “……응. 잘 모르겠지만 내가 정말 잘못했나 봐. 하하. 내 편이 없 네.” “당연한 소릴 하는군.” 안젤리카까지 한마디를 거들자 크로우는 책상 위로 고개를 축 늘어 뜨렸다. “항복, 항복. 좀 봐 줘. 너네 요새 들어서 유독 나한테 가차 없다.” 그리고 그동안 안젤리카와 죠르쥬가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저거 정말 나쁜 녀석이지.’ ‘그러니까 말이다.’ 아까 크로우가 얼굴을 들이민 이후로 토와의 뺨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안제.” 그 와중에 토와가 갑자기 안젤리카를 불렀다. 18


“불렀어, 토와?” 대답하는 안젤리카의 눈빛이 평소보다 진득하니 수상쩍은 것을 크로 우는 금방 눈치챘다. “학생회에서 교감 선생님께 학원제 날까지 풍기 단속을 주문받은 거, 너도 알지? 그런데 최근에 안제에 대한 제보가 있었어. 안제가 학년 불 문하고 여학생들을 불러내고 있다고.” “후후, 질투하는 거야? 걱정 마, 토와. 나의 가슴 속 가장 소중한 장 미는 너뿐이니까.” “질투하는 건 아닌데……, 조금 이상해서. 안제가 조금, 아니 많이 밝 히기는 해도, 자신의 절도를 아는 사람이잖아. 갑자기 이렇게 많은 여학 생들을 만나는 건, 역시 이상해.” “아아, 사랑스러운 토와가 그렇게 말해주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하 지만 모처럼 이렇게 멋지게 태어났건만 가슴 설레는 여학생들의 부름을 무시하는 것도 실례거든. 어찌할 수 없잖아.” “……안제도 참. 아무튼, 걱정하게 하지만 말아 줘.” “라져.” 그리고 또 안젤리카와 죠르쥬가 서로 눈짓하는 것을 크로우는 놓치 지 않았다. “아, 이런. 죠르쥬. 약속한 게 있었지. 우리 둘은 이만 먼저 나가보 지.” “무슨 약속?” 크로우가 묻자 안젤리카는 씩 웃어 보였다. “그건 비밀이야.” “비밀? 안젤리카 로그너 아가씨, 비밀 같은 것도 키우는 사람이었 어?” “후후, 물론이지. 크로우 암브러스트만 간혹 답지 않게 비밀스러운 19*


척 할 줄 아는 건 아니란다. 자. 늦기 전에 가자, 죠르쥬.” 안젤리카가 곤란한 얼굴의 죠르쥬를 끌고 가다시피 데리고 나가자, 회의실에 토와와 둘만 남은 크로우가 혀를 끌끌 찼다. “하. 수상하다, 수상해. 저 녀석들 정분이라도 났나? 왜 자꾸 서로 눈 짓을 하고 그러지.” “정분…… 나는 것도 좋지. 헤헤.” “얼씨구. 학생회 임원이 대담한 말씀을 하시네.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교감이 들으면 기절할걸.” “뭐 어때, 남자랑 여자잖아.” “응? 그 말 듣고 보니 좀 이상하다. 젤리카 취향이라면 여자 쪽 아닌 가?” “꼭 사람이 평소 취향에 맞는 사람하고만 만나는 건 아닌걸.” 토와가 작게 웃으며 막 결재한 서류를 뒤로 넘겼다.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높은음으로 귀를 긁다가 금방 사라졌다. 찰나의 정적 속 에 크로우는 방금 대화의 내용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들어보니 토 와는 침착하게 서류의 결재를 해나가고 있었다. 괜히 멋쩍어져 크로우 도 서류에 얼굴을 박았다. “우리 봄에 입학했는데 벌써 가을이잖아, 크로우 군. 교장 선생님의 요청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동안 마음이 통한 학생들이 만난 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일 아닐까? 아! 물론 불건전한 이성 교제를 뜻하 는 건 아니야! 나도 학생회 일원이니까!” 정신없이 서류를 넘겨 보던 토와가 서둘러 앞으로 양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구. 아무튼 순 꼬맹이라니까.” “……으으, 이것도 왠지 기분이 좋지는 않네. 크로우 군, 전부터 말했 지만 나, 그렇게 꼬맹이는 아니니까…….” 20


“하하, 그래. 우리 토와 양도 참 복잡하시구만.” 사실 여기서 토와의 심경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건 흐뭇하게 웃으 며 상대를 바라보는 크로우의 얼굴이었지만, 본인이 그런 걸 알고 있을 턱이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웃으며 토와를 바라보던 크로우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네 말대로네. 입학식이 엊그제 같은데 가을이라니, 언제 이 렇게 시간이 흘렀다냐.” “헤헤……, 그렇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넷이서 ARCUS를 받을 때만 해도 우리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사라 교관님까지 해서 다들 첫인상이 굉장했거든.” “……나는 그때 널 처음 본 건 아닌데.” “흐엑?” “워낙 쪼끄맣잖냐. 눈에 안 띌 수가 있어야지. 입학식 때부터 와. 저 렇게 조그만 애도 사관학교 같은 데 들어오는구나, 하고 감탄했었어.” “그랬구나……. 키가 작은 것도 좀 장점이 되는 거려나?” “글쎄올시다. 아무튼 꼬맹이인 줄만 알았는데 너, 엄청 열심이더라 고. 그래서 꽤 감탄했지. 그래도 역시 친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던가. 나랑은 아주 정반대니까.” “헤헤, 사실 나도 그랬어.” “신기할 것도 없구만.” “그런데 특별실습이 있었으니까……. 크로우 군, 몇 번이나 나를 구해 줬잖아. 총 쏘는 법도 자세히 가르쳐줬고. 크로우 군이 알면 알수록 생 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거든.” “야. 대체 처음 이미지가 얼마나 바닥이었길래…….” “아냐, 그게 아니야! 나는 그냥, 크로우 군이 생각보다도 더 좋은 사 람이어서.” 21*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토와 너한테 좋은 사람이라는 말 들으면 내가 기분이 이상해져. 너도 참 어쩌다 나 같은 놈이랑 엮여 서 고생이 많다고.” 토와는 대답 대신 서류에서 손을 놓았다.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크로 우가 방금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토와는 반박할 말을 떠올 리는 듯 잠깐 곰곰이 생각하다가, 반박 대신 짧게 잘라 말했다. “크로우 군, 정말 고마워.” “응?” “돌이켜 보니까 크로우 군이 꼬맹이니 뭐니 짐짓 밉살스레 말해서 그 렇지, 그동안 날 많이 보살피고 챙겨줬잖아. 그런데 거기 대해서 고맙다 는 인사는 제대로 안 한 것 같아서…….” 크로우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예의 그 흐뭇한 미소였다. 토와는 크게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하지 않을 만큼 사랑을 받고 자라왔지만, 이런 표정과 감정은 그동 안 겪은 것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토와는 크로우가 스스로 어떤 얼굴을 한 채인지 자각하고 있을까 궁 금해지곤 했다. 가을 햇살이 간지러웠다. “하하, 고맙다는 말은 됐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뭐. 네가 그 몸으로도 열심히 일하는 거 보면 괜히 뿌듯하고, 또 한편으로 걱정도 되 고. 너무 작아서 내가 일부러 챙겨주지 않으면 어디서 픽 쓰러져버릴 것 같아서, 여러 마음이 섞여서 이렇게 지켜보게 된 거지, 어, 그러니 까…….” 크로우가 허공을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대. 정치경제 늦겠다, 토와. 얼른 정리하고 가 자.” “……응.” 22


토와가 웃었다. 오늘도 이렇게 웃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 절은 서늘한데 창문 너머로 비추는 햇빛이 계속 몸을 간지럽힌다. 결국 가을의 한낮은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 어중간한 온기가 썩 싫지는 않아서, 이런 뜨뜻미지근한 온 도로 벌써 근 반년째였다. 토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크로우와 함께 바지 런히 서류를 정리했다.


2. 동일궤도

전원 기숙사제인 토르즈의 학생 네트워크는 긴밀하고 신속하다. 요 새 들어 상상하기 힘든 조합이 부쩍 붙어 다닌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 져나갔다. 고목나무에 매미 같기도 하고, 개미와 베짱이 같기도 하고 넉살꾼과 잔소리꾼 같기도 하다고. 어쨌거나 소문이 퍼질 때는 이런저런 양념이 함께 붙는 법이라, 생각 이상으로 분위기가 괜찮다는 쑥덕거림도 함께 였다. 토와 허셜은 공부와 학생회 업무에 열중하느라 바로 눈치채지 못 했지만, 발이 넓은 크로우 암브러스트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미묘하 게 따뜻한 눈빛을 받기 시작했다. “여어. 요즘 봄이라며?” “잉? 봄이라니. 슬슬 쌀쌀해지고 있는데? 이 사람, 군사학 수업 따라 가는 데 스트레스받더니 드디어 이게 홱 도신 건가.” 크로우가 검지를 들어 관자놀이께를 쿡쿡 찌르며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귀염둥이랑 매일매일 붙어 다닌 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모른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이게 무슨 소린가, 설마하니, 토와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야, 이거 어림없는 소리 마십셔. 학생회에서 저번 도박 사건 눈감아주는 조건으 로 학원제 준비 도와주기로 해서 같이 다니는 거야. 네 보기엔 그 콩알 만 한 꼬맹이가 나한테 여자로 보이게 생겼냐?” 24


크로우를 놀릴 건수를 잡았다고 신나있던 옆방 동기가 단호한 부정 에 멋쩍어 입맛을 쩝 다셨다. “뭐, 그럼 말고. 사람 무안하게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하지만 크로우의 관심은 이미 대화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복도 끝 창문을 열고 빼꼼 밖을 내다보다가, 손을 창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비가 내리나.” “응. 아침에 트리스타 방송 안 들었어?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해서 한 참 쏟아질 거라던데.” “아하. 땡큐. 그럼 이따 보자!” 대답을 듣기 무섭게 크로우는 방에서 우산을 꺼내서 계단으로 향했 다. “역시 저놈, 요즘 묘하게 정신없는데,”

타닥 타닥.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이슬비가 삽시간에 굵은 장대비가 되어 건물 벽을 때렸다. 회의실에서 혼자 문서를 정리하던 토와가 팔을 끌어안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 춥다……,” 고개를 들고 뻐근해진 목을 몇 번 돌렸다. 서류에서 손을 떼고 자리 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한가득 껴서 바깥은 이미 어 두웠고 산발적으로 천둥번개까지 번쩍거렸다. “금방은 안 그치겠지. 꼼짝없이 못 들어가겠네.” 오늘은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 날인가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계까지 힘내볼까― 라고 생각을 해봐도 이미 방 안이 습기로 축축하니 서류 작업할 맛이 나지 않았다. 토와는 시린 창가에 뺨을 대고 빗줄기 25*


가 점차 굵어지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래서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응? 크로우 군.” 흐릿하던 형체가 거짓말이나 꿈처럼 금세 가까워졌다. 어느새 창가 까지 다가온 크로우가 씩 웃으며 손등으로 창문을 톡톡 쳤다. 토와가 마주 웃으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 어. 열지 마, 열지 마. 비 엄청 내리는데 무슨 짓이야. 너 감기라 도 걸리면 큰일이라고.” 창을 황급히 닫은 크로우가 빗방울로 범벅된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 모양을 뻐끔뻐끔해 보였다.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토와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크로우는 등을 돌려 걸음 에 속도를 붙였다. 그리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크로우 군!” 토와가 반색하며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순간에 맞추어 크로우가 주 먹을 들었다. 토와의 이마에 딱 맞는 높이라 자연스럽게 꿀밤을 먹이게 되었다. “으, 으?” “인마. ARCUS는 뒀다가 국 끓여 먹냐. 이럴 때는 나나 안제라도 부 르라고. 안제 녀석이라면 나이스 찬스! 라면서 좋다고 뛰어올걸.” “기다리다 보면 그칠지도 모르잖아.” “언제까지 기다리려고? 넌 또 남을 부를 생각 따윈 아예 안 했지? 어 쩔 수 없지, 이 형님이 또 챙겨줘야지.” “헤헤, 고마워…….” “엇차. 서류는 일단 이쪽 캐비닛에 넣는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26


가지고 나가긴 좀 그렇지.” 크로우가 캐비닛을 정리하는 동안 토와는 제 발치에 놓인 커다란 검 정 우산을 들어보았다. 교사 안에 크로우는 잠깐 들를 뿐이었다. 그런 데도 우산은 물기를 말끔하게 털어서 단정하게 여민 채였다. 모양 나게 접은 큰 우산을 토와는 품에 당겨 끌어안았다. 그리고 비에 젖어 짙게 얼룩이 든 크로우의 교복 어깨나 부츠 밑창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마 침내 캐비닛 걸쇠까지 닫은 크로우가 고개를 들었다. “어.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 아니야. 그럼 가자, 크로우 군.” 비와 흙으로 미끌미끌해진 복도를 지나서, 본교사 정문 앞에서 둘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바깥은 한 치 앞까지밖 에 보이지 않았다. 어째선지 그대로 말이 없는 크로우에게 토와가 멋쩍 게 우산을 내밀었다. “그러면 크로우 군, 우산 좀 들어 줄래? 기숙사까지 같이 가면 되겠 다.” “아니. 네가 들어.” “응? 크로우 군. 우리 키가 있잖아. 내가 우산을 들면 크로우 군은 못 쓰는……”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크로우가 재킷을 벗어 머리에 쓰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토와가 황급히 우산을 펼쳐 들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보폭 자체가 차이가 나서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폭우 때문에 시야가 부 옇게 흐렸다. 금세 멀어진 크로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우산대를 잡고 있으니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만 귓전을 때 렸다. 토와는 그대로 크로우가 사라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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