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꾸는꿈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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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소식지 제92호

2011

특집 ‘유연’ 이 만든‘불안한 노동 그리고 삶’

희망버스라는 축제에 흔쾌히 몸을 맡길 당신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사람 구의원이 된 떡집아저씨, 윤보욱 칼럼 10월항쟁 6, 학살 터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이달의 회원 아직도 꿈꾼다. 김성수 운영위원

대구참여연대는 회원의 회비 및 후원금으로만 운영됩니다 후원계좌 : 대구은행 036-04-000437-9 대구참여연대

http://www.civilpow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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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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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고담대구│구수용 ‘유연’ 이 만든‘불안한 노동 그리고 삶’ │차은남 희망버스라는 축제에 흔쾌히 몸을 맡길 당신을 기다립니다│한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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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람

구의원이 된 떡집아저씨, 윤보욱│정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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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0월항쟁 6, 학살 터│함종호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전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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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역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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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오세훈의 관제투표 소동, 더 좋은 민생·복지정책으로

고엽제매립문제가 말하는 한미관계│김선우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아야” │안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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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행사

회룡포 ; 자연이 남긴, 누구에게나 개방된 로열석│신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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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지락

참여하는 투사가 되자!!│김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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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회원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을 아직도 꾼다. 김성수 운영위원│이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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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설명 2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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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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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주민자치 소식 구미참여연대는 무료기타교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이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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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보고·신입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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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비납부·후원인 명단

대구참여연대는 지금

등록번호 대구라01132 등록일 2000년 8월 4일 제호 함께꾸는꿈 간별 격월간 디자인 참디자인 발행일 2011년 9월 15일, 통권 92호


│여는 글│

고담대구 글. 구수용 (미디어위원장, sykoo@tsu.ac.kr)

범죄와 부패, 탐욕의 도시. 폐쇄적이고 암울한 회색도시. 배트맨이 사는 도시. 고 담시티(Gotham City). 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 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미국의 욕인 갓 댐(God damn)에서 유래된 이름이 라는 말도 있는 이 만화 속의 도시이름을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에 붙여 부르곤 한다. 고담대구. 물론 대구가 범죄와 타락의 도시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세계 토픽 감이었던 지하 철에서의 굵직한 사고 두 건과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황당한 사건들로 인해 외지인 에게는 그리 살만한 도시로 비춰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제 3 의 도시를 자처하지만 각종 지표는 전국 최하위권인 현실과 선거철만 되면 다른 지 역에서 놀랄 정도의 폐쇄성을 보이는 것도 대구에 이런 오명이 붙는데 한 몫을 했 을 것이다. 옛날에 대구가 능금, 섬유, 한약, 무더위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면 지금은 무엇이 대구를 대표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 걸린 대구홍보 물을 보고‘대구를 알릴 것이 이렇게 없나’ 하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꼈다. 찜갈비와 막창. 이대로는 안 된다. 무언가 바뀌어야 될 것 같다. 과거의 영광은 뒤로하고 살기 좋 은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제대로 무언가를 해야 될 때가 됐다. 최근 대구는 3D, 의 료, 로봇, 모바일, 나노분야의 대형 사업들을 유치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 다. 하지만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이런 걱정 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구시는 돈만 들이고 남는 것이 없었던 밀라노 프로젝트의 실 패를 거울삼아 사업진행에 내실을 기해 대구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 이다. 지금 대구에서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한창이다. 곳곳에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지만 경기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땀방울이 이를 상쇄시키는 듯하다. 대구가 가진 많은 문제의 중심에도 문제 해결의 중심에도 대구시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 모두 고담대구를 지키는 배트맨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

02 03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특집│

‘유연’이 만든‘불안한 노동 그리고 삶’ - 2011년 다시‘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고민하다... 글. 차은남 (민주노총 대구본부 선전총무국장, alswneorn@hanmail.net)

“우리 딸도 비정규직이에요. 그래서 남의 일이 아니다 싶어 이렇게 딸이랑 함께 왔어요.” 지난 7월 30일 부산 영도로 향하는 3차 희망의 버스를 탄 50대 아주머니의 이야기이다. 비정규직 딸을 둔 엄마는 1박 2일 노숙을 감수하고 먼 길을 왔다. 2011년 비정규직, 정리해고 문제로 뜨겁다. 2001년 한국통신계약직노동자의 투쟁으로 본격화된 지난 10년 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정규 직이 문제가 있는 고용형태이며 비정규법안은 악법이라는 사실을 사회화시켰다. 그리고 이제 저 마다 방식 과 수준이 다르기는 하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인‘비정규직 없는 세상’ 에 대해 더 많은 공감대와 목소리 그리 고 더 폭넓은 행동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공감대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물으면서 걷는다’나에게 물으며 동시에 모든 이에게 물으며 더딘 걸음을 함께 내 딛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을 계속 이어간다. 신자유주의 20년,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며 이제는 더 이상 정규직 채용은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정규직 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그 뒷자리는 비정규직이 채워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유연화의 목적은 언제라도 자유롭게 해고하는 것에 있다. 비정규직은 언제라도‘합법적’ 으로 해고할 수 있다. 그로인해 임금과 노동조건도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단결하여 투쟁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만성적인 고용불안, 저임금 그리고 사회보험 적용도 매우 낮은 편이다. 상황이 이러하지만 비정규직 조직률은 한국노총을 포함하여도 3% 수준이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 - 일반화된 고용형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이지만 근로기준법이 아니라‘비정규직 특별법’ 을 만들어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법적으로 인 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2006년 만들어진 개정된 파견법과 기간제법에 의해 뉴코아-이랜드 노동자 등 무수히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거나 외주화 되었다. 이명박정부와 한나라 등은 100만 해고대란이란 뻥을 치며 사실상 기간제한을 없애버렸다. 법이란 합법적 테두리를 통해‘모든 업종에 제한없는 비정규직 사용’즉 해고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하고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특별하고 개선되어야 할 고용형태가 아니라 마치 일반적 고용형태인 것으로 만 들고 있다.


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권리가 필요한 것이다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고용형태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마치 신자유주의가 일반화 되면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당연한 것처럼 되어 모든 삶의 형태가 왜곡 되듯이 노동자들은 하루살이 인생으로 자신의 삶의 전망을 실현하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비정규직 문제 - 보호가 아니라 권리가 필요하다 가장 흔한 오해는 비정규직 문제가‘사회적 약자’ 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정규직들도 사회적 약 자이므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정규직은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보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권리가 필요한 것이다. 또 다른 오해는 비정규직 문제를‘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가진 이들의 문제’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이미 존재하였으나 문제는 정부와 자본이 신자유주의 유연화를 시도하면서 전 체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를 시도하고,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만들어 전체 노동자의 노동권을 박탈한다 는 것이다. 더불어 아직은‘비정규직 문제’ 라는 추상적인 문제가 사회화 되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에서는‘고용불안’ 과‘저임금’ 문제만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차별 등으로 인한 인권의 문제, 정치적 권리의 문제, 그리고 건 강과 생존의 문제 등 다양한 방안의 의제들이 부각되고, 이러한 내용들이 사회화될 때 온전하게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화될 수 있다 비정규직문제 -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만드는 투쟁으로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된다고 해도 정권과 자본의 노동권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장시간 노 동과 끝없는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결국 비정규직 철폐는 일자리문제를 넘어서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안정된 고용을 넘어 신자유주의시대 불안정노동이 일상화 된 시기에서‘권리’ 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안정되고 떳떳한 일자리의 권리,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 사회보험의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권리, 자주 적 단결을 위한 노동조건·생활조건의 결정권,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권리 등이 제출되어야 하고 이러 한 권리의식을 확대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끊임없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포기의 강요... 사실 이 글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 다만 구태의연한 글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고민의 계기가 되길 바라며 갈무리 한다.

04 05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특집│

희망버스라는 축제에 흔쾌히 몸을 맡길 당신을 기다립니다 글. 한상훈 (대구민예총 사무처장, ktpac@hanmail.net)

집회는 축제다

고스란히 이어진 집회이자 축제였다. 애초에 축제

국사회에서 축제는 어디까지 왔는가? 산업화

는 공동체를 위한 제의였고, 많은 문화와 예술은 경

이후 마을공동체가 해체되자 가을걷이 이후

계에서 꽃을 피운다. 때문에 집회는 축제와 닮아 있

벌어지는 자발적 마을동제가 사라졌고, 관에서 만

을 수밖에 없다. 한때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그들의

든 관변축제들은 알량한 의전과 지리한 무대행사,

엄숙주의와 호전성을 그대로 닮았었던 집회가 축제

어지러운 야시장으로 점철되어 지리멸렬할 뿐이었

의 장으로 변화된 것은 독재정권의 몰락, 민주주의

다. 지방자치제가 시작되자 각 지자체장들이 축제

의 회복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게 축제 같았던 집

를 세금으로 하는 일종의 선거운동으로 인식하여

회문화는 이명박 정권 초기에 있었던 광우병쇠고기

창의적 기획을 도입하거나 문화저변의 성장을 고려

수입반대집회를 정점으로 휴지기에 들어간다. 가장

하지 않은 채 외형과 규모에 집착하는 기형적 현상

크고 강렬한 난장을 벌였음에도 작은 성과조차 거

이 이어졌다. 이렇게 조직동원형 관변축제로 점철

두지 못하고 꺾여버린 희망을 다시 모아내기란 쉽

된 한국의 축제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현재까지

지 않았다. 거센 저항이 허물어지며 시민운동과 노

이어지고 있지만 축제의 본의를 왜곡시킨 채 소수

동운동, 진보정치운동은 수십 년간 쌓아왔던 성과

의 외적성공만 드문드문 도드라질 뿐이었다.

들이 수년의 짧은 기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신에게 공동체적 신명과 넘실대는 광란의 파도

간 대중과 함께하지 감수성, 조직집회와 성명서를

에 실려 출렁댔던 기억은 과연 언제였던가? 아마 대

벗어나지 못한 관성 등 간과되었던 약점은 고스란

부분의 국민들이 기억하는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활동가들은 혼란과 무기력

의 거리응원은 누구하나 기획하는 사람도 없이 벌어

함에 빠졌다. 민중들은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에

진 기적적인 난장이었다. 구색을 맞춰 이리저리 배치

걸었던 작은 희망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해놓은 관변축제의 갑갑함에서 해방되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한 가지 지향점을 향해 간단

희망버스라는 또 다른 양상의 축제

며, 서로의 실수에 관대했다. 이러한 풍경들은 성공

적으로 평가받는 대형집회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도 살아 내려온 적 없는 크레인 위로 홀연히 올라

한 구호를 외치며 어울렸고, 상대의 열정을 북돋았으

느 날 밤, 세상이 삭막해지고, 조직이 붕괴되 어 맞닥뜨린 절망 앞에서 한 여인이 그 누구

간다. 한손에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스마트폰을, 집회문화와 축제문화

다른 한손에는 살아내려 올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드컵 이후로 이어진 미선이·효순이 추모집

꼭 쥔 채. 그 무모한 도전에 대한 소문이 천천히 퍼

회, 故노무현前대통령 탄핵반대집회, 광우병

지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개인들이

쇠고기수입반대집회는 잊혀졌던 6월항쟁의 열정이

유령처럼 하나둘 나타나 인터넷 공간을 배회하기


시작했다.‘그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아 닌가, 노조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한번 가보 자, 나는 그림을 그릴거다, 그럼 나는 물감을 가져 오마, 나는 종이를 가져오마, 난 그 옆에서 춤을 추 겠다, 노래를 부르겠다...’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 해 떠돌던, 실체가 없던 개인들의 의지, 한 번에 허 물어질 것 같았던 느슨한 연대는 결국 안방에서 부 산으로 단번에 내달려 85호 크레인 앞으로 옹기종 기 모였다. 높은 망루 위에서 홀로 다른 세상을 기

게 넘어가 비밀에 붙여지고, 개인의 자유에 맡겨졌

다리는 한 여인을 만나러가는 낭만적 이야기는 어

던 즐거운 놀이가 조직된 저항행동을 위한 고난과

느 순간 논리의 힘을 넘어섰다. 절망적 상황에서 희

의무를 강요당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망을 이야기하는 공상, 폭력적 대응 앞에 툭툭 내던 지는 재치, 처절함을 대신하는 신명나는 놀이, 이

다시 즐거운 반란을 꿈꾼다.

을 현실의 난장으로 풀어내자 2011년, 가장 아름다

운 축제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적 희망버스는 노선수정이 절실하다. 결국 희망버

역설적 미학에서 시작된 희망버스가 온라인의 희망

유로운 개인의 연대라는 간판을 내걸고 승리 를 위한 강성대오로 달리는 현재의 이율배반

스에 섞여 탑승한 자유로운 대중과 운동판의 선수 희망버스는 진화하고 있는가?

들이 서로를 오해하는 현실이 현재 한국사회의 운

정하게 바라보면 1차 희망버스의 미덕은 2차,

동 혹은 진보적 행동의 현주소일 것이다. 희망버스

3차, 4차를 거치며 차츰 옅어지고 있다. 김진

는 한진중공업이나, 자본가 조남호나, 이명박 정권

숙을 영웅화하고 꼭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무서운 목

을 향한 저항인 동시에 우리 안의 치열한 싸움이기

적의식은 2차 희망버스에서 폭력적 대치로 새로움을

도 하다. 이제 그냥 두면 절망의 종점으로 향할지도

조금 갉아먹었고, 비폭력 노선을 견지한 3차 희망버

모를 희망버스를 어떻게 다시 희망의 길로 회선하

스에서는 과거 집회에서 활용되었던 경찰을 교란시

게 할 수 있을까? 동맥경화에 걸린 시민단체들은

키기 위한 정보전이 도리어 참가자들의 발목을 잡았

어떻게 대중과 호흡할 수 있을까? 희망버스도, 한

다. 예상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조바심과 정

국사회도, 관성화된 운동이 아니라 조직되지 않은

교하게 기획하려는 욕심은 결국 4차 희망버스를 영

개개인의 아름다운 반란, 느리지만 올바른 길로 나

도의 크레인이 아니라 서울의 야산으로 올려 보낸

아갈 집단지성에 의해 향방이 좌우될 것이다. 여기

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모인 대중이나 운동

다음 희망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당신에게 이 버스

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소수의견자들이 만들어낸 새

에 타고 자신을 던져 세상과 맞서는 바보가 되어달

로운 축제는 횟수를 거듭하면 할수록 현재적 한계를

라고 부탁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더

떨치지 못하는 세칭‘현역선수’ 들에게 바톤이 넘어

가까이 웃고, 떠들고, 놀고, 논쟁하며 서로의 다름

가면서 민중대회 방식의 과거형 집회로 회귀하면서

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매워나가면서 제 궤도로 다

대중과 괴리되고 있다. 온라인에서 활짝 열려 공유

시 돌아올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희망버스가 다른

되고 논의되어야 할 논점들이 기획단이라는 소수에

축제를, 세상을 향하기를 기대한다.

06 07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사람과 사람│

구의원이 된 떡집아저씨

구의원

인터뷰. 정푸른 (기자단 해울, iampureuni@naver.com)

정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일반시민들은 정치가 보통 사람들과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하는데, 정치는 늘 시민들 가까이 있습니다. 사회생활 자체가 정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전까지는 대학을 졸업 하고 직장도 다녔었고, 자영업으로 떡집도 운영하며 평범 하게 살아왔습니다. 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더 불어 어우러져 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나 갈것인가 고민하고, 서민의 눈높이에서 변혁시키려 했던 노력들을 쭉 지켜봐왔습니다. 그런데 퇴임 후에 부엉이 바 위에서 돌아가시게 되는 현실을 참담히 바라보게 된 겁니 다. 물론 여러 시각이 있지만, 저는 기득권 권력이 노무현 대통령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판단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이대로는 안되겠다. 이런 정치현실들을 도저히 용 납할 수 없다.’ 고 생각해서 굳이 직업 정치인으로 나서게 됐습니다. 한 명만 뽑는 광역의원이나 자치단체장 이상의 선거와 는 달리, 기초의원은 2~3명을 뽑습니다. 한 지역구에서 2 등, 3등도 당선되는 것이죠. 대구지역에서 한나랑과 겨뤄 서 당선되기는 참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2등, 3등이라도 당선되고 보자는 마음으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기 초의원으로 출마해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치 대한민국 해방 이후 헌정사를 보면, 헌법은 정말 숭고한 가치를 갖고 있거든요. 따지고 보면, 과거의 유럽이나 프랑 스 대혁명에서 부터 자유, 평등, 박해의 정신과 헌법적 가 치들은 서양에서는 피를 흘려 쟁취한 가치들이거든요. 우 리는 그 좋은 가치들을 해방 이후에 전혀 피흘리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민주주의의 대 가들을 뒤로 지불하고 있어요. 4.19학생 혁명, 광주 민주 화운동처럼 말이죠. 그런데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대통령 을 죽음으로 몰아가게끔 부당한 권력들이 작용한다는 것 은 아직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이거든요. 거듭 강조하지만 젊은 청년과 학생들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 여해서 세상을 바꿔내고, 정당운동도 참여하고, 마음에 드 는 정당에 당비도 내고, 활동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기초의원 출마 당시 공약은? 대부분 기초의원 후보자들은 동네에 공원을 하나 만들 겠다, 작은 도랑에 다리를 건설하겠다는 현실적 공약들을 내곤 합니다. 저는 그런 것 보다는 행정적인 면에서 관행 처럼 이루어져 온 타성들을 바꿔내길 바랐습니다. 공개행 정을 요구하는 겁니다. 사실 행정권력은 국민들이 위임해 준 것이지, 자기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투명하게, 민주적으로 집행하라는거죠. 곧 조례안이 발의됩니다만 북 구의 주민참여예산제 같은 경우에도 그 예산의 쓰임새에 일정 정도 주민들이 참여해서 옳게 쓰이는지 그르게 쓰이 는지 따져서 시민들이 참여해서 예산을 짜자는 거예요. 이 런 주민참여예산제나, 구정에 대해 시민들이 심사에 참여 하는 구정 모니터링제와 같은 시스템이 민주적으로 이루 어진다면 감시와 견제가 된다는거죠. 이제까지는 감시와 견제가 잘 안되니까 일방적이고 부당하게 행정해도 주민 들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불합리하고 폐쇄적인 행정들 을 주민들한테 돌려주자. 투명하고 열린 행정으로 나아가 게 하는 그런 제도 좀 만들어보자.’그런 것들이 주된 공 약이었습니다.


구의원이 되신 후, 공약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북구에서는 진보 정당에서 진출하신 기초의원이 세 분 계시는데, 그래도 북구 구민들께서는 그 분들이 들어오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도 바뀌었다고 하시고, 변화된 모습을 보이 고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제 욕심은 더욱 큰 틀에 서 바꿔보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현실적으로 여러 한계가 있습니다. 대다수 공무원들이 타성에 젖은 관행들을 안바꾸 려 하고, 제도화하는 데에도 거부감 느끼고, 보수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수적으로 열세해 있으니까 한계를 많이 느낍니다. 그러니까 후배님들이 나중에 열심히 해서 기초의원에 나서면 좋죠. 그렇게 바꿔내야 합니다. 짧은 4년의 임기동안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기는 어렵지 만, 다른 의원들을 설득해서 좋은 방향으로 조례안도 통과 시키는 등의 성과들도 있습니다. 특히 북구는 기업형 슈퍼 마켓을 규제하는 조례안도 갖고 있고, 다른 구나 다른 자 치단체보다도 상당히 큰 폭에서 영세 자영업자들을 살리 는 쪽으로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책참여심의단, 민원심의단을 제안 하셨던데요. 어 떤 것이죠? 10억 이상의 많은 돈이 들어가는 정책 사업들은 이미 5년 전부터 심사가 되어옵니다. 그 사업에 대한 실현 가능 성, 공익성, 그리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지요. 노곡동 배수 펌프장 설치도 그렇게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 행되는 과정이 있죠. 그런데 여기서 시민 전문가들이 참여 하는 게 배제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대학 교수분들이 심 의하기도 하고 정책사업을 심의하는 심사단이 있긴 하지 만 대부분 지자체나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는 정도 로 관변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도 지지 않게 되겠지요. 그래서 정책참여심의단이라는 것은 양식 있는 시민 전문가 그룹들이 어떤 사업에 대해서 제대 로 따져보고 자문을 받자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구청장은 예산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 에게 혜택이 돌아가게끔 집행하고 예산을 써야 하는데, 일 방적으로 쓸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민원 사업들의 공공성과 우선순위를 따져보자. 국민의 소중한 세금을 제 대로 쓰게 하자.’ 는 것들을 제도화하자는 것이 민원심사단 입니다. 지금도 비슷한 제도들이 있지만 이런 내용을 선언 적으로 주장하면서 각성시키려는 거죠.

소속해 계신 주민생활위원회는 어떤 일을 하나요? 주민생활에 밀접한 복지나 생활문제들을 담당하는 주민 복지과, 주민생활지원과, 경제통상과, 환경관리과와 보건소 등이 주민생활위원회의 소관인데, 이들의 행정 집행이 제

대로 되고있나 감시, 감독합니다.

남은 임기동안 꼭 하고 싶은 일? 저는 구의원이긴 합니다만, 이번 총선 때 정치권력을 민 주진보권력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대구 지역에서도 물론이 고, 내년 12월에 행정 권력을 바꿔야 합니다. 대통령을 민 주적이고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사를 대통령으로 바꿔서 지금 고통 받는 서민들을 좀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민주 공화국을 만들고 싶은 꿈을 갖고 있습니다. 조그맣게 북구의회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관행적으로 이 루어져온 잘못된 일들을 뜯어고치고 싶습니다. 저 하나만 노력하기보다 전체적인 문화나 분위기를 바꾸어야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대신 우리 가 새로운 행정 문화나 바람을 일으켜야죠. 어렵긴 해도 제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들을 바꾸면 더욱 좋고요.

정치는 재미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요. 재미있어야돼요. 정치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자체도 재미 있고 행복해야 되거든요. 골치 아픈 정치도 재미있게 생각 하고,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해야 됩니다. 시민운동 도 마찬가지고요. 지금까지의 정치는 국민의 눈높이나 국 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 냉소주의가 팽배했 잖아요. 비리 문제도 있었고요. 법을 하나 만들어도 보통 국민들의 이익에 대변되는 법들을 만들어야 국민들이 공 감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것들이 투표장에 안 가 게 만들어요. 점점 더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 것이죠. 하지 만 그럴수록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끝까지 바꿔내야 돼요.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정책으로 만들어서 실현시 키는 정당에 투표하면 되는거에요. 내가 정당이 지향하는 정책을 보고, 지지하고, 투표하고 정당활동에 참여해야 됩 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선진 대한민국, 복지 대한민국으 로 가는 것이지요.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난 늘 주장하지만 대한민국을 큰 틀에서 바꿔야 해요. 크게 국가권력을 착한권력, 선한권력으로 바꿔야 되고, 국 민들을 정말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어내서 그렇게 바꿔내고, 그러면서 작은 틀 속에 들어가면 다 바 뀌는 거예요. 착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대통령을 해야 됩니다. 돈 100원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 한 가치들이 어떤가에 따라 세상은 바뀌는거예요.

08 09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칼럼│

활동가의 눈으로 역사를 보다

글. 함종호 (4.9인혁재단 상임이사, utopiaham@hanmail.net)

10월항쟁과 민간인 학살 10월항쟁 과정과 이후 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불법적으 로 학살당한다. 공식적으로는 10월항쟁의 직접적인 사망자가 1000여명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다. 사건 이후에도 지속적인 탄압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한다. 또한 10월항쟁 참가자는 정보기 관의 감시 명단에 올라 1949년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30만 명)되고 한국전쟁에서 모두 학살당한다. 1960년 4.19 당시 피학살자유족회가 유족 신고를 받은 바에 의 1960년 4.19 당시 피학살자유족회가 가창골에서 집단 학살 하면, 전국 114만 명, 그 중 경북지역 22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유골을 발굴하여 합장하고 비를 세웠다. 당시 포크레인 기사가 너무 많은 유골이 나오자 두려워서 작업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추정된다. 당시 유족회는 유족 신고에 따라 유골 발굴 작업을 실 시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음을 확인하였으나 5.16군사정 변에 의해 중단되고 발굴된 시신 및 학살 터도 모두 강제로 폐기되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유족회 간부 신석균, 이원식, 권중락, 이복녕, 이삼근, 이홍근, 김현구 선생님 등이 모두 사망하였거나 증언 능력을 상실하여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나마 남은 자료와 일 부 증언을 토대로 대구 지역의 학살 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대표적 학살 터 대구 인근의 대표적 학살 터는 가창골 일대와 학산 일대이다. 이 지역은 대구시 내에서 가깝고 깊은 골짜기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4.19 당시 발굴은 일부 지역에 서 이루어져 전체의 윤곽을 잡기는 어려우나 당시 신고 내용으로 볼 때 파동, 가 창골, 중석광산 일대에 수 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한 지역은 학산 일 대이다. 상인동, 본리동, 송현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학산은 원래 아주 골짜기였 고 현재 학산 아래 아파트 등으로 개발된 일대 전체를 가리킨다. 4.19 당시 이 지 역 일대에서 많은 시신이 발굴되었고 가창골에 버금가는 학살 터로 추정된다.

4.19 당시 학산 일대에서 유골이 수없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위 사진 은 본리동 쪽에서 발굴된 유골이다.

10월항쟁 학살 터 가창과 학산이 주로 한국전쟁 시기의 학살 터이었다면, 그 이전 10월항쟁의 직간접적인 관련자들이 주로 학살된 곳은 앞산 빨래터이다. 현재 남구청에서 앞산빨래터공원을 조성해놓은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두개골 에 대못을 박아놓은 시신이 발굴되어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대구형무소-가창골 그 투쟁의 길 필자는 최근 피학살자들이 대구형무소에서 가창골로 트럭에 실려 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들 었다. 트럭 짐칸에 집총한 헌병들이 둘러싸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끌려가는 사람들이 투쟁가를 목청껏 부르는, 열광적인 장면을 파동에서 수없이 보았다고 한다. 최근 몇 사람이 직접 목격한 사람에게 들은 이야 기를 증언하였는데, 모두가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사실일까? 필자는 그저 숙연할 뿐이었다. 그 래서 어설픈 시를 읊조린다.

중, 소규모 학살 터 이외에도 산골짜기, 강, 연못 등에 소규모 가족 단위에서부터 수백 명 씩 집단 학살된 곳 까지 수없이 많 다. 4.19 당시 발굴되어 언론에 보도된 학살 터만 언급해보면, 월배, 강창(강정), 칠곡 나환자촌, 신동재, 칠 곡 덕곡마을, 백안동, 봉무동, 파군재, 효목동, 능성동 등이 있다.

글을 마무리 하며 역사는‘흘러간 것’ 이 아니라‘흘러온 것’ 이다. 사회와 국가 속에, 개인의 삶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수구세력들은 당연히 역사를 흘러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국민과 진보는 역사를 단단히 붙들어야 한 다. 보수도 역사에 대해 수구와는 다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진정한 보 수는 역사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본리, 상인, 송현동의 교차 지점인 학산, 현재 학산 공원과 그 일대는 가창골과 버금가는 거대한 학살 터였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체제는 진보조차 자기 역사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 때 문에 우리 토양 속에 존재하지 않는 추 상적 이론이 난무하고, 우리와 실천적 경로가 다른 역사적 경험이 무비판적으 로 수용되고 있다. 운동은‘우리 삶 속에서’ ‘우리 삶의 역사 속에서’ 출발 한다. 10월항쟁의 10월항쟁유족들이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 '진실 규명' 결정을 받고서 밝은 모습으로 가창골에서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이를 국민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알리는 일에 우리 진보가 앞장 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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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항쟁 당시와 그 후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곳 이다.

가창골, 학산 공원, 앞산빨래터 공원에 10월항쟁, 민간인 학살 추모 비를 세우자! 가창골의 녹지에 제주 4.3평화공원 같은 역사 공원을 세 우자! 그러면 시민 교육장이자 놀이터, 청소년 수련장, 수학여행 코스가 될 수 있다. 변변한 기념 시설 없는 대 구로서는‘대구 방문’ 을 유도하는 경제성도 충분하다. 우리가 함께 꿈꾸면 그것은 결코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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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글. 전대환 (前공동대표·한울교회 목사, qooqle@naver.com)

친일반역자들 가운데서 법률에 따라 공식적으로 처벌 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 고, 친일파의 후예들이 아직까지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 닌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망증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건망증 자체가 크 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잊어버려도 괜찮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손택수 시인의 말마 따나 뭔가를 잊어버렸을 때, 오히려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다. “다람쥐의 건망증은 참으로 위대하다.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린 도토리들 이 자라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면 상수리나무숲과 숲이 불러들인 새 울음소리, 모두 가 다람쥐의 건망증 덕분이 아닌가.” 반드시 잊어버려야 할 것들도 있다. 체로키족 인디언들에게 이런 격언이 있단다. “과거를 잊고, 마음에서 화를 지우라. 아무리 강한 인간도 그런 무거운 짐을 견뎌 낼 수는 없으니.”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견뎌내기 어려운 짐은 얼른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 속에 화 가 있다면 일단 잊어버리고 볼 일이다. 따지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기억력’ 하면 금붕어가 떠오른다. 금붕어가 조그마한 어항 속에서도 그럭저럭 견디 며 살아가는 것은 기억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장식용 수중식물을 발견하 면 그것에 경탄을 한 뒤 이내 잊어버리고 유리벽에 닿을 때까지 헤엄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똑같은 식물을 보고 다시 감탄한다는 얘긴데, 그것이 미치지 않기 위한 금붕어의 자구책이라면, 괴로움이 너무 버거워서 기억의 줄을 놓아버리는 것은 사람 의 자구책일 것이다.

국치일 해방일 모두 8월에 화가 난다는 것은 마음에 불이 일어나는 것이니, 불이 나면 불부터 끄고 봐야 하듯 이, 마음의 불도 일단 끄는 게 순서다. 원인은 나중에 밝혀내도 늦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들이 있다. 8월에는 우리 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역사가 있다. 1910년 8월 29 일은 일본에게 나라를 잃은 국치일(國恥日)이고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이 된 날이다.


빛을 다시 찾은 광복절!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이 날을 두고 '독립'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에 독립한 게 아니라 이미 독립국가로 수천 년 을 살아왔기 때문에 독립기념일이 아니라 해방기념일이다. 미국 사람들은 1776년에 처음으로 '독립'한 게 맞지만 우리는 원래 독립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치일과 해방일은 영원토록 잊지 말아야 할 날이다. 일본 사람들이 요즘 독도 문제를 가지고 자꾸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데, 사실 이것을 독도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 다. 일부 일본사람들이 아직까지 우리나라를 물렁하게 보는 이유는 우리가 친일청산 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반역자들 가운데서 법률에 따라 공식적으로 처벌 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 고, 친일파의 후예들이 아직까지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 아 닌가. 큰 죄를 진 일본이 오랜 세월 만행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친일 앞잡이 들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들을 처벌하자는 말이 아니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잊고 미래지향적으로 가자는 말은 가해자 가 써먹는 전형적인 물 타기 수법이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했지만 원수가 분탕질을 할 수 있도록 협 조한 반역자는 금강석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해 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역자 이름 금강석에 새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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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일본의 침략과 친일파의 악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면 어찌 감히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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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같은 것을 가지고 일본이 딴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대마도라도 줄 테니 제발 이 제 그만하자고, 잊어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해야 할 판이 아닌가. IMF가 준 치욕을 잊고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정책을 펼친 결과가 요즘 증 권시장에 출몰하는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를 봐야 하는 것이라면, 일본이 준 치욕 을 잊고 너무 쉽게 넘긴 결과는 독도 문제와 동해 표기 문제를 놓고 일본이 억지를 부리는 것을 봐야 하는 일일 것이다. 어떤 미국 사람들이 일본 편을 들어서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해야 한다고 나서 는 것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사는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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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역뉴스│

고엽제매립문제가 말하는 한미관계 글. 김선우 (대구경북진보연대 집행위원장, dgjinbo@daum.net)

북 칠곡군 왜관에 캠프캐럴(Camp Carroll)이 라는 주한미군 기지가 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남과 북은 왜관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전선에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전투를 3개월 넘게 지속합니다. 한미연합군은 북의 남 하를 막기 위해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마저 한강철교처럼 폭파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갑니다(후에 이 다리는 ‘호국의 다리’ 라는 명칭을 가졌으나 이번 6월 25일 4 대강 사업으로 인해 불어난 수량과 유속을 못 이겨 붕 괴됨). 미국 본토에서 실려 온 군수물자가 지금의 캠프 캐럴 기지 위치에서 낙동강 전선으로 쉼 없이 보급되 었습니다. 결국 한국전쟁이 끝이 난 후 그 군수물자를 공급하던 자리는 미군기지 되어 버렸습니다. 조선시대 에는 일본인들과의 교역장소로 사용되던 왜관(倭館), 그 자리를 이제는 미국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캠프캐럴 기지는 1959년 설립되어 1961년 아시아 최대 군수보급기지로 조성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주둔 하는 모든 미군기지는 자체의 성격이 있습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미국 본토에서 실려 온 군수물자와 장비들은 부산항 을 거쳐 왜관으로 모두 운반됩니다. 그리고 이 물자 들을 전국으로 이동시키는 병참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왜관 캠프캐럴 미군기지입니다. 그렇 다 보니 왜관 IC와 가깝고 왜관역에서 직접 기지 내 로 들어가는 철도가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런데 평소에 언론에 이름날 일이 전혀 없던 칠곡 왜관이 5월부터 전국의 모든 언론과 국 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78년에 캠프 캐럴에서 근무했던 스티브 하우스라 는 퇴역군인의 증언으로 고엽제가 드럼통째 묻었다 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실 고엽제라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게 아닙니다.

고엽제라는 것은 지금도 농촌에서 사용하는 제초제 의 성능을 더욱 높이기 위해 2·4·5-T계와 2·4-D 계를 1:1로 혼합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 전에서 사용되었던‘에이전트 오렌지’ 입니다. 베트남 의 지형 특성상 수풀이 많다보니 북베트남의 게릴라 전을 막고 더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수풀을 모두 없 앨 필요성과 군인들에게 공급되는 식량을 수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미군은 베트남 전역에 고엽제를 무작위로 살포했습니다. 그러나 2,4,5-T계 제초제를 합성할 때 불순물인 다이옥신이 인체에 들어가게 되 면 5~10년이 지나서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일으 키는 등 악영향이 보고되기 시작하여 1971년에는 살 포가 중지되었습니다. UN은 고엽제를‘제네바의정 서’ 에서 사용 금지한 화학무기로 보고 베트남전쟁 이 후 고엽제의 사용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렇게 베트남전에 쓰다 남은 고엽제와 한반도 휴전선 DMZ지역에 뿌리다 남은 고엽제를 결 국 캠프 캐럴 기지에 불법으로 매립하는 범죄를 저지 른 것입니다. 미국의 규정에 의하면 고엽제는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있는‘존스턴’섬에 보관되어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이 땅에 들어온 고엽제는 어떻게 된 것 일까요? 스티브하우스씨의 증언이 나온 이후 한국에서 근무 했던 퇴역군인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군무원으로 근 무했던 한국인들의 증언도 나왔습니다. 결국 캠프 캐 럴 기지에 고엽제를 묻은 것은 사실이라는 얘기입니 다. 그러나 미군측은 고엽제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은 채 1978년 캠프 캐럴 내 화학물질을 저장하던 41구역에서 살충제, 제초제, 솔벤트 등 화학물질과 오염 토양을 헬기장 부근 D구역으로 옮겨 묻었으며 그 후 다시 그 오염 물질과 토양을 모두 파내 반출했 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당시 40~60t에 달 하는 오염 물질과 토양을 미국 본토로 가져갔는지 국


내 다른 곳으로 옮겼는지는 알지 못한다며 관련 기록 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오염물질을 다시 파낼 당시 캠프 캐럴의 주한미군은 고엽제 피해의 심각성을 충 분히 알고 있는 시점이라서 대규모 이동처리 기록이 분명히 남아있을 것이 일반 상식입니다. 미국이 공개한 1992년 미 공병단 보고서와 2004년 삼성물산 용역보고서를 의하면 41구역과 D구역, 헬기 장 지역에 극미량이긴 하지만 다이옥신이 검출됐습니 다. 다이옥신이라는 물질은 특성상 물에 잘 녹지 않으 며 이동이 적다고 합니다. 그 말은 결국 극미량이고 기준치이하라고 하더라도 다이옥신이 검출됐다는 것 은 토양오염이 심각하다는 증거입니다. 게다가 지하수 나 하천수에서 검출됐다면 이미 토 양의 오염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리고 또 하나 주목되는 건 다른 화학물질입니다. 지하 수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맹독성 발 암물질인 테트라클로로에틸렌 (PCE)가 국내 먹는 물 기준의 1110배, 트리클로로에 틸렌(TCE)이 47배가 넘으며, 중금속인 비소도 기준치 의 2420배, 수은은 808배, 페놀은 58배, 린단이라는 살충제는 최대 4380배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기준치 이상의 오염정도가 확인되면 바로 대한민국에 통보하 게 소파협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이 런 사실을 보고서를 통해 알고 있었으면서 한국정부 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결국 자기네들이 편할 때는 소파협정을 들이대고 불리할 때는 소파협정을 무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국 고엽제 매립사실이 증언으로 밝혀진 뒤 한 국정부와 주한미군은 어떤 때보다 신속하게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기지내와 기지주변에 대한 조 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사라는 것이 지금 고엽제 매립 여부와 오염 여부에 대한 진실 규 명에는 미치지 못한 채 미군에게 면죄부를 주는 '그들 만의 조사 ‘로 흐르고 있습니다. 기지 밖 수질조사 발 표 때는 극미량의 다이옥신이 나왔지만 기준치 이하 라며 불검출로 발표하고 중간조사 발표는 소문난 잔 치에 먹을 것 없더라는 속담을 몸소 증명해 보였습니

다. 결국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하거나 진실 을 향해 가는 조사로는 너무나 부족해 보입니다. 캠프 캐럴 기지에 고엽제 불법매립에 대한 사실이 알려진 후 벌써 석 달이 넘었습니다. 대구경북지역의 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왜관미군기지 고엽제 매립 범죄 진상규명 대구경북대책위’ 를 구성하여 기자회 견, 결의대회, 캠페인, 촛불문화제, 왜관주민문화제, 유인물 배포 등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활동들을 주민들과 함께 펼쳐 왔습니다. 물론 그 중 의 백미는 단연 왜관주민문화제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국민대책회의의 진상조사단에서 직접 왜관에 내려와서 기지 주변에 대한 지하수, 토양 조 사를 위한 시료 채취, 기지 주변 마을에 대한 역학기초조사 등도 실 시했습니다. 처음에 주민들이 가졌 던 색안경 낀 시각도 이제 많이 가 셔서 결국 서로의 목표가 같음을 확인하고 신뢰가 쌓이면서 공동의 행보를 걸으며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번 싸움은 SOFA 협정이라는 뒤 에 숨은 거대한 미국과의 싸움입니다. 결국 이 싸움 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왜관주민들이 투쟁의 주인으 로 나서야 합니다.

지막으로 왜관이라는 지명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지명, 왜 관. 고려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 해지자 그 회유책으로 낙동강을 이용한 교역을 허락 했고 임시로 먹고 쉬어갈수 있는 왜관(倭館)을 여러 곳에 설치했고 칠곡군 왜관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돼 왔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치열한 낙동강 전선이 형성 되면서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숨져갔던 곳, 전 쟁 이후 결국 전쟁 억제의 목적으로 주한미군의 공여 지로 100만평의 땅을 내어 준 곳. 언제까지 자신들의 친구이자 우방으로 알고 있었던 미군에게서 돌아온 것은 결국 자신들의 온갖 화학물질과 쓰레기를 무단 으로 매립하고 그 사실을 숨기기까지 했으며 지금은 제대로 조사조차 스스로 해 볼 수 없는 곳. 아픈 역 사의 기억만큼 이제는 제대로 된 한미관계의 정립과 미군기지 주둔의 문제를 왜관주민들이 스스로 고민 해 봐야 할 시기입니다.

14 15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글. 안진걸 (참여연대 사회경제국 팀장, ngo8518@pspd.org)

이건 소동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건 오세훈에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보편적 무상급식’ 을 할 것인

의한, 오세훈을 위한, 오세훈의‘관제 소동’ 이었다.

지, 오세훈 시장의 주장처럼 소득 하위수준 50%에

오죽하면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꽃이라는‘투표’ 를

게만(이것도 원래는 30%에게만 지원하겠다가 투표

거부하고‘참 나쁜 투표’ 라고 명명했겠는가. 그 누

를 앞두고 갑자기 50%로 바꿈) 급식비를 지원하는

을 할 것인지 묻는 것이어야 구도 이를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나라당도, 홍준 ‘선별적·차별적 급식’ 표 대표도 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하고 말렸다고 한

했고, 당연히 투표 문안도 그에 따라‘보편적 실시’

다. 그렇지만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세계최악의 관

와‘선별적·차별적 실시’ 를 묻는 것이어야 했지만,

제투표를 강행하였고, 그 관제투표 소동이 마감됨과

오 전 시장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한 실시시기를

동시에 자신의 표현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

내세워‘단계적 실시’ 냐‘전면적 실시’ 냐를 묻는 것

다. 우리 사회에 큰 상처를 주고 불필요한 갈등을

으로 투표 문구를 변질시켜버렸다. 전면적 실시를

야기한 책임을 지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그 순간

바라는 이들도 여러 사정상 사실은 단계적 실시를

까지도, 시민들을 나무라고 민심과 복지에 대해 악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번 관제투표는 변

담을 퍼부은 그가 아니던가.

별력도 없는 투표였고, 찍을 문안이 없는 정말 황당 한 투표였다 할 것이다.

이 관제투표 소동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외양은 주민투표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오 전 시

오 전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차별적 급식은 부자

장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치밀하게 기획하고

아이와 가난한 아이를 편 가르고, 가난한 아이를 기

주도한‘관제투표’ 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죽이고 상처받게 하는 반교육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었다. 그 스스로도‘주민투표’ 를 본인이 배후에서

그것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오세훈의 관제투표가 무

사실상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산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친환경 무상급식은

정도로, 관련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수도 없이 진행

초중학교 의무교육처럼,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한 바 있다.

아이들이 누려야 하는 의무급식이다. 아이들이 밥 먹는 문제로, 한 반에서 잘 사는 아이와 가난한 아 또, 이번 관제투표에서는 발

이로 나뉘고 낙인찍히고 위화감이 조성되는 상황을

의과정에서의 명의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헌법도 의

용 등 온갖 불법의

무교육은 무상으로 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문제점과 함께 투표

있고, 학교급식 역시 중요한 교육 과정이므로 당연

문안이 바뀌는 결정

히 무상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적인 문제도 있었다. 친환경무상급식을 둘

서울시의 경우 초등학교의 1~4학년에 대해서는

러싼 핵심 쟁점은 소득수

친환경 무상급식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타 시도처럼

준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아

5,6학년까지 친환경 무상급식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예산 659억 원이 필요했고, 그것은 서울시 전체 예

하고 있는 초중학교 무상교육 시스템에서도 부자들

산인 20조의 0.35%에 불과했다. 환경파괴에 전시성

에게는‘납부금’ 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되고 만다.

사업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한강르네상스 공사에

그들은 복지의‘ㅂ'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라나

만 몇 조원의 예산을 써온 서울시가 10/1도 안 되는

는 세대의 교육과 복지만큼은 어떠한 차별과 위화감

‘아이들 급식’예산을 못 내놓겠다고 그 난리를 피

도 없이 보편적으로 구현함으로서 사회를 최대한 공

운 것이다. 시정 홍보비로만 해마다 500억원 안팎을

정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통합적으로 운영하려는 역

썼던 오세훈 전 시장이, 우리 아이들의 소중한 급식

사적 지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과

예산 695억 원이 아깝다면서, 182억원이나 들여 관

오 전 시장과 같은 이들이 참으로 딱할 뿐이다.

제투표를 밀어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모한 오 전 시장 때문에 서울시민들은 또 혈세 3백억을 더 들여 보궐선거를 치러야 할 상황이다.

일부 편향되고 비정한 어른들의 잘못으로 우리 아 이들과 자라나는 학생들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더욱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전국적으로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 우리 사회의 미래인 학생

차근차근 보편적 복지제도의 확충에 힘쓰면서, 학교

들의 밥 먹는 문제로 어른들이 투표까지 하며 싸우

급식법을 개정해 친환경 무상급식이 올바르게 확대

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어야 했었는지 지금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현행 학교급식법에는 초

생각해도 오 전 시장의 어리석은 행동을 개탄하지

중학교의 학교급식 비용을 국가나 지자체가 지원할

않을 수 없다. 전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여야 간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긴 하지만, 임의 규정으로 돼 있

에, 진보와 보수 간에 협력도 하고 소통도 하고 타

어서 지역마다 학교급식에 대한 지원 여부와 내용이

협도 하면서 친환경 무상급식(의무급식)을 대부분

상이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이는 해당 학생·학부

확대 실시해나가고 있는데, 도대체 서울시와 오 전

모들을 사실상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결과를 야기하

시장만 왜 그랬던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부 저소득 계층을 선별하여

결국, 아이들, 학생들 보기에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

지원하는 제도는 필연적으로 차별급식, 상처급식이

러웠던 이번 관제투표 소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최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하

악의 관제투표가 되고야 말 것이다.

는 무상급식·의무급식이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 전 시장 같은 이들은 보편적

또 오 전 서울시장의 관제투표 강행 사태와 같은

복지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궤변을 일삼고, 지금까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학교 현장에서

지도 친환경 무상급식을 나쁜 것이라 폄훼하고 있다.

교육적, 사회통합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도 학

유럽의 나라들은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하고 온갖

교급식에 대한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의무화

16

보편적 복지 제도를 구현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삶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자라나는 우리

17

의 질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오

학생들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고 건강한 밥상을 맞

전 시장의 눈에는 그것이‘망국’ 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할 수 있도록 도와야할 것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 장의 관제투표 소동, 앞으로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

엄청난 부자감세를 시행하고, 국민의 혈세로 부자

은 사태를 반복하지 않아야한다는 교훈을 길이길이

와 재벌, 토건족들에게는 온갖 특혜를 주고 있는 이

남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민생대책, 더 좋

명박 정권과 오 전 시장 같은 이들이 친환경 무상급

은 복지정책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만드는 것만이 상

식을 부자 급식이라고 폄훼하는 것도 언어도단의 극

처받은 우리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최소한의 도리

치라 할 것이다. 그들 논리라면 더 많은 비용을 지원

라 할 것이다.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회원행사│

회룡포 ; 자연이 남긴, 누구에게나 개방된 로열석 - 2011, 대구참여연대 회원여름캠프를 다녀와서

글. 신동민 (기자단 해울, ehdals5616@daum.net)

람도, 생에 끝자락에 있는 사람도, 연예인도, 등록금 로열석 논쟁이 뜨겁다. 대구세계육상대회 개막식에

없어서 실의에 빠진 학생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서 전 재산이 29만원인 분이 떡하니 앉아있었기 때

심지어 독재자까지도 자연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

문이다. 네티즌들은 불쾌하다고 했다. 그 인물이 로

서 아름답고 항상 싱그럽고 동경하고 찾아가는 것이

열석에 안 어울리기 때문이다. 돈 뿐만이 아닌 사회

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자연이 어우러지는 곳,

적 지위와 그 사람의 과거 행적까지 고려해서 로열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사이좋게 만나는 곳, 강과

석을 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듯 로열

산이 만나는 회룡포로 회원캠프를 간 이유일 것이다.

석에 많은 의미를 부여해오고 상위계층의 전유물로 인식했는지도 모른 다. 결국 사람이 만

대구참여연대가 회룡포에서 만난 로열석은 바로

들어낸 로얄석은

여울마을이었다. 여울마을은 폐교한 옛 향석초등학

편을 가르고 로열

교 건물을 리모델링 공사를 통하여 건립하였다. 폐

과 비로열로 구분

교 전 마지막 8명의 졸업생들과 선생님의 이름을

하고 서로를 갈

딴 숙소와 황토방이 있었다. 좋았다. 시설도 나쁘지

기갈기 찢는다.

않았고 황토방도 너무 좋았다.

하지만 자연이

와서 짐을 풀고 물놀이를 하러 강가로 갔다. 아이

만든 로얄석은

들의‘까르르’교성이 멀리 있는 내 귀에까지 전해

어떨까? 태산은

졌다. 물놀이의 로열석은 단연 팥빙수 제조석이다.

한줌의 흙도 거부

봉사활동하시는 분들과 놀러온 학생들, 정위지간사

하지 않고, 바다는

님까지 모두 팥빙수 제조에 박차를 가했고 그 여름

한 방울의 물도 거

날 눈물 없이는 먹을 수 없는 참여연대표 팥빙수가

부하지 않는다. 누

탄생했다. 그들에 노고를 치하하며 팥빙수 만드는

구를 구분하지도

곳을 물놀이 시간 로열석으로 명명해 본다.

않고 찢어 놓지도

수박을 나눠서 아이들과 함께 먹고 안전관리를 하

않는 자연은 모

시던 할아버지께도 드리고, 한참을 자연이 주는 로

든 곳이 로열석

열석에서 함께 행복에 겨워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인 셈이다. 마음

구경도 모자라‘눌러 앉아버릴까?’ 고민할 무렵이었

이 울적한 사

다. 아이들을 부르는 부모님들의 목소리와 이를 아


쉬워하는 아이들의 생떼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때

리들은 회룡포로 갔다. 이렇게 유순한 강이 있단 말

나는 속으로 말했다.‘아이들아! 서로 연대해서 부

인가! 왜 가장 선한 것이 물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모님에게 너희의 뜻을 관철시켜야지! 너흰 참여연대

되었다. 자연이 만든 로얄석에 취해, 라면 맛에 취해

의 아들, 딸들이니까!’

2011여름 회원캠프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저녁시간에서

국 남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얼마나 자연을 닮을

가장 중요한 시간이 돌아왔다. 아름다운 오카리나소

수 있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자연 그대로가 소중한

리, 노랫소리, 건반소리, 기타소리가 하나가 되는 그

것처럼 대구참여연대 회원 모두가 있는 그대로 소중

런 시간인 것이다. 밤까지 이어진 회원가족들의 장

하다는 것을 깨달은 짧지만 아름다웠던 1박2일이었

기자랑의 끝에는 나눔과 참여가 있을 것이다.

다. 1박2일 동안 우리는 모두 하나 되었기에 로열석

한편, 그 시각 아이들에게는 꿀과 같은 휴식과 함

은 필요치 않았다. 대한민국이 하나 되어 로열석이

께 영화를 보는 시간이었다. 이 시산 로열석은 내

없어지는 그날까지 대구참여연대가 달려가야 할 것

옆자리였다. 군것질거리들을 바지에 잔뜩 넣고 내

이다.

옆에 오는 아이들에게 무차별로 군것질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복숭아보다 내 군것질을 더 사랑했던 아 이들이 그립다. 기숙사 룸메이트 형님이 씩씩거리시며 들어오셨다.

장기자랑의 끝에는 나눔과 참여가 있을 것이라고

“아, 동민아 형이 후배랑 차를 타고 가는데 후배가 조수

했다. 맞다. 나눔과 참여의 술자리가 있었다. 하나가

석에서 자더라. 휴게소에서 들러서 윗사람이랑 같이 탓을

되는 것보다 더한 경지인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때는 니가 말동무도 하고 그래야한다고 했거든? 근데 후

헷갈리는 너나일체의 상황이 술자리에서 벌어졌다.

배가‘네.’ 이러더니 조수석 말고 뒷좌석으로 가더니 출발

(술 먹어서 그런 거 아닙니다.) 역시 로열석은 고기를 굽는 회원님들! 고양이에게까지 나눔의 기적을 꽁치 로 베푸시니 고양이도 울면서 감동해 돌아갔다는 전 설은 아직도 회룡포에서 회자되고 있다. 우리들도 배 급을 기다리면서 막걸리 한 사발에 웃고 울 수 있는

하니까 자더라.” 뜨끔했다. 박처장님과 단 둘이 봉고를 타고 오는데 내 가 연신 졸다가 그냥 자버린 것이다. 박처장님이 얼마나 졸리셨을까? 선산휴게소에서 잠깐 일어나서 나는‘조선 의 인재 절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재 절반은 선산 에서 난다…….’ 라는 헛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잠자리에

하나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나눔과 참여 그리고 하나

들었다. 박처장님의 정신력에 감사드린다. 오는 길에서

됨이라는 참여연대와 회룡포가 만든 로열석 아닐까?

로열석은 운전자 조수석이었다.

그렇게 어떻게 잤는지도 모르고 아침을 맞이한 우

18 19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오, 지락│

참여하는투사가되자!! 93세 노전사의 외침「분노하라」: 오, 지락 8월 토론도서

글. 김승주 (부장, misa1052@nate.com)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는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2011년 대한민국 그들이 무상급식을 요구했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난 학부모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등록금 시위를 했을 때 침묵했다. 나는 대학생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청소노동자를 해고했을 때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을 불태워 죽였을 때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 줄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분노할 일을 넘겨버리지 말라. 찾아서 분노하고, 참여하여,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라. 어느 누구라도 인 간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거든,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93세의 노전사가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자신만의 분노의 동기를 찾아, 적극적으로 참여의 의지를 가지 고 평화적 봉기를 하라고 결연하게 말하고 있다.


최근 30쪽짜리 작은 책 하나가 프랑스 사회는 물론

음이 있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학업보다 아르바이트

우리 사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광고문구와 주석을

에 전전하는 대학생들의 고단함도 있고, 오늘도 전

뺀 본문 13쪽짜리 소책자가 60만부 이상이 팔려나가

재산 80만원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부부

며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은 저렴한 책값과 읽

의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더 나아가 사회구성원으로

기에 부담 없는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내용으로 보

서 보장받아야 할 최소한의 것도 누리지 못하며 자

면 기존에도 현 사회의 모순과 비리, 자본의 폭력에

유, 경쟁, 성장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발목 잡혀 사는

항거하고 분노하여 싸우라는 수많은 메시지가 있었

이 땅의 모든 서민들의 희망 없는 삶이 있다.

다. 하지만‘스테판 에셀’ 이 외치는 분노가 이처럼

2011년 대한민국, 일반의 이익보다 특정의 이익이

사회를 뒤흔드는 것은 단지 이 분노가 개인의 안위

더 당연시 되고, 언론의 눈과 입이 막혀 있고, 극빈

즉 자기를 위한, 자기 안에 갇힌 분노가 아니라 타협

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는 더욱더 커져가고, 돈을

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분

쫓아 질주하는 경쟁은 갈수록 더 치열해져가고 있는

노이며, 이 분노는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경우로 나

이러한 사회-분노할 이유가 너무나 많은-에서 우리

아가야 한다고, 비폭력의 희망, 인권으로 나아가야

는 어떻게 분노하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한다고, 또한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이 자신의 존 엄성을 지키는 것이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말함에 있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 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 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 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 면 구할 것입니다.”p26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 은 원칙과 가치들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 가 자랑스러운 사회일수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p10 성장과 경쟁, 성공의 가치가 아닌 그 어느 때보다 인간과 생명, 평화를 중심에 둔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사회에도 필요한 지점이 되었다. 어떤 감 성에 치우친 증오, 질시나 비아냥이 아닌 참여의 의 지를 가지고, 개인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역사를 좀

이것은 프랑스사회만의 상황들이 아니다. 2011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시키기 위한 우리 각자의 관심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 임금의 50%인 최저임금

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누구를 위한 것이

5,410을 외치는 이 땅의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이 있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도 묵묵히 일하고 있는

막는 그 모든 것들을 향해 참여하는 투사가 되자. 분

이주노동자들의 아픔이 있고, 환경과 평화를 지키기

노하자. 작은 실천과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

위해 공권력과 맞서있는 주민들의 눈망울이 있고, 동 지의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몇 달간 콘테이너 꼭대기 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의 처절함이 있고,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랐던 부모들의 애끓

“무관심하다면 분노할 수 있는 힘, 참여의 기회 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오.” 노전사의 외침을 잊지 말자.

편집자 주 |‘오,지락’ 은 시민학교 후속으로 진행되는 독서토론모임입니다. 회원·비회원 누구나 참석 가능하며 월별 추천도서는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페(http://cafe.daum.net/people-and-book)

20 21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이달의 회원│

> 회원인터뷰 <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을 아직도 꾼다.

김성수

운영위원

인터뷰. 이균호 (기자단 해울 단장, nakseomanse@naver.com)

대구참여연대

은 비판을 받는 것 중에 하나가 백화점식 운동이다. 너

활동과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처음 활동은 어떻게 시작

무 많은 일을 하다보면 역량의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하였는가?

그래도 다행인건, 분야별로 많은 단체들이 생기면서 일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게, 일단은 학교 다닐 때 선배들

이 분산되고 있다. 이제는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

이 참여광장 모임을 하더라. 그때가 군대를 제대하고 난

숙을 이루어 내야한다. 그것 또한 한국사회의 시민의식

뒤였다. 그래서 자원봉사활동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

과 관련되어있는 것 같다. 시민들이 시민단체에게 너무

때 의정감시활동이란 게 있었는데, 속기록 분석과 같은

많은 걸 바라다가 실망한 점도 있을 것이고, 정치가 바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마 1999년이었는

뀌지 않으니 시민들도 지쳤을 것이다.

데, 발족하고 나서였을 듯하다. 운영위원은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나?

대구참여연대가 하는 모든 부분을 다룬다. 운영위원회

지방 권력 감시 운동에서는 의정감시운동을 했었고,

가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이기 때문이다. 사무처에서 운

시민법률센터를 운영해서 법률 강좌도 했었다. 그리고

영위원회에 보고를 하고, 그 중에서 의결이 필요한 부분

상담도 많이 했고, 구체적인 부분은 변호사와 연결하기

은 논의하고 결정하게 된다.

도 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었다.

Q 술 먹으러 운영위원회에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A 사실이다. ^^

요즘에는 시민단체보다는 다른 곳에 힘이 모이거나, 개별로 움직이는데 변화의 이유가 뭘까?

집회에 참가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시민사회운동이 그 당시에는 없던 운동이었기 때문에

1999~2000년 후반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우리나라에

대안으로 많이 얘기가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많

서 일어난 촛불시위는 거의 다 보게 되었다. 직장이 서


울역 바로 앞이라서 맨

게 있느냐하는데, 난 지

날 봤다. 그런데 집회의 성

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

격이나 때에 따라 전경들이 집회에 참

각한다. 왜냐하면 토대가 그렇기 때문

가한 사람들을 몰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효순·미선추모

에. 지켜보는 사람이 애정을 갖고 지켜봤으면 좋겠다. 어

촛불집회 때는 몰아가는 방법을 쓴다. 그리고 고립시키

차피 많은 분들이 저보다 더 많이 애정을 갖고 있지만,

고 누른다. 그래서 코트 하나 찢어먹고...“아니, 지나가

대구참여연대는 누군가 막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조직은

는 시민인데, 왜이러시냐” 고... 그때는 그런 말들이 먹혔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구지역의 모든 고민이 녹아있고,

는데, 이후에는... ^^

좀 더 사랑했으면 좋겠다. 비판을 갖더라도 애정이 있었

노무현탄핵반대 때는 처음으로 진짜 노사모를 봤는데,

으면 좋겠다.

진짜... 직장에서 과장·부장급들의 사람들이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휴가를 내고 농성을 하더라. 그 열정을 보 고 놀랐다.

운영위원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지금 하고 있는 일 에 대해 소개해 달라. 2009년도 여름에 대구에 내려왔는데, 일을 좀 쉬고 싶

대구참여연대 활동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었다. 보험영업을 18년 동안 하고 나니까 많이 힘들었다.

뚜렷한 잔상은 남지 않지만 그 당시 느낌은 다 될 것

2년이 지나니까 이제 서울에서도 계약이 잘 안 나오고

만 같았던 느낌이었다. 거기 있었던 몇몇 사람들부터 시

해서 다시 사람들을 만나며 일을 하려고 한다. 노후설계

작해서 그 에너지가 모든 것을 다 바꿀 것만 같았던 느

와 의료문제 등은 공동체적으로 풀어야 할 것들이 많기

낌이었다. 그리고 다 이루어졌다. 자원봉사만 해서 자세

때문에 고민을 했다.

히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가 어떤 일을 하

우리 사회가 큰 변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의료비용,

더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결과에 대한 성과가 드러

퇴직을 한 이후의 공포감등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것들

났다. 그 때는 열정들이 강했고 자신감도 상당히 있었다.

을 대구에 와서 다르게 풀어보려 노력했다. 그래서 든

에서 지켜본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사람 하나하나의 에너

생각은 이 직업이 앞으로도 유효하겠구나 하는 것이다.

지가 상당히 강했었고, 시민사회운동이 이렇게 되는 구

이 일이 정년이 없기에,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보람있게

나,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일 정도의 파급력이 있구나하

하고 싶다. 어느덧 최초에 보험가입한 분들의 자녀들이

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때가 되었다. 그 아이들이 대학을 가고 나면 부모들은 은퇴를 준비해야하는데, 연금과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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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후안정이 되어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7·80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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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면서도 안타까웠던 점은 우리가 뭘 해도 사람들

되더라도 내가 체력이 된다면 계속하고 싶은 일이다. 그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이 모른다는 점이다. 그 외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

런 꿈을 꾼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

리고 모두가 대구참여연대에 대한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 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 테는 너무 행복한 조직이고, 어떻게든 어려웠지만 십 수

김성수님는 대구참여연대 운영위원이며 시민사회의

년을 우리 스스로 끌고 갔던 조직이다. 그래서 너무나

변화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애착이 간다. 대구참여연대가 지금은 사람들이 뭐 하는

- 김성수FC 011.9190.8962


│활동보고│

대구참여연대는 지금

7월 1일

반값등록금 촛불문화제 19시 30분(한일극장 앞) 고엽제매립범죄진상규명촉구 1인시위 11시(왜관캠프캐롤)

7월 4일

시민학교 정치교실 4강 19시 30분(이태수/왜, 보편적 복지국가인가?)

7월 6일

왜관캠프캐롤고엽제매립진상규명 유인물배포 풀뿌리생활정치연구회 모임 19시 30분(대구참여연대 사랑방)

7월 7일

시민학교 정치교실 5강 19시 30분(김기식/시민정치운동-내가 꿈꾸는 나라) (준)수성구주민회 사무국 회의 19시 비영리경영컨퍼런스 10시(경대)

7월 8~9일

2차 희망버스

7월 11일

새마을금고 대책위원회 11시 시민학교 정치교실 6강 19시 30분 (김민남/대구시민들은 어떻게 대구사람이 되었는가?)

7월 12일

뉴스와이드-참여예산인터뷰 11시 대구대 서상기규탄 기자회견 11시 연대회의 정책위원회 12시 풀뿌리생활정치연구회 모임 19시 30분

7월 13일

참여예산포럼 16시 (준)수성구주민회 사무국회의

7월 15일

대학등록금문제대응 간담회 15시 몽당연필콘서트 19시 30분

7월 18일

시의회 주민참여예산조례 집회 13시 30분 독서토론모임 오지락 19시

7월 19일

새마을금고 집행위원회 16시

7월 22일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집행위원회 북구의회 주민참여예산조례 간담회 14시

7월 25일

대구대정상화범시민대책위원회 10시 30분 미디어위원회 소식지 기획회의 18시


7월 27일

기자단 해울 모임 11시 청년컨퍼런스 팀메이커 모임 13시 대구대정상화범시민대책위원회 14시 (준)수성구주민회 사무국 회의 20시

7월 30~31일

하계 회원캠프(회룡포 여울마을)

8월 3일

(준)수성구주민회 사무국 회의 19시 30분

8월 8일

풀뿌리생활정치연구회 모임 19시

8월 10일

(준)수성구주민회 상상토크 1차 19시

8월 17일

새마을금고 대책위원회 11시

8월 18~20일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하계수련회

8월 20일

구미YMCA 청소년 강의(박인규)

8월 22일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회 독서토론모임 오지락 19시 30분

8월 22일

연대회의 운영위원회 16시 독서토론모임 오지락 19시 30분

8월 23일

사무처 회의 10시 30분

8월 24일

(준)수성구주민회 상상토크 2차

8월 26일

집행위원회 19시 30분

8월 30일

참여예산대구경북포럼 정책포럼 제 2차 15시 대학등록금문제대응 간담회 16시 30분 (가)등록금서포터즈 준비 단체간담회 18시 운영위원회 19시 30분

8월 31일

청년컨퍼런스 팀메이커 모임 11시 (준)수성구주민회 사무국회의 19시

24 25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풀뿌리 주민자치 소식│

구미 참여연대

글. 이봉도 (구미참여연대 대표, bisan485@hanmail.net)

구미참여연대는 주민사업의 일환으로 무료 기타교실을 7월15일부터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1일 플랜카드 2개를 개시하여 참가자 신청을 받았습니다. 처음 몇 명이나 신청을 할지, 열의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 등 걱정스러운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시간에 모든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기타를 배우겠다고 모인 주민이 25명이 넘었습니다. 사무실 공간이 부족하여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 참여연대 회원분들은 주민들을 위해 호프 집에서 술잔을 앞에 놓고 기타수업(?)을 했습니다.

홈페이지 ▶ http://gumisimin.org 구미참여연대 사무실▶ 구미시 공단동 96번지 1층 / 054-465-0468

구미참여연대

두 번째 수업부터는 공단동사무소 2층 강당을 빌려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매주 목요일 오후 7~9시까지 2시간 진행되고 있으며 기타강사는 이성우 회원분께 서 수고해주시고 계십니다. 총 12회를 진행할 예정이며 현제 8회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구미참여연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비산신평지역아동센터에서도 초·중생을 위한 기타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민과 함께하는 기타교실은 악기를 개인이 구입하면 되지만 아동센터 아이들은 기타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회원들의 빈지갑을 또 털어 기타 7대를 마련했습니 다. 매주 목요일 5~7시까지 2시간을 수업을 합니다. 역시 학생들의 습득속도는 어른보다 훨 빠릅니다. 고민이 있습니다. 주민기타교실을 12회로 종료를 할 생각입니다만 참여하고 계시는 분들이 수업을 계속하기 를 원하십니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기타교실 발표회를 한번 해야 하는 건지... 시작해놓고 마무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재정보고│

7.8월 재정현황 및 운용 결과

(사무처 재정보고/지역조직 제외)

수입부 항 목 회비 일반후원금

7월

8월

7,534,000

증감

7,811,000

항 목

277,000

200,000 17,200,000 17,000,000 0

0

0

200,000

500,000

300,000

사업후원금 특별기금후원금

지출부

급여지급

7월

8월

전월대비 증감

5,836,020

5,836,020

0

업무지원비

450,000

450,000

0

사회보험료

1,392,260

1,175,200

-217,060

퇴직급여

0

0

0

0

0

0

사업수입

1,350,000

0 -1,350,000

상여금

하계캠프수입

3,280,000

0 -3,280,000

일반관리경비

1,915,214

0

-1,915,214

잡이익

0

0

0

홍보비(소식지등)

1,214,340

1,840

-1,212,500

이자수입

0

0

0

사업집행비

6,529,000

1,551,000

-4,978,000

기타수입

609,787

607,750

-2,037

315,000

315,000

0

광고수입

0

300,000

300,000

잡손실

0

0

0

104,668

143,928

39,260

사회공헌사업비

0

0

0

0

0

0

자원활동가지원금

0

0

0

13,278,455 26,562,678

13,284,223

일상수익사업수입 잡이익 수입계

교부금 및 지원금

지출계 수입-지출

17,651,834

9,329,060 -8,322,774

-4,373,379 17,233,618

* 수입 및 지출은 현금입출금 기준이 아니라 당월의 발생분을 기준으로 합니다.

(일반후원, 사업후원, 특별기금 후원 포함) (7, 8월) 26

최인혁 상근활동가가 강금수, 백승대,

김형우, 박용구, 이동구, 이민정,

대구참여연대 사무처를 떠나

성상희, 황윤호

정푸른, 하경호, 함영근

구미에서 활동하게 되어었습니다. 새 터전에서 많은 가능성을 안고 시작할 것이라 기대됩니다. 그의 도전 앞에 많은 분들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응원 부탁드립니다.

27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회비납부·후원인 명단│

납부하신 회비는 세상을 바꾸는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소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2011. 7. 1 ~ 2011. 8. 30 회비 및 후원금 납부자 명단 / 가나다 순 / 거주지 기준입니다. / 같은 이름은 동명이인입니다. ) 경산 강선구 강영걸 강재기 고동우 곽현수 구자목 권수임 권현주 금창수 김명호 김상수 김선우 김영범 김재춘 나인호 박병진 박순태 박옥순 박원형 박철홍 배병철 손제호 안승철 안헌수 안현효 오신택 윤용희 이동기 이성희 이승근 이윤희 이응창 이종구 이철환 임순광 임영택 임재홍 장대수 장태철 전주태 전홍철 최상주 한성덕 홍덕률 홍승용 홍희정 구미 고봉수 권경자 권중일 김 찬 김상목 김성대 김수민 김윤기 김윤수 김재우 김종권 김중형 김진석 도영주 박영백 박종인 박찬문 배윤선 배재국 송진환 신명희 우기원 유미영 윤필영 이동식 이미영 이봉도 이삼범 이상돈 이선정| 최인혁 이성규 이성우 이종득 이호준 임지현 장정희 장준민 장혜숙 전현배 정기백 정도욱| 신윤정 조병찬 조복래 조용래 조현문 한상구 한상일 홍종범 황대철 남구 강금수 강상호 권옥자 김상희 김성훈 김주욱 김주태 김현근 김현철 김효정 노형석 박근수 박근식|강문희 박정호 손상호 신기욱 안영미 위한기 이복수 이상훈 이영구 이윤희 이재욱 조경희 최신일 한상훈|최경화 허노목 달서구 감병호 강경애 권명오 권석우 권영래 권영주

동구 강옥련 고춘자 권덕기 권순천 김갑순 김경환 김광석 김광석|이혜영 김량현 김미수 김석수 김석원 김선영 김성수 김수정 김순규 김연희 김인하 김정길 김정미 김정희 김현우 김휘수 남상권 노영석 류춘희 문경자 문영곤 문재환 민정식 박경욱 박기석 박성우 박순일|이미숙 박인규 박점용 박호석 백경록 서창환 서한교 손관영 손태운 신득렬 신병호 신영숙 신영욱 오문섭 우성문 유길의|이은희 윤문주 이경리 이병동 이병학 이영도 이옥례 이종수 이준일 이춘곤 이태영 이화선|정호태 장영희 정재영 조해기|이은경 조희재 진수미 채영희 최병우 허 종 홍영표 홍현덕 북구 강동인 권태호 김애화 김진숙 남인숙 박찬웅 성재환 안새봄 윤종극 이용재 이정수 임우정 정재봉 조현우 하만호

강현구 권수용 권영태 권재화 권추경 김기용|김선희 김선희 김승주 김신애 김원희 김은정 김정화 김종혁 김주영 김진숙 김해광 김형기 김희진|변정호 노미경 노인만 도경화 박 경 박상국 박헌국 백진욱|이선희 변재호 성록희 손락천 손성봉 신도철 신연자 안경완 양영일 엄시근 윤보욱 윤성아 윤재석 이동진 이미화 이상술 이선영 이성우 이은현 이의호 이인호 이재남 이정동 이정우 이정화 이중형 이창용 임병훈 장밝은 전종오 정강미 정용태 정인숙 정준호 정지욱 조원규 조윤식 조일선 주보돈 지은혜 채장식 최미애 최순석 하영수 하유신 한승균

권오혁 김도형 김상호 김상희|이재일 김시익 김영철 김은경 김인호 나인엽 노승석 류덕제 류영철 박경로 박명리 박명섭 박명호 박세정| 김은희 박신호 박영미 박용우 박인철 박종률 박지윤 박현탁 배대환 배종훈 서덕교 서미옥 서정욱 성언제 송호상 신기복 신동민 안기훈 양선봉 양소희 양인석 양정아 오홍석 우재동 윤영욱 윤창옥 윤태자 이갑순 이경상 이금화 이대영 이동형 이명호 이석진 이선혜 이성해 이소령 이순재 이승천 이재성 이종길 이종춘 이창화 이충기 이현숙 이현옥 이현우 임성무 임전수 정갑환 정경열 정기숙 정재형 정호원 조병집 조인선 조재민 주진혁 차호영 천영애 최상돈 최현진 허경주 황현익 달성군 배은경 신경희 신청호 심정숙 이경선 이성희 정금숙 최수영 최종현 홍지영

서구 김봉심 김세일 김인호 김지연 도영옥 박병규 박병철 서상민 서인찬 서준호 안현재 양선진| 임호성 이종필 이창환 정대열 진성섭 최정민 수성구 강영한 강준구 강진호 강천식 강호중 공미정 구인호 구찬동 권난경 권도준 권영규 권진희 김갑진 김경호 김남희 김동식|박원영 김미경 김미향 김병주 김상호 김성수 김순옥 김승현 김영미 김용원 김용훈 김원현 김윤상 김윤정| 김수일 김재권 김재승 김재우 김정곤 김종태 김종필 김철원 김태균|김순옥 김태석 김 혁 김형진 김형태 김희섭 남호진 도국배|김순섭 류영준|이영주 류태하 류후기 민천식 박광우 박노진 박덕수 박덕환 박명석 박선영 박수열 박재범|권미숙 박희진 배재수 백권기 백정한 변화진 서두진 서상득 서상철 서상훈 서철현

석성진 설창환 손석철 손재봉 손창희|홍경미 송경란 송광근 송상욱 송해익 신동민 신동완| 정희선 신성욱 신윤정 심병철 심윤철 안영배 안정임 안형진 양진모 여용석 오태동 유미정 유윤정 유택규 윤 영 윤병대 윤병철 윤영식 윤호석 이경일 이광동 이교희 이금용 이남수 이동인 이두병 이명자 이상구 이상목 이승익 이시하 이양우 이연재 이영윤 이영희 이원복 이재문 이재철 이정원 이정화 이종길 이종우 이종한 이준홍 이진희 이화정|최훈태 임기섭 임현태 임후순 장성수 장원용 장호원 장화환 정경하 정기철 정낙찬 정성욱 정수철 정순재 정연하 정우근 정일선 정종배 정지철 제갈남규 조영미 조용식 조혜진 조흔명 채쾌수 채휘균 천기철|고춘자 최경호 최명희 최봉춘 최연석 최원준 최진욱 최철영 최현복 최혜진 추정화| 권혁장 한광훈 한대환 현영철 홍상익 홍원대 중구 곽병호 권경옥|김세현 길혜민 김경환 김명환 김인석 김재호 김태숙 박배일 유지웅 이기수 이상원 이재천 이재호 정승필 정위지 천덕우 현명호 홍남일 황성연 기타 강경수 강동철|신동주 강성태 곽이화 권구형 권재영 권형우 김건훈|김향미 김경근 김남수 김병환 김보혁 김상인 김수동 김억남 김영도 김영진 김우주 김은영 김정애 김항서 김해환| 곽이화 박대기|이정희 박신영 박은정 박현호 박형룡 백미숙 백진숙 서주헌 설동진 신기권 신동주 신동필 신성호 염율희|이상길 유병록| 윤명화 이균호 이대전 이병술 이석주 이승수 이원영 이재성 이재희 이종명 이춘철|류정숙 이해선 이형석 이희창 임기혁 임윤환 임현수 장우철 전영주 정탁현 정혜숙 조정봉 진용인 최병해 최현석 하승헌 한은영 허주녕 현호성 홍원진 황인주 황재철 연회비납부자 강옥련 김광진 김석호 김성균 김응곤 남상걸 박근식 박동규 박정연 송종대 윤용희 윤천용 이상규 이용하 이정만 이재복 전병영 전형수 조국래 질비오 조억제 평생회비납부자 권흥락 김 미 김성희 김은주 김응곤 김영화 구수용 신숙경 이경옥 이선례 이정환 이종만 윤지현 정강미 진미화 최봉태 유영선


1998년 대구참여연대는 우리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와 시민사회의 발전, 참 된 지방자치의 실현을 통한 참여민주사회의 건설 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0여년 걸어오는 동안 성과도 많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해결해야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시민들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수렴할 새로운 민주주의, 낡은 경제 정책을 대체할 정책대안, 민생의 고충과 위기를 극복할 비전과 희망을 만드는 것입니다. 대구참여연대는 더욱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시민들과 함께 살맛나는 세상을 향한 희망과 대안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회원소식지 제92호

2011

■ 지역조직 - 동구주민회 운영위원장 : 유길의 사무실 : 053) 956-3374 대구시 동구 율하동 230번지 2층 대구참여연대 동구주민회

발행인 ‖ 한재흥 발행처 ‖ 대구시 중구 문화동 7-9번지 3층 우)700-160 전화 : 053) 427-9780~1 상담 : 053) 427-9788

- 구미참여연대

팩스 : 053) 427-9723

대표 : 이봉도 사무실 : 054) 465-0468

홈페이지 : http://www.civilpower.org

경북 구미시 공단동 96번지 1층 구미참여연대

전자우편 : dgpeople@gmail.com

■ 회원자치모임

공 동 대 표 ‖ 김영화, 원유술, 법광, 한재흥

- 산행모임‘가 자’ 대표 : 윤호석

사 무 처 장 ‖ 박인규

- 기타모임‘미칠레’ 대표 : 하만호

상 근 활 동 가 ‖ 강금수, 김승주, 이승호, 정위지

- 기 자 단‘해 울’ 단장 : 이균호

미디어위원장 ‖ 구수용

- 독서토론모임‘오지락’ 대표 : 구인호

후 원 계 좌 ‖ 대구은행 036-04-000437-9 대구참여연대

28 29 함 께 하 는 만 큼 변 하 는 세 상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다큐멘터리 <어머니>와 함께 할 친구를 찾습니다! 후원금액 계좌이체 <어머니> 후원 계좌 : 우리은행 1002-134-937553 태준식 후원 금액 계좌이체 후 이름, 연락처, 이메일, 후원 금액, 응원 글을 제작 블로그 (http://sosun.tistory.com) 방명록에 남기거나, 메일(flanerie07@gmail.com)로 보내 주세요! ● <어머니> 프렌즈가 되시면 시사회 참석 등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 제작 블로그 참조) ● ●

http://sosu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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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전지역 배달 됩니다

이 병 학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 206-2번지 반야월시장, 시민체육공원 앞 T 053-963-9919 / M 010-3516-0463

실장

대구은행 051-08-497006

농협 356-0507-0113-93

서보경 회원

705-817 대구시 남구 대명2동 1801-5 한울채 201호 Office (053)471-4667 Fax (053)471-4668 Mobile 010-5778-4667 Webhard id_d2studio/pw_1234 계좌 088-13-071987 대구은행 서보경

대한대리점 Always Green

GREEN

한 대 환 회원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1가 69-1 대표전화 : 053) 2 5 7 - 9 3 9 0 팩시밀리 : 053) 2 5 7 - 9 3 8 4 보상센터 : 053) 5 5 5 - 0 4 3 1 휴대전화 : 010-6564- 1 8 0 8 E-mail : dh1808@naver.com http://www.greenfi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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