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 어깨동무 2012 봄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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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기념사업회 2012 봄·여름호

허숙경 作 <광대-궁금한 소년 The Fool>

· 의문사를 다시 말한다 ·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다 · 국가폭력의 교묘한 위장막 벗길 터 · 내가 해봐서 아는데 · 내 삶을 자연과 가장 가깝게, 이제 시작이다! · 꽃의 예쁨에 눈뜬 후, 남자 빛깔이 달라지다 ·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낯선 곳을 향한다 · 꽃보다 쌀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한국 현실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자연의 꿈, 캠핑


편집장의 말

그 날을 꿈꾸며 끈덕지게 어깨동무 김선주

아마 그 날 합정동에 밤눈이 많이 내렸을 거예요.

전 날 밤 꿈도 좋았고요. 막걸리 몇 잔에 취한 김에 편의점에서 복권 여섯 장을 샀을 거예요. 네 장은 밤눈을 맞으며 걸었던 후배 네 명을 위해서, 두 장은 내 걸로요. 한바탕 횡재를, 그 날은 섣불리 꿈꿔 봤었습니다. 복권당첨이야 근처에도 못 갔지만, 뭐라도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고 싶었습니다. 숨고 싶은, 금방이라도 달아나 버리고 싶은 내 옷깃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사람들. 만나고 돌아서자마자 그리운 이름들. 무슨 말로 웃고 떠들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중년을 감싸주면서, 아껴두었던 푸르른 힘들을 나눴습니다. 물밀듯이 터져 버리는 봄꽃들 속에서 답답해지고 무거워진 몸들을 그냥, 봄바람에 맡기고 드러눕기도 했던가요? 참 고단하게 산다고 속으로 투덜거렸을지도 모르겠군요. 맘 속 하얗게 곰팡이가 피어버린, 풀려지지 않거나, 그리워서 서러웠던 그 시절을 더듬거리면서 우리들만의 유쾌한 사랑법으로 풀어보려 했습니다. 바람 불어도 어림없도록 어깨동무하고, 말하지 않은 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친근함으로, 엉킨 실타래를 좀 속삭이면서 풀어보았습니다. 6·10시민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철망 앞에서 얼굴 찌푸리지 않고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 부르면 그 날이 정말 오는 걸까요? 징이며 북이며 꽹과리 치며, 눈도 좀 세게 부라리는 그런 날이요. 끈덕지게, 그 날을 꿈꿔 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서성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나눌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 사람 노릇할 방법이 영 없지는 않아 보여 용기를 냈습니다. 구석 저만치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늠만하다,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니 이제, 살 거 같습니다. 눈물이 핑 돌기도, 울컥해지기도, 다정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횡재했습니다.


2 잊지 않는다는 것

강내희

4 마을의 풍경

장성백

8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이시백

11 내 삶을 자연과 가장 가깝게, 이제 시작이다!

김은희

18 꽃의 예쁨에 눈뜬 후, 남자 빛깔이 달라지다

편집부

24 시간여행을 떠나다

편집부

27 의문사를 다시 말한다

신명철

39 유가족의 목소리를 듣다

정원옥

52 국가폭력의 교묘한 위장막 벗길 터

조환준

63 캠프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자꾸 생각나요

황서영

66 지식도 챙기고 추억도 만드는 ‘어깨동무’ 캠프

이세열

69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낯선 곳을 향한다

이지원

73 꼼꼼한 자외선 차단으로 여름 피부 가꾸세요

김혜진

76 꽃보다 쌀

김선미

80 풍물녀와 캠핑남이 사는 법

곽현희

84 이준석의 처세술과 통진당의 처세술

김관

85 미국의 네 번째 광우병 소 발생과 식탁의 변화

정호선

87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정원옥

92 가을에 볼 만한 공연 두 편 미리 보기

조형준

94 행복한 그녀들의 눈물을 훔친 위험천만한(?) 영화

김선주

97 자연의 꿈, 캠핑

김산환

간첩이 될 뻔했던 화가, 홍성담

한국 현실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속삭이는 벽>과 <천변살롱>

101 반인륜적 경찰폭력·시신훼손 희생자 고 문영수 장례식

홍수정

104 추모단체, 추모제 소식

이형숙

106

회원동정

108 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111 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사무국


발간사

잊지 않는다는 것 강내희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9년 8월 15일이다. 아직 방학 중이었지만 학교에 나가 문리대 교수휴게실에 들렀더니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 거문도에서 시 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석 달 전에 조선대학교 학생 이철규가 경 찰에게 쫓기다 사라진 뒤 인근 저수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일로 전국이 아직 떠들썩 하던 때라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의 의문사 소식은 학내 구성원, 특히 2년 전에 출범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중앙대 분회 소속 회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당시 불문학과 박영근 교수, 의대 장임원 교수가 심각하게 구수회의를 하던 모습 을 본 기억이 난다. 장 선생님이 그 날로 거문도로 출발한 것은 그런 논의과정의 결과 였을 것이다. 장 선생은 중앙대 초대 교협회장을 지냈고 같은 민교협 회원이기도 했 지만, 예방의학 전문의기도 해서 중앙대 교수 가운데 의문사 현장에 가야 할 가장 적 임자였다. 장임원 선생은 이후에도 이내창 의문사 사건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많 이 하셨다. 그 후로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장 선생은 학교를 떠나셨고, 나도 어 느덧 학교에서 ‘원로’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또 이내창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소식지를 만든다고 한다. 이내창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 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아직도 의문인 것이다. 그동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89년 당시 이내창군과 함께 거문도로 들어 간 도연주가 안기부 소속이었음이 밝혀지는 등 약간의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러나 이내창 의문사 진상규명은 핵심적 정보를 가지고 있을 국정원의 협조 거부로 여 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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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다는 말과도 같다.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이내창을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적어도 우리 의 어떤 측면이 그가 살아 있던 시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구곡 어딘가를 헤매며 아직도 이승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 다. 물론 이런 모든 느낌은 이내창의 죽음이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서 비롯된다. 우리의 잊지 못함은 그러나 잊지 못하기만 하는 일은 아닐 것 같다. 이내창을 잊지 않고 그를 기리는 것은 그가 속했던 시간으로부터 그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 함이 아닐까 한다. 이내창이 겪은 의문사는 폭력과 억압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의 일 이다. 민주화가 되었다는 지금, 그 시대는 과거가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가 생명을 바치며 싸웠던 그 시대, 그 때의 폭력과 억압이 아직도 종결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그를 잊지 못하 는 것은 과거의 일만 같던 것이 오늘도 우리 삶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아직도 아린 상처를 쓰다듬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상처를 구태 여 쓰다듬으려는 이유가 있다. 애초에 상처를 만들어낸 폭력의 순간을 기억하고 그 런 폭력, 그것을 자아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함 아니겠는가. 이내창을 잊지 않음으 로써 이 소식지가 우리 사회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 란다.

강내희_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장이며, 중앙대 영문학과·문화연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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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풍경 장성백 귀농한 지 벌써 3년째 접어드네요. 아내랑 아이들이랑 도시에 살던 버릇이 정리가 되지 않아 통장잔고는 여 전히 마이너스지만, 올해엔 내가 사는 마을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여유를 부려봅니다.


작년 가을걷이가 끝난 밭의 텅 빈 느낌과 묵은해를 보 내는 정월대보름, 그리고 징그럽게 추운 겨울과 고드 름. 그래도 동네 분들과 같이 겨울끝자락에 만들어 먹 는 두부는 마트에서 사먹는 두부와는 천지차이입니 다. 서서히 녹는 개울얼음을 아이들이랑 깨며 봄을 기 다립니다.

감자를 심는 날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는 제철 꾸 러미를 위해 넣은 상추씨가 예쁘게 올라 왔네요. 매년 기념사업회 동문들에게 보내는 옥수수 싹도 올라오는 봄, 싹들이 크는 즐거움이 좋네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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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언제나 애틋함이 있어요. 서양 민들레든 토종 민들레든 꽃을 피우면 씨를 맺고 그래서 하얀 날개를 달 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민들레 씨들. 힘들지만 민들레처럼 살아야죠.

일 년 농사 중 가장 중요한 볍씨 소독은 우리가 쌀을 먹는 민족이니까 정성을 다합니다. 작년부터 귀농의 기본 은 자급자족입니다. 주변에서 이야기합니다. 남 기계 빌려서 짓는 쌀농사지만 참 기특합니다. 우렁이가 풀 없 애 주지, 논에 물만 있으면 풀 안 나지, 작년 주변 논에서 제가 하는 논이 제일 잘되고 풀도 없는 논이 되어서인 지 옆 논 아저씨가 얼마 전에 지나가며 한마디합니다. 자기는 몇 십 년째 논농사 하는데 매년 제초제 쳐서 풀을 잡는데 몸도 힘들고 약값이 더 나간다고. 그래서 그분도 우렁이를 논에 넣고 싶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초제 치 지 않는 농사를 주변에 만들어 가고 있어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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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행사에서 아이들이 트랙터 앞 바가지(?)를 타고 선물 받기를 합니다. 우리 동네 가톨릭농민회에서 자체 행 사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저는 작년 1월부 터 농민회 총무를 맡아서 올해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안 성 농활 가서 만났던 가농 형님들. 제가 그 가톨릭농민회 회원이 되었네요.

드디어 볍씨가 모내기하기 알맞은 크기로 잘 자라 주었네요. 일 년 농사 중에 가장 중요한 모내기를 하던 날, 모 판에 다 자란 벼를 바라보는 마음이 시집, 장가보내는 부모의 마음 같습니다. 한 장 찍어 봅니다. 매년 생활비가 안 되는 농사네요. 하지만 올해는 주에 한 번씩 내는 제철꾸러미도 하고, 바쁘게 살아요. 이 달 6월에는 귀농한 지 삼 년 만에 우리 땅에 집도 짓고, 출세했네요. 내 땅에 내 집이라••••••. 도시의 아파트는 허 공에 떠 있는데••••••. 매일 풀들과 인사하고는 바로 뽑지만 풀들이 있어 예쁩니다. 그래서 허리가 안 아픈 날이 없지만, 감사합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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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 봐서 아는데 이시백

잘된 일에는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며 들까불고 나서서 숟가락 올려놓는 이에게 나라를 맡긴 지 어언 다섯 해로 접어든다. 그간에 일어난 일들은 다시 돌아보기도 괴로울 지경이요, 제 손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뽑은 지 도자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지난 다섯 해를 되짚어 본다. 자수성가했다는 이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기 쉽다. 지독하게 가난하거 나, 곤경을 딛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이들은 스스로가 걸어온 길과 자신이 이룬 공업을 그 무엇보다 확실한 성 공의 푯대라고 착각할 우려가 크다. 대체로 성공이라는 것에는 운이라는 것도 따르고, 때라고 부르는 당시의 여 건이나 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처럼 성공이란 상대적인 결과인데, 그를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위대하신 지도자께서는 불행하게도 큰 형에게 ‘올인’한 가정에서 소외된 유년기를 보내며 성장했 다. 언필칭 사회의 불의에 맞서 한때 목소리를 높이다가 그 영민한 싹수를 눈여겨본 기업주에게 스카웃되어 일 약 성공한 CEO가 되었고(그의 성공과 그가 몸담았던 기업의 성공과는 별개이다), 돈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 고 첫손으로 꼽던 세태에 힘입어 졸연히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마침 서울의 살림을 관장하는 수장을 뽑는 선거 에서 청계천 복개사업이라는 호박이 그에게 넝쿨째 굴러들었다. 삽질이라면 평생 그가 해온 일이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요, 파고 쌓고 부수는 일에는 이골이 난 터였다. 제 주머니를 털어 할 일도 아니고, 생색은 제가 낼 일이니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끝없이 들어갈 돈이 장차 어디서 나올지는 알 바가 아니고, 우선 꽃나무로 뒤 발을 하고 잉어가 텀벙거리는 놀이동산을 만들어 놓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장차 제 주머니 털 생각은 미뤄두 고, 당장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구경하며 별천지를 만든 이를 찬양하기 바빴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이 났지만, 요즘은 대통령이 나온다는 항간의 말대로 그는 청계천에서 청와대로 등 극하셨고, 내친 김에 개천이 아니라 이 나라의 강이란 강들을 하나로 잇대어 유람선을 띄울 궁리를 하셨다. 여 전히 그가 잘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는 ‘내가 해 봐서 아는데’라 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막상 꽃나무를 심고 완공시켜 놓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입을 벌리고 박수를 칠 것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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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식언에도 능숙했고 변신도 신출귀몰했다. 왕년의 도로공사나 토목 공사 때마다 설계 변경하듯이 자신 이 한 말을 언제 그랬냐는 듯 집어 삼켰다. 중국 관광객들이 서해를 지나 인천에 들어와 유람선을 타고 한강과 낙동강을 관통하는 관광거리의 ‘대운하사업’을 부르짖다가 홍수와 물 부족을 앞세워 멀쩡히 흐르는 강들을 파 헤치는 ‘4대강 살리기’로 변신했다. 이제 오 년 동안 열심히 파고 보를 만들어 가로막은 강들이 어찌 될 것인지, 문제가 되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가 알 바 아니다. 강이 썩고, 백성들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려면 새털처럼 많은 날들이 남았다. 세월 은 창창하고, 백성들은 금세 잊기 마련이었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불만을 토로하는 백성들의 목소리는 그때만 잠깐 넘기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고, 인 신매매범이 순진한 처녀들을 자포자기하게 만들기 위해 순결을 빼앗듯이 밤낮으로 파대고 시멘트 보를 우뚝 가 로 막으면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가 주는 폐해는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제가 잘 알고 있다는 아 집의 지도자에게 백성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설령 그에게 신묘한 능력이 있다 해 도 그 나라와 백성들에게는 불행한 일이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보다 소통이 능한 지도자이다. 맹자 께서 이르기를 ‘여민해락, 고능락야(與民偕樂, 故能樂也)’란 말이 있다. 올바른 지도자라면 백성과 더불어 즐 거워야 한다. ‘내가 해 봐서 아는데’의 또 다른 폐해는 잘된 일에만 나서서 생색을 내며, 정작 책임져야 할 궂은일에는 수 수방관한다는 점이다. 도와주지 않아도 배가 터지는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깎아주며 뒵들이를 해 주면서도, 벌 써 22명의 귀한 생명이 희생된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벙긋 하지 않는다. 혹시 ‘그가 해 보지 않아서’ 침묵하는 것인가. 맹자의 말씀 중에 ‘무죄세(無罪歲)’란 것이 있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죽어가는 걸 두고 올바른 지도자라 면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흉년이 들어서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된 일은 제 덕이 고, 안된 일은 모두 노무현 탓으로 돌린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대통령과 어깨를 두르고 파안대소한다고, G20 회의를 수십 번 한다고 백성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도 없는 국격이란 걸 높 일 생각을 거두고, 궂은일에 백성과 함께 가슴 아파하고, 내 탓이라고 자복하는 일부터 ‘그가 해 봐서 알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시백_ 소설가, ‘리얼리스트100’의 상임운영위원이다. 연작소설집『누가 말을 죽였을까』, 장편소설『메두사의 사슬』,『종을 훔치다』,『갈보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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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담그는 매실청의 계절이 왔다. 10kg로 두 항아리 담그면 일 년 매실청 완성. 도시에서의 나만의 작은 행복이다. 올해는 꼬맹 이도 한몫 거든다. 정성껏 길러준 농민 분들 덕분이다. 꼭지 따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는 건 남편 생각에……!? 이정남의 페이스북에서 2012.6.10


제성이네 귀농일기

내 삶을 자연과 가장 가깝게, 이제 시작이다!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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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처음 본 날

니냐?” 옆에 있던 도영이가 거든다. “처음 왔을 때보

괴산 청천면 이평리 253-2번지.

단 좋은 것 같은데요? 마당에 꽃도 많고.” 덩달아 소리

현주 언니 소개로 이 집을 처음 본 날이 생각난다.

치는 감영이, “형! 안에 화장실도 있어!”

페인트가 벗겨져 흉측하게 속살이 드러난 삐딱한 철

그 전에 둘러본 몇몇 집은 마당에 재래식 변소가

문,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흙벽, 여기저기 기워놓아 바

있던 터라 감영이는 집안에 수세식변기가 있다는 것

람 불면 훌러덩 날아갈 것 같은 지붕, 아귀가 맞지 않는

자체만으로도 좋았나 보다.

문들, 빗물인지 쥐오줌인지 얼룩진 천장, 반 이상 허물 어져 내린 헛간, 수평이 맞지 않아 기울어진 방들, 울 퉁불퉁한 바닥······. 이 집은 쫌 심하다. 이런 데선 절 대 살 수 없어. 좀 더 찾아보자. 그 후로 오랫동안 찾아보고 기다렸지만 다른 집은 없었다. 이집에서 살아야 되나? 온 식구가 다시금 이 집을 둘러봤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처음보단 충 격이 덜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이제성씨 하는 말. “정리만 잘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딱 니가 좋아하는 분위기 아

흥! 좋긴 뭐가 좋아! 코웃음을 쳐놓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눈길 가는 데가 꽤 있다. 예쁘게 쌓아올린 흙돌담, 돌담 밑에 심어져 있는 예쁜 꽃들, 이것저것 길러 먹을 수 있는 아담한 마당, 손보면 살아날 것 같은 화단, 장독대, 정감어린 창호 지문······. 이 정도면······? 현주 언니가 다시금 쐐기를 박는다. “은희야, 이 동네 집이 없는 걸 어떡하니? 그냥 한두 해 캠핑한다 생각하고, 베이스캠프거니 생각하고 살아라. 살다가 집지으면 되잖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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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 네 식구 알콩달콩 꼭 붙어 살면 됐지. 집이 뭐 그리 중요하랴. “여보~ 계약해!”

비했다. 때가 되어 한두 분씩 오시더니 어느 순간 사람 들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인사하랴, 국수 건지랴, 고명 얹으랴, 상 차리랴, 술 따르랴 정신은 없었지만 ‘살러 와줘서 고맙다’며 두

이사 오던 날 대전에서 아침 일찍 짐을 싸기 시작해 괴산에 짐을 풀어놓고 보니 해가 저물었다. 천장은 낮고 문은 작다 보니 모든 살림이 해체와 조립을 반복했고, 바닥과 벽 수평이 맞지 않아 가구 수 평 잡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지 덕분에 신이 절로 났다. 다 정리하고 보니 80인분 의 국수를 삶았다. 덕분에 어르신들이 가시고 난 자리 에 쌓인 건 80인분의 마음과 정성이었다. 내복상자에 조심스레 담아 오신 빛바랜 살구씨비 누, 농협 가격표 딱지가 그대로 붙어있는 노란색 트리

는 참 좋네요”만 계속 말씀하시던 이삿짐센터 아저씨

오, 당신네 몸집보다 더 큰 휴지꾸러미, 예쁜 포도주

들께 어찌나 죄송하던지. 도시에 있을 때도 많은 살림

병에 담긴 매실효소, 내 허벅지만한 칡뿌리, 겨울김장

은 아니었는데 작은 시골집에 들여놓으니 집안이 가

꺼리 예약까지······. 아침에 방송 듣고 일하다 말고 부

구로 꽉 찬 느낌이다. 정리 못한 짐은 한쪽으로 쌓아

랴부랴 챙기셨을 그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돌아가신

놓고 좁은 방에서 네 식구가 어깨를 부딪치며 첫날밤

친할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영, 감영은 새로운 학교와 친구들에 대한 기대 와 설렘으로 재잘댔고, 이제성씨와 나는 우리가 원하 던 삶으로 한 발짝 다가섬을 자축하며 희망을 얘기하 다 잠들었다.

집들이하길 잘했지~ 아침 댓바람부터 이장님이 마을방송을 하셨다. “아~ 아! 얼마 전 백골 김아무개 집에 이사온 이제 성군이 점심 12시에 식사대접을 한다 하오니 동네 분 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오셔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 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얼마 전 백골 김아무 개씨 집에~~” 마당에 큰 솥 걸어 육수 내고, 국수 삶고, 방앗간 에 가서 떡도 맞추고, 막걸리도 말로 받아놓고, 솜씨 는 없지만 조물조물 무치고 볶고 나름 동네잔치를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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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햐~’하시며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건네는 할아버

싫은 내색 없이 “애들 뛰어 놀기 좋겠어요. 공기

을 보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손 꼭 잡아주시는 할머니, ‘아이구, 심들것어. 좀 앉았


어깨걸기

으려 애쓰자.

이 맛에 산다 요즘 이제성씨의 하루는 “예! 형님”으로 시작해서 “예~형님”으로 끝난다. 이른 아침, 눈도 비비기 전, 밥을 먹다가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전화벨만 울리면 벌 떡 일어나 “예, 형님”을 외치며 나가기 때문에 붙은 애 칭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큰 조직에 몸담고 계신 분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 반장이 되었다. 서 울촌놈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서툴러도 하려고 달려 드는 모습이 동네형님들 보기에 좋았나보다. 반장이 라고 해봐야 자질구레한, 누구나 하기 귀찮아하는 동 네 잡다한 일을 하는 것뿐인데, 우리 제성씨는 콧노래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낮에 국

를 부르며 즐겁게 한다.

수 드시며 하시던 할머니들 얘기에 자꾸 웃음이 난다.

동네 할머니들은 핸드폰이 안 울려도, 냉장고가

할머니1 : 이 동네가 될래나벼. 젊은 사람들이 모

안 돌아가도, 이장 방송이 안 들려도, 심지어 뻐꾸기

여드니 말여. 애들도 많고 을매나 좋아. 잘왔어. 근디

시계가 지 맘대로 울어도 “우리 반장님, 우리 반장님

뭐 해먹구 살껴?

~” 하며 제성씨를 찾는다.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한 최

할머니2 : 아이구~ 별걱정을 다 허네. 돈 많이 벌

고의 기술자가 우리 마을에 왔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

었으니께 이른데 오지. 옛날허구 틀려서 요즘은 읎으

는다. 이젠 “아이고~ 으르신 저 이사 안 왔으면 어쩔

면 못 와. 서울서 돈 벌어야지 이른데 올 수 있겄어? 수

뻔 하셨어요?” 하고 너스레까지 떠는 제성씨. 이 맛에

억 벌어놓구 오는겨. 안그려? 내말이 틀려?”

제성씨는 오늘도 오토바이로 바람을 가르며 서에 번

할머니1 : 허긴~ 이 음식 차린 거 봐. 잘 먹을게. 새댁~ 수억? 새댁? 얼굴이 붉어진 나는 동네잔치하길 잘 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처음엔 떡만 돌리려고 했거 든요).

쩍, 동에 번쩍! 하고 다닌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도영, 감영은 아홉 시도 되기 전에 곯아 떨어진다. 학교도, 동네도 온 천지가 놀이 터이니 한창 아이들한텐 천국이 따로 없다. 도영이 반은 일곱 명, 전교생은 마흔 일곱 명. 감

살아가는 매 순간을 감사한 마음으로 채우려 한

영이 유치원은 5,6,7세 모두 합쳐 열두 명이니 서로

다.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풍요로워

모르는 아이가 없다. 그리고 나이, 학년 따지지 않고

지지 않을까? 또 마음이 풍요로우면 저절로 행복해지

모두 어울렁더울렁 노는 또래친구들인 것이다. 특히

지 않을까? 그래! 경제적 풍요보다 마음의 풍요를 찾

우리가 사는 백골은 아이들이 많은 동네다. 우르르 같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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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 갔다 같이 와서 같이 논다. 자기네들끼리 다리 밑에 기지도 만들고,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도 구워먹 고, 산속탐험도 하고, 나무 칼싸움도 하고, 편짜서 축 구도 하고••••••. 덕분에 상처도 많고 손과 볼은 겨우 내 내 터 있었지만 그 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아 좋다. 좁은 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플라스틱 장난감 을 몇 푸대 정리해 버릴 때는(긴 장총 두 자루만 빼고) 몹시 아쉬워하더니 이젠 버린 장난감 생각이 안 난다 고 한다. 요즘처럼 봄나물이 많이 나올 때는 하루가 멀 다하고 나물을 캐온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동네 구석 구석 휘젓고 다니니 어디에 어떤 나물이 많은지 나보 다 더 잘 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깜짝 놀라 “엄마! 괴산엔 별 이 왜 이렇게 많아? 누가 하늘에 뿌려 논 것 같은데~” 하는 감영이.

작업에 들어갔다. 동네 형님이 조심스레 지붕에 올라

서울에서 내려온 외할머니한테 “할머니, 서울에

가고 제성씨는 밑에서 일을 보고 나는 안에서 ‘모듬봄

서 살 때보다, 대전에서 살 때보다 여기 괴산에서 사

나물전’을 만들었다. 지붕공사 끝나고 막걸리 한 잔 먹

는 게 제~에~일 좋아. 계속 여기서 살 거야. 할머니

기 위해서다.

도 내려오지~” 하는 도영이.

또, 비가 온다. 바람은 약하지만 어제보다 더 많

온몸이 흙투성이 된 채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다

은 양의 비다. ‘하지만 우린 어제 지붕공사를 하지 않

혼나도, 이 신발, 저 신발 다 버려놔 신을 신발이 없어

았던가?’ 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천장에서 무언가 떨

도 아이들은 이 맛에 사는가 보다.

어진다. “어?!” 하고 천장을 보니 벽지는 벌써 흥건히 젖은 지 오래다.

우리 방에도 비님이 내리시다 비가 온다. 바람마저 심하게 분다.

똑 떨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루룩주루룩

큰 바람이 불 때마다 지붕에 덧붙여놓은 것들이 들

쏟아졌다. 도영, 감영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것 같

썩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나오냐?”고 소리쳤더니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는지

하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니다 다를

우리 집 무너지는 것 아니냐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

까 마당에 크고 작은 플라스틱 판자들이 마구 떨어져

니다.

내일도 비소식이 있던데••••••. 서둘러 지붕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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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표정으로 옆에서 재밌어 하며 웃는다. “지금 웃음

이러다 우리 집 지붕 다 날아가는 거 아냐? 걱정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바로 쓰레기통을 갖다 놓았다. 처음엔 예쁘게 똑

화살은 바로 제성씨한테 날아갔다. 이게 지붕 공 사한 거냐! 이렇게 해놓고 막걸리가 넘어갔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등등. 본인도 할 말이 없는지 계

전을 시도했다. 앞집에 사는 동네형님이 수리해서 쓰

속 왔다 갔다 하더니 비가 잦아든 틈에 우비 입고 실리

라며 공짜로 주신 귀한 놈이다(실제 수리비가 만만치

콘 총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간다. 들떠 있는 곳을 실리

않게 들어가 정말 귀한 몸이 됐다).

콘으로 메꿨다며 이젠 됐다고 한다. 그래도 믿을 수 없 어 끙 하고 있는데 어! 정말 비가 안 샌다.

요즘 형님들 집엔 커다란 트럭과 승용차는 기본,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농기계가 여러 대이기 때문에 경

지금은 다 말라 희미한 얼룩만 남았다. 갑자기 이

운기는 그야말로 자리만 차지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비가 새는 판잣집에 새우잠

신세이다. 동네에서도 7,80을 훌쩍 넘기신 어르신 한

을 잔데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

두 분만 쓰신다.

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한 숨일랑 쉬지 말고 가 슴을••••••’ 비님! 우리 방에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리해서 며칠을 동네 한 귀퉁이에 고이 모셔두고 쳐다만 보다 드디어 동네 형님한테 경운기 운전을 배 웠다며 얼굴이 벌개져서 들어온 제성씨. 며칠 지나지

머리에서 몸으로 나아가기

않아 경운기로 동네 한 바퀴 태워준다며 나를 불렀다.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됐다.

헌데 웬걸? 시동도 걸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지나가던

마을 땅을 얻었다. 논 600평, 밭 1200평. 농사를

동네형님 어이없이 웃으시며 하시는 말씀, “나 원 참!

처음 짓은 우리에겐 적지 않은 크기다. 운전면허증도 없는 제성씨가 큰 맘 먹고 경운기 운

키를 거꾸로 넣고 지금 뭐 하는겨?” 그렇다고 기죽을 우리의 제성씨가 아니지. 큰기침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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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해가면 자신 있게 큰 소리로 “야! 타!” 해서 타긴 했는데 영 불안하다. 이러단 같이 죽지 싶어 얼른 내려 난 슬슬 걸어갈 테니 혼자 가라고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이젠 제법 밭과 집을 능숙하게 오간다. 헌데 너무 자만했던가! 경운기에 볏짚을 잔뜩 싣고 왼쪽 내리막으로 핸들을 꺾는 순간 경운기가 논 두렁으로 처박히고 만 것이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 해 동네형님 몇몇이 트럭과 로프를 들고 출동하셨다. “안즉 멀었어. 앞으로 몇 번 더 쳐박어야 느는겨. 그래 도 다행히 다치진 않았네.” 집에 와서 보니 팔, 다리, 등짝 여기저기 피멍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쪽팔 려서 말을 못했겠지?! 거름도 만들어 쓰고, 석유도 최소화 하는 (비닐 멀 칭도 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으려고 한다. 주위에서 걱

여기고, 진심으로 관심 있게 지켜보며 더불어 같이 살

정의 목소리, 빈정대는 목소리가 크다.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서툰 농사라서

‘1년 해 보고 얘기해라. 그래야 정신 차리지’, ‘ 풀밭 만들일 있냐?’, ‘너무 힘들이지 마라. 빨리 지친 다’, ‘뭐 먹구 살려구 그러냐. 돈이 되야지~’ 등등. 풀밭을 만들 수도 있고, 수확이 없을 수도 있고, 지쳐 주저앉아 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삶을 자연과 가장 가깝게 지켜나가자 는 내 안의 약속이기 때문에 다시금 극복될 것이다.

맘먹은 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노력과 정성으로 가꾼 것들을 밥상에 올리고 나눌 수 있으리라. 오랫동안 유기농 제품을 열심히 사 먹기만 했던 소 비자에서 진정한 생산자의 세계로 접어들 참이다. 머 리로 이해했던 삶의 가장 귀한 가치들을 이제부턴 몸으 로 터득하는 나날들이 되리라 믿고 있다. 생생하게 살 아있는 더 건강한 삶.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이들과 밭도 갈고, 돌도 고르고, 풀도 뽑아가며 함 께 기를 농작물들을 기쁘게 고대하고 있다. 아이들도 제가 기른 것은 모두 자기들이 먹을 거라고 의욕이 대 단하다. 건강한 먹거리를 먹는다는 것은 좋은 유기농 상품 을 사 먹는 것이 아니라 내 밥상에 오르는 음식들의 생 산지와 생산자와 생산과정 자체의 건강함을 중요하게

힘써주세요! 아이들이 노는 게 험하고 온통 흙이다 보니 운동화 사대기와 빨아대기가 보통일이 아니네요. 작아진 운동화, 유행이 지나서 안 신는, 그냥 이유 없이 신발장에 쌓여있는 신발들 모두 보내주시면 동네아이들과 기쁘게 나눠 신도록 하겠습니다.

김은희_ 93년도에 입학했다. 졸업 후 생활한복 <여럿이 함께>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충남 대전으로 내려가 마당극패 <우금치>에서 15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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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묻고 순재가 답하다

꽃의 예쁨에 눈뜬 후, 남자 빛깔이 달라지다

평일 점심 무렵인데도 용산의 한 마트엔 사람들로 붐볐다. 원순재 회원은 프랜차이즈 로고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 고 있었다. 황금색 넥타이가 단정했다. 지난밤에 그는 미리 질문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자신은 워낙 평범하고 밋밋하게 살아온 터라 딱히 할 말이 없 노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A4 가득한 질문지를 보내줬다. 물론 질문은 예정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실은 소식지 안에 ‘프랜차이즈 특집’이 있는데 거기에 형의 경험담을 취재하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원 회원은 안경점 사장이면서 현재 전남 무안 소재 초당대학교 안경광학과 3학년 학생 신분이다. 물론 졸업장이 없 어도 안경점을 하는 데 별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 계속할 일, 안경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라고 한다.

공동취재

김선주, 이원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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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 형, 학교생활은 이제 완전히 적응됐죠?

순재: 근데 저는 평생 연애 한 번 못해 봤어요. 여자

순재: 얼마 전에 중간고사 봤잖아. 거의 25년 만에 시

들한테 인기가 없었어요. 그냥 짝사랑만 몇 번 해 봤

험 본 거지. 성적? 그건 묻지 마. 학부 때도 성적은 형

어요.

편없었는데 뭘. 게다가 안경광학이라는 게 이과야. 물

원근: 그건 형이 딱 보기에도 밍숭맹숭 재미없게 생겨

리, 수학 이런 거 엄청 나와. 안 그래도 돌아서면 잊어

서 그렇지.

버리는데 이건 계산이 많으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야.

순재: 그러게. 내 인생이 재미가 없어. 재미와 담쌓고

선주: 나는 공부보다 거기까지 통학하는 게 더 힘들겠

살았어요. 밋밋하게 그냥저냥.

다. 요즘은 누가 불러주면 전화번호 열한 자리도 한 번

선주: 형제는 어떻게 되는데요?

에 기억을 못하는데 뭘. 애들은 어떻게 돼?

순재: 3남1녀 중 막내예요. 위로 큰 형은 중대 약대 77

순재: 큰 딸애가 중2고, 아들놈은 중1.

학번예요. 형들이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다들 성실하

선주: 결혼은 언제 했어요?

긴 한데 형제간 우애가 별로 없어요. 형제가 모여서 술

순재: 서른네 살 때요. 소개팅으로 만났어요.

한 잔 한 적이 없어요. 좀 어렵더라고.

선주: 소개팅?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네.

원근: 살은 왜 그렇게 빠진 거예요? 완전 홀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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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참, 형은 채식주의자

아를 했는데 거기에 애들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딱

죠?

이것만 했어.

순재: 살은 내가 빼려

원근: 그런데 형수가 뭐라고 안해? 나 같으면 목 졸렸

고 노력한 게 아니라

겠는데.

알아서 빠진 거야. 그

순재: 아내가 저랑 4년 차이 나요. 아내는 그때 춘천여

리고 채식은 1년 반 했는데 이젠 관뒀어. 고혈압이 있

성민우회 상근자였어요. 그 상근비로 살았어요. 그때

어서 쭉 약을 먹어왔는데 그만 콩팥이 나빠진 거야.

도 뭐 빚으로 살았지. 마흔 이전까지는 정말 경제적으

아마 독한 약 때문일 거야. 그랬더니 병원에서 채식

로 마이너스 인생이었어요.

을 하면 고혈압에 도움이 되고 혈압이 나아지면 콩팥

선주: 아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거예

이 좋아질 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생선, 계란, 우유

요? 넘 태평이었던 거 아냐?

도 먹지 않는 완전 채식을 했었지. 근데 별 효과가 없

순재: 백수생활 막바지엔 주유소 알바를 했어요. 애들

더라구.

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

선주: 채식하면 살이 빠져요?

더라고. 아빠가 여기서 기름 넣어줬다면서. 그러다가

순재: 10㎏ 빠졌는데, 채식 때문은 아니고. 장사하면

알바 그만두고 남양주로 내려갔어요. 춘천을 뜬 거지

서 그냥 빠졌어요. 몸이 고되서. 남양주 마석에서 편

요.

의점 2년 동안 3㎏, 식당할 때 4㎏, 안경점 시작하고

선주: 갑자기 뜬금없이 남양주는 왜?

3㎏. 딱 그렇게 빠지더라고요.

순재: 남양주에서 큰 형님이 약국을 하고 계셨어요. 너

선주: 대학 졸업하곤 바로 춘천으로 갔죠?

무 답답하더라고, 춘천은. 되는 일도 없고, 지역도 너

순재: 원래 고향이 춘천이에요. 대학 졸업할 때 친구들

무 좁고. 춘천이 고향이긴 하지만 춘천은 여유 있는 노

은 현장을 가는데 난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전 사실 무

인네들이 유유자적하긴 더없이 좋지만, 젊은이가 먹

서워서 시위할 때도 화염병을 못 던졌어요. 앞에 못나

고 살기엔 할 만한 게 넘 없어요. 꼴보수 성향이 강한

가서. 2선에서 그냥 돌멩이만 던졌지. 그런 빚이 계속

것도 답답했고. 일단 여길 떠나보자, 생각했지요. 정

남더라고. 그래도 뭔가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할 수 있

말 무대책으로 떠난 거야. 아내도 동의하더라구요. 그

는 게 있을까 찾다가 한겨레신문 지국을 했어요. 근데

런데 남양주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형님이 뇌출혈로 쓰

이게 결정적으로 돈이 안돼. 빚만 늘어가는 거야, 10

러지셨지.

년간 하면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손실을 보면 사람이

선주: 아이고, 저런. 남양주에서의 삶도 순탄하지만

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것도 놓쳤어. 지역사회가 워낙

은 않았겠네.

좁으니까 네트워크도 제대로 안되더라고. 한겨레 그

순재: 뭘 할 수 있을까 리스트를 한 스무 개 뽑았어요.

만두고 2년간 백수로 지냈어요.

택배업을 할까, 피자집을 할까 쭈욱 뽑아봤죠. 그러

원근: 2년간 백수로? 뭐하면서요?

다가 편의점을 열었어요. 편의점을 한다니깐 남들이

순재: 첨엔 6개월 정도만 쉬려고 했는데 그게 2년이 되

다 반대하는 거야. 몸 고되고 돈 안된다면서 모두 말

더라고. 정말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때 아이들 공동육

려요. 그런데 편의점이 저비용으로 할 수 있는데다 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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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수입은 될 것 같더라고. 물론 큰 돈은 아니지

라구요. 그때는 세 개 하는 게 목표였어요. 관리자를

만 기복이 없어. 하지만 프랜차이즈 중에서 가장 악질

두면 가능하겠더라구요. 그러다가 금융위기가 오면서

이 편의점이에요. 우리 매장이 A급에 속했는데도, 1

멀어지긴 했지만. 그때 콩팥이 나빠졌고, 그래서 다음

년 365일 하루도 못 쉬고 일하는데 달랑 생활비만 버

으로 미뤄졌죠.

는 거예요. 본사가 다 가져가. 못 쉬니까 그게 가장 힘

원근: 아니, 무슨 인생이 이렇게 드라마틱해. 다 굴곡

들더라고. 또 편의점은 알바 구하는 게 일이에요. 딱

이야. 이게 어떻게 평이하게 살아온 거야?

두 달씩 밖에 안해. 사람이 비니까 그 빈자리 채우는

순재: 아파 보니까 알게 되더라. 나이 들면 더 고집스러

게 스트레스야. 그래서 시작한 게 식당(만두집)이에

워지기도 하는데, 난 남의 말을 좀 더 듣게 되더라고.

요. 마진이 좋으니까, 권리금 주고 들어갔어요. 1년간

근데 이상하게 속은 좁아져. 이해되세요?

은 편의점하고 식당을 같이 했어요. 그땐 정말 열심히

선주: 응. 우리 집에도 한 명 있거든요. (웃음)

살았어요. 그 전에는 성실하긴 했지만 열심히는 안 살 았거든. 그때는 아무 모임에도 못 나갔어요. 딱 하나,

원순재 회원은 이 때 아산병원에 입원했는데, 6인

추사총회 때만 갔어요. 그마저도 안 가면 사람 도리가

실에서 정말 막판까지 온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큰

아니겠다 싶더라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여기서 무너지면

원근: 식당은 어땠어요? 명인만두였죠. 뭐 이러니깐

안되겠다, 겁이 덜컥 났다고.

프랜차이즈 특집 같다.(웃음) 순재: 돈은 되더라구요. 어차피 장사하는데 이익을 극

순재: 왜 센 약들 있잖아? 항암치료제, 면역억제제 이

대화하자, 식당을 여러 개 해야겠다, 그 생각이 들더

런 것들을 뭉텅이로 먹으니까 정서적으로 변화가 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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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걸기

더라고. 그 일 겪으니깐 꽃이 예뻐 보이더라, 생전 첨

원근: 프랜차이즈 특집 그만하고 기념사업회 얘기 좀

으로.

해야겠다. 내창이형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였어요?

선주: 안경점은 어떻게 해서 시작한 거예요?

순재: 사실 한 번도 못 봤어. 84년에 입학하고 85년에

순재: 누가 소개해 줬어요. 매장도 프랜차이즈도. 다

부활 총학생회에서 사회부 차장 했어. 사회부 차장이

우연이야. 편의점부터 안경원까지. 15평 매장에 직원

라는 게 그냥 이 일 저 일 잡부야. 대자보 떼었다 붙이

은 다섯이고, 일요일엔 여섯 명이 일해요. 마트 옆이

고 그런 거 하는 거야. 여기 옮기라고 하면 옮기고 저

라 주말에 사람이 몰려드니까. 주말엔 한 오십 명 정

기 옮기라고 하면 옮기고. 87년부터 89년까지는 휴학

도 찾아와요.

상태였거든. 그러니깐 만약에 봤다면 86년에 잠깐 봤

원근: 안경점에 오면 다들 안경 사가지 않나?

을 텐데 그때는 서로 전혀 몰랐으니까.

순재: 누가 다 너 같은 줄 아니? 그냥 가는 사람이 더 많

선주: 나도 내창이 얼굴을 못 봤어. 결혼식 때 왔다는데

지. 어떤 사람은 검사까지 다 받고도 그냥 쑥 가 버려.

사진에만 있더라고. 누가 소개를 안 시켜 줬으니까 몰

선주: 가족 하곤 어때요? 잘 지내요?

랐지. 그래서 내창이하고의 기억은 전혀 없는데, 내창

순재: 아이들 중심으로 돌아가죠 뭐. 최근에 가장 재밌

이와 인연 있는 후배들을 보면서 내창이를 유추해 보게

게 본 게 김정운 교수가 쓴 ‘남자의 물건’이란 책인데

되는 거지. 후배들이 사는 방식을 보면서 내창이에 대

그거 공감 많이 가더라고. 중년의 고독감 이런 거 느껴

한 신뢰라든가 그런 생각들이 간접적으로 들어. 저랬

지고. 사실 난 요즘 갱년기인가 봐. 남양주가 사실 출

겠다 내창이는, 뭐 이런 거.

퇴근이 힘들잖아? 난 서울로 들어오고 싶은데 그게 안

순재: 왜 아직도 저러고 있나,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되더라고. 아이들이 전학가기 싫다고 하니깐 그것으

선주: 사람을 대하는 방식, 관계하는 거, 보는 시각, 이

로 논의가 딱 끝나는 거지, 뭐. 아내도 동의해 버리고.

런 것의 차이지 뭐.

선주: 아내는 무슨 일 하는데요?

순재: 하여튼 내 운동의 뿌리이자 바탕은 기념사업회

순재: 춘천 여성민우회 공동대표예요. 지방은 사람이

고 여기 사람들이잖아? 다 선후배들한테 받은 거니까.

귀해. 전업주부이면서 그 일을 하지. 맡을 사람 없다고

활동은 활발히 못해도 죽을 때까지 가져가고 싶을 뿐

부탁이 들어오니까 어쩔 수 없이 맡은 거지요.

이지.

원근: 그래서 형의 ‘물건’은 뭔데요?

선주: 기념사업회에 바라는 점은?

순재: 하이파이 오디오. 아직 입문 수준인데 몇 주 전

에 이거 질러가지고 지금 아내랑 냉전 중이야. 말도 안 해. 내가 좀 오래가는 편이야. 성용이한테 추천받았는 데 3년 만에 장만했어. 그리고 또 하나. 문익환 선생 님 친필휘호. 91년에 강연 오셨다가 외대 학생회에서 써주셨다는데 애들이 관리를 못해서 막 굴러다니더라 고. 그래서 내가 보관하겠다, 하고 들고 왔지. 우리 집 마루에 걸려 있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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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장에서부터 어떻게든 적용해 보자하는 바람이 있 어. 남만 바꿔라 바꿔라 얘기만 했지, 사실 나부터 바 꿔야겠더라고. 하지만 편의점 알바는 두 달이면 그만 두지, 식당은 6개월이면 그만둬. 너무 자주 바뀌니까 적용을 할래야 할 수가 없더라고. 근데 여기 안경원은 그래도 오래 가니까 여기선 지금 하나씩 해 보고 있지. 근무시간 줄이면서 사람도 더 채용하고, 복리후생 조 건도 늘려주고, 생일수당도 따로 챙겨 주고, 여튼 좀 더 나누려고 노력 중이야. 한 사람을 더 쓰니까 업무효 율이 높아져서 그런지 이익이 변동이 없더라고. 난 긍 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자신해. 선주: 특별히 이것만은 하고 싶다거나 이런 포부는 없

어요? 순재: 프랜차이즈 하나 더 하고 싶어. 매장 하나 더.

(웃음) 이번 여름부터가 수익실현인데 그동안 빚진 것 중에 급한 거는 이번 여름에 갚거든. 그래서 올해부터 는 시민사회단체에도 매출 1%는 기부하려고. 순재: 난 기념사업회가 민주동문회로 갔으면 좋겠어.

좀 더 외연을 확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누구

서울에만 안경점이 2000여 개. 용산구에만 45개

든지 들어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들 때도 된 거 아닌가?

가 있다. 안경점도 과당경쟁 시대에 들어섰다. 원 회

민주동문회 안에서 추모사업, 기념사업을 상설기구화

원의 안경점은 용산 아이파크 백화점 지하2층, 이마트

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고. 그리고 소모임 활성화도 꼭

매장 입구에 있다.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자

했으면 해. 나는 84 동기모임부터 만들려고 해. 영어

리, 누구든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

과 모임부터 해야지. 나이가 드니깐 동기들이 보고 싶

다. 특별할 것은 없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안경점, 안

어요. 또래 애들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워. 참, 그리고

경점 특유의 깔끔하고 친절한 직원들, 스쳐 지나가게

자영업자들 모임도 만들고 싶어. 정보도 주고받고, 서

마련인 익숙한 풍경 속에 그가 있다. 꽃의 예쁨에 눈뜬

로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거라고.

이후로 귀가 열리고, 조금 수다스러워지고, 하고 싶은

원근: 형은 워낙 많은 프랜차이즈를 겪었으니까 강좌

일이 많아진 중년의 남자. 평범해 보이는 그 남자의 속

를 열어도 되겠어요.

이 여전히 뜨겁고 분주하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가 눈

순재: 강좌는 이미 기수가 하잖아. (웃음)

을 맞추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선주: 경영자로서의 마인드가 궁금해요. 순재: 한국 사회의 변혁의지와 진보적 가치들을 내 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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эЧИьИЩъ▓╜ ьзАьГБьаД

- ьКдым╝ ыСР ъ░ЬьЭШ ы╣Ды░Аь╣┤ыУЬ ьдС -

├С╨Щр▓╜ р╣ЕтАл▌НтАмр╕С ╘Йсп▒ сЬЦ┼бсо╣ ╟нр▓Ж с▒й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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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을 떠나다 정원옥 표지그림은 중앙대학교 조소학과를 나온 허숙경의 드로잉展 <스물 두 개의 비 밀카드-나의 소년, 나의 아바타 The Fool>에 전시되었던 그림 가운데 하나다. 타 로카드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면 ‘스물 두 개의 비밀카드’가 78장의 타로카드 중 22장의 메이저카드를 뜻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챘을 것이다. 타로카드는 점이다. 점은 재미로 보는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찜찜한 말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것은 잠깐의 위안이고, 가벼운 심리놀이다. 흥미로 운 건 타로가 미래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선택,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재를 거슬러 과거로 통하는 비밀스런 입구가 섬광처럼 열 렸다 닫히는 순간이다. 미래가 궁금한 사람은 과거로 떠나야만 한다. 봉인된 진실 을 알기 위해 무모한 발걸음을 내딛는 일, 타로는 시간여행이다. 나는 2010년 11월, 인사동 가나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그녀의 전시회에서 이 그림들을 처음 만났다. 당시로서는 타로카드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 다. 강렬하고 복잡한 선들, 움직이면서도 정지되어 있는 기이한(uncanny) 이미 지들, 정치철학적인 화두를 담고 있는 그림의 제목들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림 은 엽서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나는 이따금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엽서를 꺼 내서 넘겨 보곤 했다. 허숙경의 시간여행에 얼핏 동행한 느낌도 들었지만, 말로 확 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나의 시간여행이기도 한 거니까. 허숙경의 <스물 두 개의 비밀카드>는 시간여행에 대한 재현이다. 그녀의 작 업은 미래를 알기 위해 과거와 만나고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끈 덕지게 어깨동무>의 작업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이야기와 의 문사의 진실을 한 권의 책 속에 녹여내는 일, 그것은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다. 미 래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이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만으 로도 <끈덕지게 어깨동무>의 표지그림으로 허숙경의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충분 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 종일 컴퓨터만 쳐다보니 눈이 아프다. 이젠 안구 건조증도 생기는 듯하고. 라식 수술로 다시 찾은 시력이 점점 나빠져 가는 듯하다. 야쿠르트 아줌마가 뿌려주신 김수현 사진이 그나마 휴식 아닌 휴식을 주네.ㅋㅋㅋ 배성희의 페이스북에서 2012.5.30


의문사를 다시 말한다 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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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그리고 1986년 여름 ‘과거사정리를위한진실과화해위원회(이하 진화위)’가 뉴라이트 세력의 왜곡과 전횡 앞에서 무 기력하게 무너진 채 문을 닫은 지 1년이 됐습니다. 이명박 정권에 기대한 바는 없지만, 이렇게도 무참하게 막을 내리게 될 줄은 몰랐죠. 유족의 허망함과 절망을 바라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이 되고 나서 조금씩 희망이 싹트는 듯했습니다. 이거 뒤집을 수 있겠구나,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들 생각한 게 아닐까요. 희망은 과거청산 쪽에도 빛을 비춘 모양입니다. 진화위에서 일을 했던 조사관 중심으로 얘기 가 오가더니, 4·11 총선을 앞두고 과거사 사건 해결을 위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총선을 통한 의석 과반수 확보가 가능하리라는 낙관과 대선의 희망이 동력이 된 듯합니다. 평화박물관 강 의실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늦게 찾아간 강의실에는 전직 조사관과 민간인학살 유족, 단체 활동가 등 20여 명이 토론 중이 었습니다. 귀퉁이에 앉아 결론을 모아가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뭐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시간이 갈수록 더해지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어딘가 어색하고 모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 었습니다. 뭔가 이 혼돈의 정체는? 그날 찝찝하고 애매한 기분은 꽤 오래 심란하게 흔들어 댔습니다. 그리고 과거사 사건 토론 회에 참석해서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의문사’가 생략된 겁니다. 논의를 어떻 게 하든, 포장을 어떻게 하든, 의문사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사건이구나. 진화위에 신청 접수된 1만 1175건의 사건 가운데 하나, 기껏해야 40여 건에 불과한 인권침해 사건이구나. 회의가 끝나 고 몇이 남아 프란체스카 성당 뒷마당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의문사 유족과 관련 단체의 역 할, 국가기구 준비 같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헤어졌습니다. 쓸쓸한 봄날 저녁 어 스름입니다. 1986년 여름 초입입니다. 젊다는 것만으로 빛이 나는 시절,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는 말 그 대로 대학 캠퍼스다웠습니다. 시절은 엄혹해도 젊디젊은 청년들은 싱그럽기만 합니다. 잔디밭과 기타, 막걸리가 최루탄, 화염병과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기도 했죠. 파란 하늘, 시골집 주인아저씨 족대를 들고 안성천으로 나가 한바탕 물보라를 일으키던 날, 잡고기에 비빔국수로 잔칫상이 벌어진 그날은 유난히도 맑았습니다. 한낮의 막걸리는 거품을 물 고, 스무 명 남짓 청춘들은 웬 웃음이 그리 헤프던지. 미행을 조심해야 하고, 두꺼운 책들을 밤늦 도록 읽고 토론하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집회 장소로 향하던 그 시절 20대의 긴박한 하루하루에 도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겨운 사람들, 벗들, 한창 나이의 맑은 웃음들, 화창한 시간들, 아름 다운 청춘입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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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까요? 양은솥으로 하나 끓여낸 비빔국수의 맛, 그 풋풋한 젊은 맛 기억하고 있을까요. 시리게 푸른 하늘 떠올릴 수 있을까요. 그날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창이가 있었는지도 확실 치 않아요. 아무렴 어떤가요. 그렇게 맑고 푸르른 날, 나는 내창이와 함께 살아왔거든요. 젊은 삶을, 정을 나누 던 벗은 시리도록 아픈 날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그가 거문도 바다에서 주검으로 떠오른 지 23년. 여전히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고, 사람들은 그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이내창이 누구냐?”는 질문이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생생한데, 그와의 짧은 기억 들이 너무도 처연하게 선한데, 다들 그를 떠나보냈나 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를 잊어도 될까요. 이제 놓아야 하나요. 참 오래된 고민이고, 끈질긴 질문입니다.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여 살 거냐고, 아직도 의문사냐고 힐난하는 얘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난 여전히 의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 위에서 사라졌다가 싸늘한 사체가 되어 나타났는데,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 온몸이 찢기고 퉁퉁 부은 채로 나를 찾아 달라고 하는데, 가슴에 묻을 수 있을까요? 사 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빼앗겼는데, 그냥 묻어지나요? 20년이면 충분하고도 남을까요? 답을 구하고 싶어요. 그리고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나도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이렇 게는 아니잖아요. 이건 내려놓는 게 아니고, 묻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포기하는 게 아닐까요. 아직까지 내가 구할 수 있는 답은 아니라는 부정어입니다. 왜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수만 가지 이유 가운 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내창의 죽음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밝 혀 보려는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사건을 밝히고자 한다는 생각입니다. 헷갈리죠. 저도 어렵습니다. 공부하 는 사람도 아닌데, 어려운 얘기하려니 식은땀이 나네요. 다들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라 칭하니, 그렇게 인정하고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결국 이내창의 죽음이 과거의 일인지, 아니면 현재 진행형인지 확인해야 하는 일이라면, 의문사 사건 전체와 의문사진상규명 위원회를 비롯한 국가기구의 조사, 과거청산 전반에 대해 알아보고, 그 속에서 답을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길고 지루한 길이지만 답을 찾기 위해 의문사 진상규명의 세월을 복기합니다.

국가기구의 10년을 복기하면 1998년 11월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국민은행 건물 앞쪽에 모입니 다. 그리고 땅에 징을 박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할 동지도 없지만,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거칠 게 없었습니다. 그때 알았을까요? 지금 세우는 이 천막에서 겨울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사계절을 넘기고서도 또 계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이야 1000일을 넘기는 투쟁이 익숙해졌지만, 그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 죠. 아! 그러고 보니 세월이 흘러 좋아진 게 아니라 더 나빠진 거군요. 그렇게 시작한 투쟁이 422일이라는 기나 긴 시간, 천막에서 새우잠을 자고, 아침에는 빌딩 화장실에서 간신히 세수를 하고는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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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400여 일간 반복하고서야 간신히 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 이 두 개의 법입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법은 운동진영의 폭발적인 관심과 애정을 받았지만, 의문사 진상규명법은 여전히 관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다 왔다고 해서 국가의 보 상을 받고서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섰습니다. 국가의 잘못 을 따져 배상을 받는다면 몰라도 폭력의 주체인 국가가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보상을 한 다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은 만들어졌지만, 의 문사 사건을 이해하는 사람은 유족과 그 주변 사람에 불과했고, 의문사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안 고자 하는 단위도 전무했습니다. 오히려 의문사 사건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진보진영의 주류라 고 보는 게 솔직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소외된 의문사 진상규명의 과제는 유족과 피해자 단체 중심으로 해 서 어렵게 준비 조직을 꾸립니다. 시행령을 만드느라 1년 가까이 진을 빼지만, 민간조사단은 사건 별로 분석도 하고, 법의학 공부도 하면서 국가기구의 진입을 준비합니다. 민간조사단은 ‘진상규명 의 과제의 실현과 더불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의 성과를 통해 과거청산의 파열음 을 낸다’는 목표를 제시합니다. 당시에는 민간인학살 등 과거청산의 과제를 현실화할 힘이 전혀 없 었죠.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빨갱이 딱지는 실로 위력적이었습니다. 의문사는 알다시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에 이른 사건’입니다. 의 문사 사건은 특별법에 의해 69년 삼선개헌 반대운동부터 김영삼 정권까지의 사건으로 한정하고 있 는데, 그 이유는 더 아래로 내려가면 과거청산 과제와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의 죽음으로 못 박은 것도 죽음에 차별을 둔 것이 아니라, 변혁운동의 과정에서 사망한 자를 조사한 다는 죽음의 성격을 특별법으로 규정하는, 의문사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 유족과 진보진영에서는 생명권을 침해당한 모든 의문의 죽음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 었습니다. 폭력으로 침묵을 강요받던 시절에는 자신을 지키는 것부터 저항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 라서 소극적 저항도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고요. 이 점은 의문사위 에서 내내 쟁점이 되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의 생명권 침해가 국가기구를 만들게 한 근본적인 이 유라는 것이죠. 유가협 의문사지회에서 진정 접수한 23건과 개별 접수된 사건을 포함해 1기 위원회에서는 83 건의 사건을 6개월간 조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법 개정을 통해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총 1년 6개월 동안 조사가 가능했습니다. 사건을 조사하기에는 너무도 촉박한 시간이었으나 위원회 는 추가 법 개정을 포기하고 1기 위원회의 문을 닫습니다. ‘이내창추모사업회’의 파견 결정을 받고, 그곳에서 일을 한 시기입니다. 무던히도 애를 썼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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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한다고 했는데, 수많은 의혹과 정황들을 좁히지 못하고, 확신만 가슴에 묻은 채 물러나야 했던 기억이 아프 게 하는군요. 조사 권한의 한계도 있었지만, 국가를 조사해야 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가장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날들입니다. 그래도 서울법대 최종길교수사건, 인혁당사건, 허원근사건, 박영두사건, 김준배사건 등 여러 사건의 타살 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타살 개연성과 정황을 압축해 간 사건도 많았고, 수많은 조작과 은폐의 내용들을 밝혀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건이 여전히 미궁인 채로 의혹만 증폭되었습니다. 유족들은 다시 거리에 나서야 했습니다. 엄동설한, 한겨울에 여의도에서 노숙농성이 다시 시작되었고, 질 기고 질긴 싸움은 법 개정을 성사시켜 2기 위원회를 출범시킵니다. 하지만 2기 위원회는 출발부터 유족과 민간 조사단에 대한 견제와 거부감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결국 진보진영의 대표로 민주노총에서 파견한 사무 국장이 출범과 동시에 해임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출발합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입니다. 정권의 기조 가 진보진영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의문사위는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과거청산의 과제는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당연시 하게 한 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국가의 폭력에 의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 서, 괴담 수준의 문제제기로 치부했던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 책임이 국가에 있으며 사과와 재발방지 등의 국 가적 노력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의문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와 맞물려서 국가기관이 직접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겠다고 나섭니 다.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청산 의지를 반영해, 국방부과거사위원회, 경찰과거사위원회, 국정원과거사위원회 등이 자체 조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거사위는 성과도 있었고,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습니다만 대체로 한계 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입니다. 국가가 스스로 국가를 부정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내 창 사건을 조사조차 하지 않은 과거사 기구에 대한 감정적인 생각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기소를 도맡았던 검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과거사 기구의 본질적인 문제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하지만 국가의 자기반성 기조는 민간인학살 유족의 투쟁 과정에서 특별법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모든 과 거사 사건을 모아서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과거사정리를위한진실과화해위원회’가 4년 시한으로 출범한 것 입니다. 법제정부터 누더기법이란 비판을 받았던 진화위는 이름 그대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정리를 위해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한다는 국가 기구입니다. 민간인학살과 인권침해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조사가 진행됐습 니다. 민간인학살의 경우 학살이 분명하기 때문에 개별 조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국적으로 자행된 학 살이라 피해자도 많고, 오랫동안 굴욕과 감시의 세월을 살아온지라 피해사실을 숨기는 일도 많아, 시간과 공력 이 필요한 일입니다. 단 몇 년에 끝을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래도 많은 사건을 해결하고 유해도 발굴하는 등 상당한 진척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인권 침해 사건, 그 가운데에서 의문사 사건은 아예 조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내창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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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경우 3년여 걸쳐 진정인 조사만 두 번 받은 것이 다였으니, 달리 평가하고 말고도 없겠습니 다. 물론 조사팀에 따라서는 일부 진실에 근접하기도 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전적으로 개인의 공이고, 개별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진화위의 성과와 한계는 뒤로 미루려 합니다. 자체 백서도 발간되지 않은 상태이고, 평가가 아직 진행 중에 있으니 기다려 보기로 하죠. 그때 판단을 해도 늦지 않겠다 싶습니다. 다만 민간 인학살, 납북어부와 조작간첩 등의 조사와 비교하면 유독 의문사 사건의 경우 조사의 형식도 갖 추지 못했고 최소한의 성의도, 예의도 없었다는 게 아쉬움을 넘어서는 객관적 사실이라 하겠습니 다. 과거청산의 과제를 안은 진화위는 뉴라이트의 장악과 공세적인 결정과 조작 등으로 만신창이 가 되어 문을 닫았습니다.

의문사의 역사적 관점을 바로 보아야 10년의 세월을 몇 줄 문장으로 압축하니, 모호하고 어색합니다. 그 길고도 긴 세월, 무수한 일들과 사건들이 얽히어 분노, 슬픔이 버무려진 채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유족들은 절 망에 빠져 낙향을 하고 말았습니다. 말이 없어진 노인들에게서 깊은 그늘을 봅니다. 살아서 자식 을 땅에 묻을 수 있을까, 가슴에서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프고 죄스럽고 슬퍼서 얼굴 맞대기가 어 렵습니다. 10년의 세월을 평가해 주는 잣대는 국가기구 내에서의 역할과 한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극복되 었는지, 아니면 증폭되었는지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단지 국가기구의 성과가 어떠했는지를 따져 보는 것으로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국가기구의 한계에 대한 인 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공안기관과 대립 상황을 돌파하려는 위원회의 의지 또는 실천력의 유무, 폭 력기구인 국가와 대립각을 세울 진보진영의 준비 정도, 민간조사관의 실력과 파견 조사관과의 관 계로 나타나는 리더십의 문제, 유족에 대한 태도로 표현되는 공정성의 문제, 법적 권한과 결사의 질 등 조직과 사람, 진영과 관점 등등을 따지고 분석해야만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낱낱이 풀어 헤쳐야 비로소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10년 동안 제대로 논 의 한 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죠. 그만큼 의문사와 과거청산은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국가기구의 변천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사 권한 등의 한계는 처음 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의문사위에서 진화위로 가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부분 기대를 접은 상 태였으니까요. 국가기구가 유족을 민원인으로 대하고, 진보진영과 거리를 두고자 할 때 이미 의문 사 사건의 진상규명은 멀어져 간 것입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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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의존하고, 선처를 바랄 일이 아닌 것이죠. 유족의 투쟁으로 국가 조사기구가 만들어지고, 진보진영 의 이름으로 국가기구에 들어간 책임자와 민간 조사관이 있고, 이를 지원하고 견제하는 민주 세력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의문사 사건이 왜 발생했고, 이를 밝히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누가 이 일에 나서야 하는지, 책 임지고 완수하려면 어떤 각오가 필요한지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첫걸음이 관점을 세우는 일입니다. 요즘 박근혜가 국가관을 입에 올리며 진보를 비웃습니다. 그의 국가 관이 어떤지는 관심 없지만, 그만큼 우리의 역사관도 제대로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점에 의 문사의 역사관은 무엇인지 다시 새겨봅니다. 불편하고 수고스럽겠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미 찢겨질 대로 갈가리 찢겨진 의문사의 깃 발은 모두를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원점에서 원칙적으로 점검하고, 가다듬고 다시 세우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여기에 의문사의 특수성과 본질이 있습니다. 의문사는 변혁운동의 최전선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입니다. 죽음의 성격을 이해해야, 의문사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이유에 접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문사 사건이 가지 는 특별한 위치는 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으로 변혁을 꿈꾸고, 실행하던 최전선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건 이라는 성격입니다. 의문사는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 저항의 희생물로 사망한 사건입니다. 70년대 엄혹한 시절이지만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진보운동 세력은 지하에서 비합법 조직운동과 재야를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이 큰 흐름을 주도했고, 학생들의 시위가 정국을 뒤흔들었습니다. 비합법조직운동은 북 한과 연결된 반국가단체로 몰려 통혁당사건, 전략당사건, 인혁당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철저히 봉쇄당합니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라는 삼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꿈꾸고, 전 국민적인 저항에 부닥치게 되자. 다급한 정권은 저항의 불길을 끌 수 있는 대형사건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건이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입 니다. 이 사건에 독일에 공부한 대표적인 민법학자이며 서울대 학생처장으로 학생들의 편에 섰던 최종길 교수 가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의문사 1호 사건이 생겨난 것입니다.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죽게 되자, 자살 로 위장했습니다. 70년대 진보운동의 다른 한 축으로 재야의 정치운동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명망 있는 원로들이 박 정희의 반대세력으로 축을 형성하고, 장준하를 대표로 한 반독재 정치운동이었습니다. 70년대 대표적인 진보 적 잡지인 사상계를 만들었고, 국회의원을 하기도 한 장준하는 전국적인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마지막 결 단을 내리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약사봉에 등산을 갑니다. 그리고 추락사한 사체로 발견 됩니다. 등산 경로도, 사체의 모습도, 동행인도 모두 의심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적 암살이라고 합니다. 80년 광주항쟁을 거친 학생운동은 70년대 낭만적인 운동에서 과학, 철학으로 무장하기 시작해, 우리 사회 의 투쟁의 주역으로 올라섭니다. 군사정권은 투쟁의 싹이 크기 전에 잘라내려 했습니다.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이 대대적으로 진행됩니다. 시위에 참여해 경찰서에 연행되면 곧바로 군에 끌려갔습니다. 며칠 만에 군 징집통 지서가 날라 오거나 아예 바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소위 학변자(학적변경자)라고 해서 군에서 요시찰 대상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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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겁니다. 사상개조 대상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프락치 공작을 벌였습니다. 학변자들을 휴가 보내 학교 시위 주동자, 조직 활동가들의 동태를 보고하게 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시와 조사, 고문과 회유가 있었고, 소위 6인 열사가 생겨납니다. 그 이후 군에서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젊은 대학생들이 계속 늘어납니다. 정성희, 한희철, 김두황, 이윤성, 최온순, 최우혁, 허원근, 이창돈, 남현진 등이 줄 을 잇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군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군에 끌려가지 않은 학생들은 변혁운동의 최전선에 나섭니다. 학생운동이 비합법 조직운동으 로 세력을 키워나가자 공안당국은 학생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조직사건을 만들고, 관련자 검거에 나섭니다. 전국이 들끓었습니다. 소위 ‘민추위사건’이 일어나 수배령이 내려지고, 그 핵심 가운데 한 명인 우종원은 열차를 타고 내려가는 과정에서 영동 철로변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김성수는 대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해맑은 아이는 고향 강릉을 두고, 낯선 부산 송도 바다 속에서 몸에 바위 덩어리를 세 개나 묶은 채로 스킨스쿠버에 의해 발견됩니다. 수배자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박종철 을 물고문했듯이, 김성수도 그런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학생운동은 탄압 속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80년대 중반은 독재정권과 전쟁의 시기 라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학생운동의 발전은 노동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노동조합의 건 설과 쟁의, 연대투쟁 등 저항은 전국으로 번져갔습니다. 이제는 전 국민이 잠재적 범죄자가 된 것 입니다. 노동자 신호수는 ‘장흥공작’의 대상이 되어 연행되었으나 당일 훈방됩니다. 시골에 내려 가라고 서울역까지 바래다주기도 했고요. 그러나 며칠 후 여수 바닷가 맞은편 바위산 동굴 안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됩니다. 지금은 당일이 아니라 며칠 연행된 채였고, 동굴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노동운동은 대공장 중심으로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전투력은 정권만 이 아니라 자본에게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협적이었습니다. 창원 대우중공업에서도 민 주노조 건설 투쟁은 격렬했습니다. 다들 사생결단의 기세였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싸움을 합의하 러 나갔던 정경식은 1년간 실종 상태였다 88년 노동자대투쟁이 한창 고조될 때 목을 맨 사체로 발 견됩니다. 변혁운동의 발전은 국가와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독재정권은 진보세력의 제거에 총력을 기 울입니다. 거기에다 80년대 후반은 통일운동이 절정에 달합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는 생각은 금단의 땅 북한을 우리 사회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북한바로알기부터 모든 금기를 파괴 하는 저항이 거세게 타올랐습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광주 조선대 학생운동의 핵심, 1급 수배 자 이철규가 불심검문에 걸려 산으로 도주합니다. 그리고 까맣게 탄 얼굴로 제4수원지에서 사체 로 떠오릅니다. 문익환 목사, 임수경의 방북과 귀환 과정에서 또 한 명의 대학생이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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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로 발견됩니다. 임수경이 판문점을 통해 내려오는 날,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이 여수 에서 100km가 넘는 외딴 섬을 향했다가 몇 시간 만에 사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90년대는 전노협 건설과 죽음의 저항으로 시작됩니다.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했던 시절, 강경대로부터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귀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등 이어지는 죽음은 온 국민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 속에서 1000만 노동자가 전국 조직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그 핵심 축인 대기업노조 는 가장 위협적이었던 만큼, 공작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은 안양병원 에서 추락한 사체로 발견됩니다. 안기부의 공작이 부산에서, 안양병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계속된 학생운 동의 탄압은 문승필, 김용갑, 박동학, 김준배 등 학생 의문사 사건을 계속 늘려갔습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투쟁의 현장과 진보운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의문사 사건은 이 외에 도 많습니다. 죽음은 그 어느 경우에도 진보운동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청산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 저항의 과정에서 죽음을 맞게 된 의문사는 현대사를 관통하는 저항입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자가 진보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는 점은 진보운동이 역사를 바로세울 때까지, 민주주의가 완성될 때까지 그 죽음은 당 면한 현실이고, 앞으로 닥쳐올 칼날의 한 유형입니다. 과거청산은 과거의 문제를 고찰하고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의문사를 해결하면서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바로 잡고 인적 청산을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문사는 세상을 바꾸려는 자의 중심 과제여야 하고 결사를 통해서 실현됩니다. 그래서 의문사 문제는 보수 세력과 대립하는 가장 강력한 최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사하지 않고 진상규명이, 대립하지 않고 조직적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폭력을 조사하는 기구는 혁명적인 결사의 조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기구의 책임 자는 확고한 의지와 돌파력, 리더십, 진보 진영과 공동의 책임의식이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며, 조 사관들은 자신의 위치와 책무에 대해 높은 의지를 갖추고 조직하고 결사하여야 합니다. 전문가의 전문성은 이 규정 속에서 발휘되어야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공정성입니다. 유족을 민원인 취급하거나 제삼자적 입장에 서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따라서 진보적 역사관과 조사 의지가 결합된 국가기구여야만이 감춰진 오욕의 역사, 국가의 잘못을 낱낱이 파헤쳐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가 실현되는 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국가기구 또는 진상규명의 장은 보수 세 력의 저항과 왜곡과 맞닿아 있습니다. 지난 국가기구에 대한 검찰 국정원 등의 비협조와 진화위의 행태에서 이 미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문사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역사적 정리라는 시각으 로 바라봐서는 곤란합니다. 이를 법적인 관점과 과거청산의 성격의 문제로 검토해 봅니다. 의문사 사건은 살인사건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타살의 의혹을 제기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조사를 하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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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한 거죠. 살인사건 하면 가장 먼저 공소시효가 떠오릅니다. 살인의 유형에 따라 기소를 해서 처 벌할 수 있는 기한이 최장 15년입니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할 당시 이내창 사건 은 1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가해자가 밝혀지면 살인 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 금은 모든 사건이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당시에는 83건의 사건 중 46건이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 이었습니다. 50%가 넘는 사건이 현재형 사건이었습니다. 국가의 폭력을 국가기구에서 조사한다 고 할 때, 얼마나 예민하고 긴장했을까요. 여기서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 배제에 대해서 첨언합니다. 국제법상 반인도적 범죄의 경우 에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이를 국내법에 적용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추세이고요. 의문사위에서 는 반인도적 범죄의 공소시효 배제를 입법화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반인도적 범죄인 의문사 사건 은 공소시효가 없어야 하고, 현행법에 의거한다 해도 사건의 조사가 불가능했던 독재정권 시절은 시효가 중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의문사 사건 대부분이 현재도 공소시효가 살아 있는 사건이 됩 니다. 더구나 가해자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요. 이게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법이 바뀌면 국가기 관 종사자가 살인 용의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처벌이 가능한 사건이 과거의 사건일 수 없고, 학문적 영역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런 면에서 도 진실을 규명한다면서 처벌을 배제한 ‘의문사법’은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처벌을 안 하 는 것은 진실을 규명한 후에 피해자 또는 국민적 합의에 의해서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것이죠. 법적인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두 번째로는 과거청산이라는 과제의 성격에 대해 애기해 보겠습 니다. 과거청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과거청산이 민주주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 또는 과제로 보고 있습니다. 반민주적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는 과정으로 독일, 남아메리카, 남아공 등의 예를 듭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청산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과연 오늘 우리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라도 완성된 시기인가, 짙은 회의가 듭니다. 보수 세력의 협조를 얻어 집권에 성공한 정권에서 과연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자기부 정을 통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한 일일까요. 전쟁 기간 중의 집단학살과 납치 살해 등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유형과는 달리 타살의 개연 성이 높아 암살, 살해 가해자를 밝히지 않으면 해결이 안되는 특수한 사건인 의문사 사건은 우리의 과거청산 과제를 일반화하기 어렵게 합니다. 개별 사건의 사인과 가해 과정 등 사건을 직접 조사 하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일반적인 과거청산의 과정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1기 의문사위에서 직접 사인만 조사해야 한다는 공무원의 주장과 직접 사인은 물론 사인을 둘 러싼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을 조사해야 한다는 민간조사관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던 경험은 과 거청산 과제 가운데 의문사 사건의 특수성을 잘 보여줍니다. 죽음을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의 가해 자는 직접적인 살인에 개입한 자만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고 간 공작에 개입한 자와 이를 배후에서 조종한 권력에 이르기까지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의문사 사건 조사는 사인 규명만이 아니라 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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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와 국가의 반성을 통해 제도 개선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해야 하는 종합적인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청산은 처벌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 규명이 가능한 조건, 즉 민주주 의가 정착할 수 있는 세상, 진보적 관점과 철학이 시대의 바탕이 되어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정착되 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처벌이고, 화해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가해자를 밝히는 문제를 넘어서서 지시하고 배후 조종한 지휘라인의 독재에 복무한 내용을 밝혀야 과거청산이 완료되는 것이 아닐까요. 폭력의 최고 정점인 살인의 내 용과 진상을 묻어둔 채 과거청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청산의 마침표, 의문사 이제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주검으로 나타나는 친구를 두지 않아도 됩니다. 진보적 삶을 사는 자식을 둔 덕에 새벽녘에 자식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부모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세 상은 좋아진 걸까요. 더 이상 의문사는 발생하지 않는 오늘, 박창수가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한진중공업에서는 김진숙이 35미 터 크레인에 올라가 1년 가까이 농성을 해야 했고, 쌍용자동차는 스물두 명이 자살로 내몰립니다. 대한민국 최 고의 기업 삼성에서는 꽃다운 나이의 젊은 여성들이 희귀병에 걸리고 사망해도 산업재해로조차 인정받지 못합 니다. 암살이 사라지고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자가 없어진 나라, 테러가 없어진 사회가 되었는데, 용역들은 전국 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공권력이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시민들에게 벌금을 물리고,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함 께 밥도 못 먹는 계급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죽어가고 있나요. 자연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서 감사합니까.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죽 음을 밝혀내지 않고 내 자식 대에는 그런 퇴행과 폭력이 없을 거란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이명박의 퇴 행은 전두환의 퇴행도 가능하다는 경고입니다. 이제 대선에서 승리하면 모든 것이 얻어지나요. 쌍용, 한진, 재능이 해결되고 용산이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요. 과거청산은 이루어지고, 정의가 세워질 건가요. 역사는 바로 섭니까. 과거청산 기구와 조사는 의문사로부터 시작되었고 빚을 지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과제를 안고 과거청산 의 파열음을 낸 의문사의 위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는 진보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문사 사건은 과거 사건 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묻으면 또 다른 얼굴로 비극이 계속 됩니다. 어제의 사건이 오늘은 쌍차로 내일은 또 다 른 당신으로 계속 됩니다. 의문사는 오늘도 계속되는 민주화 투쟁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현재는 절망적이긴 합니다. 국가기구가 있어도 진화위와 다를 거라는 믿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동력도 없고, 2000년 초와 마찬가지로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가야 할 길이고, 누군가는 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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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야 하는 일입니다. 기구의 출범 시기보다는 최대한 인식과 관심을 넓혀 조직 대오를 꾸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 다. 누구는 정당 활동을, 누구는 노동해방을, 누구는 과거청산을 그 가운데 의문사를 자신의 과 제로 삼고 가야 합니다. 소중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의문사는 과거청산의 맨 마지막 마 침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내창이 죽고 나서 절망에 빠져 있던 89년을 기억합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핵심을 향해 더딘 걸음을 옮깁니다. 도연주를 찾아내고 안기부를 확인한 90년, 2000년대에 공작의 개 연성, 거문도 섬을 포위하다시피 한 공안기관원들, 그리고 그 무엇들,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양파 껍질 벗겨지듯, 아무리 크고 두터워도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상규명 투쟁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고 우리가 해야 할 과제이고 숙명입니다. 우리가 마침표를 찍 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한 발 한 발 걸어야 합니다. 끈덕지게!

신명철_ 81년에 입학했다.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1과 팀장으로 국정원 관련 의문사를 조사하였다. 현재는 ㈜우리교육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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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의 목소리를 듣다 정원옥

필자는 지난 해 11월부터 최근까지 의문사진상규명운동에 참여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들의 기억과 경 험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위논문을 쓰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유에서다. 이 글은 논문 작업을 위해 모았던 구술증 언 가운데 유가족의 목소리, 그 중의 일부만을 유가족의 허락을 받아 발췌하여 구성한 것이다. 유가족들은 의문사 로 논문을 쓰겠다는 필자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을 통해 변화해온 당신들의 삶의 이야기에서부터 국가위원회 활동을 지켜본 현재의 심경에 이르기까지 성의를 다해 말씀해주셨다. 지면을 빌어 구 술에 응해주신 유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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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 1기에서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 해위)에 이르기까지 유가족의 싸움은 주로 국가위원회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특 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을 통과시킨 여의도에서의 422일 천막농성 이 후에도 유가족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었다. 시행령 투쟁, 법 개정·제정 투쟁, 각종 기자회견과 항의방문 등은 언제나 그렇듯 유가족들의 몫이었다. 때때로 유가족들은 위원회 안으로 치고 들어가는 농성투쟁을 불사하 기도 하면서 당신들의 눈물과 땀으로 만든 위원회를 감시·비판하고 개입하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사 사건들이 규명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명예회복마저 되지 못한 실망스러 운 결과에 대해 유가족들은 현재 분노와 좌절, 체념에 이르는 다양한 심경들을 보여주고 계신다. 안타깝게 도, 의문사 진상규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든 만큼이나 이러한 유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은 사라진 지 오래인 듯하다. 이 글에서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유가족의 목소리를 발췌하였다. 첫째는 지난 십여 년간 위원회 활동을 지켜본 유가족들의 심경이다. 둘째는 다음 세대가 의문사 진상규명의 과제를 계속 이어나가 주기를 바라는 유가족의 당부의 목소리다. 이 글에서 필자의 역할은 유가족의 근황을 소개하고, 발췌한 구술 대목 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을 곁들이는 것뿐이다. 이 글은 구술에 대한 해석이 아닌, 구술 원 자료의 느낌을 최 대한 살려 유가족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어느덧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으로부터 멀어져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못 잡고 있는 현 시점에서 언 제나 운동의 맨 앞에서 헌신적으로 싸워 오신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후의 ‘운동’을 새롭게 고민하는 데 있어 유가족의 목소리가 어떤 식으로든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필자의 의도대로 발췌, 편집된 유가족의 목소리가 편향되게 들리거나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유가족의 마음을, 행간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허원근의 아버지, 허영춘

“사람의 생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문사인 허원근 사건은 공권력의 개입은 인정되나 민주화 운동 관련성을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의 문사위 1기에서는 기각, 2기에서는 불능, 진실화해위에서는 유가족들의 사건철회라는 집단행동

속에서 취하되었다. 허원근 사건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원회(이하 민보상위)에는 신청 되지 않았다. 대신,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총 9억 2000만 원을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원 고 일부 승소판결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국방부의 항소로 소송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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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유가협 의문사지회 회장을 맡아 일하셨던 허원근 아버지(허영춘, 73)는 현재 전남 진도에 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신다. 재판이 있거나 볼 일이 있을 때 서울에 올라오시는데, 늘 ‘한울삶(전국민 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잠을 청하신다. 허원근의 영정이 걸려 있는 “큰아들 집이 제일 좋다” 는 것이 그 이유다. 지난 해 11월, 세 차례에 걸쳐 아버지를 만났다. 그 중 두 번은 의문사 ‘삼총사 아버 지(허영춘, 최봉규, 신정학)’의 한 분으로 불리는 최우혁 아버지(최봉규, 82)와 함께였다. 기억력이 좋 은 최우혁 아버지는 중간 중간 허원근 아버지의 기억을 보충해 주기도 하고, 마실 것을 챙겨 주기도 하시 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 겨울의 초입, 시골 사랑방 같은 ‘한울삶’에서 의문사 진상규명 운동에 관한 한 역사가 만들어졌다가 쇠락해 간 이야기를 들었다. 파편화되고 희미해진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꽤 오랜 우회로를 거친 후에야 위원회 활동을 지켜본 허원근 아버지의 불편하고 복잡한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허영춘 : 조사관하고 우리하고 만났을 때는 민주화운동 한복판에 섰던 사람들이거든. 공무원이 졸지에 되

고 보니까 여기도 생각되고 저기도 생각되고 그랬던 것 같아. 의문사 가족들도 생각을 해 줘야 하고, 월 급 주는 쪽도 생각해 줘야 될 것 같더라고. 첫째 조사관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이것이 자살이 아니다, 라 는 신념이 있을 때만 밝힐 수 있는 것이지, 부모들은 어거지라고 생각하는 조사관들은 밝힐 수가 없어. (••••••)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들과 갈등이 생긴 게 뭣이냐 하면 무엇무엇 때문에 조사 못했는지 밝혀 내라 그거여. 너그들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반성하고 확실하게 적시해 놔라, 이 말을 한 거지. 니가 조 사를 안했던지 못했던지 하기 싫었던지 간에 이 한계에서 조사를 더 못한 이유를 적시를 해 놔라! 그래야 다음 사람이 조사를 할 것 아니냐? 그 말을 넣어라 하니까 싫어하지. 지가 하면 별다른 것이 있겠느냐는 거지. 적시 안했지. 아무도 나는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을 안했어. 당신들 손으로 뽑아 위원회에 들여보낸 민간조사관들이 제 역할을 해 주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볼 펜 한 자루 쥐어주고 살인자를 찾아내라”라고 한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조사관들이 “확고하니 자살이 아니다”라고 덤벼드는 의지도 약하고, “그 사람 마음을 돌려서 내 편으로 만드는” 능력도 부족한 데다가 어느새 “월급 받는 사람이 되어 갖고 국가의 입장”에서 유가족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돌아보면 보람 있게 산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진상규 명하면서 백날 후회만 되고 못한 것만 나오지”라고 허탈해 하면서도 진상규명 운동은 아직 끝난 게 아니 라고 강조하신다. 의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 무엇보다 검시관법 등의 제정을 통한 수사제도의 개선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법통과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밝히셨다. 허영춘 : 사람은 하늘이 준 생명이야. 자살이든 타살이든 나는 뭣 때문에 죽었다는 걸 써 붙여놓고 죽어

요.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법의학자거든. 이 사람들이 오히려 정권 편에 서서 의문사 가족들을 협박하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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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자살이다, 밀어갔기 때문에 의문사가 된 거야. 법의학자들이 끝까지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원근이는 자살이다, 했거든. 아니라고 해 줄 사람이 누가 있냐고? (••••••)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생명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생명을 유린하는 행위는 없어야 된다. 바보건 미친놈이건 돈이 많은 사 람이건 돈이 없는 사람이건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겨주는 세상이 되어야지. 사람을 죽여 놓고 자살로 만 들면 안되고, 살인자를 보호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 한 번 죽여 본 사람들은 계속 죽여도 죄 책감을 안 느끼는 거예요. 그러한 제도를 바꾸어야 그래야 민주사회고 사람 사는 세상이지. 사람이 사람 을 죽이고 사람의 피를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줘야 된다. 그런 것을 없이 만들어 야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 내가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법의학자가 자살 로 만드는 데 더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안치웅의 어머니, 백옥심

“나 위로 받을라고 이래 놨는갑다, 이라제. 뭣이 좋겠어요?”

치웅은 1985년 구로 동맹파업을 지원했다가 1년 실형을 선고받고 출소한 이후 수사기관의 계속적 인 감시와 사찰을 받아오다 1988년 5월, 실종되었다. 이 사건은 의문사위1, 2기에서 모두 불능을

받았고, 진실화해위에서는 유가족의 사건철회라는 집단행동 속에서 취하되었다. 민보상위에서 50%의 기 여도로 명예회복 인정을 받은 후 지난 해 5월 29일, 시신 없는 장례식 ‘초혼장’을 치렀다.

국가로부터 명예회복 인정을 받고 실종 23년 만에 초혼장까지 치렀지만 안치웅의 어머니(백옥심, 73)는 여전히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계신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때까지 쉴 새 없이, 왜 어떻게 해 서, 너는 그렇게 해서, 어떤 놈의 새끼가 죄도 안 받냐, 벌도 안 받냐?”라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씹고 또 곱씹으신다. “고통스러운 말, 이건 아무리 딴사람에게 해봤자 전달이 안될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오랜 세월, “볼탱이가 아파서 못 견딜 정도로 입만 꽉 다물고 살았다”고 하신다. 백옥심 : 정리해야지 뭔 할 말이나 있어? 할 말 없어. 도움이 안됨서 또 온다고 해서 아휴, 할 말 다했는

디, 뭐 하러 또 온다고 했는디. 할 말이 없어. 뭐시기가 와서 우리 민석이가 꼭 가보라고 해서 왔어, 이람 서 이렇게 해서 마무리를 지어야 돼. 그 말이 맞지요. 마무리를 지어야지, 언제까지 이래 놔둘 거요? 공 중에 떠 갖고 있으면 어쩔 거예요? 긍게 나는 추모제도 한 번 지내 봤으면 쓰것고. 추모제를 아직 안 지 내 봤잖아? 인자 1년이 되아야 지내지. 내년 5월 달이제. 29일 날로 날을 잡자고 그러등만. 29일 날 없 어졌으니까 그냥 그렇게 하고. 딴 사람들은 추모제라고 지내고 함서 그 앞에 가서 울기도 많이들 울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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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거기 가서 운 사람은 더 낫지. 나는 묏등도 없으니까 울도 못하고, 고통스럽게만 살았지. 할 말이 없 어. 그래서 나는 딴 사람하고 틀려요.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실감이 안 가. (묘지는) 나 위 로 받을라고 이래 놨는갑다, 이라제. 유가협 어머니들은 어쩌면 저래논 게 훨씬 좋제, 좋제 하는데 아녀! 그거 아니여. 그게 아니어요. 뭣이 좋겠어요? 사노맹이 언제 생겼니, 제헌의회가 언제 생겼니,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이런 것들이 왜 중요한 논란이 되는지 어머니는 알지 못하신다. 민보상위에서 인정을 받을 때 “참, 죽은 사람은 말이 없응게 딴 말로만 들어보고, 이런 데 써놓은 것 갖고 듣고 어떻게 알 것은 몰라, 알 수가 없어서” 갑갑하셨다는 어 머니. 아들이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과정 에서 “보석 같은 아들”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천하게 오르내리는 것 같아” 어머니는 그것이 더 괴로 웠다고 울분을 토하셨다. 백옥심 : 우리는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인정이 문제다고 주장했거든요. 이거이 인정해 주라! 국가에서 공

권력이 죽은 걸로 인정해 주라고 그래서 그렇게 파고들었지요. 돈이 눈에 보이겠어요? 안 보여요. 늙어 갖고 얼마나 산다고 보상 바라겠어요? 우리는 그것은 화끈하게 맞어요. 그렁게 진실은 못 밝혔제. 진실 은 못 밝혀 인자, 못 밝히고. 이번에 시장님, 박원순 변호사님이 치웅이 때 변호를 했어요. 인권변호사 로 그때 했거든요. 그런데 그 양반도 써줬어요. 이것 맞다고, 군사정권에서 한 것 맞다고, 인정해야 한 다고. 그러고 해서 그런가, 50프로 인정을 받았어요. 인정은 다 똑같다고 그래쌓더라고요, 거기서. 보 상이야 더 받으나 덜 받으나 나는 기여도, 그랑게 그것 갖고는 안 따져요. 결정한 그 놈이 나온 게 그 마 음이 어쩌냐, 그라면 우리 아들 보상! 이거이 뭐야? 기가 더 막히더라고요. (인정 안될 거라고) 다 그렇 게 얘기를, 다 그랬어요. 안되면 이건 정말 사람이 못 견딜 정도여. 누가 인정 안된다고, 시신도 없는데 어떻게 인정되느냐고 그러면 참 기가 막힌 거예요.

박창수의 어머니 김정자, 아버지 황지익

“아부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아부지 진상은 꼭 니가 밝히라이”

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91년 5월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된 박창수 사건 은 민주화운동 관련성은 인정되었으나 공권력 개입을 입증하지 못함으로써 의문사위 1, 2기에서

는 불능을 받았고, 진실화해위에서는 유가족의 사건철회라는 집단행동 속에서 취하되었다. 민보상위에는 신청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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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 20주기 백서를 발간할 때 유가족 인터뷰로 박창수의 부모님을 뵌 지 꼭 삼 년 만이었다. 성남 집으로 찾아가는 필자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가는 길이었기 때 문이다. 어머니(김정자, 71)는 재작년에 한 번 쓰러지신 이후로 몸도, 마음도 많이 쇠약해지셨다. 아버 지(황지익, 74)는 작년에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에 다녀오셨을 만큼 건강하 신 편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고, 멍하니 그렇다”며 기운 없어 하시던 어머니는 구술을 하시는 동안에 오 히려 조금씩 생기를 찾으셨다. 민보상위에 신청을 안한 이유가 궁금했다. 김정자 : 아부지가 그 땍에 그랬어. 창수는 그대로 묻어놓을 거다, 묻는다. 언젠가는 이거 밝혀진다. 우리

죽고 먼 훗날 자식이 있으니까, 창수는 그래도 자식이 있고 하니까 언젠가는 밝혀진다. 창수는 그냥 보 류해 놓을란다. 그래서 명예회복으로 그 땍에 안 넘어갔잖아? 딴 사람들은 다 명예회복 되고 하니까 뭐 의문사 말 한마디를 내놓는 사람이 없잖아? 그때만 해도 의문사들이 많고 할 땍에 의문사 진상 밝혀야 되 니 어째야 되네, 이래 했는데 이제 뭐 명예회복 되니까 뭐, 소용도 없어. 인자 진상규명해야 되겠다, 어 째야 되겠다, 한 사람 나서는 사람이 없잖아? 그러니까 아이고, 우리 창수는 텄다, 텄어. 내가 살아생전 에 밝히고 가야 저승에 가서라도 우리 창수인데 할 말이 있는데, 우리 창수한테 가서도 할 말이 없다. 만 날 하는 소리가 그 소리야. 자꾸 이상하게 곧 죽을 사람처럼 마음이 그래. 어머니는 훗날을 위해 “보류해 두자”는 아버님의 의견을 존중해 민보상위에 신청을 하지 않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눈치셨다. “창수 혼자 덩그러이 놔놔 놓으면 난중에 어느 누구가 창수 진상 밝히 주 겠다고 나서겠노?”라는 현실적인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단호하셨다. 민보상위에서 박 창수 사건을 “자살이다, 하는 것만 가지고 움직이는 거라. 그냥 뭉개버리는” 태도를 보며 아버지는 마 음을 접으셨다. 정권이 바뀌고 바뀌어 몇 십 년 후, 언젠가는 최종길 교수 사건처럼 진상규명이 될 때가 꼭 오지 않겠는가, 라고. 황지익 : 나는 지금 우리 창수를 민주화라고 해서 앞세우진 않아. 노동자의 권익을 찾는 그런 민주화운동

이긴 하지만 나는 부모로서 의문이야, 왜 이렇게 죽었느냐? 이건 의문사가 아니다. 이걸 숨기는 놈이 의 문을 만들고 자기의 잘못을 감추는 그거지, 이건 의문사가 아니다. 너들 자신이 의문점을 만들고 너들 잘 못된 것을 감추게 하는 그건 의문이지, 의문사가 아니다! 그걸 밝히라 하는 거지. 진상규명만 제대로 밝 혀라. (••••••) 내 혼자서 우리 창수는 민주화다, 민주화다, 이건 안해. 우리 노동자들, 민주화 운동하다가 고생한 사람들은 다 똑같은, 같은 입장이야. 아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먼 훗날로 보류시킨 박창수의 어머니는 당신들 대에서 풀지 못한 진 상규명의 과제를 자손들이 해결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셨다. 그것은 손자들에게 남기는 유언의 형식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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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지만, 의문사 사건의 부모님들을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노력해 왔던 우리 모 두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정자 : 그래, ○○아. 꼭 할미 말하는 소리 명심하게 듣고 (울음) 너그 아버지 이렇게 죽었다는 거, 니가

꼭 밝혀내고 니가 알고 있어야 된다이. (울음) 아이고, 할머니가 말이 안 나온다. ○○아, 너그 아부지 억 울하게 죽일 순 없잖아, 응? 지금 너그 아부지 허공에 떠돌고 댕긴다. 그러니까 꼭 너그 아버지 진상 밝 히서 너그 아부지 허공에 안 떠돌게, 자식으로서 니가 꼭 너그 아부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죽었다는 건 니가 알고 꼭 너그 아부지 진상을 밝히야 된다이. 할머니가 살아 봤댄들 인제 몇 년이나 더 살겠노? 너그 아부지 진상 밝힐 수 있는 사람 니 한 사람밖이다. 너그 남매, 너그 남매 둘밖이다이. 그러니까 꼭 할머 니 죽고 할아버지 죽고 없더라도 꼭 너그 아부지 진상 밝히라이. ○○아, 밝히야 된다. 아부지를 잊어서 는 안된다. 아부지 없는 자식이 어데서 있겠냐? 니가 뭐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 도 아니고 그래도 박창수 아들이 박○○이다. 그러니까 꼭 아부지 진상은 꼭 니가 밝히라이. 할머니가 니 인데 부탁은 그 한마디뿐이다.

최우혁의 아버지, 최봉규

“허허허, 돈 그 놈!”

울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한 후 의문사한 최우혁은 의문사위 1기에서는 불능, 의문사 위 2기에서는‘자살’이지만 넓은 의미에서‘공권력에 의한 사망’으로 해석되어 인정을 받았다. 최우

혁 사건은 진실화해위에 다시 접수되었다가 유가족의 사건철회라는 집단행동 속에서 취하되었다. 민보상 위에서 역시 최우혁은 ‘자살’로 명예회복 인정을 받았다.

요즘도 최우혁 아버지는 전화만 오면 ‘한울삶’으로 달려가 늦은 밤까지 계시거나 밤을 새는 일이 종 종 있다. 자식들한테도, 친척들한테도 더 이상 꺼내지 않는 이름이 되어 버린 막둥이 이야기를 “여기 오 면 다 털어놓고 얘기하니까” 좋으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91년 유가협 총무에서 시작하여 의문사지회 총무까지 16년 동안 총무 일을 맡아 오신 단 체의 살림꾼이시다. “개인적으로 돈 복이 없는데 총무 맡으니까 돈이 자꾸 들어오더라고. 살림살이가 늘 어가요”라며 미소 짓는 아버지에게 진상규명 투쟁은 곧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고. 아버지는 특 히 여의도에서 천막농성하며 식구들 밥 해먹일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고 말씀하신다. 허원근 아버지와 함께 한 자리에서 보상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버지께 넌지시 여쭤보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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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상금 얘기는 ‘한울삶’ 담장 안에서도 말하기가 껄끄러운 주제인 듯했다. 최봉규 : 첨에는 우리가 의문사 가족이고 누구고 간에 돈을 바라고 보상받기 위해서 했던 게 아니고, 법

자체가 보상을 하게끔 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돈 필요 없다, 진상규명만 되면 된다, 명예회복만 되면 된 다 했는데 법적으로 보상을 해 주게 되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뭐 받아서 기분 나쁜 건 아니지만은 일단 은 받았거든, 허허. 나도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하니까 젊은 사람들이 “왜 법적으 로 보상을 해 주게 되어 있는데 주는 돈을 안 받느냐?”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받게 되더라고. 허영춘 : 받는 사람도 있고, 못 받는 사람도 딱 자르는 것도 아니고, 몇 프로를 정해서 주는 거니까. 10프

로 받는 사람도 있고, 40프로 받는 사람도 있고. 최봉규 : 1억 5000을 기본으로 해서 10프로! 1500만 원이지! 서울대 경영학과 다니다가 카투사 가서 죽

은 용권이 엄마가 45프로 주니까 하는 이야기가, “50프로는 죽고 50프로는 살았냐?”고, 허허. 농성해 가지고 결국은 프로테이지는 올라가서 더 받았지. 허허허, 돈 그 놈! ‘의문사 진상규명하고 명예회복하자’고 다함께 싸웠는데 “허허허, 돈 그 놈!”으로 변질된 명예회복 과 국가보상이라는 것이 의문사 유가족들을 갈라지게 만들고 소외시키는 현실에 아버지는 씁쓸해 하셨 다. 생업도 접고 같은 처지의 부모들을 ‘동지’로 만나 울고 웃으며 참 열심히 싸웠는데, 아들의 죽음을 자살로 인정하고서야 보상금 몇 푼을 받은 것이 아버지는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그마저도 못 받은 부모 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앓는 소리를 낼 수도 없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르는” 고통을 안고도 아버지는 “비관하지는 않아. 운명이거니 해야 지, 뭐” 하면서 늘 웃으며 살려 애쓰셨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는 웃음을 많이 잃으셨다. 결과는 허무하 지만, 최선을 다했다. 여기까지 한 걸로 막둥이의 죽음을 이제는 묻는 게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드시는 것이다. 애써 잊고 살려는 자식들에게 당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가라고 하기엔 아버지의 마음 이 너무나 복잡해 보였다. 최봉규 : 유언을 해야지. 큰 애, 작은 애 다 해야지. 딸애는 멀리 있으니까 그렇고. (손주들은) 죽은 거만

알고 있지 어떻게 죽은지는 모를 거여, 허허허! 애들한테는 너희들도 다 알다시피 이십여 년 동안 쫓아 다니면서 그 만큼, 다 밝히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밝혔으니까 내 뒤를 이어서 너희들이 노력해야 할 것 이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지, 뭐. 같이 하자고 할 수가 없지. 바쁘니까, 먹고 살아야 되니까, 직장 생 활해야 하니까 할 수 없어. 근데 한 번 얘기할 때 듣고만 있으니까. 그런데 저희들은, 그 얘기를 꺼내면 저희들도 속상하고 나도 속상하니까 그렇지. (••••••) 서운하지. 서운한 거야 두말할 것도 없지. 휴, 한 가 족이 대가족 제도로 살면 항상 맞대고 사니까 말하기도 쉽고 자연스럽게 저기한데, 떨어져 사니까 얘기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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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가 아주 어렵고. 제사 때 하고 명절 때나 내가 가고 가끔 나한테 오기는 오지만은, 여기 와서 이 얘 기 하는 게 뭔 소용이 있겠어?

문승필의 어머니 오순례, 아버지 김준기

“의문사 진상규명이 실패한 데는 의문사가 운동화되지 않았던 부분이 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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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 전남대 오월대로 학생운동을 하다 행방불명되었던 문승필은 보름 후,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 견되었다. 경찰은 문승필이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자살이라고 보기 어려운 정황

과 의혹들이 있다. 문승필의 죽음은 의문사위 1, 2기, 진실화해위에서 모두 불능 결정을 받았고, 민보상위 에서는 명예건만 인정이 되고 보상은 불인정 결정을 받았다.

“남편이고 아들이고 전부였던”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오순례, 65)는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가 슴에 묻은 아들을 떠나 보낼 수가 없다.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을 유별나게 쫓아다니며 말렸던 어머니다. “5·18 때문에 다 데모를 해도 우리 아들은 안해야 된다”며 아들을 몰아세웠던 어머니다. 엄마 혼자 저를 어떻게 키웠는지 너무도 잘 아는 아들 아닌가?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효도할 거라고 어깨를 주물러 주 었던 착한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아들이 왜 오월대가 되고 감옥까지 다녀와야 했는지 어머니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때 아들을 조금만 이해해 주었더라면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까? 편한 마음으로 저가 옳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짙게 밀 려오는 후회와 미안함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순례 : 자식에 대한 한은, 지금도 가슴 여기가 아파. 지금도 이렇게 답답해. 이런 게 올라오면 아주 숨

을 못 쉴 정도야. 하! 미치게 돌아다니지, 집 안을. 자다가도 숨을 못 쉬어서 문 열고 나와야돼. 이불 덮 고 못 누워 있어.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까? 표현이 안돼요, 어떻게 할 줄을 모를 정도야. 내가 내 육체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올라오면서 뒤죽박죽이 되는 것 있잖아? 햐, 어떻게 할 도리를 몰라. 쥐어뜯고. 내 가 절제를 많이 하는데, 이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어머니는 법만 통과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의문사위 1기와 2기가 끝날 때까지도 희망 을 가졌었다. 그런데 진실화해위에 이르러서는, “저그들 밥그릇이었어!”라는 걸 느꼈다고 하신다. “내 가 그렇게 둔해. 다 자기들 먹고 살기 위해, 자기들 명예 있고 이름 있고 그래서 하는 거지, 우리 승필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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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위해서는 해 주지 않아”라는 게 위원회와 조사관들을 지켜본 어머니의 솔직한 심경이시다. 어머니는 승필이가 명예회복마저 인정이 안된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며 괴로워하셨다. 몸이라도 건강했으면 다 른 어머니들처럼 농성에도 쫓아다니면서 목소리를 높였을 텐데, “엄마가 그 역할을 해 주지 못해 승필이 의 죽음이 묻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신다. 오순례 : 엄마들이 나가서 막 싸우고 한 경우는 의문사에서도 보상을 받았어. 그런데 우리 승필이나 몇

몇은 묻혀 버렸잖아? 엄마들이 입심으로 싸우고 한 경우는 보상을 해 줬는데 안 나간 부모들은 아무것 도 없는 그런 법이야. 다 똑같은 자식인데 엄마들이 열성적으로 했다고 보상해 주고 안했다고 묻혀 버리 고 그래서는 안되는 거거든. 자식 목숨을 담보로 받는 보상이야. 그런 걸 받고자, 얻고자, 따지고자 그 러는 것이 아니라 다 똑같은 자식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거지. 보상받은 엄마들은 그 자식이 명예 회복이 되었다고 해서 대우가 더 나아. 그런 거 없는 엄마들은 나가도 그런 대우가 없는 거야. 승필이도 자기 학교에서는 명예졸업장 받고 명예회복도 되고 다 했어. 단 엄마가 그 활동을 제대로 못했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묻히게 되었다는 것이 엄마로서는 말할 수 없는 분노라고 할까? 위원회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고, 같이 활동했다는 가족들에 대한 감정이기도 하고. 나같이 약한 쪽 엄마들은 비슷하게 느낄 거야. 문승필이 죽은 후, 유가협의 소개로 어머니와 만나 재혼을 하신 아버지(김준기, 75)는 어머니의 절 망적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위원회나 조사관을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조심스럽게 타이르신다. 아버지는 의문사위 1기가 출범할 때부터 “한계가 명확한 법으로는 진상규명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 하셨다. 결국 ‘운동’으로 되돌아오는 것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아버지는 조언하신다. 김준기 : 의문사 진상규명이 실패한 데는 의문사가 운동화되지 않았던 부분이 컸지. 위원회에 매몰되어

버렸어. 첫째는 법이 만들어졌으니까 정부가 해결해 줄 것이다, 라고 생각했거든. 더구나 김대중, 노무 현 정권 시절이었으니까.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노무현 정권 들어서니까 다 손을 떼는 거야. 운동권이 전부 사분오열되고, 나쁘게 표현하면 권력에 붙어서 출세나 하려고 하고 자리 나 차지하려고 하고. 의문사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다 그랬어. 둘째는 부모들을 의식화시킬 필요 가 있었어. ‘왜 우리 애들이 희생을 당했느냐?’, ‘애들이 생각했던 바람직한 세상이 무엇이었느냐?’ 그걸 얘기해 줘야지. 우리 애들은 바람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싸우다가 권력으로부터 희생을 당했다. 이 권력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애들이 바랐던 세상은 요원한 것 아니냐? 그러니까 애들의 한을 푸는 것은 보 상받고 명예회복되는 것만이 아니고, 바로 애들이 못 다한 일을 부모들이 같이 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 가 산들 얼마나 사나?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애들의 주장을 받아 안고 해야 되는 것 아니냐? 부모들도 많이 변화되기는 했어. FTA 반대 집회에 항상 유가협이 조직적으로 참여를 하잖아? 셋째 추모사업회는 열사에 대한 개인들의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추모사업을 통해서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 하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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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의 장이라고 할까, 동지적 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추모사업, 기념사업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문제 야. 알다시피 의문사 운동했던 사람들도 발을 들여놓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다 빠져나갔거든. 일이라는 게 성과가 있어야 신명이 나는데 안되니까 더 힘들지. 부모들 만나면 미안하기도 하고, 부모들 위로하기 바쁘고. 그런 상태에서 이런 문제를 갖고 논의하기 힘들지.

김성수의 어머니 전영희, 아버지 김종욱

“유가족이 하나가 되고 진보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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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년, 서울대 1학년이었던 김성수는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 바위틈에서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단 채 발견되었다. 대표적 학생 의문사로 꼽히는 김성수 사건은 의문사위 1기에서는 불능을 받았지만

2기에서는 인정되었으며, 민보상위에서 역시 만장일치로 명예회복 인정을 받았다.

강릉 지역의 재야 어른으로 존경받으며 공사다망한 활동을 하고 계신 김성수 부모님을 뵙는 일은 쉽 지 않았다. 여러 번의 전화 통화와 일정 조정 끝에 부모님을 뵈러 강릉으로 찾아간 것은 사전면담을 하고 서도 두 달이 훨씬 넘어서였다. 공정무역 커피가게를 연 지인의 오픈식에 막 다녀왔다는 어머니(전영희, 74)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손수 내려 주셨다. 어머니는 민보상위에서의 기여도 문제와 “우리 새끼들 이 렇게 된 것”에 대해 국가가 어떤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먼저 성토하셨다. 전영희 : 의문사는 정권 바뀌면 다시 들고 나와야 해. 상징적으로 돈 몇 푼, 그것도 몇 프로씩, 몇 프로씩

해갖고, 그게 부모들한테 더 상처 주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등수를 매기는 거! 대한민국이 그러고 있다. 아주 못됐어요, 그것들이. 유가족들 사이에서도 의문사들은 으레 기여도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의문사들은 진짜 하찮게 보면서, “의문사 그까이 것들!” 하! 싸운 주체는 의문사인데, 말끝마다 “의문사 그까이 것들!” 하니까 속에서 이런 게 막 치받아 올라온다고. 의문사 부모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그것조차도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말 뱉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우리들은 얼마나 한이 되겠어? 나 는 뭔가 가해자들이 좀 미안하게 생각하고, 참, 사과라도 하고, 우리가 국가를 상대로 뭔가 해야 되지 않 겠나, 아버지하고 만날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가 죽기 전에 이런 걸 하는 걸 보고, 끝내놓고 우리가 죽 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억울해서, 우리 의문사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어. 죽음 앞에 는 다 엄숙해야 하는데. 나뿐만 아니고 의문사는 참 상처 많이 받았어. 울기도 많이 울고. (••••••) 차기 정권에 만약 우리가 원하는 정권이 들어선다면 의문사 집단 소송을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 국가를 상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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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해서, 그렇게라도 해서 사과를 받아내고 해야 한이 풀리지. 아버지(김종욱, 75)는 의문사진상규명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분명히 바라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지난 10여 년의 위원회 활동이 “제대로 규명은 못했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그런 억 울한 과거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린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운동의 성과다. 한계는 “가해자들이 권력기관 에 그대로 있는 한 최대한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증언자들의 입을 봉쇄하려고” 했기 때문에 위원회 활동 만으로는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의문사에 대해서는 “기여도니 나발이니 다 없애 고 전면보상, 명예회복”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하지만 그렇게 밀어붙일 운동 역량이 과연 남 아 있는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이 진행되는 동안 유가협은 둘로 갈라졌고, 활 동가들은 공무원이 되었거나 각자의 살 길을 찾아 떠났고, 추모사업회는 이름만 내걸고 있는 곳이 대부 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며 희망을 이야기하신다. 지금부터라도 유가 협이 하나가 되고, 진보가 하나가 되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 로 의문사 문제가 다시 대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종욱 :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큰 대의는 다 똑같은데 중간에 진행과정에서 오는 오해 때문에 대

의를 그르치는 분열이 자꾸 만들어지는 거지. 그걸 푸는 게 참 쉽고도 어려운 일인데 중국 고서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지. 우리가 똑같지는 않는데, 다르지 않다, 이거야. 무슨 말 인가 하면 각자 개성이 있고 다 다르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우리는 같이 간다. 이것이 군자의 길이고, 소 인의 길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말이야. 다 똑같은데 화합하지 못하고 싸우는 거야. 한 식구인데 화 목하지 못하고 자꾸 싸우는 게 동이불화란 말이야. 옛날 제자백가 시절에 하던 이야기인데 다 좀 욕심을 버리고 대의를 위해 순종하고 우리한테 궁극적인 이익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답 이 나올 거란 생각이 드는데 다 작은 사건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큰일을 못하는 거예요. 다시 과거 의 그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우리가 참, 뼈를 깎는 각오를 모두 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10년에서 이명박에게 넘어간 것도 다 우리 모두 잘못해서 그런 거예요. 우리는 서로 다르다, 똑같아져 야만 합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린 하나다! 그간의 문제는 자꾸자꾸 소통하면 화 합하게 되어 있다고.

이 글은 모든 유가족의 목소리를 담은 것도 아니고, 몇몇 유가족의 목소리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발췌한 것이 다.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진상규명이 되었느냐 되지 못했느냐, 명예회복이 되었느냐 되지 못했느냐에 따라 유 가족의 목소리에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목소리는 대체로 하나로 모아진다. 의문사 진상규 명 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다음 세대에도 이 운동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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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것은 이 운동을 이끌어왔던 가장 강력한 주체, 위원회를 흔들고 호령한다 하여 소위 ‘강성’ 유가족으 로 불렸던 의문사 부모님들이 더 이상 강성하지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사이에 부모님들은 눈에 띠게 늙으셨다. 기 억력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자신감이 떨어지고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부모님들이 가장 잘 알 고 계신다. 그러나 필자가 느낀 것은 이 운동을 해온 다양한 주체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반성하고, 가장 깊이 성찰하 고, 가장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분들 또한 유가족이라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의 이름으로 사는 부모님들은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의 의지로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 분들이시다. 우리가 유가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유가족이 이 싸움을 끝내지 않은 것이다. 지 금 유가족은 당신들 대에서 이루지 못한 의문사의 과제를 다음 세대가 함께 해 주기를, 이어나가 주기를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요구다. 문제는 이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유산을 거부하거나 포기할 권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유산은 매우 고약한 성질을 가진 유산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상속되는 유산이다. 그것 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기를 요구하고 명령하는, 끈질기게 들러붙어 우리를 지켜보는 ‘유령’의 시선과도 같 은 것이다.

정원옥_ 88년도에 입학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의문사 운동주체를 연구대상으로 학위 논 문을 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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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의 교묘한 위장막 벗길 터

간첩이 될 뻔했던 화가, 홍성담 조환준


작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곡차곡 세워진 캔버스들이 떡하니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이 집이 어떤 집 인지 알려주려는 듯. 집의 겉모양과는 달리 실내는 좁고 어두웠다. 거의 사용을 안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소파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고, 가스난로와 하얀 석고상, 황학동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골동품들이 잘못 건 드리면 툭 떨어질 상태로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한쪽 벽면에 커다란 첼로 케이스도 눈에 띄었다. 내창이 형 사건 조사 차 안산에 있는 그의 화실을 처음 방문한 지 벌써 3년이 지난 듯싶다. 사뭇 심란한 느낌을 주던 화 실의 1층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어서 오라고 반기는 그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여전하다. ‘오월 화가’ ‘민중 미술가’로 널리 알려진 홍성담. 그는 1989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의 공 동대표로 활동하면서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제작, 전시한 이유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가 안 기부에 구속된 것은 1989년 7월 29일. 며칠 지난 8월 5일 같이 민미련 활동을 했던 차일환 선배(중대 회화과) 가 역시 안기부에 구속되었고, 열흘 지난 8월 15일 임수경 대표가 판문점을 통해 귀국하던 날, 내창이 형이 거 문도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다. 그 역시 내창이 형 사건에 남다른 관심과 의혹을 품고 있기에 사건 조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건 얘기는 잠시 접어두고 작가 홍성담에 대해 얘기 나눠보기로 한다.

좁다란 원형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갔다. 훨씬 넓은 작업 공간이 펼쳐졌다. 들어서자마자 가슴 높이 까지 오르는 대형 스피커 두 대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예전 그대로다.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고개 를 돌려보니 트랜지스터라디오다. 귀에 익은 사물놀이 가락이 흘러나왔다. “커피 괜찮은가?” “네, 좋죠. 근데 스피커가 좋은 게 있는 거 같은데••••••.” “아, 작업할 땐 작게 들어, 일부러. 음악도 제대로 들으려면 그게 힘든 일이거든. 엔간히 들어 갖고는 성이 안 차지.” 유리로 된 작은 원형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는 이내 담배를 빼어 물었다. “요즘은 그냥 KBS FM 방송 틀어놓고 작업하는데, 이 시간 되면 국악이 나와. 근데 한 일주일만 듣고 있 으면 나왔던 거 또 나오고, 레퍼토리가 별로 없어. 영동이 형 이후론 인재가 없어.” 국악인 김영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래 전 ‘슬기둥’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그의 음반을 들은 기억이 얼 핏 떠올랐다. “국악 좋아하시나 봐요?” “응. 나가 본래 딴따라 출신 아닌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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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내뱉는 말 속에 남도의 구성진 억양이 묻어 나왔다. 1955년생인 그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하의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은 당시엔 목포 에서 7시간 정도 배를 타야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섬 주민들이 대개 그렇듯 대부분이 인척관계를 이루고 있 다. 바다에서 생업을 하는 이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굿을 했다. 어선의 ‘출정굿’부터 시작해서 죽은 자의 혼 을 달래는 굿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굿판이 벌어졌다. 목포고등학교로 진학할 때까지 섬에서 자란 그에게 굿 은 삶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들었다. 유년기와 성장기 시절 홍성담은 꽤나 말 안 듣는 사고뭉치였다. 교실에선 주로 뒷줄에 앉은 아이들과 어 울렸고, 중학교 시절부터 담배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또래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차지했다는데. “수호지나 삼국지 같은 걸 읽기 좋아했어. 그리고 그걸 애들한테 다시 얘기로 들려주는데, 촌놈들이라 뭘 잘 모르잖아. 그래서 내 맘대로 막 각색하는 거지. 구성 바꾸고 인물도 더 넣고 뻥튀기고 해서. 한마 디로 구라를 치는 거지. 점심시간만 되면 애들이 내 자리 주위로 먹이를 본 물고기들 마냥 이렇게 모여서 안달을 하는 거야. 그 담에 어떻게 됐냐, 빨리 해보라고.”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듯 웃는 그의 얼굴은 50대 중반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아 보였다. 그렇 게 해서 찐빵도 얻어먹고 까치담배 맛도 보면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이목을 끌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담배가 맺어준 인연, 미술 목포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비로소 뭍으로 나왔다. 여기서 미술반에 가입했는데,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미술실은 담배를 태우기 아주 좋은 곳이었거든.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태우다 놓고 간 장초들이 많았 어.” 그렇게 담배를 태우기 위해 미술실에 들락날락했는데, 하루는 친구 몇 명과 같이 적발되었다. 그때 미 술선생님 말씀이 미술반에 가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겠다는 거다. 그래서 1주일에 한 장씩 그림 을 제출했다. 일 년 재수를 하고 조선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한 것은 1974년. 바로 민청학련 사건이 있었던 해다. 전 후의 시기를 좀 더 살펴보면, 1972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헌법을 뜯어고쳤고,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발포와 함께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개정의 목 소리는 곧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그 해 4월 3일 긴급조치 4호 발포와 함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 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그리고 그 배후로 정부는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지목하면서 1975년 4월 9일 김용원·도 예종·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 등 여덟 명에 대한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대법원에서 상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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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기각된 지 20시간도 채 되기 전에 사형을 집행한 사실을 두고 역사는 대한 민국 ‘사법살인의 날’로 기록하고 있다. 이 야만의 시대에 대학 1학년이었던 홍 성담은 어떠했을까.

고문의 충격으로 모더니즘 극복 “그때가 4월 중순쯤이었지. 과에서 체육대회를 하고 술판이 벌어졌는데, 난 과 애들하고 별로 친하질 않아서 일찍 자취방으로 왔어. 그 시절에 미술학과 애들이 좀 멍청했거든, 인문학적 소양도 좀 부족하고.” 우물가에서 펌프로 물을 길어 씻고 있는데, 대문을 탕 탕 두드리는 소리가 났 다. 누구냐고 하니까 홍성담 학생을 찾는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제가 긴대요” 하 며 문을 여니, 시커먼 사내 몇 명이 갑자기 머리채를 잡아채고 지프차에 태웠다. 으슥한 숲을 지나 외진 곳에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갔는데. “내가 호기 좀 부리면서 앵겼지. 야이, 씨벌놈들아, 니들 뭐하는 새끼들이여 하면서. 왜냐하면 목포에서 광주로 갈 때 형들이 그랬거든. 광주 깡패들이 목포에서 온 놈이면 한번 집적댈 거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을 광주 건달로 생각했다. 이어서 “야, 찍어!” 하는 외 마디와 함께 몽둥이 세례와 발길질을 고스란히 다 맞아야 했다. 흠씬 두들겨 맞고 는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는데 양쪽으로 쇠창살로 막혀진 작은 방들이 쭉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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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어떤 방에 집어넣고는 다짜고짜 사람 한 명의 이름을 대면서, 누구냐고 묻는 거야. 생판 처음 듣는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또 두드려 패는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동향 출신의 선배 한 명을 그들은 추적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으면 물을 끼얹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옆방에서도 똑같이 고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주 살벌했어. 살려 달라고 사람이 비명 소리를 지르는데. 그래 속으로 아, 자존심 있게 맞지 뭘 살려 달라 그러냐 했는데, 정작 내 입에서 나중에 살려 달란 얘기가 나오더라고. 그제야 생각이 드는 거야. 여 기가 깡패 소굴이 아니라 호랑이 소굴이구나 하고.” 훗날 지인들과 함께 상황을 되새겨 보니, 당시 전남대는 민청학련 조사 차 약 1천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조사를 받았는데, 조선대는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에서 조선대를 추가 조사하는 과정 에 그가 엮여 들었다. 별 건질 게 없었던지 며칠 후 그들은 홍성담을 차에 싣고 자취집 골목길에다 버려놓고 가버렸다. 석유난로에다 물을 데워서 씻으려고 옷을 벗고 보니 온 몸이 시퍼랬다. 하룻밤 자고 나니 온 몸이 쑤시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학 교재를 헌책방에 팔아 안티프라민을 사다 발랐다. “아주 치욕스러웠고 극심한 상실감, 자괴감 같은 게 드는 거야. 생각해 봐. 깡패들하고 싸우다 그랬으면 속이라도 시원하겠는데,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없이 그렇게 죽을 지경으로 맞을 수 있다는 걸.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더라니까.” 한동안 술에 의지했던 그는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미술 공부와 함께 사회와 인간을 성찰 할 수 있는 서적을 찾으면서 그는 자신이 겪었던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의 예술철학을 형성하기 시 작했다. “자의식 안에서만 ‘자유’나 ‘해방’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회적 문제로 나아가질 못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거지. 이는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이 갖고 있는 본질을 고민하는 과정인데, 나의 경우엔 그 충격적인 사 건을 접한 이후 정신적 고뇌 속에서 모더니즘의 한계를 보았다고 할 수 있지.”

내 미술의 뿌리는 한국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대학 2학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왕성하게 미술공부를 하였고, 탈반을 만들고 기존에 있던 농악반을 활성 화시키는 활동을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굿이 몸에 배였기에 풍물과 춤은 그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주기에 더 없이 좋은 약이었다. “봉산 탈춤의 먹중 과정이 있어. 파계승이 기생 꼬시는 장면이지. 그 과정만큼은 내가 당대 내로라하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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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들 못지않게 아주 자신 있게 췄던 기억이 있어.” 그러고 보니 그가 춤을 추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그의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한창 풍물에 빠졌을 무렵엔 굿판에서 치배들을 대신해 악기를 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연유로 ‘진도 씻김굿’ 인간문화재였던 김대례 여사와 박병원 선생이 아 들로 삼고자 했다는 후일담을 전해주면서 ‘굿’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들려준다. “굿을 달리 표현하면 ‘죽음에 대한 연습’이거든. 굿이 죽은 자를 저승으로 잘 인도하기 위한 의례이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핑계로 산 자를 위로하고 치 유하는 문화적 행위니까. 내 작품의 뿌리를 한국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이라 고 보면 정확해.” 굿에는 우리 민족의 깊은 정서와 민담, 신화 등이 집약되어 있고, 이것이 자 신의 작품 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요양소에서 만난 재야인사들 1978년 대학 졸업 무렵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결핵에 걸려 전남 무 안군에 있는 ‘한산촌’ 결핵요양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1년 넘게 요양소에 머물면 서 그는 함석헌, 안병무, 김남주, 윤한봉 등 재야의 유명 인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결핵 요양소는 시국 관련 수배자들에겐 아주 좋은 도피처였거든. 일주 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선생님들이나 형님들이 쉬러 오시는 거야.” 어찌 보면 앉아서 선생님들의 방문 과외를 받은 셈이다. 그것도 단기간에. “안병무 선생님과 아주 친하게 지냈어. 선생님으로부터는 민중 신학을 배우 게 되었는데, 나중엔 선생께서 나를 한신대학으로 오라고 권유까지 할 정도 였으니까. 그 분 가족들과도 아주 친했지.” 가수 김정호도 만났다. 그에게 가사도 써 주었고 김정호는 그곳에서 판소리 창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요양소에 왔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어갔어. 그 애들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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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애들이냐, 전부다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하고 돈 벌러 나갔던, 쉽게 얘 기하면 공돌이 공순이들 아냐.” 눈시울이 벌게진 가운데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가 졸업한 하의국민학교 는 한 해에 36명 정도가 졸업했다. 그 중 네 명 정도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머 지는 대부분 서울이나 부산, 마산, 대구 등지의 공장으로 향했다. 눈칫밥, 기름 밥 먹어가며 병든 부모, 어린 동생 생각에 자본과 독재에 피를 뽑아 줘야만 했던 1970년대. 그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앞에서 무릎 꿇던 꽃다운 청춘의 영혼을 그 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항과 사랑의 공동체, 광주 다시 광주로 돌아온 1979년, 건강을 회복한 그는 어느 때보다 원기왕성하게 활동했다. 그 해 여름 백은일, 최열, 박광수 등과 함께 광주 지역의 젊은 작가들 을 중심으로 ‘광주자유미술인회’를 결성하였다. 약칭 ‘광자’로 불렸던 이 모임은 당시 김정헌, 임옥상, 오윤 등의 작가들이 주축이 된 ‘현실과 발언’과 함께 민중 미술계의 큰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유신체제를 ‘미술’이라는 도구로 거꾸러뜨리겠다는 정치적 선언과 함께 부산, 마산, 전주, 대전 등 지역의 대도시 마다 ‘시민미술학교’를 꾸려나가면서 도발적인 문화예술운동을 시작했다. 머지 않아 10·26 사건과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 1980년 5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항쟁기간 내내 대자보와 그림을 만들며 주로 선전활동을 하였던 그는 당시의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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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이렇게 기억했다. “해방 공동체였지. 재야인사나 지식인층은 사전에 예비검속으로 다 붙잡혀 가고, 도피한 상태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무지렁이들과 여자들이 태반이었 어. 그럼에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항쟁의 기간 동안 수많은 계 획을 가지고 있었지. 비로소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가 표출하기 시작했는데 시장을 새로 뽑고 관공서도 다시 정상 운영되기 시작했거든. 무엇보다 10일 간의 항쟁기간 동안 시민군에게 약 6천 정의 총이 지급되었는데, 총기사고는 물론 강·절도 사건이나 강간 사건 등이 한 건도 없었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최고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발휘한 것이었지.”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 속에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되었다. 무고한 희생자들 을 가슴에 품고 국민들은 침묵 속에 지내야만 했던 시절, 그는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통해 우리나라에 비로소 시민계급이 등장하게 되 었음을 주장했다. “시민이라는 계급은 봉건사회의 토대에서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군주를 권좌에서 끌어내 광장으로 끌고 나와 목을 쳐서 피 맛을 본 사람들만이 시민 이라고 할 수 있는 거라고 봐. 그리고 그 자각된 시민들에 의해서 비로소 ‘현 대’의 문이 열리는 것이지.” 깊은 절망과 패배 의식에 갇혀 있을 1980년대 초반, 그처럼 희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광주의 전국화’라는 이른바 ‘5월 테제’를 전파했다. 그리고 이것 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총칼로 집권한 전두환 군부독재를 거꾸러뜨리면서 달성하게 된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간첩이 될 뻔했던 화가 1988년 말, 1년여 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민미련 회원들과 함께 그간 구상했던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제작에 착수했다. 이듬해 4월에 완성된 이 대형 그림은 서울대와 중앙대 안성교정 전시를 시작으로 전국 순회전 시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전시는 7월 초,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리 는 평양이었다. 전시는 공개된 행사로 진행되었다. 물론 당국의 불허로 민미련 에서는 이를 슬라이드로 만들어 북에 우편 송부한다. 이로 인해 7월 29일 광주에 서 그는 안기부에 연행되었고, 이후 민미련 관계자들이 계속 연행·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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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기관에서 내 사건을 언론에 공개할 때 처음부터 홍성담 간첩단 사건이었거든. 단순한 국보법 위반 사건이 아니라 간첩단 사건으로 이미 언론에서 기정사실화해서 때려 버렸잖아. 그리고 내가 안기부에서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창이가 사망한 거야. 물론 내창이하고 나하고는 그 전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 고 걸개그림 제작 관련해서 어떤 일을 같이 도모하지도 않았지. 어찌되었건 나중에 재판을 통해 내가 간 첩 혐의는 벗을 수 있었지만 말이야.” 북한 공작원과 회합하였다는 수사기관의 공소 내용은 무죄가 되었지만, 그는 이미 언론을 통해 간첩으 로 둔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내창은 그가 한창 수사를 받는 과정 중에 사망하였다. 그가 갖는 의혹의 내 용은 이렇다. “안기부에서 약 한 달간 수사를 받았는데, 물론 엄청 두들겨 맞았지. 조사를 크게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겠더라고. 1, 2단계에서는 민미련의 활동과 재야 활동, 그리고 독일에서의 행적 중심이었는데 방을 옮겨 가면서 수사를 받았으니까. 그런데 하루는 ‘평양에서 VIP가 온다’면서 방을 또 옮기라는 거야. 그 러니까 내가 속으로 ‘아, 임수경이가 왔나 보다’ 했지. 그런데 그리고 나서 이틀 정도 지났을 땐가. 이 놈들이 아침부터 괜히 부산을 떨면서 분주히 움직이더라고. 어디 보고를 하러 가는 건지 들락날락하면 서 말이야. 그래서 그 날은 하루 종일 조사도 안 받고 반성문 몇 장 작성하고 멀뚱멀뚱 있다가 끝났고, 그 후로 8월 25일경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는 조사 강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거든. 약했다는 거지.” 재판 과정 중 그는 변호인에게 자신이 고문 받은 사실을 폭로하면서 자신을 수사했던 안기부 수사관의 안 면을 스케치하여 재판부에 제출했다.

앞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사건 이후에도 그는 계속 창작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제주 강정마을과 비핵·평화 등의 주 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앞으로 작품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요즘은 국가폭력이 과거처럼 몽둥이와 총, 칼 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제도, 문화 속에 은밀하 게 숨어서 행사하고 있잖아. 그러면 내 그림의 언어도 그런 숨어 있는 놈들과 대항하려면 좀 더 정교해 져야 하고 더 세밀한 장치를 가져야 하거든. 그래서 나도 이제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벗어나 좀 멋진 그 림을 보여줄 계획이었어.”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국가폭력의 위장막을 벗기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어 한다는 결론 을 얻었다. 영상매체를 작품에 도입하고, 설치미술도 많이 시도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누구보다 자 신 있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연극과 영화 제작의 경험도 있고, 직관과 순발력 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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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있었기에. “그런데 총선에서 지고 박근혜가 완전히 대세를 굳혀가고 있잖아 지금. 뭐 누구는 ‘유신공주’라 하지만, 난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아주 역겨워지거든. 박근혜가 누군가? 박근혜는 유신 그 자체야. 왜? 박근혜는 이미 1970년대 에 후계자 교육을 받고 있었거든. 사람들이 왜 그렇게 쉽게 망각하는지 모 르겠어.” 그가 지금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유신체제의 부활이고, 그의 집권으로 조성될 신공안정국이다. 박근혜라는 인물은 이미 한 개인이 아니 라 시스템과 체제라는 것이 그의 역설이었다. 때문에 국가폭력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에 숨어 있지 않고 과거처럼 뻔뻔하고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구태의연한 현 실이 되어 버렸다. “내 작품 또한 변화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되었지. 또다시 구태의연한 그림을 그려야 하니 내가 오죽 재수 없는 놈이냐고.” 멋쩍게 웃으면서 그는 또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어느덧 1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근처 식당으로 가 늦은 점심을 먹으며 인 터뷰를 마무리했다. 남도의 외딴 섬에서 태어난 섬 소년이 한국의 대표 민중미술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그의 삶에는 어느덧 역사의 중요한 굽이굽이가 녹아 있었 다. 그는 이곳 안산도 조만간에 뜰 거라며 작업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환준_ 86년에 입학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1기,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민간 파견조사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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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바깥풍경에 대한 지한이의 그림과 생각” 어린이집에서 전해준 지한이에 관한 얘기다. 지한이의 잠들어 있던 생각에너지가 폭발하는 듯하단다. 많이 커 가고 있구나. 김형균의 페이스북에서 2012.6.1.


캠프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자꾸 생각나요 황서영

황서영 현재

내가 처음 캠프를 간 것은 네 살 때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몰랐겠지 만 좋은 추억만 가득하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노는 2박3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난 어느새 성장을 해서 열세 살이지만 캠프에 대해서 좋은 추억만 갖고 있다. 처음에는 콘도에서 모였다. 직접 급식 배부를 하고, 프로그램도 알찼다. 언제나 내 또래 아이들과 동생들, 언니, 오빠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뭣도 모르 고 하나하나 징징댔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9년 동안 콘도에서만 캠 프를 하지는 않았다. 해가 지나갈수록 콘도보다는 자연으로 장소를 옮겼다. 일 곱 살 되던 해에는 삼척에서 캠프를 했다. 하지만 폭우와 낙석으로 인해 가는 길 이 매우 험난했다. 점심 12시에 출발해서 장장 10시간을 오직 차 안에서만 보내 야 했다. 어릴 때는 뭣도 몰라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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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여름캠프

2010년 여름캠프

항상 캠프를 가면 맛있는 음식이 수두룩했다. 평소에 먹지 못하던 음식도 먹고 바비큐파티도 자주 했 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면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먹지만 특히 캠프 가서 먹는 라면이 정말 맛있 었다. 평소에 맛없던 라면도 캠프 가서 먹으면 정말 금상첨화였다. 친구들과 수다 떨다 보면 늦게 자는 경 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일정 때문에 지쳐서 먼저 잔다. 항상 캠프는 2박 3일 동안 진행되는데 하룻밤 자고 난 다음날은 정말 놀 준비를 해야 한다. 어른들께서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정말 즐겁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저번 겨울캠프를 안한 것에 대해 실망감이 컸다. 매년 여름, 겨울방학을 기다리 면서 캠프를 손꼽는다. 2010년 여름에는 괴산으로 갔다. 제일 재밌었던 캠프였는데 동현이 오빠와 가현 이, 동찬이, 수영이 오빠 진영이, 세열이, 세윤이와 정말 재밌게 놀았다. 밤에는 영화도 봤는데 진짜 눈 꺼풀이 턱까지 와서 차가운 물을 뿌리면서까지 봤지만 너무 피곤해서 밤에 그냥 잔 기억도 난다. 1시간 동 안이나 걸어서 계곡에 가서 2시간 동안 수영한 것도 기억나고 트럭을 타고 신나게 질주했던 것도 기억난 다. 벌레와의 힘겨운 사투 속에서도 나는 전혀 짜증나지 않았다. 그냥 그때는 모든 게 다 좋았던 것 같다. 2010년 10월에는 공포영화를 본 것이 기억난다. 그때는 ‘솔뫼마을’에 가서 책도 보고 한살림협회를 하는 곳에서 잠을 청했다. 정말 뜨끈뜨끈해서 너무 좋았다. 너무 재밌게 놀고 나서 밤에는 공포영화를 봤 는데 진짜 너무 재미있어서 모니터에서 눈을 못 뗐다. 평소에 봤으면 ‘아••••••’ 이랬을 텐데 진 빠지게 놀 고 오빠, 친구들이랑 보니까 너무 재미있었다. 괴산을 갔다 오면 항상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2011년 7월 21일에도 괴산으로 캠프를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재미있었다. 풍선아트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밤에 영화도 보고, 삼겹살파티도 하고, 밤에는 맛있는 라면도 먹고! 게다가 친구들, 언니, 오빠, 동생들 까지 있으니까 쓸쓸하지 않고 마치 수련회에 온 기분이었다. 집에서의 하루는 늘 똑같다. 방학 때도 학교만 안 가지 늦게 일어나서 종종 친구들과 놀다가 학원 갔 다 오는 게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더 늦게 갔다. 하지만 캠프는 달랐다. 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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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만 가질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랄까? 내가 가지 못했던 시골이나 낯선 장소를 가고, 새로운 맛집도 찾 아가고, 캠프는 나의 여행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공주를 갔었다. 옛날에는 백제의 땅이었던 공주를 학 교에서 가지 않고 캠프에서 가본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5학년 사회(역사)는 성공적으로 점수를 받았다. 캠프는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신기하게도 4학년 때는 ‘부모님과 함께 시골 다녀오기’였는데 괴 산에 갔었고, 5학년 때에는 학교가 아닌 캠프에서 역사탐방을 갔다. 마지막 캠프는 2011년 7월이었다. 겨울캠프는 이상하게 소식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 이후로 나는 캠프에 대한 소식을 아직까지 기다리 고 있다. 만약에 캠프가 2011년 7월을 마지막으로 해체된다면 글쎄, 아무래도 살짝 찝찝할 것 같다. 원 래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가던 캠프가 사라지니 네 살 때부터 있었던 자리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 같 은 기분이 든다. 항상 ‘다음에 뵈요’라는 말을 하고 캠프는 해산되었는데, 그 말이 아직도 계속 생각난다. 짐을 한가득 싸고 차에서 몇 시간씩 보냈던 기억도 나고, 캠프식구들도 생각이 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캠프식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나는 중앙대학교를 참 좋은 학교라고 생각한다. 당연지사한 이야기지만 학교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캠프 때문에 늘 중앙대학교에 들러서 가곤 했는데••••••, 중앙대학교도 그립다. 솔직히 말해서 내 또래 아 이들은 중앙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연극영화과, 문학과를 많이 가고 싶어 한다. 나도 글쓰기를 통해서 한 번은 문학과에 도전해 보고 싶다. 난 중앙대학교를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너무 좋다. 시원한 오미 자 한 잔을 두고 원고를 쓰는 분위기도 좋고,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 왠지 내가 직업이 생긴 분 위기이다. 아마도 이 원고를 보고 있으신 여러분들은 제가 커서 글을 쓰게 된다면 좀 더 발전된 글 실력을 보실 수 있게 되실 겁니다. 2012년 <어깨동무> 파이팅!

황서영 어린이

황서영_ 열세 살, 6학년이다. 이원근, 정원옥의 조카로 캠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하는 어린이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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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도 챙기고 추억도 만드는 ‘어깨동무’ 캠프 이세열

나는 ‘어깨동무’ 캠프 덕에 많은 곳을 다녀오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제 일 재미있고 좋았던 때는 3학년 때이다. 여름캠프는 괴산을, 겨울캠프는 공주 를 다녀왔는데 괴산에서는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바위 를 붙잡아 무사했었다. 공주에서는 석장리 박물관과 무령왕릉을 다녀왔는데 그 곳에서는 인류 진화와 석기의 종류, 그리고 무령왕의 업적과 무령왕릉에서 출 토된 유물을 살펴보았다. ‘어깨동무’에는 나와 가장 친한 동찬이가 있는데, 여섯 살 때 처음 만나 많 이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지고 싸우지도 않아서 어른들께 철이 들었다 고 칭찬도 많이 받았다. 나중에는 내가 먼저 학교에 입학하니까 형이라고 부르 며 싸우지도 않고 잘 지내게 되었다. 그 전에는 많이 싸워서 기수 삼촌께 많이 혼났었는데 형이 되니까 동찬이가 잘 대해 주었다. 고마워서 서로 잘 대해 주는 것이 반복되어서 친해졌다. 현민이라는 친구도 있는데 현민이는 제일 처음에 나랑 사귄 친구였고, 엄마 자동차가 없었을 때 태워다 주었던 엄마 동기 성호삼 촌의 아들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동찬이랑 놀고 동찬이만 신경 써서 현민이를 잊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현민이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과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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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열 (오른 쪽)

여섯 살 때 ‘어깨동무’ 캠프를 처음 갔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다 신기했다. 그런데 엄마와 함 께 계속 캠프를 가다 보니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생겼다. 캠프는 전자기기 없이도 노는 법을 알게 해 주었다. 더 좋은 것은 지식도 챙기고 추억도 만드는 일거양득의 좋은 점이다. 공주에 갔을 때는 석장리 박 물관에서 인류 진화와 무령왕릉에서의 유물 탐구와 무령왕에 대해서 배웠다. 백제왕에 대해 배웠던 것은 지금 5학년이 되어 사회, 역사부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아쉬운 점은 4학년 때에는 캠프를 여름, 겨울 둘 다 못 간 것이다. 여름에는 사정이 있어서 못 갔고 겨울에는 캠프가 없어서 못 갔다.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눈썰매를 타봤다. 지금은 진짜 친구들이 생겨서 좋다. 만약에 ‘어깨동무’ 캠프가 없어진다면 정말 속상할 것이다. 방학이 따분해질 것이고 방학을 기다리는 이유도 없어질 것 같다. ‘어깨 동무’ 캠프는 진짜 좋은 캠프이다. 좋은 곳에 가서 체험도 해 보고 친구도 사귀게 해 주었으니까. 그런 의 미에서 ‘어깨동무’ 캠프가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어깨동무’ 캠프 forever~~~

이세열_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이다. 고재영 동문의 아들로, 2011년 공주로 겨울캠프를 갔을 때 백제 역사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해와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한 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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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비가 와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겨우내 방치되었던 마당에 담장이랑 문도 만들고 어젠 나무랑 잔디도 심었단다. 봄이 가기 전 우리 집 마당에서 꽃을 보다니……, 이게 얼마 만에 가져보는 마당이란 말이냐! 강혜연의 페이스북에서 2012.4.21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낯선 곳을 향한다 이지원

깡통이 돌아왔다 이른 더위가 시작되던 5월 어느 날, 합정동 주택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펍(pub) ‘로봇’에서 형을 만났다. 예전과 다름없는 안경 너머의 눈빛, 화살표처럼 예리한 콧날. 녹음기를 꺼내놓자 멋쩍은 듯 형이 웃는다. 그 래, 저런 얼굴로 웃는 사람이었지 형은••••••. 형의 웃음에 문득 1988년 봄날, 수상무대 언저리의 풍경이 묻어 왔다. 그 시절, 형의 별명은 왜 하필 깡통이었을까. 새삼 돌이켜보니 강동윤이라는 이름 앞자를 된소리로 불렀 던 초딩식 별명일 뿐이다. 그런데 그 별명은 공교롭게도 형의 캐릭터와 부합되는 구석이 있었다. 금속성의 샤 프함이 느껴지는 외모, 차갑고 스마트해 보이는 형의 이미지와 배반되는 허허실실 웃음, 천진난만한 허당 기 질••••••. 선배들의 무의미한 말장난이 만들어낸 별명 속에는 형이 지닌 반전의 캐릭터가 절묘하게 담겨 있었다. 결국 ‘깡통’이라는 별명은 형의 차가운 첫인상을 허물고, 깡통스런(?) 소탈함에 쉽게 다가가게 해 주는 의미 있 는 애칭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디자이너로 살다 형은 1994년에 뉴욕으로 떠났다고 했다. 형이 왜 하필 뉴욕으로 떠났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반미를 외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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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목청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로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으로 간 데는 무 슨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닐까? ‘쌍팔년 식’ 기우를 담은 질문에 형은 그저 공부하러 갔다고 ‘이천 년대’ 스타일로 대답했다. 집안의 권유로 오른 유학길이라고 했다. 형은 NYIT(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를 전공했다. 멀티미디어 2D가 전문 전공 분야였다. 졸업 후에는 의류 회사에 입사해서 7년간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 티셔츠에 전사되는 그래 픽 도안을 디자인하는 것이 형의 일이었다. 창조적인 그래픽을 통해 자신만 의 메시지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업, 디자이너로의 변신은 만족스러웠다. 한때 사업을 꿈꾸기도 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인터넷 비즈니 스에 도전했지만 결국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다시 직장인의 자리로 돌아왔다. 귀국 직전까지 5년여, 형은 새로 운 의류 회사에 입사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형의 아내는 보석디자인을 전공하고 GIA 보석감정회사에 다닌 재원이다. 아내를 만난 건 랭귀지 스쿨에 다 니던 시절이었다. 때때로 향수병에 방황하기도 했던 외로운 맨해튼 생활, 소소한 연애의 일상에 기대서 외로움 을 메워야 했던 날들이 있었다. 7년여의 긴 연애,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길에서 반지 하나씩 사 끼고 시청에 가서 결혼을 하기로 한다. 이 대목에서 잠시 허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미국식 결혼을 떠올렸지만••••••, 현 실은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못하다. 여행 차 방문하셨던 부모님의 성화로 시청 결혼식 대신 식당을 빌려서 결혼 식을 치렀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반전 스토리. 갑작스런 아들의 결혼식에 아버지는 여행용 운동화 차림으로 참 석하셨다며 형이 웃는다.

숙희 아빠 형에게는 늦게 얻은 귀한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을 물으니 숙희란다. 강숙희. 처음엔 그 고전적인 어감에 웃음 이 나다가 이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쁘장한 이름의 홍수 속에서 강직한 포스마저 풍기는 이름이다. 작명 소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굳이 복고풍 이모 세대의 이름을 손녀 에게 지어 주신 데 별다른 뜻이야 있었을까마는 뜻밖에도 뉴욕에서 그 토종 이름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한 다. 미국식 발음으로 Sookhie Kang. ‘수키’라는 이름의 특별한 매력 덕에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 딸 얘기를 하며 저절로 웃음을 섞는 형의 모습에서 여느 딸 둔 아빠들과 다름없는 ‘딸 바보’의 모습이 보인 다. 지켜야 할 자식이 있어 강해지고 또 약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모든 아빠들처럼 형도 그렇게 강해지고 약 해졌을 것이다. 동물원에 가서 “여기 있는 동물들은 누가 다 모았냐”고 묻는다는 숙희. 숙희의 엉뚱함이 아빠를 닮았겠구 나 싶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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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뉴욕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심한 것도 숙희 때문이었다. 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귀국 시점을 고민 하게 했고, 그래도 아직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이 있을 때 돌아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 이다. 요즘 숙희 아빠는 한국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 무대로 선택한 곳은 동대문이다. 동대문을 기반 으로 제작에서 생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는 마켓 플레이스를 만들고, 자신만의 오리지널 브랜드를 런칭하겠 다는 것,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유니크한 메시지가 담긴 티셔츠 그래픽을 통해서 1%의 마니아 시장을 개척 하겠다는 것이 형의 포부다. 티셔츠에 담긴 메시지는 자기가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형. 과연 형이 만드는 옷에 담겨 질 메시지는 어떤 것일지 형의 런칭이 기다려진다.

“한 번도 내 가방 안에 카메라가 없었던 적은 없었어” “한 번도 내 가방 안에 카메라가 없었던 적은 없었어.” 인터뷰 말미쯤이었던가? 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 시절, 형은 항상 카메라를 소지하고 다녔다. 형이 사진과 재학생이라는 사 실은 고가의 전문가용 카메라가 증명해 줄 뿐, 형이 수업에 들어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그 대신 종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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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자 같은 모습으로 묵직한 망원 렌즈가 장착된 캐논 카메라를 메고 집회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 언제나 열심히 찍긴 했지만 사진을 찾아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때론 형의 카메라 속에 필름이 들어있긴 한 걸까, 의심 이 들기도 했다. 그랬던 형이 미국에 가서 사진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했다. 사진을 했다는 것이 경쟁력이 되었다고도 했다. 사진을 했기 때문에 포토샵을 이용 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고 사진을 레퍼런스 삼아 새롭 고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진에서 디자인의 영감 과 모티브를 얻고, 스케치북에 데생을 하는 대신 컴퓨터 페인터로 그림을 그 리는 작업을 하면서 사진에 대한 새로운 열망도 생겨났다. 그래픽 디자이너 라는 직업이 포토그래퍼로서의 관점이 아니라, 수용자 관점에서 사진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하고 다시 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형과의 인터뷰 내내 사진에 대한 형의 진지한 애정이 느껴져서 반가웠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카메라와 있을 때 형은 형답다. 평생토록 형의 가방 안에는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형이 뉴욕 생활을 통해 얻은 가 장 큰 결실은 사진에 대한 진정한 열망을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해본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낯선 곳을 향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언제나 낯선 곳을 찾아 나선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정체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피 사체를 찾아 나설 수 있으며, 그 길에서 만난 찰나의 진실들을 미래로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 메라를 놓지 않는 삶은 깨어 있는 삶이다. 언젠가 자신이 지나온 인생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형. 형에게 묻지 못한 말들이 있었 다. 뉴욕에서 보낸 20여 년의 삶, 그 두터운 프리즘은 우리가 공유했던 80년대 후반의 시간들을 어떤 의미로 투 과시켰을까? 형의 인생에서 그 시간들은 어떤 의미로 기록되고 있을까? 언젠가 형이 자신의 인생을 담은 전시회를 여는 날, 형의 사진들이 말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가 공유했던 그 시절이 먼 옛날의 불꽃만은 아니라고••••••.

이지원_ 88년도 입학. 광고 및 각종 영상물 기획자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올 해부터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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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한 자외선 차단으로 여름 피부 가꾸세요 김혜진

선후배님들, 모두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이렇게 글로 인사드리려니 쑥스럽기 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네요. 열심히 사느라 바빴던 탓이라고 이해해 주세요.^^ 학교 땐 화장품이라고는 샘플밖에 모르던 제가 어찌 인연이 되어 이 일을 업으 로 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갑니다. 피부나 몸의 상태는 사람의 성격이 각양 각색인 만큼이나 백이면 백, 모두 저마다 다른 특성과 기질이 갖고 있어요. 따라서 그 관리법도 모두 달라질 수밖에 없죠. 짧은 지면을 빌어 설명하기 참 어려운 부분 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여름철을 맞아 피부노화와 기미, 주름의 원인이 되는 자외 선과 자외선차단제의 적절한 사용법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어느 덧 피부 관리에 신경 쓸 나이가 되었으니, 귀찮다고 소홀히 하면 안되겠지요? 먼저 자외선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자외선은 파장의 길이에 따라 A,B,C로 나 뉘는데, 가장 강력한 자외선C는 대부분 오존층에 흡수됩니다. 자외선B(UVB)는 여름에 특히 강하며 피부 표면에 일광화상을 일으키는 주범이 되는데, 흔히 사용 하는 자외선차단제의 SPF(Sun Protection Factor)라는 수치는 자외선B에 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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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어지수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외선 양이 1일 때 SPF 15차단제를 바르면 피부에 닿는 자외선 의 양이 15분의 1로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숫자가 높을수록 차단기능이 강한 것입 니다. 옷은 물론 피부 속 깊숙히 침투해 주름과 노화의 원인이 되는 파장이 가장 긴 자외선A (UVA)를 차단하는 것은 PA로 표시하는데 ‘+’ 마크의 갯수로 정도를 나 타냅니다. +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때보다 2~4배, ++는 4~8배, +++는 8 배 이상 보호됨을 의미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SPF 15~20, PA+ 정도, 실외에서의 간단한 스포츠나 야외 활동이 많은 경우라면 SPF 30, PA++ 정도가 적당하구요. 수영장, 해수욕장 등 휴양지에서 장시간 자외선에 노출될 경우에는 SPF 30 이상, PA+++를 사용해 야 합니다. 권장되는 수치가 15~30인 이유는 SPF 1~15까지는 어느 정도 비례해서 차 단율이 증가하지만 그 이후는 큰 차이를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지수가 높을 수록 상대적으로 피부자극이 강해져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으니, 민감하신 분들이 나 여드름피부들은 SPF가 높은 제품을 자제해야겠죠? 또 차단제가 제 역할을 하려 면 최소한 1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니, 외출 20~30분 전에 발라 주시고, 땀과 피지 등에 의해 효과가 떨어지므로 2~3시간마다 덧발라 주셔야 합니다. 땀이 많이 나시는 분들은 자주 덧뿌려 줄 수 있는 스프레이 방식을, 지성피부라면 화장이 밀 리거나 모공이 막히는 느낌을 줄여 줄 수 있는 액상타입, 건조한 피부는 로션타입의 제품을, 하루 종일 외출하실 경우 크림형태의 차단제를 이용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궁금증, 차단제는 왜 바르면 뿌옇게 되는 걸까요? 자외선차단제는 일반적으로 보습제와 자외선 흡수제, 자외선 산란제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자외선 흡수제는 자체적으로 자외선을 흡수해 피부 속으로 침투 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지만, 흡수를 유도하는 화학성분(표시성분 oxybenzone, benzophenone, cinnamate)이 피부에 트러블을 발생시키고 알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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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기를 유발하거나 광독성 반응의 가능성이 있는 유해물질입니다. 산란제는 흔 히 피부를 뿌옇게 보이게 하는 백탁현상을 유발하지만, 차단효과가 뛰어나고 상 대적으로 부작용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요(표시성분 titanium dioxide, zinc oxide,avobenzone). 하지만 이 또한 발림성을 위해 나노화되면 똑같은 위험성 을 가지게 되므로 매끈하게 스며드는 자외선 차단제보다는 오히려 백탁현상이 있 는 제품이 안전합니다. 자외선 차단제의 마무리는 꼼꼼한 세안입니다. 자외선차단제만 발랐을 경우 세안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차단제는 피부 밀착력이 좋고 지용 성이기 때문에 간단한 비누세안으로 잘 제거되지 않습니다. 클렌징제품으로 일차 제거하신 후 폼 타입으로 부드럽게 세안해 주세요. 일반적으로 엄청난 분장을 하 지 않는 이상, 클렌징로션이나 젤 타입이 가장 순하구요. 1차 클렌징은 1분이내 로 간단히 2차 폼 클렌징 단계에선 손에서 충분히 거품을 내어 그 거품으로 3분 이 상 얼굴에 작은 원을 그리며 부드럽고 꼼꼼하게 문질러주세요. 세안 전 손 닦는 건 기본이겠죠? 햇볕에 많이 노출되셨을 때는 바로 즉각적으로 진정관리를 하시는 게 좋고, 최대한 48~72시간 이내 얼굴과 몸의 열감을 빼셔야 색소 침착을 막을 수 있습니 다. 알로에 젤(저렴하지만 효과는 좋죠)이나 수분크림을 차갑게 해서 팩처럼 얼굴 과 몸에 두껍게 바르고 주무시는 것도 번거롭게 감자나 오이를 갈아대는 것보다 효 과적입니다.^^ 화장품은 유통기한이 3년이지만, 개봉하면 기초제품은 6개월, 색조는 1년 내 쓰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외선차단제는 여름에만 쓰시는 분들이 많아서 다음해에 도 쓰시는 경우가 많은데, 자외선차단제는 특히나 변질이 심한 제품이므로 절대 안됩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나시고요! 다음 호엔 겨울철 피부 관리로 찾아뵐게 요.^^

김혜진_ 91년도에 입학했다. 현재 서울 왕십리에 위치한 피부관리숍, <뷰티엔코>의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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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쌀 김선미

스물두 살 때, 신나 냄새 풀풀 나는 학생회 회의실로 장미 스물일곱 송이를 들고 찾아간 일이 있다. 스물일 곱 살이 된 애인의 생일 선물이었다. 난생 처음 꽃을 선물 받은 그는 쑥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쌀을 사주지, 꽃은 무슨••••••.” 학교에 다니는 동안 혼자 밥을 짓고 김치도 직접 담가 먹던 자취생이었으니 정말 꽃보다 쌀이 중요했을 수 도 있다. 아니면 남들 눈에 띌까 봐 엉겁결에 둘러댄 말이던가. 지금 나는 그 남자와 매일 한솥밥을 나누어 먹고 산다. 밥 대신 꽃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쯤은 살림을 하면 서 충분히 배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꽃을 좋아하고, 꽃으로 누군가를 축하해 주는 일이 즐겁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집 장만을 했을 때 정말로 꽃 대신 쌀로 축하해 준 사람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 이 어릴 때 경기도 광주의 산골마을에 집을 짓고 10년 동안 살았는데, 그때 집들이 선물로 쌀 한 말을 어깨에 이 고서 찾아온 선배가 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 쌀을 선물로 받았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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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왠지 모르게 쌀을 주고 싶었어.” 선배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쌀을 선물로 준 이가 아주 특별하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보였다. 순간 우리가 지은 작은 목조주택이 네 식구들 육체의 집이라면 쌀은 영혼과 존재의 집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 모두의 유전자는 조상 대대로 쌀로부터 만들어져 왔지, 새삼 깨달았다. 난생 처음 선물로 받은 쌀은 시장에서 사고파는 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시절 이웃에 살던 친구가 가을이면 고향에서 올라오는 쌀자루를 이고 와서 나 누어줄 때도 그랬다. 쌀을 나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가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하루에 두 번 밥을 짓는다. 하지만 식구들이 ‘집밥’을 먹는 일이 점점 줄어 한번지은 밥으로 세 끼를 다 해결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밥을 지을 때는 한 끼 분량으로 네 식구 기준으로 쌀 두 컵을 씻는다. 하루 평균 다섯 컵으로 계산해 보니 얼추 일 년 동안 우리 식구가 먹는 쌀이 두 가마 반에도 조금 못 미친다. 통계 에 따르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98년 99.2킬로그램에서 2008년 75.8킬로 그램으로, 10년 사이 4분의 1이나 줄었다고 한다. 우리 식구도 쌀을 통계의 평균치 보다도 적게 먹고 있었다. 신혼 초부터 꼬박꼬박 아침밥을 먹어왔는 데도 그렇다. 심지어 쌀을 탄수화물 덩어리로만 여겨 다이어트의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마 저 있으니 쌀 소비량이 늘어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고봉으로 담아먹던 옛 어른들 밥주발을 생각해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특히 제삿밥으로 꾹꾹 눌러 담은 밥 한 그릇은 온 식구가 나누어 먹어도 충분하다. ‘이밥에 고깃국’ 배불 리 먹는 것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소원이었는데, 불과 반세기만에 쌀이 이 렇게 천덕꾸러기가 될 줄이야. 정부에서는 FTA를 위해 농민들이 쌀을 포기하기만 바라고 있다. 실제로 지리 산 자락 함양의 하고초 마을 사람들은 논에 벼 대신 꿀풀을 심어 생기는 관광수입 으로 밥을 먹고 산다는 신문기사를 본 일이 있다. 아무리 내가 꽃이 좋아한다고 해 도, 쌀 대신 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 달갑지 않았다. 당장은 꽃이 밥을 먹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벼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 면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우리 쌀이 남아돈다고 걱정이지만 과연 계속 그럴 수 있 을까. 배추 파동만 나도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 되는데, 만일 쌀이 모자라게 된다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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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우리는 생존을 위협받을 것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은 생명이고 인권이다. 지난 2008년에는 한때 쌀 종주국이던 필리핀과 아이티에서 쌀 부족으로 일어 난 폭동을 텔레비전 뉴스로 본 일이 있다. 총을 든 무장경찰 앞에서 쌀을 배급받는 사람들과 진흙 쿠키를 물고 있던 어린 아이의 애절한 눈빛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 다. 우리는 부모 세대가 전쟁 뒤에 겪어야 했던 끔찍한 굶주림에서 헤어 나온 지 이 제 겨우 반세기가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쌀의 운명을 생각하면 저 먼 나 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식량 폭동이 결코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나는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에서 유기농 쌀을 사서 밥을 짓고 있다. 생산자와 소 비자의 직거래 방식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대형 할인마트나 대기업의 유기농 제품 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다. 물론 일반 쌀보다야 조금 비싸지만 내가 지불하는 쌀값 의 75%가 고스란히 생산자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뿌듯하다. ‘생 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약속 때 문이다. 2주일 단위로 쌀을 주문하는데 주문한 만큼 바로 도정한 신선한 쌀이 공급 되기 때문에 밥맛도 좋다. 그러나 밥맛이 좋은 진짜 이유는 그 쌀이 길러진 과정과 농부들의 수고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괴산으로 귀농한 친구의 쌀이 왔다. 부부가 함께 한살림의 생산 자가 된 친구다. 대아산 자락 솔뫼마을 그의 논둑에 서서 어린 모가 살랑거리고 있 는 논물이 해거름에 붉게 물들던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다. 쌀을 씻을 때마다 논둑 에 서서 처음 자기 논에 모내기한 것을 자랑하던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논 에는 화학비료와 제초제,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 무수히 많은 논 생물들이 살고 있 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에는 보통 벼 세 포기 정도의 낱알이 들어 있는데, 벼 세 포기가 자라려면 논 0.15제곱미터가 필요하다. 이 작은 공간에 물벼룩 5,093 마리, 투구새우 4마리, 올챙이 35마리, 풍년새우는 11마리가 살고 있다. 특히 친 구가 있는 솔뫼마을의 유기논들은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투구새우들의 천국 으로도 유명하다. 투구새우는 유기농 논농사로 덕분에 되살아난 것으로 환경부에 서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으로 지정한 생물이다. 뿐만 아니라 논우렁이, 미꾸라 지, 청개구리, 애반딧불이, 도롱뇽, 백로•••••• 모두가 유기농 논이 있기 때문에 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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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남은 것들이다. 우리는 논이 논에 기대 사는 생명체의 터전일 뿐 아니라 실개천을 따라 강물에 섞여 바다까지 나아가는 물줄기를 저장하는 곳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논은 홍수를 예방하고 대기를 정화하고 지하수를 저장하는 기능까지 도맡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논에 사는 생명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논이 있어야 바다도 건강 하게 지킬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먹는 쌀이 어떻게 길러지느냐에 따라 지구 전체 생 태계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밥 한 그릇에 우주의 숨과 결이 담겨 있다고 한다. 밥이 단순한 음식으로 그치

투구 새우

지 않는다는 데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는 유기농 쌀이 농부와 온 우주가 준 선물이 라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쌀 한 톨, 밥풀 하나 허투루 대하지 않게 되었다. 밥의 의 미를 온전히 깨달으면서 비로소 제대로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더구나 그 귀한 쌀 에 이제 친구의 땀방울까지 배어 있다고 생각하면 밥이 눈물겹게 고맙기까지 하 다.

김선미_ 88년에 입학. 월간 ≪MOUNTAIN≫기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현재는 살림하며 글을 쓴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산에 올라 세상을 읽다』, 『바람과 별의 집』, 『살림의 밥상』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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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녀와 캠핑남이 사는 법 곽현희

안녕하세요? 모두들 잘 지내시지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의 또 하나의 바퀴벌레 커플 장순철, 곽현희 입니다. 먼저 소식지 재발간이 정말정말 반갑고, 애쓰신 편집위원님들 감사드리고 축하해요~ 저희 가족사는 이야기를 하려니 마~이 쑥스럽네요. ㅎㅎ. 저희 부부 벌써 결혼 18年次에, 연애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저희의 인연은 어언 24~5년 쯤?! 으윽••••••. 15살(중2), 13살(초6) 두 딸과 함께 고양시 화정동에 살고 있구요, 틈만 나면 텐트 챙겨 들고 밖으로 나 가는 캠핑족이랍니다. 그런데, 이젠 두 딸들이 캠핑을 기피하네요. 각자의 스케줄을 맞추기도 힘들지만, 시 간이 난다 해도 단호하게 “아빠 엄마만 가세요!!! 우린 가끔, 아주 가끔만 갈 거야.”라고 외칩니다. 물론 그런 반응이 섭섭하기도 하지만, 드디어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길 시기가 됐구나 싶어 한편으론 쾌재를 부르기 도 합니다.

풍물녀, “지역 문화 지킴이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대학 시절 문예창작학과 풍물 동아리 ‘녹두’에서 활동하다가 졸업을 하고, 풍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이어 져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고, 장순철이라는 남자와 7년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예진, 예린 두 딸을 낳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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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2005년, 이제는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밖으로 활동을 해도 되겠다 싶어 찾아간 곳이 고양여성민우회 풍물패 <함께누리>입니다. 아이들 키 우느라 바깥 활동을 할 수 없었을 때에도 어디선가 쇳소리, 장구 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오금이 저릿저릿 하곤 했으니 <함께누리>의 활동은 저에게 말 그대로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함께누리>는 해마다 정월엔 대보름굿을 하는데 일산동구 백석동 자율방범대 아저씨들이 커다란 달집을 만들어 주시면 달집 앞에 고사 상을 차려놓고 당산굿을 치며 하늘에 정성을 담아 소원을 빌지요. 그런 다음 그 자리에 모인 시민들과 시루떡 등 고사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달집 태우기, 쥐불놀이, 연날리기 같은 민속놀이를 하며 어우러진답니다. 해마다 11월엔 일산 호수공원에서 울긋불긋 가을 단풍을 닮은 삼색띠와 민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고 민우회 회원과 고양 시민들을 모셔놓고 가을굿판을 엽니다. 올해로 벌써 가을굿이 열 번째를 맞네요. 저한테는 여덟 번 째 가을굿이구요. 대보름굿이나 가을굿을 할 때마다 8년 동안 변함없이 <함께누리>의 전속 사진사가 되어준 사람이 바로 제 남편 장순철씨랍니다. 항상 고마워하고 있지요. 2012년을 맞아서는 정월에 대보름굿 외에도 고양민우회생협 4개 매장 지신밟기와 백석동 상가 지신밟기 가 있었고, 3월엔 서울광장에서 있었던 ‘여성의 날’ 행사에 참가해 서울광장에서 서울역까지 풍물을 치며 행 진을 하기도 했고, 4월엔 위안부 할머니들 ‘수요집회’에 불러 주셔서 일본대사관 앞에서 풍물판을 벌이며 집회 에 함께 했네요. 그리고 바로 며칠 전인 5월 4일에는 고양파주여성민우회 부설 지역아동센터 ‘꿈틀이 개원 5주 년 잔치’에서 꿈틀이 아이들과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동네 분들께 잔치를 알리는 길놀이를 하기도 했지요. 평상시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 오전에 모임을 갖고 풍물을 칩니다. 풍물 연습이 끝나면 집에서 소박하 게 담아온 도시락을 나눠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근처의 맛집을 찾아가 외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주부들의 풍물 소모임이다 보니 모임의 덩치가 크거나 거창하진 않아도 지역의 건강한 문화 공동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함께누리>가 하는 강습 프로그램도 몇 있는데, 저는 지역아동센터 꿈틀이 아이들에게 3년 정도 풍물을 가르쳤고, 지금은 매주 월요일에 백석 1,2동 주민문화센터에 개설된 풍물 강습을 위탁받아 5~60대 어르신 들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요즘엔 젊은 3~40대 주부들은 아이들 뒷바라지며 재취업 등으로 바빠선지 통 풍물 에 관심을 갖는 분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서 저희 신입 정회원 모집이 몇 년째 잘 안되고 있어요. 우 리 정회원 중 가장 막내가 들어온 지 3년이 넘고 있으니••••••. 그런 반면 제2의 청춘을 맞으신 50대 후반 이후 의 어르신들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 덕분인지 회원 모집이 아주 원활한 편이죠. 100세 시대라는 말이 실감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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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기

는••••••. 고양이나 파주에 살고 계시는 여러분들, <함께누리>에 풍물 치러 오세요.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답니다. 물론, 남녀노소 모두 환영합니다.

캠핑남, “접대캠핑에서 번개캠핑, 단촐캠핑까지 달 빛추억이 책임집니다.” 저희 큰딸 아이는 고양시 소재 도시형 중고등 대안학교 ‘불이학 교’에 다니고 있구요. 춤을 아주 좋아하고 열정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랍니다. 그래도 우리 집 웃음 제조기, 이벤트와 파티의 여왕이지요.^^ 요리를 좋아해서 나중에 커서 푸드스타일리 스트가 되겠다는군요. 6학년인 둘째 아이도 언니가 다니는 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구요. 이 녀석은 좀 새침한 편이라 뽀 뽀에도 인색하고 좋고 싫음이 너무 분명해서 가끔 엄마 아빠를 섭섭하게 만들기도 한답니다. 근데 좀 이쁘긴 해 요. 이쁜 것들이 좀 차갑잖아요.ㅎㅎㅎ 저희 가족의 캠핑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저희는 때를 가리지 않고 맘 내킬 때마다 떠나는 편인데, 저희만의 오붓한 캠핑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은 동네 이웃과 ‘떼거리 캠핑’을 하거나 제 어머니, 형제, 조카들까지 대가족 캠핑을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땐 저희가 가진 캠핑 장비들이 대거 들살이에 동원되고, 제 남편 장순철(캠퍼 닉네 임, ‘달빛추억’)씨는 그야말로 ‘접대 캠핑’에 돌입하는 겁니다. 워낙 바지런하고 꼼꼼해서 이런 접대 캠핑을 할 땐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장작 준비며 텐트 주변 정리, 잠자리 정리, 거기에 마지막 코스로 은은한 음악까 지 깔아주는 DJ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 늦여름인가? 지훈 선배, 경주 언니 부부랑 소윤 이 데리고 ‘포천메가캠핑장’에서 소고기 꽃등심의 호사를 누린 번개캠핑도 있었네요. 저희 네 식구만의 단촐 캠핑은 주로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거나(특히 근래 들어서는 거리상 압박을 느껴 강화도 함허동천이나 월드컵공원 노을캠핑장으로), 시간적 여유가 좀 주어질 때는 지역의 민속과 축제, 풍물을 함께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을 선택해서 다니곤 합니다. 작년 6월에는 소금강야영장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강릉 단오제 영신제를 구경했었고, 그 전 해에는 당진 ‘기지시줄다리기’ 축제를 즐기기 위해 서산 용현자연휴양림에 텐트를 치기도 했었지요. 이럴 땐 주로 저의 은근한 의도가 깔린 거랍니다. 주로 주말에 풍물 행사며 민속 답사, 가보고 싶은 학술세미나 등이 잡히곤 하는데, 그러면 제 남편은 캠핑에 지장받는다고 난색을 표하곤 합니다. 그 렇게 몇 년간의 신경전 끝에 찾아낸 방법, 캠핑을 가고 싶어 하는 남편과 지역 민속축제에 가고 싶어 하는 제 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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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모두 충족하기 위한 ‘두 마리 토끼 잡기’ 전략이라고나 할까요?! 어찌 되었건 캠핑은 우리 부부의 대화와 친밀감 배가에 아주 많은 도움을 준답니다. 아이들도 떠나기 전 엔 투덜거리지만, 막상 캠핑장에 가면 밥 먹자마자 ‘산책하자, 게임하자’ 하며 엄마 아빠를 가만 놔두질 않아 요. 하루 이틀 정도 고양이 세수만으로 버티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구요. 그래도 여전히 벌레 무서워하 는 건 바뀌질 않네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울 남편 회사일이 바빠 요즘 캠핑이 여의치가 않습니다. 이렇게 화창하고 좋은 날에 지리산도 좋고, 단양 소선암도 좋고, 금산 적벽강도 좋은데••••••. 그래서 우리 남편이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 습니다. 아무래도 5월은 어려울 것 같구요. 대신 짬짬이 시간이 날 때 집 근처 한적한 곳에서 간단모드로 번개 캠핑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캠핑남과 풍물녀가 꾸려가는 우리 가족, 이렇게 쭈~욱 재미나게 잘 살아갈 게요.

곽현희_ 89년도에 입학했다. 곽현희는 현재 고양여성민우회 풍물패 <함께누리>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백석동 주민 센터 등 일반인을 대 상으로 하는 풍물강좌의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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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한마디

이준석의 처세술과 통진당의 처세술 김관 얼마 전 벌어진 ‘10새누리당’ 젊은 피 이준석이 손수

그에 비해 진보라고 불리는 세력은 느리다. 다들 아시

조 장수가 문재인의 머리를 잘라와 내팽개치는 삼국지 만

겠지만, 진보정치를 하는 단체들은 보수정치를 하는 사

화 사건을 기억하시는지? 그 사건으로 이준석은 엄청 뭇

람들이 먼저 깔아 둔 어장에서 고군분투를 하느라 설득

매를 맞고, 게재한 페이스북 담벼락 글을 지웠으며, 문재

하고 논리 만드는데 힘을 다 뺀다. 게다가 진보세력 안

인이 오는 공항까지 가서 직접 사과를 하는 장면이 언론

에서 20여 년 전부터 있던 종파 논리로 서로를 공격하는

을 통해 보도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어떤 사람

데 힘을 또 뺀다. 일반 국민이 바라볼 때는 합리적인 과

들은 이준석이 잘못을 저지른 거네, 한 건 했네, 뭐 이런

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들끼리 물고 뜯는 것으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만 대중들

로 받아들인다.

은 받아들일까? 이준석이 10새누리의 ‘비데위원’일 때는 젊은 피 수혈 4.11 총선 패배 후 마눌님의 멘탈붕괴에 대한 후유증

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버리는 카드’라고만 생각했는데,

을 몸소 이 한 몸 희생하여 받아들인 나(아시는 분은 아시

발 빠른 대응을 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각인시켜 준 거

겠지만 내 아내는 공포의 허벅지 힘을 자랑하는 여성이

다. 만약에 이 친구가 궤변으로 덮으려고 했다면 분명히

다. 맞아봐라), 그리고 통합진보당의 비례경선 부정 사

더 타격이 컸을 것인데, 그러지 않고 바로 연이은 사과라

건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마눌님께 대신 쏟아 부으

는 수를 둔거다. 역공당하는 것을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

려다가 그간 쌓여 있던 대출금의 원리금을 감당 못할 허

는 브라질 유술 한 방으로 제압한 거다. 젊음의 순수함

술한 재정 관리로 역관광을 당하면서 결국 ‘마눌님은 하

을 무기인 것으로 내세워서 말이다! 손자가 울고 갈 기술

느님’ 생각을 견고하게 하게 된 내 새대가리로는 좀 다르

이다. 그런데, 이거 재밌잖아? 변희재와 낸시랭의 3분토

게 느껴지던데?

론에서 변희재 멘붕시키는 낸시랭의 방법과 비슷하지 않 은가?

이준석, 대단한 새끼인데? 빠르다, 위기관리 능력이 남다르다! 발 빠른 대처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

발 빠른 대처와 위기관리는 아직도 진보의 숙제인가 보

했다고 볼 수 있다! 공항에서 정장 차림으로 고개 숙여 사

다. 아직 본게임 뛰지도 않았는데, 체중 감량하느라 체력

과하고 문재인은 웃으며 만류하는 모습을 찍은 한 장의 사

소모 다하고 링에 오르는 권투선수 같은 진보진영의 모습

진. 그리고 다음날 페이스북을 통해 이준석을 고만 공격

이다.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나도 재정관리 능력 제로

하라고 한마디 던지는 문재인. 뭐 이런 걸 보면, 이준석의

라는 측면에서 벽보고 반성 좀 해야 한다. 난 처세를 잘하

처세술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력한 한방을 날린 거였

냐고? 글쎄, 처세술에 어설퍼서 서글픈 놈팡이일 뿐이다!

다! 어장 관리에 확실한 거다.

니미럴.

김관_ 90년도 입학. 본인은 스스로를 잠정적 백수, 연극쟁이라고 소개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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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네 번째 광우병 소 발생과 식탁의 변화 정호선 퇴근길 맥도날드에 들러 빅맥을 구입한다. 그리고 집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해야 한다.

에 들어와 TV를 보면서 빅맥으로 저녁 끼니를 해결한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면서 샌드위치를 구입한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에 대해서 올바르게 갈

그리고 커피 한 잔과 함께 샌드위치로 아침 끼니를 해결한

수 있도록 우리 시민들은 현재 내용에 대해서 잘못된 부분

다. 20~30대 혼자 사는 젊은 직장인들의 끼니를 해결하

을 비판하고 해결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그에 따른

는 방법 중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나도 밥하기 싫을 때

지속적인 감시도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에 대하

이 방법으로 종종 해결한다. 하지만 이러한 젊은 직장인

여 요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식탁을 우리 스스로

들의 주요 식사방법이 2012년 4월 24일 미국에서 광우병

안전하게 만드는 생활 실천도 해나가야 한다. 그 실천 방

소가 발생하면서 위기에 처해졌다. 그리고 2008년 5월 8

법 중 하나가 유기농 식탁을 만드는 것이다. 유기농 식탁

일자 정부가 낸 신문광고를 믿고 있던 젊은 직장인들의 신

은 대형마트 유기농 코너로 인해서 값비싸다는 인식이 팽

뢰를 깨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배하다. 그래서 구매를 하는데 꺼려 하는 것이 보통의 인 식이다. 하지만 대형마트가 아니라 동네 생협을 방문하면

2012년 4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산 젖소에서 광우병

값비싸다는 인식이 바뀔 것이다. 생협에서는 일단 판매하

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가 동물성 사료를 만드는

는 곳 근교의 생산지와 직거래를 함으로서 가격에 대하여

랜더링 공장에서 발견되었고 식별표시가 없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가진다. 그리고 판매되는 제품은 생산지 및 생

어느 농장에서 사육되었는지, 몇 살인지조차 정확히 파악

산자 확인 표기를 함으로서 재품의 질과 안전성에 대해서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미국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보장을 받게 된다. 생협에서 판매되는 쇠고기를 구입한다

미국은 현재 연간 약 40,000두의 소에 대해 광우병 검사

면 이번에 문제가 되고 있는 광우병이 발생한 식별되지 않

를 시행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연간 도축소의 약 0.1%

은 젖소를 구입해 먹게 되는 일들은 없지 않을까? 그리고

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러한 검사를 진행하는 과정 속

생협에서 진행하는 생산지 직거래, 생산지 및 생산자 확

에서 광우병이 식별표시가 없는 소에서 발생하였다는 것

인 표시를 통한 생산 공정 확인 등이 정착화된다면 정부

은 광우병 검사 및 식별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에 대해서 국민의 안전성

수 있다. 또한 이 검사 과정을 검증하기 위해서 파견되었

을 확보하기 위한 내용으로 협정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던 검역전문가 현장 조사파견마저도 빈손으로 돌아오면 서 광우병 소 발견 후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사시스템에 있

퇴근길 생협에 대전에서 아침에 들어온 채소와 양산에

어서도 허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내용만 보아

서 주초에 들어온 고기 한 덩이를 산다. 그리고 집에 들어

도 정부가 맺은 미국산 쇠고기 추가협상 내용이 안전하지

와 아침에 지어놓은 봉화 오리 농법 쌀밥에 생협에서 장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는 광우병 소 검사과정에 있

을 봐온 식재료들로 국을 끓여 저녁을 먹는다. 다음날 아

어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국

침 어제 끓여놓은 국과 함께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

민들의 건강안전을 생각하면서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

을 한다. 안전한 내 식탁. 위가 참 좋아한다.

정호선_ 96년에 상경학부에 입학했다. 현재 부산환경운동연합 소속 부산환경교육센터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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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작품. 최영석의 페이스북에서 2012.3.19.


독서모임 <한걸음만 더 앞으로>의 지상토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한국 현실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리

정원옥

2010년 5월에 만들어져 만 2년 동안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는 <한걸음만 더 앞으로>는 실천적 성격의 독서모임 이다. 단순히 책을 읽고 토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극, 영화, 뮤지컬, 여행 등의 문화를 즐기면서 삶의 고 민을 나누기도 하고, 현실문제에도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임은 매달 한 번씩 순번으로 돌 아가면서 책을 정하고, 책을 선정한 사람이 토론을 주재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운영된다. 기념사업회 회원이 멤버 의 다수이지만 아닌 멤버들도 있으며, 개인적 사정으로 활동을 잠시 쉬고 있는 멤버들도 있다. 나 역시 활동을 쉬 고 있는 멤버 중의 한 사람인데, <한걸음만 더 앞으로>의 토론 현장을 회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오랜만에 모임 을 찾아갔다. 이번 모임은 5월 25일, 합정동에 있는 ‘책다방 후마니타스’에서 열렸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조지 레 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 2006)의 토론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멤버들은 저자의 문제 제기, 즉 ‘미 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 하는가’를 한국의 사회현실에서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중심으로 활 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뜨거운 쟁점이었는데, 지상 토론은 진보를 종북주의자로 몰아가고 있는 보수우익의 언어와 프레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멤버 들의 의견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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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려보기

오늘날: 보수는 부패로 무너지고, 진보는 분열로 자멸

말려들어서 그렇게 얘기하면 ‘아, 종북주의자구나’ 이

한다, 뭐 이런 말이 있는데요. 요즘이 딱 그런 것 같아

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미국

요. 오늘 토론할 책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인데요.

같은 경우, 보수는 자신들의 프레임을 만들어내기 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프레임’입니다. 보수

해서 두뇌집단이 몇 십 년을 파고들어서 연구한 거잖

는 하나의 개념을 갖고 프레임을 구성하죠. 그리고 그

아요? 근데 미국도 진보 애들은 그런 프레임에 대한,

것을 계속 반복하면서 일상적 언어로 만들어 버려요.

내지는 두뇌집단에 대한 투자는 굉장히 등한시한다는

그렇게 되면 그 언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 생각이

거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도 가장

정상적인 것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프레임

필요한 게 진보의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건데, 진보세

이죠. 보수의 프레임 안에서 진보 전체가 위기에 직면

력의 두뇌집단이라는 사람들은 그것을 연구하고 있는

해 있는 요즘, 정보 수용자로서의 성찰과 고민이 필요

가? 그 프레임을 창출해 내고 있는가? 나는 그게 되게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궁금하더라고요.

플러스펜 : 지난 <100분토론> 혹시 보셨어요? 거기서

오늘날: 진보는 현실에 닥친 것을 방어하기에 급급하

‘돌직구녀’가 화제가 됐어요. 돌직구녀가 뭐냐 하면 돌

다, 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한국도 그런 거 아닌가, 하

려서 물어보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거래. 이상

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통진당 사태가 종북하고 무슨

규가 <100분토론>에 나왔는데 한 방청객이 “통진당

관계가 있나, 라는 거죠. 지금 진보는 ‘나는 종북주의

사태가 종북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인

자가 아니다’라고 얘기하기에 급급한 거예요. 한쪽에

권이나 북핵, 3대 세습 등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서는 종북주의 철폐를 얘기하고 한쪽에서는 미군철수

라고 물어본 거죠.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서 토론하

도 정강에서 빠져야 된다, 이런 식으로 얘기되는데 내

러 나왔는데 방청객이 갑자기 북한세습에 대해서 어떻

가 보기에는 그런 얘기들이 논의의 초점을 한참 벗어

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건 당신이 종북주의자인지 아닌

난 거 같다는 거죠.

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는 거잖아요. “이런 형태의 질 문과 프레임이 문제다”라고 이상규가 반박하면서 북

플러스펜: 기본적으로 통진당 사태에 대해서 거의 모

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둥 에둘러 갔을 거 아니

든 정보가 조중동으로부터 나왔어요. 나머지는 다 조

에요? 그러니까 방청객이 “말 돌리지 말고 정확한 입

중동을 베꼈거나 거기서 조금 더 취재하거나. 그러니

장을 말해 달라”고 또 연이어 돌직구를 날린 거죠. 결

까 반론이라는 게 없어요. 반론은 없고 거기에 대한 변

국엔 자기가 프레임을 딱 만들어놓고 그 프레임 안으

명만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

로 계속 들어오게 만드는 거예요. 빠져나가려고 하면

는 거예요.

계속 가두고, 가두고••••••.대답을 확실히 못하는 것이 마치 스스로 종북주의자인 걸 시인하는 것처럼 보이게

오늘날: 나는 지금 프레임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얘

만드는 프레임인 거죠.

기를 한 건데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통진당 내부의 부 실선거에서 부정선거가 되었는데 갑자기 경기동부연

쏘가리와 빠가사리: 나는 답답한 게 우익의 프레임은 굉

합이 나오더니 북한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종북

장히 강력하고 명확한데 거기에 대응하는 진보는 프

주의자가 되어버린 거잖아요? 그런데 종북이라는 단

레임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얘기

어야말로 보수우익이 짜놓은 프레임에서 나온 거 아니

를 해야 되는지에 대한 프레임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냐? 그러니까 종북주의는 철폐되어야 된다, 라고 주장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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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 자체가 보수우익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버

여서 하는 얘기는 딱 거기까지 온 거야. 왜 애국가를

리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

안 부르나?

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종북이냐 아니냐 그 얘기 갖 고만 계속 싸우게 되는 거죠. 그 틀 안에서만 움직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가장 짓누르는 게 종북이

는 거니까.

란 말 아닌가요? 이 책에서 그 말 쓰지 말라고 하잖아 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때 ‘나는 사기꾼이 아니

기우기: 이 책에 의하면 프레임 안에서 생각을 실어 나

다’라고 말한 순간, 사기꾼이 되었다고. 우리도 이 프

르는 게 언어잖아요, 미디어를 통해서. 문제는 우리

레임에서는 종북주의라는 말 자체를 다른 말로 바꾸어

는 단어가 없다는 거예요, 종북과 싸울 만한 단어가.

야 되는 거죠.

오늘날: 여기 보면 하고 싶은 말을 열 단어로 말해라,

쏘가리와 빠가사리: 우익의 언어를 사용하지 마!

이런 게 있잖아요. 그렇게 볼 때 조중동에서 얘기하는 건 굉장히 명확해. 잃어버린 10년, 세금폭탄, 종북좌

오늘날: 종북을 척결하라, 이렇게 된 게 누구의 잘못인

파, 깡패국가, 악의 축! 와, 정말 악의 축! 도대체 누

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가 이런 말을 만들어냈는지. 세금폭탄, 얼마나 명확해 요? 하고 싶은 말이 딱 들어가 있는 거잖아.

쏘가리와 빠가사리: 내 생각이 맞나 안 맞나 잘 모르겠지

만 어떤 사건이 터지면 같이 연대해야 될 단체나 사람 플러스펜: 최근에 진보주의자들의 움직임을 보면 이런

들이, 어깨를 걸고 도와줬던 사람들이 대중들이나 국

건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들이 어떤 이슈

민들한테 욕을 먹을까 봐 은근슬쩍 자기를 빼고 “그래,

를 들고 나오면 끝끝내 계속 몰아가지고 친일로 만들

넌 좀 잘못한 거 같아”라면서 보수의 곁에 서는 모습을

어 버리는 거요. 문제는 뜻대로 안 가진다는 거지. 그

나는 참 많이 보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할 만큼 자기

럼에도 진보주의자들은 계속해서 그런 프레임을 작동

들의 언어가 없다, 라는 것 아닌가? 자기들의 프레임

시키려고 하는 것 같아요.

도 없고. 요새 이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한테, 옛날에 민노당 당원이었다거나 그런 사람들한테 “어떻게 된

오늘날: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나꼼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어보면 생각이 없는 것

제대로 프레임을 잡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나꼼수는 디

같아요. 그냥 신중하게 더 지켜봐야지, 라고만 하고.

도스를 디도스 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부정선거 사건’ 이라고 딱 그렇게 프레임을 잡아놓고 계속 밀어붙이

기우기: 이번 통진당 사태에서 제가 느낀 건 진보가 꼴

는 거잖아요? 힘이 없어서 못 가는 거지, 방향 자체는

통이라는 거. 대화가 안되고, 합의가 안되는 거거든

맞는 거잖아요. 부정선거라고 딱 정해놓고 가는 거.

요. 옛날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대자보 쓰고 논쟁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대중들을 대상화시켜서 운동하는

쏘가리와 빠가사리: 그렇게 막 가다가 아니래? 그러면 말

거. 여태 꼴통 짓을 하는 거지요, 진짜. 그래서 한계는

고. 프레임과 사실의 관계에서 결국은 프레임만 남는

정확하게 인정하고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럴 수밖에

다며? 사실은 없어지고.

없는 사태에 대해서는.

나무새: 다시 통진당 얘기로 돌아오면, 아줌마들이 모

플러스펜: 진보가 다시 살아나는 길이 ‘종북주의’ 프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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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려보기

임을 깨는 거라면, 관련자 모두 전향서를 써야 되는 건

인프라가 구성되고, 어쩌구저쩌구 설명을 오래 해야

가요? 모여서 애국가 부르고? (웃음)

되잖아요.

쏘가리와 빠가사리: 그거는 우익의 프레임 속에서 걔네

쏘가리와 빠가사리: 책을 보면 보수주의자들의 사고방식

들의 언어를 통해서 정리되는 방식인 거죠. 내 생각에

에서 의료보험은 개인이 책임질 문제지, 납세자가 책

는 종북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의 프레임이나 언어를 만

임질 문제가 아니다. 사회복지 프로그램도 비도덕적

드는 쪽으로 정리를 해야만 되는 거죠.

인 것이다.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 가야 할 인센티브 가 날아가기 때문에 그건 정말 안 좋은 거다. 없어져야

오늘날: 그런데 미국도 그런가 봐요. 이 사람도 진보

한다. 근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주의를 여섯 가지로 나눴는데, 여기 보면 진보주의자

너무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들은 ‘자신의 생각이 진정한 진보주의자가 되는 유일 한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건 참 슬픈 일입니다’라

나무새: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우

는 구절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보수는 분열 같은 것 잘

리는 가족을 중요시하고 서로 돕는 걸 가치라고 여기

안하잖아요? 저자의 얘기는 뭐냐 하면 보수주의자들

는 대신에 많이 가진 사람들을 죄악시하고 미워하는

은 이미 그런 관계를 넘어섰다. 헤리티지 재단이나 하

것들이 미국보다 훨씬 더 강한 사회잖아요? 그러니까

버드 올린 연구소에서 두뇌들끼리 모여가지고 프레임

개인 중심의 미국식 프레임에 대한 저항이 훨씬 더 강

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프레임으로 어떤 사건을 구성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는 방법, 자기들끼리 뭉치는 그런 방법을 터득했다. 최소한 삼, 사십 년 전부터 그렇게 됐다, 라는 거잖아

플러스펜: ‘우리는 어떻게 투표하는가’라는 부분도 흥

요. 보수도 색깔이 다 다를 텐데, 그렇게 본다면 보수

미로웠어요. 결국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을 중시하면

주의자들이 잘 분열하지 않는 건 하나가 되기 위해 그

서 투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투표한다,라

만큼 부단히 노력한 결과라고 봐야 되는 것 아닌가요?

는 거잖아요.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와 그에 부합하는 문화적 전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한다. 투표하는

플러스펜: ‘엄격한 아버지 모델’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시점에 시냅스(synapse)에 저장돼 있던 모델들 중 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하나 있고 나머지는

떤 모델이 더 활성화되느냐에 따라 투표행위가 갈린

다 거기에 복종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보수

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왜 계급투표가 안되는지에 대

는 스펙트럼이 다양할 필요가 없죠.

한 설명도 되는 것 같아요.

쏘가리와 빠가사리: 기득권자나 있는 자들은 자기들 것

오늘날: 대선이 이제 5개월 남짓인데 정말 진보는 뭐하

을 잃을까봐 똘똘 단결을 해야 되는 거죠. 하지만, 진

고 있나? 진보가 이 위기를 극복할 거라고 믿기는 하지

보의 사상이나 가치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함께 같이

만, 솔직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번영하자라는 거지. 플러스펜: 저는 토론 말미에는 꼭 이 얘기를 해야겠다고 오늘날: 그런데 진보는 열 단어로 설명하기가 좀 어려

생각했는데, 이런 거 같아요. 민주통합당 있잖아요,

운 것 같아요. 논리적으로 말이 길어져야 되거든. 세

또 통합진보당 있잖아요? 그 두 당의 명칭을 보면 진

금 안내면 좋잖아! 이거보다는 세금을 내면 이런이런

보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 스스로 프레임을 보여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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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아요. 이름 자체에 통합을 넣었다는 얘기는 단결

역조직 자체가 통째로 다 날아갔어요. 그 소설 이름

되지 않고, 통합 못했고, 적진 앞에서 분열되어 있음

이 뭐더라?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소설 읽고 굉장히 충

을 스스로 밝힌 거죠. 이렇게 천박한 당명을 지을 생각

격 받았거든요.

을 누가 했을까? 게다가 그것도 두 개 당이 똑같이 그 렇게 통합이라는 말을 해야만 할 정도로 절박한 걸까?

쏘가리와 빠가사리: 그래서 하는 말인데 물론 (당권파가)

오히려 새누리당은 보수 프레임에 딱 맞는 거예요.

잘못을 했다,라고 하지만 정말 보수주의자들 편에 서 서 “안 돼, 니네는 인제! 다 죽고 다시 시작해야 돼!”

나무새: 여기 책에도 그런 말이 나오는데, 한국 사람들

이런 관점이 아니라 형제지간에 다독거리는 마음, “그

은 통합이라는 거에 대한 강박이 굉장히 심하다. 힘을

래, 너 잘못했어. 잘못을 인정을 하고 앞으로도 잘해

뭉쳐야 된다는 강박이 엄청나게 강하다고 해요. 우리

야지” 이런 마인드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난 그런 생

나라는 단군부터 해서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각이 들더라고. (••••••) 보수든 진보든 원칙은 원칙이

게 있잖아요? 기본적으로 같이 해야 된다는 강박이 굉

죠. 가치나 원칙은 지켜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

장히 심한 민족이라는 거죠.

서 통진당은 반성을 해야 하는 거지.

플러스펜: 또 하나는 워낙 뿌리 깊은 보수 세력이 있으

나무새: 책의 결론 부분으로 와서 정리를 해 보면, 프

니까 뭉치지 않으면 또 지겠다, 또 지겠다, 진짜 그런

레임을 재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들에게

강박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권파와 비당권파도

어떻게 대응할 것 같은가? 이런 문제들이 남는데 사실

이기기 위해서 손잡았다가 또 분열하고 이런 과정이

은 저자의 결론에 맥이 좀 빠졌어요. 도덕주의에 호소

계속 반복되는 거죠.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아서요. 그래도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한 얘기들은 있어요. 여론 조작이나

차여니: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통합해 놓아도

프로파간다가 아닌, 도덕적 관점을 진실 되게 표현하

뭔가 틀어지면 계속 분열하게 되어 있는 거죠, 처음 시

는 프레임을 재구성하라. 보수주의자에 대해 존중하

작부터가 그런 건데.

는 태도를 보여라. 토론방식에서 예의를 지키면 이긴 다. 침착함과 선량한 유머감각을 유지하되 열정적 확

쏘가리와 빠가사리: 아주 원초적으로 얘기하면 기본적인

신을 전달해라. 이런 것들은 토론문화에서 지극히 상

자세들이 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책에서도 얘기

식적인 부분이지만, 잘 지켜지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하지만 정책 방향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디테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들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민주

일하게 들어가서 차이가 나더라도 그것을 서로 좀 인

주의의 기본과 원칙, 진보의 가치와 방향에 대해 다시

정하거나 서로 듣는 자세, 그리고 보충하려고 하는 협

고민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어요.

력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많이 부족 한 것 같아요.

오늘날: 프레임을 읽어내는 게 왜 중요한가? 진보가 보

수를 이기려면 선거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보수 기우기: 그 소설 있잖아요? 일제 때 실제 있었던 진보

의 프레임을 읽고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조직이 서로 죽이고 그랬던 사례를 소설로 쓴 거요.

을 일깨워준 책이었습니다. 다시 제 순번이 오면 『전

만주 어디에 있던 마을인데, 한 번 싸워 보지도 못하

태일 평전』을 읽고 토론해 보고 싶습니다.

고 지네끼리 죽이고 하다가 자멸했어요. 아예 그 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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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볼 만한 공연 두 편 미리 보기

<속삭이는 벽>과 <천변살롱> 조형준

소개하는 <속삭이는 벽>과 <천변살롱>은 대중적으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출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나 매우 뛰어난 작품들입니다. 한마디로 작품의 값어치가 두고두고 남아 삶의 기운을 다시 돌게 해주는 ‘불스원샷’ 같은 공연들입니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면 공연의 감동이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합 니다. 가을엔 생활의 충전제가 되는 공연 관람으로 추억도 만들고, 많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연 하나

빅토리아 채플린 연출 <속삭이는 벽>

Aurelia Thierree & Victoria Thierree-Chaplin “Murmures des murs” 안산문화예술의전당(2012. 10.13~14) / LG아트센터(2012. 10.18~20) 공연 소개

찰리 채플린 가(家) 사람들이 전하는 환상과 마법의 세계 전설적인 배우 찰리 채플린의 딸인 빅토리아 채플린이 연출하고, 그의 손 녀인 오렐리아 띠에리가 주연을 맡은 아름다운 마임극 <속삭이는 벽>이 첫 한국 공연을 갖는다. 찰리 채플린 가문이 세계 영화, 연극계에서 독보 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데 특히, 연출을 맡은 빅토리아 채플린은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유진 오닐의 손녀이기도 하다. 이렇듯 문화예술계통의 탁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빅토리아 채플린과 그 녀의 자녀인 오렐리아 띠에리와 제임스 띠에리는 서커스와 마임, 마술이 결합된 기발하고 환상적인 마임극으로 전 세계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속삭이는 벽>은 그들이 창조해 내는 마임극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비밀스러운 ‘속삭임들’과 함께 하 나 둘 사라져가는 마법 같은 작은 골목길을 홀로 여행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사랑스 럽고 비밀스러운 여인 역을 맡은 오렐리아 띠에리는 종이박스들에 그녀의 인생을 가득 채워 현실로부터 도망친 여자를 연기한다. 그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은 버려진 건물들과 거리들로 쫓겨 다니는 여자는 빌딩 속 다른 이들 의 삶의 단편들을 듣게 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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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공연한 자신의 첫 작품 <오라토리오(L’Oratorio)>로 가는 곳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선풍적인 인 기를 얻었던 오렐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부모, 형제들과 함께 서커스와 카바레 쇼, 영화 등에 출연해 왔 다. 무대가 곧 삶이었던 감수성 풍부한 소녀는 이제 할아버지 찰리 채플린과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당당히 자 신의 작품으로 전 세계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한 시간 반 동안 환상과 마법의 세계를 오가는 이 작품은 온 가족이 함께 즐기기에 제격이다.

공연 둘

박준면, 하림의 <천변살롱> 안산문화예술의전당 (2012. 9.22) 작 : 강헌, 박현향 / 연출 : 김서룡 공연 소개

1930년대의 향수 만요(漫謠)를 부르다!! 1930년 트로트, 신민요와 함께 대중을 이끌던 만요가 2011년 다시 불려 진다. 억압된 식민지 사회를 뒤틀어 풍자하는 만요 가사에 절묘하게 이야 기를 붙인 음악극으로 실력파 배우 박준면과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하림의 참여로 그 빛을 더하였다. 아코디언, 피아노, 기타, 콘트라베이스, 바이올린으로 구성된 어쿠스틱 살롱 밴드가 들려주는 귀에 익은 가락은 관객으로 하여금 타임머신을 탄 듯한 묘한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다. <천변살롱>은 만요를 가지고 일제 강점기를 재현한, 줄거리가 있는 음악극입니다. 만요란, 일제 강점기에 발생한 코믹송으로 억압된 식민지 사회에 대한 해학과 풍자로 대중들의 인기를 얻었던 대중음악의 한 장르입니다. 이 공 연은 2008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제작, 초연되어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금은 여러 극장을 순회하며 간 간히 공연되고 있어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안산공연은 추석연휴 전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 면 명절을 앞두고 더 없이 좋은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하림의 감초 같은 연기와 카리스마 있는 박준면의 팔색 조 연기는 정말 일품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매우 모던하면서도 유쾌한 공연입니다. 조형준_ 87년도 입학. 아르코예술극장 수석공연기획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현재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기획부장으로 일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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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의 영화이야기

행복한 그녀들의 눈물을 훔친 위험천만한(?) 영화 김선주

주말, 홍대 앞이라. 서울 변두리에 사는 세 여자는 서로 헤어지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핸드폰으로 있는 곳을 여 러 번 확인했고, 그러면서 또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들에겐 역시 벅찬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세 여자는 어 딘가 모르게 달뜬 소녀들 같았다. 가족을 위해 늘 비워 두었던 주말 오후에 여자들끼리만 영화를 보러 나온 것 이다. 그것도 홍대 거리로! 경옥이는 유달리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누구든 그녀를 만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최소한 만 나기 전 일주일과 만나고 난 후 일주일간의 알리바이와 계획들을 말해야만 한다. 꼭 그렇게 되고 만다! 상대방 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자기가 도울 일을 적어도 한 가지씩은 찾아낸다. 정 없으면 밥이라도 사야 직성이 풀린 다. 나도 여러 번 밥을 얻어먹었고, 밥값 하느라 내 이야기 몇 가지를 까보여 주었다. 처음 만나고 2년 동안, 내 핸드폰 목록에 저장된 그녀의 이름은 수영장에서 만났다고 ‘수영친구1’이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자신에게 몹시 심하게 했다고 자주 원망하지만, 그 말 속에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정 많은 친구다. 경옥이 남편은 사업 수완이 좋은 모양이다. 경옥이는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에서 풍족하게 산다. 희란이는 나보다 네 살 적은 동생이다. 그녀도 경옥이만큼 남과 뭔가를 나누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녀는 서 울 변두리, 땅 부잣집 며느리다! 올봄 그녀는 내게 맘껏 심어 먹고도 남을 텃밭을 빌려 주었다. 난 욕심껏 많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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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심었지만, 요즘은 물 주러 가기가 귀찮아 비오기만 기다린다. 착한 그녀는 사춘 기 시절에 엄마가 돌아가서인지 가끔 외로워 보일 때가 있다. ‘언니’를 그렇게 쓸쓸 하고도 다정하게 부를 수 없다.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일 아침에 희란이는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물었다. “언니, 나 누구 찍을까? 언니가 찍은 사람 찍으려고. 알려 줘, 응? 누구야?” 난감해서 “호호호” 웃고 말았다. 그리고 내 이름은 선주. 경옥이와 희란이처럼 부자이거나 착하거나 정직하지 않다. 항상 적게 가졌다고 생각하고, 내 것 챙기기에 바쁘다! 남의 것을 받아먹는 데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재빠르지만, 내 것을 나누려면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은 포기하는 일이 더 많다. 나이 먹을수록 불평이 많아진 데다가 내 잘못을 남의 탓 으로 돌리기 일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 원망도 밥 먹듯이 해댄다. 반성은 일주일 에 한두 번이나 할까? 세 여자가 시외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서울에 왔다. 이경순 감독의 영화 <레드마리아>를 보기 위해서다. 인색한 내가 그녀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영화 티켓은 남편이 사준 것이다. 남편은 이경순 감독과 잘 아는 사이다. 그는 좋은 감독 이 찍은 영화이니 아는 사람들이 챙겨서 봐줘야 한다고 말했다. 경옥과 희란이 어 떤 영화인지 물었을 때 난 “참 의미(?)있는 영화”라고만 에둘러 설명하고 입을 다물 어 버렸다. 어떻게 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행히 그녀들은 영화의 내용엔 관심이 없었다. 주말 오후에 홍대로 영화를 보러 나간다는, 이 스케줄에 신이 났을 뿐이다. 그녀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흥미진진해 진다. 과연 두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엄마, 창녀,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여 성, 위안부 할머니를 ‘여자’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고 시작되는 영화의 첫 장면 부터 나를 바짝 긴장시킨다. 이 친구들이 놀라지는 않을까? 나는 그녀들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의미가 뭔데?’ 나는 의미를 찾으려 애썼지만, 영화는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다. 대신 ‘네 생각은 어떠냐?’, ‘무엇이 문제냐?’ 고 끊임없이 묻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략 이렇다. 소녀시절 일본군에게 집단강간을 당 했지만 서로를 위로하며 그 사실을 당당히 꺼내 바라보려는 필리핀의 위안부 할머 니들, 십수 년간 일해 온 회사에서 쫓겨났지만 끝까지 싸워서 결국엔 그 부당함을 바로잡는 기륭전자의 해고노동자, 먼 나라에서 시집 온, 치매 걸린 엄마가 몹시 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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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려보기

리운 이주여성, 자신의 일터인 사창가에서 쫓겨난 성노동자. 노숙을 하며 아주 작 은 것이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려고 애쓰는 도쿄의 홈리스와 살던 집에서 쫓겨 나 어딘가로 가야 하는, 하지만 갈 곳이 없는 빈민 지역의 여자들까지. 감독은 한국, 일본, 필리핀에서 만난 여자들의 일상을 지극히 담백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어서 몰랐거나 알고도 모 른 체 외면했던 여자들의 삶이다. 감독은 말한다. “그들의 일상을 따라가다 한 가 지 질문에 도달했다. 어떻게 서로 다른 노동이 그토록 비슷한 방식으로 ‘몸’에 연결 되고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작정하고 그녀들의 ‘배’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는 감독. 영화는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결코 아름답지만 은 않은 배들을 간간히 보여준다. 영화 속 여자들이 맨살의 배를 드러낼 때마다 나 는 내 배가 들춰진 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가슴이 묵직해지고 말았다. 경옥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란이가 휴지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보았다. 풍족한 여자들, 그래서 구김살도 없고 베풀 줄도 아는 정 많은 여자들. 그녀들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공간에 서 살고 있는 다른 여자들의 삶을 보면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 부분, 세상의 시작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여자들이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한다. ‘함께 나누자’고, 그래서 ‘행복해지자’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삶 의 이력과 환경이 모두 다른 여자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눌 수 있을까? ‘여자’라는 이름만으로 연대할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연대해야 다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영화는 마지막까지 내게 많은 의문부호를 남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며 즐겁 게 수다를 떨어야 했다. 재미있었느니, 별로였느니, 어떤 장면이 좋았느니, 식상 했느니 씹어 주는 게 영화에 대한 예의다. 그런데 밥 먹는 내내 세 여자는 별 말이 없었다. 눈길을 피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함께 영 화를 보고 울었다는 것, 서로가 울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더 이상의 말은 필 요가 없었다. 세 여자는 제각각 소녀들에서 아줌마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을 재고 있었다.

김선주_ 83년에 입학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집 바깥으로 나왔고, 떠밀려서 소식지의 편집장까지 맡 고 난 뒤로 사는 게 너무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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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꿈, 캠핑 김산환

몇 해 전 알래스카를 여행할 때다. 캐나다에서 알

생생하다. 이곳의 캠핑시설은 작은 텐트를 칠 수 있는

래스카 하이웨이를 따라 시작된 여정은 두 달 가까이

사이트와 식량 저장고(곰의 습격을 예방하기 위해 설

걸렸다. 그 여행 동안 잠자리는 모두 캠핑장이었다.

치해 놨다), 재래식 화장실, 수도꼭지 한 개가 전부다.

여름날의 북극은 아름다웠고,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캠퍼들이 쳐놓은 텐트는 나무들이 허리춤을 넘지 않는

밤은 어느 캠핑장에서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툰드라의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보일 듯 말듯 박혀 있 었다. 캠핑장 시설이 좋기로 소문난 미국에서 이처럼

알래스카 여행이 중반을 넘어섰을 때 디날리국립 공원을 찾았다.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가 있는

간소한 캠핑장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캠 핑만큼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 없다.

디날리는 알래스카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관리되는 국 립공원이다. 야생의 자연을 해치지 않도록 탐방객에

캠핑장을 찾은 이들은 모두 최소한의 장비를 이용

게는 최소한의 편의만 제공한다. 공원 내 일반 차량은

했다. 텐트도 혼자 드러누우면 그만인 아주 작은 것이

진입이 금지되어 있다. 오직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었고, 먹을 것이라고 해야 샌드위치나 간단한 즉석식

투어버스를 이용해 관람해야 한다. 국립공원으로 드

품이 전부였다. 풍부한 것이 있다면 하나, 아주 다양

는 외길도 비포장이다. 그 외길의 끝에 ‘원더레이크캠

한 종류의 모기약이다. 알래스카의 여름은 모기 천국

핑장’이 있다. 캠핑장까지는 국립공원 정문에서 버스

이다. 얼굴을 가리는 모기장을 쓰지 않고는 생활할 수

로 6시간 30분 거리다.

없을 정도다. 밥을 먹을 때도 모기장을 살짝 들추고 재 빨리 숟가락을 입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할 만큼 모기가

‘원더레이크캠핑장’에 닿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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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다. 그런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캠퍼들의 표정은 여


째려보기

유가 넘쳤다. 이들의 일과는 툰드라를 따라 난 트레일

다. 우리 사회의 캠핑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한 휴

을 걷거나 구름 속에 숨은 매킨리가 나오기를 기다리

식이라는 캠핑이 실종됐다. 캠핑이 점점 어른들을 위

며 먼 산 바라기를 하는 것뿐이다. 캠핑장은 온종일 쥐

한 놀이로 변질되고 있는 느낌이다. 극단적으로 표현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침이면 캠퍼가 떠나고, 또 다

하자면 도심에서 먹고 마시고 놀던 것을 캠핑장으로

른 캠퍼가 들어왔지만 발자국까지 죽여 가며 조용조용

옮겨와 똑같이 하고 있다. 캠핑장의 일과를 보면, 점

움직였다. 오직 매킨리를 뒤덮은 구름만이 시시각각

심부터 시작된 먹고 마시는 일이 새벽까지 이어진다.

으로 변하며 캠퍼들을 황홀경에 빠트렸다.

저녁이 되면 캠핑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텐트마 다 불을 피우고 삼겹살을 굽느라 정신이 없다. 그 사이 를 아이들은 소란스럽게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술잔 을 돌리기에 바쁘다. 어두워지면 어른과 아이들은 두 패로 나뉜다. 어른들은 화롯불을 가운데고 여전히 부 어라 마셔라 하고, 아이들은 노트북이나 닌텐도 게임 을 하며 논다. 즉, 도심에서 자연으로 장소만 달리했 지 어른 중심의 소비적인 문화는 그대로다. 캠핑은 자연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숲과 강, 산에

요즘 캠핑이 대세다. 바람이 불었다 하면 무섭게

사는 모든 생명들의 품에서 하룻밤 머물다 가는 것이

몰아치는 우리사회에서 캠핑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사

다. 캠핑장에서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처럼 행동해야

로잡은 여가가 없다. 수도권 근교의 캠핑장은 주말이

한다. 자연 속에서 이뤄지는 생명의 질서를 깨트려선

면 캠퍼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빈다. 휴가철은 말

안된다. 이런 캠핑문화가 정착이 되려면 빨리 ‘먹자캠

할 것도 없다. 전국의 산과 계곡이 캠핑족으로 넘쳐

핑’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한국의 음식문화를 부

나다 보니 일부 캠퍼들은 여름에는 아예 캠핑을 포기

정할 수는 없다. 샌드위치 한 조각이면 충분한 서양인

하기까지 한다. 캠핑장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캠

들과 달리, 한국인은 밥과 국, 반찬을 필요로 한다. 또

핑장에서는 정말 집채만 한 텐트를 쉽게 볼 수 있다.

한, 농경사회에 뿌리를 둔 한국인들이 한 끼 식사에 각

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장비들이 초보 캠퍼들

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

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아웃도어도 하나에서 열까

도 이건 너무 하다 싶을 만큼 캠핑장에서 먹는 것에 집

지 제대로 갖추고 즐기려는 캠퍼들의 마음이 그 장비

착하는 모습은 이제 변해야 한다.

에 담겨 있다. 캠핑이 본래의 의미에서 곁가지로 빠지는 이유는 그러나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캠핑 열풍은 조금은

또 있다. 장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다. 캠핑은 생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자연과의 동화를 추

공간을 집에서 자연으로 옮기는 일이다. 최소한이기

구하는 서구의 캠핑문화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하

는 하지만 집에서 필요한 장비는 캠핑장에서도 필요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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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만, 모양과 규모 등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따

을 갖춘 셈이다. 나머지는 집에서 사용하던 것을 가져

라서 캠핑은 모든 아웃도어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장

가도 문제될 게 없다.

비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규모에 있다. 오토캠핑용이 라 불리는 장비들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다. 차량이

다만, 여름 한 철 떠나는 일회적인 캠핑이 아닌,

캠핑장비 운반의 수고를 대신해 주면서 캠핑장비의 부

봄가을에도 지속적인 캠핑을 즐기려면 전문적인 캠핑

피와 무게는 전혀 문제될 게 없어졌다. 캠퍼와 장비 제

장비가 필요하다. 이 장비들을 하나씩 사 모으는 재

조업체 모두 편리성만 극대화시키면 된다고 믿는다.

미, 이 재미도 아주 쏠쏠하다. 이렇게 마련한 장비는 그냥 장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캠핑장에서 가족

하지만 장비가 커지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생긴

이 나눈 소중한 추억이 된다. 이를 테면 아이가 자라

다. 우선 캠핑장이 커지게 된다. 텐트를 치는 사이트

청년이 되어 오래된 장비를 이용해 캠핑을 갔다고 치

의 넓이는 텐트에 맞춰 넓게 조성해야 한다. 이전에는

자. 이 청년이 가져간 텐트는 유년시절에 아빠와 함께

텐트 두 동을 치던 곳이 오토캠핑용 텐트는 한 동을 치

쳤던 것이고, 엄마와 함께 밤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들

기도 벅차다. 사이트까지 진입로도 만들어야 한다. 주

던 것이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이 그 텐트 속에 고스란

차장에서 사이트까지 그 무겁고 많은 캠핑 장비를 손

히 배어 있다. 텐트는 가족이 나눴던 정이 담긴 ‘추억

수 나르려는 캠퍼는 없다. 캠핑장의 자연이나 환경은

의 저장고’가 된다. 여기에 아이와 함께 캠핑을 가는

우선 고려대상이 아니다. 편리성만 좋으면 최고의 캠

진정한 이유가 있다.

핑장 대접을 받는다. 문제가 또 있다. 장비가 대형화 되면서 가격도 가파르게 올라간다. 캠핑 장비를 제대

사람들은 묻는다. 캠핑 가면 무엇이 가장 좋으냐

로 갖추려면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 들어간다. 이 때문

고.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똑같다. 랜턴이 어

에 캠핑을 시작하려던 이들 가운데는 비싼 가격에 놀

둠을 밝히는 불빛을 만들면서 내는 연소음, 텐트 속까

라 캠핑을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캠퍼들

지 찾아오는 풀벌레 소리와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의 열렬한 캠핑 장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캠

소리,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채 모든 생각의 끈을 놓고

핑 장비를 다 갖추지 않으면 초보 캠퍼 취급하는 분위

쉴 때, 나는 행복하다. 그거면 충분하다. 하나 더, 모

기, 캠핑 장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의 폐해다.

닥불만 피워 놓으면 긴긴 숲속의 밤도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공간이 된다.

유명 메이커의 좋은 장비를 갖췄다고 그 사람이 경 험 많은 노련한 캠퍼는 아니다. 진정한 캠퍼들은 상황 에 맞는 꼭 필요한 장비를 사용한다. 캠핑장의 조건과 환경에 맞춰 장비를 선택할 줄 아는 캠퍼가 노련한 캠 퍼다. 설령 장비가 부족하다고 해도 부끄러워하거나 초라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여름에는 하늘을 가려 줄 텐트 하나만 있으면 캠핑을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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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_ 88년도 입학. 월간 ≪사람과 산≫을 시작하여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15년간 여행레저 전문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도서출 판 ‘꿈의지도’ 대표를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오토캠핑장 602』, 『여행의 선율』, 『캠핑 폐인』 등 캠핑과 여행을 테마로 왕성한 집 필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집 토토로 내친구 초코볼 (10세, 오른쪽) 빵꾸똥꾸 아기천사 강힘찬 (3세, 왼쪽) 제주 곽지 과물 해변에서~ 강영희의 싸이월드에서 2011.10.15


의문사, 30년만의 장례식

반인륜적 경찰폭력·시신훼손 희생자 고 문영수 장례식 홍수정

지난 5월 15일, 고 문영수의 장례식이 사망한 지 꼬박 30년 만에 치러졌다. 고 인은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내 추모관에서 발인 후 광주서부 경찰서 노제, 그리고 강원도 춘천공설묘원에 부모님과 함께 모셔졌다. 문영수(1953년생, 당시 30세)는 1982년 서울에서 버스기사로 근무하다가 해직된 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광주에서 생활하였는데, 당시 같이 생활하던 지인들과 사소한 폭행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해 광주서부경찰서에 서 폭행사건 피의자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를 받던 중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 해 광주적십자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입원한 지 이틀 만인 8월 22일 뇌혈관장 애증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경찰들은 문영수를 행려사망자로 꾸며 그 사체를 전남 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 인계하였고, 그로부터 9개월 뒤 해부학 실습용으 로 사용되었다. 문영수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987년, 당시 치안본부의 ‘헤어진 가족찾기 캠 페인’을 통해 고인의 사망사실을 알게 된 동생 문덕수씨는 형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 기 위해 생계도 뒤로 한 채 백방으로 쫓아다녔고, 그 덕분에 경찰의 폭행과 불법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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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어놓기

인 사체인도가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일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1987년 검찰은 타살혐의점이 없다는 이유로, 2002년 의 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경찰의 폭행에 의해 사망하였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2009년 11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고, 나아가 사망 후에도 위법한 공권력이 행사된 인권침해사건”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하였고, 덧붙여 “피해자 의 사망사실을 알게 된 이후 수사기관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조 사하였으나 피해자의 사망경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이르게 된 점으로 볼 때 그간 피해자의 구제에 대해 국가 기관이 그 의무를 소홀히 한 사실이 인정된다. 이에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해 야 할 경찰이 그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이후 사망 사실을 가족들이 알지 못하였고, 나아가 사체가 임의로 실습용으로 사용되는 비극 적인 상황에 이르렀던 점에 대해 국가는 사과하고 그 피해자 가족들에 대해 위로와 적절한 구제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하였다. 2011년 6월, 문덕수씨 등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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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법원은 “경찰의 폭행으로 문영수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고 봄이 상당하고, 피고 대한민국이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 리남용으로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봄이 상당하다”면서 원고들에게 (일부)승소판결 을 하였다. 법원의 판결이 있은 후, 작년 연말부터 유가협을 중심으로 장례에 대한 논의 가 시작되었다. 고인을 편안한 곳으로 다시 모시는 것도 있지만, 비록 국가에서 일 정정도의 배상판결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정식 사과를 받는 문제가 남아 있 었던 것이다. 유가협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광주지방경찰청에서 농성을 하는 등 우여곡절 이 있었고, 전남대 의과대학 학장과 광주서부경찰서장이 참석하는 가운데 장례 는 치러졌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이유로건 경찰조사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경찰 로부터 폭행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또한 그 시신까지 함부로 훼손되는 일에 대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욱이 국가의 잘못을 확인하는 진상규명의 시간이 30년 가까이 걸렸다는 점은 의문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 이다.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못한 수많은 의문사 사건들을 생각하면 이나마 다행 이라고 여겨야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문영수는 당시 결혼해 처와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처는 일자리를 알아본다며 나선 남편이 연락조차 되지 않자 몇 해 뒤 재가하였고, 아들은 새아버지 집안에서 다시 출생신고를 해 문씨가 아닌 이씨 성의 이름으로 성장했다. 법원에서 처음 본 문지훈은 아버지와 외모가 많이 닮아 보였다. 장례식을 마친 뒤 함께 서울로 돌아 오는 차 안에서, “아직 문지훈이라는 이름이 낯설지요?”라는 나의 물음에 그는 수 줍게 “네••••••”라고 했다. 아들은 비로소 알게 된 친아버지의 존재와 그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홍수정_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에서 인권침해사건 담당 조사관으로 일했으며, 현재는 4·9 통일평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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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단체, 추모제 소식 이형숙

6·10항쟁 25주년 기념식 및 21회 범국민추모제와 민중올레 개최 ●

6월 10일 오후 2시 서울시청광장에서 21회 민족 민주열사희생자범국민추모제와 민중올레를 성 대히 치렀습니다. 1,300여 명의 희생자 유족과 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열사를 추모하 며 정신계승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가 되었습니 다. 이 날은 6·10항쟁 25주년이라 덕수궁 뒤 거 리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로 다양한 행 사 부스가 마련되었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인 디밴드와 민중가수들이 <Freedom 6·10>이란 제목으로 금지곡 가요제를 열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오후 6시부터는 6·10항쟁 25주년 기념식이 열렸고, 2부 행사로 610명의 대합창이 있었습니다.

37주기 49통일열사 추모제 및 인혁당사건 전시회 열려

4월 8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4·9통일열사 37주기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이 날은 인혁 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집행당한 도예종, 서도원,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송상진, 하재 완, 여정남 8인 열사를 추모하는 자리입니다. 추모제 이후 서대문형무소 옥사에서 열리는 전 시회 개막식도 진행되었습니다. 전시회에는 최초로 공개되는 인혁당 희생자 생전의 모습, 유 품, 박정희 시대 관련 자료, 김정헌(화가,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임옥상 작가 등 26명의 작가 가 참여하는 회화 및 설치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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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식 열사 1주기 추모제 치뤄 정경식 열사의 1주기 추 모제가 금속노조 부산지 부, 한진중공업, 부경울 추모연대 회원 등이 참석 해 부산 솥밭산 공원묘지 에서 열렸습니다. 정경 식 열사는 1987년 대우 중공업 민주노조 건설 과

정에서 실종되었다가 1년만에 유골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25년간 진상규명 투쟁의 결과 진실화해위에서 가해자를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타살을 입증할 여러 증거들을 밝혀내 2011년에 마침내 장례를 치를 수 있 었습니다.

추모연대에서 ‘8회 역사와 삶 독서대회’ 작품 모집합니다

일제식민지 시기부터 민족자주독립과 한국 근현대사와 각 분야에서 노력했던 분들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 고, 이를 다룬 도서를 읽고 만든 작품들을 모집합니다. 모집기간은 올해 9월 20일까지이며, 10월 초 심사를 거쳐 10월 20일 시상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응모할 수 있는 부문은 전국 초·중·고등학생 등 청소년, 대학생 이 포함되는 일반부가 있습니다. 일제식민지 시기 독립운동과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민족민주 열사·의인들의 인물도서 및 역사·사회관련 도서를 읽고 감상문, 평론, 독서신문 등 (단, 그림으로만 된 작품 은 제외) 작품으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시상식은 10월 20일 북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수상자들에게는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도서상 품권), 도서, 공연티켓 등이 수여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응모 가능한 추천도서 일부를 출 판사로부터 후원받아 신청하는 경우 무료로 보내드립니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고함’ 2차 언론노조 파업현장 방문

추모연대는 현실 운동과 과거의 피해받은 사람과의 연대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고함’이라 하 였고, 쌍용자동차에 이어 5월에는 언론노조 파업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추모연대를 비롯한 유가협, 통일광장, 한국전쟁피학살자전국유족연합회가 참여하여, 언론노조로부터 파업 현황에 대한 자세 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매월 1회 현장 방문을 통해 상호간 연대는 물론 상대 처지를 이해하는 정 서적 교류에도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추모 단체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이형숙_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현재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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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동정

김호식(경제84), 구문채(영어86) 회원이 라오스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 로 알려져 화제. 두 회원은 사파이어, 광물, 보석, 에메랄드 등등이 묻혀 있는 모 광산 의 채굴권을 따내고 지난해부터 현지에서 광물사업을 일구고 있다고 한 소식통이 전 했다. 이 소식통은 덧붙여 김지헌(영어84) 회원은 필리핀 현지에서 태양광에너지 등 재생에너지 비즈니스 카운슬러로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고석배(문창84) 회원은 지난해 모 사이버대학 한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태 국 오지에서 한국어교사로 근무 중이다. 이곳은 방콕에서 기차로 13시간, 다시 달구 지로 갈아타고 3시간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마을 중 오지로, 살짝만 넘어가면 라 오스 접경지역이라고. 고 회원은 “70여 개의 도 중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곳”이라면 서 “카톡은 위성 접속해야만 가능해 사나흘 후에나 답장 가능하다”고 하소연. 또 고 회원이 올해 초 귀국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것은 잠깐 라오스로 넘어갔다가 태국 취업비자가 취소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귀국했던 거라고.

이상길(식생88) 회원이 지난 3월 9일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이 날 이 회 원은 저녁식사를 한 뒤 건물 화장실에서 나오다 미처 턱이 있는 줄 모르고 발을 헛디뎌 변을 당했다. 이 회원은 지난해에도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다 펜션 계단에서 엎 어지면서 왼쪽 가운데 발가락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한동안 목발에 의지해 생활하 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원은 “마침 직장이 대학병원이어서 투병환경은 매우 좋은 편” 이라고 낙천적인 반응. 주변에 따르면 피곤할 때 바로 올라가 통원치료를 핑계로 한숨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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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고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익명의 동기 이모씨 는 “그나마 양쪽 발을 번갈아 다쳐 다행”이라면서 “뭐든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려는 이 양의 의지가 가상할 뿐”이라고 딴소리. 제1신: 늦장가에 아들 건화를 얻고 세무사 자격시험에 도전하고 있는 정

순호(회계88) 회원이 지난 2, 3월 두 차례 모의고사를 치른 뒤 소회를 밝

혀 눈길. 정 회원은 “시험은 아는 것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얼마나 문제에 숙달돼 있는지 를 테스트하는 것”이라고 마치 10년 공부한 사람처럼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총 160문제를 160분에 풀어야 하니 문제당 1분 꼴”이라면서 “문제를 읽는 데만 1분 넘게 걸려 종료 10여 분을 남겨두고는 거의 반 이상을 찍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지난 1년 간 꽤 열심히 공부했지만 안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 중이다”고 말했다. 제2신 : 모두 8100여 명이 응시해 지난 4월 29일 치러진 제49회 세무사 자격시험 1차 시험에서 정 회원이 합격했다. 회원은 커트라인 평균 60점에서 2문제 더 맞춘 61.25점으로 통과된 것으로 알려져 다들 ‘운수대통’이라고들 한마디. 정 회원은 “모두들 염려해 주신 덕분이다”고 감사를 전했 다. 2차 시험은 오는 7월 29일 치러진다.

김형구(중어86) 회원의 누나인 김미희씨가 지난 4.11총선에서 국회의원(경기 성남 중원 구)에 당선됐다. 축하드립니다.

김산환(문창88) 회원이 지난 5월 20일 『대한민국 오토캠핑장 602』 를 출간했다. 김산환 회원 은 지금까지 출간한 도서가 18권이나 되는 여행전문가로, 캠핑이나 여행에 관심 있는 회원들은 많 이많이 구매하길 권한다고.

조정래(영화92) 회원이 지난 5월 15일 영화 ≪두레소리≫를 개봉했다. ‘소리로 꿈을 꾸는 감 동적인 녀석들이 온다’는 카피처럼 이 영화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합창단의 창단실화를 다뤘다.

노민옥(노어95) 회원이 6월 3일 양진용 군과 남산예술원 웨딩홀에서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식 을 올렸다. 최중희(상경96) 회원이 4월 1일 조선호텔 셰프와 어린이회관 목련홀에서 짧은 열 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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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움직이니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정리

사무국

이내창기념사업회 총회가 1월 14일 흑석교정에서 열렸습니다. 이상재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총회에서는 2011년도 전체 사업 보고와 회계결산 보고, 온라인 사업보고, 2012년도 사무국장 선출 및 집행부 인준 등의 순서로 열띤 회의가 이어졌습니다. 그럼 지 난해 사업을 한 번 되짚어 볼까요? 2011년도 1월 집행부 회의를 통해 서 운영위 조직 건과 겨울캠프 개최 건, 근조기 제작과 기념사업회 기 록 보존 등이 논의됐습니다. 2월에는 경향신문 별관에서 열린 추모연

2011 4대강 반대 여주 강변걷기 대회

대 정기 총회에 참석했고, 공주 한옥마을로 2박3일간(2.25~7) 겨울 캠프를 다녀왔습니다. 3월에는 1차 중앙운위를 열어 4·19행사와 근 조기, 홈페이지 작업 등을 논의했습니다. 4월 23일에는 ‘4대강 반대 여주 강변걷기 대회’를 4·19행사 대신 치렀구요. 5월에는 2차 중앙 운위를 갖고 범국민 추모제와 8·15기제, 여름캠프 등을 논의했습니 다. 이어 6월에는 보신각과 시청 광장에서 열린 범국민 추모제에 참 가했구요. 7월에는 2차, 3차 희망버스(부산 한진중공업)에 회원들이

2011 여름캠프

참여했습니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름캠프가 괴산에서 2박3 일(7.22~24)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8월 15일 22주기 기제를 뙤약 볕 아래 땀 뻘뻘 흘리며 치러냈고, 8월 27일 4차 희망버스에도 동참 했습니다. 9월 6일 이소선 어머니 조문(서울대병원), 제주 강정마을 투쟁기금 전달, 이소선 어머니 장례위원 위촉, 왕재산 조직사건 성금 전달(특별회비를 내주신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등의 사업도 숨가쁘

2011 겨울캠프

게 진행되었습니다. 10월 29일에는 희망비행기(제주 강정마을)가 떴 고, 11월 말부터는 매주 토요일마다 열렸던 반FTA 촛불 집회에 참석 했습니다. 2011년,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기념사업회도 발 빠 르게 움직여야 했던, 정말 바쁜 한 해였습니다. 이상재 전 사무국장 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사업보고에 이은 회계결산 보고는 늘 그렇듯 별 문제없이 넘어갔습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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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뒤이은 집행부 선출에서 백기욱 회원이 만장일치로 2012년도 사무국장으로 선임됐습니다. 연대 사업은 이 상재, 총무는 십 년째 김기수, 조직지원은 박형록 회원이 맡기로 하였습니다. 캠프는 위상혁, 이원근 회원이 간 만에 합심해서 진행하기로 했고, 8·15기제는 박지훈 회원이 주체적으로 나서주었습니다. 이 외 기타 안건으로는 이천 민족민주열사 추모공원 건립과 관련한 우리 기념사업회의 입장에 관한 논의, 새로 운 종이 소식지 발간에 대한 제안, 통혁당 박기래 선배 부조금 전달 등이 논의됐습니다.

새 소식지 편집위원 기획회의가 2월 3일 열렸습니다. 기존 <어깨동무>보다 더 많은 내용과 질을 담보 하기로 하고, 3월 초부터 소식지 제호 제안을 시작했습니다. ‘도사리’, ‘그루터기’, ‘청개구리’ 등 조환준 회원 의 잇따른 70년대 중딩 교지용 제호 도발에 대해 핫한 반응이 기대됐으나 역시 우리 회원님들 깔무시해 주셨습 니다. 소식지 제호는 오랜 공모와 논의 끝에 기존 제호인 <어깨동무>를 살리되, ‘끈덕지게’ 앞으로도 쭉 기념 사업회의 과제를 해 나갈 것이라는 의지를 담아 <끈덕지게 어깨동무> 로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핵없는 세상만들기 반핵행동이 3월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렸습니 다. 너무 추웠습니다.

강정마을돕기 반찬 만들어 보내기가 3월 19일 일산 김경주 회원 집에서 왁자지껄 열렸습니다. 모두 여섯 명의 회원이 모여서 멸치볶음, 무말랭이, 깍두기, 땅콩볶음, 오징어채무침을 정성껏 조리하여 강정마 을로 보냈습니다. 성금도 모았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전까 지는 강정마을 측에서 “어떤 정성들이 답지했다, 잘 받았다” 식의 보고를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알리곤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 것부터 하지 않 고 있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워낙 어렵게 진행됐기 때문으로 이해합니다 만, 이게 잘 도착은 했는지, 맛있게들 드셨는지, 혹여 간은 심심하지 않 았는지, 보낸 사람들 입장에선 무척 서운하다는 것 또한 조심스럽게 속삭 여 봅니다. 그래서 2차 강정마을 반찬보내기 한 번 더 해보려고 합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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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노동자 추모 및 정리해고철폐 범국민추모대회가 4월 21일 평 택, 쌍용자동차 본사 앞에서 열려 정말 오랜만에 폭우 속에 몸을 내맡겨 보았습니 다. 참석하신 회원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반기 운영위원회가 5월 4일 삼각지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운위에서는 회원 주소록 다시 파악, 학번별, 모임별 주체 확정, 소식지 제호 결정, 여름캠프 및 8·15 기제 준비 등이 논의됐습니다.

제21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와 6월 항쟁 기념 6·10시민대 합창이 서울광장에서 열렸습니다. 특히 6·10시민대합창에는 회원 네 명이 참여해 목소리를 보탰습니다.

상반기 운영위원회

나누세요 담으세요 • naechang.kr • facebook.com/nae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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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2년 가을·겨울호 편집위원 되기

둘, 기고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 와 책임감이면 충분합니다.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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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함께하니 당당해졌다 월

구분

1월

2011년 이월

출금

회비

667,900

감사선물

200,000

근조배송

187,000

위상혁주점비용

20,000 30,000

박기래선배 부조

300,000

추모연대회비

50,000

박성훈 권향숙 이동희 이민진 김용수

총회지원

63,000

컵구입

381,000

구혜영 이금숙 박철민 조환준 김기수

1,231,000

현재잔액 회비 추모연대회비

50,000

총회양말30개

300,000

소계

350,000

김성희 박지훈 김현동 이주현 이상재 구은경 김학진 노병진 이영은 우유섭

659,220

원순재 조형준 노민옥 이혁승 김산환

777,960

김현숙 박응식 정경미 정원옥 김형구

50,000

근조발송

50,000

소계

100,000

666,840

강정마을반찬

274,300

추모연대회비

50,000

사무국장문자비용

50,000

소계

374,300

강동길 위상혁 황선태

778,159 23,244,849

회비

여기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보태주세요.

666,840 23,537,389

회비

687,880

추모연대회비

50,000

소계

50,000

687,880 24,175,269

회비

70,000

추모위원회비

200,000

소계

200,000

3월잔액

111

659,220

회비

3월잔액

이내창기념사업회

이남영 곽현희 신명철 정보영 이태경

고철주 홍미숙 신성호 백기욱 정순호

3월잔액

6월6일 현재

22,257,470

199

3월잔액

5월

최호식 고재영 최영석 박희성 강혜연

22,566,690

추모연대회비

4월

667,900

이자

3월잔액 3월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

추모연대달력

소계 2월

입금 22,820,570

70,000 24,045,269

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l 찍은 날

2012년 7월 5일

l 펴낸 날

2012년 7월 9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 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백기욱 010-4163-6260

cafe.daum.net/19890815

김선주,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가 함께 만들었습 니다. 허숙경이 표지그림 게재를 허락해 주었고, 제호와 마침로고 는 김경주가 캘리그래피로 디자인하였습니다. 강영희가 편집 디 자인을 맡아 주었습니다. 인쇄는 신명철, 발송은 김기수가 수고하 였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naechang.kr에서 만날 수 있 습니다. 온라인 소식지 관리는 박형록이 담당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원고를 보내 준 회원들에게 감사드리며, 회원 자녀와 기념 사업회 외부에서 원고를 주신 분들에게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페 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준 회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소식지 재창간에 많은 관심과 의견을 주신 운영위원 및 모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스물세 번째 8 15 기제, 내창이 형 만나러 갑니다 출발 : 2012년 8월 15일(수) 오전 9시 장소 : 중앙대학교 흑석 교정 정문

2011년 8월 15일, “형! 내년에 또 올게요!”

“어른들은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은 즐거워요!” 회원 자녀들이 기다리는 여름캠프 일정 : 2012년 7월 27일 ~ 29일 (2박 3일) 장소 : 충북 괴산 해밀터

2011년 7월, 여름캠프 <이내창, 자연과 함께> 성백이네 집 앞 개울에서 물놀이하고 있는 어린이들. 일 년 사이에 또 몰라보게 자라있겠지요?^^ * <8.15기제>와 <여름캠프>의 상세한 일정은 <우리다시 어깨동무 cafe.daum.net/19890815>를 참조해 주세요.


물음이 없으면 답도 없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전해질 리 만무합니다. 이야기하고 나눠야 이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 날 그 때로부터 23년, 한 청년이 새로운 청년을 키워낼 시간. 한결같이 우리의 요구는 ‘진실’입니다 우리의 손이, 입이, 몸이 움직이는 한 끈·덕·지·게·어·깨·동·무

1989년 8월 15일 조각가를 꿈꾸던 스물일곱 청년이 거문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 이내창. 우리는 그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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