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덕지게 어깨동무 2016 vol 09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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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 2016 Vol.9


목차 한편의 시

고해

윤한로

권두칼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김형태

포토에세이

옥바라지 골목 연대기

이재정 노용헌

과거청산

과거청산운동의 기록

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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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백남기 농민 쾌유와 책임자 처벌’ 투쟁일지

서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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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꾼 수준에서 맴도는 국가경찰

오창익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할 일을 하려 한다

백도라지

그 날 백남기 농민은 왜 물대포를 향해 나아갔을까

유영훈

부서진 民主, 공권력에 쓰러진 백남기 선배님에 대한 예의

신지영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농성장

강곤

38 42 46 54 58

멈추지 말고, 달려!

이원혜

2016년 봄에서 여름, 다시 과거청산을 준비하다

민주주의 회복하는 그날까지 함께 가자

백남기대책위 최석환 사무국장을 만나다 어깨동무가 만나다

4 6 10

65


생각하기

이수정의 국악이야기

이수정

77

경락이의 <연극으로 세상읽기>

김경락

81

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

혁이

85

강곤의 현장들, 기록들

강곤

89

소녀상지킴이 농성에서 <소녀상서포터즈> 활동까지

한대윤

93

363일째 전하지 못한 꽃

김영식

102

국가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목소리

의문사의 해결은 진실규명, 산자여 따르라!

신명철 서병훈 정원옥

109

30주기를 준비한다: 미래의 기념사업회 ②

전경미

123

페북동정

백기욱

130 140

궁중음악은 어떻게 현대에 전승되었을까? 뜨거운 대학로: 세월호 참사와 검열, 국가권력을 고발하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세상에서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장애에 대한 기록들

나의 한 발이 다른 누군가의 발판이 되길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마무리된 날 기획연재

의문사지회 회장 신정학 아버님 구술인터뷰 열린 플랫폼으로서의 기념사업회 : 소통과 연대, 친교의 공간을 상상하다 함께하기

2016년 상반기 사업보고


한 편의 시

고해 윤한로

내 비록 내 돈 벌어 내가 쓴다지만 이즈음엔 맛난 음식 먹는 것도 죄요 멋진 옷 입는 것도 바로 죄요 귀에 좋은 노래 달게 자는 잠 또한 죄가 되려니와 한가할 ‘한’ 늙을 ‘로’ 한가하게 늙는다는 이 이름 석자야말로 더더욱 죄스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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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늦지 않았으니 쓰게 먹고 눈 맑게 뜨리라

윤한로_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교사로 재직했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에 동시 「분교마을의 봄」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고백」은 그의 첫 시집 『메추라기의 사랑 노래』(시인동네, 2015) 에 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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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김형태

15년 전 이맘 때 쯤, 나는 거문도 바닷가에 있었다. 유림해수욕장 바위 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그로부터 12년 전 여름 이내창이 거쳐 갔던 여수, 거문리 선착장, 민박집, 삼호다방, 덕성호 나룻배, 유림해수욕장으로 이어지 는 죽음의 길을 따라나선 터였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당시의 이내창을 이리 증언했다. “ 그 사람은 잔뜩 겁먹은 표정 으로 쫓기듯 들어오더니 ‘아줌마 방 있어요?’ 하고 물으면서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 에 올라 왔어요. 방을 가르쳐 주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뒷문 있어요?’하고 묻고는 죄송하다면서 황급히 뒷문으로 도망갔어요.” 얼마나 무섭고 다급했던 걸까. 나는 사람 크기 인형을 해수욕장 앞 바다에 던져 놓고 방파제 사이, 만을 휘돌아치 는 검푸른 파도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정말 무서움증에 몸을 떨었더랬다. “ 한편의 첩보영화 같은 추리를 해 본다.‘당시 안기부는 북에서 임수경의 전갈을 들 고 온 사람이 있는 양 꾸며 이내창을 거문도로 유인하는 역공작 중이었다. 그런데 이 사정을 모르는 경찰 쪽에서 민미련 사건 수사 차 이내창을 미행해 거문도까지 쫓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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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그리고 이내창 일행을 체포하려하자 안기부의 역공작이 어그러지게 되었다. 경찰은 북에서 임수경 전갈을 가지고 내려 온 양 가장한 안기부 요원을 진짜 북쪽 사 람으로 알고 이내창과 만나는 순간을 덮쳤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이내창이 역공 작을 알게 되고 결국 죽음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몇 해 전 이내창 사건을 <한겨레신문>에 소개하면서 나는 끝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 었다. 안기부나 그 반대 쪽 모두에 눈치가 보여 신문에는 ‘추리를 해 본다’는 식으로 둘러댔지만 지금도 나는 이 ‘추리’가 진실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그때 이내창과 동행했던 안기부 여직원과 그를 미행했던 자칭 서울시경, 대전시경 경찰들이 이제라도 입을 열면 이 추리는 진실이 될 거라. 이내창이 저리도 허망하게 갔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에게도, 휴전선을 통한 귀향 을 관철하려 북쪽 당국을 향해 단식투쟁을 하던 임수경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 게도 커다란 꿈이 있었다. 돈이나 권력의 억압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한 꿈. 지금 돌이켜보면 바람과 먼지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결코 이루기 어려운 순진하 고 고결한 꿈. 돈이나 권력은 물론 사랑과 명예마저도 내 몫으로 남기지 않겠다는 그 열렬한 헌 신. 이내창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이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제 젊음과 미래와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 지금은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저 순진했던 시절의 꿈, 그래도 이 꿈은 우리 가 영원히 꾸어야 할 꿈이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를 목표로 내걸었던 사회주의는 사람의 본성인 이기주의 때문에 현실에서 또 다른 억압이 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동네 에도 철저한 이타주의의 대의 앞에 자신의 이기를 내던졌던 순진한 사람들이 있다. 그 자신도 비전향 장기수였던 신현칠은 동료의 영전에 이런 시를 바쳤다.

젊어서 논밭에 땀 뿌릴 때나/시골 우편집배부일 때나/작은 마을 세포책일 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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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상과 지하에서 면당 군당 책일 때나/ 산골짜기 산등성이/총 들고 죽음 맞선 대원일 때나/30년 독감방에서/까만 눈만 깜빡이고 앉아 있을 때나/더 잘난 때도 없고/더 못난 때도 없고/ 저가 있을 자리를 단단히/꼿꼿이 지킨 벗 30년 세월을 독방에 갇혀서도 ‘저가 있을 자리’, ‘당과 인민을 위한’ 이타(利他)가 어찌 가능할까.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란 책을 썼다. 이 세상 모든 생명 체들은 그 안에 있는 유전자들이 유전자 자신을 가장 잘 증식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그 생명체들의 행동을 이끌어간다는 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신을 희생하면서 경쟁자를 도와주는 “훌륭한 유전자”들은 결 국 사라진다. 그리고 겉보기에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사실은 더 큰 범위에서 그 런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 개체로 하여금 그런 이타적 행동을 하게 한다는 거다. 이 현실은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이타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30년 독감방에서 까만 눈만 반짝이고 있’거나 거문도 바닷가에서 쫓기다 ‘꽃도 십자 가도 없는 무덤’에 묻힌다. 명예도, 심지어는 제 유전자를 물려 줄 자식도 없이. 그래도 이런 꿈같은 일들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되풀이될 거다. 하 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셋도 되고 넷도 되는 창발(創發)의 세상이니 그렇다. ‘창발’. ‘창조’라 해도 좋겠다. ‘초월’이라는 철학 용어도 그럴 듯하다. 창조, 초월은 그 토대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비약, 뛰어넘음이다. 겨우내 언 땅에 묻혀있던 유전자 다발인 모란뿌리에 물과 바람과 햇빛이 힘을 합 쳐 저 붉디붉은 모란꽃을 피어내는 건 창발이요, 초월이요, 창조다. 흙, 뿌리, 물, 바 람, 햇빛을 아무리 모아내도 어디서 저 붉은 색 모란꽃이 생겨날 건가. 나의 뇌도 한 처음 그저 햇빛이나 물에 단순 반응하는 원시적 신경세포에서 비롯 되었다. 그리고 수억년 세월 이기적 유전자들이 생존경쟁에서 선택되는 진화를 통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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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이제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마침내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나’를 의식할 줄도 알 게 되었다. 나를 돌아볼 줄 아는 나. 이건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그런데 마치 뿌리와 흙 과 물과 바람과 햇빛이 서로 만나 저 아름다운 모란꽃을 피워내듯이, 창조해 내듯 이, 이기적 유전자들의 결과물인 나는 나를 돌아볼 줄 아는 나로 ‘비약하고’ ‘초월하 고’ ‘창조되었’다. 나를 돌아볼 줄 아는 나는 더 이상 그 토대가 되는 이기적 유전자의 종이 아니다. 그래서 신현칠과 그의 동지는 산골짜기, 산등성이 총 들고 죽음 맞서기도 하고, 30 년 독감방에서 까만 눈만 반짝이면서도 저가 있을 자리를 단단히, 꼿꼿이 지켰다. 그래서 이내창은 죽음이 어른거리는 그 험한 길을 피하지 않고, 마다지 않고 끝까 지 걸어갔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남의 고통을 나누어지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려 애쓰는 순진하고 고결한 이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으니,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김형태_법무법인 <덕수>의 대표 변호사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을 주도했고, 천주교인권위원장, 의문사진상 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저서,『지상에서 가장 짧은 영원한 만남』(한겨레출판사, 2013)에「그 여름, 거문도-이내창 의문사」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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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옥바라지 골목 연대기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들어 그 날의 일들을 SNS 라 이브 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눈앞에서 용역깡패들에 의해 사람들이 끌려 나가고, 내동댕이쳐졌다. 용역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소화기를 쏘기도 했다. 크레인이 건 물 문을 뜯어냈고, 창문을 부쉈다. 지난 5월 17일, 무악 2구역, 독립문 역 앞에 위치 한 일명 ‘옥바라지 골목’에서 벌어진 일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13학번 / 자유인문캠프 기획단_이재정

@ 노용헌

강제철거가 집행되기 전, 옥바라지 골목 안에는 두 채의 건물만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가옥 한 채와 ‘구본장 여관’ 이 그것이다. 118세대 중 단 두 가구만이 남았다. 다른 이들은 롯데건설에서 새로이 아파트를 지으면 저마다 방 한 칸씩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제 살던 곳들을 비웠다. 서울시 뉴타운 재개발은 주민들의 재정착률이 고작 2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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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공사장 펜스로 인해 사방이 꽉 막혀버린 골목은 세상과 단절 된 곳 같다. 독립문역 앞,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지만, 촘촘하게 쳐놓은 펜스는 골목 안의 세상과 골목 밖의 세상을 분리시켰다. 지나쳐간 이들은 그 날, 골목 안에서 무 슨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조차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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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

강제집행이 있던 당일 ‘구본장 여관’에는 60~7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구본장 여관의 주인 이길자 사장과 골목 에 하나 남은 가옥주 최은아씨를 포함해 여러 연대자들이 모였다. 많은 연대자가 모였지만, 100여명의 건장한 용 역들을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우리들은 손쓸 겨를도 없이 처참히 짓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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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

고립된 골목 안은 아침부터 스산했다. 언제 강제집행이 들어올지 모르기에 연대자들은 서로 짝을 이뤄 각자 맡은 곳에서 보초를 섰다. 지나가는 차 한 대, 사람 한 명에도 예의주시하면서 겁을 먹고 의심했다. 새벽 6시쯤이 되자 골목 초입에 회색 봉고차가 한 대 섰다. 그 안에선 검은 옷을 입은 용역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내 구본장 여관 앞에 서 스크럼을 짜고 있던 이들을 덮쳤다. 여기 저기서 “사람을 때리지 말라”, “소화기를 쏘지 말라”, “폭력적인 강제 집행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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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

한바탕의 강제철거가 지나간 후, 박원순 시장이 다녀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박원순 시장이 폭탄선언 을 한 날로 기억할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더이상 공사는 없다”고 선언하며 본인이 “손해배상을 당해도 좋다”고 외치고 돌아갔다. 박원순 시장의 방문 이후 더 이상의 강제집행은 없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사의 위협에 떨고 있다. 구본장 여관에서 쫓겨난 이길자 사장님과 그 가족들은 도로변에 텐트를 치고 농 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 찜통 더위에 그들이 돌아 갈 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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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2월 말 즈음 아직 제대로 대책위가 구성되기 전, 처음 옥바라지 골목에 왔다. 아직 펜스가 쳐지기 전이었고, 여러 건물들이 남아있었다. 온 벽에는 ‘공가’라는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공가. 이제 더 이상 이곳엔 사람이 살지 않음을, 싹 다 비워내고 새로운 것을 채워갈 것이라는 예고이자 경고였다. 그 새로운 것에 원주민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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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40여년 간 여관업을 해온 이길자씨에게 구본장 여관은 생계이자 주거공간이다. 길 건너 교남동에서 30년 동안 여관을 운영하다 돈의문뉴타운재개발을 피해 현재 무악 2구역으로 왔다. 오래토록 장사를 하고 싶었으나 또 다 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주민 최은아씨는 옥바라지 골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40년을 이곳에서 살았고, 현재는 3대가 함께 살고 있다. 재개발로 쫓겨날 위기가 되자 자신이 이 동네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그에게 집을 빼앗기는 일은 삶 자체에 대한 위협이다. 두 사람은 모두 떠나버린 이 골목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비대위를 구성하고 재개발을 막기 위해 서울시 에 찾아가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곳이 옥바라지 골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를 알리기 위해 자료를 찾아들고 여러 기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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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주민들의 노력에 역사학자, 도시학자를 비롯한 여러 활동가들이 결합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이곳 이 옥바라지 골목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했고, 옥바라지 골목이 왜 서대문형무소와 역사적 맥을 같이 하는지 그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조합원의 50%만 찬성하면 추진될 수 있는 도 시정비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또한 노동당, 녹색당, 자립음악생산조합, 리슨투더시티 등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결합했다. 예술가들이 영상, 사 진, 그림, 음악 등으로 연대하기도 하고, 각 학교 신학생들이 모여 ‘옥바라지 선교센터’를 만들고 매주 예배를 드리 기도 했다. 자유인문캠프도 연대단위 중 하나였다. 옥바라지 골목에 모인 여러 활동가들은 척박한 재개발 현장에 저마다의 힘으로 각자의 색을 입혔다. 이곳이 지금까지 풍성하게 유지될 수 있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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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옥바라지 골목을 지키는 일은 이 곳에 생존권이 걸려있는 주민들의 삶을 지키는 일이자 서대문 형무소와 역사적 맥을 같이 해온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1930년대에 독립운동가들이 석방된 후 묵었 던 영천 여인숙과 인혁당 사건 당시 피해자 부인들이 묵었던 동양여관이 있는 곳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사랑하는 이를 보낸 이들이 음식과 옷 등을 챙겨주기 위해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여관 골목이다. 또한 박완 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옥바라지 골목이라는 것이 이슈가 되기 이전, 종로구청은 이미 이곳을 ‘옥바라지 골목’이라고 지명한 바 있다. 하지만 대책위 측에서 이곳의 역사성을 주장하자 붙어있던 팻말을 떼어내 버렸다. 이 구역의 역사성에 대 한 조사를 해달라는 요구 역시 무시했다. 대책위 측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했던 건물을 우선 적으로 부쉈다. 서울시는 서대문형무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바라면서, 서대문형무소 바로 앞에 그곳을 증명해줄 옥바라지 골목의 여관들을 헐어버렸다. 그러고는 팻말 하나 덩그러니 세우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계획을 세우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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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서울시는 서울이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서울은 점점 역사를 잃고 있다. 거주민의 삶이 나 공간의 역사성보다는 반듯한 아파트 한 채 더 세우기에 혈안이 된 파괴된 도시다. 이길자 사장의 말처럼 ‘대한 민국은 아파트에 미친 나라’다. 이런 미친 나라에서 100여년의 역사적 맥락을 가진 옥바라지 골목의 가치나 소수 의 주민들의 삶은 너무 쉽게 짓밟힌다. 현행 재개발 문제는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국가폭력이다. 도시정비법이라는 악법은 원주민의 삶은 몰 아내고, 그 위에 건설자본의 이익만을 채운다. 국가는 이를 방조하고 동조한다. 현재 재개발로 인해 많은 사람들 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고 더욱 열악한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옥바라지 골목의 싸움은 이 공간만을 지켜내려는 싸 움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을 이르게 했던 악습적인 도시정비법을 뜯어 고치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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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옥바라지’라는 이름이 생소할 때 싸움을 시작하여 이제는 그 이름이 너무나 익숙해졌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바라지’라는 말이 참 예쁘다. 모든 삶은 ‘바라지’로 인해 시작된다. 시작을 넘어 지속되고 풍성해진다. 삶 뿐 아니 라 여러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 역시 ‘바라지’의 산물이다. 옥바라지골목 투쟁도, 의문사 진상규명, 세월 호 사건 등의 사안들도 모두 무언가를 지키고 알리기 위해서 싸우고 연대한다. 이는 모두 그 싸움에 결합하고 운 동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바라지’를 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하나의 싸움을 누가 어떻게 함께 만들 어 가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대문형무소와 옥바라지 골목은 그 기억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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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용헌

옥바라지 골목에 연대하며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치들을 놓치며 살아가는 걸까. 무 엇을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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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청산운동의 기록

2016년 봄에서 여름, 다시 과거청산을 준비하다 신명철

나는 여전히 기념사업회라는 단어가 어색하다. 익숙해지기는 글렀지 싶다. 내 정 서상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그럴까 사람들은 이내창의 무엇을 기억 하는 걸까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기억한다는 것이 바로 산다는 것(To remember is to live.)’, 신학자 부버의 말이 다. 기억이 성찰을 동반하기 때문에 바로 산다고 하나 보다. 그를 잊지 않아 내가 바 로 서고, 그의 죽음을 기억해 내 삶은 길을 바로잡아 간다. 이내창을 기억하는 일에는 성찰만이 아니라 과제가 추가된다. 그의 죽음이 완성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살이어서가 아니라, 진상규명이 되지 않아서이다. 죽음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고, 그의 짧은 삶이 명예롭게 정리될 때 비로소 성찰의 의미로 기억이 자리 잡게 된다. 같은 말을 십수 년째 반복한다. 염불도 이런 염불이 없다. 그래도 이게 내 일이라 생각했다. 이내창의 진상규명과 과거청산 과제는 벗을 잃은 자들의 몫이며, 모두의 슬픔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것도 자임한 건데, 이제와 돌이켜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러나 했겠다 싶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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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창기념사업회를 대표해서 내가 나서는 거라고, 억지를 부렸구나 싶기도 하 다. 그래서 나라도 하자는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이 또한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저 내가 하는 것일 뿐인데, 참 오랫동안 미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는 ‘우리’라 는 집단적 단어에 기대지 않으려 한다. 주체적인 개인과 의지가 모이지 않은 ‘우리’ 란 얼마나 허망한 수사인가. 내 삶에 들어온 이내창, 나는 그와 남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 과거청산 과제를 어 느 정도 실현할 수 있을지, 생전에 누가 이내창을 죽였는지 밝혀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간다. 몸도 마음도 총기 있게 쓸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관 계나 집단에 소모할 여유도 없다. 내가 모여서 우리가 되면 좋겠지만 우리가 각각의 나이기를 바라지 않기로 한다. 미심쩍음과 불안함의 시원을 따지지 않기로 하니 홀가분하기도 하다. 이내창기념 사업회 운영위원들이 진로의 문제를 고민하고, 과제를 논의한다고 하니 조속히 결 론이 나길 기대한다.

봄호에 소식을 전했듯이 2월에 최우혁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의문사 삼총사 가운 데 맏형, 한없이 온화한 아버지 같은 분을 보냈다. 아쉽고 마음이 아프다. 지난해 내 내 섬으로 내려간 우혁이 아버지를 보러 간다고, 구술을 받아놓겠다고 하고는 결국 못 갔다. 그렇게 기회도 잃고 시간은 흐른다. 이제 자식을 잃은 부모 형제들이 떠나 기 시작했다. 이삼십여 년 전에 벗을 잃은 우리가 자식을 잃은 부모를 떠나보내야 하 는 시간이다. 3월에는 맏형을 보낸 유족들께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겠다는 49통일평화재단의 뜻에 곁다리 붙어 이내창기념사업회 이름으로 함께 자리를 했다. 고기 굽고 소주도 나눴다. 갈 때마다 하는 인사지만 종종 찾아오겠다고 하고, 다음엔 또 누군가 이어갔 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안고 ‘한울삶’ 문을 나섰다. 다행히 <어깨동무> 여름호에 신호수 아버님 인터뷰가 실린다. 의문사, 한국전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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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사건 피해자와 유족 등을 찾아가자는 제안을 편집위원 회에 했고, 그 첫 출발을 의문사지회 지회장인 신호수 아버님 으로 했다. 매일 아침 국회에서 7시부터 9시까지 1인 시위를 하는 여든의 노인이 장장 다섯 시간을 쉬지 않고 쏟아내는데, 마음이 저려 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안도를 한다. 그가 새로 살림터를 옮겼다는 문산까지 정원옥이 모셔다 드 렸다. <어깨동무>에 지속적으로 인터뷰가 실려, 그들의 삶과 한을 조금은 내려놓고 떠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6년 봄은 총선의 계절이었고, 선거가 모든 사안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이었다. 표에 도움이 안 되는 과거청산 과제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공약 과제를 만들고, 국정교과 서 등과 결합해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연대 활동에 집중했다. 선거에서 여소야대의 결과가 나자 과거청산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유족회에서는 과거사 입법에 큰 관심을 보이고, 추모단체에서도 일을 찾아 나서는 모양이다. 하지만 유족들은 분열되어 있고, 과거청산 단위들도 하나로 뜻을 모 으기 쉽지 않다. 과거청산 운동이 유족을 대리하는 역할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지난 시절의 오류를 반복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이번의 준비는 보다 철저하고 조직적이어야 한다. 과거청산 운동을 해왔고, 역할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중심에 서서 긴 호흡으로 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 그 일을 준비한다. 과거사 입법이나 선거 국면에 대응하는 일은 일상적인 사 업이 되었고, 2016년 봄에 했던 유의미한 일로는 3차 유해발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굴 사업을 들 수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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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광천면 담산리 동굴 터에서 유해발굴공동조사단과 자원봉사자들이 돼지 사체의 악취와 동굴을 파고 들어가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 할 수 있었다. ‘병규’라고 적힌 지포 라이터가 발견되기도 했고, 이번에 발굴된 유해 가운데 구척장신의 장딴지 뼈와 어린아이 크기의 두개골 주인을 찾기도 했다. 유족 한 분의 DNA 검사 결과는 가족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유해발굴은 홍성군의회에서 조례를 만들어, 군 예산 지원이 가능했다. 유해 발굴과 보고대회, 용봉산에 임시 안치 시설을 만들고, 6월에 추모제를 하기까지 홍 성군 시민단체와 군이 결합해서 지역의 주요 사업으로 자리 잡는 모범사례를 만들 었다. 앞으로 추모공원을 만들고 ‘평화와 인권’의 이름으로 소녀상 건립, 사드 반대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간다고 한다.

여름호가 발간될 시점에는 과거사법 개정안이 나오고, 과거청산 주요 쟁점에 대 한 토론회가 열렸거나 앞두고 있을 시점이다. 과거청산의 문제를 반갑게 받을 정치 세력은 없지만 대선을 앞두고 있으니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해결하고 가는 일에 집 중할 때가 왔다. 이내창이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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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너무 옵니다. 발도, 깃발도 모두 젖습니다. 4·16 2년입니다. 저흰 세종문화회관 계단 위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바닷물 속에 잠겨 있고 언제쯤 진실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요. 2016년 4월 16일 <묻지말고 응답해라 의혈중앙> 밴드에 이원근이 남긴 글과 사진


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백남기 농민 쾌유와 책임자 처벌’ 투쟁일지 범죄꾼 수준에서 맴도는 국가경찰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할 일을 하려 한다 그 날 백남기 농민은 왜 물대포를 향해 나아갔을까 부서진 民主, 공권력에 쓰러진 백남기 선배님에 대한 예의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농성장

서병훈 오창익 백도라지 유영훈 신지영 강곤


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백남기 농민 쾌유와 책임자 처벌’ 투쟁일지

민주주의 회복하는 그날까지 함께 가자 서병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대회 때 불법 집회 및 과격 시위를 주도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집회와 관련해 내려진 최고의 형량이다. 한 위원장이 주도한 바로 그 집회에서 백남기 농민은 경찰이 쏜 직사 물대포에 맞아 지 금 이 시간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다. 민중총궐기 대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중형은 받 은 그 법정에는 한 농민에게 살인미수를 저지른 경찰 관련자 그 누구도 서지 않았다. 당 시 경찰 책임자들이 승진과 영전을 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지난 8개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며 펼친 활동 들을 정리했다. 10년 가까이 뒷걸음질치며 암울했던 독재정권시절로 되돌아간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눈물겨운, 힘겨운 투쟁일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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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4일 오후 6시 56분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대회는 삶이 파탄지경에 이른 농

백남기 농민,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에 쓰러지다

부와 경찰은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민심’을 외면하고 ‘갑호 비

민,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정 상령’을 내리고 살인적 폭력진압에 나섰다. 이날 오후 4시 30분께 서울광장에서 대회를 마친 참가자 10만여 명은 서울파이낸스센터 앞길과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차벽으 로 막아선 경찰과 대치했다. 5시께부터 강제해산을 시도한 경찰 은 초반부터 시위대를 조준하듯 최루액·색소 등을 섞은 물대포 를 직사 살수했다. 저녁 7시께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백남기 농민이 직사 물대포 를 맞고 쓰러졌다. 가슴 이하 부위에만 살수해야 한다는 법령을 어기고 물대포는 10미터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를 가격 했다. 쓰러진 백남기 농민에게 경찰은 20초 이상 물대포를 쏘았 고, 그는 1미터나 떠밀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의식을 잃은 백남기 농민은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1월 15일

백남기 농민은 11월 15일 오전 4시께 뇌수술을 받았다. 뇌출혈

수술 마친 백남기 농민, 의식불명

과 뇌부종이 심해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졌다. 중앙대 학생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백남기 농민은 전남 보 성군 옹치면으로 귀농해서 밀과 콩 농사를 지었다. 1980, 90년 대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장과 전국부회장 등을 지냈다. 우리 밀과 콩을 살리고 우리 농민을 살리려고 귀경한 농민이 사 경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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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촛불문화제

15일 오후 5시,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정문 앞에서 열린 ‘백남 기 농민 쾌유 기원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백남기 농민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사과는커녕 경찰 버스가 파손됐다며 손해배상 청 구를 예고하고 나서는 정부의 ‘적반하장’에 성난 민심이 서울대 병원 정문 앞으로 몰렸다.

11월 16일

전국

전국농민회총연맹(아래 전농)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

국내외 동시다발 집회 잇따라

합, 가톨릭농민회 소속 회원들이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 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대 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 씨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강신명 경찰청장의 파면 을 촉구했다. 광주

민중총궐기 전남투쟁본부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

데 16일 오후 2시 전남지방경찰청 정문 앞에서 ‘살인폭력 진압 박근혜 정권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장대비를 무릅쓰고 100 여 명의 참가자가 모인 가운데 열린 기자회견은 이석하 전농 광 주전남연맹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대전

대전지역 시민·사회·노동·종교계 인사들은 16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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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경찰청 앞에서 ‘경찰의 살인폭력진압 규탄 대전 시민사 회 · 종교계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전북

전국농민회 전북도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북

도연합 등 전북진보연대 소속 회원들이 경찰의 살인적인 진압 을 규탄하며 강신명 경찰청장 파면을 촉구하고 나섰다. 강원

전국농민회총연맹 강원도연맹 등 강원도 내 시민단체

들로 구성된 ‘2015 민중총궐기 강원준비위원회’는 17일 강원경 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폭력 살인진압 강신명 경찰총장 을 구속”하고 “박근혜 정권은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미국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고 폭력적 진압을 강행한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재미동포들의 시위가 지난 16일(미국 현지 시각) 열렸다.

11월 18일

경찰 물대포를 맞아 쓰러진 백남기 농민의 가족 등 농민단체 회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청장 고발

원들이 강신명 경찰청장 등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미수 혐 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와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 장, 정현찬 전국 가톨릭농민회장 등 30여 명은 18일 오후 2시 서 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 관계자들을 살인미수 ·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죄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피고발인에는 강신명 경찰청장을 비롯해 구은수 서울지방경찰 청장, 제4기동단 소속 단장, 경비계장, 중대장과 성명 불상 경찰 관 2명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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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11월 21일

11월 21일 중앙대 동문 100여 명의 도보행진단이 한강다리를

중앙대 동문, 중앙대에서 서울대 병원까지 도보행진

건넜다. 80년 백남기 농민이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등) 퇴진 을 요구하면 건넜던 그 다리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책임자 처 벌을 외치면 건넜다. 오후 12시 25분 흑석동 중앙대를 출발한 도보행진단은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보신각 앞에서 잠시 집회 를 열고 ‘의혈 중앙’ 깃발을 앞세우고 다시 행진에 나섰다. 오후 4시 40분 서울대병원까지 약 11km 거리를 4시간 15분 동안 걸 어 서울대 병원 앞에 도착했다.

11월 21일 이후

서울

시민 500여 명은 11월 21일 저녁 서울 세종로에서 ‘살

더 뜨거워진 국내외 집회 열기

인진압 경찰청장 파면 촉구,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시민대회’를 가졌다. 이어 강신명 경찰청장에게 항의의 뜻을 전달하려고 오 후 7시께부터 서울 미근동 경찰청 앞으로 이동했다. 구교현 노 동당 대표 등 대표단은 경찰청 안내실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광주

11월 21일, 광주시민이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살인적

인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행진에 나섰다. 광주시민행진은 상무 지구 롯데마트 앞을 출발해 1시간 정도 행진 후 집회를 가졌다. 경북

11월 22일, 경북 상주에서 2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살인경찰을 규탄하고 경찰청장의 파면과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비는 촛불 문화제가 열었다. 시민들은 경찰청장 파면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교과서 국정화와 노동개악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

12월 3일 대전 중구 문화동에 있는 기독교연합 봉사회

관 앞에서 대전·세종·충남의 목회자 164명이 기자회견을 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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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들은 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당시 발생한 폭력진압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경찰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경남

12월 10일 경남지역 야당, 종교, 학계, 시민사회 인사

들이 ‘백남기씨 쾌유와 민생민주회복을 위한 시국선언’을 했다. 김영만 6·15경남본부 대표와 김재명 민주노총 경남본부장, 이 정희 경남민주행동 위원장 등은 경남도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 견을 갖고 “야만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민주의 세상을 열어가 자”고 외쳤다. 미국·뉴욕·로스앤젤레스·시카고·워싱턴

미국 뉴욕에서는

12월 5일 저녁 6시에,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저녁 7시에 각각 총 영사관 앞에서 한국의 ‘민중총궐기 2차 대회’와 연대한 ‘살인진 압 박근혜 폭압정권 규탄 재미동포 동시연속시위’가 개최됐다. 6일에는 오후 2시에 시카고와 워싱턴 D.C 한국 대사관 앞에서 도 연대 시위가 개최되는 등 미 전역에서 동시다발적 시위가 펼 쳐졌다. 기타

캐나다에서는 토론토 시청 앞에서, 호주에서는 시드니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 광장에서 연대 시위가 개최되는 등 해외 동포들의 2차 민중총궐기 대회와 연대한 시위가 펼쳐졌다.

11월 24일

서울

11월 24일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백남기 농민의

시민단체 발족

쾌유와 국가폭력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날 서 울 종로구 흥사단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의 물대포 과잉진압을 규탄했다.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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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민주주의광주행동’은


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26일 오후 2시 광주 동구 YMCA 무진관에서 발족식 및 시국선 언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폭력을 방치하면 민주주의는 짓밟히 고, 민생도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오랜 민주주의 투쟁 과정에 서 교훈으로 얻었다”고 밝혔다.

12월 5일

12월 5일 시민 4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도심에서 열린 2차

2차 민중총궐기대회 개최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이날 2차 참가자들은 박 대통령을 비 판하기 위해 대거 가면을 쓰고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11월 14 일 1차 민중총궐기를 불법폭력집회로 규정하고 복면을 쓴 참가 자를 IS(이슬람국가)에 비유하자 파문이 일었었다.

12월 10일

12월 10일 오후, 민중총궐기 국가폭력 조사단과 민변 11·14 경

백남기 농민 딸 백도라지 씨, 살인 물대포 헌법소원

찰폭력 대응변호인단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위헌적인 직사살수 및 살수차 운용지침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기자회견을 연 뒤 청 구서를 접수했다. 이날 회견에는 백남기 농민의 딸 백도라지 씨 가 청구인으로 참석했다.

12월 19일

12월 1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제3차 민중총궐기 대회

3차 민중총궐기대회 개최

인 ‘소요 문화제’가 열렸다. 8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청계광장~ 종로를 거쳐 혜화 마로니에 공원 앞까지 2시간 가량 행진했다. 백남기 농민을 응원하려고 그가 입원해 있는 서울대병원 인근 까지 걸어온 것이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백남기씨의 딸은 “민주주의 회복하는 그날 까지 함께 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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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천주교 단체들이 ‘박근혜 정부의 폭력을 고발하는 시국미사’를

박근혜 정부 폭력 규탄 시국 미사, 전국 동시다발 진행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 진행했다. 가톨릭농민회, 우리농촌살 리기운동본부,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등 천주교 단체들은 ‘국 가폭력에 쓰러진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와 민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합시다’라는 제목의 시국미사를 28일 오후 7시 광화문광장 을 비롯해 전국 12곳에서 열었다.

12월 26일

12월 26일, 이내창기념사업회와 중앙대 민주동문회 등은 모금

이내창 열사 기념사업회와 민주동문회, 성금 전달

한 1315만 원을 백남기 농민 가족에게 전달했다. 더불어 이들 단 체는 백남기 농민(중앙대 법대 68학번) 명예졸업장 수여를 추진 하겠다고 밝혔다.

2016년 1월 29일

1월 29일에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원들과 일반 여성들이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1000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1000배’를 올렸

2016년 2월 11일

“국가 폭력으로 쓰러진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맨 지 100일이

도보순례단, 2억 4천만 보의 백남기 농민 쾌유 염원

다 돼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커녕

다.

공안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정부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도보순례에 들어간다.” 민주노총과 백남기범국민대책위를 중심으로 조직된 도보순례 단은 10일 전남 보성에서 집결해 도보순례 전야제를 가진 뒤, 이 튿날인 11일 오전 10시 보성군청에서 출발 기자회견을 개최하 고 본격적인 도보에 나섰다. 이후 화순, 광주, 장성, 고창, 정읍, 김제, 전주, 익산, 논산, 대전, 공주, 천안, 평택, 수원, 안산, 안양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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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을 거쳐 서울 4차 민중총궐기 대회장에 도착했다. 도보행진 중에는 20일 대전에서 ‘국가폭력 규탄, 쾌유기원 100 일 전야제’, 21일 ‘국가폭력 규탄, 쾌유기원 100일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총 4000여 명이 참석한 도보순례는 16박17일 동안 400km, 2억 4천만 보를 걸었다.

2월 27일

민주노총, 전국농민회, 전국노점상연합회 등이 참여한 4차 민중

4차 민중총궐기대회 및 범국민대회

총궐기대회 및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2만여 명의 시민들은 박근 혜 정권의 실정을 규탄했다. 참가자들은 범국민대회를 마친 서 울광장에서 백남기 농민이 있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앞까 지 거리행진을 펼쳤다. 한편, 4차 민중총궐기대회에 앞서 곳곳에서 사전대회가 열렸다. 이날 공무원노조가 오후 1시 서울역에서 결의대회를 갖고 성과 연봉제 도입을 반대했고, 세종로공원에서는 반전평화대회, 광화 문광장은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 촉구대회 등이 열렸다.

3월 22일

백남기 농민의 가족들이 국가와 경찰 책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손해배상청구 소송 제기

청구 소송을 냈다. 소송 대상은 국가 외에 강신명 경찰청장, 구 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현장책임자, 살수차 운용 책임자, 살 수차 조작 경찰관 등 사건 관련 경찰관 6명이다. 청구 금액은 국 가와 이들 경찰관의 연대책임으로 2억 4000여 만 원이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백도라지 씨는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관 들을 형사고발했지만 피의자 조사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며 제대로 된 사건조사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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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박종철인권상심사위원회는 제12회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백남기 농민 <박종철 인권상> 수상

백남기 농민을 선정했다. 심사위원회는 “평생을 민주주의와 농 민의 권익 옹호에 앞장서 온 백남기 선생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리고 기적적인 회생을 바라는 이들의 간절한 마 음을 담아 상을 드리기로 했다”고 선정 사유를 밝혔다.

6월 13일

백남기 농민이 지난해 11월 12일 씨를 뿌린 밀을 7개월만인 6

백남기 농민의 야윈 밀 수확

월 13일 수확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백남기 농민을 대신해 동 료 농민들이 옷소매를 걷어붙였다. 백남기 농민만큼 수확량은 야위어서 평소 40kg로 50 ~ 60가마 나오던 밀밭은 고작 32가 마만을 내놓았다.

6월 27일

백남기 농민 사건 해결을 위한 국회 TF와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백남기 농민 사건 진상규명 국회 청문회 촉구

야당 국회의원들이 27일 오전 백남기 농민이 투병 중인 서울 종 로구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박근 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백남기 농민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를 조속히 실시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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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범죄꾼 수준에서 맴도는 국가경찰 오창익

한 노인이 홀몸으로 차벽 근처로 다가섰다. 그는 차벽 쪽으로 연결된 줄을 끌어당 겼다. 역시 혼자였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불가능한 일을 혼자서 어쩌자는 게 아 니었을 게다. 2015년 11월 14일. 차벽에 가로막힌 시위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공방이랄 것도 없었다. 13만 명이나 모였고, 그걸 ‘민중총궐기’라고 부른다 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집회 참가자 누구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 는 1974년쯤에서 멈춰버린 사람이다. 힘을 과시한다고 분노를 터트린다고 귀 기울 이거나 마음을 열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분통이 터져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 었다. 2015년 11월 14일. 맵찬 사람 불던 늦가을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랬다. 홀몸으로 차벽에 다가선 농민 백남기도 그랬다.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귀와 마 음을 모두 닫아버린 저들에게 이건 아니라며 작은 외침이라도 들려주고 싶었다. 일 종의 퍼포먼스, 그건 어쩌면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화답은 없었다. 경찰은 노인 백남 기에게 물대포를 조준해서 쐈다. 죽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상대를 시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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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고위 관료가 99%의 시민이 “개, 돼지”라고 소신을 털어놓는 세상이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해댔다. 노인의 몸으로 물대포를 견딜 수는 없었다. 단박에 쓰러졌다. 이 미 쓰러진 다음에도 조준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구조를 하려던 사람에게도 쐈고, 구 급차에까지 물대포를 쐈다. 전쟁에서도 이런 일은 없다. 그날 경찰은 공권력이 아니 었다. 그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짓밟아버리겠다는 광기만 번득였다. 힘 있는 자가 미치면 힘없는 사람이 감당할 길은 없다. 그날 경찰이 꼭 그랬다. 미친 짓을 해놓고, 그래서 사람을 거의 죽여 놓고도 경찰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경찰청장 강신명은 법적으로 판단이 끝난 사안이 아니라며 사과조차 하지 못한다고 버티고 있다. 말뿐인 사과를 어디다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말조차 하지 않겠단 다. 농민 백남기는 여전히 그날 그 모습 그대로 생사의 갈림길 그 어디쯤에서 그대 로 누워 있다. 설립 이래 경찰의 모토는 ‘질서와 봉사’다. 봉사까지는 아니라도 질서는 제대로 확 립했어야 한다. 그게 경찰의 임무다.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질서는 대통령의 심 기 따위가 아니라, 헌법질서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제21조를 통 해 보장하려는 기본적인 질서다. 헌법의 원칙이 제대로 보장되는 게 바로 국가질서 의 요체다. 그러니 청와대를 중심으로 차벽을 세우는 식의 경비 계획이나 경찰력 운용은 처음 부터 잘못된 거다. 집회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축 제처럼 신나게 즐길 수 있어야 했다. 물론, 집회 참가자들이 명백한 불법행위, 이를 테면 차량이나 상점에 불을 지르거나 다중의 위력을 앞세워 행인들을 무차별 구타 한다든지 하는 ‘현존하는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위험’이 있다면, 경찰은 공권력으로 서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가스통을 들고 다니는 극소수 의 극우세력말고는 어떤 단체나 개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날처럼 광화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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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을 설치하려면, 차벽이 아니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구체적인 위험이 입증되어 야 한다. 경찰은 시작부터 과잉이었다. 집회 관리에도 질서가 필요하다. 시민들에게만 자신들이 정해 놓은 틀 속에서만 움직여야 한다며 엉뚱한 질서를 강요하거나, 대규모 경찰력을 투입해 집회 참가자 를 위축시키는 등의 대응을 하라는 게 아니다. 헌법 원칙, 헌법 질서를 최대한 지키 는 경찰활동이어야 한다는 거다. 물대포도 그렇다. 경찰이 가진 무기와 장비는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결 코 과감한 선제공격 수단이어선 안 된다. 물대포도 경찰이 보유한 장비 중의 하나이 니, 필요한 경우엔 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꼭 필요한 경우여야만 한다. 물대포가 아 니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가 생겼을 때, 합리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하 여야 하고, 쏠 때도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 이건 그저 희망사항이 아니라, 법령에 규정된 전제조건이다. 물대포가 아니면 살상을 막을 수 없는 경우쯤이 여기에 해당 한다. 농민 백남기가 홀몸으로 차벽에 다가선 상황은 결코 물대포를 쏠 수 있는 상황 이 아니었다. 물대포 발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날의 물대포는 경찰이 대통령을 위해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과시일 뿐이었 다. 시민의 집회와 시위에 대한 경찰의 뿌리 깊은 적대감의 표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쓰러진 사람에게 물대포를 계속 쐈던 건 그저 치졸한 보복일 뿐이었 고,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일 뿐이었다.

이런 식의 국가범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길거리에서 물리력으로 공방을 하 던 시절에는 이한열, 강경대, 김귀정 등의 희생이 있었고, ‘민주정부’라던 노무현 정 부 때는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맞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세 월은 훌쩍 지났지만, 정작 변한 것은 별로 없다. 시위대는 화염병과 짱돌, 그리고 각 목까지 모두 내려놓았지만, 경찰의 장비는 진화를 거듭해왔다. 예전 같이 최루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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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을 뿐, 최루액을 섞어 쓸 수 있는 다양한 장비를 갖고 있다. 최루액을 섞어 물 대포를 쏠 수도 있고, 이번처럼 조준 발사를 통해 인명을 해칠 수도 있다. 도저히 힘 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공방은 없어졌고, 그저 일방적인 폭력만 있을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가범죄 수준의 폭력이 있었는데도, 진상규명 활동이나,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 작업, 책임자 처벌이나 징계 따위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거 다. 말뿐인 사과조차 없는 상황이니 더 말할 게 없다. 겨우 하나 남은 국가작용은 국 회 활동뿐인데, 청문회 개최 등 말만 오갈 뿐, 구체적인 진전은 아직 없다. 이런 식이 면 제2, 제3의 희생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한열을 죽인 경비 책임자, 당시 서대문 경찰서장은 잠시 뒤로 빠지는 듯 했지만, 어떤 처벌도 징계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민중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경무관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이한열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지 않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계속해서 사안이 마무리될 때까지 말하기.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기 등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 한 일이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경찰만을 감시하는 전 문 감시기구를 설치하는 법을 만들 수도 있고, 살상 위험이 있는 무기와 장비는 통상 적인 집회 시위에서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수도 있다. 김대중, 노무현의 대선 공약이었던 자치경찰제의 전면적 시행을 단행하 는 법을 만들고, 전투경찰 제도를 아예 폐지할 수도 있다. 꼭 법을 만들거나 고치는 게 아니라도 청문회를 개최하거나, 예산을 통해 경찰을 통제할 수도 있다. 방법이 없 는 게 아니라, 문제는 의지다. 당장 우리부터라도 확고한 의지를 다짐하자. 다시는 이런 범죄가 반복될 수 없다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만이 저 더러운 국가범죄를 이 땅 에서 추방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일 것이다.

오창익_인권연대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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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할 일을 하려 한다 백도라지

아버지가 쓰러지신 지 벌써 7개월이 넘어간다. 워낙 평소에 건강하셨던 분이라 지 금까지 버티고 계신 것이라 생각된다. 2015년 11월 14일 아버지는 경찰의 물대포 에 맞아 쓰러지셨고, ‘외상성경막하출혈’, 즉 뇌출혈 수술을 받으셨다. 두개골을 열 어 출혈을 제거하는 수술이다. 수술 이후 뇌가 붓는 것을 우려해 두개골은 덮지 않았 고, 아직까지도 덮지 못한 상태다. 머리 수술 부위는 지금도 터져서 피가 나고 꿰매 고를 반복하고 있다. 머리에 욕창도 생겼다. 한쪽에 두개골을 열어놓아 그쪽으로 머 리를 괼 수가 없어 반대쪽으로만 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고 호흡기에 의지 하고 계시고, 배변활동도 당연히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침대에 배변 패드를 깔아놓고 있는데, 머리 쪽에도 출혈이 워낙 많다보니까 위아래로 패드를 깔아 받치 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감염 수치가 내려가지 않고 항생제 내성균이 발견되어 중환 자실 안에서도 격리실로 옮겼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신 게 그날 저녁 7시 경이고 나는 7시 반 경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물대포를 맞으셨다고 하니 그냥 젖은 정도겠거니 싶었다. 시위 진압에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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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가 쓰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저 시위대들을 물에 젖게 해서 집에 빨리 돌려보내려는 용도라고만 생각했다. 이 렇게 사람을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장비인 줄은 몰랐다. 그날 9시 경에 응급 실에 도착해서 아버지를 처음 보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눈을 뜬 적도, 의 식이 돌아온 적도 없다. 대뇌의 절반 이상이 손상되거나 뇌뿌리가 손상되면 의식을 회복하기가 어렵다는데 주치의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두 가지 경우 모두 해당된다고 한다. 의식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사고 7개월이 넘어간 지금, 정부로부터 어떠한 형태의 사과도 없다. 20대 국회가 개원하고 각 상임위별로 각 부처의 업무보고가 진행되었다. 6월 29일이 경찰청 업무 보고 날이었는데, 강신명 청장의 답변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잘 안 보이는 와중에 쏜 것이다. 나도 아홉시 뉴스를 통해 한 농민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장비가 허술한 탓이었으니 사 과는 못하겠고 이참에 살수차 모니터는 정비하겠다.” 참고로 경찰청 업무 보고 때 방 청을 신청했으나 안행위 새누리당 간사가 내가 “이성을 잃고 격분할까 봐 7분만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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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을 허락하겠다”고 해서 가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이 국회인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워 나의 방청을 방해했다. 무엇이 두려 워서 나를 못 오게 하는지? 자기네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는 있구나 싶었다. 이 사건은 국가폭력 사건이자 한 시민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형사 사건이다. 어 떤 사건이 일어났으면, 공권력이 해야 하는 일은 범인을 잡아다가 조사해서 재판에 넘기고, 구형을 해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범인도 공권력이요, 범인을 수사하는 주체도 공권력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절차는 이렇다. 범인을 잡으러갈 필 요도 없다. 애초에 도망가지도 않았고, 다들 제자리에서 승진까지 하면서 근무 잘하 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확실한 공무원들이 범인이다. 검찰은 다른 사건 에 비해 수사에 큰 노력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일단 범인이 누군지 다 알고 있으 니까. 그날을 기록한 영상과 사진도 수없이 많다. 지금까지 이 사건 의 수사를 마무 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검찰이 손을 놓고 있다는 뜻밖에 안 된다. 정부는 사과도 하지 않고 어떠한 의견도 우리 가족에게 직접 전하진 않지만, 끊임 없이 아빠와 우리 가족을 의식하고 있다. 지난 6월 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 엔 인권이사회 총회에서 한국 관련 보고서가 채택되었다. 이 보고서에 기재된 표현 을 순화하기 위해 경찰청에서는 무려 세 명을 제네바까지 보냈다. 그리고 유엔 인권 이사회 총회를 의식해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검찰이 6월 16일, 17일 양일에 걸쳐 살수 경찰 2인을 불러서 피의자 조사를 했다고 한다. 내가 고발장을 낸 것이 지 난 11월 18일이고 고발인 조사에 참석한 게 12월 17일인데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서야 피의자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유엔 인권이사회 총회에서는 외교부 국제기구 국장 유대종이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했다”라고 발표를 했는데, 그 발언을 하기 위해 피의자 조사를 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왜 외교부까지 한 시위 참석자가 부상 입은 사건에 관여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여러 부처가 나서서 이 사건에 관여하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모아서 검찰에서 수사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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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수사만 제대로 진행했어도 이 일로 국회 청문회를 요구할 필요도 없었고, 유 엔까지 가서 이 사건을 알려야 할 필요도 없었다. 검찰은 도대체 얼마만큼 많은 사람 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어서 수사에 착수하기를 바란다.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대책위가 꾸려졌고, 서울대 병원 후문에 농성장이 만들어졌 다. 사고 다음날부터 매일 오후 4시에 미사가 열리고, 목요일마다 천막에서 촛불집 회를 한다. 많은 시민들, 천주교 신자들이 참석해주신다. 잊지 않고 동참해주시고 마 음 보내주시는 많은 분들 덕택에 가족들도, 대책위 분들도 많은 힘을 얻고 있다. 각 지역 농민회와 생협 분들이 돌아가면서 농성장을 찾아주신다. 나는 회사에 다니면 서 때로는 기자님들을 만나고, 필요하다면 국회의원님들도 만나고, 주말에는 1인 시 위를 하고 틈틈이 병원에 가서 아버지 면회를 한다. 거대한 악(나의 조국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과 싸운다는 것은 정말 끝 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있는 느낌이다.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디트리히 바그너라는 분이 물대포에 맞아 실 명을 하게 되셨는데, 이 사건의 재판이 마무리되는 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독일에서 5년이 걸렸다면 도대체 한국에서는 몇 년이 걸린다는 뜻일까, 싶기 도 하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할 일을 하려 한다.

백도라지_백남기 농민의 장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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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백남기 농민은 왜 물대포를 향해 나아갔을까 유영훈

백남기 형님이 물대포에 쓰러진 지 벌써 7개월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병상에서 아무런 의식도 없이 호흡기에 생명을 의지 하고 계신 형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형님은 의료법상 호흡기를 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약물과 의료기계를 통해 생명 을 연장할 뿐이지 뇌뿌리를 비롯하여 뇌 손상이 심하여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없 다고 합니다. 제발 기적이라도 일어나 한 순간만이라도 눈을 떠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눈이라도 맞춰본다면! 한마디라도 좋으니 그리도 사랑하고 아껴주던 손자 지오에게 인사라도 나눌 수 있다면 ! 가족들의 마음속은 이미 숯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도대 체 무슨 연유로 이처럼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인지 분노와 원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워낙에 평생을 의롭게 살아온 형님께 닥친 일인지라 이것도 무슨 까닭이 있지 않을까 하며 오늘의 시대와 역사, 그리고 형님의 살아온 행 적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여지를 찾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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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역사에서 우연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백남기 농민 사건도 우연히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건이 발생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기 형님의 가족은 물론 가까운 지인들과 많은 동료들은 그날 그 순간 왜 형님께서 시위대의 선두에 서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형님께서 물대포를 맞게 된 것도 결국은 시위대의 맨 선두에 계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그 러한 일은 평소의 행동이나 성품에 비추어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농민운동가로서 형님은 대중선동가로서보다는 조용한 조직운동가로서 사람 사 이의 친밀한 소통과 교감을 중시하면서 당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행동은 내 켜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의 사건현장이 담긴 동영상에서는 시위대 열 속에서 뚜벅뚜벅 차벽을 향해 나아가는 형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랐던 그 순간 형님의 행동은 분명 형님의 의식적인 몸짓이었으며 뭔가 순 간적으로 앞으로 나서도록 하는 내면의 동기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동기는 그 즈음 형님께서 주위 분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항거하였던 형님으로서 는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에 큰 분노를 느끼셨으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애 썼던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이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허탈감과 분노의 언사들을 자주 토로하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날 서울 농민대회를 향해 집을 나서던 형님은 평소처럼 “별일 없 이 잘 다녀올 것이네”라는 인사말을 남기셨을 뿐 특별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혼잡한 집회 현장에서는 어쩌다 보성군 농민들의 대열에서 멀어져서는 시위용 상여 옆 풍물패의 흥겨운 남도가락에 어깨춤을 추며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날 함께 했던 보성 농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상여를 따라 어깨춤을 추던 장면이 형님의 마지막 모 습이었으며 그 이후는 동영상에서 확인 되는대로 시위대의 선두에서 차벽 앞에 서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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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그날 사정없이 몰아치는 물대포와 그 물대포에 무참히 부셔져버리는 상여,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물대포를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의 대열 속에서 ‘분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물대포를 향해 앞으로 나섰던 것이며 결국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결단을 하셨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형님의 이 같은 결단, 투신의 동기는 단순하게 반민주적인 정치권력 을 향한 ‘분노’ 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의 선택이지만, 한 인간의 삶이 총체적으로 응축되어 드러나는 계기일 것이며 농민 백남기, 가장 백남기, 민주화 운동가 백남기, 농민운동가 백남 기가 지녔던 삶의 에너지가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 때 문입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남북관계가 파탄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서 많은 국민들이 좌절하고 허탈해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산촌의 한 농부가 서울의 한복판에 누워있는 모습은 얼핏 보면 우연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 소 백남기 형님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분명 그 속 에 어떠한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초야에 묻혀 있던 한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제 나름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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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 가능한 근거는, 백남기 농민이 그동안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지 는 않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삶을 되돌아보라는 경종을 울려주고 있고 있다는 제 나름의 믿음입니다.

<호랑나비>라고 들어보셨는지요? 물론 대중가요의 제목과도 같습니다만, 이 호랑 나비는 형님께서 주위의 지인들과 결성한 친목계의 이름입니다. <호랑>은 호주머니 의 옛말이고, <나비>는 <나누고 비운다>는 말의 첫글자입니다. 즉 <호랑나비>는 ‘가 난한 농민들이 비록 작고 비어 있는 주머니이지만, 우리끼리라도 서로 나누고 비우 며 즐겁게 살아보세!’ 하는 작은 공동체 세상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인가요? 재산을 빼앗기 위한 형제들, 가족들 간의 혈투가 빈발하는 작금의 세태와는 전혀 달리 오히려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빈 주머니를 나누고 비우자고 하다니요! 전라남도 보성의 산촌에 사는 가난한 농민들이 연출해내는 작고 따뜻한 공동체 세상의 모습은 오늘날 각박하게 갈라져가는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경종을 울려줍 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공동체가 해체되어 심각하게 파편화 되어가고 이웃과 자연과 의 연대가 사라져가는 위기의 시대를 성찰케 하는 훌륭한 거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백남기 농민은 지금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에 눈도 못 뜨고 말 한마디 못한 채 누워계시지만, 우리 모두에게 서로 돕고 나누며 살라고 <호랑나비의 공동체 정신>을 일깨워주고 계신 것입니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이후부터 가족은 물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는 천주 교회의 미사, 농민동지들의 릴레이 가두농성, 사회각계의 성원과 후원. 이러한 모든 연대와 협력은 결국 호랑나비 정신이 오늘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는 징표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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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형님의 인격을 이해함에 있어 ‘말’을 사용하는 형님의 방식과 태도입니다. ‘말’은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남을 해치는 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형 님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로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본질과 본성을 표현해 내고 이를 통해 그들과의 관계를 맺는 독특한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백도라지’ ‘백민주화’ ‘백두산’은 자녀들의 이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시대적 명제를 이름 붙여주며 시대정신을 견지하셨던 철저한 태도. 심 지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도 ‘오이삼’(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날짜로 이름 지 은 개)과 ‘팔일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로 이름을 지으며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 려 노력하셨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소통과 교감을 중시한 형님인지라 갈등과 다툼이 있는 곳에 서는 중재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형님은 마음씨가 따뜻하고 온화할 뿐만 아니라 애틋한 생명 존중과 모심 의 태도를 견지하셨습니다. 물질보다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형님은 가장으로서, 2남 1녀의 아버지로 서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많았을 것이며 그 마음을 말로 대신하시곤 하였습니다. 자 녀들과의 통화에서도 ‘오, 사랑하는 우리 따님!’이라며 존대와 사랑의 정을 듬뿍 전 해주었으며 특히 ‘클레오파트라보다 이쁜 당신’이라며 부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표하셨습니다. 가까운 후배의 부인들에게는 부드러운 말씨로 ‘존경하고 사 랑하는 제수씨!’라고 친근감을 표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 그래도 구수한 전라도 말씨인데 후배들에게도 ‘어허 그런가?’ ‘이 렇게 이렇게 해보면 어떻겠는가?’하면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경청해주는 ’섬 김과 경청의 리더쉽‘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인정이 넘치는 형님이셨지만, 그렇다고 형님이 온정주의적으로 남의 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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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칙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시지 않았습니다. 따뜻하고 온화 한 모습이지만,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크게 분노하고 호되게 꾸짖기도 하였습니다. 대체로 공적인 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 중에 하나가 ‘권위주 의’ 태도입니다. 평생을 운동의 현장에 몸담아온 활동가로서 형님은 친근한 농민의 벗으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형님의 소탈한 모습으로 인해 많은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형님은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오 랜 현장 활동으로 형님은 보성군 지역사회 뿐 아니라 전라남도 지역에서 지도적 위 치에 있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선거철만 되면 출마를 권유받았습니다. 그렇지만 형님은 늘 일언지하에 그런 제의를 거절하였고 오히려 자신보다는 능력 있는 후배 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형님은 평생 정당에 몸을 담은 적 이 없지만, 지방선거에서 아끼는 후배를 당선시키기 위해 직접 군소야당의 당적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형님은 남 앞에 나서거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늘 사 람들 속에서 함께 하시려 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 려던 형님이 어째서 저렇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온갖 사람들이 당신이 깨어 일 어나기를 염원하도록 만들었는지 참 이해가 안가는 일”이라고 형수님은 말씀하십니 다. 그리고 이것도 형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농업 농민 농촌을 최고의 중심가치 로 삼아온 농민운동가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69 년을 묵묵히 살아온 한 농민이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지키려했던 가 치는 다름 아닌 ‘農’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형님의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는 오랜 자기 수양과 성찰을 통해 자기절제를 스스로 해낼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학시절 수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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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를 피해 숨어 있던 명동성당과의 인연으로 형님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청년 시절 몇 년간을 엄격한 천주교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소에도 늘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기도생활에 충실하셨던 형님은 자기 성찰을 통해 근본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은 묵상과 성찰 의 깊이가 더해져가고 있었다고 지인들은 말해줍니다. 결국 이 같은 형님의 모습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적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형님이 추구한 진리의 현장은 다름아닌 생명살림의 터전인 농업, 농민, 농촌 이었던 것입니다. 형님에게 ‘農’이란 우리 모두가 더불어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생명’의 원천이며 인류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선택해야 할 희망의 대안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농본주 의’적 삶인 것입니다.

면소재지는 1만 원, 광주는 2만 원, 서울은 5만 원! 형님이 밖으로 출타할 때 행선지의 거리에 맞춰 형수님께서 형님 손에 쥐어주는 용돈입니다. 그것도 다 쓰지 않고 남겨서 돌아오는 날은 책상 위에 그대로 보관했다 가 다음에 나갈 때 다시 들고 간다고 합니다. 형님은 휴대전화는 물론 그 흔한 신용 카드 한 장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참 검소한 삶입니다. 형님은 늘 검정고무신을 즐겨 신으셨습니다. 광주를 가거나 심지어 서울엘 올라 갈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는데, 당시 도시문명에 조금은 주눅 들어 있던 젊은 후배 농민들의 눈에 형님의 검정고무신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검정고무신에 자신감을 얻은 후배들이 모두 덩달아 신기 시작했 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비록 작은 예이지만 , 형님이 농민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어떠했는지 느낄 수 있 는 대목이며 농민이 ‘천하지대본’으로서 제 자리 찾기를 바라셨던 형님의 또 다른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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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입니다. 그리고 80년대 소 키우다 빚을 진 이후 여유 있게 가정경제를 꾸려보지 못한 형님 이 오늘날까지 잘 살아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형님께서 클레오파트라보다 이쁘다고 찬사를 보내는 반려자 박경숙 여사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늘 끊이지 않는 막걸리 손님들에게 술상 차려내는 일을 기꺼이 해주신 형수님은 산촌의 가난한 생활이 힘들었을 텐데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으십니다. 세 자녀 또한 너무도 잘 성장했습니다. 평소에 형수님께는 “혹시라도 목숨이 위중한 상황을 맞게 되더라도 생명을 연장 하기 위한 조치는 일체 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누누이 당부하셨답니다. 지금 병상에서 호흡기에 연명하고 계신 모습은 형님의 평소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신 형님께서는 생명을 연장하려는 조치들에 대해서는 매우 구차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장시간 계시도록 하는 일이 가족들로서도 마음 편한 일 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님의 그간 삶이 그러했듯이, 조용하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농업, 생명과 평화의 의미와 가치를 알려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47년생으로 올해 70세가 되신 백남기 형님은 여전히 생명과 평화의 여정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유영훈_80년대부터 백남기 선생과 함께 가톨릭농민운동과 우리밀살리기운동을 벌여왔다. 가톨릭농민회 부회장, 4대강 팔당 유기농대책위원장과 (사)팔당생명살림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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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부서진 民主, 공권력에 쓰러진 백남기 선배님에 대한 예의 신지영

‘의혈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 독재정권 시절 4000명의 중앙대생들이 한강을 도하했던 일을 두고 생긴 말이다. 그리고 이를 완벽히 재현하진 못 했지만 재학생부터해서 졸업생, 그리고 그 외의 다 양한 사람들이 함께 또다시 의혈기를 들고 한강을 건넜다. 바로 작년 11월 21일, ‘백남기 선배님 쾌유 기원 도보행진’ 때다. 이 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중앙대학교에서부터 서울대병원까지 이르는 긴 거리를 행진했던 이유는 과거의 한강도하와 비슷했다. 민중들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않는 정부를 향한 항의 였고, 또다시 정권에 의해 스러진 선배님을 위한 행동이었다. 1차 민중총궐기를 갔을 때만 해도 이런 이유로 행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2학기 내내 정부에서 밀어붙이는 노동개악에 관해 알리는 활동을 했었고, 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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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으로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 그 날 내 동기는 처음 간 집회에서 나를 만나지도 못 하고 캡사이신을 온 몸에 맞은 채로 택시에 실려 집에 갔고, 나는 운행하지 않는 지 하철 때문에 일행들을 놓친 채 서울 시내를 배회해야 했다. 심지어는 차벽 때문에 길 을 못 찾아 버스 밑으로 기어서 넘어가기도 했다. 경찰들은 집회가 시작되기 한참 전 부터 차벽을 세워놓고, 버스들을 서로 묶어놓는 걸로 모자라 기둥에 꽁꽁 동여맸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미끄러지도록 기름을 뿌려놨고, 사람들이 움직이자 물대포와 캡 사이신이 쏟아졌다. 바로 거기서 한 농민이 물대포를 직사로 맞고 응급차에 실려 갔 다. 언론은 그 날의 시위에 대해 ‘폭력시위’라고만 했다. 그 날 쓰러진 농민이나, 그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전문 시위꾼이 됐다. 사람들이 그토록 외 쳤던 노동개악 반대나, 쌀 시장 개방, 국정화 반대 등의 구호를 말해주는 언론은 어 디에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날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한 농민의 이야기는 아 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농민이 바로 백남기 선배님이었다. 대학생 시절에도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선 배님은 노인이 돼서도 민중의 생존을 위해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게 조준된 물대포는 과거 독재정권의 폭력과 다를 바 없었다. 시위대의 폭력을 막기 위한 저지수단이 아닌 정부를 향한 목소리를 틀어막기 위한 국가의 폭력이었고, 그 폭력에 의해 선배님은 쓰러졌다. 전문 시위꾼도, 소위 말하는 빨갱이도 아닌 그는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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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었을 때는 그렇게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을 뿐이고, 민중총궐기에 나온 이유도 정부가 약속했던 쌀값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게 됐을 때는 그런 상황들을 믿기 어려웠다. 어렸을 때 부터 아빠의 소위 ‘민주화 투쟁’에 대한 자랑을 들으며 자라온 나로서는 이런 삶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싸워서 쟁취한 ‘민주’가 또다시 부서진 걸 온 몸으로 느끼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래서 적어도 중앙대학교 학생들만이라도 이 사 실들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믿는 모 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선배님이 살아온 삶에 대 한 예의라고 느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 제안에 동참했다. 백남 기 선배님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행진에 함 께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거리를 같이 걸었다. 행진하는 동안 길거리의 사람들은 우리를 생소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조차도 이 행진이 ‘생소했다.’ 2015년의 대한민국에서 민주(民主)를 외치며, 공권 력에 쓰러진 국민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행진이라 니. 민중총궐기 당일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을 그렇게 겪고 있자니 점점 더 화가 났다. 그 누가 거리 에 정당한 요구를 하러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물대포를 맞게 될 줄 알았을까. 심지어 그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이에게 정부가 사과 한 마디조차 제대로 못할 줄이야. 내가 사는 이 나라가 조금의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렇게 충격적이었다. 그 리고 충격적인만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간단 했다.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될 수 있게 행동하고 또 행동하는 것뿐이다. 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기원하는 도보행진을 한 지 벌써 반년이 넘게 지났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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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나는 지금이 2015년의 대한민국이 맞느냐고 화를 냈었는데, 1년이 지난 현재도 많은 것이 그대로다. 여전히 선배님은 쓰러져계시고, 어떤 책임자도 처벌은커녕 사 과조차도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민주노총 한 상균 위원장이 5년형을 선고받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만 하는데 왜 내가 보는 세상 은 그대로 멈춰있는 것만 같을까. 서울대병원에 도착했을 때, 백남기 선배님의 자녀 분들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우셨다. 심지어 그 날조차도 정부가 민주노총 사 무실을 압수수색한 날이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감당해야하는 건 약자들만의 몫 이었다. 모두가 이제는 민주화가 됐다고 말하는 시대에 국민이 공권력에 쓰러졌다. 더 이 상 죽이지 말라는 외침을 내기 위해 거리에 나왔다는 이유로 감옥에 5년을 갇혀있 어야 한다. 수많은 노동자가 각종 산업재해로, 구조조정으로, 노조탄압으로 죽어나 갈 때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죄가 되지 않는 시대다. 이 모든 것들을 기 억하고 바꿔나가야 하는 건 오로지 일반 민중들, 바로 우리들이다. 선배님을 기억하 는 건 어쩌면 한 사람만을 기억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해 기 억하는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행동하 고 또 행동하자. 신지영_중앙대학교 사회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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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의 농성장 백남기대책위 최석환 사무국장을 만나다 강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2015년 11월 14일. 그날 이후 겨울이 지나 봄이 왔고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서울대학교병원 혜화동 방면 입구에 차려진 농성장 을 찾은 날은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쓰고 농성장 맞은 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문득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라 는 노래가 떠올랐다. 대학시절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라는 가사가 가슴을 후벼 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신 호등 불빛이 바뀌었고 나는 농성장을 230일째 지키고 있는 전농 대외협력부 장이자 현재 백남기대책위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최석환 씨를 만나러 농 성장으로 갔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날은 어제였지만 갑자기 청문회 문제로 국회에서 약속 이 잡혔다며 하루가 연기된 만남이었다. 국회 청문회가 어떻게 준비되고 있 는지부터 물었다.

서울대학교 병원 앞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농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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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환(이하 최)

야당 중심으로 국회에

않았겠죠.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사건

서 8개 의원실이 청문회 준비 TFT를 구

이 일어나고 며칠이 안 되었으니까 경찰

성했어요. 그분들하고 논의를 진행 중이

들도 함부로 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

지요. 전망은 별로 좋지 않아요. 일단 밀

날부터 여기서 지내고 있죠. 잠은 순번

어붙인다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을 정해서 돌아가면서 자는데 제 사무실

좀 걸릴 거 같아요. 7~8월은 임시국회가

은 여기가 된 셈이죠.

열려도 공전될 것이라고 하네요. 9월 정 기국회에서 열리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청문회 말고도 국회에서 할 수 있

떤 사람들인가요?

는 것도 찾아보고 있고요.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

대책위에 가입된 단체가 120개

정도 되지만 주로 농민단체들 중심으로 강곤(이하 강)

농성장에는 초기부터

농성장을 지키고 있죠. 일주일씩 맡아서

결합을 하셨나요? 농성장을 차릴 때 어

전농, 여농, 카농 등 농민단체들이 돌아

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가면서 농성을 하고 있고 단체별로 비정

처음부터 결합을 했죠. 14일 선

기적으로 농성장을 방문해주시고 있고

생님이 쓰러지시고 바로 여기(서울대학

요. 농성 초창기에는 겨울이라서 농사

병원) 응급실로 들어오셨어요. 그 다음

를 짓지 않는 형님들이 많이 올라오셨어

날인 15일에 자리에 집회신고를 냈는데

요. 3월 초에 많이들 내려가셨죠. 농번

원래 집회신고는 48시간이 지나야 효력

기가 시작되었으니까. 그래도 5월까지

이 발생하거든요. 14일이 토요일이었고

는 농민단체 활동가들이 매일같이 농성

바로 다음 주 월요일, 16일에 집회신고

장에 왔었는데, 지역별로 한두 명이라도

효력도 발생하기 전에 그냥 천막을 쳤

돌아가면서 매일 왔었는데 5월 중순부

죠. 경찰이 방해하거나 마찰은 없었어

터는 너무 바쁜 시기라 그것도 힘들어졌

요. 아마도 사대문 안이었으면 그렇지

죠. 당분간은 인원을 최소화하면서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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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명 정도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로 인해 물대포의 위험성이 알려지면서 영국의 시민 사회가 경찰의 물대포 도입을 막아내게 된 것이다.

농성장에는 세 동의 천막이 있다. 하나는 상황실로

인권단체와 법률단체가 모여 만든 ‘민중총궐기 국가

쓰고 있고, 그 다음 천막은 각종 홍보물 전시와 함께

폭력 진상조사단’에서 영국과 독일 활동가를 초청해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종이학’을 접는 곳이다. 그리

열린 심포지엄이었다.

고 나머지 한 동은 창고로 쓰고 있는 듯 보였다.

강 최

물대포를 맞던 그 동영상이 너무나

농성 초창기만 해도 천막이 네 동

충격적이었기에 물대포 문제가 많이 부각된

이었어요. 그 네 동 천막이 꽉 찰 정도로 사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백남기 선생님이 농

람이 많았죠. 그러다 연말연초에 사람들이

민이셨고, 평생을 농민운동에 헌신하신 분

한번 쑥 빠져나가고, 5월 중순에 쑥 빠져나

이고, 당시 민중총궐기에 농민단체는 ‘밥쌀

가고. 그래서 천막 한 동은 접었죠. 매주 목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고 참가했잖

요일 촛불집회를 여기서 하는데 그것도 초

아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반에는 매일 했어요. 두어 달 정도 그렇게

가 부각되지 않은 듯해요.

하다가 주 2회로 줄였다가 지금은 주 1회로

하고 있죠. 그렇지만 미사는 매일 4시에 계

런 논의가 있었어요. 백남기 선생님이 농

속 진행하고 있어요.

민대회에 참가하러 오셨다가 그렇게 된 것

사건이 일어나고 전농 등에서 그

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가 농민만의 문제는 며칠 전 <집회에서 물대포 사용 문제와 경찰의 집회

아니다, 농민만이 아니라 노동자, 빈민, 학

대응 개선을 위한 국제 심포지엄>이 국회에서 열렸

생, 여성 등 민중들이 자기 문제를 가지고

다. 백남기 사건이 발생하고 물대포 문제에 대해 알

모인 민중총궐기였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아보던 중 영국 런던의 경찰이 물대포를 도입하려다

정부와 경찰이 차벽을 쌓고 물대포를 쐈던

무산된 사례가 있음을 발견했다. 독일에서 물대포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래서 농민 의제도

인해 시위 참가자가 실명을 하면서 문제가 되었고 그

중요하지만 이것은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훼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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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한 더 큰 문제라는데 의견이 모아진 것이

여하는데 학생들에게 ‘혹시 부모님이 농사

죠. 농민이기 이전에 공권력에 의해 한 시민

짓는 분?’하고 물어보면 한 명도 없는 거예

의 생명이 위협을 받은 문제니까요. 물론 백

요. 친척 중에 농사짓는 사람을 물으니 3분

남기 선생님 사건과는 무관하게 농민의 의

의 1정도. 그러니 농업 문제에 관심이 없는

제가 예전처럼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게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죠.

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죠. 밥쌀 문제라는 것 도 밥을 짓는 쌀까지 수입이 완전 개방되면

백남기대책위에서는 국가폭력에 대한 책임자 처벌

서 그것 때문에 쌀값이 폭락하고, 식품의 안

과 대통령의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를 요구하고 있

전성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데 예전에 비

다. 결국 이 요구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지 여부가

하면 이런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게 분

농성장의 앞날과 관계될 것이다. 예상 밖으로 총선

명해요. 물론 먹거리 문제는 상대적으로 관

결과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낙관적으로 전망을 하기

심이 높아졌지만 그것이 정부 정책의 변화

는 쉽지 않다.

를 가져오는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에는 어 려움이 있죠.

80~90년 초만 해도 대학생이나 월

도에서 있었던 농민대회에서 두 분의 농민

급쟁이들 부모님은 대부분 시골에서 농사짓

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정부 대응과 현 정부

는 분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점

의 대응을 비교하고 있어요.

도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닐까요?

저는 99년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달 동안 실천단으로 활동했어요. 집회하고

그때만 해도 선배들이 농활이 망했다고 했

선전전하고. 그 실천단 활동이 제가 지금 전

지만 꽤 큰 규모로 농활이 진행되었어요. 제

농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사실 많

가 전농에서 대학 농활을 담당하고 있거든

이 답답해요. 농성하면서 어려운 건 별로 없

요. 여기 농성장에서도 몇 번 농활 교양을 했

어요. 그런데 3~4월, 선거 전까지 정말 힘

어요. 한 번 교양을 할 때 20여 명 정도가 참

들었어요. 2월에 도보순례를 하고 3월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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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2005년 서울 여의

그때 저는 대학생이었고 그때 한


특집_백남기 선배님의 쾌유를 빕니다

트인다는 최석환 사무국장에게 농성을 하는데 구체 적인 도움이나 필요한 것을 물었다.

오늘은 아침에 신학대 학생들이 찾

아왔어요. 그렇게 지지방문을 오면 같이 영 상도 보고, 제가 대책위 활동에 대해 설명도 해드리고, 나름 프로그램이 짜져 있어요. 편 하고 와서 있을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불 인터뷰를 마치고 최석환 사무국장이 농성장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편한 자리이지만 많이들 들려주시면 좋겠어 요. 저한테 연락주시고 오면 더 좋고요(최석

었는데 이제 뭘 해야 하나, 할 수 있는 게 진

환 대책위 사무국장 010-2551-4460).

짜 농성밖에 없었어요. 농성장을 지키고 있 는 것밖에. 검찰에 고발도 했고, 국가인권위

인터뷰를 마치고 농성장을 나서는데 빗줄기가 멎어

에 진정도 했고. 그런데 사과하는 사람 하나

있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에는 이런 가사도 있

없고, 처벌은커녕 검찰이나 경찰은 수사도

다.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물대

안 하고. 막막했죠. 국회에 가도 다 총선 뒤

포에 쓰러지지도 말자/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이

에 보자고만 하고. 행정부와 사법부에는 더

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는데 입법 부인 국회도 임기 막판이라 무슨 이야기를

2005년 전용철, 홍덕표 농민과 2016년 백

나눌 상황도 아니었던 거죠. 농성밖에 할 게

남기 농민 사이를 지키고 있는 최석환 사무

없고, 농성만 해야 하는 상황, 농성 말고는

국장. 이 기막힌 인연을 뭐라 해야 할지 모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바로 그게 힘들었어요.

르겠지만, 그가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은 분 명해보였다.

지금은 그래도 청문회라도 기획할 수 있으니 숨통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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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상암동 노을공원 난지캠핑장에서 봄맞이 소풍 겸 치맥파티가 열렸다. 속초의 ‘만석닭강정’이 배달되어왔고, 차가운 생맥주가 곁들여졌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뒤섞인 숨쉬기도 힘든 최악의 기상조건이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우리가 언제 이런 낭만적 풍경을 가져보았던가. 혼몽한 분위기에 취했다.


만주_2016년 1월. 얼어붙은 만주 하이라이얼 호수를 걷는 모습


멈추지 말고, 달려! 이원혜

문창 85, 희망제작소 후원사업팀장 인터뷰

김선주·이원근 글

이원근

시작은 별다를 게 없었다. 문이 열리자 그들이 들

면서 문예지 <노동해방문학>(이하 ‘노해문’)을 만

어왔고, 나는 잡혀갔다.

들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

평화로운 오후였다. 차창 밖은 볼 수 없었지만 아

이 지역 노동자문예운동을 조직하고 창작활동과

마 거리도, 오가는 사람들도 다들 평온했으리라.

이론을 펼치던 곳이었다. 안기부는 당시 사노맹이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채 이럴 때를 대비해

전국 90여 개 노조와 대학에서 1200여 명의 조직

만들어놨던 체크리스트를 되뇌었다. 침착하자, 침

원을 거느렸다고 발표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돌입

착하자…. 하지만 그 틈새로 불안과 공포, 두려움

했다. 1992년까지 모두 300여 명이 기소되면서 해

과 홀가분함이 뾰족한 칼날처럼 생각을 찢으면서

방 이후 최대 조직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돼버렸다. 1990년 11월 19일, 결혼식을 올린 지 꼭 열흘이 지나서였다.

연남동 대만야시장에서 만두와 탕수육 등을 시켰

스물다섯 살, 나는 남산 안기부로 연행되었다.

다. 소주 한 잔으로 마른 목을 축이는 동안 한 쪽 면 을 노랗게 튀긴 고기만두가 먼저 나왔다.

이원혜는 1989년부터 노동해방문학실에서 일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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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입맛에 맞는가. 이게 요즘 뜨는 대만식이라는

게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서 면민회의

데.

를 하는 건데 나중에 경성면민회장도 하셨

국수, 만두 원래 좋아해. 부모님이 모두 이

어. 그런 면민회가 모이고 모여 이북5도청

북사람이라서 그런가봐. 아빠는 함경도,

이 되는 거지. 아빠 형제분들 중에 똑똑한

엄마는 평안도 출신이야. 아빠는 함경북

고모들이 많았다더라고. 아마 북에서 한

도 경성이 고향인데, 형제 둘만 38선 그어

자리씩 했을 거라고 몇 번 말씀하곤 하셨

지기 전에 내려왔다가 다시는 고향에 돌아

어. 명절 때 갈 데가 없어서 외롭긴 했지.

가지 못했지. 형제 둘이 6·25때 참전했고,

부모님 생사를 모르니 제사를 못 지내다,

큰아버지는 전사하셨어.

얼추 할머니 할아버지가 100세쯤 됐다고 여겨질 때쯤부터 제사를 지냈어.

이북 출신에, 이산가족에, 참전용사면 ‘반공 3종 세트’ 아닌가.

외가는 어떤가. 그쪽도 마찬가지인가.

그렇지. 아빠는 어린 나를 데리고 (함경북

엄마는 아빠랑 9살 차이가 났어. 엄마는

도)경성면민회 같은데 나가곤 하셨어. 그

좀 나은 편이었지. 고향이 평안북도 어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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쯤이라는데 정확한 지명은 모르겠고. 수

기를 하는 데는 시작이 힘든 법이다. 이원혜는 술

업 중에 너희 집 난리 났으니 가보라 해서

을 잘했다.

갔더니, 사람들이 떼지어와서 집을 풍비 박산을 내고 있더래. 지주집이어서 아마

학창시절은 어땠나.

본보기로 당한 모양이야. 그래서 일가친

내가 광화문에서 학교를 나왔어. 경기여

척들이 몽땅 나룻배를 타고 탈출했대. 그

고 문예반 출신이야. 그 당시 자칭 5대 공

래도 아버지랑 다른 점은 갈라지지 않고

립 남고, 여고 출신 문예반 학생들이 모인

친척들이 모두 모여 한 배로 내려왔다는

교외 서클이 있었어. 서우회라고. 왜 그 나

거야. 적어도 내게 외갓집은 있는 셈이지.

이 때는 불온한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이 있잖아. 딱 그걸 충족시켜주는 곳이었

정말 의외다. 부모님 영향을 받았다면 어릴 때

지.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매주 와서 술 사

부터 반공의식이 남달랐겠다.

주고 문학 얘기 하고. 게다가 80년대 초반

초등학교 때 반공글짓기로 상 많이 탔어.

이잖아.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 한 번은

나갔다 하면 뚝딱 탔으니까. 다른 애들과

선배들 따라서 고대 축제를 갔어. 거기서

달리 나는 생생한 이야기가 양쪽 집안에

사과탄을 처음 맞은 거야. 으레 축제는 데

가득했잖아. 어릴 때는 심각하게 고민하

모니깐. 교정까지 들어오더라고. 고등학

기도 했어. 고모들이 간첩이 돼서 내려오

교 때 이미 김지하 <오적> 필사본 같은 거

면 어쩌나,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 떼고 대학 들어갔어. 게다가 아줌마 파

왜 초딩들 이런 상상들 하잖아. 아빠는 군

마를 푸짐하게 하고 갔더니 애들이 삼수한

인이셨어. 6·25때 통역장교로 입대한 뒤

줄 알았다 하더라고.

휴전 뒤에 말뚝을 박으셨지. 지뢰를 밟아 충무무공훈장도 탔어. 그 덕에 지금 대전

대학에서는? 학교에서는 보기 힘들었는데.

현충원에 계셔.

1,2학년 때는 운동 좀 하다가 선배들한테 상처를 받았어. 뭐 대단한 얘기는 아냐. 그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빈 병이 쌓여갔다. 어디서

러다 ‘중앙극회’를 열심히 했어. 연극에 푹

부터 얘길 꺼내야 하나.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얘

빠졌지. 연출도 하고. 학교는 다니는데 연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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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점을 좋게 받아서 다음 학기 초과학 점을 신청하는 수 밖에 없어. 그래 서 열심히 했지. 공부랄 것도 없 어. 요즘 같지 않 아서 허술해. 리 포트 내라 그러 면 내고, 시험 제 때 보고, 수업만 아마도 1986년. 중앙극회 시절. 윗줄 세번째가 이광희, 아랫줄 왼쪽부터 서병훈(두번째), 이원혜(네번째), 고석배( 맨오른쪽), 맨 아랫줄 앉은 이는 박철민.

들어가면 되는 거

극만 하는 거야. 방학동안 연습해서 3,4

야. 결국 그 학기

월 되면 연극 올리고 했지. 한 번은 진입

에 장학금을 받았어. 4학년 때는 고민이

로에서 애들 만났더니 동기들이 이원혜

많았지. 어떻게 살아야하나 하고 말야. 다

휴학했다고 그래. 학점? 다 F지 머. 그러

시 현장에 가야 하나. 이미 끈은 다 떨어진

다 87년 거치고 청계천 이런데서 시위하

상태인데. 성적도 엉망이고. 그러다가 일

면서 생각이 많아졌어. 지금 돌이켜보면,

단 시간을 좀 벌자 해서 간 게 대학원이야.

연극할 운명은 아니었나봐. 아니면 딱 그 길로 갔을 텐데. 사회과학서적들이 막 쏟

예상 밖이다. 문창과 대학원 말인가?

아져 나왔는데 가만 못 있겠더라고. 다시

어. 정말 아카데믹하더라고. 딱 한 학기 다

사회과학서적 스터디를 시작했어. 그리고

녔어. 그때 친구 윤정이가 연극하던 박인

는 졸업은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지. 성적

배 선생네 집에서 <장길산>을 만화로 만

이 엉망이니까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그

드는데 그 콘티작업 알바를 하고 있었어.

런데 워낙 빵꾸가 많아서 아무리 애를 써

그 분 부인이 이영미 선생이잖아. 연극평

도 졸업을 제때 못해. 방법은 한가지야. 학

론, 노래평론 하시는. 그 분이 제안을 했 끈덕지게 어깨동무

68


대. 연극평론 스터디를 해보자 했다 하더

있는 데까지 다 왔구나 하는.

라고. 윤정이가 마침 내 생각이 난거지. 그 래서 신촌 ‘오늘의책’ 근처 카페서 이영미

마침내 끝까지 왔다... 그게 잘 선택했다는 거랑

선생을 만났어. 신나서 만났지. 원래 연극

같은 의미인가.

도 했었으니까. 근데 거기 바로 뒤가 노해

노해문 할 때, 사노맹 조직 내에서도 많은

문 사무실이야. 거기에 정지아 언니가 있

사람들이 중간에 떠났어. 그럴 때마다 여

었어. 지아 언니가 옛날 내 지도선이었거

기서 내가 또 그만두면 아마 나머지 인생

든. 그날…, 거기서 딱 만난거야. 이영미

을 나 자신에 대해서 되게 자책감으로 살

선생이랑 헤어지니까 지아 언니가 나타나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왔거든. 이를 악물

더라고. 그러더니 니가 거길 왜 가냐, 노해

고 버틴 거지. 잘했다 이런 거와는 다른 거

문으로 와야지 이러는 거야. 며칠을 치열

고.

하게 고민했지. 하나는 연극평론이고 하 나는 가시밭길이잖아. 노해문이면 결말을

지금도 같은 기로에 서있다면 같은 선택을 할

어떻게 볼지 딱 예상이 되잖아. 이미 어떤

까.

걸 할 거라는 걸 알잖아. 비합법운동으로

왜 요즘도 시위 나가잖아. 이것이 정의라

가는 거고. 완전히 다른 길이지. 내가 뭘

고 생각하는 순간 여전히 답은 하나야. 정

원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갈 건지 조금만

면으로 온다면 또 가지 않을까.

시간을 달라, 그러고는 노해문으로 간 거 야.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이미 중

결혼 열흘 만에 잡혀갔다면 비극도 그런 비극이

간에 한 번 그만둔 적이 있었잖아. 그 미안

없을 것 같다. 결혼생활은?

함이 여기 한켠에 계속 있었던 거야. 만약

기다렸지. 근데 돌이켜 보니까. 그때 헤어

이번에 선택을 하면 끝까지 가야겠다. 내

졌어야 했어. 그때 이미 끝난 건데 내가 너

스스로 약속하고 지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때 내가 끝내줬

가자 이렇게 된 거야. 나중에 남산에 잡혀

어야 하는 건데. 남편하고는 20년 살고 헤

가는데 그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마침

어졌어. 한 3년 됐나. 아들 하나야. 제대 하

내 끝까지 왔구나, 그런 생각. 이제 갈 수

고 지금 홍대 다녀. 애는 이제 다 컸으니까

이내창기념사업회

69


어깨동무가 만나다

걱정 안 해.

떼어주겠다. 그때 살짝 감동했지. 상업적 인 원고를 쓰면서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

2008년 이전에는 무얼 했나. 슬슬 거슬러 올라

나 고민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바른 글

가볼까.

을 위한 자유기고가 모임’ 이런 거 만들었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일들을 무진장 했어.

어. 그 모임을 10년 가까이 했어. 월간 <말>

잡지 프리랜서라고 알지? 내가 1990년

지 출신들 조유식(알라딘), 오연호(오마이

11월에 구속돼서 92년 11월에 만기출소

뉴스), 김경환(민혁당) 등이 힘을 실어줬

했잖아. 당장 먹고 살아야하니까 93년부

지. 그게 90년대 중후반 얘기야. 그런데 그

터 잡지 일을 했어. 그때가 잡지전성기였

렇게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글 쓰면서 살면

어. 글이란 글은 안 써본 게 없어. 여성지

뇌 회로가 막 엉켜서 피폐해져. 하지만 그

성 상담부터 부부문제전문가, 육아잡지,

때 그 사람들하고는 아직도 친해. 젊었으

인테리어, 게다가 월간 <말>까지. <신동

니까 멘탈 유지가 됐어. 서로 북돋아주고

아>, <여성조선>에도 글을 썼어. 나중에는

말야. 그래도 글쓰는 재미가 있었어. 그러

IT 콘텐츠에도 진출했어. 왜 있잖아, 070

다 갑자기 일감이 확 줄었지. 잡지의 시대

서비스 전화 멘트와 매뉴얼 만드는 거. 전

가 끝난 거야.

화를 못 끊게 하는 멘트 말야. 질문 하나, 답변 하나에 통화료가 배로 올라가니까.

이원혜는 시민참여형 대안정책연구소 ‘희망제작

그 로직 짜는 거. 그러다가 꽁트집도 쓰고.

소’에서 일한다. 후원사업팀 팀장이면서 연구위 원이다. 희망제작소는 우리 사회 곳곳의 잘못된 정

상상이 안 간다. 글쓰는 기계였나.

책을 바꾸고 그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간 큰 남자 시리즈’ 이런 거 단행본도 내고

지역재생, 마을만들기, 공공정책, 사회혁신 등 여

만날 밤새니 너무 힘들더라. 하루살이 인

러 분야에서 대안을 제시해왔고, 법과 제도를 고치

생도 그런 게 없어. 매일매일이 마감이니

면서 실행에 옮겨왔다.

까. 빵에서 나오니 너희들도 이제 먹고 살 아야 할 거 아니냐 그래. 그러면서 자유기

‘희망제작소’ 어떤 곳인가.

고가 작업실에 들어오래. 자기 원고에서

내가 거의 최고령자야. 처음에 제작소 들 끈덕지게 어깨동무

70


희망제작소_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희망제작소 세월호 1주년 캠페인 ‘0416 잊지 않았습니다’ 여의도에서 거리 서명을 받고 있다

어갈 때 이미 40대 넘어서 갔지. 그땐 지

마. 민예총에 2년 있으면서 살이 많이 쪘

금보다 훨씬 더 조직이 젊었어. 절반 정도

어. 돈 걱정을 하도 해서. 걱정이 많으면

는 시민사회단체서 넘어왔지만, 반은 바

살이 붙는다, 나는. 밤마다 소주에 컵라면

로 그냥 막 온 친구들이었어. 사회를 다른

을 들이부으며 고민하다가 말야. 당시 민

눈으로 보고 다르게 작동하는 사람들이 있

예총 자금부장이 억대 횡령을 저질렀어.

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즐겁더라. 새로운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던데, 토해야 하

변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사람들

는 돈이 어마어마했지. 역대 정권에서 받

이 이렇게 많고 존재한다는 게, 생각도 젊

은 지원금 다 토해내라고 하니까. 조직이

고, 정말 내가 몰랐던 분야, 아 서로가 이

무능하고 나태해서 벌어진 일이야. 민예

렇게 다른데.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총에서 ‘문예아카데미’ 2년 했지.

하면서 그때 정이 정말 많이 들었어. 그게 2008년이었는데 1년 6개월 있다가 내 스

문예지 <노동해방문학>은 당시 사노맹의 입장과

스로 나왔어. 조직을 반으로 축소할 때 희

노선을 대변하는 기관지 역할을 했다. 활동가들은

망퇴직을 한 거지. 그리곤 민예총엘 갔지.

이곳에 기고문을 통해 자신들의 변혁의지, 정세분 석, 당면 투쟁지침 등을 담아내고 전달했다. 하지

아마 민예총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졸업하

만 <노동해방문학>은 이밖에도 다양한 문예비평,

고 처음 누나를 만난 것 같다.

취재기, 수기, 시와 소설, 번역글 등을 실어 노해문

그렇지. 한창 그림 팔고 다닐 때였지 아

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의 사랑도 받았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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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사건? 조짐이 있었지, 왜 없었겠어. 그냥 감수하고 결혼을 했어. 감쪽같을 수 있었 어. 양가 부모는 모르고. 신혼여행을 갔다 온 사이에 1차 구속사건이 터졌고. 다 흩 어져 잠수를 탔는데, 마지막으로 내가 누 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한테만 우리 집 전 화번호를 줬어. 인천 신혼집 전화번호. 그 외엔 아무도 몰랐어. 그 사람이 수첩에 적 어 놓을 줄 몰랐지. 조직에선 그게 금기니 까. 그 사람도 잡혀갔다고 그래. 그런데 그 때는 이미 지쳤어. 여기서 도망가면 어디 를 가나. 너무 복잡하지. 다 구속됐다고 하 노동해방문학 창간호(1989년 4월)

지. 수첩에 적었을까. 어느 날 문을 두드 리더라고. 그날 아직도 생생해. 남산 안기 부? 고문도 하지만 술도 먹여. 설렁탕도

좋다. 다시 1990년으로 돌아가 보자. 어쩌다 구

먹고 꼼장어도 먹었지. 밤에 야식도 시켜

속이 됐나.

줘. 지하 어디에선 어떤 애 취해서 주정부

노해문 꼴랑 1년 만에 개박살난 거지. 노

리고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그래. 자민통

해문이 사노맹의 오픈조직이야. 노동해방

으로 들어온 옆방은 잘 놀더라고. 자민통

문학실이라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고 사노맹이 같이 터져서 안기부가 버글

집단창작도 하고, 나름의 플랜이 있었어.

버글했어. 난 줄 운이 없나봐. 조사 마치고

글을 쓰자. 조정환, 백무산, 임홍배, 이원

남들 다 서울구치소 갈 때 혼자 영등포구

규 시인 등이 맹렬히 글을 썼지. 초창기에

치소 갔어. 안기부직원 따라서 다시 나가

는 파업하는 데 가서 취재도 하고 내용도

고 싶을 정도로 영등포구치소 후지더라.

만들고 했는데, 사실 생각 외로 힘들어서

항소해서는 의정부교소도로 갔지. 거긴

노해문 발간하는데 급급했던 거야. 조직

여자기숙사 같아. 새로 지어서 단정해. 그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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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엔 형 살려고 강릉교도소 갔는데, 오지 인데다가 방이 딱 3개야. 여자는 죄를 많 이 안 짓나봐. 거기선 출소 때까지 방장을 했지. 영등포에서 6개월, 항소해서 의정부 에서 3개월, 강릉에서 1년 3개월을 살았 어. 강릉에선 김장을 두 번 했어. 의정부에 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 요즘도 만나면 우리들끼리는 의정부여고 동창생들이라 고 해. 거기서 처음으로 NL애들하고 친해 졌어. 애들이 성품이 진짜 좋아. 품성론 배 울만하더라고. 요즘도 만나면 남자들 군

연구원들과 함께 시작했어. 멸종위기 동

대얘기 하듯이 빵에서 뭐 만들어먹은 얘

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해당

기 제일 많이 해. 지겹지.

동물을 선택하고, 공부를 해야 해. 시험을 봐. 내 짝꿍은 사향노루인데요. 이런저런

요즘은 어떤가? 구체적으로 하는 일은?

특성을 갖고 있고 그래서 멸종위기고 그

후원사업과 모금을 통해 희망제작소의 재

런 얘기를 쭉 풀어야 해. 그리고 넣고 싶은

정을 지원하는 일이지. 모금운동도 하고

문구를 넣는 거지(그의 명함에는 짝꿍 사

회원관리도 해. 캠페인도 벌이고. 잡지 일

향노루와 “멈추지 말고, 달려!”라는 글귀

을 그만두고 출판사 ‘길벗’에서 외주 편집

가 씌어 있다). 이건 사향노루한테 하는

자를 하다가 그 직함으로 희망제작소 출판

말이지만 내 자신한테도 하는 말이야. 사

담당으로 왔어. 지금은 후원사업팀장이야.

향노루가 차마고도 같은 높은 사막지대에 서 군집을 이루지 않고 독고다이로 살아

원래 명함(사진 참조)이 이런가.

간대. 애는 겁이 많아서 무슨 소리가 나면

내 명함만 이래. 멸종위기종과 짝꿍짓기

곧바로 달아나. 근데 애가 사향을 갖고 있

야. 사향노루가 내 짝꿍이야. 우리 디자이

잖아. 향을 풍기니 금방 잡히는 거야. 중국

너가 그린디자인 전공인데 이 프로젝트를

사람들이 또 이 향을 그렇게 좋아한다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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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사향노루 너무 고독해 보이는 거야. 가늘

든. 1,000만 원 이상씩 내는 분들도 있어.

고 긴 다리로 차마고도를 훌쩍훌쩍 뛰어

물론 한 번에 내는 건 아니고 분납하지. 7

다니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월에 그분들하고 해외탐방도 가. 공짜는

게 보이잖아.

아니고 돈 내고 가는 거야. 연간 프로그램 이 1년에 4,5회 있어. 이번에는 보스니아,

희망제작소 회원은 몇 명인가.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발

대략 6,600여 명이야. 모두 유료회원이야.

칸반도로 가. ‘포연이 걷힌 거리에 피어나

내다말다 내다말다 오랫동안 안내는 사람

는 평화의 새싹’ 그런 슬로건이지. 매년 갔

도 물론 있지. 새로운 유료회원을 만드는

어. 작년에는 메르스 때문에 못 갔지만, 1

게 내가 하는 일이야. 어떻게 해야겠어?

회 실크로드, 2회 터키 그리스, 3회 북유

회원서비스를 잘해야지. 회원들이 끊지

럽, 4회 이란, 5회 장가계. 이번이 6회야.

않도록 말이야. 요즘 캠페인을 해. 캠페인 기간이야. 신규가입하거나 아니면 증액하

좀 어떤가.

거나 하는. 회원 중에는 고액회원도 있거

후원사업 맡을 사람은 없고, 내가 나이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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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많고 해서 맡은 거야. 후원사업팀 말

다고. 그것이 한국사회를 요만큼씩은 바

그대로 어렵지. 환경을 지킨다, 기아대책

꾸어왔다, 진보진영의 정책대안을 내놓

을 세운다, 난민 어린이를 돌본다 뭐 그런

는 단위는 꼭 필요하다, 언제가 될지는 모

것들은 명확하잖아. 유니세프, 세이프더

르겠지만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

칠드런, 월드비전 이런 데는 아동소식을

에 대한 대안을 준비하는 씽크탱크, 시민

정기적으로 전해주잖아. 아이가 몇 살이

들과 함께 끊임없이 실험해가면서 내놓는

됐고, 이번에 공부는 어떻게 하고. 후원하

대안, 그게 희망제작소가 할 일이라고 봐.

는 사람들은 소식을 전해주니 너무 좋지.

그때까지 살아남자 이거야.

아 내 후원금이 이렇게 쓰이는구나. 하지 만 희망제작소는 말 그대로 매달 소식 갈

희망제작소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공존·공생하

게 없잖아. 명확하지 않는 사회혁신 연구

는 지속가능한 삶’을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미

단체 이런 거에 후원하는 사람들은 정말

래가치로 꼽았다. 이는 생존을 위한 과도한 경쟁에

대단하다고 생각해. 희망제작소는 본인들

서 벗어난 공존·공생을 말하는 것으로, 경쟁지향

이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방향

적 목표가 공동체 실패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으로 나아갔음 좋겠다 하는 걸 하는 거야.

분석했다. 또 마을 공동체나 학부모·노동자 조직,

나는 사회혁신운동, 합법, 비합법만 생각

취미·관심사 모임 등 사회 곳곳에서 시민들의 자

하면서 살다가 여기서 영리, 비영리 이런

발적인 모임이 늘어나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거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너무 많은 걸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웠어. 내가 모르고 있던 거. 세상은 다 른 방식의 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하는구나

요즘 최대 고민은 무엇인가

이런 거 느끼게 해준 곳이야. 물론 희망제

희망제작소를 중심으로 해서 가장 고민이

작소가 지지부진한 면도 있고 하지. 그럼

지. 어쨌든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움직이

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조금 더 할 일이 남

는 곳이고, 거기서 월급을 받고. 과연 우리

아있지 않나 생각해. 희망제작소가 참여

는 이것을 낭비하지 않는가 자기점검을 하

연대처럼 두드러지게 활동하진 않았지만

게 되지. 조금 더 우리가 거기에 부합하는

벌써 10년을 버텨왔어. 뭔가를 계속해왔

뭔가를 갖춰야 하고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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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가 만나다

끼리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 나 는 불화의 아이콘이야. 머리에 꽃 달았다 고 그래. 후원이라는 게 주기가 있어. 얼 마정도 하고 나면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가 꼭 온다고. 그래서 그걸 유지하도록 하 는 게 어려워. 희망제작소는 게다가 어필 하는 게 쉽지가 않아. 하루아침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낸 돈 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 는 문제도 아니니까.

하얼빈 빙등제_2015년 12월 하얼빈 빙등제에서

이원혜는 다음날이 대체휴가라고 했다. 모처럼 마 음이 편한 수다를 떤다고 했다. 6월 30일 회원들

는데. 제작소가 제작소다운 일을 하고 있

을 위해 ‘감사의 식탁’을 연다고 했다. 영화 <귀향>

구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예전

의 조정래 감독과 함께 하면서 영화도 보고 제철밥

처럼 외화된 활동보다는 별로 표 안 나는

상도 나눈다고 했다. 7월초에는 청계산으로 산행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불만이 있

을 간다고 했다. 미세먼지가 모처럼 걷힌 날이어서

는 분들도 분명 계실 테고. 또 우리가 이

밤하늘은 초롱초롱했다. 그는 씩씩하게 황량한 들

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게 내 일이

판을 건너는 사향노루처럼, 홀로 막차를 타고 떠나

이니까. 문제는 어디든 있어. 어느 조직이

갔다.

든. 사회시민단체도 마찬가지야. 내 주장 은 자꾸 점검하고 통제하지 마라. 창의력 을 기반으로 하는 조직인데 왜 그러냐, 기 본적인 신뢰와 믿음이 있다면. 그러면 그 사람들은 조직이 원래 그런 거다 그래. 나 는 또 그러지.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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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의 국악이야기 반갑다. 앞으로 근대음악사 이야기를 연재하게 되었다. 주로 일제강점 기 음악을 공부해 왔기 때문에 이 시기에 한정하되 음악에 얽힌 이야기 를 할 것이다. 앞으로 이왕직아악부의 친일음악·프록코트를 입고 듣는 궁중 연회 음악·개가수 박춘재의 경기소리·판소리 <열사가>라는 주제 로 만나 뵙겠다.

궁중음악은 어떻게 현대에 전승되었을까? 이수정

이왕직아악부와 친일음악

국립국악원은 알지만 장악원은 생소할 테고, 이왕직아악부라는 기관은 오늘 처음 들어볼 것이라 짐작한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강점기 궁중음악 전담 단체였다. 조 선시대 장악원의 기능을 이어 받았고, 해방 공간기에는 구황궁아악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1950년부터 국립국악원으로 재출발하였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단체 에서 친일음악을 했다고? 먼저 이왕직아악부가 소속되었던 이왕직과 일제강점기 궁중의 상황을 살펴보자. 광화문과 경복궁

일제는 국권 침탈 후에도 대한제국 황실은 남겨두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을 담당할 조직으로 이왕직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였다. 일본 황실 관리를 담당하는 궁 내성 하부 조직에 이왕직을 편입시키고,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천황의 친족으로 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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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분 조작을 하였다. 대한제국 황실과 이왕직의 품위 유지를 위해 매년 상당한 액수의 예산을 사용하였다. 이왕직아악대(또는 아악부)와 이왕직양악대라는 음악기관도 운 영할 수 있도록 허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상당한 대우를 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피통치권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대한제국 황 실의 위상에 지속적으로 손상을 가하였다.

정전 뜰에 잡초로 뒤덮인 인정전

공진회 출입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벽을 설치한 광화문

가장 눈에 띄는 방법은 아마 왕실의 상징인 경복궁을 비우고 고종은 덕수궁에, 순 종은 창경궁에 기거하도록 한 일이다. 주인 잃은 경복궁을 잡초가 무성하도록 방치 하고 광화문 옆 담장을 허물어 그 자리에서 공진회와 박람회 같은 행사를 크게 개최 했다. 경복궁은 왕권과 권위 상징물이다. 일제는 일부러 경복궁을 훼손하여 유원지 로 전락시켰다. 이렇게 경복궁은 일본의 근대 발전상을 극적으로 화려하게 보여주는 장소이자 통치권이 일제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장소가 되었다. 수천 년 동안 군주제가 지속되었던 한반도에서 국왕이라는 존재를 없애서 초래될 정치적·사회적 부담을 떠안는 것보다, 명맥만이라도 유지시키는 것이 식민통치에 유리하였다. 게다가 이왕가에 남아있는 조선식 전통을 적극적으로 일본식 전통과 접 목시켜 내선융화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왕직아악부는 어떤 단체인가

조선시대 장악원에서 담당하였던 우아한 국가음악이 일제강점기에서는 궁 안에 갇힌 왕실을 위한 음악으로 범위가 축소되었다. 더 이상 국가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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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에 하늘과 땅, 농사, 잠업, 명산대천, 풍운뇌우 등 전통적인 신을 섬기는 제사 는 폐지되었다. 궁중음악의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인 제례음악(오늘날의 국가의식 용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의 폐지로 많은 전통음악의 전승이 단절되었다. 군사 의 식 음악, 사신 접대 음악 역시 단절되었다. 제사음악인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실의 조 상을 위한 음악이라는 이유로 없애지 않아 계속 연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가사를 비롯한 형식과 내용에서 왜 곡이 많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이왕직에서 운영하던 서양음 악악대인 양악대는 근대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운영 비용을 문제 삼아 폐쇄하였고, 이용가치가 있었던 아악부는 남겨두었다. 각종 궁중음악을 연주하기에는 수십 명의 악사 만으로 부족하여, 1919년부터는 아악부원양성소(중고등과 정 음악학교)까지 설치하여 아악부원을 육성하였다. 고종과 순종이 모두 승하한 1930년대는 이왕직 내에 예 의를 차릴 왕마저 없었다. 일제는 왕실재산 관리를 중심으 로 이왕직 기구를 대폭 조정하였다. 종묘제례 이외는 할 일 이 없어진 이왕직아악부는 왕실을 벗어나 다양한 행사에 동 원되었다. 총독부 주최 연회, 총독관저 연회, 창경궁 벚꽃놀 이, 박람회장, 조선신궁 등 일본 관련 각종 연회와 행사장에 서 대중을 만났다. 궁궐 밖을 넘은 적이 없던 궁중음악이 빈 번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밀어내고 일 <그림> 창경원 야간 벚꽃놀이 가설무대·조선박람회장· 조선신궁의 아악부 연주 모습. 주변에 수많은 인파가 보인다. 사진은 각각 「매일신보」 1930년 4월 14일자 ; kocca 소장 자료 ; 山 田早苗,「朝鮮雅樂器寫眞帖」(일본 국립국회도서관 Digital Library from Meiji Era 소장 자료)

본 국화인 벚꽃을 잔뜩 심은 창경궁에 들어선 가설무대에 서, 남산 조선신궁에서 예제를 지낼 때 출입구에 설치된 전 각에서 참배객을 맞이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말이다.

창작국악의 효시, 친일음악 <황화만년지곡>

1940년은 일본기원 2600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건국 2600년이 되는 해라는 이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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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로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 제국주의 국가들까지 합세하여 축 하행사를 준비하였다. 식민지인 조선의 이왕직은 물론이고 만주국에서도 각종 공모 를 실시하여 축하분위기를 고양시켰다. 이왕직에서는 ‘황기2600년 봉축의 밤’을 열 계획을 세우고 이때에 쓸 봉축음악을 이왕직아악부원에게 작곡 공모하였다. 아악 부원 중 김기수는 조선 아악을 기조로 한 봉축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곡이 <황화만 년지곡>이다. 현재 이 곡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국악곡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 다. 창작국악곡은 한국 사람이 국악기를 바탕으로 서양악보와 기보법을 사용하여 만 든 창작음악을 말하는데, 이 곡이 가장 처음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최초의 창작국악 곡이라는 타이틀이 친일음악인 <황화만년지곡>에 붙는 우스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일본 건국기념 음악을 조선 왕실악 대가 지어서 바치는 방식을 취하고 경 건한 분위기에서 연주되었다. <황화만 년지곡>의 노랫말은 일본 개국신화에 등장하는 진무천황을 칭송하고 중국 과 러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한 일본의 <사진> 일장기가 걸린 부민관에서 이왕직아악부의 <황화만년지곡> 연주장면.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다. 이 곡은 해방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1991, 108쪽. 사진 중앙의 노래 부르는 사람은 작곡자 김기수.

이 되기까지 일본의 건국기념일을 비 롯한 각종 기념일에 라디오로 생중계

되었다. 이 곡을 작곡한 김기수와 작사한 이능화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 지만 일제강점기 내선융화정책에 순응해 활동했던 이왕직아악부의 음악인들에 대 한 평가는 단순하지 않다. 궁중음악을 현대에 전승하는데 기여한 점은 있지만, 해방 후 이왕직의 일제강점기 활동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수정_1985년 중앙대 국악과에 입학하였다. 2015년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이라는 논문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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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락이의 <연극으로 세상읽기>

뜨거운 대학로: 세월호 참사와 검열, 국가권력을 고발하다 김경락

8, 90년대 예술은 혁명의 무기여야 하고 대중을 선전 선동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등 등 어느 예술분야에서나 통일과 노동을 이야기하고 애국과 반외세를 외쳤습니다. 기억들 나시나요? 가끔 생각합니다. 몇몇 선배님들이 예술창작 작품과 관련해서 고초를 겪으시거나 몇몇 민족예술가들이 작품으로 저항하다가 몇 년 동안 묶인 몸이 되는 일들이 비일 비재 했던 시절을 말입니다. 우리 내창이형도 예술가셨죠. 당시에 대학로에서도 몇 몇 예술가분들이 연극으로 저항을 하다가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 받는 일들이 흔했 었지요. 거의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통일은 여전히 우 리의 소원이며 민주주의를 목이 타들어가게 외쳐대고 있고, 노동은 강제와 감시 속 에 제도와 권력에 의해 압살당하고 있습니다. 거리에서는 아직도 경찰의 폭력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고층탑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죠. 세상이 이리도 달라진 게 없다면 예술계는 어떠할까요. 가끔 그 시절 거리로 내달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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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던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거의 대부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창작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느 정도 세 대교체도 이루어졌고요. 기나긴 진보의 시간 속에 20여 년의 시간은 어쩌면 정말 눈 깜짝할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주제넘게 다른 예술분야를 언급할 수는 없고요. 제가 몸담고 있는 연극계만 이야기해 보죠.

요즘 연극계의 화두는 바로 ‘검열’입니다. 대충 온라인을 통해 소식을 접하셨을 겁 니다. 예술기금 지원을 위한 심사에서 몇몇 예술가들이 현 정권을 비판과 조롱의 대 상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사전 검열과 관련된 사건들이 있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당 연히 예상됐던 일들이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전, 노 정권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짓거리들이었으니까요. 거리에 쥐 그림을 그린 화가가 실형을 선고 받는 세상에니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지요. 그래서 결국 대학로가 들썩거렸습니다. 대학로 의 연극인들은 세월호 학살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자체 추모공연을 몇 달씩 이어가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어느 시절에나 그랬듯이 무관심 한 연극인들도 많았지요.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튼 박근혜 정권은 세 월호로 뜨거워진 연극인들의 가슴에 ‘검열’사건으로 불을 지폈습니다. 작고 큰 집회 와 1인 시위가 이어지고 세월호와 검열, 국가권력에 관한 연극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쉽게도 부족한 자본으로 인한 홍보부족과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 소위 ‘대박’을 내지는 못했지만 꽤나 많은 관객들을 만났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인 ‘검열’을 소재로 연극을 만드는 한 그룹을 소개하지요. 연극계 젊은 연출가들의 모임인 ‘혜화동1번지’ 6기 동인들이 세월호 참 사를 공연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 팀이 모여 공연합니다.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은 연극 8편을 연이어 선보이는 기획초청공연 <세월호 이후의 연극, 그리고 극장>을 오 는 8월 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혜화동1번지 소극장에서 공연합니다. 8편 모두 보시면 좋겠지만 어느 한 편 골라 봐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으리라 봅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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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세월호 를 기억하고 현재 진행형으로 참사로 인식하고자 이번 기획초청공연을 기획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진상규명 등이 답보상태인 세월호를 넘어서기 위해 연 대의 물결을 지원하고 동참하기 위함” 이라며 “연극은 무엇이며 극장은 어떠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고맙고도 반가운 목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예술 의 사회참여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않 았던 연극인들입니다. 세상이 이들을 변화시키고 있지요. 아무래도 변화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예술가들이라 타인의 고통 역시 그냥 묵과할 수 없었나 봅니 다. 세상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정권의 패악질이 여전히 운동권을 생산(?)해 내고 있 는데 왜 세상은 바뀌지 않는 걸까요? 움직임이 작아서일까요? 도대체 문제가 뭘까 요? 뒤늦은 후회일까요? 미리미리 예견하고 준비하지 못한 우리의 역량 탓일까요? 잠깐 푸념해봤습니다.

다시 연극 이야기로 돌아가서 많은 연극인들과 예술가들이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 창작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고맙고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은 미 련한 가정일 수도 있지만 과거 많은 예술가들이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수많은 민족 민주열사들이 죽임을 당할 때도 이 같은 연극인들이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 니다. 아니 그 당시에도 연극인들이 지금처럼 행동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 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외치던 열사들의 수도 없이 많은 죽음과 세월호의 참사가 결 국 한 몸이며 예술인 ‘검열’이라는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남이 아닌 나에게도 일어날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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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하며 연이은 푸념을 해봅니다. 미완성의 민주주의는 독재로 이어지고 결국 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 과 ‘식민지에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옛말 아닌 옛말처럼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리를 알리는데 연극인들이 앞장섰 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불어 욕심을 부리자면 개성공단의 폐쇄와 남북경색, 비정 규직 노동자들의 자살, 노동운동탄압, 강력범죄 증가 등등이 세월호 참사와 한 몸임 을 알고 아이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농민과 집회 한 번 열었다고 5년씩이나 감옥에서 살게 된 한 노동자에게도 관심을 갖는 연극인들 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소식도 전합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이 글을 읽으실 때에는 끝났 겠지만 8월에 같은 공연으로 다른 장소에 서 찾아 뵐 수 있을 겁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시 노래 낭독이 어우러진 종 합 낭독극입니다. 제가 주인공입니다. 많 은 기대 바랍니다.

김경락_88년 중앙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극단 <새녘>의 대표로 활동 중이며, 배우로서의 그의 이름은 진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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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 혁이의 [데이터사회의 인간학]은 다음 순서로 계속 연재됩니다. 1.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세상에서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2. 알파고의 이해와 활용 가능한 분야 3. 빅데이터의 이해와 분석의 예 4. 기술발전을 삶의 질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세상에서 우린 행복할 수 있을까? 혁이

1. 프롤로그

1999년 황우석은 복제소 ‘영롱이’를 만들었고,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 계가 들통 나 탄핵위기에 있었고, 농축협은 강제 통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세 기말적 혼돈상황에서 난 아무도 수강하려 하지 않았던 인공지능을 수강했었다. 3~4 개월 뒤 세계가 종말한다는데 특별히 피해야 할 과목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실 패한 연애에 대한 자책이기도 했다(참고로 대학성적을 통 털어 유일한 A는 이 과목 이었으니 담당 교수도 세계의 종말을 믿었거나 가정사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 하다), 난 새천년을 앞두고 그렇게 처음 인공지능을 공부했었다. 인공지능의 첫 수업에서 담당교수는 수강생 전원(수강인원 6명으로 폐강을 기적 적으로 면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앞으로 얼마나 세월이 지나면 인간과 같은 능력을 가진 기계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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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100년 뒤? 아니,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으신가? 그럼 1000년 뒤는 어떠한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제면 인간 같은 능력의 기계가 나타나겠는가? 이 질문에 난 500년쯤 뒤에 인간과 동일한 능력을 가진 기계가 나타날 것이라고 대답한 걸로 기억한다. 100년은 짧았고 1000년은 너무 길었다. 글을 읽고 있는 여러 분은 동일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사실 교수의 뜬금없는 질문은 기술발전의 예측이나 인공지능의 이해도를 알기 위 한 질문이 아니었다. 이 질문의 숨은 의도는 인간의 사고에서 재현될 수 있는 법칙성 (로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와 또 그것은 모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묻 는 질문이었다. 즉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닌, 인간은 기계와 얼마 나 다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느 정도의 기간을 대답했든 언젠가는 인간과 동일한 기계가 나올 것이라는 답변 을 했다면 적어도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의 권위는 없어지 고 만다. 인간과 기계와 차이가 없는 만큼 그만큼 의미도 축소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 공지능의 실제적 출현은 어떤 측면에서 인간에게 공포로 인식되기도 한다. 현재 과학계에서 지적능력을 갖는 기계에 대한 출현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 다. 오히려 그 출현 가능성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어쩌면 여러분과 내가 실체적인 인공지능을 접할 수 있는 1세대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학자도 적 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의 자손은 컴퓨터나 저장매체가 될 것이라 는 예언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되고 있다. 이제 문제는 기술의 발전이 아닌 사회적 사고가 기 술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가에 있는 듯하다. 인공지능 첫 수업을 들은 지 17년이 지난 지금 난 ‘인공지능’, ‘딥러닝’, ‘빅데이터’ 등 어디선가 들어는 봤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모를 새로운 기술 트렌드와 밀접한 관 계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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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문성과 완성도가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흘러가는 동향정도는 이 야기 할 수준이 되었고, 이것이 그동안 『끈덕지게 어깨동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의 글을 쓰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이쯤에서 내가 이 주제로 글 쓰기를 거부했다면 동일한 주제로 이모 동문이 글을 쓸 뻔했다는 후일담도 밝혀둔 다. 예나 지금이나 동문여러분들의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얼마 전 벌어진 알파고와 이세돌 대결을 기억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바 둑에서 9단은 입신의 경지라고 한다. 더 이상의 급수는 없으며 9단은 바둑으로 얻 을 수 있는 최고의 급수라고 한다. 이세돌 9단은 그 9단 중에서도 세계 최상위에 속 하는 프로기사였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둔다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라는 바둑게임머 신과의 대결에서 4:1로 패배하는 일이 발생했다(더불어 이세돌 5전 전승에 돈을 걸 었던 나 또한 한동안 팀원들의 점심을 사야하는 일도 동시에 발생했다). 여러분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가? 대국 진행 전 이세돌의 전승 불계승을 점치던 많은 사람들은 첫 대국에서 이세돌 이 불계패를 당하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체스 세계 챔피언 타이틀은 이미 수년전에 ‘딥블루’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양보했지만 바둑은 아직도 인간들의 게 임이었다. 언론들은 첫 패배를 이세돌이 자만한 결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둘째 셋째 판에서도 이세돌이 패배하자 사람들은 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 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특히 바둑의 전성기였던 7~80년대를 살아 온 중장년층은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바둑에서 기계가 인간 챔피언을 이기자 엄청 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세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알파고는 어쩌면 그 시절 유행했 던 영화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려움은 이벤트를 더 극적이게 만들었고 단순한 마케팅 이벤트는 인간과 기계의 대리전으로 양상이 바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을 응원하기 시작했고 마 침내 이세돌이 4번째 판을 이기자 방송들은 이것을 인간의 승리로 받아들이도록 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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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토리를 만들고 있었다. 세기의 대결이라고 말하는 알파고 이벤트 직후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임을 보였 다. 마치 남박사가 마징가제트를 발굴하여 지구의 평화를 지켰듯이 박근혜 정부는 한국형 알파고의 개발에 2조원 이상을 쓸 계획이며, 정상적인 지능으로는 도저히 뭔지 모른다는 ‘창조경제’와 연관을 짓기 시작했다. 뭔가 상황이 요상하게 전개되 고 있었다. 알파고 이벤트의 진행과정에서 보였던 과학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으 며, 정부의 반응은 온통 돈벌이었다. 기술발전을 통한 인간 삶의 질 향상이나 추구 가 능한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그 둘 사이를 비집고 나올 힘이 없어보였다. 인간은 왜 기술을 발전시키는가? 기술 발전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전에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르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어쩌면 좀 더 깊숙한 기술적 이야 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일단 뭔지는 알아야 그 쓰임과 방향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 고 현재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 다.

혁이_90년대 후반 중앙대 산업정보학과에 입학하였다. 현재 빅데이터 분석 관련 일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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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곤의 현장들, 기록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장애에 대한 기록들 강곤

이제는 절름발이를 신체장애인, 맹인을 시각장애인, 귀머거리를 청각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몇 해 전 장애운동 내에서 장애인을 ‘장 애를 가진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나을지,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나을 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을 ‘시각장애인’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의 정체 성이 오로지 시각장애라는 것으로만 드러난다는 점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과,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란 표현이 장애를 소유 했다고도 이해될 수 있기에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는 의견 이 있었다. 물론 늙은이를 노인으로, 노인을 어르신으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노인들 이 처한 상황이 금세 바뀌지 않듯이 용어의 문제가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 다. 그렇지만 불리는 이들이 불쾌감을 느끼거나 자존감이 훼손된다면 그들이 어떻 게 불리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이는 것 또한 맞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들’이 잘 보 이지도 않고 ‘그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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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 어디에 있었을까?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에서 추락사고로 장 애인이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중증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로부터 몇 년간 온몸에 사슬을 두르고 열차를 가로막고 버 스를 둘러싸고 한강 다리를 기어서 건너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불타올랐고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 터가 생기고 저상버스가 도입되는 성과를 낳았다. 나는 그 싸움을 지켜보면서 궁금했다. 저 많은 이들 이 그동안은 어디에 숨어 있었나?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삶창, 2013)는 ‘복지’라는 이 름으로 본의 아니게 수년 또는 수십 년의 인생을 ‘시설’이란 곳에서 갇혀 지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누구는 가족에 의해 납치되듯이 끌려갔고 누구는 가족을 위해 제 발로 갔지만 장애인시설에서 그들은 사람이기 이전에 수용자였고 그들의 욕구는 타 인에 의해 “너를 위한 일”이라며 무시되고 억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시설을 뛰쳐나 왔고 지역사회와 정부에 요구했다. 더 이상 나를 위한다는 말은 그만하고 나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그렇게 장애인이 사회에서 격리되어 보이지도 들리지 도 않는 시설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살 수 있게 만들 자는 운동, 탈시설 운동과 장애인자립생활 운동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당사자를 대변한다는 것

2003년 처음 뇌성마비 중증장애인들을 만났을 때는 충격적이었다. 빨대로 술을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들 ‘병신’ ‘육갑’ 같은 말을 입에 올렸다. 당시 나는 그 들이 온몸을 뒤틀며 하던 이야기를 10년이 지난 뒤에 책으로 만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시간이 지나도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몇 개의 단어를 제외하고는 통 알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고 만남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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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비장애인과 하는 대화 속도 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일상적인 대화나 인 터뷰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모든 장애인이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지적장애나 자폐와 같은 발달장애인들에게는 당사 자의 목소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발달장애 운동의 당사자는 장애인의 부모인 경우가 많다. 아 니 거의 대부분 장애인의 엄마들이다. <그래, 엄마야>(인권기록할동네트워크 ‘소리’, 오월의봄, 2016)는 그런 엄마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이게 과연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대변하는 목소리 인지 당사자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 이 말은 곧 한국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바로 한 가족이(특히 엄마가) 아이와 마찬가지로 장애인과 똑같은, 어 쩌면 더 힘든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모든 엄마들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면서도, 사회적 편견과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하 는 사회제도만이 아니라 시아버지와 남편과 비장애인 아이와 장애인 아이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부대끼고 싸워야만 하는 엄마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다시, 장애란 무엇인가

정신분열증으로 더 익숙한 조현병을 앓는 이를 인터뷰한 뒤 문득 ‘미치다’라는 말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 보통사람과 다르게 되다’는 부정적 뜻과 ‘공간적 거리나 수준에서 일정한 선에 닿았다’는 긍정적 표현을 나란히 갖고 있 는 이 동사는 어쩌면 조현병에 대한 어떤 은유이지 않을까.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의 정신세계를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사이토 미치오, 삼인, 2006>는 일본에서 정신장애인 공 동체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베델의 집’이라는 곳을 취재한 르포이다. 그곳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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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에서의 원칙은 무리하지 말 것! 병을 고쳐야지 하 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초조함 이 문제를 야기한다. 그들은 병을 고쳐서 ‘정상인’ 의 삶으로 회복되거나 재활되어 복귀해야 할 대상 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존재이며 그 자 체로 서로 존중해가는 삶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앞에서 장애인과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가 있 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류가 장애와 어떻 게 함께 살아왔는가를 고찰하면서 근대적 장애 담 론을 넘어서는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라는 책에서는 ‘장애 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안경이 없는 세상은 무 수한 시각장애인을 만들어내고 보청기가 없는 세상에서는 무수한 청각장애인을 만 들어낸다. 전동휠체어의 이동이 쉬워지는 순간 장애와 비장애, 교통약자와 일반인 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러하기에 모든 장애인은 지금 이대로가 괜찮은 존재들이 며, 결코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이지 않을까.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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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중앙대 철학과 학생이고, <의혈하다>, <소녀상서포터즈>, <평화나비>에서 활 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수식어가 붙는 소개보다는 평범한 대학생, 한대윤으로 말하 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속한 사회가 좀 더 상식적이길 바라는 보통의 대학생입니 다. 대학생으로서 한일합의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련하여 활동한 경험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소녀상지킴이 농성에서 <소녀상서포터즈> 활동까지

나의 한 발이 다른 누군가의 발판이 되길 한대윤

졸속적 한일합의

2015년 12월 31일 트윈트리타워빌 딩 정오, 대학생들 30명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습니다. 트윈트리타워빌딩에 들어선 우리들은 “한일합의 무효, 소녀 상 철거 반대, 진정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온 시민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그러자 경찰들은 예견한 듯이 우리들에 게 달려왔습니다. 50여 명의 경찰들은 우리들의 팔다리를 제압하고 마구 연행해갔 습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쓰러지는 사람들, 계단 앞에 뒤엉켜 나뒹구는 사람들, 경 찰들에 눌려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잡혀가는 와중에서도 외침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마음 속에서만, 술자리 푸념으로만 간직해야 했던 말들을 시민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꺼내 놓기 위한 절박한 외침이 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입을 막았고, 손발을 붙잡고 외치는 목소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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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를 경찰버스에 집어넣었습니다. 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고 이틀 동안 구금되었습니다. 비좁은 방 한 칸 크 기의 공간에서는 움직일 수도, 다른 소지품을 들여올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설 적으로 저에게는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비상식이 판치는 시대에서 자유로 운 신체로 무엇 하나 비상식을 이겨내지 못한 자신이 항상 답답했습니다. 조그만 일 이라도 무언가 내 힘으로 바꿔내지 않고서 담담히 이 사회에 몸담는 것이 창피하다 고 느꼈습니다. 이제 신체는 구속되어 있더라도 양심을 지켜냈단 사실이 정신을 자 유롭게 했습니다. 하지만 TV에서 종종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니 이마저도 진정한 자 유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권과 아베 정권은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불 가역적인 합의를 이뤄냅니다. 이 합의를 승전보처럼 방송은 연신 보도했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많은 합의였습니다. 중요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피해 당사자 할머님들의 요구가 반영되어있지 않은 점 ·· 법적배상이 아닌 점 (한국정부에서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이 지원하는 개념) ·· 절차적 문제점(합의 주체들 간의 입장 차이- 소녀상 철거 부분에 대해서도 한일 간 입장이 다 르다고 밝힘,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점 등)

처음에는 12월 28일 한일합의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많았습 니다. 하지만 자세한 실상을 알게 되니 한일협상은 비판을 면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일본정부에선 소녀상 철거를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민간 차원에 서 할 일이라는 모호한 답변만을 내놓았습니다. 각 국의 정상들이 모여 합의한 내용 이 이렇게 허술하고 서로 차이가 심한 것 자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에 “정부가 2016년을 맞이하여 성과를 도출하려고 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급하게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미일 삼각동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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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을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는 국제사회 안에서 미국은 더 강한 군사적 압박을 유지하 려고 THAAD(고고도미사일) 시스템을 설치하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미국은 한 미일 삼각동맹을 원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것이 한일 간 역사청산문제입니다. 역사문 제를 어떻게든 얼버무리고 나서야 군사동맹이 유지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외세의 압박에 끌려 다니는 한국정부의 모습이 일제강점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 다. 할머님들이 끌려가셨던 바로 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말입니다. 소녀상지킴이

한일합의를 받아들일 수도 소녀상 을 철거하게 둘 수도 없다는 많은 사람 들이 소녀상을 지키겠다며 소녀상 옆 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노숙 농성이 처음부터 원활하진 않았습니 다. 추운 겨울날 농성장으로 침구를 들여오기 위해 경찰과 싸우는 것으로 출발했습 니다. 왜 침구를 들여가면 안 되냐는 질문에 경찰들은 “아시잖아요. 안 된다고 하니 까 그렇죠.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답변을 받았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 더라도 지나가는 누구 하나 붙잡고 말해보세요. 어린아이 하나 설득시킬 수 있는 말 인가. 이 사회가 너무나 불합리하고 부정의하단 생각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답답함에 허덕이며 밤샘싸움을 이어나갔습니다. 수일 싸움을 이어나가다 보 니 농성장도 제법 그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천막을 뺏기거나 하는 일들도 있었지만 침구도 들여왔고 나중에는 전기장판도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노숙농성을 하는 동안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글로는 다 못 쓸 정도로 의 미 있고 감동적인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안국역에서 서명을 받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나는 이거(한일합의) 잘 했다고 봐”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의 입장 을 대변하며 할머니들의 아픔을 운운하며 질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평소라면 “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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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가세요”라며 자리를 피해 다른 분들의 서명을 받았겠지만 갑자기 너무 울컥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논박을 하려고 했습니다. 서로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았고 1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친구 분으로 보 이는 분이 나타나셔서는 “저 이거 서명할게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논박하던 분이 “하지마!”라고 했지만 저는 결국 서명을 받아내고 친구 분들끼리 다시 2차전으 로 논쟁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며 다른 분들의 서명을 받으러 떠났습니다. 일본군 ‘위 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나쁜 말을 하는 분들을 보면 안 그래야 지, 하는데도 기분이 많이 상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런 생각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집니다. 그런데 서명하면서 겪었던 일처럼 농성장에서만 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고 더욱 고무되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농성장에 있으면 다양한 시민들이 찾아오십니다.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분들, 기자, 어르신 분들, 가족, 교회에서 단체로 찾아오기도 하고, 멀리 지 방에서 서울로 여행 왔다가 들르는 청소년들도 있었죠. 익명으로 노래공연 하는 분 도 있었고 몰래 식권을 사주시는 이름 모를 직장인 분들, 지나가며 커피며 먹을 것 을 갖다 주시는 분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농성장 앞으로 음식을 배달시켜 대학생들 에게 준 중학생들, 그리고 농성장을 지키는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까지 한 분 한 분 모두 감사했습니다. 대학생 농성단에 대한 관심과 애정 은 저희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 다. 한일합의에 분노하며 할머님들의 슬픔에 공감하며 굴욕적인 역사를 이 겨내고 싶은 마음으로, 소녀상을 지키 지 못하는 미안함을 저희에게 보여주 신 것이었습니다. 나눔, 열정, 헌신, 사랑과 연대의식. 이 모든 것을 삶에서 잃어버리 지 않을 희망이었습니다. 꼭 간직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난 농성이 벌써 200일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올 6월, 30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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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소녀상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 제지를 할 수 있 었던 것은 대학생들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일합의 이후 소녀상 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일본 대사관을 향한, 일본 정부 그리고 한국정부를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 소녀상입니다. 그 시선은 아픔에 동감할 수 있는 모든 시 민들의 그리고 피해 할머님들의 시선입니다. 그 시선이 무서워 어떻게든 소녀상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더욱 더 이어나가야 합니다. 소 녀상을 지키는 것이 할머님들을 지키는 것이고, 할머님들을 지키는 것이 우리나라 를 지키는 것이며,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이 곧 나와 나의 이웃 사람들을 지키는 것 이기 때문입니다. 소녀상서포터즈

이런 정신으로 중앙대에서는 평화 의 소녀상을 건립하려고 했습니다. 소 녀상을 철거하려는 압력이 있을 때, 이 때야말로 더 많은 소녀상을 세울 때라 고 생각했습니다. <중앙대-의혈하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소녀상을 세우 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동작구에서도 종교, 사회단 체에서도 같이 소녀상을 세우는 데에 힘을 모으자고 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힘 을 모아 소녀상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는 중앙대 <의혈하다>와 <평화 나비>가 모여 <소녀상서포터즈>를 운영했습니다. 학내에서 가판 모금을 하고 팔찌 를 팔고, 소녀상 배지를 나누어주면서 서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중앙대이지만 학우들에게 실망스럽단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 었습니다. 구조조정이 일어났을 때도, 선거 부정이 일어났을 때도, <안녕들 하십니 까>(대자보운동), 청소노동자 투쟁, 학생자치 문제,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도 모두 적 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가 학생들에 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금과 서명을 진행하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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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

자 소녀상 앞에서 노숙농성을 할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정 말 많은 학우들 그리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모금과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지갑에서 5만원을 꺼내 주시곤 휙 가버리시는 분들도 있었고, 친구들을 불러와서 서명을 함 께한 학우들도, 고생한다고 따뜻한 음료를 건네는 분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일 만에 100만 원 이상을 모아냈습니다. 모금액으로 그 의미를 평가할 수는 없지 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서명해주시는 분들의 진심어린 마음을 실감할 수 있 었을 것입니다. 학내 수요시위

첫 주에는 서포터즈가 매일같이 돌 아가며 가판모금을 진행했고 곧이어 학내 수요시위를 준비했습니다. 학내 에서 하는 2차 수요시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느꼈습니다. 같이 <소녀 이야기> 영상도 보고 서포터즈 소개, <평화나비> 발언, 첫 학내 수요시위엔 없었던 학생회 임원들의 발언도 함께 해서 좋았습니다. <평화나비>에서는 <바위처럼> 공연 을, 저는 윤동주의 <서시> 낭송을 했습니다. 작년 처음으로 학내에서 수요시위를 진 행했었던 놀라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학내에서는 집회만 해도 징계를 내리겠다는 학교에서, 중앙대학교가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를 반대한다는 이 야기가 나오자 결국은 허가를 해줬습니다. 이는 학내 모든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열성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첫 학내 수요시위를 하 고 나니 두 번도, 세 번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제 중앙대학교 안에서는 일본군 위 안부문제를 보다 쉽게 터놓고 가까이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요시위가 끝 나고 나서 오늘 수요시위에 꼭 참여하고 싶었다며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주신 학우가 기억에 남습니다. 학내에서도 일본군 ‘위 안부’ 문제 해결에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이었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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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 활동

<소녀상 서포터즈>를 시작할 즈음, 일본군 ‘위안부’문제, 한일합의 문제를 더 알리 고 싶어 사람들을 모아보기도 했습니다. 무작정 “수요시위에 같이 가자, 재능 나눔 을 하자!”라고 인터넷으로 홍보를 했습니다. 무계획적인 행동이었지만 가만히 고민 하고 있을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소녀상서포터즈> 오리엔테이션을 할 즈음 몇몇 분들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안성캠퍼스에 있어 너무 멀어서 어렵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휴학을 해서 멀리 집에 있는데 다시 기회가 되면 좋겠다.” 다 들 아쉽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고맙다”, “미안하다”, “고생한다”는 말씀 을 덧붙였습니다. 온라인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응원 받은 게 처음 있는 일이 라 당황스러우면서도 기쁜 경험이었습니다. 모두 연이 안 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올해 초 개봉한 <귀향>의 배우분과도 연락을 했었고, 나중에 서명을 같이 받기도 한 새내기 친구를 만나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또 <의혈하다>에서 만화 그리는 모임을 함께 하는 친구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만화 그려주세요>를 업로드하기도 했습니 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온라인 공간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어린 마음이 공유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같은 과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새 내기 후배와 함께 수요시위에 갔던 일입니다. 후배는 생전 처음으로 수요시위에 왔 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말해는 대로>를 불러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후배 는 긴장해서 울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격려해주었고, 나중에 의미 있는 일에 다시 불 러달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사회에 관심을 갖고 함 께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도, 옆에 함께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같이 하기 힘든 것 이다. 내가 마음과 행동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 을 이때 갖게 되었습니다. 평화나비

활동을 이어나가다보니 자연스럽게 <평화나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몸 으로만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워나가면서 쌓이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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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부족함에 대한 불안감을 지니고 있던 것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보며 나아간다는 점이 항상 행복하고 기뻤습니 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주변이 아닌 중심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마음이 들 었습니다. <평화나비> 친구들을 만나게 되니 정말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진 중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4년 동안 학교에서 다양한 활동 을 해왔던 저이기에 이것저것 알려주고 싶단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보단 <평화나비> 안에서 처음부터 다시 함께 배워나가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올 여름방학을 보내기 위해 <평화나비 페스타(FESTA) 기획단> 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아직도 해쳐나갈 일이 많기만 합니다. 당장은 <평화나비 페스타(FESTA)>를 성공 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2학기에 있을 소녀상 건립도 학내에서 힘 모아 만들고 싶고, 200일이 되가는 소녀상 지킴이에도 더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 이 페스타, 평화나비, 서포터즈, 수요시위, 본질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 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걸음이 더디단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가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히신 할머님의 용기가 있기 전까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말은 있지 도 않았고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습니다. 수요시위도, 평화나비도, 소녀상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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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와 많은 것들에 분노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에 오기 전까 지 이렇게 많은 활동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드린 첫마디처럼 저는 평 범한 대학생입니다. 저도 누군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기회에, 함께하는 힘들을 발 판으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내딛을 한 발자국의 발판이라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면 다시 발판을 내딛고 또 발판을 내딛 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한 발이 나 의 한 발로 시작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대윤_2013년 중앙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의혈하다>, <소녀상서포터즈>, <평화나비>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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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일째 전하지 못한 꽃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마무리된 날 사진·글_김영식 (사진학과 졸업)

지난 1여 년간 하늘 감옥의 상징이 되었던 옛 인권위 건물 옥상 광고판 고공농성 장의 두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 한규협이 고공농성에 돌입한 지 363일 만에 땅을 밟았다. 위태로운 광고판 위에서 1년 여를 지내며 두 노동자들은 대기업 기아자동차 사내하청이 불법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사 회 이슈로 만들어냈다. 농성 마무리 소식이 알려지며 그들을 지켜보았던 수많은 사 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심 한 복판 70m 상공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위해 싸워온 동료를 맞이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을 손에 꼭 쥐고 설레는 마음으 로 동료를 기다렸지만, 눈앞에 나타난 것은 최정명, 한규협 두 동지가 아니라 경찰의 강제연행이었다. 가족상봉도 허용되지 않는 비정규직에게 꽃다발은 사치였다. 경찰 의 강제연행 이후 48시간 이내에 법원은 두 노동자에 대해 석방결정을 내렸다. 두 노 동자는 현재 병원에 입원해 1년여 간의 고공농성으로 악화된 건강을 치료 중이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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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 마지막 날 하늘에서 아래의 동료들을 내려다보는 최정명, 한규엽

남편을 기다리는 최정명, 한규엽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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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명의 사진이 들어간 피켓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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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두 노동자를 구급차에 태워 강제연행해가는 모습

경찰의 강제연행에 항의하는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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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동자가 경찰의 강제연행을 주변 시민들에게 알리는 모습

경찰의 강제연행이 허탈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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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를 막기 위해 연좌하는 동료들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아들을 저지하는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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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지 못한 꽃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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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1. 국가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목소리 올해 2월, ‘의문사 삼총사’로 불렸던 아버님들 중 한 분인 최봉규 아버님 이 돌아가셨다. 막내아들인 최우혁 열사가 학생운동을 한 것보다 더 긴 세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최봉규 아버님의 삶과 투 쟁은 제대로 기록되지도, 평가되지도 못했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서야 유가족들의 삶과 투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 히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국가폭력 사건이 유가족에 게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한을 남겼는지를 기록하는 것은 그와 같 은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연재는 진실규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국가폭력 피 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과거청산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 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의문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 간첩사건 등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 를 통해 국가폭력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의 다층적 함의를 생각해본 다. 첫 번째 순서로 신호수 의문사 사건의 유가족인 신정학 아버님의 목 소리를 싣는다.(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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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의문사 진실규명, 산자여 따르라! 의문사지회 회장 신정학 아버님 구술인터뷰 일시_2016년 6월 21일(화) 낮 12시~17시 장소_우리교육 참여_신명철,

서병훈, 정원옥(정리)

신정학 아버님은 요즘 매일 새벽, 문산에서 기차를 타고 여의도 국회로 와 오전 7시부터 9시까 지 ‘과거사법’ 제정을 위한 1인 시위를 하신다. 아버님을 만난 것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신명철 선배의 직장인 ‘우리교육’에서 만나 점심식사를 하러 갔는데, 아버님은 밥을 잘 드시지 못했다. 하고 싶으신 이야기,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식사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밥 은 드시는 둥 마는 둥 봇물 터지듯 시작된 아버님의 이야기는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여든이 넘으니 정신이 작년 다르고 금년 다르다”고 토로하시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지금 여기’에서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아버님은 마음이 바쁘셨다. 신명철 선배가 “열사의 삶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기록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편하게 말씀하시라. 다음에 또 뵈러 갈 것”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님의 바쁜 마음을 늦추지는 못했다. 아버님은 다섯 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이야기하셨는데도 “의문사에 관한 이야기는 밤을 새도 끄떡없다”시며 밝게 웃으셨다. 건강이 염려되어 구술을 반강제로 중단시 키면서 이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아버님을 그 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첫 번째 구술인터뷰는 예비면담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우리는 중간 중간 궁금한 점들을 질문 하기는 했지만, 아버님의 이야기를 최대한 방해하지 않고 경청했다. 지면의 한계로 구술 내용의 일부만을 소개하며, 다음 호에 더 정리된 아버님의 삶과 투쟁을 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름 이나 지명, 시간 순서 등의 구술에 있어 기억의 혼동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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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모르던 사람들인데 친형제보다 금방 친해져

내가 87년 6월에 유가협에 들어왔는데, 유가협 의 1급 멤버야. 어떻게 들어갔냐 하면 이돈명 변 호사를 만났어. 여수 살면서 오늘 서울 갔다가 내 일 또 올라오고, 택시 타고도 올라오고 할 때였는 데, 이돈명 변호사를 수소문해서 만났어. 우리 아 들 얘기를 했더니, 이돈명 변호사가 “그거는 계란 으로 바위치기보다 더 어려운 거고, 당신이 돈을 한 트럭으로 싣고 와도 안 된다. 집 에 가서 농사짓다가 민주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될 거니까 그렇게 알라”하더라고. 서 운터만. 눈물 흘렸어. 울고 있는데, 생전 못 보던 아가씨가 “아버님”하면서 와. 누군가 하는데, “제가 김 근태 마누라입니다” 해. 내가 김근태를 어떻게 알아? 아가씨가 “우리 남편이 운동하 다가 구속되어 있는데…”하는데, 인재근이었어. 나하고 얘기 좀 하자고 그러더라. 무슨 일로 그러냐고 하니까 유가협에 가입할 생각이 있느냐고 하더라고. 그때 유가 협이 뭔지 어떻게 알아? “유가협은 분신해서 죽고, 노동운동 하다가 죽은 부모들이 만든 단체인데, 거기에 가입하면 활동하기가 편할 겁니다”그래. 그래서 한다고. 내 가 알도 모르는데, “사람 하나 불러줄 거니까 그 양반을 따라가면 됩니다”해서 부른 사람이 조인식이었어. 8월이었는데, 엄청 더웠어. 시장가서 제일 큰 수박 사서 창신 동에 갔는데, 천막 쳐놓고 있는 데로 들어가는 거야. 조인식이 “어머니!” 그러고 들 어가더라고. “응, 누구냐?” 속에서 그러는데, 그 더운 여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 는 사람이 있어서 인사했는데, 이소선 어머니야. 구속되었다가 그저께 나왔다 하더 라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심) 눈물이 나네. 내 손을 꽉 잡으면서(잠시 말을 잇지 못 하심), 가입비가 3만원이라고 하는데, 내가 6만원 줬어. 거기서 가입을 해서 유가협 활동을 시작했어. 그때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해서 서울대병원에 있었어. 가보니까 눈만 조금 내놓 고 있더라고. 박현진 아버지가 있었어. 박현진 아버지도 86년으로 같아. 호수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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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빨라. 아이구, 생전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인사를 하니까 친형제보다 금방 친해 져. 김성수 있지? 김성수하고 우리 호수하고 하루 차이야, 죽은 것이. 호수가 하루가 빠른 거라. 호수는 여기서 죽은 거를 동굴에다 버려갖고 동굴에서 발견되고 다음 날 성수가 물속에서 돌멩이 차고 나왔다고. 말만 듣고 했지, 부모들이 얼굴도 모르고 할 때라고. 의문사 진상규명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최고로 다정한 것이 김성수 엄 마, 우종원이 엄마, 나 서이. 135일 기독교회관 농성, 싸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땐데 집에 가 있는데 전화가 왔어. 어떤 사람이 자기도 민주화운동 하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버려져서 3일 만에 깨어났다 이 거야. 자기가 어디어디에다가 집을 얻어서 촛불 켜놓고 김성수, 신호수, 우종원이 서 이를 위해 빌고 있다고, 며칠 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큰 집회를 한다고 부디 올라오셔서 사례 발표 좀 해달라는 거야. 강릉에 성수도 들먹이고, 대구에 우종원이 도 들먹이고 그래. 그 양반들이 다 오신다고, 만나보면 안다고. 그래서 올라왔다고. 내가 제일 첨 도착했어. 연남동인가, 철로 건너, 그때 천막집이 몇 채 있더라고. 철거 중이야. 여수서 왔다고 하니까 그러냐고, 자기가 박인도라는 거야. 다 쓰러져가는 집 에 촛불 켜놓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성수 엄마가 오는 거야. 거기서 또 반가워하고 있는데, 우종원 어머니는 고속터미널에 도착해서 곧 오실 거라고. 서이 만났네. 서이 만나서 집회하러 가재. 짐차 고걸 타라고 그러더라고. 탔어. 집회를 크게 한다는데 사람 몇 명 없어. 다 놀러온 사람들이야. 앉아 있는데 나보고 사례 발표하라는 거야. 그래서 “이보세요, 당신 우리하고 약속이 다르지 않냐. 대규모 집회를 하든 말든 사 람들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누굴 보고 사례 발표하라는 거야.” 성수 엄마도 꼬데꼬 데하거든. 찌라시를 보니까 이소선 어머니 이름이 있어. 이소선 어머니께 전화 걸었 어. “찌라시에 어머니 이름이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 깜짝 놀라시는 거야. 금방 쫓 아왔어. 아니거든. 박인도 이놈의 새끼, 어디 갔는지 도망가 버리고 없어. 이소선 어머니가 오더니 기독교방송국 2층에서 의문사들이 지금 농성을 하고 있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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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우린 깜짝 놀랐지. 한 이틀 됐대. 김동완 목사가 허락을 해준 거야. 그때 시국 사 건은 전부 기독교 방송으로 왔대. 거기 가면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다. 거기 서 허원근도 나오고, 전화해서 올라오라고. 신문, 라디오, 방송보고 올라오고, 의문 사가 스물여섯 명이 모여 버렸어. 그러니까 무서운 게 없지. 머리띠, 허리띠 차고 영 정 앞에 들고, 성수 엄마는 종로5가 가다가 임시파출소 쳐버리고. 경찰들이 누구시 냐고 하니까 성수엄마가 “이 개새끼들, 보고도 모르냐”고 전화기며 뭐며 다 깨버리 고. 고발한다고, 고발하라고 그랬어. 한 열흘이나 있었나. 김동완 목사님이 허락해놓고 깜짝 놀라부렀지. 며칠이면 끝 날 줄 알고 간단히 허락했는데, 안되겠거등. 식당에 밥을 중지시켜버렸어. 이소선 어 머니랑 시장가서 솥하고 석유곤로 큰 것 사고, 밥그릇 사고, 복도에서 밥을 해먹었 어. 135일이나 해버렸는데, 서울 부근에 사는 사람은 집에 가고, 영춘이랑 나랑 지킨 거야. 우혁이 아버지는 집에 갔다가 오고, 명절에 지킨 사람은 둘 밖에 없어. 우리가 생전 모르던 사람들이야. 우리 사촌들은 그때 우리 집에 오도 안했어. 왜 안 왔느냐, 저놈들이 쫓아다니면서 빨갱이인데, 빨갱이 집에 가면 절대 안 된다고, 외갓 집 처갓집 전부 돌아다니면서 빨갱이로 몰아서 오면 처벌 받을지 모르니까 우리 집 에 오도 못하고. 그러니까 우리 (의문사) 가족들을 만나면 할 말 못할 말 다 하고. 135 일 농성하면서 솔직히 말하면 바닥에 스티로폼 깔아놓고 자는데, 어머니들하고 같 이 잤어.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싸운 거는 말할 것도 없고, 싸운 거는 말할 것도 없고. (농성을 접게 된 것은) 문익환 목사님이 왔어. 제자 넷이 같이 왔어, 농성장으로. 이 렇게이렇게 하니까 여기서 농성을 풀고 나가면 어쩌겄냐? 밖에서도 싸우고 있으니 까 여기서 계속 이럴 수가 없다. 그래서 기자들 불러서 얘기하고 나왔지. 그때는 백 골부대가 있었잖는가. 의문사유가족이라는 것은 알아, 서너 달 농성을 했으니까. 낮 엔 맘대로 못해. 밤에는 발길질 하고 밀어젖히고. ‘한울삶’을 사서 먹고, 자고, 싸우고

유가협이 잘 홍보가 되면서 독일, 미국, 영국, 일본에서 돈이 많이는 아니어도 들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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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그래서 운영을 했고. 가 족들이 52명이 되는 거야. 전 부 시골 사는 사람들이 돈 주 고 여관에서 자야 되고. 회의 를 했어. 우리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으니까 어떻게든 서화 전을 해서 돈을 모아보자. 집이 안 되면 사무실이라도 얻자. 그렇게 해서 서화전을 했다고. 신촌에 가면 목단 그리는 최고 권위자가 있어. 수소문을 하면 다 나와. 허영춘이하고 나하고 둘이 음료수 들고 갔어. 반갑게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무릎 딱 꿇고 이야기했어. 석 점을 주는 거야. 한 점이 돈이 얼마인 줄 알아? 그래저래 모아갖고 인사동에서 서화전을 했어. 김대중이가 개인적으로 2천만 원 냈고, 국회의원들한테서 3천만 원 이상 나왔어. 박종철 아버지가 모아왔어. 나중에 알고 보니 김영삼이한테도 돈 받아내고, 재야에서도 사가고, 돈이 5, 6천만 원 모아 졌어. 그래갖고 동대문 ‘한울삶’이 7천 5백만 원인데 의문사 유가족이 샀다 이거야. 유가협에 종철 아버지, 이소선 어머니 둘이 들어가고 우리는 영춘이가 3분의 1조로 들어간 거야. 이걸 샀는데 천 2백만 원이 모자랐어. 전세를 껴안고 산거야. 십시일반 을 했어. 그때 제일 많이 낸 사람이 민호 아버지가 백 얼마 냈고 영춘이가 백만 원, 내 가 칠십만 원 내고, 돈이 모아졌어. 전세 내보내고 ‘한울삶’ 만들어서 시골 사는 사람 들은 거기서 먹고 자고 다했어. 쌀은 조계사에서 보내줬어. 여남은 가마씩 차에다 싣고 와. 그것도 사람이 많으니 까 얼마 못 가. 학생들 운동하다가 쫓겨 다니면 델꼬 와서 재우고, 경찰들 얼씬도 못 했어. 쌀 서너 가마 남았다 하면 삼선동 보문사가 돈이 더 많아. 거기에서도 쌀 갖 다 주고, 김치를 몇 통씩 갖다 줬어. 돈 한 닢도 안 들고. 쌀이 없다 그러면 국회의원 들한테도 전화를 걸어. 냉장고 사다주지, 쌀 몇 가마씩 갖다 줘. 그렇게 해서 살아왔 던 거지.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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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려면 죽여라, 무서운 게 없었어

“선생님, 와서 사례 발표 좀 해주십시요”하는 요청이 많았어. 부산까지 갔다 왔잖 아. 구로동 교회던가, 거기는 못 들어갔어. 삼중사중 쳐놓아서 못 들어갔잖아. 성당, 천주교에서 오라고 해서 갔어. 젊은 수녀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벌써 아버 님 오는 줄 알고 저 놈들이 봉고차 대놓았다고. 사례 발표를 했어. 사례 발표 딱 끝나 니까 수녀가 “나 따라오쇼” 해. 비밀 통로가 한두 군데가 아니야. 데려가서 택시에 얼 른 태워서 봉투 던지고 가버렸어. 돈을 도로 줄 수도 없고, 그때 돈으로 삼십 만원이 야. 삼십만 원이면 삼백만 원의 가치가 있지. 또 광주 제일교회에서는 전기 다 끊어 놓으니까 못 한다는 거야. “초를 많이 사와 라, 육성으로 할란다” 그랬지. 촛불 켜놓고 육성으로 사례 발표 하니까 그 사람들이 박수 많이 쳤어. 거기에서도 오면 그냥 안 보내. 그때는 돈이 좀 있었는데, 안 받을 수 없잖아. 우리 의문사를 엄청나게 대우했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했어. 저놈들은 사례 발표하는 거를 무서워했어. 그러다보니 금방 밝혀질 것 같아. 마음 만 커져갖고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는 거지. 그때 교회, 학생들,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적은 집회가 계속 됐어. 집회 가면 제일 앞에 서지. 집회 끝나고 싸우러 갈 때는 우리 가 제일 앞장 서. 광주 가면 5·18을 겪어서 몸에 뱄잖아. 쫓겨 가면 대문을 전부 열어 놨어. 들어가면 문 닫아버리고, 물 떠다주고, 먹을 것 주고. 광주에서는 그랬어. 거짓 말 안 해. 우리가 그렇게 싸웠고. 경대 장례식 할 때였어. 광주에서 시내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경찰이 더 많아. 관광 차가 삼사십 대 갔을 거야. 일렬로 쫙 세워놓고 하는데 경대 관을 리어카에 실어서 산으로 해서 세 시간을 싸웠어, 경찰들하고. 그 옆에 가면 아파트가 많이 있어. 아파 트 주민들이 몇 백 명 나와서 그 사람들이 싸갖고 시내로 들어간 거야. 그렇게 안 하 면 못 들어가. 그 여자들이 무슨 힘이 있어? 아파트 주민들이 총 출동을 해버린 거여. 싹 둘러싸고 시내로 들어가면 끝나는 거야. 그래갖고 이틀 만에 장례식을 했잖아. 전경들이 관광차 유리를 싹 깨버렸어. 차에 분풀이 해갖고 유리창을 다 깨버렸어. 장기표가 구속되었다가 나와서 운동권들 모아가지고 종합청사 농성을 들어갔어.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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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에 들어가서 농성을 이틀 했는데, 한 사 람 앞에 둘씩 붙어서 들어내다가 경기도 어디 어디로 다 분산해서 잡아갔어. 영춘이하고 같은 경찰서로 갔는데, 영춘이가 화장실 갔다 오더니 “형님, 내가 자료 하나 좋은 것 줄게” 그래. 그때 가 겨울이야. 영춘이가 잠바 속에 뭘 넣어왔는 데, 책자가 요만한데 두꺼워. 화장실 갔는데 신 호수 이름이 딱 보이더래. 잠바 속에 넣고 가져 온 거야. 그걸 읽어보니까 기가 막히는 거야. 요 런 사건이 있을 때는 이렇게 대처해라, 라고 딱 교본에 나와 있어. 신호수, 우종원이, 김성수 사 건을 경찰 교본으로 만들어갖고 전국으로 돌린 거야. (1998년) 서울역에서 캠페인 할 때, 그때는 현장 사진을 대형으로 해가지고 30, 40 장씩 쫙 걸어놓으면 그거 구경하는 사람이 엄청 많아. 여의도에서 할 때는 지나가는 사람이 음료수도 사놓고 가고, 봉투도 놓고 가고, 텔레비전 사다주는 사람도 있었고, 마이크 사다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때 우리 돈 한 푼도 안 들었어. 분위기가 좋을 때 였어. 그때는 재야, 학생, 크고 적은 집회가 매일 있었어. 집회를 할 때는 국가폭력, 의문사 진상규명, 이걸 걸어놓고 한 거야. 아, 이거 금방 밝혀지겠다, 그러면서 간이 커져버린 거지.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이 밤길 조심하라고 했어. 내가 우리 자식 진상 밝히려고 이러는 건데, 죽이려면 죽여라, 무서운 게 없었어. 그렇게 싸웠고, 공권력 하고 싸울 수밖에 없지. 의문사특별법과 명예회복법, 같이 올라가서 같이 통과되자!

(법 제정) 과정에서 우리 의문사가 엄청 고통을 받았어. 이거는 사실이니까 말 나 가도 돼. 박종철이, 배은심이, 이소선이 빼놓고 이 사람들이 우리 의문사를 사람으로 안 봤어. 의문사,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지. 맨 처음 유가협이 일곱 명이야. 일곱 명이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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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해. 처음에 합의하기를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어떻게 죽었든 유가협 이 전부 포용을 한다, 그렇게 포용을 한 거 아니여. 법 만들 때 어떤 줄 아는가?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하고 명예회복법하고 두 개를 만들었잖아요. 시작할 땐 좋았지. 근데 시간이 지나가니까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 해. 국회의원 누구 만나러 간다 하면, 박정기, 이소선이, 배은심이 셋이서 쏙 빠져버 리는 거야. 우리한테는 말도 안하고, 그때까지도 괜찮았어. 근데 중후반쯤 가니까 명 예회복법은 내일 통과되네, 모레 통과되네 그러는데, 우리 의문사법은 들춰보는 놈 이 없어. 영춘이하고 이희주하고 나하고, 셋이서 안 되겠다! 민주당 당사로 쳐들어가 야겠다. 밤 10시에 가서 자리 딱 깔아버렸어. 금방 소문이 나갖고 아침에 8시나 되니 까 박정기 아버지가 딱 왔어. “빨갱이가 할 짓이지, 이게 할 짓이야?”그러더라고. 하 도 기가 막혀서 내가 “우리가 빨갱이면 아버지는 뭐요?”했다고. 그때 농성 들어갔다 고 얼마나 비토를 받았는지. 그때 이상수가 왔어. 국회의원 이상수가 들어보더니 오케이, 자기는 몰랐다 이거 야. 국회에서 의원들이 들여다보고 하니까 특별법이 내일 모레 통과된다, 소문이 났 어. 그러다가 이 법이 법사위까지 올라갔어. 명예회복법은 저 뒤로 빠져불고. 그때 이부영이가 전화가 왔어. 아버님, 좀 보면 좋겠다고. 나하고 영춘이하고 최봉규씨가 삼인방이잖아. 우리가 갔어. 가니까 무릎을 딱 꿇고 “아버님들한테 죽을죄를 지었습 니다” 그래. 일어나라고 하면서, 어쩐 일이냐 하니까 의문사는 법사위에 올라가갖고 통과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명예회복법은 아직 감감하다 이거여.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쫓아가서 책상 다 뚜드려버리고, 의문사법 끌어내리라 이거야. 이부영이 “아버님, 의문사법을 어느 상임위에 보류를 해놓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하겠 습니까?” 하길래 “잘했다, 그게 원칙이다. 우리가 원래 같이 올라가서 같이 통과하 기로 했던 거다. 우리가 먼저 통과된다고 좋아할 사람이 아니다. 명예회복법이 올라 오면 같이 하자.”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야. 그러다가 허영춘이가 동네에서 무슨 문제가 있어서 구속이 되어버렸네. 나뿐이 없 는 거야. 우혁이 아버지는 하루 종일 있어봤자 말 한 마디도 안 해. 그 날 저녁에 회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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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주재했어. 전부 의문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기류가 돌더라고. 그 런데 조성만 아버지가 “의문사도 우리 유가족이고, 다 유가족인데 그렇게 해서 되겠 느냐?” 그 사람이 그렇게 해서 숨을 좀 틔었어. 그렇게 괄시를 받아가면서 우리는 좋 게만 하려고 했지. 영춘이한테 면회를 갔어. “형님, 나 죽었소 하고 참으쇼.” 참았지, 뭐. 영춘이는 보름 만에 무죄 석방으로 나왔고. 세 번을 팠어, 우리 아들을

세 번을 팠어, 우리 아들을. (처음 묘를 판 것은 사건 발생한 후) 저그 임의대로 가 매장을 했거든. 내가 1주일 만에 알았어. 가매장해부렀다 이거야. 가매장 해놓은 데 가 어디냐, 했더니 돌산 평사공동묘지야. 박창수라는 사람이 그 동네 청년회장을 했 어. 자기가 집이 있는데 우도에서 전화가 왔다 이거야. 너그 관내에 자살한 시체에 발견되었으니까 가서 확인해보라 전화가 온 거야. 이 사람이 책임이 있으니까 갈 거 아니여. 그 산에 사람이 갈 데가 없는 데야. 그리 올라가니까 사체를 덮어놨더라 이 거야. 혼자 가니까 무서울 거 아니야,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에이, 모르겠다 하고 위에서는 못 벗기고 밑에서 가마니를 들추니까 흰 양말을 신었는데 피가 묻었고 상 처가 양쪽 정강이에 있고, 위를 들춰보니까 팔이 잉크색 같이 되 갖고 수갑 찬 자국 도 있고. 야, 이놈도 데모 하다가 맞아죽어서 버렸는갑다, 얘기하면서 보호자가 분 명히 나타날 거란 생각을 해서 공동묘지에다가 자기 힘껏 사람 사갖고 좋게 해놨어. 보호자가 올 줄 알고, 가묘를. 그래서 가보니까 꽃도 하나 갖다 놓고, 자기가 갖다 놨 다는 거야. 기가 막히는 거야. 도로 내려오니까 보호자 나타났다, 소문이 나니까 동 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 거기서 아는 데까지는 얘기했지, 내가 아는 데까지는. 그 렇게 하니까 눈물 한 방울도, 그때는 눈물이 뭔지도 몰랐어. 눈물이 안 나와. 아무리 해도 안 나와. 저렇게 독한 사람들이 있냐 했어, 날보고. 아들이 죽었는데 눈물 한 방 울 안 흘리고 말한다 이거야. (두 번째 판 것은) 영춘이랑 둘이 이정빈 교수 면담을 했어. 호수 이야기를 하니까 이거는 유골을 파가지고 와서 자기가 봐야 안다 이거야. 그러면 내가 “가져와도 되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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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습니까” 하니까 그리 해도 된다 이거야. 바로 내려와서 망월동에 가서 파갖고 왔어. 서울대 의과대, 거기 가서 딱 해놓고 하더라고. “이래 갖고 자살을 할 수가….” 이 정빈 교수가 “없다”라는 그 말을 안 해. 쩜쩜, 해버려. 이틀 쫓아다녔는데, “내가 교수님, 어떻게 잘 확인했습니 까?” 물었더니 “응, 했어. 자살도 아니고, 타살도 아니고” 그래버린 거여. 그게 뭔, 기 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그걸 싸들고 내려오면서 내가 울었어, 처음으로. 허리띠 있 잖아요. 허리로 묶은 자국이 다 있어. 허리띠는 내가 못 찾았어. 없애부렀어, 저놈들 이. 내 허리띠를 끌러서 이종빈 교수를 줬는데, 내일이나 오면 얘기해주겠다고, 지 금은 얘기가 안 되겠다고. 뒷날 6시쯤 가니까 자기가 밤새도록 (목 맬 수 있는지 없 는지) 해봤다 이거야. 어떻게 해도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이거야. “이건 아니다.” 그거 하나 옳은 말 해주더라고, 허허허. 의문사 때 국과수에서 팠는데, 뭘 밝히려고 하냐 하면 자살이면 자살, 타살이면 타 살 분명히 해서 그렇게 밝혀주라 했거든. 그런데 이놈의 새끼가 뭘 밝혔냐 하면 친 자만을 밝혔어, 내 자식이라는 거.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살겠어. 뻔히 아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도로 망월동에 묻어놨지. 민간인 조사단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고도로 발달된 형사 놈들을 어떻게 이기겠 는가? 우리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 놈들은 꼭대기에 가 앉았는데, 뭐가 밝혀지 겠는가.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격려해가면서, 박수쳐가면서 그렇게 했지. 밝혀진 건도 있어. 우리 의문사가 37건밖에 안 돼. 의문사위에서 조사한 건 83건이야. 유가 협에 가입 안 된 사람들 사건이 많이 해결이 됐단 말야. 우리 의문사들은 의문사위 에서 하나도 밝혀내지 못했어, 한 사람도! 전부 불능, 불능으로 다 떨어지고, 안 그 러면 기각!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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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를 못 밝히고 눈 감을 수 있겠는가

87년도에 종철이가 죽었잖아요. 탁 하니 악하고 죽 었다고 된 거 아니여. 근디 나는 알어, 지금도 알고 있 고. 왜 종철이가 밝혀졌느냐? 중대 부속병원 의사인가. 남영동에서 그 사람을 불러갖고 살려내라 했거든. 근 데 이미 죽었거든, 물고문 해갖고. 이미 죽었는데 어떻 게 살리느냐 이거지. 이미 숨을 거뒀다 그러고 돌아왔 는데 종철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나니까. 국민들이 다 알아버렸으니까 그 래가지고 종철이가 밝혀진 거야. 종철이 아버지가 유가협에 들어올 때 의문사로 들 어왔어. 의문사로 들어와서 밝혀지고 나니까 빠져나갔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솔직히 나만 생각하고, 우리 아들만 생각하면 반토 막은 했고, 손 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의문사가 스물일곱 건이나 취하했어요. 양 친 부모 다 돌아가신 사건도 있는데, 그 사건들은 누가 책임지나. 옛날에는 저그 부 모들하고 진상 밝힌다고 그렇게 싸우고 했던 사람들인데, 손을 뗄 수가 없잖아요. 원근이 아버지하고 나하고 타협을 했어. 우리가 30년이 가깝도록 이 애들을 업고 왔는데, 지금 와서 벗을 수가 있느냐, 불쌍해서도. 의문사 혼자 힘으로 안 되니까 한 국전쟁 팀하고 같이 해서 법을 만들어보자, 해서 3년 전부터 시작했어. 19대 때 통과 못 시켰잖아요. 20대에는 야당이 좀 저기하니까 되든가 안 되든가 좀 수월할 거다. 그래 생각하고 이 애들은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야 한다. 의문사는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야 안 되겠냐. 되든 안 되든 우리가 살아 있는 한은 책임을 지고 해보자. 우리 의문사들은 협조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운영하는 것도 예전에 남은 돈 조금 있고, 허원근 아버지가 1년치 12만 원, 내가 12만 원, 인천 덕인이 아버지가 12 만 원, 덕수 동생이 12만 원 그렇게 내고 다른 사람들은 십 원 짜리 하나 안 내줘. 그 놈 갖고 우리가 경비 쓰고 힘닿는 데까지는 해 볼라고 해요. 억울해서, 다 같은 자식 들인데, 그런 자식들을 그렇게 해놓고 우리가 눈 감을 수 있겠는가. 될란지 안 될란 지 모르겠어. 최선을 다하는데 여러분도 좀 도와줘요.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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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여 따르라, 의문사 진실규명!

호수는 기념사업회라는 게 없어. 내가 가만히 보니까 추모사업이라는 것이 굉장 히 긍정적이더라고. 추모사업회에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하고. 추모사업이 라는 것이 학생들, 과에 선후배들이 뭉쳐서 되는 거 아닙니까? 끈끈한 거지. 그 사람 을 기리고, 그 사람을 마음속에 안 잊어버리고 찾아본다는 게 중요한 것이여. 대부분 학생들은 추모사업회가 다 있어요. 노동자들도 있는 사람이 있지만, 주로 학생들이 고. 여러분들이 도와줘야 우리도 힘이 날 수 있고.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서 1인 시위 나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국회에서 우리가 상당한 활동을 할 거예요. 이번에 당선된 사람들 난도 하나씩 갖다 줬어요, 잘 봐달라고. 우리는 여야를 가리 지 않고 무조건 만나고 얘기해야 한다. 새누리당에서 전부 반대하면 되는 일이 없어 요. 박근혜가 민주화운동 과정을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6월항쟁도 없애라 고, ‘민주’자가 들어가는 것은 없애버리려고 그러고 있잖아요? 박근혜 정부도 일한 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이것은 책임을 져줘야 하는 것 아닌 가. 정부가 100프로 책임을 져야 하는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골들이 동굴 속 에 쳐 박혀 있는데 수습도 안 하고 있잖아요, 수습할 데가 없다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지어갖고라도 해야지. 정부가 지금 그 사람들을 사람으로 인정을 안 하는 거죠. 빨갱이 죽이는 것이 뭔 죄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다고 해서 놔두면 안 되는 거거든요. 끝까지 싸워서 만들어내야 되는 거 고,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산 자여, 따르라,는 말에 전부 포함되어 있는 거야. 난 무식하고 공부도 안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한 생각에서 의문사도 마찬가지여. 나 만나면 그렇게 얘기해요. 당신들이 돈 몇 푼 받았다고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하는데, 진상규명은 안되지 않았느냐? 무엇이 해결된 거냐? 의문사 진상규명을 해야 되는 거지, 안 그러면 뭔 소용이 있느냐? 돈 몇 푼 줘서 받았으니까 끝났다, 그런 사람들도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이거 지. 내가 지금은 돈 받은 사람들한테 이렇다저렇다 이야기 못하겠지만, 만약에 법이 통과 되서 시행령을 만드는 과정이 돌아오면 내가 전부 불러다 말할 거예요. 의문사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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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두 딸이 살고 있는 경기도 문산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지회 사람들 불러서 이해를 시키려고 해요. 물론 지금도 이해는 하고 있어요. 이걸 밝히려는 생각은 있는디 해도 안 되니까 뒤로 빠져 있는 거예요.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않아요? 당신들이 그러니까 나도 안 해! 그러면 안 되지요. 그래서 내가 지금 이 러고 있는 거예요.

신호수 사건은… 1986년 인천의 연안가스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신호수가 방위병 근무 시절 살았던 자 취방에서 삐라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의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며칠 후 여수 돌산 동굴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서부경찰 서 수사관 차○○ 등이 장흥공작을 통해 신호수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 으로 인해 신호수가 사망에 이르자 이를 자살로 위장했던 것으로 판단”, 신호수 사건을 의문사 로 인정하였다. 신호수가 당일 훈방된 것이 아니라 3일 동안 서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경찰의 수사기록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가해 여부에 대한 조사 는 진행되지 못했다. 신호수 사건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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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2. 30주기를 준비한다: 미래의 기념사업회 ② ‘미래의 기념사업회’는 기념사업회의 미래를 상상하고 만들기 위한 기획 이다. 30주년이 될 2019년, 기념사업회의 미래는 우리가 상상하고 준비 하고 실천하는 만큼의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어떤 기념사업회 를 만들고 싶은가? 지난 호에는 재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았고, 이번 호에는 여성 회원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열린 플랫폼으로서의 기념사업회 :

소통과 연대, 친교의 공간을 상상하다 사회_김경주

참여_홍미숙,

이예진, 이차연, 김현숙, 전경미, 정원옥(참관)

진행_신성호 정리_전경미

일시_2016년 장소_이차연

6월 18일(토) 오후 7시

회원이 운영하는 <해법영어아현애오개>

애오개역을 나와 쭉 뻗은 길을 따라 걸어가니 오랜만에 뵙는 언니들이 모여 있었다. 좌담회가 열리 는 장소. 좌담회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에 이 자리를 거절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기념사업회를 여러 해 멀리 해오던 필자는 자기반성과 죄스러움으로 인해 어느새 수락하였고, 참여하였고, 아이들을 재 운 이 늦은 시간 그날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다. <또 오해영> 얘기로 시작해서 이내창 기념사업 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두루두루 아우르는 긴 수다는 많이 거르고 걸러 정리될 것이다.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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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나에게 이내창이란. 이내창 기념사업회란?

전경미 96년 봄 농활을 따라 갔다가 신

김현숙 고등학교 때 오빠가 다녔던 대

수형, 동규형, 선호형, 광채형 등을 알

학교에 놀러 갔다가 학생회실에 붙어 있

게 되었다. 96년, 97년 학생운동의 격

는 포스터를 우연히 봤다. 어떤 대학생

변기를 거치면서 낡은 구도의 학생운동

이 거문도에서 의문사했다는 내용이었

보다는 내가 속해 있는 삶 속에서 필요

다. 그때는 그런 일이 있나 보다 했는

하고 필요로 하는 학생운동을 고민하다

데, 나중에 대학에 들어와서 그 포스터

가 내창이형을 알게 되었다. 다소 촌스

속 인물이 이내창 선배라는 것을 알게 되

럽게 꼬불거리는 머리스타일을 한 흑백

었다. 대학 생활하는 동안은 내창이형의

사진 속에 청년은 아무도 모르게 거문도

정신에 따라 살았던 것 같다. 졸업하고

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학우들 만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것을 엄청 좋아했으며 언제나 따뜻

서부터 추모사업회와의 끈을 놓치게 되

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함께 들을 수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에 한번

있었다. 자연스레 졸업 뒤에 기욱이형을

이라도 총회는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덕

따라 추모사업회 집행부를 맡게 되었고

분에 간간이 얼굴을 내비칠 수 있었다.

3~4년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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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켜보며 홍보업무를 맡았다. 나 역

이예진 만약 우리에게 내창이형이 없

시 연애와 결혼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

었다면 지금처럼 가족 같은 끈끈함이 없

어 관심이 멀어지니 총회나 기제에 참석

었을 것 같다. 건전한 사회세력으로 지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진상규명 활

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끈이 헐거워졌

동이 더 진행되고 있지 않은 현시점에서

겠지만 우리에겐 내창이형이란 존재가

내가 얼마나 어떻게 기념사업회와 연결

있어서 지금까지 가족처럼, 그리고 더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기도 했

나아가 건강하고 순수하게 세상의 부조

다.

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이차연 학교 다닐 때는 마음만 함께하

있는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기념사업

는 사이였다면 지금은 기념사업회 활동

회는 내 옷장 속에 있는 여러 벌의 옷 중

을 옆에서 많이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

에 가장 좋아하는 옷인 것 같다. 예전에

서 기념사업회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할

는 추모사업회와 기념사업회의 차이를

수 있다.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기념사

잘 몰랐었는데 재작년 기제 이후로 자생

업회의 깃발 아래 모일 수 있어서 나에

적인 재학생들의 결합과 움직임을 보면

게는 고마운 존재다.

서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역할이 필

홍미숙 우리 부부에게 내창이형은 삶

요하기 때문에 기념사업회로 가는 것이

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역적으

맞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는 떨어져 있지만 기념사업회 안에 깊 숙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결혼 초기에

오늘 이 자리는?

남편은 내창이형의 뜻을 실천하는데 집

김경주 2009년 내창이형이 민주화운

중하고, 나는 가정과 개인적인 삶에 집

동관련자로 인정되고 보상을 받게 되면

중하면서 살았다. 우리 부부는 나와 기

서 추모사업회에서 기념사업회로 명칭

념사업회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하

을 바꾸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 자리

지 않는다. 자주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는 30주기를 앞두고 기념사업회가 어떤

미안함보다는 가족 같은 마음으로 대하

방향과 내용을 가져야할 지에 대해 여성

고 있다.

회원들의 생각과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

이내창기념사업회

125


기획연재

된 것이다. 지난 호에는 재학생들, 이번

것 같다. 기념사업회에 적극적으로 참여

호에는 여성 회원들, 다음 호에는 또 다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른 그룹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더디

기념사업회는 친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기념사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나 여성회원들은

회회의 미래에 대한 더 많은 회원들의 의

결혼이나 육아로 인해 부득이하게 단절

견을 모아나간다면 30주기에는 의미 있

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해 물리적으로 참

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

여가 힘들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

난 번 재학생들의 좌담회 결론은 “선배

해서는 강연이나 재능기부를 통한 다양

님들이 잘 이끌어 주세요”로 요약할 수

한 배움의 욕구를 충족해줄 수 있는 열린

있다.

플랫폼이 마련되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

정원옥 25주기에 이장을 진행하며 모

다.

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지금 기념사업

이차연 경미의 얘기는 다양한 소모임

회는 숨을 고르는 시기다. 경주언니가

의 활성화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설명했다시피 기념사업회의 미래에 대

중요하지만 함께 하지 못해 주저주저하

한 여러 그룹의 생각과 의견을 들어보

는 회원들을 이끌어내고 다독일 수 있는

고 취합해서 30주기를 준비하는 것이 필

어떤 통로나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

요하다. 두 번째로 여성회원들을 초대한

같다. 매번 집행부나 운영위원회를 하는

것은 여성회원들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사람들이 고정되어 있다. 당사자들도 힘

그 동안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운영위

들겠지만 보는 사람들도 우리 단체가 정

원회에도 여성회원들은 들어와 있지 않

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점

고, 행사에 참여하더라도 기념사업회의

도 극복되어야 할 부분이다.

운영과 관련된 의견은 거의 말하지 않는

김현숙 전경미 후배가 강연이라는 형

다.

태의 접근성이 쉬운 플랫폼을 얘기했는 데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준비하려

그 많던 여성회원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지 말고 좋은 강연을 찾아서 소모임 형

전경미 접근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태로 자유롭게 연락하여 만날 수도 있을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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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다. 한 명만 조직하면 된다. 나는 기

다른 기념사업회들은 어떤가?

본소득 문제에 관심이 있는데, 기본소득

김경주 잘 운영되고 있는 다른 기념사

과 관련된 좋은 강연이 있으면 한 명만

업회의 케이스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조직하는 거다. 밴드에 공지해서 더 많

정원옥 지지난 호 <어깨동무>에 이한

은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지만,

열기념사업회와 경희대 이수병기념사

한 명은 조직했으니까 아무도 오지 않더

업회를 소개했었다. 하지만 잘 나가는

라도 상처받을 일이 없다. 이런 방식으

이들 기념사업회는 재정규모부터 우리

로 소모임이 활성화되면 자주 만나지 못

와는 크게 다르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했던 주변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기회도

회비 내는 회원이 7백 명 가까이 되고,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수병기념사업회는 6백여 명이다. 그

홍미숙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

만큼 사업도 활발히 한다. 이한열기념사

는 현실적인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업회는 ‘이한열기념관’이라는 공간이 있

보니 밴드를 활성화하는 방법이 가장 현

어서 전시 사업과 장학 사업을 주로 하

실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밴드가 공지사

고, 이수병기념사업회도 별도 사무공간

항을 전달하는 창구로만 전락해버려서

이 있고 상근활동가만 세 명이다. 인혁

아쉬운 마음이 있다. 좀 더 가벼운 주제

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들이나 재미있는 문화공연들을 자유롭

회복 사업, 민족문제연구소 설립과 친일

게 올릴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

청산, 경희대 뿌리찾기운동 등을 하고

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있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작년에 이한 열의 유품을 복원하는 ‘운동화프로젝트’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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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를 진행했었고, 올해는 열사가 쓰러진

마련하여 운영을 한다면 재학생과 기념

장소에 동판을 세우기도 했다. 얼마 전

사업회 회원 간의 소통의 장이 될 것이

이한열 문화제에 다녀왔는데, 재학생들

고, 그 공간을 통해 소모임의 활성화도

도 많이 참여해서 보기 좋았다. 내년에

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목

는 30주기를 맞아 문화제를 크게 할 계

표와 사업내용을 정한다면 회원들뿐만

획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다.

아니라 재학생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 할 수 있을 것 같다. 늘 해오던 사업만 하

내가 생각하는 이내창기념사업회의 미래는?

는 관성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가능한 범

홍미숙 내가 생각하는 기념사업회의

위 내에서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것이 중

미래는 나와 너 그리고 학교에 있는 재

요하다. 실패하면 또 어떤가. 더 적극적

학생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만드는 것이

으로 기념사업회의 미래를 상상하고 만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보면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고 소통

김경주 다른 기념사업회들이 민주동문

할 누군가를 찾게 되는 시기가 오게 된

회와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안정적으로

다. 이를 위해서는 인터넷이든 오프라인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기념사

이든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

업회도 흑석교정 민주동문회와의 적극

수적이다. 서로의 삶을 스스럼없이 공개

적인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

하며 위로 받고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을

더불어 재학생 단위와의 열린 연대를 통

만들어야 한다. 온라인상의 공간 활성화

해 내창이형의 뜻을 따르는 후배들을 도

와 더불어 흑석동 근처에 오프라인 공간

와줄 수 있는 힘을 갖는 기념사업회가 되

을 마련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운영

예를 들어 ‘내창이형 까페’를 운영한다면

위나 집행부가 남성 회원 위주로 이루어

재학생들과 졸업생이 쉽게 모여 얘기 나

져 왔기 때문에 여성 회원들의 목소리가

눌 수 있고 상시적으로 내창이형과 관련

많이 반영되는 구조 또한 필요하다.

된 내용을 전시할 수도 있고 소모임의 장

이예진 내창이형 25주기 이장 때부터

소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거점을

흑석, 안성교정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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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후배들을 지지·지원하고 이끌어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여성회원들의 다

주는 것이 기념사업회의 미래와 관련하

양한 아이디어와 참여가 있다면 가능한

여 중요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

후배들이 졸업하여 기념사업회의 새로

는 다음 자리가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운 회원이 될 것이기 때문에 재학생들 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필요

2시간 20여 분의 수다는 치킨과 맥주가 더해지

하다. 그리고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면서 스르륵 내 핸드폰에 저장되었고, ‘오프더

있어서 기념사업회가 회원들을 이끌어

레코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랜만에 만

주고 뜻을 모을 수 있는 창구로서의 역

난 언니들은 예전 그대로였고 여전히 열정적으

할도 유지되길 바란다. 더불어 기념사업

로 기념사업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회 회원들의 다양한 활동 내용을 여러 회

모습이 존경스럽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제 내

원들과 공유해서 늘 그 자리에서 열심히

창이형의 뜻을 함께 나누고, 그 뜻을 세상에서 함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언제든

께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어깨동무하며 한걸음

지 내가 맘을 먹는다면 기념사업회에 참

한걸음 걸어 나가야겠다.

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노력해 야 한다. 김현숙 모든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목

소리를 낼 수는 없으나 국가폭력에 의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역량 을 집중하여 대응하는 모습도 가졌으면 좋겠다. 김경주 많은 회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어야 하겠다는 이야기 로 요약되는 것 같다. 건강한 시민으로 서의 투쟁을 포함하여 회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요구를 담아내는 열린 플랫폼을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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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미_96년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상봉 마리아병원 연구지원본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시준과 시연 의 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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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기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더 단단해졌다

2016년 상반기 사업보고 이내창기념사업회 신년총회

군나팔>이 선정되어 5월 19일 오픈운영위원회

1월 23일, ‘2015년 활동보고 및 2016년 계획 수

를 진행한 후 1백만 원을 전달하는 시상식을 가

립을 위한 신년총회’가 열렸다.

졌다.

서원 3주기 기제 참여

4·16 2주기 참여

3월 5일 서원의 3주기 기제에 신명철, 서병훈,

4월 16일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2주기 행

김성희, 김선주, 이원근, 정원옥, 장성백, 전성태,

사에 정원옥, 이원근, 김경주, 이예진, 이지원, 노

박희성, 노용헌 등이 다녀왔다.

용헌 등이 참여했다.

제3회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공모

어깨동무 봄나들이 치맥 파티

및 시상식

4월 23일, 회원들 간 친목 도모를 위한 봄나들

이내창의 정신을 계승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모

이 치맥파티가 상암동 노을공원 난지캠핑장에

교 재학생 지원사업인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서 열렸다. 황사와 미세먼지, 꽃샘추위가 심술

>에 대한 공모와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헬로조

을 부린 날씨에도 3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이

선프로젝트>, <평화나비>, <의혈하다>, <자유인

야기꽃을 피웠다. 이계현·이주현 동문이 금일

문캠프>, <진군나팔>, <예술하다> 등 총 6개 단

봉을, 방상운·송은진 동문이 사과를, 노용헌 사

체가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평화나비>와 <진

무국장이 올리브유를 협찬했다.

5월 19일 오픈운영위원회, <평화나비>와 <진군나팔>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에 선정된 에서 활동 중인 재학생들이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평화나비>에 장학금을 전달하는 민주동문회 심규한 회장 시상식에 참여했다.

이내창기념사업회 서병훈 운영위원장이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에 선정된 <진군나팔>에 장학금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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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상반기 운영위원회 회의 보고 1차 운영위원회

2월 27일 추모연대 정기총회(1시)와 4차 민중총

일시 : 2월 18일(목) 저녁 7시

궐기(3시)/ 강내희 기념사업회 회장 퇴임 및 출

장소 : 4·9재단

판기념회(26일 명동 YWCA) 참여/ 서원 3주기 (3월 5일) 참여

안건 : 1. 제3회 <이내창의 후배다> 사업공고

2차 운영위원회

-- 예전과 동일하게 진행

일시 : 4월 8일(금) 저녁 7시 30분

-- 대학홈페이지 공고(노용헌)

장소 : 홍대 인근 카페더웨이

-- 밴드, 페북과 메일수신(백기욱) -- 공고일은 3/1~3/20 -- 선정자 상금전달은 4월 중 행사진행 시 전달 2. 운영위원 조직정비 -- 운영위 텔레그램의 인원 정리 -- 30주년 TF팀의 조직구성(이원근) -- 서병훈 운영위원장 선출 -- 재학생 대표로 고두현이 운영위원 합류 -- 운영위 회의는 2달에 1번씩 정례화하기로 (2,4,6,8,10월 - 매달 첫째 주) 3. 기념사업회의 방향성 -- TF팀에서 방향성 및 비전30에 관한 안건을 정리하고 운영위에서 논의하기로. 4. 상반기 사업 -- 4월 23일(토) 가칭 <뭐라도 합시다>라는 행사 를 기획 --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사업 공모 진행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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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 : 1. <우리는 이내창의 후배다> 심사 및 선정 -- 총 6개 단체가 응모함 (흑석 : <헬로조선프로 젝트>, <평화나비>, <의혈하다>, <자유인문캠 프> 안성 : <진군나팔>, <예술하다>) -- 심사기준 다시 만들기로 * 차후부터는 “안성, 흑석 1팀씩” 구분조항 없이 2 팀으로 * 선정 팀의 연이은 응모불가, 격년으로 공모 가능 * “단체”가 아닌 “단체의 해당년도 사업”을 대상으 로 심사해야 * 신청서에 행사기획안과 예산계획서가 필수로 첨부돼야 * 결과보고는 당해년도 <우리다시 어깨동무>에 직접 보고하는 것으로 * 밴드, 페이스북, 대학 홈페이지, <중대신문>, 대 나무숲 등의 매체를 통해 광범위하게 홍보할 것


함께하기

-- 선정결과 * 흑석은 <평화나비>, 안성은 <진군나팔> 조건부 선정 * 4월말까지 사업계획 및 예산사용계획서 제출해 야 승인하기로

-- 시상 5월 19일(목) 저녁 7시 30분에 오픈운영위원 회를 진행하고 그 자리에서 시상하기로 함

3차 오픈운영위원회 및 <이내창의 후배다> 시상식 일시 : 5월 19일(목) 저녁 7시 30분 장소 : 서울시민청 동그라미방 참석자 : 신명철, 김성희, 서병훈, 심규한, 조환 준, 이원근, 정원옥, 노용헌, 김기수, 연창훈, 고 두현, 김여훈 외 7명, 이은진 외 1명

다시 논의(작년 인원 50여 명) -- 흑석에서 출발하는 인원이 많을 시에 대형버 스 대절 검토 2. 이내창 후배다 시상식 (8시 30분~9시) -- <평화나비>, 김여훈 외 7명, <진군나팔>, 이은 진 외 1명 참여 3. 행사 일정 공유 및 참여 독려 -- 6월 2일 대학로. 백남기농민 국가폭력 발생 200일 촛불문화제 -- 6월 4일 25회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 추모제 -- 6월 8일 제12회 박종철 인권상 시상식(백남 기 농성장) -- 6월 9일 이한열 열사 29주기 문화제 및 동판 제막식

안건 :

4차 운영위원회

1. 27주기 추모제 논의 사항

일시 : 7월 8일(금) 저녁 7시

(7시 30분 ~ 8시 30분) --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원과 민동회원, 재학생 의 참여확대 문제 -- 학번별, 동아리별, 재학생단체의 책임자 선 정 문제 -- 장임원, 강내희 선생님과 유가협 등 외부인사 연락 문제 -- 유가족 연락(이원근) -- 당일 행사로 할지 1박2일로 할지는 추후 운영 위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함 -- 예상되는 인원, 예산 문제, 프로그램은 추후

장소 : 당산역 인근 서병훈 운영위원장 사무실 참석자 : 김성희, 서병훈, 정원옥, 이원근, 노용 헌, 백기욱, 김기수, 이혁승 안건 : 1. 8·15기제 준비 (발제 : 노용헌) -- 당일 행사로 진행하고, 1부 추모제, 2부 만남 과 대화의 시간으로 구성 -- 1부 추모제(11:00 ~ 12:00) * 전체 사회(김성희) * 식순 검토 끈덕지게 어깨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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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례 / 공연(조환준 - 오카리나) / 경과

2. 기념사업회 전망과 비전에 대해 (발제 : 김성

보고 및 약력보고(노용헌) / 유족인사(이내석

희)

형님) / 이내창기념사업회 회장 인사말(강내

-- 이내창기념사업회와 민주동문회 간 상호교

희 선생님)(확인 : 정원옥) / 운영위원장 인사

류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하자는 데에 의견 확

말(서병훈) / 재학생 인사말 / 외부인사(내빈)

인사말 / 공연(산하) or 추모시 낭독(성백술) / 헌화 및 참배 * 국화 준비, 천막 마이크 제공 여부 확인 (노용헌) -- 2부 만남과 대화의 시간 * 12:00 ~ 13:00 점심식사: 식사는 작년과 동 일하게 도시락 준비, 수박, 떡 등은 별도 준 비 * 13:00 ~ 15:00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전 시실 관람/시청각실에서 영화 <자백>의 트 레일러 상영/동문들과의 담화 -- 차량은 개별차량 카풀조직을 원칙으로 하고, 인원이 많을 시에는 대형버스도 고려(흑석동 중앙대 정문에서 출발) -- 웹자보 준비 -- 이번 기제는 기념사업회와 민주동문회가 주 최하고,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진행

-- 이내창기념사업회의 현재 회비 현황보고와 수입과 사업에 대한 의견 -- 회원배가운동 전개의 필요성 공유(구글 폼 등 을 활용) 3. 재학생 활동 후원에 관해(발제 : 김기수) -- 지원에 대한 내부 가이드라인 마련(근거는 회 칙 3조 2항, 기념사업회 설립 목적에 부합하 는 행사와 사업) 4. 영화 <자백> 스토리펀딩 모금과 행사 기획(발 제 : 이혁승) -- 1인 2만원(영화 티켓2매), 총 100만원 모금으 로 9월 중 이내창기념사업회와 재학생이 함 께 공동으로 행사 진행 -- 시사회 및 강연회 등 동시기획 -- 모금은 8월 31일까지 해야 하며, 8·15 기제 때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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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이체 및 후원 계좌입니다. 국민 0250 - 1036 - 8426 추모사업회 (정원옥) 회비납부 회원 CMS 서정헌, 박응진, 박성용, 안인숙, 조형준, 우유섭, 이영은, 노병진, 김학진, 이상재, 이주현, 김현 동, 김성희, 이태경, 정보영, 신명철, 곽현희, 박성훈, 권향숙, 이남영, 박희성, 김기수, 최호식, 조환준, 박철민, 구혜영, 김 용수, 이민진, 이동희, 노민옥, 안명숙 자동이체 강동길, 강민구, 김산환, 송은진, 백기욱, 신성호, 정순호, 이예진, 홍미 숙, 정원옥, 노용헌, 원순재, 서병훈, 김형구, 박응식, 김재홍

이내창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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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세요 담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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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들어요. 하나, 2016년 다음호 편집위원 되기 자주 안 모입니다. 회의는 짧게, 뒤풀이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일은 찾아서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합니 다. 느릿느릿 갑니다. 끈덕지게 함께 갈 열의와 책임 감이면 충분합니다.

l 찍은 날

2016년 8월 1일

l 펴낸 날

2016년 8월 3일

l 펴낸 이

강내희

l 펴낸 곳

이내창기념사업회

l 연락처

사무국장 노용현 010-3715-1572

cafe.daum.net/19890815

둘, 기고하기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글이라도 좋습니다. 나누고 싶 은 생각,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 소소한 일 상의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 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원 자녀의 기고에는 소 정의 원고료가 지급됩니다.

김선주, 서병훈, 조환준, 김경주, 이원근, 정원옥, 백기욱, 신성호, 강곤, 강지우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권두칼럼을 보내주신 김 형태 변호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이내창열사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주셨음을 기억합니다. 특집으로 백남 기 선배를 다뤘습니다. 슬픔 가운데 어렵사리 원고를 보내주신 큰 딸 백도라지님과 백남기 선배의 오랜 지인이신 유영훈님,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신지영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수정 님과 혁이 님의 새 연재물이 <어깨동무>를 더욱 풍성하게 만 들어주었습니다. 원고를 보내주신 한대윤, 김영식 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여성회원들의 간담회를 진행한 신성호와 정리해 준 전경미, 포토에세이의 이재정에게 따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페이스북 담벼락의 사진과 글을 쓰도록 허락해준 회원 여러 분께 감사드립니다. 인쇄는 상지사, 발송은 신성호가 애써주었습니다. <끈덕지게 어깨동무>는 온라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 습니다. 밴드 <묻지말고 응답해라 의혈중앙>에서 근황도 나누시고, 기념사업회 소식도 공유하시길 바랍니다. 깊은 관심과 애 정으로 <끈덕지게 어깨동무>를 기다리고 애독해주시는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걸음 더 ‘끈질기게’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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