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form-L-2016-EX-Push Pull Dra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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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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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지 주제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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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범 김익현, ‹Link Path 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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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풀어 오르는 현실과 반짝이는 어둠 정시우 배헤윰 인터뷰, ‹상은 어떻게 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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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경 이윤이, Look in a Mirror, She’s Not There 이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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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정 ‹옐로우 스폿› 대담하게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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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경 큐레이터의 전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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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 공간과 감각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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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 풀, 드래그› 읽기 박가희 정세영 인터뷰, ‹데우스 엑스 마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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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우 작가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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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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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예술에 대한 관습적 대상화 너머의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은 어떻게 부각될 수 있을까? 이번 전시는 ‘주제 없는 기획’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질문은 단순히 기획 전시에서 주제라는 개념을 배반하 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수용과 이해에 있어서 우리의 사고 가 어떻게 발동되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같다. 국내 젊은 작 가 다섯 명 김익현, 배헤윰, 이윤이, 정세영, 조익정이 참여 하는 이번 전시는 전지적인 의미의 주제를 강조하는 대신, 각 작업에서 나타나는 미시적인 근거를 통해 느슨한 풍경 을 만든다.

13 2, 3층 전시장의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으로 플랫폼-엘 건물의 최 하단부 지하 기계실을 찾아 18M를 내려가야 하 는 관람동선은 하나의 전시 안에서 엇갈리는 방향과 환경 을 가진다. 사진과 드로잉, 영상과 설치, 퍼포먼스 등 전시 장에 놓인 다양한 층위의 작업들은 분절된 이야기의 병치 로 인해 의미의 전이와 탈주를 제안한다. 관람자는 전시장 의 정해진 동선을 따라가며 신체를 사용하는 물리적인 운 동을 하게 된다. 이는 예술의 이해와 그 수용으로 이어지는

‘사유의 운동’이 된다. ‹푸쉬, 풀, 드래그 Push, Pull, Drag›는 동사의 모음이다. 끌 고, 당기고, 미는 세 개의 동사는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 운 동의 방향을 상상하게 한다. 이 움직임의 주체는 작가와 기


획자를 포함하여 전시를 바라보는 모든 이를 일컫는다. ‹푸 쉬, 풀, 드래그›는 삶과 예술 사이에 있는 생경함과 그 거리 감에서 비롯되는 각자의 호기심에 집중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정된 주제와 강요된 해석을 벗어나 감상과 이해에 대한 자유로운 환경을 제안하고 궁극적으로 작가들의 예 술적 경험을 공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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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지우기 이한범

‘주제 없는 기획’이라는 문구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 다. 전시에서 주제를 비우겠다는 것은 예술(작품)이 그것 스스로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를 재검토해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이는 분명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속한 미적 실천의 태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감각이 어떻게, 무엇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이러 한 의지가 놓인 상황은 복잡다단하게 중첩된 여러 맥락에 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큐레이터라는 형상을 떠올 려보자.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의 등장 이후로, 예 술가를 넘어서는 창작자가 된 일군의 큐레이터는 자본의 글로벌리즘과 맞물리며 담론형성을 통해 거대서사 직조하 는 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언어를 보충하기 위해 적 절한 작품을 취사선택하고 그것을 배열한 장소를 선보임 으로써 지식생산자 지위를 얻었고 역으로 작품은 어떠한 방식으로 취사 선택되느냐에 따라 평가 받게 되었다. 때문 에 당대의 주제 중심 큐레토리얼 문화 안에서 작품은 충분 히 가시적인 언어로 인지되고 직접적으로(그러나 직설적 이지는 않게) 세계를 반영해야만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는 몰이해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작품이 전시 주제 혹은 담론 이외에는 의미를 획득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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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공회전하게 될 때 작가(작품)는 소비되고 큐레이터 와 기관은 전리품을 얻는다. 몰이해가 한없이 깊어지고 있 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먼저 세워진 자리 주 변에는 대체 가능한 것들이 일사분란하게 모여든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젊은 ~’의 수사를 접붙인 상 / 전시 / 행사일 것이다. 기존의 것에 대한 차이가 아방가 르드로 뭉뚱그려져 이해될 때 ‘새로움’의 뉘앙스를 내포하 는 ‘젊음’은 별다른 맥락적 이해 없이도 제도에 관성적으로 쉽사리 편입된다. 이것은 분명 한때는 급진적이었을 차이 의 정치학이 물신화된 형태일 뿐이며 차이를 무한히 축적 시킬 뿐 그 언어가 지닌 급진성의 재생산과는 전혀 무관하 다. 이 예시처럼 손쉬운 선언적 명제를 이용해 급진성의 프 레임을 짜는 것이 미술계의 비대한 몸집과 신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생산구조다. 어떤 ‘말’이 획기적이고 급진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생산구 조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주제와 담론 중심의 기획 언어가 공고히 유지되는 한 작품 은 맹렬히 돌아가는 쳇바퀴에서 언제 지쳐 쓰러질지 모르 는 존재와도 같다. 네덜란드 작가 구이도 반 데어 베르베(Guido van der Werve) 는 “이미 맥락과 내용이 정해져 있는 비엔날레와 같은 대 규모 전시에서, 자신은 작가로서 매우 괴롭다... 작품이 주 제를 부연하거나 특정한 내용을 생성하도록 요청받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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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자율성은 상실된다”라고 직언했다.1 특정한 언어 적 형태의 지식에 소요되는 것으로서의 예술(작품)이 더 이상 유효한 방식이 아니라는 판단은 공공연한 움직임이 다.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르기예프(Carolyn Christov-

Bakargiev)가 ‹도큐멘타 13›과 ‹제 14회 이스탄불 비엔날레› 를 통해 지식생산의 다른 방식을 실험했다면, 2017년에 예 정된 ‹제 57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주제를 버리고 개별적 인 ‘작가’에 집중할 것임을 공표했다.2 서구의 미술사 연구 는 동시대 로컬의 개별성에 집중하기 위한 방법론을 고군 분투하며 고안하고 있다. 이는 맹렬히 덩치를 키워 오던 주 류(글로벌리즘) 미술의 속도에 가려있던, 언제나 존재해왔 지만 비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재고하려는 움직임이지 또 다른 새로운 시스템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인 것이 중요해졌다. 개별적인 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될 때, 급진성의 재생산은 가능해진 다. 때문에 주제를 비우는 일은 단지 그럴듯한 큐레토리얼 의 번외편 정도가 아니라 지난 반세기동안의 상황을 재고 하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미술이 이제 무엇을 다시 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기 위한 원시주의적 회귀이다.

그렇다면 주제를 비운다고 해서 예술작품의 자율성이 즉 각적으로 탈환되는 것일까? 그리 속단할 수는 없을 것 같

1. Guido van der Werve, “Heavily curated biennales really bother me as an artist” [http://conversations.e-flux.com/t/heavily-curated-biennales-really-bother-me-as-an-artist/1715] 2. [https://news.artnet.com/art-world/the-2017-venice-biennale-will-focus-on-artists-not-big-themes-66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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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율성은 스스로의 완결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재성과의 배치 속에서 작품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파악 될 때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능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가시화시키는 매체 중 하나가 바로 전시일 것 이다. 전시는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픽션이다. 개별 적인 작품들이 임의적 상황에서 발생시키는 갈등으로 탄 생하는 픽션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 ‹푸쉬, 풀, 드래그› 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이번 전시에서 영상과 사 진, 회화, 오브제 등의 작품이 물리적으로 배치된 것 이외 에 특이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 었기 때문에 ‹푸쉬, 풀, 드래그›는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드 러나지 않은 픽션이다. 주제가 비워진 자리, 말을 덜어낸 그곳에는 더욱더 첨예한 갈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전시장에는 ‘주제가 없다’는 제스처만 있을 뿐, 무엇이 쟁점이 되는 상태인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공동 의 노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설계된 지식이 일방적으로 유 통되는 모델이 아닐 때, 작품을 둘러싼 모든 주체는 협상의 상태에 놓인다. 권력관계에 따르지 않는 비타협적 토론에 동참하게 되면, 작품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이곳저곳에 서 자율성을 획득할 개연성을 지닌다. 뒤집어서 얘기해보 면 작품이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엄연히 유통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모종의 상징권력이 개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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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곳에서 곪을 대로 곪은 부분이 터져나간 것을 우 리는 목도했고 나는 이것이 매우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리 에게 이전과 다른 미학적 태도가 요구되는 이유라고 생각 한다. 작품의 힘만이 기능적일 수 있는 곳을 상상하는 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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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llow Spot


Deus ex Machina Link Path Layer

Coming the Painterly Hearts Echo Like Merc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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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 ‹Link Path Layer›: 부풀어 오르는 현실과 반짝이는 어둠 정시우

금광의 어둠을 촬영한 사진을 조용히 쓰다듬어 본다. 납 작한 이미지가 전시장 벽과 밀착되며 동질화를 시도하지 만 이내 부풀어 오르며 찰나의 초 평면적 이미지는 현실로 돌아온다. 부풀어 오르는 현실을 매일 쓰다듬다 보면 양손 에 거뭇한 이미지의 흔적이 묻는데 이미지를 문지르던 손 이 시커멓게 변할수록 사진의 표면은 영롱한 광채를 발하 고 스스로 빛을 내게 된 이미지는 결국 온전한 평면으로 남 지 못한다. 젤라틴을 녹여 화학 처리한 면직물인 바리타지 에 픽셀을 대체할 미세한 분말 안료가 안착하고, 안료 층에 빛이 굴절하며 반짝이는 어둠은 물성을 획득한다. 데이터 차원에서 끌어올려진 이미지는 현실에 반응하며 불완전한 평면이 된다. 김익현은 최근의 작업에서 사진이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이미지 데이터 그 자체로 보이는 방법을 고민한다. 이미지 를 액자에 넣어 실존적 덩어리 감을 부여하는 전통적인 설 치 방식에서 벗어나 전시장 벽면에 직접 작업을 부착함으 로써 이미지는 다른 맥락에 놓인다. 전시장이라는 입체 공 간에 금광의 표면을 촬영한 이미지가 붙은 전경은 마치 3D 그래픽으로 그려낸 환경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화이트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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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는 무중력 공간에 질감을 입혀 전시 공간을 동굴 속, 혹은 서울 광장 등으로 위장한다. 작가는 전작인 모뉴먼트 작업을 통해 역사적 사건이 거대한 조형물로 고착되는 순 간의 빛을 붙잡았는데 ‹Link Path Layer›에서는 작업의 대 상이 공간으로 이동하며 그 외피가 아닌 내부, 덩어리가 아 닌 표면, 빛이 아닌 어둠을 포착한 것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작업의 대상이공간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작업을 구성하는 서사도 좀 더 다층적으로 확장되는데 이러한 구 조가 체험 서사로의 이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재현을 위한 위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Link Path Layer›는 이후의 작업과 연결된다. 근작은 같 은 풍경 사진이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촬영된 사진이 아 니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 티서울 2016을 통해 선보인 ‹모두가 연결되는 미래›는 구 글 스트리트뷰가 구현되는 방식을 참고해 여러 장의 사진 을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붙여 거대한 풍경 사진을 만들고 그것을 무중력의 공간에 재배치, 바로잡는 방식으로 제작 되었다. 구글 스트리트뷰는 특정한 날 촬영된 이미지를 지 도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구현한 거대한 입체 구조물에 덧입히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하 면 과거의 이미지와 동시간의 위치정보, 그리고 지도 데이 터로 구현된 공간이 하나의 시공간에 겹쳐진다. 특히 구글 의 스트리트뷰는 국내의 비슷한 서비스에 비해 업데이트 가 더뎌서 2016년 12월 서울광장의 위치정보를 입력하면

2014년 7월의 서울광장을 출력하고, 2014년의 서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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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2016년 현재의 위치 정보를 표시하는 등 현실과 데이터 로 구현된 공간 사이에 기묘한 어긋남이 발생한다. 김익현 이 수집한 2016년 서울의 풍경 또한 한 장의 매끈한 이미지 로 출력되지만, 애플리케이션의 불완전한 알고리즘에 의 해 일부분 깨지거나 초점이 나간, 어긋난 지점을 보이게 된 다. 이러한 어긋남이 김익현의 작업에 서사가 개입할 수 있 는 틈을 만들어 준다. 작가 김익현은 역사적 사건에 관한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작업의 대상이 기념비에서 동굴, 과거의 유산에서 동시대 풍경으로 이동하고 작업의 방식이 대상을 촬영하 고 다층적 서사로 보충하는 방식에서 연출된 무중력의 상 황 속에 서사가 투명하게 달라붙은 한 장의 이미지로 변화 했지만, 그는 꾸준히 역사적 사건을 호출한다. ‹Link Path

Layer›에서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동굴인 금광을 매개해 과 거와 연결된다. 나다르가 인공조명을 사용해 촬영한 최초 의 사진, 한 줄기 빛 없이 15일 8시간 매몰되어 있었던 광부 김창선, 그 영롱한 빛으로 욕망을 밝히는 황금. 중력이 작 용하지 않는 이미지 데이터에 겹겹이 얹혀진, 현실의 무게 가 덩어리진 서사들은 결국, 작가가 역사적 어긋남을 드러 내는 역설적 은유이다. 김익현은 동시대 작가들의 방법론 을 수용하지만, 중력이 작용하는 현실의 역사성, 그리고 정 치성을 드러내는 방법에 주목한다. 전시장으로 옮겨진 이 미지 데이터는 현실에 반응해 울퉁불퉁한 공기층으로 부 풀어 오르거나 납작하게 안착함을 반복하며 완전한 평면 을 이루지 못한다. 부풀어 오르는 현실을 매일 쓰다듬어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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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하게 하는 반복 행위는 불완전한 현실을 다잡는 행위가 되고, 스스로 빛을 내게 된 금광의 표면은 실재적 이미지로 재맥락화된다. 전시장에 단단히 달라붙을 수 없었던 이미 지의 불완전함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역사적 층위가 서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기능한다. 김익현은 이제 풍요와 참사가 공존했던 90년대로 연결된 다. 1995년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던 삼풍 백화점 붕괴사건 이 발생하고, 분홍빛 욕망이 무너진 자리는 십 년이 채 지 나기 전에 또 다른 욕망으로 채워졌다. 참사의 현장에 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포개지고, 얼마간 지하 주차장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거나 카트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는 등 기이한 소문이 돌았지만 반듯하게 정리된 자본의 논 리 앞에서 그 소문은 잦아들었다. 나다르가 지하 카타콤에 서 발견한 수많은 죽음과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 돌아온 광 부 김창선이 연결되고, 김창선의 매몰 기록을 28년 만에 경 신한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의 생존자가 어둠 속을 통과한 다. 그들이 어둠 속에서 마주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반복 되는 역사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어둠은 서로를 연결하 고 통과해 결국 투명한 한 장으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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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헤윰 ‹ 상은 어떻게 오는지 › 인터뷰 전효경 전효경 배헤윰은 오래 전부터 식물을 그려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몇 해를 걸쳐 여러 곳에 머물면서 식물 그리기를 지속한 동기가 있나? 배헤윰 식물의 운동은 거의 없다고 치부되거나 무척 느린데 그것은 어느 순간 변모해 계절의 변화를 깨닫게 해준다. 정적인 시간, 정적인 물체의 운 동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 왔다. 나의 식물 그리기에는 물론 그리는 사 람으로서 물리적 이동도 병렬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내 신체의 시간의 흐름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떠올리기와 그리기를 거듭해 가며 맞 닥뜨리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리기’의 시간인 것 같다. 그림이 되는 시 간. 나는 그것이 식물의 정적인 운동성, 켜켜이 지나온 변화의 시간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별로 없어 보이는 식물이라는 대상이 긴 시간에 걸쳐 계절을 나 고, 그 느린 변화로 삶의 시간을 시시각각 채울 때, 나는 그 생장을 가 시적으로나마 매일 다르게 경험했었다. 그 경험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형태로 머리 속에 남아있다가, 끄집어 내려고 할 때에야 어설픈 형상을 가지고 종이 위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게 그리게 된 그림을 관찰 행위의 결과로만 여길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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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머리 속 상이 그림이 되는 과정의 순간 순간으로서 촘촘하게 기 록해 타임라인을 만들고 싶었다. 하나의 상이었다가 그것으로부터 다 시 출발해 다른 상이 된 그림들이 겹겹이 이루어내는 축적된 양상을 전 시장에 펼쳐 보이고자 했다. 그렇다면 왜 ‘식물’이었을까? 다른 시리즈도 아니고, 각별히 이 시리즈에서 그런 내용을 다루게 된 것은 식물 중에서도 다소 특별한 생김새를 가진 이 대상 자체의 모양 때문이었다. 이들은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미 지로서 떠올리게 될 때의 형상 또한 제 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끝없는 줄 지음으로, 어떤 것은 솟아오름으로. 그래서 상의 움직임을 좀 더 극 명하게 보여주는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제가 된 질문은 ‘그림 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였다. 아무리 잘 그려도 어떤 것은 그림으로 의 미를 전달하지 않게 되고 때로는 가벼운 터치가 시각 언어로서 강력하 게 발화하는 경우도 있다. 화가들은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 같다. 화가라는 말을 쓴 것이 재미있다. 자신의 정체 성을 그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상정 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이런 결심, 혹은 결정이 배헤윰의 작업 방식이나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 결되는 것 같다. 어떤 것을 관찰해 기록하던 나에게 그렇게 화가로서 ‘상’의 변천을 경 험하는 시간은 유달리 적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나에게 그 리기와 그림은 행위로서의 의미가 더 컸고 그 행위에 관계한 다른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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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더불어 존재하곤 했다. 그러나 2009년 낯선 도시 리버풀에서 만났 던, 이상한 생김새를 한 이름도 모르는 식물을 2016년 서울에서 다시 떠올리면서 나는 나의 그리기가 그들의 외형을 닮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이 머리 속에서 구체화되면서 발생시키는 어떤 운동감 같 은 것을 향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상’의 움직임이 그리는 사 람의 신체의 운동으로서 현현하게 된다는 것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번 여름 작업 기간 동안에 그리기 행위 못지 않게 그려진 결 과물에도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러면서 화가들의 시점을 상상해 보 았는데, 그 자체가 무척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의적인 것이 라 이번 작업이나 이 인터뷰를 통해 내가 화가라고 전격 선언했다기에 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분명, 일정 부분 그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그 ‘어떤 운동감’은 이미지가 가지는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게 맞다면, 그리고 그 림을 신체의 운동이 현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면 그림 자체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해보고 싶 다. 배헤윰의 그림에서는 작가의 즉각적인 감 각이 가장 치열하게 드러난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배치와 구도를 따라가는 붓과 손의 움 직임이 계획된 것이 구현되기보다 물감이 얹혀 지는 순간 완성 형태가 계속 수정되고 그림의 결말이 지어지는 것 같다. 그 찰나적인 조형이 그림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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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볼 때 상을 ‘포착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배헤윰에게 그린다는 것, 아니면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 했던 작업 ‹If a Thought Can Have (2013)›에서는 ‘사 유’라는 비가시적인 대상에 대해 ‘작가의 신체 를 사용하여 그 존재를 유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었다. 이처럼 이 문제에 ‘그리 기’라는 행위를 동원하는 방법 자체가 포착 방 법(아주 예민한 감정과 느낌을 수반할 수 있는) 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의 결말이 지어진다는 표현이 흥미롭다. 완성이나 완결이라는 말 보다는 그 말이 어쩌면 나의 찰나적 그리기를 말해주는 동사일지도 모 르겠다. 나의 그리기는 상을 화면 위에 얹어 놓은 상태인 것 같다. 물의 표면에 둥둥 뜬 얇은 이물질을 떠 내듯이. 그렇게 걷어 내면 그 떠낸 도 구의 표면에 이물질이 막의 형태로 들러 붙는다. 물에 떠 있던 상태의 이물질은 이제 없지만 그 도구에 남은 흔적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나의 ‘그리기’에서는 그렇게 올려 놓아진 상이 바깥에서 빠져 나와 종 이 위로 안착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 더 상세히 포함하고 있는 것 같 다. 나는 그렇게 떠 내어 진 상태를 바라보고자 한다. 그렇게 올려 놓아 진 상들은, 정밀한 스케치에 의해 형을 갖게 되지는 않고 오히려 스케 치 없이 색면의 부딪힘이나 미끄러짐으로 인해 분별이 가능한 아웃라 인, 즉, 배경과의 임의적인 구분을 가지게 된다. (나에게는) 색이란 것 은 결국 질료의 차이이고, 그렇게 물질감의 차이로 이미지의 얼굴이 드 러나게 되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목격하는 경험을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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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것 같다. 물질감에 대해 언급했으니 그리기 재료나 기법 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이번 작업 관련해서 말하자면, ‘상’을 머리 속에서부터 끌어내어 종이 로 불러오는 과정을 기준으로 그리기의 재료를 선별적으로 사용했다. 흐릿하고 불분명한 잔상으로만 대상을 대할 때는 파스텔의 희미하고 바스락거리는 질감을, 조금 더 명확해 보일 땐 붓으로 물감을 올려서 그렸다. 점점 더 초상에 가깝게. 그리기라는 미디움에 대한 조금은 기 초적이고 근본적인 시도가 들어가 있다. 전반적인 작업 과정에 대해서는, 나에게는 그리기의 수많은 가능성이 스타일이나 유형으로 묶이지 않고 기법적으로 넓게 열려 있는 것 같다. 만약 다른 작업들을 보게 된다면 내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를 만큼 제각 각 달라 보일 수 있다. 나의 면면을 하나로 정리해서 보이는 것은 시간 이 많이 걸릴 것 같다. 여하튼 그렇게 그리기의 동기와 수사를 달리 해 보는 것이 나에겐 큰 즐거움이고 결과물을 그림으로 계속해서 내게 되 는 이유인 것 같다. 나에게는 작업이란 것은 계속 두드려 보는 액션인 것 같다. 두드리는 행동은 알 수 없음과 연관이 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할 때, 동원하는 방법들은 예정돼 있지 않다. 무엇이든 해 보고 나서 그것이 유효한지 아닌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손을 빌어 공백이었던 장소에 모르는 존재를 등장시키는 일, 혹 은 그것의 일면의 현현을 일시적으로나마 맞이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제까지 내가 육체 없이 돌아다니는 비가시적인 사유를, 그를 닮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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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의 어떤 다른 것들로 끊임 없이 추적하고 추정하고 치환해 왔던 것이 그림에서 미미하게나마 운동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결국에 나 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유 혹은 상이 지나쳐 간 수 만 분의 1초의 변 천의 순간을 어떻게든 잡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배헤윰의 그림에서는 작가가 모든 것을 머릿속 으로 상상하고 치밀하게 그림의 결말을 결정하 고 그 결말을 완수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처음부터 결말을 내리고 시작하는 그림 과 달리 배헤윰의 그림은 100% 계획하지 않은 붓 터치와 물감이 형성하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사유의 원래 출발점을 끊임없이 연결하는 과정 이라고 본다. 나에게는 그것이 흥미로운 부분 이다. 나는 그림을 전시하기 위한 결말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이런 류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생각했 다. 각각의 드로잉과 페인팅을 각목 구조로 연 결지어 함께 등장시킨 모습이 하나의 장면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전시 방식에 대해서 더 설명해 줄 수 있나? 음가를 가진 여러 개의 소리들이 특정한 조합을 거쳐 의미를 전하게 되 듯이 의미를 이룬 음가들은 음소로서의 개별성을 순간적으로 잃고 하 나의 의미로서 함께 그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독자적인 시간의 범주를 각각 점유하고 있는 식물 그림 연작 역시 그와 유사한 양상으로 겹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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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로서 제시된다면, 그 결집의 상태 역시 하나의 요소로 이제까지의 시간과 운동을 보여줄 것 같았다. 요약해보면 배헤윰은 자신의 그리기가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는 작업이라기 보다는 알 수 없 어 하는 태도로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끊임 없이 추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헤윰은 자 신이 모두 안다고 단언하지 않으며, 그렇게 그 가 던지는 질문을 통해 전시장에 놓인 회화를 익숙하게 바라보게 된 우리에게 오히려 신선한 시선으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준다. 이 것은 비단 배헤윰의 그림에만 국한해서가 아니 라 동시대 회화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 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비평적인 관점을 더한 다. 아직 배헤윰의 작업에 대해서 해야 할 이야 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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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창조가 고 있는듯 하다, 는 주제에 다 로서는 언제나 이 창조를 경험 내게 일어나는 일을 아무리 상 다. 발생하는 결과와 비교해볼 하고 추상적이고 도식적인가. 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무rien 시킨다.”

앙리 베르그송(1946), «사유와 문예출판사, p.117


가 우주 내에서 면면히 계속되 다시 한번 돌아가려고 한다. 나 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상세히 설명하려 해도 소용없 볼 때 나의 표현은 얼마나 빈약 . 그 표현을 실현시켰을 때 이 n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변화

와 운동», 이광래 역,


이윤이 ‹ 메아리 ›

LOOK IN A MIRROR, SHE'S NOT THERE 이단지

‹메아리 Hearts Echo Like Mercury›의 중반부, 아이 처럼 줄 넘기를 뛰는 여자의 장면 위로 뽀얗게 김이 서린 듯한 영상 의 표면, 말갛게 쓰여지는 연우1의 손 글씨는 우리에게 말 한다. “추하나, 깊숙 깊숙히 / 늙어서 추해도 / 마구마구 소 리 지르며 기어 나갈 것이다 / 몸이 안 되면, 정신과 마음, 영 혼으로 / 뛰쳐나가고 뛰쳐 들어오는 것이다 / 뱅글뱅글 도 는 풍차와 함께 / 죽어 나가자” ‹메아리›는 2016년 여름, 한 국에서 제작된 이윤이의 신작이다. 울창한 숲 속에서 활을 들고 누군가를 쫓는 여자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상 은 크게 세 개의 세계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여행을 함께 떠 난 작가와 친구는 꿈과 현실의 어느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노인이 되어버린 소녀를 쫓는 등장인물과 물에 비친 얼굴을 사랑하다 말라 죽은 에코, 터널에서 사고로 죽은 청 춘들의 사건에 관한 짧은 언급이, 다소 희미한 직조로 구성 되어 있다. 아니다. 사실, 구분이라고 느껴지던 것은 구분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순서없이 읽는 책처럼 앞과 1. ‹메아리›를 이끌어가는 영상 속 인물, 도연우는 실제로 작가의 오랜 친구이자 90년대 인디밴드 옐로우 키친(Yellow Kitchen)의 멤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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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가 없는 영상은 벽에 부딪혀 다시 되돌아 오는, 서로를 닮 아, 받고 다시 주는 시간 안에서 공명한다. 쌍둥이, 마음Hearts, 그리고 詩와 비디오 마음을 주지 마세요 / 마음을 주지 마세요 / 굉장한 심술쟁이예요 / 이 묵은 개울은요 / 차라리 얼굴을 줘요 / 목소리를 주세요 / 다 주세요 / 다 가지게…

‹한편… 자식›(2011), ‹Time to Play›(2011–2016) 그리고 ‹남 자는 배, 여자는 항구›(2014), ‹Maya (not that)›(2013), ‹독수 리에서 만나요›(2012) 등, 이윤이는 그녀의 거의 모든 작업 을, 둘로 나뉜 하나의 공간이라는 환영 위에서 출발해 왔다.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누군가가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 던 지는 돌을 피하거나 각각의 북을 치며 제자리를 맴도는 여 자와 남자, 그리고 Maya와 함께 지낸, 방이 두 개인 멕시코 의 아파트에 이르기 까지 그렇게 작가는 평행하는 두 세계 의 지속을 옹호하면서도 서로를 통해 경험하는 환영과 실 망, 그리고 그에 대한 나르시즘을 드러낸다. 떠나가는 항구 와 기다리는 항구, 거꾸로 읽어도 바로 읽어도 같은 발음인

‘이윤이’ 라는 작가 자신의 이름과 같이, 이들은 왼손과 오 른손이 바뀌는 음각의 존재, 늘 곁을 맴도는 거울 속 그림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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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중반에서 밀레니엄을 넘을 때, 나는 친구들과 밴드를 했다. 친구의 친구들도 비슷한 음악들과 옷 헤어스 타일을 하고 비슷한 아이들끼리 비슷한 밴드들에 있었다. 어떤 소속감이나 결속력, 음반으로 남기거나 무대에 서고 싶은 열망보다는 굉음을 만들고 그 속에 피어나는 선율같 은 것이 있으면 도취되어 따로 또 같이 어울리곤 했다. 하울 링(howling)과 피드백을 만들면서 정작 피드백이 없는 허공 에 메아리같은 시기였다. 서로가 거울이어서 자신을 바라 보는듯 부끄럽고 미운. […]”

— 이윤이 작가 노트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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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그녀의 친구인 연우와 함께 한 ‹메아리›의 정서적 드라마트루기는 ‘쌍둥이’의 이미지일 것이다. 쌍둥이는 그 들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닮은 꼴의 얼굴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둘에게 있어서 만큼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 나인지, 혹은 나와 너 사이의 경계라면 경계, 표면이라면 표면인 어느 지점을 간직한다. 우리는 서로가 동류일 때 안 쓰럽고 동류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과거와 그 리고 현재의) 우리(내)가 서로를 거울처럼 다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닥칠 때, 그것은 너를 바라보는 일일까, 나를 바라보는 일일까. 연우이자 연우로 분한, 피사체를 앞에 둔 카메라 너머의 작가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둘의 정서를 음악과 시를 빌려 전달한다. 작업의 배경에 쓰인 도연우의 음악과 같이, 태도로서의 슈 게이징[연주자가 관객을 보지 않고 자기 신발(shoe)만 쳐다본다(gaze)의 합성어로 얼터너 티브 락 계열의 무대매너에서 파생됨]이란 연주자와 감상 자의 관계가 아니라 연주자와 연주자 사이, 혹은 연주하는 나와, 나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 스피커의 하울링을 듣는 은밀함과 친밀함, 그 내면으로의 침잠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이상의 시2와 메아리(Echo)의 신화 를 인용하며 수면처럼 일렁이는 거울 이미지를 영상 곳곳 에 풀어 놓는다. 그것은 색색깔의 빛으로 산란하는 비닐 커 튼이 되어 잔잔하게 시를 낭독하는 여자의 얼굴을 비추기 도 하고, 셀로판지와 색종이를 오려 만든 가면의 모습과 바 람에 뱅글뱅글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모습에서도 그렇게, 드러난다. 끝없는 공간을 비추면서도 들여다 볼 수만 있을 뿐 심도가 없는 거울. “여자는 자기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하 다. 그 점에 대해 오랫동안 불안해해 왔다”고 고백하는 엘 렌 식수3의 ‹메두사의 웃음 / 출구›, 그리고 8–90년대에 찬란 했던 락 그룹들의 포스터와 문학에 관한 책들이 여기 저기 2. 이상의 詩 ‹거울›은 이번 작업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인 참고자료로 인용되었다. 3. Hélène Cixous (b. 1937) 여성주의 작가. “She is incomprehensible, even to herself. That got her anxious for a long time. The fact

that ‘she couldn’t understand herself’, and that she didn't know herself, seized her with a sense of guilt.” ‹메두사의 웃음 / 출구›, 1975. Excerpts of Hélène Cixous, The Laugh of the Medusa,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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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히 들어찬 연우의 작은 방을 촬영한 정지된 사진. 그 빛 바랜 붉은 톤의 표면에서도 우리는 일렁이는 비디오의 질 감을 만난다. 희미한 존재를 찾으려 안개가 자욱한 숲 길을 헤매고 있는 “단발머리, 각진 턱”의 여자, 그녀를 쫓아 패닝 하는 카메라, 그 렌즈 위에 앉은 작은 물방울들이 비디오의 껍질을 알려주 듯, 김이 서린 유리 위에 말갛게 표면을 닦아 써 내려가는 연우의 글씨처럼 그렇게 시와 비디오는 투명 한 거울 표면이 되어 우리를 비춘다.

‹메아리›의 영문 제목으로 붙인 ‘심장은 수은처럼 일렁인다 Hearts echo like mercury’를 통해 이윤이는 언어 이전에 존 재하는 것에 대해 다시 묻는다. 때때로 그것은,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귓속말로 화면 밖의 우리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 고 속삭인다. 터널에서 죽은 딸을 부르던 엄마의 소원, 나레 이션 없이 자막으로 대신한 “잠시 빠르고 먹먹하게 …살았 다[…] (다음 생에도 내 딸로) 다시 만나자”는 짧은 문장은 목숨을 산다는 것에 헌정하는 서정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질 낮은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된 몇 가지의 장면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새끼 고양이의 모습과 검은 밤 바 다를 향해 폭죽을 터뜨리며 가족의 행복을 되뇌이는 아버 지와 그의 품에 안긴 어린 아들, 갯벌을 거닐며 밝은 표정으 로 셀프 카메라를 찍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시와 비디오 이 전에, 삶의 애틋한 순간들을 기억하기를 요청한다. 비디오 는 해변가의 먼 불빛을 쓰다듬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노 4. ‹사랑의 메아리› 러시아 민요. ‹메아리›에서는 안나 게르만이 1977년에 부른 노래를 도연우가 편곡해 삽입하였다. (번역시 참고할

것) “Эхо любви (The Echo Of Love), The

original song written by Evgeny Ptichkin and sung by Anna German,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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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의 허밍소리4는 엿들어지는 독백과 같이 잔잔한 침묵 속 에서 ‘마음’을 증폭한다. 허공에서 연소되며 사그라져가는 불꽃처럼 우리는 사라지는 매 순간, 영원하지 않은 그것을 담는 ‘심장’을 기억할 수 있을까.

“아는 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뒤척이며 머물렀으므로 진짜”5 검은 방 안. 반짝이는 초록색 기타를 안고 누워 있는 여자. 기타 리프는 스피커 하울링으로 퍼져 나가고 눈을 감은 여 자는 움직임이 없다. 스피커 위, 깜박이는 작은 조각의 빨간 불빛 이외에 살아있(어 보이)는 움직임은 없다. 암전에 가 까운 장면은 소리로 진동하며 오랫동안 지속된다. 번져가 는 소리와 함께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연우의 가슴 위, 선풍기 바람에 일렁이는 하얀 레이스. 반복해서 꾼 세 번의 꿈 속에 서 그들은 무엇을 만났을까. 필립 가렐은 그의 모든 영화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얼굴을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일이 왜 그토록 힘든 것일까 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6 그에 게 영화란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연인의 모습을 하나 의 화면에 담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관계의 은 밀함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패러독스 위에 성립하는 5. ‹메아리› 스크립트의 마지막 문장에서 발췌. 6. Philippe Garrel (b.1948). 프랑스 영화감독, 필립 가렐에 대한 이 문장은 유운성이 쓴 ‹내 곁에 있어줘›에서 인용. 필립 가렐, 찬란한 절망(2016) 필립 아주리, 니콜 브르네즈,

도미니크 파이니, 김은희, 김장언, 니콜라스 엘리엇 외 10명 지음, 니콜라스 엘리엇, 배유선, 백한나, 사무엘 자미에 외 11명 옮김, 현실문화,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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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작업의 편집과정에 대해 작가에게 물었을 때 윤이 는 여행에서 촬영된 순서에 따라 비디오의 뉘앙스를 정하 고 대부분 촬영 당시의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도 그것은 세 번의 짧은 꿈을 함께 한 연우와의 순간에 대 한 오롯한 기록, “쌍둥이 언니는 시집을 갔다 했고 / 남자친 구 장가갔음을 알고 / 이름을 바꿨고 / 노래를 멈췄고[…]” 로 이어지는 두사람의 대화, 그 다정함을 그대로 옮기는 유 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태어나 먼저 남을 위하여 곁에서 잠든 밤”의 대화는 안개 속을 헤쳐가는 느린 시간 위에서

‘지금’에 대한 기억 그대로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 소녀를 찾아 헤매던 숲과 개울, 사이렌 소리가 갖혀 버린 터널, 형 광등 불빛 아래 날개를 파닥이는 나방의 모습과 바닷가 밤 하늘의 별빛으로 옮겨가는 공간은 이제 다시 안개가 자욱 한 숲으로 돌아와 그녀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배 속에선 처음이고 나와서는 닮음을 산다”는 둘의 모습을 우 리는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 는가. 이윤이에게 음악과 시, 비디오는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 는 일이다. ‹메아리›의 공명은 핸드폰 문자창에 떠 있는 헐 거운 문자들, “뭐해?” “그냥 있어.” “그렇구나.” “수고해.”

“응.”과 같이 일상의 시간에서 부재하는, ‘우리’와 계속 만 나기를 요청한다. 거울을 마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지금이 아니면 사라지고 마는 순간, 일기에 기록할 것이 없는 시간 속에서도 잊지 않기 위해 반복해서 곱씹어 보는 자각몽 같 은 것인가 보다. ‹메아리›는 결국 작가가 아니라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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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것, 보이는 것이라기 보다는 볼 수 없는 ‘심장’에 대한 것이며, 그들의 내면이라기 보다는 너와 나의 ‘마음’에 대 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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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익정 ‹옐로우 스폿›

격앙된 목소리와 울림에서

대담하게 말하기

상대방을 저주하고 있다는 전효경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옐로

배우의 대사가 서사를 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작업을

움직임을 강조하는데 더

관객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을

한다. 즉, ‹옐로우 스폿›의

수도 있는 곳에서, 보여주기 위해

흘러가기보다 등장인물이

한걸음 더 내딛는데 필요한 대담함은

뚜렷하게 보여줌으로써 기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이 대담함을

나간다. 이런 감정의 전개

훈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어진

배경으로, 베두인 사람들

현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역사와

만났을 때 나타나는 묘한

관계망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사람들의 관계에서 드러나

어떻게 작업을 설명할 것인가를

차이와 긴장감, 그리고 다

연구하는 구조적인 생각보다 기존의

대한 베두인족의 적극적인

구조나 제도를 초월하여 생각할 수

나타난다. 이 전개는 베두

있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에 대한

생긴 무대 위를 활보하는

질문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이것을

홀로 온 중국인에게 호기

예술적인 사고라 일컫는다.” 1

중국인이 처음 만난 베두

발라주는 장면, 베두인 사 조익정의 ‹옐로우 스폿›에는 욕설이 적잖이

사막의 아름다움을 노래하

나온다. ‹옐로우 스폿›의 한국인 배우들이

사람들이 중국인을 향해

극중에서 아랍어와 중국어, 영어만을 사용하기

장면을 통해 구현된다. 이

때문에 한국인인 관람객 중 아랍어나 중국어

베두인들에게 뱃속 깊은

욕을 들을 때 정확한 뜻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퍼붓고, 갈등은 최고조를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우의

다시 사막을 유유히 거닐

1. Julieta Aranda, Brian Kuan Wood, Anton Vidokle, Editoria — “Artistic Thinking”, Journal # 26 – June 2011, [http://www.e-flux.com/ journal/26/67920/editorial-artistic-thinking]


서 특정 대사가

경계하는 듯한 자세와 눈빛으로 중국인을

는 것 정도는 어렵지

응시한다.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극은 마무리

로우 스폿›에서는

된다. 공연이 베두인족과 중국인 사이의 묘한

설명하는데 쓰이기보다 중점적인 역할을

의 서사는 설명적으로

경계와 긴장을 강조하면서 끝날 때 관람객은

‘배척’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이 갖는 감정의 전개를

기승전결을 만들어

개는 사막이라는 장소를

들이 처음 중국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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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감대, 베두인

나는 미묘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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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방인인 중국인에

인 배척의 순서로

두인족이 체조기구 같이

는 장면, 그들이 사막에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하자면, 조익정의

기심을 보이는 장면,

‹스폿›시리즈는 작가가 자신과 문화적, 사회적

두인 여자에게 립스틱을

배경이 다른 무리를 만나면서 일어난 예상치

사람들이 깜깜한 밤

못한 사건을 각색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극의

하는 장면, 다시 베두인

형식을 취해 이 이야기를 전달한다. ‹옐로우

침을 뱉고 소리지르는

스폿›은 작가가 실제로 사막에 방문했을 때

이에 중국인은 곳에서 나오는 저주를

만났던 베두인족과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이고, 이전 작업 ‹스폿›은 작가가 우연한

를 맞이한다. 중국인은

기회에 십대 청소년들을 맞닥뜨렸을 때 일어났던

닐고, 베두인들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폿›에서는 자신이


런던의 작은 운하에서 스크리닝을 진행할

드러난 분노를 사적으로

때 만났던 자신을 향한 런던 지역 십대들의

마음이 생겼고, 그 후 사적

적대적인 태도를 묘사하고, 작가도 극중에서

해석의 대상으로 내용을

이에 대한 방어적인 제스처로 모종의 폭력적인

있었다. 그 구분이 가능해

태도를 스스로 모방하여 연기한다.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작가

‘배짱’에 대해 생각하게 됐 조익정은 공연에서 분노와 갈등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고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나는 조익정이 자신의 이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 조차 분노의 대상이

위해 사회적인 통념과 관

되어버린듯한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영화 등

생각한다. (혹은 사회적인

영상 매체에서는 폭력성을 흔히 다루는 반면

도전하기 위해 자신의 이

공연에서는 현장성이 뚜렷하여 보는 사람의

조익정의 이전 작업 ‹옥상

시선과 작품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네 대(2009)›, ‹Daddy’s Gi

때문인지 이 환경에서는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Does She Know(2013)›을

다루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옐로우 스폿›과

해도 될까?’ ‘이런 미적 결

‹스폿›은 배우와 관람객이 몇 미터 거리를 두고

것일까?’하는 등의 질문을

눈이 마주칠 수도 있는, 중소규모 공연장에서

작품들에서는 자신의 가족

진행됐다. 이 곳에서 폭력성을 띤 분노가

관계된 사적인 상황에 대

직접적으로 묘사됐을 때 비슷한 내용을 영상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

매체로 보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가 작업에서 전달하는

나에게는 그 감정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그

그렇지만 형식의 장르적

잔상이 머릿속에 있는 동안 몇 단계에 걸쳐

논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작업에 대해 생각했는데, 첫 째로 공연에서

스폿›을 보면서도 사막이

2. ‹옐로우 스폿›과 탈영역우정국에서 2016년 1월에 소개한 ‹스폿›과 ‹옐로우 스폿›에서는 ‹Unknown Packages›에서 실험했던 형식적인 구조의 발전된 형태를 볼 수 있다. 2015년 퀸즈미술관(뉴욕)의 ‹Unknown Packages›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전시는 문보람, 이주요, 이진주,

정지현, 조익정(가나다순)이 2015년 5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뉴욕 퀸즈미술관에서 진행한 퍼포먼스 워크숍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전시이다. 이 전시는 각각 다른 매체(회화, 설치, 퍼포먼스, 영상)를 사용하여 예술 언어를 구사해온 시각 예술가들이 각자의 장르 안에서 고민하고 연마했던


받아들이며 불편한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설정한 점, 한국어를

적인 감정이입에서

쓰지 않는 베두인족을 연출한 점을 생각할 때

구분짓는 과정이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의외성이 있었고 동시에

해진 순간 가장 먼저 이런

극이나 시각예술 사이에서 놓인 형식에 대해서도

가로서 조익정이 가진

질문과 의심이 모두 다분하다. 앞에서 언급한

됐다.

것 처럼 조익정의 작업은 언어로 풀어내는 설명보다는 몸의 움직임과 소리, 조명처럼

이야기를 풀어내기

보다 즉물적이고, 신체적인 감각을 사용하여

관습에 도전한다고

서사를 펼친다. 이는 그가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인 통념과 관습에

전형적인 무대의 형태가 아닌 본격적인 조각

이야기를 이용하거나.)

및 설치 작업을 결부하여 무대를 완성하는

상곰(2007)›, ‹냉장고

irl (2010)›, ‹Little

특성에서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조익정은 무대의 조각적인 측면을 극대화 하고 시각적인

을 볼 때 ‘이런 이야기를

요소에 천착하면서 공연의 현장성과 시간성을

결정을 내려도 되는

덧입혀 자신만의 화법을 발전시킨 것이다.2 이런

을 자주 했다. 이

화법은 시각예술과 연극의 요소를 둘 다 가지고

족이나 남자친구와

있다는 점에서, 다원적인 특성이 고무적이라고

대해 이야기 하지만

생각할 수 있지만 각 장르의 형식적 계보를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고려할 때는 어느 한쪽에 놓이기에도 애매한

이야기의 ‘수위’도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그의 작업을 볼 때 각

계보를 고려할 때도

요소에 대한 적절성을 계속 질문하게 된다.

있다. 이번 작업 ‹옐로우

그러나 그 적절함을 결정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이라는 서사의 배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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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지 않다. ‘적절한 것’임이 증명되기도

스토리텔링을 ‘극’으로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조익정은 이 워크숍과 전시 기간에 모인 구동력을 가지고 이후 퍼포먼스 형태를 가진 작업을 구체화하게 됐다. 3. 앞의 인용구. ‘예술적 사고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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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만 동시에 틀린것으로 결론을 짓기도

이 대담함은 이야기가 전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일단

촉진하는 결정적인 요소이

스스로 모든 결정을 확신할 때까지 기다리지

이야기의 결말 자체가 작

않고 많은 질문을 안은 채로 작업을 진행하고

대한 대답을 짐짓 결정 하

이에 관람자를 초대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작업의 방향성 작가의 기

가질 수 있는, ‘대담함의 원천이 되는 예술적인

적절성 마저를 규정하는

사고방식’3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의 몫으로 이야기가

대사를 되뇌게 하고 공간 조익정의 작업에서 그의 대담함은 작업을

한다. 그 질문의 가능성이

추진하게 하는 축인 동시에 그의 특질이다.

조익정의 화법이 유효한

작가의 대담함은 길이의 정의가 명확한,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

‘공연’이라는 조건에서 작업을 위해 작가가 결정한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작가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기질이기도 하다. 기질로서의 대담함은 구축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고 바꾸려고 해도 단번에 없어지지 않는 습관의 한 종류인데 작가의 이러한 기질에 더해 그가 의도적으로 결정한 대담한 태도는 작업 안에서 자신의 말을 전달하고자 채택한 화법을 완성한다. 이런 화법은 공연의 서사 자체나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보다 앞서 결정된 탓인지 작품의 다른 요소보다 즉각적이고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배우들의 강압적인 어투나 극의 분위기를 통해 실체를 갖게 되고 관람객에게 여실히 전달된다.


전개될 수 있도록

이다. 그러나 조익정

작품에서 제기된 질문에

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기질과 태도, 그리고 그 것은 이야기를 듣는 끝난 후에도 배우의

간의 공기를 떠올리게

이 대담함을 앞세운 미학으로서 힘을 갖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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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전시 투어 유지원

저예요, 동굴의 입구에 다 왔어요.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죠? 패스워드를 알려주세요. 폐쇄공포증이 좀 있어서 끝까지 내려가긴 힘들 것 같고요. 지하 18미터의 한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요. 뭉글뭉글한 것이 떠내려올 때, 그들이 형태를 잡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세요. 깊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굳이 그 꿈을 떠올리거나 기억을 더듬지 마세요. 아 그 전화는 받지 않으셨으면 해요. 냉동고가 연기를 뱉어내도, 놀라지 말아요, 지원씨 잘못이 아니에요. 빛이 돌조각들을 비추어 그림자를 찍어낸다 해도, 납작한 함정에서 꺼내 드릴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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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진동하는 자락을 노랗게 통과하고 들어본 적 없는 언어가 밀어내고 메아리들이 소원들을 끌어 당기고 채 자리를 못 잡은 하라케케가 발을 끌고 내가 어떻게 불리든 지금이 몇 월이든 돌아갈 곳을 얼떨결에 지워버리고 생각보다 낮았던 천장이 점차 가라앉으면, 하루를 더 버틸만한 탁월함을 찾거든, 연락주세요. 추신: 굉음에 놀라지 말 것,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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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감각 사이에서

‹ 푸쉬 , 풀 , 드래그 › 읽기 박가희

이 글은 공간과 감각의 역학이라는 관점에서 전시

‹푸쉬, 풀, 드래그›가 주어진 전시 공간의 한계를 미술 의 감각으로 타개하려던 시도였음을 전제로 전시를 읽는다. 위의 드로잉은 공간의 구조를 살피는 공간구 문론(Space Syntax)1의 다이어그램을 변용하여 작품 과 관객 그리고 전시공간의 삼각구도 안에서 펼쳐진 사유의 연결과 방향을 표지한 것이다. 이 드로잉을 통 해 전시가 시도하고자 했던 움직임의 작동 방식과 그 여부를 살핀다. 일단 층별로 끊어진 도식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시 공간은 구조 자체가 각각의 공간이 서 로 매개하며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하기 어렵다. 하지 만 전시와 작품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구성의 연결과 접근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기에 한정된 공간을 뛰어 넘어 작동하는 다른 층위, 즉 사유와 감각의 움직임을 살펴야 한다. 그 움직임은 검은색 노드를 이은 공간 구조의 도식 위에 펼쳐지는 몇 가지 종류의 선으로 나 타난다.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을 반영한 이 도식에서 ‘푸쉬, 풀, 드래그’하는 사유의 흐름을 막는 ‘단절’과 사유 가 그 안에 매몰되는 ‘고임’이 계속해서 그 흐름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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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시가 공동의 주제의식 을 담보하지 않고 개별 작품이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 하여, 각자가 발산하는 에너지에 집중하는 것이 기획 의 의도라 하더라도, 한 공간에서 작품들이 만들어내 는 풍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작품 이 특정 공간에서 만드는 조화 혹은 긴장은 다시 관객 에게 전시를 읽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 어, 3층의 습한 공기를 머금은 듯 보이는 광산을 세밀 하게 담은 사진과 움직이는 냉동고가 만드는 풍경은 두 작품이 내포한 의미가 상충하는데도 임의로 유추 해낼 수 있는 ‘차가움’이라는 단순한 감각적 유사성 때문에 작품 자체를 유사 이미지로 전락시킨다. 또한, 1. 공간구문론은 공간 하나하나를 각각의 독립된 단위요소로 인식하고, 그들간의 연결 관계를 파악하는 건축공간 분석 방법중 하나다. 공간구문론의 근간이 되는 것은 ‘깊이’와 이것이 만드는 ‘비대칭성’이다. 이는 물리적인 개념의 ‘거리’와는 다른 것으로, 특정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만들어지는 공간과 공간의 관계를 살피기 위한 기본 단위다. 나는 ‹푸쉬, 풀, 드래그›가 달성하고자 했던 관객의 공감각적 경험과 이를 부추기는 감각의 동력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바로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관객이 매개하며 만들어내는 감각적 층위의 ‘깊이’와 ’비대칭성’에 좌지우지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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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을 나와 다소 떨어져 있는 마지막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차갑고 매끈한 표면을 지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중정을 가로질러 지하 계단을 내려가는 여정을 경험해야 한다. 적어도 2–3분 정도가 소요되 는, 이 고안된 여정은 기획자의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 게 느껴짐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한계에 봉착하게 한다. 이는 관객이 이 계 획된 동선을 따라가는 동안 이동한다는 행위 외에 아 무것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경로에서 내 가 기대했던 것은 앞으로 보게 될 작품에 대한 단초라 든가, 지난 경로에서 경험했던 작품이 이끌어내는 단 상이 움직이는 경로로 이어지는 힘과 같은 것이었다. 아쉽게도 이 경로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시 동선 안내뿐이었다. 다시 전시 기획의 의도를 환기해 보자. 기획자에 따 르면, 이번 전시는 “주제를 내세우지 않는” 기획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예술에 대한 개념 적 수사나 범주가 아니라, 오롯이 예술이 지닌 감각 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푸 쉬, 풀, 드래그’ 라는 동사로만 이뤄진 전시 제목이 강 조하듯 전시는 관객에게 예술을 마주할 때 생겨나는 호기심과 생경함이 불러일으키는 감각 혹은 사유의 움직임에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작품과 관객, 기획자 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동력을 살피는 것이 이 전시를 만드는 것과 읽는 것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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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감각의 동력은 작동했는 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나는 이 동력 을 작품, 관객, 기획자라는 삼각구도 안에서 기획자 가 고안한 전시 공간과 이를 배회하는 관객이 충돌하 며 그려내는 긴장감에 찾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 전 시는 전시 공간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한 도전처럼 보 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기획자는 제한된 공간에 서 어떤 풍경을 그리려고 했는지, 또 어떤 감각을 관 객과 공유하고자 했는지, 이를 위해 전시를 준비하며 어떤 다이어그램을 그렸을지 궁금해진다. 공간의 한 계가 극명했다면, 단절된 공간을 메워 줄 이미지의 단상과 사유의 단초를 마련하는 더 섬세한 계획이 필 요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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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인터뷰 정시우 정시우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작업에 관해 설명을 부탁한다. 정세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연극이나 공연과 거리를 두고 극 자체의 구조나 시스템이 극장이라는 기지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지에 대한 작업이다. 나는 조형적 균형미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무대 미술을 공부했는데 극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다가 무용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극을 연출함에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데 예를 들면 전통적으로 극의 바깥에 있는 연출자가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극 중 인물이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것이 연출이라는 것을 직접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극의 구조가 드러나고 관객과 작품 사이에 심리적 거리감을 주는 데 효과적이다. 나는 연극의 전형적인 표현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극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전형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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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에게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방법들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다. 전형적이고 원초적인 것들, 관객들은 이미 무대 장치를 인지하고 있고 그것의 물리적인 성질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반응하는 상황이 있다. 무대 위에서 그러한 반응을 끌어내는 것 중의 하나가 천둥소리 같은 것인데 이것은 전형적이지만 몸에 축적된 경험적 공포를 환기해서 자극을 받으면 반응한다는 신체적 전형성이 계속 유지된다. 결국, 나는 이러한 전형성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나는 예술가들이 사실 굉장히 주관적이고 동물적인데 객관성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업은 예술가들이 그 전형성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지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에서 무대미술, 그리고 무용으로 관심사가 변화된 과정을 알고 싶다. 나는 원래 배우를 하고 싶었다. 특히 햄릿이나 로미오 같은 전형적인 배역을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실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전형성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연출을 공부하게 되었고, 무대 미술을 하게 되고, 안무로 포지션을 이동하게 되었다. 무대 미술을 하다가 안무를 하게 된 것은 실질적인 창작 환경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공연을 만들고 싶은데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안무 쪽, 특히 프랑스 현대 무용에서는 전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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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이 아닌 것을 다 환영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곳에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볼 수 있겠다 생각해서 가게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이제는 공연을 해야지.’ 생각했는데 내 위치가 살짝 걸쳐있어서인지 공연장이 아닌 시각예술 쪽에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내 작업은 조형적인 요소가 많은데 내가 전형적인 방식을 좋아하고, 직관을 따라가다 보니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풀어내는 것을 잘 못 하는 것 같다. 보통 전형성을 이야기할 때 비판 지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세영 작가는 전형성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 그러한 비판 지점을 강하게 느꼈는데 그렇다면 전형성에 대한 두 태도 사이의 혼란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읽히는 것인가? 나는 전형적인 것, 다르게 이야기하면 클래식의 완성도와 안정성을 좋아한다. 내 작업의 지향점도 그곳에 있는데 잘은 모르지만 클래식한 것을 제대로 알거나 표현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비판 없이 배척하는 예술가가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클래식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 굉장히 기분이 좋고, 그 안에 내재한 장인 정신에 박수를 보내는데 이런 것은 내가 전형적인 것을 잘하지 못하기에 더 잘하고자 하는 열망과 내가 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전형성을 배제하는 경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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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비판의식이 있다. 클래식을 잘 이해하고 하면 어떠한 것이든 설득력이 있는데 많은 작가가 동시대적인 것으로 향하면서 잃기 쉬운 지점이라 생각한다.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천둥소리가 무서운 것은 아는데 스피커를 통해 출력된 가짜이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느낀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다른 누군가를 향하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의 기준에 대한 것이다. 일종의 자기 검열이다. 다른 대상이 있기보다는 스스로 상정하는 것인데 전형적이고 클래식한 것이 좋지만, 그 안에서 유효하지 않은 부분을 빼고 새로운 것을 채워 넣어서 계속 동시대적인 클래식함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배운 연극은 철저하게 언어 기반의 연극이었다. 하지만 언어 기반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없는 작업을 접하고 조형적인 부분이나 무대미술같이 표현의 다른 언어들을 배웠다. 피나 바우쉬(Pina Bausch) 같은 경우 태생적으로 추상적이기에 언어 기반의 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춤을 다르게 표현했다. 언어적 해석의 가능성을 무대 세트에 몰아놓고 춤을 절제된 일상 행동양식으로 변용해 극적인 지점을 만들어 내곤 했는데 이러한 것들을 접하며 언어가 아닌 조형만으로도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작업에서 조형적 배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것과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흐름의 차이가 발생하니까 그러한 방향에서 조형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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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작가는 본인 작업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이 의인화된 것이 아닌 ‘안무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실행자의 대체재가 아닌 오브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대체재라기보단 연상시킬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오브제를 가져다 놓아도 필연적으로 의인화 되는 이유는 이 제품들이 디자인된 것이고, 사람을 기본으로 하기에 어떤 행동 양식을 연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측면이 작업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냉장고에서 연상할 수 있는 행동 양식은 문을 열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인데 이러한 부분은 조형적인 이유로 사용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부분, 연상시킬 수 있으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다. 예전에 선풍기 열 대를 가지고 한 작업은 완전한 배우의 대체품으로써 의인화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공연에 일반적인 오브제를 배치하고 위치에 변화를 주면 이야기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오브제가 극장이란 공간에 있고, 사람들은 드라마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오브제가 서 있는 것과 눕혀진 것의 상징 차이, 행위의 상징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누워 있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부정적인 것, 죽음 혹은 휴식의 상태로 인식하게 된다. 오브제가 극장에 들어오면 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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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이 더 강조되는데 그 부분에 집중해서 오브제의 위치 변화만으로 비극을 만드는 작업을 구상했다. 이 작업의 경우 확실히 실행자의 캐릭터를 의인화시킨 것이었고 그 이후의 작업은 대부분 그 기능의 차원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이후에도 같은 방식을 사용했는데 드라마성을 접어두고 기능적인 부분만으로 어떻게 심상을 만들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이미지나 상황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올라갔다가 내려온다든지, 뭔가를 던진다든지 대부분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오브제들로 어떻게 심상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최대한 기능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짧은 드라마인데 의인화 개념은 없었다. 심상을 만들기 위해 보조해주는 정도로 제한했다. 다만 지난번 ‹연말연시›나 이번 ‹푸쉬, 풀, 드래그›의 작업은 퍼포먼스의 맥락 안에서 작업하므로 관람객들에게 좀 더 쉽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난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전시에서는 다른 두 작가가 전시보다는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오브제를 사용하는 내가 좀 더 안정적인 방식으로 풀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번 작업의 오브제는 춤을 추는 무용수라고 볼 수 있을까? 무용수라기보단 움직이는 사람 정도인 것 같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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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화는 아니고 보통 잘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대상들이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부분에서 잘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다. 내가 냉장고라는 오브제를 선택했을 때 주변의 몇몇 분들이 그것을 언어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 백색가전이 가지는 사회적 맥락과 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지점에서의 해석이었는데 나는 이것은 그냥 냉장고이고 그 위치에 다른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기능적으로 있으면 되고, 다른 무엇이라도 움직이지 않을 그 어떤 것이면 된다. 내 작업의 구도는 다소 경직돼 있는데 종교적인 구도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구도는 교회 안에 십자가를 빼고 냉장고를 가져다 놓아도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그런 구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브제 자체엔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 구도나 시스템 안에서 의미나 가치판단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번 작업에서는 오브제 자체가 가지는 기능적인 부분과 경험적 영역에서 보이는 이미지에 의해 선택했지만 사실 A에서 B로 이동된 그 어떤 것을 가져다 놓아도 상관없다. 내가 보통 사용하는 방식이 경직된 구도 안에 일상적 오브제를 가져다 놓는 것인데, 그 구도 안에 일상적 오브제가 놓였을 때 작업의 구조가 더 명확하게 보인다. 마치 공연장의 무대처럼 화이트 큐브도 일상적인 것을 가져다 놓아도 권위가 생기고 의미가 있어 보이는 지점이 있다. 내가 처음 현대미술을 접했을 때부터 전시장이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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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작가의 작업은 결국 무대라는 환경 안에서 극을 연출하는 것인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처음에는 무대 구조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수평적 구도였다가 나중에는 무대 자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본인의 작업이 주어진 환경 안에서 요소를 배치, 연출하는 것을 넘어서 무대라는 플랫폼 자체를 구성하는 것에도 관심이 있나? 내가 혼자 하는 프로젝트면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쟁력은 다른 시각예술 작가들보다 극장, 극의 구조에 더 익숙한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 이번 전시처럼 공간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가는 경험이 많지 않다. 극장은 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혼자 점유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이번 전시의 구조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이번 작업을 준비하며 내가 좋아하는 구도를 유지하면서 공간을 공유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혹은 할 수 없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결국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작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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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작가의 작업은 결국 전형적이고 안정된 종교적 구도를 플랫폼 삼아 조형적 배치와 움직임만으로 극을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극장의 구조, 관객과 무대가 대치하며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작업이 전시장 가운데를 점유하며 무대의 정면성이 해체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극적인 배치와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무대적 특성을 포기하면서 획득한 조형적 긴장감은 포그머신이 연출하는 유사 무대효과와 전시 환경이 가진 소음으로 유지한다. 시각예술과 공연을 구분하지 않고 확장될 정세영 작가의 다음 작업이 환경의 제약을 넘어 무대라는 플랫폼 자체를 구축할 수 있을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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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현(Gim Ikhyun, b. 1985)은 최근

조익정(Ikjung Cho, b. 1986)은

공간 지금여기에서 개인전 ‹LINK PATH

이화여자대학교 회화판화과를 졸업하고

LAYER›(2016)를 열었고 SeMA 비엔날레

런던의 첼시미술대학교를 졸업했다.

미디어시티 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국내에서는 두산갤러리, 상상마당,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6), ‹URBAN

토탈미술관 등에서 그룹전을 가졌고,

SYNESTHESIA›(가오슝 시립미술관, 2015)

최근에는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퍼포먼스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공간

‹너네가너네›를, 탈영역 우정국에서 퍼포먼스

지금여기를 공동 운영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SPOT›을 진행하였다. 또한 뉴욕퀸즈미술관,

있다.

파리의 L’espace des arts sans frontiers, 모로코 라밧의 L’appartment 22, 런던의 Arts Admin과

배헤윰(Hejum Bä, b. 1987)은 2015년 독일

Salon Flux에서, 이븐더넥과 협력하여 런던의

슈트트가르트 국립예술대학교 디플롬 과정을

공공장소에서 작업을 보여준 바 있다.

마쳤으며, 슈트트가르트 시립예술재단의 신진작가를 위한 아뜰리에 지원에 선정되었다.

정세영(Jeong Seyoung, b. 1980)은 배우로 연극을

올해 초 뉴욕 소피스트리 갤러리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무대”라는 매체에 관심을

개인전 ‹Life Reportage›를 가졌으며 2015년

두게 되었으며 공간 – 몸 – 서사구조로 그 범위를

뉴욕퀸즈미술관에서 ‹Unknown Packages›전,

넓혀갔다. 2015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연말연시›,

슈트트가르트 칼베 파사쥬에서 ‹프로젝트

2014년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안무 Lab› 등

저스트›, 2013년 쿤스트페어라인포이어

다양한 공연 및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2016년

바흐에서 ‹운터 노이어 하우트› 등의 단체전에

최근에는 ‹댄스 엘라지›에서 1등상을 수상

참여하였다. 현재 서울과 슈트트가르트를

하였다.

오가며 작업 중이다. 이윤이(Yi Yunyi, b. 1979)는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한국 현대시를 공부하고, 뉴욕 헌터 컬리지에서 순수미술 학부와 통합매체 석사를 마쳤다. 2014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첫 번째 개인전 ‹두 번 반 매어진›을 가졌다. 단체전으로는 2016년 국제 갤러리에서

‹유명한 무명›, 2015년 갤러리 팩토리에서 ‹여기라는 신호›, 교역소에서 ‹헤드론 저장소›, 레지던시로는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 2013년 미국 메인주의 스코히건 회화조각학교, 2012년 멕시코 시티, SOMA 썸머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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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

김익현 ‹LINK PATH LAYER› 디지털

p.92

잉크젯 프린트, 50×40(cm), 2014.

p.25 p.26

김익현 ‹LINK PATH LAYER› 디지털

p.32 p.35

잉크젯 프린트, 가변크기, 2016.

p.93

배헤윰 ‹상은 어떻게 오는지› 설치

잉크젯 프린트, 50×40(cm), 2014.

전경, 2016. 서울, (그림: 2009–

김익현 ‹LINK PATH LAYER› 디지털

2016 까지의 드로잉 연작 중에서)

잉크젯 프린트, 40×50(cm), 2014.

p.29

김익현 ‹LINK PATH LAYER› 디지털

p.94

배헤윰 ‹솟아오르는› 서울, 설치 전경,

김익현 ‹모두가 연결되는 미래› 디지털

2016, (그림: 2009 – 2016까지의 드로잉

잉크젯 프린트, 가변크기, 2016.

연작 중에서)

김익현 ‹휴거› 디지털 잉크젯 프린트,

p.95

‹푸쉬, 풀, 드래그› 전시 전경. 2016.

가변크기, 2016.

p.97

‹푸쉬, 풀, 드래그› 전시 전경. 2016.

배헤윰 ‹Guide Drawing for Sophie› Life

p.99

조익정 ‹옐로우 스폿› 2016, 공연 장면.

Reportage, Sophie's Tree, 뉴욕, 2016.

p.101

조익정 ‹옐로우 스폿› 2016, 공연 장면.

p.37

배헤윰 ‹Guide Drawing for Sophie› Life

p.45

배헤윰 ‹상은 어떻게 오는지› 설치

Reportage, Sophie's Tree, 뉴욕, 2016. 전경, 2016.

p.47

배헤윰 ‹상은 어떻게 오는지› 설치 전경, 2016.

p.51

이윤이 ‹메아리› HD 비디오, 사운드, 컬러, 19분 12초, 2016. 비디오 스틸컷.

p.52

이윤이 ‹메아리› HD 비디오, 사운드, 컬러, 19분 12초, 2016. 비디오 스틸컷.

p.54

이윤이 ‹메아리› HD 비디오, 사운드, 컬러, 19분 12초, 2016. 비디오 스틸컷.

p.60

이윤이 ‹메아리› HD 비디오, 사운드, 컬러, 19분 12초, 2016. 비디오 스틸컷.

p.61, 62 이윤이 ‹메아리 – 포스터› 2016. p.63

조익정 ‹옐로우 스폿› 2016, 공연 무대.

p.66

조익정 ‹옐로우 스폿› 2016, 공연 장면.

p.71

조익정 ‹옐로우 스폿› 2016, 공연 장면.

p.79

‹푸쉬, 풀, 드래그› 전시 전경. 2016.

p.88

정세영 ‹데우스 엑스 마키나–냉동용 쇼케이스›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6.

p.90 – 01 정세영 ‹데우스 엑스 마키나›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5.

p.90 – 02 정세영 ‹데우스 엑스 마키나›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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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 풀, 드래그

이 책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

Aug 30 – Nov 13, 2016

로 무단 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주최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 참여작가, 글쓴이,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기획: 이단지, 전효경

아트센터.

관장: 박만우 기획실장: 전상언 책임큐레이터: 이단지 큐레이터: 전효경 어시스턴트큐레이터: 정시우, 최유은 인하우스디자이너: 김민수 경영지원: 오득영, 천수영 기술감독: 신동우 설치: 앤츠 영상설치: 아트케이 디자인: 강문식 인턴: 백지윤 발행정보 발행인: 신정승 발행처: (재)태진문화재단 서울 강남구 언주로133길 11 전화: 02 6929 4470 팩스: 02 3442 4484

www.platform-l.org 발행일 2017.11.10 글: 이단지, 전효경, 정시우, 이한범, 박가희, 유지원 편집: 이단지, 전효경 번역: 김실비 감수: 앤디 세인트루이스 사진: 김익현, 김재민, 이가영 디자인: 강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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