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화필기행전 서양문명의 젖줄을 찾아서
전시기간 : 2004. 8. 12(목) - 9. 19(일)
전시기간 : 2004. 8. 12(목) - 9. 19(일)
초대일시 : 2004. 8. 12(목) 오후 5시
초대일시 : 2004. 8. 12(목) 오후 5시
전시장소 : 사비나미술관 전관
전시장소 : 사비나미술관 전관
공동주최 : 사비나미술관, 서울신문사
공동주최 : 서울신문사, 사비나미술관
협
협
찬 : KT
참여작가 : 김봉준, 김성호, 김홍주, 박병춘, 박은선, 안창홍, 양대원,
찬 : KT
참여작가 : 김봉준, 김성호, 김홍주, 박병춘, 박은선, 안창홍, 양대원,
이강화, 이만수, 이종빈, 정정엽, 최민화, 홍성담
이강화, 이만수, 이종빈, 정정엽, 최민화, 홍성담
답사진행 : 노성두
답사진행 : 노성두
작가와의 대화
작가와의 대화
장소 : 사비나미술관 전시장
장소 : 사비나미술관 전시장
시간 : 오후 4시
시간 : 오후 4시
8.19(목) 이만수, 양대원, 이강화
8.19(목) 이만수, 양대원, 이강화
8.26(목) 김홍주, 박병춘, 박은선
8.26(목) 김홍주, 박병춘, 박은선
9.9(목)
9.9(목)
김성호, 안창홍, 홍성담, 최민화
9.16(목) 김봉준, 이종빈, 정정엽
김성호, 안창홍, 홍성담, 최민화
9.16(목) 김봉준, 이종빈, 정정엽
인사말
인사말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을 맞아 본사가 사비나 미술관과 공동으로 주최한‘아테네 화필기행’의 작품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을 기쁘
흔히 여행을 가리켜 또 다른 인생이요, 책 중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먼 곳을 향한 동경,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절
게 생각합니다. 서울신문은 7월초부터 매주 두 차례씩 금년 봄 그리스 여행에 참가했던 작가들의 개성 있는 그림을 작품 노트와
묘하게 비유한 말이지요. 여행을 즐기고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존재가 곧 인간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일까요? 거리는 여행을 떠
함께 1개면 전면에 보도해왔습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풍경과 신화를 작가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 이미지를 캔버스에
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넘칩니다. 그들은 여행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법사 메데이아가 만든 젊음의 음료라는 사실을 깨닫고
담은 이번‘아테네 화필 기행’은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자아냈으며,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고대 올림픽 발상지이자, 108년전 근대 올림픽이 처음으로 개최된 아테네에서 제28회 하계 올림픽대회가 개
이번 사비나미술관의 여름 기획전은 이런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바치는 찬가입니다. 중견작가 열세 분이 올림픽이 열
막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열리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의 올림픽 경기 관전 열기가 그대로 사비나미술관에 옮겨올 것으로 확신합
리는 그리스를 답사, 미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작가들은 서양문명의 젖줄 그리스를 각 주제별로 나누어 표현했습니다. 세계인들은
니다.
입을 모아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젖줄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서울신문사와 사비나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이번 전시회는 미술의 대중화를 위해 언론사와 미술관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홍보, 전
먼저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인 민주주의는 기원전 6세기 아테네에서 태동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 스포츠는
시에 이르기까지 서로 협력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신화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13명의 중견 작가
어떤가요.‘핵심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는데 있다’는 스포츠의 꽃 올림픽은 바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 정신을 그대로 계승
들이 참여하여 먼저 신문에 릴레이식으로 작품을 게재한 뒤 곧바로 이를 종합 결산하는 전시회를 갖는 등 전 과정에 걸쳐 서로 협
한 것입니다. 학문의 뿌리, 예술의 모태 역시 그리스입니다. 서양문학 영감의 원천인 호메로스 두 서사시인‘오디세이’와‘일리아
력해왔던 것입니다.
드’헤로도토스에서 비롯된 역사학, 철학의 대부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물
이번 전시 작품들은 참여 작가들이 사전에 워크숍을 갖고, 그리스 신화에 관해 토론한 뒤, 현지를 함께 여행하며 직접 스케치한 내
리학과 자연 과학의 시조 데모크리토스와 아르키메데스, 상상력의 원천이며 감성의 보물상자인 신화, 서양미술의 교과서인 미술
용이어서 개별 작가들의 신화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비교하면서 감상하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여름 방학 중
또한 그리스의 산물이 아니던가요.
인 청소년들이 고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학부모님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이렇듯 그리스적 요소는 인류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있지만 우리는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먼 신화의 나
끝으로‘아테네 화필 기행’을 공동 주최해주신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님, 그리고 이번 기획에 협찬해주신 KT와 도록 제작에
라로만 여길 뿐이지요. 3000년 올림픽 노하우를 지닌 나라, 영원한 신들의 도시를 미술작품을 통해 알릴 수 있어 마음이 뿌듯합니
지원해 주신 한국 필립모리스(주)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다. 올 여름 사비나미술관에서 그리스 문화 답사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번 전시가 열릴 수 있도록 미술가들의 문화유적 답사와 전시 준비과정을 함께 해주신 서울신문사 채수삼 사장님을 비롯한 임직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울신문사 사장 채 수 삼 사비나미술관 관장 이 명 옥
그리스화필기행전 : 서양문명의 젖줄을 찾아서
13인의 시각 예술가들이 서양문명의 젖줄로 불리는 그리스 문화 유적지를 찾았다. 화필기행에 무게를 둔 것은 오늘날 대량 복제 시스
만들었다. 양대원은 그리스 고대 올림픽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야말로 스포츠 제전을 문화의 제전으로 재해석하고 진정한 화합의 장
템으로 가동되는 시각 이미지 생산 체계의 저 철저한 대중매체적인 속성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손에 의존하는 화가들의 필치로 담아
으로 만드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작품에서 그리스 국기나 신전 기둥 이미지, 그리고 양대원 특유의 원형 인체들이 조합된 스포츠
보기 위함이었다. 이 전시가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는 시점에 열리는 것은 글로벌한 스포츠 이벤트가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 문명의 시
이미지들을 선보인다. 박은선은 신화 속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의 화면은 평면성과 원근
원을 찾아보는 것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지당한 예측 속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대중매체에 의해 어마어마
법을 분절된 화면 속에서 재배치하는 방법으로 정교하게 짜여있다. 평면 위에 조형적으로 재구축된 그리스 이미지들을 작가 고유의
하게 쏟아질 그리스 이미지와 어떻게 차별화되는 컨텐츠를 생산할 것인가에 있었다. 그리스를 담는 이미지는 대중매체가 선호하는 사
어법에 맞게 요리하는 것은 풍경을 다루는 화가의 예술적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정정엽은 유적으로 확인하는 고대도
진이미지와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흐르는 영상이미지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렇듯 물밀듯이 밀려들어올 사진과 영상 이미지 앞에서 손
시, 신화의 나라 등 그리스에 대한 단편적인 관념들을 넘어 올리브의 바다, 섬의 나라, 햇살과 바람 등 그리스의 땅과 삶을 풍부하게 담
으로 그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나서서 그리스를 담아왔다.
아왔다.‘올리브의 바다’를 비롯한 다량의 현장 스케치는 화필 기행의 묘미를 절감하게 한다. 최초로 민주주의를 발원한 아크로폴리 스 언덕을 바라보며, 남성중심적 민주주의의 이율배반을 떠올린 그는‘여자를 배제한 어떠한 결정도 단지 절반만 좋을 뿐이다’라는
이것은 오늘날‘뉴 미디어’시각환경 아래에서의‘올드 미디어’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역설적인 관심을 환기한다. 이점, 이번 전시의
인디언 잠언을 되새기며, 그리스의 풍경과 유적들 위에 돌아누운 여자를 그려 넣었다.
제일 핵심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신화를 비롯해서 스포츠, 정치, 역사, 종교, 전쟁, 건축, 풍경 등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이 출품되었 다. 답사 코스는 아테네와 인근의 주요 고대 도시들로 이루어졌다.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과 아크로폴리
풍경에 대한 낭만적인 해석 또한 화가로서의 당연한 관심사였을 것이다. 최민화는 푸른 지중해 바다를 끼고 있는 에기나섬에 포착한
스 박물관을 포함해서, 고대의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었던 올림피아 성지, 신탁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델피, 고대인들의 생활사를 살펴
풍경을 얇은 붓질의 유화로 화폭에 담았다. 그는 신전을 비롯한 그리스의 유적지를 그리기보다는 그곳에서 만난 이국적 풍경에 주목
볼 수 있는 코린토스, 그리고 초기 축성과 매장 관습이 유적으로 남아 있는 미케네를 돌아 그리스 현지의 문명사를 추적해 들어갔다.
함으로써 , 신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강화는 아크로폴리스 둘
출발 전부터 신화는 화가들의 제일 큰 관심사였다. 많은 화가들이 동양과 서양의 신화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인다. 이들은 그리스 조
레에 피어있는 양귀비꽃의 황홀함을 담았다. 유적 답사 여행은 때로 유적 자체의 매력보다는 그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에서 밀려오는
각의 완벽한 조형성에 매료되어 그것에 대한 예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인간 중심주의의 폭력과 전쟁, 배신과 복수, 탐욕과 지배의
깊고 진한 미적 감동을 통해서 소중한 회상 거리를 만들기도 하는 것처럼, 그의 화폭은 이미 저 뒤편 신전의 이미지를 뒤로 한 채 화려
논리로 얼룩진 그리스 신화를 통해 만들어진 그리스의 예술을 넘어서는 새로운 장치를 고안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리스 예
한 양귀비꽃으로 가득 차 있다. 박병춘은 강렬한 먹그림의 깊이 위에 컬러풀한 관광객 이미지를 담은 수묵 풍경을 제시한다. 그는 도
술과 건축의 한계를 넘어 아시아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작업에 대한 관심 또한 동아시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날아 든 큰 이유 중에 하나
도하게 자리잡은 웅장한 유적 앞에 선 갑남을녀 관광객들의 모습을 통해서 고대와 당대가 함께 하는 그리스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
였을 것이다. 또한 어디로 가든지 삶의 터전과 그곳에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감지해내는 진경정신 또한 화필(畵
다. 기행지 도처에서 박병춘은 빠른 붓질로 여러 장의 풍경을 담아냈다. 속필의 묘미를 한 껏 살려낸 그의 두툼한 화첩은 그림 그리는
筆)로 읽어내는 기행전의 맛을 더해줄 것이다.
사람의 미덕이 담긴 소중한 재산이 아닐 수 없다. 김홍주는 수없이 반복되는 필선들을 겹쳐서 푸른 원형의 반추상적 형상을 만들어내 고 있는데, 풍경을 묘사하는 구상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그 속에서 추상적인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김성호는‘여행
김봉준은 그리스 신화의 기억을 동아시아의 조형성으로 치환한‘평화 살림 신상’들을 빚었다.‘자애의 신, 대지의 신, 생산의 신 정령
이란, 새로운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내면의 영감을 자극하는 마음속의 영상을 쌓아두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
신들을 찾아 새로 신전을 만들리라’는 그의 야심찬 선언은 이번 전시의 출품작을 통해서 그 첫선을 보이고 있다. 판화 작업과 붓그림
은 여행 과정에서 접한 투명하고 순수한 이미지들을 몽환적인 구성으로 재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안창홍은 기행의 달인답게
작업을 이어오던 김봉준이 근년 들어 테라코다 입체 조형작업을 통해 예술적 성취를 높이려는 과정에서 나온 이번 작품은 그의 새로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낭만과 여유를 찾아 일행들 사이의 활력소를 불어넣었는데, 그는 지중해 바다의 푸르름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
운 선택의 향배를 가늠하는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홍성담 또한 한국 고대설화와 그리스 신화를 엮어서 장면을 설정했다. 공사
을 화폭에 담았다. 흐릿하게 단색조로 처리한 여느 풍경들도 그리스의 모습을 잡아낸 화가 특유의 맛을 드러내주고 있다.
중인 신전의 풍경을 빌어서 철조 크레인을 타고 유영하는 그리스 여신 아데나와 한국 상고사의 여신 바리데기가 마주하는 장면을 통 해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작가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자신의 가슴에 그려진 고 김선일 사건 장면으로 불의 세상 속에서 물의
신화의 재해석, 그리스의 당대성, 풍경의 재해석 등 크게 세 가지 주제에 대해‘직접 그린다’는 수공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작가들의
세상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을 바라보는 전 세계인의 심중을 담아내고 있다. 이만수는 신화 속의 극적인 갈등과
그리스 이미지들은 올 여름 대중매체를 타고 안방에 쏟아질 기계적 이미지들과는 달리, 보다 역사적 맥락에서 근원적인 인간 삶을 돌
화해의 구조가 신탁에 의한 예언적 통치행위로 이뤄졌던 고대 그리스의 권력 관계를 재해석하고 있다. 신화 속의 장면들을 재구성하
아볼 수 있는 인류학적 탐색의 장을 마련할 것이다. 아테네, 엘레우시스, 피레우스, 에기나, 코린트, 미케네, 올림피아, 델피 등 그리스
여 평면성을 유지하되 이야기 구조를 펼쳐냄으로써, 시공간을 넘어서는 통찰력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종빈은 폐허가 된 땅위에 남아
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느낀 현장감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신화시대와 당대를 오가는가 하면, 동양과 서양의 신화를 어우르는 문명의
있는 신화 속의 반인반수 켄타우로스의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 두상을 커다란 입체 조형물로 제시한다. 오랜 세월의
젖줄을 찾아나선 이들 화가들이 빚어낸 평면과 입체의 향연은 정교한 손길로 다듬어져 있다.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인간 삶의 해석의
풍상으로 갈라진 틈에 식물의 싹을 보듬어 안은 고대의 형상을 통해서 폐허 위에 존재하는 신화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폭을 넓혀주는 미술가들의 그리스 이야기, 대중매체 시대의 정보홍수 속에서 훨씬 더 풍부한 문화적 유영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몇몇 작가들은 그리스의 의미를 현재적 관점에서 읽어 내려는 시도를 보였다. 양대원은 스포츠를 매개로 그리스를 다시 읽고 있다. 근 대 올림픽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은 전 세계를 자본과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거대한 투쟁의 장으로
김준기 (사비나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올리브 숲을 스치는 에게 해의 바람
“귀하의 요청을 거부하게 되어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스 안에서 노독에 찌든 작가들은 시레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지 않으려고 밀랍으로 귓구멍을 봉인한 오디세우스의 일행처럼 가이
문예진흥원에서 날아온 편지는 누런 재생지로 달랑 한 장이었다. 그리스에 가고 싶으니 여비 좀 보태달라고 요청한지 반년 만에 온
드의 안내말씀이 이어질 때마다 지체 없이 무아의 수면에 빠지기 일쑤였다.
답장에는 심심한 유감의 뜻과 함께 앞으로도 문예진흥원의 사업에 변함없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란다는 형식적인 당
그리스 기행 일정을 서둘러 잡았던 것이 기획 단계의 큰 실수였다. 비행기를 4월에 탔는데, 그리스의 모든 박물관이 6월에야 재개관
부가 씌어 있었다.
한 것이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 델피 국립 고고학박물관의 보물들은 우리의 일방적인 구애를 외면하고 말았다. 여러 차례
아니, 올해 상반기 스케줄을 몽땅 비워놓고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었는데, 웬 날벼락이람? 사비나미술관과 야심차게 진행했던 그리스
여행사에다 박물관 개관날짜를 문의했지만,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던 점도 아쉬웠다. 그리스에서 올림픽 특수를 겨
기행전 계획이 초장부터 틀어지고 말았다. 사비나 스탭들과 넋 놓고 앉아서 탄식과 한숨으로 탁구를 치고 있는데, 마침 낭보가 들려
냥해서 박물관 유물들에게 단체목욕을 시키느라 그랬다고 한다. 그나마 올림피아, 코린토스, 에피다우로스, 미케네에서 고대의 살아
왔다. 서울신문사에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왕복 비행기 표를 열다섯 장 제공할 테니, 작가 선생님들 맘 놓고 지중해에 푹
숨쉬는 문화와 만날 수 있었다.
담그고 오시라는 서울신문사 이경형 이사님의 통 크신 말씀에 우리는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십년 전쟁을 끝내고 트로이에서 귀환 명
만남은 항상 설렘을 동반한다. 13인 작가들의 못 말리는 호기심과 모험의 발길은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역사 스페셜이었다. 고대와
령을 받아든 그리스 병사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우리는 날아갈 듯한 심정으로 당장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자리 마른자리
굳센 악수를 나누는 이들의 땀에 젖은 얼굴은 아가멤논의 황금마스크처럼 환하게 빛났다. 미지의 차원과 마주칠 때마다 어린아이처
가리지 않고 오라는 데 없이 고된 발품을 팔았던 사비나 관장님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남자들이란 기본적으로 소년기에서 성장을 멈추고 만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스는 신화의 역사를 꿈꾸는 나라다. 그리스의 산은 신들의 거처요, 바다는 영웅들의 요람이다. 그들의 전쟁은 불멸의 영웅담으로
한편 여성 작가들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웅숭깊고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처럼 장구한 호흡으로 시종 여정의 불길한 밤을 다
피어났고, 그들의 노래는 고전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다. 그러나 우리 13인의 작가들도 우리 미술계에 거인족의 발자국을 남긴 불멸의
독여주었다.
영웅들이 아닌가. 그리스를 답사하는 동안 이들의 눈은 결코 꺼지는 일이 없었다는 로도스의 등대처럼 번쩍거렸다.
길은 도처에 있었다. 바다와 숲과 하늘과 벼랑은 모두 신화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이었다. 아르테미시온의 출렁이는 쪽빛바다
현장 도착 이튿날부터 답사가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지옥답사였다. 설령 지옥의 번견 케르베로스를 때려잡고, 네메아의 괴물사자를
를 내려다보는 우리는 포세이돈 신전의 자랑스러운 파수꾼이었다. 복사꽃이 흩날리는 올림피아의 신전 폐허에서 우리의 피는 전사
십자조이기로 해치웠던 헤라클레스가 우리 그리스 답사팀에 합류했더라도 애저녁에 낙오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천오백 년 시간의
의 붉은 투지로 끓어올랐다. 아이기나의 푸른 월계수 아래 우리의 영감은 게으른 황금빛 기억으로 뒤척였다.
벼랑을 거슬러 아크로폴리스 고지를 오르내리고, 델피의 가파른 돌산을 등정하는 13인 모험대는 여독을 달랠 새도 없이 죽음의 강행
우리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가끔씩 입을 열었다. 우리는 문득 올리브 숲을 스치는 에게 해의 바람에게 물어보았다. 신화의 푸른 파
군으로 일관했다. 이들의 눈빛에는 차라리 코카서스 산정에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낌새가 간절했다. 더군다
도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파랗고 흰 깃털을 뒤척이는 올리브 잎에게 물어보았다. 그리스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신
나 그리스는 물음표 투성이였다. 파르테논의 수수께끼는 테세우스를 가두었던 미로의 실타래보다 더 지독하게 엉켜있었다.
의 수레는 얼마나 눈부신 것인지. 그리고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올리브 열매를 혀끝에 올리고 물어보았다. 고전의 향기가 우리의 영혼
13인 모험대의 유쾌한 선장 안창홍의 이마에는 이타카로 귀향하는 오디세우스보다 더 굵은 주름살이 패였다. 그뿐일까? 험난한 항
을 얼마나 지독하게 유혹할 것인지.
해 도중에 오디세우스의 운명을 질투하는 외눈박이 괴물도 등장했다. 괴물의 배역을 맡은 분은 그리스 답사 공식 가이드 조용규 선생
그리스의 올리브 나무는 심은 지 일곱 해가 지난 다음부터 천년 동안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한 그루의 연간 수확량은 대략 40-60kg.
님. 무한한 박식과 세련된 능변으로 시종 일행을 압도했지만, 공허한 예언을 내뱉는 카산드라의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리 아름 다운 무지개도 한 시간 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을 몰랐던 것일까? 가파른 벼랑 사이로 난 국도를 달리는 덜컹대는 관광버
노성두 (미술사학 박사)
김봉준
그리스 문화유적 기행- 김봉준‘평화 살림 신상들을 빚으며’ 밝은 땅 그리스의 구겨진 신화
첫눈에 비친 그리스는 역시 밝은 땅이었다. 삼천여개의 섬들의 해변을 비추는 강한 햇볕이 그랬다. 지중해 연안 그리스는 서광이 비춘 땅이 다. 그 중 가장 양기가 뻗어 있는 언덕이나 곶에 신전들이 세워져있었다. 포세이돈은 바다 바람을 타고 곶에 내려와 뭍을 넘봤다.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제우스가 신과 인간의 지배권을 주도하면서 벌겋게 물든 핏빛의 영웅주의 신화는 완성되었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 는 제우스가 천하를 제패한 영웅시대의 이야기다. 용맹한 무사와 무자비한 국가권력이 지배해버린 시대의 신화는 원초의 빛을 잃었다. 가이 아, 데메테르, 칼리스토, 메데이아, 아리아드네를 비롯한 무수한 여신들은 제우스를 비롯한 남근주의 신들에게 굴복하였다. 아마도 평화와 생 산의 신들은 지금까지도 지중해 속에 처박혀, 부서진 대리석상의 모습으로 숨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 그리스는 테러의 위협에 노출되고, 중동의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를 코앞에서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의 축제인 올림픽을 치 러야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지중해처럼 밝고, 그리스의 하얀 집들처럼 평화롭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는 전쟁과 권력의 역사 뒤에 가려진 비극의 고대사가 숨쉬는 곳. 이런 이중성이 내가 그리스 여행에서 피할 수 없었던 감회이다. 태초에 저주가 태초에 혼돈이 있어 그 불랙홀로부터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나오고, 이어서 타르타로스(지하), 에로스(사랑), 에레보스(지옥)가 나왔으며, 가 이아는 우라노스(하늘)에게 생명을 나눠 준다.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자손인 크로노스는 대지에 하늘이 너무 오랫동안 바짝 엎드려 있자 질투 가 나서 낫을 휘둘러 둘의 사이를 떼어놓았다. 그 때 아버지인 하늘의 성기가 잘려나가면서 흘린 핏방울로부터 복수의 여신, 거인족, 요정들 이 쏟아져 태어났다. 하늘의 자손 제우스도 아비를 죽이고 신과 인간을 두루 다스리는 왕 중의 왕이 된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의 첫머리이다. 그리스 신화사는 애비를 배신하고 저주와 복수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으로 상서롭지 못한 출발을 한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제우스는‘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신화라고 하지만 시작부터 이 이야기는‘콩가루 집안’을 연상케 한다. 제우스는 권좌를 지키기 위해 주위의 신들을 의심하고 미리 미리 징벌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여신과 요정을 끝없이 탐했다. 그는 천하의 제일가 는 바람둥이면서, 질투와 복수의 화신인 동시에 끝없이 의심하는 탐욕의 신이다. 가련하게도 인간은 신들의 저주와 복수 앞에 무력했으며, 신들이 정한 운명대로 내세도 없고 불멸에의 꿈도 없이 그들의 저주 아래 짓눌린 어 리석은 미물이다. 인간은 신과 닮은 형상을 하고 있지만 결코 신들을 넘봐서는 안 되는 가련한 존재로써, 신들이 인간처럼 사랑을 하고 욕망
풀을 이고 가는 당나귀 50×30×60cm, 테라코타, 2004
에 따라 쾌락도 즐기는 것에 반해, 고통 받는 현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불행한 존재이다. 제의를 통해 신들을 숭배했던 일부 그리스인들 만이 죄를 사면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유로화 동전에 새겨진‘수소 등에 탄 헬라’의 모습은 제우스가 어린 처녀를 납치해 애정행각을 벌인
인간사를 신화화하면서도 신의 형상을 인간의 가장 지고한 모습과 닮게 만들고자 정열을 바쳤을 것이다. 신적 초월에 몰입하여 초능력적 경
다는 일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제우스는 수소로 변신하여 납치한 헬라를 등에 태우고 여행하는데, 이 신화 속에서 그가 여행했던 영역이 오늘
지에 도달한 조각장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신화의 세계 까지 초월했다고 말할 수 있다. 흔한 돌덩이에서 숭고의 물아지경까지 이르렀던 그들의
날‘유럽’이라는 지정학적 공간 개념의 어원이 되었다.
조각문화는 그리스의 영웅 신화보다도 위대하다. 서양의 미술사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미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를 비롯해 르네상스 이후 낭
전쟁과 테러로 전 세계가 들끓고 있는 현대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신들의 이름을 앞세워 선민의식으로 무장하고 자유를 가장한 이들이 저지
만주의, 리얼리즘도 고대 그리스의 완벽한 조형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 조각을 보면, 거기에는 신화의 세계와는 다르게 욕망을 승화시
르는 폭력은 그들의 조상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피투성이로 싸우던 영웅시대의 민족 영웅 신화와 닮아 있다. 오늘날 중동 사막에서 벌어지는
킨 절제미가 있다. 돌이란 인간의 손으로 주무르기에는 택도 없는 존재로, 돌로 만든 그리스 조각에는 중력적 한계를 지혜와 인내로 넘어 경
이라크 침략전과 팔레스타인 분쟁도 제우스의 무자비한 피의 보복과 저주가 난무하던 고대 동서간의 전쟁과 너무도 닮아 있다. 민족 영웅 신
지에 이른 장인의 미덕이 있다. 그러나 그 완벽한 그리스 조각에도 어딘지 모를 이상한 곳이 있다. 합리적 인체비례와 숭고미 일변의 신상에서
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그리스 신화는 신적 초월과 인간의 욕망, 복수를 모두 극대화하여 갖고 있다는 면에서 그리
너무나 아폴론적인 이성주의만이 보이는 것이다. 크레타의 자유분방함과 디오니소스적인 미적 스파크는 대체 어디로 갔는가. 아하! 그래서
스 신화는 여타의 인류 문화와 견줄 수 없는 지배와 복수의 극단을 보여준다. 조화와 상생의 가치를 찾기 힘든 세계관이다.
유럽의 조각사에는 생명력 넘치는 동물조각, 정령이 넘치는 자연물조각이 사라지고 자기들만의 초월적 신, 즉 신이라는 이름의 인간중심적 숭고미만 쫓은 조각들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구나.
이성주의 조각 예술 그럼에도 나는 그리스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솔직히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 질 좋은 대리석이 많은 풍토도 부럽다. 어떻게 이천 오백여년 전
모성의 신화
이라는 그 옛날에, 그렇게도 완벽한 조각양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것도 한 두 사람, 한 시대의 유물로 전해지는 게 아니다. 페르시아,
고린도에 가면 피레네의 우물이 있다. 신화에 따르면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여인 피레네는 애절한 사랑의 눈물을 흘렸는데, 이것이 샘
로마제국 등에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수백 수천 배의 조각들이 즐비했을 그리스 고대조각을 생각하면 경외감이 앞선다. 그 당시엔
물이 되어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고 한다. 물이 귀한 이곳의 샘물을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눈물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남성적 영웅
김봉준_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를 졸업했고, 10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제2회 광주비엔날레’ (광주 1997),‘세계생명문화포럼영상미술’전(세계문화포럼추진위 원회 2003),‘숲과 마을 미술 축’전(진밭마을 2000, 2001) 등 다 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데메테르여신과 딸 40×40×130cm, 테라코타, 2004
피레네의 우는 여인 40×40×20cm, 테라코타, 2004
신화가 주를 이루지만, 이따금 부드러운 여성과 깊은 모성에 관한 신화를 발견할 수 있다. 용감하고 착한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스를 살리기 위
그와 달리 희랍 신화는 인간이 신의 경계를 넘볼 수 없으며 동물도 감히 신계를 넘볼 수 없었던 반면에, 신은 괴물과 동물을 간통할 수 있었다.
해 대신 죽겠다고 나선 아내 알케스티스 신화, 제물로 바쳐진 여인들 신화들이 간혹 있다. 그리고 영웅과 애증과 복수가 판치는 그리스 신화의
모든 자연에 신성을 부여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한 범신론이지만, 그 차원은 서로 다르다. 애초부터 인간을 신인합일의 존재로써 신령이 있다
이면을 들춰보면 거기에도 감춰진 모성과 자애의 여신들이 잠들어 있다.
고 본 것과 신과 인간은 운명적으로 다르다고 본 것에 그 차이가 있다. 이원적 상극론에 숨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있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마고할매와 손자 35×45×75cm, 테라코타, 2004
이 지닌 애욕 등 칠정을 다 누리고 신으로서의 초월적 지위도 행사하는 존재로서, 자연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을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만신 중 환웅은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라 이름 붙였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
에도‘욕심 많은 대감신’이 있지만, 그 신은 인간들에게 대접을 잘 받으면서 인간계를 떠나는데 반해 희랍 신들은 인간과 신중에 어느 한 쪽이
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징벌, 형벌, 선악 등 인간세상의 360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재세이화(在世理化)하였다. 그 때 곰 한 마리
죽어야만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물론 결과는 신의 승리로 끝난다. 복수와 단죄를 아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역사는 유전자를 타고 돌면서 무
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고 있었는데, 둘은 환웅에게 인간으로의 환생되길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수한 인과의 고리를 만든다. 평화와 자유를 앞세우지만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평화는 위선과 지배의 논리로 변신하기
스무 개를 주면서 환생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이를 잘 지킨 곰은 인간으로 환생하여 잠시 인간의 몸을 빌린 환웅과 신단수에서 혼인하여 아
도 한다. 그리스 여행 내내 나는 드러난 그리스 신화 이전에 존재했을지 모를 근원 신화를 찾으려고 헤맸다. 그리스 시민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들을 낳았으니, 그를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삼국유사> 중에서.
부터 크레타 섬에 있었다는 풍요의 여신들, 북쪽에서 내려왔다는 도리아인인 대지의 신들 이야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동이족의 신화는 동물계, 인간계, 신계를 넘나든다. 서로 간에 경계는 있으나 노력하면 동물도 인간이 되고 인간도 신이 되며 신이 잠시 인간
나는 그리스에서 돌아오면서‘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고대 인류의 신화에 숨겨진 모신, 자애의 신, 대지의 신, 생산의 신, 정령 신들
으로 변환하기도 한다. 천지 사이의 인간은 신령하게 태어나는데, 한민족 기원설화에는 신인합일의 홍익인간이 그렇다. 동굴 속에서 나온 웅
을 찾아 새로 신전을 만들리라’고 다짐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내가 꿈꾸고 있는 아시아적 정체성을 찾는 미적 창조의 여로에 있어서 이번 그
녀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숲의 선계인 신단수에서 만난다. 숲에서 신과 인간이 신령하게 교통하여 신인인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풍백
리스 문화유적 기행은 더 큰 확신을 보태주었을 뿐, 이것이 새로운 다짐이라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신전이란 전혀 색다른 신전도 아니다. 인
우사 운사를 거느리면서 하늘의 조화를 다스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여 이화세계를 이루었다. 이는 유불선 이전을 포함한 삼교인 풍류도의
류의 역사에서 독점적 권력과 생산으로 쌓아 올린 위선의 바벨탑 뒤에는 버려진 생명과 평화의 신상들이 있다. 나의 작업은 인류가 꿈꾸던 신
시작을 알리는 동아시아 대륙의 신화이다.
성한 꿈들의 잃어버린 파편들을 다시 찾아 모시는 신전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힘쓰다 갈 예술의 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에 게 죽도록 그들의 삶을 모시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때 남을 결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흙으로 빚은 살림의 신상들일 것이다.
김성호
그리스문화유적기행-김성호‘마음속의영상’
여행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의미나 시각은 십인십색(十人十色)으로 제각기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곡예사의 도약 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여행은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경험이나 관찰을 통해 그 속에 숨어있 는 인스퍼레이션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사고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그 기초를 두는 것이며 그림 을 그린다는 것 또한 어떠한 형태를 표현할지라도, 인간사회 속에서 그 무언가를 그리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사생화에서부 터 발전된 형태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을 통해 하루아침에 어떤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도 좋지만, 여행지에서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화된 형태로 내면의 창고에 저장되어지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싶다. 지금은 택지개발로 사라져 버렸지만 내 작업장 뒤쪽에 있던 작은 신나무 숲길이 단풍이 들어 천지가 붉은 빛깔로 뒤덮인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나, 오래전 별들이 선명하던 겨울 밤하늘이 온통 황금빛의 하늘로 기억되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 시간이라는 필터에 의해 淨化되어간다는 증거가 아니겠는 가. 에게 해의 검푸른 물결, 신전의 폐허와 풍화되어 가는 기둥들, 로마인들의 우물터와 순례자들의 무리를 보았고, 유적지 벤 치 위에 떨어져 쌓인 배롱나무의 붉은 꽃잎, 석회석의 흰 해안선과 나체족들의 은밀한 해변, 하얀 벽과 붉은 지붕의 집들, 아이리스와 개양귀비꽃이 만발한 언덕, 올리브 나무숲길을 걸어가는 이국 소녀의 뒷모습과 오렌지 꽃의 향기와 바람에 나 무들의 술렁거림도 보았다. 여행지에서 본 이러한 모습들과 여러 체험들도 시간의 정화작용에 의해 잡스러운 것들은 걸러지고, 투명하고 순수한 것만 이 남아 우리의 기억 속에 정제된 퇴적물로 쌓여질 것은 분명하며, 그것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인 울림으로든, 어떠한 형 태로든 간에 자신의 작업에 표출되어질 것 또한 분명하다. 몽상가는 환상적인 꿈을 꾸고, 시인은 목가적인 시를 읊조리듯 이...
아리우스 언덕위에서 54×30cm, 비단위에 채색, 2004
그리스 기억 80×34cm, 비단위에 채색, 2004
김성호_1954년에 대구에서 출생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고, 10회의 개인전과‘풍경의 풍경-4人의 풍경해석’전(부산 시립미술관 2001),‘일기예보’전(갤러리사비나 2000)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홍주
올림피아 20×26cm, 혼합재료, 2004
포세이돈의 분노 114×115cm, 캔버스에 아크릴, 2004
신선한 장소 26×20cm, 혼합재료, 2004
죽음의 입 26×20cm, 혼합재료, 2004
김홍주_1945년 충북 회인에서 출생했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1회의 개인전과‘사실과 환영, 극사실 회화의 세계’전(호암갤 러리 2001),‘바벨’전(국립현대미술관 2002)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적지에서 26×20cm, 혼합재료, 2004
박병춘
신화의나라그리스
바쁜 일상을 쪼개어 굳이 그리스행 비행기를 탔다. 언젠가 그리스를 갈 기회가 생기겠 지만, 좋은 작가들과 어울려 함께 할 수 있는 여행이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선뜻 아 테네로 향한 것이다. 빠리 공항에서 기다린 시간을 합쳐 22시간이란 긴 시간을 날아 깜 깜한 아테네 공항에 발을 디뎠다. 도시의 외곽도로는 칠흑같이 어두워 그저 현지 가이 드로 나온 조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며 에게 해를 마주한 포세이돈 호텔에 여장을 풀었 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유적지 답사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보았던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부터 시작되었다. 신전은 수리를 하느라 곳곳이 철제 빔 으로 받혀 있었고, 무리를 진 관광단들이 안내원이나 인솔선생님의 설명을 듣느라 정 신이 없었다. 박물관 유물 앞에서 열심히 설명을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뚱뚱한 여선 생 뒤로, 딴전을 피우며 짜증을 부리는 프랑스 수학여행 학생들을 보니, 가이드를 피해 이리 저리 도망다니는 우리 팀원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리스 조각들은 기원전 7, 8세기의 것들로 그 정교함이 대단했다. 옷 주름의 묘사와 근육의 표현은 수천 년 전 에 이미 로댕을 능가하는 조각가들이 많았음을 보여줬다. 물론 단단한 화강암을 가진 우리의 환경과는 다르기 때문에, 불국사의 석굴암과 비교해 어느 것이 우위라고 말하 긴 어렵다. 어쨌든 파르테논 신전 기둥의 배흘림 양식이 바다를 건너 1000년의 긴 시간 을 지나 우리나라 부석사 무량수전등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흥미로웠 다. 그리스의 아름다움은 역시 지중해를 끼고 형성된 해변의 풍경에서 맛볼 수 있다. 작은 어촌이 형성된 아담한 에기나 섬에서 나와 포세이돈 신전으로 가는 해변은 너무도 아 름다웠다. 곳곳에 부자들의 고급별장이 있고 세계 최초의 누드비치가 있어 휴가철이면 전 세계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포세이돈 신전은 아테네 여신과의 내기에서 져서 미쳐 날뛰는 포세이돈을 달래기 위해 바다와 마주한 커다란 언덕의 절벽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바다를 마주하고 우뚝 선 기 둥들만 봐도 멋스러웠다. 기묘하게 형성된 주변의 산과 언덕, 바다가 이뤄내는 풍경과 조화된 신전은 그리스의 신전 중에 가장 인상에 남았다. 하늘과 바다와 땅을 함께 떠받 든 모습이라고 표현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에피다고라스와 올림피아는 온통 기둥 과 돌투성이였는데, 역사와 신화는 세월에 묻혀진 채, 지진으로 무너진 흔적들이 고스 란히 웅장했던 그리스의 과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올리브의 나라 그리스 그리스 인상 29×23cm, 캔버스에 아크릴, 고무, 2004
그리스의 산들은 큰 나무가 없이 하얀 석회암 바위와 작은 나무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멀리서 본 산의 풍경을 보고“박선생의 흐린산수를 보는 것 박병춘_1966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동양화 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9회의 개인전과‘진경 새로운 제 안’전(국립현대미술관 2003)‘정물예찬’전(일민미술관 2004), ‘일상이 담긴 미술’전(대전시립미술관, 2004)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덕성여대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같다”는 최민화선생님의 비유에 나또한 깜짝 놀랐다. 그러나 강원도 정선 지방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곳의 산들도 석회암이 많아 속살을 드러낸 절벽산이기 때문에, 매년 정선으로 스케치를 다닌 나의 그림이 그렇게 느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른 다. 그리스와 같이 척박한 땅과 산에서 죽지 않고 천년씩을 살아가는 나무가 바로 올리브 나무란다. 키는 작아도 그 모양새가 몇백년은 됐음직한 올리 브 고목들이 온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올리브 숲을 내려다보며 해발 몇백미터에 위치한 델피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정정엽선생 은 그 풍경을 재빠르게 스케치를 하곤‘올리브의 바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정말 최상의 비유였다.
델피는 아주 조용한 산골 마을이었다. 숙소에서 건너다보이는 산과 그 사이로 흐르는 대기의 신선함은 여행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아침 을 일찍 먹고, 안창홍선생님과 동네 골목을 따라 산책을 했다. 담벼락, 벽, 문, 지붕, 계단, 베란다, 화분 등과 같이 주변의 작은 것들에 대한 그리스 인들의 따뜻한 애정, 그리고 그들의 오랜 전통과 습관이 배어있는 물건과 건축물에서 왠지 모를 부러움이 느껴졌다. 델피의 제우스신전은 몇 개의 기둥만 남기고 네로와 그 밖의 침입자에 의해 다른 나라로 옮겨졌다. 아테네와 그 주변 도시의 성금으로 치루어진 스포츠 제전을 위해 델피의 산꼭대기에 조성된 경기장의 길이는 175미터나 되어 그 스케일이 대단했다. 또한 무대 뒤로 산 아래 건너편의 병풍같 은 바위산을 마주하고 축조된 음악당도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옛날 강성했던 그리스의 문명과 문화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문화, 경제, 정치에서 탁월한 선진문화를 가졌던 그리스의 위상. 그러나 초강대국들의 출현으로 몇 천 년을 침입자들에 의해 지배당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의 입장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지중해를 끼고 도는 아름다운 해변과 옥색 바다,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숲과 그 사이로 붉게 핀 개양귀비 꽃, 유적지를 지키는 외로운 기둥들만이 번성했던 그리스의 역사를 말없이 대변해주고 있을 뿐, 그 옛날 신화의 나라는 이제 유적지의 기둥과 박물관의 유물로만 짐작할 수 있고 소크라테 스로부터 시작된 그들의 토론문화는 그리스인들이 모이면 즐긴다는“이바구”로만 현재에 이르고 있을 뿐이었다.
기념촬영-포세이돈 신전 71×390cm, 한지위에 수묵, 사진 꼴라주, 2004
박은선
역사 - 부분의 미학 대신大神 제우스와 그 밖의 다른 신들이 지상에서 하늘의 궁전으로 떠난 이래 그리스는 인간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척박한 역사 로 점철되었다. 비단 그리스 뿐이랴. 이제 그 땅에는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를 애도하는 요정들도 제우스의 미녀 사냥이나 큐피트 의 애꿎은 장난도 그리고 아테네 여신의 위력도 이젠 더 이상 없다.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채 모든 신전들은 하나 둘 공기 속에 흩어져 분해되고 산화되어 망각의 강물 속에 잠겨버렸다. 아테네 시 높은 언덕 위에서 홀로 태양 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자태란 안내 책자에서 보았던 사진 속의 모습 그 이상으로 신비로웠고 심하게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어떤 신성함과 권위를 느끼게 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들의 잔재, 그 파손된 부분들은 보기 흉하다기 보다는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다는 듯 이미 우리 눈엔 지극히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부분의 미학이라! 고대 신전의 복원도가 원래의 모습과 시절을 그대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남아있는 부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잃 어버린 나머지를 추리, 상상해 본다. 그리고 지금은 없으나 그때 살았을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어 보았다. 마치 사라진 공간과 시간의 퍼즐을 맞춰가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역사란 남아있는 신전의 기둥들처럼‘망각의 강’수면위로 떠오른 부서지고 불완전한 그림자로서, 실재의 극 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인간 자신이 본래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일 게다. 그 잔재 속! 에서도 신화 와 신들의 이름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지금까지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고 매료시키는 이유는 그리스인들이 인간 최대의 불치병인 인 간의 한계와 삶에 대한 통찰로 신화 속에 인간의 본질을 가장 지혜롭고 밀도 있게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대가 바뀌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 또한 바뀌어도 불완전한 시한부 우리 야누스들은 이 병을 치료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 신들과 신전을 필요로 했으리라. 그 어떤 동기와 이유를 불문하고 신전을 만들어 놓은 이도 인간이요 그 만들어 놓은 것을 파괴해 버리는 이 또한 인간인 것이다. 프로타고라스, 소피스트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인간 중심 사상과 시민의 힘이 그리스의 역사를 진보시킨 반면에 자유 시민과 노예, 식 민화와 식민지 그리고 민주주의와 전쟁 그 모든 역사의 이면은 나름대로 합리화된 기준으로 의미와 가치를 설정하고 정당화시켜 마침 내 자신들이 만든 기준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그리고 너와 나에 대해‘원근遠近’을 정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상하上下, 좌우左右 두 상극의 평행선을 그으며 지금까지 달려 온 건 아! 耐. 그리고 또 한편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준과 기 준의 차이,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인간과 역사의 비극은 시작되며 그 원근遠近이 극대화 되면 될수록 인간 자신 서로가 서로에 게 돌이킬 수 없는‘오이디프스’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희망이라고 한다. 오늘날‘인간 야누스’에게 희망이란 어떤 모습일까. 세계의 바다, 세개의 바다 91×73cm, 캔버스위에 거울, 라인테잎, 아크릴, 2004
박은선_1962년에 서울에서 출생하여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미 술학과 졸업 및 이태리 로마 국립아카데미 회화과를 졸업했으 며, 11회의 개인전과 'city-net Asia'전(서울시립미술관 2003), ‘삶에 스며들다’전(강남성모병원 2003),‘이야기하는 벽, Talking to the wall’전(한국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 등 다 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가나아뜰리에 입주 2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1×73cm, 캔버스에 아크릴, 거울, 라인테잎, 2004
안창홍
Blue & WhiteⅠ 70×50cm, 종이위에 과슈, 2004
Blue & WhiteⅡ 70×50cm, 종이위에 과슈, 2004
아침 7시 30분. 모닝콜 전화 벨 소리에 잠을 깨고, 호텔 식당에서 레몬 쥬스와 베이컨, 호밀빵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페레우스항의 선착장으로 향했다. 에기 나 섬으로 가는 쾌속선을 타고 호수처럼 잔잔한 에게 해를 달리는 동안 일행들은 제각기 카메라 혹은 스케치북을 꺼내들곤 말없이 사진을 찍고, 스 케치를 하거나 글쓰기에 열중했다. 나도 뱃머리 난간에 기대선 채로 작업 방향 때문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신들의 이야 기에서부터 비극의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숱하게 떠오르는 낱말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럴 땐 그냥 편안하게 작은 즐거움에 빠져 보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나를 포함한 4명의 일행은 이곳에 남아 섬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곳이 아니면 빡빡한 일정 때문에 시골길 을 한가롭게 걸어볼 수 있는 기회를 찾기가 힘들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나와 함께 한 3명의 일행도 아마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우리는 훨씬 느긋해 진 마음으로 섬의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보너스를 받은 듯 갑자기 풍족해진 시간의 여유를 얄미울 정도로 늘어지게 즐겼다. 여행의 참 맛은 이런 뜻밖의 행운 속에 숨어있는 것 아니던가!
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약속시간과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해 놓고, 제각기 뭔가 건질 거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처음엔 나도 이번 여행의 목적 을 떠올리며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작업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으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래의 목적을 잊은 채 눈앞 에 펼쳐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에 젖어 들었다.
가파른 골목길을 벗어나자 언덕 저 멀리로 수평선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푸른 하늘과 지중해 특유의 코발트 빛 바다, 맑은 햇살과 들꽃들, 선홍 빛 개양귀비며, 노란 민들레, 초롱꽃, 패랭이꽃, 온몸을 침으로 무장한 엉겅퀴, 수없이 많은 꽃들로 가득한 들판, 그리고 올리브 나무 숲과 바람이 스칠 때마다 흔들리는 잎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에기나 섬의 언덕인가! 햇빛에 반짝이는 애게 해를 내려 다 보며, 이곳의 모든 것들을 온몸으로 느 껴 보기 위해 신체의 감각기관을 모두 열어둔 채, 가능하면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올리브 나무 숲길을 지나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 내 화가라는 직업도 잊어버린 채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강화도 크기만한 에기나 섬의 선착장 주변에는 잘 정돈되고 청결해 보이는 토산품 가게와 레스토랑, 선술집이 몰려 있었고, 섬 주민들 또한 여유롭 고 친절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오래된 집들과 골목길, 잘 닦인 유리창 앞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들, 페인트로 정성껏 칠한 대문들과 그 옆에 놓인 낡고 손때 묻은 나무 의자, 길섶에 핀 작은 꽃들, 골목들 사이로 보이는 수평선. 소박하고 정겨운 이 모든 광경들은 이번 여행에서 보고 느낀 웅장한 신전들과 그곳에 얽힌 신들의 사랑 이야기나 영웅담과는 달리,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 거대한 신전 하나를 완공하기 위하 여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제물로 바쳐졌겠는가?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방식과 과거로까지 깊게 연결된 채 살아 숨쉬는 문화의 전통,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의 공간 속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녹아있는 문화를 향유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이 나는 부러웠다.
아테네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바라본 노을빛은 여행자의 마음을 감상에 젖게 했고, 배 위로 부는 바람은 마치 아름다운 여신의 손길이 나의 온몸을 애무하는 듯 부드럽고 달콤했다. 2004. 4. 22.밤 포세이돈 호텔 507호실
안창홍_1953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으 며, 서울, 부산, 수원, 전주 등지에서 21회 의 개인전을 열었으며,‘한국미술2001-현 대회화의 복권’전(국립현대미술관 2001), ‘韓中 새로운 표정’전(예술의전당 2002), ‘그리는 회화-혼성회화의 제시’(영은미술 관 2003),‘북경비엔날레(북경, 2003)등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현재 경기도 양평군 선바위 마을에 있는 작업장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에기나섬의 언덕 36×21.5cm, 종이위에 과슈, 2004
양대원
‘스포츠중독’ 이 세상은 수많은 경쟁을 통해 '최고'라는 이름의 전문가들을 양성해 낸다. 이들 전문가 중 스포츠를 통해 최고가 된 자들에게는 '챔피언(champion)'이 라는 명예가 부여되고,‘스포츠 스타(Sports Star)’ 로서 많은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고가의 몸값을 지니게 된다. 더욱이 시대가 현대화 될수 록 스포츠에 대한 열광이 가속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야말로 스포츠에 의해 울고, 스포츠에 의해 웃는 시대인 것이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를 통해 스포츠가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던 것도 결코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때 우리 국민이 보여준 단결 과 힘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 스스로도 가히 감동의 경지에 이르게 한 경이로운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스포츠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 이제 스포츠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 것이다. 또한 스포츠는‘웰빙 붐’ 과 맞물려 문화 산업 전반의 중심축으로 이동하고 있다.‘먹고 사는’ (의·식·주 위주) 시대에서‘즐기는’ (향락문화) 시대로, 즐기는 시대에서‘건강 지향’(웰 빙)시대로의 거대한 페러다임이 움직이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꽤나 괜찮아 보이는 이동이다. 지금은 스포츠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황의 경제 상황에서도 스포츠센터와 헬스클럽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매년 이맘때면(바야흐로 노 출의 계절인 것이다) 신규 등록자들로 크게 붐빈다고 한다.‘운동 중독’ 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운동과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실로 엄청나다. 그 것은 현대인들이 갈수록 심해지는 스트레스를 운동이나 스포츠 관람 등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스포츠가 정치화되고 자본화되면서 스포츠의 기본정신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스포츠 정치, 스포츠 마케팅, 스포츠 과학 등의 말들이 낯설지 않다. 스포츠를 통해 국가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그 교류에는 당연지사(當然之事)로 자본이 오가니, 가히 스포츠 선수가 외교관이고 자본의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포츠가 개인적으로는 (물론 피나는 훈련의 결과이겠지만) 영웅을 만 들기도 하고, 집단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추스르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 이 시대의 슈퍼맨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도 도핑(육상, 수영 등)이니,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반칙(축구, 농구 등)이니 하는 것들이 횡행(橫行)하고, 심판들의 편파판정이 난 무하며, 홀리건들이 난동을 피우는 폭력적인 장면들을 평소에도 TV를 통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스포츠계를 보고 있자면, 왜 우리가 스포츠 에 대한 이런 집단적 중독 증세를 보여야 하는지가 의심스럽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올림픽 정신이 부재되어 지고 오직 승리에만 집착하는 작금(昨今)의 일부 경기를 보고 있자면, 스포츠의 건강한 정신이 그리 워진다. 국제적인 경기에서 들려오는 태극낭자의 승전보나 일본에서의 마라톤 우승 등을 보며 가슴 저미는 감격을 맛 본 나 또한 이런‘어떻게든 이 겨야 해!’ 식의 스포츠 중독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순수의 시대가 지나갔다고들 한다. 하지만 여전히 스포츠, 그에 따른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순수를 지향하는 스포츠인과 대중들이 있기에 한 번 더 열 광해 보고자 한다. 2004년 여름, 지중해의 푸르름과 순백색이 상징인 나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제28회 올림픽이 열린다고 한다. 4년마다 개최하는 국제 스포츠 경기대회인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 제전경기의 하나인 올림피아제(祭)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올림픽은 종교, 예술, 스 포츠가 혼합된 형태였다. 각종 신을 섬기던 그리스인들은 올림픽 대회가 되면 각지에서 올림피아로 몰려들어 신전에 참배하고 제례를 지냈으며, 종 교의식 못지않게 예술·문화 행사도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스포츠와 모든 문화·예술 분야가 함께 교류하는 그야말로‘축제’ 였던 것이 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리스가 올림픽 개최지로 선택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고대 그리스 스포츠 정신의 부활’이라는 점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정말 간절 히 바라는 바이다. 말로만 축제인 채, 온갖 짓거리의 반칙이 난무하며 1등만을 부채질 하는 올림픽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고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본래의 올림픽 정신이 되살아난 축제로서 말이다. 자, 이제 그 시절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그리하여 모두가 월계수 잎을 머리에 두르고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를 한 가슴으로 느껴 보자. 2004. 6. 양 대 원
운동회 036040 44×51cm, 혼합재료, 2004
양대원_196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세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8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가라사대Ⅲ 117040 110×111cm, 혼합재료, 2004
이강화
에기나에서조르바를만나다 2000여 섬들의 나라 그리스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 화필 기행 팀은‘그리스 속의 그리스’라는 아름다운 섬 에기나를 찾아 페레우스 항에서 출 발하는 페리 호에 올랐다. 에게 해의 비취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하얀 선박들을 한 시간 남짓 감상하였을까. 관광객보다 그리스 인들이 더 많 이 찾는다는 에기나 섬으로 가는 바닷길에서 다른 몇몇의 섬들과의 만남도 좋았지만, 가슴 속에 남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조르바와 그리스를 한 무대에서 감상한다는 설레임은 나를 줄곧 흥분시켰다. 하얀 요트들이 가지런히 묶여 있는 항구며 물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는 신화의 젓 줄처럼 느껴졌다. 우리 일행은 32개의 기둥 중 24개의 기둥만이 떠받치고 있는 도리아 건축양식의 아페아 신전을 보기 위해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는 동안, 섬 전체를 둘러 피어 있는 양귀비의 유혹에 잠시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풀숲과 신전 기둥 밑, 돌계단과 나무 밑 둥 곳곳에서 낮은 키로 자라난 붉은 양귀비 는 우리나라의 들판에서는 볼 수 없는 꽃이어서인지 더 황홀하게만 느껴졌다. 돌기둥 한 개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아페아 신전의 기둥들은 모 두 에기나 섬에서 산출된 석회암 통바위라는 설명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고대 건축양식과는 반대로, 현대의 우리 는 너무 많은 것들을 쪼개고 파괴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일행은 먼저 아테네로 돌아가고, 그 중 몇몇이 남아 걸어서 좀더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좁은 미로처럼 얽힌 작은 골목들은 마을의 정취를 듬뿍 느 끼게 해주었는데, 나는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지나기에도 좁은 골목에서 우리네 정서와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빼곡한 상점들에 진열되어 있는 작고 아기자기한 상품들 역시 관광객들의 눈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그리스의 전통적인 시골 풍경을 느끼면서 바닷가에 즐비한 식당에 앉아 숯불에 구운 문어의 고소한 맛에 술 한 잔을 더하니, 빡빡하게 짜여진 여행 스케줄에서 빠져나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기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별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탈을 모른 채 살아가는 작중 화자인‘내’가 여성의 치모 를 모아 베개를 만들어 베고, 타락한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물레를 돌릴 때 불필요한 손을 자르는 등 거침없이 행동하는 진정한 자유인 조 르바를 만나면서 점점 그의 세계에 빠져든 것처럼, 나 또한 조르바의 뜨겁고 치열한 삶과 야성의 영혼 속으로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조 르바 역을 맡았던 우직한 안소니 퀸이 작품 속의 주인공과 너무 흡사했다고 생각했던 기억부터 시작하여, 그가 자유로움의 대명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그리스를 여행하는 동안 하나씩, 하나씩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리스와 에기나 섬을 돌아보면서 조르바의 자유로운 정 신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노을에 젖은 항구를 뒤로 하고, 섬에 남았던 일행과 함께 에기나에 아쉬움을 떨굴 땐, 바다도 이미 하늘과 닮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일행을 태운 배 를 띄워 보내고 자꾸만 작아지는 에기나 섬과 하늘과 바다 사이로 어느새 달과 별이 동행하고 있었다.
아가멤논의 인사 116.7×91cm, 캔버스에 유화, 2004
이강화_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서 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고, 프랑스 파리 8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 했다. 16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국제 환경미술제’(예술의 전당 2002),‘북경국 제아트페어’(북경 2002)등 다수의 단체전 에 참여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예체능대 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회상 82×56cm, 캔버스에 유화, 2004
이만수
파르테논, 수니온, 올림피아에서 볼 수 있는 신전들의 규모와 장소성, 극도로 사실적인 조각들에서 오는 시각적 특징은 강요적일뿐 아니라 위압 적이고 무력적이며 동시에 신과 신화에 대한 허구를 반증한다. 신화와 그 재현물들이 시각적으로 사실적일수록 그것들의 부재는 완벽하게 대체 또는 위장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적 재현은 묘하게도 현대문명의 시각적 폭력성과 욕망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흔히 신화는 부분적인 것을 전체적인 것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이며, 신화를 조작 하는 사람들은 예언자, 신의 대리인으로써 군림하면서 모든 것 을 신화의 틀 속에 가두려고 한다고 인식되고 있다. 그런 의미 속에서 신화는‘눈’과 같이 폭력적이다. 일반적으로 눈은 부분적으로 본 바를 전체 적인 것으로 개념화하고, 모든 것을 틀 지우며 끊임없이 타자화 할 뿐 아니라 차별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눈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라는 혐의에 서 자유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신화의 생산자들은 끊임없이 신화를 시각적으로 재생시키고 그 변종을 유포시켜서 모두를 몰두케하고, 열광케 만든다. 그리스에서처럼 올림피아의 유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투구와 경주 그리고 전쟁이었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상대로 싸워야하는 비극의 투 구 속에서 스미는 초초함과 두려움의 눈초리를 상상하니 소름끼쳤다. 헤라, 제우스 신전을 거쳐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달리고 싶었고, 또한 달려야만 했다. 수많은 시선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무언가에 강요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시선을 향해 나의 가치를 알리 고,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반응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아마 그리스인들도 신화 혹은 사회의 통념에 따라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경기장에서는 떼밀리듯이 달리고, 전쟁터에서는 타인의 시선과 수치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창과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델피, 여기는 지금까지의 빽빽한 여행 일정과 그에 긴장된 마음에 비해서 일종의 해방구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바다를 지나 넓디 넓은 올리브 평원을 거쳐 산속으로 들어가는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모두는 파르나수스산을 앞에 두고 지나온 바다가 멀리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숙소 에서 길고도 깊은 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모처럼 소리도 질러보고, 동네 닭소리, 개소리도 들었다. 가이드는 숙소가 좋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지만 우리 같은 화가들 족속은 도리어 사람들이 흔히 환호하는 것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태백준령의 어느 산간 마을에 온 것 같이 편안함과 시 원함을 느꼈다. 중심의 노고Ⅰ 91×118cm, 한지에 채색, 2004
이만수_1961년 강릉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 했으며, 9회의 개인전과‘고전의 지혜-현대인의 삶’전(공평아트센터 2000), ‘한.일 회화의 표현’전(일본 romenade gallery 2002),‘자화상’전(세종문화 회관 200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성신여대 미술대학에 재직 중 이다.
우리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델피에서 수리 중이었던 박물관을 형식삼아 겨우 두 칸 구경하고 산중의 산전으로 향했다. 올려다본 산들은 금세 무 너질 것 같이 나를 두렵게 했다. 해발 650m의 제우스 신전과 극장, 그 보다 더위에 있는 경기장으로 올라갈수록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그럴싸했 다. 신전에 도착하여 건물과 신전 부속물들의 잔해 속에서 당시 신전을 방문했던 사람들과 무녀들의 신탁행위, 그리고 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대 기 행렬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일상의 삶에 대한 기대와 예감에서부터 폴리스의 운명에 관한 것까지, 이미 이루어진 예언과 신탁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흡사하 여 소스라쳤다. 미리 안다는 것은 미리 본다는 것이다. 미리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폭력과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도, 그렇게 이뤄진 사회적 풍경은 절박한 상황의 표상이다. 그러나 신은 구체적 답이 없다. 오직 신의 이름으로 의탁하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탁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대한 최면인 동시에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교묘한 은폐장치였다. 가랑비 속에서 내려다보이는 그리스의 장관은 시각이 가진 힘을 느끼기에 충분했고, 내가 지금까지 신화와 시선 등에 대해 갖고 있던 잡다한 생 각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본 것에 대해 가능하면 침묵하고 싶으며 반쯤 눈을 감고자 한다. 저녁 무렵, 여행의 종착역이자 시발점이었던 아테네로 무사히 귀환했다. 중심의 노고Ⅱ 91×118cm, 한지에 채색, 2004
이종빈
반인반수(半人半獸) 삽화가 조잡하게 그려져 있는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은 어릴 적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 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속엔 기상천외한 신들의 이야기가 있었고, 영웅들의 전설이 있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수퍼맨이 있었고 해리포터가 있었으며 매트릭스가 있었다.그 중에서 도 유독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반인반마(半人半馬) 형태의 켄타우로스(Centaurus)였다. 켄타우로스는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의 형태를 한 괴물인데, 그 일족은 익시온과 여신 헤라의 모습을 한 구름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고도 하고, 또는 그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페리온 산에 서 암말과 교접하여 낳았다고도 한다. 고대인들은 말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말과 인간의 결합체를 과히 천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켄타우로스는 고대의 공상적인 괴물 중 가장 훌륭한 특성을 부여받은 유일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적에 한동안 어떻게 저러한 형태가 가능하지? 라는 의문을 가졌던 걸로 기억한다. 이러한 인체와 짐승이 결합된 그로테스크한 형태는 현대 조각에서도 더러 흥미롭게 인용되기 도 한다. 상반신은 개이고 하반신은 인체인 조각도 있고, 스테판 발켄홀(Stephan Balkenhol)이 라는 독일 조각가처럼 나무로 소, 말, 곰 등의 짐승머리를 하고 아래는 인간 형태로 표현한 경우 도 있다. 캔타우로스 이외에도 신화에는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괴물이 여럿 등장한다. 이렇듯 현대에 와서 그리스 신화는 영화는 물론 예술계 전반에 다양한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하며 훌륭 한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이번 기행은 8일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그러나 각국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과 더불어, 유적 지 곳곳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의 진지한 눈빛에서‘왜 유럽인들이 유럽의 부국들과는 달리 그다 지 잘 살지 않는 그리스를 아끼고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었고, 그러한 그들의 정신세계와 위대 한 문화유산의 근원을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였다.
무제 150cm, 폴리에스테르에 채색, 2004
축복의땅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나라, 그리스. 유럽에 관광을 가면 프랑스를 먼저 보고 그리스를 마지막에 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고대의 유적지가 도처에 널려있는 그리스를 먼저 보면 다른 여행지들이 시시하게 느껴진다는 의 미일 게다. 우기를 지나 봄을 맞은 4월의 그리스는 눈이 부셨고 올리브나 무와 쪽빛 바다로 이루어진 해안은 바로‘축복받은 땅’이었 다. 폐허가 되어버린 수천년의 유적지에는 아직도 수많은 신 화가 잠자고 있었으며, 그곳엔 느린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의 서정과 여유가 넘쳤다. 이탈리아 유학시절, 동쪽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기 만 하면 그리스 땅이었지만 그땐 그리 여유가 없어 가보진 못 했다. 대신 테오도라키스의 음악과 파란투리, 아그네스발차가 부르는 그리스의 음악은 외롭고 힘든 유학생활에 많은 위로가 되었었다. 그리스는 터키의 침공, 2차 세계 대전, 내전이라는 역사로 인 해 오랜 기간 동안 암흑기와 같은 혼란기를 보낸다. 테오도라 키스는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음악으로 그리스 국민들의 설움 과 아픔을 달래준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래서인지 그 음악들 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가볍지 않 은 멜로디가 나의 마음에 먼저 와 닿았다.
이종빈_1954년 부산에서 출생했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대학원 조각과를 졸업했으며,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대학 조각과 수학,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대 학 조 각 과 를 졸 업 했 다 . 8회 의 개 인 전 을 열 었 으 며 , 'NICAF-2003'(동경국제포럼전시실 일본 2003),‘제1회 북경비엔날레’(북경 200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거대두상 30×25cm, 드로잉, 2004
정정엽
아테네-역사의 기둥 220×160cm, 캔버스에 유채, 2004
그리스 스케치 익숙하지만 아득한 나라 그리스. 하늘 아래 대리석 기둥들이 남아있는 고대도시. 하얀 벽에 파란 창문의 집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신화 들. 이 정도가 여행을 떠나기 전, 그리스에 대해 내가 연상했던 목록이다. 하지만 기행에서 돌아와 목록은 더욱 풍부해졌다. 거친 듯, 기개 있는 산들로 이루어진 내륙과 이와는 반대로 바다를 향해있는 길 들이 있는 도시들. 회색도시 아테네를 제외하곤 점점이 뿌려져있는 올리브 나무들. 흰 벽에 붉은 기와를 얹어 단촐해보이지만 평 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낮은 집들. 고립된 땅이 아닌, 이웃 도시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갖춘 섬들. 부서지는 햇살과 맞바람에 충 분히 남아있는 고대 도시들. 연극을 하는 자건 관람하는 사람이건 간에 무대에 서면 감전된 듯한 노래 소리가 하늘에 닿을 것만 같 은 반원형의 오페라 극장 등 이 그것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현재를 사는 그리스인들의 일상에서 다른 잘 사는 유럽의 나라들과 달리, 배 아프지 않을 만큼 적당히 허름하고 적당히 단정한, 장 식이 필요 없는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것은 왁자한 우월감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믿음을 경험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이다.
아테네-돌아누운 여자 162×130cm, 천위에 아크릴, 2004
아테네-아고라 160×11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4
아테네-최초의 민주집회가 열리던 언덕 91×73cm, 캔버스에 아크릴, 2004
최초의 민주주의 발원으로서의 도시국가 아테네 2500년 전, 그리스가 이미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며 그 기나긴 민주주의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리스인들은 신을‘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한 불완전한 존재’ 로 보았고 절대권력을 가진 유일신이 아니라 다양한 성격을 인정하는 범신론을 믿었다. 아마도 그리스는 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세계관으로 내세보다 현세에 관심을 갖으면서 무궁무진한 신화를 엮어내고, 인간의 본성을 탐색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현실에서는 절대군주의 위험성보다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욕구를 조절하 는 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로, 최초의 집회가 열렸던 마당인 아고라의 돌기둥들을 내려다보면서, 시장 한 귀퉁이에서 자신의 사상을 육성으로 떠들고 있는 이와 그런 자리를 있게 한 문화의 부유함을 본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어야할 나머지 절반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를 배제한 어떠한 결정도 단지 절반만 좋을 뿐이다.’ 인디언 잠언집에 있는 이 문구가 우려하는 것처럼 그리스의 여자들은 시민이 아니었다. 남성들이 전쟁과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그들의 히스토리 (histoy)를 써내려 갈 때, 여성들의 역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민의 자격과 공적인 장소에서‘여성이 배제된 절반’ 만이 존재하는 한, 민주주 의 광장도 이률 배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신화에나 등장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이야기에서도 여성은 남자들의 욕망을 대신하 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써, 실체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2500년이 지난 지금, 그녀들이 돌아눕기 전에 다른 절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가 되 지 않았을까. 지구에 대한 내 기억 한편에 낮은 집의 평화로움, 델피, 돌기둥, 올리브, 돌아누운 여자를 끼워 넣는다. 올리브의 바다 드로잉, 2004
최민화
최민화_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고, 8회의 개인전과‘공원, 사람들’전 (마 로니에 미술관 2003),‘한국發’전(서울옥션 2002) 등 의 단 체전에 참여했으며, 현재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에기나섬에서1 54×39cm, 종이위에 유화, 2004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폐허의 미학 - 에기나섬을 그렸는데, 평소의 작업인 신화를 그리지 않고 풍경을 그린 이유가 있으신가요? 에게해는 지중해 바다답게 정말 훌륭했습니다. 에기나섬은 그 지중해 바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이 그림은 관광지의 풍 경인데, 바닷가에 있는 교회, 가게, 관광객을 태우고 다니는 마차가 있는 장면입니다. 거기에다 한 늙은 선원을 그려 넣었죠. 7박8일의 일 정 중 제일 편안한 곳이 에기나 섬이었습니다. 다른 곳은 효과적으로 가볍게 여행풍물 기분이 나게 그릴 곳이 별로 없었어요. 그곳엔 전부 기둥만 남아있었죠.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지루한 여정이었고, 기둥의 숲에서 헤매는 꿈을 꿀 정도였습니다. (기둥을 그린 다른 스케치를 보여주면서) 그러다보니 그림을 그려도 효과가 잘 나지 않았습니다. 기둥이라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효과도 그다지 나지 않는 소재예요. 이 그림도 여러 번 그려보고 고민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작업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그림을 많이 그리지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작업이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단히 그려 봐서 그 중에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이 나 오면 비로소 작업을 끝내죠. 그러다보면 실제로 습작들과 발표한 작품사이에는 규모면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습작이 더 좋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웃음) - 유적지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신전이 가장 인상깊으셨나봅니다. 가본 곳들도 다 괜찮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델피였습니다. 델피는 말그대로 정말 유적지였는데, 고산에 위치한 유적지가 정말 좋 았어요. 여행지 중에도 역시 그리스라는 인상을 깊게 주었던 것은 신전이었습니다. 가본 곳 모두, 기둥 숲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솔직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유적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 같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신화에 의해서 지배를 받은 사 회이고, 서양의 모태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곳이 그렇게까지 폐허가 되어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옛것이 많이 남아있는 인도에 비해 서양의 막강한 근원지였던 그리스가 마모된 폐허로 남아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했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스를 두고 폐허의 미학을 예찬하는 게 아닐까요? 다른 유럽에도 돌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리스엔 정말 돌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만의 분명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돌기 둥만 완벽하게 남아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거든요. 신전에 남아 있는 기둥에서 그리스만의 솔직함, 자신감을 느 낄 수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것 자체가‘우리’인 것을 그대로 말해주는 솔직함이죠. 하기야 유적들이 허물어져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 는 거죠. 다른 나라들이 유적지를 꾸미고 나름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는 유적지 자체를 있는 그대로 놔두고 있는 점이 큰 차 이점이었습니다. - 유적들 중에서도 특히 감성적으로 다가온 것은 없었나요? 그것은 유적들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유적들을 보면서 그것들에게 소위‘필(feel)을 달라’ 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며, 만약 줬다고 하면 나로선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웃음) 인도와 그리스 여행을 한 달 다녀온 사 람들이 책을 10권 내고, 10년 살다온 사람들이 여행지의 방대함을 느껴 수필 1편을 쓴다고 합니다. 이번 여행이 꼭 그렇더군요. 박물관 중 에서도 올림피아의 박물관은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박물관 자체가 넓기도 했지만, 나는 유독 하나의 방에서만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차피 짜여진 일정대로라면 다 보지도 못할 것을 예상했기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아마 일행들에게는 개인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웃음) 그 방안에는 고대 조각들, 책에서 보던 고대 작품들이 늘어서 있었고 나는 유럽의 미술학도들이 박물관에 있는 위대한 작 품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 안에서 스케치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스케치를 할 수 있는 박물관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선생님이 하고 계신 상고사 연작은 이번 그리스 기행전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내가 신화를 주제로 택한 이유는 인류의 보편성, 고대의 보편적인 어떤 것, 공시적인 공통점을 잡아내기 위해서이며, 그런 점에서 나의 작 업은 옛것에 대한 단순한 향수와는 다릅니다. 신화를 자꾸 옛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작가에겐 의미가 없습니다. 작가가 신화를 소재로 한 다는 것은 역시 오늘의 이야기,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고, 또 모든 작가가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엔 우리 것, 우리의 신화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도 존재하는데, 지금 우리에겐 고대 신화에서 현재성을 발견하기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의 신화보다도 그리스 신화에 의해 훨씬 많이 세뇌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는 습작들도 모두 그리스 신화를 기초 로 하고 있어요. 그것을 왜 부정하겠습니까. 신화는 이미 나의 뇌리에 들어와 있는 위대한 인류의 유산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서구적인 것이라고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신화자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미적 쾌감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내가 한국의 신화를 그리는 이유는 그리스 신화가 이미 나에게 많이 입력되어 있어서 다시 끄집어서 그릴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
에기나섬에서2 54×39cm, 종이위에 유화, 2004
의 상고사 신화와 고대 그리스 신화를 시각적으로 비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의 경우 고구려벽화에 의해 어렴풋하게 가늠할 수 있을 뿐 이죠.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신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근현대 화가들도 그것을 작품에서 다루지 않 습니다. 어차피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이라고 할 때, 그리스 신화는 오히려 우리의 신화를 그리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죠. 나도 그리스 신화 를 그렸던 선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에서 도움을 얻습니다. - 그렇다면 상고사 작업은 신화체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시각화 하는 과정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들이 그린 그림 속 주인공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록 골격구조, 피부색, 눈의 색이 서로 다르더라도 눈 두개, 코 하나, 입 하나 있는 것으로 보자면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르겠어요. 난 동양-서양식 구분에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조선 상고사 연작을 그릴 때 사용하는 모든 어휘와 소재들은 조선 상고사에 나오는 것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단지 소재의 차이가 있을 뿐 이지 모든 신화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실제 인간의 문제를 신탁에서 다루려는 드라마 전개방식, 즉 기본 전개 구조는 같은 것입니다. 다만 지역에 따라 그 곳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의 경중과 갖가지 가치들에 비유되는 소재가 다를 뿐입니다. 나아가 보편성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 기하자면, 동서양은 예부터 지금까지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하였고 이는 신의 모습을 형상화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인들이 만든 여러 가지 도구나 대상을 형상화하는 방법들을 보면, 고대인들은 인간으로서의 유사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고대인의 전형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광범위하게 공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인들이 지녔던 보편성처럼 나는 여행지 곳곳에서 그리스 신화의 보편성이 얼마나 강렬하게 남아있는지 찾아볼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이 보편성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사단칠정에 녹아있는 보편성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신화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 해요. 참고로 난 80년대에 민족양식의 의미를 찾는 것, 자기 지역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양식들을 찾는 것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때 민 족양식을 찾는 일도 고대를 찾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그리스 여행은 나에게 있어 고대를 찾는 데 필요하며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신정민, 황정인)
홍성담
바리데기, 아데나를 만나다 261×193cm, 캔버스에 유채, 2004
그리스 땅에는 신들의 욕망과 인간의 욕망이 함께 뒤엉켜 숨쉬고 있는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신과 신의 전쟁, 신과 인간의 전쟁, 인간과 인간들 의 온갖 전쟁의 역사가 일년 강우량이 겨우 500미리를 조금 넘는 좁다란 산야에 새겨져 있다. 그리스 남부에 있는 펠레폰네소스반도에 올림픽경기의 발상지인 고대 도시 올림피아의 유적이 있다. 고대도시 올림피아 지역은 그리스 대부분의 땅과 달리 사철 물이 넉넉한 알페이오스강이 알티스평원을 휘감아 흐르며 한껏 풍요한 정경을 자아낸다. 제우스 신전과 그의 아내 헤라 신전, 그리 고 올림피아 경기장은 울창한 크로노스 숲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것만큼 여성은 경기장에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경기장에 들어가려면 알페이오스강에 놓인 다리를 지나야 했는데, 올림픽 경기장에서는 남성으로 가장한 여성이 종종 발각되면 이 다리에서 밀어 강으로 떨어뜨렸다. 이러한 수컷 우월 의식은 운동 경기가 다분히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올림픽 경기들은 전투 행위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는 모든 기술을 세분화한 것들 로써, 창던지기, 칼싸움, 레슬링, 권투, 빨리 달리기, 높이뛰기 등 각종 경기의 동작들은 모두 사냥이나 살인 행위의 연습에 다름 아니었다. 여성의 경기장 출입을 거부했던 것은 아마도 남성들끼리 모여서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나 전투 연습이 가진 은밀한 속성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운동 시합은 남자보다 여성들이 먼저 시작했다. 올림피아엔 제우스보다 훨씬 앞서서 대모신의 역할을 했던 헤라 여신을 기리는 헤라 제전이 있었는데, 축제 행사 가운데에는 처녀들의 뜀박질 시합이 볼만 했다고 한다. 파우사니아스는‘여행기’에“시합에 나선 여성들 의 나이는 고르지 않다. 달리기를 하는 처녀들의 모습은 이렇다. 머리카락은 풀어 내리고, 무릎이 깡총한 키톤 차림에 오른쪽 어깨는 젖가슴까지 드러낸다.”라고 적었다. 한편, 우승한 처녀는 헤라 신전에 초상을 봉헌할 권리도 가졌다고 하는데, 실제로 헤라 신전의 기둥에는 눈높이쯤에 네모 모양으로 그림을 끼울 수 있게 깎여진 틀의 흔적이 있었다. 여성들만의 평화로운 뜀박질 시합이 남성들의 전쟁 연습 시합으로 바뀌면서, 인류는 어쩌면 세상을 절망 속으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남녀 차별의 시작은 남성 중심의 근육질 과시가 초래한 궁극적 결과로써의 전쟁의 역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도시 국가들의 경제적 부는 지중해의 교역으로 이뤄졌다. 그만큼 이곳에는 전쟁의 역사가 숱하게 많다. 유적들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목이 없는 대 리석 조각상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스 땅을 침략한 군사들은 자국으로 귀환하면서, 평생 자랑할 무용담의 증거로 조각상의 목을 떼어 보듬고 갔다. 여느 전쟁에서나, 고대에서 현재 이라크전쟁터에 이르기까지‘목 베임’의 이야기는 비극이다. 이것에 비하면 조각상의 목을 떼어 간 것은 차 라리 애교스럽다. 불 91×73cm, 종이위에 수채, 2004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을 닮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간은 신을 닮으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를 닮고 싶어 하는 것에 바 로 신과 인간이 서로 화해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신과 인간의 화해는 곧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 서로 간의 이해와 평화의 다리를 놓는다. 고대 그 리스의 스포츠 제전은 판 헬레나의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단합을 꾀하고 평화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열렸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 합은 신을 닮고자 하는 인간의 소박한 노력이었고, 이를 통해 신과 인간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그 댓가로 우리 인간들은 한 토막의 짧은 평화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헤라 신전 앞에 남아있는 몇 개의 돌무더기, 바로 이곳에서 올림픽 축제를 시작하는 성화를 받는다. 인류는 피로 얼룩진 전쟁으로 새로운 세기의 새벽을 맞았다. 세계 도처에선 인간 삶의 보편적 가치 기준이 무너지는 소리만 들린다. 환경, 인권, 평화가 급속하게 피폐해져 가고 있다. 이미 다분 히 상업화로 찌들어 버린 올림픽에서 다시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무망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세상 현실에 대한 절박한 마음은 지푸라기라 도 움켜지고픈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과도 같이, 이번 올림픽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새로운 세기의 첫 스포츠 제전을 알리는 이 불꽃은‘신과 신 의 전쟁, 신과 인간의 전쟁, 인간과 인간들의 온갖 전쟁의 역사’를 성찰하는 불빛으로 타 올랐으면 좋겠다. 오늘 절망의 질곡에 빠진 인류는‘불의 세상’에서‘물’을 찾는 절박한 심정으로‘아테네 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다.
홍성담_1955년에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학부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조국의 산하’전(광화문갤러리 2001),‘행방불명’전(광 주시립미술관 2001),‘대~한민국’전(200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리스화필기행전-서양문명의 젖줄을 찾아서 2004. 8. 12(목) - 9. 19(일) 사비나미술관 관 장│이 명 옥 학예연구실장│김 준 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신정민, 황정인, 박선민 도록 발행처│사비나미술관 발행인│이명옥 편집인│김준기 디자인│K·C Communications 등 록│1996. 1. 20 제 1-1971호 ⓒ 2004 본 책자에 실린 작품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사비나미술관에 있습니다. Printed by K·C Commun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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