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나팔 2018· 6 · 제14호 천주교의정부교구 “뿔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 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실 때 울려퍼지던 소리입니다. 정의 평화 위 원 회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한 세상,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질 수 있는 세상이 되길 희망합니다. •발행인 상지종 •편집 천주교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신흥로261 천주교 의정부교구청 4층 •전화 031 850 1501 •이메일 upeace@ujb.ucaholic.or.kr
평
공론장과 대안공동체 운동, 그리고 교회 (2) 경동현 안드레아 / 의정부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우리신학연구소연구실장
(13호에서 계속)
3) 해방 이후의 시기 미군정청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46년 당시 남 한 사회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합한 좌익 성 향이 전체의 77%에 달했다. 물론 아직 해방 이후 남 한 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는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해방, 친일청산, 통일, 계급 같은 단어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망이 빠르게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해방 이후 좌익 이데올로기 지형 속에서 월남 개신교 신자들과 더불어 매우 강력하고 도 공고한 내적 체계를 갖춘 반공이데올로기를 고수 하고 확산시킴으로써 남한 사회 전반의 보수화를 촉 진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미군정의 지 원을 제외하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립무원이 었던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의 ‘반공 단정’으로의 행보 에 강력한 동맹세력이었다. 당시 남한에 진주한, 맥아 더 휘하의 미군 장교들은 일본, 대만, 필리핀, 그리고 남한을 그리스도교 반공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 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산이 아시아를 통합하 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와 같은 악의 이데올로기에 대 항하는 방어막을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기가 교황 비오 12세와 함께 공산주의 무신론자들 에 대항해 공동의 전투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939 년 3월, 비오 12세 교황으로 선출된 에우제니오 파첼 리(Eugenio Pacclli)는 강력한 반공주의 교황으로 평가
된다. 비오 12세의 반공주의 입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국제 사회에서 소련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한 층 더 강화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 남한 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은 1950년대를 경유하면서 절대적 반공주의 사회가 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해방정국의 지배적 공론장이었던 ‘해방’, ‘친일청산’, ‘통일’의 가치들은 ‘멸공’, ‘친미’, ‘반북한’ 같은 가치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물론 아직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소통을 위한 사회적 제 도들이 너무 미비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지배 적 공론장을 작동시키는 요소는 대화와 소통의 이성 적 영역이 아니라 증오와 공포의 감정적 영역이었다. 신, 구교를 비롯한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지배적 공론 장의 주요 의미망의 변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4) 교회의 사회참여를 통한 공론장 형성 해방 직후부터 혼란을 거듭하던 정국은 한국전쟁 과 휴전 협정 이후에도 결코 안정되지 못했다. 이 과정 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적 성향은 강화되어갔고, 정 권 초기 동맹 세력 역할을 했던 교회는 비판적인 입장 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의 선회는 한국천주 교회의 공론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는 교회의 대 사회활동으로 대표되는 가톨릭액션의 이 념, 행동목표, 조직의 모든 면에서 큰 변화를 몰고 오 는데, 이 변화의 결과는 1970년대에 뚜렷하게 가시화
되었다. 특히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1974년에 발족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과정에서 보여준 놀랄 만한 응집성, 결성 이후의 대단히 조직적 이고 과감한 활동상 등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을 정도 였다. 사제단으로 결집된 새로운 성직자집단은 그 상 당수가 현장조직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그들은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현장활동 가와 성원들에게 그같은 움직임을 고무하고 적절한 신 학적 자원들을 제공함으로써, 민중 속에서 그들을 교 육하고 조직하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s)' 의 기능을 수행했다. 또 1970년대의 거의 모든 주요한 저항의 현장에서 발견됐던 사제들은 저항을 교회의 이 데올로기적, 물적, 인적 자원과 신속하게 연계시키고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파급시키는 가장 중요한 ‘통로 (channel)’였다. 사제단의 등장이후 1970년대에 천주교 사회운동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정도였다. 본격적인 천주교의 사 회참여가 개시되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사회참여는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던 시민사회의 질식된 정치적(민 주화), 사회적(인권) 욕구를 효과적으로 대변하는 기 능을 십분 수행했다. 그에 따라 종교적으로나 인구학 적으로 여전히 소수집단에 불과했으나, 천주교의 사회 적 공신력과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1960년 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던 신자증가율 역시 1970년대 중반 이후 급성장세로 반전되었다. .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멀다고 하면 안되겠구나... 이리도 가까운 평화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