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나팔 2017 · 08 · 제9호 천주교의정부교구 “뿔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 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실 때 울려퍼지던 소리입니다. 정의 평화 위 원 회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한 세상,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질 수 있는 세상이 되길 희망합니다. •발행인 상지종 •편집 천주교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신흥로261 천주교 의정부교구청 4층 •전화 031 850 1501 •이메일 upeace@ujb.ucaholic.or.kr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평
1.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 분들게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는지 되묻곤 합니다. 대부분은 ‘신앙에는 그런 힘이 있다’고 답하십니다.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교우님은 “신앙을 통해 변하셨습니까?” “음, 조금 변한 것 같은데 많이 바뀌진 않은 것 같아요.” “무엇이 변했나요?” “글쎄요, 성당에 나가는 것이 덜 힘들어지고, 그래도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다보는 정도….” “혹시 인생관이 바뀌셨나요?” “네, 그런 것 같은데 많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아요.” 2. 성당 활동에 적극적이고, 이웃 사랑도 잘 실천하는 교우님들을 자주 만 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분들 이니까요. 그러나 이런 분들도 사회적 사랑을 이야기하면 이내 표정이 바뀝 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3년 전 4월 16일에 세월호가 침몰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들 기억하시지만 한 2주 동안은 대부분의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가족들이 집단행동을 시작하 자 자신이 따르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국민들의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한 정 파에서는 이 사건을 교통사고에 불과한데 세월호 유가족들이 생떼를 쓴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진 불순한 행동으로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언론과 정부까지 이 입장을 두둔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름 신실한 신자들도 이 생각에 동조하며 세월호 유가족과 이들을 돕는 교회 인사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신부님이 강론에서 이를 소재로 삼으면 정치적 인 이야기를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세월호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 반대, 사드 국 내 배치 반대 운동의 경우에는 더 강경했습니다. 이런 일을 반대하는 사제, 수도자, 신자를 거의 예외 없이 종북 좌파로 몰아붙였습니다. 국가안보를 위 협하는 이적행위자로 간주한 것이지요. 합리적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입 니다. 경건한 신자라 자부하는 이들도 거의 예외가 없었습니다. 심하게 말하 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일수록 안보신앙이 더 굳건한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3. 아마도 우리 민족이 겪은 수난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6.25 전쟁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물론 전쟁 이전에도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 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겼습니다. 희생자도 희생자지만 남은 자들의 상처가 매우 컸습니다.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었습니다. 이 탓인지 비극적 사건을 겪을 때마다 남은 자들에게는 ‘생존’이 가장 우선 이라는 의식이 굳어졌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말기의 전시 동원체제도 같은 생각을 갖게 만든 경험입니다. 이때는 자칫하면 해외로 징용이나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기 일수였습니다. 강제 노역에도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대 부분 이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6.25 전쟁 때도 피아가 밀고 밀리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양쪽 다 희생이 적 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양측은 서로를 적으로 몰아붙이면서 내부 의 반대자들을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른 말을 하면 대부분 위험해졌습니 다. 이런 시절을 수십 년이나 겪었습니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집니다. 개인한테는 생존이 우선이고, 국가는 안보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약하면 센 친구(동맹)한테서라도 힘을 빌어야
박문수 프란치스코 /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교육분과장
합니다. 그 친구의 호감을 사는 일이라면 자존심이 상해도 잘 맞춰줘야 합니 다. 노예 생활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세금의 일부만 내주면 다 알아서 해준 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70년, 더 길게는 100여년 이상 살다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생존’이 최고라는 의식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거의 유전자에 새겨진 수준이라 할까요? 4. 이런 의식을 비단 우리만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약소국들 모두가 갖 고 있지요. 그러면 이런 나라들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이렇게 살아가 야 할까요?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걸까요? 그리고 강한 친구는 우리를 변함없이 지켜줄까요? 이쯤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신앙을 갖는 일이 새로운 인생관을 선택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본디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만일 신앙인들이 하느님 대신에 국가안보를 첫 자리에 놓으면 그것이 우상인 셈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우상을 공격한 이유를 떠 올려 보십시오. 우상숭배는 결국 지배 자 숭배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다수 백성들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졌습니다. 억압적인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이용되었습니다. 다수가 이 우상 숭배에 빠져들수록 통치는 쉬워졌습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도 안보라는 우상이 지배하는 동안 반대자들에 대한 억압이 심했고, 다수는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적과 무관하게 지배 자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떤 저항이 든 적을 이롭게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국민들안에 내면화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태극기 집회를 선동하는 개 신교 목사들한테서 볼 수 있듯이 성직자들도 포섭됩니다. 반공, 안보의 우상 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5. 이 때문에 단지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무엇인가 열심히 믿는 것만으 로는 우상숭배를 떠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도 알고 저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 면 정치적 행동이 필수적입니다. 다만 지키는 쪽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는 질서를 건설하기 위한 예언자적 행위여야 합니다. 자신 만 변화시키는 방식으 로는 부족합니다. 이렇게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다른 분야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 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행히도 소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신자들이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변하는 일은 어려운 일일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