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 AR vol 55,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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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do architecture hard!”

(주)종합건축사사무소 디자인캠프문박 디엠피 서울시 테헤란로 69길 9 디엠피빌딩 TEL. 02.550-7500 FAX. 02.550-7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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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RESSIBLE CONTENTS SCENE

WIDE #55

CONTENTS

PUBLISHER’S COLUMN

건축가 최 욱

<건축평단>의 실험

[4]

[21]

PROFILE EDITORIAL

[22]

in-in-ter-com-na-p-tio-re-nalssi-ism-ble

INCOMPRESSIBLE SCENE

[25]

[29]

#1 영상으로 기록하다

# 55 WOOK ARCHITECT WIDE CHOI

#2 정체성을 시각화하다 #3 감각을 일구다 #4 현장에서 교감하다 #5 조직을 운영하다 #6 가치를 나누다 INTERVIEW

시가현립대학 교수 인나미 히로시

[56]

#7 환경을 조성하다 #8 그리고 일상

PROJECTS

[71]

팔판동 스몰주택

현대카드 영등포사옥

아트 버스 쉘터

현대카드 HQ3

마포대교 플라자

(구)서울시장 공관

가회동 4제

판교주택

INTERVIEW

[92]

EPILOGUE

34

[121]


#1 영상으로 기록하다 건축가

최 욱

35


PUBLISHER’S COLUMN

PUBLISHER’S COLUMN

건축 비평이 실험되고 있다. 그것이 실험될 대상이란 것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저마다 그럴듯한 해제를 내놓겠지만

평론은 목하 실험 중이다. 그 선단에 계간 <건축평단>이

길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젊고 유능한 건축가들을

어불성설이라 여겨지겠지만 지금 여기, 한국현대건축의 자리한다. 2년 전 창간하여 3년 차, 본격 건축 비평

대학이라는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였듯이 건축 비평(가) 또한

10 ISSUES’(2015), ‘건축비평집담’(2016)을 정례화하며

그 후로 이 땅의 건축(가)은 비평의 폐허 위에서 자립의

저널을 표방하고 오프라인에서의 토론마당 ‘텐 이슈

건축과 사회의 다층 주제, 건축가와 비평가 간 심층논의를

안전과 품위를 보장하는 진공청소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수순을 밟으며 필요에 따라 수행비서 격으로 건축

수행해오며 건축의 장場 에 명함을 드밀었다. 한두 유명한

비평(가)을 호출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정쩡한

이 비평 저널의 초기 특징은 신진과 기성 평자 간 차별

문제의식이 <건축평단>의 출현을 자극했고, 더러는

평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신진 비평가, 필자들로 구성된 없이, 원고분량의 제한 없이, 제대로 된 평문으로의

완성형에 기대어 좋은 글을 생산하는 것에 조준되어 이목을 끌었다. 시각자료를 배제하고 오직 텍스트 위주로 편집된

창간호(2015, 봄호) 이후 7호에 이르는 책의 편제는 극명하게 호불호가 나뉘어졌고, 그 같은 배짱 편집은 최근 발간된

위상을 공유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의협심으로 신진과 기성 건축 비평가들이 자비自費를 털어서

비평 저널을 제작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출판시장의 붕괴와 맞물려 책을 소비하는 독자의 수 또한 자동 급락하는 시절에 이르러 이들의 초기 투지鬪志는 건축계 내부로부터의 외면 — 그에 대한 정밀

8호(2016, 겨울호)에 이르러 궤도 수정을 하며 이 저널이

진단은 다른 통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에

그리된 배경을 시시콜콜 적시하고 싶지는 않다. 변신을

위협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비평이 실험되는 양태는 그

새로운 전기轉機 를 맞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드러내었다.

전후로 이들이 당면하고 감내한 고민의 결과라는 정도로 WIDE # 55

나는 우리의 건축 비평(가)이 아카데미즘 안으로 편입되면서

압축하고자 한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여전히 이들의

봉착해 있는 양하며, 그것은 이들의 존립 기반을 크게

자체로 문제적인데, 이는 비평의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초래한 것으로 향후 이 비평 저널이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에

실험성 — 그것은 다분히 건축 사회의 구원을 향한 일방적

다름 아니다. 출구는 없을까? 직언컨대 건축의 장내場內를

점이다. 내용적으로는 건축 비평이 미치는 건축의 장 場이

발언하는 등 비평의 영토를 넓혀가는 것도 하나의 방도가

건축 비평가 집단 혹은 연대의 힘으로 건축이 만나는

참여하고 있는 소수의 대학교수들을 포함하여 — 현장에

선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 이 작동하고 있다는

이 분야의 건강성을 담보할 것이라는 순수함이 한 축이고, 사회의 문제적 이슈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지식인의 풀pool로 가동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향성이 한 축으로

보인다. 이 둘을 다시 압축하면 이 사회에 건축 비평(가)이

그럴듯한 위상으로 초대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할 것이다. 눈 깊은 이들은 마치 황무지를 연상케 하는 건축 비평의

투시하는 기능 이상으로 장외場外의 이슈에 간섭하고,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 비평 저널에

있으며 현장에서 씨름하고 있다. 그것이 이들 실험이 갖는 강점이자 가능성이다.

글. 발행인 전진삼

현재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텐데 혹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실재했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한국현대건축 비평의 그림자를 기억해내며 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80 –90년대에 웅성대던 비평(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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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방법 e-mail 접수 : idtcgongmo@idt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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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주관


건축사는 모든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감리를 수행하며, 조사 또는 감정, 유지관리, 에너지평가 등 업무를 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주형, 2013 도시건축사진공모전 대상작,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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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윤희경

부회장 류재경 이사

김정숙, 박창용, 손도문, 송근식, 신중식, 양인성, 오진석, 임재철, 정영식, 최복규

감사

조항진, 최성열

사무국 인천광역시 남동구 석산로 159 (보인프라자 7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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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  tect choi wook


건축가 최욱. 1963년생. ONE O ONE architects 대표. 모르는 사이일 때 보면 담담한 사색가 이미지, 조금 알고 보면 PROFILE

옆집 셋째 언니 이미지. 상투적으로 쓰는 말은 “소위 말해서”, 의식 전반에 깔려 있는 생각은 ‘인생이 아깝다’. 그래서 인생 아까울 것 같은 일은 안 하고 싶어하는 성격.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건 타고난 부분, 오래 숙고하고 단호하게 결단하여 뒤돌아보지 않는 건 단련된 부분. 내색은 않지만 퀄리티만큼은 원오원이 최고라는 퀄리티부심. 그걸 단지 디테일만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흥미 없음. 개념에 천착하지 않는 이유는 종국에 도그마로 작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건축 작업의 특성상 언어의 필요성은 절감. 그가 쓰는 개념어인

‘그라운드스케이프 groundscape’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이미지는 방법론, 건축가 자신에게는 태도론. 무엇보다 그의 건축 작업에서는 장소에 대한 해석이 가장 기본. ARCHITECT CHOI WOOK

가구를 디자인할 때도 건물과 주변 환경까지 단면을 그어 그에 따라 형태와 재료가 가져야 할 성질을 규정. 친구는 적지만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즐거이 기대할 줄 아는 사람. 직원들도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양한 소양과 취향을 갖췄지만 상대의 수준에 맞춰줄 줄 아는 사람.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해가 뜨는 걸 보고, 밤 10시에는 취침한다는 생활 가이드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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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그의 건축과 인물됨에서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건 조선시대 정자관 程子冠. 산을 겹겹이 쌓은 모양으로 사대부가 일상에서 쓰는 관이며, 가벼움과 통풍 같은 기능에 상징 등을 두루 갖춤. 요약하자면 기능과 격을 세심하게 쌓아올리는 스타일. 그것의 토대인 (다양한 의미에서의) 바닥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한 이유. 벼슬아치의 관모 冠帽 는 자신의 머리에 맞지 않다고 말하지만, 자신에 속한 사람과 환경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은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 사회 수준이 건축가

건축의 수준이 되는 이상, 위에서 끌어올리는 일만큼 바닥에서

최 욱

기반을 다져나가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의지’나 ‘능력’ 이상으로 ‘때’를 살피는 사람. 관련해서 옛말에 ‘천시 天時 는 지리 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 人和만 못하다’고 했는데, 그는 그와 반대로 사람을 찾고 환경을 갖추어 때를 기다림. 지금의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건축가 상 像 figure으로는 건축가로서의 뜻을 펼치기 부족하다는 판단, 좀 더 권위를 갖추고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을 열어가기 위해 지금과는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지 오래. 숙원했던 원오원의 작업환경 조성이 마무리되면 실제 건축작업에서 손을 놓겠다는 구상.

2017년 1월로 작업환경 조성까지 완료. 계획대로라면 넥스트 플랜을 가동해야 할 시점이지만 본인의 역할 조정 시기는 X년 정도 연기. 자기 방식에 맞는 노트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주간계획 위주로 작성. 하지만 좀 더 커다란 다른 노트에 자신의 인생을 연간계획처럼 한눈에 보이게 기록해가는 중. 좋아하는 건축가는 지오 폰티.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건축책들을 접함. 하지만 동경의 대상은 건축가 아닌 백남준. 고등학교 졸업하면 백남준이 있는 곳으로 유학 가려 했지만 나라마다 학제가 달라 일단은 한국에서 대학을 가야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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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5년 홍익대학교 건축과 졸업 후 이탈리아 행. 때마침 영화학교가 없어 베니스건축학교 입학. PROFILE

{공업 생산화된 건축재료의 유통과 기술의 발전}, {오브제로서의 건축과 기계적 장소} 등을 연구하여 1990년 졸업(dottore

in arch). 군 제대 후 장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장)에서 1992년부터 1년 8개월 근무. 이후 파트너와 협업으로 시간을 보냄. 1998년 서울포럼에서 ‘서울의 도시감각’이라는

ARCHITECT CHOI WOOK

주제로 발표 후 2년 간 휴식. 당시 김진애 박사가 그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도시를 한 번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 창 안에서 도시를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함. 건축과 인생에 대한 고민. 그리고 긴 여행. 하지만 2년 후에도 답은 없음.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껴안자’가 된 거예요.” 2000년 사무실을 개소하여 오늘에 이름. 2006년 베니스비엔날레, 2007년 선전홍콩비엔날레 등에 참여했고, 2014년 김종성건축상 수상. 2016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음. 건축을 잘 하는 것과 잘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도 알고, 현재의 건축에 이르기까지의 흐름과 식자 識者 들의 고민도 알고, 한국이라는 현실에서는 비전보다 그것을 단단하게 받쳐 줄 현실적 환경이 절실하다는 것도 알고, 그러기 위해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알고 있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지는 말이 겉으론 강해보여도 속은 허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건축을 쉽게 규정짓는 것에서 한발 물러서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들여 과정에 공을 들이는 것에 무게가 실리는 경향이 생김. 행복이라는 것도 자신 아닌 사회적 조장에 의해 추구되기 쉽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복잡한 상황 안에서 자기를 잃지 않고 조금씩 다듬어나가는 태도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행복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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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상으로 기록하다

in-in-ter-com-na-p-tio-re-nal-ssi-ism-ble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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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글. 편집장 이중용

혹시 그런 적 있지 않습니까? 뭔가를 떠올리려 애쓰는데

생각 사이사이에 노이즈가 느껴지는 것 말입니다.

‘그때 있었던 일…’ 하며 연속된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할 때, 생각보다 잘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누군가를 만나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해 100% 확신할

수 있지만, 만약 그 과정을 선명하게 빠짐없이 떠올리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억은 레코더 기기가

아니라서 지난 일들을 드문드문 애매모호하게 보여줍니다.

“그때 좋았죠?” ‘좋았다’고 대답하는 자신은 그렇게 대답하도록 키워진 지난 날의 자신일 수도 있고, ‘그때’ 만족했던 특정 시점의 자신일 수도 있고, 지난 많은 상황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현재의 자신일 수도 있고, 지금의 좋은 상황을 지속시키기 위해 오늘을 연기하는 내일의 자신일

ARCHITECT CHOI WOOK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게 ‘현재’라고 지칭되는 ‘순간’의

가장 간단하게는, 기억記憶과 기록記錄이 같은 듯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알다시피 사람의 몸은 기억을 할 뿐 기록을 하지는 않습니다. 좀 전에 만난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도 의식 안의 인상이나 경험의 조각들을 꺼내어 이렇게 저렇게 재구성해서 ‘전체적인 걸 대체적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을 동영상으로 보면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시간과 함께 분명하게 기록된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거기서의 시간은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처럼 한 방향(이전⇀이후)으로 일정하게 흐른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예를 들어 만약 친구와의 생일파티를

캠코더로 기록한 동영상을 다시 본다면, 우리는 ‘거기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고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우리의 기억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아. 그때 친구가 촛불을

여덟 번 만에 껐어.’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캠코더를

끄고 그 순간을 기억해보라고 하면 상황은 금방 달라집니다.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고 시간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

기억은 마치 우리가 쓰는 언어처럼, 한정되고 모호한

한 방향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시계時計와 같아져 있기

부분들을 적당히 떠올리고 만들어 붙인 총체적인 인상과

때문에 ‘지금의 자신’을 언제나 ‘현재의 자신’으로 인식하는

게 보통입니다만, ‘지금只今’이라는 말이 ‘(지금) 이 시간’을

경험들의 집합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캠코더 속의 기록은 친구를 만나고 파티가 열리고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고

하나의 대상처럼 지칭할 뿐인 것처럼 그 순간에 우리가

다시 촛불을 끄는 과정이 앞에서 뒤로 흐르듯 매끄럽게

살아내는 시간의 질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연결되어 있지만, 사람의 기억은 넓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필요가 있겠습니다. 빛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휘어지고 시간도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과학의 상대성이론 같은 걸 체계적으로 따져보고 싶은 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과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막연한 이야기를 해 보려는 겁니다.

걸리는 고기들만 잡아올린 후 그것들을 분류하는 정도의 일처럼 듬성듬성 흐릿흐릿합니다. 그것은 마치 형체 없는

유령을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봤다고 말할 수 있지만

누구도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용으로 작동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믿을 수 없고 조작되기 쉬운 것이어서, 우리는 더더욱 기록에 의존하게

됩니다. 무고한 사람이 유죄 판결 받은 사례의 75%가 잘못된 목격자 증언 때문이고 그중에 목격자가 세 명 이상인 경우도 13%나 된다고 하니, (그것이 기억의 문제이든 인간의

문제이든) 기억이란 그 나름대로 참 인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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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캠코더는

인식을 딛고 ‘다른 시간’, 예를 들면 ‘사람의 시간’ 같은 쪽으로 뜀박질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고 싶은 겁니다. 물

사람의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기록하지 않는데도 우리는

위에 얇게 펼쳐진 하얀 천 조각을 밟고 다음 걸음을 옮기라는

그것이 보여주는 영상을 기억과 동일한 것으로, 인간다운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주문 같지만 하나의 방법으로 답을 낼

관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틀리지 않지만, ‘얼음이 녹으면

인상들만 떠올려지는데, 캠코더 속 화면에서는 아무런

말입니다.

보는 우리는 마치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도의 또렷한

처음에 ‘노이즈’ 이야기를 한 걸 기억할 겁니다. 사람이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특히나 시간의

공간에서 멍하니 있었던 때를 떠올리면 그 ‘때’의 흐릿한

변화가 없어도 시간과 기간이 정확하게 표시가 됩니다. 그걸

필요는 없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건 누구나 봄이 온다’는 말에 더 크게 공감하게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대상으로 인식하는 거죠. #어린 왕자$ 속 여우는 이렇게

기억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 그 떠올려지는 것들만큼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할 수

우리는 삶 속에서 그 노이즈들을 무시하거나 제거하려

말합니다.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있었던 이유는 어린왕자와 여우, 그리고 생텍쥐페리와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의 시간이 똑같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우의 말은 정확한 시간의 비유와 함께여서 보다 쉽게

하지만 사실 시간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생명체가 아니라

기계입니다. 캠코더에 보여지는 것은 캠코더라는 기계가 본

것이고 그 속에 흐르는 시간 또한 기계적으로 기록된 시간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관념이나 정오가 되면 스스럼없이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우리 몸에 새겨지고 길들여진 기계의 시간입니다.

표현의 한계나 기록자의 의도가 감춰질 수는 있어도 기록 자체는 노이즈가 없습니다. ‘몇 월 며칠 비가 왔다’고 쓴 것,

그 날의 소리를 녹음한 것, 영상에 담은 것 등은 그 도구의

특성 안에서 명료하게 기록된 것입니다. 다른 차원의 시간도

없고 시작과 끝,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기록은 기계의 시간에 어울리는 방식입니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앞과 뒤가 분명하지 않고 파편적이며 명료하지 않은 것은 노이즈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며, 의미 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삭제되거나 다른 것과 연결시켜 명료하게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억의 노이즈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기계의 노이즈는

말 그대로 기계의 정밀도를 떨어뜨리고 용량만 잡아먹는 찌꺼기이자 위험요인이기 때문입니다. 기계는 영원을 꿈꾸지

않는데도 이미 기계인 이상, 비효율적인 것과 위협적인 것을

이쯤 되면 정확한 물리적 시간 개념인 크로노스 Kronos와

제거해나가며 자연스럽게 영원한 시간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게 아니면 시간의 역사 같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좀비 zombie가 바로 시계 속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적이며 심리적인 시간 개념인 템푸스 Tempus의 차이,

타이밍인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어려운 이야기일수록

좀비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웹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뻔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고 이 글에서는 이론보다 느낌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건너뛰기로 하겠습니다. 그냥, 오늘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시간은 ‘기계의

시간’이라는 것을 조금 더 인식해보면 어떨까 하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흔히 하는 말로 ‘느낌적 느낌’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누군가는 이론을 들어 그것이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머리로만 이해되고 삶에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라면 그것도 별수 없이 또 하나의 느낌적 느낌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어쨌든, 비록 토대 없이 얄팍한 표면처럼 형성된 ‘기계의 시간’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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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감동을 이끌어냅니다.

애를 씁니다. 기록이 그렇습니다. 기록의 도구가 가지는

건축가

“그러나 만일, 네가 무턱대고 아무 때나 찾아오면 난 언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까…” ‘오후 4시’의 약속이 아닌 ‘아무 때’ 일어나는 일은 여우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혼란스러운 일입니다. “나를 길들여줘.”라는

노이즈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IN-IN-TER-COM-NA-P-TIO-RE-NAL-SSI-ISM-BLE

이쯤 생각해 본 후 다시 캠코더를 통해 재생되는 동영상을


EDITORIAL

그런데 이러한 기계의 방식과 시간이 실상 요즘 우리가

좀 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그런

사는 삶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억보다 기록을 믿고,

의미에서 용기이자 항상하게 중요한 가치입니다. 거기서

정성적 가치보다 정량적 가치를 중시하고, 위계 안에서

선후를 따지고, 같은 생명도 중요도를 매겨 다르게 판단하고, 특정한 기준에 비춰 순수하고 명료하지 못한 것들/사람들은

배제시키거나 재조정/재배치하고, 효율과 안전을 추구하며, 할 수만 있다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계의 방식과 시간 속에서 인간을 꿈꾸는

어색한 존재로 남겨져 있습니다. 끝없이 곧게 뻗어 있는 길을

다른 생각이 고민되어지고, 다른 방법 / 기술이 만들어지고,

다른 결과가 나오고, 서로 다른 인간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계기가 생깁니다. 인터내셔널이라는 보편성의 식민 사회에서 다양 그 자체로서의 다양성을 꿈꿀 계기는 적과의 동침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회를 엿보는 것만큼이나 기계의 시간 아닌 다른 시간을 살아내려는 성실함과 인내, 거기에서 시작해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향해 나아가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노이즈가 될 만한 건 줄이고 효율과 보편만을 추구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지난 세기의 기억

중 하나인 ‘인터내셔널리즘 internationalism’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유행과 기술을 공유시키는 한편, 자유와 평등을 선전하면서 특정 가치와 폭력으로 세상에 위계를 부여하고, 말이 안 통하거나 듣지 않는 상대는 배제와 강요로

ARCHITECT CHOI WOOK

길들이며,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강요합니다. 인터내셔널한 세계에서 꾸는 개인의 꿈은 마치 자동차를 굴리는 기름과도 같고, 인간이 꿈꾸는 만큼 기계(화된 세계)의 수명도

보편 문명의 낙관적 충격을 피하기 위해 비판적 지역주의 critical regionalism를 선언해야 했던 20세기 말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기계의

시간 아닌 ‘다른 시간’을 발견해내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다른 건축’을 이야기하지 못한 채 그것의 존재나 향방에 대해서만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강물 위에 그리는 그림처럼 또 금방 인터내셔널하게 녹아버릴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압축되어서는 안 될, 압축할 수 없는, 기계의 시간 속에서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미

자동으로 연장됩니다. 자연스럽게 다양성은 억제 / 고립되고

우리 사이에 고착된 인터내셔널리즘의 틈을 벌리고 간격을

인정됩니다. 마을을 살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또

최욱과 관련된 내용들을 검토해보면서, 그것이 단순히

보편성은 증대되며, 다양성은 시장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다른 희망을 꿈꾸지만 그 뒤에 따라올 절망을 예견하는 일은 이미 이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계의 시간이 주는 계량화된 축복과 영광에 길들여지면 그 길을 벗어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유지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번 55호에서 건축가

건축적 이슈인 지역성이나 전통, 개념 같은 것 이전에 보다 근본적인 ‘시간’이라는 문제와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잡지를 만드는 두 달이라는 시간은

그 막연함을 논증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상상해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이번 기획의 주제인

‘incompressible’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작업에는 각각의

합니다. 그렇게 멈추고 속도를 줄이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작업자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며

힐링의 시간도 인터내셔널한 상황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그 과정을 함께 온전히 견뎌냄으로써 구축될 수 있는

누구나 아는 지금, 보편성이라는 적과의 동침 속에 일정한

조화로운 체계에 대한 예찬입니다. 그리고 ‘건축가를 포함한

퀄리티를 획득하면서 그 안에 포섭되지 않는 다른 계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만합니다.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 안에서 보편적 기술 없이는 현실을 뚫기조차 어려워지는데, 사람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으로 계량화하고

그 안에 더 많은 것을 넣도록,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길들여진

채로 ‘다른 시간’을 꿈꾸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최소한

말입니다. 시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인식에 다다르지는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우리를 떠미는 삶의 속도에 짓눌리지 않도록, 일그러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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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만든 건축 앞에서 느낀 것 또한, 인터내셔널의

영향 아래 흐르는 보편적 시간에서 이탈하는 ‘다른 시간’이 시작될 가능성 그것이었습니다.


INCOMPRESSIBLE SCENE

# 2 정체성을 시각화하다 [34] # 3 감각을 일구다 [39]

#1 영상으로 기록하다

# 1 영상으로 기록하다 [30]

# 4 현장에서 교감하다 [43] # 5 조직을 운영하다 [48] # 6 가치를 나누다 [52] # 7 환경을 조성하다 [60] #8 그리고 일상 [67] 건축가 최 욱

이번 기획의 주제는 ‘압축하거나 생략할 수 없는 장면들’이다. 원오원은 지금까지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갖춘 작업들을 안정적으로 쌓아왔고, 그것은 건축가 최욱을 비롯한 구성원들의 능력,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건축 상황 아래에서 그와 같은 작업들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동력에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아마도 원오원이 결과뿐 아니라 그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하는 여러 단계들에 대해서도 고민을 거듭해왔다는 사실과 관련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마치 스포츠 선수가 원하는 수준의 운동성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자세를 가다듬는 과정과도 같다. 대개 실패와 부족은 마땅히 거쳐야하는 어떤 단계들을 생략하거나 축소함에 따라 발생하고,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들은 조금이라도 그 단계를 생략, 축소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기획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오원이 좋은 건축에 이르기 위해 압축하거나 생략하지 않았던 과정의 장면들 SCENES을 담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건축가 최욱이 만든 시간’이며,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살펴보아야 할 것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 이슈이다. 진행 : 정평진, 이중용

디자인 : 신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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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RESSIBLE SCENE

#1 영상으로 기록하다

기록은 선택이다. 영상의 경우, 녹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과 화면 프레임의 경계가 선택의 기준이 되고, 동시에 그 안에 속하지 못한 대상들은 기록에서 생략된다. 다시 말하자면, 기록은 무수히 많은 대상들 가운데 생략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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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개 기록은 평소와 구분되는 성취나 완수 등의 기념할만한 순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에 반해 원오원은 주로 결과의 순간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해왔다. 그들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생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기록의 형식은 기록할 대상을 따른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과 생각은 문자로 남겨지고, 표정에 나타나는 순간의 감정은 사진으로 포착되며, 말과 소리는 녹음된다. 다양한 기록의 형식 가운데 영상은

‘시간’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과정을 기록하는데 가장 적합하다. 또한 기록은 과거를 재구성함으로써 현재를 규정한다. 기억상실이 곧 자아의 상실이듯, 기록의 누적은 단순한 데이터 축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록된 영상 안에서 원오원은 한 명의 건축가와 그의 건축 작품으로 표현되기보다 그 안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그려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은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함으로써 각 과정과 구성원들의 역할에 보다 선명한 의미를 불어넣는다. 성북동 오피스, 2010. 04. 09. 03:30–05:39 p.m, 1m 2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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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기록의 목적 지금까지 원오원은 전시에서 상영하기 위한 것부터 외부에서 의뢰받은 경우에 제작해왔다. 그러나 처음 영상을 만들기

#1 영상으로 기록하다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과 목적의 영상을

(위) rainy season, 2011. 07. 28, 2m 22s (아래) 시코쿠, 2012. 05. 31–06. 03, 1m 59s

시작한 이유는 특별한 쓰임새와 관계없이 단순히 작업하는 사람들과 그 분위기를 담아보려는 데 있었다. 작업과정과 답사, 세미나 등 일상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들은 최근까지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위) 가파도, 2013, 4m 11s (아래) 세미나, 2016. 04. 15, 2m

건축가 최 욱

#1-2 제작 과정 축대가 있는 집 영상은 2015년

7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건축의 단면들’ 포럼을 위해 같은 해 7월 13일부터 총 15일에 걸쳐 제작되었다. 3일간의 기획 과정을 통해 하루의 시간을 담는 것을 목표로 풍경, 재료, 연결성 등을 표현하기 위한 장면들을 구성했다. 특히 이른 아침 인근의 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비롯하여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산새들의 지저귐, 나뭇잎과 바람 소리 등을 장소의 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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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내용들이 반영된 콘티에는 네 곳의 녹음 위치와 각 장면의 촬영 시간대, 순서 그리고 슬라이드캠 slidecam을 INCOMPRESSIBLE SCENE

이용한 구도와 시점의 이동 등이 상세하게 기재되어있다. 기재된 촬영과 녹음은 원오원 팩토리 ONE O ONE

factory 대표 김인철 소장과 그래픽 디자이너 조엘 모리츠 joel moritz가 분담해, 7월 16일 오전 5시부터 오후

11시까지 1차 촬영, 1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보충 촬영을 진행했다. 이후 열흘간 편집을 거쳐 완성된

6분가량의 영상은 사진이나 다른 형식의 매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장소의 시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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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를 담아낸다.

#1-3 김인철 원오원 팩토리 소장 인터뷰

Q. 원오원 팩토리에서 어떤 일을 맡고 있나?

A. 사진, 영상, 편집 디자인, 웹 디자인 등 그래픽 작업을 수행한다.

Q. 그렇게 다양한 분야의 그래픽 작업을 모두 직접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A. 원칙만 있으면 분야의 경계 없이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주로 작업하는 경우에는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각을 공유하기가 어려웠다. 건축 사진도 같은 이유로 직접 촬영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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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대가 있는 집, 2015. 07. 29, 6m 6s


Q. 내부의 시선이라 그런지 영상에 담긴 직원들의 모습이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A. 카메라를 비추면 어색해질 수밖에 #1 영상으로 기록하다

없다. 카메라를 가구처럼 의식하지 않을 때까지 한 장소에 고정시키고, 200mm 정도의 망원렌즈를 사용해 가급적 먼 거리에서 촬영한다.

Q. 그럼 별도의 연출은 없는 건가? A.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느꼈던 각 직원들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두고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이 먼저 정해지면 편집에 들어간다.

Q. 그 외 건축 작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영상, 사진, 로고, 웹 사이트, 사인 디자인 등은 설계 과정 중에 협의되는 것인가?

A. 대부분 완공 이후에 별도의 요청이 건축가

있고, 완성된 공간의 분위기와 설계실의 의도를 파악한 뒤에 작업을 시작한다.

최 욱

Q. ONE O ONE architects와는 지금까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독특한 협업 구조를 유지해왔다. 어떤 이점이 있었나? 앞으로의 전망은?

A. 외부에서 의뢰받은 프로젝트의 경우 작업 과정의 순서나 논리가 분명해야 하는 것에 비해 내부의 일들은 비교적 유연하게 진행된다. 그런 이유로 가능했던 실험적인 시도들이 여러 방향으로 발전 · 확장되어 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물론 그럴 계획이다.

ONE O ONE architects, 2014, 3m 5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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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체성을 시각화하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만, 눈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손에 만져지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에는 늘 시각이 먼저 닿는다. 이때 눈은 형태와 색뿐만 아니라 표면의 질감과 온도, 때로는 맛과 향까지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ARCHITECT CHOI WOOK

수많은 감각의 복합체로 구성되어있고, 각각의 감각들은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흔히 미각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음식에도 시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들이 개입한다. 생김새부터 입 안에서의 식감과 온도, 조리할 때 들리는 소리 등이 맛과 함께 음식을 구성한다. 건축 또한 그것을 이루는 뼈대와 외피, 공간과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건축은 한 장소에 고정되어있어 상대적으로 그 풍미를 직접 전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픽 디자인은 눈과 같이, 실체에 닿기 전 여러 시각적 효과를 통해 대상에 관한 수많은 정보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건축가 최욱은 원오원 개소 초기부터 현재까지 시각 디자인을 담당하는 독립된 부서와 인력이 포함된 조직을 구성했다. 그 결과, 그래픽 작업이 건축과 별도로 이루어지기보다 서로 감각을 공유하며 발전해올 수 있었고, 건축은 시각 디자인과 더불어 보다 뚜렷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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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O ONE architects$, 2008


# 2 정체성을 시각화하다 건축가

# 2-1 ONE O ONE B.I

최 욱

원오원은 2006년 B.I(brand identity)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내부적으로 요구되는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직접 수행해왔다. 당시 만들어진 로고는 명함과 서류 등 서식과 사무소 곳곳의 사인디자인에 적용되고 있다.

2008년에는 개소 후 첫 작품집을 제작했다. 베개를 떠올려 만든 작은 판형의 두꺼운 책에는 그간의 작업들이 다이어그램, 텍스트 등과 함께 상세히 소개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만들어진 두 번째

(위) #line of shadow$, 2011 / (아래) #101 book$, 2015

작품집 #line of shadow$는 형태와 내용 모두 전과 다르게 구성되어, 짧은 문장과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들로 작품의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현재 앞선 두 권의 작품집과는 또 다른 형식을 가진 세 번째 책을 준비 중이며, 단행본 이외에도 원오원은 전시 포스터와 브로셔, 보고서, 소책자, 노트 등 다양한 형식의 그래픽 디자인에서 건축과 호홉하며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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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B.I 리뉴얼 학고재는 1980년대 전시를 목적으로 지어진 한옥을 현대미술 화랑이라는 목적에 맞게 리노베이션한 것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 리뉴얼이 그와 함께 이루어졌다. 건축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요소들을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분적인 변형을 통해 현대미술 화랑과 전통적 이미지를 동시에 구현했다. 학고재 프로젝트에서는 독립된 두 영역인 건축과 그래픽 디자인이 변화의 폭과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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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함으로써 서로를 보완한다.

학고재 B.I 리뉴얼, 2008

학고재 실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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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체성을 시각화하다 건축가 최 욱

# 2-3 사이니지 디자인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SIGNAGE 디자인은 완공 이후 공간의 분위기와 설계의도를 고려해, 기술적인 부분에서 설계팀의 자문과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SIGNAGE, 2013

협의를 거쳐 완성되었다. 사인이 배경과 같은 재료로 솟아오르는 활자와 같은 개념으로 디자인함으로써 기능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의도된 공간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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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 웹사이트 디자인

2007년에 만들어진 홈페이지는 작품집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옅은 배경 색에 로고와 메뉴만으로 간결하게 구성했다. 지금까지 건축 작업을 비롯해 원오원에 관한 여러 정보들이 새롭게 업로드 되었으나, 형식과 디자인은 그대로 유지해왔다. 또한 홈페이지 첫 화면에서는 그래픽 디자인과 함께 달팽이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달하고 있다. 이 달팽이 이미지는 2004년 건축가 최욱이 수업에 연필로 그린 손톱 정도 크기의 스케치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ONE O ONE architects 홈페이지(101-architects.co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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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감각을 일구다

#3 감각을 일구다 달팽이는 아종亞種이 많다. 이동력이 낮은 탓에 객체들이 지역별로 격리되어 다른 종과의 접촉과 교류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팽이가 자웅동체로는 드물게 자가생식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며, 그 덕분에 각각의 종은 자신들의 고유성을 지킬 수 있었다. 반대로 이동 속도가 빠른 경우 넓은 지역에 걸쳐 하나의 종만 서식하게 된다. 인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운송수단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건축가

그리고 세계화 혹은 서구적 근대화를 거치며 건축을 포함한 세계의 문화,

최 욱

생활양식은 빠른 속도로 균질화되었다. 특히 한국과 같이 급격한 성장과정을 거쳐온 후발국의 경우 빠른 속도로 밀려들어오는 수입산들에 의해 고유성을 지키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 같은 맥락에서 원오원이 지금까지 지속해온 작업방식은 달팽이의 전략에 빗대어질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의 보편적 경향에 거리를 두는 한편 빠른 속도가 주는 효율을 선택하는 대신, 좁은 범위에서 이루어지지만 고유성을 담보하는 지역적 특색이 담긴 감각을 일구는 쪽을 택하고 다시 이를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느리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파악하고 시도하는 장소성의 해석은 지역의 역사와 환경 안에서 발전시켜 온 감각의 결과물들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된다. 이어서 소개되는 세 가지 사례를 포함한 원오원의 모든 결과물들은

‘팀 원오원’이 만들어온 감각과 시간을 고스란히 나타낸다. 가회동 주택의 창호. 설계팀의 요청으로 공방에서 직접 제작한 것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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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가회동 주택 가회동 주택 리노베이션에서는 새롭게 INCOMPRESSIBLE SCENE

더해진 부분들이 한옥의 기존 요소들 위에 자연스럽게 덧붙어 서로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동시에 적당한 동질감을 갖는다. 가장 큰 변화의 요인은 창호 선이 툇마루 끝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에 따라 기존의 창호 프레임을 구성하던 수평 부재가 제거되면서 그와 결합되어있던 기둥에 깊숙한 홈이 패이게 되었는데, 가회동 주택에서는 이를 다른 재료로 덧대거나 가리지 않고 같은 수종의 나무로 메운 뒤에 표면을 다듬어 오히려 그 흔적을 드러냈다. 한편, 창호와 함께 확장된 툇마루는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얇고 어두운 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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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구조물을 마루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바닥 위에 떠있는 것 같은 효과를 통해 실내 마루의 일부가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확장된 창호는 기존 요소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새롭게 제작해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질감을 최소화했다.

(위) 가회동 주택 기둥. 리노베이션 과정에서 발생한 기존 부재의 홈 위에 같은 수종의 나무를 메워넣었다.

(아래) 가회동 주택 툇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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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성북동 주택 성북동 주택의 핸드 레일과 선반에서 철과 목재는 마치 뼈와 그를 감싸는 # 3 감각을 일구다

피부처럼 만들어졌다. 견고함을 요하는 곳에는 철을, 따듯함과 부드러움이 필요한 곳에는 나무를 사용했고, 서로 다른 두 재료는 마치 한 몸처럼 작은 틈이나 별도의 연결부가 발생하지 않는 고유의 방식으로 서로 결합된다.

건축가 최 욱

(위) 성북동 주택 핸드레일 / (아래) 성북동 주택 선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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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책장들은 도서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인 책을 더 뚜렷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제작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레임이 가늘어져야 하고, 그와 동시에 프레임은 책의 하중 또한 충분히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주요 재료는 강판으로 결정되었고,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하거나 나무로 마감하여 날카롭게 느껴질 수 있는 철의 재료적 단점을 보완해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만의 책장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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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위해 제작된 책장


# 4 현장에서 교감하다

#4 현장에서 교감하다 설계 과정을 작곡에 비유한다면 건축이 만들어지는 데는 언제나 훌륭한 연주가 필요하고, 좋은 음악은 악보를 매개로 한 서로 간의 끊임없는 대화에 의해 이뤄진다. 작곡자는 연주될 음들을 상상하며 악보를 그리고, 연주자는 작곡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악보를 읽는다. 원오원은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개소 직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분야의 시공 팀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한 협력업체 대표는 그 과정이 마치

TV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의 귀를 막고 단어를 전달하는 게임, ‘고요 속의 외침’과 같다고 표현했다. 건축은 건축주와의 미팅에서부터 설계, 시공, 건축가

감리에 이르기까지 거쳐야하는 과정과 소통해야 할 대상이 훨씬 더 많고 복잡한

최 욱

최고 난이도의 게임이다. 처음에는 몇 개의 음절로 구성된 짧은 단어로 시작했지만,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서 협업의 규모와 범위는 문장과 문단의 수준으로 늘어났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TV 프로그램의 비유처럼 목소리를 크고 정확하게 내야할 뿐 아니라, 오랜 시간 교감하며 상대의 표정과 손짓, 눈빛까지도 함께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원오원과 협력업체들은 수많은 현장에서 끊임없이 서로 질문하고 논의함으로써 견고한 협업체계를 구축했고, 디자인의 의도가 온전히 반영된 양질의 결과물들을 만들어올 수 있었다. 이어서 소개하는 금속과 목재를 다루는 대흥금속(대표 김성운)과 조이아이디(대표 김용주)는 원오원의 개소 초기부터 함께 해온 협력업체들로, 십수 년 전 어느 작은 현장에서의 만남에서 시작해 현재는 작업에 필요한 규모의 공간 및 조직, 장비 등 안정적인 여건을 갖출 정도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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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 조이아이디 일산에 위치한 조이아이디의 작업장은 부산물이 많이 발생하는 작업 특성에도 불구하고 밝은 색으로 코팅된 바닥과 강한 조명과 함께 깔끔한 상태로 정돈되어 있으며, 작업장 밖에는 다양한 수종의 자재들을 정연하게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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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만들어졌다. 내부는 톱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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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현장에서 교감하다

보통 목공 작업은 설계가 완료된 이후 시공 과정에서 시작되지만, 원오원과 조이아이디는 인테리어와 창호, 가구 등 세부 설계가 진행되는 단계에서부터 필요한 자문을 주고받는다. 현장으로 넘어온 이후에도 시공과 함께 발생되는 문제들을 여려 차례 함께 검토해 건축가

해법을 찾고 그에 따른 수정사항을 반영한 도면에 준하여 본격적인 작업에 성북동 주택 선반 제작 과정

여러 현장을 함께 거치면서 점차 확대되었고, 그와 관련된 도면의 양과 정밀도 또한 점차 늘려왔다.

판교 주택 1층 평면도. 세부적인 치수와 부재의 결합방식 등이 스케치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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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착수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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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 대흥금속

12평의 작은 공업사에서 시작한 대흥금속은 원오원과 함께 성장해오면서 확대된 작업 규모와 범위에 따라 철공작업과 자재 보관에 쓰이는 현재의 장소를 비롯해, 수평을 맞추기 위한 작업대의 역할을 하는 12m의 빔 bim,

700kg 이상의 작업물을 운반할 수 있는 호이스트 hoist, 용접 과정에서 발생하는 슬러그 slug를 최소화하는 아르곤 argon 가스 용접기, 철판과 파이프 절단기 등의 장비를 포함한 작업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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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작업은 결정된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디테일에 대한 고민과 함께 시작된다. 대흥금속은 설계실과의 미팅 이후 현장에서 작업이 시작되기 # 4 현장에서 교감하다

전에 각 부재의 결합 방식과 그에 따른 세부 치수를 결정하고, 자재를 가공하는 작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직접 부재의 절단, 절곡 치수 정보를 도면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작성한 도면에 따라 만들어진 각 부재들은 작업장에서 가공되어 현장으로 옮겨진다.

건축가 최 욱 성북동 주택 돌출 창호 및 제작 과정에서 그린 스케치

판교주택 1층 중정 캐노피 및 제작 과정에서 그린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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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RESSIBLE SCENE

#5 조직을 운영하다 건축가에게 입봉이나 등단과 같이 창작자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있다면 아마도 사무소를 연다는 뜻의

‘개소開所’일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업체를 대상으로 두루 쓰이는 말이지만, 사업이 아닌 창작으로서의 건축에서도 조직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식 서비스 분야에서 1인 기업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지만, 건강한 작업 여건을 ARCHITECT CHOI WOOK

위해서는 함께할 동료가 필요하다. 그리고 전자기기 구동을 위해

O.S(Operating System)를 설치하는 것처럼, 조직은 그 목적에 부합하는 운영 체제를 갖추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상황과 수정되는 목표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 설계사무소의 경우 꾸준히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작업을 위한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동시에 창조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오원은 개소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기 위해 시기마다 그에 적합한 조직 구성과 운영 방식을 고민하며 조정해왔다.

개념설계

2014. 3

실시설계

기본설계

2014. 4

2014. 9

2015. 2 인테리어 실시설계

인테리어 설계

2014. 4

2014. 11 토목 공사

2015. 2

주택 B 세부 진행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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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 프로세스 기본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이어지는 건축 과정 전반은 모두 설계실을 통해 # 5 조직을 운영하다

진행된다. 원오원은 이전에 시기별로 분업화되어있던 별도의 단계들을 중첩시킴으로써 기간을 단축하는 동시에 협업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불일치 등의 오류를 줄여왔다.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두 주택 프로젝트를 비교해 보면, 주택A에서는 설계에서 시공에 이르는 과정이 일반적으로 진행되었고, 주택B에서는 설계팀과 인테리어 팀이 기본설계 단계에서부터 생각과 작업을 공유함으로써 실시설계와 시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변화들에 대해 보다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으며 전체적인

CD: Concept Design

기간은 줄일 수 있었다.

SD: Schematic Design DD: Design Development

주택 A, B 설계 진행 과정 2011 CD

2012 SD

2013

CD: Construction Document

2014

2015

2016

DD CD

건축가

주택 A

interior / construction

최 욱

CD SD

DD

CD

주택 B

interior / construction

2015. 8 건축 공사

2016. 8

2015. 7 인테리어 공사

준공

2015. 11

2016. 12

49


# 5 -2 좌석 배치/호칭 다루는 프로젝트의 규모와 성격이 INCOMPRESSIBLE SCENE

달라지면서 최근에는 다시 직급체계를 구성했으나, 얼마 전까지도 서로 이름(OO님)으로 호칭했으며 여전히 일부 직원들 간에는 기존의 호칭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의 문화에서는 다소 이질적일 수도 있지만, 위계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생각을 나누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설계실의 좌석 또한 부서 등의 조직이나 수직적 위계와 무관하게 작업자들간

ARCHITECT CHOI WOOK

유연한 접촉 방식을 고려하여 배치했다.

50


# 5 -3 커뮤니케이션 설계실 조직의 운영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린 여러 형식의 # 5 조직을 운영하다

다이어그램에는 건축가 최욱과 헤더, 직원들의 역할이 흥미롭게 표현되어있다. 특히 뒤집어진 피라미드 구조로 그려진 다이어그램에서는 화살표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 하나의 생각이 수직적으로 전달되기보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일종의 플랫폼 위에서 공유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오원은 이와 같은 이미지들을 통해 운영에 대한 생각들을 내부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설계실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건축가 최 욱 ONE O ONE architects에서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 구조

51


INCOMPRESSIBLE SCENE

#6 가치를 나누다 성장하는 조직에서 하나의 성격과 지향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유명세를 탄 맛집이 그 맛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원오원은 개소 후 꾸준히 규모를 늘려왔고, 2009년 이후 신규 채용 인원은 매년 평균 7.5명으로 사무실 내에서도 세대와 층을 만들어오고 있다. 이는 원오원이 더 큰 생산력을 갖고, 더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양한 경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늘어난 규모에서도 지속해온 가치와

ARCHITECT CHOI WOOK

감각을 지켜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채용 과정에서도 업무능력뿐 아니라 사무실의 성격과 서로 부합하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다양한 형식의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한 팀이 되기 위해서는 이후로도 충분한 시간을 공유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업무를 함께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오원은 구성원들과 함께 지녀야할 가치를 나누기 위해 워크숍과 세미나 등 그들이 지향하는 바와 부합하는 주제의 행사들을 기획하고 실행해왔다. 이러한 시간들은

13

생산성을 고려하면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다양한 경험과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공통의 지적, 정서적 기반은 때로 생산 활동보다도 더 생산적일 수 있다.

8

6 5 4

4

2004

2005

3 2 1

2001

2002

2003

ONE O ONE architects + ONE O ONE factory 통합 인원, 2010년 법인 전환, 연도말 기준

52

2006

2007

2008

2009


36

# 6 가치를 나누다

40명

39

36

31 30 30명 28

23

건축가 최 욱

21

20명

10명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53


# 6 -1 워크샵-경험 원오원은 1년에 한두 차례 국내외로 INCOMPRESSIBLE SCENE

워크샵을 떠난다. 지금까지 시코쿠, 발리, 남해 등의 답사지를 다녀왔으며,

2016년에는 고려제강 기념관 키스와이어, 통도사, 아오모리 현립미술관과 국제예술센터 등을 방문했다. 이러한 시간들은 휴식과 여행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느낌으로써 건축 작업의 자양분이 된다. 나아가 구성원들이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같은 방향으로 함께

ARCHITECT CHOI WOOK

작업을 해나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54


# 6 -2 세미나-지식 원오원은 2016년 한 해 동안 모두 아홉 번의 세미나를 진행했다. # 6 가치를 나누다

첫 세미나에서는 원오원의 파트너인 인나미 히로시 Innami hiroshi 시가현립대학 인간문화학부 교수가 일본의 지역 브랜드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이후 해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 국내의 건축학자들과 함께 도시 및 건축을 읽는 관점과 다양한 건축가 상 像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Stocker-lee

architects의 이동준 소장과 노토 디자인의 나라 유이치 Nara yuichi 는 자신들이 해왔던 작업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안창모 경기대 교수와 김현섭 고려대 교수는 각각 서울의 도시건축과 후지모리 테루노부의 건축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 외에도 내부의 건의, 요청에 따라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제작한 건축가

이욱정 요리전문 프로듀서, 출판전문가 데이비드 미촌 David michon,

최 욱

강여울 동양예술철학박사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정해 시각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위) seminar #03, print-what makes a good city, david michon, 2016.05.20 (아래) seminar #01, shiga brand, innami hiroshi, 2016.03.15

55


INTERVIEW

시가현립대학교 교수 인나미 히로시

INTERVIEW

Choi先生との最初の出会いを覚えていますか?第

1960년생. 일본 츠쿠바대학 예술학부에서 건축전공, 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대학(Scholarship of Italy)

一印象はいかがでした?

수료. 1988–1997년 GK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인스티튜트 근무 후, 1997년 ‘innami synthesize

C H O I 氏と最初に出会ったのは 19 8 6 年の 10 月

planning’, 1998년 ‘a.com design’ 설립.

です。すでにイタリア生活を始めていた彼から、彼の住

2000년 이후 원오원아키텍츠 파트너로 활동하고

んでいるアパート(シェアハウス)の大家さんを紹介し

있으며, 현재 일본 시가현립대학교 滋賀県立大 인간문화학부 교수.

てもらったことがきっかけです。 当時のイタリアでは外 国人にアパートを貸してくれる大家は少なく、特にアジ ア 人 は 困 難 を 極 め てい ました 。 私 も 一 ヶ月以 上 安 い ホ

‘원오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Innami의 인문적 연구에

テル暮らしでアパート探しに疲れ果てていた時だったの

의존하는 바가 크며 원오원은 도시문화에서부터 장인의

で、CHOIの助けがとてもありがたかったのです。 CHOIの

기술보존을 위한 소품디자인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 바탕을

第一印象は、バンカラ風で、まるでボブ・ディランのような

둔다.’ 이는 2008년 출간한 원오원의 모노그래프 서문에 적힌

反体制派を気取っているような感じでした。 全斗煥政権下の

내용이다. 원오원의 조직 내부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가치를

時代の韓国から留学してきた学生だったので、自由に隣国に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최욱의 지난 시절을 들어보기 위해

旅行もできないなど、かなりヨーロッパ生活が難しそうでし

인나미 히로시 교수와의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た。

ARCHITECT CHOI WOOK

최욱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첫 인상은 어떠셨나요?

CHOI와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10월입니다. 이미

親しくなったきっかけは何ですか?

当時は中国人の留学生はほとんどいなかったの で、日本人の私としてはかなり身近に感じていました。そし

이탈리아 생활을 시작하던 그에게 그의 사는 아파트(쉐어 하우스)

て、CHOIの紹介で住むようになったシェアハウスでは隣同

집주인을 소개 받은 것이 계기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士で、ほぼ毎日一緒に自炊や通学を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외국인에게 아파트를 빌려주는 집주인은 적고, 특히 아시아인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달 이상 싼 호텔 생활에서 아파트 찾기에 지쳐 있던 때였으므로, CHOI의 도움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CHOI의 첫인상은 반카라적(バンカラ風 )이어서 마치 밥 딜런 같은 반체제파인 척 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ベニス建築大学でChoi先生はどのような学生でし

たか?彼はもともと建築よりも映像と舞台をもっ

と勉強したかった私に言いました。

当時のベニス建築大学は、理論と哲学と歴史が建

전두환 정권 시대의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었기 때문에

築教育の根幹となっていたので、CHOIもマニエリスム的な

자유롭게 이웃 나라에 여행도 할 수 없는 등 유럽 생활이 꽤

分析手法でコルビュジエやパッラーディオについて、Mauro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Lena教授の元でかなり勉強していました。それから、私が日 本から持っていった大量のジャズのカセットテープはほとん

친해지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당시 중국인 유학생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인

どすべて聴いていました。私が帰国する際、すべてCHOIに 託しました。映画もイタリアのネオレアリズモの時代のロッ

저로서는 꽤 가깝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CHOI의 소개로 살게

セリーニやフェリーニ、デシーカなどの作品をみるために大

됐던 쉐어하우스에서 이웃으로 거의 매일 함께 자취나 통학을

学の授業が終わったあと一緒に深夜までベニスの小さな名画

하게 되었습니다.

座に通っていました。最終の列車に乗り遅れそうになり、よ くベニス駅まで走った思い出です。当時の建築教育には、音

베니스건축대학에서 최욱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楽や映画の理論と知識がとても大切で、建築学生同士の話題

그는 원래 건축보다 영상이나 무대를 더 공부하고

もそれらへの興味がほとんどでした。

싶어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베니스 건축 대학은 이론과 철학 및 역사가 건축교육의 근간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CHOI도 매너리즘적인 분석기법으로 코르뷔지에와 팔라디오에 대해 Mauro Lena 교수 밑에서 상당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One O One建築事務所で発行した単行本やホー

ムページを見ると、Innami先生は、パートナーの

ように認識されています。協業はいつから始まる

ましたか?

일본에서 가지고 나간 대량의 재즈 카세트 테이프는 거의

私は 19 97 年に、それまで勤めていた会社( GK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내가 귀국하면서 모두 CHOI에게

DESIGN )を退社して、1年中世界を放浪していました。

56


맡겼습니다. 영화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시대의

そんな時、1999 年初めごろに声をかけられて、SA スクー

로셀리니 Roberto Rossellini(1906–1977), 펠리니 Federico

ルのセミナーを手伝うようになりました。空間社のセミナ

Fellini(1920–1993), 데 시카 Vittorio De Sica(1901–1974)

ー室で写真の展覧会や講演を行い、その後サマースクー ルも手伝うようになり、ムジュ、カンギョン、ヤングゥな

베니스의 작은 명화극장에 다녔습니다. 마지막 열차를 놓칠

ど韓国の地域を頻繁に訪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後、

뻔해서, 자주 베니스 역까지 달렸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2000 年ごろから私の部下だった建築家の村上雄一郎氏(現

당시의 건축 교육에는 음악과 영화의 이론과 지식이 너무나

在、革製品のデザイナー)と共に CHOI のソウルの事務所

소중했고, 건축 학생끼리의 화제도 그것들에 대한 관심이

でヘイリーの仕事などを手伝うようになったのが協業のき

대부분이었습니다.

っかけです。2002 年から私が大学で教鞭をとるようになっ

인나미 히로시

등의 작품을 보기 위해 대학의 수업이 끝난 뒤 함께 심야까지

て、研究室の学生を伴ってSAのサマーセミナーに参加する 원오원 건축사무소에서 출간한 단행본이나

ようになりました。プサン、セマングン、モッポなどのセ

홈페이지를 보면, 인나미 선생님은 파트너처럼

ミナーに参加しました。そして、2005 年にソウル市美術館

인식되고 있습니다. 협업은 언제부터

で開催された日本主催の展覧会 VISON DF THE BODY 展

시작되었습니까?

のローカルアーキテクトとして、展示計画と施工が ONE O

저는 1997년에 그동안 다니던 회사(GK DESIGN)를

ONEに全てを任されたことで、私はONE O ONEの日本側ス

퇴사했고, 1년 내내 세계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1999년

タッフとなったことが正式にメンバーとなった節目だと思い

초 즈음에 권유를 받아 SA스쿨 세미나를 돕게 되었습니다.

ます。

공간사 세미나실에서 사진전시회나 강연을 하고, 그 후에 国が違うので、それなりの協業構造が必要になる

여름학교도 돕게 되어 무주, 강경, 양구 등 한국의 지역을 자주

と思われる。仕事をするときにどのように進行す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2000년경부터 저의 직원이었던

るのですか?

건축가 무라카미 유우이치로 씨(현 가죽제품 디자이너)와 함께

私のスタンスは、あくまで客観的に分析する姿勢

CHOI의 서울사무소에서 헤이리의 일 등을 돕게 된 것이 협업의

り方、美意識など)をリスペクトして、優劣をつけない考え

부산, 새만금, 목포 등의 세미나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方です。日本的な視点は事例としてであって、回答ではあり

ONE O ONE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일본에서 주최하는

ません。

전람회 ‘VISON OF THE BODY’ 전시의 로컬아키텍트로서 전시 계획과 시공을 모두 맡게 되면서 제가 ONE O ONE의 일본 측 담당이 된 것이 정식 멤버가 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そして、すべての過程が重要だが、特に注意が必 要な部分があることを気になります。

先ずは、新しいプロジェクトのための調査分析を

국가가 달라서 그 나름대로의 협업 구조가 필요할

グローバルな視点で行います。プロジェクトの前提条件の問

텐데,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 진행을 하십니까?

題分析や基本構想へのアドバイスをしています。情報や知識

나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よりも知恵を提案することを心がけています。

자세입니다. 각각의 나라, 지역의 주관적인 상식(생각과 사물의 만드는 방법, 미 美 의식 등)을 존경하고, 우열을 가리지 않는 생각입니다. 일본적 시각은 사례인 것이지 답은 아닙니다.

Choi先生はInnami先生に多くのインスピレーシ

ョンを受けているかのように言われました。建築 に関する態度、生活に対する態度など。ところが

그리고 모든 과정이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새 프로젝트에 대한 조사·분석을 글로벌 관점에서 실시합니다. 프로젝트 전제조건의 문제분석 및 기본구상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정보와 지식보다 지혜를 제안하는 것에 유의하고 있습니다.

、先生は滋賀県立大学人間文化学部教授ですね

。建築専攻ではないので、少し驚きました。先生

が建築を理解する方法を知っていると思います。 先生が建築で重要視される部分の話を聞きたいま

す。先生が教える人間文化学科に関連があるよう な気もしますが。

私は大学というアカデミックなフィールドでの活

최욱 선생님은 인나미 선생님께 많은 영감을

動を基本としていますが、私の研究の専門領域は、道具計画

받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건축에 관한

論という領域です。これは人間生活の基本となる必需品の

태도, 삶에 관한 태도 등에서요. 그런데 선생님은

道具について、その起源、歴史、伝統、慣習、生産、技術、

시가현립대학 인간문화학부 교수라더군요. 건축

などをトータルに調査研究しています。その中には衣・食・

전공이 아니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건축을

住の3 分野が入っているので、建築、プロダクト、グラフィ

57

최 욱

です。各々の国、地域の主観的な常識(考え方や、ものの作

건축가

계기입니다. 2002년부터 내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고, 연구실 학생을 데리고 SA 여름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INTERVIEW

이해하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포괄적인 질문이

ック、ファッションデザインも関わってきます。そして、も

될 수 있겠지만, 선생님께서 건축에서 중요하게

のを作るための道具や、技術などが絶滅を危惧され、職人そ

생각하시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してその生活が絶滅を危惧される今の社会へ、新たな提言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인간문화학과 관련이 있을

や教育を地域活動として行なっています。そういう意味から

것 같기도 합니다만.

、ものづくりの職人たちをしっかりパートナーとしてリスペ

저는 대학이라는 아카데믹한 필드에서의 활동을

クトして、施工プロセスを進めていくことを理想としていま

기본으로 하고있습니다만, 제 연구의 전문 영역은 도구

す。ONE O ONEの設計思想にはそれがあります。

계획론(道具計画論 )이라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인간 생활의 기본이 되는 필수품 도구에 대해서, 그 기원과 역사, 전통, 관습, 생산 기술 등을 전체적으로 조사 ·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의· 식· 주 3분야가 들어가기 때문에, 건축, 제품, 그래픽, 패션 디자인에도 관여합니다. 그리고 물건을 만들기 위한 도구와 기술 등의 멸종이 우려되고 직인 職人 과 그들 생활의 멸절이 걱정되는 지금의 사회에 새로운 제언이나 교육을 지역 활동으로서

Innami先生は「Choi建築」、「建築家としてCh

oi」についてどのように評価していますか?友達

としての評価が困難な場合は、「このような部分 に注目してほしい」というヒントをいただければ 幸いです。

私は CHOI の建築のコンテクストを読むことは難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건을 만드는 직인들을

しくないと思います。なぜなら、誰もが解りやすいテイスト

제대로 파트너로서 존경하면서 시공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것을

を持っているからです。難解な言葉を羅列したコンセプトや

이상 理想 으로 하고 있습니다. ONE O ONE의 설계 사상에는

、流行や世界の潮流を意識した作品性を主張したイデオロ

그것이 있습니다.

ギー満載の建築と比較してみてください。とても素直でどこ

ARCHITECT CHOI WOOK

に目を向けても手を抜いた箇所は無く、素材、ディテール、 인나미 선생님은 ‘최욱의 건축’, ‘건축가로서의

光、空間のプロポーションは常にプリミティブに構成されて

최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친구로서

います。クライアントの人柄、企業のブランディング、業種

평가가 어렵다면, ‘이런 부분에 주목하면 좋겠다’는

業態の機能がストレートに表現されている品位のある建築を

힌트를 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生んでいることが、皆が CHOIを支持する所以です。ベニス

저는 CHOI의 건축의 콘텍스트를 읽는 것은 어렵지

建築大学で彼と学んでいた当時の教授たちには、Manfredo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기 쉬운 테이스트를

TafuriやMassimo Cacciari(後のベニス市長)、Franco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난해한 말을 나열한 컨셉이나,

Rella(哲学者)、Francesco dal Co など歴史学者、政

유행이나 세계의 조류를 의식한 작품성을 주장한 이데올로기가

治 、哲 学 な ど の 理 論 武 装 し た 、有 名 な 方 々 ば か り で し

가득한 건축과 비교해 보십시오. 너무나도 솔직하고 어디를 봐도

た。作品性を追求するような姿勢は無く、当時のポスト

손을 뺀 부분은 없으며, 소재, 디테일, 빛, 공간의 프로포션은

モダンへの警鐘も鳴らしていました。同時に、 Vittorio

항상 기본 primitive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Gregotti教授がJames Stirlingや、Mario Botta、Alvaro

인품, 기업의 브랜딩, 업종, 업태의 기능이 솔직하게 표현된

Siza、Peter Eisenman、Fumihiko Makiら脂の乗った建築

품위 있는 건축을 낳고 있는 것이 모두가 CHOI를 지지하는

家たちを世界中から招聘して講義を行っていました。世界、

이유입니다. 베니스 건축 대학에서 그와 배우고 있던 당시의

地域の潮流は常にダイバーシティであること、それは、文化

교수들은 만푸레도 타푸리 Manfredo Tafuri와 마시모

も建築も同じだということを気づかされる教育でした。イタ

카차리 Massimo Cacciari(후에 베니스 시장), 프랑코 렐라

リアにおいては、建築は学問であって、工学、理学、芸術学

Franco Rella(철학자), 프란체스코 달 코 Francesco dal Co

と同列に扱われる学問だということを知りました。建築とい

등 역사학자, 정치, 철학 등의 이론으로 무장한 유명한

うフィールドで、絵を描く、数学をする、音楽をする、ファ

분들뿐이었습니다. 작품성을 추구하는 자세는 없고, 당시의

ッションデザインをする、なんでもありなのです。そういう

포스트모던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비토리오

状況下での経験によって、CHOIはどんなクライアントであ

그레고티 Vittorio Gregotti 교수가 제임스 스털링 James

ってもその人の価値観を理解し共有しながら、最上のメッセ

Stirling, 마리오 보타 Mario Botta, 알바로 시자 Alvaro Siza,

ージ(建築)を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CH

피터 아이젠만 Peter Eisenman, 후미히코 마키 Fumihiko

OIの建築は饒舌ではないのです。

Maki 등 궤도에 오른 건축가들을 전 세계로부터 초빙하고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지역의 조류는 항상 다양성이 있다는 것, 그것은 문화도 건축도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건축은 학문이며, 공학, 이학, 예술학과 동렬로 취급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축이라는 필드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수학, 음악, 패션디자인 등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의 경험으로 인해서, CHOI는 어떤

58

facebookでInnami先生が黄色のシャツを着て赤

いペンを持っている写真を見ました。偶然にも、

Choi先生も赤いシャープを書いていました。もし

かしたら、お互いの好みも共有していますか?In

nami先生とChoi 先生が共通して好きなことと、

その理由について教えてください。


클라이언트라도 그 사람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공유하면서 최상의

私は普段、NY 製の SOHO にある老舗文房具店

메시지(건축)를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CHOI의 건축은

のイエローのロールトレーシングペーパーと、赤いサイン

요설 饒舌이 없습니다.

ペンを常に使っています。30 年以上変わりません。イエロ ートレペはマイケル・グレイブスのスケッチペーパーから の影響です。赤いサインペンは Pentel のもので、半世紀前

펜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우연하게도,

に日本で発売され、アメリカのジョンソン大統領が愛用品

최욱 선생님도 빨간 샤프를 쓰고 있었습니다. 혹시

し、NASA のジェミニ計画でも宇宙で使用されたことから

서로의 취향도 공유하고 계신가요? 인나미 선생님과

日本でもロングセラーになったものです。未だに 10 0 円の

최욱 선생님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과 그 이유에

価格は変わっていません。CHOI 氏が使用している赤いシ

대해 말씀해주세요.

ャープペンはスイスの Caran d ’ Ache のものです。ロシア

저는 평소 뉴욕 SOHO에 있는 문방구의 옐로 롤

語で鉛筆を意味する名前です。私のものと同様に意味とそ

트레이싱 페이퍼와 붉은 색 사인펜을 항상 쓰고 있습니다.

のものが生まれた背景が重要なのです。そして同じものを

30년 이상 바뀌지 않았습니다. 옐로 트레이싱 페이퍼는 마이클

ずっと使い続けるという点で CHOI とは道具への価値観は

그레이브스 Michale Graves(1934 -2015)의 스케치 페이퍼의

似ています。ともに赤なのにはあまり意味はありません。

영향입니다. 붉은 사인펜은 펜텔Pentel의 것으로 반세기 전

普段仕事以外では、本、お酒、町、映画、旅について話題

일본에 출시되었던 미국 존슨 대통령의 애용품이며, NASA의

にすることが多いです。お酒については、一緒に事務所

제미니 계획에서도 우주에서 사용된 것부터 일본에서 롱 셀러가

(オコナービル)の地下に真っ赤なバー( BARO )を開店

된 것입니다. 아직도 100엔의 가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したほどです。第三者が見たときに似たようなものを使っ

CHOI가 사용하는 붉은 샤프는 스위스의 카렌다쉬 Caran

ているように見えるのは、嗜好と価値観が同じからなので

d’Ache의 것입니다. 러시아어로 ‘연필’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はないでしょうか。また、一緒に旅行をすることが多いの

내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그것이 태어난 배경이 중요한 겁니다.

で、24時間共にしていると自然と似てくるのでしょう。

인나미 히로시

페이스북에서, 선생님께서 노란 셔츠를 입고 빨간

그리고 같은 것을 계속 사용한다는 점에서 CHOI와 저의 도구에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술에 대해서는 이전 사무소(오코너 빌딩)의 지하에 함께 바(BARO)를 개점한 정도입니다. 제삼자가 보았을 때에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호와 가치관이 같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요. 또 함께 여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24 시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닮아가는 것입니다.

地球が一つに接続されて速度は異なりますが、似

たような悩みを共有する時代になったようです。 ュニケーションしながら、今日この瞬間の価値を

최 욱

없습니다. 평소 일 이외에서는 책, 술, 마을, 영화, 여행에 대해서

건축가

대한 가치관은 비슷합니다. 함께 빨간색인 것에 별로 의미는

おそらくInnami先生もChoi先生と継続的にコミ

作っていきいらっしゃると思います。もちろん、

そのほかにもさまざまな価値があるでしょう。先 生の立場から、Choi / One O One建築事務所と一

緒に作りたいの価値とは何ですか?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속도를 달리할 뿐

建築を設計するということは、未来に貢献でき

비슷한 고민들은 공유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る職業だと考えています。家であれば 100 年 3世代の生活

아마 선생님도 최욱 선생님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の記憶をつなぐことができる道具であり、都市であれば 1

오늘 혹은 이 순간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계시리라

000 年のスケールで社会、文化を構築することが可能です

생각됩니다. 물론 다양한 가치들이 있겠지요.

。それはものを作らなくても、その様式やコンテクストを

선생님의 입장에서, 최욱/원오원 건축사무소와 함께

構築するだけでも可能です。そして自然の力には謙虚で

만들어가고 싶은 가치는 무엇입니까?

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ような能力とモラルを建築家は

건축을 설계한다는 것은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有していないといけません。そしてプロフェッショナリテ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이라면 100년 3세대 생활의

ィとしてそのような教育と経験を受け続けることが必要

기억을 연결할 수 있는 도구이며, 도시라면 1000년의 스케일로

です。私と CHOI は大学でも教鞭をとりながら、自身も世

사회, 문화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을 만들지 않아도

界中を旅して常にその土地の生活から学んでいます。 ア

그 양식이나 컨텍스트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합니다.

ノニマスで あっても歴 史の 痕 跡 のひとつとして O N E O

그리고 자연의 힘에는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능력과

ONEの業績が継承され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

도덕성을 건축가는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프로페셔널리즘으로서 그런 교육과 경험을 계속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와 CHOI는 대학에서도 교편을 잡으면서 스스로도 전 세계를 여행하고 항상 그 지역의 생활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익명 anonymous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흔적의 하나로서

ONE O ONE의 실적이 계승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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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CHOI WOOK

INCOMPRESSIBLE SCENE

#7 환경을 조성하다

건축 설계 사무소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한 공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기 쉽다. 일에 치이다보면 미처 신경을 쓸 틈이 없어 큰 불편이나 기능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적당히 사용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작업하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작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건축 설계가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일인 것처럼, 작업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만드는 것은 곧 그 안에서 이뤄지는 작업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원오원은 좋은 환경에서 작업해야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2010년 현재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2010년 4/5층, 2011년 3층, 2014년 1층을 정리했고, 현재 2층 공사를 진행 중이다. 다섯 개 층으로 구성된 각 공간은 모두 인테리어 전반에서부터 문, 책상, 책장, 선반, 조명, 난간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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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 7 환경을 조성하다

2층

3층

4층

5층

건축가 최 욱

ONE O ONE architects/factory 평면도

61


INCOMPRESSIBLE SCENE

#7-1 4/5F, 2010 원오원의 설계실은 2010년 수송동의

ML빌딩에서 창밖으로 나무숲이 내다보이는 현재의 건물 4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철제 프레임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같은 재료로 마감된 바닥과 프론트,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4층은 설계실과 프론트로 쓰이고 내부 계단으로 이어지는 5층은 회의실과 행정실, 그리고 세미나 등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하는 행사에 이용되는

ARCHITECT CHOI WOOK

라운지와 자료실로 구성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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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환경을 조성하다 건축가

최 욱

63


INCOMPRESSIBLE SCENE

#7-2  3F, 2011

2011년에는 수송동에 남아있던 원오원 플래닝(현 원오원 팩토리)까지 현재 건물의 3층으로 넘어와 전체 조직이 한 공간에서 일함으로써 보다 긴밀한 협업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3층에는 두 개의 회의실과 박공 집 형태로 만들어진 팩토리 대표 공간, 그리고 팩토리

ARCHITECT CHOI WOOK

직원들의 업무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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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1F, 2014 # 7 환경을 조성하다

1층의 모형제작실은 2013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2014년에 완성됐다. 목공 절단기, 콤프레셔 등의 장비가 구비되어 있고, 원오원에서 제작하는 큰 스케일의 모형을 만들거나 촬영하는 데도 무리 없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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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RESSIBLE SCENE ARCHITECT CHOI WOOK

#7- 4  2F, 2017

2017년 1월 완성 예정인 2층에는 직원들이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예정이며, 이는 원오원의 좋은 작업환경 조성을 위한 마지막 과정에 해당한다. 메뉴 및 조리도구와 시설 등에 관해서는 담당 쉐프의 자문을 얻었다. 더불어

5층에서 임시로 수용했던 세미나 기능을 담을 수 있는 공간과 갤러리 용도의 공간이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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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그리고 일상

#8 그리고 일상

시간은 수 數 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임의로 선택된 숫자들 사이에 무수히 많은 수가 존재하듯, 앞서 소개한 건축가

여러 장면들은 원오원의 시간을 이루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는

최 욱

일상적인 시간들이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고, 작업하는 과정들 틈에 있어야 하는 식사와 평범한 대화 속에서의 웃음, 짧은 휴식과 잡스러운 공상 등과 같은 시간들은 보통 작업이라는 목적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작업하는 시간을 지탱해주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시간들이고, 작업 사이사이에 그런 시간들이 충분하고 적절하게 흐르게 할 때 좋은 작업이라는 목표를 떠받치는 지속성의 토대가 만들어진다. 원오원 홈페이지를 통해 간간히 올라오는 일상의 장면들은 초점이 뚜렷하지 않거나 순간의 흐름이나 인상만을 느슨하게 포착한다. 그런 순간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기준에서는 의미 없는 것들일 수 있다. 하지만 대개는 편집되거나 누락되는 그와 같은 부분들이야말로 ‘일상’ 그 자체라는 점에서 원오원이 제시하는 세계관과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결코 압축하거나 생략될 수 없는 장면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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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ARCHITECT CHOI WOOK

INCOMPRESSIBLE SCENE


# 8 그리고 일상 건축가

최 욱

69


INCOMPRESSIBLE SCENE ARCHITECT CHOI WOOK

때로 어떤 결과는 그에 이르는 과정과 수단을 온전히 목적으로 삼을 때에만 도달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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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S

아트 버스 쉘터 [74] 마포대교 플라자 [76]

#1 영상으로 기록하다

팔판동 스몰주택 [72]

가회동 4제 [78] 현대카드 영등포사옥 [84] 현대카드 HQ3 [86]

(구)서울시장 공관 [88] 판교주택 [90] 건축가 최 욱

일반에 회자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더러 있지만

17년이라는 작업 기간에 비해 전문적으로 다뤄진 경우는 극히 소수다. 건축가는 방향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말했고, 이제는 조금씩 프로젝트를 공개하며 담론을 만들고 싶은 뜻을 내비쳤다. 본지 지면 성격과 분량상 여기서는 흐름만 간략히 볼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선별했다. 작업 내용은 원오원에서 제공했다.

35


2003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팔판동 스몰주택

한옥보존지구인 북촌의 삼청동에서

건물의 외장 재료는 동네에서 흔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팔판동은

쓰이는 타일과 대문에 주로 쓰였던 재래식

행정상의 이유로 한옥보존지역 대상에서

방법의 철판이다. 다만 타일은 세로로

설계담당 : 최진석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용도 : 단독주택 대지면적 : 56.00m²

제외되어 무관심한 변모가 지속되고 있는

쌓았고 철판은 그리드 패턴을 강조해서

건축면적 : 33.00m²

곳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흔적이 남겨진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했다.

연면적 : 55.00m²

필지를 보존하여 건물이 가능하게 하는

내부는 좁은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작업은 나름의 가치와 의미 때문에 어려운

방법으로써 백색 페인트로 내벽과 가구를

제약 속에서도 즐거운 작업이었다.

마감했고 창은 먼 곳의 풍경을 실내에서

구조 : 철골조

가질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내부마감 : 도장, 목재 등

건폐율 : 59.00% 용적률 : 97.10% 규모 : 지상 2층

외부마감 : 타일, 열연강판 등 설계기간 : 2003 시공기간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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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판동 스몰주택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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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아트 버스 쉘터

서울역사박물관 앞 버스쉘터는 신문로의

현재의 항공사진과 수선전도를 겹쳐보면

4m×16m의 평면 사각형에 곡선을 그려

중심에 자리하며 세종로와 충정로를 잇는

신문로는 경희궁의 담과 마주하고

넣고 접으면 휘어진 벽과 지붕이 공간을

완곡한 곡선의 교차점이 만나는 곳에

있던 길에 속한다. 버스정류장과

만들어낸다. 이는 한복의 평면 재단을

위치하여 시선이 모아지는 시각적 변화가

서울역사박물관 사이에 경계가 흐린

응용하여 한옥의 삼차원 입체 지붕을

큰 곳이다. 버스쉘터는 서울역사박물관

(시각적 소통이 가능한) 담을 세움으로

연출한 방식이다. 곡선에 의해 2D에서

앞 공원에 인접하여 자리하고 있어 조형성

버스 승하차 영역과 박물관 앞 쉼터

3D로 된 벽에 틈을 만들어내어 양쪽의

및 공공성이 강조되는 장소에 위치한다.

영역을 구분하고 담의 성격을 새롭게

공간을 시각적, 물리적으로 연결한다.

버스쉘터가 위치한 자리는 경희궁의

디자인함으로써 두 영역 간의 관계를 보다

담장이 지나는 자리인 것으로 인식되는데

긴밀하게 맺어준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을 포함한 일대가 경희궁 터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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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버스 쉘터 건축가 최 욱

설계담당 : 조소은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건축면적 : 17.15m² 주요외장재 : 불소수지소부도장 설계기간 : 2008 시공기간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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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마포대교 플라자

해동지도나 김정호의 수선전도 등,

한강은 1982년에 수립된

설계담당 : 염주현 위치 : 서울시 마포대교

서울의 고지도를 살펴보면 장소의

한강종합개발계획을 거쳐 올림픽을

특징과 이해를 반영한 상징화이며

전후하여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종의

왔으며 청계천 프로젝트 이후 2006년에는

설계기간 : 2008

도상학 iconography임을 알 수 있다.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발표로

시공기간 : 2009

특히 도심의 산과 물의 조화는 그 자체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완성된 자연으로 도시환경의

마포대교의 시설물은 양분된 도심을

고유한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연결하는 교량공원으로 강으로의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한 시설물이며 강변 도심의 풍경을 위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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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면적 : 625.00m² 구조 : 철골조


마포대교 플라자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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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4제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2009 – 2013

장 프루베 조립식주택

원앤제이 갤러리

6m×6m. 1945년경에 장 프루베에

건물 폭이 5미터가 안 되는 긴 건축물이다.

의해 생산되고 아프리카 등지로 이송되어

코너 가로에 위치함으로 좁은 골목길을

사용된 경사지붕을 가진 구조물. 이

막지 않기 위해 저층부의 입구를

건축물은 제작된 구조물을 그 지역의

캔틸레버로 띄웠다. 내부는 길의 연장처럼

현실에 맞는 재료를 써서 완성하는 재난

스킵플로어의 공간을 계단이 연결하고

구호 건축물이다. 서울의 기후, 장소의

있고, 자연광이 이동공간을 밝히며

성격에 맞게 변형하여 재구성되었다.

그 간접광이 전시공간으로 스며든다.

설계담당 : 조소은 구조설계 : 은구조 전기설계 : 한길 기계설계 : 주성 위치 :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용도 : 근린생활시설 대지면적 : 201.00m² 건축면적 : 118.00m² 연면적 : 315.00m² 건폐율 : 58.40% 용적률 : 101.60% 규모 :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 : 철근콘크리트조 내부마감 : 셀프레벨링, 도장 등 외부마감 : 샌드블라스팅 복층유리 등 설계기간 : 2009 시공기간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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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4 제 건축가 최 욱

한옥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

한옥은 목구조로 방과 마루, 부엌 그리고

중정을 가진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마당과

마당이 각기 다른 높이의 단면을 가진

하늘을 가장 단순한 수평과 수직으로

건축물이다.목구조의 기본틀에 다양한

두고 싶었다. 그 사이에 움직임(책을

레벨을 가진 단면을 설계하고 집의

읽는 사람)이 있다. 움직임을 만드는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벽체를

빛과 디테일이 만든 서재가 현대카드

세우는 일이 한옥건축이다.

디자인라이브러리이다. 공간은 형태가 아니라 행동이 스스로 만든다.

설계담당 : 김영수 구조설계 : 은구조 전기설계 : 한길 기계설계 : 주성 위치 :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용도 : 근린생활시설 대지면적 : 555.10m² 건축면적 : 297.00m² 연면적 : 541.60m² 건폐율 : 53.50% 용적률 : 93.30% 규모 : 지상 2층 구조 : 철근콘크리트조, 철골조 내부마감 : 셀프레벨링, 도장 등 외부마감 : 복층유리 등 설계기간 : 2012. 02 – 2012. 07 시공기간 : 2012. 07 – 201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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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CHOI WOOK

PROJECTS

장 프루베 조립식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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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앤제이 갤러리

가회동 4 제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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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CHOI WOOK

PROJECTS

한옥

82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리

가회동 4 제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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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현대카드 영등포사옥

건축물이 지어진 장소는 영등포의 오랜 생활문화가 남아있는 곳으로 앞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쳐 새롭게 만들어질

설계담당 : 이슬비, 조소은, 신애리, 염주현, 박선형 구조설계 : 은구조 전기설계 : 한길

곳이다. 주변 일대에서 먼저 만들어지는

기계설계 : 주성

건축물이라 앞으로의 변화에 영향을

위치 :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줄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저층부를 도로와 주변부로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용도 : 업무시설 대지면적 : 824.00m² 건축면적 : 493.00m²

파사드는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연면적 : 4,085.00m²

배경으로서의 빛의 상황을 반영했으면

건폐율 : 59.90% 용적률 : 353.40%

했다.

규모 : 지하 2층, 지상 7층 구조 : 철근콘크리트조 (포스트텐션) 내부마감 : 수퍼플로어, 열연강판 등 외부마감 : 복층유리, 접합유리 등 설계기간 : 2010. 10 – 2012. 02 시공기간 : 2012. 02 – 201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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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영등포사옥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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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HQ3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2014

여의도에 위치한 현대카드 본사 3관은 오피스 기능과 함께 직원 편의시설 중 하나인 어린이집, 그리고 카드를 생산하는 공장이 최상층에 설치되어 있는 복합용도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이다.

설계담당 : 이혜서, 이병호, 조재용 구조설계 : 은구조 전기설계 : 한길 기계설계 : 주성 위치 :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용도 : 업무시설 대지면적 : 2,522.00m² 건축면적 : 1,474.00m² 연면적 : 24,680. 00m² 건폐율 : 58.50% 용적률 : 532.20% 규모 : 지하 6 층, 지상 10층 구조 : 철골조 내부마감 : 금속, 도장 등 외부마감 : 알프스월, 마천석 등 설계기간 : 2012. 02 – 2013. 05 시공기간 : 2013. 01 – 2014. 04

86


현대카드 HQ3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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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울시장 공관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2016

시장공관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 안내

1. 원형에서 증 · 개축된 부분은 제거하여

센터”로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1941년에

원형 배치 회복을 원칙으로 한다.

준공된 적산가옥(옛 시장공관)의

2. 기둥 및 천장 등의 주요 부재의 원형은

외관은 당시 근대식 일본 본토 주택의

보존하고 구조보강용 부재와 기타 새로운

전형을 갖추고 있으나 구조 및 벽체 구성

재료는 원형의 구조, 구법 및 재료와

설계담당 : 배익환, 윤희영 구조설계 : 은구조 전기설계 : 한길 기계설계 : 주성 위치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용도 : 문화 및 집회시설, 근린생활시설 대지면적 : 1,628.00m²

등의 기술적인 부분은 재래식 구법과

구별되도록 한다.

한국인의 솜씨 등이 혼재된, 일본에서는

3. 대지와 건물의 관계를 유지하되,

보기 어려운 혼합형 건축물이다.

지속가능한 사용을 위하여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계획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을 위한

용적률 : 30.60%

세계유산제도를 존중하여 다음과 같은

활용(전시안내센터로서의 기능)을

규모 : 지하 1층, 지상 2층

원칙으로 리노베이션하였다.

추구한다.

건축면적 : 356.00m² 연면적 : 517.00m² 건폐율 : 21.80%

구조 : 목구조 내부마감 : 회벽, 도장, 목재 등 외부마감 : 알프스월, 기와 등 설계기간 : 2014. 09 – 2015. 04 시공기간 : 2015. 01 – 201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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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서울시장 공관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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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ARCHITECT CHOI WOOK

PROJECTS

판교주택

한국 사대부의 집을 현대화시켜본 주택이다. 여러 개의 마당을 사이에 두고 공간이 배치된 자연스러운 건축물을 만들었다. 완만하게 경사진 대지라서 실내는 몇 개의 각기 다른 레벨을 가지며, 층고의 형태와 높이는 건축공간의 성격을 만들며 창은 공간의 존재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설계담당 : 이대우, 황희정, 임미라 구조설계 : 두항구조 전기설계 : 한길 기계설계 : 주성 위치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용도 : 단독주택 대지면적 : 1,564.00m² 건축면적 : 309.00m² 연면적 : 834.00m² 건폐율 : 19.80% 용적률 : 26.60% 규모 :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 : 철근콘크리트조, 목구조 내부마감 : 도장, 목재 등 외부마감 : 도장, 목재 등 설계기간 : 2014. 03 – 2015. 06 시공기간 : 2015. 04 –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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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주택

건축가

최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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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ARCHITECT CHOI WOOK

INTERVIEW

건축가 최 욱

인터뷰 내용은 11월 28일 오후 2시 30분부터 6시간 정도

공교롭게도 그날은 사무실 인테리어가 한창이어서 소음때문에

이루어진 대화 중 앞의 3시간 분량에 해당한다. 이때는 편집실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가본 사람들은 다들 감탄한다는

내부적으로 ‘이번에 다룰 주제는 시간과 관련된 어떤 것일

최욱 건축가의 집으로 가서 서재에 생수병 하나씩 놓고 마주

것’ 정도의 막연한 기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앉게 됐다. 30분 설명만 주고받기에는 애매한, 뭔가 본격적인

이룬 결과들에 비해 생각보다 적은 자료들 속에서 ‘건축가

대화가 일어나야 할 상황이 ‘돼버렸다.’ 건축가도 이야기를

최욱’이라는 사람에 대해 머리속으로 그려보기도 하고, 수잔

해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고, 그게 어쩌다보니 6시간의

손택Susan Sontag(1933 –2004)의 {해석에 반대한다} 같은

수다가 ‘돼버렸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날 때도 그랬고,

류의 글들을 읽으며 한국건축을 읽을 다른 방법의 필요성에 대해

그의 건축 작업을 이해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고민하기도 했다. 단기간에 답을 낼 일이 아닌 것 같아 이런저런

더 궁금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상대에 대해

책들만 읽다보니 또 인터뷰를 해야 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알아가는 느낌으로 대화에 임했다. ‘건축가 최욱이 만든

이날은 정말 잠깐 가서 그때까지 정리되고 있는 내용과 생각만

시간’이라는 이번 55호의 바탕에 깔려 있는 주제는 ‘최욱이라는

전달하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길어야 30분 정도? 그런데

사람’을 조금 느끼고서야 구체화될 수 있었던 기획이었다.

92 34


이중용 :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고 말씀하시는

아니 그러니까, 개인적인 세계에 몰두하기 쉬운

그런 부분은 건축가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부분

타입이죠. 모더니즘 이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1/n로서,

같거든요.

개인으로서, ‘일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인적인

최욱 :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를 다른 말로 돌리면…

자각이 전제가 된 생활이죠. 난 그 틀은 유지를 하겠다는 거예요.

Terragni(1904–1942), 그 다음에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1906–1978)가 있고요. 그런데 스카르파랑 테라니랑

네. 한국 사회는 (대체로) 그렇지 못 했죠.

인터뷰

비유를 할 게요. 이태리 건축가 중에 쥬세페 테라니Giuseppe 난 그런 태도를 유지하겠다는 거고, 그래서 스타가

거의 나이가 같아요. 2년 차이. 둘 다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죠.

되겠다고 하는 것은 자칫하면 이 사회를 굉장히 도그마틱한

쥬세페 테라니는 천재고, 카를로 스카르파는 감성적으로는

시점으로 본다고 하는 것과 동의어라고.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인생은 굉장히 달라요. 서로 바라보는 시각도 틀려요. 그러니까, 테라니는

도그마틱하다는 건 어떤…

스물여섯 살 때 무솔리니Benito Mussolini(1883–1945)를

독단적으로.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자하 하디드

찾아가요. 그리고 무솔리니한테 ‘당신에게 새로운 미학을

Zaha Hadid(1950–2016) 건축 같은 경우에 장점도 분명히

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요. 그 새로운 미학이 추상적인

있지만, 그 하나의 표현적 의도를 완성시키기 위해 희생시키는 게

수數였어요. 넘버number, 비례죠. 비례가 왜 새로운

무지하게 많거든요.

미학이냐면 데코레이션이 없잖아요. 데코레이션은 기억을 갖고 있잖아요. 귀족 취향의 기억이든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쵸.

수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관계 없이 뉴트럴neutral하다고 본

그쵸? 기능도 그렇고 자본도 그렇고…

거예요. 그래서 테라니는 완벽한 기학학적인 넘버만 가지고 프롤레탈리아든 부르주아든, 역사에서 벗어나서 무솔리니가

가디언지 인터넷판 2014년 2월 25일자 “Zaha

원하는 파시즘fascism, 민중을 위한 미학을 만들어준다고

Hadid defends Qatar World Cup role

했어요. 자, 그러면 그 대척점에 있었던 카를로 스카르파는

following migrant worker deaths” 기사에는

그걸 기회주의라고 얘기했어요. 정치, 경제, 행정의 편에

500명 이상의 인도 이주노동자들과 382명의

선 기회주의라고. 스카르파는 그런 태도 때문에 철저하게

네팔인들이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가 설계한 2022

외면당했어요. 국가로부터. 국가에서 스카르파에게 일을 안

카타르월드컵경기장 건설 과정에서 죽었다고

줬어요. 이 사람은 공공프로젝트는 없어요. 그래서 스카르파는

기록하고 있다.)

베니스에서… 유리공예 있죠? 그거 만들고 있었던 거예요.

응. 그런 것처럼. 그 건축이 나쁘다기보다는 그 건축이

인테리어 하고. 스카르파는 개인적인 삶에 몰두했어요. 개인적인

지향하는 바가 분명하기 때문에 거기에 희생되는 게 많은데,

감성, 개인적인 건축. 입장은 틀리죠. 스카르파는 테라니를

자기가 어떤 태도를 취할 거냐 하는 건 개인적인 문제가 되잖아요.

기회주의자라고 했고, 테라니는 스카르파를 개인주의자라고

한국 사회를 봤을 때 나는… 음… 자신이 안 섰어요. 어떤 경우가

봤고. 그러나 50년이 지나서 스카르파는 자기 건축을 완성해서

있었냐면… 내가 그 이야기를 할게. 아주 옛날인데, 이십몇 년

소위 말해서, 스카르파 학파를 만들었어요. 스카르파 스쿨이라고

전에 어떤 건축주가 나한테 오셨어요. 그분이 건축설계를

부르는 일종의 분위기가 형성이 됐죠. 테라니는 나중에 피터

해달라고 하시는데 요구사항이 무지하게 많더라고요. 이거

아이젠만Peter Eisenman(1932–)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묻혀

해달라 저거 해달라, 이거 고쳐달라 저거 고쳐달라. 그리고 나중에

있는 사람이었어요. 말하면 안 되는 사람. 왜냐면 무솔리니에

우리가 설계비를 요구했는데 이분이 깜짝 놀라는 거야.

동조했던 공범? 왜요? 전범 戰犯이요?

내 요구대로 했는데 왜 설계비를 받냐시더라고.

응. 전범. 이탈리아에서는 전범이죠. 피터 아이젠만이 발견하기 전까지 이탈리아에서는 금기시되는 사람이었다고.

아… (웃음)

그러니까 둘의 입장이 다르다는 걸 설명하는 거죠. 음.. 유명한

그러니까 허가방처럼, 기본적인 허가비만 받으면

게 싫다기보다는, 한국 사회 속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는 식이예요. 그게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어른들이 살아왔던

될 건가는, 도덕적인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고 개인적인 취향도

시대가 가지고 있는 건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작용할 것 같아요. 나 같은 경우에는 내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수 있잖아요. 난 그걸 특별한 케이스라고 안 봐요. 일반적인

테라니 같은 인물은 못 돼요. 공적으로 활동할 만한 사람은 못

인식이라고 봐요. 건축주, 공무원, 심의위원, 그 상황이 건축을 해야되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내 개인적인 취향도

된다고.

있겠지만 그 터전에서 스타가 된다는 것… 스타라기보다는 그러면 스카르파는 될 수 있나요?

건축의 공공성(을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난 생각도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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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사람도 많이 죽었다는 기사도 보이고… (영국

건축가

건축을 했는데, 그게 새로운 민중을 위한 미학이라고 그랬어요.


공공성보다는 본인이 추구한 방향에 대해

네…

말씀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가난한 나라는 많은데, 가난한 나라와 관념적인

그런데 그 틀(사회환경) 안에서 잘하는 방법을 모색할 INTERVIEW

거잖아요. 거기서 나오는 태도가 있는 거죠.

선비들이 만나서 완성시켜놓은 문화가 조선의 영조, 정조 시대 때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고요. 근데 그게 나는 우리들의 DNA 속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대의 미학이라는 것이 억지로

그러니까… ‘세상이 이러니까 난 이런 태도를

만든 게 아니라 굉장히 특이한 상황에서 만들어져서 100년,

취하겠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그게 건축

200년 왔는데 그게 우리가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는 거죠. 그걸

작업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느슨하게 빠져 있는

찾으면 좋겠다, 그걸 찾는 방법 중에는, 분명 우리 목수 아저씨들

느낌이랄까요?

한테도 있을 거고 철 다루는 사람한테 있을 건데, 내가 도면 그려

내가 작업을 할 때, 어떤 가치를 내세우지는 않는 것

가지고 ‘이렇게 해주세요’ 하는 건 옳지 않다, 그건 지시사항이

같아요.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했던 건 ‘한 발자국 더’였을 것

되는 거고 그냥 공사인부 취급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철작업

같아. 예를 들어서 현실적인 제약들 있잖아요? 작업을 해놓고,

하시는 분이나 목작업하시는 분이랑 일찍부터 협업을 했어요.

그 다음 번에는 좀 더 낫게 해결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2000년도 초반부터 지금까지 15년 이상을. 그분들한테 ‘이렇게

내가 생각했던 건 두 가지쯤 있는데, 하나는 퀄리티에 대한

하세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하게 된 거죠.

문제예요. 작업의 퀄리티. 그러니까 작업의 퀄리티라고 하는 것은 내가 좋게 만들고 싶은 거랑은 다른, 현실적인 문제가 있잖아요.

그때 나이가 어떻게 되셨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흔히 사람들이 좀 잘하면 ‘야, 이거 외국 거

나? 30대 후반.

ARCHITECT CHOI WOOK

같다’ 이러잖아요. 근데 그런 작업을 안 했으면 좋겠다… 어떤 말이냐면 내가 2000년 정도에 작업을 시작한 거죠. 그 전에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져 온 거군요. 보통

좀 하긴 했지만. 그때 한국 같은 경우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디자인에 대해 회의할 때 보면, 디자인이라는

들어오신 분들도 많고, <엘 크로키El Croquis>라는 잡지도

건 취향 문제가 들어가고 그건 사람마다 다

대부분 많이 봤고. 그래서 학생들이 피상적인 사진들을 보고

다르잖아요. 작업할 사람의 특징을 받아들이지

작업을 하거나 혹은 외국 유학 갔다온 분들도 아카데믹한 공부를

않고 각자들의 취향을 던지면 이야기가 엉망이 되는

하신 분보다는 디자인스쿨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좋은 작업자도 필요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상황에서 나는 어떤

작업자를 존중하는 것도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위기감을 느꼈어요.

자신이랑 안 맞아도 좀 견디는 것도 필요하고요.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 같은데 잘 못 견디는 것

어떤 건가요?

같거든요. 한국 사회는.

한국건축이 이래가지고는 정말 쓰레기통처럼

응. 그래서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언어의 짜집기만 가득할 텐데, 이게 앞으로 10년, 20년 지나서… 그러니까… 일제시대 독재시대

2000년 전후면 사회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

그런 걸 겪지 않고 일상적인 한국 건축계가 지속되어 왔다면

같은데요? 그냥 노가다…

어떤 건축사무실이 돼야 되는 건지, 그거는 내가 생각을 해야

아니었죠. 근데 그분들이 나랑 더불어서 성장했죠.

되겠더라고요. 조선시대부터 사무실이 점진적으로 발달해왔다면,

나중에 공장A 가보면 깜짝 놀랄 거야. 결과가 어떻다기보다 그런

우리는 1910년, 1920년에 어떤 모습이 됐어야 할까 같은 생각들.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조금조금씩 정리된 게 있다는 거죠. 알게

그런 생각들이 잠재적으로 있었던 거 같아요.

모르게. ‘이거다’라고 말하긴 어려운데… 그런 부분들은 내가 서울건축학교SA에서 가르쳤던 부분이기 때문에 선생으로서

1900년대 근대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의지는 갖고 있었어요. 좀 잘하면 ‘외국 거 같다’가 아닌

생각해보셨어요?

한국 사회에서 꾸준히 발전해 온 건축작업을 하는 사무실로

음… 임진왜란이 일어나잖아요? 그때 나라가 거의 불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작업이 쌓였으면 좋겠다…

탔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알기로. 김봉렬(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작업이 쌓여야 담론이 이뤄질 거 아녜요? 그래서… 이런 생각들도

총장, 1958–) 선생님이 이야기해주신 기억을 더듬어서

있었고, 우리 작업에 대해 특별한 자신감도 없었고, 때문에 내가

이야기하는데, 이 나라가 회복되는데 백 년이 걸렸대요. 임진왜란

한 십여 년 동안 발표를 못 했던 거 같아요.

전 상태로. 그랬을 적에 우리나라가 선비문화, 유교문화잖아요. 가능한 선비들의 정신은 유지가 됐을 거고, 그다음에 민중들은

자신감은 왜 없으셨어요?

가난했고 장인들은 없어졌을 거고. 일이 없어졌으니까. 나라가

자신감이라는 표현은 좀 이상했을 것 같은데…

너무 가난하니까. 그래서 선비의 정신이랑 민중의 소박한 솜씨가 만난 미학이라고 하는 건 전 세계 역사적으로 굉장히 특이한

자신감이 없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웃음)

거라고요. 내가 보기엔.

어… 이런 것 같아요. 소위 말해서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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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건축가

최 욱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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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들이 비평할 능력이 없잖아요.

쓰기도 하는데, 외부와의 소통이 굉장히 잘 된다… 그런 이야기는

INTERVIEW

해요. 그런데 내 개인적인 특징이 있을 거예요. 내가 굉장히 어렵죠. (웃음)

내부지향적인 사람이거든요. 내부에서 바깥을 보는 사람이라고,

그다음에 포토제닉한 사진만 찍잖아요. 나는 거기에

내 특징이. 어렸을 때부터. 그런 특징들이 반영되는 것 같아요.

맞설 자신이 없었어요. 내 작업은 껍데기를 잘 보여줄 자신이

그러니까 이제 나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내 손발 다

없었어. 만약에 우리 작업을 읽어줄 잡지사가 있었다면 난

묶어놔도 일할 수 있어요.

발표했을 것 같은데, 잡지사들 대부분 다 사진을 요구하더라고요. 좋은 사진. 근데 나는 그게 자신이 없었어. 사진을 보여줄 자신이

손발을 다 묶어놔도요? 음… 아까 말씀하신

없었어요.

조선시대의 정신(머리)하고 장인의 손을…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난 머리만 갖고도 일할 수 지금은 어떠세요?

있어요.

지금은 작업이 쌓였잖아요.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고. 이제는 작업을 읽으려고 노력을 하잖아요. 옛날에는 작업을

예를 들어 주신다면요?

볼려고 했거든. 지금은 때가 된 것 같아요. 우리 작업도 많이

난 굉장히 드로잉을 잘하거든. 근데 거의 안 그려요.

쌓였고. 이것이 특별한 작업이라기보다는 정성 들여서 만든

내가 그리는 거는 손톱만 한 스케치밖에 없어요.B 거의. 내가

작업이고, 그것에 대해 같이 대화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고작 그리는 게… (노트를 펼쳐서 간단한 스케치를 보여준다.)

든다고요.

요 정도 스케치. 그게 끝이에요. 우리 작업이 꽤 많이 있거든요.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와이드AR>에 나오는 것들은 아마… 5년 전에 생각했던 게 마지막일 거야.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건축이라는 게 생각에서

ARCHITECT CHOI WOOK

완공까지 5년쯤 걸리니까. 음… 아까 작업을 ‘읽는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작업을 읽는다고 할 때, 말씀하신 것처럼

‘대략 이런 느낌’ 같은 건가요? 네. 거기서 끊임없이 직원들이 그리고 나랑 교감을 이루면서 고쳐나가죠. 또 하나는, 나는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무실에서 일종의 ‘크리틱critic’이거든. 예를 들면 이 책상을 디자인할 때, 나는 단면을 다 끊으라고 그런다고요.C

눈에 보이는 걸 보기가 쉽잖아요. 읽으려고 하더라도 보통은 특징을 읽으려고 하잖아요. 이종건 교수님께서 특이성singularity 같은 걸

건물까지요? 풍경까지. 풍경까지 단면을 그어서, 이 크기, 이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 같고요. 그래서…

스케일, 얘가 빛을 받아야 될지 흡수해야 될지. 그래서 나한테는

겉으로 보여지지 않지만 내적으로 갖고 있는

이 재료가 나무가 좋은지 벽돌이 좋은지 철이 좋은지는 관심

체계라던가 특징, 그런 것들을 꾸준히 생각해오신

밖이에요.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재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것들은 있으세요? ‘line of shadow’(2011년

되는가가 중요하거든. 이 재료가 정말 빛을 요구하는지, 빛을

출간된 원오원 모노그래프 제목)나

리플렉팅시키고 싶은지, 이 재료가 단단해야 되는지, 이 재료가

‘그라운드스케이프groundscape’라는 주제를 말씀하시는데, 저는 솔직히 그게 전체 작업에서 일관되게 읽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거든요.

말랑말랑해야 되는지, 이 재료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되는지, 그 태도에 따라서 ‘그러면 우리가 이런 재료를 사용해 볼까’ 이렇게 되는 거지, 나무가 좋을까 철이 좋을까 나는 이런 생각 안 해요.

그런 게 확실히 영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요.

그러면 그 태도를 위한 기준이 있을 거 아녜요?

그건 각자의 몫 아닐까요? 소설을 쓰면 소설의

그 기준은 장소에 대한 해석에서도 나오죠.

주인공들은 각자의 삶이 있잖아요. 읽는 사람이 반응하는 거잖아요. 나는 그게 내가 규정하는 건 좀 그래. 근데 우리

보통은 사용자 입장이 아니구요?

건축주들 이야기를 들으면, 느낌에 대한 건 있대요.

사용자 입장은 나중에 충족시켜줘야 될 부분이고, 우리가 만드는 거는 사이트-스페시픽site-specific한 거잖아요.

하이 퀄리티?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건 주변 관계들을 다 포함하는

그게 아니라, 대부분 공간이 굉장히 편안하다는

이야기라서… 사진을 찍으면 평범할 수도 있어요. 그치만 전체를

이야기를 하고…

보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거? 그래서 공간이 편안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그다음에 빛에 대한 컨트롤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우리가 두꺼울 땐 굉장히 두꺼운 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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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자료들이 사진이 많던데, 이 집(부암동 주택 D ,

2014) 같은 경우도 뭔가를 찾아보려고 사진을


인터뷰

건축가

최 욱

B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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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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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CHOI WOOK

INTERVIEW


열심히 봤거든요. 입구에서부터 주로 쓰이는

만들었어요. 로마시대나 그리스시대에는 기둥을 박았어요.

재료인 벽돌, 거친 미장, 철판이 보이는데 그게

일소점투시가 생기잖아요. 일부러 만든 거라고. 일소점투시가 생기는 공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여줬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찾아보려고 했는데요. 사진으로 봐도 이미지가

평등하다며 인본주의를 강조했고, 인본주의 강조하면서 이자를

예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실제로 제가 이

받았고, 은행을 만들었고 변호사와 회계사를 만들었고, 세금을

건물에서 느꼈던 거랑은 좀 차이가 난다는 생각이

걷었죠. 다른 측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들더라고요.

음… 이야기가 딴 데로 흘렀는데… (웃음)

인터뷰

바닥과 벽으로 이어져서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을

서양건축은 그래서 파사드 중심이예요. 왜냐면

그게 나는 이런 것 같아. 그러니까, 서양의 도시들은 파사드 중심이에요. 파사드 중심이라고 하는 거는 일소점 투시가

중세시대 건축에다가 파사드를 붙였거든. 그런 건축이 많아요.

잘 생기는 공간이라고. 일소점 투시가 잘 생기는 공간이라고

중세시대 꾸불꾸불한 건축에다가 파사드를 붙이고 기둥을 박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공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머리로 눈을

투시도화법이 나타나는 공간을 만들었다고요. 근데 그 공간에서

분석해서, 눈이 보기에 가장 가까운 상태로 만들어 낸 세계라고.

사진을 찍으면 본 거랑 사진 찍은 거랑 똑같아. 거의. 왜냐하면

그러니까 투시도가… 건물이나 도시가 있고 나서 투시도가 있는

카메라가 본 것과 같은 구도로 건축물을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게 아녜요. 투시화법을 생각해내고 거기에 맞춰 건물을 지은 아.. 그렇군요.

거라고.

찍는 거랑 공간이랑 똑같아요. 똑같다기보단 그렇군요. 그러면 브루넬레스키Filippo

비슷해요. 근데 우리나라 한옥 공간을 찍으면, 안 나와. 왜냐면

Brunelleschi(1377–1446) 이전하고 이후하고는

앵글이 일소점투시가 아녜요. 우리 한국은. 그렇게 될 수가 없는

다른 건가요? (브루넬레스키는 투시도법을

거죠. 이 한옥이라는 공간은 소점 자체가 없잖아요. 흐르거나.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건축 같은 경우에는 사진 찍어서 잘 나오는 건

좀 다를 수 있죠. 브루넬레스키 이전에는 도시가

존재하지 않아요.

미로였지. 중세시대 때는. 그 미로 도시에다가 르네상스가 전통건축에서요? 제가 아까 ‘보는 건축’으로 건축잡지에 게재할

이자요? 아… 조금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그러니까 신중심사회에서는 이자의 개념이 없어요.

건축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시각적으로 읽으려고 했을 때 쉽게 안 드러나야 된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시각적인 특징이 뭐가 있냐’고 물었을 때 저는

왜요?

대답을 안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이러한

왜냐면 시간은 신에 속한 거기 때문에, 이자는 시간에

관점에 있지 않은 서양 사람들이 봤을 적에는 읽어내는 게 좀

대한 값을 받는 거잖아요. 신의 값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요.

달라요. 서양건축이랑 다르다고 느껴요. 그래서 외려 우리 사무실

그래서 중세시대 때는 이자의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르네상스

작업은 서양 사람들이 더 좋아해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문화는 상인이 만들어요. 상인은 돈이랑 직결되잖아요. 이 상인이

거죠. 안도 작업 있잖아요.

이자를 받아야 될 거 아녜요? 그래서 은행을 만들어요. 이자가 인간의 것이 되려면 인간이 시간을 컨트롤해야 돼요. 그래서

안도 타다오安藤忠雄(1941–)요?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에 하나가 광장에 시계를 다는 거예요.

서양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었어요. 왜 그러냐면,

그리고 시간이 인간의 값이 되려면 투시도가 필요한 거예요.

우리가 보면, 동양인의 시각에서 보면 괜찮지만 그렇게

그 전에도 투시도가 있었어요. 투시도화법을 끄집어내온 거죠.

대단해보이지 않거든?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거기서 동양의

일소점화법을 끄집어내오면, 사람이 앞에 있으나 뒤에 있으나

정신세계를 느껴요. 콘크리트가 아니라 콘크리트를 넘어선

1/n로 구분이 되죠? 자기 위치가 결정되잖아요. 너, 너, 너, 똑

정신을 느껴요. 서양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소위

같은 1/n인 인간이기 때문에 돈에 대한 이자의 가치도 똑 같이

말해서 젠Zen(禪 ) 같은, 물질로 사유하는 듯한 걸 느끼거든요.

매길 수 있는 거예요. 세금도 매길 수 있고. 이게 인본주의예요. 좀

그런데 우리는 그 정도까지는 못 느껴요. 그냥 좋은 건축이죠.

다르게 이야기하면.

우리한테 익숙한 건 우리가 잘 모를 수 있잖아요.

근데 일소점투시가 아닐 때도 세금은 매길 수 있지

그렇죠. 저도 그게 고민 중 하나예요.

않을까요?

그런데 나는 감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우리에게

매겼죠. 매겼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걸 철저하게 매겼다는 거죠. 그리고 광장을 만들었지. 광장을 만든 이유가, 도시들이 다 꾸불꾸불한데 광장에는 일소점투시가 생기는 건물을

낯선 느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건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편하다’ 정도가 되면 나는 성공한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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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수 없다는 건 그렇게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우리건축이, 내

건축가

시작됐어요. 소위 말해서 인간중심주의잖아요. 인간중심주의라는 말은 어떤 거냐면.. 인간이 중심이 돼야 이자 利子 를 받거든.


그러면 가령요. 스카르파 작품집하고 원오원 $ E 하고

INTERVIEW

작품집인 #line of shadow

두 권을

이제 우리 작업 같은 경우에는, 나는 디테일을 추구하지 않거든? 다만 필요한 정도의 마감, 마무리? 우리

비교해서 봤는데, 스카르파 작품집을 보면 거기도

어머니 옷에 동정 달고 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정도의 마무리.

건물 전체를 잡지 않고 공간 한 부분, 디테일

우리는 항상 옷이나 이런 것들의 끝마무리를 했다고. 내가 보는

한 부분 이런 식으로 잡아놨더라고요. 그런데

‘우리의 디테일’이라고 하는 것은 끝마무리를 위해서 접는 게

이 건축가가 디테일에 공을 들인 부분이나 공간의

필요했고 동정이 필요했던 것처럼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정도의

한 부분을 색다르게 만들어내는 것들이 확연히

디테일이었다고. 소위 말해서 일본 사람들처럼 굉장히 정교하게

잡혔는데, #line of shadow$에 있는 이미지들은

미학을 위한 미학은 없었다고요. 다만 필요한 정도의 끝마무리는

몇 컷을 제외하고는 너무 편하게, 쉽게 다가오는

있었어요. 그 끝마무리가 내 경험에 의하면, 항상 엄마들이 옷을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옆에 있는 친구가

풀었다 꿰맸다 했다고요. 그렇죠? 그럴려면 되게 쉬워야 돼요.

‘문화사대주의 아니냐’… 스카르파는 좋게 느끼고

그래서 우리 건축에서 보면, 나는 디테일이 복잡한 걸 굉장히

최욱은 너무 쉽게 느껴버리는 거는 그런 거

싫어해요. 디테일은 간단해야 된다, 눈으로 봐서 알 수 있어야

아니냐고요. 근데 그걸 반박할 수는 없는 부분인 것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디테일은 ‘눈으로 봐서 알 수

같아요.

있어야 된다’가 디테일의 전부 다예요.

문화사대주의라는 건 누가 누구에게… 늘 특징이 눈에 잘 보이잖아요. 그리고 스타 아, 제가요. 외국 작품을 보면 근사하게 느끼는

건축가들, 스타키텍트들에서 그런 게 잘 보이고요.

거요.

그래서 대체로 건축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ARCHITECT CHOI WOOK

스카르파 작업이랑 우리 작업이랑은… 스카르파가

자기 특징을 세우려고 하는 의지들이 있는 거

가르친 학교에서 랭귀지를 공부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 수는

같아요. 건축적 의지들이. 그걸 시각적으로

있어도 엄연히 다르죠.

가시화하려는 노력들을 하는 그런 게 보통이다 보니까…

그렇죠.

그런데 거꾸로 보면, 스타가 될 수 있나요?

어떻게 다르냐면 스카르파는 개인 랭귀지가 무지무지하게 강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스카르파의 어떤

아니, 스타가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요.

책을 봤는지 모르지만, 스카르파는 누가 책을 만들었느냐에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은, 스타라고 하는

따라서 책이 달라요. 스카르파 디테일을 영국 사람들이 무지

건 스타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이 필요로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좋아했었어요. 스카르파 모든 디테일과 도면을 다시 그린 게 영국

가장 쉬운 건 만들어진 스타… 그러니까 건축물이 지금은

사람들이예요. 스카르파는 디테일을 그린 적 없어요. 스카르파는

광고판이라고요. 그쵸?

디테일을 안 그렸다고요. 스카르파는 스케치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걸 현장에서 아주 고민해서 풀었고. 스카르파는 디테일을

그쵸.

섬세하게 사진으로 찍으면 디테일이 보이지만, 스카르파가

건축물이 광고판인데, 그러면 어떤 사람을 쓰겠냐는

창을 냈을 때 그 창에는 디테일이 없어요. 바깥 풍경이 있어요.

건데, 그 상황에서 어린 스타는 안 키워질 수밖에 없어요. 어린

바깥 풍경을 잘 보기 위해서 디테일이 필요했던 거죠. 디테일이

스타를 키우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겠죠. 있는 스타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다만 책에 따라서 디테일을 집중한 사람이 있지.

제일 빠른 거죠.

근데 스카르파의 본래 목적은 아니거든요. 맞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부분의 스타들은 30년 전에도

프레임하고 디테일의 관계…

스타고 지금도 스타고 그중에 끼어든 사람이 몇 있나 보세요.

네. 스카르파는 디테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거의 없어요. 지금 유명한 사람은 30년 전에도 유명했었어요.

스카르파 건축의 본질도 아니고. 다만 그렇게 보려고 했던 사람만

다만 책에서 무명이었다고 얘기할 뿐이죠. 어떤 책에서

존재하는 거죠. 제가 전에 얘기했던 준 아오키青木淳(1956–)랑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1946–)가 유태인

똑같은 거죠. 준 아오키가 디테일을 잘 만드는 사람이지만

박물관(1999)하기 전에 무명이었다고 하던데, 아냐, 그 이전에도

디테일이 목적이 아니라고요. 디테일은 따라오는 과정이었죠.

무지하게 유명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르파는 지독한 디테일 때문에 전체 공간이 덜 읽히는 부분은 있어요. 스카르파는 디테일에 몰두했던 사람은 아니라는 거, 다만 스카르파가 활동했던 베니스라는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로 유명했었죠. 굉장히 유명했죠. 그러니까 이미 스타의 잠재성이…

장소가 워낙 뛰어난 장인들이 많고 돈이 많기 때문에, 스카르파

매체에서도 유명했었고. 그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되면서

취향도 그렇고, 만들어질 수 있는 궁합이 맞았던 거죠.

자본주의와 결탁해서 온 거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의 속성을

100 34


인터뷰

건축가

최 욱

E

101 35


ARCHITECT CHOI WOOK

F

G

102 34

INTERVIEW


잘 파악을 하면 이 한국사회 규모의 시장에서 따져보면 굉장히

하나의 스토리, 긴 이야기?

이거는 가망성이 없는 이야기예요. 안될 이야기라고. 너무나

길든 짧든 하나의 스토리. 나는 그게 장기적인

순진한 이야기라고.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냥 ‘내 생각’이고, 그게 중간에 끝날지 길어질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우리 사무실 작업은 변화가 있어요. 세상에 신경을 안 쓴다고. 바깥 세상의 변화에 기웃거리지

그러니까 그거가 목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걸

않는다고요. 그렇지만 우리의 목적하는 바는 조금씩 이루어가죠.

흉내 낸다고 하는 건 그러니까… 까만 아이가 하얀 아이 되려는

이 상황에서 쓸데없는 짓 하는 것보다는 내적으로 퀄리티 있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 싶어요.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겠다, 그래서 사회적인 상황이 조금 바뀌면

인터뷰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웃음)

좀 더 퍼블릭한 작업 쪽으로 진행하겠다… 하고 있잖아요. 가파도 그렇군요. 뭔가 설명이 굉장히 쉬운데요. (웃음)

프로젝트F (2017)도 마찬가지고, (구)서울시장공관G (2016)도

쉽게 생각을 바꿔줄 것 같은 설명이에요. 중요한

마찬가지고. (구)서울시장공관 같은 경우는 입찰 과정을 똑같이

부분인 것 같아요.

했는데 퀄리티는 높다고요. 그게 일반 입찰한 거라고요. 우리의

그래서 자본주의… 상황이 아니었으면 우린 다른

성과라고 볼 수 있죠.

생각을 또 할 수도 있어요. 다른 상황이면 다른 꿈을 꾸죠. 건축은 사회 상황이랑 밀접하잖아요. 북한에서 자기가 렘 콜하스Rem

그렇군요. 그게 예전 같으면 되기 어려운 거죠. 될

Koolhaas(1944–)처럼 되고 싶다고 하면은 어리석다고 보지

거라고 판단하시고 진행하신 거예요? 사회가 이

않겠어요? 그 사회가 조건이 아닌데. 왜냐면 자본주의가 되어야

정도는 받아들이겠구나…

지금의 렘 콜하스 나올 텐데, 그런 거죠. 사회가 달라지면 다른

그렇죠. 열어보는 거죠. 우리나라 입찰 알잖아요.

건축이 가능해지겠죠. 사회 상황이랑 자기 미래랑 명민하게

도면 안 보고 입찰하는 거, 최저입찰.

상호판단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왜… 최저가 最低價 입찰이요. (웃음) 말도 안 되는… 우리랑 사회 상황이 다른 건축가들의 모습을

사회가 허용하는 한 그걸 열어가는 거고, 그렇게 공공에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거고, 그건 건축가로서의 역할일

그들을 따라서 한다고 하는 건…

거고. 그리고 사회가 조금 더 열리면… 점프하겠죠.

내 생각엔 굉장히 어리석다고 보는 거죠.

최 욱

어리석다?

어떻게 점프할까요? 우리? 아마… 그러니까 이런 거죠. 좋은 퀄리티의 작업은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군요. 그러면 최욱 선생님 또래 세대분들 중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의 롤 모델들을 바라보는 분들이 많죠? 많죠. 그런데 그건 내 해석이고, 다른 사람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으니까. (웃음)

지금까지 계속 준비해오고 경험해오셨으니까요. 나는 우리 사무실 퀄리티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생각을 한다고요. 작업의 퀄리티는. 그 다음에 한국적인 미학에 대해서 그래도 우리가 놓치지 않고 왔으니까 거기에 대한 생각은 지속할 것 같아요. 퀄리티와 한국적 미학은 지속할 거고, 그게

아니 저는 최욱 선생님이 궁금한 거니까, 그런

기회가 되면 좀 더 우리 개인적인 생각들이 담긴 건축으로 가겠죠.

관점은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은 그 나름대로 꿈을 밀고 가시는 분들도 계신 거고.

그러면 사회 상황이 어느 정도 열렸을 때 그때 어떤

그러니까 내 일차적인 목표는 두 가지였어요. 이

식으로 될 건지 상 像이 어느 정도 지금 있으신

땅에, 조선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적으로 이상한 상황을 안

거예요? 아니면 그런 상황이 닥치면 변해가는

겪고 건축이 성장했으면 건축사무실은 어떤 모습이 될까. 그게 한

건가요?

꼭지가 있고, 그다음에 지금 현실에서 대부분 서양 같은 작업에

음… 우리가 못 보여준 작업이 많잖아요. 이미 그

몰두를 하니, 단순한 작업이라도 우리 작업이 쌓여서 이야기꺼리, 담론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

작업만 해도 굉장해요. 근데 그게 이제 좀 큰 규모로 대중화되는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그 정도 퀄리티가 대중으로 돌아갔을 때 그건 굉장한 파급력이 있겠죠. 지금은 개인적인 범위 내에

그런 게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인

있는데, 그 생각을 한다고요. 지금까지는 사실 건축주의 입장을

것 같은데요.

많이 수용하는 입장이었어요. 수용하면서 퀄리티를 높였고.

나는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가 바라보는

건축사무실이 유명해져야 되는 이유는… 건축사무실은 반드시

인생이라는 게 단편 소설이 아니라고. 그냥 하나의 스토리.

건축가

꿈꾸는가…

유명해져야 돼요.

103 35


INTERVIEW

왜요?

했던 것 같아요. 건축 공부는 좋아서 했는데, 난 건축가가 될

그래야 권위도 생기고, 그래야 건축주도 수긍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내가 건축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건

하는데, 우리 사무실은… 건축주랑은 상당 부분 타협해 온

건축을 싫어했던 건 아니에요. 근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나라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가 퀄리티는 안 놓치고 온 거라고요.

건축계가 보이잖아요. 내가 이 틈바구니에서 잘 살 수 있는

한국에서 퀄리티를 안 놓치는 게 쉽지 않은데, 이 퀄리티에다가

인간성도 아닌 거 같고… 내가 생각보다 섬세하거든. 예민하거든.

우리가 조금 더 사회적인 권위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믿었겠죠. 그때는. 하고 싶은

무궁무진하겠죠. 조금 더 우리가 성장을 한다면, 우리가 갖고

것도 많을 수 있고. 그때 나이가 삼십 중후반이었는데, 이제 뭘

있는 것만 펼쳐도 대단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하나 하면은 몰두해서 가야 될 것 같은데, 정말 내가 어떤 태도로 가야 할지가 망설여지더라고. 그게 건축이라는 확신도 없었고.

그렇게 되기까지 20여년 된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그때 우리 사무실 직원이 서른 명이었어요.

원오원?

그만두기 전에.

네.

98년 쯤 쉬시기 전에요? 서른 중반에 그 정도

옛날 파트너 형식으로 한 거 빼고 원오원만 17년째.

규모라면… 굉장히 큰 사무실이었죠. 그때 파트너십으로 둘이서

17년이라… 굉장한 것 같은데요.

같이 운영했으니까. 근데 그때, 서른 명 규모라고 하는 건 싫은

뭐… 시간은 가는 거니까.

일 좋은 일 다 할 때였거든요. 어리니까 개발 일도 하고 그럴

ARCHITECT CHOI WOOK

수밖에 없었죠. 그 상황에서 내 머릿속엔 인포메이션밖에 없는 것 사무실 오픈할 때 직원은 몇 명이셨어요?

같았어요. 나는 없고. 음… 건축에 대한 갈등도 있었겠네요. 내

2000년부터 이야기하죠. 그 전 사무실은 빼고. 그때

머릿속에 수많은 정보들밖에 없다는 거,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우리는 두세 명으로 시작했어요. 나는 사실 2000년도에 사무실

살아야 하나… 때문에 2년 동안 놀았죠. 판판이 놀았지. 놀고,

시작할 때, 그 전에 2년 동안 내가 놀았어요.

2년이 지나도 해결이 없더라고요. 해결이 없어서 ‘껴안자’가 된 거예요. 이 상황을. 헤매는 것도 내 인생이니 껴안는 수밖에

전에 말씀하셨죠. 2년 놀았더니 6년 논 효과가

없겠다… 그러면 정리할 겸 책이라도 좀 써보자, 그래서 사무실을

나타났다고요. (웃음)

차렸는데 일이 들어오는 거예요. 계속, 지금까지.

응. 그때 건축책은 전혀 안 봤어요. 머리를 비울려고. 건축 할 생각도 없었고.

책 써보자고 설계사무실을 차렸는데 계속 일이 들어온 거예요? (웃음)

와인바도 하시고, 건축계를 떠났다는 소문 들은 적

응. 그래가지고 지금까지 있는 거예요. 사무실을

있었는데요.

급히 만들었잖아요? 그때 만든 이름이 ‘스튜디오 최욱’이었어요.

건축계를 떠난 게 아니라, 음…

그리고 ‘아차, 실수했다’ 싶어서 바꾼 거야. ‘원오원’으로. (웃음)

그때 어떤 소문이 있었냐면요. 저는 원오원을 잘

그게 2000년이셨어요?

모를 땐데 누가 ‘원오원’, ‘최욱’ 이런 이야기를

2000년.

하길래 ‘거기 어때?’ 하고 물었더니 ‘거기 소장님은 디자인 안 하신대. 와인 파신대.’ 그런 이야기를

두세 명으로 시작하시고 직원이 순식간에 느셨어요?

하더라고요. (웃음) 그 소문을 2000년대 초반에

꾸준히 늘었죠. 일이 생기니까. 우리는 지속적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직원이 늘어 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설계사무실이… 내가 옛날에

건축을 떠났다 안 떠났다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일할 적에 김병현 선생님이, 장건축에 김병현(1937–)이라는 분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굉장히 컸죠. 그러니까 음… 사회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는 건가요? 사회에 대한 고민은 아닌 것 같고 개인적인 갈등,

계세요. 창조건축 대표님…? 네. 그분이 장건축 대표님이셨으니까. 김병현

내 개인적인 삶에 대한 갈증,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건 굉장히

선생님이 얘기해주셨는데, 설계사무실은 열 명까지 만들어놓기

퍼스널한 거예요. 그 고민이 해결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렵대요. 미국 예를 드시는데, 3년 안에 거의 다 망한대요.

건축을 계속 해야 될지에 대한 자신도 없었고.

5년을 버티면 10년을 버틸 수 있대요. 자, 5년을 버틴 다음에 직원을 열 명까지 키우면, 프로젝트가 세 개가 움직여야 되는

너무 열심히 사셨어요? 그 전에?

거래요. 프로젝트 세 개가 움직여야 한다고 하는 건 클라이언트가

으으응.(부정) 어떻게 사는 게 옳을까에 대한 생각을

무지하게 많이 축적이 돼야 되는 거라고요. 한 클라이언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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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 사무실은 꾸준히 간대요.

아, 맞아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이 한국이랑은 좀 다른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 말이 참

건축가에 대한 피겨, 상을 만드는 게 되게 중요해요.

맞다 싶기도 하더라고요. 우리(원오원)가 2000년에 차려서 5년 그러면 사회가 그걸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조그만 프로젝트들을 하다가, 그분들의 회사 일들이

개인적으로 계속 만드신 거세요?

연결되고, 그러면서 인원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직원이 열 명에서

그걸 만들어나가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인터뷰

좀 더 지난 뒤에 열 명쯤 됐거든. 건축주들도 서서히 만들어지고,

스무 명, 이십 명에서 사십 명, 이렇게 늘어난 거죠. 건축가 개개인이? 꾸준히 일이 있으신 거잖아요. 한 클라이언트가 집을

개개인이. 그래야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이미지를

여러 채 짓는 게 아니니까, 대단한 것 같은데요? 그걸

갖겠죠. ‘건축가라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구나.’ 그러니까

일정하게…

예를 들어서 우리 사무실이 직원식당도 만드는데, 외국에는 더러

운도 좋았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내가 경영을 잘

있는데, 가장 큰 거는 뭐냐면은 직원들이 훌륭한 건축주의 작업을

한다고 그랬잖아요. (웃음)

해주는데 이 사람들은 바빠서…

그렇군요. (웃음) ‘일이 필요한데…’ 그러면 일이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웃음)

들어오고 그러셨나요?

편의점에서 먹거나 그래요. 그건 안 되는 거잖아요.

하여튼 일이 꾸준히 들어왔었어요. 그건 내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직원들이 좋은 공간에서

최욱 선생님의 매력은 뭔가요? (웃음)

일하고 좋은 가구를 접하고 있고 좋은 음식을 먹고 하는

클라이언트한테 선생님의 매력?

거는 당연히 필요하다고요. 내 입장에서 보면은. 나는 그걸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거.

제공해주려고 노력하는 거고요. 근데 그게 건축가의 이미지를

그렇군요. 저는 그 부분을 잡지 만들면서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네 분 정도 건축가를 뵈니까… 저는

어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실 거 아녜요.

결과물 하나 잘 만들려고는 애쓰는데 막상 제 주변을

그거죠. 좋은 결과 만드는 거. 그러니까 이제…

좋은 걸로 채우고 있나를 생각해보면, 항상 너무

건축주 말 잘 들으면 집장사가 되는 거고, 그치만 적절한 선에서

급하고 대충대충이에요. 뭔가 조금씩 상황 자체를

같이 호흡을 하는 거거든요. 그 조율을 잘 하겠죠. 적절하게

바꿔나가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딱,

우리가 의견 제시해야 될 때, 또 건축주 의견이라고 하는 것이

선생님이 그런 스타일이신 것 같은데요?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맞지 않은 것도 있을 거잖아요.

난 우리 직원들이 좋은 공간을 써야 된다고 생각해요. 건축주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좋은 환경 제공하려고 하고.

그렇겠죠. 그런 상황에서라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율, 그런 것들을 비교적 잘 하지 않나 싶어요.

혹시 업무시간 같은 건 어떠세요? 나는 별로 강요하는 건 없어요. 강요하는 건 없는데 일 때문에, 또 우리 일이 프로페셔널한 일이니까요. 자기가 자기를

클라이언트 상대하면서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게

위해서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한테는 굉장히 괴로운 일… 괴로운 일이죠. 특히 한국에서는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죠.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게, 건축가의 피겨figure예요.

어쨌든 결과는 내야 하니까요. 응.

건축가의 모습. 우리는 없잖아요. 어떤 분야에 가면 결과를 낼 능력은 없는데 그쵸. (웃음) 전문가로서의 존중이 없죠.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시간은 찾고 싶어하고…

건축뿐만은 아니예요. 모든 분야가 마찬가진데,

굉장히 트러블이 있던데요.

특히 유교사회기 때문에 소위 말해서 ‘사’자 붙은 판검사에 대한

조율하는 게 어렵죠.

존중은 좀 더 있을지 몰라도, ‘사’자는 똑같지만 건축가에 대한 존경은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약해요. 약하다고 하는 것은 소위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으실 것 같으세요?

말해서 건축가에 대한 이미지를 못 갖고 있는 거예요.

어떨 때?

105 35

최 욱

그런데 이제 남의 말을 잘 들어주지만,

건축가

만드는 거기도 하겠죠. 나는 그래서 하는 거예요. 잘 들어주는 거요?


결과를 낼 능력은 안 되는데 일반적인 사회의 기준

보여주시는 거세요?

안에서만 일하고 싶어할 때.

그렇죠. 그게 현실이 되는 거죠.

내보내야죠. 일반적인 기준으로. INTERVIEW

아,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원오원이라는 조직이 그렇군요. 저도 자문을 좀 받아야 될 것 같은데요.

머리, 손, 뱃속도 있고… 하나가 유기체로 조직돼

(웃음)

있는 구성?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웃음) 그런 어려운 점이 있죠. 나는 강제하진 않아요.

그렇죠. 우리 사무실이.

그치만 분위기로 유도하죠. 근데 그 분위기에 안 맞으면 할 수 없는 거죠. 그치만 내가 공감대도 안 만들어주고 탓하기는

근데 그게 (처음 사무실 방문했을 때) 지나가면서 한

어렵죠. 일반적인 사회현상은 이렇더라도 내 기준은 이렇다는

번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 짜여져 있다는

거를 보여줄 필요는 있죠. 근데 내 기준을 보여줘야지, 내 기준을

느낌이 드는 거예요. 다른 사무실들 다니면서 느낀

말로 설명하면 안돼. 그냥 느끼게 만들어줘야지. 그러니까 예를

거랑은 좀 달라서… 그게 굉장히 특징인 것 같기도

들어서 우리 사무실 홈페이지에 보면은 미래에 이뤄질 프로젝트는

하고.

거의 없어요.

그런 느낌이… 든다면 맞겠죠.

미래에 이뤄질 프로젝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잡지 작업 때문에 다른 사무실들도 한두 달씩

된 거 밖에 없어요. 완성작밖에 없다고. 근데 그건 내

다니는데…

철칙이예요.

그러니까 사무실마다 분위기가 있거든요. 나는 알도 로시Aldo Rossi(1931–1997) 사무실은 안 가봤는데, 알도 로시

네… 뉴스도 2년 전 거까지 밖에 없던데요. (웃음)

사무실은 밀라노 옛날 건물에 있었다는데 초인종을 못 찾는대요.

ARCHITECT CHOI WOOK

어, (웃음) 그건 게을러서 그런 거고. 그러니까 된 것만 보여주자 이면에는, 건축사무실은 한 5년에서 7년 정도가

아, (웃음) 일부러 숨겨놓은 건가요?

쌓여 있다는 거예요. 진행되는 것들이. 거의 그렇거든요. 나의

조그맣고. 폰트로 보면 12폰트 정도? Aldo Rossi…

결벽증적인 태도도 있는데, 직원들한테도 나는 꿈을 이야기 안 해요. 이걸 할거라고 밖에 이야기 안 해요. ‘우리 미래에 이런 걸

정말요?

꿈꾸자’는 소리 절대 안 해요.

그래서 벨을 못 찾는대요. 사무실 들어가면 깜짝 놀란대요. 아무도 웰커밍을 안 한대. 다 일만 하고 있대. 그것도

사무실을 운영해오시면서요. 본인이 추구하시는

금발들이. 하얀 옷을 입고. 숏컷트 다 하고. 그건 독특한

좀 더 나은 건축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공방이든

취향이죠. 알도 로시의. 들은 이야기라서 사실인지 아닌지

직원이든 공간이든 계속 만드셨을 거 아니세요?

모르겠는데. 또 뭐, 마이어Richard Meier(1934–) 사무실은

제일 어려웠던 게 뭐였어요? 나아가는 과정에서요.

마이어대로의 분위기가 있잖아요. 결벽증 비슷한 하얀 테이블에,

음… 된 것만 보여주지만 꿈은 같이 꿔야 되거든요.

전부 하얗지. 사무실마다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거고, 근데 우리

그렇잖아요. 된 것만 보여주는 건 우리의 현실이고, 현실을

사무실은… 모르겠어요. 옛날에도… 내가 옛날에 직원들

이끌어가려면 꿈을 꿔야 되거든요. 소위 말해서 사무실

많았다고 했잖아요. 그때도 ‘절간이냐’ 그랬거든요. 사람들이.

직원들이랑 헤더들이랑 공감대적인 꿈을 공유하는 건 제일

외국 사람들이 우리 사무실 들어오면 젠Zen(禪 ), 그런 냄새가

어려운 일… 꿈을 꿔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스티브 잡스와

난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조용하다고. 일정한 분위기가 있어요.

워즈니악이 같이, 다른 인간이지만 같은 꿈을 꿨기 때문에 그런

옛날에서부터.

일들이 가능했던 거잖아요. 그런 사람을 찾고, 같이 꿈을 꾸고 선생님이 좋아하는 분위기세요?

키워나가는 게 제일 어렵죠.

그렇겠죠. 어쩌면은 내가 만든 분위기일 수도 있죠. 아니, 머리만 있어도 일 하실 수 있다는 최욱

은연중에. 사무실을 항상 꾸몄으니까. 옛날 사무실도 처음부터

선생님도 그건 힘드신 부분이네요.

가구도 내가 다 만들었으니까. 이십몇 년 전에도, 삼십몇 년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힘들지만 중요한 거.

전에도.

거기에 가장 많은 내 시간을 들이는 거예요. 꿈꾸는 거에. 현실만 보여주지만 꿈꾸는 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죠. 그게 미래로

그런 것들이 중요하죠?

끌고 나가는 동력이니까.

중요하죠.

그러면 본인이 꿈꾸고 스터디하는 그런 것들은

자기 환경을 만들어가는 게요. 저는 그런 걸 모르고

프로젝트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조금씩

지나온 것 같아요. 그 부분을. 나중에 보니까

34 106


그렇더라구요.

그런데 학창 시절에는 그런 생각 잘 못할 것

내가 뭘 만드는 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모형을 내가

같은데요?

잘 만들거든.

내 인생이 아까워서. (웃음) 인생이 아깝다고 생각하셨어요? 어릴 때 ‘잘

만들어’ 그러는데 막상 하고 계신 게 없으세요.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은 해도 ‘박물관에 들어갈

(웃음) 예전 결과물들이 좀 있으세요?

정도로 만들어야지’ 이런 기준을 갖기는 쉽지

(진열된 모형을 가리키며) 저기 다 있는 게

않잖아요. 그런 분들 잘 못 본 것 같아요. 가치 기준

그거잖아요. 저거는 삼십몇 년 전에 만든 거.H

인터뷰

근데 건축가 선생님들 뵈면 ‘나는 잘 그려, 잘

자체가 되게 높게 설정된 것 같은데요? 내 논문 지도교수가 있어요. 이탈리아에. 이 분이

학교 있을 때요?

나를 되게 좋게 평가했어요. ‘너 정말 잘한다. 대단하다.’ 그런데

응. 다 분해되는 거예요. 내가 만든 모형들은 삼십

선생님이 자기 드로잉을 보여주는데 깜짝 놀랐어요.

년이 지나도 끄떡도 안 해요. 거의 다. 그대로 남아 있어요. 왜요? 휘거나 그러지도 않아요? 거의. 그러니까 나는 내가 요즘은 잘 안 만드는데, 음… 박물관에 들어간다 생각하고 만들어요. 드로잉도.

너무너무나 훌륭해서. 이 사람이 나를 칭찬한 거는

‘네 수준에서 보면 잘 한다’였어요. 선생은 자기 수준을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서 나한테, 어느 날 내가 드로잉하는데 잘했대요. 근데 이걸로 책은 못 만든대요. 돋보기로 딱 대보더니, 예를

오… 정말요?

들어서 점선이 확대해 보면 지저분하게 보인대요. 이렇게

응.

드로잉하면 안 된대요. ‘네 드로잉은 책으로 인쇄될 정도까지…’, 그 당시에는 컴퓨터라는 게 없었으니까요. 필름을 떴으니까요.

신문 잘라서 만든 사람도 만드신 거예요?

큐비즘 아니고 약간 코르뷔지에 드로잉 같은…

그래도 그런 이야기 들었다고 그렇게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맞아요. 퓨… 퓨리즘Furism이라고 했던? 퓨리즘. 코르뷔지에 드로잉을 좀 더 입체적으로

누구한테나 말을 귀담아 듣는 게 아니라 ‘자기의 순간’이 있죠.

(표현한 거예요). 난 코르뷔지에도 많이 공부했으니까. 저기 오른쪽에 있는 모형 두 개 있죠. 저런 모형을 하루에 하나씩 만들

그렇죠. 가장 위기는 언제셨어요?

수 있거든. 내가 작업하는 방식이 좀 독특하다기보다도, 한국을

위기? 고3.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요? 가고 싶은 학교가 없어서요? 한국이요? 응. 한국 목수들이 어떻게 작업했을까에 대한 생각.

아니 아니 아니. 가고 싶은 데는 있었죠. 그… 음… 어렸을 때는 자기가 뭘 잘하는지 모르잖아요. 나도 몰랐고. 내가

우리는 위로 쌓아올라가는 거는 타이폴로지가 있잖아요. 한옥

그림을 그릴까 했을 적에도 정말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지, 뭐

같은 경우에는. 그러면 배치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러면

학교에서 그림 점수는 제일 좋았어요. 근데 뭔가를 집중을 하고

배치하는 순간에 바람은 어떻게 통하고 빛은 어떻게 들어올까가

싶은데 집중이 안 됐어요. 그때 빠져 있었던 게 백남준이었어요.

제일 중요하잖아요. 땅을 점유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나는

그래서 ‘독일로 가야겠다’, 백남준 선생이 독일에서 활동하고

배치도가 제일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치도에다가 빛이나

계셨거든요. 뮌헨이나 그쪽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죠.

바람이 들어올 길을 딱 정해놓고, 위로 쌓아올리는 건 굉장히

난 그때 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면 독일로 유학을 못

코르뷔지안, 그건 모듈이 있으니까, 그대로 쌓아올리는 거거든.

간다는 걸 몰랐어. 학제가 틀려서 대학교 2년을 마치면 고등학교

그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밑에서 쌓아올리는 작업은…

졸업자가 되는 거예요. 유럽 기준에.

가만있자… (자료를 찾는다.) 아, 그렇군요. 박물관에 남길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학제가 2년이 틀려요. 독일로 갔으면 좋겠다는

학창시절부터 하신 거예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건축을 싫어하진 않았는데, 뭐 건축도

그쵸.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워낙 머릿속에 뱅뱅 돌았죠. 내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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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큐비즘Cubism 이런 건가요?

건축가

코르뷔지에? 응. 코너에 인형들 다 내가 만든 거예요.

‘이게 확대해도 네 드로잉이 책으로 인쇄될 만큼 해야 돼’, 그래서 (지금까지) 내 드로잉이 남아 있는 거예요.I 상당히 많은 드로잉들이.


ARCHITECT CHOI WOOK

H I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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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잘 할 수 있는지 모르니까. 그래서 뭐, 저런 사람도 있으니 저렇게

고3 때요?

되면 좋겠다…

응. 그때가 나한테는… 가슴이 아픈 건 벽에 부딪혔기 때문인가요, 뭔가를

백남준. 그래서 독일로 가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깨달았기 때문인가요?

있었죠. 근데 한국에서 대학은 들어가야 되잖아요.

두 개 다겠죠. 그 감정 상태는 내가 딱 뭐라고

인터뷰

저런 사람?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절벽에 서 있는 느낌? 그때는 자기 세계 그건 언제 아셨어요? 대학은 가야 된다는 걸?

밖에 안 보이니까 자기가 잘나지 않았겠어요? 근데 그 상황에서

저항을 하다가, 미대로 간다고… 내가 고2 때부턴가

부딪힌 사회가 너무나 컸었어요.

공부를 안 했어요. 공부를 안 했더니, 미술 선생님이 오더니 공부 안 해도 서울대 갈 수 있대요. 난 그때는 생각도 안 했어요. 우리

그래서 홍대 건축과로 가시는데, 그때도 독일로

집안 분위기에서. 근데 어느 날 미대가 가고 싶더라고요. 어느 날

가실 걸 생각하고 가셨어요?

갑자기. 그래서 굉장히 혼나고.

네. 그때 복잡했죠. 군대 문제도 있었고. 대학교

2학년을 마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독일로 가려면. 집안에서요?

대학교 2학년 말 쯤에 홍대 선배 한 분이 ‘너 2년만 더하면

응. 반항심도 있었고, 그래서 내가 책을 다

졸업하는데…’ 그건 진심어리게 충고하신 거예요. ‘건축 안 해도

없애버린거예요.

좋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하면서 나한테 이야기해주셨죠. 그래서 학교에 좀 더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2학년

교과서 같은 것들요?

마치고 (독일로) 가기도 굉장히 어려웠거든. 군대도 그렇고

교과서만 있었어요. 왜냐하면 학교에 들고 가야

외국을 간다는 게… 그 당시는 해외여행자유화가 안 됐었잖아요.

안 맞으니까요. 교과서를 다 잘라갖고 나눠서 들고 간 거예요.

(우리나라의 해외여행자유화는 1989년 시행되었다.) 그리고

학교에. 가방 가볍게 몇 페이지씩만 들고 간 거죠. 그리고 우리

졸업작품 걸자마자 갔죠. 그러면 11월 정도?

하겠더라고. 그래서 교감선생님한테 갔죠. 본고사반 다닐 수 없다

1월 16일. 그때는 졸업작품을 12월 말에 걸었거든요.

했더니 난리가 났어요. ‘너 같은 놈 처음 봤다’셨어요. 그 후로 내 코스가 어땠냐면 종로서적, 그다음에 국립극장이 내 코스가

독일로 안 가시고 이탈리아로 가셨어요?

된 거예요. 종로서적에서 책을 보고, 국립극장 가서 무용이든

그때… 이탈리아에 친척 형님이 계셨어요. 그게

음악공연이든 보는 게 내 하루 일과였어요. 그러다가 입시가

편해서 사실은 갔어요.

다가오잖아요. 그때… ‘아차’ 싶었죠. 내가 고3 때 사회를 느낀 것 같아요.

이탈리아로 가서 베니스건축대학으로 바로 연결이 되신 거예요? 사회를요? 홍대 건축과 가고 싶어했으니까 그건 문제가 안

아니 아니. 미술대학으로 입학허가서를 받아서 갔어요. 가서 고민을 했죠. 군 미필이라는 것도 있었고. 그

되는데… 고2 때 홍대 건축과를 적어냈는데 그것도 이유가

당시에 군 미필은 여권이 연장이 안 됐어요. 다 통제하고 있어서

있어요. 홍대 건축과로 가면은 최소한 대학교 2학년까지 내

단수 여권이었어요. 2년마다 한 번씩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

머리가 굳지는 않겠다 싶었어요. 이과였거든? 당시 이과에서

검사해서 도장 찍어주는 거요. 그 부담도 있었고, 나는 건축과도

갈 수 있는 가장 소프트한 학과가 홍대 건축과였어요. 그래서

안 가고 싶었어요. 이태리 갔을 적에는. 영화학교 가고 싶었죠.

빨리 (독일로) 도망가야지 생각을 했었는데, 했는데… 내가 그것

영화, 무대미술 이런 쪽으로. 그런데 영화학교가 없더라고요.

때문에 삼십 대 후반에도 갈등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막상 가서 보니까. (웃음) 막 시간만 지나가는 거예요. 언어를

있었던 거예요.

배우면서 내가 어디로 가야 되나 생각을 하는데, 나는 시간이 정말 황금이었으니까, 군대 때문에. 근데 우리 사촌 형님이 알도 로시가

소 머리 끊고 피아노 깨고 하러 독일로… (웃음)

있는 학교가 어떻겠냐. 그 학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대요.

뭐… 여러 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거 아녜요. 거기에 대한 갈등이 있었던 거죠. 내가 건축주랑 타협을

사촌 형님이라는 분도 건축과 관련 있으셨어요?

잘한다고 했잖아요. 상대방의 기준에 맞춰놓고 조금 더 가는

무대미술. 그러면서 로시한테 전화해줄까

거, 사회가 변할 때까지 기다려서 조금 더 가는 거. 그때 내가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데 로시한테

뭐랄까… 가슴이 아프더라고.

전화했더니 비서가 받았는데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로시는 외국 다니고 있을 때예요. 다음에 연락해줄 테니 어쨌든 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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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그때 본고사반을 가면은 두 시간 수업을 더 해야 돼요. 난 못

건축가

때 본고사반이 있었어요. 나도 본고사반이었거든요. 서울대반.


어떻게 졸업하셨어요?

가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베니스로… 갔죠.

난 굉장히 빨리 졸업했죠. 그러면 다른 곳에서 1년 정도 있다가… 그러니까요. 신기한데요? 간파하셨나요? 그 사회의

INTERVIEW

아니 아니. 한국에서 유학을 가려면 초청장이 있어야 돼요. 그 당시에는. 미대에서 초청을 했죠. 그런데 내가 입학을

수준을? (웃음)

안 했죠. 언어를 좀 배우고 있다가 어느 학교를 가야 할지 고민을

군대 때문에 (웃음) 방법이 없으니 잽싸게

했었어요. 영화도 찍고 싶고 별생각이 다 있었는데, 그때 ‘알도

졸업해버렸지. (웃음)

로시가 가르치는 학교가 어떻겠느냐’, 이 사람은 무대미술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건축도 하고 등등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교고

하고 싶다고 되는 거 아닐 텐데…

그래서 베니스건축대학으로 입학한 거예요.

운도 좋았고요. 나는 배수의 진을 칠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 갔을 때 베니스대학의 총장 비서가 날 도와줬어요. 그때

초청장이 왔나요?

총장이면 높은 사람, 장관급이죠. 그때 동양인 유학생이 몇 명

시험 봤죠. 한 번 떨어지고, 한 달 뒤에 다시

있었는데 한국 학생은 내가 처음이었고, 일본 학생 몇 명 있었는데

시험봤어요.

정식 학위 과정에 다 없었어요. 대부분 다 청강 과정이었어요. 근데 내가 딱 들어갔는데 한국 사람이 처음 왔거든?

그게 가능해요?

황당하잖아요. 좀 불쌍하게 보였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가능했었어요. 당시 베니스건축대학은

총장님이 자기 비서를 통해 내 편의를 많이 봐줬죠. 학제 면제

입학 인원은 제한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학교가

받는 것도 굉장히 많이 도와줬어요. 내가 당시에 운이 좋았다고 볼

좌파 학교거든요. 알도 로시가 볼셰비키 당원이잖아요.

수 있는 거고, 뭐 급하니까 나는, 남들보다는 몰두했을 거고, 실기

타푸리Manfredo Tafuri(1935–1994)가 좌파 지식인이었고. 이

과목은 워낙 잘했고.

ARCHITECT CHOI WOOK

학교는 원래 아카데믹한 왕립미술학교였는데 베니스건축대학이 그래도 논문 쓰는 건 힘들잖아요.

된 거죠. 그리고 거기에 로마나 밀라노 좌파들이 몰려온 거예요.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망명 비슷하게. 그게 이제 브루노

이탈리아는 학제가 우리랑 달라요. 그러니까 예를

제비Bruno Zevi(1918–2000), 알도 로시, 만프레도 타푸리

들어서 타푸리 밑에서 논문 쓰는 친구들은 논문이 이렇고,

다 온 거예요. 그래서 이 학교가 세계적인 중심이 됐죠. 졸지에.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를 10cm 정도 벌려 보인다.)

(웃음)

무대미술하는 아이들은 논문보다는 퀄리티가 되냐 안 되냐만 봤어요. 설계로 졸업하는 학생들은 많이 쓰고 싶으면 많이 쓰고 거기서 5년을 보내신 거세요?

적게 쓰고 싶으면 적게 쓰고, 대신 퀄리티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그렇죠. 그 학교는 제도가 다른 학교랑 달라요. 그

문제였고.

학교는 단일 과정이었어요. 단일 과정이어서 그 학교를 졸업하면 박사가 나왔어요. 그 당시에. 지금은 제도가 바껴서 석사와

우리나라 설계 논문 같은 거네요?

박사가 있는데, 그때는 통합과정이었어요. 고등학교가 우리보다

응. 그런 거. 그래서 해당 교수가 그 학생을

2년 길잖아요? 그리고 5년 플러스 논문인데, 그걸 통과한 사람이

심사장에 들여보낼 거냐 말 거냐의 문제였죠. 알도 로시가 그

3%가 안 돼요. 그러니까 보통 나이가 지긋해서 (박사를) 하죠.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제자는 몇 명 없어요. 1년에 한두 명도 안

유급이 무지무지하게 많아요. 그게 정체가 너무 되고 이태리

내보내니까요. 우리 지도교수님도 제자가 별로 없어요. 몇 년에 한

상황이 그러니까 논문 과정을 (학제에) 포함시켰어요. 5년은

명씩 내보내니까.

석사로 하고 논문은 박사로 하고. 옛날에는 같이 있었고. 주제를 잘 잡으셨어요? 그러면 베니스건축대학교를 졸업해서 박사를 받고, 그러신 거군요? 그렇죠. 논란이 좀 있어요. 한국에서는.

나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오브제로서의 건축’이예요. 컨텍스트의 문제는 아니고 좀 메카닉하게 건축을 다루는 거였는데, 르 코르뷔지에랑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를 비교했어요.

그래요? 어쨌든 논문은 쓰신 거 아녜요?

팔라디오는 고전건축이면서 돌로 한 건축이고, 코르뷔지에는

작품이랑 논문은 다 쓰는데, 한국에서는 그걸 박사로

라멘조로 하거나 빔을 쓰거나 했잖아요? 근데 그 건축을 비교하면

인정해줘야 되느냐… 또 하나는, 이후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고전건축이랑 모더니즘건축의 변환점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러면

미국이나 세계적인 제도에 맞춘 걸로 배웠어요. 90년대 초반에.

그 다음에 내가 하는 다음 단계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걸

그때 졸업한 학생들은 석사는 쉬워졌죠. 5년 졸업하면 줬거든요.

프로젝트로 한 거죠.

근데 옛날에는 5년이 석사 / 박사 통합과정이어서 거기에 대한 논란은 좀 있어요. 졸업이 무지무지하게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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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볼 때 말이 안 된다는 건 어떤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고민도. 그죠? 어느 순간 같은 주제로

이유인가요?

자기가 반복하는 거고. 그러니까 그게 그렇더라고요. ‘아, 내

말은 되죠. 근데 어설프죠. (모형들을 가리키며)

인생을 벗어날 수 없다’ 싶어서, 2000년도에 사무실 차리기

저것들도 다 그 과정에서 나온 거예요.

전에 2년 동안 놀았으면 그 나이에 좀 불안하기도 하겠죠? 난 안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서 군대 갔다 오시고, 갔다 와서 장건축에 들어갔죠. 1년 8개월 있었죠.

나는 한국에 있었고, ‘우리 2000년도가 시작되는 1월 1일날

인터뷰

불안했어요. 더 놀 수도 있었는데… 그때 집사람은 뉴욕에 있었고 어디서 만날까’가 됐는데 리스본Lisbon(포르투갈 수도)에서 만났어요. 나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리스본으로 갔고 집사람은 그게 유일한 경력이시네요. 그리고 텀 없이 바로

뉴욕에서 왔고. 음… 파두Fado를 밤에 듣고… 애잔하잖아요.

건축사무소를 세운 거세요?

파두가.

1년 8개월 있다가, 아는 선배한테 제안이 들어왔어요. 모 기업에서 설계사무실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그 선배가,

‘네가 나랑 조인하면 만들겠다’가 된 거예요. 그래서 사무실을 그만뒀죠. 근데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그때 내가 서른두 살이었거든. 직원을 50명 정도 규모로 키워야 된대요. 선배는 그 기업에 들어갔어요. 나는 회장님 미팅 전날 고민을 했어요. 밤에.

파두가 뭐예요? 잘 몰라요. 아, 그게 포르투갈 민속음악인데, 애잔해요. 한국 정서하고 비슷해요. 한 恨 비슷한 게 촤악 깔려 있어요. 그걸 밤늦게 듣고, 집사람이랑 포르투갈에서 아프리카 근처까지 갔었어요. 나는… 고민을 하면 내 인생에 돌파구가 생길 줄 알았는데, 전혀 안 생기더라고요.

어떤 걸로요? 내 길인가… 하는. 들어가면 사장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50명 정도를 키우려면 내 느낌에 조직을 키우는데 5년

매번 그러신 것 같은데요. (웃음) 응. 인생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고민을 하면 조금 더 맑게 보일 줄 알았는데, 똑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인생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5년 동안 조직 키운다고 내 인생을

헤매고 어리석은 게 내 인생이면 껴안자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허비하는 게, 그래서 당일 날 아침에 이야기했죠. ‘형, 나 못 간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거를, 있는 범위 내에서 그냥 일상을 살아가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서울에 돌아와서 사무실을 열었죠.J

최 욱

일단 퇴사를 했는데? 응. 그리고 그 선배도 그 회사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둘이 실업자가 돼서 둘이 동업을 했었던 거예요. 그리고 5년을

그러면 연초였겠네요?

운영을 했어요. 직원도 서른 명으로 늘었고. 그런데 우정적인

2월달에. 1월 말쯤에 와서 2월달에 시작을 한 거죠.

의미에서 사무실을 같이 한 거였지만, 파트너가 될 수 있진 않았어요. 우정적 의미에서의 선배지만, 하다보니까 철학도 틀리고 그렇잖아요. 그리고나서 내 인생도 고민해 볼 겸 2년을 쉰

첫 건축주는 언제쯤 찾아오셨어요? 열자마자. (웃음) 그러니까 일이 있는 건 내 팔자 같아요. 끊임없이 일이 있으니까.

거죠. 근데 서른 살 때도 그렇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

음…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하고 싶지는 않은 거? 물론

같다는 그 생각이… 그게 참 재밌네요. 다른 분들

잘 해야 되는데, 자기 삶 자체가 일에 휘둘리기 싫은

같으면 건축에 더 빠져들 것 같은데. 저 같은

거 (말씀하신 기억이 나요.)

경우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할까

그렇죠. 내 일상을 유지하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게 굉장히 차이를 만드는 것

일상이라는 게 그… 내 생활 리듬이 있잖아요. 그걸 잘 가져가고

같아가지고요. 선생님은 늘 선택하는 데서 고민을

싶은… 근데 이 말은 좀 함부로 하기가 그래요. 직원들에게 참

하고 계셨네요.

미안해요. 딴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데…

누구나 고민을 하잖아요. 나는 결정은 무지하게 빨라요. 결정하는 데 낭비를 안 해요. 시간을. 그런데 결정하기 전에 심사숙고하죠. 판단은 빨라, 무지하게 빨라요.

그렇군요. 저도 요즘 비슷한 고민을 하거든요. 한국 사람들이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같아서… 근데 잘 못 하면서 열심히 일하잖아요. (웃음)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베니스건축대학 쪽에서도 그렇고, 갔다 와서 다른 조직을 차릴 때도

아, (웃음) 그게 문제죠.

그렇고… 고민 주제가 비슷한 것 같은데요. 결정은

그게 문제죠. (웃음)

빨리 하셨을지 몰라도. 그런 게 있죠. 살면서 남아 있는 게 있죠. 사람은 항상

건축가

정도가 필요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

성과를 내고, 남는 시간에는 생각을 좀 비워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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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자기 삶을 살고 싶은데, 생각을 일에서 떼어놓지를

아침에… 내가 좀 편하기 위해서 좋은 친구들을 모으고 그거는

못 하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느 순간에는 내가 조금 더 노력을 기울일

그게 이제 소위 말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때가 있죠. 이 정도 단계에서 이걸 하기 위해 좀 더 시간을 쏟고

있는 일종의 강박증이 좀 있죠.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만들어내고, 환경적으로 좀 더 집중할 때가 있고, 내용적으로

강박증. 뭔가 모름에 대한 쫓김?

집중할 때가 있고, 내가 안배 按排 를 하는 거죠.

네. 그냥 자기가 하는 만큼 성실히 해서 끝을 내고

일과에서 사무실… 물론 많이 신경 쓰시겠지만,

이러면 좋을 것 같은데… 근데 또 결과가 되게 좋은

실제로 사무실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것도 아니고 그런 거 있잖아요. (웃음)

하셨는데 이 정도로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거는,

내가 일본 사람들 보면, 우리 사무실에서 간혹

그러니까 나는 사무실에 내 책상 없앤지 오래 됐어요.

강의도 하러 오고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이분들이 되게 힘없이

한 10년.

보이거든요? 그런데 몇 년 지나면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길로 가요. 근데 그게 꾸준히 자기 걸 찾아서, 그다음에 뻥도 안

이번에 새로 만드시는 거예요?

치고 내실을 기하고 가는 거예요. 그게 되게 맥없이 보여요.

그건 내 책상이라기보다는… 노인정. 일본에서

근데 그 친구들이 좀 있으면 세계적인 프로젝트 스스슥 하고

내 친구가 오고, 스위스에서 내 친구가 오고, 오게 되면 하루

있고 그런다고요. 물론 국가적인 뭔가도 있겠죠. 근데 자기를

이틀이라도 편히 앉아 있으면 좋고.

잃어버리지 않고 가더라고요. 그에 비해 우리는 좀 거품이 많고, 자기가 하는 것에 대해 뻥도 좀 많고, 시켜보면 잘 못 하고.

그 분들이 업무도 간단히 보실 수 있고 그런 거예요?

ARCHITECT CHOI WOOK

그쵸. 나는 또 한편으로는 공동의 데스크가 있으면 맞아요. 그리고 우리 앞 세대 분들은 ‘잘 살아보세’

직원들이랑도 이야기할 장소도 되고,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해가지고 겉으로는 되게 열심히 사시는 분위기인 것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으면 좀 붙여놓을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같고,

내 친구들이 굉장히… 난 친구가 많지 않은데, 친구들이 굉장히

너무 열심히 일하죠. (웃음) 그러니까 그게 우리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이 친구들이

세대보다 우리 윗세대 건축가분들과 같이 여행을 하면 정말

굉장히 좋은 컨설팅 팀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열심히 보세요. 더 열심히 읽어내고 보고 그러시죠. 그분들은

사무실에서 현대카드의 쿠킹라이브러리? 곧 오픈할 건데, 우리가

사명감일 수도 있고.

만들었거든요. 우리 사무실 식당도 만들지만, 이번에 미쉐린 쓰리 스타 받은 식당(가온) 있죠? 그거 우리가 디자인한 거예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런 고민을 하거든요. 너무 열심히

그리고 정식당 K , 원 스타도 우리가 디자인한 거고. 우리가 만드는

사는데 거기에 매몰되는 거 같아서, 좀 적당한

식당들이 예사롭지가 않은데, 그런 경험이 하루 아침에 쌓이는 게

선에서 하고 싶다고 주변에다가 얘기를 해요. 그런데

아니라고요. 우리가 세계적인 음식 학교도 방문하고, 한국에 음식

‘안 될 거다’라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학교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그런 경험이 쭉 쌓여온 거거든요. 그런

그렇게 살 수 있나요? (웃음)

경험이 쌓여오기까지는 내 친구들의 도움이 컸죠. 같이 일상에서

글쎄… 내 팔잔데.

음식 이야기하고 그런 것들이 컸죠.

좋은 직원들이 많이 메꿔주시는 건가요?

제가 최근에, 아까 말씀하신 식당들 있잖아요?

좋은 직원들이 있는데, 어… 직원들이 들어오려면

인테리어든 리모델링이든 이런 작업들을 보면서

조건을 만들어야 돼요.

문득 든 생각이 2000년 초중반에 인테리어 하시는 분들이 건축으로 많이 진출하셨던 게

좋은 사람이 들어오려면요?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때 이름 알려지셨던 분들이

그렇죠. 그럴려면 좋은 작업을 해야 돼요. 그게

생각해 보면 유정한, 배대용, 박성칠, 전시형

제일 큰 조건이죠. 요즘 젊은 친구들이 건축사무실에 오는 게,

이런 분들이었는데, 그래서 최근에 그분들 작업도

건축가한테 봉사하려고 오는 건 하나도 없을 거예요.

찾아보고 그랬거든요. 그… ‘깊이’라는 부분 말씀하셨잖아요? 이전에. 인테리어하시는 분들하고

그렇겠죠.

선생님이 하시는 작업하고 그 차이가 확연한가요?

캐리어잡이기 때문에, 자기가 좋은 캐리어를 저기서

네. 깊이 면에서.

쌓아갈 수 있기 때문에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은 일단 우리가 좋은 작업을 해야 되는 거죠. 그리고 여타의 미래에 대한

그게 어떤 부분인가요? 솔직히 제가 잘 몰라서

비전도 공유해야 될 거고… 조건을 다 제공해줘야 좋은 친구들이

여쭤보는 거거든요. 인테리어는 제가 관심이 없던

들어오는 거죠. 그거를 꾸준히 만들어 온 거니까, 내가 하루

분야라 정말로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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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야기하기 힘든데, 그분들이 들으면 납득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흔히 인테리어를 눈으로 보이는 표피로

아… 우리나라에서요. 응. 그리고 몸에도 안 맞고. 그 상황에서 건축주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맡겨본 불편함을 우리를 통해서 많이 해소를

볼까’ 같은. 근데 우리는 건축가잖아요. 우리는 공간 자체를

했죠. 그 과정을 우리가 거쳐온 것 같아요. 그 과정을 거칠 적에는

바꿔버리거든. 공간에서 파워를 끌어내오기 때문에 그 면에서는

내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적당한 타협.

굉장히 달라요. 거기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감이

그러니까 내 목적은 욕심 덜 부리고 퀄리티를 만든다가 됐고, 이

있잖아요. 그게 합쳐지니까 공간적인 파워 면에서는 월등한 거죠.

다음에 약간 권위까지 얻으면 점프한다고…

인터뷰

대부분 다루거든요. 이미지로 다뤄요. ‘이런 이미지를 구현해

어떤 건 오래 안 갈 수 있는데, 우리가 한 건 건축주들이 거의 안 바꿔요. 십 년이 지나도.

경쟁자 있으세요? 한국에서?

보통 인테리어는 시즌마다 바꾸고 그런다고… 우리는 거의 안 바꿔요. 두가헌(2004)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퀄리티가 확연하게 달라요.

네. 으음… (부정)

그렇군요. 사진으로만 주로 경험을 하다보니까…

아, 그러세요? 그러면 좋은 퀄리티를 만드는

그러니까 인테리어가 표피를 다룬다고 하셨잖아요?

사무실…

사실 도면을 봐도 그쪽은 입면의 면을 그려놓고

그런 면에서는 없는 것 같아요. 경쟁자가 아니라

스케치를 하시잖아요. 그게 건축 작업을 한 걸 봐도

존경하는 사람은 있어요. 조병수(조병수건축연구소, 1957-), 김종규(MARU, 1960–), 다른 의미에서 조민석(매스스터디스,

1966–), 그런 분들은 존경스럽죠.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작업의

3차원 구성도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종류 있잖아요? 그쪽에서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조병수

나중에는 그 차이를 어떻게 느껴야 할지 생각은

선생님은 경쟁자가 아니죠. 다른 식의 작업을 하니까. 조민석

해보게 되더라고요. 직접 가봐야 아는 건가요?

선생님도. 우리 작업… 은 없는 것 같은데?

그쵸. 음… 건축주들이 알죠. 확연하게 알죠. 그런데 좀 전에 말씀하신 조병수, 김종규, 조민석

사무실 주변에 있잖아요. 이유가 있는 거라고요. 그분들이

선생님들은 뭐랄까, 비평가들이 키워드를 던져서

외국 건축가한테도 많이 맡기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정리할 수 있을 거 같은? 그에 비해서 원오원은

맡겼을 때 건축주들이 남의 옷을 입은 듯한 게 있는 거고, 특히

정말 물 같은 느낌이랄까? 이게 꼭 필요한 건

외국 건축가들, 유럽 건축가들은 건축주를 위한 작업을 하는 게

알겠는데 뭔가 잘 안 잡힌다는 느낌이 있어요. 사실

아니에요. 자기 작업을 건축주가 사는 거죠.

건축평단에서 하는 집담회(‘감각의 형식, 최욱’,

2016.12.10)를 기대하고 있어요. (웃음) 아, 그래요?

거기서 그 얘기가 나올 것 같아요.

그쵸.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데, 그림을 사는 거지 그 사람에게 맞는 맞춤 그림을 그려주는 게 아니거든요. 그거랑

다양하다고는 생각하거든요. 예전 같이 뭉뚱그려서

마찬가지죠. 건축가는 유럽에서는 지위가 최곤데. 이탈리아나

건축가들 순위 매기고 이렇게 생각하면 차이가 없는

이런 데 가보면. 그러니까 건축주가 건축가의 작품을 사는 거지

건데, 지금은 다 다양하다고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

건축가가 건축주한테 맞춰주는 게 아니거든요. 근데 우리는 생활

다양한 걸 다양하게 볼 감각이든 눈이든 부족한 건

습관이 틀리잖아요. 불편한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건축가의

사실인 거 같아요. 저도 그건 느끼고 있거든요.

디자인을 산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시공의 퀄리티를 사는

그러니까 이제… 나는 한국 사회에서 시각적인, 그 굉장히 익숙한 틀에서 읽어내는 거 있잖아요? 음… 비평가들이

거거든요.

사물을 보지 않고, 사물의 틀을 잡아내거든요? 그러면 틀 밖에 한국에서요?

안 보이는 거라고요. 그래서 그거를 스스로 벗어나야 될 때가 된

외국에서는. 예를 들어서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가

거죠. 비평하시는 분들도.

설계를 했다, 그러면 시공의 퀄리티를 사는 거라고요. 디자인을 포함해서. 그렇기 때문에 시공의 퀄리티를 산다고 하는 것은

좋은 사례 있으세요? 본인이 영감을 받았거나 하는.

시공비도 비싸고, 감리비도 비싸고, 설계비도 싸진 않고. 근데

수직 데이얀Deyan Sudjic(1952–) 같은 케이스.

우리는 (외국 건축가에게서) 기본설계만 받아와요. 그리고

비평은 많이 하진 않지만 한스 오블리스트Hans Ulrich

실시설계는 국내기업에서 하고, 현장은 현장대로 하고, 그러니까

Obrist(1968–), #큐레이팅의 역사$(미진사, 2013) 썼죠. 미술

좋은 작업이 나올 리 없죠.

쪽인데, 이 사람이 <도무스DOMUS>에다가 건축에 관한 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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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까다로운 건축주들이 우리

건축가

건축의 표피를 스케치한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 부분은 확연하게 다른 거 같은데, 어쨌든 인테리어도


ARCHITECT CHOI WOOK

J

K

114 34

INTERVIEW


무지하게 많이 썼었어요. 이 사람도 괜찮고. 그다음에 건축에

벗어나면 자기가 쇼하는 삶이 되잖아요.

대해 직접 쓴 건 아닌데 마이클 고반Michael Govan이라고 맞아요. (웃음) 그건 글 쓰는 사람으로서도 고민인 부분이예요.

정확해요. 그… 자기 견해, 경험이 많은 거죠. 소위 말해서 틀을

나는 우리 사무실이… 이런 기조에서 조금 더 가서

이야기하지 않고도 바로 본질을 이야기할 수가 있는 사람들이죠.

기여할 수 있는 걸 만들어야 되는 건 분명해요. 나도 지금 적당한

인터뷰

있어요. 라크마LACMA, LA 카운티미술관의 딘Dean이었는데, 나이는 나랑 비슷해요. 그런 사람들이 건축을 보는 눈이 굉장히

단어를 못 찾고 있는데 사실은, 틀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근사하네요.

기여할 수 있는 거요?

왜냐하면 대부분 건축평론을 보면 틀만

사회에. 이런 거죠. 좋은 재료 가지고 잘 만든다가

이야기하거든요. 이렇게 봐야 한다, 이렇게 본다, 그러니까 전혀

됐는데, 좀 더 가면 어떤 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까를 고민해야

못 보는 거죠. 보여준 것만 알고요. 그러고 사물을 보려고 하지

되는 거죠.

않잖아요. 자기의 틀만 비춰보려고 하는 거죠. 그 ‘무엇’이라는 건 어떤 거예요? 틀에 끼기 바쁘죠. 그러니까.

사회적인 가치겠죠. 그거는 내 고민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는 건축이라는 게 이념만 갖고는 안 되니까, 지금의 상황, 조건, 건축주의 의지 정도에서 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당장은

그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니라가지고요. 그것도 이해가 되고요. 남들이 내 (건축을 보는) 틀에 대해 이야기할 거거든요. 그 틀에 빠지고 싶지 않아요.

‘좋은 퀄리티의 작업’이었고, 사실은 그게 의미 있는 작업으로 가야 되는 건 맞아요. 나도 거기에 대해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얼버무리는 부분이 있죠. 사실은.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뭐 건축가들이 대체로 갖고

언어화해야 돼요. 언어화하는 거는 나한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무실의 효율성을 위해서. 미학적인 가치를,

한 사무실의 작업이 나오려면은 여러 가지 동인들이

예를 들어서 나는 있다고 치더라도, 끊임없이 그걸 설명하거나 혹은 모든 직원들이 거기에 공감할 수는 없을 거잖아요. 내

만든다는 게 쉽진 않죠. 지금 건축이라는 것도 어떤 거를 쉽게

의도가 100% 전달은 안 되더라도, 내 의도가 한 60%만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를 찾고 싶어하잖아요? 그게 굉장히

전달될 수 있다면 언어화시키는 게 굉장히 효율적이거든요.

소위 말해서 지금 사회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시스템이잖아요.

그걸 오해시키지 않고 어떤 식으로 언어화시킬 거냐가 굉장히

스타시스템을 다 공유하고 가는 거죠. 그게 위험하다는 거죠.

중요한데, 섣불리 언어화시켜서 앞으로 갈 길을 훼손시키기는

그거를 타푸리가 뭐라고 그랬냐면은 ‘나쁜 바이러스’라고

싫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얼버무린 상태로, 지금은 어느 선

그랬어요. 사회가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 소위 말해서 비평이

정도만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 싶어요.

힘을 잃었다는 거죠. 사회의 기성 틀에 아첨하는 기회주의자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 시각이라는 건.

언어화 되면 그게 또 하나의 프레임이 되지 않을까요?

사회 격변기 때 그 시각들이 혁명적 선언처럼 보여질

그러니까 그게 되게 어려운데, 건축의 벽이랑

수 있었을 텐데, 자본주의 안에서는 ‘시각’들도 다

단어에서 의미하는 벽이랑 다른 의미잖아요. 전혀 불가능한

상품처럼 변질되기 쉬워서…

거거든? 한 건축가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딘가가 제일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내 지점은 한국 건축이 꾸준히

사회가 되려면 사실은 그 시각에서 벗어나야 되거든요. 그래서

발전해 왔으면 어떤 사무실이 되어야 할까라는 그 지점은

정말 각자 개인이 작은 거에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공유사회를

있어요. 그건 분명한 지점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

만들어야 가능한 건데, 끊임없이 기득권을 추구하면 강자와 약자

대해서 굉장히 부족함을 느끼잖아요. 뭔가 흉내내고 있는 거

구도밖에 안될 텐데 그거를 비평가들이 딴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같고, 그걸 안 하고 싶다는 거죠. 그리고 건축가가 좀 더 작업을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기본 틀만 계속 이야기하고 있으니,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존경심? 그다음에

건축가가 그 프레임에 빠지는 게 바보죠. 내 생각에는. 그러니까

돈도 있어야 되고, 남이 돈을 안 주니까. 그리고 연륜도 있어야

내가 우리 사무실에서 오서독스orthodox하게 하는 작업을

되는데, 그걸 조금씩 조금씩 쌓아나가는 거죠. 나 같은 경우에는

계속 직원들에게 이야기하고 보여주고 하는 이유가, 우리가 큰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내세워서 하는 작업이 아니예요.

걸 이야기하기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해야 된다, 그리고

나는 그냥 몸으로 체득되고 현실에서 이해될 수 있는 정도를

우리의 삶의 상황을 이야기해야 되고, 삶이랑 행동이랑 예술이랑

가지고 가는 거죠.

일치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일상이 되어야 되는 거고.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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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필요하잖아요? 그걸 만들어나가서 지속가능해야 되는데,

건축가

있는 비슷한 정서인 것 같아요.


INTERVIEW

근데 식민지와 전쟁과 독재를 안 겪었으면 어떤

거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내 입장에서는 나도 피터 슈라이어 같은

사무실이 됐을까… 를 생각하면 그게 지금의 원오원

입장을 취할 거 같아요. 지금보다 한 발자국 나아가는 거. 내가

건축사무소인가요?

추구하는 지향점은 우리의 문화적인 걸 잘 가져와서 세계적인 게

그걸 이제 찾고 싶은 거죠. 소위 말해서 우리 고유의

되도 되고 안 되도 되는데, 어쨌든 거기까지 가고 싶은 거죠.

DNA 있잖아요? 그게 우리 핏속에 있거든요. 그걸 끄집어내고 싶은 거라고요. 그래서 그게 한옥 짓는 사무실이 아니라, 그

어쨌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주변의 기준도 높여가는

사무실이 인터내셔널하게 됐으면 어떤 모습일까, 자연스럽게

거겠죠.

성장해 왔으면. 일본 같은 경우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성장해 온

그렇죠. 그러면서 내 생각에는 일상이 제일

케이스예요. 1800년대에도 서양건축이 있었고,

중요하거든요. 일상이 침해되지 말아야되겠다, 직원들도. 그러니까 나는 머리 속에 두고 있는 게… 조르지오 아르마니

1860년대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하면서

Giorgio Armani(1934–) 있잖아요. 패션디자이너.

근대화가 됐죠.

그 사람한테 한 외국 기자가 인터뷰를 했어요. 당신은 도대체

그때도 불란서 가서 공부하고 그런 건축가가 있었죠.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냐고. 이 수많은 아이디어를. 그랬더니

일본 같은 경우에는 모더니즘도 서양이랑 거의 동시대로

아르마니가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책 볼 시간이 없대요. 아침부터

겪는다고요. 몇 년 차이로. 단게 겐조 丹下健三(1913–2005)의

밤까지 일한대요. 그리고 잔대요. 그러면 주말에 뭐하냐고

선생 작업…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디테일을 보면 서양 사람들이

물었더니 텔레비전 본대요. 주말에 텔레비전 본다는 소리는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콘크리트 작업이 있다고요.

자기의 오래된 친구들이랑 쉰다는 소리예요. 일상을 보낸다는

ARCHITECT CHOI WOOK

거라고요. 그러면은 자기 일상이 결국은 세계가 되고, 그걸 쿠니오 前川國男(1905 –1986)? 잘 모르겠네요.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거는 우리가 세계적인

응. 그런 분들 작업 보면 이미 서양의 테크닉이 아니라

사무실이 된다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이 보여질 수 있으면 제일

일본의 정신이 다 배어 있어요. 서양의 재료를 갖고. 그 전통,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무실로서는. 사무실로서는 성장을

그러면서 일본의 정서. 세지마妹島和世(1956–) 작업도 사실은

하면 좋을 것 같고, 어떻게 성장하든지 간에, 그 지향점은 내가

그 깊은 정서를 갖고 있는 거라고.

가져가야 될 건 아니고, 그건 세상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까.

우리 같은 경우에, 그러니까 역산을 해보는 거죠. 섣불리 하면 외국 흉내 내서 안 되는 거고, 예를 들어서 세지마

사무실을 세팅시켜 놓으면, 나는 개인적인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요. 개인적인 세계란 게 어떤 거냐면, 조금 더 미학적인 세계?

카즈요가 가벼운 건축 한다고 그래서 나는 조금 무거운 건축을 한다고 하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고요. 그래서 개념을 끄집어와서

다도 茶道, 이런 느낌으로요? 건도 建道… (웃음)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서양건축의 한 파트를 다루는 거고, 그게

아니 그게 아니라, 음…

아니라 정말 이걸 진중하게 가져갈 수 있는 게 무얼까의 문제가 있잖아요. 그건 굉장히 긴 길인데, 그거를 현실가능한 범위 내에서

다도에서도 리큐 千利休(1522–1591) 같은 사람이

조금씩 축적해보는 거죠. 그래서 장인들이랑 15년 동안 작업을

있고 그렇잖아요.

함께 해오는 거고, 건축주들이랑도 커뮤니케이션을 해보는 거고,

그렇죠. 이세이 미야케三宅 一生(1938–)도 육십에

그래서 만들어진 건축이 있는 거죠. 그다음에 이제 우리가 언어를

그만뒀거든요.

찾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그거는 우리가 못 미치는 거고. 일단 축적해 온 게 있기 때문에 조금씩, 한 스텝 씩 가는 거죠.

누구요? 이세이 미야케. 일본의 패션디자이너. 이세이

그렇군요.

미야케가 나이가 육십이 됐을 때 이세이 미야케 브랜드를 자기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1953–)가

직원들에게 넘겼다고요. 자율적으로 진행하게. 그러면서 타다오

현대자동차 사장이잖아요. 이 분이 아우디 티티TT 만든

안도가 설계한 뮤지엄 있잖아요. %21_21 디자인 사이트&. 그걸

사람이거든요. 피터 슈라이어랑 식사를 했었는데 어떤 기자가

만들었잖아요. 그러면서 자기가 문화기획을 하거든요. 어떻게

물었어요. 피터 슈라이어가 자동차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보면 직원들한테도 또 다른 공감대를 일으킬 수 있는 문화활동을

스타라고요. 세계적인 스타인데 한국 와서 기아자동차 ‘K5’

하는 거죠. 조금 다른 차원에서.

만들고 했었다고요. 사람들 보기에는 저 사람 정도면 뭔가를 막

다카시 무라카미 村上隆(1962–)라는 화가가

만들어야 되는데… 그래서 물어봤어요. 당신의 꿈은 뭐냐고.

있어요. 이 분도 좀 있으면 그림 안 그릴 거예요. 살아가는 태도의

그랬더니 피터 슈라이어 하는 이야기가 ‘지금보다 한 발자국

문젠데, 나 같은 경우에는 사무실을 잘 세팅시켜 놓으면, 적어도

나아가는 것’. 나는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깊은 공감을 느꼈어요.

자생적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기겠죠. 내가 그

왜냐하면 갑자기 티티TT 못 만들어요. 기술 따라가야 되고,

속에, 현실적인 공간에 있기보다는, 조금 다른 공간에서 영감을

사회적 인식 따라가야 되고, 그래서 피터 슈라이어의 그 말이

주는 사람이 되고 싶긴 해요. 그게 이제 사실은 올해였는데…

가장 정확하고 옳은 말이었어요. 한 발짝 더 가서 빨리 가는

오십삼, 오십사 세 정도까지 사무실을 완성해놓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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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공간은 완성이 됐죠. 어쨌든 당장의 내 역할은 좋은 사무실을

조선시대 그림을 보거나 도자기를 보거나 똑같다고. 하나의

만들어서 우리 직원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스타일이라고.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가치라는 게 스타일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어떤 번뜩이는 천재의 기질이 아니라고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건 꾸준한 항성 恒性이 있는

에디팅을 다양한 관점으로 다룰 수 있어야 되는데,

거거든요. 나는 그 정도의 건축은 하고자 하는 생각은 든다고요.

아까 조르지오 아르마니 이야기하셨잖아요? 일상이

그러기 때문에 이게 이름이 붙여지거나 개념이 붙여지거나 하는

세계가 되고 이런 말씀하셨는데, 저 같은 경우는

건, 나한테는 안 맞죠. 그 정도의 건축이랑 건축을 할 수 있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1969 –2010)

터는 내가 후원하고 싶고. 근데 혹시 내 속에 천재가 남아 있을 수

같은 갑자기 등장해서 천재처럼 활동하다

있잖아요. 아직까지.

인터뷰

그렇군요. 비평뿐 아니라요. 사실 저 같은 경우도

사라져버린 디자이너 같은… 자기自起(identity)가 있잖아요? 자기가 안에서 샘처럼 나오는 거요.

아, 그렇군요. 은근히 기대하고 있으시군요. (웃음)

건축가를 바라볼 때 기본적인 시각이 저도 좀 그런

건축은 아니더라도. 내 스스로한테 그런 시간적인

게 있어서, ‘건축가 최욱’ 하면, 거기서는 최욱이

기회를 못 줬기 때문에, 그거는 내가 사무실을 세팅해 놓으면 나는

계속 나오고 있는 뭔가를 잡아야 되고요. 프레임을

그 길로 가겠다는 거예요.

설정하듯이… 나는… 알렉산더 맥퀸 같은 사람은 굉장히 드물게

왠지 지금 백남준 관련 건물 작업 하시면서 생각이

나올 것 같아요. 내가 살아가면서 천재를 몇 명 봤거든. 나는 사실

더 짙어지고 있으신 건 아니고요?

많이 봤어요.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이에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아니, 그건 아니고요. 나는 막 어떤 작업을 하겠다는

정도의.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나 알거든요? 그냥 천재라고.

게 아니라, 나는 내 인생이 구경꾼이어도 되는데, 일기 적는 사람?

보면 천재예요. 그러니까 내가 인간성은 싫어하지만 피터

일상을 적는 사람?

아이젠만 같은 케이스, 보면 다른 사람이랑 달라요. 정신적으로 굉장히 다른 그런 게 있다고요. 피아니스트도 그렇고 대부분

1988)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 부류가 있을 것

그게 아니라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 나의 일상. 조선시대 선비들이 다 그랬다고요.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다고요.

건축에서는 그런 부류가 성공을 못할 거 같아요.

조선시대 어떤 분이 지방에 관직으로 가서 아내가

왜냐면은 이게 다른 사람이랑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그리워서 쓰는 일기글(#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건축계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는 한데,

생각하노라, 미암일기 1567–1577$, 사계절출판사,

리더는 못 돼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거는 당연히 특별한

2003) 같은 걸 본 기억이 나요.

거고, 그런데 건축가에게 그런 피겨figure를 바란다고 하는

그 일상을 어떻게 기록할 거냐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것은 굉장히 극히 드문 케이스일 거 같아요. 그런 사회적 조건이

미학적인 판단의 문제는 남아 있거든요. 어떤 식으로 들어가야

되거나.

돼냐 하는. 나는 내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어요. 나의 일상을 잘 기록하는 거. 그거를 내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떤 제 시각이 협소한 거죠. (웃음)

방법이든지, 기상천외한 방법이든지. 그러면서 내가 그래야

아니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건축가가

사무실을 꾸준히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아요. 내가 고갈되지 않고.

있기도 있어요. 자하 하디드 같은 케이스? 근데 그건 다른 조건에서 작업을 하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이나 영국이나

미학적인 판단은 있어야 된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그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꾸준히 참으면서 버티거든요. 근데 이

사실은 20세기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들은 머리로

사람들이 성공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일이 들어와요. 거기에도

짜여진 미학 같아서요. 뭔가 그런 역사적인 맥락

국가경제 논리가 따르기도 해요. 근데 한국은 내가 보면, 그렇게

연장선에서의 미학적 판단이신가요, 아니면 그냥

되기가 안 쉬워요. 나 같은 경우에는, 내가 건축에 있어서는

감각적인 판단이신가요?

재능이 없는 사람이에요. 큰 재능이 없어요. 남들보다는 잘 할

두 개가 겹치겠죠.

수 있는데, 알렉산더 맥퀸 같은 재능은 없다고. 그런데 내가 한국 건축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사무실’은 만들어 낼 수 있을

시대를 읽어내는 관점도 있으시고요.

것 같아요. 나는.

그렇죠. 내 몸이 체득한 거는 미학일 거고요. 내 머리가 판단하는 거는 시대랑 반응하는 걸 거예요. 내 몸이

‘좋은 건축’이라는 기준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좋은 건축이라고 하는 거는, 내가 얘기한 게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 이야기 했나? 우리나라

반응하는 감각만 있으면 그건 사회적 가치가 약할 수도 있다고요. 근데 내 몸이 체득한 미학을 버리지 않고 내가 바라보는 범위에서의 판단이 있어야겠죠. 그 두 개가 어떻게 만나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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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욱

같아요.

건축가

다 그렇잖아요. 물리학자 파인만Richard Feynman(1918–

사관 史官이에요?


문제거든요. 그 고민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거죠.

유명해지면 진짜 재미 없을 것 같아요. 유명해지면 바쁘게 살다가

INTERVIEW

죽잖아요. 끊임없이. 그게 특별하게 의미가 있는 사회에서는 뭔가 근사한 엔딩 장면을 준비하고 계신 느낌이…

괜찮은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난 절대 못 그럴 것 같아요.

인생의 후반부에요.

자기 스스로의, 소위 말해서 재능을 있는 데까지 다 쓴다,

그건 내가 즐거워할 일일 것 같아요.

태운다, 그거는 굉장히 내가 보면은 서양적인 관점이예요. 진보, 프로그레스progress라는 거.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살면서 별로 크게 고민은 없으셨구요?

서양에서는 그게 의미가 있는 건가요?

어떤 고민?

그런 사회니까요. 경쟁하고, 태우고, 다음 제네레이션으로 점프하고. 그런데 동양사회는 조금 달랐던 거

늙어간다는 거 있잖아요. 자기의 시간이

같아요. 서양의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서, 소위 말해서 관념적인

줄어들어간다는 거.

사회가 아니라 마음이랑 행동을 일체화시켜서 하나로 보잖아요.

음… 본능적으로 있지 않나 싶은데. 누구나 다.

그 관점에서 보면은 이상한 거죠. 스타가 된다는 건.

본능적으로 있죠. 그리고 직감하는 순간도 있고. 사람마다 꼴이 다 틀리잖아요. 상황이 다 틀리잖아요. 이제는 상황의 눈치를 볼

그쪽 관점에 더 동의를 하시는 거예요?

틈이 없다는 생각은 들어요. 내 자신에 몰두를 해야 되겠다, 그런

난 그래요. 그 관점이 우리 구조상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그래서 남의 틀에 맞출 시간이 없는 거예요.

생각이 나는 들고, 그 관점의 언어로 작업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죠.

그 와중에, 유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으시고요?

ARCHITECT CHOI WOOK

전혀 없어요. 음… 내가 그거 이야기 했나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스타가 만들어지고 하는 것은 필요로 해요. 그게 인류한테 도움이 돼요. 싸움을 할 적에도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나가서 싸우는 게 도움이 돼요. 그러니까 나는,

118 34


여담 餘談

그러니까요. 예측이라도 한듯이.

(이 내용은 다른 날, 2016년 12월 15일 진행된 네. 그래서 ‘야, 이거 감동이다’ 이런 느낌이…

스터디 과정에서 오래된 글을 하나 발견했고,

그런 게 있었구나. 내가 읽고 넘겼을 수도 있고.

그 글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낯 간지러워서.

이중용 : 이거… 98년 정도에 쓰여진 내용인데

아까 말씀하셨듯이 지금 보니까… 오히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최욱의 소박함이 좋다.’

김인철이라는 사람 자체도, 뵙고 나서 이분이

혹시 이런 문구 기억하세요?

도드라지지는 않아도 계속 꾸준히 공부를

최욱 : 누가 한 말이에요?

인터뷰

인터뷰에 담긴 에피소드 중 하나다. 인터뷰 전

하시는구나 느낌이 있었는데, 이 글 쓰셨을 때도 이렇게 뭔가가 있으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맞춰보세요. (웃음) ‘충실한 기본기를 구축하고

그렇구나. 몇 년도라고요?

있음에도 결코 과시적이거나 현시적이지 않다. 최욱의 건축은 단아하다. 갖출 것은 다 갖추었으되

1998년도.

그것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생각과 손질이 성급하지

아, 나 놀 때.

않게 골고루 닿아 있음이 곧바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의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배형민?

건축가

‘…지혜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품격은 만들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난잡한 유행의 흔적도 보이지 않으며 형이상학의 요상한

최 욱

언설도 그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귀국한 건축가들에게 기대하는 대중적 흥미로부터 최욱은 멀리 있다. 그의 건축은 여행길에서 얻어진 참고자료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최욱의 자세는 하나의 표본일 수 있다. 최욱에게 주문하는 것은 그의 건축이 이 땅의 표층에만 머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지층을 뚫고 내려갈 원동력이 땅을 파헤치는 굴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주어질 기회를 그가 어떻게 다루어 나갈지를 지켜볼 필요는 허술함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론이 그에게서 발견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누구지? 아, 모르시겠어요? 이거 완전 칭찬일색인데? 김인철(1947–, 아르키움) 선생님이 쓰신 글이에요.

1998년 5월호 <이상건축> 잡지에 {건축가 김인철이 추천한 최욱}이라는 글 안에 ‘내가 본 건축가 최욱’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글이 있더라고요. 모르겠네요. 모르셨어요? 되게 근사하게 써주셨던데요. 근데… 의미가 있는 말이네요. 지금의 내 작업을 보면.

119 35


120

ARCHITECT CHOI WOOK

INCOMPRESSIBLE SCENE


EPILOGUE

한국사회의 건축가에 대한 존경이 절실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존경과 직능에 대한 존경이 분리될 수 없다고

EPILOGUE

2016년 만난 건축가들은 모두 한결같이

생각한다면 건축가 개인의 성취만큼이나

‘건축-사회’의 성취를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고생해서 그나마 이만큼 이룬거라는 앞세대의 푸념도 알에서 태어난 것처럼 의기양양한 뒷세대의 뻔한 이야기도 분노와 짜증, 공격과 무시가 아닌 유쾌함 속에 서로를 북돋을 수 있으려면 우선 우리 각자가 ‘건축-사회’를 함께 키워가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일원이자 이웃이라는 자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7년에 이어질 <와이드AR>의 작업은 좋은 건축을 꿈꾸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좀 더 서로 끌리게 하는 한국건축 안의 다양한 이야기들과 자신감, 따뜻함들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고독한 해결사들만 양산하는 사회지만, ‘좋은 건축’ 최소한 온당하게 건축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서로들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건축가

올해 우리가 나눌 마음가짐은,

최 욱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겠습니다.”

121


REFERENCE / CREDIT

REFERENCE / CREDIT

REFERENCE 인터뷰

CREDIT 건축가제공 ⓒ 원오원 팩토리

일시 : 2016. 11.19 / 11.23 / 11.28 / 12.8 / 12.15 /

12.24(공방답사)

22, 23, 30, 31, 32, 33, 34, 35, 36 상, 37, 43, 44, 46, 48, 49, 50-51, 54, 55, 60-61, 62상, 63, 64 상, 65 상, 66, 67,

장소 : 서울시 서대문구 대신동 115-9 원오원아키텍츠

68, 69, 70, 95, 101, 114J, 120-121

건축가 자료 일반

김재경

원오원 홈페이지 101-architects.com

21, 24, 64하, 65하, 92, 108H, 108I하, 118

#ONE O ONE architects$, 원오원, 2008 #line of shadow$, 원오원, 2011

남궁선

건축가 관련 자료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제 8 회 공간대상 최우수작 ‘잊혀진 시간을 찾아서’, <공간>,

91, 98, 102G, 114K

19, 20, 36하, 39, 40, 41, 42, 45, 47, 72, 73, 74, 75, 76,

1984.11 FUORI TUTTO, <PLUS>, 1989.11

이중용

정릉동 주택계획안, <공간>, 1998.5

62하

건축가 김인철이 추천한 최욱, <이상건축>, 1998.5 스튜디오 스몰, <c3>, 2003.9

표지

반응공간과 현실의 충돌, #한국건축의 새로운 지평$,

현대카드 영등포사옥 모델 ⓒ 김재경

김성홍 외, UP, 2011

ARCHITECT CHOI WOOK

최욱 + 최진석, <와이드AR>, #38, 2013.3-4

기타 #가까운 문화 멀어진 미학$, 이지훈, 물레, 2007 #건축과 감각$, 유하니 팔라스마 지음, 김훈 옮김, 시공문화사, 2013 #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안그라픽스, 2007

‘목격자 증언’, 심리학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살아 있는 시간$, 이종건, 궁리, 2016 #슈퍼 노멀SUPER NORMAL $, 후카사와 나오토 외 지음, 박영춘 옮김, 안그라픽스, 2009 #시간적 인간$, 이원, 지식의 날개, 2016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더숲, 2014 #인사이드 현대카드$, 박지호, 문학동네, 2015 #큐레이팅의 역사$,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지음, 송미숙 옮김, 미진사, 2013 #콰이어트$,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2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이후, 2002 #현대건축사$, 케네스 프램튼 지음, 정영철· 윤재희 옮김, 세진사, 1990 #현대카드가 일하는 방식 50 PRIDE$, 현대카드 외, 이야기나무, 2015

프로젝트 자료 및 진행 협력 황선영 / 원오원 아키텍츠 소장 김인철 / 원오원 팩토리 소장 김용주 / 대흥금속 대표 김성운 / 조이아이디 대표

122



WIDE # 51 건축가 장윤규

WIDE # 52 건축가 김인철

WIDE # 53 건축가 김찬중

WIDE # 54 건축가 승효상

EDITORIAL

EDITORIAL

EDITORIAL

EDITORIAL

“이런거 본 적 있으세요?”

편견, 레거시 혹은 역사

시스템 —‘우리’라는 믿음에 이르는 방법

스케일 — 일원一元과 다원多元 사이에서

INTERVIEW

WORDS

VERSIONS

균형을 취하는 이원二元의 감각 건축가 장윤규

1947

문화

건축

문화적 배경 ‘우리 건축’

열림

V.0.1 THIS MAN의 시스템

SCALE

V.0.5 개념과 현실

1 완결하는

SCOOP PICTURE

건축의 경지 미학들

우연성

V.0.8 기술적 특이성과 합리성

2 조율하는

크링

건축의 과제 바닥

원초적 건축

V.1.0 빠르게 싸게 다르게

3 인식하는

성동문화복지 센터

건축의 목적 방법론

작업

V.1.5 산업적 이미지의 건축

4 통합하는

SK 네트웍스 강남 사옥

건축의 상태 비결정적

작명

V.1.7 이기는 전략으로서의 외부공간

5 근거하는

예화랑

건축의 실행

– 일상

장소

V.2.0 THE_SYSTEM LAB

6 기록하는

파주출판도시 어린이집

경관

사물

재료

V.2.5 SALE & SALE

공간

사진가

전형

공존

수업

전환점

예술 — 상상력

그릇

아름다움

놀이 — 상상력

기술

여운

답사 갤러리 정미소

대표작

Talk.1 정미소 디렉터 이은주

영역

KEYWORD

INTERVIEW INTERVIEW

건축가 승효상

테두리

건축가 김찬중

경기대 교수 / <건축평단> 편집주간 이종건

형상

더_시스템 랩 실장 박상현

연속성

후원자

이화여대 교수 이혜선

DRAWING

영감

SNS

목천김정식문화재단 사무국장 김미현

수졸당

Talk.2 작가 9인

수백당

PROJECTS

수눌당

INTERVIEW

이건창호 쇼룸

노헌

건축가 김인철

더 라스트 하우스

와헌

OPINION

건축사진가 박영채

한강 나들목 프로젝트

시경루

운생동 건축 대표 신창훈

PaTI 날개 안상수

연희동 갤러리

퇴촌주택

UNBUILT

EDITOR’S EYE

Talk.3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이은영

REFLEX

모헌

SK 행복나눔재단 사옥

말리부주택

KH바텍 사옥

청고당

한남동 핸즈코퍼레이션 사옥

논산주택

PROJECTS

미래디자인융합센터

수우재

김옥길 기념관

판교 현대백화점 어린이책미술관

EDITOR’S EYE JYG A-styling ver 0.1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CRITICISM

디보이드

경기도지사 관사 리노베이션

짧은 포폄 / 공철

웅진 씽크빅

더엠빌딩

우간다 힐링마운틴 청소년 센터

어반 하이브

호수로 가는 집 질모서리 크메레스크 히말레스크 바우지움 벨라리움 파티 앙코르 파비스

격월간 건축잡지 <와이드AR> 정기구독 및 구입안내는 128p 참조


제 30차 상영작

소식

골트지우스 앤 펠리컨 컴퍼니

2017년 WIDE 건축영화공부방의 키워드는 [감독탐구]입니다. 그 첫 번째 대상으로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 감독을 선정하였습니다. 1년(6회)에 걸쳐 그의 대표 작품을 함께 감상하며 감독의 시선을 따라잡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일시

2017년 2월 8일(수) 7:00pm 장소 ㈜ 원도시건축 지하 소강당 방장 강병국(간향클럽 자문위원, WIDE건축 대표) 와이드 # 55

참석 신청 예약 총원 총 35인 내외로 제한함(선착순 마감 예정) 신청 예약 방법 네이버카페 ‘와이드AR’ WIDE건축영화공부방 게시판에 각 차수별 프로그램 예고 후 선착순 접수 주최 간향클럽, 미디어랩&커뮤니티 주관

WIDE건축, 와이드AR 협찬 ㈜ 바호그룹건축 후원 ㈜ 원도시건축

Goltzius and the Pelican Company, 2010 개관 골트지우스 Hendrik Goltzius는 16세기 말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화보 인쇄업자이며, 그가 이끄는 펠리칸사社는 그의 조카나 친구 그리고 그들의 부인이나 애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그와 그의 펠리칸사는 삽화가 그려진 구약성경을 출간하기 위해 새로운 인쇄기를 구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알자스 지방(독일과 접한 프랑스 동북부 지역)의 한 후작을 유혹하여 성경 속의 간통이나 근친상간과 같은 성적인 타락과 타부를 연극을 통해 후작에게 직접 보여주고 관음증 형식의 성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금전적인 수익도 보장된다고 설득한다. %털시 루퍼의 가방 1,2,3부작&(2003–2004)이나 %프로스페로스의 서재&(1991)에서 보여준 미장센뿐만 아니라, 성경 특히 구약에서 발췌한 성과 도덕에 관련된 일화들을 감독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너웨이가 늘 그랬듯 이 영화 역시 실존 인물의 궤적에 상상력을 덧입힌 사실적 픽션으로 ‘보는 영화’가 아닌 ‘읽는 영화’다. 그리너웨이 감독의 수수께끼를 지적인 실타래를 짜 맞추듯 꿰어가는 재미 외에 그의 화려한 화면발만 해도 시간투자가 아깝지 않다.

125


NOTICE

간향클럽 사람들 간향 미디어랩 GANYANG Media Lab.

[와이드AR 편집실 editorial camp] 편집장 이중용 우리는

사진총괄 김재경

건축가와 비평가 및 다방면 건축의

인턴기자 정평진

파트너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디자이너 신건모, 낮인사

“지방(locality), 지역(region), 청년(youth), 진정성(authenticity), 실용성(practicality)”에

[와이드AR 논설실 editorialist] 논설고문 이종건

시선을 맞추고, “건축을 배우는 후배들에게 꿈을,

논설위원 김정후, 박인수

[와이드AR 전문위원실 expert member]

건축하는 모든 이들에게 긍지를” 전하자는 목표 아래 건축한다는 것만으로 반갑고 행복한 세상을

비평전문위원 박정현, 이경창, 송종열

짓는데 함께 힘을 보태겠습니다.

사진전문위원 남궁선, 진효숙

[와이드AR 발행편집인실 publisher & partners] 발행위원 김기중, 박민철, 박유진, 오섬훈, 우의정

우리는 건축계 안팎의 현안을 주시하며 이슈를 발굴-

공동편집인 김재경, 이주연, 정귀원

공론화하고, 나아가 건축동네의 계층, 세대,

네트워크 팀장 겸 에디터 박지일

업역 간의 골 깊은 갈등 구조를 중재하는 매개자

마케팅팀 박미담

역할을 통해 우리 건축의 현재와 미래를 견인하는

발행인 겸 편집인 전진삼

WIDE # 55

지렛대가 되고자 합니다. 그로써 이 땅에 필요한

[와이드AR 유통관리대행 distribution agency]

건강한 건축저널리즘을 구현함은 물론 건축과 대중 사회를 연결하는 미디어 커뮤니티가

서점관리 심상호, 정광도서

되겠습니다.

직판 박상영, 삼우문화사

우리는

제작자문 김기현, 시공문화사spacetime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잡지

인쇄관리부장 손운일

[와이드AR 제작협력 production partners]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인쇄제작국장 김은태

월례 저녁 강의

인쇄처 대표 강영숙, 서울문화인쇄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땅집사향)>

종이공급 박희진, 신안지류유통

건축가들의 이슈가 있는 파티 <Architecture Bridge(ABCD파티)> <인천건축도시컨퍼런스ICON-Ex>

간향 커뮤니티 GANYANG Community

건축역사이론비평의 연구자 및 예비 저자를

[고문단 advisory body]

지원하는 <심원건축학술상> 신예비평가의 출현을 응원하는

명예고문 곽재환, 김정동, 박길룡, 우경국, 이상해, 이일훈, 임창복, 최동규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대표고문 임근배

내일의 건축저널리스트를 양성하는

고문 구영민, 김원식, 박승홍, 이충기

<간향저널리즘스쿨 GSJ>

[후원사 patron]

건축 비평 도서 출판 <간향 CRITICA>

대표 김연흥, 김찬중, 박달영, 승효상, 이백화, 이태규, 장윤규, 최욱

[자문단 creative body]

국내외 건축과 도시를 찾아 떠나는 현장 저널 <WIDE 아키버스>

운영자문 공철, 김동원, 김석곤, 김종수, 김태만, 신창훈, 안용대, 오장연,

인간 · 시간 · 공간의 이슈를 영상으로 따라잡는

어린이· 청소년 건축학교 <AB스쿨> 등의 연속된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또는 파트너들과 함께 수행하며 우리 건축 문화의 켜를 기품 있게 다져 나가겠습니다.

126

www.ganyangclub.com

<WIDE 건축영화공부방> 건축 ·디자인·미래학 강의실 <간향 AQ포럼>

이성우, 정승이, 조남호, 최원영, 최재형, 황순우 전문분야 자문 강병국, 고영직, 고충환, 김영철, 박병상, 박철수, 안철흥, 전진성, 조택연

[협력기관 program partnership] 심원건축학술상 심사위원회 김종헌, 박진호, 우동선, 함성호 심원건축학술상 역대 수상자 박성형, 서정일, 이강민, 이연경, 이길훈 심원문화사업회 사무장 신정환

[계열사 project partner] 마실와이드 대표 김명규


우리 건축 장(場 )의 새 얼굴로부터

(시즌5)

소식

(약칭, 땅집사향)

건축가 초청강의 : Architects in Korea 2017년 1월_제121차 : Architects in Korea 09

기성, 중견, 노장 건축가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 하에 이 땅에서 활동하는 벽안의 건축가까지 주목하고자 합니다. 소위원회 박지일, 백승한, 심영규, 최호준 주관 와이드AR 주최 그림건축, 간향클럽 협찬 시공문화사Spacetime, 유오스Knollkorea

02-2231-3370, 02-2235-1960

와이드 # 55

문의

이야기손님 이승택, 임미정(stpmj 공동대표) 일시

1월 18일(수) 7:30pm

장소 이건하우스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주제 Material Play

* %땅집사향&의 지난 기록과 행사참여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카페(카페명 : 와이드AR, 카페주소: http://cafe.naver.com/aqlab)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7년 2월_제122차 : Architects in Korea 10

이야기손님 맹필수, 문동환, 김지훈(MMK+ 공동대표) 일시

2월 15일(수) 7:30pm

장소 이건하우스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주제

MMK+의 서울 정착기

127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WIDE Architecture Report, Bimonthly 통권 55호, 2017년 1–2월호, 격월간

2017년 1월 15일 발행, ISSN 1976-7412

2008년 1월 2일 창간 등록,

2008년 1월 15일 창간호(통권 1호) 발행

2011년 1월 19일 변경 등록, 마포 마-00047호 발행인 겸 편집인 : 전진삼

발행소 : 간향 미디어랩Ganyang Media Lab. 주소 : 03994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175

(동교동, 마젤란21오피스텔) 909호

전화 : 02-2235-1960

팩스 : 02-2235-1968

홈페이지 : www.ganyangclub.com

네이버카페명 : 와이드AR

• 본지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 본지에 게재된 기사나 사진의 무단 전재 및 복사, 유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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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명(기증하실 경우 기증자명 포함)&,

온라인 서점

%배송지 주소&, %구독희망 시작월호 및

구독기간&, %핸드폰번호&, %이메일 주소&, %입금예정일&을 적으시어 <와이드AR> 공식

이메일 : widea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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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가 인터넷 교보문고

팩스 : 02-2235-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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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입금 후 보내드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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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점 (02-5300-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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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점 (02-2062-8801)

확인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등포점 (02-2678-3501)

[예금주 : 전진삼(간향미디어랩)]

꼭 상기 전화, 팩스, 이메일로

잠실점 (02-2140-8844) 이화여대점 (02-393-1641) 분당점 (031-776-8004)

카드결제방법

부천점 (032-663-3501)

네이버카페 : ‘와이드AR’ 좌측 메뉴판에서

안양점 (031-466-3501)

%정기구독 신용카드결제&란을 이용하시면

인천점 (032-455-1000)

편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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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점 (051-806-3501) 부산 센텀시티점 (051-731-3601) 창원점 (055-284-3501)

<와이드AR>의 광고는 본 잡지를 함께 만드는 건축(가)네트워크와의 연계를 지원합니다. 지면 위에서의 1차적 홍보

효과를 넘어, 실질적 수익 효과의 창출을

위해 데스크가 함께 고민해 드립니다.

천안점 (041-558-3501) 영풍문고 종로점 (02-399-5600) 미아점 (02-2117-2880) 명동점 (02-3783-4300) 청량리점 (02-3707-1860) 김포공항점 (02-6116-5544) 여의도점 (02-6137-5254) 서울문고 종로점 (02-2198-3000) 건대점 (02-2218-3050) 북스리브로 홍대점 (02-326-5100) 동네 서점 효자 책방 소란 (서울 통인동,

02-725-9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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