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 05-06, no.76
Contents & Flow Map
김재경의 PHOTOSSAY 16 [18] 전진성의 건축에게 묻다 01 [36] 김정동의 레코드 재킷에서 음악과 건축 읽기 01 [38]
구분
RESEARCH [42] 한국근대건축의 현장과 이슈 16 이연경 영주시 영주동 근대역사문화거리
인물
GAIA TOPIC [34][76] 기후재앙 편집실 READING LISTS [58] 로마네스크 건축 / 유걸 구술집 전후 일본 건축 /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 내 마음을 담은 집 집의 사연 / 건축담화의 빈곤 F.L.라이트의 애리조나 건축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빌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영주시 영주동 근대역사문화거리↝
장소
사무소
추천도서
SPECIAL FEATURE [67] 건축가 박유진 Park You-Jin Architect PnJ 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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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건축↝ 유걸 구술집↝ 전후 일본 건축↝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F.L.라이트의 애리조나 건축↝ 집의 사연↝ 내 마음을 담은 집↝ 건축담화의 빈곤↝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DIALOGUE [80] 라인매스 시절, 공간연구소 입사 전/후 공간건축에서의 주요작업, 〈북서울 꿈의숲〉 〈지아의갤러리〉, 소규모 근생건물, 오피스 빌딩 주택설계, 현상설계 프로젝트 건축 여행 스케치, 마무리
표지 이미지 설명: 〈북서울 꿈의숲〉 드로잉, 2010 Ⓒ박유진
↝ ↝ 제18회 인천건축학생공모전↝ [연기] WIDE건축영화공부방↝ [연기] 땅집사향↝ 제12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공모
FEATURE [62]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 당선작 발표
NOTICE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 당선작 발표 [표2] 제12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공모 [14] [연기] WIDE건축영화공부방 [123] [연기] 땅집사향 [125]
PnJ ARCHITECTS↝ 건축권장↝
건축에게 묻다↝
사건
EPILOGUE [120] 박유진이 걸어가고 있는 건축가의 길 전진삼
부산 동래, 자성대와 부산포↝ 노트르담 대성당↝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 당선작 발표
RISING ARCHITECT 06 [48] 건축권장 장수정 이태현
심사평 김영철, 김현섭, 서정일, 한동수 당선작: 왕릉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 수상자: 이상명
콘텐트 박유진↝ 이상명↝ 장수정↝
파트너십
가로건축↝ 건축공감↝ 동양PC↝ 마실와이드↝ 삼현도시건축↝ 수류산방↝ 시공문화사↝ 심원문화사업회↝ OCA건축↝ 운생동↝ 원오원아키텍스↝ 유오스↝ 이건창호↝ 자연앤인문집↝ 퓨즈랩↝ 해안건축↝ 헌터더글라스 코리아↝
생산자
↝강병국 ↝김기중 ↝김기현 ↝김명규 ↝김영철 ↝김용남 ↝김재경 ↝김정동 ↝김종성 ↝김태만 ↝김현섭 ↝도연정 ↝목천건축아카이브 ↝박달영 ↝박상일 ↝박승준 ↝박정현 ↝박지일 ↝빌 게이츠 ↝서정일 ↝서현 ↝신동훈 ↝우치다 다쓰루 외 ↝윤세한 ↝이강헌 ↝이승용 ↝이연경 ↝이태규 ↝이태현 ↝인천광역시건축사회 ↝임근배 ↝임재용 ↝장윤규 ↝장지이 ↝전봉희 ↝전진삼 ↝전진성 ↝조진영 ↝조택연 ↝조항만 ↝조현정 ↝최욱 ↝최원영 ↝최원준 ↝편집실 ↝한동수 ↝한제임스정민 ↝황용운
지면 123 6 122 13 62, 65 9 18, 77 38 58 1 62, 64 59 58 12 17 125 58 125 61 62, 66 60 59 60 1 60 8 42 표2, 표3, 59, 62 48 15 125 5 16 10 58 표2, 77, 120 36 16 표4, 10 58 59 3 11 58 14 62, 67 7 61
21 : 05-06, no.76 pp.18-33 김재경은 인문학적 감각과 절제된 심미성을 바탕으로 공간과 건축, 인간의 풍경을 기록하는 사진가다.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사진집 『자연과 건축』, 『MUTE』, 『MUTE 2: 봉인된 시간』, 『수원화성』(공저) 및 『셧 클락 건축을 품다』, 『김중업의 서산부인과 의원』(공저) 등의 책을 냈다. 현재 본지 사진총괄 부편집인이다. pp.36-37 전진성은 부산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이며 독일 근현대 지성사와 문화사 분야의 전문가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역사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독 사회사학의 전신인 구조사학을 다룬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독일 올덴부르크(R. Oldenbourg) 출판사에서 2000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문화사와 인권사 분야로 연구의 지평을 넓혀가며 『박물관의 탄생』,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 등 여러 권의 저서와 논문을 집필했다. 부산의 인권단체 ‘아시아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본지 기획자문이다. pp.38-41 김정동은 1970년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근대건축사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년 목원대학교에서 정년퇴직했다(명예교수). 이후 세운상가군에 「우리근대건축연구소」를 열고, 운영해오고 있다. 건축문화재분야(건축시공기술사)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있다. 토탈디자인 전문지 격월간 《꾸밈》의 주간을 역임했고, 도코모모코리아 창립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 문화재청 근대건축분야 문화재위원장을 역임했다.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본지 명예고문이다. pp.42-47 이연경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건축역사이론 전공으로 석・박사를 취득했다. 심원건축학술상 제6회 수상자이며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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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of the Writers and Protagonists 학사지도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2015) 및 『사진으로 만나는 개항장 인천의 경관』, 『인천, 100년의 시간을 걷다』(공저) 등이 있다. pp.48-57 장수정은 본문에 포함 pp.48-57 이태현은 THE A LAB(에이랩 건축연구소)의 대표 건축가이다. 동시대의 아이디어, 미학, 기술 그리고 친환경적 요소들의 통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축디자인을 추구하며, 건축을 기반으로 한 도시, 공공, 예술,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국민대학교 건축대학을 졸업했고, 바틀렛 건축대학 석사과정을 최우수로 졸업했다. 서울시 ‘2019 사회혁신 리빙랩’ 사업 공모에 당선되었고, ‘2018 바틀렛 서울쇼’ 기획과 전시에 참여했으며, ‘제4회 국제건축문화교류’에서 우수 교류자로 선정되어 한국건축가협회장상을 수상하였다. 젊은건축가포럼코리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대중과 건축의 소통에도 기여하고 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다. pp.62-75 이상명은 본문에 포함 p.64 김현섭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정부장학생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셰필드대학교에서 공부했다. 2005년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를 주제로 셰필드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에서 AHRC박사후연구원으로 동서양 건축교류에 대해 연구했다. 2008년 고려대학교에 임용된 이래 건축역사・이론・비평의 교육과 연구에 임하고 있으며, 지금은 한국 현대건축에 대한 비판적 역사 서술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간 일본 건설성 건축연구소와 핀란드 헬싱키대학 및 알바 알토 아카데미에서 연구했고,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를 역임했으며, 국내외에
근현대건축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고려대학교의 건축』(2016), 『건축수업: 서양 근대건축사』(2016), 『건축을 사유하다: 건축이론 입문』(2017) 등의 단행본을 냈다. 대한건축학회 이사, 한국건축역사학회 이사, 『SPACE Academia』 편집위원, 『건축평단』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본지 비평위원이다. p.65 김영철은 고려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건축역사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2008년 베를린공대 건축학과 건축이론연구소에서 수학하며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귀국 후 건축이론연구소 군자헌을 개소했고, 현재 배재대학교 주시경교양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2년부터 매주 ‘토요건축강독’을 진행해오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새물결아카데미의 하이데거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베를린 AEDES GALERIE에서 ‘구축과 공간-김종성 베를린 건축전’(2006), ‘파주출판도시 베를린 건축전’(2005), ‘승효상 베를린 건축전’(2005)의 전시 코디네이터로 활약했다. 건축평론동우회 회원이며, 건축역사학회 편집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건축이론에 관한 다수의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 본지 기획자문이다. p.66 서정일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한민국 건축사이며 심원건축학술상 제2회 수상자이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2009~2017), 미국 뉴욕대학교 예술대학교 객원연구원(2009~2020), (재)여시재 기획위원을 거쳐 현재 한샘드뷰연구재단 자문위원이다. 공동저자 및 역자로 참여한 『동서양의 접점』(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재현 분열의 시대』(2019,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2019,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도서) 등 일련의 연구로 주목받으며 학제를 넘나드는 연구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대한건축학회, 한국건축가협회, 한국건축역사학회, 한국도시설계학회, 한국공간환경학회 정회원이다. p.67 한동수는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립대만대학에서 공학석사 학위를 받고, 중국 청화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인하대학교 전임강사를 역임하고 2002년 한양대학교에 부임했다. 대한건축학회 특별상 남파상(2013), 한국건축역사학회 우수학술발표논문상(2015, 2016, 2019), ISAIA 우수학술논문상(2016) 등을 수상했다. 문화재 설계 심의 및 평가 설계 심사위원(2011~2013), 문화재수리기술자 문제출제 위원(2014), 중국 청화대학 건축학원 건축사 잡지 편집위원(2014~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사찰 운영 자문위원(2014~2017),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건조물 분과)(2015~2017), 동양예술학회 이사(2018~현재), 서울시문화재 전문위원(2020~현재)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전공분야의 번역 및 저술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으며 관련 분야의 연구 프로젝트 및 전시회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pp.77-121 박유진은 본문에 포함 pp.120-121 전진삼은 제4회 꾸밈건축평론상(1988)을 수상하며 건축평단에 들어섰다. 종합예술지 《공간》 편집장 역임하고 월간 《건축인(poar)》을 창간하여 초대 편집인 겸 주간을 맡았다. 13년간 계간 《황해문화》 문화비평/건축 고정필자로 활약했으며, 1980년 월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건축의 발견』, 『건축의 불꽃』, 『조리개 속의 도시, 인천』, 『건축의 마사지 1, 2』 등 비평집과 『건축은 없다?』 『IMAGEABLE PLATE-AU』 등 다수의 공저를 냈다. 현재 본지 발행인이다. p.123 강병국은 본문에 약식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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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건축가 엔진포스건축 윤태권 ARCHFRAME
Yoon Joonhwan
×4
×16
×8
최종 모델
Fu’s Lab. 복잡계 미학의 건축 조형 디자인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몇 가지 질서에 따라 생성된다. 두뇌는 이러한 지구의 모습에 대칭인 지능을 가지고 있다. 질서 구조를 인지하는 알고리즘을 가지고 세상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진 질서 구조를 만족하는 조형에 호감을 느끼며 그렇지 못한 조형을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두뇌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3번째 지능 층위에 있는 미의식이다. 질서 구조를 만족시키는 조형은,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미의식으로서 호감을 준다. 홍익대학교 대학원 공간디자인 전공, 디자인 스튜디오 디자인: Chang, Ziyi(석사과정) 지 도: Wei, Ranran(박사과정) : Liu, Xu(박사과정) : 조택연(산업디자인학과 교수)
ⒸChang, Zi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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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건축의 대중화와 세계화, 그 중심에서 마실이 함께합니다. 이제는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터넷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건축물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 속에서 한국의 건축정보를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요? 한국 현대 건축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PR, 출판 기업인 마실와이드가 함께합니다. 하나의 집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듯, 마실와이드는 세계 곳곳으로 마실을 갑니다.
마실와이드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8길 45-8,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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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
공모
회
건축비평상 와이드
제 12
본지는 2010년 이래 ‘꾸밈 건축평론상’과 ‘공간 건축평론신인상’ 수상자들의 모임인 건축평론동우회와 손잡고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을 제정하여 신진 비평가의 발굴을 모색해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3회(박정현), 5회(이경창), 6회(송종열), 10회(최우용)에 걸쳐 현 단계 한국 건축평단의 파워 비평가를 배출한 통로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우리는 한국 건축평단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젊은 시각의 출현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역량 있는 새 얼굴들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바랍니다. 주최: 간향클럽, 미디어랩&커뮤니티 주관: 《와이드AR》 후원: 건축평론동우회
공 모 [시상내역] - 당선작: 1인 - 기타(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당선작’ 또는 ‘가작’을 선정할 수 있음) [수상작 예우] - 당선작: 상장과 고료(200만원) - 가작: 상장과 고료(100만원) - 공통사항 1) 《와이드AR》 필자로 대우하여, 집필 기회 제공 2) ‘건축평론동우회’의 회원 자격 부여 [응모편수] - 다음의 ‘주 평론’과 ‘부 평론’ 각 1편씩을 제출하여야 함. 주 평론과 부 평론의 내용은 아래 ‘응모요령’을 반드시 확인하고 제출바람 1) 주 평론 1편(200자 원고지 70매 이상~100매 사이 분량으로, A4용지 출력 시 참고도판 등 이미지 제외한 8매~12매 사이 분량. 단, ‘주 평론’의 경우 응모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초과 분량의 제한을 두지 않음) 2) 부 평론 1편(200자 원고지 30~40매 내외 분량으로, A4용지 출력 시 3~5매 분량) [응모자격] 내외국인, 성별, 공부 배경, 학력 등 제한 없음. 단, 만 40세 이하에 한함(1981년생까지 응모 가능) [사용언어] 1) 한글 사용 원칙 2) 내용 중 개념 혼동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괄호( ) 안에 한자 혹은 원어를 표기하기 바람
요
강
[응모마감일] 2021년 10월 31일(일) 자정(기한 내 수시 접수) [당선작 발표] 2021년 12월 중 개별통지, 네이버카페 〈와이드AR〉 게시판, SNS 등에 발표 및 《와이드AR》 2022년 1-2월호 지면 발표 [심사위원] 수상작 발표와 함께 공지 예정 [시상식] 2021년 12월 하순(예정) [응모작 접수처] widear@naver.com [기타 문의] 상기 ‘응모작 접수처’ 해당 메일 활용 바람 [응모요령] 1. 모든 응모작은 응모자 개인의 순수 창작물이어야 함. 기존 인쇄매체(잡지, 단행본 기타)에 발표된 원고도 응모 가능함.(단, 본 건축비평상의 취지에 맞게 조정하여 응모 바람) 2. ‘주 평론’의 내용은 작품론, 작가론을 위주로 다루어야 함 3. ‘부 평론’의 내용은 건축과 도시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는 시의성 있는 문화현상을 다루어야 함 4. 응모 시 이메일 제목 란에 “제12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응모작”임을 표기할 것 5. 원고는 pdf파일로 첨부하길 바라며, 원고와 별도로 성명, 주소, 전화번호를 이메일상에 표기 바람 6. 원고 본문의 폰트 크기는 10폰트 사용 권장 7. 이메일 접수만 받음 8. 응모작의 접수 확인은 문자메시지로 개별 전송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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ӯ ؍Րؒݩϼ, ӯ ؍Րؒݩϼ
Ryugaheon [Cheongun-dong, SEOUL]
2021. 03.30.→ 04.18.
VIIN Collection [Tong ui-dong, SEOUL] 2021. 05.17.→ 06.13.
photography [PA RK S an gil ]
S -0
ȊS ϊƠ ܅: ӯ ( ) ؍Րؒݩϼ by SuRyuSanBang
ࠇ؍ǻ Ѕ ށʲҕ [2021.05.18~06.13] photography [KIM Ja ek yo ung ]
זܛǻ ˱ ࢽ [2021.03.30~04.18]
Ѕ ށʲҕ VIIN Collection [ѻ ח٢ˆ| ˆ͢ࢧؠ10ª 6] T.02-736-5760 produced and designed by Suryusan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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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섬과 마린시티, 광안대교, 부산(2021)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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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비치와 엘시티, 와우산 달맞이언덕, 부산(2021)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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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SAY
김재경의 포토세이 16
부산의 원도심 동래, 자성대와 부산포 글, 사진. 김재경 본지 사진총괄 부편집인
날이 저물어 영도다리 아래서 배낭을 챙겼다. 생약 파는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된 도시”.1) 즉 초량왜관의 일본인
삼만여 명이 이재민이 되었다. 기름종이를 지붕에 덮은
점포 안에서 두 남자가 막걸리 병을 내려놓으며 나와 눈이
전관거류지(1877), 동래읍성지역, 영선산 일대의 유럽인
목조건물이 불타고 난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는 조건은
마주쳤다. 배경 선반에 말린 약재자루가 가득이 정돈되어
거주지, 조선인 토착민들이 거주하는 부산진 포구를
충분했다. 현대식 건물이 가득 찬 지금, 부산의 옛 모습을
있어 뭔가 느낌이 왔지만 걸음은 이미 뗀 다음. 지나치던
뜻했다. 용두산송현산 동편과 서편에 걸쳐 있었던 초량왜관,
볼 수 없어도 지층에 새겨진 원도심이 북항, 부산역, 남항,
발걸음을 되돌려 정중히 사진촬영을 청했다. 이런 순간을
조선시대 왜인 통제를 위한 구역이며 동관 3대청관수옥,
영도지역임에 틀림이 없다. 폭이 넓은 복도에 평상까지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크레타 섬에서
개시대청, 재판옥
놓여, 마치 한가한 동네의 골목을 닮은 영선아파트. 마늘이
지중해 주변 도시국가로 번진 힘이 동쪽으로 움직였다. 그
위치했다. 개항기에 일본인 거류지로 사용되었고,
담긴 양파자루와 시래기는 벽에 매달려 있고 주민들은
힘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정복은 인도에서 멈췄고, 아시아
일제강점기에는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산 정상에
한담을 나눈다. 재개발이 한창인 옆 단지에 좋은 집이
극동지역에서 또 다른 힘이 솟구쳤다. 거꾸로 보면 일본이
‘부산신사’를 두었다. 광대한 매축공사(1902~1934)는
많았다는 매축지마을 할머니, 얼마 전에 잃어버린 쇠종
과 빈번소 등 관청 건물이 해안선을 따라
대륙을 향한 길에 조선이 놓였고 그 길목이 부산지역인
영선산을 깎아 얻은 흙으로 부산 앞바다의 지형을 바꿔
얘기를 꺼낸다. 짐작에 외부인보다 사정을 아는 이의
것이 화근이었다. 선사시대 이래 교류에도 불구하고 잇단
나갔다. 경부선 철로 부설을 위해 자성대 아래 부산포
소행인 듯하며 이곳 대부분의 집외지인 소유들은 비었다
왜구의 노략질은 조선이 동래현에 진을 설치(1397)하게
일대를 메운 것도 그즈음. 북항 주변과 중앙동 땅이 그렇게
했다. 영도다리목 생약재상에서 만나 술잔을 건네던
작용했다. 대마도정벌(1419)로 일본과 교역을 끊거나 또
생겨났으며, 용두산에서 용미산(龍尾山) 자리로 옮겨 앉은
이의 말도 귓전을 맴돈다. “부산의 원도심은 동래입니다.”
삼포부산포, 울산 염포, 창원 제포를 열어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을
부산부청사(1936)는 해방 후 부산시청사로 사용되다가
그는 동래 사람이었고, 문화적으로 상 ‘ 혼’이라는 말이
유지했다. ‘넉넉한(富山) 고장’(1471, 東萊富山浦之圖,
연산동에 새 청사를 신축해 옮기자 지금의 제2롯데월드가
동래부를 우위에 두고서 혼사를 논했던 옛날식 표현이고
해동제국기), 이름 글자에 변화가 찾아왔다. “부산(釜山)은
초량, 부산진, 영도
들어섰다. 군면 통폐합(1914)때 부산부
가
보면 이처럼 제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잘 드러낸 표현도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 같아서 이렇게 이름 했고
동래군과 나뉘며 세운 영도다리(1934)는 이런 역사의
없을 듯했다. 양피지 위에 덧씌워진 글처럼 땅과 사람과
그 아래가 부산포이니, 늘 살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으며
일부분, 옛 부산의 기원지로서 자성대와 부산포 일대에는
시간이 직조한 무늬를 따라서 초기 부산의 도시구조를
북쪽 현까지 거리는 12리이다.”(1481, 신증동국여지승람)
‘가마 부’산(釜山)의 장소성이 깃들여 있다. “흰 모래 푸른
살펴보았다.
자원이 넉넉했던 부산(富山)이 가마솥 모양(釜)의
솔의 해안, 종일 파도뿐인” 삼천삼백여 명(1876)의 작은
산(山) 아래 부산포의 장소성(경제, 외교, 군사)을 강조한
어촌이 근대적 항구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부산(釜山)으로 바뀐 것이다.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식민지 항구도시는 근대화 이전의 경제를 그대로 안은
히데요시가 권력을 통일(1580)하자 힘을 국외로 돌려
채 일본 제국을 연결하는 무역항으로 발전됐다. 한국인
조선을 침탈(1592)했다. 부산진(자성대)과 동래성을
이만팔천, 일본인 이만오천(1910)의 도시는 경남도청이
짓밟고 한양을 접수한 후 평양에 머물던 왜군이
진주에서 옮겨 오자 이십만 명으로 늘지만 그 중 육만이
조명연합군에 밀린 것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해상
일본인이었다.(1936) 그리고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허망한
보급로를 틀어막은 채, 왜군의 교두보 부산포에 큰 타격을
꿈은 패전으로 끝이 났다. 해방이 되고 인구 28만일본인
입혔던 이유도 있었다. 지금의 좌천동, 문현동, 우암동
5만 명 귀국
해안가에 있던 적선 백여 척을 깨부순 것이고 왜군이
이 기간의 부산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그리고 전후(1955)
웅천 등 곳곳에 성을 쌓으며 전략을 바꾸도록 했다.
백만이 넘자 부산은 온통 판잣집이었다. 중부 만사백,
이 오십만(1948)을 넘어서지만 상공업이 마비된
이후 전선이 교착되고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근대기,
서부 삼천, 영도 칠백, 초량 삼천, 부산진 이천, 동래 육백
일본이 명치유신(1853~77) 후 대륙침략의 기회를 노려
모두 합해 이만 채였다. 이런 판자촌 대화재(1953)로
참조: 임진왜란(이장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산포
운양호사건(1875)을 일으켰다. 부산항에 들어온 일본
부산우체국, 부산역, 부산일보, 부산방송국을 포함한
해전의 승리 요인과 위상(임원빈. 이순신연구논 총
군함이 남해안과 동해안 탐측, 시위 후 강화도를 무력
공공건물과 삼천여 채의 집이 타서 없어졌고 육천세대
제32호), 한국의 발견 부산(한창기. 뿌리깊은 나무),
침입한 사건이다. 이로써 조선정부를 압박해 강화도 조약(1876)을 체결했다. 그 즈음의 부산은 “전체가 네 개의
1) Charles Louis Varat(1842~1893) : 프랑스 여행가, 지리학자, 민속학자
37계단 위 관수(옥)가, 일본영사관, 이사청, 부산부청사 자리, 부산(2021) Ⓒ김재경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김민수. 그린비), 팬저의 국방여행(http://panzercho.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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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대(부산진지성)와 증산(2021)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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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대 왜성, 부산(2021)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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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동 매축지 마을, 부산(2021)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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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영선아파트와 흰여울문화마을, 남항대교와 멀리 송도해변, 진정산, 천마산, 부산(2012)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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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와 부산대교로 이어진 (절)영도, 피란시절 점바치 골목의 기억, 부산(2021)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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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서 소년에게1)
GAIA Topic :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와 같이 거대한 문제 앞에서 개인은 쉽게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정치인이나 자선사업가가 아니어도 각 개인들도 변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시민으로서, 소비자로서, 그리고 고용주 또는 직장인으로서 변화를 이끌 수 있다. 34
1) 이 꼭지의 명칭 ‘해에게 소년에게’는 최남선 선생(1890~1957)이 1908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발표했던 권두시 제목에서 따왔다. 그로부터 100년 뒤 2008년 1월에 창간한 본지는 선생의 계몽주의적 정신과 시선으로 현 인류와 미래의 인류가 함께 살아갈 지구를 향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시민으로서; (기후변화는 정치인들의 유일한 관심사가 아니다. 당신 지역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전화를 걸고 편지를 쓰고 공개회의에 참석하라. 소비자로서; (새로운 대안에 대하여 수요가 존재한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낼 수 있다) 청정전기를 신청하라. 집 안 배출량을 감축하라. 전기차를 구매하라. 인공 고기를 먹어라. 고용주 또는 직장인으로서; (쉬운 일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보다 어려운 방식으로 더 많은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내부적인 탄소세를 도입하라. 저탄소 솔루션 혁신을 우선시하라. 얼리어댑터가 되어라. 정책 개발 과정에 참여하라. 정부 지원 연구와 연계하라. 혁신가들이 죽음의 계곡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와라.2) p.76 2) 빌 게이츠,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2021, 김영사) ‘12장.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것’ pp.309-319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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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게 묻다 01
건축가의 명함 없는 도시를 꿈꾸며 : 소멸과 망각의 ‘억지자’로서의 건축가를 상상하다 글.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역사학자
건물주가 가장 부러운 직종이 되는 세태 속에서 건축가들 스스로는
결코 그 냉혹한 먹이사슬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지구상 곳곳에 펼쳐진
자신의 사회적 입지가 날로 약화되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고대문명의 유적이 왜 대부분 사막 등 황폐한 지역에서 발견되는가?
외부에서 바라볼 때 건축가는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지식인이자
인간 문명이 번성하면서 주변의 자원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예나
특화된 지식을 습득한 전문가, 우아하게 돈을 버는 사업가, 첨단 재료를
지금이나 인간은 환경 파괴의 주역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연에
찰떡 주무르듯 다루는 천재적 엔지니어에 더하여 예술가다운 시크한
순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대하는 행위다. 벽을 세우고 문을 만드는 것은
차림새까지 갖춘 그야말로 모든 미덕의 총화인 듯 보인다. 남다른 교양과
자연은 물론 타인들로부터도 각자를 보호하고 구별 짓기 위함이다.
취향을 갖추지 못한 일반 시민들도 요즘은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법한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대자연과 타인에 대한 처절한 투쟁의 일환인
기상천외의 건축물들을 바라보는데 익숙하며 자신이 그러한 첨단 도시에
것이다.
살고 있다는 것에 흡족해한다. 시민들 중 일부는 몇몇 스타키텍트의 이름까지 들어본 적이 있다. 요즘의 건축가는 옛날로 치면 일종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차피 부조화의 산물이다. 우리의 주관적
점성술사와 같은 위치다. 그/녀는 미래를 꿰고 있는 자다.
욕구와 객관적 현실, 희망과 경험, 기억과 진실 간의 필연적인 어긋남이 빚어내는 비극적 과정 및 결과를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예컨대
건축가는 전문가적 식견과 독창적인 발상을 통해 일반 ‘업자’들과 자신을
인간이 구사하는 언어는 동물들의 소리에 비해 정보를 정확하게
구별 짓는다. 설령 자신의 건물 하나만을 앞세우는 얄팍한 수준은
전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하게 주관적으로 왜곡한다. 발신자와 수신자
아니더라도 도시 전체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설계자로서의 안목을
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뉘앙스’야말로 모든 사랑과 증오, 전쟁과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남다른 안목이 실제로는
화평의 원천이다. 따라서 아무런 오해와 곡해가 없는 조화로운 낙원
도시를 궁색하게 만든다. 건축가가 신화 속의 데미우르고스가 아닌 한,
상태에서는 역사와 문화란 존재할 수 없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철학자
그/녀의 국부적인 설계는 도시의 여타지역을 상대적으로 더욱 비루하게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말한다. “그대 옆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만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개 건축가의 창조성 대신 공동체적 삶의
지나가는 가축의 무리를 보라. 그들은 어제가 무엇이고 오늘이 무엇인지
총체로서 도시가 형성되는 중세기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모르는 채 (・・・) 순간이라는 말뚝에 묶여서 산다. 그래서 그들은 우울도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우리는 현대문명의 안락함과 민주적 권리를 모두
권태도 느끼지 않는다.”
다 포기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동양식 ‘풍수’의 원리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는 도시를 만들자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비우고 흐르는
우울과 권태에 휩싸인 실낙원의 음습한 땅 위에서 비로소 문화의
‘바람과 물’이라는 원리는 서구식 유물론과 기능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싹이 트고 역사가 시작된다. 바벨탑의 전설이 말해주듯, 과거의
비쳐지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특권적 구별 짓기의
황금시대와 결별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서로 간에
논리에 다름 아니다. 아무 것도 채우지 않아도 저절로 힘이 모이고
소통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아비규환이야말로 실은
배분되는 공간이란 만조백관의 무릎 위에 지어질 왕도(王都)의 원리로는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서로 다른 기억과 의견들이 쟁투하는 와중에
적합할지 모르나 그러한 특권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민주사회에는
자연의 반복성을 타개하고 미증유의 도약을 성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과연 인간이 만든 도시가 대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인간의 고유한 능력, 대자연과 타인에게 자신의 우위를 관철시키려는
있는가? 그러한 환상은 인간 세상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의 소산일
권력의 의지가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영역이 바로 테크놀로지이다.
뿐이다.
특히 전쟁기술이야말로 테크놀로지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모든 도시는 원천적으로 요새였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대지의 분점, 분배 및 조직을
잃어버린 자연을 기억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영국의 문화사가 사이먼
의미하는 ‘노모스(nomos)’, 즉 안정된 정치적 질서의 탄생은 자연적
샤마(Simon Schama)가 『풍경과 기억』에서 주장했듯이, 실제의
소여는커녕 늘 생사를 건 투쟁의 산물이었다. 결국 집과 성전, 도시를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풍경은 원초적이기는커녕 인간 사회의
세운다는 것은 또다시 헛되이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담론적, 물질적 실천이다. 인간은 자연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할 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막 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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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처럼 지울 수 없는 시간의 층적을 남긴다. 문화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띠게 된 구역들에서 주민의 사회적 통합 및 정체성/자존감 고취,
비극적 구조를 갖지만 인간 특유의 기억을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된다.
그리고 환경적 개선이 촉진되었다. 주로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위한 사회주택(Sozialwohnung)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IBA 베를린〉은
문화의 주요한 계기를 이루는 테크놀로지로서의 건축은 분명 인간에게
건축의 영역을 넘어 매우 포괄적인 사회적 실험이었다.
고유한 권력의지의 표현이지만, 시간의 불가항력적인 흐름에 따라 전혀 색다른 차원에 이르게 된다. 건축은 어느덧 인간 역사의 유골로
그렇지만 그 실험의 효과는 매우 한시적이었다. 현재 통일독일의
전화한다. 말없이 홀로 선 기둥이 마치 홍수에 쓸려나온 유골처럼 인간
수도 베를린은 저소득층 거주민들의 생활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생의 무상함을 환기시킨다. 실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건축은 멋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옛
디자인이나 탁월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런 거품이 다 빠지고 남은
베를린장벽이 사라진 공터에 등장한 첨단의 21세기형 건축물들과
빛바랜 흔적들이다. 진정 아름다운 도시란 산자들뿐만 아니라 망자들도
대비되면서 IBA의 사회주택들은 벌써부터 주변화 되었다. 어쩌면 IBA
거주하는 장소, 달리 말해 신과 자연, 혹은 권력자의 요구를 거스르던
신화의 종식은 건축을 이념화했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필연적
반역자들의 시신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널려있는 비장한 요새다. 무너진
귀결이기도 하다. 소위 ‘국제주의 양식(international style)’이 등장한
바벨탑이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과 적대, 저마다의
이래 천재 건축가들의 알량한 재능을 입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언어와 기억이 혼재한다는 점에서 모든 도시의 원형이다.
도시민들이 실험실의 모르모트 처지로 내몰렸던가. 건축이 삶의 전면에 나서는 한, 그것이 낡고 매력을 잃어감에 따라 그것에 기대었던 삶도
이에 반해 깔끔하게 구획된 ‘신도시’나 그럴듯하게 단장된 사적지는 잘
급속히 퇴조하기 마련이다. 오로지 삶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머무르는
관리되는 동물원을 닮았다. 의견 대립도, 죽음의 흔적도 없는 일종의
건축물만이 피곤한 삶을 지탱시키는 참된 보금자리가 될 수 있다.
낙원이다. 그러나 서울이 아름다운 건 복원된 광화문과 경복궁의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라진 중앙청/조선총독부청사의 음습한 망령
건축을 삶의 현장에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우파 헌법이론가 칼
때문이다. 그 불편한 기억 덕택에 서울은 경복궁이라는 동물원/낙원의
슈미트(Carl Schmitt)가 「역사적 의미부여의 3단계」라는 1950년도의
연장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된다. 건축이 이와 같이 삶의 배후에
짧은 에세이에서 제시한 ‘억지자(Kat-echon)’ 개념은 참조할만하다.
그림자/망령처럼 머물지 않고 스스로 전면에 나설 때 정작 삶은 안락한
같은 해에 출간된 그의 주저 『대지의 노모스』에도 나오는 이 낡은 중세기
희극무대로 전락한다. 따라서 좋은 건축가는 그 이름이 잊힌 무덤 속의
개념은 세계의 종말을 저지하는 현세의 지배세력을 지칭한다. 슈미트의
건축가들뿐이다.
설명에 따르면,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관념은 인간 역사의 의미를 붕괴시키기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제국처럼 종말을 저지하는 세력이
히틀러의 건축가 슈페어(Albert Speer)나 준(準)파시스트였던
필요하다. 보수주의자 슈미트는 역사의 궁극적 의미란 오로지 저지하고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논외로 치더라도, 세계를 발판으로 뛰는
연기시키는 힘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상의 의미공간에 뿌리를 박는
스타키텍트들의 화려한 경력은 지구촌 각지에서 거주민들의 생활유형과
일”이다. 슈미트가 당대의 역사(서술)가를 염두에 두고 제시한 ‘억지자’
경험양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과 정체성까지 마음대로 창조하는
개념은 건축가에 고스란히 적용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건축이 인간
신적인 권능을 보여준다. 예컨대 〈해운대 아이파크〉와 〈영화의 전당〉이
역사의 유골이라면, 그것은 역사를 앞으로 이끄는 추진체라기보다는
들어서면서 본래 피난민촌과 컨테이너 부두, 부마항쟁의 도시였던
뒤에 남기는 발자취에 가깝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 깊이 뿌리내려 가장
부산은 별안간 해체주의 건축의 낙원이 되었다. 개항 도시로서 처음
원형적인 흔적을 남김으로써 인간 역사를 유증한다. 건축물이 없다면
건설될 때부터 여태까지 줄곧 외부의 권력에 의해 휘둘려 기형적인
삶의 유지도, 기억도, 물론 역사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삶을 선도하는
형태로 성장해온 도시가 마침내 상징적으로도 ‘해체’된 것이다. 이와
아방가르드와는 정반대로 소멸과 망각의 ‘억지자’로서 건축가를
더불어 시민들의 기억과 정체성도 완전히 해체되어버렸다. 마치 일제가
상상해봄직 하지 않은가.
만든 식민도시 부산이 조선왕조의 동래부(東萊府)를 삼켜버렸듯이 부산의 외곽이던 해운대가 부산 도심을 촌스런 변두리로 전락시켰다.
건축가들이여, 부디 잘난 체하지 말고 성실하고 진부한 장인의 위치로 돌아가라. 혹여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루하거든 차라리 ‘기억
물론 건축가의 개입이 도시민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사례도
활동가(memory activist)’의 태도를 취하라. 우거진 수풀 속에 홀로 놓인
얼마든지 많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IBA 베를린 1987〉 프로젝트를
묘비와 담쟁이가 파고든 흉가의 외벽을 주목하라. 대자연으로부터도,
주요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1979년에 서베를린 도시재생 사업의
타인들로부터도 결코 환영받지 못했던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을
일환으로 시작하여 1987년에 종결된 이 기획은 탈산업화시대의
직시하라. 허망하게 사라졌건만 아련한 흔적을 남긴 사람의 체취 위에
피폐해진 도심부를 다시금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전처럼
다시 기둥을 세우고 바벨탑을 쌓아올려라. 그 무르지만 겹겹이 쌓인 반석
노후화된 건물을 파괴하고 대단지를 만드는 대신 도심 곳곳에
위에서 치열한 삶과 죽음의 비극이 계속 이어지도록.
산재하던 블록 형태의 옛 주거공간들을 복원시켰다. 이른바 ‘신중한 도시복구(behutsame Stadterneuerung)’ 및 ‘비판적 재건(kritische Rekonstruktion)’의 원리에 따라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계획이 추구해왔던 일자형 공간구조와 이에 따른 일터와 주거, 여가공간의 기능적 분리가 타파되었고 그 결과 각자 독립적 일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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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내 인생은 ‘레코드’의 인생인 것 같다. 근대건축사를 공부하며 먼지나는 건축 기록을 뒤졌으니 그것도 레코드이고, 음반(音盤) 즉, 음악을 사서 내 것으로 만든 것도 레코드이니 70여 인생 온통 레코드판인 셈이다. 1970년 이전 학창시절 갖고 있던 음반 수는 대략 20여 장이었던 것 같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선물로 받은 것들이었다. 그중 팻 분의 캐럴 판, 클리프 리처드의 영국 팝, 그리고 닐 세다카, 폴 앵카의 미국 팝, 그리고 주세페 디 스테파노의 나폴리탄 민요 정도였다. 노래를 통해 상하이, 홍콩 그리고 파리, 샌프란시스코와 친숙해졌다. 파리는 샹송을 통한 것이었다.
당시 판은 원판이 아니라 모두 청계천 세운상가 주변 불법 복제판들이었다. 백판(빽판)이란 것들이었다. 라이센스판이란 것은 한참 후였다. 비싼 원판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일 때였다. 그 레코드판들이 이제 커버가 다 삭아 너덜거리고 있다. 그러나 가끔 꺼내 보면 꺼먼 속살은 여전히 새것 같이 느껴진다. 플레이어에 올려 놀 때면 어떤 사운드가 나올까 그 소리가 궁금해지고, 우리 가곡 ‘옛 친구(思友)’같이 정겹고 귀하게 들린다. 내용물은 과거 히트곡 여부와 상관없이 값지다. 먼지만 쌓인 것도 마찬가지로 값지다. 나는 이 판들을 종묘 신주(神主) 모시듯 하고 살고 있다. 레코드에는 우리 각자의 인생 한 편이 비춰져 있다. 검은색 비닐 양면에 50분 정도로 담았다. 또한, 그 판
표지 앞, 뒷면은 우리 시대사가 그려져 있다. 대부분 건축과 관련된 것들이다. 핑계겠지만 나는 음악 내용보다 표지를 보고 판을 샀다. 그래서 건축, 도시, 풍경 등이 담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해외 관광이 어려울 땐 대리만족도 주었다. 건축사 수업 때는 사진 대신 레코드 표지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건축물마다 여러 가지 변화가 왔다. 세월이 담겼을 뿐 아니라 지진, 화재 등 재난에 의해 사라지기도 했다. 지난 레코드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레코드는 1만 장 정도 되는 것 같다. 적은 숫자는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 모이니 분류가 시작했다. 국가별, 도시별, 건물별 분류가 가능해졌다. 또 다른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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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는 성당의 파사드 부분이 서측면이다. 레코드는 파리의 ‘헌책방 거리’도 담고 있다.(1960년대, 프랑스 판) 최소한 지난 세기의 내용이 읽힌다. 불은 다행히 성당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2개의 종탑과 전면부를 피해 갔다. 레코드판은 1960년대 파리의 아코디언인 뮈제트 모음집이다(Musette a la Paris)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b.1949)가 2만 장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단한 숫자이다. 내 또래인데 도쿄 신주쿠(新宿) 재즈 바에서 어려웠던 시대 모아 세월의 풍상(風霜)이 넘쳐흐른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차용도 그 결과치이다. 그는 자신의 글 속에 수많은 음악을 넣었다. 필자는 그의 책 20여 권을 읽었는데 음악에 관한 항에 밑줄을 그었다. 그 음악 속의 현장을 찾기도 했다. 내가 감히 그와 겨룰 수는 없겠으나 나 나름 건축을 담은 재킷(표지)은 내가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레코드 대부분은 1970년대 이후 사 모은 것으로 장르 불문, 생산지 불문이다. 레코드 크기는 4각의 한변이 대략 31.5cm이다. 대개
검은색으로 골이 나 있는 레코드판은 원형의 접시 모양새이다. 중간 중간 곡 간의 틈이 있다. 보통 일곱 줄이다. 그러나 그 판을 넣은 집은 사각형이다. 이 사각형에 음악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건축각론항 같이 이를 분류해 보니 건축사이고 도시사인 것이다.
레코드 재킷에서 음악과 건축 읽기 01
각 항목마다 네 개의 레코드 표제(表題)를 조합(組合)해 섞는 형식으로 하려 한다. 일종의 조곡(組曲)이 흐르게 하려는 생각이다. 비발디의 사계(四季)에서 경험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세상, 대리 만족 겸 레코드 표지 여행을 떠나 보고자 한다.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글. 김정동)
노트르담 대성당의 복원을 기원하며 글, 자료. 김정동 우리근대건축연구소 소장
노트르담 대성당(Notre Dame de Paris) 화재는 2년 전 봄(2019.4.15.) 저녁 일어났다. 나는 TV뉴스를 통해서 이를 보았다. 집 사람이 경악하는 소리를 듣고 무척 놀랐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어디선가 ‘울게 하소서’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몇 년 전 남대문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했다. 프랑스인, 파리시민의 놀람은 더 했을 것이다. 딴 나라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길은 약 10시간 만에 잡혔다. 불은 성당을 다 태울 것같이 타올랐는데 다행히도 고딕 첨탑과 지붕의 3분의 2 정도를 태우고 진화되었다. 불은 보수공사 중이던 지붕 첨탑 주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오랫동안 쌓인 먼지와 잡물이 그 주원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들이 스파크로 화염을 일으킨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가톨릭의 상징이다. 파리교구장인 주교가 미사를 집전하는 주교좌성당이다. 서울의 명동성당과도 같은 곳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은 중세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3대 성당이라 불려진다. 중세는 AD 313년부터 1453년까지를 말한다. 노트르담 성당은 1163년부터 1325년까지 160여 년간 지어졌다.(Marc Gaillard, 『Paris de la place en place』, pp.74-77, Martelle, 1997)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화재 직후, 마치 정견 발표하듯 당장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은 너무 거칠은 발표였다. 국가 기금 모금 캠페인을 하여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성당을 “더 아름답게 재건하겠다”고도 말했다. ‘더 아름답게? 원래대로만 하면 되는데…’.[재킷 1] 대통령은 파리시장과 함께 불에 탄 성당을 방문해 복원 상황을 점검하고, 프랑스 정부는 파리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2024년까지 노트르담 대성당을 복원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너무 급한 것 아닌가….’[재킷 2] 나는 문화재 보수 공사장에 서면 언제나 세 사람을 떠 올린다. 명동성당 수리에 참여했을 때도 그랬다. 프랑스의 비올레 르 뒤크(Viollet Le Duk, 1814~1879), 영국의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그리고 이탈리아의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 1906~1978)가 그들이다. 세 사람의 문화재 건축가는 언제나 옳았다. 다름은 경우의 수가 다르다는 것뿐이었다. 존 러스킨은 정통파, 비올레 르 뒤크는 변형도 불사한다. 카를로 스카르파는 자기 것으로 만들고 새 생명까지 부여한다. 앞의 두 사람은 전형적인 보존의 선구자라면 스카르파는 오늘과 같은 재생시대에 걸맞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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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생상스의 콘체르토 1958년 판 표지. 전면 종탑 부위에 구름을 그린 것이 연기가 솟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이 에펠탑이다.
레코드 재킷에서 음악과 건축 읽기 01
건축가일 것이다. 불에 탄 노트르담 성당, 귀한 성물들을 품고 있던 성당 내부는 무너져 내린 잔해들로 뒤덮였다. 성당은 석회암 몸체가 불에 그을려 취약해 졌다. 1843년부터 1855년까지 12년간 그는 수리 현장에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노트르담 성당의 대부분은 비올레 르 뒤크의 흔적이다. 화재 이후 지난 2년간 문화재 전문가들에 의해 우선 긴급 처치는 이뤄졌다. 이제 비올레 르 뒤크의 수리 정신을 이어받은 후배들은 넉넉하게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재킷 3] 불나기 전 성당에는 하루 평균 3만 명, 매년 1,4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고 한다. 나도 2003년 파리에서 1년 지내는 도중, 이 성당에 자주 갔다. 목적 없이도 오다가다 들르던 곳이다. 성탄절에는 명가수들의 노래자랑도 구경할 수 있었다. 성당 부근에는 헌책, 레코드 등을 파는 가게가 몇 곳 있는데 이를 ‘부키니스트(bouquiniste, 헌책방)’, ‘파사쥬(passage, 몰형 상점)’라고 한다. 그 길목에서 나는 주로 샹송판을 샀다. 이삿짐이 걱정되어서 나름 엄선하긴 했지만….[재킷 4] 3
4 3. 성당 내부에서 센강을 내려다보는 사진이다. 불에 탄 첨탑과 지붕의 일부가 보인다. 『파리제(祭)』(프랑스 영화 중 주제곡 편집판) 싱글판 표지.(1960년대, 일본 판) 4. 성당은 넉넉히 잡아 2020년대 말까지 복원되었으면 한다. 표지가 보여주듯 밝은 모습으로…. 레코드판 제목은 오른쪽 아래에 붉은 글씨로 『이브 몽탕, 에트왈극장 리사이틀』(1945, 프랑스 판)이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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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건축의 현장과 이슈 11
영주시 영주동 근대역사문화거리 : 철도마을과 정미소, 이발관이 있는 영주의 근대도시풍경 글, 자료. 이연경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한국근대건축의 현장과 이슈](시즌3)는
고향이자,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중심이었다.
대상지가 된 것일까?라는 질문이 먼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등록문화재가
안향을 모시는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뿐
떠오른다. 선비의 고장 영주에는 우리가 잘
된 지역들의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니라 전통마을인 무섬마을도 위치하고
모르고 있었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던 것일까?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과 같이 전통문화와
있고, 소수서원 부근에는 선비문화를 체험할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선정된 영주
민속이 남아 있는 전통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수 있는 선비촌도 있다. 2008년부터는 매해
근대역사문화거리는 경상북도 영주시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근대역사와
한국선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2016년
영주동, 두서로와 광복로 일대의 거리이다.
생활문화가 남아 있다. 올해는 영주를
영주시는 선비도시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철도관사마을과 오래된 정미소, 이발관, 교회
시작으로 익산, 영해, 통영 등 다양한 특성을
이처럼 영주하면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간직한
등이 남아 영주의 20세기 풍경을 보여주는
가진 근대역사문화공간의 면면을 살펴볼
장소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 거리는 영주가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예정이다.(필자 주)
그런데 2018년 처음 시행된 문화재청의
‘선비도시’와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영주가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사업’에 영주시가
지나온 또 다른 시간의 성격, 즉 20세기
선비의 고장, 영주의 근대역사문화거리
군산, 목포와 함께 선정되었다. 군산이나 목포는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기를 지나며 만들어진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있는, 선비의 고장이라는
19세기 말 개항장으로 설정된 도시로, 일본식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별칭을 가진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시는 고려
가옥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말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安珦)과
근대도시들이지만, 대체 선비의 고장 영주는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의
왜?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사업의
근대역사문화공간이란?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근대 시기에 형성된 거리, 마을, 경관 등 역사문화자원이 집적된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문화재청에서는 2018년 6월 선(線)・면(面) 단위의 문화재 등록제도를 도입하였다. 동시에 도시재생 뉴딜사업과 연계하여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근대문화유산의 입체적・맥락적 보존과 활용을 통한 도시 재생 활성화를 촉진하고자 2018년 시범사업지로 군산 내항, 목포시, 영주시가 선정되었고, 2019년에는 영덕 영해장터거리, 익산 솜리, 통영시가 선정되었다. 2020년에는 창원시 진해구와 서천군 판교면이 최종 문화재 등록조사 후보지로 선정되어 국가등록문화재 고시를 앞두고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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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대상지 Ⓒ문화재청
철도부설과 영주의 근대도시화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동서방향의 광복로와 남북방향의 두서길을 중심으로 하는 가로형 근대역사문화공간이다. 광복로는 조선시대부터 서쪽으로는 풍기, 동쪽으로는 봉화와 이어지는 주요 간선도로로 주변에는 옛 영주역과 옛 군청(조선시대 관아 위치), 주요 학교와 교회 등이 위치한 20세기 중후반 근대 도시 영주의 중심지였다. 광복로에서 뻗어가는 두서길은 관사골로 이어지는 길로 두서길 주변으로는 1920~30년대 건축된 근대한옥과 철도관사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영주의 근대도시화를 촉진시킨 것은 다른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철도의 부설이었다. 1941년 7월 1일 현재의 중앙선인 경경선(京慶線)의 영주역-안동역 구간이 개통함에 따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영주역은 197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 근대도시 영주의 주요 거점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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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을 하였다. 영주역의 동측에는 후생시장을 비롯한 시장과 역전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영주역 북측에는 철도 직원들을 위한 철도관사마을이 형성되었다. 철도관사마을은 영주역의 건립(1942년)보다 이른 시기인 1935년경 건립된 것으로, 7등 관사 7개동과 8등 관사 6개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철도역보다 관사가 먼저 건립된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경경선 철도 건립을 준비하며 관사부터 먼저 건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등록문화재 제720-1, 2호인 영주역 7호 관사와 5호 관사는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철도관사로 이외에도 10개동이 더 남아 있는 상황이다. 철도관사마을은 직교하는 도로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반듯한 사각형 모양의 필지에 표준형 관사를 건설한 것으로 주변의 필지들과는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철도관사마을의 남쪽에는 등록문화재 제720-3호인 영주 영주동 근대한옥이 있는데, 이 한옥은 조선후기 의원인 이석간(李碩幹)이 명나라 황제 어머니의 불치병을 고쳐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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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고택의 별채로, 원래는 99칸 본채와 별채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1920년대에 건축된 ㅁ자형 별채인 근대한옥만 남아 있다. 영주동 근대한옥은 한의원과 하숙집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철도관사와 함께 영주동의 근대주거경관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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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0년대 영주시 영주동 일대 3. 1970년대 영주시 영주동 일대 4. 구 영주역 5호 관사(1935) Ⓒ문화재청 5. 구 영주역 7호 관사(1935) Ⓒ이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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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영주 영주동 근대한옥(1920년대) Ⓒ이연경 7. 철도관사가 양옆에 늘어선 두서길 모습 Ⓒ이연경
정미소와 이발관, 1950~60년대 번화한
발전하여 정미소와 양조장, 제조업, 상업시설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영주의 모습을 간직한 광복로
등의 숫자도 급증하였다. 풍국정미소와
1966년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한편 광복로는 영주와 풍기, 봉화를 잇는 주요
영광이발관은 1950~60년대 영주의
풍국정미소는 가로변의 1층 한옥상가와
간선도로로 현재 영주시 청소년지원센터와
산업발전기에 건축된 건물들로 광복로를 따라
후면의 정미소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정미소
영주시 수도사업소 등이 위치한 자리에는
늘어선 상업건축물들은 이 시기 만들어진 도시
건물은 트러스 목구조의 지붕을 가지며 비교적
영주군청이 있었으며 바로 옆에는 1911년
풍경을 잘 보여준다. 또한 영주 시내의 3/4이
층고가 높아 내부에 정미 기계들을 배치하여
영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1921년 현
잠겨 버린 1961년의 대홍수는 영주의 시가지
작업장으로 활용하였는데, 현재도 정미소
위치로 이전한 소학교와 신사, 영주금융조합, 경찰서 등이 위치하였다. 그 서측으로는 1907년 기도모임으로 시작하여 1958년 현재의 예배당을 신축한 영주제일교회가 있으며 광복로를 따라 풍국정미소와 영광이발관 등 1960년대 상업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영주의 행정중심지였던 광복로의 서남쪽 일대는 1940년 영주읍 승격 및 1941년 경경선 철도 개통 이후 상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해방 이후인 1955년 이후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이 개통됨에 따라 영주역은 시멘트와 무연탄을 수송하는 주요역이 되었다. 1966년에는 경부선 김천역과 중앙선 영주역을 잇는 경북선이 개통함으로 영주역은 중앙선과 영동선, 경북선이 지나는 역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역 부근의 산업도 빠른 속도로 8
철도관사
현 두서길
영광중학교 현 광복로
영주초등학교 영주군청
구 영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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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주읍 승격 당시(1940년) 영주읍 지도 중 광복로 일대 Ⓒ영주시청 9. 1954년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일대 모습 (1954년 항공사진 위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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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주 영광이발관 Ⓒ이연경 11~12. 영주 풍국정미소(1966) Ⓒ이연경 13. 영주 풍국정미소(1966) Ⓒ문화재청 14~16.영주제일교회(1958) Ⓒ이연경
운영 당시 사용하던 정미기계 등이 남아 있어 장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전히 영업하는 영광이발관은 광복로 가로변을 따라 건축된 2층 한옥상가로 1930년대에 ‘국제이발관’이 영업을 시작한 후 ‘시온이발관’으로 이어지고, 이후 ‘영광이발관’으로 이어지며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0~6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1층을 영업장으로 2층을 주거 혹은 창고로 사용하였다. 그 외에도 광복로를 따라서 단층 혹은 2층 한옥상가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건물들은 단일건물로서 건축적 가치가 높다기보다는 1950~60년대 번화한 영주의 산업 상황과 생활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크다. 시간의 적층,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개별 건축물의 건축적 가치가 아닌, 이 건물들이 군집으로서 만들어내는 근대도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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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이다. 우리는 근대건축물 하면 보통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을 떠올리는데, 사실 우리의 근대라는 시간의 켜는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식민화 이전의 시간들, 그리고 해방 이후의 시간들까지 포함하는 다층적인 켜이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길인 광복로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관사마을과 근대한옥, 그리고 1950~60년대에 건축되어 최근까지 사용되었거나 지금도 사용 중인 교회와 정미소, 이발관을 포함한 다양한 가로변 상업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다양한 시대상을 담은 건물들이 형성된 배경에는 철도의 부설과 확장, 그로 인한 상업과 산업의 발전이 있었다. 선비의 고장 영주에 철도와 함께 불어온 근대의 바람이 남긴 흔적들이 적층되어 만들어진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2019년부터 시작된 5년간의 재생활성화사업을 통해 영주의 20세기 생활사를 담는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18
참고문헌 1. 문화재청, 2018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9 2. 임유경, 심경미, 권영란, 방보람.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지속적 관리를 위한 조사・계획 체계 구축 방안.건축공간연구원. 2020 3. 양훈도, 영주, 생활사를 발견하다 –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1024#//
17~18. 광복로 주변 한옥 상가 Ⓒ이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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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의 떠오르는 건축가 06
건축권장 장수정 :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꾸준히 작업하는 건축가
장수정 소장과의 인터뷰는 세운상가에 위치한 건축권장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세운상가는 자주 찾는 장소였지만, 그곳 설계사무소의 내부를 방문하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세운상가 특유의 빛이 드는 중정을 지나 사무실에 들어섰고, 창가에 있는 사무실 한쪽 회의 테이블에서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장수정 소장은 건축에 대한 탄탄한 기본기와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서울시 공공건축가와 마을건축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이다. 많은 정보를 갖고 대화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건축을 시작하게 된 계기들과 현재까지 오게 된 과정 하나 하나를 담담히 혹은 섬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줘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다양한 건축 경험을 들려주며 그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정감 있고 따듯하게 들렸다. 그리고 초심자로서 건축을 해오며 실수했던 과정들 혹은 그로 인해 터득한 교훈과 배움을 통해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밝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오히려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으로 사무소를 시작한 것은 몇 년 안 되지만 이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여러 외부 활동으로 본인의 도시와 사회 그리고 건축에 대한 관심사를 확장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꾸준히 작업하는 건축가로 남고 싶다’는 말에서 사람을 중시하는 건축가로서의 따듯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솔직하고 담백한 그녀의 건축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가 계속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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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시: 2021년 04월 06일 10:00am 인터뷰 장소: 건축권장 건축사사무소 (서울시 종로구) 참석자: 장수정(건축권장 대표), 이태현(본지 편집위원, THE A LAB 대표)
RISING ARCHITECT 48
1. 장수정
ⓦ 건축권장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프로젝트들을 했었는지 혹은 어떤 주제들에
퀄리티를 고민하고, 다른 다가구주택과의
건축권장은 도시, 사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차별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작은 노력들을
바탕으로 사용자와 공감할 수 있는 건축을
건축과 2학년 때 한 명의 작가를 정하고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동시에 법률과
지향합니다. 이상적인 형태나 오브제에서
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디자인하는 작업을
제도가 도시에 미치는 영향이 개별 건축가의
출발하지 않고, 산재된 사실들 사이에서 문제를
했었는데 통의동에 있는 2층 주택의 옥상이
노력보다 도시공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혹은 주제를 찾아내고, 질문을 던지고, 그렇게
사이트였습니다. 그 당시에 좋아했던
있음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얻은 정보를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다양한
아티스트를 거주자로 정하고 창작과 생활이
방식을 탐구합니다.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방과
ⓦ 학교를 졸업하고 경영위치
화장실, 작업실을 각각 떨어트려 외곽으로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하셨는데, 어떤
ⓦ 어떻게 건축을 공부해왔고, 어떤 건축 실무
배치하고 사이에 비어 있는 곳이 작업과 전시에
시간들이었나요?
수련과정을 거쳤나요?
다목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제안했습니다.
다른 사무소도 비슷하겠지만 학교에서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했습니다. 1~2학년
나름 그 사람의 삶과 작업의 방식을 해석해서
배우던 것과 비슷한 것도 있었지만, 감리나
때는 손으로 이것저것 그리고 만들면서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이
실시설계처럼 새로운 것들도 있었고, 비슷한
작업하는 것이 즐거웠는데, 3~4학년이
즐거웠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오래된
것의 깊이가 깊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되면서 캐드, 포토샵, 일러, 라이노, 이런
모델을 정리하다가 다시 보았더니, 드로잉도
소장님이 처음 대지에 대한 자료를 시각화해서
프로그램을 익히는 게 너무 괴로웠던 기억이
어설프고, 단면 모델은 왜 그렇게 크게
회의를 하자고 하셨는데 표고가 잔뜩 쓰여
납니다. 수업에서 툴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만들었는지 모르겠고, 화장실 외벽에 세면대를
있고 등고선은 듬성듬성한, 대지에 대한
다른 학생들은 다 잘하고, 그러다 보니 말은
붙여 놓아서 실제로 지어졌다면 욕을 많이
해석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정말 날것의
많은데 손이 게으른 학생으로 교수님께는
먹었겠구나 싶어 혼자 웃었던 기억도 납니다.
수치지형도를 출력해갔던 기억이 납니다.
잔소리를 듣고, 딱히 설계를 하고싶다는
졸업 작품으로 하수처리장을 농장으로 만드는
클라이언트는 그 대지에 회사의 연수원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무언가 비슷하지만 다른
작업을 했습니다. 당시에 한강르네상스사업이
짓고자 했습니다. 그 수치지형도를 보며 저에게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시설계사무실,
있었는데, 그 때의 시선으로 그게 하천의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는데, 어디에 수목과
인테리어회사, 대형설계사무실 등에서 인턴을
얼굴만 다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석축이 있었는지, 바닥의 재질은 무엇이었는지,
했습니다. 또 그 중에 저에게 딱 맞는다고
그래서 순환하는 시스템을 다뤄보고 싶다는
주변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등, 정확하게
느껴지는 일이 없어서, 더 배우고 싶은 마음도
생각으로 하수처리장을 주제로 정했는데,
질문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 제가 그냥
있었지만, 반쯤은 고민을 유보하는 마음으로
이게 보안과 위생 때문에 내부를 볼 수 없고
대지에 가서 걸어 다니다 돌아왔구나, 연수원을
대학원에 갔습니다. 대학원 생활이 꽤
도면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농업에 대한
짓기 위해서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즐거웠는데, 협업하는 실무자들과 선배들에게
지식도 부족하고, 사전에 알아야 하는 데이터가
관점이 없었구나 하는, 몹시 부끄럽다는 생각이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배우면서 학부시절의
충분히 모이지 않으니 공간을 다루는 단계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컴맹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명확한
넘어가기가 힘들었는데, 졸업전시를 통해서
실무를 하면서 또 즐거웠던 점은 실제로
클라이언트(기관이나 지자체)가 있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정보를 많이
지어지는 현장에 가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계와 갈등도 있었지만, 그
모으고 그것을 가다듬어 가면서 설계를
학교 다닐 때에도 수업과 관련된 답사가 몇
평범함과 구체성이 오히려 더 즐겁게 느껴졌던
진행하는 사람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좀더
차례 있었지만, 보통은 한 번 가보는 것이었기
것 같습니다.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어지는 과정을 함께
석사 때에는 건축가들이 설계한 다세대・다가구
하면서 도면에 적혀 있는 상세한 치수와
ⓦ 건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주택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대학생 때
시스템, 재료들을 가지고 상상했던 것이
학창시절 건축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사건이나
살던 아파트가 재개발을 하게 되면서 한동안
실현되는 것과 미처 몰랐던 것을 수정하는
계기가 있었나요?
다가구주택에서 살았습니다. 옥상에 올라가면
과정이 좋았습니다. 모델에서 느껴졌던 느낌과
중학교 때 동네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웃에 비슷한 주택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
다르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한, 어떤 현장에서는
저는 입시를 준비하지 않아서 그림을 그리는
보였는데, 그 각각의 모여 있는 모습이
예상보다 재료의 질감이 훨씬 강하게 느껴
시간은 절반이고 선생님과 분식을 먹으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연발생적인 분야의
지기도 했고, 또 다른 현장에서는 화장실의
수다를 떨거나 선생님의 잡지를 뒤적거리는
건물을 건축가가 설계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폭이 생각보다 너무 거대하기도 했고, 또 다른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건축관련 기사가
궁금해서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날은 홀에서 소화전이 너무 잘 보이는 것이
재미있었고, 우드락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고,
되었습니다. 건축가들의 초기작이 많았고,
거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 이후에 답사를
전시도 보러 다니고, 건축책도 사서 읽고 하다
클라이언트의 이익을 최대로 실현시키기
가거나 일상 속에서 공간을 대하게 되면
보니 자연스럽게 건축과에 가고 싶다고 생각
위하여 최대 용적을 확보하기 위한 고군분투와
자연스레 건물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을 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공공성을 동시에 고민하는 건축가들의 고민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엿볼 수 있었습니다. 크게는 법과 제도의 안에
그리고 동료애라고 해야할지, 회사의
있었지만 그 안에서 개별 주거와 공용공간의
구성원들이 퍽 친밀한 편이었습니다. 같이
ⓦ 건축을 전공하던 학부, 석사시절에는 어떤
49
shelter of memories
고기동 단독주택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에서 개인의 기억이란
두 부부와 고양이들을 위한 집.
어떤 의미를 갖는지.
취미 생활과 파티를 위한 외향적 공간과 부부와
이 프로젝트는 2011년 연말 서울디자인재단이
고양이를 위한 좀더 내향적인 공간을 구분하고
주최한 국립중앙박물관 앞 버스정거장 공모의
수직적인 보이드를 통해 시각적으로 연결되도록
당선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앞이라는 위치,
한다.
버스정거장이라는 본래의 기억을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하다가 벽돌 사이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의 3
소소한 기억을 담은 아크릴박스를 전시하는 아이디어로 발전되었다. 기억을 모아서 쌓는다는
2 1
아이디어는 당선 후 디자인재단과 대화하면서, 그리고 완공 예정일이 반 년 늘어나면서, 서울에서 철거되는 벽돌을 모아서 짓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벽돌을 수거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철거현장은 많았지만 구청에서 제공받은 철거예정일 정보 보다 먼저
6
철거되는 곳이 절반이었고, 진행 중인 현장에서도 수거를 허락해주는 곳은 열에 하나 정도였다. 벽돌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3~40%가 파손되어서, 여유 있다고 생각했던 기간이지만 데드라인을 2주
8
6
5
7
2
4
남기고서야 가공된 벽돌 2천5백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1. 현관
5. 식당
벽돌 사이의 공간에 전시할 콘텐츠도 집에 관한
2. 취미실 6. 주방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야기를 모으는 작업은
3. 손님방 7. 메인침실 4. 거실
당시에 서울의 사라지는 공간들을 기록하고 7
전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MO!T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벽돌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손글씨의 형태로 모았다. 주택, 노인정, 공동체를 방문해서
3
이사오던 날의 기억과 집을 수리했던 일들을 듣고 기록했다. 아주 잠시, 정거장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이 집과 동네, 도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클라이언트: 서울디자인재단 위치: 국립중앙박물관 앞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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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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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shelter of memories 부분 상세, 2012 Ⓒ김재경 3. shelter of memories 전경, 2012 Ⓒ김재경 4~5. shelter of memories 설계도면 6. 고기동 주택_1층 평면도 7. 고기동 주택_2, 3층 평면도 8. 고기동 주택 내부계단, 2018 Ⓒ박세연 9. 고기동 주택 내부공간의 켜, 2018 Ⓒ박세연 10. 고기동 주택 내부공간, 2018 Ⓒ박세연
8. 드레스룸
술도 많이 마시고, 강연도 함께 들으러 가고,
세지마가 도요 이토 사무실에서
시작했을 때는 집 테이블에 노트북과 프린터를
전시도 보고, 같이 작업실을 구한 적도 있고,
독립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도요 이토의
두고 작업하다가, 일과 생활을 분리하고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한듯 싶지만, 그때는
관점이 뭔가 형태가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뚝섬의 공동 사무실에
그게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도
방향이고, 오히려 가능성을 만들어 줄 수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무실 식구들(플로건축,
한 명 한 명이 그리운, 마음의 고향 같은
있는 다른 방향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바이원, 스튜디오짓)이 공동으로 등록한
느낌이 듭니다. 비슷한 나이와 취향을 가진
순간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설계의 대상지가 우연히 제가 어렸을 때
사람들이어서 자연스레 친해졌을 수도 있지만,
저도 비슷한 순간이 오면, 이를테면 내 관점이
자란 동네였습니다. 네 팀이 같이 하기에는
사무실의 배려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명확하게 달라지는 순간이 오면 내 사무실을
굉장히 작은 700제곱미터 정도의 주민
신입사원 때 개인적으로 조그만 버스정거장
운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커뮤니티 시설이었는데, 과하게 열정적으로,
현상설계에 지원해서 당선되었던 적이 있는데,
관점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계기도 없이,
많이 대화하며 재밌게 했습니다. 각자의 실무
지금 생각해보면 좀 철이 없었구나 싶지만,
사무실에서 그냥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다
배경도 다르고 스타일도 달라서, 선홈통 하나를
이후의 과정에 대한 계획 없이 그냥 단순하게
보니 시간이 빨리 흘렀습니다. 맡은 프로젝트의
계획하면서 한 시간 동안 토론을 하기도
주말에 작업하는 건 괜찮겠지 정도의 마음으로
산재한 일들을 해결하고 나면 내 미래에
하고, 첫 미팅 때 네 사무실의 소장들이 함께
시작한 것이 덥석 당선이 된 바람에 소장님께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참석했는데 구청에서 좀 당황해 했던 것도
말씀드렸는데, 사무실 일에 영향 없이 마칠
했습니다. 친한 동료가 퇴사한 어느 날 먼저
기억에 남습니다.
수 있겠냐고 걱정하시면서 외려 시공사와
날짜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소장님께 일년 후에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 건축권장을 오픈하며 특별히 목표로 하는
배려해주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제 사무실을 열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그렇게
것들이 있었나요?
비슷한 상황에서 나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건축가가 되어야겠다는 비전이 있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무실 이름이 ‘권장’인 이유는 사실 대학생 때
보다는, 들어오는 일을 열심히 하자는
같이 사무실을 하기로 한 친구의 성이 ‘권’이고
자세이지만, 몇 년이 더 지난 후, 우리의
ⓦ 실무를 하다 현재의 ‘건축권장’을 시작하게
제가 ‘장’이라서 ‘권장’으로 하자고 농담삼아
프로젝트를 관찰할 때 어떤 일관성을
되었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말하던 것이 씨가 된 것인데, 제가 막판에 맡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로젝트가 늘어지면서 퇴사하는 시점이 계속
사실 직원으로 일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늦어지는 와중에 그 친구가 부동산 회사로
디자인 하는 과정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가버린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초반에는 의리를
같습니다. 오히려 개업하고 나서 좀 달라진
핑계로 주말과 월차를 활용해 혹사 시켰고,
것은, 디자인 이외의 관리해야 하는 영역이
다른 사무실과의 협업, 인턴, 직원들과 함께
생각보다 넓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무실의
일하게 된 다음부터는 떠나 보내게 되었습니다.
규모가 작기도 하고, 일단 제가 사무실 전반의
다니던 사무실을 나와서는 반 년 정도
다양한 업무를 결정해야 하다 보니, 모델을
운동하고 산책하고 여행하며 놀았습니다.
만들거나 드로잉 하는 시간 이외에, 건축주 및
몇 달 만에 남해의 창고를 가지고 있는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 곧 이사 갈 사무실에
클라이언트에게 의뢰가 들어왔는데, 냉동창고는
대한 계획, 회사의 자금 흐름 등등에 신경을
층고도 높고 작은 항구 근처에 있어서 다양한
쓰고 있어야 합니다. 사무소에 다니던 시절에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방식을
동료와 땅집사향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결정해서 설득하기보다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당시 와이즈건축의 전숙희 소장님이 발제를
가능하다는 상담을 했습니다. 기획설계를
하셨는데, 겸손한 인사말로 ‘우리는 생존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뭔가
위해 고민하는 초식 건축가’라는 이야기를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설득하기보다는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하나의 가능성을 동등하게 다루었던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것이 좀 아쉬웠고, 내가 건축사 면허가
기본적으로는 일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즐겁게
10
없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었고,
일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건축개요
아무튼 진짜 지어지는 프로젝트를 하고싶다는
노력합니다.
위치: 고기동
결론이었습니다. 남미 여행을 취소하고 건축사
대지면적: 534㎡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사무실과
ⓦ 지금은 그 목표들 중 어떤 것들을 이뤘고,
건축면적: 102.89㎡
생계형 프리랜서로 일하고, 다른 사무실
새롭게 생겨난 꿈과 목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소장님들과 협업으로 현상설계를 하기도
정해진 목표보다는 과정에서 지키고 싶은
시공: 건축주직영공사, 박문영소장
했습니다. 그때 당선되었었던 프로젝트가
원칙이 있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형태를
촬영: 박세연
강동구의 〈엔젤공방〉입니다. 처음 사무실을
먼저 정하기보다는 다양한 정보를 분석하고
연면적: 230.78㎡ 협력: 구조:윤구조, 전기:지성, 기계:정인
51
성수아트홀 책마루 조성 리노베이션 변화하는 사람들의 삶과 멈추어 있는 건축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긴장감이 있다. 건물은 더러워지거나 방치되고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비어 있다. 성동구청의 구정기획단을 통해 시작된 아이디어- 비어있는 로비를 뭔가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꿀수 있지 않을까 ? -는 이러한 11
13
외부계단, 개성있는 입면, 수직조경으로 구현되고
12
14
있다. 성동구청이 공공기관 로비의 전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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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을 공간적으로 해석하고 구축하는 과정에 두 번 -성동구청, 성수 아트홀-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프리랜서를 거쳐 건축사사무소로 개업했다. 사무실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시기와 프로젝트의 시기가 겹치다 보니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이다. 성수아트홀은 운생동이 설계한 공연장으로 좁은 대지에 공연장을 배치하면서 공공공간을 입체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축가의 고민이
형태였다면, 아트홀은 건축가의 개성이 구현된 강한 지오메트리를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공간이 갖는 선형적인 공간감을 살리기 위하여, 책마루 브랜드에 대한 일관된 콘텐츠를 담되 몇 가지
ܲ䛭ࢲে䛭җ䛭߶䛭ҳࢾ ↝䛭जੋ䛭 䛭હஔ䛭ࠖ࠘䛭ஔҊি䛭ೢೞ䛭जੋۼ䛭 아이들의 포켓 공간 계획 ↝䛭ࢍੈౝ䛭оࢾםҗ䛭আੈ٢ম䛭 䛭ֆਸ਼䛭৺ࠖҕр䛭
변화를 시도하였다.
활용한 외부 벤치와 식재 계획
↝䛭ٔݼ䛭߷ഉ䛭 䛭ҕ䛭ದजఞ৫䛭ࢍ୪䛭٠䛭আౝ䛭
사무실이 한동안 성수아트홀 코앞이라
건축개요 건축권장+어반토폴로지 위치: 성수동 1가 성수아트홀 면적: 711.18㎡
ۼ䛸ۓ䛭ࣺਉӜি䛭ೢೞ䛭ۼٔݼ䛭Ӝ䛭䛭
애용했었는데, 지금은 둥지를 옮겨서 살짝
협력: 구조:다우구조, 전기:문영재소장, 소방: 타임테크
ٔݼ䛭߷ഉে䛭ߒக
아쉽다.
시공: 윈도우 종합건설
엔젤공방 대지는 변종업소 공간이 청년들의 공방으로 바뀌고 있는 엔젤공방들의 중심에, 성내도서관 북측에 인접하여 위치한다. 좁은 대지에, 엔젤공방 허브센터(공방, 소모임실, 전시 및 홍보, 업무공간)와 성내도서관의 증축 두 가지 프로그램을 수직적으로 적절하게 복합하는 것이 과제였다. 일조권 사선제한으로 주광장 및 선큰은 북측에 있지만, 도서관으로의 연결은 남측으로만 가능했다. 층별로 중심공간의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오히려 중심의 오픈형 계단실, 트러스를 이용한 형태-구조의 15
통합으로 발전되었다. 사무실을 공유하는 신생 사무실들의 소장들은 각자 다른 실무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작업하는 방식도 달라서, 작업의 시간도 길었지만 대화의
건축개요 바이원+스튜디오짓+플로건축+건축권장 위치: 강동구 성내동 382, 대지면적: 285.6㎡ 건축면적: 142.1㎡, 연면적: 789.4㎡
시간은 더 길었던 것 같다. 분야를 나누어서
협력: 구조:윤구조, 전기:문영재소장, 소방: 타임테크
작업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항상 모두 함께
시공: 윈도우 종합건설
하려고 노력했다. 52
16 11~12. 성수아트홀 책마루 내부공간, 2018 Ⓒ노경 13. 성수아트홀 책마루_1층 아이소메트릭 14. 성수아트홀 책마루_2층 아이소메트릭 15. 엔젤공방 전경, 2018 Ⓒ타별사진관 16. 엔젤공방 내부공간, 2018 Ⓒ타별사진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먼저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산이 한정적이었습니다. 외피 면적을
싶지 않지만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측면이
그 안에서 대안을 검토할 때, 논리적인 것과
최소화 해서 공사비를 컨트롤 해보는 것을
중요했는데, 학습과 휴식의 패턴과 함께
우연적인 것의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전제로 건물의 볼륨을 최대한 요철없이
공부하면 좋은 이유에 대하여 학생 전반의
다양한 대안들을 만들어 보고 대안을
정방형에 가깝게 시작했습니다. 그 안에서
생각을 온라인으로 조사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관찰하고 좋은 게 왜 좋은지 고민하는 순간이
내부공간에서의 입체적인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자료를 다시 TF팀과 분석하고 함께 모델을
즐겁습니다. 설명할 수 없이 좋은 공간들이
있는 방식을 탐구했습니다.
만들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건축교육을 받은
있고,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있고요.
〈엔젤공방 허브센터〉는 지역 청년들의
적이 없기 때문에, 대안을 만들어 보기 전에
그 과정에서 솔직하고 싶습니다.
창업공간으로 지원해온 엔젤공방의
다양한 학습카페 사례를 분석하여, 가구의
최근의 단독주택 프로젝트에서, 제가 대화하고
구심점이 되는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인접한
크기-공간의 위상-재료-각 활동에 필요한
관찰한 결과로서 클라이언트에게 제시한
성내도서관의 부족한 열람공간을 추가로
공간의 크기 등을 알려주고, 〈장원당〉을 함께
공간과 건축주의 결정이 일치하지 않는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작은 대지와
돌아보며 빛이 잘 드는 곳과 외부의 전망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 판단과 건축주의 판단
정북일조의 영향으로 저층부의 광장과
요소, 주변 도로의 소음 등 사이트의 특징을
모두 오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성내도서관이 서로 다른 방향의 위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만든 모델을 분석하여
변화하니까 누구에게 딱 맞는 공간이 아닌
연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층별 중심공간의
다시 키워드를 도출하고 평면과 모델의 대안을
보편적인 공간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전을 박공 모양의 트러스구조로 해석해
작업한 후 하나의 계획안을 선정하여, 다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까 후회하기도
봤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보통
했지만, 대화의 순간에 초점을 잃고 미끄러진
가장 의미 있는 프로젝트는 작년에 마무리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사용자의 경험과
것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
〈노량진 임대주택 시범사업〉으로 긴 시간
자료를 모으는 과정이 전체 프로세스에서
초점을 잃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우선의
많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생하며
5~10% 정도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이
목표입니다.
진행해서 더 애착이 갑니다. 기존 고시원
프로젝트에서는 30~40% 정도의 비중을
건물을 리노베이션하여 저층부 SOC와 상부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함께
ⓦ 사무실을 오픈하고 진행한 프로젝트들은
청년주거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쾌적한
공부하는 것의 의미가 학생들에게 토론이나
어떤 것들이 있나요?
보행환경과 주거환경을 위해 무엇을 덜어내야
알려줌 같은 적극적인 의미가 아닌 응원과
건축권장이 단독으로 진행한 첫 프로젝트는
하는 가에서 출발했습니다. 저층부는 기둥보
견제 같은 좀 간접적인 의미라는 것을 새롭게
지인의 소개로 부부와 고양이가 함께
구조의 안정적인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발견하고, 이것을 공간 배치의 이슈로 발전시킬
사는 〈고기동 주택〉을 설계한 것입니다.
4~5층은 벽식구조에 층고도 낮아서 전면 철거
수 있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면적에 비해 공사비
후 철골구조로 계획했습니다. ⓦ 그동안 해온 작업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로 ⓦ 그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들 중 건축권장을
이어진다면 어떤 프로젝트들을 하고 싶은
대표할 만한 작업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가요?
무엇인가요?
각각의 프로젝트들이 조금씩 연결되어 있는
오래된 카페, 사장님은 커피스트를 열고 오랜 시간
작년에 학교공간 재구조화사업으로 압구정고의
것 같습니다. 작년에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휴일없이 일하다가 잠깐 쉬는 중이셨다. 지금의
독서실 공간(〈장원당〉)을 개선하는 작업을
활동하면서 세종문화회관 저층부 공간
공간도 나쁘지 않지만 오래되어 낡아 있었고,
했습니다. 학교공간 재구조화사업에 꾸준히
접근성 개선을 위한 기획설계를 하면서
따뜻한 분위기의 목재 상판과 철제 다리들은 가끔
참여하고 있고, 압구정고는 그 중 세 번째
복합문화공간에 미술관이 위치할 때의 다양한
커피스트 리노베이션
있는 전시나 공연에 유연하게 사용하기 어려웠다.
작업입니다. 〈장원당〉은 약 250석의 독서실
사례들을 조사했습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전체적인 공간의 구성은 유지하되 보다 작업과
의자가 빼곡히 들어가 있지만 사용자는
방문자 휴게공간 및 오피스공간 개선을 위해
दੈ䛭ಜঈ۽ا䛭கࣺ৫䛭ܲ䛭ѐࢵҊ 䛭
일일 평균 1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미술관 리노베이션 사례를 검토하기도 했고요.
기존의 가구를 해체 후 재활용하여 보다 유연하게
이번에는 사용자의 의견을 모으는 과정
세종문화회관 저층부의 기획설계는 조사와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획했다.
전반을 설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연구의 범위에 더 가까웠고, 도시건축전시관의
학생들과 총 세 번의 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작업도 실현될지에 대한 확정은 없는
처음에는 재구조화사업의 사례와 의의를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카이스트에서
설명하고 〈장원당〉 개선사업에 참여하고 싶은
학술문화관을 증축하여 〈카이스트
학생TF팀을 모집했습니다. 선정된 학생들에게
미술관〉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현상설계가
〈장원당〉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공부할
나왔는데,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구현해볼
때 선호하는 장소가 어디이고 그 특징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지원했고, 현재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고, 중요한
당선되어 일을 시작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요소들을 뽑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콘텐츠를 유입시키되, 기존 건물과의
설문조사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방해받고
통합적인 사용을 검토한다는 점에서는
17
17. 커피스트 리노벤이션, 2018
53
노량진 임대주택 시범사업 고시원은 현재 2종 일반주거지역의 법규를
가능성을 갖도록 계획했다.
초과하는 용적률로, 정북일조의 테두리 안에서
청년주택을 기획하고 관리해온 삼시옷과 함께
낮은 층고와 상부 셋백을 통해 최대 용적을
일하면서 청년이라고 뭉뚱그려진 개인의 삶을
구현하고 있었다. 이런 밀도를 조금 덜어내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복잡한
비워진 공간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했다.
주택 관련 주차법규 해석이라던지 실질적인
동네사람들이 산책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높은
도움도 받았고, 공공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에서
층고의 거실을 만들거나, 볕이 잘 드는 테라스를
실사용자의 의견이 배제되기 쉬운데, 삼시옷의
둔다던지.
데이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폭넓은 논의가
지하층의 채광과 일층의 개방적인 입면을 만들어
가능했던 것 같다.
내기 위해 일부 벽체와 슬라브를 털어냈다. 다행히
공공-리모델링-주거가 만나니 예상했던 것보다
기둥보구조(라멘조)라 일부만 보강하면 가능했다.
고민해야 하는 것도 그려야 하는 것도 많았다.
4~5층은 벽식구조와 벽돌조의 혼합형으로
실시설계와 감리는 눅건축사사무소 이혜서
저층부의 라멘조에 비해 변화가 가능한 정도가
소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현저하게 낮았고, 벽체를 일부 털어내서 개방감을
최저가 입찰로 시공사가 정해지는 공공발주 제도
확보한다고 해도 층고가 갖는 한계가 있었다. 전면
안에서 시공의 퀄리티를 컨트롤 하기 위해서
철거를 전제로 목구조와 경량철골구조, 철골구조
가급적 도면을 꼼꼼하게 많이 그리자는 전략으로
등의 대안을 검토하였다. 목구조는 소방법상 4,
접근했는데, 현실은 시공사가 도면을 잘 보지
5층에 적용하기가 어려웠고, 철골구조가 갖는
않았다. 다음부터는 좀더 쉽게 대략 열 장 정도로
비례와 시원시원한 공간감이 경량목구조나
정리되는 핵심정리같은 것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18
경량철골구조에 비해 더 좋았다. 䛭䛭҅തিࢱ 䛭䛭о䛭 도드라지기보다는 사용자의 배경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사용자들에 의해 점유되면서, 거주자가 키우는 식물, 좋아하는 영화의 포스터, 만들어낸 물건들, 소규모로 열리는 행사같은 것들이 잘 느껴지는 (무채색의) 바탕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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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개요 클라이언트: 한국토지주택공사
프레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획설계: 삼시옷
저층부를 리모델링하여 창작공간으로 사용하고,
기본설계: 건축권장
4~5층 주거를 철골구조로 다시 짓는다면 3층
실시+감리: 건축권장+눅건축사사무소
기존 건물의 구조를 그대로 활용하지만 주거의
대지면적: 278㎡
용도를 갖는 예외이다. 크게 두 가지 주제가
건축면적: 161.33㎡
있었는데 하나는 기존의 비주거 건물을 빠르게 주거로 바꾸는 공법에 관한 측면이다. 주방과
연면적: 703.27㎡ 협력: 구조:한울, 전기:신한전설, 기계-소방: 타임테크 인테리어: 프래그먼트
화장실(웻존)을 현장에서 설치하고, 각각의 21
유닛은 공장에서 반쯤 제작한 뒤 현장 설치 기간을 최소화 할 수 있다. 각 유닛의 디자인을 프래그먼트에서 작업해주었는데, 사용자가 선반의 위치 등을 이동시키면서 좀더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다. 이 방식이 이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변주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주요한 이슈는 공유공간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건물의 외주부에 각 유닛이 면할 경우 가운데 공유공간은 어둡고 통로같은 부차적인 공간으로 남게 된다. 이런 공용공간에 대한 대안으로 작은 방이 서로 독립된 셀로 배치되고 그 사이의 공간들은 가까운 셀이 점유하거나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22
54
23
18~19. 노량진 임대주택 시범사업_내부공간, 2019 20~23. 노량진 임대주택 시범사업_다이어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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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4
3
5
2
5
3
5
어반토폴로지와 함께 작업했던 〈책마루
ⓦ 자신에게 영향을 크게 준 건축가나
작업〉(성동구청 및 성수아트홀의 로비를
건축물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북카페로 변경하는 프로젝트)과도 유사합니다.
부럽고 좋아하는 건축가의 숫자가 점점
작년에 마무리한 〈노량진 임대주택
늘어납니다. 루이스 칸의 공간과 기술을
시범사업〉을 하면서 서울소셜스탠다드와
탐구하는 방식을 좋아하고, 세지마가
협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도시에 지어지는
프로그램을 해석해서 공간화 하고 나머지
공유주택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사람들과
감각을 절제하는 방식도 좋아하고, 줌터가
함께 일을 하면서 사용자의 경험과 의사를
다양한 감각을 건축으로 소화하는 방식도
간접적이지만 매우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좋아하고, 헤르조그가 재료를 탐구하는 방식도
좋았습니다. 공공 프로젝트에서는 예산을
좋아하고, 스튜디오 어셈블이 지역과 협업하는
집행하는 결정권자와 실제로 그 공간을
방식도 좋아하고,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용하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해석하고 다음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았던 순간들 중 하나를
프로젝트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꼽아보면, 실무 6년차의 여름 휴가기간동안
하는 리서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바 알토 건축 답사입니다. 알토가 살았던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에 건축이 아닌 다른
공간과 사무실 공간을 둘러보면서, 작은
분야에서 작업하는 친구들과 서울의 창작자
가구와 손잡이에서도 사람과 자연에 대한
공간지원사업(작업공간과 거주공간)을
애정과 이해, 지역의 재료와 구법에 대한
사용자(창작자)입장에서 조사하는 작업을 진행
고민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중입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또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김수근 선생님이
재미있는 창작공간을 디자인 할 기회로
설계하신 〈카이스트 본관〉 건물을 답사하고
이어진다면 좋겠습니다.
돌아와서 당시의 청사진 도면을 살펴보았는데, 영문과 한국어가 혼용되어 있는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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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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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린생활시설 2. 공유주방 3. 다가구주택 4. 샤워실
5. 화장실
야생화 쿠키체험장
ⓦ 특별한 디자인 방법론이 있다면 듣고
도면에서, 건축 기술의 진보가 자연스러운
싶습니다.
흐름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도전과 노력으로
자료를 모으고 질문하며 설계를 시작하기
구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한 바운더리를 만들고, 그 다음에는 다양한
그리고 또,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이 설계하신
대안을 작업합니다. 디자인 과정에서 논리적인
〈여주주택〉에 자주 갔었습니다. 공사 중, 완성
것과 우연적인 것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후에 몇차례 놀러 가서 연구실 사람들과
그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처음
수다도 떨고 교수님과 잡초도 뽑고 오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논리적인 사고가 더
시간 머물렀습니다. 저에게는 도면과 치수,
편리하지만 어떤 순간 이후에는 진행이 되지
재료와 공간, 부분과 전체가 연결되는 뜻깊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틀에 갇혀 있다는
순간이었습니다.
정선 삼탄 아트마인 부지 내에 유휴지를 활용한
느낌입니다. 그럴 때는 손이 가는 데로 다양한
야생화 정원의 인포로 계획한 프로젝트이다.
것들을 양산해 봅니다. 그 결과를 관찰하면서
ⓦ 작년부터 팬데믹 상황으로 코로나19가
아트마인 부지는 급경사지로 주변 풍경이
다시 전제가 맞았는지 생각해보고, 다양한
지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를 받은
아릅답다. 프로그램이 명확하게 정해진 상황이
사람들에게 작업을 보여주고 코멘트를 듣기도
부분이 있는지? 혹은 건축가로서 어떤 것들을
아니라서, 야생화정원-동선-이벤트에 다목적으로
합니다. 프로젝트를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느끼고 있나요?
활용될 수 있는 중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크기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무실과 협업을
코로나 덕분에 온라인 회의가 일상적이고,
공간들을 배치하고, 그 중의 한 변을 터서 주변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설계
수업이나 크리틱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풍경을 담고자 했다. 모델은 여러 시리즈 중의
과정은 하나의 주제를 실현하는 다양한 방법을
경우가 많습니다. 불필요한 이동시간을 절약할
하나로 대상지가 바뀌면서 버려졌다.
시도해 보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수 있고, 제출된 자료를 검토하면서 회의를
발견하고 강화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만, 매체의 특성상 동시
내부의 시선으로만 프로젝트를 바라보면
다발적인 대화와 피드백이 어렵고 제스처나
일관성은 있지만 어딘가 뻔하다는 생각이 들
스케치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한계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의사 결정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답사를 갈 수 없다는 것이
다수결이나 위계에 의한 것이 되면 뻔해지는 것
큰 제약입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카이스트
같고요. 사고의 경계를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는
미술관〉 프로젝트를 위해 교내의 다양한
느낌, 여행 가는 느낌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시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MIT에 가보고
25
24. 노량진 임대주택 시범사업_단면도 25. 야생화 쿠키체험장_스터디모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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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건축가 마을지도
카이스트 정문술미술관 현상설계
봉천동 주택
후암동에 거주하면서 용산구 마을건축가로
카이스트 도서관과 문화관에 수평 증축되는
두 부부와 미래의 아이들이 사용할 공간을
활동하고 있다. 작년 마을지도의 대상지는
미술관이다. 2020년에 진행한 미술관 리서치들이
작은 대지에 담기 위해서 고민한 프로젝트이다.
이태원2동 주민센터가 있는 해방촌 오거리에서
݄ۼ䛭ըআ䛭ז䛭Ѫੈ䛭আऎਔࢱ 䛭ࣖӏݼ䛭
초반에는 2~3층이 메인 주거 공간으로 중정과
보성여자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시장길이다. 이
미술관 현상설계를 찾아 참여하게 되었다.
복층거실을 연계해서 디자인 하다가, 장기적인
길은 남산에서 추후 공원으로 바뀔 미군기지까지
대상지는 현재 도서관의 북측의 폭 15m
거주를 염두에 두고 엘리베이터가 추가되면서
이어지는 주요한 보행로이다. 현재 보차분리가
유휴지이다. 매스를 어긋나게 배치하여 보행로를
전면적인 수정이 있었다. 이 계획안은 초기의
되어있지 않고 도로폭이 6미터가 되지 않는
확보하고, 열람석을 이동시켜 조망을 확보하는
것으로 완공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곳도 있다. 대부분의 서울 구도심이 그렇듯이,
한편, 내부의 전시공간이 수직적으로 연계될 수
애착이 많이 가는 프로젝트이다.
건폐율이 100%에 근접하는 밀도있는 건물들은
있도록 계획했다. 당선 이후에 전시실 면적의
나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에어컨 실외기,
추가 확보를 요청받았는데, 단계별 증축이 가능한
선홈통, 고압배선 등을 건물이 소화할 수 있는
구조로 검토 중이다. 미술관 하나만 해도 머리가
공간이 없어서 보행자공간과 겹치게 된다. 또
아픈데, 동선, 도서관, 증축을 고려해야 하고
차도와 주거의 완충공간이 없어서 소음이나 빛
상충되는 요구조건이 많아서 어렵지만, 열심히
공해에 노출되게 된다. 기존 건물의 입면에 수평의
해보고 있다.
건축개요 대지면적: 66㎡ 협력: 구조 : 윤구조, 전기:신한전설, 기계:타임테크
유틸리티 영역을 만들어 2층의 거주자에게는 테라스로 활용되고, 저층부의 위해요소를 정돈할 수 있는 방식을 상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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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학습카페 재구조화사업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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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개요 계획면적: 553.27㎡ 협력: 기계 : 두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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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6~27. 마을건축가 마을지도_다이어그램(전/후), 2020 28. 마을건축가 마을지도_단면개념도 29. 카이스트 정문술미술관_단면도, 2021 30. 카이스트 정문술미술관_증축 개념도, 2021 31. 봉천동 주택_내부공간 개념도, 2019 32. 봉천동 주택_스터디모델, 2019 33. 봉천동 주택_입면 스터디, 2019 34. 압구정 학습카페 재구조화사업_워크샵, 2020 35. 압구정 학습카페 재구조화사업_내부공간 이미지, 2020
사무실 리노베이션
싶은데 현재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 우연히, 사대문 안의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공간에
학교들을 조사하다 보니 충무초등학교에도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니까 들고갈 수 있는 것을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집을
작은 국궁장이 있고 효제초 옆에도
계획해 보자는 마음으로 가구만 디자인 하고,
테마로 한 다양한 방송이 늘어나고, 주변에서도
황학정이라는 활터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현장 공사는 최소화 했다. 테이블은 합판을
많은 문의가 있습니다. 개개인의 공간에
코로나로 대부분 수업을 안 하고 있어서
보처럼 사용해서, 가운데 전선이 지나다닐 수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소문 끝에 무형문화재교육전시장에서
있는 공간을 남겨두고 CNC 커팅으로 홈을 파서
핀란드를 여행하면서 알바 알토의 공간을
소규모로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을 찾을 수
조립했다. 책장은 9T 합판으로 조립했다, 다른
포함하여, 많은 공간들이 투시도나 조감도를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가까이 남산에도 활터가
현장의 가구에는 최소 12T 를 쓴다. 내부용이니 좀
넘어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갑니다. 아직
부서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살은 대부분 과녁에 맞지 않고, 가끔 활터를
TV를 틀면 공구의 광고와 집 고치는
벗어나기도 하는 수준입니다.
프로그램들이 나오기도 하고요. 지금의 변화
36
방향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 건축가로서 앞으로 되고자 하는 건축가의
그리고, 공공공간의 개방성과 관련된 이슈가
상을 한 줄로 정리한다면?
있습니다. 최근의 공공공간 저층부는 과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꾸준히
권위적인 디자인에서 탈피하여 사람들과의
작업하는 건축가로 남고 싶습니다.
접점을 넓힐 수 있도록 더 열리고, 프로그램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는 영화에서,
더 친근한 것들을 도입하는 방향이었는데,
88살의 주인공은 젊은 작가와 작은 봉고차를
코로나로 인해 출입통제가 명확해야 하는
타고 여행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상황이 되면서, 둘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야
기록하고 전시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하는 것인지 둘 다를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싶습니다.
해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료 협조 및 사진 크레딧
ⓦ 건축을 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은 어떤
ࠃޘ䛭䛭ࢍ䛭߁䛭䛭ҕ 䛭Ѥ୶ӂ
것들을 주로 하나요? 특별히 취미로 하는 것들이나 여가시간에 즐겨하는 것들이
37
있는지요?
장수정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경영위치
사무실을 시작하고 긴 시간을 비워 둘 수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경험을 쌓았다. 2018년 건축권장을
없어서, 이틀 이상 쉰 적이 없었습니다.
개소했다. 물질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건축이 사람들의
그러다가 직원을 뽑고 첫 휴가계획을 세울 때
온기로 채워지는 순간을 좋아한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코로나가 터져서 아직 공식적인 휴가를 가지
건축학과에 출강하고 있으며 서울시 공공건축가 및 후암동
못했습니다. 쉬는 것과 노는 것에 진심인 편인데
마을건축가로 활동 중이다.
올해는 꼭 국제적인 고립이 끝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의 루트인-아침을 좀 잘 챙겨 먹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가급적 저녁을 집에서 먹는 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2주에 한 번 꼴로 새벽까지 노트북을 붙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매주 토요일에는 산책을 하거나 미술관에 갑니다. 후암동 집 근처의 오래된 주택들의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조경, 대문이나 명패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까운 산에 가기도 하고요. 미술관 구경도 좋아합니다. 일요일 오전에는 주로 밀린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월요일 출근해서 할 일을 미리 좀 하는 편입니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라는 말을 자주하며, 분기별로 어딘가 등록한 다음 서너 번만 가서 아까워하는 유형이지만, 작년부터 활 쏘기를 38
36. 사무실 리노베이션_내부공간 개념전개도, 2019 37. 사무실 리노베이션_내부공간, 2019 38. 사무실_가구 제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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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브리프 건축가의 서양건축연구서
건축가의 구술집
건축비평가의 책
『로마네스크 건축』
『유걸 구술집』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김종성 지음
전봉희, 최원준, 조항만 지음
박정현 지음
바스무스 앤 졸랜(독일) 발행, 3만5,000원
도서출판 마티 발행, 3만원
워크룸 프레스 발행, 2만원
한국현대건축 1세대를 대표하는 현역 건축가
목천건축아카이브 한국현대건축의 기록. 구술채록
이 책은 20세기 후반부, 건축가가 펼치는 상상의
김종성(86, 서울건축 명예사장)의 역작. 2년전
시리즈 아홉 번째 책이다. 1940년생 유걸은
나래에 비하여 현실적으로 ‘결핍과 난제’에 봉착해있던
『로마네스크 건축』 사진 에세이집 제1권 “독일, 벨기에
건축가로서 인생의 궤적이 꽤나 남달랐다. 그에게
한국 현대 건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장애를
편”에 이어서 제2권 “스페인, 포르투갈 편”을 냈다.
자유는 건축의 주제인 동시에 실천 형식이었다. 그는
극복해왔는지, 그 와중에 우리 건축의 정체성 논의는
70세에 일상 업무에서 손을 놓은 그는 후학들을 위해
자신이 건축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외적 제약이나
어떤 사건이 발화점이 되었고, 건축지식의 담론화
이후의 삶을 유럽의 로마네스크 건축을 탐구하는 데
경직된 조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인원과
과정은 어떤 지점에 있었는가를 짚어 낸다. 저자의
집중해왔다. 앞으로 “이태리 편, 프랑스 편, 영국 편”을
협업체계로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증보한 건축비평서의 성격을 갖추고
차례로 출판할 계획이다.
탐구한 건축가였다.
있다.
(제2권)
2
1
58
3
1. 로마네스크 건축 2. 유걸 구술집 3.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건축학자의 책
건축가의 에세이집
『전후 일본 건축』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
『집의 사연』
조현정 지음
도연정 지음
신동훈 지음
도서출판 마티 발행, 2만4,000원
시공문화사 발행, 2만원
도서출판 따비 발행, 1만8,000원
저자는 1945년 이후 일본 건축을 서술하기 위한 틀로
이 책은 동서양 부엌의 긴 역사 속에서 큰 전환점이
건축가가 설계실 작업대에서 디자인을 고민하는
‘현대’ 대신 ‘전후’(戰後)를 선택한다. 단순히 시대를
되는 시기와 사건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것은 곧 물음의 과정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전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근대부엌의 정체성을 밝히는 과정과도 같다.
대목마다, 당연한 대목에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을 살피는 일은 나아가
곧 디자인이다. 창은 왜 거기에 그런 크기로 내야
가치 공간을 말하는 ‘전후’를 통해 건축을 살핀다.
한국 주거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하기 위한 단계로
하는지, 방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것이며, 방들의
시대의 흐름이나 양식, 건축가 개인의 특징으로 건축을
중요하다. 우리 주거에 이식된 ‘근대성과 전통성의
배열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사람이 활동하는
설명하기보다,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관계’를 부엌이라는 키워드로 추적하고 있다. 제11회
마당을 만들 것인지 구경하는 마당을 만들 것인지
건축을 파악하고 서술한다.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작.
등등. 그렇게 묻고 들었던 내용을 담았다.
5
4 6
4. 전후 일본 건축 5. 근대부엌의 탄생과 이면 6. 집의 사연
59
인문학 번역서
건축가의 에세이집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내 마음을 담은 집』
『건축담화의 빈곤』
우치다 다쓰루 외 구마 겐고 등 10인 함께 지음
서현 지음
이강헌 지음
위즈덤하우스 발행, 1만5,000원
효형출판 발행, 1만5,500원
우리북 발행, 1만9,000원
‘저출산’, ‘고령화’, ‘지방 소멸’, ‘인구 절벽’ 등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가 설계한
저자가 1991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줄어드는 인구에 따른 사회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세 채의 작은 집-문추헌, 담류헌, 건원재-의 설계
글들을 모은 책이다. 28년간의 시간에 걸쳐 있는
범지구적 문제다. 인구가 줄어들면 고용 시장이
및 시공과정을 풀어낸 책. 건축의 서사구조를 십분
기록들은 우리 건축계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되
감소되고, 이에 따라 과거의 인구수에 맞춘 국가
활용하여 세간에 넘쳐나는 단순한 집 소개 책을
과거지사가 아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점들을
정책이나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를 구성하는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리킨다. 저자는 한 세대가 지났지만 건축계는
모든 제반도 변할 것이다. 이런 변화들은 과연
소설적 플롯의 입체적 구성이 책의 전편을 하나로
혁신적인 변화의 힘을 실감하지 못할뿐더러 그 배경을
위기나 재앙을 불러일으키기만 할까? 이 책은
꿰고 있는 점이 독서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적시한다. 그 자체로 내용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책이다.
인류학・사회학・지역학・정치학 등 각 분야별 10인의 전문가들이 일본의 인구 감소 문제를 주제로 쓴 논의들을 엮었다.
8 9
7
60
7. 인구 감소 사회는 위험하다는 착각 8. 내 마음을 담은 집 9. 건축담화의 빈곤
건축 답사기
인문학 번역서
『부활을 꿈꾼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애리조나 건축』 황용운 지음
빌 게이츠 지음, 김민주, 이엽 옮김
소개하고, 이 기술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시공문화사 발행, 1만5,000원
김영사 발행, 1만7,800원
모색한다. 책의 상당 부분은 획기적 기술을 개발하고
전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주택답사』(2013)의
혁신적 엔지니어이자 실용적 환경주의자 빌 게이츠가
환경과 성장을 대립 관계로 보는 시각이 흔하지만,
후속작이다. 이 책의 주된 장소인 애리조나 지역은
10년간 집중적으로 연구한 끝에 마침내 공개하는
저자는 오히려 코로나19로부터 경제를 구하고
탈리에신 웨스트를 중심으로 라이트가 제2의
기후재앙 극복 해법을 담은 책이다. 성장과 지구가
기후재앙도 피할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축인생 부활을 꿈꾼 지역이다. 동시에 라이트 말년에
양립 가능한 계획을 위해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각자가
청정에너지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는 경기
변화하는 건축형태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물리학, 화학,
회복을 촉진하고 탄소 배출량을 감축할 수 있다.
산재해 있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지역이기도 하다.
생물학, 공학, 정치학, 경제학, 재무학 분야의 전문가와
단기적으로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장기적으로는
책에 소개된 건축물들은 라이트 말년 10년 동안에
협력해 발견한 유일한 솔루션과 실현 가능한 로드맵을
제로를 달성하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작업된 프로젝트들이다.
확인할 수 있다.
그린 프리미엄을 낮추는 정책을 도입한다면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용화한 경험을 바탕으로
청정에너지 기업들이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제공되는
저자는 ‘탄소 배출 제로’ 달성을 위한 계획을
셈이다. 경제성장과 제로 탄소 혁신이라는 두 마리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태양광과 풍력 등 탄소 배출을
토끼를 잡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출시하는 데 필요한 혁신을 설명하는 것에 할애된다.
줄이는 데 이미 적용되고 있는 재생에너지 기술을
10
11
10. 부활을 꿈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애리조나 건축 11.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61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 당선작 왕릉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 이상명 作
불혹(不惑), 미혹되지 않을 나이 마흔에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사랑스러운 딸아이도 이즈음 태어났습니다. 딸아이가 세상에 첫발을 내디딜 때, 저 또한 학문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딸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제법 학생 티도 냅니다. 시간이 제법 흐른 셈이지요. 심원건축학술상 당선 소식을 접하며 잠시나마 제 삶과 연구의 궤적을 반추해 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콘크리트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차 대학 선배의 소개로 명지대학교
수상자 이상명
한국건축문화연구소를 다니며 전통건축
(국립문화재연구소 선임연구원)
연구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유적 정비계획, 문화재수리 표준시방서, 문화재수리 표준품셈,
이상명(1974년생)은 광운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였고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재와 건축역사 이론을
근대건축물 표준시방서 등 전통건축 관련
전공하며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10여 년간 유적정비, 발굴조사, 전통건축
기술사 연구에 참여했습니다. 연차가 쌓이면서
기술 등의 연구를 담당하였다. 명지대와 인천대에서 한국 건축사를 강의하였고, 현재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좀 더 깊이 있는 연구와 나만의 콘텐츠에 대한
건축문화재연구실에서 황룡사 복원정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전통건축 기술사 연구에 관심이 많으며 「산릉의궤
갈망이 쌓여갔습니다. 결국 10여 년 다니던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 「조선후기 산릉공역의 철물 조달과 철제품 제작」 등 10여 편의
직장을 뒤로 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논문을 발표하며 후속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과연 잘한 결정일까? 몇 차례 자문했던 기억이
FEATURE
[경과보고]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의 심사는 좀처럼 꺾이지 않는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1차 예심과 2차 본심 모두 비대면 화상회의로 진행하였다. 상이 제정된 이래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심사위원 간 대면 심사로 이뤄지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웠지만 코로나19와 함께 지나온 시기에 모두가 한두 번쯤은 경험했을 비대면 화상회의의 장점을 살릴 수 있었던 점은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심원건축학술상은 1년 이내 단행본으로 출판이 가능한 미발표 원고(심사 중이거나 심사를 마친 학위 논문 포함) 중에서 학술적이며 논쟁적 가치가 높은 응모작을 대상으로 매년 1편의 당선작을 선정하여 시상 및 출판지원을 해오고 있다. 심사는 1, 2차 공히 김영철 교수(배재대, 건축이론), 김현섭 교수(고려대, 건축역사·이론), 서정일 박사(한샘드뷰연구재단, 건축학), 한동수 교수(한양대, 건축역사) 4인의 심사위원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사업회에서는 이태규 이사장과 신정환 사무장이, 주관사에서는 전진삼 발행인이 회의에 동석했다. 2차 본선 심사는 각 심사위원들이 사전 작성한 심사의견서를 공유한 가운데 세 편의 추천작에 대한 리뷰를 피력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는 특히 이상명 씨의 응모작과 석진영 씨의 응모작을 두고 심사위원 간에 팽팽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심사평은 4인 심사위원의 시선을 따라잡기에 충분할 것이다. 비록 올해의 당선작 선정에선 밀렸지만 석진영 씨와 배창현 씨에게 전하는 심사위원들의 메시지가 이 분들의 재도전 의지를 북돋을 수 있기를 바란다. 3기 심사위원회의 내부 분위기를 담고 있는 한동수 심사위원의 심사평 말미에 적은 일침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지금까지 제출되었던 대부분의 원고가 그랬고 (그동안의) 수상작도 이러한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학위논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제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향후 심원건축학술상의 응모자들이 새겨서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선작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함께 1천5백만 원의 상금(저술지원비) 그리고 1년 내 단행본 제작 지원이 부상으로 주어진다. 시상식은 6월 중 수상자 초청강연회와 함께 열릴 예정이다.(일정 추후 재공지 예정)
2021년 5월
심원문화사업회/심원건축학술상 심사위원회/격월간 와이드AR/(주)엠에스오토텍
납니다.
남아 있고 산릉의궤도 34권 정도 남아 있으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건축역사학 분야에서
박사과정 1학기 때 정정남 박사님이
그중 18건은 정자각과 산릉의궤를 직접 비교할
심원건축학술상은 신진 연구자의 성과를 좀
진행했던 『문희묘영건청등록』이라는 영건의궤
수 있어 실제 건축물과 문헌 간 실증적인
더 폭넓게 소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강독수업은 제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것
비교 연구가 가능하였습니다. 논문 주제와
제공합니다. 이렇게 의미 있는 학술상에
같습니다. 그전부터 조선시대 의궤에 관심을
대상을 정하고 산릉의궤를 한 권씩 읽어나가며,
당선되니 그동안의 노력이 존중받는 것 같아
가졌지만, 의궤가 가진 사료로서의 힘을
정자각을 일일이 현장조사하고, 데이터를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고
깨닫게 되면서 박사논문의 방향은 어렵지 않게
정리하며 차근차근 논문의 얼개를 갖추어
오랜만에 박사논문을 들춰보니 이전에는 보지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한자와 이두로 기록된
나갔습니다. 대부분 조선 왕릉은 공개되어
못했던 허점들이 제 몸 어딘가를 가시처럼
문헌을 더듬더듬 읽어나가는 동안, 조선시대
있어 쉽게 현장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출판되는 과정에 부족한
건축 시공 현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하고
관련하여 재미난 일화도 하나 있습니다. 몇
점은 최대한 채워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곳은 비공개 왕릉이어서 문화재청에 허가를
궁궐, 종묘 정전 등의 공사기록인 영건의궤로
받은 후 조사를 나가야 했습니다. 조사 당일
심원건축학술상을 주최 및 주관하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난관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난감한 적이 있었는데,
심원문화사업회, 와이드AR 관계자분들과
부딪혔습니다. 영건의궤에 기록된 건축물은
왕릉에 도착할 즈음 비가 그친 적이 두 차례
비록 졸작이지만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대부분 남아 있지 않았고 다양한 종류의
있었습니다. “이게 뭐지, 조선 왕들께서 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사논문을 쓰는 데
건축물을 다루기 때문에 제 관심 분야인
연구를 허하신 건가?” 어쨌든 좋은 신호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일일이 감사를 표하지
전통건축 시공기술사 연구에는 적합하지
여겼습니다.
못하는 점 양해 말씀드립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왕릉 정자각 등
박사과정에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국장의례를 기록한 산릉의궤가 제 연구 방향에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있도록 지원해 준 아내 은주와 왕릉 조사에
더 부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남들이 모르는 뭔가를 밝혀낼 때의 흥분은
아장아장 따라다니며 힘을 보탠 딸 채연이에게
건축 유형을 대상으로 통사적인 시공기술의
연구자라면 모두 이해하실 겁니다. 그때의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묵묵히 자식의
흐름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정자각은 40여 동이
희열은 지금까지 연구 활동을 이어오게 한
성장을 지켜봐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63
심사평 심사위원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에 응모한 총 여섯 편의
보였다면(인용 원문과 번역문의 일관된 병치
요소/공간과 연관된 첨과 퇴의 기원과 변화를
논고 가운데 세 편을 추리고, 그 세 편에서
및 해제, 산릉의궤의 샘플 페이지 도판의 더
각종 문헌과 사례를 통해 짜임새 있게 보이고
한 편의 당선작을 고르는 과정은 그리 만만치
적극적인 활용 등) 실증적 측면에서 연구의
있다. 본고를 통해 우리는 조선 중기 이후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심사자도 새로이
신뢰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온돌과 마루 조합의 보편화에 따라 공간
공부하고 깨우치는 계기를 얻게 되었는데,
또한 글쓰기의 측면에서 엄밀성이 결여된
사용 방식이 변화되는 양상, 즉 첨과 퇴(건물
이로써 함께 우리 건축학의 지평을 넓혀갈 수
부분도 종종 발견되는데, 출판을 위한 작업
최외곽 기둥열을 경계로 밖은 ‘첨’, 안은 ‘퇴’)에
있음에 감사한다. 본선 심사에 오른 세 편의
가운데 충실한 보완이 필요할 것 같다.
마루가 설치되고 툇마루의 중요성이 극적으로
응모작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높아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비록 당선되지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경합을
생활 공간과 의례 공간 전반에 나타나는
벌인 석진영의 “궁궐 연향 공간 연구” 및
가운데, 3량가, 퇴량형 3량가, 1고주 5량가,
당선작인 이상명의 “왕릉 정자각을 통해 본
배창현의 “한국 건축의 경계 공간: 첨과 퇴의
편주형 5량가 등의 가구법과 연계되고 있다.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은 그동안
기원과 변화”도 여러모로 높이 살 수 있는
저자는 이 같은 첨과 퇴 공간의 변화를
한국건축사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연구물이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한국 건축이 갖는
전통 목조건축의 시공기술을 집중적으로
독자성의 하나로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고찰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석진영의 “궁궐 연향 공간 연구”는 궁궐의 연향
이를 위해 한 섹션에서 중국 건축과 일본 건축
근대 이전 건축술의 척도였던 관영건축을
의례를 위한 물리적 공간구조와 구성요소를
각각의 경계 공간을 살핌으로써 한국 건축의
대상으로 하기 위해 조선후기의 산릉의궤를
꼼꼼히 밝힌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첨과 퇴를 살피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사료로 삼고, 일관된 관점에서 정자각이라는
판단된다. 특히 연향을 위한 임시적 가설
하지만 그 정도의 배경적 서술만으로 한국
건축유형에 초점을 맞춘 점도 무척 타당해
공간과 요소들이 갖는 함의는 현대 건축에도
건축의 독자성을 부각시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관영건축에 대해서는 영건의궤를 통한
제시하는 바가 클 것이다. 단, 연향 공간에 대한
보인다. 그리고, 본고의 전제가 된, 부재를
연구가 다수 있었지만 이 경우 의궤의 대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을 뛰어넘어, 저자가
지칭하는 ‘첨’ 및 (그 아래의 3차원적 공간도
건축물이 현존하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만
결론에서 내세운 ‘건축적 특성’에 대한 논의가
의미하는) ‘첨하/처마’를 2차원적이라 할 만한
아니라 건축유형도 다양한 반면, 정자각은
뒤따르지 않은 점이 아쉽다. 더불어 한글
‘퇴’와 직접 비교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40여 동이 현존하고 그중 18동이 산릉의궤와
표현이나 내용 구성의 엄밀성이 좀 떨어져
논의가 뒤따라야 하지 않나 싶다.
비교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연구의 잠재적 가치가 덜 부각되었고, 도판
본고는 산릉도감의 조직운영과 시공관리로부터
활용이 서툰 점도 눈에 띈다. 이 연구에는
결론적으로, 이상명과 석진영의 논고가 사료를
가설공사, 지정공사, 석공사, 목공사, 지붕공사,
적극적 해석이 개입되지 않아서인지 (문헌해제
집중 분석해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데에 좀
미장공사 등의 시공기법을 아주 구체적인
역시 해석이 중요하지만) 논쟁의 여지는 크지
더 주안점을 뒀다면, 배창현의 논고는 사료와
사항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면서도 세세히
않아 보이는데, 이는 장점이자 단점일 수
사례를 바탕으로 하되 추정과 해석을 중시하는
살피며 그 내용을 표와 사진, 도판 등으로
있다. 원 논문에서든 출판계획서 목차에서든
‘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단행본으로 출판되면
한글과 병기되지 않은 한자가 많아 출판을
논쟁적일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운 해석의
지원자의 의도처럼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위한 작업이 크게 필요할 것 같고, 한글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시공학개론서’로 쓰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옮기더라도 일반 독자들의 가독성을 위해
우리 학계는 튼튼한 실증적 연구와 도전적
그러나 내용이 전문적인 만큼 독자가 극히
세심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해석을 요하는 연구 모두를 (실상 이 둘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잘 융합된 연구를) 기대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옛 산릉의궤를 사료로 사용한 만큼
배창현의 “한국 건축의 경계 공간: 첨과
마지막으로, 금번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자에게
원문과 현대어 번역의 관계를 더 적극적으로
퇴의 기원과 변화”는 한국 전통건축의 경계
다시 한 번 축하를, 그리고 당선되지(옆면으로 계속 -->)
64
심사평 심사위원 김영철 배재대학교 주시경대학 교수
이상명의 응모작 “왕릉 정자각을 통해 본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사료의 속성이 그 원인이겠지만, 소위 학문의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은 주제의
해명하는 일은 중요해 보인다.
제1 원리는 동일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할
설정과 연구의 내용, 그리고 방법이 응모작
때, 주부와 술부를 ‘~은 ~이다’라고 표현해야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며 서로 일치하는 모습을
배창현의 응모작 “한국 건축의 경계 공간:
연구의 내용이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구 결과의 가치 및 효력의
첨과 퇴의 기원과 변화”는 첨과 퇴를 중심으로
있을 것이다.
측면에서도 수혜의 대상자가 가장 분명해
이 요소들의 진화, 한국 건축에서 이들을
보였다.
공간으로 이해했을 때, 그 역할(기능)과 성격을
석진영의 응모작 “궁궐 연향 공간
지금까지 한국건축의 역사 연구가 양식사와
체계적으로 잘 다루었다. 그리고 이 연구는
연구”는 한국전통건축의 본의를 충실하게
가구법을 중심으로 많은 성과를 보였다고
한국건축에서 이들과 3량가의 형식과 5량구조,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물로서의
할 때, 저자의 연구 주제는 드물게도 건축물
또한 비대칭 평면과의 관계 등 여러 양상도 잘
“건축”개념(건축물로서의 건축, 또한 이토
자체의 시공 과정과 구축의 방식을 잘
보여주었다.
추타 번역의 건축 개념) 이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공장사, 곧 조영 조직의
그러나 몇 가지, 아쉽고 문제가 될 만한
잘 보여주고 있다. 곧, 한국건축을 오브제의
연구(김동욱) 이후 새롭게 주목할 가치가
부분들이 있었다.
성격으로 파악하지 않고 있는 점, 건축의
있는 성과로 여겨진다. 응모작의 주제가
1. 우선 가장 중요한 개념어인 공간의 정의가
본래 의미를 “삶”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은
비록 정자각에 한정하고 있지만, 시공
일반적이지 않았다. 제목에서 설정한 개념들,
이 응모작이 유일했다. 제시된 주제와
주체(산릉도감)의 조직, 자재의 조달, 그리고
곧 경계, 첨, 퇴 등은 공간과 같은 위상에
전개된 내용도 일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각 영역의 용어들로부터 시작해서 결구
있지 않다. 첨이나 퇴가 그 기원으로부터
연향이라는 비록 한시적(permanent-많은
방식, 시공의 여러 기술을 상세하고 치밀하게
발전하고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공간의 차원에
건축관이 이 관점에 서 있다-와 대비되는
구성하여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논문이 되도록
이를 수는 없다. 따라서 논문 전체는 전제와
ephemeral-현대건축에서 새롭게 개진되는
하였다. 실제 문화재 수리의 경험도 내용의
전개, 결론 도출의 과정에서 학문적 신뢰를
주제) 삶의 기능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개념은
신뢰도를 높인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확보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첨은 첨하,
명료하게 정의되어 있고, 이를 구성하는
아쉬운 점도 있었다. 실제 시공의 주체인
처마와 다르다고 사전적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요소들과 목적, 과정 자체의 구성과 서술도
장인들의 기술 자체로 독자를 안내할 수
저자는 이를 처마와 동일시하며 공간 개념으로
탁월했다. 그 전체는 “건축적(architectural)”
있었으면 더욱 논문의 가치를 더했을 것이다.
확장하였고, 퇴도 관찰자 관점에서 위치 관계의
구도에 부합하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
장인들이 구사하던 구체적인 기술이 건축물의
정의이지만 이를 또한 공간개념으로 확대하고
여러 의궤서, 영건도감 등, 사료의 선정과
가치로 연결되는 지점이 중요할 텐데, 본
있다. 경계와 공간 개념 관계도 엄밀하게 설정된
활용의 측면에서도 효율적이었다. 논제의
논문은 정자각 건축물이 시공되는 과정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툇간이나 처마의
구성은 균형을 이루었고, 사실 및 사료와의
객관적으로 관찰자의 시점에서 구성하고 있다.
의미를 정면성의 상징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충실한 대화가 단연 돋보였다.
더 나아가 본 논문에서는 건축 자체의 주체,
정작, 이 상징성이 지시하는 것은 기능의 내용
그러나 한자가 본문에 그대로 표기된 점,
곧 정자각 자체의 원리는 질문하고 있지 않다.
이외에는 잘 명시되어 있지 않다.
사료의 번역이 가끔 음역에 머무른 점 등은
저자는 대상인 정자각이 관영 건축물이기
2. 형태 원리에서 도출된 개념들과 공간 원리의
아쉬웠다.
때문에 당대 최고의 기술과 건축적 가치를
개념들이 혼재된 점도 아쉬웠다.
보장한다고 전제하지만, 기술이나 여러 재료의
3. 응모작의 서술에서 ‘~으로 보인다’, ‘~으로
속성은 가치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상황이
생각 된다’의 표현 빈도수가 비교적 많았다.
(<-- 옆면 글 계속)
못했지만 유의미한 연구성과를 보여준 나머지 연구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65
심사평 심사위원 서정일 (재)한샘드뷰연구재단 자문위원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축적 지식이
이상명, “왕릉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이 개념을 뒷받침했다. 기존 연구들을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고 무엇을
관영건축의 시공기술”
충실히 이해한 기반 위에 새롭게 개념화하고
더 탐색해야 하는지에 대해 본선 응모작들
정자각이라는 특정한 건축유형에서의 시기별,
논리적으로 서술했으며, 사용한 근거 문헌자료,
모두 수준 높고 진지한 고민을 드러냈다.
공종별 시공기술을 충실히 밝혀냈다. 설계의
실측자료, 통계 분석도 적합하다. “경계 공간”의
심사과정에서는 응모작들의 학술적 잠재성과
혁신이 두드러지지 않는 고정된 건축유형에서
기원과 변화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이 실용적,
파급력을 우선시하면서 학술적 완성도를 함께
시공술의 혁신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미학적 가치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론적
판단했다.
과제임에도, 이를 시공기술의 전통적 측면과
이해와 만난다면 미래의 건축적 실천에도
식별해 냈다. 또한 그 변화요인을 시공성,
상당한 시사점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시공기간, 내구성의 측면에서 분석했고
기대된다.
시공기술과 가구법의 상관관계까지 도출했고 19세기 이후 시공기술의 보편화 경향을
석진영, “궁궐 연향 공간 연구 - 조선시대 궁중
주장하는 데 이르렀다. 이 연구성과가 문화재
연향 공간”
분야에 이바지할 역할은 자명할 것이며, 나아가
연향이라는 사멸된 문화적 내용을
건축역사이론 분야의 관련연구도 촉발할
텍스트로부터 추출하여 공간적 실체로서
것으로 기대된다. 서양건축의 본성이 현대적
개념화하고 구체화한 작업의 의의가 크다.
변화를 밝히는 데에 기술분야 연구가 중요한
연향의 의미를 일차적으로는 왕실 위엄의
몫을 차지했듯이 말이다.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재현으로 설정하고 행사의 위계적, 절차적
시공학개론서’를 저술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성격에 집중했으며 연향의 공간성을 동선과
위해서는 많은 분량의 정보와 텍스트를
영역구분 등과 관련시켰다.
간명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연향에는 평면적, 선향적 차원 외에도 입체적, 동시발생적 차원, 감각적 내용, 감추어진 의미가
66
배창현, “한국 건축의 경계 공간, 첨과 퇴의
있을 것이기에 이에 대한 관심도 기대된다.
기원과 변화”
공간-음악-무용-회화적 내용의 동시적
동아시아 목구조 전통에서도 한국에서만
소통성이라든지, 왕-왕실-국가-자연관과
고유하게 나타나는 특별한 형태와 경향에
우주관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정교한 해석도
주목하여 이를 발생, 진화의 관점에서 설득력
가능할 것이다. 연향의 일시적, 가설적 건축이
있게 설명했다. 퇴량형 3량가, 편주 5량가
바탕 건축물과 맺는 보완적, 긴장적 관계까지도
같은 개별건축물의 구조적-공간적 특징을
더 설명된다면 궁궐건축에 대한 이해와
개념화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시공간적으로
상상력의 폭이 크게 넓어질, 잠재성과 기여도가
넓게 걸친 많은 건축물 사례들을 분석하여
높은 연구이다.
심사평 심사위원 한동수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응모 초기에 제출된 원고와 추가로 보내온
다음으로 논지의 전개와 구성 측면을 살펴보면
다음으로 학술상 취지와의 부합성을 따져
출판 기획서를 참고하여 주제의 참신성, 논지의
이상명과 배창현의 원고는 문헌의 기록을
본다면 세 편 모두 일반적인 대중서는 분명
전개와 구성, 학술상 취지와의 부합성 등 몇
꼼꼼히 분석하고 그것을 현장에서 대조, 확인해
아니며 출판사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원고는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나감으로서 자신의 논지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더더욱 아니므로 이 학술상이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준다.
충분한 대상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제출된
먼저 주제의 참신성을 언급해 본다면 세 편
특히 이상명의 원고는 시공기술의 문제를
원고의 완성도를 비롯하여 한국건축역사
모두 한국건축역사에서 지금까지 주목하지
다루고 있어 건축 현장이 매우 중요한데
연구와 실무 전반의 상황에 비추어 굳이
않았거나 연구가 부족했던 주제를 선택하여
이 부분을 충실히 다루고 있어 문헌상의
경중을 가린다면 심사자의 입장에서는
심층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모호함을 해결하는 한편, 용어에서부터
우선순위를 이상명의 원고에 두었다. 그것은
싶다.
기술에 이르기까지 건축시공과정의 전모가
현재 심히 왜곡되어 있고 갈수록 열악해지는
이 가운데 이상명의 원고는 그 대상이 왕릉의
일목요연하게 읽혀져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문화유산 보수현장의 수준 향상을 위해
정자각에 국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궁궐과
있게 느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근본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더불어 왕실 주도의 중요한 영건 대상으로서
이것은 정자각이라는 문화유산의 원형 보존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관영건축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유지 관리 측면에서 실질적인 공헌을 할 수
상당 부분 접근하였으며 매우 미진한
있다는 점이 피부로 느껴졌다.
끝으로 사족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미
한국건축생산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반면, 배창현의 원고는 첨과 퇴의 개념을
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서 엄격한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하고 변화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지붕과
심사과정을 거친 원고를 그대로 다시 학술상의
두 번째로 배창현의 원고는 경계공간의
벽의 관계, 내부공간의 규정, 용어 해석,
심사대상으로 가져와 우열을 가리는 것이 과연
개념을 통해 개별 건축물 내・외부 공간의
이를 입증하기 위한 사례의 제시 등과 같은
합당한가, 라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제출되었던
상호 관계에 주목한 것으로 그간 당연시해
부분에서 논쟁과 모호함의 여지를 남겨
대부분의 원고가 그랬고 수상작도 이러한
온 한국건축공간의 속성을 논리적으로
놓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학술계에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론적 토대를
하나의 문제의식을 던져준 충분히 가치 있는
학위논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제출하는 것은
제공해 주고 있다.
주제였다고 여겨진다.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세 번째로 석진영의 원고는 미술사 분야에서
다음으로 석진영의 원고는 문헌과 도상의
학위논문은 여하튼 이미 하나의 전문성을
이미 어느 정도 다루어진 주제이기는 하지만
분석에 근거하여 연희공간의 전모를 파악하고
인정받아 나름대로 그 가치를 존중받아야하기
물리적인 실체를 구축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이를 정확하게 논증해 낸 것으로 아쉬운 점은
때문에 학위논문 자체를 책으로 내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을 조명함으로써 조선 후기
이러한 기록이 현실적으로 실제 건물에서는
학술상과는 별도로 『박사학위학술논총』으로
건축의 중요한 특징적 부분을 발견해 냈다.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평가해 보는 논증
출판지원을 통해 지식의 확산과 공유가 될
따라서 주제의 참신성 측면에서는 새 편 모두
과정이 누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 바람직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두 뛰어난
불구하고 한국건축역사연구에서 지금까지 거의
보인다.
면을 보여주었다.
취급되지 않았던 무대예술공간의 건축 실체를 밝혀 낸 것은 일본의 노(能)나 가부키(歌舞伎) 무대, 중국의 희대(戲臺) 시설에 견주어 볼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는 연구결과를 도출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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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당선작 요약문
왕릉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 글, 자료. 이상명
시작하며
본 연구는 공사보고서 성격의 의궤(儀軌)라는
시공기법 등 관영건축의 시공기술 전반에
한국건축역사 연구는 건축물로 한정해 보면
사료를 기반으로 조선시대 관영건축의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를
공포를 중심으로 양식사 연구를 시작으로
시공기술을 살펴보고자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통해 시대적 여건 속에 시공기술의 변화상과
가구법 발달이나 부재 변화 등을 중심 소재로
관영건축 중 동일 유형의 건축에 대한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가
다루어왔다. 이러한 계획단계의 연구는
변화상을 읽는데 유효한 조선후기 왕릉
전통건축 시공기술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유의미한 성과가 축적되어왔다. 하지만
정자각(丁字閣)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생산과정인 시공단계는 건축역사 연구의
정자각은 현재 40여 동이 남아 있고, 그중
빈틈으로 여전히 시작단계에 머물러 있다.
18동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하
산릉도감의 조직운영과 시공관리
아쉽게도 전통건축 시공기술 분야에서 동일한
산릉의궤
조선시대 관영건축에서는 공역(工役)을
유형의 건축물을 대상으로 문헌과 유구를
변화를 추적하는 데 적합하였다. 산릉의궤도
관리하기 위해 임시 조직인 도감(都監)을
아우르는 비교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34건을 참고할 수 있어 풍부한 사료 검토가
운영하는데, 산릉도감(山陵都監)은 이른
와 직접 비교가 가능하여 시기별
도리 5개로
가능하였다. 정자각은 오량가(五梁架)
시기에 조직체계가 완성되었다. 능소(陵所)가
근대 이전 관영건축(官營建築)은 국가적
구성된 가구
역량의 상징이며 당시 과학기술의 총화라 할
구성된 가구
공역을 준비하고, 능소가 정해지면 대부분은
수 있다. 삼국시대 사찰건축은 다수가 국가
오량가와 삼량가는 전통건축에서 가장
능소 현장에서 직접 공사를 관리하지만,
재정이 투입된 관영건축의 범주에 속하였다.
많은 수를 점하는 구조 방식으로, 관영건축
궁궐과 현장을 연계하는 경도감(京都監)을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시공기술의 기본 골격을 파악할 수 있게끔
도성 내 따로 두어 이원 체계로 운영되었다.
사찰건축은 더 이상 관영건축의 울타리
한다.
도감 조직은 업무와 기능별로 분류하면 크게
도리 3개로
의 정전(正殿)과 삼량가(三梁架)
의 배위청(拜位廳)이 결합된 전각이다.
안에 머물지 못하였고, 국가 의례와 관련된
정해지기 전에는 도성 내에서 조직을 꾸려
총괄 업무, 각소 업무, 보조 업무 세 영역으로
관영건축에만 재원이 집중되고 최고 수준의
본 연구는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학
구분된다. 총괄업무는 총호사(摠護使),
재료와 장인이 동원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개론서’ 성격으로 기획되었다. 시공관리 조직
제조(提調), 도청(都廳)이 맡고, 각소(各所)
관영건축은 당시 건축 기술 수준을 이해하는
구성과 운영 방식, 시공기술자의 구성과
업무는 낭청(郞廳), 감조관(監造官),
척도라 할 수 있다.
인력 조달 및 건축 자재의 수급, 주요 공종별
영역부장(領役部將) 등이 담당하였으며,
1
68
2
1. 숭릉 정자각(1674) 2. 건원릉 정자각(1870 중건)
보조 업무는 하급관리와 아전이 맡았다. 공사 분야별로 삼물소(三物所), 조성소(造成所), 대부석소(大浮石所), 노야소(爐冶所), 보토소(補土所), 소부석소(小浮石所), 수석소(輸石所)1) 등 7개 각소를 운영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전문관리직이 보강되어 시공관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영건도감(營建都監)의 조직은 건축 유형과 공사 규모에 따라 다양한 방식을 취할 수밖에
3
4
없었는데, 산릉도감은 동일한 유형의 건축물을 다루고 공사 규모도 큰 차이가 없어 17세기 중엽에 이미 조직체계가 완성되었고 18세기 말까지 큰 변화없이 지속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공사감독직인 영역부장(領役部將)이 좀 더 전문성이 강화된 패장(牌將)으로 바뀌고 인력도 늘어났다. 또한 별간역(看役)이라는 전문 기술을 가진 직종이 새롭게 등장하였으며, 회계를 담당한 계사(計士)를 1명에서 3명으로 늘려 물량 및 회계 업무를 보강하였다. 이전에 비해 실무 인력이 보강됨에 따라 전문성이 한 층 강화되었고 시공관리 역량도 개선될 수 있었다. 의궤의 초안 성격인 등록(謄錄)은 효율적인 시공관리를 위한 공사매뉴얼로서 역할을 하였는데, 이러한 공사관리 방식은 기존 방식의 답습이라는 한계도 동시에 드러냈다. 19세기에는 이전 의례 중심의
5
[표1] 정자각 공종별 시공기간(단위: 일)
공종 개념에서 현재와 다를 바 없이 세부 공종별로 시공관리가 이루어졌다. 산릉역(山陵役)산릉공사에서 건축공사를 담당하는 부서인 조성소의 담당자인 낭청은 해당 산릉역과 유사한 성격의 등록을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공역을 관리해 간다. 낭청은 임명되고 7~10일 이내에 각종 자재와 인력 조달을 해당 아문(衙門)에 요청해야 하는데, 기존 등록이 없었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존 등록을 검토하면서 낭청 등 관계자들은 공사관리 방식을 빠른 기간 내 습득할 수 있었다. 공사 운영의 지침서로서 등록을 활용함에 따라 짧은 공사기간정자각 공사기간은 평균 51일
에도 효과적인 관리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전례를 참고하는 방식은 한 번 고착된 방식이 상당 기간 변화되지 못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의궤에는 서두에 시일(時日)과 1) 삼물소는 봉분 조성을, 조성소는 능하의 건축물을, 대부석소는 능상 석물을, 노야소는 각종 연장 및 철물을, 보토소는 지세를 북돋우고 사초를 심는 역할을, 수석소는 석재 운반을 담당하였다.
공종 가설
능호
①
부계존치 31 개기굴토 기초 지정 기지간축 정초 1 석공 월대계석 18 첨계석 6 축부-지붕 3 목공 수장 3 지붕 개와 2 앙벽 4 방벽 2 축중방 3 미장 양상도회 4 내부방전 1 월대방전 1 단청 단청 18 도배 도배 2 공종 합산 101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⑨
⑩
⑪
⑫
평균
36 1 11 4 5 2 5 3 4 3 3 1 1 16 2 97
16 3 3 1 5 5 4 3 2 4 4 4 4 1 1 9 2 71
8 3 3 1 5 5 2 2 2 3 3 4 1 1 12 2 57
13 6 6 1 5 6 7 4 2 4 3 4 1 1 14 2 79
15 4 3 1 5 5 3 3 5 4 3 4 1 1 14 2 73
22 5 5 1 7 7 9 3 5 3 3 3 1 1 13 3 91
19 6 6 1 6 8 3 5 3 3 3 1 1 11 2 78
21 7 1 6 6 9 3 3 3 3 3 1 1 7 2 76
24 1 9 3 3 3 3 3 1 1 10 3 64
21 1 6 3 5 3 3 3 1 1 9 2 58
17 2 2 1 6 6 6 2 4 3 3 3 1 1 8 2 67
20.3 4.5 4.0 1.0 7.6 5.6 5.9 2.8 3.6 3.4 3.3 3.1 3.4 1.0 1.0 12.0 2.2 84.8
① 건릉(1800), ② 건릉(1821), ③ 휘경원(1824), ④ 연경묘(1830), ⑤ 인릉(1835), ⑥ 경릉(1843), ⑦ 수릉(천봉, 1846), ⑧ 수릉(천봉, 1855), ⑨ 휘경원(천봉, 1855), ⑩ 인릉(천봉, 1856), ⑪ 예릉(1864), ⑫ 휘경원(천봉, 1864).■는 의궤상 시역과 필역이 표기된 일수이고, ■는 공정 전후 관계를 통해 산출한 일수이고, 나머지는 추정한 일수임.
3. 건원릉 정자각 평면도(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綜合學術調査報告書 Ⅷ』, 2015) 4. 건원릉 정자각 단면도(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綜合學術調査報告書 Ⅷ』, 2015) 5. 능소 택지(擇地) 전후 산릉도감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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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소 일록(日錄)이라는 공사일지가 기록되어
보조역 중 조선 전기의 강제부역 형태인
외도고(外都庫)관에 각종 목재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조직된
있다. 이를 보면 8개 공종을 20개 소공종으로
연군(烟軍)은 17세기 전반까지만 역할을
계
세분화하는 등 근대적인 공종 개념이 확립되고,
하였고, 그 이후에는 승군(僧軍)과
19세기에는 수어청 등 일정한 아문(衙門)에서
짧은 기간에 여러 공종을 중복하여 운영할
모군(募軍)으로 대체되었다. 승군은
목재를 조달하였고, 호조에 목조 조달을 거의
영건공사
의 경우 17세기
정도로 공사관리 능력이 발전되어 있음을 알
영건역(營建役)
수 있다.
후반까지만 징발하였지만, 산릉역은 도성
공인(貢人)을 통해 목재를 조달하였다.
위임하였는데 외도고 공인에 의한 조달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외에서 진행되는 공역의 특성상 18세기 시공인력 구성과 자재 조달
중엽까지 징발하였는데, 가장 힘든 석물
석물 조달은 산릉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정자각 공사에는 짧은 기간으로 인해 많은
운반에 주로 투입되었다. 이후 담군(擔軍)이
하나였다. 현재 능소와 부석소 간 직선거리는
인력이 투입되었다. 시공기술을 구현하는
승군의 역할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적인
약 8km 정도이고, 도성의 동쪽은 불암산,
장인 중 목수는 직종 분화에 따른 분업화가
임노동자인 모군은 17세기 초부터 주요
서쪽은 북한산에서 돌을 뜨고 운반하였다.
이루어졌다. 톱장이는 18세기 중엽부터 목재를
보조역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능소 위치를 보면 능소 선정에 있어 부석소와의
켜는 대인거군(大引鉅軍), 소인거군(小引鉅軍),
고용되었는데, 17세기까지만 해도 비용이
거리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목재를 자르는 걸거군(擧乙鉅軍),
발생하는 모군보다는 승군이 선호되었다. 철물도 목재와 마찬가지로, 호조 및 각 군문을
지거군(歧鉅軍)으로 세분화되었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정자각에 평균 38명의 목수가
산릉역과 영건역은 시간적, 공간적 공사 여건의
통한 관 비축물량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투입되었고, 공포 조각에 최대 45명까지
차이로 인해 자재 조달 방식을 달리하였다.
18세기 초부터는 일부 복정하던 철물도
투입되어 부재별로, 시공단계별 분업화가
산릉역은 목재와 석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야소에서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 변경함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석수는 산에서 돌을
자체 생산 및 조달이 가능하도록 각소를
따라 연장의 표준화 및 적기에 철물을 각소별로
캐는 난이도에 따라 60~80명이 투입되었고,
조직하였고, 짧은 공사기간을 고려하여 관
제공할 수 있었다. 철물은 대부분 정철(正鐵)을
단청은 화원(畫員) 외에 화승(畫僧)이
비축물량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목재의 경우
원철로 사용하여 제련한 후 필요한 연장
20명 정도 투입되었는데, 19세기 초까지만
18세기 전반까지 복정(卜定)이나 벌목보다는 관
및 못을 제조하였는데, 19세기에 들어서는
징발되고 19세기 중엽부터는 민간의
비축물량을 최대한 동원하였고, 모자란 경우는
이전보다 불순물은 낮춘 철물을 사용하였고,
방외화사(方外畵師)로 대체된다.
민간 보유
사저(私儲)
목재를 구입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는 관 비축물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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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도 들여와 연장 강도를 높임에 따라 시공성을 개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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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도성 서쪽 능소와 소부석소(1915년 측량 지형도, 1:15,000尺) 7. 도성 동쪽 능소와 소부석소(1915년 측량 지형도, 1:15,000尺)
공종별 시공기법
조선 후기의 가설 비계의 구조를 짐작할 수
3. 석공사
가설공사, 기초공사, 석공사, 목공사,
있다. 19세기 초에는 가설 비계 발판에 변화가
초석의 경우 19세기 후반에는 용지판 홈을
지붕공사, 미장공사 등 6개 주요 공종별
발생하였다. 이전에는 작은 목재를 내외 횡목
가공할 정도로 석수 편수와 목수 편수 간의
시공기법을 다루었다. 공종별 시공기법은
사이에 밀착하여 설치하고, 위에는 싸리나무로
업무 조율이 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시공성을 높이고 시공기간을 단축하며 동시에
엮은 바자를 발판으로 사용하였는데, 19세기
초석 설치에는 청석(靑石)이라는 특정 석재를
내구성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초부터는 판재를 발판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사용하여 고임을 하였는데, 청석이 어떤
이를 위해 목공사, 지붕공사에서는 철물을
이전에 비해 가설 비계 조립 기간을 단축할 수
석재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산릉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사용하였고, 기초공사, 석공사 및
있었고, 본공사 시 원활한 재료 운반 및 설치가
18세기 후반부터 정자각 외의 석축공사에
미장공사에서는 재료 배합 방식을 개선하였다.
가능하여 시공성을 높였으며, 안전한 시공
사용하였다.
산릉의궤 속 철물 기록을 살펴보면, 목공사에서
환경도 마련하게 되었다. 19세기 판재는 민간
이음 및 맞춤에 의한 기존의 결구 방식의
목재상이 공급하는 주요 품목으로 조달하기
기단 및 월대를 쌓을 때에는 교착재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철물을 사용하여 보강
쉬운 재료였다. 즉 자재 조달의 여건 변화가
유회(油灰)를 사용하였는데, 본 논문에서는
및 고정 기법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왔음을
가설 비계의 구조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유회 배합비의 변화과정을 도출할 수
알 수 있다. 이는 전통건축 시공기술에서 철물
있었다. 특히 정조건릉산릉역(1800) 이후로
고정기법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2. 기초공사
횡간소입(橫看所入)이 명시되어 있어
시사한다. 기초공사, 석공사 및 미장공사에서는
기초공사 중 지정기법을 살펴보면,
19세기 전후의 관영건축에서 쓰이는 유회의
부위별로 재료 배합비의 변화과정을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까지 기단
배합비를 좀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잡석을
살펴보았는데, 미장 벽체를 제외하고 석회를
내부는 잡석도축지정(雜石搗築)
정조건릉산릉역(1800)의 횡간소입에 의한
주재료로 교합재 비율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층층히 다져 쌓은 기초
배합비를 보면 석회 1섬가마니당 법유들기름 1말
발전해왔음을 밝힐 수 있었다.
하부는 사수도축(沙水搗築)모래 지정 위에
으로 다지고, 초석
2되 2홉, 백휴지는 1.75근이다. 정조건릉산릉역
판석류
엄석(掩石)
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추정된다.
이전에 석회 1섬당 법유의 소입량은 적게는 5되
1. 가설공사
18세기 후반 무렵부터 기단 내부에는
6홉에서 많게는 1말 5되에 이른다. 사용빈도를
가설공사 중 현대건축의 가설 비계에 해당하는
잡석도축지정에 석회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보면 8되 1홉에서 1말 1되 정도가 가장 많이
기계(機械)는 요즘의 쌍줄비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기법이 강화된다.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되어 횡간소입보다는 다소 적은 비율을
구조로 구성되었다. 기계는 기둥과 기둥을
19세기 초까지 초석 하부 엄석이 기록되지
사용하였다. 휴지백휴지는 횡간의 1.75근보다
가로로 엮는 횡목(橫木), 기둥과 횡목의
않아 엄석의 설치 여부는 불명확하다. 19세기
적게 사용하였고, 특히 17세기는 휴지량을 극히
교차부를 종방향으로 이어주는 걸방(巨乙防)이
후반에는 은주초(隱柱礎)장대석을 교차하여 쌓은
적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부터
구조 부재로 구성되고, 각 부재 교차부는
기초 18㎝
지정방식으로 다시 한 번 기법에 변화를 봉분
19세기 초까지는 정조건릉산릉역의 배합비를
칡으로 묶어 고정하였다. 기둥은 직경 6치
보인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보토(補土)
유지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법유량과
정도의 목재를 사용하였고, 내외 기둥 간격은
앞 능선의 지형을 흙으로 보충
휴지량이 일정하지는 않는데, 고종년간의
2.4m
작업 시 석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차례 사용하면서 그 효능이
『탁지준절』에 따르면 석회 1섬당 법유 5되,
운반 및 이동 동선을 고려하여 적정한 발판
입증됨에 따라 정자각 기초에도 석회를
휴지 3냥으로 다시 한 번 변화된 것으로
폭이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횡목으로는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19세기 후반에 쓰인
보인다. 이전에 비해 법유와 휴지량이 줄어들어
20~30자약 6~9m에 이르는 긴 목재가
은주초지정은 당시 궁궐 내 위계가 높은 중심
교착력이 충분하였는지 의문이 남는데, 이는
사용되었다. 1980년대까지 정자각 수리에도
건물에 쓰이는 기초기법으로 왕릉의 중심
확인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긴 목재로 비계를 구성하였는데, 이를 통해
전각인 정자각에도 적용된 것이다.
최대 8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부재를
17~18c 전반
18c 후반~19c 전반
19c 후반
8
8. 시기별 정자각 지정기법
71
9
10
4. 목공사
단연은 종도리와 전량으로 고정하고
간격을 늘리는 등 비례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전통건축에서 목공사는 자재와 인력이 가장
중도리와는 절반 정도 미박이(尾朴只)로
나머지 부위별 기법은 동일하거나 대체적으로
많이 투입되는 핵심 공종이다. 정자각 역시
고정하여 19세기 후반 무렵 서까래 고정기법은
정자각 기법이 빠르고, 못의 규격이나 설치
그러한데, 산릉역 중 목재 조달과 목수 등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간격 면에서 강화된 모습을 보인다.
서까래 끝을 구멍을 내어 연결하는 싸리나무
은
인력 조달은 공사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로
연침(椽針)
중요한 부분이었다. 목공사는 목재의 확보도
구조적인 역할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쓰이고
이렇듯 산릉역인 정자각과 영건역인
중요하지만 치목 기간이 길게 소요되고 조립
있어, 당시 관습적인 시공 경향을 읽을 수
정당 간 시공기법에 차이를 보이는 것은
기간도 적지 않게 필요하였다. 산릉역의 특성상
있다. 정자각에 쓰인 기법이 당시 관영건축의
산릉의궤와 영릉의궤가 공역의 성격 차이로
정자각은 2개월 이내에 완성해야 했다.
보편적인 기술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례로서 상호 참고하지 않았던 데에서
이를 위해 정자각과 규모와 기능이 유사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정자각은 19세기
산릉의궤에는 정자각에 쓰인 많은 철물이
왕실 사묘의 중심 전각인 정당(正堂)과
정조건릉산릉역(1800)을 기점으로 기법상
기록되어 있다. 축부와 지붕가구부는 구조를
철물 보강 및 고정기법을 비교하였다. 그
변화가 구분되지만, 정당은 18세기 후반과
보강하기 위해 철물을 사용하였다. 서까래 이상
결과 시공기법이 일치하거나 유사한 부분도
19세기 초 시공기법상 차이가 명확하게 보이지
부재는 지붕가구부에 사선 방향으로 설치되기
있지만, 차이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일부
않는다. 왕실 사묘건축을 비롯한 영건역에서
때문에 맞춤과 이음만으로는 완벽하게
기법은 정당이 정자각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앞선 시공기법이 산릉역의 정자각 시공기법에
고정할 수 없었다. 정자각에서는 이러한
것도 확인된다. 부위별로 살펴보면, 서까래를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반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부위에 비해 가장
주심도리에 고정하는 기법은 정당이 20년
경우도 당연할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적극적으로 철물을 사용하였다. 서까래는 철물
정도 앞섰고, 평고대에는 18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기법상의 시차가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고정기법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3㎝
정자각보다 1치
정도 긴 못으로 고정하였다.
서까래 들뜸 방지 횡목
는 18세기
부위이다. 18세기 말까지 서까래는 중도리
서까래누리개
위의 장연 뒤뿌리만 연두박이(椽頭朴只)로
후반에는 정자각보다 3~5치9~15㎝ 긴 못을
사용되는 용어와는 적지 않게 차이가 나는데, 19세기 이후부터는 그 차이가 줄어든다.
목기연 들뜸 방지 횡목
고정하였다. 19세기부터는 주심도리에도
사용하였고, 목기연누리개
중심박이(中心朴只)로 고정하였지만 구조적인
철물고정기법은 정자각보다 20~50년 정도 부연 들뜸 방지 횡목
산릉의궤에 기록된 건축 용어들은 현재
영건의궤에 기록된 용어와 비교하면 19세기 벽체
와 용지판
이전에는 대부분 차이가 확인되는데, 19세기
역할은 미미하였다. 19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앞선다. 부연누리개
이전과는 다르게 주심도리에도 서까래 전체
측면 마감 판재
또는 서까래 2개마다 1개씩 고정하였고,
간격은 다르지만 긴 못을 쓰는 대신 설치
용어가 통합되는 경향은 시공기술이 융합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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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의 경우, 못의 규격과 설치
이후부터는 일치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19세기 들어서 산릉역과 영건역에 쓰이는
9. 초석 상부 용지판 홈[휘경원 정자각, 1864](대연건축 제공) 10. 초석 상부 용지판 홈[휘경원 정자각, 1864](대연건축 제공) 11. 17~18세기 연정 고정: 장연의 중도리 고정 12. 19세기 전반 연정 고정: 장연의 주심・중도리 고정 13. 19세기 후반 연정 고정: 장연의 주심・중도리 및 단연의 중도리・종도리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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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시사한다. 용어 변화과정을 보면
원소역의 위격이 산릉역과 비등하게 변화됨에
철물의 규격도 증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이전에는 위치 및 기능에 대한 많은
따라 19세기에는 산릉역, 원소역, 묘소역 간
정조건릉산릉역(1800)에서의 변화와는 다른
정보가 포함된 명칭이 사용되었지만, 후대로
시공기법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갈수록 글자수가 줄어들고 용어를 압축하여 사용하였다.
왕실사묘 정당에서는 18세기 후반 정자각보다 정자각 목공사의 시공기법은 17세기 초부터
시기적으로 앞선 기법들을 적용되었는데,
18세기 말까지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데,
이러한 기법들이 19세기 들어서는
정자각에 쓰이는 원재의 종류는 가장 큰
18세기 후반 영조년간부터 점차 변화가
산릉역에서도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부등목(不等木)은 별대부등(別大不等),
발생하기 시작하고, 19세기에 들어서
18세기 후반에는 정당의 서까래 고정기법은
대부등(大不等), 중부등(中不等),
정조건릉산릉역(1800)을 계기로 이전과는
정자각보다 20~50년 정도 앞서, 기술의 격차가
소부등(小不等)으로 나뉘고, 그 이하
다른 부재 명칭의 사용은 물론 부재의 보강
컸었다. 19세기에 들어서 경우궁(1824) 건립
원재는 누주(樓柱), 궁재(宮材), 체목(體木),
및 고정기법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후 19세기
시 처음으로 적심박이(積心朴只)기와공사 전
연목(椽木), 판재 등으로 구분된다. 19세기
후반 무렵에 다시 한 번 보강 및 고정기법이
서까래 위에 쌓은 목재 고정못
들어 작은 원재보다는 큰 원재를 들여와
강화되는 것을 확인된다. 이러한 변화가 왜
뒤 순조인릉산릉역(1835)에서는 적심박이와
치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전에 비해 톱
특정한 시점에 발생하였는지 짚어 볼 필요가
가공 기술이 향상되어 큰 원재로 다양한
있다. 정조건릉산릉역(1800)의 변화는 직전에
편철(匾鐵)을 처음으로 함께 사용함에 따라 기술의 시차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재를 생산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행된 화성성역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19세기에 들어 영건역과 산릉역의 시공기법상
19세기 들어 판재형 부재는 원재를 반입하여
짐작된다. 화성성역은 실학적 풍토에서
시차가 좁혀지기 시작하고 19세기 중엽
가공하기도 하지만, 구매하여 들여 쓰는 경우가
발현된 실용적인 공사기법이 다양하게 적용된
이후로는 영건역과 산릉역의 시공기법상 기술
많아진다. 이는 민간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공역이다. 도성에 준하는 거대한 공사를
격차가 거의 없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19세기
시대적 여건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는 19세기
진행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경비를 어떻게
들어 관속 장인의 상황에 변화가 나타난다.
중엽 이후 개판서까래 위 마감재, 판벽 등 판재
하면 절약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따라서
관에 대한 장인의 예속이 줄어들게 되는데,
사용량이 증가하는 경향과도 부합된다. 즉
공사비 절감을 위해 시공기간을 단축할 수
장인은 그만큼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대신
목재 조달의 여건 변화가 건축 구조 변화에도
있는 여러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인건비를
스스로 일자리를 확보해야 했다. 관영건축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줄이기 위해서 단순 일당이 아닌 성과급을
장인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일자리인데, 공사에
지급하고, 재료를 규격화 및 표준화 하여
투입되기 위해서는 장인 스스로 기술력을
운송토록 하였다. 가구법상에 눈에 띄는 변화는
입증해야 하는 상황으로 일자리 여건이 바뀌게
위계가 높은 산릉역이 원소역(園所役)
통평고대가 초매기와 착고로 바뀐 점이다.
된 것이다. 19세기 장인들은 이전 시기의 관속
왕비로 추존되지 못한 세자, 세손, 세자빈의 무덤 공사
이는 시공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방편 중
장인에 비해 경쟁체제 속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였다. 화성성역을 계기로 관영건축공사는
앞선 기술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은 불가피하게
비해 못의 규격이나 설치 간격 등에 있어서
전례보다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공사
되었다. 이 시기의 목수들은 철물 고정기법이
강화된 기법이 적용되어 위계상 시공기법에
운영방식이 이후 각종 공역인 정자각 공사에도
시공성을 높이고 시공기간을 단축하며
차이가 나타난다. 하지만 18세기 말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하다. 한편 19세기 후반
내구성을 향상시키는 방식임을 인식하였을
장헌세자현륭원원소역(1789)을 계기로
무렵부터는 철물의 사용 범위가 더욱 확대되고,
것이다. 관영건축은 목수들이 가진 기술의
정자각 목공사 시공기법은 19세기 이전에는 왕과
및
왕세자 또는 세자빈의 무덤 공사
묘소역(墓所役)
에
를 사용하는데, 약 10년
14. 경우궁 정당 평면도[1908](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5. 경우궁 정당 종단면도[1908](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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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치를 발현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이러한
설치하였는데, 이는 이전 시기부터 쓰인
양상갓방박이는 18세기 후반부터는 이전의
여건 속에 장인들, 특히 편수(邊首)들은
기법이다. 못의 규격은 시기별로 변화되는데,
10배에 해당하는 못을 사용하였다. 이는
영건역과 산릉역을 오가며 기술력을 인정받기
19세기에는 합리적인 규격으로 조정된다.
착고와 부고 간 뼈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술을 펼쳤을 것으로
산릉역에서 기와 물량을 산출하는 방식은
보이며, 또한 양상갓방박이 사이에 외와 새끼
보인다. 이러한 장인들의 활동을 매개로
17세기에는 정교하지 못한데 18세기 이후로
등을 엮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해체 수리 시
산릉역과 영건역 간 기술 격차가 좁혀졌을
개선되었지만 19세기 후반까지 정밀도가
확인된 바는 없어 더 이상의 추론은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19세기 후반 무렵의
높아지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은 조선후기
상황이다.
변화는 정조건릉산릉역과 같은 일시에 나타난
관영건축 시공기술의 한계이기도 하다. 6. 미장공사
변화가 아닌 이전의 점진적인 변화가 산릉역에 용마루는 적새용마루 구성을 위해 층층이 쌓은 암키와
미장공사 중 방벽(房壁)벽체의 바탕 및 외엮기는
고정과 사슬지붕 보수용으로 용마루에 설치된 철물 설치
시기가 후대로 갈수록 설치 간격을 좁히거나
5. 지붕공사
목적으로 양상열와박이(樑上列瓦朴只)를
눌외가로로 설치한 새끼의 두께를 늘리는 방식으로
지붕공사에서는 기와잇기 시
고정하였다. 하지만 양상열와박이는
조밀하게 시공되었다. 현재 문화재수리
18세기 중엽까지만 쓰여, 18세기 중엽
표준시방서와 비교하면 설치 간격 등에 차이가
이전부터 또는 최소한 18세기 후반부터는
나타나는데, 이는 관영건축 미장기법의 특징을
양상갓방박이(樑上加防朴只)가 사슬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적용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토용으로 석회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수막새
당
재확인하였다. 부방초(夫防草)
수막새 고정못
부방초박이(夫防草朴只)
를
1개씩 고정하여 상부 기와를 안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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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하는 기능을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17
19 16. 부방초박이[융릉 정자각](신웅주 제공) 17. 박공부 부방초박이[융릉 정자각](신웅주 제공) 18. 양상열와박이와 사슬[숭례문, 1479 개건](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서울 南大門 修理報告書』, 1966) 19. 양상열와박이와 사슬[인정전, 1856 중수](짚풀생활사박물관, 『조선 못 특별전』, 2001)
미장벽체의 테두리에는 사벽첩(沙壁貼)이라는 졸대를 설치하여 미장 경계부의 균열 등의 결함을 방지하였다. 사벽첩은 17세기에는 4치12㎝ 이하, 18세기 이후부터는 6치18㎝ 간격으로 고정한 것으로 보인다. 못의 규격이나 형태는 일관되게 못 머리가 없는 1치 5푼4.5㎝ 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고급 미장기법은 당골벽주심도리 위 서까래 사이 마감벽에서도 확인된다. 토소란(土小欄)은 도리와 당골벽의 경계부에 설치하는 일정의 재료분리대이다. 19세기 초부터 당골벽 마감을 위해 설치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엽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2치6㎝ 못을 약 1자30㎝ 간격으로 고정하였다. 사벽첩과 토소란은 고급 미장기법으로 궁궐 등 관영건축에서도 일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20
방벽과 앙벽서까래 사이 천장 미장의 초벌과 재벌은 진흙에 잘게 자른 곡초를 섞은 니토이고, 정벌은 사벽(沙壁)으로 마감하였다. 사벽의 배합재료는 17세기까지는 세사가는 모래+백와양질의 +휴지+교말아교풀이었고, 18세기부터는
진흙
세사와 백와의 기능을 사벽이 대체하였고, 사벽 재료가 사벽붉은 찰흙+휴지+교말로 바뀌었다. 마치며 정조년간에 이루어진 화성성역은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기술사적 발전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으며 관영건축의 시공기술을 융합시키는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실학건축의 정점인 화성성역을 계기로 관영건축은 한 단계 기술적 도약을 이루어낼 수 있었고, 이는 19세기 관영건축 시공기술의 발전을 이끌어 내는 모태로 작용하였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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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정자각과 문화재수리 표준시방서 간 바탕 및 외엮기 설치 간격 비교(단위: ㎜)
연구에서 밝힌 17세기 시공기술 중 상당수는 조선 전기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높고, 일부 기법은 이전 시대까지 올라갈 것으로 생각된다. 정자각의 시공기술이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표준적인 시공기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구분
중깃 간격
가시새 간격
외목 간격
벽선
중깃간
인방
가시새간
설외
표준시방서
60
300~400
30~60
600
30~50
눌외 30
정자각
-
481~603
30~75
378~508
36~49
46~78
시기별로 관영건축 시공기술의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지표임에는 분명하며, 이를
비롯한 조선후기 관영건축 수리 시 이와 같은
기초공사, 석공사, 미장공사, 지붕공사에서
수치화하여 제시한 점은 본 연구의 성과라고 할
수리지침이 필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쓰인 각종 재료를 수집하여 재료의 종류 및
수 있다.
관영건축의 시공기술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배합비에 대한 시료 분석 연구도 필요하다.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과제들이 여전히 많이
본 연구에서 취한 연구방법을 영건의궤로
본 연구가 정자각을 비롯한 관영건축 수리 시
남아 있다. 정자각의 시공기술에서 제시한
적용하여 관영건축의 전반적인 시공기술
참고 자료로 쓰이기를 기대한다. 본 연구의
내용 중에는 추론 단계에 머문 내용도
연구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연장의 발달은
결과는 궁궐 등 관영건축을 수리할 때 비슷한
많은데, 이는 향후 수리과정에서 세밀하게
시공기법을 견인하므로 이에 대한 연구도
시기 관련 의궤 검토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조사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지정기법의
필요하며, 관영건축 시공기술의 융합을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정자각을
경우에는 시굴조사 등이 병행되어야 하고,
매개하는 장인 연구로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20. 외엮기-후면 윗벽 외측[온릉 정자각, 1739](정석준 제공) 21. 외엮기-측면 윗벽 내측[휘경원 정자각, 1864](문화재청, 『光陵 및 徽慶園 補修工事 修理報告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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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서 소년에게
GAIA Topic :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불행히도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하게 양극화되었다. 상충되는 정보와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논점이 흐려지기도 한다. 우리는 더욱 사려 깊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기후변화를 논의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탄소 배출) 제로를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논의를 조금 더 건설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마법은 없다. 건설적인 대화는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나는 가족, 친구, 지도자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실을 공유하면서 대화를 건설적으로 이어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실뿐만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실도 공유해야 한다.3) p.34 76
3) 빌 게이츠, 앞의 책, 2021, pp.319-320에서 인용
Special Feature 9771976-741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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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경
Park You-Jin Architect
박유진은 인하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공간건축에 입사하여 설계실 소장을 역임했다. 도중에 영국 AA스쿨에서 수학했으며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건축사사무소 시간 대표를 역임했고 현재는 PnJ건축사사무소 대표이다. 경북대학교 및 인하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후학들을 지도해왔다. 한국건축가협회가 주최하는 건축대전 초대작가와 한국농어촌건축대전 초대작가를 역임했다. 또한 서울시 공공건축가로도 활동했다. 〈북서울 꿈의 숲 문화센터〉로 서울시건축상 우수상 및 서울특별시장 표창, 〈미야찌코리아 사옥〉으로 경기도 건축문화상 입선, 〈용인 여성회관〉으로 경기도 건축문화상 입선(이상림 공동수상), 〈용인시 문화복지행정타운〉으로 경기도 건축문화상 금상(이상림 공동수상)을 수상했고, 〈대구 동서변 레포츠센터〉로 대구시 건축문화상에 입상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제주 4.3평화공원〉, 〈팔판동 갤러리 AM〉, 〈창원 타운하우스〉 등이 있다.
인터뷰 참석 박유진(PnJ ARCHITECTS 대표) 전진삼(본지 발행인) 인터뷰 일시 1차 2021.04.09. 3:00pm~4:30pm 2차 2021.04.15. 3:00pm~5:45pm 3차 2021.04.22. 2:00pm~6:30pm 인터뷰 진행 ZOOM 화상회의 자료 협조 및 사진 크레딧 본문 전체 자료 및 사진제공 : PnJ ARCHITECTCS 사진 크레딧(별도 표기 외) : PnJ+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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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01-17] 라인매스 시절 D-01. 대학 재학 중 라인매스 활동기부터 얘기를 시작합시다. 라인매스 창립멤버인가요? 창립멤버라기보다 재창립 멤버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해요. 앞선 선배들이 처음 라인매스를 만들었어요. 동정근 선배들 시절입니다 D-02. 그 때가 언제쯤인가요? 1970년대 중반쯤 될 거에요. 정확한 시기는 찾아봐야겠네요. D-03. 그럼 재창립할 때는 언제인가요? 1984년경입니다. 1
D-04. 재창립 시 주요 구성원은 누구들인가요?
당시 대학원 재학 중이던 조상훈이 스터디그룹을 운영 중이었어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모 선배로부터 그룹명으로 ‘라인매스’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대학원생, 학부 4학년생, 3학년생, 2학년생까지 멤버로 함께 활동했어요. D-05. 당시 라인매스의 활동이 여러 루트를 통해 인하대 건축과 학생들이 조직한 동아리로 외부에 많이 알려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나요? 그 당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건축프로세스가 아닌, 주제가 있는 건축전시를 했던 것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아요. D-06. 전시를 학교 안에서 했나요? 밖에서 했나요? 교내·외에서 했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세종문화회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학교 내에서는 학우들의 졸업전시 서포터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고요. D-07. 일반적이지 않은 건축전시를 했다는데 콘텐츠가 무엇이었나요? 기억나는 것은 당시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정기적으로 고적답사를 했어요. 병산서원, 소쇄원 두 군데를 집중적으로 돌아봤습니다. 특히 병산서원은 현장 실측하고, 도면화 시키고, 모형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동시에 병산서원과 관련한 자료 중심으로 스터디를 하고, 우리들 식으로 해석하여 전시물을 만들어 공개했습니다. 그 때 당시 만들었던 병산서원 분해 모형이 인하대 본관에 전시됐었고 이후 건축학과 로비에 전시되었다가 현재는 학과 5층 복도 갤러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D-08. 전시도록 등도 남아 있나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D-09. 고적답사 기록은 전시 콘텐츠 중 하나였나요? 아니면 전부였나요? 중심 콘텐츠 중 하나였고요, 그 외에 우리가 따로 스터디 했던 ‘최소한의 주거 공간’에 대한 것도 전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는 두어 차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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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학창시절의 고건축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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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 당시 〈라인매스 전〉에 선배들도 동참했나요? 그렇진 않았고요, 후배들이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D-11. 라인매스는 지금도 존재하나요? 현재는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동아리 자체가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서···. 그 때 라인매스는 기본적으로 합숙생활을 했어요. 한동안은 학교 내에서 공동작업 하고, 학교 밖에도 작업실을 만들어 합숙생활을 했습니다. D-12. 인하대 건축과 동문모임으로 알려진 ‘용마루’하고 라인매스는 어떻게 관계 설정이 되나요? 용마루는 졸업생 모임으로 학교 졸업 후 일정 시간이 지나서까지 건축 활동을 하고 있는 동문 가운데 일정 자격요건이 갖춰졌을 때 가입되는 모임이라서 라인매스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지요. 당시만 해도 용마루란 이름의 파워가 대단했죠.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대학의 건축과 동문 모임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D-13. 다시 라인매스로 돌아가서, 라인매스 동아리 활동이 자신이 사회로 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했다고 자평합니까? 건축을 하는 기본자세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해요. 개념 설정의 방법지라든지, 건축을 하기 위해 정신자세 구축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D-14. 그렇더라도 학생들 스스로가 만든 동아리인즉 독학의 구조인데 건축하는 정신자세를 운운하는 것은 좀 과한 것 아닌가요? 혹시 선배 중에 멘토가 있었나요? رআܺܲ䛭ੈՐ،䛭ੈז䛭ೝਖࢣ䛭ઐ࢙റੈ䛭Ҋਂ 䛭ೝਖࢣੈזۃ䛭ਣகо䛭কࢵ䛭ࢵߒٛҗ䛭ѾҊܺܲ䛭оם䛭ೞ䛭 역할이 컸어요. 학교 선배 중 동정근, 송광섭, 조성룡 선생님들이 학교에 강사로 나오셨는데 그분들이 라인매스 멤버들의 멘토가 되어주셨던 것 같아요. 그 분들의 사무소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한옥 등 스터디를 할 때는 그 분야 전문가 소개도 받고, 전시 중에는 찾아주셨고···. D-15. 지금까지 얘기를 종합해보면 라인매스가 우리 고건축 중심으로 연구한 동아리처럼 느껴지는데 그건 아니지요? 물론이죠. 현대건축이론 스터디도 열심히 했죠. 주로 방학기간을 이용해 답사한 전통건축에 대한 스터디도 궁극적으로는 모던한 쪽으로 접목시키는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D-16. 그와 같은 라인매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건축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으로 나타났나요? 그랬죠. 건축대전에서는 다수 입상했고요, 후배들 대에서는 공간학생건축상 3회 연속 ‘대상’ 수상으로 이어집니다. D-17. 라인매스 후배들 가운데 현재에도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요? 문훈 소장도 한 때 참여했고, 일일이 이름을 나열하진 못하지만 여러 명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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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택 스케치_학창시절 4. 상가 스케치_학창시절
[D-18-32] 공간연구소 입사 전/후 D-18. 공간연구소에는 1987년 입사생이죠? 그 전에 다른
주변에서의 말을 듣고 큰 기대 없이 시험을 보게 되었던 겁니다.
사무소 경험은 없었나요?
필기시험은 대충 쓰고 나왔고, 실기시험은 시험본 장소가 경기도
선배 사무소에서 실습은 한 적 있고요, 공간이 첫 직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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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9. 공간 입사 시점인 1987년은 직전 해에 김수근 선생님이
공릉사옥 건물과 풍경을 담아서 제출했지요. 바들바들 떨면서
작고하신 뒤 한 해를 걸러서 신입사원을 뽑은 것으로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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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공간의 대표이자 상징적 인물인 김수근 선생님이 안 계신
뽑힌 사람이 셋이었어요.
공간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일단 건축을 하려면 건축설계사무소를 가야 하는데 당시 이름을
D-23. 10: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것이군요.
알고 있는 사무소가 몇 안 되었어요. 기껏해야 공간 그리고 학교의
거의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들이 김재영, 최원영이고 시험과
원정수 교수님이 관여하고 있던 간삼건축 정도를 알고 있었고,
무관하게 유학 전 실습생으로 들어와 있던 친구 등 한둘 더
사실 다른 곳은 어디가 있고 어떤 성격의 사무소인지 잘 몰랐어요.
있었습니다.
정림건축, 서울건축 등도 있었는데 각각의 사무소가 건축적으로 어떤 성향인지 몰랐고, 특별히 관심도 크지 않았어요. 당시 나의
D-24. 입사해서 어느 소장 밑으로 배속되었나요?
기준은 건축을 열심히 해오고 있는 사무소라면 어디든 좋다,
당시는 장세양 소장님이 거의 모든 조직을 쥐고 있던
라는 식으로 진로를 선택했지요. 김수근 선생님에 대한 정보도
때였는데 몇몇 소장님들이 계셨지만 나는 장 소장님의 밑으로
일반적인 정도 이상의 것을 갖고 있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도
배정되었습니다. 그곳에 가니까 오섬훈, 서해천 선배 등이
깊이 있게 공간과 김수근 선생님을 공부했던 바 없었고요.
있었지요. 내부적으로는 오섬훈 팀이었어요.
그랬지만 당시 건축하면 떠올릴 수 있는 분이 김중업, 김수근, 김종성 선생님 정도에서 눈에 들어온 곳이 공간이었고, 마침
D-25. 공릉사옥에서의 기억들을 떠올린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선배들의 조언도 있었고요.
기본적으로 합숙과 비슷한 생활을 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합숙생활이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에 공간 공릉사옥에서의
D-20. 공간 입사 시 시험을 치렀나요?
생활이 무척 익숙했어요. 전혀 이질감이 없었습니다.
네. 시험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공릉사옥에 한번 출근하면 2주 정도는 내리 합숙생활을 했어요.
D-21. 몇 명 정도가 응시했었나요?
서울로 연결되는 일반버스가 운행이 끊기는 바람에 야근한다고
내 기억으로는 약 30명 남짓이었던 것 같네요.
하면 으레 집에 갈 생각을 접곤 했어요.
D-22. 시험과목 중 인상에 남았던 건 무엇인가요?
D-26. 합숙생활을 전제로 한 공릉사옥 설계실에서의 24시간을
포트폴리오 같은 것을 제출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기억에
말씀해주신다면?
없고요, 시험당일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치렀던 것 같아요.
공릉사옥은 설계실에 바닥 난방이 돼 있어서 작업하다가 청사진
필기는 김수근 선생님의 건축에 대하여 쓰는 것이었지요. 앞서
도면집이나 스티로플 판을 바닥에 깔고 자기도 했는데, 취침할
실습사무소 말씀을 드렸는데 학교 이종상 선배가 운영하던
수 있는 방이 별도로 마련돼 있어서 잠자리를 가리는 멤버들은
사무소인데 그곳에서 현상설계에 참여한 적 있어요. 당시
그곳을 이용하기도 했어요. 사옥은 두 동으로 건축되었는데
현상설계 대상지가 김수근 선생님의 워커힐 힐탑바 앞에
김수근 선생님의 기념관이 있던 부속동에는 아침 누룽지부터
있었어요. 개발 프로젝트였는데 떨어졌고요, 그 후 공간에서
점심, 저녁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식당, 24시간 열려 있는
신입사원 모집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지원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샤워실 등이 있었고, 야외에는 족구장이 있었죠. 점심, 저녁
당시만 해도 파주 지역이 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밤 10시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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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대진표에 의한 족구시합으로
D-30. 자기애가 강한 분이었군요.(함께 웃음) 그렇더라도 공간
선후배 구성원들 간의 연대감, 친밀감이 무척 고조되기도 했죠.
내부에 건축초년생 박유진을 이끌었던 멘토 건축가 없었다면
또한 사옥 인접해서는 공순영릉을 위시한 좋은 자연환경이
불가능했을 텐데요?
있었습니다. 서울시내에서 접근하기엔 멀었지만 상대적으로
장세양 대표가 내겐 사숙하는 멘토였습니다. 선이 굵고, 행동이
독립적이고 조용한 천혜의 작업공간이었어요. 특별히 외근을
묵직하고, 무엇을 하든 개념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와 작업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외부로 나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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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더불어 사옥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될 만한 분이셨죠.
공릉사옥은 공간아트아카데미 구현을 목표로 한 전진기지이기도 했어서 알게 모르게 김수근 선생님의 뜻을 몸으로 익히던
D-31. 공간이 공릉사옥을 내려놓고 원서동사옥으로 다시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돌이켜보니 건축가로
나오면서 어느 정도 어지러웠던 상황이 많이 정리되는 수순을
성장하는 데 있어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길 수 있었던
밟게 되는데, 이후 공간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기 자신이 공간
곳 같습니다. 합숙하면서 선후배가 함께 부대끼며 주제토론도
잔류를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잘한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은
하고,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도움이 되었던
있나요?
것 같습니다.
공릉에서 합숙생활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다들 열심히 하고, 자기개성도 출중한 이들이었어요.
D-27. 공릉에서는 언제까지 있었나요?
특히 건축을 매우 진지하게, 또한 열심히 해오던 이종호, 양남철,
1988년 초까지 개략 1년 정도 생활했던 것 같네요.
오섬훈 선배 같은 분들은 충분히 자극을 주는 환경이었지요. 그리고 바로 위 선배들에서는 개념적인 접근성에서는
D-28. 공간 공릉사옥에서 건축하는 몸을 만들고 다시
부족하더라도 작은 디테일 하나라도 내가 직접 만든다는
원서동사옥으로 나왔을 때 개인적으론 어떤 차이를 느꼈나요?
기본적인 자세가 공유되었어요. 당시만 해도 자재업체들이 물건은
원서동으로 돌아와서도 처음엔 공릉사옥에서의 생활패턴이
팔았지만 디테일 개발은 저조한 때였거든요. 그런저런 점에서
이어졌던 것 같아요. 원서동사옥 주진입구 앞 작은 마당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가 안정을
족구를 하곤 했어요. 몸에 밴 공릉에서의 기억이 쉽게 지워지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않았던 것 같아요. D-32. 1988년 초반에 공간 설계실에 설계노조가 만들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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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9.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면 그 당시가 공간으로서는
초대 노조위원장을 동기생이 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즈음에
무척이나 위기의 시대였던 것 같은데, 이미 공간을 떠난
본인의 생각은 어떠하였나요?
류춘수, 우시용 소장, 그리고 신언학, 승효상 소장 등등 쟁쟁한
앞서서 얘기해왔듯 노조가 만들어지고 활동하게 되는 그
건축선배들이 부재한 공간에서 잔류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시절의 정당성은 있었지만 사실 나 자신에게는 큰 문제의식으로
무엇인가요?
다가오지 않았어요. 설계실 직원 입장에서 도와야 할 일이
그 당시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건축하는 게 좋아서 작업에 임했던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긴 했지만 주관심사는 아니었어요. 바로 위
때라 선배들의 움직임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선배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설계실에서 2~3년차가 돼있을
떠나간 그 분들이 왜 공간을 떠나야했는지 등에 대한 문제의식,
때 이미 프로젝트별 독립적인 팀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아니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네요. 공간이
밑으로는 신입사원들을 관할하면서 건축주까지 직접 만나야
망하게 될지, 흥하게 될지는 잘 몰랐고, 대신 나만 건축을 열심히
하는 시절이었지요. 그 바람에 나로서는 그런 부분에서 중심을
하면 공간도 살아날 것이다, 하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 때 내
잡는 것이 노조 내부에서 중심을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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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겼던 것 같아요.
[D-33-55] 공간건축에서의 주요작업 D-33. 지금부터는 공간건축에서의 작업을 전반부-후반부로
수도 있는···.
나눠서 진행하기로 하죠. 대화의 성격상 박 소장님이 주도하는 게 좋겠네요.
D-36. 주단면도에서 보이는 오프닝 아이디어는 누구의
공간에서의 작업 기간이 대략 20년쯤 되는데 전반부, 후반부로
것입니까?
구분한다면 그 시점을 각각 10년으로 끊을 수 있겠네요. 그
디자인 자체는 제가 직접 관여한 것입니다. 실현은 안 됐지만
시점의 기준은 잠깐 외유(영국 AA스쿨 수학)했던 기간을 전후로
백화점이라는 상업공간에 새롭게 시도해보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때가 공간 설계실 10년차 때였습니다.
점에서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입니다.
학생으로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시점에 유학 아닌 유학을 떠났습니다.
D-37. 그밖에 어떤 프로젝트에 관계했나요?
전반부 10년은 내가 팀장으로서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실제로 지어진 프로젝트로는 〈임자진리교회〉가 있습니다.
위로는 소장님이 계시어 그 분의 프로젝트를 받아서 진행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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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입니다. 프로젝트 치프로서의 역할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같이 진행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던
디자인의 향방은 소장님이 쥐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프로젝트입니다. 참여한 프로젝트는 더 많지만 그 정도가
팀장은 디자인을 포함한 역할까지 확장되어있었을 때라 큰 틀은
공간에서의 전반 10년 기간 동안 생각나는 것입니다.
위에서 결정하지만 디벨롭 단계에서는 팀장 책임하에 진행하는 구조였습니다.
D-38. 이제부턴 공간건축에서의 후반부 10년 기간의 얘기를 듣겠습니다.
D-34. 그럼 전반부 얘기의 시작은 〈시흥시청사〉로부터 할까요?
후반부 10년은 AA스쿨 다녀와서의 기간이 되겠고요, 설계실 내
〈시흥시청사〉 프로젝트는 거의 초기부터 작업에 임한 것입니다.
지위도 많이 올라갔습니다. 처음엔 부소장, 다시 소장으로 지위가
장세양 소장님의 관장 프로젝트였고요. 당시 저는 3~4년차였는데
상승했지요. 그 때부터는 소장으로서 디자인 진행을 하게 되는
프로젝트 치프로 수행했습니다. 시흥시 담당부서와 논의하면서
시기입니다. 프로젝트 소개 시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기회가
디벨롭을 해나갔던 프로젝트이고요, 비슷한 시기에 했던 것이
되었어요. 물론 대표와 함께 표기되긴 했지만요.
장세양 소장님의 <경기도립박물관> 프로젝트입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로 〈임자진리교회〉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D-39. 후반부 10년 얘기 진행에 앞서서 한 가지 확인하고
〈광주 롯데백화점〉이 있습니다. 이 백화점의 경우는 당시로선
넘어가지요. 영국 AA스쿨 수학 중 공간건축과 연계되어
상당히 과감한 디자인을 적용했어요. 주단면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젝트 수행을 하진 않았나요?
건물의 가운데를 지상층 출입구부터 최상부층까지 에스컬레이터
네, 없었어요. 영국으로 떠난 시기가 장세양 소장님이 돌아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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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였구요, 공간은 내부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보이는 것처럼은 안됐고요.
있었어요. 그 바람에 회사차원에서 지원받고 유학을 가지 못했어요.
D-35. 어떤 이유에서 포기하게 됐나요? 영업적인 면에서 컨슈머의 동선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통상의
D-40. 개인 비용으로 유학갔다는 건가요?
매장계획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엑스(X)자처럼 크로스가 되어
네, 개인적으로 나가게 됩니다. 유학 관련해서는 장 소장님 계실
소비자들이 자연스레 매장을 돌면서 상하부 층으로 진입하기
때에 회사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것이지만 회사의 상황이 안
편하다는 일반론에 묻혀 버렸어요. 문제는 그렇게 하면 애초
좋았던 바람에 개인 비용으로 떠나게 되었던 거지요. 때마침
우리가 의도한대로 건물의 중앙이 뻥 뚫려 있는 개방적 공간이
IMF가 터졌고, 안팎으로 뒤숭숭했을 때였으니까요. 결국은
불가한 것이었지요.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요새 같으면 가능했을
퇴사를 하고 유학을 갔다가 복직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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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롯데백화점, 1995 2. 임자진리교회, 1994 3. 서울주유소, 1996 4. 시흥시청사, 1992 5. 용인여성회관, 2000
겁니다.
좁아서 외부에 시정 관련 부서를 위한 사무소를 만들어 쓰고 있다고 합니다. 불과 10여년 만에 상황이 바뀐 거죠.
D-41. 그랬군요. 유학 전과 후의 차이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이제부터는 공간건축에서의 후반부
〈용인행정타운〉은 매우 모던한 시청사의 새로운 유형을
10년 기간의 작업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강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층부에는 의회와 대형 홀, 강당과
후반부에 와서는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디자인을 끌고 나간
같은 시설이 들어갔고, 상층부 빌딩 부분은 사무실 공간이
경우인데요, 유학을 다녀와서 보니 공간건축은 외형적으로
배치되고, 형태적으로는 고층화된 사무소빌딩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장하는 시기였어요. 1999년부터 내가 공간을 나오기
양팔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유사 형태의 시청사들이 전국적으로
전 시점까지 프로젝트 수주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확산되었습니다. 각 설계사무소의 차이라면 주변과의 관계를
국내에서 설계사무소 톱4에 들어갈 정도로 설계실 인원도
어떻게 읽어내느냐는 정도라고 해야 할 거예요.
많아지고, 해외프로젝트 전담부서도 강화되고, 주거팀, 감리팀 등이 새로 생겨나는 등 조직이 상당히 커졌습니다. 당시 공간의
턴키프로젝트의 경우 일부 시공사는 제한된 공사비 내에서
수주영역은 중국, 중동, 두바이, 아프리카, 남미에 이르기까지
작업해야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설계단계에서 세심한
공격적으로 활발하게 해외로 확장되던 시기였습니다.
부분에까지 디자인하여 납품하더라도 막상 시공사가 전권을 쥔 현장에서는 재료가 바뀌는 사례가 많았어요. 한창 턴키프로젝트
이처럼 조직이 막 커져나가던 초창기에 사무소에서는 주로
진행할 때는 그 같은 현장의 변동성까지 감안하여 디자인을
턴키프로젝트와 현상설계를 많이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했어요. 절대적으로 디자인을 포기할 수 없는 부분과 유연하게
제가 역할했던 프로젝트가 〈용인행정타운〉이었어요.
대처하는 부분으로 사전에 정리하곤 했어요. 예를 들면
처음에 〈용인여성회관〉 현상설계에 당선하면서 용인시와
〈포항시청사〉의 경우 전체 입면을 주도하는 철제 수직 구조물의
관계 맺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으로 수행한 프로젝트가
경우는 포항제철로 상징되는 포항시를 강조하기 위해 작업된
〈용인행정타운〉입니다. 그 때 그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회사에
것이라 끝까지 고수한 사례입니다. 반면 매스를 단순화시킨다거나
턴키프로젝트가 많아집니다. 국내 설계시장에 턴키가 성행하는
재료를 변경한다거나 하는 것은 서로 협의하여 수정하곤 했어요.
시기와 맞물리지요. 관공서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행정타운과 같은 복합 시청사, 기초자치단체의 구청사 등이 마구 쏟아져
D-42. 앞에서 〈용인여성회관〉 현상설계 당선이 개인적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내가 담당한 것만 해도 여러 건이 되는데 앞서의
사무소 내 입지를 공고히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고
〈용인행정타운〉을 비롯하여 〈포항시청사〉 등 규모가 상당히
했는데, 공간건축에서 수행했던 현상설계 작업 중 가장 기억에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됩니다. 일련의 사회적 흐름을 타면서
남는 프로젝트라고 하면 어느 것을 꼽을 수 있나요?
회사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게 되지요. 동시에 해외프로젝트도
〈제주 4.3평화공원〉을 들 수 있습니다.
수행하고 말이죠. D-43. 구체적으로 배치 개념 등을 소개해 주시지요. 〈용인행정타운〉은 관공서로서 규모가 상당히 크고 너무
제주도 중산간에 건축하는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그렇지만 위로는
호화롭다는 이유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라산을 향하고 아래쪽으로는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땅의
사실은 이 건물이 단순히 시청사가 아닌 행정타운으로서 시청사
형상을 따르게 됩니다. 설계지침에 제시된 〈제주 4.3평화공원〉은
외에 보건소, 청소년관련시설 등 복합적인 기능을 한 곳에
대지가 두 군데로 나눠져 있었어요. 대지의 중간지점으로
모아놓았기 때문에 규모가 커진 것이거든요. 당시 시청사 설계 시
진입하여 위아래로 구분돼있던 것이죠. 두 개의 대지를 합쳐서
인구 1백만 명을 기준으로 계획했는데 이미 용인시 전체 인구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진행했는데, 현재는 윗부분만 조성돼있고,
백만 명을 넘어섰어요. 현재 듣기로는 행정타운 내 시청사 면적이
아래쪽은 미조성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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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주4.3평화공원, 2005
D-44. 대지 아래 부분의 기능은 어떻게 조닝 되었나요?
관심사였습니다.
계획 시 (청소년)교육관이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공원으로 조성되었어요. 물론 전체 대지가 모두 공원이지만요.
D-47. 〈제주 4.3평화공원〉 현상설계에서 여타 사무소들을
D-45. 〈제주 4.3평화공원〉이 국가적 관심도 크고, 사회적 의의가
그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높았던 프로젝트였지요?
제주도 관계자들의 방향과 대체로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네. 〈제주 4.3평화공원〉은 현상설계 전·후부터 국내에서 꽤나
방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고 봐요. 주관하는 쪽은 매우
제치고 당선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이슈가 컸던 프로젝트였어요. 4.3사건이 제주도민들에겐 매우
현실적이었던 부분을 중시했던 반면 응모에 참여했던 여러
상처가 깊고 아픈 역사라서 작업하기에 앞서 사전 스터디를 통해
건축사무소나 조경사무소, 조각가의 경우 대체로 개념적인
그분들의 정서를 충분히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현재도
접근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양측의 입장을 적당한 선에서
제주도민들에게는 4.3사건과 연관이 없는 집이 없다 해도 과언이
절충점을 찾는 것이 당선의 성패를 가른 게 아닌가 싶었어요.
아닐 정도입니다.
결과적으로 공간건축의 참여작은 개념적인 제안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봐요. 행사를 위한 넓은 외부공간의 확보, 동시에
프로젝트 진행은 조경회사와 건축사무소가 공동 협력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이동했을 때를 대비한 접근로 계획 등에 생각을
작업을 했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사무소들이 대거 현상설계에
많이 담았지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을
응모했었습니다. 거기서 공간건축이 당선을 하게 되어 프로젝트를
고르는 데에 현실적인 접근에 좀 더 힘을 실어주지 않았나 싶은
수행하게 된 것이죠. 대지 내 외부공간의 조닝과 구획 등은
거죠.
조경사무소와 협의한 결과이지만 프로젝트의 책임에 있어서 건축사무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 프로젝트였어요. 그리고
D-48. 그럼 이 프로젝트에서 조경가와 조각가의 비중은 어느
특별히 이 프로젝트의 성격상 조각가가 개입하게 돼있었어요.
정도였나요?
조형물 작업을 조각가 한 것이죠. 따라서 조각가의 비중도 상당히
딱 잘라 구분하기는 힘든데 조각(조형물)이 이 프로젝트에선
컸어요. 대지 중앙에 큰 원형광장이 있는데 그곳에 조형물을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금액상으로도.
설치해야 했거든요. 상부의 제단도 조형물로 설치되었습니다. 조형물의 컨셉은 조각가가 잡고, 건축에서 돕는 구조였어요.
D-49. 그 조각가의 이름은요?
옆에는 4.3사료관이 자리 잡았는데 이것은 온전히 건축의
심문섭 선생님이시고요. 굉장히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몫이었고요. D-50. 담당했던 해외 프로젝트로는 어떤 게 있나요? D-46. 그와 같이 공간의 위계를 결정할 때 어떠한 기준이
당시 공간에는 소장별로 담당하는 해외지역이 따로 있었어요.
적용되었나요?
나의 경우는 중국, 중동 두바이, 카타르였는데 그 중 기억에
공원으로서 필요로 하는 공간이 있어요. 제일 필요로 하는
남아있는 프로젝트는 카타르와 두바이에 제안한 호텔이
공간은 대지 상부의 제단이었어요. 이곳에서 매년 4.3추념식이
있었는데 최종 계약으로는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경우와
열리는데, 대통령도 참석하는 큰 행사죠. 성격상 중심공간이지만
같이 아라비아 상인들도 보통 짠 게 아니어서 제아무리 안이
대지의 중앙에 놓을 순 없고, 순례자들의 발길이 최후에
좋고, 해보겠다는 약속을 받아도 계약까지 이르는 것은 너무
닿는 마지막 공간이 되게 계획했던 거죠. 그래서 공원을 찾은
힘들었어요. 계약 직전에서 무산된 프로젝트들이죠. 두바이
사람들이 주차장에서부터 도보로 중간영역에 구획된 길을 거쳐
팜아일랜드 한 조각에 있는 〈두바이 리조트호텔〉, 〈카타르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제단에 이르게끔 의도했습니다. 제단에
호텔〉이 그 사례입니다.
이르는 중간 과정에 어떤 이야기성을 내재시킬 것인가가 주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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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용인행정타운, 2004 8. 용인행정타운 전경, 2004 9. 두바이호텔, 2005 10. 목포축구센터, 2006
〈카타르 호텔〉의 경우 기본적으로 히잡의 이미지를 건물의 조형에
혼란스러웠고, 내 머릿속의 고착되었던 건축의 프로세스를
도입했고, 사막의 뜨거운 공기를 건물의 하부로 끌어들여서
많이 지우게 되었어요. 과거 공간에서는 어떤 프로젝트를
상부로 유도하는 과정에서 바람 길을 통한 건물의 실내 온도를
접하여서 개념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으면 건축이 아닌 것처럼
조절하는 친환경적 접근으로 입면을 수직으로 쪼개는 디자인을
여겼어요. 나중에는 하나의 건물을 만드는 데에 프로세스를
했습니다. 〈두바이 리조트호텔〉의 경우도 둥근 세 개의 형태는
거꾸로 접근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하여간
중동의 기후조건을 베이스로 하여 자연환기가 가능한 형태를
프로세스라는 게 정해진 게 없더라, 하는 것을 말이죠.
만들다보니 생긴 것이고 전체적으로는 해변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중시해서 건물의 매스가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위 또는
D-53. 바꿔 말하면 공간건축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워졌다는
파도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거예요. 지역의 특성을 건축공간화
거군요?
한다는 공간의 디자인 작법이 여기서도 주효했어요. 당시 중동에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간의 디자인으로 진출해보려고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내 담당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D-54. 그럼 본인의 변화가 공간건축 구성원들에겐 어떻게
공간건축에서 특히 공을 들였던 지역이 아프리카였어요. 르완다,
전달되었다고 보나요?
알제리에는 실제로 지어진 프로젝트도 있지요. 돌이켜보면 이때가
설계실 구성원들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공간건축이 제일 잘 나가던 시기였던 것이죠.
당시 사무소 내 디자인풀에서 다른 소장들이 고치자고 하면 맞서서 가능한 고치지 않으려고 사수했던 기억이 나요. 그
D-51. 공간건축 재직 시 현상설계 당선 비율이 꽤 높았다고
바람에 우리 팀의 작업은 초기안을 끝까지 유지하는 팀칼라로
하던데요?
자리 잡았어요. 디자인안을 여러 개 만들어서 다른 멤버들한테
글쎄요, 전반적으로 그랬던 느낌이네요.(웃음) 실제로 절반 정도는
선택해달라고 하지 않도록 노력했지요.
당선했던 것 같네요. D-55. 그런 태도였다면 사무소 내부에 안티가 많이 있지 D-52. 지금까지 공간건축에서 작업했던 전·후반부를 듣고,
않았나요?
자료를 보다보니까 각각의 시점에 따른 건축 작업의 성향이
다행히 대부분 제가 한 안을 많이 따라 주었어요. 소장들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교묘하게도 전·후반을 구분하는 시기에
사이에서도 불필요한 잡음이 적었어요. 디자인 갖고는 견제를
영국 AA스쿨 유학이 있고요, 본인이 생각하기로 영국에서의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수학경험이 어떤 영향관계가 있다고 보나요? 일단은 장 소장님을 모시던 공간건축에서의 시기는 무엇인가를 연구하며 시도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공간에는 공간만의 디자인 프로세스라는 게 존재했어요. 교과서처럼 정해진. 공간의 설계 매뉴얼대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어있었죠. 그래서 공간에서 10년차 정도가 되면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건축 프로세스대로 하면 되는 거야 식의 관성이 붙게 마련이었죠. 나또한 건축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몸이 만들어져 있었고 당시만 해도 건축에 관한 한 자신만만했었어요. 그런데 영국에 가서 보니 접근하는 것이 많이 다른 거예요. 건축을 풀어내는 데에 프로세스가. 공간에서 알던 프로세스는 수많은 방법 중 한 가지 정도였구나, 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처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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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서울 꿈의숲_배치개념 드로잉, 2010
[D-56-69] 북서울 꿈의숲 D-56. 사전에 공유했듯 공간건축에서 시간건축으로 독립 후
D-59. 구체적으로 설계안을 짚어가면서 설명해주시지요.
수행한 〈북서울 꿈의숲〉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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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서울 꿈의숲〉이 이전에 《와이드AR》에 게재된 바 있지만
주진입구가 있고 지형을 따라 위쪽에 주요 시설물들을 땅에
구체적으로 설계과정이 소개되는 형식은 아니어서 이 프로젝트의
묻어서 배치하여 최상부의 전망대까지 자연스럽게 동선을
경우 그 지점을 집중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흐르도록 한 것인데, 그걸 조금 입체적으로 보자면 대지의
이 프로젝트는 국제현상설계로 나와서 조경팀 하고 같이
경사를 이용하여 공원 안에 길을 만들고 정점 부근에 전망대를
작업하여 진행한 것입니다. 공원설계라는 프로젝트 성격상 조경
위치시키는 공간구조이죠. 대지 내에는 낮은 야산이 두 덩이가
쪽에 힘이 실린 현상설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발주처의
있는데 하나의 건물로 두 개의 지형을 연결시키고, 건물은 중간
요구내용보다 의도적으로 좀 더 많은 수의 건물을 집어넣었어요.
중간 땅에 묻는 방식이었어요. 원래 이 공원 내에는 사람들이
그게 실시설계하는 나중에 조금 문제가 되기도 했었죠. 말하자면
다니던 등산로가 있었어요. 이전에 이곳은 드림랜드라는
애초 요구됐던 건물은 현재 건축된 건물 면적의 절반 정도에
놀이공원이 있었는데 유원지였어요. 그런 시설물은 모두 없애고
불과했습니다. 조경이야 땅의 면적이 정해져 있으니까 별문제가
지역 주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의 공원으로 만드는 작업을
아니었는데 건축은 좀 다른 문제였어요. 설계비가 두 배, 세 배로
국제현상설계로 하게 된 것이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증가하게 되는 요인이란 말이죠···. 당선안의 건물은 원안대로
산책도 하고, 공원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로 했던
유지했지만 결국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늘어난 건물에 대하여는
겁니다. 그러려다보니 낮은 야산도 쉽게 쉽게 올라 다닐 수 있는
설계비 증액으로 이어지진 못했어요.
थजబ 䛭䛸ףӨ䛭Ѥޚҗ䛭মڋѱ䛭ୡ䛭זоо䛭٢䛭 주된 관심사였어요. 건물은 각각 하나로 존재하지만 서로서로
D-57. 이 프로젝트는 시간건축 오픈하고 어느 시기에 작업한
연계되도록 한다는 공간 전략을 짜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공원
건가요?
방문객들이 전망대 타워로부터 중간 중간의 건물 지붕을 밟고
개업하고 2년쯤입니다. 그 전에는 공간건축에서 해왔듯이
내려가는 동선을 생각했어요. 초기 의도는 그랬는데 실제로
턴키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고, 건설사와 함께 BTL방식의
공사를 하려고 땅을 파보니까 암반이 일찍 나오는 바람에
프로젝트도 하고, 그 와중에 〈북서울 꿈의숲〉 국제현상설계를
건물의 레벨이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초기
했던 것이죠. 그때만 해도 프로젝트들의 규모가 대부분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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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화되긴 했지요. 그러나 최대한 각 건물의 지붕에는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긴 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쉬운 부분이죠.
D-58. 국제현상설계 당선작이라는 효과를 봤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발주처의 계획을 넘어서는 여러 채의 건물을
전망대 타워 자체도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어요. 방문객들이
용인받은 것이라든지, 전망대와 같은 구조물이 실현되는 데는
공원 안에 만들어진 경사로의 각도를 타고서 그대로 전망대
국제현상설계라는 덕을 크게 봤어요. 종종 다행이란 생각을
내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지요. 그것이 전망대 타워를
하였지요. 이 프로젝트는 공원설계를 통한 지역의 개발
통상의 수직형 타워로 세우지 않은 이유입니다. 내부에는
사업이라는 성격도 일부 갖고 있었어요. 프로젝트 진행하는
장애자를 위한 경사 엘리베이터도 설치돼 있고요. 타워가 있는
나하고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요. 그 얘기를 왜 하냐면
바로 옆이 공원 내 야산의 최정상인데요, 그곳에서의 눈높이
이 프로젝트의 공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는데
기준으로 볼 때 이 타워의 높이가 약간 더 높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공사기간을 단축시키려다보니
야산 최정상의 나무보다 키가 낮아요. 그곳에서 보면 타워이되
일부 완성도가 떨어지는 일도 발생했어요. 그렇더라도 건물의
타워 같지 않은 거죠.(웃음) 타워지만 가능하면 키를 낮춰서
매스나 건축 자체의 공간 등은 디자인 원안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게 하자는 의도가 배어 있었어요. 물론
다행이었죠.
타워에서 아래쪽을 바라보면 상당히 높은 곳이란 느낌이 들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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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서울 꿈의숲_건축시설물 평면 개념 드로잉, 2010 3~4. 북서울 꿈의숲 시설물, 2010 5.북서울 꿈의숲 캔틸레버 구조를 이용한 대형 필로티 공간, 2010 6. 북서울 꿈의숲 전경, 2010
할 텐데, 옆쪽을 바라보면 높은 곳이란 느낌이 안 들게 했다는
아무래도 일반 구조물보다는 높았죠. 발주처에서도 이
거죠. 대신 타워가 가지는 의외성에 주목했어요. 타워의 구조는
프로젝트가 국제현상설계 당선작이란 이유 때문에 설계안 변경
캔틸레버를 적용했어요. 타워의 구조체 각도는 바닥 기준으로
없이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었어요. 건축심의 등 중간
30도에요. 이게 지지하는 기둥이 없이 50미터를 허공에 띄워
과정도 잘 넘어 갈 수 있었고요. 덕분에 건축가로서도 좋아하는
놓았어요. 50미터의 건물이 아무런 지지 없이 30도 각도로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죠. 여기 캔틸레버 바깥으로 조경
기울어져 있는 것이죠. 그걸 캔틸레버 구조로 푼 것이죠. 그런
쪽에서 만들어놓은 낮은 깊이의 풀이 있는데 한여름에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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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온 아이들이 자주 풀에서 놀곤 해요. 그 시간 엄마들은
물론 불안해 할 필요까진 없지요. 이 타워의 구조적 안전성을
캔틸레버 하부의 넓은 그늘에 앉아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편하게
확보하기 위해 풍동실험 등 모종의 사전 검토를 마쳤습니다.
쉬다가 가는 곳이기도 하죠. 자연스럽게 주민이 즐겨 찾는 작은 광장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돌이켜보면 이 같은 도전적 구조를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간건축에서 예전에 경험된 사례들이 있어서 아이디어를 냈던
D-64. 그럼 본격적으로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 볼까요?
것 같아요. 공간에서 〈알펜시아 스키점프 타워〉를 설계한 적
건물들은 대부분 땅에 묻어 놓는 방식을 취했어요. 전시장,
있었어요. 점프대 설계를 하면서 외국의 사례를 검토해보니까
레스토랑 등이 있고요, 박스처럼 보이는 두 곳이 있는데 앞에는
수직형 타워가 아닌 구조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 거예요.
다목적홀, 뒤는 300석 규모의 공연장이 있습니다. 이곳은 좀
그 때 당시 얻었던 경험치로 기울어진 구조물로서의 타워도
특별합니다. 공연장 무대전면 상부에 창호가 설치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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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이곳에 창을 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웃음) 무대 앞
구조물로 다가왔어요. 극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자연과
천장에 매단 음향판도 일부러 투명한 자재를 활용했어요,
어우러지는 형태가 되겠다싶었던 거죠.
낮시간에 내부 조명을 하나도 켜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공간은 매우 밝은 상태를 유지해주죠. 사실 공연 시 무대전면 상부 창호를
D-60. 당시 전망대 타워 구조설계는 어디가 했나요?
많이 활용하진 않지만, 일부 낮공연 시에 창을 개방하여 활용할 수
단구조였습니다.
있다는 면에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게 됩니다.
D-61. 그 밖에 다른 것은 뭐가 있나요?
D-65. 공원 전체가 경사지를 이용한 배치인데 그곳에도 모종의
타워 구조를 고민하면서 건축가는 상상을 많이 해야 되고 동시에
건축 장치를 해놨나요?
의외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타워 외에
말씀하신대로 전체가 다 경사지잖아요. 일부는 땅을 접어서
공원 중간부분의 건물 또한 기둥 없는 캔틸레버 구조를 실현한
공간을 들어내고 움푹 파인 외부공간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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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의 디자인 의도는 공원 내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게 하자는
있는 구조물이죠. 이것도 상당한 모험이었어요.
생각이 주효했어요. 군데군데 그 같은 아이디어를 삽입했어요. 그리고 미술관의 경우 두 개의 박스를 겹쳐놓은 형상인데
D-62.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를 채택한 겁니까?
각각(단부)의 방향성은 다음의 경로를 지시해주는 시선의 축과
통으로 ㄷ(디귿)자 트러스를 짜서 그것을 땅에 묻은 메인 구조물이
같은 역할을 의도한 것이죠. 자연스럽게 공간과 공간의 시퀀스를
붙잡고 있는 캔틸레버 구조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25미터
만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캔틸레버이다보니 국내에선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물은 아니에요. D-66. 〈북서울 꿈의숲〉 건축 이야기는 어느 정도 들은 것 D-63. 이 같은 모험적 구조물을 채택하려면 비용적인 문제를
같은데요, 국제현상설계 당시 함께 작업한 조경가는 누구였나요?
간과할 수 없었을 텐데요?
또한 누가 누구를 선택한 경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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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북서울 꿈의숲_전망대 초기안 드로잉, 2010 8. 북서울 꿈의숲 전망대, 2010
조경사무소 시토포스의 최신현 대표가 건축가를 선택했다고 볼
쪽이라고 봅니까?
수 있지요. 공간에 있을 때 〈알펜시아 프로젝트〉를 같이 해본 적
조금은 두 개의 관점이 섞여 있는 것 같아요. 건물 자체의
있었어요.
베이스는 공간건축적이지만 그것을 전개하는 방법에서 다른 태도(생각하는 방법 등에서)를 개입시켰다고 생각합니다.
D-67. 조경가와 건축가 사이의 공조는 무난했나요? 처음 공원의 방향성에 대한 큰 틀은 최 대표의 시토포스가
D-69. 전체적으로 대지를 푸는 방법에서 공간의
주도했어요. 그 때 첫 생각은 어떻게든 이 공원을 비우자는
장세양 소장님이 깊게 관여한 〈국립진주박물관〉과 그 외
게 컨셉이었어요. 우리가 제안한 응모작의 타이틀이 ‘오픈
〈국립청주박물관〉 등의 접근방식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필드’였어요. 공원의 가운데를 완전히 비우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공간에서 박물관 프로젝트를 많이 했잖아요. 공간에서 작업하는
공원 중앙에 넓은 잔디밭을 만들었어요. 부분적으론 수공간을
박물관은 진입부터 과정에 대한 스토리를 많이 심어놓게 되는데
만들었고요, 그리고 나머지 구조물은 대부분 대지의 사이드로
공간의 시퀀스 개념이 주효해요. 이 프로젝트도 연장선상에서
뺐어요. 그런 점을 서로 공감하고 대신 건물의 배치는 건축가가
동질의 공간 수법을 쓰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원 재학 중
주도하는 거로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만드는 건물은
작업에서 시퀀스 얘기를 중심에 놓고 연구해본 경험도 있고요.
대체로 야산에 묻히도록 한 것이죠. 따라서 협력체로서 서로 간의
부석사가 대표적이죠. 그런 관점은 기본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거부감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조경가 최신현 대표는 건축에도
운용하는 데 있어서 바닥에 깔고 간 것이죠.
상당히 조예가 깊은 분이어서 건축의 이해도도 높아서 작업하는
앞서도 잠시 얘기했지만 공원의 전체 흐름도에서 보면 입구에
데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방문자센터가 있고, 중앙의 넓은 마당을 감싸고 나 있는 길을
D-68. 〈북서울 꿈의숲〉을 이야기 소재로 삼을 때에
공간의 방향타 역할을 하기도 하죠. 건축가는 그렇게 장치를
건축설계프로세스에 집중하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앞의 공간건축
숨겨놨는데 방문객들이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지는 잘
매뉴얼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다고 보는지, 아니면 다른
모르겠고요.(웃음)
따라 가면 나타나는 건물의 모서리부분이 다음 동선을 유도하는
방식의 프로세스를 개입시킨 사례라고 생각하는지 본인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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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북서울 꿈의숲 전망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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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아의갤러리 모형스터디 사진, 2010
[D-70-72] 지아의갤러리 D-70. 이제부터는 〈지아의갤러리〉 얘기를 나눠보시죠. 이 프로젝트의 키워드는 ‘재료’, ‘매스’, ‘오프닝’ 등으로 구분하여 얘기하기로 했지요. 위치는 청와대 뒷산 바로 아래지역에 있습니다. 대로변이고요. 건물 철거 중인 땅이었어요. 여러 건물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주변에는 기와지붕의 집도 있고, 빨간 벽돌집도 있고 그래요. 처음 이 작업을 시작할 때에 고민했던 것 중 ՠо䛭৺䛭રܲ䛭߶ۼث䛭ؗז䛭ܲۃ䛭ޕহۼ䛭Өܲ䛭ыҊ䛭ࢣпੈ䛭݅মਂ 䛭䛸۟䛭৫હি䛭䛭ࢵ䛭ـҊࢱ䛭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한 바 있어요. 파벽돌, 큰 유닛의 석판, 그리고 패턴, 작은 돌, 둥근 돌, 베이스패널 등등 고려했는데 결과적으론 지역의 특성도 그렇고, 이 건물의 사이즈도 그렇고 벽돌로 귀결되더라고요. 벽돌 중에서도 정갈한 벽돌이 났겠다 싶더라고요. 결과적으론 공간에서 몸에 각인된 바 있는 까만 벽돌로 가야겠다고 정리했어요. 이 건물이 속한 가로의 분위기를 정리해 줄 수 있는 벽돌건물을 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에 매스를 갖고 고민했어요. 이 건물은 갤러리 사옥이에요. 대지면적이 개략 100제곱미터, 33평 남짓이어서 건폐율 60%를 적용하면 1개 층에 20평도 다 넣지를 못해요. 한 층의 면적이 최대 15평밖에 안 되는 협소한 건물이에요. 그런데다가 건축주의 요구는 엄청났어요. 건축주는 이 건물을 갤러리로 쓰고, 사옥으로도 쓰면서 거주도 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게다가 주차공간이 필요했고요. 1층은 주차로 인해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조건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Ѥ୶રо䛭২䛭݄ٗז䛭࠘ੈۃ䛭थז䛭ࣺমਂ 䛭䛸䛭߃ۇি䛭ੈࣗ݀ݟ䛭ԧ䛭ࠁਫ਼೬ढ ףਹ
그렇게 작업을 출발했는데, 집의 면적을 담은 매스를 놓고 따져 들어가기 시작해보니 이 건물이 청와대 앞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높이 제한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법적으로 정해진 사이즈가 있고, 건축주가 요구하는 내용이 있고, 게다가 건축가로서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등등.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업에 투영되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일반적인 근생 건물에서 보듯 통상의 층 개념으로 나눠서는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건물의 외관은 내부 기능과 연계하여 구멍을 내고, 내부 기능실은 요구하는 게 많아서 그것을 담아내기 위해 작은 면적이지만 단차를 두어서 공간의 위계를 나누기로 했어요. 개념적으로. 내부공간은 에셔의 상 ‘ 대성(Relativity)’(1953)이란 작품에 등장하는 그림과 같은 분위기를 넣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원래는 3개 층 정도밖에 안 되는 건데 레벨로는 8개로 만들어진 거죠. 처음엔 그렇게 접근했어요. 그렇게 이 건물에 적용할 컨셉을 잡고 진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건물의 구조는 껍데기 모두 구조체가 되게끔 했어요. 그런 까닭에 이 건물엔 별도의 구조 기둥이 없습니다. 그래서 벽의 전개도를 만들게 되었지요. [전: 종이접기 하듯이?] 접으면 자연스레 구조체가 되는 거죠. [전: 벽두께는 어느 정도 되나요?] 전부 200㎜입니다. 벽체에 창호가 들어가는 부분을 절개하는 것을 전제로 구조계산을 했죠. 건물 매스에 대한 여러 개의 대안 스터디를 했습니다. 내부도 여러 개의 판을 만들어보게 되었죠. 벽체, 매스, 플로어에 대한 스터디가 동시에 이뤄졌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큰 프로젝트 못지않게 엄청 고민하고 치열하게 작업했어요. 그렇게 완성된 건물은 작은 바닥에 단차를 두어 공간의 변화를 주었고, 과감하게 바닥판을 뚫어서 층고의 변화를 주기도 했고요, 위치를 달리하는 계단으로 각 층을 연결하게 됐지요. 생각해보면 작은 바닥면적을 이 건물에서처럼 쪼개고 뚫어서 쓴다는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주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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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1. 건축주하고는 이전에 선행 작업이 있었나요? 아니에요. 처음 만난 건축주입니다. 사실은 공사 중에 시공사가 말썽을 많이 피우는 바람에 막판에 분쟁이 생겨서 건축주하고 소원해졌어요. 어렵사리 준공한 후에는 이 건물을 더 이상 살필 수 없게 됐습니다. D-72. 이 건물은 외부 벽에 설치된 간판이 없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건축주가 전 층을 사용하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겠고요. 자세히 보면 1층 입구 캐노피에 간판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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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아의갤러리 내부 공간, 2010 3. 지아의갤러리 개념도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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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간 개념 드로잉, 2010 5. 지아의갤러리_입단면 개념 드로잉, 2010
[D-73-79] 소규모 근생건물 D-73. 이제부터는 소규모 근생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얘기 나눠보시죠. 어떤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는지 등등. 세 개 정도의 프로젝트로 압축하고,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대해선 깊이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서초동 법원 앞에 있는 근생 건물인데 변호사사무소가 입주한 곳이고요, 두 번째는 일반적인 신도시 택지 조성하면서 들어간 상업건물이고요, 마지막으로는 소규모 사무실과 근생을 복합하여 증축한 원주의 YWCA빌딩입니다. D-74. 네, 그럼 서초동 법원 앞 근생부터 들려주시죠. 이 건물은 법원의 정면과 마주보고 있는데 법원 안마당의 조경이 이 건물의 조경처럼 느껴지게끔 의도한 프로젝트입니다. 말하자면 담장 하나를 경계로 조경공간을 공유하는···. 단면에서 보듯이 여기 보이는 나무가 법원 나무에요. 이 땅의 선택지를 살펴보면 3미터 이상 높이의 담장 위로 법원이 있고, 측면엔 다른 건물이 들어서있는, 매우 작은 땅이었어요. 요는 이곳에 어떻게 건물을 꽂아 놓느냐 하는 건데 특이하게도 법원 대지경계와 맞물려서 사선제한이 걸려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통상의 경우 박스를 쌓아 셋백하면서 진행하면 되는데 이 땅에서의 또 다른 고민은 정해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의 면적을 찾아내는 것에 있었어요. 다행히 대지는 좁고 긴 형상이어서 지하층까지 최대한 활용한다는 생각에 미쳤어요. 대신 지하층은 대지 여건상 환경이 매우 열악했지요.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주차장 위쪽으로 선큰을 만들기로 한 거죠. 법이 정해놓은 건물의 용적률과 건폐율을 감안하여 종단면과 횡단면을 검토해보면 건물의 배치는 거의 정해져버리는데 여기서 조형을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습니다. 옥상의 경우 그 부분을 건물의 내부로 만들면 면적이 오버가 되는데 조형적으론 필요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건물이 반듯반듯한 박스형 건물이어서 그 같은 주변 컨텍스트를 좇자니 너무 특징 없어 보여서 최대한 법적 허용치 안에서 건물 입면의 조형성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건물의 뒤로 보이는 일반적 도시풍경에 새로운 느낌의 선을 그어본다는 발상을 했던 것이죠. 건물이 밀집된 지역 안에서 조형을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일까를 가지고 고민을 심화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완성된 사진을 보면 주변과 이질적 요소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 대지의 형상은 오른쪽과 왼쪽의 폭이 다른 사다리꼴인데 그것을 따라 사선제한의 선을 긋다보니 예상치 않은 비정형의 입면 외곽선이 만들어져서 애초 의도했던 다른 조형성을 갖게 된 경우입니다. 그러다보니 테라스가 있는 옥상 상부의 모양도 특별하게 만들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특히 좋아하는 공간인데 나중에 건축주가 그곳에 벽을 쳐서 내부공간으로 쓰면 안 되냐고 해서 적극적으로 말린 적도 있어요.(웃음) D-75. 신도시에 작업한 소규모 상업건물로 넘어 가시죠. 순천에 지은 이 건물도 일반적으로 신도시 개발 시 상업지역의 근생 건물에서 볼 수 있는 박스형 건물 중의 하나였어요. 상업건물은 최대한 경제성에 맞춰져야 했고 동시에 최대의 면적을 찾아내야 했어요. 그러다보니 버라이어티한 주출입구를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죠. 공용의 주출입구는 최소한의 크기만 확보되면 족했고요, 그 면에서 디자인의 주관심은 건물의 표정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하는 거였어요. 어차피 이 건물은 각각의 유닛을 잘라서 분양을 하거나 임대를 주는 것이라서 각 유닛을 개별적으로 독립된 부스처럼 보이게끔 수직수평으로 면분할을 한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입주자들 저마다 각각 독립된 자기 가게라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했죠. 결과적으로 별개 유닛 박스를 쌓아올린 것이 이 건물의 완성된 조형성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죠. [전: 3개 층으로 제한된 다른 이유가 있나요?] 나중에 위로 증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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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초동 근생 전경, 2009 2. 서초동 근생 단면개념 드로잉 3. 서초동 근생 사무공간 4. 서초동 근생 옥상 테라스 5. 순천상가 외관 드로잉, 2013
оםవ۽䛭೬ ਂؗז䛭जகিࢱ䛭ࠀٟ䛭ୠସӜু䛭 ѐ䛭ஔۼ䛭ষ೬ؗז䛭ՠહি䛭Ѥ୶ર䛭ӗ۰ۼ䛭䛭ஔࣺܲ䛭 제한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주변의 건물들이 대체로 3개 층 정도의 규모로 지어지고 있었고요. 문제는 건축주나 시공자나 공히 계산적으로 접근하여 가급적 저비용으로 지으려다보니 디테일 등에서 현장작업의 완성도가 떨어졌습니다. 그런 중에도 유닛과 유닛 사이에는 LED등을 심어서 야간 경관조명의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죠. D-76. 이 건물을 신도시에 짓는 상업건물의 한 타입으로 염두에 두고 있나요? 그렇진 않아요. 평소 지론인즉 상업건물에 유형은 없다고 봐요. [전: 그때그때 다르다 말이죠?] 그렇죠,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D-77. 그렇다면 지역적인 특성, 배경 등이 상업건물의 디자인에 작용하나요? 아니요. 이 건물은 순천에 신도시를 조성할 때 들어가게 된 것인데요, 말하자면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단 것이죠. 도로구획, 여타 건물 등 모든 것이 새로 만들어진 환경이어서 주변 컨텍스트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단 거죠. 그것보다는 이 건물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충족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심과제였다라고 보면 맞아요. [전: 질문의 요지인즉 그런 면에서 이 건물의 타입이 다른 신도시에 적용해도 좋을 유형이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그럴 수는 있겠죠. 다만 나의 본심은 다른 장소에서는 다른 디자인으로 접근하고 싶다는 겁니다.(웃음) D-78. 그렇군요. 다음으로 〈원주 YWCA빌딩〉을 소개해주시죠. 대지 오른쪽에 원래 건물이 있고, 그 옆에 붙여서 증축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증축부분의 외장 칼라가 백색으로 ࠀੈथબ 䛭ਖזۏ䛭Ӝ䛭Ѥޚ䛭ࡇр䛭߶ثҗ䛭݂оૐ䛭ۼ䛭҅തؗזع䛭ӗ䛭ࠖઑۼ䛭߃Դ䛭ࣺ߅ি䛭সমਂ 䛭 스타코로요. [전: 박스 조형이 앞에서 말한 〈지아의갤러리〉가 연상되네요.] 제가 하고 있는 박스의 조형은 대체로 보시는 느낌과 같습니다. 조형적으로는 개인적으로 애착을 갖고 있는 건물이긴 해요. 저비용 건축이지만 전체적으로 느낌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서요. 기능을 말씀드리면 하부 층은 상가로 임대를 주고, 2층과 3층의 절반은 YWCA 사무실로 쓰게 되어 있습니다. 테라스로 연결되는 계단실 박스의 외부벽면도 디자인의 한 부분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2층 일부와 3층 일부에 테라스를 만들었죠. [전: 증축에 따른 특별한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기존 건물과의 연결성, 필요로 하는 기능실에 대한 처리, 수익(임대 등)사업에 대한 공간적 대응이 주된 과제였습니다. D-79. 세 가지 고민 중 기존 건물과의 연계 관련해서는 보이는 건물의 매스, 재료 등에서 많이 달라 보이는데, 외장 재료가 빨간 벽돌이었을 경우에도 같은 매스의 조형이었나요? 䛸ۦढ ף䛭ݑज䛭ষҗ䛭رथি䛭৺ܲ䛭Ѿে䛭ষೞ䛭ѪੈҊ 䛭ՠહি䛭о䛭߃Նѱ䛭غ䛭Ѣબ 䛭ࡇр䛭߶ثিࢱ䛭ߓ࢜䛭 जఉ ۼ䛭о䛭ۃײૐࢱݵ䛭ੋࠖ䛭٢నੋੈ䛭ઐعૐ݄ਂ 䛭ݑज䛭ઐഉਸ਼䛭थઘੋҙ䛭ਫૐۯ䛭೬ढ ף
2. 주변도시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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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초빌딩, 2003
[D-80-83] 오피스 빌딩 D-80. 그럼 이번엔 오피스 빌딩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얘기 나누는 거로 하시죠. 딱히 소개하고픈 오피스 빌딩이라기보다 빌딩을 디자인하고 싶었는데 규모 등등의 이유로 하지 못한 부분을 중심으로 말씀드릴게요. ੶ݡ䛭݇ॸٗܽ䛭Ѫਸ਼䛭ҕрি䛭䛭ٷি䛭࠼٫䛭٢ݵ䛭মڋѱ䛭টѷ䛭ז䛭ࢣпۼ䛭ਹি䛭जகೞ䛭Ѫੈ䛭ढ ף䛭 〈서초빌딩〉인데 계획안으로 끝나버린 거죠. 주거 기능과 사무소 기능을 복합적으로 담은 두 동의 원형 평면을 지닌 고층의 빌딩 중간부분을 몇 개의 밴드로 묶어서 사용자의 커뮤니티 기반의 공유공간으로 제공하는 시스템을 제안하는 것이었죠. 구조적으로도 조금 다른 방식을 고민했고요. [전: 공간에선 언제쯤 작업인가요?] 후반부쯤인 거로 여겨집니다. [전: 영국 다녀온 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시간건축 개업 후 시행사의 요청으로 여의도 63빌딩 부근에 제안했던 빌딩인데요, 주거기능이 중심이고요 공간적으로는 스카이라운지 층을 재미있게 처리했어요. 여기서는 빌딩의 버티컬 입면 처리에 변화를 주려 했던 것이 주된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진행이 안 되었죠. 실제로 지어지기까지 한 것으로 도산대로변의 〈신사 G빌딩〉이 있습니다. 성형외과빌딩이에요. 이 빌딩도 상당히 상업적인 ઁۼౝমਂ 䛭ਹ䛭Ѥ୶રিѱ䛭ঈ೬䛭ٷ䛭जகז䛭ऩഃغ䛭Ѫҗ䛭݅ੈ䛭ܱ䛭Ѫੈબ 䛭ੈ䛭࠼٫䛭߃ੈݵ䛭ਸ਼䛭 편이어서 전체 건물의 볼륨도 작아 보이는데 이것을 해결하는 방안을 건물 외부에서 찾는 대신 건물의 모서리를 박스형의 사각이 아닌 라운드형으로 제안하고, 건물의 상부에 다른 하나의 매스를 집어넣는 방식을 채택하고 기능적으로는 로비로 ࢍਉѱՓ䛭ে䛭ҕр䛭ܲ䛭Ӓഘז䛭رथি䛭ੈਉ䛭ࢵر䛭ਣஔিࢱ䛭আۏஔۼ䛭ੈر䛭ז䛭ۼ䛸ۓ䛭 넣었어요. 로비층은 이중 외피를 갖는 구조가 되었죠. 건축주도 처음 안을 보고 계약하게 되었던 거죠. 나중에 건축주가 번복하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죠.(웃음) 건축주가 관공서가 아니다보니 상업건물에 무한 자금 공급이 애초 어려웠던 것이죠. 외부 조형의 면에서는 이 건물의 속성이 피부, 얼굴과 관련이 깊잖아요. 그러한 관점에서 건물의 이미지 자체를 구축하게 된 거였죠. D-81. 이 건물의 경우 건축사무소에서 사전에 피저빌러티스터디 내지는 스페이스 프로그램 스터디 결과를 건축주에게 제공했나요? 아니면 이미 주어진 조건을 디자인의 영역에서 해석하고 풀어낸 것인가요? 성형외과빌딩은 일반적인 병원설계의 개념과는 완전히 틀려서 복잡한 수술실 등이 필요하지 않아요. 종종 그게 사회문제로 제기되기도 했죠. 어쨌든 이 빌딩의 기능 자체는 일반 병원의 기능이 아니라는 거죠. 거의 상업건물에 가깝죠. 개별로 칸을 나누어 방을 구획하는 정도고 동시에 완전히 막힌 방의 구조가 아닌 경우도 있고요. 외부에서 볼 때는 완전한 유리건물인데요, 내부에는 시술하는 개실 기능의 몇 개 층이 있고, 업무공간의 층이 있고, 방문객을 위한 열린 공간개념의 로비층이 있어요. 그런 까닭에 달리 보면 호텔의 공간개념과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어요. [전: 장기투숙하며 시술받는 경우도 있겠네요.] 입원 후 며칠간 이곳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입원실이 있거든요. 원래 이 건물은 호텔병원이라는 개념을 넣어보자고 출발했거든요. [전: 그 같은 내부 프로그램은 건축주에게서 받아서 진행하게 되나요?] 그렇죠. 그런 정도는 받죠. 건축가가 병원의 운영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장사가 잘 되는지는 모르잖아요. 아마도 성형외과빌딩으로는 이 건물이 최초에 해당할 겁니다. 그 후 몇몇 건물이 세워진 거로 알고 있어요. 이 건물 전에는 압구정 지역에서 일반 건물 몇 개 층을 임대하여 성형외과병원을 운영하는 정도였어요. 여러 곳에 분산돼있던 것을 모아서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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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어촌공사_ 드로잉, 2013 3. 여의도빌딩_조형 스터디, 2013 4. 여의도빌딩_외관 드로잉, 2013 5. 여의도빌딩 평면조합 드로잉, 2013
빌딩을 세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형외과빌딩은 일반 건물을 개조하여 인테리어 개념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여기 신사동 빌딩은 처음부터 성형외과빌딩으로 기획하고 만들게 된 거죠. D-82. 실제로 완공된 형태와 내부공간은 스케치와 많이 다르던데 어떤 이유가 있었고, 변경된 안에서 끝까지 살리려고 노력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처음엔 외벽시스템 관련하여 디테일 스터디를 많이 했어요. 창호계획과 LED조명계획 등등···. 그런데 창호 디테일의 경우 비용이 과다하여 바꾸게 되었고, 결국은 LED조명설계로 특색 있는 건물의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어요. 건물의 모서리를 라운드 처리한 도면으로 허가를 받아놓고 나중에 공사하면서 설계변경을 하게 되었죠. 각(角)진 건물로요. 아쉬운 부분인데 문제는 건축주가 무척 불안해했어요. 언젠가 이 건물을 매물로 내놓았을 때 건축주 자신이 사옥으로 쓸 때와 다르게 박스형의 반듯한 건물이 이로울 거라고 생각한 거죠.(웃음) [전: 완공된 건물에서도 로비층이 건물 상부에 있나요?] 아닙니다. 지상층에 있어요. 대신 건물 중상부에 층고를 살짝 높여서 휴게공간으로 사용하게 했는데 그나마 원래 설계안에서 조형물이 들어가는 상부층의 흔적 일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동시에 앞에서도 말했듯이 외부 경관조명에 대해서 설계초기단계부터 많은 스터디를 했습니다. LED조명 말이죠. 야간에 이 건물이 어떻게 보여지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죠. 주간에는 깨끗한 글라스빌딩으로 보이는데 야간에는 프로그래밍된 조명 쇼를 하게 계획했죠.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건물이 이미지 매스로 바뀌게 되는 거죠. 이 자체로 신사동 권역의 주변 빌딩들의 야간조명 방식과도 큰 차이를 만들게 되는 거죠. [전: 조명설계는 어느 업체와 협력했나요?] 고기영 소장의 비츠로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빌딩을 통해서 도심에 위치한 상업건물을 어떻게 하면 건축적으로도 드러나게 할 것인가의 연구를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D-83. 앞에서 일련의 오피스 빌딩을 얘기할 때에 인상적으로 들린 것은 가급적 박스형 건물의 각을 없애려 했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이 따로 있나요? 일단은 개인적 성향이라고 해야겠네요. 일반도형을 어떻게 배열하고 쌓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비정형의 조형이 만들어지는데 특히 그런 부분에 관심이 많았어요. [전: 지금까지 여러 다른 성격의 소규모 프로젝트 얘기를 하면서 들여다본 건물 대부분이 각진 박스형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오피스 빌딩에서만은 원형, 혹은 비정형의 건물 형태를 선호하게 된 건가요?] 작은 건물에서는 맘껏 돈을 쓸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특히 민간건물에서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 면적을 확보해야 해서 자연히 건물을 비틀고 깎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러다보니 박스형으로 해놓고 그 안에서 각각의 건물에 성격을 불어넣어주는 디자인을 하게 되는 거죠. 반면에 오피스 빌딩의 설계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비교적 자금력에 여유가 있는 건축주들이기에 다른 것을 시도해보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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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사동 G빌딩 초기 개념 드로잉, 2012 7. 신사동 G빌딩 창호 디테일 드로잉, 2012 8. 신사동 G빌딩 야간경관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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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사동 G빌딩 전경 10. 신사동 G빌딩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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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구주택 내부공간, 2009 2. 행구주택 전경, 2009 3. 행구주택 인테리어 개념 드로잉
[D-84] 주택설계 D-84. 다음은 주택설계 프로젝트로 화제를 돌려보시죠. 주택 설계의 경우 자금력 받침이 되는 건축주들이 많았을 텐데 앞에서 오피스 빌딩 얘기하면서 비정형의 조형성에 관심이 많다고 했던 것을 반추해보면 주택에서 그렇게 접근한 사례가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비정형의 조형은 아니고요, 박스를 만들되 다르게 쌓고, 붙이는 정도라고 해야겠네요.(웃음) 〈원주 행구동 주택〉부터 말씀드리죠. 대지 앞 원경으로 치악산이 보입니다. 주건물 아래층에는 식당, 테라스 그 앞에 마당이 시선으로 연결되는 구조고요, 옆으로 거실이고요. 식당 위에 게스트룸이 있고 마찬가지로 테라스가 있고, 거실 중심으로 왼쪽에 두 개의 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변의 경치를 어떻게 건축공간이 품게 할 것인가? 달리 말하면 공간을 어떻게 열 것인가, 뷰포인트 방향 찾기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평소 프레임(그림 액자) 안에 주변 환경을 집어넣는 방식을 즐겨 활용합니다. 예전 학창 시절에 고택을 답사하면서 몸에 익힌 것이 지금껏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평주택〉의 경우는 도로로부터 경사각이 큰 아래 대지에 지은 별장주택인데 여기서도 땅과 주변, 땅의 해석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무엇을 보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사례죠. 당연히 앞에 보이는 청평호가 메인 뷰포인트였고요. 집 자체로만 보면 하나의 주택이 들어서기엔 상당히 큰 땅이었어요. 위의 도로에서 아래 대지까지 3개 층 정도의 레벨차가 납니다. 거실 앞에 풀이 있고요, 풀에 들어가서 보면 청평호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죠. 풀 옆으로는 바비큐파티를 할 수 있는 주방이 갖춰져 있고요. 럭셔리한 주택이죠. 이 집에서도 결국 땅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 맺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주택설계에서는 도시든, 전원에서든 무엇인가 조형적으로 디자인을 한다기보다 기능적인 공간 만들기를 기본으로 하게 되는데 그 때에도 주변 환경에 따라 내용이 결정된다고 보는 거죠. [전: 그럼 주변에 보여줄 것이 하나도 없다고 가정할 경우는 어떻게 대처하나요?] 그럴 경우라면 내부에 집중하게 되는데 거기서조차도 내부 어느 곳엔가에 뷰포인트를 만들려고 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중정을 만들어 조정한다든지, 마당을 만든다든지 등등···. 결국은 뭔가를 찾아내는 방법에 대한 고민 같아요. 세 번째 소개할 주택은 〈원주 주택〉이에요. 이 집도 마찬가지로 경사가 큰 대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주변과의 관계를 중시한 설계로 진행했습니다. 조형적으로는 지붕을 건물의 주출입구 배경이 되게끔 꺾어서 한 장의 ㄱ(기역)자 판처럼 전면 벽을 만든 것이죠. 내부는 어떻게 하면 가급적 밝고, 넓게 보이게 할까를 고민하였죠. 그 결과로 내부의 투시형 계단을 만들게 된 겁니다. 현관 입구에서 거실로 들어가는 지점에서는 계단판만 보이는 투명 계단인 셈이죠. 집 내부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을 가리지 않는···. 그 덕분에 2개 층이지만 하나의 공간으로 보이는 효과도 있습니다. 집의 실내면적은 작은데 이 같은 장치를 통해 공간 확장이 된 셈이죠. [전: 주택설계에 있어서 자신만의 전형 같은 게 있나요?] 주택설계 작업에 임하는 나 자신을 리뷰해보면 하나의 툴을 가지고 디자인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매번 달랐던 것 같아요. 무엇이 주안점이었나 하는 점에서요. 각각의 상황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해보려 하는 의지가 강했던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광주의 〈땅콩주택〉입니다. 소위 말하는 협소주택이에요. [전: 주변은 어떤 곳인가요?] 시골 길가의 주택입니다. 한적한 곳이고요. 무척 작은 땅입니다. 중간의 한 층의 바닥면적이 15평 밖에 안 되고요, 1층은 10평 남짓으로 임대를 놓기 위한 가게용도입니다. 2~3층에 걸쳐 2개 층에 젊은 집주인이 거주하는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주변에 공장이 많아서 이주노동자들도 많은 곳입니다. 현재 1층 가게는 제 용도로 쓰이고 있지는 않는 것 같긴 한데 오래지 않아 제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 건축적으로 이 집의 하이라이트는 계단에 있습니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작지만 풍요한 공간이 나오지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협소주택이지만 건축주가 즐겨 찾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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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평주택 전경 드로잉, 2010 5. 가평주택 내부공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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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평주택 배치 드로잉, 2010 7. 가평주택과 청평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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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면도 A_A’
정면도
[Ongoing Project] 세종 도담주택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도담동 485/ 지역지구: 제1종전용주거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 / 도로와의 관계: 8M 도로, 5M 보행자전용도로 / 대지면적: 304㎡ / 건축면적: 118.73㎡ / 연면적: 195.08㎡ (지상1층: 93.95㎡, 지상2층: 101.13㎡) / 규 모: 지상 2층 / 건폐율: 39.06 % (법정: 대지면적의 40% 이하) / 용적률: 64.17 % (법정: 대지면적의 80%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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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상1층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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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면도
우측면도
/ 구 조: 철근콘크리트구조 / 주요 외장재: 콘크리트 벽돌, ZINC PANEL, 로이복층유리 / 주차대수: 2대
9. 지상2층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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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역사박물관 투시도, 2010 2. 돝섬전경 개념 드로잉 3. 돝섬미술관 4. 돝섬전망대 5. 김포아트홀 6. 서귀포문예회관 7. 세종시행정복지센타
[D-85-89] 현상설계 프로젝트 D-85. 이제부터는 낙선작 중심의 현상설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의미 있게 생각하는 현상설계안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대충 낙선작을 떠올려보면 〈김포 아트홀〉, 〈서울 제2 유스호스텔〉, 〈제주 국제학교〉, 〈국립역사박물관〉, 〈서귀포 문예회관〉, 〈세종시 행정복지센터〉가 있고요, 컨소시엄의 하부 조직으로 참여하여 당선돼 작업하다가 멈춘 프로젝트로 〈마산 돝섬 공원 내 방문자센터, 전망대, 식물원 등 시설물 프로젝트〉를 거론할 수 있을 듯합니다. D-86. 현상설계를 마주할 때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생각이 있나요? 현상설계에 임하는 모든 이들이 다들 자기 것이 가장 잘한 것으로 여기잖아요.(웃음) [전: 당선의 욕망? 최면술?] 그보다는 현상설계 주제가 재미있다고 판단되면 일단 참여하려 합니다. 특히 공공적 성격의 프로젝트 중에 시청사, 문화센터 등은 예전부터 스터디도 많이 했고, 당선 경험도 있고 해서 참여하고 싶은 충동이 많이 일어요. 일반적인 기능 스터디는 되어 있어서 그런 프로젝트를 만나면 땅의 속성,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D-87. 그런 관점은 여타 건축가들도 공히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들과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을까요? 물론 부족한 게 있을 수 있어요.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그 숙제를 찾아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당락을 결정한다고 봐요. 차별점 이전에···. 그러기 위해서 내가 일반적이며 관습적인 접근을 하고 만 것은 아닌지가 판단의 기준이 되겠죠. D-88. 앞에서 소개한 여러 낙선작의 결과를 듣고 매순간 승복할 수 있었나요? 당선작에 비해 내가 제출한 안이 재미는 있지만 실현되는 과정에서 점수가 깎였을 수 있겠다 싶은 순간은 여러 번 있었어요. 더러는 정해진 1등이 있다는 가설들에 귀가 솔깃해질 때도 있었고요.(웃음) D-89. 자신도 간혹 현상설계 심사위원으로 참여할 텐데 어떤 잣대로 응모작을 읽어냅니까? 내가 설계할 때의 기준으로 적용해보면 거의 선별이 되더라고요. 거기다 더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는지 보는데 잘 안 보이더라고요. 국제현상설계 같은 큰 프로젝트 심사가 아니고, 지방에서 추진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프로젝트여서 더 그랬겠지만 특별하게 큰 아이디어가 보이는 응모안을 심사한 기억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누가 조금 더 신경 써서 작업했느냐를 가지고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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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롱샹교회, 르코르뷔지에 2. 타마로, 마리오보타 3.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 도미니크 페로 4. 시그널타워, 데뮤론 5. 인도 바라나시 6. 인도 7. 인도 힌두사원 8. 인도 샹디가르, 르코르뷔지에
[D-90-91] 건축 여행 스케치 D-90. 평소에도 스케치를 많이 하는 건축가로 알려져 있는데 국내외에서의 건축 여행 중에도 사진 찍기보다는 스케치를 더 많이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जகז䛭ձо䛭݄ի،䛭Ѥޚ䛭Ӝযѱ䛭ז䛭கੈӜا䛭ਂ 䛭ࢍ䛭ଧӜ৫䛭ܱ䛭ਫഉ䛭ҙଳ೭ਣۃҊ䛭䛭ࣺ䛭মਂ 䛭 현장에서 직접 그리며 건물의 비례감을 손으로 확인할 수 있고, 디테일 등을 찾아보게 되죠.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जகܲ䛭ࠀݵ䛭䛸۟䛭Ѫٛੈ䛭ࠀੈӜ䛭݂۱ੈিਂ 䛭< 䛭जக䛭ՠܲ䛭৭ࢾؗז䛭Ѧܺז䛭थрਸ਼ >䛭ѐۙ䛭 ࠘䛭זا䛭 걸려요. 현지 상황에 따라선 더 짧은 시간에 그리기도 하고요. 사실 엄청나게 바쁜 행위에요. 요즘 세태는 카메라를 ٛੈҊ䛭ࡄܯѱ䛭ਐੈז䛭ѱ䛭ࣀਖ਼আਂ 䛭ਐੈז䛭اહি䛭ૐ䛭࢙ఓۼ䛭ޤоܲ䛭जகೞז䛭ѱ䛭թ٘Ӝ䛭মۯ䛭ੋੋ䛭 수 있죠. اে೭ࢱݵ䛭ܯࠧܯૐি䛭Ѥޚ䛭ࠀҊ䛭ೞ䛭जக 䛭ࢍـਖ 䛭ࠚҮࢾૐ 䛭߃ۃՠथъ䛭٠٠ 䛭जக䛭ঈি䛭Ӟ䛭ഃ䛭 ה՜ਸ਼䛭ࢍזۼ䛭੶اൢ䛭ಲഃձӜ䛭൦ٛҊ䛭ࠉਂ 䛭䛸ܺז䛭ੈ䛭хੈ䛭ޙমףӨਂ 䛭जகז䛭ࢍҗ䛭ܯѱ䛭 ࢙䛭䛭ࠀۯҊ䛭֡۰ѱ䛭عѢٙਂ 䛭䛸ףࠀ䛭ՠહি䛭जகܲ䛭ࠀݵ䛭ഃ䛭Ӝযੈ䛭ڗ۵ѱ䛭ڀܯҌ䛭ૐਂ ੈѪਸ਼䛭ࣺਖഘࢾ䛭䛸ܼ䛭ѩ ף䛭٢నੋ䛭䛸ܽ䛭েਫо䛭স䛭זٷ䛭ۙۼ䛭࢙িࢱ䛭߈ז䛭ה՜䛭ਣરۼ䛭जகܲ䛭ѱ䛭 되죠. 사진을 앞에 놓고 그리는 것 하고는 많이 달라요. [전: 현장성을 무척 중시하는군요.] 네, 그래요. 유럽 여행 도중에 그린 것으로 프랑스 파리의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국립중앙도서관 외부 조형과 바닥의 패턴 그리고 코르뷔지에의 롱샹교회 등등. 그리고 루가노에서 찾은 마리오보타의 건물,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미술관의 특징을 जகۼ䛭ৣѹ֫ਸ਼䛭Ѣબ 䛭ܯઐ䛸䛭ঘ䛭ٗ䛭܃ފ䛭Ѥ ޚ䛭ۃౝ߃ۃ䛭ৈࢍ䛭٠ 䛭ੈѪٛਸ਼䛭Ҵਫೝ䛭യ䛭ӈҴӠি䛭ে೭ࢱݵ䛭 그린 것들입니다.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D-91. 학창시절의 스케치도 가지고 있나요? 원본은 없고요, 1986년 건축과 졸업전시 때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 크게 전시를 했는데 당시의 전시도록에 제가 그린 고건축의 드로잉이 남아 있긴 해요. 병산서원의 부분부분을 그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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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92-95] 마무리 D-92. 수일에 걸쳐 진행한 화상 인터뷰를 마칠 시간입니다.
있다는 점이죠. 지속적으로 유사 성격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할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죠.
수 있는 끈이 보이긴 해요. [전: 기존 건축주들이 다시 찾아주는
이제까지 사무소를 운영해오면서 편하게 지내온 적은 별로
경우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건축주들이 찾아온다는 건가요?]
없었어요. 잘되고자 노력하다가 외려 수렁에 빠지는 경우도
기존의 건축주들이 지은 건물에 만족해서 연결해주는 경우도
많아서 돌이켜볼 때마다 아쉬움이 커요. 디자인을 잘하기 위해
있고요, 시공자를 통해 연결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 편입니다.
고민도 많이 했고, 늦은 나이에 공부도 다시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시간을 훨씬 더 많이 가졌어야했지 않나 싶은 거죠. 뭔가에
D-94. 건축가 박유진을 찾아주는 클라이언트들은 자신의 어떤
쫓기듯 건축을 해오다보니 적시에 나를 충전하는 것을 놓치고
모습을 보고 찾아온다고 생각하나요?
살아온 것 같아요. 그 점이 특히 아쉽죠. 그렇지만 앞으로 그 같은
아주 전형적인, 일반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 데서
기회를 만들 기회가 더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려고 해요.
찾아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건축가가 자기 고집만 피우는 것이
다자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는 되는대로 해온 것 같기도
형태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기대를 뛰어넘는 아이디얼한 작업을
하고요. 이제는 나 나름대로 디자인을 정리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해준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사실 나는 건축에서 특히 중요한
아니고 현실적으로 건축주의 경제력, 눈높이를 만족시켜주면서
하게 되었어요.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것이 의외성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의도를 했지만 내가 가서 봐도
확신이 서지 않는데 이제는 나 스스로가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이게 뭐지? 할 정도의 신선한 의외성이 발견되는 공간이 있으면
디자인 접근 방법론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듯해요, 디자인의
기분이 좋아지는데 일반인들이 그런 경우를 마주하면 굉장한
출발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야할 것
만족감을 받게 되죠.
같습니다. D-95. 여러 날에 걸쳐서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어 D-93. 현재 시점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감사합니다.
경제적인 부분이라고 해야겠지요. 자금력 풍부한 건축주들이
초대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난시기의 작업을 리뷰할 수
주변에 많으면 좋겠지요.(웃음) 다행한 것은 주택이나 소규모 근생
있어서 개인적으로도 유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로젝트들은 그 건물을 보고 알음알이 연락해오는 건축주들이
[EPILOGUE] 박유진이 걸어가고 있는 건축가의 길 오래 전에 그를 보았다. 그 후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그를
1986년 6월, 김수근 선생님의 갑작스런 타계 후 혼란스러웠던
만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건축가 박유진. 이제는 그런
시절을 겪어냈던 공간이 세상 밖으로 건재함을 드러낸 작은
호칭이 이상하지 않다. 그 때는 달랐다. 1987년의 봄. 세상은
표식이 87사번의 신입사원 공개채용이었다. 그 시절에 입사한
바닥부터 또 다른 민주 항쟁의 불씨가 움터 올라 뜨거운 여름을
당사자들의 느낌은 달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공간 공릉사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무척 기뻤고, 반가웠다. 그러나 공채 3인의 87사번 중 어느 누구도 내가 속한 팀에 배정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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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간연구소에 입사한 나의 바로 밑 기수였다. 소위 87사번
않았다. 선생님 사후 누수된 설계실 인원 충당에 목말랐던 각
신입. 김수근 선생님이 병상에 누워 계시던 1985년 말 ~ 1986년
소 소장들이 경쟁하듯 이들 3인을 빼갔기 때문이다. 상황이
초, 공간연구소에 86사번이란 이름은 애당초 생성되지 못했다.
그러하니 유독 동기생들이 많이 있던 우리 팀에서 그들과 만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85사번인 우리가 설계실 3년차가 되어서도
견뎌내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는 큰 조직의 임원으로
여전히 신입사원인 87사번과 마찬가지로 각소의 막내기수였던
활동하던 이들이 독립사무소를 낼 때에 겪는 공통의 문제점이긴
것이다. 공간 공릉사옥의 2층에 마련된 설계실은 전체가 칸막이
하다. 이후 박유진의 시간건축은 본의 아니게 그가 몸담았던
없이 열린 공간으로 각 소의 설계실이 가구로 구분하여 쓰고 있던
공간그룹의 위기와 맞물리며 암울한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애당초
터라 팀만 다를 뿐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섞이는 데는 그리 오랜
공간으로부터의 온전한 독립이 아니었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만남이 시작되고 얘기하다보니
위기였다. 그는 50대 후반을 그렇게 몸살을 앓으며 지나왔다.
87사번 3인 모두 동년배였다. 애초 여러모로 후배 기수를 고대했던 나와 동기생들이 헛웃음을 지어낼밖에. 그렇게 우리는 한 울타리
이제 어제의 20대 청년은 막 예순의 나이테 안으로 접어들었다.
안에서 건축가의 꿈을 닦았다. 그와의 인터뷰 초반에 담겨 있는
나는 선배 건축가들이 맞이했던 60대와 지금의 그가 만나는 60대
공간 공릉사옥 시절의 내용이 당시의 공간연구소 설계실 문화를
사이에 실금 같은 차이를 바라본다. 그 미세한 차이를 화제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함께 얘기 나누면서 박유진이 지난 시기 건축가로서 성취한 모든 것들을 추억의 소쿠리에 집어넣고 새로운 출발을 예비할 수 있는
공릉사옥에서 나는 몇몇 동기생들과 그가 포함된 사내지 《시간》의
계기를 찾는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호 건축가 특집에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함께 활동하며 우정을 다졌다. 그 때 좀 더
박유진을 초대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자칫 추억의 소환이
깊이 알게 된 박유진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성실하며, 운동신경
؉ז䛭ࣖ߄ೞ䛭ٟ䛭Ѣସѱ䛭ध䛭ਣ䛭ೡृۼ䛭Ӝо䛭
남다른 청년 건축인이었다. 1987년 말~1988년 초 공간이
희미해지는 것조차 모르고 속절없이 더 많은 나이테를 두르게
공릉사옥 매각 후 다시 원서동 공간사옥으로 회귀하여 1988년
되는 것을,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벗으로서 방기할 수 없었다.
서울하계올림픽 개최시기까지 공간 설계실은 포스트 김수근의 थܲ䛭䛭ՠоӜ䛭ਣ䛭ݑਊ䛭࠘રೞ䛭ੋ࢙䛭ࠀձট䛭೬ 䛭মؓה䛭
지난 시기 건축가의 이름으로 만난 수많은 프로젝트 제의 앞에서
우리는 각각 설계실 4년차, 2년차의 시기에 있었고, 각자들은
ҾܺҊ 䛭जகҊ 䛭թಽҊ 䛭ۼݵا䛭ਜ਼䛭ૐমૐҊ䛭זоܲ䛭
각 소에서 연차 이상의 역할들을 해내고 있었다. 그때에 공간의
지켜보면서 살아온 인생이 어느 순간 도전, 또는 모험, 또는
청년들은 각자 선택한 건축의 길 위에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실험이라는 용어가 다가가기엔 비싸고, 사치스러워 타자의 가치로
박유진이 선택한 길은 오롯이 공간의 건축가였다. 장세양 대표가
여겨지는 것만큼 건축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이 더 있을까. 그가
이끌던 포스트 김수근의 공간에서 자기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인터뷰 말미에서 이제는 쉽게 만나질 수 없는 건축주를 분류하고
듯하다. 그가 당시의 멘토 건축가로 장세양을 지목하고 있음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주변에서 나이를 잊고 현업에
이를 반증해준다. 그는 공간에서 만난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종사하는 고령의 선배건축가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간커플의 계보를 이었다. 박유진은 그렇게 젊은 한 때를 오롯이
그나마 현역 건축가로서 예순의 나이테는 일흔의 나이테 안에
건축만 바라보며 성장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건축가로 우리 앞에
있는 건축가들에 비해선 더 많은 수주의 기회를 차고 있다고 볼
선다.
수 있다. 일흔의 나이테 안에선 수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이고, 여든의 나이테 안에선 건축의 장(場) 안에서 다른 역할들로 분기해
그가 시간건축으로 자신의 사무소 개업 소식을 전해왔을 때
있거나 조용히 칩거하는 정도라고 보는 것이 저들의 현재형이다.
그의 독립이 반갑던 만큼 공간의 건축가라는 오롯한 도상에서
우리는 통상 사회가 늙어가는 것이기 보다 점차 젊어지고 있다는
일탈한, 일탈할 수밖에 없는 건축동네의 지형에 대하여 나는
것을 새로운 시스템, 도구, 가치의 다변화 양상을 통해 경험한다.
내심 불안을 느꼈다. 조직으로서의 건축설계집단이 구성원들
그러기에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를 부정하고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싶어도 그것이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간다.
있었고,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독립 사무소를 개업한다는
건축가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일단의 자기 방식에 대한
것에의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까닭이다. 개업 후 그는
무비판적 수용과 공부하지 않음에 대한 자기반성이 없는 경우가
나름 건축 비즈니스에서 승승장구한다. 국내외에서는 미국 발
그렇다. 나는 박유진이 공간에서 경험한 공간의 매뉴얼이 수백,
금융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수천 가지 설계프로세스 중 하나였다는 30대 후반의 깨우침에
시련기를 맞아 사회 전반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시기(대량
대하여 그것이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중요한 깨달음이 되기를
실업, 폐업, 부동산 폭락, 주식 폭락, 생활고로 인한 극단적 선택
응원한다. 그 때의 그 충격과 자극이 그가 속한 예순의 나이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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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하며 실제적으로 옮겨올 수 있다면 그가 향후 맞이하게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한 초반 운은 나의 기우를
될 칠순과 팔순의 나이테 안에서도 승승장구하는 건축가로
ॳݟ䛭ז䛭Ѫੈ 䛭䛸ՠ䛭ҕрিࢱ䛭݄ٛম䛭Ѥ୶о䛭ނਸ਼䛭
만나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 때에 오늘의 특집 후속편이
시간건축으로의 온전한 독립체를 운영하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만들어진다면 나 또한 기쁨이 클 것 같다.
있었다. 규모 축소된 공간의 조직이 연장된 것으로서의 시간건축의 태생적 한계는 경제상황의 급변이 건축설계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글. 전진삼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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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차 : 예정 프로그램
WIDE 건축영화 공부방 코로나19의 여파로 《WIDE건축영화공부방》에서 독자 여러분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기필코 코로나19로부터 일상이 자유로워져 《WIDE건축영화공부방》이 활성화되기를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소망해 봅니다.
프로그램 일시
렘(Rem)│75min│2016│감독_토마스 콜하스(Thomas Koolhaas)
무기한 연기 감독의 이름이? 그렇다. 렘 콜하스의 아들이다. 그래서 영화제목을 ‘렘’이라고만 했나? 렘과의 관계를 은폐하려고? 장소
워낙 유명한 건축가니 ‘렘 콜하스’라고 했으면 더 파급력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건하우스(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거의 모든 건축 다큐는 온전히 건축물과 그 배경에 대한 탐구가 전부다. 반면 토마스 콜하스가 바라본 시선은, 건축가와 아버지 즉 건축은 물론 인간적인 관계에도 할애되었다. 그렇다고 가족사 속에 숨겨진 비화 따위를 기대할
방장
필요까진 없다. 이 다큐는 시애틀 도서관에서 매일 숨어 지내는 노숙자, 카사 다 뮤지카를 뛰어다니는 파쿠르 뿐만
강병국(본지 기획자문, WIDE건축 대표)
아니라 렘의 삶과 작업방법, 철학 등 다양한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사실 렘 콜하스는 따로 설명이 필요한 건축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네덜란드 출생으로 OMA 설립 및 대표, 그의
신청 예약 방법
유명한 책 『정신 착란증의 뉴욕』, 작품으로는 베이징 CCTV사옥, 시애틀 도서관, 포르투갈의 카사 다 뮤지카,
네이버카페 〈와이드AR〉 WIDE건축영화공부방
보르도 주택, 우리나라엔 서울대 미술관과 리움, 최근 갤러리아 백화점 광교점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게시판에 각 차수별 프로그램 예고 후 선착순
필자는 늘 그의 영화적 배경이 흥미롭다. 네덜란드 《헤이그 포스트》라는 신문사 기자로 일을 하다가 ‘르네
접수
달더(Rene Daalder)’등과 더불어 필름그룹 1,2,3 이라는 팀을 만들어 “1,2,3 랩소디”라는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까지 했고,
주최
“The White Slave”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까지 했다.
간향클럽, 미디어랩&커뮤니티
건축영화에서 없어서는 안 될 영화감독, 일라 베카(Ila Bêka) & 루이즈 르모안(Louise Lemoine)의 르모안이 보르도 주택의
주관
건축주교통사고를 당한 건축주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WIDE건축, 와이드AR
처음 알았다. 그가 렘의 보르도 주택에서 살고 있다니. 헉! 고 김수근 선생의 경동교회 모형이 영화에 나오는 것도
후원
인상적이다.
이건창호
(글. 강병국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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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향클럽, 미디어랩 & 커뮤니티
간향클럽 사람들
GANYANG CLUB, Media Lab. & Community 우리는
mc 1
프로듀서 전진삼
건축가와 비평가 및 다방면 건축의 파트너들과 함께
사진총괄 김재경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건축한다는 것만으로 반갑고
섹션 편집장 박지일
행복한 세상을 짓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편집위원 김태형, 백승한, 이태현, 최우용 디자이너 심현일, 디자인・현
우리는 건축계 안팎의 현안을 주시하며 이슈를 발굴-
mc 2
사진위원 남궁선, 노경, 진효숙 비평위원 김현섭, 박성용, 박정현, 송종열, 이경창, 이종우, 현명석
공론화하고, 나아가 건축동네의 계층, 세대, 업역 간의 골 깊은 갈등 구조를 중재하는 매개자 역할을 통해 우리 건축의 현재와 미래를 견인하는 통합의 지렛대가
mc 3
제작자문 김기현, 시공문화사spacetime 종이공급 박희진, 신안지류유통
되겠습니다.
인쇄처 서울문화인쇄 인쇄인 강영숙 제작국장 김은태 관리부장 손운일 우리는 이 땅에 필요한 건강한 건축 저널리즘을 구현함은
mc 4
독자지원 및 마케팅 박미담 과월호 공급 심상하, 선인장
물론 건축과 대중 사회를 연결하는 미디어 커뮤니티가
서점관리 심상호, 정광도서
되겠습니다.
직판관리 박상영, 삼우문화사 우리는 격월간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mc 5
기획자문 강병국, 고영직, 고충환, 김영철, 김정후, 박병상, 박진호, 손장원, 신용덕, 신창훈, 안철흥,
월례 저녁 강의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땅집사향)》
우종훈, 이정범, 이중용, 전진성, 허은광
건축가들의 이슈가 있는 파티 《ABCD Party》
고문 김종헌, 박민철, 박영채, 박유진, 이충기, 정귀원, 함성호, 황순우
지역 건축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응원하는 《ICON
명예고문 곽재환, 구영민, 김정동, 박길룡, 박승홍, 우경국, 이상해, 이일훈, 이종건, 임창복, 최동규
Party》
대표고문 임근배
인천건축의 디자인 리딩 그룹을 선정하는 《Incheon Architect 5》
mc 6
운영자문 김연흥, 김창균, 이수열, 이윤정, 조남호, 최원영
건축역사이론비평의 연구자 및 예비 저자를 지원하는
운영위원 강승희, 손도문, 이승용, 이치훈
《심원건축학술상》
발행위원 김기중, 김태만, 오섬훈, 우의정, 임재용, 정승이, 조택연, 하광수
신예 비평가의 출현을 응원하는 《와이드AR
패트롱 김용남, 이태규, 장윤규, 최욱
건축비평상》 내일의 건축에디터&저널리스트를 위한 《와이드AR
mc 7
부편집인 김재경
저널리즘워크숍》
부발행인 이주연
건축 비평도서 출판 《간향 critica》
발행인 겸 편집인 전진삼
건축가(집단)의 모노그래프 출판 《wide document》 국내외 건축과 도시를 찾아 떠나는 현장 저널
mc 8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자 박성형, 서정일, 이강민, 이연경, 이길훈, 강난형, 도연정, 서효원
《WIDE아키버스》
심원건축학술상 심사위원회 김영철, 김현섭, 서정일, 한동수
인간・ 시간・ 공간의 이슈를 영상으로 따라잡는
심원문화사업회 사무장 신정환
《WIDE건축영화공부방》 건축・ 디자인・ 미래학 강의실 《포럼 AQ korea》 건축 잡지&저널리즘을 아카이빙하고 연구하는 《한국건축저널리즘 연구회》 인천도시건축의 건강한 생태계를 준비하는 《인천건축발전소》 등 일련의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또는 파트너들과 함께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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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9
마실와이드 대표 김명규 팀원 최지희, 고현경, 김용수, 김정아, 김찬양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 ‘건축가 초청강의’ (시즌5)
《와이드AR》 2021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5
Architects in Korea・ Ⅵ : 6라운드 주관 와이드AR 주최 그림건축, 간향클럽 협찬 시공문화사Spacetime, 유오스Knollkorea, 수류산방 후원 ㈜이건창호 문의 02-2231-3370, 02-2235-1960 *<땅집사향>의 지난 기록과 행사참여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카페(카페명: 와이드AR, 카페주소: https://cafe.naver.com/aqlab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1년 5월_프로그램 취소 PARTNERS ARCHITECTS IN KOREA . Ⅴ EDITORIAL 한국 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젊은 리더들에게 묻다 PROLOGUE 이제는 건축가의 호칭에서 ‘젊은’ 수식어를 빼자!
: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일정 취소
2021년 6월_프로그램 취소
ESSAYS 건축이란 무엇인가? & INTERVIEW 김남건축(김진휴, 남호진) OA-LAB(남정민) 아이디알건축(이승환, 전보림) 준 아키텍츠(김현석) 이용주건축스튜디오(이용주) 착착 스튜디오(김대균) 포머티브건축(고영성, 이성범) 비유에스건축(박지현, 조성학) vs. 박지일 NOTICE 제13회 심원건축학술상 2차 본선 심사 안내 제30회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공모 제12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공모
: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일정 취소
《와이드AR》 2020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4
강병국
Kang Byungkuk
최문규
Choi Moongyu
정재헌
Jeong Jaeheon
Lee Kwanjic
이한종
Lee Hanjong
손진
Son Jean
Lim Hyoungnam, Roh Eunjoo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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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직
임형남, 노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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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건축가들 ˽
Kim Kwangsoo
김재관
Kim Jaegwan
이은석
Lee Eunseok
강승희
Kang Seunghee
김동원
Kim Dongwon
SE 04
SE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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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AR》 2019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3
PARTNERS
PARTNERS
ARCHITECTS IN KOREA . Ⅳ
ARCHITECTS IN KOREA . Ⅲ
EDITORIAL
EDITORIAL
나의 건축 인생작Masterwork
X세대 건축가들의 자서전Architect’s Autobiography
ESSAYS
ESSAYS
강병국 Kang Byungkuk_광양장도박물관
김주경 OUJAE Architects : 나의 건축 인생 연대기 혹은 기억조작
최문규 Choi Moongyu_KIST 숲속 어린이집 정재헌 Jeong Jaeheon_양평 펼친집 이관직 Lee Kwanjic_영남대60주년기념 천마아트센터 이한종 Lee Hanjong_가르멜의 모후 수도원 손진 Son Jean_아이뜰유치원 임형남, 노은주 Lim Hyoungnam, Roh Eunjoo_제따와나 선원 김광수 Kim Kwangsoo_부천아트벙커 B39 김재관 Kim Jaegwan_유진이네집 이은석 Lee Eunseok_새문안교회 강승희 Kang Seunghee_여목헌 김동원 Kim Dongwon_분당메모리얼파크 사옥
김범준 TOPOS Architectural Firm : 오리지낼러티 탐문의 건축여정 김태만 HAEAHN ARCHITECTURE : 실패의 역사 (to be) unbuilt 이상대 spaceyeon architects : 어느 건축 마라토너의 방백傍白 임영환 D・LIM architects : ‘지속가능한’ 아마추어 건축 김선현 D・LIM architects : 꿈꾸는 자의 행복한 건축 조성익 TRU Architects : 냅킨 드로잉 박창현 a round architects : 몇 가지 단서들 김세경 MMKM : 건축이라는 올가미 민서홍 MMKM : 건축 짓는 농사꾼의 길 조진만 JO JINMAN ARCHITECTS : 어느 젊은 건축가의 회상 홍재승, 최수연, 이강희 PLAT/FORM : 풍경風景, 반 풍경 그러나 알레고리
NOTICE 제12회 심원건축학술상 추천작 발표
NOTICE
제29회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공모
제12회 심원건축학술상 공모
제11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공모
제28회 김태수 해외건축여행장학제 공모
《와이드AR》 2018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2
《와이드AR》 2017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1
PUBLISHER’S COLUMN – ABCD파티–올해의 발견
PUBLISHER’S COLUMN – 친구
ARCHITECTS IN KOREA . Ⅱ
ARCHITECTS IN KOREA . Ⅰ
EDITORIAL 한국 건축의 새 판을 여는 젊은 리더들의 12가지 화법 ESSAYS 건축의 엄밀성과 농담, 혹은 사랑과 체념 : aoa architects 건축이 남긴 이야기들 : CHAE–PEREIRA architects 새로운 프로세스와 시스템 : EMER–SYS
EDITORIAL 젊은, 내일의 건축 리더들이 말하는 우리 건축 장場의 단면 #1. 건축의 뿌리 혹은 공부의 배경에 대하여 #2. 한국 건축 비평(계)에 대한 바람 #3. 귀 사무소(팀)의 작업 화두는? #4. 현대건축을 수행함에 있어서 ‘전통’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5. 귀하(또는 사무소, 팀)가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란 무엇인가? #6. 현 단계 한국 건축계, 무엇이 문제인가?
경계에서의 점진성 : EUS+ architects 새로운 주거 트렌드를 리드하는 건축, 건축가 : johsungwook architects 엘리스의 비눗방울 놀이, 그리고 일상 속 이야기 생성 : L’EAU Design 스타일의 전략–작업의 방법에 대한 근본적 이해 : Min Workshop 근대 건축, 수용과 변용의 미 : OFFICE ARCHITEKTON 들띄우기와 흰색 그리고 부산 : RAUM architects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한 발견의 방식, 질문 : Samhyun Urban & Architecture 길, 에움길, 샛길 : SUPA schweitzer song 따뜻한 건축 그리고 10+ : UTAA NOTICE 제10회 심원건축학술상 심사결과 발표 당선작 : 해당작 없음 심사위원 김종헌, 박진호, 우동선, 함성호
PROJECTS : OFFICE INFORMATION a.co.lab : 휴먼 네트워크의 수행자 BOUNDLESS : 관계의 진화를 엮는 전술가들 designband YOAP : 3인 3색의 피보나치 수열로 건축하는 집단 FHHH Friends : 좌충우돌 화려한 팀플레이 집단 HG–Architecture : 디지로그의 세계를 실천하는 스튜디오 JYA–rchitects : 함께 흘리는 땀의 가치로 무장한 팀워크 mmk+ : 한 방의 장외홈런 다음을 준비하는 히어로 OBBA : 건축, 내러티브의 소중함으로 승부하는 사무소 stpmj : 아트와 건축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이어니어 Z–Lab : A to Z, 콜라보&커뮤니케이션스 컴퍼니 NOTICE 제9회 심원건축학술상 당선작 발표 경복궁 궁역의 모던 프로젝트 — 발전국가시기 광화문과 국립종합박물관을 중심으로(1962~1973) 수상자 : 강난형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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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Architecture Report, Bimonth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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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AR》 주요 배본처
2021년 5월 15일 발행, ISSN 1976-7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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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점(02-739-2331) ・북스리브로
주 활용서체 및 라인선스
홍대점(02-326-5100)
표지 및 본문: SM/직지폰트
동네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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