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and Idea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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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노시산방(老枾山房)에서.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왼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김용준, 오른쪽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부인 진숙경.

근원 김용준 오십 주기 기념 특집호

매화와 붓꽃 근원 김용준과 존 버거의 글 그림 기획 열화당, 성북동 문화공간 17717 2017. 9. 14 - 10. 15

book and idea 2017. 9. 14

책과 선택32


매화와 붓꽃 | 전시를 열며  Foreword by Yi Soojung

놀라우면서 동시에 고요한 근원 김용준과 존 버거의 만남 이수정(李秀廷) 편집자, 열화당 기획실장

원(近園 ) 김용준(金瑢俊 ,

어 이 년 간 군복무 후 첼시미술학교에

되게 존재한다.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

의는 예술사를 포함한 역사의 일부를 설

1904-1967)과 존 버거(John

서 공부를 마쳤다. 졸업한 뒤에는 세인트

시절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시된 마르크

명할 수 있는 도구처럼 보였습니다. 하지

Berger, 1926-2017)는 한반

매리 교사양성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치

스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화단개조(畵

만 마르크스주의가 제 미학의 결정적인

도와 유럽이라는 다른 시공간에 머물렀

며 화가로 활동하다가 1952년 화가이길

壇改造)」 「무산계급(無産階級) 회화론」

요인은 아니었지요. 제가 아주 오래 전

지만, 적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회화를

포기하고 작가로 전향해 십 년간 좌파 주

을 발표하며 예술지상주의를 비판했다.

에 깨달았던 중요한 점인데, 마르크스주

전공했으나 그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으

간지 『뉴 스테이츠먼』에 예술평론을 기

그러나 불과 몇 개월이 지나 기능주의에

의에는 윤리학이 없듯이 미학도 없습니

로 붓보다는 펜을 들었고, 그렇게 남겨진

고한다. 이들이 젊은 시절을 보낸 시기

빠진 프로미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한

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빈틈입니다.

방대한 원고는 감성과 지성 모두를 아우

의 세계는 전쟁과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

다. 이같은 입장 변화의 핵심은 예술이

역겨운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었지만

른다. 에세이와 그림에서는 사소한 것들

러웠고, 시대 의식이 뚜렷했던 그들은 화

마르크스주의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미술비평문

실 안에만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 없었

프롤레타리아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예

윤리적으로 무척 고결한 사람들도 수백

에는 독특하고 날카로운 논리가 담겨 있

다. “세상이 더 인간적이었다면 글을 쓰

술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만 명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으니, 이처럼 강건함과 부드러움, 문장

지 않았을 겁니다. 그림만 그렸을 거예

거의 종교처럼 된 변증법적 유물론에 모

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지 마르크스주

과 이론을 동시에 갖춘 근현대 인물을 세

요.”(존 버거, 엘리너 와크텔과의 인터

든 것을 대입하는 마르크시스트의 편협

의에서 온 것이 아니었지요.”(앞의 책)

계 미술사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뷰, CBC 라디오, 1995; 허진 역, 『작가라

함을 지적하며, 혁명적 내용의 프로미술

그는 현실은 언제나 그 앞을 가리고 있

는 사람』, 엑스북스, 2017)

도 민중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큰 예술적

는 것 너머에 있으며, 이는 이상주의자뿐

요소’를 구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만 아니라 유물론자, 과거를 신비화하는

민지 조선, 냉전이 극에 달한

러한 주체의식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에게도 해당된

유럽의 상황은 구체적으로는

황 속에서 ‘조선의 것’ ‘조선향토색’을 찾

다고 지적했다. 김용준의 당대 프로미술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자는 민족미술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에 대한 비판적 시각, 민족미술론과 순수

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학해 유화를 전공한다. 그러나 그림보다

는 이론에 몰두했고, 학생 신분으로 당

글쓰기를 시작한 비평문에는 불합리한

시 퍼져 나가던 프롤레타리아 예술사조

세계를 향한 투쟁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를 국내 상황과 연결해 신문에 발표하기

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 이념에 무비판적

시작한다. 영국에서 태어난 존 버거는 센

으로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눈과 머리로

트럴미술학교에 다니던 1944년 징집되

판단하려는 주체성과 균형감각이 공통

김용준은 중앙고보를 졸업하 고 1926년 도쿄미술학교에 입

예술론으로의 이동은, ‘장막을 걷어내고

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현재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과거에 대

스스로 명명했던 존 버거는

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존 버

어떠했을까. 1995년 인터뷰

거의 생각과 연결된다.

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

어릴 적부터 자신은 물리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 정신을 함께 지녔다며 존 버 거는 덧붙였다. “사람들이 제게 마르크 스주의자라거나 마르크스주의였다고 하면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 지만, 일부일 뿐입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것이 공존하기 때 문입니다.”(앞의 책) 보이는 것과 보이 지 않는 것을 함께 이야기하는 그의 글들

장 모르의 개인 야고를 반기는 존. 장 모르 사진. 캥시, 2006.(왼쪽)

고 “정신이 우주의 전부가 아니며, 물질

“존은 한 번도 개를 키운 적이 없지만 남의

이 또한 우주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

개들과 잘 지내기로 유명했다. 개 주인과 그가 사이가 좋을 때에 한해서 말이다.”

던 김용준의 생각도 근본적으로 크게 다

—장 모르 『존 버거의 초상』 중에서.

르지 않을 것이다.

성북동 노시산방 뒷동산에서 개와 함께 있는 김용준. 1930년대 말-1940년대 초.(오른쪽)

2

을 보면 이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


김용준 〈매화〉 1948. 종이에 수묵. 26.5×18cm. 개인소장.(왼쪽) “매화와 더불어 벗이 되고 싶어 매화 가지 몇 개를 그려 곽건당(郭健堂) 형의 부탁에 응하였으나, 속된 화사(畵師)의 화법을 면치 못했구나. 무자년 팔월에. 근원.” “고동(古銅)의 빛이 제아무리 곱다 한들, 용천요(龍泉窯)의 품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이렇게도 적막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핀 그 앞에서 나의 환상은 한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나는 매화와 석불과 백사기의 존재를 모조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잔잔한 물결처럼 내 마음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김용준, 「매화」 『근원수필』(1948) 중에서 존 버거 <붓꽃> 2013. 『벤투의 스케치북』 중에서. (오른쪽) “붓꽃은 마치 책이 펼쳐지듯 벌어진다. 동시에 그 꽃은 가장 작은, 건축적 구조의 본질을 담고 있다. 나는 이스탄불의 술레이만 사원을 떠올린다. 붓꽃은 예언 같다. 놀라우면서 동시에 고요한.”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 중에서

태준과 함께 골동 취미에 빠져

의 고요함을 연상한다. 근원은 ‘있는 체

민 근원 전집도 전시 판매하고, 특별 강

들던 1936년 무렵부터, 근원은

도 않고 은사(隱士)처럼 앉아 있는’ 매화

연 및 대담도 마련했다. 뒤늦은 준비와

수필을 꾸준히 발표한다. 훗날

앞에서 그 향기가 다칠세라 호흡을 가다

장소의 한계로 ‘오십 주기 기념’이라는

은 모교였던 중앙고보를 시작으로 보성

『근원수필(近園隨筆)』(1948)로 묶여 나

듬는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나에게 곧

이름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이나, 젊은

고보 미술교사로 있었고, 서울대 예술대

오게 된 이 글들을 두고 그는 발문에서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세대들에게 그를 조금이나마 알리고 생

학 미술학부를 창설하고 동양화과 교수

“내 자유의 고향이 그리워 고함을 쳐 보

존 버거는 꽃을 그리며 그 형태가 ‘어떤

각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를 지냈다. 일반인을 위한 미술과 문화

고 발버둥질을 하다 보니 그것이 이따위

언어로 씌어진 텍스트’라고 상상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관련 라디오 강연을 비롯해, 국립박물관

글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했다. 평문에

“그 텍스트의 흔적을 쫓는 동안 나는 내

많다. 보성고등학교 오영식 선생님은 십

미술연구회에서 개최한 미술강좌도 했

서 보이던 투쟁적인 문체는 온데간데 없

가 그리는 대상과 한 몸이 되었고, 그것

년 전 근원 전집 보유판을 위해 발굴, 소

는데, 항상 그의 강연이 가장 인기있었다

고, 매화와 감나무, 골동품과 서화, 벗들

들이 씌어진 언어, 한계도 없고, 알 수도

장하고 계신 근원의 새 글과 장정을 제공

전해진다. 월북 후에도 평양미술대학 교

과의 소소한 사연들이 웃음짓게 한다. 이

없는 그 모국어와 하나가 되었다.” 그들

해 주셨었다. 이 전시의 많은 내용이 그

수,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

후 분단과 월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은 말 없는 것의 메시지를 읽을 줄 아는

에 기대고 있다. 귀한 근원의 원화와 장

으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미술사 연구와

그의 자유분방한 문장을 더 이상 만나기

사람들이었다.

정을 내어 주신 동양화가 우현(牛玄) 송

민족미술 교육에 힘썼다.

어렵게 된 일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쟁적인 비평가였던 그들은 대중을 위한 미술 교육자이 자 저술가이기도 했다. 근원

영방(宋榮邦) 선생님, 단잠(檀岑) 선생 화당은 2002년 ‘근원 김용준

님, 환기미술관 박미정 관장님께 깊이 감

전집’을 모두 다섯 권으로 완

사드린다. 근원의 집 노시산방(老枾山

간하고 그의 사십 주기인 2007

房)이 있던 성북동에서 의미있는 전시를

에 정착해 자유롭고 폭넓은 글쓰기를

년 보유판을 내면서 그의 모든 저작과 작

열 수 있게 해 준 17717 김선문 대표에게

출연하기 시작해, 그 유명한 「다른 방식

이어 갔다. 예술이나 정치적인 글 외에

품을 한 자리에 정리했다. 존 버거의 책

도 고마움을 전한다.

으로 보기(Ways of Seeing)」를 1972년 방

도, 그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은 2004년부터 내기 시작해 지금까지 17

영하고 이를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이 책

를 남겼고, 말년으로 갈수록 꽃, 나무, 사

권을 출간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 갈 예

은 지금도 대학교재로뿐만 아니라 일반

물을 그리며 짧은 글들을 썼다. 여든이

정이다. 이처럼 열화당이 지금까지 추구

인에게 보는 방법들을 알려 주는 가장 대

넘은 나이에 출간한 『벤투의 스케치북』

해 온 인문주의적 예술출판의 이상적인

중적인 미술이론서로 자리매김해 있다.

(2011)에는 그가 바라본 세계의 진실된

상을 보여 주는 두 저자의 만남을 김용준

았다. 근원의 글을 찾고 읽고 다듬는 일

기록이 아름다운 글과 드로잉으로 담겨

의 오십주기와 존 버거의 죽음을 맞은 해

은 초보 편집자로 버거웠지만 또한 큰 기

있다.

에 마련했다. 다만, 거창한 기념보다는

쁨이었다. 이후 이어진 존 버거와의 만남

존 버거는 졸업 직후 학교 강단에도 섰

고통을 거부하는 영국과 영국인에 환

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한 대중매체 강연

멸을 느낀 존 버거는 1962년 고향을 떠

을 많이 했다. 1959년부터 비비시(BBC)

나 1970년대 중반 프랑스 알프스 산록

텔레비전 미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김용준의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 要)』 역시 지금의 미술학도들에겐 생소

금까지 만든 책 중 어떤 것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늘 『새 근원수필』을 꼽

하나,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대중서라 할

이들이 매화와 붓꽃을 두고 쓴 짧은 글

그들이 남긴 진솔한 글귀와 그림 들을 책

역시 그러했다. 두 분의 책을 같은 서가

만하다. 그 스스로 썼듯이 “중학교 상급,

을 보면, 서로의 존재도 몰랐고 전혀 다

과 함께 펼쳐 보는 자리로 소박하게 꾸몄

에 한 권 한 권 꽂고, 이제 그들의 그림을

전문·대학교의 학생 및 일반인의 조선

른 언어를 사용했던 두 작가의 유사한

다. 워낙 방대한 세계를 아우른 분들이지

한 공간에 걸게 된 일이 우연만은 아니란

미술사의 참고서로 조선미술에 관한 이

표현에 놀라게 된다. 근원은 X선생 댁 매

만 이번 전시에는 『근원수필』과 『벤투의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끌

야기를 되도록 평이하게 약술”하고 있

화의 암향(暗香)을 맡으며 그리스의 대

스케치북』의 문장을 중심으로, 올봄 「존

어당김이 있었을 터이다.

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미술품이 왜 아

리석상, 중국의 석굴사원, 신라의 석불,

버거의 스케치북」전에서 선보인 존 버거

전시장 한켠에 나란히 걸린 매화와 붓

름다우며 어떠한 환경에서 그렇게 만들

조선의 백자로 환상을 전개하고, 존 버거

의 드로잉 원화 중 일부, 근원의 수묵화,

꽃 그림이 마치 서로 대화하는 듯하다.

어졌는가 하는 점을 밝혀” 나가고 있기

는 집 앞마당에 핀 붓꽃을 그리며 책장의

저서와 장정, 관련 사진 및 자료 들로 구

놀랍고도 고요하게. ■

때문이다.

펼침, 건축적 구조의 본질, 터키 모스크

성했다. 백 부 한정판 표지로 새롭게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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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가 근원 김용준의 삶  The Life of the Art Critic, Kim Yong-Jun by Choi Youl

‘조선의마음’에서 찾는 향토색 사학과 비평을 아우른 뛰어난 논객, 김용준 최열

미술평론가

비평가의 열정

인상 깊다.”(이종우, 「양화 초기」 『한국

1929년 여름 심영섭(沈英燮)의 글 「아

고 말이다. 이에 깜짝 놀란 김용준은 홍

의 근대미술』 3호, 1976. 10)

세아주의 미술론」을 보는 순간이었는지

득순을 향해 일대 반격을 가했다.

말의 종류는 굉장히 여러 가지일 텐데,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김용준은 창

모르겠다. 심영섭은 아시아의 고향을 인

홍득순을 향해 무모한 일개인의 독단

그 꽃은 역시 논쟁이라 하겠다. 내가 보

작보다 이론에 열심이었다. 입학 다음해

도와 중국의 위대하고 신비한 철학과 종

과 그 죄로 말미암아 ‘예술재판소에서 중

기에 김용준이야말로 평생을 논쟁 속에

인 1927년에 「익스프레셔니즘에 대하

교·예술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곳으로 복

대한 범죄인의 형을 받을 것’이라고 준엄

서 살았고, 대단히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

여」 「화단개조」 「무산계급 회화론」 「프

귀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마르크스

하게 꾸짖었다.(김용준, 「동미전과 녹향

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를테면 20세기

롤레타리아 미술 비판」을 내리 발표했

주의 미학을 거칠게 공격했다. 여기에 김

전」 『혜성』, 1931. 5) 그 준엄한 빛의 세

전반기에 미술관계 저서를 남긴 사람이

다. 이론에 열중하지 않고는 도저히 쓸

용준이 크게 공감했던 모양이다. 바로 자

기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때 자신과 조

라고 해 봐야 몇 명 안 되는데, 그 가운데

수 없는 글들이다. 내용의 독특함과 짜임

신이 1927년에 그 조선 마르크스주의자

직적으로 맞섰던 김주경(金周經)의 녹

김용준은 두 권이나 남기는 열정을 보였

새있는 논리뿐만 아니라, 총 들고 싸움터

들로부터 공격을 당해 수세에 몰렸던 씁

향회를 무너뜨려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던 것이다. 『근원수필』이 그 하나요, 『조

에 나선 병사처럼 거세찬 쟁론에 빠져들

쓸한 추억이 새로웠을 터이니까. 김용준

그 힘의 샘터는 내가 보기에 그의 글이

선미술대요』가 그 둘이다.

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이같은 논객은

은 다음해 몇 편의 뜻 깊은 글을 발표했

다.

없었다.

는데, 말 그대로 심영섭의 지지자임을 드

김용준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큰형을

녹향회와 동미회·백만양화회를 가운 데 두고 벌어진 이 논쟁은 1929년부터

따라 고향을 떠나 충북 영동군 황간에서

이보다 앞선 시기에 펼쳐졌던 몇 차례

자랐다. 부모 슬하도 아닌 조건에서 경성

논쟁은 사실 미학과 사상을 중심에 두고

“오오, 얼마나 오랜 시일을 예술이 정

1932년까지 만 삼 년을 끈 싸움이었다.

중앙고보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던 사정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논쟁은

신주의의 고향을 잃고 유물주의의 악몽

이 논쟁은 다른 논쟁과 달리 단체를 둘러

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공부를 무척 잘했

미학사상과 미술이론을 중심에 두는 굉

에서 헤매었던고.(칸딘스키) 과연 오랜

싼 것으로, 누가 누구를 비판하는 식으로

던 탓이 아닌가 싶다. 큰형의 기대가 컸

장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미술비평

동안 예술이 사회사상에 포로가 되어, 많

일관한 것은 아니었다. 이태준·심영섭·

을 터이고 김용준은 중앙고보 전교 이등

사상 그 치열함이나 규모에서만 따지자

은 예술가들이 프로예술의 근거를 찾으

김용준이 한쪽을 차지하고, 안석주(安碩

을 차지하여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면 첫째가는 이 논쟁을, 나는 김용준이란

려 애썼던 것이다.”(김용준, 「백만양화

柱)와 정하보·홍득순이 다른 한쪽에 섰

하지만 곧 그 기대를 저버리는 사건이

사람을 통해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회를 만들고」 『동아일보』, 1930. 12. 23)

으며, 김주경과 유진오(兪鎭午)가 또 다

벌어졌다. 1923년 이종우(李鍾禹)가 중

것이다. 그렇다. 김용준은 이같이 거대

앙고보 도화교실을 차렸다. 도화 성적이

한 논쟁을 통해 식민지 조선 미술동네에

뛰어난 김용준을 이종우가 불렀을 터이

그 이름을 굵게 새겨 놓았던 것이다. 그

고, 여기서 창작한 작품 〈동십자각(東十

가 상대했던 논적이 당대를 뒤흔들던 윤

젊은 날 김용준은 마르크스주의의 한 갈

서 제일가는 관념적 신비주의 논객 김용

字閣)〉이 「조선미전」에서 입선을 했다.

기정(尹基鼎)·임화(林和)와 같은 프로

래인 무정부주의자였고, 그 미학사상으

준이 등장하는 무대였다.

1924년의 일이다. 스물한 살의 청년 김

예맹 최고의 논객임을 상기해 보면 짐작

로 김복진(金復鎭)·임화에 맞섰다. 하

용준의 운명이 가름되는 순간이었다. 집

이 갈 것이다.

지만 그 뒤 무정부주의를 버리고 정신주

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른 자리에서 서 있으면서 각자의 입장을

비평의 힘과 화려한 등장

또렷이 밝히고 공격을 퍼붓기도 했던 그 런 논쟁이었다. 이 논쟁이야말로 조선에

미술사학자 김용준

안의 어른, 큰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

스스로 원했건 원치 않았건 김용준은

의 또는 신비주의 미학으로 방향을 바꿨

보를 마친 김용준은 이종우의 도움에 힘

이 논쟁을 통해 대단한 이론가로 떠올랐

다. 그리고 미술에서는 고구려나 신라미

김용준은 뛰어난 미술평론가이기도 했

입어 동경유학을 떠났다. 이종우는 그때

다. 다시 말해 비평가의 길을 매우 화려

술의 유산으로부터 ‘진실로 향토적 정서

지만 대단한 미술사학자이기도 했다. 그

를 다음처럼 회고하고 있다.

하게 닦아 놓은 셈이다. 그런데 1928년

와 율조를 노래’하는 데 빠져들어 갔다.

가 쓴 『조선미술대요』는 우리 미술사에

“김용준은 오학년 때 경복궁 동십자각

초에 다른 논객과 공방을 두 차례 주고받

화가의 꿈보다 비평가의 길에 무게를

서 대중적 고전이다. 대중들은커녕 미술

을 총독부 청사 신축에 따라 현 위치로

은 끝에 붓을 놓고 말았다. 임화를 비롯

크게 둔 결정적 계기는 1930년 12월과

가들조차 그런 책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옮겨 짓는 공사광경을 그려 선전에 입선

한 당대 쟁쟁한 논객들로부터 집중포화

다음해 1월에 다가왔다. 정하보(鄭河普)

판에 웬 뚱딴지냐고 여길 분이 계실지 모

했다. 제목은 〈건설이냐, 파괴냐〉. 이 깜

를 받아 수세에 몰리는 어려움을 겪어야

와 홍득순(洪得順)이 김용준을 세차게

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책에서

찍한 소재의 그림은 뒤에 내가 인촌(김

했던 탓인지 모르겠다. 그 뒤 두 해를 비

때렸던 것이다. 조선의 현실을 제대로 이

규정하고 있는 각 시대별 미술의 특징에

성수) 선생에게 갖다 드리고 그의 동경

평가의 길과 화가의 꿈 사이를 방황했다.

해하지 못한 채 현실을 도피한 다음 잠꼬

대한 해석은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충분

유학 여비를 마련해 준 일이 있어 매우

다시 글쓰기를 결심한 계기는 어쩌면

대 소리나 지껄이는 예술지상주의자라

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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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글이 1938년 『조광』 8월호에 발표한

다. 논객의 운명이었으므로.

「미술」이란 글이다. 아무튼 김용준이 제

이때 논적은 또 한 명의 월북 미술이론

창한 조선향토색은 관념적이지만 ‘표현

가 리여성(李如星)이었다. 리여성은 채

방식’과 같은 창작방법론의 수준을 유지

색화 양식의 전통을 중심에 놓을 것을 주

하고 있었고, 또한 미학적 특징을 연결시

장했고, 김용준은 수묵화 양식의 전통을

키고 있다는 점에서 소재주의 따위를 벗

앞세울 것을 주장했다. 리여성 대 김용준

어난 것이라 하겠다.

의 논쟁판은 국가적 규모의 관심을 얻으

그렇듯 김용준은 자신의 미학과 사관

면서 김무삼·이능종 대 조준오·한상진

을 미술비평에도 적극 적용해 나갔으며

의 논쟁판으로 번져 나갔다. 여기서도 김

실제비평은 물론 이론비평에도 심혈을

용준은 스스로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기울여 많은 글을 발표하는 정열을 보여

논객의 투혼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주었다.

이 논쟁은 1950년대 후반기 내내 이어졌 는데, 1955년 『력사과학』 1호에 발표한

마지막 논쟁과 패배 소련의 한인화가 변월룡이 그린 김용준의 초상. 1953.

이를테면 고구려미술의 특징을 패기 에 넘치는 것으로 본다거나, 백제는 온아

「조선화의 표현형식과 그 취제 내용에 대하여」부터, 1960년 『문화유산』 2호에

김용준이 줄곧 중앙고보나 보성고보 교

발표한 「사실주의 전통의 비속화를 반대

평관을 지닌 김용준은 전문 미술평론가

사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차에 대학 교수

하여—리여성 저 『조선미술사 개요』에

로서 의식이 매우 뚜렷했다.

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청 서울

대한 비판 1」까지 매우 줄기찬 것이었다.

하고 유려한 것이 특징이라고 보는 대목

1940년에 요절한 김복진의 소망은 고

시 학무과장으로 재직하던 화가 장발(張

나는 채색화 양식 대 수묵화 양식의 대

이 그러하다. 이 책은 내가 보기에 고유

유섭과 같은 미술사학자가 비평활동을

勃)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 인연으로

립, 채색 대 선묘의 대립을 사실주의 창

섭(高裕燮)을 비롯해서 미술애호회에

하는 것이었다. 그 소망이 이뤄졌다. 김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교를 개편한 서

작방법과 민족전통 계승문제의 뼈대로

속한 미술사학자들의 생각을 모아 김용

용준이 그렇게 했다. 물론 김용준이 미술

울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던 때가 1946년

세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준 나름대로 다듬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학자로 출발하진 않았지만 그때 누구

여름이다. 하지만 얼마 뒤 사표를 내고

어쨌건 김용준은 논쟁에서 패배를 맛봐

내용이 그 뒤 미술 교과서나 대학 강단에

보다도 헌신적인 자세로 우리 미술사에

나왔다. 미군정청이 미국인을 총장으로

야 했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서 폭넓게 받아들여졌음은 자연스런 일

깊이 빠져들어 갔으며, 대중적 고전이라

앉히려는 따위의 서울대 종합대학안을

이 논쟁에서 패배란 매우 뼈아픈 것이었

이겠다. 철들고 난 뒤에 이 책을 읽으면

할 열매도 맺어 놓았던 것이다.

발표했던 탓이다. 사퇴와 같은 과감한 행

으리라. 아니 어쩌면 더욱 커다란 아픔은

동의 뒷면엔 김용준의 오랜 민족주의 사

그 뒤 펼쳐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주의 미술이 채색화 양식으로 뒤덮

서 느낀 내 생각 한 토막도 그 증거다. 내

김용준은 사학과 비평을 조화시킨 보

가 자라면서 익힌 우리 미술에 대한 이러

기 드문 논객이었다. 그 조화가 낳은 열

저러한 생각이 모두 김용준의 것과 꼭 같

매 가운데 하나가 조선향토색에 관한 것

김용준의 사상 편력을 여기서 모두 따

았는데, 이건 나만의 헤아림이 아닐 줄

이다. 그는 색채나 소재 따위로 조선향토

질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민족주의 사상

검은 한묵(翰墨)으로 유일한 벗을 삼

믿는다.

색을 풀어 나가는 경향에 반대했다. 이

은 해방된 조국의 조건과 좀더 끈끈하게

아 일생을 담박(淡泊)하게 살다 가는 모

것은 밝고 가벼우며 명랑한 색채를 조선

맞물려 갔고, 나아가 젊은 날 스스로 부

습을 꿈꾸었던 김용준. 가난과 외로움을

향토색 이론의 핵심에 두었던 김주경 및

정해 버렸던 사회주의 사상과 다시 화해

벗 삼아 성북동에서, 의정부에서 쫓겨다

오지호(吳之湖)의 견해에 정면으로 맞

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니듯 식민지 시대를 견뎌 나온 김용준.

사학과 비평의 행복한 결합

여 나갔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김용준은 조선화단이 처한 어두운 그늘

서는 것이다. 김용준은, 감성과 이성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육이오 때 서

격정의 해방공간 오 년을 살며 전쟁과 분

과 비좁음 따위야말로 비평의 힘이 자리

바탕에 둔 인간의 정신에서 조선적인 것

울대 미술학부 학장에 취임했다. 이때

단을 겪은 다음, 어느새 평양 복판에 서

잡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조

을 찾았다는 점에서, 자연환경 속에서 형

김용준의 풍모를 알려 주는 일화가 지금

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 위대한 업적

선에서도 로맹 롤랑, 러스킨, 루나찰스

성된 인간의 생리와 감각에서 조선적인

도 전해 오고 있다. 교수를 대상으로 하

을 남기고 또한 새조국 건설기에 미술교

키 같은 위대한 평론가가 나타나야 한다

것을 찾은 오지호·김주경과 나누어진

는 교양강좌 때의 일인데, 김용준이 손

육자로 혁혁한 공로를 세워 나간 김용준.

고 주장하면서, 아무튼 조선화단에 미술

다.

에 「인민보(人民報)」를 말아 쥐고 강의

논쟁으로 점철된, 하지만 시원스런 승리

평론가가 없다는 사실은 부끄럽다기보

김용준이 스스로 내세운 ‘조선의 공기

실에 들어와 영특한 인민군이 부산으

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며 늘 수세에 몰

다 말하기조차 무서울 정도라고 탄식했

를 감촉케 할, 조선의 정서를 느끼게 할

로 밀고 내려가는 것을 치켜세우면서 미

렸던 김용준은, 1967년 어느 날 눈을 감

던 것이다. 따라서 화단 성립 초기에 있

가장 좋은 표현 방식’은, 다름 아닌 조선

군이 패주 중이라고 열을 올렸다는 것

아야 했다.

는 조선에서는 우선 ‘건전하고 충실한’

시대의 미술이 지니고 있는 ‘조선의 마

이다.(장우성, 『화맥인맥』, 중앙일보사,

김용준이 중앙고보 시절 야외 스케치

수준의 평론가만 나와도 좋다고 보고, 그

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 조선

1982) 그리곤 얼마 뒤 월북해 버렸다. 월

를 나다녔던 세검정을 거쳐 미술가의 꿈

랬을 때 사회가 ‘침착한 태도로 우대하고

의 마음이란 청아한 맛이라든지 소규모

북한 김용준은 평양미술대학 교수이자

을 아로새기던 경복궁 옆 동십자각을 지

편달하여 주기를’ 호소했다.

의 깨끗한 맛 따위였다. 그것은 야나기

저명한 화가요 미술사학자로서 역할을

날 때가 가끔 있다. 그때 나는 학창시절

김용준의 비평관은 ‘보다 더 작품에 대

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의 아름다움이

수행해 나갔다.

의 김용준을 떠올린다. 또 옛 서울대 문

한 태도를 겸허히 하여, 작품에 숨은 미

라고 생각한 ‘슬픈 맛’과 다른 것인데, 내

사람의 운명은 끈질긴 것인가 보다. 젊

리대 터를 지나 간송미술관에 이를 때면

를 해부하여 다시 이것을 구성해 놓은 그

가 보기엔 추상성 짙은 관념이란 점에서

은 날 화려한 논쟁을 통해 미술동네에 그

사십대 미술사학자 김용준이 남겼을 법

런 비평’에 중심을 두는 것이었다. 다시

는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오지호의 그것이

이름을 수놓았던 김용준은, 삶의 끝을 마

한 삶의 향기를 느낀다. 간송미술관에서

말하자면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미를 분

생태학적 심미주의라면, 김용준의 그것

주하면서조차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

그 근처 어느 곳이었을 노시산방을 헤아

석하고 종합하는 것을 비평의 임무라고

은 관념적 심미주의임을 엿볼 수 있는 대

었다. 논객의 운명, 그렇다. 전후 조선민

릴 때면, 내가 중학생 때 살던 집의 커다

보았던 것이다.(김용준, 「화단개조」 『조

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주주의인민공화국 미술동네에서 필요

란 감나무와 마주치는 착각에 빠지곤 한

선일보』, 1927. 5. 18-20) 이러한 비평

김용준의 미학은 순수직관 및 정신유

한 것은 사실주의 미술 구현과 그 민족

다. ■

태도는 김복진의 지도로서의 비평관과

희에 기초한 관념적 심미주의란 말로 좁

전통의 계승과 혁신이었다. 김용준이 당

이 글은 『한국근대미술비평사』(2001, 열화당)에 실린

는 다른 것이다. 아무튼 해석으로서의 비

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절정을 보여 주

면한 시대사적 과제를 피해 갈 수는 없었

「김용준, 뛰어난 논객」을 축약 재수록한 것이다.

5


근원 읽기 | 김용준이 머물던 공간들  Essays on The Places that I Lived by Kim Yong-Jun

내 우거寓居하는 집은… 성북동 노시산방과 의정부 반야초당 이야기 김용준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근원 김용준은 1920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을 계기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번지의 한옥으로 이사하게 된 이래, 동경미술학교 유학 후

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

자를 붙이는 골동 취미보다는 노(老) 자

엽이 애상적으로 지는 것과, 여름에는

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

의 순수한 맛이 한결 내 호기심을 이끌었

그늘이 그에 덮을 나위 없고, 겨울에는

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

던 것이다. (…)

까막 까치로 하여금 시흥(詩興)을 돋

귀국하여 결혼하고서도 계속해서 이 집에 살게

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

우게 하는 것이며, 그야말로 화조(花

된다. 근원의 벗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이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朝)와 월석(月夕)에 감나무가 끼어서

이 집을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 이름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풍류를 돋우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느

이 군이 일러 노시사(老枾舍)라 명명해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

편으로 보아도 고풍스러워 운치있는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이 그대

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나무는 아마도 감나무가 제일일까 한

주었다. 이후 근원은 경기도 양주근 의정부읍

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

다.(…)

붙여 주었으며, 1944년 근원은 이 집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에게 넘겨주면서

가능리 고든골로 이주하여 그곳의 집을

하기는 그후 시관(時觀*장석표)과

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같이 주안(酒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방에서.

글에서 재미있게 풀어 놓았는데, 여기 그

던 끝에 시관의 말이, 노시산방이라기보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

—『근원수필』 1948. (근원 김용준 전집 1 『새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한다.(편집자 주는 *표로

다는 고시산방(古枾山房)이라 함이 어

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

표시했다)

떠하겠느냐 하여 잠깐 내 집 이름을 다시

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반야초당(半野草堂)’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근원은 자신이 머물던 공간에 대해 몇몇

기묘(己卯, 1939) 11월 4일 노시산

근원수필』에 수록)

육장후기(楏莊後記)

한번 찝어 본 일도 있기는 하다. 푸른 이

무슨 화초 무슨 수목이 좋지 않은 것이

끼가 낀 늙은 감나무를 노시(老枾)라 하

있으리요마는 유독 내가 감나무를 사랑

기보다는 고시(古枾)라 함이, 창(唱)으

하게 되는 것은 그놈의 모습이 아무런 조

좋은 친구 수화(樹話*김환기)에게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老枾山

로 보든지 글자가 주는 애착성으로 보든

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풍스러워 보

노시산방을 맡긴 나는 그에게 화초들

房)이라 한 것은 삼사 년 전에 이(李) 군

지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요, 노시라

이는 때문이다. 나무 껍질이 부드럽고 원

을 잘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의

(*이태준)이 지어 준 이름이다.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좀 속되어 보일 뿐

초적인 것도 한 특징이요, 잎이 원활하고

정부에 새로 마련한 삼간두옥(三間斗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아니라, 젊은 사람이 어쩐지 늙은 체하

점잖은 것도 한 특징이며, 꽃이 초롱같이

屋)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늙은 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서 재미가 적다는

예쁜 것이며, 가지마다 좋은 열매가 맺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먹고 이렇다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역시 고(古)

는 것과, 단풍이 구수하게 드는 것과, 낙

는 직업도 없이 훨훨 날 것처럼 자유스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

러운 마음으로 천석고황(泉石膏肓)이 김용준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1944. 종이에 수묵과 담채. 24×32cm. 환기미술관. “근원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ㄱ’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되어서 자고 먹고 하다 보니 기껏해야 고인(古人)의 글이나 뒤적거리는 것 이 나의 일과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늦게 일어나서 소위 측상음 (厠上吟)을 하고 있는데 우연히 이러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 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한 시를 발견하고 그 시의 작자인 송씨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일명(佚名)함〕라는 이의 심경이 나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다.” —김향안

꼭같은 데 놀랐다. “집을 팔고서 / 어쩔거나 근래 들어 뼈를 에는 가난으로 / 내 살던 집 이젠 벌써 이웃에게 넘어갔네. / 다정하게

김용준, 〈기명절지(器皿折枝)〉 1949.종이에 수묵과 담채. 개인소장. (p.7 위) “맑고 소박한 기완(器玩)들은 속물 사이에 놓여 있고, 신선한 꽃과 과일들은 그윽하고 기이한 것과 어울려 있구나. 근원이 반야초당에서 그리다. 기축년 무더위에 오래도록 가물어 비가 오지 않았다.”

6

뜰에 선 버들에게 묻노니 / 앞으로 날 만나면 행인처럼 보려는가!” 송씨는 어느 때 사람인지 그의 이름 이 무엇인지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단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져 가는 사람이란 것, 이웃 사람에게 가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

난에 쪼들려 집을 팔아 버렸다는 것, 그

보다 기쁜 일이다.

고요히 앉아, 넓은 대지에 바쁜 사람들

“쉬기도 전에 군둥내부터 난다”고.

리고 그가 살던 집에는 그가 몹시 사랑하

—『근원수필』 1948. (근원 김용준 전집 1 『새

내버려 두네).” 추사 선생의 전의(篆意)

“앗게, 되지도 않은 그 멋은 그만 작작

근원수필』에 수록)

가 농후한 예서(隸書)로 쓴 글이다. 나는

부리고 푹 들어박혀 공부나 할 요량 하

소루유아정(小樓惟我靜)­

내가 거(居)하는 실내가 고물상보다 더

게.” “반야초당이라? 끝내 한운야학

요란스럽다는 것을 금시에 잊어버린다.

(閒雲野鶴)이 못 잊혀지는 모양이로

지금 세상은 얼마나 요란스러울까.

군. 자네의 낡아빠진 야취(野趣), 야만

던 버드나무가 정원에 서 있었다는 것 들 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의 몸을 담고 살던 집을 무엇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기게 된다.

당(半野草堂)’이라 부르는 것은 무슨

넉 줄의 시에서 그가 점점 가세가 기울어

“小樓惟我靜 大地住人忙(작은 누각에

뜻이냐.

보다도 사랑한 듯, 버드나무를 보고 후일

좋은 값을 주는 친구가 있어 노시산방

이 집 앞을 지날 때면 너도 나를 남인 척

을 팔아 버리고, 그 돈 중에서 얼마는 채

전쟁은 나날이 심각해 가고 거리는 공

(野蠻), 야성(野性), 야인(野人) 따위

하겠구나 하고 오열(嗚咽)에 가까운 탄

귀(債鬼)를 몰아 쫓고 얼마는 우선 ‘야

포와 초조에 싸여 있다. 미구(未久)에 우

의 소위 원시동경사상(原始憧憬思想)

식을 한 흔적이 한 토막 절구(絶句)를 통

미(やみ)’를 해 목구멍을 달래고 기천원

리 조선의 지식인은 고 소갈머리 좁은 왜

은 그만하면 청산해 버릴 시기도 되지

하여 역력히 드러난다.

(幾千圓)은 남겨 두었다가 한 달에 돈 백

놈들에게 모조리 학살이나 당할 것이 아

않았나.” 친구들이 모조리 이렇게 빈

집을 샀던 사람도 이 시를 보고서는 감

원씩 집어삼키면 한 이태는 버틸 셈치

닐까. 나는 전차를 탈 때마다 오키나와

정거리는데도 나는 묵묵히 대답할 바

격함을 못 이기어 그 집을 도로 송씨에게

고, 그리고 돈 천 원 남는 것은 그 동안이

섬(沖繩島)에서 소학교의 그 천진한 아

를 모른다. (…)

주었을 뿐 아니라 송씨의 부채(負債)까

라도 몸을 담을 두옥(斗屋)이라도 한 채

이들에게까지 수류탄을 주어 수많은 귀

나는 우선 내 소유가 아닐지라도 내

지도 물어 주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마련해야겠으므로, 근교를 쏘다니다가,

여운 생명을 무참하게 희생케 했다는, 세

몸을 담을 수 있는 이곳을 저으기 하늘

이 시에 숨어 있다. (…)

그 중에도 대원군(大院君)이 일찍 이곳

계에 유례 없는 일본족의 잔학성(殘虐

이 주는 복으로 믿을 수밖에 없고, 방

지금 회상하면 허망타 할까 어이없다

에 별저(別邸)를 정하고 회포에 맡겨 때

性)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것이 남의 일

이 협착(狹窄)하여 일하는 제구(諸具)

할까, 한참 북새통을 치른 다음 소위 ‘해

로 묵란(墨蘭)을 희롱하던 양주(楊州)

이 아니요 기미년의 수원(水原) 사건과

를 늘어놓을 수가 없어서 내가 해야 할

방’이라는 시기가 오자 나는 다시 새로운

땅 ‘고든골’에다 용슬(容膝)이 채 못 되

도쿄 진재(震災) 때의 조선동포 학살사

공부를 뜻과 같이 하지는 못하나, 그것

감격과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는 삼사 칸 두옥을 사서 오게 된 것은, 그

건과 아울러 곧 우리 목전에 닥친 일인

이야말로 팔자소관으로 돌릴 수밖에

서울로 올라온 뒤로 한번은 노시산방

래도 타고난 팔자가 산과 물과 돌과 나무

것을 생각할 때 쭉 소름이 끼치곤 한다.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달리 내가 사심

의 새 주인 수화를 만났더니 그의 말이

들과의 인연만은 아무래도 끊을 수 없어,

일본의 패배는 조석(朝夕)에 달렸다.

‘노시산방을 사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

집 앞에 돌 깔린 시내가 흐르고 시내 건

겨울 전으로 규정(規定)날 것은 불을 보

기고 보니’ 나에게 대해 ‘대단히 미안한

너편에 제법 운치스런 자그마한 산이 가

기보다 더 밝은 일이다.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후로

로누워 있고 동중(洞中)에는 몇 백 년은

그러나 일본의 패배가 오기 전에 우리

黑村)』을 읽는 것과 같아서 여러 세대

수화는 가끔 나에게 돈도 쓰라고 집어 주

확실히 넘은 듯한 소나무와 잣나무들이

는 속절없이 아무 값 없이 피살될 것이나

의 직업도 가지각색이요 그들의 성격

고 그가 사랑하는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

무더기로 서 있는 맛에 불문곡직(不問曲

아닐까.

도 가지각색이다. (…)

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옛날

直)하고 반이(搬移)를 해 버린 것이다.

을 부릴 재주도 없거니와 용기도 없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 안은 마치 고리키의 『암흑촌(暗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사형언도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이 소유

시인 송씨의 집을 산 사람을 연상하게 되

오 척 일 촌이 채 못 되는 내 키에도 마

를 받은 것처럼 나는 생(生)에 대해 아주

권 없는 집을 지키고 있다. 그들의 심

고, 옛날 세상에만 그러한 사람이 있는

음껏 다리를 쭉 뻣고 자 보지 못하는 좁

단념하고 있었다. 나 한 목숨 죽고 사는

경은 다 나와 같이 내 집으로의 애착을

줄 알았더니 이 각박한 세상에도 역시 그

은 방 안에 아내의 세간을 모조리 쌓고

것쯤 큰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하루 바

느끼지 못하고 반은 들판에 나앉은 마

와 같은 사람은 있구나 함에, 모든 것을

탁자랑 문갑이랑 필통이랑 양한장(洋漢

삐 망해 주는 것만 주야(晝夜)로 고대(苦

음으로 산다. 내가 이 집을 일컬어 ‘반

다 잃어버린 오늘에도 가장 큰 보물을 얻

裝)의 서책이랑 게다가 뜯을 줄도 모르

待)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나

야초당’이라 한 것은 멋도 아니요 호사

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함을 느낀다. (…)

는 거문고까지 방 한 귀퉁이에 세워 놓

하나뿐 아니리라.

도 아니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고, 내가 사랑하는 현판(懸板)들까지도

그러나 내 마음은 늘 고요했다.

서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

푸대접할 수 없어 문 위에다 돌아가며 걸

‘小樓惟我靜.’ 내 좁은 방 안은 고소상

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어 놓고, 안방 겸 사랑 겸 화소(畵所) 겸

(古小商)처럼 요란하건만 내 마음은 언

들어가는 사람이다.

어린애 공부방 겸 세 식구가 복대기를 치

제든지 평정을 잃은 적이 없다.

니 내가 생각해도 답답한 때가 많다. 답

—『신천지』 1946. 1.(근원 김용준 전집 보유편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

답하다느니보다 ‘나란 사람도 무척 주

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변이 없는 녀석이로구나!’ 하고 자탄(自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歎)할 적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자탄을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

하다가도 우연히 문 위에 걸린 목각 현판

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藝術心)이

을 쳐다보게 되는 때 어느 틈엔지 스르르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에 수록)

그저 나는 집에 사는 것이 아니요 집 이랬자 반분(半分)은 들판에 나앉은 셈이기 때문이다. 나는 외출 후 햇볕 없는 이 우거를 찾 을 때 ‘루카’와 같이 앓는 이들의 집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면서 고개를 숙인 다. (…)

반야초당(半野草堂) 스케치

—『신천지』 1949. 1.(근원 김용준 전집 보유편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에 수록)

내 우거(寓居)하는 집을 가리켜 ‘반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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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읽기 | 골동 취미에 대하여  Essays on Our Virtu by Kim Yong-Jun

항아리는 도적의 배 위에 높이 솟아 있었다 우리들의 해학 넘치는 골동 취미 김용준

근원은 상고주의(尙古主義)에 심취해 상허

람일 것이리라.

이태준, 수화 김환기, 대산 홍기문, 토수 황술조

맛이 아니라, 시인의 방에 걸면 그의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는 줄 아느냐. 그

시경(詩境)이 높아 보이고, 화가의 방

글로도 남겼다. 그 중 해학 넘치는 이야기를

못생긴 눈, 그 못생긴 코, 그리고 그 못생

에 걸면 그가 고고한 화가 같고, 문학

일부 발췌해 소개한다.(편집자 주는 *표로

긴 입이며 다리며 몸뚱어리들을 보고 무

자, 철학가, 과학자 누구누구 할 것 없

표시했다)

슨 이유로 너를 사랑하는지를 아느냐. 거

이 갖다 거는 대로 제법 그 방 주인이

기에는 오직 하나의 커다란 이유가 있다.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상점

나는 고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에 걸면 그 상인이 청고한 선비 같을 뿐

고독함은 너 같은 성격이 아니고서는 위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상품들까지도 돈

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안 받고 그저 줄 것들만 같아 보인다.

등의 친구들과 서화 골동 취미를 즐겼고, 이를

두꺼비 연적(硯滴)을 산 이야기 (…) 요즈음 골동가들이 본다면 거저 준 대도 안 가져갈 민속품이다. 그러나 나는

냐. 웃을 듯 울 듯한 네 표정! 곧 무슨 말

두꺼비는 밤마다 내 문갑 위에서 혼자

근년래에 일약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값을 물을 것도 없이 덮어놓고 사기로 하

이나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서 잔다. 나는 가끔 자다 말고 버쩍 불을

과 높은 자리를 차지한 분들 중에도 얼

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날 밤에 우리 내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 가장 호사스럽게

켜고 나의 사랑하는 멍텅구리 같은 두꺼

굴이 탁 틔고 점잖은 것을 보면 필시 그

외간에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치레를 한다고 네 몸은 얼쑹덜쑹하다마

비가 그 큰 눈을 희멀건히 뜨고서 우두커

들의 사랑에는 추사의 진적(眞跡)이

쌀 한 되 살 돈이 없는 판에 그놈의 두

는 조금도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다. 흡사

니 앉아 있는가를 살핀 뒤에야 다시 눈을

구석구석에 호화로운 장배(裝背)로

꺼비가 우리를 먹여 살리느냐는 아내의

히 시골 색시가 능라주속(綾羅綢屬)을

붙이는 것이 일쑤다. (…)

붙어 있을 것이리라.

바가지다.

멋없이 감은 것처럼 어색해만 보인다.

—『근원수필』 1948. (근원 김용준 전집 1 『새 근원수필』에 수록)

추사 글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미 난 사건 하나가 생각난다. 진(陳) 군은

이런 종류의 말다툼이 우리집에는 한

앞으로 앉히고 보아도 어리석고 못나

두 번이 아닌지라 종래는 내가 또 화를

고 바보 같고…. 모로 앉히고 보아도 그

벌컥 내면서 “두꺼비 산 돈은 이놈의 두

대로 못나고 어리석고 멍텅하기만 하구

꺼비가 갚아 줄 테니 걱정 말아”라고 소

나. 내 방에 전등이 휘황하면 할수록 너

리를 쳤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이 잡문

는 점점 더 못나게만 보이니, 누가 너를

어느 날 밤에 대산(袋山*홍기문)이 “깨

랑에는 갖은 서화를 수없이 진열하고

을 또 쓰게 된 것이다.

일부러 심사를 부려서까지 이렇게 만들

끗한 그림이나 한 폭 걸었으면” 하기에

“차라리 밥을 한 끼 굶었지 명서화(名

었단 말이냐.

내 말이 “여보게, 그림보다 좋은 추사 글

書畵)를 안 보고 어찌 사느냐” 하는 친

구다.

잠꼬대 같은 이 한 편의 글 값이 행여

추사 글씨에 대한 감식안이 높을 뿐 아

추사(秋史) 글씨

니라 일반 서화(書畵), 고동(古董)에 는 대가로 자처하는 친구다. 그의 사

두꺼비 값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내 책상

네 입에 문 것은 그게 또 무어냐. 필시

씨를 한 폭 구해 걸게” 했더니 대산은 눈

머리에 두꺼비 너를 두고 이 글을 쓸 때

장난꾼 아이 녀석들이 던져 준 것을 파리

에 불을 버쩍 켜더니 “추사 글씨는 싫여.

네가 감정을 가진 물건이라면 필시 너도

인 줄 속아서 받아 물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사랑에 안 걸린 데 있나” 한다.

슬퍼할 것이다.

뱉어 버릴 줄도 모르고. 준 대로 물린 대

과연 위대한 건 추사의 글씨다. 쌀이며

첨화로 손수 그림까지 그리는 화가인

로 엉거주춤 앉아서 울 것처럼 웃을 것처

나무, 옷감 같은 생활필수품 값이 올라가

지라 내심으로는 항상 진 군의 감식안

럼 도무지 네 심정을 알 길이 없구나.

면 소위 서화니 골동이니 하는 사치품 값

을 은근히 비웃고 있는 터이었다.

너는 어째 그리도 못생겼느냐. 눈알은 왜 저렇게 튀어나오고 콧구멍은 왜 그리 넓으며, 입은 무얼 하자고 그리도 컸느

김용준,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 삽화.

8

양(梁) 군도 진 군에 못지않게 서화 애호의 벽(癖)이 대단한데다가 금상

너를 만들어서 무슨 인연으로 나에게

은 여지없이 떨어지는 법인데, 요새같이

벌써 오륙 년 전엔가 진 군이 거금을

보내 주었는지 너의 주인이 보고 싶다.

책사(冊肆)에까지 고객이 딱 끊어졌다

던져 추사의 대련(對聯)을 한 벌 구해

나는 너를 만든 너의 주인이 조선 사람이

는 세월에도 추사 글씨의 값만은 한없이

놓고 장안 안에는 나만한 완당서(阮堂

란 것을 잘 안다. 네 눈과, 네 입과, 네 코

올라간다.

書)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늘 뽐내고

와, 네 발과, 네 몸과, 이러한 모든 것이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

그것을 증명한다. 너를 만든 솜씨를 보아

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諸

그런데 양 군 말에 의하면 진 군이 가

너의 주인은 필시 너와 같이 어리석고 못

家)의 법을 모아 따로이 한 경지를 갖추

진 완서(阮書)는 위조라는 것이다. 이

나고 속기 잘하는 호인(好人)일 것이리

어서, 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위조란 말도 진 군을 면대할 때는 결코

라. 그리고 너의 주인도 너처럼 웃어야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千變

하는 것이 아니니,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성격을 가진 사

萬化)의 조화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서

있었다.

“진 형의 완서는 일품이지” 하고 격


찬을 할지언정 위조란 말은 입 밖에도 꺼

제는 또 분주하게 항아리라도 팔아먹고

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우원은 그런 침착

그것들을 통해 흘러오는 옛 형제의 피

내지 않았다.

살아야겠다고 야단이다. (…)

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던지 어쨌던지

를 느끼고 그들의 감각이 어느 모양으

다짜고짜로 덤벼들어 도적의 뒷다리를

로 나타났는지가 궁금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진(陳)이 그 소식을 못 들을 리

헌데 이 항아리 취미가 어찌어찌 전파

없다. 기실 진은 속으로는 무척 걱정을

되었는지는 모르나 어느 때 이상한 소문

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위조라구? 하긴

하나를 들었다.

잡고 늘어졌다.

팔이 부러지고 목이 떨어졌다고, 혹

‘쿵’ 하고 도적이 땅바닥에 자빠졌을

은 금이 가고 이가 빠졌다고 그의 미가

그럴지도 몰라. 어쩐지 먹빛이 좋지 않고

조각가인 조(曺) 군(*조규봉), 화가

때도 항아리는 도적의 배 위에 높이 솟아

어찌 손상함이 있겠느냐. 그럴수록에

옳을 가(可) 자의 건너 그은 획이 이상하

인 최(崔) 군(*최재덕), 시인인 오(吳)

있었다. 도적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더 아름답고 그럴수록에 더 값이 높아

더라니…. 감식안이 높은 진 군은 의심이

군(*오장환)은 모두 내가 친히 아는 젊

그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 시인 백우당이

질 것이 아니겠느냐.

짙어지기 시작했다.

은 친구들이다.

었다. “못난 자식 같으니.” 화가는 시인

고인의 작품을 상품으로서 싸우고,

을 나무라고 그날 밤에 따뜻한 이불 속에

서화 골동을 수집함으로써 헛된 지위

서 재워 보냈다는 것이다.

를 자랑하고, 완물상지(玩物喪志)하

나는 그후 이 글씨가 누구의 사랑에서

조 군이 우연한 기회에 희멀건 항아리

호사를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최근에 들

한 개를 사서 우원(友園) 최 군에게 선사

으니까 어떤 경로를 밟아 어떻게 간 것인

를 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이 우원이란

나는 우원더러 “그럼 그 항아리는 주

는 것만도 우리의 정신생활에는 그 손

지 모르나 진 군이 가졌던 추사 글씨는

친구가 또 꼭 항아리처럼 생긴 데다가 그

어 보냈느냐”고 물었더니 “천만에요. 어

해가 적지 아니하겠거늘, 하물며 청빈

위조라고 비웃던 양 군의 사랑에 버젓하

리는 그림까지 항아리 같은 두루뭉수리

쩌자고 항아리를 줍니까” 하는 것이다.

한 덕을 길러야 할 학문인, 예술인 들

게 걸려 있고, 진 군은 그 글씨를 도로 팔

식 그림을 그리는 친구라 자기 딴엔 조

라고 매일같이 조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

군이 갖다 준 항아리를 무척 사랑해서 잠

우정이 무엇이라는 걸 아는가” 하고.

無識輩)의 행세거리로 내세우는 소위

었다. 추사 글씨란 아무튼 대단한 것인가

들기 전까지는 바라다보고 지내던 판이

—『민성(民聲)』, 1949. 3. (근원 김용준 전집 보유편

‘골동 취미’에 탐닉하여 멀리 학인(學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에 수록)

人)의 진지한 태도까지 상실하게 된다

었다.

보다. —『근원수필』 1948. (근원 김용준 전집 1 『새 근원수필』에 수록)

한번은 시 쓰는 백우당(白牛堂) 오 군 이 놀러 왔다 보고 그만 홀딱 반해서 항

아름다운 도적(盜賊)

나는 다시 우원을 나무랐다. “그대는

이 부질없이 항간의 불학무식배(不學

면 이는 더욱 삼갈 일이 아니랴.

골동설(骨董說)

아리를 달라고 조르다 못해 허행(虛行)

—『근원수필』 1948. (근원 김용준 전집 1 『새 근원수필』에 수록)

을 하고 만 일이 있었다. 이만하면 우리

송(宋)의 미원장(米元章*미불)은 채유

대체 수화(樹話)란 사람은 어찌 된 인간

는 그들이 얼마나 항아리의 미(美)를 심

(蔡攸)와 함께 배를 타고 놀다가 유(攸)

인지 연래(年來)로 —내리 오륙 년을 두

각하게 느끼는 정열을 가졌는지 족히 짐

가 가진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글

고— 번질나게 항아리만 사들이는데 그

작할 수 있다.

씨를 보고 황홀하여 자기의 가진 그림과

(…) 토수(土水*황술조)는 다방면의

생각나는 화우(畵友)들

것도 처음에는 조선조 항아리가 천하일

그런데 그런 지 며칠 후. 우원은 자다

바꾸자 하였으나 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취미를 가져서 우리가 눈도 뜨기 전에

품이라고 그저 길쭉한 놈, 둥그런 놈, 홀

말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잠을

아무리 해도 안 될 줄 안 원장은 글씨

그는 혼자서 구해 왔다는 추사 선생의

쪽한 놈, 뚱뚱한 놈, 씰그러진 놈, 삐뚤어

깨었다. 옆방에서 도적이 막 다녀 나간

를 가슴에 품은 채, 주지 못하겠으면 물

글씨를 걸어 놓고 즐겨 했고, 불상의

진 놈, 허여멀건 놈, 얼룩덜룩한 놈, 아무

뒤였다. 둥글둥글한 우원은 정신을 가다

에 빠져 죽겠노라 하고 별안간 물 속으로

수집과 감상에도 일가견을 가졌던 것

튼 닥치는 대로 값도 묻지 않고 마구 사

듬을 여가도 없이 구르듯 튀어 나갔다.

뛰어들려 하므로 유는 할 일 없이 허(許)

같다. 그리고 다도(茶道)에 깊은 취미

들이더니 작금 양년(兩年) 들어서는 심

맨 먼저 시선이 항아리 있던 자리로 쏘았

하고 말았다. (…)

를 갖고 조원(造園)하는 재주와 화초

지어 고려청자(高麗靑磁) 항아리에서

으나 그에게 가장 귀중한 항아리는 간 곳

삼도화기(三島畵器)에까지 발을 뻗쳐

이 없었다. 우원이 다시 마당으로 튀어

서, 항아리 열(熱)로 말미암아 탕진가산

나갔을 때 캄캄한 밤중에 달 같은 허연

(蕩盡家産)을 하다시피 해 놓고 요새 와

항아리는 막 담을 넘고 있었다.

서는 유여(有餘)하던 수화도 그만 뽕이

불의의 도적에게 준비 없이 손을 대는

빠져서 푼돈에도 쩔쩔 매는 형편인지 이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걸 그도 생각 못

서화뿐 아니라 골동을 사랑하는 사람 도 대개 이러한 심리가 작용한다. 명(明)의 동현재(董玄宰*동기창)는

예의 재주도 놀라웠으나 특히 요리를 만드는 데는 능숙하였다. (…)

그의 「골동설」에서, “골동을 상완(賞玩)

토수는 이렇게 다방면에 긍(亘)한

하는 것은 병을 물리칠 뿐 아니라 수명을

재주를 가진 탓인지 그의 그림에도 항

연장시키는 좋은 놀음이라” 하였다.

상 섬광이 빛났다. 그러나 유감인 점은

달인단사(達人端士)로 더불어 담예논

토수는 몹시 게을러서 좀처럼 그림을

도(談藝論道)를 하여 고인(古人)과 상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좋은

대한 듯 잠심흔상(潛心欣賞)하는 동안

기술을 발휘해 주지는 못한 채 가 버렸

에 울결(鬱結)한 생각이 사라지고 방종

다. 그가 가기 직전에는 동양화도 그렸

한 습관이 고쳐진다 하였다. 그러므로

다. 토수는 퍽 진실하고 침착하고 온정

골동을 완상하는 것은 각병연년(却病延

있고 의리 있는 친구였다.

年)의 좋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토수이면서도 이상하게도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의미로 골

그는 일종의 변태성이 있었다. 동경 있

동을 완상하는 반면에 우리 조선의 경향

을 때 길을 가다 말고 전차에 오르려는

(京鄕)에 산재한 골동가들은 과연 어떠

양장(洋裝)한 여성의 다리에다 쫓아

한가. 한 폭의 서화를 소유하기 위하여

가서 입을 대고 빨았다는 이야기도 내

생명을 도(賭)할 용기가 있겠으며 제왕

가 듣고 웃었거니와, 그는 어느 집이든

의 위엄까지 희생시킬 용의가 있겠는가.

누구의 발에든 윤기가 흐르게 반질반

담예논도는 차치하고 각병연년도 고

질 닦은 구두를 보면 견딜 수 없다는 것

사하고, 골동으로써 우정을 상하고 의리

이다. 그래서 곧잘 남의 집 신장에 잘

를 저버리고 간교하여지고 음모성이 늘

닦아 놓은 구두코를 걸핏하면 핥았다

고 모리심(謀利心)을 기르고 해서야 되

는 것이다. 아무튼 토수는 좋은 친구였

겠는가.

다. (…)

한 개 사기(砂器)를 어루만질 때나, 한 김환기 <무제> 1965. 종이에 펜. 35.5X28cm.

기르는 재주는 비상하였다. 일반 목공

쪽 파와(破瓦)를 얻었을 때나 모름지기

—『근원수필』 1948. (근원 김용준 전집 1 『새 근원수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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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김용준을 말한다 Writings on Kim Yong-Jun and His Works by People Who Love Him

근원 김용준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그의 글을 읽고 좋아하지 않는

복원 불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 만큼 근원의 글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매력이 있다. 시인, 소설가, 화가,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와 연령대의 사람들이 근원을 향한 애정어린 글을 여러 매체에 남겼다. 이는 근원의 호흡이 꺼지지 않길 바라는 선배들이 다음

문화재적 유미幽美

세대에게 건네는 간절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중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며, 수록을 허락해 주신 분들과 매체에 감사드린다.

근원이 잊히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 전우익 외

형,

이제부터 『근원수필』을 읽어 봅

의 수필은 정월대보름 찰밥처럼

른바 모더니즘의 기수로 당시로서는 아

은 도리없는 나의 익애에 근거한다. (…)

묵직하고 찰졌다. 그 맛은 마치

방가르드라고 할 정도의 비평활동을 벌

전집의 두번째 권인 『조선미술대요』에

엔 다음 글이 있어요. 가난이 가져다 주

별 양념 없이 담아 땅에 꼭꼭 묻어 두었

였고 민족적 서정을 ‘황토색’이라는 이

서 그는 우리 민족의 미술을 ‘부드럽고

는 운치,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 스며드

다가 봄에 꺼내 먹는 김치의 맛이었다.

름으로 담고자 할 때 그것이 소재주의에

구수하고 어리석고 아름답다’고 추량한

는 묵흔(墨痕), 완자창(卍字窓), 소담스

우리 어머님은 그런 봄 김치의 맛을 ‘게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높은 예술로 승화할

바 있는데, 이 말은 그의 글에도 적실한

런 희멀건 꽃송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

미’가 있다고 했는데, 그의 글은 읽을수

수 있는 길을 명석하게 외치고 나섰다.

표현이다. 이때의 ‘어리석음’은 대교약

렇게도 고요한 암향(暗香). 알 수 없는

록 글 맛이 그렇게 진득하게 우러났던 것

이때가 아마도 미술평론가로서 근원의

졸(大巧若拙)의 졸렬과 통한다. 무엇보

곳에 신비로움이 깃드는 것 같습니다. 알

이다. 글을 읽고 있으면 그 속에 담긴 그

전성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1940년대에

다 나는 근원의 호고취미(好古趣味)에

면 신비로움은 사라지나 봐요. 우린 자

의 마음이 내 몸과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

들어서면 근원은 『문장(文章)』지 동인

바탕을 둔 옛날투의 한문 문장에서 눈이

꾸 알려 하는데 알 수 없는 것이 참 소중

며들어 금방 내 살이 되고 따뜻한 내 피

으로서 주옥같은 수필을 기고하고 또 이

먼다. (…) 과장하건대 근원의 글쓰기를

한 듯합니다. 알 수 없는 게 많은 사람이

가 되어 내 말이 되어 주었다. (…) 이 책

잡지의 표지 장정을 맡아지금 보아도 고

‘복원 불가능한 문화재적 유미(幽美)’라

신비롭게 사는 것 같아요. 남몰래 흘리는

(『조선미술대요』)은 미술사의 대략적

아(古雅)한 북디자인 작업을 해냈다. 당

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새 근원수필』의

눈물은 암류(暗流)라 한대요. (…) 형, 쓰

인 줄거리를 기술한 책이지만, 글쓴이가

시 김기림, 정지용, 이태준 같은 문사들

문재(文才)가 어디 가겠는가. 전집의 나

려면 끝이 없어요. 그런데 이 편진 읽지

고구려의 벽화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내

이 아름다운 수필을 많이 발표한 것은 한

머지 글도 형식은 논문이되 문체의 곰삭

마시고 원전인 『근원수필』을 읽으소. 그

살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 힘이 절로 솟

국현대문학사의 뚜렷한 자취인데 특히

은 맛이 독자의 흥을 불러일으킨다. (…)

책에서 무엇을 어떻게 길어 올리는간 형

아나고, 백제나 신라의 예술품들을 이야

근원의 수필은 문인화가적 편모와 모더

근원의 수필은 까무룩하게 멀어진 전 시

몫이지 누구도 거들지 못하지요. 전 『근

기 할 때는 예술품들을 다듬고 있는 그때

니스트다운 세련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대의 추억과 향수를 눈앞에 불러모은다.

원수필』을 만난 걸 큰 행운이라 여깁니

그 사람들의 모습이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뛰어난 문체로 그가 화가인지 문장가인

근원 읽기는 맹목적인 의고취향(擬古趣

다. 평생을 두고 읽을 책이니까요.

글쓴이의 감정이생생하게 드러나는 것

지 알 수 없게 했다. 근원은 미술사에도

向)에 머물지 않고 세월에 묻힌 참가치

—전우익(작가, 농부)

이다. (…) 나는 『근원수필』을 읽고 나서

조예가 깊고 높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를 오늘 다시 그루갈이하는 일이기도 하

「『근원수필』 읽기」 『사람이 뭔데』(현암사, 2002)

『조선미술대요』를 읽었다. 수필을 읽은

8·15 광복이 되자 서울미대 교수로 『조

다.

뒤 흐뭇하고 즐겁고 괜히 서성거렸던 그

선미술대요』를 저술한 것은 단순히 한국

—손철주(미술평론가)

맛이 『조선미술대요』를 읽는 마음으로

미술사 교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부드럽고 구수하고 어리석고 아름다운」 『꽃 피는

쉽게 이어졌다. 『근원수필』과 『조선미술

미에 대한 자신의 미학을 집약적으로 기

대요』가 마치 한 권의 책인 것처럼 느껴

술한 것이었다.(…)

졌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내 머리 맡에

—유홍준(미술사학자)

놓아 두니, 세상이 든든하고, 흐뭇하고,

『동아일보』, 2002. 11. 15.

니다. 첫머리에 나오는 「매화」

중에서

행복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 속에 내

이란 실은 종이와 그 위에 얹힌 문 자 부스러기들에 불과하고 그 문

자들의 질서인 문장일 뿐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금방 다 된 떡시루의 김처럼 모락

작(寡作)이었고 글에서 과작(過

자와 문장들에 머물지 않고 저 나르시스

모락 피어오른다.

作)이었다. 넘치는 글솜씨가 그 덕에 남

의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택(시인) 『동아일보』, 2001. 2. 9.

아 사후 삼십여 년 만에 다섯 권의 책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실은 스스로를 거울

로 묶였으니, 그것이 ‘근원 김용준 전집’

에 비춰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비

원 김용준은 도쿄미술학교에서

이다. 이 전집은 근원이 본색을 넘어 천

춰지지 않는 책을 누가 책이라고 하겠는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우리 근

생의 글쟁이임을 증언한다. 전집의 백

가. 좋은 옛글들은 그래서 잘 닦인 거울

대미술 초기의 화가였다. 그러나 그의 미

미는 『새 근원수필』이란 제목이 붙은 제

들이다. 그 위에 비친 모습이 바로 각각

술활동은 화가보다도 이론가로서의 역

일 첫 권이다. 나머지 네 권은 주로 논문

의 미래요, 진리의 그림자가 아닐까. 『근

할이 더 두드러졌다. 1930년대, 근원은

형식이라 비교가 마뜩치 않다. 그러함에

원수필』만한 예술가들의 거울이 있다는

이제 막 서양화에 눈뜬 우리 화단에서 이

도 『새 근원수필』을 으뜸으로 치는 까닭

것이 우리 문장을 거울로 삼는 이들에겐

10

혼을 넣어 키우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김용준, 『근원수필』 표지화.

삶에 홀리다』(오픈하우스, 2009) 중에서.

원은 아닌 게 아니라 그림에서 과

상한 것은 그것이 ‘책인 이상’ 종이와 문


복이다. 조금이라도 ‘예술적’이고자 하

냥 편하게만은 읽히지 않는다. 수필에 등

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는 자의 축복이다.

장하는 김환기, 이상범 화백, 소설가 이

—송명주(출판편집자)

—장석남(시인) 『경향신문』, 2003. 5. 2.

태준, 현진건과의 우정, 교류 이야기도

『매일경제』, 2015. 7. 6.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격조 있는 문체

용준은 특별히 화려한 문체를 자

는 말할 것도 없고 종종 등장하는 한시

랑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용도 무

(漢詩), 시서화(詩書畵)에 정통한 글을

엇 특별할 게 없다. 『근원수필』에서는 저

읽노라면 월북해 『근원수필』 속편을 썼

게 되더라고. 뭐가 휙 시커먼 게 지나갔

자 김용준의 ‘월북의 조짐’ 같은 것은 전

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허망한 생

어. 이렇게 보니까 내가 처음 보는 매화

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일상의 세목을

각도 해 본다. 단순한 신변잡기에서 벗어

야. 우리나라 사람은 저렇게 그리는 사람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그 잔

나 자꾸 읽게 만드는 유려한 문장, 한자

이 없었어. 조그만 데다가 매화만 그리

잔함이 요즘같이 비틀고 뒤집고 억지수

어가 많아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까닭은

고. 그려도 달라. 눈에 확 띄더라고. 들어

를 써야만 겨우 존재를 인정받는 세태에

유식함을 뽐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서 얼마냐고 그러니까, 송 선생이 사면

서 오히려 적잖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

어린 사람들이 꼭 읽어 근원 선생이 보여

공부 삼아 사는 거니까 하고 싸게 주더라

내의 지청구를 받으면서까지 두꺼비 연

주었던 감성과 지성의 깊이를 체험했으

고. 통인가게라고 하는 책 파는 데였어.

적을 구한 이야기라든지, 벗에게 판 집이

면 좋겠다.

나중에 보니까 근원 선생이 그린 거였어.

불뚝불뚝 값이 뛰어도 배 아파 하기는커

—이인재(정치인) 『경향신문』, 2017. 3. 9.

사 오고 나서 집에서 보니까 말야. 예전

녕 벗이 미안해 하며 보내 준 몇 푼의 사

느 날 인사동을 걸어가는데, 지나 가다가 뒷걸음 쳐서 다시 한 번 보

김용준 <범부 김정설 초상> 1942.

에 『근원수필』을 읽은 적이 있어서 알았 변잡기부터 시절 인연, 시대 유감,

지. 그래서 그때부터 아주 귀하게 여겼

인물이다. 그린 이는 근원 김용준이라고

야기 등이 그것일 터. 게다가 그의 전공

작가론, 작품론에 이르기까지 다

어. 내가 그런 데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하는데 보는 순간 근원의 냄새가 물씬 풍

분야에 관련된 글, 예를 들어 조선조 최

양한 소재와 주제의 글이 혼재돼 있는

않았지. 사람들이 그림이라는 게 색깔이

긴다. (…)

대의 기인 화가 최칠칠이라든지 겸재 정

『근원수필』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

많은 게 좋은 줄 알지? 시커먼데 보통 솜

단장을 집고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오원 장승업, 추사 김정희 등에 대한

간을 관통한 어느 예술가의 삶과 철학이

씨가 아니야. 화제(畫題)를 봐도 얼마나

앉은 사십육 세의 범부 선생의 모습은 마

수필 같은 것은 우리 미술에 대한 새삼스

담백하면서도 멋스러운 필치로 그려져

겸손해. 나를 따를 자 없다, 뭐 이런 말이

치 시골 촌늙은이 같아 부담 없이 다가

러운 관심까지 덤으로 불러일으킨다. 한

있다. ‘그려져 있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하나도 없어. 아직 속된 선비의 수준을

서서 말을 걸 수 있게 묘사되어 있다. 하

권의 조촐한 수필집에 이런저런 군더더

이, 김용준이 생생하게 감각한 시대상과

면치 못했으니 잘 봐 주쇼, 하는 거야. 허

지만 둥근 안경과 턱수염은 양(洋)의 동

기 말을 붙일 것 없다. 남북정상회담의

심사(心思), 선인들의 예술혼, 동시대 예

허.

서를 넘나들며 막힘없던 그의 철학 정신

감격이 식기 전에 월북한 한 지식인에게

술가들과 함께한 호흡 등이 그림처럼 펼

—송영방(동양화가)

이 보인다. 이는 적당한 농담을 섞어 거

눈길을 던져 보는 것도 무척 의미있는 경

쳐진다. 책을 읽고 나면 내가 김용준이

<매화>(p.3 왼쪽)에 대한 구술기록. 2017. 8.

친 붓 터치의 선묘로 선생의 사상가라는

험이 될 것이다.

살았던 시대의 한복판으로 시간여행을

—김남일(소설가) 『국민일보』, 2000.6. 18.

떠나 김용준의 소소한 넋두리나 신념에

례에서 진한 우정을 느낀다든지 하는 이

무거운 이미지를 살포시 익살스럽게 그

찬 목소리를 직접 듣고, 김용준이 의와

교면에서 주체를 부르짖기 시작

범부가 썼다. 오른쪽 상단에는 ‘자조(自

실과 부딪혀 소음을 내지 못하는

정을 맺은 부류에 끼어 함께 담소하고,

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미술 쪽에서도

嘲)’라 하고 ‘반세기 동안 무엇을 하였는

글들이지만, 자유를 갈구했던 그

김용준이 조선시대 산수화가들을 비롯

주체적인 미학 및 창작방법론의 정착을

가(半世聊爲耳)’라고 썼다. 왼쪽에는 ‘범

의 글들 곳곳에는 조선 선비의 깐깐한 서

해 최북, 임희지, 장승업에 대해 자상하

위한 노력이 생겨나는데, 그 대표적인 장

영운(凡影云, 범부의 그림자 즉 범부의

슬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서슬은 완상

게 펼치는 미술사 강설을 육성으로 듣는

르가 조선화였다. 김용준의 <춤>은 바로

초상화라 하더라)’이라 하였고, 그 밑에

(玩賞)의 미학을 체화한 서슬이어서 더

듯한 환상에 잠기게 된다. 문체의 격조는

이런 흐름 속에 꽃피어난 조선화의 이정

는 임오년 가을날에 근원이 그렸음을 나

욱 시퍼렇다. 조선 선비의 개결함은 솔직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스러운 국한문체

표적 작품이다.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

타냈다. 족자를 가져 온 분은 효당(曉堂)

함과 호방함을 동반할 때 완성된다. (…)

서술로도 현대인들의 감성과 지성을 깨

의적 내용을 담는다’는 ‘주체미학’의 입

최범술(崔凡述, 1904-1979) 선생의 부

조선 회화사의 빛나는 정신사가 절연되

우는 김용준의 탁월한 감수성과 표현력

장에서 보면 내용상 너무 서정적일 수 있

인이시다. 주지하다시피 효당은 경상도

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근원은, 위대한 예

는 이 그림이 ‘조선화의 고전’으로 인정

다솔사(多率寺)란 절을 중심으로 불교

술은 완성된 인격의 반영이라고 못박았

을 받는 것은 형식상 기존의 그림들과 뚜

와 학교를 통한 애국 운동과 전통차 운동

다. 그런데 이 고루한 질책이 왜 이렇게

렷이 구분되면서 새화법을 여는 선구자

을 한 분이다. 효당과 범부와 근원은 모

새롭게 다가오는 것일까. 술(術)이 아니

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 인물화가

두 경상도 분으로 일찍이 모두 일본에 건

라 도(道)가 우선이라는 이 케케묵은 가

주종이 된 조선화는 선맛을 잘 살리면서

너가 공부하였고, 분야는 불교학·철학·

르침 앞에서 나는 왜 속수무책인가. 근

밝은 색채를 적극 사용하는 것을 그 기본

미술로 달랐으나 암울한 시기를 서로 도

원은 「시(詩)와 화(畵)」에서 『채근담』을

으로 한다. 선명성과 간결성 또한 대중

와 가며 민족을 위해 애쓴 애국자였다.

인용하며 이렇게 꾸짖는다. “고작 (…)

의 이해를 위해 긴요한 것으로 얘기된다.

각 분야에서는 모두 독보적 존재인데, 이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무

〈춤〉은 그런 면에서 전형을 보여 주었다.

족자 속에는 세 분으로 인한 일제 말의

현금(無絃琴)은 뜯을 줄 모르니 그 정신

여백과 흰 옷이 담백하고도 순결한 인상

분위기를 엿 볼 수 있어서 좋다. 족자 첫

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좇아다니

을 주는 한편 강약의 리듬을 타고 휘감아

부분에는 효당의 글씨로 ‘김범부 선생 초

는데 어찌 금서(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

도는 선들은 화면을 당당히 지배한다.

상 근원작(金凡父先生肖像 近園作)’이

가 있겠느냐.”

—이주헌(미술평론가) 『한겨레』,1993. 3.11.

라 적혀 있다.

십년대 후반, 북한 정권은 정치 외

려낸 근원의 탁월한 솜씨다. 글씨는 모두

—이문재(시인) 『한겨레』, 1998. 12. 22.

—김영복(문화재감정위원) 부(凡夫) 김정설(金鼎卨, 1897-

1966) 선생은 소설가 동리(東里)

야말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김시종(金始鍾)의 친형으로, 동서양 사

수필이라지만 미술사가로서의

관점에서 쓰인 전문적인 내용도 많아 그

『법률신문』, 2012. 10. 8.

김용준, <춤> 부분. 1957.

상에 능통하였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11


근원 김용준의 전작 목록  A Complete List of Works by Kim Young-Jun

김용준 아카이브를 위하여 수필, 미술사, 미술평론, 회화, 장정

이 목록은 2017년 9월 현재까지 파악된 정보를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론 『문장』, 1939. 9.

담고 있다. 지금도 계속 새로운 글과 작품 들이

회화적 고민과 예술적 양심 『문장』, 1939. 10.

발견되고 있고, 월북 이후의 자료는 정확한

한묵여담(翰墨餘談) 『문장』, 1939. 11.

파악이 어려운 상황이라 지속적인 보유(補遺)가

동일(冬日)에 제(題)하여 『여성』, 1939. 12.

최수성(崔壽誠)의 그림과 일본인의 칼 『주간서 울』 제84호, 1950. 4. 24.

「동미전(東美展)」을 개최하면서 『동아일보』, 제9 회 「미전(美展)」과 조선 화단 『중외일보』,

1930. 4. 12-13.(2회)

필요하다. 여기 포함되지 않은 글과 작품을

표정(表情)과 의상(衣裳) 『조광』, 1940. 1.

소장하고 계시거나 알고 계신 분들의 협조를

소루유아정(小樓惟我靜) 『신천지』, 1946. 1.

단원 선생의 회화 『신천지』, 1949. 1.

기대한다.

역마차 『서울신문』, 1947. 9. 16.

단원 김홍도 『신천지』, 1950. 1-2.

거지를 보고 『서울신문』, 1947. 9. 29.

겸현(謙玄) 이재(二齋)와 삼재설(三齋說)에 대하

저서 『근원수필(近園隨筆)』, 을유문화사, 1948.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 을유문화사,

1949.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과학원 출판사, 1958.

털보 『학풍』, 1948. 10. 레오나르드 다 빈치 『세계명인전(世界名人傳) 中』, 조광사, 1948. 12. 30. 반야초당(半野草堂) 스케치 『신천지』, 1949. 1. 기도(碁道) 강의 『학풍』, 1949. 3. 아름다운 도적(盜賊) 『민성(民聲)』, 1949. 3. 쓰리꾼의 도덕 『조선일보』, 1949. 4. 26-27. 『강희자전(康熙字典)』과 감투 『학풍(學風)』, 을 유문화사, 1949. 4.

수필 신세일가언(新歲一家言) 『조선일보』, 1936. 1.

5.

화가의 눈 『조선일보』, 1949. 5. 4-6. 정기(正氣)의 수호신 탁영(濯纓) 선생 『신천지』,

1949. 5.

서울 사람 시골 사람 『조광』, 1936. 1.

제 버릇 개 못 준다 『신천지』, 1949. 7.

한운야학(閑雲野鶴)의 연명(淵明)을 본받아 『조

키다리 수화(樹話) 김환기론(金煥基論) 『주간서

광』, 1936. 2. 겨울달밤 성북동 『여성』, 1936. 5. 백치사(白痴舍)와 백귀제(白鬼祭) 『조광』,

1936. 8. 모델과 여성의 미 『여성』, 1936. 9. 미술 『조광』, 1938. 8. 선부(善夫) 자화상 『여성(女性)』, 조선일보사,

1939. 1. 석분음재(惜分陰齋) 『조광』, 1939. 1. 이조시대의 인물화 『문장』, 1939. 2; 「조선시대 의 인물화」 『새 근원수필』 말과 소 『조광(朝光)』, 조선일보사, 1939. 6. 화가와 괴벽(怪癖) 『조광』, 1939. 7. 고독 『문장(文章)』, 문장사, 1939. 8.

울』 제57호, 1949.10.17. 과중왕(果中王) 『신인(新人)』 제1-4호, 문예서 림, 1949년 10-11월 합호. 서글픈 취미 『자유신문』, 1950. 1. 1. 십삼 급(級) 기인(碁人) 산필(散筆) 『학풍』,

1950. 2. 눈물로 참새를 그린 이징(李澄) 『주간서울』,

1950. 5. 1.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선생 『계우(桂友)』

30호, 1950. 생사를 초월하고 싶다 『신인(新人)』 제2 -3 호

1950. 4. 1. 김명국(金明國)의 술타령 『주간서울』 제82호,

1950. 4. 10.

2. 28-3. 5.(7회)

취미(趣味). 수록 매체 및 연도 미상.

미술사

속(續) 과정론자와 이론확립 『중외일보』, 1928.

여 『신천지』, 1950. 6. 조선화의 표현형식과 그 취제(取題) 내용에 대하 여 『력사과학』 2호, 1955.

18세기의 선진적 사실주의 화가 단원 김홍도 『력 사과학』 4호, 1955. 우리 건축의 특색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문화유 산』, 1958년 1호. 조선화 기법 『조선미술』, 1959년 5-11호. 백제 복식에 관한 자료 『문화유산』, 1959년 6호. 단원 김홍도의 창작활동에 관한 약간한 고찰 『문 화유산』, 1960년 6호. 우리 공예품의 특색을 살리기 위한 몇 가지 의견 『문화유산』, 1961년 2호. 리조 초기의 명화가들 안견, 강희안, 리상좌에 대 하여 『문화유산』, 1961년 4호. 조선화의 채색법 『조선미술』, 1962년 7-10호.

1930. 5. 20-28.(8회)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만들고 『동아일보』,

1930. 12. 23. 「동미전(東美展)」과 「녹향전(綠鄕展)」 『혜성』,

1931. 5. 종교와 미술 『신생』 10호, 1931. 「서화협전」의 인상 『삼천리』, 1931. 11; 「제1회 「서화협전(書畵協展)」의 인상」 『민족미술론』. 화단(畵壇) 일 년의 회고 『신생』, 1931. 12. 미술에 나타난 곡선 표징(表徵) 『신동아』, 1931.

12. 우수해 보이는 넉 점—혼미저조의 조선미술전람 회를 비판함 『동광』, 1932. 7. 화단 일 년의 동정 『동아일보』, 1935. 12. 27-

28.(2회)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鄕土色)의 음미 『동아 일보』, 1936. 5. 3-5.(3회) 이마동 개인전 『동아일보』, 1938. 6. 4; 「「이마동 (李馬銅) 개인전」을 보고」 『민족미술론』. 기술적 진보의 일반적 불평균 『조선일보』, 1938.

미술평론 화단개조(畵壇改造) 『조선일보』, 1927. 5. 18-

20.(3회) 무산계급(無産階級) 회화론 『조선일보』, 1927.

5. 30-6. 5.(6회)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 『조선일보』, 1927. 9.

18-30.(9회) 엑스프레셔니즘에 대하여 『학지광(學之光)』,

1927. 과정론자(過程論者)와 이론확립 『중외일보』,

1928. 1. 29-2. 1.(4회)

10. 8; 「제2회 「전국조선학생미술전람회」를 보고」 『민족미술론』. 화집 출판의 효시 『조선일보』, 1938. 11. 17. 서양화 감상법 『조선일보』, 1939. 4. 28-5. 2.(3 회) 매너리즘과 회화 『조선일보』, 1939. 6. 11. 전통에의 재음미 『동아일보』, 1940. 1. 14-16. (2회) 심산(心汕)의 산수화 『매일신보』, 1942 . 10 .

10-11.(2회) 명일의 조선미술 『자유신문』, 1946. 1. 1. 잃어진 예술감정의 탐색에서 『중앙순보』 제4호,

1946. 1. 1. 민족문화 문제 『신천지』, 1947. 1. 미적 사색의 지표—윤희순 씨의 『조선미술사 연 구』 『서울신문』, 1947. 2. 25. 광채나는 전통 『서울신문』, 1947. 8. 2-10.(4 회) 광채나는 전통 『신한민보』, 1947 . 10 . 2 -11 .

27(7회) 문화 일 년의 회고 『서울신문』, 1948. 12. 29. 「국전」의 인상 『자유신문』, 1949. 11. 27-30.(2 회); 「제1회 「국전(國展)」의 인상」 『민족미술 론』.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미 『서울신문』, 1949 .

12. 3-4. 민족적 색채 태동 『동아일보』, 1949. 12. 1. 고미술 계몽의 의의 『조선일보』, 1949. 5. 31-6.

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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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채의 신비성 『동아일보』, 1950. 3. 「리석호 개인전」을 보다 『조선미술』, 1957년 3 호. 우리 미술의 전진을 위하여 『조선미술』, 1957년

3호. 사실주의 전통의 비속화를 반대하여 『문화유

1940. 9. 조선 신미술문화 창정대평의(創定大評議) 고희 동(高羲東)・이상범(李象範)・이여성(李如 星)・고유섭(高裕燮)・길진섭・심형구(沈亨 求)・이쾌대(李快大)・김용준・문학수(文學 洙)・최재덕(崔載德), 『춘추』, 1941. 6.

통에 대한 왜곡 『문화유산』, 1960년 3호.

개인 소장. 〈매화〉 1948. 종이에 수묵. 26.5×18cm. 개인 소장. 〈기명절지(器皿折枝)〉 1949. 종이에 수묵과 담 채. 개인 소장.

산』, 1960년 2호. 회화사 부문에서의 방법론상 오류와 사실주의 전

기미술관. <매화> 1947. 종이에 수묵과 담채. 24×36cm.

<매화> 1940 년대. 종이에 수묵과 담채. 108 ×

그림

30cm. 개인 소장. 〈춤〉 1957. 종이에 채색. 177×82.5cm.

기타 산문 고저(庫底)로 갑시다 『조선일보』, 1936. 7. 23. 잊지 못할 그 강과 그 산 『조광』, 1936. 8. 내 집의 화분 『조광』, 1938. 1. 화가가 본 여인 『여성』, 1938. 4. 정계(政界)에 보내는 나의 건의 『동아일보』,

1946. 8. 20. 『정음발달사(正音發達史)』 서(序) 홍기문, 『정 음발달사』, 서울신문사, 1946. 웅장한 글씨 광개토대왕비 『주간 소학생』 제18 호, 1946. 6. 10. 제일 오래 된 그림 고구려의 벽화 『주간 소학생』 제19호, 1946. 6. 17. 우리 손으로 된 일본 법륭사의 벽화 『주간 소학생』 제22호, 1946. 7. 8. 세계의 보물 이씨조의 백사기 『주간 소학생』 제

23호, 1946. 9. 2. 신라 때 명필 김생 선생 『주간 소학생』 제26호,

1946. 9. 23. 고려의 명화가 이녕(李寧) 『주간 소학생』 제28 호, 1946. 10. 21. 조선의 명화가 김홍도(金弘道) 『주간 소학생』 제

31호, 1946. 11. 11. 오원(吾園) 장승업 선생 『주간 소학생』 제32호,

1946. 11. 18. 나의 당부—정직한 사람이 되라 『소학생』, 1947.

3. 3. 대(大)깐디의 사저(私邸) 『경향신문』, 1948. 12.

23. 변월룡에게 보내는 편지 1955. 5. 5. 당과 정부의 기대에 보답하고자 『조선미술』

1958년 9호.

서양화 〈동십자각(東十字閣)〉 1924. 캔버스에 유채. 〈이태준(李泰俊) 초상〉 1928 . 캔버스에 유채.

32.5×24cm. 〈자화상〉 1930. 캔버스에 유채. 60.8×45.7cm. 도쿄예술대학 박물관. 〈달리아와 백일홍〉 1930. 캔버스에 유채. 60×

41cm. 국립현대미술관. 〈여인상〉 1931. 캔버스에 유채. 도쿄미술학교 졸 업작품. 〈바다〉 1936. 캔버스에 유채. 23.5×32.5cm. 〈풍경〉 1942. 종이에 크레용과 파스텔. 〈스케치〉 연대미상. 〈여인상〉 연대미상. 종이에 채색. 94×62cm. 〈손톱 깎고 있는 자화상〉 연대미상.

민간단체의 확대 강화책: 서화가 제씨의 의견 『동 아일보』, 1935. 1. 1. 초유의 예술 종합논의—문화인의 진지한 기염 이

31×17cm. 〈운산구심(雲山俱深)〉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과 담채. 38×21cm. 개인 소장. 〈만산추의(滿山秋意)〉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과 담채. 43×32.5cm. 개인 소장. 〈매화〉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 120×32cm. 개 인 소장. 〈수선화〉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과 담채. 34 ×

19.8cm. 개인 소장. <메추리>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과 담채. 개인 소 장.

표지화 및 삽화 『신가정(新家庭)』, 신동아사, 1933. 2. 1. 『달밤』, 이태준(李泰俊) 저, 한성도서주식회사,

동양화 〈학수(鶴壽)〉 1941. 종이에 수묵. 24×35.5cm. 개인소장. 〈송로석불로(松老石不老)〉 선면(扇面). 1941. 종이에 수묵과 담채. 15.5×41.5cm. 〈문방정취(文房情趣)〉 1942. 종이에 수묵과 담 채. 29×43.5cm. 〈나리꽃〉 1942 . 종이에 수묵과 담채. 122 .6 ×

32.6cm. <범부(凡夫) 김정설(金鼎卨) 초상> 1942. 종이에 수묵. 51×33cm. 개인 소장. 〈문방부귀(文房富貴)〉 1943. 종이에 수묵과 담 채. 23×104cm. 〈산수〉 1 9 4 3 . 종이에 수묵과 담채. 2 9 .5 ×

41.5cm. 〈산수〉 1944. 종이에 수묵과 담채. 32×22cm. 개인소장.

대담

〈흑조(黑鳥)〉 연대미상. 종이에 수묵과 담채.

〈화훼〉 6폭 병풍. 1944. 종이에 수묵과 담채. 각

137×27cm.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1944. 종이에 수묵 과 담채. 24×32cm. 환기미술관.

1934. 7. 10. 『문학과 지성』, 최재서(崔載瑞) 저, 인문사,

1938. 6. 20. 『이심(二心)』, 염상섭 저, 박문서관, 1939. 5. 10. 『농업조선(農業朝鮮)』 제2 권 제3 호, 대동출판 사, 1939. 3. 1. 『문장(文章)』, 문장사, 1939. 4. 『문장』, 문장사, 1939. 5. 『문장』, 문장사, 1939. 6. 『문장』, 문장사, 1939. 7.(7집-증간호) 『문장』, 문장사, 1939. 8. 『문장』, 문장사, 1939. 9. 『문장』, 문장사, 1939. 11.

『문장』, 문장사, 1940. 5. (표지화는 길진섭) 『문장』, 문장사, 1940. 12. 『문학의 논리』, 임화(林和) 저, 학예사, 1940. 12.

20. 『무서록(無序錄)』, 이태준 저, 박문서관, 1941.

9. 5.

〈화훼〉 10폭 병풍. 1946년경. 종이에 수묵과 담

『화사집(花蛇集)』, 서정주 시집, 남만서고,

사치와 취미를 말하는 좌담회 김진섭(金晉燮)・ 김용준・이건혁(李健赫)・신봉조(辛鳳祚) ・이헌구(李軒求)・계용묵(桂鎔默), 『여성』,

〈강산무한호(江山無限好)〉 1947. 종이에 수묵과 담채. 23.5×40.5cm. 〈수화소노인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

1947. 종이에 수묵과 담채. 155.5×45cm. 환

1946. 6. 6. 『석초시집(石艸詩集)』, 신응식(申應植) 저, 을유 문화사, 1946. 6. 30. 『잔등(殘燈)』, 허준(許俊) 저, 을유문화사, 1946.

9. 20. 『고시조신석(古時調新釋)』, 신영철(申瑛澈) 저, 연학사, 1946. 10. 25. 『돌다리』, 이태준 저, 박문출판사, 1946. 『해방문학선집』, 종로서원, 1946. 삽화 8점. 『무녀도(巫女圖)』, 김동리(金東里) 저, 을유문화 사, 1947. 5. 10. 『복덕방』, 이태준 저, 을유문화사, 1947. 5. 20. 『소학생』 7월치 , 조선아동문화협회, 1947. 7. 1. 『근원수필(近園隨筆)』, 을유문화사, 1948. 『피리』, 윤곤강(尹崑崗) 저, 정음사, 1948. 1. 30. 『임꺽정(林巨正)』(전10권), 홍명희(洪命憙) 저, 을유문화사, 1948 『근원수필(近園隨筆)』, 김용준(金瑢俊) 저, 을유 문화사, 1948. 6. 30. 『조선 의복・혼인제도의 연구』, 홍주경(洪姝瓊) ・홍무경(洪茂瓊) 공저, 을유문화사, 1948. 7.

20. 『정정(訂正) 역대조선문학정화(歷代朝鮮文學 精華)』, 이희승(李熙昇) 편저, 박문출판사,

1948. 10. 1.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 저, 종로서 원, 1948. 10. 5. 『계우(桂友)』 제28호, 중앙중학 문예부, 1948.

9. 1. 『학풍(學風)』, 제1권 제1호, 을유문화사, 1948.

9. 28. 『민성(民聲)』, 제4 권 제9 -10 호, 고려문화사,

1948. 10. 20.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 을유문화사,

1949.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 김용준 저, 을유

致煥)・안석주(安碩柱)・길진섭(吉鎭燮)・

1940. 1. 4.

芝薰)・박두진(朴斗鎭) 공저, 을유문화사,

『문장』, 문장사, 1940. 10.

『문장』, 문장사, 1941. 3.

인섭(鄭寅燮)・김광섭(金珖燮), 『동아일보』,

『청록집(靑鹿集)』, 박목월(朴木月)・조지훈(趙

『문장』, 문장사, 1939. 12.

〈난(蘭)〉 1945. 종이에 수묵. 개인소장. 채. 개인소장.

문화사, 1946. 5. 30.

『해』, 박두진(朴斗鎭) 저, 청만사, 1949. 5. 15.

하윤(異河潤)・서광○(徐光○)・유치환(柳 임화(林和)・정래동(丁來東)・김용준・정

『지용시선(芝溶詩選)』, 정지용(鄭芝溶) 저, 을유

문화사, 1949. 6. 15. 『약혼자에게』, 김동인(金東仁) 저, 박문출판사,

1949. 8. 10. *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함께 그 린 삽화도 많이 있으나, 이는 별도로 목록화하 지 않았다.

1941. 『춘추(春秋)』, 조선춘추사, 1941. 11. 1. 『증보가곡원류(增補 歌曲源流)』 함화진(咸和鎭) 저, 종로인문사, 1943. 5. 5. 『도강록(度江錄)』, 박지원(朴趾源) 저, 이윤재 (李允宰) 역, 대성출판사, 1946. 5. 10.

13


근원 김용준 전집  The Complete Works by Kim Yong-Jun

근원의 방대한 글은 1920-1960년대에 걸쳐 발표되었지만, 오십여

‘오늘의 언어’로 되살린 우리 미술사의 보고寶庫

년 후를 사는 지금 세대에게는 어느새 낯설고 어려운 표현들이 많다. 열화당은 ‘근원 김용준 전집’을 기획하며 가능한 한 원문을 존중함을 원칙으로 하되, 지금 우리의 독서감각에 맞도록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한자 노출을 한자 병기로, 오래된 한자 술어는 우리 말로, 인명과 작품명은 지금의 것으로 바꾸었고, ‘이 책을 읽는 사전’ 식의 풀이를 페이지마다 달고, 인용된 한문 구절이나 한시를 번역했다. 또한 그의 회화 작품, 단행본 및 잡지 장정, 사진과 그밖의 여러 자료들을 연보와 함께 모아 근원의 삶과 그 족적을 ‘온전히’

근원 김용준 전집 읽기

보여 주고자 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에 흩어져 있던 우리 미술사의 보고(寶庫)를 ‘김용준’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었다는 데 이 전집의 가치가 있다.

새 근원수필

“근원 선생이 말씀하길 수필다운

근원 김용준 전집 1

수필이란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

발행일 2001년 1월 1일 면수 288면 가격 18,000원 도판 흑백 50여 컷 ISBN 978-89-301-0017-5

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 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글’이라 했 으니, 다름 아닌 선생의 말씀 그대 로 ‘완성된 인격의 반영’임에 틀림

새 근원수필

보급판

판형 및 장정 A5, 반양장 발행일 2009년 10월 1일 면수 288면 가격 15,000원 도판 흑백 50여 컷 ISBN 978-89-301-0354-1

『근원수필』(1948)은 20세기 한국 수필문학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1948년 초판본에 실린 30 편을 고스란히 살리고, 당시 미수 록되었거나 1948년 이후 잡지, 신 문 등에 발표된 글 23편을 더해 모 두 53편을 엮은, 김용준 수필의 완 결판이다. 초판본의 형식대로 1부 는 짧고 가벼운 글, 2 부는 화인전 (畵人傳)을 비롯한 미술관련 글로 구분하여 구성했다. 근원이 남긴 그림과 삽화, 참고 사진과 작품을 적절히 배치해 시각적인 이해를 도 왔다.

이 없다. 하지만 그건 이상의 경지 일 터, 선생은 덧붙여 ‘마음속에 부 글부글 괴고만 있는 울분을 어디 호 소할 길이 없어 가다오다 등잔 밑에 서, 혹은 친구들과 떠들고 이야기하 던 끝에 공연히 붓대에 맡겨 한두 장 씩 끄적거리다 보니’ 그게 그만 수 필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걸 수필의 알맹이라고 믿는다. 『근원수필』을 읽다 보면 정말 그렇다. 풍속이 보 이는가 싶으면 무슨 취미도 보이고, 어떤 사람도 보이다가 어느덧 예술 가가 나서는가 싶더니 금새 고전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어디 그뿐인 가. 근원 선생이 지닌 감성의 깊이 는 물론 지성의 성찰까지, 아무튼 삶의 내음이 한결같다.” —최열(미술평론가)

차례 발간에 부쳐 / 해제-최열 / 1부 매화. 게. 말 과 소. 검려지기(黔驢之技). 선부 자화상. 조어삼 매(釣魚三昧). 구와꽃.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 『강희자전』과 감투. 털보. 신세일가언(新歲一 家言). 한운야학(閑雲野鶴)의 연명(淵明)을 본받 아. 석분음재(惜分陰齋). 고독. 머리. 표정과 의 상. 모델과 여성의 미. 답답할손 X선생. 팔 년 된 조끼. 안경. 동해로 가던 날. 추사 글씨. 김 니콜라 이. 은행이라는 곳. 답답한 이야기. 쓰리꾼의 도 덕. 신형 주택. 이동 음식점.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 동일(冬日)에 제(題) 하여. 육장후기(鬻莊後記). 원수원과 정판교와 빙허와 나와. 생각나는 화우들. 화가와 괴벽. 백 치사(白痴舍)와 백귀제(白鬼祭). 화가의 눈. 기 도(碁道) 강의. 십삼 급 기인(碁人) 산필 / 2부 시 와 화. 미술. 예술에 대한 소감. 회화적 고민과 예 술적 양심. 골동설. 거속(去俗). 한묵여담(翰墨餘 談). 조선조의 산수화가. 조선시대의 인물화. 최 북과 임희지. 오원(吾園) 일사(軼事). 청전 이상 범론. 승가사의 두 고적. 광개토왕 호우에 대하여 / 발(跋) / 수록문 출처 / 김용준 연보 / 찾아보기 / 어휘풀이 찾아보기

를 다룬 「삼국 이전의 미술」부터 일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제 강점기의 「암흑시대의 미술」까

근원 김용준 전집 3

조선미술대요

한 향기를 풍기는 꽃은 흔치 않다.

근원 김용준 전집 2 발행일 2001년 1월 1일 면수 272면 가격 18,000원 도판 흑백 180여 컷 ISBN 978-89301-0018-2

1949년에 출간되었던 근원 김용준 의 『조선미술대요』를 내용의 정확

『새 근원수필』 해제 「근원을 담은 그릇」

성을 기하여 새롭게 복간했다. 조선

중에서

미술의 발생에서 낙랑미술의 시비

지 우리나라 미술의 역사와 각 시대 의 성격, 특징 등을 해당 시대의 작 품과 함께 자세하게 다루었다. “선생의 『조선미술대요』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미술사 지식을 담 은 그릇도 아니다. 『대요』는 조선미 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나가고 싶 어했던 한 예술가의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미술의 특징을 찾아 나섰다. 고유섭(高裕燮) 선생을 비 롯해 후학들의 발자취가 구비구비 마다 비슷비슷한 꽃들이 피웠거니 와, 내가 보기에 선생만큼 맑고 담백 무엇보다도 문장의 유연함과 유장 함이 으뜸이다. 탄력과 깊이, 게다 가 긴 숨결이 읽는 이를 붙잡아 빠져 나오기 힘든 매력이 있다. 얼핏 전문 낱말로 가득찬 지식을 늘어 둔 것처 럼 딱딱해 보이지만, 줄마다 스며들 어 있는 맛깔스러움이 일품이다. 그 것은 아마 스스로 고백하듯 ‘내가 보 고 느낀 대로 이야기하듯 기록해 본 것’이기 때문일 게다. 우리가 한 번 도 본 적이 없는 진솔한 내면의 기록 으로서 미술사는 그처럼 천연스레 탄생했던 것이다. ” —최열(미술평론가) 『조선미술대요』 해제 「아름다움의 발견」 중에서

발행일 2001년 7월 10일 면수 288면 가격 20,000원 도판 컬러 흑백 97컷 ISBN 978-89-301-0021-2 수상 및 선정 2002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

근원이 월북하기 전후 발표한 6 편 의 글에 조선화 기법에 대한 2편의 글을 더해, 모두 8편의 글을 한데 묶 은 근원의 조선조 ‘화가론’이자 ‘회 화론’. 화가로서 쌓았던 경험들을 토대로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기술 한 그의 화가론과 회화론들은 가히 조선조 회화 연구의 시원이라 할 수 있으며 사료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화가로서의 근원 선생은 그 발표된 작품의 수가 워낙 과작인 데다가 문 학잡지 등의 표지화 같은 막간적인 작업이 많아 한마디로 그 세계를 짚 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대상을 순간 적으로 파악하여 문기(文氣)있게 해석해내는 작품의 특장(特長)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교분 을 나누었던 문인이나 화가의 인물 화를 수묵화 혹은 수묵담채화로 빠 르게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분이 필 묵의 일회적 구사에 능숙했고 소묘 력 또한 비상했음을 알 수 있다. 동 경미술학교를 졸업한 분이었지만 호분을 많이 써서 꼼꼼하게 여러 번 덧칠하면서 그려 가는 전통 일본화

차례 발간에 부쳐 / 해제-최열 / 자서(自序) / 범 례(凡例) / 서론(緖論) / 1. 삼국 이전의 미술: 조 선미술의 발생에서 낙랑미술(樂浪美術) 시비까 지 / 2. 삼국시대의 미술: 삼국시대 미술 개관 / 3. 신라통일시대의 미술: 백화난만(百花爛漫)한 불 교미술의 황금시대 / 4. 고려시대의 미술: 불교미 술의 여성시대(餘盛時代) / 5. 조선시대의 미술: 유교정책으로 변화되는 미술 / 6. 암흑시대의 미 술: 국권의 상실과 말살당한 문화 / 김용준 연보 / 찾아보기

방식을 수용한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단원이나 현재 혹은 사 임당풍의 맑고 담담한 한국 전통회 화의 미의식을 계승하려는 입장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회화에 대한 그 러한 입장은 본인의 작품에서뿐 아 니라 저술에서나 혹은 교육 일선에 서도 일관되게 견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의 이러한 창작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평론은 물론 미술사 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글에는 한결 같이 소신과 철학이 담겨 있다. ” —김병종(동양화가, 서울대 교수) 『조선시대 회화와 화가들』 해제 「한

근원 김용준 전집(전6권, 왼쪽)과 『새 근원수필』 보급판(오른쪽).

14

전인적 미술가의 숨겨진 행보」 중에서


근원이 직접 그린 그림들로 표지를 꾸민, 오십 주기 기념 ‘근원 김용준 전집’ 백 부 한정판 리커버. 2017.

차례 발간에 부쳐 / 해제-김병종 / 朝鮮時代 繪 畵와 畵家들 조선시대 초기의 명화가들 안견, 강 희안, 이상좌에 대하여. 겸현(謙玄) 이재(二齋)와 삼재설(三齋說)에 대하여. 단원 김홍도. 18세기 의 선진적 사실주의 화가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 도의 창작 활동에 관한 약간한 고찰. 조선화의 표 현형식과 그 취제(取題) 내용에 대하여 / 附-朝 鮮畵의 技法 조선화 기법. 조선화의 채색법 / 수 록문 출처 / 김용준 연보 / 찾아보기 / 어휘풀이 찾아보기

김용준이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도

하에서 그의 시대의식은 구시대의

여전히 연구와 창작활동을 계속했

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확립하

음을 내외에 알리는 신호이자 북한

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그의 미술론

에서의 활동 내용에 대한 보고이다.

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그

(4편) / 3. 민족문화론(5편) / 4. 전통미의 재조명 (3편) / 5. 화단시평 (畵壇時評)(18편) / 6. 그 밖 의 산문(6편) / 수록문 출처 / 김용준 연보 / 찾아 보기 / 어휘풀이 찾아보기

학부 동양화과의 지침이 되다시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한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 우리 그림을 그릴 것

또한 그 자체로는 고구려 고분벽화

의 미술론은 순수예술론을 지향했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

라는 특정한 역사유적, 미술 장르에

지만 민족문화 건설이라는 시대적

근원 김용준 전집 보유판

했거든요. 대체로 그때 화가들은 미

대한 최초의 연구서라는 의의를 지

과제를 실천하는 것이 그 실제 목표 였다고 할 수 있다. 서양화가로 출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의 편견과 아집의 벽에 가로막히지

했던 김용준의 미술비평은, 『호산

발행일 2007년 5월 20일 면수 136면 가격 15,000원 도판 컬러 흑백 121컷 ISBN 978-89-301-0279-7

술사, 미술의 본질, 미술의 시대성

닌다. 다른 한편 『벽화연구』는 기존 근원 김용준 전집 4

않는 근원의 시야와 연구방식, 점

외기』와 『근역서화징』과 같은 전통

차 높아 가던 현실 이념의 벽을 넘

적 화론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서구

‘근원 김용준 전집’(전5권) 발간 이

말초적인 방법론만 가르쳤죠. 그런

어서지 못한 서술이 어우러져 빚어

적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아 사실성

후 새로 발굴한 근원의 글과 작품,

데 근원 선생은 미술에서의 근본적

내는 기묘한 울림의 악보이기도 하

과 주관적 표현성을 동시에 강조하

사진 등으로 꾸민 보유판(補遺版).

인 정신을 가르쳤고, 우리 미술이 가

발행일 2001년 7월 10일 면수 208면 가격 15,000원 도판 흑백 107컷 ISBN 89-301-0022-8

인가 하는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

등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대 개 선생이 가르치는 것을 답습하거 나 모사하는 정도였고, 실기에서도

다.”

는 등 근대적 미학의 특징을 드러내

수필 9편을 포함해 새로 발굴한 글

야 할 길을 제시했어요. 이것이 우리

근원이 월북 이후 진행한 고구려 고

—전호태(울산대 교수)

어, 전통과 현대 미술비평을 연결시

13편, 그리고 동양화 1점과 장정(裝

미술에 공헌한 근원 선생의 크나큰

분벽화에 대한 연구성과를 담아, 과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해제 「벽을 넘은

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미술

幀) 15점, 사진 10점을 새로 수록했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에서

연구, 벽에 가린 서술」 중에서

론은 해방 후 전문적인 미술이론으

다. 또한 좀더 풍성해진 연보와 저작

—서세옥 구술 「나의 스승 근원 김용준

로보다는 아마추어적인 글로 받아

목록이 포함되었으며, 근원의 제자

을 추억하며」 중에서

들여졌는데, 이는 해방 후 한국의 학

인 서세옥 화백의 회고를 실어 근원

계가 고유섭의 문헌 자료 검증방법

의 월북 전 생활과 교육자로서의 면

을 고고미술사학적 접근방법으로,

모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를 마 련했다.

‘예술사 연구 총서’ 제1집으로 1958 년 출간했던 『고구려 고분벽화 연 구』를 복간한 것이다. 이는 그 자체

차례 발간에 부쳐 / 해제 - 전호태 / 서론 / 1. 고 분 / 2. 벽화 / 3. 벽화의 연대 문제 / 결론 / 김용 준 연보 / 찾아보기 / 어휘풀이 찾아보기

로 고구려 고분벽화라는 특정한 역

차례 이 책을 엮으며 / 나의 스승 근원 김용준을 추억하며-서세옥 / 작은 누각에 고요히 앉아: 새 로 발굴된 근원의 글 소루유아정(小樓惟我靜). 역마차. 거지를 보고. 반야초당(半野草堂) 스케 치. 아름다운 도적(盜賊). 정기(正氣)의 수호신 탁영(濯纓) 선생. 제 버릇 개 못 준다. 서글픈 취 미. 눈물로 참새를 그린 이징(李澄). 미적 사색의 지표. 정계(政界)에 보내는 나의 건의. 화가가 본 여인. 변 선생./ 넘실대는 푸른 물결 앞에서 먹 향 기를 맡고: 근원의 회화와 장정 작품 / 해방과 전 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진과 함께 보는 근원의 일생 / 근원 김용준 저작목록

사유적, 미술 장르에 대한 최초의 연

민족미술론

그의 독일미학의 철학적 논리와 양

구서라는 의의를 지니며, 고구려 벽

근원 김용준 전집 5

식적 분석을 각각 미학과 미술사 방

화고분의 편년체계 및 고분벽화 변

발행일 2002년 11월 1일 면수 344면 가격 22,000원 도판 흑백 54컷 ISBN 978-89-301-0041-0 수상 및 선정 2003년 문예진흥원 우수예술도서

법론으로 계승했기 때문으로 볼 수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있다. (…) 비평가·작가·교육자로

시급한 문제로 일본화풍의 청산을

서 김용준의 역할과 예술정신 면에

강조하셨습니다. 선생의 논리는 아

서 현대 동양화단에 끼친 영향은 근

주 분명했죠. 일본화는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미술사에서 지나칠 수 없

일본 사람의 그림으로, 풍토가 다르

는 부분이다. 김용준은 그가 이 년

고 감정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배

간 재직한(1946 -1948 ) 서울대학

경이 다른 그림이라는 겁니다. 한마

근원 김용준 전집

교 미술대학 회화과의 방향설정에

디로 일본화는 굉장히 섬세하고 빈

전 6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해방 후

약하고 가벼워서 불면 날아갈 것 같

일본화풍에 대한 거부반응이 대두

은 그림인데, 우리 그림은 그게 아니

값 108,000원 세트 ISBN 978-89-301-0044-1

되었던 시기에 그 대안으로 교(巧)

라는 거죠. 삼면이 바다인 반도지만

와 공(工)을 초월하는 문인화 정신

우리는 대륙적인 그림을 그렸고, 자

을 주장했던 그의 이론이 설득력있

유스럽고 분방하고 생명력있는 그

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인 것으로 볼

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수 있다. ”

가능한 한 채색보다는 먹을 중심으

—정형민(서울대 교수)

로 그려야 한다고 하셨죠. 이렇게 근

『민족미술론』 해제 「근원의 미술론과

원 선생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재

작품세계」 중에서

료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인가를 구

천과정에 대한 연구서로서뿐 아니 라 북한 사학사(史學史) 연구자료 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다시 읽 으면서 놀란 눈길과 안타까운 마음 으로 우리 주변을 가리고, 우리 자신 을 덮고 있는 이 땅, 이 시대의 ‘벽’ 문 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대로 좌우 에 가득 늘어선 건물들이 채광창 크 기의 작은 쪽문만을 출입구로 만들 어 놓았을 때, 대로 한가운데에서 이 를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스치는 느 낌, 이런 것이 학문과 학문, 사람과 사람, 직업과 직업, 그 외의 온갖 것 사이사이에 놓인 벽을 확인하는 순 간 우리의 가슴에도 와 닿지 않을까. (…) 근원의 『벽화연구』는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이던 화가이자 학자

­

동경미술학교 유학시절인 1927년 부터 월북 이후 1961년까지 여러 신 문·잡지·학술지 등에 실렸던 근원 의 미술론과 미술평론, 산문 등 모 두 41편을 한데 모아 엮었다. 빈약 한 우리 근대미술사에 풍성한 목록 을 제공해 주는 사료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혼란스러웠던 근대기에 민족문화 건설이라는 도정(道程) 속에서 김용준이 전개한 미술론의 궤적을 한눈에 살필 수 있게 해준 다. “김용준에게 근대적인 자각은 무엇 보다도 시대의식에 기초한 것이었 다. 식민지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

차례 발간에 부쳐 / 해제-정형민 / 1. 우리 미술 계의 개조를 주창함(5편) / 2. 아름다움을 찾아서

근원 김용준 전집 오십 주기 기념 표지 한정판 가격 108,000원, 100부 한정판

체적으로 명확하고 간명하게 제시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술대학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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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미술사 사전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Art by Choi Youl

한국 근현대미술 지도 문헌자료에 기초한 미술사 연구

“나

는 이 책을 우리나라 근현

헌자료를 착실하게 조사해 나갔고,

대미술 지도로 만들고 싶

이렇게 하나하나 쌓이는 자료에 대

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사실을

한 비평과 해석 작업을 병행했다.

시대순으로 늘어놓는 그런 지도나

십오 년간의 자료 조사와 문헌 비평

연표 만들기가 아니라, 도화서 화원

및 해석의 결실이 『한국근대미술

들이 그린 그림지도 같은 것을 그리

의 역사』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

고 싶었다. 그 그림 안에는 사람과

다. 그 중 『한국근대미술의 역사』가

사건도 보이고, 작업실 풍경과 교육

1998년 초판 출간 후 2006년 신판

기관,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람회 풍

을 거쳐 2015년 개정판으로 선보였

경은 물론, 숱한 이론가들이 모인 사

다. 이 개정판에서는 그동안의 연구

상의 전당도 보일 수 있도록 했다.

성과에 따라 일부 내용을 추가, 수정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韓國現代美術의 歷史

또한 나는 의식의 지도를 그리고 싶

하였으며, 연도 및 인명의 오류를 바

韓國美術史 事典1800-1945

韓國美術史 事典 1945-1961

었다. 시대의 움직임과 그에 대응하

로잡았다.

저자 최열 판형 및 장정 B5, 양장 발행일 초판 1998년 1월 15일, 재판 2006년 7월 2일, 개정판 2015년 11월 10일 면수 560면 가격 40,000원 도판 흑백 150여 컷 ISBN 978-89-301-0490-6 EBOOK 수상 및 선정 1999년 제2회 한국미술저작상

저자 최열 판형 및 장정 B5, 양장 발행일 2006년 7월 2일 면수 920면 가격 60,000원 ISBN 89-301-0193-3 EBOOK 수상 및 선정 2007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2007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2008년 간행물 문화대상

는 미술가의 의식, 집단의 활동과 흐

『한국근대미술 비평사』는 『한국

름을 통해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추

근대미술의 역사』와 짝을 이루는,

적하고자 했다.”

근대 시기 ‘미술비평’의 분야만을 심도있게 조명한 후속편이다. 19세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는 작품론,

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근

작가론 및 이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

대기 미술사학·미술비평의 역사와

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문헌자

이론을 시기별·특징별로 서술했다.

료에 대한 기초조사가 빈약한 조건

이 책 역시 2016년 초판을 출간한 지

에서 행한 해석이어서, 적지 않은 문

십오 년 만에 재판을 내면서, 저자의

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 착

감회를 담은 서문이 더해지고, 그동

안했던 저자는 1990년대초부터 우

안 발견된 오류들을 수정했다.

차례 개정판 서문 / 초판 서문 / 봉건시대의 미술 / 19세기의 미술 / 19세기 말, 20세기초의 미술 / 1910년대의 미술 / 1920년대 전반기 / 1920년대 후반기 / 1930년대 전반기 / 1930년대 후반기 / 1940년대 전반기 / 연표 / Summary / 찾아보기한국 / 찾아보기-일본 / 일본인명 한자로 찾아보 기

차례 머리말 / 연구의 자취와 관점의 전환 / 1940 년대 후반기 / 1950년대 전반기 / 1950년대 중· 후반기 / 부록: 조선공화국의 미술 / 찾아보기

한국근대미술 비평사

가격 30,000원 도판 흑백 89컷 ISBN 978-89-301-0024-3 EBOOK 수상 및 선정 2002년 문예진흥원 우수예술도서 차례 근대미술 사상을 발견하는 즐거움 / Summary / 1. 19세기 미술이론 및 비평 / 2. 20세 기초 미술이론 및 비평 / 3. 조선미술론의 형성과 정 / 4. 조선미술론의 성장과정 / 5. 프롤레타리 아 미술논쟁 / 6. 심미주의 미술논쟁 / 7. 김복진 의 전기 미술비평 / 8. 김복진의 후기 미술비평 / 9. 김복진의 형성미술이론 / 10. 임화의 미술운 동론 / 11. 전미력의 미술운동론 / 12. 김용준의 초기 미학·미술론 / 13. 윤희순의 민족주의 미 술론 / 14. 박문원의 미술비평 / 註 / 附錄 미술 비평가들의 삶과 예술 / 20세기 미술비평사 인명 사전 / 수록문 출처 / 찾아보기

저자 최열 판형 및 장정 B5, 반양장 발행일 초판 2001년 9월 15일 재판 2016년 4월 1일 면수 272면

리 근현대시기의 모든 미술 관련 문

책과 선택32 book and idea

발행일 2017년 9월 14일 발행처 책과선택 편집실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25 열화당 전화 031-955-7000 팩스 031-955-7010 www.youlhwadang.co.kr yhdp@youlhwadang.co.kr

다시 ‘근원 김용준’을 말한다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져 간 근원 김용준. 남한에서의 그의

이 아니라, 시대의 이념이 우리에게서 그의 존재를 박탈한 것이라고 해야

실질적인 활동기는 대체로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던 1926년부터 한국전

맞겠다.

쟁 중 월북하던 1950년까지인데, 이중에서도 주목되는 시기는 이태준,

해금(解禁) 이후 김용준이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고, 그의 수필은 ‘이십세

길진섭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예지 『문장(文章)』을 발행하던 때(1939-

기 수필문학의 진수’라고 평가되면서 교과서에까지 수록되었다. 궁핍한 살

1941)를 중심에 놓고 그 앞뒤를 아우르는 약 십 년간이 아닐까 싶다. 『문

림에 골동집에서 ‘두꺼비 연적’을 사들여 아내에게 갖은 타박을 들은 그가,

2017. 9. 14 -10. 15

장』뿐 아니라 당시의 유수의 잡지와 주요 일간지에 수필과 미술사, 미술평

“두꺼비 산 돈은 이놈의 두꺼비가 갚아 줄 테니 걱정 말아”라고 소리를 치며

성북동 문화공간 17717

론 글을 발표하고, 또 문기(文氣) 넘치는 장정(裝幀) 작업을 하던 때였다.

썼다는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니, 긴 세월이 흘렀지만 과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수필은 김용준”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나왔

연 그의 말대로 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편집 이수정 조윤형 박미

매화와 붓꽃 근원 김용준과 존 버거의 글 그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177-17 개관 수-일 오후 1-7시 휴관 월-화, 전화 010-4441-7717 www.17717.co.kr project17717@gmail.com

대표 김선문 전시디자인 장시각융합소 포스터디자인 안마노 후원 및 협력 청년허브, 환기미술관, 온그라운드갤러리, NOL

전시 연계 특별 강연 및 대담

을 성싶다.

열화당에서 출간한 ‘근원 김용준 전집’도 그의 존재를 알리는 데 나름의

남한에서의 사십칠 년 동안 근원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백 편에

역할을 했을 것이라 자부하는데, 그러나 이 뛰어난 인문주의자의 진가를 아

가까운 글을 발표했다. 그에게 많은 호칭이 뒤따르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직도 모르는 이가 많다. 삼십팔 년이라는 세월의 공백도 컸지만, 여전히 분

‘전인적 인문주의자’였다.

단의 벽이 가로막고 있으며, 우리 사회가 예전과는 비할 데 없이 부박(浮薄)

그런 그의 존재가 잊혀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 9월 월북 이후부터다.

해졌기 때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십 주기를 맞는

와우북페스티벌 | 상상마당 | 9월 24일(일) 5시

물론 북한에서는 계속해서 뚜렷한 존재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다시 김용준

근원 김용준을 다시금 ‘소개’하고자 한다. 어둠의 시대, 혼란의 시대를 빛나

근원 김용준의 삶과 예술 | 최열

이라는 이름이 남한 사회에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삼십팔 년 만인 1988년

게 살아낸 그의 역사가 분명 우리의 거울이 될 것임을 믿으면서.

존 버거의 삶과 예술 | 김현우 최재원 백다흠

성북동 17717 | 9월 28일(목) 5시

ⓒ 2017 by Youlhwadang Publishers Printed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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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Editorial

으로, 그가 이미 서거한 지 이십 년이 지난 후였다. ‘월북작가의 도서 판매 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였다. 그러므로 근원은 삼십팔 년 동안 잊혀진 것

조윤형(趙尹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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