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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14

(사)민주언론시민연합


글순 서

글순서 여는글 광주순례일정안내 광주항쟁일지 광주항쟁 당시 언론보도 송건호 선생님 소개 송건호 선생님 연표 리영희 선생님 소개 리영희 선생님 연표 김태홍 선생님 소개 및 연표 위르겐힌츠페터 기자소개및 연표 열사 소개 (구)묘역 배치도 함께 부르는 노래 조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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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34년 전 5월이 돌아오다 화정고등학교 고 건 호

그날의 함성 영원히 울릴 거라 믿었지만 34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함성은 간데없고 기계부품이 되어버린 오늘의 우리들은 좀 더 고성능의 부품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공정을 받고 있다 34년 전 뜨거웠던 몸부림은 볼펜 굴러가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버리고 34년 전 아버지들이 잡아냈던 승냥이들이 이리로 둔갑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하루하루 자기를 잘라 이리들의 간식으로 던져 준다 34년 전 아버지들이 울부짖던 함성소리는 이제 5월의 행사가 되었고 다녀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집을 나선 아버지들은 차디찬 추모비 돌탑 안에 갇혀버렸다 기계가 되어버린 우리, 몸속에 흐르는 기름이 다시 피가 되어 아버지들의 함성을 꽃 피우자 돌탑 안에 갇힌 웃음이 돌아오는 그날까지 * 2014년 5․18 민중항쟁기념 서울청소년대회(문예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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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순례 일정

날짜

14일

시간

일 정

6:50

민언련 사무실 집결

7:10

광주로 출발

7:10

~11:30 5․18 및 청암 송건호 선생님, 리영희 선생님 영상 관람

11:30

~12:30 광주 도착 및 점심식사

12:30

~13:00 망월동 묘역 이동

13:00 14:00 15:30

~14:00 ~15:30 ~16:30

비고

송건호/리영희/김태홍 선생님 묘역 참배 특별강연 <5.18 광주와 국가폭력> 구 묘역 참배

17:00 ~18:00

저녁식사

18:00~

서울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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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항쟁 일지

5․18 민중항쟁 직전의 역사 1 9 7 9 년

국회,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10월 16일 부산대, 동아대생의 ‘정권타도’ 교내시 위 및 시민 합세한 가두시위 전개 (부 산민주항쟁) 10월 18일 마산민주항쟁 학생시위와 관련하여 부산 비상계엄령 발표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전국 비상계엄 령 선포 11월 19일 전국 대학 휴교 해제 12월 6일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긴급조치 9호 해제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발생, 신군부는 정 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 10월 4일

대통령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 의위원회’ 발족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군보안사령 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 4월 30일 계엄사령관 지휘관회의, 노사분규, 학 원소요 등 폭력 엄단키로 결의 5월 6일 학원자율화 입영훈련철폐 요구하며 대 학가 가두시위 전개 5월 14일 광주지역 대학생 등 1만여 명 가두진 출, 도청광장에서 ‘민주화 성회’ 진행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 시민 20여만 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요구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5월 18일 5·18 민중항쟁 발발 3월 13일

5․18 광주민중항쟁 상황일지 민중항쟁의 발발

◀ 부산민주항쟁

1 9 8 0 년

윤보선, 김대중 등 정치인 687명에 대한 복권 조치 단행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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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맑음)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시내 각 대 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24시 00분

(일요일, 맑음)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10시 00분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10시 15분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 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10시 20분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 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15시 40분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 서 진압작전 감행 19시 02분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 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8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03시 00분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 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4시 40분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15시 00분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 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16시 30분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 영찬이 계엄군의 총에 의해 부상 20시 00분 수만 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08시 00분 고등학교 휴교조치 10시 20분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 속 옷만 입은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 민간의 공방전 계속 18시 40분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가 전조 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20시 10분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 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21시 50분 광주MBC 건물 방화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5월 20일

계엄군의

5월 19일

발포와

무장봉

(수요일, 맑음) 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 엄군과 공방전 전개 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 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4시 30분 광주KBS 건물 방화 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 단 병력과 충돌 10시 15분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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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교체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11시 10분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몰고 온 장 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13시 00분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 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 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14시 15분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해산 종용 하는 설득 방송 14시 35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 용트럭, 장갑차 수십 대 획득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16시 00분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 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 (LMG) 2대 설치 17시 30분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10시 19분

해방광주

(목요일, 맑음) 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10시 30분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13시 30분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21시 30분 박충훈 신임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11시 25분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1시 45분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 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3일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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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 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5월 24일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 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20분

(일요일, 비) 11시 00분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 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 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5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 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 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 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 을 귀가 조치 시킴.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6일

*최후의 항쟁

(화요일, 맑음)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 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 민군들에게 사격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전역 장 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5월 27일

항쟁이후 민주화 과정 1980년 5·18 이후

5·18사망자 129구의 시신을 망월동 시립묘지 3묘원에 안장 5월 30일 서강대생 김의기 ‘학살정권 타도’를 외치며 투신 6월 9일 ‘광주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노동자 김종태 분신 12월 9일 광주 미문화원 방화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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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전두환 12대 대통령 취임 5월 18일 5·18 1주기 추모식 거행,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 5월 27일 서울대 침묵시위, 김태훈 투신 사망 3월 3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5월 18일 경찰의 원천봉쇄로 5·18 2주기 추모 식 무산, 유족 30여 명만이 위령제 거행 10월 12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5·18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단식투쟁 중 옥사

김대중 귀국 2월 12일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승리 5월 18일 5·18 5주기 추모식에 야당의원, 재야 인사, 종교인 등 500여 명 참석 5월 23일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8월 15일 노동자 홍기일 금남로에서 분신 12월 2일 광주 미문화원 점거 농성 2월 8일

3월 18일

1983년

유족, 부상자의 격리조치로 5·18 3주 기 추모식 무산, 묘지이장 회유정책으로 유족 일부 이탈 10월 9일 미얀마 랭군사건 발생 11월 12일 미국대통령 레이건 방한, 광주학살 배후조정 등 내정간섭 중지요구 반미시위 5월 18일

민주시민운동의 폭발 1986년

서울대생 이재호, 김세진 “반전 반핵 양키고홈” 외치며 분신 5월 18일 시민, 학생 천여명 참석한 추모제 거행 10월 28일 건대사건 발생 4월 28일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표 3월 6일 호남대 졸업생 표정두 “미국무장관 방 한 반대”하며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분신 5월 18일 추모식, 위령제, 기념예배 등에 수십 만 명의 시민 참여 6월 10일 6월 항쟁 발생,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광주시민 30만 명 시위 7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장례식 거행 1월 16일

1984년

3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5·18 4주 기 추모식 거행 8월 30일 경찰의 명동성당 난입 11월 18일 3개 대학생들 민정당사 점거 시위 5월 18일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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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총선, 6공화국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광 주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성격 규정 5월 18일∼27일 준합법적인 5·18행사 진행 11월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및 청문회 가동 4월

1989년

조선대생 이철규 사인 진상규 명 투쟁 및 5·18 9주기 추모식 거행 5월 18일∼27일

1990년

전야제에서 부활제까지 41개 단체 연합한 5월 행사 진행 5월 18일∼27일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망월동 참배 저지 5․18문제해결 5대 원칙(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집단배상, 명예회복, 기념사업) 확정 3월 18일

1994년

5․18학살책임자에 대한 고소 및 고발운동 전개 1995년

학살책임자 처벌운동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백골단에 의해 타살 5월 18일∼27일 정신계승결의대회에서 5월영령 부활제까지 다양한 5월 행사 진행 5월 26일 분신 자살한 전남대생 박승희 장례식 에 학생, 시민 20여만 명 참여 4월 26일

1992년 2월 25일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

5․18학살책임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 원회 구성 7월․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전두환, 이희성 등 7명을 국회위증죄로 고발 8월 5․18학살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전개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부정축재혐의로 서울구 치소에 구속 수감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 5·18특별법 제정을 민 자당에 지시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 12․12 및 5․18사건관 련 혐의로 구속 수감 7월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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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노태우 등 5․18학살책임자 8 명 내란혐의로 기소 1월 23일

오월항쟁의 의의 5·18민중항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소산이다. 조선말기의 갑오농민혁명, 일제 강점기의 3·1 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학생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1997년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형 등 5․18학살책임자들 형벌 확정 4월 29일 정부 5․18민중항쟁 국가기념일 제정 4월 17일

5․18신묘역 준공식 5월 18일 정부주관 5․18 17주년 기념식 5월 16일

1999년 5월

5․18자유공원 조성 (영창, 법정 이전)

밑으로부터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던 것이다. 5·18민중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 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 대 전환점으로 자리잡았다. 5·18민중항쟁은 당시에는 피의 진압으로 패배 하였지만 이후 전개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유신체제를 계승한 제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 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증거가 되었고, 나아가 서는 불법적인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정치 군부 세력을 심판하였으며 마침내는 부당한

2000년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무장항쟁

5월 18일

이 국민저항권의 적극적 행사로 인정되기에

정부주관 5․18민중항쟁 20주년 기념식

2001년

5․18기념문화관 건립 12월 21일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제정 5월

이르렀다. 5․18민중항쟁 시기의 수준 높은 나 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 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압제에 저항 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 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5․18민중항쟁은 저항과 단죄를 넘어 나눔과

2002년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 시행, 7월 27일 국립5·18묘지로 승격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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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 연대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우리 모두가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인류 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나가야 할 우 리 모두의 유산이다.


광 주항 쟁 당시 언 론보 도

80년 5월, 언론은 비겁했다 80년 5월, 당시 언론은 광주의 진실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왜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군부에 대해 서는 찬양으로 일관했다. 만일 언론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 았으리라는 의문과 반성을 되새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 발발 후, 광주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방송 과 신문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3일 후인 5월 21일부터였다.

학생 시민들 광주서 소요. 중앙일보 (1980년 5월 21일)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정에 의한 폭 동으로 몰고 갔다.

계엄사령부는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 동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세력이 대거 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이 보였다. 광주에 내려가 사실 무근한 유언비어를 날 고 있는 것이 멀리서 조선일보 (1980년 5월 25일) 조하여 퍼뜨린 데 기인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신문 (1980년 5월 21일)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면 ‘한국방송 ☞ 이는 기사라고 보기 어려운 계엄사령 벗기는 이북방송을 들으라’고 권유하 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데 그쳤 은는 못사례,믿으니 데모나 소요의 개념으로 다. 초기 보도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계 파악할 수 도저히 없다는 군당국의 설명이다. 엄사의 발표문을 옮겨 놓았다 하더라도 서울신문 (1980년 5월 26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후속기사 역시 다르 지 않았다. 당시 조선일보 사설은 간첩들의 유언 어떤 기사도 공수부대 과잉진압에 대해서 ☞비어에 선동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모든 언론 이러한 의한 상황을 역시 유언비어로 사태가 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폭도들의 난동, 악화된 바 있는 일본 광동 대지진 당시와 12


비교하기까지 했다. 사회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또는 격앙된 군 중 속에서 간첩이나 오열이 선동하고 파괴 와 방화, 살상의 선봉적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피흘 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 리상태에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분별력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57년 전, 일본 광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 살의 역사가 반교사적으로 우리에게 쓰라 린 교훈을 주고 있다. 조선일보 (1980년 5월 25일)

☞ 광주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보 도들만 봤다면 광주에 대해서 어떤 생각 을 했을까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아 마도 불순분자, 공산주의 폭동, 무정부상 태, 폭도, 이런 단어들만이 떠오르지 않았 을까. 따라서 5월 27일 새벽에 무자비하게 광주 시민군을 덮친 계엄군의 행위가 신 중을 거듭한 군의 노고 끝에 나온 것이라 는 신문사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 다.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조선일보 (1980년 5월 28일)

☞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한 강제진압 후 에 5․18 광주의 진실은 묻혀버리고 80년 6월 이후부터는 광주에 대한 보도는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다. 방송도 물론 이와 다 를 게 없었다. 현재 MBC, KBS 역시 당시 의 방송자료가 보관돼 있지 않다. 그러나 5·18 당시에 텔레비전 보도를 지켜 본 사 람들은 모든 방송이 신문과 다름없이 계 엄당국의 나팔수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침묵과 왜곡 이후에 벌어진 것 은 당시 신군부에 대한 찬양이었다. 모든 언론은 당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상 임위원장이던 전두환을 실권자로 전면에 내세우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시죠. -예. -그동안 국보위가 발족된 이후에 괄목할 만한 사회개혁 사업의 전개로 해서 새로운 광주 시내 출입 당분간 제한, 시민 피해 시대의 개막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 없도록. 중앙일보 (1980년 5월 27일) 합니다. 그동안 국보위를 만드시고 또 맡 으셔서 노고가 크시겠습니다마는 전 장군 새벽 3시 반 군투입 개시, 5시10분 완료, 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 시내 출입 당분간 제한. 무를 좋던 싫던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지 동아일보 (1980년 5월 27일) 않나 봅니다. 전두환 장군과 이진희 MBC 사장과의 대화 국군이 선량한 절대 대수 광주시민, 곧 국 (1980년 8월 11일 MBC 방송) 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 없었음은 당연한 13


☞ 이 방송이 녹화되기 직전에 카메라에 「나대니얼 호돈」의「큰 바위 얼굴」은 포착된 당시 이진희 MBC 사장과 전두환 장군 바로 그 자신이었다. 서울신문 (1980년 8월 19일) 장군의 대화내용을 보면 그 당시에 MBC 를 비롯한 모든 언론들이 전두환 영웅 만 들기에 얼마나 주력하고 있었는지 알 수 ☞ 당시의 언론들은 민주화를 앞당길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뒤집어엎은 쿠데타 있다. 의 주역을 큰 바위 얼굴로 칭송하고 있 다. MBC을 포함한 방송들은 일제히 몇 (대담 전 녹화내용) -저희들 지금 이미 팀을 만들어 가지고 시 개월 만에 소장에서 대장으로 고속 승진 골로 내리고, 보고서 내 보내려는데 전 장 한 전두환 장군의 전역식을 녹화 중계 방 군님 말하자면은 어린 시절부터 해 가지고 송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현재까지의 일대기를 저희들이 지금 취재 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 연병장에서는 잠시 후 전두환 육군대 -어릴 때 뭐 촌놈이라서 사진이 있어야지. 장의 전역식이 거행되겠습니다. 국내외 여 러 사정과 우리가 당면한 새 시대를 위한 ☞ 전두환을 미화하는 각 언론들의 이른 일대 전환점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지닌 강력한 양도자가 바 ‘신 용비어천가’는 끝없이 이어진다. 필요함은 국민적 여망이며 시대적 요청이 아닐 수 없는가 합니다.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경향신문 (1980년 8월 19일)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육사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 한국일보 (1980년 8월 23일)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 동아일보 (1980년 8월 29일)

내가 아는 전두환 장군 중앙일보 (1980년 8월 23일)

장군은 누구인가. 그렇다, 장군은 숨은 별 이었다. 그가 바로 우리의 지도자요. 목자 임을 우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전두환 육군대장 전역식 녹화중계 (1980년 8월 22일 MBC 방송)

☞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은 장충체 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80년 당시 언론의 이와 같은 행적은 결국 5공 정권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정통성이 없 는 5공 정권은 집권 후에도 정당성을 확 보하기 위해서 언론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5공 출범 전 뿐만이 아니라 출범 이후에 도 언론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미화하 기 위해서 애쓴 증거는 여러 군데에서 발 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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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서장 -활력과 확신의 시대> 탈했으며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도 차츰 이 분명히 말하건대 나의 대통령 입후보와 정 들의 만행에 위협을 느끼고 이성과 냉정을 권수임은 미리 계획된 것이 전혀 아니었다.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MBC 뉴스데스크 (1985년 6월 7일) 국가원수의 시해라는 엄청난 역사적 분수 령을 고비로 역사와 배후하게 된 나는 불 의의 타도, 위기의 극복에 나의 모든 것을 ☞ 계속되는 대통령 동정보도와 이어지는 바치고자 했을 뿐이다. 사심이라고는 추어 5·18 광주에 대한 왜곡보도, 이날의 뉴스 도 없었다. 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광주로부 (1982년 3월 1일 MBC 방송) 터 시작해서 5공 내내 지속됐던 진실에 대한 침묵, 또는 왜곡, 그리고 권력에 대 ☞ 5공 내내 지속된 이른바 ‘땡전 뉴스’도 한 찬양, 즉 당시 우리 언론의 행태를 적 그것이 물론 보도지침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는 해도 방송이 대통령에 대한 과잉 충성 살펴본 것처럼 1980년 민주화의 봄을 피 이었음이 틀림이 없다. 로 물들이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또 그 정권이 유지되는 데에 1등 공신은 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금요일 밤 MBC 뉴 연 언론이었다. 스데스크입니다. 오늘 뉴스데스크 첫 번째 만약 언론이 80년 5월 당시 광주의 진실 순서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오전 을 제대로 보도 했더라면 우리 현대사는 청와대에서….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4․19혁명 때는 제 MBC 뉴스데스크 (1985년 6월 7일) 역할을 했던 언론들이 무릎을 꿇으면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 그런데 이날의 뉴스데스크는 매우 상 비극이 시민들은 사건이 전국에 알려지면 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날의 뉴스에서 광주 사람들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 믿 5·18 광주에 대한 내용을 다시 접하게 된 많은 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80년 계 었다고 퍼런 계엄 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엄사령부에서 발표한 내용과 전혀 다를 서슬 수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다 받아들여야 것이 없었다. 할까, 그런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언론들에 반성은 남지 않고 변명만이 남게 된 22일 무장 집단들의 난동은 영광, 함평, 완 게는 도, 목포, 송정읍, 해남 등 전남 일대로 확 다. 산 됐고 또다시 광주 교도소를 습격해 총 격전을 벌였으며 이른바 시민군을 조직해 서 끝까지 싸울 것을 선동했습니다. 그리 고 한편으로는 평소 원한관계가 있는 민가 에 침입해 가족을 몰살시키거나 금품을 강 15


[한겨레 2015년 5월 15일 19면] “국민 통합 저해”…보훈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황당 이유’

“북한 영화 배경음악 사용…‘임’과 ‘새날’ 의미 논란” 올해 5·18 기념식에서도 제창 아닌 합창 단 합창으로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점을 거론하 며 이 노래를 제창할 경우 국민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 다. 보훈처는 이 때문에 정부 주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 곡’을 제창이 아닌 합창 방식으로 부르기 로 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14일 보도자료를 내 “18일 열리 는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예년과 같이 공식식 순인 기념공연에 포함하여 합창단이 합창 하고 원하는 사람은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2008년 이전과 같이 5·18 민주화운동 기 념식에서 제창해야한다는 5·18 민주화운 동 단체 등의 요구를 이번에도 거부한 것 이다. 5.18민주화운동이 1997년 정부기념 일로 제정된 이후 2008년까지 정부기념행 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해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첫해인 2008년 보수 안보단체들이 “대통령 참석 행사에 서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주 먹을 쥐고 흔들며 제창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2009년부터 합창단 합창 방식으로 바뀌었다.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는 이유로 “이 노래가 1991년 남쪽의 황석영과 북쪽의 리춘구가 공동집필하여 제작한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 시’ 배경음악으로 사용돼 ‘임’과 ‘새날’의 의미에 논란이 야기됐다”고 주장했다. 또 “작사자(황석영)의 행적으로 대한민국 자 유민주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의 견이 있어 국민 통합에 저해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더불어 “정부기념식에서 기념일과 동일한 제목이 아닌 특정한 노 래를 부르는 5·18 기념식과 4.3 추념식, 6·10 기념식 모두 합창 형식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논리를 댔다. 하지만 보훈처의 이런 주장이 오히려 국 민통합을 저해하는 궤변에 가깝다는 지적 이 여권에서도 나온 바 있다. 지난 4월 정 의화 국회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은 광주정신이며, 5·18 행사에서 임을 위 한 행진곡이 제창되게끔 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 시민들이 주도하는 제35주년 5·18민 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행사위)는 지난 11 일 정부 주관 5·18 기념식 불참과 국가보 훈처 예산지원 거부를 공식선언했다. 대신 같은 시각에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민주평화광장에서 독자적인 기념식을 열 기로 했다. 이 기념식에선 ‘임을 위한 행 진곡’을 제창한다. 시민 주도 기념식에 광 16


주시의회는 2명을 제외한 의장 등 전원과 천정배 무소속 국회의원도 참석한다. 윤장 현 광주시장과 장휘국 광주시 교육감은 어떤 행사에 참석할지 아직 발표하지 않 았고, 광주 지역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국 회의원들은 정부 주관 행사에 참여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계엄군에 사 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로 백 기완씨가 쓴 시에 기반해 황석영 작가가 작사를 했다. 황석영 작가는 1989년 방북 했다가 7년형을 선고받고 1998년에 사면 석방됐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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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하여

송건 호 선생 님 소 개

노동자와

는 한편, 1986년에는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을

제도권 언론이 외면하는

민․도시 민들의 실상과 민주화운동을 소개하

로해 이 해 6월 항쟁의 불 를 제공하기도 하 였다.

창간하고 사장과 남북한 문 제에 대한 냉전적인 보도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 모사건’에 연루되어 정보기관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90년부터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하 였고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2001년 12월 숨졌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을

한국 언론의 사표師表, 청암 송 건 호

회장으로 있으면서 편집권의 독립과

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청암(靑巖)이다. 1926 년 음력 9월 27일(호적상으로는 1927년 9월 27 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 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1968년 베를린신문연구원 에서 수학하였다. 대학교에 재학중이던 1953년 <대한통신> 기 자를 시작으로 언론에 몸담은 이래, 1950년대에 <조선일보>, <한국일보>, <자유신문> 등의 외 신부에 근무하였다. 이어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0), <경향신문> 논설위원․편집국장, <조선

술 활동에도 힘써 1978년 신진 학자들과 함 께 저술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비롯해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현대인물사론, 민중과 민족 , 민주언론, 민족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등 2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하였다. 제1회 심산학술상(1986), 한국언론학회 언론상(1991), 호암언론상(1994), 금관문화훈장(1999), 정일형자 유민주상(2000) 등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무궁화 장이 추서되었다. 저

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편집 국장(197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 위원(1978),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1984), 민 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987)를 지낸 뒤 1988년 <한겨레신문> 발행인 겸 인쇄인을 거

쳐 회장․고문(1991~1993)을 지 다.

직 양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한국 언 론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언론인이다.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150여 명의 기자가 강제 해직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던졌다. 이후 재야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1984 년 해직 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초 대의장 역임)를 만들고 이듬해 월간지 말을 창 ‘한국 언론의 사표’, ‘해 기자의 대부’, ‘민족지

성’ 등 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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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 호 선생 님 연 표

1940년 (15세) 경성 한성(漢城)사립상업학교에 입학하다. 이 학교로의 진학은 부친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는데, 부친은 왜놈 밑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면서 중학교 만 졸업하고 취직할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훌륭한 스승의 지도 하에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 교 때부터 고서점을 찾아다니는 취미를 갖게 되었으며 독서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과목 중에서는 특히 한문과 역 사를 좋아했다. 졸업을 앞두고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둘러싼 일본인 학생과의 차 별대우에서 한국인임을 자각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1946년 (21세)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다. 입 학 후 6개월간은 학교를 잘 다녔지만 학교가 격동에 휘말리는 바람에 제대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1948년 국 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다. 이 때부터 학비를 스스로 조달하다. 6․25 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다. 1953년 (28세) 서울에 다시 올라와 서울대 법대 에 복교. 학교에 다니면서 <대한통신사> 기자 공채에 응모하여 외신부 기자로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언론과 인연을 맺 게 되었다. 1954년 (29세) <조선일보> 외신부가 새로 생김 에 따라 이 신문사로 옮기다. 이때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신진평론가로 알 려지기 시작했다. 1959년 (34세) 이후 <자유신문> 외신부장, <세 계일보> 조사부를 잠깐 거쳐, 6월 <한국 일보> 논설위원, <민국일보> 논설위원 을 거친 후 다시 <한국일보> 논설위원 19

1965년

1969년 1974년

1975년

으로 돌아가다. <경향신문> 논설위원으 로 옮기는 한편 국학대학에 강사로 출 강하다. 이때부터 대학에서의 강연도 잦 아지게 되었다. 1964년 미국과 한국 등 평론을 발표하다. (40세)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취임하다. 드골 프랑스의 영광 출간하고, 이해에 동남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다. 1966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기고 국민 대학에 출강하다. 드골평전, 한국지 식인론 출간 (44세) <동아일보> 논설위원, 통일문제연 구소장에 취임 (49세)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 편 집인협회 보도자유위원장이 되었고 또 한 IPI국내위원. <동아일보> 기자들 언 론자유수호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다. 기자들은 민주언론운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 선언의 신문보도를 요구하는 한편, 수사기관원의 신문사 출입을 금지 하는 등 선언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려 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 (50세)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 민주언론 운동이 더욱 세차게 전개되자 정부는 1974년 12월 10일부터 <동아일보>에 대 해 유례를 보기 드문 광고탄압을 가하 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이 같은 탄압 에 굴복하는 한편, 거꾸로 권력과 은연 중에 결탁하여 자유언론실천기자들을 대거 해고하고 편집국장에게 동의를 요 구하다. 언론탄압과 대량해임에 항의하 며 기자들이 대대적인 제작거부농성에 들어가자, 3월 15일 “현재의 사태를 수 습하는 길은 회사측이 하루빨리 기자들 을 복직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렇지 않 으면 <동아일보>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건의를 내고 편집국장직을 사 임하다. 이로써 22년 간에 걸친 언론의 현장을 떠나다. 사임 후에는 원고 집필 과 번역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한양


1976년 1979년 1980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대학교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다. 민족지 성의 탐구 출간하다. (51세) 당국의 압력으로 한양대학교 출 강을 금지당하다. 조선의 예술을 번역 하는 한편 단절시대의 가교를 출간하 다. (54세) 한국현대사론, 현실과 이상,  서재필과 이승만, 소크라테스의 행복, 무지개라도 있어야 하는 세상 등을 출간하다. (55세) 5․17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 루되어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되어 서 대문구치소에 수감되다. 군재(軍裁)에서 3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 서 2년형으로 감형된 후, 다시 육군형무 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다. 김구, 한국현대인물사론을 출간. (59세) 12월 19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 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80 년 해직언론인협의회의 회원들이 중심 이 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족되고 의장에 선임되다. 말지 발행. (60세)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  말지가 문제되자 발행인으로서 마포경 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다. 살아가며 고생하며, 의열단을 출간. (61세) 제1회 심산상(심산사상연구회)을 수상. 분단과 민족, 민족통일을 위하 여, 민중과 민족, 한국현대사론 등 간행. 청암 송건호 선생 회갑기념문집 이 출간. (62세) 새신문 창간발기위원장으로 취임 하고 <한겨레신문> 대표이사 맡다. 민 주언론 민족언론을 출간 (63세) 한성인상을 받다.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사장 및 회장을 역임. (64세) 한나라 한겨레를 위하여를 출간.

1990년 (65세) 파킨슨증후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 한국현대언론사를 출간. 1991년 (66세) 제7회 언론상(서울언론인클럽)을 수상. <한겨레신문> 대표이사와 회장을 역임. 1992년 (67세) 제2회 한국언론상 본상(한국언론 학회)을 수상 1994년 (69세) 제4회 호암상 언론상(삼성복지재 단)을 수상 1999년 (74세) 금관문화훈장을 받다. 기자협회보 에서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편집·보도 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 결과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위암 장지 연 선생과 함께 선정되다. 1994년~2001년 1980년 신군부에 의한 고문후유증 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간 투 병생활을 하다. 2001년 (76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다. 12월 21일 오전 8시 영면에 들다. 24일 오전 9시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고 오 후 2시 광주 5․18국립묘지에 안장.

민언련, 2004년 제3회 송건호언론상 수상

송건호언론상’은 언론 외길 40년을 언론자 유와 진실보도를 위해 바쳤던 故 송건호 선 ‘

생을 기리기 위해 청암언론문화재단과 한겨

입니다. 우리 단체는 ‘84년 설립 이후 보도지침 폭로, 언론교육 사업과 언론감시 활동을 통해 수 용자주권 의식 확산 및 언론 바로세우기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지난 2004년 12 월 3일 제3회 송건호언론상을 받았습니다. 레신문사가 지난 2002년 제정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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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 런 이들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착했으니, 선생은 9번의 형사입건, 4번의 구속, 언론과 학계에서 모두 4번의 해직을 감수해야 했 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어머니의 부고도 감옥에서 받아야 했다. 이러했으니 권력과 그 부나비들이 선생을 의식화의 주범이라고 매도할 법도 했다. 물론 선생이 진실을 드러내고, 진실로써 어둠을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선생의 노력이 의식화 곧 계몽의 빛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생이 추구한 진실이, 다른 이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 라 모두를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비난은 부질없다. 선생의 진실은 진정한 자유인, 곧 인간의 해방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었다는 점에 서, 그들이야말로 선생을 은사로 삼아야 했다. 허 위와 우상을 키워냈고 지금도 키우는 것은 분단체 제, 분단을 빌미로 남과 북의 정권은 전체주의를 강화했고, 폭력을 제도화했으며, 수탈을 합리화했 고, 인간성 파괴를 상습화했다. 선생이 종내 민족 문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고, <한겨 레> 방북취재 기획으로 선생은 결국 다시 감옥살 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1999년 연평도 교전사태 직후 북방한계선은 남쪽의 영토선이 아니라고 하 여 충격을 주었듯이, 1998년 방북 땐 북쪽 정권의 이중성을 대놓고 비판한 것도 선생이었다. <한겨 레>의 탄생을 두고 선생은 ‘캄캄한 하늘에 뜬 큰 별’에 비유했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애정의 표현 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빛으로서 <한겨레> 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의 표시였음을 안다. 지금 도 여전한 자본과 권력의 숨겨진 진실을 <한겨 레>는 얼마나 드러냈는가. 생존을 핑계로 타협한 일은 없는가, 선생은 과연 평안히 눈을 감으셨을 까. 떨리는 마음으로 삼가 옷깃을 여민다. 자 다. 그

리영 희 선생 님 소 개

실 천 지 성,

영희

빛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데 온전히 바쳐진 선생의 삶. 이제 누가 앞장서 허위의 장막을 찢고 우상의 주술을 벗겨낼까. 탐욕의 족쇄를 깨뜨리고 자유인의 길로 이끌까. 선생은 홀연히 떠났지만, 우리의 눈앞은 캄캄하고, 머리는 허둥대고, 가슴은 떨린다. 언제나 선생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었기에 더욱 황망하다. 혹자는 선생을 사상의 은사 혹은 사상의 스승으로 상찬하지만, 선생의 위치는 전선 의 맨 앞자리였다. 대학 강단마저 허위와 싸우는 전선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땐 고교 강단 에서 전선으로 달려나갔듯이, 언론과 학계에선 허 위 그리고 우상과 맞서 싸우는 최전방의 전사였 다. 탄광의 갱도보다 더 힘들고 위태로운 진실의 막장, 선생의 자리는 언제나 그 갱도 끝이었다. 일 쑤 말했듯이 선생이 글을 쓰는 목적은 진실을 추 구하는 것에서 시작해, 그것에서 그쳤다. 베트남전 과 미군 개입의 진실, 미국 세계전략의 진실, 분단 의 진실, 남과 북의 진실, 쿠데타의 진실, 자본과 사실의

시장의 진실, 전체주의 등. 아무도 말하지 않고,

돌아보려 하지 않던 것들의 정수리를 선생 냥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그를 회유하 고 압박했지만, 그의 글쓰기를 멈추게 하진 못했 다. 진실의 드러냄만이 약자의 유일한 무기였던 시절, 그건 최고의 금기였다. 지배집단은 더 큰 권 력과 더 많은 부를 위해 거짓으로 국민의 눈과 귀 를 가리고, 우상을 앞세워 굴종의 노예로 만들고 아무도 은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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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6일자 한겨레신문 사설

영희, 담대한 진실의 향도>

<리


리영 희 선생 님 연 표

1929.12.2 부친 이근국과 모친 최희저 사이에서 평 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출생. 1936 대관공립보통학교 입학. 1942 경성공립공업학교 입학. 1946 국립한국해양대 입학. 1950 해양대 졸업. 경북 안동중학교에서 영어교 사를 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해 입대. 육군 중위로 유엔군 연락장교단 근무. 1956 윤영자씨와 군산에서 결혼. 1957 육군 소령 예편. 서울 합동통신사 입사. 1959-1960 미국 노스웨스턴대서 신문학 연수. 1959-1961 미국 <워싱턴포스트> 통신원 활동(익명 기고). 1961 5․16쿠데타. 박정희-케네디 회담 합의 내 용 특종보도 1964 <조선일보> 정치부로 옮김. 11월 유엔총회 남․북한 동시 초청안 관련 기사로 구속․기소. 12월 석방. 1965 <조선일보> 외신부장. 1969 베트남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박정희 정권의 압력을 받아 <조 선일보> 강제 퇴사. 1970 <합동통신> 외신부장. 1971 군부독재․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 언’으로 강제 해직. 1972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엠네스티 인 터내셔널 한국지부 창설 발기인. 1974 군부독재․유신체제 반대 ‘민주회복국민회 의’이사.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1976 제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강제 해임.

1977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출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2년형 선고. 1980 만기 출소. 한양대 복직. 5월 17일 ‘광주 소요 배후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날조돼 구속. 7월 석방과 동시에 다시 해직. 1984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각급학교 교 과서 반통일적 내용 시정연구회’ 지도 사 건으로 다시 구속 후 두달 만에 석방. 한 양대 제2차 복직. <분단을 넘어서> <80 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출간. 1987-1988 <역설의 변증> 출간. 미국 버클리대 아시 아학과 교수로 임용돼 ‘한민족 현대정치 운동사’ 강의. 1988 한겨레신문사 창간. 이사․논설고문 역임. 자전에세이 <역정> 출간. 1989 주한 외국언론인협회 언론자유상 수상. <한겨레> 창간 1주년 기념 방북취재기획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60 일 만에 석방. 1990 <자유인. 자유인-리영희 교수의 세계인식> 출간 1994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출간 1995 한양대 정년퇴직. ‘단재상’ 수상. 1998 <스핑크스의 코> 출간. 1999 ‘늦봄 통일상’ 수상. <동굴 속 독백> <반세 기의 신화-휴전선 남북에는 천사도 악마 도 없다> 출간. 2000 ‘만해상’ 수상. 11월 집필 중 뇌출혈로 우측 반신마비 2005 자전적 대담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 상> 출간. 2007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2010 12월 5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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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태홍 선 생님 연 표

김태 홍 선생 님 소 개

1942년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문

합동통신에 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해직기자로 한 국기자협회 회장을 지내며 계엄 철폐와 언론검열 철폐 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됐다. 1984년에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련 전신)의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1986년 말지를 통해 ‘보도지침’을 폭로한 주역이다. 이 때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두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 다. 이후 87년 6월 3일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8년 여가 흐른 1994년 7월 5일에야 서울형사지법에서 리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일보와

무죄를 선고받았다.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광고이사와 제작담당 이사로

입문, 광주광역시 북구청장을 거쳐 열린우리당)을 지냈다. 2009년 루게릭병을 얻어 투병생활을 하다 2011년 10월 1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루게릭병은 김태홍 선생이 보도지침 폭로로 투옥됐을 당시 고문의 후 유증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은 민언련과 한겨레신문사, 전국언론노조, 한국기자협회가 함께 주관하는 민주언론인장으로 치러졌다. 1995년 정계에

16, 17대 국회의원(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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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 한국일보, 합동통신 기자 1980 한국 기자협회 회장 1980.8-1981.12 기자협회 사건 및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투옥 1984-1987 민주 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공동대표 1985 말지 창간, 발행인 1986.12-1987.6 월간 [말]지 특집호 '보도지침'사건으 로 투옥 1987-1994 한겨레신문 창간 3인 기초위원, 제작․판 매․광고․발전기금 담당 이사 1987 제1회 카톨릭 언론인상 수상(한국 천주교) 1995-1998 초대 민선 광주광역시 북구청장 1998-2000 광주광역시 정무부시장 2000.4 제16대 국회위원 2000.5-2002.6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민주당 간 사)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산하'의약분업 대책위 원회'위원장 2001.11-2002.5 새천년 민주당 홍보위원장 2002.7-2006.5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위원 2003 열린우리당 창당발기인,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2003.10 제16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제4 정조위원장 2004-2007.02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위원 2004 국회 신재생에너지정책연구회 대표의원,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부위원장 2005 열린우리당 윤리위원장 2006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한미 FTA를 연구 하는 의원모임 공동대표 2008.05 제17대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저서> 『80년 5월의 민주언론』 나남출판사 『민중과 자유언론』 아침출판사 『보도지침』 두레출판사 『작은 만족이 아름답다』 수필집 인동출판사


위르 겐 힌 츠페 터 소 개

묘지 안장을 추진하고 있다.

겐 힌츠페터는 독일 제1공영방송 ARD 산하 NDR의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1980년 5월 20 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가 계엄군이 자행한 학살과 시민의 항쟁을 영 상으로 담아냈다. 언론통제로 인해 국내에서는 보 도될 수 없었던 광주의 참상을 외국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측면에서 일명 ‘푸른 눈의 목격 위르

자’로도 불린다.

살 광주’의 모습을 10롤의 필름에 담은 그는 도 쿄로 돌아가 이틀 분의 화면을 독일로 전송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카메라에 담은 이 영상은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여러 외국에 즉시 보도 됐다. 이후 힌츠페터는 23일 다시 광주로 돌아와 계엄군이 철수한 ‘해방 광주’의 모습을 다시 필름 ‘학

에 담았다.

촬영한 영상은 그해 9월 17일 ‘기로에 선 한 국’이라는 제목의 45분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되 기도 했다. 광주항쟁 취재 이후에도 힌츠페터는 꾸준히 전두 환 정권의 폭압상을 폭로하는데 주력했으며 1986 년 11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 취재 중 사 복경찰에 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 1995년 기자직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광주민주화운 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펼쳤다. 힌츠페터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을 “내 생애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엄청난 슬 픔과 서러움”이라 밝히기도 했다. 2016년 1월 25일 79세의 일기로 본국에서 삶을 마 감했으며 사후 국립 5·18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그 의 생전 소망대로 현재 기념사업회는 광주 망월동 그가

△ 2003년 5월 18일 KBS 일요스페셜 ‘푸른눈의 목격자’ 위 르겐 힌 츠페 터 연 표

1937년 1963년 1967년 1973년 1995년 2003년 2005년 2016년

독일 출생 서독 제1공영방송 함부르크 지국 TV 방송국 카메라맨으로 입사 홍콩 발령 독일 제1공영방송 도쿄 지국 특파원 발령 기자직 은퇴 송건호언론상 수상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특별상 수상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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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소개

노동열사 김종 태 (80.6.9 / 당시 22세)

넋을 위로하며”라는 목사님께 전달할 것을 당부하고,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 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5 월9일 이대앞 네거리에서 분신 80년 6월7일 광주시민의

내 의 유서를 이해학

홍기 일 (85.8.15 / 당시 26세)

활약. 85년 8월 15 앞 금남로에서8.15를 맞이하는 뜨거운 무등산이여라는 유인물과 유서를 뿌 리고 분신. 22일 운명 5월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일 전 도청

이 상 남 (89.5.16 / 당시 30세)

엔진 공업에 입사, 상기철구 공장 기능 직 사원으로 근무. 87년 9월 현대중공업 구사 대 차량에 깔려 중상. 89년 5월 16일 612일간 의 사투 끝에 운명 현대

이 상 모 (89.5.29 / 당시 20세)

노동자, 박진석의 분신소식을 듣고 회사의 노조분열 책에 분노하면서 기본근무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옥포 관광 호텔 용역계 약 해체 철폐투쟁 집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옥 포로 갔다가 취소된 것을 알고 격분. 89년 5 월 29일 대우조선 제3기숙사 7동 옥상에서 분 대우조선

신, 투신

박 진 석 (89.6.4 / 당시 20세) 신호 수 (86.6.19 / 당시23세)

남구 소재 도화가스에 서 근무 중 서울 서부서 형사들에 연행 후 행 방불명. 86년 6월 19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 86년 6월 11일 인천시

노동자. 회사 측에서 구사대 가입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나눠주자 “노동자간 싸움 을 유발시키지 말라”고 항의하며 4월 29일 분 대우조선

신 후 투신. 6월 4일 운명

최 동 (90.8.7 / 당시 30세) 장용 훈 (88.5.30 / 당시 29세)

택시기사로 근무하면서 노동자의 권 익을 옹호, 대변하는 데 앞장서오다가 1988년 5월 24일 회사 측의 부당노동행위와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 1988년 5월 30일 전남 대 병원에서 운명 현대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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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건 안 속 집행유예로 출소.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90 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경 한양대 사회과학 대에서 분신 89년 9월 인 회 사 으로 국가보 법 구 .


윤용 하 (91.5.12 / 당시 22세)

노동자. 89년 초 대학 출신 현장 활 동가를 만나면서 노동현실 인식. ‘민주화운동 직장연합’ 활동. 91년 5월 10일 ‘조국의 참된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노 태우 정권의 사냥감이 되고 만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12일 운명.

박 선 영 (87.2.20 / 당시 21세)

성 피혁

87년 2월 20일 학내

박종 태 (09.04.30/ 당시 39세)

특수고용노동자인 화물, 택배 노동 자들과 함께 ‘수수료인상’과 ‘특수고용 노동자 의 노동권 보장’을 외치며 싸우다가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 숲 속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 대표적인

비민주적 학사운영 및 미

매판세력의 지배를 받는 암담한 조 분노, 항의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 자결. 제국주의

국의 현실에

표 정 두 (87.3.8 / 당시 25세)

남 입학. 제대 후 자퇴.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밤에는 무등교회 내 ‘무등터 야학’에 서 교사 활동. 87년 3월 6일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내각제 개현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 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고 외치며 분신. 8일 운명 5.18 광주항쟁으로 정학. 83년 호 대 무역학

이용 석 (03.10.31/ 당시32세)

약직으로 일하며 비정규직 노 함께 노동조합 활동. 2003년 10월 26 일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철 폐’를 외치며 분신. 10월 31일 운명. 근로 지공단 계

이 한 열 (87.7.5 / 당시 21세)

동자들과

86년 연세대 경 학과

학생열사

운명

기혁 (85.1 / 당시 21세)

파쇼정권의 교육정책인 부당유급제 반대투쟁 중 행방불명.1월 16일 무등산 바람 재에서 변사체로 발견됨. 85년 1월

이재 호 (86.5.26 / 당시 21세)

입학. 반미자주화반파쇼투쟁위원 회 산하 ‘반전반핵 평화옹호투쟁위원회’ 위원 장 활동. 86년 4월 28일 김세진 열사와 함께 ‘전방입소 결사반대 및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 신. 5월 26일 운명. (함께 분신한 김세진 열사 는 5월 3일 운명, 판교 공원묘지 안장) 83년 서울대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 활동. 87년 6월 9일 학내에서 벌어진 ‘6․10대 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 도 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 SY-44 최루탄에 피격당해 쓰러져, 7월 5일 박 태 영 (87.12.9 / 당시 21세)

령 선거를 며칠 앞둔 12월 9일 “오 자유화여, 거국중립내각 쟁취하자” 등의 구호 를 외친 후 “이 땅의 민족 지성인에겐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억눌림도, 갈라짐도, 분노 도, 저항도, 시행착오도, 피흘림도, 여기서 끝 냅시다. 民主人本” 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 고 분신. 분신 직전 학내에서 ‘군부독재 끝장 내고 민주 정부 수립하자 ’, ‘제도교육 철폐하 고 민주교육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42 일간 단독시위를 하였고 6월항쟁의 성과로 쟁 취한 직선제 개헌과 군정종식과 민주정부 수 립의 중대과제를 놓고 분열한 민족민주 세력 의 단결을 호소. 87년 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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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만 (88.5.15 / 당시 24세)

박 승 희 (91.5.19 / 당시 21세)

84년 서울대

90년 전 대

입학하여 학생운동에 헌신. 88년 5월 15일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던 명동성당 내 교육관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 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치고 할 복, 투신하여 운명.

남 입학후 교지 <용봉> 편집위원회 활동. 91년 4월 29일 전남대에서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고 외치며 분신. 5월 19일 운명 김 철 수 (91.6.2 / 당시 18세)

최덕 수 (88.5.26 / 당시 20세)

입학 후 학생운동에 헌신. 88년 5 월 15일 “광주항쟁진상규명, 국조권 발동”을 요구하며 분신. 5월 26일 운명 87년 단국대

양영 진 (88.10.10 / 당시21세)

입소거부 투쟁. 88년 10월 10일 부 산대 재료관 5층 난간에서 “이제 조국 산하 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절규한 후 투신, 운명

입학. 5월 항쟁 11주년 기념일이 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 하던 91년 5월 18일 학생회 주최로 열린 ‘5․ 18 기념행사’ 도중 보성고 운동장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 “참교육 쟁취”를 외치며 분신. 6 89년 보성고

월 2일 운명

88년 전방

이철 규 (89.5.10 / 당시 25세)

간 련 안 반혐의로 수배. 89년 5월 3일 행방불명. 89 년 5월 10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시신으 로 발견됨 89년 <민주조선> 발 과 관 , 국가보 법 위

이내 창 (89.8.15 / 당시 28세)

앙 총학생회장. 8월 15일 거문도 앞 바다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 거문도까지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과 동행한 것으로 밝혀 짐 89년 중 대

신장 호 (90.5.19 / 당시 23세)

순례와 전대협 제4 출범식’ 참가를 위해 광주로 가던 중 장성 에서 검문을 피하다 운명. 90년 5월 19일 ‘광주 성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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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승 필 (92.11.2 / 당시19세)

YMCA 회장으로 활동시작. 경찰로부터 계속적인 협박 받음. 92년 10월 14일 밤 12시 동아리 선배를 만난 이후 귀가 중 행방불명. 92년 11월 2일 광주 보훈병원 영안실에서 변 사체로 발견됨. 경찰은 단순 열차사고로 처리 함 92년

이 경 동 (93.9.8 / 당시24세)

남 교사 청년회 간사로 활동. 93년 9 월 8일 임용고시철폐, 주한미군 철수와 기만 적인 김영삼 정권을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 고 분신 항거 광주전

한 상 용 (93.11.10 / 당시 23세)

초등 교육 개혁과 교대 교육정상화를 위한 4 학년 대책위원회 위원장 활동. 93년 11월 10 일 임용고시 반대투쟁 승리의 염원을 담은 종 이학을 접는 등 투쟁을 하다가 분신․투신, 운명


안읍에서 광주 렁 쳐박고 집단구타.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무안 읍 유성병원을 거쳐 목포 성 콜롬반 병원으로 옮겼으나 계속 악화되어 88년 3월18일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 결국 회생을 하지 못하고 3 월25일 “나는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끝

노수 석 (96.3.29 / 당시 21세)

선거 무 투쟁시 오후 5시경 무

95년 연세대 법학과

방면으로 행진하다가 경 이 논두 에 동지를

입학. 풍물패 ‘천둥’활동. 96년 3월 29일 등록금 인상저지와 교육재정확 보를 위한 연세인 수업거부 총궐기 후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울 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결의대회참여 도중 경 찰의 토끼몰이식 폭력진압으로 쓰러져 운명

으로 운명.

류재 을 (96.3.20 / 당시 20세)

입학. 97년 3월 20 일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노동법 안기부법 날 치기 통과, 한보비리 등 부정, 부패, 부도덕, 반민중, 폭력적인 김영삼 정권 규탄 남총련 집회’ 참가. 시위 도중 시커먼 물체를 맞고 쓰 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바로 운명. 96년 조선대학교 행정학과

이 정 순 (91.5.18 / 당시 39세)

열사의 장례행렬이 지 앞 철교에서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분신, 투신하여 91년 5월 18일 강경대 나가는 연세대 정문 운명

정 상 순 (91.5.29 / 당시 25세) 김준 배 (97.9.15 / 당시 27세)

절 총련 투쟁국장. 경찰의 과잉점거 작전으로 인해 97년 9월 15일 밤에 사망 광주대 재학시 인 93년부터 수배를 받아오던 한

김철수 열사가 분신한 후 괴로워하다 5월 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 상위에서 “노동자여 투쟁하라, 시민들이여 함 께 호흡하고 함께 외치고 투쟁하자”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 5월 29일 운명. 91년 고교 후배인

김 남 주 (94.2.13 / 당시 48세)

재야열사 강상 철 (86.6.26 / 당시 23세)

목포사회운동연합 사무처장. 목포민주회 복국민회의 사무차장 등을 역임하며 목포지역 에서 운동. 86년 6월 6일 목포역 광장에서 ‘민 주화운동탄압 중지와 5.18진상규명, 직선제 개 헌을 단행을 촉구하는 양심선언’을 외치고 분 86년

남 입학 후

80년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 전 대

헌 반대운동, 교련반대운동을 하다가 제 적.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써서 등단.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감옥에서 쓴 시들을 묶어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 발표. 1988년 석방 후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민족예술인총 연합 활동. 94년 암으로 운명 3선개

신. 6월 26일 운명

김길 호 (89.3.25 / 당시 35세)

입 여 활동. 87년 12월 20일. 무안에서의 대통령 80년 광주항쟁 이후 기독교 농민회에 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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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묘 역 배치 도

80년 5월 영령들이 이곳에 묻힌 것은

80년 5월 영령들이 묻힌 이래 수많은

5월 29일이었다. 27일까지 계엄군에

민주화운동 열사들이 숱한 우여곡절

학살된 시체 중 126구가 청소차에 실

속에 안장되었고, 97년 신묘역 조성

려 폭도의 이름으로 묻혔다. 80년 5월

이후에도 현 묘역에서 역사의 현장을

장례식 이후 독재정권은 유족의 제사

그대로 지키고 있다.

도 허용하지 않았다. ‘5․18 구묘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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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부르 는 노래


광주출전가

1.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2.투쟁의 깃발이 높이 솟았다 혁명의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오월의 노래 2

1.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2.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릎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3.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4.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붉은 피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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