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조사자료집(395-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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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鄭泰重 등 95인 판결문107) ▲어수갑/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그림 319. ▲1

107) 국사편찬위원회, 사건명 : 鄭泰重 등 95인 판결문 , 사건개요 : 1925년 공산주 의 사상을 통한 조선민족의 독립운동과 1919년 3.1운동정신 계승, 판결문번호 : 昭和2년 刑公 제427-439, 同 제1059-1087호, 판결일 : 1928/02/13, 판결법원 : 京 城地方法院, 인명 : <중략> 魚秀甲, <중략> 金演義, <중략>, 단체 : 高麗共産靑 年會, 朝鮮共産黨, 共産學校, 馬山共産靑年會, 大韓獨立黨, 大韓臨時政府, 사건 및 활동 : 社會運動 參加, 朝鮮民族解放觀念에 共産主義思想을 注入, 共産主義運動, 共産黨 組織, 共産黨 創設의 必要를 說, 朝鮮民族運動者大會, 朝鮮獨立萬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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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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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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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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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월 이내에는 개정 무망108)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그림 323. 중외일보 1928-02-29

10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 중외일보, 기사제목 : 상고 한 장순명 심리하고, 그 후에 복심공판, 공산당 사건의 일건 기록을 고등법원에 서 빌려다 본다, 5월 이내에는 개정 무망, 발행년월일 : 1928-02-29, 면수 : 02, 단수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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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약수 공소 취하109)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그림 324. 중외일보 1928-06-03

10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 중외일보, 기사제목 김약수 공소 취하, 복역한다고, 발행년월일 1928-06-03, 면수 : 02, 단수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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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32년의 극동정국전망(3)110)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그림 325. 중앙일보 1932-01-03

1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 중앙일보, 기사제목 : 1932 년의 극동정국전망(3), 발행년월일 : 1932-01-03, 발행구분 : 석간, 면수 : 04, 단 수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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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삼천리 제6권 제5호111)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出頭巨頭의 其後 ,第一·二次 共産黨事件의 首腦者, 民衆運動者大會事件의 首腦者 봄바람 가을비 번가라 거듭하는 사이에 세월은 흘너흘너 그러케도 몹시 세상을 격동식혀 놋튼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어느 사이에 역사라는 墓標 속에 고요히 숨어버리고, 그러고 그 사건올 꾸미든 한다하든 當代 人物들 도 한 사람 두 사람식 세인의 머리가운데서 자최를 거두어 버리고 잇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컨만 비록 史上의 사건, 史上의 인물로 영원히 銀幕 뒤에 숨어버린다 할지라도(略) 큰 사건으로 비교적 기억에 새로운 것이 1曰 朝鮮共産黨事 件이요, 2曰 民衆大會事件이다. 이제 붓가는 대로 이 두 사건의 관계인물 들로서 지금은 어느 별밋헤 무슨 꿈을 꾸면서 하로 24시간이라는 長長 긴 세월을 보내고 잇는가 그를 밝혀보려 이 붓을 잡엇노라. 여러분의 머리 가운데는 제일차 공산당사건이라 하면 저 6·10만세 사건 둥 派生的인 모든 사건의 광경이 떠오르리라. 그리고 간부급 인물이 新義 州署로 잡혀가든 광경, 裁判所에서 審理밧든 때 광경, 新聞社號外와 중로 네거리 가고 오는 시민들이 수군거리든 광경. 그때는 아직 다른 데에도 공산당이란 조직체가 업는 때 돌연 官憲의 손으 로 101명이란 多數한 사상운동자가 13道에서 檢擧되든 그 무시무시한 소 식을 발 어적게 잇든 일 가치 기억이 선명하건만 해수로 따지면 벌서 10 년 전의 녯날 일이 되엇다. 그때 제1차 공산당의 간부는 責任秘書 金在鳳, 中央委員 金若水, 兪鎭熙, 朱鍾建, 金」, 趙東祐, 鄭雲海의 7인이요, 공산청년회에 洪

植, 朴憲永,

1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잡지명 : 삼천리 제6권 제5호, 발행년월일 : 1934년 05월 01일, 기사제목 : 出頭巨頭의 其後, 第一·二次 共産黨事件의 首腦者, 民衆 運動者大會事件의 首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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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元根, 金O冶 등이 잇섯다.<112> 金在鳳의 養蜂 舊治安維持法에 의하야 그는 6년의 刑을 밧엇다. 그가 최고의 刑이엇다. 이박게 未決로 3년을 잇섯스니, 해수로 따지면 監房에 잇기를 9년 동안을 한 세음이 된다. 그가 出獄한 것이 1931년 9월이엇다. 一時 서울에서 병 올 養하고 잇다가 지금은 고향인 慶尙道 安東郡

山面 제집에 이르러 버

리를 치고 잇다. 生計에 도음이 되도록 그러케 크게 함은 아니요. 양봉하 면 버리를 따라다니느라고 신선한 공기를 마일 수 잇고 땃듯한 해볏을 바 들 수 잇스니까 消日삼아 하는 중이라 한다. 金若水의 雜誌 4년의 服役에 未決 3년까지 하고 나왓스니 7년을 在監한 세음이 된다. 그는 出獄하야 얼마동안 시세를 靜觀하고 잇더니, 결연히 언론의 陳頭에 나설 준비를 마련하여 가지고, 다시 街頭에 나와 無産大衆을 독자층으로 하는「大衆」이란 월간잡지를 刊行하야 여러 號를 거듭하다가 中途의 ∼ 跌로 몃 號를 缺하기는 하엿스나 今春부터 다시 復活하여 자기가 主幹하 리다든가. 金」은 在獄 檢擧일자 멀니 莫斯科에 走하엿다가 滿洲에서 도로 잡혀 드러와서 10년 의 刑의 言渡를 밧고 지금 京城刑務所에 服役중이다. 듯건대 이번 恩赦로 4分 1이 減刑되엿다 하니 今后 7, 8년 후면 다시 세상에 나오리라. 朱鍾建의 亡命 그때 檢擧의 旋風이 일자 이 눈치를 차이고, 자최를 멈추어 버린 뒤 그는 혹은 쏘비엣의 모스꾸바로 갓다고도 하고 혹은 上海에서 國內운동을 획책 하고 잇다고도 하나 확실한 所在는 아모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의 녯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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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李德耀 마저 北京가서 客死하엿스니, 그의 구름자는 누구의 입으로 다시 차저지랴 오직 막막할 뿐. 兪鎭熙의 新階段 그도 4년服役에 3년 동안을 未決로까지 잇섯스니 전후 7년을 콩밥에 오 동저고리입엇다. 나와서 金演義氏 등으로 더부러 월간잡지「新階段」을 創刊하야 얼마 계속하다가 문을 닷고 잇다. 이리됨에는 외부와 내부에 諸 原因이 잇섯겟지만, 들니는 말에 다시 陳容을 새로 조직하야 올 봄부터 復活한다는가. 趙東祐의 再檢擧 그도 7년을 치르고 나와서 얼마를 병치료하다가 中央日報에 입사하야 늘 政治論文을 발표하야 세인의 주목을 끄을고 잇든 중 바로 작년 겨을에 新 義州署에 檢擧되야 또 豫審에 너머 가 잇다. 鄭雲海의 消日 그도 4년 징역에 산년 미결로 전후 7년을 철창에서 신음하다가 출옥하여 大邱의 고향에 나려가서 혹은 老子와 가치 行雲流水로 벗을 삼기도 하고 혹은 蕩子인 체 狹斜紅燈으로 몸을 잠그고 혹은 도서관에 盡日을 보내기 도 하야 悠悠自若 세월을 보내고 잇다. 洪

植의 營業局長

그도 7년을 태양업는 거리에서 呻吟하고 나온 이다. 그는 檢擧 전에도 朝 鮮日報 營業局長으로 잇섯거니와 나온 뒤에도<113> 亦 中央日報의 營業 局長으로 艱難만흔 言論機關의 살님사리를 마터 縱橫으로 手腕을 휘둘느 고 잇다. 얼마전에 趙東祐와 함께 新義州로 拘禁되어 간 적이 잇섯스나 곳 嫌疑가 벗기어 도라 왓다. 그는 共靑의 간부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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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憲永의 潛跡 그는 刑을 밧고 服役 중에 병이 危篤하야 假出獄되어 나왓다. 그래서 서 울에서 얼마동안 의약에 親하다가 山水 조혼 愛人 朱世竹 女史의 고향인 咸鏡道 咸興으로 가서 靜養하든 중 하로 아츰 바람갓치 사라젓다. 들니는 風聞에 朱女史와 함께 모스꾸바에 갓다 하나 지금줌 어듸 잇는지 아모도 아는 이가 업다. 林元根의 商界投身 그도 6년을 服役하고 나와서, 서울에서 새로운 애인을 맛나 결혼까지 하 고 벌서 第2世 林元根까지 엇게 되엇다. 그의 兄이 大阪商界紳商이라, 그 를 따라 두 내외는 大阪에 이주하야 아조 珠盤들고 帳薄에 數子記入하는 상인이 되엇다. 이전에도 中央日報 大阪特派員으로 활약한 일이 잇섯스나 지금은 아모 言論機關에도 관계를 맷지안코 잇다고 한다. 金丹治의 遠走 그도 6년의 缺席判決을 밧엇다. 檢擧旋風 속에서 미리 종적올 감추어 露 西亞로 上海로 北京으로 도라다니며 國內運動을 지시하엿고, 1929년 박 람회 때에는 警戒綱을 뜰고 서울 桃花洞에 나타나 第몃次 黨을 그의 애인 高明子와 함께 조직하여 노코 활약하다가 官憲의 追及이甚하여 다시 해외 로 잠적하여 버리엇다. 이밧게 간부는 아니엇스나 一世의 雄辯家로 일홈을 날니든 朴一秉은 刑을 다 치르고 나오자失明하야 지금은 鄕里 咸北 穩域에 잇서 治療중다. 第二次 共産黨事件 제일차 당이 이와 가치 檢擧로 괴멸을 당하자 곳 再建하야 제이차 당을 조직하엿스니 그때의 간부는 責任秘書 姜達永, 洪悳裕, 權五卨, 李鳳洙, 金璟載 등이다. 그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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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達永은 臥病 그는 6년의 刑을 치르고 나오자 極度로 衰弱한 몸에다가 정신상태까지 一時는 常軌를 버서젓다는 소문이 나도록 신경이 약하엿다. 그래서 지금 은 慶尙道 晋州 自宅에서 고요히 身病을 養하고 잇다. 그가 六十萬歲事件 을 지도하엿고, 그리고 責任秘書로 지하에 잠행할 때 빠나나장수로 행적 을 감추고 다녓다 함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리라. 洪悳裕의 新聞人 그도 4년의 役을 치르고 나와서<114> 一時는 자택에서 병을 養하고 잇 다가 재작년부터 中央日報에 드러가 지금은 營業局 販賣部長으로 활약하 고 잇다. 아마 당의 관게자로 다시 言論機關에 드러간 이로는 洪

植氏와

洪眞裕의 兩氏가 잇슬 뿐이리라. 權五卨의 死亡 5년의 刑을 밧고 服役 중에 監獄에서 사망하엿다. 그의 舍弟 權五稷도 思 想關係로 投獄되어 잇더니 얼마 전에 出獄하엿다고 한다. 지금은 무얼 하 고 잇는지 알 길이 업다. 金璟載의 論客 그도 4년의 刑을 치르고 나와서 몸을 養하고 잇더니 그 뒤 快差하야 새 로 !‘人까지 마저 드리어 새문밧 洗劍亭附近에 新接살림을 꾸미고 잇 다. 독서와 思索으로 일삼는 한편 각금 侃侃愕愕의 警世의 붓대를 잡고 잇슴은 世人이 다 아는 바와 갓다. 徐廷禧氏의

郞이요, 徐範錫군의 妹

‘다. 李鳳洙의 再入獄 4년의 刑을 치르고 身病을 養하기 위하야 鄕里 咸鏡道에 가잇든 중 엇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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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人의 결혼식에 가서 祝辭하다가 舌禍에 걸니어, 2년의 判決을 박고 지 금 咸興刑務所에서 服役 중이다. 이 다음 제3차의 金俊淵, 韓偉鍵, 安光泉, 李星泰, 朴洛俊, 河弼源, 金復 鎭, 朴泉 등의 사건이 잇스나, 이것은 次號에 記코저 한다. 民衆運動者大會事件 그 다음은 民衆大會事件이다. 그것은 1929년 12월 11일에 京畿道 警察 部의 손에 檢擧되어 곳 起訴되엇는데 이 사건은 더 길게 설명할 것 업시 光州學生事件이 起因이 되야 當時 新幹會 首惱者들이 民衆大會를 개최하 려다가 事前發覺으로 被逮된 것이다. 그때 有罪決定되야 服役한 이가 許憲, 洪命意, 李灌鎔, 趙炳玉, 李源赫, 金武森 의 6인이요, 또 감곡에 까치 갓다가 不起訴釋放된 이가 權東鎭, 韓m雲, 朱耀翰, 金恒圭 등 諸氏엇다. 許憲의 讀書消日 그는 1년 6개월의 判決을 박고 未決 1년 반까지 합치면 3년동안 獄中사 리를 한 뒤 1932년 2월 15일에 나왓다. 몸이 약하야 서울 三淸洞 自宅에 서 병을 養하고 잇다가 그동안 여러가지 일로 다시 활약을 試하고 잇다. 그러치만 무슨 방면으로 엇든 일로 꼭 指摘하여 말하기까지 아직 구체화 되지 안엇슴으로 다만 讀書消日이라고나 하여 둘가. 辯護士의 復權도 不 久하엿스니 아마 다시 法曺界에 나서리란 灌測도 잇다. 洪命憙의 小說 그도 1년 6개월의 服役에 1年 반의 未決에 이리하야 3개년 간을 獄中에 서 呻吟하고 나온 뒤<115> 건강을 회복하자 곳 一代의 心力을 드리어 執筆 중이든 巨作「林巨正傳」이란 소설에 붓을 들어 방금 朝鮮日報紙社 上에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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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內의 형세를 觀望하며 老棋伏

式으로 소설 執筆로나 消日中.

李灌鎔의 長遊 그도 1년 6개월의 判決에 1년 반의 未決로 3년동안 苦楚를 격것다. 나와 서는 朝鮮日報에 據하야 侃侃의 筆陣를 펴고 잇더니 嗟乎, 咸北 淸津 海 水浴場에서 千萬意外에 溺死하엿다. 그의 遺稿를 발간한다는 설이 잇더니 아직 寂然無聞. 趙炳玉의 鑛山 그는 1년 4개월의 刑期에 1년 반의 未決과 합하야 3개년 갓가운 세월을 獄苦를 격것다. 나와서 朝鮮日報의 營業局長에 就任하야 활약하다가 지금 은 言論機關에서 손을 끈고 忠淸道와 咸鏡道로 도라다니며 鑛山經營을 하 고 잇다. 그의 鑛業을 더부러 하는 이에 閔丙疇氏등이 잇다고 한다. 들이 는 말에 永興金鑛은 매우 有望하다든가. 李源赫의 讀書消日 그도 1년 4개월에 1년 반의 未決까지 3년의 獄中生活을 하고 나온 뒤 身 病을 養하고 잇는 겸 지금은 고요히 자택에서 讀書와 思索으로 지내고 잇 다. 金武森의 建築業 그는 事變 즉후에 朝鮮劇場에 나타나 宣傳삐라를 뿌리고 아지 연설을 한 이 사건에 잇서 유일의 실행자이다. 1년 4개월의 刑과 1년 반의 未決 苦 楚을 밧고 나온 뒤 趙炳玉氏 등과 함께 조선일보에 거하야 활약하고 잇더 니 다시 언론陣에서는 손을 끈고 최근은 건축계에 投足하야 諸氏와 함께 京城建物株式會社라는 50만원의 株式會社의 創立에 間接關聯를 가지고 활약한다 전하다. 이박게 不起訴로 나온 數人에 一言式試하고 지난다면 權東鎭氏는 天道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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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據하야 舊派의 最高執權者로서 수만교도에 指!올 발하고 잇스며 韓m 雲氏는 佛敎社라는 佛敎界 言論機關에 據하야 깁흔 哲理를 중생에 說示하 고 잇스며 朱耀翰氏는 朝鮮日報 專務取締役을 辭하고 지금은 和信商會에 轉身하엿스며 金恒圭氏는 그때 不起訴 放免후 다시 新幹會關係로 一時 刑 務所에서 1년의 役올 치르고 나와서 지금 서울 昭格洞 自宅에서 思索과 讀量와 時世靜觀으로 消日하고 잇다.<116> <1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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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삼천리 제6권 제7호112)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最近朝鮮의 轉變 25年間-(思想界) 火曜, 北風, 新幹會 等의 明滅 金璟載 一. 緖言 내가 7, 8歲 때에 書堂에 다닐 때에 洞里 어른들 틈에 끼어 까닭 모를 氣 分에 緊張하엿든 일이 어제 갓흔데 벌서 그 사이에 25年의 歲月이 흘넛 다. 이러케 생각하니 歲月이 너무도 쉽사리 흘넛거니와 내가 이제는 이러케 자랏스며 25年이라면 한 世紀의 四半年이거니 하매 퍽으나 오란 歲月갓 다. 그 사이에 朝鮮 내의 團體의 轉變을 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內容이 넘우도 復雜多端한 것도 理由의 하나이려니와 아무리 表現團 體만을 中心으로 하고 體系를 세우려 할지라도 그에는 언제나 裏面에 다 른 組織이 잇고 人物이 잇서 그와 서로 交互關係를 갓고 잇스며 派的 勢 力의 對立은 中傷과 排斥을 나엇스며 그에 따라서 離間, 謀陷, 嫉妬가 運 動에 直接 혹은 間接으로 多大만 影響을 주엇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最近 25年間의 思想團體의 轉變은 그가 우리 近世史上의 가쟝 重要한 장면으로 등장될 것이다. (

-원문) 엇지 햇든 우리가 갈피를 잡

지 못하고 左往右往하야 彷徨하든 것도 이때와 가튼 때가 일즉이 업섯고 여러 가지 意味 及 意識밋헤 발자최를 옴겨 오든 것도 이 때인 것이다. 大體 한 개의 團體가 表面化하기까지에는 그에는 源因이 잇고 動力이 잇 고 그의 結果로 顯現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는 原因도 動力도 알배기 아니고 다만 表面의 團體를 中心으로 하고 그의 轉變을 말하라는 것이며 그리고 극히 쩌른 紙面에 그의 全面이러나도록 채(充)워 주고 누

1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잡지명 : 삼천리 제6권 제7호, 발행년 월일 : 1934년 06월 01일, 기사제목 : 最近朝鮮의 轉變 25年間-(思想界) 火曜, 北 風, 新幹會 等의 明滅 , 필자 : 金璟載, 기사형태 :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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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가 보든지 一讀하고 나서는 「올치」하고 25年間의 團體運動의 轉變이 그대로 머리 속에 印처지도록 要1이 잇고 아주 쉬웁게 써달나는 三千里 社의 要求인 바 執筆者인 나에게 잇서서는 마치 圓形으로 된 구멍에 三角 形의 鐵棒을<61> 접어너허 달라는 注文이나 다름업다. 따라서 格에 合하 기는 바라지 못할 것이 執筆者인 나의 지레 근심이다. 一. 運動의 始初 (7枚로 된 一節此間

-원문) 여러 해를 두고 싸우든 世界大戰은 獨逸의

敗戰으로 終幕을 告하고 巴里에서 그의 獨逸의 復興을

和會議가 열니어젓다.

내는 佛蘭西는 이 機會에 獨逸로 하여곰 永遠히 머러를

들지 못하게 하려고 하엿스니 그는 米國의 월손의 提※한 바의 自決主義 를 바더드리어 獨逸의 手足을 잘너 내이기로 햇다. 다음의 問題는 獨逸과 露西亞와의 接近을 防止함에 잇슴으로 波蘭, 리드아니아, 라트바아 等의 새 成立을 承認케 되엇스니 이 물결이 흘너서 -에 까지 옴에 이르럿다. 그래서 그 일이 잇고 그 뒤 朝鮮에는 各地에 靑年會가 出生하엿스니 그의 目的은 智德體 三育의 發達을 圖謀한다는 것이나 그의 色彩는 1920年에 京城에서 吳祥根, 張德秀 等이 中心이 되여 가지고 朝鮮靑年會聯合會가 結成되엇다. 그와 同時에 朴重華, 朴珥圭, 尹德炳, 申伯雨 等이 中心이 되 어 朝鮮8

共濟會를 組織하엿스니 그는 그 때에 잇서서는 가장 進步的의

思想을 가진 그들로서 8

者의 問題를 硏究하고 資本主義의 發達과 殖民

地와의 關係도 若干 解得하는 部類의 사람들이엇다. 그러나 朝鮮8 共濟 會는 一種 文化團體이엿다고 보는 것이 正當한 見解일 것이다. 學生團體 도 생기고 基督靑年會의 巡講 等이 盛行하엿다. 그러다가 外地의 諸 轉變 하는 몰결이 波及됨에 이르럿다. 階級分解의 進展 第1期 最近의 朝鮮의 思想運動을 그가 東京, 大阪의 思想 如何에 影響하는 바가 만타. 그리고 북쪽으로부터 오는 影響도 크다. 따라서 朝鮮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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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濟會가


그 構成要素에 잇서 組織層으로 보아 가장 進步的의 思想을 把持한 이가 만엇음으로 그로부터 오는 影響이나 波動에도 가장 敏感하엿다. 上海 , 尼市

하고 海外의 運動의

戰이 激熱할사록 그의 波動이 드듸여는 鮮內

의 思想團體에도 波及하고야 마럿다. 尹德炳, 申伯雨 等이 朝鮮8 會의 解體를 聲明하고 朝鮮8

共濟

聯盟을 組織하얏스니 그가 1921年이엿다.

그와 對立한 意味에서<62>全鮮8農大會가 組織되엿으니 그는 1923年으 로 金思國, 姜宅鎭 等이 그의 重要人物이고 그 해에 晋州에서 南鮮8農同 盟이 組織되엿스니 그는 全南北, 慶南北, 忠南北 等地에 散在한 各種의 8農團體의 聯盟體이엿으며 徐廷禧, 鄭雲海, 李榮珉 等이 그의 重要한 役 割을 坦任하고 잇든 바 1922年에 와서 비로서 朝鮮8農總同盟이 組織되 면서 前記의 3團體는 解體햇다. 朝鮮8

聯盟이나 朝鮮8農大會

는 그가 京城에 位置하고 잇는 關係上 政治的으로는 若干의 意義가 잇을 지 모르나 實地에 잇서서는 何等의 力量을 다하지 못한 團體이엿음으로 오즉 南鮮8農同盟이 잇서 실력으로 大同團結體인 朝鮮8農總同盟을 맨드 러내인 셈이다. 그에는 全鮮을 통하야 8

團體 118個 農民團體가 114個

합하야 232個의 細胞團體를 網羅한 大組織이며 벽頭에 東亞日報의 非買 決議와 示威運動으로 氣勢를 크게 떨치엿고 徐廷禧, 鄭雲海, 尹德炳, 姜宅 鎭, 馬鳴 等은 朝鮮8農總同盟 創立 당시의 有力한 役割을 하얏으며 그리 하야 朝鮮8農總同盟은 火曜系, 北風系, 서울系가 어울니어서 組織의 完 成을 實現식키엿스나 그후의 運用은 火曜系와 北風系의 손에서 움지기게 되엿섯다. 그러면 火曜會, 北風會, 서울靑年會란 무엇이며 그는 언제 엇던 由來를 갓고 잇는 것인가를 말하지 안을 수 업다. 1921年에 金翰 朴一秉 等이 中心人物이 되여서 無産者同盟을 組織하고 階級運動을 標榜하엿으나 -으로 動態를 取할 수 업슴으로 이에 學術硏究團體로 新思想硏究會를 組 織하엇스니 그는 1922年이요 申伯雨, 尹德炳, 洪增植, 具然欽 等이 幹部 級의 人物이다. 그 후 硏究會란 념우도 非活動的이요 無能하다 하야 火曜 會로 組織을 變改하얏스니 그는 1923年이고 金」, 金在鳳, 尹德炳 等이 그의 重要한 俳優이엿다. 一方에 金種範이 建設社를 組織하얏는 바 그가 1921年이고 그 翌年에 東 京에서 北星會를 組織하고 思想運動을 하고 잇든 金若水의 一

가 도라와

서 前記의 建設社의 組織을 變改하야 北風會라 하니 金若水, 鄭雲海, 宋 琫禹, 辛鐵 等이 그때 中心人物이엿으며 서울靑年會는 1920年에 一般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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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團體로 張德秀, 崔八鏞, 金思國, 申伯雨 等等이 그를 組織하엿든 것이나 3의 泥市

, 上海派 等의 싸움에 張德秀, 崔八鏞 等은 XX費 構1하엿다

는 것으로 自然陶汰가 되고 申伯雨 一派의 所謂 泥市派도 밀니여 나오고 金思國 一派의 陣營이 되는 同時에 그는 1個의 地域的의 靑年團體가 아 니라 全體運動을 意味하는 思想團體的 役割을 하야온 것이다. 金思國, 鄭 栢, 李廷允, 朴衡秉 等은 그의 重要人物이엿든 것이다. 朴憲永, 金X冶, 曹奉岩, 林元根 等이 核心이 되여서<63>新興靑年同盟을 組織하얏스니 그가 1923年이고 新興靑年同盟을 그가 組織되야 年이 淺하 나 朝鮮의 靑年運動 及 思想運動에 잇서 巨大한 賦役을 實踐하엿다는 點 에 잇서 그의 存在가 빗낫다. 朝鮮靑年會聯合會가 朝鮮靑年總同盟으로 組 織의 變改를 斷行하든 同時에 從來의 主義 綱1은-그리고 社會主義 靑年 이 運用의 機樞에 當하엿으나 그때는 임이 派的 對立이 鮮明한 후이엿음 으로 朝鮮 靑總은 언제나 서울靑年會系의 손에서 1導되여 잇섯다. 이때 에 新興靑年同盟은 火曜會系의 靑年前衛團體로 火曜會系의 運動의 實權은 언제나 新興靑年同盟의 손에서 左右되고 잇섯든 것이며 全朝鮮民衆運動者 大會도 火曜會의 提※이엿으나, 그에는 新興靑年同盟의 活動이 컷든 것이 다. 新興靑年同盟은 第1代의 委員長이 朴憲永이엿고 第2代에 林元根, 第3 代에 金璟載이엿든 바 第3代 時代에 와서 第1 第2次의 共産黨事件으로 前記의 人物이 投獄되니 그후의 新興靑年同盟은 自然히 失勢를 免치 못햇 다. 共黨이니, 共靑이니 하는 것이 正式으로 國際關係가 매저즈기는 第1 第2次黨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의 組織은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와 共히 誕生된 것이고 그리고 그이 核心勢力은 新興靑年同盟의 核心分子이엿다는 點에 잇서 新興靑年同盟은 그가 組織되야서 日淺한 比3로는 役割이 컷스 며 서울系의 손에서 運用되든 靑總과 對立的 役割을 하고 잇든 漢陽靑年 聯盟은 그가 京城市內와 漢江沿岸의 19個 團體에 1,020名의 會員을 包容 하고 이섯으나 그의 主要勢力이 新興靑年同盟이엿든 것이다. 火曜會에서 發起한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는 서울靑年會에서 反對運動이 또한 猛烈한 바이 이섯으나 北風會와 朝鮮8農總同盟이 그를 積極的으로 支援하야 警察의 集合禁止로 會合에는 이르지 못 하얏으나 그 後에 朝鮮 의 思想運動에는 비로소 色彩가 鮮明하야 왓으니 지금까지의 地方團體의 大槪는 智德體三育의 發達이란 그런 漠然한 綱1下에서 一種의 文化運動 을 하든 것으로 滿足하고 이섯으나 갓흔 線의 우리는 火曜會니 北風會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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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 아니고 하로라도 속히 統一을 圖할 것이라 하야 北風會, 火曜會, 朝鮮8

黨, 朝鮮無産者同盟이 四個團體는 合同總會를 열고 그의 具體的

<64> 實現을 꾀하엿으나 未遂하고 齊洞의 第二期 北風會 에 前記 4個 團體의 看板을 한곳에 모아 걸고 內面에 잇서서는 事務的으로 統一을 실현식키고저 하야 한 團體에서 두명式의 常務委員을 選出하야 그들로 하야곰 四個體合同委員會의 幹部에 任케 하얏스니 北風會 金若水 李奎宋 火曜會 金」 金璟載 朝鮮8 黨 李忠模 李極光 無産者同盟 朴一秉 7人의 常務委員이 잇서 實際 事務에 當햇다. 여기에서 從來의 朝鮮思想運 動에 多角的의 現象이 淸帳되고 서울 對 四合의 兩大對立이 出現햇든 것 이다. 그러나 四團體合同委員會란 그의 組織이 畸形的이엿든니만큼 그가 統制에 잇서 圓滑을 하기 어려웟고 다음에는 地X組織의 破裂이 直接으로 表面團體에 影響하얏으니 그리하야 四團體合同委員會는 再分裂의 조짐이 뵈이기 시작햇다. 1925年 겨울에 新義州에서 비밀의 일부가 루설되야서 드듸여 第1次黨의 檢擧가 잇고 그 後의 團體의 運用은 從來의 派的 싸움 의 經歷이 淺한 比較的 新進分子의 손에서 支配되면서 統一은 다시 一般 의 갈망하는 바가 되엿다. 그리고 地X組織의 權威가 날로 墜落하고 잇으 며 따라서 그가 밋치는 바의 表面團體의 影響도 아주 薄弱하게 되니 表面 線의 統一의 氣分은 날로 濃厚하고 이섯다. 1926年 봄에도 明月

에서

四合 對 前進會와의 合同懇談會까지 하게 되엿고 그 前進會의 ※導인 朝 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에도 四合側은 그에 參加하기를 決議하는 둥 X線統 一의 소래는 하로하로 놉하 가고 잇섯다. 이에 四團體合同會는 正式으로 解體하고 正友會는 創立케 되엿으니 그의 發起人에 北風會側에서 李奎宋 裴德秀 白基浩 等이고 火曜會側에서 金璟載 李鳳洙 吳義善 等이고 朝鮮8 動黨에서 李忠模 金演義 朝鮮無産者同盟에서 朴一秉 等이엿으며 그 外의 無所屬으로 金世淵 金京泰 等이 그에 參加하야서 幾多의 難關도 X線統一 이라는 口號 下에서 統一工作은 一步一步 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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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야서 正友會가 創立을 告


하고 四合의 解體式까지 畢하니 朝鮮日報와 時代日報는 『正友會의 成 立』이란 題의 社說을 載하야 그의 有意義함을 비럿다. 그보다 先하야 서울靑年會側에서 前進會를 組織하얏으니 그는 서울靑年會 란 靑年團體로 一般的의 思想運動까지 하게 되는 것은 그 組織上에 잇서 또는 그의 機構運用上에 잇서 缺陷이 잇다는 것이엿으나 그러한 表面의 理由 以外에 內面的의 事情도 그에는 잠재하야 잇섯나니 서울靑年會의 「멘버」 가운데에는 他工作을 否定하는<65> 一派와 그를 是認하는 一派 가 잇서 서로 對立的 氣勢를 갓고 이섯다. 前進會는 地X工作을 是認하는 一群이엿으니 그는 李廷允 朴衡秉 鄭栢 金越星 等이엿다. 第三期 正友會, 前進會의 創立은 그는 朝鮮社會運動線에 잇서 劃期的의 일인 同 時에 X線의 整理와 共히 一大收穫이 아닐 수 업섯다. 그리하야 意識的 統 一의 徵候가 濃厚하야 왓으니 그는 初期運動에 잇서 過去의 封建的 이데 올으기를 多分히 갓고 잇는 그들이 運動을 1導하고 잇든 關係上 피하지 못할 運命이엿다면 第1次黨의 檢擧의 結果로 內部의 事情도 만이 變햇거 니와 客觀的의 情勢는 派爭의 淸算을 促進하는 바가 이섯다. 그 후 1926 年에 第2次黨의 大檢擧가 開始되면서 全鮮에서 百餘名이 가게 되고 其他 의 多數는 海外로 닷게 되니 情勢는 再轉하야 組織에 잇서 一大變化를 招 致케 되엿다. 東京의 一月會 즉 安光泉 河弼源 朴洛鍾 等에 의하야 正友 會는 解體되고 運動方略을 從來의 經濟X爭에서 全線的 運動으로 방향을 전환하지 안으면 아니 된다고 외첫다. 종래의 朝鮮의 社會運動은 국한된 經濟X爭으로 본다는 것은 事實把握에 잇서 정당한 인식이 아니요. 다만 東京 大阪의 理論을 그대로 직수입하려는 데에서 그러한 폐해가 잇섯다 할시나 地下組織의 완성을 따라서 思想團體가 해체되여야 할 것은 당연한 노정이엿고 線의 統一이 이루워지면서 全線的의 政治運動을 소래 놉히 부 르지즌 것도 필연의 도정이엿다. 前進會에서 召集한 朝鮮社會團體中央協 議會에서 그에 대한 논쟁이 잇고 常設과 非常設의 對立的 現象에서 그의 發起 당시의 精神과 宣言 綱1에 基準한 規約을 否定하며 非常設의 理論 이 優勢를 得하얏슴도 그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그리하야 朝鮮의 社會 運動은 再一步한 것이엿다.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가 前進會에서 發起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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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고 1926年 正初에 明月

本店에서 四合對 前進會의 合同懇談會가 열

니엿을 때에 四合委員會側에서는 그에 參加는 하되 멧 가지의 주장을 聲 明하얏든 바 그에는 常設機關을 두자는 데에 反對를 表明햇든 것이다. 東 京의 一月會에서도 그 주장을 갓고 잇섯스니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는 1927年 5月에 大會가 열니여서 그 問題로 討議가 深刻化하는<66> 中에 集合의 禁止를 當하고 마럿다. (이때부터 朝鮮運動의 1導權이 俗稱 엠, 엘派의 손에서 左右되엿고 그와 對立的 地位에 서울派가 잇게 되엿다.) 社·民協同에서 再分野 『從來에 국한된 經濟X爭에서 全線的 政治運動으로의 방향전환이란 이러 한 슬로-간은 그는 필연적으로 社會主義者와 民族主義者와의 協同線의 必要를 나(生)혓다. 그에서 나온 것이 新幹會이엿다. 申錫雨, 安在鴻, 洪命 熹, 李鍾麟, 李灌鎔 等이 그 發起當時의 中心人物이엿으며 그보다 先하야 서울系의 宋乃浩 權泰錫 等이 汎民族主義團體로 民興會를 組織하엿다가 新幹會에 合倂되엿다. 光州에 학생사건이 잇고 게속하야 민중대회사건으 로 許憲, 李灌鎔, 洪命熹, 趙炳玉 等의 新幹會의 幹部級의 人物이 가고 新 幹會의 解消運動이 起하야 1931年에 新幹會大會에서 解消 可決되엿다. 그 이유는 新幹會의 1導權이 인테리의 小市民層이 갓고 잇스니 그는 鬪 X力을 발휘하지 못하고 8

者와 農民은 新幹會 運動으로 하야 自己 본

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따라서 階級的의 의식까지도 점차로 희박하여 진다 는 것이다. 全線的의 政治運動을 표방하고, 방향의 전환을 부르지즌 그들 로 新幹會란 媒介組織으로는 역량을 발휘할 수도 업거니와 8動者, 農民 의 階級的 -이 아주 不足햇다. 『從來의 局限된 經濟X爭에서 全線的의 政治運動에로 轉換이란』 看板은 華麗햇으나 그의 結果로의 所産物인 新 幹會運動은 넘우도 無爲無能이엇다. 그리하야 從來의 經濟X爭까지도 8動 者와 農民의 머리에서 빼아서 버렷다. 新幹會의 解消는 社會主義者와 民 族主義者와의 再分解를 표시한 것이다. 新幹會가 해소하야 벌서 3個年 이래에 아무런 表現團體의 출현도 업다. 그럿타 해서 新幹會의 解消로써 朝鮮의 社, 民의 協同은 永遠히 否認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업다. 한가지의 事實은 반듯이 그와 反對의 새 事實을 낫는다. 그리하야 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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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段階에 와서는 前記 두 가지의 事實이 綜合的 結果를 낫는 것이다. 組織上 缺陷이 만어서 何等의 力量을 發揮할 수 업게 된 新幹會가 解消되 여야 함은 그는 當然한 일이요 반가운 일의 하나이엿다. 그러나 一定의 目的意識을 세우고 그 共通한 要求를 향하야 協同이 再組織되고야 말 것 을 굿게 밋는 우리다. (完-원문) (1934. 5. 6) <67> <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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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조선인민공화국, 경성市인민위원 발표113)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1일 부내 휘문중학교강당에서 열린 경성시민대회에서 선출된 조선건국준 비위원회 경성지회 상임위원회에서는 그동안 협의한 결과 부내 각 계를 망라하여 다음과 같이 조선인민공화국 경성시인민위원을 선출하였다. 12 일에는 오후 2시부터 안국동의 德成實業學校강당에서 제1회 인민위원회 를 열기로 되었다. 京城市 人民委員 洪增植 崔元澤 河弼源 羅東旭 崔益翰 李英 金基道 朴俊燮 崔南周 李鍾勳 辛光範 鄭允弼 孟鍾浩 李光鎭 宋彦弼 徐丙寅 趙潤濟 朴瀅鈺 玄雲甲 韓基 俊 黃郁 朴洛鍾 金光洙 金麟錫 李源赫 金泳殷 溫樂中 李永斗 沈致寧 黃弼 鉉 尹』 趙斗元 權五卿 宋之文 鄭在達 崔永福 朴在厦 卞赫 馬壽吉 安基成 金演義 @貴善 李錫九 張洵覺 金振國 崔興峰 李定業 鄭旭載 吳憶 金昇模 金鎭億 金鎰魯 □□□ □□□ 吳成根 李鎬燮 權五翼 張錫淵 李弘 梁源喆 金昌圭 林相鶴 朴東根 許然 金成璹 @永根 柳基東 韓重銓 李謙孝 李m俊 金m岩 趙永煜 裵成m 金思馹 金相赫 李東英 金貴南 朱海 李景錫 李弼莞 徐石田 李信行 趙元淑 羅東明 崔羲楹 李東馥 李義植 鄭東錫 金昌浩 李敬 洙 韓章卨 劉在晟 許麟亢 金午星 丁七星 李鍾奎 禹鳳雲 姜貞熙 許河伯 李 桂順 高明子 顧問 洪德裕 白麟濟 鄭魯湜 徐相昊 兪珏卿 李克魯 白象圭 金度演 任永信 劉永 俊 매일신보 1945년 09월 11일

113)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제목 : 조선인민공화국, 경성市인민위원 발 표, 게재지명 : 매일신보, 게재일자 : 1945년 09월 11일, 날짜 : 1945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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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용의(容疑) 통신에 관한 건114)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114) 국사편찬위원회, 문서철명 : 검찰행정사무에 관한 기록(2), 문서번호 : 京鍾警高秘 제 15213호의 1, 발송자 : 경성 종로경찰서장, 발송일 : 1924년 12월 27일, 수신자 : 경성 지방법원 검사정, 수신일 : 1925년 01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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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관한 건115) ▲김연의(金演義)(金演羲 )1898-?

그림 327. ▲1

115)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항일운동문서> 思想에 關한 情報(7), 문서번호 : 京西 高秘 제8613호의 3, 발송자 : 京城 西大門警察署長, 발송일 : 1934년 02월 07일, 수신자 : 警務局長 등, 수신일 : 1934년 0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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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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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2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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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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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元 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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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관한 건116)

그림 331. ▲1

116)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항일운동문서> 思想에 關한 情報(7), 문서번호 : 京西 高秘 제8613호의 3, 발송자 : 京城 西大門警察署長, 발송일 : 1934년 02월 07일, 수신자 : 警務局長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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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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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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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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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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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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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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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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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3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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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炯善等의 治安維持法違反事件 檢擧에관한 건117)

그림 340. ▲1

117) 국사편찬위원회, <국내외항일운동문서> 思想에 關한 情報(6), 문서제목 : 金炯善 等 의 治安維持法違反事件 檢擧에 관한 건, 문서번호 : 京高秘 제3975호의 1, 발송자 : 京 畿道知事, 발송일 : 1933년 08월 25일, 수신자 : 警務局長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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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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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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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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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4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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