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 T R AV E L TRIP 34. Camino de Santi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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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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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여행자 ENOUGH ALONE
길거리에 함부로 파는 음식을 실컷 사먹고 느린 걸음으로 시장을 걷다가 그 카 페에 도착했다. 간판 없는 카페에서는 소녀들이 미완성의 디저트를 판다. 홀로 떠나왔거나 홀로 떠나갈 사람들만 자리에 앉아 한 방향을 바라보며 고요하게 커피를 마신다. 수많은 혼자들이 카페에 모여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데 이상 한 일이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만지고, 결핍이 결핍을 메우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든 혼자 떠나는 여행은 훨씬 느리고 깊은 숨쉬기를 요구한다. 한 골목에서 다음 골목으로 넘어갈 때까지 몇 번의 하늘을 만나고, 몇 번의 자기를 세고, 몇 번의 한기와 멀미를 느낀다. 나는 그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상관없이 결국 자기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그리려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저마다 아직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화가이거나 마지막 낱말 하나를 찾아 헤매는 시인이었다.
편집장 양정훈
수만 개의 아픔 백 개의 기억 한국 | 김종욱
2017년 겨울. 송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어느 밤이었 던 걸로 기억한다. 이태원에서 송년회가 있었고, 복잡한 이태원역 대신 마을버스를 타고 남영역으로 가서 1호선을 타고자 녹사평역 방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당시 세상은 비틀대고 있었다. 크리스 마스를 곧 지난 연말이니 모든 것이 취해도 좋은 시절이었다. 터벅 터벅 걷다 만난 이태원 끝자락에 있는 용산 평화의 소녀상. 한 취객 이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술과 함께 끼워 넣은 안주를 게워 놓은 토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오지랖이었을까? 토사물을 치워보겠다고 주변 가게에 마대자 루를 빌리러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술이 오른 남자에게 선뜻 대 걸레를 빌려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결국 빌리지 못하고 편의점에 서 물티슈와 수건을 샀다. 역한 냄새에 나도 그 곳에 토를 얹어 놓 을 것 같았다. 역겨운 토사물을 닦으면서 문득 어느 날이 떠올랐다. 약 20년전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 머니가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내 손을 잡아 주셨던 그 날. 할 머니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 손을 잡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 신의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그분들의 한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 다. 추운 겨울, 평화의 소녀상 기단석의 얼어버린 토사물은 닦았지 만 피해자들의 아픈 눈물은 간절한 노력으로도 닦이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
연말모임을 송년회(送年會) 또는 망년회(忘年會)라고 부
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위안부
른다. 살다 보면 분명 떠나 보내고 싶은 시간이 있고, 잊고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 갔던 13-16세 때의
싶은 기억이 있다. 반면 절대 떠나 보내서는 안 될, 절대
모습을 재현했다. 평화의 소녀상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
잊어서는 안 되는 시간과 진실도 존재한다. 그 기억이 치
외에서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욕스러운 과거라도 혹은,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하더라도.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거리로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국립 여성사 전시관에 가면 색다른
나와 일본대사관 앞에서 문제해결을 촉구한지는 벌써 25
위안부 기림비를 만날 수 있다. 국립 여성사 전시관은 우
년이 넘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수요집회는 연
리나라 여성들의 역사와 문화를 모아놓은 곳으로 여성이
참석인원이 5만 명이 넘는 집회로 성장했고, 세계에서 최
우리나라 문화의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보여주는 전시관
고로 길게 이어지고 있는 정기집회로 기록되고 있다. 많
이다. 이곳에는 최초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증언한
은 사람들의 꾸준한 희생과 지지가 모였다는 점을 생각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한 위안부 기림비가 있다.
하면 자랑스러운 기록이지만 일본 정부의 변함없이 안일
평화의 소녀상 원제작자인 김서경 작가는 소녀의 자리
하고 기만한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에 고(故) 김학순 할머니를 모셨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상 앞에는 전소라 작가의 <합창>이라는 작품이 있다. 생 존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분들을 상징하는 조각이 서있
본격적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한 '위안부' 기림비를
다. 내가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는 32명이 생존해 있었고
닦기 위해 청소도구를 들고 거리로 나선 건 12월 28일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는 31개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 빈
었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가 있었던 딱 2년이 되던
곳에 마음을 채워 넣는다. 꼭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날이었다. 위안부문제를 '불가역적'이라는 단어를 써 가
그분들이 원하는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도록 힘을 보태겠
며 피해자들의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다고. 이 글을 쓰는 지금 2018년 4월말에는 28개의 조각
결론 내린 졸속합의였다. 이 합의문에는 평화의 소녀상
이 서 있다. 2018년도는 생존 피해자들의 평균 나이가 90
을 철거한다는 조항도 들어가있다.
대가 되는 해이다. 우리가 방관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 무 없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다짐했다. 당신
높이가 130cm인 이 평화의 소녀상은 치마저고리를 입
의 용기 그 마음 잊지 않겠노라며.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
고 짧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가 의자에 앉은 채 일본대
실 때 꼭 사과를 받을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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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시킨 윤정옥 교수는 대
상에 알렸다.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이후 많은 일
학교 1학년이었던 시절 정신대로 나가라는 강요를 줄곧 받아왔
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 사
다. 군복 입은 사람이 강의실로 들이닥쳐 글자가 빼곡한 종이
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에 강제로 지문을 찍게 하자 정신대로 끌려갈 수도 있다는 두려 움에 학교를 자퇴했다. 강제 징용 노동자와 학도병으로 끌려갔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당당하게
던 남자들은 광복 후에 학교로 돌아오는데 여자들은 아무도 돌
자신의 아픈 삶을 증언하는 고발자로 바뀌는 순간이 미투
아오지 않았다. 이에 호기심을 느껴 관련 자료를 모으고 진실을
(#Me_Too) 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전까지 뜬소문으로 취급
찾아 다녔지만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증인도 없었다. 피
받던 문제를 어엿한 진실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용기였다.
해자가 분명 한국에 살아있을 거라 믿었지만 만날 수 없었다.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침묵과 외면 속에서 그렇게 잔혹한 역사는 잊혀지고 있었다. 고(故) 김학
시간이 흘러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여성과 관광 문화'
순 할머니는 여성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된 미투
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때 화두는 '매춘 관광'이었다. 광복을
운동을 최초로 시작하신 선구자다.
이룬 지 고작 20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60년대부터 일본인 관광객과 미군들을 상대로 매춘 관광을 시작했다. 외화
공개 증언이 있은 지 약 1년 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벌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밀며 국가는 1980년대까지 외
위안부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1992년 1월 8일 수
국인을 상대로 한 매춘을 조장했다. 이렇게 성찰하지 못한 채
요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우리나라를 방
잊혀진 역사는 모습을 달리해 반복된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들
문한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의 발단
에게 한국은 실제로 '기생파티'로 유명했다. 이 세미나에서 이
이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와 국
런 매춘 관광의 실태와 더불어 윤정옥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 관
민들이 집회에 동참했고 그렇게 대한민국에는 현재의 위드유
련 발표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with_you)운동과 성격이 같은 인권 회복을 위한 연대물결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은 위안부 문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는 "나는 일본군 위안
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매매 피해 여성들과 다른 전쟁의 피해
부였다"라고 용기를 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혔
자들과도 연대하며 여러 인권운동에 손을 내밀었다.
다. 1988년 윤정옥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지 3년만에 나온 첫번째 생존 피해자 증언이었다. 고(故) 김학순
2011년, 수요집회는 20주년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14일 수요집
할머니는 17세가 되던 해에 중국 철벽진으로 끌려가 약 4개월
회 1000회를 맞이하여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
동안 일본군 성노예로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구사일생
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으로 위안소에서 도망친 그는 중국 소주, 북경, 상해 등을 전
앞에 처음으로 평화비(평화의 소녀상)을 제작해 설치했다.
전하다 광복 이후에야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 고 자신의 아픈 삶을 공개하는데 50년의 세월이 걸렸다. 17살 때의 일을 50년간 가슴 속에만 묻고 치욕과 아픔 속에서 남몰
수요집회 요구사항
래 고통 받다가 67세가 되어서 용기 있게 증언대에 올라선 고
① 전쟁범죄 인정 ② 진상규명 ③ 공식사죄 ④ 법적 배상
(故) 김학순 할머니는 역사에 묻힐 뻔했던 위안부의 실체를 세
⑤ 전범자 처벌 ⑥ 역사교과서에 기록 ⑦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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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마포구에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
가까이 있어 오히려 소홀해지기도 한다. 내가 평화의 소녀상
물관, 월드컵공원에 있는 소녀들을 기억하는 숲은 모두 일본
을 만나러 떠난 이유도 되짚어보면 이 때문이었다. 곁에 있
군위안부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권과 평화에 대해서 고민하
다는 이유로 무심했고 몇 번 만난 적이 있다고 다 알고 있다
게 만드는 장소들이다. 무엇보다도 매주 수요일 정오, 일본대
착각했다. 서울과 경기도에 30년 넘게 살았다고 서울을 잘
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석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의 14곳, 경기도 24곳의 위안
있다. 이전 세대의 피, 땀, 눈물로 이뤄낸 이 자유는 당연한 듯
부 기림비를 찾아 다니는 동안 처음 발 디디는 곳이 많았고
보여도 당연하지 않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이 당
가 봤지만 잘 몰랐던 곳도 있었다. 서울의 중심으로 가기 위
연한 걸 얻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해 의정부행 기차를 자주 탔지만 의정부에 가 본 적은 없었
우리는 기억해야 하고 그 아픔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
다. 부천과 의정부는 위안부 기림비와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의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함께 있는 지역이다. 인천 부평에는 평화의 소녀상과 강제징 용노동자상이 함께 있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지은 경인선을
위대한 업적을 위해서 반드시 거대한 돈과 힘이 필요한 것은
오가며 일상과는 다른 감흥을 느낀다. 일상을 달리 보게 하
아니었다. 작은 도움과 열정이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
는 게 여행의 힘일 테다.
작이 되곤 한다. 큰 파도는 작지만 잦은 물결에서 시작한다. 나비의 날갯짓이 큰 폭풍을 일으키듯 말이다. 인권운동의 역
이 밖에도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수많은 장소에 평화의 소녀
사를 살펴보면 강자가 자발적으로 약자를 도운 적은 드물었
상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꿋꿋이 앉아 있었다. 중학동에 처음
다. 약자와 소수자의 작은 소리에 다른 약자와 소수자가 힘을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에 서울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더해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평화의 소녀상도 그러했다. 이 아
위안부 기림비는 서초구에 있다. 바로 서초고등학교 위안부
픈 역사를 기억하고 평화와 인권을 회복하는 일에는 많은 학
소녀상이다. 전국 최초로 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소녀상이 두
생들이 참여했다.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회관에는 2015년 11
르고 있는 목도리에 세월호를 기리는 노란 리본 배지가 눈에
월 3일 학생의 날에 오직 고등학생의 힘으로 평화의 소녀상
띈다. 그 다음 고등학교 교정에 위안부기림비가 세워진 곳은
이 세워졌다. 이 날에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확정고시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다. 대학교 캠퍼스 최초로 교정에 세워
가 있었다. 미래세대가 주도적으로 진실 알리기에 나서며 기
진 곳은 대구대학교다. 자유와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뽐내는
성세대에게 더 큰 부끄러움을 안겨줬다.
서울 홍익대학교 앞에는 거센 반대에 부딪혀 평화의 소녀상 설치에 난항을 겪었다. 어른들은 청소년들보다 세상을 더 잘
이 소녀상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역사동아리 '주먹도끼'를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자의 편견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
비롯해 53개의 고등학교와 약 16,400여명의 학생들이 힘을
고 듣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울의 보수적인 동네인 서초구와
모았다. 이화여고 학생들은 소녀상 제작에 사용하고 남은 모
보수적인 도시 대구에서 이런 모습을 보리라고 상상도 하지
금액 1,500만원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하
못한 나도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옹졸한 어른이었다. 더 이상
기도 했다. 이 고등학생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100개의 학교
순수하지 못한 나는 편협한 경험과 생각을 무기로 너무나 섣
에 작은 평화의 소녀상 100개를 설치했다. 기성세대의 무관
부르게 세상을 판단했다. 내 어리석음은 나를 속이고 있었다.
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학생들의 행동이 서울과 경기도 지역 의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깃들어 있다. 서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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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일본군 성노예 문제도 그러했다. 위안부문제를 안다고
구의 대학생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은 대학생들의 모금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분노는 공
제작됐다. 성동구 평화의 소녀상은 성동구 무학여고 학생들
허했다. 앎이 수반되지 않은 감정은 맹목적으로 불타오르다
의 제안으로 왕십리 광장 앞에 세워졌으며 도봉구 평화의 소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휘발된다. 평화의 소녀상뿐만 아니라
녀상은 노곡중학교, 정의여고, 덕성여대 학생과 지역 주민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록한 곳을 찬찬히 둘
이 자발적으로 건립을 추진했다. 평택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러보았다. 서울에서도 하루만 시간을 낸다면 일제강점기 시
도 평택지역의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 성공을 이
절 우리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둘러 볼 수 있는 장소들이 많다.
끌었다. 평택 평화의 소녀상은 평택시청소년문화센터 앞마당
남산에 위치한 기억의 터와 안중근의사 기념관, 서대문구에
에 위치해있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평화의 소녀상의 특징 중 하나는
크와 캐나다 토론토의 평화의 소녀상에 이어 화성시민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경우가 다수 존재한
세운 세 번째 소녀상이다.
다는 점이다. 서울 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 있는 성북구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중국 칭와(淸華)대 미술학과 교수
화성시는 일제강점기 일본 순사를 처단할만큼 경기도에서
판위친, 영화제작자 레오스융 두 중국예술가와 평화의 소
가장 격렬하게 3·1운동을 벌인 항쟁지로 화성시 향남읍 제
녀상 원제작자인 김운성, 김서경 작가 부부의 공동작업으
암길 50에는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제
로 탄생했다. 한국인 소녀상과 중국인 소녀상이 함께 하
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주변 3만7천㎡ 부지에 '화성시
는 모습으로 오랜 시간 많은 고통을 받은 한·중 국민들이
독립운동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367억
전쟁의 고난을 함께 기억하기 위함이다. 빈자리는 치욕과
원을 들여 조성하는 독립운동 역사문화공원은 독립운동기
고통을 겪은 한국과 중국, 대만, 필리핀, 네덜란드, 인도네
념관, 독립운동가 추모공간, 교육장, 주민쉼터 공간으로 구
시아를 포함한 27개국 소녀들이 앞으로 이 자리에 앉을
성된다. 기념관에는 일제강점기 화성지역 모습과 독립운동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가, 만세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일제가 제암리 학살사건을 일으킨 이유,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설명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는 27개국 2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하는 자료를 전시하기로 했다. 또한 3·1 만세운동길을 복원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많게는 40만명이다. 그 중 과반 이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만세길 31㎞ 전 구간을 복원해 역
상이 한국의 여성들이다. 당시 조선 전체 여성 인구가 1천
사테마길로 조성하기로 했다.
만명. 그 중 젊은 여성들의 수를 추산해 본다면 너무나도 많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의해 공출되어 혹독한 시련을
화성시와 더불어 성남과 수원도 해외 위안부 기림비 설립
당했다. 정부에 등록된 239명의 피해자들이 피해자의 전부
에 주도적으로 협조한 지자체다. 호주에서 최초로 세워진
가 아니다. 다른 평화의 소녀상과 달리 한·중 소녀상 뒤엔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후원하였으며 미국 글렌데일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실존하는 중국 위안부 할머니의 발
시의 '평화의 소녀상' 철거 논란이 벌어지자, 성남시는 특
자국을 그대로 재현했다. 두 나라 소녀의 모습은 각국 전통
사단을 파견하여 '평화의 소녀상' 보호에 앞장선 바 있다.
문화를 반영했다. 하지만 두 소녀 모두 맨발에, 꼭 쥔 손으
수원 평화나비를 비롯한 수원 시민들은 유럽의 첫 평화의
로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소녀상인 독일 비젠트 시 히말라야 공원 건립에 앞장섰다.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중국 상하이에도 있다. 이 평화의
전국의 모든 소녀상을 닦아야겠다고 처음부터 계획한 것
소녀상 건립에는 경기도 화성시가 발벗고 나섰다. 화성시
은 아니었다. 사실 전국에 위안부 기림비가 100개가 있다
는 해외 자매도시 및 우호 도시와 연계해 해외 평화의 소
는 것도 몰랐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많은 것을 모
녀상 건립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화성시는 캐
르고 있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단순히 이루어진 것이 없
나다 토론토와 중국 상하이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
었다. 소녀상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고 사람들
데 도움을 줬다. 토론토는 일제강점기에 화성에서 일어
의 정성과 염원이 녹아 있었다. 서울에 사는 나는 대중교
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가 활
통을 이용해 점점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는 횟수를 늘려갔
동하던 곳으로 화성시와 상당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 또
다. 아픈 기억은 견디면 없어지는 게 아니다. 목소리를 높
한 상하이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상하이 사범대학에 위
이고 행동하며 진실과 마주하고 진정한 반성과 용서가 있
치해 있다.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화성시 동탄 센트럴파
을 때 이루어진다.
제암리 학살사건 1919년 4월 15일 일본 군경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와서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30명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문을 잠그고 사격하는 만행을 한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한 사건이다.
12
평 화 의 소 녀 상
뜯겨진 머리카락
새
빈 의자
한복입은 소녀상
당시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평화와 자유를 상징. 돌아가신 할
세상을 먼저 뜬 할머니들의 빈 자
조선의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이 조
생각하여 함부로 짧게 자르지 않았
머니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을 연결
리이자 소녀와 함께 앉아 할머니들
직적 폭력을 가했다는 것을 새기
다. 거칠게 뜯겨진 머리카락은 소녀
하는 매개체의 역할
의 상처를 공감하고 이 땅의 평화
며, 강제로 끌려갈 당시의 소녀들
들이 일본에 의해 억지로 부모와 고
와 인권을 위해 싸워 오신 할머니
의 한복 입은 모습을 형상화
향과 단절된 모습을 표현
들의 염원을 끝까지 함께하고자 하 는 사람들의 약속 공간
꼭쥔손
할머니의 그림자
그림자 속의 하얀나비
발꿈치가 들린 맨발
일본 정부에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
소녀상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모습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할머니들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하거나
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
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원망과 한
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 바라는
돌아와서도 편치 않은 삶을 살았던
이 서린 오랜 시간을 표현한 그림
환생을 의미
할머니들의 서러움과 자신의 잘못
자이다. 깨진 조각들은 할머니들의
이 아님에도 평생 죄인처럼 살아야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
했던 한과 불편함을 상징
멈추지 말아,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돈이 없어 불편한 적은 많았지만 미안했던 적은 없
을 열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업체에서 프로젝트
었다. 그런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나
를 정중히 거절하는 메일이었다.
눔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도 있어 역사적
순간 울컥했다. 후원금이 목표액에 못 미치는 것도
진실을 알기 쉽게 전시하고 있었다. 방문 당시 9명
아니고 아예 시작도 못하는 거절이었다. 프로젝트
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생활하고 있
선정 기준을 수 차례 읽어봤지만 납득이 가는 설명
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귤 한 박스와 꿀
은 없었다. 미세먼지와 잦은 눈 때문에 너덜너덜해
단지 하나가 민망하게 느껴졌다. 20여 년 만에 찾
진 평화의 소녀상의 방한용품들을 초라하지 않게
는 나눔의 집인데 좀 더 많은 걸 들고 오고 싶었다.
바꿔보자는 작은 계획은 실패했다. 후원금이 많이
가난한 여행작가는 여행 초기라는 핑계로 돈을 아
모이면 해외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도 찾아가 알려
껴야만 했다.
야겠다는 허황된 꿈도 접어야 했다. 왜 이런 추운 날 땅끝에서 이러고 있을까 다시 한 번 묻게 됐다.
크라우드 펀딩을 신청했다. 크라우드 펀딩 자금을
미세먼지가 가득한 땅을 걸으며 목감기와 항상 함
필요로 하는 사람이 프로젝트를 기획해 온라인 플
께여야 했고 손과 발은 종종 동상에 걸리곤 했다.
랫폼을 통해 투자자 혹은 후원자들을 찾는 방식이 다. 전국의 위안부 기림비를 청소하며 모자, 목도
이 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수건이 아닌 내 맨손
리, 장갑 등 필요한 게 있으면 시장에서 구입해 옷
으로 평화비의 맨손을 오래도록 잡은 날이. 평화의
을 입혔다. 가끔은 꽃을 사 헌화했다. 이왕 떠나온
소녀상 옆 자리에 앉아 카메라로 그동안 만난 평화
길이니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싶었다. 굶으면서 밤마
의 소녀상을 살펴봤다. 소녀상이 쓰고 있는 모자,
다 터미널 근처 여인숙과 싸구려 모텔을 전전한다
두르고 있는 목도리, 발 앞쪽이 바닥에 닿아 있어
해도 괘념치 않았다. 목표한 금액을 후원 받는다면
일반 양말은 못 신겨 시민들이 직접 짠 양말을 신
평화의 소녀상을 좀 더 아름답게 꾸며줄 수 있었
고 있는 모습들은 내가 순간 잊었을 뿐 많은 사람
다. 게다가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을 위해 도움을 보
들의 관심과 노력이 피해자 분들과 함께 한다는 사
탤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실을 다시금 깨닫게 만들었다.
해남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었
충청남도 보은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방풍천막
지만 겨울이라 해가 짧아 어둑해지고 있었다. 해남
속에서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었고, 경기도 안
평화비는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가장 남쪽에 위
산 평화의 소녀상과 강원도 원주 평화의 소녀상을
치한 평화의 소녀상이다. 전라남도 지역에 처음 세
비롯한 많은 기림비 앞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워진 평화의 소녀상이다. 그 때 핸드폰에 두 번 진
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평화의 소녀상은 어김없
동이 온다. 메시지가 도착하면 한 번이 울린다. 한
이 우의를 입고 있었고, 전남 담양 평화의 소녀상
파와 폭설, 미세먼지 때문에 자주 받았던 재난문자
에는 우산이 씌워져 있었다. 똑같이 생긴 평화의
라면 굉음이 난다. 두 번 진동은 기다리는 곳에서
소녀상이라 하더라도 지역 사람들의 애정으로 각
메일이 왔다는 뜻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메일함
자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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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비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하고 만나
양한 곳에서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기리는 평
기도 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끝자락에 있는 오이
화의 소녀상마저 수난을 당했다.
도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옥구공원에 도착했을 때 다. 이곳에는 시흥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소녀상
나와 같은 남자를 만난 건 전라북도 고창이었다.
을 닦고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있는데 한 아이가 오
내가 고창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문화의 전당에
더니 내 뒤를 지킨다. 잠시 자리를 비키자 아이는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소녀상에 있는 노란색 모
쑥스럽게 가방에서 빨간 귀마개를 꺼낸다. 그리고
자와 목도리 그리고 무릎 담요를 벗기고 있었다.
소녀상 머리에 귀마개를 덮는다. 그 장면이 뭉클하
이내 평화의 소녀상을 닦기 시작했다. 같이 도와
게 다가왔다. 분명 용돈을 모아 샀을 것이고 남자
야 하나 고민했다. 너무 오래 머뭇거렸다. 청소를
아이가 앙증맞은 캐릭터가 그려진 빨간 귀마개를
마치고 다시 소녀상에 모자를 씌우는 남자와 눈이
사는 것도 마냥 쉽지는 않았을 테다. 아이가 소녀
마주쳤다. 그 민망해하는 눈동자가 낯설지 않았다.
상에 남긴 편지를 몰래 읽었다. '우리의 사랑을 받
나도 평화비를 닦을 때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
아 살아나라!' 아직 맞춤법은 서툴러도 그 마음은
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의 눈으로 내 신상정보를
서툴지 않았다. 아픈 역사로 인해 오랫동안 상처에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도 종종 만났다. 혹시 사람
머물러야 했던 과거에 사랑을 전하는 메시지가 새
들이 나를 오해하지 않을까 괜히 위축되곤 했다.
삼스럽게 내 마음을 울린다. '살아나라'는 문구가
그때 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향한 메시지로 느껴졌다. 무관심 속에 죽어 지냈던 내 생활 또한 성숙한 시민으로 깨어 살아
"선생님! 뭐하세요?"
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다가왔다. 길을 걷던 여고생 두 명이 그 남자를 부르고 있었 제천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제천 평화의 소녀
다. 남자는 선생님인 듯 했다. 그는 학생들과 반갑
상을 찾아가기 위해 제천역에 내렸다. 제천 평화의
게 인사하며 평화의 소녀상을 닦고 있었다고 친절
소녀상이 있는 의병광장은 제천역에서 걸어갈 수
히 대답했다. 나는 선생과 제자가 대화를 나누는
있는 거리였다. 가는 길 내내 당시 제천화재로 목
동안 고창 평화의 소녀상 주변을 서성였다.
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하는 현수막이 내 마음을 무겁게 흔들었다. 꽃이 가득 놓인 제천 평화의 소
어둑한 밤거리 평화의 소녀상 옆자리에 앉은 나
녀상을 닦아주기 위해 짐을 내려두고 머리에 두른
의 끈기가 민망하게 느껴진다. 진실 규명과 일본
두건을 벗기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싸우는 할머니들의 노력이 더욱 숭고하게 다가온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에요?"
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평화비를 청소도구가 아 닌 마음으로 닦자고. 소녀상의 굳건한 표정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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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도구를 보여주며 방문 목적을 조심스럽게 설
고 꼭 쥔 주먹을 보며 지치지 말고 끝까지 함께하
명했다. 오해는 그렇게 쉽게 풀렸다. 아주머니는
자고. 그래서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를 청산하
주변에 살고 있고 평화의 소녀상에 기금 마련에
자고 다짐했다. 더는 혼자가 아니다. 과거를 기억
후원을 했다고 했다. 사실 남자가 평화의 소녀상을
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려 무던히 애쓰는 사람들
만진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꺼릴게 없는 당
이 여전히 남아있다. 전국 평화의 소녀상이 갑자
연한 행동이지만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평화의 소
기 늘어나게 된 건 오히려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
녀상들이 공격을 받았다. 대구와 상주, 마산 등 다
하기로 약속한 직후부터였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강원도를 급히 방문했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코앞
조선군을 전멸시킨 부산성이 있었던 자리다. 부산 초
에 두고 있는 시점이라 여비를 아끼기 위해 일정을
량역에서 일본영사관으로 가는 길에 정발 장군 동상
서둘렀다. 유일하게 시정부의 보호를 받는 원주 평화
을 만나게 된다. 정발 장군은 부산성을 지키다가 자
의 소녀상을 만나고 강릉과 속초를 여행했다. 내가
신의 군대와 주민들과 함께 왜적에 목숨을 잃었다.
강릉 경포호 3·1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강릉 평화의
왜군은 이곳을 거점으로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소녀상을 청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아이스하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역사가 있는 부산성이 있었던
키 남북 단일팀이 경포대해수욕장을 방문했다. 그 때
자리에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영사관이 자리잡고 있
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올림픽이 한반도의 평화
다. 이 일본영사관을 부산 동구 평화의 소녀상이 바
를 앞당기는 하나의 단계가 되리라고는.
라보고 있다. 영사관 안쪽 일장기가 나부끼는 딱 그 자리를 평화의 소녀상이 응시하고 있다. 부산 동구
변화는 이렇게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꼭 달성
평화의 소녀상 평화비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
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고 진실을 위한다면. 고루한 싸움을 해야 하고 때론 상처를 입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세웁니다."
을 때도 있다. 지치고 허무해져 포기하고 싶은 날이 수없이 이어질 테다. 그러다 문득 꿈이 현실이 되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비판 받
찾아오곤 한다. 여행의 깨달음을 잊지 말고 희망찬
는 이유는 정부가 주도해 조선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마음으로 행동하자고 한라산을 바라보며 여정을 정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른 국가의 전
리했다. 부산에서 내 여행 100번째 소녀상을 만나러
쟁에서도 성매매는 있었고 심지어 강압적인 성폭행
제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더욱 진정으로 사과해 야 하는 이유는 국가가 주도해 성노예를 강요하고 관
반성하고 개선하지 않은 역사의 비극은 반드시 반복
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
된다. 2016년 12월 28일 부산 동구 평화의 소녀상이
죄와 법적 배상은 더욱 필수적이다. 광복 이후에도
설치될 때, 부산 동구청은 평화의 소녀상을 '불법 시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침탈하고 폭력을 자행
설물'로 규정했다.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끝내 부
한 일들이 이 땅에 반복되곤 했다. 내가 이제 내릴 제
산 동구청 직원과 경찰은 소녀상을 강제로 철거했다.
주국제공항 활주로에도 70년 전 무참히 희생된 사람
박근혜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가 있은 지
들의 시체가 묻혀있다. 그 이후에도 국가권력의 탐욕
딱 1년만의 일이었다. 결국 이틀 만에 소녀상이 돌아
은 개인의 삶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이 아픔과 과오
왔다. 부산 동구청은 여론에 못 이겨 소녀상을 제자
가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다.
리에 가져다 놨다. 하지만 돌아온 소녀상은 아랫돌 모서리가 깨져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31일 제막
서울 강북구 평화의 소녀상에는 헌법 제 10조가 같이
식을 치렀다.
새겨져 있다.
동구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영사관 앞에 위치하고 있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가장 먼저 들어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ART
김종욱 걸음도 느리고 삶도 느리다. 느려도 괜찮다는 걸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구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주로 여행에 대해 쓴다. '사색여담' 시리즈- 「그렇게 여행자가 된다」, 「상처 위를 거닐다」 등을 썼다.
혼자 놀았지 누군가 옆에서 없어도 없어서 더 좋았지 방콕 | 후아힌 | 최갑수
내 인생의 번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을 여기 놔두고
"올해 여름휴가를 가고 싶은 장소에 대해 아니면 지난 해 휴가를 다녀온 장소에 대해 말해주세요. (1)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2) 기간은? (3) 가져 간(가져 갈) 음악 은? (4) 갔었다면(간다면) 누구와 함께?" 어느 잡지에 서 내게 물어온 항목이다. 여름 특집호에 들어갈 설문 조사였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1) 장소는 태국 방콕과 후아힌. 비행시간이 여섯 시간 을 넘으면 안된다. 갈 때도 피곤하고 올 때도 피곤하다. 도시와 휴양지를 같이 즐기고 싶다. 복잡하지 않고 여 유로운 곳이어야 한다. 방콕 아리 지역은 요즘 떠오르 는 지역. 연남동 비슷하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바 호핑을 할 것이다. 후이힌은 휴양지다. 리조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대고 싶다. 방콕에서 후아힌 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2) 일주일 정도. 긴 휴가는 싫다. 일상이 흐트러진다. 루틴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무너지기는 쉽다. 프리랜서인 내게 루틴은 중요하다. (3) 예전엔 아이팟 가득 다운로드 받아갔지 만 지금은 스트리밍이다. 애플 뮤직을 믿는다.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잘 알고 있다. 방콕에선 보노보를, 후아힌 에서는 누자베스를 들을 것이다. (4) 물론 혼자 갈 것이 다.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최고의 여행은 혼자만 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난해 이맘 때 나는 방콕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아주 지쳐 있었다(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살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고,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이유 야 대형 트럭에 실어도 넘쳐날 만큼 널려 있으니까. 어 쨌든 나는 어딘가로 도망가야 했는데, 다행인 건 통장 에 약간의 잔고가 남아 있었다는 것. 새벽녘 책상에 턱 을 괴고 앉아 지구본을 빙그르르- 돌리며, 자 어디로 떠나볼까, 지금 내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번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을 여기 놔두고 나만 살짝 빠져나가는 거야. 그러다 손가락이 멈춘 곳은 방콕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콕... 안 가본 지 오래됐구나. 사진 스토리지에서 태국-방콕 폴더를 열어보니 마지막으로 사진 찍은 날 짜가 2008년 5월이었다. 10년이 넘었구나. 24
방콕, 수쿰빗26을 걸었지
방콕은 여전했다. 복잡했고 시끄러웠다. 수완나폼 공항을 나오자마 자 매연 때문에 목이 따끔거렸다. 택시를 타고 서둘러 수쿰빗 로드 (Sukhumvit Road)로 향했다. 방콕에서 가장 긴 도로로 방나(Bang Na) 를 거쳐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한 뜨랏(Trad)까지 연결한다. 호텔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트렁크를 풀지도 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일단 한 숨 자자.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자든 말든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려고 혼자 온 것이다. 냉면에 케첩을 뿌려 먹든 말든 내 맘이다. 이마에 방콕의 햇살이 어룽댔고 커튼을 치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귓전에 재잘대던 새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눈을 뜬 건 오후였다. 나는 양치를 하고 샌들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배가 고팠다. 일단 쌀국수 한 그릇. 구글은 가까운 곳에 룽르엉(Rung Ruang)이라는 쌀국수 집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방콕에서도 소문난 태 국식 쌀국수 집이라고 했다. 한국인 여행자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쌀국수는 맛있었다. 면은 부드러웠고 육수는 깊었다. 나는 차가운 콜라 와 함께 쌀국수를 후루룩 후루룩 먹었다. 쌀국수만큼 혼자 먹기 좋은 음 식이 있을까. 아니 쌀국수 뿐만 아니라 모든 면요리는 혼자 먹기 가장 알맞은 음식이 아닐까. 쌀국수, 짜장면, 칼국수, 파스타, 우동, 라멘 등등. 구석진 테이블에 혼자 앉아 면을 건져 올리다 보면 '나의 인생이 다른 이의 인생을 방해해서는 안되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홀 한가운 데에서는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식당 내부 사진과 셀피를 찍는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한국인도 보였다. 나의 여행이 누군가의 여행을 방해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쌀국수를 먹고 거리를 걸었다. 뭔가 달콤한 게 마시고 싶었다. 나는 수쿰 빗26을 따라 걸었다. 비교적 한산한 거리다. 큰 도로를 따라 사다리처럼 펼쳐지는 골목들 사이로 멋진 카페와 레스토랑이 숨어있다. 바쁘게 움 직이는 택시와 오토바이 사이로 현지인들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걷다가 만난 카페는 카페 소라(Sora). 자전거를 테마로 한 카페였다. 누 군가 초코시럽이 잔뜩 올라간 팬케이크를 먹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문 을 열고 있었다. 시럽을 잔뜩 뿌린 팬케이크는 달고 또 달았다. 포크로 커다랗게 잘라 입 속 으로 팬 케이크 한 입을 밀어 넣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남을 행복하게 하 기 위해 사는 건 절대 진짜 인생이 아니야. 먼저 자신이 행복해야 하는 거야. 28
아리와 소이 26
방콕에서의 또 다른 하루는 아리(Ari)에서 보냈다. 요즘 방콕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짜두짝 시장이 있는 모칫 역에서 BTS로 두 정류 장 거리. 세련된 바와 식당이 즐비하다. 평일 점심과 저녁엔 근처 직장인 들로 붐비고, 주말과 저녁이면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세계 각국의 음식을 즐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서 들른 곳은 솔트(Salt)라는 레스토랑. 간단한 맥주와 드링크 메 뉴, 그리고 이탈리안 푸드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외국에 나와 좋은 점이 있다면 혼자서 놀고 혼 자서 먹고 혼자서 마시는데 아무 눈치를 보지 않아서 좋다는 것이다. 아 무도 신경 쓰지 않고 참견하지 않는다. 도넛은 도넛의 삶을 살아가고 있 고 지우개는 지우개의 인생을 살아간다. 검은 건반에게 넌 왜 검은 건반 으로 태어났느냐고 묻지 않는다. 솔은 솔로 태어나 솔 음을 낼 뿐이다. 이렇게 혼자 느긋한 레스토랑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 오아시 스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머릿속에서 바람이 불고 얽힌 실이 스르륵풀어져 나가는 것 같다. 그래 다만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레스토 랑 바깥의 어둠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뭔가 서서히 충만해지 고 있는 것만 같다. 마지막 날은 시암(Siam)과 람부뜨리(Rambuttri)에서 보냈다. 시암은 쇼 퍼를 위한 천국이다. 시암 디스커버리(Siam Discovery)는 일본 출신의 디 자이너 사토 오오키가 건축한 곳. 태국 디자이너 의류, 생활 잡화 등 태국 의 디자인과 패션 트렌드를 한자리에 모았다. 배낭여행자들의 성지 카오 산로드 옆에 자리한 람부뜨리는 밤이 되면 밴드의 공연과 다국적 음악이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길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흥겨워지는 곳이다. 람부뜨리에 얼마간 앉아 있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숙소는 시암에 있는 센타라 그랜드 앳 센트럴월드 방콕(Centara Grand at CentralWorld Bangkok)이다. 5성급 호텔이다. 가끔 혼자 와서 고급 호텔에 묵곤 한다. 누군가 물었던 적이 있다. "혼자서 굳이 비싼 숙소에 묵을 필요는 없잖 아?"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혼자 있을 때 가장 좋은 걸 먹고 가장 좋은 걸 입고 혼자 쓰는 물건을 가장 비싼 걸로 사야해. 그게 삶의 질을 높 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 나는 지금 호텔 꼭대기에 있는 바 우노 마스 (Uno Mas)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다. 2천 개 이상의 병으로 꾸민 8미터의 와인 타워가 눈길을 끈다. 발밑으로 방콕의 화려한 야경이 펼쳐진다. 바 텐더를 향해 한 잔 더를 외쳤다. 방콕의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32
후아힌, 혼자 놀기 좋은 해변
방콕 남부 버스 터미널에서 후아힌(Hua Hin)으로 가는 버스를 탔 다. 찬 바람과 더운 바람이 번갈아 나오는 에어컨바람을 맞으며 흔 들리며 졸다 보니 어느새 후아힌 역에 도착했다. 썽태우를 타고 십 분 정도 가자 호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방콕에서 남쪽으로 200km 거리, 자동차로 세 시간 반 거리에 위치 한 후아힌은 태국 최초의 휴양지이자 왕실 휴양지다. 1760년대 아 유타야 왕국이 몰락한 이후 약 100년을 폐허로 방치돼 있다가 1920 년대 왕족들이 휴가를 가기 위해 후아인에 기차역을 만들면서 태국 의 대표 휴양지로 떠올랐다. 아직도 남아 있는 후아힌 역은 태국에 서 최초로 세워진 기차역이자 가장 아름다운 역으로 꼽힌다. 후아힌은 우리가 익히 아는 파타야나 크라비, 코사무이와는 분위기 가 다르다. 떠들썩 하지도 않고 흥청망청 즐기는 분위기도 아니다. 모든 것이 적당하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의 야시장과 산책과 해수 욕을 즐길만한 해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맥주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바가 늘어선 다운타운도 있다. 이른 새벽 후아힌 비치로 나갔다. 매일 아침 여섯 시에서 여섯 시 반 사이, 어스름한 새벽녘에 승려는 해안가를 따라 탁발에 나선다는 말을 들었다. 해변을 서성이고 있으니 붉은 승복과 바리때를 든 승 려가 해변 끝에서 걸어왔다. 그 장면은 아주 신비로웠다. 해변에 있 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시주를 했다. 승려들이 떠나가고 해가 떠오르면 해변에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밀려 들기 시작한다.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이도 있다. 야자나무 그늘 아래에서 몇 시간씩 바다를 바 라보는 이들이 많다. 해변 가까이 카페와 펍, 레스토랑이 몰려 있는 여행자 거리가 만들 어져 있다. 해안가를 따라 커다란 해산물 레스토랑도 몇개가 들어 서 있다.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인기 있는 식당은 챠오레이(Chao Lay)다. 튀긴 게를 카레에 버무려 만든 요리인 풋파퐁 커리와 싱하 맥주를 시켰다. 건너편 남자가 맥주잔을 들었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리듬에 생을 맡기는 거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38
후아힌의 하이라이트, 프라야 나콘 동굴 트래킹
오늘은 카오삼 로이욧 국립공원(Khao
시절에 사용한 물품과 골동품을 전시
Sam Roi Yot National Park)에 있
하고 있다. 호텔 바로 앞은 바다다.
는 프라야 나콘 동굴(Phraya Nakhon Cave)에 가는 날이다. 오전 8시 반, 물
다시 말하지만 혼자 오면 꼭 좋은 숙
한 병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소에 묵는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 건 직장과 가족을 빼고 남은 게 진짜
남쪽 해안을 따라 1시간 정도 달리니
나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간다면 다
국립공원 입구인 방 반푸 비치(Bang
살아갈 방법이 생기게 되어 있다는
Ban Pu Beach)다. 이곳에서 작은 배
것. 이젠 누구를 탓할 나이가 아니다.
를 타고 반대편 해안인 렘 살라 비치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그래서 나에
(Laem Sala Beach)에 내려 40분 정
겐 약간의 사치를 즐길 권리가 있다.
도 트래킹을 하면 프라야 나콘 동굴이 다. 회색빛 석회암 바위와 울창한 나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무들이 뒤엉킨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다녀온 내 친구는 지금까지 단 한 번
원숭이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장난
도 취직한 적이 없다. 동네에서 영어
치며 따라온다.
와 수학 과외를 하며 그럭저럭 살아 간다. 유니클로를 입으며 모은 돈으
동굴에 도착하니 아, 하는 탄성이 짧
로 일년에 서너 번은 해외 여행을 다
게 터져 나온다. 기이한 형상의 종유
닌다. 대기업에 들어간 나의 다른 친
석과 석주들이 가득한 동굴, 그 속에
구들은 서류 더미에 파묻힌 생을 살
작은 사원 하나가 서 있다. 이 동굴엔
며 명퇴 걱정을 하고 있다. 예전엔 몰
반드시 오전 열 시부터 열한 시 반 사
랐는데 지금은 그 친구가 가장 현명한
이에 가야 한다. 이 시간이면 동굴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들어온 빛이 정확히 사원의 지붕 위로 떨어진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으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한다. 일단 자야지. 젊었을
빛을 받은 사원은 이 세상 풍경이 아
땐 자는 시간이 아까웠지만 지금은
닌듯 신비롭다. 바위에 기대어 사원을
잘 수 있을 때 푹 자는 것이 무엇보다
바라본다. 혼자라도 충분하다는 생각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한 숨 자고
이 드는 동굴에서의 시간. 지금, 여기
나서 생각하자. 분명 더 좋은 방법이
가, 나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날 거야.
동굴에서 돌아와 차가운 물에 샤워를
창 밖 새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혼자 오
한 후 침대에 누웠다. 후아힌에서도 센
길 잘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포
타라 그랜드 후아힌에 묵었다. 1920
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용기다.
년대 문을 연 고급 리조트다. 호텔의
모든 걸 다 가지려는 것에서 괴로움이
박물관에는 '레일웨이 호텔'로 불렸던
시작된다. 혼자면 충분하다.
TRAVEL
45
후아힌 개요 태국 서부 쁘라쭈압키리칸 주에 위치한 도시.
미얀마 라오스
면적 911km² 인구 약 8만명
태국 기후 사바나 기후로 11-2월은 건기, 3-5월은 우기. 방콕 후아힌
캄보디아 베트남
특징 후아힌은 1926년 라마 7세가 태국 왕실의 여름 별장을 세우며 발전하기 시작한 휴 양지다. 태국 최초로 골프장과 해양국립공원인 카오삼로이요드 국립공원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
TRAVEL NOTE 여행기간 여행동선 여행비용 교통정보
숙소정보 레스토랑정보
2017년 6월 18일-6월 25일 태국 수완나품 공항 입국 후 방콕-후아힌으로 이동 (항공료/기차비/이동비, 숙박료, 체제비): 약 120만원.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후아힌으로 간다면 리무진에 해당하는 벨트래블 버스를 추천한다. 방콕 도심에서는 남부 터미널에서 빅 버스를 타면 된다. 이곳에서는 미니밴 롯뚜도 이용할 수 있다. 방콕과 후아힌에서 태국의 고급 호텔 브랜드인 센타라 호텔 앤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호텔과 리조트에서 묵었다. 자세한 사항은 센타라 호텔 앤 리조트 공식 홈페이지(www.centarahotelsresorts.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암 디스커버리 4층에는 푸드코트인 마이키친(My Kitchen)이 있다. 쇼핑몰에 있는 번잡한 푸드코트를 상상하지 말길. 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디저트 카페, 중식, 태국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센타라 그랜드 후아힌에 묵는다면 맛있는 음식을 맛보기 위 해 멀리 나갈 필요가 없다. '레일웨이 레스토랑'은 태국요리, 아시아 요리를 비롯해 각종 인터네셔널 퀴진을 제공한다. 빌라 쪽에는 '수안 부아 타이 레스토랑'이 있다. 태국 요리를 한층 세련되게 표현한 곳이다. '코스트 비치클럽&비스트로'는 아침부터 늦은 저녁 시간까지 칵테일을 비 롯한 드링크 메뉴와 식사 메뉴를 제공한다. 특히 구운 고기, 해산물 플레이트, 갓 구운 나폴리 피자 등이 맛있다. 후아힌 비치로 이어진다.
COMMENT 주말에 방콕에 머무른다면 짜뚜짝 시장으로 가보자. 27개 구역에 걸쳐 1만 5천여 개의 도매, 소매 상점이 있다. 쇼핑도 쇼핑이지만 로컬 음식을 맛보는 일도 즐겁다.
최갑수 생의 탐색가, 시간의 염탐자, 길의 몽상가. 여행작가로 일하며 신문과 잡지 등 각종 매체에 여행글 과 사진을 기고하고 있다. 1997년 <문학동네>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고, 시집 「단 한 번의 사랑」 을 펴냈다. 여행을 떠나지 않을 때면 여행을 생각하고 여행을 궁리한다. 「잘 지내나요, 내 인생」, 「당신에게, 여행」,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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