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편호 안내 6 권두언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강수돌 13 사진으로 이야기하기 양시영 14 시를 적다 시를 만나다 나의 소망 두메 16 단순 소박한 삶 다시 인드라망 이영희 18 계절 품은 농사 이야기 단순 소박한 삶, 농사로부터 오창균 27 마음공부 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현미선 34 식약동원 약이 되는 음식 낙지, 정어리 40 공동체 탐방 경남 양산 생명평화덕계마을에 가다 편집위원 특집 ┃ 마을공동체는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있나 48 사부대중공동체의 가치와 방향 육화경, 공동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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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생명평화자치도 ‘생명평화 전라북도’를 상상한다 정웅기 88 '생명평화 자치'에 던지는 물음 또 다른 세계는 어떻게 태동하는가? 주요섭 98 작은만남 큰 거 한 방, 없어요! · 이재수 전 춘천시장 나익수 108 기후위기, 마을공동체의 역할 한생명 실상사 선지식 법회 · 기후재난 속 마을공동체의 적응 방향과 창조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114 지리산 정치학교 사회적 참사와 정치 · 정치를 비추는 사회적 참사 이무열 120 평범한 대담 사회적 참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126 서평 인드라망 추천도서 130 붓다공부방 부처님의 삶에서 내가 배운 것들 석승억 139 나누고 싶은 한 구절 성현들의 한 말씀과 이에 대한 해석 박두규 143 대중교육프로그램 개발기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로그램 개발과정의 고민들 김한나 150 인드라망대중교육 시범사업 소개 삶의 결을 바닥부터 바꾸는 전환 캠프 · 실상사 공동체학교 155 후원내역
개편호 안내
월간 소식지 ‘인드라망’이 부정기 간행물(무크지) ‘인드라망’으로 개편합니다. 인드라망에서는 활동 소식을 홈페이지와 문자 발송, 뉴스레터, 소 식지, SNS를 통해 회원들과 나눴습니다. 인드라망 운동을 시작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활동 소식 알림도 대중의 흐름에 발맞춰 갈까 합니다. 홈페이지는 반응형 홈페이지로 PC, 스마트폰, 테블릿PC 등 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하여 일상의 인드라망 소식을 SNS, 뉴스레터와 함께 실시간으로 온라인 알림을 하려 합니다. 그리 고 2005년부터 발행해온 소식지 인드라망은 개편을 통해 인드라망 철학, 인드라망 운동의 담론을 담아내는 부정기 잡지로 거듭나려 합 니다. 기후위기 시대인 만큼 인쇄물은 최소화하고 온라인 배포로 나 아갈 예정입니다. 개편되는 소식지는 일 년에 2~3차례 발간을 예정하고 있으며, 일상 소식보다는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내용, 대안사회를 생각하는 사람, 생명평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고 나누어 볼 수 있는 내용 으로 채워가려 합니다. 2022년 개편호는 마을공동체와 사회적 참사 에 대한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공동체 운동을 돌아보고, 생명평화 관점으로 전북지역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담습니 다. 지난 10월 29일 벌어진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며 사회적 참사를 바라보는 참된 지혜를 모으려고 합니다. 소식지 개편 후 첫 발간이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차차 향상시켜 나아가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살인자 앙굴리말라에게 자비의 손길을 펴서 스스로 참회하 고 새 삶을 찾도록 하신 것이나, 가난한 할머니의 작은 등불 하나에 밝혀진 그 정신의 순수함과 공덕의 무량함을 칭찬하심으로써 그 할머니가 자신의 행동과 삶,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새로운 긍지와 신념을 갖도록 하신 것. 그런 가 하면 외아들을 잃은 홀어머니의 비탄을, 연민의 정으로 모든 것의 덧없 음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려주신 이야기들은 부처님 의 가르침 또는 깨달음이 존재하는 당처(當處)가 어디인지를 우리에게 알 려주고 있다. 소식지 <인드라망> 역시 이런 정신에 입각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생명 본연의 질서를 인식하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 질서에 따라 삶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한 강물로 만나는 장이 될 것이다.』 _발간사 <공존, 협력, 균형을 위한 소통의 매개> (상임대표 도법 스님)
※ 무크지 : ‘잡지’를 뜻하는 ‘매거진’(magazine)과 ‘책’을 뜻하는 ‘북’(book)이 합쳐 진 말로 대개 시리즈물이나 기획물, 계간지에 자주 쓰인다. 현재는 ‘부정기 간행물’ 로 순화되었다[출처.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권두언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강수돌 한국 사회가 비교적 최근에 경험한 사회적 참사만 해도 1993년 서 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9년 씨랜드, 2003년 대구 지하철, 2006년 서해대교 참사, 2014 년 세월호 참사 등으로, 매번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이 생명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운명이 바뀌는 순간은 짧으나 트라우마(충격과 상처)는 깊고도 길다.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충격과 공포,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 온갖 책 임 공방이 일어나고, 분노와 항의, 논쟁과 성찰을 거치면서 다시는 이 런 일이 없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고 다짐하나 불행히도 참사는 반복된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역시 같은 맥락이다. 여기 서 꽃 같은 청춘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 강수돌 1961년 경남 마산 출생. 날마다 생태 뒷간에 똥을 누고 "똥아, 잘 나와 고마 워!"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25년간 대학생을 가르친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지금 은 경남 하동에서 텃밭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자본이 사람을 멈추 기 전에, 부디 제발», «잘 산다는 것», «더불어 교육혁명» 등이 있습니다.
이런 참사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 는가? 여기서 우선 독일 철학자 헤겔의 말을 상기해 보자.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그간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The only thing we learn from history is that we learn nothing from history.) 이 말은 역사 자체가 배울 게 없다 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깨치지 못한 점을 반성하라는 얘기다. 이는 “기억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과 통한다. 사회적 참사도 마찬가지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과거 참사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선, 이태원과 같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실제 사람들의 반 응이 어떠한가를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본다. 나아가, 그에 대한 비 판적 성찰을 통해 향후 참사의 반복을 예방하기 위한 건강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첫째, 세월호 참사이건 이태원 참사이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 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들 상당수는 속으로 ‘그 사람들, 정말 재수가 없 었네.’ ‘왜 하필이면 그때 그곳에 갔나?’ ‘내 가족이 거기 없어서 참 다 행….’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물론, 즉각적으로 드는 느낌을 속일 순 없다. 문제는 우리네 의식이 그 차원에만 갇힐 때다. 일차원적 의식은 참사의 원인을 희생자 개인 탓으로 돌린다. 그 연장선에서 ‘내가 그런
기’를 한다. 이런 태도는 사태의 책임을 운명(misfortune)으로 돌리거 나 개인의 어리석음(stupidity)으로 몬다. 언제 어디서건 발생할 수 있 는 사회적 참사, 이런 식으로는 결코 사전에 예방할 순 없다. 늘 사후적 인 희생자 비난만 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다음 참사의 준비 과정이다. 둘째, 이와 연관된 모습으로, 그 현장 자체를 편견과 혐오를 섞어 낙인(stigma) 찍는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노동자 자녀들이 대거 포 함된’ 수학여행단이 타고 가던 배라 했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 “할로 윈 축제는 원래 서양 문화인데, 이상한 게 수입되어 물을 흐려 놓았 다.”거나 “거기는 마약쟁이나 게이, 레즈비언 같은 사람들이 벌이는 축제.”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으려 했다. 이 태도 역시 사태의 예방이 나 해결엔 도움이 못 된다. 오히려 희생자와 생존자를 배타적으로 나 눔으로써 그 어떤 공감이나 소통, 연대도 불가능하게 한다. 사회 구성 원 중에 노동자 내지 그 자녀가 아닌 경우가 어디 있으며, 그것 자체 가 어떻게 사회적 참사의 원인인가? 또, 축제나 행사의 뿌리가 서양 이라 문제라면, 한국 고유의 축제나 행사에선 아무 사고도 없다는 보 장이 있는가? 참사엔 국적이 없다. 게다가 모든 문화는 두루 섞이면 서 천천히 진화를 거듭한다. 마약쟁이나 성소수자들을 낙인찍는 태 도 역시 문제다. 호불호를 떠나 그들의 존재 자체가 참사의 원인일 수 는 없다. 이런 태도는 마치 민주화 시위를 두고 정권이나 언론이 ‘불
셋째,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자 ‘명단 발표’가 큰 논란을 불렀 다. 원래 참사가 일어나면 언론이나 정부가 나서서 희생자 이름을 발 표하고 그 가족을 찾아 수습대책을 논의하는 게 본연의 책무다. 그러 나 이번 이태원의 경우, 명단 발표 자체가 교묘히 방해를 받았고, 심 지어 시민언론 ‘민들레’와 종교계에서 명단을 발표하자 일부 정치권 이나 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패륜 행위’라거나 ‘정치적 목적에 악용’, ‘불법’이란 막말까지 했다. 나 역시 처음엔 명단 공개가 유족에게 엄 청난 결례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곧 ‘이름과 얼굴을 모른 채 참된 애 도가 가능한가?’ 싶었다. 심지어 명단이 없으니 희생자 가족을 사칭해 각종 지원을 받으려는 자까지 생겼다. 유족들 입장에서는 얼굴과 이 름 없는 추모는 가짜 추모였으며 ‘2차 가해’였다. 오히려 정권 입장에 서는 명단이나 얼굴이 공개되고 유족회가 결성되어 (‘세월호’ 경우처 럼) 집단행동이 시작되면 ‘정권 안보’에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1월 22일 유가족들의 기자회견을 보니,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그나마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 같은 공신력 있는 단체가 주 축이 되어 11월 중순경 고립됐던 유족들을 모아내고 상호 협의 아래 희생자 명단을 수집, 공개한 것이 다행이다. 11월 22일 첫 기자회견 후 유족 65여 가족이 모여 유가족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국가의 책임 방기도 큰 문제이고 당연히 비판해야 하지만, 정부나 국가에 기 대지 않는 시민사회의 자기 조직화(self-organizing)야말로 최선임이 드러났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좀 더 빨랐다면 초기 분란이나 혼란도 방지했을 것이다. 이 또한 이번 참사의 교훈이다.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왜 당초엔 명단 공개가 그렇게 ‘패륜 행위’로 내몰렸을까? 그것은 (정권의 무책임과 무능함 외에) 앞서 말한 첫 번째, 두 번째 태도와 연 관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유족들 입장에서 ‘희생자들이 하필이면 그 곳에 간 잘못’을 범했다거나 ‘쓸 데 없이 서양 축제에 간 잘못’ 또는 ‘아이가 마약쟁이나 성소수자로 낙인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명단 공개를 꺼린 게 아닐까?
그래서 늘 ‘두려움’이 문제다. 두려움이 사람의 건강한 행위 능력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거듭된 사회적 폭력과 배제의 역사가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건강하게 이기는 방법은 열린 소통과 연대다. 이런 점에서 민변이 유 족들과 소통 및 연대를 한 것은 대단히 선구적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회적 참사 앞에서 얼마나 건강한 태도를 보이 는가에 따라 참사를 반복 또는 예방할 가능성이 달라진다. 물론, 일반 인들이 아닌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참사를 대하는 태도는 더 문제투 성이이다. 무책임, 무능력, 무감각은 그들의 고질병이다. 그 결과, 고 위층일수록 ‘꼬리 자르기’ 식 대처로 끝내려 하거나 ‘책임 전가’ 식 태 도로 일관한다. 이태원의 경우, 대통령 경호실, 법무부장관, 서울시장, 경찰서장, 용산구청장 등이 책임 있는 당사자다. 이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말, 증거 인멸, 상황 조작 등을 예사로 한다. 용산 대통령실 이전도 문제였거니와 (이태원 할로윈 축제 와중에) ‘마약과 의 전쟁’을 위해 작년까지만 해도 착실히 했던 시민 안전 조치가 완
전 부재했다. 재난 예방과 안전 확보를 위해 각종 기구나 제도를 만들 어 놓긴 했지만, 그것을 책임성 있게 운용하려는 의지나 능력은 고위 층으로 갈수록 희박하다. 돈 중독, 권력 중독 탓이다. 이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자기기만’이 다. 감각이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며, 능력이 없으면서도 있는 체하 고,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책임지는 척한다. 고인이나 유족 앞에 직접 사과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추상적으로 사과 흉내만 내는 것이야 말로 국민 기만이자 자기기만이다. 정직한 자신의 느낌(그게 있는지 도 의심스럽지만)을 속이면서 지위와 권력, 부와 탐욕에 한사코 집착 한다. 이런 자들이 주도하는 사회 구조 전반이 곧 ‘중독 시스템’이다 (《중독 사회 : 우리는 모두 중독자다》(앤 윌슨 섀프, 이상북스) 참조). 중독 시스템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진 개인과 마찬가지로 병든 사고, 병든 태도, 병든 행위를 보이는 구조와 과정을 일컫는다. 그렇다. 사회적 참사가 우리의 소망과 달리 거듭 발생하는 까닭은 사 회 자체가 중독 시스템이기 때문! 따라서 이 병든 시스템을 운용하는 당사자들(정치가, 행정가, 기술자)은 물론 그 시스템에 적응해 살고 있는 일반 구성원들(국민, 시민)이 모두 중독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시스템을 만드는 게 근본 해법이다. 첫째, 돈 중독, 권력 중독, 경제성장 중독에 빠진 시스템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상호 존중하며 공생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참사의 반복 없이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시스 사회적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템 전환의 논의를 지금부터라도 새로 시작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이주민, 외국인 등을 차별적 시선으로 보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양한 존재가 공존하면서 상호 이해와 협력의 수준을 높여 나갈 때 그 사회는 더 건강하게 지속된다. 셋째,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이 표준이라 하는 사회적 기준에 맞춰 ‘한 줄 세우기’로 통치하는 거대 사회는 닫힌 사회다. 이런 사회는 무한 경쟁과 차별, 분노와 증오를 조장, 불평등과 양극화를 정당화한다. 진 정 더불어 살려면 ‘마을 공화국’에 기초한 열린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느낌과 태도, 행위를 건강하게 쇄신하는 동시에 병든 시스템을 건강하게 전환함으로써, 사회적 참사의 공포 가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들이 매일 핏기 없이 학 교를 오가고, 노인들이 삶의 즐거움 없이 시간만 때우고, 노동자들이 경제 가치를 추구하는 노동에 매몰(노동현장에선 해마다 2천 명 이 상 죽음)된 우리네 일상 자체가 이미 ‘일상적 참사’ 아닌가? 이런 면 에서 이태원 참사는 매일 벌어지는 일상적 참사의 연장선일지 모른 다. 따라서 참사의 반복을 막으려면 우리의 일상인 ‘중독 시스템’ 자 체를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메시지처 럼, “두려움은 당신을 감옥에 가두고, 희망은
시를 적다 시를 만나다
나의 소망
작자 미상
나는 단순하게 살고 싶다.
비가 내릴 때 창가에 앉아
전 같으면 결코 시도해 보지 않았을
책을 읽고 싶다.
무엇인가 증명할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원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 몸에 귀를 기울이고 싶고
달이 높이 떠올랐을 때 잠들어
천천히 일어나고 싶다. 급하게 달려갈 곳도 없이
나는 그저 존재하고 싶다. 경계 없이, 무한하게
視詩한 한마디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잃어버린 가장 큰 가치가 '순박함'인 것 같
습니다. 경쟁과 물욕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순박함이 들어설 자리는 점
차 줄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단순 소박한 삶'이라는 인드라망의 깃발이
더 소중해지는 오늘입니다. 우리의 소망입니다.
계절 품은 농사 이야기
단순 소박한 삶, 농사로부터
오창균 24절기의 입동과 소설을 지나면서도 겨울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계절의 변화가 그다지 반갑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리산과 둘레길에 는 단풍이 물들고 아침엔 소금을 뿌려놓은 듯 서리가 반짝거립니다. 제철을 잃어버린 계절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조금 우울합니다. 사계가 뚜렷했던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도 가볍게 떨어지는 낙엽
오창균 실상사농장지기 짱짱.
을 보면 그랬습니다. 초록을 잃어버린 작물의 잔사가 흩어진 논밭을 보는 마음도 심란합니다. 오행(五行)의 금(金)에 해당하는 가을은 농사의 결실을 얻지만, 땅 의 기운으로 살아온 작물이 생을 마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 유로 농사가 끝난 들녘을 바라보는 우울한 마음은 농부의 직업병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부로 살기 농사를 잠시 쉬는 겨울에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합니다. 농사를 시작 할 때부터 흙에서 사람 냄새를 느끼는 재미에 빠져서 가족에게 소홀 했습니다. 지난 몇 해의 겨울을 돌아보면 미안한 마음에 가족과 해외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고, 일당을 받는 농사일을 하러 다른 지역에 서 겨울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집에서 농사 관련 책을 읽고 농 사 글을 쓰면서 몸은 쉬지만 머리로 농사짓는 시간을 보낸 적이 더 많습니다. 제 주변의 농부들 겨울나기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농사일을 마무 리하고 겨울에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 다며 남의 농사일을 해주고 받은 일당을 생활비와 다음 농사의 종자 돈으로 모으기도 합니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전업 농부의 삶은 천차만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해에 억대의 수익을 내는 농부도 있고, 수백만 원에 한 숨짓는 농부도 있습니다. 농사가 산업이 되면서 농업도 적자생존의 단순 소박한 삶, 농사로부터
절박한 생존경쟁이 된 지 오
래되었습니다. 농지의 규모와 시설 등 여
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농사
가 돈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 도 합니다. 농사를 돈 만들어
내는 사업으로만 본다면 몸 과 마음이 다칠 수도 있습니
다. 즉, 농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불만과 고통의 삶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농사로 돈을 벌어보겠다며 무리한 방법으로 시작했다가 불행한 삶으로 끝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돈도 벌고 무 엇에도 억압당하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는 농사가 가능할까요?
농사의 속살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누구나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각자의 생활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많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직업 중에서 농부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은 아마도 가장
이 아닙니다. 오롯이 자연이 일으키는 현상을 온 몸으로 받아주는 넉 넉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될 수 있습니다. 편리한 농기계가 있더라도 끊임없이 걷고 몸을 움직이는 일이 농 사입니다. 바쁜 농번기에는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일하는 날들의 연 속이기도 합니다. 일하는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쉬
어가는 휴일도 없는 직업입니다. 그나마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쉬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의 기후위기 시대에 농
사의 결과를 예측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 는다거나 땀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말들은 농사에서는 예외가 많습 니다. 오히려 운이 좋았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농부는 수확의 결과에 웃기도 하지만, 한 순간에 참담한 상황을 마주하는 일이 농사입니다. 농사가 잘되었다 고 해도 시장가격이 폭락하거나 인건비도 안 되는 작물을 갈아엎는 것이 농업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농사가 잘되었더라도 판매를 못 하거나 제값을 못 받으면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농산물 유통시장의 편리함은 있지 만, 규격을 맞춰야 하고 생산자로서 가격에 대한 결정권이 없습니다. 시장이 원하는 대로 똑같은 공산품처럼 만들어야 하고, 결정된 가격 을 주는 대로 받아야 합니다. 농산물의 가치와 농부의 노력을 알기보 다는 공산품처럼 가격 비교를 하는 소비도 문제입니다. 단순 소박한 삶, 농사로부터
농부의 자격 도시와 비교하면 모든 것이 불편한 농촌을 떠나고 돈이 안 되는 농 사를 멀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도태되어 가는 농촌과 농업 에 국가의 정책은 말잔치일 뿐이고, 사회의 관심이 낮은 현실도 문제 입니다. 그것이 식량위기의 부메랑이 되어서 되돌아오리라는 이런저 런 경고는 쌀값 폭락을 보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럼에도 농부의 삶을 살아보겠다며 농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젊은 청년부터 환갑의 나이에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여러 가지 삶의 이유로 농사의 길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저 역시 비슷한 이유로 전업 농부의 삶을 시작했지만, 시작부터 지 금까지 한 번도 순탄하게 내가 생각하는 농사가 된 적은 거의 없습니 다. 그 말은 농사의 결과가 좋지 못한 때도 많았고, 농사 수입도 계산 기에 나오는 숫자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일 들을 겪으면서 나에게 맞는 작물이 있음도 알았습니다. 농사로 먹고 사는 방법을 조금 알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농사의 결과를 알 수 없듯이 그것이 지속가능한 방법일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농사가 잘되고 제값을 받아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사와 궁합이 맞아야 합니다. 즉, 농사를 하면 서 즐겁고 흥분되는 날들이 많은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농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그 기준은 새벽에 동트는 여명을 보면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
으로는 5시에서 6시쯤이 되는데 실제로는 그 시간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즉, 꾸준한 부지런함이 먼저 선행되지 않으면 농부의 삶은 순탄하 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경험한, 농사를 포기하는 대부분의 이유이기 도 합니다. 어릴 적 경험을 돌아보면 농촌은 새벽부터 논밭에 다녀와 서 아침밥을 먹고 다시 일하러 나가는 게 당연했습니다. 내가 농부가
된 뒤에 반드시 그래야 되는 것이 농사임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일찍 농장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농부들도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일터로 가는 모습을 봅니다.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면 함부로 농부의 삶에 들 어오기를 서두르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의 시간을 따르는 농사이기에 농부도 같은 시간에 움직이지 않으면 농 사일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벽 공기가 주는 기운과 해가 뜬 뒤에 받는 기운은 많이 다릅니다. 제 경험으로는
농사의 기술 농사는 표준화된 매뉴얼(설명서)이나 기술이 없습니다. 전기에너지 (석유)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온실의 스마트 팜(smart farm)이라는, 흙이 아닌 것에서 키워내는 작물은 매뉴얼이나 기술이 있을 수 있겠 다는 생각입니다만. 저는 비바람을 피할 수 없는 노지에서 화학비료 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사의 경험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농사는 오래된 경력보다는 짧더라도 농사를 이해하는 경험이 더 중 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똑같은 방법의 10년 농사보다는 다양한 방 법을 시도해 본 5년 농사 경험이 예측 불가능한 기후와 농사 생태계 의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양한 경험의 농사가 가능하 려면 흙과 작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의 토대는 농사공부 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해를 못 하는 농사는 악순환의 연속 이 될 수 있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물론, 이해를 하는 농사를 짓더 라도 기후변화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합니다. 요즘 농산물 가격이 비싼 이유도 농사가 잘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잘 짓던 농부들이 담합해서 모두가 농사를 일부러 망쳐버린 것이 아닙니다. 자연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농사는 갑작스러운
농사를 시작한 이후로 좋아하는 책 읽기는, 농사 관련 서적만 겨울 에 여러 권을 몰아서 읽고 있습니다. 다른 농부의 농사 경험에서 얻어 지는 것들도 많은데, 잘되는 농사는 왜 잘되었는지 안 된 것은 왜 그 런지 관찰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농사짓는 지역의 기후와 흙의 상태 를 살피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남의 농사와 지식을 무조건 따라가 기보다는 나의 농사에 맞게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농사를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잘할 수는 없습니다. 무수한 시행착오 와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똑같은 농사를 짓더라도 한 번도 똑같은 과정과 결과가 나온 적은 없을 만큼 농사는 매우 다양한 현상을 보이는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 소박한 삶 농사는 인간의 삶(생명)과 바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천 금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지만 현실에서 농사는 돈이 안 되는 직업입니다. 온갖 수식어로 농사와 농부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어머니의 말씀이 촌철살인입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그들은 왜 안 한다냐.” 농사는 예술이 아니라 먹고사는 일이라서 처음 시작을 잘해야 합 니다. 머리로만 농사를 생각했다가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힘듭니다. 충분한 준비와 작은 농사 경험이라도 해보라고 권합니다. 텃밭 농사 를 해보는 것도 좋고 농촌에서 농사 체험도 좋은 경험이 됩니다. 농부가 된 이후로 농사로 얼마나 돈을 벌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단순 소박한 삶, 농사로부터
제 대답은 항상 똑같은 ‘밥은 먹고 살아요.’입니다. 얼마 정도의 돈을 벌어야 많은 이가 농부의 삶을 살겠다고 할까요? 분명한 점은 농사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억지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저는 한 번도 생각 한 적이 없는 농부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돈 욕심이 없는 농사 를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나의 힘으로 가능하다면 최선의 방 법으로 농사를 잘 짓고 돈도 벌고 싶습니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만 하는 농사는 사람과 자연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폭력의 농사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적게 가지더라도 모든 생명 에게 유익하고 덜 해로운 농사를 짓는다는
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오늘은 <21세기 약사경> 중에서 ‘획일성만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 서서 다양성을 꽃피우는 깨달음의 문명으로’ 이 내용과 연결하여 우 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상을 한번 같이 확인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혹시 살면서 내 얼굴하고 똑같은 사람을 본 적 있으세요? 없지요? 그
리고 여러분은 각자 나의 색깔대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사 는 방식으로 나도 살고 있습니까? 실은 다 내 폼대로 사는 것 같지만 우 리는 나도 모르게 획일화되어 살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획일화를 불러오는 상대 비교의 사고방식 우리를 획일화시키는 대표적인 사고방식이 어떤 게 있을 것 같습 니까?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온갖 상처를 받 고, 분노를 일으키고, 원망을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아주 본 질적인 것이 바로 ‘상대 비교’입니다. 우리는 거의 상대 비교의 사고 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정리•현미선 실상사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입니다.
방식으로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 비교의 사고방식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한, 삶은 편안 해질 수가 없습니다. 넉넉할 수도, 충만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습니 다. 불행이 뭐죠? 불만족이 불행이죠. 행복은 뭘까요? 자기 삶에 만족 하는 게 행복입니다. 내 것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상대 비교 때문에 저 사람 것이 더 좋 네 하는 식이면, 비교할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돈, 학력, 힘, 키, 피부 색깔, 지식, 모든 게 다 비교 대상입니다. 어쨌든 상대 비교로부터 벗 어나기만 하면 삶은 확 달라지죠. 여기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이 불교 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실상을 알고 보 면 상대 비교할 일이 없습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진 자신의 참모습대로 살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내 멋대로
살면 된다는 얘기하고는 다릅니다. 소유 가치로 획일화된 사고방식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로 뭘 갖고 비교를 하는지 살펴봅시다. 대표 적인 한 가지가 소유의 사고방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와 비교해서 얼마를 가졌는지 비교하면서 살고 있고, 그로 인해 삶이 엉망진창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고 쓰는 말 가운데, 소유의 사 고방식을 표현한 대표적인 말들이 몇 가지 있죠? 1등, 최고, 승리, 부 자…. 부자 되는 건 좋은 거야, 부자 되면 행복해, 1등이 최고야, 1등만
이 희망이야, 죽기 살기로 1등 해야 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의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지, 사고방 식 자체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1등, 최고, 부자가 되기 위해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더 쉽게 더 쉽게’ 등을 답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을 얻게 되면 따라오는 결과도 더 재밌게,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더 편리하게, 더 예쁘게, 더 기분 좋게 등 이렇게 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획일화되어 있지요. 이런 것들이 모두 소유의 사고방식입니다. 소유의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결과 이런 소유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인생은 형편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 습니다. 스스로 자신감도 가질 수 없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없고, 만 족감을 가질 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내 것’, ‘더 편한 것’, ‘더 쉬운 것’ 등을 갈구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한 삶이 더 바빠 지고, 더 혼란스러워지지요. 더 빨리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지 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매일매일 무수하게 경험하고 있
는 결과를 결코 충족할 수 없습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 풍요로운 삶,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거죠.
존재의 사고방식으로 누리는 풍요로운 삶
제가 누리는 삶은 어떨까요? 저는 실상사를 잘 누리고 있습니다. 제 것은 아니지만 실상사의 풍경도, 문화재도 누리고, 지리산도 누리고, 저 멋있는 구름도 누리고, 바람소리도 누리고, 새 소리며 매미 소리도 누리고…. 내 소유는 아니지만 ‘있는 것 그 자체’를 마음껏 누리고 있 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어요. 소유가 아니고 누리는 것으로 보 자면 이보다 부자가 없지요. 우리가 ‘있는 것 그대로’를 누리는 실력만 있다면 누릴 것은 넘쳐납 니다. 지금 실상사에서 천일결사를 하면서 ‘미혹문명 내려놓고 깨달 음의 문명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내용을 보면 바 로 이런 실상에 눈을 뜨자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다른 능력 이 필요 없습니다. 실제 우리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는가를 정확하 게 직시하면 됩니다. … 지난 번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그 얘기 를 오늘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존재의 실상, 세계의 실상, 삶의 실상, 역사의 실상 또는 민족의 실
상, 국가의 실상, 인종의 실상, 생명의 실상, 자연의 실상 등등 어떤 것이든 그 실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정말 다양성으로만 이루 어졌을까요? 아니면 통일성으로만 이루어졌을까요? 부처님께 물어 보면 뭐라고 할까요? “부처님, 세상은 다양성으로 이루어졌습니까? 통일성으로 이루어 졌습니까.” 이제 답을 다 아시죠? (웃음)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단정한다면 그건 단견이야. 통일성으 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단견이야. 양극단 을 버리고 있는 사실대로 봐.”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모두 웃음)
그러면 있는 사실대로 보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 사 실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있는 사실 자체에 는 미치지 못합니다. 있는 사실은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 등으로 표현합니다. 말에 빠지지 말고 뜻을 살피자 그럼에도 인간은 소통하면서 살아야 하기에 말을 할 수밖에 없습 니다. 당연히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면 문제가 발생하겠죠. 말
말라.” 또는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상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말로 소통할 수밖에 없으니, 잘 소통하고 삶을 잘 살아가려면 말에 빠지지 말고 뜻을 잘 살피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해야 할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다양성이라 는 말로 표현해야 할 내용이 있을 수 있겠지요. 또 통일성이라는 말로 설명해야 할 상황도 있을 수도 있고, 통일성이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실상은 양자택일로 설명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말의 한계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잘 설명해 보려고 노력한 결과 물이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개념입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 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뜻이지요. 이 같은 사고방식 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의식문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반야 심경>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그대로 공이요 공이 그대로 색이다 또는 색과 공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 다,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어떤 말을 들으면 (말 속에 담긴) 뜻으로 듣기보다는 말의 지배를 받습니다. 실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분리되거나 고정된 것처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사용하곤 합니다. 그 결과 문제가 생겨나죠.
중도적으로 공부하면 삶은 달라져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말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말
에 속지 않도록, 말에 지배받지 않도록,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나타 난 개념들이 ‘불일불이(不一不二)’,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 行處滅)’, ‘불립문자(不立文字)’,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 色)’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개념을 책에서 읽거나 배우다 보니까 별것 아니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실제로는 불조들이 정말 죽기 살기로 노력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마치 말 타고 달려가면서 산 능선을 한번 쓱 쳐다보듯이 취급하지 말고 말 한마디, 개념 하나하나가 불조(佛 祖)의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졌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씀 에 의지하여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서 그 내용이 내 피가 되 고 살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하는 게 불교 공부이고 수행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공부하면 삶은 달라집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그냥 주마간산 격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다시 말하면 중도적으로 공 부하지 않기 때문에 보니 뭘 많이 하긴 하는데도 잘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법회에서 이야기했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내용 과 연결해서 오늘 좀 더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도법스님의 법문을 정리한 글입니다.
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약이 되는 음식
낙지•정어리
지난 5월 쑥쑥주를 담갔다. 쑥쑥주는 지리산 실상사 자생식물인 황해쑥으로 담그는 약술이다. 쑥쑥주는 겨울철 냉기를 제거하고, 밤 에 꿀잠을 자게 만들어 주는 약술이어서, 이 시기 찾는 사람들이 늘 어난다. 나는 평소에 몸이 많이 차고, 조금만 온도가 내려가도 일반인들보 다 훨씬 더 온도에 민감하다. 그렇기에, 여름에도 등에 냉기가 차 있 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인생 전반 부에는 아주아주 건강해서, 겨울에도 반팔에 맨발로 다니던 사람이 었다. 인생 중반부에 아주아주 아파서, 한여름에도 손과 발이 얼음장 처럼 차가운 적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냉기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 되 김낙희(낙지) 2018년 산내로 이주하여 목금토공방 활동과 산내인드라망공동체 진료소 주치의로 활동중. 2023년 실상사 농장에서 활동 예정이다. 허정일(정어리) 정어리 발효연구소. 자연이 내어주는 맛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마 이크로 나노 세계를 연구하던 공학기술로 발효를 연구합니다.
었다. 산 중턱, 지리산 실상사는 고도 300~400미터 지점 어딘가에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화림원은 거기서 더욱 올라온 곳에 있다. 실상 사와도 온도 차이가 3~4도 더 춥다. 방을 나가면 바로 야외인 구조로 되어 있는 화림원 방사(승려가 거처하는 방)는 냉탕과 온탕을 오고가 는 듯한 자연인의 삶이기에 9월말 찬바람이 불면, 나는 이미 밤에는 롱패딩을 애용한다. 등이 시리기 때문이다. 실상사에 내려와 살면서 3여 년 동안, 주변 자생식물들의 생육 시 기를 확인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중에 으뜸은 민들레, 쑥, 싱아, 뽕잎, 솔 순이다. 이런 나에게 희소식 같은 선물은 실상사 주변 의 자생식물 중 하나인, 쑥이다. 평소에도
겨울에는 독주가 당기는 계절이기도 하다. 냉기를 빠르게 제거해 주 기도 하고, 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편안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5월. 한참 생명의 기운이 활발하고, 찬란하다. 단오 전후, 쑥은 약성 이 최고조에 이른다. 그런 뒤 생장의 시기가 변화한다. 석회화 현상 이 진행된다. 쑥의 줄기와 잎이 마르고, 말라 버리는 현상으로 가는 지점이다. 생명의 후반기를 준비한다. 쑥은 줄기를 다 잘라내도, 다 음 해에 똑같은 자리에서 쑥이 올라온다. 그 이유는 쑥은 뿌리가 옆 으로 옆으로 번져나가고, 줄기가 잘려도 그 다음 해에 생명력이 이 어지는 뿌리 깊은 쑥이다. 쑥버무리와 쑥전, 쑥떡을 먹기 위해선 3 월~4월 쑥이 새로 막 올라올 때 채취한다. 약술을 담그기 위해선, 기 다림이 필요하다. 5월 단오 때까지! 이즈음이 되면, 쑥은 이미 줄기 가 길어지고 30~40cm까지 커있는 상태라 봄에 막 올라온 새순과 는 다른 형태를 띤다. 올해도 기다린 보람이 있다. 실상사 경내에 황
해쑥들이 지천이다. “오! 다 내꺼다! 쑥쑥주로 탄생시킬 황해쑥들! 고맙습니다 부처님! 오예! _()_”
5월에 담근 쑥쑥주는 11월까지 기다린다. 6개월의 기다림! 쑥쑥주 로 탄생하고, 여러 사람들의 겨울철 냉기를 제거하려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실상사와 화림원 주변에는 자생 쑥으로, 참쑥과 황해쑥이 많다. 이 제부터 쑥의 성질과 효능, 성분, 부작용 등 한방 지식을 공부해 보도 록 하자. 공동체 주치의 낙지의 설명을 듣겠다. "약용으로 쓰는 쑥은 황해쑥을 많이 사용한다. 6~7월경 꽃이 피기 전에 채취한다. 약쑥의 효능은 아랫배를 따듯하게 한다. 특히 아랫배가 찬 여 성에게 좋다. 그래서 아랫배가 찬 데서 생기는 여성 질환에 두루 쓰인다. 생리통, 생리 시기가 고르지 못한 경우, 과다 월경 출혈, 냉대하, 불임, 임 신 태동불안 등. 이런 문제가 아랫배가 찬 데서 오는 경우에 약쑥을 사용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증상이라도 그 원인이 열인 경우도 있다. 이럴 경 우에 쑥을 많이 먹으면 더 악화될 수 있다. 손발과 아랫배가 차고, 찬 물 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 생리주기가 한 달보다 더 길어지는 여성들에게 맞는 약이니 오랫동안 많이 먹고자 한다면, 잘 구분해야 한다. 쑥은 지혈 효과도 뛰어나다. 이 경우에는 쑥을 태워 재를 바르면 지혈 효과가 좋다." 약이 되는 음식
경남 양산 생명평화덕계마을에 가다
편집위원
생명평화덕계마을(이하 덕계마을)은 지난여름 마을공동체 활동가들 이 모이는 ‘지리산소풍’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공동체다. 경남 양산에 서 젊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같이 키우고 마을을 가꾼다는 말을 듣고, 실상사에 초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공동체운동을 하는 곳마다
젊은 사람들이 귀한데, 이들이 힘을 모아 마을을 가꾼다니 반가움이 앞섰다. 지리산소풍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덕계마을을 찾아뵙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공동체탐방 취재를 구실 삼아 덕계마을로 나들이 갔다. 덕계마을을 상상했을 때, 읍 소재지와 논밭이 있는 시골마을로 생 각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양산시 덕계 ‘꽃피는학교’ 주변으로 마을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모습이었다. 마을 주변을 둘러보면 논밭이 보 이고 아파트도 많고 울산, 부산과 같은 대도시와 가깝고 가까이에는
공동체 탐방 40
공동체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첫 탐방지인 마을카페 ‘이음’에서 만 난 마을 중학교 교사인 우경 님의 정성스러운 환대와 안내로 본격적 인 공동체 탐방을 시작하게 된다. 덕계마을 공동체에는 아이, 어른 합해서 150여 명 정도의 식구들
이 있다. 150명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모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15년 전에 양산으로 자리를 옮긴 초등 대안학교 ‘꽃피는학교’가 이 공동체
의 디딤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꽃피는학교가 이 지역에 생기면서 부 모들은 계속 학교를 중심으로 연결되면서 살아온 세월이 있었다. 이
모았다. 이 과정에서 꽃피는학교 교사, 학부모뿐만 아니라 지역의 각 종 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아 마을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활동은 마을거점을 만드는 일이었다. 마을카페 ‘이음’ 마음이 모아지니 공간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것도 외부 지원 없이 순수하게 공동체 식구들의 힘으로 만들었다. 공동체 식구들이 출자금을 모아 4천만 원을 만들었다. 페인트칠, 테이블 만들기 등등 카페 공간도 3개월간 식구들의 봉사로 직접 꾸몄다. 아무 대가 없이 마을거점 공간을 만드는 데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탰다니, 놀라울 따 름이다. 공동체 식구들이 편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간 절함이 바로 느껴졌다. 공간이 생기기 전에는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 서 모였는데, 이제는 아이들 목공 수업부터 아이들 놀잇감 만들기 등 등 할 수 있는 일들이 공간을 중심으로 넘쳐났다. 또한 이 공간을 통 해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게 되니, 지원을 받아 여러 가지 프로그램 도 운영하게 되었다. 첫해 1년 동안 지원을 받아 많은 시도를 해보고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리고 한 해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마을 거점이 지원사업 중심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마을공동체로서 방향이 맞나? 하는 고민이 생겼다. 공동체 거점공간이 애초에 학교를 중심으 로 연결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진짜 제대로 된 공동체로 나 아가고, 우리 아이들을 마을 안에서 잘 이끌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공동체답게 한 걸음 더 첫해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마을거점을 운영했을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보내면서 얻은 것들도 많겠지만, 지원 사업을 활용해 마을을 가꾸는 방식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자꾸만 올라오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서울의 인수마을과 홍천마을,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는 마을을 가꾸는 밝은누리 공동체의 경험을 나누게 되고, 밝은누리와 함께 공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밝은누리 공동체의 최철호 선생님께서 덕계마을 사람들이 진짜 뜨겁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서울에서 진행하던 공동체지도력훈련원 프로그램을 부산에서 열어주신 거예요. 마을주민들과 주변 활동가들 이 이 과정을 함께 들었어요. 이 시점부터 전환이 된 것 같아요. 뭔가
다. 그래서 모든 배움의 결과는 관계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공동체지도력훈련원 공부를 함께 하고부터 본격적으로 덕계마을 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다 흩어져 살며 차로 이동 을 했지만, 지금은 학교를 중심으로 90% 이상이 다 모여 산다. 그러 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모여서 걸어 다니고, 어른들은 늘 만나 고 삶을 나누는 이야기를 하고 같이 밥 먹고 기도하는 등등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밝은덕중학교
3년 전 만들어져 올해 첫 번째 졸업생이 나오는 밝은덕중학교는 덕 계마을공동체에서 만든 대안 중학교다. 초등 과정의 꽃피는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이 마을에서 살다 보니 정말 좋아서, 아이 들을 마을에서 쭉 키우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때마침 마을에 들어 온 멋진 청년이 교사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내주었다. 학생과 교사가
있고 학부모의 의지가 크니, ‘학교 공간을 구해 만들어보자!’고 의기 투합해서 만들어진 학교다. 학교라는 곳이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곳이었나? 덕계마을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을이란 이름을 가진 역 사만 짧지, 이전부터 쌓아온 공동체 문화가 큰 바탕이 되는 것 같다.
다양해진 마을거점
사람들이 모이니, 마을거점들도 하나하나 늘어갔다. 카페처럼 품앗 이를 통해 다 같이 만드는 공간도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공간도 있 다.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든지, 마을 사람들이 같이 만들며 함께 사용 하는 공간이다. 마을공방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모여 사부작사부 작 무얼 만들기도 하고, 마을책방에서는 학교에서 쓰는 교재나 마을 서원에서 공부하는 책을 구입한다. 마을공방에서는 아이들 목공 수 업을 한다. 방송국에서는 팟캐스트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을 소식
을 전하고, 학교 발표회 촬영 등의 활동으로 마을에 활력을 주고 있
경남 양산 생명평화덕계마을에 가다
다. 마을거점들이 함께 만드는 것도 좋지만, 공동체 식구 중 뭔가를 하고 싶은 사람이 마을에 얘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한 다. 공동체 식구들은 서로를 돕기 위해 품앗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따뜻한 공동체 덕계마을의 큰 특징이라면 모든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저녁을 먹는 다는 점이다. 마을밥상이라고 150여 명의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는 다. 지금은 코로나 상황 때문에 70~80명 모인다. 삶을 공유하는 활동 중에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이 아닐까? 한자대로 한집에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 탐방을 가는 날도 마을밥상이 있는 날로 꼭 맞췄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잠깐이라도 덕계 마을 식구가 되어 환대를 받았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공동체 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부와 함께 필수 요소다. 공동체를 꾸리 고 싶다면 일단 서로의 밥을 챙겨보라 말하고 싶다. 덕계마을은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실현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동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는 동학의 유무상자를 해보자는 청년의 제안을 받아 시작을 했다. 현대식 유무상자는 온라인으로 투명하게 관리되는 온라 인 은행 플랫폼을 활용해 누가 입금하고 누가 쓰는지 알 수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입금자명은 모두 ‘한사람’이다. 한사람 만 원, 한사람 오천 원, 한사람 이만 원. 이렇게 넣어서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한다. 마을카페를 새 단장할 때도 사용하고, 개인적으로 필요할 때 빌려가
기도 한다. 빌릴 때는 개인 이름을 적는다. 최근에는 청년 한 명이 이 사할 때 사다리차를 빌려 도움을 주었다. 공동체마을을 가꾸는 곳이 라면 따라해볼 만한 방식이다. 덕계마을이 음으로 양으로 마을 안에 나눔의 문화가 이어지면서 확장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더 튼튼한 공동체로서 최근 덕계마을에서는 고등 과정 개설을 위한 논의가 한창 있었고, 여러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마을이 생기면서 처음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금 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중등 과정과 달리, 고등 과정 은 이후 성인 교육 및 진로와도 상관없지 않은 부분이기에 중등 과정 을 만들 때와 달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드라망에서도 공동체로 살다보니 이런 식의 갈등 상황을 종종 마 주하게 된다. 이때 평소에 쌓였던 관계망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갈등이 발생했다는 것은 공동체로서 더 성장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건들이 우리 공동체가 정말 단단해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 각하자. 그리고 개인의 삶을 계속 돌아보고 그 삶과 공동체의 삶을 맞 춰나가는 공부를 하고 따뜻한 밥을 나누는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생
사부대중공동체의 가치와 방향
육화경, 공동체의 여섯 가지 화합 원리 ¹
정웅기
공동체살이 6년 동안 배운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도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 어려움을, 그만큼 소중함을 종종 느낀다. 좋은 인간관 계는 세련된 기술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당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겠다 는 확실한 마음가짐, 즉 세계관의 전환이 바탕이 되어야 함도 알게 되 었다. 불교에서 이상적인 관계는 ‘도반’이다. 붓다는 제자들을 ‘같은 길을 걷는 친구 사이’로 대했다. 당신 스스로를 스승이나 지도자로 칭 하지 않았고 다른 구성원들과 평등하게 어울려 살았다. 붓다가 공동체의 화합 원리로 제시한 여섯 가지가 ‘육화경(六和 敬)’이다. 붓다께서 꼬삼비 비구들의 분쟁을 피해 아누룻다 등 세 명 의 수행자가 머무는 고씽가
눈으로 바라보면서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이에 붓다는 고씽 가 수행자들이 잘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칭찬하면서 화합의 여섯 가 지 방법에 대하여 설한다. 이 내용이 맛지마 니까야의 ‘꼬삼비 설법의 경(M48)’에 담겼다. 이를 옮겨본다.
1)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은 동료 수행자에 대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 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 는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은 동료 수행자에 대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 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 는 것이다. 3)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은 동료 수행자에 대해 여럿이 있을 1. 이글은 2022. 11. 전남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가 마련한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종교의 역할’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글 <갈등 해소, 불교의 관점과 실천 방향화쟁의 관점과 육화경의 방법론을 중심으로>에서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육화경, 공동체의 여섯 가지 화합 원리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 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 는 것이다.
4)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여법한 소득 즉 정당하게 얻어진 것 이 있다면, 하나의 발우에 있는 것일지라도, 이와 같이 소득을 남김없 이 나누어, 계행을 지키는 동료들과 함께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 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 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5)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결점이 없고 하자가 없고 섞임이 없고 오염이 없고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마찰이 없어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행이 있는데, 수행승은 이와 같은 계행 속에서 동료 수행자들 과 함께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계행과의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 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 끄는 것이다.
6)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은 고귀한, 해탈로 이끄는 견해가 있 어 그것을 실천하면, 올바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데, 수행승은 이 와 같은 견해에 관하여,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그 견해와의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 이것은 새 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새겨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 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 고, 일치로 이끄는 여섯 가지 원리가 있다.” (맛지마 니까야 M48, 전 재성 역 567쪽)
육화경의 출발이 되는 것은 ‘자애롭게’이다. 상대에 대해 자애로운 마음을 내고, 자애롭게 행해야 그것이 서로 간에 사랑을 만들고, 존경 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 고, 일치로 이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자애롭게 행하 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아누룻다는 내 하고 싶은 것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가 하고 싶은 일을 따르는 것이 ‘자애롭게’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누룻다여. 어떻게 그렇게 (자애롭게) 살고 있느냐?” (아누룻다가 답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내가 나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 들의 마음을 따르면 어떨까?’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제쳐두고 이 존자들이 하고 싶은 일을 따 육화경, 공동체의 여섯 가지 화합 원리
릅니다. 저희들의 몸은 여러 가지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세존이 시여, 저희들의 마음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² 북방의 <불설식쟁인연경>, 중아함경 제52권 <주나경> 등에도 여 섯 가지 화합 원리가 설해져 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이를 ‘육화 경’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수행공동체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화합 원리로 삼아오고 있다.
① 신화공주(身和共住) ; (자애롭게) 몸으로 화합하여 함께 머문다.
② 구화무쟁(口和無諍) ; (자애롭게) 입으로 화합하여 다툼이 없게 한다.
③ 의화동사(意和同事) ; (자애롭게) 뜻으로 화합하여 함께 일한다.
④ 계화동수(戒和同修) ; (자애롭게) 공동체규칙으로 화합하여 함께 지 킨다.
⑤ 견화동해(見和同解) ; (자애롭게) 견해로 화합하여 함께 이해한다.
⑥ 이화동균(利和同均) ; (자애롭게) 이익으로 화합하여 함께 균등하게 한다. 앞의 세 항목은 공동체가 화합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상호간에 ① 몸 ② 말 ③ 마음의 나눔과 공감대가 먼저 확보되어야 함을, 신·구·의 삼업, 즉 삶을 나누는 공감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몸으로 2. <맛지마 니까야> 31.
함께 머문다는 말은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토 론이나 대화를 하거나 몸으로 함께 머물며 함께 행하는 것이다. 우리 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몸으로 연결되는 것에서 다른 공감으 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오랫동안 같은 시공간을 점유 하고 있다 해도 몸의 나눔이 없으면 동질감조차 제대로 생기기 어렵 다. 이는 갈등의 해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보통의 경우는 누군가 와 불편함이 일어날 시 서로 같은 자리에 있거나 마주치려 하지 않는 다. 이렇게 되어서는 작은 차이나 다툼조차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증 폭되게 된다. 비록 큰 의견차와 갈등이 있더라도 서로 같은 자리에 앉 을 수만 있다면, 이미 해결 쪽으로 한 발 나아간 것이다. 이렇게 몸으 로 함께 머물면서 함께 땀 흘리며 몸짓을 나눌 수 있다면, 서로를 대 하는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거기서 마음도 감정도 조금씩 열리며 실 마리가 풀린다. 두 번째 원리는 다툼을 일으킬 말(험한 말, 욕설, 비난, 뒷담화 등) 을 않는 것이다. 신체적 충돌이나 폭력이 현저히 줄어들은 현대사회 에서 갈등은 대부분 ‘말’에서 비롯되고 말로 증폭되고 말로 결말을 맺는다. 다툼의 말을 주고받으면서 제대로 화합하기는 어렵다. 옳고 필요한 내용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 말해야 하며, 남의 말을 잘 들어 야 한다. 상대의 잘못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고 섭섭하더라도 나는 최 소한 다투는 말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일시적으로 그런 마음이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기도문이나 금언 등을 평소에 함께 염송하 는 등 서로에게 부드럽고 도움되는 말의 습관을 들여야 한다. 세 번째 화합원리는 뜻을 나눔이다. 가족끼리 사는 것도 쉬운 일만 은 아닌데 타고난 기질과 성장배경, 경험이 다른 사람들하고 화합하 여 살기는 만만찮은 일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달 라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답답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일지라도 한자리에 머무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입으로 다툼의 말 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그래, 이것 정도는 같이 뜻을 모아보자’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의화동사’의 동사(同事)다. 공동 의 관심사를 정하고 함께 해보는 것이다. 이때의 일은 노동일 수도 있 고, 봉사일 수도 있고, 공부와 수행일 수도 있고, 소박하고 작은 나눔 일 수도 있다. 상대편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면서 화합은 깊어간다. 이상과 같이 몸말마음으로 화합하기 위하여 애쓰 면 삶의 화합이 이루어진다. 아무리 밉고 보기 싫은 사람이라도 한 자 리에 있는 것을 피하지 않고, 서로 다툼이 되는 말을 참으면서, 무언 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고 모색할 수 있으면 그것이 참 된 화합으로 가는 바탕이 된다. ④ 계화동수의 ‘계’는 공동체 규칙 혹은 약속이다. 함께 규칙을 정 하고, 함께 지키는 것이다. 규칙은 함께 만들었을 때 마음으로 승복하 고 더 책임 있게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만드는 과정에서 구성원 전
체의 의견을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새 구성원이 왔을 때 이미 만들 어진 규칙이 있다면, 기존 규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고, 지킬 것인지 의사를 확인함으로써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개인 주의 성향이 강해진 요즘에는 반대의 편향이 나타난다. 내가 동의하 여 만들어진 규칙이 아니므로 지킬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경우다. 비록 만드는 데 직접 간여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일 단은 공동체에 깃들었다면 앞서 경험한 이들이 만든 규칙을 존중해 야 한다. 그런 식으로 규칙이 무너지면 공동체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존 규칙을 존중해야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 기하고 고쳐나갈 길도 열린다. 공동체 규칙은 권력과 지위에 관계없 이 함께 지켜야 한다. 내가 어른이라 하여 힘이 있다 하여 규칙을 어 기면 그 때의 규칙은 약자의 입장에서는 억압 도구가 되고, 화합의 원 동력이 되기보다는 다툼의 씨앗이 된다. 규칙은 공평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그것이 곧 기계적 평등을 말함은 아니다. ....(붓다가 묻습니다)
“대단하구나. 너희 모두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확고하기를 바라 느니라. 그런데 그대들은 어떻게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 는가? (아누룻다가 답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 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육화경, 공동체의 여섯 가지 화합 원리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마을에서 탁발하여 맨 나중에 돌아오는 자는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가 원한다면 먹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풀 이 없는 곳에 던지거나 벌레 없는 물에 가라앉게 합니다. 그는 자리를 치우고 음료수 단지나 세정수 단지나 배설물 통이 텅 빈 것을 보는 자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치웁니다. 만약 그것이 너무 무거우면, 손짓으로 두 번 불러 손을 맞잡고 치웁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 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 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31/ 율장대품 Vin.I.352)
필요한 규칙을 정하고, 평등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숙소에 똑 같이 들어올 수는 없다. 같이 모여 일을 분배할 수 없을 때 먼저 온 사 람은 먼저 할 일을 하고 나중 온 사람은 나중 할 일을 하는 모습이 경 전에 그려져 있다. 그때그때 말로 규칙을 정할 수 없을 때 서로를 위 해 각자의 몫을 하는 것도 계화동수에 들어간다 할 수 있다. 또한 닷 새마다 진리를 나누는 대화를 하자고 약속하고, 밤을 새워 대화한다 고 했다. 전문 수행자 집단이 아니면 5일마다 밤새워 이야기하는 것 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바쁜 현대인들 가운데서도 1주일에 한 번씩 공부 모임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함께 공부하며 탁마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공동체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 을 규칙으로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함께 공부하지 않으면 가치 와 방향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고, 가치와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형
성이 안 된다면, 아무리 좋은 규칙을 만들어 놓은들 공동체가 오래 존 속될 수 없다. 공부를 함께하는 규칙이 꼭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다. ⑤ 견화동해의 ‘견’ 역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치와 방향을 공감하 기 위한 규칙이다. 누구나 자기 견해가 있고, 구성원들마다 다른 견해 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소수일지라도 자기 견해를 자유 롭게 표현하되, 그것이 공동체를 갈등에 빠뜨리거나 각자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존중해야 한다. 부처님은 세 차 례나 자신을 시해했던 데와닷따도 참회하자 받아들였다. 그의 언행을 문제 삼은 것이지 견해를 문제 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고 치열하게 대화하여 더 나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상호완성으로 향하는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작은 공동체든 큰 공동체든 상호 이해와 신뢰가 일정하게 형성되면, 견해의 차이가 있을 시에는 치열하게 대화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래 야 화합의 질이 높아지고, 공동체 전체가 한 생명처럼 앞으로 나아가 게 된다. 특히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견해의 차이를 잘 녹여내지 못 해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대화와 토론을 할 시에는 저마다의 세를 형 성해서 공동체 내에 편을 가르거나,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한 다. 견화동해는 하나의 견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신뢰함으로써 따로 또 같이 견해의 조화를 위해서다. ⑥ 이화동균의 ‘이’는 이익, 이로움이다. 이를 고루 나눈다는 것은 육화경, 공동체의 여섯 가지 화합 원리
좁게는 수행공동체 내에서 보시물의 평등한 분배를 말하는 것이고, 넓게는 우리 몸을 길러 주는 의·식·주 등 삶의 조건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의식주, 교육, 건강, 생애주기(요람에서 무덤까지)별 보호, 공동의 생활공간을 가꾸는 것까지 넓혀 해석할 수 있다. 동균의 ‘균’ 또한 저울추를 달아 나누는 식의 기계적 평등이 아 니다. 형편에 맞게, 필요에 맞게 고루 나눔이다. 아이를 키우거나 노 부모를 돌봐야 한다거나 병이 든다거나 하는 경우에 필요한 만큼 더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동균에 가까울 것이다. 주변의 어려운 이 웃들을 돌보는 것도 나눔의 하나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육화경 각각의 뜻을 살펴보았다. 육화경은 애초 작은 수 행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설해진 것이다.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 안 에서 협동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어려웠던 시절 육화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너무 달라 졌다. 경제적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워졌고, 민주화와 인권도 크게 신장되었다. 감각적 욕망의 추구, 자기과잉이 지나치다 보니 화 합을 이야기하면, 집단주의나 거추장스런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적지 않다. 왜 화합해야 하는가? 이 시대에도 화합은 자기향상과
육화경은 일차적으로 수행공동체 내부의 화합을 도모하는 원리이 지만, 가족, 회사, 마을 등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지역사회, 국가 등 큰 공동체의 갈등 해결을 방지하거나, 갈등 해결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 에 참고할 만하다. 공동체 규모가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구성원 들이 직접 몸 말 마음으로 소통하기는 어려워진다. 국가와 같이 규모 가 큰 공동체의 경우 최소한 ④~⑥ 일의 화합 원리인 규칙, 이익, 견 해의 나눔을 중요한 화합의 요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실상사는 지난 30여년 간 불교내적으로는 사부대중공동체를, 사회 적으로는 마을공동체를 꿈꾸며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구성원 각자 가 대자유와 평화의 길을 주체적으로 걸으면서도,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긴밀하게 공동체로 연결되어 살았던,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 도 빛났던 불교 전통을 잘 살려 나가려 앞으로도 애쓸 것이다. 거기에 실상사의 미래,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 있고, 불교공동체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자체만으로 세상의 의지처가 될 것이라 믿는다.
육화경, 공동체의 여섯 가지 화합 원리
지리산 소풍 스케치
2박3일의 기록, 놀고 쉬며 하나임을 만끽하다
최세현 실상사 공동체처럼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을 함께 모색하 고, 해결해가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의 공 동체를 가꾸기도 하지만, 주변의 마을과 지역 공동체를 함께 가꾸고 있다. 세어 보니, 이런 작은 공동체들이 전국 20여 곳에 있는 듯하다. 이런 작은 공동체가 많아졌을 때, 우리가 당면한 문제인 기후위기, 기 후재난의 대안인 탈성장 시대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지난여름 공동체를 가꾸며 사는 10여 개의 작은 공동체와 공동체 활동가들이 ‘지리산소풍’이라는 이름으로 실상사에 모였다. 참석한 공동체들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활동을 하고 있지만,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이 소중함을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공 동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소풍’ 에 함께한 10여 개 공동체와 ‘지리산소풍’을 소개한다. 최세현 인드라망생명공동체 활동가.
이번 ‘지리산소풍’에는 실상사 공동체와 같은 불교 수행 공동체로 는 ‘정토회’와 ‘행복한마을’이 참석했다. ‘정토회’는 30년 이상의 역
사와 전국적인 대중이 함께하는 수행 공동체다. 법륜스님을 지도법
사로 모시고, 즉문즉설, 에코붓다, 평화재단 등의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기인생의 주인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 하기,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는 환경활동, 나와 이웃이 함께 행복한 세 상을 만들기 위한 복지활동,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한다. ‘행복한마을’은 명상과 생활, 자족경제, 사회적 기능이 어우러진 마 을로서 삶과 명상이 일치되는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는 마을을 추구 한다. 육바라밀의 삶을 현대적 해석으로 ‘공공생활’이라고 하며, 나랑 명상센터,
식식당 베지나랑, 공동 수행 공간, 공동 주거 공간을 이루며 알찬 공 동체 생활 중이다. 기독교 중심의 공동체로서 ‘예수살이공동체’와 ‘산위의마을’이 참 석했다. ‘예수살이공동체’는 1998년 설립된 가톨릭 신앙인들 공동체 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소유로부터 자유, 가난한 이와 함께하는 기 쁨,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투신의 정신을 실행하려 한다. 도시에서는 ‘대안운동’을, 농촌에서는 ‘공동체 마을’이라는 두 방향에서 살아가고 있다. 농촌생활의 공동체 마을인 ‘산위의마을’은 “산 위에 있는 마을 은 드러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서 이름을 따온 충북 단양에 있는 공동체다. 신앙 활동 못지않게, 축산과 유기농업 활동에 힘쓰며, 무소유의 삶을 통해 예수살이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실상사에 ‘실상사작은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있듯이, 학교와 교육 을 중심으로 마을을 가꾸는 작은 공동체들도 있다. 충북 제천의 ‘간 디공동체’와 순천의 ‘사랑어린마을배움터’, 양산의 ‘생명평화덕계마 을’이다. ‘간디공동체’는 제천 간디학교가 중심이 되어 제천 덕산면 일대를 마을공동체, 생명·평화 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활약하 고 있다. 대안학교인 간디학교 외에도 지역 아이들을 위한 지역아동 센터 누리꿈터, 지속가능한 마을을 꿈꾸는 주민 모임 ‘마실’, 지역사 회에 활력을 주기 위한 마을기업으로 마을여행사, 마을공방 등을 운 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간디교육문화센터’를 열어 마을공동체 거점 공간을 운영 중이다.
‘사랑어리다’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 어디에나 무엇이든 사랑이 배 어 있는 모습을 뜻한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 라고 말하는 ‘사랑어린마을배움터’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정신 을 지향하며, 아이에서 노인까지 함께 어울려 놀면서 크는 법을 나누 고 있다. 초등 9학기제 사랑어린학교, 청소년 고등과정 사랑어린마을 인생학교, 사립공공 관옥나무도서관, 마을 문화예술 공간 순천(順天) 판, 청년공동체 마을인생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하며, 현재 50여 가구 가 마을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생명평화덕계마을’은 경남 양산의 구도심에 있는 시골마을이다. 마을 안에는 초등 대안 ‘꽃피는학교’와 중등 대안 ‘밝은덕중학교’도 있으며, 학교라는 공간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삶을 나누고 배움을 함께하는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마을카페, 마을방송 국, 마을공방, 마을책방 등등 다양한 마을 거점에서 배움과 경험을 통 해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리산소풍’에 참석한 많은 공동체들이 농촌을 기반으로 두고 있 지만 그중에도 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로 ‘변산공동체’가 있다. 1995년 2월에 충북대학교 철학교수였던 윤구병 선생이 ‘실험학교 변
가 깊고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는 ‘홍성공동체’도 있다. 60년 역사 의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유기 농업과 축산으로 순환농업을 하고 지 역사회와 학교가 함께 만드는 마을을 모토로 하는 ‘홍성공동체’는 협
동조합, 마을조직 등이 50여 개나 되는 협동과 협력의 네트워크로 이 루어진 마을이다. 씨앗도서관, 청년농장, 어린이집, 만화방, 지역아동 센터, 신협, 의료생협 등 작은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까지도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마을활동 가들이 애쓰고 있다. 도시에도 마을공동체를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 마포구에 성미 산을 둘러싼 크고 작은 70여 개 커뮤니티 네트워크를 일컫는 ‘성미산 마을’이다. 1994년에 전국 최초로 협동조합형 어린이집이 만들어졌 고, 성미산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 활동과 투쟁의 경험에서 이웃 과 마을 주민이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마을 활동에 필 요한 여러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다. 현재는 더욱 다양해지고 넓어 진 연결망으로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찾고 있다. ‘밝은누리’ 공동체는 도시 따로 농촌 따로가 아닌 도시와 농촌 마을 을 서로 살리는 공동체다. 서울 강북구 인수마을에는 공동체가 운영 하는 어린이집, 마을배움터, 마을카페, 마을서원, 마을공방, 마을밥상 에서 서로를 돌보는 150여 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있다. 강원도 홍천 밝은누리에는 ‘생동중학교’와
고 있다. 신기하게도 10여 개의 작은 공동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비슷하면 서도 다르다. 그러나 공동체 방식으로 살아가고, 공동체 밖의 세상을 가꾼다는 점은 모두 같다. ‘지리산소풍’으로 이 분들을 모시려는 이유 는 길지 않은 공동체운동 역사 속에서 굳게 공동체를 지켜와 주신 이 들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공동체를 가꾸는 사람들이 크게 소진되지 않고 행복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일 년 중 2박 3일 정도는 실상사 툇마루에 모여 앉아, 편히 쉬고 서로 격려하며 희 망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리산소풍’을 열었다. 또한 지리산 을 품고 있고, 사부대중 공동체와 산내 지역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는 실상사라는 곳이 전국의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이 모이기에 걸맞는 곳 이기도 하다. ‘지리산소풍’은 크게 세 가지 섹션으로 준비했다. 1일차 저녁은 공 동체 소개와 활동가들이 인사하는 ‘첫 번째 야단법석’. 두 번째는 2일 차 소풍 프로그램으로 아침울력, 아침을 여는 법석, 실상사 농장살이, 도법스님과 차담, 스님과 참선, 약수암 산책, 산내 마을공동체 탐방, 뱀사골 물놀이, 불멍&곡차 한 잔. 3일차는 ‘마을공동체에서 희망 찾 기’라는 주제로 ‘두 번째 야단법석’ 시간이다. 지리산소풍의 1일차 야단법석은
람들이니 우리 스스로를 위해, 세상을 위해서라도 희망이고 대안은 ‘공동체’라는 점을 잘 알려 달라 하셨다. 도법스님의 인사말 후 실상 사 선재집에 모인 마을활동가 70여 분은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 였다. 지리산소풍 2일차는 종일 지리산과 산내마을, 실상사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다. 전국의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은 실상사와 산내마 을에 흩어져, 일상을 떠나 여유와 쉼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 시간이 되어 즐겁게 하루를 보낸 마을활동가들의 얼굴을 보니, 어제보다 더 맑고 밝아 보인다. 지리산소풍 3일차가 되니, 그동안 함께 먹고 놀았 던 시간만큼 공동체 활동가분들이 친척집에서 만난 사촌 언니, 누나, 형, 동생 같이 느껴진다. 마지막 공식 일정인 ‘두 번째 야단법석’ 시간 이다. ‘마을공동체에서 희망 찾기’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박3일의 기록, 놀고 쉬며 하나임을 만끽하다
희망뿐만 아니라 힘든 점도 자
연스레 이야기하는 소통의 장
이었다. 전국의 작은 공동체들이 모
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80여 명의 마 을공동체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오가며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체 운
동의 큰집인 실상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상사의 큰 품에 다시 한 번 감동한다. 작은 공동체들을 모아 보자 했을 때, 어떠한 결과도 기대하지 않았 다. 그저 공동체로 살아가는 분들을 잘 모시는 일이 전부였다. 전국의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은 2박 3일 동안 함께 먹고, 자고, 놀다 보니, 공 동체살이가 어렵지만 소중함을 공감했다. 또한 작은 공동체들이 세 상의 희망이 되기 위해서 공동체를 가꾸어야 하는 일도 필요하고, 지 속가능하기 위해 함께 풀어가야 할 어려움들도
인드라망 운동의 현재
다양한 ‘생명-생명평화운동’과 함께 걷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위하여!
이정호
실상사의 모델은 대중화하기 어렵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시작될 때 실상사의 ‘사부대중공동체와 마
을공동체’는 활동가들의 머릿속에 있었던 막연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우여곡절을 거쳐, 우리는 사부대중공동체와 마
을공동체의 염원을 ‘실상사 모델’의 형태로 구체화하였습니다. 지난 20여 년은 소위 ‘실상사 모델’을 향한 노력에 집중했습니다. 반면 향후 인드라망운동의 방향은 이 모델을 대중과 공유하고, 보편 적 운동 모델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20 여 년 모색했다면, 향후 20여 년은 그것을 대중과 함께하는 과정이지 싶습니다. 많은 불자 대중과 뜻있는 시대 대중들은 인드라망운동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두 가지의 의문을 가지고 그랬습니다. 하나는 소위 사
설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다른 사찰’에도 적용 가능한가라는 의문 입니다. 첫 번째의 의문은 ‘사부대중공동체’가 과연 현실 속에서 가능하겠 는가라는 의문입니다. ‘그러면 좋지만, 되겠어?’라는 의구심입니다. 지난 1994년 이후 언어로만 조계종의 ‘사부대중공동체’의 염원이 대 중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조계종 개혁불사의 과정에서 사부대중의 힘과 지혜를 모아서, 당시의 난국을 타개하자는 방안으로 제안되었 습니다. 다행히 시절인연이 되어 개혁불사는 진행되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불자 대중들은 그 원칙은 중앙 단위에서 ‘대중 동원’의 방편으로 유용성은 있으나, 일상적인 불교 활동의 원칙으로 구체화 되는 것은 차이가 있겠다고 보았습니다. 지난 20여 년 인드라망과 실 상사의 발걸음은 대중 동원의 슬로건으로만이 아닌 불교 일상 문화 로서 사부대중공동체를 향했습니다. 실상사의 모델은 이러한 노력을 한 축으로 품고 있습니다. 두 번째의 의문은 ‘그것은 실상사만이 가능한 것이야!’라는 강한 대 중적 믿음에 기인합니다. 도법스님과 인드라망의 활동가들이 만들어 낸 특이한 사례라는 평입니다. 실상사만의 특별한 경우라는 것은 ‘보 편적 모델’이 아니며, 나아가 보편성을 띌 수 없는 모델은 ‘불교 대중 운동’의 모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20여 년, 인드라망은 묵묵히 이 두 가지 의문에 직면하며 걸 어왔습니다. 그리고 현대 불교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실상사 모델’을 만들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걸음에 대하여 잘 정리해 보고, 그것이 좋
다고 느끼면 성심껏 대중과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이었으면 합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인간 이 증명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증거였습니다. 인류의 첫걸음이었습 니다. 그래서 후세들은 그것이 가능함을 믿게 되었습니다. 실상사 모 델은 그것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어느 사찰이나 사부대중들의 노 력으로 가능하다고 증명한 것입니다.
시대적 고를 붙잡고, 실상사 모델을 실험하다. 인드라망과 실상사는 올바른 불교(정법불교)를 향하고, 한편으로는 불교의 시대적 역할에 대면하기로 했습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시대를 성찰하면서 이분법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죽임의 문명’에 대하여 진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생태적 대안문 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실상사는 주변의 조손가정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으며, 사찰 유휴 지 땅을 개간하면서 ‘실상사농장’을 통한 ‘지역 사찰의 역할’을 모색 했습니다. 이런 성찰과 노력들이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이병철 선생 님과의 만남을 통해 ‘불교귀농학교’와 ‘실상사귀농학교’로 나아갔습
화엄학림과 실상사농장, 실상사작은학교, 한생명의 대중들이 함께 실 상사운영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형식적 회의 체계가 아니라, 실상사가 불교 내외적으로 나아갈 방향과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이 이 회의 체계를 통해서 논의되고 결정되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많은 부침과 에둘러감 그리고 회의와 숙고들이 있 었습니다. 그래도 이 원칙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명운동’과 ‘다양한 생명들’ 그리고 ‘생명평화운동’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사회적으로 펼치는 운동을 우리는 ‘생명평 화운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근대적 생명운동은 장일순 선생님과 김지하 선생님, 박재일 선생님 등의 ‘한살림선언’을 통해 세상에 제안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살림선 언은 한편으로는 ‘대안문명을 향한 사상혁명’과 ‘협동을 통한 생활혁 명’의 방법으로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생명운동에 대한 호명은 엄혹 한 독재시대에 ‘생명의 저항’을 움트게 했습니다. 기나긴 겨울의 시대 에서 새로운 시대로의 꿈을 시작했습니다. 생명운동에 대한 반응은 다양한 생명 현상과 조우합니다. 생명 현 상은 한편으로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한편으로는 대안을 향한 몸 부림으로 나타납니다. 다양했습니다. 화엄동산을 이루어 갔습니다. 인드라망운동은 지리산 실상사에서 움텄습니다. 최초의 선불교 가 람에서 출발했습니다. 지리산이라는 역사적 공간(삼국시대의 변방, 근현대의 아픔의 공간)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확인하고 그것의 평화
로운 공존을 향한 시대적 모색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리산 실상사는
90년 선우도량의 ‘올바른 수행자상 정립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모 색한 흐름에서 사회화의 첫발을 딛었습니다. 1999년 인드라망은 시 대적 과제를 ‘대안문명의 개척’으로 삼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 우리 사회는 정말 다양한 흐름으로 생명에 대한 움 틈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 리우회의 이후 그동안 지체되었던 ‘반공 해적 사회반응’은 다양하게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으로 진화하 고 있었습니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생명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체요인이 비로 소 깨지게 됩니다. 생명의 가치에 대한 눈뜸은 죽임의 문명을 만들어 낸 현대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물질주의적 생활 방법에 대한 광범위 한 대중적 의심으로 공진화하고, 현대 문명을 넘어설 필요성을 인식 케 했습니다. 유기농업운동에서, 협동조합운동에서, 귀농운동에서, 대안교육운 동에서, 마을운동에서, 유전자조작에 대항하는 과학기술운동에서, 마 을운동에서, 지역자치운동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명’과 ‘평화’의 가 치는 생겨납니다. 이를 지리산운동과 생명평화탁발순례는 ‘생명평 화’라는
상황에 따라 다소 주춤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사회정치적 환경과 전 세계적 팬데믹으로 주춤거림과 새로운 성찰의 시기인 것 같습니 다. 그래도 우리의 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생명평화의 가치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공동체운 동은 있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있어온 다양한 공동체운동과 기후위 기 시대를 사는 ‘생명평화’ 공동체운동은 조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의 공동체운동은 개인들이 ‘살기 위한 협동’이었습니다. 흩어 져있는 약한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협동을 택했습니다. 내가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기후위기 시대는 ‘모두를 살리기 위한 협동’을 선택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공멸’에 대한 위기의식의 반응이기도 하고, 관계적 세계관에 입각한 자연스러운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제 생명평화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공동체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소수의 실험은 가치와 방향에 집중했습니다. 그것의 대중화와 사회화는 전면화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흐름에 대한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이촌향도’를 진행했습니다. 농촌공동체의 파괴와 도시의 파 편화된 개인들을 특징으로 합니다. 전자를 통해 후자를 완성해 갔습 니다. 큰 흐름은 이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공동체의 경험은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학생들은 학생회와 동아리를 통해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농민
들은 농민회를 통해 그리고 도시의 시민사회단체들은 개별화되어 있 던 개인들을 새롭게 ‘사회적공동체’의 경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 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경제 조직과 마을공동체 조직은 도시 대중들의 삶도 사회적 공동체로 조직 가능함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는 그들의 생활과 경제적 이익 그리고 사회정치적 요구를 집약하는 방법으로 재조직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40대 후반에서 60대 중후반의 세대들은 이러한 과정 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의 가치를 경험하였습니다. 이 과정은 그들을 ‘근대적 시민’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들의 공간은 도시였습 니다. 그 경험은 그들을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역으로 만들었습니 다. 이 같은 과정은 이 세대가 진행한 20대 이후의 ‘제1의 사회적 진
출’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이 세대는 직장에서 가정과 지역사회로 돌아갑니다. 새로운 사회적 진출이 필요합니다. 이 세대는 대략 3-40년이라는 ‘사회적 활 동’의 기간을 갖게 됩니다. 최초의 국민연금을 가진 가난하지만은 않 은 혹은 자산이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사회로 몰려나옵니다. 앞으로 기후위기와 생태적 시민사회를 향한 과정은 이 세대들의 ‘사회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들은 도시 한 귀퉁이에서 자 신의 노년을 설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전국으로 흩어질 것입 니다. 국민연금은
일생의 가치에 대한 토론이 필요합니다.
실상사사부대중공동체와 실상사마을공동체의 경험이 이들과 함께 토론할 토양이 될 수 있을까요? 인드라망의 20년은 그 가능성을 보 여준 과정이었다고 판단합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향후 20년을 위한 과제는?
두 가지의 차원에서 과제를 상상합니다. 하나의 차원은 실상사사부대중공동체와 실상사마을공동체의 사회 경제적 네트워크 형성입니다. 지금까지 인드라망의 경험은 사상적, 이념적 관계망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곳에는 젊은 세대와 좀 더 사회적 약자들은 깃들기 어렵습니다. 지속가능한 사부대중공동체와 마을공동체를 위해서는 사상·이념 적 관계망과 더불어 사회경제적 관계망의 존재가 함께 공존해야 합 니다. 몇 가지 방향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실상사 유역은 불교 및 인드라망생명공동체 활동과 관련된 사회경제적 관계망을 충분히 활성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상사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1년에 4만 명에 달합니다. 이들에게
께 경제적 자립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시작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관계망이 준비될 때, 청년 세대와의 소통과 연 대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둘째 차원의 과제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실상사 유역이 모든 세 대에게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교육과 소통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의 방식은 ‘불교공동체’를 통해 모색될 수 있겠고, 귀농대학을 통해 도 가능할 것입니다. 어쩌면 ‘은퇴자출가학교’와 ‘마을공동체대학’도 가능할 것입니다. 어떤 이름이건 그것은 실상사의 사부대중공동체와 실상사마을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와 자연환경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이기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교육과 소통의 공간에서 ‘생태적시민사회’를 꿈꾸는 사람들 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공동체운동들을 소개받을 것이며, 저 마다 자신과 가장 맥이 닿는 곳으로 향할 수 있는 징검다리로서의 역 할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서 다양하게 피어 나고 있는 생명운동-생명평화운동들이 교류하는 공간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실상사사부대중공동체가 우리나라의 생명
전북생명평화자치도
‘생명평화 전라북도’를 상상한다
생명평화는 문명전환의 서사가 될 수 있는가
정웅기
새로운 서사의 필요성
많은 인류학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전환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낙뢰 등 자연발화 불 을 힘센 포식자들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 다양한 실험과 도전 끝에 인간은 불을 다룰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불이 상용화되는 1만5천 년 전부터는 수렵채집 대신 농업이, 유랑생 활 대신 정주생활을 하고 마을이 형성된다. 그 뒤 인류는 청동과 철, 숫자, 문자, 나침반, 선박, 인쇄술, 증기기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문 명의 이기들을 3천여 년 동안 쉼 없이 개발하였다.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쳐 삶의 터전인 지구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인류 의 종말을 불러올까 염려하는 정도가 되었다. 불이 인류문명의 시발 이 된 것은 ‘어떻게 하면 불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서 시작되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 다양한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정웅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운영위원장.
다른 인류사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로 변화의 열망 혹은 현실불만족 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 서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진 것들이다. 기후위기는 20~30년 전만 해도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사회 일부의 경고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의 공식 견해로, 일 국단위의 정책을 간섭하고 규제하는 국제규범이 마련될 정도에 이르 렀다. 그만큼 현실이 매우 엄중함을 말해준다. 생태적 시각으로 보면 재난의 진행속도에 비해 대응 수준은 여전히 느리고 미흡하며, 전망 은 비관적이다. 인류가 앞으로도 기존의 방식과 질서를 고집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변화에 직면할 것이고, 공멸의 길로 갈 가능성 이 높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지구적 공감대가 급속하고 강력하 게 형성되어온 과정도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변화이다. 이 또한 ‘위 기의 서사’가 작동한 때문이다. “지금처럼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 비의 산업문명이 유지된다면 이번 세기 안에 인류공멸의 파국을 피 할 수 없다.”는 쪽으로 빠르고 넓게 공감대가 확산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성장, 저성장, 생태주의와 같은
합형 규모의 경제 ⇨ 수평통합형 규모의 경제 / 중앙집중형 가치사슬 ⇨ 분산형 가치사슬 / 거대복합기업 ⇨ 민첩한 첨단기술 중소기업 / 지식재산권 ⇨ 오픈소스 지식공유 / 제로섬게임 ⇨ 네트워크 효과 / 세계화 ⇨ 세방화 / 소비자 주권주의 ⇨ 환경책임주의 / 국내총생산 (GDP) ⇨ 삶의질 지수 / 부정적인 외부효과 ⇨ 순환성 / 지정학 ⇨ 생명권 정치학으로의 전환을 포함한 경제 및 사회의 전면적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효율성’에서 ‘적응성’ 혹은 ‘회복성’으 로 전환해야 파국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서사의 골자이다. 제러미 리프킨이 주장하는 새로운 문명의 서사는 다소 복잡하고 어 렵다. 다방면에서 일어나야 할 변화의 총체성을 잘 설명해주는 반면, 그러한 내용들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적응성이나 회복성이라는 말이 좀 낯설기도 하다. “불을 만들어 천적들을 쫓아야겠다.”거나 “문자를 만들어 정확한 소통을 해야겠다.”는 식의 단순한 서사로까지 발전하 는 데는 앞으로도 많은 공력이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20세기 가장 강력한 서사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들이었다. 보 수, 진보,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이러한 서사들에 사람들이 몰입되고, 삶을 던졌다. 아직 인류는 기후위기와 팬데믹 이후의 새로 운 문명에 대한 서사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21세기를 전 후해 4차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서사들이 나왔지만, 그런 류
의 서사들은 기후위기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20세기 말 부터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쓰이고 있는 서사들은 여전히 구체적이고 대중적이지 못하다. 지금은 새로운 서사가 더욱 다양한 집단에서 다 양한 내용으로 만들어져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가운데 어 떤 서사들이 시민에게 더 쉽고 명료하게 인지 공감될 때, 변화는 비로 소 도도한 물결이 될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잘못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고치려고 애쓰는 이는 늘 소수였다. 위기의식이나 죄의식만으로 다중이 움직이기도 쉽지 않 다. 다수는 “그렇게 해도 괜찮겠네. 한번 해보자.”라는 긍정적인 서사 에 반응하고 합류한다. 수많은 담론과 복잡한 변혁이론이 홍수를 이 뤘던 1987년 민주화운동 당시의 주요 서사가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 을 뽑아보자. 한국도 직선제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도 같은 맥락 이다. 지금보다 더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쓰여야 한다. 욕심 으로는 한 발 더 나아가 “잘하면 현실이 될 수 있겠네.”라는 희망의 싹 을 티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꿈꾸는 ‘생명평화 전라북 도’에 대한 대화와 토론의 과정이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고
는 사회질서, 자본주의보다 긴 인류사의 부정적 측면) ▲무지(痴)의 사회화(한생명임을 망각한 무지와 이분법, 욕망과 분노가 역사발전 의 원동력이라는 등의 잘못된 신념)의 길을 걸어온 데서 비롯됐으며, 이 물꼬를 돌려 깨달음의 사회화로 전환하는 것이 문명전환의 방향 이자, 인류가 나아갈 길이라는 생각이다. 탐진치로 조직된 사회에서 깨달음(바른 이해와 통찰)으로 조직되는 사회로! 2천7백 년 전 붓다 가 그랬던 것처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사무친 ‘깨달음’이 이 서사의 열쇠말이다. 지금 실상사에서 진행하는 문명전환을 위한 결사와 기 도는 대체로 이러한 공감 하에서 이뤄지고 있다. 생명평화는 새로운 서사의 열쇠말이 될 수 있는가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 소비를 인류가 지금처럼 유지한다면 기후 위기는 재앙이 되어 문명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영화 매드맥스에 그려진 것처럼 그 과정에서 벌어질 약탈과 파괴의 광기들을 생각하 면 아찔하기만 하다. 새로운 인류의 생존방식에 대한 필요성은 앞으 로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다다. 생태주의 담론들은 더욱 풍성 해질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낙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많은 서사들 가운데, 모두의 공감을 얻 어 변화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 서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체화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과연 21세기 기후위기 시대 ‘생명평화’는 문명전환 서사의 열쇠말
이 될 수 있을까? 생명평화라는 단어는 20여 년 전 지리산 운동의 과 정에서 나왔다. 김지하 선생을 비롯한 생명운동의 선각자들과 지리 산 운동을 함께한 대중들이 좌우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가 동의 할 수 있는 삶의 가치와 지향을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 뒤 생 명평화 탁발순례와 생명평화결사, 인드라망 운동 등에서 생명평화라 는 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왔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종교계이다. 그 가운데 도법스님은 ‘생명이 안전하게, 그 삶이 평화롭 게’라는 단순한 말로 생명평화를 설명하곤 한다. 최근 월드컵 경기에 서 생명평화무늬를 몸에 새긴 축구선수가 화제가 되었듯이, 안상수 교수가 디자인한 생명평화 무늬도 세상에 조금 알려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생명평화는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말이다. 파급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문명전환의 서사에 생명평 화라는 말보다 적절한 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진영간 대결문화 가 강고한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이 정도를 대체할 공감의 언어를 찾 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나은 말이 나오면 모르겠지만, 당분 간은 생명평화를 보편적인 전환의 키워드로 삼고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더 나은 열쇠말이 찾아지면
만물은 깊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크고 작은 어울림을 통해 서로를 돌보는 삶으로 전환시켜내자. 그것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최선의 몸짓이고, 자연도 뭇생명도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생명가 치의 회복을 바탕으로 뭇생명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길을 만 들자.” 좀 더 단순하게 ▲욕망의 무한 추구에서 단순 소박한 삶으로 ▲적대와 증오에서 더불어 사는 평화의 삶으로 ▲분열과 배타에서 어울려 사는 공동체 삶으로.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다. 제가 속한 인드라망이 생명평화의 서사에 담아온 내용들을 보면,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삶, 마을공동체에 기반하여 농촌도 빛나고 도시도 빛나는 사회, 다툼대신 화쟁으로 상생공존을 모색하 는 사회, 지구적 연대와 협동도 빛나고 로컬도 빛나는 조화로운 사회 에 대한 지향 등이다. 산내를 비롯한 실현지들을 중심으로 그러한 생 각으로 살면 현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제안 하고 실험하고 가다듬는 과정에 있다. 생명평화 운동가들을 결집시킨 새로운 서사도 있다. “세상의 평화 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것이었다. 타자화와 편가름, 증오와 다툼, 승패를 다투는 방식이 운동의 대세이던 시절(지금도 그 런 경향이 많이 남아
전히 유효하다. 기후변화를 바라거든 내 삶의 현장에서 먼저 내 소비 생활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최근 기후정의를 넘어 기후평화로 전환 하자고 제안하는 생명운동 진영내의 움직임도 맥락을 같이 한다. 문 명의 이기를 누려온 각자의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고,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너나 할 것 없이 생명의 실상을 참되게 알고, 그 실상대로 살고자 하는 몸짓을 나로부터 시작 하여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갈 시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평화가 되려는 노력과 더불어 세상을 평화롭게 가꾸려는 노력을 긴밀하게 결합시켜야 할 때이다. 내면의 성찰과 세상의 변화는 어느 하나를 선 택/포기할 것이 아니라 함께 빛나야 할 문명전환의 요체이기 때문이 다. 내용도 좀 더 구체화되어야 한다. 왜 이런 전환이 필요한지, 구체 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누가 할 것인지를 다양하게 상상하고 나름의 답안을 채워넣어야 한다. 자기 현장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내 용과 방식으로 가정이나 직장, 커뮤니티와 같은 작은 공동체에서부 터 마을, 지역사회, 국가, 인류, 지구별까지 생명평화공동체로 재조직 하자는 적극적인 의지를 담아내야 한다. 전라북도, 새로운 질서의 필요성 전라북도를
책에서 늘 소외되어 왔으며, 같은 호남 지역인 광주전남에 비해서도 차별받고 있다는 소외감이 전라북도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였고, 두 번째는 20년이 넘게 ‘새만금 블랙홀’이 전라북도를 집어삼켜 왔다 는 것이다. 새만금이 마치 전북 발전의 유일한 해결책처럼 되어 다른 합리적인 논의와 공론의 장 자체가 마련되기 어려웠고, 그 속에서 정 작 새만금 개발계획은 뜯어볼수록 비현실적이고 허황되다는 평가였 다. 설혹 부분적으로 개발이 된다 한들 정치권+지역행정+토호세력의 이익 외에 지역의 균형발전과는 거리가 먼 국소적인 결과를 낳을 것 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선거 때면 여야 할 것 없이 ‘새만금’을 앞세운 선심성 지원계획을 남발하다, 정작 집권 후에는 생색내기에 그치는 일이 되풀이 되면서, 새만금은 시민사회에서조차 버리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계륵을 다루는 것처럼 어려운 사안이 되었다. 이제는 생명평 화 전라북도를 실현함에 있어 그동안 새만금을 둘러싼 개발-보존의 이항대립을 넘어 새만금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번에 출범한 김관영 전북지사의 5대 핵심사업을 살펴보았다. 상 세한 사업계획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5개 대기업 계열사 유치’, ‘미래차 산업벨트 구축’, ‘국제금융도시 육성’, ‘새만금 첨단농업 클러 스터 구축’, ‘새만금 국제투자진흥지구 지정’, ‘K-문화지원센터 건립’, ‘국제학교 유치’와 같은 장밋빛 구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국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모여 사는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어느 지역에서
도 실현하기 녹록치 않은 아이템들이자 산업의 논리, 경제의 논리로 봐도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사업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거기에 지어진 화려한 공장과 회사와 국제도시에 누가 있을 건데?” “서울 사 람들이 그거 누리려고 전북에 올 수 있어?”라고 물어보면 답이 궁색 해진다. 개발시대에 대한 성찰의 흔적도 없고, 최소한 시대변화를 담 고자 하는 균형감도 찾기 힘들다. 성장과 개발의 낡은 서사에 대한 맹 신이 빚어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전라북도는 생명평화의 그릇에 담기기 좋은 생태역사문화 자원들을 갖고 있다. 영성, 생명가치, 농도, 마을공동체, 로컬푸드, 순 례와 걷기, 역사와 문화자원이 풍부하다. 주민자치, 마을만들기, 에너 지 자립, 도시재생 등 미래의 대안이 될 만한 현장의 경험들도 타 지 역에 비해 적지 않다. 앞으로도 타 지역에서 전라북도에 관광오거나, 이주해 온다면 새만금에 들어설 국제금융도시나 산업단지 때문이 아 니라 전북이 가진 생태적 영성적 문화적 자원을 누리기 위해서일 가 능성이 더 높다.
개발과 보존의 이항대립을 넘어 지역발전과 주민행복을 생명평화의 관점으로 설계한다면 마을도, 지역도, 전북도 크게 달라질 수 있지 않 을까? 전라북도 전체를 ‘세계적인 생명평화 교육장’으로 가꾼다는 식 의 획기적인 상상이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다음 호에 이어집 니다.)
'생명평화 자치'에 던지는 물음
또 다른 세계는 어떻게 태동하는가?
전북생명평화포럼을 준비하며 ‘다시’ 생각해본 ‘생명평화’ 이야기 주요섭
오랫동안 나의 세계에 전라북도는 거의 없었다.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일 테다. 첫째, 나와 연결된 이야기가 적었다. 둘째, 쌓인 정(情) 을 느낄 수 없었다. 이제 나에게 전라북도는 또 하나의 세계다. 아직 은 멀고 낯설지만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다. 친근해지고 있다. 그런데, 전라북도가 힘들다. 인구는 줄고, 산업은 취약하고, 농촌과 농업은 갈 수록 쇠락한다. 물론 나의 감각과는 다르지만, 엄연하게 존재하는 하 나의 전라북도다. 나는 오늘 ‘또 다른’ 전라북도의 태동을 예감한다. 또 다른 전라북도의 태동에 관한 생각을 꺼내본다. ‘다시’, 또 다른 세계를 탄생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 우리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나의 언어로 말하면, 또 주요섭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오랫동안 정읍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해왔다. 최근 에는 체계이론과 정동이론을 공부하며 <(사)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를 중심으 로 ‘또 다른’ 생명사상·생명운동의 태동을 탐문하고 있다. 지은 책과 논문으로 «전 환 이야기», «신체는 어떻게 소통되는가?» 등이 있다.
또 다른 세계는 어떻게 태동하는가?
다른 세계를 태동시키고자 열망했다. 변혁을 위한 유력한 방법 중 하 나는 비판과 대안이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다시’라는 개념을 통해 또 하나의 방법을 탐색한다. _비판과 대안, 바로-보기와 새로-보기 ‘다시’의 관점에서 ‘비판’은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진리’의 관점에서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옳 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타자의 ‘그름’을 전제한 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대안’ 역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안이 ‘양자택일’로 인식될 경우, 숨겨진 독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의 관점에서, 대안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대안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로’ 보기나 ‘새로’ 보기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혹은 ‘새로’ 같은 말도 하나의 구별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르게 보기는 진리/거짓을 구별하는 것이고, 새로 보기 는 새로움/낡음을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별을 통해서만 세상 을 기술(記述)할 수 있다. 요컨대, 구별을 통해 하나의 세계가 창조 된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구별이라는 자각이 없이 자신의 바름 과 새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생명’ 역시 ‘관찰된 생명’이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을 구별한 개념이다.)
_복수(複數)의 세계들 앞에서 ‘대안은 대안들’이라고 했거니와, 최근 SF영화들은 복수 의 우주들, 즉 다중 우주론이 대세다. 우주는 ‘우주들’이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복수의 자연을 뜻하는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가 뜨고 있다. ‘하나의’ 자연, ‘다양한’ 문화가 아니라, 자 연 역시 복수라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공간 역시 시·공간들이 다(‘시계는 시간을 측정하지 않는다. 시간을 구성한다.’는 경구가 떠 오른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들이다. 우리는 제각각, 입장에 따라 다른 대한민국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기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전일성(holism) 개념 이나 ‘부분/전체’ 프레임으로 부족하다. ‘변증법적 통일’에 빗대어 말 하면, ‘분화된 통일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_‘다시’, 또 다른 세계 함께 만들기 한 마디로, 또 다른 구별을 통한 다시보기, 다시쓰기, ‘다시 함께 이 야기 만들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의 철폐’가 아니라, ‘구별의 자각’과 ‘자각적 구별’이 나의 발상이다. 이를테면, 좌파/우 파, 진보/보수, 노동/자본과는 구별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과 거의 구별들과 다른 또 다른 구별 작동을 통해 전개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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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를 산출하자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변혁은 하나의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기보다는 또 다
른 세계의 태동을 통해 전체 세계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된다. 이를테 면, ‘변화는 분화(分化, differentiation)’를 경유한다. 새로운 세계의 태동이 변혁의 시작이다. 생명평화 다시보기 앞에서 일종의 ‘다시’론(?)을 간략히 이야기했거니와 생명평화도 다 시 보고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생명평화 담론의 혁신, 혹은 ‘또 다른’ 생명평화, 혹은 생명평화(2.2, 2.3…, 3.0, 4.0...)일 수도 있다.
_‘생명평화 다시보기’의 환경들 생명평화 다시보기를 위해서 먼저 팬데믹-기후재난의 현실을 생각 해본다. 우리가 경험하는 미증유의 생태학적 문제들은 또 다른 세계 태동의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로봇,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 적 문제들도 물론 주목해야 할 조건들이다. 우리는 이제 ‘기계들과의 평화’를 현실의 문제로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새로운 담 론과 서사들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 인류세, 포스트휴먼, 새로운 실재 론들, 우주정치학 등이 그것들이다. 특별히 개인적으로는 몸의 사유가 중요하게 다가온다. ‘몸(신체)’의 재발견/재발명이다. 또 다른 생명평화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몸은 세계의 영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테면 몸은 우주(생명-마음-사
회-기계)의 기본 매체다. 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첫 번째 척도이
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 이전에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사는 존재, ‘느끼는(有情)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세계상에서 세계상은 세계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확실성의 종말’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절감하 며, 역설적으로 ‘의미구성’의 시대, 의미의 자기창조 시대를 예감한 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이후 ‘뉴노멀’을 묻는다. 세계의 목적과 방향 및 척도의 부재와 의미상실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준 거상실이다. 신도, 자연도, 인간도, 민족도, 민주주의도 더 이상 확고 한 준거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구성된 것임을, 인공적 인 것임을 안다. 하나의 이야기, 서사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거꾸로 의미구성의 시대에 진입했음을 깨닫는다. 주어진 의미대로 사는 것 이 아니라, 자각적으로 의미와 서사를 생성해야 한다. 길을 만들면서 길을 가야 한다. 모든 길은 새길이다. _생명 다시보기 생명은 물론 하나의 개념이다. 표상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생 명의 본질을 묻지 않는다. 어떤 생명인지를 묻는다. 어떻게 생명이 되 는지 묻는다. 생명 개념에는 수많은 관념들이 얽혀있다. 특히 코로나 19를 경험하면서, 바이러스를 통해 얻은 생명에 관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작은 깨달음이다. 바이러스는 생명이면서 생명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생/사가 미(未)결정된 반(半)생명적 생명체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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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숙주를 만나는 ‘조건’에서만 생명이다. 바이러스의 ‘생명 의 역설’을 통찰케 한다. 생명은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그 러나 그것이 생명의 경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계 가 있어야 생명이다. 단, 생/사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진다. 생명은 비(非)생명과 함께 산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열망하는 생명시대는 ‘상생의 시대’가 아니 라, ‘상생/상극’ 역설의 시대, ‘생/사’ 역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사상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의 생명사상은 살아있는 것 과 살아있지 않은 것의 구별에 머물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것은 어떻게 살아있을까?” 를 묻는다. 이제 우리는 생명/신명, 생명/영성을 구별한다. _평화 다시보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뉴스를 보며 얻은 다시 확인하는 깨달 음 하나. 평화는 전쟁과 함께 온다. 평화의 역설이다. 평화는 비(非)평 화와 함께 온다. 돌아보면, 일상에서의 평화도, 공동체에서의 평화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평화는 평화/비평화의 ‘조건화된 공동생산’이 다. 분쟁 속에 평화가 있다. 그리고 평화는 구성된다. 평화는 조건에 따라, 수많은 평화들(peaces)이 있다. 생명체의 대량생산 시대, 생명 체의 대량절멸 시대. 생명평화는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지만) 우리시 대에 특별하게 절박한 가치가 된다(우르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신냉 전의 현실을 보면서 동학의 불택선악(不擇善惡)을 떠올린다.).
평화(平和)라는 한자에서 배움을 얻는다. 천칭저울 평(平), 다발피 리 화(龢), 이를테면, 평화는 ‘비평형적 평형’이며, ‘차이 나는 어울림’ 이다. ‘역동적 어울림으로서의 생명평화’를 생각한다. 사회세계 내 예 술,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법, 돌봄체계 등의 차이 나는 어울림. 또 다른 관점에서는 마음세계와 사회세계와 생명세계와 기계세계의 네 기틀의 어울림. 또 다른 우리(전라북도)를 이야기하기 _복수의 전라북도 앞에서 복수의 세계들을 이야기했거니와, 이제 ‘n개’의 전라북도를 이야기해 보자. 전라북도는 ‘전라북도들’이다. 예컨대, 전북이라는 하 나의 세계 속 수많은 부분 세계들이 있다. 14개 시군들만이 아니다. 마을-읍·면·동-시·군으로 이어지는 공간적 세계들로만 구성되지 않 는다. 170만 개의 마음 세계들과 사회적 필요의 생산하고 공급하는 산업의 세계들이 있다. 문화예술의 세계도 있고, 집합적 결정을 강제 하는 정치의 세계도 있다. 고대서부터 이어온 풍류의 역사적 시간들 과 동학혁명의 역사적 시간들, 그리고 오늘 재창조되는 생명평화로 여는 미래의 전라북도도 있다. 전라북도가 추진해온 ‘새만금’특별자치도도 있으나, ‘생명평화’특 별자치도도 있다. 물론, 새만금특별자치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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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한다. 예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생명평화특별자치도 이야기 (서사)를 지어내고 실험할 경험과 지혜와 열정이 있다. _전라북도 다시보기 지금껏 전북은 농업의 전북이었다. 아니 탈농업을 꿈꾸는 전라북도 였다. 또 하나의 전라북도는 저개발 성장 소외의 전라북도였다. 오늘 전라북도는 인구감소로 소멸을 걱정하는 전라북도이다. 그러나 오늘 ‘다시’ 보는 전북은 새 문명의 틈새다. 성장 없는 번영 의 여백이다. 탈성장, 탈도시적 문명 전환의 틈새다. 파국적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재-공동체화’의 여백이다. (소멸/생성, 해체/재구성은 동시 발생한다. 그러므로 탈-전북과 재-전북은 동시 발생한다). 전라북도 안의 또 다른 움직임들을 실사구시로 관찰한다. 새만금만 이 아니라 농촌의 산업폐기물, 축사의 가축들과 이주노동자들, 요양 병원의 노인들, 독존(獨存)하는 청년들, (귀촌이 아니라) 향촌(向村) 하는 도시민들이 관찰된다. 새로운 문화예술적 실험으로 자신과 도 시를 풍요롭게 하거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청년-노년 예술인들이 주목된다. 또 다른 생명평화적 삶을 실험하는 선각자들이 느껴진다. _전라북도 다시쓰기: 또 다른 감응적 서사 함께 만들기
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이름을 다시 짓고, 다시 부른다. 자기의 재-호명이다. 우리에 관한 이야기들, 우리 전라북도의 세계관, 역사, 관계, 비전을 다시 쓴다. 자기의 재-기술, 자기 이야기 다시 쓰기다. ‘쓰는 자’,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세계를 창조한 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주로 관료, 학자, 언론, 예술가들에 의해 생산 되어 왔다. 그런데 찬찬히 보면, ‘쓰는 자’는 늘 다시 쓴다. 말 바꾸기, 정책 바꾸기, 슬로건 바꾸기, 세계관 바꾸기가 그것이다. 이제 전라북도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출발점은 느 끼기이다. 이야기는 상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상은 생각의 자 기생산일 가능성이 높다. 상상만으로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수 없 다. 오히려 상상이 깨질 때(破像), 새로움이 생성된다. 사회적 사실들, 생태적 사실들, 정동적 사실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치밀한 통계는 담대한 서사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이야기는 체험과 행위의 역동적 결 합으로 만들어진다. 뼈저린 고통과 눈물의 감정과 정동 없이는 만들 어지지 않는다. 생명의 관점에서, 사회적 이야기의 구성은 살아있는 생명세계에 기반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과 뭇 생명들과의 다정(多情)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신체와 신체, 생명과 생명,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정(情)이 쌓여야 사회와 역사가 형성된다. ‘새만금 전북특별자치도’도 ‘전북생명평화특별자치도’도 하나의 서 사다.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 허구다. 그러나 모든 허구는 살아있는 생명세계를 지향한다.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세계에서 비롯된다. 또 다른 전라북도 태동은 ‘또 다른 감응적 서사 함께 만들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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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만남
큰 거 한 방, 없어요!
이재수 전 춘천시장
나익수
이번 호 인드라망 ‘작은만남’을 위해 강원도 춘천을 찾았다. 춘천시 는 강원도 서쪽에 있으며 경기도 가평군, 양평군과 이웃하고 있는 곳 이다. 북한강 줄기가 길게 이어져 흐르며 소양호과 의암호가 있는 호 반의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줄곧 춘천에서 태어나 모든 학교를 춘 천에서 다닌 춘천 토박이, 이재수 전 춘천시장을 만났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삶의 방향을 고민하다 생협운동에 뛰어들 었다. 서울 한살림을 모델로 하여 농산물 직거래를 중심으로 하는 생 활협동조합이었다. 생명운동에 방점이 찍혔고, 갓 사회생활을 하면 서 어렵게 10년을 끌어오다가 문을 닫았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때 가 졌던 꿈과 소망은 쭉 이어졌다. 또한 봄내생협을 하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권유로 시의원에 도전하였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무소
나익수 갖가지 리페어와 수작업에 관심이 많은데 실행력이 달리고, 다른 삶 다른 관계를 고민하는데 추진력이 달려 번뇌만 합니다. 겉다르고 속다른 수박 같은 편집 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속으로 춘천시의원에 당선된 뒤 2014년까지 내리 3선 시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춘천시장에 당선되어 2022년 6월 30일까지 시장으로서 임기를 마쳤다.
서로서로 상통함이 있는 종교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간략하게 소개하다 보니 ‘인드라망’이 어떤 뜻인지 얘기를 나누다 종교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저는 개신교에 오래 속해 있었는데 교회를 다니거나 이러진 않았 고요. 예수의 삶과 예수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세계관을 아주 어 려서부터 접해 와서 불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시피 했어요. 한 30년 전에 읽은 책 가운데 《작 은 것이 아름답다》에 불교에 대 한 얘기가 좀 있었던 기억이 있 네요. ‘불교 경제학’ 이야기가 나온 듯한데, 그래도 관심을 갖 진 않았어요. 최근에 제가 도법 스님 만나서 그런지 관심이 커 졌지요. 이쪽(불교) 세계도 굉 장히 들여다볼수록 자꾸 매력 이 있어 보여요. 큰 거 한 방, 없어요!
기독교 영성가 중에 다석 류영모라는 분이 계세요. 어려서부터 제 가 그분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어 왔어요. 그분 얘기를 들어보면, 비 어 있음으로 귀결이 돼요. 근데 이게 불교에서도 얘기를 한다더라고 요. 몇 년 전인지 어느 절에서 스님과 세 시간을 얘기했는데, 불교를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고, 비어 있음을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서로 서로 상통함이 있는 종교구나 싶었죠. 그래서 불교에도 조금 관심을 가져가는 중이에요.” 실상사에는 언제 가신 건가요? “시장 임기 중이니까 2~3년 전에 갔죠. 코로나로 다들 힘들 때였는 데, 제가 자리를 비우지 않으니 일하는 공무원들도 힘들겠구나 싶어 휴가를 냈어요. 순천에서부터 절을 찾아다녔죠. 그때 실상사에서 귀 한 가르침을 받았어요. 생명평화무늬. 그건 내가 아무리 들어도 놀라 운 얘기 같아요. 내가 도시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모든 가르침 이 거기 다 있는 것 같아요.” 생명평화 운동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언제였나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으로 ‘크리스찬 아카데미’로 연결이 되어 생명운동 공부를 했어요. 이 때 인연을 맺은 분들이 나중에 많은 도움을 줬고, 실상사도 소개를 해 줬어요. 한 1년 공부를 하고는 서울 한살림을 모델로 하여 농산물 직 거래를 중심으로 하는 ‘봄내생활협동조합’을 1991년에 세우고 운영 을 시작했어요. 협동조합보다는 생명운동에 방점이 찍혔죠. 20대 후반의 나이에 어 렵게 어렵게 해오며 부딪힘도 많은 상태에서 10년 정도 끌어오다가 실패를 해요. 그때 함께했던 분들이 꽤 많았어요. 아주 우호적인 지인 들이 제 청춘이 아까우니까 이제 나의 진로를 뭐로 할까 그러다가 시 의원으로 자연스럽게 갔어요. 제가 무소속이었는데 그분들이 있으니 까 자신 있게 도전하던 차에 당선이 되었어요.”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시의원을 내리 세 차례나 하셨던데. 게다가 무소속으로요. 3선의 비 결이 뭐였을까요? “생각보다 단순해요. 관(행정)하고 늘 부딪히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정말 쉬운 상대가 되겠다고 했어요
관과 어떤 일로 부딪힐까요?
“사소한 거겠죠, 실은. 예를 들어, 과속방지턱 만드는 일로 분쟁이 나면 행정은 아무 일도 안 해요. 저는 적극 개입해서 문제의 배경과 원인을 확인하며 해결을 해요. 지역 사회에서는 관이 우리 일상과 직 접 관련된 민원을 많이 다뤄요. 그런 부분을 많이 챙기고 살폈죠. 제 가 민원왕이었어요, 민원왕. 그런데 막상 시장이 되니까 안 되더라고 요. 집행자잖아요. 또 우리 직원들을 괴롭히는 일이니까. 시의원 때는 제가 책임지지 않으니까 어거지를 써서라도 강행하고 그랬는데, 달 라진 거죠.”
12년 시의원 활동하면서 어떤 얻음이 있었을까요?
“도시를 알아가게 됐죠. 도시의 작동 원리가 보이고 무엇에 의해 누 구에 의해 움직여지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가 보였어요. 제 눈에 는 굉장히 우려스러웠죠. 또 특정한 집단이나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 로 움직이는 모습에 저항감과 동시에 책임감이 커졌죠. 1조 안팎의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였는데, 거기에 생명이 있는 쓰임을 만들 고 싶었어요.”
시의원 활동이 시장으로 가는 디딤돌이 된 셈이네요. 시장이 되면 서 어떤 정책이나 사업을 추진하였나요?
“시장이 요구받는 게 ‘큰 거 한 방’이에요. 난 뭔가 큰 거 한 방을 보 여줘야 한다는 강박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거 없
습니다.’ 하고 언론에다가도 얘기했죠. 저는 ‘시민이 주인인 도시’와 ‘지속 가능한 도시’를 2대 핵심 목표로 하고 ‘시민 주도성 확립’과 ‘10 대 시정 철학’을 여러 정책에 녹여내려고 했어요. 함께 사는 이웃이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관계망을 회복하는 ‘선한 이웃 프로젝트’가 있어요. 국가가 하는 복지는 표준화, 평균화이기에 촘촘하거나 구체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잖아요. 그래서 시민이 시민을 돌보게 하는 복지 서비스를 개발한 거죠. 그리고 ‘1억 그루 나무 심 기’가 있어요. 그동안 개발 욕망 그룹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에 의해 망가진 자연을 회복하기 위해 틈만 나면 나무 심기를 시도했어 요. 또 자동차 중심의 도로 정책을 바꾸는 일이었어요. 2차선, 4차선, 6차선 이러는데 가만 보면 자동차 중심의 사고방식인 거예요. 게다가 공장이 없다시피 한 춘천에서 자동차 배기가스가 도시 오염의 30% 큰 거 한 방, 없어요!
를 차지해요. 그래서 도로도 10미터 도로, 20미터 도로 이런 식으로 부르고 20미터 도로면, 10미터는 자전거/사람/숲/문화를 위한 자리 로 내놓자 이거죠. 2.3km 정도 되는 도로를 시범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시장이 바뀌면서 다시 바뀌는 듯하더군요. 그 밖에 지역 에서 나는 걸 지역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하고 학교급식도 지역에서 생 산된 것을 먹을 수 있게 체계를 바꾸는 정책들이 있었죠.” 운명을 맡기지 말자 시의원부터 해서 시장까지 20년 정도 쭉 정치 활동을 하셨는데, 정 치란 무엇이라고
이 주인 되게 하는 거고 시민이 중심이 되게 하는 일들을 만들어가는 게 우리의 몫이다. 그런 생각은 했어요. 집중된 권한을 계속 부수고 벗게 하는 일, 이게 지난 이십 년 동안 해온 일이기도 해요. 권한이 모아지는 것이 위험한 거거든요. 절대로 시장한테 모든 걸 맡겨서는 안 돼요.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시장한 테 뭘 맡기는 거예요. 중요한 걸, 운명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 은 짓이죠. 우리의 운명이나 지역사회의 미래가 시장 한 사람이 책임 질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늘 얘기하는 게, ‘시장이 결단하십시 오.’ 이러는데. 결단하면 지역사회가 결딴난다 그랬어요. 정말 결딴나 는 거예요. 시민들이 결정을 해야죠. 자기 문제를 자기가 결정해야지 왜 시장한테 맡깁니까. 저는 그게 중요한 정치의
“아까 이웃에 대한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얘기했죠. 공동체, 이웃. 이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농촌 지역에서 작은 공 동체를 이제 생각하고 있는데. 뭐 마을 공동체가 됐든 뭐가 됐든 지역 사회가 서로를 돌보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행정 영역에서만이 아니 라 시민 영역에서 해야 될 일이 있다고 봐요. 지금 청년들이 이웃과 함께하는 법인을 만드는데, 저도 손을 보태면서 도움을 주고 있죠.” 30대 후반에 시작하여 20여 년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그전에는 뭘 해도 설고 그랬겠죠.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여물지가 않은 부분이 굉장히 있었겠죠. 아직도 제가 모자람이 많지 만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 데 확신도 있고 철학적 받침도 좀 뚜렷하 다는 차이가 있겠죠. 또 인류가 그렇게 가야 할 길이기도 한데, 이제 지속 가능한 춘천의 방향을 그렇게 봤거든요. 하나가 시민이 주인 되게 하는 일이고 둘은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런 주인됨에 대한 얘 기를 누가 하자 하면, 100가지도 설명할 수 있죠. 또 지속 가능함이 왜 우리 도시 안에서 필요한지를 확고하고 분명한 이유를 갖고 설명 할 수가 있는 거가 되겠죠. 전에는 구호가 때로는 선언적으로 스스로 를 자꾸 강제했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때보다 여문 거죠 조금.” 큰 거 한 방, 굵직한 성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재수 전 시장
의 철학이나 정책이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또 그런 식으로 비판
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춘천시장으로 있으면서 추
진한 ‘선한 이웃 프로젝트’나 ‘시민 주도성 확립’ 정책 들이 그의 임기 말 또는 임기 이후 각종 경진대회나 우수 사례 공모전에서 인정을 받 았다. 관행이나 습관을 전환하기가 그만큼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일 이 아니고 쉽지 않은 길이 아닐까 싶다. 긴 시간 나눈 이야기에서 춘천에 대한 그의 애정을 많이 엿볼 수 있 었다. 어디에서 살든 그곳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알아가며 애정 을 가지는 삶이 깔려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춘천은 영적 감수성이 있는 도시이고 오래된 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소도가 있던 곳인 만큼 예술 활동의 원 형이 흐르는 곳이기도 하죠. 또 이 도시에 오면 저절로 시인이 돼요. 산도 좋고 물도 좋으니 시인의 감수성이 살아나지 않겠어요. 이중환 의 <택리지>에 평양과 춘천은 물도 좋고 산도 좋다는 내용이 있을 정 도로 산수가 좋은 곳이죠, 춘천이.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107 큰 거 한 방, 없어요!
기후위기, 마을공동체의 역할
실상사 선지식 법회 기후재난 속 마을공동체의 적응 방향과 창조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한생명
실상사 스님들의 승가결사체 ‘다르마로드’에서 준비한 2022년 11월 선지식법회를 인드라망 회원들과 나눕니다. ‘기후재난 속에서 마을 공동체의 적응 방향과 창조적인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 고 네 분의 강사님을 모셔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공부에서는 기후위기의 원인과 전 세계가 이상기후 때문에 비 상인 상황을 그래프와 영상 자료로 현실감 있게 느끼도록 설명해주 셨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공부에서는 강사님들이 실상사 사부대중 공동체에서 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 내 용을 아래에서 간략하게 공유합니다. 11월 6일 첫 번째 강의 : 기후위기와 심층 적응
자세가 필요한지, 이에 대한 충분한 대화와 논의가 필요하다. 1.5도를 지키기 위한 과감한 행동과 정책을 펼치도록 요구를 하면서도, 실패 할 가능성과 현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이야기들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기후대응의 실패라는 진실을 말하면서, 한편으 로는 회의에 기반한 행동주의를 하는 것을 말한다. 11월 13일 두 번째 강의 : 기후변화와 탈성장 전환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탈성장이라는, 산업구조와 생활방식을 바꾸는 대안이 필요하다. 생각의 변화, 행동과 인식의 변화를 위해서 는 새로운 문제를 실험적으로 해쳐나갈 개인이 있어야 한다. 개인들이 결사체를 만들고, 만들어진 결사체를 통해 다시 습관이 변화하도록 해 야 한다. 돌봄 결사체를 만들 수 있는 여건들은 많은 공동체들이 이미 가지고 있으니, 강력한 실행 의지를 가지고 전진할 필요가 있다. 그렇 게 결사체들이 연대하여 더 큰 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20일 세 번째 강의 : 기후위기의 대응으로서 마을공동체 – 실상 사 사례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실상사에서 이미 잘하고 있는 일상적인 습 관의 변화를 꾀하는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나의 모델로 보여주면서 이것을 확산시키는 일이 기후위기의 대응이 아닐까라고 첫 출발로 생각해보았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 역시 사람들의 기존 삶을 크게 방해할 정도 의 대응책을 내놓으면 아무도 실천하지 않을 것이다. 적정 규모, 적정 분배, 효율적인 배분. 이 세 가지 원칙을 위해서는 공동체적으로 사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세 원칙에 동의하고 현실화될 수 있도록 디 테일하게 논의를 해야 한다. 논의 결과를 수용할 수 있어야 현실적으 로 가동이 가능한데, 결국에는 공동체성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 공동 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강력한 연대가 아니라 오히려 느슨한 연대 가 지속가능한 공동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실상사 공동체는 공통의 철학을 통해 결속력 및 공동체성을 높이고 있다. 사회적 컨텍스트의 공감도가 다른 상황에서 결속형 사회 작용 이 어느 정도 끈끈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피크오일 사태와 기후변화라는 두 가지 위기를 동시에 극복하고자 공동체를 중심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곳이 전환마을네트워크로 잘 알려진 토트네스라는 곳이다. 더 지역 화 되고
할 때 그 공동체가 더 결집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어 떤 플랜이 세워지더라. 제가 생각한 아까 초기의 고민이라고 했던 그 림은 거꾸로 보자면 오히려 기후위기 대응 체계라는 것. 그러니까 계 속 공동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세상과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 방과 더 연계될 수 있을까 이런 걸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 방식의 관 점을 완전히 바꿔서, 기후위기가 기후재난까지 이어진 상황에서 그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식의 관점부터 시작해 서 하나씩 하나씩 방법들을 찾아나가다 보면 거꾸로 실상사의 공동 체성이 강화되겠다라는 식으로 발상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는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인식의 전환을 위해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크다고 본다. 예술적 인사이트 가 마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데에 있어서 청년 세대와 예술 가 집단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을 제안하 고 싶다. 11월 27일 네 번째 강의 : 산림자원을 활용한 탄소 중립선언 가능성실상사 사례 중심
원으로 활용하면서 성장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숲을 건 강하게 가꾸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숲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목재로 이용할 수 있는 나무들이 별로 많지 않다. 우리나라 화력발전소에서 재생가능에너지 의무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바이오매스를 섞어서 연소하는데, 이 때 사용하는 바 이오매스는 외국의 나무를 가져온 것이다. 외국의 탄소를 사다가 우 리나라에서 배출하는 꼴이다. 탄소중립은 흡수량과 배출량이 같아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세 계적으로 공통의 정의이다. 탄소중립은 생활 속에서 나무를 심어 탄 소를 흡수하여 고정시키고, 고정시킨 탄소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국 가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산업들로 시장을 채워가자는 큰 취지에 서 탄소중립을 선언하였다. 현재 잘 이행되고 있지는 않다. 탄소중립 을 위해서는 지역중심의 에너지 정책이 필요하다. 산림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림자원을 이용한 산업의 연관성이나 여러 경제 구 조를 바꾸려면 규모가 있어야 한다.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산림 자원 을 순환시키고 수익을 낼 수 있는 크기 정도가 되어야 한다. 어느 한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시범사업과 선도 주자가 있어 야 된다고 본다. 실상사와 실상사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가장 유리한 조 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림을 경영한다는 것은 탄소를 흡수하고,
든 것이 완비되어 있지는 않고 큰 틀에서의 분위기를 소개하고 가설 을 세운 것이다. 네 번의 강의를 통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더 체감하고 우리가 행 동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또 이 기후위기라는 문명의 위기를 가속화 한 인식들을 전환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 도 시급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돌아보아도 감각 적 쾌락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개인의 의지로 쉽게 제어되거나 사라 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욕망을 생태적 한계선과 인류가 안전하고 공정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기초 사이에서 제어할 수 있는 제도와 경제 구조를 만들기 위해 뜻과 철학, 바른 앎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앞서 그 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불타는 집 속 같은 위기를 생태문명을 여는 기회로 만들려면 무엇 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 니다. 실상사 선지식 법회
지리산 정치학교
사회적 참사와 정치 정치를 비추는 사회적 참사
이무열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이어서 너무나 지독한 현실이 청년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오히려 더 깊게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에서 정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디어는 늘 그렇게 너나없이 가슴이 내려앉는 참사까지도 차이 없 는 차이를 만들어 묘하게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이분법적으로 정치 를 경계 짓고 대립시킵니다. 이를 따라가며 여야 정치인들의 오가는 거친 말과 행동이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이 되어 반성과 대안에 앞서 각자의 방식에 따라 참사의 정치를 연출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정쟁 이무열 전환스튜디오 와월당 대표이자 문명전환하는 지리산정치학교 운영위원 장. 달에 누워 구름을 보는 삶을 꿈꾼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겨 나며, 생명이 지닌 힘으로 세상이 호혜적인 관계로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일하고 있 다. 사단법인 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생태적지혜연구소와 함께 개인의 욕망 , 트 렌드, 사회적 경제, 생태철학, 생명운동 등을 연구하며 브랜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요사이는 근대산업문명이 일으킨 기후재난 시대에 ‘지역이 답이다’라는 생각으로 지역회복을 위한 연구와 실천을 하고 있다.
(政爭)의 장이 시작됩니다. 선거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차악에 투표하 듯 어느 한 진영을 선택해 정쟁(政爭)의 틀에 갇히면 자기도 모르게 확증편향이 생겨 현실 정치 사이와 너머로 깊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 다. 여기서 빠져나와야 사회적 참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 는 정치적 문해(文解)가 가능합니다.
일부러 근사한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공동체 안에서 정치가 하는 일은 분배, 균형, 조율, 지속, 안녕, 비전 등을 이루리라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직한 정치가 있었다면 참사는 없었을 텐데.” 하는 돌 이킬 수 없는 가정을 하면 더욱더 사회적 참사는 참사가 일어난 사회 를 잘못 작동하고 있는 정치가 만든 결과라는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작동되는 정치를 그대로 두고서는 사회적 참사 는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둘러 정치권력에 게 책임과 대안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과 대안을 내놓을 수 없 다면 다른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간의 정치행태를 보면 물음보다는 지금여기 우리의 생명을 위해 시급하게 다른 정치를 준비하는 게 훨 씬 낫다는 생각입니다. 폭 3.2m, 길이 40m의 경사진 골목에서 어떻게
켜주는 권력의 안녕이 먼저였습니다. 지역의 웬만한 시와 군 인구보 다 많은 13만 명의 인파가 이태원에 몰릴 것이 예상되는 위험 상황과 현장에서 계속되는 신고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뒤늦게 공식적인 행 사가 아니라는 변명은 참 구차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공공조직 이 시민의 안녕이라는 말에 공식과 비공식을 나눌 수 있는지. 정치의 자기부정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정치입니다.
2019년 3월 15일 뉴질랜드 남섬의 최대도시 크라이스트처치 중심 부 이슬람사원에서 총격사건이 일어나 50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 어졌습니다. 38살의 여성 총리 저신다 아던Jacinda Arden은 참사가 발생하자마자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쓰개 히잡을 두른 채 검 정색 옷차림으로 무슬림 공동체를 찾았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우리 다.”라는 말로 공동체를 위로하고 무슬림 이민과 이번 공격이 연관성 있다는 한 의원의 포퓰리즘적 평가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소하며 온 나라가 슬픔에 빠졌다고 위로했습니다. 반면에 10.29할로윈참사 가 있고 나서 대통령을 비롯해 국정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무위원들 과 경찰청장 누구에게서도 희생자 가족을 위로하고 참사 진상규명과
로 올 더 큰 위기를 방지하는 조직 위기관리의 상식이 된 먼저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방식 이 정치권에서는 유독 통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승자독식의 정치권 력의 세계에서 잘못을 반성하고 책임지는 모습이 나약하고 상대방에 게 지는 것이라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정치입니다. 정신과 행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사회적 참사로 인한 트라우 마(Trauma)는 가족에게는 끝낼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사회에도 깊은 아픔으로 새겨집니다. 10년이 다돼가는 4.16세월호참사도 아직 가 족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로 남아있습니 다. 사회적 참사의 상처가 충분하리만큼 계속 치유되지 않으면 오래 도록 사회는 아픔과 두려움, 분노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10.29할로윈참사 이후 정부는 사망자와 희생자, 사고와 참사, 국가애 도기간 지침과 리본의 문구 등으로 치유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부추 기고 가족과 사회의 상처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갈등을 일으키고 있 습니다. 정권이 사회적 갈등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 라면 158명의 희생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권 력독점(權力獨占)’의 정치입니다.
고 존재를 회복시켜주는 공생의 정치였습니다. 또 김지하 시인은 동 양의 정치를 ‘하늘의 뜻을 받아 그 뜻이 가진 법칙에 따라 인위적으로 세상을 조절해 가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우주적인 생명운동의 법 칙에 따라 그것을 인위적으로, 적극적·능동적으로 실천하는 포괄적 정치’로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근본적인 정치는 다른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고 균형을 맞춰주는 일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억울한 죽임이 없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근본적인 정치를 거스르며 사회적 참사로 드러난 죽임 앞에 무기력한 거짓 정치가 정치뿐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있 습니다. 2014년 세월호참사와 2022년 할로윈참사로 그 속이 비춰진 정치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승자독식(勝者獨食)’, ‘권력독점(權力 獨占)’이 앞서는 정치입니다. 경쟁에서 살아나는 게 모두를 죽임으로 모는 지금의 기후재난과 사회재난을 만든 신자유시장 질서를 그대로 따르는 위험한 정치입니다. 우리는 10여 년 전 세월호라는 사회적 참사의 아픔을 겪고도 위험 한 정치인들에게 여전히 정치를 위임하며 정치를 바꾸지
러서 위험한 정치를 생명활동의 정치로 전화해야 합니다. 정치전환 을 상상하는 책 《시민권력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Civilizing the State)》에서 협동조합운동 연구실천가 존 레스타키스John Resttakis 는 한 사회가 구성하는 정치 형태는 어떻게 권력이 축적되고, 배치되 며, 무엇보다 누가 권력을 누리는지의 함수로 결정되고 독점된 정치 권력은 자기정화(自己淨化)가 어려워 최대한 정치권력을 분산해야 한다고 합니다. 시민 사이에서 생성된 정치권력(정당)과 이렇게 창조 된 정치권력과 적극적인 협치를 벌이는 시민권력(평의회, 시민의회 등)의 양가적(兩價的) 정치융합이 절실합니다.
이것을 수직, 집중, 하향, 전체정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정치와는
다르게 수평, 분산, 상향,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명전환을 위한 정치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이야기를 빌려 쓰면, ‘지금이 바로 죽임의 정치에 합의와 동의를 멈추고 새로운 정치 창조를 시작 할 때입니다.’
정치를 비추는 사회적 참사
사회적 참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일시 │ 2022년 12월 5일 월요일, 오후 6시~7시 30분
장소 │ 한생명 사무국
참석자 │ 강양화(20대 아이의 부모), 윤형수(20대 청년), 이창림(초등아이의 부 모), 최세현(인드라망사무처장)
*평범한 대담은 사회적 이슈를 젊은이들, 평범한 사람들, 약자들이 느끼는 바를 각각의 생생한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이태원 참사를 어떻게 알았나요?
윤형수(이하 윤) 경주에서 친구들과 MT로 함께 있다가, 카카오톡 으로 전해들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소식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꿈 같은 느낌으로 오래 있었다. 주변 친구들 생각이 자꾸 났다. 친구 중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라 판단돼서,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아직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뉴스로 보았을 때 비상식적이 다 이상하다라고 느낀 점은, 세월호 때와 비슷하다.
최세현(이하 최) 사고가 있던 날 밤, SNS를 보고 알았다. 동영상인 데 흐릿한 화면으로 사람들 여럿이 구조 활동하는 화면이었다. 할로 윈이라 누가 장난치는 건가 싶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려나 싶은 조바심이 생긴다. 얼마 전 개인적인 일로 서울에 가서도 사람 많
평범한 대담 120
은 백화점에는 안 가게 되더라.
윤형수 할로윈 느낌과 겹쳐서 기괴한 느낌, 장난치는 느낌이었다.
이창림(이하 이) 당일에 참사 소식은 못 듣고 다음날에나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현실적이다, 전쟁이 나야 이정도 죽는 거지 싶었다. 그럼 세월호는 뭐였지? 그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건가 싶었다. 상식선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만 행동해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세 월호 때는 학생들과 강의로 만나던 때라 더욱 강한 충격이 있었는데, 이번 일은 영상을 못 보겠어서 일부러 안 봤다. 세월호 때와는 다르 게, 지리적 거리감이 생겼고 내 나이가 좀 더 들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때보다는 감정적으로 약간 거리감이 들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이다. 울컥한다. 강양화(이하 강) 아침에, 새벽 4시경에 군복무 중인 아들의 한 줄 짜리 짧은 문자를 확인하면서, 부대에 비상상황이라는 말에, 서울에 서 하룻밤 새 146명(새벽 4시 당시 파악된 숫자)이 한꺼번에 죽을 이 유는 전쟁이거나 미사일이 떨어졌을 거라고 추측했다. 허겁지겁
참사 이후 우리 사회의 대응은 적절했나요?
이 전쟁이 아닌 이상 개인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국가가 만들어 주지 못한 상황이다. 거기 왜 갔냐는 질문들을 보면서, 어디로 화살이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황 같다.
유 책임 있는 사람들의 사과나 반성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었고, SNS에 올린 당시의 직접적인 화면들이, 유가족들에게 끼치는 2차 피 해 또한 엄청나게 컸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말과 댓글 퍼 나르는 행위들에서, 2차 피해를 방지하려는 의식이 얼 마나 없는지를 느꼈다.
이 진영을 나누고 같은 말이 반복되고 하는 것, 사건이 일어났을 때 초기 골든타임에 방향을 제시하는 메시지가 있었어야 하는데, 사 건에 대한 제대로 된 초기 정리가 없었다.
최 애도기간 등이 진행될 때, 애도가 행정절차 같이 유도되는 것 같아 좋지 않았다. 뒤의 과정들을 보면 아쉬움밖에 남지 않는다.
이 국가가 유가족들이 모이는 것과 집단적으로 이야기를 내는 것 을 두려워하는 거 같다. 피해자, 유가족들 한명 한명의 서사를 알게 되면, 슬픔과 분노가 더 커질 거다.
최 집에 TV를 두지 않고 사고현장과 거리상 떨어져 살고 있어서인
지 충격감이 좀 덜한 느낌이다. 서울 살 때는 생활 속에서 이런 현상 은 일상이었다. 지하철에 스크린도어가 없던 시절이 생각난다. 뭐가 모자라서 생긴 일이 아니고, 시스템이 없어서 생긴 일도 아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우리들의 삶은 어떤 변화나 배움이 있었을까 이 이후로, 사람들이 버스나 지하철에 꽉꽉 안 차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잘 안 간다는 뉴스를 봤다. 이전에는 안전에 대한 위험에 둔감했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시민들이 해야 할 부분이 분명 히 있다. 최 산내에 살면서 생활의 안전은 어떤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가? 인도가 부족하고, 차가 많이 다닌다. 운전자도 조심해야 하지만, 운전 하지 않고 걸어 다니는 어르신들과 아이들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 각된다. 우리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인도가 없다. 우리의 삶 곳곳에서 안전을 생각한다. 이 참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고 질문을 하니, 참사는 참사대 로 존재하고, 나와 따로 분리된 느낌이다. 진정한 애도는 무엇일까? 최 우리는 세월호 때 이런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생명과 안전, 우리 가 평상시에 많이 놓치고 산다. 일상적으로 언론이나 정부 메시지가 부동산이나 경제에 혈안 되지 말고, 일상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일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중요한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 사회적 참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회, 어른이 있는 사회, 그런 사람을 잘 뽑는 사회면 좋겠다. 이 다수의 대중이 일상에서 안전하게 지내도록 제도를 그렇게 만 들고(지하철에 사람이 많으면 개찰구에서부터 아예 입장이 안 되게, 버스에서 입석을 없애고 등등), 그런 걸 만들어간다면 일상에서 대중 들이 좀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청소년, 사회적약자 등 안전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사회를 재구성해 바라보고, 그 기준에 서 할 수 있는 것만큼 해보는 게 필요하다. 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추모, 유가족의 아픔을 함께 하려면 생 명평화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제일 약한 사람 기 준으로 바라보고 사회를 세팅하면 모두가 안전해질 것이다. 일반적
인 건강한 남성 기준의 관점에서 소비하고 세팅하면, 그보다 약한 다 른 사람들에게는 힘들어진다. 작은학교에서 진행하는 도보여행은 걷
기 힘든 아이들도 함께할 수 있는 기준으로 짜야 한다. 감성적으로 가 장 민감한 학생들 기준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 다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회가 참사 이후에 그 다음 단계로 진입했다고, 한 단계 더 나아갔다고 느낄 수가 없다. 유 축제의 의미가 뭔지 성찰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공동체가 다 같이 즐기고 함께 기쁜 일인지. 안전하고 평화롭게 다 같이 노는 축 제의 성격보다는 상업적이고 쾌락 유흥적인 요소도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설령 그렇더라도 안전해야 한다고 본다. 자본주의 그런 삶의 방 식이어도 안전해야 된다고 본다.
강 이번 참사 이후의 책임 문제 처리가 이전의 참사와 비교해서, 뉴스에서 말이 많이 나오고 있더라.
유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나눠져야 하는구나 느낀다. 이태원 은 누구나 가 본 곳이라 이런 참사는 나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 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길에서 우루루 쏠린 경험이 있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나는 운이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 남자라 다행이었고 내리막 길이 아니어서 다행이었구나 싶었다. 강 이태원 참사에 대한 뉴스를 볼 때 아직까지도 꿈 같다. 누구나 에게 일어날 수 있었고, 결국 내 모습일 수도 있었기에 이런 큰 사고 에 소름이 끼치기도 하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으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이 많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아이와 이런 주제 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또한 앞으로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려면, 지 금의 나는 또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이 개인, 사회는 어떤 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야겠다. 사회적 참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인드라망 추천도서 《 도법스님의 신심명 강의 》 도법스님 지음 │불광출판사 도법스님이 '신심명'을 읽고 중도연기의 시각으로 누 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신심명>을 새롭 게 옮긴 책이다. 《 인도 수업 》 신상환 │휴(休) 불교 성지 여행기이자 마음공부 에세이이다. 저자는 불법의 길을 따라 인도·네팔 무스탕·티벳·중앙아시아 를 오가며 찾은 한 생의 깨달음을 직접 번역한 불교
《 공감의 반경 》
장대익 │바다출판사
혐오와 분열의 시대, 공감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에겐 다
른 공감이 필요하다. 감정을 넘어서는, 경계 없이 확장되
어 우리와 다른 존재에게까지 가닿는 진정한 공감이!
《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브래디 미카코 │다다서재
영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일본인 저자가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이 겪는 인종도 국적도 계층도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복잡 미묘한 사건을 관찰하며 다양
성과 차별이라는 민감한 이슈를 풀어낸다.
《 스미기에 좋지 》
김복희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곰출판
집착에 가까울 만큼 자연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어느 과학자의 삶을 흥미롭게 좇아가는 이
책은 어느 순간 독자들을 혼동의 한복판으로 데
려가서 우리가 믿고 있던 삶의 질서에 관해 한 가
지 의문을 제기한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디플롯
혐오가 일상인 상황에서 버석버석 말라가는 인
간을 향한 애정에 이 책은 긴급 처방이 될 수 있
지 않을까. 두 명의 진화 인류학자가 밝힌 인류
진화의 비밀! 우리 피에는 다정함이 있다. 《 녹색계급의 출현 》
느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이음 멀지 않은 미래의 절망을 구체적으로
《 회복력 시대 》 제러미 리프킨 │민음사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개발하 고 확장하고 뻗어 나가는 것이 곧 옮음이라 믿던 진보의 시대는 파국을 불러왔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의 서사를 제시한다. 적응과 어우러짐, 생명 애 의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회복력의 시대다. 《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사계절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다. 그러나 어린이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어린이가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이 세 계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깨닫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어린 아이와 만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 ◌ 인드라망 추천도서
부처님의 삶에서 내가 배운 것들
석승억 나는 불교에 대한 지식과 견해가 미천하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15년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대안적 삶으로써의 공동체를 추 구하며 현재 ‘실상사 사부대중 공동체’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변 화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세상은 더 나은 나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은 나는 수행을 통한 삶의 변화와 깊 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불교 공동체 안에서 내가 변화의 역할 모형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부처님이 아닐까? 그런 발심 때문인지 ‘부처님의 생애’라는 책과 인연이 닿았다. 석승억 20대 중반에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중 ‘신이 있다면 나를 태어 나게 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여 나를 찾는 길에 올랐다. 30대 초 반에 사업 실패와 채무의 경험을 토대로 IMF의 피해자인 과중채무자의 자조모임 을 거쳐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를 만들었다. 채무자 양산 방지, 재기 지원, 채권·채 무자의 형평을 위해 10여 년간 활동했다. 개인회생·개인파산 법의 입법 활동을 끝 으로 채무자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적 삶으로써 공동체를 선택하고, 일상의 삶을 통해 15년째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부처님 의 삶을 바르게 본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처님의 삶을 먼저 이해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인연 닿아 공부하게 된 불교 서적, 《부처님의 생애》라는 책을 여러분께 추천하며 부처님의 삶 속에서 내가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나 깊은 인상으로 남았던 장면을 함께 나 누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나의 경험이 가치 없이 휘발되지 않고, 우리 모두의 지혜인 집단지성의 보따리 속에 담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우선, 본문이 시작되면서 등장하는 바라문 청년 수메다의 이야기를 통해 초발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수메다는 부처님 으로 탄생되기 이전 생으로써, 늙음과 질병과 죽음은 물론 두렵고 무 서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의 학문을 배웠다. 어느 날, 어머 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귀향하던 길에 디빵까라 부처님을 만나게 된 다. 이때 수메다는 “저도 당신처럼 부처님이 되게 하소서. 혼자만의 평안은 바라지 않습니다. 눈길과 발길이 닿는 곳마다 고통과 공포가 사라져 모든 이들이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세계에서 중생을 건질 수 있는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하소서.” 하고 초발심을 일으킨다. 처음 마음을 끝까지 이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는 경험했을 것이다. 술과 담배는 10년, 고기와 밀가루, 설탕 그리고 부처님의 삶에서 내가 배운 것들
정제 탄수화물인 백미와 과자류, 화학조미료 같은 것들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완전히 끊고 현미 채식만을 고집했던 나 역시, 처음 마음을 끝까지 이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부처님은 그 어려운 초발심을 한 생의 끝이 아니라 백겁의 길고 긴 시간 동안 유 지하고 추구함으로써 결국 해탈·열반의 성도에 이르신 분이다. 나는 공동체가 미래의 대안이라는 처음의 믿음과 실천을 얼마나 잘 유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 나의 신념과 믿음을 위해 어떤 각오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만든 본문이 있다. 수메다는 디빵까라 부처님과 만남 이후 “나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 라. 허공에 던져진 흙덩이가 땅으로 떨어지듯 나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리라. 짙은 어둠이 끝나면 태양이 솟아오르듯 나는 반드시 부처님 이 되리라.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자가 포효하듯 나는 반드시 부처님 이 되리라. 짊어진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듯 나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 리라.” 하고 노래하였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확 고부동한 목표 의식은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인 이라 단언한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가 반드시 포효하는지는 모르겠 지만 허공에 던져진 흙덩이는 반드시
들인다. 자신의 목표와 그 목표의 성취를 받아들이고 당당히 나아가 는 실천은 초발심과 함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메다의 초발심은 백겁의 시간 동안 이어져 결국 목표했던 부처님이 되는 동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표를 세우고 포기하기를 반복한다. 누구는 ‘작심삼일’이 라고 비아냥거릴 수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작심삼일이 열 번이면 한 달이 가고 백 번이면 일 년이 간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마음을 고쳐먹다 보면 끝내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관건은 처음 먹은 마 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리라. 초발심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 으려면 초발심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모두 내려놓는 현명함이 필 요하다고 본다. 내려놓음은 오직 목표에 집중하여 한 길을 유지하고 미련한 소처럼 꾸준히 밀고 나아가는 성실한 실천의 덕목이기 때문 이다. 성서에는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 라.’는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지켜온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 가 진지하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 그러자 그는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갔다. 부처님의 삶에서 내가 배운 것들
성서의 부자 청년 이야기는 ‘부자가 영생을 얻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사 용되곤 한다. 하지만 수메다는 초발심을 이루기 위해 성서의 부자 청 년이 실천하지 못하고 돌아간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해내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 들에게 나누어주고 영생을 향해 나아갈 때 영생을 얻는다면 수메다 는 당연히 영생을 얻어야만 한다. 『세상은 병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병을 치유할 의사는 없을까? 병이 있다면 그 병을 치유할 방법도 있으리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안온한 세계는 없을까? 길이 있으리라. 아니, 있어야만 한다. 나는 그 길을 찾으리라.’ 수메다는 자기 몫의 재산을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길을 떠 났다. 세상의 학문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해 눈 덮인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세상 밖의 학문을 배웠다.』 본문은, 수메다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주문을 실천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수메다는 안
욕망을 내려놓은 수메다의 이야기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내려놓음 이야말로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함으로써 목표한 바를 이
룰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처님을 ‘해탈·열반이라는 깨달음의 복을 스스로 받아 누리
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스스로’란 의미는 내려놓음이라는 자
기 결정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세워놓은 목표 이외
의 모든 것을 스스로 내려놓고 앞을 향해 나아간 자기 승리의 결과라 는 말이다. 따라서 내려놓음은 포기와 완전히 다른 피나는 노력과 희 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철저한 의식 속에서 자기 주도적 선택과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2014년 제주도에 있던 ‘에미서리 공동체’에서의 삶을 시작할 무렵 나는 나의 나다움을 살아낼 방법으로 받아들임과 수용이라는 키워드
를 화두로 선택했다. 그리고 대를 이을 억만장자라는 내 이름대로 살 기 위해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노력하던 오랜 과거의 방식 을 내려놓고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며 살기로 했다. 훗날 노장사상 의 영향을 받아 나름의 확신을 세우고 받아들임과 수용에 애를 써 보 았지만 쉽지는
에 따라 사회와 관습의 요구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실상사와 인연 이 닿았고, 잠깐의 갈등기를 거치며 받아들임과 수용이라는 삶의 방 식과 수행의 방향을 목표로 세우게 되었다. ‘꿈 깨는 인생 학교’와 ‘내 인생의 3박 4일’에 참석한 이후 나의 화두에 점차 확신을 얻었고, 수 메다의 초발심과 내려놓음은 결단을 세우게 했다. 이제, 받아들임과 수용은 내 삶의 지향점이면서 수행의 방향이기도 하다. 수메다는 태자 싯다르타로 태어났고 야소다라와 결혼도 했다. 그리 고 라훌라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던 그날 밤, 깊은 생각에 잠긴 태자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태자는 어떤 나그네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그 네는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고 있었다. 나그네는 등나무 뿌리를 타고 말라버린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아래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고 우물 위에는 성난 코끼리가 있었다. 그러나 잡고 있던 등나무 뿌리도 쥐들이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달콤한 꿀이 입속으로 흘려들었다. 바람에 벌들이 쏟아져 나와 쏘아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입속으로 꿀이 흘러들기를 바라며 나그네는 눈을 감아버렸다. 태자는 이 나그네와 자신의 처지가 다를 바 없다고 여기고 있다. 코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던 까삘라의 작은 왕국. 태자의
의 꿀맛에 젖어 있는 나그네와 같아 보인 모양이다. 나그네의 어리석 은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하여 ‘나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달콤한 꿀맛에 안주하며 만족하지 않으리라.’와 같은 굳은 결심을 세우고 떨 쳐 일어난 것은 아닐까? 이를 증명하듯 나그네를 상상한 직후 태자는 아내 야소다라와 왕자 라훌라를 남겨놓고 출가를 단행한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만 하는 이 고통과 근심을 해결하지 못하면 돌아 오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다. 적은 비용으로 물건을 만들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 이를 위해 적은 임금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더 많은 일을 시키고 그렇게 얻은 이 익을 자기 곳간에 쌓아두는 경제방식을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부른
다. 한쪽에선 부를 쌓아두고 다른 쪽에는 부채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만드는지 나는 경험해 보았다. 또한,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해 부당함에 말을 아끼고 눈을 감아본 경 험도 많다. 나는 이런 이기적 자본주에 수탈당하며 부역하고 싶지 않 았다. 파괴적 삶의 방식에 더는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고민은 연대와 협력을 근본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공동체를 내 삶과 현 대 모든 인류의 대안으로 여기고 동참을 결심했다. 그리고 벌써 15년 의 세월이 흘렀다. 선한 목적이라는 생의 큰 방향을 정하고 발심하는 마음과 이 초발 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근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곳에 집중하고 나 부처님의 삶에서 내가 배운 것들
머지는 모조리 내려놓는 결단, 그리고 목적한 바를 과감하게 결행하 는 실천력. 이것이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에게서 내가 얻은 값진 교 훈이다. 다만 부처님처럼 더 큰 목표와 결심을 세웠더라면 좋았겠지 만, 영성과 공동체를 삶의 이정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도 대도의 길이 라 위안 삼아 본다. 영성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며 각자의 본성을 찾 기 위해 서로 돕고 탁마해가는 과정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 게 가장 이상적인 수행의 방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불교이면서 영 성 공동체이고 또 생명·평화 사상을 표방하는 시민단체이기도 한 ‘실 상사 사부대중 공동체’는 15년간 찾아 헤매던 나의 맞춤 자리라는 생 각이 든다.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시듯, 내려놓음과 수용을 삶의 방식 수행의 방향으로 삼고 나는 오늘도 필요한 연장을 들고 삶의 자리에서 묵묵 히 나의 맞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현들의 한 말씀과 이에 대한 해석
나누고 싶은 한 구절
박두규 神降衷일신강충, 性通光明성통광명, 在世理化재세이화, 弘益人間홍익인간 (본래 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진성이 사람의 중심에 내려와 있으며 이 본성을 통하면 모 든 것이 환하게 광명해진다. 이러한 근본 이치(진리)를 펼치는 세상을 이루어 인간을 널 리 이롭게 해야 한다) 위 구절은 『三一神誥삼일신고』의 내용과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내 고 있는 말인데 괄호 속 구절의 해석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말 을 조금 덧붙였다. 『三一神誥삼일신고』는 우리 상고사 속의 경전으 로 진리의 모체가 되는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부경’과 함 박두규 시인. 전북 임실 출생으로 1985년 <남민시(南民詩)>와 <창작과 비평>으 로 문단에 나왔으며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등 6권의 시집과 《生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 등 2권의 산문집을 상재했다. ‘여순사건순천시민연대’와 ‘교육공동체시민 회의’, ‘순천작가회의’ 등을 조직하여 전교조 활동과 함께 했으며 이후 ‘한국작가회 의’ 부이사장,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공동대표, ‘지리산사람들’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성현들의 한 말씀과 이에 대한 해석
께 단군 이전의 시절부터 백성들을 일깨우기 위해 쓰였던 경전인데 삼성기전과 단군세기, 태백일사 같은 책에서도 ‘백성들을 교화할 때 천경(천부경)과 신고(삼일신고)를 가르치고 환단의 옛 역사를 강론 했다’고 나온다. 이 경전들은 처음에는 구전되다가 환웅시절에 녹도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단군시절에 와서 가림토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 후 한자로 전해져 지금에 이른다고 전한다. 이런 상고사 속의 경전들 은 학계에서는 환국 7세, 신시의 환웅 18세, 그리고 단군 47세의 상고 사 자체를 고증하기 어려워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중국의 고서 나 우리의 고문헌 속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구체적 사실 언급들을 보 면 존재했던 과거사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삼일신고의 三一思想삼일사상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 이며 천지인(天地人) 우주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는 좀 넓게 보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도 상 통하며 모든 생명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생명평화결사
어났으니 스스로의 안에서 찾고 구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性通光明 성통광명은 그 본성을 통하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빛과 같은 밝은 지혜가 생긴다는 것이며 在世理化재세이화, 弘益人間홍익인간은 이러한 이치와 진리를 통해 세상을 다스려서 인 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일신강충과 성통광명’은 性通성통을 말한 것이고 ‘재 세이화 홍익인간’은 功完공완을 말한 것인데, 요즘에 맞춰 말하면 性 通성통은 인간의 참성품을 깨달아 자기완성에 이르는 것이며 功完공 완은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완성한다는 사회적 삶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닦아서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서 실천을 완 성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性通功完성통공 완의 진리다. 나는 『三一神誥삼일신고』를 보며 상고(上古)의 그 오랜 옛날 정신 세계는 오늘날의 그것과 비교할 때 훨씬 높았으며 세상을 살아내는 구체적인 삶 또한 더 바르고 깊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이
은 사실 ‘나(우리)는 왜 사는가?’라는 근본 질문보다는 먹고 즐기는 것에 우선을 두고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또한 진리가 삶의 바탕에서 운용되는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이고 사랑과 평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진리가 책 속에만 있고 일상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 한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한다는 머릿골 속의 높고 귀한 신성의 자성은 자신의 것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끝내 먹고사는 일의 일차적 욕구만으로 세상을 살다 간다면 요샛말로 정 작 메인요리는 먹어 보지 못하고 에피타이저만 먹고 끝나는 것이니 그 또한 얼마나 억울하고 손해 보는 일인가.
대중교육프로그램 개발기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로그램 개발과정의 고민들
김한나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로그램 논의는 귀농학교 종료 이후에 대안문 명을 만들어갈 사람들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꾸준히 제안되었습니다. 2021년에 구성되었던 ‘인드라망 내일’은 공 동 사업의 부재로 인드라망이 어려움을 겪은 부분이 있다고 진단하 였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20년간 축적해온 ‘제1실현지 실 상사의 경험’을 잘 정리하여, 향후 인드라망 운동의 대중화·사회화의 단초로 삼아야 한다고 파악하였습니다. ‘2022년 총회준비위원회’에서는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2022년 총회를 통해 ‘정책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또 운영위원회를 보좌하는 기능을 맡은 ‘실무 기획팀(운영위원장, 사무처장, 정책위원장, 교육위원장+사무처구성 원)’이 구성되어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활동하였습니다. ‘실상사의 김한나 2014년 인드라망 대학 1기. 2018년부터 실상사에서 활동 중이다.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로그램 개발과정의 고민들
사부대중공동체와 마을공동체의 통합적 실천 경험을 잘 정리한다.’, ‘실상사의 공동체 경험을 체험하고 교육할 수 있는 대중교육 프로그 램을 모색한다.’ 등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하 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2022년 인드라망 실무기획팀의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 로그램 논의에서 사용되었던 여러 마중물 발제문을 발췌, 편집한 내 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개발 과정에서 붙잡은 고민을 인드라망 회 원과 나누고 함께 모색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대중교육 역사 : 늘어나는 귀농 열망, 쇠퇴한 운동으로서 귀농
지난 1996년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생태귀농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귀농학교는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와 협력하여 1998년 3월 불교귀농학교를 열었고, 10월에는 실상사 장기 귀농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전국귀농운동본부의 만남을 계기로 ‘귀농’ 이라는 말은 급속하게 사회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실상사와 도법스 님은 ‘귀농’이라는 ‘언어혁명’의 최첨단에 있었습니다. 귀농이라는 사 회현상을 통해 새로운 언어와 개념은 탄생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정이었습니다. 귀농 현상은 확산되었으나 ‘운동으로서의 귀농’은 2010년도를 넘어서면서 시들해졌습니다. 전국귀농운동본부는 몇 개 의 귀농학교를 운영할 뿐이었으며, 인드라망의 불교귀농학교와 실상 사귀농학교는 중단되었습니다. 불교귀농학교는 2014년까지 운영하였고, 실상사귀농학교는 2009 년까지 운영하였습니다. 불교귀농학교는 ‘심심학교’를 통해 지속하 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상사귀농학교는 ‘남원귀농귀촌학교’를 통해 이어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교육 프로그램은 계획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불교귀농학교나 실상사귀농학교는 다른 형식일지라도 하나의 문제 의식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인드라망의 대중적 교육체계를 지속하 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던 ‘인드라망생명공 동체’가 지속적으로 시대대중, 불자대중과 만나가는 대중교육 프로 그램을 갖고자 하는 점에서는 일치된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농을 위해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서는 작업이 필 요합니다. 공동체 정신의 회복과 생태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귀농을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이 과정은 이 사회의 흐름에 대 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고, 인류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필수 적인 요소입니다. 많은 연구와 머뭇거림, 그리고 이성적 결심과 감성 적 결단 등 대단히 많은 요소가 결합되어야 합니다.
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책적 귀농의 경우도 개별적, 자본 중심적 귀농으로 바뀌었습니다. 귀농 열망을 건 강한 ‘사회적 진보’로 연결하지 못하고, 개인적 차원에서도 성공적인 귀농으로 안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생겨난 고민 _지금 이 시대의 고는 무엇이고, 인드라망의 문제의식과 해답은 여전 히 유효한가?
도법스님은 지리산살리기운동에 생명평화의 이념을 제안하였고, 이를 생명평화탁발순례 5년 동안 꾸준히 사회대중들과 만나며 확인 하였습니다. 불교 세계관이면서 사회적 대안이념으로 ‘생명평화’라 는 통합이념을 불교계에 그리고 사회에 제안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이 생명평화 세계관을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유력한 방안 으로 제안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고통인 기후위기로 표 현되는 총체적 생명위기, 인류의 종적 전멸의 위험성을 생명평화를 통해 극복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불교의 가장 큰 목적은 인간 고통의 해결입니다. 불교적 문제의식
대안문명 운동의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생명평화의 관점을 통해 현 대사회의 고통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고통은 ‘인간의 종적 전멸 가능성’을 전면화하는 ‘기후위기’ 문제입니다. 이제 ‘생명평화’의 통합이념은 현대사회의 ‘구체적 고통’을 분명하 게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생명평화 이념은 한 번의 사 회적 보림(탁발순례)의 과정과 한 번의 불교적 보림(붓다로 살자 운 동)의 과정을 통해, 지리산이라는 지역성을 넘어서고 불교적 특수성 을 뛰어넘는 시대적 대안이념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도법스님은 이 시대의 가장 큰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대안 문명 운동으로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생을 당시 인도사회에서 대안문 명 운동을 개척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과제를 생 명평화 세계관으로 생명평화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제안하였습니다. 인드라망 운동은 ‘실현지’를 구현하는 운동으로, 대안문명 운동은 나 를 포함한 주체들의 세계관 변화와 생활의 변화, 총체적 생명 위기를 넘을 사회경제적 재구조화를 전부 포함하는 개념으로 제안되고 있습 니다. 대안운동은 자본을 비판하거나 정부를 압박하거나 하는 종류의 운동과는 괘를 달리 합니다. 스스로 대안적 문명을
구성하자!’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귀농운동, 지리산살리기, 탁발순례, 협동조합과 사 회적경제, 사부대중공동체와 마을공동체운동 등 여러 분야의 경험을 축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야별 과제는 시대대중과 시대불자들에게는 ‘사부대중공 동체’와 ‘마을공동체’라는 ‘삶의 재구성’으로 집약되었습니다. 어떻게 나의 삶을 재구성해 갈 것인가? 이것이 가장 큰 물음이었습니다. 이 제는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와 마을공동체에 대한 경험을 자신감을 가지고 대중과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대중교육’의 필요성이 제 기되고 있습니다. 실상사의 경험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불교사상과 불교적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현대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봤고, 그에 입각한 ‘새로운 삶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경험과 성과가 우리에 게는 있습니다. 인드라망 제1실현지인 실상사가 바로 그곳입니다. 실 상사는 ‘작은 지역에서의 대중적 불교 운동’ 전형으로, 실상사를 이루 고 있는 사부대중들은 ‘실상사와 마을공동체’에 대한 전망을 공유하 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상사의 사부대중은 마을공동체가 대안문명의 토대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주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법스님과 인드라망의 역사 그리고 실상사의 경험을 통해 다음으로 나아갈 바를 모색해야 합니다. 하나는, ‘생명평화의 통 합이념’을 잘 가다듬어 시대대중과 시대불자들과 공유하는 일입니 다. 두 번째는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와 ‘마을공동체’의 통합적 전 망과 경험을 공유하는 일입니다. 이 공유의 일환으로 실상사 사부대 중공동체의 일상을 함께하고, 활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드라망의 축적된 경험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으로 인드라망 대중교육의 첫걸음 을 내딛고자 합니다.
인드라망 대중교육 프로그램 개발과정의 고민들
인드라망대중교육 시범사업 소개
삶의 결을 바닥부터 바꾸는 전환 캠프
실상사 공동체학교
실상사 공동체학교는
자연의 품에 깃들어 단순 소박한 삶을 살면서, 자기를 바로 보는 힘을 기르고
이웃과 어울려 마을공동체를 가꾸는 길을 탐색하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대중교육 입문과정입니다. 2023년 2월 9일(목) ~ 12일(일), 3박 4일 실상사, 남원시 산내면 일대 초대합니다
생태적 삶, 귀농귀촌을
시간 1일차(목요일) 2일차(금요일) 3일차(토요일) 4일차(일요일) 환영하기 연결하기 공동체 맛보기 희망 찾기
07:00~ 07:30
<공동체 살아보기> 아침 울력 (실상사 농장)
07:35~ 08:30 <모심과 환대> 밥모심 (양혜당) 08:30~ 09:30
<공동체 살아보기> 하루를 여는 법석 (반야전)
09:30~ 12:00
<농사와 밥모심> 지금 먹는 것이 너의 몸이다 (실상 사농장·허정일)
<차담> 더불어 사는 즐거움 (도법스님·극락전)
<모색2> 새로운 여정을 위한 대화/수료식 (정웅기·휴휴당)
12:00~ 13:30 <모심과 환대> 밥모심 (양혜당)
<명상>
13:30~ 16:00
도착·접수 방배정
반야전)
손으로 만드는
보람 (목금토공
【전환 캠프 프로그램 안내】
쉼과 여유
실상사와 인드라망 : 지리산 품에 안긴 소박한 절 실상사와 인드라망 생
명공동체 소개
인사 : 경청의 대화법을 익혀 참가자들끼리 친밀하게 연결
밥모심 : 실상사 농장에서 농사짓고, 공양간에서 요리한 건강한 채식 밥상
잠자리 : 천왕봉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아 쉴 수 있는 소박한 템플스테이 전용관 공동체 살아보기
아침 울력 & 하루를 여는 법석 : 대중이 함께 일하고, 마음 모으는 기쁨 체험하기
농사 : 실상사 농장에서 농부들과 만나 함께 땀 흘리고 농사 경험 나누기
밥 : 좋은 먹을거리가 왜 중요한지 배우고 체험하기
공방 : 나무를 다듬고 만드는 자립 기술을 배우고, 직접 지은 6평 작은집 둘러보기
마을 : 산내마을 둘러보며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의 꿈을 그리기
놀이 : 도란도란 모닥불 피우고, 곡차 한잔하며 자발적 소외와 아날로그
삶의 기쁨 나누기
【새로운 삶의 여정 설계】
명상 : 자신에 대한 앎으로부터 새 삶은 시작된다, 선재스님과 함께하
는 내면으로의 여행
차담 : 도법스님과 차담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가는 법을 유
쾌하게 배우기
새로운 여정을 위한 대화 :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삶과 고민
을 듣고, 삶을 모색하는 각자의 이야기 나누기
자주 묻는 질문과 답변
Q. 실상사까지 이동은 어떻게 하나요??
A. 자가용을 이용해서 오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합니다. 지리산 백무동 오는 버스를 타면 실상사 앞에서 내릴 수 있습니다. 또는 남원 KTX역이나 인월버스터미널로 오시면 마중 갈 수 있습니다.
Q. 숙소는 어떻게 사용되나요?
A. 고즈넉한 한옥 건물에 6개의 방이 있고, 남/여 나누어, 한 방에 2~3인이 사용합니다. 화장실, 샤워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불편하지 않다면 생태화장실 사용을 추천합니다. 환경을 생각해서 샴푸, 린스 등은 친환경제품을 써주세요.
Q. 식사는 어디서 어떻게 하나요?
A. 실상사 공양간인 양혜당에서 합니다. 식재료의 일부분은 실상사 농장에서 기른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합니다. 기본적으로 채식입니다. 삶의 결을 바닥부터 바꾸는 전환 캠프
Q. 종교가 불교가 아니더라고 상관없나요?
A. 종교는 상관없이 신청 가능합니다. 실상사라는 사찰의 특성상 불교적 의례나 사찰예절/문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크게 불편하시지 않다면 괜찮습니다. 【참가 신청하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홈페이지 www.indramang.org/home -접수 기간 선착순 10인, 충원 시 마감 -참가비 25만 원, 3박 4일 숙식, 프로그램 진행비 -계좌 농협 100012-55-012462, 예금주·인드라망생명공동체 -관련 문의 전화·문자 : 02-576-1886, 010-8470-1886 이메일 : indramang1@hanmail.net 홈페이지 : www.indramang.org/home 페이스북 : www.facebook.com/indramang
수입 지출 관 항 금액 소계 항 금액 소계 이월금 전월이월금 44,335,392 44,335,392 인건비 인건비 10,660,000 14,472,630
교육사업 1,000,000 사무실운영비 6,278,850 귀농사업 - 자료구입비 126,400 회원사업 - 지급수수료 1,103,490 기타 - 회의비 1,832,778 비경상 수익
지원금 - 조직사업비 13,313,806 외부활동수익 - 회원사업비 1,387,000 특별사업 - 홍보사업비 3,207,100 기타 558,449 지리산소풍 6,530,190 기타 차입금특별사업비 6,300,000 대여금반환 - 기관기구지원비 8,200,000 연대사업비 100,000 후원내역 2022년 3~11월 수지 결산서
후원금 300,000 828,449 기타
출장비 172,900 기금사업 - 기타관리비 5,851,510 사업지원금사업비 공과금
차입금반환 6,000,000 - 오납입반환 540,570
125,000
교육사업비 1,526,230 40,564,326 월계 71,711,949 월계 77,068,454 이월금 38,978,887 수입 총계 116,047,341 지출 총계 116,047,341 22년 수입 누계 87,480,999 22년 지출 누계 85,878,864 •CMS로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 중 미납분에 대해서는 3개월 전까지 미납 출금을 하고 있습니다. •주소가 바뀐 구슬님께서는 누리집에서 정보를 수정하거나, 바뀐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세요!! •자동이체 후원 사무처에 문의하시면 친절히 안내해드릴게요!! •회원가입 문의 전자우편 indramang1@hanmail.net 전화 02-576-1886
【신입회원】 신유희 강경자 임희경(인월) 김말임 박경진 이성술(오부자공방) 이남재 박혜성 【22년 3~11월 회비 납부해 주신 회원】 강대규 강동민 강손주 강수돌 강수형 강용준 강유진 강종구 강지영 강지효 고명석 고병헌 곽우석 광주전남지부 구은모 구장현 권기철 권다솜 권 선아 권성실 권순상 권순용 권오현 권희원 귀정사 금산사 금정길 김경예 김경호 김경희(마 포) 김귀선 김귀옥 김기정 김남희(파주) 김대성/길은실 김만수 김명숙 김명화 김미경(의령) 김미경(주안) 김미숙(심심3기) 김미향 김복희 김봉구 김상채 김석정 김선애 김선엽 김성동 김성일 김성희/조용대 김소연 김수 김수경 김시향/전상규 김여진 김연순 김영옥(강서) 김옥 희(동작구) 김용구 김용식 김유미(의왕) 김윤미(마포) 김은경(수지) 김은경(하동) 김은숙 김 잔디 김장전 김정순(도봉) 김정연 김주리 김지은(강서) 김춘우 김태경 김태환(과천) 김하연 김현숙/이성근 김형균 김형숙 김호영 김홍모 나명숙 나익수 남태희 노시춘 노을혜 도법스 님 류지호 마을카페그물코협동조합 마정숙 명훈재 문근식 문병국/김계연 민경은 박건욱 박 경선 박경호(부산) 박경화 박미경/고영록 박민주/최정훈 박상진 박상희(종로) 박선경 박선 태 박수환 박순옥(이재희) 박순천 박영선(대전) 박영호 박용규 박용배 박용주 박유미 박윤 희 박윤희(부산) 박은숙 박인선 박재군 박정은(순천) 박정훈 박종학 박지선 박진신 박진현 박철규 박후임 배병국 배영화 배정환 백승준 변영숙 변택주 상정스님 서강석 서금주 서민정 서석원 서수보/김연수 서현석 선덕사 설동인 설혜윤 성미선 성연동 성용숙 성종기 성진스님 (윤용순) 손정옥 송기봉 송미정 송은주 송지연/민태문 송혜주 시재일(김혜숙) 신명옥 신명 희 신승순 신유정/김문욱 신유희 신재열(정애란) 신한보경 신현종 신현주 실상사 심우영 안 문재 안미숙 안선주 안수현 안정연 안정혜 안혜영 양상은 양시영/박은정 엄대용 여원익 오 미정 오진탁 오창균 오현주 왕영술/최명자 우경식 원묵스님 원소영/김태환 원종호 원현경 원현욱 월정사 위양자 유백식 유병천 유선화 유이상 유홍열 윤대중 윤덕영/김춘희 윤미경 윤상복 윤순자 윤유미 윤정인 윤현자 윤형수 은동원 이강구 이건열/이재건 이경미 이경섭/ 정성화 이경숙 이경순(종로) 이경 이귀선 이기원/이향숙 이기춘 이동언 이동열 이동춘 이동 호 이명진 이모정 이미선(남해) 이미선(영등포) 이미현 이민정 이병성 이병욱 이상경 이상기 (성북) 이상동 이상민(파주)/이윤경 이상정 이석민 이석재 이선화(과천) 이성미/이병석 이성 우 이소영 이순우 이연창 이영미 이영민 이영숙(거제) 이영숙(서울) 이영한 이영희/홍진섭 이용진/장인영 이은 이은주(충주) 이은주(홍성) 이일구 이장림
욱 이효선 인드라망생협 임경도 임완숙 임재복 작은학교 장동임 장상준 장순자 장예진 장철 현 전대식 전보선 전수경 전영호 전원배 정교용 정면 정명희 정명희(하동) 정봉수 정석우 정 세홍 정연철 정영태 정은주 정제봉 정진희 정춘심 정혜숙/박차식 정호상 제지현 조경순 조 미정 조선원 조순례 조원옥 조장래 조재원/구진아 조태임 조행임 조현삼 주성철 주염숙 주 용수 진영욱 채수광 천기원 최경애 최관숙 최만엽 최복순 최수정 최연희 최영규/박연옥 최 우영 최은정 최정은 최충기 최평식 최현숙 최현지 최훈 최희정 편정자 하림스님 하성준 하 충식 한광용/장희정 한마음선원진주지원 한생명 한설룡 한숙영 한영미/구현석 한정숙 한주 영/윤남진 한해정 함지호 해공스님 허갑열 허극 허남결 허용석 허정일 허현정 현미영 현영 심 홍경아 홍수찬(지각스님) 홍승규 홍영진 홍태경 황남채 황말희 황은영
【광주전남지부 회원】 강경자 강동완 강병우 강은정 고영석 권태성 김경미 김선아 김선옥 김 성부 김신혜 김연화 김영봉 김영임(광주) 김옥자/설이원 김용성(광주) 김유미(광주) 김은숙( 광주) 김인태 김정분 김정태(19기) 김종덕 김주헌 김준길 김향화 김활현 노병암/박경여 문동 숙 문영숙 문한식 문혜원 박귀환 박성수 박세은(박숙)/최기주 박영숙 박정출/김우용 박주석 (삼보공덕) 박희선(광주) 방상영 범지희 봉문수 서판규 송인홍 송화숙 신숙 양성미 양은석 양효심 여은영 염준구 오경애 오선옥 유경준 유순종 유채원 윤우향 이경순(광주) 이동호(광 주) 이동호(광주운림동) 이두행 이매실 이명규 이보상 이옥인 이창식 이해모 이효정 임현수 임희숙 장흥수 전금자 전동선 전성수 전향진 정순명 정옥순 정재영 정종명 조배균 조태정 조 현정 진슬기 최병욱 최선영 최연산 최정숙 최정준 최혁희 하태호 한희정
서만억 서상남 서석곤/임부영 선재스님 송동현 승묵스님 신명화/최영래 신부용/하헌영 신 윤상 신정근/최승희 신현진 심영지 안오순 안지현 양미희 양원석/오정윤 양재경 양정수/이 순복 양창목 엄혜원 염순이 오지영/김성오 용묵스님 용춘란/양운석 윤수민/이귀섭 윤영숙 윤용병 윤지홍 이경재 이규동 이길동 이덕임 이말란 이명희(수지행) 이상현 이세열 이숙경 이영경 이영미(마천) 이영준 이은희/송사석 이일형/김영선 이재경(남원) 이정원 이정은(남 원) 이종익 이주신/한수경 이준하/석라비 이지선 이창호 이철승 이해경(이향천) 이현정 이현 주 이현지 이혜경(남원) 이혜정(산내) 이희열 임동석 임송 임희경 임희경(인월) 장동욱/오선 미 장소영(온빛) 장순녕 장준모/김미정 장현숙 전석규 전소영(산내) 전재성 정경아 정경화/ 조의제 정계임 정귀분 정대환 정도경 정상길 정상순/윤정준 정영순 정용우 정웅기 정충식 조미영/임현택 조선우 조선희 조윤호 조찬욱 조창숙/윤여정 주상용 주지환 지숙현/손성진 진상훈/최윤선 진원숙 채윤경 채지연 최귀순 최근정 최석민/정상은 최세현(남원) 최수옥 최 연율/조회은 최은주(남원) 최종식 표외숙 하건찬/백혜순 하대덕 하수용 한동훈/오실란 한미 경/조종환 한승명 한형민 허은정/김동규 현미선 황대중/안수희 황미경 황지견 황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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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호(통권 1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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