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orea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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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3~4, 2012. no.273. sunday.joongang.co.kr

ISSUE

동양 문화와 한뿌리

유럽 자기의 미학


CONTENTS THIS WEEKS PEOPLE

editor’s letter

06

첫 내한공연 뮤지컬 ‘위키드’ 초록 마녀 엘파바

28년 만의 이사

ISSUE

08

제가 입사했을 때는 납 활자 시절이었습니

시그니처 패턴으로 본 유럽 명품 자기의 원류

다. 편집국에서 넘어온 원고를 문선부장이

ART

죽죽 찢어 나눠주면 담당자들은 좌대 사

16

이를 돌아다니며 재빨리 활자를 골라냅니

스위스 바젤서 개인전 연 현대미술계 스타 제프 쿤스

다. 기사 내용을 중얼거리며 글자를 찾는

INTERVIEW

모습이 노래를 하는 것 같기도, 염불을 하

18

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성냥개비보다 조

스타 찍는 스타 포토그래퍼 홍장현

REVIEW & PREVIEW

금 큰 본문 활자는 한 줄에 13자씩 들어갑 22

헝가리 명품 자기 브랜드 헤렌드 아포니 패턴의 자기들

터키 무용 ‘파이어 오브 아나톨리아’

BOOK

통에 채자한 덩어리를 순서대로 모은 뒤 24

먹을 묻히고 롤러로 밀어낸 초고를 일본식

숨은 책 찾기 <7> 포노의『말러 앨범』

GUIDE

니다(당시 신문 1단 규격). 뚜껑 없는 나무

으로 ‘게라’라고 불렀죠. 25

이 게라를 보고 제목을 뽑고 오·탈자를 잡

이 주의 문화행사

아내는 사이 정판부에서는 바퀴 달린 쇠

GALLERY

26

탁자 위에서 편집자의 레이아웃(이것도

‘천재 화가’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

‘와리스케’라고 불렀습니다)을 보며 판을

PORTR AIT ESSAY

짜기 시작합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긴

27

장감은 고조됩니다. 갑자기 급한 기사라

‘코리안 좀비’ 정찬성

CAR

도 들어오게 되면 말 그대로 호떡집에 불

28

이 납니다. 편집자 지휘 아래 모두 달라붙

세계적인 올드카 경주 이탈리아 밀레 밀리아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의 스위스 바젤 개인전

COLUMN

직입니다. 축축이 젖은 시험지에 OK 사인

31

이 나면 쇠 탁자 위 활자판을 꽉 조이고 반

스타일 # : 공무원 여름철 간편 출근복 논란

SOUL-SEARCHING

들반들한 종이에 최종 지면을 찍어냅니다.

32

이 종이를 필름으로 찍어 윤전기는 신문을

강신주의 감정 수업 <13> 명예욕

CARTOON

어 머리를 조아리고 쉴 새 없이 핀셋을 움

토해냈지요. 난리법석이 사라진 정판부의

33

적막은 정갈했습니다.

김재훈의 문화 캐리커처 VS

편집국이 이사간다는 얘기에 문득 옛 생

CONTE

34

각이 났습니다. 납 활자 제작 시스템도, 일

35

의 흔적을 뒤로 하고 28년 만에 고향집으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본식 용어도 다 옛날 얘기입니다. 그 추억

PHOTO ESSAY 이창수의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

로 돌아갑니다. 근사하게 새로 꾸며진 공 간에서는 또 어떤 추억이 만들어질까요. 포토그래퍼 홍장현

이탈리아 올드 카 경주 밀레 밀리아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S MAGAZINE 표지 동양의 국화·당초 문양으로 장식한 유럽의 명품 자기 로얄 코펜하겐의 블루 플루티드 시리즈. 사진 로얄 코펜하겐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홍주희 유주현 사진 조용철 최정동 편집 우현아 교열 한규희 디자인 전유진 최귀연 통신원 이지윤(런던)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강희경(뉴욕) 박철희(베이징) 광고 김진영 구명서 엄태규 마케팅 박유선 이용임 박유림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구독신청 1588-3600, 080-023-5001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04 SUNDAY MAGAZINE


THIS WEEK PEOPLE

피부색 다르다고 못생겼다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에 빗자루 든 녹색 마녀 첫 내한 공연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의 엘파바

내한공연 뮤지컬 ‘위키드’에서 녹색 마녀 엘파바 역을 맡은 제마 릭스.

으레 모든 전래동화가 그렇듯 미국의 고전인 ‘오즈의 마법사’도 권선징악으로 끝난다.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하고 못생긴 녹색 마녀는 도로시를 괴롭히다가 제대로 응징을 당한다. 우리 한번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오즈의 나라를 들여다 보자. 도대체 왜 텍사스에서 잘 살 고 있던 도로시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오즈의 나라에 떨어졌을까? 무엇보다 녹색 마녀는 원 래부터 사악했던 걸까? 지난달 31일부터 내한공연을 시작한 미국 브로드웨이 최고 흥행작 ‘위키드(Wicked)’는 ‘오 즈의 마법사’가 구축해 놓은 견고한 세계에 반기를 들며 시작한다. 스토리의 빈틈을 짓궂게 파 고들어 권선징악의 판타지를 깨뜨려버린다. 그리고 그 중심엔 녹색 마녀 ‘엘파바’가 있다. 엘파바의 비극은 남들과 다름에서 시작됐다. 사실 명석한 두뇌에 우직하고 넓은 마음을 지녔 지만 피부색 때문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소수자의 상처를 잘 아는 엘파바는 동물 탄압 정책에 반대해 이를 해결해 달라며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마법사는 되려 엘파바가 가진 능력을 이용해 동물들을 더 탄압하려 들고, 엘파바는 이에 대항하며 도망친다. 남은 것은 치부를 들켜버린 마법사의 보복뿐이다. 그는 엘파바를 ‘사 악한 마녀’라고 공표하고 수배령을 내린다. 오즈의 주민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를 나쁘다고 믿어버린다. 왜? 못생긴 녹색 마녀이니까. 이 작품이 2003년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후 9년째 흥행 1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마치 우리나 라에서 ‘춘향전’을 비튼 영화 ‘방자전’이 흥행에 성공한 이유와 비슷하다. 누구나 잘 아는 고전 을 비틀어 통념을 거슬러 보려는 묘미가 있고, 겉모습에 현혹된 우리들의 오만함을 까발려 보려 는 발칙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엘파바는 불쌍한 동물을 모른 체하고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마법사를 도와 한몫 챙 기고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악한 마녀로 매도될지언정 옳다고 믿는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 도덕적 신념보다는 편의와 이익에 따라 갈아타는 것이 쿨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엘파바의 행보는 생경한 울림이 있다. 가장 미국적인 동화에서 시작했지만, 이 작품이 보편성을 가지면서 세계적인 흥행몰이를 하 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블록버스터급의 무대와 아름다운 멜로디, 오랜 기간 글로벌 투어 로 다져진 배우들의 호연은 덤이다. 과연 사악한 마녀도 도로시처럼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글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사진 Jeff Busby 06 SUNDAY MAGAZINE


ISSUE

1 08 SUNDAY MAGAZINE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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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봉황이 나는 마이센 국화 문양 로얄 코펜하겐 화사한 일본풍 꽃 헤렌드 시그니처 패턴으로 본 유럽 명품 자기의 원류

북서울 꿈의숲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 자기의 원류를 찾아서-마이센으로의 초대전’(6월 10일까지)은 귀 한 자리다. 복전영자(福田英子·67) 부천유럽자기박물관 장이 40여 년간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를 30여 차례 오가며 모아온 개인 소장의 희귀본 700여 점을 대중에 3

처음 공개했다. 전시는 유럽 최초의 자기 브랜드인 독일 마이센(Meissen)을 중심으로 유럽 자기 300년의 발자

취를 더듬고 있다. 동양 자기가 어떻게 마이센에 영향을 미쳤으며 마이센은 프랑스의 세브르, 영국의 로열우스터, 덴마크 로얄 코펜하겐, 헝가리 헤렌드 등 유럽 명품 자기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한눈 에 볼 수 있게 했다. 새삼 흥미로웠던 사실은 유럽 자기 수백 년 역사의 가장 초기에 나타났던 고유 문 양들이 지금 생산되는 신제품에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으며, 그런 각 브랜드의 ‘시그니처 패 턴’들이 대부분 중국과 일본 자기의 영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이다. 15세기 말 동·서양 해상무역이 시작되며 도래한 ‘시누아즈리(Chinoiserie·중국 취미)’의 시대. 유 럽인들을 가장 열광시킨 것은 동양의 백자였다. 자기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목재나 은 등으로 식기를 만들어 온 유럽인들은 희고 단단한 중국의 자기를 보물 다루듯 귀하게 여겼다. 중국 청화백자와 일본 색회자기 컬렉션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됐다. 왕궁에서는 ‘자기의 방’을 만드는 풍토까지 생겼다. ‘시누아즈리’ 열풍 속에 값비싼 동양 자기를 사들이느라 재정파탄 위기에 놓인 유럽 각국은 앞다퉈 왕립 브랜드 개발에 나섰다. 초기에는 동양 자기를 모방하다 점차 동·서양을 융합한 독자적 디자인 으로 발전해 갔지만, 시누아즈리 DNA 로 시작된 전통의 패턴들은 지금도 클래식의 품위를 간직한 1 블루어니언 패턴을 모던하게 변형해 적용한 마이센 자기들. 전통적인 청화백자에 금채와 컬러를 덧입혔다.

2 마이센 블루어니언 클래식 티세트.

모던한 디자인으로 개발되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이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독일의 마이센,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헝가리의 헤렌드라는 세

모든 백자 장식중 가장 전통적인 문양으로

계 3대 명품 도자기 브랜드다. 일찌감치 수공예를 포기하고 기계로 문양을 찍어내 온 대부분의 브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카피되고 있다.

드와 달리, 현재까지도 일일이 장인들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핸드 페인팅’을 고수하고 있는 3대 명

3 꿈의숲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 자기의 원류를 찾아서-마이센으로의 초대전’전시장 모습. 마이센의 블루어니언 패턴과 가키에몬 패턴으로 전시장을 열고 있다.

품 브랜드의 대표 패턴에서 유럽 자기의 DNA를 이루는 동양 자기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최정동 기자, 마이센로얄 코펜하겐헤렌드 SUNDAY MAGAZINE 09


ISSUE

4

대나무 밑동에 새긴 독특한 쌍칼 마크, 마이센 “The First in Europe.” 마이센은 최초와 최고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The First’로 꼽힌다. 유럽 최초로 백자소성에 성공한 가마가 마이센이기에, 뒤이은 많은 자기 브랜드들은 백자소성법뿐 아니라 기물성형과 패턴 모든 면에서 마이센에 빚지고 있다. 독일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1세가 연금술사 J.F. 뵈트거를 잡아 가두고 백자를 만들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710년 마이센에서 유럽 최초의 자기 브랜드가 탄생했고 유럽은 본격적인 자기의 시대를 맞게 됐다. 마이센은 기물성형 과 장식 부문에서 각각 궁정조각가 J.J. 켄들러와 궁정화가 J.G. 해롤트의 활약으로 조각적이면서도 회화적인 유럽 자기의 초석을 다졌다. 잔과 받침, 접시, 보울, 튜린 등 오늘날 사용되는 양식 테이블웨어의 기본형은 거의 켄들러의 디자인에서 나왔다. 해롤트는 시누아즈리 양식의 예찬론자였던 아우구스트 1세의 취미에 맞게 동양 의 모티브를 이용한 패턴들을 선보였고, 이는 이후의 유럽 자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블루어니언

가키에몬

‘마이센으로의 초대’ 전시장 초입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마이센을 대표하는 문양 ‘블루어니언’ 세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색회자기 ‘가키에몬’ 이자 유럽 자기 사상 가장 중요한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어니언’ 테이블웨

양식에서 유래한 ‘인디언 패턴’이다. ‘가키에몬’은 마이센 초기의 가장 전통적인

어 세트다.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석류 무늬를 양파로

장식 패턴이다. ‘인도’라는 명칭은 동양의 미의식을 유럽에 운반한 ‘동인도회사’

오인해 만들어졌다. 해롤트가 1730년대 디자인을 완성했는데, 청화는 색회보다

에서 유래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을 데려가 백자소성에 성공한 이

노력과 비용이 절감돼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수많은 카피

후 화려한 채색자기를 발전시켜 갔다. 17세기 동인도회사 설립 이후 동서무역 전

와 변종을 낳았다. 1860년 의장등록되었지만 19세기 말 재정위기 때 사용권을 매

성기는 곧 명·청 교체기였고, 중국 관요 경덕진이 폐쇄된 틈을 타 일본의 색회자기

각해 체코의 츠비벨무스터, 독일의 후첸로이터 등에서 똑같은 디자인을 볼 수 있

가 중국의 청화백자를 대체해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누렸다. 마이센 초기 해롤트

다. 블루어니언의 매력은 무의식적으로 조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장식적

는 1725년부터 유약 위에 그림을 그리는 상회기법의 가키에몬 양식을 모사해 다

구조에 있다. 둘레에는 8각형을 이루며 풍요와 장수를 상징하는 석류와 복숭아

채로운 색감의 자기 생산을 시작했다. 대나무와 호랑이, 다람쥐와 포도, 붉은 용

문양이 교차하고, 중앙에는 남성적 심벌 대나무 줄기와 대나무꽃, 여성의 심벌인

과 봉황 등의 모티브와 선이 가늘고 여백이 살아 있는 화폭은 대표적인 시누아즈

연꽃과 국화꽃이 어우러진 무늬로 완벽한 인간을 상징한다. 그리스신화에서 올

리 도안으로 확립됐고, 이후 다양한 조합으로 발전해 갔다.

림포스 신들의 색깔로 여겨졌던 푸른색은 18세기 왕들도 세계적인 권력의 상징 으로 사용했다. 대나무 줄기 밑동에 새겨진 마이센의 쌍칼 문양 마크가 정품임을

특히 중국 경덕진 가마의 용 도안을 모방해 상회기법으로 채색한 가키에몬 자 기는‘Ming Dragon’ 패턴으로 자리잡아 마이센 채색자기를 대표하고 있다.

인증하는데, 유달리 카피가 많아 마이센 자기 중 마크가 유일하게 전면에 새겨진

200년 가까이 붉은색으로만 그려지던 용 패턴은 현재 여덟 가지 컬러로 제작

패턴이기도 하다. 지금도 식기는 물론 문구, 화병, 욕실 제품에 이르기까지 750개

되고 있으며 모던한 스타일로 변형돼 침구와 인테리어용품에까지 광범위하게 사

이상 품목에 적용되는 디자인이다.

용되고 있다.

10 SUNDAY MAGAZINE


ISSUE 4 마이센 ‘Ming Dragon’패턴의 찻잔들. 붉은색의 전통 문양이 20세기 들어 여덟 가지 컬러로 다양화됐다.

5 Ming Dragon’ 클래식 티세트. 중국에서 행복과 번영의 상징으로 경외받던 용 패턴을 가키에몬 식으로 강렬하게 채색한 것. 봉황과 함께 그려진 ‘Court Dragon’과 함께 마이센의 양대 용 패턴이다. 발톱 네 개짜리 용은 황제의 왕손을 상징하고 구름은 행운을, 구름을 에워싼 구슬 또한 소원성취와 행운을 상징한다.

6 블루어니언 패턴을 응용한 마이센 화병들. 7 20세기 초부터 마이센의 대표적인 피규어린(도자기 인형)으로 자리잡은 Hentschel Kinder 시리즈 14개 인형 중 가장 사랑받는 ‘물컵을 든 아이’. 블루어니언 패턴의 물컵을 들고 있다.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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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넝쿨·문창살  영국 로열우스터에도 한국 문양 많아” 복전영자 유럽자기박물관장

보통 엄두를 못 낸다. 마이센이 이런 것이란 걸 보여주

기서 끌려간 사람들인데도 그렇다. 도자기 애호가 입

려고 개인 소장품을 처음 꺼냈다. 다른 브랜드는 전사

장에서는 그 점이 안타깝다. 그래서 저쪽이 더 발달

(傳寫)를 하기도 하지만 마이센은 순전히 장인의 손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에서 태어난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핸드페인팅을 유지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나?

-마이센은 아직 한국인에게 생소하다. 마이센 도자기를 소개해 달라.

“독일 마이센을 카피한 초기의 유럽 자기 브랜드가 덴마크 로얄 코펜하겐, 헝가리 헤렌드, 프랑스 세브

-유럽 자기가 중국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데 비해 한국 자기는 세계 도자사에서 소외된 느낌이다.

“옛날 유럽에서 자기는 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

“그렇지 않다. 일본 나고야의 노리다케 공장에 갔더

다. 장인 손끝에서 완성된 핸드페인팅 자기를 귀하게

니 한국 도자기들이 가장 좋은 진열장에서 뽐내고 있

여겼다. 마이센 공장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오동나무

었다.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나 속상해서 다 걷어오

가마에 집어넣고 옛날 재래식으로 자기를 굽는 걸 봤

고 싶었다. 한 번은 일본의 한 시골 온천에 갔는데, 어

다. 자기네 방식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거다.”

떻게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한국 도자기만으로 박물

-자기는 동양에서 건너간 것인데 근대 이후 유럽 자기가 비할 수 없이 발전한 이유는 뭘까.

“옛날 유럽 사람들은 동양적인 문양에 굉장한 동

관을 차려놨더라. 같이 간 일행들은 다 박수를 치던 데 나는 오히려 가슴 아프고 정말 다 가져오고 싶었 다. 영국 로열우스터에 갔을 때도 한국 문양을 엄청

르, 영국 로열우스터 등이다. 그러다 각자 독자적인

경을 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아리타 문양이다. 많이 갖고 있어 깜짝 놀랐다. 창호지에 그려진 포도넝

것을 찾고자 영국에선 장미 문양, 프랑스는 금을 화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조선도공 이삼평을 데려다 자

쿨, 문창살무늬, 한국 야생화…. 조선 초기에 건너온

려하게 장식하면서 개성을 찾게 된다. 마이센은 동독

기를 굽게 한 곳이다. 일본인들은 이삼평을 도자기

것이라고 했다. 자기를 장식할 때 우리 문양들을 응용

에 속해 있어서 접할 기회가 드물었지만 철의 장막이

할아버지로 모신다. 우리는 예부터 도자기 빚는 사람

한 거다. 우리만 모를 뿐 한국 도자기도 중국 것 못지

무너지면서 서서히 알려졌다. 하지만 너무 고가라서

을 우대하지 않았지만 일본만 해도 대우가 좋았다. 여

않게 가치가 있다.” SUNDAY MAGAZINE 11


ISSUE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 로얄 코펜하겐 푸른색의 정교한 기하학적 꽃무늬 패턴 ‘블루 플루티드’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덴마크 왕실도자기’ 로얄 코펜하겐은 3대 명품 도자기 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다. 1775년 국왕 크리스찬 7세와 왕비 율리안 마리의 재정적 지원 아래 화학자 프란츠 하인리히 뮐러가 가마를 열었다. 마이센에서 우수한 도공, 도화가 를 초청해 기술지도를 받았기에 초기작에서는 마이센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덴마크가 입헌군주제로 이행하면서 1868년 민영화된 이후 왕실 전문에서 탈피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자기업체로 거듭났지만, 왕실의 용인 아래 ‘로얄’ 칭호를 유지하고 있다.

블루 플루티드

던 상회와 금채의 고전적인 장식을 부정하고 하회 청화 장식에 주목한 크로의 블

지난 5월 15~20일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열린 ‘로얄 코펜하겐-덴마크 헤리티

루 플루티드 디자인은 1888년 스칸디나비아박람회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지, 그 이상을 만나다’ 전시를 참관한 덴마크 왕세자 부부가 직접 핸드페인팅을

에 출품해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시연해 화제가 됐다. 당시 이들이 보여준 것이 ‘블루 플루티드’를 변용한 ‘블루 플

이를 계기로 로얄 코펜하겐의 명성은 일약 전 유럽에서 인정받게 된다. 2000년

루티드 메가’ 패턴. 마이센에서 1735~40년께 개발된 ‘밀짚꽃 모양’ 패턴에서 유

대 들어서는 전통적 패턴에 드라마틱한 재해석을 가했다. ’블루 플루티드 메가’

래한 것으로, 중국 청화백자의 국화·당초 문양을 따온 것이다. 청초한 아름다움,

는 문양의 일부를 확대시켜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디자인에 활

북유럽을 연상시키는 서늘한 취향은 고전적인 품격의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로얄

력을 불어넣었다.

코펜하겐에 1778년 처음 도입됐다. 초기에는 마이센의 카피로서 크게 주목받지

그 밖에 문양의 단편을 새롭게 조합해 만들어낸 블루 팔메테(2004), 문양을 모

못했던 블루 플루티드는 민영화 이후 부임한 아트디렉터 아놀드 크로에 의해 블

던하게 배치하고 옐로나 오렌지 같은 과감한 컬러를 사용한 엘리먼츠(2008) 라

루 플루티드 풀레이스, 하프레이스 등 다양한 디자인으로 발전했다. 당시 유행하

인 등 블루 플루티드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1 12 SUNDAY MAGAZINE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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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얄 코펜하겐에서 가장 사랑받는 블루 플루티드 패턴의 접시들. 2 2000년대 들어 디자이너와 협업해 개발한 모던 디자인 ‘엘리먼츠’. 옐로, 오렌지, 블랙 등 다양한 컬러를 구사한다. 3 블루 플루티드 문양의 일부를 확대한 디자인 ‘블루 플루티드 메가’. 5월 전시회에서 왕세자 부부가 직접 핸드페인팅을 시연한 문양이다.

4 블루 플루티드 메가 패턴의 센터피스. 5 마이센의 ‘밀짚 꽃모양’패턴 티세트. 로얄 코펜하겐 블루 플루티드 패턴의 원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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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

황후 엘리자벳과 빅토리아 여왕의 보물, 헤렌드 다른 유럽 제국보다 근대화가 한 세기 늦었던 헝가리는 182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 아래 수도 부다페스트 북서쪽 100㎞ 지점에 있는 전원도시 헤렌드에 자기공 장을 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새로운 미술사조로 신고전주의 양식이 대두하면서 도자기도 고대 미술을 모티브로 삼는 경향이 나타났다. 다른 가마들이 전통의 오리 엔트 문양을 떠나 새로운 패턴을 모색하던 시기, 후발 주자로서 유일하게 초기 마이센 자기를 충실히 카피해 오히려 명성을 얻은 것이 헤렌드다. 그래서인지 헤렌드는 모던한 변용보다 전통의 계승에 가치를 두는 브랜드로 정착했다.

인도의 꽃

빅토리아

1840년대 탄생한 헤렌드 최장수 패턴 ‘인도의 꽃’은 가키에몬에서 유래한 마이

대담한 총천연색 꽃과 나비, 새싹과 꽃봉오리가 움트는 나뭇가지, 녹색과 금채가

센 ‘인디언 패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인도의 꽃’은 1867년 개최된 파리 만

봄날의 초원을 연상시키는 테두리. 투명한 백자 위 생명의 기쁨이 가득하다. 초창

국박람회에 출품됐다. 파리 만국박람회는 일본의 우키요에 등이 대대적으로 소

기의 완벽한 마이센 카피에서 점차 독자적 양식을 모색하던 헤렌드가 청조의 색

개돼 유럽에 자포니즘이 대유행하는 계기가 된 행사였다.

회자기 분채(粉彩)를 닮은 독특한 디자인을 적용한 디너용 서비스다.

그래서 일본풍 최신 모드 ‘인도의 꽃’ 시리즈는 나폴레옹 3세의 비 위제니의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에 선보여 그랑프리 수상과 동

눈에 들었다. 위제니는 그 자리에서 ‘인도의 꽃’ 디너세트를 구입해 마침 박람회

시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주문을 받았다. 윈저성의 식탁을 장식한 디너 풀세트

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엘리제궁 만찬회 접대에 사용

는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라인으로 불리게 됐고, 이를 계기로 헤렌드는 마

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성립되자 헤렌드는 전설적인 황후 엘리

이센 등 유럽 명가마와 어깨를 견주는 동유럽 굴지의 명가마로 등극하게 된다. 빅

자벳에게까지 두고두고 사랑을 받았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도의 꽃’은

토리아 패턴의 인기는 1851년 이후 총 20여 가지 버전이 제작되었다는 사실로 뚜

지금도 헤렌드의 대표적 패턴의 하나다. 19세기 후반에는 아포니 백작이 귀빈 접

렷이 증명된다.

대를 위해 새로운 디너세트를 급하게 주문하는 바람에‘인도의 꽃’ 패턴을 단순

2001년에는 창업 175주년을 기념해 헤렌드 페인터 중 5% 미만인 마스터페인

화한 ‘아포니’ 디자인이 탄생했다. 즉흥적으로 탄생한 ‘아포니’는 이후 헤렌드 최

터의 손으로 1851년 버전을 충실히 재현한 175세트의 ‘빅토리아 히스토릭’으로

고의 베스트셀러 패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탄생해 많은 컬렉터의 환영을 받았다.

14 SUNDAY MAGAZINE


ISSUE

1 헤렌드를 대표하는 빅토리아 패턴의 자기들. 청조의 색회자기 분채(粉彩)를 닮은 디자인으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을 사로잡았다.

2, 5 헤렌드의 가장 전통적인 문양 ‘인도의 꽃’이 그려진 자기들. 마이센 인디언패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나폴레옹3세의 비 위제니가 합스부르크 황제 프란츠 요제프를 접대한 것으로 유명한 디자인이다.

3 인도의 꽃’을 단순화한 디자인 ‘아포니’라인. 헤렌드의 베스트셀러 패턴이다. 4,6 빅토리아패턴의 자기들.

2

3

5

4

6

SUNDAY MAGAZINE 15


ART

만약에 비틀스가 작가였다면 이런 걸 조각했을걸 현대미술계 스타 제프 쿤스의 스위스 개인전

세계 최대의 미술 장터인 스위스 아트 바젤

하이라이트를 보여줘 왔던 바이엘러 파운데

을 올해 찾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이션에서 그간의 미술사적 맥락의 연장선에

전시가 있다. 바젤에서 트램으로 20분 거리

서 내 작품이 조명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영

인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에서 5월 13일부터 9

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제

월 12일까지 열리고 있는 현대 미술계의 스타

프 쿤스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제작해 온 대표작 50여 점을 소개하는 자리다. 전시

제프 쿤스(Jeff Koons) 전시다. 피카소와 몬드리안, 자코메티 등 근

장은 쿤스의 대표적인 시리즈 ‘The New (새

현대 미술사 거장들의 전시를 주로

로움)’ ‘Banality (진부함)’ ‘Celebration

기획해 왔던 바이엘러 재단 에서 쿤스의 전시는 뜻밖

라인(Riehen)의 자연 속에 자리잡은 바

의 선택으로 보일 수 있

이엘러 재단의 고요함과 대조적으로 알록달

다. 하지만 2010년 타계

록 형형색색 쿤스의 작품들은 그간 쿤스의

한 바이엘러는 살아 생

작가로서의 행적을 자축하듯 화려하게 빛나

전 제프 쿤스의 작품에

고 있었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바이엘러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재단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잔디 위에

의 뒤를 이은 현 디렉터

특별히 7만여 개의 꽃으로 이루어진 공룡과

사무엘 켈러는 그의 의지

개를 합쳐놓은 듯한 동물 머리 모양의 조각 을 제작했다.

를 이번에 실현했다.

3 16 SUNDAY MAGAZINE

(축하)’의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구성됐다.

5월 11일 열린 프레스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이용한 마르셀 뒤샹

콘퍼런스에서 제프

의 작품세계의 연장선에서 일상생활에서 흔

쿤 스는 “모더

히 대하는 오브제들을 예술 작품으로 제작

니즘의

하는 쿤스는 팝아트를 가장 평범하고 또 의


ART

2

인 목표는 우리 내부의 삶이 밖으로 나가도록

1 바이엘러 재단 정원에 설치된 ‘Split-Rocker’

내버려두는 것이고, 그 과정은 우리를 둘러

“나는 비틀스가 작가였다면 만들었을 조각

싼 세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흥미를 갖는 과

들을 만들었다. 아무도 비틀스의 음악이 숭

soil, geotextile fabric,

정이며, 모든 것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나아

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음악

internal irrigation

가기 위한 은유다.”

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flowering plants,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다.”

1120.1x1181.1x1082㎝,

1980년부터 87년까지 그가 제작한 레디

1

게 밝혔다.

(2012), Stainless steel,

system, and live

Collection of the artist

메이드 시리즈인 ‘더 뉴’ 섹션에서는 단 플래

쿤스는 고고한 하이 아트가 대중에게 군

빈의 미니멀리즘과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

림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대중들이 친숙

드를 조합한 청소기 시리즈가 전시됐다. 미

하게 자신들 스스로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

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초현실주의와 다다, 그

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를

3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원했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제프 쿤스. © Jeff Koons

리고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대해 매료

되었던 그는 그림을 멈추고 그저 주위에서 쉽 ‘셀레브레이션’ 섹션은 쿤스의 그러한 바람을

© Jeff Koons

2 바이엘러 재단 전시장 풍 경. © Jeff Koons Photo : Mathias Mangold

Photo : Matthias Willi

4 ‘Balloon Dog(Red)’, (1994~2000), High

도적으로 저속하기까지 한 형태로 끌어내리

게 발견할 수 있는 오브제들을 사모으면서

가장 잘 담아낸 곳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조

면서 ‘키치의 황제’라는 자극적인 별명까지

이들을 이용한 작품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

각 시리즈 작품인 풍선 강아지(Ballon dog),

얻었다.

에게 청소기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공

행잉 하트(Hanging Heart), 달 (Moon) 등

게다가 경매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는

유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는

의 조각 작품들과 사진을 캔버스에 투사해

그의 작품 가격은 그를 “별 볼일 없으면서 미

보다 복합적인 오브제였고, 그래서 강한 존

팝아트적인 경쾌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회화

collection, © Jeff Koons

작품들이 전시됐다.

Photo: Jeff Koons

술시장의 투기 바람에 안겨 비싸져 버린 작가” 재감을 지닌 사물로 새롭게 인식됐다. 라는 악명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 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들을 통해 예술에는 상하관

“당시 나는 시각적으로 매우 강한 임팩트를

대표작인 풍선 강아지(Ballon dog)에 대

가지면서 동시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담

해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는 매우 아름다

고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또 레디메이

운 사물이다. 반사되는 재료를 이용해 만든

계가 없다는 것과 어떤 절대적인 잣대가 없

드를 이용해 일종의 지적인 대화를 던질 수 이 오브제는 보는 사람들을 비춤으로써 이

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예술작품에 절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한시적으로 존재

들 존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생각

대적인 판단 기준은 작품과의 거리를 만들고

하는 사물에 강한 시각적 존재감을 부여

과 야망, 욕망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자유로움을 저해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오브

한다.”

제들이 영원을 일깨운다고 생각했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세 가지 시리즈 의 의미와 제작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 들려주었다.

흔히 볼 수 있었던 싸구려

“나는 내 자신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내 스

도자기 소품들을 큰 규

스로를 발견하는 이상의 그 무언가를 원했

모로 제작한 1988년

다.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방법에

도의 ‘바날리티’ 시리

대해 배우게 되었다. 나에게 예술의 궁극적

즈에 대해서는 이렇

color coating, 307.3x363.2x114.3㎝, European private

Studio, New York

“이 전시장에 진열된 내 작품들은 비 어 있다. 이 작품들에는 창작 과 제작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가정집에서

steel with transparent

이렇게 덧붙였다.

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신념이 무엇인

chromium stainless

4

많은 생각과 노력이 들어 있지 만 궁극적으로 그 안에 예술은 없다. 예술은 관람자들 속에 있다.” 바젤(스위스) 글 최선희 중앙SUNDAY 매거진 유럽통신원 사진 바이엘러 파운데이션 SUNDAY MAGAZINE 17


INTERVIEW

일단 Who Are You 몇 마디 나누고 카메라 뒤에 숨어 기다린다 피사체가 몰입할 때를 : 스타 찍는 스타 포토그래퍼 홍장현

18 SUNDAY MAGAZINE


INTERVIEW

“사진은 누구를 찍느냐가 중요하다.” 패션 포토그래퍼 홍장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그가 찍은 사진이 좋다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찍은 피사체가 좋았다는 말이다. 요즘 대세라는 이 포토그래퍼의 말은 겸손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이효 리, 배용준, 빅뱅, 조인성, 원빈, 강동원…. 국내 최고 스타들의 내밀한 표정과 몸짓이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바 꿔 말하면 수많은 스타가 그를 지목했다는 얘기다. 패션지는 “홍장현과 촬영하자”면서 스타를 섭외한다. 명 품 브랜드들은 제품 촬영을 맡기고 그의 의견을 묻는다. 최근엔 대중적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올 초 가수 이효리와 함께 ‘유기견 입양 돕기 사진전’을 연 것이 계기가 됐다. 최근엔 케이블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그야말로 스타보다 더 유명한 사진작가가 됐다. 글 박지호 ‘아레나’ 피처디렉터, 사진 홍장현

-셀레브리티만큼 유명해 졌다.

“유명세를 타고 싶진 않다. 사진작가가 대중을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사진으로 나를 보 여주고 사진에 대한 반응을 들으면 된다. 방송 출연도 (이)효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사진으로는 얼 마든지 응원하겠다고. 방송은 구색 맞추기에 이용되는 듯한 느낌이 있다.”(*그는 케이블채널 온스타일의 프로그램 ‘이효리의 소셜클럽 골든12’에 출연 중이다. 이효리와 그의 친구들이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놀아 보자’며 진행하는 소셜 프로젝 트 프로그램이다.)

-어쨌거나 스타와의 작업으로 유명해진 거 아닌가.

“내 경력의 큰 전기를 만들어준 건 사실이다. 2006년 패션지 화보 촬영 때 이효리와 작업하면서 의뢰가 3 배 이상 늘었으니까. 그냥 연예인 화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타를 잘 찍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배우나 가수 는 이미 대중에게 각인된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살리면서 패셔너블하게 만드는 게 만만치 않다. 패션모델을 잘 찍기는 오히려 쉽다.” -작업은 어떤 식으로 하나.

“억지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뽑아낸 감정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다. 방송이나 매체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처럼 사진가들이 요란하게 작업하는 건 아니다. 나는 몇 마디 나누고 는 카메라 뒤에 숨는다. 때를 기다리는 거다. 꼭 필요할 때만 조명 안으로 직접 들어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의견을 나눈다. 피사체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사진가는 인성이 좋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패션 사진은 상업과 예술 사이의 경계에 있다. 혹 예술적 평가라든지, 아쉬움은 없나.

“난 내 사진이 실린 잡지를 통해 반응을 받는다. 그건 배우들이 연기할 때 느끼는 것 이상의 짜릿함이다.” SUNDAY MAGAZINE 19


INTERVIEW 박지성도 에인트호번을 거쳐 맨유 갔듯이  몸값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그가 최근엔 또 한 가지 성과를 이뤘다. 한 국 ‘토종’ 포토그래퍼 최초로 파리의 사진 에이전시인 윕 에이전시(Wib Agency)와 계약한 것이다. 패션 모델들이 국제적인 모델 에이전시와 계 약해 뉴욕·파리·런던·밀라노를 무대로 활약하는 것처럼, 그도 패션의 중 심에 자신의 사진을 직접 알릴 수 있게 됐다. 윕 에이전시 홈페이지엔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한스 페러(Hans Feurer)의 이름이 그의 이름과 나란히 놓여 있다. 196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 보그 등을 중심으로 활약한 일흔 둘의 백전노장이다. -세계적인 작가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파리에서 20년 넘은 에이전시다. 뉴욕·런던·밀라노에도 지사가 있다. 평소에 사진 시안을 찾기 위해 들여다보던 곳이다. 거기 내 이름이 올랐 으니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 -어떻게 계약이 이뤄졌나.

“올해 초 국내 패션지 촬영을 뉴욕의 현지 스태프와 진행하면서 연이 닿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러고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게 다인가.

“4년 전쯤 대학생들 앞에서 특강할 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의 준비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길을 찾기는 쉽지가 않았다. 맨땅 에 헤딩하고 싶지도 않았고.” -보통은 맨땅에 헤딩해서 성취했다고들 하는데.

“외국에서도 연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다. 누구의 제자다, 인맥이 어떻 다…. 오히려 한국에서 헝그리 정신이 더 통하는 것 같다. 물론 한국에도 해외 유학파가 갑자기 나타나지만 예전보다 그런 건 많이 사라졌다. 하지 만 해외 무대에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취약점들이 있다.” 1

-어떤 건가.

“모델이 약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한국 모델을 찍었는데 해외 에선 한국 모델을 잘 모른다. 사진은 누가 찍느냐만큼 누구를 찍느냐가 중요하다. 톱 모델이 오케이한 작가라는 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운 좋게 도 최근 세계 모델 랭킹 1위인 라라 스톤을 촬영했다. 전 세계에서 통하 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는 뜻이고, 라라 스톤보다 아래의 모델은 다 찍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 1~2년은 좋은 모델을 촬영해 포트폴리오 를 업그레이드할 생각이다.” 그는 파리 진출을 더 큰 무대로 가는 교두보라고 했다. “업계에서 아시 아 시장에 관심이 많다. 구단이 유니폼 파는 부수효과를 노리고 아시아 선수들을 데려가는 것처럼 에이전시가 나를 데려간 것도 전략적 판단일 수 있다”면서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는 상관없다고 했다. “오히려 이 2

3

용당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예를 들었다. “박지성 선수를 생각하면 된다. 처음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 지 않았다. 네델란드 에인트호번에서 뛰다가 빅리그로 옮기지 않았나. 이 기회를 이용해 나도 5년 안에 더 큰 무대로 옮기면 된다.”

4 20 SUNDAY MAGAZINE

5

1 모델 송경아. 바자 코리아(2008) 2 빅뱅의 지드래곤. 싱글즈(2011) 3 가수 이효리. 코스모폴리탄 코리아(2010) 4 배우 김혜자. 바자 코리아(2009) 5 빅뱅의 탑. 엘르 코리아(2009)


INTERVIEW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장인어른, 김중만 그는 고등학교 시절 “멋있어 보여서” 사진을 시작했다. 운동을 했지만 그저 그런 선수가 될 것 같아 대안으로 선택한 게 사진이었다. “원래는 체육을 전공하려고 테니스를 했는데, 고3이 되니까 아버지께서 국가대표 못 될 거면 관두라고 하시 더라. 그러곤 멋있을 것 같다고 사진 책을 가져다 주셨다. 아버지가 악기도, 그림도 좋아하셨던 좀 ‘노시는’ 분 이다(웃음). 그때 한눈에 꽃혀버렸다. 화려하고 멋지니까 일종의 ‘겉멋’이 들어 시작했던 거다.” -출발은 싱겁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도 생각했지만 스튜디오에 어시스턴트로 들어갔다. 아침 8시에 나가서 새벽 3시까지 일하면서 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았다. 그래도 확신이 있어 밀고 나갔는데, 작가로 독립하고 나서 힘들었다. 2 년 동안 내가 지금 도박을 하고 있구나, 이렇게 찍은 사진을 세상이 알아줄까 고민했다. 그렇게 찍고 또 찍으면 서 결혼도 했고,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이런 과정은 다른 패션 포토그래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에겐 좀 더 특별한 점이 있는데, 그가 사 진계의 ‘로열 패밀리’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하는 그가 ‘로열’ 소리를 듣는 건 장인 덕분이다. 그의 장인은 사진작가 김중만이다. 최근 김중만 작가의 아들이 한국에 들어와 사진 공부를 시 작하면서 ‘패밀리’의 수도 불었다. 그는 대화 중에 장인어른이란 호칭 대신 ‘선생님’이란 말을 썼다. “에이전시 계약은 아직 선생님께 말씀 못 드렸다”는 식이다. -평소에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나.

“장인어른이기 전에 내겐 사진 스승이다. 얼마 전 책을 기획하신다며 사진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40장을 보 여드렸는데 한 장 빼고 좋다고 하신 게 거의 처음 들은 칭찬이다. 평소 칭찬을 거의 안 하시지만 늘 사진에 대 해 고민하시고, 내게도 ‘나중에 너의 작업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신다.” -김중만 작가가 말하는 ‘나중에 너의 작업’은 어떤 건가.

“선생님은 나와는 사진의 출발점이 다른 분이다. 패션 사진 작업도 하셨지만 그건 선생님 작품 세계의 일부 다. 그래서 내게도 패션 외의 작업을 고민해 보라는 말씀인데, 난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한 셈이다. 끝까지 패션 으로 갈 생각이니까.” -패션계는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곳이다.

“마흔 살만 넘어도 젊은이들에게 밀려 일이 줄어드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작가들이 사진의 근원을 찾겠다 면서 다른 분야로 옮겨간다. 외국에선 일흔 넘은 작가들이 명품 화보를 찍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도 일흔 살 이 돼도 패션 사진을 찍을 거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피사체를 보는 눈도 좋아진다. 그 눈 으로 평생 패션 사진을 찍고 싶다.” SUNDAY MAGAZINE 21


REVIEW & PREVIEW

지구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뜨거운 춤이 온다 ‘파이어 오브 아나톨리아’ 오리지널 댄스팀 내한공연 6월 7~9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

르는 터키의 민속춤과 발레, 현대무용 등 장

은 터키 영화의 제목은 ‘원스 어폰 어 타임

르를 망라한 다양한 춤이다.

인 아나톨리아(Once Upon A Time In

무대는 태초의 불로부터 시작한다. 불멸의

Anatolia)’였다. 어렵고 길고 지루한 예술영

산에 피어오른 불꽃은 모든 생명체에 축복을

화의 내용은 차치하자. 터키 감독은 “옛날 옛

내린다. 신성한 몸짓의 언어가 불길 속에 젖

적에…”라고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 영화

어드는 가운데 아나톨리아인, 프로메테우스

제목을 지었는데, 하필 이야기의 무대가 아

는 인류에 불을 가져다줬다. 불의 제전을 통

나톨리아다.

에게 신의 형벌이 내려진다. 모든 악이 담긴

국가대표급 공연도 아나톨리아를 무대로 삼

판도라의 상자. 악이 지배하게 된 인간 세상

았다. 터키의 열정과 신화를 담은 ‘파이어 오

엔 곧 선과 악의 전쟁이 벌어진다. 웅장한 북

브 아나톨리아(Fire of Anatolia)’다. 전 세

소리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치열한 전쟁의 군

계 투어 10년 만에 85개국에서 2000만 명이

무가 극을 절정으로 이끌어 간다.

관람한, 터키가 국가 브랜드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는 무용 공연이다.

터키의 민속춤 제이베크(Zeybek) 터키 서부에서 전해진다. 남자들만 추는 춤으로 원형으로 서 있다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팔은 어깨 높이로 올리는 동작으로 이뤄진다. 호론(Horon) 흑해 연안의 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몸을 떨듯 춤춘다. 할라이(Halay) 중앙 아나톨리아의 춤으로 반원형으로 서서 서로의 손이나 어 깨를 잡고 스텝과 방향을 조절하며 춘다. 차이다 츠라(Cayda cira) 여자들끼리만 촛불을 들고 추는 서부의 민속춤. 보통 결혼식 전날 밤 신부의 집에서 춘다. 22 SUNDAY MAGAZINE

해 생명이 꽃을 피우지만 이내 멋대로인 인간

그리고 6일 한국에 첫선을 보이는 터키의

몸짓으로 풀어낸 신화의 울림은 상상 이상 이다. 특히 전통춤에 따라 달라지는 화려한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에서 유래

의상과 둥둥둥 무대를 호령하는 북소리, 40

한 아나톨리아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 ‘동

여 명의 무용수가 무대를 오르내리며 펼치는

방의 땅’을 뜻한다. 터키 영토의 97%를 차지

웅장한 군무는 터키 역사의 깊이만큼이나 깊

하는 아시아의 서쪽 끝 반도다. 유라시아 대

고 역동적이다.

륙을 동서남북으로 연계하는 이곳은 오래전

동서양이 만나는 터키의 신비로움을 잘

부터 교통의 요지였고, 자연스레 문명이 꽃

활용한 ‘파이어 오브 아나톨리아’ 공연은

을 피웠다. 그리스·로마를 비롯해 이집트에

1990년대 말 한 개인의 프로젝트에서 시작

맞선 히타이트 문명까지 다채로운 문명의 토

됐다. 지금까지 무용단을 이끌면서 공연을

대가 된 아나톨리아에서 터키의 오랜 역사는

총감독하는 무스타파 에르도안이다. 앙카라

시작됐다.

의 빌켄트 대학에서 민속춤을 연구하던 그

공연 속엔 고대문명의 신화가 버무려져 있

는 99년 ‘Sultans of Dance’라는 프로젝트

다. 이를 표현하는 몸짓은 3000여 가지에 이

를 계획했다. 지역 신문에 무용수를 모집하


REVIEW & PREVIEW

반 세기 이어온 창작 오페라의 맥 국립오페라단 창작 오페라 갈라 6월 7~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문의 02-586-5284

‘미미’나 ‘피가로’가 아닌 ‘춘향’과 ‘호동왕자’를 오페라 무대에서 만난다. 1962년 창 작 오페라 ‘왕자 호동’으로 창단공연을 하고 50년간 오페라의 보급과 토착화를 위해 힘 써온 국립오페라단이 창단 50주년을 맞아 총 12편의 창작 오페라를 한자리에 펼쳐내 며 대한민국 창작 오페라 50년사를 총결산한다. 이틀에 걸쳐 펼쳐지는 ‘창작 오페라 갈 라’ 무대는 각각 다른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7일 공연은 고구려인의 용맹한 기개가 살 아 움직이는 ‘고구려의 불꽃-동명성왕’(박영근·2002) 서곡으로 힘차게 시작해 최초의 창작오페라 ‘춘향전’(현제명·1950) 등이 재현된다. 8일 공연은 또 다른 ‘춘향전’(장일 남·1966), ‘자명고’(김달성·1969), ‘봄봄’(이건용·2001), ‘아랑’(황호준·2009)까지 한국 인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은 레퍼토리가 펼쳐진다. 서울대 김덕기 교수와 연세대 최승한 교수가 지휘를, 총연출은 원로 성악가 박수길이 맡는다.

는 광고를 내고 750명의 지원자 중 90명을 선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오페라단

발했다. 1년6개월 동안 이들을 엄격한 관리 하에 훈련시키면서 각기 다른 전공을 가진 무용수들이 발레, 현대무용, 다양한 민속춤 을 익히게끔 했다. 넓은 아나톨리아 반도 곳 곳의 춤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됐고, 2001년

한 무대서 만나는 한국 춤 명인들 명작명무전 6월 9일 오후 5시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문의 02-3011-1720

첫 공연이 열렸다. 수개월 전에 티켓이 매진되 면서 터키 국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끈 공 연은 이듬해 전 세계 투어에 나섰다. 그야말로 ‘쇼’라 불릴 만큼 강렬한 에너지 가 넘치는 공연은 기네스북에 오른 진기록도 갖고 있다.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춤’. 터키 안탈리아 남부에 있는, 2000년 전 만들 어진 아스펜도스 극장에서 2009년 열린 무 대에서 1분에 241번 스텝을 밟는 춤을 선보 였다. 초당 네 번 발을 구른 이들의 춤은 인간 이 음악에 맞춰 출 수 있는 가장 리듬감 넘치

한국 춤의 산증인인 올해 여든다섯의 동갑내기 춤꾼 이매방(왼쪽)과 김백봉(오른쪽)이

는 춤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 무대에 선다. 목포 권번 출신의 이매방은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요, 최승희의 제자

또 다른 기록은 ‘가장 많은 관객이 관람한

인 김백봉은 부채춤과 화관무를 한국의 상징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고령의 두 대가가 함

공연’이다. 흑해 인근 에레클리 지역에서 동

께 춤추는 시간은 5분, 나머지 춤사위는 이매방의 부인인 김명자와 김백봉의 딸인 안병

시에 40만 명이 스탠딩으로 공연을 관람하

주가 이어간다. 이들 한국 춤의 대가를 위한 헌정 무대에는 ‘화관무’와 ‘굴레’의 김말애,

는 기록을 세웠다. 이번 공연은 2012 여수 세계박람회에 참가

‘승무’의 임이조, ‘숨’의 김매자, ‘태평무’의 정재만, ‘살풀이’의 김명자, ‘입춤’의 국수호, ‘부채춤’의 안병주, ‘진쇠춤’의 조흥동 등 한국 춤의 명인들이 총출동한다. 원장현(대금),

하는 터키가 국가 홍보의 일환으로 마련했으

최종관(아쟁), 김귀자(가야금) 등 당대의 고수들이 흥을 돋운다. 공연을 기획한 진옥섭

며 터키 대사관이 후원한다.

예술감독은 “한국 무용의 정통을 제대로 맛볼 시간”이라고 자신했다.

글 홍주희 honghong@joongang.co.kr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명작명무전

사진 제이에스아이 파트너스 SUNDAY MAGAZINE 23


BOOK

업실 서가에서 처음 만났다. 1995년 출간된 『말러 앨범』의 초판이었다. 사진의 역사는 음악의 역사에 비할 수 없이 짧아 우리가 익 숙한 작곡가를 풍부한 사진으로 만나기란 어 렵다. 말러의 경우 비교적 많은 사진이 아직 까지 남아 있어 우리는 그를 직접 만난 사진 가의 시선에 동참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 2010년과 2011년은 말러가 태어난 지 150 년, 사망한 지 100년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 해 캐플런재단은 초판 이후 수집한 자료들을

딱! 1000부 한정판으로 결실 맺은 지독한 ‘말러앓이’

숨은 책 찾기 <7> PHONO의『말러 앨범』

추가한『말러 앨범』의 개정판을 지난해 출 간했다. 사진뿐 아니라 말러의 뮤즈였던 부인 알마 말러가 말러의 동료 알프레트 롤러에게 의뢰한 글과 전 작품 목록, 생애 연표, 풍부한 사진 캡션이 더해져 말러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의 한국어판을 출간하고 싶었 다. 에이전시를 통한 몇 차례의 가격 협상 끝 에 우리는 출간을 포기했다. 여러 번 계산해 보아도 우리 음악책 시장의 규모에서는 우리 가 구상한 수준의 책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좋은 개정판이 나오길 바라고 출간되면 꼭

사랑하는 일을 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서 아메리칸 심포니를 지휘해 말러의 ‘부활’ 구입하겠노라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출간하 하나는 그 일에 뛰어들어 그 일을 업으로 삼

을 연주한 것이다.

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일로 밥을 벌며 그

호사가가 펼친 이벤트 정도에 그칠 수도 있

제안이 왔다. 한국의 상황이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어디 그리 녹

었던 캐플런의 말러 연주는 이후 요청이 이어

지 몰랐다며 재단에서 받는 로열티를 감해주

록하던가. 문학을 꿈꾸던 청년 가운데 어떤

지며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는 본격적인

겠다는 것이었다. 책을 내기로 했다.

이는 글을 쓰며 밥을 벌다가 문학에는 끝내

연구재단(Kaplan Foundation)을 설립해

‘샘이 깊은 물’ 편집차장이었던 말러리안

발을 담그지 못하거나, 호기롭게 문학에 투

전 세계에 흩어진 말러에 대한 자료를 모두

임선근씨가 번역을, 품위 있는 책꼴로 이름

신했으나 밥을 벌지 못해 결국에는 문학을

모았고, 말러에 대한 광범위한 저술로 세계적

난 디자이너 이영미씨가 디자인을, 고급 사진

떠나는 경우가 흔하다.

인 명성을 얻었다. 줄리아드음대 야간학부의

인쇄 영역에서 뼈가 굵은 로얄프로세스의 신

교수가 되었고, 하버드대·옥스퍼드대 등 유

임호 전무가 색 분해, 제판 및 인쇄를 담당해

수의 대학에서 강의했다.

주었다. 여러 차례의 판형 제작, 용지 테스트

그러나 여기 돈을 벌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게 된 한 사내의 이야기가 있다. 길버 트 캐플런이 그의 이름이다. 연주가 끝났음을 알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

지휘자로서도 세계 50개 이상의 오케스트

와 시험 인쇄를 거쳐 마침내 매권 한정판 고

라의 초청을 받아 말러 교향곡 제2번을 전문

유번호가 날인된 한국어판『말러 앨범』이

소리에도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적으로 지휘해 갈채를 받았다. 그가 지휘한 벼락 같은 감동이 그를 꿰뚫고 지나갔다. 명

세상에 나왔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제2

지난 2월 13일 저녁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

지휘자 레오폴트 스토콥스키가 이끄는 아메

번(코니퍼, 1987·1998)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

인 풍월당에는 100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

리칸 심포니가 연주한 구스타프 말러의 제2

이 판매된 말러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됐다. 빈

정신과 전문의 박종호 대표의『말러 앨범』

번 교향곡 ‘부활’을 만난 것이다.

필하모닉을 지휘한 음반(DG, 2002)도 발매

강의 ‘말러의 회상’ 자리였다. 모두 사진 속

이래로 말러 제2번 교향곡의 음반 베스트셀

말러의 발걸음을 좇으며 음악에 취했다. 이로

그는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에

24 SUNDAY MAGAZINE

기 힘들겠다는 답을 보냈다. 재단에서 다시

서 권위 있는 금융 잡지로 자리 잡은 ‘인스티

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5년에는 성남 아

써 『말러 앨범』에는 또 하

튜셔널 인베스터 매거진’을 설립해 성공한 후

트센터의 개막 기념공연에 초청돼 KBS교향

나의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왔던 꿈을 실현한다. 악단을 지휘해 역시 ‘부활’을 연주했다.

이다.

1983년 그때 그 연주가 벌어졌던 카네기홀에

글 최재균 포노 대표, 사진 최정혜

나는 이 책을 사진가 주명덕 선생님의 작


GUIDE

금주의 문화행사 영화

전시

공연

클래식

다른 나라에서

The Art on Your Wall

2012 한팩 솔로이스트

첼리스트 조영창 리사이틀

감독: 홍상수

기간: 5월 25일~6월 23일

기간: 6월 8~9일, 15~16일

일시: 6월 7일 오후 8시

배우: 이자벨 위페르, 유준상

장소: 서울 서초동 artclub1563

장소: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문의: 02-585-5022

문의: 02-3668-0007

문의: 02-720-3933

빚에 쫓겨 휴양지를 찾은 영화과 학생의 시

19세기 후반 예술가의 장인정신을 되찾기

현대무용을 비롯한 한국 춤, 발레, 모던 힙

세계적 첼리스트 조영창(독일 에센 폴크

나리오에는 세 명의 안느(이자벨 위페르)

위해 영국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와 사회

합 등 여러 무용 장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방 국립음악대학 교수) 이 10년 만에 국내

가 등장한다. 첫째 안느는 잘나가는 감독,

비평가 존 러스킨이 중심이 되어 진행한

보이는 8명의 무용수가 한 무대에 오른다.

리사이틀을 갖는다. 그의 스승이었던 첼

둘째 안느는 한국 남자와 몰래 만나는 유

‘Arts & Crafts’ 운동을 기리며 기획한 전

김미애·이우재·김설진·안영준·최진욱·이

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서거 5주년을

부녀, 셋째 안느는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시. 6인의 현대미술 작가가 디자인한 벽지

은경 등 6명의 중견 춤꾼들과 지난해 ‘한

맞아 열리는 기념 공연이다. 이번 리사이

빼앗긴 이혼녀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

작품을 통해 Arts & Crafts 운동을 현대

팩 솔로이스트’ 공연 때 호평을 받았던 김

틀에서 조영창은 베토벤의 ‘첼로와 피아

페르와 감독 홍상수의 인연이 눈에 띈다.

적으로 재해석한다.

용걸(사진)·예효승 등 2명이 나선다.

노를 위한 변주곡’ 등을 연주한다.

블루 발렌타인

천루오빙전 ‘Image of Time’

2012 아세안축제

서울시향의 러시아 시리즈 2

감독: 데릭 시엔프랜스

기간: 5월 25일~6월 29일

기간: 6월 6~10일

일시: 6월 8일 오후 8시

배우: 라이언 고슬링, 미셸 윌리엄스

장소: 서울 반포동 샘터화랑

장소: 여수 엑스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문의: 02-514-5122

디큐브파크 등

문의: 1588-1210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의대생 신디(미셸

중국의 대표적인 추상화가 천루오빙의 개

문의: 02-2287-1135

서울시향이 준비한 이번 러시아 시리즈에

윌리엄스) 앞에 다정한 남자 딘(라이언 고

인전. 천루오빙의 작품은 동양적 형태와

브루나이·캄보디아·인도네시아·베트남

서는 프랑스 출신 젊은 지휘자 스테판 드

슬링)이 나타난다. 그에게 사랑을 느낀 신

서양적 색채가 한 화면에 담겨 극도로 단

등 아세안 10개국의 전통 공연, 문화체험

네브의 지휘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

디는 딘과 결혼을 선택하지만 시간이 흐

순한 형태와 화려한 색채가 어우러진 묘

이 한자리에서 펼쳐진다. 6일에는 여수 엑

주곡 1번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이

르면서 점점 현실적인 문제들로 지쳐간다.

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다. 색채와 색채 사

스포, 8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

연주된다. 피아노 협연자로는 하마마쓰

현재 할리우드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

이에서 만들어지는 율동감, 빛을 통한 신

서 이어지며 9일과 10일 본 공연은 신도림

콩쿠르 우승자인 알렉산드르 가브릴류크

는 두 주연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비로움, 그리고 형태적 편안함이 있다.

디큐브시티 내 디큐브파크에서 열린다.

가 나선다.

THIS WEEK CHART 베스트셀러 순위 책명

자료=교보문고

영화 예매

작가·출판사 순위 영화명

자료=맥스무비

공연 예매

자료=인터파크

주연 순위 공연명

클래식 음반

자료=풍월당

출연 순위 음반명

음반사

01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스님·쌤앤파커스 01 맨인블랙3

윌 스미스·토미 리 존스 01 뮤지컬 위키드 오리지널 내한공연

02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 고도원·해냄출판사 02 차형사

강지환·성유리·이수혁 02 연극 옥탑방 고양이

박성훈·장지우·윤정빈 02 실비우스 레오폴트 바이스

임수정·이선균·류승룡 03 뮤지컬 시카고

인순이·최정원·윤공주 03 에드워드 엘가:첼로 협주곡 외

03 무지개원리

차동엽·국일미디어 03 내 아내의 모든 것

-

01 브루흐: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집 ARS Glossa CHANDOS

04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마이클 샌델·와이즈베리 04 스노우화이트 앤 더 헌츠맨 크리스틴 스튜어트 04 뮤지컬 캐치미 이프유캔 엄기준·규현·김정훈 04 아스투리아나:스페인과 이탈리아 노래 05 정의란 무엇인가 06 은교

마이클 샌델·김영사 05 미확인동영상:절대클릭금지 박보영·주원·강별 05 연극 웨딩스캔들 박범신·문학동네 06 어벤져스

07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칼 팔레머·토네이도 07 돈의 맛 08 십자군 이야기3

시오노 나나미·문학동네 08 코리아

서현철·남문철·최덕문 05 슈만 & 브람스 피아노 사중주 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06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 김도현·김재범·성두섭 06 쇼팽:왈츠 김강우·백윤식·윤여정 07 뮤지컬 광화문 연가 하지원·배두나 08 연극 라이어1탄

ECM Sony

Harmonia Mundi France

윤도현·조성모·리사 07 지네트 느뵈, 요셉 하시드 초기 레코딩 Testament 김원식·공명·김연철 08 나의 사랑 나의 탱고

Warner Music Korea

법륜·휴 09 다른나라에서

이자벨 위페르·유준상·정유미 09 뮤지컬 모차르트!

박은태·장현승·최성희 09 바흐:브란덴부르크 협주곡

Tafelmusik

10 그리스인 조르바 나코스 카잔차키스·열린책들 10 블루발렌타인

라이언 고슬링·미셸 윌리엄스 10 뮤지컬 친정엄마

나문희·김수미·이혜경 10 드보르자크:피아노 오중주

CHANDOS

09 스님의 주례사

SUNDAY MAGAZINE 25


GALLERY

1

일제 강점기 천재 화가의 살아간 흔적

일제 강점기인 1930~40년대, 우리 고향 산천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원시적 생명력을 풍요로운 색감으로 그 려낸 작가가 이인성(1912~50) 화백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열 살 때에야 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3학년 때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고, 졸업 후에는 중학교 진학 대신 대구의 수채화가 서동진 밑에서 그 림을 배운다. 열일곱이던 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그늘’로 입선하고, 스무 살에는 특선을 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인성은 유럽의 야수파, 후기인상파, 표현주의 등을 파고들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다. 44년까지 꾸준히 선전에 출품해 10여 차례가 넘 게 입선과 특선을 반복하며 ‘천재화가’라는 명성을 얻지만, 총기 오발 사고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이번 전시는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두 달여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

동안 서울과 대구에 사료 수집공고를 내고 흩어져 있던 자료를 수집했다. 이를 중심으로 여섯 개의 소주제 아래

5월 26일~8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

학술행사도 마련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연계 행사도 많다. 관람료는 없다.

문의 02-2188-6000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 가을 어느 날(On an Autumn Day)’(1934), 캔버스에 유채, 96x161.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2 ‘해당화(Sweet Brier Flowers)’(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 개인 소장

3 ‘카이유(Kaiyu)’(1932), 종이에 수채, 78x57.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2

26 SUNDAY MAGAZINE

3


PORTRAIT ESSAY

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

‘코리안 좀비’ 정찬성 “저는 세계 종합격투기 무대인 UFC에서 ‘코리안 좀비’로 불립니다. 맞고 맞아도 전진합니다. 쓰러질 듯하다가 일어섭니다. 뼈가 부러질 위기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니 ‘좀비’라고 환호합니다. 하지만 어릴 땐 심한 약골에다 내성적이었습니다. 혼자서는 짜장면 한 그릇도 못 시켜 먹을 정도로 소심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도 나아질 기미가 없자 참다 못한 이모님이 합기도 도장으로 끌고갔습니다. 운동이 저의 모든 것을 다 바꾸었습니다. ‘코리안 좀비’ 근성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SUNDAY MAGAZINE 27


CAR

27~57년식 노장들의 질주본능 움직이는 스포츠카 박물관 세계적인 올드카 경주 이탈리아 ‘밀레 밀리아(1000 Miglia)’

그것은 움직이는 스포츠카 박물관이었다. 운

티 백작은 1600km가 1000마일이라는 점

전하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 역사적인 자동

에 착안해 경기 이름을 ‘밀레(1000) 밀리아

차 경기에 참가한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Miglia·이탈리아어로 마일)’로 붙였다.

1927년부터 57년까지 30년 동안 제작된

일반 도로에서의 자동차 경주는 위험성과

스포츠카 375대까지만 참여할 수 있는, 세계

소음, 먼지 등의 측면에서 부정적이었지만, 당

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의 빈티지 카 경주

시 무솔리니는 대단한 스포츠광이자 드라이

밀레 밀리아(1000 Miglia) 얘기다. 올해는 5

버였고 파시스트당의 당수이자 서기장이었

월 17일부터 19일까지 2박3일간 열렸다. 그 현

던 아우구스토 투라티는 경주를 허가했다.

장을 다녀왔다.

경주의 대흥행에 힘입어 27년 3월 26일 첫 공식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관중석 충돌

28 SUNDAY MAGAZINE

밀레 밀리아의 전설은 1926년 말 시작됐

사고 및 전쟁 등으로 중단과 재개가 반복됐

다. 자동차와 자동차 경주에 열정을 가졌던

다. 결국 스피드 경기 대신 정해진 시간에 가

네 명의 이탈리아 젊은이(아이모 마지 백작

장 정확하게 왕복하는 차가 우승하는 방식

과 그의 친구 프랑코 마조티 백작, 렌조 카스

으로 변경됐다. 올드카만 참여하는 만큼 93

타녜토, 스포츠 신문 기자 조반니 카네스트

년부터 전자기기의 사용은 금지됐고 수동 스

리니)가 고향인 브레샤부터 로마를 왕복하

톱워치의 사용이 의무화됐다.

는 1600km의 일반 도로 ‘스피드 경주’를 기

밀레 밀리아에 참여하는 차들은 엄격한 심

획한 것이다. 미국을 다녀온 적이 있던 마조

사를통해선정된다.이중에는오스카(OSCA)


CAR

오래된 자동차들만의 경주인 밀레 밀리아 경기가 열리는 이탈리아 브레샤 시의 두오모 광장에 모인 올드카들.

나 오엠(OM), 스탄겔리니(Stanguellini) 등

에 브레샤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전

참여한다.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올드카들

경기 초반에 우승한 모델이지만 생산 중단된

세계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자동차 매니어들

은 쉴 새 없이 들어왔고 광장 가장자리는 구

차들도 있다. 밀레 밀리아에서 가장 많이 우

로 거리는 활기찼다. 길거리에는 밀레 밀리아

경 온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승한 알파 로메오, 스포츠카의 여왕 페라리, 의 로고와 스폰서 로고가 프린트된 깃발이

없었다. 차를 몰고 광장으로 들어오는 드라이

최고 스피드를 자랑하는 메르세데스 벤츠

꽂혀 있었다. 가게 진열장도 밀레 밀리아 행사

버들의 표정은 자부심으로 가득했고, 바리

(1955년 스털링 모스가 SLR을 타고 10시간

에 관련된 상품이나 그림 등으로 잔뜩 장식돼

케이드 뒤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에

7분48초의 기록을 세웠다), 재규어, 1940년

있었다.

가득 찬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평균시속 166.7km의 신기록을 낸 BMW, 50

메인 및 공식 스폰서들은 광장 주변에 천

인증을 받은 드라이버들은 귀가 먹먹해질

년대 중반부터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불리는

막을 치고 참가자들과 초대손님들에게 휴식

정도로 엔진소리를 붕붕거리며 출전을 준비

포르셰, 그리고 이탈리아의 국민차 피아트

장소를 마련했다. 매년 월드 스폰서로 참여

했다. 자동차 매니어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등은 밀레 밀리아의 주인공들이다.

하는 스위스의 주얼리-시계 브랜드 쇼파드

곳곳에 주차된 올드카들을 구경하며 드라이

5월 15일에는 이번 경기에 참석하는 375

는 모든 드라이버에게 4000유로(약 600만

버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대의 올드카들이 밀레 밀리아의 공식 로고

원) 상당의 시계를 선물했고, 유명 남성 패션

했다.

(가장자리 회살표와 밀레 밀리아 글씨)를 만들어

브랜드 스테파노 리치는 점퍼와 장갑 등을 선

기네스북에 올랐다.

물했다.

오후 4시, 모든 참가자가 브레샤의 밀레 밀 리아 박물관에 집결했다. 피아트 자누시 폰

전설적인 빈티지 카들을 한꺼번에 볼 수

경기 전 등록된 자동차들은 1000마일을

테바소(FIAT Zanussi Fontebasso MM)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17일 새벽 밀라

잘 달릴 수 있는지 엔진과 기타 장비를 미리

를 몰고 참가한 이탈리아 드라이버 코라도 미

노에서 베네치아행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만

점검받고 출발 당일 아침에는 인증 이벤트에

누에게 참가 소감을 물었다. “올드카를 모는 SUNDAY MAGAZINE 29


CAR

것은 지난 역사와 문화를 되찾는 것과 마찬

가 함께 334번 차에 탑승했다. 자가토 디자인

2012년 밀레 밀리아 우승컵은 1933년형

가지입니다. 올드카를 운전할 때 느끼는 감

의 안드레아 자가토, 그리고 브레이크 제작으

알파 로메오 6C 1500을 타고 경기에 참여한

동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게

로 유명한 브렘보(Brembo) 회사의 회장 알

아르헨티나의 클라우디오 스칼리제와 다니

다가 밀레 밀리아에 참여할 수 있는 허락을

베르토 봄바세이도 281번을 달고 참여했다. 엘 클라라문트가 차지했다.

받았다는 것은 올드카를 소유한 사람들에

페라리의 대표 루카 디 몬테제몰로는 경기에

브레샤(이탈리아) 글·사진 김성희 중앙SUNDAY 매거진

게는 대단한 영광입니다. 저는 우승을 하느

참여하진 않았지만 반환점인 로마에서 참가

유럽 통신원

냐 마느냐에 상관 없이 이 경기에 참여했다

자들과 인사했다.

는 자체를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밀레 밀리아 경기에는 유럽 자동차 회

리아에 참여한 올드카들이 출발하기 시작했

사들의 대표들도 대거 참여했다. 피아트 회

다. 차들은 번호 순으로 한 대씩 약간 높이 설

장 존 필립 엘칸은 코 파일럿을 맡은 부인 라

치된 단 위에 잠시 올라갔다가 출발했다. 3일

비니아 보로메오와 함께 1952년에서 1954년

에 걸친 대장정이 시작

사이 제작된 피아트 8V를 타고 나왔다. 독일

된 것이다.

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보유한 독일 다임 러 그룹의 디터 제체 회장이 1954년형 메르 세데스 벤츠 300 SL W198-I에 탑승했다. 포 르셰 AG 최고경영자 마티아스 뮐러, BMW 이탈리아의 프란츠 융, 영국 재규어 브랜드 디 렉터 아드리안 홀마크 등의 얼굴도 보였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의 경쟁도 뜨거웠다. 독 일 아우디 수석 디자이너 울프강 에거와 이 탈디자인의 공동회장 파브리지오 주지아로 30 SUNDAY MAGAZINE

오후 6시30분, 코르소 베네치에서 밀레 밀


COLUMN

6~8월 ‘수퍼 쿨비즈’ 서울시 반바지 실험 정말 쿨할 수 있을까 스타일 # : 공무원 여름철 간편 출근복 논란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이런 배움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옷을 스 스로 입는다기보다 옷이 입혀진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남자들은 어렸을 땐 엄마가, 나이 들어서는 여자친구가, 이어서 아내가 입혀주 는 옷을 입는다. 아내마저 바빠지면 매장 직원이 감언이설로 남자의 옷을 입혀준다. 이런 보통 남자들이 입는 반바지라면 ‘추리닝’과 등산 바지부터 떠 오른다. 화보에 등장하는 ‘버뮤다 쇼츠’가 옷장에 있을 가능성은 거 의 없어 보인다. 포인트를 주는 양말 대신에 발목 위로 길게 올라간 희 고 검은 양말이 더해질 터다. 아무리 너그럽게 봐줘도 출근용으론 무 리다. 실용적이고 편하면 됐지 보이는 게 뭐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다. 하 지만 옷차림은 남의 눈에 의존하는 속성이 있어 나의 편안함·만족감 말 줄이는 데 일가견 있는 일본인들은 2005년 ‘쿨비즈(cool biz)’라

이 중요한 만큼 남의 시선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다. 더구나 소재가 얇

는 말을 만들었다. 쿨(cool)과 비즈니스(business)를 결합한, 시원하

고 맨살이 드러나는 여름옷은 더욱 시선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게 입는 간편 출근복쯤 되는 말이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시작한 ‘쿨

결국 남의 눈 신경쓰이고 안 입던 옷을 입는 게 외려 불편해 반바지

비즈’ 캠페인 성과가 좋았는지, 같은 해 겨울엔 ‘웜비즈(warm biz)’ 가 암만 시원해도 마냥 반가운 공무원이 많을 것 같진 않다. 2008년 가 생겼다. 지난해엔 ‘수퍼 쿨비즈’도 등장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여름 반바지·샌들을 허용한 대구시 서구청에서 1년 만에 슬그머니 반

원전 가동이 중단되면서 에너지 초긴축에 들어간 것이다.

바지가 사라진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쿨비즈는 한국에서도 여름 남성 패션의 키워드가 됐다. 올해는 ‘수

일단 서울시의 새로운 지침은 강제 사항은 아니다(5월부터 9월은

퍼 쿨비즈’도 바다를 건너왔다. 서울시가 최근 공무원 복장 지침을 바

재킷을 금지한다는데, 뭘 금지까지 했을까. 실내온도는 28도로 맞추

꾸면서 6~8월을 ‘수퍼 쿨비즈’ 기간으로 정한 것이다. 이 기간엔 일

고 더워도 재킷을 입겠다는 사람은 입게 내버려두면 될 것을). 하지만

본 공무원들의 반바지 차림 허용을 참고해서 서울시도 반바지와 샌 “25개 구청과 산하 출연기관,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동참을 유도할 방 들을 허용해 에너지를 아끼겠다고 한다.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에너

침”이라는 걸 보니 공무원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될 것 같다. 정책

지를 절약하고 능률이 오를 것이라는 찬성과, 반바지가 공무원의 품

홍보와 매체의 보도 관행을 봤을 때 한 번쯤은 ‘반바지 입은 시장님’

위를 해친다는 반대 의견이다.

이 뉴스에 등장할 것도 같은데, 공무원들이 나 몰라라 하기는 쉽지 않

사실 반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양말로 포

을 것도 같다.

인트를 주거나, 바지에 맞춰 로퍼나 스니커즈를 신거나, 자연스레 주

반바지 허용은 실용적이어서 좋고 에너지를 절약해서 좋은 일이다.

름진 마 소재 재킷을 입어 진정 쿨하게 ‘쿨비즈’ 스타일을 완성할 수

반대하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반바지 자체가 공무원의 근무자세

있다. 문제는 이게 어렵다는 거다.

와 품위를 해칠 것도 없다. 다만 좋자고 입는 옷이 부담이 되고, 미적

옷 좀 입는다는 사람들도 날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관심을 갖고

으로 보기 좋을 가능성도 썩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공무원들도 “이러

노력하고 투자하면서 옷 입는 법도 익힌다. 쇼핑에 들인 시간과 실패

다 말겠지”라는 의견이 대세라는데, 과연 서울시의 실험이 어찌 될지

한 쇼핑에 쓴 돈이 수업료다. 그래야 내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고, 옷

두고 볼 일이다.

좀 입는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글 홍주희 기자 honnghong@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SUNDAY MAGAZINE 31


SOULSEARCHING

남의 시선이 그리도 중요한가요 강신주의 감정 수업 <13> 명예욕, 혹은 사랑하는 이를 절망시키는 감정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에 몰입한다는 게 가능할까. 나와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배경으로 물러가지 않는 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부부 사이의 파탄은 테레즈가 바보처

바로 이때 남편 베르나르는 ‘처음으로’ 진

럼 순진해서 벌어진 비극인지도 모른다. 테레

지하게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느냐고 질문한

즈는 남편 베르나르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다. 사실 독살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난 남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편 베르나르는 아내가 집안의 재산인 소나무

계는 마지막 대화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 프랑수아 모리아크 (Fran ois Mauriac· 1885~1970)

않아 테레즈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숲을 독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남편 베르나르는 테레즈라는 한 여성을 좋아

다.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시키는 명예욕이란 감정의 실체다. 지금 베르나르는

고 오해할 정도로 속물이었던 사람이다.

아내의 분노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명예만을 추구하던 남편이 과연 이제야 테

의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

는 정치가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레즈의 내면과 직면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감당할 수 있

되었으니까.

것일까? 불행히도 테레즈가 자신의 속내를

해서 결혼한 것이라기보다는 돈 많고 잘나가

그렇지만 테레즈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까. 테

심리소설의 계보를 잇는

다는 말인가! 베르나르가 걱정하고 있는 것

이야기하는 순간, 베르나르는 아내의 이야기

프랑스 소설가. 죄와 타락

은 아내의 절망보다는 오히려 남들이 자신을

를 믿지 않는다. 속물의 눈에는 속물만 보이

에 끌리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이것이

그렸다. 1952년 노벨문학

레즈가 남편 베르나르를 독살하려고 했었던

는 법. 어떻게 베르나르가 테레즈의 순수한

것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결합이 아니라 인

욕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남편

“단지 사람들의 기분에 들기 위한 이유에서

간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되찾으려는 절망적

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희

만 어떤 것을 행하거나 피하려는 노력, 이런

인 노력에서 나온 몸짓인지도 모른다. 프랑수

망이 그렇게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노력을 명예욕(Ambitio)이라고 말한다.” (스

아 모리아크가 자신의 소설『테레즈 데케루

테레즈는 이제 정말로 완전히 남편을 포기해

피노자『에티카(Ethica)』)

(Therese Desqueyroux)』를 통해 우리에

버린다.

상을 받았다.

바로 명예욕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제3자의 시선

게 묻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일체의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요. 내가

만 의식하게 마련이다. 결국 베르나르와 같은

외적인 조건과는 무관한, 오직 두 사람만이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왜 다 거짓처럼 들리

사람이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

는 걸까요?” “목소리 낮춰요. 우리 앞에 있는

에 몰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언

신사가 뒤돌아보잖소.”

젠가 현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말하

기쁨으로 충만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독살이 미수에 그친 뒤, 양 가문은 모두 사 태를 미봉하려고 애쓴다. 상황은 테레즈가

베르나르는 이 순간을 끝내고 싶은 생각뿐

지 않았던가. “사랑은 둘의 관계”라고 말이다.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

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미친 여자’를

나와 너를 제외하는 일체 모든 것이 배경

이다. 사실 테레즈가 원했던 것은 사랑 없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사소한 면

으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영위되는 부부관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

하나하나까지 기꺼이 따져보고자 할 것이었

는 의미다. 그렇지만 슬픈 것은 우리도 점점

으니까 말이다.

다. 테레즈 역시 이 남자가 한순간 가까워지

베르나르가 돼가고 있다는 현실 아닐까. 애

는 듯하더니 다시 영원히 멀어져 버린 것을

인을, 부인을, 그리고 남편을, 혹은 아이를 사

그렇지만 두 가문은 테레즈의 사랑과 행복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가문의 명예만을 소중

알고 있었다.

랑하는 짝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제3자의

하게 여겼다. 그러니 애초에 이혼도 불가능한

테레즈의 절망이 안타깝기만 하다. 명예

시선을 통해 바라보려고 하니까 말이다. “오

일이었고, 심지어 남의 눈을 의식해 별거마저

만 눈에 보이는 남편의 눈에 진정한 인간 사

늘 옷이 왜 그러니. 너무 눈에 띄잖아.” “좀 조

도 힘들었다. 독살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의 유대와 사랑을 꿈꾸는 아내는 ‘미친 여

용히 말해요. 옆 사람들이 힐끗거리잖아요.”

명예 실추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그녀

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무슨 상관이란 말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

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가식적인 삶만 이어

인가? 이제 테레즈에게 남편도 ‘미친 남자’에

한 시간』 『철학적 시읽기

지는 지옥 같은 나날 끝에 다행스럽게도 그녀

지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불쌍한 테레즈

는 파리행 허락을 받아 혼자 살 수 있게 된다.

를 절망하도록 만든 남편 베르나르의 내면세

32 SUNDAY MAGAZINE

의 괴로움』 『상처받지 않 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 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성적이 이게 뭐니, 창피하게.”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명예욕에 사 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제2, 제3의 테레즈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CARTOON

김재훈의 문화 캐리커처

20세기 의자 부부

임스 한눈에 반할 정도로 뛰어난 자태를 가진 나 정도의 의자? 임스 부부는 수도 없이 디자인했어. 의자 세계의 황금 콤비였지.

의자 팝 아티스트

판톤 다리 없이 일체형으로 무게를 지탱하면서 세련된 모양에 광택도 나는 의자를 만들려면 어떤 재료를 써야 할까? 정답은 플라스틱!

플라스틱으로만 만든 제품은

섬유 유리 소재를 이용해 등받이와 좌판,

여러 장점이 많긴 하지만

그리고 팔걸이를 일체형으로 만들고

주변 환경과 어울려 고급스러운 느낌을

금속과 나무를 조화롭게 연결시킨

주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의자는 찰스, 레이 임스 부부가

그러나 덴마크 출신의 가구 디자이너

1948년에 디자인한 걸작품이다.

베르너 판톤은 그것마저도 편견임을

그들은 재료가 지닌 미학적

자신이 디자인한 의자 한 개로 증명했다.

잠재력을 발굴해 견실한

1960년대에 나와서 20세기 팝 아트 작품에

생활용품을 만드는

버금가는 명성을 획득한 판톤 의자다.

탁월한 설계자들이었다.

난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멋진 설계를 하고 싶어 한 남편의 부족한 면을 내가 채웠지.

여보! 그 말은 내가 마누라 잘 만난 덕에 출세했다는 의미를 반 정도 내포하고 있구려.

나는 아르네 야콥센의 건축 사무실에서 일을 했었는데, 거기 사람들이 “넌 건축 일을 못하니까 가구 따위나 만들어”라고 하면서 세계적인 가구 디자이너가 될 바탕을 마련해 주었어.

20세기 의자 디자인계 인물들의 업적을 따져

1957년 판톤이 일체형 의자를 처음

신분을 매긴다면 황제와 왕비의 자격은

구상했을 때만 해도 플라스틱 성형 공법이

분명히 임스 부부에게 주어질 거다.

발달하지 않아 제작 비용 등의 문제로

오늘날에도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나서는 업자가 없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뒤

거의 모든 의자가 그들의 손에 의해 탄생했으니까.

세상에 등장한 판톤 의자는 곧 생활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임스 부부가 디자인한 의자들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가 하면 말이야. 짝퉁 만드는 사람들도 설계도를 다 외우고 있을걸? 임스 부부의 예만 보더라도 좋은 일을 하려면 아내의 말을 새겨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예, 예!

판톤은 현대를 넘어 미래적 감성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했어.

플라스틱 의자로 말할 것 같으면 기능적·미학적으로 보나, 또 관능적으로 보나 이것이 최고봉 아냐?

김재훈씨는 홍익대에서 디자인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상디자인과 문화사회학을 공부했다. 인문과 문화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정보 만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SUNDAY MAGAZINE 33


CONTE

학다리 선생님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모습 그대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길었던 머

선생님은 참석하지 못한 제자들의 근황도

생님보다 더 늙은 것 같아 송구하고 민망했

하나하나 챙긴다. 30년 전의 이름들일 텐데

다. 선생님은 먼저 손을 내밀어 제자들에게

잊지 않고 세세한 것까지 기억한다. 반면에

악수를 청했다.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

나는 선생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기억나

고 그만 선생의 손부터 잡았다. 크고 따뜻한

는 것이라고는 국어를 가르쳤고, 야간 자습

손이다. 내 이름을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그

시간이면 두꺼운 책을 들고 들어와 말없이 독

래, 상득이”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데 꼭 조

서하던 모습 정도가 전부다.

얼마 전 나는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우리 3

례시간에 출석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예”

학년 때 2반 담임이셨던 이학근 선생님이 서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사모님은 우리가 졸업한 해에 모교로 부임 한 국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나는 사모님과

울에 오신다고 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선생은 자리에 앉아 제자들 얼굴을 쭉 둘

몇 마디 나누자마자 금세 깨달았다. 선생님이

했다. 일요일 저녁 7시. 장소는 종로 5가. 3학

러보더니 “그래 다들 명함 한번 꺼내 봐라”고

아니라 사모님에게 배웠더라면 아마 국어공 부를 훨씬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하고.

년 2반 친구들은 많이 와다오. 학다리 선생님

말했다. 그건 마치 숙제 검사를 하시는 것 같

이 반가워하실 거다.” 선생님은 나를 그다지

았다. 그래, 고등학교 졸업하고 30년 동안 어

9시 반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사모님이 묻

반가워하실 것 같지 않았지만 나는 선생님

떻게 살았는지, 내가 가르친 대로 성실하게

는다. “한 달 뒤에 또 서울 올 건데 전화해도

소식이 반가웠다. 선생님께 인사드릴 수 있으

살고 있는지 어디 숙제들 한번 꺼내 봐라 하

되겠죠?”

니까.

고 말이다. 3일 연휴의 중간 일요일이라 친구

자녀 결혼상담일까? 나는 “물론이죠” 대

들이 많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나까지 해서

답한다. 헤어지면서 선생님은 또 악수로 인사

스승이 없는 사람은 불우하다. 가령 스승 의날이 되어도 찾아뵐 선생이 없는 사람은

겨우 여섯 명이었다. 은행 지점장, 대학 교수, 를 대신한다. 두 분은 늦봄의 서울 거리를 좀

불우하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생을 만났

대기업 상무, 증권사 상무, 광고회사 대표.

걷다가 들어가겠다고 한다.

던가. 둔하고 어리석으며 게으른 내가 이나마

다들 숙제를 잘한 것인지 선생님은 제자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누군가 선생님의 별

사람 흉내라도 내며 살고 있는 것은 다 선생

들의 명함을 하나씩 받아 보면서 계속 고개

호가 왜 학다리였는지 물었다. 글쎄, 돌아보

님들의 가르침과 깨우침 덕분이다. 그런데도

를 끄덕였다. 내 차례다. 선생은 내 명함을 보

니 선생님 부부는 한 쌍의 학처럼 우아하게

나는 선생님들과 계속 연락하지 못했다. 사

고는 뜻밖이라는 듯 놀란다. “상득이는 그래

건널목을 건너는 중이다.

람 사귐에 어둡고 스승을 모시고 따름에 능

어떻게 이곳에 들어갈 생각을 했지?” 대답을

하지 못한 탓이다.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닌데도 나는 마치 숙제

사모님과 함께 나타난 선생님은 30년 전

들숨날숨

것도 없다는 듯 선생님은 건배를 청한다.

리가 사뭇 짧아진 정도랄까. 제자인 내가 선

안 해온 핑계를 대듯 중얼중얼 말한다. 들을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 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 『슈 슈』를 썼다.

“서러운 사람에겐 서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한결 위안이 된다”

34 SUNDAY MAGAZINE

▶“콘코리트와 철근을 사용하는 세계와 장

▶“과학은 믿음을 시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흔히 동화에다 설교조의 교훈을 담곤 하

인의 세계는 균형 있게 공존해 왔다. 양자 간

믿음의 신비는 과학보다 훨씬 오랫동안 사람

는데, 과연 그런 동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

존경과 협력의 관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변화

한지 알 수 없다.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아, 장인들의 이런 점을 꼭 살

무쌍한 그것(별)에서 불멸을 찾고, 푸닥지게

것은 훈시나 설교가 아니다. 설교를 듣는 것보

려 보고 싶다’고 느끼고, 또 이어가고자 하는

많은 그것으로부터 절대를 구하며, 짧게 나

다, 한 권의 도덕 교과서를 보는 것보다 푸른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

타났다 사라지는 한 점의 빛에 불과한 그것

하늘과 별과 그리고 나무와 숲과 들꽃을 바

해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 뒤 많은 건축가가 장

을 통해 영원을 꿈꾼다. (중략) 오늘도 누군가

라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중략) 내가 쓰는

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서로 해야 할 것을 모

는 밤하늘에 외로이 붙박여 빛나는 그것으

동화는 그냥 ‘이야기’라 했으면 싶다. 서러운

색했다. 한국은 건축기술이 놀랍게 발달하고

로부터 위안을 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그

사람에겐 남이 들려주는 서러운 이야기를 들

있지만 예부터 내려오는 기예의 세계와 단절

리움과 회한으로 한숨짓고, 설렘으로 마음

으면 한결 위안이 된다. 그것은 조그마한 희망

돼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을 환하게 밝힌다.”

으로까지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 인터뷰 중에서

-김별아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중에서

-권정생 산문집 『빌뱅이언덕』중에서


PHOTO ESSAY

이창수의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

부처님 생일상 아는 스님이 초파일날 아침상을 같이 들자고 해서 스님 도량으로 내려갔습니다. 서로 간에 마음을 내어 만나는 사이인지라 도량 가는 발걸음은 항상 가볍습니다. 도량 주인은 말과 행동이 단출해 주변 또한 항상 깔끔합니다. 초파일날도 역시 그랬습니다. 풍성한 마음을 가득 담은 소박한 부처님 생일상을 차렸습니다. 일 년에 한 번, 꽃 장식에 둘러싸여 호사를 누리는 나무 부처님께서도 흐뭇한 웃음을 보내는 듯합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엌살림이 빠지긴 했어도 지금 보이는 게 스님 살림살이의 거의 전부입니다. 어릴 적에 출가해 법랍은 높지만 대중과 호흡하는 선방 생활을 빼먹지 않으려는 선승입니다. 제가 아는 한 이 도량 주인은 ‘신도’보다는 ‘친구’가 많고, ‘차’를 타기보다는 ‘걷기’를 좋아하고, 그저 ‘허허’ 웃기를 좋아합니다. 요즘 서울에 있는 절집이 몹시 시끄러워 보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 어느 누구나 흠이 없을 수 없겠지만 세상 구석구석에서 ‘스스로의 맑음’을 지켜내며 불자의 길을 걷는 스님들이 있는 한 구원의 연꽃등은 꺼지지 않을 겁니다. 말라깽이 스님! 하안거 다녀와서 거문고 소리나 들려 주세요.

이창수씨는 16년간 ‘샘이 깊은 물’ ‘월간중앙’ 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2000년부터 경남 하동군 악양골에서 ‘중정다원’을 운영하며 녹차와 매실과 감 농사를 짓고 있다.

SUNDAY MAGAZINE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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