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선교사 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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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선교사 <새해 새 소망> 새해에는 이런 소망을 가져봅니다. 언제나 웃음이 그치지 않는 행복한 가정 새해에는 이런 바람을 가져봅니다. 누구나 일할 곳이 있고 일한 만큼 인정받는 일터 새해에는 이런 기대를 가져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회 새해에는 이런 희망을 가져봅니다. 전쟁의 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 새해에는 이런 소원을 가져봅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이 가득한 세상 모든 이에게 이런 2018년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글_ 심수봉 필리핀 선교사(bonghwong@hanmail.net) 일러스트_김은영(lewis1212@naver.com)

2018 선교는 누구든지 해야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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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를 사랑하는

성목사 부부

해산의 고통 편집자주 : 성기호 목사님과 서좌원 목사님의 선교사를 향한 사랑의 이야기를 격월로 연재합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것이‘해산의 고 통’ 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포식자가 가까이 있는데도 아주 조용히 출산을 합니다. 그리고 그 새끼는 몇 분 안에 일어서 고, 젖을 빨며, 몇 시간 안에 걸음마는 물론 어미를 따라 뛰 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사람만은 출산할 때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을 감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머님들이 아기를 낳으려고 안방으 로 들어가기 위해 댓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뒤돌아보며“내 가 무사히 아기를 출산하고 이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 까?” 를 염려했을 만큼 위험한 일이 해산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참 복음에 기초하여 세워졌던 갈라디 아교회가 율법주의적인 유대인 교사들에 의해 믿음으로 구 원을 받았으면 율법을 지킴으로 그 구원을 유지하라는‘다 른 복음’ 으로 신앙이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 기에게 눈이라도 빼줄 만큼 사랑을 보이던 갈라디아 교회가 변질되는 모습을 보고 책망하는 편지를 써 보냅니다.“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 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말하며 갈라디 아교회 신자들이 변질된 복음에서 돌이켜 순수한 복음에 다 시 설 수 있도록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 니다(갈4:19). 복음을 전하며 선교하는 일은 해산의 고통과 위험이 있는 일 이나 생명을 출산하는 일이기에 보람 있고 값진 일입니다(요 16:21). 새 생명이 태어난 것에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합니 다. 남자는 임신과 해산의 고통을 경험할 수 없지만 그에 못 지않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신경계에 생기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몸에 띠 모양으로 수포가 생기며 열이 나는 대상포진(帶狀疱疹, Shingles)입니다. 또 하나가 쓸개주머니[담낭]에 돌이 생기는 담석증(膽石症)입니다. 성결대학교와 중국에 있는 대학교가 자매결연을 한 후 중국 의 학교 관계자들이 유명한 음식점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북경오리집에서 오리를 재료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을 맛있 게 먹고 호텔로 왔는데 속이 불편하고 잠을 이룰 수 없었습 니다. 누울 수도 없고 숨 쉬기도 불편했고 땀도 많이 났습니 다. 여러 시간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지내는 중 해외 선교사로 수고하는 동문 목 사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 심 대접을 위해 음식점에 갔습니다. 원래는 철판구이 집을 찾았는데 그날따라 직원야유회를 간다고 공지문을 붙이고 문을 닫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음식점에 갔는데 오 리 전문점이 아닌데도 메뉴 맨 위에 오리요리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오리를 먹고 고생한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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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뜩 떠올랐지만 선교사님은 오리 요리를 잡숫겠답니다. 그래서 손님이 원하시는 음식을 시켜 같이 먹었습니다. 그 런데 그날 한밤중에 똑같은 증상이 왔습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며, 숨이 잘 쉬어지지 않 았습니다. 단순한 소화불량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응급실 로 가서 진료를 받으니 담석증이랍니다. 기름기가 들어오 니 쓸개즙을 짜내야 하는데 쓸개 안에 돌들이 있어서 통증 이 생기는 것이랍니다. 그 고통이 해산의 고통에 비길만한 고통이랍니다. 수술로 쓸개를 떼어냈기에 고통은 사라졌지 만‘쓸개 없는 사람’ 이 되고 말았습니다.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해산의 고통’못지않은 어 려움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박사과정 학점은 다 취득했 으나 종합시험을 치룰 일이 까마득했습니다. 보통 박사과 정을 시작한 사람들이 코스워크(course work, 학점을 취득 하는 일)는 끝내지만 종합시험에서 1/3이 탈락하고, 1/3은 논문을 못 끝내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때 한 인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고 있었는데 교회는 성장하고, 공부하는 일은 힘들어 교회를 사임하고 학교 기숙사로 이사 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험과목 선택을 너무 과하게 한 것 같 았습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공부할 분량이 적고 또 인물 들은 덜 알려진 사람들로 저서도 빈약한 사람을 선택하는데 나는 이왕이면 시험공부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욕 심으로 고대사, 루터, 웨슬리, 종말론을 선택했는데 공부할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교 회를 사임하고 학교로 왔지만 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그때 어려움이 해산의 고 통에 비견할 만 했다고 생각됩니다. 전자 한선을 내겠다고 여러 번(공지사항으로 6번, 발행인의 글에서 1번, 선교사의 소리에서 1번 등) 알려드렸는데 그 후로도 앱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니‘전자 잡지’ 출간이 해산하는 고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고통 중에 약속한 종이 한선도 정기휴간 외에 세 번을 휴간하게 되니 독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또 글을 부 탁드렸던 선교사님들께 10회 분량으로 말씀드렸는데 일곱 번으로 2017년을 끝내게 되어 글을 쓰시던 분들께도 죄송 한 말씀을 드리며 양해를 구하게 됩니다. 전자 잡지를 발행 하는 일을 위해 비록 늦었지만 수고해주신 호산나 팀에 감 사를 드립니다. 드디어 해산의 고통을 지나‘옥동자’ 가출 생 했구나 여겨주시고 더 많은 사랑과 기도를 해주시기 부 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KO MI

글_성기호 목사 본지 발행인 keehosung@hanmail.net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

첫번째, ‘선교사’로의 부르심 편집자주: C국 박화목 선교사의 사역이야기를 10회에 걸 쳐 연재합니다.

중국어 찬양인 野地的花(들의 백합화, 마6장25-34절) 를 배우게 되었고 어려움이 올 때 마다 이 찬양을 지금 도 부르고 있습니다.

선교사로의 부르심 90년대 초 중국에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여기 중국 에 왜 왔냐고”질문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을 안하고 다른 대답을 하곤 했 습니다. 왜냐하면 질문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서면 이 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해서 왔다고 했 습니다. 즉 사도행전 13:47절 말씀을 보면“주께서 이같이 우 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실은 중 국인들이 질문한 의도는 한국 사람을 본적도 없지만 신기하고 궁금해서 질문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좀 더 발전한 나라로 가지, 발전도 하지 않은 중국에 무엇이 좋은 게 있다고 왔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80년대 중반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씀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히“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라는 말씀을 붙잡고 새벽기 도, 철야기도, 산기도, 금식기도를 하면서 나의 이방 은 어디십니까 라고 부르짖었을 때 중국의 한족(漢族) 에게로 가서 빛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80년대는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 었고 주변에 있는 교우나 특히 아내는 반대를 했습니 다. 아내는 딸아이 하고 한국에서 기도하고 후원하겠 다며 본인은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 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이 너무 분명하 였고 포기할 수 없었으며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중공(중국)은 공산주의 나라이고, 어떻 게 갈 것이며, 특히 복음을 전하면 체포되어 목숨이 위 태롭기 때문에 반대를 했었습니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누구 하나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었 습니다. 그러나 중국을 향한 불타는 심정은 식을 줄 모 르고 할 수만 있다면 중국인이나 중국에 관한 것을 찾 고 관심을 가지게 되어, 서울 정동에 위치한 중화기독 교 한성교회를 알게 되어 매주 목요일 중국선교를 위 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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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첫 중국방문시 만리장성에 선 박화목 선교사 이 중국교회 내에 세워진 중국선교기관인 중국복음 선 교회에서 3년이 넘게 사역을 하면서 중국선교에 대하 여 배우게 되었고 앞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어떤 자세 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선교사로서 사역을 해야 하는 지와 중국교회 상황과 문화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 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중국에 들어가기만을 기도했는 데 1990년이 되면서 기회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도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북경아 시안 게임이 그 해 9월에 개최하게 되어 국내외적으로 “죽(竹)의 장막” 인 중국의 빗장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선교회 주관으로 방문단을 구성하여, 앞으로 장기적인 중국 선교사역을 위해 중국교회를 알아야 하 고 중국선교 관심 자 및 선교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 게 더 효과적인 이해와 장래에 사역을 하도록 돕기 위 하여 그 해 봄부터 중국을 방문하겠다고 한국문화부에 신청을 하였습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국이 아니고 적성국가 이므로 먼저 한국정부에서 발행하는“북방 사회주의 허가” 를 받아야 갈 수 있었습니다. 정부에 신청하여 넉 달을 기다려서 드디어 중국방문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말로 가슴이 벅찼고 간절


히 기도했던 대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을 추진 하려면 인내하면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려야 했 으며,“선교는 기다림” 에서 시작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리장성을 넘다 그때 당시에 수교가 되지 않은 관계로 직항로가 없어 서 대만을 거쳐 홍콩에 도착하여 홍콩의 협력단체인 “왕” 형제에게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1990년 8월29일 기차로 중국국경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회고 하면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공산당들을 눈앞에서 보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이 동행했 던 팀원들도 엄청 긴장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으로 인도하심을 하염없이 내 리는 비를 맞으며 국경을 통과하면서 긴장 속에서도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만나 는 사람들이나 눈에 보이는 신기한 장면이나 풍경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서 로 간에 호칭도“사장님, 부장님, 과장님”등의 호칭 으로 부르며 공장도 방문하고 거리도 구경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가정교회 방문과 고난과 역경가운데 승리한 교회 지도 자를 만나고 또 농촌 가정교회에서 사역 자 들을 위한 훈련이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조용히 서로 간에 대화도 되도록 하지 않고, 눈짓, 손 짓 등으로 연락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하면서 왕 형제의 인도로 여러 곳을 이동 하였습니다. 함께 동 행한 화교목사님이 부분적으로 설명도 해주었지만 상 황파악도 잘되지 않았고 용어도 생소하므로 일단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인도자에게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첫 가정교회를 방문하다 계속되는 여정 속에 밤늦게 중국광주(廣州)에 도착하 여 모두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다음 날 새벽에 인도자 왕 형제가 서둘러 저희들을 깨우면서 바로 외출을 한 다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 고 잠이 덜깬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턱대고 따라 나섰 습니다. 어디 복잡하고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골목길 을 들어서서 조용히 숨소리도 멈추어지는 긴장감 속에 허름하고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작은 의자들과 오래된 긴 의자가 촘촘히 놓여져 있는 즉 말로만 듣던 중국가정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키가 작으신 한 분이 환한 웃음으로 저희 일행 을 맞이하여 주셨습니다. 한국에서 중국가정교회를 위 해서 또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사역자들을 위해 서 기도했었는데 기도했던 그 분을 만나게 될 줄을 생 각지도 못했습니다. 중국을 방문하여 첫 교회와 가정 교회 지도자이신 Samuel Lamb(林獻羔,린씨엔까오)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선생님의 부친도 마카오의 침례교회에서 목회하셨 고, 이 린 선생님은 1950년에 현재 장소인 광주시 따 마짠 35호인 집에서 집회를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계속 되는 간증을 듣는 중에 공산화가 된 후에도 굽히 지 않고 집회를 진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1955 년에 중국정부가 추진하던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에가 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한“따마짠 반 혁명집단” 두목으로 체포되어 1957년에 석방되었다가 1958년에 제2차로 체포되어 20년 유기징역형을 받고 감옥생활 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한 린 선생님을 만나고 간증을 듣는 것 자 체가 기쁨이고 축복이었습니다. 앞으로 선교현장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며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KO MI

글_박화목 C국 선교사 baishicin@gmail.com

세계 선교의 현장에서 힘쓰시는 선 교사님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 씀과 분별력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긴 <시대를 아는 힘>을 소개해 드 립니다. 선교현장에서, 자녀들의 교 육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힘 을 얻기위해 활용하셨으면 합니다.

중국 가정교회의 상징적인 지도자 린씨엔까오 선생님(2014년 소천)

이 책의 판매 수입금은 탈북자들을 위한 선교에 쓰입니다. 문의: 통일소망선교회 이빌립 선교사 (02-2625-0497) 가격: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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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 이야기

하나, ‘천국으로 가는 징검다리 ’ 편집자주: 탄자니아 윤봉석 선교사의 사역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웬만한 것은 웃음으로 답하는 저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사람입니다.

천국! 주님께서 절위해 준비하신 천국은 어떤 곳일까 요?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사역지 에서 하루에도 수 십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정작 아내와 찍은 사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바닷가에서 가장 멋진 곳을 택해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아마도 제 자신이 사진 찍는 걸 좋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아내의 사진을 보니 60도 안된 사람의 얼굴에 검버섯 이 여기 저기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모두 내가 그린 작품 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수많은 경 쟁자를 물리치고 쟁취한 사랑인데.. 정말 저 천국에서 제일 먼저, 가장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아내이 고 마냥 천국을 손잡고 거닐고 싶은 사람이 바로 이 사 람입니다.

긴 수술을 마치고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의 사가 어떤 선고를 내릴지 염려와 대책을 세워야 하나는 생각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천국에 대한 기대로 2주 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악성 림프종 암 2기로 항암을 9 차례를 받아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다행이다, 최악은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감사했습니다. 좀 쉬어 가라는 주의 뜻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직 검사를 기다리는 2주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 다. 그 생각 중에 천국에 대한 생각이 비중이 가장 컸 습니다. 사역지에서 말씀을 전하고 제자 훈련을 하면 서도 다루지 않았었고, 전하지도 않았던 말씀이었습니 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천국에 관한 생각이 정립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막연히‘성도 는 이 땅의 나그네요, 마지막 날 주께서 예비하신 천성 을 향해 간다는 것이 성도의 삶’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2주간 뇌리에 떠나지 않았던 세 말씀이 있었습 니다.“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20)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랑의 동반자인 아내와 탄자니아 해변가에서 윤봉석 선교사 결혼 전, 아내와 함께하지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무 하고 죽음 같아서 몇 사람의 반대와 염려를 뒤로 하고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의 천국도 잠시 때로는 폭풍 처럼 때로는 번개처럼 서로를 부수고, 찌르고, 그러다 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기처럼 예쁘고 달콤하게 서로 를 탐하기도 했습니다. 부부 사이는 참 이상합니다. 아내의 한마디에 왜 그리 빨리 반응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 고, 화를 내고, 거침없이 말하고, 그러다가 어이 없이 웃기도 합니다. 남에게는 너그럽고, 한없이 포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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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도는, 이 땅에서 음부의 권세 즉 사단과의 끝없는 전쟁의 연속입니다. 전쟁의 강도나 수준은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일괄되게 영과 육을 죽이지 못한 사 단의 전쟁 전략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강퍅함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의 마음 중심에 강퍅함이 자리 잡는 순 간 천국은 사라지고 사단이 다스리는 지옥이 되고 맙니 다. 그래서 현세에서 추구하는 천국이 성도들의 본향인 하늘나라에까지 이어지고 그 열매로 천국의 삶이 확정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 말씀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와 성도들 에게 주는 교훈과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세상은 구속의 은혜와 긍휼로 품어야 하는 대상이며 성도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현지인과의 관 계와 주변 선교사들과 관계 중 더 큰 비중을 묻는다면 단호히 한동네의 함께 사는 선교사들 가정과의 관계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 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 할 것임이니라.” (사11: 6-9) 을 묵상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 될 하나님 나라 의 다스림(구속사)과 성도의 죄에 대해서 잘 기록하였 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 가 아래서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내려 놓는다 한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 울의 고백처럼 세상의 모든 지식, 배경, 영광 등을 배 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의미는 버린 다는 의미도 있지만 천국에서는 더럽고 쓸모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겨우 그 그림자를 밟을 뿐입니 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한 길뿐입니다. 십자가 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이고, 마음이며 사랑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인 동시에 십자가는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드는 지혜와 지식이기도 합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는 가정을 보면서 천국을 맛 보곤 합니다. 먼저 아내의 사랑(섬김)을 받으면 너무 행 복합니다. 또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충만 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갖는 기분이 듭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첫째인 딸은 힌두교를 믿는 네팔 청년과 사랑에 빠져 미국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딸에게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다가 마지막 으로 그 청년과 헤어지지 않으면 사역에서 은퇴하겠다 고 하였습니다.‘목사요 선교사의 딸이 힌두 청년과 결 혼을 하는 것은 세상의 비웃음거리인데 어떻게 내가 계 속 사역을 감당하겠니? 그리고 내 자존심과 좌절감은 어쩌고…’ 그러나 딸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결혼 반지를 사주니 미국으로 떠나갔습니다. 둘째인 아들은 항암의 가장 힘든 시기인 3차 때 누나의 일로 너무나 큰 못을 가슴에 박았습니다. 아버지의 역 할을 제대로 하라면서.. 생과 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 는데 너무나 서운하고 슬퍼서 기도인지 통곡인지 그날 새벽에 한참을 엎드려 울었습니다.

11살의 막내인 주성이는 2007년에 입양을 했습니다. 부부의 행복 덩어리인데 참 이상하게도 사랑을 줘도 줘 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주성이를 위 한 시간은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아니 더 하지 못해 미 안할 뿐입니다. 그래서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막내이 지만 잘못을 하고 회초리를 들 때면 보통 힘든 게 아닙 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으면 이젠 괜찮다 고 하며 회초리를 집어 던지고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듭니다. 그럴때면 얼굴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윤 주성 잘못했지? 오늘은 5대다!”팔을 높이 들어 종아리를 후려치곤 힘껏 껴안아 준후 간략하게 기 도로 마칩니다. 그러고 나면 저의 마음은 너무 아프다 못해 아립니다. 얼마 전 주성이에게 입양 사실을 알릴 때가 됐다는 생 각이 들어 아주 좋은 분위기 속에 엄마가 입양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돌아누워서 조 금 있더니“엄마 저 행복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그리고 난 후 어렸을 때 사진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마침 저장해둔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 주며“우리 주성이 어릴 때 너무 귀엽지!”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 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주성이의 눈치를 보며 지 내고 있는데 잠자리에서 주성이가“엄마 저는 지구에 서 천왕성만큼 보다 더 행복해요.”하길래“엄마는 우 주보다 더 행복해”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주영이, 주광이와는 이런 사랑의 고백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빠!"라고 사랑스럽 게 저를 부르는 막내 주성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괘 씸하고 원망스런 첫째와 둘째의 얼굴이 떠오르곤 합니 다. 그리고 이런 다짐을 합니다.‘또 속자, 속아 주자 그리고 이해하자.’ 자식들이 아무리 서운하게 가슴에 못을 받아도 이상하게 마음에 머물지 않고 흘러가 버립 니다. 너무 서운 하다가도 자식의 얼굴을 보면 더 챙겨 주고 싶고 더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위해 늘 십자 가를 지고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 습니다.그래서 이 땅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하는 사랑이 야 말로 마지막 날 천국으로 가는 징검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KO MI

글_윤봉석 탄자니아 선교사 jybs7411@gmail.com

월간 한국인선교사 쉴터는 선교사님들을 섬기고자 마련된 작은 숙소입니다. 현재 인천시 구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다섯 채가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용문의: www.kormi.net / ☎ (070) 8884-6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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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 이야기

일, ‘아이티(Haiti) 미션 이야기’ 편집자주: 아이티 강영기 선교사의 사역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지며, 2012년부턴 의료사역( 한방포함) 등으로 사역의 충실을 다하고 있습니다.

회심 아이티 선교사 강영기입니다. 전 크리스천이 되기 전 대대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절에 다녔 고 학생 때는 무신론을 말하며 기독교를 흠잡는데 앞 장을 섰습니다. 이후 사회에 나와선 절간의 처사라 고 불리기까지 했던 저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와서도 올림픽가의 절을 드나들곤 했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북부 (버지니아, 메 릴랜드,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로드아이랜드, 코네티캇, 매사츄세츠)에서 7-8 개의 단기선교 팀이 현장방문해서 함께 사역에 임하므로 선교의 현장과 선 교를 배우는 학습장으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랬던 제가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로 필라델피아로 이 주케 하시고, 1983년부터 교회에 출석은 하였으나 신 앙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5 년 2월경 호흡과 내장 전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 고 필라델피아의 팍스체이스 암센터에서 짧겐 6개월 정도의 생을 가질수 있다는 선고 아닌 시한부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로 아이티를 방문할 때마 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기의 한국에 타임머신을 타 고 와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릴 적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저로 하여금 아이티에 대해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머나먼 이국땅, 아이티에서 미국 이민생활에 지친 저의 심신 은 아이티선교를 통해서 27년이나 고국을 한 번도 못 가 본 저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이 허락하신 또 하나의 고향이 되찾아지는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이러니라 고 하겠습니다.

한 달 후, 한국 예수원의 대천덕 성공회 신부님이 인도 하신 부흥성회에 참석해 기도 받던 중 예수님께서 친 히 오셔서 믿음도 주시고 병을 완치해 주신 체험을 한 후, 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천국의 기쁨이 넘치는 생활 중 선교에 대한 소명도 함께 받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 농장 미션 저는 이민자로 미국 땅에 왔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디 아스포라" 로서의 삶을 선교의 현장과 접목하게 되었 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8절을 보면 "보낸다" 는 단어 가 두 번 나옵니다. 보냄을 받은 자, 즉 사도를 통해 교회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 장1절에는 제자들이 흩어짐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되 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디아스포라로 흩으신 것은 농부가 씨를 뿌리듯 큰 수 확을 위해서 "흩으신" 것으로 믿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매년 여름에 블루베리 수확을 위 해 아이티에서‘해먼톤 뉴저지’ 를 찾아오는 계절노동 자들과 함께 주일 저녁예배와 친교를 나누는 것은 사 뭇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예배한지가 벌 써 18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여름성경학 교와 구제사역, 한국문화소개등 사역의 범위가 넓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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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계절노동자들과 함께 한 농장미션예배 주변과 주변이 만나는 선교(Mission that brings margins together) 창세기에 아브람과 롯이 서로 땅을 나누어 선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롯은 에덴동산 같이 보이는 동쪽평 지를 택했고, 아브람은 황량한 산지에 남겨졌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아브람에게는 하나 님의 임재하심이 함께 하였습니다.


제가 아이티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산악지역에 치중되 는 이유를 성경말씀으로 무턱대고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좀 더 가난하고 여유가 없고 열악 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은 저도 어찌할 수 없나 봅니다. 왜냐하면 수도권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그래도 세상을 요령껏 살려는 재주나 방편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또 한 이들에겐 NGO나 선교단체 등 주변에 여러 혜택들 이 이미 다가와 있어 손만 내밀면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져서가 아니라 저 또한 디아스포 라의 삶을 통해 갖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주변인의 서 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류의 중심에 서 있 는 자보다 주변에서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가가 용기를 북돋아주고 함께 고민하며 고단한 삶의 무게를 같이 져주는 심정으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습 니다. KO MI

글_강영기 아이티선교사 mission.newhope@gmail.com

알립니다 그간 인내와 관용으로 전자 한국인선교사(한선)를 기다려오신 여러 애독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전자 잡지가 곧 발행될 것으로 알아 종이 한선 발행을 못하고 넘어가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 해 정기 휴간 말고도 세 번이나 발행을 못 했습니다. 새해 들어서도 1월 호 종이 한선은 물론 전자 한선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앱 개발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알지만 전자 한선 발간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산악지역 노방전도에 참여한 현지인들(2012년 2월) 사실 초창기 선교의 구성은 도심지 사역과 산악지역 선교를 동시에 주셨는데 성령께서 저의 마음을 점점 산악지역으로 쏠리게 하셨습니다. 이미 삶의 방편을 찾아 나선 사람보다 산지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마음을 쏟게 하셨습니다. 2010년 대지진후 첫 직항 항공편으로 방문 시엔 끊이 지 않은 여진과 대지진의 여파로 산악지역 출입이 여 의치 않았습니다. 두 달 후(2010 년 5월1일) 다시 방 문했을 땐 고도3500피트에서 4000피트의 산악지역 11개 교회 중 4개 교회를 돌아보고 현지 사정을 파악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 도시와 산지를 다녀 보았지만 아이티 의 상황은 너무나 암울하고 참담하기 까지 하였습니 다.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지진 직후 지진 진앙지인 ‘레오간’ 을 지날 때 본 한 가정은 막대기 두 개에 천을 걸쳐 놓아 지나는 행인의 시선을 가리려했지만 그들의 구차한 삶의 현실은 지나는 행인들에게 모두 노출되는 형편이었습니다. 지붕은 거의 없었고 부엌은 돌덩이 셋 위에 50-60년 전 우리가 사용했던 백철 솥을 겨우 걸어서 쓰는 형편이었습니다.

1년 구독을 하시면서 대금을 납부하신 분들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를 고심했습니다. 매월 구독료를 납부하시는 분들에게도 동일한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매월 1천 원, 1년 1만 원의 구독료를 내신 분들에게 구독료를 돌려드리는 것이 원칙이라 생각을 합니다. 금액이 크든 적든 간에 은행계좌와 명의자 이름을 알려주시면 송금해드리겠습니다. 전자 한선이 발간된 날로부터 한 달 안에 연락주시는 분들에게 미 발행 치의 구독료를 송금해드리겠습니다. 연락이 없으신 분들은 이미 보내주신 구독료를 후원금으로 처리하는 것을 양해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종이 한선을 발행하지 않더라도 전자 한선을 발행하는데 경비가 필요하고, 경상비 지출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문서 선교에 동참하시는 뜻으로 더 많은 관심과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8. 02. 01 월간 한국인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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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위한 축복의 통로

MK 스토리

제 별명은 그리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리스에서 집시민족 선교사 자녀로 태어난 손주영입니다. 저희 가족은 부모님, 입양한 집 시 형 두 명, 누나, 저, 그리고 여동생까지 7명의 대가족 입니다. 집시들은 어린 나이에 (15-16살) 결혼을 하기 때문에 저보다 12살 위인 발라디형과 같이 산 기억은 없지만, 4살 많은 토도리스형과 2살 위인 주애누나와 같이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닌 기억이 있습니다. 집시들 은 나라가 없는 떠돌이 민족으로서 주로 날씨가 좋은 그 리스나 스페인 등이 속한 지중해 나라들에서 천막을 세 워 생활합니다. 주로 구걸을 하거나, 신호등에서 자동 차 유리창을 닦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꽃을 팔거나, 고 철을 수거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시절 나라이름이 별명이신 적이 있었나요? 제 별 명은“그리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를 다닐 때 왜 주변사람들이 저를 신기하게 쳐다봤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 형은 학교에서 유일한 집시 학생이 었고, 제 누나와 저는 둘밖에 없는 동양 학생들이었습니 다. 인종차별도 가끔 받았지만, 든든한 형이 대신 싸워 줬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형 때문에 부모님이 학교로 불려가신 적도 적진 않았습니다. 저희 셋은 사이가 좋으면서도 자주 싸웠고, 저희가 잘못 한 것이 쌓일 때면 아버지는 단체로 저희를 훈계하셨습 니다. 저희 집에는“사랑의 매” 라고 적혀있는 몽둥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혼내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오늘부터 3일간 밤마다 3대씩.”혼나는 첫날, 엉덩이를 한대 맞고 나면 잘못했다고 울면서 빌기 일쑤 였습니다. 아버지는 저희가 아무리 울어도‘3일간 3대 씩’이라는 약속을 꼭 지키셨습니다. 혼나는 주간에는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게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돌이켜보면 아버지께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사랑의 매” 에는 화풀이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훈계를 하신다는 것이 확 실했고, 마지막에는 항상 저희를 안아 주시면서 저희보 다 더 많이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사랑의 매를 딱 12살때까지만 사용 하셨고, 그 이후부터는 대화로 훈육하셨습니다. 중학교를 들어 가면서부터는‘내가 누구인가’ 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습 니다. 그리스 친구들은 저를 당연히 한국인으로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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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식년으로 한국에서 살았던 초등학교 3학년 및 중 학교 2학년때의 한국친구들은 절 그리스인으로 바라보 았습니다. 정체성 혼란이 올 수도 있었던 시기였는데 감 사하게도 전 그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그리 스도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선 수백 번도 넘게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선 의심조 차 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던 하나님 은 항상 그냥 성경에 적혀있는 하나님, 제 부모님의 하 나님이셨습니다. 2005년도 여름에 5일간 있었던 목회 자 자녀 수련회를 통해 부모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의 죄를 위해서도 돌아가시고 다시 사신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나’ 를 자녀 삼으신‘나’ 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세상시민이기 이 전에 하늘시민이었고, 또 저를 제일 많이 정죄하실 수 있는 분이 제일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이 저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우애가 넘쳤던 주애누나(좌)와 나(가운데) 그리고 토도리스형(우) 대학 시절 하나님의 은혜로 한동대학교에 합격을 했습니다. 생명 과학과 상담심리를 연계전공 하면서 의학 전문대를 계 획하였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영적 도 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의사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학교에선 삶에 대한 많은 것을 배 웠습니다. 한 학기에는 16학점에 동아리활동을 5개를


했었는데 바쁜 중에도 제일 중요시 여겼던 것은 하루를 늘 기숙사 기도실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가 잘 될 때도 있었고, 아예 거기서 잠이 들어 새벽에 일 어나 겨우 기숙사 침대로 기어들어갈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몇 주간 모든 걸 잘하고 있는 것 같고 기도하는 것도 즐거워서 기도실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면 춤추다 가 기도를 하기 위해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성경인물들이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고 실패하는 모습들 이 떠올랐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고, 형제들이 요셉 을 팔고,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 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들이 머릿속을 채 웠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제가 성경의 인물들처럼 모든 것에 실패를 할지라도 저를 여전히 사랑하실 것 이 라는 마음의 감동을 주셨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몇 주간 하나님 안에서 거한 것에, 나의 행위와 퍼포먼스를 기반 으로 기뻐하지 말고, 변치 않는 하나님 사랑을 기뻐하라 는 감동을 받고 더더욱 하나님께 반했습니다. 또한 한동대학교에서 제 첫 여자친구이자 현 약혼녀, 올 여름에 결혼하게 될 김의린(영어이름은 Irene)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상담심리학 전공을 같이 했고, 대학교 영 어예배 교회를 함께 섬기면서 1년 반정도 친구로 지내 다가 제가 고백해서 사귀게 되었었습니다. 전 마음에 드 는 사람이 있어도,“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야 말로 여자친구를 사귀면 안 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채움 받고 싶은 마음 가짐으로 사귀면 누굴 만나든지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솔로로써 오직 하나님 안에서 가장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할 때만 누군가에 게 고백을 하기로 결심했었고,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때 에 준비해주신 배우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군 생활 군대는 하나님의 또 하나의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거기 서 전 독서 및 규칙적인 생활 습관화의 중요성을 배웠 고, 목회자의 길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늘 기독교 공동 체 안에서만 자란 저로썬 병사들 사이에 오고 가는 이 야기들은 나름 큰 문화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서나 죄는 항상 있기 마련이지만, 죄가 죄로 전혀 인지 되지 않고 오히려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 당황스러웠 습니다. 감사하게도 운전병과 군종병을 병행하면서 주 일예배를 참석하지 못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대 장님이 기독교인이셨기 때문에 롤 모델을 삼아 많은 것 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반 기상시간 보다 한 시 간 전인 5시 30분에 일어나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을 때는 설교를 주로 들었습니다. 오랜 묵상과 기도 끝에 하나님의 마음을 제 주변 사람들 에게 더 직접적으로 전할 수 있는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자 동역자인 약혼녀 김의린(좌) 현재 전 현재 만으로 스물여섯 살이고, 미국 펜실베니아에 있 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MDiv 과정을 막 시작 했으며, 한인 필라연합교회에서 유년부(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3학년) 전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전 선교사 의 자녀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어릴 때부터 접하고 알 수 있게 되 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이 글에는 하이라이트 위주로 적어서 그렇습니다만, 전 실제로 겸손하기보단 교만했고, 부지런하기보단 게을 렀고, 이웃을 챙기기보단 자신만을 챙겼고, 선하기 보 단 악 했고, 순종하기보단 불순종하기를 훨씬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를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사랑해 주셨 기 때문에, 저는 힘을 입어 이 주님을,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소망이신 주님과 더 많이 동 행하시며 더 많이 전하시는 2018년도가 되시길 소망하 며 글을 맺으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KO MI

글_손주영 그리스 MK sonjuyoung@gmail.com

월간 한국인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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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소리 캄보디아에 선교를 나오기 전 내색 은 안했지만 저는 사실 작은 부담감으 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지에서의 교통수단 이었습니다.

그래서 약 3개월 뒤 저는 저 나름대로 의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릴 적 자전거를 몇 번 밖에 안타본 제가 오토바이를 배우기로 한 것이었 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장기적으로 선교를 할 거면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해 야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보니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나를 너무 믿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는데 알고 보니 아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터 오토바이를 탔었다는 것이었습 니다.

글_박기성 캄보디아 선교사 prayerkspark@gmail.com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이 지나면서 저의 오토바이 실력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딸이 유치원에 입학해서 다니기 시작했는데 제가 직 접 오토바이로 등교를 시켜주곤 하였 습니다. 제 뒤에 딸이 타고 그 뒤에 아 내가 타고 이렇게 세 명이 한 오토바이 에 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현지인들은 이렇게 많이 타고 다 니지만 외국인 가정이 이렇게 타고 다 니는 건 조금 드문 광경이었습니다. 그 래서 주일날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저희 세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에 갈 때면 현지 사람들이 동물원 동물 보 듯 쳐다보며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캄보디아에 나온 지 5년째가 된 지 금도 아내는 초등학교 때 그 실력으로 학사 학생들 식사를 위해 뒤에 주방 아 주머니를 태우고 매일 아침 시장에 다 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내심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감사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주 님께서 오래전부터 아내를 준비시켜 놓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지금은 오토바이를 잘 타고 다니 고 있는데 아내와 같이 외출을 하거나 선교사 모임이 있어 갈 때면 오토바이 를 각자 타고 나갑니다. 가끔 이런 광 경을 본 다른 한인 선교사님들이 엄지 를 치켜 올려주시곤 합니다. 그럴 때면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곤 합니다.

이후 저는 단기 사역자로부터 약 2~3주 가량의 오토바이 연수를 받았 습니다. 그리고 점점 지경을 넓혀 가 던 중 드디어 솔로운전의 기회가 생겼 습니다. 심장은 뛰고 식은땀은 나고 도 로에 오토바이 한 두 대가 다니는 것도

그리고 옆에서 묵묵히 동역하며 그 때 저에게 강하게 동기부여를 준 아내에 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 로 지금까지 안전하게 오토바이를 타 고 사역을 잘 감당하게 해주신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KO MI

월간「한국인선교사」 | 서울 중앙우체국 사서함 5998호 | 대표전화 070-8884-6636 HomePage http://www.kormi.net | E-mail kormi@kormi.net | 팩스 02-2268-6346 후원이사 서좌원 권오기 권희숙 김석주 김영국 김재일 김희경 돌다리교회 박원홍 시카고한인교회 오은희 이동수 이상호 안동근 조주형 추진 발행인 성기호 | 편집인 조성수 | 편집장 김종남 | 편집 안세혁 | 행정 박정례 | 미국팀장 이윤수

월간 『한국인선교사』는 도서잡지 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월간 『한국인선교사』에 실린 글, 사진, 그림은 월간 『한국인선교사』의 서면 허가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캄보디아 속으로...”

막상 선교지에 나와서 대중교통을 이 용해보니 생각보다 차비가 만만치 않 았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는 버스라는 것이 없어서 대중교통이 라고 해봐야 툭툭(오토바이 뒤에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한 교통수단) 이와 모토돕이라는 오토바이택시였습 니다.

아니고, 그렇게 저는 기도하며 처음으 로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언어공부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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