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교사 <사막에는 생명을 위한 펌프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채 봄의 햇살이 다다르지 않은 삼월의 사막, 멀리서 보면, 사막은 죽은 듯 황망한 듯, 잠자는 듯 해 보입니다. 공허하고 쓸쓸하고 막막하고 적막하기에 사막이나 광야 길을 좋아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대도시의 현람함과 북적거림, 수많은 복합빌딩이 도시인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기에 충분 합니다. 대도시의 뒷켠에서 베어 나오는 수많은 악성 가스와 오염물질, 각종 독이 되는 가스들로 인해 영혼은 점차 오염되고 중독되어 병들어 가지만, 도시의 문화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은 그 오염물 질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지만 정작 생명을 위한 약동의 소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사막의 깊은 곳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길고 긴 호흡의 펌프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죽은 듯 마른 나뭇가지 에서, 햇살에 벌겋게 탄 잔디나 풀의 뿌리 결에서, 돌에 눌려 꺾인 틈새에서 새 생명을 위한 펌프질 소리가 약동합니다. 단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찢어지는 뿌리로 더 깊은 곳을 찾아가는 홀로된 밤 에 부르는 치열하고 처절한 생명 연가, 생명을 찾기 위해 절명의 피 터짐으로 부르는 미완성 교향곡은 듣는 이에게 애절함을 가져다 줍니다. 생명의 찬가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사막은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곳입니다. 고국을 떠나 변방을 걷는 선교사들에게 사막은 친근한 벗으로 다가오기에 지치지 않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글_김동욱 필리핀 선교사(yeadalm@hanmail.net) 일러스트_김은영(lewis1212@naver.com)
2015 선교는 누구든지 해야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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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를 사랑하는
성목사 부부
기분 나쁜 성경 구절 날마다 성경을 읽으라는 담임목사님의 권면에 따라 아 침 출근 전에 급히 성경을 펴고 그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믿고 한 두 절 읽고 가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펴 읽은 성경이 그리 좋은 내용이 못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하 루를 지내며 묵상하기는 마땅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접었다가 다른 곳을 펴자“물러가 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기 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삼세번이란 말이 있으니 이번에 주시는 말씀이 오늘의 양식이 될 것이란 기대 속에 다시 성경을 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구절 은 더욱 난감했습니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청년이 찾아 읽은 성경 구절이 하루를 묵상하기엔 기분 나쁜 구절이었습니다. 그날 주신 말씀이 사탄이 들어가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물러가 목매어 죽은 유다같이 되라는 말씀인가 요? 그렇지 않지요. 위의 이야기는 성경을 읽을 때 아 무데나 이곳저곳을 펴 읽는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성경 은 날마다 차례대로 읽어가라고 가르치는 예화로 애용 되고 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는 말씀은 성경학자인 율법 교사와 예수님의 대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교 정통신앙을 이어간다고 자부하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습니다.“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 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 질문은 여러 세대를 거쳐 동일하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그 공로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지킴으로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다른 복음 즉 갈라디아인 주의(Galatianism) 등 많은 잘못된 주장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 들이 해야 할 일은“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6:29).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묻 는 말에 바울 사도가 대답한 말도“주 예수를 믿으라” (행16:31)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sola gratia), 믿음으로만(sola fidei) 죄인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 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 셨기에 믿는 자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고, 부활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함 받은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먼저 구원을 받았고 말씀을 전파하라는 부탁을 유언으 로 받았기에 낯설고 물설은 곳에 나가 좋은 소식(Good tidings, 즉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의 발이 아름답 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도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는 복음이 기 분 나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들 이 예수님 이름으로 욕을 먹고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동정하고 다가가 자기의 물질을 희생 하고 정성을 다해 생명을 살린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에게 개 취급을 받는 입장이지만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 인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KO MI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바울 사도에게“선생들이여 내 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물은 것도 구 원을 받으려면 무얼 해야 할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 다. 젊고 부자인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은 질문도 율법교사의 질문과 동일했습니다.“What must I do?"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 치는 율법주의나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역사할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천주교의 행위 의인론 (work righteousness), 믿음으로 구원 받은 후 율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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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성기호 목사 본지 발행인 keehosung@hanmail.net
라오스에서 보내 드리는
하늘나라 백성들
Face of Lao - 단골손님이란?(2) “라오스” 는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이름으 로 다가온다. 라오스말로 라오, 영어로는 Laos, 헬 라어로는 λαὸ(라오) 혹은λαὸς(라오스)인데 벧전2: 9~10절에“오 직너희는…그의 소유된 백성(λαὸς) 이니…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 나님의 백성(λαὸς)이요”Laos는 하나님의 백성(my people)이라는 뜻이다. 라오스 땅은 이미 사람들 의 입에서“라오스” 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하나 님께서“내백성”이라는 불붙는 마음으로 이 땅을 보실 것이다.
(76x56cm charcoal pastel 2013)
이번에도 룩카빠짬(단골)에 대한 이 야기를 하려 한다. 라오스와 우리나 라가 서로를 잘 모를 때는 관계가 소 원하더니 이제 관계가 개선되고 친 해지니 라오스가 우리나라에게 당연 한 듯 이런 저런 많은 요구를 하는 것 을 보면, 또한 그런 요구를 우리나라 정부, 선교단체, 기업, NGO단체 그 리고 이 땅에 밀알처럼 사는 한국인 들이 흔쾌히 기쁘게 도와주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라오스의 단골개 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튼 참 다르다. 라오스 사 람들이 입는 옷에 제일 많이 인쇄된 글이 “ Same But Different!”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참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게 틀린 것은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것이니 라오스 에 살아가려면 우리가 빨리 적응해야 하지 않을까! 혹 여러분들이 자주 다니는 거래처나 가게 주인이 여러분을 단골이라고 인 정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물건 값을 올려 받으려는 기미가 보이거든“아 이 사람이 나를 단골로 이젠 형제(피 넝)로 인정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서 기쁘게 더 주든지 아니면 마음 상 해하지 말고 과감하게 새로운 거래처 나 가게를 개척하심에 좋을 듯! KO MI
글과 그림_그림-엄미정 라오스 선교사 & 화가 apost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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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Ⅰ
선교사 천로역정(2) 편집자주 : 브라질 김선웅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의 필요성과 유치원, 그리고 부녀자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되었습니다.
아이고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1차 사역에서는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려야했습니다. 사역지가 너무 낙후된 지역이라 경제적으로 어렵고 생 활환경이나 지식수준에서도 최저 수준인 그 곳, 사람 들과 함께 어울리며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마치 바윗 돌에 계란치기와 같아 보였습니다. 어떤 말을 해도 믿 지 않고, 머릿속에 들어가지도 않는 이들을 보며 너무 나 불쌍해서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선교 현장은 문맹률도 높고 법의 보호도 이루어지지 않는 산골 마 을이어서 여자들은 남편의 폭력에 일상 시달렸고 음 주, 흡연에 노출되어 있어 여성들의 인권이나 지위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정신적인 억압과 상처를 가지고 쉽게 술이 나 담배, 마약에 손을 대곤 했습니다.
첫 번째 교회 개척 = 기쁨과 고난의 동시 상영 1995년 12월24일, 현지인들은 한국에서 온 원숭이가 교회를 개척 했다고 신기해하며 구경꾼처럼 모여 들었 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루가 다르게 한국에서 온 원숭이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 의 수가 계속해서 더해갔습니다. 2년쯤 되었을까요?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120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이 인원을 모으기 위해서 사실 우리는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헬몬 교회와 가장 가까운 집이 1Km이며 보 통 4-5Km떨어져있었습니다) 시골 흙길을 중고차로 이리 저리 사방으로 돌아 다녔으니 사람들은 많이 모 여졌지만 우리는 지쳐만 갔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매주 점심을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하느라 녹초가 되 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지친 나머지‘스스 로 교회까지 걸어오는 사람들이 진짜 교인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삼 개월 동안 광고를 한 후 차량 운행을 멈추었습니다.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헬몬 교회 여름 성경 학교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고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지며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비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함으로 자식들 또한 대를 이어 나쁜 영향이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됩니다. 한번은 어린아이 하나가 벌에 쏘여 왔는데 현지 여성 하나가 식기세제로 벌에 쏘인 상처를 닦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된장을 발랐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된장과 식기세제 모두 약효 가 있는 걸까요? 상상이 가지 않는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교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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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예상대로 지난주까지 120명 오던 교인들이 18 명으로 줄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18명은 교인이 아 니라 성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까로나’ (차로 데려 오고 데려다 주는 것) 였구나.. 저는 한 영혼의 소중함 때문에 열심히 하 루에 5시간씩 차편을 제공했던 건데 한 순간 좌절하고 낙심했습니다. 120명이 18명으로 줄었으니 아내는 많 이 예민해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아내에겐 저를 흔 들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생활비였고' 두 번째는‘목사가 이런 것도 못해?’ 였습니다. 저는 헬몬 교회를 갔다 오면 깊은 피로감에 그냥 쓰러 져 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10시쯤 일어 났습니다. 그리고도 잠이 모자라서 낮에 또 자야 했습 니다. 그래서 붙어진 별명이 'Pastor está dormindo ainda?' (목사님 아직도 자고 있나요?) 이었습니다. 무 려 6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슬픈 애칭이었습니다. 또 한 저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현지인들
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말도 잘 못하는 우리를 상대로 이들은 이용하려고만 하고 온갖 핑계를 대며 자기 합 리화를 하였는데 그 때마다 용서해 주기를 반복하면서 현지인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헬몬 유치원 예배 시간에 진지하게 기도하는 어린 친구들 항상 나를 이길 수밖에 없는 현지인들 현지인들과 싸우면(싸움은 아니고 그저 문제가 생기기 만 하면) 반드시 그들이 이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말(브라질)도 못하면서, 또는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브 라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가르치는 것 이 옳아도 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강력한 무기가 나를 힘겹게 만들었고, 아내와의 말다툼에서도 역시 도저 히 이길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에겐 그들 모 두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어쩌 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제가 잘하지 못하여 발생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주어야 하고 당연히 선교사로서 그들의 말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도 못하는 저는 우 리 안에 갇혀있는 외로운 원숭이와 똑 같은 처지였습 니다. 원숭이는 그들 앞에 재주를 부리고 잘하면 잘했 다고 박수를 받지만 못하면 못했다고 돌을 맞는 존재 였습니다. 어느 토요일엔가 아내와 저는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말다툼을 벌였고 결국 강력한 무기를 지닌 아내에게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주일 성찬식 이 있었는데 저는 교인들에게 "오늘 성찬식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원인을 몰 랐지만 아내는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이후 주말에는 좀처럼 큰 말다툼을 벌어지지 않게 되 었습니다.
부간의 싸움도 선교 사역의 일부였습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이 싸웠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싸움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선교 사역 만은 멈추지 않게 하셨습니다. 좌우지간 이 부분은 선 교와 관련된 책에도 나오지 않았고 선교 훈련 때에도 배우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 던 선교지에서의 부부 싸움은 그래도 다행스럽게 선교 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선교 첫 기간 동 안 문화충격에 의한 스트레스로 이혼도장을 두 번이나 찍을 만큼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위안이 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 는 유일한 취미생활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가끔씩 열리는 숲속의 음악회였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공부했 었기 때문에 저는 플루트를 불고 아내는 피아노로 반 주를 하곤 했습니다. 듣는 청중은 아이들과 숲속의 동 물들과 식물들 뿐 이었습니다. 달빛이 비치는 숲 속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는 조금이나마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감격스러운 2005년 따보앙 교회 개척 예배 5년 8개월이 되던 어느 날 우리는 안식년 계획서를 올 리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 었습니다. 파송교회가 없다보니 안식년을 위한 지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안식년을 브 라질에서 해야 한단 말인가? 이리 저리 궁리를 하다가 혹시나 해서 그동안 이용했던 항공사의 마일리지를 합 산해보니 미국 LA까지 공짜 비행기를 탈 수가 있었습 니다.(당시에는 아이들이 아직 어렸었습니다. 5살, 7 살) 하나님께서는 돈이 없으니까 돈 없이도 안식년 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미국 서부에서 안식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 다. KO MI
부부싸움도 사역만큼 중요하다? 한국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첫 기간의 선교 현장은 부
글_ 김선웅 브라질 선교사 brazilgp@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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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Ⅱ
셋, ‘일본 목사님과의 동역’ 편집자주 : 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 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서 전도지를 돌리며 교회를 알렸습니다. 그러나 3개월 이 지나도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3. 일본 목사님과의 동역 마침 교단 모임에 갔다가 테라다 유이찌 목사님을 만 났는데 이 분의 사모님이 한국 분이셨고“일본 선교의 비밀을 벗긴다” 라는 한국어로 된 책도 펴신 적이 있는 일본 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 분을 만나게 되었 습니다. 그 후 테라다 목사님은 저에게 동역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일본 교회에서 함께 일하다 가 이들의 도움을 얻어 일본교회를 개척하고 두 사람 이 동사 목회를 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일본 교회에서 격주로 설교를 하고 수요예배 및 가정 예배 등 여러 그룹들을 돌아가면서 인도를 하였는데 그러면 서 일본어가 급속히 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적당 한 장소가 있어 건물을 빌려서 또 하나의 일본 교회가 개척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 기 아내가 정신병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있는데 주말마 다 집으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발작을 하여 누구도 그녀를 제어할 사람이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신경 안정제를 먹 으니까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 맛있는 음식도 먹고 기운이 나서 발악을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좋으니 병원 심방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분의 성도들을 모시 고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이 여 자의 눈이 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더니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적으로 이것은 정신병이 아니고 귀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 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당신의 아내는 나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겠느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에 게 지금 바로 당신의 아내를 집으로 데려가서 집에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집으로 데 려가서 방에 앉았는데 계속 주위를 살피면서 불안해했 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여자가 집에 와서도 발작은커 녕 너무 조용하게 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를 하자고 하여 기도를 하는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집 안에 온갖 부적들이 곳곳마다 붙어있는 것을 보여 주 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병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인
은혜로운 더니든 일본인 교회 주일 예배 그러나 성도가 한 사람도 없이 저희 가족만으로 시작 하기는 너무 힘든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테라다 목 사님 섬기시는 교회에서 매주 성가대의 절반 정도가 교회의 안내 및 전반적인 것을 섬겨주면서 교회다운 규모를 갖추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격주로 테라 다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해 주시고 저는 테라다 목 사님의 교회에서 설교를 격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을 동원하여 거의 매일 근처 지역에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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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교회 안내를 맡은 자매들
데 부적 같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서 너무 싫 어하시니 떼어버려도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 적을 파는 사람들이 이것들을 떼면 화가 미칠 것이라 고 해서 겁이 나서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걱정 마시라고 안심을 시키고 우리가 떼겠다고 했더니 그러 라고 했습니다. 구석구석 다니며 일본 성도 한 사람이 다 떼어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2층에 세 개 가 더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올라가서 3개를 마저 떼 오라고 했더니 정말 더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 는 앞에서 수천만 원씩 하는 부적들을 다 불사르고 예 배를 드리면서 설교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안수기도를 하였더니 정말ㄹㅎ 이 여자가 깨끗이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 뒤로 이 여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정신병동 마다 다니며 전도하는 전도자가 되어 교회의 부흥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병자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그로 하여금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께로 돌리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일 년이 되어 창 립 1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데 33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 다. 뿐만 아니라 테라다 목사님이 섬기시는 요시가와 복음 교회도 날로 부흥이 되어 30-40명 정도 모이던 인원에서 100명까지 모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러자 그 주위의 있는 목사님이 안 계시는 조그마한 일 본교회의 성도들이 찾아와서 오후 예배라도 좋으니 자 기들에게도 찾아와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였 습니다. 그래서 테라다 목사님과 격주로 오후 시간에 그 교회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 교회도 덩달 아 부흥이 되었습니다.
뉴질랜드 남섬(사역지)의 마운트 쿡과 테카포 호수 또한 교회가 없는 지역을 성도들과 함께 돌면서 계속 전도지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한, 두 명으로부터 전화 가 왔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데 자기 집으로 와
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중에 시간을 만들 어 찾아가니까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그 다음 주에 가 면 서너 명이 모여 있고 또 다른 그룹이 형성되고 해서 조그만 셀 그룹들이 계속 생기게 되었습니다. 테라다 목사님과 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런 셀 그룹들 을 각각 찾아가 말씀을 전하느라 많이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여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했습 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선교는 너무 힘이 든다고 하 는데 제가 보는 견지에서는 전도를 하면 일본 사람들 도 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더니든 교회의 세례자 1호인 홀랜드인 마크(왼위)와 그의 가족들 한국교회가 개척이 힘들다고 하는데 정말 매일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며 전도지를 돌리고 한 사람이라 고 붙들고 복음을 전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 않았습 니다. 저는 벽에 사이타마 현과 치바 현의 지도를 붙여 놓고 한번 다녀오면 한번 긋고 두 번 다녀오면 곱표를 하고 네 번 다녀오면 그 위에 더하기를 긋고 하면서 교 회에서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씩 떨어진 곳까지라도 가 서 전도지를 돌리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시골의 아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 더니 그게 과자 이름이냐고 되묻는 바람에 황당한 적 도 있었다.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교회가 하나도 없 는 곳이 일본에는 수두룩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 본은 전도만 하면 되는 황금어장입니다. 목회자와 성 도가 교회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사 람들을 찾아가 좋으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 전도가 아 닐까요? 예수님께서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 하시고 사람들의 영육 간에 구원하시고 치료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정말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 게 사랑하시고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심을 확신합니다. KO MI
글_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 gideon9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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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Ⅰ
세번째 - 선교사의 '기쁨' 편집자주 : 러시아 박광배 선교사의 선교를 향한 이야기를 10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선교 사역에 많은 기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역보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스스로 독립 하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선 교지로 갈 때는 한참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초등 5학년 의 아들 정석과 유치부에 다니던 딸 진실이, 그리고 선 교지에서 태어난 막내 은석이가 있습니다. 이들의 성 장 과정을 보면서 많은 선교사님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습니다. 아이들은 아침이면 학교에 갔다가 저녁이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적응하는 줄 만 알았습니다. 아이들의 정서불안과 불만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아이는 그렇게 6학년이 되고 중학교 과정인 7학년, 8 학년, 9학년을 거치면서 현지에 적응한다고 하지만 얼 굴은 언제나 어두웠습니다.‘내가 왜? 선교사 부모를 만나서 이곳 러시아에 와야 했나?, 러시아어는 왜 배 워야 하나?’수많은 생각과 갈등이 있었지 않았을까 요? 지금 생각해보면 큰 아들 정석이와 아이들에게 미 안한 마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떠나서 인생을 먼저 살았던 인생의 선배로서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너무나도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고, 하지 말아야 할 실수 였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 니다. 선교지로 떠날 때에는 먼저 아이들과 아내와 함 께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와 아내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 지 대화와 소명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교사역의 가장 큰 기쁨인 가족들과 함께 첫째 아들 정석이는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닐 때 러시아 로 가는 것을 두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서 데리고 갔 습니다. 아이는 힘없이 아버지의 강압 앞에 모든 꿈을 포기하고 러시아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에 도착했지만 매사에 불만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나라에서 졸업도 못하고 혼자 중간에 외국으로 떠나온 아이였으니 얼마나 친구들도 보고 싶고 개인적으로 영 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인 충격이 심했을까요? 이제야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당시 우리 부부만이 한국에서 몇 개월간 선교지 언어 훈련을 받았고 아이들은 현지에서 해결한다고 하여 전 혀 언어 공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러시아어 읽 기와 쓰기 정도는 현지에서 개인교습으로 가르치고 러 시아에 도착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현지 학교에 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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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 정석이와 새로운 가족이 된 며느리 미정 어느 날 대학도 다 졸업한 다 큰 아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아버지!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좋아 했던 과목이 무엇인지 아세요?” 전 정석이 가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러시아 현 지 학교에 다니면서 교과서를 도와 줄 수 없었던 부분 도 있었지만 현장 사역이 너무 바쁘다 보니 가정을 돌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 또한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사역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것입 니다. 보이는 건물이나 현지인들을 섬기는 일도 중요 하지만 먼저 가족이 무시 받으며 버려진 가운데서 무 슨 사역이 중요하단 말인지 자문해봅니다. 그리고 지 금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선교 사에게 가장 먼저 감당할 사역은 설교도 교회 건축도 가정보다 먼저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영순위 는 가정이고, 아이들이 먼저입니다. 제 선교 사역에서 아내의 의견도 무시하고 선교지로 합류하도록 강압적으로 하였던 실수도 있었습니다. 아 내는 워낙에 알뜰하고 계획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깨비 같은 저를 만나서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겪으 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목회를 할 때도 성도가 먼저였고, 아내는 언제나 다음이었습니 다. 성도들에게는 목사로 거룩해야 했고, 아내에게는 나를 잘 보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폭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시 받던 아내가 선교지 로 장소를 옮겼다고 달라 진 것이 있었을지 스스로 생 각해보면 우리 부부는 치유되지 못한 영성으로 선교지 에서 고통 중에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이 충만하였을까? 정말 성령으로 충만하였을까? 모든 잘못된 제 문제를 선교지에서 받는 어려움으로 포장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 안에 있었지 외부의 영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선교지에서의 시간도 24 년이 지났습니다. 좋은 일도 후회되는 일도 이제는 역 사 속으로 묻혀만 갑니다. 이런 지면을 통해서라도 잘 못을 시인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한국인 선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더불어 현장 사역 보다 가정과 아이들을 잘 돌보는 사역자로 다듬어 가 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충분한 사역의 나눔을 통 해서 아이들이 아버지의 사역에 사역자로 세워진다면 아주 이상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둘째 진실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 아 이는 한국에서 1학년을 마치고 선교지로 따라왔습니 다. 마냥 호기심과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안기며 목을 끌어안던 생각이 아련합니다. 잘 웃고, 어두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여자 아이는 세포조직도 남자와 다르 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교도 많고 작은 일에도 그렇게 잘 웃었습니다. 아이의 성품도 있지만 아이는 어린 나 이에 선교지로 왔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지의 어려움들 을 사춘기의 시간 속에 보내던 오빠 보다는 어렵게 느 끼기 전에 선교지의 어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 습니다. 참 적응을 잘했습니다. 음악학교도, 학교생활 도, 교회생활도 주변 사람들과의 교제도 참 좋았습니 다. 물론 이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본인이 겪는 어려움 도 있었겠지만 오빠와 비교하면 잘 적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교지로 떠날 때 아 이들이 어릴수록 현지 적응에 유리합니다. 인생을 이 모작으로 생각하고 인생의 후반부에 선교지로 헌신하 시는 어른들이 계십니다. 아이들을 다 성장시키고 독 립한 다음에 재능기부로 오셔서 젊은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업적들을 남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선교 사 역에 아이들을 돌보고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그 만큼 과소평가 할 수도 없이 많은 헌신을 요구합니다. 이제 우리 가정에는 선교지에서 얻은 막내 은석이가 있습니다. 큰 아들과 나이 차이는 거의 14년이 납니 다. 이 아이는 거의 출생과 성장을 선교지 러시아에서 보냈습니다. 러시아어로 이 아이가 찬양을 하면 제 영 이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러시아 성도 들도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오늘은 이 아이들이 잘 성장하여서 우리 부부 이상의 큰 사역들을 감당하는 사역자로 성장하여 준 것에 대 한 감사와 아픔들을 작은 지면을 통해서 나누었습니 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저에게 너무 나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축복은 저의 아내와 아이 들입니다. 이 축복을 한국인 선교사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KO MI
글_박광배 러시아 선교사 nakhodkach@hanmail.net
3월 7일에 믿음의 가정을 꾸민 사위 원준과 딸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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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Ⅱ
'나는 엄마다' 세번째 이야기 편집자주 : 바울 선교회 MK맘 허은영 선교사의 삶과 사역 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아프리카를 안내한 한 장의 명함! 어둠이 걷히는 새벽녘에 3살 샤론이와 9살 된 아들 지훈이와 함께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했습 니다. 누구하나 아는 사람 없는 아프리카 땅에 우연히 소개받은 한인민박집 명함 한 장 들고 입국장에 서 있 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계획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명함에 적힌 민박집 사장님이 안 나 오시면 어쩌나 하는 염려뿐이었습니다. 처음 대하는 아프리카에서 만나는 한국 분은 고향 그 차체였습니 다. 민박집에서 머무는 10일간은 온통 총기사고와 강 도사건으로 치안이 불안한 아프리카를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오리엔테이션 이었습니다. 걸어서는 집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 은 목숨을 내어 놓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를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가정이 머물 기에 민박은 재정 부담이 커서 할 수 없이 임시 거처 를 위해 월세 방을 얻어서 독립했습니다. 정말 냄비하 나, 수저 4개, 접시와 공기 가 전부였습니다. 한국에 서 가져간 이불 한 개는 바닥에 깔고 다른 한 개는 덮 고 네 식구가 지냈습니다. 시간은 많은데 갈 곳도 없 었고, 갈 수도 없었고, 또 아무도 우릴 찾아오는 사람 조차 없는 곳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열방의 어미가 되게 하리라!’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 사무엘이 할 수 있는 일은 날마다 신나게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이 어디든지 의사소통이 되는지도 상관하지 않고 마당에 모여든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는 아이를 보며 불안과 두려움 에 쌓여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언제나 보츠 와나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기다리기에 살림살이도 준비 할 수 없었습니다. 밤이 되면 커튼 하나 달려 있 지 않은 유리창으로 달빛이 들어왔습니다. 낮엔 햇살 이 유일하게 집에 놀러 오는 손님이었고 밤엔 달빛이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사방이 꽉 막혀있는 낫선 곳 에서 오직 하늘만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을 향해 두 팔을 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하 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대답하시듯 밤하늘만이 제 눈 에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남아공 동쪽에 위치한 보츠와나 지리와 국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 지고 만델라 정권이 시작한지 2년째 되는 시기라서 사회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듯 했습니다. 피부색으로 거주지가 나뉘어져 있었고 사용하는 마켓조차 피부색 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리 를 더 불안하게 한 것은 이곳이 정착지가 아니라는 사 실 이었습니다. 차편을 마련하여 몇몇 큰 교회들을 찾 아가 보았습니다. 혹시 이웃나라인 보츠와나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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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에서 가족들과 함께
그런데 기도할 때 마다‘내가 너로 열방의 어미가 되 게 하리라’하시는 약속이 마음에 음성으로 들려 왔 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말씀하시듯 말입니다. 감사함으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지만 눈을 뜨면 현실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혼 자 서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열방의 어미보다는 당장 내 품에 두 아이조차 잘 양육할 수 없는 나약한 엄마 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안전하게 하루를 마무리 하 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과였습니다. 갑자기 필리핀이 그리워졌습니다.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인 필리피노들 의 웃음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지낼 때는 몰 랐는데 떠나오고 보니 트라이시클의 시끄러운 모터 소리를 타고 자유롭게 어디든 다닐 수 있었던 필리핀 을 떠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저의 아프리카 적응 은 그리움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만으로도 집에 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들뜬 마 음으로 남아공 국경을 넘었습니다.‘쾅! 쾅!’도장 두 번 찍으니까 이민국이 통과 되었습니다. 다시 차를 타 고 500미터 정도 지나니까 아까와 전혀 분위기가 다 른 보츠와나 국경에 도착했습니다. 제 눈에는 똑 같은 사람들 같은데 국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이민국을 통과하고 나왔습니다.
보츠와나 시절의 선교편지
보츠와나 전통 가옥의 전경 드디어 보츠와나 국경을 넘다! 남아공에서 약 2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하나님의 은 혜로 차량이 생겼습니다. 비록 10년이 넘은 중고 차 였지만 우리 가족의 발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움직 일 수 있는 발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던지 마치 아프리카를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몇 주 째 예배 참석하던 리폼드 교회에서 보츠와나로 파송한 평신도 교사 선교사에 대한 정보를 받았습니다. 그리 고 그 주에 임시 비자를 받아서 요하네스버그에서 약 400Km 떨어진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를 향해 달 려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나라인데 단지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는 그것이 이미 저를 보츠 와나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달려가도 끝이 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은 기쁨이고 희망이었습니 다. 마치 저 끝에 우리 가족을 위한 아름다운 집이 기 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당장 오늘 밤 머물 숙소 도 준비 되어 있지 않지만 보츠와나 국경을 넘는 것
그런데 가족을 태우고 차에 시동을 거는데 걸리지 않 는 것이었습니다. 차키를 몇 번이나 다시 끼우기도 하 고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았지만 차는 아무 말이 없었 습니다. 그렇게 보츠와나 국경에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정말 기대하고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하고 도착한 보츠와나였습니다. 첫발을 딛는 영 광의 순간이어야 하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상황을 알아챈 현지인들이 하나 둘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주여!! KO MI
글_허은영 바울선교회 MK 선교사 baurim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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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쪽과의 만남
Love Story
우리 부부의 색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믿음의 가장인 장대옥 선교사(좌) 결혼 40주년을 앞둔 지금 러브스토리를 쓰려니 새삼 그때의 추억에 빠져 행복한 마음이 든다. 그때의 그 풋 풋한 사랑. 참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여러 가지 모습 으로 변해온 사랑의 색깔들. 남편과 처음만난 시간은 지금부터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남편은 중학교 1학년에 막 입학한 까까머리 신입생 소년이었다. 그 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상태로 그냥 누나와 동생으로 가깝게 지내 며 가끔 우리 집에 놀러오면 딸 부잣집(2남7녀)인 우리 집의 모든 형제들의 환대를 받으며 스스럼없이 형제처 럼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우리부부는 1950년생(범띠) 동갑내기다. 그러나 남편 이 어려서 건강이 안 좋은 까닭에 학교를 2년을 늦게 입학하게 되었고 내가 2년이나 선배이기 때문에 깍듯 이 누나 대접을 해주었다. 어느 날 남편이 국민투표 선 거열람 업무를 도와주다가 가족 명부를 보게 되었고 내 가 1951년생으로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1살 아래 동생이라는 사실에 용기 를 내어서 '누나가 아니라 연인' 으로 갈수도 있다는 확 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부부는 8년 이상 을 친구이자 누나 동생 관계로 이어왔다. 결혼을 하게 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남편은 전주에 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동생과 함께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을 때였다. 서울에서 막내 이모가 우리를 돌봐주고 계셨는데 여기 저기 혼처를 알아보시 면서 선을 보도록 주선을 하셨다. 나는 남편에게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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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없이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나중에 남편이 그때 이 야기를 들으면서 빨리 속마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뺏기겠구나 하고 무척이나 조급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할지 고민 하다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직장 동료와 함께 여름휴가를 가서 사랑의 고백을 하고 여기 에서 들어주지 않으면 차라리 약을 먹고 여기서 죽어버 리겠다고 하자고 각본을 짰다는 것이다. 그해 여름 우리는 친구 커플과 함께 무주구천동으로 여 름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텐트를 양쪽에 두 개를 나란히 치고 남자와 여자는 따로 잔다는 약속을 철썩 같이 믿 은 철없는 아가씨들이었다. 그리고 각본대로 정해진 시 간이 되자 남편은 결혼하자는 고백을 하였고 나는 그럴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하였다. 그러자 준비해 놓은 소 화제를 입에 털어 넣었고 남편은 얼굴이 벌거진 상태로 쓰러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겁을 해서 정말 이 남자가 이렇게 죽어 가는가 보다고 생각 을 했다. 연극인지도 모른 체 겁이 나고 너무 슬퍼서 같 이 울면서 결혼하자고 승낙을 하였다. 그 후로 남편과 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부모 님의 실망과 반대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 님의 은혜로 우여곡절 끝에 1974년 4월23일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남편은 33년간의 직장의 삶을 은퇴하고 목사안수 를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부부가 함께 선 교사의 길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를 택하시 고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아바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 며 오늘도 동남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그 땅을 축 복하며 그곳에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며 그 민족이 하나 님의 백성을 믿으며 그 곳에 예배자로 중보자로 살아가 고 있다. KO MI
글_ 김혜연 태국 선교사 ok3578@hanmail.net
낸시가 사랑하는
하나님 만나기 3
그림_안민희 자매 als36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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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와 IT
세상 돋보기 3
On Line과 Off Line의 조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갖는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온라인을 활성화 하는가 도 포함이 됩니다. 특별히 말씀 증거의 최 일선에 있 는 선교사님들의 경우 어떻게 현대문명의 이기를 복 음을 전하는데 사용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정지역의 사람들 에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프라인 잡지나 홍보물을 통해 온라인 사이트를 선전하는 방법입니다. 일단 나 를 아는 사람들이 확보되기 시작하면 온라인의 활성 화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기간까지는 반드시 오프 라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20년이 넘게 산 필자는 이곳 한인교회의 전도방법에 대해 20년 전부터 이의를 제기해 왔습니 다. 이곳의 전도방법은 천편일률적으로 담임목사의 설교를 담은 CD를 한인이 많이 출입하는 마켓이나 음식점 등에 비치하여 그것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 입니다. 오래전에 비해 바뀐 것이라고는 카세트에서 CD로 바뀐 것이 전부입니다.
예를 들어‘한국인 선교사’사역을 활성화시키기 위 해 오프라인 잡지가 당분간 필요한 것이 그 이유입니 다. 적절한 시간이 된다면 한국인 선교사는 오프라인 보다는 온라인으로 더욱 활성화 될 것이 틀림없습니 다. 지금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과는 많이 다르겠지 만 이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제조건이 한 국인 선교사의 온라인 사이트를 오프라인 잡지를 통 해 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사람의 입을 통해 온라인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CD는 누가 가져가게 될까요? 정답은 너무 도 뻔합니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실망하 여 타 교회를 찾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전도의 타깃이 예수님을 안 믿는 자가 아닌 현재 교 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조금은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CD를 배포하는 것은 같지만 CD의 내용에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재미있는 스마트폰 사용법’이라던가‘UC입학을 준비하는 학 부형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런 것이 앞에 들어가고, 찬양 2-3곡과 함께 목사님의 복음에 관한 5분 정도 의 짧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방법이 아직 활 성화 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름 적지 않은 반응을 불 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적어도 믿지 않는 이들이 복음 을 들을 수 있는 확률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미국에서 이런 방법을 활용한 전도를 실시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를 위해 다양한 콘 텐츠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컨텐트는 무상 으로 제공될 것입니다. 이 방법은 선교지에서 나름대 로 번역을 해서 활용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온라인을 활성화 하는 방안은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 다. 그런데 현재까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오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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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의 재정 관리를 위해 4명이 3시간을 걸려 야 끝나는 작업이 한 사람이 효율적인 방법을 시행하 면서 시간도 인원도 반으로 줄었습니다. 이제 열심 히만 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습니 다. 열심히 해도 효과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 어쩌면 우리 주님은 그것을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 리에게 컴퓨터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KO MI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7).” 글_ 윤승준 Kyelp 대표 sjyoon7231@gmail.com 블로그 blog.naver.com/joshua7231
선교사 디브리핑을 위한 모임 4월 11일 (토) 오후 5시 문의: 김종남 목사 (gbm1958@naver.com/010-2765-9654)
선교사 건강상식
코미 게시판
병은 없다 3
폭식증(스트레스성)
한국인선교사 해외후원
폭식증 환자들은 대부분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해 설 탕이 많이 든 단음식과 지방이 많은 기름진 음식들, 빵 등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혼 자 있는 경우에는 음식물을 씹지도 않고 삼키거나 빨리 먹는 경향이 있고 어떤 분들의 경우에는 과체중이면서 도 체중을 줄이면 얼굴이 늙어 보인다고 불안해하는 경 우도 있다. 이러한 폭식증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서로 협조하여 음식물을 멀리하게 하고 환자 주변에 음식물을 통제해야 한다. 현대의 가공된 음식물들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몸의 여러 장기들은 점점 고장 나게 되고 각종 중금속이나 식품첨가물들이 체내에 축척되어 결국은 질병에 걸리 게 된다. 우리 몸은 한 가지만 과잉되어 넘쳐도 종기나 염증 등이 생기고 반대로 부족하여 결핍되면 몸 전체가 심한 결핍증이나 갈급증, 불편함 등의 질병으로 나타나 게 된다. 자연건강법은 인체에 꼭 필요한 필수요소를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안전한 자연적 방법으로 체내 결핍된 것은 보충하고 과잉 축척된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 중금속 (독소)을 빼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건강법은 환자의 강한 의지와 노력,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환자 자신과 가족들의 이해와 노력과 일정한 시간이 요 구된다. 폭식증은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 라 생활습관과 식생활습관으로 인해 생긴 병으로서 생 활습관과 식생활 습관을 고쳐야 병이 낫게 된다. KO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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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우 목사는 자연치유 전문가
다음 카페 <병은 없다> 운영 cafe.daum.net/leedokwoo 건강문의 nlc8004@hanmail.net
한국인선교사 국내후원
쉴터 이야기
월간 『한국인선교사』는 도서잡지 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월간 『한국인선교사』에 실린 글, 사진, 그림은 월간 『한국인선교사』의 서면 허가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폭식증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음식에 대한 욕심이 많 아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고, 음식을 먹는 동안 만족 감을 느끼면서 폭식을 하게 된다. 또한 스트레스나 불 안, 근심, 걱정, 두려움, 어린 시절 가난 등이 있는 경우 에도 폭식을 통한 포만감으로 스트레스나 불안을 해소 하기 위해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과식과 폭식을 계속 하게 된다. 이러한 폭식은 체중증가, 복통, 구토, 약물복 용, 무리한 다이어트, 무리한 운동, 알코올 중독, 우울증 등을 반복하면서 증상이 점점 심하게 된다.
개인수표 보내실곳 1806 Morning Canyon Rd. Diamond bar, CA91765 수취인:KOREAN MISSIONARY 문의: 이윤수 목사 (williamwooramlee@yahoo.co.kr/ ☎ (909)276-0011&(909)912-9104)
일반후원: 매월 천원부터 자유롭게 구독후원: 1년에 1만원 후원계좌:국민012-21-0840-091조성수 문의: 박정례 간사 (kormi@kormi.net/ ☎ 010-2797-6103) 월간 한국인선교사 쉴터는 선교사님들을 섬기고자 마련된 작은 숙소입니다. 현재 인천시 구월동의 한 빌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다섯 채가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습니다.
운영헌금: 매월 1만원 후원계좌: 국민 512625-95-102325 조성수 이용문의: www.kormi.net / ☎ (02) 2268-6636
코미 메세지
*월간 한국인선교사 20주년 감사예배 및 선교잔치가 신대방동 보라매교회 (서좌원 목사 시무)에서 있습니다. 일시 : 2015년 5월 11(월)-12(화) 문의 : 김종남 목사 (010-2765-9654/gbm1958@naver.com) *인천 쉴터 5채가 새롭게 단장하는 중에 이불, 베개, 선풍기, 벽시계, 가스렌지, 전기밥통, 전자렌지, 밥솥, 주방용품 등 필요물품을 기증해주실 분을 모집합니다.
문의 : 박정례 간사(010-2797-6103)
2월 재정보고
재정 보고
한구인선교사 하는일
들온모든셈 2,626,347 나간모든셈 2,845,936 전월이월 -2,824,732 당월이월 -3,044,321
1995년 3월에 창간한 월간『한국인 선교사』 는 해외에서 사역하는 한국 인선교사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 기를 사진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선 교 역사로 기록하고자 발행하는 선 교잡지의 하나로서 선교사님들에게 무료 월간 보내기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쉴터 운영 을 하고 있습니다.
후원이사장 서좌원 | 후원이사 권오기 권희숙 김석주 김영국 김재일 김희경 돌다리교회 박원홍 시카고한인교회 오은희 이동수 이상호 안동근 조주형 발행인 성기호 | 편집인 조성수 | 편집장 김종남 | 편집 안세혁 | 행정 박정례 | 지원 최숙 이석영 | 미국팀장 이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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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소리
글_편미선 필리핀 선교사 GP선교회 punmisun65@hotmail.com
얼마 지나 손님들을 모시고 사역지에 다녀 온 남편이 당황스러워서 혼이 났 다면서 이야기를 해주는데 듣는 나도 무안 할 지경이었다. 손님들이 도착한 시간이 마침 점심 시간 쯤 되어 교회 에 도착을 했고, 점심을 준비한 상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섯 분의 목사님을 모시고 갔는데 반 찬은 야채 볶음 한 접시와 여섯 마리의 생선을 구워 놓은 것이 전부였던 것이 다. 그 손님들을 인솔하여 간 우리 남편이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밥을 어찌 먹었 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고 했다. 그 후에 들려진 소식은, 우리 선교지의 방 문을 마치고 마닐라로 이동하여 그 곳 의 선교사로부터 융숭한 최고급의 대 접을 받은 후 그 분들이 천국과 지옥을 맛보고 왔노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슴이 쓰렸다. 우리 선교지 가 지옥인가?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어 교 인 집을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몇 명 의 친척을 포함하여 열다섯 명 정도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우리가 일 반적으로 쓰는 국그릇 사이즈의 대접 에 아도보(닭 간장 조림반찬) 한 대접 과 커다란 밥솥에 가득 차 있는 밥이 전부였다. 나 혼자 먹어도 부족할 것
같은 양의 반찬을 열다섯 명이 나누어 먹고 있었는데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가 먹을 수 있는 양 만을 갖다가 손으 로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궁금해서 반찬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물으니 수줍은 듯 환하게 웃으며 이것으로 충 분하다고 했다. 내 눈엔 이 모습이 마치 천국의 모습 같았다. 그렇다. 이것이 이들이 살아가 는 삶의 방식이고, 생활수준이다. 손가 락만한 사이즈의 소금에 절인 생선 한 마리로 수북이 쌓인 밥 한 접시를 다 먹을 수 있고, 그것도 형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간장을 반찬 삼아 아무런 갈등 없이 감사함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 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많은 종류의 음식을 하라고 부탁한 나 의 한국적 기준의 생각과 야채 볶음 한 접시와 일인당 한 마리씩 여섯 마리의 생선구이가 여섯 명의 손님들이 먹기 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이곳 현지인들 과의 생각 차이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대형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간 선교사나, 선교지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을 포 함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그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머리 를 조아려야하는 급이 똑같은 죄인들 인데 무슨 기준에 의해 누구는 대접을 잘 받아야하고, 어느 누구는 반찬이 없 어 간장을 반찬삼아 먹어도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없을 땐 다 그랬어...'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는 선교사나 선교사를 위해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는 교회나 선교지의 영 혼들을 마음에 품고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것을 고집하지 않고, 이들의 문 화를 수용, 이해하고, 이들처럼 되려고 애쓰는 모습일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 셨던 것처럼.. 비싸고 맛있는 음식이 풍성한 화려한 곳이 천국이 아니라, 간장을 반찬 삼아 먹어도 주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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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어느 날 한국의 목회자 몇 분이 우리 가 사역하고 있는 선교지를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중간에서 소개해 준 분이 그분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주면서 한국에서 제법 큰 교회에서 목 회하는 분들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그 때 우리 가족은 본국에서 본부사역중 이어서 남편만 시간을 내어 그분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큰 교회에서 목회하 는 분들이라고 강조한 속 내용은 잘 모 셔야 된다는 뜻 일 것이다. 그러나 현 지인 성도들은 한국음식을 할 줄 모르 고, 또 이 지역엔 이렇다 할 좋은 식당 도 없다. 하는 수 없이 교인들 몇몇에 게 음식을 준비하되 돈 생각하지 말고 푸짐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하라고 전 화로 신신당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