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선교사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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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선교사 <하늘을 보거라 아들아> 하늘을 보거라 아들아 그러나 꿈틀거리며 오르는 담쟁이 넝쿨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거라 돌담 사이 끼여 짓눌린 허리춤 마디마디 쑤셔와도 돌틈 새 비집고 일어서며 한 줄기 햇살 보기위해 한 밤을 새우는 담쟁이 넝쿨에도 눈길 주어라 하늘을 보거라 아들아 그러나 하늘까지 끌어안고 이슬 한 방울로 아침을 맞는 푸른 솔잎 위 키 작은 청개구리의 눈망울을 보거라 글_김동욱 필리핀 선교사(yeadalm@hanmail.net) 일러스트_김은영(lewis1212@naver.com)

2015 선교는 누구든지 해야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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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를 사랑하는

성목사 부부

난감한 질문들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집에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 다. 들어가 잠시 묵상기도를 드린 후 눈을 뜨자 주인인 남편이 난감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니 아담이 따 먹을 것도 아셨을 텐데 왜 선 악과를 만드셨습니까?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까를 생 각하고 있는데 또 다른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었 습니다. 부인되는 분이 미안해하며 양해를 구했습니다.“죄송 합니다. 전에 담임하시던 목사님께서 오셨을 땐 인사 만 하고 남편이 나가버리곤 했었는데 그래도 오늘은 앉아 있으니 이것만 해도 많이 발전한 것입니다. 이해 해주세요.” 남편의 질문은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 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질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 고 싶어서 묻든,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한 질문 이든 간에 알기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공룡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인 가? 왜 공룡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나? 지구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나?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의 운명 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많을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의 질문에 답하거나 우리의 호 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고 구원의 길 을 가르치기 위한 책입니다(딤후 3:15).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20여명 안팎의 목회자들이 월 요일마다 모여 성경을 토론하며 목회연구를 하는 모임 이 있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전도할 때 흔히 받는 질문이“기독교가 전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은 예수님을 몰랐는데 지옥에 갔나요? 예수 를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고 하시니 말씀입니다.” 이질 문을 중심으로 참석자들이 자기의 의견을 밝히며 토론 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 를 범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또 죄의 삯은 사망이며 예 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이 야기를 듣는 불신자 중에는 자기 조상이나 배우자가 예수님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들이 없는 천국에 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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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12절에서 16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성경 이나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양심을 따라 살았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율법으로나 양심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나 양심은 사람이 죄 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심판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할 뿐 입니다. 율법의 행위나 양심대로 산 것으로 하나님 앞 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성경은 단언 합니다(롬 3:20). 신자의 가정에 상사(喪事)가 생겼는데 세상을 떠난 이 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경우 장례식에서 무엇이라 설교할 것인가도 토론의 제목이었습니다. 목회현장에 서 심각하게 부딪혀오는 문제일 것입니다. 참석자 중 한 분이 지혜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 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니 사람이 판단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이니 하나님께 맡기 고 남은 가족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가도록 노력 하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했습니다. 난감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 성직자이든 평신도든 간 에 질문한 사람을 언짢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은“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전 3:15-16) 고 명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잘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면 되고,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는 경우에 도 온유함을 잃지 말고 성의껏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가 성경을 다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 알지는 못하나 다 믿는다는 지혜로운 대 답을 했습니다. 성경에 모르는 부분도 있기에 모른다 고 대답하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KO MI

글_성기호 목사 본지 발행인 keehosung@hanmail.net


라오스에서 보내 드리는

하늘나라 백성들

Face of Lao - 돈으로 본 라오인(1) “라오스” 는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이름으 로 다가온다. 라오스말로 라오, 영어로는 Laos, 헬 라어로는 λαὸ(라오) 혹은λαὸς(라오스)인데 벧전2: 9~10절에“오 직너희는…그의 소유된 백성(λαὸς) 이니…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 나님의 백성(λαὸς)이요”Laos는 하나님의 백성(my people)이라는 뜻이다. 라오스 땅은 이미 사람들 의 입에서“라오스” 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하나 님께서“내백성”이라는 불붙는 마음으로 이 땅을 보실 것이다.

(76x56cm charcoal pastel 2007)

라오스에 16년 넘게 살아오면서 이 땅과 이 사람들의 수 없는 문화, 풍습과 만난 다. 때론 우리나라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 여 놀라고 때로는 너무 달라 놀라고.. 필자가 라오스에 입국한 것이 1997년 10 월인데 그때 환율이 한국은 1$에 약 800 원 수준 이였고 라오스 Kip의 환율은 1$ 에 약 1000낍 정도였다. 1997년 말부터 강타한 IMF 사태로 한화의 환율은 98년 1월 1,800원까지 하락한 반면 라오스 kip 은 약 10,000kip까지 곤두박질 한 후 몇 년 전부터는 대략 8,000kip으로 유지되 어 오고 있다. 그때는 한국에서 라오스로 보내오는 달러 가 반 토막 나는 등 라오스에서 과연 살아 갈 수 있을까 자체를 재고할 정도의 대위 기였지만 다행히 라오스의 환율이 10배 가 뛴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그 위기를 넘 길 수 있었다. 1997년의 라오스 화폐는 50, 100, 500, 1000, 2000, 5000kip 화 폐가 있었으니 미국 돈 100$ 한 장을 라 오스 돈으로 바꾸면 100kip, 가장 고액권 인 5000kip 화폐로도 200장이나 되었으 니 돈지갑이 아닌 돈 가방 한 가득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라오스가 그런 경제위기에서도 이제까지 버티어 오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할 따름이 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필자는 라오스 사람들의 돈 세는 모습에 서 찾아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KO MI

글과 그림_그림-엄미정 라오스 선교사 & 화가 apost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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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Ⅰ

선교사 천로역정(3) 편집자주 : 브라질 김선웅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선교의 두 번째 Parent(Peer to) Stage 단계(2001년부 터)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개척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우리가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개척하고 떠나온 헬몬 교회가 목사도 없 이 안수도 안 받은 피택 집사를 중심으로 그들 스스로 열심히 교회를 이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지의 교 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면서 지내온 1년 동안의 교회 예배 일지를 써서 건네 왔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안식년 때에 놓 고 갔던 차도 잘 관리를 해 놓았습니다. 사택 역시 관 리 상태가 좋았습니다. 6년 동안의 보잘것없는 선교 사역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았 다는 것을 이런 감동으로 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사의 아들로 당당하게 '아넴비 모름비' 종합대학 항공과에 합격하여 대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졸업하였습니다. 두 번째 기간의 시작은 우리가 없는 동안 헬몬 교회를 열심히 나왔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지도자 훈련이었 습니다. 왜 청년들을 훈련하게 되었느냐 하면 어른들 이 예수 믿고 삶이 변화될 확률은 10%, 청년들이 거듭 나는 확률은 30%, 아이들이 예수 믿고 변화될 확률은 50%가 넘었기 때문입니다. 선교 두 번째 단계가 끝나 는 10년 동안 놀라운 일들이 생겼습니다. 헬몬 교회가 있는 베이자 플로르 동네에 그동안 대학생이 한 명도 없었는데 드디어 대학생이 생긴 것입니다. 더 감격적 인 사실은 그 대학생이 바로 우리가 훈련시킨 교회 청 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로도 계속적으로 더 많 은 대학생들이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우 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었지만 그 말씀을 통 해 그 지역 청년들이 깨어나고 커다란 비전을 가슴에 품게 된 것입니다.

선교사의 자녀로 잘 성장해 준 성순(좌)과 형순(우) 안식년 후 우리는 이렇게 두 번째 P단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소위 선진 교육을 맛본 아이들, 성순이와 형순이를 다시 이전에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 분교에 다시 복학 시켰습니다. 달랑 4학년까지만 있 는 학교였습니다. 교실은 두 개였고 선생님 역시 두 분 이었습니다. 교실 하나마다 두 개의 학년이 함께 공부 하면서 한 학년은 앞을 보고 앉고 다른 학년은 뒤를 보 고 앉아서 수업하였습니다. 세상에나! 이런 학교가 아 직까지 있었다니.. 그래서인지 아들 성순이는 아직까 지도 브라질어인 포르투갈어 문법에 약합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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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기증한 일본인 이민자 대표와 함께 헬몬 유치원을 개원하다. 2000년 18명의 아이들과 함께 교회 건물 내에서 하나 님의 은혜(복)가 시작하는 곳(헬몬의 이슬로부터 시작 하여..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시133:3)의 의미 로 이름 지은 헬몬 유치원을 시작했습니다. 헬몬 유치 원은 시작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학생으로 가득 찼습니 다. 계속되는 성장 속에 69명의 원생으로 교실 두 개 가 꽉 찼습니다. 더 이상 아이들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


다. 그러던 중에 아내의 브라질 사람들을 향한 교육 열 정에 감동을 받은 일본계 브라질 이민자 2,3세들로부 터 한국 평수로 약 5,000평의 땅을 기증을 받게 되었 습니다. 정말로 이 부분을 간증하자면 일주일 동안 말 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때 느낀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돈이 있었다면 땅을 사려 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중에 그럴 만 한 돈이 없었 습니다. 그 때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서는 다른 방법으로 땅을 주셨습니다. 기증 받을 당시 땅값은 1억 원이 넘는 큰 액수였습니다. 기증자 모두 는 조상 대대로 불교 신자들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 는 사람들이 선교사에게 땅을 기증한다는 것이 가능하 기나 할까요? 하나님의 섭리 속에 그 땅 위에 먼저 두 번째 교회를 세웠고 곧 바로 학교 건물을 새로 세워서 유치원을 그 곳으로 옮겼습니다.

현지 시정부가 감동을 받다. 지역 청년들을 계몽시키고 부족한 교육시설을 확충하 는 등 지역 사회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우리의 사역 에 감명 받은 브라질 시정부는 정식 사립 크리스천 스 쿨이 된 우리 헬몬학교에 현재까지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2011년 당시 학교를 위한 간식과 부식, 스 쿨버스까지 포함하여 매월 만 불 이상을 지원받았는데 이런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선교지에서 일어나고 있었 습니다.

현지인 실비우, 에리카 선교사 파송식

헬몬 유치원 초창기 모습 학교는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 오후반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10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80명의 아이들로 줄이고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온종일 반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헬몬 학교는 정말 기적적 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많았음을 고백 합니다. 학 교는 제 모습을 갖춰 갔지만 브라질 교육청에 정식 등 록 학교가 되기 위해선 자격을 갖춘 교장 선생님이 있 어야만 했습니다. 교장의 월급은 매우 비쌌습니다. 그 래서 아내 김혜란 선교사는 석사학력에도 불구하고 다 시 브라질 교육 대학에 입학 했습니다. 왜냐하면 브라 질에서는 교사 및 교장 등등의 모든 자격증을 대학 과 정에서만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장을 영입해 월급 을 지급하는 것 보다 교육 대학 등록금이 훨씬 더 싸다 는 경제적인 이유도 한몫 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 안 아내는 난이도 높은 외국 언어의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낮에는 사역지에서, 밤에는 대학교에서 만학에 힘쓴 결과 3년 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대학 졸업과 함께 교장 자격증을 받아 냈습니다.

현지 이양과 또 다른 개척 그리고 방해 공작들 우리는 헬몬 교회를 개척 한 지 10년 만에 직접 훈련 시킨 현지인 사역자 화비오에게 현지 이양을 하고 곧 바로 기증 받은 땅위에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 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첫 번째 단계에 없었던 열 매들이 열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역을 방해하는 걸림 돌도 있었습니다. 우선 2003년 1월 17일에 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가 발 생 했습니다. 차는 폐차될 정도로 크게 망가졌지만 차 안에 있었던 가족 모두는 무사했습니다. 사고는 고속 도로에서 일어났으며 우리 차는 굴러서 개울에 거꾸로 처박혔습니다. 정말로 죽을 뻔 했었습니다. 같은 해인 11월15일에는 총을 든 강도가 어린 자녀들을 인질로 잡고 양 쪽에 있던 옆집들을 차례로 싹쓸이 하고 우리 집에서는 가져갈 것이 없었는지 반지와 시계만을 들고 사라졌습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교회에 있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아 집에 늦게 도착했었는데 만약 제 시간에 집에 갔었더라면 저까지 인질이 될 뻔한 아주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나님 의 계획을 막진 못했습니다. KO MI

글_ 김선웅 브라질 선교사 brazilgp@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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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Ⅱ

넷, ‘안식년을 뉴질랜드로 떠나다’ 편집자주 : 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 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일본은 영적으로 악한 영들의 공격이 무척 강한 곳입 니다. 그래서 더 영적인 전쟁을 하기 위하여 기도하기 에 힘썼습니다. 전도지를 돌리면서 대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서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올 것과 악한 영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고 명령하기도 하였습니 다. 그러면서 사역의 폭은 점점 넓어져 갔지만 그 만큼 말씀 준비하랴, 기도하랴, 다니면서 집회 인도하랴, 전 도하랴 정신없이 뛰다 보니까 몸이 상하기 시작하였습 니다. 불과 일본에 간지 오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내 도 나도 몸에 이상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절대 안정이 필요하며 무리하면 큰일을 당할 수 있다고 했 습니다. 그래서 섬기던 교회를 후배에게 부탁 하고 일 년간의 안식을 얻었습니다. 일 년 동안 미국에 가서 공 부를 할까, 아니면 조용한 곳에 가서 푹 쉴까 고민하 다가 기도 중에 뉴질랜드로 무조건 쉬러가기로 했습니 다. 그래서 온 가족이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무작정 몸 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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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할 때 연료 절약을 위해 몰래 온도를 낮춰서 소각 을 하면서 발생하는 다이옥신으로 인해 아내는 폐결핵 이 걸려 있었고, 저는 위와 간이 많이 상한 상태였습니 다. 그런데 뉴질랜드로 가서 좋은 물, 공기와 함께 과 일, 야채 주스를 마시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치 유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참 으로 빈틈이 없으시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주님의 새로운 계획과 인도하심은 실로 큰 은혜입니 다. 안식년 기간 동안 우리는 서구의 교회를 보면 앞 으로의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매주 다른 교회를 돌면서 교회의 분위기와 역사를 공부했습 니다. 과연 여기저기 다녀보니까 앞으로의 한국이나 일본 교회의 방향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서구 교회처럼 되지 않고 좀 더 능력 있는 교회가 되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2기 사역의 그림이 그려지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끝나갈 무렵 뉴질랜드 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퀸스타운으로 여행으로 떠났습 니다. 이제 곧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에 좋은 추억을 만 들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동역자요 든든한 후원자인 가족들과 함께

일본인 엄마들과 야외예배 후 함꼐한 정은혜 선교사(우)

처음 가 본 뉴질랜드는 정말 천국 같은 곳이었습니다. 날씨 뿐 아니라 영적인 분위기가 기독교 배경이라 너 무나 평화롭고 안정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과일과 야채가 너무 싸서 가자마자 평소에 마시고 싶었던 과 일, 야채를 실컷 만들어 안식년 기간 동안 계속 마셨습 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본에서 머물던 곳이 쓰 레기 소각장이 23군데나 모여 있던 곳이었는데 밤에

퀸스타운은 뉴질랜드 남 섬 중에서 거의 남단 내륙에 위치한 만년설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스키 장이 네 곳이나 있습니다. 그래서 스키 시즌이 되면 전 세계에서 스키를 타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특히 그 때만해도 일본의 경기가 좋을 때라 수많은 젊은 일본인들이 스키를 즐기며 영어도 공부하 기 위해 몰려 왔습니다. 디모데 목사님은 이곳에서 교


회를 개척하여 12년간 목회를 하시면서 일본인들을 위한 모임을 따로 만들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어가 약한 일본인들이 말로는 주님을 믿겠다고 하 면서 전혀 신앙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어로 설교가 가능한 사역자를 위해 기도해 오셨다고 하셨습 니다. 그래서 마침 호텔업을 경영하시던 한국 집사님 이 우리를 디모데 목사님에게 소개를 하셨는데 만나자 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첫 만남에 워크비자를 주 겠다고 동역을 제의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 리는 퀸스타운 침례교회와 함께 동역을 하게 되었습니 다. 대상은 주로 스키를 타러 오거나 영어를 공부하러 오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로 작정을 하고 집에서 나왔는데 매주 교회 앞을 지나 가도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일본인 교회 간판이 그날따 라 보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살하기 전에 교회나 한번 가보자 생각을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서성이고 있었는데 우리가 달려 나와서 얼마나 좋았는 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동경 마찌다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마크,유이꼬 부부(교회 파송)

더니든 시내에서 전통의상을 입고 축제를 즐기는 현지인들 처음엔 주일날 예배를 시작하여도 우리 가족 외에는 아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리로 나 가서 일대일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거리로 나 가서 일본인들을 만나서 친구를 만들고 집으로 데려와 서 함께 식사를 하고 그리고는 주일날 교회로 인도하 였습니다. 그러자 친구의 친구를 또 만나게 되고 하여 조금씩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주일 예배를 위해 교회에서 분주히 식사 준비 를 하고 있는데 바깥쪽에서 간판 주위를 서성이는 한 자매를 발견했습니다. 분명히 교회에 오고 싶은데 용 기가 없는 것 같아 보여서 달려가 교회 안으로 데려왔 습니다. 그 자매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 앉자마자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 시간은 다 되어감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아 일단은 예배를 마치고 이야기하자고 달래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 내내 울음 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자마자 그 자매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 했습니다. 내용인즉, 자매에게는 사귀는 남자가 있었고 결혼 날 짜까지 잡은 상태였는데 분주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결 혼을 준비하는 도중에 갑자기 그 남자로부터 다른 여 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청천 벽력같은 결별선언을 듣 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자매는 죽기

그 이후 그 자매는 거의 매일 같이 우리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면서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함께 공부하고 기 도를 했습니다. 그 자매는 자기는 결코 결혼을 못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사람을 반드시 붙여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이상형 을 함께 종이에 적어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하자고 했 습니다. 자매는 반신반의하며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 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라고 했지만 이 자매는 성경 공 부를 시작한지 7개월 만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세 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기도의 응답을 받아 믿음이 신실한 형제와 결혼하여 두 자녀 를 낳았습니다.지금은 일본 동경의 타마대학교에서 영 어를 가르치며 캠퍼스 사역에 전념하는 선교사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 자매의 이 름은 사키꼬인데 세례를 받을 때 함께 세례를 받은 사 람이 6명이 더 있어서 퀸스타운에서 일본인 교회를 시 작한 첫 해에 7명의 세례자가 나왔습니다. 그 이후 계 속해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보내 주셔서 매해 적게는 세 명에서 많게는 10명 이상이 세례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가 지금도 일본 현지 교회에서 찬양 인도나 교회 의 리더로써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한명의 세례 자를 얻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일 본 선교의 황금어장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KO MI

글_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 gideon9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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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Ⅰ

네번째 - 선교사의 '삶과 애환' 편집자주 : 러시아 박광배 선교사의 선교를 향한 이야기를 10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저는 러시아 극동 연해주 선교지에 한국 선교사로서 제일 먼저 갔으면서도 이곳 지방에서 조직된 한인 선 교사회에서 회장직을 7년이나 지나서야 맡았습니다. 그것도 1997년부터 러시아에서 잔뜩 외국 선교사들에 게 겁을 주면서 옐친이 보드카에 취해서 서명을 하였 다는 1998년 종교법이 시행되자 회장직도 떠밀려서 그 직책을 감당했습니다. 이 법은 당시 15년 이상 러 시아 영내에서 종교 단체로 등록되지 않은 외국 선교 단체는 모두 철수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1991년부 터 1세대 선교사들이 러시아로 들어갔으니 등록된 종 교단체는 년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즉, 러시아 정교회 외에 모두 철수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절 박한 심정으로 러시아 침례교를 찾아가서 호소하였습 니다. 그때만 해도 외국 선교사로서 그 지역의 개신교 교회 를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무엇을 도와 드릴까요?”하 면서 선을 베푸는 자리에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 나 법이 제정되고 나니“우리를 도와주세요” 라고 입장 이 바뀌었습니다. 우선은 한국의 지방회, 시찰회, 노 회 성격을 띤 모임에 호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상부 기관이 모이는 모임에도,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모이는 전 구소련 침례교 총회에 참석해서 호소를 했 습니다. 전체 모임에서 우리의 절박한 상황을 설명하 면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틀을 회의하고 정회한 후 낸 결론의 내용은“한번 침례교 목사로 입회하면 영구히 침례교 회원으로 남는 조건으로 외국 선교사들을 영입한다.” 는 내용이었습 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살 길이 생긴 것입니다. 러시 아 침례교 교단이 우리를 위해 우선 교단적 역할을 한 다면 계속 선교 사역은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 나 우리가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던 항목인“잠시 침례 교 우산 아래 있다가 우리 외국 선교사들이 자기 교단 을 설립할 조건이 주어지면 우리를 놓아 준다.” 는내 용이 무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 교단에서 작성된 답변서를 들고 모스 크바에서 동 시간에 개최된 러시아 오순절 교단에 찾 아갔습니다. 그리고 침례교 답변서를 들고“우리 외국 선교사들이 잠시 여러분의 교단에 들어와 있다가 각 교단이 자격을 갖추고 교단을 설립하면 도와 준다.” 내용을 넣어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일에 답변 서가 나왔습니다.“우리도 러시아 침례교 안에 있다가 방언 문제로 독립된 교단으로서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 교단에 잠시 머물다가 때가 되면 독립하는 일을 적극 돕겠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바울의 자취를 쫓아 방문한 터키 이스탄불

고향을 그리면서 중국에서 살아가는 북한의 젊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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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년 후 사할린에서 러시아 연해주에서 최 관홀 목사님의 선교 사역을 러시아 고문서 보관소에서 찾아와 장로교와 감리교는 러시아 영토에서 15년이 아니라 이미 100년 가까이 존재하였던 교단이라는 자 료를 가지고 러시아법정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이 일 이후 외국 선교사들은 다시 장로


교와 감리교 우산 아래 들어와서 지금까지 열심히 사 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선교사들 중 아직도 현지 러시아 침례교단과 오순절 교단에 소속되어서 일 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는 교단을 세우지 않 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묵묵히 한 알의 밀알이 되 겠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정치가 필요할까? 라는 질문에 위 의 내용으로 봐서는 절대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선 교사들이 사역은 하지 않고 정치를 하냐?” 라고 오해 도 받지만 선교사들이 현장에 투입되어서 각종 사역들 을 감당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 중 하나가 행 정적인 부분입니다. 첫째로 비자를 해결하는 문제, 자녀들이 학교에 진학 하면서 학교 문제, 사역지에 대하여 정부 기관에 등록 하여 허가를 받는 문제, 그리고 매년 각종 서류 제출 하는 문제, 세무서에 회계 보고를 해야 하는 업무 등 이 있습니다. 둘째로 사역지의 임대 계약서 작성, 건 축 업무를 위해 업무 부서에서 허가 받는 일, 건축회사 와 계약을 하여 건축을 진행 하는 일, 그리고 자재를 잘 준비해 현장 작업이 순탄하게 되도록 일정을 맞추 는 일, 건축 후 건물을 관리하는 일등도 해야 합니다. 셋째로 러시아와 같이 북방 선교지의 경우는 7개월간 을 겨울 난방에 의존해야 하기에 살인적인 건물 난방 비를 지출해야 하는 일과 직원으로 채용된 직원들을 현지 노동법에 따라 관리하는 일등이 있습니다. 넷째 로 각종 예배를 위해 설교준비시간을 가져야 하고 수 시로 찾아오는 외부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도 해야 합 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름이면 선교지를 돕겠다고 찾아오는 단기선교 팀들과의 연합 사역이 있습니다.

미루다가 속을 썩이면? 선교사의 스트레스는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후원하는 교회와 무슨 일 로 틀어져서 후원도 끊어지면?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 다. 철수냐? 현장을 고수 하느냐?를 심각하게 고려하 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을 만납니다. 저 또한 참 하나님의 은혜로 25년을 선교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현장을 복음화 시킨다? 이와 같은 꿈같은 슬로건은 파송식 때 사용하고 잊어버린 지 오 래입니다. 어찌 하던지 선교지를 잘 지키고 벌여 놓은 일을 잘 챙기면서 살얼음판 같은 선교지를 오늘도 사 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그 정치 출 발점은 가정이고, 교회이고, 사회입니다. 선교지는 복 음이 전해지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 베이스캠 프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일에는 전도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부수적인 일들이 산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보이지 않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잊어버리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대나무는 심어 놓으면 3년간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뿌리와 뿌리끼리 서로 자라면서 단단한 연대감을 형성 하면서 비바람 폭풍에는 서로 잡아 주면서 버티고 있 기에 넘어지지 않는 신비감을 갖고 있습니다. 자라나 는 싹은 하루에도 몇 십 센티씩 쑥쑥 자랍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마디를 만듭니다. 약한 나무가 부러지지 않 도록 대나무는 마디를 만듭니다. 이 대나무의 마디는 선교사에게 안식년과도 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나는 선교지에서 안식년도 없이 지금 까지 보냈습니다.” 라고 말하곤 합니다. 시한폭탄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에 게 때가 되면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쉬면서 가 거라, 그래야 멀리 간다. 즐기면서 가거라, 그래야 주 변 사람들이 즐겁다. 놀면서 가거라, 그래야 인간미가 있다. 여행하면서 가거라, 그래야 넓게 멀리 본다. 당 당하게 가거라, 그래야 하나님이 보인다. 내 아이들을 챙기면서 가거라, 그래야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다.” KO MI

글_박광배 러시아 선교사 nakhodkach@hanmail.net

민족의 아픔과 함께 떨어지고 있는 천지의 폭포 이 글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 은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사역하는 정부에서 선교사를 아니꼬운 눈으로 보면서 서류라도 이리 미루고 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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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Ⅱ

'나는 엄마다' 네번째 이야기 편집자주 : 바울 선교회 MK맘 허은영 선교사의 삶과 사역 이 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국경에서 멈추다! 선교사에게 선교지는 마치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을 분 배 받은 지파들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의 선교 지가 어떠하든지에 관계 없이 파송 받은 날로부터 그 땅은 영적으로 내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 음으로 그 땅이 바라봐지고 품어지고 기도 속에 그 땅 의 사람들,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위해 기도하며 눈물 을 흘리는 신비로움이 바로 선교사 안에 있습니다.

꼼짝없이 밤을 지새우게 생겼습니다. 그렇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이민국 유니폼을 입은 한사람이 다 가오더니 우리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렇다고 하자‘내 친구 중에 한국 사람이 로바체라는 타 운에서 자동차 정비 공장을 하고 있는데 전화를 해볼게 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것도 반가웠지만 정비공장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 소식은 우리에게 사막 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전화가 연 결되고 그 분이 보내주신 견인차에 매달려서 그렇게 보 츠와나 땅을 밟았습니다. 견인되어 가는 우리차를 보 고 동네아이들이 따라오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놀려대 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보기에 외국인의 차가 끌려가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마치 나귀타고 입성하 시는 예수님께‘왜 하필 나귀지요?’ 묻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준비해서 밟는 보츠와나의 첫 걸음 인데 왜? 견인되어 가는 거죠? 놀려대는 아이들의 웃 음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하며 묻고 싶었 습니다.

보츠와나 교민회의 설날 축제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필리핀에서 6년 사역 을 마치고 두 번째 텀을 준비하면서 아프리카에 대한 마음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보츠와나의 부시맨을 향해 방향을 주시더니 바울선교회 훈련을 받 을 때도 이미 보츠와나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파송 식 후에 비자의 문이 열리지 않아 기다림의 시간을 갖 다가 인접국가인 남아공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내 딛었 고 그렇게 오랫동안 갈망하던 보츠와나 국경, 이민국 앞마당에 서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깐,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아 여기저기서 모여 든 현지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구경하는 상황이 벌어 진 것입니다. 정말 난감했습니다. 처음 입국하는 나라 에서 날은 저물어가고 또한 도시도 아닌 외진 국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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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기에 이웃이 되어준 말라위 지팡귀목사님(중)과 함께 예비 된 사람들 밤 늦게 도착한 곳은 정말 한국분이 운영하시는 정비공 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된 것은 차를 고칠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저녁식사와 함께 저희 가정이 머물 수 있는,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선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차는 공장으로 그리고 저희 가족은 사장님의 배 려로 사장님 댁에서 묵었습니다. 다음날 수리된 차량 으로 수도 가보로네로 출발하려는데 도시에 사는 다른


교민을 추천해 주셨고 그리고 그렇게 연결된 분들을 통 해 보츠와나의 비자를 해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 렐루야! 보츠와나 국경에서부터 견인되어 입국하게 된 시나리 오는 바로 하나님께서 보츠와나의 비자를 해결하시기 위한 예비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 땅에는 이미 오래전 부터 이민 와서 칼라하리의 뜨거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 으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업을 이뤄가는 교민들이 있 었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위해 예비하신 참으로 귀한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 해도 정말 고마운 분들입니다. 선교사보다 더 선교사처 럼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한국문화축제를 열고 문화부 장관과 함께 한 허은영 선교사

현지인 교회의 초청으로 예배 설교 중인 서승학 선교사 드디어 시작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땅! 칼라하리 사막이 80%가 되는 보츠와나! 참으로 낯설기만 하던 이름이 이젠 제 인생의 가장 큰 이름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로 지내다가 1965년 도에 독립한 나라이기에 공용어가 영어입니다. 세츠와 나어가 있지만 도시에서는 영어만으로도 활동에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일단 의소사통에 문제가 없었던 것 이 정말 큰 감사였습니다. 그런데 보츠와나만 오면 모 든 것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시계가 다시 멈추어 섰습 니다. 바로‘Waiting List’즉 대기자 명단 이었습니다. 전기를 신청 하러 갔더니“Waiting List가 깁니다. 신 청하시고 연락 갈 때 까지 기다려 주세요!” 사무엘을 학 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학교를 찾아 갔습니다. 역시 대 기자 명단에만 올려놓고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전화 국에 가서 전화를 신청했더니‘글쎄요 10년 전에 신청 한 사람들도 아직 기다리고 있는데요.’ 모든 것이 인내 해야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과 샤론이를 데리고 시작한 것이 성경읽기 였습니다.

찾아올 사람도 찾아갈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소원 하고 기도해서 들어온 보츠와나 이었지만, 그 길을 만 들어 가야 하는 싸움은 철저하게 외로워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기간이었습 니다. 처음 정착하는 선교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서 성경을 잡게 되었습니다. 전혀 거룩한 의도가 아니 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을 10번이나 통독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셨고 나만의 성경노트를 만들어 주석을 달아가며 말씀의 깊이 속에서 하늘의 풍성함을 누리는 시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였습 니다. 뒤돌아보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말씀 으로 무장하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로 는 그렇게 말씀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습 니다. 무려 6개월의 시간은 세상의 모든 커튼을 다 닫 고 오직 말씀을 입체적 파노라마로 체험하고 함께 말씀 속을 걸어 다닌 시간이 되었습니다. KO MI

글_허은영 바울선교회 MK 선교사 baurimk@naver.com

세계 선교의 현장에서 힘쓰시 는 선교사님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과 분별력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긴 <시대를 아는 힘>을 소개해 드립니다. 선교현장에서, 자녀들의 교육 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힘을 얻기위해 활용하셨으면 합니다. 이 책의 판매 수입금은 탈북자 들을 위한 선교에 쓰입니다. 문의: 통일소망선교회 이빌립 선교사 (02-2625-0497) 가격: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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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쪽과의 만남

Love Story

동역자 & 선생님 & 아내 무앙 마을을 다시 찾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 사를 하던 중 아내와 단 둘이서 식사를 하는 시간이 있 었다. 사실 아내가 나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 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을 남긴 뒤 귀국하게 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나는 태국인과의 결혼에 대해 부모님과 여러 지인들에게 조언을 듣게 되었고, 귀국 후 한 달이 지나 아내에게 국제전화를 걸어‘나와 결혼해줄 수 있 겠는지’물어보았다. 그 때 아내는 내 질문에‘좋다’ 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태국으로 건 너가 아내의 고향을 방문해 어머니와 친척들을 만나 결혼 승낙을 얻어 결혼에 골인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인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은 2007년 1월 태국 남부에 위치 한 방무앙이란 마을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였다. 아내 는 나보다 보름 정도 먼저 방무앙으로 이사와 월드비 젼에서 근무하던 교회 성도였다. 나의 주 사역은 태권 도, 음악과 같은 문화 사역이었는데 아내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하여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사실, 나는 국제결혼에 대하여 언제나 열린 마음이었 다. 같은 신앙 안에서 같은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선한 믿음의 자매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교제하고자 하는 마 음이 있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2007년도에도 동남 아시아에는 한류바람이 불어왔다. 그래서 한국인에 대 한 좋은 인상이 있었고 하얀 피부를 가진 한국 사람은 동남아 사람들이 교제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선교지로 떠나기 전 부터 현지인과의 교제에 대해서 신중하고자 했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중 일부는 한국 사람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 보단 부(副)를 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8월 초에 사역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방콕에서 언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하루는 아내가 방콕 에 오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오랜만에 교회 성도였던 지금의 아내와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갖게 되 었고, 우연히도 한국 선교사님께서 아내를 보게 되면 서 교제를 해보라고 말씀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에도 나는 아내에게 별로 호감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음 해 1월이 되어 나는 한국으 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3일 전 예전에 사역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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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었던 아내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을 하 지 않으려 했었다. 왜냐하면, 태국에서 성실하고 책임 감 있는 기독교인 남자를 만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하얀 피부 를 가진 멋진 남자가 선교사로 온 것을 보고 마음이 바 뀌었다고 말해주었다. 결혼 한 지 7년 차인 지금 우리 부부 사이에는 하나님 이 주신 자녀 강에스더(6) 강에스라(2)가 있다. 뒤늦게 신학 공부를 하는 나를 위해 아내는 여러 가지 아르바 이트를 하며 생계를 도왔고 동시에 아이까지 잘 키워 주었다. 작년 말 우리 가정은 태국선교사로 파송 돼 현 재 아내의 고향인 태국 남부 나컨씨탐마랏에서 선교사 역을 하고 있다. 태국에 와서 보니 한국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못해준 것이 많아 미안함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나의 동 역자이자 태국어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로 늘 곁에 있어준 그녀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랑한다는 말 과 함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KO MI

글_ 강승우 태국 선교사 thwai@naver.com


낸시가 사랑하는

하나님 만나기 4

그림_안민희 자매 als36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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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와 IT

세상 돋보기 4

선교지에 '안쓰는 스마트 폰' 보내기 운동 이제 스마트 폰을 단순한 전화기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막상 그것을 컴퓨터라 여기는 사람도 많 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만큼 활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면이 작아 그 럴 수 있지만 컴퓨터와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데서 오 는 이질감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사용할 앱 즉 프로그램을 찾지 못함에 있습니다. 스마트 폰으로 마이크로 소프트 오피스를 사용하는 것 은 이제 보편화된 일입니다. 워드파일을 보고 수정 한 다던가 엑셀 파일을 불러와 활용하는 일은 이제 많은 분들이 아주 쉽게 사용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스마트 폰을 어떻게 선 교현장에서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현지에 신학교를 세워 현지 지도자 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컴퓨 터를 확보하여 활용하지만 컴퓨터란 당연히 고장이 나 는 기계이고 또 이를 고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전무한 상태라 시간이 지날수록 활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현상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스마트 폰입니다. 새로운 스마트 폰의 출하 시기는 이제 1년 주기에서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표적으로 삼 성은 봄에, 애플은 가을에 발표를 하고 있고 그때마다 소비자들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스마트 폰의 교체시기를 2년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는 통신회 사와의 계약이 대부분 2년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많은 수의 구형(?) 스마트 폰이 개인의 서랍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스마트 폰은 통신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인 터넷이 되는 환경인 와이파이 아래에서는 훌륭한 컴퓨 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스마트 폰들을 선 교지에 보내는 일은 선교지를 후원하는 교회에서 반드 시 해야 할 일이고 이를 잘 활용한다면 아주 훌륭하게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의 활용은 이제 누구나 공감하는 일입니다. 컴퓨터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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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스마트 폰의 고장률은 매우 낮은 반면 와이파이 환 경에서는 이동에 자유로워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앞에 스마트 폰은 훌륭한 컴퓨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 다. 컴퓨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인터넷입니 다. 자료를 찾는 모든 일이 이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입 니다. 또한 동영상을 본다던가 성경을 읽는다던가 하 는 모든 일을 스마트 폰에서는 더욱 편리하게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후원하는 교회 혹은 개인들을 통해 ‘선교지에 안 쓰는 스마트 폰 보내기’운동이 펼쳐지 기를 원합니다. 크기도 작아서 보내는 일도 비용이 그 리 많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에 어느 선교사님이 LA에 오셔서 노트북을 기증 받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게나 부피 때문에 아무 리 좋은 데스크 탑 컴퓨터가 있어도 가져가지 못하고 부피가 비교적 작은 노트북만을 가져가면서 적지 않은 무게에 당황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마트 폰이 라면 몇 십대도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 니다. 통신회사에 가입이 해지된 스마트 폰이라도 통신 기능 을 빼고는 와이파이 상태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인터넷은 물론 카카오톡도 모든 종류의 메신저도 SNS 도 가능합니다. 이에 관련된 모든 질문은 제 개인 이 메일(sjyoon7231@gmail.com)로 질문 주시면 성심껏 답해 드리겠습니다. KO MI

글_ 윤승준 Kyelp 대표 sjyoon7231@gmail.com 블로그 blog.naver.com/joshua7231

선교사 디브리핑을 위한 모임 5월 9일 (토) 오후 5시 문의: 김종남 목사 (gbm1958@naver.com/010-2765-9654)


선교사 건강상식

코미 게시판

병은 없다 4

열사병

제 8회 선교잔치 코미 메세지

우리 몸은 외부 온도와는 상관없이 체온을 조절하는 체 온조절중추가 있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그러 나 체온조절중추의 능력을 넘어설 정도가 되면 체온조 절중추가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특히 여름철에 뜨거운 햇볕에 장시간 노출되거나 지나 치게 더운 장소에 오랫동안 있게 되는 경우에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게 되면 열사병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열사병이 나타나기 전 증상으로는 두통, 어지러 움, 구역질, 경련, 시력 장애 등이 있으며, 의식이 저하 되고 몸은 뜨겁고 건조하며 붉게 보이게 된다.

주 제:“회복 및 힐링여행 1박2일” 기 간: 2015년 5월11(월)~5월12일(화) 장 소: 강화도(등촌 제일교회 선교수양관) * 서울 보라매교회(서좌원 목사)에서 출발(11일 오전 9시 접수 시작) 대 상: 한국인 선교사 및 파송예정자 인 원: 선착순 100분 회 비: 무료 프로그램 : 감사예배, 강화도 여행, 필리핀 어린이 찬양, 뷔페 등 주 최: 월간 한국인선교사 후 원: 보라매교회 신청방법 : 본지 홈페이지에 선교잔치 공지 게시판에 신청(WWW.KORMI.NET) 문 의 : 김종남 목사 010-2765-9654 박정례 간사 010-2797-6103 한국인선교사 02)2268-6636

월간 『한국인선교사』는 도서잡지 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월간 『한국인선교사』에 실린 글, 사진, 그림은 월간 『한국인선교사』의 서면 허가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열사병은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는 여름철에 주로 발생 하며 그 증상으로는 의식이 저하되고 40도 이상의 고 열이 나며, 저혈압이 생기고, 호흡이 곤란해지며 이러한 고열은 간부전과 신부전을 일으키며 그대로 방치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호흡이 얕아지고 느리며 혈압이 떨어지며 피부가 뜨거 워지고 건조해지며 땀이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좋으나 응급처치로는 시원 한 그늘로 환자를 이동시키고 기도를 유지하고, 의복을 벗기고 팬으로 체온을 내려주며 물을 뿌려주고 아이스 팩을 목이나 겨드랑이에 넣어주고 어느 정도 의식이 회 복되면 조청이나 산야초발효액을 냉수에 타서 먹인다.

쉴터 이야기

열사병의 예방법으로 평소에 풍욕이나 냉온옥 등 자연 건강법을 꾸준히 실천하고 물(1일 8-10잔), 죽염(1일 5 그램이상), 감잎차(1일 2잔), 과일과 채소를 골고루 먹어 면역력을 상승시켜야 하고 특히 여름철에 과로를 하거 나 햇볕에 장시간 노출을 피해야 한다. 그 외에도 야외 활동시 창이 넓은 모자(밀짚모자)를 쓰 고, 밝은색 옷을 입고, 충분한 염분 보충과 함께 오이나 당근, 토마토 등 시원한 채소와 과일을 준비하는 것이 열사병을 예방하는 좋은 방법중 하나이다.

운영헌금: 매월 1만원 후원계좌: 국민 512625-95-102325 조성수 이용문의: www.kormi.net / ☎ (02) 2268-6636

재정 보고

KO MI

이덕우 목사는 자연치유 전문가

다음 카페 <병은 없다> 운영 cafe.daum.net/leedokwoo 건강문의 nlc8004@hanmail.net

월간 한국인선교사 쉴터는 선교사님들을 섬기고자 마련된 작은 숙소입니다. 현재 인천시 구월동의 한 빌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다섯 채가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구인선교사 하는일

3월 재정보고 들온모든셈 2,997,050 나간모든셈 3,185,972 전월이월 -3,044,321 당월이월 -3,233,243

1995년 3월에 창간한 월간『한국인 선교사』 는 해외에서 사역하는 한국 인선교사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 기를 사진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선 교 역사로 기록하고자 발행하는 선 교잡지의 하나로서 선교사님들에게 무료 월간 보내기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쉴터 운영 을 하고 있습니다.

후원이사장 서좌원 | 후원이사 권오기 권희숙 김석주 김영국 김재일 김희경 돌다리교회 박원홍 시카고한인교회 오은희 이동수 이상호 안동근 조주형 발행인 성기호 | 편집인 조성수 | 편집장 김종남 | 편집 안세혁 | 행정 박정례 | 지원 최숙 이석영 | 미국팀장 이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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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소리

어느 날 그냥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는 데 홈쇼핑 채널에 내 눈을 확! 사로잡는 물건이 포착되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물 건이었는데 아무 야채나 넣고 돌리면 다 져져서 나오고, 기구만 바꾸어 끼우면 채 썰기도 굵은 사이즈, 가는 사이즈 내가 필 요한 대로 힘들이지 않고 썰어지는 물건 이었다. 그 물건을 보는 순간 그 채널에 푹 빠져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그 물건의 광고를 마치고 나니, 곧이어 다 른 물건이 소개가 되고 있었다. 그 물건은 장롱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수납박스였다. 장롱이 없는 선교지에서 바퀴벌레, 개미, 도마뱀, 쥐들의 습격을 염려할 필요 없이 모든 물건을 그 박스에 수납하여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물건이었다. 그 물건들을 보는 내내 마치 감추어져 있던 보물을 찾 아낸 느낌이었다. 그 채널을 보고 있으니 광고에 나오는 모든 물건을 반드시 사야 만 할 것 같은 구매욕을 불러 일으켰다.

글_편미선 필리핀 선교사 GP선교회 punmisun65@hotmail.com

종전까지만 해도 그런 물건의 존재조차 도 몰랐었고, 선교지에서도 그런 물건 없 이도 아무런 불편을 못 느끼고 생활했었 는데 그 방송을 보는 한 시간도 채 안 되 는 사이 그 물건이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반드시! 꼭! 필요한 물건이 되어 버렸 고, 마침내 선교지로 복귀할 때 가지고 가 야할 제1의 품목이 되어 버렸다. 그것들 이 없는 세상은 마치 앙꼬 없는 찐빵이 될 것만 같았다. 그 광고 물건을 보면서 마구 마구 사고 싶 은 충동감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을 보니, 짧

은 시간에 그 광고를 보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급기야 그 물건을 구매 하도록 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과 연 구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얼마 나 치밀하게 공격적인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고, 그에 따른 시행착오들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여 해결해줌으로서 소비자들의 마음이 흡족 하도록 세심한 관찰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지도 높고 유명세를 타는 배우들을 광고 모델로 내 세워 광고의 시너지효과로 더불어 더 많 은 수익을 창출해내기 위한 회사들의 노 력의 흔적들을 홈쇼핑 채널을 시청하며 가슴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광고의 위력이었다. 20여년 동안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선교사라는 호칭을 쓰기가 무서워졌다. 한낱 잠깐 동안 쓰다가 깨어지거나 망가 지면 쓸모없어질 물건을 파는 홈쇼핑 광 고하나에도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저 토록 처절한 몸부림의 노력을 하고 있건 만, 주님께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한 영혼을 영원히 죽지 않는 소망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주님께 인도해야하는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아 여기까지 와 있는 나는 그들을 얻으려고 어떤 전략을 가지고 어 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에 대한 반성이 들었다. 나를 하나님나라의 광고 모델로 쓰시려 고 감히 셀 수 없는 비싼 모델료로 주님의 목숨 값을 내어 놓으셨는데, 나에게 투자 한 광고주의 마음이 흡족할 만큼 수익을 창출해내고 그 가치만큼 내 삶을 통해 하 나님 나라가 잘 광고되어지고 있는지?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예쁜 모 델이 입은 옷을 입으면 나도 그 모델처럼 될 것 같아 그 옷을 사서 입게 되는 것처 럼, 나의 삶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 가 뿜어져 나오고 그 향기가 다른 사람들 에게도 전해지고 있는지에 대한 내 스스 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홈쇼핑 광고를 보면서 물건이나 구경하 면 될 일이지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내 머리속을 어지럽게 하고 마음 무겁게 하 는지.. 물건을 보며 주문하려고 들었던 전 화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월간「한국인선교사」 | 서울 중앙우체국 사서함 5998호 | 대표전화 02-2268-6636 HomePage http://www.kormi.net | E-mail kormi@kormi.net | 팩스 02-2268-6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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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권 200호 1995년 2월 6일 등록 등록번호 라-7036호 2015년 5월1일 발행

"한국인선교사 홈쇼핑 광고 채널"

작년 가을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였 다. 지피선교관 5층 거실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뉴스도 보고 드라 마도 보면서 고국의 정취(?)를 한껏 느끼 고 있었다. 딱히 정해놓고 보던 채널이 없 었던 관계로 이 채널, 저 채널을 바쁘게 돌려가며 관심을 끄는 채널을 선택하여 시청을 하고 있는데 공영방송 채널 중간 중간에 많은 채널을 홈쇼핑 채널로 할애 하여 이런저런 상품들을 선전하며 시청 자들의 마음을 빼앗고 있었다. 그때까지 만 해도 그 홈쇼핑 채널은 나와 상관없는 채널이었다. 아직 한 번도 홈쇼핑에서 물 건을 구입해 본 적이 없던 터라 그 채널은 한국의 한가한 사모님들의 독점채널이려 니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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