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교사 <영혼의 향기> 오늘도 창가에 별 내리고 부숴진 파도들 은하수와 대화 나누면 그대 푸르른 하늘에 띄워 보낼 시리어 아름다운 영혼의 향기 찾아 나섭니다. 수우수우 파도위에 내려 앉아 억광년의 사랑을 노래하는 작은 천사들, 저들의 날개가 황홀해서만은 아닙니다. 수많은 이의 눈물 방울 짊어지고라도 하늘 향해 오르는 끊임없는 날개짓 푸드득이는 날개깃에 영그는 영혼의 푸르른 시어들, 꿈이 찬란한 것은 반드시 영글어서만은 아닙니다. 꿈의 나래를 좇아 쉬임 없이 시도하는 인고의 걸음마, 부러져 상처 난 영혼의 앙금을 껴안으며 일 년을 하루같이 촛불로 사루어 가는 침묵의 기원, 유월 하늘 소외된 언덕받이 거친 돌멩이 사이 수줍게 피어오른 들장미 가시에 찔린 만큼 널리 퍼뜨리는 향기, 황무한 거리에 커피 향처럼 스며드는 영혼의 향기에 오늘 지친 걸음 허기진 무릎을 일으켜 세웁니다. 글_김동욱 필리핀 선교사(yeadalm@hanmail.net) 일러스트_김은영(lewis1212@naver.com)
2015 선교는 누구든지 해야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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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를 사랑하는
성목사 부부
외로움의 유익 제8회“선교사를 섬기는 선교잔치” 가 월간 「한국인선 교사」 창간 20주년 행사를 겸해 보라매교회와 등촌제 일교회의 협조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끝났습니다. 작년에는 세월호 침몰사고로‘잔치’ 를 열 분위기가 되 지 못해 선교잔치를 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해를 걸렀고 이번 잔치의 홍보기간도 짧아 많은 선교사님들 이 동참하시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번 잔치의 첫날 밤은 선물나누기와 간증 등 은혜롭고 도전받는 시간들이었습니다. 28세 꽃다운 나이에 남미 선교에 나섰던 선교사님 사모님의 간증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 였습니다. 28년간 남미 오지에서 선교하는 동안 선교 지를 찾아온 이들이 없었기에 버려진 느낌과 외로움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선교지에서 보낸 세월이 선교지에 들어갈 때 나이와 같아질 무렵 몸에 이상이 느껴졌습 니다. 현지 병원에서는 몸에 암 징후가 있는 것은 발견 했으나 무슨 암인지 어디에 발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했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조국이지만 병든 몸을 친정에 도 시집에도 맡길 수 없어 공항에서 직접 병원으로 가 셨답니다. 정밀검사 결과 다섯 개의 종양이 몸속에 있 는데 세 개는 물혹이었고, 두 개는 좋지 않은 종양이었 다 합니다. 그 종양을 건드리면 온 몸에 전이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 그냥“함 께 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담당의사가 말씀하 셨답니다. 절망감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함께 해주 지 않는다고 느꼈던 외로움 속에서‘같이 살’친구(?) 가 생겼다는 위로도 느꼈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사 랑하고, 그 친구를 품고 있는 자기 몸을 사랑하기로 결 심했답니다. 선교지로 돌아와서 날마다 걷고 운동한 일 년이 지난 후 다시 찾은 한국에서 물혹이 줄어들었고 악성종양은 크지도 줄지도 않은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답니다. 췌 장에 있는 종양이기에 건드리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 다. 사모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분들이 사모님을 위해 기도하며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간 연장하신 하나 님의 능력이 사모님께도 임하기 기도했는데 그런 기도 를 하신 분이 세 분이시랍니다. 그러니 15년 씩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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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45년은 더 사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이신 선 교사님 일동이 박수로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몸속의 종양과“같이 사시지요.” 하는 의사의 말이 위로로 들렸을까요? 가슴이 찡해옴 을 느낍니다. 어느 한 분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선교현장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이 종종 경험하는 외로움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중 죄인은 독방에 감금한답니다. 좁은 공간 에서 여러 명이 함께 사는 불편이나 노동하는 괴로움 보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 홀로 갇혀 외롭게 지내는 것 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 을 더욱 사모하며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 닫고 겸손함을 익히는 시간을 삼았습니다. 애굽의 왕 자였지만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간 양 을 치던 모세,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으로 가던 길 에서 만난 사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지내던 3년, 이 스라엘에게 나타나기까지 빈들에서 지내던 세례 요한 의 경험이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인들 특히 하나님께 부름 받고 광야 같은 외로운 곳에서 사역하게 되는 선교사님들에게 주어지는 고독 은 고통이 아니라 유익을 얻는 시간으로 선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외로움을 극복하고 주님과 더 가까이 교 제하며 승리하시는 삶이 선교사님들에게 있기를 축원 합니다. KO MI
글_성기호 목사 본지 발행인 keehosung@hanmail.net
라오스에서 보내 드리는
하늘나라 백성들
Face of Lao - 돈으로 본 라오인(2) “라오스” 는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이름으 로 다가온다. 라오스말로 라오, 영어로는 Laos, 헬 라어로는 λαὸ(라오) 혹은λαὸς(라오스)인데 벧전2: 9~10절에“오 직너희는…그의 소유된 백성(λαὸς) 이니…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 나님의 백성(λαὸς)이요”Laos는 하나님의 백성(my people)이라는 뜻이다. 라오스 땅은 이미 사람들 의 입에서“라오스” 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하나 님께서“내백성”이라는 불붙는 마음으로 이 땅을 보실 것이다.
(76x56cm charcoal pastel 2007)
한국 사람들은 돈을 셀 때 돈의 허리를 잡 고 안쪽으로 세면서‘하나, 둘, 셋’ 하며 센다. 이 모습은 마치 돈을 하나씩 세면서 이 돈은‘내꺼, 내꺼, 내꺼’ 하는 것 같다. 미국사람으로 대표되는 서양 사람들은 돈 을 잡고 밖으로‘1,2,3’ 하면서 센다. 이 모습은 마치 베푸는 모습 즉‘네 것, 네 것’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라오스 사람들은 돈의 끝을 왼손으로 잡 고 오른손으로 안쪽에서 돈을 하나씩 옆 으로 넘기면서 센다. 또 10장씩을 한 묶 음이 되도록 따로 접어놓기를 즐겨 한다. 이렇게 돈을 세면 상대방이 그 돈이 얼마 인지 함께 볼 수 없다. 마치 돈을 세면서 너 보지 마. 너 보지 마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감춤과 숨김으로 는 더 이상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글로벌 (Global)시대, 즉 글로컬(Glocal ← global + local)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이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며 감춤과 숨김으로 는 살아갈 수 없다. 라오스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감춤과 숨김의 그림자를 떨쳐버 리고 개방과 드러냄을 자신 있고 활기차 게 추진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돈 세는 모습은 그 동안의 우 리 민족의 자화상 이였다. 어떻게든 가난 을 벗고 잘 살아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내 것만 외치며 절약과 저축이 미덕이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 리는 나눔과 섬김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 가야 한다. 우리도 더 이상 돈을 셀 때 내 것 내것 하며 세지 말고 나누며 살자. 나 눔과 섬김이 미래를 향한 가장 큰 투자임 을 잊지 말아야 한다. KO MI
글과 그림_그림-엄미정 라오스 선교사 & 화가 apost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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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Ⅰ
선교사 천로역정(4) 편집자주 : 브라질 김선웅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선교지에서 보낸 10년의 삶(1994년-2004년까지 정리 해 보면) 선교사들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 러기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더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 라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 선교사는 분명히 굉장한 배짱 과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 역시 백일이 넘은 아 들과 아내를 데리고 달랑 가방 6개에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을 넣어 브라질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 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 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과연 무엇이 변 했을지 스스로 질문해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두 번째 사역은 그리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역의 열매들이 조금씩 보이면서 사역이 급성장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목자인가? 동물원 주인인가? 한 때는 양떼를 거느리는 목자가 아닌 각양각색의 뿔 달린 짐승들이 모인 교회라고 우습개 소리를 할 만큼 고집 세고 미련하던 교인들이 한사람씩 변화되며 크리 스천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기쁨은 선교사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 을 가르치고 싶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야학을 보내고 검정고시 과정을 공부하게 하여 처음 그 지역에 1호 대학생이 나왔습니다. 전체 6명의 청년이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교회 유치원에서 교사 보조로 일하면서 학비를 받고 있습니다(2000년 브라질 대학생 은 국민의 6%). 14명의 교인들이 밤 7시부터 10시30분 까지 검정고시 과정을 공부하면서 함께 비전을 나누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할 때 주위에 있는 동네 청 년들이 자극을 받아 함께 공부도 하고 교회에 차츰 발 을 디디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청소년을 위한 영어교실 사역의 변화와 열매들 6년 동안의 첫 텀을 지내는 동안 경험했던 무수한 문화 충격과 갈등, 경제적 어려움, 보이지 않는 사역 열매로 인한 좌절감, 언어 소통의 불편함 등등이 정신적 육체 적으로 저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운데 겨우 교회 건축을 완공하고 유치원 개원을 한 후 안식년을 떠났습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와도 같은 현지인들에게 교회 와 유치원, 내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와 그밖에 물건들 을 맡기고 간다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맡기 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1년간의 안식년은 고갈되었던 나의 영혼에 충만함과 쉼을 주었고 많은 새로운 지식 들로 재충전돼 2차 텀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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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도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김선웅 선교사 이양 후 또 다른 개척지를 찾아 떠나는 우리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 시고 싸우며 사랑했던 시간들을 정리할 때가 온 것입니 다. 그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저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 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또한 그들은 우리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그 분이 하시는 것 이기 때문에 저의 편견과 상식 그리고 고집과 걱정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 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2006년 12월에 졸업을 하고, 헬몬교회 담임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가방을 쌉니다.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 여.. 첫 아이의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잊어버린 체 또 다른 아이를 잉태하기 위하여 떠납니다. 40대 백 발의 영광과 빛나는 두피를 가지고 무능력한 종처럼 떠 납니다. 하지만 세상은 모릅니다. 내 안에서 흘러넘치 는 생수의 강을 말입니다. 이는 저와 주님만 아는 비밀 입니다.
교회 리더들을 위한 수련회 에리카 자매도 대학을 졸업한 후 헬몬 유치원 선생님으 로 일하고 있다가 2007년부터는 학교 교무선생님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2006년에 조앙 파울로가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는 빠뜨리시아 자매가 대학 시험 본 후에 헬몬교회 담임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헬몬 유치원 졸업식에서 계속되는 변화들 2005년 4월에 첫 번째 개척한‘헬몬교회’ 를 현지 이양 했습니다. 그곳은 산골 중 산골마을이기에 사람들이 그 리 많지 않은 곳입니다. 대부분 남의 땅을 지켜주며 먹 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꿈과 희망이 없는 땅 끝에서 사는 사람들 같이 보였습니다. 헬몬교회 교인은 약 30명 정 도입니다.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이기에 더 이상 양적인 성장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하지만 하나 님께서는 그곳에 질적인 성장의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 다. 헌금은 브라질 보통교회 150명이 모이는 교회 헌금 이상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는 자기 땅과 자 기 집이 있는 사람은 한 가정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자기 땅과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회가 공부할 수 있는 분의기를 만들 어 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1호 대학생인 따찌아니는 임신하여 학교를 휴학했고, 베니시우는 음악 대학을 졸 업했습니다. 그리고 케일라 자매와 레일라 자매는 대학 1학년 과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끌 레이지 자매는 대학 공부 중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고
우리는 다시 두 번째 가방을 풀었습니다. 첫 번째 교회 에서 약 10Km 떨어진‘따보앙’동네에 일본 이민자 16명으로부터 15,000 평방미터의 넓은 대지를 무료 기 증을 받아 따보앙 교회를 개척하면서 학교 건물을 신축 하였습니다. 교회 개척 1년 만에 100명의 교인들이 함 께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학교는 성장하여 2007년부터 는 약 80명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KO MI
10년간의 브라질 선교경험으로 터득한 선교사 10계명 1. 복음은 순수해야 한다. 2.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세워 가신다. 3. 신실하신 하나님은 내가 신실하길 원하신다. 4. 현지의 문화와 삶을 존중하라. 그리고 배우라. 5. 현지인들은 내가 그들을 믿는 것만큼만 성장한다. 6. 나의 상식은 그저 상식일 뿐이다. 절대로 현지에 적용하지 말라. 7. 현지인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섬김의 대상이다. 8.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9. 현지인을 얻기 위해서 흘린 눈물(기도)과 땀방울(노력)은 정비례한다. 10.사탄에게는 하나님의 왕권으로 다스리고, 현지인들을 위해서는 종의 마음으로 섬긴다. 글_ 김선웅 브라질 선교사 brazilgp@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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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Ⅱ
다섯, ‘ 새로운 사역지를 보게 하시다’ 편집자주 : 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 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우리가 일본에 있다가 뉴질랜드에서 일본 선교를 한다 고 하자 많은 분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뉴질랜드에 주 저앉았다고 오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후 원이 많이 중단이 되는 바람에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 불처럼 내일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계속되 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까마귀를 동 원하셔서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현지 자매가 이혼을 하고 힘들어 하면서도 우 리의 사역을 보고 수표로 몰래 헌금을 하고 가고, 차가 고장이 나서 몇 백 만원의 수리비가 나왔을 때, 한번 밖에 보지 않은 분이 대신 지불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일에는 학교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 고, 주중에는 집을 개방하여 성경공부 및 영어 공부를 하였는데 현지인들이 많이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 리고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우리는 학생들이나 젊은이 들을 차로 데리러 갔다가 마치고 데려다 주어야만 했 습니다. 매번 식사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 이 모일 때는 30명씩 모여서 끝나고 돌아가고 나면 설 거지 하는데만 두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 이들이 만 15세가 되면 운전 면허를 딸 수 있는데 면 허를 다 따도록 하여 자녀들이 이들을 운송하고 저는 집에서 양파까기, 감자 깎기, 밥, 청소, 설거지를 담당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후 함께한 더니든 교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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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경공부 수준이 다 달라서 어떤 때는 일주일에 네 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이곳이 너무 조그 만 도시다 보니 한국인들은 있으나 한국교회가 없어서 한국인들의 불만이 많았습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현지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부탁하기 를 제가 한국 교회도 하도록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일 년을 버티다가 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할 수 있다면 최 선을 다하자고 하여 교회를 시작을 하였는데 일 년 만 에 30여명이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가며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어 기뻤습니다. 그런데 두 교회를 맡은 것도 너무 힘듦에도 불구하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도시들도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섬의 최 남단 에 있는 인버카길을 방문하였더니 일본인들이 수십 명 이 있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 아 교회에서 식사를 하고 모임을 가지면서 복음을 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본인들이 펑펑 울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읽고 싶다고 하여 성경을 전달하 였습니다. 어떤 자매는 밤새 주님에 대해 듣고 싶다고 하여 자기 집에 우리를 묵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 음날까지 계속 복음을 듣고는 주님을 영접하여 지금은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께서는 학원도시인 더니든이란 지역 을 보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도 는 마음으로 그 도시를 매달 찾아가 돌면서 악한 영들 을 결박하고 묶여있던 영혼들이 풀려나길 위하여 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퀸스타운에서 두 명의 자매가 헌신을 하여 통신으로 신학 공부까지 하면서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때가 되어서 더니든을 찾아 갔는데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할 장소, 협력할 교회, 협 력할 사람들을 이미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너무 기뻐하심이 틀 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족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미리 아시고 사람 들을 보내시고, 환경을 변화시키시며, 준비된 영혼들을 보내시어 구원받게 하시는 것을 보면 더욱 그 마음이 확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혔더니 즉석에서 전화를 하여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 람을 소개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가서 보니까 일 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분이신데 일본에 오래 계셨다고 하시며 우리를 보자마자 식사를 대접하시며 자기 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하셨습니다. 나중에 사정 을 설명하고 일본인 두 자매를 이곳에 보내야 한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두 자매의 워크비자와 잠자리를 제공 하여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하였습니 다.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복음 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더니든 교회에서 세례 후 헌신을 다짐 한 사치까 자매(좌) 어느 날 더니든의 오타고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사키꼬 자매를 통하여 한 교회의 장로님들을 소개 받 았습니다. 그날따라 장로회의 모임이 있어 자연스럽게 교제를 하다가 왜 더니든으로 왔는지 물어보시기에 기 도 중에 하나님께서 더니든에 일본인 교회를 시작하려 고 땅 밟기를 하고 있으며 기회가 되면 시작을 하고 싶 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분들이 저의 신앙 간증을 듣기를 원하여 즉석에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 다. 한참을 듣고 난 후에 장로님들은 신앙관이 자기들 과 맞기 때문에 장로님들이 다니시는 코너스톤 교회에 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을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회의가 마치자마자 란스 장로님이란 분이 자기 차에 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시작할 만한 장소 를 여러 곳을 보여주신 후에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정말 깜짝 놀 랐습니다. 신앙관이 같다는 것 하나로 이렇게까지 일 사천리로 진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뉴질랜드에는 자유주의 신앙이 많아서 신앙관 이 바른 지도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했습니다. 뉴질랜드 장로교회 안에는 이단도 있고 게이, 레즈비 언 목사도 있을 정도라 장로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집 요하게 여러 가지 질문도 하고 간증도 시키고 하여 저 의 신앙관을 테스트 하신 것이었습니다. 정말 어리둥절했지만 대학교와 시내가 가장 가까운 곳 을 정하자 장로님이 즉석에서 계약을 하셨습니다. 그 리고 언제 올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퀸스타 운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사역을 하고 있지만 헌신한 자매 두 명이 있으니 이들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나 중에 우리 둘이서 식당을 갔는데 한국 남자분이 혼자 서 술을 드시다가 합석해도 되겠느냐고 해서 그러시라 고 했더니 술을 계속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분을 밝
일본인 어머니들과 함께한 정은혜 선교사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게 사람 들을 준비시켜 놓으시고 때가 되매 일사천리로 진행하 게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이곳 현지인들은 일본을 참 좋아해서 젊을 때 일본에 가서 영어도 가르치고 일본 어와 일본 문화도 배우고 관광도 하다가 돌아온 분들 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니든에서 일본인 교회를 섬 긴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 던 현지인 두 가족이 일본인 교회에서 영어 교사로 봉 사를 자처하였습니다. 두 자매를 퀸스타운에서 파송하 고 난 뒤, 저는 한달에 한번씩 예배를 인도하고 그들을 격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멋진 손길로 또 하나의 일 본인 교회가 탄생된 순간이었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두 자매의 힘으로 교회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시집을 가게 되었고, 한 자매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일 본의 경기가 급격히 나빠짐으로 퀸스타운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고, 더니든 일본인 교회는 사역자가 없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중에 학원도시가 복음을 전할 기회가 더 많을 것 같아 가족이 더니든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오늘까지 살게 되었습니다. KO MI
글_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 gideon9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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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Ⅰ
다섯번째 - 북한 선교의 키워드 '장마당' 편집자주 : 러시아 박광배 선교사의 선교를 향한 이야기를 10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남북문제를 다루다 보면 현실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 글로 표현하기 쉽지 않습니다. 마치 럭비공이 어 느 방향으로 갈지 모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인 도적인 일을“우리가 지원하는 헌금으로 북한은 무기 를 만들어 남한을 침략하고 협박하는데 저런 사람들에 게 무슨 도움을 주느냐?” 며 면전에서 면박을 주는 분 들이 많습니다. 예상은 했던 일들입니다. 그러나 일을 추진하는 저로서는 매순간마다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듣는 분들에 게 시원한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같 은 말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북한에 대해서 생각할 때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구분해서 생각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전에 볼 수 없이 급변 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식 배급사회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시장형태 인 장마당은 한 마디로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한 모습입 니다. 이 장마당이 북한에 처음 등장하게 될 때, 공식 명칭은 농민시장이었습니다. 농민 스스로 재배한 농산 물들을 물물교환 방식으로 내다 파는 소시장 형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어가는 고통을 당한 끝에 북한 사람들은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자연발생적 시장형태인 장마당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에 가서 현재 형태의 합법적인 상설시장 으로 공식화된 것입니다. 장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북한의 시장경제 활동은 아주 다양합니다. 북한주민들 이 자율적으로 가능한 경제활동은 장마당이 유일하여, 모든 경제의 실핏줄이 이곳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래서 북한의 모든 경제와 사회활동이 장마당과 깊이 연 계돼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암시장 거래처럼 복합적 으로 연계되어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가계 소득의 약 80%를 암시장에서 얻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시행하는 배급 체계는 이러한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는 이른바 "장마당" 세대라는 새로운 세대가 확 산되고 있으며 암시장을 뜻하는 이들 장마당 세대에 의 해 북한에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 장 마당 세대는 기존의 북한 주민들과는 3가지 측면에서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6년도 북한에 비료보내주기에 합의한 예장 합동측 저는 러시아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북한노동자들과 허 심탄회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그들은 우 리가 예측하는 일보다 북한은 더 어려움들이 산적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전력난입니다. 그리고 공 장 가동 중단으로 직업창출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물가는 폭등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예의는 무너져가 고 있고 물질만능사회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인민들이 당에 대한 충성심은 형편없어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한국이 북한보다 잘 살고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내용은 전 인민이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자리를 잡아 가고 있습니다. 장마당이라는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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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오일장 처럼 없는 것이 없는 북한의 장마당 이들은 우선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왕조에 대해 전혀 충성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주체 사상에 세뇌 교육을 받았지만 김씨 왕 조에 대한 충성심은 전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장마당 세대는 해외 언론과 정보에 폭넓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암시장에는 단순히 음식과 옷가지 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 영화와 K팝을 담은 비디 오와 USB, DVD 등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타이타 닉'과 같은 미국 영화에서부터 미 프로레슬링까지 다양 한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엔터테인먼 트들을 보면서 자란 장마당 세대들은 북한 당국의 검 열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드라마를 본 많 은 북한 젊은이들은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공개 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드라 마나 비디오 속 주인공들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 젊은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저소득층들 마저 북한의 현실보다는 잘 살고 있다고 이들은 생각하 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마당 세대는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적입니 다. 이들은 암시장에서 자랐고 물건을 사고파는데 익숙 합니다. 이는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성분'이라는 일종의 계급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 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당국이 제공할 수 있는 부(富) 를 암시장을 통해 대체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당국의 통 제 수단이 무력화되고 있습니다. 장마당 세대들은 외국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부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북한의 새로운 경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장마당 세대 북한 주민은 지금도 여전히 굶주리고 있지만, 고난의 대행군 시절에 일어난 대량아사와 같은 고통은 줄었습 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북한 전역의 350여 곳에 달하는 장마당 덕분입니다. 없는 것이 없다는 장마당을 통해 북한 사람들은 저마다 먹고 입는 문제를 어느 정 도 자율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장마당 은 배급이 끊어진 북한 사회에서 주민들의 유일한 생명 줄입니다. 그래서 김정은 정권조차 장마당이라면 어쩔 수 없어 합니다.
독을 맡은 자들조차 이를 눈감고 한통속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어와 악어 새 같은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 습니다. 북한 정권은 어느새 눈치를 보며 적당한 수준 에서 공존하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장마당의 전면 폐쇄라는 강력한 제동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개장 시간을 제한하거나 질서를 지키게 하는 정도에서 적당 하게 단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장마당이라는 사적 경제 공간이 북한 내부의 제도적 변화를 촉진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긍정적 신호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마당의 영향력이 정부 와 사회 곳곳에서 은밀히 확대되는 양상입니다. 최상류 층이나 서민층이나 서방세계가 전하는 자유를 향유하 려는 욕구로 가득합니다.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념을 북한 당국도 부정하지 못하 는 단계에 왔습니다. 그래서 최근 북한은 농장원들에 게 국가의 땅을 1,000평씩 배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서 재배한 농작물을 장마당에 팔아 얻은 소득의 일 정 부분을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개인 소득으로 인정하 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국가 기업소도 장마당에 팔 물 건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 상품이 의류와 신발 입니다. 물론 아직 중국 제품을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생산자율제’ 라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김정은 정권은 기업소에 돈벌이를 촉구하고 그 소득으로 월급을 올려 주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이제 북한 경제는 새로운 이윤을 창출하는 일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를 연상 할 만큼 북한주민들은 황금시대를 향해 점차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개인의 안정과 번영을 향해, 개인의 소득과 치부를 향해 달려가는 북한 주민들의 욕구는 누 구도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왔습니다. 장마당이 욕망의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시 장경제이든 자유의 바람이든, 혹은 사회주의 붕괴든 북 한 정권의 종말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소유 가 늘어나고 부자가 되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욕구에 불타고 있습니다.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일은 구 소련연방을 붕괴했듯,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는 힘은 바 로 장마당에서 시작되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KO MI
글_박광배 러시아 선교사 nakhodkach@hanmail.net
또한 장마당에서는 갖가지 경제나 문화 활동이 지극히 사적인 수준에서 수용되고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에서 당연히 비합법적 수단들이 동원되지만, 감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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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Ⅱ
'나는 엄마다' 다번째 이야기 편집자주 : 바울 선교회 MK맘 허은영 선교사의 삶과 사역 이 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하산 하도록 하여라 돌이 지난 사무엘을 품에 안고 필리핀으로 떠난 엄마선 교사는 6년이 지나 아프리카 보츠와나 땅을 밟을 때엔 사무엘과 샤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선교지인 보츠와나에서 선교사로 사는 것을 뭐라 고 표현해야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필리핀과 는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이 저로 하여금 많이 당황스 럽게 했습니다. 물론 인생은 예행연습이 없기는 하지 만 필리핀에서 6년의 시간동안 나름 선교가 무엇인지, 성육신적인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 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프리카로의 부르심에도 기쁨 과 기대로 순종했는데 막상 아프리카에서의 삶은 달라 도 너무 달랐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달랐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환영하 고 반겨주는 필리핀 사람들에 비해 보츠와나 사람들은 무뚝뚝했습니다. 움직임도 시간이 필요하고 서로 인사 만 나누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아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물가였습니다. 열대성 과일이 풍성하고 일 년 내내 푸른 채소와 생선들을 먹을 수 있는 필리핀에 비한다면 보츠와나는 사막 그 자체였습니다. 85%이상 이 칼라하리 반사막입니다. 사람이 살수 없는 환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얼마나 귀한지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돈(뿔라)이 내린다고 합니다. 자체 생산되는 것 보다 주변국가인 남아공에 모든 것을 의존해서 공산품 은 물론 채소와 과일까지도 수입하고 있습니다. 이러 한 실정은 현지 생활비가 높다는 것이 선교사에게는 어 려움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현지인들과 교회를 세우고 사역에 분주할 때 쯤 저희가정이 결정해야 할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 로 큰 아이 사무엘의 진로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한국에 한동대 안에 MK를 위한 한동 국제고 등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다른 나라 선교사님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무엘이 한국 으로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들어 도 고등학교까지는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 던 제게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기 도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계획은 대학을 한국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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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계획이었는데 갑작스레 3년이 앞당겨진 것이 당황 스럽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우리보다 더 열심히 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볼 때 새벽마다 기도로 울부 짖는 아들의 기도소리와 묵상과 성경 읽기등 사무엘의 모습 속에 믿음이 굳어졌습니다. 그때 아들을 보며 우 리부부가 한 이야기가“이젠 하산하도록 하여라.”이 었습니다. 부모로써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줘야 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인데 사무엘이 스스로 신앙을 세워가 는 것을 보니 이젠 세상 가운데서 너의 신앙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한 말입니다.
해피홈 어린 친구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허은영 선교사 떠날 준비를 하며 한국을 천국처럼 생각하고 기쁜 마 음으로 짐을 싸는 아이와는 달리 저는 눈물을 멈출 수 가 없었습니다. 학교 입학을 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함 께 한국으로 보내고 샤론이와 둘이 남은 보츠와나는 마 치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밤엔 잠이 들기 전까지 울다가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 울 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들이 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 만 엄마선교사 초년시절의 모든 상황을 함께 했던 그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젠 아들을 위해 밥도 지어 줄 수 없다는 것 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유난히 돈까스를 좋아 하는 아들! 필리핀 바기오의 지진 가운데도 엄마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삐나뚜보 화산이 터져 화산재가 온 하늘을 덮은 때도 무작정 피난길에 올라야 할 때도 아 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이라서 더 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일찍 아들을 떠 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식사를 기다리며 길게 줄 서있는 해피 홈 가족들 그렇게 눈물로 아침을 맞던 어느 날 아침 마태복음 14 장을 묵상하는데 16절에‘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에 나는 바로 대꾸 했습니 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이 뭐가 있어요? 저는 줄게 없어 요. 하나 뿐인 아들도 제 옆에 없잖아요’잔뜩 골을 부 리고 묵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샤론이와 함께 아침을 먹 고 수저를 놓는데 상에 남아 있는 음식을 보며 문뜩 묵 상한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오후에 늘 다니던 시장에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여느 때처럼 거리 아이들 이 몰려와서 손을 내밀며 동전을 원했습니다. 순간 아 침에 주신 말씀과 함께‘내가 오늘 밥상을 나눌 수 있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몰려든 거리아이들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에 시간 약속을 하고 얼른 집 으로 와서 밥과 쇠고기 스튜를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묵상한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샤론 이의 손을 잡고 아이들과 약속한 시장 통으로 갔습니 다. 아까 만난 아이들이 모여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었 습니다. 시장의 한 모퉁이에 비닐을 깔고 밥을 나누었 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잘 먹던지 정말 뱃속에 거지 가 들어 앉아 있는 듯 했습니다. 밥 먹는 속도가 줄어 들 때쯤 아이들과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칼라하리 사막 (800Km 떨어진 곳)에서 삼촌을 찾아 왔는데 찾을 수 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들 먼 빌리지에서 먹을 것과 지 낼 곳을 찾아 무작정 도시로 걸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복음도 나누고 찬양도 한 후 나는 다시 운전 을 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부자가 된 듯했습니다. 아버지의 눈물 운전을 하는 제 마음속에 주님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은영아 요즘 왜 그리 울었니?” “사무엘 때문이잖아요” “나도 날마다 울고 있단다. 저 거리의 아이들 때문에 ..” 더 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로 옆에 차를 세
우고 엉엉 소리 내서 울었습니다. 내가 울고 있기에 주 님이 거리 아이들 때문에 눈물 흘리신다는 말씀이 마음 에 강하게 박혀 왔습니다.“주님도 저처럼 울고 계시는 군요. 주님! 주님이 제 아들 책임져 주세요! 누군가를 보 내셔서 밥도 먹여주시고 키워주세요 여기 있는 보츠와 나 아이들은 제가 키우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7명의 거리의 아이들을 시작으로 해피 홈 고아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장 안에서 시작했는데 날마다 모이는 숫자가 늘어나서 주변 공원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면서는 가보론 근교에 가 장 낙후된 지역인 올드날래디에 추장의 환영과 동역자 의 헌신으로 작은 센터를 짓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날 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 암송도 하고, 영어 도 배우고 악기도 배우고 도서관도 만들어 책읽기도 하 고, 날마다 한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는 아이들이 300 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싱글맘의 자녀들, 친척이 돌봐 야 하는 고아들 또한 이런저런 사연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믿음의 자녀로 키우는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단순히‘하나님은 내 자녀 키워주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를 키운다’ 는 맘으로 시작은 했지만 저는 심부름꾼 에 불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30여 명의 외국인 봉사자들이 요일마다 시간마다 와서 봉사 해 주었고, 때로 옥수수가루로, 쌀자루로, 빵으로, 신발 로, 옷으로 후원하고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보츠와나의 주재 대사부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우먼스 클럽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함께 도왔습 니다. 보츠와나에 있는 한국교민들도 마음과 물질로 동 역해 주었습니다. 특별히 텐트메이커로 선교하고 있는 세가정이 전심으로 동역해 주었기에 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아이의 엄마로, 보츠와나 300명의 자녀 들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일하신 분은 하 나님이셨음을 고백합니다. KO MI
글_허은영 바울선교회 MK 선교사 baurim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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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쪽과의 만남
Love Story
생명의 은인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표석구 선교사(좌)와 자녀들 야근으로 인해 늦은 시간, 피곤한 퇴근길의 건대입구 역. 하차를 위해 문 앞으로 나왔을 때,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거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교회에서 주일 저녁 과 수요예배 준비 찬양을 인도하던 청년이었다. 이어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른 척 했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키도 작았던 그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청년회 회장인 나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을지 로 3가부터 지켜보다가 겨우 말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 나 엄청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고 보복을 기약했다고 한다. 이것이 어설픈 앙숙 같은 만남의 시작이었다. 현충사 야유회를 가던 날, 당연히 자매들끼리 앉으리 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찌 2 시간을 갈까 하는 예상과는 달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 며 서로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심지어 돌아오는 길조차도 같은 좌석으로 돌아오자고 제의하 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나와 같이 앉아가려고 일 부러 티켓을 같은 좌석으로 배정했다고 했다. ‘청년회 밤’ 축제를 조이 회관으로 동행하여 함께 이경 철 목사님을 초빙하던 날 제기동 골목길을 내려 오던 길 에 립스틱과 성경책 선물을 받았다. 엄청 당황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교회에 가기 전에 잠깐 커피숍에서 만나 커피 한잔 하고 교회에 가자고 약속한 날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과 함께 한말은 첫째,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이고, 둘째, 나를 위해 살기 원한다는 고백이었다. 12월 31일, 어린이 대공원 코끼리 앞에서 처음 손을 잡았다. 떨리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교회 안의 비밀 데이트는 계 속 되었고, 함께 신앙을 나누며 다른 청년들과 더불어 교회 섬김은 계속할 수 있었다. 늘 그렇지만 예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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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자연스럽게 집에까지 다른 청년들과 함께 바래다 주는 식의 보이지 않는 데이트였다. 그렇지만 부모님 과 가족의 반대(홀시어머니에 결혼하지 않은 두 누나. 그리고 아직 대학생이라는 이유)에 부딪쳤고‘이제 그 만’ 이라는 말과 함께 서로의 길을 가자고 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았다. 1991 년 3월의 어느 날 집에 연탄가스 사고가 났고, 학생부 교사로서 예배에 불참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부장 집사님과 우리 집에 방문, 가스에 중독된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 동생은 먼저 하늘나라에 가고 나는 3일 후 에 깨어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하고 나는 천국행을 막았다는 엇갈린 주장 속에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 그 사건으로 인해 늘 내 곁을 지키게 됨으로써 교회에 우리의 관계가 알려지게 되었고, 후에 결혼에 이르렀 다. 그리고 해마다 아이들이 태어나 3남 1녀의 선물을 받았다.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둘째가 태어나던 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학을 선 택하고 주의 길을 시작했다. 전도사, 준목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게 되고 지난 1999년 7월에 필리핀 일로일 로로 짐을 쌌고, 현재에 이르렀다. 지난 4월18일이 23주년 결혼기념일인 것을 보면, 야 곱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처럼 느끼는 것을 왜일까? 교회사역(필리핀 파나이섬 12곳의 교회 사역), 신학교(장로교 신학대학원), 그리고 학교(The Great International School) 사역 등에 하나님의 함 께 하심이 없었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멀기만 한 우리들의 사역과 영글지 못한 우리 아이들 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우리들이 감당하고 짊어져야 할 일이 많지만, 그리할지라도 언제나 함께 해 주신 하 나님과 남편 그리고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이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조용히 입가에 웃음 을 지어본다. KO MI
글_ 박은숙 필리핀 선교사 davidpyo@hanmail.net
낸시가 사랑하는
하나님 만나기 5
그림_안민희 자매 als36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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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와 IT
세상 돋보기 5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잘 사용하십시오 이제 스마트폰의 경쟁은 카메라 경쟁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미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이 디지털 카 메라를 넘어서 전문가의 영역을 침범했기 시작했음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최대 장점은 손쉬운 조작과 편리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젠 사진의 퀄리티는 물론 여러 가지 기능이 더해짐으 로 우리의 삶을 여러 면에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삼성 등 안드로이드폰의 카메라 기능에 대해 말 씀을 드리려 합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카메라를 잘 사용하고 계시겠지만 필자의 경우 거의 모든 부분에서 카메라는 이용이 됩니다. 아내가 부탁한 마켓 심부름에 서 사진을 찍어 카카오톡으로 아내에게 보내 정확한 물 건인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각종 공문서를 사진으로 찍 어 보관해 둡니다. 또한 가벼운 접촉 사고를 비롯한 분 규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을 사진으로 보관해 둠은 물론 주차시 주차한 위치번호를 찍어 두기도 합니다. 즉 펜 으로 기록해 두던 많은 부분이 사진으로 대체된 것입니 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카메라에 여러 기능이 추가되면서 우리 삶은 보다 편리해졌습니다. 스마트폰에서 카메라를 선택한 후 모드를 누르면 나타 나는 기능중 대표적인 것이 파노라마입니다. 이것은 한눈에 찍기 어려운 장면을 한 장에 담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단체사진을 찍을 때 한 컷에 담기에 사람들 이 너무 많을 때라든가 혹은 높은 나무 아래에서 나무 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경우, 그랜드 캐년 같은 멋 진 광경을 좌우로 길게 찍고 싶을 때 사용하면 됩니다. 사용방법은 모드를 파노라마로 맞추고 셔터를 누른 후 좌우 혹은 상하로 움직인 후 스톱버튼을 누르면 됩니 다. 이제 한 장에 담기 위해 뒤로 한없이 물러서실 필 요가 없으십니다. 그저 셔터를 누른 후 좌우 혹은 상하 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기능은 듀얼카메라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피사체와 함께 자신의 모습을 담는 기능 으로 스마트폰의 앞뒤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 을 말합니다. 자신의 사진의 위치와 크기도 조절이 가 능해서 재미있는 사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 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한 장에 나타나는 기발한 이 기능을 많이 이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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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사진과 함께 9초 동안의 소리를 담을 수 있 는 sound & shot이 있습니다. 이 기능은 여행시 사용 하면 아주 유용합니다. 자연의 멋진 소리를 사진과 함 께 담을 수도 있고 사진을 찍을 당시의 느낌을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담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 내에게 사진과 함께 사랑한다는 멘트를 담을 수 있어 실제 사용해보면 확실한 효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 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한번씩 사용 해 보시면 쉽게 익히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알고 사용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사용하지 못하는 것 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아주 놀라 운 속도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 은 시간에도 놀라운 속도로 변하는 기능을 일일이 다 따라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유의하시 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repairservant.com이라는 사이트 를 통해 사역을 하십니다. 미자립 교회의 음향시설이 나 악기 수리등을 자비량으로 수리해 주시는 귀한 사 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은 자신이 수리한 내용을 원인과 함께 그대로 사이트에 올리십니 다. 이는 참으로 귀한 자료가 됩니다. 다른 목회자들에 게 언젠가 자신의 교회에 이런 문제들이 생겼을 때 대 처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에게 사진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진기능을 잘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 다. 그 사례를 잘 공유한다면 여러분의 선교사역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래서 우리 모든 선교사님들의 사역이 잘 정리되어 차세대 사역자들에게 귀한 도움이 되길 기도합니다. KO MI
글_ 윤승준 Kyelp 대표 sjyoon7231@gmail.com 블로그 blog.naver.com/joshua7231
선교사 디브리핑을 위한 모임 6월 13일 (토) 오후 5시 문의: 김종남 목사 (gbm1958@naver.com/010-2765-9654)
선교사 건강상식
코미 게시판
병은 없다 5
식이섬유의 효능
한국인선교사 해외후원
한때는 이러한 식이섬유가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인 체에 해롭다고 생각하여 먹지 말것을 권하기도 하였으 나 1970년대 초 섬유질을 적게 섭취하는 사람에게 대장 암을 비롯해서 심장병, 당뇨병 등의 성인병 많다는 학설 이 발표되면서 섬유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사람은 체내에서 에너지를 생성하는 탄수화물, 지방, 단 백질 등의 영양소를 섭취해야 살 수 있다. 그런데 섬유 질은 이러한 영양소와 그 기능이 다르다. 섬유질은 대장 내의 세균에 영향을 끼쳐 발암 물질의 작용을 억제하여 대장암을 예방하고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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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터 이야기
또한 섬유질은 콜레스테롤의 흡수를 막아 주므로 성인 병을 예방하며, 위장의 공복감을 덜 느끼게 하고 음식물 의 흡수를 더디게 하여 콜레스테롤을 걸러 낸다.
코미 메세지
또한 수용성 식이섬유인 펙틴은 물에 녹아서 젤처럼 팽 창되는 경향이 있어 대장 운동을 촉진시켜 변이 내장을 통과하는 시간을 짧게 하고 배변량을 증가하며, 배변이 원활해지므로 변비가 없어지고, 얼굴색이 맑아지며 따 라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섬유질은 채소의 질긴 부분(셀룰로스), 나무 세포벽의 갈 색 색소(리그닌), 과일 속의 펙틴, 미역, 다시마의 끈적끈 적한 성분(알긴산), 특히 버섯류에도 많이 들어 있다. 이처럼 건강에 매우 유익한 섬유질은 육류나 생선류, 우 유제품에는 거의 없고, 생채소, 생과일, 해조류, 버섯 등 에 많이 들어 있다.
일반후원: 매월 천원부터 자유롭게 구독후원: 1년에 1만원 후원계좌:국민012-21-0840-091조성수 문의: 박정례 간사 (kormi@kormi.net/ ☎ 010-2797-6103) 월간 한국인선교사 쉴터는 선교사님들을 섬기고자 마련된 작은 숙소입니다. 현재 인천시 구월동의 한 빌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다섯 채가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습니다.
운영헌금: 매월 1만원 후원계좌: 국민 512625-95-102325 조성수 이용문의: www.kormi.net / ☎ (02) 2268-6636
어떤 섬유질은 장내에서 염분과 결합하여 몸 밖으로 배 출시켜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막아 준다. 따라서 고혈압 의 치료와 예방에 도움이 된다. 비만인 사람도 섬유질을 충분히 섭취하면 영양분의 소 화와 흡수를 억제하면서 만복감을 주기 때문에 과식을 하지 않게 되고 대변을 부드러워져 배변이 잘 되고 변비 로 인한 복통이 없어지게 된다.
월간 『한국인선교사』는 도서잡지 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월간 『한국인선교사』에 실린 글, 사진, 그림은 월간 『한국인선교사』의 서면 허가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식이섬유는 식품 중에서 채소, 과일, 해조류 등에 많이 들어 있는 섬유질 또는 셀룰로오스로 알려진 성분으로 사람의 소화효소로는 소화가 되지 않고 장내에 머물면 서 장벽을 자극하여 장의 연동운동을 촉진하고 장내 노 폐물을 끌고 몸 밖으로 배출되는 고분자 탄수화물이다.
개인수표 보내실곳 1806 Morning Canyon Rd. Diamond bar, CA91765 수취인:KOREAN MISSIONARY 문의: 이윤수 목사 (williamwooramlee@yahoo.co.kr/ ☎ (909)276-0011&(909)912-9104)
재정 보고
* 월간 한국인선교사 20주년 감사예배 및 선교잔치에 참석해 주신 선교사님 및 도움의 손길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주소가 변경되신 분은 한국인선교사 (02-2268-6636)로 연락을 주시거나 이메일(kormi@kormi.net)로 바뀐 주소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월 재정보고 들온모든셈 2,881,850 나간모든셈 2,725,875 전월이월 -3,233,243 당월이월 -3,07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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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우 목사는 자연치유 전문가
다음 카페 <병은 없다> 운영 cafe.daum.net/leedokwoo 건강문의 nlc8004@hanmail.net
한구인선교사 하는일
1995년 3월에 창간한 월간『한국인 선교사』 는 해외에서 사역하는 한국 인선교사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 기를 사진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선 교 역사로 기록하고자 발행하는 선 교잡지의 하나로서 선교사님들에게 무료 월간 보내기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쉴터 운영 을 하고 있습니다.
후원이사장 서좌원 | 후원이사 권오기 권희숙 김석주 김영국 김재일 김희경 돌다리교회 박원홍 시카고한인교회 오은희 이동수 이상호 안동근 조주형 발행인 성기호 | 편집인 조성수 | 편집장 김종남 | 편집 안세혁 | 행정 박정례 | 지원 최숙 이석영 | 미국팀장 이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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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소리
"잔소리"
생각해보니 잔소리거리가 큰소리로 바뀔 때까지 참는 것 자체가 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고, 또 언제 큰소리 가 날지 눈치를 봐야하는 우리 아이 들에게도 좋지 않은 것 같아 잔소리 모드로 바꿔 상황에 따라 잔소리를 해댔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제발 잔소리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었는데 어느새 다 자라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니 이젠 하 고 싶어도 할 상대가 없다. 잔소리는 하는 쪽도 괴롭지만 듣는 사람도 힘 들긴 마찬가지인데 자식들을 키워보 니 자식에 대한 관심과 사랑하는 마 음이 클수록 잔소리도 많아지는 것 같다. 어른이 되고 보니 어렸을 적 들었던 엄마의 잔소리가 무척이나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신 고 향엘 가도 이젠 더 이상 옛날의 그 정 겨운 잔소리를 들을수 없고 오히려 내가 부모님께 잔소리 할일이 많아 졌다. 생각해보면 가볍게 여기고 넘 어가도 될 것 같은 그 소리를 잘 들으 면 약이 되는데..
글_편미선 필리핀 선교사 GP선교회 punmisun65@hotmail.com
어느 날 한국에 있는 큰딸아이가 카 톡에 이런 글을 남겼다. 엄마, 이젠 엄마의 잔소리가 너무도 듣고 싶고 그리우니 빨리 전화해서 잔소리 좀 해주면 안돼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잔소리도 같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거야' 요즈음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영적 인 둔감에서 비롯되는 타락과 세속 화문제로 인해 기독교의 위상이 바 닥을 치고 있다. 아니 그리스도인답
게 살지 못함으로 인해 주님의 이름 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로 인해 많은 사람 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현 상이 팽배해졌다. 나는 종종 이런 기도를 무심코 한다.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달 라고.. 그 기도를 하는 내면은 내 스 스로 옳은 길을 가기가 힘이 드니 그 저 주인 되신 주님만 따라가면 쉬울 것 같은 생각에서 그런 기도를 한다. 그러나 솔직히 누군가와 24시간, 365 일을 함께 동행 한다고 가정해보니 쉽게 할 기도는 아닌 것 같다. 누군 가가 나의 모든 생각, 행동을 감찰하 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태클을 걸 며, 이건 왜 이렇게 하니?, 저건 왜 그 렇게 했니?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지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마, 이렇 게 해, 라고 참견을 하고 잔소리를 해 낸다면 아마도 스트레스와 고혈압으 로 쓰러지든지 아니면 참견하는 사 람을 어딘가로 보내 버리려고 방법 을 찾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의미는 우리 안 에 성령님을 모시고 살게 되는데 바 로 그 분에게서 쉴 새 없는 간섭과 참 견과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을 허락하 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재를 살아가 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잔 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분의 요구대 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삶을 산다면 빛 된 우리의 삶으로 인해 아마도 이 세상은 지금보다 좀더 밝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적어도 기독교의 본질 에 다가가기도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부하 게 하는 잘못을 범하진 않을 텐데.. 시시때때로 잔소리를 해주시는 성령 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요구를 잘 살피어 그 분이 기뻐 하시고 기다리시는 풍성한 열매를 드릴 수 있기를 소원하며 기도한다. 그분의 잔소리가 큰소리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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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 아 니다. 잔소리를 해야 할 상황이 엄청 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참고 그 잔소리 거리를 몸소 해결하는 편 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도 잔 소리를 모았다가 가끔 한번씩 큰소 리를 만들어 폭발하는데 그 때는 목 소리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매도 함 께 댄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