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교사 <마르지 않는 강> 검푸르게 짙은 미명 그리움의 두레박을 내려 시작과 끝의 정점에서 끌어올린 한 모금의 생수를 서럽게 들이마시면 뜨겁게 불타던 어제의 사막 갈증의 연무 끝에 서서 서럽게 들이마신 한 모금의 생수에 태초부터 그려놓은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짙푸른 연무를 걷어낸 어제의 사막에서 고요히 일어난 강들이 담쟁이 넝쿨을 따라 내 영혼의 광야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이 되었다. 글_천혜경 국제 YWAM 캠페인 선교사 (egyptchun@hanmail.net) 일러스트_김은영(lewis12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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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선교는 누구든지 해야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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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를 사랑하는
성목사 부부
선교사와 자동차 여러 해 전에 필리핀을 방문했습니다. 후배 선교사가 그곳에 설립한 신학교에 와서 한 주간 집중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갈 형편이 못 되어 부정 적인 대답을 했었는데 교단 총회에서 또 부탁을 해 왔 습니다. 교단 직영 신학교의 필리핀 분교이니 꼭 강의 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강의료는 물론 없고 비행 기 표도 개인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회(上會)의 요청이니 무겁게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 지만 강의료가 없고 비행기 표도 자담이라니까 거절하 는 것으로 비칠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겠 다고 약속하고 강의일정에 맞추어 필리핀 공항에 도착 했습니다. 마중 나온 선교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현지의 선교현장으로 차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날이 어두워지자 전조등을 켜고 가는데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약해지더니 차가 서고 말았습 니다. 바깥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도로 곳곳 엔 빗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선교사께서 차 밖으로 나 가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부탁하니 기꺼이 차를 밀어주 었습니다. 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물구덩이에 발이 빠지는데도 개의치 않고 차를 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다시 시동이 걸리자 쏜살같이 차가 속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하고 또 차가 섰습 니다. 그런 일이 그 후에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도로에서 그것도 어두운 길에서 자동차 불도 켜지지 않는 상태에서 차가 서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입니다. 더욱 간절한 기도와 함께 차 를 타곤 했습니다. 마침내 무사히 필리핀에서의 사역 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엔 그곳에 남아 사역할 선교사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 후원교회의 담임목사님을 만났을 때 현지 사정을 설명하고 차를 바꾸어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선교사님 의 부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생색을 낼 일도 아 니었지만 그 후에 들으니 새 차는 아니지만 운행도중 서지 않는 차를 타게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 리며 감사했습니다. 대중교통수단도 있고 택시를 불러 탈 수도 있겠지만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자동차는 선교사의 발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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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나 신자 들의 눈에는 선교비를 받아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 비 춰질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 캄보디아 선교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항에 영접 나온 선교사님이 일본에서 만든 고급차를 운전하고 계셨습니다. 예전상(禮典上) 빌려 온 것인가 도 생각했는데 일상에서 늘 그 차를 운전하셨습니다. 내가 묻지 않았지만 캄보디아는 관세가 비싸서 헌 차 도 한국의 새 차 값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제 차도 헌 차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다시 캄보디아를 가보니 이번엔 한국제 자동차를 운전하고 계셨습니다. 아마 그간 캄보디아 를 다녀간 분 중에“선교사님, 차 좋은데요!” 라고 지나 가는 말로라도 한 마디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기도 했습니다. 선교사 입장에서는 같은 값이라면 조 건이 좋은 차를 선택해야 하겠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 서는 호화로움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자동차보다 귀한 것이 사람 목숨이고, 특히 선교지에 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위험한 차를 운전하는 일이 사역의 비효율화는 물론 목숨까지 위태롭게 할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바울 사도가 지중해 를 오가며 선교사역을 할 때 운송수단인 배가 파선하 여 위기에 처한 것이 세 번이나 되고 꼬박 하루를 바 다에서 표류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도 했습니다(고후 11:25). 하나님의 종을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선교사는 자기 신앙양심에 따라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면 되겠지만 혹 다른 사람이 오해하고 나 아가 실족케 될 수도 있기에 자기 스스로 조심하고 절 제하는 삶이 필요할 것입니다. KO MI
글_성기호 목사 본지 발행인 keehosung@hanmail.net
라오스에서 보내 드리는
하늘나라 백성들
Face of Lao - 씨양쌈니양 2 “라오스” 는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이름으 로 다가온다. 라오스말로 라오, 영어로는 Laos, 헬 라어로는 λαὸ(라오) 혹은λαὸς(라오스)인데 벧전2: 9~10절에“오 직너희는…그의 소유된 백성(λαὸς) 이니…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 나님의 백성(λαὸς)이요”Laos는 하나님의 백성(my people)이라는 뜻이다. 라오스 땅은 이미 사람들 의 입에서“라오스” 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하나 님께서“내백성”이라는 불붙는 마음으로 이 땅을 보실 것이다.
(56x76cm charcoal pastel 2004)
라오스가 과거 3국시대 즉 루왕파방왕 국, 비엔티얀왕국, 짬빠싹왕국의 역사가 깃들여 있음이 분명하다. 파싸따이(라오스 중남부어)는 컵짜이(감 사합니다), 빠이싸이(어디가세요?), 타오 다이(얼마입니까?), 돈레우버(오래되었 습니까?). 파싸느아(라오스 북부언어)는 컵짜으(감스합니다), 빠이싸으, 타오다 으, 흥레우버. 라오스 최북부인 퐁싸리는 컵쩌(감서합니다). 라오스에 여러 도에 사는 우리가 그들 도 에서 사용되는 씨양쌈니양(방언)을 사용 하면 그들은 여러분을 가족처럼, 고향사 람처럼 친근히 맞아줄 것이다. 루왕파방 생활 8년째 살면서 이젠 필자도 루앙파 방 방언으로 무장하여 이들과 어울리며 -아이가 아닌 -아으 즉‘컵짜으’ ,‘빠이 싸으’ 가 표준말로 알고 살고 있다. 어느 날 비엔티얀에 출장을 가 호텔에 투숙하 러 갔더니 종업원이 대뜸 루왕파방에서 왔냐고 해서 나는 비엔티얀에 산다고 하 니 아니란다. 네 말투가 루왕파방 말투란 다. 한편으로는 흐뭇했다. 우리 한인들이 라오스의 1개 특별시와 17개 주(州)에 흩 어져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일을 할 때 각 주의 방언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면 훨씬 그들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KO MI
글과 그림_엄미정 라오스 선교사 & 화가 apostol@hanmail.net
하나님의 은혜로 월간 한국인 선교사 발행이 20년이 넘어갑니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의 책 내용을 모두 스캔해서 ISSUU에 올려두었습니다. 자유롭게 가져가셨으면 합니다. (홈페이지: http://issuu.com/koreamission/docs, 아이디: koreamission, 패스워드: 22686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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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Ⅰ
선교사 천로역정(8) 편집자주 : 브라질 김선웅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브라질 본부 설립 배경 및 진행 사항 지피 선교회는 1992년부터 남미 대륙을 개발하고자 파라과이 정금태 선교사님을 파송하고, 1993년 칠레 박영완 선교사님을 그리고 1994년 브라질에 저희 가 정을 파송 하였습니다. 파송 된 세 가정은 각자의 선 교지에서 사역을 하며 남미 대륙에 흩어져 있는‘한인 디아스포라’ 를 공동으로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들을 선교에 동원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99년부터 선교 남미 프로그램을 브라질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의 세력으로 보지 못하고 피선교국으로만 보았던 어리 석음을 답습하지 말고 새로운 차원의 선교를 시작하는 선교 전략을 수립해야만 한다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GP선교회의 선교 전략을 수립 각 선교지에서 지역에 맞게 전략을 세우고 행동 지 침을 만들어가던 중 브라질에서 사역하고 있던 저는 2004년‘포어(포르투칼어) 문화권 선교’라는 프로젝 트를 지역 회의를 거쳐 국제 협의회에 상정하였습니 다. 이 프로젝트는 브라질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내용이었 는데 당시 국제협의회에서는 미주 이사회에 이 안건을 일임하였고 2005년 상반기(3월 7일-8일) 미주 이사 회에서 당시 미주 이사장이셨던 김원기 목사님의 허락 을 받고 나자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고 진행이 되었 습니다.
2013년 브라질 선교남미 대회 2003년 지피 대회에서 당시 국제 대표이셨던 안성원 선교사님이‘GP의 미래상’ 이란 주제로 선교사역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얼마나 많은 제자를 양육했느냐라 며 현지 지도력을 키우는 선교회가 되자고 말씀하셨 습니다. 또한 오늘날 세계선교의 동향을 보면 많은 피 선교국이 이제 선교사를 파송 할 수 있는 선교국이 되 었는데 이러한 나라들이 선교사를 파송 할 수 있도록 GP 선교회가 앞장을 서서 도와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 제 발표를 하셨습니다. 뒤를 이어 백운영 선교사님이 ‘지피 선교회 장기 전략 방안’ 을 발표 하면서 한국 선 교는 이제 다른 민족의 교회들이 선교할 수 있는 교회 가 되도록 밑거름 역할을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 며, GP 선교회는 우리가 선교한다는 생각보다는 우리 를 통하여 현지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탈바꿈 하는데 밑거름 역할을 한다는 전략을 지향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서구 선교가 오랫동안 현지 교회를 새로운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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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GP-BRAZIL 선교회 창립예배 한편 1995년부터 브라질에서 현지 교회를 설립하여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던 우리부부는 12년간의 훈련의 열매로 2007년 브라질 사람인 베니시우 형제를 모잠 비크로 파송 하였고, 선교사를 후원하기 위해 현지 교 회들과 연합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브라질 은 경제적 성장이 힘입어 선교에 붐이 일기 시작했는 데 선교의 노하우가 없던 현지 교회들이 선교에 앞장 서고 있던 한국 선교를 부러워하며 우리와 함께 일하 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선교회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 꼈고 자연스럽게‘포어 문화권 선교’프로젝트에서 ‘선교회(선교단체)’구성하는 방향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GP-BRAZIL 선교단체를 브라질 법인체로 등록 법인체를 만들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브라질 사람들 을 이사로 영입하여 2009년 12월 정부에 등록된 브라 질 지피 선교회가 설립되었고 초대 이사장으로 바우도 미로 목사를 선출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 4월 24 일 국제협의회 회장이셨던 양춘길 목사님과 지피대표 였던 김병선 선교사님을 모시고 창립예배를 드리면서 2호 선교사인 조제윌슨, 클레이지 부부를 모잠비크로 파송 하였습니다. 그리고 2011년에 3호 선교사인 시 우비우, 에리카 선교사를 역시 모잠비크로 파송 하였 습니다. 특이한 점은 3호 선교사까지 모두 개척한 교 회의 교인들로서 훈련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3가정의 선교사가 나왔다는 것 은 어떤 환경이나 어려움도 하나님의 복음 증거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파송 된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의 경우 처음에는 브라질에 있는 현지 브라질 교회들과 개인 후원자들뿐 이었으나 이제는 브라질에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들도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들 의 후원금이 외부 유입이 없이 100% 브라질 현지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선교지로 나갔을 때에 는 선교비가 적게 들어와 약 500불 정도의 선교비를 외부로부터 받았지만 점차 후원하는 교회와 개인 후원 자들이 증가 되면서 이제는 평균 1300불-2000불 이 상의 선교비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이나 미국 등 외부에서 들어오는 헌금 의존도가 하나도 없이 현 지에서 공급 되는 헌금만으로 브라질 파송 선교사들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미 1.5세 김정호 선교사 파송식 주로 선교사를 파송 했었는데 그 외의 나라들에게도 선교사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1.5세들은 한국을 떠 나올 때 남미 여러 나라들을 거치며 정착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어 뿐 아니라 스페인어까지 사용할 수 있고, 이미 초 문화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초창기 선교사들 이 거쳐야 하는 언어, 문화 충격을 받지 않고 선교 지 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1.5세들은 한국이나 미국에 연고가 없기 때문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파송 된 선교사들처럼 선교 후원자들을 모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남미에서 배출되는 1.5세 한인 선교사들을 후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브라질에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들을 모티브로 한 ‘한인 디아스포라 이사회’ 입니다. 이미 브라질에서는 법인체로서 GP-BRAZIL 선교회 본부가 자립되어 가 동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이사회 안에 한인 디아스포라 이사회를 설립하기로 이사회의 결정이 내 려지면서 현 GP-BRAZIL 선교회 이사장이신 고영규 목사님이 이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순 차적으로 김용식 목사님과 소진석 목사님, 그리고 김 성민 장로님이 한인 디아스포라 이사회에 들어오셨고 이로서 남미에서 배출되는 1.5세 한인 선교사들을 후 원하고 밀어줄 수 있는 기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KO MI
글_김선웅 브라질 선교사 brazilgp@hotmail.com
아프리카 모잠비크 우물 파기 운동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사 파송을 시작 그러는 동안 브라질 1.5세로 한인 교회가 아닌 브라 질 교회를 섬기고 있던 고영규 목사님이 선교회 이사 로 들어오면서 브라질 사람뿐만 아니라 한인 1.5세들 이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 래서 이제까지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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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의 발자취Ⅱ
아홉, ‘ 주님께서 구원하신 자녀들 이야기 2’ 편집자주 : 장철호 뉴질랜드 선교사의 20여년간 사역이야기 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마부치 아야꼬 이야기 아야꼬 상은 일본 동경 소재의 일본 대학교에서 의학교 수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몇 년간 연구 기간을 얻어서 오타고 대학교의 의학부에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당 시 저는 퀸스타운이라는 곳에서 사역을 섬기고 있었습 니다. 현지 교회와 협력을 하며 사역을 하던 중, 디모 데 목사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전국 기독교 신문에 올려 주셨습니다. 마침 아야꼬 상이 더니든의 한 현지교회를 찾아갔는데 영어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목사님 께 일본교회가 없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마침 도착한 기독교 신문에 저희 기사가 올라와 있었던 기억을 하며 장기드온 목사를 찾아가라고 권면 했다고 합니다. 더니 든에서 퀸스타운은 버스로 다섯 시간 가량 걸림에도 아 야꼬 상은 주저 없이 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복음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아야꼬 상과의 대화는 겉만 도는 식이었습니다. 똑똑한 머리로 이성적으로 납득을 하며 믿으려고 하니까 답답했던 것 입니다. 나중에 일본의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 상의 '시 오카리 토우게'라는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다 끝나고 나서 많이 감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직은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면 응답해 주실 것인데 혹시 기도 제목이 있 으신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자기는 뉴질랜드가 좋아 서 영주권을 받아서 살고 싶은데 나이가 만 55세에다가 영어도 못하는데 기도를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서 제가 걱정하지 마시고 영주권을 바로 신청해 보시라
고 알려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 금요일 새벽에 아야꼬 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네요!" 저의 말을 듣고 영주권을 바로 신 청 했는데 5일 만에 바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 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고 얼 마간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더니든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어 본격 적으로 캠퍼스 사역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아야꼬 상 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야꼬 상은 반갑게 저희 일본교회도 나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주 임 교수와 오해가 생겨 자존심 싸움이 되었고, 급기야 는 주임교수가 아야꼬 상의 책상마저 치워버렸다는 것 입니다. 너무 힘든 나머지 눈물도 나오지 않는 나날들 이 계속되면서 나중에는 목사님과 성경 공부를 하고 싶 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주 님을 영접시켰습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마음에 평안 이 찾아오고, 주임교수와의 문제도 아야꼬 상이 먼저 찾아가서 사과를 하게 되면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지금 은 일본에 돌아가 노모를 모시면서 가까운 교회에서 신 앙생활을 잘 하고 있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카나꼬 모우가미 자매(좌)와 세 자녀들
마부치 아야꼬 상(좌) 과 어머니(우) 6
카나꼬 모우가미 이야기 카나꼬 상은 일본 명치대학을 나온 유수한 자매입니다. 그녀는 목회를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설교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등학 교 때부터 부모를 떠나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탓
입니다. 대학시절에 만났던 한 형제와 사랑에 빠져 불 신 결혼을 하였으나 얼마가지 않아 이혼을 하고 말았습 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죽 기 전에 뉴질랜드라는 곳을 한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었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퀸스 타운으로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내 돈은 바닥이 나 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모텔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주인은 카나꼬 상에게 사업을 아예 맡기고 매일 같이 밖에 나가서 실컷 놀다가 밤에나 돌아온다고 했 습니다. 그것 때문에 일본교회로 나오고 싶어도 나오 지 못한다며 가끔 심부름을 시킬 때 교회에 와서 펑펑 울고 가곤 했습니다. 급기야 우리가 일본인 주인을 만 나 양해를 구하고 교회에 데리고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니 이젠 더욱 교회 를 오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인 주인은 영주권 을 신청해 주겠다는 것을 빌미로 전혀 시간을 내어 주 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소문을 하여 더니든의 일본식 당에 소개를 하여 취직 및 잠자리 제공 그리고 영주권 까지 해결되도록 해 주었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서 머리에 원형 탈모가 여러 곳에 생길 정도였습니다.
교회에 헌신적인 삶을 사는 히라이 사키까 자매 그래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 일본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중에 한 네덜란드 형제가 자매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처음엔 거절을 했지만 집요하게 찾아오는 형제의 마음 을 받아주어 교제를 하는 중에 어느 날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결혼 주례를 받으려면 믿지 않는 형제는 안 되겠지요?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주말에 휴가를 내어 그 형제를 데리고 오라고 했 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와 같이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을 앉혀 놓고 복음제시를 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형제님을 지으시고 사랑하고 계시는데 여 태껏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었으니 얼마나 하 나님 마음이 아프셨겠느냐는 말에 갑자기 형제가 눈물 을 펑펑 흘리면서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릴 때부터 부모님 과 교회를 다녔는데 그게 싫어서 네덜란드에서 뉴질랜
드까지 유학을 와서 12년간 혼자 살았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깨달음을 주 심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일 제 가 더니든 일본 교회를 시작했을 때 세례자 일호가 된 형제입니다. 지금은 자녀 셋을 두고 온 가족이 정말 주 님을 사랑하면서 교회를 잘 섬기고 있습니다. 야스나오 요리타 형제와 사치까 자매 이야기 야스나오 형제는 워킹 홀리데이로 더니든에 첫발을 내 디뎠습니다. 일본에서 잠깐 만났던 영어 선생님이 더 니든에 살고 있어서 만나기 위해 찾아왔는데 다른 곳 으로 이사를 가서 연락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 머물 고 있던 백패커스 호스텔에 붙어있던 일본교회 안내문 을 보고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온 이 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다른 곳에 일절 여행도 가지 않고, 교회에만 줄 곳 참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 하고 나니까 갈급함이 생겨 성경을 일주일에 몇 번이고 공부하고 싶다고 하여 매일 만나다시피하며 말씀을 전 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만 있 으면 인터넷으로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급속 도로 영적인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사치까 자매가 저희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자연스럽 게 성경 공부반에 함께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 되 지 않아서 사치까 자매도 주님을 영접하고 야스나오 형 제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워킹 홀리 데이로 온 젊은이들은 뉴질랜드로 오면 다른 도시를 돌 면서 일도 하고 관광도 하면서 마음껏 즐기는 것이 목 표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일 년간 꼬 박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야스나오 형제는 곧바로 동경에 있는 신 학교로 입학을 하여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지금은 외 국 젊은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며 기회가 되면 복음 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치 까 자매는 후쿠오까로 돌아가서 근처의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자신도 신학을 공부하여 헌신자로 삶을 드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들 의 앞길과 이들이 배우자를 만나 보다 효과적으로 주님 을 섬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KO MI
글_장기드온 뉴질랜드 선교사 gideon9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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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Ⅰ
아홉번째 - 해야 '할 일', 떠나야 '할 일' 편집자주 : 러시아 박광배 선교사의 선교를 향한 이야기를 10 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온 선교지를 떠나 이제는 하나 둘 씩 고국에 선교 본부로 가거나, 정년이 되어서 떠나는 동역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박수칠 때 떠나 라” 는 말을 합니다. 선교지에서 일생을 보내다보면 어 느새 나도 모르게 주인 의식을 가지고 주장하려는 태도 가 몸에 배인 것을 느낍니다. 개인적인 주장이 교단이 나 교리나 성경보다 위에 존재하는 어이없는 일도 많습 니다. 스스로는 많은 스트레스와 워커 홀릭에 빠져 있 지만 본인은 하나님께 충성을 하고 있는 전무후무한 선 교사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고립된 밀림의 한 사 람처럼 살면서 누구하고도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고집 불통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위대한 선교사라 자위하곤 합니다.
는지 돈에 미처 있는지 정체성도 없이 선교의 나침판을 분실한 선교사는 아닌가?’ ‘일은 , 하나를 하였으면 보 고는 천 가지를 보고하면서 자기 사역을 과대보고로 도 배하지는 않는가?’ 정말로 끊임 없이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고 훈련시키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큰 고기를 잡아 돌아 왔지만 뼈 만 앙상하게 남은 고기만 가지고 돌아오는 어부의 모습 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받은 형제를 축복하는 박광배 선교사
나호드나호드까 교회의 희망인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예배 그래서 지금 무엇이 맞는지 틀린지는 서둘러 판단하 지 않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만한 분별력은 모두에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을 통해서 자신 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너무 나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고집불통의 사람은 아닌가?’ , ‘내가 너무나도 자기 자랑에만 빠져 있는 자아 도취형 은 아닌가?’ ‘나는 , 현대 문명을 거부한다는 미명하에 그 문명을 거들 떠 보지 않으면서 스스로 청빈한 선교 사로 착각하지는 않는가?’ ‘외부 , 지원이 없어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변명할 말이 없어 자비량선교를 한다고 가족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가지는 않는가?’ ‘비즈 , 니스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세상에 푹 빠져 선교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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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사의 해외 선교사역 역사가 서서히 성숙해가 고 있는 가운데 선배 선교사들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를 살피며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삼는 것은 어 떨까요? 한국교회사에서 볼 때, 최초의 해외 선교사는 러시아 연해주로 보냄을 받은 최관홀 선교사입니다. 1909년에 평양신학교 2호 졸업생으로 졸업을 하고 블 라디보스톡으로 파송된 후에 공산주의로 인해서 선교 사의 맥이 끊겼다가 한국인 선교사들이 다시 선교를 시 작한 것은 1991년입니다. 1998년 엘친 대통령의 선포 로 선교역사 15년이 되지 않은 선교 단체는 모두 철수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최관홀 선교사의 사역 때문 에 장로교는 다시 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 다른 분들에게는 어떻게 가슴에 와 다가올지 모르지 만 당시 저에게는 관에 넣은 사람이 무덤에 묻히기 직 전에 벌떡 살아난 기분이었습니다. 최관홀 선교사의 사 역 평가는 뒤에 하기로 하고 그 분이 이 땅에 있었던 일 로 인하여 장로교는 오늘도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또한 비단 러시아뿐 아니라 5대양 6대주에
2만5천명이 넘는 한국인 선교사들이 사역을 감당 하는 가운데 당대에는 어떤 평가도 미루기를 원합니다. 왜냐 하면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들의 발걸음을 어떻 게 사용하실지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선교사의 삶을 마치고 천국으로 불림 받은 고 서만수 선교사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하여 선교사로서 멋진 삶을 사신 또 한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생전에 이분을 뵙고 저 렇게 멋진 선교사로 살고 싶다고 은근히 생각을 했던 고 서만수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는 평생을 인도네시아 에서 사역하신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심으로 모든 한 국 선교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홍릉 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장경두 목사님께 가시기를 간청 하였으나 당시 장목사님은 선교사로서 가시기보다는 보내는 선교사로 국내에 남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은퇴 후에도 순회선교사로 전 세계를 활보하시면 서 집회와 강의와 전도하시는 일을 83세에도 왕성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장경두 목사님이 안 가시는 인 도네시아에 당시 기독신문 기자로 일하시던 서만수 선 교사와 정소라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파송식 때 충 현교회 김창인 목사님께서 부탁을 하셨습니다. “서만수 선교사! 선교지에 가면 현지 그 나라 시민권을 취득하 시오. 그리고 서만수 선교사 선교지에서 죽으시오” 나 이 어린 선교사는 파송식에서“예” 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고 서만수 선교사님의 인도네시아 사역은 전설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 후반부에서 폐암말기로 한 국 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 중에 계셨습니다. 치료를 받는 중에 파송식 때 권면의 말씀을 해 주신 김창인 목 사님께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병문안을 오셔서 “서만수 선교사 여기 뭐하고 있는 거야? 내가 선교지에서 죽으 라고 하지 않았어?” 아버지 같았던 김창인 목사님을 반 가이 모실 사이도 없이 고 서만수 선교사님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 목사님 선교지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시 인도네시아로 가셨고, 그 후 몇 달을 못 넘기고 하늘나라로 불림을 받으셨습니다. 당시의 박에스더 기자가 기록으로 남긴 것을 소개하면 서 이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슬람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40여년간 사역하며 선교 의 기념비적 교두보를 구축한 서만수 선교사가 9월16일 오후 2시경, 70세를 일기로 현지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서 선교사의 장례예배는, 늘“신실한 동역자” 라 고 불렀던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가 주축이 되어 9월18 일 오전10시 교회에서 천국환송예배를 드렸다. 부인 정 소라 선교사와 함께 예장(합동)총회 제1호 원로선교사로 추대 받은 지 채 한 달도 못된 시간이라 안타까움이 컸다. 이날 환송예배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인도네시아 선교사들과 자카르타교민들, 현지 사역자들, 서 선교사 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스틴신학교 학생들, 세계선교회 와 파송교회 관계자 및 선교 동역자들 1천2백여 명이 참 예하여 애도했고, 이 장례를 지켜보는 현지 사회도 놀라 워했다. 특히 이날 환송예배에서는, 김호영 주 인도네시아 대사, 림택권 목사(전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김완일 목 사(인도네시아 목회자협의회 증경회장), 최광식 선교사 (한인선교사회 회장)의 추도사를 통해 선교사 서만수 목 사의 존재의미와 선교열매, 그리고 모슬렘권 선교에 남 긴 수많은 일화, 인도네시아 선교를 위해 바친 그의 삶 을 깊이 재인식하는 자리가 됐다. 서만수 선교사의 약력을 소개한 이승민 장로는, 자카 르타연합교회는 앞으로 미망인 정소라 선교사를 잘 모 실 것과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선교에 변함없이 진력 할 것을 다짐하며 연합교회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유 족으로는 평생을 함께 동역해 온 미망인 정소라 선교 사뿐이다. 서 선교사는 인니선교를 위한 마지막 소원으 로 추진하던 종합대학교 부지 바로 곁 공원묘지(TAMAN KENAGAN LESTARI)에 묻혔다. 서 선교사는 1970년 예장합동 제55회 총회에서 인도네 시아선교사로 파송 받아, 바울의 선교방식을 채택하여 소천 하던 날까지 384개 현지교회를 개척 설립하여 지 도해 왔고, 3000 촌락에 십자가 세울 비전을 품고 5년 제 정규신학대학(STTIN)을 운영하며 사역자를 양성 파 송해 왔다. 또한, 사역 초기부터 선교동역자로 자카르타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여“이국땅에 사는 성도들의 사 명이 바로 선교” 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며 이민교회의 사 명을 새롭게 고취 시켜 모든 성도를 선교사가 되게 했으 며, 아시아권의 기념비적인 한인교회로 성장시켰다. KO MI
글_박광배 러시아 선교사 nakhodkach@hanmail.net
세계 선교의 현장에서 힘쓰시는 선 교사님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 씀과 분별력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긴 <시대를 아는 힘>을 소개해 드 립니다. 선교현장에서, 자녀들의 교 육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힘 을 얻기위해 활용하셨으면 합니다. 이 책의 판매 수입금은 탈북자들을 위한 선교에 쓰입니다. 문의: 통일소망선교회 이빌립 선교사 (02-2625-0497) 가격: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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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
땅끝이야기Ⅱ
'나는 엄마다' 아홉째 이야기 편집자주 : 바울 선교회 MK맘 허은영 선교사의 삶과 사역 이야기를 10번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MK를 아시나요? 선교사자녀를 영어로 Missionary Kids라고 합니다. 그 이니셜을 사용하여 MK라고 부릅니다. 2014년 12 월에 한국선교사협의회 통계보고에 따르면 한국인 해 외 파송숫자는 26,400여명 이라고 합니다. 바울선교 회 현재 통계로 보면 428명의 파송선교사중 한국인은 384명이고 선교사자녀의 수는 368명에 이릅니다.
2011년 바울선교회 전체 MK 수련회 왜? MK? 보츠와나 해피 홈 아이들이 생각나서 전주의 하늘아 래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갑작스런 본부의 이동 명령 에 순종을 배우며 달려왔지만 선교 현장과는 다른 것 이 참 많았습니다. 저의 사역대상인 선교사 자녀들은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얼굴을 대하 고 삶을 공유하던 해피 홈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또한 본부는 혼자의 사역이 아니라 12명의 팀 사역이었습 니다. 21년간 선교현장의 사역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 니다. 아침마다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해 야 하는 것부터 다른 삶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전주에 는 아무 연고지가 없어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오히려 아프리카보다 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반 갑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서로 마음이 오가지 않는 관 계들뿐이었습니다.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환 경 때문인지 참 많이 울어야 했습니다. 살아져야 하는 데 오히려 내 나라는 보츠와나가 되어져 버린 것이 다 시 한국에 적응해야 하는 선교사의 가장 큰 어려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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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습니다. 하늘을 보며 아프리카 하늘을 그리워하고 아스팔트 위를 달리며 칼라하리 사막을 추억하고 살 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질문한 것 같습니다.“하나 님 왜? MK사역인가요? 해피 홈과는 달라도 너무 다 른데..” 무엇으로 보답할꼬 한 살 아들을 품에 안고 떠났던 89년도의 김포공항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인천공항에선 23살 이 된 아들과 18살의 딸아이가 함께 했습니다. 큰 축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MK사역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곧 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무 결정권이 없는 어린 나이에 아무런 동의 없이 선 교지의 삶이 주어진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마치 미운 오리새끼들처럼 현지인들 사이에서 끼어 자랐습니다. 그것을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부모선교사들의 마음 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이 반주가 되는 아픔도 저는 알고 있습니 다. 현지인들을 사랑으로 양육하지만 정작 내 자녀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각자 주어진 환경에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가야하는 부모의 고통의 숨소리를 저는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선교에 미쳐서 달려가는 부모 선교사들은 늘 자녀들에게 미안함을 마음 가득 담고 있습니다. 다만 표현 받고 살아보지 않아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2015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함께 정을 나눈 MK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 을까? 그곳이 아프리카든 한국이든 무슨 상관일까 하
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선교지보다 더 어려운 선교지 가 고국이 되었지만 한국이 선교지라고 생각하니 낯 설음도 그리움도 이겨낼 힘이 생겼습니다. 은혜였습 니다. 저는 엄마로 선교사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다 만 선교지만 바뀌었을 뿐이고 선교 대상만 해피 홈에 서 MK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받은 소명과 주신 사명 모두 그 자리였습니다.
는 진로와 진학 때문에 다시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기숙사에서든 친척집에서든 홀로 서기를 시작해야 하는 MK들. 마치 1호 선교사이신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떠나 세상에 오신 것처럼 또한 세상에 사시는 동안 머리 둘 곳도 없이 이곳저곳 떠남 의 연속이셨듯이 선교사의 자녀인 MK들의 삶이 주님 의 삶을 꼭 닮았습니다.
MK부모 알기 MK사역은 그 창을 통해 가정을 케어 하는 사역입니 다. 먼저는 엄마 아빠의 삶을 늘 공부해 가는 부모들 아니 더 나아가 MK라는 특별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부모선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저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역이라서 좋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에 부모 선교사들의 고충을 대변해주고 선교 현장의 실상을 알려 더 깊은 선교사 멤버 케어를 확장 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의 자녀로 또 선교사로 살아가는 MK
2015년 하계 MK 수련회를 진행 중인 허은영 선교사 한번 더, MK를 아시나요? 하나님은 그 나라의 상속을 위해 자녀들을 준비시키 시고 계십니다. 그 총책임자로 부모를 두셨고, 하나님 의 자녀를 가정에 위탁하십니다. 믿는 부모를 얻은 자 녀는 한번 캐스팅 되었고, 사역자로 헌신한 부모의 자 녀들을 두 번 캐스팅 받은 것이며, 현지 선교사로 부 름 받은 부모의 자녀들(MK)은 세 번 캐스팅된 것입니 다. 선교지에서 자라는 선교사 자녀들(MK) 95%가 본 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에 의해 사역지로 이동합 니다. 사역지에 정착기에는 낫선 문화와 새로운 언어 의 높은 장벽을 이겨나가는 MK들은 든든한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가 부모를 도와 MK들의 신앙과 교육지원의 울타리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MK들의 삶은 떠남을 시작으로 해서 떠남을 기반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고국을 떠났고 선교지에서 조차 한곳에 정착하기보다 셀 수 없는 이동을 연습합니다. 모든 것이 익숙해 질 무렵에
연속적인 떠남의 결과로 정체성도 뿌리의식도 약한 MK들이 한국인으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고, 한국 대학에 진학하러 재입국한 수가 지금은 전체 MK 2만 명의 약 20%에 이르는 4천 명 정도가 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나라에 재입국했는데도 누구의 케어와 관 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선교 다음세대들이 자기의 삶의 짐까지 혼자 감당하며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그 것도 선교강대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너가 MK들의 엄마가 되어주렴" 하고 이 자 리에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울고 다닙니 다. 아프리카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이 아니라 자녀를 떠나보낸 부모 선교사들의 마음이 느껴지고 타국인 한국에서 MK들이 홀로서는 외로움이 느껴져 울고 있 습니다. 저에게 MK를 부탁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 다. KO MI
글_허은영 바울선교회 MK 선교사 baurimk@naver.com
선교사 디브리핑을 위한 모임 11월 14일 (토) 오후 5시 문의: 김종남 목사 010-2765-9654 gbm19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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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쪽과의 만남
Love Story
내 눈엔 당신만 보여요! 없다고 했더니 아버지께 승낙을 얻는다고 용감하게 찾 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손님 대접은 잘해서 보내셨지 만 큰 딸인 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은 반대 하 셨다. 청년의 어머니도 우리 가정의 어려움과 내 몸이 너무 약해서 애기도 못 낳을 수 있다고 하시며 나랑 결 혼하면 고생한다고 반대하셨다고 했다. 양쪽 집안 모 두 안 좋은 환경을 내세워 반대했지만 이 청년은 다른 사람은 싫고 자기 눈에 들어온 이 연약하고 가냘픈 소 녀인 나만을 내세웠다고 한다.
하나님의 깊은 뜻 안에 만난 송대석 선교사(우)와 함께 우리 부부가 처음 만난 지도 46년이 되었다. 때는 1970년. 나는 대전에서 볼일을 끝내고 버스를 타고 여 러 가지 생각을 하며 집에 갔다. 우리 집은 산골이었 고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하루에 한번 들어가는 버스 가 생겼다.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학교 졸업 후 일 주일의 직장생활이 끝나면 이 버스로 집에 가곤 했다. 그런데 긴 생머리에 몸이 가느다란 나에게 한 청년이 말을 걸었다. 그는 이웃 마을에 작은 누님을 보러 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누님 앞집에 사는 친척오라버니와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이 청년은 친척 오라버니에게 나를 소개 해 달라고 여러 날을 졸라서 편지를 보냈다. 매일같이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냈다. 처음엔 이상히 여기며 편지를 보지 않았다. 어느새 수북이 쌓 이는 편지들... 어느 날 편지를 열어보니 여러 가지 좋 은 말들과 때로는 한편의 시로 아름다운 표현이 편지 속에 가득하였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나 는 그 편지에 마음을 빼앗겨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몇 달을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만들어 나 갔다. 어느 날 이 청년이 우리 집에 결혼 승락을 받으러 찾 아 왔다. 깜짝 놀란 나는 아직은 안 된다고 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셔서 집안이 매 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맏이인 내 밑으로 어린 동생이 5명이나 있었고 나는 이 동생들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이 지나 아버지는 새 어머니를 얻으셨고 이런 상황 때문에 아직 결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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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작은아버지와 친구인 면사무소 부면장 님이 찾아 오셨다. 이분이 우리 아버지와 진지하게 이 야기를 나누시고 가셨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이 청 년은 작은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작은누나는 돌아 가신 우리 어머니를 잘 알고, 우리 집안을 잘 알아서 중간역할을 해주신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어려움 없이 사랑을 키워갔다. 결혼도 양가 집안에서 도움을 받았고 특히 시댁에서 많이 협조해 주셨다. 신혼살림 은 알콩달콩 재미있고 깨가 쏟아지는 생활을 했다.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었다. 하나님은 나 를 사랑하사 예수님을 믿는 청년을 강권적으로 역사하 셔서 눈에 콩깍지를 씌워서 사랑하게 하시고 한 몸 되 게 하신 것이다. 신랑은 어릴 때부터 고모님들과 교회 를 다녔지만 나는 유교집안에서 효도만 배우며 살았 다.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던 신랑은 믿지 않는 나를 만나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은 아들 둘을 낳고 천사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가정이 되었다. 금이 연단 받아 빛 나는 것처럼 나 또한 무수한 연단을 받고 1989년 선교 사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고 있다. 두 아들은 믿음으로 잘 자랐고 선교의 동역자가 되어서 함께 하늘 상급을 쌓아 가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KO MI
글_송한나 멕시코 선교사 iglesiacf@hanmail.net
월간 한국인선교사 쉴터는 선교사님들을 섬기고자 마련된 작은 숙소입니다. 현재 인천시 구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다섯 채가 1997년부터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용문의: www.kormi.net / ☎ (02) 2268-6636
믿음의 눈으로 그리는
엘가의 빛그림 4
(C국 전도여행 첫 사역지인 비둘기교회를 떠나며 팀원들과 기념 촬영)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0-11). 우리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전의 모습들은 다 달랐어도 이제는 주님의 각 지체로 오직 하나님의 나라 한 곳만 바라보며 삽니다! 전 세계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헌신하시는 선교사님들! 영광의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의 소망 붙잡고 주님의 사명 잘 감당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KO MI
사진_이기수 엘가 대표 elga1004@gmail.com
1995년 3월에 창간한 월간『한국인선교사』 는 해외에서 사역하는 한국인선교사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로 기록하고자 발행하는 선교잡지의 하나로서 선교사님들에게 무료 월간 보내기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쉴터 운영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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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와 IT
세상 돋보기 9
노트5의 Live Cast로 새로운 형태의 선교보고
미국에 살면서 느끼는 가장 불편함은 언어입니다. 언 어란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남의 생각을 듣는 것인 데 그 속에 내재된 깊은 뜻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들리 는 소리의 의미 정도를 이해하니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폐쇄되고 드라이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 한인들을 만나는 교회에 서는 아주 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다 보니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쪽에 서의 부족함을 다른 쪽에서 보상받으려는 행동이 때로 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IT 기술이 발달하며 선교에 걸림이 되기도 하지만 이득이 되는 많은 부분들도 있 습니다. 이를 통해 균형을 잘 유지해 간다면 걸림까지 도 이득으로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제 스마트폰을 갤럭시 노트5로 바꾸었습니다. 새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기도 했지만 카메라의 기능 중 Live Cast가 가장 끌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생방송을 하는 기능입니다. 더욱이 내가 전송 을 해 주는 상대가 스마트폰 뿐 아니라 컴퓨터로도 화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릴 적 야구를 무척 좋아하던 제 기억 속에 동대문 운동장 에 가면 볼 수 있던 커다란 방송국 차가 선명하게 기억 납니다. 소위 중계차라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 차를 운 영하기 위해 발전차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 쨌든 이를 통해 가정에서 생방송을 볼 수 있던 것인데 그와 맞먹는 수준의 생방송을 작은 스마트폰 하나로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스마트폰에서 먼저 카메라 를 선택하고 모드를 생방송으로 바꾼 후 중계를 해 줄 사람을 선택하고 촬영을 시작하면 그 화면이 바로 원 하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좋아하는 유명가수의 Concert를 보면서 이를 친구에게 바로 보 여 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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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교회에서 금년 여름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EM은 태국으로 KM은 나바호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주로 VBS를 중심으로 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 리고 거기서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은 잘 편집하여 선 교 후 광고시간에 선교보고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이 방법도 아주 훌륭한 선교보고의 방법임에 틀 림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 라이브 캐스팅을 이용한 선교지에서의 생방송이 예배 중 온 성도들에게 대형화면을 통해 바로 중계될 수 있 을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컴퓨터 기술은 이것이 가능 하여 전 세계의 TV방송을 Live로 누구든 볼 수 있습 니다. 스포츠를 좋아 하는 저의 경우 컴퓨터를 이용하 여 관심 있는 모든 경기를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있습 니다. 하지만 이것이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누구나 스 마트폰으로 촬영만 하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엄청난 장비를 들여 예배를 지성전으 로 방송하던 일이 이제 스마트폰으로 가능해졌다는 뜻 이기도 함은 예배처소를 여러 곳에 개척한 선교사님의 경우 한 곳에서의 예배가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이뤄 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 경우 이를 교육에 잘 이용하려 합니다. 아울러 교회에서 장애 때문에 새 벽기도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에게 새벽예배 실황을 중 계해 줄까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잘 이용하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 니다. 특히 이런 스마트폰의 좋은 기능은 아주 유용한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이런 기능들이 우리 선 교사님들에게 좋은 도구로 사용되길 기도합니다. KO MI
글_윤승준 Kyelp 대표 sjyoon7231@gmail.com 블로그 blog.naver.com/joshua7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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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건강상식
낸시가 사랑하는
병은 없다 9
하나님 만나기 9 보호(保護)
건선 피부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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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선은 피부염은 다양한 형태를 보이며 악화와 호전을 반 복되는 만성염증성 피부병으로 발병원인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 면역력저하 등이 있으며 한번 발병하면 대부분 점 점 진행된다. 이러한 건선 피부염은 겨울 같은 차고 건조 한 기후나, 건조한 피부, 스트레스, 약물 등에 반응하며 악 화된다. 발병 초기에는 피부에 붉은색의 작은 좁쌀알 같이 생기고, 이것이 점점 커져서 동전이나 계란 크기 정도의 크기가 된다. 현대의학은 약물을 바르는 치료법으로 부신피질호르몬 제, 비타민 D 유도체, 보습제 등을 매일 피부에 바르거나 투여하는 약물로는 비타민 A 합성 유도체, 면역억제제인 Cyclosporine, Methotrexate, steroid 등이 있고 최근에는 단 파장 자외선 B를 이용하는 광선치료가 가장 많이 사용된 다. 이러한 피부질환에 사용하는 현대 약물들은 부작용이 심해 간이나 신장 등을 점점 더 망가지게 하며 결국 체내 독소를 더 쌓게 되므로 병이 점점 더 심해지게 된다. 그러나 자연건강법에서는 현대인들의 의, 식, 주 전반에 대 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질병의 원인을 찾고 이에 따라 잘 못된 삶의 환경을 바꾸고 자가 면역력을 향상시켜 스스로 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매일 먹는 음식물에서 부터 마시 는 물, 숨쉬는 공기, 입는 의복, 생활방식과 식생활 방식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또한 거의 모든 질병의 예방과 치유를 동시에 하는 자연건강법은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치유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우리 인체의 피부는 내장에 거울로 피부가 깨끗하고 건강해야 장기도 건강한 것이다. 반대로 피부가 거칠고 반점이나 점이 생기는 것은 곧 장기 에 이상이 있음을 알려주는 적신호인 것이다. 건선 피부염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스턴트 식품, 육 류, 생선, 계란, 우유, 빵 등의 가공식품을 끊고 자연건강법 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차근 차근 따 라 실천해야 한다. 생수, 풍욕, 1분냉온욕, 현미 생채식, 죽 염, 감잎차를 마시며 자연건강법을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피부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연고 등을 바르는 것은 일시적 으로 낫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간이나 신장에 독소를 쌓게 되고 연구적으로 피부질환을 앓게 되는 것이다. KO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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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우 목사는 자연치유 전문가
다음 카페 <병은 없다> 운영 cafe.daum.net/leedokwoo 건강문의 nlc8004@hanmail.net
그림_안민희 자매 als36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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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소리
글_편미선 필리핀 선교사 GP선교회 punmisun65@hotmail.com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할 머니가 안 계셨다. 우리 집에서 한 시 간 쯤 떨어진 산 밑에 사시는 작은댁 에 가셨고, 하룻밤을 주무시고 오실 거라고 했다. 그 때는 그 작은집이 가 고 싶을 때,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 니었다. 들길을 지나야 하고, 산길을 지나야 하고, 냇가를 지나야 했다. 그 냇가 옆에 조그만 상여집이 있었는 데 그곳을 지날 때면 머리카락이 쭈 뼛쭈뼛 서고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칠 만큼 무서웠다. 아마도 전설처럼 내 려오는 그 상여집에 얽힌 으스스하 고 무서운 이야기들이 작은집을 마 음대로 갈 수 없도록 만든 원인이기 도 했다. 할머니께서 작은집에 가셨 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곳 을 가야할 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 는 동안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급기야 나는 비장한 각오 를 하고 그곳엘 가기로 결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
빨리 서둘러야 해가 환할 때 그 상여 집을 지날 수 있기에 빠른 걸음을 재 촉하여 가끔은 달리기도 하고 달리 다가 지치면 걷기도 하며 그 곳을 가 는 동안 나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 며 갔다. 제발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 를 보내 주셔서 이 무섭고 겁나는 길 을 그 착한 아주머니와 함께 갈수 있 게 해달라고... 이렇게 두렵고 막막 할 때 신뢰하는 누군가와 같이 그 무 서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 을까?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의 어떤 금은보화도 소용이 없고 오직 그 순 간이 나 혼자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 라고 또 바라면서 그 길을 걸어갔던 기억이 새롭다. 가끔씩 어릴 적 느꼈던 머리카락 쭈뼛쭈뼛 서던 그 두려움이 그리울 때가 있다. 선교지에서 영적으로, 육 적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사모 하며 임마누엘의 주님을 갈망하던 열정과 그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에 서 조금씩 멀어져갈 때 느껴지는 두 려움 말이다. 산길을 지날 때도, 들길 을 지날 때도, 냇가 상여집을 지날 때 도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앞뒤 주 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잠시 뒤면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 로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 열심 처럼 주님을 그렇게 찾고, 그리워하 고, 그분께로만 나의 모든 삶의 초점 이 맞추어져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며 걷는 즐거움을 더욱 느끼며 살고 싶 다. KO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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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자"
어렸을 적 나는 할머니 곁에서 떨 어지기 싫어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 녔다. 할머니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 든 따라다니기를 좋아했다. 솔직히 좋아서 따라 다닌 것 보다는 지금 생 각해보니 약간 분리불안증 같은 것 이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해본다. 따 라오지 못하게 매를 들고 협박을 해 도 할머니와 떨어지는 것이 매를 맞 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 같다. 학교 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할머니가 어디 계신지 먼저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