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청년기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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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기도 주일 낭독문

믿음의 본질

예수 이번 기도 주일에는 우리를 지탱해 주는 ‘기둥’인 핵심 교리의 아름다 움을 재발견하고 예수님께 올바른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자 합니다.

필자 소개_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교회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기 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특별한 사명을 밀고 나아가 구원의

타이 깁슨 목사는 ‘라이트 베어러

기쁨과 새롭게 하는 성령의 바람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의 간

스’ 공동 이사이며 미국 오리건 주

절한 기도입니다.

유진에 있는 스토리라인 재림교 회 담임목사입니다.

길버트 켄지 대총회 청소년부장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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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지막 때

01

8. 재림 첫째 날

각각의 창문을 통해 건물을 들여다보면, 우리 눈에는 예수

삼위일체

님, 예수님, 또 예수님 그리고 정확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속 성을 나타내고 계시는 예수님이 보일 것입니다. 창문은 무언가를 내다보고 들여다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지 그 자체가 주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창문은 무언가를 잘 보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

이게 해 줄 때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는

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리고 조금 후에 또 이렇게 말씀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안식일, 죽은 자들의 상태, 심판,

셨지요. “내가 곧 진리요”(요 8:32; 14:6). 진리는 단순히 암기하

마지막 때의 예언 등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진리들은

고, 인용하고, 논쟁을 벌여야 하는 추상적인 사실을 담은 정보

진리 그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

꾸러미가 아닙니다. 진리는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체의

려 안식일은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 역할을

이름은 바로 예수입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결박하

합니다. 성소를 비롯하여 다른 성경 상의 교리는 또 다른 관점

고 있던 모든 것, 즉 뒤틀린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한 수치에서부

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

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

우리는 많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으로 한 가지

라고 말합니다. 살아 계시고 사랑하시고 동정 넘치는 예수를

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가지가 달려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삶의 중심으로 선포하지 않는 진리는 인간을 영적, 정서적, 관

같다고 할까요. 또 여러 개의 줄기로 갈라지는 큰 강처럼 말이

계적으로 죽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드높이지 않는 진

죠. 이제 여덟 개의 창문 중 첫 번째 창문 너머를 들여다볼까요?

리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거나 바리 새인같이 비난하는 정신에 물들게 합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에

아주 오래된 사랑

게는 상호 보완적인 두 요소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

성경을 열고 마주하는 첫 번째 진리는, 하나님은 혼자 계시

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상태로 이 땅에 오셨다

지 않고 사회적 단위를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요 1:14).

문장에 주목해 볼까요.

교리적인 진리는 여러 개의 창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

창들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수 있

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습니다.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진리의 구조를 팔각형 모양의

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태초에 누가 누구와 계셨다

건물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여덟 개의 벽마다 창문이 달려 있

고요?

습니다. 각 창문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교리적 신조를 나타냅

“태초에…하나님이…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니다.

네. 좋습니다. 그런데 동등한 신격을 가진 분들이 서로 “함

1. 삼위일체

께” 계셨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18절에서 요한은 다음과 같

2. 대쟁투

이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3. 하나님의 율법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4. 안식일 5. 성소

엘로힘

6. 죽음과 지옥

“하나님(엘로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

108  교회지남


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

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기도

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하셨습니다.

1:26~27).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

여기서 “우리” 와 “우리의”로 표현된 ‘엘로힘’은 하나님을 복

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수로 표현한 용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나를”이나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로 여길 것이 아니라 단일한 존재 이상이 포함된 사회적 단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

위로 생각해야 합니다.

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

이 기본적인 사실을 통해 하나님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님

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즉 사회적 단위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로 존재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원하옵나이다”(요 17:22~24).

이제 창세기 1장으로 다시 돌아가 다음 성경절을 살펴봅시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절)라고 말씀하시며

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함께 성령 하나님 역시 창조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음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마쳤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다.

따라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의 이름을 지닌 창세기 1장의 하

성령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다.

나님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이루어

친밀한 사회적 유대감으로 세 분이 함께 모여 한 분의 하나

진 하나님입니다. 피조물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존재 양

님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설명하는 것도

식 자체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상대를 중심으로 교제하며 자기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희생적인 우정을 지닌 분입니다. 창세기부터 성경 이야기를 죽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쉐마(들으라)’라고 일컫는 부분이 등장 합니다. 오늘날까지 그들은 이것을 가장 중요한 신학적 선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 와이시니”(신 6:4).

이는 딱딱한 교리적 사실도, 따분한 방정식 이론도 아니며 복잡한 철학적 개념은 더더욱 아닙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는 수정처럼 투명한 창문입니다. 그 창 문을 통해 외향적이고, 타인 중심적이고, 사교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이 말씀에 숨겨진 아름다운 사실을 밝혀 봅시다. “오직 유일 한 여호와시니”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에게서 그 대답을 찾 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과 아버지 사 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쉐마에 포함된 용어 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02

둘째 날

이기는 사랑

대쟁투

하나님은 단독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한 분이 아니라 일체된 관계라는 의미에서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요한복 음 17장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라는 말을 다시 사용하셨습니다.

하늘의 전쟁

이때 그분께서는 ‘하나’를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로 규정하셨습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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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안 됩니다. 전쟁에 가담한 존재는 인간만이 아닙니다. 창세

장면 2 : 포기

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천사라 불리는 존재

비참하게도 우리의 첫 부모는 낯선 주인의 말을 듣기로 하여

들을 발견합니다. 이들이 인간보다 먼저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지구에 대한 지배권 빼앗겼습니다. 그 주인이란 한때 빛나는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욥 38:4~7; 계 1:20).

존재 루시퍼로 불리던, 오늘날 사탄이라고 불리는 원수인 타락

그중에 ‘루시퍼’라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빛의 전달자’라는

한 천사입니다.

뜻을 지닌 이름이지요. 이 천사는 본래 동료 천사들에게 하나

그렇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도덕적 타락이면서도 법적인 타

님의 성품을 나타내도록 창조되었지만 기고만장해져서 다른

락입니다. 권력이 이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지배

행동 노선을 택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높이고,

권을 빼앗긴 이유는 그것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동료 천사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충성심을 제거했

사탄은 속임수를 사용한 전쟁으로 인간에게 승리를 거두었

기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습니다(사 14:12~14). 사탄은 하나님

습니다. 그는 우리의 첫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에 거역하게 만

의 본질적인 선하심을 부정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

들었고 하나님 신뢰하는 능력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무

리고 그분에 맞서 반역을 조장하려 계획을 세웠습니다. 성경은

아적인 하나님의 참된 품성이 드러나는 것만이 그때부터 지금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계 12:7)라며 이 사건을 묘사해 놓고

까지 인간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있습니다. 루시퍼가 하나님의 법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

장면 3 : 약속된 용사

랑에 반항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

우주 전쟁이 시작되자, 양측은 즉시 자신들의 세력을 조직하

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사랑의 법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

고 각자의 원칙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전

습니다. 사탄은 사랑 없이 살기로 그리고 사랑 없이 다스릴 수

쟁 선포와 약속의 말씀으로 공격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있는 왕국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잇속만 차

서는 아담과 하와가 듣는 데서 사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

리는 분이며 그분의 법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시행된 제멋대

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

로의 규범이라고 호도하기 위해 그렇게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 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장면 1 : 지배권

3:15). 사탄의 머리를 부술 용사가 이 땅에 올 것이라고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구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음

은 선언하셨습니다. 용사 또한 승리를 거두는 과정에서 원수에

을 창조에 관한 설명에서 알 수 있습니다(창 1:26). 지배권은 성

게 부상을 당할 것입니다.

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자유로운 도 덕적 행위자인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귀

장면 4 : 조직된 세력

중한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위임을 통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는 여러 민족 가운데 선택된 백성을 세우셨습니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주님의 몫’이라 불리며 ‘이방신’을 섬

그들은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고 이 땅은 그들

겨서는 안 되었습니다. 모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을 위한 보금자리로 주어졌기 때문에 이 무대에서는 영원히 행

방 민족의 ‘신들’은 ‘마귀’, 즉 타락한 천사가 신으로 가장한 것

복한 관계가 이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위험도 내재

에 불과하다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또 시편 106편 37~38절에

되어 있습니다. 자유 의지에는 빛나는 가능성과 함께 잠재적인

서는 이방인의 ‘우상’ 뒤에 ‘사탄’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배”에는 약속과 위험이 동시에 지

줍니다. “그들이…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쳤도다 무

워져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하는 일은 오롯이

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110  교회지남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이 자신의 영역

잃어버린 “첫 통치권”이 재정립될 것입니다. 그날에 대해 하나

임을 하나님은 분명히 못 박았고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에 대한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소유권을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계보를 택하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

셔서 약속된 용사요 구주가 세상에 나게 하시고 인류를 사탄

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가장 먼저

의 지배에서 되찾게 하셨습니다.

우리 내면의 영역이 먼저 회복될 것입니다. 이어 지구라는 영 역 자체가 회복되고 영원히 새롭게 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

장면 5 : 맨손의 용사

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계 21:5).

약속된 용사는 포대기에 싸인 힘없고 의존적인 아기로 이 땅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 왕국에서부터

에 오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소작농의 손에 자란 그

이 땅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지구는 온 우주의 새로운 수도가

분은 어둠의 왕국에 대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

될 것입니다.

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체계적으로 찬탈자의 머리를 깨뜨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첫 지배권을 완전히 회복한 영원한

렸습니다. 그분은 ‘맨손의 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예수께서 안전하게 옮겨 놓으신 새 땅에

그분은 속임수와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승리하셨기 때

발을 내딛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문입니다. 그분은 그 어떤 폭력적인 무기도 손에 쥐지 않습니다. 포악 한 군대를 지휘하지도 않습니다. 잃어버린 인류를 되찾기 위해 단 한 가지 행동이면 충분합니다. 장면 6 : 교회의 전투와 승리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만 선악의 대쟁투가 벌어지

03

셋째 날

자유를 주는 사랑

하나님의 율법

는 게 아닙니다. 진짜 전쟁은 우리 머릿속 약 1.5킬로그램을 차 지하고 있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복음의 빛으로 생각이 밝아진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

마”를 주시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계 14:1). 다시

도 사명과 우리의 복음 전도의 사명에 대해 명확하게 말했습니

말해서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정신, 정서, 의지의 영역을

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름 아닌 사람의 이마에 ‘자신의 이름’

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

을 쓰고 싶어 하신다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하나님

우리의 싸움은 생각과 느낌이 만들어지는 곳, 지식이 상주

의 일꾼은 ‘새 언약’을 알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하는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원수는 진정한 ‘하나

기별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이라

님에 관한 지식’을 차단하기 위해 ‘논쟁거리’를 만들어서 우리와

는 맥락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접근해야 합니다.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기 희생적 성품을 알리는 것입니다.

왜 중요할까? 바울이 언급했듯이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율법을 그저 따라야 할 도덕 조항 목록 정도로 이해한다면

장면 7 : 첫 지배권의 회복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께 갈 수 있고 그분에게 인정받고 사랑받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은 강압적인 정권을 모두 끝장내고 영

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위험합니다.

원한 자유의 통치권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한때 아담과 하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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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

복음이 없는 율법은 우리를 혼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모

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

습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베푸신 일

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라고 말합니다(롬 7:4, 6). 그리고 “그

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분을

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에 짓눌립니다.

(롬 10:4)이 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3장 24~25절

그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면서 바울은 7절에서 율법을 “죽

을 봅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

이는 직분”이라고, 9절에서는 “정죄의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분

등 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

명 그는 신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에 대해 주로 말하고 있

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 교사 아

는 것입니다. 율법은 양심에 ‘정죄’ 의식을 불어넣어 죽음으로

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중요한 개념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믿

향하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율

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결자이시며 율법은 우리를

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초등 교사라는 개념입니다. 또 신자들이

율법은 도덕적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의 완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율법에 대해 죽는다는 개념 역시 중

표준과는 정반대인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합니다. 신자들이 율법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경험적인 개

율법을 보고, “아, 난 망했어! 난 그렇지를 못해. 그 표준에 전

념도 여기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재림교인이 큰 음성으로 그리

혀 안 맞는다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꽝이야.”라고 생각합니다.

고 늦은 비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려면 바울이 율법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율법은 이 점을 분명히

에 대해 가르친 것을 재현해야만 합니다.

밝힙니다. 율법으로 죄가 드러났다고 해서 생명을 얻지는 못

바울의 이 가르침을 기독교에서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

합니다. 죄책감만으로는 진정한 삶의 변화에 대한 동기가 생

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폐기론을 받아들였습

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신적으로 죄책감에 얽

니다. 율법 전부가 폐지되었다고 여긴 것입니다.

매여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이유가 율법의 요구에 기초

역사적으로 재림 신앙이 태동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이 재발

해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늘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견되었습니다. 마땅히 재림교회는 십계명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입니다.

것으로 드높였습니다. 그러나 율법폐기론에 전면적으로 맞서다 가 우리 또한 바울이 율법에 대해 가르친 내용 전반을 제대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전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가르침 받은

하는 데 대해 우리 선지자는 거듭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율법

사람은 다음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를 경험할 것입니다. 1. 남을 감시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심판관처럼 행세하는 독 선적인 바리새인이 된다. 2. 공포감 또는 정죄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순종하기 위해 애쓰고 애쓰고 또 애쓰다가 마침내 좌절에 빠진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 다. 새 언약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활약하

폐기론과 율법주의의 양극단을 피하여 스스로를 다그치며 십 계명을 연구한다면 복음에 대해 전에 몰랐던 힘 있는 통찰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 이후 역사는 대부분 율법폐기론과 율법주의라는 양극단 중 한쪽을 선택하는 방식 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소개한 아름답고 감 동적인 가르침 가운데 발견되거나 전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십니다. 새 언약이 전달될 때 진짜 영적인 삶이 시작되고 자라

고린도후서 3장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주셨습니

바울은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제는 우리가

치리라”(9절). 하나님은 “정죄”의 직분이 아니라 “의”의 직분으

112  교회지남


로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새 언약 안에서 활동하시

바울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율법의 본래 역할

면서 그리스도의 업적이 효과를 발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과 그에 따른 효력의 한계를 올바로 제시한 것뿐입니다. 그는

우리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느껴지게 하십

율법을 싸잡아 무효라고 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수단으로서는

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위대한 진리입니

아무 효력이 없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하나라고

다. 바울이 “새 언약”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롬 4:17)이라

하는 초등 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

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줄 아시지만 하나님은 우

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

리를 의롭다고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아시면서도

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최고의 신학적 깨달음을 경험했습니다.

잘못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법적인 허구가 아니라 관계의

율법이 영광 받았던 자리에 이제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

최고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가 한 번도 죄짓지 않은

광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뀐 바울은 우리에게도

것처럼 우리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죄에 대해 핑계하거나 죄의

생각을 바꾸라고 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다시 말해 율법

굴레를 남겨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죄에서

의 영광에서 복음의 영광으로 눈길을 돌린다면 마침내 재림교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회에는 하나님이 뜻하신 강력한 신학적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

달리 말해 객관적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업적을 통해

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의 의 되시는 그리스도라는 한 가지 관심사에 마음을 빼앗기

것도 없습니다. 이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일은

고 다른 모든 문제는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리

믿음으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삶

뷰, 1890. 12. 23.).

과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용서, 그분 의 받아 주심에 대해 “예!”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는 사실 그대로를 단순하게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우리 앞에 두 가지 분명한 선택권을 제시하고 있습 니다. 1. 옛 언약의 경험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순종은 정죄에 대

04

넷째 날

쉼이 있는 사랑

안식일

한 부담감에서 비롯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옛 언약의 경험에서는 순종의 겉모습만 존재합니다. 가식적이고

우리는 일요일 준수자들을 신학적 ‘적대자’로 여기고 율법에

표면적이고 위선적이고 비판적인 순종입니다. 외부에서 가한

순종하도록 그들을 설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

압박에 의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순종하는 것이 옛 언약의

다. 그 결과 율법에 대한 우리의 신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

특징입니다.

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못 취급했기 때문에 기독교계에서 재

2. 새 언약의 경험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빠

림교회의 평판이 나빠졌다고 엘렌 화잇은 지적했습니다. 우리

져서 순종하게 됩니다. 새 언약의 경험 속에서는 하나님의 율

가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엘린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법을 순종하려는 진정한 열정이 우러납니다. 정죄를 의식하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율법, 율법 하지만 그리스도를

않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율법

가르치거나 믿지 않는다”(목사, 92).

을 순종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미 나를 받아 주셨다는 해방

우리가 율법을 잘못된 방식으로 가르치고 복음을 명확히 전

감이 새 언약 경험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전혀 알지 못했던 새

하는 데 실패했음을 직시하도록 엘렌 화잇은 애를 많이 썼습

로운 순종의 능력이 생겨납니다.

니다. 우리 교회가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며 그녀는 죽기 직전

2016. 3.

113


까지 다음과 같이 촉구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는 두 가지 주제에 대

“이상하게도 재림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

해 계속 말합니다. 바로 창조와 재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도를 전하는 일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 진리를 믿으라고 주장

안식일은 두 이야기의 결정적 실마리입니다. 여기서 놀랍도록

하는 많은 사람조차 경험으로 얻는 믿음의 지식이 부족하다.

설득력 있는 논증이 나타납니다. 이야기의 자연스런 흐름을 통

사역에는 생명을 주는 능력이 존재해야 한다. 모든 곳의 선교

해서 보면 안식일은 율법주의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습니다. 안

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분의 사랑,

식일은 창조의 완성뿐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상징하는 날이므

그분의 용서, 그분의 은혜를 전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능력,

로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개념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인하

즉 하늘이 내려 주신 깨달음의 능력과 더불어 확신에 찬 음성

며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데 초점을 모읍니다. 안식

으로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1888, 842, 844~855).

일 진리에 관해 이런 부분은 말하지 않고 성경절을 근거로 날

우리는 옳고 그른 날을 따지는 논쟁의 화두 정도로만 안식일

짜 논쟁만 벌였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의 의미를 축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일 진리

의 은혜를 기억나게 하는 날로 안식일을 소개했다면 율법주의

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교인들은 “아멘”이라고 큰 소리로 대

에 빠질 일도 없고 우리의 증언은 세상에 훨씬 더 설득력 있었

답할 것입니다.

을 것입니다.

“안식일 진리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첫째 날

안식일은 한 주일 중 24시간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하지 말아

이 아닌 제칠일 안식일을 말합니다.”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입

야 할지를 생각하는 날이 아닙니다.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무엇

니다.” “가톨릭이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한 것입니

을 이루셨으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실지를 생각하는 날입

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안식일은 구원을 위해 예수

맞는 말이고 중요한 대답이지만 이것이 안식일 자체에 관한 진리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넷째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증거

님을 끊임없이 의지하게 만드는 날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율 법주의의 대항마입니다.

제시용으로만 안식일을 제한한다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놓 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

것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를 함께 살펴봅시다.

따라서 구원에는 일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를 누리는 휴식이 담겨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설명은 놀라운

창조와 구원의 기념

게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 모두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

둘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실현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창조가 “이루어지니”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창 2:1~2)하셨다고 진술합니다.

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 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없이 자유로

지상 사역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운 삶을 그분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메시지 신약’에서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4). 창세기 2

는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을 배우라”라는 말로 훌륭하게 표현

장에 일곱째 날과 관련하여 언급된 용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이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내면에

외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구원 사역을 “이루었다”고 말

서부터 나를 강하게 흔드시므로 쉼을 누리는 가운데 움직인다

씀하신 날은 “예비일”, 다시 말해 금요일이라고 31절에서 설명

는 것입니다.

합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습니다.

114  교회지남

엘렌 화잇은 “사랑이란 마음에서 죄를 몰아내기 위해 하나님


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라고 멋지게 설명합니다(보훈, 76). 또

확하게 나타납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과 연결되어 가는 방식입니다.

1) 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사로잡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

2) 성소

의 오묘함입니다.

3) 지성소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경고와 격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요컨대 성소란 사람들이 즉각적이고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자기에게만 관심을 쏟으면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걱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 또는 체험적 과정을 제공합니다. 하

정과 두려움에 빠져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능력의 근원에서

나님께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것을 계획하

멀어진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그분을 믿으라. 예

셨습니다.

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라. 그분에게 빠져들라. 의심은 모조 리 버리라. 공포를 쫓아내라. 바울처럼 이렇게 말하라. ‘이제 내

예수님=여행

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갈 2:20). 하나님 안에서 쉬라”(정로, 71).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행위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

성소에 묘사되어 있는 ‘길’이란 바로 자신이라고 예수님은 설

달으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

명하십니다. 여기서 성소라는 길이 가리키는 목적지, 즉 예수

시는 쉼입니다. 이것은 쉼 이상입니다. 쉼과 함께 에너지가 생

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종착지는 장소가 아니라 인격체임을

기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쉴 때에

꼭 기억하십시오. 자신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라고 예수님은

만 그분의 은혜가 나를 흔듭니다. 나에게 힘을 주고, 순종의

말씀하십니다. 성소는 딱딱한 신학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지 않

유일한 참된 바탕인 순전하고 강력한 사랑의 동기를 불어넣어

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마음 깊고 깊은 곳에 이르는 체험적

줍니다. 그분이 주시는 자연스런 은혜의 리듬 안에서부터 움직

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여정이 바로 예수님이

임이 시작됩니다.

십니다. 그야말로 성소의 모든 상징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우

갑자기 전보다 훨씬 더 안식일이 좋아지는군요.

리가 지성소의 하나님과 관계 회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감행 하실 위대한 구원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성소의 주된 의식은 놋 제단에서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 리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우리의 죄에 대한 희

05

다섯째 날

가슴 아파하는 사랑

성소

생 제물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 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 손과 발을 씻는 데 사용된 물두멍은 “생수”(요 4:11)이신 예 수님을 나타냅니다. “거듭나게 씻어 주심과 성령으로 새롭 게 해 주심”(딛 3:5, 표준새번역)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성소를 ‘길’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13절에서

■ 성소의 떡 상에 있는 떡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

다윗은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도(道)”는 히브리어로 ‘데렉’입니다. ‘길’이나 ‘여행’을 뜻하는 말

(요 6:3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입니다. 이 단어에는 정해진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어딘가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소라는 길에는 다음의 세 가지 기본 단계 혹은 경험이 명

■ 성소에는 일곱 등잔이 계속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우리 죄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

2016. 3.

115


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 분향단은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경험을 가리킵니다. “금향로

죽임을 당합니다. 구원의 유일한 수단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

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

생을 다시 한번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염소의 피 일부를 지성

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 성소에

소로 가져가 하나님의 파괴된 계명 위에 있는 속죄소에 뿌립니

서 타오르는 향은 우리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예수

다. 이것은 1년 동안 이스라엘이 매일의 제사를 통해 고백한 모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든 죄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속했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대속

■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열 가지 법으로 표현한 십계명

죄일은 백성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법칙을 우리

완전히 서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진행되는 돌이킬 수 없는

마음과 생각에 새겨 넣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갈망을 상

심판을 뜻합니다.

징합니다.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 록하리라”(히 10:16).

그런 다음 대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백성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염소는 죽이지 않고 ‘무인지경(無人之境)’, 즉 ‘광야’로 내몰아 혼자 죽게 만듭니다.

구속의 역사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여호와의 염소’도 아니고 희생 제물처럼

성소는 구원의 역사 전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번제단이 놓

피를 흘리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아사셀이란 죄의 출현과 인간

여 있는 성소의 뜰은 서기 31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의 타락에 대해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존재를 상징하는 게 틀림

에서 돌아가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부활 후 그분은 하늘로 승

없습니다. 고대 히브리인은 아사셀이 악의 기원이자 인류를 미

천하셔서 하늘의 ‘진짜 성막’에 있는 성소에서 하늘 대제사장

혹한 사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고 유대 학자들은 오늘날까지

직분을 맡으셨습니다. 서기 31년에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봉

이 견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죄일은 마지막 계

사는 184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하늘 성소의

산 혹은 심판의 날이며 이 기간에는 각 사람의 송사가 확정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대제사장의 마지막 사역을 시작하셨습

고 죄의 장본인인 사탄에게 그 책임을 지웁니다. 심판에 임한

니다.

다는 생각 때문에 이날을 부담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

유대력에는 구속의 전체 이야기를 묘사하는 두 가지 기본적 인 예식이 있습니다. 매일 수행하는 예식과 매년 수행하는 예

다. 그러나 이날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 장 아름다운 모습을 대면하는 날입니다.

식입니다. 매일 수행하는 예식은 레위기 1~4절에 설명되어 있 습니다.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의미 있는 의식들에 관한 조항입

심판

니다. 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위해 정기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고 그 피를 지성소 앞 휘장에 뿌려서 상징적으로 그들의 죄를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

옮겨 주는 것이 그 의식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죄를 위해 십자

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

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치르신 완전한 희생을 가리킵니다.

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매년 수행하는 예식은 레위기 16장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1년 단위로 순환하는 희생의 과정 마지막 날이면 성소 봉사의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6~18).

상징이 끝을 맺습니다. 이 행사를 ‘욤 키푸르’, 즉 ‘대속죄일’이라

요한은 무엇보다 심판을 옳게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 부릅니다. 이날에는 죄 문제의 최종적 해결, 다시 말해 완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으면 심

한 속죄와 죄악의 근절을 상징하는 특별한 예식이 진행됩니다.

판 날에 “담대함”을 지닐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자신의 의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 앞에 모두 모이고 염소 두 마리가 대제

를 확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의를 철저히 의지하여 심판

사장 앞으로 끌려옵니다.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이며, 다

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의 영광스런 비밀이며

116  교회지남


대속죄일의 복된 진리입니다. 심판을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면

고 이해합니다. 첫째 사망을 당한 사람은 그 즉시 하늘이나 지

우리는 의로운 심판의 기준인 하나님의 율법과 마주합니다. 그

옥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덮고 있는 속죄소 위에는 보혈이 뿌려져 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첫째 사망 다음에는 구원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라는 찬란한 빛과 함께 거기에는 위험

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이 남아 있습니다. 예

과 경고가 따릅니다. 야고보는 심판 때 우리를 위해 마련된 하

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

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

야박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

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

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느니라”(약 2:13). 남의 죄를 들추고 지적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악한 자들은 첫째 사망 이후 이른바 “심판의 부활”로 다시

자기 죄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살아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반발했던

그런 사람은 심판 날에 하나님의 은혜가 마련되어 있어도 은혜

자기 삶의 기록을 낱낱이 대면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를 볼 수 없습니다. 야멸친 정신으로 마음의 눈이 가려졌기 때

서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문입니다. 남에게 몰인정한 사람은 스스로 정신적·감정적 벽을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쌓아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남의 잘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못만 캐고 있으면 속이 좁아져서 하나님의 자비가 뚫고 들어올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

수도, 감동을 줄 수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남에게 재판관 행세

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

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행동인 게 분명

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

합니다.

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계 20:12~14). 이것은 성경에서도 매우 심각하고 슬픈 부분입니다. 악인의 마지막 멸망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각자

06

여섯째 날

이기심 없는 사랑

죽음과 지옥

를 사랑하셨고 그들 각자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 선물 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악인에게 “책들”이 펼쳐지고 그들은 “자 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다시 말 해 자기 죄의 실상을 보고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완전히 깨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

어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성경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부활”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의 이기적인 행동 하나

보면 “둘째 사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계 2:11; 20:6, 14; 21:8).

하나가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납니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자

둘째 사망이 있다면 첫째 사망도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죄의 추악한 참상을 보여 줍니다.

이 둘의 차이점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다

그런 다음 악인들은 삶의 기록을 대면하고 자기 죄의 무거

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

움을 남김없이 느끼면서 불로 멸망당합니다.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성경에서 하나님은 불과 관계있습니다.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첫째 사망이란 단지 육체가 죽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죽음입니다. 재 림교회에서는 첫째 사망이 무의식 상태, 잠자는 상태와 같다

■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계셨습니다 (출 3:2). ■ 하나님의 율법은 “번쩍이는 불”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신

2016. 3.

117


33:2).

도 둘째 사망을 겪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우

■ 하나님의 영광은 “맹렬한 불”입니다(출 24:17).

리 모두를 위해 단번에 둘째 사망을 겪으시고 그것을 이기셨기

■ 하나님의 보좌는 “불꽃”이며 그 앞에서 “불이 강처럼 흘러”

때문입니다. 모두를 위해 둘째 사망을 맛보신 분은 그분뿐입니

나옵니다(단 7:9~10). ■ 하나님의 사랑은 “불길”입니다(아 8:6).

다. 그리고 둘째 사망에 지배받지 않는 분도 그분뿐입니다. 그 분만이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히 12:29).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 죄의 마지막 대가는 둘째 사망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

“죄가 발견되는 곳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

리를 위해 견디셨고 이기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

이 되신다. 그의 권능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첫째 사망만 겪었다면 첫째 사망에서만

성령은 죄를 소멸하실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버리지 않는 사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여전히 우리는 둘째 사망을 맞이할

은 그 죄와 동일시된다. 그러면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끔찍한 둘째 사망을 남김없이 맛보

그들 또한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소망, 107).

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겟세마네에 갔던 모습을 눈여겨

의인과 악인 모두 불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지만 둘 다

보십시오. 엄청난 사건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불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으로 비틀거렸습니

순결하게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이 임재 앞에서 더할 나위 없는

다. 제자들은 뭔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습니다. “내 마음이 매

평안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소멸

우 고민하여 죽게”(마 26:38) 되었다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하는 불”이 될 것입니다. 엘렌 화잇은 악인의 멸망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직 신체적 학대를 당하지 않았는데도 그분은 죽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폭행을 당해 몸에서 피가 난 것도 아닌데 그분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독재적인 권력을 휘두르기 때

은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누가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

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거절한 자들이 저희가 심은 것

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을 거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사람이 죄를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우리의 수치스런 죄를 지시고

섬기기로 선택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생명

맹렬한 번민에 시달려서 땀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나를 미워하는 자는

이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와 수치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6)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자기 성

로 인한 어둠의 세계에 들어가셨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격을 개발시켜 그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하나님은 그들의 생존

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죄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분은 이

을 허락하신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거두

모든 것을 자기 양심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게 된다. 사탄 그리고 그와 연합한 모든 존재는 반역의 생애를

에서 십자가로 끌려가십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몸

통해서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는 곳에 자기 자신을 두었으므

이 상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신체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 한마

로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에게 삼키는 불이 될 것이다. 사랑이

디 하지 않습니다. 정신적 고통이 너무 맹렬해서 신체의 고통

신 그분의 영광이 그들을 멸할 것이다”(소망, 764).

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방금 지옥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망

엘렌 화잇의 진술을 한 줄 한 줄 주의해서 읽어 보십시오.

이 곧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땅속이나 우주 먼 곳에서 악인

“고문으로 서서히 죽어 간 사람이 많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

이 불꽃 속에 영원히 고문받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활

람도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죽음은 이들과 무엇이

하여 자기 삶의 기록을 최종 확인한 다음 “본래 없던 것같이”

다른가? 분명 그분은 십자가에서 가장 잔인하게 죽었다. 그러

(옵 1:16) 영원히 없어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한 사람

나 신체적 고통만 따지자면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똑같은 모양

118  교회지남


으로 고통 당한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의 죽

니다. 자신을 구하라는 강렬한 유혹 속에서도 그분은 자신을

음은 그분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다른 이들의 고통보다

희생하면서 우리 모두를 계속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겟세마

더 무서운 것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체적인 고통뿐이

네와 갈보리에서 변함없는 성실 가운데 지속된 이타적 사랑은

었다면 순교자들의 고통과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의 율법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받는 고난 중 신체적 고통은 일부

사랑으로 둘째 사망을 이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은

에 지나지 않았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셨다. 또 범죄의 형벌까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죄,

지 짊어지고 아버지의 분노를 느끼셨다. 이것 때문에 그 거룩

죄에 대한 우리의 책임, 우리의 죽음을 그분이 모두 이기셨다

한 영혼이 으스러진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가려졌고 사랑하

는 증거입니다.

는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는 느낌이 몰려왔다. 이것이 그를 절 망에 빠뜨린 것이다. 갈보리의 순결한 사람이 고통을 받았다. 죄 때문에 생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괴리를 남김없이 뼈저리 게 맛보고 있었다. 흑암의 권세가 그를 짓눌렀다. 미래를 밝혀 줄 빛줄기 하나 없었다”(2증언, 214). 예수님의 고뇌 중 신체적 고통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니 요? 미래를 밝혀 줄 빛줄기 하나 없었다니요? 이게 무슨 뜻일

07

일곱째 날

강요하지 않는 사랑

마지막 때

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위해 어떤 고통을 당하 신 걸까요? 엘렌 화잇의 다음 진술에서 더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사건에 대해 설교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엘렌 화잇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무덤 문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정복자로 무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둘러 의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친구로

에서 나오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자기의 희

삼아야 한다고 독려하는 경우가 많다. 동기 유발이 이런 식으

생을 받으셨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께 죄란 심히

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기심을 부추기는 방법이기 때문이

역겨운 것이어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가 영원히 분리되지나 않

다. 하나님의 날이 무섭게 다가와야 하고 공포감 때문에 옳은

을까 그는 두려웠다”(소망, 753).

행동을 취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매력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사망을 경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둘째 사망이란 영원한 멸망 이고 거기에는 부활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여기 빛나는 희소 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둘째 사망을 경험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맛보시고 물리치셨다는 것입니다.

적인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사랑, 자비, 동정이 가득하다. 그분 은 우리의 친구이시다(영문 <시조>, 1887. 3. 17.).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을 외치는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방법으로 성경 예언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

사도행전 2장 24절(쉬운성경)에서 베드로는 분명히 말하고

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음

다는 태도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태도입

의 고통에서 그분을 풀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예수님

니다. 자기 보호를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듯

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죽음이 예

하나 실상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수님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일까요? 단순하면서도 심

주님을 섬기는 바람직한 동기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매

오한 이유가 있습니다. “죄가 죽음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었

력적인 분”이라고 엘렌 화잇은 말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관해

고, 율법의 죄책이 죄에게 권세와 파괴력을 주었습니다”(고전

설교할 때는 그분의 사랑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15:56, 메시지). 그런데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습

종말론은 분명 재림교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2016. 3.

119


의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

회와 국가의 연합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 충

하게 만드는 창문으로 활용되어야 그분의 뜻에 맞는 역할을 하

격적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들을 제압할 능력이 있었

고 있는 것입니다.

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폭력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은 진리와 사랑으로 기만과 폭력을 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 세상 왕국을 정복하시는 우주

리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예언의 핵심

의 왕이 계십니다. 어떻게 세상을 정복하셨을까요? 인간의 증

논리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전부를 놓친 것입니다.

오와 분노에 대해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다니엘서는 세상 왕국들을 연속적으로 보여 줍니다. 각 나 라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쓰러뜨리고 진격합니다. 예언에 등 장한 마지막 왕국에 대해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 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사 랑이 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묘사한 예수님은 남들과 전혀 다른 왕이십 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셨기 때문에 통치권을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

얻으셨습니다. 우주의 보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요

며 그가 장차 놀랍게 파괴 행위를 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

한의 진술을 살펴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가 또

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 그가 꾀를 베풀어 제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서 한 어린양이 서 있는

손으로 속임수를 행하고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평화로

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

운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

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깨지리라”

이더라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단 8:24~25).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계 5:6~7).

앞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는 속임수와 파괴로 세력

계속해서 11~13절을 보겠습니다.

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때 다니엘은 새롭고 전혀 다른 무엇인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

가를 보여 줍니다. 이 막강한 체제는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을 정

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

복하고 마침내 “만왕의 왕”이신 메시아를 대적합니다. 예수 그

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

리스도에게 대항하는 이 나라는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아

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

니하고” 부서질 것이라고 다니엘서는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님은 인간의 권력 조직이 사용하는 법칙을 통해 세상을 정복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왕국의 원칙과 정반대되는 원

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칙으로 움직이십니다. 이 세상은 속임수와 무력을 사용합니다.

하니.”

그러나 그분의 무기는 사랑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이 관심과 찬양의 중심이

왕이신 예수께서는 다른 종류의 힘에 의해 움직이신다는 사

십니다. 강요 없는 사랑으로 구원하고 다스리는 분과 극명하게

실을 다니엘서에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 반

대립하는 존재에 대해 요한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큰 용…옛

역하여 타락한 인류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

뱀 곧 마귀…사탄”(계 12:9)이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요한계시

들이 분노를 쏟아 내도 그분은 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교

록 12장 11절에서는 이 이야기의 핵심 요점을 선명하게 드러냅

회와 국가의 결탁 세력에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을 내어 주시

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

는 방식으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유대 종교 제도와 로마 정

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

치권력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분이 교

끼지 아니하였도다.”

120  교회지남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마지막 때 사탄의 박

아니라 자기의 사랑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해 세력을 보복이나 앙갚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

구원의 계획은 단지 우리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

하여 이겨 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진정한 승자는 지

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는 사람입니다. 비폭력적인 사랑이 진정한 정복의 비밀 병기이

의 구원에는 목표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기 때문입니다.

벗어나 최고의 상황을 맞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요한계시록에는 두 가지 세력이 등장합니다. 바로 어린양의 세력과 용의 세력입니다. 사탄과 그를 따르는 세속적인 체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뿐 아 니라 연인처럼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원하십니다.

의해 움직이는 세력은 폭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 도에 의해 움직이는 세력은 그와 반대로 자기희생적인 사랑에

함께하기 위해

의지합니다. 사랑과 폭력이 맞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니

요한복음 14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엘과 요한계시록 전체 이야기의 간결한 요약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

이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이 떠오를

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 예수님을 나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는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세상에 마지막 역사가 펼쳐질 때 우리 각자는 자신이 생각하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는 하나님의 모습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 당시 결혼 풍습

종교 자유의 원칙을 짓밟는 무리와 한편이 되든지 양심의 자유

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첫 단계는 구애입니다.

를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강요 없는 사랑과 조화를 이루든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상대의 관심을 끄는 방식으로 접촉합

둘 중 하나입니다.

니다. 그 여자가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면 연애 단계로 진

그렇게 이 세상에 끝이 옵니다.

입합니다.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사랑을 키워 갑니다. 그러면 남자가 결혼을 요청합니다. 여자가 청혼을 받아들이면 남자는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서 미래의 신부 곁을 떠납니다. 그가 떠나는 이유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그녀가

08

여덟째 날

갈망하는 사랑

재림

머물 곳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신 게 아니라 신 부를 위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아주 깊이, 열정적으로, 간절히 사랑하시며, 우리와 영원히 교제하기 원하

전통적으로 재림교회 전도회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방식이

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

비밀 휴거와 다르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어

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

떤 방식으로 강림하시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가에 달리기 얼마 전 예수님은 자기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습

분이 왜 오시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기

예수님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

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저 그분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통찰을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 함께 있으면 좋은

얻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해 오셨을 뿐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배우자, 어머니, 아버지 또는 친구일

2016. 3.

121


수 있습니다. 요점은 간단하고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한 평화

는 함께 있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우리가 그런

성경이란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완전하게 연결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우정, 우리의 사랑

는 이야기입니다. 참사랑의 근원이신 분 그리고 영원한 복락을

에서 얻는 즐거움을 원하십니다.

위해 그 사랑을 절박하게 구하는 자가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완전히 경험할수록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되돌려 영원한 평화가

떤 존재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둘 사이에 이루어지게 하려는 계획이 바로 구원입니다. 또 재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현재 우리는 하나님과 연애하는 단계입

이란 우리의 연인인 예수님이 돌아오셔서 우리가 그분과 영원

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구애하며 마음을 사고 계십니다. 자신

히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의 아름다운 품성을 보여 주시면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입니다. 애타는 사랑으로

도 무르익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은 결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

혼식이 진행될 때에야 완전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

람들인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

과 혼인 예식을 치르기 위해 영적으로 “예비”될 역사적 순간이

서 그분이 돌아오십니다. 문제는…우리가 그분과 함께하고 싶

이를 것입니다. 우리의 준비 상태를 온 우주가 목격하고 결혼

은가입니다.

을 선언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6~8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 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 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 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경 전체는 최고로 아름다운 순간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교회를 영원한 신부 로 맞이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122  교회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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