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기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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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기도력

M arch

3월

2018년도 장년 기도력

교회,

그 참된 의미를 찾아서

이름으로 본 믿음의 사람들(구약 편) 성경에는 다양한 믿음의 영웅이 있어요. 그리고 그 영웅들의 이름에는 특별한 뜻,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답니다. 그 이름 을 통하여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 견하고 우리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

이번 한 달 저는 우리 시대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교회를

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생각하면 떠오르는 교회에 대한 고민과 모자라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쩌면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속에서 저는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떠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글┃ 김은배 목사

필자 김윤호 목사 김윤호 목사님은 충청합회 어린이부장입니다. 가족으로 김보형 사모님과 자녀 연우, 시우, 하은이 있습니다.

이달의 필자_ 김은배 목사 삼육대학교 신학과 졸업(1982년) 후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D,Min.)에서 수학, 일선 교회에서 11년간 목회했다. 삼육대학교 신학과 교수로서 설교와 목회를 가르치며, 현재 신학대학원장과 신학대학장, 재 림교회/엘렌 G. 화잇 연구센터 원장을 맡고 있다.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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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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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목) 아담과 하와 – 서로 의지하는 사람

교회란 무엇인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 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고전 1:2)

교회와 관련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숙고해야 할 주제가 있다면,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매우 피상적입니 다. 우리는 보통 예배드리는 장소를 교회(the church)라고 부릅니다. ‘교회 에 다닌다’, ‘교회를 세운다’ 같은 일상적 표현에서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장 소나 건물로 취급합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인식은 교회의 중요도나 성공 여부가 건물 자체의 크기 나 웅장함에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낳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크고 아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 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창세기 2장 7절)

안녕하세요. 어린이 여러분! 혹시 인류의 조 상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바로 아담이에요. 우 리 친구들도 아담 할아버지에 대해서 많이 들 어 알고 있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 상을 만드신 후에 가장 마지막으로 아담과 하 와, 즉 사람을 만드셨어요. 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답게 짓는 데 몰두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건물로 인식하는 이런 개념은 이

그런데 사람이라는 이름에는 아주 놀라운

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를 가져옵니다. 결국 사람들은 교회의 성격과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답니다. 중국 문자로

그 성경적 목적 및 사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나요? 중국 문자

그렇다면 교회에 대한 바른 인식이 왜 중요할까요? 교회에 대한 이해에

로 사람은 ‘人’ 이렇게 씁니다. 참 쉽죠? 이것을

따라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알

우리는 ‘사람 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

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사명과 역할을 모르게 됩니다. 결국 교회를 세우

인’ 자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바로 사

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룰 수 없으며, 그 특권도 누릴 수 없습니다.

람끼리 서로 기대고 있다는 의미예요.

성경은 우리에게 오해할 수 없는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예수

중국 문자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음

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 16:18)라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서로 의지하며 기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짧은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대고 살라는 명령을 주셨어요. 그런데 잠깐 아

중요한 이해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교회를 세우신 분의 교회에 대 한 기대와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교회’로 번역된 에클레시아(ekklesia)는 건물이나 구조물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혹은 회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어디에도 ‘교회에 가자’라고 표현 한 곳이 없을 뿐더러 은유를 제외하고는 교회를 건물 개념으로 언급한 곳

담과 하와가 서로 떨어졌을 때가 있었어요. 그 때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어 요.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기대고 살도록 창조 되었어요. 우리 친구들도 주변에 의지하고 기 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가깝게는 부 모님, 친구들이 있고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 교 회에 가면 목사님과 교회 어른들이 있을 거예

도 없습니다(엡 2:19~22).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요. 여러분에게 어려운 일이나 어떤 유혹이 있

자들”(고전 1:1~3), 곧 인격적 존재로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

을 때,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부모님이나 목사

도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가 교회라는 말입니다. 바로 내가 교회이며, 그대

님, 선생님을 찾아가 보세요. 그분들이 여러분

가 교회입니다.

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 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친구들이 되길 바 랍니다.

76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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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금)

나는 참된(진리) 교회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내가 교회라면, 이런 의미에서 참된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재림교

에녹 –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세기 5장 24절)

회를 진리 교회라고 지칭하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

친구들 중에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리는 이렇게 이것을 교단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오해의

어려움을 겪어 본 친구 있나요? 목사님은 어렸

소지가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장하는 대로 재림교회가 진리 교회라면

을 때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아, 사고 난 경험

다른 개신교회는 진리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목사님은 후회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본질적으로 진리란 어떤 단체나 개인이 독

를 했답니다. “부모님 말씀에 순종만 했더라면

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후회

리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요 14:6). 그러므

는 언제나 늦어요. 후회하기 전에 먼저 순종함

로 진리 교회라는 말은 진리 되신 그리스도가 계신 교회를 의미합니다. 다

으로 어려운 일을 피해 가는 것이 진정 지혜로

시 말해서, 교회인 개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질 때 참된 진리 교회가

운 사람이랍니다.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 교회인 까닭은 재림교회 안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계실 때 내가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 제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의 방식을 따라 그분과 같이 사 는 삶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으로 표현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에는 ‘순종하는 자, 따르는 자, 드려진 자’라는 뜻이 있어요. 그의 이름처럼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어 요. 창세기에 보면 에녹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 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다만 에녹이 하나님 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 록되어 있지요. 에녹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을까요? <부조와 선지자>라는 책을

마지막 때의 교회로 표상되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보면 에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제는 무엇입니까?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 미지근한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고 나와 있어요. 즉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3장 20절은 그 교회의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문밖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예요. 그

에 서서 두드리노니.” 그리스도가 문밖에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가

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요하여 부족할 것이 없다 하나 곤고하고 가

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책이에요.

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에 따

나는 참된 교회입니까?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

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예

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선언합니다. 또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될 때 여러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요일 5:12)다고 말

분은 하나님의 지혜도 갖게 되고, 구원받아 하

합니다. 나에게는 아들이 있습니까? 자식 있는 어느 부모에게 물어도 자식

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 수 있게 된답니다.

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쉽고도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민하 거나 생각이 필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자식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있습니까? 아들이 없으면 나는 교회 가 아닙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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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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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안)

교회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 들이시니이다”(마 16:16)

노아 –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위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장 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안식과 위로’예요. 노

베드로가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의 부모님은 왜 노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

아들이시니이다.” 이 대답은 정말 훌륭한 고백이었습니다. 이후로 이것은 그

을까요? 우리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성경을 보

리스도교의 짧지만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아

면 노아가 살던 시대는 매우 악한 시대였어요.

네가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를 어떤 분으

사람들이 얼마나 악했는지, 하나님께서 세상

로 인식하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게 그분은 어떤 분인가? 어쩌

을 만드신 것을 한탄하셨다고 나와 있어요. 세

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대답에 달려 있습

상이 악하면 어떤 사람들이 살기 좋을까요? 아

니다.

마도 힘이 세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악당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교회를 세울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이 살기 좋을 거예요. 반대로 하나님을 잘 믿

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의 교회로 데리고 가십

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힘든 삶을 살아

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특히 복음주의자들은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 만 일차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예수와 나’의 관계로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 들은 교회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은 ‘Yes!’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No!’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단 순히 예수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예수

야 했을 거예요.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요? 바로 ‘위로’랍니다. 그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노아의 부모들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어요. 그 래서 아들에게 노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답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했는지 하나님은 세상을 물

님과의 단순한 개인적인 교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공동체라

로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어요. 그래서 지구를 뒤

는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엎을 홍수가 일어났답니다. 사십 일 동안 쉬지

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않고 하늘에서 비가 내렸어요. 땅이 갈라지고,

교회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 교회를 떠

산이 무너지고, 모든 집이 물에 잠겼답니다. 높

나 있을 때면 고통 받는 쪽은 언제나 자신입니다. 종종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은 산도 물에 다 잠겼어요. 정말 무서웠겠죠?

문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갈등도 생겨납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교회 안에

그 가운데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에서 몇 달을

서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떠날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보내야 했어요. 하지만 노아는 두려워하지 않았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는 하나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서

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가

로 다른 지체와 기능을 가진 몸으로, 거룩한 나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족을 지켜 주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보호

으로 묘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 이상의 것입

아래 노아의 가족들은 안식할 수 있었답니다.

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 로 교회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예수께 대한 헌신과 구별될 수 없습니다. 교 회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78  교회지남

우리 친구들도 무서운 일을 만날 때가 있지 요? 하지만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하 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을 지켜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지켜 주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 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랍니다.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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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일)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 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아브라함 – 모든 성도의 조상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장 2절)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 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요 4:23). 이 점에 미치지 못하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받는 것을 좋아한답

면 교회는 그 무엇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니다. 그래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복 받았다

극장의 일종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배를 본다고

고 기뻐해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들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좌석에 앉은 관람객으로 무대 위의 배우를 열심

에게 복을 많이 나누어 준 사람의 이야기가 나

히 쳐다봅니다. 배우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배우의 공연이 만족

와 있어요. 바로 아브라함이에요.

스러우면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답례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결코 이 러한 극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매우 중 요한 약속을 하셨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구경하는 관객입니다. 그리고 설교

지라.”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거라는 약속

자는 주연 배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중들의 마음에서 발생합니

이었어요. 복의 근원이라는 말에는 ‘복을 나누

다. 예배자인 회중이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 라 드리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예배는 예배자가 관객이 되어 버 렸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객은 하나님이십니다. 종종 우리는 ‘오늘 내가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나?’ 질문하며 교회 문을 나 섭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 따라 오늘 예배가 시시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날 목회자의 설교가 맘에 들면 예배가 좋았다든지 예배를 잘 봤다

어 준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실제로 아브 라함의 삶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 어 주는 삶을 살았어요. 조카 롯이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갔을 때에 도 아브라함은 용감하게 달려가 조카 롯을 구 해 주었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손님들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의 예배로 오늘 하

주었고, 따뜻하게 쉴 수 있도록 집을 내주었어

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 ‘나는 오늘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렸을까?’

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는 언제나

목회자나 음악이나 성례전이나 기타 예배를 돕는 모든 수단이 결국은 예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랐답니다. 그렇게 아브라

배자들과 하나님의 교통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

함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복을 나

과의 만남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지켜보

누어 주며 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시는 하나님, 거룩한 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대하셨을까요?

그리고 이 예배는 일상의 삶으로 확대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버지’라

이 곧 예배가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코람데오(Coram Deo)의 정신을 그

는 뜻이에요. 그 말은 많은 사람의 조상이라는

들의 삶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코람데오, ‘하나님이 지켜보신다.’ 이것은 거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

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려는 열정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켜 성경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해

리의 예배는 단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의식이나 행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 제 어디서나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가 삶이며, 삶이 예배입니다.

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 고 복을 나누어 주는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 의 조상으로 삼아 주셨답니다. 우리 친구들도 아브라함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멋진 친구들이 되길 바랍니다.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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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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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월)

예배를 예배되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많은 사람이 예배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짧은 예배 를 좋아하고 긴 설교를 싫어합니다. 예배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종종 우

이삭 – 웃음이 멋진 믿음의 영웅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 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 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 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26장 22절)

리의 예배는 무례하며 경박합니다. 형식적이며 때로는 따분할 지경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별로 애를 쓰지 않습니다. 아무런 영감을

여러분은 친구와 먹을거리나 장난감으로 싸

주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감동이 없는 예배, 이러한 예배는 우리의 예배 이

워 본 일이 있나요? 배가 고픈데 빵이 하나밖

해와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에 안 남아 있으면 양보를 하나요? 아니면 서로

이런 예배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영광과 그

먹기 위해 싸우나요? 내가 꼭 필요한 것이 있는

분의 존귀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누가 우리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여 이 가

데 그것을 양보하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

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예배 중 너무나 많은

만 웃으면서 양보하게 될 때 뜻하지 않은 복을

것이 실제 없는 의식이 되어 버렸고, 능력 없는 형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받기도 한답니다.

두려움 없는 즐거움이 되어 버렸고, 하나님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삭의 이름의 뜻은 ‘웃음’

그렇다면 예배를 예배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

이에요. 그런데 이름만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

까? 겸비한 기도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찬양이 드려져야

가 웃음인 멋진 믿음의 영웅이랍니다. 왜 그런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의 살아 있는 음성이 들리도록 설교자

지 한번 살펴볼까요? 이삭이 사는 곳은 황량

는 설교하고, 회중들은 그렇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한 광야였어요. 그래서 우물이 매우 중요했답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 는 그저 예배당에 왔다가 무익하게 돌아가는 어리석은 예배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초월성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 가운 데 인간의 이 보편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 면, 그것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 행위야말로 가장 신비적인

니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이웃의 불량한 사람들이 나타나 우물을 빼앗는 거예 요. 이삭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그런데 이 삭은 화를 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호탕하게 웃 으면서 우물을 양보했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 나 우물을 빼앗기고도 화를 내지 않고 양보했 어요. 그리고 네 번째로 얻은 우물이 ‘르호봇’이

요소가 담겨 있는 신앙의 실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라는 우물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양보할

진정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마다 좋은 우물을 찾을 수 있도록 그를 인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신앙을 반지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

하셨어요. 그리고 더 많은 복을 주셨지요.

기는 사람들 그리고 회의론자들에게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 하는 가장 강

우리 친구들도 오늘 이삭처럼 멋지게 웃으며

력한 증거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

양보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는 이러한 예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거의 느끼지 못

친구들에게도 더 멋진 복을 선물로 주실 거예요.

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명백히 역사 함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험 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교회의 분위기가 정직하고, 서로에 대하여 마 음이 열려 있고, 만인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어야 하며, 예수를 향한 깊은 애정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80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6일(화)

참된 예배의 축복

이스라엘 –속이는 자에서 승리자로 바뀐 믿음의 사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진정한) 예배니라”(롬 12:1)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는 성도들이 행복합니다. 현재의 예배에서 즐거움 을 맛보는 사람들만이 하늘나라 예배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 장은 하늘 예배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천국은 밤낮 쉬지 않고 세세토록 예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 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 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 어 이기었음이니라”(창세기 32장 28절)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배하는 곳입니다. 1시간 예배가 지루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하늘 예배에 참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여할 수 있겠습니까?

에요. 이스라엘은 친구들이 잘 아는 것처럼 한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축복을 제공합니다. 심리학자인

나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에릭슨은 “아기가 제일 행복한 순간은 엄마의 풍성한 임재를 확인하는 순

야곱이라는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

간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은

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일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릴 때 사람들

곱이라는 이름에는 ‘속이는 자’라는 뜻이 있어

은 메말라지고 독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의 품 안에서 차가운 독한

요. 그의 이름처럼 그는 사람을 자주 속였어요.

마음도 풀립니다. 감동이 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우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그의 외삼촌도

리에게 필요합니다.

속였지요. 그렇게 그의 인생은 속고 속이는 삶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보면서 서로 닮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인격)을 닮는 축복을 누립 니다. 이렇게 진정한 예배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 시간이 끝남으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만난 하나 님은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참된 능력 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축복으로 받 습니다. 이제 예배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감과 기대감을 가

의 연속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어 요. 그 변화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면서부터 시 작되었지요. 야곱이 형을 속인 일로 인해 형이 야곱을 죽이려 했어요. 무서웠던 야곱은 밤새 도록 예수님과 씨름했답니다. 그런데 그때 야 곱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수 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어요. 이스라엘은 ‘승리자’라는 뜻이지요. 속이는 자가 승리자가 된 거예요.

지고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

야곱이 ‘이젠 끝났구나.’ 하고 절망할 때 그는

운데 계시다”(고전 14:24~25)라고 외치면서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할 만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붙잡았

진지한 찬양과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요. 그때 예수님은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 주

오늘 우리의 문제는 성경 지식에 대한 빈약함이 아니라(물론 이 백성이

셨어요. 멋진 승리자로요! 여러분도 무슨 일이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

잘 안 될 때 예수님을 붙들고 기도해 보세요.

랑에 대한 감격에 걸맞는 행동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이 절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승리자로 바꾸어

실히 요구됩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 예배(경건 시간)를 통한 축복의 경험을

주실 거예요.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모

예배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예배에서

든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답니다.

경험되는 은혜와 말씀의 도전은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가운데 구체적인 행 동의 열매로 반드시 맺혀져야 합니다.

2018. 3.

81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7일(수)

그리스도의 교회

요셉 – 하나님께서 더하는 삶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사실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는 주님이 자신의 피로 사실 만큼 그분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에베 소 교회의 감독들을 향하여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행 20:28) 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엘렌 화잇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약하고 결함이 있어 보이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당신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 았더라”(창세기 39장 3절)

우리 친구들은 요셉이라는 멋진 믿음의 영 웅을 잘 알 거예요.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지 만,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 족을 구원한 영웅이지요. 요셉이라는 이름의

의 최고의 관심을 쏟으시는 대상이다”(사도행적, 12).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

뜻은 ‘하나님께서 더하신다’예요. 실제로 요셉

께 속해 있습니다.

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을 알

우리는 종종 목사나 장로 혹은 집사들이 ‘내 교회’ 혹은 ‘우리 교회’라고

수 있어요.

말하는 것을 정말 흔하게 듣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진정으로 그렇게 믿

형들의 시기로 요셉은 애굽의 군대장관인 보

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자기 방식대로 운영하고 자기 생각을 주장할

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팔려 가게 되었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주인의식과는 근

요. 부잣집 아들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노예가

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된 거예요.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요? 새벽

오래전에 교단 합회 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총회 석상에서 어떤 장

에 일어나 부지런히 마당을 쓸고, 물을 길어 놓

로 한 분이 일어나 발언을 했습니다. 이분은 어떤 의견을 개진하면서 교회

고, 밭에 나가 농사도 지었겠죠. 하루하루가 정

에서 목회자는 나그네이고, 장로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말 힘든 삶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힘든 일을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화 중 대부분 은 정확하게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즉 누가 교회를 소유하고 있는지, 누 가 더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말해서 이 교회가 누구의 교회인지가 문 제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회에는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려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교권

하는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답니 다. 이 멋진 청년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 었어요. 바로 요셉의 주인 보디발이었어요. 보 디발은 요셉이라는 노예가 주어진 일도 성실하 게 잘하고, 불평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

주의도 있고 이와 더불어 주도권의 대립 현상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

는 모습을 지켜보았답니다. 그리고 그를 신뢰하

의 분열을 심화시킵니다. 실제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소외됩니다.

게 되었어요. 결국 요셉은 보디발의 집을 맡아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소설에 이러한 이야기

관리하는 가정총무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중

가 나옵니다. 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던 중세, 예수님이 스페인의 세빌을

에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답니다. 그 비결이 무

방문하여 대재판관인 추기경과 만나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추기경은 예

엇일까요? 바로 감사하는 마음과 성실한 삶이

수님을 알아보고 기겁하여 그를 깊은 감옥에 가두고 처형하려다가 어두운

에요. 우리 친구들이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

밤에 풀어 주면서 다시 교회를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이

며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여러

미 인간들의 체제로 안정된 교회에 예수님의 개입이 대혼란을 야기하기 때

분의 삶에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실 거예요. 오늘

문이라는 것입니다.

도 감사하는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주권을 그리 스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82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8일(목)

승리하는 교회

모세 – 물에서 구원받은 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 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교회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 음이라 하였더라”(출애굽기 2장 10절)

라”(마 16:18)는 약속과 함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가 하나 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궁극적으로 죄와 악의 권세들을 이기리라는 확신 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우리에게 위임된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 약 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며, 현세에서 담대히 악을 대적한다 는 말입니다. 정의와 의를 실천하라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물을 무서워하는 친구들 이 있나요? 목사님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 을 뻔해서 물을 무서워했어요. 그런데 모세라 는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물에 빠져 죽을 뻔했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싸움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성

어요. 모세가 태어날 때 이집트(애굽)를 다스리

경에는 군사, 원수, 대적 같은 그리스도인 삶을 싸움으로 묘사하는 풍부한

던 파라오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남자아이

상징적 언어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

를 물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에요.

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는 말씀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호하셔서

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영적 싸움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

모세는 죽지 않았어요.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님의 백성들이 이 영적 싸움의 실체를 바르게 이해할 때 교회는 비로소 교

입양이 되어 멋진 왕자로 자랄 수 있었답니다.

회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모세가 그만 사람을 죽이게

이 시대의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육적인

되었어요. 이집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

싸움은 여전하지만 영적으로는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악과의 싸움을 포기

롭히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이집트 사람을 죽

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재림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재림교회 신 앙 정신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재림교회만이 가진 독특한 신념 중 하나는 대쟁투라는 특수한 용어에 함축된 신앙 정신입니다. 대쟁투란 하나 님과 사탄, 참과 거짓, 선과 악 사이의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의 실재를 상기 시키는 용어입니다. 이 싸움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전투입니다.

이게 되었지요. 모세는 죽는 것이 두려워 이집 트를 떠나 광야로 도망을 갔어요. 다행히 모세 는 사람이 살기 힘든 광야에서도 생명의 은인 을 만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요. 이렇게 모세 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두 번이나 생명을 구원받았답니다.

어느 기독교 TV 프로의 메시지는 이렇게 전합니다. “당신은 완전한 평화

모세의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 냄을 받다’

와 희열, 행복과 번영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고통 받는 것

예요. 우리도 모세처럼 연약하기 때문에 때때

을 원치 않으시기에 단지 간구하기만 하면 주신다. 구하라. 그러면 풍성히

로 죽음의 위협을 만날 수 있어요. 물에 빠진다

받을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 물질주의적 기대만이 교회 안에 넘칩니다. 기

거나 교통사고를 당한다거나 무서운 사람을 만

복신앙으로 도취된 기독교는 이제 편안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신앙에 긴장

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기억하기 바랍니다. 모

이 없습니다. 영적 싸움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교회라면,

세를 지켜 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도 지켜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라면 악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

주신답니다. 모세를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여

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러분도 구원해 주실 거예요. 이런 멋진 하나님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을 싸

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 일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싸움입니다.

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하루 되길 바랍니다.

2018. 3.

83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9일(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 라”(창 12:1)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불러냄을 받은 무리입니다(요 15:16). 이러한 교회에 대한 신약의 대표적 비유 중 하나 는 ‘하나님의 백성(laos)’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특별한 기원을

갈렙 – 끝까지 충성한 믿음의 영웅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 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 리이다”(여호수아 14장 12절)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옛날에 어느 선비에게 충성스러운 개가 있었

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친숙한 곳), 친

어요. 어느 날 선비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집

척(안전한 곳), 아비 집(의미 있는 곳)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으로 가다가 풀밭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어요.

(창 12:1).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모두를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

그런데 그만 선비가 자는 그 풀밭에 불이 난 거

해서 그를 불러내시는 것(ecclesia)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원형(pro-

예요. 불이 활활 타올라 선비를 태우려 하였죠.

totype)을 만납니다.

어리석은 선비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잠에 취

우리가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이후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있었어요. 주인 옆에 있던 충성스런 개는 주

의 후손은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아져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대부

인을 깨우기 위해 계속해서 짖었지만, 술에 너

분의 사람은 아브라함을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별한 인물로 생각하는 경

무 취한 나머지 깨어나지 않았어요. 주인을 살

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편적 인간입니다. 그의

리기 위해 가까운 시냇가로 가 몸을 적신 후 불

종교적 행적은 어떤 사람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만큼 단순합니다.

구덩이로 뛰어들어 몸으로 불을 끄기 시작했어

불교의 고승처럼 높은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며, 수도사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사실 비범하기보다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무엇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영웅적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과 대화 하는 첫 번째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벗으로 나타납니다(약 2:23). 그래서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 인지를 보여 줍니다.

요. 그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후에야 비로소 불이 꺼졌어요. 그러나 개는 결국 죽고 말았어 요. 주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충성 스런 개에 대한 이야기예요. 오늘의 주인공은 갈렙이에요. 혹시 갈렙의 이름의 뜻을 알고 있나요? 갈렙이라는 이름은 ‘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마치 주인을 위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종의 영적 여행(spiritual journey)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을 버린 충성스런 개처럼, 갈렙도

찾아서, 진리를 찾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지식과 관념에서 떠나는 것

죽는 그날까지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다

이며, 전통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진정

간 멋진 영웅이에요.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한 진리를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이러한 영적 여행을 위해 편안한 집을 떠나

젊은 시절에 열두 정탐꾼으로서 여리고를 정찰

는 것, 출가(出家)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했어요. 모든 사람이 여리고를 정복할 수 없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

고 말했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용감하

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라고 기록합니다. 막

게 여리고를 정복하자고 말했지요. 그리고 노년

연한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떠나

에는 거인들이 무서워서 아무도 정복하려 하지

는 것이 순종의 행위라면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것은 신뢰의 행동입니다.

않는 헤브론 성을 정복하기도 했답니다. 이렇

결국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전적인 순종과 신뢰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처음

게 죽을 때까지 충성스럽게 살다 간 갈렙을 하

부터 아브라함은 배웁니다. 교회인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님은 정말 사랑하셨어요. 여러분도 갈렙처럼 하나님께 언제나 충성하는 멋진 친구들이 되 길 바랍니다.

84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0일(안)

광야 속에 있는 교회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행 7:38)

진리를 찾는 여정이란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게 되는 과정

여호수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믿음의 영웅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 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 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여호수아 10장 12절)

입니다. 아브라함이 집을 떠나 길을 나서자마자 들어선 곳은 광야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인간이 자신의 안온한 곳에 머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여호수아는 모세

물러 있다면, 전통과 관습과 통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는 광대한 하나님

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믿음의 영

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광야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막막합니다. 기

웅이랍니다. 모세가 죽고 낙담해 있는 이스라

존의 지식이나 경험, 관념, 명예, 권력, 지위, 부 같은 떠나기 전에 그토록 중

엘 백성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

요했던 모든 것이 자신의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을 정복했지요.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문이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이

고, 마지막 날 안식일에 일곱 바퀴를 돌았을 때,

해나 관념에 대한 회의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실, 광야는 아브라함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

게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던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곳

다. 그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여호수아랍니다.

으로 나를 인도하시나? 생존의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회의와 의

그런데 여호수아와 관련된 더 멋진 이야기가 있

문을 가지고 씨름하며 아브라함은 비로소 자신의 생존 기반이 자신의 능력 에 있지 않음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인생이 먹고 마시는 것 이상임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생존 자체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기존에 배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광야의 경험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똑같이 재현됩니다. 지금도

어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아모리 사람들과 전쟁할 때였어요. 싸움이 거의 이겨 가는데 그만 해가 지려고 하는 거예요. 해가 지 면 캄캄해지기 때문에 적들이 도망가고 전쟁 은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그때 여호수아 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태양을 향해 멈추라고

하나님은 교회인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광

명령했어요. 그리고 달에게도 멈추라고 명령했

야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 속에 있는 교회(행 7:38)입니다.

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로 태양과 달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배웁니다. 우리의 인생에 불어오는 모래 폭풍 속에

멈추어 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날 이스라엘은

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숱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깊은 회의에 휩

크게 승리했답니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일이

싸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인생의 의미

일어났을까요? 그건 바로 여호수아의 기도와

가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하나님은 진정 사랑이신지, 왜 그렇게 오

믿음 때문이랍니다.

랫동안 침묵하시는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나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

아갑니다. 그리고 그 광야의 길을 걸었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처럼 때로

이시다’예요. 그 이름의 뜻처럼 여호수아는 하

는 폭풍 속에서, 생존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합니다.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거라는

나님이 내 자신의 생존의 기반임을 깨닫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섭리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믿음

발견합니다. 이렇게 광야 속의 교회는 하나님을 알아가며 견고해집니다. 하 나님이 자신의 생존의 기반이며, 삶의 의미이며, 인생의 목적임을 고백합니 다. 하루하루 그분의 지붕 아래서, 임재 아래서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손 하게 살아갑니다.

을 가지고 기도하며 전진했을 때 이스라엘 민 족을 구원한 멋진 지도자가 되었어요. 여러분 도 여호수아와 같은 멋진 믿음을 갖게 되길 바 랍니다.

2018. 3.

85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1일(일)

교회 -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룻 –지혜로운 여인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구약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교회의 이미지 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은 “네 자손 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창 26:4)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 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고 선포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기 1장 16절)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가요? 혹시 그 친구를 위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나요? 비 록 친구가 좋을지라도 그 친구를 위해 내가 소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이스라엘은 구약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이미지는 신약에도 똑

을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는 우정을 위해 소중

같이 등장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을 향하여 “오

한 것을 포기한 룻이라는 여인이 나와요. 룻이

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

라는 이름의 뜻은 ‘우정’이에요.

유된 백성”(벧전 2:9)이라고 선언합니다. 같은 구약의 단어들을 사용해서 교 회인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천명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모압이라는 지방에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남

어떤 분들은 제사장을 고귀한 신분으로만 여기거나 오늘날의 목회자들

편과 아들들이 죽고 말았어요. 모압 지방에서

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귀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자, 나오미는 고향인 이스

신분임에는 틀림없지만 신약에서는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만을 제사장으

라엘로 돌아가고자 했어요. 그래서 며느리인

로 지칭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 고귀한 신분과 역

룻에게 이제 남편이 죽었으니 자유롭게 살라고

할을 공유합니다. 신구약 모두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하면서 그분의 백성의 특성을 거룩함으로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하다는 것입 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백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거룩이란 히브리어로 카 도쉬(qadosh)입니다. 이 단어는 ‘~으로부터 구별되다(set apart from)’는 의 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말했어요. 그런데 룻은 시어머니를 정말 좋아 했어요.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고향을 떠나서 이스라엘로 함께 가기로 결심 했지요. 룻에게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거예 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그녀가 평생 동안 살 던 모압과는 전혀 다른 낯선 곳이기 때문이지

거룩하신 분인 까닭은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안식

요. 모압을 떠나면 이제 가족과 고향 사람들 그

일이 거룩한 것은 그날이 다른 날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리고 친구들과도 모두 헤어져야 하거든요. 힘

이스라엘을 구별된 백성으로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부르심의 첫 출

든 선택이었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존경하고 사

발점으로 삼으신 것은 소유권의 문제였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

랑했기 때문에 시어머니와의 우정을 위해서 고

니”(출 19:5)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유권에 대한

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룻

개념을 바꾸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소유의 주체는 자신입니다. 그러나 이

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셔서 큰 은혜와 복

스라엘의 소유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소유의 주체인가라는 문제

을 주셨답니다.

는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핵심 사안입니다. 이 것은 그분의 거룩한 백성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친구들도 예수님과 의 우정을 위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까지 포기할 수 있는 지혜로운 어린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86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2일(월)

거룩함의 두 가지 측면-1

한나 – 기도로 아들을 얻은 어머니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 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신 5:15)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방인들과 구별됩니 다. 첫째는 예배(제의)의 구별입니다. 이방인의 예배는 언제나 다산(多産) 지 향적입니다. 모든 제의는 다산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다산이란 자 기 이익의 극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는 무 엇을 중심으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 중심으로인가, 다산 중심으로인가? 다산을 목적으로 행하는 이방인의 제의(예배)는 결국 복 받기 위한 수단 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배는 근본적으로 이방인의 제의와 다릅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사무엘상 1장 20절)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여러분의 아빠와 엄마는 정말 행복했을 거예요. 왜냐하 면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거 든요. 목사님에게도 세 명의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들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정말 기쁘고 행 복했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 렸지요.

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그런데 한나라는 여인은 아이를 갖지 못했어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요. 그래서 너무 슬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

지요. 여러 해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해 슬퍼하던

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저

이스라엘의 예배는 기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특정한 목

에게 아이를 주세요. 하나님께서 아이를 갖게

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 주시면, 그 아이가 자라서 하나님의 일을 할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한

때 그들이 종이었음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예 배의 실존적 출발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 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첫 실존적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와 죽음의 종 된 자들(하나님도 없는 자들, 율법의 정죄 아래 있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맞아요. 하나님 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그래서 귀 한 아들을 낳게 되었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사무엘이에요. 한나는 이렇게 기도를 통해 아이를 갖게 되

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율법과 사망의 속박에서 자유 하게 하

었어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지요. 한나라는

신 하나님의 구속과 사죄의 은총에 대한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이방인과

이름의 뜻은 ‘은혜롭다’예요. 그녀의 이름처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어요.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감격이 사라질 때 우리는 이방인과 같아집니다. 더

우리 친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보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무엇을 추구합니다. 이 이상의 궁극적 가치가

고 싶나요?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나요? 그러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형식적이고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얻기 위한

면 기도해 보세요.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

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사를 기억하고 이를 감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분의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의 기도에

구속의 능력과 은총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진정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응답해 주실 거라고 약속하셨답니다. 예수님의

것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의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약속을 믿고, 언제나 기도하는 멋진 친구들이 되길 바랍니다.

2018. 3.

87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3일(화)

거룩함의 두 가지 측면-2

사무엘 –기도의 선지자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 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 음이니라”(신 10:18~19)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구별되는 두 번째 측면은 삶의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 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상 3장 10절)

방식입니다. 자기 이익의 극대화라는 이방인의 궁극적 가치는 뇌물을 주고 받고 저울을 속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오늘은 퀴즈로 시작해 볼까요? 어제 한나 이

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물질주의라는 것은 매우 고전적인 것이

야기를 들었지요. 한나가 기도를 통해 낳은 아

며 인간의 악한 본성과 잘 어울리는 현상입니다. 결국 자기 이익의 극대화

들이 누구지요? 맞아요. 바로 사무엘이에요. 그

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원리를 작동하게 합니다. 언제나 사회적 약

런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을 아세요? 사무

자는 고통을 받습니다. 고아와 과부가 고통을 당합니다. 부의 독점 현상이

엘은 ‘하나님의 이름’ 또는 ‘여호와께 구함’이라

일어나고 사회 정의는 사라집니다.

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한나의 기도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 사무엘,

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다산 지향적 삶의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한나는 하나님

방식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분리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은 약자에 대한 배려로 나타납니다. 부의 독점이나 빈익빈 부익부가 아닌 분배의 정의를 실현합니다. 선지자 이 사야는 이러한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사 11:6). 이리, 표범, 사자와

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린 사무엘을 성전 에서 살도록 하였어요. 그래서 사무엘은 어렸 을 때부터 성전에서 자랐답니다. 매일 엘리 제 사장을 따라 성전을 청소하고, 제사드리는 것 을 도와주고, 성전에서 여러 봉사를 했어요. 또 한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 었고, 매일 기도를 드렸어요.

어린양, 염소, 어린아이가 함께 지내는 곳에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존재하지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잠자리

않습니다. 보통 천국의 모습으로 이해되는 이 묘사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사

에 든 사무엘에게 한 음성이 들렸어요. 바로 하

회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의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님의 음성이었지요.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

그러므로 누가 이스라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약자에 대하여 어

을 부르셨어요. 정말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었

떠한 반응을 나타내는가와 자기 이익의 극대화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을 것 같아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달려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배려는 거룩함의 기초입니다.

본 적이 있나요?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회적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과 이방 사회를 구별해 주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결정적 사안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

로서의 구별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이스라엘을 향

은 사무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후에 이스라

한 책망 속에서 이방 사회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질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엘에서 가장 훌륭한 선지자가 되었답니다.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임 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 의 삶의 가치와 방식은 진정 다른가? 나는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 거룩 함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 형식만 남아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 서 겸손히 자신을 돌아봅시다.

88  교회지남

사무엘은 기도를 통해 태어났고, 기도를 통 해 훌륭한 선지자가 되었어요. 우리 친구들도 이 세상에 기도를 통해 태어났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자라고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도 사무엘처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훌 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4일(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 라”(엡 1:23)

다윗 – 하나님께 사랑받은 왕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사무엘 상 24장 17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의 이미지는 사도 바울이 가장 많이 사용하 는 교회에 대한 비유입니다(엡 1:23; 고전 12:12; 롬 12:5). 이것은 그리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이 누

의 교회에 대한 사랑(엡 5:25)과 그 교회의 가치(행 20:28)를 표현하는 가장

구인지 아세요? 바로 다윗이에요. 다윗은 많은

분명한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함축하고 있는 교회의 의

사람에게 사랑받은 왕이에요. 그리고 오늘날까

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존되어 있음을 말

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는 사람이에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만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요. 이런 다윗을 하나님 역시 사랑하셨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은 각 지체가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

다윗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많은 인기와

를 갖게 될 때 가능합니다. 그 지체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고 죽는 사

사랑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의 이름의 뜻

람들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분 때문에 하나

은 ‘사랑스러운 자’입니다.

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이며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지체도, 교회도 아닙니다. 지체는 그 자체로 독립해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몸에서 분리된 지 체는 쓸모없을 뿐 아니라 생명이 없습니다. 또한 몸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 어 있는 지체들은 유기적 관계를 가집니다. 이것은 다른 믿음의 지체인 동 료들에 대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몇 해 전 집 안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거실에서 잠들었 다 잠결에 침실로 들어가다 방문 옆에 있던 가구의 아래 틈새를 그만 발로

다윗은 젊은 시절 골리앗을 상대로 승리한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어요. 많은 전쟁에서 승리 한 훌륭한 장군이었지요. 또한 사울 왕의 사위 이기도 했어요. 그런 다윗을 이스라엘 백성 모 두가 좋아했어요. 그런데 다윗의 인기가 높아 질수록 사울의 마음에 다윗을 시기하는 마음 이 깊어졌어요. 그리고 결국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했지요.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로 도망을 갔어요.

찬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잠이 확 깨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왼쪽 엄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숨어 지낼 때, 사울이

발톱 부위에 피가 흥건합니다. 너무 아팠습니다. 흐르는 피를 보면서 자세

다윗을 잡으러 왔어요. 다윗은 사울의 군대를

히 들여다보니 엄지발톱이 수직으로 들려 있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웠던 경

피해 동굴에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사울이 굴

험은 바울이 말한 교회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게 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에 잠시 쉬러 들어온 거예요. 다윗의 부하들이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고전 12:26). 발톱으로 인한

다윗에게 말했어요. “다윗, 지금 사울 왕이 홀

통증은 발톱만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몸의 고통이었습니다.

로 굴에 들어왔어요. 아무도 지키지 않아요. 지

한 영혼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까? 발톱이 하나 빠져도 이렇게 아픈데 팔

금 사울 왕을 죽여야 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전혀 아프지 않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한센

했을까요? 다윗은 부하들에게 아무도 사울 왕

병에 걸렸거나 교회가 아닙니다. 영혼을 잃어버려도 전혀 아프지 않은 교회, 이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우리 몸의 지체 중에는 하찮은 것이 하나도 없습 니다. 발톱 없이 얼마간 지내면서 그것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소 중합니다. 각 사람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제각기 고유한 기능이 있습 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더 귀한 사람도 덜 중요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사 울 왕이 비록 자신을 미워해도 하나님께서 선 택한 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미워해 죽이려고 한 사울 왕을 용서해 주었어요.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다윗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 러분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친구들을 대 한다면, 친구들도 여러분을 사랑할 거예요.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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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5일(목)

‘믿음 안에서의 교제’로서의 교회-1

요나단 –우정으로 왕위까지 양보한 믿음의 영웅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행 2:42)

교회가 진정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은 물으나 마나 한 질문처럼 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 불어 언약을 맺었으며”(사무엘상 18장 3절)

이지만 진지한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흥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느 냐 혹은 무엇이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들리와 해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이었어요. 당연히

드 웨스트의 <왜 재림교회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가?>라는 책은 교회

사울 왕에 이어 왕이 될 사람이었죠. 그런데 이

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를 떠난 한 청년

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는 중에 다윗이

의 편지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존

골리앗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았고, 자신

재였다. 교회의 교리가 옳다고 하지만, 부디 사랑으로 교리가 담겨져 있으면

보다 어린 친구가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거인

…친절한 웃음과 따뜻한 악수, 우정 그런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행 20:28)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 리스도께서 자기를 줄 만큼 사랑을 쏟으신 사랑의 대상입니다(엡 5:25). 그 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살전 1:4)이 라고 부릅니다. 오늘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이

장군 골리앗과 싸우는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 았어요. 요나단은 다윗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 요. 그래서 다윗과 친구가 되기로 했어요. 그런데 요나단의 아버지인 사울 왕은 요나단 이 다윗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 았어요. 왜냐하면 다윗의 인기가 너무 높아 다

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

윗이 왕이 될 것 같아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다

은 교회를 이 사랑의 대상들이 나누는 ‘믿음의 교제’라고 부릅니다.

윗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이런 아버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제였습

의 마음을 눈치챈 요나단은 다윗을 다른 곳으

니다(행 2:42). 교제는 사귐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교제를 의미하는 코이노

로 피신시켰어요. 그래서 아버지인 사울 왕에

니아(koinonia)는 단순한 인간의 사귐 이상을 의미합니다. 사업상의 교제

게 큰 꾸지람을 들었지요.

나 세상 사람들의 친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뜻을 같이 하는 사귐이며 마음을 같이하는 믿음의 사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눔

여러분은 우정을 위해서 왕위를 양보할 수 있나요? 또는 우정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나요? 정말 쉽지 않을 거예요.

(sharing)입니다. 초기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요나단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셨다’

떼며 기도하기를”(행 2:42)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떡을 떼”는

예요. 아마 사울 왕과 왕비가 요나단을 낳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그룹이나 구역 모임을 마치고 단순히 다과를 나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이름을

누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성만찬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떡을 나 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떡은 생존을 위한 양식입니다. 그 래서 그들은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을 실현했습 니다. 이러한 나눔은 그들이 섬기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운 사도들의 가르 침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나눔

그렇게 지은 것 같아요. 그런데 요나단은 왕위 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 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친구 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지요. 이렇게 요나단은 우정도 좋았지만, 믿음도 좋은 멋진 사람이랍

을 배웠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떼어 나누어 주는

니다. 우리 친구들도 요나단처럼 하나님의 뜻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왕국(교회)은 나눔에 있습니다.

을 알고, 친구들과 멋진 우정을 쌓는 어린이들 이 되길 바랍니다.

90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6일(금)

‘믿음 안에서의 교제’로서의 교회-2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4)

믿음의 교제의 두 번째 요소는 돌봄(caring)입니다. 사도 바울은 돌봄에

나단 –용감한 선지자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사무 엘하 12장 13절)

대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서로 돌아보아

혹시 친구의 잘못된 행동을 보면서 그 잘못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돌봄은 동료 인간을 향해 눈을 돌리는

을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나요?

것입니다. 돌봄과 반대되는 개념은 무관심과 냉담입니다. 영어의 돌봄이라

목사님은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어요. 하지만

는 말은 원래 고트어인 ‘카라’에서 온 것으로 ‘애도하다’, ‘슬픔을 표현하다’, ‘함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누군

께 울부짖다’라는 의미의 비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돌보는 것을 약자를 향한 강자의 태도로, 힘없는 사람을 향한 힘 있는 자의 배려 로,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한 가진 사람의 동정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우는 것에서 이런 교만한 모습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긍휼로 표현되는 비탄은 상대의 자리,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돌봄의 모범입니다. 그분은 아들을 잃은 나인 성 과부

가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용기가 없으 면 쉽지 않아요. 성경에 나온 선지자들은 대부분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이스라 엘 백성이 잘못을 할 때마다 하나님을 대신해 그들의 잘못을 알려 주었거든요. 그래서 때로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

의 슬픔을 함께하셨기에 그의 아들을 살려 주셨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

도 했어요. 오늘 함께 살펴볼 나단이라는 사람

픔과 함께하셨기에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돌봄은 이처럼 이

도 용감한 선지자였어요. 왜냐하면 그는 왕이

웃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는 것이며, 상대의 처절한 필요에 함께 공감하

잘못한 것을 용기 있게 말해 주었거든요.

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봄은 큰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어느 날 다윗이 큰 범죄를 저질렀어요. 그 범

일을 통해 돌봄을 생활화하는 것이 더 실제적입니다. 돌봄을 통해 우리는

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나 비록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의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

식하게 됩니다.

요.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 왕에게 보내

하버드와 예일대 교수를 지냈던 <실천하는 영성>의 저자인 헨리 나우웬

죄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셨어요. 나단은 목숨

은 어느 날 그의 모든 교수직을 그만두고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가

을 걸고 다윗 왕에게 나아갔어요. 그리고 하나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생의 마지막 10

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어요. 어떻게 되었을까

년 동안 ‘아담’이라는 한 명의 지체장애자를 돌봅니다. 사실 그의 봉사의 위 대함은 단 한 사람 ‘아담’을 위한 헌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후 아담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음을 고백합니다. 진정 도움을 받은 사람 은 그 자신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러한 돌봄을 통한 믿음의 교제가 함축하는 것은 개인주의적 신앙의 배 격입니다.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한 강조입니다. 교회는 진정

요?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감옥에 가뒀을까요? 아니에요.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렸답니다. 참 용감한 선지자죠?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나단은 ‘주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선지자는 하나님 을 대신해 희망의 기별도 주지만, 때로는 책망

한 믿음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의 기별을 주기도 해요. 정말 힘든 일이지요. 그

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러나 하나님이 보내신다면 어디든 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권속, 다시 말해서 하나

선지자예요. 이렇게 선지자는 용감한 사람들

님의 가족의 일원이라는 말입니다.

이랍니다. 여러분도 선지자처럼 용감한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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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7일(안)

놀이터 같은 교회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13)

믿음 안에서의 교제로서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다 떠오른 또 다른

솔로몬 –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 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 이 없으리라”(열왕기상 3장 12절)

교회의 이미지는 놀이터입니다. 인간의 생존은 놀이에서 시작됩니다. 어머 니 복중의 태아가 움직일 때 우리는 그것을 논다고 합니다. 놀지 않으면 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

은 아이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시작부터 놀이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장 유명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솔로몬이

은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일함으로 살게 하신

아닐까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제일

것이 아니라 놀이함으로 행복하게 살도록, 즐겁게 살도록 창조하신 것입니

지혜로운 사람으로 유명하지요. 열왕기상 3장

다. 그러므로 사람이 인생을 즐겁게,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 나온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래서 사람은 놀이할 때 즐겁고 신이 납니다. 놀이에는 쉼이 있고 자유와

사람들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솔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몬이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워질 수 있었는지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놀이 공동체입니다. 놀이터라는 말입니다. 초기 교

알고 있나요? 그 이유는 기도에 있어요. 솔로몬

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감격으로 모이면 떡을 떼

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어요.

고 찬송을 부르며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며 기쁘게 살았습니다. 환난과 핍

그렇게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지혜

박 중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놀

와 더불어 재물의 복도 주셨어요. 솔로몬의 이

이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름의 뜻은 ‘화평함’이에요. 솔로몬이 하나님을

그들은 성령의 새 술에 취했습니다(행 2:13). 술이 들어가면 노래도 나오 고, 춤도 추게 되며, 놀고 싶어 지듯이 새 술에 취한 성도들은 찬송을 불렀 고 즐거워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들은 모이기를 힘썼으며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서로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놀이는 서로 사랑할 때만, 한마음이 되었을 때만 같이할 수 있습니다. 미운 사람, 싫은 사람과 일할 수는 있지만 놀이할 수는 없습니다.

잘 믿을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평화를 선 물로 주셨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한때 하나님 을 떠나기도 했어요. 젊었을 때는 하나님이 주 신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리며 성경 잠언도 기 록했지만, 중년에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뜻 대로 살았어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래

교회는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자고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

서 여러분도 너무 자만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탄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도 시험에

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람들과 함께 괴로워하

빠뜨릴 만큼 교활하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하

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할

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답니다.

때 비로소 놀이의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

다행히 솔로몬은 노년에 가서 다시 회개하고

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은 행복한 삶으로 고백됩

하나님께 돌아왔어요. 그리고 전도서를 기록했

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와 봉사와 헌신이, 즉 모든 신앙 행위가 행복이

지요.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젊은 시절에 창조

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기도 생활, 예배, 성경 공부, 전도, 헌금, 구

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제, 친교, 봉사의 모든 신앙 행위가 의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고달

하고 있어요. 우리 친구들도 솔로몬 왕의 말을

픈 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영혼의 놀이가 된다면 얼마

명심하세요. 어린 시절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

나 즐거울까요? 교회는 우리 영혼의 놀이터입니다.

92  교회지남

하고 믿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하나님 을 잘 믿는 우리 친구들이 되길 바랍니다.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8일(일)

진정한 교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2, 4)

참된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공동체를 찾을 수 있을 까요? 우리는 이런 교회를 찾기 위해 기독교 역사 이래 가장 순수했던 초기 교회로 돌아가 볼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말씀 속에서 그 교회의 모습과 더불어 교회

엘리야 –불의 선지자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 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 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 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열왕기상 18장 37절)

여러분, 가뭄이 뭔지 아세요? 가뭄은 오랫동 안 비가 내리지 않는 거예요.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식물이 죽고, 곡식도 자

안에 임했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라지 못해 먹을 것이 없게 되지요. 먹을 것이 없

을 성령행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무수한 성령의

으면 동물도 죽고, 사람들도 살지 못하게 돼요.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한 살아 계신

정말 무서운 재난이지요. 엘리야 선지자가 살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임으로 엎드러

던 시대에 이스라엘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어

져 죽는 일 같은 영적 권위와 권세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교

요.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거예요. 그런

회의 외적 모습이었으며, 이러한 권위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출현했습니

데 그 가뭄은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

다. 이렇게 시작된 신앙 공동체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가장 놀랍고 특별

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에 일어난

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된 공동체, 모든 물건을 서로

일이에요.

통용하는 공동체,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는 공동체,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 게 전설처럼 전해 주는 초기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것은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를 구현한 사 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에 비쳐진 그들의 모습은 성령으로 충만했습 니다. 흔히 사람들은 초기 교회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모든 사람에게 초 자연적인 능력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한 은사 는 오직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비상한 은사를 얻는 것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의 기별을 전하셨 어요.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이야기했 어요. “갈멜산에서 누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 나님인지 알아봅시다. 바알이 살아 있는 신이 면 바알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울 것 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있는 신이면 여호 와 하나님이 불을 내리실 것이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맞아요. 바알은 살아 있

더 훌륭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를 위

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불을 내리지 못했어요.

함이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것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제단과 그 주위

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의 물까지 몽땅 태우셨답니다. 여호와 하나님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심령을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

이 승리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으로 채우시고,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를 통해 모든 정욕과 욕망을 육신과

엘리야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함께 십자가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심령의 내적 변화를 통해서, 믿음의 행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엘리야의 이름의 뜻은 ‘여

위를 통하여,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인내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과 같

호와는 하나님이시다’예요. 그의 이름처럼 우리

이 행하도록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

이 열매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열매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존속

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참하나님이세요. 여러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매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위대

분도 엘리야처럼 참하나님을 잘 믿는 친구들이

한 역사이며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되길 바랍니다.

2018. 3.

93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19일(월)

참그리스도인

엘리사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선지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여기 한 사람이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사도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습니다(행 2:37~38).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 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열왕기하 6장 17절)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예요. 엘리야가 불병 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뒤, 엘리야의 뒤를 이 어 선지자가 되었어요. 엘리사는 물에 빠진 도 끼를 떠오르게도 하였고, 문둥병에 걸린 나아

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것이 그의 신앙의

만 장군을 고치기도 했지요. 또 독이 든 수프에

본질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아들이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서 독을 제거하기도 했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

얻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들을 살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

리사 선지자가 한 것이 아니라 엘리사 선지자

님을 믿으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주님을 찬

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랍니다.

양하며 구주 되신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주인님! 큰일났어

그는 하나님의 빛나는 형상을 자신의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영혼이 참된

요. 아람의 군대가 우리 성을 에워싸고 선지자

거룩함으로 새로워지길 갈망합니다. 그는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하나

님을 잡으러 왔어요. 우리가 죽게 되었어요.” 게

님의 날이 임하기를 고대합니다. 그의 심령은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평온해

하시가 놀라서 엘리사를 찾아온 거예요. 엘리

져 언제나 형제들의 잘못을 감싸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형제를 사랑

사가 게하시의 말을 듣고 성벽에 나가 보니 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니다. 그는 참된 사랑을 알기에 교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 신이 작은 자요, 빈약한 자요, 비천한 자입니다. 그는 온유하며, 모든 일에서 중용을 지키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에 대 해 초연합니다. 격정과 교만, 육욕과 허영, 야심과 탐욕, 이 모든 것에서 구

람의 군대가 성벽을 가득 메운 것이 보였어요. 게하시는 이제 죽게 되었다고 난리법석을 떨었 어요. 그런데 엘리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 았고, 걱정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기도했지 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엘리사가 기도한 후에 게하시가 다시 성 밖

원받았습니다. 언제나 동일한 주의를 가지고 그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을 보니,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

그 입술의 문을 지킵니다. 항상 기도와 말씀 연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

가 아람 군대를 두르고 있는 거예요. 엘리사 선

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강해지고 날마다 은혜 안

지자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에서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서 하늘의 군대를 보내신 거랍니다.

이것이 성경이 그리는 참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

엘리사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예요. 그의 이름처럼 엘리사와 이스라엘은 하

사용하는” 초기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습

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니다. 이 시대, 이런 신자는 어디에 있을까요? 모든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해

어려움에 빠질 때도 역시 하늘의 군대를 보내

있는 그런 교회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교회,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그립

셔서 도와주신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습니다.

주시지요.

94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20일(화)

그리스도인 영성의 실체

나아만 –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 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창조로부터 인간은 영적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인간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다음 하 나님께서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라는 단어입니다. 호흡 혹은 숨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에는 영(spirit)이라는 의 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태생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 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 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열왕기하 5장 14절)

여러분! 혹시 큰 병에 걸린 적이 있나요? 아 니면 큰 사고가 나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본 경험이 있나요? 목사님은 큰 사고가 나서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본 경험이 있어요. 성경에 보면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나와요.

인간 영성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

나아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아람 나라

어넣으신 것은 단지 육신이 살도록 한 숨(호흡)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

의 군대장관이었어요. 아람은 이스라엘을 괴롭

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신

혔던 나라 중 하나예요. 그런데 나아만 장군이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육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문둥병은 살

간이 단지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

이 썩어 가는 매우 무서운 병이에요. 아무도 고

이 죽은 자들을 육신이 죽은 자와 동일시하셨습니다(마 8:22).

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나아만과 그의 가족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생기로 죽었던 영이 살아

들은 매우 슬퍼했어요. 그런데 나아만이 이스

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 영성이 깨

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소녀가 있었어요. 그

어납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에 대하여 영성이 ‘있다’ ‘없다’ 혹은 ‘크다’

소녀가 이렇게 말했어요. “장군님, 이스라엘에

‘작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영성이 있거나 없거나 하며 크거나 작거나 합니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요. 그 선지자라면

다. 영성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어떤 영적 능력이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 영 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기운이며, 생기(vitality)가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운이 넘칩 니다. 그래서 영성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 기운으로 사랑하며 봉사하며 헌신 합니다. 그의 삶은 생기발랄합니다. 삶에는 열정이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 선지 자를 찾아갔어요.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거라 고 말해 주었어요. 나아만 장군은 어떻게 되었 을까요? 선지자의 말을 믿고 요단강에서 몸을 씻었을까요?

주시는 찬란한 꿈을 꾸며 두려움 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가난해도 비굴

여러분, 나아만 장군의 이름에는 ‘기쁨, 즐거

하지 않고 모자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넉넉해도 교만하지 않고 넘쳐도 자

움’이라는 뜻이 있어요. 나아만 장군이 믿음을

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영성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생기가 넘

가지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었을 때,

치는 사람입니다. 즐겁고 생기발랄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영성 있는 그리스

그의 이름처럼 기쁜 일이 일어났어요. 그의 몸

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깨끗해진 거예요. 문둥병이 나았어요. 나아

만 장군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기뻐할 수 있었어요. 우리 친구들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 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놀라운 일을 이루어 주실 거예요.

2018. 3.

95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21일(수)

표층신앙과 종교적인 삶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몇 년 전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 발표된 영화 ‘쿼바디스’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가서는 제도가 되었고, 유럽에 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에 가서 는 기업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는 영화 말처럼 분명 교

이사야 – 메시아를 예언한 선지자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 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 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사야 61장 1절)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의 초림에 관해 가장

회는 커지고 부유하게 되어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는 문밖에 계시

많은 예언을 한 선지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이

는 현실이 되었습니다(계 3:17~20). 이 영화는 줄거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야 선지자예요.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이

“교회는 점점 커졌고, 예수는 점점 작아졌다. 아버지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의 이름처럼 우리

고, 아들 목사가 다음 주인이다. 다들 탐욕에 미쳐 버렸지만 교회엔 침묵만

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

흐를 뿐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하지 못한다. 교회가 예

를 하고 있지요. 방금 읽은 성경절은 예수님께

수를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라면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 한다.”

서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삶)을 주고자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

성경 구절이에요.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습니다(요 10:10).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풍성한 삶을 풍요로운 삶

말씀을 읽으시면서 자신이 바로 예언된 메시아

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날의 천박한 물질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경 해

라고 말씀하셨어요.

석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는 요한의 말씀을 물질적 번영과 건강의 축복

전에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같은 현세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같은 번 영신학의 후원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는 복 받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풍성한 삶을 풍요로운 삶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이해는 신자 들로 하여금 표층적 신앙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합니다. 종교가 복 받는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외형만 갖추면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예배일이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

걸쳐 약 5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 자예요. 그러다 결국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멸망해 가는 조국을 바 라보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러 오실 것이라는 희망의 기별을 끊임없이 전했

리고 헌금도 드립니다. 대부분의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요. 그의 이름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

진정 그리스도를 닮은 그분의 제자가 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자

선지자예요.

신의 내면적 삶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53장은 메시아 장으로 불린 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신앙이나 종교는 그저 액세서리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이 공동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

안에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듣지 않게 조심하고 자신의 삶이 신앙적으로

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심으로

보이도록 포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이나 천국은 갈망합니다. 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것은 표층적 신앙이며 종교적인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신앙이나 삶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어요.

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정말 감사하지요?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하루 보내세요.

96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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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목) 히스기야 – 훌륭한 믿음의 왕

심층신앙과 영적인 삶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 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 전 4:7~8)

물론 표층신앙과 종교적인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 없는 삶이라는 말은 아 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생활에 계신 하나님은 대체로 하나의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근원적으로 대면해야 할 분으로 여기는 것 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어떤 것이든 제공해 주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 다. 불행하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이러한 종교적인 삶에 익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 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 다 하니라”(열왕기하 19장 19절)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이웃 나라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어요. 역사책에 나오는 것처럼 일 본의 침략을 받아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기

숙합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삶과 어떠한 어려움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

도 했지요. 그리고 그 이전에는 중국, 몽골과 같

나님과 생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영적인 삶은 언제든지 대비됩니다. 영

은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적인 삶이란 심층적 신앙입니다. 그것은 이 만물의 마지막 언저리에 살고 있

성경 속의 이스라엘 나라도 주변 나라로부터 많

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하

은 침략을 받았어요. 블레셋, 아람, 앗수르, 바

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내적 성찰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벨론 등 여러 나라로부터 침략을 받았지요.

있는 삶입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18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깨우침을 갈망합니다. 깨우침이 없는 종

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왔

교나 신앙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어요. 앗수르는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히스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란 종교적인 삶이

기야 왕에게 항복하라고 엄포를 놓았어요. 예

아니라 영적인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삶입

루살렘 성안에 갇혀 있는 백성들은 무서워 떨

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의 축복이란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 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오해해 왔습니다. 재물, 번영, 성공, 건 강, 직위와 명예, 자식의 출세 등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 안에 있는 가난

었지요. 심지어 장군들과 병사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요. 신하들이 히스기야 왕에게 말 했어요. “왕이시여, 이 싸움은 싸워 보나 마나 우리가 질 것입니다. 저 대군을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 까?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히스기

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일까요? 하나님께서

야 왕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항복했을까요?

주시는 풍성한 삶이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진 것과 없는 것의

아니에요. 히스기야 왕은 항복하는 대신 하나

차이가 아닙니다. 없는 중에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어려운 중

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에도 남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요? 놀랍게도 앗수르가 포위를 풀고 자기 나라

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축복으로 여기지 말아

로 돌아갔어요. 이스라엘은 히스기야의 기도

야 합니다.

를 통해 구원을 받았어요.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의

히스기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강하시다’라는

영성은 신학 강의를 듣거나 신앙에 관한 지성적 논쟁을 통하여 성장하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의 이름처럼 이스라엘은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분

약했지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강하

을 충직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셨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악의 세력

을 대면하는 개인적, 심층적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을 물리치는 강한 하나님이랍니다.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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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금)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요구

예레미야 – 하나님께서 높이신 선지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 후 3:11)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오늘날의 세상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진리나 복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불신앙의 탁류와 회의주의의 물결은 높아만 갑니다. 그 앞에서 복음의 능력을 잃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 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예레미 야 1장 5절)

어린 시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선지

버린 교회와 표층적, 종교적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영향

자로 부름을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력은 초라하게만 보입니다. 세상은 예수에 대하여 듣는 것이 아니라 보기를

부르시자 두려운 마음에 예레미야는 “나는 아

원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요구는 우리에게 중요한 한 질문을 생각하게 합니

이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벧후 3:11). “나는 어떠한 그리

그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네가 엄마 뱃속

스도인이 되어야 마땅한가?” 이것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돼야 하는가에 대

에 있을 때부터 너를 알았고, 너를 구별하였으

한 질문입니다.

며, 너를 선지자로 세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은 끊임없이 세상을 본받으라는 압력에 노출되어

예레미야는 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보며 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단코 세상을 본받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물을 많이 흘린 선지자였어요. 어쩌면 망해 가

(렘 18:3~4; 롬 12:2; 마 6:8).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

는 이스라엘을 위해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싶

며 가치나 기준 면에서 교회와 세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별해

었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 더 많이

주는 요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울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연

공언하는 자들과 불신자들과의 한계를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 의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고 그들과 연합하 고자 한다”(대쟁투, 588). 그러나 교회사를 통해 볼 때, 타협을 거부한 고귀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 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타협할 때가 아니라 그 둘을 구분하는 빛이

약하고 겸손한 예레미야를 사용하셔서, 비록 이스라엘이 망할지라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 이라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어요. 그리 고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망했다가 다시 회복되었어요. 예레미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높이신

가장 밝게 빛날 때 세상을 향해 진정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스

다’예요. 예레미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

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

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무엇

어요. 목사님도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정말 많

을 가르치셨으며, 그분이 무엇을 하고 사셨는지, 어떻게 사셨는지, 이런 것

이 했어요. 아마 우리 친구들 중에도 멋진 꿈을

들이 모두 중요합니다.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

려운 마음이 들어 망설이는 친구들도 많을 거

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예요.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

삶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분은 섬기고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죽으

나님께서 틀림없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에

러 오셨고 죽기 위해 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을

요. 여러분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전제로 한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갈 2:20), 이것은 우리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멋진 꿈을 이뤄 주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비결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들

신답니다.

을 보기 원합니다. 세상은 교회가 교회답기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답기를 원할 뿐입니다. 98  교회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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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안)

“다 하나님의 은혜”

요시야 – 이스라엘 최후의 선한 왕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곡은 가사와 곡조가 너무 잘 어울리는 훌륭한 찬양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사랑하는 까닭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 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 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열왕기 하 23장 25절)

라는 노랫말이 이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 입니다. 2세기 말 시온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에 가득 찬 존재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

며, 신약의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포용하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

에 빠지면 어려운 일을 만나는 것을 성경에서

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강림

보게 됩니다. 요시야 왕의 아버지인 아몬 그리

하셔서 모세에게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고 할아버지인 므낫세 시대에 이스라엘은 우상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숭배에 심취해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겪었지요. 심지어 아버지인 아몬 왕은 신하들에

은혜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

게 죽임을 당했어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요시

의 일방적 호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야는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어요.

는 개념입니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단어가 있겠지만 생각할수록 마음이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여전히 이스라엘은

끌리는 이 시대 최고의 단어는 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어요. 그리고 성전은 허

는 언제나 모든 좋은 것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물어져 갔고,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

주어지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었어요. 요시야는 온 힘을 다해 이스라엘 백성

우리 인간의 삶이란 비은혜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은혜 없는 현실 속 에서 살고 있습니다. 은혜란 성취가 아닌 선물로 외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세상, 2등은 없다는 이 세상에서 은혜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현실은 냉정합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줄 모릅 니다. 차별과 배척,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인간은 모두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지도했어 요. 무너져 가는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멈춰 버린 예배를 다시 회복했어요. 그리고 잃어버린 율법책을 발견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했어요. 요시야라는 이름에는 ‘여호와는 구원이시

그것이 표출이 안 될 뿐 늘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인정해

다’ 또는 ‘여호와가 고치신다’라는 의미가 있어

주고, 품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 그런 사람, 그런 장소를 그

요. 그의 이름처럼 요시야 왕을 통해 이스라엘

리워하는 것입니다. 사회건 가정이건 비은혜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세상은

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은혜에 굶주려 있습니다.

을 회복시켜 주셨어요. 혹시 여러분도 잘못된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볼 때, 교회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은혜(카

습관이나 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나요?

리스)라는 단어의 어원에 나타나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러한 정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어 보세요. 하나님

서보다는 엄숙함과 조심스러움입니다. 언제나 교회는 은혜보다는 도덕이

께서 여러분의 삶도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실

먼저입니다. 사실 세상이 은혜를 찾을 곳이 교회 말고 또 어디 있을까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은혜를 찾을 수 없기에 찾 는 것이 아닐까요?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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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일)

은혜의 계산법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 끝까지 믿음을 지킨 세 친구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8~9)

포도원의 품꾼을 쓰는 한 농부의 이야기(마 20:1~16)는 하나님의 은혜 와 더불어 생각나는 비유입니다. 품꾼 중에는 해 뜰 무렵에 온 사람도 있고, 오전 휴식 시간에 온 사람도 있고, 점심 나절에 온 사람도 있고, 오후 쉬는 시간에 온 사람도 있고, 끝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을 마 치고 일당을 지급할 때까지는 다들 괜찮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뙤약볕 아 래 열두 시간 꼬박 일한 충성파는 온 지 한 시간도 채 안 된 사람들의 일당 이 자기들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인은 모두에게 같은 임금을 지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 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다니엘 3 장 17절)

혹시 창씨개명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나요?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다스릴 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었어 요. 그것을 창씨개명이라고 해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당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급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처사는 노동자 동기 부여나 공정 보수와는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어요. 그때 하나냐, 미사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비유는 경제적으로 보면 전혀 말이

엘, 아사랴라는 젊은이들이 함께 잡혀갔어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분의 취지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주님이 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한 것은 바로 은혜라고 생각합

지요. 이 친구들의 이름은 바벨론식으로 사드

니다. 은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은혜란 하루 품삯처럼 계산할 수 있는

락, 메삭, 아벳느고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원래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일등이냐 꼴찌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산수가

히브리식 이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

담겨 있었어요. 그들의 이름처럼 하나냐, 미사

닙니다.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것은 이 비유를 읽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

엘, 아사랴는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을 해 질 무렵 끼어든 품꾼이 아니라 온종일 고생한 자들과 동일시한다는

멋진 청년들이었어요.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책임감 있는 일꾼으로 여기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인의 엉뚱한 처사에 당황한 당시의 일꾼들과 똑같이 불평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를 자랑하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 …상급 은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 암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실물교훈, 400). 하나님은 품삯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우리

어느 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모든 사 람으로 하여금 금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 렸어요. 만약에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뜨 거운 풀무불에 집어 던진다는 엄포까지 놓았지 요. 그런데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는 끝까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 나님을 신실히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

중 자기 공로대로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

이예요. 마침내 그들은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

한 삶 근처에 약간이라도 미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공평한

졌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뜨거

기준대로 받기로 한다면 우리는 다 가망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운 풀무불에 던져진 청년들은 머리카락 하나

은혜를 생각합니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도 타지 않고 살아서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그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시는 하나님”(시 103:10)을 생각합니다. 이 비은혜

들을 지켜 주신 거예요. 놀랍지요. 우리가 믿음

의 세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경이롭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을 지킬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으로

리고 시편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

지켜 주신답니다.

디 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100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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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월)

교회로 교회 되게

다니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믿음의 선지자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 리라”(고전 14:25)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마디로 묘사하는 데는 ‘격변’이라는 낱 말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우리 삶의 환경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불안정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시대의 영적 어두움은 더욱 깊어 갑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받지 못하고 거룩한 진리에 대한 회 의주의가 만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을 본받으라는 또 다른 거센 도덕적, 윤리적, 신앙적 압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 셨다 함이요”(다니엘 5장 26절)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지만, 느 부갓네살 왕이 그를 사랑하여 바벨론의 총리 가 되었어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 다니엘을 좋 아하던 느부갓네살이 죽고, 그의 손자인 벨사 살이 왕이 되었어요. 벨사살은 다니엘을 별로

불행하게도 “교회 홍수 시대에 예수님은 갈 곳이 없으시다.”라는 래리 크

좋아하지 않았지요. 벨사살 왕은 나쁜 왕이었

랩의 말처럼 이 시대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건물과 직원과 규정과 홍보 활

어요. 어느 날 벨사살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동이 있는 하나의 기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교회는 복음의

잔치 자리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

능력을 잃어버렸고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은 점점 초라하고 왜소해져 갑니

에서 가지고 온 거룩한 그릇들을 가지고 오게

다. 사실 역사를 통해서 교회나 개인에게 있어서 말만 많고 실제로 그 안에

하였어요. 그리고 그 그릇에 술과 음식들을 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 시기에는 별로 배울 것이 없습니다. 구약 성

아 먹었지요. 그렇게 잔치를 즐기고 있는데 갑

경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배우는 교훈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기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쓰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거예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이 깜짝

교회나 신자가 비참해지는 때는 언제일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을

놀라 두려워 떨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글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 때입니다. 기도해도 효험

뜻을 알 수가 없었어요. 왕은 다니엘을 불렀어

이 없을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난한 교회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힘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을 때 세속적 가치가 들 어오고 세속적인 성취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배설물과 같이 여기며 버렸던 쓰레기들을 다시 주워 모으며 서로 자랑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영적인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교회 행사는 많아도 영적 인 삶은 황폐해집니다.

요. 그리고 다니엘에게 글의 뜻을 가르쳐 달라 고 했어요. 여러분! 그 글의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 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는 내용이 담긴 글이었 어요. 정말 무서운 글이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두려워하지 않고, 심판의 메시지를 왕에게 전 달해 주었어요. 다니엘의 이름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언젠가 그 실상을 보이게 될 그날을 생각하며 신앙의 거품

나의 심판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예수님

을 빼고 영적 구조 조정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 땅에 요청되는 그리

께서 재림하실 때 바벨론이 심판을 받은 것처

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매여 불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

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룩한 하나님에 대하여 불경한 세상과 복음을 청종치 않는 교만한 이 도시

될 거예요. 매우 무섭고 두려운 순간이죠. 그러

속에서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애통해하며 중보의 사명을 감당하는 깨어 있

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는 각성한 신자들입니다. 진정 우리에게는 세상에 대한 정확한 현실 인식과

하나님을 잘 믿는 재림 어린이들이기 때문이에

진지한 고민 그리고 거룩한 슬픔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는 죄와 세상의

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믿고 말씀대로 살면

풍조를 따라 흘러가는 거대한 탁류를 거슬러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충성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주신답니다.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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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27일(화)

왜 재림교인인가?

에스더 – 별과 같이 빛나는 여인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7)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 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장 16절)

나는 왜 재림교인인가? 이것은 바로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물론 어 떤 사람에게는 그 대답이 간단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재림교인으로 태어났거나, 사회 문화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재림교인이 되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부모가 그러했습니 다. 그들이 재림교인이 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그레이스 켈리라는 미국의 영화배우가 있었 어요. 원래는 미국의 영화배우였지만, 후에 모 나코 왕국의 왕비가 된 사람이에요. 전에는 영 화배우였지만, 왕비가 된 이후로는 왕비로서

희생을 요구했으며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에

품격을 가지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어요. 이

대한 갈망이 있었으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렇게 한순간에 삶이 바뀌는 사람들이 있어요.

재림교회에는 다른 교회가 가지지 못한 성경적 진리가 있었으며 재림교회

오늘 소개할 여인도 그렇게 한순간에 삶이 바

만이 지닌 독특한 신앙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다른 교회와

뀌는 경험을 한 사람이에요. 원래는 이스라엘

차별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따를 가

의 고아였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페르시

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부모만이 아니라 재림교회를 선택한

아의 왕비가 되었어요.

다른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만이라는 페르시아의 총리가 무서

그러나 오늘의 재림교회는 어떠한가요? 재림교인이 되어야 할 어떤 이유

운 법령을 만들어 왕에게 나아갔어요. 그 법령

가 있을까요? 여전히 이 교회는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들어올 가치가 있

에는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

습니까? 여전히 그런 신앙 정신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 앞에서

람을 죽인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지요. 얼마나

우리는 과연 “그렇다”라는 대답을 분명히 할 수 있을까요? 역사적으로 재림교회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종말적 계시들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교회는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예언적 기 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초기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안식일 준수 재림 교도들로 발전하는 데는 요한계시록 14장 6~12절의 세 천사의 기별에 대한

무서운 법인지 몰라요. 그 소식을 에스더 왕비 가 듣게 되었어요. 에스더는 너무 슬펐어요. 왜 냐하면 이스라엘은 그녀의 고향이었고, 이스라 엘 백성은 곧 그녀의 백성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에스더는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왕에게 찾아가 그녀의 백성, 이스라엘 사

이해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서 재림 직전에 세

람들을 구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결과

천사의 기별을 전할 마지막 날의 백성들을 가지실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했

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비를 너무나 사랑한

습니다. 이것은 재림교회 신앙 정체성의 본질을 제공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왕은 에스더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었어요. 이

들을 고무시키고 선교의 방향을 제공하는 기별이었습니다.

스라엘 백성을 죽이지 않기로 한 거예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기별이 제공하는 재림교회의 신앙 정신을 잃어버

용감한 선택을 한 에스더의 용기가 이스라엘

렸습니다. 우리는 계시록 14장 7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

백성을 구원했어요. 에스더의 이름의 뜻은 ‘별’

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라는 말씀을 읽지만, 하

이에요. 그녀의 이름과 같이 별처럼 빛나는 일

나님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을 한 거예요. 우리 친구들도 에스더처럼 용감

는 때때로 속이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 사도 바

한 일들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용감

울의 말처럼 “싸움과 시기와 분노와 야심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교만과 무

한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도와주셨

질서”(고후 12:20)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던 것처럼 여러분도 도와주실 거예요.

102  교회지남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28일(수)

재림교회 신앙의 본질

에스라 –훌륭한 조력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 라”(계 12:17)

재림교회 신앙 정신 중 중요한 하나는 요한계시록 12장 17절의 남은 백성 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라는 두 가지 특징에 대한 이 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계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세상 역사의 끝이 가까울 때 이러한 계명으로 인한 갈등이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재림 신앙의 선구자였던 죠셉 베이츠는 이 말씀을 토대로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 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장 10절)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 야의 예언처럼 페르시아 시대에 회복되어 다 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때 이스라 엘 백성을 인도한 여러 지도자가 있었어요. 스

대쟁투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대쟁투 정신은 매우 중요한 재림교회의 신

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 등이 백성을 이끌고

앙 정신이며, 재림교회의 독특하고 특별한 기별입니다. 저에게 재림교회는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언제나 영적 싸움이 상존하는 실제적인 현장이었습니다. 지금껏 저는 수많

함께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고, 무너진 예루

은 영적 싸움을 목격해 왔고 지금도 그 전장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습니

살렘 성을 쌓았지요. 그런데 에스라는 성경을

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사탄,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 참교회와 거짓 교회

연구하는 학자였어요. 방금 읽은 말씀처럼 에

사이의 대쟁투가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

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으로 인도했을 뿐

(딤전 6:12)을 싸울 것을 권고합니다. 이것은 세속적 투쟁이 아닌 양심과 영

만 아니라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잊어버린 하나

혼의 싸움입니다. 복음과 진리의 싸움입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사랑으

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에스라

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이러한 대쟁투 정신의 실종입

의 가르침 덕분에 이스라엘은 잊고 지내던 하

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정신, 신념을 지키는 정신, 정직히 행하고자 하

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어요.

는 정신의 실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림교회다움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적 위기가 찾아오고 우리의 정체성은 모호해집니다. 재림교회 신앙 정신의 또 다른 하나는 엘렌 화잇을 통하여 주어진 예수 의 증거로서 예언의 선물에 대한 우리의 확신입니다. 이 교회는 예언의 선 물을 소유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재림교회는 예언의

에스라의 이름은 ‘조력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조력자는 도와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친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쉽게 이 해할 수 있나요? 목사님도 오랫동안 성경을 보 고 연구했지만,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정 말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성경을 보기 위해

선물을 포기하려는 교회처럼 보입니다. 예언의 신을 무시하거나 기피하는

여러 도움을 받는답니다. 화잇 여사가 기록한

정서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엘렌 화잇은 이제 ‘영감 받은’ 하나님께서 이

예언의 신도 보고, 주석도 보고, 여러 목사님이

교회를 위해 보내신 선지자라는 입장에서 단지 훌륭한 기독교 저술가로 폄

기록한 책들도 참고해요. 때로는 설교 말씀을

하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의 신을 읽으면 너무 아프다고 하고 어떤 사

들으면서 몰랐던 부분도 이해하곤 합니다. 이

람들은 무섭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처럼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력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책

자가 필요해요. 그러나 무엇보다 성경을 이해하

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를 깨우치시고 마

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분은 바로 하나님

침내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언의 선물을 기피하거나 경시한다

이세요.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력

면 재림교회 신앙 정신은 사라지고 맙니다. 교회는 더욱 세속 정신으로 물

자가 되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실 거

들고 우리의 영적, 도덕적 표준은 저하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오늘부터 성령 하나님께서

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를 주셔서 성경 말씀을 잘 깨달을 수 있도 록 기도하는 우리 친구들이 되어요.

2018. 3.

103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29일(목)

재림교회 신앙은 아직도 유효한가?

느헤미야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은 믿음의 영웅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재림교회 신앙 정신은 세상에 대항 문화적입니다. 또한 재림교회는 다른 복음주의 교회들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 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느헤미야 2장 5절)

교회가 세상 문화에 어느 정도 적절하게 맞추어 주어야 세상에 전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사람들을 이 세상 문화에 오히려 부적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궁전에서 왕을 섬기

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비정상적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

는 관리였어요. 어느 날 고향 이스라엘에서 하

리가 이 세상의 표준에 비추어 볼 때 비정상적이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나니와 그의 동료들이 페르시아 궁전을 방문했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는 말씀은 이 세상을, 이 세상의 문화와 가

어요.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예루살렘 소식을

치를 본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보수적 교회들이 성장하는가>라는 책을

물어보았어요. 하지만 그들로부터 들려온 소식

쓴 딘 켈리(Dean Kelley)는 아주 솔직한 대답을 제공합니다. “보수주의적

은 절망적인 소식뿐이었어요. “느헤미야, 예루

교회들은 그들이 어떤 것을 표방하기 때문에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교

살렘 성은 무너졌어요. 모든 집이 불탔지요. 성

회에 가입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특별한 진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알

전도 무너지고 없어졌어요. 백성들은 낙담해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문화에 대항하여 우위에 서 있는 교회 를 찾고 있으며, 진리와 오류가 있으며 그중 진리를 가졌다고 당당하게 믿는 그런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특별한 진리가 없다면, 그 교 회에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의 많은 재림교인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진리가 없다면 왜 재림교인으로 남아 있어야 할까요? 건강

있어요.”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큰 근심에 사로잡혔어요. 그렇게 근심에 싸여 있는 느헤미야에게 왕이 물었어요. “느헤미야, 무슨 걱정이 있느냐?” 느 헤미야는 생각했어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 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실지 몰라. 왕 에게 솔직히 말해 보자.’ 느헤미야는 잠깐 하나

한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상위 문화의 가치에 대항하여 우위에 서야 하며 주

님께 기도드렸어요. 그리고 왕에게 대답했지

변 문화가 싫어하는 진리들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요. “왕이시여, 고향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이

유명한 대항 문화적 가치는 산상수훈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백성들은 고통

수훈의 가치는 세상과 충돌하는 가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재림교회 신

당하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성을 중건

앙은 교회가 우리의 시대를 위한 예언적 기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포함

하고, 성전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되었

으로 강하게 됩니다. 종말적 계시는 재림교회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

을까요? 왕은 느헤미야가 고향으로 돌아가 성

은 우리를 이 예언적 기별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대쟁투의 정

을 중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놀라운 일

신은 양심과 영혼의 싸움, 복음의 싸움, 진리의 싸움을 하도록 재림교인들

이지요. 느헤미야의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라

을 깨우는 외침입니다. 예언의 선물에 대한 확신과 존중은 우리를 큰 빛인

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

성경의 진리에 눈뜨도록 깨우는 외침입니다. 이제는 재림교회 신앙 정신을

은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돕는 분이세요. 때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진리 에 대한 갈망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하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중이 우 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열정과 의지가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재림교회 신앙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104  교회지남

때로 우리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올 수 있 어요. 그리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 만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 하시고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 친구들이 되길 바랍니다.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30일(금)

‘오직 말씀(Sola Scriptura)’

하박국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 하여”(히 4:12)

우리가 아는 대로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종교개혁의 3대 모 토입니다. ‘오직(Sola)’이란 말은 그동안 인간이 겹겹이 쌓아 올린 인본주의 종교의 높은 탑을 깨뜨리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녀야 할 믿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 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 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 뻐하리로다”(하박국 3장 17~18절)

과 삶의 절대적인 최고 권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입니 다. 1521년 4월, 루터가 이단 사상을 출판했다는 혐의로 고발돼 보름스 제

여러분은 찬양을 좋아하나요? 목사님은 어

국회의(the Imperial Diet of Worms)에서 그의 책과 신학 사상을 철회하

렸을 때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왜

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는 이러한 역사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냐하면 찬양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목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

사님은 음도 잘 못 잡고, 박자도 잘 못 맞춰요.

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에 매

그래서 찬양하는 시간이 되면 두렵고 떨렸지

여 있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

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지 않을까

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엘렌

언제나 걱정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화잇 역시 대쟁투에서 루터의 이 답변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마르 틴 루터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 교훈은 교회의 전통과 인간의 권위 그리고 교황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과 삶의 유일한 기준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을 성경 말씀 앞에 비추어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직 말씀(성경)의 정신은 재림교회 신앙 정신의 기반입니다. 전통

정말 후회가 돼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 리가 찬양을 잘 못해도 정성을 다해 부르면 기 뻐 받아 주신다는 거예요. 성경에는 다양한 찬양이 있어요. 시편에는 정말 아름다운 찬양이 많아요. 하지만 목사님 은 그 많은 찬양 가운데서 특히 하박국 선지자 의 찬양을 정말 좋아해요. 하박국 선지자는 의

적으로 재림교회는 성경을 유일한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 왔습니다. 초기 재

인들이 고난 받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림 신자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책의 백성(people of the Book)’으로 불렸습

한 선지자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

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

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받고, 바벨론이나 페르

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아는 축복받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하박국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어

하는 그런 진지한 애씀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순수했던 처음의 신앙 정신

요. 하박국 선지자의 이름은 ‘껴안는 자, 매달

이, 성경의 진리들을 탐구하는 그 말씀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인간적 욕망

리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매달리고 기도

과 적당한 타협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무관심으로 대치되는 현실을 부인할 수

했을 때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의인은 믿음으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교회, 말씀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

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메시지를 주셨어요.

린 교회,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이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지 못하는 교회

하박국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너무 기뻤어

와 우리 자신 역시 500여 년 전 루터 시대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회개와 개혁 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이제 교회는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날 선 검과 같 은 우리의 환부를 찔러 쪼개는 예리한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어 요. 나의 형편, 내가 가진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 이 아니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지요. 우리 친구들도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 로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2018. 3.

105


Daily ┃ 오늘을 위한 생명의 양식

devotional

3월 31일(안)

두 교회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역사를 통해 로마 가톨릭의 부패로 1천 년 동안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한

말라기 –하나님의 사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 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 이요”(말라기 3장 1절)

시대를 중세 종교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의 시대에도 한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motto)가

구약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말라기로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였다면,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빛난다”(요 1:5)라는

마칩니다. 말라기는 구약 시대에 마지막으로 활

말씀은 왈덴스인들의 모토였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언제나

동한 선지자예요. 말라기 이후로 오랫동안 이

당신의 충실한 백성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종교적인 배도와 부패와 타락

스라엘에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말

이 만연한 시대에도 무서운 핍박과 환란을 감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

라기라는 이름은 ‘나의 사자, 나의 메신저’라는

한 신실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왈덴스인들이 그 사람들이었습니

뜻을 가지고 있어요. 사자는 왕을 대신해 다른

다. 이 시대에 우리가 왈덴스인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

사람에게 왕의 명령을 전하는 사람을 말해요.

엇일까요? 그것은 어두운 배도의 시간에도 진리의 빛을 비추었던 그들의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

고결한 신앙과 무서운 박해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그들의 견고한 신앙과 용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중세에 지어진 많은 예배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고 그 건축물들이 주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 교회의 교권에 압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당시 교회가 이런 호 화스러운 교회당과 수도원을 건립하기 위해 얼마나 사람들을 기만하여 돈

나님의 사자였어요.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의 책 을 보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고 하 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뒤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 시대에 다시 고 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다시 짓고, 느헤미야를 중심

을 내도록 강요했을까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류와 미신으로 얼

으로 예루살렘 성도 다시 건축했지요. 에스라

룩졌던 중세 암흑시대의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잃어버리고 종교의 형식만

와 같은 성경 학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정

남은 교회의 모습을,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대로 살도록 가르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오랜 박해 기간 동안 진리의 횃불을 밝혔던 교

쳤어요. 그리고 여러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

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박해를 피해 산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보잘것없는

을 전하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

작은 왈덴스인들의 광야 교회입니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

종하며 살도록 지도했어요.

의 대도시에 거만하게 자리 잡고 있는 교권 교회가 아닌 이 ‘광야 교회’는 하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100년이 지나면서

나님께서 온 세상에 나누어 주라고 당신의 백성에게 맡기신 진리의 보화를

신앙에 대해 무감각해져 갔어요. 뜨거웠던 믿

잘 간수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참교회였다”(대쟁투, 64). 이 두 교회, ‘교권 교

음도 식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않았지

회’와 ‘광야 교회’는 인간의 종교와 하나님의 종교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줍

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를

니다. 이 두 교회는 형식과 진리, 어둠과 빛, 거짓과 참, 외형적 종교와 내면 적 종교, 교만한 인간의 종교와 겸비한 하나님의 종교를 대비시켜 주는 상 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분명 어둠이 밤의 한 경점을 지나는 시대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는 두 교회가 공존합니다.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 거예요. 성경 은 오늘날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입니 다. 우리 친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 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돕지요. 우리가 말 씀대로 사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 이랍니다. 올 한 해도 말씀대로 사는 우리 친구 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106  교회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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