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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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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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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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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서론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30
만약 당신이 5년 전에 내게 언젠가 내가 잠언 31장에 나오는 이
구절로 시작하는, 기독교 여성을 위한 책을 쓰게 되리라고 말했다 면, 나는 아마 당신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렸을지도 모른다. 성경에
서 여성에 대해 언급할 때 이보다 더 많이 인용되는 구절은 없을 테
지만, 질리도록 뻔한 이 구절을 나와 함께 끝까지 살펴보면 좋겠다.
이제 이 일을 위해 잠언 31장 30절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 구절에 담긴 여성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내용
도 살펴보려 한다.
서론 ┃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이 된다는 것 9
우리 어머니 집에는 17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
한 남녀의 작은 타원형 초상화 두 점이 걸려 있다. 이들은 뉴욕 호
머에 사셨던 데이비드와 낸시 코이 부부로 내 외증조할머니의 증조
할머니와 할아버지다. 우리는 이분들을 ‘조상’이라고 애정을 담아
부르는데 이들은 회중 교회와 장로교를 믿는 강직한 시민이셨다.
사진에서 이분들은 문명이 흔들리지 않게 애쓰는 듯한 표정을 짓고
계신다. 그분들의 얼어붙은 표정에서 그 삶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
할 수 있다. 특히 낸시 할머니는 농담이라곤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
의 표정을 짓고 있다. 만약 화가가 그림의 범위를 넓혀 할머니의 상
반신까지 그렸다면 낡은 성경을 꽉 움켜쥐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동시대 다른 여성들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할머니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를 구체화한 모습을 하고 있으시다. 오늘
날 누군가를 그렇게 부른다면 참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낸시 할머니의 시대에 그런 말은 잠언 31장 30절과 직접 연결되는
아주 높은 칭찬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여성을 경건하다고 칭찬하고 싶을 때 우리는
“그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또는 “그는 주님과 아주 가까이
서 동행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할 것이다. 이런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아마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오프닝
장면에 나오는 줄리 앤드루스의 스틸컷처럼 들판과 필터링된 햇빛
이 나오고, 팔을 뻗은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배경이 부드럽게
처리된 사진일 것이다. 이는 경건함을 묘사하기에 나쁜 방법은 아
니지만, 낸시 할머니와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나는 존경하는 낸시
할머니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에 대한 우리 현대 여
성들의 개념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물어볼 여지는 없을까
궁금해진다. 낸시 할머니가 더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 니다.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성에 대한 더 정확한 개념이 근
엄한 찡그림과 인공적 달콤함의 미소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이 시점에서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은 고백을 하나 하자면, 성경
에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구절이 잠언 31장에 나오는 구절이 아
니라는 것이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성경 구절은 시편 111편
10절이다.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 야 할지 막막했던 20대 초반에 이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 신학을 공
부해야 할까? 멘토를 구해야 할까? 성경을 외워야 할까? 그 당시 내
신앙은 주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형성되
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하나님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
을 읽다가 시편 111편 10절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내
질문에 가장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답해 주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읽어야 했다. 내가 갈망하던 지
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지혜의 모든 출발점 중에서 주님을
서론 ┃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이 된다는 것 11
경외하는 것은 나 혼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구절은
음악을 틀고 팔을 벌려 운동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싶게 만드는 구
절이 아니었다. 내가 교회에서 자라던 시절의 하나님은 포근한 아
빠 하나님,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지상의 아버지와 매우 흡사한 분
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개념은 내게 낯설었다. 어떻게 지혜로
가는 길의 출발점을 주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 성
경 구절을 훑어보면서 내 눈은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꾸
려고 계속 노력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지혜의 시작이 되어야 하
지 않을까? 어떻게 성경은 단숨에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
낸다고 말하고는 돌아서서는 두려움이 지혜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친근하고 접근하기 쉬운 분, 주기도문에
서 “우리 아버지”라고 사랑스럽게 부르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 하
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다. 자비롭고 영광스러운 아버지시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할 때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주님이 단지 거기에서 그
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다른 모든 이름보다 거룩한 이름
을 가지신 “하늘에 계신” 분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도록 배운 그 아버지가 또한 그룹들 사이에 앉으셔
서 열방 가운데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우주의 주라는 사실을 아
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포근한 지상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것은 아니므로
아빠 같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더욱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
리 중에는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낸시 할머니처럼 )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비난의 눈초리를 던지고 계신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고 우
리를 애지중지하지도 않는 하나님, 즉 “우리 아버지”시면서 “하늘
에 계신” 완벽한 균형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 준다. 이런
균형을 찾으려면 시편 111편 10절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어떻
게 사용하는지 올바른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를
찾아볼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
의 거룩하심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해 설명한다. 둘 다 우리를 떨게
할 수 있지만, 후자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회개하게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과 나는 두려움에 떨며 천둥과 번개가 치는
시내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영광스러우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온산으로 기대하며 나아간다( 히 12:18-24 ).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으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받
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라”( 28-29절 ) 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움츠러드
는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존경심과 경외심이 주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정의한다.
주를 예배하려는 존경심과 경외심이 지혜의 시작이다.
주님을 올바로 두려워할 때, 우리는 주님을 무서워 떨면서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확신하며 하
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보장해 주신다. 우리는 귀신들처럼
떨지 않는다. 귀신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올바로 두려
워한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서 만족되었
음을 이해하는 자처럼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한
계가 없으시고 따라서 우리가 아는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전혀
다른 분이다. 바로 이것이 지혜로워지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시편 111편 10절의 메시지를 뒤집어 생각해 보라. 여호와
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일 뿐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잠언
31장 30절의 이중적 권고 사항이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의 위엄 바라보기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위엄에 대한 이야기로 시야의 공백을 메운다. 배우자나 지도자를
존경하게 된다. 자녀나 친구를 숭배한다. 심지어 우리 자신을 향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기도 한다. 이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사람을 숭배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비합리성의 결정판이다. 그리고 이는 피곤한 일이다.
이 책은 고풍스러운 타원형 액자에 담긴 누렇게 색이 변한 초상 화와, 또한 인스타그램의 부드러운 필터로 장식된 프레임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성’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려는 책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점 10가지
다음 장에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묵상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
장 합리적인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
서 다른 사람과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 오직 하나님만 가지신 모습
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경향성을 정확히 응시하게 되길 바란다.
잘못된 방식으로 잘못된 것을 두려워하며 보내기에는 인생은 너
무 짧고 너무 소중하다. 나는 우리가 다른 누구와도 다르신 하나님
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배우자고 제안한다. 그래야만 사람에 대 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며, 자기 숭배는 잠잠해지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리라. 나는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 되어 시온산 기슭에 기쁨으로 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길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지
혜로워지는 시작점에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것 15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
주님,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사모합니다.
그 섭리의 알 수 없는 심연,
유한한 인간의 소리와 함께하기엔 너무 깊습니다.
미미한 우리의 감각으로 보기엔 너무 어둡습니다.
아이작 와츠
내가 태어나던 날, 나를 분만하게 해 준 의사는 내 출생 기록부에
흔들리지 않는 손으로 7파운드 11온스, 21인치( 약 3.5킬로그램, 53센티
미터 ) 라고 적어 넣었다. 그것은 내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였다.
이 효력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그 후 몇 년 동안 제공하겠지만,
1969년 2월 4일, 내가 처음으로 반항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처음으
로 반항적인 말소리를 내고, 처음으로 불순한 발걸음을 내딛기 훨
씬 전, 내 인생의 가장 처음 순간에,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내가 누구
인지의 격차는 내가 측정 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로 이미 확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모든 논의는 우리는 측정
가능하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
야 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한계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측정도 거부하신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의 바탕을 이루며, 그 능력, 지식, 사랑, 자비는 단순히 위대할
뿐 아니라 무한히 위대하고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 그 누
구도 하나님의 어떤 면을 저울이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책을 쓰는 일이 특히 어렵게
느껴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중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사랑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를 말해 준다. 이 찬송가를 쓴
작사자는 그 사랑을 완전히 헤아리려는 노력이 얼마나 무익한지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렇게 표현한다.
잉크로 바다를 채울 수 있을까?
종이를 하늘에 펼친다 해도
지구상 모든 나무줄기가 펜대라 해도
모든 세상 사람이 다 글 쓰는 이라 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적는다면
바닷물을 전부 마르게 하겠고
두루마리에 그 사랑을 다 담을 수도 없겠네
종이를 이 하늘에서 저 하늘까지 펼친다 해도! 1)
나는 잉크로 아주 작은 두루마리에 글을 쓰는 미약한 사람이다.
내 임무는 하나님의 속성 열 가지에 대한 몇 가지 빈약한 통찰력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열 가지로 말이다. 나는 내 한계를 그 어
느 때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기 위
한 이 지속적인 시도로서 내 역할을 다하고 싶다. 신실한 작가들이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해 주었다. 스티븐 차녹, 아서 핑크, A. W. 토저, R. C. 스프로울은 모두 하나님의 무한하신 성품을 탐구해 내게 큰
유익을 주었고,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이까지 탐구해 주
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이 저자들이 조명한 하나님에 대한 그
고귀한 관점을 취하면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하나님이
이러이러하시다는 지식은 내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속성을 묵상한 결과, 측정
할 수 있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할까?
우리가 측정을 좋아하는 이유
한계가 많은 우리 인간은 측정하기를 좋아하고 숫자를 세며 정량
화하고 관찰한다. 당신의 식료품 창고를 들여다보면 아마 상자마다
내용물의 무게가 적혀 있을 것이다. 식품의 라벨마다 특정 식품의
칼로리, 지방, 그리고 탄수화물 함량이 표기되어 있을 것이다. 자동
우리와 다른 점 10가지
차 기름 표시판에는 기름통에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표시되어
있다. 시계는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 준다. 예
산은 당신이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을 알려 준다. 소셜 미디어 계정은
여러분의 친구 범위를 측정해 준다. 우리는 측정 시스템에 사방으
로 둘러싸여 있다.
측정에 대한 인간의 강박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고대인들은 하늘
의 움직임을 추적했는데, 그들이 측정했던 도구를 우리는 협곡에
있는 조각이나 돌 반지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고대인들은 조수와
계절, 시간의 흐름을 측정했다. 측정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
신의 세계를 정량화해 그 한계를 초월하려는 유한한 인간의 수천
년 된 집착이다. 우리가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후지어> ( Hoosiers, 1986 ) 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인디애나주 히코리 지역의 작은 마을 농구팀이 노
먼 데일이라는 코치의 지도로 자신들의 뛰어남을 발견하는 이야기
를 담고 있다. 영화의 결말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으며 80년대 신시
사이저 음악은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영화 속에는 진 해크먼과 바
바라 허쉬의 ‘영화 제작 역사상 가장 어색한 키스신’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타이틀을 거머쥔 장면도 있다. 하지만 영화 1분 34초가
지나면서 영화는 걸출한 장면을 보여 준다.
1951년 주( state ) 결승전에 진출한 데일 코치의 작은 마을 시골 소
년 팀은 챔피언 결정전이 열릴 장소를 처음 보게 되는데, 그곳은 자
신들이 올 시즌 내내 경기를 치렀던 작은 마을 고등학교 체육관의
10배에 달하는 거대한 체육관이었다.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진 가
운데 데일은 줄자를 꺼낸다. 그는 한 소년에게 백보드에서 자유투
라인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여 보고해 달라고 부탁한다. 약 4.6미터
였다. 두 선수에게 바닥에서 네트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달라고 부
탁한다. 약 3미터였다.
데일은 살짝 웃으며 “여러분은 이 체육관이 히코리에 있는 우리
체육관과 똑같은 치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안심할 수 있다는 보
편적인 진리를 보여 주므로 훌륭하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편안함
과 통제에 대한 감각을 준다.
인간은 환경뿐 아니라 동료 인간도 측정하려 한다. 새로운 지인을
사귀거나, 정치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직업을 구하려고
면접을 볼 때 우리는 상대방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격과 능력을 ‘측정’한다. 상대방의 속성을
정량화해 신뢰나 지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나 판단하고 그 기대
치를 현실적으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우리는 또한 비교를 위해 자신과 타인을 측정한다. “나는 똑똑한 가?”, “나는 부자인가?”, “나는 도덕적인가?”와 같은 질문에 “누구
와 비교해” 대답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잣대를 신중하게 선택하며, 종종 자기 결점이 비교 대상에서 우위에 서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을 유리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한다. 우리
는 내가 아무개와 비교해 정말 더 똑똑하고, 더 부유하고, 더 도덕적
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한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우리보다 더 똑똑
하고, 더 부유하고, 더 도덕적이지 않은 한, 우리는 자신이 우월하다
는 신화를 계속 믿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경쟁자가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의 개인
적 우월감을 뒤엎기 시작하신다.
측량할 수 없는 우리 하나님
피조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정량화하고 측정과 비교를
통해 통제하려는 인간의 마음에는 신격( the Godhead ) 이 수수께끼처
럼 다가온다. 성경의 하나님은 측정할 수 없고, 정량화할 수 없으며,
담을 수 없고, 제한이 없는 무한하신 분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
도 하나님을 온전히 측정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물리적 또는
정신적 경계 안에 가둘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으며, 하나님 곁에다 우리의 선함을 쌓을 수도 없다. 욥의 친구 소발은 이
런 우리 딜레마를 잘 표현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의 무한함을 찬양한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시 145:3).
솔로몬 역시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역설적이게도, 헤아릴 수 없는 이 하나님이 만물의 척도가 되
신다.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대조에 주목해 보라.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 40:12-13).
간단히 말해 누가 이 모든 것을 측정했는가? 하나님이다. 누가 하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점 10가지
나님을 측정했는가? 아무도 측정하지 못했다.
많이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은 방주와 성막, 성전과 도시의 치수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있으시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다. 머리털의 수를 세신다. 별과 모래알의 수
를 세신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우리 팔다리의 길이와 머리뼈의 둘
레를 정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그리고 의도
를 가지고 손바닥 넓이로 측정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측정하시는
모든 것은 완벽하다. 하나님이 묶으시는 모든 것은 완벽하게 경계
가 정해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무한히 세밀하고 한계가 없
으시며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다.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
소발이 말한 것, 다윗과 솔로몬이 경배한 점, 이사야가 이해한 것
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는 경쟁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뿐 아
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이 거할 경계를 측정하시고 정
하신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 전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 하신 한계를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데 할애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시련, 징계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으로 그 한계를 가르쳐 주 신다. 이런 수단을 통해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아는 그 누구도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 켜 주신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피조물보다 무한
히 높으시고 비교할 수 없는 분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하나
님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무한한 것을 제한된 용어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어떻게 비교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하늘의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인간의 언어를 찾았던 것처
럼, 우리도 자신을 보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표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홍해 바닷가 모래
에서 젖은 샌들을 신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늘 한가
운데 떠 있는 질문의 무게를 느낀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시편 기자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6).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의 한계 안에 존재하는 피조물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온전
히 표현하기는커녕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
은 아주 첫 순간부터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경쟁하려 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우리 첫아들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의 한계를 탐험
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만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은 어디였을까? 어린 자녀를 20개의 물건이 있는 빈방에
두면, 그중 19개는 만져도 되고 한 개는 만지면 안 되는 물건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점에는 어떤 부모든 동의할 것이다.
처음에는 허용된 물건을 가지고 만족스럽게 놀 수 있지만 얼마 지
나지 않아 그 아이는 금지된 물건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곧 아이는
금지된 물건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지만 실제로 만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드럽게 말로 경고하면 아이는 부모에게 시선을 돌리고
자기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겠지만, 부모가 물리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아이는 결국 20개의 물건 중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그
한 가지 물건에 손을 댈 게 거의 확실하다.
이 과정이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웃음을 감추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아이 내면의 도덕적 줄다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고, 꾸밈없는
아이의 솔직함과 친숙함이 참 재밌었다. 우리는 한계를 시험하려는
욕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서 침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
을 전기 콘센트에 넣거나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벽에 이름을 쓰지
않을 만큼의 자제력은 키울 수 있지만, 여전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만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뻗고 싶은 강박감이 우리 안에 남
아 있다. 우리는 선을 넘고, 경계를 허물고, 울타리를 뛰어넘는 사람
이며,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우리에게 필요하거나 즐거운 것을 보
류하기 좋아하신다는 왜곡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즐기면서도 하나님이 설정하신 경계를 지나치게 인식
하고 그 경계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
아홉 가지 선물을 주시고 한 가지 위험에서부터 멀리하라고 경고하
시지만, 우리는 보류된 것이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고 바람직한 게
아닐지 의심한다.
우리는 성경 첫 페이지에서 이 패턴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안전과
기쁨을 위해 설계된 환경 속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만드신 우리의
부모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곧 하
나님처럼 될 수 있는 자격인 줄 착각했다. 인간 존재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꼭 하
나님처럼 되고 싶었다. 창조주는 아담과 하와를 붙잡고 계셨다. 그
러나 교활한 목소리는 손을 뻗으면 무한한 것을 잡을 수 있지 않겠
냐고 이들에게 제안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
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렇게 유한한 존재는 낮은 나뭇가지에서 무한한 존재를 뽑아 보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점 10가지
려고 손을 뻗었고,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향해 인간의 긴 팔을 뻗
은 이 첫 번째 움켜쥐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창조 세계의 모든 봉
우리와 모든 틈새에 빠지고 무너지는 하나님과의 경쟁이라는 파괴
적 패턴을 시작하게 되었다.
되비출 것인가 경쟁할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길 갈망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도록 설계된 우리는 대신 하나님의 영 광과 경쟁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 즉 무
한한 존재에게만 적합한 속성에 손을 뻗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우
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경배하고 신뢰하기보다 스스로 모
든 것을 알려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경외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영향력 영역에서 궁극적인 힘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안주하기보다는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 자신의 죄 패턴을
가리키며 우리는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는 존재라 선언한다. 우리
의 아버지 아담과 어머니 하와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한계를
거부하고, 어리석게도 우리가 휘두를 수 있고 소유할 자격이 있다
고 믿는 무한함을 갈망하며 하나님만을 위한 것을 갈망한다. 구속
받은 자로서도 우리는 경쟁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갈망한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할 때 두 가지 목록을 만 든다. 한 목록은 하나님에게만 해당하는 속성이 포함되어 있다. 다
른 목록에는 하나님에게 해당하나 우리에게도 해당할 수 있는 속성
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그런 목록의 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은(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
무한하시다 거룩하시다
이해를 초월하신다 사랑이 많으시다
자존하신다 공의로우시다
자족하신다 선하시다
영원하시다 긍휼이 많으시다
불변하신다 은혜로우시다
어디에나 존재하신다 오래 참으신다
전지하시다 지혜로우시다
전능하시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질투가 많으시다
주권적이시다 신실하시다
의로우시다
진실하시다
두 목록에 나온 모든 속성은 하나님에 대해 무한히 참이다. 성령
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오른쪽 목록이 우리에게 사실이 된다.
이 목록은 우리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며 걸을 때 성장하는 것들
의 목록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이 목록이 바로 우리가 살피는 목록이다. 이 목록은 그리스도처
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세상에 다시 비추는 방법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점 10가지
이 책에서 살펴보려는 문제는 우리 인간이 왼쪽 목록에 적힌 내
용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 있다. 이 목록은 하나님께만 해당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도 해당하길 원한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경쟁하려고 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오른쪽 목록이 우
리에게 참이 되길 바라기보다 왼쪽 목록이 우리에게 참이 되길 더
원한다. 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면 스스로 다음의 두 질문을 해 보라.
1.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을까 계획하 며
2.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지배할 무한한 힘을 얻을까 계획 하며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른쪽 목록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지만 우리는 왼쪽 목록, 즉 우리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는 목록에 끌린다.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영광을
훔치려 한다. 뱀이 하와에게 속삭이듯,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라 고 속삭이는 목록이다. 이 목록을 갈망하는 것은 죄악 가운데 있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성향이지만, 새로운 열망을 가진 새 마음을 받 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오른쪽 목록을 갈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른쪽 목록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생명을 나타 낸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님께만 참된 속성의 목록을 다루겠다.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