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칼뱅 작품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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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54년 10개월 17일을 살았고 절반을 거룩한 복음 사 역으로 보냈다. 그는 보통 키에 약간 창백하고 거무스름한 안 색과 죽을 때까지 맑았던 눈을 가졌고 총명을 타고났다는 말을 들었다. 옷차림은 세련되지도 남루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절제 라는 말이 어울렸다. 식사도 절식했으며 허접이나 향락과는 매 우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우 적게 먹었는데, 많은 햇수 동안 약한 위장 때문에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

* * * 칼

고 기억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그가 한 번 본 사람은 많은 해가 지난 후에도 즉각 알아보았으며, 구술 도중 종종 몇 시간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동안 혼란이 생길 경우, 알려 주지 않아도 이내 받아쓰던 곳으

<기독교 강요/초판, 1536>

로 돌아올 정도였다. 또한 자신의 소임 때문에 알아 두어야 할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중대한 것은, 아무리 무한히 많은 업무로 압박을 받아도 결코 잊지 않았다. 판단력은 상담 내용이 무엇이든 맑고 정확해 거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의 예언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의 충고를 따른 사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람이 방황한 기억이 없다. 그는 말솜씨를 경멸했고 말을 적게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도 (시샘하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맑게, 더 무게 있게, 더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통찰력 있게 글을 쓰지 못했다.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했으나 결코 부적합한 작가는 아니었다. 이날까지 어떤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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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즈의 칼뱅 전기>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박건택 옮김

<칼뱅 서간집>(1530~1538)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69-1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4,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1

Jean Calvin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Articles de 1537 )… …………………………………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 1537)………………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Confession de la foi [de Farel], 1537)………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Les Ordonnances Ecclésiastiques , 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Catechismus , 1545)………………………………………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L’ordre du Collège de Genève , 1559)… ……………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 (Les Ordonnances Ecclésiastiques de 1561 )………………………………… 359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 ……………………………………………………… 144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1533)… ……………………………………………………………………… 6 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1536)…………………………………………………………………… 44 성만찬 소고(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1549/1555)… ……………………………………………………… 94


스캔들 론(1550)… ……………………………………………………………………… 150 유언과 두 고별사(1564)………………………………………………………………… 288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6 성물론(1543)… ……………………………………………………………………………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341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1543)…………………………………………………………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1552)… ……………………………………………… 330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1534/1542)… ………………………………………………………… 6 재세례파 논박(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1547)… …………………………………………… 348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1537)… …………………………………………………………………………… 6 신도의 처신(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 185 네 편의 설교(1549/1552)… …………………………………………………………… 211 세르베투스 논박(1553)… ……………………………………………………………… 298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 333 2. 참고문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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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역자 서문 |

1990년대 초부터 진행해 온 편역자의 칼뱅 한국어화 작업은 다음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하나는 한국 장로교회의 영적 뿌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고전 인물의 한국어 텍스트가 총서로 묶여 도서 관 및 관련된 개인/단체 서재에 꽂혀 있어 활용되어야 할 당위성이다. 활용이라 함은 일례로 논쟁이 되는 사건 ( 세르베투스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 ) 을 텍 스트로 확인해 보는 일이며, 나아가 2차 자료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지 적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칼뱅, 나아가 동아시아의 칼뱅의 가 능성 여부를 타진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길 바라는 소망이다. 번 역의 정확성도 여전히 미흡한데다, 아직 아무 결과물도 내놓지 못한 채 거창한 주제를 언급하는 것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지만, 이것이 편 역자가 지금껏 시도해 온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의 궁극 목적이다. 첫째 목적은 텍스트의 분량과 정확성으로 평가될 수 있다. 분량으 로 말하면 전집이 아니기에 추가되어야 할 문서들이 더 있을 수 있지만 주요 소품들은 모두 갖춰졌다. 16세기 용어의 정확성은 지속적으로 확 인될 필요가 있다. 소품의 내용 확인에 목적을 두었던 편역자에게는 중 세와 근대를 아우르는 유럽의 정치와 법을 아우르는 제도사까지 연구할 여력이 없었다. 둘째 목적의 성취 여부는 방법론에 달려 있다. 칼뱅의 <서간집> 1권과 <기독교 강요> ( 1541 ) 프랑스어 초판이 청년 칼뱅을 통해 개혁신학의 태동 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칼뱅의 생애를 관통하는 본 소품집은 제

8 | 칼뱅 작품선 1


네바의 개혁교회와 신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얼마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당연히 이 과정의 결과물 로 여겨질 수 있다. 이 제네바 개혁신학은 유럽과 신대륙으로 이동하는 동안 모판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또한 각 현장의 수용 과정에서 전혀 변 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양 세계에서 역사적 개혁주의는 무엇을 의미 하며, 비 서양 세계의 다른 토양에서 개혁교회와 신학을 수용하고 확장시 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로서는 토론만을 양산시킬 뿐인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길은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일 이다. 그래도 질문은 계속된다. 제네바 개혁자가 전기 칼뱅과 후기 칼뱅 으로 나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소품집에서 칼뱅의 변화하는 모습을 발 견할 수 있는가? 답을 얻으려면 직접 읽어 보는 수밖에 없다.

1. 방법론

칼뱅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와 활 동, 저술과 사상을 총 망라해야 한다. 칼뱅의 생애를 다룬 책들은 베즈 [베자]가 선배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두 편의 전기물1  )  이후 한동안 뜸 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야말로 봇물이 터지도록 쏟아져 나왔다. 7권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에밀 두메르그2  )  에서부터, 기독론을 종합 으로 하는 변증법적 이해를 시도한 카를 바르트와 빌헬름 니젤,3  )   텍스 트를 통해 가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 내려한 프랑수아 방델,4  )   변 증법 신학의 우산에서도 개혁자의 다양한 텍스트를 소개한 T. H. L. 파

1  )   Théodore de Bèze, La vie de Jean Calvin , 1564; Vita Calvini , 1575. 2  )   Emile Doumergue, Jean Calvin, 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 , Lausanne, 7

vols., 1899-1927. 3  )   Karl Barth, The Theology of John Calvin , Eerdmans, 1922; Will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 1957. 4  )   François Wendel, Calvin: sources et évolution de la pensée religieuse , Paris, 1950.

편역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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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5  )   개혁자의 청년 시절 분석을 통해 역사적 칼뱅 연구의 문을 열어 준 알렉상드르 가녹지,6  )   그리고 역사적 칼뱅 연구가 만들어 놓은 결과로 서 개혁자의 내면적 심리를 추구한 일련의 역사가들 ( 윌리엄 바우스마, 드니 크 루제 ) 7  )  까지

말이다. 물론 이 외에도 개혁자를 경건의 코페르니쿠스적 혁

명가로 묘사한 장 카디에,8  )   칼뱅을 레닌에 비유한 엘리스터 맥그래스,9  )   개혁자를 움직이는 초상화로 그려 낸 베르나르 코트레10  )  도 언급할 가 치가 있다.11  )   새 밀레니엄을 맞이해서도 마치 100년 전에 그러했듯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학자들이 칼뱅의 전기물을 남겼으며, 특히 2009년을 전후로 이 위대한 16세기 인물에 대한 엄청난 충적물이 형성 되는 듯하다.12  )   지금까지 칼뱅의 전기물들이 상당수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또 국내 학자들의 저술도 있으므로 개혁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얼마 간 객관적인 지식을 얻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저술과 사상의 영역에서 우 리는 철저히 의존적이다. 정작 칼뱅 자신의 텍스트를 한국어로 읽어 낼 기회가 없는 토종인들에게 그들의 번득이는 지혜와 직관은 별반 쓸모없 는 모양새다. 물론 주요 자료들이 번역 안 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여 기서도 ‘통전적’ 읽기다. 몇 가지 텍스트만으로 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우리는 칼뱅에게 한복도 입혀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적 칼뱅’이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방향은 그렇게 되어

5  )   T. H. L. Parker, John Calvin , A Lion Paperback, 1975. 6  )   Alexandre Ganoczy, Le jeune Calvin: Genè se et évolution de sa vocation réforma-

trice , Wiesbaden, 1966. 7  )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th Century Portrait , Oxford, 1988: Denis

Crouzet, Jean Calvin: Vies parallèles , Paris, Fayard, 2000. 8  )   Jean Cadier, Calvin: l’homme que Dieu a dompté , Paris, 1958. 9  )   Alister E. MacGrath, A Life of John Calvin , Basil Blackwell, 1990. 10  )   Bernard Cottret, Calvin: biographie , JCLattès, 1995/ Patot, 1999. 11  )   박건택, “칼뱅 전기물 연구”, 신학지남, (2004/가을). 12  )   참고. Olivier Abel, Jean Calvin , Paris, 2009; Bruce Gordon, Calvin , 2009; Herman J.

Selderhuis, John Calvin: A Pilgrim ’s Life , IVP, 2009.

10 | 칼뱅 작품선 1


야 한다. 칼뱅 연구의 방향은 오랫동안 교의학의 방면으로 치중되어 왔다. 이 미 16세기에 베즈에게서 칼뱅의 신학의 중심은 예정론으로 흐르면서 개 혁 교의학은 스콜라주의의 색채를 띤다. 20세기에 쌓인 무수한 칼뱅 연 구물들을 분석하면 거의 70% 가까이가 교리 해설서다. 교의학자로서의 칼뱅 이미지는 지난 세기의 중후반까지 강세로 지속되었고 지금도 일 부는 이 이미지를 숭상한다. 새로운 문명의 토대를 제공하고, 특히 초기 근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근대적 칼뱅 이미지는 정확히 교의학 적 칼뱅 이미지의 진행과 반비례한다. 오늘날은 근대 정치와 경제에 끼 친 칼뱅과 칼뱅주의의 영향을 다루는 책들이 더 많이 보이는 듯하다. 그 러나 모더니즘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근대적 칼 뱅 이미지는 흉물스러울 수 있다. 교회와 국가 (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말은 모호 하다 ) 가

분리된 사회에서 종교적 견해를 국가의 통치 이론으로 삼는 칼뱅

의 정치철학은 이미 근대에서도 구시대에 속한다.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 전을 이끌어 왔던 칼뱅주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칼뱅의 내 면성과 신앙을 자아성찰의 차원에서 들여다보는 일은 서양 사회에서 당 연한 귀결점이다. 그런 점에서 칼뱅의 자성적 이미지는 20세기 후반에 칼뱅 연구의 새 방향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라틴 기독교 세계 에서 벌어진 일이고 우리에게는 뭔가 맞지 않는 옷과 같다. 물론 청바지 나 양복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고 한쪽으로 버려진 우리 옷들이 어색 한 느낌이지만, 이 전통은 결국 우리 혼과 함께 다시 돌아오며 적어도 병 행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칼뱅을 읽을 것인가? 답은 단순하다. 처음부 터 꼼꼼히 읽으면서 우리의 고전과 대면하기 위해 우리의 정신, 우리의 직관, 우리의 내면성에 맡겨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도전받는 독자에게 해 당된다. 도전받았다는 것은 토종으로서의 인문학적인 토양이 쌓여 있 음을 전제한다. 어찌됐건 우리는 서양의 근대 초기의 인문주의자이자 편역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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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누군가가 해석해 놓은 것들은 나중에 보자. 설령 그들이 매우 멋진 말로 미리 다 말해 놓았다 해도 말이다. 어 찌됐건 해설서들을 먼저 볼 경우, 그건 내 것이 아니어서 그들을 흉내 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해설서의 홍수 가운데서 누구를 모방해야 할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자. 아니면 단지 안내서로 참고하자.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에게 번역된 텍스트들을 순서 대로 읽어 가 보자. 여기에는 33개의 소품이 있다. 일부 소품이 번역에서 제외되었지만, 칼뱅을 전반적으로 읽어 내는 일에는 모자라지 않아 보 인다. 대작인 <주석>과 <설교>는 칼뱅 자신의 성경 연구에 대한 의무와 방법이었다고 여기자. <기독교 강요>는 L초판,13  )   F초판,14  )   최종판이 번역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완성적인 칼뱅의 주저서는 저자의 역동적 변화의 파노라마를 잘 보여 주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1536, 1539/1541, 1559/1560을 이정표로 두고, 1532-1564 사이의 소품들을 그냥 읽어 나가는 것이다. 간간이 번역된 주석과 설교를 참고한다. <서간집>을 모 조리 볼 수 없다는 것이 정녕 너무 안타깝다. <서간집> 1권만으로도15  )   그 수확은 크다. 간혹 2차 자료에서 만나게 될 편지들은 살짝 가져오자. 그렇게 해서 무엇이 보일까? 먼저, 두 문명의 고전의 엄청난 인용들이 보인다. 33개의 소품 가운 데 단 하나만이 헬레니즘에 속한 고전이고, 다른 소품들은 대부분 성경 과 교부들의 인용으로 채워져 있다. 인문학 소품에도 성경과 교부의 인 용이 있지만 극히 적으며, 반대로 신학논문과 팸플릿에도 적지 않은 고 대 작가들이 등장한다. 결국 칼뱅의 방법론은 그가 이 양쪽의 작가들의 글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 배치했느냐를 찾아내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의 <기독교 강요> ( 1541 ) 를 통해 얼마간 알아 낼 수 있다. 그

13  )   <기독교 강요> 라틴어 초판, 생명의 말씀사, 2009. 14  )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초판, 부흥과개혁사, 2018(XR, 2015). 15  )   <칼뱅 서간집>, 부흥과개혁사, 2019(X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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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본서의 소품들에는 제네바 개혁자가 다양한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 이면서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추가 인용문들이 ( 고전 작가건 교부건 ) 제시되며 그것들과 함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본서에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칼뱅의 신학적 변화의 추이가 보인다. 그가 성경과 교부 들의 글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의미에 중점을 두는가? 그리하여 어떤 신학적 주제가 무시되거나 강조되는지를 찾아내는 일은 칼뱅의 신 학이 어떻게 고정되는지 알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칼뱅에 게 소중했던 계시 이해에서 이탈되는 것인지 강화되는 것인지 확인해 보는 일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우리 문명의 고전 작가들과의 융 합 ( 칼뱅은 화해라는 말을 쓴다 ) 을, 마치 칼뱅이 했던 방식에 따라, 새롭게 시도 하는 일이 가능한지 파악할 수 있어 보인다. 물론 루터와 함께 칼뱅에 게 소중했던 개혁적인 발견인 종교적 급진주의를 재확인하는 것이 전 제된다. 이교 문명은 동서양이 같으며 그 지향하는 바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양쪽의 같은 것들을 찾아내되, 서양 고전만의 독특성이 있다면 그 대로 살려야 할 것이고 우리에게 더 나은 인용문들이 발견된다면 금상 첨화일 것이다.

2. 고전 읽기의 인문학적 토대

칼뱅이 중등 교육과정에서 자신의 학문을 형성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한 작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시대에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고전 읽기다. 그러나 모두가 하는 공부지만 결과는 다르다. 탁월한 지식인으 로 발돋움해 가는 사람은 단순한 읽기로 끝나지 않고, 거기서 인문학적 인 소양을 쌓으며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지식 세계의 발판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몇 가지 필수 요건이 요구된다. 첫째는 언어요, 다음 편역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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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는 인문학적 소양이다. 마지막으로는 법학과 신학[심지어 의학]이 라는 더 전문적이지만 여전히 넓은 의미에서 교양 분야에 속하는 지식 이다.16  )   1530년대 초 칼뱅은 나름대로 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지식 세계 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문은 에라스무스에 의해 열렸다. 사실 에 라스무스는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후학들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 두었고 훗날의 종교개혁자들은 그의 영향 하에서 성장했다. 네덜란드 인문주의자는 세네카의 <관용론>을 두 번씩 고증본으로 펴내면서17  )   누 군가를 그것에 대한 주석으로 초대했다. 칼뱅은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 했다. 어째서? 칼뱅은 주석을 마치고 그것을 헌정하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밝 힌다. 헌정 서한에 나오는 순서대로 말하면, 첫째는 고등 교육을 마친 무 명의 칼뱅이 당대의 인문주의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야심 때문이었다.18  )   둘째는 에라스무스의 고증본에 여전히 탈자와 오자가 남 아 있었음을 발견하고 독자들이 본문을 잘 읽을 수 있도록 수정할 필요 를 느꼈기 때문이다.19  )   물론 그의 목적이 새로운 고증본을 내는 데 있지 않았기에 가벼운 본문 비평으로 끝낸 듯하다. 셋째는 세네카가 생각보다 저평가되어 왔음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20  )   필자는, 이 드러난 세네카 주석 집필 이유 외에 숨겨진 미래의 정치철학자로서 16  )   칼뱅이 훗날 제네바 콜레주의 규정을 만들면서 교과목을 어떻게 배치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

롭다. 17  )   1515년과 1529년. 18  )   “이것은 평범한 민중의 하나로서 보잘것없는 학문을 하는 나에게 유명해질 어떤 소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더욱 그러합니다”(본서 8.7). 19  )   “분명 문학의 두 번째 영광이요 총아인 에라스무스가 이 영역에서 두 번씩이나 땀을 흘렸지

만, 그의 눈을 피한 어떤 것들이 있는바(반감 때문에 한 말이 아님) 우리가 처음으로 그것에 주목했습니다”(본서 8.8). Battles/Hugo는 에라스무스의 두 고증본과 칼뱅의 본문을 비교하 면서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p. 66*). 20  )   “만일 세네카의 어떤 작은 생각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차지해, 이미 고정된 편견(즉 세네카의

장점들이 웅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고, 철학에서는 장점들이 단점들 가운데 감춰져 있기에 수 와 무게에 있어[양과 질에 있어서] 빈약하다는)이 되지만 않았던들 나는 철저히 침묵했을 것 입니다”(본서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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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꿈에 대해 다른 곳에서 말한바 있다.21  )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의 고전 읽기 결과물 자체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은 칼뱅의 인문 학적 토대를 잘 드러낸다. 먼저는 언어학과 문헌학이요, 다음은 역사와 철학을 포함한 문학 비평이며, 마지막은 격언 모음과 그 활용이다.22  )   칼뱅의 텍스트에서 이 요소들을 직접 찾아내는 작업을 후학들 중 누 군가가 하길 바란다. 물론 정확한 한국어의 정착과 그 학문적 활용, 칼 뱅 텍스트에 대한 문학/문헌 비평 ( 칼뱅이 세네카와 에라스무스에게 했듯이 ), 서양 고 대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사유 등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 어야 한다. 인문학과 법학이 비교적 전문적인 접근을 요하기에 여기서 는 다만 격언 모음과 그 활용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겠다. 르네상 스 시대는 그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고대의 지혜를 담은 격언들을 부활 시킨 시대다. 이 일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에라스무스와 그의 <격언 집> ( Adagia ) 이 가장 유명하다. 에라스무스는 4,151개의 격언을 고대 문명 에서 끌어냈다.23  )   자신이 모아 놓은 격언들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은 고 대의 지혜를 공유하기 위함이지만, 실상 자신의 내면을 살찌운 지적 자 양분을 나눠 주는 일이기에 한편으로 아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의 자신의 학문적 내공에 대한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유교 사상가들의 글 을 모아 놓은 사람도 <논어>를 통해 동양 고전의 지혜를 모두에게 나눠 주고 싶었을 것이다. 맨 앞에 내세운 글은 유교가 최고로 치는 가치가 배 움에 있음을 보여 준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고대 지 혜의 최고봉을 나눔 공동체로 보았다. 그러므로 격언의 모음도 어떤 목 적을 위해 있으며 편집자의 의도가 그 속에 들어 있게 된다. 칼뱅은 에라스무스처럼 무슨 격언집을 만들지 않았다. 직접 읽어서 모 21  )   <기독교 강요>(1541) 역자 서문 참고. 22  )   Battles/Hugo는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 결과를 주고 있다(pp. 72*-140*). 23  )   최근 출간된 라틴어와 프랑스어 대조본이 있어 소개한다. Erasme de Rotterdam, Les

Adages , Paris, Les Belles Lettres, 2013. 에라스무스는 이것 외에도 Apoththegmata 와 Flores Senecae 라는 다른 격언집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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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둔 격언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격언집을 자신의 집 필 목적에 활용했다. 칼뱅이 인용한 격언들은 당대 작가들의 모음집들24  )   뿐 아니라, 고대의 모음집들25  )  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플루타르코스 로부터 시작한다. “권좌에 있는 자들에게 충고하기란 어렵다.”26  )   칼뱅은 출처 없이 쓴다. 어쩌면 너무 잘 알려진 격언일 수 있다. 마치 논어의 첫 문장을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말이다. 칼뱅 텍스트의 고증본은 이 출처가 <무식한 군주에게>임을 알려 준다.27  )   세네카가 군주에게 충고하 는 글을 주석하는 칼뱅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치국과 관련된 격언 들이다. 기독교 시대의 군주 교육의 책임을 인식한 인문주의자들은 이 런 종류의 격언들을 모았고, 칼뱅은 이 모음집들을 이용한 것으로 보 인다.28  )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덕목으로 권모와 술수를 천거했다면, 기 독교 인문주의자들은 무엇으로 군주들을 교육하고 싶었을까? 이들은 공 통적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근간이 되는 문학과 철학과 역사 서 적들에서 군주의 덕목들을 끌어냈다. 에라스무스와 뷔데의 비교는 여기 서도 흥미롭다. 전자의 책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의 철학과 정치학/법학, 플루타르코스의 도덕과 역사, 그리고 그리스/ 로마의 역사가들이 총망라되었다. 뷔데는 언어, 웅변, 시, 역사의 영역에 서 훨씬 멀리 간다. 에라스무스가 구약의 지혜뿐 아니라, 특히 복음서를 통한 “그리스도의 모방”을 군주에게 가르치면서 “평화의 왕”이 되도록 요구했다면, 뷔데는 그의 정치 이론을 구약의 잠언에 두고 책을 프랑수

24  )   에라스무스는 Adagia 외에 Apophthegmata 와 Flores Senecae 라는 격언집을 펴냈으며,

Beroaldus는 Suetonius (De Vita XII Caesarum ), Apuleius (Metamorphosis ), Cicero (Tusculanae Disputationes )의 저술들을 주석하면서 많은 격언을 가미했다. 25  )   Plutarchos의 Moralia 와 Publilius Syrus의 Sententiae 이다. 26  )   본서 8.19. 27  )   다행히 우리는 Battles/Hugo의 고증본 덕분으로 칼뱅의 인용의 정확한 출처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어떤 훌륭한 논문만큼이나 귀하고 소중하다. 28  )   Erasmus, 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 (1516); G. Budé, L ’Institution du Prince (1547,

posthumous); Ph. Beroaldus, De Optimo Statu Libellus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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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1세에게 헌정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수행에 초점을 두 었다.29  )   칼뱅의 주석은 이런 격언들로 도배되어 있다.30  )   동아시아의 개혁신학을 위한 한국의 칼뱅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 리 문명의 문학, 철학, 역사, 법학 등을 섭렵하는 인문학의 소양을 갖춰 야 한다. 뿐만 아니라, 칼뱅의 모든 고대 사상의 인용구들을 유불선의 종 교철학 사상과 황하/요하 문명의 역사의 고사/명구들로 대체할 수 있어 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그럴 능력을 갖춰야 한다. 칼뱅의 <세네카의 “관 용론” 주석>은 개혁자의 삶에 있어서 무시해도 상관없는 초기 회심 이 전의 무의미한 실패작이 아니다. 성공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 젊은 날 의 승부수를 띄운 운명의 주사위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으며, 칼뱅은 주 사위의 다른 짝을 맞추기 위해 유대-기독교의 영역에서 다시 한 번 똑 같은 시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4년 후에 나온 <기독교 강요> ( 1536 ) 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먼저 쓰고 출 판하려 한 신학 책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먼저 쓴 책보다 다 음에 쓴 책이 앞서 출판된 것이다.

3. 이교 지혜에서 기독교 신학으로: 회심과 소명

칼뱅이 신학 관련 서적인 <영혼 수면론 논박>을 작성한 것은 1534년 이다. 그가 언제 회심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나, 이 최초의 신학 저술에서 칼뱅은 회심 경험과 관련된 뉘앙스를 남긴다. 칼뱅은 욥이 죽음을 생각 하며 비탄해하는 것을 언급하면서 “호의적인 하나님이 없는 자에게 음부 와 깊은 웅덩이와 죽음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31  )   물

29  )   참고. Battles/Hugo, 104*-109.* 30  )   Battles/Hugo는 이것들을 정치적 격언, 법학적 격언, 도덕적 격언, 일반 격언으로 분류해 정

리했다(113*-114*). 31  )   본서 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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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이것은 루터의 “호의적인 하나님” 발견에 대한 뉘앙스일 뿐이다. 그 런데 이 루터의 하나님은 칼뱅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코프의 강연> 에도 나타난다. 칼뱅이 코프와 함께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나타나는 “하 나님의 호의”를 말했다면,32  )   일면 회심 연대를 앞당기는 학자들에게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33  )   본래 기독교 인문주의자에게 자 신의 종교와 관련된 해설서를 내는 것은 거의 의무에 가깝다. 칼뱅은 회 심과 관계없이 성경과 교부들을 읽고 있었고, 여러 지인의 권면으로 재 세례파의 종말론을 비판하는 책을 썼다. 그는 세네카를 주석하면서도 아 우구스티누스를 인용했지만,34  )   신학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히포의 주 교와 상당수의 교부들을 인용한다. 하지만 칼뱅이 이 책의 출판 의지를 꺾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한 진술로 관심 방향을 바꾼 것은 스트라 스부르 개혁자인 카피토의 충고가 한몫했다.35  )   이후 칼뱅은 신학의 길 로 매진하며 이교의 지혜에 대한 연구는 그만큼 약해진다. 이것은 새 문 명의 융합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칼뱅은 이 사실을 훗날 ( 1557년 ) “갑 작스런 회심”36  )  에 대해 언급하는 그의 자서전적인 소명 이야기에서 이 렇게 밝힌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의 약간의 맛과 지식을 맛본 후, 나는 즉시 발전 하려는 커다란 욕망으로 너무 불타올라, 비록 다른 학문을 완전히 버

32  )   본서 3.8. 33  )   올리비에 미에도 T. H. L. 파커를 따라 회심 연대를 1533(?)으로 가정한다. 34  )   칼뱅은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16번(<신의 도성> 15번, <영과

문자> 1번) 인용했는데, 그중 인간 본성(동정심, 양심, 명성 포함)에 대해 4번, 역사(교회사 포 함)에 대해 6번, 언어와 문헌학(경건의 의미 포함)에 대해 5번 언급했다. 35  )   <칼뱅 서간집> 62쪽(서신 18). 36  )   칼뱅은 1532년에 이미 자신의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을 풀어 줄 해설을 달아 놓

았다. “Subita란 말은 ‘갑작스런’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을 의미 한다. 사실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은 거의 사전에 계획되지 않는다. 따라서 Subitum은 ‘충고를 듣지 않는’의 뜻으로 사용된다”(본서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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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에 더 느슨하게 열중했습니다.37  )

참된 경건으로 대변되는 칼뱅의 종교 경험은 다음 두 가지 것과 관련

한다. 즉 자신을 의롭게 할 자유의지의 완전 부인과 직업적 소명의 선택 이다. 칼뱅의 갑작스런 회심은 그의 내적 삶과 외적 삶에 결정적인 변화 를 가져다주며, 결국 기독교 세계를 개혁하라는 예언적이고 목회적인 소 명으로 귀결한다. 개혁자가 되라는 이 특별 소명에 응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당시 칼뱅 자신에게도 모호했을 것이다. 그 앞에는 앞서 활동했 거나 하고 있는 많은 개혁자들이 있었다. 아주 멀리는 마키아벨리와 사 보나롤라, 얼마 전까지는 에라스무스와 뷔데, 그리고 근자에는 루터, 부 처, 카피토, 그리고 일찍 죽은 츠빙글리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의 “응답하는 자아”는 이 당대의 선지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비 롯된다. 여기서 미래의 제네바 개혁자의 선지자적 자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리쾨르의 부름/응답의 해석학을 끌어오는 것이 부당하지 않을 것 이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의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에 대한 분석은 어쩌면 16세기 제네바 개혁자에게서 “자신에 맞서는 칼뱅”, “불 안한 두 칼뱅”, “자기성찰의 칼뱅”을 찾아내고자 시도한 역사가들의 노 력을 지지할 것이다.38  )   부름에 응답하는 그리스도인/선지자의 자아는 내면성과 외면성으로 이뤄진 자아다. 에라스무스와 루터로 이어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이중적 자아의식은 칼뱅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 록 앞의 두 선배처럼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는 않 았지만, 칼뱅이 여러 모로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이렇

37  )   <시편 주석> 서문, (CO 31.22). 38  )   Suzanne Selinger, Calvin against Himself. An Inquiry in Intellectual History ,

Hamden, 1984; Wi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th Century Portrait , Oxford, 1988; Denis Crouzet, Jean Calvin. Vies parallèles , Paris, Fayard,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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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볼 때, 칼뱅의 내면성을 관통하는 초심으로의 회귀와 직업적이자 목 회적인 소명에 따른 외적 삶 사이에는 평행적 삶이 있어 보인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고 제네바의 목회자가 되는 외적 소 명의 과정은 다른 곳에서39  )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그의 직업적인 소 명과 평행을 이루는 선지자적 소명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 두 소명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네바에서 칼뱅의 목 회신학은 이 사이에서 갈등한 결과일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현대 해석학의 도움을 받아 보기로 하자. 폴 리쾨르는 1985-1986년 두 번의 기포드 강연에서 유대-기독교 전통에서의 자아 이해방식에 대해 강론 했다. 하나는 “성경 거울 속의 자아”요, 다른 하나는 “위임 명령받는 자 아”다.40  )   전자는 자아가 어떤 “상징적인 해독”을 통해 유대-기독교 전 통에서 그 자신을 이해하는가이다. 후자는 그렇게 해서 “어떤 자아”가 얻어지는가이다. 리쾨르가 말하는 성경을 통한 자아상은 부름에 응답하 는 자아다. 그러므로 전자가 부르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라면, 후자는 그 것에 응답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목적은 리쾨르의 강연을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칼뱅의 텍스트를 들여다보는 데 있다. [1] 먼저, “성경 거울 속의 자아”는 칼뱅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표현 이다. 칼뱅은 성경을 읽다가 부름에 응답했다. 교부들과 루터의 텍스 트가 있었지만 성경을 앞지르지 못했다. 루터는 교부들만 못했다. 이것 은 칼뱅이 인용하는 강도가 첫째가 성경이고 둘째가 교부라는 사실이 입증하며, 루터 ( 를 포함한 당대 인물들 ) 는 인용 명단에도 없다는 사실이 입증 한다. 물론 성경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칼뱅이 다윗을 롤 모델로 삼 아 자신과 비교하게 된 것은 시편에 들어 있는 내면의 토로와 무관하지

39  )   박건택, “역자서문”,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초판/1541, 16-17쪽. 40  )   두 강좌의 제목은 The Self in the Mirror of Scripture 와 The ‘Commissioned Self ’: O

my Prophetic Soul! 이다(Paul Ricoeur, Amour et justice , Paris, 2008, pp. 4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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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 물론 다윗의 이야기는 설화 담론에도 들어 있다. 비록 칼뱅이 성경 의 모든 장르 ( 토라,

역사서, 예언서—리쾨르는 이것을 “다중음의 텍스트”라 부른다 ) 에서

나님의 부름을 듣지만 적어도 종교 경험과 관련해서는 시편에서, 그것 도 일인칭으로 응답한다. 수줍은 그가 다윗처럼 내면을 공개한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길게 말이다. 명예의 욕망이 없다는 것은 무대 위의 조명 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그때를 기다릴 뿐이다. 이렇게 다 윗과의 비교는 천한 자리에서 고귀한 신분으로의 상승, 하나님의 통치 를 위한 싸움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칼뱅이 말했듯이 영혼의 모든 부위 의 해부인 시편은 다윗처럼 그를 내면 깊은 곳까지 데려가 심정을 토로

하게 한다. 이따금 칼뱅의 글에서 “심정으로 느끼는 하나님”과 “심정 토 로로서의 기도”를 읽는 것은 놀랍지 않다. 리쾨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점에서 시편은 무수한 뉘앙스로 된 이런 다형의 응답이 모아지고 언어 로 기재되며 정경 형식으로 연결된 문서다. 이처럼 연결된 의미의 공간 은 탄식과 감사의 축 사이에서 펼쳐진다. 구원받은 인간의 감사, 용서받 은 인간의 감사, 생명체로 창조된 복을 받고 공동의 실존을 누리는, 그 리고 일반적으로 비참한 상태를 중단시키는 기쁨의 섬광을 누리는 인간 의 감사.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위험에 놓인 인간의 탄식, 심판하시 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된 인간의 탄식, 구원과 연민의 하나님에게 호 소하는 재앙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탄식.”41  )   다윗은 칼뱅을 부르는 성 경의 일차적인 거울이며, 그의 소명 이야기의 서론과 결론이다. 이 이야 기가 칼뱅이 제네바에서의 승리를 확정지은 ( 1553-1554년 ) 이후에 쓰였다는 점에서 다윗과의 비교 역시 온전하게 가능해진다. 유형론의 특징을 갖는 역사서에서의 다윗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칼뱅의 마지막 설교인 사무엘하 설교 ( 1562/1563 ) 는 좋은 참고 자료다. [2] 다음으로, 갑작스런 회심의 해석의 문제다. 칼뱅의 회심은 그의 소

41  )   Paul Ricoeur, Amour et justice , p.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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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이야기를 출발시키는 원초적인 사건이며 본론 전체를 구성한다. 텍스 트가 이야기체로 되어 있으므로 이미 제네바 목회자가 된 개혁자 입장 에서 자신의 회심이 어떤 소명으로 이어졌는지 말해 주는 본문으로 비 칠 수 있다. 하지만 시편을 주석하는 곳에서의 이야기체는 사건과 장소 보다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한 지도적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에 더욱 초점이 맞춰질 수 있다. 회심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최초의 결과다. 칼 뱅은 자신의 갑작스런 회심의 근저에 참된 경건에 대한 깨우침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소명 이야기의 핵심어는 이 말에 있으며, 그것은 응답하 는 자아상 전체를 지배한다. 리쾨르는 성경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아상의 네 가지 단계를 말한다. [i] 선지자로의 부름, [ii]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초대, [iii] 내적 스승, [iv] 양심의 증언이다.42  )   [i] 칼뱅의 회심이 선지자로서의 자의식으로 가는 데는 물론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나, 이내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는 사실은 1557년 의 칼뱅이 초기부터 이 소명을 확인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칼뱅은 고국 프랑스인들을 향해 문서 ( 프로파간다 ) 활동을 보이는 초기 글들 표지 에는 주로 선지자들의 말들이 적혀 있다.43  )   칼뱅의 선지자적인 자의식 은 그의 글 도처에서 발견된다.44  )   따라서 칼뱅의 회심이 선지자로의 부 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리쾨르는 성경의 소 명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선지자적인 자아”의 도식이라는 공통 구 조를 끌어낸다. “하나님과의 대면” ( confrontation ), 부르시는 이의 “자기소 개” ( introduction ), “파송 임무 부여” ( identité ), “반론” ( objection ), “파송 대화 구 조” ( réassurance ) . 물론 리쾨르가 끌어내는 소명 이야기의 공통 구조를 칼

42  )   Paul Ricoeur, Amour et justice , pp. 77-109. 43  )   <두 서신>(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0]?), <기독교 강요>

(1541) (주여, 언제까지입니까[합 1:1]?), <신도의 처신>(왕상 18:2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그들이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하게 말하는 자를 싫어한다[암 5:10]). 44  )   R. Stauffer,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1인칭 화법”, <칼빈의 설교학> (박건택 편역), 나비, 1990,

12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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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에게 적용하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첫째, 대표적인 대면 장면은 모 세의 “불타는 가시덤불”. 이사야의 성전에서의 현현, 에스겔의 “야훼의 전차”와 먹도록 제공되는 책이다. 칼뱅이 하나님과 대면했을 때의 장 면은 그의 제네바 소명과 요나의 소명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의 손을 내게 뻗쳐 그를 붙잡는 장면 과 요나의 부름 받는 장면이다. 그 후의 “예언적인 ‘나’는 너무 급진적으 로 그 중심이 이탈되므로” 그의 본래의 자리는 더 이상 없다. 둘째, 하나 님은 선지자를 부르기 전에 친히 먼저 자신을 알린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칼뱅 에게 자신을 소개하신 하나님은 신구약에 공히 제시되시는 하나님이다. 셋째, 선지자로 세워지는 정체성 확립이다. 칼뱅은 그의 선지자의 자의 식을 타인에게서부터도 확인하는 듯하다. 넷째, “사명의 위대함과 파송 된 자의 보잘것없음 사이에 낀 나”는 반발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가겠 습니까?”는 결국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소서”로 귀결하지만, 다 시 “주여 언제까지입니까?”로 이어진다. 칼뱅의 은둔적인 모습은 이 반 론의 단계다. 다섯째, 파송의 대화 구조는 “재확인”의 말씀에 의해 서명 된다. “내가 진실로 너와 함께 하겠다.” 칼뱅이 이런 내면을 구체적으 로 말하는 곳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마지막 제네바 23년은 재확인의 결 과다. [ii] 에라스무스적인 개혁 성향의 칼뱅은 인간이 자유의지와 고전 ( 히브리 고전을 포함 )

교육을 통해 문명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고 여겼으나, 데보티

오 모데르나를 잇는 “그리스도의 모방” ( Imitatio Christi ) 의 영성에는 처음부 터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에서 본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 입 증한다. 거기서 칼뱅이 주장하는 영성은 “그리스도의 모방”의 영성이 아 니라 “자유와 사랑과 정의”라는 실천적인 세속적 영성이다. 칼뱅이 자신 의 소명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약간 미미한 것은 그의 주 변에서 데보티오 모데르나의 영성을 따르는 자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비 편역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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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즈의 칼뱅 전기 | 1  )

[1] 머리글 2  )

누구든 내가 장 칼뱅의 전기를 쓰는 일에 착수한 것이 진리를 주장하 기 위한 동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나는 인간사의 현재 상 태가 나를 비난에서 쉽게 옹호해 주길 소망한다. 덕을 칭송하는 것보다 더 온갖 종류의 재난에 이르는 지름길은 거의 없다. 실로 극도의 광기는 침묵으로 보상될 수도 있는 악을 너[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사악한 자 도 무슨 덕목이 됐건 아무렇지도 않게 선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진 대, 경건을 선포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사람들은 무슨 기대를 해야 하겠 는가? 이 경건의 사람들은 사악한 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1  )   Joannis Calvini vita , 1575. 제네바 교회 목회자 테오도르 드 베즈가 정성을 다해 기록한 장 칼

뱅의 생애.

데오도르 드 베즈는 칼뱅이 죽은 후 미처 세상에 나오지 못한 개혁자의 <여호수아 주석>을 출판하면서 서문을 대신해 프랑스어로 된 간략한 칼뱅의 생애(VC/1564)를 기록했다. 순서가 교리, 생애, 죽음으로 된 최초의 전기물은 선배의 삶을 목격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후배 의 생생하고 절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렇게 그는 칼뱅의 죽음을 서둘러 애도하는 바람에 교 리 수호자의 모습을 강조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글은 전기물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이것 을 인식했는지, 바로 이듬해(1565) 더 전기물다운 칼뱅의 생애가 니콜라 콜라동의 손으로 출판 된다. 프랑스어로 된 콜라동의 <칼뱅 전기>(VC/1565)는 앞의 서두 부분은 베즈의 것과 동일하 지만, 정작 생애를 다룸에 있어서는 교리 부분을 삭제하고 일반적 전기물의 방식대로 출생부터 시작한다. 그 후 10년이 지나서 베즈는 칼뱅이 주고받은 서신들을 모아 출판하면서 새로운 <칼 뱅 전기>(VC/1575)를 라틴어로 써서 서문으로 달아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번역한 텍 스트다. 2  )   괄호로 된 일련번호와 소제목(주로 연도로 되어 있음)은 편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베즈의 칼뱅 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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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매우 정직한 모습을 보이고자 ( 그리고 때로는 정직하고자 ) 한 자들에게서조 차 공격을 당했다. 경건에서는 거짓 종교를 품고는 그것을 참 종교로 여 기는 자들보다 더 가혹한 적은 없다. 이것들은 비록 외견상 끔찍하지만 결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 선한 이들이 악한 자들이 두려워 침묵하 고, 경건의 소리가 미신에 빠진 자들의 함성 때문에 그친다는 것은 수치 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칼뱅의 생애를 쓰는 것이 진리를 옹호하는 것과 별개의 것이라고 반박한다면, 나는 일단 사람과 진리는 별개라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진리 자체이신 이가 “아버지가 나 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요 20:21 ) 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 ( 눅 10:16 ) 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경솔하게 하신 말 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지 때문에 그렇게 믿건 악의로 그렇게 말하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루터와 츠빙글리와 칼뱅을 신들로 여긴다고 주장하게 하 라. 우리가 성자 경배를 계속 우상숭배로 비난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 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떠들게 하라. 우리에게는 답이 준비되어 있다. 즉 우리는 단순히 거룩한 인물들이 종교를 위해 수행한 노고를 그들의 언 행과 함께 기념한다는 것이다.

( 이런 종류의 글쓰기의 유일한 목표는 선한 것에 대한 지

식은 다 나아지는 반면 사악한 자들은 반박되도록 하는 것이다. )

이것은 그들이 아는 행위

와는 매우 다르다. 그들은 유치할 뿐 아니라, 불경한 서술로 정녕 경건 한 자들의 삶의 명예를 훼손한다 ( 아브디아스[Abdias]라고 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랬듯이 말이다 ) .

불린 모호한 인물이 사도들

그들은 매우 비열한 거짓으로 가득한 우화

를 작성한다. ( 그들은 미개한 말로 황금 성인전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들을 분리되어야 할 쓰레 기라 3  )   부른다. )

게다가 그들은 옛 신들의 우상들을 이름만 바꾼 채 회복시

킨다. 우리는 이런 죽은 자들의 경배와 거리가 멀되 빛이 어둠에서 멀 듯 이 한다. 그들의 그런 행위에 대해 주님은 매우 준엄한 위협을 가하신다.

3  )   Legendas aureas, Ablegandas stercoreas. 베즈의 장난스런 말 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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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고하심에 따라 몸과 마음의 눈으로 그의 활 동에 집중하도록 애쓴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의 모든 작품 가운데서, 그 밖의 인생들 가운데서, 이 사람들이야말로 거룩함과 교리에서 가장 특 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주목받았음을 부인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을 별들에 비유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 단 12:3 ) . 그들은 그들의 밝음으로 타인에게 복된 길을 보여 준다. 그 밝음이 죽음 때문에 완전히 꺼져 버리게 되는 것을 허용하는 자들은 스 스로 이전보다 더 짙은 어둠에 빠져 마땅하다. 아무튼 나는 웅변술과 찬 사에4  )   열중한 나머지 진리로 장식하기보다 그것을 의심하게 만든 사람 들을 흉내 낼 생각이 없다. 나는 얼마나 우아하게 쓸까가 아니라 얼마 나 진실하게 쓸 수 있을까에 노력했으므로, 단순한 이야기 문체를 선호 했다.

[2] 1509-1533

장 칼뱅 5  )  은 AD 1509년 7월 10일 피카르디6  )   지방, 또는 적어도 피 카르디 근교의 유명한 도시인 누아용 7  )  에서 태어났다. 부친 제라르 칼 뱅 8  )  과 모친 잔 르 프랑 9  )  은 모두 성실한 평판을 가진 평범한 가문 출신 이다.10  )   제라르는 판단력과 신중함이 적지 않은 인물로서 그 지역의 대

4  )   e.pideictico.n et panhgurico.n. 이 말들은 각기 책 제목들이기도 하다. 5  )   L: Joannes Calvinus. 6  )   L: Veromandus. F: Picardie. 7  )   L: Noviodunus. F: Noyon. 누아용 성당에서 이전에 프랑스 왕가(Hugues Capet)가 대관식을

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할 수 있다. 8  )   L: Gerardus Calvinus. F: Gerard Cauvin[→Calvin]. VC/1564와 VC/1565는 Girard Calvin

으로 기록한다. 9  )   L: Joanna Franca. F: Jeanne Le Franc. 10  )   VC/1565에는 형제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부친의 죽음 이후 성년기에 죽은 장남 샤를,

28년 전부터 [장을] 따라다니며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손아래 동생 앙투안, 어려서 죽은 두 명 의 다른 동생들인 또 다른 앙투안과 프랑수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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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의 귀족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러므로 아들 칼뱅은, 아버지의 덕분으 로, 소년 시절부터 인근에서 가장 특출한 가문 가운데 하나였던 몽모르11  )   가문에서 자유롭게 교육받았다. 후일 그는 이들 덕택으로 파리12  )  에서 학 업을 계속했는바, 콜레주13  )   드 라 마르슈에서는 덕성과 학식을 갖추고 아동 교육자로서 프랑스의 모든 학교에서 높은 평판을 얻은 마튀랭 코르 디에를 선생으로 만났다. 이 사람은 85세까지 살면서 제네바의 제네바 콜 레주에서 가르치다가 칼뱅과 같은 해 9월 13일14  )   죽었다. 이후 칼뱅은 콜레주 몽테귀 15  )  로 옮겨 결코 학식이 없지 않은 선생으 로 히스파누스라 불리는 사람 16  )  을 만났는데, 그 밑에서 천성적으로 근 면한 칼뱅은 많은 진보를 이뤘다. 그는 문법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을 뒤 처지게 했으므로 교양과목이라 불리던 형식 논리학과 다른 반으로 월반 했다. 애초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신학 공부를 시킬 목적이었기에, 자 연히 그는 그 방향으로 집중했다. 젊은 나이에도 그는 놀랍게 종교적이 었고, 그의 동료들에게 있는 모든 악덕에 대한 엄격한 검열자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그가 유명해지고 난 수년 후에 몇몇 가톨릭의 신임할 수 있 는 증인들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다. 이처럼 그의 부친은 거룩한 직무의 명목으로 누아용 주교에게서 성당 교회 17  )   ( 사람들이 그렇게 칭하는 ) 에 속한 성 직록과, 이어서 퐁-레베크 18  )  라 불리는 이웃 소읍의 주임신부직 19  )  을 얻 어 냈다. 이 소읍은 부친 제라르 칼뱅이 태어나 거기서 떠날 때까지 살았 던 곳이다. 장 칼뱅 자신이 프랑스를 떠나기 전 사제직을 받지 않은 상태

11  )   L: Mommorius. F: Montmors. 12  )   L: Lutetia. F: Paris. 13  )   L: Gymnasium. F: Collège. 14  )   VI Nonas Septembris. 15  )   L: Gymnasium ab Acuto Monte. F: Collège Montaigu. 16  )   cognomitatum Hispanum. VC/1565는 그를 의학박사로 소개한다. 17  )   ecclesia cathedrali. Chapelle de la Gésine라 불리는 성당 내의 소 예배실을 의미한다. 18  )   L: Pons episcopi. F: Pont-l’Evêque. 19  )   L: curatio. F: c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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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곳에서 여러 차례 설교를 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계획은 부자간 상호 마음의 변화로 중단되었다. 아버지는 법학을 부와 영예의 더 확실한 길로 보았고, 아들은 피에르 로베르 올리 베탕 20  )  이라는 이름의 친척 ( 프랑스 의 빚을 그에게 졌다 ) 을

교회는 뇌샤텔 21  )  에서 출판된 히브리[구약] 성경 번역

통해 참된 종교로 권면을 받아 성경 읽기에 열중하고

미신을 혐오했으며, 그리하여 저 종교 의식들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법률 쟁의를 들으러 오를레앙으로 갔다. 거기에는 피에르 드 레투 알 22  )  이라는 당대 프랑스 제일의 법학자가 가르치고 있었는데, 칼뱅은 단시일에 놀라운 진보를 이뤘고 매우 종종 교수들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학생보다는 선생으로 여겨졌다. 그가 떠날 때 그가 [오를레앙] 아카데미 [대학]에 준 공로를 대신해 아무 보수 없는 교수 자격증 23  )  이 모든 교수 진의 만장일치로 그에게 수여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성경 문헌을 부 지런히 연마했으며, 그의 진보가 너무 커서 순수한 종교에 대해 알고자 한 그 도시의 모든 이들이 그에게 찾아와 물을 정도가 되었고 그의 학식 과 열정에 크게 놀랐다. 당시 그의 친지요 동료였던 어떤 이들이 아직 살 아 있는데, 그들은 그가 극히 검소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한밤중까지 작 업하는 데 익숙해 있었으며, 아침에 일어나서는 침대에서 읽었던 것을 묵상하고 깊이 생각했으며, 이 묵상 중에는 방해받길 원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이런 지속적인 불철주야로 그는 확고한 학식과 탁월한 기억력 을 얻었지만, 그 대신 후일 많은 질병을 가져오고 결국 그를 불시의 죽음 으로 이끈 위장 장애를 초래했다. 당시 부르주 24  )   아카데미[대학]는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인 안드레아

20  )   L: Petrus Robertus Olivetanus. F: Pierre Robert Olivétan. 21  )   L: Neocomes. F: Neuchâtel. 22  )   L: Petrus Stella. F: Pierre de l’Estoile. 23  )   doctoratus insignia를 박사 학위로 보긴 어렵다. 24  )   L: Biturgus. F: Bour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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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치아티 25  )   ( 분명 동년배의 첫 번째 법학자 ) 로 인해 큰 유명세를 탔는데, 우리의 장도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곳으로 갔 고 종교적이고 학문적인 이유에서 로트바일 26  )  에서 온 독일인 그리스어 교수인 멜키오르 볼마르27  )  와 우정을 맺었다. 나는 매우 즐겁게 이 사람 을 상기한다. 그는 나의 소년에서 청년까지 내가 가졌던 유일한 선생이 었다. 그의 학식, 경건 및 다른 덕목들은, 아동 교육의 놀라운 능력과 함 께, 아무리 칭찬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제안과 도움으로 칼뱅 은 그리스어를 배웠다. 칼뱅은 훗날 <고린도전서 주석>을 그에게 헌정함 으로써 그에게서 받은 지난날의 혜택을 공개적으로 입증했다. 이 학문[법학]을 하는 동안 그는 여전히 성경 문학을 근면하게 연마했 으며 간간이 부르주 근교의 마을인 리니에르 28  )  에서, 그곳 통치자의 승 인과 참석 아래, 설교도 했다. 그런데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고향 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나이 24세에 파리로 가서 관 용에 대한 세네카의 책의 주석서를 썼다.29  )   이 매우 무게 있는 작가는 칼뱅의 성향과 명백히 어울리는바, 그가 매우 좋아하는 작가였다. 이곳 에서의 몇 달 간의 거주는 더 순수한 종교를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그를 알렸다. 나는 그가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에티엔 포르주 30  )  를 언급하는 것을, 그의 경건에 대한 강한 증언과 함께 들었다. 이 유명한 상인은 훗 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당했고, 칼뱅은 <리베르탱파 논박>에서 그 의 이름을 칭송했다.31  )   그때부터 칼뱅은 다른 모든 학문을 내던지고 하 나님에게, 그리고 파리에서 은밀한 모임을 가졌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 게 기꺼이 헌신했는데, 오래지 않아 강력한 박해가 일어났다. 25  )   L: Andreas Alciatus. I: Andrea Alciati. 26  )   L: Rotvillens. G: Rothweil. 27  )   L: Melchiorus Wolmarus. G: Melchior Wolmar. 28  )   L: Linerias. F: Linière. 29  )   본서 8권 참고. 30  )   L: Stephanus Forgeus. F: Etienne de la Forge. 31  )   본서 6.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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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파리 아카데미[대학] 총장은 왕의 의사였던 바젤의 기욤 코프32  )   의 아들 니콜라 코프33  )  였고, 그는 관례에 따라 교황파가 축하하는 모든 성자들의 축일인 11월 1일에 강연을 했다. 칼뱅은 그에게 연설문을 제 공했는바, 거기에서 종교는 이전에 그래왔던 것보다 더 순수하고 명백 하게 다뤄졌다.34  )   소르본[파리 신학대학]은 이것을 참을 수 없었고 의 회 ( senatus ) 35  )  (사람들은 파리 최고의회인 Parl [ i ] amentum 을 이렇게 불렀다 ) 는 그것을 인정 하지 않았다. 의회는 총장을 소환했고 그는 그의 보좌관들과 함께 출두 하려 했으나, 도중에 친구들이 적들을 조심하라는 권면하자 집으로 돌아 왔으며, 후에 나라를 떠나 바젤로 갔다. 칼뱅이 머물렀던 콜레주 포르트 레 36  )  에는 색출이 시도됐다. 다행히 그는 숙소에 없었으나 그의 노트 뭉 치가 압수되었는바, 그 가운데는 친구들에게서 받은 많은 편지들이 있 었다.37  )   많은 사람이 생명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보다 더 긴박한 것은 없었다. 사법관들은 교회에 대해 극도로 가혹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장 모랭의 무자비함은 유명했다. 하지만 주님은 프랑수아 [1세] 왕의 유일 한 누이이자 놀라운 재능을 지닌 여인인 나바르의 왕비의 경건하고 호 의적인 중재로 이 폭풍을 흩으셨다. 그 여인은 칼뱅을 궁정으로 초대해 대단히 영예롭게 영접하고 그의 말을 들었다. 칼뱅은 파리를 떠나 생통주 38  )   지방으로 이주해 친구 39  )  를 보좌하면서, 그의 요청으로 간략한 기독교적 권면을 작성했는바, 이 글은 몇몇 교구 의 예배 시간에 읽혀져서 사람들이 조금씩 진리 탐구로 이끌리게 해 주

32  )   L: Guilielmus Copus. F: Guillaume Cop. 33  )   L: Nicolaus Copus. F: Nicholas Cop. 34  )   본서 3권, <코프의 강연> 참고. 35  )   VC/1565: Parlement 36  )   L: Gymnasium Fortretum. F: Collège de Fortret. 37  )   이 편지들이 남아 있었다면 <칼뱅 서간집>의 분량은 훨씬 두꺼워졌을 것이다. 38  )   L: Santona. F: Xantonge[Saintonge]. 39  )   베즈는 결국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간 루이 뒤 티에의 이름을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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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이 시기에 또한 칼뱅은 아키텐 40  )  의 도시인 네라크에 가서 자크 르 페브르 데타플 41  )  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장기간의 치열한 논쟁 끝에 파 리 아카데미[대학]에서 되살아난 수학과 다른 철학의 정규 과목 때문에, 그리고 스콜라 신학에 대한 비난 때문에 열 받은 42  )   소르본 신학자들이 죄어 오는 생명의 위기에서, 나바르 왕비의 도움으로 해방되어 그의 관 할 도시에 배치되었다. 어진 노인은 젊은이를 환대했으며 그가 장차 프 랑스에서 하늘나라를 회복할 뛰어난 도구임을 흔연히 알아챘다. 얼마 후 칼뱅은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듯이 파리로 돌아왔다. 성 삼위일체 를 반대하는 독을 이미 퍼뜨리던 저 불경한 세르베투스도 그곳에 왔다. 그가 회담을 매우 갈망한다고 주장했으므로, 칼뱅은 시간과 장소를 정 했다. ( 이것은 커다란 생명의 위험이 없지 않았는데, 이는 적대자들의 불붙은 분노가 그를 숨어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기다림은 헛되었다. 칼뱅의 모습이 노출되지 않도

록 더 이상은 안 되었다.

[3] 1534-1536

1534년은 많은 경건한 이들에게 두드러지게 경악스런 잔혹함이 있던 해다. 소르본의 교수지만 경건의 학문에 크게 이바지한 제라르 루셀 43  )   과, 강단에서 쫓겨났을 뿐 아니라, 감옥에 갇혔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 회 소속의 코로가 그들이다. ( 이들은 한두 해 동안 호의적인 나바르 왕비의 도움으로 이 도 시[파리]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일들을 전진시켰다. )

미사에 반대하는 유인물이 도시에

뿌려지고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 붙었으므로, 미혹당한 프랑수아 왕의 분노가 불붙었다. 공공[금식]기도가 선포되었으며, 왕은 자신의 세 자

40  )   L: Aquitania. F: Aquitaine. 41  )   L: Jacobus Fabrus Stapulensus. F: Jacques Lefevre d’Etaples. 42  )   mataeologis. 사전에 없는 이 단어를 문맥에 따라 번역했다. 43  )   L: Gerardus Ruffus. F: Gérard Roussel. 처음에 사용된 Ruffus가 후에 Rousselus로 바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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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와 함께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속죄의 목적으로 타오르는 횃 불을 들고 거기에 참석했다. 그는 도시의 가장 유명한 네 개의 장소에서 [각기] 8명의 순교자를 화형에 처하라고 명하고, 누구든지 저 심히 혐오 스런 이단들 ( 그가

호칭한 대로 ) 에게

오염된다면 자신의 자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장엄한 맹세로 증언했다. 칼뱅은 이 사건의 본질을 간파했고, 조금 후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잠잔다고 매우 오래전부터 지속해 반복적으로 잘못 가르쳐진 오류에 맞 서, <프시코파니키아>라는 표제를 붙인 유명한 책을 오를레앙에서 출 판했다.44  )   그리고 프랑스를 떠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생통주에서 얼 마간 함께 살았다고 우리가 말한 그 인물과 함께 로렌 45  )   지방을 경유 해 바젤로 갔다. 메스46  )  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47  )   칼뱅은 큰 곤경에 봉 착했다. 신의 없는 하인들 가운데 하나에게 두 사람의 돈이 탈취당한 것 이다. 그 하인이 더 힘센 말에 올라 힘껏 달려서 그를 따라 잡을 수 없 었다. 주인들에게 여행비 전체가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결국 다른 하인 에게서 차용한 10코로나 48  )  의 금액으로 겨우 스트라스부르49  )  와 이어서 바젤 50  )  에 도착했다. 거기서 칼뱅은 매우 저명한 인물들인 시몬 그리나 이우스와 볼프강 카피토를 친구로 얻었고, 히브리 문학에 전념했다. 은 둔 상태로 머물길 매우 갈망했음 ( 이듬해

부처가 그에게 쓴 편지에 나타나는 대로 ) 에

도, 그는 매우 입문적인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당시 복음에 명분을 바친 독일 군주들은 프랑수아 왕의 사형집행 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칼뱅은 그들과의 우호관계를 청했다. 왕

44  )   실제로 출판하지는 않았다. 45  )   L: Lotharingia. F: Loraine. 베즈는 여기서도 루이 뒤 티에의 이름을 생략한다. 46  )   L: urb Metensi. F: Metz. 47  )   VC/1565는 이곳 지명이 Desme이라고 알려 준다. 48  )   L: corona[tis]. E: Crown. 영국에서 발행한 크라운 은전(銀錢)을 의미한다. 49  )   L: Argentina. G: Strassburg. F: Strasbourg. 50  )   L: Basilea. G: Basel. F: Basle=Bâ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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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욤 뒤 벨레51  )  의 제안으로 “현명한 처방”을 찾았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 대신 그들의 영을 과시하며 모든 위정자들을 경멸하는 재세례파들 만 엄히 처벌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참된 종교에 낙인찍힌 이 런 불명예를 용납하지 않고, 그의 책 ( 내 판단에는 비견될 수 없는 ) 을 출판할 기 회로 삼았으며, 거기에 왕 자신에게 드리는 탁월한 헌정 서문을 첨가 했다. 만일 국왕이 그것을 읽은 것이라면, 내게 결정적인 실망이 되거나, 그가 저 바빌론의 창녀에게서 크게 상처를 받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왕은 뒤를 이은 이들과는 달리, 사건에 대한 매우 예리한 평가자요, 참된 것을 알아보는 데 적지 않은 판단력을 갖췄으며, 학식의 후원자며, 사적 으로는 우리에게 적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작품을 읽기는커녕 들 어 보지도 못했다. 이는 프랑스 백성과 왕 자신의 죄가 드러나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매우 임박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책을 출판한 뒤, 칼뱅은 조국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프 랑스 왕 루이 12세의 딸인 페라라 공작부인 52  )   ( 당시 었다 ) 을

그의 경건은 널리 알려져 있

방문하려 했으며, 동시에 멀리서나마 이탈리아에게 경의를 표하

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53  )   그리하여 그는 공작부인을 방문하고, 상황 이 허락하는 한, 참된 경건에 대한 그의 열정을 격려했다. 그래서 그 후 그 부인은 평생 특별히 그를 귀중히 여겼고, 최근 아직 살아서 감사할 줄 아는 그 부인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눈부시게 증언했다. 그 후 칼뱅 은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탈리아에 들어간 목적이 거기서 나오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곤 했다.54  )   그는 모든 가사를 정리한 후 바젤이나 스트라스부르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유일하게 생존한 동

51  )   L: Guilielmus Bellaius Langaeus. F: Guillaume du Bellay de Lange. 52  )   르네 드 프랑스를 의미한다. 53  )   페라라는 로마 동북쪽으로 아시시와 베니스 사이에 있으며, 칼뱅이 방문한 유일한 이탈리아

도시다. 베즈는 칼뱅이 받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영향을 똑같은 심정으로 느끼고 있다. 54  )   이것은 칼뱅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인문주의적인 수사학을 동료들에게 종종 사용한 흔적이다.

92 | 칼뱅 작품선 1


생 앙투안 칼뱅을 데리고 나왔는데, 다른 길들이55  )   봉쇄되어 그들은 스 위스56  )   국경을 통해 전쟁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야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제네바에 왔고 이 도시에 자신을 알릴 생각이 없었으나, 하나님 의 뜻에 따라 즉시 드러났고 그렇게 이끌렸다. 바로 직전 이 도시에서는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탁월한 두 사람의 활동에 의해 도입되었 는바, 도피네 57  )   출신인 기욤 파렐 ( 혹자가 말하듯 수도원 출신이 아니라 자크 르페브르 데 타플의 학생이었음 ) 과

베른 지역이자 프리부르 58  )   관할권인 오르브 59  )   사람 피

에르 비레가 그들이다. 그들의 노력에 주님은 풍성히 복을 주셨다. 칼뱅 은 선량한 사람들이 서로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들을 방문했다. 명백히 영웅적인 정신을 부여받은 인물인 파렐은 더 세월을 보내지 말고 제네 바에서 같이 일하자고 많은 말로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칼뱅은 쉽 게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파렐은 말했다. “나는 너의 공부를 핑계 대 는 너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래를 선포하노니, 만일 네가 여기서 우리와 함께 주님의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주님은 너 자신만큼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않는 너를 저주하실 것이다.” 이 끔찍한 위협에 겁 먹은 칼뱅은 치리회 60  )  와 위정자가 원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들의 동의 와 백성의 찬성으로 그는 설교자 ( 처음에 그는 이것을 거절했다. ) 뿐만 아니라, 성 경학 교사로도 선출되었으나, 1536년 8월, 그가 받아들인 이 직분[후자] 만이 명시되었다.

55  )   [CO]: 수정판에서는 finibus가 itineribus로 바뀐다. 56  )   Allobroges. 베즈는 고대 프랑스어권 스위스 지역에 살던 주민의 이름(121년에 로마에 종속

된)을 사용한다. 57  )   L: Delphinatis. F: Dauphiné. 58  )   L: Friburgensis. SF: Fribourg. [CO]: 프리부르 관할권(수정판 삭제). 59  )   L: Orbensis. SF: Orbe. 60  )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사제단을 뜻한 presbyterium이라는 말이 목사회를 의미하는지 치리회

를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계속되는 문맥을 통해 볼 때 후자가 더 어울린다. 치리회를 지칭하는 consisterium이 베른에서 만들어진 것이 1528년 5월임을 감안할 때(<칼뱅 서간집> 157쪽), 막 종교개혁 진영으로 넘어온 제네바 역시 이 심의 기관을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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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536-1537

이 해[1536]에 베른과 제네바 두 도시 간의 긴밀한 언약이 체결되고 로잔이 교황파와 맞서 자유로운 토론 ( 여기에 칼뱅이 개입한 것은 유명하다 ) 을 치른 후 그리스도에게로 귀속했다. 이 시기에 칼뱅은 교황 체제의 오물에서 갓 벗어난 제네바 교회에 적합한 기독교 교리 신조를 출판했다. 여기에 문답형으로 된 <교리문답서>를 추가했는데,61  )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주요 주제만을 담은 훨씬 짧은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파렐과 코로와 함께 교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그의 동 료들이 수줍음 때문에62  )   소란을 회피했으며, 심지어 어떤 이들 ( 이들은 뱅의 큰 걱정거리였다 ) 은

주님의 일을 방해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시민들

에 의해 그들 전체 모임이 교황 체제를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기독교 종 교와 치리 ( 소수의 우두머리가 포함된 ) 를 맹세하도록 시도했다. 적지 않은 수가 거부했으나, 사부아 공작의 올가미와 적그리스도의 멍에에서 막 해방되 어 여전히 분열이 크게 만연했던 도시에서, 1537년 7월 20일에 주님은 제네바 시의회와 백성이, 서기의 명백한 공적 선창에 따라서, 기독교 종 교와 치리에 대한 원칙을 맹세하도록 허락하셨다.63  )   이에 대해 화가 난 사탄은 그가 외부의 적을 통해 끝없이 시도했던 것을 경건을 구실로 이 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소용없었다. 그중 첫째가 재세례파이고, 다 음으로 피에르 카롤리다. 우리가 후에 말하겠지만, 이 사람은 주님의 어 떤 일을 위협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크게 배은망덕한 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후에 일어날 일들이 혼란을 초래할 뿐 아 61  )   본서에 수록된 <신앙교육서> 외에 다른 <교리문답서>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62  )   [CO]: 수정판에서는 timiditate앞에 prae를 붙여 둔다. 63  )   이 중대 사건에 대해 VC/1565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와 동료 목회자들은 사람들이 교황제의

우상숭배와 미신을 버렸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을 성찬에 받아들이는 것이 성례의 경멸임을 보고, 위정자들에게 백성을 열 명씩 불러 신앙고백에 서약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시 의회는 이것을 선하게 여겨 명을 내렸고 백성은 즐겁게 순종했다. 이는 칼뱅 자신이 작성하고 이어서 1538년 3월에 바젤에서 라틴어로 출판한 카테키스무스의 서문에 기록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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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주의 일을] 철저히 파괴하고 전복시키리라는 것을 예견하기 때문 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보다 앞서 가신다. 그가 친히 사건의 결말을 이끄 시기 때문이다. 1537년 3월 18일, 칼뱅과 그의 동료들은 재세례파를 자 유로운 공적 토론으로 소환해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준엄하게 논박했다. 이것은 드문 성공으로서, 그 후로는 교회에 겨우 한두 명 정도 나타났다. 교회를 소란하게 했던 두 번째 인물인 피에르 카롤리는 더 크고 더 긴 소란을 주었는데, 나는 그 요점만을 이야기하겠다. 다툼의 전체 이야기 는 분명히 드러나 있고 그리나이우스에게 쓴 칼뱅의 편지에서 얻어 낼 수 있다.64  )   열성적으로 이런 파렴치한 궤변가를 낳은 모태인 소르본은 훗날 그 자체로 이단에 해당되지 않는 그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카롤리 는 처음엔 제네바로, 다음엔 로잔으로, 그 후엔 뇌샤텔로 갔다. 그의 동 반자인 사탄의 영은 그가 다닌 어느 곳에서나 그의 추잡함의 깊은 흔적 을 남겼다. 자기 자신이 우리 쪽 사람들에게 폭로되는 것을 보고 그는 적 대자들에게로 갔다가 다시 그들에게서 우리에게로 되돌아왔다. 그의 수 법은 파렐이 칼뱅에게 쓴 긴 편지에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결국 그는 주로 우리 쪽 최고의 사람들인 파렐과 칼뱅과 비레가 성 삼위일체에 대 해 덜 바르게 판단하고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로 매우 많은 이가 참석한 대회가 베른에서 개최되었는바, 거기서 무고죄로 정죄된 피 에르 카롤리는 점점 약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메스65  )  로 갔는데, 이는 파 렐이 거기서 즐겁게 시작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도록 [사탄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편지로 경건한 자들을 도발했다. 이 굶 주린 개는 자신의 배교를 통해 어떤 이득을 얻겠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로마는 그를 사면했고 이 짐승을 면전에서 속죄했다. 거기서 조롱을 받은 그는 가난과 프랑스 옴에 시달려 즉시 병원에 수용 64  )   <칼뱅 서간집> 126쪽(서신 37). 65  )   Mediomatrices. 베즈는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Metz 지역)에서 살았던 종족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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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으며, 마침내 죄의 자식에 의해66  )   죄의 대가, 즉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이 저 불행한 자의 결말이었다. 1537년 한 해 동안 칼뱅은 프랑스에서 많은 사람이 내면에서는 진리 를 바르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자신에게 탐닉하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한편 [몸은] 가증한 교황파와 함께 했다. 칼뱅은 매우 정교한 <두 서신>을 썼는데,67  )   우상숭배를 피하 는 법에 대한 첫 편지는, 오를레앙 시절 오랫동안 우정과 친절을 베풀었 고 후에는 로렌 68  )   지방에서 법무관으로 임명된 니콜라 뒤슈맹69  )  에게 보냈다. 교황파 사제직에 대한 둘째 편지는 내가 앞서 언급한 제라르 루 셀에게 보냈다. 이 사람은 처음엔 수도원에, 다음엔 주교직에 있다가, 파 리의 소요를 면책하는 칙령 이후 바른 길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여주인인 나바르 왕비를 점점 침몰시켰다.

[5] 1537-1538

칼뱅이 이런 일에 몰두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매우 심각한 갈등 국면을 맞이했다.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도시는 복음을 수용하고 교황체제를 거부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 헌신한 도시에서 참사회원들과 성직자 들에 의해 오랫동안 팽배해진 부당한 악습을 버리지 않았으며, 또한 몇 몇 [제네바] 제일의 가문들이 포함된 토종들은 사부아 전쟁 70  )   때 생긴 적대감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칼뱅은 처음에는 부드럽게 권면했고 66  )   [CO]: 수정판에는 a filio peccati가 없다. 67  )   본서 7권 참고. 68  )   L: Cenomanensi. 알프스 북쪽 프랑스에 거주하는 민족을 뜻함. F: Lorraine 지방인가? 69  )   L: Nicolaus Cheminus. F: Nicholas Duchemin. 70  )   L: Sabaudices. I: Savoia. F: Savoie. 11세기 초에 발생한 이탈리아 사보이아(프랑스어 명 사

부아) 왕가는 1536년 프랑스에게 점령되었다가 1559년에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영토를 회복 한다. 여기서 사부아 전쟁이란 프랑스와 사부아 사이의 전쟁이지만 제네바에게는 독립 전쟁이 었다. 사보이아 지배 시절, 힘이 있었던 토종들은 독립 이후 그 영향력을 많이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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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완강한 자들에 맞서 제거되어야 할 이들에게 심한 책망을 했으 나, 아무 유익이 없었고 악은 진보했다. 사적인 분열이 도시를 여러 파당 으로 갈라놓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강제로 맹세된 질서에 결코 예속 되지 않았다. 마침내 고상하고 영웅적인 정신을 갖춘 파렐과 칼뱅은 동 료 코로 ( 우리는 앞서 그가 파리에서 얼마나 강하게 진리를 위해 싸웠는지 말했거니와, 칼뱅은 그를 바젤과 제네바로 이끌어 주었고 그 후 그는 이곳에 정착했다 ) 와

함께, 서로 불화하는 사람

들 가운데서, 그리고 모든 교회 치리와 상관없는 시민들에게, 주님의 성 찬을 바르게 시행할 수 없다고 명백히 증언했다. 이것에 다른 불행이 가중되었다. 제네바 교회와 베른 교회가 의식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제네바 사람들은 [성찬 시] 보통 빵을 사용했고 세례 직무 시 불필요한 세례반 ( 그렇게

불리는 ) 과

주일 외에

다른 축일들을 폐기했다. 이 문제들로 베른 사람들이 소집한 로잔 대회 는 제네바에 누룩 없는 빵이 회복되길 요청하도록 결정했고 제네바 목 사회71  )  가 먼저 동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또 다른 취 리히72  )   대회가 통고되었다. 이렇게 발생한 국면에서, 당시 시장들로 73  )   선출된 ( 이것은 제네바 공화국에서 매년 시행되는 가장 중대한 [행사]다 ) 분열과 불화의 지 도자들은 백성을 소집하고 상황을 이끌어 갔다. 그의 동료들의 견해와 같이한 칼뱅은 제공되는 모든 수단을 시도해 봤으나 소용없었다. 더 많 은 쪽이 더 나은 쪽을 이겼는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인 이 세 사람에게 이틀 안으로 도시를 떠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들이 주의 성찬 시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이 칼뱅에게 통지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사람들 을 섬겼다면, 고약한 대가를 치른 것이겠지만, 자신의 종들에게 한번 약 속하신 것을 언제나 갚으시는 이를 내가 섬긴 것이니 다행이다.” 이것이

71  )   collegium ministrorum Genevensium. 72  )   L: Tigurus. G: Zürich. 73  )   제네바는 네 명의 시장(sindicus)이 다스렸고 그 가운데는 수석 시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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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

1  )

매우 존경하는 시의원 여러분! 분명하기는, 우리 주님의 성만찬이 자주 거행되고 빈번하게 실시되지 않는 한, 교회의 질서가 제대로 잡혔다고 말할 수 없고, 누구도 거룩하고 특별한 경외 없이는 성찬에 감히 참여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한, 좋은 행정 조직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그 순수함 에서 보전하려면 출교라는 권징이 필요한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 한 말씀에 즐겁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자들이 바로잡힙니다. 나아가 공공 기도의 형식으로 몇몇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교회의 교화 에 매우 적절한 일인바,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를 칭 송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같은 기도를 드 리고 같은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데로 이끌리기 위함입니다. 셋째, 백성 을 교리의 순수함으로 지키려면 복음 교리가 실추되지 않도록 어린아이 들을 젊을 때부터 교육해 그들이 신앙의 동기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함이 매우 요구되며 거의 필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금언이 손에 서 손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부지런히 전달되어야 합니다. 마지

1  )   Articles baillés par les prê cheurs [de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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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으로, 결혼 문제에서 교황이 행사한 독재와 그가 결혼에 강요한 부당 한 법률은 많은 논쟁을 야기하는바, 이것들을 해결하려면 어떤 법규를 만들어 그것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리며, 상이한 일이 생길 경우 처 결해 그것을 가라앉히는 일이 매우 적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을 같이 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2  )   전, 처음 이 도시에 있었던 소동과 혼 란에 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단번에 질서 잡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백성의 무지 자체가 질서를 보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3  )   하지만 이곳 에 주님이 자신의 통치를 더 잘 세우시길 기뻐하신 이상, 이 일들에 대 해 다 같이 협의하는 것이 선하고 유익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주 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영의 도움을 청하면서 금후 어떤 정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지 주님 말씀을 통해 심사숙고한 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을 따라, 우리가 생각한 것을 조항을 만들어 그대들에게 제출 하기로 결정했기에, 여기서 그대들의 직무에 해당되는 것을 기꺼이 행해 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들이 우리의 충고가 복음의 거룩한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 의견서가 그대들의 도시에서 받 아들여지고 유지되도록 서두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선하심 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교회를 보존할 법규들이 어떤 것인지 그대들에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인바, 곧 이 법규들은 모든 정부와 행정의, 특히 교회 정부의 확실한 규칙인 그의 말씀에 실로, 그리고 가장 잘 갖추어져서 부 합된다는 것입니다.4  )   [성찬]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 시행은 최소한 매주 교회의 많은 수가 모였을 2  )   1536년 5월 21일. 3  )   칼뱅이 임종 때 동료들에게 이 시기의 형편을 “Tout estoit en tumulte”(Bonnet 2.574)라고

회상했다. 4  )   칼뱅은 <기독교 강요>(1536)에서 국가가 교회의 보존에 책임을 갖는다는 생각을 말한바

있다(CO 1.230).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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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행해짐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그곳에서 큰 위로를 받고 온 갖 방법으로 열매를 얻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믿음으로 그곳에 제시 되는 약속들, 곧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그의 죽음, 그 의 생명, 그의 영, 그의 모든 부에 참여자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뿐 아니 라, 우리로 하여금 기이한 것들,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들을 인정 하고 찬양으로 고백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모두 한 몸의 지체처럼 선한 평화와 형제적 일치로 결합되어 기독교적으로 살도록 하는 권면들에 대 해서도입니다.5  )   사실 예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은 이것을 일 년에 두세 번 기념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듯이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성찬 법규인 분병을 집요하게 밀고 나가는 것처 럼, 기독교 회중이 모일 때 사용해야 하는 우리 믿음과 사랑의 빈번한 행 사를 위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증한 미사가 도입되기까지 고대 교 회가 언제나 실시해 온 것입니다. 미사에서는 모든 신자의 참여 대신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제사한다는 이 끔찍한 신성모독을 만들었습니다. 그 리하여 성찬은 온전히 파괴되고 폐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이 너무 자 주 시행될 경우 이 거룩하고 너무 탁월한 신비가 경멸될 위험이 있을 만 큼 백성의 믿음이 약하므로, 이것을 고려해 아직 허약한 백성이 더 견고 해지기까지 한 달에 한 번 현금 설교가 이뤄지는 세 곳에서 곧 생 피에 르 ( St.

Pierre ),

리브,6  )   생 제르배 ( St.

Gervais ) 에서

시행되는 것을 좋게 여깁

니다. 방법은 이번 달에 생 피에르에서 하면, 다음 달은 리브에서, 그 다 음달은 생 제르배에서 하며, 이런 식으로 차례로 돌아가면서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한 지역을 위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전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7  )   이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편리한 시간을 정하고 그것을 한 주 전에 각처에 알릴 것입니다. 아무것도 경멸되지 않고 오히

5  )   성찬의 영적 열매에 대해 1536년 <기독교 강요>에 이미 나타난다(CO 1.126, 129). 6  )   Rive. 프란체스코 수도원이었던 교회당으로 뒤에 Madeleine이란 이름으로 바뀐다. 7  )   제네바시를 교구로 나누는 일은 더 뒤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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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이 숭고한 신비가 가능한 한 가장 큰 존엄으로 다루어지도록, 본래 하 나님의 신비들에 속한 모든 것을 관리하는 직분들인 말씀의 사역자들이 우리 주님의 살과 피의 표상이요 성사인 빵과 포도주를 분배함이 최상 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성실하고 소동이나 불손함이 없이 이루어지도 록 우리는 백성이 어떤 질서를 지켜야 할지 훈계하고 경고하며 각자를 타일러 혼동을 피하게 하며, 그대들이 보기에 편리한 방법을 통해 좋은 지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8  )   것을 우리 의무로 삼기로 했습니다. 성 바 울도 우리에게 특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곳 ( =성찬 ) 에 오라고 그토록 명 하기 때문입니다. [치리]

그러나 요구되는 주된 질서는 또한 가장 크게 배려함이 합당한 질서인 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한 몸과 한 영으로9  )   결합시키기 위해 세워지고 제정된 성찬이, 스스로 사악하고 불의한 삶을 통해 전혀 예수에게 속하지 않음을 공언하고 드러내는 자들이 그곳에 참여할 경우, 더럽혀지고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례 모독으로 우리 주님이 명 예를 크게 손상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명예까지 미치 는10  )   이런 오염이 우리 무지로 말미암아 우리 중에 들어오지11  )   않게 조 심해야 합니다. 성 바울도 이 성례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자들에 대한 그 토록 심한 보복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정책을 만들 권 세가 있는 자들은 이 영성체 모임에 오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정 된 지체가 되도록 개선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출교라는 징계와 권징을 두신 것인바, 이것을 통해 그는 한 그리

8  )   vous supplier de provoyr(=pourvoir). qu’il y aye bonne conduicte. 9  )   본문에는 avecq leur chefz et entre eux mesmes가 있다. 10  )   redunder = redonder (se répandre sur, rejaillir sur). 11  )   vehir = charrier.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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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인으로서 무질서하고 부당한 삶을 사는 자들, 그리고 훈계된 뒤에 도 개선되어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을 멸시하는 자들이 교회의 몸에 서 거부되며,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과 초라함을 인정하면서 회개로 되돌 아서기까지 거의 썩은 지체처럼 잘리길 원하셨습니다. 이 징계의 방식은 주님이 마태복음 18장에서 자신의 교회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멸시하지 않을진대, 우리는 그것 ( 출교 ) 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 바울에게도 그런 예가 있는데 ( 딤전 1장, 고전 5장 ), 그는 우리가 스 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 명백하게 방탕한 자, 인색한 자, 우상 숭배자, 나쁘게 말하는 자, 술 취한 자 또는 노략질에 빠진 자들과 결코 사귀지 말라고 엄히 선포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 경외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법규가 우리 교회에 세워져야 합니다.12  )   게다가 다음과 같은 명백한 명령이 없다 해도, 우리는 이 법규가 서 있는 근거 들과 그것에서 오는 열매들을 사용하는 데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 명령 은 이렇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자신의 교회가 사악하고 모 든 악덕에 물든 자들의 푸닥거리이기나 한 것처럼 그렇게 모독과 치욕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징계를 받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부 끄럽고 창피하게 여겨,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을 고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은 그들과 사귐으로 부패하거나 타 락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예를 통해 유사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경 고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3  )   이 징계의 사용과 실천은 고대에 교회에서 얼마동안 지속되어 특별 히 유용했고 또 기독교의 발전도 가져왔습니다. 어떤 사악한 주교들 아 니 주교 자리를 점령한 강도들이 그것을 독재로 바꿔 놓고 그들의 좋지 않은 탐욕으로 남용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이 그의 교

12  )   이 말을 그대로 받을 경우, 당시 제네바에는 아직 수찬 정지라는 권징이 행사되지 않고 있

었다. 13  )   칼뱅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같은 것을 순서만 다르게 언급한바 있다(CO 1.76).

166 | 칼뱅 작품선 1


회에 주신 가장 유익하고 유효한 것 중의 하나인 출교가 오늘날 교황의 나라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장 해롭고 흉악한 것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 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은 가짜 주교들이, 사실 말씀을 통해 볼 때 실로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출교에 대한 인식과 권세를 신자들의 모임에게 서 약탈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권세를 찬탈한 다음, 그것을 아주 사악한 것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한 교회가 주님의 이 명 령을 간직하지 않고는 그 진실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이 명령 에 대한 경멸이 두렵게도 하나님의 크신 보복으로 처벌될 수 있음을 상 기한 이상, 우리에게 명백해 보이는 것은 이 명령을 교회에서 다시 살리 고 우리가 성경의 규율에 따라 실행하되, 그러나 한편으로 그릇된 사용 으로 부당하게 그것을 타락시키고 부패시키지 않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의 시행을 위해 우리는 그대들에게 부탁할 것을 결의했는바, 모 든 신자 가운데서 선한 생활과 선한 증거를 가지며 또한 매우 꿋꿋하 고 결코 쉽게 부패하지 않는 몇 명을 선출하고 임명하되, 그들로 도시의 전 구역을 분담해 각자의 생활과 감시하고 감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 일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 책망할 명백한 악덕을 볼 경우, 그들은 목회자 들 중 누구와 연락해 잘못된 자는 누구나 훈계하고 스스로를 고치도록 형제애로 권면해야 합니다. 만일 그런 훈계가 아무 유익을 가져오지 못 할 경우, 그의 고집을 교회에 알리겠다고 그에게 경고합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이미 이 권징의 큰 유익입니다. 만일 그가 인 정하길 원하지 않을 경우, 이 소송을 건 사람들에게서 내용을 들은 목 회자가 회중에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아무 유익이 없었는지에 대해서 와, 그를 치료할 의무에 대해 공개적으로 포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가 그 마음의 강퍅함을 고집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그 때가 그를 출교할 시기, 다시 말해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회중에서 버림 받아 마귀의 권세에 넘겨진 자로 간주되는 시기가 될 것인바, 이는 일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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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창피함을 주는 것으로 그가 자신의 회개와 개선의 참 모습을 보일 때까지 할 것입니다. 이 출교의 표로서 그는 성찬의 영성체에서 거부되 고 다른 신도들에게 그와 친밀히 대화하지 않도록 공고되는 것입니다.14  )   그러나 그래도 그는 설교에 참여해 변함없이 교리를 받되 주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하사 선한 길로 돌아서게 하시길 기뻐하실지 알아보아야 합 니다. 이런 방식으로 징계되어야 할 악덕들은 그대들이 앞서 들은바 성 바울이 명명한 것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입니다. 이웃이나 친척 같은 어 떤 이들이 이런 악덕을 저지를 경우, 위에서 말한 대표자들이 그것에 대 해 알기 전에 그들 스스로가 훈계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그것을 유익 하게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경우, 그들은 그 대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에 출교를 회복시켜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얼 마나 우리에게 좋은 수단으로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징 계 외에는 실행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출교당하는 것을 조소 하고 그런 거부에 생사를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온갖 퇴폐에 빠져 있는 거만한 자들이 있다면, 그런 타락과 그런 하나님 및 그의 복음의 우롱 을 처벌하지 않고 오랫동안 참아야 하는지는 그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 도시에는 복음을 전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어 긋나는 온갖 미신들로 마음에 채우면서 할 수 있는 한 복음을 반대하는, 많은 거주민이 있다는 커다란 의혹과 거의 명백한 기미가 있으므로, 첫 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보증인이길 원하는 자인지 아닌지 14  )   파렐은 이렇게까지 멀리 나가지는 않았다. 1534년 그의 Sommaire에서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S’il ne se veult amender, alors tous ceulx de la parroisse…le doivent prier et admonnester de soy retourner et laisser son péché. Et si pour tout cecy il ne veult rien faire, alors on ne doit converser avec luy, sinon comme avec ung infidèle: avec lequel tu ne vouldroys point venir à la table de Nostre Seigneur, ne aussi converser avec luy approuvant sa vie ne sa foy. Mais en toute autre sorte beuvant et mangeant avec luy, pour le gaigner et retire. Ainsi fault converser avec l’excommunié, en toute chari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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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매우 적절할 것입니다. 사실 이전에 실 로, 그리고 타당하게 우리 회중의 회원으로 간주되었던 자들을 출교로 거부할 필요가 있다면, 하물며 회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들과, 받아들 여서는 안 될 자들을 구별하는 것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신앙 의 분리보다 더 큰 분리가 없음이 분명할진대 신앙에 있어서 우리와 일 치하는 자들이 그들의 악덕으로 인해 출교된다면, 하물며 종교에 있어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자들이 교회에서 너그럽게 취급되어서는 안 될 것 은 더욱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해 우리가 생각한 치료책은 그 대들의 도시의 전 거주민들로 하여금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신앙의 동 기를 설명하게 해15  )   누가 복음에 일치하는지,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 라보다 교황의 나라에 속하길 더 좋아하는지 알아보도록 그대들에게 부 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의회 여러분, 그대들이 각자 시의회에서 신앙고백을 한다면 이것이 기독교 위정자들의 결의서가 될 것이며, 이것 을 통해 귀 신앙의 교리가 실로 모든 신자가 하나의 교회 안에서 연합되 는 교리임을 사람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그대들의 모범을 통해 그대들을 따라서 각자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 로 그대들 동료 중 몇몇을 임명하고 어떤 목회자와 결속시켜 시민 각자 에게 똑같은 것을 행하게 요구하십시오. 이것은 이번 한 번만을 위한 것 인바, 이는 사람들이 아직도 각자가 어떤 교리를 간직하고 있는지, 교회 의 올바른 시작이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찬송]

또 다른 하나는 시편에 대한 것으로, 우리는 고대 교회에 있는 모범에 따라, 그리고 회중 가운데서 입술과 마음으로 찬양하는 것이 좋다고 말

15  )   Herminjard는 21개 조항으로 된 파렐의 <신앙고백서>가 본 청원서(1537년 1월 13일)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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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성 바울의 증언에 따라 교회에서 시편을 찬송하길 바랍니다.16  )   우리 는 이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시편 찬송에서 오는 신앙의 증진과 교화 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의 기도 는 너무 냉랭해 우리를 크게 수치스럽고 창피스럽게 합니다. 시편은 우 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끌어올리게 하고 열렬히 하나님을 부를 뿐 아 니라, 찬양으로 그 이름의 영광을 높이도록 이끌어 갑니다. 게다가 이것 을 통해 사람들은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참된 영적 찬양이 되어야 할 시 편을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중얼거리도록 만들었을 때, 그들이 교회에 서 어떤 유익과 어떤 위로를 빼앗아 갔는지 알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을 시행하는 방식은 간단한 교회 찬송을 미리 연습한 몇몇 어린 이가 크고 뚜렷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 주민이 아주 주의 깊게 듣고 입 으로 노래되는 것을 마음으로 따라하되, 점점 각자가 공동으로 노래하기 에 익숙할 때까지 하는 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혼잡을 피하 려고, 그대들이 누군가가 무례함으로 질서를 어지럽혀 거룩한 회중을 조 롱으로 만들지 못하게 함이 필요합니다. [교회 교육]

셋째 조항은 어린이 교육에 대한 것으로, 어린이들의 신앙고백은 의 심 없이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고대에는 각자를 기독교 의 기초로 육성하기 위한 일종의 교리문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기독교를 선포하기 위해 사용하는 증거 문서와 같은 것으로, 어 린이들은 이 교리문답으로 분명하게 교육받아 유아 세례 시 증언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신앙을 교회에 와서 입증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 에 성경은 고백을 신앙과 연결시키며, 우리가 진실로 마음으로 믿어 의 에 이른다면, 우리가 믿은 것을 입으로 고백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16  )   1541년 Clément Marot가 번역한 Les Pseaumes de David 이전에 이미 프랑스 운문에 맞춘

시편이 있었다(참고. Herminjard 4.163, 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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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이 규례가 결코 합당하고 적절하지 못 했다 해도 이제 이 규례는 필요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전반적으로 하나 님 말씀에 대한 경멸과 자녀들을 하나님의 길로 양육함에 있어 부모들 의 소홀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길에 대한 놀라운 무지와 무뚝뚝한 태도를 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개선책은 모든 어린이 들에게 가르칠 쉽고 간단한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며,17  )   일 년 중 어느 계절에 그들이 목회자들에게 나아와 그들 각자의 능 력에 따라 문답과 시험을 받고 더 풍부한 고백 선언을 갖되, 충분히 교 육을 받았다고 인정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들은 기꺼이 부모들을 명해 그들의 자녀들이 이 요약을 배우고 공지되는 시기에 목 회자들 앞에 출두하도록 수고와 근면을 아끼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결혼]

마지막으로, 교황이 멋대로 등급을 만들고 모든 이성에 거슬려 부당 하게 이혼을 야기하면서 결혼의 명분들을 너무 흐릿하게 했으므로, 또 한 하나님 말씀에 의해 너무 자주 일어나는 논쟁들을 해결하는 것이 요 구되고 또 필요하므로, 우리는 더 확실한 것을 갖기 위해 그대들에게 다 음과 같이 청원합니다. 곧 그대들은 그대 동료 중 몇몇 사람에게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위해 몇몇 목회자와 결속시켜 앞으로 있을 모든 소송을 판결하고 결정하는 책임과 임무를 부여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위원들은 위에서 말한 목회자회와 함께, 공 동으로 일어날 경우에 대한 규례들을 세우고, 그에 따라 판단할 것인데 물론 시행하기에 앞서 그대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먼저 그대들에게 그 규례들을 제출할 것입니다.

17  )   <제네바 신앙교육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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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매우 존경받는 지도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여러분에게 모두 일치해 애정을 다해 청원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라는바 만일 이 충 고와 권면이 진정 하나님 말씀에 속한 것이라면, 이것들을 우리에게서 나온 것으로 받지 말고 이것들이 나오게 하신 분의 것으로 받으십시오. 마찬가지로 이 충고와 권면이 하나님 영광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존하며 교회를 온전히 유지하는지 고려하십시오. 이런 고려는 그대들이 보기에 그대들의 직무에 속한 것뿐 아니라, 그대들의 백성을 좋은 정책으로 보 존하기에 필요한 것을 부지런히 수행함에 있어 그대들의 몸을 아끼지 않게 할 것입니다.18  )   그리고 이 일에 있어 누군가가 주장할 수도 있는 어 려움이 여러분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 신 것을 따르고자 헌신할 때, 그가 선하심으로 우리 계획을 끝까지 인도 하시고 왕성하게 하시리라는 희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그 대 자신들이 충분히 경험한 바대로 모든 일에서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께서 그대들을 자신의 능력으로 도우사 모든 것을 좋은 결과로 이끄시길 빕니다!

18  )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 사항에 대해 Herminjard 4.165, n.17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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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신앙교육서

1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태어난다는 것

사람들 가운데, 그가 아무리 야만적이고 우둔하다 해도 약간의 종교 의식을 접하지 않은 자가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므로, 우리가 모두 우리 창조주의 위엄을 알도록 지음 받았음에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를 알되, 그를 소중히 평가하며 모든 경외와 존경으로 영예롭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이 하나님 의식을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제쳐두고, 경건을 고백하 는 우리는 곧 끝나게 될 이 육체적 삶이란 영생에 대한 묵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외에는 어디서고 영 원불멸의 삶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주된 주의와 염려는 하 나님을 추구하고 마음의 모든 정을 다해 하나님을 바라며 그분 외에는 다른 곳에서 안식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참된 종교[경건]2  )  와 거짓 종교[경건]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우리 삶에 종교가 없다면 우리가 매우 비참하게 살게 된다는 것과 심 1  )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 ’Eglise de Genève , 2  )   칼뱅은 이따금 religion(religio)과 piété(pietas)를 혼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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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 야수보다 더 탁월할 게 전혀 없다는 것이 모두의 동의로 인정되므 로,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서 아주 멀어진 것으로 간주되길 원하 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종교를 표명하는 방식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진실로 맛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들로 생각나 게 하는 이 사유, 곧 어떤 신성이 있어 그 힘으로 그들이 확고히 서거나 넘어진다는 생각에 묶여 있으므로, 그들은 그토록 큰 힘을 생각하고 놀 라 그것을 너무 크게 경멸하므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들을 향해 자극시 키지 않도록, 그것에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갖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질 서하게 살고 또는 정직성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는 데서 큰 안심을 한다. 게다가 그들이 하나님을 그의 무한한 위엄으로 평가하 지 않고 그들 정신의 우둔하고 경솔한 허영으로 하므로, 이 점에서 그들 은 하나님에게서 돌아선다. 따라서 그들이 후에 제아무리 큰 치유로 하나님을 섬기려 애를 쓴다 해도 그들은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영원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 그들 마음의 허상과 몽상을 경배하는 까닭 이다. 그런데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자발적으로 피하면서 그 피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는3  )   그런 두려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참된 경 건은 하나님을 온전히 아버지로서 사랑하며 그를 주님으로 온전히 존경 하며 그의 의를 사랑하며 그에게 죄짓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 는 순수하고 진정한 열심 안에 있다. 이 열심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들의 경솔함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하 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며 또 그들에 게 제시되고 선포되는 그대로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 는다.

3  )   mais pourtant quelle ne le peult fayre en a horr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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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하나님의 위엄이 본래 인간 오성의 수용력을 넘어서고 심지어 오성으로 이해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 위엄의 높이에 대해 알아보기 보다 그것을 경배해야 하는바, 이는 그토록 큰 광명 ( 지식 ) 으로 완전히 압 도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가 하신 일들 속에 서 찾고 생각해야 하는바, 이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의 작품들은 보이 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불린다 ( 롬

1장; 히 11장 )

그것들이 다른 방도로

는 주님에 대해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 은 보잘것없고 헛된 사색을 통해 우리의 이해를 미해결 상태로 두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이며 공급물을 만들어 내고 우 리 안에 참되고 확고한 경건 곧 경외와 결속된 신앙을 굳건히 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삼라만상 안에서 만물의 시작과 근원이 유 래하는 우리 하나님의 불멸성을 응시한다. 다시 말해, 그토록 거대한 기 구를 만들고 이제는 그것을 유지하는 그의 힘, 그토록 크고 복잡한 다양 함을 매우 분명한 질서로 구성하고 지배하는 그의 지혜, 만물이 창조되 어 지금 존재하는 원인 자체인 그의 선함, 선인들을 보호하고 악인들을 보복함에 있어 놀랍게 나타나는 그의 정의, 우리를 불러내어 고치기 위 해 그토록 큰 인자함으로 우리의 불의를 참아내는 그의 긍휼 등이다. 확 실히 우리는 우리의 조잡함이 그토록 큰 빛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이것 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워야 했다. 그 러나 눈이 멀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이 점에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그것들을 나쁘고 사악하게 여기고, 밝히 비춰질 하늘의 모든 지혜를 온전히 뒤집어 버리 는 그런 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그를 매우 잘 묘사하는 말씀에게로 나와야 한다. 이는 이 작품들이 우리 판단의 사악 함을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규칙으로 말미암아 평가되기 위함 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모든 생명, 정 제네바 신앙교육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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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혜, 능력, 선함, 관용의 근원이요 샘이라는 것을 배운다. 어떤 예외 도 없이 모든 선이 하나님에게서 유래하듯이 모든 칭송도 그에게 돌려 져야 함이 마땅하다. 비록 이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어느 곳에서도 명백 히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로 내려와 주님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우리에게 밝히시며 자신의 정의와 관용과 선함을 베푸시는지 고려할 때, 궁극적으로 우리는 진정 그 작품 들이 주로 무엇을 목적으로 삼으며, 무슨 가치를 가지며, 우리가 그것들 을 왜 알아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

인간은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는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고상하게 입히신 그 장식들 안에서 그것들의 주인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에게 합당한 그런 인식을 통해 그를 명예롭게 하기 위 함이다. 그러나 그의 본성의 그렇게 놀라운 탁월함을 부여받고서도 그것 이 어디에서 와서 존속하고 있는지 망각한 채 주님 없이 자신을 높이려 애쓰므로, 그가 어리석게도 자랑했던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빼앗기는 게 필요했다. 이는 모든 영광을 빼앗기고 나서, 그가 주님의 하사품에 풍요 로웠을 때 감히 멸시했던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아 담의 씨를 근원으로 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 모양이 우리에게서 지워진 채, 육체에서 육체로 태어난다. 비록 우리가 영혼과 육체로 구성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육체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심 지어 우리 눈을 돌려 인간의 어느 구석을 살필 때 하나님에게 부정하고 속되며 가증스럽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다. 인간의 신중 함이란 눈이 멀고 무한한 오류로 덮여 있어,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에 반 대되기 때문이다. 부패된 감정으로 가득한 악의 ( 惡意 ) 가 하나님의 정의 이상으로 더 싫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행을 향해 무능한 힘은 불 의를 향해선 맹렬히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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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에 대해

성경은 자주 인간이 죄의 노예임을 증언한다. 이 사실은 인간의 정신 이 하나님의 정의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불의하고 더럽고 나쁜 짓 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완전히 죄의 독액으로 젖은 마음이란 죄의 열매 외엔 아무것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 간이 격렬한 필요에 의해 마치 어쩔 수 없이 죄 짓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인간은 매우 성급하고 비뚤어진 의지의 동의로 죄를 짓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정의를 극도로 미워 하는 한편 모든 종류의 악에 열심이므로, 인간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선악에 대해 선택의 자유로운 힘이 없다. 죄와 죽음에 대해

성경에서 죄는, 모든 악의 근원인 인간 본성의 사악함으로 불릴 뿐 아 니라, 그 본성에서 태어나는 나쁜 탐욕과 이 탐욕에서 나오는 불의로 불 린다. 곧 살인, 도둑질, 간음, 그리고 이런 식의 다른 것들처럼 말이다. 우 리는 커 가면서 하나님의 더 중한 심판을 언제나 우리 위에 쌓아 놓는다. 결국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매일 더 앞당긴다. 만일 모든 불의가 하나님 의 정의에 비춰 가증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을진대, 우리 곧 그토록 큰 죄책으로 짓눌리며 끝없는 오물로 더럽혀진 비참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에서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분개하신 모습 그대로의 매우 확실한 당 황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런 인식은, 설사 그것이 인간을 공포로 치고 절망을 짓누른다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바,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 의를 벗어 던지고 삶의 모든 기대를 물리친 뒤 우리의 가련함과 비참함 과 수치를 깨달아 앎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복함을 배우고, 우리 의 죄악과 무능과 타락을 인정함으로써 거룩함과 힘과 구원의 모든 영 광을 그에게 드리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다.

제네바 신앙교육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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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구원과 생명으로 회복되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는 우리에 대한 이런 인식을 통해 그 인식이 명백히 우리 마음에 들어올 경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 을 쉽게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 자신이 다음 두 가지 전염 병 곧 하나님의 보복이 없이 안전하리라는 것과 우리 자신에 대한 그릇 된 확신을 파괴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나라의 첫 관문을 열어 주 셨다. 그때 우리는 이전에 땅에 고정시켰던 눈을 하늘로 들어올리며, 우 리 자신 안에 머물러 있던 우리가 주님을 바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한 한편으로 이 긍휼의 아버지는, 비록 우리 죄가 정녕 다른 것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그의 후덕함에 따라 이처럼 고통받 고 놀란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에 적합하다고 여기 시는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 오류에서 올바른 길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마귀의 나라에서 그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 러므로 주님이 하늘의 생명의 유업 가운데 두길 기뻐하신 모든 자에게 우선 이 단계를 세우셨으므로, 다시 말해 그들이 자기들의 죄의 무게에 대한 양심과 죄책으로 상심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 괴롭힘을 당하 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이 지식 안에서 우리를 연단시키는 자신 의 율법을 제시한다. 주님의 율법에 대해

하나님의 율법에는 모든 정의의 매우 완벽한 규칙이 부여된바, 사람들 이 이를 주님의 영원한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음은 매우 타당하다. 그곳에 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두 돌 판 안에 충분하고도 명 확히 담아 놓았기 때문이다. 첫째 돌 판에서 그는 자신에게 합당한 자신 의 위엄에 대한 섬김이 무엇인지 몇 가지 계명으로 기록했다. 다른 돌 판 에서 그는 이웃 사람들에게 속한 사랑의 직무가 무엇인지 기록했다. 그 러므로 이 율법을 들어 보자. 그러면 우리가 어떤 교훈을 취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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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54년 10개월 17일을 살았고 절반을 거룩한 복음 사 역으로 보냈다. 그는 보통 키에 약간 창백하고 거무스름한 안 색과 죽을 때까지 맑았던 눈을 가졌고 총명을 타고났다는 말을 들었다. 옷차림은 세련되지도 남루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절제 라는 말이 어울렸다. 식사도 절식했으며 허접이나 향락과는 매 우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우 적게 먹었는데, 많은 햇수 동안 약한 위장 때문에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

* * * 칼

고 기억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그가 한 번 본 사람은 많은 해가 지난 후에도 즉각 알아보았으며, 구술 도중 종종 몇 시간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동안 혼란이 생길 경우, 알려 주지 않아도 이내 받아쓰던 곳으

<기독교 강요/초판, 1536>

로 돌아올 정도였다. 또한 자신의 소임 때문에 알아 두어야 할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중대한 것은, 아무리 무한히 많은 업무로 압박을 받아도 결코 잊지 않았다. 판단력은 상담 내용이 무엇이든 맑고 정확해 거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의 예언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의 충고를 따른 사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람이 방황한 기억이 없다. 그는 말솜씨를 경멸했고 말을 적게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도 (시샘하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맑게, 더 무게 있게, 더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통찰력 있게 글을 쓰지 못했다.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했으나 결코 부적합한 작가는 아니었다. 이날까지 어떤 신학자

1

- <베즈의 칼뱅 전기>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박건택 옮김

<칼뱅 서간집>(1530~1538)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69-1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4,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1

Jean Calvin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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