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적이] 불경건한 통치를 펼 치기 위한 구실로 “교회”라는 공허한 이름을 거론할 때 어떤 장 애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름을 내뱉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참된 교회란 무엇이며 이 교회의 일치 는 어떤 것인가를 판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중 첫 번 째는 이것인데, 즉 우리가 교회를 그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 * * 칼
뱅
총
서
로부터 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을 말할 때, 나는 [이 이름을] 그가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인친 바 복음의 가르침과 함께 묶어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들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이 참된 교회임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한다면 우리 적들은 무
<기독교 강요/초판, 1536>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엇보다 맨 먼저 그들 자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순수한 가르침이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있음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말하고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있는 올바른 교리의 설교와 순수한 성례의 집행이 바르게 질서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잡힌 참 교회의 일치된 영원한 표지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바울은 교회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의 터 위에 세우심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을 입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2:20). 이 터 위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2
에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반드시 곧 무너질 것입니다. - <교회 개혁의 필요성>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0-7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16,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2
Jean Calvin 교회 개혁서 2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De Necessitate Reformandae Ecclesiae , 1543)… ……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Vera ecclesiae reformandae ratio , 1549)… …… 144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1537)……………………………………………………………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 ……………………………………………………………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1545)… ……………………………………………………………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1559)………………………………………………………………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61)… …………………………………………………… 359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1533)… ……………………………………………………………………… 6 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1536)…………………………………………………………………… 44 성만찬 소고(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1549/1555)…………………………………………………………… 94 스캔들 론(1550)… ……………………………………………………………………… 150 유언과 두 고별사(1564)………………………………………………………………… 288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6 성물론(1543)…………………………………………………………………………………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341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1543)…………………………………………………………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1552)…………………………………………………… 330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1534/1542)……………………………………………………………… 6 재세례파 논박(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1547)… …………………………………………… 348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1537)… …………………………………………………………………………… 6 신도의 처신(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 185 네 편의 설교(1549/1552)………………………………………………………………… 211 세르베투스 논박(1553)… ……………………………………………………………… 298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 333 2. 참고문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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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의 필요성
1 )
지금 슈파이어에서 제국의회를 관장하고 있는, 최고 무적의 황제 카를 5세와 가장 뛰어난 군주들, 그리고 기타 신분의 인사들에게 드리는 탄원적인 권면.2 )
그들이 교회 개혁의 직무를 진지하게 담당하고자 하기를! 그리스도가 통치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제출함. 요하네스 칼비누스.3 )
황제 폐하, 폐하는 지극히 탁월한 군주들과 제국의 다른 신분들과 함 께, 결국 우리 모두에게 지극히 비참하고 거의 절망적으로 보이는 교회 의 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이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폐하 자신에게와 동시에 지극히 탁월한 군 주들 및 저명인사들께 내가 간절히 바라고 탄원하는 바는, 폐하께서 이
1 ) De Necessitate Reformandae Ecclesiae . 2 ) Supplex exhortatio ad invictiss Carolum Quintum et illustriss principes aliosque
ordines Spirae nunc imperii conventum agentes. 3 ) Eorum omnium nomine qui christum regnare cupiunt . per D. Ioan. Calvinum.
6 | 칼뱅 작품선 2
회의에 좌정하고 계시는 동안 내가 여러분 앞에 내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을 읽고 신중하게 검토하길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 명분 의 무게와 중대성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듣고자 하는 강한 마음을 불러 일으킬 것인바, 나는 주제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어 려움 없이 방향 설정을 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든 간에 나는 여기서 경건한 교리와 교회를 옹호할 것을 표명하는 바입니다. 이런 이 유에서, 내가 이런 자격을 거짓으로 찬탈하는 것인지, 내가 그런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고 내가 주장하는 바를 입증하는지가 드러나기까지, 여 러분이 내 말 듣기를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자격이 내게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나는 내가 이런 중책을 맡기에 결코 합당하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내 임무의 이유를 듣고 나서, 내가 감히 이 직 무를 맡아 수행했다는 이유에서 나를 ‘정신 나갔다’라든지 ‘분별없다’고 비난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흔히 인간들이 행하는 방식에 는,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장려하거나 분명히 금하는 두 가지가 있 습니다. 즉 정직하고 경건하게 열심히 한 일은 칭찬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이요, 또한 공적 필요성의 압력에 의해 발표된 것은, 우리가 판단하기 에, 적어도 핑계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내 게 명백하므로, 공평함이 여러분에게 있는 한, 이 나의 충언이 용이하 게 여러분께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 필요한 상황에서 당장 내게 일이 맡겨질 수밖에 없는 때, 내가 그리스 도의 교회 ( 지금 는 ) 를
심각하게 시달리고 극도로 위기 가운데 처해 있으나 전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되
힘을 다해 돕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낫고 더 고결한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튼 내 자신에 대해선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모든 사람의 일치된 목소리에 의해 표명된 것으로 받 아 주십시오. 벌써부터 교회 회복을 위해 노심초사해 온 사람들이거나 교회가 참된 질서로 회복되길 열망하는 모든 사람의 목소리로 말입니다. 결코 낮은 계층이 아닌 몇몇의 군주와 적지 않은 탁월한 도시 국가들이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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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의명분에 속해 있습니다. 비록 내가 개인의 자격으로 이 모든 것 을 말하지만, 나를 통해 동시에 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는 실로 그들입 니다. 이 사람들에 덧붙여 기독교 세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으면서 나와 함께 이 탄원에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무수히 많은 경건한 사람들 을 첨가해 주십시오. 요컨대, 이 글을 현 교회의 타락을 너무 심각하게 한탄한 나머지 더 이상 더 참을 수 없어 무슨 개선책이 보이기까지 가만 히 있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일치된 진술로 간주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가 불쾌한 이름으로 망신당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우리 주장을 들어주시고, 또 듣고 난 후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가 어떤 것인지 판단해 주십시오. [글의 목적]
먼저, 문제는 교회가 많은 악성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 그것은
예컨대 웬만한 판단을 내리는 모든 사람 사이에서는 자명한 일이므로 ) ,
그런 종류의 질환이 더 이상 치료를 연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인지 아닌 지의 문제입니다. 너무 지지부진한 처방을 지켜보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 든 유익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경솔하고 불경한 혁신을 꾀 한다고 비난받고 있는바, 그 이유는 우리가 교회의 옛 상태에서 뭔가를 감히 완전히 축출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치 그렇게 된 것이 정녕 아무 이유도 없거나 잘못된 것인 양 말입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런 점에서 서슴없이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개선책을 바라는 데 있어서는 실로 정당하지만, 그것을 수행함에 서는 정당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물들에게서 내가 당장 바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 빨리 성급하게 굴지 않았다는 것과, 우리 의무 에서 벗어난 어떤 것도 경솔하게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 극단적인 필요 성의 강요 없이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음을 실제로 내가 증명해 보이 기까지 잠시 판단을 유보해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입증하려면
8 | 칼뱅 작품선 2
싸움이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사태로 보이는지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초기에 루터와 다른 이들을 일으켜 구원의 길로 우리를 비추도록 횃 불을 들게 하시고 그들의 사역을 통해 우리 교회들을 세우고 건립하셨 을 때, 우리의 종교의 진리와 순수하며 합법적인 하나님 예배와 인간의 구원이 포함된 주요 교리가 거의 다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는 성례의 사용이 많은 점에서 손상되고 부패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우리는 교회의 통치가 견딜 수 없는 광적인 폭정으로 변해 버렸다고 주 장합니다. 하지만 더 잘 설명되지 않고서는 이런 것으로 어떤 사람들을 설득시기에는 충분한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태가 필요 로 하는 만큼은 못 되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설명을 할 것입니다. 그 렇다고 여기서 우리의 모든 논쟁을 재론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긴 논의를 요구하는 일로서, 여기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다만 나는 우리 를 바꿔 놓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들 ( 그것 때문에 우리가 비난받는 ) 이 얼마나 정 당하며 필연적이었는가를 밝히려는 바입니다.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나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함께 취급하려 합 니다. [I] 첫째, 우리로 치료책을 찾게 만든 악습들을 간단히 열거해야 합니다. [II] 둘째, 우리 쪽 사람들이 사용한 바로 그 치료책이 적합하고 유익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III] 마지막으로, 사태가 즉각적인 개선을 요구했으므로 손을 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음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첫째 사항은 단지 다른 두 가지 사항의 전개를 분명하게 할 목 적이므로 몇 마디로 정리하려 노력하겠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속하지도 않은 직무를 부당하고 성급하게 찬탈했다는 주장에 근거해 우리에게 씌 워진 신성모독적인 대담함과 선동이라는 무거운 비난을 씻어 내야 하는 곳에서는 약간 길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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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교회의 현재 상태—악습에 대한 열거] [기독교의 몸과 영혼]
만일 우리 가운데 기독교 종교가 무엇에 달려 있으며 무엇으로 그 진 리를 견지하는지 묻는다면, 다음 두 가지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할 뿐 아 니라, 그것에 다른 모든 부분과, 그리하여 기독교의 모든 영향력이 포 함된다는 게 명백합니다. [1]4 )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예전으로 경 배받으신다는 것과, [2] 이로부터 구원이 자신들에게 얻어진다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랑할 수 있겠지만, 그때 우리의 고백은 헛되고 무익합니다. [3] 이것들 다음으 로 성례와 교회 통치가 있는바, 이 두 가지는 앞서 두 가지 교리를 보존 하려고 세워진 것이므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 이 거룩하고 질서 있게 집행되는지 아닌지 평가하는 것은 이 목적에 따 라서만 측정됩니다. 누군가가 더 명확하고 더 상세하게 이것을 이해하려 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즉 교회의 통치와 목회의 직 무 및 그 밖의 질서가 성례와 함께 몸에 비유된다면, 한편 바르게 하나 님을 예배하기 위한 규칙을 정하고 또한 인간의 양심으로 하여금 구원 의 소망을 갖게 만드는 근거를 지시하는 교리는 영혼인바, 바로 이 영혼 이 몸에 호흡을 주며, 몸을 활기 있고 하고 활동하게 하며, 요컨대 몸으 로 죽어 무용한 시체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내가 말 씀드린 것에 대해 경건한 사람들과, 바르고 건전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 들 사이에 아무 이론이 없습니다. [1] [기독교의 영혼—예배]
이제 합법적인 하나님 예배에 대한 정의를 내립시다. 그 주된 기초는
4 ) 이 번호는 칼뱅이 설명하는 순서다.
10 | 칼뱅 작품선 2
하나님을 모든 덕, 의, 성결, 지혜, 진리, 능력, 선, 자비, 생명, 구원의 유 일한 원천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모든 선한 것의 영광을 하 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에게서만 모든 것을 구하며, 필요할 때면 언제나 하나님만 의뢰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기도와 찬양과 감사가 발생하는 바, 이것들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을 입증하는 것들입 니다.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의 이름을 진 실로 거룩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에 경배가 결합된바, 이 경배로 우리 는 그의 위대함과 탁월함에 합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며, 의식들은 마 치 돕는 수단이나 도구처럼 이 경배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몸이 영혼 과 함께 하나님 예배를 실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자기부정 이 뒤따르는데, 이는 우리가 육과 세상을 부인함으로써 변하여 마음을 새롭게 하며,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 며 행동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자기부정으로 우리는 그의 뜻에 복종 하고 헌신하는 데 이끌리며, 그리하여 그에 대한 경외가 우리 마음 지배 하고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을 제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인정 하고 그만이 기뻐하는 참되고 순수한 하나님 예배가 이상과 같은 것들 에 들어 있다는 것은 성령이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경건에 대한 의식 자체조차, 긴 토론 없이도,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우 리에게 단순하고 소박한 이 영적 진리가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비유 가 운데 감추어 있었다는 것 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른 방법은 처음부 터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요 4:23 ) .
이 말씀으로 그는 조상들이 이와 같은 영적인 방법으로 예배했음
을 부정하려 하신 게 아니라, 다만 차이점이 외적 형식에 있었음을 지적 하려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많은 비유로 말미암은 희미한 영 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단순한 영이 있습니다. 남은 것은 항상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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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의미입니다. 즉 영이신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로 경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경배와 거짓 경배]
나아가 순수한 하나님 경배와 더러워진 경배 사이를 식별하는 일반적 인 법칙이 있는바, 그것은 우리에게 [적합하게]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만 들어 내지 않고, 오직 제정권을 갖고 계신 이가 규정하는 게 뭔지 바라보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인정해 주시길 우리가 원 한다면, 그가 어디서나 지극히 엄하게 강요하는 이 법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이 모든 거짓된 예배를 금하고 정죄하면서 우리에게 그 자신의 음 성에만 따르게 요구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우리의 임의대로 그를 섬기지 않고 전적으로 그의 지시에 의존하는 것 이 그의 권위를 세우게 되기 때문이며, 둘째, 우리는 허망한 존재여서 만 일 자유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단 길에서 벗어나면 끝없이 방황해 결국 미신에 파묻히고 맙 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자신의 온전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우리로 자신의 명령에 따라 행하게 하시고 동시에 그 명령에 어긋나는 인간들 의 고안물들을 배척하길 원하시는 것은 정당합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가 그릇된 예배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의 진노를 초래하지 않게 자신의 입 으로 우리에게 한계를 정해 주신 것 역시 정당합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도외시하고 만들어진 모든 예배가 그에게 인정되 지 않음을 세상에 설득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오 히려 다음과 같은 확신이 자리 잡고 있으며, 심지어 만인의 뼈와 골수 에까지 고착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 든 그것으로 열심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어떻게 행동을 해도 충분히 정당 한 승인을 얻게 된다는 확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그의 명 령과 관계가 없는 열성으로 드리는 예배를 모두 헛된 방식으로 여길 뿐
12 | 칼뱅 작품선 2
아니라, 명백히 가증스런 것으로 여기실진대, 그렇게 맞서 싸움으로써 우리가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음성은 분명하고 명확합 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 삼상 15:22 )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 를 헛되이 경배한다 ( 마 15:9 ) . 하나님 말씀에 첨가시키는 게 뭐든, 특히 이 문
제에서, 거짓입니다. “제 뜻대로의 예배”( evqeloqrhskei,an ) 은 진정 허망한 것 입니다. 판관이 한번 선고를 내리면 더 이상 논쟁할 여지가 없습니다. [부패한 예배]
폐하, 이제 황제께서는 나와 함께 다음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또 한 매우 탁월한 군주 여러분도 내 말에 유의해 주십시오. 즉, 오늘날 도 처에서 기독교 세계가 대체하고 있는 하나님 예배의 모든 것이 이런 도 리에서 전적으로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그들은 말로는 모든 선 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만, 실제로는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약탈합 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성자들과 나누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대자들은 하고 싶은 만큼 조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신 들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 심각하지 않은 양, 그 오류들이 엄청나다 고 과장하는 게 우리라고 중상합니다. 사실 자체가 누구에게나 명료하듯 이, 나는 그것을 단순하게 제시하렵니다. 하나님의 직무가 성자들에게 분배되었는바, 마치 이들이 지극히 높으 신 하나님의 동역자로 임명되어 그 일부를 짊어지고, 하나님은 허다한 성자들 속에 숨어 계시기나 한 듯이 말입니다. 내가 개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비꼬는 속담을 통해 고백하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은 사도들에게 알려질 수 없다”5 ) 라고 말할 때, 사도들이 그리스도 의 높이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그의 존엄이 지워지거나 최소한 흐려지 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뭐겠습니까? 이런 잘못을 따라 5 ) L: Dominum prae apostolis non cognosci. 사도와 성자들이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욱 영광을 얻는 것을 빗대어 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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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레미야가 말하듯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이 새어 빠져 나가는 웅덩이 파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 렘 2:13 ) . 그들은 구원과 모든 선한 것을 어
디서 구했나요? 오직 하나님 안에서 구했나요? 그렇지만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공공연하게 이에 반대됩니다. 그들이 과연 말로는 구원과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른 곳에서 구하므로 속이는 핑계일 뿐입니다. [기도]
악습들은 이런 사실을 명백히 믿게 만드는바,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먼저 부패되고 이어서 폐기되며 말살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 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지 아닌지 기도로 입증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탈취해 피조물들에게 옮기는지 아닌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향 한 참된 기도에는 단순한[어떤 식으로 드리는] 간구 이상의 것이 요구됩 니다. 즉 예를 들면 인간의 영혼[간구하는 자]은 ‘하나님만이 필요 때 도 와주실 수 있으며 또한 그런 행위자의 역할을 담당하시므로, 하나님이야 말로 인간이 피난처로 삼아야 할 유일한 분’이라고 확실하게 믿어야 합 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명령과, 또한 이 명령에 따라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약속을 바라보지 않는 한, 누구도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명령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반 대중은 하 나님과 함께 천사와 죽은 자를 향해 구별 없이 기도하기 때문이고, 배 운 사람들도 하나님 대신 그들에게 기도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을 중 보자들 ( 이들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 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만 지지되는 약속은 어디로 간 것 일까요? 유일하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배제함으로써 각 사람은 스스 로 만들어 놓은 수호성인들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설령 그리스도에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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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제공된다 해도, 그는 일반 사람처럼 군중 속에 숨겨져 있을 것입 니다. 주저나 불신보다 더 하나님을 향한 참된 기도에 위반되는 것이 없 긴 하지만, 이런 것들이 바른 기도의 규칙에 맞는 것으로 흔히 받아들여 집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에 게 기도하게 하고, 우리가 그의 명령과 약속에 의거해 구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변호자로 내세워 그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세상이 알지 못했다 는 데 있습니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상례적인 기도들이 검토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무수한 더러움으로 오염되어 있 음이 발견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 예배의 이 부분이 얼마나 부패 했는지에 대한 판단이 내려집니다. 감사 행위도 못지않게 부패했습니다. 그 증거는 통용되고 있는 찬송가인데, 거기에도 마치 성자들이 하나님의 친구들인 양, 그들을 향한 모든 아름다운 찬미가 기록된 것입니다. [성상숭배]
이제 경배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숭배라면 뭐든지 조각과 그림에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미친 짓과 이교도들의 미친 짓 사이에는 뭔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릇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돌멩이들을 경배하는 것을 금하실 뿐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서 경배받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그것들에게 고 착시키는 것도 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증함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오늘날 무슨 구실을 내세운다 해도, 그것들은 일찍이 이교도들 이 그들의 불경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것들입니다. 게다가 심지어 하나 님 대신에 성인들이 아니 그들의 뼈나 의복이나 신발이나 초상이 숭배 받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어떤 교활한 이들은 경배하는 데도 여 러 종류가 있다고 내게 반박합니다. 그들이 말에 따르면, 둘리아 ( dulia, 숭 경 ) 는
성자들과 그들의 초상과 뼈에 대한 경의요, 라트리아 ( latria, 흠숭 ) 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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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오직 그에게 속하는 경우이며, 다만 열광이 상 승함으로 말미암아 복된 동정녀 마리아를 다른 것보다 더 높이는 히페 르둘리아 ( hyperdulia, 상경지례 ) 라는 단계가 착상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런 미묘한 구별이 석상 앞에 엎드린 사람들의 마음에 알려지거나 제시 되기나 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모든 선지자가 도처에 서 그토록 증오했던 이집트 사람들의 옛 우상숭배보다 뒤지지 않을 만 큼 조잡하고 감촉적인 (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는 것입 니다. [전례의식]
나는 조금 뒤에 더 상세하게 확대할 것이므로 지금은 항목별로 간단 하게 언급합니다. 전례의식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예배의 엄숙한 증거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조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이 분명한 음성으로 폐지한 유대교 대신 새로운 유대교가 여러 곳에서 수집된 많은 유치한 바보짓에 의해 되살아났고, 이런 바보짓에 일부 이 교도에서 빌려 온 불경한 의식이 혼합되었는바, 이 의식은 우리 종교의 존엄에게보다도 무슨 연극적인 과시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첫 번째 죄악은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로 단호히 폐지한 허다한 전례의 식이 또다시 추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죄악은 전례의식이 경 건의 살아 있는 실천이 되어야 함에도 사람들은 하찮고 무익한 수많은 의식에 헛되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중대한 해악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전례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우롱한 뒤, 마치 이 의식들에 경건과 하나님 예배의 모든 본질이 포함되기나 한 듯이, 자 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개]
새 생명으로의 중생의 근거가 되는 자기부정에 대해 말하면, 이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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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전부 인간의 마음에서 완전히 망각되었거나 적어도 절반은 매장되 어 있어 소수에게, 그것도 피상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특별히 권면하는 것은 영적 제사로서, 이는 우리가 옛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어쩌면 설교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뭔가 를 중얼거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예배의 이 부분을 회복시키 려는 우리 시도를 완강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비록 그들이 이따금 회개에 대 해 논의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멸적으로 언급하며, 오직 육체를 통한 외 적 훈련방식에 머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말하듯 크게 유익하지 않 습니다 ( 골 2:23; 딤전 4:8 ) . 이 사악함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람 들이 치명적인 오류에 빠져 본질 대신 그림자를 추구하고 진정한 회개 는 간과한 채 금욕, 철야 및 바울이 세상의 초등학문 ( 갈 4:9 ) 이라고 부르 는 다른 것들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참된 하나님 예배와 사악하고 잘못된 예배를 식별하 는 표지라고 말씀드린바 있거니와, 이로부터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 고 있는 하나님 예배의 모든 형태가 부패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과 그가 인정하는 것에 주목 해 더 나은 방법으로 그를 섬기려 하지 않고, 제멋대로 예배 방식을 고 안하는 자격을 자신들에게 돌리고는 그것을 순종의 대체물로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는 말에서 과장된 게 있어 보인다면, 이 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행위를 자세히 조사 하시기 바립니다. 나는 그것들 중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 곤 10분의 1도 안 된다고 감히 말합니다. 더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하나 님은 거짓으로 창안된 예배를 거절하고 정죄하며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단순한 복종 가운데 두시기 위해 우리에게 말씀의 굴레를 씌우 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멍에를 버리고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을 좇 아 헤매며 무분별하게 만들어진 인간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때, 설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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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 그것이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쓸데없 이 무익한 것, 아니 오물이요 쓰레기입니다. 인간적인 전통의 옹호자들 은 가지가지 아름다운 색채를 가지고 그것들을 채색합니다. 바울 사도도 그것들에게 지혜의 모양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 골 2:23 ) .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제사보다 순종을 높이 평가하시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승인되 지 않는 예배라면 어떤 형태건 배척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구원의 단계]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 교리의 다른 한 가지 주안점을 말씀드렸거니와 그것은 인간이 어디에서 구원을 구해야 하는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입 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지식은 세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 리를 죽은 자와 같이 절망에 빠지도록 이끌어 가는 자신의 비참한 의식 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본래적이고 유전적인 허물 ( 모 든 악의 근원인 ) 이
우리에게 드러날 때 발생합니다. 이 허물은 우리 안에 불
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 오만, 욕심, 욕망, 온갖 종류의 탐심을 초래하며, 우리를 모든 올바름과 정의로부터 돌아서게 함으로써 죄의 멍에에 포 로가 되게 합니다. 이것은 나아가 각자의 죄가 자신에게 드러나, 자신의 수치가 자신에게 싫어지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 닌 것으로 여길 때 발생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대 로 소환되어 자신의 저주를 알고 영원한 사망의 통고를 받기나 한 듯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법을 배웁니다. 나는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첫 단계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크게 놀라 거꾸러져 모든 육체의 도움에 대해 절망하며, 그러면서도 하 나님의 심판에 대해 완고해진다거나 두꺼워 주름진 피부처럼 마비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으로 근심하고 떨면서 치유책을 구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다음[둘째] 단계로 올라서야 합니다. 이것은 그가 그리 스도의 지식으로 세워져 숨을 쉬게 될 때 이뤄집니다. 우리가 말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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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겸손해진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그의 은혜로 말미암 아 비참함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는 자야말로 그에게서 구원을 구 하는 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로 성부와 화해시키는 유일한 제사 장으로 인식하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유일한 제사 ( 이것으로 말미암 아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충족되며 진실하고 완전한 의를 얻는 ) 로
인식하는 자이며,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를 2등분하지 않고, 하나 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오직 그의 무상의 은혜임을 인식하는 자입 니다. 여기서 그는 다시 셋째 단계로 올라서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 혜에 대해서와 그의 죽으심 및 부활의 열매에 대해 배울 때, 그는 그리스 도가 너무 완전히 자신에 속함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의와 생명을 소 유한다는 확신을 느끼면서, 확고하고 굳건한 신뢰로 그 안에 머무는 단 계입니다. [이신칭의]
이제 이 교리가 얼마나 비참하게 뒤집혔는지 보십시오. 원죄에 대한 까다로운 문제들이 대학들에서 탐구되었는바,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인 간의 처참한 질병을 완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원죄에 대해 논하면서 그것 을 무절제한 식욕과 성욕으로 축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신앙과 미 신의 기원이 되는 마음의 맹목과 헛됨이라든지, 영혼의 내적 부패라든 지, 오만, 야심, 완고함 및 숨어 있는 악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었습 니다. 설교도 조금도 건전하지 못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해, 루터나 다 른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 말하던 대로, 이를테면 인간을 인간 자신의 무력한 능력으로 채움으로써, 빈 공기로만 부푼 그에게 성령의 은혜와 도움에는 하등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 외에 들은 내용이 무엇입 니까? 무슨 많은 말이 필요할까요? 칭의의 문제, 즉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인지 공로로인지에 대한 문제보다 더 예리하게 논의되고,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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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적대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는 쟁점은 없습니다. 그들은 행위 공로의 일부가 동시에 인정되지 않으면,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영예를 그리스도에게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것은 선행이 경건한 사람들에게 수행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에게서 보상을 받는지의 문제가 아니고, 선행이 그 자체의 공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지, 우리가 선행의 대가로 영생을 얻는지, 선행이 유죄를 면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정에서 지불되어야 하는 배상금인지, 또 구원 의 담보를 선행 자체에 둘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해, 그 결과 하나님을 자신에게 관대하게 만들고 그의 은혜를 받으며, 영 생의 유산을 얻으며, 요컨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는 오류를 비난합 니다. 첫째,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의무를 지시기나 한 듯이 행위의 공로를 자랑합니다. 실제로 자존심이란 불행한 정신의 만취 상태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 대신에 자기 자신을 경배하며, 죽음의 깊은 심연에 빠져 있으면서도 생명을 소유하는 꿈을 꾸기 때문 입니다. 내가 이 주제를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모든 대학과 교회에서의 익숙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 혜가 행위에 의해 얻어져야 한다는 것, 영생은 행위에 의해 획득되어야 한다는 것, 선행의 도움이 없다면 구원의 확신은 경솔하고 당돌하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선행의 보속 때문이지, 무상의 죄 용 서 때문이 아니라는 것, 선행이 영원한 구원에 합당한 이유는 그것이 그 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로 전가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계약 때문이라는 것,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때마다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는 것이나, 죄인이 도움을 받을 만할 경우 그 도움이 그리스 도와 순교자에게서 보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상의 죄 용서 때문이 아 니라 소위 보상적인 행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루터가 세상에 알려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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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모든 사람이 이런 불경건한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 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가르침 중 적대자들이 비상한 열성과 고집으로 공격해 오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불신]
마지막으로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바,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점령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심해서는 안 될 신앙의 주된 조항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는 실정입니다. 그것은 신자가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심하며 불안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악마적인 망상에 의해 신앙의 힘은 전적으로 질식되었고 그리스도의 은 혜는 말살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 마음에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우리로 하 나님 앞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롬 5:2 ) . 그가 다른 구 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한결같습니다. 즉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언한다 ( 롬 8:15-16 ) 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원수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이 양자 됨에 대한] 저 망설임은 하나님 약속에 대한 모든 신앙을 사라지게 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 이 되고 약속은 폐해졌다 ( 롬
4:14 ) 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이 인
간을 의심 가운데 두며 확실하고 확고한 신뢰를 갖게 하지 않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바울이 요구하는 확신으로부터 인간을 축출 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추측으로 몰아넣는 신앙을 꿈꿉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번 구원의 담보를 행위의 공로에 둔 뒤 이런 모든 부조 리 가운데 빠지고 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절벽 으로부터 이런 파멸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행위 가운데서 의혹 거리와 결국에는 절망의 재료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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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류가 오류를 부른다는 것을 압니다. 최고 무적의 황제 폐하 및 가장 뛰어난 군주 여러분, 내가 앞서 말씀드 린 것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생명이 영혼에 달려 있는 것처럼 교회의 구원은 교리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교리의 순수 성이 조금이라도 더러워진다면, 교회는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이 교리의 대부분이 소멸되었음을 증명한다 면 교회는 빈사 상태가 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제껏 나는 이것 을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했지만, 이제부터는 더 분명하게 드러내려 합 니다. [3] [교회의 몸]
이제 나는 내가 몸에다 비유한 [교회] 통치와 성례의 집행에 대한 문 제로 갑니다. 이것들은 설령 외부 형태에 결함이 없다 해도, 교리가 뒤 틀려져 있다면, 그 능력과 효력이 사라지고 맙니다. 만일 내부와 외부에 서 건전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 은 실로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성례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이 고안해 낸 의식들이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례]의 신비들을 대체합니다. 그리스 도가 두 가지 성례만을 세우셨고 나머지는 인간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 는데도, 일곱 가지 성례가 분별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런데도 이런 성례들에 마치 그 가운데 그리스도가 갇혀 있기나 하는 듯 이 하나님의 은총을 결부시켰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두 가지 성례는 끔찍하게 더럽혀졌습니다. 세례는 너무 불필요한 첨가물 로 가려져 여러분이 순수하고 진정한 세례의 흔적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찬 역시 외부의 부속물로 말미암아 부패했을 뿐 아 니라, 전혀 잘못된 형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어떻 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게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명령이 경시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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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의 공연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성찬을 대체한 것입니다. [성례]
사실 미사와 참된 주의 만찬 사이에 무슨 유사점이 있습니까? 그리스 도의 명령으로 신자들은 주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 안에서 서로 교제 해야 한다면, 미사에서는 오히려 일종의 성찬 중지가 보입니다. 사제가 회중에게서 떨어져 그들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혼자 먹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치 아론의 후계자인 양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제사를 드리 는 일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가 어디서 희생제사를 언 급하셨나요? 그는 우리에게 가져다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사람들 이 받아야 할 것을 드릴 것으로 바꾸도록 허락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런 변질은 그리스도의 침해할 수 없는 영원한 명령을 인간들의 제 멋대로의 결정에 양보하는 것 외에 무엇일까요? 실로 이것은 심각한 악 입니다. 그러나 더욱 극심한 미신은 이런 행위를 은혜를 얻는 공로로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적용시키는 일입니다.6 ) 이런 식으로 해서 그리스 도의 죽음의 효력은 무익한 연극 공연으로 바뀌었고, 그와 동시에 영원 한 제사장의 존엄은 그리스도에게서 박탈되어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백성은 영성체에 부름 받아도 절반만 허용될 뿐입니다. 왜 이래야 합 니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잔을 주시고, 모든 사람에게 마시도록 명하셨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신자의 회중으로 하여금 잔에 손 을 대지 못하게 금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권위가 풀릴 수 없 는 매듭으로 묶어 놓은 표징들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분리되고 있는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와 미사의 봉헌은 마법적인 주술과 전연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숨 쉬는 소리, 중얼거리는 소리, 이해할 수 없는 소리
6 ) F: c’est d’avoir appliqué cest oeuvre aux vivans et aux morts pour leur meriter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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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신비를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 이 신비로운 상태로 머물길 원했고, 분명한 목소리로 발음되길 원하지 않았기나 한 듯이 말입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의 능력, 성격, 용도가 모호 하지 않은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는 빵 을 놓고 중얼거리지 않으셨고, 사도들에게 분명한 말씀으로 전달하셨습 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으며 신자들 사이에서 공동 신앙고백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포 대신 은근히 구마 의식이 만들어지는바,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성례보다 주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첫째 이유는 의식들의 광경은 백성에게 보이면서도 그 것들의 의미나 진리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례의 시행 이란 표징이 상징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에 맞춰 설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성례에서 눈을 즐겁게 하는 무익한 상 징 외에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면, 그들은 참된 목표로 이끄는 어떤 교리 도 듣지 못하므로, 외적 행위에 고정된 채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가장 유해한 미신이 발생하는바, 그들은 회개나 믿음이나 심지어 그리 스도 자신까지도 개의치 않은 채, 성례만으로 구원에 충분하기나 한 듯 이, 진리 대신 표징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치명적인 죄로 방해받지 않는 한, 성례는 그 자체로 유효하다는 불경한 교리가 도처에, 무지한 일반인 들에게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속되었습니다. 마치 성례가 주어진 것 이 우리의 손을 이끌어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나 용도가 아닌 듯이 말입니다. 이에 더해 그들은 빵을 경건한 의식이라 기보다는 차라리 잘못된 주술로 축성한 후에 이것을 작은 상자 속에 넣 어 그리스도 대신 경배를 받고 기도를 받게 되도록 이따금 엄숙하게 들 고 돌아다닙니다. 따라서 어떤 위험이 닥치면 그들은 유일한 보호수단으로서 빵에게 피 신하며, 모든 재난에 대해서는 그것을 부적처럼 사용하고, 하나님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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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를 구할 때는 최고의 속죄제사로 그것을 이용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성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그것이 모든 종류의 바보짓 에 욕보임을 당하길 원하기나 하신 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그 약속의 내 용이란 우리가 그의 성찬을 시행할 때마다 그의 몸과 피에 참가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마
26:26-29; 눅 22:19 ) .
우
리는 이 두 말씀 중 어떤 경우에도, 약속이 그 한계를 갖고 있음을 보지 않습니까? 약속이 베풀어 주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제 해야 할 한계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합법적 시행에서 벗어나 자신 들이 축성되지 않은 보통 빵과는 다른 것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또한 마치 성찬이 돈벌이 수단 외에 다른 목 적으로 제정된 것이 아닌 양, 이것을 더러운 거래에 이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흔한 남용입니다. 이런 종류의 거래가 부끄러워하며 몰래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장바닥이나 다름없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습 니다. 각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미사가 팔리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의식에도 각각 값이 정해져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제대로 관찰해 보면 교회당은 일반 상점과 다르지 않으며 거기서 팔리지 않는 신성한 의식은 한 종류도 없습니다. [교회정치]
내가 교회정치의 악폐에 대해 열거하려 한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은폐될 수 없는 몇 가지 더 심각한 것들을 간단하게 언급할 것입 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목사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폐물이 되 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감독과 목사 ( 어떤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 를 교회에 임명하 신 것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분명 그들로 하여금 건전한 교리로 교 회를 세우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 규칙에 따르면,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 하지 않을 경우 누구도 교회의 참된 목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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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목사의 칭호를 가진 자가 이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는 주교는 백 명 중에 한 사람 될까 말까 합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주교들이 세속 사회에서 변질되었 기 때문입니다. 하급 사제들 역시 그리스도의 명령과는 동떨어진 하찮은 것들로 자신들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주교들에게서 배운 대로 이 직무를 타인의 어깨 위로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직임대는 토 지임대 못지않게 관습적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그리 스도가 우리에게 위탁하신 영적 통치는 온전히 사라지고 새롭게 날조된 통치 형태가 도입되었습니다. 어떤 이름을 내세우건 간에 그것은 그리스 도의 영적 통치와 같을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통치와 같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설령 자신들의 의무 를 게을리하는 자들의 과오를 성직 서품에 돌려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먼저 이 악폐가 너무 만연해 공공연한 관례가 되어 버 렸을 정도라고 답합니다. 다음으로, 설령 모든 주교와 휘하 하급 사제들 이 각기 자신의 직위에 있으면서 현재 자신의 직업으로 여기는 것을 행 한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참된 지침에 따라 볼 때 뭐가 되겠습 니까? 그들은 교회당에서 노래하거나 중얼거리며, 무대 의상으로 자신 을 과시하며, 많은 의식을 거행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려는 마음은 드물 거나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면, 주님의 말씀으 로 자기의 무리를 먹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주교나 목사의 칭호를 요 구할 수 없습니다. [목사의 삶]
무릇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은 타인들보다 더 성결한 삶의 모범을 보 여야 할진대, 오늘날 이런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점에 서 자신의 소명에 제대로 부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설령 세상이 타락 의 극에 도달했다 해도 이보다 더 모든 종류의 수치로 가득 찬 계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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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제발 그들이 자신들의 무죄로 내 말을 반박이라도 해 주길 바 랍니다. [그럴 경우] 나는 당장 기꺼이 내 말을 철회하렵니다. 그러나 그 들의 악행은 모든 사람의 눈에 노출되어 있고, 그들의 배고픈 줄 모르 는 탐욕과 착취는 드러나 있으며, 그들의 용서할 수 없는 오만과 잔인성 도 분명합니다. 그들의 집은 파렴치한 춤으로 떠들썩하며, 놀음의 열정 으로 들끓으며, 무절제한 대주연이 열리는바, 이런 것들이 관습과 관례 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들은 마치 쾌락과 사치가 훌륭한 덕인 양 자랑합 니다.7 ) 다른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하나같이 특별히 인정받고 싶어 하는 독신생활에도 얼마나 많은 불결함이 있습니까? 만일 그들이 조용히 행실을 고치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제거되길 바라는 그것을 폭 로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나는 은밀한 것들을 공중 앞에서 공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드러난 추악함과 파렴치죄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음란죄에서 결백한 사제가 몇 명일까요?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그들의 집이 매일의 음란죄로 악명이 높은가요? 얼마나 많은 정숙 한 가정을 그들은 그런 분방한 정욕으로 더럽히고 있나요? 나는 그들의 악덕을 들춰내는 일로 기뻐하지 않으며, 그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도 아 닙니다. 다만 오늘날 성직자 사회 도처에서 보이는 생활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진실한 직분에게 어울리는 생활이 서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생각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목사 선출]
교회를 다스릴 사람들이 규칙에 따라 법대로 선출되고 직무에 임명되 는 것이 결코 교회 통치의 마지막 부분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7 ) F: Ils tiennet comme chose approuv é e par usance, d’avoir brelan de jeux
deshonnestes en leurs maisons, comme de cartes et de dez: d’y avoir dames impudiques et faire banquetz desordonnez: d’avoir cusine friande et table excessive: d’ estre somptueux en accoustremens et toutes autres pompes, de s’en glorifier comme de belles vert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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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오는 규칙이 있는바, 그것으로 모든 선출이 판단되어야 마땅합 니다. 또한 적절한 선출 방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세심하고 현명하게 규 정한 옛 공의회들의 많은 결정사항도 있습니다. 우리 적대자들은 단 하 나의 선거법 사례만을 인용하며 나는 그들의 승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 성령은 바울의 입을 통해 목사에게 모종의 검증 을 요구하고 있으며 (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 ,
옛 교부들도 인정합니다. 오늘날
주교를 선출함에 있어서 이런 검증이 고려되고 있습니까? 아니, 직위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교회 직분에 적합한 자질을 부여받은 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는 사도들이 일꾼을 세울 때 준수한 질서, 그 후 초대 교회가 따른 질서, 또한 옛 교회법들이 따르기로 정한 질서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질서가 경멸되고 거부되는 것을 개탄한다면 이 개탄은 정당하지 않 을까요? 모든 정직함이 짓밟힌 채 지극히 파렴치하고 수치스런 행동으 로 승진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 도 없습니다. 교회의 명예들이 협정가격으로 매수되거나, 힘과 권력으로 점유되거나, 고약한 불법타협으로 얻어지거나 더러운 충성으로 얻어지 기 때문입니다. 이 명예들은 때로 매춘 소개나 그와 유사한 책략의 대가 입니다.8 ) 간단히 말해, 세속 소유권 취득의 경우보다 더 훨씬 뻔뻔스러 운 많은 일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폭정]
교회를 다스리는 자는 그 통치를 부패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죄 를 범한 것이며, 적어도 자신의 악한 모범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입 니다.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악은 실로 그들이 매우 잔인한 폭정을 행 하며 그것도 영혼에 폭정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과시되고 있는 8 ) F: ou ce sont recompenses de bouteilliers et palefreniers, quelquefois asussi salaire
de maquerel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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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권력은, 영혼을 매우 비참한 노예 상태로 속박하는, 법도 기준도 없 이 제멋대로 행하는 영혼 지배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사도 들에게 하나님이 이전에 선지자들에게 부여했던 것과 같은 권위를 주셨 거니와, 거기에는 확실한 한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을 대신해 사람들에게 대사직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사직의 영원한 법칙이란 보내심을 받은 자가 명령으로 받은 것을 충실하게 최고의 성 실함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 속 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을 모든 민족에 게 가르치라 ( 마
28:19; 막 16:15 ) .
가르치되,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가 아니라
복음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들 후계자들에게는 어떤 권위가 부여되 었는지 묻는다면, 이에 대해 베드로는 교회에서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듯 하라 ( 벧전 4:11 ) 고 규정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길 원하는 자들은 하고 싶은 말 은 무엇이든지 하는 권리를 자신들에게로 돌리며, 그들의 말은 떨어지자 마자 아무 검증 없이 순종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중 상모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계시하는 것을 자신들의 권위 로 확정하는 것 외에 다른 권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자들의 양심을 그들의 고안물이나 욕망에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 계시된 성령의 말씀에 굴복시키는바, 그들은 바로 이 말씀을 확고히 해 타인에게 알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묘하 게 만들어진 핑계에 분명합니다. 만일 그들이 성령에게서 직접 받은 것 을 전달하는 한, 그것에 지체 없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 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은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므로 성령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거나, 자신들은 진리의 강단 에 앉아 있으므로 자신들의 말이 모두 다 진실할 뿐이라고 덧붙여 말할 때,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말이 예외 없이 성령의 말씀으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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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인정된다면 그들의 지배권은 무한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말을 하 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받으라고 명령하는 일처럼 신하의 인내를 무제한 남용하는 자가 엄청난 폭군이 아닐까요? 폭군들은 자신들의 명령이 어 떤 것이든 그대로 지켜지길 바랍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그들의 몽상 을 주장할 때마다 성령이 말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권세로 무장한 그들이 신자의 영혼을 얼마나 가혹 하고 부당한 예속 상태에 묶어 두었는지 봅니다. 법 위에 법이 제정되지 만 그것들은 양심의 덫이 될 뿐입니다. 그들은 그 법들을 외적 질서가 아 니라 영혼의 영적이고 내면적 지배에 적용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법들이 엄청나게 많아지기까지 끝없이 지속되어, 지금은 미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중 일부는 전혀 양심을 비틀고 고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법의 준수는 마치 거기에 경건의 본질 전체가 있는 것처럼 엄격하게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 한 위반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제기되지 않거나 중벌이 가해지지 않 는 반면, 인간의 법규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는 죄에 대한 최고의 대가가 요구됩니다. 교회가 이런 폭정의 멍에로 억압당하고 있는데도, 누군가 이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그는 즉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맙니다. 요컨 대, 자유로운 탄식이 중죄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견딜 수 없는 지 배권을 점유하기 위해 유혈 명령을 통해 백성이 성경을 읽거나 이해하 려는 것을 금하며 그들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에게 벼락 치듯 호통 칩니다. 이런 과도한 엄격성은 나날이 증가되어 이제는 종교에 대 한 어떤 질문도 거의 용납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이렇게 방대하고 짙은 흑암으로 질식되고, 종교가 이 런 숱한 불경한 미신으로 더럽혀지며, 하나님 예배가 끔찍한 신성모독으 로 부패하고, 그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며, 구속의 은혜가 많은 사악한 견 해로 뒤덮이고, 파멸적인 행위 확신에 도취한 자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구원을 구하며, 성례의 시행의 경우 일부는 찢겨 나가 소멸되고 일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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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부패된 조작물들로 덧붙여져 있으며 다른 일부는 돈벌이 거래로 속화되었으며, 교회의 통치는 온통 어지러운 황량함으로 변질되었고, 목 사직에 앉아 있는 자들은 첫째 그들의 삶의 방탕으로 교회를 극도로 훼 손하고, 둘째 잔인하고 매우 해로운 폭정을 영혼에 행해 온갖 종류의 오 류로 인간들을 짐승처럼 파멸로 이끌어 갔는바, 바로 이런 때에 루터가 일어났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서, 종교가 숱한 오물에서 정화되고 경건의 교리가 본래의 순수함으로 회복되며 교회가 이런 재난 에서 벗어나 견딜 만한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합심해 찾았 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이 과정을 계속 진행합니다.
[II] [치료책 제시] 앞서 제안한 대로 이제 나는 이런 악습들의 개선을 위해 우리가 취한 처방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진행해 온 방법을 기술하기 위해 서가 아니라 ( 이것에 대해서는 후에 논할 것입니다 ) , 우리의 노력에는 교회의 최악 의 상태를 어느 정도라도 개량하자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음을 밝히 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가르침은 많은 사람의 많은 중상모략에 의해 공 격받아 왔고 지금도 매일 공격받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통해 큰 소리로 우리의 교리를 대적해 열변을 토하며, 어떤 이들은 책을 출판 해 그것을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이들 모두는 이 모든 것을 모아 그것으 로 우리 교리를 무지한 자들에게 헐뜯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굴의 폐하시여, 우리가 폐하께 바친바 있는 우리의 신앙고백 은 사람들의 수중에 있으며, 우리가 이처럼 많은 가증스런 고발로 말미 암아 얼마나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듯이 과거에도 우리는 항상 우리의 교리를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었 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교회에서 공공연히 주장하지 않은 교리 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쟁점으로 삼고 있는 것들은 우리의 신앙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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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가운데 명백하고 정직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그중 어느 것도 우리 쪽 사람들에 의해 상세하게 다뤄지고 주의 깊게 설명되지 않은 것은 없 습니다. 이로부터, 부당하지 않게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모든 불 경건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가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공평 한 사람이건 불공평한 사람이건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은, 우리 쪽 사람 들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고 무지의 깊은 흑암에서 나오도 록 격려하고, 그 성경을 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애쓰며, 꼭 알 필요가 있는 기독교 교리의 조항들을 즐겁게 밝혀 주었다는 점에서, 교 회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설교들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 이라곤 노파의 우화와 이에 못지않은 하찮은 이야기들뿐입니다. 대학들 은 논쟁적인 문제로 떠들썩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성경은 드물게 언급됩 니다. 교회의 통치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은 수익의 감소를 방지하는 것 만을 그들의 유일한 걱정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밀가루 통[쌀통]을 채우 는 일이라면 뭐든 어렵지 않게 허락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편견을 갖고 있는 자들도, 비록 후에 우리 교리를 헐뜯긴 했지만, 우리 쪽 사람들이 이 악습을 약간 개선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의 노력에 의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 해도, 만일 다 른 면에서 우리가 무슨 해를 끼쳤다면, 그것이 우리의 잘못을 경감시키 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1] 교리, 우리의 [2] 성례 시행, [3] 교회 통치 방식은 검토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것 중 어느 것에도, 하 나님 말씀의 올바른 규범에 따라 회복시키려 시도한 것을 제외하고는, 옛 형식을 바꾼 흔적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1] [교리에 대한 처방]
이제 우리가 앞서 정한 구분으로 돌아가면, 교리에 대한 우리의 모든 분쟁은 합법적인 [i] 하나님 예배와, 우리 [ii] 구원의 확신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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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배]
분명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격려하는 일 에 냉랭하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으며, 그 방법을 천명함에서도 바른 목적 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것에 유익한 것은 결코 빼놓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흔히 사람들이 선포했던 것보다 훨씬 드높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 안에 빛나는 능력이 더 알려지도록 진지하게 애쓰고 있습 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은덕을 할 수 있는 대로 찬양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엄을 우러러보는 데로, 그의 위대 하심에 합당한 경외를 그에게 드리는 데로, 마음에서부터 진실한 감사 를 드리는 데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또한 이로 부터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생기며, 이어서 이 신 뢰는 기도를 낳습니다. 또한 이로부터 각 사람은 진정한 자기부정을 배 우는바, 이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 함입 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적인 방식으로 예배받길 바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영 적 제사를 드리도록 전력을 다해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적대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 금 하나님에게서만 모든 복을 기다리며, 그의 능력을 신뢰하며, 그의 자 비에서 안식하며, 그의 진리에 의존하며, 온 마음으로 그를 향하며, 소망 을 가득히 품고 그를 의지하며, 궁핍한 때, 즉 매순간 그에게 구하며, 받 은 모든 복을 그에게 돌려드리고 찬미의 고백으로 이를 입증하도록 끈 질기게 권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뒤로 물러서지 않게 우리는 모든 복의 원천이 그리스도 안 에서 우리에게 열려 있으며 거기서 필요한 모든 것을 길어 올린다고 설 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책들과 설교들도 이를 증언하는바,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육적인 욕망, 그리고 자기 자신을 부인 해 오직 하나님을 복종하고 더 이상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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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도록 촉구함으로써, 진정한 회개를 권면하는 일에 자주 그리고 부지런 히 애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갱신에 뒤따르는 외적 의무와 사 랑의 행위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으 로 우리가 아는, 확실하고 무오한 예배의 방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으로 규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에게 인 정받는 그리스도 교회의 유일한 제사입니다. [우상숭배]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는 모든 미신에서 떠나 오직 하나님이 경건한 형식으로 경배되는바,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 지혜, 힘, 진리 및 그 밖의 모든 능력이 다른 어느 곳에서 더 충만하게 선포되기 때문이며,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진실한 신앙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이뤄지기 때 문이며, 그의 은혜가 마음과 혀로 찬미되기 때문이며, 사람들은 항상 하 나님께 단순하고 진지하게 복종하도록 이끌리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의 거룩함을 촉진하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기 때 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우리를 나 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첫째,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들은 우 리가 세상 도처에서 보이는 어리석은 미신을 가혹하게 비난하는 ( 이것이 필요하기에 )
것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미지로 숭
배되는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예배가 제정되는 것, 성자의 이미지 를 통해 기도드리는 것, 죽은 자의 뼈에 신적 영예를 표하는 것, 이런 것 들과 기타 이와 유사한 것들이 가증한 것인 만큼, 우리는 그것들이 가증 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의 교훈을 미워하는 자들은 우리를 몰아세우고, 옛 적부터 교회가 인정한 하나님 예배를 감히 폐기한 이단자로 만듭니다. 그들이 늘 방패로 내세우는 교회라는 말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보겠습 니다. 먼저 한마디만 하면, 하나님 예배가 이토록 수치스럽고 부패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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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드러났는데도 그것을 옹호할 뿐 아니라, 그것을 숨기기 위해 뻔뻔 스럽게도 바로 그 하나님 예배란 말을 구실로 삼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요? 우리나 우리 적대자들은 모두 우상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된 죄악 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지 숭배를 건드리기만 하면 그들 은 즉각 반대해 우리와 함께 정죄한 이 죄악의 옹호자가 됩니다. 아니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들은 그리스어로 된 이 말에 대해서는 우리와 동 조하면서도 그것을 라틴어로 옮기는 순간 우리와 맞서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우상예배를 정죄하면서 이미지 숭배는 강하게 옹호하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영리한 사람들은 이미지에게 표하는 경의가 예배임을 부인 합니다. 마치 옛[구약의] 우상숭배와 비교할 때 서로 무슨 차이라도 있 는 양 말입니다. 옛 우상숭배자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신들을 예배하는데 다만 그것들을 상징하는 육체적 형상을 통해 그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적대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이것과 다를까요? 하나님이 이 같은 변 명으로 만족하실까요? 선지자들은 이집트인들이 그들 신학의 은밀한 신 비를 핑계 삼아 교묘하게 자신들을 숨겼던 그들의 광기를 비난하는 일 을 멈추었던가요?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숭배하던 구리 뱀을 마치 하 나님의 상인 양 경배했다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왕하 18:4]? 암브로시우스는, 이방인들이 나무를 숭배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이 미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보이는 것이 아 닌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9 ) 그러나 오늘날 행해지는 것은 무엇
입니까?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이미지들 안에 계시기나 한 듯이 그것들 앞에 무릎 꿇지 않나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석상과 그림에 결부시키지 않고서야, 기도할 때 과연 그것들에게 호소할까요? 나는 아직 더 조잡한 미신들에 대해선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들
9 ) Ambrosius, Psal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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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공공연히 인정되므로 무지한 사람들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그들 은 자신들의 우상을 때론 꽃과 모자로, 때론 옷, 겉옷, 허리띠, 지갑 또는 기타 여러 가지 하찮은 것으로 장식합니다. 그들은 우상 앞에 촛불을 밝 히고 향을 피우며, 그것을 어깨 위에 메고 행진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에도 유사한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의 조각상을 보기 위해 먼 지 방에서 순례자로 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배당에는 여러 성모 마 리아 이미지들과 기타 성자들의 이미지들이 있으며, [그중] 다른 것들이 제외된 채 하나의 이미지가 마치 하나님 이상으로 자주 방문됩니다. 그 들은 크리스토포로스10 ) 나 바르바라11 ) 의 이미지 앞에서 기도할 때 주기 도문과 아베 마리아를 노래합니다. 이미지들이 우아하거나 그을려 있을 수록 그 탁월성은 더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에다 우화적인 기적에 의한 새로운 천거가 첨가됩니다. 그들은 이미지 중 어떤 것은 말을 했고, 어떤 것은 교회당의 불을 발로 밟아 껐으며, 또 어떤 것은 자유의지로 새 집으로 이사했으며, 또 어떤 것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세 상이 이런 몽상으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그의 말씀의 규범에 따라 회 복하고 그 회복된 것을 성심껏 유지하고 있는 우리가, 또한 우리의 교회 를 모든 우상숭배뿐 아니라, 모든 미신으로부터 깨끗하게 한 ( 이 점에서 결백 한 )
우리가, 이미지 숭배를 폐기했다는 이유로 하나님 예배를 위반했다
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지 숭배를 우상숭배로 이해하지만 우리 적대자들은 그것을 우상존중이란 말로 부르길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는 명백한 증거 외에도 고대 교회의 권위 역시 우리를 지지합니다. 더 순수하던 시대의 저자들은 모두 이방인들 10 ) 14명의 구난(救難) 성인 가운데 하나로 3세기경 소아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
스도를 짊어진 자라는 뜻을 가진 그는 여행자들의 수호성인으로 7월 25일이 축일이다. 11 ) 역시 14명의 구난 성인 가운데 하나다. 니코메디아의 이교도의 딸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
했다가 부친에 의해 관헌에게 넘겨져 순교당했다. 그는 포병과 소방수들의 수호성인이며 12월 4일이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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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있는 이미지 남용을 기록하고 있는바, 그것은 오늘날 세상에서 불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시 그 들이 비난하던 사람들 못지않게 현대에도 적합합니다. 그들이 우리가 이 미지들을 성자들의 뼈 및 유물과 함께 폐기했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한 답은 쉽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리 뱀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서도 안 되며, 그것들을 제거하는 이유는 히스기야가 구리 뱀을 깨 부순 것 ( 왕하 18:4 ) 보다 못지않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마 음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중독은 미치게 된 원인을 제거함으로써만 고쳐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부 터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보상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채 그것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아우구스 티누스의 말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를 십분 경험합니다.12 ) 그는 또한 형상들은 입과 눈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므로, 불행한 영혼을 바로잡아 주기는커녕 도리어 잘못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으며, 어떤 면에서 외부의 형상이 부여한 결과는, 몸 안에 살아 있는 영혼이 자신의 몸과 매우 같은 몸이 똑같은 지각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는 것
이라고도 말했습니다.13 ) 성물들에 대해서는14 ) 이것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심하게 더러워졌 는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할례 시에 나온] 포 피가 세 개나 현시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를 십자가에 고정시킨 세 개의 못이 14개로, 병정들이 제비 뽑은 통으로 된 옷이 세 개, 십자가 위에 걸렸던 명패가 두 개, 그리스도의 가슴을 찌 른 창이 세 개, 그를 장사지낼 때 몸을 싸맸던 세마포가 대략 다섯 장이 현시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던 모든 집기와 이 12 ) Augustinus, Ep . 49. 13 ) Augustinus, Psalm 115.4. 14 ) 본서 4권의 <성물론>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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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종류의 쓸모없는 성물이 무수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또 유명한 성인 들치고 두세 개의 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단순한 부석 이 베드로의 두개골로 오랫동안 숭배된 장소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너 무 창피해 더 이상 이 추악함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오염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하려는 일에 전심전력한 우리를 비난하 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하나님 예배]
하나님 예배에 대해 우리 적대자들은 우리가 허망하고 유치하며 위선 에 적합할 뿐인 것들을 버림으로써 더 단순하고 순결하게 하나님께 예 배드린다는 이유로 우리를 고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예배를 추 호도 손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에 의해 증명됩니다. 그것[=영적 예 배]이 거의 폐기처분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의 이전 권리15 ) 로 그것을 회 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에게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한지 살펴봅시다. 나는 교리에 대해 우리가 선지자들과 공통된 명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백성이 우상숭배에 따라 하나님 예배가 외 양에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보다 더 가혹하게 백성을 책망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선포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 님이 의식 자체만이 고려되는 의식에 머물거나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 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는 마음의 믿음과 진실을 감찰하신다는 것이며, 그가 의식을 명하시고 인정하시는 유일한 목적은 의식이 다만 신앙과 기도와 찬미의 순수한 실천이 되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의 글에는 이런 이의신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앞서 말 한 바와 같이 그들에게 이 이상 더 노력한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동 15 ) postiliminium. 귀국권(歸國權)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본래 고대 로마제국에서 적군에게 포
로가 된 사람과 재산이 귀국 후 상실한 법적 권리를 회복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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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들[개혁자들]이 나타났을 때 세계가 전례 없이 이런 맹목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은, 뻔뻔한 자들이 아닌 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이 볼거리로 만족하듯이 하나님이 헐벗은 의식으로 만족하 신다고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그들이 선지자의 질책으로 사람들을 맹 렬하게 공격하고, 마치 억지로 그들을 그런 어리석음에서 끌어내는 일은 전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하나님의 영 적 예배 교리를 강권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이 두 가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저술 및 설교에서 분명하게 증명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 자체를 공격하고 그 대부분을 박탈함에서 우리와 선지자들 사이에 모종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선지자들은 백성이 하나님 예배를 외면적 의식 속에 가두었다고 공격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의식들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었던 반면, 우리는 똑같은 영 예가 인간이 고안한 하찮은 것들에게로 돌려지는 것을 한탄합니다. 그들 이 미신을 정죄하면서 하나님이 명하시고 초등학문 시기에 유익하며 적 합한 많은 의식에 대해 불문에 부친 반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잠입했거 나 남용된, 그래서 결코 시대에 부합되지 않는 많은 의식을 교정하기 위 해 노력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려 하지 않는다 면, 우리는 마땅히 구약과 신약 사이의 구별을 견지해야 하며, 율법 아래 준수함으로써 유익했던 의식들이 지금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악하고 부 조리함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지 않고 아직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았을 때,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신자의 영혼 속에서 그의 강림의 희망을 심어 주고 성장시켜 왔지만, 그의 영광이 임하여 현저한 지금 그 의식들은 이 영광을 어둡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 뭔지 알고 있 습니다. 하나님은 일시 명하셨던 의식들을 영원히 폐지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입을 통해 그 이유를 듣습니다.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교회 개혁의 필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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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적이] 불경건한 통치를 펼 치기 위한 구실로 “교회”라는 공허한 이름을 거론할 때 어떤 장 애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름을 내뱉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참된 교회란 무엇이며 이 교회의 일치 는 어떤 것인가를 판단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중 첫 번 째는 이것인데, 즉 우리가 교회를 그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 * * 칼
뱅
총
서
로부터 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을 말할 때, 나는 [이 이름을] 그가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인친 바 복음의 가르침과 함께 묶어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들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이 참된 교회임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한다면 우리 적들은 무
<기독교 강요/초판, 1536>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엇보다 맨 먼저 그들 자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순수한 가르침이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있음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말하고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있는 올바른 교리의 설교와 순수한 성례의 집행이 바르게 질서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잡힌 참 교회의 일치된 영원한 표지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바울은 교회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의 터 위에 세우심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을 입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2:20). 이 터 위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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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반드시 곧 무너질 것입니다. - <교회 개혁의 필요성>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0-7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16,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2
Jean Calvin 교회 개혁서 2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