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해설 2』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
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에게 그가 아무리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
이라 해도 그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라는 사실을 가르치며 책망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는 명령과 함
께 아말렉을 치라고 사울을 보내셨습니다( 3절 ).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였
습니다. 아말렉 백성을 도말하고 그들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가축의 가장
좋은 것들을 살려 두었습니다. 하나님 명령을 그대로 받들지 않고 소견에
옳은 대로 부분적으로만 순종한 것을 사무엘이 책망하자, 사울은 하나님께
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한 것을 분명
히 알면서도 가장 좋은 소와 양을 길갈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
백성이 남겨 둔 것이라고 둘러댑니다. 본문은 이런 사울의 어리석은 변명
에 대해 사무엘이 대답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
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하나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 땅에서 드리는 모든 제사보다 더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1.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순종을 요구하십 니다. 아무도 이 의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매
한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 역
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 아래 있습니다.
2. 하나님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방식대로 자신의 뜻을 알리고 계시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
러므로 본문은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혼은 먼저 하나님이 뜻하신 바
를 알고 그대로 순복해야 합니다.
3. 탁월하고 고귀한 순종의 의무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무입니다.
(2) 이 의무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번제와 제사, 심지어 가장 숫
양의 기름조차 이 의무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 교리를 가르칩니다.
교리.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는 계시된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먼저, I. 이 교리가 뜻하는 바를 밝히고, II. 이에 따른 몇 가지를 우리 삶
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I.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할 의무의 원리와 특징과 이유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의무를 생각해 보고, 그것의 원리
와 특징 및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1. 사람이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마땅한 의무는 순종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뜻을 따라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입니다.
이 왕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법과 규례에 순종해야 합 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 된 우리가 순종하는 자녀로서
의 모든 존경과 경외함과 사랑을 돌려 드림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의 주와 주인 되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기쁜 마음으로 무한히 하나님을 섬
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지존하신 율법의 수여자이시므로, 하나님
의 입에서 나온 율법을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모든 율법과 규례에는 하나
님의 권세의 인이 박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하는 모든 규례에 민첩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2.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이 순종을 요구하십
니다. 하나님 뜻을 알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외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비천한 자는 물론 가장 위대한 자도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습
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나, 백성이나 왕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 아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어느 인간도 하나님께 순종할 이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담의 아들딸이라면 누구도 하나님 뜻에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 의무는 변개하지 못할 법으로서, 모든 인간이 짊어
진 쉬운 멍에입니다.
3. 무엇에 순종합니까?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 뜻은 우리가 가진 최고
의 법입니다. 여기서 순종의 원리가 되는 하나님 뜻이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은 어느 인생에게도 드러난
적이 없고, 인간이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계시된 하나님
뜻만이 순종의 원리를 삼을 수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
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
니”( 신 29:29 ). 유대인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오늘날까지 무거운
죄책 아래 신음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이 부지중에 하나님의 은밀한
뜻과 섭리 가운데 정하신 것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행 2:23 ). 하지만 계시된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믿음의 내용이든
삶의 방식이든 성경에 하나님 뜻으로 계시된
여”라고 합니다( 시 18:23 ). 위선적 순종은 사람을 기쁘게 할지 몰라도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전해진 교훈의 본을 “마음으
로 순종”했다고 칭찬합니다( 롬 6:17 ). 마음을 다해 드리지 않는 제사는 하나
님의 제단에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
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의 행위만이 아닌 그들의 행위를 불러일으킨
‘그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으로 판단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이 이
삭을 바친 것과( 히 11:17 )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드린
제사의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민 14:40, 42, 44 ). 후자는 노골적으로 하나
님 명령에 불순종한 경우입니다. 바르고 진실한 마음이 없는 모든 순종은
유사순종과 가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역겨워하실 것입
니다.
(2) 부단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의 율법을 항상 영원히” 지켜야 합니다( 시 119:44 ).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
을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율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합 니다. 오한에 걸린 사람의 열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종이 간헐적이
거나, 즐거움을 위해 배 타는 일에 뛰어들었다가 풍랑이 일면 금세 뭍으로
돌아오는 사람과 같이 변덕스럽다면 이는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런 하나님 뜻에 순종함에서 한결
같고 부단해야 합니다. 이런 순종의 원리를 감히 거슬러 행할 여유가 없습 니다.
(3) 민감하고 섬세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
야 합니다( 살전 5:22 ).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싫어”해야 합니다( 유 23절 ). 악
인 줄 알면서도 그 악을 만지작거리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음
탕한 눈길조차도 가증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겔 6:9 ).
아무리 잘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입니다. 이미 특
정한 죄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그렇게 하면 큰 죄가 될지 작은 죄가 될지
재보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죄를 이렇게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큰
범죄고, 크든 작든 악은 그 모양이라도 취하지 않고 모든 죄를 미워하는 부
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성정과는 부합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죄 짓길 두려워할 줄 알고 생각으로든 행위로든 그릇된 일을 저지를까 조
심하는 ‘부드럽고 섬세한 마음’과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요구하십
니다.
(4) 민첩하고 기꺼운 순종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라고 시편 기자가 묘사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 시 18:44 ).
순종을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
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저 선한 다윗처럼 말입니다( 시 119:60 ). 하나
님이 명령하실 때 사람들의 의견을 물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 1:16 ).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가타부타
쟁론하지 않고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자신이 아는 하나님 명령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히 11:8 ). 그가 칭찬받아 마땅한 이유입니다. 고난을 당하든 무
엇을 행하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것이 조금이라도 분명하다면
즉시로 기꺼이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육신적인 이유를 들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명령을 피해 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육신적인 안일을 아쉬워하
는 자기애착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삼켜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까? 즉시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주여, 주께서 명하시는 뜻을 행하기 위해 우
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민첩함과 기꺼움
이 없는 순종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강압에 따라 억지로 행한 ‘아무짝
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온전하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섬김에 합
당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받지 않으십니다.
(5) 삶의 모든 계명에 대해 이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모든 계
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시 119:6 ). 하나님의 전체 계명
에는 똑같은 하나님의 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하
나의 황금사슬을 이룹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제하면 이 사슬은 끊어지고
맙니다. 야고보 사도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
명에 대한 불순종이 무마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계명에 대한 불순종
은 곧 전체 계명을 주신 이에 대한 모욕입니다. 영광스런 교회의 입법자가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
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
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 5:19 ).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계명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거스르는 것은 곧 다른 계명에도 똑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전체 계명에 대한 순종을 명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경시하
고 모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행할 의무를 알면서도 그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나머지 계명에 대해서도 위선자로 드러날 뿐입니다.
(6) 절대적인 순종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땅을 향해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나
선 것과 같은 순종이어야 합니다( 히 11:8 ). 백성이 위의 권위에 순복하고, 회 중이 목사에게 순종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순종은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 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이는 하나님뿐입니다( 마 23:9 ). 이 땅 의 권위자들의 요구가 하나님 명령과 배치된다면, 그것에 순종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명령이 온 세상과 배치될 때, 우리는 하나님 명령
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유대 법정
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길 쉬지 않았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유대 법정의 명령은 승귀하신 주님의 명령과 정면으
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행 4:19 ). 예외나 주저함이 없는 무조건적이고 무
제한적인 순종은 천지의 위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만 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7) 완전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타락한 상태에서는 완전한 순종을 돌려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떤 상태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이런 순종을 요구할
수 있으시고 또 그렇게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진실
한 순종을 받으시는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한 순
종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불완전한 순종은 그들의 죄입니다. 순종이 완전한
지 아닌지에 따라 그들의 칭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하나님
께 완전한 순종을 돌려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그
들 자신을 통해서든 그들의 보증인을 통해서든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이런 완전한 순종을 돌려 드릴 수 없는 자
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절감하는 신자들은 아무리 진실한 순종이라 해도, 자신의 죄악 되고 불완전한 순종을 거부하고 자신의 보증이 되신 이의 완
전한 순종에만 호소합니다. 그 완전한 순종을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
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들의 순종으로 받으십니다.
요컨대 하나님 뜻에 대한 모든 참되고 받으실 만한 순종은 믿음과 사랑
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드는 연합의 도구고, 하나님
을 향한 순종은 이런 연합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원천은 사랑
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순종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순
종하는 것은 본성적인 양심을 잠잠하게 하기 위함도, 사람들의 칭송을 얻
기 위함도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을 닮아 가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 리기 위함입니다.
5.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순종을 돌려 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존재를 주신 위대하고 영광스런 창조주이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
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뜻에 순복하는 것이 합당하고 바릅니다. 하나님
께는 우리를 명령할 모든 권세가 있고,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
히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의 주권적인 능력을 통해 사람은 각 기능대로 움직이고 능력을 발휘합
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람은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 뜻이 아니고는 무엇
하나 행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라 부르면서 하나님께 순복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면전에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속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기 자신을 위해 지으셨습
니다. 만물은 하나님 때문에 생겨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하 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궁극
적인 목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짐승은 물론 모든 생물, 무생물이 피동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이성
적인 존재인 사람과 천사는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도록 지어졌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람들을 보존하십니다. 피조물을 보존하는 것은 창조가 계속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계속적인 창조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 또한 끊임없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전혀 움직이거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과 행
위가 전적으로 자신들을 붙드시는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이런 생명과 행
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하나님 뜻을 증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4) 우리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의 탁월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고 탁월한 분입니다. 모든 다른 존재의 원천이요 근원입니다. 무한하고 초월적인 모든 방식에 있어 완전하고 탁월 하십니다. 무엇이 되었든 피조물에게서 발견되는 완전함, 탁월함, 사랑스런
자질들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탁월하고 완전하게 발견되고 가장 찬란하고
영광스럽게 빛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존귀와
순종을 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5)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선과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의 넉넉하고 인자한 손에서부터 우리가 누리는 모든 자비가 흘러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행하고, 존재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건강, 능력, 시
간, 모든 영적이고 현세적인 복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섭리적인 돌보심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우리는 마땅히
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2 ). 하
나님에게 이런 엄청난 은택을 입은 이스라엘은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 베푸
신 복을 거두시는 것은 물론 순종의 의무를 소홀히 한 이들에게 크나큰 재
앙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6) 하나님은 우리의 통치자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율법의 수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인 피조물은 물론 비이성적인 피조물 모두에게 법을 주
신 분입니다. 천체가 움직이는 법칙이 있습니다( 욥 38:33 ). 모든 피조물에는
이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성적인 피조물은 그 마음
에 하나님의 규례가 새겨져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
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
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 15 ). 더
구나 이들은 말씀으로 분명하고 온전히 기록된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
을 제정하고 부여하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약 4:12 ). 양심을 어거할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법을 받아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 합니다.
II. 적용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가지고 몇 가지 적용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계시된 자신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슬픈 고
가운데 있다 해도, 심지어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
할 의무가 있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
면 이런 순종의
때문에라도 인간은 더욱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에 있
든 인간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2. 그렇다고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으신 것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
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의 의무는 인간의 상상력이 아닌 오직 계시된 하나님 뜻을 따라 규정되어
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신 것을 인간의 의무로 규정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누가 이런 일들을 하라 했느냐?’라고 하실 것입
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들만이 우리가 행할 합당한 순종의 의무입니다.
3. 복음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들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정죄를 받을지언정, 복음을 믿지 않은 것 때
문에 정죄를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의무 이전에 반드시 하
나님 뜻이 계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
을 받으리라”( 롬 2:12 ).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하기에 충분합
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라는 위대한 계명에 대해서는 더욱 그
렇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순종하
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막 16:16 ).
4. 모든 인간은 교회든 세상에서든 자기 위에 권세를 가진 사람들의 뜻이
무엇인지 잘 살펴서, 그 뜻이 하나님 뜻에 부합한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 뜻과 배치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윗사람의 명령이라도 따라서
는 안 됩니다 ( 고전 10:15 ) . 그렇게 함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칭찬을 받았습
니다( 행 17:11 ). 윗사람에 대한 우리의 행위인 복종과 순종에는 차이가 있습
니다. 윗사람과 여전히 복종하는 관계에 있으면서도 악한 명령에는 순종하
길 거부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여전히 복종하면서도 합당하지 않은 명령을 따르는 것은 거부했
습니다( 행 4:8, 9, 19 ).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명령과 가르침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배치될 때, 그것들을 따르지 않아도 되게 하셨습 니다. 합법적이지 않은 명령을 따르는 것은 곧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
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일에 순종과 복종을 돌려 드림 이 마땅합니다.
5. 우리는 모두 하나님 뜻에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뜻을 행하기로 다짐하고 그리스도의 중보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받
으실 것을 바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에 ‘진실하고 지속적이고
섬세하고 민첩하고 보편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
가 행한 모든 불순종의 행위를 은혜로 용서해 주시고, 자기 백성을 대신해
모든 의를 성취하신 하나님 아들의 완전하고 완성된 순종으로 우리의 불완
전하고 죄로 오염된 순종을 가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6. 무엇이나 의무로서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일은 그렇게 행할 능
력과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기록된 말씀에 있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뜻에 이런 순종을 돌려 드리길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
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
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7 ). 하나님은 능력과 은
혜를 충분히 주지도 않으시면서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대
로 순종함이 마땅합니다.
순종의 원리로서의 도덕법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
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
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 15).
이 말씀에서 사도는 세 가지 사실을 보여 줍니다. 1.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 또는 기록된 말씀이라고 하는 율법이 없다는 말입 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이 없습니다. 2. 하지만 마음에 새겨진 법은 있습 니다. 그들에게는 이 법이 율법입니다. 자연법 말입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도덕법과 일치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기록된 도덕법처럼 완전하지 않고 덜
명료합니다. 이마저도 인간 본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이중 몇 가지는 완전
히 누락되어 버렸습니다. 3. 그러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자연법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인간이 고안한 것도 아니고 전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아담에게서 본성적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본성의 법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남아 있는 도덕법
의 잔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
습니다. ‘완전한 상태의 도덕법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
이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기록된 율법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남아 있는 도덕법의 잔재들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리.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맨 처음 계시하신 순종의 원리는 도덕법이다.”
I. 개요
1. 이런 사실에서 사람은 언제나 율법 아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자신의 창조자께 순종할 의
무를 가진,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된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이 순종의
원리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짐승은 율법 아래 있을 수 없습 니다. 인간과 달리 그들의 본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높아질 수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고 불
법을 자행하는 것은 본능을 따라 사는 것이 전부인 짐승으로 자처하는 일 입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은 그 가진 본성에 따라 거기에 맞는 법에 순응하
며 살아갑니다. 세상 만물에는 각각의 본성에 맞는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해, 달, 별과 같이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은 섭리의 법과 밤과 낮의 언약 아
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
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시 148:6 ). 이런 피조물들은
각각 움직이는 경로와 방식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
이 움직입니다. 가장 변화무쌍하고 사나운 피조물 중에 하나인 바다조차
이 법에 순응합니다. 모래 띠로 울을 두른 듯, 하나님은 바다를 향해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고 하셨습니다( 욥 38:11 ). 하물며 스스로 선택할 능력을 가진 이성적인 피조
물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히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은 율법을 따라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피조물인
인간은 반드시 율법에 부합하게 살아야 합니다.
질문.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요 1:17 )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율법은 모세
를 통해 주어진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모든 아담의 후
손의 마음에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데 필수적인 공정성의 기준을 담고 있
는 도덕적 원리와, 하나님과 자신과 피조물에 대한 의무의 정도를 포함하
는 율법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음에만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
들이 가진 이성의 빛과 자연적 양심의 명령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 울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이성은 이 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롬 7:12 ). 이 율법은 거룩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원형인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행위들에 부합하는 거룩한 일들을 명령하기 때문
입니다. 이 율법은 의롭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기능에 정확히 들어맞고 세상
을 살아가는 인간의 상황에 가장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은 선합니다.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
니이다”( 시 19:11 ). 창세기 1장 27절이 말하는 것처럼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마음에는 이런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이란 아담의 영
혼의 온전함과 아담이 가진 도덕적인 자질을 가리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이는 곧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을 말합니다. 하
나님은 아담이 자신과 소통함으로 만족과 행복을 누리도록 자신이 가진 온
전함의 생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는 곧 그가 가진 모든 기능이 각각의
쓰임새에 맞게 작용하도록 하는 정확함과 올곧음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서는 사람의 창조를 다루면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2.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율법을 발견합니다.
(1) 의식법. 모세를 통해 주어진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보는
이 법은 구약의 유대인에게만 적용됩니다. 이 율법이 바라던 원형인 그리
스도가 오심으로 장차 올 선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그림자로서의 이 법은 폐기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던 담으로서의 이 법은 그리스
도의 오심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2) 시민법. 구약 이스라엘의 시민법을 말합니다. 이 법 역시 처음에 모
세를 통해 주어졌고, 이 법으로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렸습니다. 이런 면에
서 당시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였습니다. 이런 복된 통치 아래 있던 그들은
얼마나 복된 백성이었습니까? 이 법에 담긴 도덕적 공평 말고는 다른 민족
을 구속할 만한 요소는 없었습니다. 이 법은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라는 고
유하고 특수한 환경을 위한 시민법으로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3) 도덕법. 도덕법만큼은 모든 인류와 함께 공통적으로 그들에게 주어 졌습니다. 모든 인간의 의무로서의 도덕법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3. 도덕법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모든 인간의 마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마음에 새겨졌던
도덕법의 흔적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롬 2:15 ).
그러므로 이런 도덕법을 가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예
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과, ‘모든 사람을 합당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등
을 압니다. 우리 양심이 현저한 죄악들에 대해 고소하고 나서는 것은 아직
도 양심에 이 법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롬 1:32 ). 사람의 마음에 남겨진 이
런 법은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인간 사회를 보존하고, 덕스러운 일을
권장하고, 악을 억제하는 법들로 나타납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이성이 이 법을 위한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이런 법
을 제정하는 목적은 상호 교통과 교섭이 가능하도록 인간을 선의 경계 안
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각자의 본성에 이 법을 가지
고 태어납니다. 이성을 뒤덮고 있는 감각과 감정의 안개가 걷힐 때에라야
인간은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사람마다 자기 안에 한 법이 있
어, 자신이 이 법을 거스르려 할 때마다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압 니다. 자신 속에 율법의 판결과 고소하는 자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2) 이 법은 또한 십계명에서 요약적으로 나타납니다.
(3) 전체 성경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자연적 인간에게 있는 육신 의 생각은 이 법과 원수로 행하고, 중생과 함께 인간의 마음에 다시금 새롭 게 기록됩니다( 히 8:10 ).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이 법
을 성취하셨습니다.
4. 이 법의 계시와 관련하여 세 가지 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통해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마음
에 새겨졌습니다. 아담의 순전한 본성과 함께 이 법을 아는 지식이 주어졌
습니다. 아담이 가졌던 총명은 등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을 통해 아담은 자
기 의무가 무엇인지 자기에게 계시된 그대로 명백히 알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계시하실 모든 것을 믿고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자연법의 한 부분입니다. 율법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이 아담에
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금하시고 인간을 시험하
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법 또한 아담이 순종해야 할 규칙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이 율법에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생명의 약속과 불순종할
경우에 맞닥뜨리게 될 사망의 위협을 더하시되, “행위 언약”이라 부르는
언약의 형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금지령은 가장 지혜롭고 정당한
근거 위에서 주어졌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권리를 선언하고, 이런 하나님의 권리를 선언하는 것에 아주 적합한 일을
통해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런 금지령이, 금지된 것 자체에 있는 어떤 도덕적이고 내적인 악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면, 하나님의 주권이나 이 금지령에 대한 아담의 순종을 그렇게까지 분명
제아무리 잘 보
존했다 해도, 아담의 타락과 함께 전체 인간 본성이 타락함으로 이 율법을
아는 지식이 어두워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애굽에 머무는 동안 이
들은 율법에 대한 많은 것을 상실해 버렸고, 이 지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3)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조차 이 율법을 아는 지식의 많은 부분을 상실
했을 즈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해 이 율법이 다시금 세상에
계시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통해 이 율법을 깨닫 습니다.
5. 이 율법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보편적인 법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
는 법입니다( 롬 2:14, 15 ).
(2) 완전한 법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갖는 모든 의무를 포괄하는
법입니다. 이 율법과 관련해 그리스도가 무슨 새로운 의무를 더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 전부터 이 법은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시 19:7 )
(3) 항상 있을 영원한 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
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눅 16:17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
6. 이 율법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1) 처음에 이 율법은 순종하는 자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한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순
종하여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
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 아무도
율법을 지켜서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죄책 아래 있으므로, 율법
이 요구하는 완전한 순종을 이룰 사람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전 7:20 ). 성경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라고 합니다( 약 3:2 ).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율법이 필요합 니다.
[1]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세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a.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
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
b.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겸손해집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 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9:11, 12 ).
c.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인지를 압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
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19 ). 사도는 또한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통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피합니다. (a)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
입니다. 율법이 금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이 범한 죄악을 깨닫습니다. 율법
이 명하는 것을 통해 율법을 태만하게 하고 그대로 행하지 않은 죄를 깨닫 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 “율법으로 말
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롬 7:7 ). 하나님의 율법이 밝히
보여 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죄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b) 이
렇게 허다한 죄를 지은 그들 위에 드리운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와 저주를
깨닫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
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 3:10 ). (c) 양심을 일깨워 죄책을 깨닫
게 하고, 그런 죄책 아래 있는 자신의 포로 됨과 비참함을 대면하게 함으
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고귀함을 확연히 보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고백하게 합니다. [2]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a. 율법을 통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과 자신의 죄를 깨달음으로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게 됩 니다 ( 롬 3:20 ). 이렇게 자신의 소망 없는 상태를 깨달은 사람은
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
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딤전 1:9 ).
c. 죄악 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양심을 괴롭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율
법의 저주 아래에서도 핑계할 수 없게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a.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이
의무를 온전히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더 존귀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율법의 요구 앞에서 처참할 정도로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사도는 이
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
로다”( 롬 7:24, 25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
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
게 하려 함이라”( 갈 3:13, 14 ).
b. 삶의 규칙으로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순종함으로 그리스
도를 향한 감사를 표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인을 저주
와 정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들을 인도하고, 그리
스도는 이들을 다시 자기에게 순종하는 기준과 원리로서의 율법으로 인도
합니다.
반대. 하지만 사도는 로마서 6장 14절에서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 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도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 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합 니다.
답변. 신자들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의롭게 되거나 정죄를 받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말입 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 ). 더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율법을 이루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들은 정죄하거나 명령하는 율법의 권세 아래에 있지 않고, 행위 언약으로
서의 율법은 더 이상 신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
도가 율법의 범과에 대한 심판으로서 죄인들에게 요구하는 모든 형벌의 요
구도 다 담당하셨으므로 신자들에 대한 심판의 요구도 다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의 요구에서 완
전히 자유롭습니다. 신자들을 통해 맺는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 뜻과 율법
에 부합하는 성령의 역사의 산물로서, 율법의 정신은 물론 율법의 요구와
도 전혀 부합합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여전히 율법 아래에 있습니다. 행
위 언약의 요구로서가 아닌 삶의 규칙으로서 말입니다. 율법은 이제 신자
의 마음과 삶의 규칙으로 작용합니다. 이들의 삶의 항로를 천국의 포구로
인도하는 북극성 역할을 하는 율법은 시간이 갈수록 신자들 안에서 자신들
을 대신해 율법을 완전히 이루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더 크게 촉발합니다.
우리가 살핀 내용과 관련된 몇몇 적용으로 본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II. 적용
1. 교황은 적그리스도요 죄의 사람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인 양 도덕법과
배치되는 일들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 살후 2:3, 4 ). 교황주의자들은 도덕법에
교회법과 전통을 덧붙입니다. 마치 도덕법이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법을 만들거나 피조물
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주면 안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선
하심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죄를 선동하는 짓입니다. 하
나님의 거룩한 법을 손상하거나 그 법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계 22:18, 19 ).
2. 도덕법은 우리 마음과 행실 모두를 합치해야 할 순종의 규칙이 아닙
니까? 그렇다면 이 법을
칙과 기준으로 두고 자신의 타락한 이성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신의 정욕
과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적인 욕망과 감각적인 요구를
채우기 위해 공부할 뿐,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가 없
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모든 요구를 무시하고, 하나님 명령을 팽개칩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짓입
니다. 이런 죄책 아래 있는 이들의 머리 위로 머지않아 하늘의 진노가 쏟아
져 내릴 것입니다.
3. 사람들로 죄를 깨닫고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순종하는 데 무능력한지
를 절감해,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죄와 임박한 진노에서 능히 구원
할 모든 의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도록 율법을 설교해야 합
니다. 마음과 삶에 참된 거룩함을 이루길 바라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의지해, 하나님의 전체 율법에 신실하고 바르게 순종
하기 위해 율법을 연구하고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들 발의 등이요 길의 빛입니다. 율법의 신령함과 정도를 더 연구해 알수록 율법에 부합하게 살
려고 더 열렬하게 애를 씁니다.
4. 상황과 경우가 어떻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율법 아래 있음을 기억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는 그에 적합한 결실을 거두게 하는 씨앗
입니다. 모든 사람의 행실과 일들은 물론 그 숨은 동기와 과정마저 속속들
이 드러나게 될 심판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부합한 사람을 위해 율법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 하나님이 거룩
하신 것처럼 거룩하고, 우리 양심을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거리낌이 없
도록 지켜 갑시다.
십계명으로 요약된 도덕법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율법의 행위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던 사람에게 그리스도
가 하신 말씀입니다. 그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그리스도는
율법을 대면하게 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여기
서 계명들이라 함은 십계명을 말합니다. 18절에 보면 실제로 십계명 가운
데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십니다. 2. 이 계명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전체 도덕법을 가리키셨습니다. 부자 관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서 도덕법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
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12 ). 누구든지 율법 책
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 3:10 ). 이 부자 관원은 지금 율법을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받 아들임으로
교리. “도덕법은 십계명이 잘 간추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살펴보고 적용해 보겠습니다.
I. 어떻게 계명이 주어졌는가? II. 왜 율법은 그렇게 주어지고 또 새롭게
되었는가? III. 십계명은 어떻게 도덕법을 간추리고 있는가? IV. 적용.
I. 어떻게 계명이 주어졌는가
어떻게 도덕법 또는 십계명이 주어졌는지부터 보겠습니다. 신명기 10장
4절은 십계명을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열 개의 계명이 나옵니다. 하
지만 교황주의자들은 2계명을 빼고 10계명을 둘로 나눈 것을 십계명이라
부릅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된 후 시내산 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멍에를 벗어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십계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1. 시내산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선포되 었습니다. 이와 같이 끔찍하고 두려운 위엄과 함께 주어진 율법은 없었습
니다( 출 19장; 신 4:5; 히 12:18 ).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 백성은 자신의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율법을 받는 백성의 귀와 마음을 깨끗하게 예비해야
할 것을 상징적으로 요구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수여되는 순간에 사람들이
시내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경계를 정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율법과 거룩
하고 의로운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함을 불러일
으켰습니다. 당시 시내산에는 엄청난 번개와 천둥이 일었습니다. 하늘의 뇌
성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을 “불같은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하는 이 자리에는 천사들도 함께 했습니다. 하늘
의 군대가 이 중요한 순간을 위해 시내산에 소집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율
법이 수여된 이 자리에 최고의 위엄이 드리운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은 죄인이 율법의 행위를 따라 생명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
고 헛된 것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생명을 얻으려면 중
보자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2. 십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두 돌 판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계명이 돌 판
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인간 마음의 완고함과 율법의 항구성을 대변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신 두 돌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
니다 ( 출 31:18 ). 하지만 이스라엘 진으로 내려온 모세는 두 돌 판을 깨뜨립
니다. 사람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를 대변하는 대목입니다.
모세는 다른 두 돌 판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직접 새
기십니다 ( 34:1 ). 율법에 따르면 죄인은 이처럼 도륙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은혜의 법은 사람의 마음에 복음의 성령을 통해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나
중에 이 두 돌 판은 언약궤 안에 보관됩니다.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
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기 위함입니다. 이렇
게 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이 최초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이
기록으로 남기는 이런 고상하고 유익한 일 역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습
니다. 대대로 온 교회가 유익을 누리는 이후에 모세가 남긴 기록은 다 이
계명을 토대로 합니다.
II. 왜 율법은 그렇게 주어지고 또 새롭게 되었는가
이제 왜 율법이 이렇게 주어졌고 갱신되었는지 보겠습니다.
1. 자연법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그들 마음에 주신 율법을 굳이 확증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
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졌고, 의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서
와 모든 다른 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게 되었고, 그나마 남은 흔적과 기
능들마저 상실한 위험에 처했으므로 십계명을 주셔서 자연법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2. 인간의 타락으로 부패하고 불완전하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기 위함입 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할 정도로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부패와 결함 투성이가 된 본성의 법의 왜곡은 심각합니다.
(1) 본성의 법을 통해서는 인간이 처한 모든 비참함의 처음
율법이 아니면 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으
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
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
(2) 악을 선으로 알고 선을 악으로 알고, 빛을 어둠이라 하고 어둠을 빛
이라 할 정도로 본성의 판단은 완전히 뒤틀리고 혼미하게 되어 버렸으므 로, 본성의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본성이 인간을 지배하므로 실상
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말하길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계 3:17 ).
(3) 본성의 법으로는 부패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
한 해결책을 얻게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숭고해도 철학은 사람
으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도록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저 예전의 폐허에
서 쓸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워 자기 집을 꾸미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
의 책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수치와 부끄러움과 혼란
과 자기를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의를 빌려 오는 것이 전
부라고 합니다. 물론 많이 배웠다고 하는 철학자들에게는 비이성적이고 나
약한 소리로 들릴 뿐이겠지만 말입니다.
(4) 본질상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게 된 인간은
처음 아담이 지음 받았던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
어 본성의 법만으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시궁창에서 나서 자란 인간은 궁
궐이 어떤 곳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또는 제아무리 귀족의 자제라도 어려
서 납치를 당해 거지 슬하에서 자란 아이는
같이 부정한 곳에서 자라, 처음부터 흑암의 권세를 잡은 자에게 사
로잡힌 타락한 인간이 가진 부패한 본성으로는,
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비에게서 자녀에게로 율법을 아는 지식이 전수된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인간의 연수는 줄었고 후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율법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무지해져 갔습니다. 이런 부족함을 매우고 하
나님 백성 중에 율법을 아는 지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
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4. 이렇게 율법을 바로 알게 된 하나님 백성에게 중보자의 필요를 확증하
기 위함입니다. 새롭게 주어진 율법을 통해 사람들이 이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는 데, 자신이 전혀 무능한 것을 성령의 확증하심으
로 깨닫는 가운데, 율법의 명령과 이를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심
판 모두를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함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III. 십계명은 어떻게 도덕법을 간추리고 있는가
이제 어떻게 십계명이 하나님 율법의 핵심을 간추리고 있는지 보겠습
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전체 성경에 걸쳐 계시될 만큼 광범위합니다. 하지
만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은 이 계명의 핵심을 간추려 주
셨습니다. 십계명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의
무의 요체입니다. 십계명은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그리스도가 친히 이 십계
명을 설명합니다. 이 계명들은 인간이 가진 전체 의무를 포함합니다 ( 전
12:13 ). 율법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요구 가운데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나
믿을 것을 요구하는 1계명이 요구하는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을 우리의 참된 하나님이요 우리가 온 맘과 삶을 다해 예배하고 영화롭게
할 것을 요구하는 1계명은 우리가 예배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
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정해 주신 대로 우리의 예배를 순전하고
전하게 보존하고 지킬 것을 명하는 2계명은 예배의 방법과 관련이 있습 니다.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 칭호, 속성, 규례, 말씀, 역사 등을 거룩하고
합당하게 사용할 것을 말합니다. 4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합니다. 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할 것을 요구
합니다. 7계명은 마음과 말과 행실을 통해 우리 자신과 이웃의 정절을 존중
하고 보호할 것을 요구합니다. 8계명은 우리 자신과 다른 타인의 소유와 재
물을 합법적으로 보존하고 번성하게 할 것을 명령합니다. 9계명은 사람 사
이에 진실을 추구하고 증진할 것을 요구합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에 대해
증언하는 일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10계명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만족하
고, 이웃과 이웃의 소유를 의롭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각
계명은 이 10계명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거나 반하는 모든 것을 금합니다.
십계명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1. 십계명은 외적인 행위는 물론 마음과 생각에도 적용이 됩니다. 율법은 영적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행실은 물론 내면에까지 미 칩니다. 말과 행동과 태도는 물론 오성과 의지와 감정에까지 미칩니다. 그
러므로 우리의 행실은 물론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율법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연구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롬 7:14 ). 율법을 주신 분이 영이 십니다. 우리 몸의 행실은 물론 영혼의 성향과 움직임까지 다 살피십니다.
삶에서 드러나는 잘못된 행실은 물론 마음의 부정함에도 진노하시고 탄식 하십니다. 우리가 행실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 뜻을 따르고 순종
하길 바라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가진 기능 중에 가장 변
화무쌍하고 불안정한 상상과 공상에까지 미칩니다.
하지만 사람이 꿈꾼 것까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욕이나 거짓말하지
말라는 등의 하나님 계명을 적용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
니다. 이 사람은 잠만 잤을 뿐 무슨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답변. 꿈에서라도 죄는 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고 용서받
지 않는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서도 정죄를 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1) 성
경이 그것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서 8절에서 사도는 “꿈꾸는 이 사
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라고 합니다. (2)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책을
의 소유라 생각하면서도 그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도둑질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4) 이
런 모든 것은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되므로, 이들 중 어떤 것은 육신적이고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일상으로까지 계속 이어지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양
심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것은 여전히 죄악 된 것일 뿐입니다. (5)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
를 사는 꿈을 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왕하 3:5 ). (6) 마음에 율법을 새기신 것
은 잠자는 중일지라도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
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잠 6:22, 23 ). 율법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으려
힘쓰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다가 잠이 들어 그런 꿈을 꾸게 되면 어떻게 되
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게 악하게 연상되는 것에 마음이 동하는 한, 아무
리 꿈에서 그랬을지라도 그것은 엄연히 죄악 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
리가 활동하는 시간은 물론 잠자는 동안에도 은혜로 시험을 물리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계명은 완전을 요구합니다. 부분적인 순종은 받아들여지지
도 않고 인정받지도 못합니다. 조금만 흠이 있어도 치명적입니다. 당장에
저주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런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우리의 불순종
과 모든 흠결을 덮기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됩니다.
3. 죄는 무엇이든 금하고, 그와 반대되는 모든 것을 명합니다. 의무를 명
령하는 데마다 그 의무와 대비되는 악을 금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살아 계신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만을 예배하고 섬기라고 합니다.
하라는 것은 곧 자녀로서 마땅히 부모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율법이 금하는
악에서 떠나지 않고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금하는 죄
를 짓지 않으려면 그 죄와 상반되는 덕행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거룩함이 얼마나 충분하지 못한지
보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이 금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율법
이 요구하는 일을 준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 순종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4. 계명이 금하거나 요구하는 특정한 죄나 의무가 있다면, 이와 관련된
모든 죄나 의무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웃을 죽이는 것은 물론, 구타하고 위해를 가하는 것 역
시 금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시기, 질투, 악의, 앙심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근친상간, 음란, 모든 부정한 상상, 생 각, 의도, 감정까지도 포함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서는 모
든 강탈, 강도질, 불의한 저울과 계량으로 속이는 일까지도 금하십니다. 다
른 한편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예배하고 숭모할 것을 명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의무를 소중
히 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통해서는 이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특정한
죄를 금하신다는 것은 곧 그 죄로 이끄는 모든 일과 방편들까지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명이 금하고 있는 어떤 현저한 죄가 있다면, 그
정도에는 미치지 못해도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그와 관련된 모든 죄까지
도 멀리하고 혐오해야 합니다.
5. 하나님이 어떤 죄를 금하시면 그 죄에 이르게 하는 원인 역시 금하시
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금하실 때는 안식일을 범하
게 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 역시 금하시는 것입니다. 부정함을
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이 순전할 것을 명할 때는 절제와 온건함, 하나
님이 부르신 소명을 힘써 이루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한 방편과 자원을 근
면하게 사용하는 부지런함까지도 포함합니다.
6.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과 두 번째 돌 판을 동시에 이루기 어려운 상황 에서는 항상 첫 번째 돌 판의 계명을 이루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부모도 때로는 미워해야 할 것을 명하지 않습니까( 눅 14:26 ) ? 부모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맞설 때는 부모 형제에
대한 의무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
를 때는 사도들이 잘 보여 주는 것처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야 합니다( 행 4:19 )
7. 하나님의 율법이 금하는 것은 언제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명
하시는 것은 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4장 9절
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
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각각의 의무를 동시에 다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의 요구를 담은 계명도 많기 때문
입니다. 이렇게 각 의무에서 직시한 상황이 아닌데도 굳이 그런 의무를 행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
니다. 이 계명을 지키려면 우선 부모가 생존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
면 이 계명과 직접적인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건과 상관없이 하
나님의 율법이 금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
극적인 규례 가운데는 환경이나 조건에 부합해야 적용이 되는 것이 있지 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규례는 항상 적용됩니다. 무엇이든 악은 항상
IV. 적용
본 주제와 관련해 우리가 적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1. 인간이 순종해야 할 기준과 원리는 흑암이나 어둠 가운데 감추어 있어
모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배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상식적이고 인간의 이성에 부합합니다. 십계명이 이 원리를 잘 간추리고
있고 성경의 각 책들이 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드러냅니다. 또한 각 사
람의 마음에 어느 정도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담의 모든 아들딸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에 이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부패와 타락의 물결이 미친
듯 온 인류를 휩쓸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 마음에 새
겨진 이 법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우리도 이 율법에 대해 순종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롬 10:8 ). 그러므
로 이 원리를 모르는 것처럼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 봐야 거짓으로 그런 척하는 것일 뿐,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
실이기 때문입니다.
2. 이 순종의 원리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근거로 이 원리를
설득하는 성경이 있는 빛이 비추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알면 자신들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이해가 걸려 있는 원리를 모른다는 것은 정
말이지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물론 이 율법이
얼마나 신령한 것인지 사람들은 두려울 정도로 무지합니다. 마음이나 행실
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율법은 완전합니다. 그만큼 완전한 일치를 요구합니다. 각각의 의무를
완벽하게 준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최소한의 죄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 생명과 구원을 얻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어느 인
생도 율법의 이런 요구를 만족시킬
말미암아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의 이런 순
종과 만족에서 은택을 얻어 누리는 것 또한 이처럼 기뻐하십니다. 4. 하나님의 계명은 무척 광대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마
음의 모든 움직임과 바람과 감정에까지 미칩니다. 이 계명은 우리 마음과
삶 모두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알 뿐 아니라, 율
법의 신령함과 거룩함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 부지런히 연구해,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바른 목적과 바른
원리에서 비롯된 진실한 순종,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보편적인 순종, 자원
하고 기뻐하는 순종, 한결 같은 순종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우
리에게 총명을 주셔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순종하
게 하셔서 자기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사랑, 십계명의 총체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예수님이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본 한 서기관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을
요량으로 던진 물음에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의 물음에 대답하
시면서 만약 그리스도가 어느 한 계명만 언급하셨다면, 서기관인 이 사람
이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계명들을 홀대한다고 예수님
을 책잡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율법의 두 돌 판을 요약
해 주십니다. 아니, 이는 거룩한 삶의 요체요, 전체 성경의 요약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이 있습니다.
1. 율법의 첫 번째 돌 판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요약됩
니다. 가장 숭고하고 훌륭한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몸과 영이 가진 모든 힘
과 능력을 다해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입니다. 2. 두 번째
돌 판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 사랑과는 다름 )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3. 그리
스도는 이 두 사랑을 비교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이 자기 사랑이나 이웃 사
랑과 같은 것을 지배하는 가장 우선적인 사랑임을 보여 주십니다. 둘째 사
랑 역시 첫 번째 말한 사랑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을 말씀하시면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로 언급된 이 사랑은 첫 번째 사랑과
맥을 같이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두 번째 돌 판에 새겨진
계명을 순종하는 원천입니다. 처음 언급된 하나님 사랑이 첫 번째 돌 판이
요구하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순종의 참된 원천인 것처럼 말입니다. 4.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모든 율법이 이 모든 것의 요약인 이 두
계명에 달렸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리를 발견합니다.
교리. 십계명은 우리의 온 맘과, 온 영과, 온 힘과, 온 지성을 다해 주 우리 하 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보다시피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사랑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주로 사랑의 좌소인 마음에 대한 법입니다. 이
계명의 범주는 사람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고 인간 서로를 하나 되게 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이렇게 하나로
연합하게 하는 것은 거룩함뿐입니다. 본장의 성경 본문과 교리는 다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I. 율법의 첫 번째 돌 판은 하나님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II. 두 번째
다른 계명과 관계가 되는지를 보고, 5. 이런 내용들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
려고 합니다.
1. 하나님 사랑을 이루는 요소
먼저, 하나님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스스로
를 계시하신 하나님이므로, 우리가 온몸과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 사랑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눈으
로 보지 못하면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옥 불은
빛이 없이도 뜨거울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천국의 불에는 열은 물론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길 바란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바로 이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을 말합니다.
[2]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우
리가 사물이나 사람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스
스로를 계시하신 것을 따라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하나
님의 사랑이 비추일 때, 비로소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벗어집니다.
(2)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최고선이요 유업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 73:25 ). 온 맘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어
느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유업으로 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나님 안에
서 자신의 영혼이 만족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행
복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합 니다. 영원한 안식을 얻습니다.
(3)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너희 하
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랑은 하나 되게 합니다. 영혼으로 사랑하는 대 상과 연합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과
말씀 등에 착념해야 합니다. 마귀나 세상이 무슨 이간질을 해도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 무엇과도 이 사랑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 8:7 ).
당신의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
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바로 사랑할 수 있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당신의 하
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아담도 그랬고, 심지어 그리스도도 그러셨는데 신
자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1] 믿음이 모든 참된 순종의 원천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나지 않
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어떻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자체로 최고의 선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
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완전한 분일수록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 있는 우 리에게는 재앙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받고 자신
의 사랑을 얻도록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하나
님을 사랑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요,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힘써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모셔 들입시다. 그리고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힘써 믿읍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사
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
(4)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아 5:10 ) . 하나님은 가장 탁월한 존재입
니다. 비할 데 없는 완전함으로 빛나는 가장 사랑할 만하며 아름다운 분입 니다. 이런 하나님이므로 우리의 가장 큰 사랑과 존귀함 여김을 받기에 합 당합니다. 유한한 우리로서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아무리 높이고 사랑해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에는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합니다. 모든 생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 악인들의 고약한 성품입
니다( 시 10:4 ).
(5)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시 73:25 ). 다른 무슨 바람이 있든지 간에, 우리가 가진 바람의 줄기는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시 27:4 ). 이 땅
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뿐 아니라 이 후에 하나님을 온전히 누릴 바람 말
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누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려”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빌 1:23; 살후 3:5 ).
(6)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아 1:13 ).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을 기뻐
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해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하나님이 우
리와 맺으신 관계, 모든 말씀, 방식, 역사를 즐거워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런 감사와 즐거움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2. 하나님 사랑의 속성
하나님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성격을 보겠습니다.
(1) 진실한 사랑입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닌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고 하나님에게 달려가는 진실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잠 23:26 )
(2) 열렬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입니다. 가장 강력하지는 못해도 진실한 사랑이기만 하면 복음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부분적인 사랑은 물론 완전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사랑만이 하나님께 합당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열렬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순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택을 베
푸시기 때문이 아니라( 시 116:11 ),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탁월함( 아 1:3 ) 과 진실 함과 정의로우심과 긍휼과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4) 모든 것을 초월하는 최상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
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눅 14:26 ). 그러므로 모든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
랑에 삼킴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을 사랑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어야 하고, 하나님
께 합당한 순종을 돌려 드리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5) 지각 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막 12:33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은 마땅히 사랑받으실 만한 선한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가 그 선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눈먼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사랑
의 대상인 하나님께는 숨겨야 할 허물이나 잘못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
려 하나님을 더 알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6)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요일 3:18 ). 그래서 사도는 말 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
의 완성이니라”( 롬 13:10 ). 사랑은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랑은 세상
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롬 14:7, 8 ).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세상
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 해도 내려놓습니다( 행 20:24 ). 하나님의
부르심에 진력하고 이를 위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3. 이런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이유
이런 사랑만이 하나님께 합당한 이유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탁월함과 절대적인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선한 것만 있습니다.
모든 선함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선하심의
각 부분이 하나님 안에 무한하게 자리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만이 하 나님께 합당합니다. 피조물에게는 어떤 사랑스러움도 없는 반면, 하나님께
는 모든 사랑스러움이 있습니다( 마 19:17 ). 하지만 피조물은 한결같이 뭔가 부
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께로만 돌아가야 합니다.
4. 하나님 사랑과 다른 계명과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계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보겠 습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대부분이 요구하는 의무요, 모든 일에 있어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에 비하면 믿음도 방
편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을 다른 모든 의무보다 우선에 두는 것
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입니다( 고전 13장 )
(2)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무입니다( 롬 13:10 ). 하나님 사랑이 그런 것처럼,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완전해야 한다면, 순종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모든 다른 의무들이 자라는
옥토입니다.
(3) 보편적인 의무입니다. 모든 의무를 관통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섬김은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다른 의무들이 고기라고 한다면, 하나님 사랑은 이런 고
기에 풍미를 더하는 소금입니다.
5. 적용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가지고 몇몇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1) 사랑의 법인 하나님 율법은 얼마나 달콤합니까? 얼마나 사리에 맞습 니까?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백성에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법을 제정한 왕
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백성은 기쁨으로 이 계명을 따르고, 이 법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유익한지를 발견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탁월한 일인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체 율법은 사랑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순종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하나님께로 이어 주는 이
중심 고리를 부여잡으십시오. 그 뒤로 모든 고리가 줄줄이 딸려 올 것입 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사랑은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세상에서 참된 거룩함과 순종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하
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무정하고 냉랭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의 손과 발은 얼마나 무딘지요! 과연 사람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랑을 돌
려 드린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그렇게
이 너무 미약하다는 서글픈 증거입니다.
(4)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고안하려는 것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요? 우리의 온 맘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율법이 요구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완전한 사랑을 이룰 사람이 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을 너무 잘 압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그에게
는 크나큰 슬픔입니다. 아무리 많이 하나님을 사랑했다 해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끊임없이 갈망하고 치열하게 힘 씁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자신은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 이상으로 하
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리 만무합니다.
(5) 중심으로 믿는 신앙이 아니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
하지 않으면 율법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에 심겨져 역사하는 하나님
을 사랑하는 원리가 없으면 신앙이 있는 척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순종의
원천으로서의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된 내면의 순종에 토대를 두지 않는 외
적인 순종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참된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매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과
규례와 법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6) 우리의 온 맘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든 다른 것보다, 무엇을 얻고 소유하고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사 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와 교
훈을 진실로 존중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의 가장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선과
이제 이 본문과 교리가 말하는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II. 두 번째 돌 판-이웃 사랑
율법이 기록된 두 번째 돌 판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이웃 사랑의 대상, 2. 이웃 사랑의 정의, 3. 이웃 사랑의 방법, 4. 적용.
1. 이웃 사랑의 대상
먼저,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알든 모 르든, 동지든 적이든,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우
리의 이웃입니다( 눅 10:29, 37 ). 이런 이웃됨은 특별히 두 가지 사실에 토대를
둡니다. 1. 똑같은 가지에서 난 모든 사람은 공통의 본성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행 17:26 ). 2. 모든 사람은 같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
안에서만 충분히 발휘될 공통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라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불멸하는 영혼이 무한한 선
을 누릴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 어떻게 악인들을 미워하는 것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
는지를 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
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시 139:21 ). 이 말씀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본문과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서 앞
에서 말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공통된 근거를 얻습니다. 죄는 이런 공
통된 본성의 타락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므로, 죄인들을 사랑할지라도 그들이 지은 죄는 우리가 미워합니다. 우
리가 좀을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옷을 좀이 망치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이웃도 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하지만
니다.
(2) 여기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봅니다. 아무리 원수라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졌습니다. 우리에게 악을 자행하지만, 그들에게도 우
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즐거워할 능력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
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괴롭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2. 이웃 사랑의 정의
이웃에게 돌려 줘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겠습니다.
(1) 합당한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벧전 2:17 ). 존중할
만한 구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성
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받은 은사가 있습 니다( 약 1:17 ). 세상보다 훨씬 소중하고 가치 있는 영혼을 저마다 가지고 있습
니다. 거름더미에 뒹굴고 있어도 진주는 진주입니다.
(2) 선행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 ). 이 땅에서와 영원히 이들의 영혼이 복을 누
리고 좋은 일들이 있길 바라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해 이런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혹시 불행과 슬픔이 닥쳤을 때 이들과 함께
슬퍼할 수 있고, 번영과 즐거움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우리도 이웃에게 선 을 행해야 합니다( 마 7:12; 갈 4:10 ).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과 이
웃을 위해 살려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세상과
인류의 선을 증진하는 데 유용하게 드려지도록 준비하고 힘써야 합니다. (4) 이웃에게 드러나는 좋은 점이 있다면 그 점을 기뻐하고
3. 이웃 사랑의 방법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할지를 보겠습니다. 본문은 “네 자신같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합당한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어야 할
사랑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원리를 이웃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합당한 방편을 통해 자기 몸을 돌보고 사랑하여 몸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언제
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엡 5:29 ). 또한 우리는 자기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영혼을 파괴할 어떤
것도 조심하고 피해야 합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잠 8:36 ).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사랑해
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는 하나님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기 때문입
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에 두고 그 사랑에 순복하지 않는 자기
사랑, 이웃 사랑을 저해하는 자기 사랑은 모두 죄악 된 자기 사랑입니다.
(2)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의 내용과 방식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웃이 잘못되길 바라서도 안
되고 이웃에게 해를 가해서도 안 됩니다.
[2] 우리 자신에 대해 바라듯, 이웃이 잘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우리
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꺼이 해야 합니다.
[3] 이웃에 대한 진실한 존중과 존경으로 그렇게 하되, 우리의 유익을 위
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랑의 방식에 대해서도 다음 세 가지를 말해 볼 수 있습니다.
[1]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그리고 실제로 이웃을 사랑
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지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
로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그래야 합니다. 탐욕스럽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자기만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2] 한결 같은 열렬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에게 좋게 다가오고
우리를 좋아해 주는 이웃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듯
한결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고 사랑하고 있느냐
에 따라 우리의 사랑이 영향을 받거나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이웃이 우리
의 그런 사랑을 몰라주고 고마워할지 모른다 해도, 우리의 사랑은 그들 앞
에서 여전히 빛을 발해야 합니다.
4. 적용
이제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이 부분과 관련해 몇몇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1) 자기 사랑의 원리가 바르게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가 틀어지
면 이 원리를 따라 조정되어야 할 모든 것이 다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잘못되면 바른 이웃 사랑 역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과 서로를 공통된 파멸로 이끄는 죄 가운데 있는 동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이웃을 대하는 것에 대한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의 내용은 우리 자
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명
령은 이웃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계명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의무들은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사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딛 2:12 ).
(3) 우리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이웃 사랑에 대한 십계명의 두 번째 돌
판의 계명을 다 거스르는 죄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두 번째 돌 판의
가장 중심되고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의무라고 한다면, 이웃을 미워하는 것
은 이 계명들을 거스르는 가장 대표적이고 포괄적인 죄입니다.
(4) 이렇게 볼 때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1]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몸을 망가뜨리고, 영혼을 파괴하는
죄악 된 길을 고수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함 부로 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
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함부로 취급한
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내달리는 사람입니다. 온통 관심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소유에만 쏠려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를 해롭게 하고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가장 비천하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3] 사랑하는 이웃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
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개는 나를 원수처럼 대한다’라고 말하는 사람
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런 그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
니다. 그가 당신을 미워하고 원수처럼 대한다 해서 그런 그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를 정당한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그를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라는 것이 곧 그의 잘못까지 사랑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을 향해 적개심을 가진 그이기에 그와
의 그런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면 배나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원 되
신 그리스도에게 달려가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
이지, 그 사람이 가진 질병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미워하
고 우리의 원수 된 사람을 사랑하고 그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야말로 그를 다시 얻는 가장 아름답고 빠른 길입니다. 무엇이든 이 일을 이
룰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편일 것입니다.
[4]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요압과
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면전에서는 사람을 칭찬하고 돌아서서 비수를 꽂는
사람입니다. 가증한 위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 미워하시는 일입
니다. 모든 정직한 사람에게 역겨움으로 다가가는 일입니다.
[5]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이웃은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웃을 사랑하
는 것처럼 하지만, 정작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외면하는 사람입
니다. 또 상황이 자신의 도움을 요구하고 있고, 또 도울 능력도 있지만, 돕 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은 가식이요 허상입니다.
[6]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이웃이자, 교회와 국가의 핵심이자 능력일 뿐 아니라,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인” 하나님
나면 홀연히 영광의 나라로 들려 올라갈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
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들을 사
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율법과도 부합하지 않는 크나큰 죄입
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신하요 종들인 이들의 경건한 삶을 질시하고 그들
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자, 하늘의 지존자에 대한 모독입 니다.
(5)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적개심과 미움과 악의
를 이길 수 있도록 연구와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동기로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슬픈 표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
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 ).
[2] 같은 종류의 피조물을 하나로 묶고 연대하게 하는 본성적인 고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자와 늑대는 아무리 포학해도 자신들과 같은 늑대와 사자를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사람은 마땅히 서로에게 그렇
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사람은 모두가 한 아버지를 둔 형
제이므로 서로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십시오. 하나
님의 이런 사랑은 인간들이 사정사정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게
사랑받을 공로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들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창조주와 주를 반역하고 대적하는 원수들은 오히려 사랑
합니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황폐하게 된 인간은 스스로는 아
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황량하고 절망스런, 사랑할 만한 구석
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자기 아
들을 보내 그들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 율법의 저주와 임박한 진노에서 속
량하셨습니다. 타락해 아무 소망도 아름다운
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4]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
면 삶이 얼마나 행복해지겠습니까? 열 사람이 있는데, 열 사람 모두가 자신
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저마다 열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이 됩
니다. 열 개의 가슴이 자신을 향한 사랑을 품고 있고, 스무 개의 눈이 자신
을 돌보고, 스무 개의 손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스무 개의 발이 자신을 위
해 길을 나서길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열 사람 모두가 얼마나 행복
하겠습니까?
하나님 백성은 특별히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인애와 자비로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이끌어 낸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자
신의 보혈로 구속한 자들입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거룩하게 하고 위로하십
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거하시고 영원토록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의 가족이고, 하늘의 시민이고, 믿음의 집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
로 모신 한 몸의 지체입니다.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소망을 가진 자들
입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죄와 멸망의 도성에서 나와, 하늘의 본향을 향해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대제사장이요 자신의 보증이신 그리스
도의 완전한 의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신부입니다.
모두가 형제요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다 함께 본향에 이르러야 할 것
이 아닙니까?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도가 말하
는 것처럼, 서로를 형제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길 먼저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롬 12:10 ) ? 형제 사랑하길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 13:1 ) ? 이런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친구요 그리스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