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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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이 책은 근대주의, 세계대전, 공립 교육, 복음주의, 현대의 사회문제 등을 통해 세계사를 탐구합니다. 뒷표지 글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누구나 쉽게 세계사를 배울 수 있는 책으로 역사, 지리, 종교, 경제, 정부 조직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교 과과정은 성경적 세계관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역사를 서술합니다.

기독교 정치학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박문재 옮김 584쪽 32,000원

이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장: 이 책은 3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34주 과정으로 공부할 수 있음). 2. 과: 각 장은 다섯 개의 과로 되어 있으며, 각 과를 공부하는 데는 대략 20~30분이 소요됩니다. 읽을 내용이 먼저 짧게 나

세계사

오고, 그다음에 토론 문제가 나옵니다. 어떤 문제는 본문에서 정확한 답을 찾아야 하지만, 다른 문제들은 정해진 답이

언약과 자연법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김남국 옮김 760쪽 40,000원

The Modern Age to Present 1900 AD to Present

없는 문제로서 학생들로 하여금 본문을 떠나 스스로 사고하도록 유도합니다. 3. 주 1회 시험: 교사 안내서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두 개의 시험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4. 학생이 할 일: 이 과정을 수료하는 데 필요한 책임감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학생들은 매일 주어진 본문을 읽고, 읽은 내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제출해 평가받습니다. 이 교과과정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지은이

제임스 스토보(James Stobaugh) 제임스 스토보 박사는 밴더빌트 대학교, 럿거스 대학

제임스 스토보 지음 김희정 옮김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자연법과 두 나라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있습니다.

접 네 자녀를 홈스쿨링으로 가르쳤다.

기독교 관점으로 본

1. 먼저 생각해 보기: 해당 역사 기간에 대한 배경 설명.

4. 역사를 만든 사람들: 역사의 진로를 확실히 바꾼 인물들. 5. 역사적 논쟁: 한 시대나 주제를 둘러싼 역사적 이론들에 대한 검토.

제임스 스토보 지음

2. 토론 문제: 일반적으로 블룸의 분류법(Bloom’s Taxonomy)에 기초한 문제들.

김희정 옮김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박문재 옮김 298쪽 15,000원

히 많이 저술했다. 아내 캐런과 함께 1985년부터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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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요 단어: 익혀야 할 용어, 개념, 이론들을 굵은 글씨로 강조. 대부분이 각 장의 첫 페이지에 나열되어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다. 노련한 학자일 뿐 아니라 홈스쿨링 분야에서 널 리 인정받은 전문가로서 홈스쿨링 학습 도서를 무수

5. 점수: 학생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매주 과제물을 제출합니다.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김남국 옮김 696쪽 35,000원

교, 프린스턴 신학교,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공부하였

세계사

옮긴이

근대에서 현대까지

김희정

(AD 1900 ~ 현재)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SFU)에서 언어학을 전공했고 캐나다 리전트 대학에서 수학했다.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는 밴쿠버 지구촌교회에서 청소년부를 섬기고 있다. 역서로는 『로이드 존스를 말하다』,『태초 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 『미친 듯이 바쁜』, 『만화로 보는 진화론 비판』, 『성경신학이란 무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윤석인 옮김 288쪽 13,000원

엇인가』(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이해를 이야기하는 믿음 케빈 밴후저 지음 윤석인 옮김 460쪽 27,000원 ISBN 978-89-6092978-89-6092-715-5 ISBN 978-89-6092-712-4 978-89-6092- (세트) (세트)

00,000원 www.rnrbook.com 값 30,000원


세계사 3: 근대에서 현대까지 서문 ‥‥‥‥‥‥‥‥‥‥‥‥‥‥‥‥‥‥‥‥‥‥‥‥‥‥‥‥‥‥‥‥‥ 9 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 ‥‥‥‥‥‥‥‥‥‥‥‥‥ 13 근대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의 재능과 기술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엄청 난 재앙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 25 미국 사회 안에서 고상한 진보주의는 과도한 것을 완만하게 하거나 불공정한 일을 개 선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근본적으로 진보주의는 실패할 운명을 갖고 있었다. 진보주의는 자유적 이데올로기와 우월 의식을 포용함으로써 결국엔 배척당한 정치 운동이었다. 5세의 토미 호킨스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 스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1910년(NARA)

3장. 1900~1914년: 위기 직전‥ ‥‥‥‥‥‥‥‥‥‥‥‥‥‥‥‥‥ 39 전례 없던 영광스런 번영은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의 주요 특징이었다. 이런 번영 가운데 쉬고 있던 세상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끔찍한 재난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재난은 바로 20세기에 일어날 여러 전쟁 중 첫 번째 전쟁이었다.

4장. 전쟁 중인 세계: 1차 세계대전에 대한 회고 ‥ ‥‥‥‥‥‥‥‥‥ 49 이 장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주체가 국가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 할 수 있다. 모든 영광과 슬픔이 희미해지면 인간의 이야기와 약점과 비극이 남는다. 이 점이 바로 이번 장의 본질이며 또한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본질이다.

5장. 근대 미국: 문화 혁명‥ ‥‥‥‥‥‥‥‥‥‥‥‥‥‥‥‥‥‥‥ 71 어쩌면 당시 다가오던 근대 미국을 가장 적절히 비유한 말은 회전목마일지도 모르 겠다. 오르락내리락, 돌고 도는 회전목마에 탄 사람들은 매우 다양하고 놀라운 경험을 하는 복을 누린다. 하지만 문제는 운 좋던 이 사람들이 여기서 내리면 다시 시작점에 서 야 한다는 것이었다.

6장. 러시아 혁명: 윤리 없는 싸움‥‥‥‥‥‥‥‥‥‥‥‥‥‥‥‥‥ 83 프랑스 혁명은 아주 칭찬받을 만한 목적을 갖고 시작되었지만 불과 한 세대 만에 엄 청난 재난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부터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이 었고, 국민은 이에 희생되었다.

7장. 금주법: 도덕의 법률화‥ ‥‥‥‥‥‥‥‥‥‥‥‥‥‥‥‥‥ 101 술 금지는 고상하고 매우 효과적인 실험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회 비평가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금주법은 그 지향하던 바를 모두 달성했지만 미국 정치인들은 다 시는 도덕을 법률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8장. 미국의 교육: 연기된 꿈‥ ‥‥‥‥‥‥‥‥‥‥‥‥‥‥‥‥‥ 113 금주법 기간에 사람들이 술을 버리고 있다 (PD).

공립 교육은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모순적이게도 공립 교육은 절대 공립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하나님이 자녀 위에 권위자로 두신


부모가 할 때, 최상의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가장 개인적인 인간의 노력이다.

9장. 복음주의: 구원과 성경의 권위 ‥ ‥‥‥‥‥‥‥‥‥‥‥‥‥‥ 125 미국은 그 시작부터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국가였다. 미국 사람들은 기독교 핵심 지도자 들을 양성하려고 대학을 설립했다. 이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지도하고 미국 문화를 형성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이 일이 후 퇴하고 있다.

10장. 스콥스 재판: 자신의 어리석음에 갇힌 멍청이 ‥ ‥‥‥‥‥‥‥ 139 스콥스 재판은 근대 시대의 비극이 다시 한번 재현된 사건이다. 이와 같은 근대 시대의 비극은 이때부터 계속 미국 역사에 나타나게 된다. 1925년 7월 말의 뜨거운 오후, 스콥스 재판이 끝나면서 미국은 일종의 암흑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장. 1871~1945년의 독일: 실패한 민주주의 ‥ ‥‥‥‥‥‥‥‥‥‥ 153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부당한 보상금이라는 족쇄에 묶여 대공황의 재난 속에 있던 바이 마르 공화국은 전례 없던 쾌락주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알기로 20세기 가장 극 악무도한 일의 도약대의 상징이 되었다.

12장. 뉴딜 정책: 자유 국가의 실패 ‥‥‥‥‥‥‥‥‥‥‥‥‥‥‥‥ 165 뉴딜 정책은 한 민족과 국가가 전례 없던 경제적 공황 속에 허우적거리며 행한 실패의 울음 소리였다. 불행하게도 이런 간절한 인간의 노력은 예기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고, 이 는 곧 비극으로 바뀌었다.

13장. 노예제도 속에 태어나다: 1936~1938년 노예들의 이야기 ‥ ‥‥ 181 WPA 노예들의 이야기 프로젝트는 아마 뉴딜 정책이 낳은 결과 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결과일 것이다. 많은 통찰력과 유쾌함이 들어 있는 이 이야기들은 모든 시대의 미국인들 에게 가장 통탄할 만한 미국 역사에 대해 매우 소중한 구전 역사를 들려준다.

14장. 2차 세계대전: 1차 사료 ‥‥‥‥‥‥‥‥‥‥‥‥‥‥‥‥‥‥ 195 여기 나온 미국인의 두려움과 욕망과 꿈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실제 이야기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이들의 속삭임과 외침, 분노, 좌절, 소박한 소망을 듣는다. 이것이 바 로 실제 역사다!

15장. 집단 학살: 의도적 파괴 ‥‥‥‥‥‥‥‥‥‥‥‥‥‥‥‥‥‥ 205 홀로코스트는 근대주의에 대한 충격적 기념비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는 자신의 지식을 믿음과 분리하려는 미래 세대에 경고를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20세기 최고의 기술과 실력을 가지고 20세기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16장. 냉전: 지정학적 갈등 ‥ ‥‥‥‥‥‥‥‥‥‥‥‥‥‥‥‥‥‥ 217 냉전은 끊임없는 갈등과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우주에서, 옛 식민지에서, 유 럽의 평원에서 이 싸움을 했다. 미국은 이 전쟁의 자연스러운 승자였다. 소련은 실제 전쟁 이 아닌 이 전쟁을 계속 치를 능력이 없었다.

거의 아사 직전의 굶주린 포로들이 오스트 리아 에벤제에 있는 수용소에서 포즈를 취 하고 있다. 이 수용소는 ‘과학’ 실험을 했다 는 끔찍한 평판을 갖고 있다. 1945년 5월 7 일, 미국군 제80사단이 이들을 해방시켜 주 었다(NARA).


17장. 극장: 사회 안의 문화적 힘 ‥‥‥‥‥‥‥‥‥‥‥‥‥‥‥‥ 227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사람들의 인식에서 우주적 중심이 되었다. 영화의 문 제는 영화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우리의 남녀 영웅들을 정의하고, 우리의 패션과 도덕성을 정의한다.

18장. 로큰롤: 변하는 시대 ‥‥‥‥‥‥‥‥‥‥‥‥‥‥‥‥‥‥‥ 239 재즈의 중심에서 세계사 중 가장 커다란 문화 운동의 아이콘이 태어났다. 바로 로큰 롤이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음악이었지만 신학이기도 했다. 이것은 여전히 이 나라 전국 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전쟁의 성가(聖歌)다.

19장. 20세기: 급진적 혁명 ‥‥‥‥‥‥‥‥‥‥‥‥‥‥‥‥‥‥‥ 249 한 세기 동안 한두 번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에는 대여섯 번이 일어 “햄”이라는 이름의 침팬지가 1961년 1월 31 일에 시행된 시험 비행에 앞서 머큐리-레드 스톤 2호의 5번 캡슐 특수 의자에 우주복을 입고 앉아 있다(NASA).

났다. 기술 혁명, 컴퓨터 혁명, 의약 혁명 등, 이것들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20장. 1960년대: 분노의 죽음 ‥ ‥‥‥‥‥‥‥‥‥‥‥‥‥‥‥‥ 259 이들 세대 이후부터는 더 이상 경멸과 분노가 젊은이들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젊은이 들은 이제 변화하려 했다. 이런 변화는 교육, 가치, 삶의 방식, 법, 오락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의 십대들은 21세기로 항해해 오는 고대의 선원들이다.

21장. 미국 정부: 힘의 균형 ‥ ‥‥‥‥‥‥‥‥‥‥‥‥‥‥‥‥‥ 275 미국 정부는 좋은 정부다. 완벽하진 않지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정부다. 강 력한 개인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의심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민중 운동이 가져올 수 있 는 위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미국 정부는 미국 국민을 통해 최상의 정부를 만들고 있다.

22장. 우주 프로그램: 인류의 거대한 도약 ‥‥‥‥‥‥‥‥‥‥‥‥ 285 달을 향한 경주, 우주를 향한 경주는 그저 꿈에 불과했다. 벅 로저스나 기타 만화책의 영웅들이 접하던 일, 상상에 불과했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우주탐험의 역사 는 대단했다!

23장. 엄청난 변화: 현대 가정 ‥ ‥‥‥‥‥‥‥‥‥‥‥‥‥‥‥‥ 295 사회는 매우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으므로, 한 지역의 변화는 다른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점점 변화시키곤 했다. 그 결과 전통에 서 ‘현대’로의 변화가 생겼고, 사람들은 성스러운 것은 거의 전부 거부하게 되었다.

24장. 도시 교회: 하나님의 도시 ‥ ‥‥‥‥‥‥‥‥‥‥‥‥‥‥‥ 309 1890년대, 사람들이 살던 정착지의 외부 경계선은 10km 정도였다. 주변 지역을 합쳐 나가고 만을 채워 가면서 공간에 대한 활용도는 점점 더 다양해졌고, 도시는 점점 더 커 졌다. 도시 교회는 크고 작은 모습으로 성장했다.


25장.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 불행하지만 그것을 즐김 ‥‥‥‥‥‥ 329 ‘탈근대주의’라는 용어는 계몽주의와 관련된 객관성과 진보의 과학적 정신인 ‘근대주의’ 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말이다. 탈근대주의는 기독교 공동체에 도전과 기회, 두 가지 모두 를 제공한다.

26장. 정치와 그 외: 미국의 상황 ‥ ‥‥‥‥‥‥‥‥‥‥‥‥‥‥‥ 339 때로 가장 중요한 문화적 변화는 각 개인의 수많은 일상생활의 결과로 시작되기도 한다. 즉 현대적 가정의 등장, 사생활과 같은 현대적 개념의 발생, 개인주의의 성장 등으 로 인해 문화가 변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27장. 20세기의 성자들: 문화의 전사들 ‥‥‥‥‥‥‥‥‥‥‥‥‥‥ 349 복음주의자들이 언제나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 이들은 마지못해 복잡성이나 의심과 싸운 적도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의 세상은 여러 절대적인 것 중 하나일 뿐이다. 성 자 네 명의 짧은 전기를 통해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 볼 것이다.

28장. 대학: 벨사살의 연회 ‥ ‥‥‥‥‥‥‥‥‥‥‥‥‥‥‥‥‥‥ 369 하나님은 복음주의 공동체에 호의를 베푸신다. 역사상 지금처럼 우리가 수준 높은 학교 에 다닐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대학은 다윈 주의나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과 같은 싸움에서 무감각하다.

29장. 역사 뒤에 가려진 것: 이면 기사 ‥ ‥‥‥‥‥‥‥‥‥‥‥‥‥ 381 미국의 열광적 기름 소비를 살펴본 후, 미래 연료 소비의 가능성을 알아볼 것이다. 또한

1984년 뉴욕시의 소니 카나리 빌딩(예전 의 AT&T 빌딩). 필립 존슨이 설계한 이 건 물은 당시 건축에서 흔했던 네모 상자 형태 의 기능적 사무실 빌딩에서 변형되어 고전 적 형태의 삼각형 지붕이 깨진 모양을 하고 있는데, ‘탈근대주의’를 잘 보여 준다(CCASA3.0).

미국을 병들게 하는 반복적이면서도 곳곳에 만연한 폭력도 살펴볼 것이다.

30장. 유럽 연합: 바다 건너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 ‥‥‥‥‥‥‥‥ 393 50년 전, 유럽 연합이란 것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은 현실이다. 유럽 연합은 지속될 수 있을까? 유럽 연합은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31장. 변화하는 혁명: 중국의 세기 ‥‥‥‥‥‥‥‥‥‥‥‥‥‥‥‥ 403 역기능적 은행에서부터 종교적 불안까지, 어떤 이들은 중국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문제 로 인해 중국이 거의 재난 직전까지 왔다는 견해에 회의적이다. 또 어떤 이들은 중국의 상 황에 약간 의구심을 갖는다. 사람들은 중국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정말로 해낼지 궁금해 한다. 우리는 앞으로 그 결과를 지켜볼 것이다.

32장. 테러리즘: 전술과 전략 ‥ ‥‥‥‥‥‥‥‥‥‥‥‥‥‥‥‥‥ 415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다. 그는 테러리 스트라고 지정된 조직 및 그 조직과 연관된 정권에 대항하는 세계적 규모의 군사적, 정치 적, 이념적 투쟁을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33장. 세상의 종말: 모든 것의 끝 ‥ ‥‥‥‥‥‥‥‥‥‥‥‥‥‥‥ 427 1950년과 60년대에는 향후 20년 안에 핵전쟁으로 세상이 끝날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 이 많았다. 이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맨 왼쪽)과 영부인 낸 시 레이건 여사가 1983년 4월 18일 베이루 트 소재 미 대사관 공격으로 숨진 희생자 열 일곱 명의 관을 보며 예를 갖추고 있다(PD).


34장. 미래학: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 ‥‥‥‥‥ 439 미래학은 최근에 와서야 신뢰받기 시작한 예견의 과학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먼 미래는 어떨까? 2030년 미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 미래의 일들을 상상했던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그중 어떤 꿈들이 현실이 될지 예상 해 보자.

참고 도서 ‥‥‥‥‥‥‥‥‥‥‥‥‥‥‥‥‥‥‥‥‥‥‥‥‥‥‥‥‥ 주요 단어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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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3: 근대에서 현대까지

서문 나는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매우 오래되고 커다란 단풍나무에 매달린 폐타이어 그네에 가 보았다. 그것은 여느 폐타이어 그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러분 마당에도 이와 비슷한 그네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그 그네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 들은 없지만, 이 버려진 그네는 한때는 펄쩍 뛰는 야생마이기도 했고, 빙글빙글 도는 UFO이 기도 했고, 멋진 팀북투 왕국의 왕자님이기도 했다. 이 그네는 나의 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라 면 무엇이든지 다 되었다. 내 자녀들은 이 폐타이어에서 전 우주를 만났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는 점을, 그렇지만 또다시 평범한 땅 위로 안전하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 그 폐타이어에서 이 아이들은 역사 속을 이동했다. 이 아이들은 구구 소리 내며 지나가는 비둘기를 향해 우아하게 발가락을 움직였고, 온 몸으로 느끼던 초원에다 아주 작은 밭고랑을 일구기도 했다. 천둥소리가 나면 웃었고 갑자기 나타난 메 뚜기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단풍나무 낙엽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기도 하며 무지개를 보고 는 웃었다. 처음에 이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 일에서 나를 의지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 어 다리가 점점 길어지고 튼튼해지면서 이들은 스스로 타이어나 자신만의 비밀의 장소로 들어 갔다. 이들은 자신의 역사를 조종했고, 어떤 점에서는 내 역사를 조종했다. 우리가 역사를 공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다. 그 타이어 그네에서 자극받던 내 인생과 꿈은 그 아이들을 포함 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 그네 위에서 이 아이들은 홀로 지평선까지 갔다. 이들은 자신을 시 간과 구별했고, 확실성으로부터 멀리했으며, 무모한 인습 타파에 대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 았다. 이 아이들은 빙글빙글 돌려고 했지만 그렇게 못했다. 내가 가서 돌려줘야 했다. 이것은 나에 게 조용한 기쁨을 주었다. 이 아이들의 유년기의 무엇인가가 그 폐타이어 그네 안에 갇혀 있었 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그 안에 있다. 그 아이들의 유년기의 무엇은 내가 그 타이어 그네로 다가갈 때 부활하고, 아주 잠깐 동안 우리의 평온한 영혼은 다시 한번 입맞춤한다. 이 그네 아래 에 있는 풀은 걷잡을 수 없이 자란다. 나의 초원에 튀어나와 고랑을 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때 꼬마 우주 전사들이 우주를 공격하던 곳에 애벌레들이 꾸물꾸물 나오기도 한다. 그 닳아빠 진 타이어 속에서 말이다. 나에게 이제 그 초원은 필요 없지만 아직도 그 발가락들은 필요하다. 여러분이 내 농장 옆을 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이 타이어 그네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잠깐 멈춰 소리를 들어 보길 바란다. 이 아이들, 그리고 이 아이들을 빙글빙글 돌려주어 어른이 되게 한 그들의 아버지를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여러분은 아는가?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역사는 사람들과 시간과 차이(분리 되어 떨어짐)에

대한 것이다. 역사는 치료제가 아니다. 즉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는 말이다. 역사는 과거를 한번 돌아보는 것이다. 또한 미래로 향하는 지도다. 하지만 지금은 위 기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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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21세기 초, 미국은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험의 날개를 뻗어 보지만 하나님 에게서는 더 멀리 떨어지고 있다. 미국은 곤경 가운데 있다. 1988년 10월 28일,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열린 장로교 센터 헌납 심포지엄에서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회개를 촉구하면서 전 미국인뿐 아니라 미국의 장로교 교회들을 놀라게 했다. “우 리 종교주의자(복음주의자)들은

(세속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합법화하는 이상한 사회 안에 갇혀

있습니다. 머리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재를, 즉 명백히 세속화되어 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는 잘 돌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사회 안의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브루그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현재 포로기에 있으며, 따라서 이에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는 탈기독교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드보라는 탈유대인 시대에 살았다. 그가 살던 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예 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하나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바로잡으라고 드보라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듯 말이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네 번째 여선지자였다. 그는 전사와 같은 어머니였고, 문화를 만들어 내 는 사람이었다. 성경에서 유일한 여선지자 드보라는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 맞서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 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 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사사기 5:6~7).

나는 여러분이 이 세대의 드보라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여러분이 이 땅의 고급문화를 이끌면 좋겠고, 여러분이 아주 영리하게 이 일 을 해냈으면 좋겠다. 아주, 아주 영리하게 말이다! 나는 드보라가 단지 위대한 전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라 믿는다. 물 론 드보라는 위대한 전사였지만 그 이상이었다. 드보라는 군사 전쟁 에서 이겼지만 또한 문화 전쟁에서도 이겼다.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 지어다.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 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 드보라의 노래, 사사기 5장, 목판화, 1866년경(PD).

로우신 일을 노래하라(사사기 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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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문화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곳은 바로 이 “물 긷는 곳”이었다. “물 긷는 곳”은 몸과 마음과 영 혼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와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물을 긷기도 하며, 영적 깨달음을 얻어 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 “물 긷는 곳”은 드보라 시 대의 대학과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었고 정책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삶을 인식하는 중심지였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곳으로 가길 바란다. 어쩌면 그곳은 대학일 수도 있다. 대학에 가서 고급문화를 만들라! “고급문화”(high culture)라는 말을 영어로 처음 소개한 사람은 매슈 아널드인데, 그는 1869년 출 판된 자신의 책 『문화와 무정부』에서 이 말을 사용했다. 아널드는 고급문화를 “인간의 완벽함을 따르는 무관심한 노력”이라 정의하고, 문화를 갖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 중 최상의 것을 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널드는 고급문화가 도덕적, 정치적 선을 위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 아널드는 문화가 한 문명에 속한 사람들이 즐기 는 삶을 촉진하고 만들어 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보는 예술, 즐기는 영화, 읽는 책이 모두 이에 속한다. 지금 나는 일시적 유행이나 불필요한 외면적 세부사항들을 말하고 있 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지배하고, 예배하는 것을 좌우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이다. 고급문화라는 말은 대중문화나 전통문화라는 말과도 대조된다. 나는 여러분이 새로운 고 급문화를 창조해 내길 바란다. 유익하고 거룩한 고급문화를 말이다.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될 수 있는 최상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뜻에 따라 교육, 정부, 엔터테인먼트, 건강, 법, 종교 분야의 고급문화를 창조해 내길 바 란다. 그런 영역에 가라. 그리고 그 영역에서 최고의 사람이 되라. 이 일을 생각하면 나는 매우 흥분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시간 속에 우리를 포함시켜 주셨 고, 우리의 젊음을 사용해 주셨으며, 잠자고 있던 우리를 깨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915년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루퍼트 브룩

학생용 교과서 이렇게 활용하세요.

이 교과과정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장: 이 책은 3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34주 과정으로 공부할 수 있음 ). 2. ‌ 과: 각 장은 다섯 개의 과로 되어 있으며, 각 과를 공부하는 데는 대략 20~30분이 소요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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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니다. 읽을 내용이 먼저 짧게 나오고, 그다음에 토론 문제가 나옵니다. 어떤 문제는 본문에 서 정확한 답을 찾아야 하지만, 다른 문제들은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로서 학생들로 하여 금 본문을 떠나 스스로 사고하게 유도합니다. 3. ‌ 주 1회 시험: 교사 안내서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두 개의 시험이 마련되 어 있습니다. 4. ‌ 학생이 할 일: 이 과정을 수료하는 데 필요한 책임감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학생들은 매 일 주어진 본문을 읽고, 읽은 내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제출해 평가받습니다. 이 교과과정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 고안되었습니다. 5. 점수: 학생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매주 과제물을 제출합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있습니다. 1. 먼저 생각해 보기: 해당 역사 기간에 대한 배경 설명. 2. 토론 문제: 일반적으로 블룸의 분류법(Bloom’s Taxonomy)에 기초한 문제들. 3. ‌ 주요 단어: 익혀야 할 용어, 개념, 이론들을 굵은 글씨로 강조. 대부분이 각 장의 첫 페이지 에 나열되어 있다. 4. 역사를 만든 사람들: 역사의 진로를 확실히 바꾼 인물들. 5. 역사적 논쟁: 한 시대나 주제를 둘러싼 역사적 이론들에 대한 검토.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공책: 작문 과제를 위해 필요합니다. 2. 펜이나 연필: 문제에 답하고 에세이를 쓰기 위해 필요합니다. 3. ‌ 교사 안내서에는 매일 공부할 단원과 매주 실시될 시험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으며 매일 내는 숙제를 기입할 수 있습니다.


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근대주의는 모더니즘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후기 근대주의라고 불리는 탈근 대주의와의 대비를 위해 근대주의로 표기했다-옮긴이)

타이태닉호가 침몰하던 당시 구명선 15호가 구명선 13호 거의 바로 위로 내려오고 있는 모습, 찰스 딕슨이 「더 그래픽」에서 묘사한 그림(PD).

먼저 생각해 보기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 “1910년 12월 또는 대략 그 즈음에 인간의 특성은 변했다”1)고 한 말은 정말 사실이다. 그때 근대주의가 인류 역사에 주요 사 회적 세계관으로 등장한 것이다. 근대주의는 하나님과 인간, 세상,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생각에 급진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상으로, 이전의 인본주의나 17세 기 철학( 예를 들어 임마누엘 칸트 ) 이 그 전조 증상이었다. 프랑스 혁명에도 이런 사상이 깊이 녹아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루소가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지만, 20세기 가 되어서야 이 단어는 완전히 꽃을 피우게 되었다.

1장의 학습 목표 1장에서는 근대주의라고 하는 사상의 사회적, 종교적, 지성적 특징을 알아보자. 또한 이 사상을 정의하고, 그 기원을 논의할 것이다. 다음으로 예술과 문학에 나 타난 근대주의의 예를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근대주의의 한계에 대한 매우 슬픈 예, 타이태닉호의 침몰을 자세히 살펴보자. 1장을 공부한 후 다음을 수행해 보라. 1. 근대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라. 주요 단어 이신론 실용주의

2.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왜 근대주의를 대표하는 것이었는지 설명해 보라. 3. 문학 속에 나타난 근대주의를 분석해 보라. 4. 예술 속에 나타난 근대주의를 분석해 보라. 5. 타이태닉호의 침몰이 왜 근대주의의 한계를 보여 주는 예가 되는지 설명해 보라.

인식론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1) Dr. Bryony Randall, University of Glasgow, “‘On or about December 1910 human

character changed’ Centenary reflections and contemporary debates: modernism and beyond,” December 10~12, 2010, University of Glasgow, UK, http://call-for-papers.sas. upenn.edu/node/3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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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1과 근대주의 이신론이 제시하는 세계관이 하나님이 점심 먹으러 잠깐 외출하셨다는 관점이라면, 자연주의

인식론이란 지식의 본 질에 대한 연구다.

의 사촌인 근대주의는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넓은 의미에서 근대주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서양 사회에 광범위하고 크게 영향 력을 미치며 일어났던 문화적 경향을 의미한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는 불과 한 세대 만에 농경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급속히 변화했다. 근대주의는 과학과 기술을 맹신했다. 또한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았다. 근대주의 는 한계주의나 실용주의와 같은 보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근대주의의 대표적 특징은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근대주의는 지속되는 계몽주의 인식 론의 확실성을 거부했으며, 인류에게 연민을 갖고 계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역시 거부했다. 근대주의자들은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진보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 은 비현실적 사고의 첫 번째 피해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도덕성이었다. 근대주의는 관습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문학, 예술, 건 축, 종교적 신념, 사회적 조직, 일상생활마저 이 놀랍도록 거만한 운동의 목표가 되었다. 아 마 근대주의만큼 그 도덕적 모호함에 대해 확신과 자신감을 가졌던 사회 운동은 없었을 것 이다.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1934년 “새롭게 만들라!”2)라는 명령은 옛것이나 구식에 대해 근 대주의가 접근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파운드는 근대주의에 심겨 있는 역설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파운드는 인간의 자유와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받아들였지만, 또 한편으론 당시 발생하던 전체주의와 반유대주의도 받아들였다. 다른 여 러 근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파운드도 자신의 세계관과 윤리관을 분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착각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던 나치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고안하여 시행했다. 근대 시대의 매우 흥미로운 화가이자 조각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조각, <실베트>(PD).

20세기 초에 근대주의 운동에서 처음으로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 는 ‘근대주의’라는 말이 만연하게 되자 이를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예술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아방가르드 형식의 근대주의’였다.

2) www.stanford.edu/dept/DLCL/cgi.../make_it_new_stanford.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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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토론 문제 예술 사학자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근대주의의 본질은 규율 자체 를 비판하려고 규율의 특징적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 규율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권한의 영역 안에서 그것을 더 확고히 자리 잡게 하려고 말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논리의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 논리를 사용했고, 비록 기존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기는 했지만 다른 방법으로 논리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했다.”3) 전통적인 것이라면 무엇 이든 공격하려 했던 근대주의는 독재적인 자유주의를 만들어 냈다. 이를 설명해 보라.

2과

2과

대서양 횡단 케이블 근대주의자들에게 과학과 기술은 인류의 궁극적인 연합 과 최종적 구원을 보장해 주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의 기술적 능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으로 대서양 횡단 케 이블이 있었다. 1844년에 워싱턴과 볼티모어를 잇는 최초의 전신선이 완공된 지 22년 후, 미국과 유럽을 잇는 최초의 대 서양 횡단 케이블이 생겼다. 이는 겨우 몇 주밖에 가지 못하 고 망가졌지만 곧 새것으로 복원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시인 로시터 존슨은 이 중대한 사건 을 축하하려고 다음의 시를 썼다.

제임스 앤더슨 선장이 맡았던 “그레이트 이스턴”이라는 이름의 배가 새 대서양 횡단 케이블을 설치했다. 이 거대한 배의 선체 안에는 해리 약 3,700km의 케이 블 선을 수용할 수 있는 철 탱크 세 개가 있었다(PD).

승리 인간, 창조자의 형상으로 된 인간이 세상에 왔을 때 새로 생긴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숲을 정복하고, 야수를 길들이기 위해 보물을 찾아 모으고 그 가치를 알기 위해 왔을 때 인간에게는 능력과 공간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지. 바다와 산, 시간과 공간을 구하라. 그리고 이 넷은 인간의 연약한 몸집을 비웃었네. 또 인간의 주권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지. 가축을 치며 수없는 시대가 지나갔고

3)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http://www.sharecom.ca/greenberg/modernis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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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은 더 많은 것을 탐구하고 꿈꾸었네. 마침내 인간의 뛰어난 재능이 나타나는 시대가 다다르기까지 인간의 재능은 강 위에 다리를 놓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폭풍을 이겨 내는 지붕을 쌓아 올렸지. 또한 색채와 형태의 아름다움을 모두 통달했네. 하지만 시간과 공간, 산과 바다 근처에서 인간은 힘을 쓰지 못했고 인간의 통치는 끝났지. 산들은 엄숙하게 그 자리에 솟았네. 사람들 사이에 솟아서 사람들을 서로 낯설게 만들었지. 자만심과 당돌함의 순간에 자기 주변에 있는 산등성이를 올라가 보네. 거기 서서 아래에 있는 부족들을 내려다보면 무시무시한 적밖에는 보이지 않지. 오직 길고도 날카로운 전쟁의 외침만 들릴 뿐이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전쟁의 메아리가 뛰어다니네. 바다는 강하고 장엄하게 있었네. 천천히 없어지는 해안선을 씻어 내리지. 그리고 강하든 부드럽든, 열방의 목소리는 끝을 모르는 바다의 함성 속에 묻혀 버리네. 연약한 배를 타고 위험한 파도가 휘감는 항해를 시작하고 슬픈 눈동자는 멀리 있는 푸르른 바다 끝에 머무네. 인간의 생명은 그 얼마나 불안하고 빈약한가! 바다는 언제까지나 영원히 인간의 주인이네. 공간과 시간의 거대한 규모는 서로 형제인 인간과 인간을 분리했고 서로의 사이에 엄청난 차이의 씨앗을 뿌렸지. 이 씨가 자라 증오와 카스트 제도와 씨족으로 열매 맺었네. 따라서 바다와 산과 시간과 공간은 자신의 주인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비웃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만든 발명품에 부끄러워 얼굴 붉히게 만드네. 그리고 인간의 성취는 그렇게 볼품없이 조그맣게 돌고 도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인간은 가느다란 철사 줄을 만들었지. 한 예술가의 비전이 실현되는 데 그의 인생이 걸리듯 인간이 하늘나라에서 그 이상하고도 사나운 불 한밤의 폭풍 가장자리의 그 붉은 불을 끌어당겼고 그것을 산꼭대기를 넘어 가지고 갔고, 바다 밑바닥에 떨어뜨렸네.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까지 과학이 외쳤지. 이제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이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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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그러자 시날 평원에서 잃어버렸던 인류애가 땅 위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왔네. “하나가 되라!” 한숨 쉬며 산이 쪼그라들어 사라졌네. “하나가 되라!” 물줄기를 내뿜으며 바다가 중얼거리네. “하나가 되라!” 공간이 말하네. “나는 더 이상 금지하지 않 으리라.” “하나가 되라!” 시간이 메아리치네. “나의 순간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하나다!” 열방이 손에 손을 잡으며 말하네. 육지에서 육지까지 흐르는 전기의 찌릿함 속에서.4) 바다를 가로지르는 통신은 근대 시대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PD ).

토론 문제 근대주의자들에게 대서양 횡단 케이블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을까?

3과

3과

근대주의와 문학 T. S. 엘리엇은 질서 있고, 안정적이며, 본질적으로 의미 있는 19세기의 세계관은 “현대 역사라 할 수 있는 공허감과 무정부 상태의 거대한 전경과 연결될 수 없다”5) 고 말했다. 근대주의는 빅토리아 시대의 안정적 도덕성을 아주 크게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현상으로 도덕적 상대주의가 발생했는데, 이 세계관은 무엇보다 문학에 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이런 세계관과 관련된 대표 작가들로는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 프, W. B.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 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장 폴 사르트르가 있다. 문학 비평가 존 바르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실주의 소설의 미학적 부담을 던져 버리려는 시도로 이 작가들은 이전에 없던 다양한 문학적 기법 과 장치를 사용했다. 이들은 죽 이어지는 이야기를 갑작스럽게 바꾸기도 하고, 구 성이나 인물, 인과관계 진행을 사용해 일관성을 갖추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전통적 으로 예상하는 바를 뒤틀기도 하며, 문학적 행동의 도덕적·철학적 의미에 대한 질 문을 던지기 위해 모순적이고 불분명한 병렬 구조를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순진한 4) http://history-world.org/Laying%20Of%20Atlantic%20Cable.htm. 5) 이 말은 T. S. 엘리엇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한 비평과 연결되어 있다. people.virginia..edu/

~jdk3t/eliotulysses.htm.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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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부르주아가 가진 견해의 가식을 비웃기 위해 스스로를 조롱하는 어조를 사용하기도 했고, 이성 적·공공적·객관적 담론에 대한 내적 의식에 반대하기도 했으며, 19세기 부르주아의 사회적 세계의 덧없음을 지적하려고 주관성을 왜곡하려는 경향을 갖기도 했다.”6) 근대주의 작가들은 보통 새로운 형식을 연구하려고 목차도 사용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이 소설가들과 시인들은 예술가들이 정통 예술 형식에 혁신을 일으켰던 것처럼 문학에 완전한 혁 신을 일으켰다. 문학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근대주의는 ‘일반적이지 않은’ 또는 ‘아방가르드적인’ 관점을 무모하게 추구하던 나머 지 허무주의나 이보다 더 안 좋은 사상의 지지자를 만들기도 했다. 다수의 주요 근대주의자들은 파시즘에 관심을 갖거나 공개적으로 이를 지지했다( 예: 엘리엇, 예이츠, 함순, 파운드 ). 근대주의 문학에는 일종의 고유한 엘리트주의가 있었는데, 이는 여러 비평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대 부분의 독자는 제임스 조이스의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모호한 엘리트주의는 근대주 의 작가들의 생각에 있어 평범함에서부터 문학을 구해 내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일반적인 세계 문학에 근대주의 작가들이 이룬 업적이 거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이나 시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런 작품을 주로 읽거나 이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다음 세상의 엘리트가 될, 또는 어쩌면 20세기 세상의 사회・정치 정책을 만들 대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7)

토론 문제 다음 시의 구절 가운데 근대주의의 경향을 띠는 부분은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가? 한번 헤아려 보아야지. 나는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만큼 당신을 사랑하네.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이 내 존재와 이상적인 은혜의 끝에 닿을 만큼. 나는 매일 일상에서 가장 조용하게 필요한 것, 태양과 촛불만큼 당신을 사랑하네. 나는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하네. 인간이 권리를 위해 애쓰듯이 나는 순전하게 당신을 사랑하네. 찬양에서 인간이 몸을 돌리듯이 나는 내 오래된 슬픔 속에서, 그리고 내 어린 시절의 믿음 속에서 사용하려는 열정으로 당신을 사랑하네. 나는 내가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잃어버릴 것 같은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네. 나는 내 숨결과 함께 당신을 사랑하네. 6) John Barth, The Friday Book: Essays and Other Non-Fiction , “The Literature of Replenishment” (London:

Th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84.), p. 68. 7) http://www2.iath.virginia.edu/elab/hfl0255.html.


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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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와 눈물, 내 모든 삶으로!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나는 죽음 이후에 당신을 더욱 사랑하겠네. -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

당신이 가장 바라는 것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때가 그때가 가장 최악의 순간이다. 당신이 바랄 수 있는 것에 기꺼이 만족하기 전, 바랄 수 있는 것 중 무엇이 남았는지 알기 전, 그리고 당신은 계속 바랄 수 있는 것, 욕망이 남겨 놓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 늙었다고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 T. S. 엘리엇, “칵테일파티”(1949년)의 한 부분

4과

4과

근대주의 예술: 중산층이 길들인 예술 아마도 전통주의에서 가장 멀리, 급진적으로 떨어져 나온 분야는 예술일 것이다. 근대 예술의 뿌리는 16세기에 있는데, 그때 근대주의 초기라 부르던 시기가 시작되어 18세기 까지 연장된다. 근대주의의 지성적 토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즉 인본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 시, 철학, 과학 연구를 통해 인간의 즐거움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되살려 내고 이 개념을 교육과 정부에 적용하고 장려했던 때에 등장했다. 예술도 곧 이를 뒤따랐다. 예 술 역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르네상스는 또한 완벽한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제시했다. 이 비전은 1516년에 토머 스 모어 경이 쓴 『유토피아』에서 나온 개념으로, 그는 이것을 완벽한 섬 공동체로 묘사했다. 돌 아보면 르네상스 인본주의는 자신과 세상의 미래를 만들어 갈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근대주의 적 자신감의 표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현재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의 힘을 이해하고 통제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우주의 본질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20세기 초, 근대주의는 유럽 예술계를 장악했다. 초기 근대주의 예술가들은 선 또는 보수적인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거나 반영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고결한 일의 예를 제공해 주거나 영감을 자극하는 기독교 정서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런 예술은 그 주제나 소재에서 전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그 구성이나 형태, 세 계관으로 예술을 분석 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다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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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예를 들어, 장 폴 로랑스의 그림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 안의 마지막 순간>( 18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헤르미타주 ) 에는 총 든 군인들이 황제를 처형하기 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런 묘사는 마네가 대략적으로 그렸던 ‘미완성’ 그림과는 대 조를 이룬다. 마네는 이 사건을 비( 非 ) 영웅적 관점으로 묘 사했다. 로랑스가 보여 주는 황제는 제정신이 아닌 고해신 부를 조용히 위로하는 고귀한 영웅이다. 그의 그림에서 황 제의 신실한 부하는 무릎을 꿇고 그의 왼손을 잡고 있다. 그를 처형하려는 멕시코 군인들은 문가에 서서, 황제의 평 정심에 감탄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이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어 장 폴 로랑스의 그림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마지막 순간>에는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에게 죽기 바로 전 황제의 모습이 담겨 있다(PD).

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자유를 바라는 구호이자 외침이 었다. 진보적 근대주의자의 관점에서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자 유였다.

1890년에 출판된 근대주의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책 『적을 만드는 온화한 예술』에 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술은 모든 쓸데없는 말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예술은 홀로 서 야 하고, 눈과 귀의 예술적 감각에 충실해야 하며, 헌신이나 연민, 사랑, 애국심 등 이와 완전히 이질적인 감정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은 역효과를 냈다. 휘슬러가 자신의 예술 작품을 팔았던 같은 중산 층 계급 사람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외침을 금세 형식적 예술로 바꿔 놓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술을 색채, 선, 형태, 공간, 구성과 같은 형식적 용어로 논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사 람들은 예술 작품을 볼 때 더 이상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근대 예술에 한계를 정한 나머지, 이제 전문가와 아마추어 모두가 똑같이 예술 작품을 토론하고 분석하는 상태에까 지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매우 팽배했는데, 이전 전통주의자들( 예를 들면 바로크 예술가들 ) 이

자신의 형식에 대해 그랬던 것만큼이나 이들도 자신의 근대적 형식에 대해 폭압적이

었다. 점점 근대주의 예술은 폐쇄된 형식주의자들 사이에서만 행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형식주의자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근대주의 회화”라는 제목으로 1965년에 처음 출판 된 자신의 논문에서 근대주의가 자기지시적인 자치 체제를 만들어 냈다고 보았다. 사람들이 예 술 작품을 형식적 발전의 내적 법칙에 지배되는 고립된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은 물질주의적 세상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사람들은 근대주의 예술을 싫어하게 되었고, 근대주의 예술 작품을 사지 않게


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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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8)

토론 문제 근대주의 예술이 나타내는 바가 가정하는 점은, 축소해 보면 일반적인 근대주의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근대주의 예술은 예술가가 예술가만이 특별히 허가받은 힘을 기반으로 완전히 추 상적이고 개인적인 이해와 표현 방법을 통해 인간의 가장 우수한 것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렇게 완전히 시각적인 근대주의 예술은 이를 자치적인 행동, 즉 인간의 사회・정치적 일상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이는 역사에서 배운 교훈과도 완전히 달 랐다. 스스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본질을 가진 시각 예술이라는 것은 곧 이에 대한 질문을 오직 자신의 용어로만 대답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근대주의의 ‘역사’는 오직 근대주의 자체가 자신 을 해석한 바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근대주의의 이런 점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

5과 타이태닉호의 침몰 2차 사료: 1912년 4월 15일, 「뉴욕 타임스」 4월 15일, 뉴펀들랜드 케이프레이스-화이트 스타 기선 회사의 대형 여객선 올림픽호가 오늘 저녁 무선으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오늘 새벽 큐나드 카르파티아호가, 타이태닉호가 빙산과 충 돌한 지난밤 이후 무선 구조 요청을 보냈던 지점에 도착했다고 한다. 카르파티아호는 현존 최대 증기선이 남긴 파편과 구조선만 발견했다. 타이태닉호는 대략 새벽 2시 20분, 북위 41도 46분, 서경 50도 14분 부근에서 침몰했다. 이는 배가 빙산과 충돌한 지역에서부터 남쪽으로 30분, 약 55km 떨어진 지점이다. 배에 있던 모든 구명선의 소재가 확인되었고, 선원과 승객 약 655명이 목숨을 건졌는데, 이들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태닉호에 승선한 사람들은 대략 1,200명이었다. 레일랜드 기선 회사의 캘리포니아호는 사고 지점에 남아 수색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카르파 티아호는 생존자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오고 있다. 카르파티아호가 구한 생존자들을 제외하고 11시 정각부터 밤까지 파리지안호나 버지니안호,

8) http://arthistoryresources.net/Modernism/artsake.html.

5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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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1912년 4월 10일, 사우샘프턴을 떠나는 RMS 타이태닉호(PD).

기타 배들이 다른 생존자들을 구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곳 마 르코니 재난 센터에서 들은 바나 보고받은 바는 없다고 진 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타이태닉호 재난에 대한 최초 소식을 전달받은 곳은 마르 코니 무선 센터로, 받은 시각은 지난 밤 10시 25분이었다( 어 제 「뉴욕 타임스」에 나온 바대로 ).

타이태닉호는 처음 재난 신호인 “C.

Q. D.”를 보냈고, 카르파티아호와 발틱호, 올림픽호를 포함 한 다수의 배들이 이에 응답했다. 타이태닉호 선장은 배가 빙산과 충돌하여 즉각적인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고, 배의 위치가 북위 41도 46분, 서경 50도 14분이라고 말했다. 10시 55분에 타이태닉호 선장은 배가 머리부터 가라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곳 구조 센터는 11시 25분에 앨런 선사 의 버지니아호와 핼리팩스에서부터 리버풀에 이르는 연락망 을 구축했고, 버지니아호는 타이태닉호가 긴급히 구조를 필 요로 한다는 점과 타이태닉호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1912년 4월 16일, 「더 월드」의 첫 지면 사진. 타이태닉호의 침몰에 대한 머리기사가 나와 있다(LOC).

버지니아호는 마르코니 구조 센터에 타이태닉호가 큰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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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주의(모더니즘): 세상을 지배하기

난을 맞게 될 것이라고 즉시 알려 주었다. 11시 36분에 타이태닉호는 올림픽호 선장에게 여자들을 배에서 내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으며, 승객들을 옮기기 위한 배를 검침해 줄 것을 요청했다. 타이태닉호 선장은 이 모든 시간 동안 계속 재난 신호를 보냈고, 배의 위치를 알렸다. 무선 교환원은 매우 냉정하고 침착했으며, 그의 보고는 안정적이고 완벽한 형태를 갖 추고 있었다. 그가 내린 판단은 최고였다. 타이태닉호로부터 받은 마지막 신호는 새벽 12시 27분에 있었다. 버지니아호는 타이 태닉호에서 몇 번 불분명한 신호가 오다가 갑자기 끊겼다고 했다.9)

바다에서 숨진 타이태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

토론 문제 타이태닉호의 침몰은 근대주의가 강타를 맞은 사건이었다. 20세기 공학의 위업, 절대 가라앉을 수 없는 타이태닉호는 근대 주의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진보된 최 신 기술과 과도한 사치가 모두 담겨 있었다. 타이태닉호에 탄 승 객들은 여태까지 인류 역사에 없던 호화로움과 뛰어난 기술 속 에 여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불과 두 시간 여 만 에 이 배는 수천 명의 목숨과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비극을 통해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을까?

명예로운 행동과 불명예스러운 행동

J. J. 몰리 브라운 여사가 타이태닉호에서 구조 작업을 해 준 아서 헨리 로스트론 선장에게 트로피를 증정하고 있다(LOC).

명예는 타이태닉호 재난과 관련된 많은 이들에 대한 주제다. 이 배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배가 그 최후 를 향해 거침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는 위험을 무 시한 채 자신의 몸을 구조선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책 임지고 있던 배 위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그 가 선원들에게 “영국인답게 행동하라”고 격려했다는 점 외에 스미스 선장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우리가 아 는 것은 없다. 하지만 배 위에 끝까지 남아 있기로 한 그의 결정을 우리는 명예롭게 기억한다. 최근 MS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와 MTS 오세아노스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충돌, 2012년(CCA-SA3.0). 9) http://www.nytimes.com/learning/general/onthisday/big/04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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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호, 두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선장들이 보인 행동을 비난하며 사람들은 오 늘날까지 스미스 선장의 행동을 인용한다. 배가 침몰하는 위험 속에서 선장, 심지어 선원들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승객들을 버려 둔 채 자신들만 구조선에 올랐던 것이다. 역사는 또한 카르파티아호의 로스트론 선장에 대해서도 명예롭게 기록한다. 그는 조금의 망 설임도 없이 배의 최고 속도로 위험한 바다의 물살을 헤쳐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 이 구하려고 용감히 나아갔다. 타이태닉호에 다가가기 위한 먼 거리를 극복하고 말이다. 역사는 또한 사람들이 옳게 또는 그르게 여겼던 SS 캘리포니아호의 스탠리 로드 선장과 그 의 선원들이 했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기억한다. 타이태닉호의 재난에 대해 다양한 사실이 밝 혀지게 되자, 당시 타이태닉호 근처에 있던 배 한 척이 구조를 위해 오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로 드 선장은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구조 신청을 거절했는데, 지난 100년간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행동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고, 타이태닉호에 타고 있던 수백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행동이었다. 한 작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스탠리 로드의 범죄는 그가 타이태닉호가 쏘아올린 로켓탄을 무시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구조 요청을 확 실히 묵인했다는 것이다.”10)

10) http://en.wikipedia.org/wiki/ss_Californian


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1910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여덟 살짜리 신문팔이 소년 두 명(LOC).

먼저 생각해 보기 진보주의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납세자, 소비자, 고용인, 시민, 부모와 같은 자신 의 역할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정치 운동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진보 주의는 포퓰리즘(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의 형태 ) 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 지만 20세기에 진보주의가 그 본색을 드러내면서 그 진짜 문제들이 사회에 등장 하게 되었다. 진보주의 엘리트와 경제적 엘리트들은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 했다.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을 위해 말이다. 또한 독점적 엘리트주의를 향한 근 대주의적 경향을 수용했다. 이들은 고유하고 자립적인 서양 문화의 전통을 보존 하려 했던 경건한 전통주의자인 유대-기독교인들을 매우 싫어하는 적이 되었다.

2장의 학습 목표 2장에서는 진보주의의 발생을 알아보자. 매우 유명하고 중요한 허버트 크롤리 의 책 『미국식 삶의 약속』을 살펴보고, 이 책이 미국 역사에 미친 영향도 알아보 자. 또한 어떻게 할리우드가 이 시대를 대중화했고, 이 시대의 진실성을 평가했는 지 살펴보자. 다음으로 매우 다채로운 성격의 테디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국 사회 에 미쳤던 영향과, 최초의 연방 소득세를 자세히 살펴보자. 2장을 공부한 후 다음을 수행해 보라.

주요 단어 이신론 실용주의 인식론

1. 엘리트 가부장주의를 향한 정부의 애호를 평가해 보라. 2. 허버트 크롤리의 관점을 요약해 보라. 3. 영화 <뉴시스>( 신문팔이들 ) 를 보고, 이를 실제 1899년 노동 파업과 비교해 보라. 4. ‌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했던 방법을 알아보고, 진보주의 시 대에 그와 같은 대통령이 큰 인기를 얻었던 이유를 설명해 보라. 5. 소득세 시행 이후 몇 십 년 동안 일어나게 될 문제를 예상해 보라.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도덕적 상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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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1과 새 시대 근대주의의 결과로 세계 지도자들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혁명을 목격했고, 어떤 경우엔 이를 장려했다.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진보주의자라 부른다. 진보주의자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20세기 여성들의 삶에 일어났던 변화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여성들의 산아 제한 능력 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1916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인종차별주의자 마거릿 생어는 미국 최초로 뉴욕 브루클린에 산아 제한 클리닉을 열었다. 그로부터 10일 후 경찰은 이 클리닉의 문을 닫았다. 마거릿 생어는 ‘산아 제한’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고, 정부가 산아 제한에 대한 정보나 기구를 보급할 의무가 있고 이에 대한 권리를 전적으로 가지 고 있다고 법원이 납득하게 만들기도 했다. 생어는 ‘가족계획협회’라는 단체를 설립 했고, 피임약 개발을 지원하기도 했다. 피임약은 1960년에 등장했고, 점점 낙태를 지 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생어는 세계사 전체에서 가장 악의적인 인물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인종 간의 관계는 시들해졌다. 시민권에 대해 괄목할 만한 진보는 없었다. W. E. B. 두보이스가 낸 책 『흑인들의 영혼』1)에서 그는 새롭고 더욱 대립적인 방식으로 시민권이라는 주제에 접근했다. 두보이스는 “20세기의 문제는 곧 색깔( 인종 ) 의 문제”라고 말하며 이 책을 시

1922년의 마거릿 생어

작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두보이스는 부커 워싱턴의 타협 철학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야망 없이 육체노동만 하며 지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비난했다. 두보이스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가로, 그의 견해는 맬컴 엑스와 같 은 이후 개혁가들이 인종 분리 대 인종 화합과 같은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자연 보호가 처음으로 공공 정책의 한 부분이 되기도 했다. 근대 시대까지 대부분의 사람은 미국의 자원이 무한할 것이라 생각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재임 기간 약 60만 km2가 국가 산 림 지역으로 분류되었고, 32만 km2 이상의 광산 지대는 개인에게 팔 수 없는 지역으로 지정되 었다. 1902년,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최초로 노동 분쟁에서 노동자의 편에 서서 중재를 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광산 소유주들이 파업을 중재하지 않을 시 군대를 사용하겠다고 이들을 협박했다. 1905년에 시카고에서 만난 인종 노동 지도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모두를 위한 하나의 큰 연합이었다. 이 단체는 세계 국제 노동자( IWW ) 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노련한 기술자들에게

1) W. E. B. Du Bois, The Souls of Black Folk (Chicago, IL: A. C. McClurg & Co.,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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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만 높은 지위를 허용한다는 미국 노동 총연맹의 접근 방식을 거부했던 IWW는 직업과 인종, 종 교, 성별에 관계없이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언제나 미국 개혁을 자극하고 촉진한 것으로 종교적 사상과 기관들이 있었다. 진보주의 개혁 가들은 사회적 복음이라고 하는 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 복음이란 교회가 사회 개혁에 활발히 개입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드와이트 무디와 윌리엄 부스( 구세군 ) 가 오랫동안 이 런 일을 했다. 하지만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한 독일 신학자들에게 영향받은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여러 기독교 원칙을 사회 문제에 적용해야 하며, 사회 질서와 기독교 가치가 서로 일치되게끔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분야에서도 근대주의자, 특히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것이 독특하고 이전에 없던 것이라 주장하는 불편한 습관을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경우에 그랬듯이 )

( 사회복지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신문을 읽는 사람이 매우 많이 늘었다. 근대에 들어 인 쇄비가 싸지면서 모든 미국인이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강력한 사회적 도구가 되었다. 뉴욕시의 한 신문사가 새로운 유행에 대한 사진을 실으면 이것은 다음 주에 댈러스나 톨레도, 시애틀의 신문에 그대로 나오 곤 했다. 이후 20세기의 주요 문화 생산자는 신문에서 텔레비전으로 바뀌 었지만, 그래도 신문의 영향력은 50년이나 계속되었다. 추문을 폭로하는 기자들은 대량 부수가 발행되는 신문을 이용해 미국 정치와 기업의 부정행위를 공격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 갖지 않거나 잘 모르는 일들을 옹호하고, 도리를 벗어난 입장을 지지하며, 갈 등과 혼란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일은 단지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함이 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따 서 이들을 “추문 폭로자들”( muckrakers ) 이라 불렀다. 이 책에서 추문 폭로자 는 하늘나라보다는 더러운 추문에 더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기자들은 좋은 일도 했다. 「맥클루어스」, 「코스모폴리탄」, 「콜리어스」와 같은 인기 잡지들은 미국 사회의 악을 폭로하는 기사를 냈다. 업턴 싱클레 어는 『정글』이라는 책에서 고기 포장 산업의 비위생적 환경을 폭로했다. 하지만 이때 위험한 선례가 자리 잡게 되었다. 유권자나 기타 통제권자 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대중매체가 오직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진실 보다는 선정주의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사상 최초로 대중매체는 기준이라 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무를 벗어 버리고 자기만의 기준을 정하기 시 작했다( 이것 역시 근대주의적 경향이었다 ). 더 나아가 대중매체는 객관성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 어떤 정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중매체는 이타주의와 정 당성을 보여 주려는 정신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편협하고 광신적 애국주의

1922년 1월호 「사이언스 & 인벤션」에 실린 마거릿 생어의 책 『여성과 새로운 인종』의 광고(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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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적이며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하는, 이윤만 추구하는 기계가 되어 버렸다.2)

토론 문제 대다수의 미국인이 낙태 합법화 반대 운동이나 이 운동을 지지한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를 적 극적으로 지지하고 시민들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생어에게 반대했음에도, 정부는 여전히 생어의 활동을 허용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2과

2과 『미국식 삶의 약속』 – 허버트 크롤리 진보주의적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한 책을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허버트 크롤리의 『미

허버트 크롤리는 정치 이론가이자 언론인으 로 「더 뉴 리퍼블릭」이 라는 잡지를 출간했다.

국식 삶의 약속』 ( 1909년 ) 일 것이다. 크롤리 ( 1869~1930년 ) 는 아주 출중한 진보주의 철학자였다. 1909년에 출판된 이 책에서 그는 도시화, 산업화 시대의 전례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미국 인들이 최소한의 정부, 권력의 분권화, 개인 자유의 신성화를 중시하면서 제퍼슨식 유산을 극복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주의가 대부분의 노동자를 일종의 ‘임금 노예’로 전락시켰고, 강한 중앙 정부만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며 사회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장 보통의 미국인들은 매우 애국심이 강하다. 에밀 라이히는 『국가들 속의 성공』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미국인들은 가득 차 있다”(The Americans are filled)고 말한다. 즉, “이들이 자신들의 연합과 미래의 성공에 대해 그토록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차 있어 대부분 칭찬의 말 외에 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심 을 던지는 대중 연설가의 연설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기독교 전체 구조의 진실성의 역 사적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의 주인 하나님 안에서 매우 작은 의심의 속삭 임이나 믿음에 대한 소망도 잡지 못할 만큼 운이 없었다. 미국의 미래에는 무한정의 믿음이 있 는 것이다.” 라이히 씨의 강조 방법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말하는 것의 실체 는 맞다. 미국인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갖는 믿음은 종교적이다. 그 강도에서 그렇지 않다면, 어 쨌든 거의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권위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마시는 공기 안에 가 득하다. 우리는 마치 어른들이 대화 속에 주장하고 암시하는 것을 듣는 어린이들처럼 이를 받

2) http://www.digitalhistory.uh.edu/era.cfm?eraid=11&smt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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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아들인다. 우리가 받는 교육 훈련 과정 마다 이 신념에 대해 추가적인 증언이 나오고, 우리는 이를 듣는다. 신문과 소 설가들, 웅변가들과 극작가들, 비록 유 명하지 않을지라도 이들은 최소한 충성 된 진리의 설교자들이다. 사람들은 무 신론자들을 반박하지 않는다. 그냥 눈 감아 준다. 이것은 생각의 목적이 되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암시인 형태의 믿음 을 만들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 로 우리의 개인적 삶 가운데 들어와 우 리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우리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친 애하는 국민이 행한 많은 일을 불신하 고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국가 그 자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체제, 번

1912년 선거는 논란이 많았다. 보수당과 진보당으로 당이 갈라짐으로써 공화당 후보에 패배하면서 시어도 어 루즈벨트 전 대통령은 제3당인 진보당에 속하기로 결정했다. 진보당은 이후 재선출되기를 소망하며 불 무스당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허버트 크롤리는 이 새 정당과 루즈벨트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공로를 인정받는다(LOC).

영할 미래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연히 미국인들은 애국적 열심과 좋은 믿음을 독점하고 있지 않다. 영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영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교회에서, 맥주 집에서, 또한 희가극에서도 감사를 표한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가 가장 문명화한 근대 국가라는 점을 소중히 여기고, 이 를 주장하며, 높은 사회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해 준다. 정치·사회적 상 태가 별로 당대 주변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러시아는 신비롭게 미화된 러시아라는 비전을 내놓는다. 이 비전은 세상을 계몽하는 ‘팍스 브리태니카’(영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와

‘라 벨

르 프랑스’(아름다운 프랑스)의 비교적 평범함에 형을 선고한다. 모든 국가는, 그 민족이 철저히 살 아 있는 데 비례하여, 그와 같은 믿음으로 인해 무르익어야 한다. 하지만 믿음, 예를 들어 영국 제국의 영국인의 믿음과 민주주의 땅에 사는 미국인의 믿음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영 국인의 국가적 개념에 대한 내용은 좀 더 배타적인 경향이 있다. 영국인의 애국심은 대영 제국 의 역사적 위업에 그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그것에 제한을 받는다. 좋은 영국인 애국자는 자신의 이상이나 국가의 미래적 가능성보다는 좀 더 국가 기관이나 전통의 고유 조직에 몰두 한다. 이와 같은 국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은 정말로 매우 중요한 이상적 내용을 암시한다. 하지 만 영국인이나 독일인, 심지어 프랑스인의 국가적 이상주의조차 자신의 국가 역사에 매우 많이 저당 잡혀 있으며, 솔직히 말해 이 빚을 청산할 수는 없다. 좋은 애국자는 자신의 국가가 고집 스런 보수주의보다 시기상조의 해방이라는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약간 독 단적인 기관이나 사회 형태, 지적 습관의 조직망에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다. 프랑스는 혁명으 로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 했던 유럽 유일의 국가였다. 프랑스인의 이 실험이 낳은 결과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좋은 예가 되기보다는 이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이와 달리, 더 우월한 미국의 애국심은 역사적 전통과 선례에 대한 충성심과 이상적인 국가 적 약속에 대해 상상하고 계획하는 바를 모두 갖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는 언제나 더욱 열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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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많은 젊은이들의 흥미를 끌곤 했는데, 그것은 주로 국가적 가능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멋진 국가 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이라는 책을 쓴 휴고 뮌스터베르크 교수는 “인종도, 전통도, 실제 역사도 미국인들을 자국민과 엮지 못한다. 이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미래만이 이들을 하 나로 묶어 준다”고 말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와 같은 비전은 어쩌면 이전의 특정 세대에 게 그랬던 것만큼 현 세대 미국인들에게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장애물과 함정에 더 친숙함에도,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을 여전히 약속의 땅이라 보고 있다. 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것보다 더 좋은 어떤 일이, 어떤 이유에서든, 언젠가 선 량한 미국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 여전히 믿는다. 그리고 이 모호하고 순진하며 그 근거가 불 충분한 생각일지도 모르는 이 신념은 우리나라의 민족적 이상을 구성하는 핵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인들에게 과거가 의미하는 바는 미국인들의 과거의 의미보다 더 적어야 하며, 미 래가 더 많은 것을 의미해야 한다. 확실히 말하면, 미국인들의 삶은 유럽인들을 유럽 국가의 삶 에서 확 분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미국에서 억지로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미국의 과 거는 유럽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우리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미국(역사)의 특이한 점은 단순히 그 짧고 간결함에 있지 않고, 그 시작부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미국인들 은 건국 초기부터 더 나은 미래를 바라고 계획했다. 이 민주주의 국가는 시작부터 약속의 국가 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인의 민족적 전통에 대한 충성이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창의적 계획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약속의 땅이 아닌 미국, 앞날 에 대한 전망이나 건설적 이상을 갖고 있지 않은 미국은 우리가 선조에게 물려받은 미국이 아 니다. 미국인들은 더 나은 국가의 미래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국가적 전통이 라는 개념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이를 성취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자신의 국가를 약속의 땅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 엇인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 말은 일반적으로 말해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 에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 더 좋은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의미를 매우 피 상적으로 분석해 보면 어떤 특정한 모호함을 볼 수 있다. 더 나은 미래가 미국인들에게, 개인 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줄 수 있는 특정 이익은 무엇인가? 또한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성취 할 수 있는가? 저절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는 어떤 책임이 있어야 한다 는 말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책임일까? 어떤 젊은이가 촉망받는 직업을 갖고 있다 고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능력과 기회가 그로 하여금 부유하거나, 유명하거나, 권력이 많은 사람 이 되게 해 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런 판단은, 우리가 아는 한, 여기서 말하는 책 임을 말하진 않는다. 이것은 단지 그가 과거에 보여 준 성과와 자질에 기초해 내린 예견일 뿐 이다. 하지만 외부인의 관점으로 보면 단순히 예상과 기대라고밖에 할 수 없는 직업이라는 것 은 그 젊은이에게는 매우 중요한 임무가 된다. 어쨌든 그에게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은 저절로 일 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다. 이 미래는 예상하지 못 한 난관이나 뜻밖의 질병, 또는 어떤 심각한 판단의 실수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 로 미국적 삶의 약속인 것이다. 한 이민자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 약속은 더 나은 미래(이것은 그저 미국 땅에 살아감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이다)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진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미

국인이 되면, 이 약속은 단순히 기대와 예상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이는 책임 이 된다. 그와 그의 동료 미국인들이 참여해 행해야 하는 특정 행동을 요구하는 책임 말이다. 그래서 ‘미국식 삶의 약속’이라는 말을 정의하려 할 때, 우리는 또한 그런 약속의 성취를 위해


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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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행동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정의해야 한다. 이전 글에서 말한 약속의 땅으로서의 미국이 가진 두 가지 면모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하 지만 평범하고 선량한 미국인 애국자들은 이를 쉽게 간과한다. 자신과 자신의 자녀, 다른 미국 인을 위해 약속된 더 나은 미래는 전적으로 그 기대에 확신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보 통 미국인은 이 문제를 마치 한 우호적 외부인이 촉망받는 한 개인의 직업과 미래를 바라보는 정도로 바라본다. 그는 더 나은 미래가 그냥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약속의 땅이라 부를 뿐 아니라 운명의 땅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은 멋지고 성공적인 직 업(장래) 위에서 공정하게 출범했고, 사람들은 미국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미국이 지속적 으로 번영하리라 예견했다. H. G. 웰스 씨가 『미국에서의 미래』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 듯 말이다. “누군가가 미국인에게 그의 국가적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 미국인은 약간 당황한다. 만약 그에게 국가적 운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매우 민첩하게 이에 답한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아마 『미국식 삶의 약속』이라는 책에 주로 영광스러운 미국의 미래에 대한 화려한 묘사가 담겨 있고, 일종의 최신식 유토피아, 매우 좋은 땅에 위치해 있으며 성조기가 펄 럭이는 미국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들은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미 래를 성취하는 일이 곧 특정 책임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을 말로는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을 놀랍고 새로운 것으로 인정하진 않는다. 우리의 전임자들은 이런 책임을 전적으로 도맡아 행했다. 우리 후손들도 이런 책임을 맡아 행할 것이다. 영예로운 미국의 과거가 더 나은 미국의 미래를 예언하는 만큼, 근본적으로 미국의 국가적 책임은 미국의 전통적 행동 방식과 기준, 이 상에 충실한 것이다. 우리 미국인들은 약속된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계속 열심을 내야 한다. 지 속적으로 단호하고도 즐겁게 우리가 임명받은 이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 애국적인 예언이 많이 들어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나는 절 대 말로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나는 앞서 말한 낙관주의와 운명론, 보수주의의 혼합을 매우 적극적으로 또한 강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관례적 조건이나 기관, 이념의 필연적 결과로 인해 스스로 완성될 더 나은 미국 미래에 대한 생각을 품는 것, 그와 같은 개념을 고집 스럽게 갖는다는 것은 미국적 삶에서 약속을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세우려는 더 나은 미래는, 어떤 개념이 특정한 본질적 면에 있어 과거로부터 해방 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 역사는 자랑하고 축하할 일과, 후회하고 수치스러워야 할 일을 많이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 역사는 충성스런 미국인들이 부끄럽게 느낄 만 한 것이 전혀 없는 역사인데, 그 이유는 미국이 더 나은 미래라는 비전을 가지고 항상 과거보다 더 발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인들, 오늘과 내일의 미국인들은 반드시 이런 전통적 비전을 진실한 마음으로 지켜 나가야 한다. 미국인들은 그런 전통적 비전, 심지어는 이를 깨닫는 전통 적 미국 방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춰야 한다. 내가 믿기로 이와 같은 희생이 필요한 때가 오고 있다. 또한 이런 희생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식 삶은 점점 특정 약속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 이 르게 될 것이다. 한 개인이나 국가의 삶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익한 약속 중 유일한 것은 이상이 결정하는 약속 이다. 이와 같은 약속은 성취되는데, 이는 낙관적 기대나 과거 업적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으로 모방함으로써 성취할 수 없고, 열심히 전념하며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일함으로 써 성취할 수 있다. 만약 한 개인의 촉망된 직업에 특별하고 가치 있는 목적이 없다면 이것은 금방 성공을 향한 기류 속으로 흘러가 버린다. 또한 그런 그의 추구가 성공을 거둔다 해도 그가

네 방향 경쟁-1912년 선거를 통 해 우리는 미국 사회 변화기의 모 습, 많은 것을 포함하는 철학적 이 념, 정부의 현실, 개인적 가치를 잘 볼 수 있다. 이 선거에는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선거에서 승리), 진보 당의 시오도어 루즈벨트, 공화당의 윌리엄 태프트, 사회당의 유진 데 브스가 나왔다(L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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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예전에 바라보았던 약속은 승리라는 무덤 속에 묻히고 만다.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가 가 가진 약속(된 미래)이 겨우 권력과 성공에의 비전이라면, 이 목적에 가치는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도덕적 세상에서는 목적이 있을 때만 미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몇몇의 유럽 강국은 많은 부분에서 역사적 상황에 따라 결정된 특정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단순 히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목적만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은 민주주의적 이상을 깨닫는 일에 전 념하고 있고, 미국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인들은 반드시 이런 이상이 지향하는 바를 잘 따를 준비를 해야 한다. 의심의 여지 없이 미국인들은 항상 자기 국가의 미래를 성취해야 할 이상으로 생각해 온 부 분이 있다. 이들의 기대는 희망적일 뿐 아니라 자신감 넘치고 허영심 넘치기도 했다. 이들은 단 지 안전하고 큰 업적을 거둔 미래만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예언했다. 어떤 개인적이고 사회적 인 개선을 위한 이상적 요구는 언제나 가장 허영심이 많은 애국적 예언을 수반했다. 이들은 이 런 더 나은 미래가, 더 나은 미래인 이상, 저절로 가속이 붙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 획하고 건설해야 하는 것임을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 든, 미국의 국가적 약속의 이상을 구분하고 강조하는 일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미국적 전통 에 대해 내 생각이 전적으로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미국인들이 이런 이상적인 결과를 소 홀히 여겼다 해도,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미래가 주로 익숙한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그럼에도 이상에 대한 요구는 언제나 명백히 존재해 왔다. 만약 이것이 미국식 전통의 지배적 인 면모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전통을 위반하지 않으며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국가적 약속이 성취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미국인의 기질을 싫어하는 것만 큼, 우리는 이런 기질이 현재 이만큼 이 정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인의 이런 기질은 미국적 삶의 핵심적 상태에, 또한 미국인들의 실제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중이 이해하는 바, 국가적 약속은 어떤 면에서 저절로 성취되고 있다. 만약 근본적인 상태가 여태까지와 비슷하게 남아 있게 된다면, 현재 만연해 있는 혼합된 낙관 주의와 운명론, 보수주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정당성을 보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근본적 상황 속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변화와, 미국인들이 국가적 범주에서 경험하고 있는 변화 는 이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정신 상태가 급진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합리적 인 기대를 하게 해 줄 것이다. 미국인들로 하여금 국가적 약속에 대한 개념을 과정으로 볼 것이 냐, 이상으로 볼 것이냐 선택하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 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생각해 보기 전에, 우리는 초기 미국의 경제적·사회적 상황과 이와 관 련된 이념 및 기관 사이의 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 전통을 더 잘 이해함 으로써만, 또한 그 유익과 그 어려움을 잘 분석함으로써만, 우리는 미국적 삶의 약속에 대해 더 욱 일관되고 유익한 개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3)

토론 문제 허버트 크롤리의 관점을 요약해 보라.

3) http://www.gutenberg.org/files/14422/14422-h/14422-h.htm#CHAPTER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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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3과

3과

신문팔이들 디즈니 영화 중에서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는 ( 첫 째는 <바위에 박힌 검>) ( Newsies ) 다.

<뉴스보이>

이 영화는 1992년

에 나온 디즈니의 뮤지컬 영 화로 크리스천 베일, 데이비드 모스코, 빌 풀먼이 출연했다. 로버트 듀발과 앤 마그릿도 조 연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줄거리가 아주 뛰어날 뿐 아니 라 그 이야기 속에 나타난 역 사가 기본적으로 아주 정확하 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열두 곡의 노래가 나오고, 여러 번 연속해 춤추는 장면도 나온다.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로는 “깃

신문팔이 소년들은 신문 발행 부수가 대량으로 증가한 19세기 중반에 거리에 등장했다. 이 소년들은 거의 매우 가난하고 집이 없는 아이들이어서, 보통은 밤까지 일하고 거리에서 잤다. 이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긴 했지만, 너무 적었고 시설 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발을 들고”, “산타페”, “오늘을 즐기라”, “세상을 알겠지”, “뉴욕의 왕”이 있다. <뉴스보이>는 1899년 뉴욕시에서 일어났던 신문팔이 소년들의 파업이라는 실화에 기초한 영 화다. 먹을 음식을 사기 위해 신문을 팔던 수천 명의 노숙자 고아 어린이들이 신문팔이 소년 숙 소에 살았는데, 여기엔 열일곱 살짜리 맨해튼 뉴스보이인 잭 카우보이 켈리 ( 크리스천

베일 ) 도

었다. 그는 조지프 퓰리처( 로버트 듀발 ) 를 위해 「뉴욕 월드」 신문을 팔던 평범한 신문팔이 소년이 었다. 1866년, 기독교인 사회 개혁가 찰스 로링 브레이스는 뉴욕시의 노숙자 신문팔이 소년들의 상 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어느 추운 겨울 밤 나는 약 10~12명 정도의 어린 노숙자 아이들 을 보았다. 이들은 「뉴욕 선」의 사무실 계단 아래 추위를 피하려고 서로 몸을 포개고 있었다. 「아틀라스」의 사무실에도 이런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 아이들은 인쇄업자들이 물을 뿌리며 쫓 아낼 때까지 로비에서 잠을 자곤 했다. 어떤 겨울에는 오래되고 불에 다 타 버린 금고 하나가 월 스트리트에 겨우내 있었는데, 소년 두 명이 여기 있는 불에 탄 구멍 속으로 어떻게 기어들어가 서는 이곳을 침실로 사용하기도 했다.”4)

4) http://www.digitalhistory.uh.edu/disp_textbook.cfm?smtID=2&psid=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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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1872년, 구세군 회원이었던 제임스 맥케이브 주니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뉴욕의 길거리에 사는 어린이가 만 명이 있다……집 없는 이 어린이들 중 여럿이 바로 이 신문팔이 소년들이다. 이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다……이 아이들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귀가 먹을 정도 로 시끄럽게 낸다. 이 아이들은 보도를 걷는 여러분을 에워싸며 신문을 사라고 거의 강요하다 시피 한다. 이 아이들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으며 더럽다. 어떤 아이들은 외투도, 신발도, 모자도 없다.”5) 영화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1899년에는 수천 명의 신문팔이 소년들이( 이들은 대략 하루에 30센 트를 벌었다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조지프 퓰리처의 신문 팔기를 거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뉴욕 월드」의 경쟁사인 신문사들은 이에 덕을 보았고, 「뉴욕 월드」의 문제와 파업을 상세히 보 도했다. 「뉴욕 트리뷴」은 키드 블링크가 2,000명의 파업 소년들에게 한 연설을 인용했다. “친구 이자 동료 노동자 여러분. 지금은 사람들이 마음을 쓸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풀처럼 서로 붙 어 단결할 때입니다……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설사 눈이 멀지라도 이를 쟁취 할 것입니다.”6) 이 파업은 즉각적인 결과를 낳지는 못했지만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고, 곧 도시의 아동 복지 정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출판업자들은 신문팔이 소년들에게 상을 주거나 여행을 보내 줌으로써 신문팔이 소년들에 대한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토론 문제 영화 <뉴스보이>를 보고, 1899년 노동 파업 때 실제로 일어난 일과 비교해 보라.

4과

4과 시어도어 루즈벨트

러프 라이더스(의용 기 병대)는 산후안 언덕을 정복했던 루즈벨트의 스페인계 미국인 군대 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개성이 강한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히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진보주의나 근 대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1858년에 뉴욕에서 태어난 루즈벨트는 자신의 말을 따르면 ‘겁 많고 소심한’ 청소년이었다. 또한 약간 유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그는 ‘소심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5) 위와 같음. 6)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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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어른 루즈벨트는 강하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1912년에 어떤 암살자가 그에게 총 을 쏴 그는 가슴에 총을 맞았지만 총알을 제거하지 않고서 한 시간 길이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루즈벨트는 23세 때 뉴욕주 의회에서 자신의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 후 1884년에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같은 날 사망했다. 그는 매우 상심한 나머지, 노스다코타 배드랜드에 있는 100km2 크기의 목장으로 들어가 카우보이가 되었다. 그는 부츠에 톱니바퀴 장식을 달고 뉴욕 의 티파니 보석 가게에서 산 진주 장식 권총을 갖고 다녔다. 이렇게 비싸고 멋진 권총을 든 카우 보이 이미지는 이후 루즈벨트가 보여 줄 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 준다. 그는 이후 정치계로 다시 돌아왔고, 1900년에 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해군 보조비서 및 뉴욕주지사로 일했다. 군사 경험이 없었지만 그러면서 도 정말 군대의 일원으로 보였던 루즈벨트는 미국-스 페인 전쟁 동안 브룩스 브라더스가 특별 제작한 색다른

군복을 입었다. 루즈벨트는 쿠바에서 싸웠던 자원 부대 러프 라이더스의 부사령관으로 일했다. 그는 산후안 언

덕에서 영웅적인 승리를 이끈 후 명성과 영예와 부통 령직을 얻었다. 루즈벨트는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로 죽자 42세의 나이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공화당원이었지만 분명 진보적 경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 독점 금지, 자원 보호, 소비자 보호를 국가 우선 정책으로 만들었다. 또 한 광산업자들로 하여금 미국 광산 협회라는 단체를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미국-스페인 전쟁 중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령이 자신의 “러프 라이더스”가 산후안 언덕과 케틀 언덕을 점령한 후에 이들과 함께 쿠바의 산후안 언덕에 서서 승리를 맛 보고 있다(LOC).

역사학자 스티브 민츠 는 이렇게 말한다. “루즈 벨트의 삶은 모순으로 가 득하다. 그는 미국 내 가장 부유한 20가정 중 한 가정 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재 계의 거물들을 ‘막강한 부 를 가진 악당’이라고 맹렬 히 비난했다. 대도시에서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었 던 루즈벨트는 사냥꾼이자 자연 보호가이기도 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사진 중앙)와 그의 아들 커미트(왼쪽)가 독일 황제 카이저 빌헬름 2세와 함께 되베리츠 마을 근처에서 군 사 문제와 관련해 우호적 분위기 속에 만나고 있는 모습이다. 루즈벨트는 1910년 5월 12일에 베를린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전에, 로마나 빈과 같은 유럽 국가의 수도들을 방문했다(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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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그는 백악관에서 권투를 하던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 간 평화 협상을 중재해 미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 물이다.”7) 루즈벨트는 당 시대에 등장한 낙관주의를 잘 보여 주었다. 그는 영리함과 활력, 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틈틈이 시간을 내 역사에서부터 사냥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36권에 이르는 책을 쓰기도 한 ‘증 기 기관차처럼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이름의 이니셜 만으로도 알았던 최초의 유명인 대통령이었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의 권한을 매우 많이 확장했다. 그는 대중매체 의 영향력을 전적으로 이해했던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정부, 대기업의 불가피함, 외교 정책에 있어 적극적인 미국의 개입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연설했던 백악관 강단을 ‘나쁜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1914년에 펜실베이니아 알렌타운의 알렌 호텔 발코니에서 연설하고 있다(PD).

강단’이라 부르기도 했다. 루즈벨트는 부커 워싱턴을 백악관 만찬 에 초대한 자리에서 인종에 대해 매우 감동적인 대중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하인 외에 흑인이 백악관에 초대되었던 적은 한 번 도 없었다.

토론 문제 루즈벨트 대통령은 어떤 방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했고, 왜 진보주의 시대에 그와 같은 대통령이 큰 인기를 얻었는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왼쪽)와 시에라 클럽의 설립자이자 자연 보호가인 존 뮤어가 1906년에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서 있다 (LOC).

7) http://www.digitalhistory.uh.edu/disp_textbook.cfm?smtID=2&psid=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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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진보주의: 신문팔이와 추문 폭로자들

5과

5과

소득세 기간: 1900년대 연방 소득세는 1913년 처음 나왔다. 현재 연방 정부는 연방 소득세를 통해 주요 수익을 얻

는다.

연방 소득세는 소득에 근거해 세금을 내는 최 초의 연방 세금이었다.

1866년에서 1893년까지 연방 정부는 관세 및 내국 소비세로 인해 흑자 경영을 했다. 북부의 공화당원들은 보호 관세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지지했다. 이들은 높은 관세가 산업화와 도시 화를 촉진하고, 높은 임금과 이윤을 창출하며, 농부와 제조업자들에게 풍요로운 시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887년부터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이끄는 민주당원들은 관세가 부 유한 산업주의자들의 이윤을 위해 소비자들이 부담하는 세금일 뿐이라 주장했다. 이들은 관세가 물건 값을 올렸 고, 외국으로 하여금 미국 농산물 수출에 대해 보복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적 신뢰의 성장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1894년, 정부는 남북 전쟁 이래 최초로 적자 경영을 했 고, 단기 소득세를 법으로 제정했다. 이는 1895년에 다 시 헌법에 위반되는 일이 되었다. 대법원이 이 법은 세금 이 각 주 사이에 할당되어야 한다는 헌법 조항을 어기고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1909년 4월, 남부와 서부 의원들은 새로 바뀐 대법원 인사들이 승인해 주리라 희망하며 또 다른 소득세 법안 을 제출했다. 상원 투표는 77표 대 0표였고, 하원 투표는 318표 대 14표였다. 대법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분명 소득세는 헌법에 위반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1912년 선거에서 민 주당의 우드로 윌슨과 제3당 후보자 시오도어 루즈벨트 는 승인된 헌법 개정안인 소득세를 지지했다. 이렇게 해 서 소득세가 계속 존재하게 되었다. 새로운 연방 소득세는 그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 고, 겨우 0.5%의 인구에게만 적용되었다. 이들은 개인 소

의회가 “세금을 부과하고 거둔다”는 헌법에 대한 개정안(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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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득의 1%를 세금으로 부과했다. 4,001달러 미만의 소득을 가진 부부들은 세금을 면제받았다. 20,000달러의 소득부터 적용된 누진 소득세로 소득이 500,000달러가 넘을 시 세금은 6%로 올 랐다. 1939년에는 겨우 390만 명의 미국인만 세금 보고를 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나자 4,260만 명의 미국인이 세금 보고를 하게 되었다. 이 수는 75년간 더욱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은 단 한 번도 소득세를 내지 않았다.

토론 문제 이후 몇 십 년 동안 소득세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예상해 보라.


3장 1900~1914년: 위기 직전

드레드노트의 일종인 영국 해군 전 함 오데이셔스호가 기뢰에 맞은 후 가라앉고 있다. 1914년 10월(CCASA3.0).

먼저 생각해 보기 “이 전쟁은 무엇인가? 이 전쟁은 진흙, 참호, 피, 쥐, 이, 폭탄, 고통, 철조망, 썩 어 가는 시체, 가스, 죽음, 비, 고양이, 눈물, 총알, 두려움, 그리고 우리가 한때 믿 었던 모든 믿음의 상실이다.”1) 당시 예술가 오토 딕스가 했던 이 말에서 우리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의 환멸을 느낄 수 있고, 이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었는지 엿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은 그저 서로 죽이는 전쟁 그 이상이었다. 이 전쟁은 인류가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소망을 모두 잃어버린 전쟁이었다. 이 전쟁 은 섬뜩한 세계사의 전환점이었고, 이후 세계사에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 어떻게 해서 온 세계는 이와 같은 대참사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두말할 필요 없 이 매우 악했던 이 세계적 재앙에 말이다. 이 전쟁 때문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전쟁이 이뤄 낸 것도 없었고, 해결한 문제도 없었다. 물론 이 전쟁으로 기뻐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

3장의 학습 목표 3장에서는 대재앙이었던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자세히 알아보자. 근대주의자 들의 비전이 인간의 이기심 앞에 얼마나 비참하게 실패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전쟁에 대한 이들의 근거 없는 믿음을 살펴보고,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촉발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자. 또한 어느 누구도 1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결코 예상할 수 없었다는 점도 알게 될 것이다. 군사주의와 무능력한 국가 정부가 1차 세계대전의 두 가지 주요 원인이었음을 살펴보고, 이 점에서 독일인 이 가장 큰 비난을 받을 만하다는 사실도 살펴보자. 3장을 공부한 후 다음을 수행해 보라.

주요 단어

1.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왜 모순적인 일이었는지 설명해 보라. 2.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원인이 독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보라.

문화 투쟁

3. 1차 세계대전이 이전의 유럽 전쟁들과는 달랐다는 점을 이해해 보라.

드레드노트 전함 1) http://history-world.org/world_war_on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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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4. ‌ 여러 유럽 정부를 분석해 보고, 1914년에 이 정부들이 그토록 무능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라. 5. 미국이 1914년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아닐지를 평가해 보라.

1과

1과 한때 우리가 믿었던 모든 믿음의 상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 중동, 그 외 다른 지역의 나라들 이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 4년에 걸친 이 전쟁으로 세계의 주요 세 력들이 맞붙었다. 대표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가 연합국 과 싸웠는데, 연합국으로는 대표인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러시아, 이 탈리아, 일본, 1917년부터는 미국이 참여했다. 이 전쟁은 주 세력국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이전에 거의 볼 수 없었던 규모의 살육과 대학살, 파괴가 일어났다. 또한 전례 없던 야만적 행위들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되

포지에르를 통해 바폼으로 가는 주요 도로의 지반이 흉측하게 벗겨져 있다. 통신 용도의 참호와 부러진 나무가 보인다. 1916년 (PD).

었다. 이 전쟁으로 네 개의 커다란 왕조( 독일, 왕조 ) 가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의

멸망했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으며, 유럽 사

회 안에 불안감이 생겨 2차 세계대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후와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전쟁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전쟁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역 사학자 로버트 기세프의 설명처럼 한 가지 점은 분명해 보였다. “당시 만연하던 민족주의가 무 능력한 독일 지도자 카이저 빌헬름 및 잘못 형성된 연합국 체제와 결합되었는데, 이 점이 이 전 쟁의 중심에 깔려 있었다.”2) 분명 독일이 이 전쟁의 핵심적 원인이었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유럽의 민족주의적 자 부심이 1914년 연합국 체제와 결합되면서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당시 유럽의 이류 권력으로 잘 발전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이 사실을 인정 하지 않고 최소한 발칸 지역 점령은 유지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며 주장했다. 그래서 오스트리 아 대공이 암살되자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할 구실로 삼았다. 세르비

2) http://history-world.org/world_war_one.htm.


3장 1900~1914년: 위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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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전쟁은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이 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조약 때문에 러시아와의 전쟁은 곧 프랑스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 조약 때 문에 프랑스와의 전쟁은 영국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섬뜩한 모순 속에서 세계는 스스로 친 덫에 걸려들어 전쟁으로 향했다. 독일의 카이저는 연합국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 체제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 에 생겼는데, 그는 독일에서 유일하게 연합국 체제를 이해했던 사람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권 력에서 제거했다. 비스마르크는 언젠가 유럽을 전쟁으로 집어넣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 고 발칸 지역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유럽은 그 길을 택했다. 이 전쟁은 목적 없는 전쟁이었고, 선의도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천만 명이 죽었고, 네 제국이 멸망했으며, 2차 세계대전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기까지 했다. 이 전쟁은 헛된 평화를 위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다.3)

토론 문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모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2과 근대 세계의 정신 희망에 가득 찬 낙관주의인 근대주의를 그토록 찬사한 근대 세계의 정신이 결국 폭력적 근대 주의의 종말을 야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인류가 바벨탑을 쌓 고는 이 탑을 무너뜨릴 신들을 초청한 것과도 같았다. 모드리스 에크슈타인은 자신의 책 『봄의 제전: 1차 세계대전과 근대 시대의 탄생』에서 1차 세 계대전이 근대 역사와 의식에서 중심축이 되는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에크슈타인의 주장은 근대 세계에는 삶과 예술이 함께 섞여 있었고, 이 시대에 미학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주의자들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를 확실히 알 지 못했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이와 같은 이념이 가장 잘 표현되 었던 국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델이 되어 줄 가장 탁월한 근대주의 국가로 지적한다. 에크슈

3) 위와 같음.

2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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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타인에게 1차 세계대전은 구세계의 질서( 이성, 논리, 전통 의 이념 계몽에 기초했고, 일차적으로는 영국, 일부는 프랑스가 표현했던 질 서)와

이 구세계 질서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분

투하는 근대 세계의 새로운 이념, 즉 독일과의 충돌 이었던 것이다. 비록 독일이 전쟁에서는 졌지만 독일 사회를 특징짓는 여러 사상이나 사고방식이 점점 승 리했고, 근대 의식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 시 말해, 독일은 총의 전쟁에서는 졌지만 문화 전쟁 에서는 승리했다.4)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레만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첫 공연 당시 무용수들의 모습으로 의상과 무대 배경은 니콜라스 로에리치가 디자인했다. 1913년(PD).

하우프트는

( 1989년 3월 13일에 )

에크슈타인이 이 전쟁을

비유하려고 1913년의 러시아 발레 <봄의 제전>을 사 용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다음에 전쟁 직후 사람들, 특히 독일 사람들이 주로 어떤 의견을 가지 고 있었는지 자세히 관찰해 말한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의 분석은 거의 전적으로 전쟁 이전 과, 난폭하고 처절했던 전쟁 기간에 일반 사람들이 표현했던 사고방식과 이념에 초점이 맞추어 져 있다. 전쟁 이후에 대해 그는 전쟁이 세상을 바꾼 방식에 대해 통찰력을 주는 두 가지 문화적 현상, 즉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한 린드버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현상과 『서부전선 이상 없다』 라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전쟁 도서가 성공을 거둔 현상에 집중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독 일이 나타낸 이상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파시즘과 사회주의( 나치즘 ) 와 같은 이념을 만들어 냈는지 분석하며 글을 마친다.5) 에크슈타인은 정곡을 찌른다. 그는 양편이 전쟁 중 가졌던 비이성적인 기대와, 임박한 갈등에 대한 소식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열의를 지적하며 말한다. 전쟁의 시작이 여러 사람이 생각하 는 바와 같이 당시 일반적이었던 세상의 낭만적 관점이 갑자기 끝났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양편이 여전히 가지고 있던 태도를 잘 보여 준다. 독일인들은 당 시 참호 속에서 불을 켜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했고( 잠재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 양편 사이의 휴전은 즉 석에서 이루어졌으며, 영국인들은 이 전쟁을 마치 스포츠처럼 여겼다. 전쟁이 극심한 상태로 치 닫게 된 후에야 이들의 이런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변화가 일어난 후, 한때 존재했 던 근대주의는 끝났다. 1차 세계대전 후 근대주의는 완전히 형편없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변해 1960년대의 반문화 저항을 직접적으로 이끌었다. 확실한 것은, 기독교에 그토록 많은 불행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이 형편없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근대주의였다는 사실이다. 스콥스 재판의 사례나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부했

4) Modris Eksteins, Rites of Spring, The Great War and the Birth of the Modern Age (Toronto: Key Porter

Books, 1989), discussed in http://www.allempires.com/article/index.php?q=The_Rites_of_Spring. 5) Christopher Lehmann-Haupt, “Books of The Times; Modernism: Rites of Spring, rites of Destruction,”

March 13, 1989, http://www.nytimes.com/1989/03/13/books/books-of-the-times-modernism-ritesof-spring-rites-of-destruction.html.


3장 1900~1914년: 위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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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당시의 현상을 보라. 실제로, 1차 세계대전으로 사람들은 버리지 말아야 할 본질까지 버렸지 만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듯한 근대주의는 신중한 낙관주의를 옹호했지만, 사실 여기서부터 미국 사회에 오늘날까지 팽배한 깊고 악의적이며 진정한 절망이 나타났다.

토론 문제 한 비평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으로 믿지 않는 사회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 세상의 고도 문명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사회다. 우리 가 사는 시대는 모든 이론과 가치가 어느 정도 진실을 갖고 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는 않은 불확실의 시대다. 에크슈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해방이라는 것은 단순히 해방을 요 구한 독일적 사상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고, 새로운( 또는 옛 ) 이념이나 생 활 방식이나 가치를 19세기 사회의 근간이었던 계몽주의 때의 생활 방식이나 가치와 마찬가지 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라 할 수 있다. 근대주의 인간이 어떤 것에도 확신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한 결과는 바로 죽음과 운동( 또는 변 화)과

새로운 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화( 근거 없는 믿음 ) 는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들이 근대 사람들, 즉 무엇을 믿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 하는 이들의 삶에서 빠져 버린 신비로움과 의미를 이들에게 다시 채워 주기 때문이다.”6) 신화란 무엇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신화는 무엇인가?

3과 독일 제국 의견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독일에 있다고 생각 한다. 1914년, 당시의 독일 제국은 1875년의 프랑스-독일 전쟁 이후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독일은 그 전쟁에서 매우 쉽게 승리했고, 더욱 성공적인 해외 식민지 확장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어떤 점에서 독일은 영국처럼 헌법 군주제 국가였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민주주의가 잘 실행 되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영국과 매우 유사한 의회를 갖고 있었다. 한 의회의 의원들은 전부 임 명받은 의원으로, 또 다른 의회는 전부 투표로 당선된 의원으로 되어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 크는 25세 이상의 남자들이 선출한 사람들이 한 의회의 의원이 될 수 있게 했다. 독일 제국을

6) http://www.allempires.com/article/index.php?q=The_Rites_of_Spring.

3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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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이끄는 사람은 카이저로, 프로이센의 왕이었다. 오토 폰 비스마 르크의 정책은 전통적 토지 소유자와 지칠 줄 모르고 성장하던 사업가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많았다. 독일은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좋은 장비를 갖춘 군대를 갖고 있었다. 이 군대는 대부분의 자금을 독일 의회에서 지급받던 러 시아 군대 다음으로 컸다. 독일 군대가 효율적이었던 주요 요인 은 독일의 군사 지휘 지도자들 덕분이었는데, 이들은 정말 일류 였다. 1870년 스당 전투 이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세의 모습(PD).

당시 독일 영토는 우리가 현재 아는 독일 영토와 같았다. 슐레 지엔, 동부 프로이센, 서부 프로이센, 남부 프로이센, 알자스로렌, 벨기에 일부가 이에 속했다. 또한 독일은 아프리카 토고, 나미비아, 탄자니아, 콩고 북부에도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태평양 일대에도 여러 식민지를 갖고 있었다. 독일의 경제는 단연 세계에서 가장 탄탄했다. 1871년에서 1914년까지 독일 산업은 매우 빠르 게 성장하고 있었다. 1914년 이전, 독일은 그 전까지 세계 최고의 철강 생산국이었던 영국 제국 전체의 생산량보다 더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 점을 상당히 불편하게 여겼 고, 독일의 부상에 위협을 느꼈다. 1871년에서 1914년까지 독일의 인구는 6,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독일 산업은 호황을 누렸 고 예술은 번창했다. 사람들이 점점 독일을 하나의 통일 국가로 보면서 민족주의는 더욱 깊어 졌다. 사회당과 중산층을 대변하던 민족 자유진보당이 독일 제국에서 중요한 정당이 되었다. 1872년에서 1879년 사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을 희석시킬 목적으로 일련의 개혁을 펼쳤다. 이것을 문화 투쟁이라고 한다. 뛰어난 군사력과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아직 연약한 나라임을 깨달은 비스마르크는 계 속 이해 못할 동맹국을 만들어 나갔다. 어떤 이들은 이 일이 마치 독일을 죽어 가는 동물들, 즉 쇠퇴하던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묶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동 맹국들은 자신이 정복할 수 없는 상대와는 전쟁을 치를 의도가 전혀 없던 비스마르크에게 충성 스러웠다. 만약 비스마르크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그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가만두지 않았 을 것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 카이저는, 연약한 동맹국들에게 묶여 있었음에도, 유럽 전체에 대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모든 이를 유감스럽게 만들었다.7)

7) http://history-world.org/world_war_on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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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900~1914년: 위기 직전

토론 문제 독일이 거의 확실히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원인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4과

4과

군사주의 1914년 당시 유럽은 전쟁을 외교 정책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짧고 효율적인 전쟁은 지난 천 년 간 국가의 이익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 이 되었던 것이다. 30년 전쟁처럼 지나치게 길었던 전쟁도 몇몇 있 었고, 프랑스 인디언 전쟁처럼 사상자도 많고 비용도 많이 든 전쟁 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짧았고, 규모가 작았으며, 그 효 과도 비교적 좋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승자와 패 자 모두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프로이센( 독일 ) 이 얻은 것도 적었 지만 프랑스가 잃은 것은 그보다 더 적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럽인 들은 위신을 위해 전쟁을 했는데 질 경우라도 이를 다시 쉽게 회복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유럽인 그 누구도 다가오던 재난에 대해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인은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이 전쟁을 예전의 전쟁처럼 사상자가 적고, 화려한 깃발이 나부끼며 용감하게 싸우고, 손주들에게 해 줄 무용담이 많은 전쟁 정도로 생 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제 무기가 군사 전략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었다는 점이 었다. 이 문제는 라이플 총과 라이플 대포가 전투원 5명 중 1명을 죽 였던 미국 남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군인들은 당시 한 줄로 질서 있게 정렬한 후 모두 죽었었다. 또한 부정확한 머스킷 총

1912년, 미국 퀸시의 조선소에서 일류 수준의 아르헨티나 리바다비 아호가 건조 중에 있다(LOC).

과 활강포 대포를 사용했던 미국 혁명에서는 라이플 총이 좋은 효과 를 냈지만, 남북 전쟁에서 이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상황은 달랐는데, 유럽 군사 작전가들이 이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 은 정말 놀랍다. 가장 큰 문제는 독일에서 처음 발명한 기관총이었다. 이 지독한 기계는 1분에 50~60명을 죽일 수 있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도살이었다. 그럼에도 군대는 자신의 무기에 필적할 만한 전략이나 작전을 짜지 않았다. 최소한 아직까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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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점으로 본 세계사 3

또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군대를 좋아 했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군대로 인해 안락 함과 안전함을 느꼈다. 이들은 또한 유럽 전 체에 불어닥치던 민족주의를 흡수하고 있 었다. 유럽의 모든 국가가 군사적이었지만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그랬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 은 때에 이미 그 작은 유럽 안에 거의 600만 명의 군인이 있었던 것이다! 한 국가가 군사

영국 군함 드레드노트, 세계 최초의 거대 전투함이다. 1906년(미 해군).

력을 증강하면 다른 나라들도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국 의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또한 일단 군대를 만들면, 이 군대를 사용해야 한다고 느꼈다. 독일이 영국의 해상 권력에 도전하며 영국을 건드렸다. 섬나라 영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 었다. 독일의 강한 해군이 전 세계 영국의 식민지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태평양 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 위해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 또한 드레드노트라고 하는 거대 전투용 군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1909년에 드레드노트 네 척을 만들기로 계획했지만, 독일이 군함 건조 개수 제한에 거부하자 영국 국민은 항의하며 “우리는 군함 8척을 만들어야 하고, 이 일을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독일은 해군력 경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쟁은 그 지역을 상당 히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유럽 국가들은 모두 육군과 해군을 조직했 다. 1914년, 평화 시(전 쟁 전) 유럽 국가들의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 독 일: 군인 220만 명, 군함 97척 •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 81만 명, 군함 28척 • 이 탈리아: 군인 75 만 명, 군함 36척 • 프랑스: 군인 112만 5천 명, 군함 62척 • 러시아: 군인 120만 명, 군함 30척 • 영국: 71만 천 명, 군 함 185척 1)

또 참작해야 할 요인은 유럽 국가들이 불과 1~2주 만에 군대의 규모를 대폭 증가시킬 수 있 는 훈련된 예비군을 대량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 역사학자는 당시 유럽 국가들이 모집할 수 있는 남성의 인구를( 예비군 포함 )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독일: 850만 명 •러시아: 440만 명 •프랑스: 35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 300만 명 8)

마지막으로, 1914년에 독일 군대는 세계에서 그 규모가 가장 컸고 최강이었다. 하지만 러시 아 군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독일 장군들은 수년 안에 독일 군대가 더 이상 러 시아 군대를 손쉽게 제압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 걱정했다. 1924년에 일어날 기나긴 전쟁보다 1914년의 깔끔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더 좋았었다. 하지만 이와 완전히 다른 결과가 모두

1) http://www.johndclare.net/causes_ WWI2.htm.

8) 위와 같음.


3장 1900~1914년: 위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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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토론 문제 1차 세계대전은 그 이전 유럽의 전쟁과 왜 그 성격이 다른가?

5과

5과

정부의 실패 유럽의 정부는 민주주의 정부조차 외교 정책과 정치 분야에서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근대 주의와 진보주의 속의 정부는 혼란 가운데 있었고, 1914년 6월에 발생한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회주의, 볼셰비키 사상( 과격주의 ), 특히 무정부 상태는 유럽 정부들을 약화시켰고, 유럽 정부들은 발칸반도에서 폭발한 위기를 적절하게 완화시킬 수 없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났던 자유주의, 민족주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민주주의를 시행 하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았다. 국민이( 한 지배자나 몇 명 의 공직자가 아닌 )

전쟁에 동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전제 정치나 군주제에서는 그와 같은 대중

적 지지가 필요 없었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바대로,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는 동맹국 중심의 군사적 외교 정책이 가 져올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 예로, 카이저 빌헬름이 진심으로 의혹과 불안감을 갖긴 했지만( 그는 이 점에 대해 자신의 사촌 러시아 황제와 이야기 나눈바 있다 ), 독일은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 리의 제안을 거부할 만한 도덕적 용기가 없었다. 이도 모자라, 독일은 약하고 제 기능을 못하는 또 다른 정부들과 손잡으며 자신에게 족쇄를 채웠다. 오스만 제국과 터키는 동방 유럽의 환자들이었다. 한때 터키는 발칸 지역을 지배했고, 이곳을 안정시켰고 이슬람교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터키가 쇠퇴하면서 민족적, 종교적 성향의 전쟁이 여럿 발발했다.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철도 발명 이전부터 계속 그 정부가 건강하지 못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문제는 이탈리아가 너무 어린 신생국이라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는 아직 연합되지 못했고, 정부가 연약했고, 군대는 힘이 없었다. 큰 곰 러시아는 거대했으나 퇴보 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약하고 무능한 지도자였으며, 그의 부인과 부인의 하인 라스푸틴 은 그를 쥐고 흔들었다.

입헌 군주제는 사실상 민주주의이며, 영국의 경우에 거대한 입헌 군주제 제국을 형성하 기도 했다.


기독교 관점으로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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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자연법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김남국 옮김 760쪽 40,000원

The Modern Age to Present 1900 AD to Present

없는 문제로서 학생들로 하여금 본문을 떠나 스스로 사고하도록 유도합니다. 3. 주 1회 시험: 교사 안내서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두 개의 시험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4. 학생이 할 일: 이 과정을 수료하는 데 필요한 책임감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학생들은 매일 주어진 본문을 읽고, 읽은 내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제출해 평가받습니다. 이 교과과정은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지은이

제임스 스토보(James Stobaugh) 제임스 스토보 박사는 밴더빌트 대학교, 럿거스 대학

제임스 스토보 지음 김희정 옮김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자연법과 두 나라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있습니다.

접 네 자녀를 홈스쿨링으로 가르쳤다.

기독교 관점으로 본

1. 먼저 생각해 보기: 해당 역사 기간에 대한 배경 설명.

4. 역사를 만든 사람들: 역사의 진로를 확실히 바꾼 인물들. 5. 역사적 논쟁: 한 시대나 주제를 둘러싼 역사적 이론들에 대한 검토.

제임스 스토보 지음

2. 토론 문제: 일반적으로 블룸의 분류법(Bloom’s Taxonomy)에 기초한 문제들.

김희정 옮김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박문재 옮김 298쪽 15,000원

히 많이 저술했다. 아내 캐런과 함께 1985년부터 직

3

3. 주요 단어: 익혀야 할 용어, 개념, 이론들을 굵은 글씨로 강조. 대부분이 각 장의 첫 페이지에 나열되어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다. 노련한 학자일 뿐 아니라 홈스쿨링 분야에서 널 리 인정받은 전문가로서 홈스쿨링 학습 도서를 무수

5. 점수: 학생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매주 과제물을 제출합니다.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김남국 옮김 696쪽 35,000원

교, 프린스턴 신학교,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공부하였

세계사

옮긴이

근대에서 현대까지

김희정

(AD 1900 ~ 현재)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SFU)에서 언어학을 전공했고 캐나다 리전트 대학에서 수학했다.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는 밴쿠버 지구촌교회에서 청소년부를 섬기고 있다. 역서로는 『로이드 존스를 말하다』,『태초 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잃어버린 기독교의 보물 교리문답 교육』, 『미친 듯이 바쁜』, 『만화로 보는 진화론 비판』, 『성경신학이란 무

데이비드 반드루넨 지음 윤석인 옮김 288쪽 13,000원

엇인가』(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이해를 이야기하는 믿음 케빈 밴후저 지음 윤석인 옮김 460쪽 27,000원 ISBN 978-89-6092978-89-6092-715-5 ISBN 978-89-6092-712-4 978-89-6092- (세트) (세트)

00,000원 www.rnrbook.com 값 3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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