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리를 모양 있게 하기 위해 모양 없게 되셨고, 그는 우 리의 생명을 위해 죽으신바, 그를 통해 거친 것이 부드러워지 고, 분노가 완화되며, 흑암이 밝아지며, 불의가 의로워지며, 연 약함이 힘을 얻고, 낙담이 위로받고, 죄가 방해받고, 멸시가 멸
* * * 칼
뱅
총
서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시되며, 두려움이 안정되며, 빚이 청산되며, 노동이 가벼워지 며, 슬픔이 즐거움이 되며, 불행이 행복이 되고, 어려움이 쉬워 지고, 무질서가 정돈되며, 나뉨이 하나가 되며, 치욕이 고상함 이 되며, 반역이 굴복되고, 위협이 위협당하고, 매복이 쓸데없
<기독교 강요/초판, 1536>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게 되고, 공격이 공격당하며, 노력이 자제되며, 전투가 전투 대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상이 되며, 전쟁이 전쟁 대상이 되며, 복수가 복수되며, 고통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되었다. 간단히 말해, 긍휼이 모든 비참을, 선이 모든 불행을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삼킨 것이다.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작품선 33권
지옥이 지옥에 갇히고, 사망이 죽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이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작품선 33권
이 고통당하며, 저주가 저주되며, 구덩이가 구덩이에 빠지며,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3
- <올리베탕 성서 서문>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1-4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18,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3
Jean Calvin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Concio Academica , 1533)………………………………………… 6 올리베탕 성서 서문(Préface à la Bible, 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Articles de Lausanne , 1536)………………………………… 44 성만찬 소고(Petit Traité de la Sainte Cène , 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Defensio doctrinae de sacramentis , 1549/1555)… … 94 스캔들 론(De scandalis , 1550)………………………………………………… 150 유언과 두 고별사(Deux Discours d’Adieu , 1564)… ……………………… 288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1537)……………………………………………………………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 ……………………………………………………………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1545)… ……………………………………………………………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1559)………………………………………………………………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61)… …………………………………………………… 359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 144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6 성물론(1543)…………………………………………………………………………………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341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1543)…………………………………………………………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1552)…………………………………………………… 330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1534/1542)……………………………………………………………… 6 재세례파 논박(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1547)… …………………………………………… 348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1537)… …………………………………………………………………………… 6 신도의 처신(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 185 네 편의 설교(1549/1552)………………………………………………………………… 211 세르베투스 논박(1553)… ……………………………………………………………… 298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 333 2. 참고문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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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프의 강연
1 )
기독교 철학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표현하고, 심지어 이해하는 것을 훨 씬 능가하는 위대한 어떤 것으로, 그리스도가 참되고 가장 확실한 행복 을 보여 주려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힘으로 주신 철학입니다. 이것을 통 해서만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또 믿습니다. 이 철학은 자신의 뛰어남과 탁월함으로 세상의 모든 지혜를 무색하게 만들 었습니다. 내가 보듯이, 이 지혜에 뛰어난 사람들은, 사람이 동물을 능가 하는 그 정도로 그 밖의 사람들보다 더 뛰어납니다. 이것이 의심할 바 없 이 그런 이유는,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위대하고 더 탁월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철학이 기묘하고 거룩 하다 할 때 그것은 실로 적합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사람에게 가 져다주기 위해 사람이 되시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불멸의 존재이신 그가 죽을 존재가 되시길 원했다는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남기시는 것보다 더 위대한 방법으로 나타날 수 없으리라고 말 할 때, 확실히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이보다] 더 밀접하 1 ) Concio academica nomine rectoris universitatis parisiensis Nicolai Copi scripta et
recit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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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더 확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변론술, 자연 과학, 윤리, 기타 학문의 유용성을 갈채하고 경탄한다면, 그때 이런 종류의 철학 곧 모든 철학자가 오랫동안 추구했으나 결코 찾지 못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 는 철학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 하는 철학을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 곧 모든 이의 마음을 인준하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영을 약속하는 철학을 말입니다.2 ) 이런 연 구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칭찬할 만한 것으로 판단할는지 나 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의 기쁨과 모든 염려에서의 해방이 추구된다면 ( 이것은 선하고 복된 삶의 생활을 기대하는 요소들임 ), 기독교 철학이야말로 이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마음의 혼란스런 움직임을 억제하기 때문입 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영광과 가치가 이토록 크므로, 나는 그것을 설 명할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이 매우 기쁘고, 나의 현 직책이 이것을 [내 게] 요구한다는 사실로 더욱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항 가운데서, 우리의 강연을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낼까요? 토론의 주제가 이 한 번의 연설에 담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것임이 명백하므로, 나는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읽히는 복음서 구절을 주로 취급하렵니다.3 )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나는 여러 분이 나와 함께 불타는 기도로, 성부와 함께 유일한 참 중보자이신 가장 선하시며 가장 위대하신 그리스도께 그의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춰 달라고 구하십시다. 그 자신이 성부의 영광[이시며 또한 모 든 선의 조성자]이신 것처럼, 우리의 강연도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맛보며, 그를 호흡하고, 그를 우리에게 말하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 오시고, 그의 영적[하늘의] 은혜의 이슬을 우리에 게 뿌려 주시길 기도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저 엄숙한 [그리고 모든
2 ) 원문은 quod sola Dei gratia peccata remittit? spiritum sanctum…pollicetur? 식으로 의문
형이다. 3 ) 로마의 성구집에 따르면, 만성절을 위한 복음서 읽기는 마 5:1-12였다.
코프의 강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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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중 가장 아름다운] 성모송 ( Ave gratia ) 4 ) 으로 가장 복 받은 동정녀에게 문안한다면, 나는 이런 은혜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복음서 구절의 목적이 무엇인지와, 그 목적과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없는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을 설명하고 복음을 설명한 다음, 둘을 비교함으로써 쉽 게 이해될 것입니다.5 ) 그러므로 복음이란 성부 하나님이 모두에게 도움 을 가져다주고 영생을 주도록 보내신 그리스도와 관련한 메시지요, 구원 을 전하는 선포입니다. 율법은 계율 안에 담겨 있어서, 위협하고 짐을 지 우며 아무 호의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위협 없이 활동하며, 사람 을 계율로 끌고 가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를 우 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을 명백하고 정직하게 해석 하길 갈망하는 사람은 위에 말한 설명[율법과 복음에 대한 묘사]으로 모 든 것을 시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취급 방법을 따르지 않는 사 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철학[기독교 철학]6 ) 에 충분히 정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 극도로 사악한 궤변가들 ( Sophistae ) 7 ) 이 빠진 난관입 니다. 그들은 산양의 털에 대해 끝없이 논증하는바, 그들은 싸우고 논쟁 하며 토론합니다 (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전혀 [죄 용서에 대해 4 ) 공관복음 설교에서 칼뱅은 이 구절(눅 1:28)을 “복음의 총화”라고 부른다. 다만 그것이 동정녀
에게만 절대적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이 있던 죽음의 혼돈에서 건져 내시고 생명의 희망과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셨는지 모든 하나님의 자 녀들이 알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실 목적에서” 의도된 한에서 그렇다. 뒤에 그는 이것을 로마 가톨릭의 “아베마리아”의 미신적인 발전에서 조심스럽게 구별한다. 이 훗날의 설교에서, 총장 연설에서 암시될 수 있었던 것을 잘 다듬었음이 명백하다. 5 )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는 IRC 2.11.10 참고. 6 ) Christi (christiana) philosophia.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철학과 기독교 철학의 구분이 이뤄지
지 않는다. 7 ) 소르본의 신학자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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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전혀, 은혜에 대해서도 전혀, 칭의에 대해서도 전혀] 참된 사역에 대해서도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 습니다 ).
설사 그들이 정말로 토의한다 해도, 모든 것을 헐뜯고 더럽히며,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의 궤변적인 법에 가두어 둡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이 모욕과 이 이단들을 팔짱 끼고 받아들이지 않길 바랍니다. 강연이 딴 길로 샜으나, 이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 특별한 구절에 있는 복음의 규범에서 이탈한 것 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계율에 따라 행동하며 [또] 우 리에게 [심령이] 가난할 것과 온유할 것, 마음이 청결할 것, 화평하게 하 는 자가 될 것을 명하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는 우리 앞에 보상을 두[약속하]십니다. 물론 누구도 선물[은사]에 동요되어서 는 안 되고 다만 자유로이 그리스도를 주시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 해야 하며, 지옥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무엇을 해서는 안 되지만 말입 니다. 이런 생각들은, 말하자면, 그물을 통해 8 ) 하나님의 철학을 읽는 사 람들, 그것을 자기들의 윗입술로9 ) 시험해 보되 복음을 증진시키는 일 은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바울의 말을 사용하면, 그들 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나 우둔한 자가 된 것입니다[롬 1:22]. 복음은 오히려 가 장 두터운 어둠을 쫓아 버리고 우리를 암흑에서 해방해 주어, 한때 육신 의 눈으로만 볼 수 있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는 그의 마음의 눈을 열 게 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세를 위해 기록된 충분히 명백하지 못한 계율들을 여기서 [이 구절에서] 더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 니다. 따라서 이 복음은 어떤 명령도 부과하지 않고, 오히려 [다만] 하나 님의 선하심과 그의 긍휼과 은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가 “선물”을 “보상”이라는 말과 같게 사용한 것에 놀라지 마십시
8 ) Cicero, De oratore 1.35.162; 참고. Erasmus, Adagia 3.1.49. 9 ) Erasmus, Adagia 1.9.92f; 참고. Seneca, Epist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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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10 )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잠시 여러분의 온전한 주의를 내게 기울여 주십시오. 보상이란 말 은 매우 자주 하나님의 은택을 의미하는바, 설사 이 두 가지가 다른 이유 로 우리에게 온다 해도 말입니다. 이 말은 물론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 이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 리의 의무가 우리의 능력을 훨씬 앞서는 반면, 의무는 또한 능력을 배상 하고 “보상”이라는 말로 일컬어집니다. 이 점에서 한 가지 비유를 사용 한다면, 모든 문제가 더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한 아들이 자기 힘을 다해 부친을 기쁘게 해 드리려 애쓰며, 부친을 향한 자신의 모든 의 무를 다 갚는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 아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받 게 될, 유산을 상속하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이것 을 “보상”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빚을 갚기 때문이 아니라, 부친을 향 한 아들의 의무를 완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아주 흔히 사용 된 “보상”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것과는 달리 영생을 “지불”로 이해하 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영생이 우리의 선행의 대가라거나, 우리의 선행 이 영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단언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있 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서의 이 특별한 문구에서, (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도 마 찬가지로 )
그리스도가 자신의 은혜와 친절을 우리의 눈앞에 두시고 계시
며, 어떻게 율법을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모세의 가르침을 올바르 게 해석하고 계심을 우리 모두 깨달아 압시다. 마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마 5:1-3].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하오니, 들으시
오, 그리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유별난 은혜에 대해 명상하십시 오. 하나님은 우리가 더 이상 흑암 속에서 졸고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
10 ) 제네바 사본은 이 문장 중간에서 끝난다. 참고. CO 9.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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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시고, 깊은 잠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며, 우리 안에 있는 거칠고 불완전 한 것을 다듬고 완전하게 하십니다. 옛사람들에게는 이방 신들을 가져서 는 안 된다는 명령을 주셨습니다[출 20:3]. 그들은 가장 깊은 무지 상태 에 있었고 영적으로 그토록 불완전했으므로, 우상에 대해, 어떤 것을 하 나님으로 취해 경배하지 않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지 금 우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악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열방의 우상은 은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시 135:15 이
하].11 ) 설사 그들이 우상들에 대해 가장 참되고 가장 확실하게 안다고 여 긴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만족시키지 못합니다[그것은 여전히 만족스 럽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어떤 것에도, 어떤 피조물에게도 위탁되는 것 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는 인간이 사물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마 음으로 주님께만 가까이 해야 할 것과, 어떤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돌리 지 말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는 모든 인간적 행복을 경멸하고 인간적 명 예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우리를 부추기십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하 나님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고, 육으로 영을 이기게 하지나 않는지 두렵 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자기 동료들보다 지위를 더 높이길 원하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람들 가운데서 존경받기 위해서라는 잘못된 이유 로, 내가 “하나님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이 누구 입니까? 인간적 행복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복음의 진리 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어리석고 하찮은 것으로 사람들을 기쁘 게 하길 더 좋아하지 않는 이는 누구입니까? 오 인간의 기괴한 어리석음 이여, 오 헛된 영광이여! 우리는 하나님이 심장과 폐부를 살피신다[시 7:10; 계 2:23]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가요?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이 영혼을 온 통 파괴해 지옥에 보내실 수 있음[마 10:28]을 모르는가요? 야수처럼, 그토 11 ) 우상에 대해서는 <기독교 강요>(1541) 184-194쪽 참고; 루터, <교리문답에 관한 설교: 십계
명>, 루터선집, 10권, 컨콜디아, 1987, 472쪽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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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어리석게도 다만 현재의 것에만 동분서주하는, 오 짐승같이 어리석 은 인간들이여. 다시 말하거니와,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줄 알지 못합니까[롬 14:10 참고]? 우리가 이 점을 명백 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력을 경건 12 ) 에만 곧 영에게만 쏟아 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재난, 질병, 고난, 시련 등과 함께 훈 련하시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롬 8:35 참고]. 그리스도가, 애통하는 자[마 5:4], 자신의 능력에 절망하는 자, 그럼에도 정직한 삶을 갈망하 고 모든 것을 시도하며, 모든 노력을 다해 덕 있는 자가 되려 할 뿐 아니 라,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더 나은 삶과 의를 받아들이게 하는 자들을 복 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 른[마 5:6] 자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속일 수 없을진대, 그들은
그 의로 배불릴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의 양심에게 죄의 용서에 대해, 하나님 의 사람에 대해, 또한 그들을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일에 대해 확신 시켰다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이 상 기쁜 일과 이 이상 좋은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깊은 오류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양심에 의심이 있을 때, 실로 무슨 예배와 무슨 경건과 무슨 종교가 있 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로마서에서, 그들의 양심 으로부터 모든 의심을 쫓아 버리기 위해, 화해와 칭의가 우리 자신의 가 치나 공로에 달려 있지 않음을 많은 논증으로 주장합니다. 그는 시편 [시 32:1-2]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 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
12 ) Pietatis를 칼뱅 신학의 한 가지 풀이말로 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Battles가 근거로 내세운 기
독교 강요(라틴어 최종판)의 Iohannes Calvinus Lectori 내용 가운데 sinceram pietatis doctrinam은 다음 해에 나온 프랑스어 최종판에는 la pure doctrine qu’il(=Dieu) nous a apprise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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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도다[롬 4:7-8]. 그런데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의에 대한 긴 숙고 끝
에,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 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 라[롬 3:27-28]. 그러나 그가 4장 초두에 쓴 것보다 더 명백하게 진술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 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 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롬 4:1-3]. 그리하여 바울은 우
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고 논증합니다[롬 4:23 이하 참고]. 이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 문제가 우리의 도덕 적 또는 의식적 행위의 가치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불확실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확실한 새 복음을 가르치는바, 그것은 복음과 관 련해, 우리에게 호의적인 하나님이 되기 위해 다만 갚아야만 하는 율법 이 뛰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3 ) 율법도 하나님의 자비를 언급하 나, 다만 ‘율법이 충족된다면’이라는 한정된 조건에서 그러합니다. 복음 은 죄의 용서와 칭의를 아낌없이 제공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에 게 용납되어 온 것은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채웠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 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이와 같은 용서를 의심한다면, 그는 경 건하게 살 수 없으며, 스스로 지옥 불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만일 주님이 신자들의 육체의 악덕과 관계하신다면, 그는 오직 믿은 자 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죄 를 용서하실지 안 하실지에 대해 불확실하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 가 운데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됩니다[고전 15:19 참고]. 내가 잘 알기로 동물 인간[육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이나 미움 13 ) Novum quiddam docet evangelium quod lex praestare non potest, quo modo certi
reddamur, Deum nobis esse propitium. Battles의 영역판에는 이 문장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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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치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전 9:1].14 ) 바울의 말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받지 못하나,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하고 지각합
니다[고전 2:14-15].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모두 복음 전체를 뒤엎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매장하고, 모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파괴하 는 것입니다. 의심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경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음과 같은 믿음으로 나를 인도했습니다. 곧 의심보다 더 큰 어 떤 악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언제든지 의 심이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힌다면, 우리는 주여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심령이 가
난한 사람들이”[마 5:3] 슬퍼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마 5:6]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절망한다 해도,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죄의 용서 와 칭의에 대해 확신하는 것입니다.15 )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9]. 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
이 참여하고 있는 얼마나 가치 있는 노력입니까! 화평과 평화보다 더 좋 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너무 큰 평 화를 이루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원 건축에 엄청난 열정으로 준비 를 다 했을진대,16 )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보존을 위해, 불화하는 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일치를 가져오기 위해 얼마나 더 일을 해야겠습니까! 이방인들은 평온하게 살기 위해 평화를 구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아 들임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위대하고 더 훌륭한 것을 기대 합니다. 이들은 주로 영적 화평 ( 이것 없이는 세상의 평화란 헛되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 는 ) 을
얻기 위해 일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외부의 악을 제거하는 데 있습
14 ) IRC 3.2.38. 15 ) 구원의 확신은 루터로부터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의 바울-아우구스티누스적 부흥의 특징적
표시다. Battles는 그 증거로 <왕께 드리는 서한>을 든다. 16 ) 평화의 사원에 대해, Suetonius, Vespasianus , 9; Josephus, Jewish War ,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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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요 14:27 참고]. 그것은 겉으로 선한 것 속에 있고, 친한 이웃과 함 께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하는 불화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 있는 곳에 어떻게 세상 의 평화가 오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평화에 두는 자들, 교회에서 모든 분쟁을 제거하며, 만사를 진리의 말씀으로 부 드럽게 하고, 결코 위협으로 행동하지 않는 자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 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고문한다 해서 그렇게 행동하 게 [마음이] 움직여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최고 지도자, 곧 이 방인들과 유대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 그들을 자 신의 말씀으로 이끄시길 더 좋아하신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지 않겠습 니까? 오, 지금과 같은 불행한 시대에 교회의 평화를 다시 일으키기 위 해 우리가 검보다 말씀을[마 10:34 참고] 사용한다면 좋으련만! 하나님 말씀이 사탄을 이기든가 사탄이 이기든가, 명백히 둘 중에 하나이기 때 문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 니라][눅 11:21, 22]. 그 “더 강한 자”는 그리스도이지 인간의 이성도, 인
간의 괴로움도 아닙니다.17 ) 끊임없이 불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리 스도보다는 전적으로 부패한 바리새인들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리스 도가 자유롭고 친절하며 준비가 된 마음을 요구하심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 그는 곧 불화 가운데 있는 자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화해시키는 자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더욱 복이 있습니다[마 5:10]. 로마인들은 신념
을 지키기 위해 모든 고문 가운데서 더할 나위 없이 가장 악한 고문을 감내한 인물인 그들의 레굴루스18 ) 를 칭찬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 17 ) 이런 알레고리를 누가 사용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18 ) Atilius Regulus는 자신의 약속을 깨뜨리기보다 차라리 카르타고 사람들 손에 죽은 로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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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믿음직한 소크라테스19 ) 를, 그가 이교의 신들을 멸시했다고 재판에 회 부된 뒤 주저 없이 죽었으므로, 그렇게 충분히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하 지만 그런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 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던 사람들을 복되다고 누가 판단 하겠습니까? 20 ) 선한 사람들을 중상하고 군주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는 자들은 한없이 많으나, 그들을 복되다고 부르는 [성경]구 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이 있 습니다[마 5:10]. 실로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밀접하게 붙어 있는 하나님
의 의를 구하고,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것들과 꿈들을 경멸했습니다. 모 든 말은 복음으로부터 눈곱만큼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의 다음 구절 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 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 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 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이런 이유에서 핍박을
받는 자들은 틀림없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그의 뜻을 밝히는 일에, 그리고 진리 를 선포하는 일에 더 냉담해질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특권과 우리의 명 성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로 말미암 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 희에게 복이 있다[마 5:11].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오히
려 진리를 담대히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1 )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 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살전 2:4; 행 4:19; 갈 1:10]? 몸은 죽이되 영혼은 장군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1539)에서 이 인물을 언급한다(IRC 2.4.8). <기독교 강요> (1541)에는 이름 없이 언급된다(149쪽). 19 ) 참고. IRC 3.24.10. 20 ) 의로운 이교도의 복에 대해 칼뱅과 츠빙글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참고. Zwingli, Exposition
of the Faith , 12. “Eternal Life”[ET: LCC 24, p. 275f]; Calvin, IRC 2.3.4. 칼뱅의 견해가 더 아우구스티누스에 가깝다(Augustinus, De civitate Dei 2.17, 23; 3.17). 21 ) L: Quid igitur dissimulamus, ac non potius verum dici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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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마 10:28; 눅 12:4 이 하]? 오,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신 이 ( 그의 피가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사탄의 족쇄에서 해방시킨 ) 의
이름으로 가장 경미한 고통도 견디지 못할 인간의 배은
망덕함이여! 세상과 악인들은, 신자들의 마음을 복음에 두게 하려고 순 수하고 진지하게 애쓰는 사람들을, 이단과 사기꾼과 유혹자와 헐뜯는 자 들로 부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고 생각합니다”[요 16:2].22 )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용감히 재난을 참으면서, 이 모든 것을 침착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습 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그러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전진합시다. 우리의 전력을 다해 이처럼 큰 행복에 도달하도록 애씁시다. 말씀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음 과 소망과 사랑을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이, 그의 은총을 우리에게 불어 넣으시고 우리의 심령을 열어 복음을 믿게 하시길 [바랍시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마음으로 섬겨야 될 유일한 분임과, 그의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참으며 견뎌야 함을 진정 알게 되길 [바랍시다]. 하나님이 모든 기쁨 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채우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 안에서 이기게 하 시며[롬 15:13] 최후로 하늘에서의 영원한 승리를 축하하길 [바랍시다].
아멘.
22 ) 이 말은 IRC 4.2.6에서 정확히 같게 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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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탕 성서 서문
1 )
라틴어 서문 장 칼뱅이 황제, 왕, 군주, 그리고 제국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문안드립니다
왕의 윤허가 새 책 2 ) 에 적용되는 일이 결정되었는바, 이것은 일찍이 유익이 없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당한 공유 재산도 갖게 했습니다.3 ) 그 리고 아직까지 어떤 책도 책 장식에 대한 규정된 왕의 윤허를 통하지 않 고서는, 출판되지 않았길 바랍니다. 만일 그 윤허가 호의로 얻어지거나 돈으로 확보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는 경솔하게 인쇄공의 소득 에 따라 책을 맡기기보다는 신중하고 정확한 증언에 따라 맡기도록 하 기 위함이며, 모두가 밝히 볼 수 있기에 합당한 책을 있는 그대로 공포하 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쓰고자 하는 저 광적인 욕망은 이런 처방으 1 ) Praefactiones bibliis gallicis Petri Roberti Olivetani. 2 ) 불어 성경 역본을 의미한다. 3 ) “왕의 윤허”는 인쇄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3년간의 전매권을 주어 그들의 투자를 보호했다. 이
것은 1507년에 시행되었으며, 르페브르 데타플의 불어 성경(1530)도 이 혜택을 받았다. 그것 의 표지에는 “황제의 호의와 윤허로”라는 말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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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억제됨이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허다한 책들을 조사해 보면, 이런 욕 망은 아무 절제와 수치심 없이 닥치는 대로 즉시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 니다. 명성에 대한 저 어리석은 욕망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초조하게 했 고 그리하여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는 것보다는 아무튼 업적을 통해 널 리 유명해지길 원합니다.4 ) 이제 국사를 다루는 군주들이 자기들의 극도 로 절제 없는 능력으로 조치를 내리는바, 그들은 좋고 나쁜 책들의 출판 을 마구잡이로 허용할 뿐 아니라, 더 나쁜 책들까지도 그들의 동의로 승 인합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거룩한 작품 ( 성경 ) 은 결코 인간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것은 최근에 출현한 것도 아 니고 인간에 의해 진행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거룩한 작 품이 이런 찬사 ( 이 저속함은 그 존엄을 더럽힐 뿐임 ) 를 간직하고 있다 해도, 실로 그것은 가장 부당하게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왕이요, 천 지와 바다의 주시며, 왕 중의 왕이신 이의 말씀과 영원한 진리야말로 이 윤허의 인가서입니다. 그 말씀이 영광스럽게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고 있 기 때문이며, 또한 온 백성, 온 세대, 온 계층에게 사적 및 공적으로 존경 받는 국가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지키기에 적합한 명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무지한 천민들에게 신비들을 공개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외치는 어 떤 이들의 불충한 목소리들이 들립니다.5 ) 이 사람들은 신비 가운데서 뿐 아니라, 재능과 교리의 요새에서 평생 살지만 결국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경기장에서 자주 물러나며, 이들 중 마지막 결승선에 도달하는 사람은 매우 적거나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교양 학술에 대해 무지한 ( 저들이 이런 언어 사용에 불평한다면 ), 매사에 미숙한 저 불쌍한 바보 들이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로 주님이 4 ) 참고. Erasmus, Adagia 2.4.308-309. 5 ) 이것은 1526년 12월 “규정”(determinatio)에서 에라스무스와 르페브르의 입장을 비난한바 있
는 소르본(파리 신학대학) 사람들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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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의 울타리에서 선지자들을, 어부의 배에서 사도들을 자신에게로 이 끄셨을진대[암 7:14; 마 4:18], 이제 그와 유사한 제자들을 자격 있다고 인정하시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뿐만 아니라, 저 [구태의연한] 신 학 선생들 ( rabinis ) 에게 ( 그들의 마음에 고상함이나 용기가 있는 한 ) 천민들 및 무지한 자들과 함께 배워야 하는 공통된 처지가 수치스러울진대, 지혜로우신 주 님에게[사 54:13; 살전 4:9] 근거를 두기 때문이 아니라면 가장 평범한 자들보다 조금도 탁월하지 못한 이런 스승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얼마 나 수치스러울까요? 하지만 나는 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신분을 폐 기하기 위해 이편에서 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 님에게서 파송된 선지자들, 박사들, 주석자들을 통해 올바르게 가르침을 받을 때 그의 놀라운 호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신실한 백성이 자신 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들을 수 있고 또 교사에게서 배울 수 있기 만을 원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서부터 지극히 큰 자에 게 이르기까지 알려지길 원하시기[렘 31:34] 때문이며, 모두가 “하나님 의 교사”( qeodida,ktouj ) 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며, 젖 뗀 아이들 과 품에서 떠난 아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들은 것을 알게 하시기[사 28:9] 때문이며, 우매한 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마 11:25] 가난한 자들 에게 복음을 먼저 알려 주시기[마 11:5]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학교에서 유익을 얻는 사람들이 모든 계층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모 든 육체에 부어지는 성령에 대해 약속하시는[욜 2:28; 행 2:17] 그의 진 리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이것에 대해 저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이는 하 나님에게 그의 관대하심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마 20:15]? 오, 만일 그들이 빌립보에 예언하는 6명6 ) 의 처녀들이 있던 시대 에 살았더라면, 혹 부당한 방식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 처녀들을
6 ) 행 21:9. 여기 6명은 4명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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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언짢게 여겼을까요? 실로 그들은 마음먹을 때면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강하게 비난하는바, 어째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스스로의 몫 인 양 제시하는 이 본보기들을 통해 아버지를 닮지 않을까요? 히에로니 무스는 공동으로 배우는 여자들을 부당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7 ) 크리 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평민들로 하여금 이런 배움을 취하도 록 권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집에 가는 즉시 교회에서 들은 것을 가 르치도록 말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수도사들보다 마술사들에게 성경 읽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이유이며, 그들이 이 난파된 세대 에 휩쓸린 여러 일과 업무의 조류에서 즉시 건짐 받게 되는 것이 이 피 난처에 머물기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8 ) 순교자 팜필루스는 에 오세비오스에게 칭송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준비된 성경 사본들을 집에 늘 갖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남녀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 유가 통용된 것은 저보다 순수한 시대뿐 아니라 그 후 긴 세월 동안이었 습니다. 백성이 부패하고 돼지의 탐욕에 빠져 그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 로 말미암아 이런 종류의 연구를 소홀히 하기까지 말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 곳에는 폭군이 출현해 백성을 공공 유익에서 차단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마치 누군가가 물과 불, 그리고 기본 원리들을, 그것들을 사 용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백성에게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 니다. 교구 사제들에게는 그들이 양들의 목구멍에서 생명의 양식을 빼내 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큰 잔인함이 있음을 ( 교구 사제들은 인정받고 칭송 받길 원하므로 )
누가 알았겠습니까[겔 34장 참고]?
그들은 “하지만 백성이 그들의 심한 무지로 잘못되거나 깨닫지 못하 는 자들을 타락시키고, 이렇게 음식 대신 돌을 삼킬 위험이 있다”9 ) 고 말 7 ) 참고. John D. N. Kelly, Jerome, his life, writings, and controversies , London, 1975, pp.
91-103. 8 ) Chrysostomus, Homiliae in Genesim 35, 2. 9 ) 르페브르 데타플의 신약 역본 서문에 같은 표현이 나온다(참고. Jacques Lefèvre d’Etaples,
Le Nouveau Testament, facsimile …, 1523 (London, 1970), vol. I, A6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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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매우 경솔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복음은 멸 망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죽음의 냄새요[고후 2:16], 유대인들 에게는 거치는 돌이며, 그리스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 1:23]. 그 러므로 백성이 읽어서도 들어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모든 자들, 즉 유대인과 동시에 그리스인에게 속 한 것입니다[롬 1:16]. 그들은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부딪혀서 깨어 지는 거치는 돌이기에[롬 9:32-33; 사 8:14; 벧전 2:8] 그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영생이며, 아버지께로 가는 유 일한 길이요 진리이십니다[요 14:6]. 그들에게는 이것이 덜 확실하게 보 이므로, 그들은 지금 세상을 고통스럽게 하는 허다한 이단 가운데서, 백 성은 교리보다는 순종에 의존하라고 부언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와 아 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를 부추기어 하늘의 교리에 대한 연구를 했습 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단들을 보고했을 때는 세상이 이단으로 들끓었으 며, 그들은 이런 처방으로 이단에 맞서 백성을 보호했고 이런 방어무기로 백성을 훈련시켰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구 사제들은 백성이 사납고 교만하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성경에 대한 약간의 맛을 보았습 니다. 흔히 교만하다는 말은 자신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평가하는 것, 그리고 신탁에 따르지 않고 ( 혹 꿈으로 뭔가를 깨달았을지는 몰라도 ) 성공을 간구하 는 것으로 여겨집니다.10 ) 그러기에, 그러기에 저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11 ) 이와 같이 옛적에 로마 대제관들과 하급 제관들은 코르넬리우스12 ) 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들이 자신들의 권한으로 여기길 바랐던 공판 날짜를 백성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 말 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연기를 오직 밤에 백성에게 팔 수 밖에 없으므로,
10 ) Erasmus, Adagia 2.2.218-220. 11 ) 참고. Terentius, Andria 126. 12 ) BC 304년경 대제관들의 바람에 맞서 로마 공화국 시민이었던 Cornelius (Gnaeus) Flavius
는 법 행위가 수행되는 날짜를 일반 시민에게 알게 하려고 공판 예정표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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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 빛을 발하는 존재를 참아내지 못한다 해서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정 최악으로 그에게는 이처럼 공개적으로 폭로되고 드 러나야 할 그들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 그들에게는 이따금 풍요의 여신에게 헌신한 자들에게나 심지어 바쿠스 축제에서보다 더 많은 음란함이 있습니다. ) 13 )
좀 더 공정한 것들이 보이길 원하는 어떤 이들은, 평범한 평민이 이 미 출판된 성경 14 ) 을 사용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 웁니다. 이런 [성경] 번역들은 ( 언어의 진실에 따른 방식에서가 아니라 말하는 정확성 자 체에 따른 방식에 의해 걸러짐 )
무지한 자들의 손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니기보다
는 교양 있는 서재에 꽂혀 있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즉 무지한 자 들 중 정확히 이해하는 자는 매우 소수이고 대다수는 실로 새로운 것 때 문에 범죄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뭔가 근본적인 것을 알려 하 는 것이 아닐진대 내가 못 보는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 러 곳에서 인정되고 있는 가장 왜곡된 역본과 비교해 더 순수한 다른 역 본이 필요함을 부인하므로, 그들은 분명한 성령 모독자들입니다. 바울 은 언어의 해석이 성령의 은사임을 주장하고[고전 12:10] 그것이 교회 의 덕을 세우는 데[고전 14:5, 12] 이바지할 것을 기대합니다. 만일 그들 이 이 은사를 멸시한다면 그들은 신성모독자들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 은사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도록 제거하려 한다면, 그들은 적 개심을 가진 불의한 자들입니다. 물론 나는 새로운 더 많은 가증스런 것 들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수확한 농산물은 말할 것도 없고 도토리를 제 외하고는 먹지 못하는 많은 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15 ) 이 새로운 것이 아무 노력의 대가도 없이 명백히 그냥 외부에서 얻어진 것인 한, 그것은 혐오를 받을 만합니다. 이 새것이 실로 매장된 진리를 들춰내는 한, 그 진리를 전적인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가장 수치스런 배은망덕입 13 ) 참고. Augustinus, De civitate Dei , 6:9, 18:13. 14 ) 불가타 성서를 의미한다. 15 ) 참고. Cicero, De oratore 9.31; Erasmus, Adagia 2.7.121,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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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설령 그 새것이 인간들의 조야함에 불과해 혜택 자체에 나쁜 영향 을 준다 해도, 모욕과 혐오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어쨌건 그것이 진리의 대가로 얻어진 것인 한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백성에 대해 염려하 지 않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것을 기피한다는 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래전부터 굶주린 그들은 그런 향연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 들의 악의에게 이런 핑계를 모색하는바, 그들은 자신들의 보화가 손상되 지 않고 온전한 상태에서 더 나은 평가를 위해 백성에게 한두 푼 빼앗기 는 것을 속상해하는 경우 외에는, 가득 찬 보화에서 뒹굴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역자에 대해 조금 말하겠습니다. 그와 나 사이에 있는 무슨 친척관계 16 ) 나, 우리의 오랜 친분관계 때문에 말하는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될 것입 니다. 다만 ( 내가 믿기로 그 자신이 감히 제안했고 시샘 같은 것이 섞일 수 없으므로 ) 그가 근 면, 성실, 노력을 다했고 지대한 성실함으로 이런 번역 일에 숙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성품상 게으르지 않고 박학다식을 결여하지 않은 인물 임을 말해야 합니다. 나는, 다른 의견 때문이건 때로 잠의 긴 활동에 빠 지기 때문이건,17 ) 모든 사람이 만족하지 못할 뭔가가 있지나 않을까 염 려됩니다. 그러나 실로 내가 독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혹 그의 친척 ( 사 위 ) 들을
만나더라도 거룩한 열정이라는 장점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고 비
판하며 비방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부족을 상기하는 편이 낫다는 것 입니다. 이 자유인 출신에게는 기독교 경건과 문예가 어울립니다. 그것 들은 우리의 로베르18 ) 에게서 결코 심히 나쁘지 않은 우아함을 돌려받습 니다. 다른 많은 재능에서도 탁월한 그는 절제로 자신을 극복합니다. 설 령 이 절제와 극도의 부끄러움이 우월한 성품은 아니라 해도, 하나님 말
16 ) 칼뱅과 올리베탕은 사촌으로 알려져 있다. 17 ) 칼뱅이 올리베탕 불어 성경 역본을 교정본 것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편지를 참고하라. 18 ) 물론 올리베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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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의 증인이요 거룩하고 불굴의 사람들인 파렐과 비레19 ) 가 권면과 재촉 으로 그에게 항복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런 책임 있는 거룩한 노력에서부터 자칫 떨어져 나갈 뻔했던 것입니다. 실로 사악한 말에 대 해 아무 근거를 담을 수 없는 자들은, 만일 누군가가 기술을 겨루려 할 경우, 비방하는 기술이 가장 쉬움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의 웅변술 교사보다 광장에서의 여인네들이 그런 기술을 더 잘 사용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실로 나는 저 유명한 희극 대사, 즉 자신의 비방 때문에 역으로 나쁜 말을 듣는 자들20 ) 이라는 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들
은 이 사람 ( 올리베탕 ) 을 지속적인 무례함에 이를 만큼 마음껏 괴롭힙니다. 내가 권고하거니와, 그들은 내가 저 매우 유해한 말재주를 칭찬하길 기 대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를 야유하는 것은 용이[명백]하지만 똑같이 경 쟁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21 ) 는 사실은 평범한 만큼 진실입니다.
19 ) 칼뱅은 파렐과 비레를 표기하기 위해 각각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이용한다. Cusemeth는 라
틴어 far(곡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요, Chlorotes는 불어 vert(초록)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다. 20 ) 참고. Statius, Chrysion , 19-21. 21 ) 참고. Erasmus, Adagia LB 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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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서문 지극히 완전한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탁월한 조성자이신 하나님은, 이 미 더할 나위 없이 감탄할 모습을 다른 피조물들에게서 보이셨을 뿐 아 니라, 특별한 탁월함을 볼 수 있는 걸작으로서 인간을 만드셨다. 사실 그 는 자기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 1:26 이하] 인간을 지으시되, 자기 영광 의 빛이 그 안에 환하게 비췰 정도로 지으셨다. 그런데 인간을 그가 만들 어진 그 상태에 놓아둘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겸손히 항상 하나님의 위 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감사의 행동으로 그 위엄을 찬미하며, 자신 안에서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이 위로부터 온 것임을 보면서, 항상 위를 바라보고 찬양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영화 롭게 했던 데 있다. 그러나 불행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뭔가가 되 길 원하면서, 복이 어디서부터 자기에게 오는지 즉시로 망각하고 무시하 기 시작했으며, 심한 배은망덕으로, 자신을 만드신 이와 모든 은혜의 조 성자를 대적하고 승리하길 시도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파멸에 빠졌고, 첫 창조의 모든 위엄과 탁월함을 상실했으며, 그의 모든 영광을 빼앗겼으며, 자신 안에 있었던 은사들에서 멀어져서는, 스스로 교만해져 서 자기가 선한 뜻으로 들으려 하지 않은 것, 곧 자신이 헛된 존재에 불 과했고 또 능력의 주님이 도와주지 않았던들 자신이 결코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었던 것을 [마지못해]1 ) 자신에게 가르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으며, 또 자기 형상과 모양이 지워지고 자신의 선한 은혜가 밖으로 밀려난 까닭으로 인해, 그가 받아 마땅하듯이, 그를2 ) 자기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 님이 그를 만드사 매우 귀한 자녀처럼 그를 즐거워하고 만족해했던 것 처럼, 반대로 그를 경멸과 가증으로 대하되, 전에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이 1 ) par force. 이 말은 1543년판부터 첨가되었다. 2 ) COC에만 le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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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하게 했고, 그를 즐겁게 했던 것이 화나게 했으며, 부성애적인 인자 한 사건으로 바라봤던 것을 싫어하기 시작했고 후회스럽게 보기 시작했 을 정도였다. 요컨대, 인간은 그 외양과 행위와 생각과 말과 삶과 함께 전적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는바, 마치 특별한 원수와 적대자가 된 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이 렇게 혼란하게 된 뒤로, 인간은 자기의 저주의 씨로 번식력을 갖춰 자기 와 유사한 자손, 곧 악하고 패덕하며, 부패하고, 선이라곤 도무지 없으 며, 악으로 넘치고 풍부한 그런 자손을 낳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사랑이며 자애이신 긍휼의 하나님은,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그의 한없는 선하심으로 사랑하길 원하시면서, 인간 들을 그들의 불의가 요구하는 대로 온전히 없애 버리거나 멸하거나 파 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온유와 인내로 붙드사, 자기에게 돌아와 그들 이 떠났던 그 순종의 상태를 되찾을 기간과 기회를 주신다. 설사 하나님 이, 마치 그들에게서 자신을 숨기시길 원하시기나 하듯이, 그들을 법과 통치와 말씀의 수정 없이 그들의 탐욕과 욕심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 시면서, 은폐하시고 침묵하신다 해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를 찾으며 더듬거려 발견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그의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 록 부추기는 충분한 경고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그리고 만사에, 최고의 주, 즉 자신의 위대함 을 그토록 충분히 높이신 분을 몰랐다고 핑계 댈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 로 명백한 가문의 이름으로 자신의 휘장과 문장 3 ) 을 세우셨다. 이것은 그가 하늘과 땅, 세상의 모든 곳에서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와 영 원성의 영광을 기록하시고 또한 말하자면 새기셨을 때 하신 일이다. 그 러므로 성 바울은 주님이, 자기 말을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까지, 결코
3 ) 가문, 휘장, 문장에 해당되는 blason, enseignes, armoiries는 봉건제나 군주제의 주권을 표현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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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없이 자신을 남겨 두지 않았음을 참되게 말했다. 곧 하늘 4 ) 에서 땅 한복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신의 피조물들이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영 광을 증언하고 전달해, 그들로 하나님을 찾고, 또 그를 발견한 뒤, 그토 록 선하고 능력 있으며 지혜롭고 영원하신 주님의 위엄에 따라 자신에 게 신하가 되는 서약을 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그 들의 이런 추구를 도왔다[롬 1:19 이하]. [이런 식으로], 노래하는 작은 새들이 하나님을 찬양했고, 짐승들이 그의 가호를 빌었으며, 자연의 힘 들5 ) 이 그를 몹시 두려워했으며, 산들이 그의 소리를 메아리쳤으며, 강 과 샘들이 그에게 눈길을 주었으며, 초목과 꽃들이 그에게 웃음 지었다. 비록,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있는 그의 능력으로 지탱되고 보전된다는 점에서, 각자가 그를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있기에, 그를 너무 멀리서 찾 는 것이 실로 합당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 가운 데 자신의 무한한 선함과 인자함을 더욱 충만히 보이기 위해, 우리가 선 포한 그런 교훈으로 그들 모두를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고, 특별 히 어떤 한 민족, 곧 그의 선한 의지와 자유로운 은혜로 지상의 모든 민 족 가운데서 선택하고 고른 민족에게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셨다. 이것 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그는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 의 음성으로 명백하게 보이셨으며, 기이한 일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할 줄 아셨는지 드러내셨다. 그가 이집트 왕 바로의 속박에서 억류되고 억 압받던 그들을 이끌어 내사,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는 그들이 도망할 때, 그들 가운데 있는 피난민처럼 되어 밤낮으로 그들 과 동행하셨다. 그는 사막에서 그들을 먹이셨다. 그는 그들을 약속된 땅 의 소유주들로 삼으시고, 그들의 손에 이김과 승리를 주셨다. 그는 마치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처럼, 분명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길 원하셨고, 그들이 그의 백성이라고 호칭되길 원하 4 ) 여기서 하늘은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세계관에 입각한 닫힌 세계의 하늘이다. 5 ) éléments는 우주의 기본 요소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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셨다. 다만 그들이 다른 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협정 6 ) 하에 말이다. 이런 계약은, 그가 그들에게 준 언약과 증 거에 따라, 확실한 증서 아래서 확고히 되고 인정되었다. 그럼에도 인간 들은, 모두가 자기들의 저주받은 혈통을 느끼고 스스로를 조상 아담의 죄악의 참된 상속자들로 나타내면서, 여러 방식의 훈계에도 결코 마음의 움직임이 없으며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경고한 그 교훈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이 새겨진 피조물들은, 이방인들에게 그것들이 증언하는 이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아무 유익도 주지 않았다. 율법과 선 지자들도 유대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았다. 모두가 빛 앞에 맹인들이며, 훈계 앞에 못 듣는 자들이며, 계명 앞에 강퍅한 자들이었다. 물론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는 수많은 재물과 혜택들에 놀라 고 설득되어, 그런 호의를 베푸는 은밀한 후원자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음 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참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기 는커녕, 자기들의 기호에 따라, 그리고 허망함 속에 있는 자기들의 우매 한 망상과 거짓이 상상해 낸 것에 따라, 한 신을 만들어 냈다. 아니 하나 뿐 아니라, 자기들의 경솔한 오만함이 속이고 주조해 낼 수 있는 만큼 만 들어 냈다.7 ) 그래서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대로, 새로운 신들을 만들지 않는 백성과 영토란 없었다. 이로부터 우상숭배가 자기 왕국을 취하게 되었는바, 이 배신의 뚜쟁이8 ) 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 고, 사람들로 그들 자신이 모양과 이름과 존재를 부여한 많은 우상으로 즐기게 했다. 유대인들의 경우, 비록 그들은 주님이 자신의 종들을 통해 보내신 메시지와 명령서들을 받고 접수했지만, 즉시 그를 믿는 신앙을
6 ) convenance = convention. 7 ) 칼뱅이 쓰고 있는 동사는 위 문장에서부터 forger, feindre, fondre이다. 8 ) 우상숭배를 배신의 뚜쟁이로 부르는 것은 의인화의 시작이다. 매춘으로서의 우상숭배는 호세
아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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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했고, 그에게서 가볍게 돌아섰으며, 그들이 미워했고 후회하면서 따 랐던 그의 율법을 위반하고 멸시했으며, 그의 집에서 멀어져 9 ) 방탕하게 다른 신들을 따라 달려갔으며,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이방인들의 방식 으로 우상숭배했다. 따라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사람들을 하나님께 접근시키기 위해, 새 언약 곧 확실하고 안전하며 깨어질 수 없는 언약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세우고 견고히 하려면, 양 당사자들 사이에 개입하고 중재해 그들을 화합시킬 중보자가 필요했는바, 그가 없었더라 면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 아래 머물렀을 것이고, 인간이 빠져 있던 저주와 비참과 혼돈에서 벗어날 아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참되시고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아들이시요, 우리 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부가 세상의 회복자 ( 그에 게 창세부터 아담이 상실한 것을 다시 찾을 소망이 있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세상은 사라지고 멸망하며 황폐하게 되었을 것이다 ) 로
인간들에게 보내신 분이다. 사실 아담의 파멸 후 즉
시 그에게,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여인의 씨를 통해 뱀의 머리가 부 서지리라는 약속을 주셨는바[창 3:15], 이 말은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탄의 세력이 무너지고 깨지리라는 말이다. 그 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를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실 때[창 12:3], 아브라함에게 풍부히 갱신되었다. 곧 육신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씨에게서 나와, 그의 복으로, 어떤 영 토에 속했든지,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 후로, [이 약 속]은 이삭에게 같은 형식과 같은 말씀으로 계속되었으며[창 26:24], 여 러 선지자의 증언을 통해 자주 포고되고 되풀이되며 확인된 다음,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떤 고난과 죽음을 당하며 어떤 영광으로 부활해, 어떤 왕국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어떤 구원으로 이끌지 매우 큰 확신으 로 충만히 입증하기까지 지속되었다.
9 ) estranger = élo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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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어떻게 태어날지 이사야를 통해 예언되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 하리라[사 7:14]. 모세의 글에는 그 시기가 묘사되었는바, 곧 사람 좋
은 야곱이 이렇게 말했을 때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 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보냄 받을 이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 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확증되었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서 모든 통치권을 빼앗 은 지 대략 37년 만에, 그들 위로 헤롯 왕을 세웠기 때문인바, 이 헤롯은 이두메 사람인 부친 안티파테르 ( Antipater ) 와 아라비아 출신 어머니 사이 에서 태어난 외국인이었다.10 ) 때때로 유대인들에게 왕이 없기도 했었으 나, 그런 때도 통치자와 입법자와 고문관들이 결코 없지 않았다. 다니엘 서에는 [그 기간을] 칠십 주간이라는 계산으로 묘사한 다른 구절이 있다 [단 9:24]. 그의 탄생 장소는 미가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 줬다. 그 는 이렇게 말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 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영원한 날들의 시작에서 부터니라[미 5:2].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짊어져야 했던 고통과, 우리
의 구속을 위해 당해야 했던 죽음에 대해서는, 이사야와 스가랴가 풍부 하고 확실하게 말했다. 그의 부활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특성, 그가 자기 백성에게 가져올 구원의 은혜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스가랴가 풍족히 취급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이 거룩한 인물들에 의해 선포되고 입증된 이 약속들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택함 받은 자들은 안식과 위로를 얻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그의 뜻대로 펼치시길 기다리면서, 그곳에서 그들의 소망을 키웠고 붙들었으며 부양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왕과 선지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 음을 통해 마음과 영으로 이해하는 데 그쳤지만, 그 약속의 성취를 보길
10 ) 헤롯 대왕의 전기는 주로 1세기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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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갈망했다. 하나님은 이 위대한 메시아에 대한 오랜 기다림에서 온 갖 방법으로 그들을 견고히 하기 위해, 많은 의식과 결례와 희생제사가 담긴 기록된 율법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 ( 이분 만이 이것들의 본체요 진리다 ) 를
통해 오게 될 큰 복의 상징이요 그림자에 불과
했다. 왜냐하면 율법은 누구도 완전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고, 다만 초등 교사처럼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했을 뿐인바, 이 그리스도가, 바울이 말하 는 대로, 율법의 목적이요 완성이었다[갈 3:24; 롬 10:4]. 유사하게, 매우 자주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왕들과 군주들과 우두 머리들을 보내사 원수의 세력에서 그들을 건지시고, 평화로 다스리시며, 잃은 것을 되찾게 하시며, 그들의 나라를 꽃피우게 하시며, 다른 모든 민 족에게 이 위대한 메시아 (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힘과 능력이 전개된다 ) 에게 받 은 큰 기적들을 어느 정도 맛보게 하기 위해 그들의 용맹으로 명성을 날 리게 하셨다. 그러나 때가 차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기간이 다 찼을 때, 그토록 약속되고 그토록 기다렸던 이 위대한 메시아가 와서 우리의 구속과 구 원에 필요했던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셨다[갈 4:4 참고].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영토의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는바, 이는 인간이 그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식으 로 메시아는, [이 서문에] 이어지는 책, 곧 프랑스어를 이해하는 모든 남 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법과 따라야 할 믿음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그리스어의 진리와 특성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충 실하게 번역한 책에서, 충분히 담겨 있고 공공연히 나타나 있다.11 ) 이것 11 ) “이런 식으로……신약이라고 불린다”의 문장은 1535년에 쓰인 것이고, 1543년에는 다음과 같
이 바뀌었다. “이것을 천명하기 위해 화해의 기초이자 실체이신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도들 을 세우사, 그들에게 그의 은혜를 세상에 알리도록 명하시고 책임을 부여하셨다. 이제 그의 사 도들은 그들의 의무에 전적으로 전념하기 위해 입의 전도를 통해 그들의 대사직을 수행하는 수고와 근면을 행했을 뿐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의 본을 따라 그들의 교리를 영원한 기념으 로 남기기 위해 글로 요약했는바, 그곳에서 그들은 먼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고 고난당하신 이야기를 기록했으며, 다음으로 이 모든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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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구약과 관련해 신약이라고 불린다. 구약은 그것으로 제한되는 한, 그 자체로는 허약하고 불완전하며, 오히려 폐지되고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언약이며 영원하고, 닳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결코 그렇게 되 어서도 안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보자로서 그의 죽음을 통해 구약을 인준하셨고 확고히 하셨으며, 그의 죽음 안에서 첫째 언약 아래 에 있는 모든 의무 태만의 전적이고 온전한 용서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히 9장]. 성경은 또한 그것[=신약]을 복음, 다시 말해 복되고 즐거운 소식이라고 부른다. 그것 안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유일하고 자연적 이며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사 우리를 입양함으로써 그 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음이 선포되어 있기 때문이다[롬 8:15; 갈 4:5]. 이처럼 그는, 그 안에 우리의 구속, 평화, 정의, 성화, 구 원 그리고 생명이 온전히 있는, 우리의 유일하신 주님이시며,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칭의를 위해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우리 를 그곳에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이름으로 소유 삼으셨으며, 우리의 변호사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언제나 자기 아버지 앞에 계시며, 하늘과 땅의 만물을 회복하기 위해, 왕 ( 모든 이에 대해 주와 스승 이 되시는 ) 으로서
그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것은 모든 천사나, 족
장이나, 선지자나 사도들이 할 수도 없었고, 할 줄도 몰랐던 것이다[히 7장, 8장]. 그들은 이 점에서 명령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많은 증언을 통해 수도 없이 약속된 것처럼, 또한 예수 그리스도도, 다른 사람이 아닌, 오기로 되어 있었고 또 기다려 왔 던 분임이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 없는 증언을 통해 선포되었다. 사실 주 하나님이 그의 음성과 그의 영을 통해, 또한 그의 천사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심지어 그의 모든 피조물을 통해, 이 점에 대해 너무 충 분히 확실하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그의 능력을 거슬려 저항하고 반발 그것에서 어떤 유익을 얻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 주었다. 이 모음집을 신약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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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고서는 항변할 수 없다. 우선, 영원하신 하나님이, 결단코 철회할 수 없는 진리인 그의 음성을 통해, 이 점을 입증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 하는 자라. 그의 말을 들으라[마 3:17; 17:5]. 성령은, 성 요한이 말한 대로,
우리 마음에 큰 증인이다[요일 5:6]. 동정녀 마리아에게 파송된 가브리 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서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본질상 같은 메시
지가 요셉에게도 전달되었다[마 1:20]. 그 후 또한 목자들에게도 주, 곧 그리스도이신 구주가 나셨다고 알려졌다. 이 메시지는 한 천사가 가져왔 을 뿐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에 평화를 선포한 허다한 천군이 인정한 것이다[눅 2:11 이하]. 의인 시므온은 예언의 영으로 이 사실을 당당하게 고백했다. 그는 아이를 팔에 안고 이렇게 말했다. 주여, 말씀하 신 대로 이제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두십니다. 내 눈이 만민 앞에 예비하신 주의 구 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눅 2:29-31]. 세례 요한도 이 점에 대해 적절히 말
했는바, 그는 메시아가 요단강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 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진 이로다[요 1:29]. 베드로와
모든 사도도 구원에 속한 모든 것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모든 것이 하나 님의 참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선 포했다. 주님이 우리 시대까지 증인으로 세운 자들도 그들의 글들을 통 해 이 사실을 상세하게 드러냈는바, 이는 독자들이 충분히 알아챌 수 있 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증거는 하나로 모아지고 서로 일치가 되므로, 그 일치를 통해 이것이 매우 확실한 진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거짓에 는 그런 합의란 있을 수 없다. 어쨌든, 성부, 성자, 성령, 천사들, 선지자 들 및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뿐 아니라, 이 기이한 일들 이 매우 탁월한 그의 능력을 입증한다. 병자, 못 걷는 자, 맹인, 못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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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말하지 못하는 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심지어 그를 통해 부활한 죽은 자들까지 그의 휘장을 달고 다녔다. 자신의 능력으로 그는 부활했 고, 자신의 이름으로 그는 죄를 용서했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에게 행하 라고 주신 일들이 충분히 좋은 증인이라고 말한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요 5:36]. 게다가 심지어 악한 자들과 그의 영광에 대한 원수들도, 가야 바[요 11:49]나, 빌라도와 그 아내[마 27:19 이하]처럼, 진리로 인해 그 에 대해 고백하고 뭔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귀신들과 더러운 영 들의 증언들을 끌어올 생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막 1:25와 기타 구절들]. 요컨대, 모든 자연의 힘들과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을 드린 것이다. 그의 명령에 바람이 그쳤고, 출렁이는 바다가 잔잔해 졌으며[마 8:26과 유사 구절], 물고기가 그 뱃속에서 드라크마를 내놓 았다[마 17:24]. 또한 그를 증언하기 위해 돌들이 부서지고, 성전 휘장 이 찢어졌으며, 태양이 깜깜해졌으며, 무덤들이 열리고 많은 시체가 부 활했다[마 27:45 이하와 유사 구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요, 주 와 스승이시며,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성부가 이 땅에 파송한 큰 대사임 을 증언하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이 언약에 선포되고, 증언되고, 쓰이고, 인준되었는바, 이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 나라에 상속자들이 되게 하 시고, 그의 상속자들에게 하나의 유언자처럼, 자기 뜻이 실행되도록 그 뜻을 우리에게 선포하신다[엡 1:11 참고]. 그런데 우리 모두는, 남자나 여자, 작은 자나 큰 자, 종이나 주인, 스승이나 제자, 성직자나 평신도, 히브리인이나 그리스인, 프랑스인이나 라틴 사람 12 ) 을 막론하고 이 상속 에 부름 받았으며, 아무도 거부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확실한 신뢰로 자 기에게 보냄 받으신 이를 영접하는 자는 자기에게 제시된 것을 받을 것 12 )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이건(Français)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건(Latin), 즉, 야만인이건 지식인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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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간단히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에게 받은 그대로 그를 인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남녀 그리 스도인 여러분, 우리가 이 언약 ( 이 언약이 우리에게 속해 있음은 매우 정당하며, 이 언약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으며, 이 언약 없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큰 복과 약속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예비하신 영광과 행복을 알지 못한다 ) 이
약
탈당하고, 숨겨지며 부패되는 것13 ) 을 내버려 두겠는가? 복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거나 금하신 것을 모르며, 선과 악, 밝 음과 어둠,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헌법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복 음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쓸모없고 허망할 것이며, 복음이 없다면 우리 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모든 부는 가난이요,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우 둔이요, 힘은 허약이요, 모든 인간 정의는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다. 하 지만 복음을 앎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갈 4:6], 예수 그 리스도의 형제가 되며, 성도들과 똑같은 시민이 되며[엡 2:19], 하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며[빌 3:20],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 속자들이 되는바[롬 8:17], 이 그리스도를 통해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 고, 연약한 자가 힘 있는 자 되며, 우둔한 자가 현자가 되며, 또한 슬픈 자가 위로받고, 의심 많은 자가 확실하게 되며, 종이 자유하게 된다. 복 음은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다. 그것은 모든 신자의 구원을 위한 하나 님의 능력이며, 신도들에게는 그들을 죄에서 해방하면서 천국 문을 열 고, 불신자들에게는 그들을 죄로 묶어 그 문을 닫는 하나님의 지식의 열 쇠다[마 18:18 참고]. 그의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모두 복이 있다[눅 11:28]. 그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명하기 때문 이다. 그를 듣지도 따르지도 않으려는 자들은 화가 있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오 남녀 그리스도인들이여, 여기서 듣고 배우라. 이는 무지한 자가 그 13 ) 약탈하고 감추고 부패시키는 것은 로마 가톨릭이 신도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성경
번역을 금하며 불가타 역으로만 접근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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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함께 망할 것이며, 맹인이 다른 맹인을 따르다 함께 구덩이에 빠 질 것이기 때문이다[눅 6:39].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뿐으로,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인바, 이것은 복음 없이는 가질 수 없다. 이 복음을 듣고 앎으로써 살아 있는 믿음이, 확실한 소망과 하나 님 안에서의 완전한 사랑, 이웃을 향한 열렬한 사랑과 함께 부여되는 것 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들이 이 거룩한 복음을 듣고 보고 읽고 붙드는 일을 멸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대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 상에 애착을 갖는 자들은 자기들의 행복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노력 과 몸과 생명과 명성을 아끼지 않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추구한다. 그리 고 이 모든 것은 이 불행한 육체 ( 그 생명이 너무 허망하고 비참하며 불확실한 ) 를 봉 사하기 위해 행해진다.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생명, 측량할 수 없는 영원 한 행복, 낙원의 모든 보화 등이 문제가 될진대, 우리가 그것들을 추구하 는 데 과연 애쓰지 않을까? 공예에 전념하는 자들은, 그것이 아무리 보 잘것없고 형편없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배우고 알기 위해 그토록 큰 수 고와 노력을 기울이며, 덕 있는 인물로 평가받길 원하는 자들은 바람과 연기에 불과한 인문학에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밤과 낮으로 머리를 굴 린다. 그에 비한다면, 우리는 전 세상을 능가하며 하나님의 신비 ( 그는 이것 들을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드러내시길 기뻐하셨다 ) 에까지
도달하는 이 하늘의 지혜 14 )
에 대한 연구에 얼마나 전심전력해야 하겠는가[엡 1:7 이하]. 그렇다면 우리를 이 거룩한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소외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어 떤 것일까? 모욕과 저주와 치욕과 세상 영예의 박탈일까? 그러나 우리 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그의 제자가 되길 원할진대 마땅히 따라야 할 길로 가셨음을 잘 알며, 또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영예를 얻고 존경받 으며, 영화롭게 되고 찬양받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멸시와 조롱과 천대 14 ) 칼뱅은 하늘의 지혜(sapience cé leste)와 공예(arts mé caniques) 및 인문학(sciences
humaines)을 대조하고 있다. 그는 도처에서 신앙이 없는 인문학 또는 인간학에 대해 가차 없 는 비판을 가한다.
올리베탕 성서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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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받고 쫓겨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음을 잘 안다. [그러면] 추방과 배 척과 재산 및 부의 박탈일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한 나라에서 추방 될 때도, 땅이 주님에게 속했음을 잘 알며, 모든 땅에서 쫓겨날 때도, 우 리는 그의 나라 밖에 있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우리가 헐벗고 가난해질 때도, 우리에겐 우리를 먹이시기에 충분히 풍부하신 한 아버지가 계심을 알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하게 되사 우리로 가난 가운데서 자 기를 따르게 하셨음을 잘 안다. [아니면] 괴로움과 감옥과 고문과 고통 일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이것이 영광에 이르 는 길임을 안다. [그러면] 결국 죽음일까? 하지만 죽음은 우리가 마땅히 바라는 생명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못한다.15 )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실진대, 우리는 그에게 복 받 지 못할 정도의 저주스런 일이나, 거룩하게 되지 못할 정도의 가증한 일 이나, 우리에게 선으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의 나쁜 일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세상의 모든 권세와 힘을 우리가 볼 때, 낙담하지 말자. 하늘의 주님이 자기를 대적해 음모를 꾸미려는 자들의 모임과 노력을 비웃으신다는 약속[시 2:4]이 우리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눈 앞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죽어 없어져 가는 것을 볼 때, 마치 모든 소 망이 사라지는 것처럼 슬퍼하지 말자. 왜냐하면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라고 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말 16 ) 은 진실로 그러하고, 언제나 그렇게 체험되었으며, 또 세상 끝까지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에겐 더 좋고 더 확고한 위로가 있다. 그것은 우리 눈을 이 모든 세상으로부 터 돌리며 우리 앞에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인내로 하나님의 큰 심판을 기다리는 것인바, 그 심판을 통해 인간들이 자신을 대적해 일을
15 ) 이 문단은 롬 8:35 이하의 말씀에서 영감 된 것이다. 16 ) 이 유명한 말은 테르툴리아누스의 글 가운데 이대로 되어 있지는 않다. 그의 Apologeticum
(50, 13)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대들이 우리를 죽일 때마다, 우리의 수는 더욱 많아진다. 이 는 그리스도인의 피가 씨이기 때문이다(semen est sanguis christian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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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민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파괴되고 뒤집힐 것이다. 이것은, 우 리가 지금 소망 가운데서 보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날 때이며, 예수 그 리스도가 천사들과 함께 그의 위엄으로 나타나실 때다. 그때는 선인과 악인이 이 대왕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이다. 이 언약에 굳게 머무르며 선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지킨 자들은 참 자녀로서 오른편에 있게 되 고, 복 곧 그들의 신앙의 궁극인 영원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예 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앞에서 멸시받고 업신여김을 받을 때, 그를 고백 하고 자백하길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므로, [이제] 그의 영광에 참여자가 되어 영원히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거룩한 복음을 멸 시하고 업신여긴 반역적이고 버림받은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영예와 부와 높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겸손하 고 겸비하려 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무서워 하나님 경외를 버린 자들 ( 사 생아들과 이 부친에게 불순종자들처럼 ) 은
왼편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주 가운데
던져져 자기들의 불신앙의 대가로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마 25:31 이하]. 이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은혜가 이루어졌음 ) 를
그대들에게 제시하고, 율법과 선지서에 예언된 대로, 그가 성부에게서 파송받아 지상에 내려오사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우리 구원에 속한 모 든 것을 완성하셨다고 선포하는 것을 그대들이 이해했을진대, 그대들에 게 낙원의 보화가 열려 있고, 하나님의 부가 펼쳐져 있으며, 영생이 드러 났음이 매우 확실하고 명백해야 한다. 사실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 님과 그가 보내신 이, 곧 그 안에서 우리 구원의 시작과 방법과 마지막을 구성하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바 로, 제물로 드려졌으나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사랑받 는 아들 이삭이다[창 22장]. 그는 바로 자기가 지켜야 할 양들을 그토록 보살폈던 부지런한 목자 야곱이다[창 30장]. 그는 바로, 자신의 영광 가 운데서 자기 형제들 ( 그들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비열했어도 ) 을 아는 체하길 부끄러 올리베탕 성서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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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를 모양 있게 하기 위해 모양 없게 되셨고, 그는 우 리의 생명을 위해 죽으신바, 그를 통해 거친 것이 부드러워지 고, 분노가 완화되며, 흑암이 밝아지며, 불의가 의로워지며, 연 약함이 힘을 얻고, 낙담이 위로받고, 죄가 방해받고, 멸시가 멸
* * * 칼
뱅
총
서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시되며, 두려움이 안정되며, 빚이 청산되며, 노동이 가벼워지 며, 슬픔이 즐거움이 되며, 불행이 행복이 되고, 어려움이 쉬워 지고, 무질서가 정돈되며, 나뉨이 하나가 되며, 치욕이 고상함 이 되며, 반역이 굴복되고, 위협이 위협당하고, 매복이 쓸데없
<기독교 강요/초판, 1536>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게 되고, 공격이 공격당하며, 노력이 자제되며, 전투가 전투 대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상이 되며, 전쟁이 전쟁 대상이 되며, 복수가 복수되며, 고통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되었다. 간단히 말해, 긍휼이 모든 비참을, 선이 모든 불행을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삼킨 것이다.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작품선 33권
지옥이 지옥에 갇히고, 사망이 죽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이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작품선 33권
이 고통당하며, 저주가 저주되며, 구덩이가 구덩이에 빠지며,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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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베탕 성서 서문>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1-4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18,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3
Jean Calvin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