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저자 서문 ┃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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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6 1장 주 예수 31 2장 선지자 예수 70 3장 인자 예수 112 4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 143 5장 고난 받는 종 예수 188 6장 유월절 어린양 예수 224 7장 메시아 예수 266 8장 구주 예수 307 9장 마지막 아담 예수 329 10장 말씀 예수 365 11장 대제사장 예수 403 결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43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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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목차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왕에 대한 오니아스의 탄원 서머나 신자에게 쓴 이냐시오의 편지(AD 2세기 초) 엘리야 선지자가 돌아올 것에 대한 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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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의 서신 속의 모세와 예수
에녹1서의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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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중에 대선지자” 예수
다니엘 7장의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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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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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좌에 앉은 택하심을 받은 자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
148
쿰란의 “하나님의 아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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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186
양자론 이단에 대한 히폴리투스
201
『조하르』에 나오는 이스라엘로서의 종
고난 받는 종과 예수에 대한 바나바의 서신 우슬초와 유월절 어린양
222
249
사르디스의 멜리토의 “유월절에 대하여”
264
277
에스라4서에 나오는 메시아
이냐시오의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소망 없는 자들의 구원자”
312 327
클레멘스2서에 나오는 “구주” 집회서 15장 13–15절
336
오리게네스의 로마서 5장 주석
353
이레네오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에 대하여 플루타르크와 로고스
305
368
순교자 유스티누스와 로고스 예수 왕보다 더 중요한 대제사장
399
413
클레멘스1서에 나오는 대제사장 예수
428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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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이 책은 우리가 『신약의 신성한 전통: 복음서와 서신서에 나타난 구약 주제의 연구』( Sacred Tradition in the New Testament: Tracing Old Testament Themes in the Gospels and Epistles ) 를 위한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신약의 신성한 전통』은 포터가 저자로 참여했으며 다이어는 포터의 조교 겸 편집자로, 그리고 한 장의 기 고자로 참여했다. 『신약의 신성한 전통』은 엄밀한 연구 학술 논문이 어서, 우리는 신약 기독론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검토 중인 전통들 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쓸 수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 『신약의 신성한 전통』 중에서 다섯 개 의 장은 이 책의 구성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어떤 부분은 원래 형태를 찾아볼 수 있겠지만 모든 자료는 재고하고 종종 새로 썼으 며 이 기독론 작품을 염두에 두고 많은 부분에서 확충했다. 이런 장 들에는 다음을 포함한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책의 1장에서 작은 부분에 사용되었다. “다니엘 7장 13절과 인 자”는 3장을 위해 개작했다. “이사야 42–53장과 고난 받는 종”은 5장을 위해 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고 예수”는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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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과 7장을 위해 개작했다. “출애굽기 12장과 요한복음의 유월절 주 제”는 6장을 위해 개작했다. 이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는 이유는 해 당 부분에 제시된 개념들을 더 엄밀하게 변호하는 데 관심이 있는 독자가 『신약의 신성한 전통』에 포함된 원래 형태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 책의 제목을 『신약 기독론의 기원: 예수에게 적용된 전 통과 칭호』( Origins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An Introduction to the Traditions and Titles Applied to Jesus ) 로 정한 이유는 이 책을 신약 기독론
의 토대를 이루는 전통들에 대한 입문서로 명확히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임 있는 학문 연구를 반영하는 열한 가지의 핵 심 전통을 검토하는데, 비전문가도 이 자료를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구성하려 노력했다. 서론 장에서 설명하는 대로, 우리는 이런 전통들과 신약 저자들이 이런 전통들을 사용한 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기독론 연구에서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전통들은 신약 기독론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분야에 생 소한 독자가 신약에서 예수께 적용된 전통과 심상을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작품을 쓰고 싶었다. 이런 독자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우리가 내 린 한 가지 결정을 설명하려 한다. 우리의 결정은 성경의 용어를 유 지하고 ( 영어 ) 음역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의 편의상 한글 음 역을 표기하였음-편집자 주 ). 음역이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모르는 독자
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음 역이 어떤 도움을 준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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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를 읽지 못한다면, 특정 용어를 음역하는 것이 이 용어를 그냥 헬라어로 표기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될지는 불분명하다. 우리는 필요한 경우에 실제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함께 표기하는 것이 우리 가 참여하고 있는 연구에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NRSV를 번역으로 사용한다. 이 책은 모든 중요한 점에서 두 저자가 각자 맡은 부분에서 유익 한 공동의 노력이었다. 우리는 개별 장들을 집필하는 작업을 분담 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집필한 장들은 다른 저자가 읽고 논평하고 편집했으며 그 뒤에 우리가 최종 결과물에 모두 충분히 만족할 때 까지 수정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많은 다른 사람도 원 고가 책의 형태를 갖추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는 이 책을 위한 조사를 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 제이슨 정, 잭슨 테운 ) 과 여러 장의 초고를 읽은 사람들( 메디슨 피어스와 월리 시라페시를 비롯 ) 도 포함된다. 우리는 또한 유용한 논평을 해 준 익명의 검토자뿐 아니라 베이커 출판사 직원( R. 데이비드 넬슨, 브랜디 스크리치필드, 팀 웨스트 ) 에게도 감사 하고 싶다. 우리는 그들의 도움과 공헌에 감사하지만, 이 책의 모든 결점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 아내, 웬디 포터와 애나 다이어의 한결같은 지원에 감사하는데, 이들은 격려와 사랑의 원천이었다. 우리는 왕성한 학문 활동을 하다가 최근에 덴버 신학 교에서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크레이그 블롬버그에게 이 책을 바친다. 포터는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블롬버그를 처음 만나 서로 많은 시간을 토론했는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신 약 해석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서 서로에게 도전이 되었다.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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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어는 문학석사 과정에 있을 때 블롬버그와 함께 공부했는데, 자신 이 연구할 때 처음부터 시간을 들여 지도하고 꾸준히 격려해 준 점 에 대해 블롬버그에게 감사한다. 우리는 모두 블롬버그가 좋은 친 구이자 동료라고 생각하며, 그가 신학 연구에서 이바지한 많은 것 에서 혜택을 누렸다.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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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복음에는 예수께 기름을 붓고 자기의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씻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눅 7:36–50 ). 이 여 인은 예수께서 한 지역 종교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 부으려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져온다. 식사 자리를 마련한 지도자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면서 이 여 자가 “죄인”이며 예수가 정말 선지자라면( 헬라어 어구는 이 지도자가 이 사실을 의심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 이 여자에 대해 틀림없이 알 것이므로
추측건대 이 여자가 자기를 만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 한다. 예수는 이런 생각에 대해 비유로 답변하시고 뒤이어 이 여자 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신다. 이 사실은 예수와 함께 식사 자 리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동요를 일으키는데, 복음서 저자는 우 리에게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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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도 사하는가 하더라”라고 전한다( 7:49 ). 예수께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말이나 행동을 하시는 것은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모든 네 복음서의 여러 지점에서 예수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수면으로 떠오르며 다양한 대 답이 나온다.1) 여자가 예수께 기름을 붓는 이 사건 바로 직전에, 누 가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를 기술한다. 세 례 요한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기의 두 제자를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 까”라고 묻게 한다( 눅 7:19; 참고. 마 11:3 ). 두 장 뒤에 누가는 헤롯왕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 가”라고 숙고하는 모습을 기술한다( 눅 9:9 ).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 수의 신원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와 종교 지도자 사이의 긴 대화를 제시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대화 중에 “네가 누구냐”( 요 8:25 ) 그 리고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다( 8:53 ). 마태복음은 예 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이는 누구냐”라고 전한다( 마 21:10 ). 이 질문은 대단히 지속적이어서 처음의 세 복음서 곧 공관복음서 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신원에 대해 뭐라고 말하 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누 구라 하느냐”( 마 16:13–17; 막 8:27–30; 눅 9:18–20 ).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어떤 다른 선지자처럼 여러 가지 답변을 제
1) 마 11:2–4; 막 2:6–8; 11:27–28; 눅 23:39; 요 7:25–31; 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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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다. 그 뒤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메시아( 막 8:29; 눅 9:20 ) 와 하나님의 아 들( 마 16:16 ) 이라고 대답한다. 이 대화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예수의 신원을 친숙한 범주나 전통 안에 두려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리는 예수를 이스라엘 선지자의 전통 속에 두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베드로는 메시아와 하 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전통에서 가져온다. 예수의 신원과 관련된 이 질문은 복음서에 한정되지 않고 신약 전반에 나온다. 이런 글들은 복음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렇게 하듯이 항상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지는 않아도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질문을 계속하는데, 예수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나 예수께 부여하는 이름과 칭호로 그렇게 한다. 신약은 다양한 장르의 문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예수도 항 상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지만, 각 본문은 예수의 신 원에 대한 문제에 이바지한다. 신약 저자들도 예수의 제자들과 마 찬가지로 예수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분명히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숙한 전통과 장르에서 가져온다. 신약의 여러 지점에 서 예수는 이사야의 전통에서 가져온 고난 받는 종, 다니엘 7장에 묘사된 알기 어려운 인자, 왕-제사장 멜기세덱, 유월절에 죽임을 당 하는 어린양 등으로 소개된다.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 도의 인격을 밝히기 위해 이런 전통들에 의존해서 때로는 이런 인 물이나 전통들과 예수를 동일시하고 때로는 이 둘 사이에서 중요한 연결점을 찾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신약의 저자들이 “이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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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공식화할 때 그들의 답변을 분 명히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당대의 다양한 전통에 의지한다는 것 이다.
신약 기독론을 위한 전통들의 중요성 기독론 곧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예수의 신원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 붙여진 이름이다. 기독론은 신학자에 따라, 그리고 신학자가 질문하고 있는 문제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지만, ‘그리스도의 사 역’( 구원론 ) 이 여기에 복잡하게 결부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의 인격’과 관련이 있다. 많은 훌륭한 신학자는 여러 세기에 걸쳐 단 일 주제의 연구로 또는 더 큰 조직신학의 일환으로 기독론을 탁월 하게 표현해 왔다. 기독론의 문제는 특히 교부 시대에 신학자들이 네스토리우스주의, 아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 적인 기독론 운동을 차단하려 할 때 특히 두드러졌다.2) 그렇지만 예 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는 초대 기독교 교회의 경우만큼이나 오늘날 도 여전히 중요한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기독교 신학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3) 기독교 신학은 성경을 교리의 일차 자료로 지지하는데, 기독론 교 리는 신약이 예수를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시작해야
2) 다음을 보라. Norris, Christological Controversy . 3) McGrath, Christian Theology ,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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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따라서 기독론을 잘 표현하려면 신약에 나타나는 기독론을 고 찰해야 한다. 이 책은 예수에 대한 신약의 묘사를 명확히 하려는 시 도다. 우리는 이것이 가치 있는 노력이라고 믿지만, 또한 이 연구가 그리스도의 교리를 신학적으로 다루기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되기를 바란다. 신약 기독론을 구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학문 연구 의 역사는 다양한 접근법의 장단점을 보여 준다.4) 어떤 학자는 각 책의 독특한 공헌을 강조하기 위해 신약 전체를 책별로 이동하면서 도 그 과정에 나타나는 전체적인 초상화에 주의한다.5) 어떤 학자는 연대기적 접근법을 취하는데, 기독론적 개념의 발전 속에 역사적으 로 배치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초기 저술로 여겨지는 글들을 살 핀다.6) 어떤 학자는 “칭호적 접근법”을 취하는데, 이 접근법은 그 뒤에 감추어진 기독론적 중요성을 파헤치기 위해 신약 저자들이 예 수께 부여한 칭호나 속성을 고찰한다.7) 이런 연구들은 모두 소중한 방식으로 이바지하지만 저마다 문제가 있다. 책별로 연구하는 접근 법은 기독론의 문제와 관련해 때로 나무를 보느라고 숲을 놓치거나 신약 정경을 하나로 묶는 일관성 있는 유대를 간과한다. 책별 접근
4) 여기서 연구의 역사는 제공하지 않아도 책 전반에 걸쳐 많은 학자와 소통할 것
이다. 이 책의 결론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공헌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여러 주요 사상가와 신약 기독론의 접근법과 소통한다. 5) Matera, New Testament Christology ; Tuckett, Christology and the New
Testament . 6)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 7) Cullmann,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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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법도 중복적일 때가 있는데, 같은 주제를 여러 번 다루기 때문이다. 연대기적 접근법 또는 발전주의 접근법은 우리에게 기록 연대를 결 정할 것을 강제하며, 일부 문헌( 곧 초기 문헌 ) 을 더 신뢰할 수 있는 것 으로 지정하고 다른 문헌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지정할 때가 자주 있다. 이 결과로 신약이 역사적 발전이 아닌 긴급 함으로 독자에게 제시되는 방식을 간과하는 접근법이 나타난다. 칭 호적 접근법은 특정 칭호나 심지어 개별 단어에 지나치게 많은 신 학적 비중을 두려는 생각에 쉽게 사로잡힐 수 있으며, 기독론적 칭 호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신약 기독론이 아주 복잡하다는 사실을 거의 설명할 수 없다. 서사적인 요소는 특정 칭호에 대한 연구 때문 에 간과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우리의 과제는 이런 연구들보다 더 알맞은데, 우리가 완전한 신약 기독론을 구상하려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론을 표현하는 작업을 신약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신약 기독론을 시도하는 사람이 예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의 초상화 배후에 놓여 있는 종교적・문화적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우리는 신약 저자들이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 를 다루려 할 때 어떤 전통이나 이전의 문화 사상에서 가져왔는지 의 문제를 제기한다. 초기 예수 운동은 유대의 운동이었으며 신약 저술도 본질적으로 초기 유대의 저술이므로, 우리는 이 저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묘사하고 이해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구약과 다른 유대의 문헌에 종종 의지한다. 똑같이 중요한 사 실은 기독교가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그리고 로마 제국의 통치 아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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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발전했다는 것이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원 독자 중에 많은 사람이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그리스의 도시에 살던 이 방인 회심자다. 신약 저자들은 예수의 인격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 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유대의 사상 외에도 그리스-로마의 사상에 자주 의지한다. 우리는 신약 저자들이 예수를 표현하면서 통합시킨 열한 가지의 주요 전통을 확인한다. 이들 전통 중 대부분은 신약에서 예수께 부 여되는 ‘칭호’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인자, 대제사장, 주 등이 포함 된다. 고난 받는 종이나 유월절 어린양 같은 일부 전통은 다른 전통 들처럼 칭호의 역할을 하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예수를 특정 전통 이나 신학적 개념과 동일시한다. 각 전통에서 우리는 신약 저자들 이 해당 개념을 예수께 적용하고 있는 방식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관련된 유대의 용법, 그리고/또는 그리스-로마의 용법을 고찰한다. 앞으로 분명해지겠지만, 이 전통들은 종종 복잡해서 심지어 같은 시기나 개별 사상가에게서도 여러 가지 다른 견해나 해석이 공존하 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 전통들을 분리로서가 아니라 신약이 등 장한 고대 세계 속에서 동시에 생겨난 요소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으 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초기 조사가 끝나면, 우리는 각각의 용법 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신약이 특정 전통이나 칭호와 어떻게 연관 되는지를 검토한다. 이 전통들은 각자 나타나는 맥락에 따라 다른 성경 저자들에게서 다르게 사용되거나 이해될 때가 많은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복잡성을 찾아내려 시도하면서도 또한 이 전통들이 전체 신약 정경에서 사용될 때 나타나는 일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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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일관성도 설명한다. 우리는 각 전통이 더 큰 신약 기독론에 이바지 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밝히면서 각 장을 마무리한다. 신약 기독론이 아주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려면, 독자는 여기 서 제시하는 전통들을 넘어가야겠지만 이 전통들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접근법은 빈센트 테일러, 오스카 쿨만, 페르디난트 한 등의 학자들을 통해 20세기에 두드러졌던 “칭호적 접근법”과 겹치 므로8) 이런 연구 방향의 단점에도 취약하다.9) 우리는 아래에서 이 런 우려 중 일부를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연구가 기독론 자 체로서가 아니라 신약 기독론에 대한 공헌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 란다. 우리가 여기서 제공하는 기초 연구를 넘어서기를 원하는 독 자라면, 신약이 그 자체의 기독론을 표현하는 다채로운 방식을 고 려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데이비드 케이프스가 밝히는 대로, 여 기에는 “메시아적 주석, 비칭호적 언어 양식, 행동 양식, 역사학, 다 양한 서술 전략”이 포함될 것이다.10)
이 연구의 공헌 우리는 신약 기독론을 주제로 하는 많은 학술서와 다양한 견해가
8) V. Taylor, Names of Jesus ; Cullmann, Christology of the New Testa-
ment ; Hahn, Titles of Jesus in Christology . 이 연구와 다른 연구들과의 관계 는 다음을 보라. Marshall, Origins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 11–31. 9) 다음에 나타나는 논의를 보라. Tuckett, Christology and the New Testament , 10–11. 10) Capes, “New Testament Christology,”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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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책을 쓰는 일이 어려운 작업임을 인정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우리의 초점과 정해진 목표를 단순화하면서도 이 책이 기독론에 대한 더 큰 연구에서 자리매김하 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특징을 강조하겠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시도와 관련된 몇 가지 조건을 정하기 위해 우리 연구의 주요 특징 을 설정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의 작업을 더 명확히 하고 이전 연구들이 빠졌던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몇몇 구체적 인 주의 사항을 상기시킬 것이다. 첫째, 이 책은 신약 기독론의 입문서 역할을 하도록 구상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기독교 교육 기관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가 가 르치는 학생을 이 책의 주요 독자층으로 염두에 두었다. 우리는 우 리의 독자가 신약과 어느 정도 친숙해도 우리가 이 책에서 검토하 는 전통에는 친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을 바탕 으로, 우리는 이 분야에 생소한 사람도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수준으 로 우리의 논의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각 장은 수 세기에 걸쳐 이 루어진 학문적 논의와 연관되어 있어서 논쟁과 이차 문헌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관심 있는 독자를 위해 이런 논의를 각주에서 지적하려 했다. 또한 참고 자료를 추가해서 내용 에 쉽게 접근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동시에 우리가 검토 중인 전통의 중요 구절이나 해석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둘째, 이 책은 신약 기독론이 관심 대상이어서 신약의 정경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교부 시대에 등장한 이후의 기독론 논쟁 을 간혹 언급할 수도 있으나 우리의 관심은 신약 바깥에서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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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지는 기독론의 발전에 있지 않다. 실제로 이 연구는 신약 안에서나 신약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기독론적 개념들의 발전을 상세히 기록 하는 데 지면을 거의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정경적 관점에서 이 과제에 접근한다. 우리의 연구 배후에 있는 질문은 다 음과 같다. 우리가 오늘날 신약으로 부르는 27권의 문헌으로 이루 어진 이 모음집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견해를 명료하게 밝히기 위해 어떻게 다양한 전통에서 가져오는가? 이 정경적 접근 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저자나 역사성의 문제는 넘어가겠다. 우 리는 찬성하거나 반대할 충분한 논거가 있더라도 전통적으로 각 신 약 본문에 부여된 저자의 이름( 가령 마태, 누가, 야고보, 바울 ) 을 실제 저 자로 상정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런 문제는 신약에 포함된 문헌들 의 기독론을 조사하는 우리 연구의 범위를 넘어간다. 이뿐 아니라,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흔히 말하는 역사적 예수에 있는 것이 아 니라, 그보다 예수께서 이 문헌들의 모음집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 느냐에 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자기이해( 가령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아 로 여기셨는지 ) 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연구를
종종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우리의 관심은 신약에 포함된 문헌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로 ) 이 예수의 신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셋째, 우리는 “전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가 우리 연구의 초점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통이라는 용 어는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기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 서 의미를 부여받는 신념이나 사고 양식을 가리키며 종종 특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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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부여받는 기원 지점에서 전승된다. 우리는 우리가 찾아낸 열한 가지의 전통이 기독론 연구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이들 중 일부는 예수께 주어진 칭호지만, 어떤 일부는 신약 저자들이 그들 의 작품에 통합하는 개념적 심상의 역할을 한다.11) 이 모든 전통은 초기 예수 운동보다 앞서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므로 그 자체로 받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약 저자들이 이 전통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했는지를 질문하기에 앞서 이 전통들을 그 자체의 복 잡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역사 속에 서 이 전통들을 보전하면서도 동시에 이 전통들이 신약 시대에 어 떻게 이해되었는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후의 기독 교적 주석이나 사상을 이런 전통들 속으로 끌어들여 읽는 것을 피 하기를 바란다. 방금 말한 요점에 비추어,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약 기독론에 대한 이전 연구의 위험을 피하게 해 주는 네 가지 주의 사항을 지적하려 한다. 첫째, 우리는 각 전통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 외에도 또한 이 전통들 가운데 특히 고대의 전통과 초기 유대교의 전통( 그리스-로 마 세계의 전통은 확실히 그렇지 않지만 ) 이 그리스도로 나아가는 진행 과정
에 있음을 암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신약이 예수 그 리스도를 특정 문화의 성취나 절정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평가할 수 있어도, 해당 전통이 자체의 고유한 종교적・문화적 맥락에서 이해 된 방식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많은 경우에 신
11) Longenecker, Christology of Early Jewish Christianity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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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약은 이 전통들을 가지고 독특한 일을 하는데, 이 전통들을 단순히 그리스도라는 사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수단으로 연구한다면 우 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평가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신약이 이 전통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전에 이 전통들을 온전하게 유지해야 한다. 많은 전통이 신약 저자 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밝히는 장차 나타날 인물을 예기한 것은 사 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이런 예기를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시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도 거의 언제나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이 이 전통들을 어떻게 통합시 키는지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이 전통들이 1세기 당시에 어떠했는 지를 평가한다. 두 번째 주의 사항은 용어와 개념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이 들 중 많은 전통은 특정 단어나 어구( 가령 구주, 주, 로고스 ) 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특정 용어를 그것과 결부된 전통이나 개념과 섞 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독론적 칭호를 주제로 다룬 이전 연구 들은 칭호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일정 개념을 지닌 것으로 가정 한다고 비판받았는데, 이런 비판은 옳은 것이다. 우리는 특정 단어 나 어구가 유대의 문헌이나 그리스-로마의 문헌에서 어떻게 사용 되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어떤 전통 이 특정 용어를 사용해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더 잘 이해하 기 위해서다. 우리는 특정 맥락에서 한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다 른 상황에서도 같은 것을 의미하거나 표시할 것이라고 상정할 수 없다. 우리는 한 개념이 특정 용어나 어구에 내재해 있어서 해당 용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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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를 재생하기만 하면 같은 개념을 계속 적용할 수 있다고 상정하 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셋째, 신약 기독론에 대한 “칭호적 접근법”의 한계는 이런 연구들 이 칭호가 그것이 나타나는 이야기나 논증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부여받는지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12) 우리는 서사적 기 독론에 대한 연구가 제공하는 공헌, 특히 기독론적 칭호가 신약 저 자들이 만든 더 큰 체계 안에서 종종 작용하는 방식을 평가해야 한다.13) 예를 들어, C. 캐빈 로우는 누가복음이 서사적 발전을 통해 역사와 신학을 결합하고 예수의 신원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묶기 위해 ‘퀴리오스’( ku,rioj, 주 )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14) 어떤 면에서 이 요점은 이전 요점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런 전통과 칭 호들이 항상 더 큰 이야기나 논증 안에 포함되어 나타난다는 사실 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더 큰 담화가 전통이나 칭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때 이 점을 설명하려 노력 한다. 우리는 심지어 어떤 경우에 이런 접근법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지만( 6장을 보라 ), 이 역학 관계에 대한 완전한 평가는 우리 연구의 한정된 범위를 넘어간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서 사적 접근법에도 한계가 있으며 이것은 칭호에 기초한 접근법이 여 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서사적 접근법은 적어도 12) “칭호적 접근법”에 대한 이 비판을 우리에게 지적해 준 점에 대해 이 원고의 외
부 독자에게 감사한다. 13) 다음을 보라. Malbon, Mark’s Jesus . 14) C. Rowe, Early Narrative Christology . 다음도 보라. Henrichs-Tarasen-
kova, Luke’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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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가장 설득력 있는 접근법이지만 대체로 단일 서사에 한정된다. 신 약에 나오는 구체적인 기독론적 칭호에 대한 완전한 견해를 제시하 려 할 때, 칭호적 접근법이 여러 가지 서사를 초월하는 연구 결과들 을 더 잘 종합할 수 있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끝으로, 이번 장의 서두에 소개한 복음서 이야기의 사례들은 우리 가 검토해야 할 접근법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가리키는데, 그것 은 이런 전통이나 칭호들이 다른 전통들과 분리된 상태로 예수께 적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 신약 저자들은 일반 적으로 칭호나 전통들을 결합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의 서두에 나 오는 감사에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주”라 고 부른다( 롬 1:4 ). 이 조합은 중요할까, 그리고 이 조합은 각 칭호가 단독으로 나타날 경우에 서로 다를 수도 있는 의미를 전달할까? 각 각의 개별 전통이나 칭호를 분리해 다루도록 이 책을 구성함으로 써, 우리는 구체적인 신약 본문 안에 나타나는 전통들의 상호작용 을 무시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책의 본문에서 이 현상에 대해 다루 려 시도하지만, 우리의 연구를 토대로 삼아 이 역학 관계를 더 완전 하게 다루는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진 몫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신약 저자들도 복음서에서 예수와 접촉하거나 예수에 대한 이야 기를 듣는 많은 등장인물처럼 “이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관 심이 있었다. 신약 저자들이 이 질문에 대답하는 중요한 한 가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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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다양한 종교적・문화적 전통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비추어 재 검토하고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예수를 가리키는 칭호로 요약될 때 가 자주 있는 이런 전통들에 대한 연구는 신약의 기독론을 평가하 는 데 중요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런 유형의 접근법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유행과 멀어졌으나, 우리는 전통들( 물론 기독론적 칭호들 ) 에 대 한 조사가 신약 연구에 제공하는 근본적인 공헌을 재확립하기를 바 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신약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 매우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전통들을 독자 여러분이 더 잘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이 신약의 기독론을 이해하는 데 공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책이 신약이 자체의 기독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달하는지에 대한 추가 연구의 발판이 되기를 바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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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1장
주 예수
서론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자신을 대신해 보내심을 받는 제자들 에게 금언에 가까운 조언을 하신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 하나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라는 것 이다( 마 10:24 ). 마태복음 8장 5절에서는 백부장이 가버나움에 오신 예수께 나아간다. 백부장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자신이 기꺼이 가서 종을 고치겠다고 응답하시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옵나이다”라고 말한다. 산상설교의 일부인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 예수는 무리( 제자들과 아마도 예수를 둘러싼 큰 군중도 포함 ) 에게 제자도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예수는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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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다. 끝으로, 마태복음 1장 20절에서 “주의 사자”가 요셉에 게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라고 전한다. 이 네 가지 사례는 신약에서 “주”로 종종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퀴리오스’( ku,rioj ) 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보여 준다. 우리는 이 모든 사례를 마태복음에서 선택했는데, 마태복음은 이런 용어가 일으킬 수 있는 몇 가지 혼동의 사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례 에서 예수의 진술은 명백히 종과의 관계에서 주인을 가리키기 위해 “주”로 번역된 단어를 사용한다( NIV는 실제로 ‘퀴리오스’를 “주”보다는 “주 인”으로 번역한다 ). 이 사례에서 ‘퀴리오스’는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
거나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의미한다. 백부장의 사례는 더 난해하다. 백부장은 치유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들었으므 로 예수께 나아와 중풍병에 걸린 자기 종을 고쳐 주시기를 부탁 한다. 얼핏 보면 우리는 백부장이 예수께 단순한 존경 이상의 것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백부장 이 예수를 아마 신성한 치유자로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부장은 예수께서 자기 집을 방문하시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에게 종이 있고 자기 수하에 군사가 있으나 자신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는 사 람( 주인 ) 이 아닐 뿐 아니라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해명한다. 이 경우는 백부장이 “주”로 번역된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를 아는 일이 더 난해하다. 마태복음 7장의 사례에서 예수는 제자와 제자의 특징 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는 자기의 제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 는 모든 사람( 곧 자신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 ) 이 다 자기의 인정을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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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는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이 구절에서는 권위 있는 사람을 존 경한다는 의미가 뚜렷하지만, 문제는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이 제 자들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나타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제자들은 ‘주인이여 주인이여’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여 하나님이여’와 같이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가? 마태복음의 시 작 부분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반복되는 의미가 있는 마지막 사 례( 가령 마 1:22, 24; 2:13, 15, 19; 3:3; 4:7, 10; 5:33 ) 는 여기서 “주”가 신적 속성을 소유하시는 구약의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시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분, 곧 유혹을 초월하 시는 것으로 묘사되는 예배의 대상이다. 신약의 “주”를 주제로 다루는 많은 연구는 두 가지의 일차적 의미 가 있는 ‘퀴리오스’라는 단어와 관련지어 이 문제를 구성한다. 첫 번 째는 권위 있는 신분과 같은 인간적 탁월성의 의미며, 두 번째는 예 수께 신적 존재의 특징을 돌리는 예수의 칭호로서의 의미다. 우리 는 이 헬라어 단어가 ( 신분이나 소득에 상관없이 )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 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거나, 아니면 유대인의 성경 중 다른 곳에 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된 용어를 전유함으로써 예수를 가리키고 이 로써 예수께 신적 특징을 돌리기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상반되는 두 가지의 의미가 아니다.1) 이것은
1) 다음을 보라. C. Rowe, Early Narrative Christology , 특히 45–47. 로우는 서
사적 해석법을 사용하지만 많은 초기 연구와 같은 어휘적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접근법이 “주”라는 용어를 다루었던 이전 연구들의 여러 한계를 극복한다고 믿는다.
1장 ┃ 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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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론적 확장의 사례인데, 어떤 사람에게 마땅한 존경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용어가 나중에 이런 의미론적 확장을 통해 신적 속성을 돌림으로써 본질적으로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을 포함할 정도 로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퀴리오스’는 의미가 하나지만, 이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다. 위에 소개한 사례들은 이런 결정을 내리는 작업의 어려움 중 일부를 보여 주는 것이 분명하지 만, 우리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기초해 이렇게 구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상황적 지표도 제공한다. 이번 장에서는 예수를 단순히 존경 할 가치가 있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분으로서 주라고 말할 때 기독론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신약에서 “주”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겠다. 하지 만 신약을 살피기 전에 우리는 “주”라는 용어가 유대의 문헌과 그 리스-로마의 문헌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구약과 그리스-로마의 문헌에 나오는 “주”의 용법 “여호와”는 구약에 대략 6,580회 나오며 영어 성경에서 “주”로 번 역된다. 이 번역에 대한 예외는 소수에 그친다( 예. 창 6:5 ). 구약에서 하나님께 사용되는 다른 이름이나 칭호도 “주”로 번역될 때가 있으 나 상대적으로 더 적은 편이다( 700회 미만에 불과하다 ). 하지만 이런 지 배적 용법들을 구별하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이 다른 이름으로 알려 지시더라도 이들 모두가 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권위가 있는 다른 인물을 말할 때( 예. 창 18:3, 12 ), 이런 인물은 여호와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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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기독론의 기원
니라 존경을 표현하는 다른 용어로 불린다.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을 때,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인 여호와( Tetragrammaton ) 에 대해 적절한 번역을 찾아야 했다. 오랫동 안 학자들은 “여호와”가 “주”( ‘퀴리오스’ ) 로 번역된 것으로 단정했고 이로써 구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신약에서 예수께 종종 사용된 용어 와 동일시했다. 하지만 더 최근의 학문 연구는 헬라어로 번역된 히 브리 성경의 초기 사본이 여호와를 ‘퀴리오스’로 번역하지 않았다 고 주장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초기 헬라어 원문에서 서기관은 번 역하는 것을 피할 목적으로 히브리어 글자 YHWH를 활용했다.2) AD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이르러서야 ‘퀴리오스’가 칠십인역 전 반에 걸쳐 YHWH를 번역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YHWH가 일관되 게 ‘퀴리오스’를 사용해 번역되었다.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유대의 문헌 안에서 하나님을 YHWH로 부르다가 “주”로 부르게 된 시점이 언제냐는 것이다. 일부 학자는 이런 전환이 일어나는 일을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BC 1-2세기 사이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은 하나님을 “주”로 생각했고 이런 생각에 따라 그들의 사본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에 대한 많은 가능한 이유와 많은 이론이 있다. 하 나님을 위해 “주”를 사용하는 것이 단순히 번역의 등가성에 기초했 을 가능성은 적은데, ‘퀴리오스’의 자연스러운 상당 어구인 히브리
2) 예로 다음을 보라. P.Fuad. 266과 8HevXIIgr(소선지서 헬라어 두루마리). 전자
는 이집트에서 발견되었고 후자는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되었다. 이 부분에서 사 용하고 있는 다음을 보라. Fitzmyer, “ku,rioj,” 2:328–331(특히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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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단어 ‘아도나이’( ynda ) 는 ‘퀴리오스’로 일관되게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도나이”는 히브리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위 해 사용되었으므로 이런 현실이 그와 같은 사실에 이바지했을 수도 있다.3) 이에 대한 설명은 더 큰 문화적 문제를 수반하므로 아마 더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라는 이 개념은 그 당시의 많 은 아람어와 히브리어 사본에 모두 나온다.4)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을 “주”( ‘퀴리오스’ ) 로 생각하는 같은 현상 이 또한 헬라어를 사용한 여러 유대인 저자 사이에서 분명히 나타 난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로는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20권 90절과 13권 68절( 사 19:19의 인용 ), 레위의 유언 18장 2절, 에녹1서 10장 9절이다. 우리는 바울이 일부 구약 구절을 인용하면서 ‘퀴리오 스’를 사용한 사실이 1세기까지는 이런 관례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 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확증한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조셉 피츠마이어가 지적하는 대로 이 후자의 사례들이 YHWH를 ‘퀴리오스’로 최종적으로 번역한 시기를 반드시 증명하는 것은 아 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이 결국 YHWH를 ‘퀴리오스’로 번역하므 로, 이 번역이 상대적으로 고정된 시기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관례는 하나님을 ‘퀴리오스’로 부르는 사례에서 기 원한 뒤에 성경의 헬라어 사본 사이에서 확고하고 거의 변하지 않
3)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설명이다. Cullmann, Christology of the New Testa-
ment , 200–201. 참고. Moule, Origin of Christology , 36–41. 4) 아람어 사본은 다음을 포함한다. 11QtgJob 24.6–7; 1QapGen 20.12–13;
4QEnb1. 히브리어 사본은 다음을 포함한다. 11QPsa 2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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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통이 될 만큼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5) 하나님을 “주”로 부르는 현상의 발전에 대한 이런 간단한 설명은 초기 기독교가 “주 숭배”, 곧 예수를 “주”로 숭배하게 된 공동체로 서 다양한 인물을 신격화한 다른 이교 집단과 다르지 않았다는 빌 헬름 부세의 신념과 관계가 있다.6) 부세는 유대교 안에는 이런 종류 의 사상에 대한 전례가 전혀 없었으며 예수를 “주”로 높이는 이런 견해가 칠십인역과 헬레니즘 기독교의 영향으로 생겨났다고 주장 한다. 그래서 부세는 주 숭배의 토대를 구약에서 찾는 대신에 헬레 니즘의 영향에 주의한다. 부세에게는 이런 헬레니즘의 영향이 특히 동양의 지배자 숭배와 다양한 신비 종교와 숭배를 포함한다. 부세 는 로제타석처럼 중요한 본문이 “절대적인 ‘퀴리오스’”를 언급하지 않아도7) 실제로 ‘퀴리우 바실레이온’( ku,riou basileiw/n, OGIS 90.1 ), “왕 관의 주”라는 명칭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부세도 헬레니즘 시대와 이후 로마 시대에서 “주”를 사용하는 다른 여러 비문을 인용하기는 하는데, 이들 중 많은 사례 를 아돌프 다이스만의 『고대 동양의 빛』에서 가져온다.8) 다음과 같
5) Fitzmyer, “ku,rioj,” 2:330. 6) Bousset, Kyrios Christos , 특히 119–152. 7) Bousset, Kyrios Christos , 140. 부세는 이것을 소유격 수식어가 없는 ‘퀴리오
스’의 사용으로 정의한다. 8) 참고로 다음을 보라. Bousset, Kyrios Christos , 140–141;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 특히 349–357, 하지만 또한 상호 참조(다이스만의 해 석은 이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Evans, Mark 8:27–16:20 , lxxxii–lxxxiii; Fantin, Lord of the Entire World , 특히 192–204(황제 숭배는 77–148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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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참고문헌은 우리가 추가로 덧붙였다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왕에 대한 오니아스의 탄원 요세푸스의 작품에 나오는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퀴리오스’가 1세기에 여호와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19장 19절에서 가져온 인용문은 ‘퀴리오스’가 헬라어에서 “여호와”에 대 한 적절한 번역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이 이 거룩한 곳을 청결하게 하는 일을 저에게 허락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곳은 주인이 전혀 없고 무너졌으므 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본떠서 이곳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성 전을 지으리이다 이 일은 당신과 당신의 왕비와 자녀에게 유익할 것이요 애굽에 거하는 유대인들이 와서 서로 화목하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얻을 것이며 당신의 이익에도 합당하리니 이는 선 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애굽 땅에 주 하나님[‘퀴리오 토 테 오’(kuri,w| tw/| qew/|)]을 위하는 단이 있어야 할 것이며 선지자 이사 야가 이곳과 관련하여 다른 많은 것도 예언한 까닭이니이다.a
a.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3.67–68. 영어 번역은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Whiston, (Works of Flavius Josephus) , 339.
•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주와 신의 왕”(‘투 퀴리우 바실 레오스 테우’[tou/ kuri,ou basile,oj qeou/])으로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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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2년의 비문9) •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주 들과 가장 크신 신들”(‘토이스 퀴리오이스 테오이스 메 기스토이스’[toi/j kuri,oij qeoi/j megi,stoij])로 부르는 BC 52년의 비문10) • 이 둘을 “여왕”(‘텐 퀴리안 바실리산’[th. n kuri, a n basi, l issan])과 “주 헤르메스”(‘퀴리오스 헤르메스’ [ku,rioj ~Ermh/j])로 부르는 BC 13년의 비문11) • “왕과 주 황제를 위한”(‘휘페르 투 테우 퀴리우 아우토 크라토로스’[ `pe.r tou/ qeou/ kuri,ou Auvtokra,toroj]) 제 사와 관련해 아우구스투스를 가리키는 파피루스12) • 여러 헤롯을 “주”로 부르는 비문들13) • 티베리우스와 리비아를 “위엄 있는 주들”(‘톤 퀴리온 세바스톤’[tw/ n kuri, w n Sebastw/ n])로 부르는 시리아 비문14) • 클라우디우스(AD 41–54년)가 AD 49년의 한 파피루 스에서 “주 티베리우스 클라디우스 카이사르”(‘티베리우 클라우디우 카이사로스 투 퀴리우’[Tiberi,ou Klaudi,ou
9) OGIS 186.8. 10) Wilamowitz-Moellendorff, “Alexandrinische Inschriften,” 1096. 11) Wilcken and Mitteis, Grundzüge und Chrestomathie , 1.2, no. 4, p. 11. 12) P.Oxy. 1143.4. 13) OGIS 415, 418, 423, 425, 426. 14) OGIS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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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aroj tou/ kuri,ou])로15) 및 다른 여러 도편에서 “티 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위엄 있는 주 황 제”(‘티베리오스 클라우디오스 카이사르 세바스토스 아 우토크라토르 호 퀴리오스’[Tibe,rioj Klau,dioj Kai/sar Sebasto.j auvtokra,twr o` ku,rioj])와16) “주”(‘호 퀴리오 스’[o` ku,rioj])로 불림17) • 네로(AD 54–68년)가 다양한 파피루스와 도편에서 “주 네로”(‘네론 호 퀴리오스’[Ne,rwn o` ku,rioj]),18) “주 네 로”(‘네론 퀴리오스’[Ne,rwn ku,rioj]),19) “주 네로 카이사 르”(‘네론 카이사르 호 퀴리오스’[Ne, r wn Kai/ s ar o` ku,rioj]),20) “온 세상의 주 네로”(‘호 투 판토스 코스무 퀴리오스 네론’[o` tou/ panto.j ko,smou ku,rioj Ne,rwn]),21) “주 위엄 있는 [네로]”(‘투 퀴리우 세바스투 [네로노스]’ [tou/ kuri,ou Sebastou/ Ne,rwnoj])로 불림22)
15) P.Oxy. 37.6. 16) Wilcken, Griechische Ostraka , 268 (no. 1038). 17) O.Petr. 209. 18) P.Lond. 1215; P.Oxy. 246.30; Wilcken, Griechische Ostraka , 268 (no.
1038); P.Meyer II.22.2–3; 23.3–4; 24.2–3; 25.2–3; 36a.3; 37.3–4; 76.4–5. 19) P.Meyer II.39.4. 20) O.Petr. 288; P.Oxy. 246.36–37. 21) SIG 3 814.31. 22) SIG 3 8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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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심지어 네로를 “주”라고 부른다( 행 25:26 ). 요세푸스는 유대의 순교자들이 카이사르를 “주”로 부르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고 말한다( 『유대 전쟁사』 7.418–19 ). 이후의 참고문헌도 있는데, 여기에 는 “주” 세라피스로 부르는 것과23) 황제를 “주”로 부르는 것이 포 함된다.24) 이런 증거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세는 이것을 기독교가 주 숭배였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시 말해 기독교가 헬 레니즘 문헌에 나오는 유사 용법을 기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주”를 사용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이해한다. 1세기경 고대 지 중해 세계에서 “주”라는 표현이 신적 존재 및 황제 같은 통치자를 비롯한 중요 인물에게 사용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것이 부세가 자기 논점을 밝히기 위해 모색하는 칭호적 용법은 아 닌데, 이중에서 일부는 칭호와 관련이 있다기보다 경의와 존경을 표현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세가 의존하는 많은 증거를 정리하고 종교사에 대단히 큰 관심을 보인 다이스만은 자료를 다르게 해석한다.25) 다이스만은 이런 증거가 최 선의 경우라도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라고 이해한다. 다이스만은 “주”라는 표현의 사용이 네로에게서 크게 증가한 사실에 주목한다. 다이스만은 이 현상이 네로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도
23) P.Oxy. 110.2–3; BGU 423.6. 24) Martyrdom of Polycarp
8.2; P.Oxy. 1439; SB 1927; Wilcken, Griechische Ostraka , 126 (no. 439); 153 (no. 563). 25) 다음을 보라.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 352–353,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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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주인으로 선포된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뿐 아니라, 다 이스만은 주 숭배의 많은 증거가 셈족 문화와 애굽 문화 사이의 밀 접한 접촉이 이미 동시에 발생한 애굽에서 기원했다는 점을 우리에 게 상기시키는데, 비슷한 발전들을 “애굽 문화와 팔레스타인 문화 사이에서 이미 강조된 유사성의 또 다른 사례”로 이해할 정도 였다.26) 이것은 “주”라는 용어가 애굽에서 이루어진 히브리 성경의 헬라어 번역에 흡수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래서 다이스만은 “로마 제국 초기의 수많은 헬라어 파피루스, 비문, 도편에서 ‘주’라는 칭호 가 애굽인과 시리아인에 의해 카이사르에게도 붙여진 것은 다름 아 닌 애굽의 관례나 애굽-셈족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27) 따라서 바울은 주/황제 숭배가 로마 세계에서 AD 54년 네로의 즉 위와 함께 강력하게 대두된 시기에 자기의 편지를 남겼다. 다이스 만은 심지어 바울이 권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특히 황제에 게 사용된 용어에 대한 항의로 “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이해 한다. 다이스만은 고결한 “주”라는 용어가 등장한 현상을 부세보다 훨 씬 만족스럽게 설명한다. 신약에서 “주”라는 용어는 그리스-로마 세계 안에 나타난 발전과 서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 셈족 문화와 애굽 문화 요인의 혼합에 의존하는 후기 칠십인역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최선일 것이다. 기독교는
26)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 353. 27)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 353(참고. 365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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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세가 상상하는 대로 ) 소위 동양적 사상에 의존하는 헬레니즘적 주 숭
배가 아니며,28) 설령 주 숭배라고 말할 수 있더라도( 그런데 이렇게 여기 는 것은 의심스럽다 ) 새로 생겨난 칠십인역 전통과 성경적 전통을 기초
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런 전통들은 신약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믿었느냐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을 포착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가 주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신약에 나오는 ‘퀴리오스’ ‘퀴리오스’의 용례는 신약 전반에 걸쳐 나온다. 이것은 이 용어의 사용 범위에 대해 앞서 논의한 내용에 비추어 보면 놀라운 일이 아 니다. ‘퀴리오스’는 신약 기독론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 중 하 나였다. ‘퀴리오스’는 널리 사용될 뿐 아니라 신약의 다양한 하위 용 어 자료 안에서 추가로 구별할 가치가 있는 미묘한 차이도 나타 낸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과 바울 서신 서, 히브리서와 일반 서신과 요한계시록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다 룬다.
28) 부세와 다른 학자들이 오늘날 우리가 고대 근동으로 부를 수 있는 “동양”에 대
한 고정관념에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 민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은 Said, Orientalism 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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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와 사도행전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주”가 단순히 크게 존경받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다. 예수는 대단히 많은 사람에게 그렇게 여겨지며 심지어 베드로를 비롯한29) 제자들에게 서 ‘퀴리오스’로 불린다.30) 이중 많은 경우는 부세가 올바르게 지적 하는 대로 호격으로 나타나는데, ‘퀴리오스’라는 용어가 호칭으로 적절히 사용된다. 이런 사례들은 아마 ‘퀴리오스’의 사용에 함축된 기독론적 의미를 평가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31) 중요한 문제는 ‘퀴리오스’가 예수를 가리킬 때 단순히 선생이나 종 교적 인물, 심지어 이적을 일으키는 인물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용 어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 가 그런 결론을 상정하지 않고 이 사실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와 관 계가 있다. 복음서에 사용된 “주/주군”에 대한 많은 연구는 다른 신 약 저자들( 특히 바울 ) 이나 이후의 교회 저자들이 복음서 용법을 해석 한 것에 기초한 사전 이해를 채용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안 된 한 가지 방법은 원래의 맥락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신약의 맥락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구약의 인용문을 검토하는 것이다. 우리
29) 마 14:28, 30; 16:22; 17:4; 18:21; 눅 5:8; 12:41; 22:33; 요 6:68; 13:6, 9,
36, 37; 21:15–17, 21. 30) 예로 다음을 보라. 마 8:25; 26:22; 눅 10:17; 11:1; 17:37; 22:38, 49; 요
6:34; 11:12. 31) 하지만 이런 예들이 논의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아마 지나
칠 텐데, 하나의 예가 다른 용법의 의미를 굳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격에 대 해 과잉 반응하는 학자의 예는 다음을 보라. Moule, Origin of Christology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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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퀴리오스’가 복음서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마태복음 1장 20, 24절과 2장 13, 19절, 누 가복음 1장 11절과 2장 9절은 “주의 사자”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는 데,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자인 불가사의한 인물을 가리 킨다( 예. 출 3:2 ).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사용해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다른 실체를 가리키는 사례도 있는데, 여기에는 성경( 마 1:22; 2:15 ), 이름( 마 21:9; 행 2:21 ), 계명( 눅 1:6 ), 성전( 눅 1:9 ), 율법( 눅 2:24, 39 ), 날( 행 2:20 ) 등이 있다. 또한 “주 하나님”이라는 어구32)나 “주”가 하나님임
을 분명히 하는 대구법도 있다( 예. 눅 1:46–47, 68 ). 문제는 복음서에 서 예수를 이런 식으로 여긴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부세가 고의로 무시하려 하는 몇몇 사례를 비롯해 복음서에 나오 는 ‘퀴리오스’의 여러 가지 사례는 실제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나타 낸다. 하지만 하나님을 가리키는 구약 구절에서 분명히 가져오는 것은 한 곳뿐이다. 이것은 논의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제시한다. 마 태복음 3장 3절과 누가복음 3장 4절( 참고. 요 1:23 ) 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임을 설명 하기 위해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원래 문맥에서 하나님을 “주”라고 부른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예기되는데, 누가 복음 1장 17절에서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주 앞에 먼저 올 것 이라는 말을 듣는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는 세례 요한이 그 길
32) 마 4:7(신 6:16 인용); 마 4:10(신 6:13 인용); 마 22:37(신 6:5 인용); 막
12:29, 30(신 6:5 인용); 눅 1:16, 32; 4:8(신 6:13 인용); 눅 4:12(신 6:16 인 용); 눅 20:37; 요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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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비하고 있는 대상인데, 이 사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사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 은 예수를 자신이 기뻐하는 자기 아들로 선포하신다( 마 3:17//막 1:11// 눅 3:22 ).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
들”( 마 4:3, 6; 8:29; 14:33; 17:5; 27:54; 막 1:11; 3:11; 9:7; 15:39; 눅 1:35; 8:28; 9:35; 22:70 ), “아브라함의 자손”( 마 1:1, 20; 눅 19:9 ) 또는 “다윗의 자손”( 마 1:1; 9:27; 12:23; 15:22; 20:30, 31; 21:9, 15; 22:45; 막10:47, 48; 12:35, 37; 눅 18:38, 39 ) 으로 이해되느냐에 상관없이 복음서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이 양식은 마태복음 22장 44절//마가복음 12장 36절//누가복음 20장 42절( 참고. 행 2:33–35 ) 의 평행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우 리가 더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수는 바리새인과 대화 를 시작하시면서 메시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신다. 바리새인 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진술한다. 그런 뒤에 예수는 다윗 이 시편 110편 1절에서 메시아를 “자손”이 아닌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 셨도다.” 예수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데, 이 진술에는 잠재 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시편에서 가져온 이 인용문이 “주” 곧 구약의 하나님 을 묘사하면서 또 다른 “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인데, 이 두 번째 “주”는 하나님이 그의 원수를 이기고 복종시키시는 동안 하나님의 동료 재판관으로 앉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두 번째 “주”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신적 특권을 행사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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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동안 오른편( 심판의 장소 ) 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에 함축된 두 번째 의미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며 시편의 이 메시 아적 인물이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위치하므로 메시아를 신적 인 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함축된 세 번째 의미는 이번 장에서 우리의 논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예수께서 다윗 의 자손이 다윗보다 열등하지 않고( 이 점은 그의 메시아적 지위에서도 암시 된다 ), 실제로 “주”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신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단순히 호칭의 형태였을 수도 있는 것이 이제는 분명하게 하나님과 동등한 자 곧 주 하나님과 동등한 두 번째 주를 가리키는 칭호다. 이것은 마가복음 5장 19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여기서 예수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다. 예수는 귀신 들린 자에게, “집으 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마가는 그 뒤에 20절에 서 이 사람이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전파했다고 진술한다. 이 구절에서 “주께서 네게 행하신 큰 일”에 대한 진술은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된 구약의 용어 를 연상시키는데, 여기서는 마가가 예수께서 이 일을 행하셨다고 명시한다. 누가는 자기의 복음서에서 이 점을 훨씬 명백히 밝히는 데, 여기서 예수는 귀신 들린 사람에게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라고 말씀하시며 이 사람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파한다( 눅 8:39 ).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는 부활 이후의 이야기에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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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여러 번 ‘퀴리오스’로 불린다.33) 이런 동일화는 예수를 주 예수로 부르는 상황에서 더 명백해진다.34) 여기서 사용된 용어는 주 예수의 이름과 말씀 및 구원을 위해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하나님께 사용된 용어와 비슷 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활의 증언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부활 이후의 상황은 “주”를 사용하는 구약 구절이 예수를 “주”로 가리키 는 것으로, 곧 예수를 주 하나님이라고 의미하는 것으로 어떻게 이 해될 수 있는지를 훨씬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사도행전 2장 25– 28절에서 베드로는 자기 앞에 있는 주 곧 구약의 하나님을 보았다 고 말하며, 하나님이 이 주를 죽음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 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 언급은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주” 로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를 “주”로 여기는 분명한 진술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해 도,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구약의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상정하는 다 른 사례가 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의 중요한 사례는 예수 를 “주”로 부르고 병 고침과 같은 신적 행동을 수행하시는 것으로 묘사하는 사건과 관계가 있다. 마태복음 8장 5–13절에서 예수는
33) 예로 다음을 보라. 요 21:12, 15, 16, 17, 20, 21; 행 1:6, 24; 7:59, 60; 9:10,
13; 22:19. 참고. Rainbow, Johannine Theology , 187–188. 그러나 레인보 우는 요한복음을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떼어 놓기를 원해서 요한복음에서 “주” 의 중요성을 경시한다. 34) 행 1:21; 7:59; 8:16; 11:17, 20; 15:11, 26; 16:31; 19:5, 13, 17; 20:24, 3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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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종을 고치신다. 백부장은 예수를 “주”로 부르는데( 8:6 ), 예 수는 “주”로서 멀리서도 자기 종을 고칠 수 있으시다고 믿으므로 예수께 자기 집에 오시기를 청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4장 22– 32절에서 예수는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합류하러 물 위로 걸 으신다. 베드로도 물 위로 걷고 싶어 하여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14:28 ). 하지만 베 드로는 충분한 믿음이 없어서 물 위를 걷지 못하고 가라앉는데, “주 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친다( 14:30 ). 마태복음 15장 22절에서 가나안 여자는 예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의 긍 휼을 간구하는데, 자기 딸에게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가나안 여 자는 자기의 간청( “주여 저를 도우소서” ) 을 되풀이하는데 그의 믿음 때 문에 칭찬받는다. 누가복음 5장 12–15절에서 한 나병환자는 예수 께 나아와 주께서 원하시면 자기를 고치시기를 간청하는데 예수께 서 이 사람의 병을 고치신다. 누가복음 9장 54절에서 제자들은 주께 서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서 주의 원수들을 멸하기를 원하시 는지를 예수께 묻는다. 복음서의 증거는 신약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증거만큼 결정적이 지 않지만, 예수를 위해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사례는 다양한 상황에서 나온다. 이 사실은 심지어 ‘퀴리오스’의 사용이 분명한 지 시자가 없는 사례에서도 예수께 사용될 때( 이 용어가 예수를 가리키든지 예수와 관련해 사용되든지 간에 ) 공경의 의미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포
함할 정도로 확대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점은 만일 부세의 생각이 옳았다면 우리는 아마 바울 서신보다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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