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글로벌 선교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때, 『성경적 종말론』( Biblical Eschatology ) 의 집필을 마치고 출간하게
된 것은 저자로서 특별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본서는 새 언약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글로벌 선교 현장에 흩어진 하나님 백성을 위 해 저술된 『하나님 나라와 언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 2017 ) 을 보완하는 책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독자에게는
두 책을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여러 신실한 성도를 위시하여 다양한 교회와 기관이 기도와 함께
후한 재정적 지원으로 필자의 연구, 교수, 집필 사역을 후원했다. 특
히 몇몇 후원자의 이름을 거론하여 그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자 한다. 강창욱 박사, 김상연 박사, 홍장석 목사님과 시무하시는 호
산나 교회, 오웬 리 담임목사와 시무하시는 그리스도 중앙장로교회, 윤태선 목사와 시무하시는 미주 임마누엘교회에 특별한 감사를 드
린다. 『성경적 종말론』을 집필하는 과정 내내 필자는 성령의 인도하심
을 겸손히 의지해야 했다. 때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때로는 경
외심과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 속에서, 본서의 모든 집필 과정이
기쁨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존 칼빈, 존 오웬, 프란
키스쿠스 투레티누스,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핫지, 헤르만 바빙크,
게르할더스 보스, 코넬리우스 반틸, 메러디스 클라인 등 진실한 믿
음의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새로운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품지 않
을 수 없었다. 특히 본서, 『성경적 종말론』의 근본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보스와 클라인의 저술이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두 신학 저널의
연구”( Calvin and the Two Kingdoms: Calvin’s Political Philosophy in Light of Contemporary Discussion ). Westminster Theological
철학에
Journal 72/2 ( 2010 ) : 299–320;
( The Noahic Covenants and Redemptive Judgment ) . The Confessional
Presbyterian 15 ( 2019 ) : 148–162,
도움을 주
었다.
『성경적 종말론』의 출간을 준비하던 2020년 초봄, 코로나 전염병
의 대유행이 마치 산불처럼 전 세계로
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필자가 속한 벧엘교회의 백신종 담
임목사와 모든 성도의 따뜻한 기도와 돌봄에 감사를 드린다.
이 땅과 하늘의 두 시민권을 지니고 살아가는 전 세계 선교지에
흩어진 모든 독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가 풍성한 복을 더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 땅
의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때로 극한의 고통과 순교적
삶을 마주하기도 한다. 이때 우리가 외치는 마라나타는 하염없는
눈물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일 수 있으나 성삼위 하나님의 눈에 그
것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도의 소리일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솔리 데오 글로리아' ).
저자 서문 15
가난하든 부하든, 강자이든 약자이든,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아
름답든 추하든, 젊든 늙든 관계없이,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숙명이
있다. 현세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 있
는가 하면 이 세상을 떠나는 날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그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 세상에서
나라와 민족은 언제나 흥망성쇠를 겪는다. 아무리 막강한 제국이나
왕국이 있다고 한들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인류 역사가 이를 증명
한다. 성경은 개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도 그 끝이 있
을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 eschatology ) 이라는
표현은 적절한 신학적 용어로 여기기에 손색이 없다. 루이스 벌코
프는 교회 역사를 통틀어 종말론이 “기독교
미래에 대한 영광스러운 예언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그리스도인이든 교회든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한 이를 통해 위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교회가 세상의 근심에 짓눌리
거나 세상의 쾌락에 휩쓸려 미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게다가 장차 있을 소망의 구체적인 요소 가운데
어떤 때는 어느 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른 때는 다른 부분
을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교회가 태만 한 시기에는 기독교의 소망이 때로 희미해지고 막연해지기
도 했지만, 그런데도 이 소망이 완전히 소멸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종말론이 기독교
사상의 중심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 또한 함
께 언급해야 할 것이다. 교의학의 다른 논제는 각각 나름의
특별한 발전 시기를 겪었지만, 종말론의 경우는 그렇지 못
했다.1) 이미 예상되듯이 지금까지 글로벌 선교 시대의 새 언약 공동체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 종말론에는 몇 가지 다른 이론이 존재
한다. 따라서 우선 종말론의 다양한 형태를 간략하게 규명할 필요
가 있다.
1) Berkhof, SystematicTheology, 662.
자유주의 신학과 종말론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는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의 전성기
를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임마누엘 칸트의 낭만주의 철학과 헤겔의
변증법적 관점의 역사 철학이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와 목회자의 사
고와 경험 속으로 녹아들었다.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에는 성
삼위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무오성과 무
류성에 대한 완강한 부인이 존재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새 언약 교
회의 신학과 실천을 위한 두 중심축이 공공연하게 폐기되고 거부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거부로 인해 자유주의 신학자의 사고에는 예
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신자의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
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 심판과 더불어 천
국과 지옥의 실체조차 부정되었다. 이에 따라 고전적 자유주의의
종말론적 비전은 급진적인 재정립과 해명을 겪었다. 최선으로 표현
하자면 나사렛 예수에 의해 한때 구현되고 예시된, 도덕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진보와 실현이 고전적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종말론적 비전이라 하겠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이러한 19세기의 도
덕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실현을 다룬 대표적 인물이다. 리
츨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성취를 부인하고, 현 세계와 관
련한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해석을 장려했다. 따라서 리츨은 “보편
도덕적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가 지향하는 근본 목적으로 규
정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것이 민족의 자연적 한계를
초월하고 민족의 도덕적 사회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택
함 받은 공동체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목적을 의미한다. 이러
한 측면에서 기독교는 완전한 도덕적 종교로 드러난다……
그런 양 측면에서 우리는 완전한 영적 도덕적 종교의 이상
속에 성경의 유일신적, 영적, 목적론적 종교의 정점을 보게
된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서로에게 상호 조건이 된다는 점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는 보편 도덕적 하나님 나라
를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셨고, 따라서 그분은 죽음까지 고난
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하나님과의 복된 친
교를 공고히 유지함으로 자신이 성취한 유형의 구속을 알게
되셨고 그 일을 위한 결정에 이르셨다.2)
칼 바르트와 더불어 루돌프 불트만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실존주
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비록 그들이 신학적 사조의 분명한 차이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와 근본적
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자는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서유럽의 지배적인 철학 사조였던 실존주
의 철학이라는 큰 뼈대 위에 신학적 개념과 언어를 두텁게 덧칠
했다. 그렇게 그들은 실존주의의 렌즈를 통해서 종말론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진리를 전형화시켰으며 개인의 주관적 경험으로 만들
2) Ritschl, ChristianDoctrineofJustificationandReconciliation, 10.
었다. 예를 들면 불트만은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의 부활과 승천 기사를 비신화하면서 “종말론적 사건”의 개념을 급
진적으로 재해석한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사건, 옛 세계
에 종지부를 찍는 하나님의 행위 자체다. 이 종말론적 사건은
기독교회의 설교를 통해 항상 다시 현재적 사건이 될 것이며
실제로 이것은 믿음 안에서 항상 다시 현재적 사건이 된다.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 옛 세계는 그 끝에 도달했다. 그는 ‘그
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사람이 ‘옛 사람’으로
서 스스로 종말에 이르렀고 이제 ‘새로운 사람’, 자유인이 되
었다는 사실과 함께 옛 세계는 그 종말에 도달한다.
이것은 기독교 메시지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종말론적
사건은 바울과 요한에 따르면 하나의 극적인 우주적 파국으
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해
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시작된 것이며 역
사 안에서 되풀이하는 것과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역사가에 의해 확증할 그런 역사적 발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설교와 믿음을 통해 반복적으로 하나의 사건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과거에 확립된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지금
여기 나 자신과 여러분에게 말을 건네며 계속 반복되는 현재
적 사건인 종말론적 사건이다.3)
결과적으로 불트만의 실존주의 조명 아래 제시된 그의 종말론적
비전은 지금 여기 ( here and now ) 의 현재적 종말론을 조장하며, 그것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미래 완성에 대한 어떤 소망도 없는 케리
그마적 말씀과의 개인적 주관적 조우를 중심으로 한다. 이런 의미 에서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몸의 부활, 최후 심판의 성경적 예언 또한 비신화화한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종말론
19세기 중반 넬슨 다비( Nelson Darby ) 를 통해 소개된 세대주의 해
석법과 신학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과 종말론
의 전환점이었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20세기에 미국에서 빠르게 확
산하였다. 세대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은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뚜
렷한 구분에 있다. 물론 세대주의에는 고전적 세대주의, 수정 세대
주의, 점진적 세대주의 등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스라
엘과 교회 사이의 구분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중점을 두는 지상 천
년왕국은 다양한 형태의 세대주의 종말론의 공통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세대주의 종말론을 옹호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같은 날에 임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하지
3) Bultmann, HistoryandEschatology, 151–152.
만 이 사실은 성경적 종말론이 보증하는 진리다.4)
현대의 세대주의 종말론과 신학을 대표하는 맥아더와 메이휴는
자신들의 관점을 역사적 전천년설과 구별한다. 그들은 대환난 시기
에 있을 요한계시록 6–18장 환상의 미래적 성취를 강조하고, 자신
들의 관점을 대환난과 지상 천년왕국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할
을 강조하는 “미래주의 전천년설”로 규명한다.
첫째, 미래주의 전천년설은 다니엘의 일곱 주간과 요한계
시록 6—18장의 인, 나팔, 대접 심판이 역사의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천년왕국만
이 미래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일어나는
특별한 대환난 기간 또한 미래에 있을 일이다. 이것은 미래주
의 전천년설이 왜 ‘미래주의’가 되는지 설명한다. 미래주의
전천년설은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장래에 있을 대환난 시기
와 천년왕국에서 중요한 정체성과 역할을 지닐 것이라 생각
한다. 미래의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한 신구약의
예언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반드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야
한다. 따라서 미래주의 전천년설은 어떤 식으로든 교회를 하
나의 민족으로서
보는 온갖 형태의 대체 신학 또는 대체주의를 거부한다. 하나
님은 개인과 교회를 위한 계획이 있으실 뿐 아니라 세상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계획도 가지셨다. 예수 왕국에서 이스라
엘은 열방에 대한 리더십과 봉사의 역할을 지닌다(사 2:2–
4). 천년왕국은 이전에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과 약속의 모
든 측면이 이스라엘을 위해 성취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5)
따라서 종말론에서 묘사되는 세대주의
연속성이 결여된 이스라엘 중심적이고 이
스라엘 완결적인 해석이다. 그것은 성경적 종말론 본래의 비전과
균형을 잃고 있다. 안타깝게도 세대주의 신학과 종말론은 지금까지
북미 복음주의 안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었다. 이런 세대주의 신학은
특히 글로벌 선교 현장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데, 이
는 20세기 초를 시작으로, 세대주의 신학과 종말론으로 무장한 수
많은 북미 선교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전 세계 교회에 자기들의
신학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전천년설과 종말론
20세기 초부터 세대주의 종말론은 북미 복음주의 교회에서 산불
5) MacArthur and Mayhue, Biblical Doctrine, 891.
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대주의 해석법과 신학을 거부하면
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 지상 천년왕국을 성경적이라고 인정하
는 신학자가 일부 있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세대주의에서 스
스로를 차별화하는 역사적 전천년설로서 자신들의 종말론을 수정 보완했다.6) 오늘날 역사적 전천년설의 대표주자 격인 그루뎀은 역
6) 예를 들면,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Jr., 1906–2002년)는 보수 장로교 목
회자로서 1937년에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페이스 신학교를 설립했다.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은 미래 장로교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신학교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칼 매킨타이어의 주도하에 성
경장로교회 교단이 창립되었고, 그 창립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교
리문답, 소교리문답의 종말론 부분을 개정해 다음을 표준 고백으로 삽입했다. 지
상 천년왕국,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있을 신자의 몸의 부활, 지상 천년왕국 후
그들이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기 전에 있을 불신자의 몸의 부활과 최후 심판.
나는 1996년 뉴저지의 매킨타이어 자택에서 그와 사적으로 대화할 기회가 있
었다. 매킨타이어는 자신의 성장 시절, 순회 성경 교사와 부흥사가 자기 모교회
에 자주 방문해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르쳤기 때문에, 당시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매우 대중적인 운동이었던 세대주의 종말론에 자신도 깊이 노출될 수밖에 없
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받은 자
신의 신학 교육이 세대주의 종말론을 단념하도록 도왔지만 전천년설 자체를 버
리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것이 매킨타이어가 페이스 신학교와 성경장로
교회를 설립할 당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강력하게 옹호했던 배경이다.
덴버 신학교에서 학장으로 봉직했던 페이스 신학교의 졸업생 버논 그라운
즈(Vernon Grounds, 1914–2010년)의 영향에 따라, 해당 신학교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장려하는 신학 기관이 되었다. 덴버 신학교 및 다른 학교 교수진 가
운데 역사적 전천년설에 대한 현대적 변론에 대해서는 Blomberg and Chung, Case for Historic Premillennialism을 보라.
한편, 정성욱(Chung)은 무천년설을 “계 20:1–6에 대한 영지주의식 독법의
산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오독한 것이
며 부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역사적 전천년설이 종교개
혁과 종교개혁 이후 시대 신앙고백의
사적 전천년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현재의 교회 시대는 그것이 마지막에 가
까워짐에 따라 대환난의 시기와 고난의 때가 지상에 임할 때
까지 계속될 것이다……교회 시대의 마지막 무렵에 있을 대환난
의 시기 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죽었던 신자는 부활할 것이고, 그
들의 몸은 자신들의 영혼과 재결합할 것이며, 이 신자들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상에서 다스릴 것이다……이 기간
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한 몸으로 실제로 지상에서 거하
실 것이며, 왕으로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 죽은 자 가
운데서 살아난 신자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지상에 있던 신자
는 다시 죽지 않는 영화로운 몸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부활의
몸 안에서 지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지
상에 남아 있던 불신자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자들
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는 완
전한 공의로 지상을 다스리실 것이며, 지상 전역에 평화가 있
을 것이다. 많은 전천년주의자가 사실상 이때 땅이 새로워질
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다고 한다면, 조직신학의 주요 교리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감안할 때, 무천년설 종말론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리가 없지 않은가? 정성욱은
전통 개혁주의 언약 신학이 구속의 물리적 제도적 측면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영적 의미로 해석해 온 방식에 대해 보여 준다. 정성욱에게 있어서 무천년설은
계 20:1–6에 대한 영지주의식 독법의 산물이다.” Blomberg and Chung, Case for Historic Premillennialism, xviii–xix.
것이고 실제로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이라 여
긴다(그러나 이것이 전천년설을 옹호하는 자들의 필수적 입
장은 아니다. 최후 심판이 있을 때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전천년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초반에 사탄은 결박되어 무저갱 속에 던
져질 것이며, 따라서 사탄은 천년왕국 동안에는 지상에서 아
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계 20:1–3). 전
천년설 견해에 따르면, 사탄은 천 년이 지나고 무저갱에서 다
시 놓여나게 될 것이고, 외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
종하지만 내적으로는 그를 향한 반역으로 들끓었던 허다한
불신자 무리에 합세할 것이다. 사탄은 그런 불순종하는 자들
을 모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지만, 그들
은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이다. 그 후에 그리스도는 역사상 죽
었던 모든 불신자를 죽음에서 일으킬 것이며, 그들은 최후 심
판을 위해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신자는 최후 심판이 있은
후에 그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7)
비슷한 현상이 글로벌 선교 현장에서도 발생했다. 일부 유력 신학
자의 주도 아래, 역사적 전천년설은 교단을 초월한 복음주의권 선
7) Grudem, Systematic Theology, 1112. 다른 관점에서 본 역사적 전천년주의
사상으로 Ladd, Blessed Hope; Ladd,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Ladd, CrucialQuestionsabouttheKingdomofGod; Ladd, Gospel oftheKingdom; Ladd, “Historic Premillennialism,” 17–40를 보라.
교 현장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종말론의 한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8)
후천년설과 종말론
유럽 교회에서 일어난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17세기 초를 시작으
로 많은 무리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건 긴 항해 끝에 대서
양을 지나 북미 대륙으로 건너왔다.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은 지칠
줄 모르는 수고와 열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었다. 목사와 신
학 교사는 주민을 경건한 생활로 이끌었고 공동체 안에 새로운 교
회를 세웠다. 우리는 이들을 청교도 목회자와 신학자로 일컫는다.
이들은 뉴잉글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회 공동체에서 설교
와 교육과 목회 사역에 일생을 헌신했다.
점점 다양한 공동체와 민족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이 전 해짐에 따라, 이들은 그리스도인 마을과 도시와 국가의 건설에 대
8) 예를 들면, 박형룡(1897–1978)과 박윤선(1905–1988)은 교단을 막론하고
20세기 한국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보수주의 장로교 신학자다. 이들은 자신의
교수 및 저술 사역 전반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가장 성경적인 형태의 종말론으
로 주장하고 가르쳤다. 그런데도 이들은 북미의 성경장로교회 창립자와 달리 웨
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한국의 장로교 교단 안에서 신앙고백 표준으로 채택
된 종말론 부분을 개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형용과 박윤선 둘 다 웨스
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종말론 가르침이 역사적 전천년설과 조화되지
한 낙관적인 전망과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여
러 청교도 목회자는 후천년설을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받아들였다.9)
복음이 깊이 침투해 들어가는 곳마다 문화적 변혁이 일어나면서, 예
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기독교 공동체와 도시와 나라가
가시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을 목격할 것처럼 보였다.10) 후천년설을
지지하고 주장하는 케네스 젠트리는 후천년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한 정의을 내리고 있다.
후천년설은 복된 성령으로 힘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가 현세대에 인류의 대다수를 구원으로 인도할 것을 기대한다. 복
음 전파의 점진적인 성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인간사와 국
가 내정에서 믿음과 공의와 평화와 번영이 만연하는 역사의 한 시
기를 서서히 창출해 낼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긴 시간이 흐른
다음, 그리스도는 가시적으로, 몸으로, 위대한 영광으로 다시 오셔
서, 모든 사람의 보편 부활 및 대심판과 더불어 인류 역사는 종결
에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천 년기” 시대의 상황 후에 그리
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의 체
계는 후천년주의다. 그러므로 후천년주의자는 역사가 “그분
9)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후천년설 입장을 취한 대표적인 청
교도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Edwards,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을 보라.
10) 후천년설 사조의 흐름에 대해서는 Gentry, “Postmillennialism,”(『천년왕국이
란 무엇인가』,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1), 13–57; Mathison, Postmillennialism을 보라.
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가운데 독특한 방식으로 그
것을 선포한다.11)
이 같은 후천년설은 뿌리 깊은 죄 문제와 그로 인해 현시대가 겪
는 파괴적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은 특
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있을 새 언약 교회에 대한 고난과 박
해의 마지막 날인 종말론적 시대로서의 새 언약 시대에 대한 올바른
비전을 놓치고 있다.
완전 과거주의와 종말론
구속사에서 있었던 몇몇 전환점 가운데 하나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 기간 로마 제국의 군사 행동으로 초래된 AD 70년 예루
살렘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다. 일부 신학자는 AD 70년의
이 역사적 사건을 그 자체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 사건으로 여겼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
의 날을 포함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AD 70년의 이 사건으로 이미
성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사건들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의 저작
연대는 AD 70년 이전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
들은 자신들이 전망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관련한 모
든 예언이 이미 그 해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이 관점은 ( 극단적인 ) 완
11) Gentry, “Postmillennialsim,” 13–14.
전 과거주의라고 지칭한다. 현대의 완전 과거주의 주창자 찰스 미
크는 완전 과거주의의 광범위한 그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여러분이 고려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제시하는 관점은 이와
같다. 과거주의(preterism)란 용어는 과거를 의미하는 라틴
어 프레터(praeter)에서 유래한다. 과거주의자는 전부는 아
니라고 하더라도 예언 사건 대부분이 1세기의 사건과 함께
이미 성취된 것으로 믿는다……심판 가운데 임하는 그리스
도의 재림과 종말론적 약속의 완전한 성취가 AD 70년에 이
루어졌다. 사도들이 생전에 예수가 다시 오실 것으로 생각했
던 것은 틀리지 않았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생각이 낯설게 보
일 수 있지만, 우리는 신구약의 여러 구절이 여러분에게 과거
주의 견해를 고려할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증명해 준다고
믿는다……영감 받은 저자가 기대했던 대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토대가 완성되었다. 그것은 이미 실현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에, 영생에
대한 약속의 실상과 관련하여 심지어 더 큰 확신도 갖게
된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는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말씀처럼……과거주의는 일
종의 낙관적인 종말론이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임할 환난에
대해 두려워할
기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임종 즉시 영광스러운 몸
으로 역대의 모든 성도와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하
여 곧장 천국에 들어간다.12)
그러나 개인적으로 완전 과거주의는 이단이라고 생각한다. 단순
히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의 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정하자면, 완전 과거주의를 주장하고 옹호
하는 이들 대부분이 다른 성경 교리에 대한 신념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12) Meek, ChristianHopethroughFulfilledProphecy, 46–47, 296–297. 한
편, 완전 과거주의자와는 스스로 차별된 모습을 보이는 부분적 과거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두 강림(재림)을 주장한다. 미크가 요약하는 대로
그들은 AD 70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은유적 강림”이었던 반면, 세계 역
사의 종국에는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강림’”이 있을 것
이라 주장한다. “완전 과거주의자와 달리, 부분적 과거주의자는 AD 70년 심판
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유적 강림’에 더하여 마지막 때에는 문자 그대로 육체
적 그리스도의 ‘완전한 강림’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완전 과거주의자는 신약
성경이 단 하나의 재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믿으며, 재림과 관련한 다른 일부
본문은 그것과 관련되는 시간 참고의 기준이 불명확하지만, 반드시 1세기로 국
한되는 시간적 지시가 분명한 본문의 조명 아래에 해석해야 한다고 믿는다. 부
분적 과거주의자는 하나님이 구약에서 다양한 시기에 수차례 심판으로 임하셨
기 때문에, 예수가 AD 70년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 때에 다시 한번 총 두 차례
의 ‘두 번째’ 강림(즉 2회의 재림)을 갖는 것이 오히려 일관성 있어 보인다는 자
신들의 추론에 기초해 이런 주장을 전개한다.” Meek, Christian Hope throughFulfilledProphecy, 48.
무천년설과 성경적 종말론
무천년주의자는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천 년 통치를 상징적
이고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과 재림 사이의 현시대를 순교 당한 자들과 죽은 신자
들의 영혼이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다스리는 종말
론적 시대로 이해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후천년주의자처럼 그 기간
이 땅의 세계 역사와 새 언약 공동체의 주변 문화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은 갖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인 주의 날과 최후
심판의 날이 같은 날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무천년주의자와 후
천년주의자가 공통된 입장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필자는 무천년
설이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 보증되는 가장 성경적인 형태의 종말론
이라고 생각한다.13) 성경적 종말론의 가장 탁월한 주창자 가운데 한
명인 게르할더스 보스는 무천년설의 일반적 양상에 대해 다음과 같
이 요약한다. 이 흐름 안에 우리가 놓여 있는 역사는 결말을 맞게 될 것
이다. 이것은 끝없는 진행 과정이 아니라, 경계와 한계를 지
닌 채 뚜렷한 목적으로 마무리되는 하나의 진정한 역사다. 여
13) 무천년설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Kline, God,Heaven and Har Magedon(『개혁주의 종말론』, 부흥과개
혁사 역간, 2012); Riddlebarger, A Case for Amillennialism; Strimple, “Amillennialism,” 81–129; Vos, ThePaulineEschatology을 보라.
기에 시작이 있었던 만큼, 이것은 분명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 결말은 일종의 위기로 찾아올 것이며, 이 위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바로 ‘마지막 일에 대한 교리’에 속한다……이 결
말은 세계사의 맨 끝에 모두 동시에 임한다. 이같이 마지막에
속한 것과 그것과 관계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일반 종말론
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또한 개인에게도 이생을, 곧 이 시대
를 떠나는 것과 함께 마지막이 임한다. 개인은 자신의 죽음으
로 속세의 전개 안에 있는 이 세대에서 위로 들림을 받고, 어
떤 의미에서는 다가오는 세대로 더 가까이 이끌린다. 실제로, 성경에는 두 세계 시간 사이의 반정립이 두 세계 공간 사이의
반정립과 교차한다. 이 세대가 장차 오는 세대로 흘러들어 갈
그때, 새 예루살렘, 미래의 도성, 천상 왕국이
전환과
이제 우리는 성경 속에 계시된 성경적 종말론의 신비와 그 전개
국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우리는 성경 계시의 점진적인 특성과
종말론 교리의 조명 속에, 성경에서 전망되는 언약 종말론의 일반 유
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구속적 심판에 적용된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간의 차별적 모습에 나타난 모형론적 적용
또는 삽화처럼 제시된 함의와 마지막 구속적 심판에 대한 그것의
14) Vos, ReformedDogmatics, 5:251–253.
미래적 적용에 대해 논증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구속적
심판을 집행하기에 앞서,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와 신실한
신자를 동원해, 행위 언약을 기반으로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부
단한 언약 소송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적 규모의 노아 홍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
님이 구속사 안에서 계시하신 언약 종말론의 패턴에 따른 윤곽을 드
러내고자 할 것이다. 특히 노아 때의 구속적 심판 행위였던 홍수 심
판을 통해 언약 공동체와 비언약 공동체를 서로 분리함으로써 드러
내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유형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그 후, 아
브라함 언약의 역사적 문맥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구속적 심
판을 통해 하나님은 언약 종말론의 유형을 가시적으로 집행하셨다.
유아를 포함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행위 언약
의 언약적 규범에 의거해 저주와 죽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를 소알 성읍으로 인도해 구원하
셨다.
또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곳 거민과 거
룩한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하나님은 모세 언약의 제정과 더불어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언약 종말론의 유형을 다시금 보여 주셨다.
모세 언약의 율법에 기초해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에게 임하는 복
또는 저주는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한 가시적 전조
722년, 앗수르 제국의 군사력을 사용해 북이스라엘 왕국에게 언약
저주를 집행하셨다. 그리고 BC 586년에는 바벨론 제국을 사용하여
남유다 왕국에게는 예루살렘 함락과 바벨론 포로의 언약 저주를 집
행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으로 새 언약 시대가 이미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이다. 한편, 모세의 율법 언약은 새
언약 아래에서도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에게 여전히 유효한 것이
었다. 그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언약 소송의 역사적 진행 과정으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사용하
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와 신실한 신자가 그 언약 소송의 대리
자였다. 마침내, AD 70년에 하나님은 결국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상대로 모세 율법 언약에 기초한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날에 최후 심판장이자
만물의 마지막을 완성하시는 이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
도의 이 두 번째 강림은 곧 마지막 구속적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마지막 구속적 심판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린 구속적 심판
을 통해 이미 예표된 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불 심판이 될 것
이다. 그렇게 심판하는 가운데, 성부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6–19절
에서 최초로 수립되고, 노아 홍수 심판 후 창세기 8장 20절—9장
17절에서 재개된 일반 은총 언약의 모든 수혜를 폐하실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이제 그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언약 정경인 성경 구속사 의 장대한
다양
한 패턴과 그것을 추적하는 이 여행길을 독자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란다.
1장
노아 언약과 구속적 심판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는 홍수 심판의 에피소드를 포함한
창세기 1–11장의 기사를 역사적 기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일종
의 신화로 간주한다. 최근에 일부 복음주의 학자는 역사와 신화 사
이에서 일종의 절충적인 중간 입장을 취하며 창세기 1–11장을 “신
학적 역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롱맨과 월턴은
창세기 6–9장에 기록된 “성경의 홍수 이야기”를 신화도 아니고 역
사도 아닌 “신학적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신학적 역사는 “비유적 언어의 사용을 통한 과거의 실제 사건”의
“과장법적 진술”을 반영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성경의 홍수 이야기를 신화라고 믿지는 않지만, 창
세기 6–9장의 저자가 우리에게 그 배경이 된 사건에 대한
직설적인 묘사를 제공하려 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영감을 준 어떤 사건이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
결국, 창세기 6–9장은 신학적 역사다. 그러나 우리는 물론
홍수 기사를 포함한 창세기 1–11장에 대한 최선의 이해는
해당 본문이 비유 언어의 사용을 통해 과거의 실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홍수 이야기 사례에서
우리는 홍수에 대해 기술하기 위해 과장법이 사용된 것을 규
명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배후에는 실제로 어떤 사건이 존
재한다. 이것은 여호수아 1–12장에 제시된 여호수아의 정
복에 대한 과장법적 진술 배후에 실제 정복 사건이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1)
그러나 필자는 창세기 6–9장의 홍수 심판 이야기가 성령의 감동
과 감화 아래 선지자 모세가 어떤 과장이나 왜곡 없이 기록한, 노아
시대의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그것은
하나님이 창세기 6장 5절—8장 19절의 홍수 전 노아 언약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노아 홍수를 통해 성경적 종말론의 패턴을 보여 주신 사
건이다.2)
1) Longman and Walton, Lost World of the Flood, 145.
2) 홍수 전과 홍수 후의 노아 언약 구분에 대한 성경신학적 논의는 Horton, Introducing Covenant Theology(『언약신학: 개혁신학의 뼈대를 세워 주는』, 부흥 과개혁사 역간, 2009), 111–128; Jeon, BiblicalTheology(『하나님 나라와 언
약적 관점으로 보는 성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9), 33–57; Kline, KingdomPrologue, 212–262를 보라.
우리는 노아 홍수 심판의 사건에서 성경적 종말론의 요소를 몇
가지 배울 수 있다. 첫째, 노아 홍수 심판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공동체를 비언약 공동체와 구별해 내시는 일종의 구속적
심판이
었다. 추가로, 이것은 국지적 사건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심판이
었다. 노아 홍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마지막 우
주적 대심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심판은 첫째 아담이
위반한 에덴의 행위 언약 원리에 의거해 언약 소송의 형태로 나타
난 일종의 가시적 심판이었다. 특히 이것은 첫째 아담의 모든 후손
에게 전가된 원죄의 전가 효력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계 21:2 ) 과 새 땅의 영광스
러운 결합을 모형론적 그림으로 보여 주셨다.3)
3) 홍수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에 대해서는, Vos, Eschatology of the Old Testament, 81–83을 보라. 흥미롭게도 보스는 은혜 언약을 하나님이 택자와 맺으신 “특별 계약”로 간주하는 반면, 노아 언약을 일반 은총 언약으로 규명 가능 한 “보편 언약”으로 묘사한다. 이런 식으로 보스는 홍수 전과 홍수 후의 노아 언
약 사이의 정당한 차이를 적절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세게딘, 무스쿨루스, 폴라누스, 볼레비우스 등은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 동물과 맺으신
일반 계약(foedus generale, ‘포이두스 게네랄레’), 즉 보편 언약과 택자와 맺으
신 특별한 영원한 계약(foedus special ac sempiternum, ‘포이두스 스페키
알 아크 셈피테르눔’), 즉 특유의 영원히 지속적인 언약 간의 차이를 구분한다.
전자의 언약, 모든 피조물과의 언약과 관련하여 혹자는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 체결에 호소할 수 있다. 그 언약과 더불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질서가 다
시는 홍수에 의해 파괴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고 이에 대한 일종의 표지와 보증
으로 무지개를 두셨다……[그것은] 창 6:13; 9:9 및 후속 구절에서 하나님과 노
아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하나님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령 사이의 언약임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은혜 언약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 언약이다.” Vos, ReformedDogmatics, 2:122–127.
한편, 창세기 8장 20절—9장 17절의 홍수 후 노아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노아 홍수 심판 후에 일반 은총 언약을 다시 회복하고 재
개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최후 심판이 임할 때까지 하나님과 지
구를 포함한 인류 사이의 언약을 그 수단으로 하여 현재 세계에서
인류 역사를 보존하신다. 창세기 3장 16–19절에서 최초 수립된 일
반 은총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 연장하심은 홍수 심판 후의 인
류를 위한 안정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 땅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언약 공동체의 존재, 교회
의 거점을 마련한다. 노아 홍수와 구속적 심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
님이시다. 노아 홍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히 거룩하
심과 의로우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신다. 신실한 노아가 순종적으
로 방주 건설을 마친 후, 노아 언약 공동체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방주로 입성하는 모습은 노아 언
약 공동체와 비언약 공동체 사이에 가시적 구별 과정을 보여 준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탁월한 신학
울뿐만 아니라 첫 사도인 예수의 열두 제자 또한 오순절 사건 후 성
령의 감동하심 속에 히브리어 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해
석의 모범을 따를 수 있었다. 유명한 감람산 담화에서
예수 그리스
도는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을 자신의 재림의 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
의 때와 비교해 말씀하신다.
36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노아의 때와 같
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
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
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때에 두 사람이 밭
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
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너
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
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36–44)4) 4) 보스는 노아 홍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를 듣게 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자가 임하는” 그날 ( 37, 39절 ) 은 택자를 유기당하는 자와 분리해 내는( 41–42절 ) 마지막 심판
의 날과 동일한 날이다. 하나님은 노아 언약 공동체와 비언약 공동 체를 서로 구별하셨다. 노아 언약 공동체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님은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언약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진노를 쏟아붓기 시작하셨다. 이와 유
사한 방식으로, “인자가 임하는” 그날에 하나님은 택자와 불택자 사
이를 가시적으로 갈라놓으며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마지막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40–41절의 진술,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
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라는 예수가 재림하시는 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 때에 택
자와 유기되는 자 사이에 있을 영원한 분리에 대한 일종의 비유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주의 날을 정하셨다. 그날은 영광스러운 신
현과 심판의 실체가 마침내 가시적으로 현시되는 날이다. 주의 날
한다(참고. 마 24:37; 눅 17:26). 이 구절들은 우리가 검토 중인 그 두 시대 직전
에 처한 죄악상을 서로 비교하며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련성 속에서 특
히 강조되는 것은 불시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강림이다. 벧전 3:20 이하는 세
례의 물과 홍수의 물을 서로 비교한다. 이 물들은 둘 다 종말론적 의의를 지녔고
구원을 지향한다. [홍수 때의] 물은 세계 심판의 도구였고, 세례 때 그랬던 것처
럼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를 나뉘게 했다.” Vos, Eschatology of the Old Testament, 82.
이 임했을 때,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과 언약 공동체에게 적대적인
우상숭배자의 박해를 견디며 하나님의 신실한 종 노아가 120년 동
안 건설했던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노아 언약 공동체가 방주 안으
로 들어간 후에 하나님은 신현의 영광으로 나타나셨고, 홍수 전 본
래의 지구에 구원의 방주였던 노아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 하나님
이 친히 그 일을 행하신 가운데 그분은 사람들에게 방주로 들어가
는 추가적인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방주의 출입구를
닫으며 그것을 봉쇄하셨다. 영광의 주가 보이지 않는 천국의 지상
적 형상이라 할 방주의 문을 닫으심으로 그 아름다운 영광의 출입
구가 봉쇄되었다. 방주의 문을 닫으신 것은 하나님이 언약 공동체
와 비언약 공동체 사이의 가시적 구별 과정을 마치셨음을 의미
한다.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열이렛날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
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3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
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
갔고 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
류대로 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
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
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창 7:11–16)
여기서 우리는 13절,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바로 그날에”( hZ<h; ~wOYh; ~c,[,B., ‘브에쳄 하욤 핫제’ ) 라
는 문구는 홍수 심판이 생명의 복과 죽음의 저주가 함께 수반하는
사건임을 핵심적으로 암시하는 중요한 표현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
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엿보게 된다. 주의 날에 홍수
심판이 임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두 무리를 서로 갈라놓으셨다. 그
런데 하나님이 서로 다른 이들 두 무리를 구별하셨을 때 일종의 논 리적이고 시간적인 순서가 존재했다.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적대적인 죄인을 향해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를 드러내기 전에 노아
언약 공동체를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시고 방주 문을 닫으심으로 언
약 공동체를 보존하셨다. 그 후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으로서
그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공포의 자비 없는 심판을 하나님을 대적
하는 죄인이 거주한 그 최초의 땅에 쏟아붓기 시작하셨다.
비록 살상 무기 또한 창세기 3장 16–19절에서 개막된 일반 은총
언약 시대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런 도구를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럽고 공의로운 심판의 도구로
홍수 물을 사용하셨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가시적
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적 심판을
나타내실 때, 교만하고 죄로 물든 인간에게서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홍해 사건 등의 역사적 사례에
서 보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적 심판을 집행하실 때마다 그런
심판의 패턴은 계속 이어진다.5)
롱맨과 월턴은 노아 시대에 발생한 홍수 심판의 진정성을 부정
한다. 그들은 창세기 6–9장의 홍수 이야기를 고대 근동의 문화와
종교의 맥락으로 읽고 본문을 해석함으로, 해당 홍수가 전 세계적
인 것이 아니라 국지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설명한 여러 이유로, 우리는 이 홍
수가 전 세계적 규모의 홍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홍수가 특별히 파괴적인 홍수였다고 생각한다. 우
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당 홍수 사건의 연대 또는 그 장
소를 알아낸다거나, 당시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
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대 근동 주민이라면 누구나 익숙했을 그 사건 자체가 영감
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감이 된 그 무엇,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 도구가 되는 그것은 성경 저자에 의해
제시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설명이다. 우리는 오히려 창세
기의 편집자가 그 홍수 사건을 이용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
며, 하나님이 홍수 사건 속에서 그리고 그 홍수 사건을 통해
5) 그러나 한 가지 예외적 사례가 있다.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약속의 땅을 정복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룩한 전쟁을 싸울 것
을 명령하셨다. 이 사건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화롭게 된 신자가 만물의 회복
행하시는 일에 대해 그가 기술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6)
그러나 우리는 이 홍수 심판이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
으로 발생한 우주적 심판이며 세상의 모든 지면을 뒤덮은 홍수였다
고 믿는다. 노아 때의 우주적 홍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파루시아( 종말 ) 때에 있을 최후 심판이 전 세계적이고 우주
적인 심판이 될 것임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였다. 홍수
심판으로 인해 방주 밖의 인류가 멸망했다. 이는 그 홍수가 당시 다
른 신을 따르던 사람들의 죄악에 보응하여,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 나님의 구속적 심판으로 일어난 홍수였기 때문이다.
파루시아가 임할 때 하나님은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를 서로 구별할 것이다. 마지막 아담 안에 있는 택자는 영원한 하나님
6) Longman and Walton, Lost World of the Flood, 85. 우리는 성경의 역사 비
평적 해석에 자기 생각의 뿌리를 둔 성경에 대한 이들의 관점에 근본적인 문제
가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주의 신학자가 갖는 전제이다. 편집 비
평에 대한 순응과 함께 모세오경에 대한 역사 비평적 해석을 지지하면서, 그들은
오경의 모세 저작권마저 명백히 거부한다. “호기심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특정한 홍수가 그 홍수 이야기를 초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
경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6–9장의 장르(신학적 역사)로 인해,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단언
하는 모든 것에서 참되다는 우리의 확언 속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실재했을 것
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결론은 그것이 성경의 해당 사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흑해의 홍수가 궁극적으로 성경의 이야기에 영감을 주었을 파괴적 유형의 홍
수라는 것이다. 정확한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든 이 이야기는 대대로 전수되어 결
국에는 ‘톨레도트’를 위한 기초를 형성했다……[그것은] 노아와
나라를 받게 될 것이나,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불택자들은 지옥의 완
성인 사탄의 나라로 던져질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의 심판을
통해서 그 마지막 심판의 유형을 우리에게 계시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최초 피조 세계의 홍수 심판 당시 택자와 불택
자를 구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 공동체와 비언약 공동체
를 구별하셨다. 예를 들면, 노아의 아들 함은 노아 언약 공동체의 일
원이었다. 따라서 함에게 방주 안으로의 입장이 허락되었고, 이에
그는 홍수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노아 언약 가족의 아들인
함은 그들의 예배에도 정식으로 참여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함에
대해서 말할 때 그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하나
님이 미리 정하신 택자,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
이 창조 전에 영원한 경륜으로 세우신 구속 언약( pactum salutis, ‘팍툼
살루티스’ ) 안에 있는 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창세기 9장 22절의 “가
나안의 아버지 함”에 대한 해석에서, 칼빈은 함이 비록 홍수 심판
때 가시적 교회의 회원으로 방주 안에서 구원을 얻긴 했지만 사실
비가시적인 교회의 회원은 아니었음을 옳게 지적한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바, 부모를
공경함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함이란 자는 사악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성벽의 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는 함이 단지 자기 아버지의 수치 입은
것을 즐겼을 뿐 아니라, 자기 형제들에게까지 아버지의 수치
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범죄는 가벼이 다룰 사안이
아니다. 첫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섬기는 종이자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의 주역인 노아가, 극도로 연로한 나이에 술에
취해 자기 집에 누워 있었다. 그런 다음 그 불경건하고 사악
한 함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의 혁신을 위하여 여덟 명의 영혼을 모든 부패에서 철저
히 정결하게 하사 거룩한 씨로 택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
나 큰 특권으로 높임 받았든 상관없이, 노아의 이 아들은 모
든 사람은 하나님의 고삐로 제어함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
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함의 불경건은 사람 안에 죄악이 얼
마나 뿌리 깊게 자리해 있는지를 증명한다. 성령의 권능이 통
제하고 주장하는 곳이 아니면, 그 죄악은 지속적으로 싹을 틔
우게 된다. 그런데 그곳처럼 완전한 하나님의 성소 안에, 그
토록 소수의 인원 가운데서조차 마귀 같은 한 사람이 존재해
있었다고 한다면, 훨씬 많은 수의 사람을 수용하고 있는 오늘
날의 교회 안에, 의인 사이에 악인이 한데 섞여 있다고 한들
그리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7)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마지막 구속적 심
판의 날에, 함은 비록 그가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
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는 못하게 될 것으로 보
인다. 7) Calvin, Genesis, 9:22, in Calvin’s Commentaries
우리는 노아 시대에 드러난 하나님의 심판 방식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당시 인류를 포함한 방주 바깥의 모든 생명
체를 전멸시키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 창세기 3장 16–
19절에서 일반 은총 언약 시대를 여신 이후로 택자와 불택자에게
차별없이 수여하셨던 일반 은총 언약의 유익을 거두어들이셨다. 하
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첫 세계에서 유기된 자들과 이 세상에 은
혜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허락하셨던 그분의 복과 인애와 사랑과 자
비를 거둬들이신 것이다. 이윽고 그 두려운 주의 날이 도래한 순간
하나님은 사탄 왕국의 영을 따랐던 악한 인류와 세상에 대해 거룩
한 전쟁을 일으키셨다. 그것은 완전한 진멸( ‘헤렘’ ) 전쟁이었고, 이후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약속의 땅으로 입성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
들에게 이 진멸을 명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노아 홍수를
통해 그분의 구속적 심판을 집행하실 때, 일반 은총 언약을 종결하
시면서 일종의 거룩한 전쟁으로 그들에게 홍수 심판을 내리셨다.
한편, 방주 밖에서 유기된 자의 물리적 죽음은 그 자체로 이야기
의 최종 결말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든 저주받은 자의 영혼을 홍
수 심판에서 지옥으로 던지셨다. 이미 논한 대로 홍수 심판 당시 방
주 밖에서 일어났던 일은 비언약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물
리적 죽음의 저주가 임한 가운데 제시된 지옥에 대한 일종의 가시
적 도해 또는 모형이었다.8) 또한 그분은 모든 죽은 자의 영혼을 현
8) 천국과 지옥의 존재 및 그 실체에 대한 고전적인 설교 사례를 Edwards,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 인』, 부흥과개혁사 역간, 2004)에서 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지옥의 “영원한 진
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인 지옥으로 보내셨다. 단언하건대, 홍
노”의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한 묘사로 설명한다. “그것은 영원한 진노입
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맹렬한 진노를 단 한순간 겪는 것도 무시무시한 고
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옥에서 그 고통을 영원무궁토록 겪어야 합
니다. 이 격한 두려움과 끔찍한 고통의 비참함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장래를 내다볼 때, 끝없이 길고 긴, 영원히 무한한 고통의 시간이 자신
앞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모든 생각을 집어삼키고
여러분의 영혼을 아연실색하게 만들 것입니다. 어떤 구원도, 어떤 끝도, 어떤 경
감도, 그 어떤 짧은 휴식에 대한 모든 희망도 다 사라지고 철저히 절망하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수억만 년의 긴 세월을 그 전능하
신 이의 무자비한 보복과 고군분투해야 하며 그러한 비참함 속에서 철저히 낡고
닳아 피폐해질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낸 후에, 그 길고 긴 세월이 실제로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지나간 후에, 여러분은 그
모든 고통의 세월이 앞으로 남은 고통의 세월에 단지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게 될 그 형벌은 영원토록 무한히 계속 됩니다.” Edwards, SinnersintheHandsofanAngryGod, 36.
한편 복음주의적 태세를 취한다는 일부 학자와 신학자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
를 부정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것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취한다고 해도, 결국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의 좋은 소식과 하나님의 구속적 심판의 양면적 원리에 대
립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영원한 지옥 형벌의 실재를 부정한다. Edwards and Stott, Evangelical Essentials, 313–320. 스토트는 악인의 영혼 멸절을 지지하며 지옥에서 유기된
자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은 부인한다. “영혼 멸절설의 개념에 호의적인
세 번째 논증은 공의에 대한 성경적 비전과 관계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들이
행한 것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예. 계 20:12)이라는 신념이 이 논증의 기본
이다. 그것은 부과된 형벌이 그 악행과 양적 시간적으로 비례할 것임을 함의하
며……나는 이런 것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부분적으로는
성경의 한 가지 참된 해석으로 주장해 오면서 오랫동안 지속된 전통을 나 역시
크게 존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경솔하게 무시하지 않는다. 또한 전 세계
복음주의 지지자의 연합이 나에게 항상 큰 의미였던 것이 그 또 다른 부분적인
이유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쟁점은 억누르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나의 현재 생각을 밝히도록 나에게 도발한 것에 대해 고마움을 갖는다. 내가 도
달한 입장에 대해 교리화하는
수 심판을 통해 지옥으로 보낸 모든 영혼도 마지막 파루시아가 임
할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할 몸의 부활
은 마지막 아담 안에서 택자에게 주어질 “생명의 부활”( 29절 ), 즉 영
광스러운 몸의 부활이 아니다. 그것은 악인에게 있을 “심판의 부
활”( 29절 ) 인 몸의 부활이다. 따라서 그들은 지옥의 완성이 될 사탄
왕국으로 던져질 것이다( 요 5:25–29 ). 9)
언약 소송과 원죄의 입증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고, 그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신실하게 지키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전지전능한 주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언약을 결
코 잊는 분이 아니시다. 놀랍게도, 노아 홍수 심판의 배경은 하나님
이 첫째 아담과 행위 언약을 맺으셨던 에덴의 그 거룩한 동산까지
주장으로, 의식 있는 상태에서 그들이 겪는 영원한 고문에 대한 성경적 기반의
한 가지 대안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dwards and Stott, EvangelicalEssentials, 318–320.
9) 보스는 요 5:29를 해석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서 가시적으
로 현시될 “신정의 완성”이란 조명 속에 마지막 파루시아에 있을 택자와 유기된
자의 몸의 부활에 대해 단언한다. “요 5:29에서 예수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의 공식적인 구별을 끌어낸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 교리가 개
인 구원론보다 더 광범위한 토대를 기초로 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죽은
자의 부활은 물리적 우주 전체를 그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우주적 규모의 진
행 과정을 일부 형성하며 그에 따라 의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확장된다. 심지어
악인의 경우도 몸의 부활과 몸으로 받을 보상은 왕국의 마지막 도래의 정수를
이루는 신정에 필수적이다.” Vos,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