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칼뱅 작품선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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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 이 누워 잠들기 위함인가? 어리석은 태만에 빠지기 위함인가?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의 조용한 평온을 누리면서 동시에 기 도로 깨어 있기 위함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빌 2:12] 권면한다. 이것은 그들 이 결과에 대해 근심스럽게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숨어 그에게

* * * 칼

만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그들 자신들을 그에게 맡기기 위함 이며, 그의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마지막에 그들이 승리하리라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이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들[너희]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그들[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그들로 의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혹의 상태에 있지 않게 그는 이미 모든 의심을 그들에게서 제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거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마치 우리의 구원이 의심스런 상태에서 흔들리기나 하는 듯이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기도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지 이루시리라 ( 빌 1[:6] ).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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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4-5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32,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5

Jean Calvin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Responsio contra Pigium de libero arbitrio , 1543)… ………………………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 1552) …………………………………… 330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1537) … ………………………………………………………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 ……………………………………………………………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1545)… ……………………………………………………………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1559)………………………………………………………………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61)… …………………………………………………… 359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 ……………………………………………………… 144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1533)… ……………………………………………………………………… 6 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1536)………………………………………………………………… 44


성만찬 소고(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1549/1555) … …………………………………………………… 94 스캔들 론(1550)… ……………………………………………………………………… 150 유언과 두 고별사(1564)………………………………………………………………… 288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 6 성물론(1543)… …………………………………………………………………………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341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1534/1542) … ………………………………………………………… 6 재세례파 논박(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1547)… …………………………………………… 348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1537)… …………………………………………………………………………… 6 신도의 처신(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 ……………………………………………………… 185 네 편의 설교(1549/1552) ……………………………………………………………… 211 세르베투스 논박(1553)… ……………………………………………………………… 298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 333 2. 참고문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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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1  )

헌정 서한 장 칼뱅이, 매우 저명한 사람 필리프 멜란히톤에게 2  )   나는 당신의 특별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을 잘 알고 있으며, 모든 사람 도 당신의 비판적 능력에 매우 탄복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보냈다면,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순수함에 의지해, 나는 긴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담대하게 공식적으로 이것을 말하게 되었으므로, 이런 내 행동 의 경솔함을 비난할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 므로 그들 때문에, 나는 확신을 얻게 된 부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할 텐 데, 당신에게는 이런 일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나는 당신에게 갑절의 기쁨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 책을 바

1  )   Defensio sanae et orthodoxae de servitute et liberatione humani arbitrii adversus

calumnias Albert Pighii Campensis. 2  )   칼뱅은 1543년 2월 16일자 편지에서 멜란히톤에게 이 책의 헌정하겠다고 알린 바 있다(CO

11.515; Herminjard 8.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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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니다. 당신은 이 책의 저자인 나를 사랑하고, 이 책은 경건하고 거룩한 가르침에 대한 변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경 건하고 거룩한 가르침의 열렬한 지지자일 뿐 아니라, 특별하고도 매우 용감한 투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 번째의 장점과 특별한 점이 있는 데, 그것은 내가 사용한 변증은 직선적이고 솔직하다는 사실입니다. 명 백하고 공개적인 일들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식의 논쟁을 할 때의 교활 하고도 우회적인 수법, 간단히 말해 모든 그럴듯한 핑계와 궤변에 대해 당신이 위축되므로, 당신은 숨김없이 목전에 놓인 주제를 붙잡고 그것 을 설명하는 방식, 즉 꾸밈없고 솔직하면서도 분명한 방식을 기뻐할 것 입니다. 당신의 이런 특성은 나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 는 이런 특성이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뛰어난 사람이긴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직설적인 솔직성을 가장 우위에 둡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기로는, 이런 이유로 이 작은 책이 당신의 호의 를 얻는 데는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 내가 기억하기로는, 피기우스가 계속 우리에게 도전해 온다면, 그의 무례함을 억제시키기 위 한 글을 쓰라는 임무를 당신이 내게 맡겼던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금 이 작업을 시작하도록 나를 이끈 것은 단지 당신의 권위만은 아닙니다. 나는 그의 간교한 술책에 의해 강제로 이 논 쟁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자유의지와 예정에 대한 열 권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판단하고 선택한 이후가 아니라 투쟁에 대한 단순한 열정만으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주장한 모든 것을 논박할 임무를 떠맡 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우리가 수호하려는 경건에 대한 순수한 가르침에 반대해 무례하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침묵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배신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 엄 청나게 무례한 인간에게 몇 가지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비평을 취급하려면 약간의 여유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길게 연기한다면, 우리 대적이 내 연기를 이용해 사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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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의 마음에 선입견을 주입하려고 노력하리라는 것을 알므로, 이것이 충분하게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침묵함으로써 이 좋은 주장 이 패배하게 하거나 피기우스가 공허한 자만심에 가득 차 있게 해 주기 보다는 오히려 빨리 어떤 조치를 제시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약간 지체했으므로 필요 이상의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인해 비틀 거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체로 나의 주된 목적을 성취했는 지, 즉 우리 대적의 오류를 충분하게 반박했는지 당신이 판단해 줄 것을 바랍니다. 그럼에도 이 변명을 생략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 이 친절하게도 이것을 수용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방법을 제시 할 수 있으며 그들이 나에게 심히 불공평하게 대하거나 관대하지 않게 대하는 것을 막아 줄 것입니다. 확실히 내가 우리 상황에 대해 불평하는 일이 매우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를 억누르는 수많은 일로 압도당하고, 그런 일들의 빈번한 발생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 의 다양성으로 당황스럽게 되므로, 우리는 마음을 집중할 수 없고 그것 들 중의 어느 하나를 취급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 이 우리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급하게 서두르도 록 강요받습니다. 즉, 결코 함께 성취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힘겨운 임 무를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사람들처럼, 그리고 사방에서 동시적으로 압 력을 받아 피곤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급하 게 서두르도록 강요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를 공 격하겠다고 결정한 우리 적들은 모든 다른 책임이 면제되고, 원하는 만 큼 깊은 평안 속에서 여유롭게 지내므로, 온 힘을 집중해 전쟁 도구를 준 비하고 나중에 기회가 생길 때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게 됩 니다. 만약 그들이 한 가지 일의 결과로 피곤함을 느낀다면, 휴전하고 재 충전의 기회를 만든 후에, 마음과 몸을 새롭게 가다듬고 다시 무장하고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안 정감을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합니다. 즉, 상황적인 면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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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면에서 볼 때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계획에 대해 토론할 수가 없습 니다. 내가 말했듯이, 이런 것들에 대해 괴로운 탄식이 없을 수 없으며 우 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으로 인해 내가 크게 상심하지 않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 결코 작지 않은 위로가 마음속에서 생깁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 의 확실한 권면을 별도로 한다면, 우리를 돕는 인간적인 도움이 부족해 도 그런 어려움으로 우리가 괴로워하거나 압박당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욱 깨어 있게 되고 그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 내가 생각하기로는 고대의 전례가 있는 것으 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거룩한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회복된 이후에 성읍을 건설하고 있을 때도 ( 느 4장 ) 이와 같은 어 려움 아래 일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일이 있고 시간적인 어려움 이 더욱 크게 그들을 짓눌렀을 때, 그들은 적들에게서 오는 많은 고통과 불안감을 참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들이 꾸준하게 계속 일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불변하는 꾸준한 고집으로 마침내 적들의 사악한 분노를 무너뜨릴 때까 지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일했다는 사실입니다. 칼을 허리에 차고 벽돌 과 모르타르를 모으는 것, 한 손으로는 칼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흙손 을 사용해 작업을 하는 것, 그럼으로써 건축에 집중하는 동시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용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평범한 본보기 이상입니다[느 4:17]. 우리도 또한 저 역사를 기억해 각성함으로써, 우리를 절망하게 만 드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그 가운데에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 어야 합니다. 주께서 선하심과 놀라우신 능력으로 로마의 적그리스도 의 무서운 폭정에서 우리를 구하셨으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즉 교회를 다시 건축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또 다른 방해가 추가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확실히 어렵고 고생스러운 임무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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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사탄의 사역자들과 공범자들은 교회가 다시 건축되지 않게 하 려는 목적을 가지고서 (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한 ) , 지속적인 전쟁으로 우리를 괴 롭힘으로써 추가적인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혁하고 고 치는 정규적인 작업을 주께서 선하게 여기시고, 이 일에 우리가 임명되 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려면 다른 관심으로 방해받지 않고 전적으 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도, 그들은 나팔을 불어서 우리를 소 집해 전쟁에 나가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집단이고 그들은 거대한 군대 를 형성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저항도 하고 바쁘게 일도 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손의 능력을 더욱 빛나게 만들기 위해, 지금도 오랫동안 일해 오셨던 것처럼 일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만 한다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작업이 거의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미 현재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처럼 확신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깃발 과 명령 아래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 일을 급하게 서두른 감이 있으므로, 그리고 오늘날의 많은 사람은 까다 롭고 고집스러워 몇몇 사람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주인이요 안내자이신 예수님과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 의 일을 인정했음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지지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한, 내가 누구의 종인지 너무 잘 알므로 내 봉사는 어떤 종류의 봉사든지 전부 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온전히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의견이 요구된다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겠지만, 당신 의견은 내게 있어서 항상 모든 다른 사람의 것과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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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기우스 책] 1권 논박 [피기우스의 위협]

우리가 2년 전에 보름스에서 회합에 참석했을 때,3  )   알베르투스 피기 우스가 나를 위협하면서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요원 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나는 들었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나를 완전히 끝장내 버릴 수 있는 어떤 책을 쓰고 있다고 떠벌리고 있었지만, 아직 은 그 책을 출판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4  )   그러나 레겐스부르크 회 의5  )   후에 주로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에 반박해 쓰였지만 2차적으로 는 우리 모두를 반박해 작성된 한 책의 절반이 나왔을 때 ( 그것은 이후에 뒷부 분이 보충되었다 ) ,6  )   나는

그가 특별히 나를 목표로 삼아 어떤 반론을 발표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상당히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다 음과 같다. 즉 그가 자신의 힘을 입증하기에는 나 자신이 보잘것없는 희 생양일 뿐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책에서 일반적인 주제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하길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승리한다면, 그는 승리로 인해 더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반면에 패배한다면 그 불명 예는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나를 반대하며 다루기로 결심했던 주제를 진행해 나갔고, 많은 곳에서 특별히 나를 대항하기 위 해 펜대를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 화려한 책이 매우 인 기가 있음을 들었다.7  )   물론 더 깊이 조사해 보지도 않고 그리스도의 교 리를 공격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러하다. 나 는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검토할 기회가 없었다. 그 3  )   칼뱅이 스트라스부르 시절 참석한 세개의 회담 가운데 하나로 1540년 말에 열렸다. 4  )   피기우스가 1540년 3월 5일의 한 편지에서 밝힌 미출판 원고 Peri archon 을 의미한다. 이것은

후에 그의 Controversies 에 통합된다. 5  )   Ratispona. 프랑스어로도 Ratisbonne. Regensburg 회의는 1541년 4-6월에 열렸다. 6  )   피기우스의 Controversies 1권과 2권은 각기 별도로 인쇄되었다가 후에 한 권으로 묶여 출간

된다. 7  )   이 책을 쓰는 1543년에는 적어도 Controversies 의 5판이 나와 있었다.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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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그것에 대해 많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만 애초 에 나는 그것이 가까운 시일에 출판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고 나 서 한 해가 다 지나도록 그것은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빛을 보지 못했다.8  )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계획을 바꾸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피기우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나는 이제 다른 과업에 착수했 는데,9  )   그때 많은 분량으로 된 <자유의지>10  )  라는 제목의 책을 예상하지 도 않게 받게 되었다. 비록 그가 처음에 직접적으로 나를 거론하지는 않 았지만, 그는 주제 자체를 다룸에 있어서 <기독교 강요>에 있는 내 논의 를 뒤엎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고 충분하게 보여 주고 있다.11  )   그는 자신의 특별한 의도는 ( 말하자면 ) 그의 창으로 내 옆구리를 꿰뚫어 루터와 우리 측의 나머지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참으 로 솔직하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나 한 사람에 대한 도전을 선언하고 나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내가 이 주제의 전체적인 부 분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주의 깊게 다루었고,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 들보다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정리했다고 그가 생각하고 있 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우리 모두를 함께 공격했다면 나는 스스로 그 일반적인 주제를 방어하는 것을 섣불리 떠맡지 말아야 했다. 훨씬 유능 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나서길 원했던 것처 럼 보일 수도 있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내 자신의 성급함과 어리석은 자만심에 의해 더욱 자극을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8  )   첫 권은 1541년 3월경에 인쇄되었다. 9  )   [COR]: 1542년 9월 1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그 도시의 새로운 헌법에 대한 일을 맡

겼다(CO 21.302). 이것은 1543년 1월에 완성되었다. 10  )   A. Pigius, De libero hominis arbitio et divina, Libri decem (1542). 이 책은 A. N. S.

Lane이 편집한 본 칼뱅 텍스트의 부록으로 붙어 있다(COR, IV/III, Defensio sanae et orthodoxae de servitute et liberatione humani arbitrii , Genève, Droz, 2008, pp. 331450). 11  )   <기독교 강요>(1539)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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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이미 언급했던 초기의 책에 대해 답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더욱 훌륭하고 멋지게 다룰 수 있는 부처가 이 일을 떠맡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스스로를 억제하고 물러선 것이 어떤 이유에서든 기쁘다.12  )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누구도 내가 피기우스에게 응답하는 일에 대해 나쁘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리라고 기대 할 수도 없고, 내가 건전한 교리의 변호에 대해 중재하지 않으면 피기우 스가 하나님을 그렇게 공적으로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보다 더 학식 있고 더 많은 훈련을 받았고, 이 오만한 골리앗의 무례함을 저지할 능력이 있으며,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준비가 된 주의 군사들이 오늘날 아무리 많이 있을지라도, 그가 그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나를 지명해 대결하자고 도전했으므로, 나는 그를 맞으러 나아갈 것이다. 나 의 왕이요 주권자이신 분과 그가 종들에게 늘 공급하시는 영적인 무기 들의 큰 능력에 의지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내 대적은 그리스도의 종 들 중에서 한 명에 대해서조차도 승리했다고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 피기우스는 오직 자기가 볼 수 있는 ( 광기로 눈이 먼 사람이라도 뭔가 조금은 볼 수 있는 )

수많은 사람 중에서 유독 나와 논쟁을 시작하려 선택했

을까! 그가 호의적으로 던진 우발적인 말 한마디에 영향 받는 보잘것없 는 수준으로 나를 생각했다면 그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추측하건 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약간의 우선권을 줄 때, 좀 평범한 사람 과 논쟁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 대비해, 자신에게 유리한 점을 확보하 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은 나에게 있 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 또는 매우 사소한 것이다. 신자의 영광은 지식이나

12  )   [COR]: Bucer, De vera ecclesiarum in doctrina, ceremoniis, et disciplina

reconciliatione et cimpositione …Responsio ad calumnias Alberti Pighii Campensis (Strassburg, 1542). 부처의 공격에 피기우스는 그의 Apologia adversus Martini Buceri calumnias 로 답했다(Paris, 1543).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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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말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양심에 있기 때문이며[고후 1:12], 또

한 인간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 따른 것이기 때문 이다. 게다가 나는 그의 판단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한다. 고대의 한 비극에서 유명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칭찬을 받아서 행복하다. 그것은 칭찬할 만한 어떤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13  )

따라서 비록 내가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참으로 더럽고 악취 나는, 그 리고 끊임없이 혐오스러운 욕들만을 그리스도를 향해 내뱉는 그런 입술 들에게 찬양을 기대할 만한 이유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어리석은 싸움을 하는 동안에 판단력과 통찰력이 완전히 결핍되었다. 그 이유는 타락한 마음[롬 1:28]으로 그의 불경건함이 신적 징벌의 명백한 본보기가 될 만큼 컸기 때문이거나, 우쭐대게 만드는 참을성 없는 자존 심이 가장 해로운 눈먼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무대에서 펜테우 스 ( Pentheus ) 가 복수의 여신들, 두 개의 태양, 그리고 테베 ( Thebes ) 가 나타나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던14  )   것처럼,15  )   그도 그렇게 예리한 눈을 가져 그가 거기에

없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백주대낮에 가장 심각한 현기증을 느낄 때 생길 수 있는 것과 같은 실명 상태의 고통으로

13  )   [COR]: Cicero가 인용한(Tusculan Disputations 4.31.67) Gnaeus Naevius의 말. 14  )   [COR]: Vergilius, Aeneidos 4.469-470. 테베의 왕인 펜테우스는 바쿠스를 경배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미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Euripides의 비극인 Bacchae 의 주제다. 15  )   RO: 마치 포도주에 취한 고주망태들이 종종 자기들이 있지 않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거

나, 가련한 정신이상자들이 침대에 있으면서도 물이나 불이나 강도 옆에 있다고 상상하듯이, 이 사람의 눈은 이토록 예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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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한다. 나는 다른 견지에서는 그 사람이 지혜롭고 학식 있는 사람임을 인정 한다. 나는 그가 날카로운 논쟁자이며 숙련된 연설가임을 인정한다. 나 는 그가 대중적인 의미에서 달변가임을, 즉 오늘날에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매료시킬 수 있는 일종의 웅변술에 능한 사람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모든 마음이 광기로 왜곡되고 황 폐해질 때 그런 모든 재능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만약 그가 교육받 은 자들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얻어 자기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 으로 보이게 할 만한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먼저 올바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현재 그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는 이런 광기를 치 료하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처방이 있다. [먼저] 그로 하여금 하나 님의 명확하고 확실한 진리에 대항하는 깊은 적개심을 품고 전쟁을 수 행하는 것을 그만두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 석은 견해와 완전히 분별력이 없게 만드는 위협 속에서 드러난 오만한 자만심을 벗어 버리고 던져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논쟁의 열 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를 대적하게 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나는 내 독자들이 마치 피기우스의 책 앞에 있는 것처럼 그의 책의 순서를 따 라가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내가 말하는 게 뭐든지 다 확신하고 그 이상의 것까지도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논의 전개 방법]

그러나 이 일을 하기 전에 내가 따르기로 결정한 논의의 순서에 대해 미리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해 두겠다. 첫째, 독자들은 내가 대답할 때 피 기우스의 논증의 가느다란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기대할 어떤 이유도 없다. 만약에 내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이 상세하게 개인적인 부분들을 검토하길 원했다면, 내 책은 굉장한 부피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 고난 달변을 소유한 것에 더해, 그는 또한 끊임없이 많은 노력과 연구를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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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이는 과장된 언변으로 문제를 숨기고, 또 길고도 용감한 언어 구 사를 통해 적을 압도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한 칭송 을 갈망하기조차 할 것이다. 무식한 자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가장 좋 은 방법은 큰 목소리와 길게 늘어놓는 단어들을 가지고 거칠게 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런 문제로 싸우지 않고 그에게 기꺼이 상 을 양보할 것이다. 나는 말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을 장이 느슨해져서 설사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 류의 간계, 말하자면 말들을 쏟아 부음으로써 승리하려는 그의 노력에 도 불구하고, 그가 안개를 가지고 독자들의 눈을 덮음으로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움직일 수 는 없는 너무 연약한 방어수단일 뿐이다. 그는 틀림없이 소박한 마음을 지닌 자들과 판단력이 부족한 자들을 속일 것이다. 그러나 의로운 이해 의 불꽃을 지닌 자들은 누구든지 그런 과장된 이야기에 시간을 투자하 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어떤 실속 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하고 지각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피기우 스는 “밝음에서 [연기 속으로] 향하게 하는 반면에 나는 연기 속에서 빛을 끄집어내 온다”16  )  는 것을 알게 하는 것에 나는 만족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잘못된 표현과 악의 있는 비평을 통해 내가 바르게 쓴 것들을 왜곡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사탄의 연기를 흩뜨려 깨끗하고 단순한 하나님의 진 리만이 빛나게 하길 원한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게, 길고도 불필요한 글쓰 기로 나 자신을 헛되이 쇠약하게 하고 동시에 내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 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또한 내가 간략하게 글을 쓰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시간적 압박이라는 제한을 받고 있다. 나는 가능한 한 프랑크 푸르트 도서전17  )  에서 이 답변서를 출판하려고 결정했는데, 그 도서전까 16  )   Horatius, Ars poetica 143. 17  )   1543년에 3월 1일부터 20일까지의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를 말한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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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겨우 두 달밖에 여유가 없었다. 내가 만약 그 시간의 절반을 저술 을 위해서만 절대적으로 비어 있는 시간으로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이유들로 독자들은 내 서두름을 용서할 것이다. 만 약 어느 곳에서 내가 좀 더 긴 숙고와 더 주의 깊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들에 대해 너무 경솔하게 서둘러야 한다 해도 말이다. 만약 원했다면 피 할 수도 있었을 비난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탄원하는 것은18  )   불합리하다는, 고

대에 널리 통용되던 말로써 누군가가 반대한다면, 나는 준비된 답변이 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진리가 내 진술들과 연관되어 공격당할 때, 의무감을 가지고 그것을 지지하고 방어해야만 한다. 둘째, 그럼에도 내 수고가 그런 심각한 문제에 폭넓게 유용하고 부적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빨리 써 나갈 것이다. 비록 그것이 모든 부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한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을 돕기 위해, 그와 내가 쓴 것들을 비교할 때, 더 쉽고 도 더 확실하게 그들이 판단하고 요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내게 하려고, 나는 피기우스 자신의 책이 취하고 있는 순서와 배열을 따를 것이다. 단 지 이런 많은 차이는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을 미사여구로 칭찬하려 는 반면에, 나는 가능한 한 간결함과 단순함을 목표로 할 것이다. 다음으 로 그는 우리를 대항해 악의 있는 욕설로 많은 장을 채울 것이다. 그것 은 트라소니쿠스19  )  와 같은 오만함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것에서 역시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양보할 것이다. 만약 피기우스가 유 창한 욕쟁이든지 그렇게 불리든지 간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어떤 손실을 유발하지도 않을 뿐더러, 선한 사람들의 명성에 어떤 해를 가하 지도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부분적으로는 광란적인 남용 에의 열정과 부분적으로는 나쁜 기질이나 광기로 분별없이 이리저리 끌

뤄지지 않았다(CO 11.474; Herminjard 8.341). 18  )   Aulus Gellius, Noctes Atticae 11.8. 19  )   Thrasonicus은 Terentius의 Eunuchus 에서 나오는 허풍선이 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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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다닌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피기우스의 헌사]

우선 지나는 길에 피기우스가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헌정 서한에서 다 루고 있는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20  )   비록 이 논의에 적절하지 않음에도, 그것에는 우리 입장에 압력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 피기우스는 독일인들 의 무감각함에 놀라고 분개하고 있다. 그들이 너무 무감각했으므로 우 리 가르침에 대해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도들 이 성취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우 리 가르침은 완전히 터무니없고, 우리는 과거의 이단들의 잘못된 가르침 들을 모두 부활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경건의 참된 규칙과 일치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들 모두의 헛소리들을 초월하고 있다. 아 직은 우리가 외관상으로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겉모습은 자신 의 화려한 광채 ( 물론 거짓된 것이지만 ) 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우리는 배운 것에서도 웅변에서도 거룩한 삶에 있어서도 뛰어나지 않다. 그것은 반 드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피기우스는 이런 것을 더 상세하게 설명하 려고 우리의 진행 방식이 얼마나 분별없고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나는 간략하게 답하겠다. 피기우스는 너무 우둔해 [우리의 성공]이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경탄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능력의 명백하 고 명확한 기적임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너무 크고 어려 운 일이므로 우리가 잘 준비되거나 잘 배우지 못할수록 하나님 능력은 더 명확히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온 세계를 흔들고 빛을 비춘다. 그러 나 만약에 피기우스의 그런 불평들을 사도들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당신 은 포르피리우스 21  )   또는 그 시대의 다른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생각 20  )   여기서부터는 “추기경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피기우스의 헌정 서한”에 대한 칼뱅의 답변이다. 21  )   Porphyrius(233-304).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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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에 너무 긴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나는 바울을 인용해 답변하려 한다.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단지 그런 큰 힘을 견뎌 내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방어 수단 중에서 아주 작은 것만을 가졌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리와 신앙의 진리는 우리 자신의 명쾌한 언변이나 교 육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고전 2:3-5]. 만약에

하나의 주장이 인간의 보호나 다른 외부의 지원으로 지속되는 게 아니 라 자체적인 선함으로부터만 지속되려면, 그것은 확실히 강하고 힘이 있 어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에 말씀한 이는 루터가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 의 입을 통해 뇌성을 발하셨으며, 지금 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고, 하나 님이 자신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나타내어 보이시고 있다는 사실이 선포 되었을 때, 피기우스로 하여금 우리 가르침의 새롭고 또 들어 보지 못한 효과의 기원에 대해 놀라지 못하게 하자. [사도들과 개혁자]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우리가 사도들과 참으로 다르다고 선언한다. 확실히 그것이 인격의 문제라면, 사도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정도를 어 떤 말로도 다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기우스가 우리 와 차이점을 보이는 교리 문제에서는 나는 우리가 가장 위대한 동질성 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길, 사도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여 마신 것들을 묘사했다고 한다. 그것은 미리 예견된 것이거나 형상으로 나타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는가? 우 리가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사 도들이 선포한 복음에는 작별을 고했다는 말인가? 우리는 로마의 적그 리스도의 영역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한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추론한다. 그 사실이란 우리는 그 리스도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을 듣기 원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우리 대적들은 감히 드러내놓고 그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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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자리를 차지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길, 교리에 대 해 사도들 사이에는 멋진 만장일치가 있었다고 한다. 마치 주님이 이와 같은 만장일치를 오늘날 복음의 가르침을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려는 자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는 말하길, 그때는 신적인 행 동의 즉각적인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즉, 그들의 행동, 그들의 얼굴, 그 들의 눈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불같은 성령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러나 사실상 이런 것들, 다시 말해 피기우스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예찬 하고 확증하기 위해 연관시키는 것들은 뭐든지 모두 다 우리 무기다. 우 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피기우스가 수많은 명백한 증거로써 확증되 었다고 선언한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야 한다는 주요 핵심으로 되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묻혀 있었다는, 말하자면 인간들의 기억에서 잊혔다는 우리 불만은 매우 정당화된다. 우리는 이 25년 동안22  )   오직 한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갈등이 끝나되 승리가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선포한 가르침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그들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가르친 죄가 있다면, 우리는 그 것을 철회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헌신해 그것을 공격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복음의 위엄을 확증해 주었던 것과는 다른 기적들이 우리에게 요구될 때, 사도들을 통해 행해진 것들 외의 다른 어 떤 것들도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한 번 일어났지만 복음을 확 증하기 위해 영원히 봉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치 새롭고 최근에 기원한 것처럼 새로운 기적적인 표적들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 길 요구할 뿐 아니라, 복음의 영광에 공헌해야 하는 바로 그런 기적들을 모독과 조소의 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자들의 배은망덕함과 악 한 마음과 뻔뻔스러움에 대해, 나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이

22  )   루터의 95개 논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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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것들을 말할 수 있는 넓은 영역들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 그러나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작품에서 깊이 다루었으므로,23  )   당장 멈출 것 이다. 그러나 피기우스는 우리의 이런 방어를 제거하려고 계속 노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은 경건의 작은 부분까지도 뒤 엎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모든 종교적 생각을 제거하므로, 우리는 순전한 속임수, 간계, 속임, 성경의 사악한 남용, 예외적인 뻔뻔스러움과 철면 피, 거짓말들, 욕설들, 악한들의 계략, 폭동, 그리고 이교도보다도 더 나 쁜 삶의 방종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가 참고 말하지 않을 만한 게 도대체 뭔가? 앞의 비난은 뒤의 것과 함께 적당한 위치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 행동이 관련되는 한, 나는 피기우스의 거짓말을 논박하기 위해 사 실들 그 자체에 호소할 것이다. 우리의 신랄한 주제에 대해서는 나는 단 지 이것만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 말씀 자체를 죽음의 냄새 [고후 2:16]로 느끼는 그들에게만 퍼부어져 왔다고 말이다. 더 나아가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서 말씀을 탈취한 수치스러운 상황을 기억 한다면, 그것은 과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게다가 말씀을 오용하는 자들의 행위에 근거해 가르침이 평가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하다. 그러 나 만약에 우리와 우리 대적들에 대한 결정이 우리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에 동의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결코 이 판정을 거절하지 않는다. 우 리가 지금 무엇이든 간에, 우리 행동은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지 지하는 가톨릭교도들의 행동과는 다르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바라던 것 보다 훨씬 좋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우리 행위 와 그들의 행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양자를 비교해 봤지만 올바른 이 해를 하지 못했다 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 려워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멸시함을 보통 사람들

23  )   칼뱅은 <기독교 강요>의 “왕께 드리는 헌정 서한”에서 기적의 문제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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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명히 파악하지 못하리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기우스가 옛날 사도들이 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가지고 우리가 씨름한다고 말하는 것은, 만약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일말의 진리 를 담고 있다. 루터가 유명해졌을 때의 시대 상황을 통찰력을 가지고 숙 고하는 사람은 루터가 거의 사도들이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상황이 사도들보다 더 나쁘고 어려웠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그들이 전쟁을 선포할 왕국이나 통치가 없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제국 중에서 가장 힘 있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말하자면 모든 다른 제국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있었던 그 제국[교황체제]의 전복이나 파괴에 의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심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방도도 없었다. 이것은 우리 역시 지금 직면하고 있 는 어려움이다. 무력에서 그리고 조약으로부터의 도움에서, 부요함에서, 그의 칭호에 부여되는 바로 그 존엄에서 교황이 얼마나 힘이 있는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교황은 세상 전체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쓰 레기 집단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안전과 힘을 얻고 있는가 하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추기경들과 감독들과 사제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 나 그들의 안전에 대한 유일한 소망은 우리 가르침을 파멸시키는 데 있 음을 알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부요와 힘을 우리를 공격하는 데로 돌리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자산, 즉 참으로 자신들의 생 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몇몇 선지자와 사도들이 이와 같은 전장에서 이와 유사한 호된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이 없었다면, 교회의 속이는 영과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자신을 숨기는 종교에 대한 숨겨진 적의와 싸워야 하는 수고로움 때문에, 나는 우리의 어려움이 사도들의 어려움보다 더 컸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기우스의 고소에 딱 잘라 답변하는 것 ( 무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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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괴물


들, 그처럼 엄청난 불신앙적인 가르침의 미궁,24  )   수많은 종류의 미신을 재빨리 던져 버리고 완전히 제 거하는 것 ) 은

참으로 어렵고 지루한 일이다. 그들은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

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고,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매혹 적인 겉모습을 하고 있다. 세상 모든 힘이 우리를 반대하고 칼과 불과 모 든 종류의 잔인함과 함께 일어나 그들을 방어할 때는 특별히 상황이 더 어렵다. [우리 싸움은] 용감한 계획이라고 피기우스는 말한다. 나는 그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일이 아니라 인간들 의 일이라면 경솔한 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이론을 파괴 하고 인간의 계획을 멸망시키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대적해 스스로 높아진 것을 사로잡기 위해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무적불패의 힘에 대해 바울이 강론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을 때[고후 10:4, 5], 교황제도가 계속적으로 존속하게 만드는 이런 모든 사탄의 무기 창고에 대해 우리 는 마음을 모아 단호히 대항해야 한다. [초대 교회의 회복]

게다가 우리는 결코 성인들의 모든 견해를 가지고 전 역사를 해치지 않고 ( 그가 거짓되게 말하고 있다 ) , 오히려 역사의 유해한 영향들 때문에 손상되 고 유실되어 온 것들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게 노력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항상 피기우스가 매춘부를 더럽힐 때 사용하는 페인트를 제거할 스폰지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대항한다. 즉, 우리는 이것이 사물 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대항하는 비 방에 대한 어떤 증거물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의 책은 이런 문제에 대 해 단단하고 명백한 증거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우리 위에 쌓아 놓은 잘 못된 고소들은 확신에 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남편인 그리 스도가 1,400년 동안 교회를 버렸다고 우리가 말했으므로, 우리는 그리

24  )   칼뱅이 ‘심연’과 함께 자주 쓰는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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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를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방들은 단 한 번 의 참된 답변의 바람이 불면 사라져 버릴 먼지와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 는 약속하신 것처럼 자신의 교회와 함께 신실하게 계셔 왔고 또 항상 계실 것이라고[마 28:20] 주장한다. 또 우리는 교회는 소멸되지 않게 그의 능

력으로 보존되어 왔으며, 진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의 성령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이 분명하게 예언한 대 로 무서운 반역의 사건이 지구의 어느 먼 구석에서가 아니라 범세계적 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바울은 확신을 갖고 교회의 미 래의 상태, 즉 이후의 교회에 대해 말한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이미 죄의 수수께끼를 움직이는 일에 착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즉시 다음 에 덧붙인 것은 훨씬 심각하다. 즉 그 ( 불법의 사람 ) 가 공개적으로 활보하고 교회에 대항해 난폭하게 행동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오는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차지한 이후에 온다는 것이다 ( 살후 2:3-12 ) .

바울이 이런 것들을 말할 때, 그는 반역이 일어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언된 대로 그것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가 보았으므로, 우리는 그 리스도의 영이 참됨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 성취됨 을 고백한다. 참으로 엄청난 재앙 속에서 그는 놀랍게 약속을 보존하셨 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안전하게 죽음의 심연에서 빠져 나올 수 있 었다. 그는 교회가 그런 엄청난 침몰 속에서 파멸하게 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소망을 상실한 것처럼 보일 때, 말하자면 그는 죽음 그 자체에서 교회를 구원했다. 우리가 오늘 보는 이 수확은 바로 그 씨에 서 산출된 것이다. 자, 이제 피기우스로 하여금, 우리 편에 서서 자기 마 음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가서 그리스도를 거짓말하는 자 또는 신실하 지 못한 자로 고소하게 하자. 사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세상을 거의 전체 적으로 눈멀게 함으로써 자신의 복음을 멸시한 것에 대해 벌할 때도 결 코 그 교회에서 자신의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빼앗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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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장애물을 통해, 그리고 모든 기대와는 다르게 혼자서 길을 만들고 흔들리지 않고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신실하심이 더욱 영화롭게 되 었음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옳게 남든가 오히려 나쁘게 남는 것에 있어 피기우스는 과도하 게 경직되어 보이지 않기 위해, 교회 안으로 오용들이 스며들어 온 것과, 모든 독실한 신자들은 그것을 바로잡는 것을 보기 원함을 마침내 인정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우리가 시도해 온 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목회자들의 책임인데, 우리가 그들로부터 여러 수단과 방법을 빼앗아 왔기 때문이라고 그는 불평한다. 그리고 그는 그 악행은 우리가 교회에서 떠나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 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 고 교회의 일치를 버렸다는 비난에 대해 변호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 안 에서 지배적이었던 악습들과 성직자들의 부패한 행위를 인용할 수 있다. [교황체제의 악습]

이 마지막 부분과 함께 시작해 보자. 나는 누구의 입에서 그가 이런 변 명을 들었는지 알고 싶다. 우리 동료들이 쓴 책에서 그가 루터에 대해 읽 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루터가 매우 엄청난 악습들과 사제들 의 불명예스러운 행위만을 비판했는데, 항상 그의 대적들의 사악함 때 문에 이전보다 더 비판의 강도가 심해졌다는 내용을 읽는다는 것은 가 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과 피기우스의 비방 사이에 있는 닮은 점은 무 엇인가? 다른 어떤 곳에서 루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 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대적들은 나로 하여금 나날이 더 지혜롭게 되도 록 몰아댄다.25  )   그가 말하는 것은 매우 옳다. 그것들은 그의 지성을 날카

롭게 하는 숫돌과도 같기 때문이다. 아직은 거의 온 세상을 삼켜 버린 깊

25  )   Martin Luther,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WA 6.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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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어둠 속에 잠겨 있지만, 그는 좁은 틈에서 나오는 한줄기 빛을 보았고 거기에 도달하려 애썼다. 바로 여기에서 그 빛의 대적은, 이 사람의 경건 한 연구를 방해하고 거칠게 저항하려 했으므로, 소란을 일으켜 처음에 는 넓은 창을 열었고 마침내는 모든 문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교황에게서 돌아선 것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약 루 터가 한 번에 교황제도의 모든 부패를 철저하게 잘라 냈다면 우리 대적 들이 얼마나 인내했을까를 명백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때 그들은 노골적 인 악행들에 대한 부드럽고도 정중한 비판을 참을 수 없었다. 참으로 루 터의 의도는 적그리스도의 폭정에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꼭 필요한 만큼 치료하기도 쉬워 보이는 그런 질병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 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서 실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교 황제도는 온갖 종류의 고름 덩어리 같은 악취 나는 관습들로 가득 차 있 으므로, 일단 손을 대기 시작해도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며 한가운데로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피기우스는 우리가 도덕적인 결핍 ( 그것이 심각하긴 하지만 ) 을 바로잡기 위해 신앙의 일치를 깨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양심적이지 못함을 알 아야 한다. 우리는 악행들을 바로잡고 책망할 때, 평화의 연결고리가 파 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용이 필요함을 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중 용이 죄를 부추기지 않게 하려면 인내에 한계가 있어야 함을 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처음부터 침묵이나 위장으로 이런 가장 불명예스러운 교 황체제 귀족들의 삶의 방식을 찬성하거나 숨겨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 은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불명예스런 행위로 더럽혀진 삶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의무감에서 그렇게 할 수 없다. 특 히 이 주제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중요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원인은 일반적인 부패의 경우처럼 사제들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므 로, 우리가 사제들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몸에서 악 행들을 제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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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원인은 악습이 아니라 교리]

그러나 이것이 그런 분열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사악한 거짓 말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함께 묶는 끈으로써 순전하고 바른 교리에 대한 일치에 만족해야 한다고 늘 명확하게 진술해 왔다. 그것이 교회의 회복에 대한 질문일 때, 우리는 참으로 교리에 규율을 덧붙인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선한 질서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과 교회 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만약에 우리가 부패한 행위에 대한 불인정 때문에 교회와의 교제를 포기하고 다른 분파로 우리의 헌 신을 돌려 버린다면, 우리에 대한 피기우스의 비난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의 원인이 자신의 불신앙적인 가르침에 대한 정당 하고 거룩한 비평을 묵인할 수밖에 없는 로마의 적그리스도의 무능함이 라는 것이 명백하다면, 왜 탈퇴의 책임이 아직도 우리에게 돌려지고 있 는가? 게다가 약간 무질서한 성직자들의 행위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한 이유는 단지 우리의 지나친 세심함 때문이었다는 경솔한 고소를 덧붙이 기까지 한다. 피기우스는 단지 인기를 끄는 이야기를 하려고 화제를 만들어 내는 학 교의 소년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다음의 두 가지 개념을 자신 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즉, 우리가 교회에서 분리해 나가게 부추기는 선동자였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단지 우리가 사제들의 삶에서 약간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서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 분리가 우리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부인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숨 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우리는 발생한 대로의 사실 그 자체를 말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우리에게 교회의 분열의 책임은 로마의 적그리스 도에게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주고 있다. 어떤 법적인 시도도 없이, 교회 적인 전통뿐 아니라, 인간의 원칙에도 반하는 그런 폭력적이고 거친 방 법을 통해, 그는 진리를 위해 담대히 말하는 자들이나 진리를 소중히 여 기는 자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진영은 야만적이고 피에 굶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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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린 법령으로 우선적으로 그들과의 모든 교제에서 우리를 배제시켰음 에도, 아직도 우리가 분리의 죄를 저질렀다고 간주할 것인가? 그러나 그 는 말하길, 우리에게 있어서는 인내와 침묵을 통해 평화를 얻고 그럼으 로써 신앙의 일치 속에 남아 있는 것이, 과도한 폭력적 치유법을 통해 몸 전체에 파멸의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나았으리라 한다. 이 평화는 무엇 인가,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말하는 이런 신앙의 일치는 무엇인가, 거기 에는 평화의 유일한 연결점이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설 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성령은 교회의 연합이 바르고 참된 교리의 일 치[엡 4:3-6]로 유지된다고 선포하신다. 피기우스는 비록 자기 마음속 으로는 달리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 하는 말에 있어서는 감히 이에 이 의를 달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황제도는 어떤 고리로 함께 결속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우 선, 거기에서는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 한 공개적인 부인도 없지 않다. 비록 하나님 경배의 아주 작은 부분이 미 신의 더러운 악취 속에서 남아 있다 해도, 부분적으로는 날조된 의식들 로 오염되고 부분적으로는 타락한 사고에 의해 부패되어 있다. 참된 교 리는 전적으로 부패되고 오염되었다. 그리스도는 반쯤 장사되어 능력의 영광은 없어지고 이름만을 유지한다. 그는 사실상 참된 존재이기 보다는 유령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깊은 어둠 속에 숨겨지고 그의 직무는 망각 속에서 잊히며, 은총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 이다. 무엇보다도 성례의 시행이 쓸모없게 되고 조각으로 찢긴다. 더욱 이 성례는 이방 나라의 많은 의식 제도에 의해 외관을 손상당하고 결국 에는 불경스러운 상상의 산물들로 둘러싸인다. [침묵은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

그렇다면 피기우스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가? 평화를 방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조건과 어떤 상황에서 말인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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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 악들에 대해 완전히 묵인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가 로 사들이는 것은 불법적인 평화다. 그러나 피기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 장한다. 그와 성직을 뒤쫓아 짖고 할퀴면서 사냥하는 적그리스도의 다 른 개들은 신앙에 있어서 어떤 혁신적인 것도 새로 만들어 내지 않으며, 전심으로 악습들을 바로잡으려 하되 자신들의 위치와 직무를 잊지 않 고 다른 사람의 책임 아래 있는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것이 무슨 말인가? 마치 교리에 대한 공개적 위반과 하나님 이름에 가 장 심한 모욕을 퍼붓는 예식을 피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가 아닌 것 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침묵을 지켰어야만 했다고 피기우스 는 말한다. 그런 침묵은 신뢰할 수 없고 혐오스러운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와 복음을 배반하는 침묵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모든 선한 종교는 파괴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가련한 영 혼들이 파멸될 것이며[고전 8:11], 말하는 것도 금지될 것이다. 충성스 러운 개는 도둑의 첫 번 기척에 짖고, 주인의 생명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 해 자기의 목숨을 건다. 교회가 불경건한 자들에게 약탈당하고, 하나님 의 위엄이 발아래 짓밟히며, 그리스도의 왕국이 강도를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요점이다. 적그리스도 편에 서서 피기우스는 그의 나라를 협 박하는 위험을 볼 때, 엄청난 소동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 국의 폐허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런 방법에서조차 평화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 하다. 우리는 단지 참여로써, 일종의 침묵의 투표로써 그런 대다수의 죄 악들에 찬성표를 던져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앙의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이 신앙의 결속을 깨뜨리는 것이 되고, 교회에서부터의 분리가 되고, 공동의 평화와 일치를 방해하는 것이 되는가? 그런 말들 은 참으로 옛적에 거룩한 선지자가 악한 왕에게 들었던 종류의 말이다.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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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지자는 어떻게 자신을 변호했겠는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을 방해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따 른 것은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다 ( 왕상

18:17, 18 ) .

우리의 변호도 마찬가

지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는 어떤 방해와 소요의 발생에 대해서도 책임 이 없다. 또한 우리는 그것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모든 책임은 그리스도 의 왕국에 순복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늘과 땅과 바다를 계속 혼동하는 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은 성취되어야 한다. 불법한 자가 나타 나면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실 것이다[살후 2:8].

그러나 피기우스는 우리가 지나치게 서둘러 행동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는 하나뿐인 수단을 없앴다고 한다. 이 일을 감당해야 할 목사들의 권 위를 우리가 약화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지금 참으로 통탄할 만한 재앙을 당할 동안 루키아노스의 이 제자가 26  )   공개적으로 즐거운 게임을 하고 있음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것 도 로마의 교황과 그의 모든 동료가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하는 것을 막 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그렇게 할 능력을 우리에게 빼앗겼다. 내 요구는 이렇다. 그들이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음에도, 교회에 대한 책 임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경우에 취하게 될 태도보다 훨씬 무관심하고 무행동적일 때 우리가 침묵을 지킨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떤 행동을 취 하고 있었을까? 만약 치료가 곧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마지막 파 멸이 다가오리라고 모든 사람이 부르짖는다. 상황 그 자체는 매우 날카 로운 무기로써,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들을 압박함으로써 피할 곳이 없게 된다. 우리는 그들의 나태함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엄청난 잔인 성을 강력히 공격한다. 그들은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모든 자극으로도 각성하지 않을 때, 피기우

26  )   Lucianus(Samosatae)는 2세기의 풍자가다. 루터도 에라스무스에 대해 같은 비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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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의 권고 (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악습을 바로잡을 최초의 기회에 서둘러 행 동했었으리라는 권고 ) 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우리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이제는 뭔가를 할 것 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여러 번 질문을 받은 후에도 그 들이 그런 의도에 대한 약간의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는가? 이런 소란스 러운 시기는 변화를 만들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는 식의 답변을 우 리는 듣게 될 것이다. 사실 그들은 타당성 있는 이유 때문에 교회의 현 상태를 치료하길 두려워한다. 건물의 기초가 약하고 부패되고 썩은 재료 들의 무게로 거의 붕괴될 지경이며 결국에는 흔들려 쓰러져 버릴 이 건 물을 누군가가 손을 댄다면, 그것은 곤두박질치며 무너질 것이며 붕괴되 면서 건축가 자신도 매몰시킬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 하다. 모든 늑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미래에 대한 자 신들의 독점적 폭정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책략으로 그 것을 지탱할까,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욕망에 대한 더 이상 의 협박이 일어날 수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로 교회가 어떻게 되 느냐는 그들의 관심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가 수백 번 죽더라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피기우스가 내가 이런 것을 날조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나는 나를 지지해 줄 증인들을 한 명도 거명하지 않을 것 이며, 오직 모든 신실한 자의 양심을 내 증거로 삼을 것이다. [바른 교회치리]

우리가 교회의 공적 치리를 심각하게 손상시켜 왔다는 피기우스의 불 평에 귀 기울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에 따르면, 마치 과거에는 정말 어떤 규율이 있었던 것 같고, 지켜보기 두려운 혼돈도 없고, 더럽고 왜곡된 혼란 속에 있는 것들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교회가 질서 있게 형성되게 하는 고대 기준들에 대해 피기우스가 우리에게 자랑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타당성이 있는가? 그 기준들은 기록되지 않았을 경우와 비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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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해 본다면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피기우스의 이런 모습은 마치 폭정의 압제 이후에 디오니시우스27  )  나 팔라리스28  )  의 어떤 조신이 나와 국가의 붕괴, 법의 몰락, 법정의 타락을 슬퍼했던 것과도 같다.29  )   누가 이 자유와 법의 수호자에 대해 인내를 베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에 피기우스가 이런 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가 나에게 과거의 폭군 치하에서보다 로마의 적그리스도 아래에서의 상황이 얼마 나 더 좋았고 더 질서가 있었는지 보여 주길 원한다. 독자들이 그의 비난에 설득당해 문제 그 자체에 편견을 가지지 않게 하려고 피기우스의 서문에 신속하게 이 짧은 응답을 하는 게 옳은 것으 로 보였다. 이 점에서 나는 성공했다고 확신한다. 루터의 성격과 생활 방 식에 대한 피기우스의 비난과 욕설들을 논박하는 것은 내 현재 목적의 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현재 당면 문제와 관련해 볼 때 그 리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루터가 내 변호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피기 우스는 지금 물어뜯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짖음으로써 복수 하는 몹시 굶주린 개와 별로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 루터 에 대한 그의 가장 신랄한 고소의 내용도 루터가 종종 지옥의 고통과 번 민과도 같은 양심의 격렬한 투쟁으로 괴로움을 당했으므로 흉악한 괴물 이 틀림없다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 바보가 꿈에서라도 이것이 의미하는바, 즉 이것이 암시하는 바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그는 벙어리가 되었든지 오히려 루 터의 추종자나 찬양자로 변했을 것이다. 때때로 양심에 대한 혹독한 시 련을 참는 것이 경건한 신자들의 일반적인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 들을 통해 그들은 좀 더 참된 겸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성숙해 27  )   Dionysius 1세(BC 430-367)는 기원전 5세기 후반과 4세기에 시실리의 Syracuse를 다스렸

던 왕조의 설립자다. 28  )   Phalaris(BC 570-554)는 시칠리아의 아크라가스의 폭군이었다. 그는 그의 희생자를 속이 빈

청동 황소 안에 넣고 산 채로 구웠다. 29  )   Erasmus, Adagia 1.1.83; 1.6.70; 1.7.33; 1.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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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 그러므로 그들 각자는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특별히 뛰어난 특성 을 부여받았으므로 때때로 이상하고 낯선 방식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 래서 그는 죽음의 고통으로 둘러싸일 뿐 아니라, 지옥 그 자체에게 삼킨 바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성자들, 말하자면 하나 님의 선택된 작업장과 같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적인 감각을 초월해 경이롭게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이 필수적이다. 내가 너무 많은 예를 들어 지체하지 않기 위해 간단히 말하면, 야곱의 씨름이 바로 그런 것이다. 거기서 저 유명한 씨름꾼은 인간적인 대적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만난 것이었다[창 32:24-32]. 이제 만약 그가 경 기장에서 씨름하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이해하길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 의 능력을 깊이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 비록 이겼음에도, 그는 인생의 마 지막까지 불구였다는 사실에서도 결론을 끌어내게 하라. 이런 말들이 경 건한 자들을 위한 것이 되게 하라. 당신은 피기우스와 참으로 비종교적 인 저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양심도 없고 헌신의 마음도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을 신 들의 연회에 대한 호메로스의 이야기처럼 간주하는 사람들이다. [피기우스의 책 1권: 표절]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에 대한 지식은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로 연 관되어 있으므로, 피기우스가 자유의지에 대한 주제로 논쟁을 시작하는 것은 타당하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배열이 나 자신의 것이므로 칭찬한다 고 말할 것이다.30  )   그러나 그것이 가르침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였으 므로 그것을 사용했다고 나는 답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 대적이 내가 최상의 것이라고 판단한 계획을 따른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31  )   그러나 30  )   피기우스의 De libero arbitrio 의 1권 1장은 신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

에서 칼뱅의 <기독교 강요>(1539)의 방법론을 닮았다. 31  )   칼뱅도 멜란히톤의 방법론에서 차용한 것이므로 이 점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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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뻔뻔스럽게도 내 책 내용을 표절해 자 기 책에 삽입시키는 대담성을 보니 참으로 놀랍다. 만일 그런 일이 그의 오랜 규칙적 습관이었다는 변명으로 호소하지 않는 한, 나는 그가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반대해 들고 나온 그 큰 책에서, 그는 전체적으로 내 <기독교 강요>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하 는 것들을 채워 넣은 후에 마치 어떤 곳에서도 표절하지 않은 것처럼 자 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 무슨 권리로 또는 어떤 구실로 그가 내 것 을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사용하는지 알고 싶다. 만약 우리 사이가 아주 가깝다면 나는 우정으로 이런 뻔뻔스러움을 너그럽게 봐주는 것이 별 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상황으로 볼 때 그런 용서의 여지는 없다. 그렇 지 않다면 내가 그의 적이므로 그가 내 모든 생산물에 대해 약탈할 권리 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나 정의와 관습에 따른다면 이 런 종류의 약탈은 변호될 수 없다. 하나의 변호만이 남는데, 그것은 내가 말한 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지만 모든 교육받은 자들도 그와 같은 생각 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독자들에게 간절 히 바라는 것은, 만약 그들이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피기우스의 책 1장 과 내 <기독교 강요> 1장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32  )   독자들이 그 사람 의 완전히 썩어 빠지고 뻔뻔스러운 행위를 보면 조롱과 항의가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피기우스가 다른 작품에서 칭의에 대해 다룬 부분을 살펴보고 그것을 내 <기독교 강요>의 6장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라.33  )   독자들이 분노를 자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피기우스는 조금이라도 비밀스럽게 또는 선택적으로 표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도둑질을 교묘하게 숨기려는 노력 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내 저술에서 끌어 모은 것들이 원래부터 자신 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의 주요 논거들을 단어마다 공개적 32  )   <기독교 강요>(1541) 1장 참고. 33  )   <기독교 강요>(1541) 6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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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되풀이해 말하되, 나태함 때문에 그것들을 그대로 베끼는 수고를 하지 않고 부분 부분을 꿰매 봉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참된 저자 의 이름을 명시했다면, 나는 그가 그것들을 빌려 쓰고 있다고 말할 것 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토록 분명한데 그가 공공연히 표절자라고 불리 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호소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작품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한 사람이 표절함에 있어 즉각적인 발각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분별력이 없을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 모든 일을 신중히 검토해 볼 때, 그를 변호하는 입장 에서 말하려 하는 게 있다. 즉 그는 그것을 부주의해서라기보다는 확신 을 가지고 했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것에 찬 사를 보내는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의 작품들을 읽기를 회피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피기우스는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 하여금 참으로 유명한 그의 허풍을 어둠 가 운데에서 즐기게 하자. 그러나 빛과 선한 자들의 시각에서는, 내 <기독 교 강요>가 그의 한없는 뻔뻔함에 대한 증인과 보복자로 나타나게 되길 바란다. 그의 무가치한 행동들이 나를 그렇게 강요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문제를 언급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주 엄청난 거만함으로 부터 나온 멸시를 우리에게 쏟아 붓는다. 마치 우리가 배우지 못했고 지 적이지 못하며, 판단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비웃는다. 그러므로 사실 상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자는 존경과 감 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치 있 는 일이다. 그가 계속 자기 말을 삽입함으로써 올바른 진술을 왜곡하거나 부정확 하게 설명한 부분들을 조사하는 것은 이 책의 임무가 아니다. 그의 주장 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인간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그것 들을 서로 비교함에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으므로 계명에 순종 하는 것, 악을 금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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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는 때만 하나님 판단이 정의로움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피 기우스는 이렇게 확정지은 후에 재빨리 우리 견해에 대해 설명한다. 먼 저 루터의 말 34  )  을

( 그것은 대중의 마음에 충분하게 적용되지 못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 ,

음은 내 말 35  )  을 인용해 설명했다. 그는 작품 전체에 걸쳐 그런 관점을 유지했으므로, 나는 우리를 가리켜 “파당”라고 부르는 공격에 맞서야 했다. 그것으로 첫 번째 책은 끝을 맺는다. [이성에 대한 루터의 태도]

이제 그가 우리 가르침을 뒤집기 위해 사용하는 주된 간계는 그것이 매우 상식에 어긋난다는 비난이다. 루터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육적 이 성과 지혜를 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요구를 첫 번째 원리로 삼았다 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우리에 대한 비난 을 시작한다. 루터의 교리의 대부분은 매우 불합리하므로 의 속박에 대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부분이 그러하다 )

( 특히 인간의 선택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설득시키

길 원한다면, 당신은 우선 그들의 마음의 “눈”을 뽑아 버리고 그들의 이 성적 감각을 없애 버려야 한다. 피기우스는 육적 이성을 버리라는 제안 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만큼이나 논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얼마나 경멸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는가! 그는 말하길, 루터의 견 해는 믿음은 선포를 들음에서 난다고 증언한 사도들과 상충된다고 한다. 한 번 더 말하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아들과 바보들이 다른 사람 들보다 믿음을 배우기에 더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바울이 믿음은 하나님의 비밀 계시에 의존한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고전 2:6-16] 이 피기우스의 난점을 즉시 잘라 냈음에도, 피기우스는 34  )   피기우스는 루터의 저술에서 인용한다. 참고. Assertio omnium articulorum M. Lutheri

per Bellam Leonis X (WA 7:141-49). 35  )   피기우스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1539) 2장에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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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한다! 또한 피기우스는 사람에게서 육 적 이성, 즉 인간적 지혜에 대한 헛된 확신을 빼앗는 것은 마치 그 사람 을 얼간이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기우스가 자신의 논 쟁이 우리와의 논쟁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의 논쟁임을 이해하게 하려 고, 그로 하여금 만약 귀가 있다면 바울의 말을 듣게 하도록 하자. 바울 은 자연인 ( 육에 속한 사람 ) 은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고 한다[고전 2:14]. 이것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바울로 하여금 자세히 말하게 하자. 분명히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기 때문 이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믿는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다[고 전 1:20, 21]. 무슨 목적으로? 그로 하여금 한 번 더 스스로 답하게 하자. 이는 지혜자의 영광을 멸하시기 위해서다[고전 1:19, 27-29]. 결국 그는 여기 에서 무엇을 추론하는가? 누구도 자기 자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자. 만약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한다면 세상에 대해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해야 지혜로운 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 나님께는 미련한 것이다[고전 3:18, 19].

영적 지혜의 첫 번째 기초는 세상의 지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바울이 어떻게 선포하는지 보라. 이제 피기우스로 하여 금 바울에 반대해 제기하는 매우 불쾌한 비난, 즉 바울은 모든 사람의 마 음의 눈을 뽑고, 그들을 야만적인 짐승처럼 만들고, 바보보다 더 나쁘게 다루길 원한다고 하는 비난을 모두 토해 내게 하자. 그들의 눈에 지혜로 운 사람들 중의 누구도 바울의 선언에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지혜의 겉모습만 보고 즐거워하는 저 모든 미련함 을 정죄하지 않는 한, 이런 입장에 도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 닫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거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의 지혜에 대한 확신 보다 더 위험한 주문은 없다. 간단히 말해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가진 지혜는 어떤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순전히 어리석은 것이다. 거기에다 자기 확신이 더해질 때 광적으로 된다. 만약 그밖에 다른 아무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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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없다 해도, 피기우스가 그런 사실의 충분한 증거다. 만약 루터가 오 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부분을 사도와 성경과 천사들이 가르친다면, 피기우스가 그것들을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충분한 증거 라 할 수 있다. 논의가 진행되어 루터의 실제 견해에 이르렀을 때, 피기우스는 정죄하 기 원하는 모든 것을 두 가지의 주요 내용으로 요약한다. 즉, 첫 사람의 타락 이후 자유의지는 명목상으로만 실재하게 되었고,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루터가 가르쳤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덧붙이길 자유의지는 상상의 산물이고, 실 체가 없는 이름이며, 따라서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것이 절대적 필연에 따라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표제 와 관련해 많은 것이 그를 괴롭힌다. 첫째, 여기서 뒤따라오는 논리에 따 른다면,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인 힘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준 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 본성은 부패한 것으로, 말 하자면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 게는 불가능함에도, 우리는 우리 능력을 초월하는 그 율법을 지키지 않 음으로써 잘못을 행한다. 넷째, 이것은 우리의 ( 즉,

가톨릭교회의 )

원죄의 교

리, 즉 그가 괴물 같은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섯째, 루터 에 따르면, 의로운 자들은 자신들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다. 그 런 선행은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용납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죽을 운 명에 처해진 죄다. [선행의 보상]

나는 내 독자들에게 피기우스가 계속 똑같은 옛날 노래를 부르고 있 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모든 다른 문제는 적당한 자리에서 다 시 나타날 것이므로 나는 여기서 단지 마지막 요점을 말하려 한다. 루 터가 선행을 이런 방식으로 말했을 때, 그들에게서 그들이 드리는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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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결코 하나님 이 그들을 받아 주시지 않는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관 대하심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간주할 경우, 루터는 그들이 할 만한 가 치가 있는 것만 보여 주길 원했다. 분명히 어떤 선행일지라도 인간 자신 의 덕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호의 로만 가능하다. 그들이 비록 그만한 가치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 을 굉장히 가치 있게 여기시기 때문이다.36  )   그러나 당신은 루터가 과장 한다고 말할 것이다. 루터가 그런 과장을 하게 된 타당한 이유가 있었음 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즉 그는 세상이 행위에 대 한 거짓되고 위험천만한 확신, 즉 일종의 죽음의 잠 때문에 감각을 빼앗 겨 버려 세상을 깨우려면 목소리나 말이 아니라 천둥과 벼락과 같은 나 팔 소리를 필요로 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 솔직하고 분명 하게 참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행의 가치는 행위 그 자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의존하므로, 행위는 만 약 그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의롭지 않 고 순수하지도 않다. 이제 당신이 그처럼 많이 이야기된 인간의 완전함 중에서 그 자체로 선한 행위가 있음을 내가 동의할 수 있게 만들어 보길 원하는 바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선한 일을 이루시는 성령을 경시하는 것이 된다 고 생각하므로 반대한다. 만약 당신이 선행에 있어 인간에게 기원하는 것과 성령에 기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성인들이 아무리 많이 하나님께 복종하려고 신실 하고도 진실하게 헌신한다 해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 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후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약된 율법의 요

36  )   칼뱅의 ‘이중칭의’의 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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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 대해 순종하려는 준비된 마음이 있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마 22:37-39; 막 12:29-31; 눅 10:27]. 참으로 이것이 행위의 시험이 이루 어지는 기준임을 모르는 자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다. 이제 피기우스로 하여금 주의 깊게 듣도록 하자. 내가 말하려는 것은 성인들이 육체의 영 원한 연약함으로 인해 그들이 행하는 선행을 완전하게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달려야 할 때 걷거나 때로는 절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과 적으로 전적으로 순수하고 완전하며 어떤 흠도 없는 선행은 결코 존재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육체의 불완전함의 결과로 성인의 행위에 저급한 어떤 것이 늘 포함된다면,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자세히 검토되 고 천사들조차도 두려워 떠는 그런 저울에서 측량될 때, 또한 인간의 판 단으로 그들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한다 해도 그들은 부패한 것으로 드 러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순전함이 극히 사소한 흠 때문에 더러워진다는 것은 합 리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첫째, 모든 선행에 죄가 포함되어 있다면 내 경우를 증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둘째, 나는 사소 한 흠집 때문에 완전한 순전함이 망쳐진다는 게 비합리적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달콤하고 상쾌한 포도주의 맛이 약간의 신맛 때문에 완전히 망 치며, 그래서 본래 가지고 있던 상쾌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그 렇다면 더럽혀진 선행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다고 선포한다 해도 누가 하나님에 대항해 고소를 제기할 것인가?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서도 만 약 부정한 상태에 있는 자가 거룩한 것을 만지면, 그것은 부정한 행위로 간주된다고 했다[민 19:22; 학 2:13]. 이런 율법을 통해 인간의 부정함은 너무 강하고 전염성이 있는 독이므로 단순한 접촉으로도 다른 거룩한 어떤 것도 더럽힘을 보여 주었다. 이제 우리가 믿음 외에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일반적인 더러움에서 자유할 것인가?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만약 선행이 본질적인 면에서 평가된다면 예외 없이 죄악된 것이다. 그 리고 선행이 선한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칭송받을 만하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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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부성적인 수용을 통해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할 경우에는 그 것이 선행 자체의 본래적 본질적 공로가 아니다. [절대적 필연의 문제]

모든 사건의 절대적 필연의 문제와 관련된 질문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 정에 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 다른 논점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곳으 로 연기하겠다. 이후에 그는 말하길, 우리가 그 교리를 부끄러워해 그 교 리의 절반을 포기했다고 한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외부적인 문제와 공적 인 일들에서는 인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주장 때문에 이 철회를 순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 았다고 말한다. 칼뱅 진영의 사람들은 출판된 작품들에서 복음이 속임수 로써 발전해 가는 게 허용된다고 주장한다는 것, 그들은 그처럼 엄청난 신성모독의 원조인 루터를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초창기의 책 들에 대해 비난하지 않음으로써 분명히 잘못이 있었음을[철회가 순수한 게 아니었음을] 시인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자기 혼자서 꿈꾸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우리가 모략과 속 임수로써 발전해 가는 복음에 대해 썼다는 그의 고소는 신뢰할 수 없 는 것이다. 그런 어떤 진술도 우리 진영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기 때 문이다. 또한 루터에 대해서도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전 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를 이 시대에 복음의 순수성을 회 복하기 위해 수많은 일과 사역을 행한 특별한 그리스도의 사도로 간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솔론 ( Solon ) 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했다고 알려진 말, 즉 우리는 나이를 먹고 빨리 늙어 가더라도 매일매일 배 운다는 말을 기꺼이 인정한다.37  )   그러나 우리가 늘 인정해 온 전체 교리

를 꾸준히 고수하는 지금 이때, 왜 피기우스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틀

37  )   Ct. Erasmus. Adagia 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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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고 선포하게 요구하는가? 우리가 다른 방식의 화술을 사용한다는 것, 즉 거의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자기 자신만의 화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 모든 세 대의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사용해 오던 어떤 것이 허용될 수 없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즉 우리 책들의 재판이 찍힐 때, 우리는 조악한 것을 개선하고, 너무 거칠게 표현된 것을 부드럽 게 하고, 모호한 점을 명확히 하고, 너무 압축된 것을 충분히 더 길게 설 명하고, 새로운 이유들로 우리 주장을 강화하고, 마지막으로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는 곳에서 소리를 낮추고 언어를 부드럽게 한다. 세월도 실천도 연습도 독서도 묵상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삶 의 요점은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으로 결과가 나 오지 않는다면 진보한다는 것의 요점은 무엇이겠는가? 반면에, 만약 피 기우스가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신실하게 전달한 가르침을 우리가 최 고라고 판단한 형태로 형성시키려고 밤낮으로 노력함을 그에게 분명하 게 말해 두려 한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루터가 스콜라적인 언어로, 즉 대중적 취향에는 낯 선 스타일로 쓴 작품들의 외형을 신중하고도 매우 능숙하게 부드럽게 표현함으로써, 수많은 대중의 일상적인 용법에 맞게 적응시켰다.38  )   마 찬가지로 아우구스부르크 고백서가 작성될 필요가 있었을 때, 멜란히톤 은 교회에 특징적이고 구원을 아는 데 필수적인 그 가르침에만 머물길 원했다. 즉, 자연적인 힘만으로는 신앙을 가질 능력도 율법에 순종할 능 력도 온전한 영적 의를 이룰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멜란히톤은 그들이 공적인 일로써나 외면적인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자 세히 논의하길 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신앙에 중요한 게 아

38  )   1546년에 칼뱅은 멜란히톤의 Loci communes 의 프랑스어 번역판 서문을 썼다(CO 5.848-

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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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었기 때문이다.39  )   그러나 이 가르침은 이 논쟁의 주요 쟁점이며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다. 이 가르침이 루터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맨 처음 제 기되었으므로, 우리가 지금 이것을 변호하고 있다고 세간에서 이야기 한다. 불편한 느낌을 주는 부분들을 제거함으로써 표현의 형태를 부드럽 게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라 해도, 신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 라고 내가 선언한 문제들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 [개혁자들이 모호하다는 비난]

피기우스가 전체 연극 중 이 부분을 끝마친 후에도 계속 자신의 불신 을 다른 장면에까지 투영시킨다. 그는 “우리 교리의 신비들”이라는 말 을 사용했는데, 바로 그것이 어둠 속에서 우리의 저술들 안에 숨겨져 있다고 보고, 그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끄집어내려 했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모호함과 다양성에 대해 불평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은 그 자체로 어둠의 충만이므로, 우리는 우리 속임수를 잘 사용하기 위해 숨을 곳을 찾아야 하고, 게다가 우리는 서로 같지 않고 달라서 우리의 모든 저술에서 어떤 확정적인 결론을 끌어낸다는 것은 끝없는 일이 되 리라는 것이다. 대낮보다 저녁 무렵에 더 잘 보이는 종류의 약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시력이 섬세하고 약한 사람들이 만 일 대낮의 밝은 빛 속으로 나온다면 더 큰 시력 장애로 고통당함을 우리 는 안다. 피기우스가 그와 같은 자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타 인들에게 멋진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칭찬을 보내지만 어렵고 혼 란스러운 말은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우리가 진지하게 우리 자신들 을 남에게 알리려고 노력함을 안다. 우리 대적들이 우리에게 매우 화내 고 있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게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 도의 가르침을 보통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오직 피기우스만 우리 주

39  )   Augsburg Confession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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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매우 모호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 말했 던 적이 있다. 학교에서 연설을 연습하는 소년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써 그는 수사학의 모든 규칙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한다. 당신 대적이 모 호하다고 비난하는 게 그의 원인을 손상시키는 데 도움이 됨을 그는 어 딘가에서 읽었다. 피기우스는 이런 무기를 잡았다. 그것을 좋아했기 때 문이다. 그리고 지금 경솔하게 그 무기를 우리에게 휘두르고 있다. 그러 나 우리 책은 별도의 방어가 없어도 이런 헛된 비난에서부터 스스로를 매우 적절히 보호할 수 있으므로, 현재의 경우에는 이런 편백나무를 위 한 어떤 장소도 없다.40  )   나중에는 피기우스 자신조차도, 마치 자기의 주 장을 잊어버린 것처럼, 최소한 질서와 명료성에서는 나를 신뢰했다. 그 의 선언처럼 우리가 서로 불일치한지 아닌지 증명하는 것은 그에게 달 려 있다. 그가 무차별하게 우리를 반대하면서 모든 것을 지껄여 댐을 제 외한다면 내가 그 밖의 다른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우리 가르 침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가르침에 혐오감을 가지게 하 려 한다. 그는 우리 작품들에 조금이라도 접촉했던 사람들에게는 관심 을 가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그는 내 말을 사용하면서, 우리 진영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 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비록 ( 그가 자기 자신과 지나치게 모순되어 보이지 않게 하려 고 )

그가 우리 진영 사람들이 하나의 관점을 공유하는 곳에서 제시된 어

떤 실례를 하나의 예외로 취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독자 여러분은 사 람들이 이런 방법과 저런 방법 모두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루터주의 진영의 어떤 개인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루터주의 진영 전체에 대항하는 전투를 시작하는 것으로 보이길 원한다. 그는 연합된 몸체에 대한 공격을 제외한다면 우리 모두를 동시에 공격할 수 없다. 마지못해 그는 우리 사이에 일치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동시에

40  )   Horatius, Ars poetica 19-21. 참고. Erasmus, Adagia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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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그는 풀 수 없는 매듭을 찢는다. 이것에 대해 그는 내 <기독교 강요> 두 번째 장에 있는 이 주제에 대한 내 논쟁의 요약을 덧붙인다. 나는 인색하거나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내 논지를 모방 하는 나쁜 신앙을 가진 피기우스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과도하게 우쭐대지 않게 하기 위해,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피 기우스가 내 전체적 논지를 대충 묘사했는데, 거기에 따른다면, 내가 마 지못해 내 전체 작품에 대한 그 요약을 허용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 나 나는 그것을 내 적대자가 만들었음을 독자들이 기억한다는 조건에서 만 인정한다. 그가 나 자신의 것보다 더욱 조리 있고 일관성 있는 논의라 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특징적인 두 가지 관점으로 행동하는 데, 그것은 공허한 자만심과 비진리에 대한 관대함이다. 그가 내 진술들을 쓴 물방울처럼 여기저기 뿌려 독자들의 구미에 맞 지 않게 만들어 놓은 부분들이 있다. 피기우스에 따르면, 내가 크리소스 토무스의 진술을 글자 그대로 인용했음에도 그것이 마치 자기 책에만 나오는 것처럼 여기고 내 인용이 핵심을 빼먹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 한다. 또 모든 사람이 내 해설이 정확함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내가 어떤 개념을 거짓으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생각으로 돌렸다고 말 한다. 또한 내가 몇몇 곳에서 불가타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내가 선지자 들의 글을 인용할 때 부정직했거나 신실한 번역자들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언급에 대해서도 역시 그냥 지나칠 것이다. 이 런 것들은 피기우스의 놀랄 만한 무지와 사악함을 보여 주는 것 외에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 오히려 정상적인 독자들은 이런 무지와 사악함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다른 곳에서 반복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다루어질 곳에서 한 가지 는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그는 신자의 영혼이 중생에 의해 두 부 분으로 나뉜다는 내 가르침을 순수한 환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한마디의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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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 이 누워 잠들기 위함인가? 어리석은 태만에 빠지기 위함인가?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의 조용한 평온을 누리면서 동시에 기 도로 깨어 있기 위함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고[빌 2:12] 권면한다. 이것은 그들 이 결과에 대해 근심스럽게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숨어 그에게

* * * 칼

만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그들 자신들을 그에게 맡기기 위함 이며, 그의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마지막에 그들이 승리하리라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이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덧붙이기 때문이다. 그들[너희]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그들[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그들로 의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혹의 상태에 있지 않게 그는 이미 모든 의심을 그들에게서 제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거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마치 우리의 구원이 의심스런 상태에서 흔들리기나 하는 듯이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기도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지 이루시리라 ( 빌 1[:6] ).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5

이다. -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4-5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32,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5

Jean Calvin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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