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엮은이와 지은이 6 │약어표 8
서론_ 브라이언 탭·앤드루 킹 10
1장 첫째 성경 접근법_ 존 골딩게이 20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의 논평_ 트렘퍼 롱맨 3세 56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_ 하빌라 다람라즈 63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의 논평_ 제이슨 드루치 70 현대 이전 접근법의 논평_ 크레이그 카터 79 답변_ 존 골딩게이 87
2장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_ 트렘퍼 롱맨 3세 91 첫째 성경 접근법의 논평_ 존 골딩게이 128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_ 하빌라 다람라즈 136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의 논평_ 제이슨 드루치 143 현대 이전 접근법의 논평_ 크레이그 카터 151 답변_ 트렘퍼 롱맨 3세 159
3장 수용 중심적 · 상호 본문적 접근법_ 하빌라 다람라즈 163 첫째 성경 접근법의 논평_ 존 골딩게이 197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의 논평_ 트렘퍼 롱맨 3세 205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의 논평_ 제이슨 드루치 212 현대 이전 접근법의 논평_ 크레이그 카터 222 답변_ 하빌라 다람라즈 230
4장 구속사적 ·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_ 제이슨 드루치 234 첫째 성경 접근법의 논평_ 존 골딩게이 277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의 논평_ 트렘퍼 롱맨 3세 285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_ 하빌라 다람라즈 292 현대 이전 접근법의 논평_ 크레이그 카터 299 답변_ 제이슨 드루치 307
5장 현대 이전 접근법_ 크레이그 카터 312 첫째 성경 접근법의 논평_ 존 골딩게이 349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의 논평_ 트렘퍼 롱맨 3세 357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_ 하빌라 다람라즈 365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의 논평_ 제이슨 드루치 372 답변_ 크레이그 카터 380
결론_ 브라이언 탭, 앤드루 킹 384 │참고문헌 396
서론
브라이언 탭·앤드루 킹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주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 셨다( 눅 24:27 ). 주님은 성경을 여셨고 또한 제자들의 마음도 여셔서 자신에 대해 기록된 것을 깨닫게 하셨다( 31–32, 45절 ). 이 유명한 장 면은 우리를 경탄으로 이끄는데, 다음과 같은 해석학적・성경신학적 질문도 유발한다. 제자들은 선지자가 말한 것을 왜 “더디 믿었을 까”( 25절 ) ? 그리스도가 오시기 수백 년 전의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은 이 고대 문서들이 어떤 식으로든 메시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이해 해야 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성경에 기록된 것을 “성취 하셨을까?” 초대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주님의 모범을 따랐다( 행 17:3 ). 베드로는 시편 16편과 110편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즉위를 선포했고( 행 2:25–35 ), 빌립은 이사야 53장을 근거로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좋은 소식을 나누었으며( 행 8:30–35 ), 바 울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만을 증언한다 고 설명했다( 행 26:22 ). 클라인 스나드그래스는 “모든 지점에서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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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죽음・부활의 새로운 빛으로 그 들의 성경을 이해하려 했다. 초기 기독교인은 그들의 기독교적 신학 을 제공하고 기독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약을 사용했다. 구약 은 신약 신학의 하부 구조를 제공했다”라고 말한다.1)
모든 길이 그리스도께로 이어지는가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구약을 읽는다면, 우리는 오늘날 기 독교인이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야 하는지를 질문할 것이다. 일부 학 자는 사도들의 독특한 계시적 입장과 해석적 상황을 인용하면서 주 저한다. 사도들의 방법론은 유대교의 주석 관례에 풍부한데, 유대교 의 주석 관례는 1세기 청중에게 복음을 상황화하는 데는 적합했으 나 현대 독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리처드 롱네커는 “해석 학과 관련된 우리의 입장이 ‘회복주의’가 아니라면, 오늘날 기독교 인이 신약의 사도적 믿음과 교리에 헌신하더라도 신약이 우리를 위 해 상술하는 사도적 주석 관례에 반드시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2) 어떤 사람은 우리가 사도들의 교리적 결론뿐 아니라 성 경의 통일성과 구속사에서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대한 사도들의 해 석학적・신학적 전제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레고 리 빌은 우리가 성경 저자들의 “영감으로 된 확실성”을 모사할 수는 없어도 ( 모형론 같은 ) 성경 저자들의 해석 관례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1) Klyne Snodgrass,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in The Right Doc-
trine from the Wrong Texts? Essays on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 ed. G. K. Beal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1994), 29. 이 인용의 마지막 줄은 C. H. 도드의 중요작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e Sub-Structure of New Testament Theology (London: Nisbet, 1952)의 부제를 인유한다. 2) Richard N. Longenecker, “‘Who Is the Prophet Talking About?’ Some Reflections on the New Testament’s Use of the Old,” Them 13 (1987): 8.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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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가 채용할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라고 설명한다.3)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일찍이 영국의 모든 마을과 도시마다 런던으로 가는 길이 있듯이 “성경의 모든 본문에도 성경의 수도인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 있다”라고 언급했다. 스펄전은 “나 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 없는 본문을 지금까지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그 안에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이 없는 본문을 찾 는다면 그 길을 만들 것”이라고 부언한다.4) 많은 목회자와 학자는 구약의 모든 구절이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과 관련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5) 일부 목회자와 학자는 라합의 붉 은 줄이 예수의 피를 의미한다는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주장이나6) 히폴리투스에서 베르나르에 이르는 아가에 대한 다양한 풍유적 읽 기처럼7) 창의적이지만 강제적인 시도라고 여기는 예를 인용하면서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찾기 위해 ‘너무 서두르지 말라’라고 주문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구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일부 연구는 율법・선지자의 글・
3) G. K. Beale, Handbook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xege-
sis and Interpretati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2, 『신약의 구약 사용 핸드 북』,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3), 25(강조는 원문의 것임). 4) C. H. Spurgeon, “Christ Precious to Believers,” in The New Park Street Pulpit Sermons (London: Passmore & Alabaster, 1859), 5:140 (sermon 242). 5) G. K. Beale, “Finding Christ in the Old Testament,” JETS 63 (2020): 25–50;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 The Application of Biblical Theology to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2000,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성서유니온선교회 역간, 2002)의 미묘한 논법 을 보라. 6)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111. 7) Tremper Longman III, Song of Songs , NICOT (Grand Rapids: Eerdmans, 2001, 『NICOT 아가』,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8), 28–35에서 개요를 보라. 다음도 보라. Mitchell L. Chase, 40 Questions about Typology and Allegory (Grand Rapids: Kregel, 2020), 207–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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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성문서 안에서 메시아적 기대의 발전에 대한 전망적 접근법을 채택 한다. 이 노선을 따르면, 우리는 구약의 시편 2편 2절( 세상의 군왕들이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해 일어나며 ) 같은 본문과 다니엘
9장 25–26절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불가사의한 언급에 특히 초점을 맞추면서 히브리 단어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이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 의 39가지 용법을 조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
어, 앤드루 애버네시와 그레고리 고스웰은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이 행하기 위해 임하실 왕에 대한 구약의 소망을 철저히 탐구하면서, 왕과 같은 메시아적 인물을 전조로 보여 주거나 예견하거나 묘사하 는 다양한 본문을 검토한다.8) 학자들은 또한 제2 성전 시대 동안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대교의 역사적 발전도 조사한다. 예를 들어, 조지프 피츠마이어는 구약 성경 에서 메시아사상의 흔적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지만, 제2 성전 시대 동안 유대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다양한 메시아적 소망을 탐구 한다.9) 잘 알려진 예로는 장차 임할 “선지자……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들”에 대한 사해 문서( 사해 문서 중 공동체 규범서 9:11 ) 와 솔로몬의 시편 17편 21절-18편 9절이 있는데, 솔로몬의 시편의 본문은 시편 2편과 이사야 11장 같은 구약 본문에 의지해 “여호와의 메시아”, 곧 장차 이스라엘을 의로 다스리고 그들의 원수를 무찌를 다윗 혈통의 아들에 대해 말한다.10) 8) Andrew T. Abernethy and Gregory Goswell, God’s Messiah in the Old Testament:
Expectations of a Coming King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20), 1. 9) Joseph A. Fitzmyer, The One Who Is to Come (Grand Rapids: Eerdmans, 2007),
82–133. 다음도 보라. John J. Collins, The Scepter and the Star: Messianism in Light of the Dead Sea Scrolls ,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2010). 10) 사해 문서의 번역은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Florentino Garcia Martinez and Eibert J. C. Tigchelaar, eds., The Dead Sea Scrolls Study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0). 위경의 번역은 다음을 따른다. James H. Charlesworth, ed.,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 2 vols. (Garden City, NY: Doubleday, 1983, 1985).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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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자들은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후향적 접근법을 채택하 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의 증언에 비추어 구약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리처드 헤이스는 복음서 저자들 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경을 “다시 읽었다”라고 설명하 면서, “우리는 복음서부터 뒤로 읽음으로써 구약을 읽는 법을 배우 며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구약부터 앞으로 읽음으로써 복음서를 읽는 법을 배운다”라고 제안한다.11)
토론을 위한 핵심 질문 문제에 대한 이런 다양한 접근법이 있는 현실에서 오늘날 기독교 인은 어떻게 그리스도에 비추어 구약을 읽어야 할까?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구약 성경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기정사 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 책이 관심 있게 다룰 내용이다. 기고자와 편집자는 기독교 독자를 위해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미국・영국・인도의 기독교 성경학자와 신학 자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많은 해석학적・성경신학적 질문과 씨름 한다. 여러분은 성경의 본질・통일성・발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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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러분이 구약 본문을 해석할 때 신약의 역할은 무엇 인가? 구약의 인간 저자 및 편집자의 의도와 신적 저자의 의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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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11) Richard B. Hays, Reading Backwards: Figural Christology and the Fourfold Gos-
pel Witness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14), x,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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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구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데 필요한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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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무엇인가? 기독교 독자가 그리스도에 비추어 구약을 책임감 있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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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 따라야 할 구체적 절차는 무엇인가?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접근법은 독자에게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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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을 주는가?
이 각각의 질문은 기고자의 전제와 방법론을 드러내며, 이어지는 해석적 진행에 대한 결정적 맥락을 제시한다. 독자가 구약의 그리스 도에 대한 이런 견해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 기 위해, 기고자는 히브리 정경의 세 가지 주요 부분에서 각각 창세 기 22장, 잠언 8장, 이사야 42장 본문을 선택하여 같은 사례 연구를 진행한다. 독자는 각 견해의 장점과 일관성을 그 자체로 평가하도록 권유받는다. 이 접근법은 각 구절을 가장 잘 이해하는가? 이 접근법 은 다른 장르에 속하는 본문에 대해서도 ‘작동’하는가? 이 접근법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기독교 성경으로 종합하는 데 도움을 주는가? 다른 기고자들의 논평은 이런 질문 중 일부를 끌어낼 것이다. 우리 는 독자 여러분이 가장 설득력 있게 느끼는 방법을 자신의 구약 읽 기에 적용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다섯 가지 견해에 대한 소개 첫 번째 기고자 존 골딩게이는 풀러 신학교의 구약 수석 교수이자 데이비드 앨런 허버드 구약 명예 교수다. 골딩게이는 많은 주석서와 작품을 저술했는데, 이중에는 『우리에게 신약이 필요한가?』 등이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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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12) 그의 “첫째 성경 우선적 접근법”에서, 골딩게이는 그리스도 에게 이르는 가장 가까운 길을 곧바로 찾기보다 첫째 성경( 골딩게이가 구약을 가리킬 때 선호하는 용어 ) 을 그 자체로 진지하게 생각할 것을 독자
에게 촉구한다. 골딩게이는 “선지자들은 조상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도발적으로 단언한다. 성경의 의미( 성경 저자 가 원래 청자에게 전달하려 했던 것 ) 를 성경의 중요성이나 적용과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성경의 중요성이나 적용은 저자의 원래 메시지와 연 결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신약은 첫째 성경의 의미 를 정하거나 바꾸거나 첫째 성경의 “더 완전한 의미”를 제안하지 않 으나 우리에 대한 고대 본문의 중요성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다음으로 트렘퍼 롱맨 3세는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을 제시한다. 롱맨은 이름난 학자며 웨스트몬트 대학 의 성경학 명예 교수다. 롱맨은 많은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는데, 이 중에는 레이먼드 딜라드와 함께 쓴 『최신구약개론』이 있다.13) 롱맨 은 구약 저자들이 그들의 글이 성경의 목적( ‘텔로스’ ) 으로 계시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비하는 방식에 놀랐을 것이라고 인정 한다. 기독교 해석자는 그리스도의 강림에 비추어 고대 본문의 더 완전한 의미뿐 아니라 구약 구절의 “개별 목소리”도 원래의 맥락에 서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구약 본문을 두 번 읽어야” 한다. 세 번째, 하빌라 다람라즈는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수용 중심 12) 예로 다음을 보라. John E. Goldingay, Do We Need the New Testament? Letting the
Old Testament Speak for Itself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5); Genesis , Baker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Pentateuch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20). 13) 예로 다음을 보라. Tr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최신구약개론』, CH북스 역 간, 2009); Tremper Longman III, Psalm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OTC 15–16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4, 『시편 I・II: 틴데일 구약주석 시 리즈 15・16』, CLC 역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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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을 채택한다. 다람라즈는 인도 방갈로르의 남아시아 고등 기독교 연구소 성경학과 과장이다. 다른 책 중에서 다람라즈는 아가의 상호 본문 연구서와 룻기 주석서를 저술했다.14) 다른 기고자들은 성경 저자의 의도를 강조하지만, 다람라즈는 본문 이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는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 적 방법론”을 제안한다. 다람라즈는 “보통의 독자”를 제안하면서 시 작하는데, 보통의 독자는 구약에 친숙하며 구약을 그리스도와 연결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보통의 독자는 성경의 “공적 의미”( 설교·찬 송·교회 예전·미술 등을 통해 발전된 연상 ) 를 알고 있는데, 구약 본문을
“기독론적 공명”으로 읽으며 본문의 지배적 주제, 곧 “도상”( icon ) 을 찾아내며 같은 도상을 특징으로 하는 다른 본문과의 대화에 이 본문 을 집어넣는다. 상호 본문들을 그들의 역사적 상황에서 연구하는 동 시에 그들의 문학적・신학적 공명에 주의함으로써, 독자는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슨 드루치는 미드웨스턴 신학교와 스펄전 대학교의 구약 및 성경신학 연구 교수로서 이 책의 네 번째 기고자다. 드루치는 많은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는데, 여기에는 『구약 저자들의 실제 관심사』 가 포함된다.15) 자신의 “구속사적・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에서 드 루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 목적의 절정과 중심으로 서 계신다”라고 단언한다. 드루치는 독자가 본문에서 하나님이 의도하 신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구약 구절의 문학적・성경신학적 맥락에 14) Havilah Dharamraj, Altogether Lovely: A Thematic and Intertextual Reading of the
Song of Songs (Minneapolis: Fortress, 2018); Ruth , Asia Bible Commentary (Cumbria, UK: Langham Global Library, 2019). 15) 예로 다음을 보라. Jason S. DeRouchie, ed., What the Old Testament Authors Really Cared About: A Survey of Jesus’ Bible (Grand Rapids: Kregel, 2013); How to Understand and Apply the Old Testament: Twelve Steps from Exegesis to Theology (Phillipsburg, NJ: P&R, 2017, 『구약,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죠이북스 역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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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드루치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 리스도를 위해” 구약을 읽기 위한 일곱 가지 원리를 제안하는데, 곧
(1) 메시아적 예견, (2) 구원 역사적 구상, (3) 옛 언약과 새 언약 사 이의 유사점과 차이점, (4) 모형론, (5) 여호와의 신원과 활동, (6) 윤리적 표준, (7) 사랑의 삶에 대한 율법의 지도다. 마지막 기고자는 크레이그 카터인데, 카터는 틴들 대학교 신학 연 구 교수이자 온타리오주 에이잭스의 웨스트니 하이츠 침례교회 전 임 신학자다. 카터가 출판한 많은 간행물 중에는 『위대한 전통과 함 께 해석하는 성경』과 『위대한 전통과 함께 묵상하는 하나님』이 있다.16) 카터는 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현대 이전 접근법”을 옹호 하는데, 이 접근법은 독자적인 “방법론”이라기보다 “영적 훈련”에 더 가깝다. 이 접근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내고 이 메시지에 올바르게 반응하기 위해 다양한 해석 기법을 채용하는데, 여기에는 메시아적 예견・모형론・풍유법・인물론적 주석, 그리고 교회사를 통틀어 흔히 사용되는 다른 신학적 읽기가 포함된다. 카터 는 역사 비평의 방법론과 결과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기독교 독자가 구약을 읽는 방식을 지도하기 위한 네 가지 원리로 (1) 성경의 통일 성, (2) 본문의 문자적 의미의 우선권, (3) 본문의 영적 의미의 실재,
(4) 본문의 의미에 대한 기독론적 통제를 제시하는데, 본문의 의미 에 대한 기독론적 통제 덕분에 “일관성 있는 교리 체계가 주석에서 생겨날 수 있다.” 카터는 “성경의 진실한 해석은 성경을 예수 그리스 도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된 책으로 인정하는지에 달려 있다”라고 주
16) Craig A. Carter, Interpreting Scripture with the Great Tradition: Recovering the
Genius of Premodern Exegesi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8); Contemplating God with the Great Tradition: Recovering Trinitarian Classical Theism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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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장한다. 골딩게이・롱맨・다람라즈・드루치・카터의 견해가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구약 성경과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법을 완전히 망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고자는 각자의 글과 논평에서 창세기 22장・잠언 8장・이사야 42장에 대한 구체적 적용뿐 아니라 신학적・해석학적・주석적 원리도 논의한다. 이 본문들은 그리스도 의 강림을 아브라함의 더 위대한 아들, 성육신한 지혜, 여호와께 택 함을 받은 종으로 직접 예견하는가 아니면 모형론적으로 예기하는 가? 아니면 이런 주장들은 기록된 것을 넘어가며 하나님이 선지자들 을 통해 우리 조상에게 주신 풍부한 메시지를 모호하게 하는가? 독 자 여러분은 저자의 논증을 저울질하고 성경을 직접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책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든 성경을 더 충실하게 읽도 록 독자 여러분을 더 잘 준비시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제 가르침과 증언으로 들어가자.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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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첫째 성경 접근법
존 골딩게이
접근법 소개 신약에서 우리가 ‘구약’으로 부르는 작품은 그냥 ‘성경’이다. 조금 애석한 명칭인 ‘구약’은 나중에 만들어졌다. 나는 이 저작물을 오래 되고 구식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시사하기보다 ‘첫째 성경’으 로 부르는 편을 좋아한다. 이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하신 행동과 말씀에 대한 증거와 기록으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 이의 진정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신약은 이 성경이 우리를 위해 예수를 밝히게 할 것을 권면하지만, 이번 장에서 내 주장은 우리가 예수를 성경으로 들여와 읽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놓친다면 지혜 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성경에 비추어 신약을 읽고 모두 기독교 경전을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서로에 비추어 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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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과 신약을 읽는 것이 지혜롭다.1)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신다. 그리고 아버 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관여하 셨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삼중 측면이 드러나고 사람들의 삶에서 실현된 것은 단지 성육신과 오순절을 통해서였다. 첫째 성경 이 하나님을 가리킬 때면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이 포함되고 성령도 이런 언급에 영감을 주시는 데 관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첫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이 의 사소통의 내용 중 일부로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첫째 성경 이야기의 모든 곳에 계시며 사건에 관여했으나, 본문에서 언급하는 어떤 인물로 “첫째 성경 안에” 있지 않다. 첫째 성경이 하나님의 백 성에게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 백성이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생각하 게 이끌지 않는다. 첫째 성경은 단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 하도록 이끌 뿐이다. 우리는 첫째 성경을 읽을 때 첫째 성경이 하나 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살피고, 첫째 성경이 예수께서 사 람들에게 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의 더 충만한 관계로 우리 를 이끌게 하는 것이 지혜롭다( 요 14:6 ).
1부: 성경의 본질 이어지는 연구에서는 먼저 성경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본질 및 성 경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과 우리를 위한 성경의 중요성을 찾아내는
1) 나는 여기서 다음에서 발전시킨 논증과 신념을 전제로 한다. John Goldingay, Do We
Need the New Testament? Letting the Old Testament Speak for Itself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5); Goldingay, Biblical Theology: The God of the Christian Scriptur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6).
1장 ┃ 첫째 성경 접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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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의 차이를 살필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신학과 윤리와 신앙의 측면에서 성경의 통일성, 그리고 그리스도가 참으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절정이 되는 의미로 넘어갈 것이다. 세 번째로, 우리는 그리스 도가 첫째 성경에 있다는 생각을 장려할 수 있는 성경 사이의 관계 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인 하나님의 행동과 모형론, 하나님의 언어 사용, 하나님의 약속과 위협을 검토할 것이다. 신약에서 서로 편리하게 접근하는 두 구절은 첫째 성경과 관련해 예수에 비추어 첫째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몇 가 지 가정을 요약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 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5–16).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 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2).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첫째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히브리서의 논평은 선지자들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자였음을 시사한다. 사무엘이 아말렉을 진멸함으로써 아말렉을 “바칠” 것을 사울에게 말하고( 삼상
2) 모든 성경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번역에서 특별히 중요한 차이가 없는 경우에는 모두 개역
개정 4판을 인용함-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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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15:3 )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릴 레위인이 항상 있을 것
이라고 약속했을 때( 렘 33:18 ), 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자 로 이스라엘에게 말했다. 선지자들이 곧 아기를 낳고 이 아들을 “임 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 ”로 부를 만한 이유가 있을 여자에 대해, 아니면 상함을 받겠으나 높임을 받을 운명인 하나님의 종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 7:14; 52:13–53:12 ). 하나님은 선지자 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는데,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이 이 조상에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에 있다. 성령이 장래에 발생할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에게 말하도록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것은 사실 이다( 사 2:2; 참고. 벧전 1:12 ). 그러나 이사야 7장과 52장 13절–53장 12절은 이 구절들이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발생할 사건에 대 해 언급하고 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오히려 선지자가 살던 당시의 사건을 가리킨다. 이 구절들의 영적 의미, 신적 저자의 의미는 성령이 이 조상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주신 메 시지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저자를 통해 신적 저자의 의도에 다가간다. 인간 저자가 의미한 것은 신적 저자가 의미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설명에는 상보적 함축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진술의 함축은 단지 예언이 오류나 잘못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 론 성경은 오류나 잘못이 없다 ). 성령이 성경에 관여하시는 사실에 대한
다른 신약의 언급은 이런 성령의 관여를 원래 대상이던 청중이 아닌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비상한 능력과 관련짓는다( 예. 행 1:16; 4:25–26; 28:25–28 ).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이런 비상하고
놀라운 언급에 대한 개념적 배경이나 전경을 제공한다.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영적 의미는 성령이 그들의 백성에게 전하는 메시지 였으나, 첫째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또한 원래의 맥락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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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유익하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리스 도를 통한 구원에 대해 알리고 교훈・책망・바르게 함・의로운 삶으 로 교육하는 성경의 능력의 기저를 이룬다. 성경은 저자가 결국 예 수를 믿게 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는지와 상관없이 이런 능력이 있다. 가령 마태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이 해하려 할 때 이사야서에서 깨달음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의 의미와 중요성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의미를 성경의 중요성이나 적용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에 내재하는 것이다. 특정 메시 지의 의미는 메시지의 전달자가 수신자에게 전달하려던 것이다. 어 떤 것의 중요성은 메시지가 다른 누군가에게 일으킬 수 있는 깨우침 인데, 이 깨우침은 원래의 의사소통 행동과 거의 무관할 수도 있다. 마태가 이사야 7장 14절을 동정녀 탄생과 결부시키는 것은 이사야 서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거나 거기서 ‘더 완전한 의미’를 찾아 내는 작업을 수반하지 않는데, 이스라엘 조상에게는 완전한 의미가 해당 구절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문자적’ 의미와 반대되는 ‘영적’ 의미를 찾아내지도 않는다. 마태는 성경을 새로운 맥락 특히 예수의 맥락에서 읽을 때 성령이 일으키실 수 있는 중요성을 이사야 서에서 찾아낸다. 이 역학 구조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이 선지자와 관련된 것인지 다른 누군가와 관련된 것인지를 질문할 때 도 비슷하다.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 했다”( 행 8:35 ). 질문과 대답 사이에 간격이 있음이 암시된다. 빌립은 이사야 53장이 선지자나 유대 백성이나 여호야긴왕이나 그밖에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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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안된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3) 그러나 빌립은 또 한 “이것이 예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빌립은 해당 구 절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지혜롭게 피하고 자신의 관심사와 결부시 켜 해당 구절의 중요성을 계속 설명하는데, 이것은 예수에 대해 말 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신약은 다른 방향으로 그 중요성을 전달 하기 위해 이사야 53장을 선택하는데, 이 장에는 신자가 학대에 대 응하는 방식에 시사점을 준다( 벧전 2:22 ). 이 구절의 의미는 ( 내 생각에 는 선지자에 대해 ) 조상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 속한다.4) 그러나 여
기에는 예수와 신자에 대한 시사점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수십 년 전에 등장한 두 가지 해석법의 측면에서 재구성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과 신약 의 기록 사이에는 ‘상호 본문적’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오 늘날 상호 본문성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데, 여기서 나는 신약이 심지어 첫째 성경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지 않을 때도 첫째 성경을 인유하고 첫째 성경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는 방식 을 가리킨다.5) 예수도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설명하실 때 이사야 35장 과 61장에서 구절을 택하면서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눅 7:22 ). 요 한복음 1장도 태초부터 진리였던 메시지( “말씀” ) 를 설명하면서 이렇 게 한다. 이후의 저자가 선택한 본문의 의미를 검토하면 이후의 저 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후의 저자가 원래 본문의 3) 예로 다음을 보라. John Goldingay, “Servant of Yahweh,” in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Prophets , ed. M. J. Boda and J. G. McConvill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2), 700–707. 4) 예로 다음을 보라. John Goldingay, The Message of Isaiah 40–55: A Literary-Theological Commentary (London: T&T Clark, 2005), 473–477. 5) 고전적 작품으로 다음을 보라.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9,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 여수룬 역간, 2017);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Gospels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16, 『복음서에 나타난 구약의 반향』, 감은사 역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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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로 작업한다는 가정은 전혀 없다. 원래 본문은 이후의 저자가 이로써 새로운 점을 제시하고 이 목적을 위해 해당 본문을 사용하는 수단이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신약이 예수를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 해 하신 약속과 결부시키는 것은 제2 성전 유대교의 다른 작품들이 선지자들과 상호작용한 것처럼, 그리고 기독교인과 유대교인, 불가 지론자와 무신론자, 평범한 독자와 비판적 독자가 이후 수 세기 동 안 그랬던 것처럼, 선지자들을 수백 년에 걸쳐 ‘수용한’ 방식의 일면 이다. 첫째 성경의 ‘수용’을 연구하는 것은 틀림없이 흥미롭고 유익 하지만, 이것은 본문의 해석자가 본문의 실질적 의미를 스스로 정의 한다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또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 셨다. 선지자들은 발언과 관련해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는데, 하 나님을 그들이 전하는 말의 원천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런 말씀들을 받아쓰게 하셨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참고. 삼상 3:1–14 ). 이 경우에 선지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서기일 뿐이다. 그렇지
만 선지자들이 사용하는 표현 형식의 다양성은 받아쓰기가 이런 발 화를 위한 유일한 모델이 아님을 나타낸다. 첫째 성경은 또한 왕과 사자의 모델도 시사한다. 산헤립이 히스기야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사 36–37장 ) 그 내용을 명하지만 전달할 말은 산헤립의 사자가 만 드는데, 메시지는 권위를 전혀 상실하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하나님 이 메시지의 부담을 정하시고 선지자가 말을 고안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메시지여서 진리를 전혀 상실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것은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 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한 결과다( 벧후 1:21 ).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 인 동시에 선지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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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은 발언 형식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에서는 누가가 자신에 게 주도권이 있음을 나타낸다( 눅 1:1–4 ). 대부분의 시편에서는 예배 자가 주도하며 찬양이나 기도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 한다. 인간 저자는 그들의 일을 했는데, 이사야는 인간 저자가 하나 님과 우리와 관련해 또는 우리와 하나님과 관련해 중요한 방식으로 진리를 말한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를 이해하는 데 이들 이 도움을 준다는 신약의 발견은 인간 저자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 더라도 하나님이 이들의 기원에 관여하셨음을 증명한다. 인간 저자 는 앗수르의 황제가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부정적 방식에 대응하는 긍정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밝혀진다. 인간 저자와 신적 저자의 관계에는 다양성이 있으나, 해석자에게 는 아무 차이가 없다. 성경은 성령과 인간 저자를 수반하는 협력에 서 나오는데, 우리는 성령이 인간 저자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 임으로써 말씀하고 계심을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성경을 읽 든 간에 마찬가지다.
두 성경을 통한 한 하나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으나, 이제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과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 사이에는 차이가 전혀 없다. 차 이는 하나님이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식과 이 가르침이 예수 안에서 통일적으로 체현되는 데 있다. 예수의 제자나 원수도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말씀하신다고 이해하 지 않았다. 새롭고 충격적인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체현으 로 제시하신 것이었다. 유대 백성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고 자비하시 지만 엄격하고 위협하실 수도 있음을 알았는데, 예수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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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유대 백성은 하나님이 자연계를 지배하시며 초자연적인 지혜 가 있음을 알았는데,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성경이 하나님에 대 해 말하는 모든 것은 예수 안에서 참되며 예수에 대한 것이다. 신약 이 예수와 성령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성령이 내주하시고 예수를 믿 는 신자가 하나님의 일체성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했는데, 이 사고 과정은 결국 삼위일체 교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신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새로운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말 하지 않는다. 또한 신약은 하나님과 관련해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성문서에 없는 것이 있다고 제안하지도 않는다. 신약이 반영하는 선 물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 “말씀”은 복음 메시지인데, 이 메시지는 예수와 사도들이 선포한 것이다( 예. 요 5:24; 8:31; 행 4:31; 8:4 ). 그래서 요한은 이 메시지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단언함으로써 시 작한다. 이 메시지는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이후에 예수 안에서 체현되는데, 따라서 예수께는 은혜와 진리가 충 만하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왔다( 요 1:14, 17 ). 요한은 은혜와 진리가 율법에서 선포되지 않았다거나 율법에 있지 않았음을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 “은혜 롭다”와 “진실이 많은”이라는 단어는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묘 사하실 때 함께 오는데( 출 34:6 ), “은혜”와 “진실”은 율법의 다른 곳 에서 많이 반복된다. 요한이 말하는 요지는 히브리서 1장에서 선지 자들에 대해 말하는 요지와 비슷하다. 많은 다른 면에서 율법과 선 지자의 글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실을 선포하는데, 예수 안에서 한 사람으로 체현“되었다.” 첫째 성경의 하나님이 진노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이 사랑 의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어느 성경을 읽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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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골딩게이에 대한 롱맨의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의 논평
트렘퍼 롱맨 3세 먼저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1985년 케임브리지 틴데일 하우스에 서 첫 안식년을 보낼 당시에 노팅엄 성공회 학교의 교장이던 골딩게 이를 처음 만난 이후로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크게 존경하는데, 골 딩게이의 연구 과제 중 한두 개를 면밀하게 읽고 편집까지 했던 적 도 있다. 나는 이 책의 기고자 중 한 명이 골딩게이라는 사실을 알았 을 때 골딩게이가 다른 누구보다 서로 의견이 다른 기고자가 되리라 고 생각했다. 우리가 의견을 같이하는 주제도 많지만, 구약의 그리스 도와 관련해서는 우리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 하지만 내가 완전 히 틀렸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강조점과 의미론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나( 이것 때문에 골딩게이가 내 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일 수 도 있으나 ), 요점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 평가는 내가 다른 세 가지 논설에 대해 표현한 우려의 영 향을 받을 것이다. 이 논설들은 나름대로 가치와 통찰이 있지만, 구 약 본문을 원래의 맥락에서 충분히 주의하지 않는다. 이 논설들은 원래의 맥락을 지나치거나 그리스도 중심적・그리스도 목적적 해석 으로 곧바로 넘어가거나 신약에 비추어 찾아낼 수 있는 해석일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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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에 없는 것을 강요한다. 이에 반해, 골딩게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구약의 풍부한 신학적 메시지를 다감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숙고한다. 골딩게이는 구약 성경에 수록된 이 글들이 신약 성경에 수록된 글 들보다 더 오래된 것이지만 신약이 등장한 뒤에도 마찬가지로 연관 성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구약을 구약으로 부르기보다 첫째 성경 부름으로써 구약의 개별 메시지를 존중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첫째 성경 이야기의 모든 곳에 계시지만……본문에서 언급하는 어떤 사 람으로 ‘첫째 성경 안에’ 있지 않다”라는 골딩게이의 지적이 옳다고 생각한다.1) 나는 디모데후서 3장 15–16절, 히브리서 1장 1–2절과 이 본문들 이 “예수에 비추어 첫째 성경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방식에 대한 골딩게이의 논평을 높이 평가하고 여기에 동의한다. 나는 또한 골딩 게이가 예수께서 첫째 성경을 밝히시는 범위의 측면에서 누가복음 24장 25–27, 44–49절, 요한복음 5장 36–40절에 대해 말하는 것 도 듣고 싶었다. 예를 들어, 150편의 시편 각각에 대한 첫 번째 읽기 를 한 뒤에 계속해서 그리스도 목적적 읽기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할 까,2) 아니면 예수에 비추어 읽기가 단지 일부 시편만을 밝힐까? 나는 또한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영적 의미는 성령이 그들의 백성에게 전하는 메시지였으나, 첫째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또한 원래의 맥락을 넘어서도 유익하다”라는 골딩게이의 강조도 높이 평 1) 이 인용은 구체적으로 첫째 성경의 ‘사건들’을 다룬다. 나는 골딩게이가 구약의 다른 비역사
적 부분을 배제할 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골딩게이가 잠언과 이사야서에서 가져온 예 들도 골딩게이가 거기서 그리스도 목적적 중요성을 목격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 이다(‘그리스도 목적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내 정의를 대해서는 106-107페이지를 보라). 2) 내가 다음 작품에서 하려고 시도하는 대로, Tremper Longman III, Psalm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 TOTC 15–16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4).
골딩게이에 대한 롱맨의 그리스도 목적적 접근법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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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다. 나는 또한 그들이 쓴 글이 “결국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게 될” 방식을 첫째 성경의 인간 저자들이 알지 못했다는 골딩게이의 견해도 긍정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더 깊은 의미와 신적 저자가 의도하신 의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지만, 골딩게이는 의미와 중요성 사이의 구별에 호소한다. 골딩게이에 따르면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메시지와 관계 가 있겠지만, 중요성은 “메시지가 다른 누군가에게 일으킬 수 있는 깨우침”을 가리키는데 “원래의 의사소통 행위와 거의 무관할 수도 있다.”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이 구별과 약간 씨름하지만, 이것은 내 문제 일 뿐 골딩게이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나는 월터 카이저가 쓴 작 품 덕분에 이 구별을 잘 알고 있는데,3) 이 구별은 문학 이론가 E. D. 허쉬를 기반으로 한다.4) 카이저와 허쉬는 인간 저자의 의식적 의도 에 따라 결정되는 문학적 의미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이해한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카이저의 경우에 저자 중심적 해석에 대한 카이저 의 접근법이 의도의 오류로 표현되는 정당한 우려를 훼손하는 것 같다.5) 나는 또한 의미와 중요성을 분명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골딩게이가 자신의 의미 및 중요성의 구별로 실제 본 문들에 대해 논의할 때, 나는 골딩게이의 분석에 공감한다. 하지만 나는 신적 의미가 어떻게 골딩게이의 제안처럼 첫째 성경 본문의 의
3) Walter C. Kaiser Jr., Toward an Exegetical Theology: Biblical Exegesis for Preach-
ing and Teaching (Grand Rapids: Baker, 1981, 『구약 성경신학』, 생명의말씀사 역간, 2005), 31–34. 4) E. D. Hirsch, Validity in Interpretation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67). 5) 물론 나는 내가 쓴 글에서 저자의 의도에 대한 더 미묘한 이해를 도출하기 위해 케빈 밴후저 의 작품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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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미에 대한 이후 저자들의 성찰을 통해 일어나는 유형의 추론에서 나 올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말할 수 있을지가 의아하다. 결 론적으로 여기서 골딩게이의 논의는 내게 더 생각할 거리를 주었는 데, 덕분에 예수와 첫째 성경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내 이해가 풍부 해졌다. “신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새로운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또한 신약은 하나님과 관련해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성문서 에 없는 것이 있다고 제안하지도 않는다”라는 골딩게이의 관점에 내 가 의문을 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참이라 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골딩게이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계시의 진전”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나는 하나님 이 첫째 성경에서 삼위일체로 계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적 본질이나 내세나 마귀에 대해 실제로 많이 알지 못한다는 견해에 골딩게이도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골딩게이는 이것을 알면서도 진전이라는 은유를 여전히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골딩게이의 함께 이런 진전이 세부 사항을 채우는 것보다 도토리가 자라서 나무가 되 는 것에 더 가깝다고 인정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첫째 성경의 하나님이 진노 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어느 성경을 읽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라는 골딩게이의 요점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싶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심판에서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 또는 다르게 표현하면 구약에 묘사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실제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손쉬 운 일이 되었다. 우리는 골딩게이가 자신의 해석 단계 대부분에서 첫째 성경의 개 별 메시지를 중요하게 강조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단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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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메시지를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1–4, 6–7단계 ). 나는 또한 우리의 사회적 상황성이 우리가 본문을 읽는 렌즈를 만든다는 골딩게이의 인식도 높게 평가한다. 다람라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내가 공동체 읽기, 그것도 다양한 공동체 읽기로 부르는 것을 권장 하는 데 있어서 골딩게이와 협력한다. 신약의 구약 사용을 살필 때, 나는 “때때로 신약은 첫째 성경의 고 유한 의미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첫째 성경을 사용하기도 한다”라는 골딩게이의 결론이 옳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인간 저자의 의식 적인 인간적 의도의 측면에서 심지어 인간 저자의 “의식적인 주변 시야”에서도 그렇다고 믿는다.6) 다른 한편으로, 나는 신약의 사용과 구약의 의미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사야 같은 구약 선지자가 “처녀”에게 태어날 아이에 대한 자기의 진술( 사 7:14 ) 을 마태가 사용하는 방식을 접하면 처음에는 충격을 받 겠지만 그 뒤에는 아마 골딩게이가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자기 글의 헬라어 번역의 프리즘을 통해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다시 한번 이 지점에서 나는 더 깊은 의미와 신 적 의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골딩게이가 자신의 사례 연구에서 이 첫째 성경 본문의 풍성함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닌데, 골딩게이의 첫 번째 본문 읽기로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 단지 몇 가지만 질문하고 싶다. 창세기 22장의 경우, 나는 그리스도가 창세기 22장에 있다는 의미에 서 본문이 메시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골딩게이의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이 본문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6) 이 어구는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G. K. Beale, “The Cognitive Peripheral Vision of
Biblical Authors,” WTJ 76 (2014): 263–293. 이 범주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는 내 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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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것도 사실인데( 나에게는 이것이 두 가지 다른 점이다 ), 골딩게이가 말하는 대로 “창세기 22장이 마가와 바울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 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창세기 22장이 마가와 바울에게 어떻게 그런 도움을 주었는지를 더 자세히 분석하는 모습을 보고 싶 었다. 나는 또한 “그리스도가 잠언 8장 22–31절에 있지 않다”라는 골 딩게이의 진술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잠언 8장이 어떻게 “그리스도 에 대한 이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를 설명하는 골딩게이의 방식도 마음에 든다. 이것은 내가 나의 글에서 신약 저자들이 그리 스도를 지혜로운 여자와 동일시하지 않고 그보다 그리스도를 지혜 로운 여자와 관련지어 생각한다고 말할 때 도달하는 결론이다. 나는 골딩게이가 호크마를 “영리함”으로 이해해 결국 영리함 여사에 대 해 말하게 되는 논증에 반박하고 싶다. 내 생각에는 영리함이 호크 마의 개념을 지능 지수 쪽으로 너무 많이 치우치게 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 지혜는 감성 지능에 더 가깝다. 아마 골딩게이는 “세상 물 정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 같은 것을 의미하겠지만, 이것은 지혜의 실천적 차원에만 너무 한정되어 지혜의 윤리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 을 설명하지 않는다.7) 그래서 나는 여기서 골딩게이의 의견에 정중 히 반대하는데, 참으로 호크마는 풍부하고 복잡한 개념이어서 지혜 처럼 “거창한” 단어가 매우 잘 포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42장과 관련해, 나는 골딩게이와 내가 서로 마음이 잘 맞 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골딩게이가 나보다 이사야서에 대해 더 많이 안다 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 그리고 다시 한번 나는 “이 구절이 메시아
7) 지혜의 이 세 가지 차원에 대해서는 나의 다음 글을 보라. The Fear of the Lord Is Wis-
dom: A Theological Introduction to Wisdom in Israel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7),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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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조상들에게 주는 요소는 전혀 없다”라는 골딩게이의 진술에 동의하는데, 이것은 복음서가 예수께서 계실 때 아무도 메시아의 “고난 받는 종”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주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시 한번 나는 “그리스도가 이사야 42장에 있지 않다”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만, 내 생각에는 이것이 이사야 42장이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 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런 더 깊 은 의미를 이해하려면 부활이 필요했던 것은 명백하다. 다시 한번 나는 우리가 모두 첫째 성경 곧 구약이 자체의 방식( 자체 의 개별 메시지 ) 으로 하나님, 우리 자신,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우리
의 이해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 점에 대해 골딩게이에게 감사한다. 전반적으로 나는 골딩게이가 그 뒤에 첫째 성경에 대한 신약의 그리스도 목적적 전유를 설명하는 방식에 동의 하지만, 골딩게이가 이 방식을 좀 더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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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골딩게이에 대한 다람라즈의 수용 중심적 · 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
하빌라 다람라즈 나는 구약에서 예수를 소개받은 어떤 사람에 대한 다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에 입학한 한 청년 힌두교 신자가 자신의 캠퍼 스 기숙사에 도착했다. 자기 방에 들어간 이 학생은 침대에 놓인 성 경을 발견했다. 이 성경은 인도 복음주의 학생 연합( UESI ) 이 놓아 둔 것이었다. 이 학생은 성경을 ‘기독교 서적’으로 생각해 지금까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었는데, 성경을 아무렇게 펼쳐서 나봇의 이야 기( 왕상 21장 ) 를 읽었다. 곧 이 학생은 그 이야기에서 자신에 대해 읽 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학생은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계급인 달리 트에 속해 있었는데, 달리트는 소위 상급 카스트에 의해 수 세기에 걸쳐 압제받던 집단이었다. 이 학생은 나중에 나봇에 대해 “이것은 내 이야기야”라고 말했다. “우리도 무고하게 고통을 겪고 땅을 빼앗 기고 가족을 잃었어.” 이 학생은 성경을 계속 읽었는데, 여기서 하나 님이 기구한 나봇을 대신해 정부와 맞서기 위해 자기 선지자 엘리야 를 보낸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이 학생은 “이런 신(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드 는 신 ) 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라고 외쳤다. 이 학생은 “이 정의
의 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골딩게이에 대한 다람라즈의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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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첫째 성경을 읽을 때 첫째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살피고, 첫째 성경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의 더 충만한 관계로 우리를 이끌게 하는 것이 지 혜롭다( 요 14:6 ) ”라는 골딩게이의 진술을 예증하는 것 같다. 이 일이 발생하자 이 학생은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현재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하는 모든 것에 비추어 구약의 하나님을 훨씬 많이 즐거워한다. 첫째 성경 접근법은 “예수를 첫째 성경으로 들여와 읽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첫째 성경이 말해야 하는 것을 우리가 들을 수 없게 됨 을 의미한다”라고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학생은 구약이 말해야 하는 것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고대 청중에 대한 구약의 메시지는 정확히 21세기에 이 학생이 들어야 할 메시지로 밝혀졌다. 남아시아에서 우 리는 그것이 친족 관계의 역학 구조든 아니면 과부나 노예에 가까운 계약 노동자의 취약한 상태든 간에 구약의 환경과 쉽게 연결될 때가 종종 있는 문화적 환경에서 성경을 읽는다. 더욱이 시・노래・격언・ 무엇보다 서사와 같은 구약의 문학 장르는 우리가 교훈을 후대에 전 승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한 장르다. 우리는 바울의 수사법의 논 리보다 서사 신학을 훨씬 쉽게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첫째 성경 접 근법의 가치를 지지하는 데 크게 만족한다. 이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거리가 가깝든 멀든 간에 구약이 말해야 하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하고 인 식하기를 원하시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간과할 위험에 빠질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좋은 친구이자 조언자인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쓴 책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도발적인 제목 의 “내게 예수님만 주면 안 돼요”에서 인용한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 죄의 진상과 크게 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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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운 결과, 불의와 압제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용, 땅의 모든 나라와 역 사의 모든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계시하기 위해 최선 을 다하신다. 라이트는 다음처럼 통찰력 있게 지적한다.
물론 우리는 어떻게 이 모든 중대한 주제가 결국 우리를 그리 스도께로 이끄는지를 보여 줄 수 있다……그러나 항상 우리가 “이것이 모두 예수와 관련된 것이 분명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의 풍성함 과 깊이를 놓치게 될 것이다……그런데 이런 생각은 유감스러울 뿐 아니라 비극적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런 생각 때문에 사람 들은 성경 안에 있는 대단히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용하 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이런 본 문들에서 그들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에 사람들이 귀 기울 이지 못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심각하게 나쁜 일이다.1)
골딩게이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인용하며 말하는 대로, 구약 본문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운 삶으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구약은 저자가 결국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는지와 상관없이 이런 능력이 있다.” 참으로 우리 는 성경의 4분의 3을 곧바로 예수께로 돌릴 때 우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 를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구약의 이런 능력을 훼손한다.
내가 밝히고 싶은 두 번째 논평은 구약의 우선권에 대한 골딩게이 의 단호한 입장인데, 골딩게이는 이 입장을 자신의 논설에서 연구한
1) Christopher J. H. Wright, How to Preach and Teach the Old Testament for All Its
Worth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16,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성 서유니온선교회 역간, 2016), 57.
골딩게이에 대한 다람라즈의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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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그리스도가 있지 않다”라는 반복구를 통해 강조한다. 골딩 게이는 그리스도가 “본문에서 언급하는 어떤 사람으로” “요시야가 열왕기상 13장에 있거나 안티오쿠스가 다니엘 11장에 있는 방식으 로”, 곧 역사적 인물로 구약 안에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 지만 “그리스도는 첫째 성경 이야기의 모든 곳에 계신다.” 이런 전제 를 바탕으로 골딩게이는 성경을 읽기 위한 단계를 제시하는데, 이 단계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끝난다. “특정 본문이 예수에 대해 어 떻게 밝히는가?”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내가 골딩게이의 입장이라고 이해한 것을 라이트가 자신의 책을 위해 선택한 제목인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 스도를 아는 지식』의 도움을 받아 요약하는데,2) 곧 그리스도가 그 자체로는 구약 성경 안에 있지 않으나 구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구약 본문을 기독론적인 신약 본문과 쌍 으로 결합하는 내 방법론에서, 나는 이삭・지혜의 인물・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예수를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골 딩게이는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구약 문헌 안에 있지 않 더라도 구약 문헌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자기주장 안에 포 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논평은 골딩게이의 다른 반복구와 관련이 있는데, 곧 구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런 표현 방 식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더라도 특히 남아시아처럼 기독교가 힌두 교나 이슬람교나 불교와 병존하는 대다수 세계의 많은 지역에 존재 하는 다종교 환경에서 심각한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
2) Christopher J. H. Wright, Knowing Jesus through the Old Testa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2,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성서유니 온선교회 역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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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자신이 방금 인용한 이사야 본문을 스스로 이루었다는 예수의 주 장( 눅 4:16–21 ) 을 골딩게이가 어떻게 설명하는지부터 시작하여 내 우 려를 자세히 설명하겠다. 골딩게이에 따르면 “전통적인 번역 ‘응 하다’는 이 논평을 마치 그 증언이 예견이었던 것처럼 들리게 하지 만 헬라어 단어 ‘플레로오’는 이보다 더 일반적인( 그렇지만 흥미로운 ) 단어인데”, “예수는 이 본문을 더 일찍 인용하시고( 눅 4:16–21 ) 이 성 경이 자기 말을 듣는 사람들의 귀에 ‘응하거나’ ‘가득해지거나’ ‘채 워졌다’라고 논평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영국 선교사 존 니 콜 파커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계속해서 견인력 있는 선교에 대 한 완전히 획기적인 접근법을 시작한 파커는 어느 논설( 1910년 ) 에서 마태복음 5장 17절을 인용하는데, 이 본문은 골딩게이가 이용한 것( 눅 4:16–21 ) 과 비슷한 본문이다.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 전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선포는 구약과 관련된 우 리의 모든 어려움을 완전히 해결하는데……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죽음・부활・교훈에서 완벽하게 완성에 이른다.”3) 파커는 “응하다”라는 동사를 예견으로서가 아니라 “완벽한 완성” 으로 채운다는 의미에서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 지만 골딩게이가 이 본문을 “율법과 선지자와 관련지어” 적용한다 면, 파커는 유대교-기독교 정경을 넘어 “그리스도가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했을 때 유대교뿐 아 니라 이방 신앙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3) 다음에 인용된 내용임. Geoman K. George, “Early 20th Century British Missionaries
and Fulfilment Theology: Comparison of the Approaches of William Temple Gairdner to Islam in Egypt, and John Nichol Farquhar to Hinduism in India,” in Christian Witness between Continuity and New Beginnings: Modern Historical Missions in the Middle East , ed. Martin Tamcke and Michael Martens, Studien zur Orientalischen Kirchengeschichte 39 (Berlin: LIT, 2006), 17.
골딩게이에 대한 다람라즈의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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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는 “어떻게 기독교”가 인도 아대륙의 많은 종교의 “성취와 절 정”인지를 계속 설명한다.4)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여기서 요점은 골딩게이가 올바르게 단언하는 데로 “그리스도가 첫째 성경 이야기의 모든 곳에 있더라도”, 이것이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 그렇 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경전이 그리스도를 가 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선교에서 이용되고 있다면,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구약의 가능성은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오해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언어로 존중해야 한다! 설명하는 수식어를 추가하지 않은 상태로 구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라고 강조하는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구약이 그리스 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다. 여기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구약 본문의 의미를 구약 본문의 중요성이나 적용에서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의미와 중요성 사이의 차이를 유지할 가치가 있는데, 창세기나 이사야서 및 갈라디 아서나 마태복음이 별개의 의미를 갖게 함으로써 우리가 두 본문에 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세기와 이사야서를 갈라디아서 와 마태복음에 동화시킨다면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의미만 남게 된다”라는 골딩게이의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의미와 중 요성의 이런 분리가 지난 150년에 걸쳐 인도 기독교 신학자들이 고 대 산스크리트 본문과 철학적 개념을 힌두교 안에서의 원래 의미와 분리하고 십자가에 비추어 완전히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한 방식을 상기시킨다. 토착 찬송은 다른 신들에게 돌리는 찬가에서 어구들을 빌려 왔는데, 이 어구들은 원래 예수와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이렇
4) 다음에 인용된 내용임. George, “Early 20th Century British Missionaries and Fulfil-
ment Theology,”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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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5가지 견해
게 하는 것이 유용한지는 또 다른 토론의 문제다. 여기서 요지는 다 른 종교에서 개작해서 의미와 중요성의 분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본문과 개념과 달리 구약의 본문과 개념은 신약과 통일되고 일치하 므로 이처럼 분석적으로 정확한 분리는 필요하지 않거나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정경을 구성하는 두 부분의 통일 성에 대한 골딩게이의 언급은 여기서 적절하다. “신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새로운 어떤 것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또한 신약 은 하나님과 관련해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성문서에 없는 것이 있다 고 제안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정교하게 구성 된 산문이나 시 작품을 다루듯이 의미의 층위에 대해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모든 층위가 서술자나 작가의 마음에 전부 다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구약 저자들의 마음에 기독론적 층위가 전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런 기독론적 층위는 그것이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약을 읽는 신약 작가든 아니면 교회사의 시대에 따라 구약을 읽고 구약의 글들을 통해 예수 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모든 사람이든 간에 독자의 것이다. 첫째 성경의 우선권에 대한 골딩게이의 강조는 특히 세계 교회가 기독교 정경의 처음 39권에 대해 갈수록 무지해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서구 사회가 문화와 종교에서 갈수 록 다원화되고 신흥 교회의 무게 중심이 남반구로 옮겨지는 현실 속 에서, 다른 종교의 신성한 문서들보다 구약에 논쟁의 여지 없이 명 백하게 특권을 부여하는 언어로 구약과 예수와의 관계를 묘사할 필 요가 있다.
골딩게이에 대한 다람라즈의 수용 중심적·상호 본문적 접근법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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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딩게이에 대한 드루치의 구속사적 · 그리스도 중심적 접근법의 논평
제이슨 드루치 나는 골딩게이의 방법론에서 (1) 예수가 어떻게 첫째 성경1)의 의 미와 중요성과 관련되어 있는지, (2) 모형론의 본질과 역할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부분에 대해 다루겠다.
예수와 첫째 성경의 의미와 중요성 골딩게이는 “메시지의 의미는 메시지의 전달자가 수신자에게 전 달하려던 것”이라고 유용하게 진술한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는……본문에서 언급하는 어떤 사람으로 ‘첫째 성경 안에’ 있지 않다. 첫째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 백 성이 그리스도와 관련해 생각하게 이끌지 않는다”라는 골딩게이의
1) 예수는 히브리 성경이 “오래되고 구식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골딩게이의 의
견에 동의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많은 구속사적 요소로 말미암아 “구약”이 “첫째 성 경”보다 더 나은 명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구약을 첫째 성경으로 부를 텐데, 독자들은 모세가 옛 언약의 종결과 새 언약의 필요를 예기했으며(예. 신 4:25–31; 30:1– 14) 모세의 가르침이 이후 선지자들의 소망을 지배한 사실(예. 사 54:1–55:5; 렘 31:31– 34)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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